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철야예배설교]  가까이 다가오신 하나님 Friday Night Sermon

제목 / 가까이 다가오신 하나님
본문 / 출애굽기 3:1~12

 

1.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3.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 때에
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5.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
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8.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9.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래서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은 나의 가장 가까운 곳에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높고 높은 보좌 위에서 팔짱을 끼시고 물끄러미 바라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초월자이시지만,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 가까이에 다가오시는 분이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잘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까이 계시는데, 하나님을 잘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부재(不在)’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무지(無知)와 무관심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무지하고 무관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부재를 느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려고 하시는데, 우리는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셔도, 바쁘게 살아가다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시는 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거리감 때문에 힘들어합니다. 하나님이 멀리 계신다고 느낍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멀리 계신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힘이 빠집니다.
신앙생활을 하지만, 하나님이 멀리 계시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낯설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 속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집요하게 인간에게 다가오십니다. 하나님은 집요하게 우리의 곁에 다가오십니다.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경험하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힘을 잃습니다. 주일도 잘 지키고, 교회의 활동에도 참여하지만, 하나님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바깥 세계에 계시는 분이라고 생각하고 신앙생활하면,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지 못하면, 종교생활을 하는 것이 됩니다. 신앙에 힘이 없습니다. 늘 제자리를 맴돕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면, 우리의 삶은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나님과의 거리에 달려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우리의 신앙은 어려워지고, 우리의 삶은 딜레마(dilemma)에 빠집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는 삶의 매 순간 놀라운 변화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만날 때, 우리의 삶은 사건이 됩니다. 우리의 삶에 역사(役事)가 일어나고,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시는 순간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다가오시면 역사가 일어난 것을 발견합니다.
야곱이 홀로 외로이 돌 베개를 베고 잘 때,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야곱이 얍복 나루에서 죽음의 위협 앞에서 모든 것을 상실할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과 씨름하며, 하나님의 거친 숨소리를 들었을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다가오셨습니다. 모세는 그것을 느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떠나신 적이 없습니다.
모세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함께하셨습니다. 모세가 나일 강에 띄워질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보고 계셨습니다.
그가 왕실에서 자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애굽을 떠나 광야를 지나는 동안에도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모세에게 하나님은 잊힌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가까이 다가오셨습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광야의 길을 지나다녔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순간은 뭔가 다릅니다. 특별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것을 직감했습니다. 부인할 수 없는 경험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떨기나무가 불에 계속 타는데, 불이 사라지지 않은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불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 것입니다. 불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불이 타고 있는 상징적인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임재를 뚜렷하게 경험했습니다.
저 멀리 계신다고 생각했고, 자신과 상관없을 것 같던 하나님께서 모세의 생애 가운데 아주 가까이 다가오셨습니다. 모세는 불 가운데 임하신 하나님을 아주 뜨겁게 느꼈습니다.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멀리서 불을 구경하는 것과 불에 대한 그림책을 읽는 것은 매우 다릅니다. 불은 이론으로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뜨겁고 강력합니다.
화재의 현장 근처에 가보면, 불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것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모세는 매우 충격적인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 문자로 이해하는 하나님과 실제로 온몸으로 경험하는 하나님은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글을 읽고 감동을 느끼는 것과 하나님의 임재를 직접 경험하는 것은 매우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가까이 다가오셨다는 것을 느끼면, 용광로 근처에 있는 것보다 더 강력한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떨기나무에 불이 붙어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불꽃 가운데 계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불꽃보다 더 뜨거운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타지 않으시는 불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고강도의 열기와 함께 빛으로 오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직감(直感)했습니다. 충격적이고 경이로운 경험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까이 찾아오실 때에는 용무(用務)가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하나님께서 가까이 다가오시는 때는 매우 특별한 순간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냥 다가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말을 거십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이름을 부르시며 모세에게 말을 거셨습니다.
모세가 애굽의 왕실에 있을 때에 사람을 죽이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쳤습니다. 그 후에 그는 은둔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가까이 다가오셨습니다. 이때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인간의 편에서는 저항할 수 없고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모른 체 하거나 딴청을 피울 수도 없었습니다. 매우 강력했기 때문에, 그 자리에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본문에서 모세는 가던 길을 멈춰 섰습니다.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일을 경험하신 적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매우 가까이 다가오셨습니다. 그때에는 모든 것을 멈출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일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에 매우 가까이 다가오시면, 아무리 바쁜 일이 있고, 귀중한 일이 있다 해도, 우리 가까이에 다가오신 하나님께 주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일을 경험하신 적 있습니까?
이런 때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시선을 주목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만 집중하게 하십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자신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것을 경험한 적이 없습니다. 그냥 지나다녔을 뿐입니다. 양을 치며 풀을 찾아 다녔을 뿐입니다. 그저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모세는 불타는 떨기나무의 강한 흡입력으로 인해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저항할 수 없는 힘에 끌려갔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매우 가까이 다가오신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 순간, 모세가 하나님을 주목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주목하시는 것입니다.
이때는 한눈 팔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한눈팔지 않으십니다. 모세를 주목하고 계십니다. 이때는 무조건 멈춰서야 합니다. 다른 것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다가오실 때,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멈춰 세우십니다. 열심히 살아가는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시면, 세상에서 잘나가는 직장에서 전성기를 구가하던 사람도 꼼짝할 수 없습니다. 가던 길을 멈추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가오시면, 그 앞에서 꼼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길을 열심히 걸어갔던 사울을 멈춰 서게 하셨습니다.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다가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미션(mission)을 가지고 그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현재와 만나는 순간입니다.

본문 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이곳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과거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지금 이곳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라고 질문했습니다(출 3:13).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I am who I am)”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 3:14). 이것은 하나님 외에는 쓸 수 없는 표현입니다.

모세가 만난 하나님은 지금 이곳에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과거의 하나님도 아니고, 미래의 하나님도 아닙니다. 현재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현재이십니다.
타고 만 잿더미 속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떨기나무가 불에 타면, 잿더미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떨기나무가 사그라들지 않았습니다. 계속 불이 붙어있었습니다. 불 속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셨습니다.

떨기나무가 잿더미가 되어버리면, 과거가 되어버립니다. 나무가 잿더미가 되어버리면, 과거로 끝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현재이시기 때문에, 불 가운데서 계속 타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현재의 시간 속으로 들어오셔서 모세를 만나고 계십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곳에, 모세 앞에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만나는 시간은 우리의 삶 속에서도 현재입니다.

모세는 궁에서 40년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지냈습니다. 80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이 시간은 잃어버린 시간입니다. 과거의 시간입니다. 묻힌 시간입니다. 흘러가버린 시간입니다. 그 시간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실패와 방황으로 점철된 시간입니다.

우리가 방황하고 고통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확실하게 쥘 수 있는 현재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제는 금방 지나가버렸습니다. 나이가 들었습니다. 우리의 시간은 계속해서 과거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가버리고 추억으로 남습니다. 그리고 흘러가버린 시간은 후회로 남습니다. 미래는 아직 우리의 손에 쥐어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내일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내일은 낯섭니다. 그리고 내일은 언제나 불안정합니다. 그래서 미래에 대해서는 모두 염려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34). 이것은 내일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내일에 대해서는 늘 염려스러워합니다. 그렇다고 내일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입니다.

현재의 시간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현재의 시간도 눈 깜빡할 사이에 과거로 흘러가버립니다. 우리는 달력을 넘기느라 바쁩니다. 지금도 순간순간이 과거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가 과거로 끝나버리지 않고, 현재가 현재가 되려면, 지금 이곳에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영원히 현재이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모세는 지금 그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양떼를 치며 호렙 산을 지나고 있습니다. 어제와 똑같이 반복되고, 과거로 흘러가버릴 수밖에 없는 시간입니다.
곧 과거가 되어버릴 한 시점에서 현재적인 하나님이 모세를 찾아오셨습니다.

우리의 삶은 늘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 임재하신 하나님을 만나면, 그 순간의 시간은 단순한 시간이 아니고, 하나님의 현재와 만나는 시간이 됩니다.
특별한 시간이 됩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한 시간이 됩니다. 하나님의 존재로 인한 충만함이 현재의 나의 시간 속으로 들어올 때, 내 삶의 시간은 특별한 현재가 됩니다.
단 한 시간이라도 내 삶을 바꾸어놓습니다. 과거의 40년, 80년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시간의 질량이 폭발해버립니다. 마치 핵이 분열하여 엄청난 에너지를 발하는 것과 같습니다.
영원히 현재이신 하나님께서 나의 시간 속으로 침입해 들어오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고린도후서 6장 2절에 보면,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시편 118편 24절에 보면, “이 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현재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실 때, 이 시간은 흘러가버릴 과거의 시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현재와 만나서 시간의 질량이 폭발하면서 인생에 특별한 사건이 벌어질 때, 내 삶은 단순히 과거가 아닙니다.
내 인생에서 두 번 다시 경험할 수 없는 특별한 현재적 사건이 됩니다. 그 시점부터 내 인생은 뒤로 물러가는 것이 아니라, 전진하게 됩니다.
이때는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생명이 밀고 들어오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충만한 에너지가 넘쳐흐르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다가오신다는 것은 거대한 사건입니다. 애굽의 바로를 꺾는 힘이 여기에서 나오고,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과거의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 출애굽하게 만드는 힘이 여기에서 나옵니다.
폭풍 같은 힘이 나옵니다. 영원히 현재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시간 속으로 찾아오시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현재 속에 찾아오시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출애굽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나를 묶고 있던 아픔과 상처를 떠나보낼 수 있습니다.
현재의 시간에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나면, 이때부터 과거로 되돌아가지 않습니다.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사역 현장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면, 전혀 새로운 일이 벌어집니다. 사건이 일어납니다.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가까이 다가오시는 곳은 특별한 장소가 아닙니다. 모세는 양떼를 몰고 다니던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곳은 매우 평범한 곳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상 속에 다가오시면, 그곳은 특별한 곳이 됩니다. 우리가 어디로 가야 특별한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직함을 가져야 특별한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가까이 다가오신 그 순간은 특별한 현재가 됩니다. 그 순간을 붙잡고 놓치지 않으면, 우리의 시간은 미래를 향해 빠르게 움직입니다. 바로 이때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순간에 선택해야 합니다.

모세는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하는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이전에는 양떼들을 거느리고 광야를 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가오신 순간, 평범했던 삶이 비범하게 바뀌었습니다. 이때 기회가 온 것입니다. 결단을 해야 합니다.

이전에는 머뭇거렸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머뭇거릴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면 됩니다.
이전에는 모든 것이 불확실했습니다. 그러나 가야 할 길을 하나님께서 선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가야 할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모세, 가라. 고통하고 신음하는 내 백성들에게 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삶을 흔들어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순간과 나의 선택이 만나면, 폭발이 일어납니다. 사건이 터집니다. 모세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살았던 세월을 청산하고, 구원사(救援史) 속으로 들어가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것은 마치 핵이 분열하여 폭발하는 것과 같습니다.

선택의 순간에 선택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 일 없이 지나가버립니다. 순간으로 끝나버립니다.
시간은 매정합니다.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지나가버린 시간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지나가버린 파도로는 서핑(surfing)을 탈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순간에 적절하게 반응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에 반응할 때, 우리의 인생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수많은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반응하지 못하면, 인생 전체가 안타까운 과거가 되어버립니다. 과거의 시간이 되어버립니다. 과거는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간 속에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말을 거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선택은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찾아오셨고, 모세는 선택해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모세가 당황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이미 40년간 광야를 떠도는 목동의 생활에 익어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반응하기를 주저했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이제 무엇인가 새롭게 시도할 나이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 저는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 가보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모습은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모세처럼 반응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저는 아닙니다. 그냥 살던 대로 살도록 내버려두세요. 이 나이에 무엇을 하겠습니까. 힘들지만 그런 대로 살 만합니다. 이제 익숙해졌습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렵습니다. 두려운 일입니다. 미래는 항상 두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일을 시도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회를 주실 때, 우리는 그 순간을 붙잡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새로운 일을 시작할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위기의 순간에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힘들고 어려워서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는 상황 속에 빠져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모세의 나이 80세였습니다. 히브리 민족들은 애굽의 압제 속에서 고통이 극에 달해있었습니다. 고통으로 인한 부르짖음이 하늘에 닿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위기의 순간에 다가오십니다.

욥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욥 42:5).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깊이 실제적으로 경험했다는 의미입니다.
부인할 수 없는 놀라운 경험은 인생의 위기의 순간에 경험하게 됩니다. 단순히 은혜 받았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오순절에 불과 바람 같은 경험과도 같습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를 흔들어놓습니다. 모든 경험보다 뛰어난 경험입니다.
어떤 위기도 뚫고 지나갈 수 있는 새로운 경험입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이롭고 신비로운 경험입니다.

폭풍 속에서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만날 수 있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환난의 순간에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경험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는, 인생의 밑바닥에서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을 만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위기의 순간에 염려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문제에 사로잡혀서 시간을 보냅니다. 바람이 불면, 바람을 보며 불평합니다.
그런데 무엇이든 보려고 할 때에 보입니다. 사람이 앞에서 왔다 갔다 해도 보려고 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주님께서 가까이에 다가오셔서 말을 거시는데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한 충격으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폭풍이 몰아치면 앞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그들의 시력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불안과 염려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위기가 다가왔을 때, 하나님이 다가오신 것을 모든 사람이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위기가 닥치면, 사람들은 감각이 무디어지고, 생각이 좁아지고, 마음 문이 닫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당황합니다.
모세도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다가오신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기이한 사건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다가오신 것을 확실히 알려주시려고 하셨습니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특이한 일입니다. 모세는 가까이에서 보려고 떨기나무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이름을 부르시며 모세에게 말을 거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을 소개하셨습니다.

인생에서 폭풍을 만났을 때에 중요한 것은 폭풍이 잠잠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폭풍 속에 다가오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생에서 폭풍을 만났을 때에 중요한 것은 폭풍이 아닙니다. 폭풍을 다루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헷갈리면 안 됩니다.

폭풍이 아무리 거세다 할지라도 폭풍에 정신이 팔려서 폭풍 가운데 찾아오신 하나님을 놓치면 안 됩니다. 인생에 폭풍과 같은 문제가 몰아닥친다 해도 하나님을 만나면, 폭풍은 잠잠해집니다.
하나님은 실재(實在)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폭풍은 왔다가 사라지지만, 하나님은 현존(現存)하십니다. 지금 이곳에서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놓치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인생은 폭풍으로 인해 흔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흔들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놓칠 때, 우리는 어려움을 당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떠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곁에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포기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통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시편 23편 4절에 보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깊을수록 하나님의 임재는 더욱 빛납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통의 바깥에서 점잖게 무게 잡고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하는 고통의 가장 깊은 곳에 들어와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통 당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고통의 한가운데서 함께 고통하고 계십니다.
지금 고난 중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가장 가까이에 와 계십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문제에 빠져서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들어가지 못하고, 문제에만 사로잡혀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문제 가운데 찾아오시고, 고통 가운데 찾아오십니다.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를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 속에 찾아오실 때, 더 이상 인생의 아픔으로 인해 시달리지 않습니다. 내 삶에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시간 속에 가까이 다가오셔야 일이 시작됩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쓰라린 경험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시지 않고,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지 않은 상태에서 그가 스스로 하려고 했던 것은 모두 실패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시간 속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야 합니다. 그때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 떨기나무에 불이 사라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불’은 파워(power)를 상징합니다.
출애굽기 3장의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어떤 힘도 다루실 수 있는 분이심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떨기나무가 계속 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불을 통제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이라는 엄청난 힘을 계속해서 다루고 계시니까 불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파워를 다스리실 수 있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면, 어떤 일도 해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것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불은 계속 타고 있습니다. 떨기나무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불을 계속해서 붙이려면, 기름이 있어야 합니다. 불을 태울 수 있는 원료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전혀 없는데도 불이 계속 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타고 있는 불과 같은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충분하시고, 자원이 전혀 고갈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충분하고 흘러넘칩니다. 하나님은 에너지가 영원히 넘치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불 가운데 찾아오셨습니다. 사라지지 않는 불로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능력을 주셔서 새 일을 행하시기 원하셨습니다.

불 가운데 찾아오신 하나님, 사라지지 않으시는 하나님, 영원히 자존(自存)하시는 하나님, 영원히 충분하신 하나님, 영원히 넘쳐흐르시는 하나님, 에너지가 충만하신 하나님, 스스로 능력을 통제하시고 조절하시고 다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놀라운 일을 행하셨던 것처럼, 우리 가운데에도 그런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떨기나무는 사막에서 아주 흔한 나무입니다. 사막에는 떨기나무만 자랍니다. 다른 나무는 사막에서 살 수 없습니다. 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떨기나무는 잎도 나지 않습니다. 사막에서 물이 있는 낮은 지역에서만 자랍니다. 떨기나무는 사막에서 잎도 나지 않는 거친 나무, 그늘도 만들지 못하는 쓰임새 없는 나무입니다. 불에 타면, 재가 한 줌도 남지 않는 나무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3장에 보면, 떨기나무에 불이 붙어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떨기나무와 같은 존재입니다. 볼 품 없는 존재입니다. 불이 붙으면, 한 줌의 재 밖에 되지 않을 인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존재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소멸되지 않는 성령의 불이 우리에게 붙으면, 우리에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떨기나무와 같이 보잘것없는 인생이지만, 척박한 땅에 심겨 있다 할지라도 영원한 불이신 하나님께서 임하시면, 어떠한 경우에도 망하지 않고 살아날 것입니다. 활활 타오를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드러내는, 멋진 인생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순간, 우리의 삶은 거대한 힘에 의해 이끌려갑니다.
그때는 우리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이 하려고 했던 일과는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납니다.

광야에서 모세와 출애굽의 모세는 전혀 다른 인생입니다. 영원한 현재로 다가오신 하나님을 만날 때,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타는 떨기나무 가운데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난 것은 모세의 인생 가운데 매우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모세가 자신의 인생에 가까이 다가오신 하나님을 만난 순간, 그의 인생에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과거와 완전히 구분되는,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 속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의 시간 속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새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찾아오셔서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되면, 전혀 다른 인생이 펼쳐질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지각변동이 일어날 것입니다.
나이와 상관없습니다. 스펙과도 상관없습니다. 모세는 살인자의 딱지가 붙은 사람입니다. 그는 양치기였습니다. 도피하는 삶을 살았고, 자랑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다가오시는 순간, 하나님의 현재와 만났습니다. 그의 인생에서 과거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시간이 우리의 삶에 종종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가까이 다가오신 때가 언제입니까?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경험한 적이 언제입니까?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경험입니다.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것입니다. 나의 발걸음을 멈추고, 나의 존재를 흔들어놓는 경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막의 떨기나무를 이용하셔서 모세를 집중시키셨습니다. 아무리 둔하다 해도 알아차릴 수 있는 확실한 사인(sign)을 통하여 다가오셨습니다.
우리가 깨어있고 민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 가운데 가까이 다가오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삶에 임합니다.
이런 일은 특이한 곳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곳에서 일어납니다.
사막은 모세가 늘 다니던 곳이었습니다. 그 길에서 모세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우리가 일상 가운데 늘 다니는 곳, 우리가 하고 있는 일, 우리에게 익숙한 곳에서 하나님과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가까이 다가오시는 것을 언제 체험해보셨습니까. 길을 걷다가 하나님의 강한 임재를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강력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 하나님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직장에서 일하는데, 하나님께서 가까이 다가오셔서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저는 설교하다가 그런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설교하는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느낍니다. 제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말씀을 준비하다가 그런 경험을 할 때도 있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에 사로잡히는 것을 경험합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말을 거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무릎을 꿇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시는 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모세는 그의 걸음을 멈추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인을 경험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불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을 거십니다. 우리의 삶을 흔들어놓으십니다. 우리에게 새 일을 시작하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과거로 돌아가지 않게 하십니다.
이 사건 이후, 모세는 과거회귀형의 인생을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미래의 시간으로 갔습니다. 영원한 현재이신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과거로 돌아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우리의 모든 상황은 바뀝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우리의 삶은 후회로 점철됩니다. 돌아보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이만 한 살 더 먹었을 뿐입니다.

40년 동안 모세의 인생은 광야에서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들었습니다. 40년 동안 광야에서 헤맸으니 얼마나 쪼그라들었겠습니까. 매일 반복되는 일상만 반복되었습니다.
사라질 운명이었던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영원한 현재이신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타지 않는 불 되신 하나님께서 모세의 인생 가운데 찾아오셔서 반전(反轉)을 일으켜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 가운데 다가오시지 않으시면, 우리의 인생은 그냥 흘러갈 수밖에 없습니다.
사라지는 인생이 많습니다. 사라져서 한 줌의 재가 되고 맙니다. 시간은 과거로 흘러가버립니다. 초라하게 쪼그라듭니다.
사라지지 않고 불꽃 같이 일어나는 인생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가까이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만나세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현재 시간으로 찾아오십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신 시간을 통하여 우리의 인생의 이야기를 새롭게 써나가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와 우리의 이야기가 겹쳐질 때, 우리의 삶은 기적이 되고, 인생의 특별한 스토리가 쓰여집니다.

그냥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시간 속으로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가오시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경이를 만나게 되고, 놀라운 기적과 특별한 사건들이 하나님의 스토리 안으로 들어가고, 그것이 우리의 삶에 간증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까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 문을 노크하십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마음 문을 열지 않습니다.
나에게 다가오시고, 나와 마주 앉기 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면, 시간은 흘러가버리고 맙니다.

40년 광야의 삶에 종지부를 찍어버릴 수 있는, 80년의 세월이 한 줌의 재로 사라져버릴 수밖에 없는 시점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인생에 위대한 반전을 일으키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과 마주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임재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디로 데려가시는가에 대해 온전히 반응하고 순종하면, 색다른 인생이 펼쳐질 수 있습니다.

후회로 가득 찬 과거형의 인생이 아니라, 영원한 현재이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현재이십니다.
영원히 현재이신 하나님을 만나면, 후회로 점철된 인생이 아니라,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새로워집니다.

하나님을 갈망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가까이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열어놓고,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시기 바랍니다. 가까이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마주 대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밋밋하지 않습니다. 강력합니다.
오순절에 불처럼 바람처럼 임하셨던 성령의 충만함이 사도들의 삶을 바꾸어놓았던 것처럼, 역사를 새롭게 썼던 것처럼,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적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과거에 빠져서 과거에 묻혀 살아가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반복된 삶을 살아가는 우리를 이끌어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를 사용하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불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면, 우리는 불이 됩니다. 사그라들지 않는 불꽃처럼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에너지가 우리 속에 임합니다. 하나님의 에너지는 소멸되지 않습니다. 충만한 에너지입니다. 하나님은 불꽃 가운데 계십니다.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매우 가까이 다가오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다가오시면, 우리의 인생은 달라집니다. 파묻히거나 사그라들지 않습니다.

불은 하나님의 영광의 실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끊임없이 충분히 드러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때, 끊임없이 영광을 드러내는 복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불은 능력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어떤 시련과 환난도 이겨내게 하시는, 하나님의 불이 우리 가운데 임하심으로 사건이 일어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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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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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철야예배] 행동보다 기다림이 먼저다 Friday Night Sermon

제목 / 행동보다 기다림이 먼저다
본문 / 시편 62:1~12

 

1.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2.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3.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이 사람을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공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4. 그들이 그를 그의 높은 자리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 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 (셀라)
5.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6.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7.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8.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9.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
10. 포악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
11.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12. 주여 인자함은 주께 속하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입니까? 어려운 것 중에 가장 어려운 것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것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다급한 상황에 코앞에 닥치면 기다리기 어렵습니다. 그때의 기다림은 죽음을 의미할 수도 있고, 실패, 파산일 수도 있고, 우리의 삶을 망가지게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더 참을 수 없을 것처럼 압박감이 밀려오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습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실패하는 이유는 기다리는 것에서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기다림의 끝에 있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지 못하고, 조기(早期)에 무너져버립니다.

본문은 다윗이 인생의 역경 가운데서 절박한 상황 속에서 기록한 시입니다. 사람들의 추측에 의하면,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에 이 시를 기록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죽음을 피해 다니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 기록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아들 압살롬의 반역에 의해 죽음의 위기를 느꼈던 때에 이 시를 기록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습니다.
다윗의 인생 가운데 어려운 순간이 많았지만,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 죽음이 몰아닥쳐 왕권과는 멀어져가던 때와 왕이 되었음에도 아들의 반역으로 인해 쫓겨 다니던 이때가 가장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다윗은 인생의 혹독한 시기를 보내며 이 시를 기록했습니다.

본문 1절에 보면, 다윗은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바란다는 말에는 기다린다(wait)는 의미가 있습니다.
신앙은 기다림입니다. 믿음은 기다림을 통해 단련되고, 기다림을 통해 증명됩니다. 믿음이 있다면 기다립니다. 기다림을 통해 믿음이 정금(正金) 같이 다듬어집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기다림을 통해 믿음을 입증합니다. 노아는 120년을 기다렸습니다. 굉장한 시간 동안 기다렸습니다. 모세는 40년을 기다렸습니다. 아브라함은 25년을 기다렸습니다. 요셉은 17년을 기다렸습니다.
다윗도 왕이 되기까지 계속 도망자로 살았습니다. 그는 지겹도록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어려움이 있을 때, 어려움이 언제 끝날 것인지를 기다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신자들은 기다림을 통해 훈련을 받습니다. 시련을 통과하게 됩니다.

그런데 기다리는 동안에는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본문 1절에 보면, 다윗은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라고 기록했습니다. 기다리는 사람은 잠잠히 기다려야 합니다.
본문에서 다윗은 어떤 상황 속에 있습니까? 본문 3절에 보면,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이 사람을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공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입을 열지 말라는 것입니다. 잠잠히 있는 것은 기다리는 자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왜 입을 열면 안 됩니까? 입을 열면, 원수들이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일제히 공격합니다. 본문 3~4절에 보면,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이 사람을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공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그들이 그를 그의 높은 자리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 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악인들은 다윗을 흔들려고 입을 엽니다. 독설(毒舌)을 퍼붓습니다. 겉으로는 축복을 말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저주를 퍼붓고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에 가장 힘든 것은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악담을 듣는 것입니다. 축복인지 저주인지 헷갈립니다. 좋은 말인 것 같은데, 속을 파고듭니다.
욥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 주변 사람들이 그에게 좋은 말을 해줬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쓴 소리였습니다.
사람들이 쏟아내는 말에 귀 기울이면 정신없습니다. 내가 힘들 때에 주변 사람들의 입방아가 오히려 더 힘들게 합니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기다리다 보면, 스스로 자신을 변호하고 싶은 유혹이 생깁니다. 자신이 기다리는 이유를 설명하고 싶습니다. 자신이 바보가 아님을 말하고 싶습니다.
어려움이 많아지면, 사람들은 할 말이 많아집니다. 왜 자신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어려움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말하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말하면 기다리는 것에서 실패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더 큰 부끄러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설명해도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습니다. 나를 온전히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주변의 사람들은 무기력하기 때문에 기다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기다리는 것을 쓸데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문제가 있을 때에 기도합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것을 사람들은 무기력한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실패자로 여깁니다.

본문 1절에 보면, 다윗은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냥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잠잠히 기다려야 합니다. 침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는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에는 우리도 침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리는 사람은 침묵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떠들어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해도 침묵해야 합니다.

어려운 순간이 찾아왔을 때에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네가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 있다면, 무엇인가 해야 한다. 왜 기다리고 있냐, 뭐하는 거냐.”라고 다그칩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무기력하고 게을러 보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없습니다.

본문 9절에 보면, 다윗은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사람들을 의지할 필요도 없으니 사람들을 신경 쓰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의 입방아도 끝나는 날이 옵니다.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말을 귀담아 듣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넋을 놓고 막연히 있는 무기력한 상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기다리는 것에는 고도(高度)의 영적 집중력이 필요합니다.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시켜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영적 집중력을 말합니다.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것을 말합니다.

삶 속에서 이슈(issue)는 끝없이 일어납니다. 세상적으로도 그렇고, 개인의 삶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시선을 빼앗아가는 것이 매일매일 수없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시선을 고정하는 것은 매우 힘듭니다. 전쟁과 같습니다.

오늘 하루에도 수많은 일들이 생겼습니다. 우리의 삶에 사고가 끝없이 터지고, 우리의 시선을 빼앗아갑니다.
은혜 받았을 때에는 좋습니다. 그런데 세상으로 나아가면, 여러 가지 문제들이 우리의 시선을 빼앗아갑니다. 마치 그 문제밖에 없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 사건이 삶에서 중심부를 차지해버립니다. 그래서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 두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영적 집중력을 테스트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나만 바라볼 수 있겠니? 나만 바라보고, 나만 기다릴 수 있겠니?”라고 물으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시선을 빼앗기지 않고, 우리가 만난 문제보다 더 크신 하나님께 고정할 수 있겠는지 하나님께서는 물으십니다.

