8월 금요철야예배설교 / 형통한 삶의 원리 Friday Night Sermon

제목 / 형통한 삶의 원리
본문 / 창세기 49:22~26

 

22.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23. 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24.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25.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26. 네 아버지의 축복이 내 선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 없음 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이미 복을 받았습니다. 구원의 복을 받았습니다. 구원의 복만 확실하게 붙잡아도 복된 인생입니다.
다른 복을 다 받았다 해도 구원의 복을 받지 못했다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구원의 복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신령한 복입니다. 하늘에서 주신 복입니다.

성경은 미래적인 의미의 구원, 장차 우리에게 닥칠 천국만을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지상(地上)에서의 삶에 대해서도 매우 적극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구원 받은 백성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천국에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구원 받은 백성들이 이 땅에서 살 것인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구원 이전의 삶은 하나님의 축복이 끊어진 삶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구원 받지 않은 사람이 세상적으로 잘나간다 해도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졌기 때문에, 세상에서 어떻게 살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축복이 그 삶 속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빠진 복은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 받은 백성은 다릅니다. 하나님을 떠나 살 때에 잃어버린 것을 구원 받음으로 되찾는,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영적인 의미의 복을 받을 뿐 아니고, 우리의 삶의 영역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풀어주시는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구원 받은 백성이 구원 받은 백성으로서 살아갈 때에 누리는 복이 있습니다. 미래에 천국에 가는 복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복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의 삶에서 묶여있는 것들이 풀리는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것을 약속했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고, 은혜를 받으면, 삶이 달라집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 때의 삶과는 다른 일상이 우리 앞에 펼쳐집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는 주일에 은혜를 받고, 월요일에 출근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금요일 저녁부터 놀다가 주일 저녁에는 지쳐버립니다. 세상의 낙을 좇아 살아가기 때문에 생활의 중심이 잡혀있지 않습니다. 술 마시고 복잡하게 살다 보면, 몸도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삶은 그렇지 않습니다.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거나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지 않기 때문에 맑은 정신으로 생활할 수 있습니다. 삶에 질서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규칙적으로 생활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성실해집니다. 새벽기도에 나온다는 것은 그만큼 성실하다는 의미입니다. 시간 관리(time management)가 되어야 새벽기도에 나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쓸데없이 객기(客氣)를 부리지 않습니다. 과욕(過慾)이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욕심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는 그런 것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스트레스 지수가 낮아졌습니다. 마음이 평안해졌습니다. 삶의 질서가 생겼습니다. 성실해졌습니다. 게으름이 사라졌습니다. 객기가 사라졌습니다. 정신이 맑아지고, 몸도 건강해졌습니다. 열 받을 일도 적습니다. 웬만한 일에는 열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삶에 안정감이 생깁니다. 삶의 규모가 생깁니다.
신앙인들이 장수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미국에서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찬양대 봉사를 하시는 분들이 장수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정상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묶여있던 것들이 하나씩 풀립니다. 그래서 집안 전체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물론 힘든 일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믿음생활을 하면서 질서 있고 안정된 삶을 살면, 불필요한 일과 어려운 일들이 점점 사라집니다. 꼬였던 관계가 풀립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난 후 변한 것이 많아집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고 난 이후에 사람들과의 관계가 편안해지고 자연스러워집니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꼬인 것이 풀립니다. 나쁜 습관들이 제거됩니다.
염려하고 근심하며 살던 사람이 은혜 생활을 통해 평강을 얻게 됩니다. 어두웠던 가정에 웃음꽃이 핍니다. 그래서 일의 능률이 오릅니다. 쓸데없는 곳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게 됩니다.
은혜를 받고, 기도하다 보면, 모든 것이 처리됩니다. 힘 있게 찬양하다 보면, 카타르시스(catharsis)를 느끼게 됩니다. 열심히 기도하면, 문제와 응어리들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를 통해 우리의 근원적인 문제가 풀리는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교회에 다닌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신앙 없이 살았던 때에 우리를 감고 있던 족쇄들이 하나씩 풀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싸움이나 갈등이 이전보다 훨씬 적어집니다. 이것이 믿음생활을 하는 사람의 정상적인 모습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가지고 믿음생활을 하면, 삶의 전반에 걸쳐 혁명이 일어납니다.
저희 집안을 보면, 그것을 느낍니다. 예전에는 형제들끼리도 싸우고 정신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난 이후, 그런 모습이 없어졌습니다.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관계가 아주 좋아졌습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백성에게 따라오는 변화가 있습니다. 그것이 삶에 축복이 됩니다.

