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설교


말씀 : 창22:9~14

제목 : 믿음과 순종과 축복

1.믿음과 순종과 축복

믿음이 있는 곳에 순종이 있고, 순종이 있는 곳에 축복이 있다. 여러분, 맞는 말입니까? 예, 맞는 말입니다. 안 그래요? 믿음이 있으면 순종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지요. 있고말고요. 아니 믿는데 순종이 없을 수 있습니까? 안 그래요? 좋으신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을 믿는데 어찌 순종이 없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또 순종이 있는 곳에 축복이 있다. 이것도 마찬가지잖아요. 순종하는 복이 안 오면 그게 이상한 거지요. 능력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축복의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데 어찌 복이 없겠습니까? 여러분, 신28:2절 보세요.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잖아요. 그러면서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하시면서 오만가지 복을 다 주실 것을 말씀하고 있잖아요. 여러분, 하나님이 뭐 허튼소리 하시는 분이 아니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진실로 믿음으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았던 사람들은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 물론 지금 여기서고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오늘 말씀에 나오는 아브라함인데요, 오늘 말씀은 여러분이 너무 많이 들어서 식상하실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어떻습니까? 귀가 따갑도록 들었는데 잘 됩니까? 잘 안되지요. 왜요? 귀가 따갑도록 들었지만 실상은 그래봤자 얼마나 안 되기 때문입니다. 안 그래요? 이 이야기 들어봤자 몇 번 들었습니까? 한 백번 들었을까요? 그런데 세상에서 정치이야기, 경제이야기, 먹고 마시고 놀고 즐기며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는 몇 번 쯤 들었을까요? 한 천 번 들었을까요? 만 번도 더 들었을걸요. 그러니까 믿음 안에서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이야기는 아무리 많이 해도 세상에서 먹고 입고 잠자고 놀고 하는 이야기의 백분의 일, 천분의 일도 못 듣고 못 보는 거예요. 그러니 잘 안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하지요. 그러면 안 되는 게 당연하다고 가만히 있을 겁니까? 아니죠. 그러므로 더욱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일에 힘써야 하지요. 그래야 조금이라도 기독교적 가치관이 확립되고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그래야 조금이라도 하늘의 신령한 은혜와 땅의 기름진 축복을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인간적으로는 말도 안되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아브라함의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다 읽어드리지 못했지만 2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삼아 각을 뜨고, 불에 태워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말이 됩니까? 인신제사는 우상숭배자들이 하는 악습으로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일입니다. 게다가 이삭은 하나님께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시고 무려 25년 만에 달랑 하나 주신 약속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장차 큰 민족을 이루고 주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삭을 잡아 불에 태워 번제물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게 말이나 되느냐 말입니다.

아마도 아브라함도 처음에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게 정말 하나님의 말씀일까? 이삭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자녀가 아닌가? 그것도 아이를 도저히 낳을 수 없는 100세나 되어서 기적적으로 주신 아들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큰 민족을 이루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았는가? 큰 민족을 이루려면 오히려 더 많은 자식을 주셔야 하는데 겨우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불에 태워 인신제사로 드리라니 내가 늙어서 헛소리를 들었나? 망령이라도 들었나?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아브라함은 인간적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고 말도 안되는 명령에 순종합니다. 왜요? 그게 하나님의 명령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선하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기에는 분명 말도 안되지만 분명 뭔가 하나님의 섭리와 뜻과 계획이 있을 것을 믿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우리의 이성으로 다 수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섭리는 언제나 우리 보다 높고 깊어서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이성과 경험과 능력을 초월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성적으로 이해가 됩니까? 예수께서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다. 경험적으로 납득이 갑니까? 저 영원한 천국, 이것이 인간의 논리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착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이성적으로 믿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모든 이성과 과학과 논리를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니 그런 것들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이해가 되든 말든 납득이 되든 말든 순종할 것 뿐입니다. 아브라함이 만약 조금이라도 이성이나 논리를 가지고 생각했더라면 절대로 이삭을 바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인신제사를 드리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그런 명령을 내리실 수 있습니까? 어떻게 내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땅의 티끌과 같이 많게 해주시겠다고 해놓고 25년 만에 겨우 아들 하나 주어놓고 그걸 도로 달라고 하십니까? 하면서 따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자신의 모든 생각들을 다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과 선하심과 인도하심을 믿고 순종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취해야 할 태도인 것입니다. 이해가 가든 안가든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죄와 무지를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높으심과 인도하심과 선하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언제나 내 뜻과 이성과 경험과 논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고 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잠3:5,6절에서는 말씀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이해가 되든 말든, 세상의 가치와 같든 다르든, 내 경험과 맞든 안 맞든, 손해가 되든 유익이 되든, 내 생각과 관계없이 인정하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의 태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내 모든 생각과 경험과 환경을 떠나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오직 온전한 길이며 진리며 생명이신 예수님의 뜻에 온전히 순복하십시오. 그저 갓난아이와 같이 주님의 말씀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십시오. 그때에 분명 주님 안에 있는 은혜의 풍성함이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2.온전한 순종

여러분,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었지만 말씀에 순종합니다. 창22:3,4절 보세요.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여러분, 이 말씀을 보십시오. 그는 아침 일찍 떠났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솔직히 무언가 하나님의 섭리가 있을 것임을 믿었지만 밤새도록 얼마나 고민을 했겠습니까?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아들을 잡아서 번제로 드리라는데 그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날이 밝자마다 곧장 시행에 들어간 것입니다. 아내 사라에게 말도 없이 떠났습니다. 아내에게 말했다가 보나마나 이 양반이 나이가 들더니 드디어 망령이 들었냐고 하면서 핀잔만 들을 것이 뻔했기 때문에 아내에게 말도 하지 않고 떠난 것입니다. 그리고 솔직히 자신도 시간을 지체하다간 아들을 번제로 드릴 자신이 없었기에 마음 변하기 전에, 마귀가 틈타기 전에 떠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즉시 시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시행하고 그 뜻대로 살아가는 일을 뒤로 미루면 안됩니다. 어떤 사람은 계속 나중에 나중에 그럽니다. 이것만 해 놓고, 저것만 해결하고...... 나중에 생활이 안정되면, 나중에 시간 나면, 나중에 할 일 없어지면... 그러나 여러분, 지금 못하는 사람이 나중에 여유 생기면 할 수 있을 것 같죠? 그런 사람은 99%는 여유생기면 놀러 다닙니다. 여유돈 있으면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즐기는데 쓰게 됩니다. 설령 나중에 한다 해도 지금 못한 것은 죽을 때까지 아니 천국에 가서 까지 못한 것으로 계속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마귀가 장난칩니다. 마음이 변하기 쉽습니다. 방해꾼이 생기기 쉽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길을 떠나 사흘 동안 걸어 하나님이 지시하는 곳으로 걸어갑니다. 여러분, 그 사흘길을 걸어오는 동안 아브라함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아무리 하나님의 무슨 뜻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고, 그래서 길을 떠나오긴 했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외아들을 자기 손으로 잡아 불에 태워서 번제로 드려야 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 마음이 과연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마음을 다잡으며 발걸음은 재촉합니다. 이삭을 잡아 번제로 드릴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천갈래 만갈래 찢어지는 듯 아팠지만 그는 묵묵히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께서 지시한 산 밑에 이르러 종들을 거기 머물라고 하면서 번제에 쓸 나무를 아들의 등에 지우고, 자기는 칼과 불을 들고 산을 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때 이삭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번제를 드리려면 제물이 있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제물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아버지, 나무와 불은 있는데 제물은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이 말을 듣는 순간 아브라함의 마음이 얼마나 뜨끔했겠습니까? 차마 ‘네가 바로 번제물이다. 하나님께서는 너를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단다. 나도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지만 하나님께서 너를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단다. 그러니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구나.’ 차마 이렇게 말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비해 주실 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묵묵히 산에 올라 드디어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에 도착하게 되고, 아브라함은 번제를 드릴 준비를 합니다. 장작을 쌓아 올렸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제물을 잡아서 각을 떠서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태워야 할 차례였습니다. 그 번제물은 다름 아닌 사랑하는 아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떨리는 목소리로 아들에게 말합니다. ‘아들아, 하나님께서 너를 번제로 드리라는구나. 내가 너를 대신해서 번제가 될 수만 있다면, 내가 너를 대신해서 죽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니? 그러나 내가 아닌 너를 요구하시는구나. 그러나 사랑하는 아들아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있을 거야. 그러니 순종해야지.’ 하면서 아들을 결박합니다. 그 운명의 순간에 하늘이 무너지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과 아픔이 몰려 왔습니다. 그러나 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떨리는 손으로 아들을 붙잡아 결박하고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죽이려고 눈을 감고 칼을 높이 들어 올렸습니다.

여러분, 그 상황을 상상해 보십시오. 아들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결박하는 아버지의 심정. 아들을 장작더미위에 올려 놓고 칼을 높이 들어 올린 아버지의 심정, 정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 이삭, 그것도 하나 밖에 없었던 아들 이삭,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해서 결박 당할수만 있다면.... 내가 너를 대신하여 번제물이 될 수만 있다면...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해서 죽을 수만 있다면...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해서 불 태워 질수만 있다면.... 이런 마음으로 이삭 대신 자신이 번제물이 되고 싶었지만 하나님이 요구하는 건 자신이 아니라 이삭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무슨 선한 뜻이 있을 것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이니 거역할 수 없었기에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속에서 도저히 눈뜨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눈을 감고 아들을 향해 칼을 내리치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게 순종입니다. 내 생각과 달라도, 도저히 이해가 안가도, 있을 수 없는 일을 시켜도 그냥 따르는 것이 순종입니다. 아무리 내 생명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것이라도 하나님이 필요로 하신다면 그냥 드리는 것이 순종입니다. 이것이 믿음이고 이것이 순종입니다. 그래서 순종하는 자에게 주님의 은총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게 믿음이고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정이며 하나님께 대한 신뢰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믿습니까? 주님의 선하심을 믿습니까? 구원자이심을 믿습니까?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상황이 이래요. 형편이 이래요. 저래요. 이래서 곤란해요. 저래서 곤란해요. 그럼 내가 손해봐요. 웃음거리 돼요. 주일날 하루 쉬면 손해가 얼만지 아세요? 아니 이 귀한 걸 달라고요? 그럼 난 어떻게 살라고요? 여러분, 이런 거 다 버리세요. 그냥 믿고 따르세요. 순종하세요. 그게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의 사람에게 주님의 한량없는 은총이 임합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순종하는 자에게 임할 복

여러분, 그렇습니다. 순종이 곧 온전한 믿음이기에 순종하는 자에게 주님의 놀라우신 은총이 임합니다.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내리치려고 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창22:11,12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이삭을 바치라고 하시던 하나님께서 도리어 다급하게 아브라함을 제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너 정말로 이삭을 잡으려는 것이냐? 내가 정말 이삭을 죽여서 번제로 받기를 원하는지 아니냐? 아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네 믿음을 보고 싶었단다. 이제 충분하다. 그 믿음이면 충분하다. 너는 정녕 믿음의 조상이 될 만한 자격이 있다. 그러니 이삭을 풀어주고 내가 너를 위해 준비한 양으로 번제를 드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아들을 풀어주고 옆에 뿔이 나무에 걸려 꼼짝 못하고 있는 양을 가져다가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삭이 아닌 양으로 제사를 모두 마쳤을 때 다시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창22:16,1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요구했던 것은 이삭이 아니라 믿음이었습니다. 순종이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독자 이삭을 빼앗아가려고 했겠습니까? 왜 말도 안되는 인신제사를 드리라고 했겠습니까? 그게 아니라 믿음과 순종을 요구하셨고 그 믿음과 순종이 있는 자에게 임할 하나님의 은총을 그렇게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순종하게 되고, 순종하는 자에게는 축복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순종이 곧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순종이 하나님께 대한 신뢰이기 때문입니다. 순종이 곧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신앙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순종이 하나님의 나의 주인이라는 종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종이 주인에게 따질 수 있습니까? 우매 자가 지혜 자에게 따질 수 있습니까?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왜 그래야 하느냐고 따질 수 있습니까? 죄인이 구세주에게 이러니저러니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믿음과 순종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요, 진정 주님만이 생명의 주님이시오, 구원자시오, 주권자라는 믿음이 있다면 순종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종이 곧 믿음이요, 그래서 순종하는 자에게 복이 임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러한 순종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때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아도, 현실적으로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워도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달라고 하셔도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결코 빼앗으려는 것이 아니라 주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온전히 주인으로 모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순종하실 때에 좋으신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께서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우리의 모든 생각 지식 경험 이성 가치관 나 내려놓고 순종하심으로 주님께서 채워 주시는 영육간의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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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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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의 우선순위와 축복. (마태복음 6:32-33절)


오늘은 성도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우선순위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삶에는 우선순위기 있습니다.

 

먼저해야할 일이 있고 나중에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산상수훈, 산상보훈의 말씀입니다.

기독교의 황금률이라 할 수 있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성도들이 먼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할 때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더하신다고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성경에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한

예를 말씀드림으로 은혜와 축복의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손가락이 10개입니다.

열 손가락에 꼽히는 것들 중에

우선순위를 한 번 정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것이 제일 먼저 꼽힙니까?

 

무엇이 우선이냐에 따라서 우리의 신앙을 알 수

있습니다.

 

성도의 삶, 신앙생활의 우선순위에

맨 먼저는 성삼위일체 하나님이시지요.

