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철야예배설교] 고난에 응답하라 Friday Night Sermon
고난에 응답하라
본문 / 로마서 5:3~6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우리는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신자든 불신자든 모든 사람은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뉴스를 보면, 하루도 그냥 지나가지 않습니다. 온갖 고난의 이야기가 들립니다.
마치 온 세상이 고통하는 것 같습니다. 세상이 고통의 바다, 고해(苦海)인 것 같습니다. 아이든 어른이든 똑똑한 사람이든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능력이 있든지 없든지 고통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별별 일이 일어납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고난이 없는 무풍지대(無風地帶)에 사는 것은 아닙니다. 설명하기 어려운 고난 가운데 있는 분들이 성도들 중에도 많습니다.
교역자들이 제출한 심방보고서를 보면, 성도들이 경험하는 여러 가지 삶의 문제를 알 수 있습니다. 아픈 사연들이 매우 많습니다. 아픔, 시련, 고난 등의 문제를 가지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에게도 고난은 있습니다. 지금은 고난이 없어도,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연세가 많은 분들에게만 고난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중ㆍ고등학생들에게도 고통스러운 것이 많습니다. 찌르면 눈물을 쏟습니다. 부모는 아이에게 “네가 걱정할 게 뭐가 있냐”라고 말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중ㆍ고등학생들을 만나보면, 인생은 고난이라고 말합니다.
고난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따라 인생이 결정됩니다. 고난이 우리를 지옥과 같은 곳으로 끌고 갈 수도 있고,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축복의 길로 갈 수도 있습니다. 고난이 우리의 삶을 갈라 지옥과 같은 삶을 살게 하던지 천국과 같은 삶을 살게 합니다.
고난에 대한 우리의 행동이 매우 중요합니다. 고난에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두 종류의 행동이 나타납니다.
reaction과 response, 두 종류의 반응이 나타납니다. 두 가지 모두 ‘반응’이라고 해석할 수 있지만, reaction은 반응이라 할 수 있고, response는 응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난에 대한 반응하는 것은 본능입니다. 고난이 찾아왔을 때, 많은 사람들은 힘들어하고 절망합니다. 때로는 분노하고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벽을 치기도 합니다. 이것은 reaction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힘들어서 불평과 원망을 쏟아냈습니다. 이것이 reaction입니다.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본능적인 것입니다.
먼저 그들은 하나님께 반응했습니다. 그것이 reaction입니다. 인간의 본능적이고 자연스러운 행동입니다.
고난이 닥치면, 누구나 이렇게 행동합니다. 어려운 상황이 갑자기 몰아닥치면, 처음에는 누구든지 당황하여 인간적인 행동을 하게 됩니다.
힘듭니다. 죽고 싶습니다. 고통이 클수록 절망이 큽니다. 고통 앞에서 태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고난은 우리의 삶을 한 순간에 뒤집어엎어버립니다. 고난으로 인해 우리의 삶이 뒤엉켜버립니다.
reaction은 상황에 대한 원초적인 행동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reaction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response해야 합니다. 고난에 응답해야 합니다.
response는 reaction과 다릅니다. reaction은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것이고, response에는 자신의 의지가 들어갑니다. 자신의 주관이 들어갑니다. 자신의 해석이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response는 반응하는 것이 아니고 응답하는 것입니다. response는 우리의 의지가 담긴, 믿음의 행동입니다.
reaction은 본능적인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원망하고 불평하고 분노하고 좌절하는 것은 reaction입니다.
response는 reaction과 다릅니다. response에는 믿음이 들어갑니다. 의지적인 행동이 따릅니다. 본능적인 행동을 거부하고, 응답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주도적입니다. 믿음으로 상황을 해석하고, 의지적으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반응(reaction)과 응답(response)은 전혀 다른 인생을 만듭니다.
신자는 고난에 대해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고난에 대해 체념해서도 안 됩니다.
고난에 대해 반응하기만 하면, 궁지(corner)에 몰리게 됩니다. 반응(reaction)은 상황을 바꿀 수 없습니다. 오히려 악화시킬 뿐입니다.
신자는 고난에 적극적으로 맞서야 합니다.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응답해야 합니다. 고난 자체에만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에 대해 하나님께 응답해야 합니다.
