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주일낮설교/사랑의 십자가 ( August Sunday Sermon)

제목 : 사랑의 십자가

말씀 : 마27:38-44

 


1.우리의 저주를 대신한 주님의 십자가

 


여러분,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십자가는 사실은 저주의 상징입니다. 끔찍한 고난의 상징입니다. 그러면 왜 그런 저주받은 십자가가 교회의 상징이 되었습니까? 말할나위없이 우리의 저주를 대신한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받은 죽음을 당하심으로 우리가 지옥의 저주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고전1:18에서는 말씀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의 도, 즉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저주받은 죽음을 당하시는 것만이 우리를 모든 죄와 사망과 지옥의 권세에서 건져주는 유일한 능력이요 힘이요 지혜라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무슨 다른 좋은 방법이 있을까요?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다른 방법이 있다면 예수님인들 왜 십자가를 지고 싶으셨겠습니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어떻게 기도하셨습니까?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 방법 밖에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셨기에 그 저주받은 십자가의 길을 가셨던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도대체 다른 무슨 방법으로 인류의 죄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돈으로 할까요? 지식으로 할까요? 과학으로 할까요? 윤리도덕으로 할까요? 다른 어떤 방법도 없습니다. 오직 죄없고 흠 없으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만 죄를 용서 받을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걸 모릅니다. 아니 자신들이 죄가운데 있다는 사실 조차 모릅니다. 다 자기가 잘나고 똑똑하다고 옳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죄와 무지가운데 있다는 사실은 새까맣게 모르고 천국이 있네 없네, 아무거나 믿으면 좋은 데 가네 마네하며 떠듭니다. 누구 맘대로 그럽니까? 참 안타깝고 답답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요. 그러니 반대로 이 놀라운 생명의 비밀을 알고 믿고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된 우리는 얼마나 감사하고 얼마나 다행이고 얼마나 영광입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나같은 죄인을 위하여 그 저주받은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하여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신 주님을 온전히 모셔 들이고 감사와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려드리며 겸손히 동행할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며 주님의 영광 나타내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렇게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 이 놀라운 은총을 입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2.죄를 미워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의 은총을 받은 우리는 죽을 때까지 감사하고 영광돌리고 찬양해야 하는 것을 말할 것도 없고 동시에 죄를 미워하고 멀리해야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 놈의 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옥으로 가고 있습니까? 그 놈의 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아픔과 상처를 받고 있습니까? 그래서 그 놈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그렇게 참혹한 죽음을 당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어떻게 죄를 가까이 할 수 있습니까? 얼마나 죄를 혐오하고 멀리해야 되겠습니까? 정말 그렇잖아요? 그 놈의 죄 때문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지옥가게 되고 지금 여기서도 아픔과 상처와 고통을 받게 되고 그래서 주님이 우리가 받을 벌을 대신 받으시려고 그 끔찍하고 참혹한 죽음을 당하셨는데 어떻게 우리가 그 흉악하기 짝이 없는 죄를 가까이 할 수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들을 보면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은 아닌지 하면서 좀 걱정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끔찍한 죽음을 당하심으로 생명을 얻었는지를 망각하고 마치 구원이 거저 얻어진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구원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지 못하니까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죄에 대하여 무감각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의 것도 그렇지 않습니까? 거저 얻어진 것은 귀한 줄을 모릅니다. 귀한 줄을 모르면 감사할 줄도 모르고 또 가치 없이 막 써버립니다. 그래서 부자집 자녀들은 돈 귀한 줄 모르고 감사할 줄도 모르고 흔전만전 써버리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우리가 얻은 이 영원한 생명이 얼마나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주어진 것인지를 알면 절대로 우리가 얻은 구원을 조금이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거나 죄에 대하여 무감각하여 죄를 가까이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진짜 안 그래요? 여러분, 여러분은 온갖 썩은 냄새와 똥냄새가 풀풀나고 구더기가 들끓는 그런 더럽고 추하고 혐오스러운 곳을 가까이 하겠습니까? 또는 사자가 나를 잡아먹으려고 으르렁거리며 대드는데 그곳으로 가까이 가겠습니까? 걸음아 날 살려라하고 도망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죄는 이보다 더 더럽고 악하고 사납고 흉악한 것인데 어찌 그것을 가까이 하겠습니까? 그래서 약4:8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사순절 특별히 오늘 고난 주일을 맞이하여 먼저 그 저주받은 죽음을 당하심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건져주신 주님께 정말 감사와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려드리며 동시에 정말 죄를 미워하고 멀리하고 오직 주님을 가까이 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풍성한 은혜가 넘쳐나는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주님의 고난에 동참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의 은총을 기억할 때에 우리가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총을 주시기 위하여 온갖 저주와 멸시와 천대와 조롱과 고난을 당하시고 마침내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당하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고난에 동참함으로 주님이 그토록 원하셨던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은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그 온갖 저주와 멸시와 천대와 조롱과 고난과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당하신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이 사실을 몰랐으면 몰라도 죄의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그래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주님이 얼마나 끔찍한 고통을 당하셨는지, 그리고 처절한 고통을 통해서 주신 생명이 얼마나 고귀한 줄 안다면 우리가 어찌 생명의 역사를 위한 일에 참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은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너무나 끔찍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로마의 병정들이 무지막지하게 휘두르는 채찍에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넘어지고 쓰러지면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셔서 십자가에 손과 발에 대못이 박혀 뼈가 으스러지고 살이 찢어지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런 육체적 고난 뿐 아니라 주님은 온갖 멸시와 천대와 조롱을 당했습니다. ①로마 병정들은 사정없이 때린 후에 가시면류관을 씌우고, 홍포를 입히고, 침을 뱉으며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지어다’하면서 조롱하고 멸시했습니다. ②유대종교지도자들은 눈을 가리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뺨을 치며 너를 친 자가 누구인지 알아맞혀 보라면서 조롱했습니다. ③불과 며칠전만 해도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하면서 환호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④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있을 때는 지나가는 사람들은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면서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⑤심지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있는 강도들도 네가 그리스도라면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며 모욕했습니다. 이런 참혹하고 끔찍하고 처절한 고통을 통하여 우리 죄가 용서되어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이 놀라운 은혜를 입은 우리는 백번 천번 만번 죽어도 감사하고 찬양하고 영광을 돌려야하지 않습니까? 또 그냥 감사하고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면서 그 은혜만을 누리고 앉아 있을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래서 주님이 그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얼마나 처절한 고통을 당하신 것을 안다면 어찌 그냥 편히 앉아 은혜만 누리고 있을 수가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16:24절에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정말 백번 죽고 또 죽어도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도 주님의 그 거룩한 생명의 역사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게 주님의 은혜를 덧입은 자의 마땅한 의무이고 거룩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일이고 우리 자신이 더욱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길입니다.

물론 주님을 따라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아직도 마귀사탄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죄와 무지 가운데서 물질만능주의와 개인이기주의와 인본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따라 생명의 역사를 이루는 일에 참여하려면 이러한 모든 마귀사탄의 역사와 세상의 물결을 거슬러 올러가야 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신을 부인하며 육신의 안일함과 평안함과 즐거움만을 향하여 가던 길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세상의 돈과 명예와 권세와 세상 즐거움보다는 선과 진리와 의를 따르며 주님의 거룩한 역사를 위하여 우리의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과 정열을 받쳐야 합니다. 열심히 모여 깨어 기도하고 말씀 묵상함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사랑을 베풀어야 하고 전도도 해야 하고 거룩한 삶을 영위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역사에 참여한다는 것은 쉽지만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의 생명의 은총을 덧입은 자들의 마땅한 의무입니다. 그것이 가장 아름답고 복되고 고귀하고 영화로운 삶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살리고,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자신도 정말 세상이 주지 못하는 참된 기쁨과 은혜와 가치를 누리며 살다가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정말 복되고 아름답고 고귀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고난주일을 맞이하여 또 오늘 성찬식을 행하면서 우리는 주님의 놀라운 십자가의 사랑을 기억하며 주님이 당하신 그 처절한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며 주님께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돌려드리시기 바랍니다. 정말 죄를 멀리하고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따라가며 우리 각자에게 주신 십자가를 기쁨으로 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땅위에 생명의 역사를 아름답게 이루어가며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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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완전한 승리의 부활( August Sunday Sermon)

 

제목 : 완전한 승리의 부활

말씀 : 요11:21-27

1.유일한 생명의 예수 그리스도

 


할렐루야! 오늘 예수께서 세상의 모든 어둠, 부정적인 것, 약한 것, 죽음, 마귀사탄, 지옥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 온갖 멸시 천대 능멸 조롱 뺨맞음을 당하시고 그 모질고 잔인한 채찍질과 십자가의 죽으심을 당하신 것은 결코 힘이 없어서도 아니요, 지혜가 없어서도 아니요, 능력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오직 그것은 완전한 승리를 위한 과정일 뿐이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죄와 무지와 어리석음과 약함과 추함 가운데 있기 때문에 그래서 죄와 무지 가운데 살다가 영원한 고통에 처할 수 밖에 없는 인생이기에 이 더럽과 악하고 추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어쩔 수 없이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으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류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능력과 권세가 충만하시고 우주만물의 주권자이시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따위 어둠과 무덤과 사탄과 죽음의 권세 아래 계속 머무실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주만물의 주권자가 되시는 그 권세와 능력으로 죄와 어둠과 사망과 사탄과 지옥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심으로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자시오 생명의 주권자이시오 그 안에만 온전한 승리가 있음을 만천하에 명백히 드러내시고 그를 믿고 따르는 자마다 영원한 승리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날 이 귀한 날, 복된 날, 승리의 날을 맞이하여 정말 온전히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알고 이 온전한 부활의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이 엄청난 은혜와 축복을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동시에 이러한 인류의 유일한 생명의 이시며 능력이신 주님을 늘 심령 속에 모셔 들이고 살아감으로 정말 여러분의 삶이 언제나 부활의 능력과 은혜와 감사와 축복이 넘쳐나는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이 인류의 가장 큰 원수인 사망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심으로 죄와 사망과 지옥의 권세를 이기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하고 완전한 승리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다른 그 어떤 것도, 어떤 사람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 어떤 사람도 종교도 철학도 과학도 무기도 문명도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생명을 조금 연장하고 조금 더 건강하게 도울 수는 있겠지만 결코 죄의 문제 해결할 수 없고 생명의 살릴 수는 더더구나 없습니다. 오직 유일한 생명의 창조자이시며 주권자이시며 완전한 능력과 지혜자이신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 자신이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시기 전에도 죽음을 향하여 명령하셨고, 죽음은 예수님의 명령에 복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눅7장에 보면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죽어서 장사를 지내러 가는데 예수께서 가까이 가셔서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청년이 즉시 살아나 관 뚜껑을 벗기고 나왔습니다. 또한 막5장에 보면 야이로의 딸이 병들어 죽었을 때 예수께서 찾아가셔서 ‘달리다굼’ 즉 ‘소녀야, 일어나거라.’고 말씀하시자 죽었던 소녀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습니다. 또 요11장에 보면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과 같이 죽은 지 나흘이 지나 무덤에 장사되어 썩은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향하여서도 또 명령하셨습니다. 요11:43,44절을 보겠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여러분, 우리가 이걸 뭐라고 어떻게 말해야 하겠습니까?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죽은 자에게 일어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인간적으로 말이 됩니까? 만약 사람이 죽은 자에게 일어나라 그런다면 그 사람은 미친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생명의 창조주이시며 주권자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생명과 죽음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계시고 그래서 그런 것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죽음에게 명령하셨고, 그러자 죽음이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하여 물러가고 생명이 역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 당신 자신께서 우리의 죄과를 대신하시고 십자가의 처절한 죽음을 당하셨다가 오늘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심으로 다시한번 당신 자신이 생명의 주가 되심을 만천하에 공포하시고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25,26절에서는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습니다. 세상의 것들은 별거 아닙니다. 제아무리 대단한 권력, 명예, 돈, 과학, 지식 이런 것들 진짜 별거 아닙니다. 인류의 유일하고 완전하고 영원한 진짜 능력, 진짜 소망, 기쁨, 승리는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오직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고, 승리가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부활절을 보내며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심령 속에 더욱 온전히 모셔 들이기 바랍니다.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영접하여 그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이 주시는 생명과 기쁨과 능력과 승리가 충만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부활은 영원한 승리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세상의 승리와는 전적으로 다른 승리입니다. 세상의 사람이나 과학이나 철학이나 문명이 그 어떤 것이라해도 우리에게 진정한 승리를 줄 수도 없고 또 그나마 조금 준다고 해도 얼마 안 있으면 다 허물어집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완전하고 영원한 승리자이십니다. 주님의 부활이 바로 그러한 완전하고 영원한 승리의 상징이요 표본이요 증거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모든 어둠과 무지와 슬픔과 절망과 죽음의 권세를 깨트리신 완전한 승리인 것입니다. 인류의 마지막 원수인 죽음을 보기 좋게 정복하셨고, 그 영원한 승리를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도 그 부활에 동참하여 영원한 승리를 누리며 살게 해 주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도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날 마르다의 오라비 나사로가 죽을 병이 걸립니다. 그래서 마르다와 마리아는 급히 예수님을 모셔오려고 합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주님께서는 곧바로 오시지 않고 뒤늦게 오셨는데 그것은 이미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나서였습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끝장난 상황이었습니다. 더 이상 그 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금방 죽었다해도 아무 방법이 없을텐데 하물며 죽어서 나흘이 지나 시체가 부패하기 시작했으니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이제는 정말 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는 절망의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희망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예수께서 다가오셔서 실로 엄청난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앞에서 보았던 25,26절을 다시 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걱정하지 말아라. 슬퍼하지 말아라. 왜 두려워 하느냐, 왜 절망하고 있느냐?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죽지 않는다. 나를 믿으라. 그러면 나사로도 살 것이고, 너희들도 살 것이다. 그리고 부활의 생명으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런 말씀입니다.

 

그리고 나서 죽은 지 나흘이 지나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명령하셨고, 그러자 죽은 지 나흘이 지나 냄새가 나던 나사로에게 생기가 돌아와 어정어정 걸어 나왔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죽어도 산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눈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명백히 알 수 있는 것은 죽음은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생명의 부활이 있기에 죽음은 더 이상 마지막 원수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더 이상 두려운 존재도 아니고, 절망도 끝장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완전한 영광의 나라에서의 새로운 시작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영광의 부활이 반드시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나면 영으로 주님과 함께 천국의 은총을 누리다가 주님이 재림 하실 때 우리의 몸도 영화의 몸으로 부활하게 됩니다. 그리고 완성된 천국에서 영생 복락을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고전15:55~57절에서는 말씀합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여러분, 이 부활의 새아침에 다시금 부활의 주님을 새롭게 모셔들이기 바랍니다. 주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완전한 영원한 부활이 있어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예비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주님과 동행함으로 부활의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아직도 세상은 죄와 무지속에 있고 우리의 부활은 그 부활이 완성되지 않았기에 세상에 살면서 마음적으로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 어렵고 힘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곧 지나갑니다. 이 세상도 지나가고 고통도 지나고, 병도 지나가고, 부귀영화도 지나가고 걱정염려 다 지나갑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 때문에 너무 슬퍼하거나 절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있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부활의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분명히 부활의 주님께서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과 지혜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생명력이 넘치는 삶이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부활의 능력과 은혜가 넘쳐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부활은 현재적 승리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부활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영광의 나라에 대한 보장이요, 소망일 뿐 아니라 오늘 여기서도 얼마든지 승리자로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인 것입니다. 오늘 나사로의 가정도 보세요. 나사로의 가정은 말 그대로 초상집이었습니다. 그 가정은 슬픔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절망에 삼킨바 되었습니다.