창세기 49장에 보면, 자손들을 향한 야곱의 축복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유언이면서도 예언입니다. 그리고 축복입니다.
본문은 요셉에 대한 야곱의 축복입니다. 본문 22절에 보면,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참으로 멋진 그림입니다. 요셉의 인생을 샘 곁의 무성한 가지에 비유했습니다. 요셉의 인생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샘 곁에 있는 나무는 가뭄과 상관없습니다. 기근이 와도 상관없습니다. 주변의 상황과 전혀 상관없습니다.

땅이 말라있으면, 그곳에 있는 나무는 비가 올 때 잠시 파릇해지다가 다시 말라버립니다. 그러나 샘 곁에 있는 나무는 언제나 푸르고 무성합니다.
이집트의 사막은 매우 덥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도 곳곳에 나무가 있습니다. 싯딤나무와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 나무는 샘 곁에 있습니다.

경기(景氣)가 좋으면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가, 경기가 좋지 않을 때에는 표정이 굳어버리는 사람은 샘 곁에 있는 나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한때 잘 나갈 수는 있지만, 계속해서 잘 나갈 수는 없습니다. 결과를 보면, 한때 잘 나간다고 해서 계속해서 그럴 것이라고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말하는 성공은 매우 불안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은 가끔 일어나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반짝 축복이 아닙니다. 지속되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시련이 오고, 어려움이 와도 견뎌낼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은 비가 오지 않아 매우 메마릅니다. 잎사귀가 바짝 마를 만큼 태양빛이 강렬하지만, 샘 곁에 있는 나무는 살아납니다.
햇빛이 너무 뜨거우면, 햇빛이 나무를 말려 죽일 것 같습니다. 그러나 샘 곁에 있는 나무는 일시적으로 어려움을 겪지만, 결과적으로는 살게 되어있습니다.
문제를 뛰어넘는 파워가 있습니다. 문제가 일어났을 때 문제를 이겨낼 힘이 없는 것이 인생의 불행입니다.
샘 곁에 심어진 나무는 외풍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샘 곁의 나무는 뿌리가 건강하기 때문입니다. 샘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에 가뭄에도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의 뿌리를 강화하는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신앙의 뿌리는 신앙의 기본기를 의미합니다. 복음, 신ㆍ구약 말씀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뿌리를 깊이 내리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골로새서 2장 7절에 보면,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으라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그리스도 위에, 복음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신ㆍ구약성경,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후에 허공에 뜹니다. 복음을 받아들일 때, 구원을 받습니다.
누가 구원에 이르는 복을 누립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정확하게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왜 이 땅에 오셨고, 그분이 왜 죽으셨고, 그분의 죽음이 나와 무슨 연관이 있는가 하는 복음의 중요한 메시지가 우리 안에 뿌리내리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에 대해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기본적인 것이 내 삶에 뿌리내려야 합니다.
삶에서 근원이 흔들리면 안 됩니다. 모든 것이 흔들린다 해도, 뿌리가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삶이 요동치는 이유는 뿌리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중심이 잡혀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트경기장에 가면, 요트를 볼 수 있습니다. 요트의 바닥에 보면, 납덩어리로 된 축이 있습니다. 납덩어리로 된 축이 요트의 중심을 잡아줍니다.
그래서 바다에서 파도가 쳐도, 요트가 뒤집어지지 않습니다. 작은 배는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면 뒤집어집니다.
요트는 아주 날렵한데, 납덩어리가 요트의 중심을 잡고 있어서, 바람이 불고 파도가 쳐도 뒤집어지지 않습니다. 크지 않은 요트를 타고 태평양까지 항해하기도 합니다. 흔들렸다가도 다시 일어납니다. 중심이 잡혀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뿌리를 지키면 나무는 삽니다. 그러므로 샘 곁의 나무는 뿌리가 중요합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뿌리를 내리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대형 교회에는 건성으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는 것을 보험 든 것처럼 여깁니다. 그래서 교회에 다니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무엇을 믿는지, 왜 믿는지, 진리 안에서 뿌리를 확고하게 내려야 합니다.

