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금요철야설교]  지키기보다 누려라 August. Friday Night Sermon

지키기보다 누려라

본문 / 요한복음 5:1~18

 

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11.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하니
12. 그들이 묻되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13.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1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8.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본문의 내용은 우리가 잘 아는 내용입니다. 유대인의 명절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본문 1절에 보면, ‘유대인의 명절’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명절이지만, 베데스다 못가에는 수많은 병자들이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명절과 대조되는 장면입니다.
명절에는 잔치가 벌어집니다. 그런데 본문의 카메라는 베데스다 못가를 비추고 있습니다. 베데스다 못가에는 수많은 병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38년 된 병자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데스다 못가는 병자들의 신음소리로 가득했습니다.

본문 3절에 보면, “그 안에 많은 병자”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한 번 상상해보세요. 연못이 있는데, 연못가에 많은 병자들이 누워있습니다. 다리 저는 사람도 있고,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의 신음 소리가 들립니다. 그들은 중증 환자였습니다.

본문 3절에 보면, 이 사람들이 누워서 물의 움직임을 기다렸다고 했습니다. 병이 낫기를 바라며 베데스다 못가에 모여서 신음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세상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세상을 보면, 성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병이 낫기를 바라며 어디론가 갑니다.

본문의 베데스다 못가의 모습은 오늘날 교회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옵니다.
문제가 전혀 없고, 기도제목도 없는데, 갈 곳이 없어 교회에 오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보따리를 풀어놓으면, 기막힌 일들이 많이 나올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물이 움직일 때, 가장 먼저 물속에 들어가는 사람이 병이 낫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는 설(說)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물이 아주 가끔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물이 움직이더라도 물이 움직일 때에 먼저 들어가는 한 사람만 낫는다는 것이 심각한 일입니다.
물이 움직일 때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모두 낫는다면 좋겠는데, 물이 움직일 때에 먼저 들어가는 한 사람만 낫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은 아주 가끔 움직였습니다.

실제로 물이 움직일 때, 베데스다 못가에는 야단법석이 날 것입니다. 정해진 시간이 물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언제 물이 움직일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힘든데, 다른 사람에게 먼저 들어가라고 양보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물속으로 들어가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데스다 못가는 치유의 장소가 아니고, 절망의 장소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끙끙 앓고 있는데, 물이 움직일 때에 먼저 들어가는 한 명만 낫는 그 곳을 소망의 장소라고 할 수 있습니까. 회복의 장소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 곳은 절망의 자리입니다.
먼저 들어갔다가 나온 사람은 자칫하면 사람들에게 맞아죽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곳은 축복의 장소가 아닙니다.
게다가 가끔 물이 움직인다는 것이 더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모두 사실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습니다.

수많은 환자들이 병원에 찾아갔는데, 그 병원에 간 환자들은 가끔 낫는다면, 그곳을 병원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곳은 병원이 아닙니다. 사람을 죽이는 곳입니다.
지금 이곳에 수천 명의 사람이 모여 있습니다. 이곳에 있는 사람 중 단 한 사람만 기도응답을 받는다면, 이곳을 은혜의 자리라고 할 수 있을까요. 강단이 움직일 때에 앞으로 뛰어오는 한 사람만 병이 낫는다면, 뒷자리에 앉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베데스다 못가는 소망의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축복의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은혜의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물이 가끔 움직일 때에 물속에 들어가면 낫는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못가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촉각(觸角)을 곤두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민해져있었습니다. 한 사람을 죽여야 자신이 살 수 있습니다.

본문의 베데스다 못가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것 때문에 서로 싸웁니다.
언제 물이 움직일지 알 수 없고, 물이 움직인다고 해도 죽을힘을 다해 달려가는 것조차 힘듭니다. 죽을힘을 다해 달려갔는데, 다른 사람이 먼저 들어가 버립니다.

본문에 나오는 병자는 38년 된 병자였습니다. 그가 베데스다 못가에 몇 년 동안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만일 이 사람이 38세라면 태어나서부터 이때까지 병을 앓은 것입니다. 병이 오래되어도 너무 오래되었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베데스다 못가에 누워있다는 것은 희망이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끔 물이 움직이고, 기적이 희귀한 것 역시 절망의 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끔 물이 움직이고, 물이 움직일 때에 물속에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만 병이 낫는다는 것은 절망의 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희망이 없습니다. 이미 결론이 나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주님께서는 베데스다 못가에 있는 38년 된 병자를 찾아오셔서 그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누워있는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셨습니다.

주님은 자주 질문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질문이 많이 나옵니다. 창세기에서부터 하나님은 질문하십니다.
디베랴 바닷가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질문하셨습니다(요 21:16).

주님께서 왜 물으셨습니까?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38년 동안 누워있었던 병자에게 질문하셨습니다.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회복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절망을 많이 경험하고 살면, 정신세계가 무너집니다. 일평생 실패를 경험한 사람은 내면세계가 완전히 무너져있습니다.
한 번 실패한 것이 아니라, 서른여덟 번 실패했다고 생각해보세요. 실패를 너무 많이 경험하면, 기도할 수 없습니다. 기도가 나오지 않습니다. 소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초기 감기로 병원에 간 사람에게 의사가 “살기 원하십니까?”라고 묻는다면, 그 의사는 제정신이 아닙니다. 그렇게 물을 수 없습니다. 가벼운 병을 앓는 환자에게는 낫기를 원하는지 묻지 않습니다. 질문할 필요도 없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는 이 질문은 소망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38년 된 병자는 감기 환자가 아닙니다. 죽음의 끝에서 모든 것을 포기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믿음은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로마서 10장 10절에 보면,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먼저, 마음에서 믿음이 일어나야 합니다. 마음에 일어난 것을 입으로 선포해야 합니다. 드러내야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믿음이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입술로 믿음을 선포하셔야 합니다. 마음으로 믿은 것을 입으로 선포하셔야 합니다. 마음으로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38년 된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질문하신 의도는 분명합니다. 그의 안에 믿음을 일으켜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질문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낫게 하실 수 있는 분이 질문하셨습니다. 능력이 없는 사람은 그렇게 질문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질문하시고, 주님은 답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생의 모든 질문에 답하십니다.
주님께서 질문하시고, 주님께서 답도 가지고 계십니다. 질문을 잘 들으면, 질문 속에 답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는 주님의 질문에 38년 된 병자는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무도 그를 못에 넣어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스스로는 나을 수 없는 한계를 가진 인간이라는 의미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은 낫고 싶은데, 실제 상황은 거리가 멀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의 대답 속에는 그의 갈망이 있습니다. 그는 살고 싶은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 보였습니다. 그는 38년 동안 누워있었지만, 여전히 기대하고 갈망했습니다.

우리는 쉽게 포기해버리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너무 쉽게 포기해버립니다. 너무 빨리 결론내립니다.
1년 동안 기도하고 지쳐버립니다. 너무 힘들어합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습니다. 희망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1년 동안 기도하고 결론을 내리면 됩니까?

본문에 나오는, 38년 된 병자는 살아야 한다는 의지가 있었습니다. 의지가 중요합니다. 살 수 있다는 믿음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의지를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믿음의 의지를 가진 사람에게 역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38년 된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실낱같이 작은 믿음이라도 갖고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대단한 믿음이 아니라도 괜찮습니다. 아주 작은 믿음만 가지고 있어도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주님께서는 대단한 믿음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믿음이 아주 작다 해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반응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38년 된 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병자는 즉시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었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상징적인 기적이 여러 번 나옵니다. 기적은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낫는, 본문의 이야기 안에는 놀라운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베데스다 못에서의 치유는 물이 움직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풍문(風聞)이었고 전설이었습니다. 왜 병이 나았는지도 모릅니다. 가끔 기적이 일어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못 가에 모여 있었을 것입니다.
불교에서도 기적이 일어납니다. 타종교에서도 신비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아기를 낳지 못했는데, 절에서 기도하여 아기를 낳은 경우도 있습니다.

못의 물이 움직인 후에 물에 먼저 들어간 자가 낫는다 해도, 물이 움직인 후에 물에 먼저 들어가는 것은 참으로 냉혹한 일입니다.
물이 움직인 후에 물에 먼저 들어가는 것은 가장 성한 사람이라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절실한 중환자가 물에 들어가기 전에 경증 환자가 물에 먼저 들어가게 됩니다. 거기에는 인간애가 없습니다. 정말 나아야 하는, 중환자는 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베데스다, 그곳에는 희망이 하나도 없습니다. 언제인지도 모르게 가끔 물이 움직일 때에 물에 먼저 들어가는 한 사람 외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곳에 찾아오셨습니다. 베데스다의 기적에서 핵심은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명절의 주인공은 그리스도이셨습니다. 명절을 명절답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않으셨다면, 명절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이 자리에 오신다면, 이곳이 명절이 될 것입니다. 축제가 될 것입니다. 잔치가 벌어질 것입니다. 기적의 주인공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들려오는 잡다한 소리에 귀 기울이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그곳으로 가보세요. 그곳에 가면, 희망이 있을 것 같지만, 오히려 더 좌절할 뿐입니다. 우리의 희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기적은 단순한 기적에 불과합니다. 세상에서도 기적이 일어납니다. 기적이 기적으로 끝난다면, 그 기적은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기적이 일어나 병이 나았다 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죽습니다. 생명이 조금 연장되었을 뿐입니다. 그런 기적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별 일이 일어난다 해도,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않으면, 하나의 해프닝(happening)에 불과합니다.

베데스다 못 가에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이야기가 반전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입니다.
38년 된 병자를 못에 넣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모두 자신이 살려고 베데스다 못 가에 왔습니다. 그곳에는 자비가 없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를 도우실 이는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너무 기대하지 마세요. 기대한 만큼 상처를 입을 수 있습니다. 목회자도 믿지 마세요.
막연하게 상황만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물이 가끔 동하는 것에 자신의 운명을 걸어서야 되겠습니까.
상황은 조작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만들 수도 있습니다. 대중의 여론을 따라가고, 세상의 이론을 따라갈 수도 있습니다. 거기에 가면 산다고, 거기에 가야 희망이 있다고 합니다.
거기에 가야 희망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을 만나야 희망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려주십니다. 예수님께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십니다.
교회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목사가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메시아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것입니다. 베데스다 못의 물이 움직여도 그를 물속에 넣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시고, 예수 그리스도만 붙드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는 주님의 질문에 대한 답은 주님께 있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는 주님의 질문은 “네가 나음을 입는 것이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다고 생각한다면, 인생이 헤매게 됩니다. 숱한 날 동안 의미 없이 반복하며 보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않으시면, 세월이 많이 흘러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물속에 들어갈 필요도 없습니다. 물이 움직일 때를 기다릴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주님께서 오시면 됩니다.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이상한 기적을 믿지 마세요.

38년 된 병자가 낫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우리는 여기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본문 요한복음 5장 10절에 보면,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해괴망측한 말을 했습니다.
병이 나아서 병자가 자리를 들고 일어났는데,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일어났다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병자가 일어났으니 병자와 함께 기뻐하고 박수를 쳐줘야 할 텐데, 유대인들은 오히려 병자를 비난했습니다.
이것은 종교의 틀에 갇힌 자의 모습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대한 규칙에 갇혀있었습니다.

안식일에 대한 진정한 정신은 무엇입니까? 묶인 자가 풀리는 것, 억눌린 자가
 자유하게 되는 것, 병든 자가 병에서 놓임을 받는 것이 안식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를 묶고 있는 것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시고, 참된 안식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죄악과 질병, 귀신의 억눌림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38년 된 병자가 나은 것을 보고 딴지를 걸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규칙을 만들고, 규칙을 지키는 것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의 기준, 장로의 유전을 만들어놓고 그것에 매여서 꼼짝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오히려 그것이 신앙이라고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안식일에 이런 일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심중에 의도를 가지고 이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비판할 것이라고 예상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참된 정신을 보여주시려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의 참된 정신은 무엇입니까?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생명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38년 된 병자에게 그냥 일어나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안식일의 규정을 어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이렇게 말씀했을 때, 비난 받을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규칙을 깨뜨려버리셨습니다.

종교생활을 하지 말고, 참된 신앙 속으로, 참된 생명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무엇을 지킬 것인지에 대해 몰두하지 마세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직분을 가지게 되면, 무언가 지키는 것에 집중하게 됩니다. “주일을 지킨다.”라고 애매하게 말합니다. 그 속에는 의무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각종 집회에 참석하는 것도 직분자이기 때문에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라면, 그 속에는 의무감이 들어있습니다. 그것은 종교적 수행입니다.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할 수밖에 없는 의무사항을 준수하는 것입니다.

종교적으로 굳어지면, 주님의 놀라운 기적에 대해 전혀 감동을 받지 못합니다. 38년 된 병자가 일어난 것을 보고 비난하는 것은
 기막힌 일입니다.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역사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일어난 것임을 보지 못하는 유대인들은 38년 된 병자처럼 몸이 마른 자입니다. 영적으로 병든 자입니다. 중증 환자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규칙을 깨뜨리신 것에 대해서 분노하고, 주님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규칙을 지키시지만, 생명 없는 무기력한 종교에 대해서는 역겨워하십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활력, 생동감이 매우 중요합니다. 생생하고 활기가 넘쳐야 합니다. 생동감이 넘쳐야 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간증거리가 넘쳐나야 합니다.
힘들고 아픈 사람이 있으면, 모여서 함께 기도하세요.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는 것과 역사하시는 것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때,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도 그들이 성전 앞을 그냥 왔다 갔다 했습니다. 기도하는 시간이 되어 그들이 성전 앞을 지나갔지만, 그때는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종교적 삶을 살았을 뿐입니다.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무기력하고 고만고만한 삶을 살았습니다. 생명이 하나도 없는 종교적 행위를 습관적으로 반복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성전 앞을 지나가는데, 나면서 못 걷게 된 이가 그들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성령께서 역사하셨습니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향해 베드로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외쳤습니다(행 3:6).

이 말은 “유대 종교여, 누워 있지 말고 일어나 걸으라”는 의미입니다. 기도 시간에 성전 앞으로 수없이 왔다 갔다 하지만,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 종교적 삶으로부터 일어나 걸으라는 것입니다.

신앙에 생동감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나면서 못 걷게 된 이가 일어나서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죽은 종교는 끝났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이런 역사가 일어난다는 의미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입니다.

규칙을 지키고, 정해놓은 시간에 따라 성전에 가서 기도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열심히 교회 다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인생과 같습니다.
구걸하는 사람, 동전을 던져주는 사람 모두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상황은 끝났습니다. 더 이상 소망이 없습니다. 절망적입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이전에는 그랬습니다.

유대인들은 종교적 의식만 넘쳐났습니다. 성전 앞을 왔다 갔다 할 뿐이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38년 된 병자는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하지 못하고 누워있는 것이 그에게 삶이 되어버렸습니다. 절망도 오래되면 굳어버립니다. 절망을 합리화하고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당시에 종교는 무력했습니다. 쓸데없는 규칙만 하나둘 늘어났습니다. 규칙을 철저히 지켰지만, 생명의 역사와 생동감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냥 교회를 왔다 갔다 하지는 않습니까? 주일을 지키는 것에 집중하지 않습니까? 그냥 다니다 보면, 그것이 규칙이 되어버릴 수 있습니다.
새벽기도 하는 것도 힘든데, 금요일에는 철야기도까지 해야 합니다. 지키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지켜야 할 것이 더 생기면 힘들어집니다.
종교적으로 생활하는 사람은 집회가 하나 더 늘어나면 피곤해집니다. ‘누가 철야기도를 만들어서 사람을 힘들게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철야기도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철야기도가 규칙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규칙을 지키려고 하면, 피곤합니다. 그래서 하나둘 빠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주일낮예배만 남게 될지도 모릅니다.
왜 그렇게 될까요? 주일낮예배는 빠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켜야 하기 때문에 지켜야 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재미가 없습니다. 생명이 없습니다.

한국 교회에서 그토록 열심히 기도하던 것이 왜 하나둘 사라지고 희소해졌습니까? 신앙의 감격과 기쁨과 흥분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중에 있는 철야기도는 다가오는 것이 두렵습니다.
새벽기도와 철야기도가 하나의 프로그램이 되어버린다면, 그것이 직분자를 세우기 위한 기준과 규칙이 되어버린다면, 사람들이 지키기는 하지만, 그 안에 생명은 없습니다.
그리고 직분을 받고 나면, 더 이상 참석하지 않습니다. 나온다 해도 눈치 때문에 나오게 됩니다. 그 안에 생명은 없습니다.

규칙을 만들고 지킨다는 것은 매우 무서운 일입니다.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것도 힘든데, 금요일 저녁에 교회에 가서 기도한다는 것이 무거운 규칙이 될 수 있습니다.
나중에는 기도를 인도하던 목회자마저 지쳐서 포기해버립니다. 신나지도 않고, 흥분되지도 않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베데스다 못 가와 같은 곳에서 버티기 어렵습니다.

38년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어려운 풍문, 신화만 떠돌아다닙니다.
철야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래 다니다 보면, 규칙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규칙을 지키는 사람이 아닙니다. 말씀을 규칙으로 지키는 사람이 아닙니다. 말씀을 경험하고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율법의 잣대로 평가하고 정죄하고, 복음의 능력을 상실해버린 신앙인이 아니라, 복음의 한 가운데 들어가 복음이 주는 강력한 은혜의 불길 안에 휩싸여야 합니다.

철야기도가 주는 은혜와 기쁨이 큰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는 철야기도하는 것이 참 좋습니다. 한 달에 한 번 밤을 새며 기도하는 날이 제게는 명절 중의 명절입니다. 자유롭게 설교할 수 있어서 아주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은혜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철야기도에 참석하는 것이 규칙이 된다면, 그냥 왔다가 가면 됩니다. 그러나 철야기도에 나와서 생명의 역사를 체험하고, 역동적인 복음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철야기도에 나와야 직분자가 될 수 있다면, 철야기도가 규칙이 되어버립니다. 기도십일조에 나와야 중직자가 될 수 있다면, 또 하나의 규칙이 되어버립니다. 규칙을 지켜야 직분자가 된다면, 규칙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사람을 속일 수 있습니다. 조직을 속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신앙이 허구에 빠져버립니다. 규칙을 지키는 것이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만일 중ㆍ고등부에서 “철야기도에 참석하지 않으면, 임원이 될 수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만일 임원이 되기 위해 철야기도에 나왔다면, 기도하는 것이 재미있겠습니까?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우리 교회의 중ㆍ고등부 학생들은 철야기도에 자발적으로 나옵니다. 제가 알기로는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생활에 규칙이 많이 만들어지면 안 됩니다. 의무감으로 규칙을 지킨다면, 영적 활력과 생동감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신앙이 어린 신자들에게는 기본적인 틀을 가르쳐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중요합니다. 왜 그것을 지켜야 하는가를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규칙을 지킨다면,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철야기도에 활력이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성도들이 사모해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한 번은 끌려나올 수 있을지 모르지만, 계속해서 끌려나올 수는 없습니다.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봉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직분자이기 때문에 봉사한다면, 봉사가 하나의 규칙이 되어버립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자발성이 없습니다.
직분 때문에, 체면 때문에 주일을 지킨다면, 문제가 심각합니다. 생명의 역사가 없습니다. 오래가지 못합니다.

종교성이 강화되면, 영은 죽습니다. 영이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대해 왜곡된 태도를 가지게 됩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고, 직분을 가지면, 종교적인 체계가 강화될 위험이 많습니다. 그러면 해가 거듭될수록 힘들어집니다.

교회에서는 규칙을 잘 지키는 사람을 좋은 신자로 여기지만, 하나님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주일을 지키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예배하는 가운데, 하늘로부터 생명의 힘을 공급받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지키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배 순서에 참여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배 시간에 하늘이 열리고, 예배를 통해 하늘의 영광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임재에 압도당하고, 부활의 영이 임하여 낙심과 절망이 사라져버려서 용기백배 하여 믿음으로 세상을 향하여 담대히 나아갈 수 있도록, 영적으로 충전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붙들어야 하는 것은 규칙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을 경험하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에 참여해야 합니다. 주님은 규칙에 초점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8년 된 병자가 살아나는 생명의 역사에 초점을 두셨습니다.
그런데 유대교라는 종교적 체계는 집단을 유지하고 보존하지만, 하나님의 역사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절망하는 자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심으로 베데스다 못 가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분석하거나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딴지를 걸면 안 됩니다. “할렐루야”라고 외쳐야 합니다. 우리의 입에서 “할렐루야”가 터져 나와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할렐루야”라는 탄성(歎聲)이 살아나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는 의미 없이 덧붙이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라는 의미의 벅찬 감격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실제적으로 경험했을 때, 내 영혼에서 “할렐루야”라는 탄성이 터져 나오게 됩니다.
‘할렐루야’가 의미 없이 쏟아 붓는 주술(呪術)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종교생활을 하면, ‘할렐루야’가 의미 없이 되뇌는 주문이 되어버립니다.

신앙생활에 ‘할렐루야’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십니다. 할렐루야”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입에서 ‘할렐루야’가 사라지면, 영적으로 아주 위험한 상태에 빠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상황이 어떠한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절망적인 상황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영혼과 우리의 입술을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할렐루야”라고 선포할 수 있다면, 이미 승리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높여드리고, 하나님을 찬양하면, 여러분은 이미 승리한 것입니다. 암 말기라고 할지라도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은 위대하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이미 승리한 것입니다. 죽든지 살든지 상관없습니다.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실 것입니다.

38년 된 병자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므로, 신음으로 가득하던 베데스다 못 가에서 구원의 탄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38년 동안 병으로 고생하던 병자가 나음을 받고, 자리를 들고 일어나면서 외쳤던 ‘할렐루야’는 어떠했을까요?
1년 된 병이 아닙니다. 감기가 나은 것도 아닙니다. 38년 동안 괴롭히던 병에서 나음을 받았을 때, 그의 입술에서 터져 나온 ‘할렐루야’는 다릅니다.
감기가 나아 “할렐루야”라고 외치는 것과 말기 암이 나아 “할렐루야”라고 외치는 것은 다릅니다. 죽기 직전까지 이르러 모든 것을 내려놓은 상태에서 나았을 때 “할렐루야”라고 외치는 것은 다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놀라운 역사가 우리 안에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죽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구원이 무엇입니까? 죽었던 우리가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말기 암이 나은 것이 아닙니다. 죄로 인해 영원히 죽었던 우리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다시 살아났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이 찬양은 그냥 쉽게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입에서 ‘할렐루야’가 터져 나오지 않는다면, 우리의 영혼이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요한복음 5장 1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일이 무엇입니까? 38년 된 병자를 낫게 하신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규칙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이라는 규칙을 지키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안식일의 참된 정신이 살아나게 하고, 죽었던 자를 살아나게 하고, 38년 된 병자를 자리에서 일어나게 하는 것이 주님의 일입니다.
주일에 교회에 오다가 여러분의 가정에서, 여러분의 이웃 가운데, 죽을 위기에 있던 자를 살려내셨다면, 교회에 오지 않았다 해도 주일을 범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일을 하고 계십니다. 쓸데없는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구원의 사건을 일으켜야 합니다.
죽었던 자를 일으키고, 예수님을 믿지 않던 사람에게 예수님을 믿게 하고, 예수님을 믿지만 시시하게 믿는 사람의 믿음을 일으키고, 영적으로 병든 자를 일으켜 세워줘야 합니다. 아직 자라지 않는 영혼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롭게 일으켜서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입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도 그 일을 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 안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생명의 역사가 일어날 때, 우리의 입에서 기쁨과 환희와 감격의 탄성이 터져 나오게 됩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현장에 가보세요.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것은 파격적인 질문입니다. 38년 된 병자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질문입니다.
물이 움직일 때에 서로 물속으로 들어가려고 하고, 누구도 그를 도와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그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스스로 ‘이제 나는 희망이 없어.’라고 규정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유대주의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틀 안에 갇혀있었습니다. 틀에서 벗어나면 죽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안식일’이라는 거대한 틀이 그들을 묶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38년 된 병자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묶여있었고,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오심으로 걷고 뛰고 춤추는 시대가 이미 왔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거대한 유대 종교가 그들을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8:32). 여러분을 묶고 있는, 여러분 스스로 규정하고 있는, 인간이 만든 수많은 규칙 속에서 빠져나오시기 바랍니다.

“목사는 그렇게 하면 안 돼.”, “장로는 그렇게 하면 안 돼.”, “권사는 그렇게 하면 안 돼.”라고 말하며 “이렇게 해야 해”, “저렇게 해야 해”, “이것을 지켜.”, “저것을 지켜”라고 규칙을 만들어놓고 살아갑니다.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신앙의 핵심이 아닙니다.

법궤가 들어올 때, 다윗은 춤을 췄습니다. 그의 아내 미갈은 다윗을 비난했습니다. 왜 비난했을까요? 미갈은 왕실의 규칙을 너무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왕실의 기준으로 보면, 미갈의 말이 맞습니다. 왕이 바지가 내려올 정도로 체통 없이 춤을 추다니…. 고대 사회에서 왕실의 기준이 얼마나 엄격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왜 창녀와 세리 등 그 당시에 무시당한 사람들을 좋아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세리들과 창녀들과 함께하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그들과 어울리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창녀, 세리와 어울리셨습니까? 그들은 규칙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창녀와 세리, 죄인에게 무슨 규칙이 있겠습니까. 그들은 아무 규칙 없이 살아왔습니다. 그들은 격식 없이 주님을 맞아들였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과거가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거부 없이 받아들이면서 모든 것이 깨어졌습니다.
그를 묶고 있던 종교적 틀이 더 이상 그를 붙잡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복음이 역사하는 현장을 보세요. 우리가 만들어놓은 기준과 규칙에서부터 빠져나오셔야 합니다. 우리가 만들어놓은 선을 지워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만들어놓은 수많은 고정관념을 깨뜨려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밤을 새며 기도하는 것도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는 초저녁에도 기도하기 힘든데, 밤을 새며 기도하는 것이 가능할까’라는 생각은 고정관념입니다. 안 될 것 같은데, 잘 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안 된다고 했지만, 잘 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철야기도가 이 시대의 교회의 대안인 줄 믿습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승부를 걸어야 합니다.

