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금요철야설교]  지키기보다 누려라 August. Friday Night Sermon

지키기보다 누려라

본문 / 요한복음 5:1~18

 

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11.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하니
12. 그들이 묻되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13.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1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8.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본문의 내용은 우리가 잘 아는 내용입니다. 유대인의 명절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본문 1절에 보면, ‘유대인의 명절’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명절이지만, 베데스다 못가에는 수많은 병자들이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명절과 대조되는 장면입니다.
명절에는 잔치가 벌어집니다. 그런데 본문의 카메라는 베데스다 못가를 비추고 있습니다. 베데스다 못가에는 수많은 병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38년 된 병자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데스다 못가는 병자들의 신음소리로 가득했습니다.

본문 3절에 보면, “그 안에 많은 병자”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한 번 상상해보세요. 연못이 있는데, 연못가에 많은 병자들이 누워있습니다. 다리 저는 사람도 있고,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의 신음 소리가 들립니다. 그들은 중증 환자였습니다.

본문 3절에 보면, 이 사람들이 누워서 물의 움직임을 기다렸다고 했습니다. 병이 낫기를 바라며 베데스다 못가에 모여서 신음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세상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세상을 보면, 성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병이 낫기를 바라며 어디론가 갑니다.

본문의 베데스다 못가의 모습은 오늘날 교회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옵니다.
문제가 전혀 없고, 기도제목도 없는데, 갈 곳이 없어 교회에 오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보따리를 풀어놓으면, 기막힌 일들이 많이 나올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물이 움직일 때, 가장 먼저 물속에 들어가는 사람이 병이 낫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는 설(說)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물이 아주 가끔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물이 움직이더라도 물이 움직일 때에 먼저 들어가는 한 사람만 낫는다는 것이 심각한 일입니다.
물이 움직일 때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모두 낫는다면 좋겠는데, 물이 움직일 때에 먼저 들어가는 한 사람만 낫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은 아주 가끔 움직였습니다.

실제로 물이 움직일 때, 베데스다 못가에는 야단법석이 날 것입니다. 정해진 시간이 물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언제 물이 움직일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힘든데, 다른 사람에게 먼저 들어가라고 양보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물속으로 들어가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데스다 못가는 치유의 장소가 아니고, 절망의 장소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끙끙 앓고 있는데, 물이 움직일 때에 먼저 들어가는 한 명만 낫는 그 곳을 소망의 장소라고 할 수 있습니까. 회복의 장소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 곳은 절망의 자리입니다.
먼저 들어갔다가 나온 사람은 자칫하면 사람들에게 맞아죽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곳은 축복의 장소가 아닙니다.
게다가 가끔 물이 움직인다는 것이 더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모두 사실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습니다.

수많은 환자들이 병원에 찾아갔는데, 그 병원에 간 환자들은 가끔 낫는다면, 그곳을 병원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곳은 병원이 아닙니다. 사람을 죽이는 곳입니다.
지금 이곳에 수천 명의 사람이 모여 있습니다. 이곳에 있는 사람 중 단 한 사람만 기도응답을 받는다면, 이곳을 은혜의 자리라고 할 수 있을까요. 강단이 움직일 때에 앞으로 뛰어오는 한 사람만 병이 낫는다면, 뒷자리에 앉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베데스다 못가는 소망의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축복의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은혜의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물이 가끔 움직일 때에 물속에 들어가면 낫는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못가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촉각(觸角)을 곤두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민해져있었습니다. 한 사람을 죽여야 자신이 살 수 있습니다.

본문의 베데스다 못가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것 때문에 서로 싸웁니다.
언제 물이 움직일지 알 수 없고, 물이 움직인다고 해도 죽을힘을 다해 달려가는 것조차 힘듭니다. 죽을힘을 다해 달려갔는데, 다른 사람이 먼저 들어가 버립니다.