시편 1편에 보면,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시 1:3).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을 시냇가에 심은 나무에 비유했습니다. 말씀을 붙잡고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말씀을 끊임없이 빨아 당기는 사람은 뿌리가 좋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성경을 읽을 때에도 마치 성경에 구멍을 낼 듯이 집중하여 읽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갈망과 사모함이 매우 큽니다.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있기 때문에 말씀을 먹습니다. 말씀을 놓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고, 말씀의 핵심을 기록하여 그것을 묵상하고, 그것을 놓고 기도하여, 말씀을 강화시켜 자기의 것으로 소화시킵니다. 그렇게 하면, 믿음의 뿌리가 강화됩니다.
그 사람은 샘 곁에 뿌리내린 사람입니다. 그래서 가지가 무성해집니다. 가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뿌리가 중요합니다. 뿌리를 보아야 합니다.

말씀으로부터 멀어지면 큰 일 납니다. 영혼이 힘을 잃습니다. 환난과 시련을 이겨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말씀에 깊이 뿌리내리고, 말씀 안에 살면, 어려움이 와도 말씀이 나를 지켜줍니다. 진리의 힘은 굉장히 큽니다.

예수님께서는 40일간 금식하며 기도하신 후에 빵을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빵 앞에 조금도 요동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4:4).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받으면, 우리의 영혼이 튼튼해집니다. 그래서 외부에서 오는 환난과 시련과 고난을 넉넉히 이겨냅니다. 그리고 고난이 축복으로 바뀌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말씀의 한가운데 복음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우리가 말씀 안에 있으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뿌리박고 있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점점 자랍니다.

바울의 신앙의 핵심은 ‘in Christ(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힘이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뿌리를 확고하게 내려야 합니다. 그래서 샘 곁의 무성한 나무가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는 ‘샘 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매일 집회가 열립니다. 매일 새벽에 세 번의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매일 저녁 9시에 예배를 드립니다. 매일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혼자서 신앙생활하기 힘들면, 교회에 오시면 됩니다.
부지런히 말씀을 읽고 듣고 쓰고 외워서 말씀이 내 안에서 피가 되고 살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가지가 무성해집니다.

그러면 ‘무성한 가지’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삶의 풍성함을 의미합니다. 샘 곁에 심긴 나무는 자연스럽게 가지가 무성해집니다.
무성한 가지는 풍성함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가지에 열매가 맺힙니다.

이것은 요셉의 삶을 연상시킵니다. 요셉이 국무총리가 되었을 때, 풍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곡식을 창고에 모아들였습니다.
그 후에 주변 나라에는 기근이 들었지만, 애굽은 부자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가족 70인을 다 먹여 살렸습니다.
주변 나라에서는 기근이 들었지만, 요셉은 끄떡없었습니다. 요셉은 샘 곁의 무성한 가지였습니다. 기근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는데, 요셉은 샘 곁의 무성한 가지였습니다. 마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변 나라에서 도움을 요청하러 애굽으로 왔습니다. 요셉의 형들도 도움을 요청하러 애굽으로 왔습니다. 나중에는 야곱도 애굽으로 왔고, 모두 고센 땅에서 먹고 살게 되었습니다.