철야기도에는 기준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올 수 있습니다. 강요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저는 억지로 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억지로 할 필요가 없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은 기뻐 뛰고 춤추며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기도하고 싶어 합니다. 영적 갈증을 느낍니다. 사람들은 마음껏 기도할 수 있는 곳을 찾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불이 꺼지면 안 됩니다. 교회는 불을 밝혀야 합니다.
세상에는 24시간 영업하는 곳이 많습니다.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 밤을 새며 24시간 영업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주일에 한 번 예배드리고 불을 꺼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한국 교회 중에도 주일오후예배가 없는 교회, 철야기도가 없는 교회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새벽기도마저 하지 않는 교회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춤추는 곳에 가보세요. 그곳은 새벽 2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모여든다고 합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춤추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천국의 춤을 춥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구원 받은 것을 기뻐하며 춤을 춥니다.
세상 사람들은 밤늦게까지 놀고 나면 허무함을 느끼지만, 우리는 밤을 새며 기도할수록 오히려 기쁨을 느낍니다. 밤새도록 찬양을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38년 된 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시면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시면,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않았던 삶이 벌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의 모습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일으키시기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걷지 못하고 누워 제자리에 맴돌던 삶을 청산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진리 안에서 전혀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스스로 규정하고 묶여있던 삶을 차버려야 합니다. 우리를 감고 있는 것들을 걷어버려야 합니다. 고정관념을 깨뜨려야 합니다. 지키는 자가 아니라, 누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 요한복음 5장 8~9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안식일의 규칙을 깨뜨릴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확실하게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이제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깔고 앉아있어서 냄새나는 자리는 더 이상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과감하게 던져 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과거의 자리에서 뱅뱅 돌아서는 안 됩니다. 운명의 자리를 던져버리면 살 수 없을 것 같아 불안하여 자리를 끌어안고 제자리에서 뱅뱅 돌아서는 안 됩니다.
삶의 반경이 넓어져야 합니다. 자리에 앉아있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전혀 다른 삶으로 이끄시고, 진리 안에서 우리를 자유하게 하실 것입니다.
규칙에 매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서 뛰고 춤을 추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선포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율법을 어겼다고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어긴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일부분만 알았고, 율법을 엉터리로 해석했습니다.
율법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38년 된 병자의 질병을 고쳐주신 것이야말로 이웃 사랑의 모범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이루셨습니다.

삶 속에서 규정을 지키는 것에 매이지 마세요. 여러분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흘러넘치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신앙에 변화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는 밋밋한 봉사, 규칙 준수, 교회 출석, 모임 참여, 종교적 활동을 그만두세요. 38년 된 병자가 일어난 것처럼, 생명의 역사가 여러분의 삶 가운데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물이 움직이기를 막연하게 기다리며 세월을 보내지 마세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물이 움직일 필요도 없고, 물속에 뛰어 들어갈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을 만나면 됩니다. 주님을 경험하고, 주님의 은혜를 맛보고, “할렐루야”라고 탄성을 지르고, 하나님의 능력을 매일 매일 체험하며, 생동감 넘치는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와 고통, 절망과 질병이 치유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기도가 응답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런데 38년 된 병자처럼, 원한다고 말하지만, 진심으로 원하지 않을 만큼 이미 무너져 내려서 하나님에 대한 어떤 기대도 없이 신앙생활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진심으로 원하지 않습니다. 아무런 기대와 소망 없이 교회를 다닙니다. 눈치껏 교회 다니고, 하나님에 대한 기대감 없이 믿음생활 한 것을 청산하셔야 합니다.

교회 출석은 100점인데,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지 오래되었고, “할렐루야”라는 탄성이 나오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역사를 진정으로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점점 종교인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철야기도가 있습니다. 철야기도는 규칙 준수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철야기도에 참석한다고 해서 상 주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계속되면, 규칙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8년 된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이미 무너져서 온몸으로 절망을 체득하고, 희망을 끊어버린, 38년 된 병자에게 예수님께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실패를 반복한 사람은 희망의 줄이 끊어졌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종교인의 삶입니다.
그런데 종교인도 규칙을 지킬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피곤합니다. 규칙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습니다.

자리를 들고 일어나셔야 합니다. 밋밋하고 아무 변화 없이, 하나님에 대한 어떤 기대감도 없이, 의식을 반복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생생한 생명의 역사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서 영혼 깊숙한 곳에서 “할렐루야”라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이 회복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안에 그런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입술에서 “할렐루야”가 회복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오늘도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에게 놀라운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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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금요철야예배설교] 하나님의 리듬에 장단 맞추라 Friday Night Sermon

하나님의 리듬에 장단 맞추라
본문 / 전도서 3:1~11

 

1.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3.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5.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6.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7.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8.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9. 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10.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본문을 보면, ‘때’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때에 대한 개념을 바로 이해해야 멋진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때에 대한 감각을 익힐 필요가 있습니다.
열심보다 때가 중요합니다. 열심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를 알아야 멋진 인생, 복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지혜는 때와 항상 연결되어있습니다. 전도서의 여러 곳에서 그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삶은 때를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에 대한 감각이 살아나야 합니다. 성공적인 삶을 살려면, 때를 맞추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시간 관리를 많이 말합니다. 시간 관리에 관한 책도 많습니다. 그런 책이 도움이 됩니다.
저도 시간 관리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시간 관리를 잘 하려고 애씁니다.

그런데 시간 관리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신자는 거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합니다. 때에 대한 감각을 길러야 합니다.
때에 대한 감각은 24시간, 1주일 등 시간에 대한 개념보다 더 큰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때에 대한 감각을 가지려면, 시각(視覺)을 가져야 합니다.

농부는 밭을 갈고 밭에서 일합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계절감각을 갖는 것입니다. 계절감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하루하루 열심히 일해야 하지만, 계절에 맞게 일해야 합니다. 무슨 계절인가도 알지 못한 채 열심히 일한다면,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봄에 해야 하는 일이 있고, 여름에 해야 하는 일이 있고, 가을에 해야 하는 일이 있고, 겨울에 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씨를 뿌릴 때와 거둘 때에 맞게 일하려면, 계절에 대한 감각이 있어야 합니다.
계절에 맞는 행동 패턴이 있어야 하고, 계절에 맞게 스케줄(schedule)을 조정해야 합니다. 봄의 일상과 겨울의 일상은 전혀 다릅니다.

인생의 계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이별로 때에 대한 강조점이 다릅니다. 강약(强弱) 조절이 필요합니다.
성실하게 사는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늘 성실하게 자기관리를 잘하지만, 인생 전체를 들여다보는 눈이 없으면, 나중에는 크게 후회하게 됩니다.

누가복음 12장 5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매일의 일기예보는 확인하면서 시대에 대한 분별력을 갖지 못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외식주의자들은 시대를 분간하지 못했습니다. 시간 관리를 잘하고, 종교적으로 활동을 많이 했을지는 모르지만, 시대에 대한 감각이 없었습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때를 전혀 알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므로 영적 기상도가 완전히 바뀌었는데, 외식주의자들은 일기(日氣)만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니까 죽은 자가 살아나고, 눈 먼 자가 눈을 뜨고, 귀신 들린 자에게서 귀신이 쫓겨나는 등 영적으로 거대한 폭풍이 불어 닥치는데, 외식주의자들은 그것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천지의 기상은 잘 아는데, 영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거대한 역사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수많은 선지자들이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계속해서 예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전혀 알지 못하고, 영적 어두움 가운데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했습니다. 어둠 속에 있었기 때문에 눈이 가려져있었던 것입니다. 분별력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는지, 그들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영적 분별력이 없으니까 때에 대한 감각이 없었습니다. 영적 흐름이 어떠하며, 영적으로 바람이 어떻게 불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단지 열심히 제사 드리며 의식을 행하는데,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감각을 갖고 있지 않으니 딴 짓만 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솔로몬은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라고 말했습니다. 농부도 그렇지만, 어부도 때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썰물의 때가 있고, 밀물의 때가 있습니다.

호주에 있을 때, 성도 중에 낚시를 좋아하는 성도들이 많았습니다. 낚시 장비가 좋고, 낚시 기술이 훌륭해도 때를 맞추지 못하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미끼가 아무리 좋아도, 물고기가 물지 않는다고 합니다.
물때가 있다고 합니다. 물고기가 오는 시간이 있다고 합니다. 때를 맞추지 못하면, 아무 소용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때를 정확하게 맞추면, 낚싯대를 내리기만 하면 물고기를 잡을 수 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마찬가지입니다. 때와 타이밍(timing)이 중요합니다.

성경에서 때에 대해 말씀한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시간표에 맞추는 것입니다. 본문 11절에 보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시간에 있어서 핵심은 ‘하나님의 때’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시간 관리 안에는 이런 개념이 전혀 없습니다. 단지 자기만의 방식으로 시간을 관리하고, 자기의 스케줄에 따라 살아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타임 테이블(time table)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열심과 우리의 성실보다 하나님의 열심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의 행동보다 하나님의 행동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과 세상 사람들의 차이입니다.

우리의 움직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움직임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디에서 움직이시는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움직임에 민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언제 무엇을 하시려는가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전(殿)을 지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달랐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그가 왕이 될 때까지의 하나님의 타임 테이블은 따로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에 보면,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충동적으로 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때를 따라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때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살펴보면, 성령께서 일하시는 방향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성령의 타임 테이블에 따라 종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중요한 곳에 세우셔서 거대한 바람이 일어나게 하십니다.
바람이 임의로 부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일은 성령의 주도하심 속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바울이 가려고 하는데, 성령께서 막으셨습니다. 그리고 마게도냐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유럽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곳에 하나님께서 준비해놓으신 마스터플랜(master plan)이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때에는 아무리 가려고 해도 갈 수 없었습니다. 온갖 고생을 하고도 아무 열매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게 하시는 대로 가면, 그곳에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준비해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를 따라 우리에게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시간표와 다른 시간표를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시간표가 중요합니다.
요셉을 보세요. 그가 꿈을 꿨지만, 현실은 꿈과 전혀 달랐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요셉이 생각한 시간표와 하나님의 시간표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현실이 반대로 가는 이유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시간표대로 진행될 때, 가장 멋지고 아름답고 풍성하고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믿음생활을 할 때, 시간에 대해 정확하게 생각하는 것을 훈련해야 합니다. 시간을 미세하게 들여다보고 분석하면, 해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을 보면, 큰 덩어리의 시간 개념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정확하지만,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보면, 큰 덩어리의 시간 개념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발견합니다.

우리의 시간표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아도, 조급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요셉이 감옥에서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주었으나, 관원장은 요셉을 잊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습니다.
요셉은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주며 자신을 생각해달라고 말했는데, 술 맡은 관원장은 감옥에서 나간 후에 요셉을 까맣게 잊었습니다.
그는 잊힌 존재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소망 없이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했을 것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름 부음을 받았으나, 왕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죽을 것 같은 상황이 계속되었습니다. 시계가 거꾸로 돌아가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살다 보면, 힘든 때가 있습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때입니다. 일이 빨리 진행되어야 하는데, 힘들고 어려운 순간이 다가와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상황이 벌어지면 힘듭니다.
우리가 세워놓은 야심찬 프로젝트가 휴지조각이 되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진전이 없습니다. 시간이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때 믿음이 필요합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때에 믿음이 필요합니다. 시간이 흘러야 하는데, 1초도 흐르지 않고, 멈춘 것 같다고 느끼면, 숨이 막히는 듯합니다.
시련은 계속됩니다. 마치 터널 속을 지나는 것 같습니다. 어려운 순간, 미동조차 일어나지 않을 때,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런 순간을 맞이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기 직전에 가장 혹독한 시간이 찾아옵니다. 다윗은 왕이 되기 전에 어려운 순간을 맞이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가장 약한 상태로 만드신 후에 일하십니다. 우리가 약해질 대로 약해졌을 때, 하나님의 강한 능력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 바로 직전이 매우 어렵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시간이 멈추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매우 약해져있을 때, 하나님의 때가 임박해있습니다.

임산부는 만삭이 되었을 때가 가장 힘들다고 합니다. 바로 누워 잘 수도 없고, 여러 모로 불편합니다.
그때가 가장 어려운 때입니다. 그리고 위험한 순간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기 직전입니다.
그때는 시간이 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시간이 빨리 흘러서 아기가 빨리 태어났으면
 좋겠는데, 하루가 길게 느껴집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임박하면, 그때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때는 잠잠히 기다려야 합니다.
아무것도 할 것이 없고, 하나님만 기다릴 수밖에 없는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모든 것이 불확실합니다. 하나님 외에는 기대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때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의 때는 불확실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수중(手中)에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는 한치 앞도 알지 못합니다. 예측할 수는 있지만,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 대한 계획은 하나님의 수중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 앞에 일어날 일을 하나님께서는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全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개인의
 삶에서 디테일(detail)한 것까지 다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주 신실하신 분이시고, 우리의 인생에 대해 우리보다 더 세심하게 아시고,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개인의 삶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계시고, 신실하게 이끌어 가십니다. 하나님은 지혜와 지식이 완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기다리면서 겸손해져야 합니다.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내어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때가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을 믿고,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겸손하게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잠잠히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가 오면,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기다리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때는 반드시 옵니다. 그때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모험과는 다르지만, 모험적인 삶을 살게 합니다. 믿음을 갖지 않는 사람들도 모험을 많이 시도합니다.
오늘날 많은 기업들이 모험합니다. 모험하지 않으면, 기업이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기업의 CEO들은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낼 때가 많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망하기 때문에, 새로운 결단을 하고, 모험을 해야 합니다.

믿음과 모험은 비슷합니다. 그런데 믿음과 차이가 있습니다. 믿음은 대상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믿는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무엇을 믿는가에 따라 도박이 되기도 하고, 믿음이 되기도 합니다. 세상의 모험은 도박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에 기초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정확하게 이해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은 일을 하려고 하면, 믿음이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이 머리 좋은 사람에 의해 움직이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과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다른 사람보다 크면, 그 사람은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음 좋은 사람들이 앞서 나아가는 것을 따라갑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역사를 만들어냅니다. 믿음은 행동하는 것입니다.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두려움을 이겨내고 행동하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았을 때에는 숨죽여야 합니다.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그때 잘못하면, 사고를 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고를 치고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아직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았는데, 섣불리 행동하다가 무너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아닌데 행동하면 불행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가 되면, 용감해져야 합니다.

기다려야 하는 때에는 잠잠히 있어야 합니다. 그때 나서면 안 됩니다. 그러나 때가 왔다면, 확신을 가지고 행동해야 합니다. 망설여서는 안 됩니다.
엘리야를 보세요. 하나님의 때가 오기 전, 엘리야는 그릿 시냇가에 숨어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드러내실 때, 엘리야는 아합 왕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갈멜 산 정상에서 850대 1의 싸움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었습니다.
숨어있어야 할 때에는 숨어있었지만, 하나님의 때가 왔을 때에는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행위입니다.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하고, 믿음으로 행동하는가에 모든 것이 달려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때를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타이밍이 왔다면, 대담해져야 합니다. 민첩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주저하거나 망설이지 않고, 하나님의 때에 여러분의 삶을 맡겨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기회는 더 이상 기회가 되지 않습니다. 기회는 기회를 알아보고, 기회에 반응하는 사람에게 기회가 됩니다. 기회에 반응하지 않으면, 기회는 기회가 되지 않습니다. 기회는 지나가버리고 맙니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때는 나와 상관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켜야 합니다.
믿음이 강화되면, 때가 왔을 때에 두려움 없이 반응하는 용기가 생깁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으면, 때가 와도 용기가 생기지 않아서 기회가 지나가버립니다.

에스더를 보세요.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에 4:14)”라고 말했을 때,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라고 반응했습니다.
에스더는 때에 맞게 반응했습니다. 그리고 유대 민족을 살렸습니다. 하루만 늦었어도 유대민족이 말살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에스더는 때를 정확하게 맞춰 행동했고, 왕 앞에 나아갔습니다. 자칫하면 자신이 죽을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믿음으로 용기를 내고 나아갔을 때, 반전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때가 오면, 몸을 사려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몸을 던져야 합니다. 모든 것을 걸어야 합니다.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놓치면 안 됩니다.
여러분의 삶에 기회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타이밍이 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허비하기를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때에 맞게 반응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때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 있게 모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다른 차이는 없습니다.
가슴 설레는 일들이 여러분의 삶 속에 일어날 것입니다. 믿음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주저하면 안 됩니다. 기회를 잡으셔야 합니다.

본문 전도서 3장 1절에 보면, “범사에 기한이 있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 감각이 필요합니다.
믿음의 생활을 할수록 영적으로 날이 서야 합니다.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영적 깨달음이 쌓일수록 우리 안에 영적으로 날이 서야 합니다. 영적으로 예민해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일을 행하신다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징조가 반드시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징조를 느낍니다. 영적 감각이 탁월하면, 징조를 다른 사람보다 먼저 느낍니다.
징조는 있습니다. 말세의 징조도 있습니다. 영적 감각을 갖고 있는 사람은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를 압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한가운데 적극적으로 개입하십니다. 2천 년 전,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에는 하나님께서 유대 민족 안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셨습니다.
그런 때에는 시간이 무지하게 빨리 지나갑니다. 그래서 보통 사람은 알지 못합니다. 어마어마한 일들이 지나갔는데,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한 시간을 가리켜 ‘크로노스(χρόνος)’라고 하지 않고, ‘카이로스(καιρός)’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때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개입하시는 시간, 하나님께서 관여하시는 특별한 시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한 시간이 오면, 시간이 매우 빨리 흐릅니다. 전운이 감돕니다. 하나님께서 움직이시는 시간 속으로 우리가 들어가면, 우리가 알지 못한 일들,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한국 역사 속에도 그런 일들이 있었습니다. 5천 년 한반도 역사 가운데 늘 시련 속에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니 1907년 평양에 강력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1970년대에는 여의도광장에 2백만 명의 성도들이 모인 것도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민족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한국은 경제적으로도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변화가 일어났고 성장했습니다. 그로 인해 한국은 2만 7천여 명의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가 중요합니다. 믿음의 촉수를 곤두 세워야 합니다. 우리는 경거망동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자칫하면 유산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한 박자라도 늦거나 앞서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카이로스가 임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행동하면, 기회는 지나가버립니다.

서핑(surfing)을 하는 사람들은 타이밍을 정확하게 맞추어야 합니다. 타이밍을 맞추지 못하면, 물속에 빠집니다. 타이밍을 잘 맞추어야 합니다.
영적 생활에 있어서도 타이밍을 맞추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파도를 타야 합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들도 위험천만한 일이 일어나지만, 하나님의 타이밍을 정확하게 맞추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위험하지 않은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정확하게 맞추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때를 주신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때 믿음으로 반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역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힘을 써도 잘되지 않았는데, 하나님의 때가 오면, 자신은 수고하는 것 같지 않은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가 오지 않았을 때는 밀물의 때에 앞으로 나아가려 하는 것 같습니다. 맞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습니다. 매우 힘듭니다. 열매는 없습니다. 될 듯 될 듯하다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에는 힘을 쓰지 않고 있는데,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것을 ‘대세’라고 합니다. 파도가 치고 바람이 불기 때문입니다.
목회와 사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땅에 있을 때에는 모르는데, 하늘을 날 때에는 바람을 타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모든 일이 그러합니다.
인생을 복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에 적극적으로 반응합니다. 그런데 기회를 기회로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회를 기회로 알아보지 못하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아무리 준비되어있고, 실력을 갖추었다 해도 기회를 알아보지 못하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기회는 예측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미리 신호를 보낸 후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영적 감각을 길러야 합니다.
때에 대한 분별력을 갖는 것은 영적 활동에서 매우 핵심적인 것입니다. 영적 감각이 있으면, 하나님의 때가 온 것을 알아차립니다.

모든 것이 잘 되고 있지만, 만족하기보다는 내적으로 결핍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겠다.”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내가 하려고 하는 일이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일에서 만족하게 하지 않으시고, 새로운 길을 보여주시려고 하십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느끼게 하십니다.

모든 바람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바람을 일으키십니다. 새로운 일이 일어난다면, 그곳에는 분명히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바람을 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길로 이끄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때라고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바람이 불기를 바랍니다. 그 바람에 여러분의 몸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성실하게 사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아무리 성실하게 살아도 늘 제자리에 머무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치 밧줄에 묶인 듯이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밧줄을 끊어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에 새로운 차원을 여시기 위해 바람을 일으키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하고, 우리의 몸을 맡길 때, 신비로운 일들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

때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때를 영원과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본문 전도서 3장 11절에 보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구절은 전도서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영원’이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헛되고 헛되다고 말한 전도서 안에 ‘영원’이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때는 영원을 향해 맞추어져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원을 향해 기도록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은 우리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영원을 사모하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무엇인가 열심히 하고, 무엇을 이루려고 하면서 왜 허무함을 느낍니까? 전도서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해 아래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입니다. 전도서에 ‘헛되다’라는 말이 몇 번 나올까요? 총 29회 나옵니다.

지금은 중요하게 여기지만, 얼마 가지 않아 마음이 식어버립니다. 미용사가 머리를 마음대로 잘라버리면, 기분이 나쁩니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 마음이 누그러집니다.
당장은 분노하지만, 조금만 지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갖고 싶은 것을 가지게 되면, 매우 감격하고 행복해합니다. 그러나 며칠 가지 않아 그 마음이 식어버립니다.
새로운 것은 없습니다. 새로운 말씀을 강조하는 것은 이단입니다. 새로운 지식은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구입해도, 금방 또 다른 새로운 브랜드가 나옵니다.

잠언 31장 30절에 보면,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말을 지금 시대에 맞게 바꾸어 말하면, “몸짱도 거짓되고, 얼짱도 헛되나, 영짱만 영원하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 목마릅니까? 세상에는 새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새것이 없습니다. 대단한 것 같아 보여도, 오래 가지 않습니다.
가진 것이 많고, 남부러울 것 없이 사는데도 기도하러 나오시는 분이 있다면, 그분은 대단한 분입니다. 없는 것이 없이 다 갖추었는데, 무엇이 부족해서 기도하겠습니까.

모든 것을 가지고 있고, 권세도 있는데, 기도하러 나온 사람에게는 비밀이 있습니다. 쉽게 비밀을 터득한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깊은 것을 발견한 사람입니다. 그 비밀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기도하러 나올 수 없습니다.
돈만 많이 번 사람이라면, 돈을 원 없이 써본 후, 끝지점에서 허무함을 맛보기 전까지는 기도하러 나올 수 없습니다.

돈이 나를 만족시켜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시간이 걸립니다. 대개는 대가를 지불한 후에야 깨닫습니다. 대가를 지불하기 전에는 깨닫지 못합니다.
돈이 있고 건강하다면, 나를 부르는 곳이 얼마나 많습니까. 돈이 많고 잘 나갈 때에는 기도하러 나오고 싶어도 나올 수 없습니다.

돈이 있으면,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그 사람들은 나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좋아합니다.
돈 냄새를 풍기면, 사람들이 몰려와서 아첨하고 기분을 돋울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돈을 마음껏 쓰게 할 것입니다.
돈이 바닥나기 전까지는 그 재미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돈이 바닥나고, 친구들이 떠나기 전에는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전도서는 세상의 모든 것을 가져도, 허무하고 식상하고 지루해진다는 것을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권력을 가지든, 돈을 끌어 모으든, 지식을 쌓든, 성적 쾌락에 빠지든 그것을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결국 허무를 느끼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진 것이 영원과 연결되지 않으면, 우리는 허무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참된 목적을 찾아야 합니다. 영원한 목적과 빨리 연결시켜야 합니다.
영원한 목적을 찾으면, 삶의 방향이 분명해집니다. 그러면 삶에 불이 붙습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입니다(잠 1:7). 하나님을 경외하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 금방 나옵니다.
인생이 빙빙 돌지 않습니다. 방향 감각이 생기고, 시간 개념이 분명해집니다. 지금 자신의 나이에 맞게,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분명해집니다. 때에 맞게 행동해야 합니다. 늦을수록 후회합니다. 믿음의 눈이 떠지고, 영안이 열리기를 축원합니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유치한 일에 매여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빨리 돌이켜야 합니다. 기회가 지나가고 난 후에 “이 몸, 주를 위해 불태우겠나이다.”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때를 놓치면 허무해집니다. ‘때’는 늘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올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놓치면 허무해집니다.

시편 1편에 보면,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시 1:3). 인생의 계절에 맞게 열매를 맺어야 성공한 인생입니다.
그것이 ‘철든 인생’입니다. 철든 인생은 하나님의 때를 따라 춤추는 인생입니다. 뒷북을 쳐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때를 놓치면, 나중에는 아무리 힘쓰고 노력해도 소용없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계절을 보는 시야를 가져야 합니다.

복된 인생을 살려면, 허무한 것에 굴복하지 않아야 합니다.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말씀에 귀 기울이고, 성령의 이끄심에 민감한 삶을 살아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를 금방 알아차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기회를 주셨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새 길을 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박자에 따라 춤추는 인생을 사용하시기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일에만 빠져 살지 마세요. 부지런히 산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해 안테나를 뽑아 올려서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매일 매일 타임 테이블을 체크하는 것도 좋습니다. 열심히 자신의 길을 가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눈을 감고 잠잠히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바람을 느끼세요. 지금도 하나님의 바람은 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바람을 느끼세요. 그리고 하나님의 바람에 자신을 맡기세요.

지금도 영적 파동은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흔들어놓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지루한 일상의 리듬을 깨고, 하나님의 리듬 속으로 들어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 속으로 여러분이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미 있는 곳으로 인도하시고, 분명한 목적에 따라 살도록 우리를 이끄십니다. 그곳에는 강한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읽으면, 하나님의 강한 바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강한 바람을 일으키시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한 목적으로 이끌어 들이십니다. 하나님의 시간이 흐르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현장으로
 가야 합니다. 힘을 들이고 노력한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때에 믿음으로 반응할 때, 우리가 힘쓰고 노력한 것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거대한 파도가 일어나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 받는 도구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장단에 맞춰 춤추시기 바랍니다. 엉뚱한 곳에서 힘 빼지 마세요. 여러분이 가진 것을 모두 쏟아 부을 수 있는 곳으로 가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을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보세요. 하나님께서 부르신 인생은 결코 허무하지 않습니다.

인생이 얼마나 행복하고 즐겁고 신나고 부요한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파도를 타면, 꽉 찬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때에 반응하고 사는 사람들은 꽉 찬 인생을 살게 됩니다. 꽉 찬 인생을 살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때에 반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흘러가버렸습니다.

허접한 인생이 아니라, 꽉 찬 인생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려면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파도를 타야 합니다. 하나님의 리듬에 맞춰 춤춰야 합니다.
나의 타임 테이블에 맞춰서 나의 열심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파도에 나를 맡겨야 합니다.

저는 사역자로서 늘 그것을 느낍니다. 내 힘으로는 별 짓을 다 해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에 내가 덩달아 춤추며 ‘이것이 하나님의 때구나.’라고 느낍니다.
그때 기이하고 놀라운 일, 새로운 일을 경험합니다. 광야에 길을 내시는 역사를 맛보게 됩니다.
인생은 짧습니다. 아주 짧습니다. 후회함 없이 멋지게 살다가 주님 앞에 서시기 바랍니다.