본문에 나오는 병자는 38년 된 병자였습니다. 그가 베데스다 못가에 몇 년 동안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만일 이 사람이 38세라면 태어나서부터 이때까지 병을 앓은 것입니다. 병이 오래되어도 너무 오래되었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베데스다 못가에 누워있다는 것은 희망이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끔 물이 움직이고, 기적이 희귀한 것 역시 절망의 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끔 물이 움직이고, 물이 움직일 때에 물속에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만 병이 낫는다는 것은 절망의 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희망이 없습니다. 이미 결론이 나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주님께서는 베데스다 못가에 있는 38년 된 병자를 찾아오셔서 그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누워있는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셨습니다.

주님은 자주 질문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질문이 많이 나옵니다. 창세기에서부터 하나님은 질문하십니다.
디베랴 바닷가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질문하셨습니다(요 21:16).

주님께서 왜 물으셨습니까?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38년 동안 누워있었던 병자에게 질문하셨습니다.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회복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절망을 많이 경험하고 살면, 정신세계가 무너집니다. 일평생 실패를 경험한 사람은 내면세계가 완전히 무너져있습니다.
한 번 실패한 것이 아니라, 서른여덟 번 실패했다고 생각해보세요. 실패를 너무 많이 경험하면, 기도할 수 없습니다. 기도가 나오지 않습니다. 소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초기 감기로 병원에 간 사람에게 의사가 “살기 원하십니까?”라고 묻는다면, 그 의사는 제정신이 아닙니다. 그렇게 물을 수 없습니다. 가벼운 병을 앓는 환자에게는 낫기를 원하는지 묻지 않습니다. 질문할 필요도 없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는 이 질문은 소망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38년 된 병자는 감기 환자가 아닙니다. 죽음의 끝에서 모든 것을 포기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믿음은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로마서 10장 10절에 보면,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먼저, 마음에서 믿음이 일어나야 합니다. 마음에 일어난 것을 입으로 선포해야 합니다. 드러내야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믿음이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입술로 믿음을 선포하셔야 합니다. 마음으로 믿은 것을 입으로 선포하셔야 합니다. 마음으로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38년 된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질문하신 의도는 분명합니다. 그의 안에 믿음을 일으켜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질문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낫게 하실 수 있는 분이 질문하셨습니다. 능력이 없는 사람은 그렇게 질문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질문하시고, 주님은 답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생의 모든 질문에 답하십니다.
주님께서 질문하시고, 주님께서 답도 가지고 계십니다. 질문을 잘 들으면, 질문 속에 답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는 주님의 질문에 38년 된 병자는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무도 그를 못에 넣어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스스로는 나을 수 없는 한계를 가진 인간이라는 의미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은 낫고 싶은데, 실제 상황은 거리가 멀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의 대답 속에는 그의 갈망이 있습니다. 그는 살고 싶은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 보였습니다. 그는 38년 동안 누워있었지만, 여전히 기대하고 갈망했습니다.

우리는 쉽게 포기해버리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너무 쉽게 포기해버립니다. 너무 빨리 결론내립니다.
1년 동안 기도하고 지쳐버립니다. 너무 힘들어합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습니다. 희망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1년 동안 기도하고 결론을 내리면 됩니까?

본문에 나오는, 38년 된 병자는 살아야 한다는 의지가 있었습니다. 의지가 중요합니다. 살 수 있다는 믿음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의지를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믿음의 의지를 가진 사람에게 역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38년 된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실낱같이 작은 믿음이라도 갖고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대단한 믿음이 아니라도 괜찮습니다. 아주 작은 믿음만 가지고 있어도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주님께서는 대단한 믿음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믿음이 아주 작다 해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반응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38년 된 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병자는 즉시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었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상징적인 기적이 여러 번 나옵니다. 기적은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낫는, 본문의 이야기 안에는 놀라운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베데스다 못에서의 치유는 물이 움직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풍문(風聞)이었고 전설이었습니다. 왜 병이 나았는지도 모릅니다. 가끔 기적이 일어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못 가에 모여 있었을 것입니다.
불교에서도 기적이 일어납니다. 타종교에서도 신비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아기를 낳지 못했는데, 절에서 기도하여 아기를 낳은 경우도 있습니다.

