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예배설교]시작하신 분이 끝도 책임지신다 Friday Night Sermon

 

제목 / 시작하신 분이 끝도 책임지신다
본문 / 빌립보서 1:3~6

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5.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오늘날 우리는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문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내면에 있는 자아는 욕구를 충족시키라고 부추깁니다.
자아의 욕구는 끝이 없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자아는 우리의 욕구가 채워지기를 원합니다.

연말이 되면, 마음이 괴로운 분이 있을 것입니다. 왜 마음이 괴롭습니까? 자신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자아에서부터 욕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자아는 현대인들에게 우상입니다. 자아는 끝없이 요구합니다. 그래서 늘 목마릅니다.

자아의 욕구가 많은 인생은 만족할 수 없습니다. 끝없이 전쟁을 치릅니다. 그 삶은 불안정합니다. 자아의 욕구가 우리의 삶을 어디로 이끌어갈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이것을 원하지만, 내일은 또 무엇을 원할지 알 수 없습니다. 오늘은 이만큼을 원하지만, 내일은 얼마나 많은 것을 원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만족을 느끼지 못하며 고통 속에 살아갑니다.
세상에서 들려오는 고통의 소리에 귀기울여보면, 모두 자아에 시달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에게 따뜻한 격려를 쏟아놓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른 서신서에서는 볼 수 없는 내용을 빌립보서 앞 부분에 기록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에게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한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에게 감사와 기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본문 5절에 보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기록되어있습니다. 본문 5절에 보면,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빌립보교회가 처음부터 지금까지 시종일관 똑같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가 처음과 끝을 동일하게 유지하고 있는 비결은 그들이 복음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변함없이 그 길을 달려가게 만든 힘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본문 6절에 보면,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바울은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출발점, 그들의 행위의 출발점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의미입니다.

지금 우리가 무엇을 얼마나 열심히 하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열심을 내게 만드는 힘이 무엇인가가 중요합니다.
우리 안에서 나오는 열정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인간적인 열심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사람의 지혜를 동원해도, 그것은 언젠가 동납니다.

중요한 것은 출발점입니다. 내가 시작했는가, 주님께서 시작하게 하셨는가가 중요합니다. 출발지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본문 6절은 시작점을 말합니다. 바울은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예수 그리스도이신가”라고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인생은 다릅니다. 자아로부터 시작한 인생과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인생은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 안에 있는 자아를 다스리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자신의 욕망대로, 충동적으로 살아가려는 우리의 생각을 다스리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 안에 새로운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착한 일을 우리가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우리가 착한 일을 하는가 하지 않는가보다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누구인가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우리 안에서 무슨 일을 하시는가가 중요합니다.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예수의 날까지 착한 일을 이루실 것인데,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분은 우리 안에 좋은 생각과 착한 생각을 일으키십니다. 우리 안에 거룩한 욕구를 불러일으키십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성령께서 도우셔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를 이끌어내셔야 합니다. 진짜 기도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처음에는 내가 기도합니다. 그러나 내가 기도할 때에는 언제나 중언부언합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성령께서 우리를 기도로 이끌어 들이십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성령께서 우리의 귀를 열어주십니다. 말씀하시는 분이 우리의 귀를 열어주십니다.

기도는 우리가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는 것을 따라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기도할 때, 아버지의 뜻을 따라 기도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 안에 거룩한 생각, 착한 생각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개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하나님을 위해 기도하도록,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를 이끌어 가십니다.
그래서 우리 개인의 욕구는 줄어들고, 하나님의 뜻이 내 안에서 점점 커져가게 하십니다.

우리가 실패하는 것은 우리의 갈망이 우리 자신에게 집중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바람이 우리 자신에게 기울어져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집중되어있는 기도를 하고, 자신에게 집중되어있는 삶을 살면, 기쁨이 점점 줄어듭니다.
마음이 휑하고, 마음이 어둡습니까? 내 속에 어떤 갈망으로 채워져 있는지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31). 이것은 단순히 염려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의 초점을 자기 자신에게 두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 얽매이지 않게 하십니다. 바울은 자신의 신변의 문제로 인해 힘들어하지 않았습니다.
‘기쁨의 서신’ 빌립보서를 기록할 때, 바울의 상황이 어떠했습니까? 바울은 감옥 안에 있었습니다. 그는 죄수였습니다. 그는 매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기뻐했습니다. 왜 기뻐했습니까?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에 대해서는 관심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전파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기뻐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힌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 때문에 사도 바울이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불순한 동기를 가지고 열심을 내는 사람들을 보며 언짢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라고 말했습니다(빌 1:18).
사도 바울은 자신이 어떻게 되는가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이 전파되는 것만으로 기뻐하고 기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복음에 참여하기를 열망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자유했습니다.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든지 상관없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비춰질 것인가를 염려하지 마세요. 사람들의 평가에 의해 울고 웃는 삶을 살지 마세요.
우리는 사람들과 비교하고, 사람들을 지나치게 의식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자유가 없고, 기쁨이 없습니다.

