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철야예배 설교 / 다시 살아나는 힘

본문 / 호세아 6:1~3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호세아 시대는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였습니다. 호세아의 가정은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를 가장 잘 보여줍니다. 호세아의 가정에서 일어난 일은 이 시대의 영적 상황을 보여줍니다.
호세아의 아내 고멜은 음란한 여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에게 음란한 여인 고멜과 결혼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가 막히는 일입니다. 고멜은 호세아와 결혼한 후, 밖에 나가 다른 남자에 의해 임신하고 돌아왔습니다. 기가 막히는 일이 계속 일어났습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왜 그런 곳으로 몰아넣으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행음을 가르쳐주시기 위해 호세아를 시청각 자료로 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명령하신 것은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을 종종 내리십니다.

호세아의 아내 고멜은 밖에서 임신하여 돌아와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호세아 1장 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스르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흩으신다는 의미입니다. 이름의 의미가 좋지 않습니다.

고멜이 또 임신하여 딸을 낳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의 이름을 ‘로루하마’라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호 1:6). 히브리어로 ‘로’는 ‘없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로루하마는 ‘긍휼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고멜이 세 번째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의 이름을 ‘로암미’라고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호 1:9). 로암미는 ‘내 백성이 아니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의 아들과 딸의 이름을 통해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을 알리셨습니다.

간음한 여인과 결혼한 선지자 호세아가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받아들이기 어렵고 곤혹스러운 일을 하게 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고통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이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네가 내 마음을 알겠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고멜은 간음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밖에 나가서 다른 남자에 의해 아이를 임신한 여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멜과 호세아가 함께 살게 하셨습니다. 호세아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네가 내 마음을 알겠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행음에 빠져있음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호세아가 겪고 있는 고통을 동일하게 겪고 계셨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백성들에게 전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백성들에게 드러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자들은 하나님의 아픔을 아는 사람입니다. 선지서를 보면, 선지자들은 그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고통했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눈물의 선지자였습니다. 다니엘, 에스겔을 비롯한 선지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그 시대의 아픔으로 인해 고통했습니다. 선지자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세상 속에 전달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자신이 경험한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고통을 느끼고,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았습니다.

크게 쓰임 받는 목회자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고통을 많이 겪었다는 것입니다. 죽음 직전까지 갔거나 시련과 고통을 많이 겪었습니다.
인생에서 고통의 쓴 물을 경험하고, 밑바닥까지 경험했습니다.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 본 사람이 하나님의 동역자가 됩니다.

십자가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신앙에서 참으로 큰 주제입니다. 대개 십자가를 머리로 이해합니다. 깊은 고통의 끝에서 십자가와 마주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삶에서 고통을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고통을 통과하는 가운데 이해할 수 없는 사건 속에서 뒹굴다가 십자가를 만납니다.

십자가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물론 교리를 통해서는 십자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머리로만 이해한 것이기 때문에, 삶 속에서는 별로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고통의 끝점에서 더 이상 갈 곳이 없을 때, 그곳에서 기다리고 계시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할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놓으신 하나님의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상에서 고통으로 절규하실 때, 고통의 어두운 커튼 뒤에서 울고 계시는 성부(聖父) 하나님을 우리는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은 아무나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을 쉽게 시작하신 분들은 십자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가볍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속에 하나님과 고난이 뒤섞이면,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집니다. 십자가에 아들을 매다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호세아의 고통은 하나님의 고통의 일부일 뿐입니다. 호세아는 자신이 겪는 고통이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인 줄 알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고통의 일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의 고통을 바라보시며 고통하셨습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하나님의 고통에 공감하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이 시작되었습니다.