 

다음은 예배 그 다음은

선교와 전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더하실 줄로 믿습니다.

 

1.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우선시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라는 말씀에 아브라함은 신앙에

갈등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서둘러 삼일 길을 가서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곳

모리아 산에 제단을 쌓고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했을 때

하나님의 사자가 아브라함을 말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순종하는

믿음을 보시고 큰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고

언약하시며 메시야 예수님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보내주실 것을 언약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자녀보다 하나님이 우선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2.예수님께서 우선순위를 정하여 주셨습니다.

 1)부자청년-십계명을 다 지켰다는 청년에게 주님께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고 말씀하셨을 때

청년은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갔습니다.

 

십계명도 지켜야 하지만

사랑의 실천과 순종도 중요한 것입니다.

청년은 하나님과 이웃 보다 재물이 우선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2)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녀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이나 형제 자매 부모 자녀가 전토를

100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막10:29-30)

 


3)장례식 보다 주님 따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장례식 보다 먼저

주님을 따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장례식은 5-7일-10일-15일

이상 걸리는 풍습이 있었기에 장례보다 선교가

우선임을 주님께서 가르치셨습니다.

 

3.바디매오의 우선순위(막10:46-52)

소경 거지 바디매오는

눈을 뜨는 게 우선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디매오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질문을 하셨을 때 바디매오는 “보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주님께서 바디매오의 소원대로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만약에 바디매오가 동냥을 했다면

우선순위기 바뀐 것입니다.

 

눈을 떠야 돈을 벌고,

눈을 떠야 결혼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4.예수님의 우선순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독생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본문의 하나님 나라는 천국을 의미하며

의는 하나님의 정의 공의를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영생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도 이뤄지며

하나님의 정의, 공의가 이 세상에 이뤄지기

까지 천국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공평하신 공의가 이 세상에

이뤄지도록 구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5.성도들의 삶의 우선순위.

자녀 보다 부모가 우선인 사람이

효자 효녀입니다.

 

순교자 스데반 집사는 자신의 생명 보다

하나님이 우선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도 자신의 생명 보다 주님이

우선이었고 선교가 우선이었습니다.

 


하나님과 교회 그리고 선교가 우선이면

손해 보는 것 같지만 주님의 약속대로

모든 것을 더해 주시는 것을 체험해 보시고

하나님의 축복을 더하시는

축복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교회를 세웁시다.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시다.


선교와 전도에 최선을 다합시다.

범사에 감사를 드립시다.

헌신하고 봉사하며 충성하고 순종합시다.

 

하나님과 교회와 영혼을 사랑합시다.

큰 믿음을 가집시다.

 


성도 여러분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정의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먼저 가족이나 자녀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세요.

그리하시면

가족과 자녀를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먼저 예배를 드리세요.

축복을 보장해 주십니다.

먼저 하나님께 감사드리세요.

그리하시면 넘치는 축복을 주십니다.


먼저 선교와 전도에 힘쓰세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십니다.

먼저 교회를 사랑하세요.

그리하시면 집을 축복해 주십니다.

먼저 기도 드리세요.

그리하시면 응답과 축복이 보장됩니다.

먼저 하나님을 위해 시간과 정성을

기우리시고 바치세요.

 

그리하시면

생애를 지켜주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열 손가락의 우선순위

1)하나님의 영광,

2)예배(주일성수와 예배마다 참석, 새벽기도참석,

3)선교와 전도, 4)감사와 십일조, 5)성령 충만,

6)무시로 혹은 시간을 정해서 성령 안에서 기도,

7)하나님과 교회에 충성, 8)순종,

9)성령의 열매,

10)가족구원, 가정예배, 성도와 가족과 자녀축복.

이상은 제 생각입니다.

 

기도도 우선순위가 있지요.


하나님의 영광과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리고

성령의 역사를 구하고 교회와 목회자위해 기도,

성도들과 가족을 위해 이웃의 구원을 위해

기도드리고 사업과 직장과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교회는 부흥되고

성도는 축복을 받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부터

예수님의 가르치심대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셔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의 원천의 기름진 축복과 만사형통의

복과 영혼이 잘 되시고 범사에 넘치는

축복과 강건하시고 안전한 축복을 받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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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스러운 삶의 비결

요한복음 12장 23~30절

 

사순절 기간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깊이 되새기며 그리스도인으로의 삶을 되돌아볼 때입니다. 어떤 자세로 신앙생활을 해야 주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큰 사랑을 깨달으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 11장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대속의 죽으심을 앞두고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시는 기적을 통해 부활의 예고를 하십니다. 이어 12장에서는 헬라인 몇 명이 예수님을 뵙고자 제자들에게 요청을 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의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면서 밀알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면서 주님을 따르는 길은 영광의 삶이지만 희생의 길이라고 강조하십니다. 이 말씀은 믿는 자들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니라 헬라 사람들, 즉 이방인들도 들어야 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물론이거니와 오늘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깊이 생각해봐야 할 대목입니다. ‘영광스러운 삶의 비결’이 무엇인지를 성경을 통해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희생을 통해 하나님께 온전히 영광을 이루어 드렸습니다. 훗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역시 순교의 제물로 영광의 삶을 살았습니다.

요한복음 12장 27∼28절에는 앞으로 지고 가실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예수님의 괴로운 마음이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의 때를 면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으나 “내가 이때를 위해서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라며 결국 십자가를 지시겠다고 결심하십니다. 그때 하늘에서는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곁에 있던 사람들은 천둥소리가 들렸다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고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라며 진정한 영광의 삶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삶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초점을 두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밀알의 썩어짐을 통한 희생보다는 세상의 영광과 권위와 자부심과 명예욕으로 군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신의 명예와 권위를 위해 기대와 가치, 목표에 집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요한복음 12장 23절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합시다.

예수님께서는 그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앞에 놓고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믿음으로 사는 길에 고난이 닥치고 어려운 시련이 밀려와도 결코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말라는 메시지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희생과 헌신으로 온전히 영광을 돌려드릴 때가 왔구나’라고 여기며 십자가의 희생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렇게 담대하게 주님의 길을 따를 때 하나님께서는 귀히 여기시고 부활의 영광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요 12:26) 주님을 따라가는 그 길이 영광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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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바닥 인생에서

요나서 2장1∼10절

 

인생을 살다 보면 밑바닥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심한 우울증과 자살 충동을 느끼기도 합니다. 기독교인들도 예외 없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지만 밑바닥 인생을 살 때가 있습니다. 그 원인이 죄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죄와 상관없이 고난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요?

첫째, 우리는 인생의 밑바닥에서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1·4절).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시는 이유는 내 고집 내려놓고 하나님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내 환경과 내 운명에 매여 있지 말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밑바닥 인생에서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본문 2절에서 요나의 고백을 보십시오.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요나는 고통이 자신의 죄로 인해 생겼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고통이 하나님의 징계라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요나는 그 고통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의지합니다. 모든 고통이 죄로 인해 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밑바닥 인생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점검해 볼 수 있는 영성을 지녀야 합니다.

둘째로, 인생의 밑바닥에서 감사로 예배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9절). 하나님의 백성은 가장 크게 실패했을 때 가장 크게 감사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실패 속에서도 나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의 손길을 보기 때문입니다. 본문 9절에 보면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라고 했습니다.

지금 고난을 겪고 계십니까? 인생의 밑바닥까지 내려오셨습니까? 이제 환경을 보지 마시고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회복의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오른손을 붙들고 계시다는 것을 보십시오. 그리고 그 구원의 하나님을 예배하십시오. 이 순간의 예배는 나의 눈물과 회개와 헌신이 담긴 최상의 예배가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인생의 밑바닥에서 서원에 대한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9절). 요나는 자신이 지금 왜 배 밖으로 던져졌고, 물고기 뱃속에 처해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고요하던 바다가 왜 풍랑이 심하게 이는지, 선원들이 제비를 뽑았는데 왜 요나 자신이 뽑혔는지,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는데 왜 큰 물고기가 자신을 집어삼켰는지, 다 이해합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전도자로 쓰시려고 집요하게 붙들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사랑입니까.

이제 요나가 하나님의 그 명령에 순종할 때가 왔습니다. 9절에서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라고 합니다.

요나서 3장을 보면 요나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니느웨 백성들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을 선포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으며 회개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 땅을 용서하셨습니다.

인생의 밑바닥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새 인생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 여러분 한 사람을 통하여 수많은 영혼이 구원받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생의 밑바닥에서 감사하고 헌신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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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희망을 낳습니다

히11:1-6


새해가 밝았습니다. 묵은 해는 지나고 새해가 왔습니다. 새해를 맞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신 것은 “희망”입니다. 세상에 희망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어느 대학의 심리학과에서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두 개의 큰 통에 물을 가득 채우고 크기가 비슷한 쥐 한 마리씩을 넣었습니다. 예상대로 이들은 열심히 헤엄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두 통은 서로 달랐습니다. 하나는 뚜껑이 닫혀 있고 다른 하나는 뚜껑이 열려 있었습니다. 뚜껑이 닫혀 있는 쥐는 한참 헤엄치다 탈출구가 눈에 보이지 않자 아예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4분만에 죽었습니다. 뚜껑이 열려 있는 쥐는 뚜껑이 열려 있음을 알고 여유있게 움직여 36시간이나 헤엄을 쳤습니다. 문제는 통의 뚜껑이었습니다. 뚜껑이 열리고 닫히고의 차이가 그렇게 큰 차이인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연구원들이 이런 결론을 냈습니다. “살고 죽는 것은 희망에 달려 있다. 희망이 있으면 살고 희망이 없으면 죽는다”.

그렇습니다. 희망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살기 때문에 희망이 있는 것이 아니라 희망이 있기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음식없이는 40일 밖에 살 수 없고, 물이 없이는 8일 밖에 살 수 없고, 공기가 없이는 4분 밖에 살 수 없지만, 희망없이는 단 몇 초도 살지 못한다”. 이렇게 희망이 중요합니다.

작년 가을, 하나님이 새해 우리 교회가 나갈 방향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얼마동안 낑낑대며 기도하는 데 어느 새벽에 저에게 한 단어가 전광석화처럼 떠올랐습니다. 희망이었습니다. 작년 한 해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는 한 해였습니다. 세월호로 인해 온 국민이 좌절에 빠지고 경제란, 남북관계의 경색등으로 힘들게 살았습니다. 한국교회도 이런 저런 실수로 비난을 받아 자신감을 잃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기 원하실까? “희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기 원하셨습니다. 문제는 이 희망이 어디서 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다가 어느날 롬15:13을 읽었습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여기에 “소망의 하나님”이 번뜩 눈에 띄였습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모든 좋은 것은 소망의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기쁨과 평강을 주십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안에서” 옵니다. “믿음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믿음이 희망을 낳고 믿음이 희망을 충만케 합니다.

오늘 말씀 히11:1을 보시겠습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오늘 말씀은 희망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히11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1-3절은 믿음이 무엇인가를 말합니다. 4-40절은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말합니다. 여기서 실명으로 10명이 나옵니다. 그리고 익명으로 많은 사람들이 나옵니다. 1-3절에 나오는 믿음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고 또 하나는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믿음은 먼저 바라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믿음의 본질은 바라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희망은 믿음안에 있었습니다. 믿으니까 바라는 것입니다. 저희 부모님은 어릴 때부터 저를 많이 믿었습니다. “공부잘하고”, “착하고”, 그래서 희망을 가졌습니다. “윤재는 커서 무엇인가 할거야”. 목사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일반 대학에 가서 법조인이 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제가 부모가 기대한 것만큼 된 것은 아니지만 부모의 기대가 저를 여기까지 인도한 것은 사실입니다. 부모는 저를 믿었고 믿기 때문에 바라셨습니다.

믿음은 또한 보이지 않은 세계에 대한 관심입니다. 1절,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보이는 세계만 본다면 어떻게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믿음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미리 보는 것입니다. 누가 천국을 가 보았습니까? 천국에 가면 돌아올 수도 없습니다. 누가 영생을 보았습니까? 못 보았지만 영생이 있음을 믿습니다. 믿음의 세계는 본질적으로 미지의 세계며 미래의 세계입니다. 믿음은 곧 보이지 않는 미래의 세계에 미리 가 있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이 곧 희망입니다.

여러분에게도 믿음이 있습니까? 보이는 환경에서 희망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은 믿음에서 희망이 생기는 것을 믿습니까? 희망의 근원은 믿음입니다. 요14:1을 기억하십니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마음의 근심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방법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모든 문제가 풀립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나님 믿는 것이 희망의 시작입니다. 그러면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합니까? 그것이 오늘 말씀 6절입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크게 세 가지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는 믿음, 두 번째는 하나님은 그를 찾는 자에게 상주신다는 믿음, 그리고 세 번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다는 믿음, 이 믿음이 희망을 낳습니다. 새해 벽두에 희망의 하나님이 믿음안에서 여러분에게 기쁨과 평강을 주며 성령의 능력안에서 희망으로 넘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희망을 낳는 첫 번째 믿음은 하나님은 살아계신다는 믿음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는 것을 믿습니까? 이 질문이 왜 중요합니까? 이 질문이 모든 믿음과 희망의 출발이기 때문입니다. 몇 년전 모 기독교 신문에서 기독교인들을 상대로 그런 조사를 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을 믿습니까?” 그랬더니 “하나님은 확실히 살아계신다”고 믿는 사람이 64.2%, “살아 계신 것 같은 데 확신할 수는 없다”가 28.9%, 그리고 “잘 모르겠다”가 14.5% 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40% 가까운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살아 계신지 잘 모르겠다. 있는 것 같은 데 확신할 수 없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고 믿습니까?