전도서는 허무로 가득 차 있습니다. 허무로 가득한 가운데서 허무하지 않은 인생으로 우리를 이끌어내시는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그때를 준비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때에 반응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우리의 방향을 정확하게 맞출 때, 우리의 인생은 날아오를 것입니다. 파도칠 것입니다. 춤출 것입니다.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의 상상을 넘어서는 위대한 역사가 여러분의 삶 속에 일어날 것입니다.

기회는 누구에게든지 다가오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하나님 앞에 다시 한 번 도약하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런 기대 속에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촉각을 곤두세우세요. 영적으로 예민해지시기 바랍니다. 민감하게 반응하세요.

지금 하나님께서 흔들고 계십니다. 지루하게 밋밋한 아무것도 없는 공허한 삶을 계속해서 사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숨지는 날까지 하나님의 거대한 파도를 타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사용해주실 줄 믿습니다. 믿음으로 승부를 거시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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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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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금요철야예배설교 / 형통한 삶의 원리 Friday Night Sermon

제목 / 형통한 삶의 원리
본문 / 창세기 49:22~26

 

22.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23. 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24.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25.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26. 네 아버지의 축복이 내 선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 없음 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이미 복을 받았습니다. 구원의 복을 받았습니다. 구원의 복만 확실하게 붙잡아도 복된 인생입니다.
다른 복을 다 받았다 해도 구원의 복을 받지 못했다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구원의 복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신령한 복입니다. 하늘에서 주신 복입니다.

성경은 미래적인 의미의 구원, 장차 우리에게 닥칠 천국만을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지상(地上)에서의 삶에 대해서도 매우 적극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구원 받은 백성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천국에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구원 받은 백성들이 이 땅에서 살 것인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구원 이전의 삶은 하나님의 축복이 끊어진 삶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구원 받지 않은 사람이 세상적으로 잘나간다 해도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졌기 때문에, 세상에서 어떻게 살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축복이 그 삶 속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빠진 복은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 받은 백성은 다릅니다. 하나님을 떠나 살 때에 잃어버린 것을 구원 받음으로 되찾는,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영적인 의미의 복을 받을 뿐 아니고, 우리의 삶의 영역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풀어주시는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구원 받은 백성이 구원 받은 백성으로서 살아갈 때에 누리는 복이 있습니다. 미래에 천국에 가는 복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복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의 삶에서 묶여있는 것들이 풀리는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것을 약속했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고, 은혜를 받으면, 삶이 달라집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 때의 삶과는 다른 일상이 우리 앞에 펼쳐집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는 주일에 은혜를 받고, 월요일에 출근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금요일 저녁부터 놀다가 주일 저녁에는 지쳐버립니다. 세상의 낙을 좇아 살아가기 때문에 생활의 중심이 잡혀있지 않습니다. 술 마시고 복잡하게 살다 보면, 몸도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삶은 그렇지 않습니다.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거나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지 않기 때문에 맑은 정신으로 생활할 수 있습니다. 삶에 질서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규칙적으로 생활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성실해집니다. 새벽기도에 나온다는 것은 그만큼 성실하다는 의미입니다. 시간 관리(time management)가 되어야 새벽기도에 나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쓸데없이 객기(客氣)를 부리지 않습니다. 과욕(過慾)이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욕심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는 그런 것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스트레스 지수가 낮아졌습니다. 마음이 평안해졌습니다. 삶의 질서가 생겼습니다. 성실해졌습니다. 게으름이 사라졌습니다. 객기가 사라졌습니다. 정신이 맑아지고, 몸도 건강해졌습니다. 열 받을 일도 적습니다. 웬만한 일에는 열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삶에 안정감이 생깁니다. 삶의 규모가 생깁니다.
신앙인들이 장수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미국에서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찬양대 봉사를 하시는 분들이 장수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정상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묶여있던 것들이 하나씩 풀립니다. 그래서 집안 전체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물론 힘든 일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믿음생활을 하면서 질서 있고 안정된 삶을 살면, 불필요한 일과 어려운 일들이 점점 사라집니다. 꼬였던 관계가 풀립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난 후 변한 것이 많아집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고 난 이후에 사람들과의 관계가 편안해지고 자연스러워집니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꼬인 것이 풀립니다. 나쁜 습관들이 제거됩니다.
염려하고 근심하며 살던 사람이 은혜 생활을 통해 평강을 얻게 됩니다. 어두웠던 가정에 웃음꽃이 핍니다. 그래서 일의 능률이 오릅니다. 쓸데없는 곳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게 됩니다.
은혜를 받고, 기도하다 보면, 모든 것이 처리됩니다. 힘 있게 찬양하다 보면, 카타르시스(catharsis)를 느끼게 됩니다. 열심히 기도하면, 문제와 응어리들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를 통해 우리의 근원적인 문제가 풀리는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교회에 다닌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신앙 없이 살았던 때에 우리를 감고 있던 족쇄들이 하나씩 풀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싸움이나 갈등이 이전보다 훨씬 적어집니다. 이것이 믿음생활을 하는 사람의 정상적인 모습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가지고 믿음생활을 하면, 삶의 전반에 걸쳐 혁명이 일어납니다.
저희 집안을 보면, 그것을 느낍니다. 예전에는 형제들끼리도 싸우고 정신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난 이후, 그런 모습이 없어졌습니다.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관계가 아주 좋아졌습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백성에게 따라오는 변화가 있습니다. 그것이 삶에 축복이 됩니다.

창세기 49장에 보면, 자손들을 향한 야곱의 축복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유언이면서도 예언입니다. 그리고 축복입니다.
본문은 요셉에 대한 야곱의 축복입니다. 본문 22절에 보면,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참으로 멋진 그림입니다. 요셉의 인생을 샘 곁의 무성한 가지에 비유했습니다. 요셉의 인생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샘 곁에 있는 나무는 가뭄과 상관없습니다. 기근이 와도 상관없습니다. 주변의 상황과 전혀 상관없습니다.

땅이 말라있으면, 그곳에 있는 나무는 비가 올 때 잠시 파릇해지다가 다시 말라버립니다. 그러나 샘 곁에 있는 나무는 언제나 푸르고 무성합니다.
이집트의 사막은 매우 덥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도 곳곳에 나무가 있습니다. 싯딤나무와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 나무는 샘 곁에 있습니다.

경기(景氣)가 좋으면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가, 경기가 좋지 않을 때에는 표정이 굳어버리는 사람은 샘 곁에 있는 나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한때 잘 나갈 수는 있지만, 계속해서 잘 나갈 수는 없습니다. 결과를 보면, 한때 잘 나간다고 해서 계속해서 그럴 것이라고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말하는 성공은 매우 불안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은 가끔 일어나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반짝 축복이 아닙니다. 지속되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시련이 오고, 어려움이 와도 견뎌낼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은 비가 오지 않아 매우 메마릅니다. 잎사귀가 바짝 마를 만큼 태양빛이 강렬하지만, 샘 곁에 있는 나무는 살아납니다.
햇빛이 너무 뜨거우면, 햇빛이 나무를 말려 죽일 것 같습니다. 그러나 샘 곁에 있는 나무는 일시적으로 어려움을 겪지만, 결과적으로는 살게 되어있습니다.
문제를 뛰어넘는 파워가 있습니다. 문제가 일어났을 때 문제를 이겨낼 힘이 없는 것이 인생의 불행입니다.
샘 곁에 심어진 나무는 외풍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샘 곁의 나무는 뿌리가 건강하기 때문입니다. 샘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에 가뭄에도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의 뿌리를 강화하는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신앙의 뿌리는 신앙의 기본기를 의미합니다. 복음, 신ㆍ구약 말씀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뿌리를 깊이 내리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골로새서 2장 7절에 보면,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으라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그리스도 위에, 복음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신ㆍ구약성경,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후에 허공에 뜹니다. 복음을 받아들일 때, 구원을 받습니다.
누가 구원에 이르는 복을 누립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정확하게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왜 이 땅에 오셨고, 그분이 왜 죽으셨고, 그분의 죽음이 나와 무슨 연관이 있는가 하는 복음의 중요한 메시지가 우리 안에 뿌리내리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에 대해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기본적인 것이 내 삶에 뿌리내려야 합니다.
삶에서 근원이 흔들리면 안 됩니다. 모든 것이 흔들린다 해도, 뿌리가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삶이 요동치는 이유는 뿌리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중심이 잡혀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트경기장에 가면, 요트를 볼 수 있습니다. 요트의 바닥에 보면, 납덩어리로 된 축이 있습니다. 납덩어리로 된 축이 요트의 중심을 잡아줍니다.
그래서 바다에서 파도가 쳐도, 요트가 뒤집어지지 않습니다. 작은 배는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면 뒤집어집니다.
요트는 아주 날렵한데, 납덩어리가 요트의 중심을 잡고 있어서, 바람이 불고 파도가 쳐도 뒤집어지지 않습니다. 크지 않은 요트를 타고 태평양까지 항해하기도 합니다. 흔들렸다가도 다시 일어납니다. 중심이 잡혀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뿌리를 지키면 나무는 삽니다. 그러므로 샘 곁의 나무는 뿌리가 중요합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뿌리를 내리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대형 교회에는 건성으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는 것을 보험 든 것처럼 여깁니다. 그래서 교회에 다니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무엇을 믿는지, 왜 믿는지, 진리 안에서 뿌리를 확고하게 내려야 합니다.

시편 1편에 보면,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시 1:3).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을 시냇가에 심은 나무에 비유했습니다. 말씀을 붙잡고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말씀을 끊임없이 빨아 당기는 사람은 뿌리가 좋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성경을 읽을 때에도 마치 성경에 구멍을 낼 듯이 집중하여 읽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갈망과 사모함이 매우 큽니다.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있기 때문에 말씀을 먹습니다. 말씀을 놓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고, 말씀의 핵심을 기록하여 그것을 묵상하고, 그것을 놓고 기도하여, 말씀을 강화시켜 자기의 것으로 소화시킵니다. 그렇게 하면, 믿음의 뿌리가 강화됩니다.
그 사람은 샘 곁에 뿌리내린 사람입니다. 그래서 가지가 무성해집니다. 가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뿌리가 중요합니다. 뿌리를 보아야 합니다.

말씀으로부터 멀어지면 큰 일 납니다. 영혼이 힘을 잃습니다. 환난과 시련을 이겨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말씀에 깊이 뿌리내리고, 말씀 안에 살면, 어려움이 와도 말씀이 나를 지켜줍니다. 진리의 힘은 굉장히 큽니다.

예수님께서는 40일간 금식하며 기도하신 후에 빵을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빵 앞에 조금도 요동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4:4).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받으면, 우리의 영혼이 튼튼해집니다. 그래서 외부에서 오는 환난과 시련과 고난을 넉넉히 이겨냅니다. 그리고 고난이 축복으로 바뀌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말씀의 한가운데 복음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우리가 말씀 안에 있으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뿌리박고 있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점점 자랍니다.

바울의 신앙의 핵심은 ‘in Christ(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힘이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뿌리를 확고하게 내려야 합니다. 그래서 샘 곁의 무성한 나무가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는 ‘샘 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매일 집회가 열립니다. 매일 새벽에 세 번의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매일 저녁 9시에 예배를 드립니다. 매일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혼자서 신앙생활하기 힘들면, 교회에 오시면 됩니다.
부지런히 말씀을 읽고 듣고 쓰고 외워서 말씀이 내 안에서 피가 되고 살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가지가 무성해집니다.

그러면 ‘무성한 가지’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삶의 풍성함을 의미합니다. 샘 곁에 심긴 나무는 자연스럽게 가지가 무성해집니다.
무성한 가지는 풍성함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가지에 열매가 맺힙니다.

이것은 요셉의 삶을 연상시킵니다. 요셉이 국무총리가 되었을 때, 풍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곡식을 창고에 모아들였습니다.
그 후에 주변 나라에는 기근이 들었지만, 애굽은 부자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가족 70인을 다 먹여 살렸습니다.
주변 나라에서는 기근이 들었지만, 요셉은 끄떡없었습니다. 요셉은 샘 곁의 무성한 가지였습니다. 기근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는데, 요셉은 샘 곁의 무성한 가지였습니다. 마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변 나라에서 도움을 요청하러 애굽으로 왔습니다. 요셉의 형들도 도움을 요청하러 애굽으로 왔습니다. 나중에는 야곱도 애굽으로 왔고, 모두 고센 땅에서 먹고 살게 되었습니다.

‘샘 곁의 무성한 가지’가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가정에서 샘 곁의 무성한 가지가 되면, 여러분 한 사람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살게 됩니다.
샘 곁의 무성한 가지는 기근이 와도 끄떡없습니다. 여러분이 샘 곁의 무성한 가지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이 샘 곁에 서 있으면 됩니다.
요셉 한 사람으로 인해 요셉 가(家)의 모든 사람이 먹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의 가족은 기름진 고센 땅에서 거대한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삶은 부요합니다. 풍요합니다. 물질적으로 부요할 수도 있지만, 영적으로 부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한 삶을 살게 됩니다.
물질적으로 부족한 사람은 물질적 가난을 이겨낼 만큼 영적으로 부요하면 됩니다. 영적으로 부요하면, 얼마든지 감사할 수 있습니다.
물질적으로 부요해도 항상 힘들게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물질적으로도 부요하고, 믿음도 좋다면, 정말 좋습니다. 그런데 물질의 유무와 상관없이 영적으로 부요한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풍성함을 이야기할 때, 기쁨이 충만하고, 지혜가 충만하고, 사랑이 충만한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이것이 진짜 복입니다.
사랑이 충만하지 않으면, 다른 것이 소용 있겠습니까. 몸은 건강한데, 사랑이 충만하지 않고 기쁨이 충만하지 않다면,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0:10).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은 구원의 복을 의미합니다. 더 풍성히 얻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현재적 삶 속에서 누려야 하는 부요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으면, 바닥을 긁는 삶을 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늘 끙끙 앓고 힘들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바울을 보세요. 인간적으로는 힘들게 살았습니다. 감옥생활도 했고, 쫓겨 다니기도 했고, 굶주리기도 했습니다. 그가 불편한 삶을 산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불행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감옥 안에 있었지만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말했습니다(빌 4:4).

그리고 바울이 쓴 서신을 보면, 감사로 넘쳐납니다. 고린도후서 6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라고 말했습니다(고후 6:10). 이것이 복입니다.

사도 바울의 사역은 아름답고 풍성한 열매를 많이 맺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삶은 샘 곁의 무성한 가지였습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구원 받는 사람이 생겨났습니다. 믿음의 백성들, 제자들이 생겼습니다.
그는 샘 곁의 무성한 가지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요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삶은 어려웠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은혜를 체험하며 살았습니다. 그의 삶은 쪼그라들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영적 여유로움이 항상 있습니다. 영적 부요함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넉넉합니다. 샘 곁의 무성한 가지와 같습니다.
복음 안에 사로잡힌 부활의 신앙이 바울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고, 뿌리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본문 창세기 49장 22절에 보면,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풍성함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갔습니다. 요셉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복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좋은 영향력을 끼쳤다는 의미입니다.

창세기 39장에 보면, 요셉으로 인해 보디발의 집이 복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여러분으로 인해 여러분의 직장에서 매출이 신장되는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만 먹고사는 생활을 해서는 안 됩니다. 가지가 담을 넘어야 합니다.
요셉은 자신만 잘 된 것이 아닙니다. 자기 가족만 먹여 살린 것이 아닙니다. 애굽과 주변의 나라까지 먹여 살렸습니다.
이것은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이 성취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라고 약속하셨습니다(창 12:3). 여기서 ‘복’은 전체적이고 종합적인 의미입니다.

우리가 복 받은 것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까? 나누는 것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복을 나눌 때, 복이 나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갑니다.
채워지지 않은 사람은 나눌 것이 없습니다. 채워진 사람이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가졌어도 결핍 증세를 느낀다면, 아직 채워지지 않은 것입니다.
결핍 증세를 느끼는 사람이 나눌 수 있겠습니까. 나눌 수 없습니다. 더 채워야 하는데, 어떻게 나눌 수 있겠습니까. 아직 만족하지 못하는데, 나눌 수 있겠습니까. 나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통해 우리를 축복하신 후에 우리를 통해 복이 흘러가게 하십니다. 구원의 복이 흘러가게 하십니다.
그래서 전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도는 내가 받은 은혜를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실 때, 우리는 받을 그릇을 준비해야 합니다. 준비한 그릇이 차고 넘치면, 또 다른 그릇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래서 흘려보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흘려버리고 낭비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주는 것, 나누어주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소비 중심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쓰기에도 모자랍니다. 이 사회는 과소비를 부추깁니다. 그래서 아무리 벌어도 부족함을 느낍니다.
지금은 연봉이 올라가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삶을 규모 있게 정리하고, 욕망을 다스려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모자랍니다.

사람들이 부족함을 느끼니까 나누지 못합니다. 그래서 온전한 축복 안에 있지 못합니다. 진정한 축복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금 상태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때 느끼는 충분함은 여호와가 나의 목자이시기 때문에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때문에 충분합니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외부적인 요인으로 인해 충분함을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 인해 만족함을 느끼게 되면, 부요한 자가 됩니다. 흘려보낼 수 있게 됩니다.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십니까.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재앙과 같습니다.
신앙의 최고 레벨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감사하는 삶입니다. 신앙의 절정에 감사가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왜 문제가 생겼습니까? 에덴동산은 완벽한 환경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고, 하나님께서 베푸신 완벽한 곳에서 아담과 하와는 부족함을 느꼈습니다. 감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었습니다. 그것이 인류의 재앙을 가져왔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상태가 얼마나 위험한지 아십니까. 무슨 죄를 지을지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사고를 칠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으로 만족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으로 만족을 느끼며 살아간다면, 천국의 삶이 시작됩니다. 감사가 넘칩니다.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며 살아가게 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할 뿐 아니라,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것은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한다면 하나님을 경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감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경험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입술에서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깊이 경험한 사람입니다.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서 살게 하시므로 우리의 삶을 뻗어나가게 하십니다. 남을 섬기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의 사람까지 빛나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 그늘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그 속에서 위로 받고 힘을 얻고 용기를 얻어 다시 일어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고통 받는 사람이 위로 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축복하시며 내가 받은 축복이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가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주변에는 여러분이 빨리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내가 샘 곁의 가지가 되어 담을 넘어야 합니다.
그래야 고통 속에 있는 주변의 사람들이 나로 말미암아 위로 받고, 소망을 얻고, 구원 받고,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는 샘 곁의 가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말라 비틀어져서 뿌리 뽑힌 나무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샘 곁의 무성한 가지가 되어 담을 넘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까지 복을 흘려보내야 합니다. 우리의 즐거움과 행복이 흘러가야 합니다.

본문 창세기 49장 23~24절에 보면, “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요셉을 힘들게 하는 사람이 요셉의 주위에 많았습니다. 그들은 적개심을 가지고 요셉을 학대했습니다. 마치 활을 겨누듯 요셉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더 강했습니다.

신앙생활하다 보면, 믿음생활을 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주변에 불신 세력이 얼마나 많습니까.
요셉은 전능자의 손을 힘입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요셉을 붙들어주셨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힘들게 하는 것은 사람도 아니고, 환경도 아닙니다. 우리가 전능자의 도우심을 경험하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는 데서 신앙의 묘미(妙味)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시련의 파도를 타고, 목적지까지 항해하는 법을 체득해야 합니다.
산이 높을수록 골짜기가 깊습니다. 어려운 상황을 극복함으로 인생이 더욱 깊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순풍에 돛단 듯 순탄하게만 흘러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장애물과 복병이 생기고,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마세요. 전능자의 손길이 우리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어려움들을 우리의 힘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실력으로는 세상과 싸워서 이길 수 없습니다. 온갖 술책과 간교함으로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말씀을 붙들고 산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리숙합니다.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간교와 술수, 중상모략 등 온갖 죄악이 가득합니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그 속에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 우리는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세상 사람들을 이기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을 이기려면, 그들보다 한 수 위여야 합니다.
우리의 방식으로는 세상 사람들을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리 떼 가운데 있는 양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이기고 지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요셉의 인생을 보세요. 요셉의 형들은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을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요셉의 힘으로는 그것들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어려움 가운데서 요셉을 빼내셨습니다.

전능자의 손이 보이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삶을 보면, 전능자의 손이 항상 있었습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손을 볼 줄 아는 것입니다.
힘들어도 말씀의 원리와 방법대로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손을 들어주실 것입니다.

본문 창세기 49장 24~25절에 보면,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24절에 보면, 하나님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야곱의 전능자’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25절에 보면,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리고 26절에 보면, “네 아버지의 축복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요셉을 축복하는데, 야곱의 이름이 등장하고, 하나님을 가리켜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요셉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축복은 야곱의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야곱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야곱은 문제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약점 투성이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자기 힘으로 복을 얻으려고 발버둥치고, 잔꾀를 부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그를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태중에 있을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그를 축복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축복하시기로 결정한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면, 그 문제를 고치고서라도 그를 반드시 축복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혀 소망 없는 백성일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구원을 안겨주시고 그를 축복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야곱의 인생을 보면, 하나님께서 왜 야곱을 축복하셨는지 알 수 없습니다. 천국에 가서 하나님께 물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결함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보다 나아서 구원 받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 중에도 훌륭한 사람이 많습니다. 성격 좋고, 매너 좋고, 매력적인 사람이 많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 중에도 성격이 까칠한 사람이 있습니다. 성격이 까칠해도 구원 받았습니다. 이해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보면, 오십보백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자비가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서를 미워하시고 야곱을 사랑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예뻐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은혜 받게 하시는가는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단어입니다.

야곱은 실패 투성이였지만,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야곱을 축복하셨습니다. 후에 야곱이 요셉의 자녀,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하는 것을 보면, 야곱은 두 팔을 엇바꾸어 얹었습니다. 야곱은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 위에 얹었습니다. 이것은 신비로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기로 결정하시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결정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편에서 주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될 것이 안 되고, 안 될 것이 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일반적인 은총을 넘어 특이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구동성으로 안 된다고 말하던 사람들을 무색하게 만드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야곱의 인생처럼, 무엇인가 안 되고, 일이 꼬여 힘들게 살아가는 분이 계십니까? 하는 일마다 어렵습니까?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본문은 그것을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절에 보면,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사람의 머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을 경험합니다. 사람의 머리로는 야곱의 인생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야곱으로 하여금 복을 받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말이 되지 않는 야곱으로 하여금 복을 받게 하시는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드러내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의 권능을 드러내시는 데 있습니다. 인간 야곱은 실패해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려 하셨습니다.
우리의 실수로 인해 우리의 인생이 망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임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후, 하나님과 우리는 공동 운명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편들어주실 수밖에 없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실력대로 우리의 인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실력으로 우리의 인생이 결론날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이후,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우리의 편이 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것을 알면, 우리는 조금 느긋해질 수 있습니다. 별 일이 일어난다 해도, 죽는다고 앓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창세기 49장 24절에 보면,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반석이 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요동하지 않으신다는 의미입니다. 환경으로 인해 요동하지 않으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반석 되시는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목자이시고, 우리를 돌보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했습니다(시 23:1).
우리는 이스라엘의 목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지켜보시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요셉의 삶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요셉의 삶에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요셉을 지키셨습니다. 망할 것 같았지만, 망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야곱의 삶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셨습니다. 요셉의 삶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셨습니다. 그래서 안 될 것 같았던 것을 되게 하셨습니다.

열심만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셔야 합니다. 아주 잘 될 것 같았는데,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안 될 것 같았는데, 막판에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잘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것입니다.
99% 될 것 같았던 일이 안 되는 것은 자기의 힘으로 그 일을 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안 될 것 같아서 눈물 흘리고 금식하며 기도해서 잘 되었을 때에는 우리의 입술에서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열심으로 사는 삶을 끝내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재주와 능력과 열심으로 살던 것을 내려놓으시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살려주십니다.

우리의 열심에 도취되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살지 않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너무 열심히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열심 안에는 불신앙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재주와 능력으로 살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대한 손길 아래 산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에 안정감과 여유로움을 줍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전능자의 손길 아래 있을 때, 세상 사람들이 절대 가질 수 없는 자신감을 갖게 됩니다.

전능자 야곱의 손에 우리의 인생이 달려있다는 것을 믿으면, 별 일이 일어난다 해도, 끄떡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를 붙들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대단한 능력을 가진 아버지의 자녀에게는 힘이 있습니다. 사고를 친다 해도 아버지가 나를 도와줄 것이라는 배짱이 있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이 그런 분이십니다. 야곱이 한두 번 사고 쳤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개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한두 번 도와주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야곱으로 하여금 문제를 뛰어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 자신만 복을 받게 하신 것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까지 복을 나누어주는, 복의 통로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믿음의 거장(巨匠)으로 세우셔서 그들의 자손들을 축복하게 하셨습니다.

쫓기는 인생이 아니라 이끌어가는 인생, 헤매는 인생이 아니라 길을 제시하는 인생, 남의 덕을 보는 인생이 아니라 남에게 덕을 끼치는 인생, 꼬이는 인생이 아니라 풀리는 인생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두려워하지 마세요.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야곱의 생애를 추적해보면, 결론은 하나,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 인생의 결론 역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손길로 우리를 붙들어주십니다.

전능자의 손을 의지하세요. 샘 곁의 무성한 가지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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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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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예배설교] 영적 상승기류를 타라 Friday Night Sermon

제목 / 영적 상승기류를 타라
본문 / 이사야 40:27~31

 

27.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28.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29.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30.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말세가 되면 피곤합니다. 이것이 말세의 특징입니다. 사람들의 왕래가 빨라지기 때문입니다. 교통이 발달하면, 편리해야 할 텐데,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피곤합니다.

본문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루살렘의 멸망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예언한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포로로 잡혀가는 상황을 그리고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피곤’, ‘곤비’, ‘무능’, ‘넘어짐’, ‘쓰러짐’이라는 단어가 눈에 띕니다. 개역한글성경에 보면, ‘쓰러지다’라는 단어 대신, ‘자빠지다’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자빠진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본문 30절에 보면,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소년은 쉽게 피곤해지지 않습니다. 남자 아이들은 지칠 줄 모릅니다. 힘이 넘칩니다. 아침이 되면 벌떡 일어납니다. 청년도 마찬가지입니다. 밤을 새도 끄떡없습니다.
그런데 소년과 장정이 지쳤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지치고 피곤하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한계를 의미합니다. 인간이 가진 힘의 한계를 의미합니다. 아무리 대단해보여도 한계를 넘어서면 무너진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외적인 면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사회적으로, 모든 면에 있어서 한계에 도달하면, 모두 무너진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도 이것을 늘 경험합니다.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고 난 후, 전반기가 지나가기 전에 무너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름이 지나고 나면 무너지기 시작하여 12월이 되면 만신창이가 되어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희생자가 많습니다. 부상자가 늘어납니다. 가정적으로, 영적으로 무너지는 사람이 많습니다.