우리의 삶의 초점은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나라와 복음 전파에 우리의 삶의 초점이 맞추어져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들의 평가에 목을 매는 체면 문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적인 삶에 있어서도 사람들에게 멋지게 보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 시작된 착한 마음에 우리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 그 마음은 우리 안에 있는 욕구를 억제하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집중하게 하는 생각으로 충만하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거룩한 소원과 생각에 반응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자아의 욕구, 신변 등에 목을 매면, 우리의 삶이 굉장히 피곤해집니다. 그것은 이루어질 수도 없고, 이루어져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착한 생각, 거룩한 생각, 거룩한 기대감, 거룩한 소원을 심어주십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십니다.
내 안에 좋은 생각이 들어오면, 그 생각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확인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착한 동기를 일으키십니다. 무엇을 하는 데 있어서 동기(motivation)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동기가 부여되지 않으면, 우리는 움직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돈을 준다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 해도, 그 일을 해야 하는 궁극적인 이유와 목적을 분명히 깨닫지 않았을 때에는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동기부여입니다. 왜 이 일을 해야 하는가, 마음이 일어나야 합니다. 자기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든 동기가 부여되지 않으면, 오래할 수 없습니다. 공부하는 학생들이 왜 공부해야 하는가를 깨달으면, 스스로 공부하게 됩니다. 그런데 왜 공부해야 하는지, 왜 학교에 가는지를 깨닫지 못하면 제대로 공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억지로 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설복(說服)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감동하게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감동, 감화시키셔서 하나님을 위해 기쁨으로 복음에 동참하게 하십니다.
교회에서 억지로 일한다면,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억지로 봉사하게 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일을 망칩니다.
그러나 복음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감동을 주셔서 동기가 부여되면, 하나님과 관련된
 일이라면 무조건 좋아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시작점입니다. 누가 강요하거나 설득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설득에 의해 동기가 분명하게 부여되면, 그 다음에는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선한 동기를 일으키시고, 악한 동기는 막아주십니다. 불순한 동기, 옛 자아에서 나타나는 잘못된 동기를 물리치게 하십니다. 쓸데없는 욕구가 일어나지 않게 하십니다.
왜 인생이 낭비됩니까? 쓸데없는 일에 우리의 에너지를 낭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잘못된 동기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생각, 어두운 마음이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힘은 자발성입니다.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위해 생명을 바치도록 동기를 부여합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동기를 부여합니다. 복음은 생명을 바칠 만한 동기를 우리에게 부여합니다.
동기가 무엇인가에 따라 우리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복음으로 동기가 부여되어서 무엇인가 하고 있다면, 우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분이 우리를 끝까지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 삶에 동기가 부여되고 나면,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우리 안에 계속 동기를 부여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끝까지 헌신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기꺼이 주님을 위해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은 복음을 경험한 사람에게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반응입니다.
아무런 보상이 없고, 아무도 칭찬하지 않고, 오히려 욕한다 해도, 멈출 수 없게 하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복음입니다.
복음에 의해 설득당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복음이 나를 움직이게 합니다. 복음 하나만으로 충분합니다. 복음이 나를 이끌어갑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을 위해 기쁨으로 일하지 않는다면, 그 일을 언제 그만둘지 알 수 없습니다. 그 일을 하고 있는 동기가 복음이어야 합니다.
다른 것이 일시적으로 일할 수 있게 하겠지만 오래가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박수쳐주고, 선물을 주며 격려하지만, 그것으로는 얼마 가지 못합니다.