성경은 먼저 자연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합니다. 3절입니다. 히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존재를 우선 가장 쉽게 아는 방법이 자연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연은 우리 눈에 가장 잘 띄기 때문입니다. 작년 여름에 교회학교 어린이들이 시골로 수양회를 다녀왔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산에서 무엇을 보았니?” “별을 보았어요. 밀가루같이 많은 별들을 보았어요”. 그러나 우리 아이들이 보았던 별은 아마도 우주안에 있는 수많은 별들중에 지극히 작은 부분을 보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팔을 벌려 동전 100원짜리를 쳐들면 그 순간 하늘에 떠있는 별 1,500만개가 우리 눈에 가려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은하계는 지구에서 약 2백만 광년 떨어진 안드로메다 성운입니다. 빛이 200만년 달려야 도달할 있는 은하계가 안드로메다 은하계인데 그 은하계가 이 우주에 1천억 개 이상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 우주는 얼마나 넓습니까? 그 넓은 우주를 하나님은 손가락하나로 지으셨습니다. 시8:3,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하나님은 자연속에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 또 하나의 증거는 역사입니다. 제가 작년에 독일통일세미나를 참석하기 위해 독일을 갔습니다. 동서독은 분단된지 45년인 만인 1989년11월에 통일되었습니다. 저는 독일 가기 전에 독일 통일은 어떻게 될만하니까 되었겠지 막연하게 생각하고 갔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독일 통일은 기적이었습니다. 우선 독일을 둘러싼 모든 나라가 통일을 반대했습니다. 영국, 프랑스, 미국, 다 반대했습니다. 반대한 이유는 물론 달랐습니다. 무엇보다 동독은 소련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적어도 소련이 물리력을 동원하면 통일은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때 나타난 사람이 고르바쵸프입니다. 그가 1985년에 공산당 서기장이 되었습니다. 동서독 분단의 최정점에 서기장이 된 것입니다. 그때는 이미 동서독 통일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었고 라이프니찌 교회에서 몇 년씩 통일 기도회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때 고르바쵸프의 행동이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고르바쵸프는 때맞춰 일어난 동구권의 개혁운동을 소련군 탱크가 진압하지 않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전에 베이징에서는 민주화운동을 탱크로 진압했던 중국 공산당과는 대조적이었습니다.

소련이 할 수 있는 것은 무력인데 무력을 포기하는 일은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닙니다. 소련이 스스로 한 일입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도 아무런 진압이 없었습니다. 공산국가로서는 경이로운 일입니다. 누가 시킨 일입니까? 누가 역사를 움직입니까? 독일 통일이 필요할 때 고르바쵸프를 세운 분은 누구입니까? 그래서 통일은 대박이기 전에 신비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평화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통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믿습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루터가 종교개혁하다가 실망했습니다. 모든 일이 마음대로 안됩니다. 그래서 낙심해서 누었습니다. 어느날 보니까 아내 카타리나가 상복을 입고 앉아 있습니다. 루터가 깜짝 놀라 물었습니다. “아니, 누가 죽었나요?” 카타리나가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죽었어요”. 루터가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죽다니. 무슨 소리야? 하나님이 왜 죽어?” 부인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죽지 않았다면 당신은 왜 그렇게 실망할 수 있어요?” 그때 루터가 자리에서 일어났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는데 무엇을 두려워 하겠는가?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데 내가 무엇을 낙심하겠는가?

어떤 큰 교회 목사님이 병들어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그는 평생 고생해서 교회를 개척하고 큰 교회로 부흥시켰으나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죽으면 이 교회는 어떻게 됩니까? 모두 뿔뿔히 흩어져 교회도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답니다. “네가 죽는 것이 문제냐? 내가 죽는 것이 문제지”. 그렇습니다. 내가 죽는다고 세상이 달라집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죽는다면 큰 문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죽습니까? 하나님은 죽는 분이 아니잖아요? 다시 히11;6, “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그는 반드시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은 죽지 않습니다. 영원토록 살아 산자와 죽은 자를 다스립니다. 자연과 역사와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찾는 자에게 상주십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두 번째 믿음은 하나님은 그를 찾는 자에게 반드시 상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문제도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언제라도 우리에게 보상을 주십니다. 히11장에는 그렇게 살았던 사람 10명이 등장합니다. 아벨로부터 기생 라합까지 입니다. 이들의 삶을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들이 모두 믿음으로 살았다는 것과 믿음으로 산 이들을 하나님이 복주셨다는 공통점입니다. 자. 4절, 아벨이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가인은 준비되지 않은 곡식으로 하나님께 예배했지만 아벨은 준비된 제물로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아벨의 믿음은 예배로 나타났습니다. 믿음의 예배는 정성과 희생으로 드립니다. 구약의 예배는 동물을 죽여 희생제사로 드렸습니다. 아벨이 그렇게 예배했습니다. 믿음은 예배로 표현되고 고백됩니다. 여러분도 올 한 해 예배로 믿음을 고백하겠습니까? 그렇게 예배드렸을 때 어떤 상급을 받았나요? 4절, 아벨을 “의로운 자”라 부르셨습니다. 믿음의 예배는 우리를 의로운 자로 만듭니다. 5절, 에녹은 어떻습니까? 에녹의 믿음은 천국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다”. “죽은 후에는 반드시 천국이 있다“. 이 믿음이 에녹으로 하여금 천국에 올라가는 상급을 받게 했습니다. C.S.루이스가 말했습니다. “지상에서 발자취를 남긴 사람들은 모두 천국을 목표했던 사람들이다. 천국을 목표삼으면 지상도 얻게 되지만 지상을 목표삼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올 한 해 에녹처럼 지상보다 천국을 더 목표하며 살겠습니까? 천국을 목표하고 살면 천국과 지상을 같이 얻습니다.

7절에 노아가 나옵니다. 노아는 어떻게 살았습니까? 믿음으로 방주를 예비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삶은 언제나 말씀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노아는 어느날 배를 만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배를 만들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햇빛은 쨍쨍 내려쪼이고 비는 올 기미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노아는 순종해서 배를 만듭니다. 그 결과 어떤 상급을 받았습니까? 다 죽었는 데 노아 8식구만 살았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의의 상속자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믿음으로 순종했더니 의로운 상속자가 되어 땅에 살아 남은 것입니다. 올 한 해도 말씀대로 순종하여 살겠습니까?

그 후에도 몇 명이 더 있습니다. 아브라함, 사라, 야곱, 모세, 라합, 이들이 믿음으로 살았던 방식은 서로 달랐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산 사람에게 하나님이 상급주신 것은 맞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세계 3대 종교의 조상이라는 명예를 받았습니다. 사라가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 다음 해 아들 이삭을 상급으로 받았습니다. 모세가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는 구원자의 상급을 받았습니다. 라합이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정복할 때 모든 식구가 다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사는 자에게 상급을 주십니다. 믿음의 삶은 헛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33절 이하에 이름없이 죽은 수많은 사람들이 나옵니다. 이들에게도 예외없는 약속과 상급이 주어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희생당했지만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40절에 결론입니다. 히11: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으니”. 언제나 더 좋은 것은 예비하신 하나님, 믿음에는 반드시 대가가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믿음은 공짜가 아니라는 것을 아십니까? 오늘 믿음으로 살면 내일 보상받고, 오늘 고생하고 살면 내일 축복받고, 오늘 기도하고 살면 내일 응답받고, 오늘 손가락질 받고 살면 내일 존경받고 살 것을 믿습니까? 희망은 여기에 있습니다. 믿음의 삶은 공짜가 아니기 때문에 희망이 있습니다. 반드시 상급이 있습니다.

독일의 신학자로 위르겐 몰트만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이 1964년에 쓴 고전적인 책이 있습니다. 제목이 “희망의 신학”입니다(사진). 이 책은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희망이라는 것을 밝힌 책입니다. 이 책에 있는 몇 구절을 소개합니다. 묵상할만한 내용들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실로 한계선을 넘어간다는 것, 그것을 초월한다는 것, 탈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이란 현재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한계선을 넘고, 그것을 초월하고, 그것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믿음의 본질은 현재가 아니라 미래라는 말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미리 취한 희망 가운데서 십자가에 달린 자의 부활로 말미암아 무너진 그 한계선을 넘어간다는 것을 뜻한다”. 믿음은 현재의 한계선을 뛰어넘는 것이지만 혼자 뛰어넘는 것이 아니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뛰어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부활은 이미 죽음을 뛰어 넘어 영원한 미래로 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부활의 세계로 가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 희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현재는 육으로 현재를 살아도 우리의 미래는 영은 미래에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희망입니다.

한 마디 더 있습니다. “믿음이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되심을 아는 것이라면 희망은 그분과 함께 사는 것이다. 믿음이 우리에게 영생이 주어졌음을 아는 것이라면 희망은 우리가 영생을 누리며 사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은 희망을 세우고 희망은 믿음을 키운다”. 어떻습니까? 명확하지 않습니까? “믿음은 희망을 세우고 희망은 믿음을 키운다”. “믿음으로 살면 반드시 희망이 있다. 그 이유는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이미 죽음을 이기고 현재의 한계선을 뛰어 넘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면 반드시 하나님이 상주신다”. 그 믿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나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살겠습니다.
우리가 믿을 세 번째는 “나는 반드시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살겠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중심한 삶입니다.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가량 방안에 T.V있다고 합시다. “T.V야, 너는 네가 존재하는 이유를 알고 있니?” T.V가 말합니다. “잘 모르겠어. 왜 내가 방에 있는지”.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삼성전자에 갔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당신들이 이 T.V 만든 것이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당신들이 만든 이 T.V가 왜 존재하는지 그 이유를 말해주겠어요?“ 그때 삼성전자 직원들이 말합니다. ”T.V요?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만들었죠. 그런데 그것을 T.V에게 물어보면 어떻게 알겠습니까? 만든 사람에게 물어보셔야지. T.V는 사람들을 기쁘게 할려고 우리가 만들었지요“. 여기서 나오는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발병자만 발명품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피조물이 어떻게 자기 존재이유를 알겠어요? 만든 사람이 알지 않겠어요? 잠16:4입니다. “여호아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이 말씀을 영어 성경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The Lord has made everything for its own purpose”. 주께서 모든 것을 그 자신의 목적에 맞게 지으시고“. 그렇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이 그 목적에 맞게 지으셨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 분의 목적에 맞게 살도록 지음받았습니다. 희망은 어디서 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목적에 맞게 살 때 옵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목적입니다.

그래서 러셀 컬퍼라는 사람이 “당신이 당신이 된 것은”라는 시를 썻습니다.

당신이 당신이 된 것은 이유가 있지요.
당신은 하나님의 신묘막측한 계획의 한 부분이에요.
당신은 소중하고 완벽하고 독특하게 만들어졌으며
하나님은 당신을 그분의 특별한 여자와 남자로 부르고 있죠.

존재의 이유를 추구하는 당신
그러나 실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부터 손수 당신을 지으신 그분,
그러기에 당신은 그분이 원하는 바로 그 사람이지요.

당신의 부모님도 그분이 선택했어요.
지금 당신이 어떻게 느끼든
하나님의 빈틈없는 계획대로 그들을 선택하사
그들의 손에 주님의 확인 도장을 찍어주신 것이죠.

물론 당신이 당한 고통 견디기 쉽지 않았겠지만
하나님 역시 당신이 마음 상했을 때 눈물 흘리셨어요
하지만 그것을 통해 당신의 마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닮아가고 성장하길 원하셨죠

당신이 당신이 된 것은 이유가 있지요.
주님의 지팡이로 지어진 당신
당신이 사랑받는 당신이 된 이유는
하나님이 만드셨기 때문이죠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살겠습니까? 희망은 거기서 옵니다. 저는 이렇게 하나님을 기쁘게 하겠다며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고 산 사람중에 강영우 박사를 기억합니다(사진). 그는 일생 믿음으로 산 사람이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때 축구하다 실명한 후 맹아원에서 아내를 만나고, 그 후에 미국에 가서 한국인 최초의 맹인 교육학 박사가 되고 백악관 국가 장애인위원회 차관보로 일하게 된 것은 믿음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생이었습니다. 그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암에 걸렸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미국에서 최고의 의료진에서 치료받고 낫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그는 치료를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최근 여러번 병원에서 검사와 수술, 치료를 받았으나 앞으로 저에게 허락된 시간이 길지 않다는 것이 의료진들의 의견입니다. 여러분들이 저로 인해 슬퍼하시거나 안타까워하지 않으셨으면 하는 것이 저의 작은 바람입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누구보다 행복하고 축복받은 삶을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끝까지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렇게 하나둘 주변을 정리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할 시간도 허락받았습니다. 한분 한분 찾아 뵙고 인사드려야 하지만, 그렇게 못하는 점,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으로 인해 저의 삶이 더욱 사랑으로 충만하였고 은혜로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가 마지막까지 붙잡았던 것은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었고 그 믿음 때문에 희망을 가졌습니다. 그가 믿었기 때문에 가진 최고의 희망은 천국의 희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수술을 포기하고 하나님 나라를 택했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남긴 최고의 교훈은 이것입니다. “믿는 자는 희망을 가진 자다. 그리고 최고의 희망은 하나님 자신이다”. 그래서 그가 남긴 마지막 책이 “내 눈엔 희망만 보였다”입니다(사진).