 

오늘 21절부터 24절까지 주님과 마르다의 대화 내용을 보십시오. 그 대화에 보면 마르다가 주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면서도 슬픔을 이기지 못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먼저 마르다가 말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주께서 구하시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 것이다.’ 그러자 마르다가 대답합니다. ‘마지막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아나이다.’

 


보십시오. 분명히 주님이 계셨으면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과 설령 죽었어도 지금이라도 주님이 무엇이든지 하시면 하나님께서 들어 주실 것이라고 말을 해놓고는 막상 주님께서 네 오라비가 살 것이라고 하자 마지막 날에 부활 때에는 그렇게 되겠지요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물론 마지막 날은 살겠지요. 그러나 지금은 벌써 부패가 되어 냄새가 나는데요. 물론 나중에는 부활하겠지만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나중에 부활하여 영광의 나라에 들어갈 때는 완전한 기쁨을 누리게 되겠지만 지금은 슬프고 어둡고 않습니까?’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그 유명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는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너는 어째서 머언먼 피안의 세계만을 생각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내 말은 머언먼 미래의 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를 포함한 모든 날들을 말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내안에 있는 자는 비록 죽어도 살 것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죽어도 산다는 말씀은 그래도 이해가 되는데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씀은 조금 어렵지 않습니까? 물론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은 불로장생이라도 한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죽기는 죽습니다. 그러나 죽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다시 살아날 것이기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기도 하고 동시에 지금 여기서도 부활의 주님의 능력으로 죽음이나 절망이나 아픔이나 고통을 이기고 근심 걱정 염려 원망 불평 낙심 절망 세상 환경 상황 뭐 이런 것들에게 사로잡혀 죽은 자와 같은 삶을 살지 아니하고 생명의 기쁨과 자유와 평화와 은혜와 소망과 감사가 넘쳐나는 그야말로 생명력이 넘치는 진짜 산 사람처럼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현재적 천국도 누리고 영원한 천국도 누리니까 죽어도 산자요 살아도 산자니까 나를 믿는 자는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 온전히 모셔들이고 사는 사람은 사나 죽으나 살아있는 삶을 삽니다. 은혜와 기쁨과 감격과 능력가운데 삽니다. 죄와 사망과 어둠과 슬픔과 고통과 미움과 시기와 욕망이나 환경이나 상황에 지는 삶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그것을 정복하는 삶을 삽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눅17:21에서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못한다고해서 실제적으로 임할 천국이 장소적으로 오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분명히 장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완성된 천국이 오기 전까지는 천국이 돈 많은 데 있는 것도 아니고, 권력이나 지식에 있는 게 아닙니다. 천국은 주님을 모신 우리의 마음속에 이미 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래요? 지금 여기서 우리가 걱정할 일이 무엇이 있습니까? 죽으면 천국가고 힘들면 주님 앞에 맡기고 기쁘면 주님께 감사드리고 어려우면 주님 앞에 아뢰고 어차피 죽을 인생이 이제 죄사함은 받았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티켓은 확실히 따 놓았겠다 뭐 근심걱정염려 할 일이 무엇이 있습니다.

여러분, 요14:1~3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거처를 마련해 놓았으니 나를 믿고 이 세상 사는 동안도 걱정 근심 염려하지 말고 사명감당하며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 안에서 얼마든지 가능함으로 너희가 나를 믿는다면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오늘 예수께서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모든 죄와 어둠과 추함과 약함과 절망과 죽음의 권세를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고, 그 모든 어둠의 세력들을 무덤에 묻어버리고 무덤을 박차고 나오셨습니다. 그래서 나오셔서 우리의 마지막 원수 죽음을 물리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완전한 승리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부활의 주님을 모셔 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 승리의 주님, 은혜의 주님을 모시고 그 주님을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활의 주님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합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힘주시고 은혜주시고 능력 주셔서 승리하게 하십니다. 모든 죄와 마귀사탄의 권세를 이기게 하십니다. 상황과 환경도 이기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승리의 기쁨을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이 시간 다시 한번 부활의 주님을 온전히 모셔 들이고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부활의 주님이 늘 여러분과 함께 하심으로 부활의 주님의 능력과 인도하심과 역사하심 가운데 세상의 모든 약한 것과 부정적인 것들과 상황과 환경과 세상의 왜곡된 가치관과 유혹과 도전들을 이기고 승리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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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주일낮설교/ 사모하는 믿음 ( August Sunday Sermon)

 

 

제목 : 사모하는 믿음

말씀 : 고전15:57,58

 

1.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기복신앙 즉 복을 비는 신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기복신앙이라는 말은 대부분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기복신앙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신앙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믿음을 세상의 물질이나 명예와 영광이나 건강이나 이런 세상적 물질적 육체적 복을 받기 귀한 위한 도구쯤으로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여러분 그렇다고 기복신앙이 다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물론 단순한 세상적 기복 신앙은 잘못된 것이지만 올바른 기복 신앙, 즉 올바르게 복을 받아 누리기를 원하는 신앙은 당연하고 도리어 필요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올바르게 복을 바라는 것도 자신의 책임이나 의무는 하지 않으면서 그저 천국에 가려고 하고 평안이나 누리려고 한다면 당연히 잘못된 믿음이지요. 그러나 참되고 올바르고 진정한 복을 사모하며, 그래서 더욱 열심히 주를 섬기고 수고하는 가운데 복을 받아 누리려는 것은 당연하고 도리어 우리가 꼭 가지고 있어야 할 신앙의 모습인 것이지요. 왜 그렇습니까? 그래야 열심을 내게 되고 그래서 신앙에 발전이 있고 성숙해 지고 그래서 주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며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뭔가 바라는 게 없다면 어떻게 열심히 힘쓰고 애쓰겠습니다. 뭔가 바라보는 것이 있고 간절히 소망하는 것이 있어야 열심히 그것을 얻기 위하여 힘쓰게 되고 그러다보면 더 발전해 나가고 뭔가 역사를 이루어갈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그렇지 않습니까? 공부를 해서 뭔가 좀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 애쓰는 것이지요. 아무리 공부해도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다면 누가 공부를 하겠습니까? 열심히 논밭에 나가서 일을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뭔가 기대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지요. 아무리 피땀을 흘려 일해도 수확할 것이 없다면 누가 그 고생을 하겠습니까?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도 그렇지요. 열심히 일하는데 아무런 보상도 없다면 누가 일하겠습니까?


믿음도 그렇습니다. 솔직히 예수님 믿고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다면 누가 예수님을 믿겠습니까? 믿으면 뭔가 좋은 것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걸 바라고 믿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예수님 믿으면 받아 누릴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물론 한두가지가 아니지요. 정말 예수님 안에서 바르게 진실하게 열심히 살아가면 분명히 이 땅에서도 평안과 기쁨과 위로도 받고 육체적 물질적으로 복을 받습니다.

 

물론 가장 큰 복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그야말로 완전한 복과 은혜를 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바르게 만나서 믿고 따르는 사람은 이 땅에서도 예수님 안에서 진정한 생명과 자유와 평안과 기쁨을 누리면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실 것을 기대하고 사모하며 열심히 주님을 섬기며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말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의 올바른 신앙의 모습이고 그럴 때 더욱 은혜 충만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런 올바른 기복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 안에서 진실하게 성실하게 열심히 살아갈 때에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 물론 지금 여기서도 영육 간에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그리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도 더욱 큰 상급을 주실 것을 믿고 열심히 성실하게 소망가운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정말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총 속에 살아가고 마침내 하나님 나라에 갔을 때에 영광의 면류관을 받아쓰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정말 영광의 나라의 은총을 아는 자요, 이런 사람이 순수한 마음과 믿음의 사람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순진한 아이들은 먹을 것을 보면 그거 하나 먹고 싶어서 눈을 떼지 못하지 않습니까? 또 그러다가 사탕하나 받으면 얼마나 기뻐합니까? 그래서 사탕하나 얻어먹기 위하여 재롱을 떨기도 합니다. 그래서 1,000원 한 장을 사모하며 그것을 얻기 위하여 기꺼이 심부름을 합니다. 그러다가 1,000원 한 장 얻으면 너무나 기뻐합니다. 요즘 아이들은 천원 알기를 우습게 여길지 모르지만 그것은 그 아이가 잘못된 것입니다. 적어도 천진난만한 아이들이라면 뭔가 작은 것이라도 자신에게 기쁨을 주는 것을 사모할 줄 알아야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예쁜 짓도 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순수한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수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얻기 위하여 말씀을 그대로 믿고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그대로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삼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순수한 마음과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와 은혜와 복을 간절히 사모하게 됩니다. 그냥 단순히 간절히 사모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사모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열심히 봉사하고 충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순전한 마음으로 간절히 사모하며 열심히 주님을 섬기면서 주님과 동행할 때에 그 심령 속에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넘쳐나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도 아름답게 이루어가며 주님도 기쁘시게 해 드리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벧전2:2절에서는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갓난 아기에게 가장 좋은 것은 엄마 젖입니다. 속된 말로 엄마 젖만 있으면 장땡입니다. 그래서 갓난 아기들은 죽으나사나 엄마젖만 찾습니다. 그래서 결국 젖을 얻어먹고 만족함을 누리며 건강하게 성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에게 정말 생명을 주고 은혜를 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더 나아가서는 우리에게 완전하고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주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사모하며 열심히 말씀을 묵상하고 그 나라를 향하여 힘차게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자신이 먼저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고 주께 영광을 돌리며 주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복된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는 가운데 온전히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러한 순진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주님과 동행할 때에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은혜가 넘쳐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순전한 믿음에 큰 상급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린아이와 같이 순진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라고 하신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건 말할 것도 없이 이런 사람들이 진정한 복을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뭐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시고 생명이시고 기쁨이고 평안이시고 위로이시고 소망이신데 어린아이와 같이 순진한 믿음으로 그 하나님과 동행할 때에 어찌 그 안에 있는 복을 받아 누리지 못하겠습니까? 그래서 순전한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 복은 크게 두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하늘의 신령한 복입니다. 다시 말해 겸손히 하나님 앞에 무릎꿇고 경외하며 섬기며 주님과 동행하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도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충성한 자들에게는 더 크고 영광스러운 상급도 보너스로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계22:12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즉 예수님께서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고, 그때에는 확실하게 우리가 행한대로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행한 대로 갚는다는 것은 물론 벌 줄 자를 벌주고 상 줄 자를 상 준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상과 벌이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복은 현세적인 복입니다. 즉 지금 여기서 우리가 이 육신을 가지고 살아갈 때에 누리는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 복입니다. 여러분 신28:2~4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한마디로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따라 사는 사람에게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으며,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으며, 자녀가 복을 받고 토지의 소산이 복을 받고 짐승까지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콩 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나지 않습니까? 열심히 일하면 일한만큼 주어지는 것입니다. 농부가 열심히 일을 하면 가을에는 풍성한 수확이 있습니다. 열심히 공부를 하면 좋은 학자가 될 수 있습니다. 열심히 운동을 하면 좋은 운동선수가 됩니다. 성실하게 열심히 사업을 하면 좋은 사업가가 될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 열심히 충성스럽게 일하면 반드시 인정을 받게 됩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갓난아기와 같이 하나님의 창조, 주권, 능력, 은혜, 축복을 믿고, 그 안에 생명과 복과 은혜가 있음을 믿고 주님을 따라가면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 물론 이 땅에서도 좋은 것들로 채워주십니다. 하나님 자신께서 우리를 푸른 초장 잔잔한 물가로 인도해 주십니다. 죄와 사탄의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나아가 우리에게 지혜와 능력과 분별력을 주십니다. 그래서 환경과 상황을 이기게 하십니다. 진실한 마음과 성실한 자세를 주십니다. 그래서 열심히 성실하게 진실하게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인정받을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사랑받고 인정받고 존경받게 됩니다. 그러면 당연히 이 땅에서도 많은 것을 누리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데 귀하게 쓰임 받게 됩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복을 누리지 않을 수 없고 물론 당연히 영원한 영광의 나라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상급은 열심히 성실하게 진실하게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당연한 보상입니다. 반면에 우주만물의 창조주시오 주관자이시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의 뜻을 거스리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벌이 주어지는 것도 당연한 대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주님 뜻대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복을 주실 것을 수없이 약속하셨고, 반면에 주님의 뜻을 거슬러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을 수없이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진정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믿음으로 주님이 주실 상급과 칭찬을 바라보며 열심히 성실하게 진실하게 주님 뜻대로 충성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약속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주어질 이 땅에서의 축복과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의 그 무한히 영광스러운 상급을 사모하면서 열심히 주의 뜻대로 살아갈 때에 여기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도 큰 상급도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복을 받으려면 열심히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순진한 마음으로 복을 받기를 원하고 상급을 받기를 원한다면 물론 그 상을 받기 위하여 열심히 충성해야 합니다. 오늘 58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을 줄을 앎이니라.”

 

고전 15장의 말씀은 소위 부활장이라고 불리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앞부분에서는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의 모든 육체는 부활한다, 불신자는 죽음의 부활로 나타나 영원한 형벌가운데 처하고, 예수 안에서 죽은 자들은 영광의 몸으로 부활하여 영원히 주와 함께 왕노릇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57절에서는 말씀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부활의 승리를 주신, 그래서 영원한 승리와 영광을 주신 주님께 감사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바로 그러기 때문에 그날을 바라보며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수고에는 반드시 상급이 있을 것이므로 장차 주께서 우리를 생명의 부활로 일으키셔서 영원한 영광의 기업을 누리게 하실 그날을 바라보며 주님의 일에 힘쓰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부활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부활하게 됩니다. 어떤 이는 생명의 부활로, 어떤 이는 죽음의 부활을 하게 됩니다. 그때에는 상과 벌이 확실해 집니다. 어떤 이는 완전한 형벌 가운데 처하고 믿음으로 승리한 사람들은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믿음을 지키고 주님이 주실 큰 상급을 기대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순진한 믿음의 모습입니다. 또한 그런 삶에 힘이 있습니다. 희망과 소망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래서 강하고 담대하게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주신 사명을 감사와 기쁨으로 열심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의 역사도 힘 있게 이루어가며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생명과 진리와 선과 의와 위로와 소망이 되시는 주님과 동행하는데 주님이 왜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과 위로와 소망으로 채워주지 않겠습니까? 또한 그 엄청난 영광의 나라가 있는데 그 나라를 바라보면 왜 희망과 소망과 힘과 용기와 위로와 기쁨이 솟아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지 못하는 인생은 진정한 평안도 기쁨도 소망도 누릴 복도 없습니다. 설령 나름대로는 평안과 소망과 복이 있는 것 같이 보일지라도 그것은 진정한 평안과 소망과 복이 아닙니다.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말 것들입니다. 그야말로 일장춘몽에 불과한 것이지요. 아니 그냥 일장춘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들이 바라보는 그것들의 노예로 살기 십상입니다. 혹시 끝까지 그런 희망과 소망 속에 기쁨을 누리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순간들이 일식간에 끝나고 마침내 주님 앞에 섰을 때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롬8:24절에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또한 벧전1:24,25절에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보이는 소망 즉 세상의 모든 물질과 권세와 부귀영화는 풀의 꽃과 같은 것이기에 금방 시들고 마르고 썩어 없어질 것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은 결코 소망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고 영원한 영광을 가져다 줄 그 하늘의 소망만이 완전한 소망이요, 그때 받을 상급만이 완전한 상급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결코 세상의 썩어 없어질 것들만을 바라보며 사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실 이 땅에서의 진정한 복, 나아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주실 그 영광스러운 복을 간절히 사모하며 거기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대한 참된 기대와 소망 속에서 정말 갓난아기와 같이 순수한 믿음으로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가정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진실하고 성실하고 열심히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진정 어린아이와 같은 순전한 마음으로 주님이 주시는 상급을 간절히 사모하는 가운데서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갈 때에 세상에서도 진정한 희망과 소망과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다가 마침내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주님의 약속된 축복을 풍성하게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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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주일예배설교/영혼이 잘 되어야 합니다( August Sunday Sermon)

제목 : 영혼이 잘 되어야 합니다.