못의 물이 움직인 후에 물에 먼저 들어간 자가 낫는다 해도, 물이 움직인 후에 물에 먼저 들어가는 것은 참으로 냉혹한 일입니다.
물이 움직인 후에 물에 먼저 들어가는 것은 가장 성한 사람이라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절실한 중환자가 물에 들어가기 전에 경증 환자가 물에 먼저 들어가게 됩니다. 거기에는 인간애가 없습니다. 정말 나아야 하는, 중환자는 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베데스다, 그곳에는 희망이 하나도 없습니다. 언제인지도 모르게 가끔 물이 움직일 때에 물에 먼저 들어가는 한 사람 외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곳에 찾아오셨습니다. 베데스다의 기적에서 핵심은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명절의 주인공은 그리스도이셨습니다. 명절을 명절답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않으셨다면, 명절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이 자리에 오신다면, 이곳이 명절이 될 것입니다. 축제가 될 것입니다. 잔치가 벌어질 것입니다. 기적의 주인공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들려오는 잡다한 소리에 귀 기울이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그곳으로 가보세요. 그곳에 가면, 희망이 있을 것 같지만, 오히려 더 좌절할 뿐입니다. 우리의 희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기적은 단순한 기적에 불과합니다. 세상에서도 기적이 일어납니다. 기적이 기적으로 끝난다면, 그 기적은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기적이 일어나 병이 나았다 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죽습니다. 생명이 조금 연장되었을 뿐입니다. 그런 기적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별 일이 일어난다 해도,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않으면, 하나의 해프닝(happening)에 불과합니다.

베데스다 못 가에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이야기가 반전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입니다.
38년 된 병자를 못에 넣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모두 자신이 살려고 베데스다 못 가에 왔습니다. 그곳에는 자비가 없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를 도우실 이는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너무 기대하지 마세요. 기대한 만큼 상처를 입을 수 있습니다. 목회자도 믿지 마세요.
막연하게 상황만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물이 가끔 동하는 것에 자신의 운명을 걸어서야 되겠습니까.
상황은 조작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만들 수도 있습니다. 대중의 여론을 따라가고, 세상의 이론을 따라갈 수도 있습니다. 거기에 가면 산다고, 거기에 가야 희망이 있다고 합니다.
거기에 가야 희망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을 만나야 희망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려주십니다. 예수님께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십니다.
교회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목사가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메시아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것입니다. 베데스다 못의 물이 움직여도 그를 물속에 넣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시고, 예수 그리스도만 붙드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는 주님의 질문에 대한 답은 주님께 있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는 주님의 질문은 “네가 나음을 입는 것이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다고 생각한다면, 인생이 헤매게 됩니다. 숱한 날 동안 의미 없이 반복하며 보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않으시면, 세월이 많이 흘러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물속에 들어갈 필요도 없습니다. 물이 움직일 때를 기다릴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주님께서 오시면 됩니다.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이상한 기적을 믿지 마세요.

38년 된 병자가 낫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우리는 여기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본문 요한복음 5장 10절에 보면,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해괴망측한 말을 했습니다.
병이 나아서 병자가 자리를 들고 일어났는데,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일어났다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병자가 일어났으니 병자와 함께 기뻐하고 박수를 쳐줘야 할 텐데, 유대인들은 오히려 병자를 비난했습니다.
이것은 종교의 틀에 갇힌 자의 모습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대한 규칙에 갇혀있었습니다.