자신이 당하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고통을 발견하면, 그때부터 인생이 바뀝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보입니다.
목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는 인간의 고통에 다가가는 것입니다. 고통에 다가가다 보면, 인간이 고통하는 것보다 더 크게 고통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호세아가 직면한 고통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인해 고통하시는 것을 살짝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가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구약시대의 선지자처럼, 오늘날의 목회자, 사역자들은 고통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고통하는 사람이 목회자의 눈에 보이면, 그때부터 목회가 시작됩니다.
인간이 당하는 고통에 직면하여 몸부림치다보면, 어떻게 목회할 것인지 보입니다. 고통을 외면하고 목회한다면, 그것은 목회가 아닙니다. 설교자는 세상의 고통을 보는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세상을 보면, 세상이 고통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세상은 절규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만신창이가 되어있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고통이 그 속에 있습니다. 죄로 인해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세상의 모습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이스라엘은 만신창이가 되어있습니다. 호세아 5장 13절에 보면, “에브라임이 자기의 병을 깨달으며 유다가 자기의 상처를 깨달았고 에브라임은 앗수르로 가서 야렙 왕에게 사람을 보내었으나 그가 능히 너희를 고치지 못하겠고 너희 상처를 낫게 하지 못하리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병들었습니다. 상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칠 수 없었습니다. 야렙 왕에게 사람을 보내 도움을 구했지만, 고쳐주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의지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야 병을 고칠 수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이 세상을 보면, 문제가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심각한 상태로 망가져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해결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신적으로 많이 무너졌습니다. 도덕적으로도 상태가 심각합니다. 가정이 휘청거립니다. 가족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지도자들이 무너졌습니다.
우리는 시대의 끝에 서있습니다. 문제는 끊임없이 일어나는데, 답은 보이지 않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 속으로 들어와 있습니다. 빨간 불이 켜져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상처 나고 병들어있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호세아를 보내시고, 호세아를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시대를 진단하셨습니다. 본문의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를 통해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 심플(simple)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모든 것이 깨어졌습니다. 왜 깨어졌습니까? 왜 망가졌습니까? 왜 병들었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떠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치료하실 수 있으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호세아를 통해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떠남으로 모든 문제가 시작되었습니다. 모든 문제의 근원은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 몸살을 매우 심하게 알고 있습니다. 원인은 무엇일까요? 세속화가 원인이라고 말합니다.
세속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세상에 치우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세상이 앉아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무늬만 크리스천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이야기하지만, 삶 속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집 앞에 교패는 붙어있는데, 그 집 안에 하나님의 이름이 없습니다.
성경을 읽기보다는 TV와 신문, 인터넷을 더 많이 봅니다. 말씀보다 돈을 더 많이 묵상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떠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문제를 바로 파악해야 합니다. 가정에 문제가 있다면, 문제의 근원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고,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고, 세상적인 방법을 구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은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우상숭배 속에는 음란이 있습니다. 호세아의 아내는 음란한 여인이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우상숭배는 곧 음란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의 부도덕을 상징합니다.
우상숭배는 영적 음행이고, 음행은 육체적 음행입니다. 영적으로 타락하면, 육체가 타락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음란에 빠진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매우 음란합니다. 가정이 무너지는 이유 중 하나가 성적 타락입니다. 음란이 노골적인 사회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말할 필요도 없고, 교회도 안전지대가 아닙니다.
왜 이런 일이 자꾸 일어납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면, 우상숭배와 음란만 남습니다. 이것이 호세아서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요즘 부부 사이에서 불륜이 범람하고 있습니다. 남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완전히 미쳤습니다. 제정신이 아닙니다.
가정이 깨어졌습니다. 자녀들이 탈선했습니다. 마음이 깨어졌습니다. 정신적으로 병들어 고통하는 소리가 가득합니다.
정신병이 많이 생겼습니다. 사람이 온전하지 않습니다. 겉은 멀쩡한데, 속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죄악의
 물결을 막을 수 없습니다.
신자들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있습니다. 신자들은 하나님을 따르지 않습니다. 세상에 취해 세상을 따르고 있습니다. 세상을 너무 많이 사랑합니다.
돈이 없는 사람은 돈을 버느라 정신없고, 돈이 많은 사람은 돈을 쓰느라 정신없습니다.

세상을 너무 사랑하니까 교회에서 기도회는 인기 없습니다. 기도하는 자리에 사람들이 모이지 않습니다. 한국 교회에서 기도가 사라졌습니다.
기도회에 사람이 많이 오고 적게 오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구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구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철야기도 하는 것을 편안하게 느끼지만, 철야기도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모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기도에 매력을 느끼지 못합니다. 카페에 앉아 3~4시간은 쉽게 보내지만, 밥을 먹기 위해 많은 시간이 걸려도 먼 곳까지 가지만, 기도하는 자리에는 오지 않습니다. 겉모양만 번지르르 할 뿐, 속은 곪아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세상에 빠져있습니다. 세상을 구하면, 우리는 속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세상을 구하면, 그 결과가 어떠한가를 호세아가 우리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고 세상을 구하면,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본문 호세아 6장 1절에 보면, 호세아 선지자는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라고 외쳤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하나님께서 낫게 해주실 것이고, 하나님께서 치셨지만 하나님께서 싸매어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분단국가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치셨으나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나님께서 싸매어주실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북한은 핵을 들고 있습니다. 전쟁의 위기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치료해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진정으로 치료해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완전한 치료자가 되십니다.