말씀 : 골4:2~6


1.영혼이 잘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은 어디서 나옵니까? 물론 마음에서 나옵니다. 안 그래요? 마음에 미움이 잔뜩 들어 있으면 미워하게 되잖아요. 마음에 원망과 불평이 들어 있으면 원망하고 불평하게 되잖아요. 마음에 사랑이 들어있으면 사랑하고 나누게 되잖아요. 마음에 욕심이 잔뜩 들어있으면 어떻게든지 더 가지려고 난리를 치잖아요.

 

그러면 우리 마음속에 들어 있는 그것은 어디서부터 왔을까요? 말할 것도 없이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서 보고 듣고 배운 것들입니다. 보고 듣고 배운 것들이 뇌와 마음과 영혼 속에 축적되어 가치관과 인격을 형성되고 그렇게 형성된 가치관과 인격을 따라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무엇을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하며 살고 있습니까? 99%가 사람과 교제하며 거기서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한 것들입니다. 즉 하나님과 교제하며 보고 듣고 배운 것은 별로 없고 거의 대부분을 사람과 교제하며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하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 속에는 주님의 가치관이 아닌 사람의 가치관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뜻대로 살지 못하고 자꾸만 왜곡된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일주일동안의 삶을 생각해 보십시오. 일주일이 168시간입니다. 그러면 그 중에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은 몇 시간입니까? 일주일 달랑 한번 예배드리는 사람은 불과 1시간이지요. 그러면 1/168입니다. 약 0.6%지요. 오후예배까지 드리는 사람은 2시간 즉 1/84 약 1.2%입니다. 수요예배까지 드리는 사람은 3시간 약 1/55 약 2%입니다. 매일 새벽기도까지 드리는 사람은 10시간 약1/16 약 6%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어떤 사람은 아예 하나님을 찾지 않고 세상과만 교제하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도 많아야 6%, 적으면 1%도 안되는 시간만 하나님과 교제하고 나머지 시간은 세상과 교제하며 거기서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 뇌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겠습니까? 우리 가치관과 인격이 어떻게 형성되어 있겠습니까? 물론 당연히 세상에서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한 것들로 가득차 있겠죠.

 

물론 그렇게 세상에서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한 것들이 완전히 옳고 바르고 선하고 의롭고 진실하고 거룩하고 하다면야 문제될 게 없겠죠.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렇지를 못하지 않습니까? 인간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영혼이 죄로 심각하게 오염되어 인간은 본질적으로 죄와 무지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 영혼이 죄와 무지 가운데 있음으로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들이 심히 죄되고 왜곡된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니 그렇지 않아도 내 영혼도 이미 심각하게 죄로 오염되어 있는데 거기다가 또 죄와 무지 가운데 있는 사람들과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우리 영혼과 인격이 어떻게 올바르게 형성되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지극히 인간적 물질적 이기적 자기중심적 사고와 그 밖에 온갖 왜곡된 가치관이 자리하고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지극히 왜곡된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서 선과 진리와 의를 따르지 못하고 그래서 결국 자신도 생명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고 남에게도 아픔과 상처와 고통을 주는 그러한 삶을 살 때가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어찌하든지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늘려야 합니다. 그래서 어찌하든지 우리 영혼이 조금이라도 더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과 사랑과 선과 진리와 의와 진실 등의 하나님의 가치관, 예수님의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 영혼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어야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과 선과 진리와 의와 은혜와 사랑을 덧입어 내가 먼저 진정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올바른 관계가 되면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물질 사이에도 올바른 관계가 형성됩니다. 그러면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선과 진리와 의로 대하게 됩니다.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바르게 사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이 전인적인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됨은 물론 남에게도 생명의 기쁨을 가져다주는 그래서 우리 모두가 함께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는 복된 사회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42:1절에서는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혼이 주의 은혜로 가득할 때에 진정한 생명의 은총을 누릴 수 있기에 하나님께서 내 영혼에 은혜로 가득 채워 주시기를 간절히 사모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어찌 하든지 하나님을 가까이 함으로 우리 영혼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온전히 회복되어 여러분 자신도 생명의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고 남에게도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가져다주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럼 어떻게 우리 영혼이 늘 은혜가 충만한 삶이 될 수 있습니까?

2.말씀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영혼이 잘 되기 위해서는 먼저 말씀 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두말할 나위가 뭐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인류에게 완전하고 유일한 생명의 양식이며 동시에 완전한 나침반이며 규범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영혼이 살아나고 바른 길을 깨닫고 구원의 길,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영생 복락의 길을 가려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거기에만이 완전하고 영원하고 생명과 진리와 은혜가 있습니다. 우주와 하나님과 인간과 이 세상과 내세와 영원한 나라에 대하여 유일하고 완전하게 정보를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누가 우리에게 완전한 생명과 진리와 의와 영생 복락의 길을 알려 주겠습니까? 누가 우주만물에 대하여 다 알겠습니까? 그 어떤 철학이나 도덕이나 지식이 생명의 길을 알겠습니까? 무엇이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과 가치를 가르쳐 주겠습니까?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제아무리 위대한 사람도 다 죄인이요 무지한 존재요 한계 속에 있는 존재입니다. 그렇게 죄와 무지와 한계 속에 있는 인간은 그 아무도 자신이 길이요 진리가 될 수도 없고, 우리에게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영생 복락의 길로 안내해 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영생복락을 주실 수 있고 우리를 선과 진리와 의와 영생 복락의 길로 인도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분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만이 유일한 생명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시19:7,8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 영혼을 소생케 하고 영혼의 눈을 밝혀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유일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말씀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압니다. 그래야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알게 됩니다. 그래야 지혜와 능력을 얻게 되고, 그래야 속지 않고, 시험에 들지 않고, 세상에 끌려 다니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모르면 인생을 모릅니다. 인생의 목적과 가치와 의미를 모릅니다. 인생의 종착역도 모릅니다. 온전한 지혜도 능력도 분별력도 없어집니다. 그러면 왜곡된 가치관에 판판이 속습니다. 세상에 질질 끌려 다닙니다. 유혹에 빠지고 시험에 듭니다. 그래서 자신이 죄와 무지 속에 있는 줄도 모르고 자기 마음대로 삶으로 세상에서도 볼품없는 인생이 되고 끝내 멸망의 길로 가는 불행한 인생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우리의 작음과 무지와 어리석음을 인정하고 자신의 생각과 지식과 경험과 이성을 따라 살지 말고 오직 인생의 유일한 참되고 영원한 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가까이하며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그 말씀에 순복하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말씀이 주시는 능력과 은혜와 권세와 지혜로 세상의 모든 왜곡되고 악한 것들을 물리치고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잘 달려가 여러분의 영혼이 생명의 은혜가 넘쳐 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기도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영혼이 회복되어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기 위하여 또 하나 정말 중요한 것은 기도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육체가 육체적 호흡을 통하여 산소를 공급받음으로 육체적인 에너지를 가지고 마음껏 활동하는 것처럼 우리 영혼도 기도를 통하여 영적 산소를 공급받아 영적 에너지를 얻어야 영적으로 생기 있는 삶을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단지 하나님께 무언가를 요구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우리 생각을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로 결단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과 은혜와 지혜와 위로와 평안과 능력이 내 영혼 속으로 흘러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면 모든 욕심과 시기와 질투와 미움과 원망과 불평과 근심과 걱정과 좌절과 더럽고 추하고 악한 것들이 물러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영혼이 생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온전한 분별력과 능력을 가지고 세상의 유혹을 이기게 되고, 마귀사탄에게 속아 끌려 다니는 일이 없게 됩니다. 세상의 유혹과 도전과 시험을 얼마든지 이기며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26:41절에서는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고, 오늘 2절에서는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여러분 보세요. 계속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즉 언제 어느 때 어느 상황이라도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말씀에 보면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즉 맨 날 달라는 기도만하지 말고, 먼저 감사의 기도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요구만 하는 게 아니라 먼저 감사해야 하고 회개해야 하고 또 내가 주님을 위해서 이렇게 하겠다고 기도해야 합니다. 물론 달라는 기도도 해야 하지만 그러나 그런 기도를 하기 전에 먼저 나 같은 죄인을 살려주신 주님, 때를 따라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신 주님께 먼저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기억한다면 당연히 내가 이렇게이렇게 하겠노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요구하는 것과 무작정 요구하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요구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잘 알지 못하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기도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면서 먼저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은혜를 아는 사람도 요구하는 기도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요구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 아닙니다. 그 요구는 나와 내 가족과 이웃에게 정말로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하기 위한 기도입니다.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가 나옵니다. 맨날 무엇을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족과 이웃과 주님을 위해서 어떻게 하겠노라는 기도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난 자의 기도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응답해 주시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물론 그 기도자의 심령 속에 은혜를 주셔서 더욱 감사와 기쁨이 넘치고, 하나님께도 더욱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기도와 관련하여 한가지 더 생각할 것은 영혼 구원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3절을 보겠습니다.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하고 저들이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영혼 구원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당연하지 않습니까? 세상에 영혼 구원하는 것보다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가 어디 있습니까? 영혼 구원을 받지 못했을 때 당하는 고통과 아픔보다 더 큰 아픔이 어디 있겠습니까? 반대로 영혼 구원을 받았을 때 누리게 되는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평안보다 더 크고 기쁘고 즐겁고 복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가족에게 억만금을 주는 것보다 그 영혼이 구원받게 해야 합니다. 가정이나 국가의 경제발전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내 가족 이 나라 이 백성이 하나님을 알고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지금 여기서나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나 진정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정말 여러분의 영혼이 밝아지고 지혜로 충만하고 성령의 능력과 은혜가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가정을 위해 기도하고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고 특별히 복음의 역사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지역사회와 나라와 민족의 영혼이 깨어나고 살아나서 우리 모두 함께 주님의 생명의 은총을 더욱 풍성하게 누리게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영혼이 잘되어 생명의 은총을 누리면서 그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려면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물론 먼저 예배와 말씀과 찬양과 기도를 통하여 직접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생명의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걸로 끝나면 안되고 그렇게 은혜를 받았으면 이제는 당연히 일상생활에서 은혜 받은 자로서 거룩하고 진실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생명의 은총을 누리고 다른 사람에게 생명의 기쁨을 가져다 주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롬12:1절에서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하셨고, 오늘 5절에서도 “외인에게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세월을 아끼라는 것은 세월을 고이고이 간직하고 있으라는 게 아닙니다. 세월을 바르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래요? 돈이나 시간이나 재능을 아끼는 게 뭡니까? 그냥 고이 간직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돈이든 시간이든 재능이든 그 본래의 목적대로 바르게 사용하는 게 아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월을 아끼라는 것도 그냥 가만히 있으라는 게 아니 원래의 목적대로 바르게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말할나위없이 하나님 뜻대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시간이든 재능이든 돈이든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될 때에 가장 올바르게 사용되어 우리 모두가 서로가 서로에게 기쁨과 유익과 복을 주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풍성하고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6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여기서 맛을 낸다는 것은 세상에 기쁨과 평안과 은혜와 사랑과 소망과 위로를 주어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그렇게 맛을 내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우선 말을 예쁘게 곱게 긍정적으로 상냥하게 친절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로서 다른 사람에게 기쁨과 은혜를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말도 예쁘게 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만 잘하면 뭐하냐, 행동을 잘해야지 그럽니다. 그러면 그렇게 말하는 너는 얼마나 행동을 잘하냐?

 

여러분, 말도 나쁘게 하고 행동도 나쁘게 하면 빵점입니다. 그러나 비록 행동은 다 못할망정 말이라도 잘하면 50점은 됩니다. 물론 그렇다고 말만 잘하면 된다는 말씀이 아니라 우선 말을 예쁘게 하고 그 다음에 행동도 예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우선 말이 예쁘고 그 다음에 행동도 잘해야 합니다. 진실해야 합니다. 의로워야 합니다. 성실해야 합니다.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느 곳에 있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의 기쁨과 유익과 소망을 가져다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소금으로 맛을 내는 인생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면 나도 행복하고 너도 행복하게 됩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 믿음의 사람들의 삶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혼이 잘 된 자의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 세상의 것도 잘되기를 바랍니다. 가정이 화목하고 모두 건강하고 출세하고 물질적으로 부유해 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영혼이 잘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말씀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기도생활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받은 은혜를 삶에 적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 자신이 먼저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고 가정과 교회와 사회를 살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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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주일낮설교/기쁨이 충만한 인생( August Sunday Sermon)

제목 : 기쁨이 충만한 인생

말씀 : 요15:5~11

 

1.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모든 부모들은 한결같이 자녀들이 기쁘고 즐겁고 감사하며 의롭게 선하게 아름답고 복된 가정도 이루고 서로 사랑하며 아껴주며 복되게 살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어떤 부모도 자녀가 슬프게 고통스럽게 원망하고 짜증내고 싸우고 죄짓고 무가치하게 살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떠시겠습니까? 물어보나마마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이 행복하고 기쁘고 감사하고 선하게 의롭게 아름답게 살기를 바라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그렇게 살기를 바라십니다. 여러분들이 그저 자나깨나 내 새끼 잘되고 밝게 기쁘게 감사하며 살기를 바라는 것처럼 우리 하나님도 우리가 정말 늘 기쁘고 즐겁고 감사하며 살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론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구원이 뭡니까? 죄와 무지와 어둠과 슬픔과 고통에서 건져주어 천국의 은총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국이 뭡니까? 물론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평안과 감사와 위로와 소망이 넘치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물론 우리가 모든 죄와 고통과 불안과 미움과 저주 속에서 해방되어 선과 진리와 의 속에서 참된 기쁨과 평안과 은혜의 삶을 살게 해 주시기 위한 것이지요. 이게 주님이 오신 목적이고 이게 천국의 삶이고 이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내는 삶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 믿고 구원받았으면 그 은혜를 누리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선과 진리와 의 가운데 감사하며 기뻐하며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며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천국은 죽어서만 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도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 여기서의 천국은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가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이 내 안에 있으면 천국의 모형을 맛보며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천국에 근접한 삶을 살아다가 죽어서 완전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진정한 구원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자주 말씀드렸지만 예수님께서 눅17:20,21절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천국은 이미 우리 안에 도래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11절 말씀에서는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 안에서 맺을 열매는 뭡니까? 물론 생명과 기쁨과 자유와 평안과 사랑 등의 주님이 주시는 온갖 좋은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면 이러한 내가 주는 온갖 좋은 열매를 풍성하게 맺게 될 것이므로 너희가 생명의 기쁨이 넘치는 복된 삶을 살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시16:1절에서는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정말 우리의 모든 죄를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도말하시고, 무덤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셔서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님을 온전히 심령 속에 모셔들이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물론 지금 여기서도 주님이 주시는 그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면서 주께 영광을 돌리는 복된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습니까?