1월에는 마치 천국에 도달할 것 같습니다. 영적으로 충만합니다. 송구영신예배를 드리고 나면, 뭐든지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현실은 만만치 않습니다. 몇 개월 지나고 나면, 삶이 힘들다고 구시렁거립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신다는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본문 31절에 보면, ‘새 힘’이라는 단어가 눈에 띕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왜 ‘새 힘’이라고 표현했을까요? 지금의 상황은 다른 힘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한계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지쳐버린 이스라엘 민족을 새롭게 회복시켜줄 수 있는 힘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우리를 쉽게 지치게 만듭니다. ‘피곤하다’는 말은 이 시대의 유행어입니다.
삶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사람들은 무너져버립니다. 지친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된다는 것이 희망적이지 않습니다. 이전보다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없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된다는 것은 피곤의 연장일 뿐입니다.

오늘 하루를 힘 있게 산 사람은 내일에 대한 기대감을 갖습니다. 그러나 오늘 피곤하고 지쳐있는 사람에게 내일은 절망적입니다.
삶이 피곤한 이유는 떠밀려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삶의 주도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삶을 자기 스스로 이끌어나갈 에너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만두고 싶은데, 그만두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하는 사람들은 떠밀려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모든 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안식이 없고, 자유가 없고, 평안이 없고, 기쁨이 없습니다.

이런 상태에 있으면, 침체(depression)를 경험하게 됩니다. 침체(沈滯)는 생각보다 강력합니다. 우울증도 일종의 침체입니다.
침체의 덫에 걸리면 무섭습니다. 영혼의 어두운 밤을 보내며 고통스러워합니다. 낙심과 절망, 좌절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울증이 되고, 심해지면 자살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모든 것을 그만두고 싶습니다. 극단적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 위험한 인생이 되어버립니다.

본문 이사야 40장 27절에 보면,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다.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는 하나님의 돌봄을 받지 못한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나를 모르신다. 내 삶은 하나님의 눈에서 벗어났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침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돌봄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런 일들이 많이 보입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갑자기 바닥을 쳤습니다.
엘리야는 굉장히 능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전천후였습니다. 갈멜 산에서 850대 1의 싸움을 치를 정도의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굉장히 강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엘리야의 힘이 빠져버렸습니다. 심각하게 지쳐버렸습니다.

엘리야만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시편 42편에 보면, 다윗에게도 그런 시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영혼이 낙심하여 매우 불안한 상태에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울증의 증세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와 요나 선지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영적으로 굉장한 침체 상태에 빠졌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선지자는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무너져버렸습니다.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무너졌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모델로 삼았던 사람이 주저앉아버렸습니다.
인간에게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지칩니다. 인간은 다 무너집니다.

본문에 보면, 소년과 장정이 그런 상태에 빠졌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이런 상태에 빠지면, 영적으로 침체되지만, 의심과 절망, 분노와 적대감이 생깁니다.
이런 증상이 나타나면, 삶이 추락합니다.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매우 위험해집니다. 앞으로 치고 나아가는 힘이 없습니다. 삶에서 공회전을 반복합니다.
어느 순간 우리의 삶이 주저앉아버릴 수 있습니다. 출구가 보이지 않고, 정체(停滯)에 빠질 때, 사람들은 의욕을 상실합니다.

오늘날 사회에 이런 현상이 많이 나타납니다. 우리의 인생이 쉬웠던 적이 있습니까. 굉장히 어렵습니다. 다양한 사건과 일들이 일어납니다.
30대까지는 무엇인가 시도해봅니다. 그래도 30대는 희망적입니다. 40대가 되면, 불안이 가중(加重)됩니다. 30대일 때는 희망이 남아있습니다. 젊음도 있습니다. 기회도 있습니다.
그런데 40대가 되면, 불안이 커집니다. 그 고비를 넘지 못하면 삶이 힘들어집니다. 50대가 되면, 무엇인가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모든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쪼그라듭니다. 50대가 되면, 새로운 것을 시도하여 성공할 가능성이 점점 줄어듭니다.
청년들에게는 취업과 결혼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 결혼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쪼그라듭니다. 마음이 위축됩니다. 피곤해지고 자신감이 사라집니다.

영적으로든 육체적, 사회적으로든 마찬가지입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 하다 보면, 영적으로 새로움과 감동이 줄어듭니다.
관록이 늘수록 주변의 기대도 늘어납니다. 책임이 많아졌습니다. 직분도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갈망할 만한 영적 에너지가 풍성하게 없으면, 모든 것이 힘들게 느껴집니다.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 에너지가 계속 나오고 흘러 넘쳐 파도쳐야 합니다.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런데 변화가 전혀 없습니다. 교회를 개척하면, 처음 1년 동안은 희망을 갖습니다. 무엇이든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3년이 지나도 아무 변화가 없다면, 절망에 빠집니다. 목회자로서의 정체성(正體性, identity)이 무너집니다. 목사가 맞는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 맞는지 의심합니다.
5년이 지나도 아무 변화가 없으면, 소명감마저 의심합니다. 소명감이 흔들립니다. 그렇게 되면, 가정도 흔들립니다. 그렇게 되면 침체됩니다. 우울해지고 바닥을 치게 됩니다.

본문 이사야 40장 28절에 보면,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난 상태에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2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누구인지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시고, 땅 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느끼는 피곤, 곤비(困憊)와 대조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힘이 고갈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힘은 고갈되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힘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현재이십니다.
하나님은 한때 우리를 너무 열심히 돌보셨기 때문에 이제 기력이 쇠해지셔서 우리를 도우실 수 없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를 도우실 수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에너지원(源)이십니다. 원자는 아주 작은 것인데, 분열이 일어나면 엄청난 파워(power)가 나옵니다. 그것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파워가 어느 정도인지 상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힘의 원천(源泉)이십니다.

왜 소년이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 넘어지며 쓰러집니까? 힘의 공급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힘을 공급해주십니다. 하나님의 공급은 마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삶에서 실패하는 이유는 우리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원래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공급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실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배터리(battery)와 같습니다. 계속 충전해야 합니다. 에너지를 계속 채워야 합니다.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힘이 계속 공급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내버려두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힘을 우리에게 공급해주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난 후에 우리를 버려두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계속 돌보십니다. 계속 우리에게 공급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유지하게 하십니다.

본문 이사야 40장 29절에 보면,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여기서 주어(主語)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피곤해지신다면, 그것은 큰일입니다. 우리는 갈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피곤을 모르시고, 지칠 줄 모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무시지도 않으십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땅 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땅 끝까지 창조하신 분께서 우리의 길을 모르시겠습니까. 아무도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매우 잘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상태를 잘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명철이 한없으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는 길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모릅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일을 해석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당황합니다.
가끔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우리의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내 인생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그때 우리는 명철이 한이 없으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길로 우리를 인도하실 수 있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해하는 길로만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명철하신 분이심을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께서 명철하신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미련하고 무지합니다. 한 치 앞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명철을 믿고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힘이 없고 빨리 지치고 넘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히 힘이 넘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한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빨리 힘이 빠져 쓰러집니다.
본문에 보면, 영원히 힘이 넘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힘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이 힘들고 어려워도, 능력이 있으면, 이겨낼 수 있습니다. 능력이 있으면 즐겁습니다. 아무리 힘든 일이 생겨도, 능력이 있어서 감당할 수 있으면 신납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피곤을 몸에 달고 살 것인지, 능력 있는 삶을 살 것인지 해답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능력이 무엇입니까?

본문 이사야 40장 31절에 보면, “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독수리는 유일하게 수직상승하는 새입니다. 바람을 이용하지 않고, 스스로 날갯짓하여 상공으로 상승하는 파워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여느 새들과 다릅니다. 다른 새들은 수직상승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날개’는 힘을 상징합니다. 강력하고 용맹스러운 이미지와 연관이 있습니다. 공군, 비행기라는 단어도 히브리어 날개와 어근이 같습니다.
전투기의 모습은 대단합니다. 순간적으로 날아오릅니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것과는 상관없습니다.

독수리가 언제 수직상승합니까? 위기의 상황에 수직상승합니다.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면,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때는 수직상승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도 위기의 상황이 닥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독수리같이 날아올라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삶의 위기 속에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삶의 곤란 속에서 우리의 날개에 힘을 실어주십니다. 독수리가 날개 치며 상공을 날아오르는 것 같이 날아오르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뒤에 애굽의 군사들이 따라오고, 앞에 홍해가 놓여있는 답답한 상황 속에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신 사건은, 마치 독수리가 날개 치며 하늘을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위기로부터 벗어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삶의 위기 순간을 내 힘으로 극복하려 하면 힘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수직상승하게 하시면, 의외로 쉽게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엎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위기의 순간에 놀라운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독수리같이 날아오르는, 수직상승하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면,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위기의 상황입니다. 그때는 솟아오를 수밖에 없습니다. 위기의 상황에서 우리의 신앙이 빛을 발하게 됩니다.

둘째, 본문 이사야 40장 31절에 보면,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여기서 ‘달음박질’은 최선을 다하는 삶의 모습을 의미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열심히 삽니다. 다른 어느 민족보다 열심히 사는 민족입니다. 이렇게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순발력은 있는데, 뒷심이 부족합니다. 이어령 박사는 “한국 사람들은 머리도 좋고, 순발력도 탁월하고, 능력이 많은 반면, 스태미나(stamina)가 부족하다.”라고 말했습니다. 뒷심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지구력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인생은 마라톤과 같습니다. 단거리 경기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순발력만 있어서는 안 되고, 지구력이 있어야 합니다.
한때 열심히 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한때 열심히 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멈추어버립니다.
지속적으로 변함없이 달려가야 승산(勝算)이 있습니다. 나중에는 지구력의 싸움입니다. 힘을 언제까지 지속적으로 꾸준히 낼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이것이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한 해의 시작부터 끝까지 동일한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멋진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기준과 목표를 정확하게 세우고, 꾸준히 달려간다면, 엄청난 인생이 됩니다. 그리고 그런 생활이 유지되면, 인생이 날아오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지구력이 없습니다. 하다가 그만둬버립니다. 용두사미(龍頭蛇尾)가 이런 때를 의미합니다.
처음에는 대단한 일을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뱀 꼬리처럼 의지가 스르르 식어버립니다. 에너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10년, 20년 변함없이 나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에너지를 유지해서 동일한 모습으로 나아가는 것은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도중하차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삶에 돌발적인 문제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삶이 변칙적(變則的)입니다. 가족이 아플 수도 있고, 사고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나는 잘하고 싶은데, 인생을 피곤하게 하고, 힘들게 하고, 곁길로 빠지게 하는 일이 많습니다. 내 힘으로 버틸 수 없는 일이 닥칩니다. 많은 변수(變數)가 발생합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도록 우리를 잡아당기는 듯한 상황이 발생할 때가 많습니다. 사건과 일들이 불가피하게 계속해서 발생하면, 한계를 느끼고, 삶을 포기해버립니다.
우리의 힘만으로 살아가려고 하면,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수많은 변수 앞에 주저앉아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내 힘만으로 버티기에는 어려운 상황이 우리의 삶에 수없이 발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이전 같으면, 벌써 끝났을 텐데, 하나님께서 힘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로해주시고, 용기를 주셔서 다시 일어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고비, 고비를 넘어가게 하십니다. 이겨내게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삶에 별별 일이 일어나겠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면, 고비와 위기와 여러 가지 사건 속에서도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셋째, 본문 이사야 40장 31절에 보면,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일상에서 반복해서 일어나는 일들은 우리를 지치게 만듭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반복해서 일어나면 힘들어집니다.
아무 감동 없이 살다 보면 피곤해집니다. 피곤이 쌓이고 쌓이면, 인생을 무너뜨릴 수도 있습니다.

일상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그런데 일상의 무게가 만만치 않습니다. 매일 우리에게 밀려오는 일을 처리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아이를 돌보는 일이 얼마나 힘듭니까. 남자 아이 둘을 키운다면, 전사(戰士)가 됩니다. 집은 전쟁터가 됩니다.
직장인들은 얼마나 힘듭니까. 이제 막 취직한 사람들은 얼마나 힘듭니까. 정신없습니다. 말단직원으로 코피가 터집니다.
간부가 되면 힘들지 않습니까. 간부가 되어도 힘든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다루는 것이 만만치 않습니다.

일상의 삶을 즐겁게 받아들이고
 감당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일상에서 승리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일상에서 승리하면, 모든 일에 승리합니다. 일상을 사랑하고, 매 순간 찾아오는 압박감을 이겨내는 것도 힘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저의 일상은 거의 똑같습니다. 저는 대부분의 시간을 사무실에서 보냅니다. 이전에는 사무실에서 가끔씩 바다를 내다보기도 했는데, 요즘은 사무실 블라인드를 내려놓았습니다.
사무실에서 책 읽고 설교를 준비합니다. 설교를 준비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많은 시간을 들여도 부족한 것 같습니다. 설교 한 편을 준비하는 데 30시간을 투자한다면, 좋은 설교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사무실에 있는 것이 즐겁습니다. 사무실에서 책을 읽고 설교를 준비하는 것이 즐겁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는 것도 즐겁지만, 설교하는 것도 즐겁습니다. 강단에 서는 것도 즐겁습니다.

일상은 똑같은 생활의 반복이지만, 오늘이라는 평범한 일상을 잘 살아야 좋은 인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매일 일상에서 찾아오는 수많은 일 속에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즐겁게 생활한다는 것은 보통 은혜가 아닙니다.

일상에서 지치지 않는 사람은 멋진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의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아도 일상의 삶 속에서 피곤해하지 않고 즐겁게 살 수 있다면, 그것은 놀라운 축복입니다.
여러분의 일상 속에 궂은 일, 힘든 일이 있어도, 그것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위로부터 부어지기를 축원합니다.

구멍가게를 운영하더라도 그것을 통해 가족을 먹여 살리고, 자녀들을 공부시킨 것을 감사하고, 자신의 삶을 사랑해야 합니다. 죽지 못해 할 수 없이 지겹게 살아가는 것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서 우리에게 와 닿는 최고의 명 문장은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입니다(사 40:31). 여기서 힘의 근원, 파워의 출처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라는 단어가 매우 중요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어디에 플러그 인(plug in) 해야 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집에 가면, 휴대폰을 충전기에 꽂습니다. 배터리를 오래 사용하면 방전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집에 가면, 휴대폰을 충전기에 꽂습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힘이 빠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연약해질 때,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노력해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수렁에 빠집니다.

우리는 살아가다가 문제를 만나면, 우리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씁니다. 우리는 힘들면, 더 좋은 방법, 더 좋은 묘수(妙手), 더 좋은 수단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힘들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시는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라고 말했습니다(고후 12:10). 사도 바울은 왜 약한 때에 강함이라고 말했습니까? 우리에게서 힘이 빠질 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서 힘이 빠질수록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약해도 괜찮습니다. 약함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의 능력에 따라 적당히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적당히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자기관리를 너무 잘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살아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잘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려면, 자신의 힘이 다 빠진 한계상황을 경험해야 합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다 한 후에 인간의 절대 한계를 느껴봐야 합니다. 절박한 순간에 하나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자신의 재능과 능력만 믿고 살아가지 마세요. 한계에 도전하세요. 밀고 나아가보세요. 끝이 어딘지 경험해보셔야 합니다. 우리의 힘이 소진되었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새 힘은 인간의 힘이 아닙니다. 새 힘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입니다. 그 힘은 우리의 상상을 넘어섭니다.
우리가 주의 일을 할 때,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일하면 무너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새 힘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을 체험해보아야 합니다.

“나에게 힘이 없다, 나에게 능력이 부족해서 할 수 없다”라고 말하지 마세요. 우리가 연약하고, 우리에게 한계가 있다는 것은 전혀 문제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새 힘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우리 자신을 믿었다가는 큰 일 납니다. 그런데 우리가 연약하다는 것이 다행입니다.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머물러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보세요. 에너지가 넘치고, 열정이 흘러넘치는 사람이라도 그것을 믿고 살았다가는 한 방에 무너집니다. 누가 봐도 대단해 보이는 사람이지만 한 방에 무너집니다.
그런데 사람의 눈에는 약해 보이고, 힘든 것처럼 보이는데, 무슨 일이든 잘해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겉모습이나 자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디에 연결되어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에너지 공급처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됩니다.
우리를 볼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연약할수록 더 좋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접속되어있으면, 하나님의 힘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흘러옵니다. 우리가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달려가려면, 항상 하나님을 앙망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휴대폰을 가지고 있다 해도, 매일 매일 충전해야 합니다. 충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가 지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면서 살아가려면,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날마다 하나님께 엎드려야 합니다.

말씀 묵상과 기도생활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경건생활을 잘 해야 합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꾸준히 기도함으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갈망해야 합니다. 무엇인가 하려는 것보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마틴 루터는 “나는 바쁠수록 더 기도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일이 많으면,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니 더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그런데 일이 많고 바쁠수록 기도 시간을 더 늘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데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할 일이 많아지면, 일에 몰두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면, 금방 방전되어버립니다. 일이 많으니 잠시 충전한 후 다시 일에 몰두합니다. 이렇게 하면, 금방 지쳐버립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갖지 않고, 일에 몰두하면, 하나님의 일을 자신의 힘으로 하려다 보니 힘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부어주시는데, 하나님께 접속하지 않기 때문에 힘듭니다. 우선순위(priority)가 잘못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하나님을 기다리는 데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은 절대 낭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으면, 우리의 힘으로 무엇인가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기다려야 합니다. 본문 31절에서 여호와를 앙망한다는 것은 기다리는 것(wait)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다릴 때, 기다림을 통해 채워짐을 경험하게 됩니다. 평안이 옵니다. 안정감이 옵니다. 염려가 사라집니다. 근심이 물러갑니다. 참된 자유가 옵니다.
나를 짓누르던 무겁고 어두운 생각이 떠나가고, 하나님 안에서 주어지는 평강과 자유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독수리가 날개 치며 하늘로 오르는 것 같은 새 힘이 채워집니다.

우리를 누르는 잡다한 생각이 우리를 잡아당기고 있습니다. 그것이 염려입니다. 내가 하려는 대로 되지 않으니까 악을 쓰게 되고, 스트레스를 받으며 짓눌려있습니다.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까 지쳐버립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임재 앞에 있으면, 모든 것이 사라져버립니다. 나를 끌어당기던 것이 없어집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끌어올리시는 것을 느낍니다. 우리에게 새 힘이 생깁니다.

독수리가 하늘로 치솟아 올라가면, 다른 것이 더 이상 방해하지 못합니다. 독수리가 날개치며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은 기막힌 표현입니다.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고 날아오릅니다. 제한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을 때입니다.
우리는 언제까지 하나님을 기다려야 합니까. 내 안에서 힘이 흘러넘치기까지 하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새 힘을 얻는다는 동사의 실제적 의미는 더 좋은 것으로 바꾼다는 것입니다. 대체(代替)하다, 교환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대체될 때, 우리에게 새 힘이 주어집니다. 완전히 방전되었는데, 새로운 배터리로 갈아 끼운 것입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영혼에 솟구치는 힘이 생깁니다.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은혜 받고 나면, 새로운 힘이 생깁니다.
매일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생활을 꾸준히 한 사람은 에너지가 방전되는 시간이 없습니다. 언제나 충전되어있습니다. 언제나 충만함이 있습니다.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새 힘을 주신다고 할 때, 그냥 주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충만히 주십니다. 풍성하게 주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이라고 표현했습니다(엡 3:8).

하나님을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어느 순간 솟아오릅니다. 비상(飛上)합니다. 수직상승합니다.
왜 염려하는 삶을 삽니까? 날아오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갇혀있기 때문입니다. 왜 스트레스 속에 살아갑니까? 비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눌려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힘을 주실 때에는 그냥 주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적을 두시고 힘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적 없이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십니다.
새 힘을 얻으면, 독수리가 됩니다. 땅을 기어 다니지 않습니다. 바닥을 치며 헤매지 않습니다. 영원히 피곤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 받으시기 바랍니다.

삶의 출력을 높이세요. 열심히 한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한계가 있습니다. 한계를 느껴야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의 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플러그 인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끊임없이 공급받아야 합니다.

인간은 지치게 되어있습니다. 인간의 에너지는 방전됩니다. 영원히 힘이 넘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은 언제든지 절망적인 상황에 빠질 수 있습니다.
본문은 복음을 소개한 것입니다.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의 상태가 얼마나 절망적인가를 말해줍니다. 소진되고 방전되고 침체되고 실패하고 좌절하고 무너지고 깨어지고 낙심하고 바닥을 치고 기어 다니는 것이 죄 아래에 사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세상적으로 성공했다 해도 소용없습니다. 삶에 짓눌려서 꼼짝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그러므로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숨어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외면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힘이 빠질 때마다, 지칠 때마다 하나님께 나아가세요. 지치기 전에, 충만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세요.
방전될 겨를이 없을 정도로 끊임없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가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넘치는 힘을 공급받으면, 날아오르는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고출력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수직상승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흔들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가 새 힘을 얻을 것입니다. 무한한 힘이 위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연결되어있으면, 충만한 상태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새 힘을 주실 것입니다. 새 힘을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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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예배설교 / 둘 중 하나만 하라 Friday Night Sermon

제목 / 둘 중 하나만 하라
본문 / 빌립보서 4:4~7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세상을 바라보면, 기대하기보다 염려하게 됩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사람들은 염려하는 데 많은 시간을 사용합니다. 염려가 일상사(日常事)가 되어버렸습니다.
염려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염려하지 않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사람들은 ‘이 고비만 잘 넘기면, 모든 일이 잘 될 거야. 이제 염려하지 않아도 될 거야.’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 고비를 넘기고 나면, 또 다른 고비가 찾아옵니다.
염려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엄밀하게 들여다보면, 이 세상은 염려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인 것처럼 보입니다.

새로운 한 해를 기다리고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두려움과 염려가 섞여있는 모습을 봅니다. 신문이나 뉴스를 보면, 새로운 한 해도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합니다.
그리고 향후 10년 동안 한국은 거대한 소용돌이 안에 있을 것이라 전망합니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모든 영역에 있어서, 한국 교회 또한 10년 동안 어떻게 변할지 짐작할 수 없습니다.

염려는 인간의 삶에서 떠난 적이 없습니다. 시대마다 염려의 주제가 조금씩 바뀌고 있습니다. 염려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나이별로 염려하는 것이 다릅니다. 직업이 없을 때에는 직업이 없는 것으로 인해 염려합니다. 그러나 직업을 갖게 되면, 또 다른 염려가 찾아옵니다. 마치 기다리고 있다가 나타나는 것처럼, 우리에게 정확하게 찾아옵니다.

염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면, 멋진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염려 때문에 낭비하는 에너지와 시간은 엄청납니다. 감정적으로, 정신적으로 소모되는 에너지가 대단합니다.
그리고 염려는 또 다른 부작용을 낳습니다. 특히 연말이 되면, 염려가 많이 쌓입니다.

부모는 자녀에 대해 늘 염려합니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염려가 언제쯤 끝날 것 같습니까? 사업하는 사람들의 염려가 언제쯤 끝나겠습니까?
나이든 분들은 건강을 염려하십니다. 그것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학생들에게는 시험에 대한 염려가 있습니다. 학생으로 있는 동안에는 계속 염려합니다. 불안정한 경제 여건으로 인해 계속 염려하며 살아갑니다.

주변 환경을 보면,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학생이든 어른이든 청년이든 남자든 여자든 직장인이든 누구든지 염려하며 살아갑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신 분들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 때문에 염려합니다. 그런데 아이를 낳으면, 아이로 인해 염려하게 됩니다.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주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31~32). 염려를 이방인과 제자를 구별하는 구별점으로 보셨습니다.

제11계명이 있다면,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일 것 같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주제입니다. 우리가 염려하지 않는다면, 불신자와 뚜렷하게 구별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염려하는데, 우리가 염려하지 않으며 살아간다면,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正體性)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흉내 낼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염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27).
염려는 우리가 어디에 속한 자인가를 확증시켜줍니다. 염려는 우리가 믿음의 길을 갈 것인가, 불신앙의 길을 갈 것인가를 선택하는 기준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운명처럼 붙어 다니는 염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단순히 우리를 격려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26, 28).
이 말씀을 보면, ‘내가 지금 얼마나 힘든데, 새를 보고 꽃구경할 시간이 있나. 여유가 있어야 새도 보고, 꽃도 보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은 우리가 순종하기 어려운 주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본문 4절에 보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본문 5절에 보면,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본문 6절에 보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주제입니다.

첫째,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항상’ 기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둘째,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알게 하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두 사람에게나 가족에게라면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셋째,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단순히 염려하지 말라고 기록되어있다면 좋겠는데,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두 불가능해보입니다. 마치 에베레스트 산의 정상(頂上)을 오르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이 세 가지를 이룰 수 있다면, 그곳은 천국입니다.
마치 그림의 떡처럼 보입니다. 항상 기뻐하는 삶,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나타내는 삶,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곳은 천국입니다.

때때로 염려하지 말라, 가능한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어느 정도 지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아무 것도’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영어성경에 보면, “Do not be anxious about something”라고 기록되어있지 않고, “Do not be anxious about anything”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과연 이것이 가능합니까. 사도 바울이 치열한 인생살이를 모르고 말한 것은 아닙니까? 사도 바울은 결혼하지 않아서 현실감이 떨어지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삶을 가볍게 보고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무리한 강요인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이 “가급적 염려하지 말라”라고 말했다면, 우리가 화나지 않을 것입니다. 혹시 성경을 잘못 읽은 것은 아닌가 하여 눈을 닦고 다시 봐도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여기에서 걸려 좀처럼 뒤로 넘어갈 수 없습니다.

매일매일 밀려오는 수많은 문제들 속에서 숨 막히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본문의 말씀은 현실의 삶과 동떨어져있는 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 수백 가지 염려가 몰려오는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니….
이런 본문을 읽을 때에는 그냥 읽고 지나가버립니다. 현실에 와 닿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현실과 거리가 멀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와 상관없는 말씀으로 여깁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불가능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말한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의 기록은 무책임하게 내뱉는 넋두리가 아닙니다. 진리에 대한 무게를 느껴야 합니다.
이것은 현인(賢人), 성인(聖人)이 말한 것이 아닙니다. 공부를 많이 하여 학식이 있는 사람, 경륜(經綸)이 높은 사람이 말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진중한 태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해야 합니다. 현실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말씀이라도, 믿음으로 받아들이려는 태도로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을 수 있는 답을 이 말씀 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답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그러나 가능합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두 가지 주제를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는 소극적인 주제이고, 하나는 적극적인 주제입니다.
소극적인 주제는 “염려하지 마라”이고, 적극적인 주제는 “기도하라”입니다.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염려’이고,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기도’입니다.