빌립보서에 보면, 바울은 감옥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쁨에 차있었습니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억지로 움직이게 하지만, 복음은 기꺼이 움직이게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사역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습이 변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늘 똑같은 마음, 똑같은 얼굴로 섬길 수 있는 것은 복음 때문입니다.

복음의 능력에 사로잡히면, 기쁨이 넘칩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행하신 일이 얼마나 놀라운가를 깨닫는 순간, 미칠 듯이 기쁩니다. 무엇을 아끼겠습니까.
복음이 우리를 기쁨으로 충만하게 할 때, 우리는 지치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복음의 힘은 우리가 느끼는 것보다 더 위력적입니다. 식을 줄 모르는 에너지를 만들어냅니다.
빌립보교회가 그런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 일을 시작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복음 안에서 우리 자신도 놀랄 만한 일이 일어납니다. 열정으로 끝없이 달려가게 만드는 에너지는 복음에서 나옵니다. 이것이 복음의 신비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라고 고백했습니다(행 20:24).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능력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함으로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거룩한 상상력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게 하실 때, 거룩한 상상력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상상력을 일으키심으로 착한 일을 시작하십니다.
믿음의 삶에는 상상력이 동원됩니다. 믿음은 보지 못한 것을 보게 합니다. 믿음의 삶을 살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상상력을 일으키십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눈앞에 보이는 것만 좇던 사람이 영의 세계 속으로 진입하려면, 상상력이 일어나야 합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하다 보면, 우리 안에 주어지는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 중 하나가 상상력입니다. 믿음의 삶은 상상력을 자라게 합니다.
믿음으로 상상력이 자랄 때, 그것이 비전(vision)이 됩니다. 믿음으로 성경을 읽거나 말씀을 들을 때, 상상력이 계발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상상의 세계 속으로 이끌어 들이십니다.

믿음의 세계는 신비롭습니다. 신비로움은 상상력을 불러일으킵니다. 우리가 가보지 않은 곳, 해보지 않은 것에 대한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 미래에 대한 상상력이 생깁니다.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상상하며 현재의 고난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단어들은 상징적입니다. 그러므로 문자적으로 해석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상징적인 언어 속에는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세계가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상징적인 언어를 읽으며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상상하게 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상상력을 펼칩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가보지 않아도 천국을 알 수 있습니다. 천국에 갔다 왔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의 이야기는 거짓말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읽으시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주신 천국을 상상해보세요. 천국에 갔다 왔다고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오히려 상상력이 죽어버립니다.
천국은 사람들의 언어로 표현하는 세계에 갇혀있지 않습니다. 천국은 사람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놀라운 곳입니다.

시는 상징적인 언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시를 읽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됩니다. 요즘은 비주얼(visual) 시대라서 별로 좋지 않습니다.
제가 어릴 때에는 라디오를 많이 들었습니다. 연속극을 눈을 감고 귀로 들으며 장면을 상상했습니다.

성령께서 귀를 열어주시고, 눈을 열어주셔서 새로운 세계를 보게 하십니다. 상상하면서 믿음의 세계가 자랍니다.
엘라 골짜기에서 다윗은 상상력이 뛰어났습니다. 다윗은 어린 시절부터 하늘의 별을 보며 하나님과 대화하며 상상력을 키웠습니다.
다윗은 들판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교제했습니다. 이를 통해 영적 세계가 더욱 실제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그의 눈에 보이는 골리앗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상상력이 커졌습니다. 신비의 세계가 그에게는 현실처럼 다가왔습니다. 그는 믿음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골리앗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시인(詩人)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세계를 크게 느꼈습니다. 그가 믿음으로 상상한 세계가 현실보다 더욱 강력하게 뿌리내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다윗의 삶에서 파워(power)가 되었습니다.

상상력이 자랄 때, 믿음이 자랍니다. 상상력을 통해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기대감이 일어납니다.
기도하면 상상력이 커집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 속에 이루실 것을 기대하게 됩니다. 그것이 꿈이 되고, 비전이 됩니다.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밧모 섬에 갇혀 시련과 고난과 환난 가운데 있으면서도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세계를 상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요한에게 거룩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를 생생하게 바라보았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이 그에게 생겼습니다.