2.온전히 예수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미 앞에서 얼마간 언급이 되었지만 우리가 진정한 기쁨의 삶을 살려면 말할 나위 없이 온전히 예수님을 심령 속에 모셔들이고 예수님 안에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확실히 생명의 은혜가 넘쳐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뭐 지극히 당연한 거 아닙니까? 주님이 누구십니까? 주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모든 마귀 사탄과 어둠의 세력들 물리쳐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 안에 있으면 그런 은혜들을 누리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안 그래요? 어두운 곳에 있으면 왠지 불안하고 두렵지 않습니까? 반대로 빛 가운데 있으면 마음이 밝아지고 따뜻해지고 편안해지지 않습니까? 따뜻한 곳에 있으면 따뜻하고 추운 곳에 있으면 춥습니다. 상처와 고통과 아픔이 있는 곳에 있으면 마음이 슬퍼지고,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한 곳에 가면 나도 덩달아 마음이 기뻐지지 않습니까? 분위기가 험악하거나 어두침침한 곳에 있으면 두려움이 생기고, 뭔가 음침하고 더러운 곳에 있으면 영혼이 더러워져 집니다. 그러나 사랑과 은혜가 넘치는 곳에 가면 나도 은혜가 넘치게 되고, 깨끗하고 정결한 곳에 가면 마음이 정화가 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인생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빛이신 예수님 안에 있으면 어찌 예수님 안에 있는 그 생명의 기쁨과 평안과 위로를 누리기 못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좌우단간 어찌하든지 죽으나사나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약4:8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즉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자꾸 세상의 것을 바라보면서 마음이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갈리게 하지 말고 어찌하든 하나님을 향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가까이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해 주시면 당연히 하나님안에 있는 그 생명과 기쁨과 은혜와 평안과 위로와 소망은 저절로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바로 그런 말씀입니다. 오늘말씀에서 예수님은 당신 자신은 포도나무이시고 우리는 가지라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가지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그건 말하나마나 죽으나사나 나무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삽니다. 그래야 영양분을 공급받습니다. 그래야 꽃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안 그러면 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으나사나 우리의 줄기이신 즉 우리의 근본이며 기초이며 생명의 주권자이시며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예수님께 붙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로부터 영적 육체적 물질적 정신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좋은 것들을 충분하게 공급받음으로 생명의 은혜가 넘쳐나고 잎이 싱싱해지고 꽃이 실하게 피고 충실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5,6절에서는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주님 안에 있으면 주님이 주시는 능력과 지혜로 생명의 풍성한 열매를 맺어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지가 줄기를 떠나면 말할 것도 말라 죽게 되고 그러면 아무 쓸모없어 불태워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으나사나 예수님께 붙어 있어 생명의 은혜가 넘쳐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온전히 예수님께 착 달라붙어서 온전히 주님과 동행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그 생명의 은혜를 풍성하게 받아 누리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 주님께 딱 달라 붙어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건 여러분 7절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7절 보겠습니다. “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보세요.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우리 안에 있고, 동시에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그러면 너희가 구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무른 말씀입니까? 내가 너희 안에 거한다면 내 말도 너희 안에 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든 원하는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면 주님의 말씀도 당연히 우리 안에 거해야 하고 그러면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게 되고 그러면 주님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죽으나사나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야 하고, 예수님을 모시고 산다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산다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예수님이 우리 안에 있다. 이건 좀 추상적이예요. 예수님이 내 안에 있다는 걸 보여줄 수도 없고, 만져 볼 수도 없고, 예수님의 음성을 직접 들어 볼 수도 없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압니까?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선과 진리와 의와 거룩을 따르고 그러면 그게 바로 예수님이 우리 안에 있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죽으나사나 예수님 안에 있어야 하는데 그러면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모든 생각과 판단과 가치와 행동과 삶의 잣대여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 안에 있는 삶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가까이하는 자의 삶이요, 예수님과 동행하는 자의 삶인 것입니다. 그럴 때 진정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혜가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1:2,3절에서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죽으나사나 주님을 심령속에 온전히 모셔들이고, 주님을 모셔들였으면 더 이상 세상의 헛되고 왜곡된 가치관을 따라 살아가지 말고 오직 유일한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이시며 인생의 유일한 등불이며 기준이며 안내자인 말씀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은혜와 기쁨과 평안과 위로가 넘쳐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말씀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어떤 은총을 누리게 됩니까?

3.천국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게 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 자는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천국의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천국은 두가지 천국이 있고, 예수님 믿는 사람은 이 두가지 천국을 동시에 누리게 됩니다.

물론 1차적으로 누릴 천국은 영원한 영광의 나라입니다. 예수님 믿으면 죄에서 해방되고 부활의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마귀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래서 지옥 백성에서 천국백성으로 옮겨집니다. 그래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가장 시급한 문제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천지가 개벽을 해도 이것만은 먼저 얻어놔야 합니다. 그까짓 세상적인 부귀영화 영광 명예 아무리 얻어 놔봤자 별것 아닙니다. 진정한 생명의 은혜도, 영광의 나라도, 진정하고 영원한 자유와 평안과 기쁨과 소망 줄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우리에게 완전한 생명의 은총을 주십니다. 영광의 나라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선해서 예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예수님이 믿고 구원받아야 합니다.

그 다음 두 번째 천국은 지금 여기서 누리는 천국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은혜받고 천국의 은총을 누리게 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능력과 지혜와 은혜를 주셔서 세상의 모든 어둠의 세력과 마귀 사탄의 유혹과 시험과 도전을 이기게 하십니다. 세상에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생명과 기쁨과 은혜를 주지 못하는 세상 영광이나 명예나 즐거움으로부터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에게 얽매이지 않게 되고 끌려다니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그것을 바라보고 그것을 향하여 달려가게 하십니다. 그래서 진정 자유와 평안과 위로와 소망가운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상황과 환경과 환경에도 얽매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의 권세와 지옥의 권세와 세상의 모든 왜곡되고 추하고 악한 것들에게서 자유하게 되어 지금 여기서도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자유와 평안을 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재적인 천국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영접하지 아니하고 주님을 따라 살지 아니하고 세상의 것에 소망을 두고 그것을 바라보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어둠의 권세에 얽매이고 상황과 환경에 얽매이고 온갖 시기와 질투와 욕심 가운데 살면서 아무리 가져도 만족함을 모릅니다. 도리어 싸우고 빼앗고 갈등하고 어떻게든지 더 가지려고 난리를 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러한 세상의 것들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감격과 행복과 가치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다 썩어지고 없어지고 우리를 떠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은 엄청나고도 영원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진정 영원하고 완전한 복과 은혜와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심지어 우리 믿음의 사람들조차도 그렇게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세상의 것은 대단한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엄청난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세상의 것을 얻으면 다 얻은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세상의 것을 갖지 못하면 아무것도 못 가진 자처럼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믿음을 얻은 것, 구원을 얻은 것, 이것을 별 것 아닌 것처럼 여길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정말 기뻐하지도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고, 영광을 돌려 드리지도 못하고 살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하찮은 것 때문에 걱정과 원망과 불평을 할 때가 많습니다. 심지어 믿음을 팔아먹고 세상의 것을 위하여 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닙니다. 그건 정말 너무나 어리석은 일입니다. 실상은 정 반대여야 합니다. 믿음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세상의 별 것 아닌 것, 세상의 대단치 못한 것 그런 것은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얼마든지 버릴 수 있는 것들입니다. 세상의 것들은 예수님 때문에, 믿음 때문에, 구원의 은총 때문에 얼마든지 버려도 좋은 것들입니다. 그게 손해인 것 같지만 손해가 아니고, 그것이 잃은 것 같지만 실상은 모든 것을 얻는 길인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별 것 아닌 것 때문에 믿음 안에 있는 것, 대단한 것, 엄청난 것을 포기하는 사람은 껍데기를 위하여 알맹이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썩어 없어질 것을 위하여 영원한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더 나은 것을 위해서라면 덜 나은 것은 버릴 수 있지 않습니까? 더 좋은 것을 위해서는 덜 좋은 것은 포기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덜 좋은 것을 위해서 더 좋은 것을 버린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대단치도 않은 세상의 것을 얻기 위하여 참으로 가치있는 믿음의 행위를 포기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또 세상의 별로 대단치도 않은 것을 좀 잃었다고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생각하며 절망하며 슬퍼하며 원망하며 산다면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세상의 별 것 아닌 것을 좀 잃었다고 마치 천국마져 잃어버린 것처럼 탄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의 명예와 돈과 건강과 지식으로 부요하지 않더라도 설령 있는 것마져 빼앗겼다해도 천국을 놓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실제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마16:25,26절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예수님을 위하여 세상의 것을 포기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얻을 것이고, 세상의 것을 위하여 예수님을 포기하는 사람은 결국 모든 것을 잃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결단코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 물론 여기 누릴 현재적 천국의 은총을 누리기 위한 것들과 세상의 것을 바꾸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을 기억하면서 정말 예수님을 온전히 모셔들이고, 모셔들였으면 이제는 정말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오직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세상의 별 것 아닌 것들에 끌려다니거나 거기에 함몰되어 현재적인 천국을 누리기 위한 일들을 게을리하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직 주님 안에 진정 생명의 기쁨과 자유와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하며 오직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분명 진정 생명의 은혜와 기쁨과 능력과 평안이 넘쳐나는 삶이 되실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상황과 환경과 도전과 유혹을 이기고 자유의 평안을 누리시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행복하고 기쁘고 감사하고 은혜가 사랑이 넘치고 생기가 흘러넘치는 복되고 아름답고 향기로운 인생이 되실 것입니다 주의 영광 나타내며 주님 나라 이루어가는 삶이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정말 이런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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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셋째주일설교/믿음과 순종과 축복(August Sunday Sermon)


말씀 : 창22:9~14

제목 : 믿음과 순종과 축복

 

1.믿음과 순종과 축복

믿음이 있는 곳에 순종이 있고, 순종이 있는 곳에 축복이 있다. 여러분, 맞는 말입니까? 예, 맞는 말입니다. 안 그래요? 믿음이 있으면 순종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지요. 있고말고요. 아니 믿는데 순종이 없을 수 있습니까? 안 그래요? 좋으신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을 믿는데 어찌 순종이 없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또 순종이 있는 곳에 축복이 있다. 이것도 마찬가지잖아요. 순종하는 복이 안 오면 그게 이상한 거지요. 능력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축복의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데 어찌 복이 없겠습니까? 여러분, 신28:2절 보세요.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잖아요. 그러면서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하시면서 오만가지 복을 다 주실 것을 말씀하고 있잖아요. 여러분, 하나님이 뭐 허튼소리 하시는 분이 아니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진실로 믿음으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았던 사람들은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 물론 지금 여기서고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오늘 말씀에 나오는 아브라함인데요, 오늘 말씀은 여러분이 너무 많이 들어서 식상하실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어떻습니까? 귀가 따갑도록 들었는데 잘 됩니까? 잘 안되지요. 왜요? 귀가 따갑도록 들었지만 실상은 그래봤자 얼마나 안 되기 때문입니다. 안 그래요? 이 이야기 들어봤자 몇 번 들었습니까? 한 백번 들었을까요? 그런데 세상에서 정치이야기, 경제이야기, 먹고 마시고 놀고 즐기며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는 몇 번 쯤 들었을까요? 한 천 번 들었을까요? 만 번도 더 들었을걸요. 그러니까 믿음 안에서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이야기는 아무리 많이 해도 세상에서 먹고 입고 잠자고 놀고 하는 이야기의 백분의 일, 천분의 일도 못 듣고 못 보는 거예요. 그러니 잘 안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하지요. 그러면 안 되는 게 당연하다고 가만히 있을 겁니까? 아니죠. 그러므로 더욱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일에 힘써야 하지요. 그래야 조금이라도 기독교적 가치관이 확립되고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그래야 조금이라도 하늘의 신령한 은혜와 땅의 기름진 축복을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인간적으로는 말도 안되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아브라함의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다 읽어드리지 못했지만 2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삼아 각을 뜨고, 불에 태워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말이 됩니까? 인신제사는 우상숭배자들이 하는 악습으로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일입니다. 게다가 이삭은 하나님께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시고 무려 25년 만에 달랑 하나 주신 약속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장차 큰 민족을 이루고 주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삭을 잡아 불에 태워 번제물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게 말이나 되느냐 말입니다.

아마도 아브라함도 처음에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게 정말 하나님의 말씀일까? 이삭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자녀가 아닌가? 그것도 아이를 도저히 낳을 수 없는 100세나 되어서 기적적으로 주신 아들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큰 민족을 이루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았는가? 큰 민족을 이루려면 오히려 더 많은 자식을 주셔야 하는데 겨우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불에 태워 인신제사로 드리라니 내가 늙어서 헛소리를 들었나? 망령이라도 들었나?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아브라함은 인간적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고 말도 안되는 명령에 순종합니다. 왜요? 그게 하나님의 명령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선하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기에는 분명 말도 안되지만 분명 뭔가 하나님의 섭리와 뜻과 계획이 있을 것을 믿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우리의 이성으로 다 수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섭리는 언제나 우리 보다 높고 깊어서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이성과 경험과 능력을 초월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성적으로 이해가 됩니까? 예수께서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다. 경험적으로 납득이 갑니까? 저 영원한 천국, 이것이 인간의 논리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착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이성적으로 믿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모든 이성과 과학과 논리를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니 그런 것들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이해가 되든 말든 납득이 되든 말든 순종할 것 뿐입니다. 아브라함이 만약 조금이라도 이성이나 논리를 가지고 생각했더라면 절대로 이삭을 바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인신제사를 드리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그런 명령을 내리실 수 있습니까? 어떻게 내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땅의 티끌과 같이 많게 해주시겠다고 해놓고 25년 만에 겨우 아들 하나 주어놓고 그걸 도로 달라고 하십니까? 하면서 따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자신의 모든 생각들을 다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과 선하심과 인도하심을 믿고 순종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취해야 할 태도인 것입니다. 이해가 가든 안가든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죄와 무지를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높으심과 인도하심과 선하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언제나 내 뜻과 이성과 경험과 논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고 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잠3:5,6절에서는 말씀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이해가 되든 말든, 세상의 가치와 같든 다르든, 내 경험과 맞든 안 맞든, 손해가 되든 유익이 되든, 내 생각과 관계없이 인정하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의 태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내 모든 생각과 경험과 환경을 떠나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오직 온전한 길이며 진리며 생명이신 예수님의 뜻에 온전히 순복하십시오. 그저 갓난아이와 같이 주님의 말씀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십시오. 그때에 분명 주님 안에 있는 은혜의 풍성함이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2.온전한 순종