어떻습니까? 새 해 첫 주일, 여러분도 믿으면 희망이 있다는 것을 믿습니까? 믿음은 희망을 낳으며 희망은 또한 믿음을 지킨다는 것을 믿습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에게 상주심을 믿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이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바로 여러분이 믿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희망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올 한 해 우리에게 주신 말씀으로 마치겠습니다. 롬15: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히11:1-6 2015.1.4(일)
믿음이 희망을 낳습니다
“음식없이는 40일 밖에 살 수 없고, 물이 없이는 8일 밖에 살 수 없고, 공기가 없이는 4분 밖에 살 수 없지만, 희망없이는 단 몇 초도 살지 못한다”.

롬15: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히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요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히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네가 죽는 것이 문제냐? 내가 죽는 것이 문제지”.

히11;6, “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하나님은 그를 찾는 자에게 상주십니다.

C.S.루이스, “지상에서 발자취를 남긴 사람들은 모두 천국을 목표했던 사람들이다. 천국을 목표삼으면 지상도 얻게 되지만 지상을 목표삼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히11: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으니”.

위르겐 몰트만, “희망의 신학”(사진).
“믿는다는 것은 실로 한계선을 넘어간다는 것, 그것을 초월한다는 것, 탈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믿는다는 것은 미리 취한 희망 가운데서 십자가에 달린 자의 부활로 말미암아 무너진 그 한계선을 넘어간다는 것을 뜻한다”.

“믿음이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되심을 아는 것이라면 희망은 그분과 함께 사는 것이다. 믿음이 우리에게 영생이 주어졌음을 아는 것이라면 희망은 우리가 영생을 누리며 사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은 희망을 세우고 희망은 믿음을 키운다”.

나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살겠습니다.

”발병자만 발명품을 안다“

잠16:4, “여호아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러셀 컬퍼, “당신이 당신이 된 것은”
당신이 당신이 된 것은 이유가 있지요.
당신은 하나님의 신묘막측한 계획의 한 부분이에요.
당신은 소중하고 완벽하고 독특하게 만들어졌으며
하나님은 당신을 그분의 특별한 여자와 남자로 부르고 있죠.

존재의 이유를 추구하는 당신
그러나 실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부터 손수 당신을 지으신 그분,
그러기에 당신은 그분이 원하는 바로 그 사람이지요.

당신의 부모님도 그분이 선택했어요.
지금 당신이 어떻게 느끼든
하나님의 빈틈없는 계획대로 그들을 선택하사
그들의 손에 주님의 확인 도장을 찍어주신 것이죠.

물론 당신이 당한 고통 견디기 쉽지 않았겠지만
하나님 역시 당신이 마음 상했을 때 눈물 흘리셨어요
하지만 그것을 통해 당신의 마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닮아가고 성장하길 원하셨죠

당신이 당신이 된 것은 이유가 있지요.
주님의 지팡이로 지어진 당신
당신이 사랑받는 당신이 된 이유는
하나님이 만드셨기 때문이죠

강영우 박사(사진).

“내 눈엔 희망만 보였다”(사진).

롬15: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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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 큰 나무되게 하소서


히11:24-27 
성령님, 큰 나무되게 하소서

오늘은 교회력으로 맥추절이라 합니다. 맥추절은 옛날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보리를 추수하여 하나님께 바친 절기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왜 이 절기가 우리에게 중요할까요? 보리는 해마다 이스라엘에서 거둔 첫 번째 곡식이었습니다. 이스라엘 곡식은 밀과 보리가 있지만 그중에 보리는 아무데서나 잘 자랍니다. 우리처럼 좋은 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돌작밭이거나 산 등성이의 비탈진 테라스가 전부인 이스라엘 땅에서는 밀보다 보리가 잘 자랍니다. 보리는 생활력도 강하고 소화도 잘 됩니다. 이 보리가 긴 겨울이 지나면 가장 먼저 익습니다(장재일, 245). 그러면 그 보리를 수확합니다. 보리를 수확하는 장면입니다.(Food, 24). 그리고 그것을 볶아서 13번 체로 곱게 걸러 가루를 만든후 떡을 만듭니다. 그것을 제사장이 하나님께 드립니다(장재일, 247). 이것을 “소제”라고 불렀습니다. 언제나 첫 번째가 중요하지 않습니까? 겨우내 곡식이 없다가 뜨거운 햇빛에 익은 보리를 수확했으니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뿐만 아닙니다. 맥추절을 또한 초실절이라고도 불렀는 데 그 이유는 보리와 함께 난 첫 열매들을 하나님께 바쳤기 때문입니다. 포도, 무화과, 석류, 감람열매, 그 땅에서 처음 익은 곡식들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었습니다. 지역마다 먼저 익고 늦게 익은 지역이 있기 때문에 유월절부터 49일동안 자유롭게 수확해서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첫 열매를 하나님께 바치지 않습니다. 아예 우리는 농경사회에 살지 않습니다. 도시에 삽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 절기를 지키는 것입니까? 먹는 열매만 열매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 모두 나무를 심고 열매를 거두는 농부와 같습니다. 우리 자신이 곧 열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열매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열매를 바라시며”.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도 열매맺는 것입니다. 요15:16,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열매를 맺으라. 그나마 항상 열매맺으라”.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열매맺습니까? 그나마 항상 열매맺고 있습니까? 맥추절, 초실절에 우리가 질문할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는 열매맺고 있는가?” 그 중에서 가장 좋은 열매가 우리 자녀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주제는 이것입니다. 나는 지금 열매맺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 자녀들은 지금 열매맺고 있는가? 열매맺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가 이 이야기를 할 때 모델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모델이 모세입니다.
 
신구약을 통해서 모세는 가장 큰 나무중의 하나입니다. 400년 동안이나 노예상태로 있던 이스라엘을 해방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위대한 민족지도자요, 애국자였습니다. 또한 기도의 사람이요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그만한 인물이 이스라엘에 없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자녀도 모세같은 인물이 되게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말에 사람을 표현할 때 나무로 비유합니다. 큰 나무, 재목, 동량, 대들보, 거목등이 그것입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시편에서만 봐도 시1편, 시냇가에 심은 나무, 시52편, 감람나무, 시80편, 포도나무. 백향목, 시92편, 종려나무, 다 사람을 표현한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큰 나무, 많은 열매를 기대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렇게 될까요? 큰 나무가 되려면 세 가지 과정이 필요합니다. 뿌리, 성장, 그리고 열매입니다.
 
믿음의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큰 나무가 되는 첫 번째 과정은 뿌리내리기입니다. 뿌리없는 나무는 자랄 수 없습니다. 그나마 물가에 깊히 뿌리를 내려야 큰 나무로 자랄 수 있습니다. 자, 모세를 봅시다. 모세가 큰 나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우선 그의 부모때문이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레위인이었습니다. 출2:1절입니다. “레위족속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들었더니.” 2절입니다. “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 그들 석달을 숨겼더니.” 모세의 아버지는 “아므람”이었습니다. 그 뜻은 “찬양을 드립니다”라는 뜻입니다. 어머니는 “요게벳”입니다. 뜻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소서” 라는 뜻입니다. 둘 다 다 믿음의 사람입니다. 아버지는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며 살았고”, 어머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았습니다”. 이것이 모세가 큰 나무가 된 첫 번째 뿌리입니다. 성경은 모세의 부모에 대하여 아무 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만 말합니다. “그들은 믿음의 사람이었다“.좋은 부모는 언제나 좋은 자녀를 낳습니다. 자녀의 문제는 곧 부모의 문제입니다.
 
”삶으로 가르치는 것만 남는다“는 책이 있습니다. 수원중앙침례교회 김장환 목사님의 아들 김요셉 목사의 책입니다. 이 책에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김요셉목사가 어릴 때 미국에 혼자 남아 공부하고 있었답니다. 미국 유학생이 가장 외로운 때는 감사절, 성탄절 휴가때입니다. 미국 사람은 모두 휴가 떠나고 한국학생은 대부분 한국나갑니다. 그런데 한국 못가고 집에 있으면 그렇게 외로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탄절 전날 , 자기 한국에 있는 아버지, 어머니가 아들에게 왔습니다. 성탄절이 얼마나 목회자에게 바쁘고 중요한 때입니까? 목회자가 성탄절에 교회 비우고 미국가자 신자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 어떻게 목사님이 성탄절에 교회를 떠날 수 있나요?“ 그때 목사님이 말했답니다. ”교회가 잘못되면 다른 목회자가 대신 할 수 있지만 아들이 잘못되면 아무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김요셉 목사는 그때 부모님이 보여준 것은 삶으로 보여준 사랑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삶으로 보여준 사랑만 자녀에게 남는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부모는 자녀의 뿌리입니다. 하나님을 믿음의 땅에 뿌리내리게 하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부모는 보여준 또 하나의 사랑이 있습니다. 23절입니다. 히11:23, “믿음으로 모세가 태어났을 때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출애굽기에는 이 말을 “준수하다”라는 말을 썻습니다. “아름답다, 준수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토브”입니다. 이 말은 보통은 “좋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평소에 가장 많이 쓰는 말이 세 마디입니다. “샬롬”, 평안의 인사입니다. “바룩 하쉠 아도나이“. 하나님을 축복합니다. 기도입니다. ”토브“, ”좋다“는 말입니다. 그냥 좋다는 것이 아니라 이지만 기대하면서 좋다는 말입니다. 모세가 핏덩어리 모세를 보면서 부모는 좋아했습니다. 다만 핏줄이기 때문이 아니라 기대감 때문입니다. 아들을 낳으면 다 죽이라난 불행한 시대에 모세가 태어난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있다. 하나님은 반드시 아들을 통해 반드시 고난의 민족을 위해 큰 일을 하실 것이다”. 이 믿음과 기대가 모세의 부모에게 있었습니다. 그렇게 믿자 부모들은 모세를 죽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23절입니다. “믿음으로 모세가 태어났을 때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달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여러분, 큰 인물은 부모의 기대와 믿음에서 온다는 것을 아십니까? 부모가 자기 자녀를 보고 “내 자녀는 잘 될거야” 하고 믿는다면, 그래서 날마다 입버릇처럼 “너는 하나님이 보냈어. 너는 반드시 잘되거야” 한다면 그 자녀는 반드시 잘되게 되어 있다는 것을 믿습니까? 저도 아이들을 키우면서 아이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압니다. 목회사역으로 바쁜 저는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는 했습니다. “격려와 비전”입니다. 아들은 초등학교를 외국에서 보냈기 때문에 한자도 모르고 한글도 잘못 썻습니다. 그가 중학교 다닐 때 부모로서 고민이 많았습니다. 동양문화권에 살면서 한자를 모르고 한글도 못쓰면 어떻게 합니까? 한번은 무슨 글 하나를 써 보라고 숙제를 냈습니다. 저녁에 와서 보니 엉망입니다. 고쳐야 할 문장이 너무 많습니다. 고쳐주면서 말했습니다. “그래도 내용은 좋네. 잘썻어. 너는 앞으로 훌륭한 책을 쓸거야”. 그런데 먼 훗날 이 말에 감동받고 신문기자가 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리고 이번에 책도 냇습니다. 딸은 어릴 때부터 높은 데를 올라가기를 좋아했습니다. 엄마는 위험하다고 말했지만 저는 그것은 기특히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늘 말했습니다. “높은 데를 올라다니는 것 보니 너는 앞으로 공부를 잘하겠구나”. 이 말이 훗날 학자가 되겠다고 미국에서 공부를 시작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어떤 사람도 처음부터 위대한 인물로 태어나지 않습니다. 누구나 사람은 약하고 작은 어린이로 태어납니다. 그때 그를 하나님께 연결해 주는 사람이 부모입니다. 성경은 부모를 여러 가지로 비유합니다. “부모는 도공이다”. 부모는 자녀라는 도자기를 빚는 도공과 같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정성으로 빚으면 자녀는 튼튼하고 아름다운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부모는 궁수다”. 부모가 자녀의 안고 활을 쏘는 궁수라는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가 쏘는대로 날아갑니다. 부모가 자녀를 위해 어릴 때부터 하나님안에 자신을 심는 믿음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성경이나 역사가 하나님과 세상에 기여한 사람들은 모두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믿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한국교회 통계가 있습니다. 한국교회 신자의 86%가 10대부터 교회 나온 주일학교 출신입니다. 15살 지나서 교회 나왔다는 사람은 14%에 불과합니다. 40세 넘어서 교회 나온 사람은 전체의 4%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이 먹고 예수믿기가 그렇게 어렵습니다. 100명중 4명꼴입니다. 설령 40 이후에 믿는다 해도 그 이전의 삶은 신앙적으로 허송한 것입니다.
 
믿음은 어릴수록 좋습니다. 유명한 성서 주석가 매튜 헨리는 10살 때 하나님 믿었습니다. 유명한 발명가 아이작 와츠는 9살,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총장 죠나단 에드워드는 7살, 성경학자 아이언사이드는 4살, 초대교회의 유명한 순교자 폴리캅은 9살, 모라비언 교파의 지도자 진젤돌프는 4살, 그리고 유명한 전도가 빌리 그래함은 3살 때 하나님을 믿고 주일학교에 다녔습니다. 성경 잠언 22:6입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묘목도 일찍 심어야 잘 늦게 심으면 바람에 흔들리고 병충이 먹어 넘어집니다. 이를수록 좋습니다. 이를수록 오래 몸에 배고 이를수록 오랫동안 습관이 되기 때문입니다.
 