본문에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은 기도와 연결되어있습니다.
기뻐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염려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염려의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 본문에서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은 염려의 대항마로 기도를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무 것도’와 ‘다만 모든 일에’ 이 두 가지 표현을 대칭적으로 사용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염려와 기도, ‘아무 것도’와 ‘다만 모든 일에’를 대칭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염려와 기도는 서로 반대편에 놓여있습니다. 하나를 붙들면, 다른 하나를 놓을 수 있습니다. 둘 다 붙들 수는 없습니다.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어느 쪽을 붙들 것인가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됩니다. 염려와 기도, 이 두 가지는 서로 반대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염려와 기도는 마치 물과 기름 같습니다. 서로 어울릴 수 없습니다. 물과 기름은 섞이지 않습니다. 따로 분리됩니다. 염려와 기도는 물과 기름 같습니다. 같이 있을 수 없습니다.
미국의 설교가 찰스 스윈돌(Charles Rozell Swindoll) 목사는 “염려의 리스트(list)를 기도의 리스트로 바꾸어라”라고 말했습니다. 염려 내용을 기도문으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염려를 기도로 바꾼다는 것은 우리가 들고 있는, 무거운 염려거리를 하나님의 손으로 옮겨놓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기도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본문 6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굉장히 섬세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기도는 단편적인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매우 디테일(detail)합니다. 굉장히 정교하게 조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본문 6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단어 하나도 놓칠 수 없는 알맹이만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모든 일에 기도와’입니다.
가장 일반적인 것을 먼저 말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하러 교회에 나오는 것 자체가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염려가 일어나면, 주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집안의 공기가 좋지 않습니다. 그런 때에는 창문을 열어서 집안의 공기를 바꾸어주어야 합니다. 환기(換氣)시켜야 합니다.
환기시키지 않으면, 좋지 않은 냄새가 몸에 배입니다. 심한 경우에는 질식할 것 같습니다. 좋지 않은 공기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염려의 환경이 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환기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관심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입니다.

문제가 있을 때에는 기도의 자리에 나아가는 것 자체가 염려로부터 벗어나는 첫 번째 단계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관심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입니다. 평소 우리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세상으로 나아가면, 우리는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립니다. 그렇게 하는 것에 익숙합니다. 하나님께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염려하게 하는 것에 집중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우리의 관심을 의도적으로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입니다.

염려에 싸여있는 사람을 보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인 것처럼 보입니다. 한숨을 쉽니다. 염려거리를 늘어놓습니다. 불신앙적이고 부정적인 말을 합니다.
마치 밀폐된 공간에 좋지 않은 공기가 가득 차는 것 같습니다. 그 속에서 염려가 더 자랍니다. 염려가 무럭무럭 자랍니다.

우리는 빨리 하나님께로 방향을 전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염려의 자리에 앉아있지 말아야 합니다.
염려의 자리에 둥지를 틀고 앉아있는 것처럼 미련한 짓은 없습니다. 우리가 무슨 재간으로 이길 수 있겠습니까.

계속 염려하고 있다는 것은 자신이 추구하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보면, 염려는 우상을 숭배하는 행위와 같습니다.
우상숭배가 무엇입니까? 주목하여 바라보는 것입니다. 계속 돈만 생각하거나 자녀만 바라보고 있는 것은 우상숭배입니다. 염려하는 형태의 우상입니다. 자신의 건강문제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한다면, 자신의 몸이 우상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관심을 돌리는 것입니다. 염려로부터 빠져나와 하나님을 주목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의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염려는 주님의 손으로 옮겨집니다.

둘째, 간구입니다.
간구(懇求)는 기도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것입니다. 집중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기도라기보다는 집중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께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로 방향을 튼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께 집중(concentrate)해야 합니다. 주님께 마음을 쏟아내어야 합니다.

염려가 무엇입니까? 생각이 분산(分散)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나누어진(double-minded) 상태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산란(散亂)합니다. 삶이 굉장히 힘듭니다.
염려가 많은 사람을 보면, 안정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고를 자주 일으킵니다. 실수를 자주 합니다. 정신없이 행동합니다. 마음이 깨어졌기 때문입니다.

간구는 기도의 적극적인 형태입니다. 그러므로 가볍게 기도하고 끝내어서는 안 됩니다. 기도가 깊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훈련이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깊이 기도하지 못하고, 얄팍하게 기도하는 데 머뭅니다. 기도가 깊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염려를 기도로 막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기도 속으로 깊이 들어가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염려 반, 기도 반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기도하기 위해 앉아있지만, 염려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런 것은 간구라고 할 수 없습니다. 기도 반, 염려 반인 경우는 기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간구는 기도의 세계에 깊이 빠지는 것입니다. 기도의 세계에 깊이 빠진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에 다른 것이 끼어들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깊은 교감(交感)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이에 염려가 끼어들 수 없습니다. 하루아침에 그런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염려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그런데 염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것을 간단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하는 것을 간단하게 생각하고, 가볍게 다루기 때문에, 염려가 몰려오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염려를 차단하려면, 기도 훈련을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기도의 영역에 있어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기를 원합니다. 한국 교회의 성도들이 기도를 많이 하지만, 기도하는 데 있어서 약합니다. 열심히 기도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기도의 깊이에 문제가 있습니다.
새벽기도, 철야기도 등 기도를 많이 합니다. 그런데 기도가 깊지 않습니다. 몰입해서 집중적으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몰입해서 집중적으로 기도하면, 염려가 한 방에 날아가 버립니다. 염려할 일이 생겨도, 기도가 깊어지면 끄떡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교감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간구는 우리가 도달하지 못할 산이 아닙니다. 간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노력해야 합니다. 열심히 노력해야 하고,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찬송가 288장의 가사처럼,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여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훈련 중 하나는 간구하는 것입니다. 교회사 속에서 깊은 기도의 세계 안으로 들어간 기록들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때로는 시간의 개념을 넘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기도에 취하는 경험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과 나 둘만 있는 듯한 경험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나를 흔들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염려가 점점 작아져서 나중에는 없어져버립니다.

셋째, 구하는 것입니다.
필요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염려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삶에 찾아오는 염려에 직면하지 않고, 염려를 무시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염려에 대한 그릇된 태도입니다. 현실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삶이 힘들면, 이럴 수 있습니다. 생각하면 머리가 터질 것 같으니 아예 생각하지 않으려고 염려를 밀어내어버리는 것입니다.
사태(事態)는 심각한데, 친구와 놀러 다니기도 하고, 해외여행을 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면, 다시 염려가 밀려옵니다.

염려는 거부하거나 가볍게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삶 속에서 경험하는 고통의 문제를 무시하고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주님께서는 염려할 만한 사실을 부정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염려를 부정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염려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인정하셨습니다.

염려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직시하고 인정할 때, 구체적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염려하는 문제를 정확하게 직시한 사람은 정확하게 기도합니다.
그러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사람은 모호하게 기도합니다. 왜 기도하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기도하게 됩니다. 염려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실의 문제 속으로 밀고 들어가는 기도를 하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으려면, 모든 일에 기도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염려하게 하는 것들을 놓치지 않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으려면, 모든 일에 대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기도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문제가 너무 커서 하나님께 부담을 드리지 않으려고 기도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불편해 하실까봐 기도하지 않습니다.
매우 오랫동안 응답되지 않은 기도는 더 이상
 기도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도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찮게 여겨서 기도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본문 6절에 보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여기서 ‘아무 것도’와 ‘모든 일에’를 주목해서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삶의 모든 영역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상세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삶의 문제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삶의 모든 영역을 직시해야 상세하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신기한 것은, 우리가 기도하지 않은 틈새로 염려가 밀고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적극적으로 기도해야 하고,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비 오는 날, 한 자매가 버스를 기다리다가 다 젖어버렸습니다. 자매는 “하나님, 버스가 오게 해주세요.”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버스 여러 대가 한꺼번에 왔습니다.
그런데 자매가 기다리던 버스가 아니었습니다. 자매는 실망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버스 보내달라고 기도했는데, 왜 응답하지 않으십니까?”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버스 보내줬잖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매는 “제가 타야 하는 버스는 501번인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 501번 버스라고 말하지 않았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재미있게 꾸며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우리가 염려할 때에는 매우 상세하게 염려하는데, 기도할 때에는 매우 엉성하게 기도합니다. 이것이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상세하게 염려하는 것 이상으로 상세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정확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문제는 너무 커서 기도하지 않고, 어떤 문제는 너무 작아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데 있어서 구멍이 매우 많습니다. 그래서 기도일지를 쓰는 것이 아주 유용합니다.

기도 속으로 깊이 들어가 살펴보세요.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엉성한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고통의 문제도 한두 종류가 아닙니다. 우리의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우리가 삶에서 경험하는 상처도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우리가 겪는 스트레스도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우리의 무거운 짐 또한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어두운 감정 또한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우리가 삶에서 느끼는 피곤함, 살아가면서 갖는 욕망, 살면서 느끼는 필요 또한 엄청납니다.
우리가 왜 염려하며 사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이에 반해 우리의 기도는 매우 엉터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실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넷째,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즉 감사기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매우 상세하게 말했습니다. 감사는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것에 대한 반응입니다. 은혜를 아는 자가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는 은혜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뿌리에는 감사가 기본적으로 깔려있어야 합니다. 기도의 바탕에는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감사기도에 대해 아주 많이 강조했습니다. 우리가 염려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 여기에 있습니다.

감사는 하나님께로 향하는 마음입니다. 주신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주신 분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깊어질 때, 염려는 자연스럽게 소멸됩니다. 그러므로 감사와 염려는 같이 있을 수 없습니다.

주석가 윌리엄 헨드릭슨(William Hendriksen) 박사는 “감사가 없는 기도는 날개가 없는 새와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감사가 없는 기도는 하늘에 도달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감사를 놓치는 이유는 현재의 어려움에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전에 베풀어주신 것을 매우 쉽게 잊어버립니다.

시편 103편 2절에 보면,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망각하는 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망각하는 것은 염려를 불러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받은 은혜를 반복해서 회생(回生)해야 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일을 경험합니다. 힘든 일도 겪습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을 많이 경험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금 이 시간 살아있는 것은 기적이요 은혜입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매일 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설교 한 편을 준비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감사기도를 할 때, 대충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매우 상세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깊이 들여다보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을 매우 가볍게 다룹니다.
감사기도를 할 때, 자신만을 보며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만을 생각해도 감사하지만, 가족들을 생각하면, 가족들로 인해 감사한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함께 믿음생활을 하는 교우들을 보세요. 그들로 인해 감사한 일이 많습니다. 교회 공동체와 나라를 생각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것들을 보면, 나라는 존재가 그냥 있는 것이 아님을 느낍니다.
감사가 파도처럼 밀려오면, 염려는 사라져버립니다. 그러므로 소극적으로 감사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기도에서 핵심적인 것은 기도의 대상입니다. 기도의 종류, 기도의 형태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는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나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기도를 받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의 기도에 귀 기울이십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만 가져도, 대부분의 염려는 사라져버립니다.

기도는 우리의 관심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현실 바깥에서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아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잘 이해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삶에서 느끼는 삶의 무게, 살아가면서 느끼는 고통, 우리가 경험하는 치열한 삶의 현장을 주님께서 매우 잘 아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주님이 우리의 삶을 피상적으로 이해하신다면, 주님께서는 ‘염려’라는 말을 사용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삶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삶의 초점이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날 때, 염려가 찾아옵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하나님 없는 삶입니다.
가장 염려스러운 삶은 아버지가 없는 삶입니다. 염려는 무서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없는 삶은 가장 무서운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관심을 살려내는 것입니다. 기도, 간구, 감사의 초점은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필요를 구하더라도,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기도가 우리의 필요로부터 시작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집중함으로 우리의 진정한 필요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기도의 출발은 나의 필요로부터 시작되었지만, 기도가 깊어지면, 하나님께서 내 삶에 가장 필요한 분이시요, 하나님께서 내 삶의 전부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한다면, 우리의 필요들은 중요한 주제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이 채워지면, 그 외의 것은 극복할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배고파서 울고 있습니다. 아이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우유인 것 같습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엄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으로 인해 충분함을 경험하면, 우리의 삶에서 초조함은 사라집니다.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자유함이 생깁니다.
가장 시급하고 절실한 것이 채워졌습니다. 그 외의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면 감사하고, 주시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필요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필요들은 우리를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는 수단일 뿐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께 대한 집중도를 높이는 것입니다. 기도 훈련은 전심으로 여호와의 얼굴을 구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차이는 집중력의 차이로 나타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염려에 대한 집중력을 키우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집중력을 키우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반대로 합니다. 염려에 대한 집중력을 높이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집중하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염려에 대한 집중력을 키우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집중력을 키우면,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집중력이 깊어지면,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염려거리가 아무리 크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평강으로 완벽하게 덮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평강의 강은 거대하게 흐릅니다. 그에 비하면, 우리의 염려는 지류(支流)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평강과 염려는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본문에 보면, 기도 응답에 대한 다른 이야기는 기록되어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확실한 응답이 나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평강’입니다.
본문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라고 시작하여 하나님의 평강이 임하는 것으로 맺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임하면, 모든 것이 끝납니다.

염려는 세속 세계에서 몰고 들어오는 폐수(廢水)와 같습니다. 기도는 하늘의 청정(淸淨) 공기를 우리의 영혼에 밀어 넣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무엇으로 가득 채우시겠습니까. 답은 분명합니다. 고민할 이유가 없습니다. 기도와 염려 중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둘 다 할 수는 없습니다.

염려하며 사시겠습니까? 평강 가운데 사시겠습니까?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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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예배설교]시작하신 분이 끝도 책임지신다 Friday Night Sermon

 

제목 / 시작하신 분이 끝도 책임지신다
본문 / 빌립보서 1:3~6

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5.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오늘날 우리는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문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내면에 있는 자아는 욕구를 충족시키라고 부추깁니다.
자아의 욕구는 끝이 없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자아는 우리의 욕구가 채워지기를 원합니다.

연말이 되면, 마음이 괴로운 분이 있을 것입니다. 왜 마음이 괴롭습니까? 자신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자아에서부터 욕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자아는 현대인들에게 우상입니다. 자아는 끝없이 요구합니다. 그래서 늘 목마릅니다.

자아의 욕구가 많은 인생은 만족할 수 없습니다. 끝없이 전쟁을 치릅니다. 그 삶은 불안정합니다. 자아의 욕구가 우리의 삶을 어디로 이끌어갈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이것을 원하지만, 내일은 또 무엇을 원할지 알 수 없습니다. 오늘은 이만큼을 원하지만, 내일은 얼마나 많은 것을 원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만족을 느끼지 못하며 고통 속에 살아갑니다.
세상에서 들려오는 고통의 소리에 귀기울여보면, 모두 자아에 시달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에게 따뜻한 격려를 쏟아놓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른 서신서에서는 볼 수 없는 내용을 빌립보서 앞 부분에 기록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에게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한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에게 감사와 기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본문 5절에 보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기록되어있습니다. 본문 5절에 보면,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빌립보교회가 처음부터 지금까지 시종일관 똑같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가 처음과 끝을 동일하게 유지하고 있는 비결은 그들이 복음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변함없이 그 길을 달려가게 만든 힘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본문 6절에 보면,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바울은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출발점, 그들의 행위의 출발점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의미입니다.

지금 우리가 무엇을 얼마나 열심히 하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열심을 내게 만드는 힘이 무엇인가가 중요합니다.
우리 안에서 나오는 열정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인간적인 열심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사람의 지혜를 동원해도, 그것은 언젠가 동납니다.

중요한 것은 출발점입니다. 내가 시작했는가, 주님께서 시작하게 하셨는가가 중요합니다. 출발지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본문 6절은 시작점을 말합니다. 바울은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예수 그리스도이신가”라고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인생은 다릅니다. 자아로부터 시작한 인생과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인생은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 안에 있는 자아를 다스리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자신의 욕망대로, 충동적으로 살아가려는 우리의 생각을 다스리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 안에 새로운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착한 일을 우리가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우리가 착한 일을 하는가 하지 않는가보다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누구인가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우리 안에서 무슨 일을 하시는가가 중요합니다.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예수의 날까지 착한 일을 이루실 것인데,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분은 우리 안에 좋은 생각과 착한 생각을 일으키십니다. 우리 안에 거룩한 욕구를 불러일으키십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성령께서 도우셔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를 이끌어내셔야 합니다. 진짜 기도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처음에는 내가 기도합니다. 그러나 내가 기도할 때에는 언제나 중언부언합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성령께서 우리를 기도로 이끌어 들이십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성령께서 우리의 귀를 열어주십니다. 말씀하시는 분이 우리의 귀를 열어주십니다.

기도는 우리가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는 것을 따라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기도할 때, 아버지의 뜻을 따라 기도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 안에 거룩한 생각, 착한 생각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개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하나님을 위해 기도하도록,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를 이끌어 가십니다.
그래서 우리 개인의 욕구는 줄어들고, 하나님의 뜻이 내 안에서 점점 커져가게 하십니다.

우리가 실패하는 것은 우리의 갈망이 우리 자신에게 집중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바람이 우리 자신에게 기울어져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집중되어있는 기도를 하고, 자신에게 집중되어있는 삶을 살면, 기쁨이 점점 줄어듭니다.
마음이 휑하고, 마음이 어둡습니까? 내 속에 어떤 갈망으로 채워져 있는지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31). 이것은 단순히 염려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의 초점을 자기 자신에게 두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 얽매이지 않게 하십니다. 바울은 자신의 신변의 문제로 인해 힘들어하지 않았습니다.
‘기쁨의 서신’ 빌립보서를 기록할 때, 바울의 상황이 어떠했습니까? 바울은 감옥 안에 있었습니다. 그는 죄수였습니다. 그는 매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기뻐했습니다. 왜 기뻐했습니까?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에 대해서는 관심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전파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기뻐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힌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 때문에 사도 바울이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불순한 동기를 가지고 열심을 내는 사람들을 보며 언짢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라고 말했습니다(빌 1:18).
사도 바울은 자신이 어떻게 되는가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이 전파되는 것만으로 기뻐하고 기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복음에 참여하기를 열망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자유했습니다.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든지 상관없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비춰질 것인가를 염려하지 마세요. 사람들의 평가에 의해 울고 웃는 삶을 살지 마세요.
우리는 사람들과 비교하고, 사람들을 지나치게 의식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자유가 없고, 기쁨이 없습니다.

우리의 삶의 초점은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나라와 복음 전파에 우리의 삶의 초점이 맞추어져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들의 평가에 목을 매는 체면 문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적인 삶에 있어서도 사람들에게 멋지게 보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 시작된 착한 마음에 우리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 그 마음은 우리 안에 있는 욕구를 억제하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집중하게 하는 생각으로 충만하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거룩한 소원과 생각에 반응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자아의 욕구, 신변 등에 목을 매면, 우리의 삶이 굉장히 피곤해집니다. 그것은 이루어질 수도 없고, 이루어져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착한 생각, 거룩한 생각, 거룩한 기대감, 거룩한 소원을 심어주십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십니다.
내 안에 좋은 생각이 들어오면, 그 생각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확인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착한 동기를 일으키십니다. 무엇을 하는 데 있어서 동기(motivation)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동기가 부여되지 않으면, 우리는 움직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돈을 준다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 해도, 그 일을 해야 하는 궁극적인 이유와 목적을 분명히 깨닫지 않았을 때에는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동기부여입니다. 왜 이 일을 해야 하는가, 마음이 일어나야 합니다. 자기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든 동기가 부여되지 않으면, 오래할 수 없습니다. 공부하는 학생들이 왜 공부해야 하는가를 깨달으면, 스스로 공부하게 됩니다. 그런데 왜 공부해야 하는지, 왜 학교에 가는지를 깨닫지 못하면 제대로 공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억지로 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설복(說服)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감동하게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감동, 감화시키셔서 하나님을 위해 기쁨으로 복음에 동참하게 하십니다.
교회에서 억지로 일한다면,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억지로 봉사하게 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일을 망칩니다.
그러나 복음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감동을 주셔서 동기가 부여되면, 하나님과 관련된
 일이라면 무조건 좋아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시작점입니다. 누가 강요하거나 설득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설득에 의해 동기가 분명하게 부여되면, 그 다음에는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선한 동기를 일으키시고, 악한 동기는 막아주십니다. 불순한 동기, 옛 자아에서 나타나는 잘못된 동기를 물리치게 하십니다. 쓸데없는 욕구가 일어나지 않게 하십니다.
왜 인생이 낭비됩니까? 쓸데없는 일에 우리의 에너지를 낭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잘못된 동기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생각, 어두운 마음이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힘은 자발성입니다.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위해 생명을 바치도록 동기를 부여합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동기를 부여합니다. 복음은 생명을 바칠 만한 동기를 우리에게 부여합니다.
동기가 무엇인가에 따라 우리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복음으로 동기가 부여되어서 무엇인가 하고 있다면, 우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분이 우리를 끝까지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 삶에 동기가 부여되고 나면,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우리 안에 계속 동기를 부여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끝까지 헌신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기꺼이 주님을 위해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은 복음을 경험한 사람에게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반응입니다.
아무런 보상이 없고, 아무도 칭찬하지 않고, 오히려 욕한다 해도, 멈출 수 없게 하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복음입니다.
복음에 의해 설득당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복음이 나를 움직이게 합니다. 복음 하나만으로 충분합니다. 복음이 나를 이끌어갑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을 위해 기쁨으로 일하지 않는다면, 그 일을 언제 그만둘지 알 수 없습니다. 그 일을 하고 있는 동기가 복음이어야 합니다.
다른 것이 일시적으로 일할 수 있게 하겠지만 오래가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박수쳐주고, 선물을 주며 격려하지만, 그것으로는 얼마 가지 못합니다.

빌립보서에 보면, 바울은 감옥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쁨에 차있었습니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억지로 움직이게 하지만, 복음은 기꺼이 움직이게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사역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습이 변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늘 똑같은 마음, 똑같은 얼굴로 섬길 수 있는 것은 복음 때문입니다.

복음의 능력에 사로잡히면, 기쁨이 넘칩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행하신 일이 얼마나 놀라운가를 깨닫는 순간, 미칠 듯이 기쁩니다. 무엇을 아끼겠습니까.
복음이 우리를 기쁨으로 충만하게 할 때, 우리는 지치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복음의 힘은 우리가 느끼는 것보다 더 위력적입니다. 식을 줄 모르는 에너지를 만들어냅니다.
빌립보교회가 그런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 일을 시작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복음 안에서 우리 자신도 놀랄 만한 일이 일어납니다. 열정으로 끝없이 달려가게 만드는 에너지는 복음에서 나옵니다. 이것이 복음의 신비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라고 고백했습니다(행 20:24).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능력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함으로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거룩한 상상력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게 하실 때, 거룩한 상상력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상상력을 일으키심으로 착한 일을 시작하십니다.
믿음의 삶에는 상상력이 동원됩니다. 믿음은 보지 못한 것을 보게 합니다. 믿음의 삶을 살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상상력을 일으키십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눈앞에 보이는 것만 좇던 사람이 영의 세계 속으로 진입하려면, 상상력이 일어나야 합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하다 보면, 우리 안에 주어지는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 중 하나가 상상력입니다. 믿음의 삶은 상상력을 자라게 합니다.
믿음으로 상상력이 자랄 때, 그것이 비전(vision)이 됩니다. 믿음으로 성경을 읽거나 말씀을 들을 때, 상상력이 계발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상상의 세계 속으로 이끌어 들이십니다.

믿음의 세계는 신비롭습니다. 신비로움은 상상력을 불러일으킵니다. 우리가 가보지 않은 곳, 해보지 않은 것에 대한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 미래에 대한 상상력이 생깁니다.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상상하며 현재의 고난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단어들은 상징적입니다. 그러므로 문자적으로 해석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상징적인 언어 속에는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세계가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상징적인 언어를 읽으며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상상하게 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상상력을 펼칩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가보지 않아도 천국을 알 수 있습니다. 천국에 갔다 왔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의 이야기는 거짓말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읽으시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주신 천국을 상상해보세요. 천국에 갔다 왔다고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오히려 상상력이 죽어버립니다.
천국은 사람들의 언어로 표현하는 세계에 갇혀있지 않습니다. 천국은 사람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놀라운 곳입니다.

시는 상징적인 언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시를 읽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됩니다. 요즘은 비주얼(visual) 시대라서 별로 좋지 않습니다.
제가 어릴 때에는 라디오를 많이 들었습니다. 연속극을 눈을 감고 귀로 들으며 장면을 상상했습니다.

성령께서 귀를 열어주시고, 눈을 열어주셔서 새로운 세계를 보게 하십니다. 상상하면서 믿음의 세계가 자랍니다.
엘라 골짜기에서 다윗은 상상력이 뛰어났습니다. 다윗은 어린 시절부터 하늘의 별을 보며 하나님과 대화하며 상상력을 키웠습니다.
다윗은 들판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교제했습니다. 이를 통해 영적 세계가 더욱 실제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그의 눈에 보이는 골리앗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상상력이 커졌습니다. 신비의 세계가 그에게는 현실처럼 다가왔습니다. 그는 믿음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골리앗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시인(詩人)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세계를 크게 느꼈습니다. 그가 믿음으로 상상한 세계가 현실보다 더욱 강력하게 뿌리내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다윗의 삶에서 파워(power)가 되었습니다.

상상력이 자랄 때, 믿음이 자랍니다. 상상력을 통해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기대감이 일어납니다.
기도하면 상상력이 커집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 속에 이루실 것을 기대하게 됩니다. 그것이 꿈이 되고, 비전이 됩니다.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밧모 섬에 갇혀 시련과 고난과 환난 가운데 있으면서도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세계를 상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요한에게 거룩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를 생생하게 바라보았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이 그에게 생겼습니다.