우리는 고난에 대해 react하는 것이 아니라, response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응답하는 사람들입니다. 다니엘을 봅시다. 다니엘은 포로로 붙잡혀 바벨론으로 갔습니다.
다니엘의 삶은 용광로를 통과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그를 시기하고 그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고난의 풀무불 속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고난에 react하지 않고, response했습니다. 그는 고난에 믿음으로 응답했습니다.
고난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사람들은 고난 속에서 더욱 강해집니다. 진짜 믿음은 용광로 속에서 더욱 진짜가 됩니다. 그것이 고난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자기를 죽이려는 음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창문을 열어놓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다니엘은 고난 속에서 죽겠다고 한 것이 아니고, 고난에 응답했습니다.
고난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응답하려면, 상황을 잘 해석해야 합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해석을 잘합니다. 잘 해석하면, 해석의 과정 속에서 고난의 덩어리가 작아집니다.
눈으로 보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해석하면, 고난을 다루어서 고난에 대해 응답할 수 있습니다.
상황을 어떻게 재해석하는가가 핵심입니다.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면, 고통이요 절망입니다. 그러나 상황을 재해석하려면, 우리의 믿음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상황을 다르게 볼 줄 압니다. 오랫동안 믿음생활하다 보면, 사물과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angle)이 달라집니다. 관점이 다양해지고 넓어집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을 경험하다 보면, 다른 눈이 열립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믿음생활하다보면, 우리의 시야가 점점 넓어집니다. 사물 하나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을 둘러싼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사물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따로 떨어져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많은 것과 연결되어있으며, 하늘에 닿아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고난의 때에 왜 원망하고 불평합니까?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큰 고난을 당하면,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힘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는 과정에 바로의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아가는데, 앞에 홍해가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뒤에서는 애굽의 군대가 추격해왔습니다. 길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돌변하여 모세를 향해 분노했습니다. 그들은 모세에게 원망과 불평을 쏟아냈습니다.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죽기 직전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길이 없습니까? 길은 있습니다. 하나님이 길이십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길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4:6). 하나님께서는 어디에서든 길을 내실 수 있으십니다.
믿음의 시각(視覺)을 가지면 자유로워집니다. 믿음은 큰 그림을 보게 합니다. 상황만 보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둘러싼 주변의 모든 것을 보게 합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의 생애가 그러했습니다. 그의 삶은 고난으로 가득했고, 모든 것이 꼬일 대로 꼬여있었습니다. 요셉은 고난에 react하지 않고, response했습니다.
요셉이 자신이 당한 고난에 대해 react했다면, 그의 인생은 굉장히 불행했을 것입니다. 오히려 더 꼬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 부지런히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습니다.
렌즈(lens)를 고난에 맞추면, 고난에 집중하지만,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면, 고난에 response하게 됩니다. 말씀과 기도 가운데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혀야 합니다. 눈이 열려야 합니다.
고난 때문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으면 죽을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불을 걷어차고 교회에 나와 말씀을 듣고 찬양을 부르고 기도하다 보면, 눈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고난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렌즈가 바뀌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2~4절에 보면,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환난과 시련에 대해 react하는 것이 아니라, response하라는 의미입니다. 시험이 오는데 기쁘게 여기는 것은 믿음으로 응답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응답하면, 고난은 우리를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난에 대해 응답하면, 우리는 고난의 피해자(被害者)가 아니라, 고난의 수혜자(受惠者)가 됩니다.
우리의 삶에 찾아올 수 있는 수많은 고난에 의해 떠밀려 다니지 않고, 오히려 고난으로 인해 축복의 자리로 나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어떻게 하면 고난에 react하지 않고, response할 수 있을까요?
첫째, 고난에 대한 관점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고난 자체를 다룰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고난에 대한 관점은 바꿀 수 있습니다.
고난에 대한 일반적인 관점은 무엇입니까? 고난을 하나님의 징벌이라 생각합니다. 고난은 불행이요 저주라고 생각합니다. 고난을 당하면,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고난을 당하는가, 하나님은 왜 나를 버리시는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고난에 대해 성경적인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본문 로마서 5장 3~4절에 보면,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데서는 보기 힘든 표현입니다. 환난이 여러 단계를 거쳐 발전해갑니다. 환난 자체는 힘듭니다.