신앙의 여정(旅程)에서 실패한 순간을 더듬어보세요. 하나님만을 기다리는 것에 실패했을 때, 우리의 인생은 무너집니다.
문제 때문에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고정시켰던 시선을 문제 때문에 놓칠 때에 삶이 무너집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기다리다가 문제가 인생 가운데 크게 찾아와서 모든 것을 포기해버렸기 때문입니다. 회오리바람이 부니까 정신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선을 놓치면, 우리의 삶은 요동칩니다. 세상이 요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에 고개를 돌리게 하는 유혹이 매우 많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수많은 방법을 찾습니다. 묘수(妙手)를 찾아다닙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 외에 많은 길이 우리 앞에 펼쳐져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우리가 하나님만을 바란다는 것은 다른 많은 가능성과 기회를 포기한다는 의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는 것에서 실패합니다. 중도(中途)에서 포기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길을 걸어갑니다. 그런데 자기의 길을 걸어가다 보면, 길을 잃어버립니다.
다윗은 광야 속에서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했습니다. 이것이 그에게 가장 큰 과제였습니다.

기다리는 과정에서 힘든 것은 기다리고 있는데 상황이 더욱 악화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기다리고 바라고 있는데, 상황은 더 악해집니다.
상황이 좋아지면 좋겠는데, 상황이 악해질 때, 불안함을 느낍니다. 그때 자신이 무엇인가 하려고 액션(action)을 취합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수많은 고비를 넘어야 합니다. 죄악의 고비를 수없이 통과해야 합니다.
최악의 상황으로 내몰리면서 막바지를 통과해야 합니다. 도무지 출구가 보이지 않는 듯한 막바지를 통과해야 합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시선을 놓치지 않고, 하나님을 바랄 때, 승리하게 됩니다.

기다리다가 지친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납니다. 흩어집니다. 흩어지고 떠나고 난 후에 마지막으로 남은 자들과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고비를 넘으면서도 마지막까지 시선을 놓치지 않고,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믿고 기다린 사람을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기다린 자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하나님을 바라고 기다린 자들을 결코 무시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눈을 고정하고 기다린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결코 거절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기다리는 자들을 위해 일하십니다.

이것이 다윗의 스토리(story)입니다. 다윗이 기름 부으심을 받고 왕이 되는 그 날까지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선을 놓칠 만한 사건들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그의 시선에서 하나님이 사라질 것 같았습니다.
이것이 끝이구나, 이것이 마지막이구나, 이제 벼랑 끝이구나, 이제 죽음이구나라고 생각될 만한 자신을 죽일 듯한 어마어마한 문제들이 그에게 닥칠 때, 그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선을 놓칠 뻔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시켰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다릴 때, 사람들은 궁금해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기다림에 반응하실까? 자칫하면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 수치를 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들을 향해 사람들은 욕할 거리를 찾고 있습니다. “네가 하나님을 기다렸는데,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 오히려 네 삶은 힘들어지지 않았느냐?”라고 공격하려고 합니다.

시편 69편 6절에 보면, “주 만군의 여호와여 주를 바라는 자들이 나를 인하여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를 찾는 자가 나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기다리고 찾는 자들이 수치를 당하거나 욕을 당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어렵고 힘든 순간에 기다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대적들이 둘러싸고 있을 때에 가만히 있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우리에게 신앙은 기다림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기다림은 비활동적인 것입니다. 활동적인 것이 아닙니다. 기다림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활동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것입니다.
오늘날은 활동적인 사람을 좋아합니다. 활동적인 사람이 인정 받습니다. 활발하게 움직이고,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을 유능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너의 실력을 입증해봐”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광야에서 금식하신 후에 약해지신 주님께 사탄은 “너의 실력을 보여 봐”라고 말했습니다. 문제를 빨리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문화는 우리를 다그칩니다. 우리를 정신없이 몰아갑니다. 능력을 드러내라고 합니다.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해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가만히 있지 못하게 합니다. 문제를 만났는데, 왜 가만히 있느냐. 왜 기도만 하고 있냐고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무능한 사람으로 취급합니다.
무엇인가 해보라고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굶어죽는다고 합니다. 가만히 있지 말고 움직이라고 활동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귀가 아프도록 듣는 이야기입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압력을 넣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무엇인가 노력하라고 우리를 부추깁니다. 기도하지 않고, 충동적으로 살라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충동질에 막 몰려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신없이 무언가를 합니다. 마치 지금 하지 않으면 망할 것처럼, 마귀는 우리를 몰아넣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새도 없습니다.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들은 움직여야 할 때와 기다려야 할 때를 구분할 줄 압니다. 액션을 취해야 할 때와 기다려야 할 때를 구분할 줄 아는 것이 영적 센스(sense)입니다.
잠잠히 기다리라는 것은 해야 할 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신자가 세상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과 하나님께서 하셔야 하는 일을 구분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있으면 안 됩니다.

학생이 시험공부를 하지 않고 교회에 와서 “하나님만 잠잠히 바람이여, 내일 시험 문제의 답은 하나님께서 알려주실 줄 믿습니다.”라고 기도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 살 것인지 진로에 대해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에는 잠잠히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 저의 미래를 주님께 맡깁니다. 무엇을 해야 할까요?”
공부는 내가 해야 하는 것입니다. 길을 여시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시험 문제에 대한 답은 책에 있지만, 인생의 문제에 대한 답은 교과서에 있지 않습니다.
공부는 잘했어도 인생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인생에서 알 수 없는 어려움에 빠지면, 답이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풀 수 있는 문제보다 풀 수 없는 문제가 훨씬 많습니다.

다윗은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사울 왕이 그를 죽이려고 추격했습니다. 답이 없었습니다. 왕을 죽일 수도 없습니다. 도망갈 수밖에 없습니다.
언제 어떤 일이 닥칠지 알 수 없었습니다. 다윗 스스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아들이 반역하여 아버지의 권좌(權座)를 빼앗으려 했습니다.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일입니다.
교과서에 없는 문제입니다. 교실 안에서 출제되지 않는 유형의 문제가 세상 속에는 매우 많습니다.
다윗만 이런 문제를 경험한 것이 아닙니다. 예상하지 못한 난제(難題)들이 오늘도 끊임없이 밀고 들어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죽음의 위협이 수시로 닥칩니다.

세상이 강조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런 상황 속에서 무엇인가 해보라고 합니다. 인간의 노력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릅니다. 우리의 행동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시편 46편 10절에 보면,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신자가 경험해야 하는 매우 중요한 레슨(lesson)입니다.
이것보다 우선되는 것은 없습니다. 이것을 경험하지 못하고, 열심히 하는 것만 배운다면, 큰 낭패를 당하게 됩니다.
우리의 행동 이전에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내가 무엇인가 열심히 하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는가를 기다리고, 그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겉으로 보면, 인간의 노력과 재능으로 만든 세상이 대단해보입니다. 스티브 잡스(Steve Jobs)나 빌 게이츠(Bill Gates)가 만들어놓은 것은 세상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제가 전도사 시절에만 해도 설교를 준비할 때 원고를 종이에 손으로 썼습니다. 쓰다가 틀리면 찢어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써야 했습니다. 그런데 타자기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컴퓨터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태블릿PC를 보며 설교합니다.
과학 문명은 끝없이 발전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인공지능을 가진 로봇시대가 올 것입니다. 음식을 주문하면, 사람이 철가방을 들고 오는 것이 아니라, 로봇이 철가방을 들고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과학이 우리에게 주는 편리함과 신속함과 생산성은 놀랍습니다. 앞으로 로봇 산업이 대단할 것 같습니다. 이미 굉장히 많이 진화되었습니다. 앞으로 지능이 있는 로봇이 인간이 하던 일을 다 빼앗아갈 것입니다.

인간의 문명은 어마어마하게 진화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문명을 보세요. 인간이 열심을 다해 만들어놓은 것으로 인간이 만족해하고 행복해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절망합니다. 열심히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 열심히 해서 인간은 오히려 절망에 빠집니다.
인간 스스로 만들어낸 것은 한계를 만납니다. 인간이 가진 문명끼리 충돌을 일으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터집니다.

우리가 노력하여 얻은 것에 만족하는 순간, 곧 절망에 빠집니다. 한평생 심혈을 기울여 직장에서 높은 성과를 내며 최선을 다했는데, 은퇴한 이후에는 ‘이 일을 위해 내 인생을 바쳤는가.’하는 실망과 좌절에 빠집니다. 허무가 밀려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허무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잘 살았다고 생각하고, 세상에서는 성공적인 인생이라고 평가받은 사람들도 마지막에는 허무에 빠집니다. ‘내가 누구인가, 내가 어디에 있나, 내가 어디에서 왔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자신이 노력하여 얻은 성과를 아무도 쳐다보지 않습니다. 그토록 몸부림치며 업적을 쌓았는데, 아무도 보지 않습니다. 기억조차 하지 않습니다.
경쟁에서 지지 않으려고 죽을힘을 다해 노력했는데,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얼마나 허망하겠습니까.

그럴수록 인간의 능력과 활동이 더욱 강조됩니다. 조급해집니다. 문제를 빨리 해결하려고 애씁니다.
그런데 오히려 더 큰 어려움에 빠집니다. 온 세상이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다가 오히려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지혜와 능력을 강조할수록 오히려 더 큰 미궁(迷宮)에 빠집니다. 하나님을 기다리기보다 사람의 도움을 얻으려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다윗의 태도는 분명합니다. 그는 자신의 액션과 자기 방법, 자기 지혜를 내려놓고, 하나님을 기다립니다.
왜 기다려야 합니까?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다리는 것은 헛된 것이 아닙니다.

하박국 2장 3절에 보면,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고 했습니다. 상반(相反)된 말씀이 나옵니다.
사람의 편에서 보면, 지체(遲滯)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편에서는 지체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정확한 때에 역사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편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우리가 아무리 기다려도 늦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시간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때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기다리는 시간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시간에 강력하게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작품을 만드시는 시간입니다. 다윗을 다윗답게 빚어내시는 시간입니다. 우리의 활동보다 하나님의 활동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다립니다.

우리가 신뢰할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 훨씬 더 크고 놀랍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1년, 10년, 20년, 한평생 쏟아 부은 것보다 하나님의 1분이 더 낫습니다. 우리는 한평생 모든 것을 쏟아 부었지만, 오류가 있습니다. 불완전합니다. 허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 순간 역사하셔도 완전하십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기다리면서 초조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이 하는 일과 비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기다려야 하는 이유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현실은 갈수록 어려워졌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졌습니다.
단순히 약속만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랫동안의 기다림을 통해 마침내 믿음의 조상으로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우뚝 세워주신 것입니다.

후손을 얻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을 통해 아브라함이 믿음의 족장으로 태어난 것이 중요합니다.
기다림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아브라함 되게 하셨습니다. 다윗을 다윗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다림을 통해 역사하신다는 것을 경험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레슨입니다. 기다리는 것이 훈련된 사람은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라이센스(licence)를 가졌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하나님보다 앞서지 않는 태도를 견지(堅持)해야 합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하든지 먼저 액션을 취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실 것을 기대하며 잠잠히 기다릴 줄 아는 것, 그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본문에서 다윗의 고백을 살펴봅시다. 다윗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잘 알고 있습니다. 본문 5절에 보면,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본문 7절에 보면,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핵심은 우리가 행동하기 이전에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비활동적인 것입니다. 내가 일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기다리는 것을 먼저 익혀야 합니다. 내가 열심히 하기에 앞서 하나님의 열심을 경험해야 합니다.
급하게 서두른다고 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이 급하다 해도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먼저 일을 시작하여 다 망쳐놓은 후에 하나님께 책임지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며 기다리지 못하고, 성급하게 내 뜻대로 다 망가뜨려놓습니다.
기다리지 못할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하나님의 역사를 망쳐놓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 가운데서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잠잠히 기다려보셨습니까. 남편에 대해, 아내에 대해, 자녀에 대해, 주변의 환경에 대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기다려보셨습니까.
우리는 기다리기 전에 답답한 현실 앞에 '문제를 확실히 고쳐놓고야 말겠어.'라고 생각하며 먼저 칼을 들어버립니다.

아이를 부모의 마음대로 바꿔놓을 수 있습니까? 아이가 사춘기만 되어도 부모가 아이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남편을 아내의 마음대로 바꿔놓을 수 있습니까? 아내의 마음대로 남편을 바꿀 수 없습니다. 오히려 더 엉망으로 만들어놓고 난 후에야 손을 듭니다.

다윗은 기다릴 줄 알았습니다. 다윗은 지독스럽게 기다린 사람입니다.
그는 어두운 터널의 끝이 어디인지 몰랐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황무지로, 굴로 계속해서 옮겨 다녔습니다.
상황은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블레셋까지 도망가서 미친 체 하고 살았습니다. 아들 압살롬이 그를 반역할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신앙은 기다림입니다.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행 1:4).
120명의 무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었습니다. 그들은 기다려야 하는 이유를 확실히 알았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활동과 노력과 재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들은 기다릴 줄 알았습니다.

본문에서 다윗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본문 1절에 보면,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순절에 120명의 사람들이 기다린 것은 무엇일까요? 그들은 성령을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다른 것을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성령 하나님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1절에 보면, 다윗은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라고 고백했습니다. 다윗은 더 나은 상황을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기다렸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문제를 당하면, 그것이 해결되기를 원합니다. 문제가 빨리 해결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형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문제가 해결되는 것보다 하나님을 기다렸습니다.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안에 모든 것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삶은 환경이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입니다. 아무리 늦어도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면, 늦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이 산 것은 허송세월한 것이고, 후회만 남습니다.

하나님 안에 들어가면, 그곳에 인생의 해답이 다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다윗의 고백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본문 2절에 보면,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시편에서 여러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본문 5~7절에 보면,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몰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그의 시선이 고정되어있습니다. 그 안에서 모든 것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어려운 시기를 광야에서 보냈습니다. 광야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곳입니다. 위험한 곳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광야에서 반석과 힘과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세상은 요동칩니다. 불완전합니다. 갈수록 더 심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항상 흔들립니다. 요동치지 않는 순간은 한 순간도 없습니다.
안전을 위해 담을 치지만 무너져버립니다. 높은 울타리도 흔들립니다. 그렇게 되면 공격자들이 침입해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우리에게 답을 말해줍니다. 답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문제에 휩싸이지 마세요. 하나님께 사로잡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압도당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문제를 풀려고 하면, 오히려 더 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본문 11절에 보면,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능력은 위기의 순간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문제가 꼬이고 복잡할 때, 내가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기다려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셔야 합니다. 우리의 실적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실적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쌓아도, 우리가 쌓는 것은 쌓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쌓으시는 것은 쌓입니다.

우리의 능력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경제력은 우리의 힘이 아닙니다. 인간의 재능과 실력은 우리가 믿을 만한 것이 되지 않습니다.
세상이 흔들릴수록 뚜렷한 음성은 하나입니다. 하나님만 우리의 의지가 되시고, 우리가 믿을 만한 분이십니다.

삶의 문제가 당장 해결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여러분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마세요.
우리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다 보면, 하나님의 역사를 망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잘 만들어 가시려는데, 괜히 끼어들어 망가뜨리게 됩니다.

여러분의 노력을 내려놓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먼저 경험해야 합니다. 아무리 오래 기다린다 해도, 기다리는 것은 마이너스(minus)가 아닙니다. 믿음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이고, 인생의 노정(路程)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끊임없이 들리는, 세상의 소리가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가만히 있지 말라고 합니다. 무언가 하라고 합니다. 움직이라고 합니다.
요란한 소리에 귀 기울이지 마세요. 먼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경험하기 위해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리는 가운데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경험하고 나면, 우리에게 담대함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길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됩니다.

기분이 나아지는 법을 찾지 마세요. 상황이 완화되는 길을 찾지 마세요. 오직 하나님만 찾으세요.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시키세요.
먼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경험하면, 삶의 어떤 순간에도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상황보다 크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기다리는 것을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이 있는 만큼, 기다릴 수 있습니다. 믿음은 결코 헛되지 않고,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합니다.

삶 속에서 어려운 문제를 당한 분이 계십니까? 스스로 문제를 풀려고 하지 마세요. 기다리세요.
상황이 악화되더라도 기다리세요. 결코 마이너스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바라고 기다리는 것은 결코 후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경험하기 위해 고비를 넘으면, 상황을 넘어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시편 46편 10절에 보면,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하고 나면, 우리의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우리의 삶에 어떤 문제가 찾아와도,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으로부터 놓치지 않고,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문제가 터지면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시켜야 합니다. 어떤 문제가 터져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문제보다 훨씬 더 크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문제에 빠지지 않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길이 없습니까? 그때야말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chance)입니다. 다른 길을 찾지 마세요.
문제를 두려워하지 마세요. 문제 때문에 기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경험할 수 있는, 기막힌 순간입니다. 기다리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언제까지 하나님을 기다리는가를 보십니다. 언제까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가를 보십니다.

본문 시편 62편에 보면, ‘그만(He alone)’라는 문구(文句)가 반복해서 나옵니다. 그 외에 다른 길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만을 철저히 신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어려움이 와도 기도의 줄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기도의 줄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유일한 줄입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기도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기도의 줄을 붙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다가 그만둬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도하다가 그만두는 것처럼 억울한 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줄은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기도의 자리에 앉아야 합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기도의 자리에 앉아있어야 합니다.
하나님만을 바라고, 하나님만을 기다리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외면하지 않으시고, 무시하지 않으시고,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십니다.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드러나게 됩니다.

저는 제 삶에서 그런 것을 경험했습니다. 호주에 가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 그런 것을 경험했습니다.
길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왜 여기에 왔지’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당황스러웠습니다. 모든 것이 막힌 것 같았습니다.
제가 기대한 것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졌습니다. 정말 암울했습니다. 어떤 것도 의지할 수 없었습니다. 막다른 길에 놓인 것 같았습니다. 비상구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하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주머니에 돈도 없었습니다. 이역만리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액션을 취하고 싶은 욕망이 일어났습니다. 세상의 많은 줄을 잡고 싶었습니다. 사람의 방법을 찾고 싶었습니다. 묘수를 찾고 싶었습니다.
그때 기다려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기다려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끝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방법을 찾고 싶은 욕망이 목까지 차올랐을 것입니다. 사무엘상 24장에 보면, 사울이 굴에 들어왔을 때,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어려움을 더 이상 겪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방법대로 하면, 문제가 깨끗하게 해결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다렸습니다.

실력이 있고, 재주가 많아서 우리의 열심을 펼쳐나가는 것을 먼저 배웠습니다. 그래서 많은 실패와 좌절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경험해볼 기회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리고 끊임없는 딜레마(dilemma)에 빠집니다.
이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인생의 막다른 길에서 액션을 취하지 않고,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다림의 끝에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볼 때, “하나님, 당신은 위대하십니다. 놀라운 분이십니다.”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될 것입니다. 그 후로는 우리에게 찾아오는 모든 문제들 앞에 두려움 없이 하나님만을 기다릴 수 있게 됩니다.

문제가 오면,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해야 합니다.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라고, 우리 스스로 방법을 찾으라고, 우리의 실력을 보이라고 우리를 충동합니다. 사탄이 끊임없이 활동하는 이 시대 속에서 믿음은 비활동적인 것입니다.

힘든 일을 겪고 있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때야말로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먼저 경험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날아오르게 될 것입니다. 문제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액션이 발달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터지면, 자기가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뒤로 돌려놓습니다.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래서 더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여러분의 실력으로 살려는 행위를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경험할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믿음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 단계까지 이르지 못하면, 우리는 끊임없이 요동치는 세상 속에서 자기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발버둥치며 살아가는 삶을 반복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은 능력 있으십니다. 모든 소망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삶의 완성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알파와 오메가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다른 것을 찾지 마세요. 움직이지 마십시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바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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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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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철야예배] 아낄 것을 아끼지 않을 때에 일어나는 반전
Friday Night Sermon

제목 / 아낄 것을 아끼지 않을 때에 일어나는 반전
본문 / 요한복음 6:1~13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2.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3.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4.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8.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12.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본문에 나오는 오병이어 사건은 아주 유명합니다. 소년이 바친 오병이어로 남자만 5천 명이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은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 속에는 다양하고 깊은 메시지가 많이 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누군가가 바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기적을 행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소년이 가져온 오병이어를 가지고 축사(祝謝)하신 후에 그것을 나누어주셨습니다.
여기서 오병이어가 참 중요합니다. 오병이어는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데 있어서 마중물 역할을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얼마든지 기적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십니다. 성자 예수님도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자가 되신다는 것은 무(無)에서 유(有)로 만드실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안드레가 소년의 오병이어를 가지고 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가지시고, 축사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아시고, 제자들을 테스트하시기 위해 누군가가 가지고 오기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무엇인가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가지고 일하십니다.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소년이 가지고 온 오병이어를 가지고 기적을 베푸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참여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역사(役事)에 참여하는 기쁨을 누리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기적을 베푸신 사건은 유명합니다. 소년의 이름은 성경에 기록되어있지 않지만, 소년이 바친 오병이어는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는 재료가 되었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은 4복음서에 다 기록되어있습니다.
주님께서 기적을 행하셨지만, 소년의 오병이어가 부각되고 있습니다. 소년의 오병이어는 기적을 일으키는 데 있어서 원인을 제공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것이 아니고, 이미 있는 것을 가지고 일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도움이 필요 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존(自存)하시는 분이십니다. 홀로 스스로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도와드리는 것이 하나님께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하고 싶어 하시는 일들을 마음껏 얼마든지 무한하게 하실 수 있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돕지 않아도, 하나님의 일에는 조금도 차질이 생기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충해드려야 하나님의 일이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돕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전혀 불편하지 않으십니다. 아쉬움이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누군가의 도움이 전혀 필요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소년이 가지고 온 오병이어를 통해 역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어린 아이의 도시락이 탐나셔서 그렇게 하셨을까요? 아이의 도시락에 눈독을 들이신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기를 원하십니다.

본문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벳새다 들판에 5천 명의 남자가 앉아있습니다. 여자와 아이들까지 다 합하면, 2만 명가량 될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앉아있는 가운데, 기쁨이 가득한 얼굴을 가진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자신의 도시락을 내어놓은 소년입니다.
소년이 바친 오병이어를 예수님께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배불리 먹고도 남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소년이 이것을 직접 눈으로 보며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에, 하나님의 역사에, 하나님의 기적으로 불러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러주시고, 하나님의 역사에 우리를 끼워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상(床)을 차려놓으시고, 우리에게 그 위에 젓가락만 올려놓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어마어마한 잔치에 젓가락만 올려놓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돕든지 돕지 않든지 하나님께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얼마든지 마음껏 무한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오병이어를 가지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을 때, 제자들도 신났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이후, 가장 신나는 날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기고만장했을 것입니다. 흥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병이어를 바친 어린 아이가 가장 기뻤을 것입니다. 자신이 드린 작은 도시락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먹는 것을 보며 기뻐했을 어린 아이의 모습을 상상해보세요.

주님께서는 그냥 기적을 행하실 수 있으셨지만, 소년의 오병이어를 사용하셨습니다. 도시락의 위대한 변신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일에 끌어들이시는 이유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들판, 어두운 곳, 빈들, 아무것도 없는 곳, 사람들이 허기진 절박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일을 행하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 아이의 오병이어를 사용하셔서 일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참여의 기쁨을 누리게 하십니다. 오병이어, 그것 자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한 아이가 먹어버렸다면,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소년이 그것을 가져왔을 때,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을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 아이의 한 끼 분량의 도시락으로 많은 어른들을 먹이고도 남는 역사를 일으키셨습니다.
어린 아이의 작은 도시락으로 많은 어른들을 먹이고도 남는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은 일종의 반전(反轉)입니다. 작은 도시락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끼어들 때, 우리는 초라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을 통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의 일상과 하나님의 역사가 만나는 지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어린 아이와 주님이 만났을 때, 땅과 하늘이 만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작은 도시락이지만, 주님의 손에 드려지니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거대한 역사를 일으키시는 타이밍(timing)과 우리의 작은 행동이 맞아떨어지면,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많은 군중 속에서 오병이어를 예수님께 내어드리는 어린 아이의 행동은 눈에 띄지 않습니다. 감추어질 수 있는 작은 행동입니다.
많은 군중들이 운집해있는 가운데, 아이가 자신의 도시락을 가져오는 행위는 묻힐 수도 있습니다. 눈에 띌 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거대한 역사를 일으킬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거대한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충격적이고 감동적이고 경이로운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들판에 있는 사람이 모두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러고도 남았습니다.

누가 오병이어를 바쳤습니까? 어린 아이가 오병이어를 내어놓았습니다. 많은 어른들은 뭐했을까요? 먹을 것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어린 아이 뿐이었을까요?
성경은 어린 아이의 출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오병이어를 가지고 왔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생각이 단순합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생각이 복잡합니다. 본문에 보면, 안드레와 빌립, 다른 제자들은 생각이 복잡했습니다. 그곳에 있던 다른 어른들도 빌립과 안드레처럼 생각이 복잡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 외에도 음식을 가지고 온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벳새다 들판은 외딴 곳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간식을 챙겨왔을 것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먹을 것을 챙겨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생각이 복잡했습니다. ‘나만 먹어도 모자라는데, 각자 알아서 하겠지. 이런 때에는 가만히 있는 것이 상책이야.’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는 생각이 단순합니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이 좋지만, 어떤 행동을 해야 할 때에는, 무엇인가 결정해야 할 때에는 생각이 단순해야 합니다.
역사가 일어날 때에는 행동합니다. 결정하고 행동하기 전에는 생각이 천 갈래, 만 갈래로 나뉩니다. 그러나 결정하는 순간에는 생각이 단순해집니다.

어른들은 생각이 많고 복잡하여 생각이 정리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복잡하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단순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습니다.
일을 해내는 사람들은 단순합니다. 고수(高手)는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만듭니다. 하수(下手)는 단순한 것을 복잡하게 만듭니다. 아이들은 생각이 단순합니다.

문제가 있을 때,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너무 오랫동안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행동으로 빨리 옮기는 사람들은 생각이 단순합니다. 아이들은 복잡하게 생각할 줄 모릅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경우의 수를 생각하고, 여러 가지를 복잡하게 생각합니다.
어른들은 얼굴만 보아서는 속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속이 환하게 보입니다. 단순하기 때문입니다. 수를 감추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의 상징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오병이어 이야기에 아이가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벳새다 들판에 어른들이 수없이 많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이를 사용하셨습니다. 벳새다 들판에 남자 어른만 5천 명이 있었습니다. 어른들이 가지고 있는 보리떡은 아주 큰 것이었을 것입니다.
한글 성경에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라고 기록되어있지만, 원어 성경에 보면, ‘아주 작은 보리떡 다섯 개와 아주 작은 물고기 두 마리’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멸치 정도 되는 물고기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외형이나 크기, 수와 상관없습니다. 똑똑한 사람, 재력이 있는 사람, 말 잘하는 사람과 상관없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어린 아이를 통해 역사가 일어납니다.

왜 염려가 생깁니까?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일들이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도하면, 우리의 생각이 단순해집니다.
기도하고 난 후에도 머리가 계속 아프다면, 기도하지 않고 생각을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절에서는 기도시간에 기도하지 않고 딴 짓을 하면 죽창으로 맞습니다.

기도하기 전에는 머리가 복잡하고 아프다가도 기도한 후에는 머리가 맑아져야 합니다. 기도하기 전에는 머리가 복잡했는데, 기도하고 나면 개운해져야 합니다.
먹구름이 걷히고, 머릿속이 맑아집니다. 문제가 단순해졌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안고 씨름하다가 문제를 하나님께 맡겼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안고 있으면 복잡합니다. 그러나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면 간단합니다. 복잡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아이가 오병이어를 가지고 복잡하게 생각하거나 계산했다면, 그것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생각이 많습니다.
아이는 계산 없이 오병이어를 가지고 주님께 나아갔습니다. 자신은 오병이어를 가지고 있는데, 말씀을 가르치시는 주님께서 계시니까 오병이어를 가지고 주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오병이어를 가지고 주님께 나아간 것이 중요합니다. 아주 단순한 행위입니다. 그러나 삶의 핵심을 가르쳐줍니다.
나에게 있는 것이 얼마가 되든지,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그것이 무엇이든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주님과 연결시켜야 합니다.

기도는 우리의 문제를 주님께 넘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주님께 넘기시기 바랍니다.
내가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한 후에 그 문제를 다시 가져가십니까? 다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문제를 주님께 맡기면, 문제는 주님의 손에 있습니다. 이것을 행동으로 옮겨본 사람에게는 단순한 일이지만, 행동으로 옮겨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어려운 일입니다. 자기가 가진 문제를 주님께 옮기는 데 10~20년 걸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생각을 단순하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설득당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복잡한 생각들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께서 정리해주시는 답을 붙잡으면, 우리의 생각이 단순해집니다.