오늘날은 사람들에게 상상력이 현저하게 줄어들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합니다. 그래서 눈을 부릅뜨고 살아가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실재(實在)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상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현대인들은 시를 읽지 않습니다. 이것은 좋지 않은 현상입니다. 시를 읽어야 상상력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시편을 읽어야 합니다. 그런데 시편을 문자적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믿음으로 마음을 열고, 시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의 눈을 여십니다.
시편을 읽을 때, 문자적으로 해석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시편을 읽으며 꿈을 꾸어야 합니다. 생각의 나래를 펼쳐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이 작동되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에만 매달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상상력을 불러일으키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해 우리가 상상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비전이 됩니다. 그리고 비전은 현실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께서 하실 일에 대한 기대감을 갖습니다. 그것이 상상력입니다.
가슴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커져야 합니다. 그때, 현실은 힘들고 어려워도,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서를 기록할 당시, 그는 감옥 안에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감옥 안에서 그가 승리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그가 복음을 위해 달려갈 수 있었던 힘은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는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에 대한 기대감을 가질수록 미래에 대한 상상력은 강력해지고 커져가고 실제화 됩니다. 마치 실제처럼 여겨지기 때문에, 현실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여러분 안에서 일하십니다. 말씀생활과 기도생활을 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세계가 있습니다.
기도할 때와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께서는 내 안에 무엇인가 생각하게 하십니다. 상상의 세계가 일어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상상력을 기르는 법을 훈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시편 62편 5절에 보면,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앞으로 이루실 것에 대한 그림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만 잠잠히 바라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소망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어도, 먹구름 사이로 새어나오는 빛줄기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은 상상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상상력을 가진 예언자였습니다.
현실은 암울했습니다. 예레미야, 에스겔이 보았던 현실은 참혹했습니다. 어두웠습니다. 절망적이었습니다. 기대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현실을 보면, 기대할 것이 아무것도 없고, 칠흑같이 어두운 밤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선지자들은
 어두움을 뚫고 비치는 한 줄기의 빛을 보았습니다. 마른 뼈가 가득한 상황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넘어 군대가 일어나는 것을 꿈꿨습니다. 그 상상력은 하나님께서 일으켜주신 비전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갇혀 매를 맞고 있으면서도 찬송했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찬송할 수 있게 만든 힘이 무엇일까요? 캄캄하고 폐쇄된 감옥에 있었지만, 그들은 하늘로부터 임한 빛줄기를 보았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거룩한 소원, 착한 생각, 거룩한 동기, 거룩한 상상력을 일으키심으로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이루어가십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여러분 안에 일어나는 소원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선한 동기가 일어나면, 그것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시작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고, 새로운 비전을 주셨습니다. 사명을 주셨습니다.
모든 것은 주님으로부터 왔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은 주님으로부터 출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시작하신 분이 끝내십니다. 주님께서 나로 하여금 일을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선한 마음을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선한 동기를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나로 선한 상상력을 갖게 하셔서 시작하게 된 일들은 하나님께서 시작하게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일을 끝내실 것을 확신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담력을 갖게 됩니다. 자신감이 생깁니다. 우리는 시작과 끝을 하나님께서 지배하신다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시작과 끝 사이에 별 일이 다 일어납니다. 그러나 시작하신 분과 끝맺는 분이 동일하다면, 우리는 그분을 신뢰해야 합니다.
주님은 알파와 오메가가 되십니다. 요한계시록 1장 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의 출발은 하나님이십니다. 끝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시작과 마침이 되십니다. 주님께서 끝내십니다. 우리 마음대로 결론나지 않습니다.

소설을 읽다 보면, 이야기가 예상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구성이 뻔하면, 독자(讀者)들이 흥미를 잃고, 읽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재미가 없습니다.
독자가 예상하는 대로 이야기가 진행된다면, 긴장감이 없습니다. 재미없는 소설입니다. 이야기의 구성이 싱겁습니다.
독자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이야기가 흘러갈 때, 독자들은 긴장하고 읽습니다. 작가의 손에 의해 이야기가 결론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독자는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느낍니다. 책을 다 읽을 때까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예측할 수 없을 때, 그 소설은 재미있습니다.
나쁜 사람들이 흉기를 들고 무리를 지어 주인공을 죽이려고 달려오지만, 독자들은 아주 재미있어 합니다. 나쁜 사람이 무리를 지어 주인공을 공격한다 해도, 주인공은 중간에 죽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이 죽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악인에 의해 결론나지 않습니다. 지금 일어난 불행한 사건은 우리의 인생의 운명을 가로막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시작과 끝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라고 자신을 소개하셨습니다. 우리는 시작점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손길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을 잡고 있으면, 아슬아슬할 때가 많습니다. 비가 많이 와서 물이 범람하는 가운데 계곡을 건널 때, 아이가 아빠의 손을 잡으려고 하면 위험할 수 있습니다. 아빠의 손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빠가 아이를 잡으면 안전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잡으셔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안전합니다. 하나님의 손은 강력한 손입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통치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오차가 없으십니다. 하나님의 손을 꺾을 자가 없습니다.

끝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 결정됩니다. 다른 것은 잊어도 됩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죽더라도 객사(客死)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품 안에서 끝나게 되어있습니다.
다윗은 그것을 알았습니다. 시편 23편 4~6절에 보면, 다윗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원수의 목전에 놓인다 해도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자신을 따라다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따라다니면, 소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놓치지 않고 반드시 나를 따라다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끝없는 사랑의 추격자가 되셔서 우리를 놓치지 않으시고, 우리를 붙잡으시고,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지금 일어난 일들과 상황에 의해 우리의 믿음이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자신이 기대하고 예상한 만큼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인해 속상해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삶은 진행형입니다. 하나님께서 끝이라고 하시기 전에는 끝나지 않습니다.

일이 꼬였다면, 반전(反轉)을 일으키시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편에서 보면 힘들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을 재미있게 만들어가십니다.
욥의 삶은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반전시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새롭게 놀랍게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이전보다 훨씬 아름답게 전화위복(轉禍爲福)시켜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현실이 어려울수록 끝이 더 기대됩니다. 하나님 때문입니다.

본문 6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빌립보서 4장 6절에 보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처음과 마지막은 하나님께서 쥐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면 됩니다.
왜 감사할 수 있습니까? 우리로 하여금 시작하게 하신 분의 손에 우리의 끝도 맡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뿐, 더 이상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노력하고 기도하지만,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이 있고,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을 다 했다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영역이 남아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열심히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발 물러나야 합니다. 바쁘게 움직인 손을 잠시 모아야 합니다. 손을 모으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먹 쥔 손을 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호흡을 가다듬으세요. 숨을 길게 내쉬세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귀 기울이세요.
이제 우리의 기도가 달라져야 합니다. 내려놓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우리의 편에서보다 하나님의 편에서 하실 일이 많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기도하며 열심히 살았습니다. 바쁘게 살았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친밀함을 나누어야 합니다.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 초조해하거나 조바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더욱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란다는 것은 단순히 체념하고 기다린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대한 결말을 쥐고 계시는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소망한다는 것은 막연히 상상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어주실 것이라는 강한 기대감을 갖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설정해놓은 높은 꿈을 이루어달라고 하나님을 닦달하는 것이 믿음은 아닙니다.

시편 130편 5~6절에 보면,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기다렸습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바란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세요. ‘하나님께서 꼭 주셔야 하는데…’라고 생각하는 것을 다 내려놓으시고, 하나님께 시선을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시키세요. 하나님만 신뢰하세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하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결정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삶은 우리의 손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수중(手中)에 있습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주님으로부터 시작된 일인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당장 접으세요. 자아의 욕구에서부터 출발된 것, 자아중심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삶에서 출발한 것이 있다면,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시작점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선한 마음, 주님께서 주신 선한 갈망, 거룩한 소원을 붙잡고 달려왔다면, 주님께서 그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기대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나아가면, 우리의 끝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 완성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생각을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소원을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갈망을 점검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고, 그것을 위해 달려왔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반드시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복음을 위해 끊임없이 헌신했던 빌립보교회를 바라보며 사도 바울은 감사하고 기뻐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힘든 감옥 안에 있었지만, 그가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안에 복음을 주신 하나님, 구원을 주신 하나님과 십자가의 은혜에 사로잡혀 달려왔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으로 인해 복음이 진보될 것을 믿고 기뻐하고 감사하며 흔들림 없이 살았습니다.

시작되시는 하나님, 끝을 책임져주실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안에 거룩한 소원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반응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안에서 거룩한 상상력이 날마다 자라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책임져주실 것입니다. 끝도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신뢰하세요. 하나님을 높여드리세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세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끝을 멋지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전능자의 손에 의해 우리의 삶이 완성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우리의 삶을 올려드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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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예배설교 /  고통의 터널 끝에서 마주친 하나님 Friday Night Sermon

제목 / 고통의 터널 끝에서 마주친 하나님
본문 / 욥기 42:1~6

 

1.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2.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4.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욥기는 사탄이 하나님께 시비를 거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욥기 1장 9절에 보면, 사탄은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라고 시비를 걸기 시작했습니다.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유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욥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잘해주시니까, 욥이 축복을 많이 받아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지, 만일 축복을 빼앗아버리면, 하나님을 섬기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욕하고 떠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가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영적 세계에서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영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니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욥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의 제안을 받아들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욥 1:12). 하나님께서는 사탄이 욥의 신앙의 진위(眞僞)를 시험하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사탄이 욥에 대해 하나님께 고발한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합니다. 사탄은 신자들의 믿음의 진위를 늘 공격합니다. 저 사람이 왜 예수님을 믿는가. 저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왜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왜 믿음생활을 하십니까? 예수님을 믿는 이유를 확인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재물의 복을 주셔서입니까? 건강의 복을 주시고, 자녀의 복을 주시고, 가정에 행복을 주셔서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과 은혜 등 감사할 것이 많습니다. 만일 내가 가진 것을 하나님께서 다 빼앗으셔도 예수님을 믿겠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허락이 떨어지자 욥에게 무차별적인 고난이 찾아왔습니다. 재산이 모두 없어져버렸습니다. 자녀들까지 잃었습니다. 나중에는 아내까지 그에게 저주하고 떠나버렸습니다.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욥은 혼자 남았습니다. 생명만 겨우 남았습니다. 모든 것이 한순간에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욥은 고통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습니다. 친구들은 욥에게 와서 욥이 당한 고난에 대해 다양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욥이 고난의 한가운데서 어떻게 반응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욥은 처음에는 고난에 대해 잘 대처했습니다.
욥은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욥 1:21).
모든 것을 잃고 난 후에 이렇게 고백한다는 것은 대단한 믿음입니다.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욥이 어느 단계에 이르렀을 때, 인내의 한계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조금씩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아주 험악해졌습니다. 욥이 하나님께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으시는 하나님에 대해 고분고분하지 않는 욥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욥은 하나님께 까다로운 질문을 하며 대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응답하지 않으시고, 아무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길고 긴 시간 동안 욥이 혼자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침묵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욥기에서 가장 힘든 부분은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장면입니다. 욥은 깊은 고통 속에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셨습니다.

아무리 부르짖어도 하나님께서 침묵하시고, 하나님께서 반응하시지 않으실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순간에도 욥은 쉬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 무엇인가 쏟아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대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하나님으로부터 찾으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화를 내는 것이 낫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나쁜 기도는 없습니다.

자녀가 아무리 버릇없이 행동해도 집 안에서 결판내려고 하는 것이 가출해버리는 것보다 낫습니다.
가정에서 부부가 싸우는 것은 괜찮습니다. 부부가 싸우는 것은 두 사람이 둘 사이에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것입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서로에 대해 관심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싸우지 않는 것입니다. 서로 무엇을 하든 개의치 않고, 따로따로 생활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할 것은 다 합니다. 주일예배에 빠지지 않고, 봉사도 하고, 새벽기도와 철야기도에도 열심히 참석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내어놓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외적 행동은 있는데,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상태입니다.

기도는 하지만, 자신이 진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허공을 치는 기도를 합니다. 그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향한 기도가 아니고, 의미 없는 되뇜에 불과합니다.
기도를 마치고 집에 가지만, 뭔가 허전합니다. 기도다운 기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형식은 있지만, 하나님을 향하고 있지 않습니다.

남편에게 밥도 차려줍니다. 집 청소도 합니다. 아이들도 돌보지만, 마음은 가정에서 떠난 여인과 같습니다.
대화하지만, 대화 속에 서로에 대한 애정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저 한 집에서 함께 살 뿐입니다. 정신적 이혼 상태와 같습니다.

욥의 인내는 우리가 생각하는, 점잖은 인내가 아닙니다. 처음에는 욥이 친구들의 변론에 대해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는 입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난에 대해 하나님께 대들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집요하게 달려들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그에게 회개하라고 했지만, 욥은 친구들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친구들의 말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정을 속이지 않고 우리 속에 있는 것을 털어놓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기도는 대부분 정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체면을 차립니다. 우리 속에 있는 것을 그대로 털어놓지 않고, 근사하게 꾸미려고 합니다.
마치 바리새인들처럼 모양을 내고, 규격화된 기도를 하려고 합니다. 형식을 갖추고, 예의를 갖추고, 미사여구로 꾸미려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통정(通情)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의문화가 있습니다. 속은 그렇지 않은데, 겉으로는 그럴 듯한 모습으로 행동하려고 합니다.
욥은 처음에 그렇게 행동했습니다. 그래서 욥은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라고 고백했습니다(욥 1:21, 2:10).

그러나 욥은 무조건 참지 않았습니다. 그는 지독한 고통의 한가운데서 힘겹게 사투(死鬪)를 벌이며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하나님을 떠났으면 좋겠는데, 그는 화가 난 상태에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욥은 고난 속에서 피를 토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깊은 곳에 쌓여있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습니다.

막다른 길에서 출구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곳으로 도망가거나, 다른 곳에서 해답을 얻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물고 늘어졌습니다.
욥은 고난 때문에 다른 곳으로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집요하게 하나님께 따졌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가볍게 생각하고, 간단하게 해답을 얻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 성급하게 결론내리고, 자신의 문제를 무마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으면서 이미 답을 얻은 것처럼 태연하게 행동하거나, 어려운 문제를 만나 매우 힘든 상태에 있으면서도 마치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 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문제가 너무 많아 그냥 문제를 덮어버린 것입니다.
너무 힘들어 생각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길이 없고, 답이 없다고 스스로 결론을 내려버린 것입니다.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데, 그것조차 싫어졌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기대를 끊어버렸습니다.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창자가 뒤틀릴 만큼 기도할 용기가 없어졌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고난이 찾아오고, 어려운 문제에 부딪치면, 답이 보이지 않고, 막막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불러도 대답이 없습니다.
너무 힘들면, 말씀을 들어도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해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통이 오면, 외로워집니다. 나의 고통 안으로 들어와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더 고통스럽습니다.

욥기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삶의 해답은 간단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고통은 다면체(多面體)입니다. 그래서 삶이 헷갈립니다.
고통에 대한 답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고통에 대한 답을 쉽게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얄밉습니다.

고통의 때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쉽게 답을 얻은 것처럼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솔직해져야 합니다.
화가 나면 화난다고 해야 합니다. 힘들면 힘들다고 해야 합니다. 이해되지 않으면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야 합니다. 죽고 싶으면 죽고 싶다고 해야 합니다.
따지더라도 하나님께 따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해도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속이 넓은 분이십니다. 맹숭맹숭하게 기도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창자가 끊어질 듯이 기도해야 하는데, 그렇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제 속에서 그런 기도가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문제를 풀려고 하는, 전투적 의지가 우리에게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결론을 내려버립니다.
그리고 점잖고 형식적인 기도를 되뇌고 있습니다. 의미 없이 맹숭맹숭하게 영양가 없는 미사여구로 기도를 꾸미고 있습니다.

우리는 욥기에서 십자가와 마주칩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난해(難解)한 사건입니다. 욥의 고난이 난해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이해하기 힘든 사건입니다.
십자가는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사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십자가를 내칩니다. 십자가를 미련한 것으로 여깁니다. 십자가를 무시합니다. 십자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경험하신 고통은 독특한 고통입니다. 어떻게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시고, 종이 되셔서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는지, 그 비밀을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토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독특한 고통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마 26:39).
예수님께서는 세 번 반복해서 기도하셨습니다.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의 터널을 지나시며 아버지께 절규하며 기도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에서 중요한 레슨(lesson)은 정직함입니다. 욥기를 보면, 욥은 자신의 감정을 매우 정직하게 여과 없이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하나님께 대들었습니다.
고통 속에서 정직해야 합니다. 고통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 정직해야 합니다. 정직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영혼 깊은 곳에서 진실하게 터져 나오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욥기를 통해 우리는 욥의 진실함을 배웁니다. 욥의 인내도 중요하지만, 욥의 진실함을 배웁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는 고통을 위장(僞裝)하거나 신앙이 좋은 체 하지 않았습니다.
정직해야 하는 순간에 자신을 위장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여러분이 처한 고통과 환경에 대한 여러분의 감정을 정직하게 드러내면, 이곳은 눈물바다가 될 수도 있습니다. 데굴데굴 구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고통을 위장하려 합니다. 고통을 합리화하려고 합니다. 고통을 멋지게 꾸미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정직함, 진실함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멋지게 기도하는 것을 듣고 싶어 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정직하게 기도하는 것을 듣고 싶어 하십니다. 고통의 한가운데서 나오는, 영혼의 정직한 고백을 듣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미사여구로 꾸며 자신을 감추어버린 기도에는 관심이 없으십니다. 사실 그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언어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가슴을 치며 펑펑 우는 것이 오히려 더 낫습니다.
영혼이 없는 기도를 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영혼이 없는 기도를 할 때가 있습니다. 기도하러 교회에 왔다고 해서 기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고 답답해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영혼이 없는 기도, 토해내지 않는 기도, 감정을 숨긴 기도를 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그런 기도는 하나님께로 향하는 기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기도하는지도 모른 채 기도할 때가 많습니다. 안락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셔가며 마치 음악을 감상하듯이 기도하는 것에는 우리의 진실한 마음이 표현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적 치열함이 묻어있지 않는 기도를 싫어하십니다. 시련과 고통과 환난과 어려움의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몸부림치며 끊임없이 다가가지 않는 기도를 싫어하십니다.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직면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고통보다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치명적인 약점은 가벼움입니다. 신앙의 형식만 남아있고, 내용은 얄팍해져버렸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의 고난에 매우 가볍게 다가갔습니다. 남은 고통 속에서 죽어 가는데, 친구들은 그럴듯한 교리로 무장한 교과서적인 답만 늘어놓았습니다.

저는 설교자이기 때문에 늘 그것을 고민합니다. 제 나이에 삶 속에서 머리로 이해되어지는 인간의 고난의 깊이를 몸에 어느 정도 습득하고 있지만, 성도들이 직면한 고통에 대해 말씀을 통해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고 너무나 쉽게 다가가 답을 주려고 하는 얄팍한 설교자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제게 있습니다.
좋은 말을 하는데, 얄미운 사람이 있습니다. 맞는 말을 하는데, 기분을 나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통의 바깥에서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모르는 사람이 고통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말할 때, 참기 어렵습니다.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는 “상처를 입어보지 않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흉터를 놀린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가진 상처는 겉으로 보기에 아주 작아 보이는 상처라도 그는 죽을 뻔한 경험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고난을 당할 때에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다가가십니까? 삶이 무너질 때,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착한 신자들은 하나님께 대들 생각을 감히 하지 못합니다. 현실은 받아들이기 힘들고, 이해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결론만 붙들고 애쓰지만, 속으로는 심히 불편하고, 하나님께 대해 불만을 가진 적은 없습니까.

문제를 피상적으로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 집요하게 다가가야 합니다. 욥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가져갔습니다.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쏟아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 생각 없이 고분고분한 신자를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신앙과 삶의 문제로 인해 깊이 고민하지 않는 사람은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신앙의 세계 안에서 씨름한 흔적 없이 믿음을 쉽게 가진 사람은 힘이 없습니다. 인생에 회오리바람이 불면,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저 고상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안에서는 요동치는데,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합니다.
분명히 문제가 있는데,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않습니다.

지성적이고 고상한 사람이라 하나님께 떼쓰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적당히 거리를 두고,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려고 합니다.
하나님께 무엇인가 해결해달라고 떼쓰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려는 마음도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사이에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냉랭합니다. 하나님과 주고받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무덤덤하게 하나님과의 거리를 유지하며 힘없이 신앙생활을 합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아주 좋아하는 것도 아닙니다. 어려움이 와도 그저 그렇고, 평안한 때에도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생명 없는 종교생활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다 보면, 세월이 흘러도 하나님과의 교제가 깊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야곱과 에서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에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어려움이 찾아와도 하나님을 찾으려는 마음이 그에게 없었습니다. 그는 철저히 육적(肉的)인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은 문제가 많았습니다. 치졸했습니다. 간사했습니다. 인간성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인생의 문제 앞에서 지독하게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과 씨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과 함께하실까요.

성경을 읽다가 이해되지 않으면, 하나님께 물어보아야 합니다. 인생에 문제가 있으면, 성경을 들고 고민하고 씨름해야 합니다.
답이 나오지 않으면,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답을 주세요.”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욥은 이전에도 하나님을 알았고,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그러나 인생에 거대한 폭풍이 몰아닥치고, 그 기간이 길어지니 욥은 흔들렸습니다.
욥은 매우 좋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생에 풍랑이 일어나고, 고통의 시간이 길어지니 욥은 흔들렸습니다.
친구들은 기막힌 답을 그에게 이야기해주었지만, 욥은 그것에 쉽게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직접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과 승부를 걸려고 했습니다.

인생에서 만만한 것은 없습니다. 인생 자체가 싸움입니다. 무엇과 싸우시겠습니까. 욥은 마귀, 친구와 싸운 것이 아닙니다. 욥은 하나님과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모든 결론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욥은 알았습니다.
길고 긴 고통의 터널을 지나는 가운데,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이 본문 욥기 42장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욥은 고통의 터널을 통과했습니다. 욥기 42장에 보면, 마침내 회복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욥기 42장에 보면, 욥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결코 가볍게, 쉽게 만난 것은 아닙니다. 그는 길고 길었던 고통의 터널을 통과한 후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냉랭한 교리적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머리로, 상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책으로 공부한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욥은 깊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솔직하게 질문한 사람들만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긴 고통 속에서 뒹굴고 소리치며 하나님께 원망하며 대들다가 마침내 그는 하나님과 마주쳤습니다.

욥기 42장 5절에 보면, 욥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신앙의 차원이 달라졌습니다.
그는 그동안 듣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보게 되었습니다. 듣는 것과 보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다른 세계의 일입니다.
듣기만 하던 사람이 자신이 들은 것을 직접 보게 되면 전혀 다른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눈으로 직접 보게 되면, 모든 전쟁이 끝납니다. 모든 시비가 그칩니다. 왜 말이 많습니까? 왜 애매모호합니까?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는 헷갈렸는데, 이제 보았습니다. 더 이상 헷갈릴 것이 없습니다.
욥은 마침내 하나님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귀로 듣기만 하다가 이제는 눈으로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고통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고통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고통이 이해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하나님에 대해 오해하고 있던 것이 풀렸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문제가 있어도,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면, 이해되지 않는 문제 때문에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가 이해되지 않고, 고통이 이해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으면 됩니다.
나의 고통이 해석되지 않지만,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면, 고통이 더 이상 문제되지 않습니다. 고통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기 때문입니다.

욥은 자신이 고난당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이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시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다는 것을 알고 난 후에는 모든 의문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은 것은 한 번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믿음이 부족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면 고통마저도 축복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면, 모든 것이 새로운 국면에 들어가게 됩니다.

욥기를 읽어보면, 비슷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과 그의 친구들의 이야기를 계속 듣고 계셨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이야기에 전혀 개입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이야기에 전혀 끼어들지 않으셨습니다. 말이 되지 않는, 그들의 이야기를 하나님께서는 계속 듣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인내는 욥의 인내보다 탁월하십니다.

욥은 앙탈을 부리며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쏟아놓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듣고 계셨습니다. 욥이 언제 하나님께 다가오는지,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보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나중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욥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욥을 다그치지도 않으셨습니다. 모든 것을 욥에게 맡기셨습니다.

욥이 갈등하고 괴로워하며 하나님께 대들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욥이 하나님께 나아오기를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이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신앙을 가지기 원하셨기 때문에 끝까지 기다리셨습니다. 욥이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하고, 하나님을 경험하기까지 하나님은 기다리셨습니다.
답을 빨리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답을 찾아가야 합니다. 욥이 고통 속에서, 고통의 대가(代價)를 통해 고통의 크기만큼 하나님을 깊이 경험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욥을 하나님 앞에 항복하는 자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욥을 다루고 계십니다. 그리고 더 깊은 세계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에 대해 모른 척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을 하나님께로 끌어당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사람을 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주 뻔한 방식으로 사람을 만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대하시는 방식을 아주 다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답을 미리 노출하시지 않으십니다. 수학문제를 풀 때, 답을 미리 보고 나면, 실력이 향상되지 않습니다. 문제를 올바로 풀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를 풀 수 없습니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물론 옆에서 누군가가 도와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와주는 것은 진정으로 그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아닙니다. 망하게 하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 몸부림치며 익힌 만큼, 그것이 자신의 것이 됩니다.

성경공부 시간에 리더가 설명해주는 하나님은 머리에만 남을 뿐입니다. 쉽게 사라질 수 있습니다.
고난의 거대한 폭풍이 몰아치면, 머리에 남아있는 하나님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머릿속에 지식으로 남아있는 하나님은 삶과 연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직접 경험해야 합니다. 삶의 고통 속에서 싸우며 오랜 시간 동안 하나님과의 관계를 열어가야 합니다. 그 시간은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닙니다.

욥은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욥은 자신이 알지 못한 것을 마치 아는 것처럼 떠들었던 것을
 회개했습니다. 욥은 고통을 경험하면서 자신이 알고 있던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리게 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루터(Martin Luther)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버리시다니, 누가 이것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다 알 수 없습니다.
욥은 자신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욥은 자신에게 고통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욥은 의롭게 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욥은 탁월하게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자녀들이 죄를 짓지 않도록 욥은 자녀들을 위해 번제를 드렸습니다. 욥은 정결한 삶,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고통 속에 빠졌을 때, 욥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 분노하고 따졌습니다. 욥은 자신의 감정을 쏟아냈습니다.

욥은 힘들고 어려운 과정 속에서 하나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전에 알던 하나님과 크게 다른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그에게 어려움이 없었다면, 그는 하나님을 도무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입술을 통해 욥의 정직한 고백을 듣고 싶어 하셨습니다. 고통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서 이 고백이 나오는 순간까지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귀의 시비를 잠재워버리시고, 욥이 하나님의 친구라는 사실을 사탄 앞에서 입증하셨습니다.
욥기는 하나님의 인내가 돋보이는 책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욥으로 하여금 고통을 겪게 하시고, 욥이 고통당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 계셨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을 지나가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 쉬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하는 고통을 없애버리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고통을 제거하시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는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통을 통해 이전보다 더 깊어지기를 원하십니다. 고통을 통과한 만큼,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다워지기를 원하십니다. 고통 속에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더욱 깊이 경험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에 찾아오는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진가(眞價)를 발휘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고통 가운데 두십니다.