‘샘 곁의 무성한 가지’가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가정에서 샘 곁의 무성한 가지가 되면, 여러분 한 사람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살게 됩니다.
샘 곁의 무성한 가지는 기근이 와도 끄떡없습니다. 여러분이 샘 곁의 무성한 가지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이 샘 곁에 서 있으면 됩니다.
요셉 한 사람으로 인해 요셉 가(家)의 모든 사람이 먹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의 가족은 기름진 고센 땅에서 거대한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삶은 부요합니다. 풍요합니다. 물질적으로 부요할 수도 있지만, 영적으로 부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한 삶을 살게 됩니다.
물질적으로 부족한 사람은 물질적 가난을 이겨낼 만큼 영적으로 부요하면 됩니다. 영적으로 부요하면, 얼마든지 감사할 수 있습니다.
물질적으로 부요해도 항상 힘들게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물질적으로도 부요하고, 믿음도 좋다면, 정말 좋습니다. 그런데 물질의 유무와 상관없이 영적으로 부요한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풍성함을 이야기할 때, 기쁨이 충만하고, 지혜가 충만하고, 사랑이 충만한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이것이 진짜 복입니다.
사랑이 충만하지 않으면, 다른 것이 소용 있겠습니까. 몸은 건강한데, 사랑이 충만하지 않고 기쁨이 충만하지 않다면,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0:10).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은 구원의 복을 의미합니다. 더 풍성히 얻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현재적 삶 속에서 누려야 하는 부요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으면, 바닥을 긁는 삶을 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늘 끙끙 앓고 힘들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바울을 보세요. 인간적으로는 힘들게 살았습니다. 감옥생활도 했고, 쫓겨 다니기도 했고, 굶주리기도 했습니다. 그가 불편한 삶을 산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불행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감옥 안에 있었지만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말했습니다(빌 4:4).

그리고 바울이 쓴 서신을 보면, 감사로 넘쳐납니다. 고린도후서 6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라고 말했습니다(고후 6:10). 이것이 복입니다.

사도 바울의 사역은 아름답고 풍성한 열매를 많이 맺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삶은 샘 곁의 무성한 가지였습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구원 받는 사람이 생겨났습니다. 믿음의 백성들, 제자들이 생겼습니다.
그는 샘 곁의 무성한 가지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요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삶은 어려웠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은혜를 체험하며 살았습니다. 그의 삶은 쪼그라들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영적 여유로움이 항상 있습니다. 영적 부요함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넉넉합니다. 샘 곁의 무성한 가지와 같습니다.
복음 안에 사로잡힌 부활의 신앙이 바울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고, 뿌리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본문 창세기 49장 22절에 보면,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풍성함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갔습니다. 요셉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복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좋은 영향력을 끼쳤다는 의미입니다.

창세기 39장에 보면, 요셉으로 인해 보디발의 집이 복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여러분으로 인해 여러분의 직장에서 매출이 신장되는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만 먹고사는 생활을 해서는 안 됩니다. 가지가 담을 넘어야 합니다.
요셉은 자신만 잘 된 것이 아닙니다. 자기 가족만 먹여 살린 것이 아닙니다. 애굽과 주변의 나라까지 먹여 살렸습니다.
이것은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이 성취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라고 약속하셨습니다(창 12:3). 여기서 ‘복’은 전체적이고 종합적인 의미입니다.

우리가 복 받은 것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까? 나누는 것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복을 나눌 때, 복이 나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갑니다.
채워지지 않은 사람은 나눌 것이 없습니다. 채워진 사람이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가졌어도 결핍 증세를 느낀다면, 아직 채워지지 않은 것입니다.
결핍 증세를 느끼는 사람이 나눌 수 있겠습니까. 나눌 수 없습니다. 더 채워야 하는데, 어떻게 나눌 수 있겠습니까. 아직 만족하지 못하는데, 나눌 수 있겠습니까. 나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통해 우리를 축복하신 후에 우리를 통해 복이 흘러가게 하십니다. 구원의 복이 흘러가게 하십니다.
그래서 전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도는 내가 받은 은혜를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실 때, 우리는 받을 그릇을 준비해야 합니다. 준비한 그릇이 차고 넘치면, 또 다른 그릇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래서 흘려보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흘려버리고 낭비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주는 것, 나누어주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소비 중심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쓰기에도 모자랍니다. 이 사회는 과소비를 부추깁니다. 그래서 아무리 벌어도 부족함을 느낍니다.
지금은 연봉이 올라가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삶을 규모 있게 정리하고, 욕망을 다스려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모자랍니다.