본문 호세아 6장 3절에 보면, 호세아는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라고 크게 외쳤습니다.
이스라엘이 망한 근원적인 원인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보다 나은 지식은 없습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지식이 많습니다. 세상에서도 지식이 없으면 망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투자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 투자하면 망할 확률이 높습니다.
등산에 대한 지식 없이 산을 오르면 죽습니다. 등산하는 사람들은 산에 오르기 위해 계획하고 준비하는 데 산에 오르는 시간보다 많은 시간을 사용합니다.
자동차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 없이 운전할 경우, 사고가 날 수 있습니다. 사고가 나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나무에 대한 지식 없이 나무를 기르다가는 나무를 죽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이런 지식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큰 주제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 인생 전체가 망가지고, 나라가 망가지고, 온 세상이 망가집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근원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처한 상황은 심각하고 근본적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우상숭배에 빠졌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상숭배가 무엇입니까? 자신의 욕구를 형상화시킨 것입니다. 인간의 탐심이 우상숭배를 만들어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려고 하면, 우상숭배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살려줄 것 같은 우상이 아무 힘이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상은 허상(虛像)입니다. 실재(實在)하는 것 같은데, 사실은 실재하지 않는 허구입니다. 우상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해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거기에 목을 맵니다.
사람들은 사랑할 이성을 원합니다. 자기가 찾던 사람을 만나면,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거기에 만족이 있을 줄 알고, 거기에 목을 맵니다. 그런데 깊이 들어가 보면, 그것이 사랑이 아니고, 욕망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사랑과 욕망이 구분되지 않습니다. 사랑과 욕망을 구분할 줄 모릅니다. 사람들은 사랑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구합니다.
그런 관계에서는 비극으로 끝납니다. 사랑을 구한 것이 아니라 욕망을 구했고, 그 속에 탐심이 불타올랐기 때문에 그것이 채워지면 모든 것이 끝납니다.
욕망은 쉽게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또 다른 욕망을 찾아 나섭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사랑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진정한 사랑을 배우지 않고서는 어떤 사랑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십자가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상대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것이 사랑입니다.
세상에서 만나는 욕망은 어떤 것입니까? 상대를 희생시켜 자신을 만족시키려 합니다. 이기적이고 탐욕적이고 육체적이고 자아 중심적입니다.

더 이상 만나지 말자고 하니까 집에 가서 사람을 죽이고, 폭력을 행사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아름답습니다. 그 사랑은 시작도 아름답고 끝도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욕망은 시작도 끝도 비극입니다.

호세아서에서 만나는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와 음란은 이런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자신의 욕망이 추구하는 대로 형상화시켰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우상숭배와 음란이 함께 움직입니다.

세상의 지식은 우리를 살릴 수 없습니다. 많은 지식은 우리를 오히려 망하게 합니다. 마귀는 잘못된 지식을 우리에게 심어줍니다. 잘못된 지식은 우리를 고통으로 몰아갑니다.
전도서는 하나님 없는 지식의 끝이 얼마나 허무한가를 가르쳐줍니다. 세상 지식의 끝은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떠나가게 하고, 허무와 절망에 빠지게 합니다.

요즘 인문학 열풍이 대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는 인문학은 한계를 만나게 됩니다. 인문학도 필요합니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John Calvin), 마틴 루터(Martin Luther) 등은 인문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없는 인문학은 한계를 만나게 됩니다.

인간을 이해하려면,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없는 모든 학문은 결론을 맺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철학은 질문하고, 신학은 답한다.”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지식을 쌓고도 망하는 길로 갑니다. 그런 경우를 많이 봅니다. 이를 통해 세상의 지식이 얼마나 부실한가를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고, 바른 지식을 대하면, 세상이 눈에 보입니다.

우리 교회의 금요철야에 학생들이 많이 참석한다고 이야기했더니 “그 학생들은 공부하지 않고 철야기도하러 나옵니까? 그 학생들은 언제 공부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은혜를 받으면, 공부를 잘하게 되어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을 알면, 지혜의 문이 열립니다. 세상의 이치를 깨닫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면, 내가 누구인가 알게 됩니다. 내가 누구인가 알게 되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분명히 보입니다. 엉뚱한 길로 빠질 수 없습니다.
철야기도하러 나와서 은혜를 받으면, 100% 보장됩니다. 하나님께서 미래를 책임져주실 것입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왜 방황합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엉뚱한 곳에서 시간을 낭비합니다.

