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설교

제목 : 세상을 이기는 믿음

말씀 : 시27:1-6

1.진정한 승리는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여러분,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고 큰 소리를 치며 유럽대륙과 러시아와 이집트까지 정복했던 나폴레옹은 키가 157Cm 였다고 합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저는 그 보다 조금 큽니다. 그래봤자 그야말로 도토리 키재기이지만.... 그런데 여러분, 이 세기의 영웅 나폴레옹은 자신의 작은 키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 키는 땅에서부터 재면 가장 작지만 하늘에서부터 재면 제일 크다.’고 말입니다. 그는 이런 자신감과 당당함으로 큰 소리를 치며 세계 정복에 대한 꿈을 가지고 결국 유럽대륙과 러시아와 아프리카까지 정복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큰소리치며 승승장구했던 나폴레옹도 별 수 없는 연약한 인간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 유명한 워털루전투에서 영국과 프러시아의 연합군에게 비참하게 패하게 되는데요, 여러분, 나폴레옹이 워털루전투에서 패한 이유가 어떻게 보면 아주 웃긴다고 합니다. 그는 만성 위궤양이 있었는데 그로 인하여 심한 변비가 생기가 되었고, 변비 때문에 치질에 걸리게 되었고, 심한 치질 때문에 말을 타기가 힘들어 전쟁에 나갈 때는 항문 주위에 마취제 주사를 맞아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워털루에서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에 하필 치질이 너무 심하여 전쟁을 2시간가량 늦추게 되었는데 그 사이에 영국을 지원하는 프로이센군이 합류하여 나폴레옹은 아주 강력한 마취제를 투여하고 전쟁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국부적인 마취제였지만 너무 강력한 마취제를 맞아 정신이 좀 몽롱한 상태에서 지휘를 하다가 그만 힘도 못쓰고 패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고 큰소리를 쳤던 세기의 영웅 나폴레옹이 그 놈의 치질 때문에 결국 쓰디쓴 패배를 당하고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되어 초라하게 생을 마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가 패한 다른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이 있었겠지만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고 큰 소리쳤던 나폴레옹도 치질 하나도 제대로 다스릴 수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세상의 것은 그것이 사람이든 권력이든 부귀영화든 아무리 크고 높고 대단해봐야 별거 아닙니다. 아무리 대단한 영웅호걸이라도 금방 늙고 병들고 결국 죽습니다. 제아무리 큰 권세라도, 제아무리 천하 없는 부귀영화라도 금방 썩어지고 없어지고 그야말로 물거품과 같이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립니다. 또 사실 그것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도 별거 없습니다. 많은 것을 가졌다고 행복에 겨워 죽을 지경인 것도 아니고, 가진 것이 별로 없다고 맨 날 슬프고 고통스럽고 비참한 것도 아닙니다. 있는 자나 없는 자 때론 웃고 울기도 하고, 때론 평안하기도 하고 근심 걱정이 있을 때도 있고 다 그렇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벧전1:24,25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육체는 풀과 같이 연약해서 금방 스러질 것이요, 그 영광도 풀의 꽃과 같이 곧 시들어 질것이지만 오직 하나님의 말씀, 그 약속 안에서 주어지는 영광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풀과 같이 시들어 버릴 세상의 것들 바라보고 의지하고 거기에 소망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별 것 아닌 것들 때문에 근심하고 걱정하고 낙심하고 절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별것 아닌 것 때문에 시기하고 질투하고 싸우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하찮은 것들에 얽매어 믿음 생활도 제대로 못하는 어리석은 인생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안 그래요? 그거 뭐 사실 정말 아무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뭐 좀 많이 가졌으면 어떻고 좀 적게 가졌으면 어떻습니까? 그게 뭐 인생의 행복을 좌우합니까? 아닙니다. 행복은 결코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분명코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백만원 수입으로도 행복한 사람이 있고, 천만원 수입으로도 불행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눅12:15절에서도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인생의 행복이 결코 세상의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이시오 영원하고 온전한 생명의 기쁨과 능력과 은혜와 평안을 주시는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물질과 상황과 환경을 초월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은총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습니까?

2.하나님의 전을 사모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세상의 것에 얽매이지 않고 진정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온전히 누리려면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며 가까이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려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덧입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연히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지요.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덧입고, 그래야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자연히 세상의 사람이나 환경이나 상황이나 돈이나 명예나 혹은 죄와 마귀사탄의 유혹을 이기고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며 살게 되지 않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빛의 은총을 누리려면 빛을 가까이 해야 하지 않습니까? 선하고 아름답고 능력 있는 사람을 가까이해야 뭔가 유익한 것을 얻지 않겠습니까? 더럽고 추하고 악하고 사납고 흉악한 사람을 가까이하면 얻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공기가 오염된 공간에 머물면 어떻게 됩니까? 오물과 썩은 것들이 잔뜩 쌓여 있는 공간에 머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선하고 아름답고 능력과 지혜가 충만해서 우리에게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주는 존재를 가까이해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에 그런 존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밖에 무엇이 있습니까? 누가 우리에게 완전한 생명과 기쁨과 은혜와 영원한 복을 주겠습니까? 누가 우리에 영원한 소망과 위로를 주며, 누가 우리를 영원히 온전히 지켜 줄 수 있습니까? 오직 하나님 한분뿐이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바로 그렇게 하나님을 가까이함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받아 누렸던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할 만큼 믿음을 인정받고 하나님의 큰 은혜를 누렸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분이 하나님께 인정받고 놀라운 은총을 누릴 있었던 것은 물론 저절로 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정말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성전을 간절히 사모하며 가까이 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했기 때문에 틈만 나면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아니 틈만 나면이 아니라 틈을 만들어서 찬양했습니다. 하나님을 얼마나 사모했는지 그 말씀을 그리워하며 늘 묵상하였고, 그래서 말씀의 맛이 꿀과 송이 꿀보다 달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어찌 능력과 은혜를 받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여러분,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모했는지 오늘 4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참 놀랍지 않습니까? 다윗이 정말 간절히 원하는 한 가지 소망이 있었는데 그게 뭐냐, 영호와의 집 곧 성전에 살면서 여호와를 사모하며 그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집이 무엇입니까?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얼마나 하나님을 사모하는지 교회에서 사는 게 소원이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이 소망이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이 소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세상에서 건강하게 오래오래 부귀영화 누리면서 사는 것도 소원이 아니요, 자식이 잘되고 자식 자랑하며 자식 덕 좀 보며 사는 것도 소원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 오직 하나님께 나아가 경배하고 찬양하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누리는 것, 이것이 딱 한 가지 유일한 평생의 소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소망은 무엇인지요? 자식이 잘되는 것입니까? 돈을 많이 버는 것입니까?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는 것입니까? 나라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더욱 발전하여 온 국민들이 평안하게 잘 먹고 잘사는 것입니까? 서로 사랑과 은혜를 나누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입니까? 좀 더 고상하게 서로 사랑하고 위로하고 돕고 희망과 위로를 주며 사는 것이 소원입니까? 물론 당연히 그런 소망들도 가져야 합니다. 저도 그런 소망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그런 소망은 결코 온전한 소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소망을 곧 사라지고 썩어지고 없어지고 결국 우리에게 실망을 안겨주는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설령 그런 것들이 이루어져도 우리에게 온전한 행복을 주는 소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영원히 온전히 생명의 기쁨을 주는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 대한 소망,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대한 소망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고자 하는 소망만이 진정으로 영원토록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가치를 누리게 하는 복되고 고귀한 소망인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무엇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줍니까? 무엇이 우리를 끝까지 지켜줄 수 있습니까? 무엇이 정녕 우리를 영원토록 온전하게 행복하고 평안하고 자유하고 위로와 소망을 줄 수 있습니까?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돈도 명예도 지식도 과학도 권력도 우리에게 영원하고 온전한 생명의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과 행복과 사랑과 평화와 자유를 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영원하고 온전한 사랑과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과 행복을 주실 수 있습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 물론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도 세상의 모든 것을 초월해서 기쁨과 은혜와 행복을 주실 수 있습니다. 돈과 명예와 권력과 지식과 능력이 없어도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운데 살 수 있게 하는 소망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잘 아는 합3:17,18절을 보십시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 주셨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며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평안을 주시기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없어도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 안에 완전한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과 기쁨과 은혜를 주십니다. 세상의 모든 죄와 유혹을 이기게 하십니다. 세상의 환경과 상황과 조건도 이기게 하십니다. 모든 마귀사탄의 권세와 사망의 권세와 지옥의 권세에서 승리케 하십니다. 그래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는 물론 지금 여기서도 분명히 어떤 상황에서도 생명의 기쁨 가운데 살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공연히 우리에게 진정으로 생명과 기쁨과 은혜와 평강과 위로와 소망을 주지 못하는 세상의 것을 바라보며 그것을 위하여 살면서 그것에 끌려 다니면서 생명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구원과 생명과 진리와 은혜와 사랑과 기쁨과 소망이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며 주님과 동행할 때에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모든 상황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이와 같이 철저히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았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더욱 큰 믿음과 능력과 은혜를 주셔서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하나님께도 인정받고 세상 영광도 누리며 하나님의 역사도 이루어가는 위대한 신앙인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 1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여러분, 참 대단한 신앙고백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빛이시고 구원이시고 생명의 능력이 되기 때문에 누구도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실 당연한 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이기시는 것은 물론 우리에게도 힘과 능력과 은혜를 주셔서 모든 것을 이기게 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면 그런 하나님이 계신데, 그런 하나님을 믿는데 두려울 것이 뭐가 있겠으며, 낙심되고 한탄하고 불평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 오늘 다윗이 이렇게 큰소리를 치는 것은 결코 상황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오늘 시27편 전체 말씀을 보면 다윗은 결코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양하고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6절에 보면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원수 위에 들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아직은 들리지 않은 것입니다. 또 9절에서는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말아달라고 호소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뭔가 버림받은 것 같은 상황까지 몰린 것입니다. 또 12절에서는 위증자와 악을 토하는 자가 나를 치려고 하오니 내 생명을 내 대적에게 맡기지 말아달라고 애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지금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러한 위경에서도 한탄 원망 불평 불신 근심 걱정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3절에서는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하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할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1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의 빛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이시고 빛이신데 그래서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고 빛을 비춰주셔서 은혜를 주실 것인데 두려워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낙심하고 근심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다윗은 이것을 분명히 믿었기 때문에 그런 위대한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이 이렇게 큰 믿음과 능력으로 세상에서 다가오는 모든 위험과 유혹과 죄와 왜곡된 가치관과 악한 것들을 이길 수 있는 능력과 지혜는 어디 나왔습니까? 물론 하나님께부터 나왔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렇게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덧입게 되었습니까? 물론 성전에서 사는 것이 소원이라고 할 만큼 하나님 가까이 했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맛이 꿀보다 더 달다고 할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기 때문입니다. 그 수많은 전투와 도전과 위험 속에서도 찬양하는 생활을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더욱 큰 믿음과 지혜와 능력과 은혜를 주심으로 그 은혜와 능력과 지혜로 세상에서 다가오는 모든 위기와 유혹 앞에서 요동하지 아니하고 의연하게 헤쳐 나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또 시56:11절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느 때 어느 상황이라도 여전히 살아계시고 역사하십니다. 우리의 눈에 보기에는 어떠하든지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역사를 주관하시고 계십니다.