여러분,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었지만 말씀에 순종합니다. 창22:3,4절 보세요.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여러분, 이 말씀을 보십시오. 그는 아침 일찍 떠났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솔직히 무언가 하나님의 섭리가 있을 것임을 믿었지만 밤새도록 얼마나 고민을 했겠습니까?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아들을 잡아서 번제로 드리라는데 그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날이 밝자마다 곧장 시행에 들어간 것입니다. 아내 사라에게 말도 없이 떠났습니다. 아내에게 말했다가 보나마나 이 양반이 나이가 들더니 드디어 망령이 들었냐고 하면서 핀잔만 들을 것이 뻔했기 때문에 아내에게 말도 하지 않고 떠난 것입니다. 그리고 솔직히 자신도 시간을 지체하다간 아들을 번제로 드릴 자신이 없었기에 마음 변하기 전에, 마귀가 틈타기 전에 떠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즉시 시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시행하고 그 뜻대로 살아가는 일을 뒤로 미루면 안됩니다. 어떤 사람은 계속 나중에 나중에 그럽니다. 이것만 해 놓고, 저것만 해결하고...... 나중에 생활이 안정되면, 나중에 시간 나면, 나중에 할 일 없어지면... 그러나 여러분, 지금 못하는 사람이 나중에 여유 생기면 할 수 있을 것 같죠? 그런 사람은 99%는 여유생기면 놀러 다닙니다. 여유돈 있으면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즐기는데 쓰게 됩니다. 설령 나중에 한다 해도 지금 못한 것은 죽을 때까지 아니 천국에 가서 까지 못한 것으로 계속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마귀가 장난칩니다. 마음이 변하기 쉽습니다. 방해꾼이 생기기 쉽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길을 떠나 사흘 동안 걸어 하나님이 지시하는 곳으로 걸어갑니다. 여러분, 그 사흘길을 걸어오는 동안 아브라함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아무리 하나님의 무슨 뜻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고, 그래서 길을 떠나오긴 했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외아들을 자기 손으로 잡아 불에 태워서 번제로 드려야 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 마음이 과연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마음을 다잡으며 발걸음은 재촉합니다. 이삭을 잡아 번제로 드릴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천갈래 만갈래 찢어지는 듯 아팠지만 그는 묵묵히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께서 지시한 산 밑에 이르러 종들을 거기 머물라고 하면서 번제에 쓸 나무를 아들의 등에 지우고, 자기는 칼과 불을 들고 산을 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때 이삭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번제를 드리려면 제물이 있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제물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아버지, 나무와 불은 있는데 제물은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이 말을 듣는 순간 아브라함의 마음이 얼마나 뜨끔했겠습니까? 차마 ‘네가 바로 번제물이다. 하나님께서는 너를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단다. 나도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지만 하나님께서 너를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단다. 그러니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구나.’ 차마 이렇게 말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비해 주실 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묵묵히 산에 올라 드디어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에 도착하게 되고, 아브라함은 번제를 드릴 준비를 합니다. 장작을 쌓아 올렸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제물을 잡아서 각을 떠서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태워야 할 차례였습니다. 그 번제물은 다름 아닌 사랑하는 아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떨리는 목소리로 아들에게 말합니다. ‘아들아, 하나님께서 너를 번제로 드리라는구나. 내가 너를 대신해서 번제가 될 수만 있다면, 내가 너를 대신해서 죽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니? 그러나 내가 아닌 너를 요구하시는구나. 그러나 사랑하는 아들아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있을 거야. 그러니 순종해야지.’ 하면서 아들을 결박합니다. 그 운명의 순간에 하늘이 무너지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과 아픔이 몰려 왔습니다. 그러나 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떨리는 손으로 아들을 붙잡아 결박하고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죽이려고 눈을 감고 칼을 높이 들어 올렸습니다.

여러분, 그 상황을 상상해 보십시오. 아들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결박하는 아버지의 심정. 아들을 장작더미위에 올려 놓고 칼을 높이 들어 올린 아버지의 심정, 정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 이삭, 그것도 하나 밖에 없었던 아들 이삭,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해서 결박 당할수만 있다면.... 내가 너를 대신하여 번제물이 될 수만 있다면...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해서 죽을 수만 있다면...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해서 불 태워 질수만 있다면.... 이런 마음으로 이삭 대신 자신이 번제물이 되고 싶었지만 하나님이 요구하는 건 자신이 아니라 이삭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무슨 선한 뜻이 있을 것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이니 거역할 수 없었기에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속에서 도저히 눈뜨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눈을 감고 아들을 향해 칼을 내리치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게 순종입니다. 내 생각과 달라도, 도저히 이해가 안가도, 있을 수 없는 일을 시켜도 그냥 따르는 것이 순종입니다. 아무리 내 생명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것이라도 하나님이 필요로 하신다면 그냥 드리는 것이 순종입니다. 이것이 믿음이고 이것이 순종입니다. 그래서 순종하는 자에게 주님의 은총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게 믿음이고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정이며 하나님께 대한 신뢰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믿습니까? 주님의 선하심을 믿습니까? 구원자이심을 믿습니까?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상황이 이래요. 형편이 이래요. 저래요. 이래서 곤란해요. 저래서 곤란해요. 그럼 내가 손해봐요. 웃음거리 돼요. 주일날 하루 쉬면 손해가 얼만지 아세요? 아니 이 귀한 걸 달라고요? 그럼 난 어떻게 살라고요? 여러분, 이런 거 다 버리세요. 그냥 믿고 따르세요. 순종하세요. 그게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의 사람에게 주님의 한량없는 은총이 임합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순종하는 자에게 임할 복

여러분, 그렇습니다. 순종이 곧 온전한 믿음이기에 순종하는 자에게 주님의 놀라우신 은총이 임합니다.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내리치려고 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창22:11,12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이삭을 바치라고 하시던 하나님께서 도리어 다급하게 아브라함을 제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너 정말로 이삭을 잡으려는 것이냐? 내가 정말 이삭을 죽여서 번제로 받기를 원하는지 아니냐? 아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네 믿음을 보고 싶었단다. 이제 충분하다. 그 믿음이면 충분하다. 너는 정녕 믿음의 조상이 될 만한 자격이 있다. 그러니 이삭을 풀어주고 내가 너를 위해 준비한 양으로 번제를 드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아들을 풀어주고 옆에 뿔이 나무에 걸려 꼼짝 못하고 있는 양을 가져다가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삭이 아닌 양으로 제사를 모두 마쳤을 때 다시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창22:16,1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요구했던 것은 이삭이 아니라 믿음이었습니다. 순종이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독자 이삭을 빼앗아가려고 했겠습니까? 왜 말도 안되는 인신제사를 드리라고 했겠습니까? 그게 아니라 믿음과 순종을 요구하셨고 그 믿음과 순종이 있는 자에게 임할 하나님의 은총을 그렇게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순종하게 되고, 순종하는 자에게는 축복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순종이 곧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순종이 하나님께 대한 신뢰이기 때문입니다. 순종이 곧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신앙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순종이 하나님의 나의 주인이라는 종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종이 주인에게 따질 수 있습니까? 우매 자가 지혜 자에게 따질 수 있습니까?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왜 그래야 하느냐고 따질 수 있습니까? 죄인이 구세주에게 이러니저러니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믿음과 순종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요, 진정 주님만이 생명의 주님이시오, 구원자시오, 주권자라는 믿음이 있다면 순종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종이 곧 믿음이요, 그래서 순종하는 자에게 복이 임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러한 순종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때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아도, 현실적으로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워도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달라고 하셔도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결코 빼앗으려는 것이 아니라 주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온전히 주인으로 모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순종하실 때에 좋으신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께서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우리의 모든 생각 지식 경험 이성 가치관 나 내려놓고 순종하심으로 주님께서 채워 주시는 영육간의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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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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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주일낮설교/가정 천국을 이룹시다 ( August Sunday Sermon)

말씀 : 엡5:31~6:4

제목 : 가정 천국을 이룹시다.

1.가정천국을 만들어 갑시다.

여러분,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영원한 천국만 아니라 지금 여기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지금 여기서 누려야 할 천국은 결코 청와대에 있는 것도 아니고 이건희회장집에 있는 것도 아니고 절세미인의 집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천국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눅17:21절을 보십시오.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보세요. 천국이 우리 안에 있다는 거예요. 물론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 저 하늘나라 어디엔가에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의 천국은 외부적인 어떤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각자의 마음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안 그래요? 어떤 사람들은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도 불행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사람보기에는 초라해 보여도 천국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여러분, 가정도 동일합니다. 가정이 천국이 되느냐, 지옥이 되느냐하는 것은 돈이나 명예나 권세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의식주 문제는 해결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천국을 이루는데 필수적인 조건이 아닙니다. 의식주문제가 해결되면 그 다음에는 우리가 어떤 마음과 삶의 자세를 가지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가족들이 하나님을 섬기며 사랑하고 귀히 여기고 아끼며 살아가면 거기 가정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누릴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닙니다. 안 그래요? 의식주 문제 해결되었지요, 마음껏 예배드릴 수 있지요, 자유와 평화를 누리고 있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지 못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떤 분들은 그저 죽어라고 공부하고 일해서 돈 많이 벌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행복해 지는 것으로 압니다. 물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일도 열심히 하고 기왕이면 돈도 많이 벌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일날은 하나님의 거룩한 존전에 모여서 열심히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현실이 아무리 팍팍해도 가끔은 어떻게든 짬을 내어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도 가져야 합니다.

무슨 배부른 소리냐고 하실지 모르지만 여러분,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열심히 일해서 돈 버는 시간 보다 더 중요한 시간입니다. 안 그래요? 왜 공부하고 왜 열심히 일합니까? 행복하기 위해서 아닙니까?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사랑과 은혜와 기쁨을 나누는 시간도 갖지 못하고 죽도록 돈만 번다면 그게 뭡니까? 어떤 분은 그러고 싶지만 돈도 없고 시간도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일하고 남는 시간으로 가족하고 함께 시간을 갖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도 좀 쉬면서 사랑하는 가족과의 교제를 통하여 가정 천국을 만들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요즘 같이 정말 바쁠 때는 그럴 수 없겠지요. 그러나 농촌이라고 일년 365일 계속 눈코 뜰새 없이 바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또 그럴 돈이 어디있느냐고 하실지 모르지만 돈 별로 안 듭니다.

죄송하지만 저는 저 양반하고 한 달에 한 두번은 바람 쐬러 갑니다. 여러분, 죄송하지만 제가 재주가 꽤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회사 다닐 때에는 서예 사진 바둑 탁구 낚시도 하고 글도 좀 써본다고 써봤고 여러 가지 취미생활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목회를 시작 한 후 돈이고 취미생활이고 심지어 운동까지 몽땅 다 버렸다가 몇 년 전부터 너무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서 지금은 운동도 조금씩하고 한 달에 한 두 번은 아내와 함께 바람도 쐴 겸 사진을 찍으러 갑니다. 우리는 어디 갈 때 사먹는 거 일절 없습니다. 김밥이나 주먹밥 싸고 물과 과일 몇 개 가지고 카메라 들고 나가면 돈 몇푼 안 들이고 몸과 마음이 힐링이 됩니다.

그러면 또 어떤 사람들은 기도하면 다 힐링되지 그런 게 뭐 필요하냐고 하실지 모르지만 죄송하지만 그건 무지한 말입니다. 인간은 영과 육과 혼의 전인적인 존재이므로 영적 육체적 정신적 양식을 골고루 섭취해야 하고 동시에 영적 육체적 정신적인 활동도 균형있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전인적으로 균형이 잡히고 건강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물론 일할 때는 열심히 일하고 예배드리는 날은 열심히 예배드리고 동시에 어떻게든 짬을 내어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도 가지면서 여러분에게 주어진 상황과 환경을 잘 다스리며 천국을 만들어 누리는 지혜로운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예수님을 중심에 모셔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의 가정에 천국을 이루고 그것을 누리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일단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하나님을 가정의 중심에 모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극히 당연한 말씀이잖아요. 안 그래요? 천지만물의 창조주로서 모든 생명과 기쁨과 자유와 평강과 위로의 근원이신 하나님 없이 어찌 천국이 이루어지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모든 생명과 평강과 기쁨과 위로의 근원이신데 하나님이 없는 곳에 어찌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평안과 안식이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이것도 제가 누누이 드린 말씀이지만 요15:11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보십시오.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시고 구원해주시고 말씀을 주시며 그 말씀 안에서 살아가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고.... 즉 우리를 억압하고 힘들게 하려고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자유와 평안을 마음껏 누리게 하려고 주님이 오셨고 말씀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평안을 온전히 그리고 영원히 누리려면 오직 예수님은 우리 심령과 가정 속에 온전히 모셔야 합니다. 그래야 죄와 무지와 사탄과 지옥을 비롯한 모든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고 영적 육체적 물질적 정신적으로 전인적인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주님을 심령 속에 온전히 모셔들이면 주님의 능력과 인도하심으로 모든 상황과 환경과 조건을 초월해서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물론 이 기쁨만이 영원한 천국으로까지 이어지는 영원한 기쁨입니다. 이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참되고 영원하고 온전한 기쁨인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에이, 목사님.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도 행복하게 잘만 살던데요.’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가짜 행복이요, 위장된 행복입니다. 마치 마약에 취하고, 술에 취한 자가 누리는 평안이나 기쁨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마약이나 술에 취하면 어떻게 됩니까? 감각이 무디어집니다. 그래서 근심걱정이나 슬픔이나 고통을 조금쯤은 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치유되어 없어진 게 아니고 마약이나 술로 마취를 시켜 놓은 것입니다. 여러분, 치유하지 않고 마취를 시켜 고통을 없애주는 방법은 언제 쓰는 겁니까? 그건 살 가망이 없는 사람들에게 마지막 순간이라도 좀 고통 없이 지내라고 써 먹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경우라면 마약과 술과 담배로 해결하려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점점 문제가 심각해져 가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마약과 술은 사람의 마음을 마취시켜 죄에 대해서도 무감각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마약에 취하고 술에 취하면 용감하게 되고 부끄러움도 수치심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상방뇨도 하고 음란한 짓도 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왜요? 도덕적 윤리적 감각이 무디어져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기쁨이 바로 그와같은 것입니다. 죄와 무지에 취해서 있어서 감각이 무디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할노릇 다하지 않으면서도 심지어는 악을 행하면서도, 그리고 자신이 가는 길의 끝이 영원한 진노라는 사실도 알지 못한채 희희낙락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없이 누리는 기쁨은 무지한 자아에 속고, 사탄에 속아 잘못 누리고 있는 기쁨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생명과 진리와 기쁨과 평강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심령 속에 모신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압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거룩하고 진실하고 성실하게 서로 사랑하고 격려하고 위로하며 살아가기를 힘쓰게 됩니다. 하나님과 가족과 이웃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참 생명의 기쁨과 위로와 평강과 소망으로 채워 주십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도 참된 기쁨과 평안과 위로를 누리며 살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주님을 우리 심령과 가정 속에 온전히 모셔들이고 살아감으로 주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과 역사하심 가운데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넘쳐나는 복된 가정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부부가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가정천국을 이루기 위해 두 번째 생각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남녀가 만나 가정을 이루고,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고 위해주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창2:24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여러분, 이 말씀은 명령입니다. 사람이 장성하면 반드시 남녀가 만나 가정을 이루고, 서로 사랑하고 위로하고 도우면서 자녀를 낳아 양육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이런 명령을 주신 것은 이 말씀을 따라 살아갈 때에 인간의 삶은 가장 아름답고 가장 풍성하고 가장 행복한 상태가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장성하면 반드시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가정을 이루었으면 부부간에는 어떤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뭐 너무 많지만 부부간에 서로를 자신의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33절 보세요.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 여러분, 너무 당연한 일 아닙니까? 부부는 말 그대로 일심동체잖아요. 그러면 내 몸인데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또 부부만큼 소중하고 고마운 존재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부부만큼 늘 가까이하면서 서로 위로해주고 도와주고 아껴주고 하면서 좋은 친구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부부는 그야말로 죽을 때까지 함께하며 인생의 모든 희노애락을 함께하는 가장 가깝고 가장 소중하고 가장 친한 친구가 아닙니까? 그러니 얼마나 서로 사랑해야 하겠습니까?