그러므로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표현입니다. 그런데 성경 속에서 자주 발견되는 표현입니다.
성경에서는 고난과 시련을 부정적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환난과 시련에 대해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를 가집니다. 이것은 고난에 대한 응답입니다.
환난 중에 즐거워한다는 것은 환난 자체를 즐거워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환난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 자체는 힘들지만, 인내하며 연단 받는 가운데 마침내 이루어질 긍정적 결과를 기대하며 즐거워한다는 의미입니다.
고난 자체는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환난 중에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은 환난을 통해 하나님의 연단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연단이 끝났을 때에 소망이 이루어질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결과를 바라보며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고난 자체를 보면, 좋은 것이 아닙니다. 고난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고난 속에는 하나님의 축복의 비밀이 숨어있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당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고난으로 인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고난을 당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떠나버리시고, 밀쳐버리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 속에서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고난은 하나님께서 우리로부터 멀리 떠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가까이 오시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고난은 육체의 가시였습니다. 극심한 고통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 번이나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바울이 고난을 당한 것은 바울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다는
의미입니까? 하나님께서 바울을 싫어하셔서 바울에게 고난을 주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과 더 가까워졌습니다. 바울이 약한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더 가까이 계셨습니다.
바울의 약함 때문에 하나님의 강함이 그에게 머물러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고후 12:9).
바울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응답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난으로 인하여 영적으로 더욱 깊어졌습니다.
시편 119편 71절에 보면,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고난에 대해 react하지 않았습니다. response했습니다. 고난에 응답했습니다.
본문 로마서 5장 3절에 보면, 바울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모두 고난에 대한 response입니다.
시편 119편 71절에서 시편 기자는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말씀을 말씀으로 배우고 익히면, 그 후에는 우리의 삶에서 모든 것의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제대로 배우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에는 말씀을 다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고난이 오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고난을 통과하면서 체득한 말씀은 우리의 영혼에 제대로 박힙니다. 그것이 진짜입니다. 그것이 제대로 배운 말씀입니다.
그 외의 것은 알 듯 모를 듯합니다. 삶에 체득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체화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고난으로 인하여 말씀에 눈을 떴습니다. 성경공부를 한다고 말씀에 눈을 뜨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공부 시간에 배우는 말씀은 머리에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고난이 오면, 다 사라져버립니다. 능력이 되지 않습니다. 지식으로 남아있을 뿐입니다. 고난이 왔을 때, 내 편이 되지 않습니다.
시편 119편 67절에 보면,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했는데, 고난을 통하여서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고난을 통과하지 않으면, 삶이 새로워지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고난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보다는 오히려 멀어지기 쉽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를 온전히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인간의 한계이자 축복입니다.
고난당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원망하기 쉽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가.’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중요한 질문이면서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결코 간단한 질문이 아닙니다. 어려운 문제입니다.
고난의 문제는 하나님의 편에서는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는 쉽습니다. 하나님께 어려운 문제가 있겠습니까.
고난의 문제가 우리의 편에서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의 편에서는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에 대해 설명해주셔도 우리는 고난에 대해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고난에 대해 잘못된 관점과 견해를 가지고, 고난 속에서 회의(懷疑)에 빠져 어려움을 당합니다.
세상은 고난이고, 신자는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때로는 의문의 고난을 맞이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고난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고난 속에서 헤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갈등을 겪으며 신앙의 딜레마(dilemma)에 빠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하는 고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사용하셔서 우리의 고난을 다 없애버리시지는 않으십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고통에 대해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인내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으로 인내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response하는 것입니다. 고통을 선택하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신 방식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의 고통을 짊어지시고 죽으신 사건이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고통 가운데 계실 때, 하나님께서는 아들의 고통을 경감시켜주시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고통의 마지막 쓴 잔 한 방울까지 다 마시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끝까지 고통 속에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고통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왜 십자가를 선택하게 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슬픔을 지시고, 우리의 고통을 안으시고, 고난의 한가운데 들어가심으로 우리와 함께하셨습니다.
