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저녁예배설교] 믿음은 뒤로 물러나지 않는다 Friday Night Sermon

제목 / 믿음은 뒤로 물러나지 않는다
본문 / 히브리서 10:36~11:1

 

10: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37.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38.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앞으로 나아가는 인생이 있는가 하면, 자꾸 뒤로 물러나는 인생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뒤로 물러나고 있습니까.

본문 히브리서 10장 끝 부분에 보면, 뒤로 물러나는 인생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장입니다.
본문 히브리서 10장 38~39절에 보면,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믿음을 가진 자의 삶은 뒤로 물러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믿음은 뒤를 보는 것이 아니라, 앞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믿음은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미래적입니다.

그런데 자칫하면 뒤로 물러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과거의 아픈 상처들, 아픈 경험들이 우리에게 족쇄가 될 때가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포로가 되어 살아갑니다. 과거의 아픈 경험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이 생각보다 아프게 작용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에 오랫동안 노예생활을 했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간 듯한데, 뒤로 돌아왔습니다. 계속 제자리를 맴돌았습니다.
앞으로 치고 나아가야 하는데, 과거에 노예생활을 했던 경험이 믿음의 삶을 방해했습니다. 그래서 가는 듯하다가 돌아오기를 되풀이했습니다. 늘 제자리를 맴돌았습니다. 그들은 광야 속에 갇혀있었습니다.

과거에 실수한 것을 가지고 자책(自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못난이야. 나는 실패자야. 나는 할 수 없어.”라고 스스로 자신의 점수를 매깁니다.
과거의 실수로 인해 스스로에게 딱지를 붙입니다. 과거의 경험, 과거의 이력(履歷) 속에 갇혀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과거를 돌아보면, 부끄러운 부분이 많습니다. 누구든지 과거를 돌아보면, 성공한 것보다 실패한 것이 더 많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실패가 더 많습니다.
유혹에 넘어간 것, 죄를 지은 것 등 숨기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지난날을 생각하면, 부끄러운 것이 많습니다. 이러한 과거의 경험이 자신을 위축시킵니다.
과거의 경험은 굉장히 강력합니다. 외상증후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과거의 강한 경험은 쉽게 잊히지 않고, 오늘 나의 삶에서 나의 발목을 잡습니다.
그래서 큰 교통사고를 경험한 사람은 운전을 하지 못합니다. 비 오는 날에 교통사고를 경험한 사람은 비가 오면 운전을 하지 못합니다. 비가 오면,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끔찍했던 사고가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자꾸 뒤로 물러서게 합니다. 좋지 않은 일을 경험한 사람은 생각이 부정적이고 어둡습니다.
어두운 생각의 습관이 자신을 꽁꽁 묶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나아가는 듯하다가 뒤로 물러나고, 제자리를 맴돕니다.
사실은 태도에 문제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지 않고 이전의 경험으로 만들어진 태도의 영향을 받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과거로 돌아가지 않고, 미래로 향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뒤로 물러나게 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과거로 돌아가지 않고, 과거로부터 미래로 향하게 합니다. 과거에 어떻게 살았는가는 상관없습니다. 믿음은 미래적인 삶을 살게 합니다.
우리의 삶은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뒤에서 잡아당기는 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쉽지 않습니다.

성도들과 상담해보면, 과거의 힘이 얼마나 강한가를 느낍니다. 과거의 힘은 아주 강합니다. 과거는 어느 시점에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지난날의 실수와 실패, 아픈 경험들을 묵상하고 곱씹게 합니다. 과거의 환영(幻影)에 시달리게 합니다. 과거의 경험, 사건, 좋지 않은 기억들이 완전히 지워지기를 축원합니다.

믿음은 과거로부터 자유하게 합니다. 과거로부터 벗어나게 합니다. 이사야 43장 18~19절에 보면,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광야로 가는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노예생활을 하는 동안 경험했던 어둡고 끔찍한 일들을 기억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새 일을 행하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뒤로 물러나게 하지 않으시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과거의 어두운 기억에 갇혀 사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뒤로 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과거로부터 나오게 하셨는데, 왜 자꾸 과거로 돌아가려고 합니까? 뒤로 물러서면 안 됩니다. 믿음의 삶은 앞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비행기는 후진(後進)하지 않습니다. 비행기에는 후진 기능이 없습니다. 비행기가 이륙하기 전에도 자체적으로 후진하지 못합니다.
믿음의 삶이 그렇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믿음의 날개를 단 사람입니다. 믿음의 날개를 단 사람은 뒤로 날아가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믿음이라는 자동차에는 백미러(back mirror)가 없습니다. 그 기능 자체가 필요 없습니다. 앞으로만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사막에 사는 맹수(猛獸)들을 보면, 눈이 앞에 있습니다. 옆을 보지 않습니다. 옆을 볼 필요도 없습니다. 목표물이 보이면 전진합니다. 앞으로 달려갑니다.
그런데 사슴을 비롯한 연약한 동물들은 눈이 옆에 있습니다. 누가 공격하지는 않는지 살피며 불안해하고 두려워합니다.