아마 우리 젊은 부부들은 보셨을지도 모르지만 인터넷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일본의 노부부의 감동적인 사랑이야기가 있어 잠깐 소개합니다. 뭐 영상은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우리 마음을 감동하게 만듭니다. (실명한 아내를 위한 꽃밭.mp4, 유튜브 다운로드 영상) 마지막 부분에 환희 웃으며 다정히 앉아 있는 노부부 보이시지요. 저 할머니가 당뇨로 실명을 하고 우울증에 빠지자 할아버지가 할머니가 밖에 비록 눈으로 보지는 못해도 코로 향기라도 맡고 기분 전환도 하고 또 꽃을 많이 심으면 사람들이 찾아와 할머니의 말벗이라도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꽃을 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10년 이상을 꽃을 심고 가꾸었는데 그러는 동안에 할머니가 점차 밖에 나와 꽃향기를 맡으며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고 또 점점 사람들도 찾아오기 시작하여 지금은 일년에 3,000명 이상이 찾아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친구가 되어주며 즐겁게 해주어 결국 실명한 할머니가 저렇게 밝게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멋있는 할아버지입니까?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그렇다고 아내들은 또 남편한테 당신은 뭐했냐고 하면 곤란하지요. 남편과 아내가 서로가 저런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정말 얼마나 행복하고 아름답고 복된 가정이 되겠습니까? 33절 다시 한번 보실까요?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부부간에 정말로 소중히 여기고 아끼고 사랑하며 서로 위로와 기쁨과 힘이 되어 가정천국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자녀를 말씀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가정이 천국이 되기 위해서는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는 가운데 자녀를 잘 양육해야 합니다. 자녀를 바르게 잘 양육하면 먼저 그 가정이 행복해지고 나아가서는 다음 세대의 가정이 바로 서고, 아름답고 복된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부모들 혹은 기성세대가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대부분의 부모들이 그저 자녀들이 잘 먹고 잘 살게 하는 것에만 몰두할 때가 많습니다. 물론 잘 먹고 잘 살 수 있도록 최대한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잘먹고 잘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도외시 한 채 그저 외적인 풍요로움만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올바른 영성과 인성과 지성을 가지고 위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고, 부모님께 효도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배려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교육을 해야 하는데 그저 남보다 편하게 대접받으며 잘 먹고 잘 살게 하는 일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영성과 인성에 문제가 생기고 자녀자신도 행복하지 못하고, 부모와 자녀 사이에도 문제가 생기고, 더 나아가서는 많은 사회적인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4절의 말씀을 보세요.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무엇으로 양육하라고요? 주의 교양과 훈계로... 즉 그저 맨날 공부해라, 공부해라 하면서 세상 공부만 시키는데 열정을 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힘쓰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내 사랑하는 자녀가 영적, 인격적, 지적으로 올바르게 성장하여 영성과 인성과 지성을 고루 갖춘 올바른 지성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물론 자녀 자신이 행복하고 가정에 평안과 기쁨과 소망이 있고 나아가 이 사회가 아름답고 복된 사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물론 여러분의 자녀들이 잘 먹고 잘 살게 하기 위해서도 열심히 가르치고 기도하고 힘써야 하겠지만 그에 앞서 여러분의 자녀들이 정말 성숙한 신앙인, 성숙한 인격자가 되게 하기 위하여 더욱 힘쓰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세상의 공부만 위하여 투자하지 말고 아이들의 영성과 인성을 길러주는데 더 많은 투자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든 자녀들이 영성과 인성과 지성과 감성을 고루 갖춘 올바른 인격체가 되어 주님도 기쁘시게 해드리고 남에게도 기쁨을 주며 자기도 진정한 인생의 가치와 기쁨과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는 우리의 모든 자녀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5.자녀는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가정천국이 되기 위하여서는 부부 진정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자녀를 사랑과 말씀으로 양육하고, 자녀는 부모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가정은 정말 복된 가정, 아름다운 가정, 천국의 은총을 누리는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6:2,3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약속 있는 첫 계명이란 십계명 중 인간에 대한 계명중 첫 번째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인데 그 계명을 따라 부모님을 바르게 공경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약속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결국 부모님 공경이 첫계명이라는 것은 결국 부모님 공경이 인간 윤리의 기본이며 근간이며 뼈대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인륜의 근본이 되는 부모공경을 잘 실천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을 때의 공경은 마음으로만 하는 공경이 아닙니다. 여기서 부모님을 공경하라는 것은 부모님을 존경하고 존경한다며 그에 합당한 예우를 해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부모님이 평안하게 기뻐하며 살아가실 수 있도록 마음도 평안하게 해드리고, 물질로도 봉양해 드리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부모님들에게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대하여 간곡히 말씀드려 주님을 영접하게 해야 함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이렇게 부모님께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필요한 모든 것으로 봉양해 드릴 때 부모님이 이 땅에서도 평안과 기쁨과 은혜를 누리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효도이고 공경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남녀가 만나 가정을 이루고 부부가 정말 서로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고 아끼고, 또 부모는 자녀를 사랑과 말씀으로 양육하고, 자녀는 부모를 공경할 때에 가정천국이 이루어지고, 그러면 나도 너도 우리 모두가 행복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의 달 오월을 맞이하여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하나님을 가정 속에 온전히 모시고 부부가 정말 서로 사랑하고 부모는 자녀를 말씀과 사랑으로 양육하고 자녀는 부모를 공경하며 가족 간에 함께 하는 시간도 갖으며 가정 천국을 이루어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 물론 지금 여기서 누려야 할 천국의 은총도 마음껏 누리는 복되고 아름답고 멋있는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기 도 ) 거룩하시고 영화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계절을 우리에게 주시고, 그 아름다운 계절만큼이나 아름답고 복된 가정을 우리에게 주심에 감사와 영광을 돌리나이다.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많은 사람들이 가정의 소중함을 인식하지 못하고, 가족구성원들 간에 진정한 사랑과 은혜를 나누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나이다.

주여, 이 땅의 모든 가정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셔들이고 주님의 인도하심과 말씀안에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가족구성원들이 서로의 필요를 채워달라고 요구하기 보다는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는 존재로 살게 하시고, 부모는 자녀를 기도와 사랑과 말씀으로 양육할때에 우리의 모든 자녀들이 영성과 인성과 지성과 감성을 갖춘 성숙한 인격체로 성장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자녀는 부모님의 권위와 사랑과 헌신을 인정하고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을 드려 공경할 줄 아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모든 가정들이 믿음과 사랑이 넘치는 천국을 이루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아름답고 복된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 봉헌기도 ) 영화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이 아름다운 계절, 이 생명력이 넘치는 계절을 우리에게 주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은총을 덧입어 이 생명과 자유와 평화를 마음껏 누리게 하시오니 영광과 존귀를 돌리나이다.

오 주님이시여, 지금 이 시간 우리가 주님의 그 놀라운 사랑과 은총을 기억하며 예물 드리나이다. 주님의 그 은혜와 사랑과 인도하심에 감격하여 믿음으로 예물드리옵나니 드리는 손길 손길 위에 주님의 놀라우신 은총으로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것 거룩히 구별하여 십일조 예물 드리는 손길위에 축복하셔서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육체적으로 더욱 풍성하고 강건한 은총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임을 고백하며 감사예물 드리는 손길에도 복을 주셔서 더욱 감사와 은혜가 가득한 복된 삶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이 예물을 통하여 주님의 생명의 역사가 더욱 힘있게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 축 도 ) 이제는 온전히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셔들이고, 부부간에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며, 부모는 자녀를 사랑과 말씀으로 양육하며, 자녀는 부모를 진심으로 공경하여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총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야 할 우리 모든 성도들과 이 땅위의 모든 가정들 위에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인도 교통 역사 충만케 하시는 은사가 이제로 영원까지 함께 하시옵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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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 주일예배설교  어버이의 사랑(삼하18:31-33)

말씀 : 삼하18:31~33

제목 : 어버이의 사랑

제법 오래전에 부모의 재산을 갈취하고 부모를 해외에 방치한 현대판 고려장 이야기가 방송에 보도된 적이 있습니다. 어떤 부부가 딸만 둘이 있었는데 결혼해서 둘 다 캐나다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부모님에게 캐나다로 와서 함께 살자고 하여 그렇게 하기로 결정을 하고 재산을 다 정리하고 정리한 돈을 캐나다에 있는 큰 딸에게 송금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캐나다 벤쿠버 공항에서 만나기로 하고 비행기를 타고 공항에 도착했는데 아무리 딸을 찾아도 딸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공항에서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가까스로 공항경찰의 도움을 받아 큰 딸이 보내준 주소지를 찾아 가게 되었는데 딸이 적어준 주소지에는 딸은 없고 엉뚱한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다시 둘째 딸이 살고 있다는 주소지를 찾아갔는데 역시 둘째 달 부부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여러 날을 찾았지만 끝내 딸을 찾지 못한 부부는 오갈 데 없는 국제미아가 되었는데 불행 중 다행으로 이러한 사연을 알게 된 한인교회의 도움을 받아 이 노부부는 교회에서 쪽방에서 지내며 교회에서 조금씩 도와주는 돈과 폐지와 깡통 등을 주워 조금씩 버는 돈으로 근근히 생활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가 이 부부만이 아니라 해외에 살면서 늙은 부모를 모시겠다는 말로 부모의 재산만 챙기고 연락을 끊어 버리는 사례가 상당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짐승만도 못한 인간들이 어디 있습니까? 그야말로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을 비롯한 자신의 모든 인생을 다 쏟아 부으며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은 못할망정 노후대책으로 남겨놓은 재산 마져 빼앗아 버리고 자취를 감추어 버리는 이런 파렴치한 인간들이 있다니 이건 정말 같은 인간으로서 그리고 같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얼마나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여러분, 오늘 어버이 주일인데요, 사실은 어버이 주일이 있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서글픈 일인지도 모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평소에 잘하면 이런 날을 만들 필요가 없는데 잘 못하기 때문에 좀 잘해보자는 의미로 무슨 날, 무슨 날을 만든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안 그래요? 평소에 자녀들을 정말 귀하게 여기고 올바르게 양육한다면 어린이날을 굳이 만들 이유가 없지요. 평소에 부모님을 공경하고 바르게 섬기면 어버이날을 만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평소에 가정을 정말 소중히 여기고 가족 간에 진실로 서로 사랑하고 아끼고 그러면 가정의 달을 일부러 만들 이유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하니까 일부러 이런 날들을 만들어서라도 가정생활이나 신앙생활을 잘하며 바르게 아름답고 복되게 살아 보자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 어버이 주일을 지키면서 다시한번 부모님의 은혜를 되새겨보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할 때에 부모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하여 다시한번 되새기며 부모님을 바르게 섬김으로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결국은 자신도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으며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도 풍성하게 받아 누리는 복된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부모는 자식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합니다.

오늘 말씀은 압살롬의 죽음 앞에서 아버지 다윗이 통곡하고 있는 장면인데 이 말씀을 보면 부모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보게 됩니다. 다윗에게는 여러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압살롬은 제일 잘생기고 영리하고 용기 있는 아들입니다. 그런데 압살롬은 왕이 되려는 야욕에 사로잡혀 눈이 뒤집혀 아버지를 쫓아내고 왕이 되기 위하여 4년 동안 몰래 군대를 훈련시키며, 사람들의 마음을 훔쳐 민심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반란을 일으켜 예루살렘으로 입성을 하게 되는데 다윗은 이미 민심이 압살롬에게 돌아간 것을 알고 급히 예루살렘에서 도망가게 됩니다. 그러나 압살롬은 후환을 없애고 왕의 자리를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 아버지를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계속 아버지를 추격합니다. 세상에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되려고 하다니 이런 짐승보다 못한 인간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사필귀정이라고 했던가요? 결국 이 싸움에서 압살롬은 다윗의 군대 장관 요압에게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전쟁은 다윗의 승리로 끝나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전쟁에서 승리한 다윗은 어떻게 합니까? 반역자의 우두머리를 죽이고 전쟁에서 승리했으면 큰 잔치를 베풀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사람들에게 포상도 하고 치하도 하면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그럴 수가 없었죠. 왜냐하면 비록 자신을 죽이고 왕이 되려했던 천하의 몹쓸 자식이었지만 아들 압살롬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몹쓸 자식 압살롬의 죽음 앞에서 대성통곡을 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말씀인 것입니다. 33절 같이 읽겠습니다.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여러분, 다윗은 지금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하면서 목놓아 울고 있는데 이 자식이 어떤 자식입니까?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되려 했던 천하에 불효막심하기 짝이 없는 몹쓸 놈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자식의 죽음 앞에서 차라리 자신이 대신 죽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대성통곡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인 것입니다. 아무리 패역부도한 자식이라도 그래도 내 몸에서 나온 내 핏줄이요, 내 분신이기에 자신을 죽이고 왕이 되려했던 천하의 나쁜 자식의 죽음 앞에서 이렇게 목 놓아 울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생명을 가지고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먼저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때문이요 동시에 바로 이러한 부모님의 사랑과 은혜 때문인 것이지요. 자신은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해도 자식만은 어떻게든 잘먹고 잘살게 해주려고 그야말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부모님들 덕분에 오늘의 우리가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하나님의 사랑과 부모님의 사랑을 잊으면 안 되는 거지요. 이걸 잊는다면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공경하고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해야 할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우선적인 의무이며 도리이며 책임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과 부모님의 그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과 부모님을 진심으로 공경하며 살아감으로 하나님과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그렇게 인간의 도리를 다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하나님의 은총도 충만하게 받아 누리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부모는 자식의 불행을 자기 탓으로 여깁니다.