만약 우리가 그걸 잘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의 영의 눈이 어두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영성이 뭔가 둔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영성을 풍성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하나님의 집이며 주님의 몸인 교회를 가까이 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럴 때 능력이 임합니다. 은혜가 충만해 집니다. 감사와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지혜의 영으로 충만해 지게 됩니다. 그러면 마귀사탄 따위가 역사하지 못하게 됩니다. 세상의 유혹과 핍박이 우리를 어찌 할 수 없게 됩니다. 때론 하나님께 직접 보호하여 주심으로, 때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과 지혜와 능력으로 세상의 것을 넉넉히 이게 됩니다. 그래서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은혜의 길을 잘 달려가 세상 모든 것을 이기고 영원한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이제 이후로 더욱 교회를 가까이 함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와 인도와 보호 가운데 세상의 모든 시험이나 유혹이나 환난이나 핍박이나 기타 모든 어둠의 세력들을 주님의 권능으로 이기고 승리의 은총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제목 : 기도하라

말씀 : 히13:18,19

1.기도의 중요성

1)사도 바울의 기도에 대한 태도

히브리서의 마지막 부분. 본론적인 말씀을 모두 마치고 이제 남은 부분은 성도들에게 부탁의 말씀과 축복. 그중에 오늘은 부탁의 말씀. 그 부탁은 무엇인가? 기도해 달라는 것.

히13:18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우리를 위해 기도하라. 바울은 다른 서신서에서도 자신이 기도할 뿐 아니라 기도할 것을 강조하며 동시에 계속 기도를 부탁.

①바울 자신이 기도함

[행16:13]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행16:25]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빌1:9]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②기도할 것을 강조함

[롬12:12]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엡6:18]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골4:2]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살전5:17]쉬지 말고 기도하라

③기도를 요청함

[고후1:11]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골4:3]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살전5:25]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히13:18]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2)예수님도 기도하시고 기도를 명령하심

①예수님이 기도하심

[막1:35]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마14:23]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눅22: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②예수님이 기도를 명하심

[마6:9]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26:41]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눅18:1]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③예수님이 기도를 가르쳐 주심

주기도(마6:9~13)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기도가 얼마나 중요하면 예수님이 직접 기도하시고 기도를 명하시며 기도를 가르쳐 주셨겠나? 그러니 얼마나 기도해야 하겠나?

2.기도의 의미

1)기도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자기를 부정하는 것

내가 똑똑하다고 여기면 기도할 필요 없다. 그러나 나는 정말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면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님을 긍정하고 자기를 부정하는 신앙의 행위. 이것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바른 신앙생활은 이루어지기 어렵다.

눅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2)기도는 영혼의 호흡.

육체는 육체적 양식과 호흡, 마음에는 마음의 양식과 호흡, 영혼에는 영혼의 양식과 호흡이 있어야. 말씀을 통해 생명의 양식을 먹고, 기도로 영적인 신선한 공기를 계속 공급해 주어야.

세상은 영적으로 너무나 오염된 공기. 불신, 불만, 시기, 원망, 이기심, 욕심, 살인, 더러움, 증오, 간음, 도적질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 그래서 영혼이 죽어간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 기도함으로 영적 신선하고 깨끗한 공기를 마셔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영혼이 치유된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3)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과의 교제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고 그 영광과 은혜를 나누어주시기를 바라신다. 그러한 교제의 수단이 말씀과 기도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부르셔서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일단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많은 경우 기도하면 하나님께 자신의 요구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사실은 듣기부터 해야 한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12:1)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행9:4)

그런 다음에 우리는 비로소 말해야 한다. 세상에서도 먼저 어른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아랫사람이 말하는 것이 예의. 말을 할 때도 예의를 갖추어서 해야. 자신의 필요만을 다짜고짜 말해서는 예의가 아니다. 먼저 영광과 찬양을 돌리고 감사하고 자신의 죄와 허물을 고백하고 그리고 나서 자신의 필요를 아뢰어야 한다.

그러므로 기도를 통해 늘 하나님과 올바르게 의사소통을 하자. 대화가 단절되면 서로간의 관계도 단절되는 것이다.

4)기도는 문제해결의 열쇠.

그렇다고 기도가 내 뜻을 이루는 도구라는 것은 아니다.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 능력과 지혜를 주셔서 해결하시고 때로는 직접 개입하셔서 해결 하신다.

렘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여기서 ‘비밀한 일’은 것은 원어로는 ‘숨겨진 일, 단절된 일, 도달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의미. 우리 지혜로는 도무지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알게 됨으로 문제가 해결된다는 의미인 것이다.

우리는 알 수 없는 일들이 많다. 하나님께 관한 모든 것도 우리 지혜로는 알 수 없다. 하나님이 알려주시고 감동감화를 주시지 않으면 주님도 알 수 없다. 주님을 영접한 후에도 우리의 지혜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나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대해서나 스스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도무지 이해가 안가는 일들이 많다. 그러므로 더욱 말씀묵상하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그나마 주님이 지혜와 능력을 주셔서 깨닫게 하셔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상황과 환경을 변화시키기도 하신다. 때로는 도리어 나를 변화시켜 해결하게도 하신다. 때로는 기적을 통해서도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도 하신다. 예수께서도 많은 기적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도 하셨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진실로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기도할 때에 분명히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더욱 말씀 묵상과 기도생활에 힘씀으로 주님의 능력과 인도하심과 지혜로 문제를 해결하고 승리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자.

5)성도의 향기이다.

계8:3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즉 기도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향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왜 기도가 향기인가?

일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때문이다. 구약에서는 성막 안에 있는 지성소 법궤 앞에서 항상 향을 피워 제사를 드렸다. 제사는 짐승을 잡아 태움으로 죄를 태우며 헌신하겠다는 의미. 동시에 그 향기를 하나님께서 흠향하신다는 것은 그 제사 드리는 자의 마음을 받아 주신다는 의미이기도.

마찬가지로 기도란 물론 하나님과의 대화를 의미하지만 자신의 죄와 무지와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찾아 아뢰며 도움을 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도 자체가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향기가 되는 것이다.

②성도의 인격의 아름다운 향기이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 자기 부정. 자기 죄를 고백하고 선과 의와 진리 가운데 살기를 다짐. 남을 욕하고 정죄하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사랑하고 용서하기를 구하게 된다.

그래서 점점 성화되어 감. 그래서 진정으로 기도하는 마음에는 불만과 시기와 적개심과 원망과 미움이 자리 잡지 못하게 된다. 가정과 이웃과 사회 속에서 화평과 사랑과 정의의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그래서 결국 향기를 발하는 성도가 되는 것이다.

3.기도의 내용

물론 개인과 가정과 교회와 이웃과 이 나라에 영적, 물질적, 정신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자신과 우리 모두가 믿음과 사랑과 은혜와 선과 진리와 의 가운데 살기를 기도해야. 그 중에 오늘 말씀에 나타난 기도의 내용.

1)선한 역사를 위하여

히13:18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모든 일’은 물론 복음을 전하는 일, 교회를 섬기는 일, 성도를 믿음 위에 세우는 일, 감사와 기쁨과 은혜 속에 살게 하는 일. 이런 일들을 행함에 있어서 어떤 사심이나 명예욕이나 권력욕이나 물욕 없이 오직 주의 영광을 위하여, 생명의 역사를 위하여, 성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했다는 것. 그러므로 너희들도 이 일을 위하여 열심히 기도해달라는 것.

즉 내 욕망이나 세상에서의 필요나 현실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기도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를 위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살게 되기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는 것.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그게 가장 귀한 일이고, 우리 모두에게 결국 생명의 은혜와 기쁨과 평안과 복을 가져다 주는 일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귀한 것보다 먼저 기도해야 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2)현실의 문제들

기도의 첫 번째 제목은 선한 역사를 위하여, 복음의 역사를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러나 그렇다고 현실적인 문제를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는 뜻은 아님. 현실적인 문제도 하나님의 일보다 중요하지 않지만 그래도 중요한 문제. 그래서 주님이나 바울도 현실적인 문제를 가지고 기도할 것을 요청.

오늘 히13:19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 위하여 너희가 기도하기를 더욱 원하노라. 내가 될 수 있는 한 빨리 너희에게 갈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는 것. 무슨 문제이지만 모르지만 그들에게 속히 가기를 원했지만 갈 수 없는 상황. 그래서 속히 갈 수 있도록 현실적인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고 있는 것.

예수님께서도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시면서 그러나 마6:11절에서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먼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한 다음에 현실적으로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적인 문제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그러나 그것도 자신의 욕심과 영광과 안일함과 부귀영화를 위해 구하지 말아야. 부귀영화를 위해서도 물론 기도해야 되지만 자기 혼자 영광을 누리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도구로 사용하기 위하여 구해야.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시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우리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영광을 누리게 됨.

그러므로 더욱 기도생활에 힘쓰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선한 역사를 위하여, 성도들이 믿음 소망 사랑위에 든든히 서도록, 물질적로 넉넉하고 육체적으로 강건할 수 있기를 기도하자.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고 교회도 더욱 든든히 서가고 우리도 더욱 영육 간에 큰 기쁨과 은혜와 감사와 능력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삶을 살아가자.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제목 : 오직 바른 교훈을 따릅시다

말씀 : 딤전6:3-5

1.유일한 완전한 진리인 성경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크게 보면 두가지 차원에서 생각할 수 있다. 우선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 없이는 우주도 나도 그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음을 믿는 것이다.

안 그런가? 어떻게 우주만물이 존재하는가? 자연발생설, 진화론 모두 말도 안 되는 엉터리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연적으로는 그 어떤 것도 생길 수도 없고 완전히 사라질 수도 없다. 어떤 사람은 세상이 저절로 될 수 있다는 것은 20만개나 되는 비행기 부품을 다 흩어 놓았더니 어느 날 저절로 조립이 되어 비행기가 나왔더라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고 하였다. 그런데 사실은 만에 하나 20만개의 부품이 저절로 조립되어 비행기가 된다해도 우주는 그렇게 될 수 없다. 우주의 부품이 20만개만 되겠는가? 20만개가 아니라 2,000만 조도 넘는다. 아니 그야말로 천문학적 숫자이다. 그런데 그게 어떻게 저절로 생겨서 저절로 조립되어 이 신묘막측한 질서가 이루어진다는 말인가?

즉 저절로 생기는 것도 불가능하고 만에 하나 어찌어찌 해서 생긴다해도 그 지극히 단순한 물리적 원리와 생명이 이 엄청나고 신비하고 복잡미묘한 존재로 진화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에 불과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은 오직 한가지 방법 밖에 없다. 성경이 말씀한 그대로 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것만이 정답이고 이것만이 유일한 가능한 방법이다. 그런데 죄와 무지 가운데 있는 인생들이 엉뚱한 소리를 하는데 속된 말로 개풀 뜯어먹는 소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걸 바르게 믿으라. 분명히 알라.