그들은 자기가 하고 싶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야 살 것 같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어른이 되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출세해서 성공한 자리에 있지만, 망가지는 인생이 많습니다. 왜 사는지, 무엇을 위해 사는지 모른 채 달리다보니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엉뚱한 곳에 빠집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면, 그것이 우리의 인생을 살립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부터 풀립니다.
하나님을 알면, 인생이 보입니다. 인생 전체가 보입니다. 어디에 삶을 쏟아 부어야 할지 깨닫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갈등하느라 세월을 보냅니다. 왜 갈등이 생기는지 아십니까? 둘 사이에서 머뭇거리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기준이 정확하게 세워져있지 않기 때문에 갈등이 일어납니다. 갈등하느라 세월을 다 보냅니다.
왜 갈등합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기준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준이 되시면, 갈등이 사라져버립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의 인생의 기준이 정확해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인생의 기준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라고 고백했습니다(빌 1:20). 살고 죽는 이유가 그리스도와 복음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갈등하거나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말은 선명했습니다. 그는 이기적이지 않았습니다. 자기중심적이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뜻을 품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혼란스럽지 않았습니다. 선명하고 뚜렷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사수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실패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호세아 4장 6절에 보면,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여기서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이스라엘이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을 버리시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리면, 모든 것이 끝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지식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은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삶에서 어떻게 취급되는가에 여러분의 미래가 있습니다. 말씀을 대하는 여러분의 태도가 여러분의 삶을 결정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여기면, 그 교회는 소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에 놓여있어야 합니다.
다른 것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입니다. 온갖 프로그램을 동원해도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지 않으면 백약이 무효합니다.

말씀은 뒷전에 두고, 이상한 프로그램이나 세미나로 대치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교회학교에서 아이들을 재미있게 해주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말씀을 말씀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아이들이 공부하느라 피곤하기 때문에 캠프 기간만이라도 쉬게 해줘야 한다고, 말씀은 양념 정도로 생각하면, 그 캠프는 죽습니다. 나중에는 부모들이 아이들을 캠프에 보내지 않습니다. 아이를 쉬게 하기 위해 왜 굳이 교회 캠프에 보내겠습니까.

본문 호세아 6장 3절에 보면,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을 알되 힘써 알자고 강조했습니다. 그냥 아는 정도가 아닙니다. 힘써 알자고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함으로 인해 모든 문제가 시작되었습니다.

힘써 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욥은 고난 가운데 마침내 하나님과 대면(對面)했습니다. 욥기 42장 5절에 보면, 욥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욥은 하나님에 대해 귀로 듣기만 한 것이 아니라, 눈으로 하나님을 보았다고 고백했습니다.
고난을 통해 욥은 자신이 이전에 알던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귀로 듣는 것과 눈으로 보는 것은 다릅니다. 욥은 눈이 열려 하나님과 대면했습니다.

야곱의 인생에서 전환점(turning point)은 무엇입니까? 얍복 나루에서 하나님을 온몸으로 만난 것입니다.
야곱은 얍복 나루에서 하나님과 씨름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그곳을 ‘브니엘’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대면했다는 의미입니다.
그 후 야곱의 인생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야곱은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귀로만 들었다가 하나님을 눈으로 본 것입니다.

여호와를 알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현재의 순간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교제를 누리며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성경 속에 기록된 역사적 예수님이 아니라, 오늘의 시간, 나의 삶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있으면, 우리가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어디에 가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운전하고 달려가는 자동차 안에서, 일하는 가운데, 집에서, 때로는 잠결에도 하나님의 임재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둔감하고, 죄 속에 살면,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주 끝에 계신 것 같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의식에 참여해도 마음은 냉랭합니다.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거리가 느껴진다면, 하나님을 알아가는 삶을 산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요한일서 1장 1절에 보면, 사도 요한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보지 못했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상처를 직접 만져보고 싶어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20:27). 도마가 예수님의 상처를 만지도록 예수님께서 허락하셨습니다.
도마는 확실하게 경험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이 시대를 가리켜 ‘감각적 시대’라고 합니다. 온몸으로 느끼는 것을 좋아합니다. 감각은 매우 중요합니다. 좋은 것을 느끼고, 좋은 것을 보고 감동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감각으로 죄를 즐기고, 감각을 쾌락의 도구로 사용하여 망가져버렸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호세아가 우리에게 말하려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하나님을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온몸으로, 모든 감각으로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의 영과 혼으로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과 대면해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느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피상적으로 모호하게 아는 것에 그친다면, 감각적인 세상에서 유혹을 이겨내기 어렵습니다. 머리로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으로는 죄악의 물결을 이길 수 없습니다.