믿음은 전진형(前進形)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앞을 바라봅니다. 믿음은 실상(實狀)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실상을 손에 잡은 것처럼 바라보면서 앞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미래를 보는 것입니다.

미술전시회에 갔을 때, 그림을 볼 줄 모르는 사람은 그림을 보면서 할 말이 없습니다. 특히 추상화의 경우에는 뭐가 뭔지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림에는 화가의 사상과 철학이 담겨있습니다. 그냥 그린 것이 아닙니다.

눈이 있다고 해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볼 줄 알아야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은 볼 줄 아는 것입니다. 볼 줄 아는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을 가지면, 미래가 보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으면, 과거가 보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매입니다. 과거로 돌아가려 합니다.

믿음을 가지면, 과거가 지워져버립니다. 미래가 더 강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매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은혜가 임해야 합니다.
과거에 실수했습니다. 실패했습니다. 넘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고, 믿음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미래가 보여야 합니다. 미래가 선명하게 보일수록 담대해집니다. 누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까? 과거보다 미래가 더 선명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기억하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과거를 기억하고 추억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을 통해 미래를 바라보라는 의미입니다. 미래를 바라보기 위해 믿음을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과거의 사건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기억하라는 것은 과거의 추억에 사로잡혀 있으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행하신 사건들을 보면, 하나님께서 미래에 행하실 역사(役事)에 대한 기대감이 생깁니다.
홍해 사건을 깊이 묵상하면, 홍해가 갈라진 사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단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로 바뀝니다.
거룩한 상상력이 일어납니다. 믿음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게 되어, 성경에서 일어난 역사가 내 삶에도 일어날 것 같습니다.

소년 다윗이 거인 골리앗을 넘어뜨린 이야기를 읽다 보면, 가슴이 뜁니다. 다윗의 이야기는 신화(神話)나 동화가 아니고, 실제 사건입니다. 얼마나 통쾌합니까.
이런 이야기를 계속 읽고 묵상하다 보면, 그 이야기가 액자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에 재현(再現)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생기면서 믿음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의 사건을 왜 기록해놓으셨습니까? 단지 재미있게 읽으라고 기록해놓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믿음을 일으키시려는 것입니다.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의 역사가 오늘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을 일으키시려는 것입니다.

성경은 단순한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생명의 책입니다. 진리의 책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살아계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도 여전히 살아있는 생명의 생생한 언어입니다.
성경은 단순한 역사(歷史)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역사(役事)는 계속됩니다. 성경 어디를 보든지 하나님께서 함께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추억하려는 목적으로 기록된 책이 아닙니다. 미래를 향해 마음이 움직이게 하는 책입니다. 믿음으로 성경을 읽다 보면, 미래가 보여야 합니다. 그것이 정상(定常)입니다.
다윗의 이야기,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읽는데, 왜 미래가 보입니까? 아브라함에게 역사하셨던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삶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겠구나.’라고 기대하게 됩니다. 답답한 상황 속에 있지만, 홍해를 여신 하나님을 기대하게 됩니다. 홍해는 오늘도 열립니다. 홍해는 오늘도 갈라질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우리를 미래로 이끌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흥분하게 됩니다. 꿈이 생깁니다. 가슴이 뜁니다.
필립 얀시(Philip Yancey)는 “믿음은 시간이 지나야 이해될 수 있는 것을 미리 믿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가서 직접 보고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미리 보고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것, 지금은 이해되지 않는 것을 미리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미래에 될 일이 미리 보이고, 그것이 믿어지면, 그것을 통해 우리가 힘을 얻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살면, 다른 사람보다 몇 단계 앞선 삶을 살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단계적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삶은 그렇지 않습니다. 점프합니다. 도약이 일어납니다. 출발 지점부터 다릅니다. 믿음은 점프하게 하고, 상상을 넘어섭니다.
기적이 무엇입니까? 논리적으로 도약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성이나 현실적으로 계산 가능한 세상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고, 크게 점프한 것입니다. 그것이 기적입니다. 산술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영역의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은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바라봅니다. 그런데 씨앗만 보면 초라합니다. 별 것 아닙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들은 씨앗 하나를 보면서 그것을 통해 어마어마하게 펼쳐질 농장을 기대합니다.