두 번째는 하나님의 속성과 사역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는 당연한 것인데 그러면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냐 하는 것이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자존하시는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 완전한 선이며 진리이며 생명이심을 믿는 것이다. 바로 그런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우주만물을 창조하셨고, 그런 사랑과 선와 의 때문에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구원하신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고, 그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시는 것이다. 이걸 확실히 알고 믿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여기서도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믿음의 근거는 무엇인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성경이다. 성경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성경이 생명의 말씀이요, 진리의 말씀이다. 오직 말씀만이 기준이며, 규범이며, 준거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고 따를 때만이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은혜의 길을 가게 된다.

오늘 본문 3절을 보라.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결코 다른 교훈을 따르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만을 따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교만한 자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가장 무식한 자이며 거기서부터 모든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성경 말씀만이 바른 말이요, 올바른 교훈이라는 걸 기억하고 이것만을 받아들이고 따라 살아야 한다. 안 그런가? 정말 옳은 말씀이 무엇인가? 정말 진리의 말씀이 무엇인가? 정말 무슨 말씀이 옳고 선하고 완전하며 무슨 말씀이 우리에게 정말 생명과 기쁨과 은혜와 평안을 주겠는가?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성경 말씀에 정말로 귀 기울이지 않고 자꾸 자기 생각과 경험과 이성을 따라 살려고 한다. 당장에 뭔가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을 따르려한다. 당장 편하고 물질적 육체적으로 좋아 보이는 것을 따르려고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도 안 오면서 하나님은 믿는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믿는다면서 성경대로 믿지 못한다. 이런 건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 자기가 만들어 놓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교회에 다녀도 성경대로 믿지 않으면 내가 만든 하나님에 불과한 것이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어떤 이들은 교회에 나오긴 나오는데 자기 경험과 지식과 이성을 따라 교회 생활한다. 주일날 교회에 오고 싶으면 오고 바쁘면 밭에 가서 앉아 있다. 십일조도 형편에 따라 자기 기준에 맞추어 하게 되면 하고 못하게 되면 그만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교회를 섬기는 일은 자신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것도 예수님의 교훈을 바르게 따르지 않는 것으로 온전한 신앙의 모습이 아니다. 자기의 생각과 가치관과 기준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말씀대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정말 세상의 그 어떤 다른 교훈도 따르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라. 조금도 가감하지 말고 말씀그대로 믿으라. 이해가 되건 안되건, 내 생각과 같건 다르건 말씀 그대로 믿으라. 오직 주님의 말씀만이 생명의 말씀임을 믿고 순종하라. 그리하면 반드시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리라.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 물론 여기서고 진정 은혜와 사랑과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넘치는 삶이 되리라.

2.성경을 믿지 않으면 가장 교만한 것

딤전6:4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그렇다. 성경을 거부하면 가장 교만하고 어리석고 무지한 인생이다. 당연하지 않나? 인생이 아는 게 얼마나 있다고 그걸 거부하겠나? 태초부터 있었는가? 모든 것을 알 수 있는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가? 도대체 우리가 알 수 있고, 할 수 있고,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게 얼마나 있는가? 그런데 마치 자기가 다 아는 것처럼 이러쿵저러쿵 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얼마나 교만한 일인가?

가장 유식한 것은 성경을 바로 알고 믿고 따르는 것이다. 당연하지 않나? 진정한 지식이 뭔가? 생명을 살리고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지식이 생명을 살리고 풍요롭게 하나? 진정 인생이 가야할 길과 목적과 방향과 의미와 가치를 누가 알려주나? 오직 성경 밖에 더 있나?

그런데 요즘에 정말 엉뚱한 소리 하는 사람들 많다. 성경이 아니라고 하는데 자기가 그렇다고 하고, 성경이 그렇다고 하는데 자기가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그건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는 자살행위에 불과하다.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계22:18,19절을 보라.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아니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이 말씀이 우습나?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히 엎드리라. 다른 무엇보다 말씀을 바르게 알고 믿고 따르라. 그리하여 진정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잘 달려가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라.

3.성경을 따르지 않으면 문제 발생

딤전6:4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그렇다. 성경을 그대로 믿지 않고 따르지 않으면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 당연하다. 성경이 오직 유일한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인데 그걸 믿지 않으면 결국 생명과 진리를 버리는 것인데 문제가 안 발생하는 게 도리어 이상하지 않은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따르지 않으면 결국 거짓 것을 따라가는 것인데, 참 진리의 길, 생명의 길도 모르고 죄와 무지와 어둠 속에서 캄캄한 길을 더듬고 다니는 것인데 어찌 문제가 생기지 않겠나?

변론과 언쟁과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왜 날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무지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겸손히 하나님 앞에 엎드려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알게 된다. 주님이 주시는 사랑과 은혜와 기쁨과 평안이 우리 가운데 임하게 된다. 그러면 당연히 시기와 분쟁과 싸움과 비방과 악한 생각들이 물러가는 것이다. 도리어 사랑과 기쁨과 은혜와 위로와 소망이 넘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싸우고 헐뜯고 악을 행하겠는가?

또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은혜로 구원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그러면 어떻게 되나?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형제자매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나? 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서로 사랑하며 도우며 위로하며 살게 된다. 그러니 어찌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교만한 가운데서 서로 싸우고 헐뜯고 비방하고 불화하겠는가? 심지어는 원수조차 사랑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진정 하나님을 알고 그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이러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찌 하든지 성경으로 돌아가라.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라. 하나님 말씀을 마음 판에 새겨 넣으라.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영혼이 소생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능력과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면서 남에게도 생명의 은총을 주는 복된 인생이 되자.

4.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삼지 말라.

딤전6: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이것은 성경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또 다른 폐단이다. 성경을 바르게 알지 못하며 마음이 부패해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조차도 이익의 방도로 삼는다. 이익의 방도로 삼는다는 것은 경건을 물질적, 육체적 유익의 도구로 이용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목회자일 경우에는 삯군 목사요, 성도일 경우에는 하나님을 세상 행복의 도구로 부려먹으려는 거짓 성도가 되는 것이다.

물론 참 목자와 참 신자라도 경건을 올바른 이익의 방도로 삼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올바른 이익이란 정신적으로는 경건생활을 통하여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서 예수님을 닮아가며 참 사랑과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누리는 것을 말한다. 또한 물질적, 육체적으로는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강건함과 풍성함을 누리는 것이다. 이것도 사실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성실하게 열심히 진실하게 살아가면 하나님과 사랑에게 귀히 여김 받게 된다. 그러면 육체적으로나 물질적으로도 풍성함을 누리는 것도 사실인 것이다.

그래서 잠3:3,4절에서는 말씀한다. “인자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또 잠3:9,10절에서도 말씀한다.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그러므로 이런 은혜도 누려야 한다.

그러나 경건을 잘못된 이익의 방도로 사용하면 안 된다. 돈 많이 벌고 건강하게 출세하고 자식이 잘되는 등 그저 세상의 복을 위하여 경건생활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건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왜곡된 모습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도 이런 모습들이 있다. 삯군 목자도 있고, 그저 세상적인 복이나 바라며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도 있다. 우리는 이걸 잘 분별해야 한다. 사탄마귀가 그럴듯하게 미혹해서 우리를 자꾸 그쪽 방향으로 몰고 가려고 한다.

물론 돈이나 건강이 평안함과 기쁨도 구해야 한다. 그러나 그 자체만을 구하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서 그런 것을 추구한다든지 하는 것은 결국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삼는 행위로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든 오직 진리의 말씀, 은혜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따르자.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만이 영원토록 바른 말씀, 생명의 말씀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그 말씀을 기준으로 신앙생활하자. 경건을 세상적 유익의 수단으로 삼지 말고 오직 주님 안에 있는 참된 생명과 은혜를 구함으로 진정 참되고 영원한 생명의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면서 그 은혜를 세상에 끼치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자.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제목 : 선한 싸움을 싸우라

말씀 : 딤전6:11-12

 

 

1.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세상이 너무 왜곡되어 있어서 자칫 잘못하면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세상의 왜곡된 물결에 휩쓸려 가기가 쉽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얼마나 물질주의와 인본주의와 이기주의와 편의주의와 향락주의가 만연되어 있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즐기고 큰 집에서 좋은 차 타고 좋은 옷 입고 좋은 것 먹으며 많은 것을 누리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 명예와 권세를 누리며 대접받고 살아가는 것이 인생인양 여기고 있지 않은가? 그러려면 어찌 하든 남을 이겨야 하고 더 많은 것을 가져야 하니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고 그래서 결국 갈등과 아픔과 상처와 고통을 주고 미움과 시기와 질투에 빠지고 그래서 결국 싸우고 속이고 빼앗고 심지어 죽이고 하며 살아가지 않는가?

그래서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있지 않으면 그런 삶의 양태를 따라 살아가기 쉽기 때문에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벧전4:7절에서는 말씀한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또 예수님께서는 마26:41절에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고 하신 것이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바로 이러한 세상에서 우리가 정말 믿음으로 승리하기 위하여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을 묵상할 때에 주님이 주시는 믿음과 은혜와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왜곡된 가치관과 삶의 모습들을 물리치고 주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삶을 살아감으로 주님의 은총이 넘치는 삶이 되기를 바란다.

2.세상의 왜곡된 것을 피하라.

딤전6: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1)하나님의 사람임을 잊지 말라.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하나님의 사람.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인가? 얼마나 존귀한 이름인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이름인가? 그렇다면 그 이름값을 좀 해야 되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사람이 마귀의 사람들과 같은 사고를 가져야 되겠는가? 하나님의 사람에 땅에 얽매여서야 되겠는가?

그러므로 ‘너 하나님의 사람아.’하시는 이 말씀을 기억하라.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하지 말고 주님을 닮아가자. 사탄이 가져다 주는 왜곡된 가치관과 삶의 모습을 버리고 주님의 사람처럼 아름답게 기쁘게 가치 있게 보람 있게 거룩하게 살아가자.

2)세상 욕망을 피하라.

이것들을 피하라. 이것들은 앞의 9,10말씀. 돈을 사랑하는 것, 부하려 하는 것, 세상적인 욕심. 이런 것들을 피하라는 것이다. 즉 세상에 만연되어 있는 왜곡된 가치와 풍조를 따르지 말라는 것. 그런 것들을 피하고 주님의 가치관을 따르라는 것.

그렇다. 어떤 목표를 향해 가려면 먼저 피할 것은 피해야 한다. 박사, 판사, 의사가 되려는 사람이 놀고 먹고 마시고 향락을 가까이 하면? 술을 안 마시려면 술집을 피해야. 술꾼을 피해야. 천성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돈이나 향락이나 죄된 장소를 바라보고 가까이하면 어떻게 거룩한 모습으로 주님을 향해 가겠는가?

히11: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마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물론 돈을 완전히 배격하라는 것은 아니다. 돈이 주인이 되지 않게 하라. 예수님이 주인이 되게 하라. 내가 돈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돈이 나에게 의하여 지배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돈보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일이 우선이어야. 돈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마음껏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내가 돈을 지배하는 삶이다.

