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예배설교 / 둘 중 하나만 하라 Friday Night Sermon
제목 / 둘 중 하나만 하라
본문 / 빌립보서 4:4~7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세상을 바라보면, 기대하기보다 염려하게 됩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사람들은 염려하는 데 많은 시간을 사용합니다. 염려가 일상사(日常事)가 되어버렸습니다.
염려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염려하지 않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사람들은 ‘이 고비만 잘 넘기면, 모든 일이 잘 될 거야. 이제 염려하지 않아도 될 거야.’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 고비를 넘기고 나면, 또 다른 고비가 찾아옵니다.
염려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엄밀하게 들여다보면, 이 세상은 염려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인 것처럼 보입니다.
새로운 한 해를 기다리고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두려움과 염려가 섞여있는 모습을 봅니다. 신문이나 뉴스를 보면, 새로운 한 해도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합니다.
그리고 향후 10년 동안 한국은 거대한 소용돌이 안에 있을 것이라 전망합니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모든 영역에 있어서, 한국 교회 또한 10년 동안 어떻게 변할지 짐작할 수 없습니다.
염려는 인간의 삶에서 떠난 적이 없습니다. 시대마다 염려의 주제가 조금씩 바뀌고 있습니다. 염려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나이별로 염려하는 것이 다릅니다. 직업이 없을 때에는 직업이 없는 것으로 인해 염려합니다. 그러나 직업을 갖게 되면, 또 다른 염려가 찾아옵니다. 마치 기다리고 있다가 나타나는 것처럼, 우리에게 정확하게 찾아옵니다.
염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면, 멋진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염려 때문에 낭비하는 에너지와 시간은 엄청납니다. 감정적으로, 정신적으로 소모되는 에너지가 대단합니다.
그리고 염려는 또 다른 부작용을 낳습니다. 특히 연말이 되면, 염려가 많이 쌓입니다.
부모는 자녀에 대해 늘 염려합니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염려가 언제쯤 끝날 것 같습니까? 사업하는 사람들의 염려가 언제쯤 끝나겠습니까?
나이든 분들은 건강을 염려하십니다. 그것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학생들에게는 시험에 대한 염려가 있습니다. 학생으로 있는 동안에는 계속 염려합니다. 불안정한 경제 여건으로 인해 계속 염려하며 살아갑니다.
주변 환경을 보면,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학생이든 어른이든 청년이든 남자든 여자든 직장인이든 누구든지 염려하며 살아갑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신 분들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 때문에 염려합니다. 그런데 아이를 낳으면, 아이로 인해 염려하게 됩니다.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주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31~32). 염려를 이방인과 제자를 구별하는 구별점으로 보셨습니다.
제11계명이 있다면,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일 것 같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주제입니다. 우리가 염려하지 않는다면, 불신자와 뚜렷하게 구별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염려하는데, 우리가 염려하지 않으며 살아간다면,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正體性)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흉내 낼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염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27).
염려는 우리가 어디에 속한 자인가를 확증시켜줍니다. 염려는 우리가 믿음의 길을 갈 것인가, 불신앙의 길을 갈 것인가를 선택하는 기준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운명처럼 붙어 다니는 염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단순히 우리를 격려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26, 28).
이 말씀을 보면, ‘내가 지금 얼마나 힘든데, 새를 보고 꽃구경할 시간이 있나. 여유가 있어야 새도 보고, 꽃도 보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은 우리가 순종하기 어려운 주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본문 4절에 보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본문 5절에 보면,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본문 6절에 보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주제입니다.
첫째,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항상’ 기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둘째,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알게 하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두 사람에게나 가족에게라면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셋째,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단순히 염려하지 말라고 기록되어있다면 좋겠는데,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두 불가능해보입니다. 마치 에베레스트 산의 정상(頂上)을 오르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이 세 가지를 이룰 수 있다면, 그곳은 천국입니다.
마치 그림의 떡처럼 보입니다. 항상 기뻐하는 삶,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나타내는 삶,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곳은 천국입니다.