우리가 고난 받을 때,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고난 받으셨습니다. 우리의 슬픔에 동참하심으로 우리의 고통을 다루시고, 고난의 바다를 우리와 함께 건너가십니다.
십자가는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되셔서 최고의 고통을 경험하심으로 온 인류가 경험하고 있는 고통의 가운데로 뛰어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멀리 서서 팔짱을 끼고 지시하시거나 우리가 고통당하는 것을 바라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통을 겪으심으로 우리가 경험하는 고통의 한가운데 들어오셔서 우리가 경험하는 고통을 이해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고통의 과정을 지나가게 하십니다.
고통은 우리에게 매우 유익한 것이요, 우리를 복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독특한 축복이 고통 속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 속에서 우리를 강하게 만드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난을 당해 넘어지지 않고, 고난을 통해 강하게 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 보면,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난을 이겨내는 가운데 우리에게 영적 근육이 생기게 하십니다.
나이가 들면, 근육이 약해집니다. 근육이 없으면, 서있을 수 없습니다. 관절염이 생기는 이유는 근육이 약해지기 때문입니다. 근육이 받쳐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뼈를 받쳐주는 것이 근육인데, 근육이 생기려면 운동해야 합니다. 청소년들은 특별히 운동하지 않아도 많이 움직이기 때문에 몸이 단단합니다. 그런데 근육이 없으면, 몸이 물렁물렁합니다.
역기나 아령을 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근육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근육(muscle)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근육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근육은 고통을 통해 만들어집니다. 역기나 아령을 들면, 고통을 통해 근육에 미세한 파열이 일어나면서 근육질이 됩니다.
고통을 견뎌내야 합니다. 그래야 근육이 생깁니다. 고통을 피할 수 없습니다.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영적 근육이 필요합니다.
역기를 들 때, 처음부터 무거운 것을 들 수는 없습니다. 꾸준히 들다 보면, 무거운 것을 들 수 있게 됩니다. 포기하고 싶지만, 이겨내야 합니다.
무거운 것을 들고 나면, 처음에는 몸살을 앓습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계속해서 들다 보면, 더 무거운 것을 들 수 있게 됩니다. 조금 무게가 달라져도, 운동하는 사람에게는 큰 차이가 나는 것 같습니다.
고통 없이는 근육이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힘들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근육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편안하게 살면, 성인병에 걸립니다. 먹고 운동하지 않으면, 활동하지 않으면, 몸이 약해집니다. 근육이 풀어져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서있을 수도 없습니다. 근육이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뼈는 있지만, 근육이 없습니다. 뼈를 받쳐주는 근육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피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고난은 필요합니다. 고통을 피할 수 없습니다. 죄로 인해 이 세상에서는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신자든 불신자든 믿음생활을 잘하는 사람이든 못하는 사람이든 고난은 찾아옵니다. 설명할 수 있는 고난, 설명할 수 없는 고난, 불가해(不可解)한 고난 등 별별 고난이 찾아옵니다.
고난은 고난을 통해 이겨내야 합니다. 고난을 이겨내면서 만들어진 영적 근육이 또 다른 고난을 이겨내게 만듭니다. 우리가 믿음의 순례의 길을 걸어갈 때, 고난을 통해 만들어진 영적 근육이 필요합니다.
일평생 별별 사건과 수많은 시련과 고난과 시험이 닥치는데, 우리는 그것을 이겨내야 합니다.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우리는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고난은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이라는 아령으로 영적 근육을 계속해서 키워야 합니다. 우리는 고난이라는 단백질을 먹으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난에 맞서 reaction하는 것이 아니라 response해야 합니다.
고난을 통과하면서 영적 근육이 조금씩 생깁니다. 영적 근육은 한꺼번에 생기지 않습니다. 고난을 이길 수 있는 면역 체계는 한꺼번에 생기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순례의 길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며 고난을 이겨내는 과정을 통해 영적 근육이 만들어집니다.
시련과 환난을 많이 경험한 사람들은 그 시간을 통해 더 강해집니다. 30대 때에 매우 깊은 시련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 받고, 능력을 받고, 영적 근육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사람은 40~50대가 되면 어떤 고난도 가볍게 지나갈 수 있습니다. 웬만한 고난에는 믿음으로 response합니다.