요즘 미래학으로 사람들에게 한국사회의 미래를 진단하는 데 도움을 주는 학자가 있습니다. 최윤식박사입니다. 그가 쓴 책을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앞으로 2030년, 40년이 되면 한국교인은 400만이 되고, 교회학교는 3-40만으로 줄 것이다“. 그래서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우선 가장 큰 이유가 저출산이랍니다. 지금같이 한 집에 하나 낳고 결혼 늦게 하고 아예 싱글로 혼자 사는 문화가 계속되면 인구의 감소로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몇 년전 제 아들이 결혼한다고 해서 제가 며느리될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그래, 아이는 몇이나 날거야?“ 놀랍게도 그가 말합니다. ”저는 하나님이 주시는 데까지 낳겟습니다“. 제가 그 자리에서 ”합격” 했습니다. 저출산과 함께 이유가 하나 또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같이 한국교회가, 믿는 가정이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면 그들이 어른이 된 2030, 40년년대에는 거의 신자가 없을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와 가정이 할 일이 두 가지 있습니다. 우선 생육하고 번성해야 합니다. 또 하나는 신앙교육을 제대로 해야 합니다.
 
최근 미국의 빌리 그래함이 인터뷰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요즘 교회와 크리스쳔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빌리 그래함이 한참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세상과 같아지려는 것이 문제입니다.” 요즘 가장 큰 문제는 교회가 세상과 같아지려는 것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 더 큽니다. 어떤 시인이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가 적을 만나 보니 적은 다름 아닌 우리였다“. 우리가 바로 교회를 허는 여우라는 말입니다. 초대교회는 교회가 세상과 같아지는 것을 두려워 했는 데 요즘은 교회가 세상과 달라지는 것을 두려워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세상과 달라지지 않으면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가 요즘 교인들을 세 가지로 표현했습니다. 하나는 ”유목민 교인“, 옛날에는 신자들이 모교회 의식이 있었는 데 지금은 없답니다. 조금만 수가 틀리면 유목민처럼 교회를 옮깁니다. 또 하나는 조금 어려운 말인데 ”코쿠닝 교인“. 코쿠닝은 누에고치를 가리키는 영어단어랍니다. 누예고치는 좀처럼 속에 있고 나오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요즘 교인들은 힘든 일, 손해볼 일, 희생하는 일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꽁꽁 숨어 있습니다. 저희 교회가 광교에 한신교회 세우고 제가 ”가라, 가라, 제발 가라“ 했지만 겨우 두 세 가정 갔습니다. 힘든 일을 안하려고 합니다. 세 번째가 구들장 교인, 겨울에 추울 때 구들장에 군불을 때면 따뜻합니다. 그러면 밖에 안 나옵니다. 편하기 좋아하고 모험하지 않고 피곤한 것 싫어하고 그냥 누었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는 것, 자기를 귀찮게 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 이것이 구들장 교인입니다.
 
이러다 보니 자녀들이 보고 배울 것이 없습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세 가지 반드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첫째 주일날은 반드시 교회가고, 둘째 하나님께 반드시 십일조 드리고, 셋째 하나님께 반드시 기도하고, 이 “반드시”가 없기 때문에 “반듯한” 자녀가 안 생깁니다. 이렇게 나가니 2030년대에 한국에 교회학교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유려가 나온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정말 큰 나무가 되기 원합니까? 하나님께 뿌리를 내리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뿌리에서 공급받습니다. 믿음은 공급의 문제입니다. 어릴 때부터 에배하는 습관, 기도하는 품성, 섬기는 체질, 몸이 말을 듣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자녀도 살고 한국교회도 삽니다. 시80편에 정말 좋은 말씀이 있습니다. 시80:-10,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 주께서 그 앞서 가꾸셨으므로 그 뿌리가 깊이 박혀서 땅에 가득하며 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고 그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 여기에 뿌리가 땅에 깊히 박히면 어떻게 된다고 말합니까? 10절, “그늘이 산들을 가리고, 가지는 백향목같이 바다를 덮으며”. 아, 이 축복, 이것이 하나님이 꿈꾸는 큰 나무입니다. 뿌리를 하나님께 두기를 바랍니다.
 
다음 고난을 이기고 자라야 합니다.
뿌리를 하나님께 내리게 했으면 그 다음은 자라는 일이 남았습니다. 뿌리를 내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꾸준히 자라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꾸준히 자랄 때 가장 큰 문제는 인내와 고난입니다. 모세를 볼까요? 히11:24-26,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여기에 중요한 단어가 둘 나옵니다. 24절에 “거절하고”, 25절, “더 좋아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큰 나무로 자라기 위해서는 우리가 거절할 것은 거절하고 좋아할 것은 더 좋아해야 합니다.
 
먼저 무엇을 거절해야 합니까? 24절을 다시 보십시오. 히11: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받기를 거절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거절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모세는 애굽의 공주의 아들을 거절했습니다. 공주의 아들을 거절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십니까? 애굽은 당시 세계 최강국이었습니다. 아마도 지금의 미국, 중국, 러시아를 합쳐놓은 것과 같았을 것입니다. 모세는 그 나라의 왕자였습니다. 그가 왕자 자리에 있기만 하면 모든 부와 명예, 행복이 보장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거절했겠습니까? 세상적으로 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술과 향락에 젖어 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권력을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오늘 무엇을 거절합니까? 25절에 “죄악의 낙”이란 말이 나옵니다. 죄를 가져오는 재미와 쾌락과 즐거움을 거절합니까? 성경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거절할 것을 거절해야 합니다. 다니엘은 하루에 세 번 기도하기 위하여 술과 포도주를 거절했습니다. 느헤미아는 무너진 조국을 재건하기 위해 왕의 음식을 거절했습니다. 요셉은 순결하게 살기 위해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거절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울을 미워하는 마음을 거절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기 위해 호의호식을 거절했습니다. 거절할 뿐 아니라 더 좋아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25-26절을 보십시오. 히11:25-26,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는 세상의 쾌락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고난받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신앙은 거절이며 동시에 선택입니다.
 
무명의 시인이 쓴 “올바른 선택을 위한 기도”라는 시가 있습니다. 신앙이 선택임을 깨닫게 합니다. “주 하나님/ 올바른 결단과 선택을 통해 제가 성숙하게 하소서/ 쉬운 일이 아니라 옳은 일을/ 사람들이 좋아하는 일이 아니라 참된 일을/빛나는 일이 아니라 영원한 일을 선택하게 하소서/제가 택하는 모든 것이 마침내 제 자신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쉬운 일보다 올바른 일을, 지금 빛나는 일보다 영원한 일을, 사람들에게 인기있는 일보다 하나님에게 참된 일을 더 좋아해야 합니다. 시인 박노해도 그런 시를 썻습니다. 제목은 ”평화“입니다. ”일상에서 작은 폭력을 거부하며 사는 것/세상과 타인을 비판하듯 내 안을 잘 들여다보는 것/현실에 발을 굳게 딛고 마음의 평화를 키우는 것/경쟁하지 말고 각자 다른 역할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일을 더 잘하는 것만이 아니라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평화를 이루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 실패입니다. 신앙은 실패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실패앞에 당당한 것입니다. 진정한 실패는 잘못해서 넘어진 실패가 아니라 넘어졌는데도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영국속담에 이와같은 말이 있다. “잔잔한 바다에서는 좋은 뱃사공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G.허버트도 말했습니다. “폭풍은 참나무가 더욱 깊이 뿌리를 박도록 한다.” 아브라함 링컨이 상원의원 선거에서 낙선했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길이 약간 미끄럽기는 해도 아주 낭떨어지는 아니야.” 그리스도인의 기준은 실패했느냐 성공했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했느냐 불순종했느냐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음으로 실패했지만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성공했습니다. 고난을 이기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열매가 됩시다
고난을 이기고 큰 나무가 되면 어떻게 됩니까?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어떻습니까? 이런 열매가 주렁 주렁 맺혔다면 여러분은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석류입니다(장재일271). 포도입니다(Food, 33). 종려열매입니다(Food, 41). 무화과입니다(Food, 44). 이런 열매들을 거두어 하나님께 바치는 농부들은 얼마나 기뻣겠습니까? 이것이 오늘 우리가 맥추절, 초실절을 지키는 이유입니다.
 
이스라엘 순례를 하다보면 매우 덥습니다. 그래서 주변을 두리번 거리다가 그늘있는 곳으로 갑니다. 너무 더우니까 종려나무나, 무화과나무처럼 키가 크고 잎이 많은 나무를 찾습니다. 그리고 찾으면 그 나무 밑에 앉습니다. 그때 얼마나 시원합니까? 잎이 많고 무성하니 그늘이 있어 시원하죠. 열매가 주렁 주렁 달렸으니 열매를 먹을 수 있어 좋죠. 나무가 있으면 주변이 물이 있으니 시원한 물가에 발을 담글 수 있어서 좋죠. 그래서 그 그 나무밑에 누어 봅니다. 그러면 하늘 높히 솟은 큰 나무가 보입니다. 그 큰 나무가 그늘이 되어 피곤한 나그네를 덮어줍니다. 그 큰 나무를 보면서 생각합니다. “아, 나도 저렇게 큰 나무가 되어야지. 그래야 많은 사람에게 그늘과 열매와 생수를 제공하지”. 그리고 열매를 보며 생각합니다. “아, 저렇게 많은 열매맺기 위해 나무는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많이 기다리고 많이 참고 많이 노력했겠구나“. 그래서 나무에게 말합니다. “나무야, 고맙다. 그동안 네가 흘린 땀방울과 그동안 네가 지불한수고의 대가로 오늘 내가 이렇게 편하게 쉬는구나”.
 
여러분. 우리가 누어 쉬는 큰 나무를 보면서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아, 이 나무의 수고로 내가 오늘 쉬는구나”. 그리고 큰 나무가 되기 위해 얼마나 오래 참고 기다렸는지를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불후의 명작 <노인과 바다>는 헤밍웨이가 80번이나 고쳐 썻다고 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을 10년이나 넘게 그렸다고 합니다. 괴테는 <파우스트>를 23세부터 쓰기 시작하여 82세까지 60년에 걸쳐 완성했다고 합니다. 아주 가끔 대나무에 꽃이 핀 것을 봅니다. 그런데 그 꽃 한송이가 적어도 60년, 길게는 120년을 참고 견뎌서 피었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대단합니다. 꽃 한송이가 그냥 피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의 주인공 모세의 일생도 기다림과 인내의 일생이었습니다. 그는 호렙산에서 떨기나무를 볼 때까지 40년이나 광야에서 양을 쳐야만 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시내산에 올랐지만 십계명을 받은 것은 그가 8번이나 힘들게 정상에 올라간 후였습니다. 그리고 그 후 40년 가나안 땅을 행진했습니다. 오랜 기다림과 인내없이 모세같은 인물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모세만 그럴까요?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는 데만 25년 걸렸습니다. 야곱은 하란에서 라헬을 얻기 위해 20년을 일했습니다. 요셉은 애굽의 흉년을 이기기 위해 14년을 지나야 했습니다. 오랜 기다림, 그것이 큰 나무되는 길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렇게 40년을 지나서 가나안땅에 도착했으나 막상 가나안 땅에는 들어가지 못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직 눈이 흐리지 아니하고 기력이 쇠하지 않았는 데 120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가 큰 나무가 되어 많은 열매를 맺었으나 그 모든 영광을 자신에게 돌릴까봐 하나님은 모세를 느보산에서 급하게 데려가셨습니다. 그렇게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모세는 죽자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와 성경은 그리고 모든 백성은 모세가 땀흘려 맺은 열매를 따먹고 평생을 안전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는 사명을 다하고 하나님 나라 간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이렇게 살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의 자녀도 이렇게 살게 하지 않겠습니까?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리고 자신이 일생에 걸쳐 맺은 열매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삶, 그것이 우리가 큰 나무가 되고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할 이유입니다. 오늘 거룩한 맥추절, 초실절에, 우리 모두 하나님의 열매가 되고 하나님의 나무가 되겠습니까? 오늘 교회학교 주일에 우리의 모든 자녀들, 우리 교회학교 자녀들을 하나님의 큰 나무로 키우겠습니까? 성령님, 우리의 자녀들을 큰 나무 되게 하옵소서. 많은 열매를 맺게 하옵소서. 이를 위해 자녀들의 뿌리는 하나님의 믿음암에 세워지게 하옵소서. 말씀과 성령으로 양육되고 성장하게 하옵소서. 고난을 이기며 실패앞에 당당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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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와 종자의식


마태복음 13장 31∼32절

 