그러면 어떻게 돈에 지배당하는 삶이 아니라 돈을 지배하는 삶이 될 수 있는가? 주님의 영광을 본 사람은 이게 가능해 진다. 그까짓 세상 부귀영화와 비교할 수 없는 그 영광의 나라를 본 사람이 그까짓 돈 따위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안 그런가? 그 영광의 나라를 아는데 그게 내 건데 그까짓 돈 몇 푼에 혹하겠는가? 그 완전하고 영원하게 영광스럽고 그야말로 어둠과 절망과 고통과 미움과 한숨과 슬픔과 고통이라고는 찾아야 볼 수 없는 영원한 영광만이 가득한 그 나라를 본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세상의 별거 아닌 것에 목맬 필요가 뭐란 말인가? 돈 몇푼 때문에 신앙생활 제대로 못하고, 돈 몇푼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돈 몇푼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에 먹칠을 하겠나?

그러므로 그까짓 세상의 것에 연연하지 말라.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라. 세상의 죄된 곳을 피하라. 주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드리고, 찬양하고, 사랑하고 은혜를 나누고 섬기고 하는 곳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반드시 풍성한 삶을 살아간다. 참된 자유인이 된다. 평강을 누리게 된다.

피할 것을 피하고 멀리할 것을 멀리한 다음에 이제는 따를 것을 따르고 가까이 할 것을 가까이 하라고 말씀하신다.

3.진리를 따르라.

딤전6: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1)의를 따르라.

의를 따르라. 의란 무엇인가? 옳은 것이다. 그럼 진정으로 옳은 일은 무엇인가? 옳은 사람은 누군가? 오직 말씀만이 옳다. 오직 예수님만이 완전한 의이시다. 세상의 어떤 것도 완전히 옳은 것은 없다. 세상의 어떤 사람도 완전히 옳은 사람도 없다. 세상의 진리가 비록 상대적인 의가 있다 해도 그것은 완전한 의가 아니다. 생명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천국으로 안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직 말씀만이 오직 예수님만이 완전한 선이며 생명이며 의이며 거룩이며 사랑이시다.

그러므로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오직 말씀을 따르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만을 따르라. 그리하여 의의 길,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달려가 주님의 은총을 누리라.

2)경건을 따르라.

경건을 따르라. 두려워하고 공경하며 삼가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 세상의 욕심과 향락과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 무엇을 따를 것인가? 진리를 따를 것인가? 세상 사람들을 따를 것인가? 주님을 따를 것인가? 돈을 따를 것인가?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설령 손해를 보더라도 선과 진리와 의와 사랑과 거룩과 성실과 진실을 따르라.

3)믿음을 따르라.

예수님께 대한 믿음. 천국에 대한 믿음.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도하심에 대한 믿음. 승리에 대한 믿음. 영광의 나라에 대한 믿음. 그러면 그 믿음을 따르라. 그 믿음이 내 행동을 좌우하게 하라. 사람이 좌우하고, 세상의 가치관이 좌우하고, 돈이 좌우하게 하지 말라. 정말로 믿으면 주님을 따르라. 도대체 주님보다 신뢰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 주님께서 주실 은혜보다 더 큰 것을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세상의 어떤 것도 믿을만하지 못하다. 죄와 무지와 악속에 있다. 사람이건 돈이건 학문이건 예술이건 체육이건 문화가 어떤 것도 우리 미래를 보장하지 못한다. 오직 예수님만이 완전한 신뢰의 대상이다. 완전한 생명을 보장한다. 완전히 선하시다. 완전히 구원하신다. 완전히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믿음을 따르라.

4)사랑을 따르라.

사랑을 따르라. 무슨 말인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길을 따르라. 이웃을 사랑하는 길을 따르라는 것이다. 자신과 돈과 세상 즐거움을 사랑하는 길이 아니라 주님과 의와 진리와 이웃을 사랑하는 편을 택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정말 무엇을 따르나? 물질적 유익을 따르나, 사랑을 따르나? 내 욕심을 따르나 사랑을 따르나? 주님 사랑을 따르나, 자녀 사랑을 따르나? 주님의 몸된 교회 사랑을 따르나? 세상의 것 사랑을 따르나? 교회의 일과 세상의 일 중 어느 편을 따르나? 교회가 더 중요한가? 세상이 더 중요한가? 정말 무엇을 더 사랑하나? 이 집이 내 아버지 집인데, 주님의 몸인데. 믿음 안에서 한 가족들인데.......

5)인내를 따르라

인내는 물론 참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을 참으라는 것인가? 세상에서 열심히 참고 일하고, 열심히 참고 공부하라는 것인가? 물론 그런 인내도 필요하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인내는 믿음안에서의 인내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주님을 끝까지 신뢰하고 주님의 선하심을 믿고 주님의 때를 기다리라는 것이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데 어렵고 힘들어도 인내하며 주님의 일을 하라는 것이다. 불평하고 원망하고 좌절하고 짜증내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주님의 일도 뭔가 일이 잘 풀리고 인정해주고 칭찬해 주면 신이 나서 하고 힘들거나 알아주지 않으면 그만 낙심해서 예배고 봉사고 다 집이치우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힘들 때라도 겸손히 주님 앞에 엎드리며 진리의 길을 가라는 것이다.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가신 주님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주님의 십자가, 주님의 몸에 찍힌 채찍 자국, 그 손의 못 자국, 그 허리에 창 자국, 그 당하셨던 온갖 모욕들, 침 뱉음, 따귀를 맞으심 등을 생각하며 진리의 길을 달려가라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이 도우심과 인도하심으로 결국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 힘들면 낙심과 절망과 나아가 원망하고 불평한다면 결국 나도 너도 다 힘들어지고 주님의 능력도 덧입지 못한다. 은혜도 자꾸 멀어진다. 그러면 자꾸 더 힘들어진다. 그러므로 힘들더라도 그저 겸손히 주님의 뜻을 인정하고 엎드리며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라. 그러면 분명히 주님이 힘주시고 은혜 주셔서 감당케 하신다.

6)온유를 따르라.

온유. 부드러운 것. 그러나 그냥 단순히 인간적으로 부드러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능력과 권한과 사랑을 의지하여 겸손한 태도를 말한다. 이렇게 하나님의 능력과 주권과 사랑을 의지하며 겸손히 엎드리면 당연히 다른 사람에 대해서 부드러운 모습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왜?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알기에. 모든 것이 하나님의 권한에 있음을 알기에. 그도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임을 알기에. 그러므로 나는 그저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리며 나의 일을 할 뿐 나머지 문제는 주님께 맡기면 될 것이기에 분노하고, 정죄하고, 짜증내고, 화내고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물론 이것도 인간적으로는 쉽게 안 되겠지만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하다.

4.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딤전6: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앞에서 말씀했던 모든 내용들이 결국의 믿음의 선한 싸움이다. 세상의 추한 것을 피하는 것도 선한 싸움이요,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는 것도 선한 싸움이다. 결국 자신과의 싸움이다. 믿음의 싸움이다. 이 싸움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서만 승리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부르심을 받았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며 그 은총을 누리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자꾸만 육체적인 것들과만 씨름하지 말고, 돈과만 씨름하지 말고, 정말 진리와 믿음과 의와 거룩과 경건과 사랑을 따르며 그것들을 지키는 일에 더욱 힘쓰자. 그러기 위하여 더욱 말씀과 기도와 찬양에 힘쓰자. 그래서 성령의 능력을 덧입자.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승리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더욱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삶을 살아가자.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주일오후찬양예배설교


제목 : 흠 없이 설 수 있도록

말씀 : 딤전6:13-16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피할 것은 피하고, 취할 것을 취해야 한다. 운동을 잘하려면 게으름이나 향락을 피하고 건강에 좋은 음식을 먹고 열심히 훈련하고... 좋은 공부를 잘하려면? 돈을 벌려면? 권세를 얻으려면? 모두 마찬가지. 육체적, 정신적 좋은 것을 취하고, 해로운 것들을 피해야....

경건도 마찬가지. 경건에 유익한 것을 취하고 경건에 해로운 것을 피해야. 말씀 기도 찬양 예배를 가까이. 전도 사랑 봉사도 가까이. 반대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피해야. 욕심을 피해야. 탐심을 버려야. 그래서 앞의 6~12절에서는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라. 돈을 피하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자유도 누리지 못하고 신앙생활도 바르게 못하고 생명의 기쁨도 잘 누리지 못해. 여기서 자유하면 아주 행복한 인생이 되는데.......

그 대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라. 이런 것들로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세상의 것보다는 하나님 나라에 더 우선권을 두라. 그리하면 자유와 행복과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된다. 그래서 벧전2:11절에서는 말씀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말씀.

오늘은 그렇게 욕심을 버리고 영생을 취하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할 이유를 말씀.

1.사도의 명령(=예수님의 명령)

딤전6:13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언을 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하나님 앞과 그리스도 앞에서 명한다. 그 하나님은 누구시냐? 예수님은 누구시냐? 하나님은 만물을 살게 하신 분. 즉 만물의 존재의 근원, 생명의 근원, 생명의 수여자. 생명력의 공급자. 그 이름으로 명령함. 따라서 엄중한 명령. 다른 이의를 달 수 없음. 아멘으로 받아야 함. 두렵고 떨림으로 받아야 함.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거를 하신 예수님. 빌라도 앞에서 하신 선한 증거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당신께서 왕이신 것을 증언하신 것을 말한다.(마27:11, 막15:2, 눅23:3, 요18:37) 요18:37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왜 하필 빌라도 앞에서 하신 선한 증거에 대하여 말씀하셨을까? 빌라도는 유대의 총독. 물론 빌라도보다 더 높은 로마 황제도 있었지만 당시 빌라도는 유대에서 가장 높은 사람. 그 앞에서 내가 왕이다. 너의 권세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즉 최고 통치자 위에 계신 분. 인간적으로는 빌라도가 예수님께 대한 사형 언도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것은 인류 구속을 위하여 하나님의 허락하심으로만 가능했던 일. 예수님은 그 모든 권세 위의 권세를 가지고 계신 분. 모든 영계, 물질계의 통치자, 주권자, 심판자. 그 이름으로 명한다.

따라서 이 말씀을 아멘으로 받으라. 두렵고 떨림으로 받으라. 순종하라. 그것이 당연한 것이고, 그것이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비결이다. 예수님의 말씀, 생명의 말씀, 은혜의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 성도로서의 본분을 다하고 그로 인한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마음껏 누리는 삶을 살아가라.

2.주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함.

딤전6: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흠과 책망 받을 것이 없도록 지키라. 흠은 모자라는 것. 책망은 모자라는 것을 포함하지만 악하고 불의한 일을 함으로 질책을 받는 것. 즉 흠은 할 것을 하지 않는 것. 책망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함으로 질책을 받는 것.