믿음으로 미래를 바라본다는 것은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실상, 보이지 않는 것을 마치 손에 잡힌 것처럼 보는 것입니다. 마치 실물을 쥐고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환상이 아니라, 실상을 가리킵니다.
믿음의 삶이 깊어지면, 멀리 있는 것이 나에게 가까이 다가온 것처럼 느낍니다.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마치 내 앞에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왜 우리는 미래를 두려워합니까? 까마득하게 잘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믿음을 가지면, 내 앞에 와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절망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절망합니다. 눈앞에 있는 것만 보이고, 멀리 있는 것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절망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멀리서 바라봅니다. 마치 그것이 내 앞에 펼쳐진 것처럼 여깁니다. 그러므로 뒤로 물러날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앞에 있는데, 왜 뒤로 물러납니까?
믿음은 미래를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말하는 것입니다. 미래를 본 사람은 미래에 일어난 일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과거형보다는 미래형을 많이 사용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반석’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장차 게바라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42). 게바는 반석이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베드로는 반석과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반석은 흔들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굉장히 충동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매우 불안정한(unstable)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해 “장차 게바라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왜 이렇게 이름 지어주셨습니까? 현재의 모습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미래의 모습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촐랑거리는 베드로의 모습 때문이 아니라, 사도행전에서 주역(主役)으로 뛸, 견고한 베드로의 모습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게바라는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담대하고 흔들림 없이 복음을 전하는 베드로를 예수님께서 미리 보시고 베드로에게 “장차 게바라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언어를 사용하셨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믿음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현재를 말하지 않고, 미래를 말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과거를 말합니다. “너는 이전에 실패했잖아. 그래서 너는 안 돼.”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폐쇄적이고 부정적이고 비관적(cynical)인 용어를 얼마나 많이 사용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믿음의 세계는 다릅니다. 항상 미래적입니다.

우리에게서 믿음의 언어가 흘러나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믿음의 언어가 흘러나온다는 것은 미래적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결을 맞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결을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하나님과 결을 맞추는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묵상이 깊어지면, 어느 순간, 입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흘러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우리가 엽기적인 소설을 계속 읽으면, 생각도 오염되고, 말도 엽기적으로 사용하게 됩니다. 머리에 들어있는 것이 밖으로 튀어나오게 됩니다.
우리가 그냥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묵상한 말씀이 우리의 입을 통해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여러분의 말을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입에서 흘러나와야 합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전 미문 앞에 앉아있는,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향해 베드로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선포했습니다(행 3:6).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는 계속 성전 미문 앞에 앉아있었습니다. 그에게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40세 정도 되었습니다. 과거에 묶여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를 향해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선포했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선포입니다. 미래적인 말입니다.

놀라운 것은 베드로가 이렇게 선포했다는 것입니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이가 일어난 것도 기적이지만, 더 놀라운 것은 베드로의 변화입니다.
베드로 역시 얼마 전까지 과거에 묶여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그는 디베랴 바닷가로 도망갔습니다.
베드로가 물고기를 잡으러 디베랴 바닷가로 간 것은 과거로의 회귀(回歸)를 의미합니다. 물고기 잡던 과거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는 실패자요 예수님을 더 이상 따를 수 없는 낙오자의 모습으로 과거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과거로 숨었습니다. 뒤로 물러났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는 성령을 받고 난 후 과거에 사로잡혀있지 않을 뿐 아니라, 과거에 사로잡혀있는 사람을 믿음의 선포를 통해 일으켜 세웠습니다.
베드로는 미래를 향해 믿음의 눈을 뜬 것입니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이에게만 기적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베드로에게도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과거에 머물러있고, 과거로 도피했던 삶에서 미래를 보고, 다른 사람까지 미래로 이끌어주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여러분, 믿음의 눈을 뜨셔서 과거의 것을 모두 떠나보내고, 앞에 선명하게 보이고, 눈이 열려서 다른 사람까지도 미래로 이끌어주는 단계로 나아가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베드로가 믿음의 눈으로 보니, 나면서 못 걷게 된 이가 일어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렇게 선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배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장차 게바라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미래형을 사용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통해 살아있는 믿음의 형태를 실제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향해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선포했습니다.
베드로는 나면서 못 걷게 된 이의 현재 운명을 말한 것이 아니라, 그가 일어나 춤출 것을 미리 보며 말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믿음의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믿음의 언어를 사용하려면,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골로새서 3장 16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면, 그 말씀이 우리 안에서 흘러나오게 되고, 그 말씀으로 다른 사람들을 권면할 때, 사람들이 힘을 얻게 됩니다. 자신도 모르게 말씀이 흘러나옵니다.
내 안에 가득 차 있는 말씀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말씀이 나오기 시작하면, 그 말씀은 그냥 말씀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말씀이 됩니다.