도자기를 몇 도에 굽느냐에 따라 도자기의 강도(强度)가 달라진다고 합니다. 낮은 온도에서 구우면, 쉽게 깨어지는 그릇이 됩니다. 귀한 그릇이 아닙니다.
힘든 일만 없으면 상관없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믿음이 필요 없습니다. 인내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약한 단계에 머물러있으면, 하나님께 부탁하느라 시간을 다 보냅니다. 조금만 힘들어도 죽는다고 야단입니다. 이것은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무당을 찾아가 액땜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것을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관계로 하나님과 우리가 맺어지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기를 원하십니다. 둘도 없이 친밀한 사이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어떤 것도 끼어들 수 없는 관계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바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라고 고백했습니다(롬 8:35,37~39).
하나님과 바울의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들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도 끼어들 수 없다고 했습니다. 죽음의 위험마저도 하나님과 바울 사이에 끼어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완벽한 사랑 때문입니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다른 이유가 없다는 것을 입증했습니다. 사탄은 욥이 왜 경건하게 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그가 복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소유가 넘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사탄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까닭을 제거해버리면, 욥이 하나님을 떠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사탄의 모든 시험을 무색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욥은 자신의 믿음은 오직 하나님 때문이라는 것을 입증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외에는 다른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모든 것 되십니다. 주님은 나의 전부이십니다. 내 믿음의 이유이십니다.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되십니다. 죽음마저도 받아들일 수 있고, 하나님 한 분 만으로 충분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무슨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할 수 있습니까?

살아가다 보면, 인생이 흔들릴 때가 반드시 있습니다. 그때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을 테스트 받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무엇이 끼어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욥은 자신이 귀로 들었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았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을 분명하게 만나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면, 결론이 분명해집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 안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욥은 혼자 고난당하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의 주인이시고, 통치자이시고, 주권자이십니다.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때로는 친구가 되십니다. 이것은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축복입니다.

마침내 욥은 자신에게 일어난 고난을 전부 이해할 수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하겠다고 고백했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욥은 고통의 끝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욥의 모습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오버랩(overlap)되고 있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발악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혹과 배신과 고독과 오해의 긴 터널을 통과하셨습니다. 욥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완성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라갈 때, 고난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의 한가운데에 빠질 수 있습니다. 사탄은 지금도 여전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싸움은 계속됩니다.
고난이 찾아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칠 때, 하나님을 향해 정직하게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더 깊고 높고 풍성한 자리로 나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통당할 때에 모르는 척하시는, 비정한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손들게 됩니다. 그 후에는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우리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무조건 순종하며 살 수 있습니다. 더없이 좋으신 하나님을 만나고 나면, “나는 충분합니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수없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예배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욥은 이전보다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졌습니다. 그것이 승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승리로 이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이겨낸 우리를 칭찬하시고, 더 풍성한 은혜를 통해 우리를 회복시켜주십니다.

고통에는 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의 주관자가 되십니다. “어떤 경우에든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높여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나는 항상 하나님을 찬송하겠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겠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어떤 것도 끼어들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고통의 한가운데서 정직하게 반응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 여러분의 감정을 그대로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고통의 끝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온 사람만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귀로 듣기만 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머리에서 맴도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세계로 나아가 하나님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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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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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저녁예배설교] 믿음은 뒤로 물러나지 않는다 Friday Night Sermon

제목 / 믿음은 뒤로 물러나지 않는다
본문 / 히브리서 10:36~11:1

 

10: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37.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38.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앞으로 나아가는 인생이 있는가 하면, 자꾸 뒤로 물러나는 인생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뒤로 물러나고 있습니까.

본문 히브리서 10장 끝 부분에 보면, 뒤로 물러나는 인생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장입니다.
본문 히브리서 10장 38~39절에 보면,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믿음을 가진 자의 삶은 뒤로 물러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믿음은 뒤를 보는 것이 아니라, 앞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믿음은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미래적입니다.

그런데 자칫하면 뒤로 물러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과거의 아픈 상처들, 아픈 경험들이 우리에게 족쇄가 될 때가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포로가 되어 살아갑니다. 과거의 아픈 경험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이 생각보다 아프게 작용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에 오랫동안 노예생활을 했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간 듯한데, 뒤로 돌아왔습니다. 계속 제자리를 맴돌았습니다.
앞으로 치고 나아가야 하는데, 과거에 노예생활을 했던 경험이 믿음의 삶을 방해했습니다. 그래서 가는 듯하다가 돌아오기를 되풀이했습니다. 늘 제자리를 맴돌았습니다. 그들은 광야 속에 갇혀있었습니다.

과거에 실수한 것을 가지고 자책(自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못난이야. 나는 실패자야. 나는 할 수 없어.”라고 스스로 자신의 점수를 매깁니다.
과거의 실수로 인해 스스로에게 딱지를 붙입니다. 과거의 경험, 과거의 이력(履歷) 속에 갇혀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과거를 돌아보면, 부끄러운 부분이 많습니다. 누구든지 과거를 돌아보면, 성공한 것보다 실패한 것이 더 많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실패가 더 많습니다.
유혹에 넘어간 것, 죄를 지은 것 등 숨기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지난날을 생각하면, 부끄러운 것이 많습니다. 이러한 과거의 경험이 자신을 위축시킵니다.
과거의 경험은 굉장히 강력합니다. 외상증후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과거의 강한 경험은 쉽게 잊히지 않고, 오늘 나의 삶에서 나의 발목을 잡습니다.
그래서 큰 교통사고를 경험한 사람은 운전을 하지 못합니다. 비 오는 날에 교통사고를 경험한 사람은 비가 오면 운전을 하지 못합니다. 비가 오면,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끔찍했던 사고가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자꾸 뒤로 물러서게 합니다. 좋지 않은 일을 경험한 사람은 생각이 부정적이고 어둡습니다.
어두운 생각의 습관이 자신을 꽁꽁 묶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나아가는 듯하다가 뒤로 물러나고, 제자리를 맴돕니다.
사실은 태도에 문제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지 않고 이전의 경험으로 만들어진 태도의 영향을 받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과거로 돌아가지 않고, 미래로 향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뒤로 물러나게 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과거로 돌아가지 않고, 과거로부터 미래로 향하게 합니다. 과거에 어떻게 살았는가는 상관없습니다. 믿음은 미래적인 삶을 살게 합니다.
우리의 삶은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뒤에서 잡아당기는 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쉽지 않습니다.

성도들과 상담해보면, 과거의 힘이 얼마나 강한가를 느낍니다. 과거의 힘은 아주 강합니다. 과거는 어느 시점에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지난날의 실수와 실패, 아픈 경험들을 묵상하고 곱씹게 합니다. 과거의 환영(幻影)에 시달리게 합니다. 과거의 경험, 사건, 좋지 않은 기억들이 완전히 지워지기를 축원합니다.

믿음은 과거로부터 자유하게 합니다. 과거로부터 벗어나게 합니다. 이사야 43장 18~19절에 보면,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광야로 가는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노예생활을 하는 동안 경험했던 어둡고 끔찍한 일들을 기억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새 일을 행하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뒤로 물러나게 하지 않으시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과거의 어두운 기억에 갇혀 사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뒤로 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과거로부터 나오게 하셨는데, 왜 자꾸 과거로 돌아가려고 합니까? 뒤로 물러서면 안 됩니다. 믿음의 삶은 앞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비행기는 후진(後進)하지 않습니다. 비행기에는 후진 기능이 없습니다. 비행기가 이륙하기 전에도 자체적으로 후진하지 못합니다.
믿음의 삶이 그렇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믿음의 날개를 단 사람입니다. 믿음의 날개를 단 사람은 뒤로 날아가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믿음이라는 자동차에는 백미러(back mirror)가 없습니다. 그 기능 자체가 필요 없습니다. 앞으로만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사막에 사는 맹수(猛獸)들을 보면, 눈이 앞에 있습니다. 옆을 보지 않습니다. 옆을 볼 필요도 없습니다. 목표물이 보이면 전진합니다. 앞으로 달려갑니다.
그런데 사슴을 비롯한 연약한 동물들은 눈이 옆에 있습니다. 누가 공격하지는 않는지 살피며 불안해하고 두려워합니다.

믿음은 전진형(前進形)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앞을 바라봅니다. 믿음은 실상(實狀)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실상을 손에 잡은 것처럼 바라보면서 앞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미래를 보는 것입니다.

미술전시회에 갔을 때, 그림을 볼 줄 모르는 사람은 그림을 보면서 할 말이 없습니다. 특히 추상화의 경우에는 뭐가 뭔지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림에는 화가의 사상과 철학이 담겨있습니다. 그냥 그린 것이 아닙니다.

눈이 있다고 해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볼 줄 알아야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은 볼 줄 아는 것입니다. 볼 줄 아는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을 가지면, 미래가 보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으면, 과거가 보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매입니다. 과거로 돌아가려 합니다.

믿음을 가지면, 과거가 지워져버립니다. 미래가 더 강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매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은혜가 임해야 합니다.
과거에 실수했습니다. 실패했습니다. 넘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고, 믿음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미래가 보여야 합니다. 미래가 선명하게 보일수록 담대해집니다. 누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까? 과거보다 미래가 더 선명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기억하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과거를 기억하고 추억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을 통해 미래를 바라보라는 의미입니다. 미래를 바라보기 위해 믿음을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과거의 사건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기억하라는 것은 과거의 추억에 사로잡혀 있으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행하신 사건들을 보면, 하나님께서 미래에 행하실 역사(役事)에 대한 기대감이 생깁니다.
홍해 사건을 깊이 묵상하면, 홍해가 갈라진 사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단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로 바뀝니다.
거룩한 상상력이 일어납니다. 믿음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게 되어, 성경에서 일어난 역사가 내 삶에도 일어날 것 같습니다.

소년 다윗이 거인 골리앗을 넘어뜨린 이야기를 읽다 보면, 가슴이 뜁니다. 다윗의 이야기는 신화(神話)나 동화가 아니고, 실제 사건입니다. 얼마나 통쾌합니까.
이런 이야기를 계속 읽고 묵상하다 보면, 그 이야기가 액자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에 재현(再現)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생기면서 믿음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의 사건을 왜 기록해놓으셨습니까? 단지 재미있게 읽으라고 기록해놓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믿음을 일으키시려는 것입니다.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의 역사가 오늘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을 일으키시려는 것입니다.

성경은 단순한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생명의 책입니다. 진리의 책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살아계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도 여전히 살아있는 생명의 생생한 언어입니다.
성경은 단순한 역사(歷史)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역사(役事)는 계속됩니다. 성경 어디를 보든지 하나님께서 함께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추억하려는 목적으로 기록된 책이 아닙니다. 미래를 향해 마음이 움직이게 하는 책입니다. 믿음으로 성경을 읽다 보면, 미래가 보여야 합니다. 그것이 정상(定常)입니다.
다윗의 이야기,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읽는데, 왜 미래가 보입니까? 아브라함에게 역사하셨던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삶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겠구나.’라고 기대하게 됩니다. 답답한 상황 속에 있지만, 홍해를 여신 하나님을 기대하게 됩니다. 홍해는 오늘도 열립니다. 홍해는 오늘도 갈라질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우리를 미래로 이끌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흥분하게 됩니다. 꿈이 생깁니다. 가슴이 뜁니다.
필립 얀시(Philip Yancey)는 “믿음은 시간이 지나야 이해될 수 있는 것을 미리 믿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가서 직접 보고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미리 보고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것, 지금은 이해되지 않는 것을 미리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미래에 될 일이 미리 보이고, 그것이 믿어지면, 그것을 통해 우리가 힘을 얻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살면, 다른 사람보다 몇 단계 앞선 삶을 살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단계적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삶은 그렇지 않습니다. 점프합니다. 도약이 일어납니다. 출발 지점부터 다릅니다. 믿음은 점프하게 하고, 상상을 넘어섭니다.
기적이 무엇입니까? 논리적으로 도약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성이나 현실적으로 계산 가능한 세상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고, 크게 점프한 것입니다. 그것이 기적입니다. 산술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영역의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은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바라봅니다. 그런데 씨앗만 보면 초라합니다. 별 것 아닙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들은 씨앗 하나를 보면서 그것을 통해 어마어마하게 펼쳐질 농장을 기대합니다.

믿음으로 미래를 바라본다는 것은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실상, 보이지 않는 것을 마치 손에 잡힌 것처럼 보는 것입니다. 마치 실물을 쥐고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환상이 아니라, 실상을 가리킵니다.
믿음의 삶이 깊어지면, 멀리 있는 것이 나에게 가까이 다가온 것처럼 느낍니다.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마치 내 앞에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왜 우리는 미래를 두려워합니까? 까마득하게 잘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믿음을 가지면, 내 앞에 와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절망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절망합니다. 눈앞에 있는 것만 보이고, 멀리 있는 것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절망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멀리서 바라봅니다. 마치 그것이 내 앞에 펼쳐진 것처럼 여깁니다. 그러므로 뒤로 물러날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앞에 있는데, 왜 뒤로 물러납니까?
믿음은 미래를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말하는 것입니다. 미래를 본 사람은 미래에 일어난 일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과거형보다는 미래형을 많이 사용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반석’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장차 게바라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42). 게바는 반석이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베드로는 반석과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반석은 흔들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굉장히 충동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매우 불안정한(unstable)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해 “장차 게바라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왜 이렇게 이름 지어주셨습니까? 현재의 모습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미래의 모습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촐랑거리는 베드로의 모습 때문이 아니라, 사도행전에서 주역(主役)으로 뛸, 견고한 베드로의 모습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게바라는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담대하고 흔들림 없이 복음을 전하는 베드로를 예수님께서 미리 보시고 베드로에게 “장차 게바라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언어를 사용하셨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믿음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현재를 말하지 않고, 미래를 말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과거를 말합니다. “너는 이전에 실패했잖아. 그래서 너는 안 돼.”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폐쇄적이고 부정적이고 비관적(cynical)인 용어를 얼마나 많이 사용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믿음의 세계는 다릅니다. 항상 미래적입니다.

우리에게서 믿음의 언어가 흘러나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믿음의 언어가 흘러나온다는 것은 미래적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결을 맞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결을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하나님과 결을 맞추는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묵상이 깊어지면, 어느 순간, 입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흘러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우리가 엽기적인 소설을 계속 읽으면, 생각도 오염되고, 말도 엽기적으로 사용하게 됩니다. 머리에 들어있는 것이 밖으로 튀어나오게 됩니다.
우리가 그냥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묵상한 말씀이 우리의 입을 통해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여러분의 말을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입에서 흘러나와야 합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전 미문 앞에 앉아있는,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향해 베드로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선포했습니다(행 3:6).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는 계속 성전 미문 앞에 앉아있었습니다. 그에게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40세 정도 되었습니다. 과거에 묶여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를 향해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선포했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선포입니다. 미래적인 말입니다.

놀라운 것은 베드로가 이렇게 선포했다는 것입니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이가 일어난 것도 기적이지만, 더 놀라운 것은 베드로의 변화입니다.
베드로 역시 얼마 전까지 과거에 묶여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그는 디베랴 바닷가로 도망갔습니다.
베드로가 물고기를 잡으러 디베랴 바닷가로 간 것은 과거로의 회귀(回歸)를 의미합니다. 물고기 잡던 과거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는 실패자요 예수님을 더 이상 따를 수 없는 낙오자의 모습으로 과거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과거로 숨었습니다. 뒤로 물러났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는 성령을 받고 난 후 과거에 사로잡혀있지 않을 뿐 아니라, 과거에 사로잡혀있는 사람을 믿음의 선포를 통해 일으켜 세웠습니다.
베드로는 미래를 향해 믿음의 눈을 뜬 것입니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이에게만 기적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베드로에게도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과거에 머물러있고, 과거로 도피했던 삶에서 미래를 보고, 다른 사람까지 미래로 이끌어주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여러분, 믿음의 눈을 뜨셔서 과거의 것을 모두 떠나보내고, 앞에 선명하게 보이고, 눈이 열려서 다른 사람까지도 미래로 이끌어주는 단계로 나아가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베드로가 믿음의 눈으로 보니, 나면서 못 걷게 된 이가 일어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렇게 선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배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장차 게바라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미래형을 사용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통해 살아있는 믿음의 형태를 실제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향해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선포했습니다.
베드로는 나면서 못 걷게 된 이의 현재 운명을 말한 것이 아니라, 그가 일어나 춤출 것을 미리 보며 말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믿음의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믿음의 언어를 사용하려면,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골로새서 3장 16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면, 그 말씀이 우리 안에서 흘러나오게 되고, 그 말씀으로 다른 사람들을 권면할 때, 사람들이 힘을 얻게 됩니다. 자신도 모르게 말씀이 흘러나옵니다.
내 안에 가득 차 있는 말씀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말씀이 나오기 시작하면, 그 말씀은 그냥 말씀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말씀이 됩니다.

교역자가 성도의 집에 심방을 가면, 바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성도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동안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물론 심방을 가면서 말씀을 준비해가지만, 성도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성령께서 생각나게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가정에 가장 필요한 말씀이 무엇인지 생각나게 하십니다. 그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그 말씀은 그 성도의 가정에 살아서 역사하시는 말씀이 됩니다. 그 말씀을 통해 힘을 얻습니다. 그 말씀이 성도의 가정을 살립니다.

그런데 말씀이 생각나려면, 먼저 말씀을 많이 읽고 묵상하고 암송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없는데, 성령께서 말씀을 생각나게 해주실 수는 없습니다. 자기 속에 있는 말씀이 흘러나오게 해야 합니다.
내 안에 말씀이 차 있으면, 말씀이 내 삶을 바꿉니다. 믿음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믿음으로 말씀을 읽다 보면, 말씀에 내 속에 충만히 거하게 되고, 말씀이 나를 사로잡고, 내 삶을 바꿉니다. 그리고 그것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저는 목사이기 때문에 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며 말씀 속에 삽니다. 이것이 제게 축복입니다. 독수리같이 날아오르게 하시는 은혜를 경험합니다.
행복한 마음으로 여러분과 말씀을 나눌 수 있는 것은 말씀이 저를 사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얼마든지 설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40일간 금식하신 후,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가셨을 때, 사탄이
 예수님을 공격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입에서 말씀이 흘러나왔습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예수님께서 ‘이때는 뭐라고 말해야 하나’라고 고민하지 않으셨습니다. 머리에서 짜낸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말씀이 흘러나왔습니다. 말씀이 가득 채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말씀을 열심히 읽어야 합니다. 주야(晝夜)로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말씀을 가득 채워야 합니다.
밥 한 끼를 먹지 않으면 배고픔을 느낍니다. 그런데 1주일 동안 말씀을 읽지 않아도 영이 생생하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계속 먹으면, 힘든 상황이 다가와도 말씀으로 힘든 상황을 이겨냅니다. 힘든 상황에 적합한 말씀이 떠오르면, 힘이 납니다. 진리의 힘이 바로 그렇습니다.
말씀의 능력은 엄청납니다. 상황에 맞는 적절한 말씀이 떠오르면, 그 말씀이 힘이 됩니다. 고난의 순간에도 말씀이 나에게 임하면, 그 말씀으로 인해 고난을 넉넉히 이깁니다.
말씀을 믿음으로 받으면, 말씀은 우리를 미래로 이끌어갑니다. 현재는 암울하고 힘들어서 낙심할 수밖에 없지만, 말씀을 믿음으로 받으면, 말씀은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힘이 납니다. 말씀을 통해 미래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입술에서 말씀이 흘러나오면, 그 말씀은 이미 여러분 안에서 능력이 되어있습니다. 그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선포하면,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말씀에 대한 강한 믿음이 생기면, 미래는 이미 열린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읽고 암송하고 묵상하세요.

성경에 보면, 역사서도 있고, 예언서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렵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잘 알려져서 우리에게 익숙한 명구(名句)는 계속해서 읽어야 합니다. 암송해야 합니다. 성경을 암송하고 묵상하고 수시로 입으로 되뇌세요.
기도할 때에도 말씀을 가지고 기도하는 습관을 가져보세요. 자신의 말로 주절주절 기도하지 말고, 말씀을 떠올리며 기도하세요.

조지 뮬러(George Müller)의 기도 방식이 이러했습니다. 조지 뮬러는 기도하기 전에 말씀을 읽었습니다. 말씀을 읽다가 확신이 생기는 말씀이 있으면, 그 말씀을 가지고 기도했습니다. 5만 번 기도응답 받은 조지 뮬러의 기도의 파워는 말씀에서 나온 것입니다.
말씀을 붙잡고 기도할 때, 그 기도는 파워가 있습니다. 기도할수록 말씀에 대한 믿음이 생깁니다. 확신이 생깁니다. 그 확신은 우리를 미래로 이끌어갑니다. 그래서 기도가 강력해집니다.

감사와 불평은 단순히 말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결을 맞출 때, 감사할 수 있습니다.
왜 불평 불만합니까? 하나님과 결이 어긋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결이 맞는가 맞지 않는가에 따라 그림이 달라집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에 대해 기대할 때,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기대 때문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현실만 보고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아멘”으로 반응하는 것은 하나님과 결을 맞추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결이 맞춰지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말씀을 들을 때, “아멘”으로 반응하는 것은 하나님과 결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어느 날 말씀이 우리의 삶 속에서 흘러나오게 됩니다. 그것이 곧 능력이 되고, 현실이 되고, 미래가 됩니다. 그것을 통해 기적이 일어납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서 익어가고 흘러넘쳐서 우리의 입을 통해 선포될 때, 말씀의 능력이 우리의 삶 가운데 실제화 됩니다. 미래를 향해 우리의 삶이 열립니다.

믿음으로 미래를 본 사람들이 순종합니다. 믿음은 미래를 보는 것입니다. 믿음은 말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믿음은 순종을 통해 미래를 향해 갑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을 보면, 믿음이 순종으로 나타났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순종으로 나타났습니다. 아브라함의 눈에 본향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분명히 이루어질 것을 믿음으로 보았습니다.
믿음은 미래를 보게 하고, 미래를 본 사람으로 하여금 순종하게 합니다. 아무나 순종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의 눈이 열리지 않으면, 순종할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 보면, 가나의 혼인 잔치 집에서 마리아의 믿음이 돋보였습니다. 혼인 잔치 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그때 마리아는 믿음의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라고 말했습니다(요 2:5). 마리아는 이미 보았습니다. 앞으로 되어질 일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순종하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순종의 단계에서는 위기를 맞이합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마리아가 예수님께 알렸을 때, 예수님께서는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2:4).
예수님의 싸늘한 반응에 마리아는 당혹스러웠을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려고 할 때, 상황이 묘해지기도 합니다. 마리아에게 두려움이 찾아왔지만, 마리아는 두려움을 이겨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믿음을 강화하여 하인들에게 믿음의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라고 말했습니다.
마리아는 이미 보았습니다. 이미 보았기 때문에 순종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기대하는 마음이 가득 차 있습니다.

믿음으로 미래를 기대하는 사람들은 순종하는 것을 미루지 않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감각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육감(六感), 여섯 번째 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께서 기적을 행하실 것을 예감했습니다.
믿음은 기대감을 갖게 하고, 구체적으로 행동하게 합니다. 그래서 미래를 본 사람들은 행동하는 데 민첩합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을 익히면,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당장 역사가 일어나지 않아도, 믿음으로 사는 법을 익히면, 그것 자체가 축복입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해서 모든 일이 잘 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믿음과 반대되는 상황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익히고 살아가다 보면, 반드시 믿음의 역사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삶의 방식이 다릅니다. 생각하는 태도가 다릅니다.

오병이어 사건을 보면, 빌립은 믿음의 태도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요 6:5)”라고 말씀하셨을 때, 빌립은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요 6:7)”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4:16).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을 훈련시키셨습니다. 믿음을 사용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먹을 것을 주려고 접근하는 사람과 흩어져서 각자 알아서 해결하게 하려는 사람은 태도가 다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이 상황 속에서 제자들이 무엇인가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자세히 보면, 답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먹을 것을 주라”라고 말씀하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창조자이십니다.

교회에서 사역하면서 믿음으로 접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 번 해보자”하는 긍정적인 태도로 접근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은 부정적으로 접근합니다. 항상 부정적으로 이야기합니다. 반대부터 합니다.

야구를 보면, 타율(打率)이 높은 선수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은 방망이를 많이 휘두릅니다. 방망이를 휘두르는 횟수가 많아야 공을 맞출 확률이 높아집니다.
아무리 잘 치는 선수라도 지나치게 신중하면 공은 그냥 지나가버립니다. 삼진아웃 되어버립니다. 이것은 확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태도를 바꾸어놓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을 가지고 있습니다. 삶의 태도가 다릅니다. 관점이 다릅니다. 그래서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산다고 해서 모든 것이 잘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의 태도를 가지고 꾸준히 살면, 확실히 다른 인생이 펼쳐집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가는 길이 다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확신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미래에 대해 긍정적이고 열려있습니다. 무엇이든 해보려고 합니다. 실패하더라도 해보려고 합니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이고 열린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려워도 도전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출발점이 다릅니다. 출발하기 쉽습니다. 무엇이든 시작하는 것이 쉽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무엇인가 시작하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고민하는 시간이 매우 깁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시작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오랫동안 갈등하고 고민하고 주저하고 멈칫거리며 세월을 보냅니다.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는 자신의 묘비명을 스스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묘비에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라고 썼습니다. 우물쭈물하다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우물쭈물하다가 인생이 지나가버렸다는 것입니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아닙니다. 제대로 한 번 살아보고 죽어야지, 사는 것처럼 살지 못하고 죽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제대로 살아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두려울 뿐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시작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쉽게 시작합니다. 이것이 특징입니다.
특별하게 살았던 사람들은 무엇인가 시작하는 데 별로 고민하지 않습니다. 시작하는 것이 쉽습니다. 실패할지 모르지만, 쉽게 시작합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아찔한 일인데, 믿음의 사람은 시도해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쉽게 시작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시작할 때에 고민을 지워버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나중에 돌아보면, ‘내가 어떻게 그 일을 했지?’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저도 그런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저는 이전에 굉장히 소심했습니다. 그런데 제 삶에서 중요한 고비에는 미친 결정을 했습니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가 났는가, 어떻게 그 일을 시작했는지 의문스럽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믿음이 저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믿음의 사람이 많이 필요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앞으로 나아가 있습니다.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습니다.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시작하는 것이 쉽습니다.