열매와 씨앗은 본질상 같은 것이지만 기능은 분명히 다릅니다. 씨앗이나 열매는 모두 우리의 식단을 채울 수 있으나, 종자로 구분되는 씨앗은 아무리 배가 고파도 남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대를 이어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씨앗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사는 동안 분명한 ‘종자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전 인류의 종자가 되고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받은 모든 백성의 종자가 되었듯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종자들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보면 항상 택한 한 사람 혹은 택한 민족을 통해 큰일을 이루셨습니다. 마치 누룩 비유나 겨자씨 비유처럼 작은 것에서 시작해서 전체에게 확산되는 방법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백성을 택하시고 부르셔서 그리스도의 태반이 되게 했으며, 신약의 선교 역사를 보면 로마와 영국, 미국 등과 같은 나라들을 통하여 선교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그렇게 쓰임 받은 나라들은 처음부터 복음의 도구가 된 것이 아니었지만 그들이 갖고 있는 국력과 경제력, 문화적 힘에 복음을 실어 전 세계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로마 제국의 경우에는 칼과 병거로 유럽과 아프리카를 지배했으나 그 지배력은 결국 복음 전파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대영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별칭을 얻었던 영국은 제국의 힘에 복음을 실어 전 세계에 전파했습니다. 현재의 미국도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데 쓰임 받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 대한민국은 어떻습니까? 대한민국은 전 세계 175개국 중 726만명이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세계 8대 경제대국이 되었으며, 문화적으로는 한류라 불리는 드라마와 K팝이 전 세계인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확산되고 있습니다. 역사상 대한민국의 영향력이 이렇게 커진 때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하여 우리 민족을 쓰시려고 만드신 환경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는 선교 초기부터 해외선교를 위해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실제로 많은 성과도 보았습니다. 초기 선교의 경우 가난한 나라가 가난한 나라에 복음을 전하는 입장이었다면 이제 경제력과 문화적 힘을 바탕으로 보다 공격적인 선교 역량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 한국 교회는 선교 역량을 극대화하기 위해 힘을 모으고, 더욱 순전한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도록 하는 데 진력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동족이면서도 하나가 되지 못한 북한 동포들을 가슴에 품고 살아갑니다. 북녘 땅은 우리에게 아직도 미전도 지역으로 남아 있는 ‘땅끝’입니다. 새로운 지도자가 등장했지만 북한 상황은 결코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상황이 아무리 비관적이라고 해도 우리는 동토의 땅 북한에도 복음이 전파될 것을 기대하며 파종해야 합니다. 그 종자는 탈북 동포들일 수 있고, 중국 국경에 살아가는 조선족일 수도 있으며, 북한 땅에 드나드는 경제인일 수도 있습니다. 대량의 종자가 아니라 단 한 알의 종자라도 좋은 땅에 뿌려지기만 하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음을 믿음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의 종자의식을 갖고 북한 땅에 뿌려질 종자를 찾아 파종하는 데 우리의 역량을 모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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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영광스러운 삶의 비결

요한복음 12장 23~30절

 

사순절 기간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깊이 되새기며 그리스도인으로의 삶을 되돌아볼 때입니다. 어떤 자세로 신앙생활을 해야 주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큰 사랑을 깨달으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 11장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대속의 죽으심을 앞두고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시는 기적을 통해 부활의 예고를 하십니다. 이어 12장에서는 헬라인 몇 명이 예수님을 뵙고자 제자들에게 요청을 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의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면서 밀알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면서 주님을 따르는 길은 영광의 삶이지만 희생의 길이라고 강조하십니다. 이 말씀은 믿는 자들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니라 헬라 사람들, 즉 이방인들도 들어야 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물론이거니와 오늘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깊이 생각해봐야 할 대목입니다. ‘영광스러운 삶의 비결’이 무엇인지를 성경을 통해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희생을 통해 하나님께 온전히 영광을 이루어 드렸습니다. 훗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역시 순교의 제물로 영광의 삶을 살았습니다.

요한복음 12장 27∼28절에는 앞으로 지고 가실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예수님의 괴로운 마음이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의 때를 면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으나 “내가 이때를 위해서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라며 결국 십자가를 지시겠다고 결심하십니다. 그때 하늘에서는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곁에 있던 사람들은 천둥소리가 들렸다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고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라며 진정한 영광의 삶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삶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초점을 두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밀알의 썩어짐을 통한 희생보다는 세상의 영광과 권위와 자부심과 명예욕으로 군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신의 명예와 권위를 위해 기대와 가치, 목표에 집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요한복음 12장 23절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합시다.

예수님께서는 그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앞에 놓고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믿음으로 사는 길에 고난이 닥치고 어려운 시련이 밀려와도 결코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말라는 메시지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희생과 헌신으로 온전히 영광을 돌려드릴 때가 왔구나’라고 여기며 십자가의 희생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렇게 담대하게 주님의 길을 따를 때 하나님께서는 귀히 여기시고 부활의 영광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요 12:26) 주님을 따라가는 그 길이 영광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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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가?

요한일서 2:21-23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열여덟 살에 왕이 되었습니다. 대학교에 입학하지도 않은 고등학생 나이 일 때 왕이 되었으니 나라를 어떻게 다스리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왕이 된 후 실수하지 않았고 구설수에 오르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는 여론에 따라 흔들리지도 않았습니다. 신문이나 잡지를 보지 않았지만 그가 판단한 대로 하면 일이 형통하게 이루어져 만인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고, 그가 64년간 나라를 통치할 때 영국이 황금시대를 이루었습니다. 그는 나라를 다스릴 때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찬송을 부르면서 쉽게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도와주시고 그에게 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손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빅토리아 여왕이 64년간 그렇게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형통했던 비결이 어디에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빅토리아 여왕에게 이렇게 물었답니다. “여왕 폐하, 폐하께서는 하루에 기도를 몇 번 하십니까?” “한 번 합니다.” “신앙 깊은 폐하께서 하루에 한 번밖에 기도를 안 하시다니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나는 새벽에 일어나면서부터 저녁에 잠들 때까지 계속 기도합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하나님과 동행했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혼자 세상을 살지 마시고 날마다 순간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하며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모든 문제의 해답을 알고 있는 분입니다. 보통 학생이 풀 수 없는 시험 문제를 천재 학생과 함께 풀면 아주 쉽게 풀 수 있는 것처럼 인생의 어려운 문제를 우리의 힘으로는 풀 수 없지만 하나님과 함께 풀면 쉽게 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설교는 아주 기초적인 기독교의 진리를 다루려고 합니다. 오늘 다루는 진리가 아주 기초적인 것이지만 이 진리에 답을 할 수 있어야 참된 기독교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 진리에 대한 대답이 잘못되었다면 그는 참 기독교인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가졌다고 할 때 하나님을 믿는다는 표현보다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표현이 더 정확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종교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있지만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 없습니다. 기독교와 일반 종교의 차이점 중에 가장 두드러진 차이가 이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예수님을 유일한 구세주로 믿습니다.
   사도 요한은 어떤 사람의 영이 하나님께 속한 영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라고 말했습니다. 본문 22절에서는 진리에 속하지 못하고 거짓말 하는 자가 누구인지를 밝힙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거짓말 하는 자입니다. 그는 적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입니다. 23절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참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아들에 대한 올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아들이 없는 사람은 그가 아버지 하나님을 찾는다 할지라도 사실은 그에게 아버지 하나님이 없는 것입니다.
   요일 4:1-3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2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3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영을 다 믿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영을 분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거짓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하나님께 속한 영은 어떤 영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사람의 영입니다. 예수님을 시인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속한 영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은 적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입니다.
   요일 5: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하나님께로부터 났다는 말은 거듭났다는 말입니다. 누가 거듭난 사람입니까? 누가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들입니다. 왜 이 시대의 유대교에는 구원이 없을까요? 이미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기 때문입니다. 왜 타종교에 구원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까? 왜 그럴까요? 타 종교는 유일한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주장입니다. 그것은 목사들의 주장이 아닙니다. 성경의 주장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사람들은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가?”입니다. 오늘 설교는 예수님이 유일한 구세주라는 전제 하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이유 3가지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우리의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분이 예수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인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선포입니다.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모든 사람이 죄인입니다.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여기서 ‘모든 사람’은 헬라어로 ‘파스’라는 말인데 ‘어떤 자든지 다’라는 의미입니다. 인류 최초의 사람인 아담으로부터 시작해서 이 시대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을 말합니다.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 포함해서 모든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어떤 자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모두가 죄인입니다.
   모든 사람은 두 가지 측면에서 죄인입니다. 첫째는 원죄 때문에 죄인입니다. 원죄란 인류의 조상인 아담의 범죄로 인해 모든 사람이 가지고 태어나는 죄책과 부패성을 말합니다. 원죄로 인하여 사람은 지정의(知情意) 전체가 전적으로 부패되었습니다.
   둘째는 자범죄 때문에 죄인입니다. 자범죄는 원죄의 부패성을 가진 모든 사람이 삶 속에서 짓는 죄를 뜻합니다.
   간혹 자기는 이 세상에서 단 한 번도 죄를 범한 일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죄를 범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양심을 속이는 말을 하는 것이든지 아니면 자기의 죄를 볼 수 있는 눈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누를 사용해서 세수를 하고 나면 얼굴이 깨끗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현미경으로 보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세군이 얼굴에 붙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현미경으로 보면 깜작 놀랄 만큼 세균이 많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수준에서 보면 자신은 다른 사람들 보다 훨씬 의로운 것 같고 자신에게서는 흠을 찾아볼 수 없는 것 같지만 도덕성이 더 높은 사람의 눈으로 보면 상당히 많은 죄가 보이는 것이고 또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많은 죄를 범한 죄인인 것입니다.
   죄의 가장 무거운 영향력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것입니다.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죄를 범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기 위하여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죄를 없애기 위해서 노력해왔습니다. 고대로부터 인간은 철학으로, 도덕적 행위로, 선행으로, 종교생활로 혹은 수도생활을 통해서 죄를 없애려고 노력했으나 죄의 부패성과 죄책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노력해도 죄의 부패성과 죄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는 사람은 누구나 전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입니다.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의 어떤 노력도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외상값을 갚지 못하면 고기로 대신 갚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기가 썩었다면 썩은 고기로 어떻게 외상값을 갚을 수 있겠습니까? 누가 썩은 고기를 받고 외상값을 계산해 주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어떤 노력도 하나님을 만족 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죄를 없이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시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일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믿는 자들을 위한 대속의 죽음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사 53:5,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예수님이 찔리시고 상하시고 징계를 받으시고 채찍에 맞으신 이유는 예수님에게 문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가 계산해야 할 죄의 값을 대신 지불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 대신 우리 죄를 담당하신 것입니다. 담당하셨다는 말은 우리의 죄의 짐을 대신 짊어지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대속의 피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담당의 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피에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는 능력의 피입니다.
   요일 1:7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우리의 죄를 없이 하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미 7:18,19절을 보면 주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데 우리의 죄를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신다고 말씀합니다.
   물건을 발로 밟는 것은 부수기 위해서입니다. 부순다는 것은 이제 끝낸다, 이제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쓸 것은 발로 밟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돌아보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깊은 바다에 던지신다는 말은 다시는 기억치 않는다는 말입니다. 인류 역사상 제일 깊이 내려간 바다의 깊이가 300m라고 합니다. 그것도 사람을 보호해 주는 특별 장치가 되어 있고 산소와 먹을 것이 있는 우주복 같은 것을 입고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300m를 내려갔다 올라오는데 한 달이 걸렸답니다. 빨리 올라오면 수압에 의해 즉사하기 때문이랍니다. 사람은 301m 바다에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를 300m의 바다에 던지시는 것이 아닙니다. 깊은 바다에 던지십니다. 사람이 발견한 가장 깊은 바다는 깊이가 약 11km입니다. 300m 깊이에 던진 것도 찾지 못하는데, 11km 깊이의 바닥에 있는 것을 어떻게 찾겠습니까? 그것은 아예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의 모든 죄를 발로 밟으시고 깊은 바다, 11km가 더 되는 바다에 던지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해결 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입니다.
 
2. 우리를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는 분이 예수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 장로님이 연세가 드셔서 운명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꿈을 꾸다가 그만 천국과 지옥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온 장로님은 놀래서 많은 것을 회개하였습니다. 특히 목사님께 잘못한 것 같아서 목사님을 찾아뵈어 용서를 구하고 그리고 목사님과 화해를 하였습니다. 장로님은 꿈 이야기를 목사님에게 하였더니 잠시 후에 목사님께서 그 장로님을 서재로 부르시고는 심각하게 묻더라는 것입니다. “장로님! 정말 천국이 있기는 있는 것입니까?”    천국에 대한 확신이 없이 기독교 신앙을 가졌다는 것은 그의 신앙이 성경적이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난 금요일에 말씀드렸던 어느 군목의 죽음입니다. 어느 날 군함이 파선되어 모두가 바다에 빠져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군목은 구명튜브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살려고 아우성이었습니다. 군목이 옆에 있는 죽어 가고 있는 병사를 보고 물었습니다. “자네 예수를 믿는가?”, “아니요.”, “그럼 이 튜브를 자네가 가지게.”, “목사님을 어떻게 하려고 하십니까?”, “나는 예수를 믿네. 나는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가네. 자네는 예수를 안 믿으니까 지금 죽으면 지옥에 가는 거야. 내가 이 구명튜브를 주고 죽을 터이니 자네는 살아나거든 예수 믿고 천국에서 만나세.” 그리고 구명튜브를 던져주고 목사님은 익사하였습니다. 그 병사는 후에 예수를 믿고 자기 대신 죽은 목사님을 평생 그리워하며 살았답니다.
   천국에 대한 확신이 우리를 참된 신자로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천국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천국을 향해 가는 나그네로 이 세상을 살기를 바랍니다.
   히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사람이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습니다. 이 심판은 계 20장에 나옵니다. 희고 큰 보좌 앞에 앉으신 주님 앞에서 지구상에서 살았던 모든 사람들이 심판을 받습니다. 그 심판을 이기지 못한 사람들은 불못인 영원한 지옥에 던져집니다. 그리고 심판을 통과한 사람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인 영원한 천국에 들어갑니다.
   천국은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이고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입니다.
   계 21:22,23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천국에 하나님이 계시는데 성경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이 예수 그리스도 뿐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천국에 갈 길도 예수님뿐인 것입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행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딤전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우리를 영원하신 아버지 앞으로 인도하실 분이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실 분이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께서 어린 아이들에게 설교를 하시다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 믿으면 죽어서 천국을 가는데 너희들은 나중에 죽어서 천국을 가고 싶으냐? 아니면 지옥을 가고 싶으냐?”라고 묻자 모든 아이들이 일제히 손을 들고서 “천국을 가고 싶어요!”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너무나 기쁜 마음에 목사님께서 또 다른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럼, 너희가 천국을 갈려면 어떻게 해야 되지?”라고 묻자 한 아이가 번쩍 손을 들었습니다. 목사님은 속으로 틀림없이 이 아이가 “예수님을 믿어야 되요!”라고 말할 것을 기대하면서 그 아이에게 답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자신 있게 손을 든 아이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이렇게 크게 말했다고 합니다. “네, 우리가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먼저 죽어야 해요!.” 네 죽어야 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는 유일한 분입니다.
 