죄악이 넘쳐나는 세상으로 들어가 보세요. 유혹의 현장에 가보세요. 음란한 바람이 불어 닥치면, 웬만한 사람은 정신을 잃습니다. 우리의 감각과 이성이 흔들립니다. 그래서 주저앉아버립니다.
정욕을 부채질하는 곳에 가보세요. 열기가 대단합니다. 세상의 즐거움의 현장에 가보세요. 뜨겁습니다. 화끈합니다. 불길이 타오릅니다.
슈퍼스타의 공연장에 가보세요. 영혼이 떠나갈 정도로 압도하는 힘이 느껴집니다. 사람들은 소리 지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머리로만 아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이해하는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역사적, 교리적으로 하나님을 알아서는 안 됩니다.
이런 상태로 세상으로 나아가면, 모든 감각을 흔들어놓는 세상의 유혹 앞에 무릎 꿇게 됩니다.
10분 기도했는데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상태로는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무슨 재주로 이기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라고 말했습니다(빌 3:8).
여기서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은 예수님을 머리로만 아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을 만큼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와 기름 부으심을 의미합니다. 성령의 열기에 사로잡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매년 가을 광안대교에서 불꽃축제를 합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며 압도당합니다. 그런데 동네에서도 아이들이 불꽃놀이를 합니다. 거기에 눈길을 돌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이들끼리 노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압도당하면, 온 영혼이 사로잡히는 것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세계 안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이것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바울은 세상의 유혹을 이길 만한 강력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고백했습니다.
모든 것을 무가치하게 여길 만큼 하나님을 경험하셔야 합니다. 세상의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영적 경험이 하나님 안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찬송가 몇 장 부르고, 잠시 기도했다고 해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깊이 나아가지 못하면, 우리를 유혹하는 세상 속에 빠져들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열기가 매우 강력합니다. 세상은 너무나 매력적입니다. 세상의 유혹은 강한데, 신앙생활은 지루하다면, 세상을 어떻게 이기겠습니까.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즐거움보다 세상의 즐거움이 강하다면,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성경을 지식으로, 교리로만 알고, 하나님을 뜨겁게 경험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전쟁에서 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은혜는 이 세상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저는 금요철야기도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1주일 동안 세상의 죄악의 물결 속에서 살았습니다. 주일에 1시간 자리에 앉아있는 것으로는 우리는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금요일에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하나님의 임재 속에 푹 빠져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눈이 열려야 합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 경험해야 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듣는 가운데,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힘써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하나님께 빠져들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보다 위대한 것은 없습니다. 더 큰 기쁨을 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안으로 들어가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늘어가기를 축원합니다.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을 알아가세요. 여러분의 고통에만 머물러있지 마시고, 고통을 통해 십자가를 발견하고,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아가야 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용광로입니다. 그 속에 빠지면, 죽고 싶을 만큼 좋습니다. 세상의 하찮은 우상과 즐거움으로부터 우리를 빠져나오게 하고 자유하게 하는 능력이 복음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생활을 대충 해서는 안 됩니다.

금요철야에 오실 때에는 작정하고 오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깊이 알게 되기를 소망하며 오셔야 합니다.
금요철야에 오는 순간, 세상에서 놀던 사람도 하나님의 임재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영적 흡입력을 경험해야 합니다.

금요철야 시간에 압도하는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사로잡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깊은 도를 깨닫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빠져드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세상의 염려와 근심으로부터 자유하게 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금요철야 시간에 하나님의 불이 임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은 세상의 것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날마다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여호와께로 돌이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힘써 알고, 하나님께 돌아가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치유하시고, 회복시켜주실 것입니다. 깨어진 것을 모두 싸매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구하세요. 그것이 가장 위대한 지식이요, 그것이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바꾸어놓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욱 깊이 경험하고 알아갈수록 이 세상의 음란과 우상숭배로부터 자유함을 얻고,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만족과 기쁨, 즐거움으로 회복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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