순종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보면, 순발력이 있습니다. 다윗은 대단한 순발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엘라 골짜기에서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40일 동안 대치(對峙)하고 있었습니다. 40일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엘라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블레셋 군대를 고함치고 있고, 이스라엘 군대는 벌벌 떨고 있습니다. 어느 쪽도 먼저 행동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소년 다윗이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의 도시락을 가지고 왔다가 그 장면을 보았습니다. 다윗은 막대기와 물맷돌을 가지고 골리앗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순발력을 가지고 사고를 저지른 사람은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은 물맷돌을 들고 전혀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전혀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물맷돌을 고르는 데 시간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아무렇게나 주워들고 갔습니다. 다윗은 이미 이긴 자의 모습으로 골리앗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베드로도 순발력이 있었습니다. 밤에 예수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베드로가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마 14:28).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바로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었습니다. 대단한 순발력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베드로는 우물쭈물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바로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었습니다. 탁월한 순발력입니다. 풍랑이 이는 바다 위에서 주님께서 “오라”라고 말씀하시니 베드로는 바로 배에서 내려서 물 위를 걸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베드로는 풍랑의 높이와 길이를 재거나 따지지 않았습니다. 이 순발력으로 인해 베드로는 쓰임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사도행전에서 주역(主役)이 되었습니다. 그는 사도행전의 전반부를 장식하는 리더가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행동파였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불을 받고 난 후, 그는 온전하게 행동하게 되었습니다.

믿음은 앞으로 내딛는 것입니다. 뒤로 물러서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탁월한 순발력을 통해 드러납니다.
순종하는 데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앞으로 되어질 일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미래가 보이는 사람은 순종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미래에 되어질 일을 보았습니다. 멀리서 본 사람입니다.
현실에서는 약속을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 못했지만,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멀리서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을 예비해놓으신 것이 매우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그들을 가로막는 것이 있고, 어떠한 핍박이 있다 해도 뒤로 물러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그들의 앞에 선명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믿음은 뒤로 물러서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바칠 만한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뒤로 물러나는 사람이 아닙니다. 믿음의 삶은 뒤로 물러나는 삶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앞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나 멸망할 자들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미래를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과거에 붙들리지 마세요. 과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평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과거에 실패한 것을 붙잡고 평가하는 것에 연연해하지 마세요.
과거에 실패한 것은 과거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으로 앞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미래를 향해 담대히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새 일을 시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물쭈물하지 마세요. 믿음으로 현실을 정면 공격하고, 정면으로 승부하세요.
우리에게는 믿음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미래를 말하세요. 미래를 선포하세요. 믿음의 언어를 사용하세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히 채우셔서 말씀이 흘러나가면, 그 말씀이 살아있는 말씀이 되고, 현실이 됩니다.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되고,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가 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기도하는 동안 미래가 선명하게 보이는 은혜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읽을 때, 말씀이 오늘도 현실화되는 약속임을 믿으시고, 미래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두려움 없이 순종의 발걸음을 내딛을 때, 순종이 기적을 낳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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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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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주일낮예배설교 /유혹 앞에서 (August Sunday Sermon)

제목 : 유혹 앞에서

성경 : 마4:1-11

 

1.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요즘에 보면 상대적 빈곤감 또는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절대적으로 보면 즉 실제로는 빈곤한 게 아닌데 많이 가진 자들과 비교하며 상대적으로 가난하게 여기고 박탈감을 느끼면 불평불만을 하게 되고 그래서 자존감도 잃어버리고 진짜로 가난한 자처럼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바보 같은 일입니까? 실상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는데 하필이면 없는 것을 가지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남이 가진 것을 보면서 시기하고 질투하며 가지고 있는 것도 누리지 못하고 진짜로 가난한 자처럼 기쁨을 모르고 산다면 이렇게 어리석은 일이 어딨습니까?

그럼 왜 그렇습니까?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자꾸 남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월급 200만원도 못 받는데 남이 300만원 500만원 1,000만원 받으니까 저 사람은 무슨 복이 많아서 머리가 좋아서 일류대학 나와 대기업에 들어가고 출세하여 잘먹고 잘사나, 저 사람은 무슨 복이 많아서 부잣집에 태어나서 저렇게 좋은 조건 속에서 온갖 좋은 혜택을 누리며 잘먹고 잘사는데 나는 왜 쎄가 빠지게 일해도 이 모양인가 하면서 원망하고 불평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저항하고 시비를 걸고 그래서 결국 스스로 자존감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나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는 그러면 안됩니다. 남이 월급을 1,000만을 받든 1억을 받든, 대궐 같은 집에서 호의호식하며 온갖 사치를 누리든 그런 거 배 아파하지 말고 그냥 하나님 앞에서 믿음 안에서 성실하게 감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셔서 누리고 있는 것 자체를 보면 우리는 결코 가난한 것은 아닙니다. 물론 힘든 사람들도 있지만 그러나 이 정도면 먹고 살만한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알라고 하셨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셨습니다. 게다가 영원한 영광까지 주셨습니다. 그럼 됐지 자꾸 더 바라고 욕심을 내고 비교하며 원망하고 불평하고 근심하고 걱정하고 그럴 일이 뭐 있습니까? 그러면 그럴수록 행복은 자꾸 도망가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요즘 세상이 그렇지를 못합니다. 완전히 물질만능주의에 빠져서 그저 좋은 집에서 좋은 것 먹으며 좋은 옷 입고 많은 것을 소유하면 행복할 줄 압니다. 그래서 죽어라하고 돈돈돈 경제경제경제하면서 온통 관심의 초점을 돈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꾸 물질적 외형적인 것만 남과 비교하며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너무나 많은 갈등과 상처와 아픔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게 바로 마귀사탄의 역사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마치 옛날에 나라에 시끄러운 일이 있으면 소위 북풍이라고하여 작은 일을 크게 부풀리든지 없는 일을 만들든지하여 북한 공산당이 무슨 큰 일을 저지른 것처럼 하여 국민들의 관심의 초점을 그쪽으로 돌리게 함으로 시끄러운 일을 잊어버리게 하려고 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마귀사탄이 우리의 관심을 온통 돈에게 두게 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믿음이니 사랑이니 진리니 의니 선이니 이런 것에 눈을 돌리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런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잘먹고 잘살면 장땡이라고 여기며 예수님도 안 믿고, 심지어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예수님보다 돈을 좋게 여기게 만들어 자꾸 당장에 눈앞에 보이는 돈을 따라감으로 생명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계속해서 깨어 기도하며 올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마귀 사탄의 유혹에 속지 말고 진리를 따라 살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엡5:16~18절을 보겠습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여러분, 보세요. 세월이 선하다고 했습니까? 악하다고 했습니까? 악하다고 했습니다. 악한 게 뭡니까? 죄와 무지 속에서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저 돈과 명예와 권력과 세상 즐거움에 빠져 사망 길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세상이 이러니까 우리는 주님의 뜻을 바로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알려면 세상의 것에 취하지 말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올바르게 판단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거짓되고 왜곡된 것들을 물리치고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 왜곡된 가치관이 만연된 세상에서 정말 깨어 기도하며 말씀에 귀를 기울임으로 올바른 영성을 가지고 모든 왜곡된 가치관과 유혹을 바르게 분별하고 물리치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까?

2.예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왜곡되고 유혹 많은 세상에서 진정한 승리자가 되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조건은 오직 예수님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하지요. 오직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빛이시기 때문에 오직 예수님 안에 있을 때만이 세상의 모든 죄와 유혹과 왜곡된 가치관과 악한 것들을 올바르게 분별하고 물리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런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는데요,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신 후에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그 더럽고 추하고 악한 마귀 따위에게 시험을 받을 수 있습니까?

물론 왜 이유가 없겠습니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이 마귀의 권세를 무너뜨리는 분임을 명백히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최초의 인간 아담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이 되었는데 예수님은 사탄의 권세와 유혹을 물리침으로 마귀에게 저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을 살리러 오신 분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알리기 위함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능동적으로 시험에 임하셔서 사탄을 호통을 쳐서 쫓아내심으로 사탄의 권세룰 물리치고 우리를 구원해 주실 유일한 분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마귀에게 속아 죄와 무지 가운데 빠진 인생은 결코 자기 힘으로는 죄와 사탄의 권세를 이길 수 없습니다. 선이나 진리나 의에 대한 온전한 분별력도 없고, 악을 이길 힘도 없습니다. 자신이건 남이건 죄과 마귀와 지옥의 권세에서 건져낼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의 지식이나 과학이나 다른 어떤 능력이나 지혜로도 안됩니다. 이 일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으나사나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약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임으로 그 안에 있으면 안전한 것입니다. 사탄 마귀가 넘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설령 사탄 마귀가 도전해도 주님의 능력으로 이기게 됩니다. 사탄 마귀가 어떻게 교묘하게 유혹하고 시험하고 도전해도 주님이 주시는 지혜와 능력으로 분별하고 물리치게 됩니다. 세상의 왜곡되고 그럴듯한 가치관에 속지도 않고 물질이나 권력이나 명예 따위에 끌려 다니지 않습니다. 세상의 물결이 아무리 거세게 밀려와도 휩쓸려가지 않습니다. 주님의 능력으로 그런 것들을 이기고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위로와 기쁨과 자유와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15:5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든지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안에서 그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심으로 세상의 모든 죄와 사탄의 권세를 이기고 생명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물질의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가장 먼저 이겨내야 할 시험은 물질의 시험입니다. 사탄은 온갖 방법으로 교묘하게 우리를 유혹하는데 가장 흔한 것이 물질을 통한 유혹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간사한 마귀가 심지어 예수님께도 물질을 가지고 장난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즉 40일 동안이나 금식하여 주리신 예수님께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린 배도 채워서 좋고 권능을 보여주면 하나님의 아들임이 증명될 거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론 그런 수작이 예수님께 통할 리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말을 듣고 사탄을 꾸짖습니다. 마4:4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한마디로 떡 즉 물질이 우리를 지배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물질에 의하여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좌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 영생복락의 말씀인데 그 말씀이 우리를 지배하지 않고 썩어 없어질 물질이 지배하면 어떻게 됩니까? 당연히 생명의 길도 진리의 길도 모르고 썩어 없어질 물질만 따라가다가 영원한 멸망길로 가게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내가 배가 고프고 힘든 건 사실이지만 너 따위의 말은 들을 수 없다며 사탄의 교묘한 물질적 유혹을 일축해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물질은 요긴한 것이긴 하지만 절대로 물질이 내 삶을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물질적 가치에 의하여 내 생각과 말과 행동이 좌우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과 그 말씀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당연히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 세상은 물질지상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사람들의 삶이 믿음이나 사랑이나 진리나 의보다는 물질에 의하여 좌우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물질 때문에 싸우고, 때리고 심지어 죽이기도 합니다. 물질 때문에 이웃과 친구와 심지어는 가족 간의 관계가 파괴될 때가 많습니다. 믿는 사람들도 물질 때문에 신앙생활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풍조가 세상을 뒤덮고 있어서 그게 도리어 정상인 것처럼 여겨질 지경입니다. 그러나 물론 말할 것도 없이 그건 속고 있는 것입니다. 껍데기에 인생을 거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런 껍데기에 지배당하는 인생은 당연히 진정한 생명의 기쁨과 은혜도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세상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 지를 잊지 알고 더욱 깨어 기도하며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며 말씀으로 무장하여 물질보다 오직 주님을 앞세우시기 바랍니다. 물질적 이해관계에 의하여 내 삶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말씀과 믿음과 사랑과 진리와 선과 의의 참된 가치를 앞세우고 주님과 동행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참된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명예의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여러분, 마귀는 물질적 시험에 실패하자 이번에는 예수님의 명예욕을 자극시켜며 유혹합니다. 즉 성전 꼭대기로 가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너를 붙들어 다치지 않게 하실 것이고, 그러면 너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웅대접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그런 수작에 넘어갈 분이 아니시죠. 그래서 또 마귀를 꾸짖습니다. 마4:7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내가 너 따위의 말을 듣고 여기서 뛰어 내린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게다가 여기서 뛰어 내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이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사탄 따위의 말을 듣고 뛰어 내린다는 것 자체가 그 말에 순종하는 것이니 수치가 아니겠습니까? 설령 뛰어 내려서 좋은 결과가 있다고 할지라도 마귀의 말에 따라서 행동한다는 것 그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여러분, 우리도 그렇습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내 마음대로 한다면 그게 바로 사탄의 말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설령 돈보따리가 생긴다해도 마귀 따위의 말에 순종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마귀의 말에 의해서든 아니면 자기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서든 성전에서 뛰어내리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로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전에서 뛰어 내리는 행위는 하나님의 뜻도 하나님의 방법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목적이 있다면 마귀의 말처럼 뛰어내릴 때 하나님이 지켜주신다면 자신이 영웅이 되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런 방법으로 명예를 주지는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방법대로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갈 때에 명예를 주는 것이지 영웅심리를 가지고 쓸데없이 성전에서 뛰어내리는 것을 지켜 줌으로 영웅이 되게 하지는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게 바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이 지켜 주실 만한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그렇게 해 주실지 안 해 주실지 한번 테스트해보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무모하게 행동하면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 뜻 안에서 하나님의 방법대로 말씀에 합당하게 믿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합니다. 이게 올바른 믿음이고 그럴 때 하나님께서 명예와 영광도 아울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기본적으로 먹고 마시는 것을 비롯하여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교회에서나 무엇을 하든 오직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결코 영웅심리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하여 무언가를 행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하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함으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 속에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고 명예도 얻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영적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첫 번째 두 번째 시험이 실패로 끝나자 마지막으로 사단은 세상의 권세를 가지고 영적으로 예수님을 시험하였습니다. 높은 산으로 가서 예수님에게 천하만국을 보여주면서 자신에게 절하면 천하만국을 모두 주겠다는 것입니다. 즉 그저 눈 한번 질끈 감고 자신에게 절하면 세상만국을 다 주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탄이 그럴만한 권한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지 까짓 게 무슨 그런 권세가 있습니까? 그저 예수님이 지금 40일동안이나 전혀 아무것도 안 잡수시고 약해져 있으니까 이 약해진 틈을 노려 어떻게든 예수님을 넘어트리려고 술수를 쓰고 있는 것 뿐입니다.

그러나 그런 수작이 예수님께 어떻게 씨알머리나 먹히겠습니까? 예수님은 사탄을 향해 호통을 치십니다. 마4:10절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내 지금 비록 힘이 들어도 어딜 감히 나한테 수작을 부리느냐? 오직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받으실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거늘 어찌 더럽고 추하고 악한 너 따위에게 경배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오늘날도 사탄은 끊임없이 속삭입니다. 나에게 절하라. 그러면 천하만국 즉 명예와 권세와 부귀영화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온갖 우상을 섬기게 만듭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돈과 명예와 권세와 세상 즐거움을 미끼로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신은 없다고도 했다가 신은 똑같다고 하면 믿지 말든지 아무거나 적당히 믿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머니가 최고다. 돈과 명예와 권력에 행복이 있다. 그걸 소유하라. 그러면 행복하리라고 하면서 우리를 미혹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꾸 그 길로 갑니다. 자기 생각대로 갑니다. 그저 돈돈돈 경제경제경제 하면서 삽니다. 그게 바로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모습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 선악과를 볼때에 보기에도 탐스럽고 먹음직스럽고 먹으면 뭔가 지혜와 생기를 얻을 것처럼 보여 덜커덕 따 먹음으로 죄의 굴레를 뒤집어썼던 것처럼 지금은 더 크고 더 좋은 선악과들이 세상에 널려 있어서 사람들이 그런 것들에게 쉽사리 걸려들어 선악과 따먹으며 죄의 길로, 멸망의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그 소리에 속으면 안됩니다. 돈이나 권력이나 향락이나 세상의 가치관 앞에 무릎을 꿇으면 안됩니다. 그건 죽음의 길입니다. 오직 우리가 경배해야할 분은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 뿐입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뿐입니다. 세상의 돈이나 권력이나 지식이나 명예나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생명과 기쁨과 은혜를 주는 것이 아니라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이 이 모든 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특별히 사순절을 보내면서 더욱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묵상함으로 성령의 능력과 지혜를 덧입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육체적, 정신적, 영적 시험을 이기고 온전히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능력을 온전히 맛보며 주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이루신 생명의 역사를 힘있게 이루어가 갈 수 이는 우리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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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주일낮예배설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August Sunday Sermon)


말씀 : 고전10:31-33

제목 :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여러분, 사람이든 물건이든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모습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무엇인든 본래 그것을 만든 목적에 부합되는 상태를 유지하고 그 목적에 맞게 잘 사용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TV가 아무리 크고 디자인이 좋아도 영상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지 않습니까? 자동차가 아무리 크고 멋있어도 잘 달리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야말로 빛좋은 개살구에 불과한 것이지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인물이 훤하고 키가 크고 능력이 많아도 사람 노릇 제대로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지식과 능력과 부와 명예와 권세가 있어도 그걸 본래의 목적에 바르게 사용하지 못하면 아무 유익이 없지 않습니까? 아니 유익은커녕 도리어 그걸 잘못 사용하면 인간의 삶에 해악을 끼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존재의 목적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생명과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주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알고 거기에 합당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정말 멋있고 아름답고 가치 있고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고귀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존재의 목적은 무엇이겠습니까?

1.인간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인생 뭐 있냐 잘 먹고 잘 놀고 잘살면 되지 그럽니다. 기왕이면 부귀영화도 누리고 명예도 누리고 그래서 떵떵거리며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 그게 인생이지 그럽니다. 그래서 어떻게든지 잘먹고 잘살기 위하여 인생의 모든 것을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세상에서 떵떵거리며 부귀영화 누리면서 살다가 죽으면 대단한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누구 맘대로 그게 인생이라고 그럽니까? 그건 죄와 무지 가운데 있는 인생이 자기 멋대로 생각하는 인생이지 결코 그게 인생이 아닙니다. 여러분, 인간의 목적은 사람이 정하는 게 아니라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정하시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만들어진 존재가 어떻게 자신의 목적을 정합니까? 텔레비전이 자기가 목적을 정했나요? 밥그릇이 나는 밥을 담는 그릇이 되어야지 하면 자기가 목적을 정하고 만들어졌나요? 사람이 태어나면서 나는 이런 인생이 되어야지 하면서 스스로 어떤 목적을 가지고 태어나나요? 아닙니다. 물건은 그것을 만든 사람이 정하고 우리의 목적은 내가 정하는 게 아니라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이 이미 정해 놓은 것입니다.

그게 뭡니까? 그건 사43:7절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같이 보실까요?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무엇이 인간의 목적이라고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존재로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어졌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자세히 말하면 길어지니까 간단히 말씀드리면 첫째는 직접적인 의미로서 우리를 지으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경배하며 찬양하여 섬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간접적인 의미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혜와 능력을 잘 활용하여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부합되게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아름다운 창조의 세계에서 인간도 자연도 하나님의 은혜를 흡족하게 누리며 살아감으로 그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도록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하신 의미와 이유를 분명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일단은 인간은 무조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말하면 뭐하겠습니까?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약하고 미련하고 어리석은 인간이 우주만물의 창조주로서 전지전능하시고 영화로우시고 완전히 거룩하고 의로우시고 선하시고 사랑과 은혜만이 충만하신 하나님께 어찌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드리지 않겠습니까? 만약 이걸 모르는 인생이라면 자신의 존재의 근원을 모르는 자로서 결국 하나님의 은총에서 끊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갈 때에 세상은 가장 아름답고 복된 세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행하면 어떻게 됩니까? 물론 무엇을 하든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인지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 생각과 지식과 경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옳은 길을 따르게 됩니다. 선과 진리와 의를 따르게 됩니다. 목적도 방법도 의도도 선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을 바르게 사용하게 됩니다. 그러면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도 영광이 돌려지고 우리도 하나님의 나라를 마음껏 누리는 복된 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내 영광을 위하여 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죄와 무지 속에 있는 내 생각과 방법과 경험과 지식을 따라 행하게 됩니다. 그러면 물론 옳은 것도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죄와 무지가운데 있기 때문에 선하고 아름답고 귀한 목적과 방법과 의도를 가지고 하지 못하고 잘못된 목적과 방법과 의도를 가지고 하기가 십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악을 행하기도 하고 헛된 것에 인생을 바치기도 하고 그저 자신의 욕심과 영광을 위해 하다보니까 시기와 질투와 분쟁과 싸움이 일어나 결국은 서로 아픔과 고통과 상처를 주는 어리석은 삶을 살 때가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죄와 무지 가운데 있는 인생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겸손하게 엎드려 경배와 찬양과 영광을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목적으로 행할 때에 선과 진리와 의를 따름으로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내 경험과 지식과 이성이나 세상의 왜곡된 풍조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여러분도 귀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모든 행위를 하나님의 영광과 결부시켜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하는데 그러려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을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영광과 결부시켜야 합니다. 즉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이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인지 혹은 가리는 일인지를 깊이 생각하며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쪽으로 결론이 나고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31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보십시오.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먹고 마시는 것은 인간의 생존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요구이며 행위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이고도 본능적인 욕구나 행위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살기 위해서 먹는다거나 아니면 식탐을 채우기 위하여 먹는 것이 아니라 먹음으로 건강을 유지하여 그 건강한 육신으로 성실하고 열심히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먹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의식주 생활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의식주 생활도 정말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방법으로 영위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들 중에서도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분들은 멀리까지 유명한 음식점을 찾아 여기저기 다니기도 합니다. 또 일인분이 몇 만원, 몇 십만원씩하는 음식을 아무렇지도 않게 먹기도 합니다. 혹은 몇 만원짜리도 수두룩한데 굳이 몇 십만 몇 백만 원짜리 옷을 입기도 하고, 그저 삼십여평만 되어도 충분할 것 같은 데 굳이 몇 십 평짜리 집에 살면서 온갖 비싸고 좋은 것들로 장식을 하고 호화롭게 살기도 합니다.

여러분, 이런 모습들이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일일까요? 어떤 분들은 내가 능력이 있어서 돈 잘 벌어서 내 돈 가지고 내가 쓰는데 왠 잔소리냐 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 능력도 지혜도 여건도 환경도 상황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필요이상으로 크고 화려한 곳에서 살며 좋은 음식 먹고, 좋은 옷 입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영광과 자기 만족을 위한 것이므로 옳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제적 능력이 있어도 적당한 수준에서 검소하게 의식주생활을 하면서 내 영광과 내 기쁨을 위하여 사용하는 그것을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 옳은 일이고 그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인생의 모습인 것입니다.

뭐 기타 지식이나 권력이나 지위나 그 어떤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을 나의 영광과 기쁨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도구로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드릴 것은 드리고, 복음의 역사를 위하여 사용하고, 이웃을 위해서도 사용해야 합니다. 그럴 때 남에게 생명의 기쁨을 가져다주고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고 우리도 귀하고 복되고 아름답고 가치있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이 사실을 잊지 말고 가장 기본적으로 먹고 마시는 일 조차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대로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엇을 생각하고 말을 할 때나 공부를 할 때나 일을 할 때나 직장 생활을 할 때나 결혼을 할 때나 무엇을 하든지 먼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대전제를 잊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는 편을 택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에게 생명의 기쁨을 주고 여러분도 주님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며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내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남을 세워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저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할 일 중의 하나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게 뭐냐 그건 다름 아니라 남을 세워주는 자 즉 남에게 힘과 위로와 소망과 기쁨과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가져다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너무 당연하지 않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하나님의 형상이요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들인데 어떻게 그 귀한 존재를 아프게 하고 넘어지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겠습니까? 또 그렇게 서로 아프게 하고 상처를 주고 넘어지게 하면 서로가 얼마나 힘들겠으며 또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겠습니까? 그러나 반대로 서로 사랑하고 세워주고 위로하고 힘을 주고 하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더 아름답고 풍요로워지겠으며 얼마나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겠습니까?

오늘 32,3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누구에게나 남을 걸려 넘어지게 만들고, 상처와 고통과 아픔을 주는 자가 아니라 기쁨과 위로를 가져다주는 자라가 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뭐 당연하지요.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고 사랑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서로 세워주고 위로하고 힘을 주고 유익을 줄때에 우리 모두가 함께 복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내 식구나 남의 식구나 할 것없이 누구라도 걸려서 넘어지게 하고, 상처를 주고, 고통을 주는 자가 아니라 생명과 기쁨과 은혜와 복을 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의무이고 그게 우리가 서로 행복한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그 반대로 행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오직 자기 영광을 위하여 남을 넘어뜨리고라도 자신의 유익을 취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기치고 도적질하고 싸우고 때리고 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남에게 상처와 고통과 아픔을 줄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심지어는 교회에서도 이런 모습들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 헐뜯고 싸우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꼴입니까? 이건 우선은 교인들을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일입니다. 나아가서는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지 못하도록 문을 막는 행위와 동일한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입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결코 이런 우를 범하지 말고 서로 정말 사랑하고 용납해야 합니다. 생각하고 말하는 모든 것들이 사랑과 진리와 의 안에서 이루어지게 해야 합니다. 어떤 삶의 자리에 있든 자신이 있는 삶의 현장에서 누구보다도 성실하고 정직하고 모범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 갈등과 시기와 질투와 아픔을 주는 자가 아니라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가져다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가정과 교회와 직장과 이 사회를 아름답게 세워가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며 우리들도 생명의 은혜가 가득한 복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꼭 이런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영혼구원의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남을 유익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남을 가장 유익하게 하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머니가 아니라 복음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무엇이 가장 중요하고 가장 유익한 것입니까? 물론 생명이지 않습니까? 온 천하를 얻어도 생명을 잃어버린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러니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주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무엇이겠으며 이보다 기쁨과 유익과 은혜를 주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33절 다시 보십시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어찌하든지 남을 유익하게 함으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여 구원의 길로 이끌라는 말씀입니다. 즉 남에게 유익을 주는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 궁극적인 목적은 구원이라는 말씀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가난한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자에게 옷을 주고, 병든 자를 고쳐주고 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만약 그 영혼이 구원받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물론 먹을 것을 주고, 입혀주고, 병을 고쳐주는 일들은 그것대로 그럴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기에 그런 일도 중요하고 당연히 해야할 일이지만 그러나 단지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통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고, 그것을 통하여 그들이 구원을 얻게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남을 유익하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일에 보다 더 관심과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구원의 은총을 누리는 가운데 그것을 바탕으로 세상에서 누려야 할 영적, 물질적, 정신적, 육체적 은혜도 누리다가 결국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 인생을 전인적으로 영원히 유익하게 하는 일이요, 행복하게 하는 일이요 하나님을 가장 영화롭게 해 드리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사순절과 대강절에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평소에도 해야할 일이고 또 평소에 사랑과 거룩과 진실과 선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그들로 하여금 그 선하고 아름답고 의로운 모습을 보면서 주님품으로 오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하지만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결정적으로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알게 하고 예수님 믿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목적이요 이것이 사람들에게 가장 큰 유익과 기쁨과 은혜를 주는 일이요. 이것이 하나님을 가장 영화롭게 해드리는 길이요, 이것이 우리가 생명의 은총을 가장 풍성하게 누리는 길인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먹고 마시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공부하고 일하고 힘쓰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시기 바랍니다. 남을 기쁘게 하고, 남의 유익을 구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열심히 주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기쁨을 주며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려 드리는 가운데 여러분도 더욱 생명의 은혜가 넘쳐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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