3. 예수님이 우리를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성자 소리를 들으실 만큼 존경 받는 삶을 사신 분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훌륭한 목회를 하신 분도 때때로 상처를 받고 아픈 일을 당하셨다고 합니다. 하루는 너무너무 힘이 들어 심방을 마치자마자 돌아와 그대로 쓰러지셨답니다. 아픈 일을 당하여 너무너무 아픈 가슴을 안고 쓰러져 있는데 비몽사몽간에 꿈인지 환상인지, 지친 몸으로 흐느적거리며 힘들고 어려운 길을 걸어가는 자기 모습이 보이더랍니다. 너무 힘들어 가기 싫지만 가야만 할 길이라 걸어가더랍니다. 그런데 곧 앞으로 쓰러지더랍니다. 바로 그때 사람의 손보다 엄청나게 큰 손이 나타나 목사님을 척 받쳐서 세워주더랍니다. 그래서 힘들게 다시 걸어가는데 얼마 가지 못해 또 좌측으로 비틀하고 넘어지려 하니 몸이 땅에 닿기 직전에 또 그 큰 손이 나타나 척 받쳐서 세워주더랍니다. 우측으로 넘어지려 할 때나 좌측으로 넘어지려 할 때나 어김없이 그 큰 손이 나타나 도와주더랍니다. 그렇게 그 길을 끝까지 다 가더랍니다. 그때 목사님이 ‘아, 그 큰 손은 하나님의 손이구나. 내가 이렇게 힘들고 어렵게 목회를 하지만 나 혼자 하는 것이 ! 아니라 하나님의 손이 언제나 나를 도와주시는구나.’라고 깨닫고 힘을 얻어 오랜 세월 동안 승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를 도우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우리 구주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고 이 땅에 40일을 계시다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오르신 예수님은 지금 하늘 보좌 우편에서 대표적으로 세 가지 일을 하고 게십니다.
   첫째는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기도 하고 게십니다.
   롬 8:34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둘째는 우리를 위하여 천국에 거처를 예비하고 계십니다.
   요 14:2,3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셋째는 고난 받는 자들을 응원하고 계십니다.
   행 7:55,56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주님은 하늘 보좌에서 일어나셔서 스데반을 응원하시며 위로하셨습니다.
   주님이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28:20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 말씀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당신은 가시는데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좀 모순이 있는 말씀 아닙니까? 가시면 함께 하실 수 없는데 가시면서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승천 직전에 모순처럼 들리는 말씀을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오셔서 믿는 자들과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 14: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성령님을 모릅니다. 성령님을 받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성령님을 아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 속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믿는 자 속에 오셔서 무슨 일을 하십니까? 믿음의 사람들을 인도하시고 도와주십니다.
   롬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를 도와주셔서 어떤 결과가 만들어집니까? 두 가지 결과입니다.
   첫째는 성령님은 예수님을 대신해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저는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이 말씀이 너무 좋습니다. 내가 비록 부족해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고, 내가 실수를 했어도 하나님이 도우시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믿음만 확실하면 우리는 어떤 상황을 만나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미국이 낳은 유명한 육상 선수 '칼 루이스' 는 오토바이를 타고 출퇴근을 하였는데, 그 오토바이를 도적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전거를 사서 타고 다녔는데 또 도적을 맞았습니다. 화가 난 그는 “내 다리만큼은 도적질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서 왕복 24km을 매일같이 억지로 참고 달리며 출퇴근을 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세계적인 육상 선수가 되었습니다. 오토바이를 도둑맞고 자전거를 도둑맞는 것은 속상한 일이지만 그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칼루이스는 세계적인 육상선수가 되게 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중에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화가 화가 아니라 복이 된 경우가 많습니다.
   케몬스 윌슨이라는 미국의 한 남자가 회사에서 해고를 당했습니다. 남자들에게 직장에서 해고를 당했다는 것은 인생의 위기이며 기근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보통 남자들은 이럴 때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해고 시킨 회사와 상사를 원망하게 됩니다. 그런데 케몬스 윌슨은 낙심하고 절망하고 원망하는 대신 해고 통지서를 들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해고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저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여관 사업을 해라. 사람들이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여관을 만들어 보아라.’라는 감동을 주셨습니다. 그는 기도 중에 받은 그 감동에 순종해서 작지만 깨끗한 여관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손님이 얼마나 많이 오는지 많은 돈을 벌게 되었고 차츰 여관의 수를 늘리기 시작해서 전 세계에 수많은 호텔을 가지고 있는 재벌이 되었습니다. 그 호텔이 바로 홀리데이인 호텔입니다. 케몬스 윌슨은 인생의 위기 앞에서 자신의 약함을 알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다가 홀리데이인 호텔을 창업하여 재벌이 된 것입니다. 해고를 당해! 도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새 길을 주시는 것입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면 예수님은 성령으로 우리를 도우셔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울 이루게 해주시는 분입니다.
   둘째는 성령님은 예수님 대신해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닮게 만드십니다.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를 도우셔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닮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는 분명한 목표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도우셔서 예수님을 닮도록 역사하십니다.
   롬 8:29,30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면 자연스럽게 변화가 일어납니다. 전에는 나쁜 생각을 하고 나쁜 말을 하고 나쁜 행동을 해도 양심에 걸리지 않던 사람이 이제는 나쁜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면 양심에 걸려서 마음이 불편하고 하나님께 죄송한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많이 불편해 집니다. 성령님께서 마음속에서 역사하셔서 죄에 대해서 책망하시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렇게 되면 잘못을 회개하게 되고 돌이키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성령님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언행심사가 주님을 닮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까? 세 가지 이유를 나누었습니다. 첫째는 우리의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분이 예수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우리를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는 분이 예수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예수님이 우리를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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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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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설교 ( Dawn Prayer Meeting Sermon)

 

우리가 기다리는 하나님의 날

베드로후서 3:8-14


 

하나님의 시간대와 우리의 시간대는 다릅니다. 8절에 보니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고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천년의 시간이 주님에게는 하루처럼 빠르기도 하고, 우리에게는 하루의 시간이 주님에게는 천년처럼 길기도 한 것입니다.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는 다 아시죠? 토끼는 거북이에게 경주에서 져서 화가 잔뜩 난체로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는 토끼에게 달팽이가 나말했습니다. “너 거북이에게 졌다며, 나는 네가 빠른 줄 알았는데 별거 아니네” 그러잖아도 화가 난 토끼는 자신을 무시하는 달팽이의 말에 감정이 폭발해서 발로 달팽이를 차버렸습니다. 달팽이는 저 멀리 보이지 않는 곳까지 날아가버렸습니다. 그리고 토끼는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약 1년이 지난 후 누군가가 토끼의 집 문을 두드립니다. 토끼가 문을 열어보니 자신이 1년 전에 발로 찬 달팽이가 서있습니다. 달팽이는 화가 잔뜩 난 얼굴로 토끼를 째려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니가 날 쳤냐?”
   하나님의 시간대와 우리의 시간대는 분명 다릅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의 약속이 더딘 것처럼 느끼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기 때문에 약속하신 대로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날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10절에서는 그 날을 ‘주의 날’이라고 말합니다. 12절에서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날을 ‘하나님의 날’ 이라고 말합니다.
   신앙생활은 ‘주의 날’ 즉 ‘하나님의 날’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모든 것을 그날에 걸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는 우리가 기다려야 하는 하나님의 날은 어떤 날이고, 하나님의 날을 기다리는 우리는 어떻게 그 날을 기다려야 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우리가 기다려야 하는 하나님의 날
   1) 재림의 날이다.
   우리 주님 다시 오십니다. 구름타고 오십니다. 우리는 그 날을 기다리며 사는 것입니다. 자대배치를 받은 이등병이 가족이나 애인의 면회를 기다릴 때 얼마나 간절히 기다리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그것보다 더욱 간절히 주님의 재림을 사모해야 합니다.
   살전 4:16입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주님이 재림하실 때 호령이 있습니다. ‘호령’이라는 말은 ‘부르시는 소리’입니다. 누구를 부르시는 소리일까요? 저와 여러분을, 믿는 우리들을 부르시는 소리입니다. “경훈아~”하고 부르실 것입니다. 그리고 천사장의 소리가 들립니다. 아마 “보라! 신랑이로다”라는 소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온천지가 떠나갈듯 한 나팔 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공중으로 이끌림을 받을 것입니다(살전 4:17). 이것을 휴거라고 말합니다. 이 때 우리를 공중으로 모으는 일을 천사들이 합니다(마 24:15). 주님의 재림의 순간은 신랑과 신부가 만나는 시간입니다. 주님은 신랑이시고, 믿는 우리들은 신부입니다.
   우리가 휴거 되어서 공중에서 얼마나 오래 있을지는 모릅니다. 그 때 지상에서 주님의 재림을 원치 않는 세력들이 군대를 모아 재림하시는 주님을 막기 위해서 전쟁을 일으킵니다. 이 전쟁이 아마겟돈 전쟁입니다.
   공중에서 우리가 무슨 일을 하고 있을지도 구체적으로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공중에서 주를 보게 될 것이고 그 이후로 영원토록 주와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 살전 4:17입니다.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는 몇 가지의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육체적인 재림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몸 그대로 재림하십니다. 예수님은 가신 그대로 오십니다. 가실 때 부활체를 입고 가셨으니 오실 때도 부활체로 오실 것입니다.
   둘째는, 가시적인 재림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눈이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계 1:7). 이 세상에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눈으로 재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셋째는, 갑작스런 재림입니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시기에 예수님은 갑자기 재림하십니다. 그래서 도적 같이 오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생각지 못한 때에 갑자기 오는 것입니다.
   넷째는, 영광스러운 재림입니다. 마 25:31입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주님은 영광으로 오셔서 영광의 보좌에 앉으십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만나면 서로 ‘마라나타’라고 인사했습니다. ‘마라나타’란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뜻입니다. 로마의 핍박을 견디고 믿음을 지키게 했던 신앙의 비밀이 ‘마라나타’신앙이었습니다. 우리가 주일 낮 예배 시간에 마지막 부르는 찬양이 ‘마라나타’입니다.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며 주님이 속히 오시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부르는 찬양입니다. 제가 그 찬양을 예배 마지막 곡으로 선택한 이유는 여러분의 신앙이 ‘마라나타 신앙’, ‘재림 신앙’으로 무장되기를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2) 천년왕국에 들어가는 날이다.
   두 번째 우리가 기다리는 하나님의 날은 천년 왕국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들은 들림을 받아서 공중에서 주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이 지상세계에 내려오게 됩니다. 이 때 주님은 백마를 타고 오십니다.
   주님은 하늘 군대와 함께 올 것인데 공중에 들림 받은 우리 역시 하늘 군대에 속해서 이 땅에 내려옵니다. 주님을 따르는 하늘 군대도 흰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지상에 내려옵니다. 그리고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들의 군대와 더불어 전쟁을 합니다. 이 전쟁이 아마겟돈 전쟁입니다. 아마겟돈 전쟁에서 하늘 군대가 승리합니다.
   아마겟돈 전쟁 이후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사로 잡혀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집니다. 또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용 즉 마귀, 사탄을 잡아 결박합니다. 마귀는 잡혀서 무저갱에 들어가게 되고 천년동안 그 곳에 갇혀서 나오지 못합니다.
   슥 14장에 보면, 재림하신 주님이 예루살렘 감람산으로 가십니다. 주님이 감람산에 서시니 감람산 한 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서 남과 북으로 쪼개집니다. 그리고 감람산에서 생수가 나와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릅니다.
   마귀가 결박되고 천년 동안이나 마귀가 세상을 미혹하지 못하니 세상에는 평화가 찾아옵니다. 아담과 하와가 마귀의 미혹에 넘어가서 잃어버렸던 에덴동산이 회복되게 합니다.
   짐승의 666표를 받지 않고 믿음을 지킨 우리들은 천년 왕국 기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게 될 것입니다.
   이 때는 온 세계의 수도가 예루살렘이 될 것이고 율법이 시온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와서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온 세상에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그 날에는 무기를 녹여서 농기구를 만들 것이고,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먹고, 어린이가 사자들과 뛰놀고, 독사 굴에 손을 넣고 장난치는 평화가 찾아올 것입니다.
   천년 왕국 기간 동안에는 사단을 결박하여 무저갱에 가두었으므로, 재난사고, 흉년, 질병, 전쟁이 없는 지장낙원이 될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이 날을 기다리며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3)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는 날이다.
   천년이 차게 되면 마귀가 잠간 놓임을 받습니다. 이 때 마귀가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불택자들은 마귀의 유혹을 받아서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바다 모래처럼 많은 사람들이 미혹을 받아서 마귀를 따르게 됩니다. 그들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포위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불이 내려서 그들을 태워버립니다. 이 전쟁을 곡과 마곡의 전쟁이라고 합니다.
   곡과 마곡의 전쟁이 끝난 후에 그 유명한 백보좌 심판이 벌어집니다. 이 심판을 백보좌 심판이라고 하는 이유는 심판자께서 크고 흰 보좌에 앉으셔서 죽은 자들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백보좌 심판을 통과하기를 바랍니다. 백보좌 심판을 통과하는 비결은 생명책에 이름을 기록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구원 받은 사람들은 백보좌 심판을 이기고 새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심판을 통과하지 못한 자들은 영원한 유황 불못에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영원토록 쉼 없이 괴로움을 당하게 됩니다. 그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지금 있는 하늘과 땅은 마치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듯이 불타게 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새예루살렘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올 것입니다. 우리는 그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토록 행복하게 살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눈물도 사망도 저주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생명수 강이 흐르고 강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주를 섬기며 주의 얼굴을 보고 세세토록 왕 노릇하며 살 것입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하나님의 날은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는 날입니다.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날을 어떻게 기다려야 하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날을 기다립니다. 하나님의 날은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입니다. 천년왕국에 들어가는 날입니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는 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날을 어떻게 기다려야 할까요?
 