그런데 살아오면서 고난을 전혀 경험하지 않고, 아주 편안하게 산 사람에게 어느 날 고난이 밀려오면, 죽는다고 야단입니다.
영적 근육이 만들어진 사람들은 담력이 있습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와도 넉넉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고난 속에서 믿음이 자랍니다. 고난 속에서 믿음이 깊어집니다. 고난 속에서 성품이 다듬어집니다.
고난을 통하여 천국의 소망이 깊어집니다. 우리 안에 있던 불순물이 고난을 통해 제거되어 순결하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이 순금 같이 됩니다.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만 닮아가게 됩니다.
고난을 통해 우리는 영적으로 강해지고, 담대해집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 인간의 한계를 인식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더욱 깊이 의지하게 됩니다.
이러한 삶의 과정 속에서 영적 근육이 만들어지면, 어떤 시련과 환난에도 즐거워하며 소망 가운데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유토피아(utopia)가 아닙니다. 고난의 무풍지대에 사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고난에 대한 관점을 바꾸는 것입니다.
고난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고난에 대해 긍정적인 관점을 가집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은 가질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고난은 고난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은 고난에 대해 긍정적인 관점을 가질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고난은 저주요 고통이요 불행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렌즈로 보면, 고난이 축복이 된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고, 궁극적 승리를 약속하신 말씀을 믿습니다. 거꾸로 매달로 죽는다 해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책임져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십자가의 끝에 부활의 영광이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고난에 대해 긍정적인 관점을 가집니다.
여러분에게 고난이 와도 분명한 것은 끝에는 승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고난의 과정 속에서 별 일이 다 일어날 것입니다. 우여곡절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유익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소망을 이루게 하시고, 우리를 순금 같이 빚으시고, 우리를 성화(聖化)시켜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닮게 하실 것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고난을 이겨낸 사람과 믿음으로 고난을 통과한 사람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후자(後者)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고난에 react한 사람들은 고난으로 인해 한이 맺혀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하는 고난의 가해자(加害者)가 아닙니다. 성경의 인물을 보면,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 일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욥을 보세요. 사탄이 그에게 시비를 걸었지만,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게 하시고, 욥에게 이전보다 갑절의 복을 주셨습니다. 욥기의 피날레(finale)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욥의 손을 들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고난을 주실 때에는 고난을 통해 반드시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다줄 것을 믿고,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며, 고난에 대한 긍정적인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물론 고난이 오면 힘듭니다. 그러나 무조건 ‘할렐루야’라고 반응해야 합니다. 고난에 대해 긍정적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그리고 피할 수 없는 고난을 인내함으로 영적 근육을 키워야 합니다. 영적 근육을 만드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인내를 통하여 response함으로 영적 근육을 만들어야 합니다.
친구가 나를 위해 아령을 든다고 해서 내 몸에 근육이 생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근육을 만들려면, 내가 운동해야 합니다. 아무도 대신해줄 수 없습니다. 고통을 겪으며 내가 운동해야 내 몸에 근육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난으로부터 옮기실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고통의 바다를 건넘으로 영적 근육을 키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오면 인내해야 합니다.
만일 인내하기를 포기한다면, 지상(地上)에서 살 수 없습니다. 고난에 떠밀려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을 보세요. 그는 고난을 통해 고난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고난마저도 관여하고 도와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영적 근육맨이 된 것입니다.
그는 고난에 적극적으로 응답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고난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고난까지도 도와줄 수 있는 강력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고난이 없기를 바라면, 힘든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고난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시기 바랍니다.
고난을 통과하되 바르게 통과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고난을 믿음으로 다루는 실력이 있어야 합니다.
고난을 통해 영적 근육이 강화되면, 고난을 감당할수록 강력해집니다. 그리고 멋진 그리스도인으로 세워집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 우리에게 의도하신 목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난을 통과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영적 근육이 생기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더 큰 고난이 왔을 때,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기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관점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고난에 대해 긍정적인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어떠한 고난도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이라는 고난에 대한 긍정적인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 고난을 믿음으로 경험해야 합니다.