교역자가 성도의 집에 심방을 가면, 바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성도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동안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물론 심방을 가면서 말씀을 준비해가지만, 성도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성령께서 생각나게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가정에 가장 필요한 말씀이 무엇인지 생각나게 하십니다. 그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그 말씀은 그 성도의 가정에 살아서 역사하시는 말씀이 됩니다. 그 말씀을 통해 힘을 얻습니다. 그 말씀이 성도의 가정을 살립니다.

그런데 말씀이 생각나려면, 먼저 말씀을 많이 읽고 묵상하고 암송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없는데, 성령께서 말씀을 생각나게 해주실 수는 없습니다. 자기 속에 있는 말씀이 흘러나오게 해야 합니다.
내 안에 말씀이 차 있으면, 말씀이 내 삶을 바꿉니다. 믿음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믿음으로 말씀을 읽다 보면, 말씀에 내 속에 충만히 거하게 되고, 말씀이 나를 사로잡고, 내 삶을 바꿉니다. 그리고 그것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저는 목사이기 때문에 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며 말씀 속에 삽니다. 이것이 제게 축복입니다. 독수리같이 날아오르게 하시는 은혜를 경험합니다.
행복한 마음으로 여러분과 말씀을 나눌 수 있는 것은 말씀이 저를 사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얼마든지 설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40일간 금식하신 후,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가셨을 때, 사탄이
 예수님을 공격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입에서 말씀이 흘러나왔습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예수님께서 ‘이때는 뭐라고 말해야 하나’라고 고민하지 않으셨습니다. 머리에서 짜낸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말씀이 흘러나왔습니다. 말씀이 가득 채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말씀을 열심히 읽어야 합니다. 주야(晝夜)로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말씀을 가득 채워야 합니다.
밥 한 끼를 먹지 않으면 배고픔을 느낍니다. 그런데 1주일 동안 말씀을 읽지 않아도 영이 생생하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계속 먹으면, 힘든 상황이 다가와도 말씀으로 힘든 상황을 이겨냅니다. 힘든 상황에 적합한 말씀이 떠오르면, 힘이 납니다. 진리의 힘이 바로 그렇습니다.
말씀의 능력은 엄청납니다. 상황에 맞는 적절한 말씀이 떠오르면, 그 말씀이 힘이 됩니다. 고난의 순간에도 말씀이 나에게 임하면, 그 말씀으로 인해 고난을 넉넉히 이깁니다.
말씀을 믿음으로 받으면, 말씀은 우리를 미래로 이끌어갑니다. 현재는 암울하고 힘들어서 낙심할 수밖에 없지만, 말씀을 믿음으로 받으면, 말씀은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힘이 납니다. 말씀을 통해 미래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입술에서 말씀이 흘러나오면, 그 말씀은 이미 여러분 안에서 능력이 되어있습니다. 그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선포하면,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말씀에 대한 강한 믿음이 생기면, 미래는 이미 열린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읽고 암송하고 묵상하세요.

성경에 보면, 역사서도 있고, 예언서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렵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잘 알려져서 우리에게 익숙한 명구(名句)는 계속해서 읽어야 합니다. 암송해야 합니다. 성경을 암송하고 묵상하고 수시로 입으로 되뇌세요.
기도할 때에도 말씀을 가지고 기도하는 습관을 가져보세요. 자신의 말로 주절주절 기도하지 말고, 말씀을 떠올리며 기도하세요.

조지 뮬러(George Müller)의 기도 방식이 이러했습니다. 조지 뮬러는 기도하기 전에 말씀을 읽었습니다. 말씀을 읽다가 확신이 생기는 말씀이 있으면, 그 말씀을 가지고 기도했습니다. 5만 번 기도응답 받은 조지 뮬러의 기도의 파워는 말씀에서 나온 것입니다.
말씀을 붙잡고 기도할 때, 그 기도는 파워가 있습니다. 기도할수록 말씀에 대한 믿음이 생깁니다. 확신이 생깁니다. 그 확신은 우리를 미래로 이끌어갑니다. 그래서 기도가 강력해집니다.