여러분,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한이 없어서 자식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주고도 늘 부족하게 여기며 그래서 혹시 자식이 뭔가 잘못 되기라도 하면 마치 모든 것이 자기 탓인 것 같아 마음 아파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다윗도 역시 그랬습니다. 그는 압살롬이 그렇게 못된 자식이 된 것이 모두 자기 탓인 것만 같아 더욱 마음이 아팠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다윗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일생일대에 지울 수 없는 너무나 커다란 과오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죄를 은폐하려고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고의로 죽게 만듭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통해 책망하십니다. 그러자 다윗은 불행 중 다행으로 나단 선지자의 말을 듣고 참회를 하게 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비록 용서는 받지만 그 심각한 범죄에 대한 징계까지 면제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즉 그를 용서하셔서 왕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지위는 유지하게 하시되 범죄에 대한 징계는 가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삼하12:10절에서는 말씀합니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다윗의 범죄로 말미암아 다윗의 집 안에서 혈육간의 죽고 죽이는 비참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 말씀대로 큰 아들 암논이 압살롬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고 압살롬이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되려다가 도리어 자기가 죽임을 당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압살롬의 이런 패륜아적 행동이 자신의 범죄의 결과라고 여기고 자신의 범죄로 인하여 가정에 이런 불행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며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 도무지 견딜 수 없는 아픔으로 통곡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부모도 물론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심지어는 죄 가운데 빠질 때도 많습니다. 자식이나 배우자에게 잘못할 때도 많습니다. 그래서 후회할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자식이 뭔가 좀 힘들어지고 잘못되고 엉뚱한 길로 가고 하면 다 나의 부족함과 무지와 허물과 죄 때문인 것 같아 마음이 미어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자식은 설령 부모님이 부족하고 자식에게 잘못 할 때가 있다해도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부모는 아무리 부족하고 허물이 많아도 심지어 죄가운데 빠질때도 있고 혹시 자식에게 해준 것이 없어도 그래도 자식에게 만큼은 공경 받고 섬김 받을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잘 났건 못났건, 인품이 훌륭하든 훌륭하지 못하든, 사회적 지위가 있든 없든 부모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시오, 부족한 것이 많지만 그래도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며 우리를 양육해 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부모인가와 관계없이 무조건 공경하고 섬겨야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이 귀한 생명을 주신 것만해도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또 비록 부족한 것이 많았다 할지라도 그래도 주어진 환경과 상황속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받쳐 희생하며 우리를 양육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혹시 부모님이 부족한 것이 많아도, 혹 많은 것을 해주지 못했어도 생명주시고 이제껏 양육해 주신 그 한가지만으로라도 감사하며 공경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결국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부모는 자식을 자신의 생명보다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렇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자기 생명보다 사랑합니다. 그래서 압살롬의 반란 사건이 진행되어 가는 과정을 보면 다윗의 관심은 온통 자기 아들 압살롬을 향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군대장관 요압에게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해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러나 요압이 이 말을 무시하고 압살롬을 죽이고 다윗의 군대가 승리하게 전령이 와서 승전보를 전합니다.

그러나 이때도 다윗의 관심의 초점은 전쟁에서의 승리보다는 압살롬의 안위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승전보를 전하러 온 사람에게 제밀 먼저 묻습니다. 오늘 32절 상반절을 보겠습니다. “왕이 구스 사람에게 묻되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구스 사람은 승전보를 가지고 온 사람인데 다윗은 그에게 다른 어떤 것도 묻지 않고 압살롬의 안부를 먼저 묻고 있는 것입니다. 천하의 몹쓸 불효자식이었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몸에 나온 자기 생명과 같은 존재요, 자신의 분신과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만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면서 목놓아 울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자기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어버이의 사랑과 은혜로 지금까지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사회의 풍조를 보면 안타깝게도 부모님께 대해 소홀히 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이런 설교를 하는 저도 사실 부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저도 돌아보면 자녀에게나 아내에게나 부모님께나 부족한 것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저의 아버님은 20여년 전에 하나님 품으로 가시고 어머니는 올해 88세이신데 사실 저희 어머니는 그런대로 노년을 평안하게 지내고 계신 편입니다. 형님 내외분과 살고 계신데 형님 내외분도 살만 하시고 특히 제 둘째 여동생이 남편은 읍장이고 자기는 건강보험공단 차장으로 있어 살만하여 어머니께 용돈도 많이 드리고 딸 들 다섯이 가까운 거리에 살고 있어서 자주 찾아뵈며 잘해 드려서 저의 어머님은 노년을 평안하게 보내시고 있는 편입니다.

그러나 저는 너무 멀리 있고 경제적으로도 넉넉하지 못하다는 핑계로, 그리고 어머님이 별다른 걱정 없이 잘 지내고 계시다는 이유로 자주 찾아 뵙지도 못하고 용돈도 제대로 드리지 못해서 늘 죄송한 마음입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저를 볼 때마다 내가 바보 같아서 아무 것도 못해 주어서 미안하다고 말씀하시니까 더 죄송한 마음 뿐입니다.

물론 저의 부모님 뿐 아니라 모든 부모들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자식을 자기 목숨처럼 사랑하며 자식에게 좀 더 잘해주지 못하고 많은 것을 주지 못한 것에 대하여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니 자식들은 이러한 부모님의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며 잘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에 이러한 당연한 가치관이 자꾸 퇴색해져 가는 것 같아 참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부모님들이 자식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하고, 어른을 어른으로 대접해 드리지 않을 때가 너무 많습니다. 선거 때에 보면 어떤 돼먹지 못한 젊은이들이 무식한 꼰데들 때문에 나라가 제대로 안된다며 선거하지 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4년전 국회의원 선거 때는 이름을 대면 다 알만한 작자가 꼰데들은 방해만 되니까 투표하지 말라고 말했다가 된통 혼이 난적도 있습니다.

여러분, 저는 안 늙습니까? 제 혼자 태어나서 제 혼자 잘나서 제 혼자 공부하고 제 혼자 잘나서 나라 세웁니까? 모두가 우리 부모와 선조들의 덕분입니다. 물론 근본적으로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인간이 제아무리 뛰고 날아도 하나님이 안 해주시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과 지혜와 힘과 능력과 은혜를 주시고 상황과 환경과 여건과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을 주시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혼자하시지 않고 사람들을 통하여 일하십니다. 우리나라도 우리 부모들의 수고와 헌신과 희생을 통하여 우리가 이만큼 살게 된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존재할 수 있는 것도 또 우리가 이렇게 부족함 없이 살게 된 것도 우리 부모님들이 못 먹고 못 입고 못 자면서 수고하신 덕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 부모님이나 어르신들을 무시하지 말고 공경하고 받들어 모시고 대접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인간의 본분이고 책임이고 의무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부모롤 공경하고 잘 섬기는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축복도 약속하신 것입니다. 출20:12절을 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당연하지 않습니까? 부모님이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신데 그리고 당신의 모든 것을 다바쳐 우리를 양육하셨는데 어찌 공경하지 않겠습니까? 그걸 알고 부모님을 공경하고 사랑하고 섬기며 인간의 본분을 다할 때에 어찌 복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어버이 주일을 보내며 다시 한번 부모님의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며 부모님을 공경하고 섬길 때에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으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충만하게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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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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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설교] 내 아버지 집 (Sunday Sermon)
제 목 : 내 아버지 집

말 씀 : 요2:13-17

 

1.세상에서 가장 귀한 교회

올해 우리교회는 창립55주년을 맞이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곳에 교회를 세워주시고 지난 55년간 인도하시고 역사해 주셔서 오늘의 우리 교회가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비록 사람들 보기에, 심지어 우리 자신이 보기에도 대단하게 보이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숫자는 많지 않지만 그러나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합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므로 한 영혼만 구원해도 천하보다 귀한 일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걸 정말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는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살리고, 진정하고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숫자의 많고 적음을 떠나 너무나 귀한 공동체이고, 우리가 하는 일들은 세상의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귀하고 복되고 아름답고 가치있는 일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먼저 이곳에 이 귀한 교회를 세우시고 지금까지 인도하셔서 생명의 역사를 이루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동시에 오늘 우리 교회가 있기까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헌신적으로 섬겨 주신 모든 분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다같이 박수 한번 칠까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동안 이 귀한 생명의 역사를 위해 함께 기도하고 수고하고 헌신하신 분들도 정말 감사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교회는 너무나 소중한 공동체입니다. 물론 무슨 공공기관이나 기업체나 문화시설이나 체육시설이나 이런 것들이 있는 것도 그런대로 우리에게 유익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제아무리 대단한 시설이 있다해도 귀한 영혼을 살리고, 생명의 양식을 공급하고, 그래서 영원한 천국의 은총은 물론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도 참된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자유와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주는 교회와는 비교가 안되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돈과 명예와 권력이 생명을 줄 수 있습니까? 진정한 평안과 위로와 소망과 참된 자유와 평화를 줍니까? 그렇지 못합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참 행복을 준다면 선진국은 벌써 파라다이스가 이루어졌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과거에 먹을 것도 제대로 없던 시절보다는 백배도 더 행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보다 100배도 더 잘살고 있는데 도리어 과거보다 더 달라고 아우성이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빼앗고 난리를 칩니다.

여러분, 정말 영원히 그리고 지금 여기서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며 참된 행복과 기쁨과 평안과 소망과 위로를 누리려면 그 무엇보다도 먼저 영혼이 거듭나야 합니다. 그래야 인생의 의미와 가치와 목적을 알게 됩니다. 그래야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바르게 사용하고 바르게 누리게 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영원한 천국의 은총은 물론 지금 여기서도 진정한 행복과 기쁨과 자유와 평안을 맛보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그런 일을 하는 곳이고 그래서 교회는 세상의 다른 어떤 공동체와도 비교도 할 수 없이 귀하고 복된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래서 시84:2절에서는 말씀합니다.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보고 싶어 상사병이 난 것처럼 성전 즉 교회를 너무너무 사모한 나머지 그만 상사병이 날 지경이라는 것입니다. 왜요? 거기 하나님이 계시고 말씀과 기도와 찬양이 있고,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 가운데서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가운데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정말 오늘 교회 창립55주년을 맞이하여 다시한번 교회의 소중함을 기억하며 교회를 사랑하고 귀하게 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직 교회를 통해서만 생명을 얻고 풍성하게 누리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며 교회를 가까이 하며 말씀과 기도와 찬양생활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의 성령의 역사하심과 인도하심 가운데 진정 생명의 은혜와 기쁨과 자유와 평안이 넘쳐나는 복되고 아름답고 귀하고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열심히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공동체로 천하보다 귀한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곳이기 때문에 교회의 일에 열심히 참여해야 합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생명을 살리고 풍요롭게 하는 그야말로 세상에서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귀하고 복된 일인데 어찌 이 귀한 일에 참여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생명의 은총을 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그 온갖 멸시 천대 조롱 핍박 고통 심지어는 십자가의 저주받은 죽음까지 당하심으로 죄사함의 은총을 입어 구원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주님은 이렇게 당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시며 우리를 구원해 주셨는데 그 귀한 생명의 역사에 어찌 열심히 참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오늘 본문에도 보면 주님이 얼마나 교회를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며 열심히 교회를 섬기셨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어느 유월절에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셨는데 유대종교지도자들과 결탁한 자들이 제물을 팔고 로마화폐를 유대화폐로 환전을 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정상적으로 장사를 하는게 아니라 정상가의 두 배는 비싼 값에 팔아 폭리를 취하면서 집에서 가지고 온 제물은 트집을 잡아서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할 수 없이 성전에 와서 비싼 값으로 제물을 사서 드렸습니다. 또한 로마 화폐를 유대화폐로 환전을 해주면서 과도한 수수료를 받으며 폭리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너무너무 화가 나셔서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행동을 하십니다. 오늘 15절을 보겠습니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세요. 그 온유하시고 사랑과 자비와 긍휼과 은혜가 풍성하신 주님이 오죽하면 채찍을 휘두르시고, 상을 둘러엎고, 돈을 쏟아버리시기까지 했겠습니까?

왜 그랬습니까? 그 이유는 16절 말씀에 있습니다.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즉 성전은 하나님의 집으로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그래서 말씀과 찬양과 기도가 있고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곳인데 장사꾼의 소굴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특별히 기억할 것은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무소부재 하셔서 우주공간 어디에나 계십니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구별하여 세우신 공동체로 특별하게 임재하셔서 은혜를 주시는 곳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섬김과 은혜가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곳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교회를 정말 소중히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가까이 하며 섬김으로 먼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며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를 힘있게 이루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에 사람들이 자꾸만 개인주의와 편의주의와 이기주의에 빠져 교회를 소중하게 여기지도 않고, 가까이 하지도 않고 적당히 그냥 자기 편한대로 종교생활하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섬기는 일에 열심을 내지 않고, 심지어 주일날도 시간 되면 나오고 바쁘면 안 나오고, 심지어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교회에 나오지 않고 혼자 하나님 믿으며 살겠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와같이 어리석은 생각이 없습니다. 여러분, 영어공부하지 않고 영어잘하는 방법이 있습니까? 일하지 않고 잘 먹고 잘사는 방법 있습니까? 열심히 피아노를 치지 않고 피아노를 잘 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 물론 없습니다. 신앙생활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예배와 말씀과 기도와 찬양을 통하여 우리 영성이 풍성해 진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열심히 모여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헌신과 수고와 섬김을 통해서 하나님의 귀한 생명의 역사가 이루어져 간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열심히 교회를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비판하기 전에 나는 교회가 인정받고 신뢰받는 교회가 되게 하기 위하여 얼마나 기도하고 힘쓰며 거룩한 삶을 살아왔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선은 나 자신이 생명의 은혜가 넘쳐나고 교회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으며 주님의 역사를 힘차게 이루어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저와 여러분이 오늘 교회 창립55주년을 맞이하여 교회의 소중함을 재인식하면서 우리 다같이 한마음으로 감사와 기쁨으로 교회의 행하는 모든 일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배는 물론 지역사회를 섬기는 일이나 전도하는 일에 적극 참여하며 또한 각자 삶의 자리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감으로 주님의 향기가 되는 삶을 살아갈 때에 우리 자신이 먼저 생명의 은혜와 기쁨이 넘쳐나고 우리가 교회가 주님의 역사를 힘있게 이루어 가게 되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교회의 기본에 충실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교회는 이렇게 소중한 곳으로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생명의 역사를 힘있게 이루어가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의 기본사명에 충실해야 합니다. 제아무리 프로그램과 시스템과 외적인 조건들이 좋아도 기본에 충실하지 않으면 기초 없는 빌딩과 같고 모래위에 세운 집과 같아서 바람이 불고 홍수가 나면 넘어져 버리고 맙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기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배와 말씀과 기도와 찬양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신앙을 지키고 풍성하게 하며 교회가 힘있게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갈 수 있는 기초이며 근본이며 핵심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통하여 생명력을 공급받습니까? 말할 것도 없이 예배와 말씀과 기도와 찬양을 통해서입니다.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과 신령한 교제가 이루어지고 그러면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과 사랑과 은혜와 능력과 지혜를 덧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생명의 은혜가 넘쳐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당연하잖아요? 우리 육신이 튼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영양가 있는 음식을 잘 먹고 운동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지적 문화적 수준이 높아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책도 읽고 공부도 하고 문화생활도 해야 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며 하나님과 교통해야 합니다. 그래야 영혼이 살이 찌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와 말씀과 기도와 찬양을 소홀히 하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뜻도 제대로 모르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지혜를 충만하게 덧입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 결국 그저 자신의 가치관과 생각과 세상의 풍조대로 끌려 다니게 됩니다. 그러면 더욱 하나님과 멀어지고, 그러면 그럴수록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4:23절에서는 말씀합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보십시오.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하였습니다. 왜요? 예배가 신앙의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말씀을 듣고 찬양하고 은혜를 덧입는 가장 기본적인 신앙의 행위이고 은혜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가장 기본적으로 예배와 말씀과 기도와 찬양생활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게 여러분의 신앙과 교회를 지키는 기초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덧입는 비결입니다. 그게 더욱 풍성한 영적 생명력과 더욱 온전한 분별력을 갖는 지름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기본에 더욱 충실하여 주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덧입어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고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우리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편의주의를 경계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 교회를 아름답게 세워가며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려면 그저 육신의 눈으로 보기에 좋은대로 당장 편하고 즐겁고 좋은 것만을 따라가려는 편의주의를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래 죄와 무지 가운데 있어서 이러한 편의주의에 빠지면 결국은 믿음이나 선이나 진리나 의 등의 본질적인 것을 버리고 당장 눈에 보기에 좋은 것들을 따라감으로 결국은 생명의 길을 떠나 죽음의 길로 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성전에서 제물을 팔기 시작한 것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월절과 오순절, 장막절에는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와서 제물을 드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멀리서 오는 사람은 200리도 넘는 길을 와야 했기 때문에 그 먼길을 제물을 가지고 오려면 불편하니까 그들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하여 성전에 사서 드리도록 했던 것입니다. 환전도 마찬가지지요. 로마의 화폐는 드릴 수가 없어 유대화폐인 세겔로 드려야 하는데 돈을 바꾸기 위하여 일부러 다른 곳을 찾아가지 않고 성전에 오면 바로 바꿀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성전에서 환전을 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서 시작했던 일이 나중에는 변질되어 기득권자들의 치부수단으로 전락하고, 결국 성전을 도둑놈의 소굴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교회가 편의만을 추구하다보면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편한 것, 재미있는 것, 육체적 물질적으로 유익한 것, 간편한 것, 현실적인 필요만을 생각하다보면 상황논리에 빠지고 현실과 타협하면서 결국에는 알맹이도 생명도 없는 껍데기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서양교회가 그렇게 되고 있는 것입니다. 저녁 예배가 오후 예배로 바뀌고, 나중에는 그것도 귀찮아져서 오후예배를 없앴습니다. 그러다가 일주일에 한번 예배드리는 것도 귀찮아 그냥 집에서 드리거나 주일날 어디 놀러갔다가 잠깐 예배드리고, 그러다가 꼭 예배드려야 믿나? 마음속으로 믿으면 되지. 꼭 기도해야 되나, 기도 안 해도 다 아시는데. 꼭 십일조 드려야 되나? 마음만 드리면 되지? 그러면서 주일성수와 예배와 기도와 헌금생활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교회가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도 이미 그걸 따라가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도 오래지 않아 오후예배와 수요예배와 새벽기도회를 없애자고 할 것입니다. 아니 이미 없앤 교회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꼭 교회에 가야하나? 꼭 주일성수해야 하나? 십입조 드려야 하나? 마음으로 믿으면 되지 그럴 것입니다. 여러분, 이건 사탄이 던져주는 달콤한 미끼입니다. 그걸 물면 마귀에게 낚이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우리 영혼이 죽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롬12:2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무슨 말씀입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죄와 무지 속에서 이기주의와 개인주의와 물질주의와 편의주의에 빠져 만들어 놓은 왜곡된 풍조를 따르지 말고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빛이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기 생명이 있고 기쁨이 있고 자유가 있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올해 창립55주년을 보내면서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교회를 소중히 여기고 이 교회를 세워주신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예배와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교회를 섬기는 더욱 열심을 내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왜곡된 풍조를 따르지 말고 오직 인생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가까이 하며 교회를 섬기고 예배드리고 찬양하는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먼저 여러분이 더욱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우리 교회도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더욱 힘있게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복된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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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 (Sunday Sermon)