사람들이 부족함을 느끼니까 나누지 못합니다. 그래서 온전한 축복 안에 있지 못합니다. 진정한 축복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금 상태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때 느끼는 충분함은 여호와가 나의 목자이시기 때문에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때문에 충분합니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외부적인 요인으로 인해 충분함을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 인해 만족함을 느끼게 되면, 부요한 자가 됩니다. 흘려보낼 수 있게 됩니다.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십니까.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재앙과 같습니다.
신앙의 최고 레벨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감사하는 삶입니다. 신앙의 절정에 감사가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왜 문제가 생겼습니까? 에덴동산은 완벽한 환경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고, 하나님께서 베푸신 완벽한 곳에서 아담과 하와는 부족함을 느꼈습니다. 감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었습니다. 그것이 인류의 재앙을 가져왔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상태가 얼마나 위험한지 아십니까. 무슨 죄를 지을지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사고를 칠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으로 만족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으로 만족을 느끼며 살아간다면, 천국의 삶이 시작됩니다. 감사가 넘칩니다.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며 살아가게 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할 뿐 아니라,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것은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한다면 하나님을 경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감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경험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입술에서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깊이 경험한 사람입니다.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서 살게 하시므로 우리의 삶을 뻗어나가게 하십니다. 남을 섬기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의 사람까지 빛나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 그늘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그 속에서 위로 받고 힘을 얻고 용기를 얻어 다시 일어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고통 받는 사람이 위로 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축복하시며 내가 받은 축복이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가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주변에는 여러분이 빨리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내가 샘 곁의 가지가 되어 담을 넘어야 합니다.
그래야 고통 속에 있는 주변의 사람들이 나로 말미암아 위로 받고, 소망을 얻고, 구원 받고,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는 샘 곁의 가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말라 비틀어져서 뿌리 뽑힌 나무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샘 곁의 무성한 가지가 되어 담을 넘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까지 복을 흘려보내야 합니다. 우리의 즐거움과 행복이 흘러가야 합니다.

본문 창세기 49장 23~24절에 보면, “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요셉을 힘들게 하는 사람이 요셉의 주위에 많았습니다. 그들은 적개심을 가지고 요셉을 학대했습니다. 마치 활을 겨누듯 요셉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더 강했습니다.

신앙생활하다 보면, 믿음생활을 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주변에 불신 세력이 얼마나 많습니까.
요셉은 전능자의 손을 힘입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요셉을 붙들어주셨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힘들게 하는 것은 사람도 아니고, 환경도 아닙니다. 우리가 전능자의 도우심을 경험하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는 데서 신앙의 묘미(妙味)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시련의 파도를 타고, 목적지까지 항해하는 법을 체득해야 합니다.
산이 높을수록 골짜기가 깊습니다. 어려운 상황을 극복함으로 인생이 더욱 깊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순풍에 돛단 듯 순탄하게만 흘러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장애물과 복병이 생기고,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마세요. 전능자의 손길이 우리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어려움들을 우리의 힘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실력으로는 세상과 싸워서 이길 수 없습니다. 온갖 술책과 간교함으로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말씀을 붙들고 산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리숙합니다.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간교와 술수, 중상모략 등 온갖 죄악이 가득합니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그 속에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 우리는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세상 사람들을 이기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을 이기려면, 그들보다 한 수 위여야 합니다.
우리의 방식으로는 세상 사람들을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리 떼 가운데 있는 양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이기고 지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요셉의 인생을 보세요. 요셉의 형들은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을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요셉의 힘으로는 그것들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어려움 가운데서 요셉을 빼내셨습니다.

전능자의 손이 보이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삶을 보면, 전능자의 손이 항상 있었습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손을 볼 줄 아는 것입니다.
힘들어도 말씀의 원리와 방법대로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손을 들어주실 것입니다.

본문 창세기 49장 24~25절에 보면,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24절에 보면, 하나님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야곱의 전능자’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25절에 보면,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리고 26절에 보면, “네 아버지의 축복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요셉을 축복하는데, 야곱의 이름이 등장하고, 하나님을 가리켜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요셉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축복은 야곱의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야곱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야곱은 문제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약점 투성이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자기 힘으로 복을 얻으려고 발버둥치고, 잔꾀를 부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그를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태중에 있을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그를 축복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축복하시기로 결정한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면, 그 문제를 고치고서라도 그를 반드시 축복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혀 소망 없는 백성일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구원을 안겨주시고 그를 축복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야곱의 인생을 보면, 하나님께서 왜 야곱을 축복하셨는지 알 수 없습니다. 천국에 가서 하나님께 물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결함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보다 나아서 구원 받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 중에도 훌륭한 사람이 많습니다. 성격 좋고, 매너 좋고, 매력적인 사람이 많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 중에도 성격이 까칠한 사람이 있습니다. 성격이 까칠해도 구원 받았습니다. 이해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보면, 오십보백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자비가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서를 미워하시고 야곱을 사랑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예뻐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은혜 받게 하시는가는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단어입니다.