때때로 염려하지 말라, 가능한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어느 정도 지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아무 것도’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영어성경에 보면, “Do not be anxious about something”라고 기록되어있지 않고, “Do not be anxious about anything”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과연 이것이 가능합니까. 사도 바울이 치열한 인생살이를 모르고 말한 것은 아닙니까? 사도 바울은 결혼하지 않아서 현실감이 떨어지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삶을 가볍게 보고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무리한 강요인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이 “가급적 염려하지 말라”라고 말했다면, 우리가 화나지 않을 것입니다. 혹시 성경을 잘못 읽은 것은 아닌가 하여 눈을 닦고 다시 봐도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여기에서 걸려 좀처럼 뒤로 넘어갈 수 없습니다.
매일매일 밀려오는 수많은 문제들 속에서 숨 막히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본문의 말씀은 현실의 삶과 동떨어져있는 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 수백 가지 염려가 몰려오는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니….
이런 본문을 읽을 때에는 그냥 읽고 지나가버립니다. 현실에 와 닿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현실과 거리가 멀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와 상관없는 말씀으로 여깁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불가능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말한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의 기록은 무책임하게 내뱉는 넋두리가 아닙니다. 진리에 대한 무게를 느껴야 합니다.
이것은 현인(賢人), 성인(聖人)이 말한 것이 아닙니다. 공부를 많이 하여 학식이 있는 사람, 경륜(經綸)이 높은 사람이 말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진중한 태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해야 합니다. 현실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말씀이라도, 믿음으로 받아들이려는 태도로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을 수 있는 답을 이 말씀 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답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그러나 가능합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두 가지 주제를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는 소극적인 주제이고, 하나는 적극적인 주제입니다.
소극적인 주제는 “염려하지 마라”이고, 적극적인 주제는 “기도하라”입니다.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염려’이고,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기도’입니다.
본문에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은 기도와 연결되어있습니다.
기뻐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염려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염려의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 본문에서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은 염려의 대항마로 기도를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무 것도’와 ‘다만 모든 일에’ 이 두 가지 표현을 대칭적으로 사용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염려와 기도, ‘아무 것도’와 ‘다만 모든 일에’를 대칭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염려와 기도는 서로 반대편에 놓여있습니다. 하나를 붙들면, 다른 하나를 놓을 수 있습니다. 둘 다 붙들 수는 없습니다.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어느 쪽을 붙들 것인가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됩니다. 염려와 기도, 이 두 가지는 서로 반대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염려와 기도는 마치 물과 기름 같습니다. 서로 어울릴 수 없습니다. 물과 기름은 섞이지 않습니다. 따로 분리됩니다. 염려와 기도는 물과 기름 같습니다. 같이 있을 수 없습니다.
미국의 설교가 찰스 스윈돌(Charles Rozell Swindoll) 목사는 “염려의 리스트(list)를 기도의 리스트로 바꾸어라”라고 말했습니다. 염려 내용을 기도문으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염려를 기도로 바꾼다는 것은 우리가 들고 있는, 무거운 염려거리를 하나님의 손으로 옮겨놓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기도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본문 6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굉장히 섬세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기도는 단편적인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매우 디테일(detail)합니다. 굉장히 정교하게 조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본문 6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단어 하나도 놓칠 수 없는 알맹이만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모든 일에 기도와’입니다.
가장 일반적인 것을 먼저 말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하러 교회에 나오는 것 자체가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염려가 일어나면, 주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집안의 공기가 좋지 않습니다. 그런 때에는 창문을 열어서 집안의 공기를 바꾸어주어야 합니다. 환기(換氣)시켜야 합니다.
환기시키지 않으면, 좋지 않은 냄새가 몸에 배입니다. 심한 경우에는 질식할 것 같습니다. 좋지 않은 공기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염려의 환경이 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환기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관심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입니다.