아이는 계산할 줄 몰랐습니다. 아이는 안드레처럼 ‘이것이 얼마나 도움이 되겠나’라고 생각하거나, 빌립처럼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할 것이다.’라고 산술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이에게는 그렇게 생각할 능력이 없습니다.
계산을 넘어선 곳에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계산하면 계산으로 끝납니다. 계산하지 않은 곳에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본문에 나오는 어린 아이처럼 단순하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복잡한 생각, 수많은 계산 등을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문제를 주님께 올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힘으로 풀 수 있는 문제라면, 여러분 스스로 해결하세요. 여러분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을 주님께 기도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할 수 없는 것 때문에 끙끙댈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께 올려놓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삶은 단순해지는 것입니다. 고민하고 염려하고 생각한다고 문제가 해결됩니까? 머리만 복잡해집니다.
둘째, 오병이어입니다.
단순히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아닙니다. ‘아주 작은 보리떡 다섯 개와 아주 작은 물고기 두 마리’입니다. 그래서 안드레는 예수님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원재료는 아주 미미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무시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것을 무시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작다고 해서 작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수량을 봅니다. 그러나 수량을 보아서는 안 됩니다. 어린 아이가 주님께 바친 오병이어는 어린 아이의 전부였습니다.

아이가 먹을 것을 내어놓은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것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아이는 배고픈 것을 참지 못합니다. 어른들은 배고파도 참습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굶더라도 아이들은 먹입니다.
아이들은 이기적입니다. 자기밖에 모릅니다. 어린 아이가 공동체를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아이들은 너무 배고프면 옆에 있는 아이의 것을 빼앗아먹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먹을 것이 풍성하지 않았습니다. 슈퍼마켓이나 편의점이 있던 시대가 아닙니다. 아주 작은 보리떡과 아주 작은 물고기는 그 시대가 빈곤했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한 끼 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시 배고픔을 느낍니다. 넉넉한 상황이라면, 남에게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교회 로비를 지나가다가 아이들이 무엇인가 먹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제가 다가가 “목사님 하나 줄래?”라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아이의 반응을 보면, 아이의 가정 배경을 알 수 있습니다. 선뜻 주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손을 뒤로 숨기는 아이도 있습니다.
선뜻 주는 아이의 손에는 하나가 더 있습니다. 풍족하기 때문에 선뜻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과자 한 봉지를 가지고 있으니, 하나 정도는 선뜻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지고 있는 것이 별로 없을 때에는 주면서도 고민합니다. 하나만 있을 때에는 줄 수 없습니다. 더구나 자신이 좋아하고, 맛있는 것은 더욱 줄 수 없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보릿고개가 있었습니다. 풍족하지 않은 시대였습니다. 먹을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저희 집에는 식구가 열다섯 명이었습니다. 저희 형제 6남매에 고모와 삼촌까지 같이 살았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께서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식사 시간이 되어 어머니께서 상을 차리시면, 전쟁이 벌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빨리 먹지 않으면,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생선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생선이 반찬으로 없는 날에는 밥을 먹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생선이 있어야 밥을 먹었습니다. 가난한 시절에 철없이 생선을 달라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제가 본문의 어린 아이였다면, 보리떡 다섯 개는 내어놓았겠지만, 물고기 두 마리는 끝까지 내어놓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생선을 어떻게 내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어렸을 때에는 가난했기 때문에, 사물을 보면, 먹을 수 있는 것인지 먹을 수 없는 것인지 두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산에 올라가 꽃을 따서 먹기도 하고, 나무뿌리를 먹기도 했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나누어먹는 것은 아이에게 어려운 일입니다. 게다가 배고프고, 가진 것이 하나밖에 없을 때에는 더더욱 어렵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아이는 자신이 가진 것의 전부를 내어놓았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허기진 배를 채울 유일한 음식이었고, 아이가 가진 전부였습니다. 이것을 작은 것이라고 치부할 수 있겠습니까. 아이에게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그것을 대단한 것으로 여기셨습니다. 주님은 수량을 보지 않으셨습니다. 아이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셨습니다. 아이가 그것을 가져오기까지 얼마나 망설였겠습니까.

아이가 오병이어를 예수님께 가져온 때는 이미 해가 저물었을 때였습니다. 사람들은 이미 허기진 상태였습니다.
아이는 허기진 상태에서 떡과 물고기를 예수님께 내어놓았습니다. 그것은 아이에게 있어서 전부였습니다. 아이의 엄마가 그 도시락을 얼마나 정성껏 싸주셨겠습니까.
아이들에게는 절제력이 없습니다. 먹는 것에 있어서 인내력이 없습니다. 먹고 싶은 것을 절제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아이는 자신이 가진 떡과 물고기를 예수님께 내어놓았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우리는 오병이어를 통해 기적이 일어난 것만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이에게 있어서 오병이어는 전부였습니다. 절제력이 없고, 이기심이 많은 아이의 관점에서 보면, 배고픈 상태에서 오병이어를 내어놓았다는 것은 설명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어른들도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자제력이 약하고, 먹는 것을 밝히는 아이가 자신에게 오직 하나밖에 없는 도시락을 주님께 가져왔다는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아이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모두 예수님께 가져왔습니다. 그가 가진 전부를 가져왔습니다.

아이가 자신이 가진 전부를 가져왔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이라면 조금은 남기고 가져올 것 같은데, 본문에 나오는 아이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가져왔습니다.
아이가 오병이어를 가지고 오면서 아까워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아이는 자신이 가진 전부를 아끼지 않고 내어놓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소년의 행위를 봅니다.

움켜쥐고 싶어 하는 욕망이 사람에게 있습니다. 하나라도 더 가지려고 몸부림칩니다. 많이 가졌음에도 더 가지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남의 것들을 빼앗으며 살아갑니다. 그런 점에서 생각해보면, 소년이 자기가 가진 도시락을 아끼지 않고 내어놓았다는 것은 특별한 일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소년이 자기가 가진 것을 아끼지 않고 내어놓은 것을 주목해서 보아야 합니다. 소년은 자신의 배를 채울 수 있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고 내어놓았습니다. 이것은 특별한 행위입니다.
아이가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그래서 오병이어의 사건은 4복음서 모두에 기록될 만한 특종거리입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붙잡아야 할 핵심적인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오병이어의 사건은 단순히 기적이 일어난 사건이 아니고,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의 사건을 통해 단지 군중들이 배불리 먹었다는 것을 말씀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려 하십니다.

요한복음 6장의 뒷부분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떡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떡을 먹고도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6:49~51).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이가 내어놓은 보리떡 다섯 개를 놓고 축사하시고, 군중들을 먹이셨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소년이 바친 보리떡은 곧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제자들이 떡을 나누어주는 행위는 주님의 살이 찢어지는 것을 상징합니다.

아이가 떡과 생선을 아끼지 않고 내어놓은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내어주신 것과 오버랩(overlap)됩니다.
아이가 아끼지 않고 내어놓은 떡으로 군중들이 먹고 배부름을 경험한 것 같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심으로 인류가 구원 받았습니다.

아이가 자기에게 가장 귀중한 것을 내어놓은 행위를 4복음서에서 대서특필(大書特筆)한 이유는 그 속에 구원사적인 의미가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놓으심으로 우리가 구원 받았습니다. 우리의 근원적인 목마름과 배고픔이 사라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만찬을 행하실 때, 떡을 떼시며 제자들에게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6:26). 주님을 먹음으로 우리의 영혼이 배부름을 얻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소년이 자신의 도시락을 아낌없이 내어놓은 사건을 통하여,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놓으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것을 아끼지 않고 내어놓을 때, 하나님의 아낌없는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기심을 버려야 합니다. 소년은 아낌없이 내어놓으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아낌없음과 하나님의 아낌없음이 만날 때, 상상을 초월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본문의 사건을 통하여 우리는 흘러넘치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부요하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소년이 가지고 있던 한 끼 분량의 도시락을 통해 5천 명, 아니 2만 명이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크게 축복하시는 것을 30배, 60배, 100배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본문의 오병이어 사건은 100배가 아닙니다. 아이의 한 끼 도시락을 통해 2만 명이 먹고도 남았으니 2만 배입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수입니다. 흘러넘치고도 남도록 부어주시는 은혜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은혜는 수치(數値)로 측량할 수 없습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어떤 것도 아끼지 않으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32절에 보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이것은 복음입니다. 아마도 바울은 이 말씀을 기록하면서 흥분했을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19절에 보면,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것은 바울 자신이 경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상상을 초월할 만큼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면서 당당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자존감의 근거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내어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귀중한 아들 예수님을 우리를 위해 내어주셨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을 확인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나라에는 모든 것이 흘러넘칩니다. 부족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살아간다면, 바닥을 긁으며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계산하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머리를 굴리며 살지 마세요. 하나님께서는 마구 부어주시는데, 따지고 계산하며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본문에 보면, 자신의 도시락을 아낌없이 내어놓은 아이의 행위가 클로즈업(closeup)되고 있습니다. 아이는 아끼거나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아끼려고 하십니까? 무엇을 움켜쥐고 계십니까? 여러분 자신이나 주변 사람들은 본문의 안드레처럼 “그것을 가지고 무엇 하려고?”라고 이야기할지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우리의 삶을 드리려고 할 때, 주변 사람들이 우리에게 불신앙적인 말을 쏟아 부을 수 있습니다. 그 말에 귀 기울이지 마세요.

우리가 떡을 쥐고 있으면, 그것으로 끝납니다. 그것을 주님의 손에 올려드려야 수많은 역사가 일어납니다. “주님, 여기 있습니다.”라고 주님의 손에 올려놓아야 합니다.
오병이어가 여러분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것 같고, 재주도 없어도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마세요.

자신의 것을 주님의 손에 올려놓아야 합니다. 자신의 가장 귀중한 것을 주님의 손에 올려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직업일 수도 있고, 돈일 수도 있고, 재능일 수도 있고, 젊음일 수도 있고, 여러분의 삶 전체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끼는 것, 그것이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주님 앞에 올려놓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쥐고 있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을 주님의 손에 올려놓으면, 위대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아낌없음과 하나님의 아낌없음이 만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 5천 명 중의 한 사람, 어린 아이, 어린 아이의 작은 도시락을 가지고 허기진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시고도 남게 하셨습니다.
본문은 어린 아이의 작은 도시락이 하나님의 손에 닿았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배고픈 현실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어린 아이를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내셨습니다.

아낌없이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무궁무진한 축복을 우리에게 부어주시기 원하십니다. 30배, 60배, 100배가 아닙니다. 천 배, 만 배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구원도 우리가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얻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경이(驚異)로운 일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일을 행하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드러내시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아끼는 것을 아끼지 않고 내어놓을 때,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반전이 일어나는 역사를 우리에게 보여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세요. 무엇인가 움켜쥐고 있으면, 움켜쥐고 있는 것으로 끝나버립니다. 우리의 삶을 주님 앞에 내어놓을 때, 주님의 위대한 손길 속에서 무한대로 확장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주님의 손에 올려질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찾고 계십니다. 주님은 그것을 통해 주님의 일을 이루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작은 것을 하나님의 위대한 나라의 도구로 사용하기 원하십니다.

여러분 중에 움켜쥐고 있거나 아끼는 것이 있다면, 주님께 올려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아끼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어린 아이가 자신의 가장 귀중한 것을 아끼지 않았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기적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요하신 분이십니다. 무한하신 분이십니다. 흘러넘치시는 분이십니다. 제 삶 속에서 경험한 하나님은 흘러넘치시는 분이십니다. 부요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까다로운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넉넉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0:10).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십니다(엡 3:20).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헤아리는 것 이상으로 흔들어 넘치도록 우리에게 안겨주십니다. 하나님의 부요함이 여러분의 삶에 흘러넘치시기를 바랍니다.

아이의 작은 도시락을 통해 수많은 군중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는 엄청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광야와 같고, 빈 들과 같고, 벳새다 들판과 같은 이 세상에서 허기진 군중들을 먹이고도 남는 구원의 만찬에 여러분의 삶이 기막히게 쓰임 받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삶에서 귀중한 것들을 하나님 앞에 올려놓기를 원하십니다. 자신이 내어놓은 도시락이 제자들의 손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지는 것을 보며 소년은 최고의 기쁨, 환희, 즐거움으로 충만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그렇게 쓰임 받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쫀쫀하지 않습니다. 바닥을 긁는 삶이 아닙니다. 부요한 삶입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그런 분이십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막혀있는 것이 터져야 합니다. 삶을 가로막고 있어 삶을 답답하게 만들고, 응고되게 하는 것이 터져야 합니다. 그것이 터지면, 하나님의 무한대와 연결되어 상상할 수 없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그렇게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우리 교회는 귀한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귀한 일을 우리 교회에 맡기실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면 어떤 것이든 어렵지 않습니다.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우리 교회와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게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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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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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철야예배] 잘 먹는 것이 신앙이다 Friday Night Sermon

제목 / 잘 먹는 것이 신앙이다
본문 / 여호수아 14:10~15

 

10.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하게 하셨나이다 오늘 내가 팔십오 세로되
11.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 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
12.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니
13. 여호수아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을 위하여 축복하고 헤브론을 그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매
14.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라
15. 헤브론의 옛 이름은 기럇 아르바라 아르바는 아낙 사람 가운데에서 가장 큰 사람이었더라 그리고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

오늘날 우리는 쉽게 포기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너무 쉽게 포기합니다. 물론 본인에게는 쉽게 포기하는 것이 아니겠지만, 사람들은 이전에 비해 쉽게 포기합니다.
결혼생활에 어려움이 오면, 길이 없다고 생각하고 포기해버립니다. 직장생활을 하다가 어려우면, 쉽게 포기해버립니다. 학업이 힘들다고 학업을 포기하는 학생도 있습니다. 삶이 힘들다고 인생 자체를 던져버리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를 가리켜 ‘포기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오죽하면 사람들이 포기하겠습니까. 포기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사회 구조를 보면, 포기하지 않고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실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일에서 반복하여 실패하면, 포기하고 싶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자신이 생각했던 대로 되지 않으면, 사람들은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포기는 어떤 한계점을 넘어설 때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더 이상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사람들은 포기합니다.
이 시대를 살다 보면, 많은 한계점에 부딪칩니다. 우리를 좌절하게 하는 일들이 매우 많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절대긍정적인 사람이라도 현실의 벽에 반복해서 부딪치면,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패배감에 빠진 젊은이들이 매우 많습니다. 그런데 젊은이들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모든 세대가 끙끙 앓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살아가기 어렵지만, 젊은 세대만 힘든 것이 아니고, 모든 세대가 힘듭니다.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얼마나 힘듭니까.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취준생’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피가 마르는 듯한 고통을 겪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도 힘들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겪는 고통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렇다면 취직한 사람은 괜찮을까요? 국내 최고의 기업에 취직했던 엘리트들이 그곳에서 평균 6년을 버틴다고 합니다. 힘들게 입사했으나, 평균 6년을 버틴다고 합니다. 6년을 버틴 후에 이직(移職)합니다.
젊은이들에게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고령화 시대를 살아가는 노인들에게도 걱정은 태산 같습니다. 건강, 물질, 가정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산적(山積)해있습니다.

사람들이 쉽게 포기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 어려움을 만났을 때, 삶을 포기해버리는 이유는 잘못된 기대감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현실을 가볍게 바라보는 태도를 우리는 경계해야 합니다. 근거 없는 낙관주의를 조심해야 합니다.

‘희망고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희망해도 얻을 수 없는 현실 속에서 계속 희망을 이야기함으로 고통을 겪게 하는 것입니다.
거대한 현실의 벽 앞에서 희망을 찾아볼 수 없는데, “조금만 더 기다려보라”라고 말하는 것은 고통이 됩니다.

세상은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느낍니다. 처세술이나 성공하는 법에 대한 책을 읽는다고 답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너무 힘드니까 “잘 될 것이다.”라고 현실의 삶에 최면을 겁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전혀 생각하지 않은 문제들이 여기저기서 터집니다.

행복을 위해 결혼했는데, 배우자가 데이트할 때와 다릅니다. 전혀 다른 사람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때 사람들은 실망합니다.
서로 사랑하여 결혼한 두 사람이 마음을 모아 한평생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연애하고 결혼하면 좋을 줄 알았습니다. 함께 살면 행복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너무나 사랑해서 결혼하여 살아가는데, 결혼생활이 만만하지 않습니다.
사업을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악한 사람이 그렇게 많다는 것을 이전에는 알지 못했습니다. 사기꾼이 그렇게 많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아무리 선한 의도를 가지고 일하려고 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이면(裏面)을 들여다보면, 세상은 우리가 낙관적으로 생각할 만큼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거대한 풍랑이 끊임없이 밀려옵니다. 풍랑은 한 번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풍랑은 끊임없이 연속해서 밀려옵니다. 풍랑에 휩싸여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데, 그 위에 또 다른 풍랑이 덮칩니다.
이런 일을 겪는 사람을 쉽게 위로할 수 없습니다. “큰 문제없을 거야. 조금만 참아봐. 잘 될 거야.”라고 말하는 것은 오히려 희망고문이 됩니다.
신앙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기도해. 잘 될 거야.”라고 쉽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은 삶에 대한 잘못된 기대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결혼할 때에는 완벽한 배우자를 만나 그림 같은 집을 짓고, 날마다 행복을 누리며 살 것이라 생각합니다. 자신이 사귀는 사람에 대한 기대감으로 부풉니다.
사업을 시작할 때에는 온 세상의 돈이 굴러들어올 것 같습니다. 무엇을 하든 성공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매우 다릅니다. 기대한 것과 다른 현실에 부딪치면, 사람들은 절망합니다. 절망이 깊어지면, 체념하게 되고, 모든 것이 끝이라고 결론내리고 포기해버립니다.

우리의 삶에 쉬운 것은 없습니다. 가정을 꾸리는 것도 어렵습니다. 공부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돈을 버는 것도 어렵습니다. 대인관계도 쉽지 않습니다. 모두 어렵습니다. 쉬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문제 없는 삶은 없습니다.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문제 없는 삶이 아니라, 문제투성이 세상에서 문제를 하나하나 풀어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문제가 생겼을 때 ‘왜 이 문제가 생겼는가’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문제가 생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인생이 그런 것입니다.

문제가 생기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문제가 생기는 것은 정상(正常)입니다. 인생 자체가 불편하고 까다롭고 위험한 문제투성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문제를 만났을 때, 언제나 승리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실패한다고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실패를 통해 얻는 유익이 참 많습니다. 실패를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실패를 통해 겸손을 배우게 됩니다. 실패를 통해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실패를 통해 하나님의 곁에 붙어있는 삶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깨닫습니다.
실패를 모르면 위험합니다. 하나님을 떠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인생 전체가 공중에서 분해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므로 실패는 좋은 것입니다.

실패 때문에 포기할 이유는 없습니다. 성경을 보세요.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실패한 사람들입니다.
요셉의 인생은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모세, 다윗, 룻, 욥, 다니엘 등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은 어마어마한 시련과 고통과 문제 등에 휩싸였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끝이라고 소리 지르고 싶은 순간을 끊임없이 통과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절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에 포기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포기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포기하고 싶은 순간을 통과할 때,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가 임합니다.

둘째, 거대한 문제에 부딪치면, 우리는 포기하고 싶어집니다.
인생에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너무 큰 문제에 부딪치면, 누구나 포기하고 싶어집니다. 그렇게 큰 파도가 밀려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시드니에서 목회할 때의 일입니다. 교민들 중에 바닷가에서 낚시하다가 1년에 한두 명씩 죽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파도가 잔잔하게 올 때에는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낚시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큰 파도가 옵니다. 한국에서도 그런 일이 있을 것입니다. 갑자기 큰 파도가 올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파도에 휩쓸려서 바위에 부딪쳐 쓸려 내려가 목숨을 잃게 됩니다.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면, 시야에서 모든 것이 사라져버립니다. 이와 같이 인생에서 큰 문제가 닥칠 때에 사람들은 시선을 놓쳐버리고, 문제에 휩쓸려버립니다.

큰 문제를 만나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집니다. 절망하게 됩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 포기하지 않는 한 사람 갈렙을 봅니다.
본문 12절에 보면, 갈렙은 여호수아 장군에게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 보면, 아낙 자손과 크고 견고한 성읍이 나옵니다. 견고하고 심히 큰 장벽 앞에 서있습니다.

큰 문제 앞에 서면, 대부분의 경우에는 짓눌립니다. 작은 파도가 아니라, 큰 파도가 밀려오면, 겁에 질립니다.
아낙 자손들은 심히 장대(壯大)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거대한 문제 앞에 갑자기 부딪치면, 문제만 보이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절망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려 합니다. 비슷하면 시도해보겠는데, 비슷하게 견주어볼 만하지 않고, 거대한 문제가 오면,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현실의 벽이 매우 크기 때문에 엄두가 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여깁니다. 현실의 벽이 크고 두껍게 느껴집니다.
아낙 자손과 크고 견고한 성읍이 갈렙 앞에 버티고 있습니다. 세상 안으로 들어가 보면, 이렇게 거대한 장벽이 많습니다. 장벽이 하나인 것이 아니고, 거대한 장벽이 밀림과 같이 놓여있습니다. 하나의 장벽을 통과하면, 더 큰 장벽이 놓여있습니다. 장벽의 숲 같습니다.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심히 장대한 아낙 자손과 이스라엘의 오금을 저리게 합니다. 모두 거기서 물러섰습니다. 골리앗 앞에 선 사울과 이스라엘 사람들과 같습니다. 블레셋의 전설인 골리앗 앞에서 이스라엘의 장수(將帥)들은 꼼짝하지 못하고 떨고 있었습니다.
문제 앞에서 떨고 주저앉는 것은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갈렙은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갈렙은 어떻게 해서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었습니까? 갈렙이 거대한 장벽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요?
민수기 14장 9절에 보면,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말했습니다.
개역개정판 성경에는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라고 기록되어있지만, “개역한글판 성경에 보면,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의 밥이라”는 표현이 우리에게 더욱 와 닿습니다. 기막힌 표현입니다.

견고한 성읍, 아낙 자손, 철옹성 같은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성을 바라보며 갈렙은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라고 생각했습니다. 갈렙은 문제를 밥으로 보고 있습니다.
갈렙은 거대한 장벽과 문제를 밥으로 봤습니다. 특이한 관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주목해야 하고 배워야 합니다. 갈렙은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승리하는 비결, 다른 삶을 사는 비결을 배우게 됩니다.
거대한 문제가 갈렙에게는 밥으로 보였습니다.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가 우리에게 일어나야 합니다.

밥은 무엇입니까? 매일 먹는 밥은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밥을 먹어야 힘을 내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먹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밥의 힘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밥을 먹지 않으면, 힘을 낼 수 없습니다. 밥을 먹지 않으면, 우리는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힘이 빠졌다가도 밥을 먹고 나면 힘이 납니다. 그러므로 밥은 우리에게 필수적인 것 중에서도 필수적인 것이요,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갈렙은 무엇을 밥이라고 했습니까? 갈렙은 거대한 장벽, 난공불락의 견고한 성읍을 바라보며 “우리의 밥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려운 문제를 만나면, 사람들은 힘이 빠집니다. 그런데 갈렙은 오히려 반대였습니다. 어려운 문제를 밥으로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문제를 보며 벌벌 떨고 있는데, 갈렙은 입맛을 다시고 있습니다. 마치 식사 때가 되어 달려온 사람 같습니다. 문제를 보며 낙심하거나 포기하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힘이 났습니다. 문제는 문제가 아니라, 밥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2절에 보면, 갈렙은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라고 말했습니다. “거대한 성읍, 크고 견고한 성읍, 아낙 자손들이 사는 거대한 성읍을 내게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밥 좀 주십시오. 지금 밥 먹게 해주십시오. 심히 허기져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갈렙은 문제를 만나 좌절하거나 낙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힘이 났습니다.
이때 갈렙은 85세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젊었을 때나 지금이나 동일하다고 말했습니다. 45년 전과 같이 힘이 넘쳤습니다. 기력이 조금도 쇠하지 않고, 오히려 힘이 넘쳐흘렀습니다.

그동안 갈렙은 수많은 전쟁을 치렀습니다. 그는 백전노장(百戰老將)입니다. 전쟁은 게임과는 다릅니다. 항상 긴장감이 넘칩니다. 사느냐 죽느냐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그런데 갈렙은 전쟁으로 인해 지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45년 전과 동일하게 힘이 넘치는 청년의 모습이었습니다.

갈렙은 거대한 문제 앞에서 입맛을 다시고 있습니다. 그는 문제를 문제로 보지 않고, 밥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갈렙은 살아오는 동안 수많은 전쟁을 치르면서 수많은 문제를 뛰어넘었습니다. 문제를 뛰어넘었다는 것은 밥을 먹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문제를 딛고 승리하며 얻은 힘이 밥입니다.

문제는 밥입니다. 큰 문제는 큰 밥입니다. 아주 어려운 문제는 별미(別味)입니다. 갈렙은 지금까지 밥의 힘으로 살아왔습니다. 싸움을 치르며 경험한 난관과 문제가 그의 밥이었습니다.
많은 문제들은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의 힘을 빼는 것입니다. 그러나 갈렙은 문제를 통해 오히려 힘을 얻었습니다.

갈렙은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었을까요? 45년이 지난 후에도 어떻게 변함없이 강건함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요?
본문 12절에 보면, 갈렙은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적이 아무리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면’ 이것이 답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아무리 거대한 문제라도 우리에게는 밥이 됩니다.

다윗도 이것을 경험했습니다. 시편 23편 5절에 보면, 다윗은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여기서 ‘상’은 밥상(table)을 의미합니다.
원수와 결전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다윗은 주님께서 차려주신 밥상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감히 원수의 목전에서 밥상을 차려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실 수 있으십니다.
갈렙은 다윗이 고백한 것과 같은 것을 가나안으로 입성하는 전쟁에서 이것을 수없이 경험했습니다. 크고 작은 경험들을 통해 갈렙의 삶은 더욱 풍성해졌습니다.

여호수아서는 정복의 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가나안은 하나님께서 차려주신 밥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을 밥상 위에 올려놓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입을 열고 먹어라. 먹는 것은 네 힘으로 먹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갈렙은 하나님께서 차려주신 상(床)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난공불락의 성이 그의 눈에는 밥으로 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면, 우리는 먹으면 됩니다. 밥은 한 번 먹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밥은 계속 먹어야 합니다.
밥은 한두 번 먹고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밥을 먹지 않으면, 힘이 없을 뿐 아니라, 나중에는 죽습니다. 믿음의 삶은 밥을 먹는 행위와 비슷합니다.
45년이 지났지만, 갈렙은 동일하게 힘이 넘치는 것은 그가 이런 밥을 계속 먹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들에게는 전쟁이 두려울지 모르지만, 갈렙은 오히려 신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차려주신 밥을 먹는 재미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승리를 거두어들이는 즐거움, 하나님께서 주신 상을 받아먹는 즐거움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밥을 두려워하여 먹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본문에서 갈렙은 85세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청년과 같았습니다. 그는 밥을 너무 잘 먹었습니다. 그리고 잘 소화했습니다. 식욕이 왕성했습니다.

다른 지파 사람들은 대충 만족했습니다. 남아있는 아낙 자손과 견고한 성읍에는 아무도 눈을 돌리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편안한 현실에 젖어있었습니다.
그러나 갈렙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배고팠습니다. 거대한 장벽을 통과한 승리 이후에 주어지는 밥의 힘은 대단한 것입니다. 거대한 문제가 닥치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를 경험하고 나면, 힘이 솟습니다.

언제 살맛이 납니까? 아무 문제없는 세상에서 산해진미(山海珍味)를 먹어야 살맛이 나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다 한두 번 먹을 때는 좋을지 모르지만, 계속 그렇게 생활하면 죽습니다.
자살을 많이 하는 북유럽의 나라가 그렇습니다. 문제가 별로 없는 곳에서 자살률이 더 높습니다. 생활고(生活苦)로 인한 자살은 엄청나게 많습니다.

언제 밥맛이 최상입니까? 어렵고 힘든 일을 통과하고 난 후에 먹는 밥맛은 최고입니다. 어려운 문제를 극복하고 난 후에 느끼는 감정이 어떤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문제가 해결되고 난 후에 희열(喜悅)을 느끼신 적 있습니까?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밥입니다.
힘들고 어려워서 죽을 것 같았는데도 하나님께서 문제를 통과하게 하시고 난 후에 주어지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것이 밥입니다. 그것으로 인해 힘이 솟습니다. 날아갈 듯이 힘이 솟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기쁩니다. 이런 밥맛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아무런 어려움 없이 사는 것이 신앙생활은 아닙니다. 어려운 문제를 두려워하지 않고, 어려운 문제 앞에 맞서서 도전하여 믿음으로 승리했을 때의 주어지는 기쁨이 우리의 인생의 밥입니다.