고난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경험입니다. 남의 고난에 대해서는 아무리 들어도 내가 고난을 당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몸이 아파도 당사자가 아픈 것이지, 내가 아픈 것은 아닙니다. 나는 그저 위로할 뿐입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경험하기 전에는 알 수 없습니다. 직접 겪어보기 전에는 고난의 참관자이지, 고난의 참여자는 아닙니다.
대부분의 경우, 고난의 바깥에서 고난을 해석합니다. 욥의 친구들이 그러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의 고통을 자신의 관점으로 바라봤습니다.
단순히 지식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은 위험합니다. 머리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 믿음은 힘이 없습니다. 생동감이 없습니다.
성경을 열심히 읽어도, 가슴으로 밀고 들어오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가볍습니다. 기도도 가볍습니다. 묵상도 가볍습니다.
영혼의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기도와 찬양은 다릅니다.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찬송이 있습니다. 단순히 은혜로운 찬양이 아닙니다.
고통의 밑바닥에서부터 나오는 찬송은 그냥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묵상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의 깊이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얼마나 깊은 고난의 밑바닥까지 갔는가에 따라 하나님의 사랑의 강도(强度)도 다릅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저주가 아닙니다. 고난을 통해 만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배고픔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에게 밥은 절실하지 않습니다. 식사 때가 되어 먹을 뿐입니다. 그러나 끼니 문제로 고통을 경험해본 사람이 주기도문의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기도하는 것은 의미가 다릅니다.
우리의 신앙은 사변적으로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피부에 와 닿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설교를 듣고, 말씀을 읽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나와 상관없는 말씀처럼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나는 배부르고, 아무 문제가 없는데, 말씀이 귀에 들어오겠습니까.
지식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인식적 지식과 경험적 지식이 있습니다. 인식적 지식은 머리로 아는 지식입니다. 이것은 큰 힘이 없습니다. 여기에 생명을 걸 수도 없습니다.
경험적 지식은 경험을 통해 체득한 지식입니다. 고난을 통해 경험한 지식입니다. 이것은 이론이 아니고, 실제입니다. 실제를 경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방식 중에 중요한 것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겪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책상에서 배운 하나님은 추상적인 하나님입니다. 가까운 하나님이 아니라, 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 더 배우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해야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와 깊이와 높이에 대해 말하며 측량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언제 그것을 경험했습니까? 바울은 십자가를 통해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바울은 고난을 통과하면서 십자가를 만났습니다.
바울이 그의 서신에서 계속해서 십자가를 말한 이유를 아십니까? 십자가와 정면으로 마주쳤기 때문입니다. 그의 삶 한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지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언제 십자가를 깊이 경험하게 됩니까? 평소에는 십자가를 깊이 경험할 수 없습니다. 고난의 깊은 골짜기로 들어갔을 때, 십자가를 만나면, 그 속에 농축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죄인인 나에게 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사로잡혀버립니다.
본문 로마서 5장 5절에 보면,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말씀이 가슴이 꽂힐 정도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은 다릅니다.
본문 로마서 5장 6절에 보면,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왜 우리가 그리스도 앞에서 무너지고 깨어집니까? 예수님께서 고난을 경험하시고 난 후에 우리를 만나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식으로 우리를 만나주신 분이 아니십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바울 사도의 이 말씀은 하나하나가 뼈 속 깊이 파고드는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을 아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우리가 아프다고 할 때, 우리의 아픔이 무엇인지 매우 잘 아십니다.
예수님께서 아신다는 것은 인식적으로 아시는 것이 아닙니다. 경험적인 지식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고통의 한가운데 밀고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게 하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체득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신앙의 노른자위는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우리의 응어리가 풀리고, 아픔이 치유되고, 고통에 대한 답을 얻게 됩니다. 십자가는 독특한 사건입니다. 이 세상에서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형틀에 매달려 가장 극심한 고통을 경험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저주요, 실패의 상징입니다.
이것보다 더 큰 고통은 없습니다. 이것보다 더 큰 저주는 없습니다. 이것보다 더 큰 실패는 없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통이 십자가와 만나면, 그 고통은 다른 사건으로 변합니다. 고통이 축복이 되고, 고통이 아름다운 스토리(story)로 변합니다.