안식일에 대한 진정한 정신은 무엇입니까? 묶인 자가 풀리는 것, 억눌린 자가
 자유하게 되는 것, 병든 자가 병에서 놓임을 받는 것이 안식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를 묶고 있는 것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시고, 참된 안식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죄악과 질병, 귀신의 억눌림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38년 된 병자가 나은 것을 보고 딴지를 걸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규칙을 만들고, 규칙을 지키는 것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의 기준, 장로의 유전을 만들어놓고 그것에 매여서 꼼짝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오히려 그것이 신앙이라고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안식일에 이런 일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심중에 의도를 가지고 이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비판할 것이라고 예상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참된 정신을 보여주시려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의 참된 정신은 무엇입니까?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생명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38년 된 병자에게 그냥 일어나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안식일의 규정을 어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이렇게 말씀했을 때, 비난 받을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규칙을 깨뜨려버리셨습니다.

종교생활을 하지 말고, 참된 신앙 속으로, 참된 생명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무엇을 지킬 것인지에 대해 몰두하지 마세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직분을 가지게 되면, 무언가 지키는 것에 집중하게 됩니다. “주일을 지킨다.”라고 애매하게 말합니다. 그 속에는 의무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각종 집회에 참석하는 것도 직분자이기 때문에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라면, 그 속에는 의무감이 들어있습니다. 그것은 종교적 수행입니다.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할 수밖에 없는 의무사항을 준수하는 것입니다.

종교적으로 굳어지면, 주님의 놀라운 기적에 대해 전혀 감동을 받지 못합니다. 38년 된 병자가 일어난 것을 보고 비난하는 것은
 기막힌 일입니다.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역사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일어난 것임을 보지 못하는 유대인들은 38년 된 병자처럼 몸이 마른 자입니다. 영적으로 병든 자입니다. 중증 환자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규칙을 깨뜨리신 것에 대해서 분노하고, 주님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규칙을 지키시지만, 생명 없는 무기력한 종교에 대해서는 역겨워하십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활력, 생동감이 매우 중요합니다. 생생하고 활기가 넘쳐야 합니다. 생동감이 넘쳐야 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간증거리가 넘쳐나야 합니다.
힘들고 아픈 사람이 있으면, 모여서 함께 기도하세요.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는 것과 역사하시는 것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때,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도 그들이 성전 앞을 그냥 왔다 갔다 했습니다. 기도하는 시간이 되어 그들이 성전 앞을 지나갔지만, 그때는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종교적 삶을 살았을 뿐입니다.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무기력하고 고만고만한 삶을 살았습니다. 생명이 하나도 없는 종교적 행위를 습관적으로 반복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성전 앞을 지나가는데, 나면서 못 걷게 된 이가 그들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성령께서 역사하셨습니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향해 베드로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외쳤습니다(행 3:6).

이 말은 “유대 종교여, 누워 있지 말고 일어나 걸으라”는 의미입니다. 기도 시간에 성전 앞으로 수없이 왔다 갔다 하지만,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 종교적 삶으로부터 일어나 걸으라는 것입니다.

신앙에 생동감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나면서 못 걷게 된 이가 일어나서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죽은 종교는 끝났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이런 역사가 일어난다는 의미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입니다.

규칙을 지키고, 정해놓은 시간에 따라 성전에 가서 기도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열심히 교회 다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인생과 같습니다.
구걸하는 사람, 동전을 던져주는 사람 모두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상황은 끝났습니다. 더 이상 소망이 없습니다. 절망적입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이전에는 그랬습니다.

유대인들은 종교적 의식만 넘쳐났습니다. 성전 앞을 왔다 갔다 할 뿐이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38년 된 병자는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하지 못하고 누워있는 것이 그에게 삶이 되어버렸습니다. 절망도 오래되면 굳어버립니다. 절망을 합리화하고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당시에 종교는 무력했습니다. 쓸데없는 규칙만 하나둘 늘어났습니다. 규칙을 철저히 지켰지만, 생명의 역사와 생동감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냥 교회를 왔다 갔다 하지는 않습니까? 주일을 지키는 것에 집중하지 않습니까? 그냥 다니다 보면, 그것이 규칙이 되어버릴 수 있습니다.
새벽기도 하는 것도 힘든데, 금요일에는 철야기도까지 해야 합니다. 지키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지켜야 할 것이 더 생기면 힘들어집니다.
종교적으로 생활하는 사람은 집회가 하나 더 늘어나면 피곤해집니다. ‘누가 철야기도를 만들어서 사람을 힘들게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철야기도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철야기도가 규칙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규칙을 지키려고 하면, 피곤합니다. 그래서 하나둘 빠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주일낮예배만 남게 될지도 모릅니다.
왜 그렇게 될까요? 주일낮예배는 빠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켜야 하기 때문에 지켜야 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재미가 없습니다. 생명이 없습니다.