갈렙은 그 밥맛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갈렙은 영원한 청춘입니다. 항상 청년같이 살았습니다. 갈렙은 문제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했기 때문에 영원한 청춘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문제를 계속 밥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문제를 통과하고 난 후에 힘이 솟았습니다. 그는 기력이 조금도 쇠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명기 34장 7절에 보면,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모세는 백전노장으로 홍해를 가르고, 광야를 통과하는 동안 숱한 시련과 문제를 하나님의 은혜로 통과했습니다. 모세 역시 문제를 밥으로 삼아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힘이 나게 하는 원천은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지치지 않고, 시간이 갈수록 힘이 넘치는 삶을 살게 하는 비밀을 알아야 합니다. 문제를 밥으로 보고, 문제를 밥 삼아 살아가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밥상이 있다고 해서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 밥상은 보이지 않고, 원수만 보입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덤비는 세력만 눈에 띄면, 밥상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본문 10절에 보면, 갈렙은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하게 하셨나이다 오늘 내가 팔십오 세로되”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대목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하게 하셨나이다’입니다. 갈렙의 인생을 하나님께서 책임지셨다는 의미입니다. 갈렙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왜 포기합니까?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크기 때문에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으시는 것 같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낙심합니다. 홀로 고생한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서러워하고 포기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갈렙은 지난 45년 동안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하셨다는 믿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항상 전쟁의 한가운데에 있었습니다. 갈렙은 자신이 살고 있는 것은 하나님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믿음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죽고 사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상황이 나를 죽일 것처럼 보이지만, 상황이 나를 죽이는 것은 아닙니다.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우리는 상황과 조건이 나를 죽인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허약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허약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식욕이 없습니다. 문제 앞에서 문제만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상황에 갇혀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늘 문제만 바라보고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뛰어넘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문제가 닥치면 기가 죽고 절망합니다.

영적 세계에서 시험을 이겨낸 적이 있습니까? 믿음으로 문제를 돌파하는 사람은 그 속에서 놀라운 힘이 생깁니다. 그래서 힘이 있습니다.
마귀와 싸워서 이겨본 사람은 마귀가 별 것 아님을 압니다. 마귀와 정면대결해서 나아가면, 마귀는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마귀는 사람에게 겁을 줍니다. 이것이 마귀의 기본 전략입니다. 마귀가 왜 겁을 주는지 아십니까? 마귀는 힘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상대에게 겁을 주어 스스로 무너지게 만듭니다. 이것이 마귀가 사용하는 전법(戰法)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마귀를 겁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대장 되신 주님과 함께 싸우면, 마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왜 마귀와 싸워보지도 않고, 지레 겁먹습니까. 마귀는 우리의 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를 겁내면 안 됩니다. 오히려 마귀가 우리를 겁내야 합니다. 그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마귀를 단칼에 끝내버리지 않으시고, 마귀를 그대로 두실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괴롭히시려고 마귀를 그냥 두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마귀를 그대로 두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마귀를 처단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마귀를 해결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마귀를 해결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귀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직접 확인하도록 마귀를 그냥 두셨습니다. 마귀는 강력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 것을 하나님께서는 마귀를 통해 드러내고 싶어 하십니다.

마귀는 우리의 밥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시험을 만나면 절망하고 포기합니다. 그러나 신자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문제를 취하여 우리의 밥으로 삼기를 원하십니다. 문제가 우리를 절망하게 하고, 낙심하게 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문제를 붙잡고, 믿음으로 문제를 돌파하여 그것을 밥으로 삼아 우리의 인생에 힘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서 힘을 빼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문제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문제를 통해 우리에게 힘을 주시려고 우리에게 문제를 허락하십니다.
옛날에는 숱한 문제를 통과하면서 좌절하고 낙심하고 넘어졌지만, 어느 순간부터 믿음으로 문제를 돌파하고 이겨냅니다. 그리고 그 후에 자신감과 당당함이 생겨 삶에 힘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밥 먹을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관점을 바꾸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밥을 먹고 힘을 내라는 의미입니다. 문제가 얼마나 크고, 우리가 얼마나 형편없는 자인가를 확인하게 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난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문제를 위한 문제를 주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자는 우리의 보호자가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는데, 우리를 보호하시지 않으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해주시는 분이시라는 의미입니다. 구원자는 곧 보호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책임져주시고 지켜주시는 분이십니다.
성경 곳곳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신실하게 보호하시고 지키시는 분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방패가 되십니다.

절대 포기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무엇인가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본문 11절에 보면, 갈렙은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 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싸움은 특수한 상황을 의미하고, 출입은 일반적인 삶을 의미합니다. 갈렙은 자신이 지금 모세가 자신을 가나안의 정탐꾼으로 보낼 때와 똑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 때나 지금이나 같아서”라는 대목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4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청년의 때와 동일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때 대단하게 살았는데, 어느 순간 기력이 쇠하고, 점점 눌려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앙은 왕년의 추억에 잠겨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한때는 대단했지.’라고 생각하며 살아서는 안 됩니다. 신앙은 지금이 중요합니다. 현재가 중요합니다. ‘지금 이곳’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유년기, 청소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갈렙을 보면, 영적인 면에 있어서는 그에게는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가 없습니다. 갈렙은 언제나 영적인 청년기였습니다. 영적으로 언제나 청춘이었습니다.
20년 전에도, 40년 전에도 기력이 쇠하지 않았습니다. 에너지가 넘쳤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문제와 위기와 장벽을 밥상으로 보고 달려들었습니다.

그는 항상 거침없이 도전했습니다. 문제를 피해가거나 어려움이 오면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굶주린 자가 밥을 찾듯이 도전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14절에 보면,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갈렙은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습니다. 이것이 답입니다. 마음이 분산되지 않고, 두 마음이 아닌 상태로, 하나님만 좇았다는 것입니다.

환경과 상황, 문제를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현실을 분석하는 데 시간을 많이 보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시세를 너무 많이 압니다.
그렇다고 현실을 무시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쓸데없이 너무 많이 아는 것은 병입니다. 인터넷 뉴스를 실시간으로 보고, 문제를 확인하고 고민하고 분석합니다. ‘문제가 심각하구나. 답이 없구나. 포기해야겠다.’라고 생각하며 절망합니다.

제가 아는 분 중에 이혼상담 변호사가 있습니다. 이분은 이혼과 관련한 것만 다루는 변호사입니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꼬이고 꼬인 가정사를 매일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인지 어느 날부터 자신의 부부생활에도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분도 결국 이혼했습니다. 이혼상담을 계속 하다가 자신도 이혼해버렸습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납니까? 복잡한 가정의 문제를 들여다보고, 문제를 분석하고, 그 문제 속에 살다 보니 인간과 가정에 대한 환상이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리고 염증을 느꼈습니다. 자신도 문제 속에 빠져들었습니다.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엇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는가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기가 막힌 산해진미로 상을 차려주시는 하나님,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다윗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라고 고백했습니다(시 23:4).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본 것이 아니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데,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않고, 음침한 골짜기를 보면, 두려움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두려움에 대한 처방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두려워하고 낙심하여 문제로부터 도망쳐서는 안 됩니다. 어렵다고 포기하고 도망치면, 밥에서 점점 멀어지고, 힘이 점점 빠져서 나중에는 죽습니다.
어려울수록 문제에 직면해야 합니다. 손을 뻗어야 합니다. 그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민수기 13장 30절에 보면,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갈렙은 백성들에게 “우리가 능히 이기리라”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면, 시각(視覺), 관점, 감각이 바뀝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과 관점이 바뀌는 것입니다. 문제가 밥으로 보입니다. 하나님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확실히 이길 것이라는 확신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밥맛과 입맛이 살아날 때, 힘이 넘치게 됩니다. 밥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문제에 휩싸여도 죽는다고 소리 지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힘이 납니다.

밥은 늘 먹어야 합니다. 신앙은 밥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에게 일어난 문제는 여러분으로 하여금 힘을 빼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여러분에게 힘나게 하시기 위한 밥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 사람들과 살아가는 방식의 차이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지금도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문제를 정면 돌파하기를 원하십니다. 큰 문제를 믿음으로 이겨내고 나면, 그것이 인생의 힘이 됩니다. 능력이 됩니다. 살맛이 되고, 밥맛이 됩니다.

힘은 어디로부터 옵니까? 이 세상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이기는 힘은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을 베풀어주셨습니다. 가나안은 난공불락이지만, 많은 난제(難題)가 있지만, 하나님께서 이미 허락해놓으신 승리의 전쟁에서 숟가락만 들고 입에 갖다 넣기만 하면, 능히 이기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힘을 다른 데서 찾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문제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문제를 믿음으로 이겨낼 때, 그것이 인생에 힘이 나게 합니다. 그래서 문제는 밥입니다.
밥을 먹지 않으면 죽습니다. 매일 밥을 먹어야 합니다. 밥은 믿음으로 문제를 돌파할 때에 주어지는 은혜요, 위로입니다. 격려요, 소망이요, 기쁨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살도록 끌고 가는 능력이 됩니다.
문제를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문제 앞에 좌절하거나 도망가지 마세요. 밥을 피하면 죽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정면 돌파했습니다. 문제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힘이 솟구치게 하십니다.

갈렙은 영원한 청춘이었습니다. 45년 동안 기력이 쇠하지 않고, 힘이 솟았던 것은 밥을 열심히 먹었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어떤 밥을 드셨습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허락하신 밥상을 드셨습니까? 그것이 힘나게 하는 것입니다.

문제를 피하지 마세요. 문제 앞에서 포기하지 마세요. 문제를 정면돌파하세요. 우리가 취할 것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밥을 한 그릇, 두 그릇 먹고 나면, 기골이 장대해지고, 영원한 청춘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45년 동안 하나님께서 갈렙과 함께하셨습니다. 그래서 갈렙은 나로 생존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
살고 죽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문제 때문에 죽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죽을 수 없습니다.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밥 잘 먹는 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모든 문제를 밥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큰 문제가 있습니까? 밥그릇이 크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감사하세요. 믿음으로 밥을 취하시기 바랍니다.
승리의 기쁨과 즐거움이 여러분을 살게 하는 에너지입니다. 하나하나 정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하나 취하시기 바랍니다. 두려워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어떤 것도 포기하지 않고, 물러서지 않고, 밥상을 끌어안고 취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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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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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예배설교] 기도의 위력을 믿는가 Friday Night Sermon

제목 / 기도의 위력을 믿는가
본문 / 마태복음 7:7~11

 

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합니다. 오늘날 세상을 비영적 세상이라고 말합니다. 영적인 것을 무시합니다.
우리는 철저히 세속화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물질에 매여서 살아갑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손에 잡히는 것만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자칫하면 신자도 세상 속에 휘말릴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 비영적인 것, 손에 잡히는 것만 전부라고 믿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 속에 휩쓸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상 속에 휘말리면, 동일하게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속화된 세상 속에 빠지면, 하나님을 찾지 않게 됩니다. 기도하지 않게 됩니다. 기도하지 않는 순간,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 추구하게 됩니다.
기도하고, 기도하지 않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순간,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세상에 압도당합니다.

기도는 신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경쟁력입니다. 기도를 놓치면 안 됩니다. 기도가 풀리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이 흔들리는 것은 물론이요, 삶 전체가 흔들립니다.
신앙생활을 할수록 기도가 깊어집니까? 기도생활에 탄력이 생깁니까? 기도생활에 파워가 생깁니까? 기도하는 것이 신납니까? 기도하는 것이 몸에 익어집니까?
기도하는 것이 뒤로 밀려납니까? 기도하는 것이 신통하지 않게 여겨지고, 지루하게 여겨집니까? 기도가 약해지지는 않습니까? 기도의 문이 활짝 열리기를 축원합니다.

공허한 기도를 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도 모르는 말을 주절주절하다가 기도를 끝내면 안 됩니다. 그렇게 기도하면, 기도하는 것이 재미없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신앙의 중심부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놓치면 안 됩니다. 기도는 신앙생활의 전부입니다. 사생결단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천하가 무너진다 해도 기도를 붙잡고 있으면 살 줄 믿습니다. 기도가 살면, 하늘을 날아오르게 될 것입니다. 춤을 추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문제가 큰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기도가 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기도가 살면, 문제가 더 이상 문제되지 않습니다. 문제가 오히려 축복으로 바뀔 것입니다. 왜 끙끙거리며 살아갑니까? 기도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기도의 원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용이 아주 선명합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구하는 것입니다.
본문 9~1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짧지만 강력하고 명확한 예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그동안 한국 교회는 기도에 열심이 있었습니다.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았습니다. 한국 교회 어디서든 철야기도를 했습니다. 어느 교회든 새벽기도 시간에는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적극적이고 열심 있게 기도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방적으로 기도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기도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편에서 열심히 하는 것을 많이 강조했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 교회가 그동안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옛날 물 떠다놓고 기도하신 어른들의 열심을 그대로 교회로 옮겨와서 새벽부터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신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6장 3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필요를 구체적으로 알려드려야 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언제 얼마나 필요한가를 아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응답하실 때에 혼동을 일으키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떡과 돌, 생선과 뱀을 구별하실 수 있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하실 때에는 배달사고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확하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기도에 정확하게 응답하십니다. 우리가 이상하게 기도해도, 하나님께서는 정상적으로 응답하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두루뭉술하게 기도하고, 무슨 기도를 하는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알아들으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구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지만, 정작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구하는 대로 하나님께서 다 응답하셨다면, 큰 일 날 뻔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 그렇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암이 낫는 것이 좋을 수도 있고, 좋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자신의 생명을 연장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생명을 15년 연장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후에 악한 왕이 되었고, 그의 아들 므낫세도 악한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고통 당했습니다.

우리가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정욕은 기도에 있어서 최대의 걸림돌이 됩니다.
야고보서 4장 3절에 보면,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가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 주십니다. 그러나 야고보서 4장 3절에서 딱 걸립니다. 정욕이 문제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정욕은 쉽게 처리되지 않습니다. 일평생 정욕이 처리되지 않아서 우리가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잘못된 안경을 쓰고 있기 때문에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잘 모릅니다.
아이들이 떼쓰는 대로 다 주었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것만 주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만 주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정욕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잘못 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응답하시는, 좋으신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 누구신가를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기도해야 하는가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 누구신가가 중요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집을 나간 아들이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결심한, 결정적인 순간이 있습니다. 탕자가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라고 깨달았을 때입니다. 탕자는 고생하다가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먹으려고 하다가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탕자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탕자가 왜 탕자입니까? 아버지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떠나는 순간, 그는 탕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그가 집을 떠나는 순간, 복잡한 문제가 그에게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가진 것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거지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의 삶에 한두 가지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는 순간,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모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집이 거지의 집이라면, 그 속에 들어가면 거지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집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가 누구인가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소개하고 싶은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을 통해 아버지를 소개하고 싶어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기도하면 응답 받는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누구인가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어 하십니다. 하늘 아버지를 우리에게 소개하고 싶어 하십니다.

본문 11절 끝 부분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아버지’는 누구입니까?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신 후에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시는 분이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오해하지 않고,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의 눈높이에 맞추셔서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도록 예를 들어서 설명하셨습니다.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주고,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줄 아버지가 있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있다 할지라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그런 분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예로 들어 기도를 설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예는 없습니다. 이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예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시는 아버지가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옷을 사다 주는 데, 질이 좋지 않고 허름한 옷을 사다 주는 아버지가 있겠습니까. 개와 고양이가 먹는, 유통기한이 지난 통조림을 아들에게 사주는 아버지가 있겠습니까.

하늘 아버지를 우리가 제대로 알면, 우리의 기도가 달라집니다. 왜 우리는 기도하지 않습니까? 열심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아버지가 누구신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늘 아버지를 마음에 와 닿도록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아버지를 모르면, 기도할 수 없습니다. 기도하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낯선 분에게 기도하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기도하면, 세월이 흐름에 따라 기도가 깊어지고 풍성해집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경험하지 못한 상태로 기도하면, 기도하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하나님이 낯설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별별 수식어를 다 쓰며 기도하게 됩니다.

육신의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로 인해 하나님 아버지에게 기도하는 것을 불편하게 느끼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아버지는 따뜻한 분이십니다.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동네 아저씨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는 세상의 어떤 아버지와도 비교할 수 없이 좋으신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아버지로부터 받는 것으로 아버지와의 관계가 끝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버지에게 구하는 것을 주기를 원하실 뿐 아니라, 우리가 아버지와 맞먹는, 아버지와 같은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이것이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려고 하는 핵심입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100평의 아파트에 사는데, 아버지의 옆에서 눈치 보며 사는 아들이 있겠습니까. 아버지와 아들이 같이 삽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같이 누립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구했을 때, 조금 주시고 우리를 약 올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버지와 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아버지의 소유가 나의 소유입니다. 아버지께서 누리시는 것을 나도 누립니다.
아버지가 대통령이라면, 아들도 대통령과 맞먹는 권세를 누립니다. 그래서 청와대를 마음껏 들락날락할 수 있습니다. 청와대에 있는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물건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전혀 문제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버지에 대한 개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구할 때에 우리가 구하는 것을 주시는 정도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가 누리는 것을 아버지와 함께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발을 동동 구르며 아슬아슬하게 사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늘 불안해하고 초조해하며, 시간에 쫓기며 힘들게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큰 아들에게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라고 말했습니다(눅 15:31).
아버지의 것은 모두 아들의 것입니다. 아버지의 소유와 아들의 소유는 구분되지 않습니다. 탕자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재산을 탕진하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받아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었습니다. 아들을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다 아버지의 것입니다.

제게는 아들이 두 명 있습니다. 저는 재산이 없기 때문에, 아들에게 남겨줄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책은 많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둘 다 영어권 나라에서 자라서 한글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한글로 기록된 책은 별로 소용없습니다.
다행히 영어로 기록된 책이 제게 조금 있습니다. 큰 아들이 목회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어느 날, 큰 아들이 제게 영어로 된 책을 달라고 한다면, 제가 아들에게 책을 줄까요? 당연히 줄 것입니다. 아들에게 책을 줄 뿐 아니라, 아들이 더 원하는 책이 있다면, 아들에게 책을 사줄 것입니다. 기쁨으로 줄 것입니다. 제 것이 제 아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분이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생각하지 마세요.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훨씬 풍성하고 거대하고 놀랍습니다.
가장 큰 축복은 무엇입니까?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최고의 축복입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말 속에는 구하면 주신다는 의미도 있지만, 아버지와 함께 있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삶에 고난과 시련이 찾아오지만, 고난으로 인해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서 주님과 함께 시간을 가지고, 주님을 배우고, 주님을 경험하고, 주님과 함께 거할 때에 고난은 축복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의 아들인데도, 자신이 아버지의 아들인 것도 알지 못하고, 세상 속에 빠져 살아가던 사람을 고난을 통해 아버지께로 나아오게 하십니다.
아들이 아버지께로 돌아와 아버지를 구하고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낼 때,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탕자가 깨달은 것은 무엇일까요? 아버지의 집보다 좋은 것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가 계신 곳보다 나은 곳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의 집은 아버지가 계신 곳입니다. 그곳에는 모든 것이 있습니다.
탕자는 아버지 없이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탕자는 오늘날 인간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오늘날의 문명은 탕자의 문명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떠나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자만합니다.
탕자의 문명의 특징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을 비웃습니다. 기도하는 것을 천박하게 여깁니다. 무능하고 유약한 사람들이 기도한다고 생각합니다.

가끔은 우리도 헷갈립니다. 기도하지 않는데도 잘 사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는데도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는데도 언제나 얼굴이 밝습니다. 행복해보입니다. 모순인 것 같습니다. 반대여야 할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큰소리를 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탕자가 많습니다. 누가 탕자입니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탕자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사람, 자기 힘으로 살아가려고 궁리하는 사람, 자신만만해하고 자기 인생은 자기의 힘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탕자입니다.

탕자는 우선은 모든 것이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합니다. 세상을 부러워하지 마세요. 오래가지 못합니다. 인생은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습니다.
주머니의 돈이 영원히 있는 것은 아닙니다. 돈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 큰소리치고 살아가는 사람을 부러워하지 마세요. 오래가지 못합니다. 영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이 자기의 힘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 기도하지 않는 사람, 기도를 무시하는 사람은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자원은 바닥나게 되어있습니다. 바닥을 긁게 되어있습니다. 주변을 보세요. 틀림없습니다. 한때는 큰소리쳤습니다. 그런데 계속 큰소리치는 사람은 없습니다.

개인이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때는 잘 나갑니다. 그런데 기도하기는 싫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간다면, 어느 날 자신의 인생의 자원이 바닥나게 되어있습니다. 돈만 바닥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있다 할지라도 삶의 모든 것이 쪼그라듭니다.
아버지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부재(不在)가 주는 엄청난 공간을 메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버지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큽니다.

세상을 들여다보세요. 늘 배고픕니다. 돈을 가지고 있는데도 늘 배고픕니다. 만족되지 않습니다. 성공을 했는데도 여전히 허전합니다. 인기를 얻었어도 여전히 배고픕니다. 약을 먹어야 잠을 이룰 수 있습니다. 고아의 영, 거지의 영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것입니다.
만족하지 못하는 병은 여간 큰 병이 아닙니다. 만족되지 않는 병은 큰 병입니다. 병원에서도 고칠 수 없습니다. 약이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고치실 수 있으십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 자신이 부족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만족할 수 있다면, 부족한 것이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전혀 부럽지 않다면, 문제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왜 부러워합니까? 은혜가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충만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보세요. 세상 사람들은 언제나 껄떡거립니다. 구걸하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아무리 많이 가져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무엇인가 더 찾습니다. 무엇인가 더 채우려고 합니다.

본문은 아버지와 함께할 때에 누리는 축복을 말합니다.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를 경험하고, 아버지와 함께할 때에 누리는 축복을 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는 한계가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불경기도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좋은 것을 함께 누리는 특권이 있습니다.

누가 아버지와 함께 기뻐할 수 있습니까? 아버지와 함께하면, 아버지와 함께 기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말했습니다(빌 4:4).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 아버지와 함께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원한 기쁨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울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평강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시편 23편 1절에 보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가 되시면,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시편 23편 4절에 보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함께하시니까 해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두려움이 없습니다. 만족합니다. 기쁩니다. 불안함이 없습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기도를 확실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해야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아버지와 함께하고 있는 삶 자체가 축복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보다 우리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안달해야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열심히 해야 우리에게 반응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우리보다 더 적극적으로 우리에게 열심을 다하십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말씀은 우리가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에게 응답하시려고 우리보다 더 적극적으로 기다리시는 아버지를 소개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보다 더 적극적이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적극적이라 해도 하나님 아버지보다 더 적극적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적극적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적극적이지 않으시면, 우리의 열심이 아무 소용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보다 더 적극적이십니다.

우리가 신통하지 않게 기도한다 해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믿는 사람은 아버지 안에서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시고, 우리에게 응답하시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받으실 하나님께서 먼저 존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소개하시기 위해 유치원 수준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계십니다.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도록 설명하고 계십니다.
아버지를 경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도는 아버지를 경험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머리로만 신앙생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공부 많이 해서 아는 것은 많은데,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 경험한 것이 하나도 없다면, 그 사람은 신앙생활하는 것이 재미없습니다.
아버지에 대해 연구하지 마시고, 아버지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아버지학, 아버지론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아버지를 맛보아 알아야 합니다. 아버지를 경험해야 합니다.
기도에 관련된 책 100권을 읽는 것보다 기도의 맛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도의 맛은 기막힙니다. 기도의 맛을 본다는 것은 아버지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전시용으로 만든 음식은 아무리 그럴 듯 하게 세팅되어있어도, 아무리 맛있어 보여도 먹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성경에 전시되어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추상적인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매일 우리의 삶에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우리와 함께 호흡하십니다. 우리와 대화하십니다. 우리와 눈길을 마주치십니다. 우리에게 속삭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거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리얼하게 경험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떡을 떼어주시며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6:26). 하나님을 경험하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앙을 잘 소개하셨습니다. 신앙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신앙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온몸으로 전율해야 합니다. 가슴이 뛰어야 합니다. 찬양을 부를 때에 심장이 쿵쿵 뛰어야 합니다.

기도를 경험하지 못한 분이 계십니까? 우리의 기도는 이름 모를 신을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독백이 아닙니다.
지금 이곳에서 나와 함께하시는 전능하신 하늘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느끼고,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고, 하나님의 속삭이심을 들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에 보면, “쉬지 말고 기도하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이 무슨 의미입니까?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지라는 의미입니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떠나시지 않으십니다. 언제든지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라는 의미입니다.
기도하는 시간을 따로 가질 수도 있지만, 우리의 삶 자체가 기도여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삶, 그것이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축복입니다. 성경에 보면, 구하면 주신다고 여러 번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 중의 약속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시작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시작합니다.
기도는 아버지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아버지의 임재 앞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 하나로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우리가 자녀의 권세를 누리려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셔 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모셔 들이는 일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아버지를 아버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로 인정해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가 활짝 열립니다.
기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최고의 선물이요 특권입니다. 기도는 아버지의 아들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특권입니다.
최고의 권세인 기도가 어떻게 우리의 삶의 주변부로 밀려날 수 있겠습니까. 기도는 중심 중에서도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기도가 우리의 삶의 중심에 있을 때, 우리의 삶이 회복되고, 하나님 아버지와 동일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첫째, 확신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먼저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라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자녀 됨을 누리려면, 자녀 됨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가를 우리에게 말씀하시려고 하십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소개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없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 되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를 소개하셨습니다. 그 배경에는 예수님의 죽으심이 깔려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만큼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기도에 힘을 실어줍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에 대해 설명하시며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께로 인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 것은 예수님 때문임을 우리에게 간접적으로 알려주십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본문의 배경이 됩니다.

우리가 담대하게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우리가 믿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당하게 구하고 찾고 두드릴 수 있음을 우리에게 확인시켜주십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멋진 배경이 되셔서 본문의 내용이 우리에게 더욱 멋지게 느껴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한, 우리의 기도는 무시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스러운 자녀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기적 중의 기적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 것입니다. 이 기적은 그냥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입니다.
우리에게 무언가를 주시는 것만 기적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 것이 기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 것보다 더 큰 기적은 없습니다.

기도해서 취직되면, 물론 좋습니다. 기도해서 암이 나은 것도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아니라면, 그것은 아무 소용없습니다.
비록 삶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도, 손에 잡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해도, 하나님께서 아버지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 속한 것입니다. 삶도 죽음도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죽음을 축복으로 바꿀 수 있는 권세가 하나님 아버지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선교사가 이역만리에서 말이 되지 않게 억울한 죽음을 당해 남들은 비극이라 말할지라도, 남이 보기에는 처참한 죽음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영생의 복으로, 하늘의 면류관으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은 기적 중의 기적을 경험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병이 낫든 낫지 않든 상관없습니다.
기적 중의 기적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것은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현상이 일어나는 것만이 기적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납니다. 인생의 결론이 이미 나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변함없는 분이시라면, 우리의 삶도 하나님의 변함없는 약속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은 우리의 의문과 두려움을 잠재우고도 남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선하시고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이것을 확신하시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다는 것이 우리에게 주는 충만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으면, 충만함이 없습니다. 다 가지고 있다 해도 무엇인가 빠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면, 가진 것이 없어도 충만 중의 충만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형편이 어떤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기도한다면,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아버지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둘째, 담대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은 굉장히 적극적인 태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담력을 얻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9절에 보면,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에 보면,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소극적으로 기도하지 마세요. 기도 자체가 적극적인 것입니다. 기도는 굉장히 능동적인 태도입니다. 기도 자체가 기대요 가능성이요 소망입니다.
우물쭈물 기도하지 마세요. 아버지의 입장에서 보면, 아들이 아버지 앞에서 우물쭈물하는 보면 답답합니다.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아버지 앞에서 우물쭈물 기도한다면, 아버지께서 답답하실 것입니다.

눈치 보지 마세요. 담대하세요. 담대하게 기도하세요. 소극적으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답답해 하실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 2절에 보면,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셋째, 사랑 안에서 기도하세요.
아들이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사랑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믿고 아버지께 구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합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기도했을 때에 우리에게 응답하시는 것으로 그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경험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응답에만 초점을 맞추고 기도하지 마세요. 기도하다가 낙심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기도하다가 낙심하면, 기도를 멈추어버립니다. 응답에만 초점을 맞추고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구한 대로 응답해주셔야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편에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 편에서는 우리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를 신뢰하고, 아버지의 사랑에 초점을 맞추고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알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다 아시면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구해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림으로 하나님께 나아오고, 하나님을 향해 “아빠”라고 부르고,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고, 하나님과 눈을 맞추고,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 속에 들어갈 때, 우리가 아무 말하지 않아도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손 안에 들어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기도하는 시간은 하나님을 느끼는 시간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눈을 마주치며,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확인하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말씀을 붙잡고, 삶 전체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깊이 경험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의 중심에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설명하신 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의 수준으로 내려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서 멀리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추상적인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너무 거룩하셔서 우리가 근접하기 어려운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알고 느끼고 경험하고 주고 받는 관계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부르면 들을 수 있을 만큼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그러므로 종교생활을 끝내시고, 지루한 신앙생활을 끝내시고, 무미건조한 신앙생활을 끝내시고, 아버지의 아들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신앙생활을 할수록 기도가 더욱 풍성해지고, 기도 속에서 주님을 마음껏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회복됨으로 고아의 영이 떠나고, 거지의 영이 떠나고, 양자의 영을 얻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며,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모든 것을 함께 누리는, 부요한 주님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기도에 맥이 빠졌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교만해졌습니다. 아버지가 없어도 살 수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돈도 잘 벌고, 교회도 커지고, 모든 것이 잘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외적인 조건은 풍성해졌지만, 바닥을 긁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면, 기도가 회복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버지의 아들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양자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아버지께로 돌아가세요. 그 안에는 모든 것이 있습니다. 풍성한 삶이 있습니다. 위대한 역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 되십니다. 아빠를 마음껏 부르짖으시기 바랍니다.
천하 열국을 자녀들에게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마음껏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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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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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철야예배설교] 지금 어렵다면 믿음의 삶이다 Friday Night Sermon

제목 / 지금 어렵다면 믿음의 삶이다
본문 / 신명기 32:10~12

 

10.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11.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12.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여러분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고난에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우리의 인생과 우리의 신앙은 우리에게 닥쳐오는 고난에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 결정됩니다. 신앙과 고난은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굉장히 밀접한 관계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난을 달갑게 여기지 않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문제가 생기면, 문제가 빨리 해결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문제를 빨리 해결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고난이 다가왔을 때, “문제가 천천히 해결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간격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서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정보다 결과에 집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서 과정을 통해 일하기 원하십니다. 과정은 믿음이 단련되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과정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고난이 왔을 때에 우리가 힘들어한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시지만,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금방 제거하지 않으십니다.