흠은 조금은 소극적 악, 책망은 좀 더 적극적 악. 우리는 해야 할 일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말아야.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물질적으로 육체적으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야. 동시에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물질적으로 육체적으로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피해야. 거꾸로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고, 해야 할 할 일을 하지 않는다면 이건 심각한 문제.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말씀 앞에 서야. 성령의 은총을 덧입어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그러면 선한 일에 관심과 시간과 재미와 기쁨과 가치와 보람을 느껴. 그러면 감사함으로 할 수 있어. 책망 받지 않기 위하여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3.명령에 순종해야 할 이유

딤전6:15, 16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오 /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1)그리스도 앞에 서야 하니까

딤전6:14,1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즉 우리가 주님 앞에 서야 하니까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이 없이 그 앞에 설 수 있도록 말씀 안에서 성결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엄청난 희망이며 기쁨이며 소망이며 영광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다시 오심은 완전한 영광의 나라, 완전한 기쁨, 모든 적대자들을 물리치심. 마귀사탄을 결박하심. 모든 어둡고 칙칙하고 더럽고 추하고 슬프고 아프고 미련하고 약하고 부족하고 원망과 불평과 가난과 미움과 증오와 불안과 염려와 슬픔과 고통을 완전히 물리쳐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다시 오심은 우리에게 궁극적인 희망이요 소망이요 기쁨이요 영광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을 고대하며 혹은 우리가 예수님 앞에 설 날을 기다리며 감사와 기쁨과 은혜로 주님과 동행해야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오심을 생각하며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삶을 영위해야 한다. 그 앞에 섰을 때 영광도 받고 상급도 받지만 심판도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15절에서는 유일한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라라고 하셨다. 온 우주만물의 주권자, 통치자시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 분의 뜻대로 살아가는 자에게는 영광과 상급이 주어진다. 그러나 그 분의 뜻에 반해서 살아가면 결국 우주만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 한다. 그 심판은 세상의 어떤 심판과도 비교할 수 없는 준엄한 심판이다. 영영한 심판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혹은 주님 앞에 설 것을 생각하며 한편으로는 감사와 기쁨과 감격과 소망과 위로 속에 다른 한편으로는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자신을 살피며 주님 앞에 설 날을 준비하며 살아가자. 그리하여 여기서도 하나님 안에서 은혜의 풍성함을 마음껏 누리고 주님 앞에 설 때에는 잘했다 칭찬받으면 많은 상급도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자.

2)하나님 안에 복이 있으므로

딤전6:15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하나님은 복되시고..... 하나님은 생명, 기쁨, 평안, 은혜, 위로, 소망, 사랑, 풍성....... 무엇이 복인가? 복이 어딨나? 행복이 어딨나? 하나님이 복이시다. 주님을 만난 것이 복이요, 주님을 아는 것이 복이요, 주님을 믿는 것이 복이요,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복이다. 이 이상의 복은 없다. 이 이상의 보화는 없다. 이 이상의 행복도 없다. 이 이상의 축복도 없다. 그래서 주님은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를 통해서 천국을 발견한 사람은 그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그것을 산다고 하였다.

마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3)영생, 빛, 초월적인 하나님이시므로

딤전6: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오직 그에게만 영생이 있음. 물론 우리도 영생함. 그러나 온전한 영생은 예수님의 생명을 덧입어야 가능. 물론 안 믿는 자는 영생은 영생. 그러나 그것은 영생이 아니라 영벌. 영생은 완전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상태에서 영원한 삶이 영생. 하나님은 바로 그런 생명을 가지고 계신 분.

그러므로 마땅히 그를 경외하고 따르고 순종하고 명령을 지켜야. 그때 그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게 됨.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심. 완전한 빛. 참 빛. 영원한 빛. 어둠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없는 완전한 빛의 세계. 죄를 가지고는 그 빛가운데로 들어갈 수 없어. 예수님의 보혈로 깨끗함을 입고 예수님의 생명의 덧입어야 그 빛에 가까이 갈 수 있어. 그 빛에 가까이 가면 그 빛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게 됨.

볼 수 없는 분, 본 사람이 없음. 천상의 세계에서도 하나님은 볼 수 없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대리인으로 통치하심. 그 빛이신 그 영광스러우신 초월적인 하나님 앞에 서려면 흠도 없이 책망 받을 것이 없어야 함. 물론 우리 의로서는 안됨. 오직 예수님의 의를 덧입어야 함. 그러나 예수님의 의를 덧입은 사람은 최대한 의를 행하며 살아야 함. 잘 안되어도 때로는 쓰러져도 또 다시 일어나 십자가를 붙들고 예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진리의 길로 생명의 길로 달려가야 함.

그러면 이 땅에서 하나님 안에서 누려야 할 온갖 좋은 것들을 다 누리게 됨. 평안과 기쁨과 위로와 소망과 자유와 만족과 행복을 누리게 됨. 그리고 주님 앞에 감사와 기쁨으로 설 수 있음. 잘했다 칭찬받게 됨. 영광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고 상급도 받아 누리게 됨.

그러므로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혹은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이 없게 서기 위하여 말씀 안에서 살아가자. 진리와 성실과 의로써 살아가자. 부족하고 미련할 때는 다시금 주님 앞에 엎드려 회개하고 위로와 힘을 얻자. 성령의 능력을 덧입자. 그리하여 오늘 여기서도 주님과 동행하는 자들이 누릴 수 있는 은혜의 풍성함을 마음껏 누리다가 주님 앞에 서는 날 영광의 면류관을 받아쓰자.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주일오후찬양예배설교] 흠없이 서기 위하여 Sunday night worship

제목 : 흠 없이 서기 위하여

말씀 : 살전3:11-13

1.아름다운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 참 아름다운 교회, 복된 교회. 바울이 2차 전도여행시에 불과 3주일 동안 말씀을 가르치고 세운 교회. 그런데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 가운데 든든히 선 교회. 믿음의 소문이 퍼진 교회. (행17:2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그리고 곧 핍박으로 데살로니가를 떠남.(행17:10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그리고 이후로 오랫동안 데살로니가에 가지 못함. (살전2:18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

즉 불과 3주일 가르쳤다. 물론 거기서 쫓겨나다시피 한 것이 3주일 후 곧바로는 아니라할지라도 불과 한 두 달. 그런데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바울과 주를 본받은 교회(살전1:6) 그래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 가운데 든든히 선 교회. (살전1: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남다른 애정. 당연하지 않겠나? 불과 3주일. 그런데 믿음의 소문이 난 교회. 환난과 핍작을 잘 견뎌내는 교회. 그러니 얼마나 애정이 가고, 얼마나 대견하고, 얼마나 그립겠는가? 그런데 무언가 모를 특별한 사정으로 갈 수 없는 상황. 그래서 데살로니가 전후서를 통해서 서신으로 안부를 전하여 가르치고 감사의 마음을 표함.

그러나 데살로니가 교회를 가보기를 간절히 원한 것은 물론 인간적인 사랑과 정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들의 믿음을 굳게 하고, 말씀으로 위로하고, 환난 중에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었다.(살전3:10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

즉 그들이 다른 어떤 것들 즉 육신의 건강이나 물질적 축복이나 세상의 명예나 뭐 이런 것들을 얻은 것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 위에 굳게 선 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그들에 세상의 다른 어떤 것들을 주려고 가기를 원한 것이 아니라 믿음을 굳게 하고 믿음으로 위로하고 환난 중에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었다.

우리는 무엇으로 기뻐하는가? 우리가 정말로 얻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성도에게, 자녀에게 무엇을 줄 것인가? 눅10:20 “눅10: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요이1:4 “너의 자녀들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를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오늘은 그래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감사와 기쁨의 안부를 전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를 드리고 있는 장면.

2.데살로니가 교회를 방문할 수 있기를 기도함(11절)

살전3:11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는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갈 수 있게 하시오며

여기서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하여 얼마나 애틋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즉 데살로니가에 가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을 가지고 주님 앞에 그 길을 열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것. 이것은 이미 2:17절에서도 말씀한바 있다. 살전2:17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개역개정 성경에는 직행하게 해달라고 하였다. 직행한다는 것은 걸림돌 없이, 장애물 없이, 신속하게, 다른 것은 생각지 않고 곧바로 가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보고 싶은 열망을 말함.

이 기도는 후에 실현. 고후2:13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하지 못하여 그들을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 고린도후서는 데살로니가전서보다 2년 정도 뒤에 기록되었다. 따라서 바울은 2년 뒤에 마게도냐에 갔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당연히 이때 데살로니가 교회를 방문했을 것. 물론 데살로니가 교회를 방문했다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 지역의 중심도시인데 마게도냐에 가면서 그토록 보고 싶었던 데살로니가 교회를 방문하지 않을 리가 없다.

우리는 정말 사도 바울이 얼마나 교회를 사랑했는지, 또 데살로니가 교회는 얼마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 가운데 든든히 서있었는지 되새기며 우리 모두가 정말 믿음과 소망과 사랑 가운데 든든히 서서 위로 주님을 사랑하고 아래로 성도 간에 서로 사랑하며 주님의 은총을 누리며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자.

3.사랑이 더욱 넘치기를 기도함(12절)

살전3:12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사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미 사랑이 넘치는 교회였다. 살전1: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이미 그들은 사랑으로 교회를 위하여 수고하고 사랑으로 성도를 위하여 수고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의 수고가 있다는 것은 말로만 하는 사랑이 아니라 행동으로 하는 사랑을 말한다. 그만큼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이미 성숙할 정도로 서로를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다시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시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하나는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 즉 모든 사람이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신자나 불신자나,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나 싫어하는 사람이나,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나 미워하는 사람이나, 나에게 뭔가 은혜를 준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마음에 맞는 사람이나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이나 동일하게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다.

두 번째 생각할 것은 사랑을 넘치게 한다는 것이다. 그냥 어느 한 구석에 조금 있는 게 아니라 사랑이 흘러넘치도록 되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어려운 이야기이긴 하지만 사랑이 흘러넘칠 때만이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다. 사랑이 조금만 있다든지, 제법 많은 정도 가지고는 진정한 사랑을 하기가 어렵다. 그러면 자기와 관계가 있고 사랑하는 사람은 그런대로 사랑 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은 사람을 사랑하기 어렵다. 그리고 상황이 좋으면 그런대로 사랑하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사랑하기 어렵게 된다. 더더구나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사랑이 흘러넘치면 누구나 사랑할 수 있다. 마음에 들든 말든, 나를 좋아하든 말든, 교인이든 말든, 친구이든 말든, 은혜를 주었든 말든, 상황이 좋든 좋지 않든 사랑하게 된다. 우리는 이런 사랑을 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5:44절에서 말씀하셨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물론 우리는 완전히 예수님처럼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더 사랑으로 채워야 한다. 그래서 가능한 넘치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모든 일들을 사랑하고 그런 가운데서 함께 기쁨과 은혜와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다.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 심령을 채워야 한다. 그래야 그나마 우리는 좀 더 사랑할 수 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지만 성령이 역사하시고 주님이 내 심령을 사로잡아 주시면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더욱 깨어 기도하며 성령의 능력과 주님의 사랑을 충만하게 덧입어 사랑하고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아가자.