감사와 불평은 단순히 말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결을 맞출 때, 감사할 수 있습니다.
왜 불평 불만합니까? 하나님과 결이 어긋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결이 맞는가 맞지 않는가에 따라 그림이 달라집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에 대해 기대할 때,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기대 때문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현실만 보고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아멘”으로 반응하는 것은 하나님과 결을 맞추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결이 맞춰지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말씀을 들을 때, “아멘”으로 반응하는 것은 하나님과 결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어느 날 말씀이 우리의 삶 속에서 흘러나오게 됩니다. 그것이 곧 능력이 되고, 현실이 되고, 미래가 됩니다. 그것을 통해 기적이 일어납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서 익어가고 흘러넘쳐서 우리의 입을 통해 선포될 때, 말씀의 능력이 우리의 삶 가운데 실제화 됩니다. 미래를 향해 우리의 삶이 열립니다.

믿음으로 미래를 본 사람들이 순종합니다. 믿음은 미래를 보는 것입니다. 믿음은 말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믿음은 순종을 통해 미래를 향해 갑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을 보면, 믿음이 순종으로 나타났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순종으로 나타났습니다. 아브라함의 눈에 본향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분명히 이루어질 것을 믿음으로 보았습니다.
믿음은 미래를 보게 하고, 미래를 본 사람으로 하여금 순종하게 합니다. 아무나 순종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의 눈이 열리지 않으면, 순종할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 보면, 가나의 혼인 잔치 집에서 마리아의 믿음이 돋보였습니다. 혼인 잔치 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그때 마리아는 믿음의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라고 말했습니다(요 2:5). 마리아는 이미 보았습니다. 앞으로 되어질 일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순종하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순종의 단계에서는 위기를 맞이합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마리아가 예수님께 알렸을 때, 예수님께서는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2:4).
예수님의 싸늘한 반응에 마리아는 당혹스러웠을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려고 할 때, 상황이 묘해지기도 합니다. 마리아에게 두려움이 찾아왔지만, 마리아는 두려움을 이겨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믿음을 강화하여 하인들에게 믿음의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라고 말했습니다.
마리아는 이미 보았습니다. 이미 보았기 때문에 순종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기대하는 마음이 가득 차 있습니다.

믿음으로 미래를 기대하는 사람들은 순종하는 것을 미루지 않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감각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육감(六感), 여섯 번째 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께서 기적을 행하실 것을 예감했습니다.
믿음은 기대감을 갖게 하고, 구체적으로 행동하게 합니다. 그래서 미래를 본 사람들은 행동하는 데 민첩합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을 익히면,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당장 역사가 일어나지 않아도, 믿음으로 사는 법을 익히면, 그것 자체가 축복입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해서 모든 일이 잘 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믿음과 반대되는 상황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익히고 살아가다 보면, 반드시 믿음의 역사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삶의 방식이 다릅니다. 생각하는 태도가 다릅니다.

오병이어 사건을 보면, 빌립은 믿음의 태도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요 6:5)”라고 말씀하셨을 때, 빌립은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요 6:7)”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4:16).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을 훈련시키셨습니다. 믿음을 사용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먹을 것을 주려고 접근하는 사람과 흩어져서 각자 알아서 해결하게 하려는 사람은 태도가 다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이 상황 속에서 제자들이 무엇인가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자세히 보면, 답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먹을 것을 주라”라고 말씀하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창조자이십니다.

교회에서 사역하면서 믿음으로 접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 번 해보자”하는 긍정적인 태도로 접근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은 부정적으로 접근합니다. 항상 부정적으로 이야기합니다. 반대부터 합니다.