제자들이 주님과 함께 배를 타고 가는데, 바다에 풍랑이 일었습니다. 제자들은 죽는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제자들은 깊이 잠들어계신 주님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주님은 일어나셔서 바다를 잔잔하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서는 풍랑을 잠잠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니, 처음부터 풍랑이 일지 않게 하셨으면 좋았을 텐데, 풍랑이 일기 전에 풍랑이 일지 않게 하셨다면 좋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아슬아슬하게 보내는 것을 은근히 즐기시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에 로마서 8장 28절의 말씀을 통해 위로를 받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지금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지 말고, 아예 문제가 일어나지 않게 하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움을 일으키시는 분과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 같은 분으로 여겨질 때, 우리에게 혼란이 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의 삶을 어렵고 힘든 상황 속으로 몰아넣으시는가’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죽도록 기도해야 마지못해 들어주시는 분으로 여겨집니다.

성경에 보면, 그런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늑장대응하시는 분인 것 같습니다. 굉장히 늑장을 부리시는 것 같습니다.
요셉이 고난 당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침묵하고 계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는 동안에도 하나님께서는 침묵하고 계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에 섰습니다. 뒤에서 애굽의 군대가 추격해옵니다. 얼마나 아슬아슬한 순간입니까. 앞에는 길이 없습니다. 뒤에서는 애굽의 마병들이 몰려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속은 타들어갔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는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모세에게 원망과 불평을 쏟았습니다. 부도직전에 있는데, 은행마감 시간은 다가오고, 돈이 준비되지 않아 모든 것이 끝날 것 같은 상황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위기의 상황에 내몰릴 때가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순간이 시시각각 닥칩니다.

우리는 쉬운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편안한 삶, 아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문제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복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치면, 하나님의 사랑을 덜 받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힘들지 않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그러나 간단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산을 오를 때, 4륜구동의 힘이 좋은 자동차를 타고 단숨에 올라가기를 원하십니까? 걸어서 땀 흘리며 힘들게 올라가기를 원하십니까?
자동차를 타고 산을 오른다면, 쉽게 올라갈 수 있습니다. 자동차를 타고 산에 올라가면, 시간도 절약할 수 있고, 힘들지 않고 정상(頂上)에 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유혹입니다.
쉽고 빠른 길은 많습니다. 그러나 쉽고 빠른 길을 걷다 보면, 경험할 수 없는 세계가 있습니다. 정상에 쉽게 오른다면, 많은 것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걸어서 산을 오를 때에 경험할 수 있는 비경(祕境)이 있습니다.
자동차를 타고 산을 오른다면, 쉽게 정상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걸어서 올라갈 때, 순간순간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올라가는 동안 다리의 근육이 단련됩니다.
그리고 자동차를 타고 정상에 이른 사람이 느끼는 기쁨과 걸어서 정상에 이른 사람이 느끼는 기쁨은 다릅니다.

요즘 세상이 척박합니다. 갈수록 경쟁이 심해집니다. 사는 것이 전쟁 같습니다. 살다 보면, 고난이 성난 파도처럼 우리에게 밀려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려움을 견뎌내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청소년들 중에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역경지수가 없습니다. 머리가 좋고, 실력이 있고, 능력은 있는데, 역경지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역경을 이겨내지 못합니다.
조금만 힘들어도 견디지 못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우울해집니다. 일이 잘 되지 않는 것을 불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 실패해도 인생이 끝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삶을 포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편안한 삶을 사는 것보다 강해지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강하게 하시기 위해 그들을 광야로 보내셨습니다.
본문 11~12절에 보면,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독수리가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해서 새끼들을 떨어뜨립니다. 새끼가 어릴 때에는 어미는 새끼의 보금자리를 아주 포근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조금만 지나면, 보금자리를 어지럽혀서 그곳에 있지 못하게 만들어서 새끼를 밀어내어버립니다. 새끼를 떨어뜨립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내모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보금자리에서 떨어지는 독수리 새끼처럼 죽는다고 소리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죽이려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강하게 하시려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내모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답게 만드시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편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라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출 14:11).

노년이 되어 살아온 삶을 회고할 때, 무엇이 기억날 것 같습니까? 여행가고 편하게 살았던 것이 기억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순간이 기억날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순간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했던 것이 기억날 것입니다.

삶이 힘든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힘든 삶을 통해 우리가 강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삶이 힘들수록 얻는 혜택이 있습니다. 삶이 힘들수록 강해집니다.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하다가 어렵고 힘들었던 순간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좋았던 순간은 전혀 기억나지 않습니다. 굉장히 힘들었던 순간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습니다. 자신에게 잘해준 사람보다 자신을 힘들게 했던 사람이 기억에 남습니다.
힘든 일을 통해 하나님께 매달리고, 그 일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낮아지고, 그 일 때문에 하나님 앞에 열심히 부르짖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힘들지 않고 강해지는 법은 없습니다. 강해지려면 힘든 순간을 반드시 보내야 합니다. ‘그래도 편안하게 살고 싶어요.’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은 편안하게 살 수 없게 되어있습니다. 반드시 어려움이 오게 되어있습니다. 풍랑이 치게 되어있습니다. 위기가 오게 되어있습니다. 문제가 생기게 되어있습니다. 약한 상태로 있으면, 당할 수 있습니다. 죽을 수 있습니다.
운동할 때에 힘이 들어야 제대로 운동이 됩니다. 힘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운동은 숨쉬기운동밖에 없습니다. 숨을 몰아쉬고, 근육이 고통을 느낄 정도로 운동해야 제대로 운동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왜 강해져야 합니까? 강해져야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독수리 새끼들이 보금자리에서 떨어져 바닥을 치기 전에 어미 독수리는 자신의 날개를 펴서 새끼들을 받습니다.
독수리 새끼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독수리 새끼가 높은 벼랑에서 떨어지며 날갯짓을 할 때에는 거의 죽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죽지 않으려고 날개를 퍼덕거립니다. 최악의 상황입니다.
어미가 새끼를 벼랑에서 떨어뜨립니다. 그러면 새끼는 수직으로 떨어집니다. 새끼가 살려고 날갯짓을 하지만, 아직 날개에 힘이 없어 계속 떨어집니다. 그때 새끼는 죽는다고 소리칩니다.
그런데 어미는 이것을 한 번만 하지 않습니다. 한 번만 해서는 독수리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미는 수없이 반복해서 새끼를 떨어뜨립니다. 새끼는 최악의 상황을 수없이 경험하게 됩니다.
바람을 가르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독수리는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죽기 직전까지 죽을힘을 다해 퍼덕거린 새끼만 독수리로 다시 태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강해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닭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독수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닭은 주인이 잘게 부셔서 던져주는 것만 집어먹습니다. 닭은 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입에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편하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위험 앞에서 도피적인 삶을 살고, 수동적인 삶을 살고, 안일하고 편안한 삶을 좇았기 때문입니다. 작은 어려움이 생겨도 죽는다고, 힘들다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왜 독수리들은 벼랑 끝에 집을 지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새끼들을 떨어뜨리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훈련시키실 때에 벼랑 끝을 사용하십니다. 사람은 벼랑 끝에서 강해집니다. 그래서 더 이상 밀릴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에게서 괴력이 나옵니다.

독수리 새끼가 둥지에 있는 동안에는 독수리에게서 괴력이 나올 수 없습니다. 벼랑 끝에서 떨어질 때, 독수리에게서 괴력이 나옵니다.
둥지 안에서 “날 때는 이렇게 나는 것이다. 1초에 날갯짓을 몇 번 해야 한다.”라고 훈련받는다고 해서 괴력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독수리 새끼가 벼랑에서 떨어지면, 죽을힘을 다해 날갯짓을 합니다. 새끼가 떨어져서 바닥을 칠 때까지, 어미는 새끼를 돕지 않습니다. 어미가 새끼를 도우면 안 됩니다. 도울 것 같으면, 떨어뜨리지 말아야 합니다.
어미는 새끼가 날갯짓을 충분히 할 수 있도록 새끼를 내버려둡니다. 날갯짓을 통해 새끼는 독수리가 됩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이 힘들다면, 그것이 정상(正常)입니다. 힘들지 않고 편안한 삶은 비정상입니다. 힘든 시간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져갑니다.
숱한 어려움 속에서 우리의 믿음의 날개가 강하게 작동할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힘든 순간이 우리에게는 반갑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시간을 통해 나를 나답게 만들어 가십니다.

습관은 참 무서운 것입니다. 쉬운 것에 무릎 꿇는 것도 반복하면 습관이 됩니다. 아주 쉬운 일에 쉽게 포기하고 무너지는 것도 여러 번 반복하면 습관이 됩니다.
힘든 일을 이겨내는 것도 반복하면 습관이 됩니다. 어려움이 왔을 때, 쉽게 무릎 꿇어버리면, 거기서 인생이 멈추어버립니다. 어려움이 왔다고 해서 무릎 꿇어버리면, 거기서 인생이 끝납니다.

어려운 일을 이겨내는 것을 반복하다 보면, 이기는 것이 습관이 됩니다. 죽을 것 같아도 계속해서 날갯짓하다보면, 날개에 힘이 생깁니다. 이기는 것이 습관이 되면, 삶이 강력해집니다.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기는 것이 습관이 된 사람입니다. 어려움을 통해 자신이 점점 강해져간다는 것을 느낍니다.
맨바닥에서 생고생하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환경을 통해 믿음이 점점 강화됩니다. 자신도 모르게 맷집이 생깁니다. 그래서 어려움을 잘 감당하게 되어 자신이 강해졌음을 느끼게 됩니다.
문제가 생기면, 전에는 반쯤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문제가 생겨도 아무렇지 않습니다. 문제가 생겨도 죽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죽을 것 같은 때에는 하나님께서 받쳐주시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려움이 아닙니다. 어려움을 통해 강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날 이 땅에서 편안하게 사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편안하게 사는 것이 목적이 되면, 우리의 기도는 늘 맴돌게 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기도하고, 힘들어서 못 살겠다고 기도하게 됩니다. 늘 골골거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만 의지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일어난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강하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늘을 비상(飛上)하게 하십니다. 그 은혜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편안함이 오늘날 우리에게 최고의 유혹입니다. 사람들은 편안하게 살아가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이미 그 속에 감염되어있습니다. 편안하게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편안한 삶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최대의 적입니다. 편안함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합니다. 세상의 즐거움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합니다.

우리가 언제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립니까? 우리는 벼랑 끝에 서 있을 때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립니다.
사람이 성장하고 성공하면, 부모로부터 독립합니다. 부모의 도움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이든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독립을 선언합니다.
그러나 영적 세계에서는 다릅니다. 영적으로 성장할수록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됩니다. 영적 독립선언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유혹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훈련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과목은 하나님만 의지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는 ‘독립’이라는 은밀한 욕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도 하나님에게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이런 이중적인 면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에는 “하나님, 도와주세요. 문제를 해결해주세요.”라고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그러나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더 이상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문제가 있을 때에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기도를 멈춥니다.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을 원해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고, 문제가 해결되기 원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찾기 위해 교회에 나오십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으십니까? 당면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그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하나님을 찾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와 상관없이 하나님을 찾으러 교회에 와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러 교회에 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과의 관계에서 쉬운 길을 허락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광야를 지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광야를 통과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백성들을 먹이실 때에도 매일 하루분만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는 40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이틀분의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안식일 위해서는 이틀분의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만나와 메추라기를 모으지 못하게 하시고, 매일 하루분의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타협하지 않으셨습니다.

광야를 지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메시지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먹을 것을 구하지 말고, 하늘로부터 매일 먹이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살면, 세월이 흐를수록 삶이 점점 더 쉬워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처음에는 어렵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쉬워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초기에는 어려움을 겪어도, 나중에는 편안해지는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결코 그렇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문제가 끝나고, 아쉬움이 없어지고, 모든 것이 풍족해지면, 하나님을 잘 섬기고, 믿음 생활을 잘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살펴보면, 결코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식은 다양합니다. 많이 주셔서 넘치게 하시는 경우도 있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부족하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힘듦과 어려움을 겪게 하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기도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식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고난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서 그것이 결정됩니다.

모든 것이 잘 돌아가는 것만이 형통은 아닙니다. 내 마음대로 돌아가는 것이 형통은 아닙니다. 오히려 마음대로 돌아가는 것이 때로는 형통입니다.
내 생각대로 돌아가는 것이 형통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각대로 되는 것이 형통입니다. 고난을 겪는다고 해서 형통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요셉을 보세요.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39장에 보면,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창 39:2).
모든 것이 자신의 꿈과 다르게 돌아갔습니다. 제대로 맞아떨어지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자신이 알 수 없는 방향으로 자신의 삶이 흘러가는데, 창세기에는 그가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외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난 후에도 기쁨과 평안을 유지할 때, 하나님께서는 가장 기뻐하십니다. 하나님 외의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는데,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할 때, 하나님께서는 가장 기뻐하십니다.

욥기에서 욥이 발견한 것이 그것입니다. 욥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난 후, 하나님의 면전에서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그래서 욥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욥 42:5).
욥은 하나님께서 물질을 회복시켜주셔서 감격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 한 분 밖에 남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는 단계에까지 나아간 것입니다.

지금 삶이 어렵고 힘든가, 편안하고 풍족한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의지하고, 하나님을 얼마나 찾고 있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하나님을 얼마나 갈망하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지금은 비록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만을 앙망하고 붙들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장 복된 삶입니다. 시련이 닥치고 어려워도, 하나님을 더욱 신뢰함으로 믿음이 자란다면, 문제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문제를 제거하는 것에 초점을 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이 자라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자라면, 그 후에 어떤 문제가 닥쳐도, 하나님만 의뢰하게 됩니다. 시련을 통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자라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운 사람에게는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9절에 보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왜 사람들이 좌절하고 절망하고 원망합니까?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간격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더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구하지 마시고, 믿음이 자랄 수 있는 기회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어려움이 올수록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려움이 전혀 없도록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 제 삶에 아무런 어려움 없이 평안하게 살아가게 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렇게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어려움이 없도록 기도할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자라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믿음이 자라면, 어려움이 오든 오지 않든 상관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종종 우리의 삶을 흔들어놓는 문제가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혼란에 빠집니다. “하나님, 왜 저를 이렇게 어렵게 하십니까?”라고 기도합니다. 문제에 걸려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반면, 기도생활을 열심히 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분이 있습니다. 기도를 배우기 원하고, 기도가 깊어지기 원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분이 있습니다. 이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으로 하여금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겪게 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이 사람은 “기도를 배우고 원하고, 기도가 깊어지기를 원한다고 기도했지, 어려움을 달라고 했습니까?”라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러나 기도가 깊어지기를 원하는 것이나 어려움을 달라는 것은 같은 의미입니다. 기도가 깊어지고, 기도가 성숙해지기를 원하는 것은 어려움을 달라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언제 기도합니까? 벼랑 끝에서 기도합니다. 생존의 문제가 걸렸을 때에 기도합니다. 언제 죽기 살기로 기도합니까? 죽을 만큼 어려움이 닥쳤을 때, 죽기 살기로 기도합니다.
생사(生死)를 건 기도를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편안할 때에는 이런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죽을 만큼 강력한 기도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사(敎會史)를 살펴보면, 기도의 깊은 경지에 이른 분들은 고난의 깊은 골짜기에서 기도를 배운 분들입니다.

아무나 기도를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도 기도의 맛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에 관련된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기도를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를 아무리 강조해도, 사람들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하려고 애쓰는데도 기도의 줄이 끊어질 때가 있습니다. 죄성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교묘함과 간교함으로 인해 우리는 조금만 배불러도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기 쉬운 존재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기도를 통해 나타납니다. 기도의 강도(强度)를 보면, 얼마나 절박한 상태에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얼마나 간절히 찾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필요를 구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이 구하는 것과 가진 것을 하나 더 구하는 사람은 기도의 태도가 다릅니다. 한 끼를 굶은 사람과 1주일을 굶은 사람의 기도가 같겠습니까. 먹을 양식을 구하는 사람과 명품 가방을 구하는 사람의 기도가 같겠습니까.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지 않아서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매달리는 우리의 태도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의 필요를 놓고 기도하든, 절망적인 문제를 놓고 기도하든 우리는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자신에게 어떤 위기가 찾아오든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을 더욱 간절히 찾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려움과 고난을 통해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필요를 채우고, 문제를 해결하고, 상황을 바꾸기 원합니다. 상황이 바뀌면, 행복이 온다고 생각합니다.
변하는 상황을 바꾸려고 하지 마시고, 변함없으신 하나님만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면, 모든 문제가 끝납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찾지 않고, 우리와 관련된 문제에 사로잡혀 있으면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에서 이런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쉽게 잊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야단법석을 떨어서 하나님께서 살려주시면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그들과 비슷하게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는 길을 종종 막으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 앞에 서게 하셨습니까? 왜 사면초가의 상태에 빠지게 하십니까? 왜 광야와 같은 불편한 곳으로 몰아가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 외에는 의지할 것이 없는 상황으로 이끄셔서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하고, 관록이 붙고, 경험이 쌓이고, 계급장과 훈장이 늘어나면, 우리의 눈에 무엇이 보입니까? 오직 하나님만 보인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모세는 홍해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라고 말했습니다(출 14:13).
가만히 있을 때가 아닌데, 모세는 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말했습니까? 무엇을 해도 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그때는 한 가지 방법 밖에 없습니다. 가만히 서서 하나님을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만 붙들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몇 개의 줄을 붙들고 있습니까? 하나님만을 붙잡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시간을 통해 우리가 붙들고 있는 여러 가지 줄을 잘라버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붙들고 있는 것들이 다 헛된 것임을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하기 위해 고난을 통해 우리가 붙들고 있는 줄들을 모두 잘라버리십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의 줄만을 붙들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 자랑을 모두 버리게 하시고, 헛된 야망을 모두 포기하게 하시고, 우리가 붙들 것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음을 믿게 하십니다.

누가 지치지 않고 기도할 수 있습니까? 별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기도할 수 있습니까? 아무리 기도해도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때, 기도생활이 어렵게 느껴집니다. 기도해도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더 힘들어질 때, 기도하는 것이 힘들게 느껴집니다. 기도하는 것을 포기하고 싶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만 초점을 맞추고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만 초점을 맞추고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에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도, 기도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향해 나아갑니다.
여러분이 당한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면 이깁니다. 그때 문제는 작아지고, 하나님은 점점 커집니다.

지금 우리는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어렵지 않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세상은 점점 어려워져갑니다. 힘들지 않은 인생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고난의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갑니다. 삶이 힘듭니다. 사람들은 고통 속에 살아갑니다.

신자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평안하고 어려움 없이 살기를 구한다면, 그것 자체가 문제입니다.
신앙생활은 위기를 넘나드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고, 위기 속에서 기도를 배우고, 위기 속에서 믿음이 자라고, 날아오르는 법을 배웁니다.
어려우면 기도하십시오. 끝까지 기도하세요. 기도를 포기하지 마세요. 어려움을 통해 기도를 배워야 할 사람이 기도를 멈춘다면, 모든 것이 끝나버립니다. 끝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다니엘은 기도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기도했습니다. 죽음의 위협이 와도 기도했습니다. 기도의 끝에서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정권이 바뀌고, 세상의 환경이 바뀌어도 하나님께서는 다니엘과 함께하셨습니다.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다니엘과 함께하신다는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위기는 축복입니다. 위기는 우리를 우리 되게 합니다. 지금 어렵고 힘드십니까? 신앙이 제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어려운 것이 정상입니다. 당연합니다.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벼랑 끝에 계십니까? 앞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닙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깊이 만날 수 있습니다.

본래 삶은 위험한 것입니다. 위험이 없다면, 기적도 없습니다. 어려움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만일 제가 고난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길이 없어 방황하고 헤매다가 길 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공허한 이야기를 들으며 방황하다가 진리 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삶을 포기하고 싶었는데, 인생의 끝에서 생명 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에 전부가 되십니다.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바른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지금 힘든 것이 정상입니다. 힘들어야 합니다.
힘들지 않은 일을 경험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마세요.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통해 믿음을 강화하여 믿음의 날갯짓을 통해 비상하는 은혜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온전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시련이 왔을 때에 점점 더 강력하게 피어오릅니다. 믿음을 통해 환난을 통과하기 때문에 가라앉지 않고 솟아오릅니다. 아름다워집니다. 겉사람은 후패하지만, 속사람은 새로워집니다. 하나님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상 속에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왜 삶의 시련 속에서 절망합니까? 무엇을 바라봅니까? 어려움이 없어지기를 기도하지 마세요. 하나님만을 신뢰하세요.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절망 앞에 무릎 꿇지 않고, 절망을 무릎 꿇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정확하게 개입하십니다. 때를 따라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도 때도 없이 팔을 내미는 분이 아니십니다.
어미 독수리는 새끼 독수리를 벼랑에서 떨어뜨린 후, 새끼를 계속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확한 순간에 날아가서 새끼를 받아 올립니다.
새끼 독수리가 벼랑에서 떨어지면서 죽는다고 소리를 질러도 어미 독수리는 가만히 있습니다. 새끼 독수리가 바닥을 치기 직전에 어미 독수리는 총알같이 날아가 새끼 독수리를 받아서 올립니다.
중요한 것은 어미 독수리가 새끼 독수리를 등에 업는 것이 아닙니다. 어미 독수리는 새끼 독수리를 벼랑에서 떨어뜨렸다가 받아 올리기를 여러 번 반복하면서 새끼 독수리를 독수리가 되게 만듭니다.

본문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새끼가 죽지 않도록 어미가 새끼를 보호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강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독수리가 벼랑으로 떨어지는 새끼 독수리를 등으로 받아 올리는 것은 새끼 독수리를 살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다가오는 수많은 환난과 시련 앞에서 굴하지 않고, 날아오르는 독수리가 되게 하십니다.
어려움이 와서 기도했는데도 응답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길 수 있습니다.

독수리는 자기 마음대로 날아다닙니다. 언제든지 어디든지 날아갈 수 있습니다. 악천후(惡天候) 속에서도 가고 싶은 대로 날아갈 수 있습니다. 참새, 비둘기와 다릅니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면, 새들은 어디론가 숨어버립니다. 그러나 독수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늘 높이 날아오릅니다.

믿음의 삶이 무엇입니까? 자기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 가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와도 돌진하는 것입니다. 독수리와 같습니다.
독수리는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날아갑니다. 바람에 따라 움직이지 않습니다. 자기의 날개로 자기가 방향을 정하고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날아갑니다.
시련과 어려움이 와도, 방해가 있어도, 그것 때문에 멈칫하지 않습니다. 날개를 펴고 날아갑니다.
자유롭게 날고 싶으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독수리와 같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우시기를 원하십니다.

인생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앞으로도 수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독수리 되게 하셔서 날아오르게 하십니다.
우리가 독수리가 되면, 그 순간부터 말씀을 따라 살게 됩니다. 생각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한 대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됩니다.

어려움이 와도 상관없습니다. 고난이 오고, 시련이 와도, 그것 때문에 멈칫하거나 좌절하거나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두려움에 빠지지 않습니다. 날아오릅니다.
끙끙 앓으며 신앙생활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날갯짓을 통해 강해져서 오직 여호와만을 앙망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본문 1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눈동자 같이 지키실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홀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도하십니다.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분은 오직 한 분밖에 없습니다. 마지막까지 우리의 인생을 책임지실 분은 한 분밖에 없습니다. 오직 여호와 한 분 만이 우리가 바라볼, 유일한 대상이십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여러분의 삶에 다가오는 고난과 시련, 역경 앞에 무릎 꿇지 마시고, 오히려 역경을 무릎 꿇게 만드는, 강력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으로 날아오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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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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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철야예배] 열려진 가능성의 세계로 들어가라 Friday Night Sermon

제목 / 열려진 가능성의 세계로 들어가라
본문 / 창세기 1:27~28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대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신적인 삶을 살게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은혜, 특권과 축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무한한 능력과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본문 2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에게 주신 특권은 대단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으로 하여금 대리적 통치를 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이 깨어져버렸습니다. 그 순간 인간에게 있는 신적 능력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사람은 피조의 세계를 다스리고 정복하며 살아야 하는데,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오히려 지배를 받고, 굴복하는 비극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범죄로 인해 인간은 극도로 망가지고, 하나님의 피조세계가 신음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아름답게 지으셨지만, 타락한 인간에 의해 땅이 황폐해졌습니다. 타락한 인간이 만든 문명이 세상을 파괴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피조물들이 신음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인간의 범죄는 악독해지고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이 만든 문명은 파괴적이고 퇴폐적이고 비극적입니다. 그래서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퇴폐적이고 타락한 문화는 갈수록 심각해져가고 있습니다. 비인격적이고 파괴적이고 음란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문화 속에는 아름다움이 없습니다. 오히려 아름다움을 파괴합니다. 악한 것을 미화(美化)합니다.
인터넷 문화 속으로 들어가 보세요. 퇴폐적이고 타락한 문화가 그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격과 영혼을 망가뜨립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죄로 인해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이후에 만든 문화와 문명은 갈수록 절망적이고, 비극적으로 흘러갑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무서운 세상입니다. 인간의 내면세계를 깊이 들여다보면, 참 악합니다. 어린 아이의 속에도 악이 있습니다.
뉴스를 보면, 세상이 악하고 어둡고 비극적이고, 폭력적이고 비인격적인 것을 깨닫습니다. 세상을 보면,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이 점점 좋아져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은 멸망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점점 악해집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타락하므로 일어난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타락한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악한 문화와 멸망의 세계로 달려가는 이 땅을 위해,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회복하게 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죄로 인해 망가진 우리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에 보면,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이 구절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걸작품(masterpiece, ποιημα)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걸작품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태초에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만드셨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모습으로 다시 만드시는 일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이전 것은 다 지나가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된 생명을 가지고 우리 안에 들어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걸작품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걸작품이 되므로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에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었습니다.
우리는 생명 있는 포도나무에 접붙임 된 가지가 되었습니다. 포도나무에 있는 생명의 기운을 가지가 받아 열매가 열린 것처럼, 소망이 없던 우리에게 새로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전에는 소망이 없었습니다. 살아갈수록 죄만 늘어났습니다. 악취만 더해갑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기 전에 우리는 악한 존재였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경험한 사람들은 가장 먼저 자신이 얼마나 악한 존재인가를 깨닫습니다. 자기 안에 선한 것, 의로운 것이 전혀 없음을 깨닫습니다. 소망이 전혀 없고, 하나님 앞에 멸망해야 마땅한 존재임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소망 없이 살던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캄캄한 가운데 살아가던 우리에게 소망의 빛이 비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에서 실패한 인간에게 재창조의 기회를 허락하시고,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주셨던 번성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는 권세를 회복시켜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황폐하고 소망이 없는 땅을 하나님의 나라로 다시 바꾸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이 다스리고 지배하여 악이 창궐하던 세상의 한 가운데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나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천국에 가는 것만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소망 없는 이 세상 안으로 들어가 이 세상을 건져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위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 세상을 그대로 두면, 소망이 전혀 없습니다. 악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깊숙한 곳에 있는 죄악에 직면하면,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도 우리의 머릿속에는 악한 궤계가 있습니다. 복음이 아니면 소망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에서 실패한 인간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아 하나님의 걸작품이 된 우리는 도피적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적극적으로, 공격적으로 세상의 한가운데로 들어가 세상을 복음을 정복하고, 세상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는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이것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다스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것은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백성들로 충만하게 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 사명을 수행해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문화명령을 주셨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재생산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시고,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명령입니다. 모든 생명은 재생산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생명에게 허락하신 독특한 힘입니다.
작은 물고기 속에 생명이 있으면, 그 속에 생육하고 번성하는 힘이 있습니다. 참으로 놀랍습니다. 생명이 있으면 자랍니다. 번식합니다. 번성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생명체에 주신 비밀입니다.
모든 생명은 끊임없이 재생산합니다. 생명력은 대단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생명체든 생육하고 번성하는 힘을 부여하셨습니다.