4.흠이 없게 하시기를 기도함.(13절)

살전3:13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 기도에서 우리는 세 가지 주제를 발견한다. 하나는 마음을 굳게 하기를 기도하셨다는 것이다. 다음은 반드시 주 예수님이 강림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그때까지 우리는 흠이 없는 삶의 모습으로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마음을 굳게 하신다는 것은 지지하다, 고정시키다, 강하게 하다는 의미이다. 지지한다는 것은 넘어지지 않게 한다는 말이다. 고정시킨다는 것은 흔들리지 않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지 않고 한 곳에 머물러 있다는 말이다.

이것도 말 할 나위 없이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성령님이 함께 하실 때 우리는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는다. 세월따라, 세상따라, 사람따라, 상황따라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는다. 안 그러면 흔들린다. 우리는 믿음도 마음도 의지도 부족하다.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야만 강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어 성령의 능력과 지혜로 세상의 도도하게 흐르는 왜곡되고 악한 가치관에도 휩쓸리지 말고, 상황과 환경에 따라 이리저리 끌려다니지 말고 오직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 믿음과 선과 진리와 의를 향하여 힘차게 나아가자.

또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주님은 반드시 재림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주님의 약속이다. 주님의 강림이 이루어져야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

마24:30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 요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 살전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우리는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이 여기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인생의 목적지도 여기가 아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다. 그러나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는 삶은 현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현실의 삶에 더 충실해야 한다. 올바르게 주님 뜻대로 살아야 한다. 왜냐하면 주님 앞에 서야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끝나버린다면 되는대로 살아도 되겠지만 우리는 주님 앞에 서서 의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의 강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삶을 모습에 대하여 말씀한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흠이 없다는 것은 비난할 것 없는, 질책할 것이 없는, 잘못이나 결점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여기서 결점이나 흠이나 비난거리는 세상적인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의 관점에서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말한다.

우리는 무엇에 흠이 없어야 하나? 말씀에서 흠이 없어야 한다. 세상적인 가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기준에서 흠이 없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영광, 그래야 생명의 기쁨, 그래야 기쁨으로 주님과 만난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는 서로를 진정 애틋한 사랑으로 사랑하자. 누구나 사랑하자. 어렵겠지만 그러기 위해 더욱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자. 사랑으로 충만하게 채우자. 그렇게 사랑하며 거룩한 삶을 살아가자. 더욱 가정과 직장과 교회에 충실하자. 그리하여 이 땅에서의 삶을 마감하고 주님 앞에 섰을 때 더 나아가 주님 다시 오실 때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을 만나자.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주일오후예배설교] 성령이 임하시면(전도설교)행1:6-8) Sunday evening Service

제 목 : 성령이 임하시면(전도)

말 씀 : 행1:6-8

1.교회의 목적

교회의 정체성. 엡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그러면 교회의 목적은? 주님의 몸이므로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곳. 주님의 역사는? 생명의 역사.

사람들은 교회의 정체성을 사랑, 인도주의, 자비, 희망, 아름다운 사회 건설 등으로 생각하지만......... 그것이 근본 목적은 아니다. 교회는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가는 곳. 아무리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고 희망을 주어도 생명이 없으면?

그러므로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바르게 알고 그 목적에 부합되는 교회가 되어야...

2.예수님이 오신 목적

요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눅19: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마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눅10: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생명을 살리고 풍성하기 위하여

3.예수님께서 하신 일

마9: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마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요12:23,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눅24:7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4.예수님의 명령

마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막16:15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생명을 살리는 일

5.성령을 받은 자의 삶의 모습

먼저 구원의 은총. 인간은 죄인,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자. 그러므로 믿고 회개하고 새생명. 이것이 성령 받은 자의 기본적인 모습. 그러나 그렇게 새생명을 얻고 나면 삶의 변화, 인생의 가치관과 목적과 방향과 언어와 행실 등에 삶에 변화가 있어야. 전혀 새로운 존재가 되었으므로...

오늘 말씀.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성령이 임하면 권능.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는 권능. 세상의 왜곡된 가치관과 문화와 지성과 이성과 과학을 이기는 권능. 상황과 환경과 조건을 이기는 권능. 사람을 이기는 권능. 세상의 돈과 명예와 권력을 이기는 권능. 그래서 힘있게 증인의 역할을 감당하는 권능.

당연하지 않나? 성령의 능력을 덧입었는데... 새생명의 은총을 입어 새로운 사람이 되었는데..... 이 새생명의 역사가 얼마나 굉장한 것인지를 알았는데.... 생명을 살리는 일이 얼마나 시급한 일인지를 아는데......... 온천하와도 바꿀 수 없다는 걸 아는데...... 그러면 증인이 되지 않을 수 없어.

그래서 1년에 두 번 정기적으로 전도. 물론 일상생활에서 계속 해야 되지만... 그러므로 열심히 참여해야. 기도해야. 평소에도 해야. 특히 가족들의 구원을 위하여 다른 무엇보다 힘써야.

오늘부터 실시되는 전도에 열심히 적극적으로 임해 주시길...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다른 무엇보다도 이 일에 힘써 주시길... 그래서 자신이 더욱 구원의 기쁨과 능력가운데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며 가족이 믿음 안에서 하나되고, 복음의 역사를 이루어 갈 수 있기를...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주일찬양예배설교] 생명의 길  Sunday Night Service

제 목 : 생명의 길

말 씀 : 요14:1~6

 

전도에는 여러 가지 접근법이 필요하다. 나름대로의 노하우도 필요하다. 여러 가지 전도법을 배우면서 나름대로의 이론을 정립하라. 물론 핵심은 빼놓지 말아야 한다.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전도법이 몇 가지 있는데 사영리, 전도폭발, 다리예화 등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농촌 실정에는 잘 맞지 않는다. 솔직히 나도 그것을 몇 번 시도해보았지만 사람들의 공감을 얻기가 어려웠고 나 또한 절실하게 공감이 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그래서 힘 있게 전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므로 자신도 절실하게 느껴지고 농촌분들이 공감할 수도 있는 무엇인가를 찾아야 한다. 그래서 제가 나름대로 만든 것이 우리 교회에서 쓰는 ‘생명의 길’이라는 전도지이다. 물론 이것도 여러분이 직접 실시하기에는 또 어려움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복음 전도의 기본 틀이다. 이것을 잘 익혀서 여러분 나름대로 살을 붙여서 활용하면 좋을 것이다.

1.착각속에 있는 인생

다음 페이지 그림의 세로선은 직선이다.(기타 다른 착시현상도 게시) 아래에서 위로 비스듬히 보면 확인된다. 그러나 우리 눈에는 중간부분에서 꺾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세로선 주변의 빗금이 눈에 착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육신의 눈 뿐 아니라 영혼과 마음의 눈에서도 일어난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서 보고 듣고 배운 것들과 환경과 상황들이 우리의 영혼과 마음에 착각을 일으키게 하여 참된 진리의 길을 막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태양이 지구 주위를 돌고 있는 것처럼 보임. 우리가 지구에 붙어서 지구와 함께 돌기 때문에 실제로는 지구가 도는데 태양이 도는 것처럼 보인다. 자동차를 타고 자동차 옆의 창밖을 내다보면 차가 가는 것이 땅이 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마찬가지.

2)옛날 사람들은 지구를 평평하다고 생각함. 그래서 바다에서 멀리 나가면 낭떠러지기가 있어서 떨어져 죽는다고 여김.

3)우물안 개구리. 정저지와(井底之蛙). 망양지탄(望洋之嘆).우물속의 개구리는 우물안이 세계의 전부인 줄 앎. 황하를 보며 이보다 큰 물은 없을 거라고 여기던 사람이 바다를 보고 감탄함.

4)일부다처제. 지금도 일부의 나라에서는 그렇지만 옛날에는 부인이 많으면 능력있는 사람으로 여김.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어기고, 가장 사랑하고 아끼고 귀하게 여겨야 할 아내에게 가장 큰 고통을 주는 것. 가정의 불화를 초래하는 악행.

5)기타. 도적들이 모여 사는 동네가 있다면 도적이 정상. 지금도 원시인처럼 사는 사람들. 그들은 그게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김. 흑인은 검정색이 살색. 그래서 늑대인간도...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무지와 어둠과 한계와 착각은 생각하지 못하고 하나님도 없고 천국도 없고 죽으면 그만이라고 여기며 살아감. 그러나 착각. 그 길로 계속 걸어가면 결국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다.

잠14:12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 벧전1:24,25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2.착각의 주범

이런 심각한 착각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죄로 인한 무지와 어둠과 세상의 모든 왜곡된 현실에서 비롯된 것임. 그리하여 생명의 길에서 멀어져 죽음의 길로 달려가게 만듦.

1)죄

죄가 문제이다. 죄가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생명과 은혜와 진리와 선과 의의 근본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킴으로 무지와 착각과 왜곡된 가치관 속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천국과 지옥과 참된 진리와 생명과 인생의 목적이나 가치나 의미나 인생의 결국에 대하여 무지하게 만든 것이다.

육신의 눈이 어두워지면 아무리 대낮이라도 아무것도 분별할 수 없듯이, 지식의 눈이 어두워 영어를 알지 못하면 영어책을 갖다 주어도 무슨 뜻인지 모르듯이, 마음이 어두워지면 악과 증오와 미움과 저주와 불평과 원망과 시기 등의 어둠의 세력으로 가득차 도덕적으로 올바른 삶을 살 수가 없듯이, 인간 영혼이 죄로 말미암아 심각한 어둠속에 빠져 하나님이나 진리나 생명이나 영원한 은총의 길이나 인생의 목적과 가치와 의미도 알지 못한 채 눈에 보이는 것만 전부인 줄 알고 따라 다니고 있는 것이다. 영혼이 이렇게 어두워지니까 마음도 어두워도 윤리적으로 참 선과 의의 길을 가지 못하고 있다.