문제가 있을 때에는 기도의 자리에 나아가는 것 자체가 염려로부터 벗어나는 첫 번째 단계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관심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입니다. 평소 우리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세상으로 나아가면, 우리는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립니다. 그렇게 하는 것에 익숙합니다. 하나님께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염려하게 하는 것에 집중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우리의 관심을 의도적으로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입니다.
염려에 싸여있는 사람을 보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인 것처럼 보입니다. 한숨을 쉽니다. 염려거리를 늘어놓습니다. 불신앙적이고 부정적인 말을 합니다.
마치 밀폐된 공간에 좋지 않은 공기가 가득 차는 것 같습니다. 그 속에서 염려가 더 자랍니다. 염려가 무럭무럭 자랍니다.
우리는 빨리 하나님께로 방향을 전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염려의 자리에 앉아있지 말아야 합니다.
염려의 자리에 둥지를 틀고 앉아있는 것처럼 미련한 짓은 없습니다. 우리가 무슨 재간으로 이길 수 있겠습니까.
계속 염려하고 있다는 것은 자신이 추구하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보면, 염려는 우상을 숭배하는 행위와 같습니다.
우상숭배가 무엇입니까? 주목하여 바라보는 것입니다. 계속 돈만 생각하거나 자녀만 바라보고 있는 것은 우상숭배입니다. 염려하는 형태의 우상입니다. 자신의 건강문제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한다면, 자신의 몸이 우상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관심을 돌리는 것입니다. 염려로부터 빠져나와 하나님을 주목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의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염려는 주님의 손으로 옮겨집니다.
둘째, 간구입니다.
간구(懇求)는 기도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것입니다. 집중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기도라기보다는 집중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께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로 방향을 튼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께 집중(concentrate)해야 합니다. 주님께 마음을 쏟아내어야 합니다.
염려가 무엇입니까? 생각이 분산(分散)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나누어진(double-minded) 상태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산란(散亂)합니다. 삶이 굉장히 힘듭니다.
염려가 많은 사람을 보면, 안정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고를 자주 일으킵니다. 실수를 자주 합니다. 정신없이 행동합니다. 마음이 깨어졌기 때문입니다.
간구는 기도의 적극적인 형태입니다. 그러므로 가볍게 기도하고 끝내어서는 안 됩니다. 기도가 깊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훈련이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깊이 기도하지 못하고, 얄팍하게 기도하는 데 머뭅니다. 기도가 깊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염려를 기도로 막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기도 속으로 깊이 들어가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염려 반, 기도 반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기도하기 위해 앉아있지만, 염려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런 것은 간구라고 할 수 없습니다. 기도 반, 염려 반인 경우는 기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간구는 기도의 세계에 깊이 빠지는 것입니다. 기도의 세계에 깊이 빠진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에 다른 것이 끼어들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깊은 교감(交感)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이에 염려가 끼어들 수 없습니다. 하루아침에 그런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염려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그런데 염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것을 간단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하는 것을 간단하게 생각하고, 가볍게 다루기 때문에, 염려가 몰려오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염려를 차단하려면, 기도 훈련을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기도의 영역에 있어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기를 원합니다. 한국 교회의 성도들이 기도를 많이 하지만, 기도하는 데 있어서 약합니다. 열심히 기도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기도의 깊이에 문제가 있습니다.
새벽기도, 철야기도 등 기도를 많이 합니다. 그런데 기도가 깊지 않습니다. 몰입해서 집중적으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몰입해서 집중적으로 기도하면, 염려가 한 방에 날아가 버립니다. 염려할 일이 생겨도, 기도가 깊어지면 끄떡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교감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간구는 우리가 도달하지 못할 산이 아닙니다. 간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노력해야 합니다. 열심히 노력해야 하고,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찬송가 288장의 가사처럼,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여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훈련 중 하나는 간구하는 것입니다. 교회사 속에서 깊은 기도의 세계 안으로 들어간 기록들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때로는 시간의 개념을 넘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기도에 취하는 경험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과 나 둘만 있는 듯한 경험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나를 흔들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염려가 점점 작아져서 나중에는 없어져버립니다.