야구를 보면, 타율(打率)이 높은 선수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은 방망이를 많이 휘두릅니다. 방망이를 휘두르는 횟수가 많아야 공을 맞출 확률이 높아집니다.
아무리 잘 치는 선수라도 지나치게 신중하면 공은 그냥 지나가버립니다. 삼진아웃 되어버립니다. 이것은 확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태도를 바꾸어놓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을 가지고 있습니다. 삶의 태도가 다릅니다. 관점이 다릅니다. 그래서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산다고 해서 모든 것이 잘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의 태도를 가지고 꾸준히 살면, 확실히 다른 인생이 펼쳐집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가는 길이 다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확신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미래에 대해 긍정적이고 열려있습니다. 무엇이든 해보려고 합니다. 실패하더라도 해보려고 합니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이고 열린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려워도 도전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출발점이 다릅니다. 출발하기 쉽습니다. 무엇이든 시작하는 것이 쉽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무엇인가 시작하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고민하는 시간이 매우 깁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시작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오랫동안 갈등하고 고민하고 주저하고 멈칫거리며 세월을 보냅니다.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는 자신의 묘비명을 스스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묘비에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라고 썼습니다. 우물쭈물하다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우물쭈물하다가 인생이 지나가버렸다는 것입니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아닙니다. 제대로 한 번 살아보고 죽어야지, 사는 것처럼 살지 못하고 죽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제대로 살아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두려울 뿐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시작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쉽게 시작합니다. 이것이 특징입니다.
특별하게 살았던 사람들은 무엇인가 시작하는 데 별로 고민하지 않습니다. 시작하는 것이 쉽습니다. 실패할지 모르지만, 쉽게 시작합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아찔한 일인데, 믿음의 사람은 시도해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쉽게 시작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시작할 때에 고민을 지워버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나중에 돌아보면, ‘내가 어떻게 그 일을 했지?’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저도 그런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저는 이전에 굉장히 소심했습니다. 그런데 제 삶에서 중요한 고비에는 미친 결정을 했습니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가 났는가, 어떻게 그 일을 시작했는지 의문스럽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믿음이 저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믿음의 사람이 많이 필요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앞으로 나아가 있습니다.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습니다.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시작하는 것이 쉽습니다.

순종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보면, 순발력이 있습니다. 다윗은 대단한 순발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엘라 골짜기에서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40일 동안 대치(對峙)하고 있었습니다. 40일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엘라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블레셋 군대를 고함치고 있고, 이스라엘 군대는 벌벌 떨고 있습니다. 어느 쪽도 먼저 행동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소년 다윗이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의 도시락을 가지고 왔다가 그 장면을 보았습니다. 다윗은 막대기와 물맷돌을 가지고 골리앗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순발력을 가지고 사고를 저지른 사람은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은 물맷돌을 들고 전혀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전혀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물맷돌을 고르는 데 시간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아무렇게나 주워들고 갔습니다. 다윗은 이미 이긴 자의 모습으로 골리앗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베드로도 순발력이 있었습니다. 밤에 예수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베드로가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마 14:28).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바로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었습니다. 대단한 순발력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베드로는 우물쭈물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바로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었습니다. 탁월한 순발력입니다. 풍랑이 이는 바다 위에서 주님께서 “오라”라고 말씀하시니 베드로는 바로 배에서 내려서 물 위를 걸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베드로는 풍랑의 높이와 길이를 재거나 따지지 않았습니다. 이 순발력으로 인해 베드로는 쓰임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사도행전에서 주역(主役)이 되었습니다. 그는 사도행전의 전반부를 장식하는 리더가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행동파였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불을 받고 난 후, 그는 온전하게 행동하게 되었습니다.

믿음은 앞으로 내딛는 것입니다. 뒤로 물러서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탁월한 순발력을 통해 드러납니다.
순종하는 데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앞으로 되어질 일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미래가 보이는 사람은 순종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미래에 되어질 일을 보았습니다. 멀리서 본 사람입니다.
현실에서는 약속을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 못했지만,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멀리서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을 예비해놓으신 것이 매우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그들을 가로막는 것이 있고, 어떠한 핍박이 있다 해도 뒤로 물러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그들의 앞에 선명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믿음은 뒤로 물러서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바칠 만한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뒤로 물러나는 사람이 아닙니다. 믿음의 삶은 뒤로 물러나는 삶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앞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나 멸망할 자들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미래를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과거에 붙들리지 마세요. 과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평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과거에 실패한 것을 붙잡고 평가하는 것에 연연해하지 마세요.
과거에 실패한 것은 과거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으로 앞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미래를 향해 담대히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새 일을 시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물쭈물하지 마세요. 믿음으로 현실을 정면 공격하고, 정면으로 승부하세요.
우리에게는 믿음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미래를 말하세요. 미래를 선포하세요. 믿음의 언어를 사용하세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히 채우셔서 말씀이 흘러나가면, 그 말씀이 살아있는 말씀이 되고, 현실이 됩니다.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되고,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가 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기도하는 동안 미래가 선명하게 보이는 은혜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읽을 때, 말씀이 오늘도 현실화되는 약속임을 믿으시고, 미래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두려움 없이 순종의 발걸음을 내딛을 때, 순종이 기적을 낳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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