한국 교회에서 그토록 열심히 기도하던 것이 왜 하나둘 사라지고 희소해졌습니까? 신앙의 감격과 기쁨과 흥분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중에 있는 철야기도는 다가오는 것이 두렵습니다.
새벽기도와 철야기도가 하나의 프로그램이 되어버린다면, 그것이 직분자를 세우기 위한 기준과 규칙이 되어버린다면, 사람들이 지키기는 하지만, 그 안에 생명은 없습니다.
그리고 직분을 받고 나면, 더 이상 참석하지 않습니다. 나온다 해도 눈치 때문에 나오게 됩니다. 그 안에 생명은 없습니다.

규칙을 만들고 지킨다는 것은 매우 무서운 일입니다.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것도 힘든데, 금요일 저녁에 교회에 가서 기도한다는 것이 무거운 규칙이 될 수 있습니다.
나중에는 기도를 인도하던 목회자마저 지쳐서 포기해버립니다. 신나지도 않고, 흥분되지도 않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베데스다 못 가와 같은 곳에서 버티기 어렵습니다.

38년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어려운 풍문, 신화만 떠돌아다닙니다.
철야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래 다니다 보면, 규칙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규칙을 지키는 사람이 아닙니다. 말씀을 규칙으로 지키는 사람이 아닙니다. 말씀을 경험하고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율법의 잣대로 평가하고 정죄하고, 복음의 능력을 상실해버린 신앙인이 아니라, 복음의 한 가운데 들어가 복음이 주는 강력한 은혜의 불길 안에 휩싸여야 합니다.

철야기도가 주는 은혜와 기쁨이 큰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는 철야기도하는 것이 참 좋습니다. 한 달에 한 번 밤을 새며 기도하는 날이 제게는 명절 중의 명절입니다. 자유롭게 설교할 수 있어서 아주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은혜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철야기도에 참석하는 것이 규칙이 된다면, 그냥 왔다가 가면 됩니다. 그러나 철야기도에 나와서 생명의 역사를 체험하고, 역동적인 복음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철야기도에 나와야 직분자가 될 수 있다면, 철야기도가 규칙이 되어버립니다. 기도십일조에 나와야 중직자가 될 수 있다면, 또 하나의 규칙이 되어버립니다. 규칙을 지켜야 직분자가 된다면, 규칙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사람을 속일 수 있습니다. 조직을 속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신앙이 허구에 빠져버립니다. 규칙을 지키는 것이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만일 중ㆍ고등부에서 “철야기도에 참석하지 않으면, 임원이 될 수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만일 임원이 되기 위해 철야기도에 나왔다면, 기도하는 것이 재미있겠습니까?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우리 교회의 중ㆍ고등부 학생들은 철야기도에 자발적으로 나옵니다. 제가 알기로는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생활에 규칙이 많이 만들어지면 안 됩니다. 의무감으로 규칙을 지킨다면, 영적 활력과 생동감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신앙이 어린 신자들에게는 기본적인 틀을 가르쳐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중요합니다. 왜 그것을 지켜야 하는가를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규칙을 지킨다면,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철야기도에 활력이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성도들이 사모해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한 번은 끌려나올 수 있을지 모르지만, 계속해서 끌려나올 수는 없습니다.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봉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직분자이기 때문에 봉사한다면, 봉사가 하나의 규칙이 되어버립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자발성이 없습니다.
직분 때문에, 체면 때문에 주일을 지킨다면, 문제가 심각합니다. 생명의 역사가 없습니다. 오래가지 못합니다.