셋째, 구하는 것입니다.
필요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염려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삶에 찾아오는 염려에 직면하지 않고, 염려를 무시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염려에 대한 그릇된 태도입니다. 현실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삶이 힘들면, 이럴 수 있습니다. 생각하면 머리가 터질 것 같으니 아예 생각하지 않으려고 염려를 밀어내어버리는 것입니다.
사태(事態)는 심각한데, 친구와 놀러 다니기도 하고, 해외여행을 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면, 다시 염려가 밀려옵니다.
염려는 거부하거나 가볍게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삶 속에서 경험하는 고통의 문제를 무시하고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주님께서는 염려할 만한 사실을 부정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염려를 부정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염려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인정하셨습니다.
염려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직시하고 인정할 때, 구체적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염려하는 문제를 정확하게 직시한 사람은 정확하게 기도합니다.
그러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사람은 모호하게 기도합니다. 왜 기도하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기도하게 됩니다. 염려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실의 문제 속으로 밀고 들어가는 기도를 하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으려면, 모든 일에 기도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염려하게 하는 것들을 놓치지 않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으려면, 모든 일에 대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기도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문제가 너무 커서 하나님께 부담을 드리지 않으려고 기도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불편해 하실까봐 기도하지 않습니다.
매우 오랫동안 응답되지 않은 기도는 더 이상
기도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도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찮게 여겨서 기도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본문 6절에 보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여기서 ‘아무 것도’와 ‘모든 일에’를 주목해서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삶의 모든 영역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상세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삶의 문제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삶의 모든 영역을 직시해야 상세하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신기한 것은, 우리가 기도하지 않은 틈새로 염려가 밀고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적극적으로 기도해야 하고,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비 오는 날, 한 자매가 버스를 기다리다가 다 젖어버렸습니다. 자매는 “하나님, 버스가 오게 해주세요.”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버스 여러 대가 한꺼번에 왔습니다.
그런데 자매가 기다리던 버스가 아니었습니다. 자매는 실망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버스 보내달라고 기도했는데, 왜 응답하지 않으십니까?”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버스 보내줬잖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매는 “제가 타야 하는 버스는 501번인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 501번 버스라고 말하지 않았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재미있게 꾸며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우리가 염려할 때에는 매우 상세하게 염려하는데, 기도할 때에는 매우 엉성하게 기도합니다. 이것이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상세하게 염려하는 것 이상으로 상세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정확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문제는 너무 커서 기도하지 않고, 어떤 문제는 너무 작아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데 있어서 구멍이 매우 많습니다. 그래서 기도일지를 쓰는 것이 아주 유용합니다.
기도 속으로 깊이 들어가 살펴보세요.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엉성한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고통의 문제도 한두 종류가 아닙니다. 우리의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우리가 삶에서 경험하는 상처도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우리가 겪는 스트레스도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우리의 무거운 짐 또한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어두운 감정 또한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우리가 삶에서 느끼는 피곤함, 살아가면서 갖는 욕망, 살면서 느끼는 필요 또한 엄청납니다.
우리가 왜 염려하며 사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이에 반해 우리의 기도는 매우 엉터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실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넷째,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즉 감사기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매우 상세하게 말했습니다. 감사는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것에 대한 반응입니다. 은혜를 아는 자가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는 은혜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뿌리에는 감사가 기본적으로 깔려있어야 합니다. 기도의 바탕에는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감사기도에 대해 아주 많이 강조했습니다. 우리가 염려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 여기에 있습니다.
감사는 하나님께로 향하는 마음입니다. 주신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주신 분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깊어질 때, 염려는 자연스럽게 소멸됩니다. 그러므로 감사와 염려는 같이 있을 수 없습니다.
주석가 윌리엄 헨드릭슨(William Hendriksen) 박사는 “감사가 없는 기도는 날개가 없는 새와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감사가 없는 기도는 하늘에 도달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감사를 놓치는 이유는 현재의 어려움에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전에 베풀어주신 것을 매우 쉽게 잊어버립니다.