2)환경

사람들은 이 세상이라고 하는 좁은 공간속에서 태어나서 거기서 보고 듣고 배우며 살아간다. 그리하여 마치 자기가 보고 듣고 경험한 세상만이 전부인양 여기고 있는 것이다. 흑인은 살색이 검정색이고 황인은 황색이고 백인은 백색이다. 북한 어린이들은 실제로 북한 정권을 찬양하고 그들이 자기들을 먹여 살린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보고 듣고 배웠기 때문이다. 즉 악도 선이라고 계속 가르치면 선으로 아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우물안개구리와 같은 삶, 늑대 인간도 그렇다. 일부다처제도 그렇고 술, 담배 문제도 그렇다. 옛날에는 술 담배 잘하고 바람 잘 피우고 하는 것을 대장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실 꼭 그런 특정한 부분에서만 그런게 아니라 우리 삶 전체가 그렇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여기서 보고 듣고 배우고 공부하고 결혼하고 일하고 나름대로 어떤 가치를 추구하며 살다보니까 여기가 전부인양 착각하게 만들고 그게 인생인양 여기고 잘못된 지식을 올바른 것으로 아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실상은 우리도 세상도 우주공간속에서는 먼지 알갱이보다 작은 존재이다. 그러니 우리가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은 또 얼마나 작겠는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러한 좁은 공간속에 갇혀 살면서 거기서 얻은 지식과 경험이 전부인줄 여기며 그걸 절대시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죽으면 그만이다. 천국과 지옥도 없다고 자기 맘대로 생각한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엡4:18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총명 : 영적, 도덕적 이해력

마13:14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3.죄의 삯

그러면 죄와 무지는 어떤 결과를 가져오나? 이 땅에서의 삶을 마감하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에 심판을 받고 영원한 형벌 가운데 처하게 된다. 학생이 학교도 안 오고 술 담배하면서 계속 나쁜 짓을 하면 어떻게 되나? 회사원이 자기 마음대로 하면 어떻게 되나? 군인이 훈련장이나 초소를 벗어나 제멋대로 하면 어떻게 되나? 국민이 국가의 헌법이나 기타 다른 법을 어기면 어떻게 되나? 그 대가를 치를 수 밖에 없다. 우리 인생도 동일하다. 하나님의 피조물로 하나님의 법을 어기면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죽으면 끝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나름대로 선하게 살면 좋은 데로 간다고 하지만 그것은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그냥 혼자 생각하는 것이지 정확한 정보가 아니다. 죄와 무지 속에 있는 인생은, 아니 죄와 무지 속에 있지 않다해도 죽어서 실제로 그곳에 가보기전에는 인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죽어서 가보면 알게 되는 이미 때는 늦다. 거기에 대해서는 오직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시며 근원이신 하나님만 아신다. 하나님만 해결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본래의 곳으로 돌아가기 전에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걸 해결하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하나님께 배우는 것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이걸 해결하지 못하고 영원한 본향으로 돌아가면 거기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롬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 계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4.구원의 길

그러므로 죽기 전에 다른 어떤 것보다 먼저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인간은 그 누구도 자신의 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 도를 닦아도 안되고 지식이나 과학이나 문화나 윤리나 그 어떤 것으로도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성경 말씀을 주셨고, 예수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신 것이다. 성경을 통하여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받을 길이 열리게 되었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덧입혀 주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죄는 자기가 해결해야지 예수가 죽는 것과 내가 죽는 것이 무슨 상관이냐고 하는데 좋은 생각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건 불가능하다. 내가 해결할 수 있다면 내가 해결해야 하지만 내가 해결할 수 없으면 도움을 받아야 한다. 물에 빠져 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네가 알아서 나오라고 할 것인가? 갓난아기에게 네 문제는 네 해결하라고 할 것인가? 중한 병에 걸려서 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네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하라고 하겠는가? 누군가가 해결해 줘야 되지 않나?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것이다. 예수님이 바로 우리를 죄에서 건져주기 위하여 오신 유일한 구세주 이신 것이다. 우리는 나의 죄와 무지와 한계와 연약함을 인정하고 예수님께 도움을 구해야 한다. 오직 유일한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음으로서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의 유일한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우리가 사는 길은 그 길 밖에 없다. 그러면 모든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나 이 땅에서도 자유와 평안과 기쁨과 소망을 마음껏 누리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된 인생이 된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 요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말씀은 세상 누구도 할 수 없는 말이다. 한 사람도 없다. 석가도 공자도 이런 말은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도 없었다. 오직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신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이고, 주님만이 하셨다.

그러므로 먼저 우리 자신이 죄와 무지 속에서 자기 생각대로 살아가지 말고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바르게 따라가며 생명의 은총을 누리자. 그리고 죄와 무지 속에서 이 사실을 모르고 죽음의 길로 달려가고 있는 저들에게 이 말씀을 전하여 저들도 생명의 은총을 누릴 수 있도록 더욱 기도하고 힘쓰자.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주일오후예배설교] 떳떳한 인생(요일3:18-22) Sunday evening Service

제목 : 떳떳한 삶을 위하여

말씀 : 요일3:18~22

 

법이 왜 필요할까? 그밖에 무언가 인간의 삶을 규제하고 통제하는 것 같은 질서나 규범이나 관례나 이런 것들은 왜 필요할까? 물론 그런 것들은 결코 인간의 삶을 규제하고 통제하고 자유를 제한하고 불편하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아니다. 도리어 그런 것들은 인간의 삶을 평안하게 하고, 자유롭게 하고, 기쁨을 누리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들이다.

물론 애당초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서 굳이 그런 규제를 두지 않아도 자기 이성과 영으로 자신을 제어하고 통제할 수 있다면 그런 것들은 필요치 않다. 아니 사실은 만약 하나님의 형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면 구태여 스스로를 통제하고 제어할 이유도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영성과 지성과 감성과 이성이 우리가 굳이 애쓰지 않아도 진리와 선과 의를 따라 살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그렇지를 못하다. 우리 모두가 죄와 무지 속에 있어서 올바른 분별력이 없다. 때로는 분별을 하면서 그 분별한 선과 의를 따라 살아갈 능력이 없다. 그래서 법과 규범과 질서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법과 규례와 질서를 따라 살아갈 때에 우리는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죄와 무지 속에 있는 세상에서 최대한의 평안과 기쁨과 자유를 누릴 수가 있는 것이다.

물론 성경은 두말할나위도 없다. 모든 인생이 죄와 무지 속에 있어서 자신이 누구인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어떻게 죄와 무지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받아 생명의 은총을 누릴 수 있는지 알지 못함으로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당신 자신과 인간과 세상과 영원한 나라에 대하여 계시해 주신 말씀이 성경인 것이다. 그래서 그 말씀 안에서 살아갈때에 우리가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명과 진리 안에서 평안과 기쁨과 자유를 누리려면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경으로 돌아가서 물론 완전할 수는 없겠지만 최대한 주의 율례와 법도와 계명을 따라 살아갈 때에 우선은 자신이 생명의 은총을 누리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고 그래서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빛을 비춤으로 저들을 주님 품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 말씀은 주님의 말씀을 따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할 때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요, 또한 그럴 때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게 될 것임을 말씀하고 있다.

1.행함과 진실함으로 할 때 진리에 속한 자임이 나타남

요일3:18,19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우리가 정말로 사랑의 예수님, 구원의 예수님을 심령에 모시고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랑은 마음과 말로만 아니라 실제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당연한 것이 아닌가? 마음이 있다면 행위도 따른다. 물론 정말 마음은 원인데 여건과 상황이 안돼서 못하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긴 하다. 그러나 대부분은 행동하지 않는 것은 사실은 마음에 별로 없다는 뜻이다. 마음이 있으면 서울이고 부산이고 단숨에 달려가지만 마음에 없으면 안강이라도 안 달려간다.

그래서 마6:21절에서는 예수님께서도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하셨고, 약2장에서는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느냐고 하셨다. 당연하지 않나? 사랑한다 사랑한다 하면서 실제로 행동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나? 말로만 하는 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을지 모르지만 계속 말만 하면 위선이 된다.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연약해서, 혹은 상황과 여건이 안돼서 못한다고 생각을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마음이 없는 것이다. 뭐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그 마음에 있다는 것도 결국 자기 방어와 변명을 위한 수단에 불과할 수 있다.

안 그런가? 정말로 사랑하고 자신이 필요하다고 여기면 결국은 한다. 주님을 위한 일도 그렇다. 주님을 위해 드릴 물질도 시간도 없다고 하면서도 자신을 위한 것이나 자녀를 위한 것은 한다. 이웃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시간과 물질이 없고 여건이 안된다고 하지만 자녀를 위해서는 한다. 물론 다는 못하겠지만 주님을 위해서나 이웃을 위해서는 못하는 일도 자녀를 위해서는 하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인가? 마음의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이렇게 믿음이나 사랑이 행위로 나타날 때에 우리가 주님의 자녀인 것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즉 행함과 진실함으로 형제를 사랑할 때 진리에 속한 자 곧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논리. 하나님께 속하였으면 하나님께 속한 모습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하나님께 속한 자가 마귀에게 속한 불법과 거짓과 악과 더러움 속에 살면 안 되지 않는가? 빛 가운데 왔는데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더듬거리며 산다면 어떻게 빛 가운데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예수님의 보혈로 씻음을 받았는데 여전히 더러운 모습으로 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요8:12절을 보라.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한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빛이신데 그 예수님을 따르면서 어둠 속으로 갈 수는 없지 않은가? 예수님이 빛이시니까 빛이신 예수님께로 나오면 그 빛을 받아 당연히 빛의 은혜를 누려야 되지 않는가? 그래서 엡5:8,9절에서는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빛과 진리와 생명과 의와 선과 사랑이신 예수님께로 나온 자로써 온전히 예수님을 따름으로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과 지혜로서 선과 진리와 의를 따라가자. 다만 따라 가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속에서 사랑과 의와 선을 실천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진실한 삶을 살아감으로 생명의 은총을 누리며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복된 삶을 살아가자.

2.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할 때 굳세게 됨

요일3: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주 앞에서 굳세게 한다는 것은 행함과 진실함으로 행할 때에 마음에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넘침으로 더욱 믿음 위에 굳게 서서 모든 불안이나 두려움이나 상황이나 환경이나 사람에 의하여 다가오는 모든 어려움 등의 어둠에 속한 것들을 물리치고 빛과 같은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뜻이다.

그렇다. 우리가 진실로 행함과 진실함으로 선을 따르고 사랑하며 살아갈 때에 우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동시에 나도 평안과 위로와 소망 가운데 담대한 삶을 살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 행함과 진실함으로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주님의 능력도 덧입지 못하고, 그래서 마음에 기쁨이 없고, 스스로 위축되고, 당당하지 못하고, 불안하고, 부끄럽고 그래서 결국 능력이 없는 삶을 살게 된다. 또한 이렇게 주님의 능력을 덧입지 못하면 결국 마귀에게 끌려 다니는 형국이 됨으로 더더욱 빛의 은혜를 누리기 못하고 어둠의 세력들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이다.

신앙적으로만 아니라 윤리적 도덕적으로도 그렇다. 깨끗하고 선하고 의롭고 아름답고 진실하게 살아가면 당당하다. 마음이 뿌듯하고 자존감이 있고 자랑스럽다. 그러나 죄와 향락과 불법과 불의에 빠지면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럽다. 숨으려고 한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나무 사이에 숨은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범죄는 주로 어두운 곳에 이루어진다. 물리적으로 어둡고 캄캄한 곳에서 이루어지고, 의미적으로도 숨겨진 곳, 은밀한 곳, 사람들의 이목이 없는 곳에서 이루어진다. 선하고 자랑스럽고 당당한 일이라면 왜 숨어서 하겠는가? 일부러 나보란 듯이 하지... 그래서 잠28:1절에서는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선과 진리를 따르되 행함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이 지혜와 능력을 주신다. 평안과 가쁨과 위로와 소망을 주신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당당하게 된다. 얼굴이 밝아진다. 그러나 죄가운데 있거나 하나님 앞에 뭔가 떳떳하지 못할 때는 얼굴에 생기가 없어진다. 뭔가 그늘진 모습이 생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선과 진리와 의를 따라서, 특별히 사랑의 도를 따라서 그런 말씀들을 실천해 나아갈 때에 정말 당당하게 자랑스럽게 자부심을 가지고 생기있게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복된 삶을 살아가자.