종교성이 강화되면, 영은 죽습니다. 영이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대해 왜곡된 태도를 가지게 됩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고, 직분을 가지면, 종교적인 체계가 강화될 위험이 많습니다. 그러면 해가 거듭될수록 힘들어집니다.

교회에서는 규칙을 잘 지키는 사람을 좋은 신자로 여기지만, 하나님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주일을 지키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예배하는 가운데, 하늘로부터 생명의 힘을 공급받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지키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배 순서에 참여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배 시간에 하늘이 열리고, 예배를 통해 하늘의 영광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임재에 압도당하고, 부활의 영이 임하여 낙심과 절망이 사라져버려서 용기백배 하여 믿음으로 세상을 향하여 담대히 나아갈 수 있도록, 영적으로 충전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붙들어야 하는 것은 규칙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을 경험하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에 참여해야 합니다. 주님은 규칙에 초점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8년 된 병자가 살아나는 생명의 역사에 초점을 두셨습니다.
그런데 유대교라는 종교적 체계는 집단을 유지하고 보존하지만, 하나님의 역사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절망하는 자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심으로 베데스다 못 가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분석하거나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딴지를 걸면 안 됩니다. “할렐루야”라고 외쳐야 합니다. 우리의 입에서 “할렐루야”가 터져 나와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할렐루야”라는 탄성(歎聲)이 살아나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는 의미 없이 덧붙이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라는 의미의 벅찬 감격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실제적으로 경험했을 때, 내 영혼에서 “할렐루야”라는 탄성이 터져 나오게 됩니다.
‘할렐루야’가 의미 없이 쏟아 붓는 주술(呪術)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종교생활을 하면, ‘할렐루야’가 의미 없이 되뇌는 주문이 되어버립니다.

신앙생활에 ‘할렐루야’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십니다. 할렐루야”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입에서 ‘할렐루야’가 사라지면, 영적으로 아주 위험한 상태에 빠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상황이 어떠한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절망적인 상황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영혼과 우리의 입술을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할렐루야”라고 선포할 수 있다면, 이미 승리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높여드리고, 하나님을 찬양하면, 여러분은 이미 승리한 것입니다. 암 말기라고 할지라도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은 위대하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이미 승리한 것입니다. 죽든지 살든지 상관없습니다.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실 것입니다.

38년 된 병자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므로, 신음으로 가득하던 베데스다 못 가에서 구원의 탄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38년 동안 병으로 고생하던 병자가 나음을 받고, 자리를 들고 일어나면서 외쳤던 ‘할렐루야’는 어떠했을까요?
1년 된 병이 아닙니다. 감기가 나은 것도 아닙니다. 38년 동안 괴롭히던 병에서 나음을 받았을 때, 그의 입술에서 터져 나온 ‘할렐루야’는 다릅니다.
감기가 나아 “할렐루야”라고 외치는 것과 말기 암이 나아 “할렐루야”라고 외치는 것은 다릅니다. 죽기 직전까지 이르러 모든 것을 내려놓은 상태에서 나았을 때 “할렐루야”라고 외치는 것은 다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놀라운 역사가 우리 안에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죽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구원이 무엇입니까? 죽었던 우리가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말기 암이 나은 것이 아닙니다. 죄로 인해 영원히 죽었던 우리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다시 살아났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이 찬양은 그냥 쉽게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입에서 ‘할렐루야’가 터져 나오지 않는다면, 우리의 영혼이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요한복음 5장 1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일이 무엇입니까? 38년 된 병자를 낫게 하신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규칙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이라는 규칙을 지키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안식일의 참된 정신이 살아나게 하고, 죽었던 자를 살아나게 하고, 38년 된 병자를 자리에서 일어나게 하는 것이 주님의 일입니다.
주일에 교회에 오다가 여러분의 가정에서, 여러분의 이웃 가운데, 죽을 위기에 있던 자를 살려내셨다면, 교회에 오지 않았다 해도 주일을 범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일을 하고 계십니다. 쓸데없는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구원의 사건을 일으켜야 합니다.
죽었던 자를 일으키고, 예수님을 믿지 않던 사람에게 예수님을 믿게 하고, 예수님을 믿지만 시시하게 믿는 사람의 믿음을 일으키고, 영적으로 병든 자를 일으켜 세워줘야 합니다. 아직 자라지 않는 영혼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롭게 일으켜서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입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도 그 일을 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 안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생명의 역사가 일어날 때, 우리의 입에서 기쁨과 환희와 감격의 탄성이 터져 나오게 됩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현장에 가보세요.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것은 파격적인 질문입니다. 38년 된 병자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질문입니다.
물이 움직일 때에 서로 물속으로 들어가려고 하고, 누구도 그를 도와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그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스스로 ‘이제 나는 희망이 없어.’라고 규정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유대주의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틀 안에 갇혀있었습니다. 틀에서 벗어나면 죽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안식일’이라는 거대한 틀이 그들을 묶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38년 된 병자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묶여있었고,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오심으로 걷고 뛰고 춤추는 시대가 이미 왔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거대한 유대 종교가 그들을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8:32). 여러분을 묶고 있는, 여러분 스스로 규정하고 있는, 인간이 만든 수많은 규칙 속에서 빠져나오시기 바랍니다.