오늘날은 사람들에게 상상력이 현저하게 줄어들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합니다. 그래서 눈을 부릅뜨고 살아가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실재(實在)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상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현대인들은 시를 읽지 않습니다. 이것은 좋지 않은 현상입니다. 시를 읽어야 상상력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시편을 읽어야 합니다. 그런데 시편을 문자적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믿음으로 마음을 열고, 시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의 눈을 여십니다.
시편을 읽을 때, 문자적으로 해석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시편을 읽으며 꿈을 꾸어야 합니다. 생각의 나래를 펼쳐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이 작동되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에만 매달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상상력을 불러일으키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해 우리가 상상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비전이 됩니다. 그리고 비전은 현실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께서 하실 일에 대한 기대감을 갖습니다. 그것이 상상력입니다.
가슴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커져야 합니다. 그때, 현실은 힘들고 어려워도,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서를 기록할 당시, 그는 감옥 안에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감옥 안에서 그가 승리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그가 복음을 위해 달려갈 수 있었던 힘은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는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에 대한 기대감을 가질수록 미래에 대한 상상력은 강력해지고 커져가고 실제화 됩니다. 마치 실제처럼 여겨지기 때문에, 현실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여러분 안에서 일하십니다. 말씀생활과 기도생활을 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세계가 있습니다.
기도할 때와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께서는 내 안에 무엇인가 생각하게 하십니다. 상상의 세계가 일어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상상력을 기르는 법을 훈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시편 62편 5절에 보면,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앞으로 이루실 것에 대한 그림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만 잠잠히 바라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소망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어도, 먹구름 사이로 새어나오는 빛줄기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은 상상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상상력을 가진 예언자였습니다.
현실은 암울했습니다. 예레미야, 에스겔이 보았던 현실은 참혹했습니다. 어두웠습니다. 절망적이었습니다. 기대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현실을 보면, 기대할 것이 아무것도 없고, 칠흑같이 어두운 밤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선지자들은
 어두움을 뚫고 비치는 한 줄기의 빛을 보았습니다. 마른 뼈가 가득한 상황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넘어 군대가 일어나는 것을 꿈꿨습니다. 그 상상력은 하나님께서 일으켜주신 비전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갇혀 매를 맞고 있으면서도 찬송했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찬송할 수 있게 만든 힘이 무엇일까요? 캄캄하고 폐쇄된 감옥에 있었지만, 그들은 하늘로부터 임한 빛줄기를 보았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거룩한 소원, 착한 생각, 거룩한 동기, 거룩한 상상력을 일으키심으로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이루어가십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여러분 안에 일어나는 소원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선한 동기가 일어나면, 그것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시작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고, 새로운 비전을 주셨습니다. 사명을 주셨습니다.
모든 것은 주님으로부터 왔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은 주님으로부터 출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시작하신 분이 끝내십니다. 주님께서 나로 하여금 일을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선한 마음을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선한 동기를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나로 선한 상상력을 갖게 하셔서 시작하게 된 일들은 하나님께서 시작하게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일을 끝내실 것을 확신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담력을 갖게 됩니다. 자신감이 생깁니다. 우리는 시작과 끝을 하나님께서 지배하신다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시작과 끝 사이에 별 일이 다 일어납니다. 그러나 시작하신 분과 끝맺는 분이 동일하다면, 우리는 그분을 신뢰해야 합니다.
주님은 알파와 오메가가 되십니다. 요한계시록 1장 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의 출발은 하나님이십니다. 끝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시작과 마침이 되십니다. 주님께서 끝내십니다. 우리 마음대로 결론나지 않습니다.

소설을 읽다 보면, 이야기가 예상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구성이 뻔하면, 독자(讀者)들이 흥미를 잃고, 읽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재미가 없습니다.
독자가 예상하는 대로 이야기가 진행된다면, 긴장감이 없습니다. 재미없는 소설입니다. 이야기의 구성이 싱겁습니다.
독자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이야기가 흘러갈 때, 독자들은 긴장하고 읽습니다. 작가의 손에 의해 이야기가 결론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독자는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느낍니다. 책을 다 읽을 때까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예측할 수 없을 때, 그 소설은 재미있습니다.
나쁜 사람들이 흉기를 들고 무리를 지어 주인공을 죽이려고 달려오지만, 독자들은 아주 재미있어 합니다. 나쁜 사람이 무리를 지어 주인공을 공격한다 해도, 주인공은 중간에 죽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이 죽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악인에 의해 결론나지 않습니다. 지금 일어난 불행한 사건은 우리의 인생의 운명을 가로막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시작과 끝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라고 자신을 소개하셨습니다. 우리는 시작점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손길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을 잡고 있으면, 아슬아슬할 때가 많습니다. 비가 많이 와서 물이 범람하는 가운데 계곡을 건널 때, 아이가 아빠의 손을 잡으려고 하면 위험할 수 있습니다. 아빠의 손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빠가 아이를 잡으면 안전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잡으셔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안전합니다. 하나님의 손은 강력한 손입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통치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오차가 없으십니다. 하나님의 손을 꺾을 자가 없습니다.