우리가 받은 생명력은 어떤 것입니까? 우리 안에 있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력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새로운 생명은 아주 특별한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새로운 생명은 예수님과 연결되어있습니다.

이전에는 우리가 마른 가지와 같았습니다. 가만히 두면, 더 말라버립니다. 생명이 없기 때문에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점점 더 말라버립니다. 원나무에서 잘려졌기 때문에 생명이 없습니다. 그래서 신비한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왔습니다. 이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요, 부활의 생명입니다.

우리는 봄에 물이 가득 차오른 나뭇가지와 같습니다. 봄에 물이 오른 나뭇가지를 보세요. 자르기도 힘듭니다. 생명의 기운이 있기 때문에 가지가 힘 있게 뻗어나갑니다. 잎사귀가 돋아납니다. 열매가 맺힙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합니다. 생명의 힘이 터져 나오기 때문입니다. 땅속의 기운을 빨아올려서 가지 안에 생명의 힘이 충만하게 있습니다. 그래서 포도나무에 포도가 맺힙니다.

생명의 힘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 안에는 수많은 씨앗이 있습니다. 씨앗이 번식하면, 어마어마한 농장을 이룹니다. 신비롭습니다. 끝없이 번식하고 번성합니다.
씨앗 하나에 담긴 생명력은 참으로 신기합니다. 작은 씨 안에 생명이 들어있습니다.

이전에는 우리가 생명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안에 생명력이 들어왔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을 때에는 얼굴에 핏기가 없었고, 소망이 없었습니다. 삶이 힘들어 지쳤습니다. 생명력이 전혀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한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 안에 생명의 기운이 돌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은혜를 받으면, 하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주어집니다. 하늘의 부요함이 우리 안에 찾아와 세상의 것들로 인해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생명력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므로 영적 생명을 공급받았습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새로운 생명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중생했다는 것은 구원 받았다는 의미도 있지만, 우리 안에 새로운 생명이 주어졌다는 의미입니다.
지금까지는 육체적 생명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 세상의 것과는 다른 생명을 부여받았습니다. 그 생명의 씨앗이 우리 안에서 점점 자라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임하고 있습니다. 물오른 인생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이 생겼습니다.

산불이 나서 나무가 다 타버린 것 같은데, 봄이 되면, 새싹이 돋아납니다. 생명이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을 통해 또 다른 생명이 예수님을 믿게 된다면, 내 안에 생명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전도한다는 것은 자기 안에 있는 생명력이 분출되어 옆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으면,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치게 되어있습니다. 집안에서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는데, 나중에는 가족이 모두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 속에 생명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을 보세요. 생명력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아무도 막을 수 없을 만큼 폭발력이 있었습니다. 열두 명에서 120명이 되고, 120명에서 3천 명이 되고, 5천 명이 되고, 나중에는 허다한 무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로,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이 퍼져나갔습니다.
생명의 특징은 번식하는 것입니다. 생명은 또 다른 생명을 낳습니다. 재생산의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성령의 불을 받으면, 그 한 사람을 통해 교회가 세워질 수 있습니다. 한 사람 때문에 교회가 세워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별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스데반의 안에 있는 생명이 터졌습니다. 부활의 능력이 임하여 바울이 탄생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 현장에 불이 붙어 바울이 태어났고, 바울은 많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여러분 안에 예수의 생명이 작동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특별한 힘입니다. 이것은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소멸되는 힘이 아니고, 왕성한 확장력을 가진 힘입니다.
생명은 확장되고 번식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염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파급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 안에 생명의 힘이 작동될 때,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은 생명의 힘의 지배를 받습니다. 생각 안에 생명의 힘이 역사하면, 생각이 팽창되어 풍성해집니다.
신자가 은혜를 받으면, 생각에 창의력이 생깁니다. 긍정적인 사고(思考)를 하게 되고, 창조력이 생깁니다. 생각이 쪼그라들지 않고, 하나님의 무한한 세계 속으로 들어갑니다. 믿음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신자의 말은 소모적이거나 파괴적이지 않습니다. 생산력과 창조력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력을 가진 신자에게서 흘러나오는 말은 생명을 낳습니다. 죽은 언어가 아니라, 살아있는 언어가 흘러나옵니다. 죽은 언어는 절망적입니다. 원망하고 낙심하고 비판하게 합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언어는 다릅니다. 희망이 있습니다. 격려가 있고, 축복과 약속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일으켜 세웁니다. 생명력이 있는 사람은 말을 하면, 사람이 살아납니다. 생명의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보세요. 죽음의 힘이 강력하게 작동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생명의 언어를 사용할 줄 압니다. 글을 쓰더라도 죽이는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글을 씁니다.
생명의 언어를 통해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삶에는 놀라운 열매가 맺힙니다. 생명의 힘을 가진 사람의 땀은 거대한 역사를 일으킵니다.

오늘날에는 헛된 땀을 흘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오늘날 헛수고하다가 허무하게 삶을 마치는 사람이 많습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납니까? 그 안에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력을 가진 사람에게는 열매가 나타납니다. 번식력이 있고, 생명력이 있습니다.

죄를 지은 이후, 이 땅에 엉겅퀴가 나고, 땀을 흘리고 수고해야 열매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힘은 힘대로 들고, 열매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헛된 수고를 그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는 다릅니다. 의미 있는 땀을 흘립니다. 수고한 만큼 열매를 거두는 것이 아니라,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거둡니다.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거둔다는 것은 풍성한 열매를 거둔다는 의미도 있지만, 저주가 끝났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 속에는 하나님께서 맺게 하시는 생명의 열매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거둔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 안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부인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가 우리 안에 나타납니다. 이것이 생명의 역사입니다.
힘으로 일하려고 하지 마세요. 우리의 힘으로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기 때문에 나무에 있는 생명으로 인해 가지에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예수님의 안에 있는 생명에 접붙여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살면, 우리에게 극상품 열매가 맺힐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교제의 즐거움을 누려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시선을 두어야 합니다. 끊임없이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주님을 묵상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면, 우리는 열매를 많이 맺습니다. 주님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 시선을 고정해야 합니다. 주님께만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붙어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주님의 생명이 내 안에 들어오면,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생명의 역사가 우리 안에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역사하면, 죽음의 권세도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 교회 중등부와 고등부의 학교기도회가 확장되고 있습니다. 30개의 중학교에서, 37개의 고등학교에서 기도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기도회를 시작했는데, 수십 명의 학생이 모여 기도하는 학교가 있다고 합니다. 어느 학교에서는 학생 한 명이 기도하기 시작했는데, 기도하는 학생이 점점 늘어났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왕따 당하는 학교도 있고, 선생님들이 반대하는 학교도 있고, 교장선생님이 기도회를 방해하는 학교도 있지만, 학생들이 눈물 흘리며 기도한다고 합니다. 대단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그 속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더 많은 학교로 번져나갈지 모릅니다. 학교 안에서 기도회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세상 속에는 사망의 힘, 쇠퇴의 힘이 작동합니다. 죽이고 끌어내리는 힘이 작동합니다. 비난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영이 작동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힘을 빼앗아갑니다. 사람들은 좌절하고 낙심하고 한숨지으며 살아갑니다. 힘을 빼는 부정적인 에너지가 세상에 깔려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눌려있습니다. 사람들의 영이 눌려있습니다. 사람들의 정신이 눌려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눌려있습니다. 환경과 사람의 말이 짓누릅니다. 어두운 세상의 영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서로 비난하고 공격하는 곳에서는 생명의 영이 작동되지 않습니다. 교회가 살려면, 생명력이 일어나야 합니다. 다시 일으키는 힘이 일어나야 합니다.

화초는 밟으면 죽습니다. 그런데 잡초 안에 있는 생명력은 굉장합니다. 그래서 콘크리트를 뚫고 나오기도 합니다.
예수 안에 있는 생명력은 잡초 안에 있는 생명력과 같습니다. 아무리 밟아도 다시 일어납니다. 힘든 일이 있는데도 입에서 찬송이 나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생명력 때문입니다.
생명력이 있으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찬송이 터져 나옵니다. “어려운 일이 있어도 나는 죽지 않는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나는 실망하지 않는다.” 이것이 생명력입니다.

그런데 어려운 일이 왔을 때에 눌린다면, 생명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력이 있어도 매우 약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찬양할 때에도 힘 있게 찬양해야 합니다. 힘 있게 찬양하면 마귀가 떠납니다. 어둠과 슬픔이 떠나고, 염려와 낙심, 한숨이 떠납니다.

누가 나를 욕한다 해도 가슴이 뜨거워지고, 세상이 알 수 없는 기쁨이 몰려온다면, 그것은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힘 때문입니다. 내 안에 생명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살아나신 예수님의 생명이 내 안에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련이 와도 끄떡없습니다.
여러분 안에서 생명력이 강하게 분출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생명력을 옮겨야 합니다.

집회에 열심히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집회는 수원지와 같습니다. 생명이 흘러나옵니다. 집회 시간에는 우울함이 찾아올 수 없습니다. 찬송하고 말씀을 듣고 기뻐하기 때문에 우울증이 파고들어올 틈이 없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나오는 생명력은 죽음의 흔적을 없애버립니다. 사망의 냄새를 사라지게 합니다.

여러분의 안에 생명의 힘이 넘쳐납니까? 죽음의 힘이 넘쳐납니까? 생명의 힘이 넘쳐나야 합니다. 생명력이 있으면 번식합니다. 생명력으로 인해 열매를 맺습니다. 다른 사람을 살립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잠재력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가능성입니다.
씨앗 하나를 통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 속에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씨앗 하나가 심어지면, 싹이 나고 자라서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힙니다. 열매를 거두어서 그 속에 있는 씨앗을 또 다시 심으면, 어마어마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저는 아이들을 좋아합니다. 아이들에게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가진 가능성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 한 사람을 통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흥분됩니다.

성경에서는 씨앗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하나님께서 씨앗 안에 가능성을 숨겨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 제가 살던 집에 텃밭이 있었습니다. 유실수도 심고, 온갖 작물을 심었습니다. 씨앗이 자라 열매가 맺히는 것이 참 신기했습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제한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해 하나님의 걸작품으로 만드셨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들어온 이상,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그냥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는 시간은 우리의 심령에 씨를 뿌리는 시간입니다. 설교자가 가진 가장 영광스러운 특권은 말씀을 통해 성도들의 심령에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씨를 통해 무슨 역사가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씨를 뿌리다 보면, 어느 날 말씀이 믿음과 만나 말씀을 확실히 믿게 됩니다. 그때 말씀의 씨앗이 자라 열매 맺게 되고, 말씀을 통해 생명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말씀 자체가 강력한 것입니다. 믿음이 말씀과 만나 작동되면, 말씀이 폭발해버립니다. 우리 안에 잠재되어있던 것들이 일어나 우리 안에 있던 부정적이고 어두운 생각들이 사라지고, 인생이 꽃피우게 됩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자기가 자신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엄청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 가능성을 가두어버립니다. 열등감이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분이 무엇입니까? 직업이 어떠하든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걸작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는 새로운 신분을 부여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대가로 지불하시며 우리를 기막히게 빚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누구와 비교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복음을 듣고, 예수님의 생명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자신의 존재의 귀중함을 깨닫는 순간,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놀라운 것을 심어놓으셨습니다. 우리의 삶에 많은 것을 부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많은 것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적 역사를 대행하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엄청난 가능성을 심어놓으셨습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께서 심어놓으신 가능성의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타락한 심성으로 말미암아 죽어있던 것들이 다시 위대한 작품으로 살아날 때, 우리의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꽃피우게 됩니다.

나이와 상관없습니다. 나이를 의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는 89세까지 살았습니다. 그는 죽기 전까지 대작을 그렸습니다.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는 80세에 불후의 고전 〈파우스트(Faust)〉를 썼습니다.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는 90세까지 지휘를 했습니다. 피카소(Pablo Picasso)는 92세까지 창작활동을 했습니다. 에디슨(Thomas Alva Edison)은 92세까지 발명에 몰두했습니다.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는 95세까지 하루에 6시간씩 연습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대한 기대감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열어놓으신 세계로 들어가야 합니다.
구원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특징은 자신감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정체성이 회복되고, 하나님의 걸작품으로 살아갈 때, 자신감이 회복됩니다.

우리는 외적인 조건이나 세상적인 기준에 따라 주눅 들면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걸작품으로 회복된, 하나님의 백성답게 당당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 인해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 안에 의욕이 일어납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선물이 무엇입니까? 절망이 아니라 희망입니다. 패배주의가 아닙니다.
저는 청소년기에 소망 없이 살았습니다. 소망 없는 환경 속에서 자랐습니다. 절망과 좌절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환경은 매우 열악했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복음을 경험했습니다.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후에 자신감이 회복되었습니다. 제 인생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역하는 것이 신납니다. 설교하는 것이 신납니다. 제 안에 열정이 있습니다. 걱정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을 생각하면, 기대가 됩니다. 복음의 영광과 광휘(光輝)에 빠지면, 세상의 것들로 인해 주눅 들지 않습니다.
바울을 보세요. 얼마나 당당했습니까. 사도 바울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라고 고백했습니다(빌 1:21). 바울은 세상의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빌 3:8).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주신 어마어마한 가능성을 쓰지 않고 있습니다. 갈렙처럼 남들이 도전하지 않는 영역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수 14:9).
기적만 찾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것들을 사용하기만 해도 충격적인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 중에도 엄청난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 중에도 큰 일을 해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라는 기막힌 도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안 돼”라고 결론 내렸다면, 회개하고 다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기대를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 안에 어마어마한 잠재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하여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의 삶에 있는 어마어마한 가능성을 마음껏 표출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에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의욕이 넘치고, 자신감이 넘쳐서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다스리는 권세를 회복시켜주셨습니다.
통치권은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으로부터 통치권을 부여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각 생물의 이름을 짓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문화명령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세상 가운데 문화를 만들어가는 사람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따라가면 안 됩니다. 세상의 문화에 끌려 다니면 안 됩니다. 우리는 다스려야 하는 사람입니다. 다스림을 받는 사람이 아닙니다. 통치권을 행사해야 합니다.

통치권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벧전 2:9). 우리는 왕의 자녀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권세를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권세를 사용해야 합니다. 사용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을 통치하는 권세를 부여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땅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다스린다는 것은 명령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이에게 “일어나 걸으라”라고 말했습니다(행 3:6). 명령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든 자들을 치유하실 때 “아이야 일어나라(눅 8:54)”,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요 5: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명령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주님의 명령권과 통치권을 사용한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이에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 3:6)”라고 말했습니다.
권세를 가진 자들이 명령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통치권을 베드로가 동일하게 사용했을 때, 못 걷게 된 이가 걷고 뛰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오순절 사건 이후, 성령으로 충만한 그들에게 영적 권세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고, 통치권이 살아났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습니다.

다스리는 권세를 구체적으로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권세 잡고 있는 곳으로 들어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권세로 제압하시기 바랍니다.
세상 가운데 큰 권세가 있습니다. 에베소서 6장 12절에 보면,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것은 마귀의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이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귀를 제압하려면, 성령의 검을 가지고 선포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4장 7절에 보면,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는 복종하고, 마귀는 대적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귀를 제압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얼마든지 제압할 수 있습니다.

영적 전쟁에서 우리는 명령권자입니다. 우리는 마귀에게 명령해야 합니다. 우리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권세를 잘 쓰지 못합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선포해야 합니다. 돈의 권세가 나를 지배하려고 하면, 명령해서 내쫓아야 합니다. 어두운 생각과 근심도 명령해서 내쫓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스림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를 다스릴 분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우리를 다스릴 자가 없습니다. 어떤 환경도 우리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 어두운 환경이 나를 누르면, 어둠의 영들을 공격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물질의 세계를 다스리기만 해도 멋진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물질에 끌려 다니면, 신자 노릇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물질의 세계에 끌려 다니면 비참한 삶을 살게 됩니다. 줄에 매인 개와 같습니다. 줄에 매여 있는 개는 주인이 끌고 가는 대로 끌려갑니다. 자유가 없습니다. 돈이 주인이 된 인생,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어도 아주 적게 가진 듯이 살고, 아무리 적게 가졌어도 엄청난 것을 가진 듯이 사는 법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엄청나게 많아도 아주 적게 가진 듯이 사는 법을 배우세요. 아무리 적게 가졌어도 어마어마하게 많은 것을 가진 듯이 사는 법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별 것 아닌 것에도 행복해할 수 있습니다.

왕의 통치권은 기도를 통해 사용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것은 다스림의 영역에 속합니다. 적극적으로 기도하세요.
어두운 곳을 바라보면, 그곳에 빛이 임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영혼이 어두워지면, 진리의 빛이 영혼을 지배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불의가 있는 곳을 바라보면서 선포하세요. 불의하고 어둡고 더럽고 악하고 음란한 것이 떠나가도록 선포하세요. 무너지고 깨어진 것이 수축되고 재건되도록 기도하세요.

우리가 다스려야 할 영역이 매우 많습니다. 세상 주관자인 마귀가 다스리도록 방치되어있는 세상 속으로 우리가 들어가야 합니다. 그냥 내버려두면, 마귀들의 무대가 되어버립니다.
우리는 그 속에 들어가 전투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어두움이 떠나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선제공격해야 합니다. 반전의 역사를 일으켜야 합니다. 우리는 명령권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권세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지배당하지 않고, 오히려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이 땅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명령하고 다스리는 권세를 사용할 때,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천국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다스림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다스릴 때, 그곳에 천국이 임합니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면, 그곳에 천국이 임합니다. 그러므로 적극적으로 신앙생활하시기 바랍니다. 수세에 몰려 전전긍긍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다스림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다스려야 하는 사람입니다. 어디서든 왕의 권위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왕이십니다. 하나님은 왕 중의 왕이십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권세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직급과 상관없습니다. 신분과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권세의 대행자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통치권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것에도 얽매이거나 끌려 다니는 인생을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생명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번식력과도 같습니다. 번성하는 힘입니다. 확장하는 힘입니다. 그래서 생명이 분출됩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인해 잠재력과 가능성이 깨어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마음껏 쓰임 받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안에 다스림의 권세가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지배 받지 마세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일에 여러분 모두 쓰임 받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절망의 세상 한가운데로 들어가 소망을 일으키는 일에 쓰임 받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그 역할을 하지 않으면, 이 땅은 소망 없는 땅이 되어버립니다. 버려진 땅, 사탄의 권세 아래에 지배 당하는 땅이 되어버립니다.
그 땅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바꾸어놓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가진 생명력을 드러내어야 합니다. 잠재력의 문이 열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가진, 왕의 권세를 아낌없이 사용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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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저녁예배] 감정보다 믿음에 우선하라 Friday Night Sermon

 

제자 / 감정보다 믿음에 우선하라

본문 / 열왕기상 19:1~8

 

1. 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하니
2.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3.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4.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5.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6.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7.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8.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우리의 감정은 매우 중요합니다. 감정이 우리의 삶에 끼치는 영향력은 매우 큽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어떤 시대보다 감정의 영역은 우리의 삶에 많은 영향력을 끼치는 영역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감정 상태에 따라 우리의 행불행(幸不幸)이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감정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감정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전 세대에서는 감정이 무시되었습니다. 감정을 표출하는 데 문화적으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자아이들은 울지 못하게 하고, 여자아이들은 큰 소리로 웃지 못하게 하며 감정을 억압시켰습니다.

과거에는 먹고살기 힘들었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참아야 했습니다. 외로워도 참았습니다.
한국 문화 속에는 참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화병(火病)이 되었습니다. 화병은 세계에서 통용되는, 한국인의 병을 가리킵니다. 한국 사람들에게만 있는 병입니다.

감정을 억누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병이 됩니다. 감정을 억제하고 억압하고 무시합니다. 그것이 스트레스가 되고, 그것이 암이 됩니다. 그러므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감정을 억누른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감정이 순화(純化)되어야 합니다.

감정은 중요한 것입니다. 감정의 영역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감정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감정이 죽으면, 사람은 살 맛이 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행복을 느끼는 것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감정에서 오는 것입니다. 감정이 살아있어야 모든 것이 생동감 있습니다.

아이들은 감정이 건강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생동감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감정을 그대로 표현할 줄 압니다. 좋은 것을 좋다, 좋지 않은 것은 좋지 않다고 표현할 줄 압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면, 점점 사라집니다. 겉으로는 웃지만, 속에서는 부글부글 끓습니다. 그것을 ‘포커페이스(poker face)’라고 말합니다.

기쁨을 표현하고, 감탄사를 터뜨리고, 박장대소하는 등의 모든 것이 감정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연애하고 사귐이 깊어지려면, 감정적 작용이 일어나야 합니다.
감정을 중요시하는 것은 좋지만, 감정을 너무 중요하게 다루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요즘 감정 때문에 고통을 겪는 분들이 많습니다. 감정의 요소를 잘못 다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생 전체가 무너집니다.
감정에 빠져 살다 보면, 감정 에너지가 어마어마하게 쏟아지면서 삶의 위기를 맡게 됩니다. 그래서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감정의 문제에 구멍이 생기고, 감정이 깨어지면, 감정의 영향력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다가 큰 사고가 터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요즘은 의지보다 감정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시대입니다.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깁니다.
느낌(feeling)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직설화법(直說話法)을 사용하여 말합니다. 감정을 숨기지 않습니다. 느낌을 그대로 표현합니다.
느낌과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은 좋지만, 감정이 있는 그대로 드러난다면, 굉장히 위험해집니다. 오늘날 감정이 중요하게 여겨지면서 초래되는 위험이 굉장히 많아졌습니다. 무엇보다 감정이 신앙을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엘리야는 갈멜 산에서의 대전투에서 승리한 전사(戰士)입니다. 엘리야는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그냥 선지자가 아닙니다. 대선지자입니다.
그는 어둡고 불의한 시대와 맞서서 하나님 편의 선두에 서서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 850명과 싸워 이긴 사람입니다. 850명을 홀로 상대했던, 강성(强性)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엘리야는 그 엘리야라고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감정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갑자기 우울해졌습니다. 우울해진 정도가 아닙니다. 그는 자살충동을 느꼈습니다. 자살할 수 있는 상태까지 갔습니다. 이것이 믿어집니까? 간단하게 다룰 만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엘리야,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대선지자였습니다. 갈멜 산 정상에서 승리했던 전사였습니다.
그런데 죽고 싶은 마음이 생길 정도라면, 갈 데까지 간 것입니다. 선지자이기 때문에, 자살하지는 못하고, “하나님, 데려가주세요.”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은 인생의 밑바닥까지 간 것을 의미합니다. 감정이 곤두박질친 상태입니다. 절망의 상태에서도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간 상태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이 정도면 갈 데까지 간 것 아닙니까. 더 이상 갈 곳이 있겠습니까.

기막힌 승리를 거둔 후에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과의 영적 교감(交感)을 경험했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뜨겁게 경험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런 엘리야가 극단적인 생각을 했다는 것은 단순히 감정적 영역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문제가 영적 문제에까지 연결되어 영적 침체(depression)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죽고 싶다는 감정에 사로잡혀있습니다. 모든 것이 싫습니다.

감정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엘리야에게 영향을 준 것은 감정적 요소입니다. 감정을 잘못 다루면, 감정이 우리의 삶 전체를 뒤집어놓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벼랑 끝으로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인생이 곤두박질치는 것 같습니다. 그 상태로 내버려두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감정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그리고 감정은 묘한 것입니다. 어떤 감정에 휩쓸리면, 자기 자신도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자기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심장, 신장 등의 기관이 아플 때, 약을 먹으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런데 감정의 문제는 약으로 처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열이 오르고, 밥맛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삶 전체가 흔들립니다. 심한 경우에는 최악의 상태에까지 몰고 갈 수 있는 것이 감정의 영역입니다.

감정이 우리의 삶에서 중심에 놓이는 순간, 삶은 불행 쪽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그때부터 삶은 위태로워집니다.
감정이 우리의 삶에서 앞에 와있게 됩니다. 우선됩니다. 감정이 나를 이끌고 갑니다. 감정이 나를 주도합니다. 감정이 나를 지배하고, 나를 사로잡아버리면, 감정이 나를 어떤 지경에 빠지게 할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감정이 어디에 있는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감정을 자신의 삶의 중심에 두고 있습니다.
감정을 자신의 삶의 중심에 둔 사람은 자신의 감정이 어떠한가에 매우 민감합니다. 자신이 지금 즐거운지, 외로운지, 슬픈가에 매우 집중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감정 상태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살아가면, 자신의 감정에 휩쓸리게 됩니다.

우리는 감정의 특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감정은 충동적인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지금 아합 왕의 아내인 이세벨의 말 “내일 너를 죽이겠다.”는 한 마디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엘리야는 갑자기 곤두박질쳤습니다.
그에게서 강력한 전사의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습니다. 갈멜 산 정상에서 승리했던 선지자라고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는 갑자기 꼬리를 감추었습니다.

엘리야는 이미 길르앗에서, 그릿 시냇가에서,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단련된 백전노장입니다. 그는 전사 중의 전사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와 능력과 기적을 한두 번 체험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엘리야가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조금 당황스럽습니다.
수십 년 동안 신앙생활하고, 어마어마한 기적을 체험하고, 온갖 훈련을 받았다 할지라도 엘리야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야고보서 뒷부분에 보면, 야고보는 엘리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라고 기록했습니다(약 5:17). 엘리야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엘리야가 갈멜 산 정상에서 850대 1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던 위대한 역사는 엘리야 자신의 인간적 힘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실력입니다. 엘리야가 하나님께 주목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갈 때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시선을 놓치고, 지금 일어난 형편을 주목하고, 한 여인의 말이 비수에 꽂혔습니다. 그때 본문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에게서 시선을 떼는 순간, 추락할 수 있습니다. 수십 년간 신앙생활을 했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목사 등의 직분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순간에 추락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아무리 잘했다 해도 내일 무너질 수 있는 가능성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잘 했던 사람들 중에 우울증으로 힘들어 하는 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시선을 떼고, 자신의 상태에 몰두하는 순간, 갑자기 허망해집니다. 갑자기 낙심하게 됩니다. 갑자기 절망하고, 갑자기 울적해집니다.

화려한 무대가 끝나고, 커튼이 내려진 후, 무대 뒤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있습니다. 자신을 묵상하기 시작하면, 갑자기 비참한 감정이 느껴집니다. 자기를 비하하는 감정에 빠집니다. 그래서 절망하게 됩니다.
자기 자신과 자신이 처한 상황에 빠지면, 감정이 무너집니다. 외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울적해집니다. 자신이 불쌍하게 느껴집니다. 삶이 무의미해집니다. 그래서 도망가고 싶어집니다. 우리는 죄 아래에 있기 때문에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감정은 온전하지 않습니다.

감정은 변화무쌍합니다. 아침, 저녁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시시각각 다른 얼굴을 갖습니다. 일희일비(一喜一悲)합니다. 감정이 파도를 탑니다.
바다를 보면, 파도가 없을 때가 없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같은 파도는 없습니다. 크고 작은 다양한 파도가 다양한 모습으로 밀고 들어옵니다.
감정의 바다가 그렇습니다. 감정에 휘둘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파도처럼 불안정합니다. 바다 물결에 밀려 요동하는 것 같습니다. 하루에도 천의 얼굴을 갖습니다.

감정의 파도가 높이 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파도가 난폭해지면, 큰 사고가 발생합니다. 그 파도에 자신이 휩싸입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피해를 입습니다.
외로움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것은 아닙니다. 다양합니다. 그런데 외로움이 나를 사로잡는 순간, 우울증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사람은 본래 쉽게 변하는 존재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잘 변하는 것이 우리의 감정입니다. 변하는 것 중에 가장 잘 변하는 것이 감정입니다. 감정보다 쉽게 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감정에 의존한 삶을 믿을 수 있을까요? 감정의 영향을 잘 받는 기질을 가진 사람을 믿을 수 있을까요? 그 사람은 늘 불안정합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해도 불안정합니다. 감정이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감정의 영역이 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부분에 있어서 자주 사고를 칩니다.

신자가 감정의 영역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 자주 넘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신자들 중에 우울증 환자가 많습니다. 신자가 되었지만, 화를 잘 내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전의 기질이나 감정의 영역이 전혀 길들여지지 않은 채 있기 때문입니다. 감정의 영역이 우리를 지배하도록 내버려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제 어떻게 위험한 상태에 빠질지 알 수 없는, 불안정하고 위험한 삶을 살아갑니다.

마귀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마귀는 우리의 감정에 집중하라고, 지금의 감정에 충실하라고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지금 느끼는 것이 옳은 것이고, 전부라고 속입니다. 그것에 충실하라고 속입니다.
그래서 감정을 들끓게 합니다. 충동질합니다. 감정이 앞장서서 우리를 끌고 가게 합니다. 그렇게 되면, 사고가 발생합니다.