제목 :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

말씀 : 엡5:15~18

1.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믿음이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시고 영광스러우시고 거룩하시고 진실하시고 선하시고 은혜로우시고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생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빛이신 유일한 구원자라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한 천국의 은총을 누리고 여기서도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믿음을 가지고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러한 믿음을 가진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는 진정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풍성히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물론 우리가 믿는 그 믿음대로 주님을 믿고 따라가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마음으로 믿는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는다면 그 믿음을 따라 살아야 그 믿음이 진짜 믿음이고 그래야 비로소 그 믿음이 주는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예수님을 믿는다면 당연히 예수님과 동행해야 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빛이라고 믿으면서 그래서 그 안에 생명과 기쁨과 자유와 평안이 있다고 믿는다고 하면서 따라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은혜를 누리겠습니까? 어둠 가운데 있으면서 빛의 은혜를 누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니 그 은혜를 누리고 못 누리고를 떠나서 믿는다고 하며 따라가지 않는다면 그건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야 하고 그러면 분명히 예수님이 주시는 그 무한한 생명의 은총을 마음껏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하면 진정 예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함으로 생명의 은혜가 넘쳐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그건 말하나마나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 받으면 하나님을 믿게 되고 더 나아가서 충만하게 받으면 정말 성령께서 주시는 힘과 능력과 지혜로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며 얼마든지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쳐나는 복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전체를 다시 한번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여러분, 보세요. 너희는 지혜 없는 자같이 하지 말고 지혜있는 자가 되라는 거예요. 왜요? 때가 악해서 그렇다는 거예요. 때가 악해서 뭐 어쨌다는 겁니까? 지혜가 없으면 악하고 왜곡된 세상의 물결에 휩쓸려가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혜 있는 자가 되어 악한 세상의 물결에 휩쓸려가지 말고 올바른 분별력과 힘을 가지고 그걸 물리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성령의 능력과 지혜로 올바른 분별력과 능력을 얻게 되어 주님과 동행하며 세상의 왜곡되고 헛된 것들을 물리치고 진정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성령을 받아야 하고 성령을 받되 충만하게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알고 그래서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자신도 하나님도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고, 죄를 해결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과 동행하지 못하고 죄와 무지가운데서 사망의 음침할 골짜기를 방황할 수 밖에 없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 어두운 영혼이 밝아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알게되고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알게 되고, 인생의 목적과 의미와 방향을 알게 됩니다. 사탄에게서 해방되고, 세상의 죄와 무지와 도전과 유혹으로부터 자유하게 됩니다. 올바른 분별력과 지혜로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며 생명의 은혜가 넘쳐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성령의 받아야 합니다. 받되 한번 받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충만하게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받되 충만하게 받지 못하면 어떻게 근근이 죽지 않을 만큼의 생명을 유지할지는 몰라도 세상에 너무나 만연되어 있는 왜곡된 가치관과 유혹과 도전을 이길만한 영적 능력이 부족하여 세상의 것에 끌려 다니게 되어 생명력이 왕성한 삶을 살아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느라고 다니기는 다니는데 예수님 안에 넘쳐흐르는 그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자유와 평안을 마음껏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정말 어찌 하든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다른 것은 못 받아도 별거 없습니다. 세상의 것 많이 받은 사람이나 적게 받은 사람이나 별 차이 없습니다. 거기서 거깁니다. 그래봤자 죄인이고 그래봤자 다 근심걱정 시기질투 속에 지지고 볶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령충만 받으면 다릅니다. 인생이 바뀝니다. 운명이 바뀝니다. 영생복락은 물론 지금 여기서도 얼마든지 생명의 능력과 은혜가 넘쳐나는 살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진정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어떻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습니까?

여러분,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성령 충만함을 받습니까? 물론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지만 먼저 성령의 임재를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인간은 죄와 무지 가운데 있어서 자연인 그대로는 어떤 생명의 은총도 누릴 수 없고 오직 성령을 받아야 생명의 은혜와 능력 가운데 산다는 것을 인정하고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성령의 역사하심을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야 성령께서 기쁘시게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어 생명의 능력과 은헤와 기쁨과 소망으로 충만하게 채워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누군가를 만나고 싶은데 그 사람이 여러분을 달갑지 않게 여긴다면 갈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설령 억지로 간대해도 반가워하기는커녕 시큰둥하게 여기고 귀찮게 여기면 그 사람과 오래 함께 머물겠습니까? 성령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님을 사모하는 가운데 성령의 오심을 다른 무엇보다 기뻐하고 간절히 기다리는 그 영혼 속에 기쁨으로 찾아 가셔서 거기 계속 머무시면서 큰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107:9절에서는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모하는 영혼 즉 하나님 안에 생명과 기쁨과 위로와 소망이 있음을 믿고 그러기에 그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자에게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성령님과의 만남과 그 안에서 누리게 될 은총을 진실로 사모해야 하는데 그러면 여러분, 우리가 진실로 사모하는 마음으로 성령의 임재를 기다린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말할 것도 없이 말씀과 기도와 찬양 생활에 힘쓰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돈을 사모하는 사람은 어디로 달려갑니까? 돈 냄새가 나는 곳으로 달려갑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어디로 달려갑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곳을 달려갑니다. 오락이나 도박이나 술이나 이런 것에 빠지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곳으로 달려갑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에 거기에 생명이 있고 기쁨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역사하심을 간절히 사모한다면 어디로 달려가겠습니까? 물론 성령이 역사하는 곳으로 달려가게 되겠지요. 그러면 성령이 역사하는 곳이 어디입니까? 말씀과 기도와 찬양이 있는 곳이지요. 그러면 말씀과 기도와 찬양이 있는 곳이 어딥니까? 교회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예배드립시다. 말씀 묵상합시다. 기도합시다. 찬송합시다. 그러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무엇으로 성령의 은총을 덧입을 수 있습니까? 영은 오직 영으로만 통하기 때문에 오직 영이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그리고 말씀 안에서 기도로 대화할 때에 하나님과 우리 영이 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과 기도생활에 힘쓰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믿음을 주시고 힘과 능력과 은혜와 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활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셨고, 제자들은 그 말씀을 따라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열심히 말씀 되새기며 기도할 때에 성령 충만함을 받아 능력 있는 제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행1:14절을 보십시오.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그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주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기도하기에 힘썼던 것입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행2:4절을 봅니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말씀 되새기며 기도에 힘썼을 때 드디어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열흘 만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생명의 능력과 은혜가 넘치는 교회가 되어 놀라운 생명의 역사를 일으켜 나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성령의 은총을 간절히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은총을 사모하신다면 말씀과 기도와 찬양생활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교회를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과 우리 교회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과 평안과 위로가 넘쳐나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왜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까?

여러분, 그러면 왜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까? 물론 앞에서 이미 상당부분 언급이 되었습니다만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않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는 성령을 받아야 하나님을 알게 되고 인생을 알게 되고 그래서 주님을 믿고 거듭나 새 생명을 얻음으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에 성령의 역사하심과 인도하심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모든 죄와 유혹과 도전과 상황과 환경을 이기고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의의 길로 잘 달려가 여기서도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과 평안을 누리며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다른 것은 못 받아도 성령은 받아야 합니다. 받되 충만하게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죄와 무지 가운데 있던 옛자아가 죽고 영혼이 소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죄와 무지 속에 가지고 있던 인생의 목적과 방향과 의미는 사라지고 주님이 주시는 새롭고 올바르고 살아있는 인생관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그야말로 천국시민이 됨으로 거듭나고 가치관과 목적과 방향이 달라지니 거듭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야말로 새로운 인생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전에는 알든 알지 못하든 사탄의 지배 속에서 사탄의 조종을 받으며 내 마음대로 내 생각대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죄되고 왜곡된 가치관을 따라 살며 그게 인생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건 죄와 무지 속에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방황하는 인생에 불과한 것입니다. 스스로는 다 똑똑하고 잘나고 세상에 모르는 것 하나 없는 것처럼 여기며 살아왔지만 그러나 실상은 죄와 무지 가운데 살아가는 무지몽매한 인생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완전히 새로운 삶이 전개됩니다. 이제는 내가 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나를 지배하게 됩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세상에 지배당하고 세상에 취하여 세상 사람들이 살아 가는대로 살아갔는데 이제는 성령에 취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게 됩니다. 물론 성령은 생명의 영, 은혜의 영, 거룩한 영, 진리의 영이기시 때문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면 생명의 풍성한 은혜과 기쁨과 능력을 평안과 위로와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삶의 모습을 보면 흡사 술에 취한 사람과 비슷합니다. 물론 결과는 반대지만 원리적으로 보면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술 취하면 어떻게 됩니까? 내 몸과 마음을 술이 지배해버립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내 마음대로 잘 안됩니다. 그래서 이리 비틀 저리 비틀 거리다가 넘어지고 쓰러지고 자빠집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술이 내 마음을 지배해 버리니까 평소에 안하던 짓을 하게 됩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시비를 걸고 싸우기도 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노상방뇨도 하고, 음행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술이 나를 지배해 버려 제정신이 아니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령에 취해도 그렇습니다. 물론 술은 영적 육체적 마음적 감각을 둔하게 만들어 부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가지만 성령은 진리의 영, 선한 영, 은혜의 영, 의의 영이시므로 우리의 영혼이 살아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지혜와 분별력과 능력을 주십니다. 그래서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의의 길로 달려가며 주께 영광을 돌리는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능력을 주셔서 어렵고 힘든 일도 이기게 하십니다. 상황과 환경도 이기게 하십니다. 심지어 환난과 핍박과 죽음까지도 이기게 마침내 완전한 승리자가 되게 하십니다.

또 여러분, 술에 취하면 술이 내 정신 줄을 제 맘대로 조종하여 평소에는 못하던 이야기도 거리낌 없이 하고, 추하고 더러운 말도 서슴없이 하게 되고,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하곤해서 사람을 질려버리게 만들기도 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도 그렇습니다. 물론 술에 취하면 쓸데없고 추한 말이 많아지지만 성령에 취하면 생명과 기쁨과 은혜와 평안을 주는 말이 많아집니다. 말씀 읽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전도하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소망을 주느라고 말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또 여러분, 술에 취하면 감각이 무뎌져서 근심걱정을 조금쯤은 잊어버려 약간은 평안함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물론 이건 진짜 평안이 아닙니다. 잠시 약간의 정신적인 마취를 시켜 놓은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취가 풀리면 즉 술에서 깨어나면 더 괴롭고 후회스럽고 수치감만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에 취하면 생명과 평강과 소망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 영혼과 마음을 근본적으로 치유해 주십니다. 그래서 세상의 근심 걱정이나 상황과 환경을 이기고 진정으로 평강과 위로와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영광의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인하여 더욱 모든 상황과 환경을 이기고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은혜와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고 생명의 풍성한 은혜가 넘쳐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요즘에 보면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성령에 취해 있지 않고 돈과 명예와 안일함과 물질주의와 이기주의와 세상 즐거움에 취해 있습니다. 심지어는 술과 마약과 향락과 도박에 취해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믿음의 사람들조차도 세상에 취해서 헌신과 봉사와 충성과 이런 거룩한 귀하고 복된 가치들을 고색창연한 옛말로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일성수하지 않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도 하고, 술을 마셔도 아무 상관없는 것처럼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18절에서 술 취한 것을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방탕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잠23:31~33절을 보십시오.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 그것이 마침내 뱀 같이 물 것이요 독사 같이 쏠 것이며 / 또 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요 네 마음은 구부러진 말을 할 것이며...” 여러분, 그래도 마셔도 된다고 하시겠습니까? 그러면 이 말씀들은 도대체 뭡니까?

여러분, 롬12:1,2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여러분, 보세요. 우리 몸을 거룩한 산제물로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술 먹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하겠습니까? 그게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삶이겠습니까?

여러분, 바로 그래서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바르게 분별하게 됩니다. 그래야 이 왜곡된 세대를 본받지 않고 주님을 본받게 됩니다. 그래야 우리 몸이 거룩한 산제물이 되고 그래야 거룩하고 복되고 아름답고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성령강림절기를 보내면서 더욱 깨어 기도하며 말씀 묵상함으로 성령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정말 이 세대의 왜곡된 풍조에 휩쓸려가지 말고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분명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거룩하고 복되고 아름답고 귀한 사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고 귀하게 쓰임 받는 복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꼭 이런 삶이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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