시편 103편 2절에 보면,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망각하는 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망각하는 것은 염려를 불러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받은 은혜를 반복해서 회생(回生)해야 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일을 경험합니다. 힘든 일도 겪습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을 많이 경험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금 이 시간 살아있는 것은 기적이요 은혜입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매일 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설교 한 편을 준비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감사기도를 할 때, 대충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매우 상세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깊이 들여다보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을 매우 가볍게 다룹니다.
감사기도를 할 때, 자신만을 보며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만을 생각해도 감사하지만, 가족들을 생각하면, 가족들로 인해 감사한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함께 믿음생활을 하는 교우들을 보세요. 그들로 인해 감사한 일이 많습니다. 교회 공동체와 나라를 생각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것들을 보면, 나라는 존재가 그냥 있는 것이 아님을 느낍니다.
감사가 파도처럼 밀려오면, 염려는 사라져버립니다. 그러므로 소극적으로 감사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기도에서 핵심적인 것은 기도의 대상입니다. 기도의 종류, 기도의 형태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는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나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기도를 받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의 기도에 귀 기울이십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만 가져도, 대부분의 염려는 사라져버립니다.
기도는 우리의 관심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현실 바깥에서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아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잘 이해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삶에서 느끼는 삶의 무게, 살아가면서 느끼는 고통, 우리가 경험하는 치열한 삶의 현장을 주님께서 매우 잘 아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주님이 우리의 삶을 피상적으로 이해하신다면, 주님께서는 ‘염려’라는 말을 사용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삶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삶의 초점이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날 때, 염려가 찾아옵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하나님 없는 삶입니다.
가장 염려스러운 삶은 아버지가 없는 삶입니다. 염려는 무서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없는 삶은 가장 무서운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관심을 살려내는 것입니다. 기도, 간구, 감사의 초점은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필요를 구하더라도,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기도가 우리의 필요로부터 시작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집중함으로 우리의 진정한 필요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기도의 출발은 나의 필요로부터 시작되었지만, 기도가 깊어지면, 하나님께서 내 삶에 가장 필요한 분이시요, 하나님께서 내 삶의 전부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한다면, 우리의 필요들은 중요한 주제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이 채워지면, 그 외의 것은 극복할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배고파서 울고 있습니다. 아이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우유인 것 같습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엄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으로 인해 충분함을 경험하면, 우리의 삶에서 초조함은 사라집니다.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자유함이 생깁니다.
가장 시급하고 절실한 것이 채워졌습니다. 그 외의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면 감사하고, 주시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필요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필요들은 우리를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는 수단일 뿐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께 대한 집중도를 높이는 것입니다. 기도 훈련은 전심으로 여호와의 얼굴을 구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차이는 집중력의 차이로 나타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염려에 대한 집중력을 키우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집중력을 키우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반대로 합니다. 염려에 대한 집중력을 높이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집중하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염려에 대한 집중력을 키우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집중력을 키우면,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집중력이 깊어지면,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염려거리가 아무리 크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평강으로 완벽하게 덮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평강의 강은 거대하게 흐릅니다. 그에 비하면, 우리의 염려는 지류(支流)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평강과 염려는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본문에 보면, 기도 응답에 대한 다른 이야기는 기록되어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확실한 응답이 나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평강’입니다.
본문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라고 시작하여 하나님의 평강이 임하는 것으로 맺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임하면, 모든 것이 끝납니다.
염려는 세속 세계에서 몰고 들어오는 폐수(廢水)와 같습니다. 기도는 하늘의 청정(淸淨) 공기를 우리의 영혼에 밀어 넣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무엇으로 가득 채우시겠습니까. 답은 분명합니다. 고민할 이유가 없습니다. 기도와 염려 중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둘 다 할 수는 없습니다.
염려하며 사시겠습니까? 평강 가운데 사시겠습니까?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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