3.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용서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

요일3:20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우리가 나름대로 열심히 의롭게 살아가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약하고 미련하고 부족하다. 그래서 실족할 때도 많다. 그러나 정말 믿음 안에서 선과 진리를 따라서,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 사랑을 실천하기를 힘쓰는 사람은 자신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의기소침하고 위축될 필요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는 것을 아시고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격려해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힘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희망과 기쁨과 위로와 소망과 능력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는 것을 핑계로 최선을 다해 힘쓰지 않는다면 그건 우리를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하나님을 이용해 먹는 것과 같다. 정말 마음에 원이면 원하는 것을 향해 힘써 가야하고 그러다가 넘어지고 실족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별로 힘쓰지도 않는다는 것은 실상은 마음에도 그다지 없다는 뜻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은 원이로된 육신이 약하다는 핑계로 주님의 일을 소홀히 하지 말고 열심히 사랑하고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자. 그래도 우리가 어찌 할 수 없는 문제들은 주님께 맡기고, 그저 하나님앞에 기도하며 말씀 묵상하며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의 역사 감당하며 생기 넘치는 삶을 살아가자.

4.행함과 진실함으로 할 때에 구하는 바를 얻게 됨

요일3: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말씀 그대로 행함과 진실함으로 할 때에 기도 응답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것이 계명을 지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당연한 말씀이 아닌가? 앞의 2:2절에서는 계명을 지키면 그를 아는 줄 알 것이라고 하셨다. 2:5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 안에 있는 줄 알리라고 하셨다. 2:10절에서는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있는 자라고 하였다. 2:29절에서는 의를 행하는 자라야 그에게서 난 줄 알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라면 마땅히 기도를 응답해 주시지 않겠는가? 선을 행하며, 사랑을 실천하며 주님의 뜻을 향하여 갈 때에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면 흡족한 마음으로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겠느냐는 말씀이다. 그리고 또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은 기도라고 해서 맨날 달라는 기도만 드리지도 않는다. 도리어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기를 기도한다. 그러니 응답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말과 혀로만하고 하고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결국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것이니 어떻게 기도응답을 기대하겠는가?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는 정말 주의 율례와 법도를 따르자. 주님의 말씀은 결코 우리를 힘들고 부자유스럽고 어렵고 번거롭고 통제하고 제한하기 위하여 주신 말씀이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과 자유와 평안을 주기 위하여 주신 말씀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그 말씀 안에서 살아가자. 물론 그래도 안되는 것이 있을지라도 그런 것은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용서해주시고 격려해 주시고 힘을 주신다는 것을 기억하며 의기소침하지 말고 주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 속에서 당당하고 생기가 넘치고 능력이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자.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주일오후설교] 주님을 통해서 봅시다Sunday evening Service
말씀 : 막8:22~26

제목 : 주님을 통해서 봅시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존재이기에 세상에 존재하는 세 가지 영역의 세계를 모두 볼 수 있는 존재입니다. 하나는 물질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육신의 눈을 가지고 산이나 바다나 땅이나 사람이나 기타의 모든 물질세계를 볼 수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우리 인간은 지적, 정신적 눈을 가지고 정신적이고 지적인 세계를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눈을 가지고 있기에 도덕적 가치를 분별하며, 철학적 사고를 하고, 음악이나 미술 등의 예술 활동을 하는가 하면 과학이나 수학 등의 지적인 활동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인간은 영적인 눈으로 신령한 세계를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지정의는 물론 영혼을 가진 존재이기에 이 영적인 눈으로 신령한 세계를 보고, 하나님의 세계를 보며,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반드시 보아야 할 이러한 세 영역의 세계를 모두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세가지 영역의 세계를 보되 바르게 그리고 밝게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이 올바르고 풍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벳새다 지방의 맹인을 고쳐주시는 과정에서 이 맹인에게 육적인 눈과 아울러 영적인 눈도 밝게 해 주신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벳새다의 맹인의 고쳐주시는 과정을 통하여 우리가 생각할 것은 무엇입니까?

1.주님의 방법을 따라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은 주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셨는데 그 방법이나 과정은 매우 다양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맹인을 고쳐주신 기사도 여러 번 나타나는데 그들을 고쳐주신 방법도 다양했습니다.

먼저 오늘 23절에서는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오늘 말씀에서는 맹인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눈에 침을 뱉고 안수하셔서 고치셨습니다. 그러나 마9:27~31절에서도 맹인을 고쳐주신 기사가 나오는데 거기서는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눈이 밝아졌습니다.

마가복음10:46~52에는 바디매오라는 맹인을 고쳐주셨는데 거기서 예수께서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시자 눈이 떠졌습니다. 즉 여기서는 오직 말씀으로만 고쳐 주셨던 것입니다. 또 요한복음 9:1~7을 보면 나면서부터 맹인된 사람에게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시며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시자 그가 그대로 하자 눈이 떠졌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침으로 이긴 진흙을 눈에 바르고 나서 어떤 행동을 요구하셨고 그 요구에 순종할 때 고쳐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같은 맹인을 고쳐주시는데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셨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주님은 사람이나 환경이나 물질이나 그 어떠한 것의 제한도 받지 않으시고 당신의 주권에 의하여 자유롭게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 믿음과 순종을 요구하시고 때로는 무조건 고쳐주시기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인간은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따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주님의 방법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주님의 능력을 마치 자기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기기도 합니다. 자신이 원하면 자신이 원하는 방법대로 주님께서 역사해 주실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소위 특별한 은사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이런 오류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믿음이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무지와 교만의 소치입니다. 주님은 결코 내 생각대로 내 뜻대로 내가 원하는 방법대로 내가 원하는 시간에 얽매어 역사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약 주님의 역사하심을 맛보기를 원한다면 다만 주님앞에 겸손하게 엎드려 주님의 뜻대로 주님의 방법대로 주님의 때에 주님께서 역사해 주실 것을 간구하며 기대하며 주님께 맡기는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2.주님께 전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어떤 방법을 취하시고 무엇을 요구하시든 그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오늘 23절 다시 봅니다.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이 치유의 과정에서 우리는 우선 두 가지 사실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께서 그를 동네 밖으로 데리고 가셨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의 눈에 침을 뱉고 안수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치유과정에 대해서도 우리는 자칫하면 회의 또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일부러 동네 밖으로 데리고 가신 것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굳이 사람들이 없는 동네 밖으로 데리고 가실 이유가 없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아니 도리어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서 고쳐 주시면 얼마나 주님의 인기가 높아지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굳이 그를 동네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그 이유는 26절을 통하여 짐작할 수 있는데 거기에 보면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이르시되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유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단지 병이나 고쳐주는 분인 줄 알고 병이나 고침받기 위하여 따라다니는 것을 우려해서 였을 것입니다. 마치 오병이어의 기적 때와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기억할 것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해도 주님께서 뭔가를 요구하시거나 뭔가를 행하실 때에는 반드시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무조건 주님의 방법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우리가 생각해 볼 장면은 주님께서 그를 데리고 나가서 그의 눈에 침을 뱉고 나서 안수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만약 누군가 우리 얼굴에 침을 뱉는다면 어떻겠습니까? 극심한 모멸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물론 주님께서 눈에 침을 뱉는 것은 전혀 다른 경우이긴 하지만 아니 기왕 고쳐 줄 것이면 좀 고상한 방법으로 하시지 왜 하필이면 침을 뱉아 고쳐주시느냐고 불평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 그랬지 않았습니까?(왕하5장) 그는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 갔을 때 무슨 대대적인 종교의식을 통하여 고쳐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엘리사선지자가 나와 보지도 않고 요단강에 가서 씻으라고 하니까 모멸감을 느끼며 제깐 놈이 뭔데 나와 보지도 않고 그 잘난 요단강에 가서 씻으라고 하느냐, 그까짓 요단강에서 씻으려면 차라리 그보다 몇배 더 크고 아름다운 우리 아람의 아바나와 바르발 강에서 씻겠다고 하면서 화를 내며 돌아가려고 했던 것처럼 말이지요.

그러나 이 맹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하시든지, 그것이 이성적으로 수용이 되든 안되든, 침을 바르든, 물을 바르든, 진흙을 바르든, 심지어 똥을 바르든 주님의 방법에 순응하고 수용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순순히 주님을 따라 나서야 합니다. 내 의사와 내 이성의 생각과는 별개로 주님께서 어떤 방법을 사용하시든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그때 결국 주님의 역사는 일어나는 것입니다.

3.주님을 통해서 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일단 침을 바르고 안수하신 다음에 무엇이 보이느냐고 질문을 던지자 맹인이 대답합니다.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막8:24) 그러니까 아직 제대로 못보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는 들이었기 때문에 나무들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나무가 많이 서있는 것을 보고 사람 같기도 하고 나무 같기도 해서 마치 나무들이 걸어가는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다시 안수를 하시자 그가 말합니다.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막8:25)

여러분,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는데 안수를 두 번 하신 것입니다. 23절에서 안수하고 25절에서 다시 안수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한번 안수로 병을 못고치시나요? 아니 안수하지 않으면 못고치나요? 아니죠. 말씀만으로도 고치시죠. 그런데 왜 굳이 침을 뱉고 두 번씩이나 안수를 하셨을까요? 일단은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어떻게 하시든지 순종하라는 의미가 있고 다른 하나는 이 맹인이 믿음이 부족해서입니다. 그래서 온전히 주님을 믿고 바라보고 의지하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다시 안수를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안수는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 또는 영력이 주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손을 얹고 기도한다고 하나님의 역사가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안수를 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모두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믿는 마음으로 성령의 임재를 간절히 사모하며 행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임재하심으로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안수를 두 번하셨다는 것은 물론 안수를 받는 자의 태도가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안수를 하셨는데 그러자 이 사람이 주목하여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처음에는 주목하여 보지 않아서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 같은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제대로 눈이 안떠진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안수하니까 주목하여 보게 되었고 그러자 온전히 보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하여 보았다는 문자적인 뜻은 ‘~을 통하여 보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의역을 해서 주목하여 즉 열중하여 보다는 의미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의 원뜻은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을 보기를 간절히 열망하는 마음으로 보았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고쳐주실 것을 믿고 확신하는 마음으로 있는 힘을 다하려 세상을 보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주님이 보였고 세상이 보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주님을 통해서 세상을 바르게 보기 위한 열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고 귀를 열어 주심으로 주님과 천국과 세상을 밝게 바르게 볼 수 있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세상이 바르게 보입니다. 목적과 방향과 목표가 확실히 보이게 됩니다. 주님 안에서 주님을 통해서 세상을 보고 자신을 보고 물질계를 보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보면 그 모든 것이 바르게 정확하게 확실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로소 정말 올바르고 정확한 눈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영역의 눈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맹인은 오직 주님을 통하여 세상을 보면서 모든 어둠에서 해방되어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벳새다 맹인은 고쳐주시는 과정을 다시한번 기억하면서 주님께서 언제 어떻게 역사하실지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엎드리며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역사하시든 그대로 믿고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을 통해서 모든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통해서,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세상을 보고, 물질을 보고, 경제를 보고, 정치를 보고, 소망을 보고, 영광의 나라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밝고 바르고 정확한 눈으로 모든 물질계를 보고, 지적이고도 정신적인 세계를 보며,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르게 확실하게 보면서 살아가실 때에 더욱 온전한 생의 은총을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