우리가 감정에 끌려 다닌다면, 감정이 우리의 삶의 주인이 되어버립니다. 감정이 끌고 가는 대로 끌려가는 인생은 미래가 없습니다. 어디로 끌려갈지 알 수 없습니다.
감정에 빠지지 마세요. 감정에 몰입하지 마세요. 감정에 속지 마세요. 감정이 전부인 것은 아닙니다.
감정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감정은 부분입니다. 전부가 아닙니다.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은 전부가 아닙니다.

감정도 습관입니다. 오래된 죄성에 의해 속박된 감정은 습관이 되고 기질이 됩니다. 기질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환경은 바뀌었지만, 여전히 불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기질입니다. 어두운 감정이 그 사람을 계속해서 지배했기 때문에, 감정을 다루지 않은 상태로 살아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두 번 은혜 받았다고 해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습관화된 슬픔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좋은 일이 일어났음에도, 습관화된 슬픔에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우울해집니다.
우울이 삶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감정이 자신을 지배해왔기 때문에 기질이 되어버렸습니다. 우울한 기질이 되어버렸습니다. 우울증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감정적으로 침체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우리의 힘으로 감정을 해결하려 하면, 실패합니다.
자신이 자신의 감정을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감정을 이기려고 하다가 오히려 참담한 상태에 빠집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어두운 감정에서 헤어날 수 없습니다.

외롭고 우울한 감정을 이기려고 친구를 만납니다. 친구를 만날 때에는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러나 돌아오면 외롭고 우울한 감정이 다시 찾아옵니다.
감정을 이겨보려고 나들이하기도 하고, 맛있는 것을 먹으며 신나게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나 돌아오면 다시 우울해집니다.
맛있는 것을 먹는 동안에는 괜찮습니다. 그러나 오래가지 않습니다. 친구를 만나고, 즐겁게 시간을 보냈지만, 오히려 더 깊은 우울감에 빠집니다. 즐거워지려고 노력할수록 실패합니다.
자신이 해결하려 할수록 자신의 상태가 비참하게 느껴집니다. 자신이 불쌍하게 보이고, 더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때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의 시선을 그리스도께 두어야 합니다. 우리의 초점을 그리스도께 두어야 합니다. 우리의 감정의 초점을 그리스도께 두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어둠의 감정으로부터 빠져나와야 합니다.
우울의 감정에서 기쁨의 감정으로 전환하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그렇게 전환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쁨은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무궁한 기쁨을 누리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기쁨을 주실 때, 우리는 우울한 감정에서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기쁨은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만이 기쁨의 원천이 되십니다. 감정이 여러분의 중심에 놓이게 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중심에 놓이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의 좌소(座所)에 그리스도께서 앉아계실 때, 우리의 삶의 감정을 그리스도께서 지배하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 고개를 돌리면, 놀라운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5:11). 예수님께서 우리의 감정을 지배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기뻐하려고 해서 기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울한 감정에서 빠져나오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빠져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깊이 빠져들 뿐입니다.

빌립보서에 보면,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말했습니다(빌 4:4).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말씀은 기쁨의 감정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감정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기쁨이나 행복이라는 감정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우리가 행복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불가능합니다. 웃고 싶다고 해서 웃을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기쁨은 자가 생산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안에서 기뻐할 수 있습니다.

감정에 충실하려고 하지 마세요. 감정에 집중하지 마세요. 때로는 외로운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 외로움의 감정에 매달려 그것을 해결하려 하지 말고, 그리스도께 관심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위해 살기 위해 더욱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 집중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갖고,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에 전력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주님의 교회를 섬기고,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 그리스도께 주목하는 삶입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외로운 감정, 우울한 감정은 사라져버립니다. 그리스도로 인해 주어진 행복과 즐거움 때문에 춤을 추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우울할 틈이 없습니다. 외로울 틈이 없습니다. 즐거움과 행복이 넘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이 무한히 흘러넘칩니다.

기쁨이라는 단어 속에는 ‘충만’이라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5:11).
그 속에는 우울함, 울적함, 답답함 등의 어두운 감정이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기쁨이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정이 다운되고, 무엇인가 힘들게 느껴지는 순간이 오면, 즉시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힘들고 어렵고 곤경에 처하고 절망 속에 있을 때, 시편 기자들은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습니다. 그래서 어두운 감정의 터널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적극적으로 찾지 않을 때, 부정적인 감정이 생겨납니다.

우울증은 영적 태만으로부터 비롯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울증의 요인이 하나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울증의 요인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영적 태만입니다. 가장 근원적인 요인입니다.
그리스도를 부지런히 찾는 것에서 다른 것으로 시선을 옮겼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고통이 우울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 시선을 둔 채 살아갑니다. 자기 자신의 감정 상태에 매우 예민하여 그 속에 빠져듭니다.
여러분의 감정 상태에서 빠져나와 그리스도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찾되 간절히 찾으시기 바랍니다. 여호와의 얼굴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우리가 가져야 할 처방은 감정 상태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느끼는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느낌이 대세입니다. 느낌이 강조되면, 감정이 왕이 됩니다. 감정이 주인이 됩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느낌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객관적 사실이 중요합니다. 감정이 사실 자체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면, 더 이상 약이 없습니다.
감정에 빠진 사람들은 사실 여부보다 자신이 느끼는 것에 무게를 둡니다. 자신의 느낌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시편 34편에 보면,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시 34:8). 여기서 ‘맛본다’는 것을 감정적인 것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 Jones) 목사는 “맛보아 안다는 것은 어떤 느낌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시험해보기 전에는 느낄 수 없다. 이것은 감정적 충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맛보고 난 후, 좋아하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시편 기자가 맛보아 안다고 한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진리를 의미합니다. 진리를 알고, 진리를 깨달을 때에 찾아오는 것이 기쁨입니다.

맛본다는 것을 체험에만 초점을 두면, 핵심을 놓쳐버립니다. 중요한 것은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관심의 초점은 진리에 있습니다. 진리를 진리로 깨달을 때에 오는 기쁨은 순간적으로 느끼는 기쁨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조명하심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깨달음으로 온몸이 전율하는 것은 엄청난 것입니다. 이것은 감정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으며, 말씀의 의미가 깨달아지고, 말씀이 영혼을 파고들어오는 것은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니고, 진리를 체득함으로 느끼는 기쁨을 말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좋다’라고 감정적으로 느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며 말씀을 들을 때마다 이런 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가 진리에 지속적으로 집중하는 삶을 살면, 감정의 지배를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정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감정은 전부가 아닙니다. 감정은 부분입니다. 감정보다 중요한 것은 진리에 근거한 믿음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이것은 사실입니다. 진리입니다. 변함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은 사실에 근거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 같다고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루 이틀 기도한 것도 아닌데, 응답을 받지 못하고, 상황은 점점 더 어려워질 때,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 영적 거인들 중에도 하나님의 부재(不在)를 느낀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다는 것은 느낌입니다. 자기 느낌입니다. 주관적인 느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감정과 상관없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고, 지금 이곳에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상황에 집중하다 보면, 감정에 빠지게 됩니다. 본문 3절에 보면, “그가 이 형편을 보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엘리야는 상황을 보았습니다. 엘리야는 상황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본문 3절에 보면,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한심한 모습입니다. 어려움이 오면, 우리도 엘리야처럼 될 수 있습니다. 감정에 치우치기 쉽습니다.
엘리야는 자기가 처한 형편을 보니 갑자기 우울해졌습니다. 비참함을 느꼈습니다. 자신이 홀로 남았다고 생각하니 외로움이 밀려왔습니다. 이세벨의 독기어린 말이 그의 가슴에 꽂혔습니다. 외로워하고 있을 때에 영향력 있는 사람의 한 마디는 사람을 흔들어놓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당당함의 근거는 우리의 상황이나 다른 사람의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상황이나 모습에 따라 우리를 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변함없이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십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믿음이 중심이 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감정의 지배를 벗어나 믿음의 삶을 살아갈 때, 우울한 감정을 이겨내게 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이 우리를 지배하게 됩니다.
믿음이 여러분의 삶을 끌고 가야 합니다. 그때 생기 넘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신앙의 활기를 유지할 때, 강력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감정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감정의 횡포에 시달립니다. 더 우울해집니다. 더 힘듭니다. 이겨내지 못합니다. 감정이 통제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울하면 술을 마십니다. 과할 정도로 운동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근원적인 해결책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화가 나있습니다. 늘 우울해합니다.

살다 보면, 감정이 망가질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내가 고통스러워할 때에 위로해주기보다는 오히려 소금을 뿌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속을 뒤집어놓습니다.
우리의 삶을 참 복잡합니다. 감정이 파도칠 때, 그것을 그대로 방치하면, 사고 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는 건망증이 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금방 잊어버립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와 역사를 금방 잊어버립니다.
엘리야는 자신에게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 점점 빠져 들어갑니다. 마침내 낙심합니다. 그는 진리가 아니라, 감정에 집중했습니다.

비가 와도 구름 위에는 태양이 있습니다. 그런데 태양이 없다고 느끼면, 태양이 없습니까? 태양이 없어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힘든 순간에도 주님의 이름은 ‘임마누엘’이십니다.
우리가 고난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의 침묵보다 더 무서운 것은 고난에 대한 해석입니다. 자신의 처지로 인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은 것을 지어내어 자신을 공격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데, 하나님의 말을 자기가 만들어내어 자기에게 일어난 고난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합니다. 자신의 감정에 빠져 자기 스스로 공격합니다.

말씀에 사로잡히면, 가라앉아있던 감정이 살아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감정을 분석하지 마세요. 말씀을 묵상하고, 믿음으로 반응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에 충만하여 여러분의 감정이 말씀의 지배를 받도록 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감정이 여러분을 붙들고 있게 하지 말고, 하나님의 진리가 여러분을 붙잡게 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6장에서 사도 바울은 영적 전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라고 말했습니다(엡 6:14). 그러므로 진리로 여러분의 허리를 둘러 무장해야 합니다.
허리띠를 느슨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단단히 매어야 합니다. 말씀을 놓치면 안 됩니다. 말씀을 놓치면, 감정이 그 자리에 끼어듭니다.

진리로 허리띠를 단단히 매어야 합니다.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해도, 진리의 허리띠가 나를 붙들어주고, 나로 하여금 중심을 잡게 해주어야 합니다.
만약 진리가 느슨해지면, 감정이 밀고 들어와 나를 어디로 이끌고 갈지 알 수 없습니다. 삶을 힘들게 만듭니다.
말씀으로부터 멀어지면, 그리스도에게서 시선을 떼게 되고 혼란스러워집니다. 그 지점에서 모두 추락하게 됩니다.

상황을 떠올리지 마세요. 말씀을 떠올리시기 바랍니다. 말씀의 위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의 위력이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 파도치는, 여러분의 감정을 믿지 마세요. 요동치지 않는 진리를 믿으세요. 우리의 시선을 그리스도께 고정시켜야 합니다.

시선을 놓치면, 언제든지 떨어질 수 있습니다. 영적 시야가 흐려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보면,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지속적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매 순간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의 대상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들은 시선이 산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연약한 사람은 눈길을 다른 데로 돌립니다.
믿음은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의 말씀에 고정시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에 시선을 맞춥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도적으로 시선을 고정시키고, 여호와께로 얼굴을 돌립니다. 의도적이고 의지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감정은 어려운 상황에 시선을 고정시키게 하고, 어려운 상황에 집중하게 합니다. 그때 우리는 의지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여호와께로 돌이켜야 합니다. 지속적인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할 때, 감정이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신기한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찬양하며 하나님께 예배하는 상황 속에서 우리의 시선을 그리스도께 고정시키고, 그리스도의 말씀에 우리의 시선이 머물러있게 하는 동안 말씀이 강화됩니다. 말씀이 강화될수록 감정의 파도는 잠들게 됩니다. 마음에 평안이 오고, 안정감을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듣는 가운데, 불안과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시선을 그리스도께 돌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주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근심과 염려, 우울함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가운데, 우울증 환자들이 우울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우울증 때문에 괴로워 술을 마시는 여 성도가 있었습니다. 의사를 찾아다니기도 하고, 약물을 복용해도 소용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배를 드리며 말씀을 듣는 가운데 말씀이 가슴에 꽂혔습니다. 그리고 회복되었습니다.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헌신자가 되었습니다.
말씀의 위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의도적으로 그리스도께 시선을 고정시켜야 합니다.

시편 42편 11절에 보면,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불안하십니까? 낙심 가운데 갇혀있습니까? 지쳤습니까?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습니까? 그 가운데 멈추어있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 안으로 들어가면, 파도처럼 밀려오는 문제 가운데 휩싸여 기분이 나쁘고, 짜증이 나고, 분노가 일어납니다. 그 순간, 하나님을 잊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의 시선을 의도적으로 하나님께로 돌려야 합니다. 상황에 따라 즐거워할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즐거워해야 합니다. 지금 일어난 감정에 따라 춤추지 말고, 믿음을 중심에 두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주님을 지속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항상 하나님을 찾고, 구해야 합니다.

무엇을 느끼는가에 몰두하지 마시고, 무엇을 믿고 있는가에 집중해야 합니다. 자신이 느끼는 것에 집중하지 마세요. 믿고 있는 것에 집중하세요. 그것이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모든 환경을 이겨낼 것입니다. 변화무쌍한 감정도 안정감을 얻고, 믿음의 삶에 더 큰 활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사회가 굉장히 불안합니다. 특히 한국 사회는 불안정한 것이 특징입니다. 굉장히 요동칩니다. 정치적으로도 변화가 많습니다. 경제적으로도 불안정합니다. 별 사건이 다 일어나고 있습니다.
서구사회에서는 자살 원인의 1위가 우울증입니다. 한국에서는 화병이 더 많습니다. 분노로 인해 일어나는 사건이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뛰어내립니다. 감정이 통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두운 감정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의 삶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환경은 언제나 파도칩니다. 그 속에 우리의 감정을 던져놓으면, 감정이 어떤 파도가 되어 나를 삼켜버릴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그런 일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정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진리가 우리의 감정을 지배해야 합니다. 진리에 대한 확신이 우리의 감정을 이끌고 가야 합니다. 그래서 순화되어야 합니다.

어둠의 감정에 오랫동안 사로잡혀 있었던 사람에게는 기질이 있습니다. 그것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선을 끊임없이 그리스도께 고정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진리에 집중해야 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순간이 오면,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기쁨의 근원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뻐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주님으로 인해 기뻐해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기쁨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신앙생활은 기뻐하는 것입니다. 행복해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우리의 감정을 하나님께서 지배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객관적인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기쁨의 근원 되시는 그리스도께 우리의 시선을 떼지 말아야 합니다. 항상 주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위대했던 엘리야, 그러나 그는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연약한 인생이었습니다. 아무도 보장되어있지 않습니다.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알고, 지속적으로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감정에 집중하지 마시고, 말씀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진리에 사로잡히면, 진리가 나를 지배하고 통제할 것입니다. 그때 주님으로 인해 충만한 기쁨이 찾아올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경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울해지면 하나님의 말씀을 펴세요. 말씀을 들으세요. 신기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말씀에 능력이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에 능력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감정을 압도하는 힘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주 안에서 기뻐하는 삶이 무엇인지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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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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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철야예배] 문제보다 목표에 집중하라 Friday Night Sermon

 

제목/ 문제보다 목표에 집중하라

본문 / 빌립보서 3:12~16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우리 인생은 문제투성이입니다. 문제가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문제를 풀다 보면, 끝이 없습니다. 문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그래서 문제를 해결하느라 세월을 보냅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인생을 다 보내면 안 됩니다. 문제를 해결하다 보면, 문제 속에 갇힙니다.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문제는 늘 있지만, 우리는 우리가 가야 할 목표를 확인하고, 목표를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문제는 사라져버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목표에 도달해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에 매이지 말고, 목표에 집중해야 합니다. 문제를 따라가지 말고, 목표를 따라가야 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기도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를 풀기 위해 기도하지 마세요. 목표를 향해 달려가기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문제를 푸는 데에만 목적을 두고 기도하다 보면, 수세에 몰릴 수 있습니다. 문제에만 매달리기 때문에 문제가 해결되든 해결되지 않든 문제 속에 갇히게 됩니다.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달려가야 할 목표를 향해 기도하며 나아가다 보면, 문제는 우리에게서 떨어져버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목표를 향해 계속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늘 고민을 풀어놓고, 넋두리하듯이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의 과녁이 정확해야 합니다. 무엇을 향해 나아가는 데 하나님의 도우심이 어떻게 필요한지 목표를 정확하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와서 예배드릴 때마다 우리의 방향을 정확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목표를 정확하게 하지 않고 나아가다 보면, 방향이 흐트러질 수 있습니다. 문제로, 고민으로 빠져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길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문제에 휘말려버리고, 달려가야 할 목표를 놓쳐버리면, 문제 속에 갇혀서 문제를 풀다가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나중에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게 됩니다. 신앙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삶의 방향을 놓쳐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시기 원하시는지, 우리는 큰 그림(big picture)을 보아야 합니다. 큰 그림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좁고 작게 보지 말고, 크게 보는 것을 훈련해야 합니다. 목표에 집중해야 합니다.

바울은 목표가 분명했습니다. 자신이 가야 할 방향에 집중했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사도 바울이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의 어디쯤 가고 있는가에 민감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12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자신이 어디쯤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어디로 가야할지도 알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목표가 분명했습니다. 자신의 목표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목표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푯대를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푯대의 방향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달려가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도 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을 미완(未完)으로 보았습니다.

바울이 어떤 사람입니까? 바울은 영적 세계에 들어간 사람입니다. 초신자가 아닙니다. 웬만큼 믿은 정도가 아니라, 영적으로 상당히 깊은 세계에 들어간 사도입니다. 영적 성취를 맛보았던 사도입니다. 삼층천까지 경험한 사람입니다. 신비한 세계에 들어간 사람입니다.
바울의 서신을 읽어보면, 사도 바울이 신학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헌신에 있어서도 굉장한 수준에 이른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영적 고지(高地)에 이른 사람입니다. 그의 신앙세계와 사역은 엄청났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자신을 어떻게 표현했습니까? 사도 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라고 말했습니다. 가야 할 길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는 의미입니다.
에베레스트 산을 등정하는 베테랑 산악인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해발 5천m 이상 올라갔음에도 더 높은 세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런 태도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영적 세계에서 일찍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은혜를 어느 정도 받고 나면, 포만감(飽滿感)을 느낍니다. ‘내가 어느 정도 됐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만족합니다. 그러나 영적 세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누리는 구원을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천국에 가는 것으로 결론 내려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날 동안 누려야 할 구원의 부요함을 이야기합니다. 미래에 천국에 갔을 때, 완성된 구원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우리가 이 땅에서 이루어가야 할 구원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미래에 우리가 가게 될 천국도 있지만, 이 땅에서 확장되어야 할 천국이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 세계가 얼마나 풍성한가를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평강과 기쁨이 무궁무진하게 흘러나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에도 끝이 없습니다. 찬송가 304장에 보면,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더 깊은 세계를 향한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사랑에 더욱 목말라합니다. 좀 더 깊은 사랑을 원합니다. 갈망이 일어납니다.

성경공부를 하다 보면, 끝이 없습니다. 저는 성경에 대해 목마릅니다. 그래서 성경공부를 할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느낍니다. 솔직한 심정입니다.
오랫동안 성경을 공부했습니다. 성경을 대하고, 성경을 연구하고, 성경에 대한 책도 읽었지만, 성경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더 많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하나님은 어린 아이가 손으로 물을 움켜내는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는 하나님을 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안다면,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이라고 할 때, 우리는 그것이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세계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세계의 초입(初入)에서 찰랑거리는 정도만 경험했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여러분은 어디까지 도달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悔心)한 후에 굉장히 열심히 달려왔습니다. 그는 율법에 통달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복음 안에 들어와서 율법을 재해석했습니다. 그는 복음에 사로잡힌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서신서에 “달려가노라”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멈출 줄 모르는 열정을 서신서를 통해 느낄 수 있습니다.
그는 최선을 다해 달려왔습니다. 그는 질주했습니다. 믿음의 경주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라고 고백했습니다.

진리의 세계는 끝없습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해도 끝이 없습니다. 은혜의 바다에서 아무리 헤엄쳐도 끝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충만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무엇으로 알 수 있겠습니까.

목회자는 영적 세계 안에 깊이 들어가고 싶은 열망과 함께 성도들을 영적 세계 속으로 좀 더 깊이 끌어들이려는 갈망을 느낍니다.
자신이 알지 못하고, 자신이 도달하지 못하면, 성도들을 이끌어가지 못합니다. 어마어마한 세계가 있는데, 성도들을 동굴 속에 가두어놓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성도들은 목회자를 잘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48).
예수님께서는 신앙의 세계에서 우리가 어디까지 도달해야 하는가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가 크다는 의미입니다. 완전의 세계로 나아가라는 의미입니다.
지금은 비록 연약하고 무력하고 속이 좁고 무너지고 깨어지고 시험에 들고 죄를 짓지만,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세계는 높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속상한 이유는 다른 사람 때문이 아니라, 나 자신 때문입니다. 남편이나 아내, 자식 때문에 속상한 것이 아닙니다. 나 자신 때문에 속상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산과 같은 분이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어떤 도전을 줍니까? 자신은 영적 세계에 도달한 자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달려가야 할 목표가 여전히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결코 멈추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할 것이 없다고 결론내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미 다 이룬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경지에 이른 것처럼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직분자가 되었고, 양육 과정을 다 마쳤고, 봉사도 어느 정도 했다면,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됩니까? 옆에 있는 사람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보다 못한 사람, 만만한 사람과 비교해서 ‘저 사람보다는 내가 낫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기준을 우리의 옆에 있는 사람에게 두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기준은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목표는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목표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우리를 비교하면, 우리는 한없이 부족한 자가 됩니다. 교회에서 양육 받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바울은 영적으로 많은 것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여러 가지 은사를 가진 사람입니다. 천국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너무 심오한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바울은 쉽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영적 정상(頂上)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라고 말했습니다(빌 3:13~14).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머물러있습니까? 영적 세계에서 안주(安住)는 없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안타까움이 사라지면 안 됩니다. 어느 시점에 멈추어서 세월을 보내면 안 됩니다.
갈증이 일어나야 합니다. 간절함이 생겨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순간, 어느 지점에 도달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어느 수준에 이르렀다고 자만하고 멈추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바울처럼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바울의 모습은 우리에게 도전이 됩니다. 우리가 바울을 어떻게 쳐다볼 수 있겠습니까. 바울과 우리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도달하지 않은 것을 분명히 바라보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어떤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렇게 고백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해 고백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등정 길에서 수많은 능선을 넘으며 비경(秘境)을 맛본 사람은 더 오르려는 갈증을 느낍니다. 좀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갖게 되고, 사모함이 일어나고, 갈증을 느낍니다.

바울은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가를 보았습니다. 더 나아가야 할 자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누가 달려갑니까? 누가 멈추지 않습니까?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숙제입니다.

우리가 실패하는 이유는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에서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참 어렵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착각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면, 문제가 쉽게 풀립니다. 자신을 볼 줄 아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때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고백할 것은 고백하고, 주님 앞에서 시인할 것은 시인하고,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진실된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대한 세계 안으로 들어간 후, 비쳐진 자신의 모습은 한없이 부족한 모습이었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을수록 은혜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하나님의 진리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모습이 비쳐집니다.
한없이 연약한 자신의 모습이 비쳐지면서 자신의 상태를 깨달아 알게 됩니다. 그때 변화가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아는 것이 은혜입니다.

말씀을 듣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습을 비쳐주시기를 원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자신의 모습이 드러날 때,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나아가, 그리스도의 보혈로 덮이는 은혜를 경험해야 합니다.

자신을 모르면, 착각하게 됩니다. 자신만만해합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자신만만해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제 힘을 믿고 목회할 때에는 아슬아슬한 게임을 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부족함을 느껴야 합니다. 그때 겸손해집니다. 겸손해야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내 삶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고통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자신의 부족을 깊이 느끼면, 고통이 옵니다.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고백했습니다(롬 7:24). 이것은 고통의 절규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에 대해 절규했습니다.

자신의 부족한 상태로 인해 안타까워한 정도가 아니라, 고통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자신의 부족함이 깊이 느껴지면, 고통이 찾아옵니다.
이런 고통이 찾아오면 처절해집니다. 갈 곳이 없어집니다. 자신에게 소망이 없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의 은혜로만 채워지는 절박함을 느낍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만큼, 태도가 달라집니다. 우리가 달려가야 할 목표를 확인하면, 우리가 얼마나 부족한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그냥 멈추어 있을 수 없습니다. 달려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왜 달려간다고 했을까요? 사도 바울은 자신의 부족함을 느꼈기 때문에 멈출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푯대를 향해 나아가는 일에 있어서 자신의 연약함을 날마다 깨달아야 합니다. 연약함을 하나님의 은혜로 채우기 위해 달음박질해야 합니다.
연약한 자신의 모습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발견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자신이 어딘가에 도달한 것처럼 만족하거나 멈추어 있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푯대를 향해 달려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과거를 잊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과거에 복잡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살기등등하여 사람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교회를 핍박하고, 복음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무자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종교적 열심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는 사람을 죽이기도 했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며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던 사도 바울이 교회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과거가 적잖게 무거웠습니다. 심심찮게 자신을 괴롭혔습니다. 자신의 과거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해 달려가려고 하다 보면, 자신은 부적격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거의 죄가 수치(羞恥)로 떠올랐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이 드러났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믿음 생활로 깊이 나아가려 하고, 주님을 위해 살아가려 하면, 자신의 과거의 부도덕한 삶이 생각납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인해 괴로워하며 시간을 보낼 때가 많습니다.
이전의 삶이 현재의 삶에서 나의 발목을 잡습니다. 이전의 상처가 나로 하여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과거를 회상하면, 아름답다고 여길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과거를 되돌아보면, 수치스러움을 발견하게 됩니다. 상처를 발견하게 됩니다. 실수를 발견하게 됩니다.
나쁜 경험은 쉽게 잊히지 않습니다. 나쁜 경험은 오랫동안 기억됩니다. 칭찬 들은 것보다 욕들은 것이 오랫동안 기억됩니다. 칭찬은 수없이 들었지만,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마디의 욕을 들은 것은 쉽게 잊히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행복했던 순간은 별로 생각나지 않습니다. 행복했던 순간보다 비극적인 순간을 오랫동안 기억합니다. 성공한 기억보다 실패한 기억이 더 뚜렷합니다. 그것을 ‘트라우마(trauma)’라고 합니다.

전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전쟁으로 인한 트라우마 때문에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한다고 합니다. 상처가 너무 깊어서, 기억이 너무 선명해서 과거를 떠나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생이 뒤로 돌아갑니다. 과거라는 감옥에 갇혀 살아갑니다. 이것이 만만치 않습니다. 정신병원에 들어가는 것만 감옥은 아닙니다.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여전히 감옥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전에 좋지 않은 경험과 실수를 계속 떠올리다 보면 불행해집니다. 그래서 우울증에 걸립니다.
그런데 불행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현재의 삶을 삼켜버리고,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미래 없는 삶을 살게 합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을 위해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목표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와 복음의 능력이 무엇입니까? 교회를 핍박하고, 믿는 사람들을 죽이고, 예수님을 핍박하는 등 끔찍한 일을 행했던 사울과 같은 사람을 용서하시고,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이야기하면서 복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죄인 중의 괴수요, 포행자였던 자신,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삶을 살았던 자신을 받아주셨을 뿐 아니라, 영광스러운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삼아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과거의 어떤 불의와 실수, 오점도 완전히 지워주시는 능력이 복음인 줄 믿습니다.

휴대폰에 저장된 기록을 지워도 통신사를 통해 휴대폰을 처음 샀을 때의 기록을 다 복구할 수 있다고 합니다. 현대 과학으로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이 세상에는 지워지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 서로의 관계 속에서도 지워지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보혈의 능력은 우리의 불의와 실수, 오점도 완전히 지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가끔씩 떠오르는, 과거의 아픈 기억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덮이는 은혜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과거의 부끄러움이 계속 반추(反芻)되고 복기(復棋)되어 자신을 부끄럽게 만들어 죄책감에 시달리며 과거로 도망쳐버리는 안타까운 삶을 사는 분이 없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과거의 부끄러움과 실수 때문에 굴을 파고 도망가면 안 됩니다. 보혈의 능력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보혈을 의지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의(義)가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의로 우리가 주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보혈의 능력은 큽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닙니다. 미래입니다. 뒤가 아니라, 앞이 중요합니다. 앞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더 이상 뒤로 물러나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보혈의 능력으로 우리의 과거는 끝났습니다. 보혈의 능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보혈의 능력으로 덮이시기 바랍니다.