십자가 없이 우리가 홀로 당하는 고통은 저주와 같지만, 십자가를 만나면 고통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 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신비로운 사건입니다.
사람들마다 다른 고통을 안고 십자가를 만납니다. 우리가 당한 고통은 십자가 안에서 다양한 색깔로 변하여 영롱하게 빛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통해 진리를 경험하고, 고난을 통해 십자가를 깊이 만나면, 그 속에서 우리의 고난은 새로운 색깔로 변화되고, 고난을 축복으로 바꾸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고난의 세계 안에서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할 때, 십자가의 의미를 일부분이라도 깨닫게 됩니다. 그것만으로도 우리에게 엄청난 위력이 됩니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의미 있는 이유는 십자가는 고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부활로 반전됩니다. 완전한 승리입니다.
우리의 고통이 십자가와 연결되면, 실패가 아닙니다. 부활로 연결됩니다. 부활로 완성됩니다. 놀라운 영광으로 결론 맺게 됩니다.
고난을 통해 영적 경험이 쌓일 때, 믿음이 자랍니다. 세상 속에서 우리의 믿음이 자라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믿음은 그냥 자라지 않습니다.
믿음은 교실에서 자라지 않습니다. 책상 앞에서 자라지 않습니다. 책을 통해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소파 위에서, 따뜻한 카페에서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 가운데서 치열한 싸움을 하는 가운데 십자가를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때, 하나님을 알아가는 경험의 끝에서 믿음이 자랍니다.
고난 끝에서 십자가를 만나고,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의 믿음은 무적의 믿음입니다. 어떤 고난이 와도, 십자가로 맞서고, 고난에 응답할 때, 우리의 인생이 멋진 인생이 될 것입니다.
힘들고 풀리지 않을 것 같은 문제가 하나님의 은혜로 풀리는 것을 경험한 사람들은 이미 다른 세계에 와 있습니다.
고난은 선물이요 축복이라는 말이 처음에는 와 닿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난의 골짜기를 통과하고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기 때문에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고난이 오기 이전에는 하나님을 깊이 경험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세계가 얕을 수밖에 없습니다.
고난의 한가운데서 만난 하나님은 다릅니다. 이론적인 하나님이 아닙니다. 실재(實在)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머리로 아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온몸으로 경험한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온몸으로 하나님을 경험할 때, 어떤 고난이 와도 응답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고난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거나 답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믿음으로 재해석하고, 고난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에 응답하는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아십니다. 고통을 겪으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고통 당할 때에 도우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찾아오는 고통에 주님과 함께 응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 우리를 더 가까이 다가오시고, 우리를 더 깊이 만나주십니다. 그러므로 고난으로 인해 피해자가 되지 마시고, 수혜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고난을 통해 십자가를 만나고,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경험하심으로 영적으로 더욱 강력해지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날 동안, 불가피한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영적 근력을 키워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 속에서 우리가 자라기를 원하십니다. 본문 로마서 5장 3~4절에 보면,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고난을 피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세요. 믿음으로 응답하세요. 믿음으로 맞서세요. 그러면 고난은 반드시 축복이 될 줄 믿습니다.
고난은 반드시 우리를 유익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반전시키실 줄 믿습니다. 고난은 우리를 영광스러운 길로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고난 속에서 십자가를 만나면, 부활로 이어질 것입니다. 고난에 react하는 것이 아니라, response하시기 바랍니다. 고난 속에서 믿음으로 승리하는 주의 백성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추천설교 > 금요철야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금요철야예배 설교] 신앙생활의 우선순위와 축복 (0) | 2017.08.31 |
---|---|
금요철야예배 설교 다시 살아나는 힘 (호세아 6:1~3 ) (0) | 2017.08.25 |
[8월 금요철야설교] 지키기보다 누려라 August, Friday Night Sermon (0) | 2017.08.18 |
[8월 금요예배설교] 하나님의 리듬에 장단 맞추라 Friday Night Sermon (0) | 2017.08.18 |
8월 금요철야예배설교 / 형통한 삶의 원리 Friday Night Sermon (0) | 2017.08.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