“목사는 그렇게 하면 안 돼.”, “장로는 그렇게 하면 안 돼.”, “권사는 그렇게 하면 안 돼.”라고 말하며 “이렇게 해야 해”, “저렇게 해야 해”, “이것을 지켜.”, “저것을 지켜”라고 규칙을 만들어놓고 살아갑니다.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신앙의 핵심이 아닙니다.

법궤가 들어올 때, 다윗은 춤을 췄습니다. 그의 아내 미갈은 다윗을 비난했습니다. 왜 비난했을까요? 미갈은 왕실의 규칙을 너무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왕실의 기준으로 보면, 미갈의 말이 맞습니다. 왕이 바지가 내려올 정도로 체통 없이 춤을 추다니…. 고대 사회에서 왕실의 기준이 얼마나 엄격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왜 창녀와 세리 등 그 당시에 무시당한 사람들을 좋아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세리들과 창녀들과 함께하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그들과 어울리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창녀, 세리와 어울리셨습니까? 그들은 규칙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창녀와 세리, 죄인에게 무슨 규칙이 있겠습니까. 그들은 아무 규칙 없이 살아왔습니다. 그들은 격식 없이 주님을 맞아들였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과거가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거부 없이 받아들이면서 모든 것이 깨어졌습니다.
그를 묶고 있던 종교적 틀이 더 이상 그를 붙잡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복음이 역사하는 현장을 보세요. 우리가 만들어놓은 기준과 규칙에서부터 빠져나오셔야 합니다. 우리가 만들어놓은 선을 지워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만들어놓은 수많은 고정관념을 깨뜨려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밤을 새며 기도하는 것도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는 초저녁에도 기도하기 힘든데, 밤을 새며 기도하는 것이 가능할까’라는 생각은 고정관념입니다. 안 될 것 같은데, 잘 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안 된다고 했지만, 잘 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철야기도가 이 시대의 교회의 대안인 줄 믿습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승부를 걸어야 합니다.