둘째, 현실에 충실해야 합니다.
본문 16절에 보면,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현재에 집중하여 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라고 말했습니다. 행동하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달려가노라’는 말은 구체적으로 계속해서 진행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멈추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영적 변화와 성숙을 위해 끊임없이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적으로 부요한 경지로 나아가려면, 주저앉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그때부터 도태됩니다.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도태됩니다.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피카소(Pablo Picasso)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입니다. 피카소처럼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도 끊임없이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됩니다.
기술도 마찬가지입니다. 끊임없이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됩니다. 기업도 끊임없이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됩니다. 쇠퇴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의 삶도, 재능과 은사도 부지런히 달음질하며 앞을 향해 나아가지 않으면, 뒤로 물러나 도태될 수밖에 없습니다. 쇠퇴해버립니다.

믿음의 경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안일한 마음으로 앉아있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묵상하고, 기도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만히 앉아있으면, 깊이 있게 묵상할 수 없습니다. 끊임없이 앞으로 달려가는 삶 속에서 묵상할 때, 파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흘러나와 내 삶을 움직이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묵상은 철학적이고 모호한 개념 덩어리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일으키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묵상은 사람을 살리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 영혼을 살린 말씀이 다른 사람의 영혼을 일으켜 세웁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위해 앞으로 치고 나아가는 사람의 기도에는 용맹함이 있습니다. 기도가 살아있습니다.
피를 토하는 기도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달음질치는 사람만이 그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푯대를 향해 믿음의 행군을 하며 끊임없이 달음질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도움을 구할 때에 기도가 터져 나옵니다.

우리가 어디에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해야 합니다. 현재 무엇을 하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도 열심히 해보세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지금의 행동이 인생을 결정합니다. 현재가 중요합니다. 신앙은 이상주의가 아닙니다.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믿음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미래의 천국을 말할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천국을 경험해야 합니다. 현실이 있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성장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쉬지 말고 자라야 합니다.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경주하는 자는 쉬어서는 안 됩니다. 완주할 때까지 계속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한순간도 머물러있어서는 안 됩니다.

셋째, 목표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시선을 목표에 두고 놓치지 않았습니다.
문제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목표를 바라보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문제가 있지만, 문제에 빠지지 말고, 목표에 집중해야 합니다.
지금은 부족하고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방향만 놓치지 않으면 됩니다. 방향만 놓치지 않으면, 우여곡절이 있다 할지라도 마침내 목표에 도달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신의 목표에 집중해야 합니다. 방향성이 중요합니다. 큰 그림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목표를 놓칠 때가 많습니다. 집중력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한순간에 목표를 놓칩니다.

복잡한 세상을 살아갑니다. 세상은 산만합니다. 오늘날의 문화는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지 못하도록 우리를 흔들어놓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목표보다 현실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킬 때가 많습니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높이 나는 새는 멀리 보지만, 낮게 나는 새는 먹이를 잘 먹습니다.
그러므로 먹이를 잘 잡으려면, 멀리 볼 수 없습니다. 멀리 보지 못하기 때문에 현실에 안주해버립니다.

해운대에서 오륙도까지 오가는 유람선이 있습니다. 유람선 옆에 항상 갈매기가 함께 날고 있습니다.
갈매기가 왜 유람선과 함께 나는지 아십니까? 관광객이 던져주는 과자를 먹기 위해서입니다. 갈매기는 관광객이 던져주는 과자를 먹기 위해 유람선 주위를 돕니다. 그래서 그 갈매기들은 더 높이 날 수 없게 됩니다. 이처럼 현실의 유혹은 위험한 것입니다.

현실에서 당면한 문제에 시달리다 보면, 영적 성숙에 집중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목표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영적 성숙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인격이 연마되는 일도 하루아침에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삶의 변화는 쉽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삶이 원숙해진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 안에서 어느 경지에 도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이 변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지만, 돌아서면 금방 잊어버립니다. 황당한 행동을 합니다. 말씀을 금방 잊어버립니다.
아는 것은 많은데, 아는 대로 사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아는 것이 체화(體化)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의 관심과 방향, 시선이 분산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집중력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영적 집중력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목표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푯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시선을 고정시켜야 합니다. 현실의 잡다한 문제들이 우리의 시선을 흐트러 놓을 때, 우리는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켜야 합니다.
신앙은 시선을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세상에는 시선을 고정시키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과 시선을 놓쳐버리고 방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나이와 상관없이 그리스도인의 푯대는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야 합니다. 영적 성숙을 향하여, 그리스도 안에서의 부요함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초점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분명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라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달려간다고 표현했습니다. 목표를 분명히 바라본 사람만이 달려갈 수 있습니다.

목표지점을 놓치지 않는 사람은 한 방향을 향해 질주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달려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분명히 아는 사람이 달려갈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목표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목표에 시선을 고정시켰습니다.

시선을 놓치는 순간, 우리는 비본질적인 것에 집중하게 됩니다. 왜 삶이 복잡해집니까? 비본질적인 것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왜 마음이 산란하고 복잡한지 아십니까? 본질에서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왜 삶이 유치해지는지 아십니까? 본질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이 삶을 낭비하는지 아십니까? 본질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본질에 집중하면, 삶이 심플해집니다.

왜 기도와 묵상이 필요합니까? 기도와 묵상은 우리의 삶의 목표를 정확하고 선명하게 확인하는 작업입니다.
탈선하지 않았는지, 시선이 흐트러지지는 않았는지, 묵상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을 정조준하며 달려가야 할 목표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나 자신에게 맞춰진 초점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아 중심적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기 쉽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왜 아이가 길을 잃어버립니까? 엄마를 바라보지 않고, 자신이 관심 있는 것에 몰두하기 때문입니다.

바둑판만 보고 있으면, 판이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나 자신만 보고 있으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나 자신만 보고 있으면,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있으면, 비행기가 보이지 않습니다.
바둑과 관련된 격언 중에 ‘반외팔목(盤外八目)’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둑판 밖에서 보면, 여덟 집이 더 유리하다는 의미입니다. 바둑판 안에서 보면 보이지 않는데, 바둑판 밖에서 보면 여덟 집이 더 유리해진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불안함이나 욕심으로 가득 차 있으면, 눈앞에 있는 이익을 보지 못하는 것을 비유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한눈팔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길에서 한눈팔지 말고, 푯대를 정확하게 바라보며 달려가야 합니다. 집중력이 신앙의 관건입니다.

고난이 힘든 이유가 무엇입니까? 고난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힘들어서 고난 바깥으로 나오지 못합니다. 그래서 고난이 전부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고난 속에 파묻혀서 고난을 이길 수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고난을 혼자 당하는 것 같습니다. 나 외의 다른 사람은 모두 행복해보입니다. 나만 불행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고난에 파묻혀서 인생이 점점 죽어갑니다.

고난만 보면, 질 수밖에 없습니다. 고난 너머에 계신 주님을 보면, 이길 수 있습니다. 고난을 통해 나를 나답게 빚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만나면, 푯대가 보입니다.
푯대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야 합니다.

목표를 바꾸면, 습관과 태도가 달라집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푯대는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친밀하고 깊은 사귐 속으로 들어가도, 그리스도는 끝없이 깊은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난 후 복음의 빛을 발견하고, 너무 좋아 밤을 새워보았지만, 복음의 광채를 다 볼 수 없는 바울의 안타까움이 본문에 묻어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의 광채를 다 본다면, 우리의 눈을 멀게 됩니다. 우리는 한꺼번에 하나님을 다 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좁은 이성으로는 하나님을 한꺼번에 알 수도 없고, 하나님의 사랑을 한꺼번에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다 체험할 수도 없습니다.
수많은 사건 속에서 푯대를 놓치지 않고 달려가다 보면, 우리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됩니다.

스티브 잡스(Steve Jobs)가 스탠포드대의 졸업식 연설에서 남긴 말이 유명합니다. 그는 점들을 연결하는 것의 중요성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점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인생을 만들며, 마침내 세계적인 신화를 창조한 애플사가 탄생했는가를 이야기했습니다. 자신의 삶에 상당히 중요한 지점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점들이 연결되어 오묘한 일들이 일어나 애플사가 탄생했습니다.
췌장암 진단을 받은 것도 그의 인생에서 하나의 점이었습니다. 자신이 설립한 애플사에서 쫓겨난 것도 그의 인생에서 하나의 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것을 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문제들이 우리의 삶에 일어날 때, 우리는 당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정확하게 우리의 인생의 점들을 연결하셔서 우리를 성숙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끌어내십니다. 거룩한 목표를 향해 달려가게 하십니다.

살다 보면 아찔한 순간이 있습니다. 인생의 길을 잃어버릴 것 같습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인생에 수많은 파도가 친다 할지라도 우리의 삶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푯대입니다.
목표를 놓치지 않으면, 앞으로 달려가기 위해 애쓰면, 어느 순간 주님께서 우리를 완성의 세계로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구원을 이루어가는 역사는 개인의 노력과 하나님의 은혜가 만나야 합니다. 누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까? 목표를 놓치지 않고 달려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우리를 완성시켜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온전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려운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앞으로도 많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좁은 길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길은 어렵습니다. 좁은 길입니다. 힘듭니다. 피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틀린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완성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바른 길을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힘들지만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그 길만이 미래가 보장된 길인 줄 믿습니다.

쉬운 길을 찾지 마세요. 우리의 낮은 몸이 영광의 몸으로 변화되는 그 날이 올 줄 믿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우리를 변화되게 하실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안에서 끊임없이 자라야 합니다. 달려가야 합니다.

우리의 관심은 지상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구원이 완성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의 약점과 허물, 실수와 실패가 끝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연약한 허물이 다 벗겨지고, 주님과 같이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는 날이 우리 모두에게 올 것입니다.
그 날을 기다리며 연약한 모습에 머물러있지 않고 영적으로 끊임없이 성장하기 위해 달음질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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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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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저녁예배설교] 하나님이 일하시는 통로가 되라 Friday Night Sermon

 

제목 / 하나님이 일하시는 통로가 되라
본문 / 사무엘상 3:1~9

 

1.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2.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3.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4.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5. 엘리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나는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는지라 그가 가서 누웠더니
6. 여호와께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일어나 엘리에게로 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대답하되 내 아들아 내가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니라
7.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
8. 여호와께서 세 번째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일어나 엘리에게로 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엘리가 여호와께서 이 아이를 부르신 줄을 깨닫고
9. 엘리가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하니 이에 사무엘이 가서 자기 처소에 누우니라

본문의 말씀은 어려울 수도 있고, 아주 쉬울 수도 있습니다. 듣는 사람에 따라 반응이 다르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은혜 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알게 되는 하나님은 무한(無限)하신 분이십니다. 제한이 전혀 없으신(unlimited)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는 한없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접속(接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어서 하나님과 떨어져 상관없이 살았던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되었습니다. 무한하신 하나님과 유한한 인간의 접속이 일어난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굉장한 능력과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그것이 단절되었습니다. 믿음을 통해 하나님과 우리가 다시 이어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동선(動線)이 됩니다. 믿음이 강하면, 하나님과 강하게 접속됩니다.
하나님과 연결되면, 하나님께 있는 능력과 지혜,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무한한 자원들이 우리에게 흘러오게 됩니다. 그것을 통해 다양한 역사(役事)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문제가 있습니다. 수원지의 물이 가정으로 오기까지 연결해주는 관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관이 끊어졌거나 녹이 슬거나 막혀있으면, 물이 흘러올 수 없습니다.
요즘은 인터넷으로 설명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어디를 가든 와이파이(Wi-Fi)가 터지는가에 관심이 많습니다. 와이파이가 연결되는 곳에서는 인터넷을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특히 한국은 휴대폰이 발달되어있어서 어디서든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연결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터넷이 연결되는 순간, 지구촌 어디와도 소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얻고 싶은 대로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어마어마한 세계와 이어집니다.
연결된다는 것은 신자에게 있어 최대의 사건입니다. 하나님과의 접속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것보다 나은 접속은 없습니다.

하나님과 접속되면, 하나님으로부터 지혜가 흘러나옵니다. 하늘의 지혜, 하나님의 계시가 우리에게 임할 때, 우리의 삶은 한 순간에 달라집니다.
세상에서 최고의 연결은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누구와 연결되는가보다 더 중요한 주제는 없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연결되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통로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의 접속이 일어날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접속된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를 흘려보내시고,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시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하나님의 통로가 된다는 말은 하나님의 도구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접속된 곳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곳이 됩니다. 하나님과 접속이 일어나는 순간,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아예 듣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말았다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앙의 차이로 인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연결이 끊어진 사람입니다. 아무리 연결하려고 해도 연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말았다 하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수신 상태가 약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때도 있고, 들리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항상 듣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수신 상태가 매우 양호한 사람입니다. 어디서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본문 3장 1절에 보면,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시대에는 말씀이 거의 끊긴 상태였습니다. 완전히 끊긴 것은 아닙니다.
어두운 시대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이 끊겨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연결 상태가 아주 좋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편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듣는 자의 편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다’는 것은 송신(送信)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수신(受信)에 문제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는다는 것은 가장 무서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편에서 침묵하시면, 대혼란이 일어납니다. 그때는 바로 혼돈의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기근 중의 기근은 말씀의 기근입니다. 가장 무서운 기근입니다.

아모스 8장 11~13절에 보면,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말씀의 기근은 무서운 것입니다. 그 시대에 말씀의 기근이 있으면, 시대 전체가 어두움과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일종의 재앙입니다.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이 희귀하면, 영적으로 갈하여 쓰러집니다.

본문에 보면, 당대 최고의 영적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엘리와 어린 사무엘이 선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매우 충격적인 그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굉장히 두려운 일입니다.
엘리 제사장은 영적 지도자였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본문 3절에 보면,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구약 시대에 성막에서는 밤에 등불을 켜서 아침까지 가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등불이 꺼지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 밤임을 의미합니다.
소망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의미입니다.

본문 3절 뒷부분에 보면,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말씀은 2절의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라는 말씀과 대조를 이룹니다.
뭔가 거꾸로 된 것 같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워야 할 것 같은데, 엘리는 자기 처소에 누웠습니다.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여호와의 궤가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사무엘이 누워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처음에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이 부른 줄 알았습니다. 나중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어린 사무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직분이나 나이, 경륜과 상관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 사무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그 시대의 상태를 잘 묘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 사무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이 희귀한 시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 사무엘과 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엘리 시대와 영적 상황이 비슷한 시대가 또 한 번 있었습니다. 엘리 시대에 영적 어두움이 있었던 것과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직전에 영적 암흑기가 있었습니다. 그 시기를 ‘하나님의 침묵기’라고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던 시기입니다.
심각한 영적 접촉 불량이 일어난 시기에 하나님과의 최상의 접촉 상태를 유지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그를 가리켜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했습니다(마 3:3).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出現)과 하나님의 새 시대를 여는 계시를 선포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 시대에 그 말씀을 송출(送出)했습니다.

아무리 어두운 시대라 해도 하나님께서는 통로를 열어놓으셨습니다. 엘리 시대에는 어린 아이 사무엘이 하나님의 통로였습니다. 신약 시대에는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통로였습니다.
그는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살았던 야인(野人)이었습니다. 멋진 성전 안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감당하는 종교 지도자가 아니라, 빈 들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였던 세례 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풀어놓기를 원하십니다. 문제는 통로입니다. 누구를 통해 일하시는가, 누구에게 말씀을 흘려보내시는가가 중요합니다. 누가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풀어놓을 자인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하나님과의 접촉 상태가 양호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이나 직분자를 통해 일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자를 통해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 제사장에게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니라, 어린 아이 사무엘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충격적인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먼저 말씀을 통해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먼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구원 받은 것도 말씀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병이 나은 것보다 중요한 것은 말씀이 임한 것입니다. 말씀이 임하고 말씀의 능력으로 병이 나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일하실 때 항상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들어야 기도할 수 있습니다.

어린 사무엘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에게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답답해 하셨을까를 알 수 있습니다.
영적 지도자는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시대 전체가 어두움에 휩싸여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 아이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에게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은 이제 엘리 시대는 끝났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와는 할 일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굉장히 두려운 일입니다. 하나님과 절연(絶緣)된 엘리와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신 것은 ‘이제 너와 일하겠다’는 의미입니다. ‘너를 통해 이스라엘의 구원의 역사를 펼쳐가겠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접속이 끊어지면, 할 일이 없어집니다. 그냥 자리만 지키고 있을 뿐, 직분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모든 상황이 종료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는 것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닙니다. 재앙에 가까운 일입니다. 기근 중의 기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연결된 자와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곳에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연결된 곳에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과의 소통이 일어나는 곳이 역사의 주 무대가 됩니다.
우리가 평신도로서 사업을 하거나 직장에 다니거나 무엇을 하든지 삶의 영역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엄청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약의 엘리와 신약의 세례 요한을 대조하여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성전에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여기서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엘리는 성전에서 살았음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습니다. 성전은 모든 것이 하나님을 위해 세팅(setting)된 곳입니다. 하나님과 연관된 것들로 가득한 곳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도배된 곳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만들어진 곳입니다. 어느 것 하나 그냥 만들어진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피할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의 이름으로 도배된 곳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하나님의 임재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희귀했습니다.

광야는 어떤 곳입니까? 아무것도 없는 곳입니다. 거룩하게 만들어진 것이 하나도 없는 곳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하나님의 음성이 임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였습니다. 세례 요한에게는 거창한 타이틀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당시 제도권의 제사장이나 지도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세례 요한은 웃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성소(聖所)는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의 음성이 터지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곳입니다. 특정한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약으로 가면, 더욱 뚜렷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곳, 제도나 직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곳이 성소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 있는데, 사람들이 광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 당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끊긴 시대였습니다. 사람들은 목말랐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당시의 지도자들은 해박한 지식으로 성경을 꿰는 성경학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목말랐습니다. 하나님과의 접속이 끊어진 것입니다.

당시의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궤변에 불과했습니다. 소음(騷音)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지 못했습니다. 하늘로부터 임한 말씀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가슴이 탔습니다.
하나님과 살아있는 교제가 없는 말씀으로 허기를 일시적으로 채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람들의 영혼을 살릴 수는 없었습니다. 순간적으로 기분은 좋아지지만, 돌아서면 공허해졌습니다. 목이 말랐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공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터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나이와 직분에 상관없습니다.

사무엘은 굉장히 어린 나이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아직 성전에 대해 모든 것이 낯설었습니다.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에 비해 성전에서 일평생을 보낸 엘리는 성전에 익숙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래 전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얼마나 오래 다녔는가, 직분이 무엇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본문 2절에 보면,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엘리의 육신의 눈이 어두워진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눈이 어두워진 것을 의미합니다.
본문에 보면, 엘리는 계속 누워있었습니다. 영적으로 할 일이 별로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의자에 앉은 채로 넘어져서 죽었습니다.
말씀이 끊어지면, 영은 자동적으로 어두워집니다. 말씀이 끊어지면, 영은 이미 죽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기능이 멈춘 것입니다.

엘리와 세례 요한을 자세히 살펴보면, 두 사람 사이에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엘리는 하나님과 관련된 것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위해 산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하나님의 일에만 열심을 내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하나님의 일에만 열심을 내면,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자신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라고 포장되어있지만, 들여다 보면 자신의 일입니다.

성전 안에 있는 엘리와 두 아들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신의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했으나, 그것이 일이 되고, 일을 계속하다 보니 자신의 일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목회자에게 경종(警鐘)을 울리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듣지 못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우리는 세례 요한을 통해 답을 얻게 됩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는 세례 요한에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을 잊었습니다. 그리스도께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에게는 거창한 타이틀도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였습니다. 형체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외치는 광야의 소리(voice)였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가는 세례 요한에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자아실현과 성취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철저히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았던 세례 요한의 삶을 요한복음에서는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가 드러나고, 자신은 쇠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사도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고 말한 것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사람들이 세례 요한에게 몰려들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인기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자신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주목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관심이 많습니다.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자신이 하는 일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지만, 돌아서면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언제 짜증이 많이 납니까? 하나님께 대해 불평이 일어나는 때는 언제입니까? 왜 하나님께 불평합니까? 자신이 중심이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중심이 아니라, 자신이 중심이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시지 않으실 때, 우리는 기도라는 도구를 통해 하나님을 통제하려 합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다스림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통제 안에 들어가려 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을 움직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기도가 순수하지 않습니다. 자기중심으로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성이 강화됩니다. 그래서 신앙이 계속 딜레마(dilemma)에 빠집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주파수가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인지 자신의 일인지 구분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보다 자신의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자세히 보면, 자신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지만, 그 속에는 자신의 영광이 교묘하게 숨어있습니다.

자아 중심적 삶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수신하는 데 가장 치명적인 결함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기보다 하나님께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습니다. 하나님께 주장하고 싶은 것이 매우 많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는 이기심이 굉장히 고질적입니다.

짜증이 많이 나는 때는 언제입니까? 화가 많이 나는 때는 언제입니까? 가장 민감하게 행동하는 때는 언제입니까?
자신과 연관된 것에 이해관계가 얽혔을 때입니다. 자신과 연관되지 않은 것에는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때 이기심이 발동합니다.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할 때, 누군가가 자신에게 거슬리면 화가 나고, 짜증이 나고, 불평이 일어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화를 내거나, 그리스도 때문에 민감하게 반응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엘라 골짜기의 다윗의 영성이 우리에게 주는 도전이 무엇입니까? 할례 받지 못한 이방 족속의 입술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컬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해 아무도 불쾌하게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단 한 사람, 소년 다윗 외에는 분노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자아로 가득 차 있을 때에는 하나님과의 접촉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임할 수 없습니다.
접속 불량이 일어납니다. 자아로 충만해져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수 없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탐욕이 가득하여 자아 중심적이고, 세상의 욕망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삶에 하나님의 음성이 끊긴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매일 자신의 일로 분주하게 살아갑니다. 엘리도 제사장 업무로 바빴을 것입니다.
사실 제사장의 일은 굉장히 많습니다. 엘리는 일로 인해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일 틈이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르다를 생각하게 됩니다. 마르다는 주님을 섬긴다고 생각했지만, 주님보다 일을 더 신경 썼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모셔놓고 일에 빠져있었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것인지, 자신을 기쁘게 하려는 것인지 헷갈렸습니다. 자신을 기쁘게 하려고 할 때, 자신이 중심에 놓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원망과 불평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마르다는 주님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눅 10:40).

자아중심적인 사람과 일 중심적인 사람은 동일합니다. 불평하는 사람은 모든 일을 자아 중심적으로 해석합니다.
다른 사람 때문에 자신이 피해를 입는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외의 모든 사람을 가해자로 생각합니다. 늘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마르다는 주님마저도 못 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마르다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데 관심이 없었습니다. 자기 일, 자기 생각, 자기 계획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마르다는 온통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습니다. 마르다는 그리스도 중심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주님을 섬긴다고 생각하고 일했지만, 주님과 상관없는 일을 한 것입니다.

마르다의 모습은 자신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한 채 살아가는 오늘날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자신을 만족시키려고 노력합니다.
많은 사람이 매일 매일 분주하게 살아갑니다. 가끔 주님을 생각할 뿐, 주님을 위해 시간을 내기에는 매우 바쁩니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오히려 광야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광야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들을 수 있습니다.
어린 사무엘은 이미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이었습니다. 한나의 통절한 기도로 하나님께서는 영적 불임을 치유하시고, 사무엘을 말씀의 통로로 사용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무엘, 세례 요한과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흘려보낼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적 있습니까? 언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셨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어떻게 들으셨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은 다양한 방법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 영혼에 깊은 울림으로 다가오는 음성이 있습니다. 평소와는 다르게 다가오는, 영혼을 흔드는 음성이 있습니다.
때로는 흔들어 깨우십니다. 설교 시간에 말씀을 듣는데, 영혼이 깨어지는 듯한 아픔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영혼에 들려주시는 음성이 있습니다. 때로는 폭풍처럼, 때로는 속삭이듯이 들려주시는 음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음성인 것은 분명히 느낄 수 있습니다.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을 직감합니다. 이것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영혼에 어두운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죄와 타락한 본성, 인간의 욕망과 탐욕으로 덮인 곳에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임해야 합니다. 영혼을 관통해야 합니다. 심장의 폐부(肺腑)를 갈라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임을 확신할 수 있는 경험을 했다면, 그것은 굉장히 큰 축복입니다. 그것은 특별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임하면,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신한다면, 그냥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을 움직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양가 없는 농담을 말씀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을 바꾸어놓으십니다.

저는 말씀사역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말씀해주신 것을 전합니다. 제게 임했던 말씀이 성도들에게 동일하게 역사하여 성도가 변화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도에게로 흘려보내는 말씀의 통로가 됩니다. 말씀이 흘러가는 곳에 능력이 나타나고, 기적이 일어나고, 변화가 일어나고, 부흥이 임하고, 홍해가 갈라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의 통로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가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시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 사무엘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순간부터 이스라엘 역사의 새로운 출발이 시작되었습니다. 새로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엘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엘리는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셨는지 엘리는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 사무엘에게 물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엘리에게 말하기가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전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 3:10)”라고 반응했습니다.
이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어린 사무엘의 입술을 통해 이스라엘의 미래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말씀하셨는가가 중요합니다. 사랑방 안에서 누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는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종을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신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일을 행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어떤 어려움이 있는가는 상관없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말씀이 임하면, 여러분의 가정이 살아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끝납니다.
아이냐 어른이냐, 목사냐 평신도냐, 10년 믿은 사람인가 초신자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실 때, 받으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영혼에 들린다면, 놀라운 일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과 일하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로로 사용하시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수신 상태가 좋다면,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말씀하십니다. 수신 상태가 좋다는 것은 자아 중심적 삶을 버리고, 자기부인의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말씀하실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 말씀이 홍해를 가릅니다. 그 말씀이 흘러나갈 때, 죽은 자가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에스겔서에서 골짜기에 마른 뼈들이 군대가 되어 일어난 것처럼. 절망 속에 있던 사람들이 큰 위로를 받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사명의 길을 가게 하시고, 수많은 일꾼을 일으키는 역사가 말씀이 임하는 곳에 나타납니다.

삶이 위험한 모험인 이유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위험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은 모험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가는 것보다 확실한 삶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고,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행한다면, 그것보다 위대하고, 그것보다 멋있는 삶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곳이 역사의 중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때가 삶의 전성기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반응했던 사무엘처럼 반응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하나님, 말씀하십시오. 하나님, 말씀해주십시오.”라고 반응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제게 말씀이 필요합니다.”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왜 답답해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두려워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슬퍼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무능력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혼란에 빠져있습니까? 왜 갈등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지금 암에 걸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말씀이 우리의 인생을 열어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는 것은 재앙입니다. 기근입니다. 가장 위험한 인생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기도가 가장 중요할까요? 우리는 하나님께 “말씀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나이와 형편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조건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 아이에게 말씀하시고, 이스라엘의 역사를 써나가셨습니다.
학력, 사회적 지위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디에 사는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곳이 역사의 중심부입니다. 그곳에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곳에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홍해가 갈라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하옵소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 일어난 사건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준비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준비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겠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은 어머니의 서원에 의해 이미 하나님께 바쳐졌습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사무엘은 하나님 앞에 다시 반응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무조건 순종할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이러한 고백이 여러분의 심령에서 흘러나온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이것이 생명입니다. 이것이 능력이 됩니다. 이것이 축복이 됩니다.
말씀을 듣고, 말씀에 반응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말씀을 듣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입니다.

엘리, 그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종교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서 말씀이 끊어졌습니다. 제도적 교회 안에서 규율을 지키고, 하나님과 관련된 일을 하고, 하나님과 관련된 일에 열심을 낸다고 그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우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자아 중심적 삶을 내려놓고, 철저히 그리스도께 집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여, 말씀하십시오. 무슨 말씀에든 순종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길이 사는 길인 줄 믿습니다.

오늘날은 말씀이 희귀한 시대입니다. 그래서 눈물이 납니다. 가슴이 미여집니다. 통곡하게 됩니다.
말씀의 홍수시대이지만, 먹을 물이 없습니다. 말씀이 희귀한 시대입니다. 말씀이 끊어진 시대입니다. 영적 어두움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다른 것을 찾지 마세요. 말씀을 갈망하시기 바랍니다. 잡다한 소음과 같은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과 같은 말씀, 영혼에 빛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 우리의 삶을 바꾸어놓는 능력의 말씀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말씀에 대한 갈증을 느끼시며, 주의 말씀을 들을 귀를 허락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엘리는 눈만 어두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귀도 어두웠습니다. 그리고 말할 줄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선포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드러누워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은 상태의 인간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우리가 교회를 오가며 열심히 봉사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부인할 수 없을 만큼 영혼을 충만하게 채우고도 남는, 존재를 흔들어놓는, 폭풍처럼 임하시는, 영혼을 뒤덮는, 생명의 말씀이 여러분의 삶에 밀고 들어와 말씀 앞에 압도당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통하여 놀라운 일을 시작하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생명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자에게 말씀하시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능력을, 하나님의 지혜를 세상 가운데 흘려보내십니다.
여러분 모두 그 일에 쓰임 받는 통로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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