야곱은 실패 투성이였지만,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야곱을 축복하셨습니다. 후에 야곱이 요셉의 자녀,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하는 것을 보면, 야곱은 두 팔을 엇바꾸어 얹었습니다. 야곱은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 위에 얹었습니다. 이것은 신비로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기로 결정하시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결정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편에서 주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될 것이 안 되고, 안 될 것이 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일반적인 은총을 넘어 특이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구동성으로 안 된다고 말하던 사람들을 무색하게 만드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야곱의 인생처럼, 무엇인가 안 되고, 일이 꼬여 힘들게 살아가는 분이 계십니까? 하는 일마다 어렵습니까?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본문은 그것을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절에 보면,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사람의 머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을 경험합니다. 사람의 머리로는 야곱의 인생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야곱으로 하여금 복을 받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말이 되지 않는 야곱으로 하여금 복을 받게 하시는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드러내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의 권능을 드러내시는 데 있습니다. 인간 야곱은 실패해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려 하셨습니다.
우리의 실수로 인해 우리의 인생이 망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임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후, 하나님과 우리는 공동 운명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편들어주실 수밖에 없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실력대로 우리의 인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실력으로 우리의 인생이 결론날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이후,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우리의 편이 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것을 알면, 우리는 조금 느긋해질 수 있습니다. 별 일이 일어난다 해도, 죽는다고 앓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창세기 49장 24절에 보면,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반석이 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요동하지 않으신다는 의미입니다. 환경으로 인해 요동하지 않으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반석 되시는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목자이시고, 우리를 돌보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했습니다(시 23:1).
우리는 이스라엘의 목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지켜보시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요셉의 삶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요셉의 삶에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요셉을 지키셨습니다. 망할 것 같았지만, 망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야곱의 삶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셨습니다. 요셉의 삶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셨습니다. 그래서 안 될 것 같았던 것을 되게 하셨습니다.

열심만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셔야 합니다. 아주 잘 될 것 같았는데,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안 될 것 같았는데, 막판에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잘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것입니다.
99% 될 것 같았던 일이 안 되는 것은 자기의 힘으로 그 일을 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안 될 것 같아서 눈물 흘리고 금식하며 기도해서 잘 되었을 때에는 우리의 입술에서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열심으로 사는 삶을 끝내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재주와 능력과 열심으로 살던 것을 내려놓으시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살려주십니다.

우리의 열심에 도취되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살지 않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너무 열심히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열심 안에는 불신앙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재주와 능력으로 살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대한 손길 아래 산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에 안정감과 여유로움을 줍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전능자의 손길 아래 있을 때, 세상 사람들이 절대 가질 수 없는 자신감을 갖게 됩니다.

전능자 야곱의 손에 우리의 인생이 달려있다는 것을 믿으면, 별 일이 일어난다 해도, 끄떡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를 붙들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대단한 능력을 가진 아버지의 자녀에게는 힘이 있습니다. 사고를 친다 해도 아버지가 나를 도와줄 것이라는 배짱이 있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이 그런 분이십니다. 야곱이 한두 번 사고 쳤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개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한두 번 도와주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야곱으로 하여금 문제를 뛰어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 자신만 복을 받게 하신 것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까지 복을 나누어주는, 복의 통로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믿음의 거장(巨匠)으로 세우셔서 그들의 자손들을 축복하게 하셨습니다.

쫓기는 인생이 아니라 이끌어가는 인생, 헤매는 인생이 아니라 길을 제시하는 인생, 남의 덕을 보는 인생이 아니라 남에게 덕을 끼치는 인생, 꼬이는 인생이 아니라 풀리는 인생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두려워하지 마세요.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야곱의 생애를 추적해보면, 결론은 하나,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 인생의 결론 역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손길로 우리를 붙들어주십니다.

전능자의 손을 의지하세요. 샘 곁의 무성한 가지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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