철야기도에는 기준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올 수 있습니다. 강요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저는 억지로 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억지로 할 필요가 없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은 기뻐 뛰고 춤추며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기도하고 싶어 합니다. 영적 갈증을 느낍니다. 사람들은 마음껏 기도할 수 있는 곳을 찾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불이 꺼지면 안 됩니다. 교회는 불을 밝혀야 합니다.
세상에는 24시간 영업하는 곳이 많습니다.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 밤을 새며 24시간 영업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주일에 한 번 예배드리고 불을 꺼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한국 교회 중에도 주일오후예배가 없는 교회, 철야기도가 없는 교회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새벽기도마저 하지 않는 교회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춤추는 곳에 가보세요. 그곳은 새벽 2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모여든다고 합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춤추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천국의 춤을 춥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구원 받은 것을 기뻐하며 춤을 춥니다.
세상 사람들은 밤늦게까지 놀고 나면 허무함을 느끼지만, 우리는 밤을 새며 기도할수록 오히려 기쁨을 느낍니다. 밤새도록 찬양을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38년 된 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시면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시면,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않았던 삶이 벌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의 모습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일으키시기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걷지 못하고 누워 제자리에 맴돌던 삶을 청산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진리 안에서 전혀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스스로 규정하고 묶여있던 삶을 차버려야 합니다. 우리를 감고 있는 것들을 걷어버려야 합니다. 고정관념을 깨뜨려야 합니다. 지키는 자가 아니라, 누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 요한복음 5장 8~9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안식일의 규칙을 깨뜨릴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확실하게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이제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깔고 앉아있어서 냄새나는 자리는 더 이상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과감하게 던져 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과거의 자리에서 뱅뱅 돌아서는 안 됩니다. 운명의 자리를 던져버리면 살 수 없을 것 같아 불안하여 자리를 끌어안고 제자리에서 뱅뱅 돌아서는 안 됩니다.
삶의 반경이 넓어져야 합니다. 자리에 앉아있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전혀 다른 삶으로 이끄시고, 진리 안에서 우리를 자유하게 하실 것입니다.
규칙에 매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서 뛰고 춤을 추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선포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율법을 어겼다고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어긴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일부분만 알았고, 율법을 엉터리로 해석했습니다.
율법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38년 된 병자의 질병을 고쳐주신 것이야말로 이웃 사랑의 모범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이루셨습니다.

삶 속에서 규정을 지키는 것에 매이지 마세요. 여러분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흘러넘치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신앙에 변화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는 밋밋한 봉사, 규칙 준수, 교회 출석, 모임 참여, 종교적 활동을 그만두세요. 38년 된 병자가 일어난 것처럼, 생명의 역사가 여러분의 삶 가운데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물이 움직이기를 막연하게 기다리며 세월을 보내지 마세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물이 움직일 필요도 없고, 물속에 뛰어 들어갈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을 만나면 됩니다. 주님을 경험하고, 주님의 은혜를 맛보고, “할렐루야”라고 탄성을 지르고, 하나님의 능력을 매일 매일 체험하며, 생동감 넘치는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와 고통, 절망과 질병이 치유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기도가 응답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런데 38년 된 병자처럼, 원한다고 말하지만, 진심으로 원하지 않을 만큼 이미 무너져 내려서 하나님에 대한 어떤 기대도 없이 신앙생활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진심으로 원하지 않습니다. 아무런 기대와 소망 없이 교회를 다닙니다. 눈치껏 교회 다니고, 하나님에 대한 기대감 없이 믿음생활 한 것을 청산하셔야 합니다.

교회 출석은 100점인데,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지 오래되었고, “할렐루야”라는 탄성이 나오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역사를 진정으로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점점 종교인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철야기도가 있습니다. 철야기도는 규칙 준수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철야기도에 참석한다고 해서 상 주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계속되면, 규칙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8년 된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이미 무너져서 온몸으로 절망을 체득하고, 희망을 끊어버린, 38년 된 병자에게 예수님께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실패를 반복한 사람은 희망의 줄이 끊어졌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종교인의 삶입니다.
그런데 종교인도 규칙을 지킬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피곤합니다. 규칙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습니다.

자리를 들고 일어나셔야 합니다. 밋밋하고 아무 변화 없이, 하나님에 대한 어떤 기대감도 없이, 의식을 반복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생생한 생명의 역사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서 영혼 깊숙한 곳에서 “할렐루야”라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이 회복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안에 그런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입술에서 “할렐루야”가 회복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오늘도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에게 놀라운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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