끝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 결정됩니다. 다른 것은 잊어도 됩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죽더라도 객사(客死)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품 안에서 끝나게 되어있습니다.
다윗은 그것을 알았습니다. 시편 23편 4~6절에 보면, 다윗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원수의 목전에 놓인다 해도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자신을 따라다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따라다니면, 소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놓치지 않고 반드시 나를 따라다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끝없는 사랑의 추격자가 되셔서 우리를 놓치지 않으시고, 우리를 붙잡으시고,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지금 일어난 일들과 상황에 의해 우리의 믿음이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자신이 기대하고 예상한 만큼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인해 속상해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삶은 진행형입니다. 하나님께서 끝이라고 하시기 전에는 끝나지 않습니다.

일이 꼬였다면, 반전(反轉)을 일으키시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편에서 보면 힘들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을 재미있게 만들어가십니다.
욥의 삶은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반전시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새롭게 놀랍게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이전보다 훨씬 아름답게 전화위복(轉禍爲福)시켜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현실이 어려울수록 끝이 더 기대됩니다. 하나님 때문입니다.

본문 6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빌립보서 4장 6절에 보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처음과 마지막은 하나님께서 쥐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면 됩니다.
왜 감사할 수 있습니까? 우리로 하여금 시작하게 하신 분의 손에 우리의 끝도 맡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뿐, 더 이상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노력하고 기도하지만,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이 있고,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을 다 했다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영역이 남아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열심히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발 물러나야 합니다. 바쁘게 움직인 손을 잠시 모아야 합니다. 손을 모으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먹 쥔 손을 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호흡을 가다듬으세요. 숨을 길게 내쉬세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귀 기울이세요.
이제 우리의 기도가 달라져야 합니다. 내려놓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우리의 편에서보다 하나님의 편에서 하실 일이 많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기도하며 열심히 살았습니다. 바쁘게 살았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친밀함을 나누어야 합니다.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 초조해하거나 조바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더욱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란다는 것은 단순히 체념하고 기다린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대한 결말을 쥐고 계시는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소망한다는 것은 막연히 상상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어주실 것이라는 강한 기대감을 갖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설정해놓은 높은 꿈을 이루어달라고 하나님을 닦달하는 것이 믿음은 아닙니다.

시편 130편 5~6절에 보면,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기다렸습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바란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세요. ‘하나님께서 꼭 주셔야 하는데…’라고 생각하는 것을 다 내려놓으시고, 하나님께 시선을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시키세요. 하나님만 신뢰하세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하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결정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삶은 우리의 손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수중(手中)에 있습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주님으로부터 시작된 일인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당장 접으세요. 자아의 욕구에서부터 출발된 것, 자아중심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삶에서 출발한 것이 있다면,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시작점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선한 마음, 주님께서 주신 선한 갈망, 거룩한 소원을 붙잡고 달려왔다면, 주님께서 그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기대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나아가면, 우리의 끝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 완성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생각을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소원을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갈망을 점검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고, 그것을 위해 달려왔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반드시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복음을 위해 끊임없이 헌신했던 빌립보교회를 바라보며 사도 바울은 감사하고 기뻐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힘든 감옥 안에 있었지만, 그가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안에 복음을 주신 하나님, 구원을 주신 하나님과 십자가의 은혜에 사로잡혀 달려왔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으로 인해 복음이 진보될 것을 믿고 기뻐하고 감사하며 흔들림 없이 살았습니다.

시작되시는 하나님, 끝을 책임져주실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안에 거룩한 소원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반응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안에서 거룩한 상상력이 날마다 자라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책임져주실 것입니다. 끝도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신뢰하세요. 하나님을 높여드리세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세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끝을 멋지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전능자의 손에 의해 우리의 삶이 완성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우리의 삶을 올려드리시기 바랍니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