   1) 주님의 약속 위에 서라.
   주님이 오시기 전에 적그리스도가 나타나게 됩니다. 적그리스도는 온 세상을 미혹하려고 들 것입니다. 666짐승의 표를 온 세상 사람들에게 받게 하려고 할 것입니다. 짐승의 표를 받으면 그는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고 영원한 불못에 들어갑니다.
   요즘 666 짐승의 표를 ‘베리칩’으로 보는 견해가 강합니다. 미국에서는 2014년부터 모든 국민이 베리칩을 받아야 한다는 법이 통과 되었습니다. 지금은 경제적인 면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 베리칩을 받게 하겠지만 결국은 그것이 모든 사람들을 통제하게 될 것이고, 하나님을 떠나게 만드는 악한 자들의 도구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짐승의 표가 베리칩이 되었든 다른 방법이 되었든 중요한 것은 우리는 짐승의 표를 받으면 안 되고 마귀의 미혹을 이겨야 합니다. 하지만 마지막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미혹에 넘어가고 배교하는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살전 2:3).
   사람들이 넘어지는 이유는 말씀이 없어서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자기 열심으로 합니다. 바울은 롬 10:2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열심에 관해서 말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말씀 없는 열심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대학 교수로 있을 때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더군요. 시험을 내보면 기가 막힌 학생들이 있답니다. 어떤 학생은 교수님이 낸 문제는 지우고, 자기가 스스로 문제를 내서 해답을 달았답니다. 그 학생은 정답을 달았습니다. 그런데 성적은 안 나갑니다. 마찬가지로 스스로 생각하기를 예수를 잘 믿었다, 잘 섬겼다 해도 그것은 내 기준이라면 내 삶에 의미가 없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들이 내 생각이 아닌 말씀 위에 서서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4절을 보면 주의 재림에 관한 약속을 믿지 못해서 실족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말세에는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지 않기 때문에 미혹을 받아서 타락하고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가 가까워질수록 우리들은 더욱 말씀을 가까이 하고 재림의 약속을 붙잡고 살아야 합니다.
 
   2) 기도에 깨어 있으라.
   10절에 보니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사람들이 예기치 못할 때 오신다는 말입니다. 도적이 도적질하러 온다고 통보하고 오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까? 도적은 집안사람들이 방심하는 틈을 타서 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하려면 영적으로 깨어있는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종말에 대한 가르침의 핵심은 “깨어 있으라.”입니다. 마태복음 24장에서 종말에 일어날 일들을 말씀하신 후에 결론적으로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25장에서는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의 비유를 하신 후에 결론적으로 “그런즉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깨어있는 신앙생활은 기도하는 신앙을 말합니다. 마 26:41에 보니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신앙은 잠든 신앙입니다. 기도하는 신앙이 깨어있는 신앙입니다.
   기도생활은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는 데 크게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일상생활에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하는데도 크게 도움이 됩니다.
   경북 지사를 지내신 장로님의 간증입니다. 이분이 도지사 시절에 강원도에서 산불이 일어나서 강릉에서부터 불이 번져서 경상북도 울진 경계에까지 오게 되었답니다. 일주일 동안 불이 계속 붙었습니다. 나라에서는 많은 회의를 했고,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장비와 방법을 다 동원했습니다. 그러나 그 불은 꺼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번져갔습니다. 드디어 그 불길이 경상북도로 넘어왔습니다. 불도 넘어가면 그 지역에 있는 기관장이 인계를 해야 한답니다. 장로님도 강원도에서 내려온 그 불을 인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장로님은 내일 아침부터 책임지고 그 불을 잡아야 하기 때문에 밤새워 하나님께 기도를 했답니다. “하나님 불 좀 꺼주세요. 도와주셔서 불을 잡게 해주세요. 불이 울진 원자력 발전소에 붙으면 이 나라를 난리가 납니다. 도와주세요” 장로님이 다음 날 새벽에도 간절히 기도하고 다섯 시에 창문을 여니까 밖이 조용하더랍니다. 그렇게도 강하게 불던 바람이, 끊임없이 불던 바닷바람이 조용하더랍니다. 그래서 직원들에게 “항상 이렇게 바람이 없습니까?”라고 물었더니 “아니요. 항상 바람이 부는데 오늘은 이상! 하게 바람이 안 부네요”라고 하더랍니다. 늘 불던 강한 바닷바람이 그날만 잠잠한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 그렇게 하셨겠습니까? 장로님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의 응답인줄 믿습니다. 바람이 그치니 일주일 동안 꺾일 것 같지 않았던 불이 아침 열 시 반이 되니 다 꺼졌답니다.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기도는 시시한 일이 아닙니다. 기도는 재림을 준비하는 우리들의 생명줄과 같은 것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에게 생명줄을 던져주면 그 사람은 죽기 살기로 그 줄에 매달려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마지막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죽기 살기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기도하면 말세에 일어나는 온갖 미혹을 이기게 되고, 또 생활 속에서 주님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3) 거룩하고 경건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거룩하고 경건한 생활을 해야 하는 이유는 첫째, 깨어있는 영성으로 마귀를 대적하기 위함이고, 둘째는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 모든 것이 다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를 따라합시다. “모든 일이 드러난다”
   10절에 보니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일이 드러난다는 이 말씀은 어떤 이들에게는 한없는 위로를 주고, 또 다른 이들에게는 한없는 두려움을 줍니다.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라는 말씀에 위로받을 사람은 누굴까요? 사람이 알아주든 말든 오로지 주님만을 바라보고 충성, 헌신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들이 드러날 때 아마 “모르시는 줄 알았는데 이것도 아셨네요!”라고 탄성을 지르면서 손뼉을 치며 기뻐할 것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주님을 만났을 때 주님이 저를 안아 주시면서 “목회하느라고 수고했다. 고생했다”라고 하셨는데 제가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주님이 나를 알아주시니 얼마나 감사하고 얼마나 힘이 나는지요.
   “모든 일이 드러나리라”는 말씀에 두려워 할 사람은 누구일까요?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고 어둠의 일을 했던 사람일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아무도 모르는 줄 알고 여태까지 살아왔는데 모든 것이 드러난다면 얼마나 놀랍고,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우리가 완벽하게 숨겨도 주님이 드러내시면 다 드러납니다. 오래 전 제주도로 발령받은 경찰서장이 가족을 서울에 두고 혼자 생활했습니다. 외롭게 지내다 보니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바람이 난 것입니다. 남편의 이상한 행동을 눈치 챈 아내가 닦달하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은 어느 날 밤에 잠자는 아내의 귀에다 못을 박아 죽였습니다. 그리고 고혈압으로 사망한 것처럼 사망진단서를 떼어 장례를 지냈습니다. 감쪽같이 속인 줄 알았지요. 그런데 사정에 의하여 몇 년 후 아내의 무덤을 이장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오빠가 두개골을 수습하다보니까 머리에 큰 못이 박힌 것을 발견했습니다. 결국 살인죄가 발각되어 사형을 당하고 말았답니다.
   히 11:24,25에 보면 모세가 주 앞에 쓰임 받기 전에 먼저 버렸던 것이 있습니다. 먼저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버렸습니다. 권력과 명예를 버린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을 버렸습니다. 육체적인 쾌락을 버린 것입니다. 세 번째는 애굽의 모든 보화 즉 재물을 버린 것입니다.
   히 11:26에 보면 모세가 그렇게 좋은 것들을 버린 이유가 나옵니다.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다시 말하면 모세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 설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수고한 것들이 다 드러날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기의 수고에 상 주실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은 점차 더 악해져 갑니다. 전에는 생각도 못했던 범죄들이 지금은 쉽게 저질러지고 있습니다. 전에는 불신자도 부끄러워하던 악하고 음란한 일들을 기독교인들마저도 아무런 부담 없이 행하는 시대입니다.
   말세에는 악한 자들은 계속 악을 행하고 믿음의 사람들은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믿음의 편에 있어야지 악한 자들 편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계 22:11을 보면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이 악하고 음란하다고 우리도 악하고 음란한 생활을 하면 안 됩니다. 영적으로 살아있는 사람은 세상풍조를 따라가지 않습니다. 세상풍조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입니다. 장마철에 홍수가 나면 생명이 없는 물체는 물결 따라 떠내려가지만, 생명이 있는 물고기는 물결에 저항하면서 물결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말세가 될 수록 세속주의와 죄악의 물결이 범람하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은 쾌락과 음란을 따라 살지 말고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거룩하고 경건한 생활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4) 하나님의 날이 앞당겨지도록 노력하라.
   본문 12절에 보면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간절히 사모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날이 좀 더 빨리 올 수 있도록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의 날 즉 재림과, 천년왕국과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도록 노력하는 것일까요? 세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① 하나님의 날을 앞당기려면 전도자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빨리 오셨으면 좋겠는데 주님은 너무나 더디 오시는 것 같습니다. 주님이 더디 오시는 이유는 무엇일가요? 9절에 보면 답이 나옵니다. 주님은 택하신 자들이 다 회개하고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더디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주님이 빨리 오실 수 있도록 전도자로 살아야 합니다.
   롬 11:25,26을 보면 이방인의 충만한 자의 수가 차면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되고 온 이스라엘이 돌아오면 그 때 주님께서 재림하실 것입니다. 믿는 자의 수가 차야 주님이 오십니다. 그러므로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전도자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은 전도자의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전도는 능력이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씨를 뿌릴 뿐이고 역사는 주님이 하십니다.
   약 50여 년 전에 미국 텍사스에서 석유사업으로 큰 부자가 된 세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들의 이름은 죤 뉴우턴, 루이 웨더포드, 사무엘 프레스톤입니다. 석유산업 호황으로 억만장자가 된 이들은 전세 비행기를 타고 뉴욕으로 놀러갔습니다. 그들은 엠배서더 호텔 69층 전체를 예약하고, 첫날 뉴욕 관광을 즐겼습니다. 그리고 밤늦게까지 술을 먹고 취한 채로 호텔에 돌아와 보니 일이 생겼습니다. 엘리베이터가 고장 난 것입니다. 프론트 직원은 하룻밤만 2층에서 지내달라고 사정합니다. 그러나 이 세 친구는 술기운에 객기가 생겨 69층까지 걸어 올라가기로 결정합니다. 등산하는 기분으로 걸어올라 가는데, 처음 몇 층은 괜찮았으나 점점 힘들어졌습니다. 마지막 몇 층은 거의 기어 올라가면서 2시간 반 만에 69층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올라와 보니까 프론트에서 방 열쇠를 받지 않은 것입니다. 다시 1층까지 걸어서 내려갈 것을 생각하니 그만 정신이 아찔해지고 고민이 됩니다. 마침 그때 청소하는 흑인 아주머니가 손에 마스터키를 들고, 활짝 웃으면서 객실 문을 열어주며 농담 비슷하게 말합니다. “이곳까� �올라오느라고 많이 고생하셨지만 방 열쇠가 없으면 방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만약 이 마스터키가 없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그런데 진짜 마스터키는 예수님이지요.” 방문이 열리고 세 친구는 방으로 들어가서 침대에 누웠습니다. 그런데 존 뉴우턴라는 부자의 머릿속에 ‘예수 그리스도는 마스터키입니다.’라는 흑인 아주머니의 농담이 떠나질 않으면서 어린 시절의 교회생활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존 뉴우턴은 두 친구에게 “예수님은 정말 우리의 마스터키이다”는 신앙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러자 두 친구도 그 고백에 동의하고 그날 밤 그들은 눈물로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그 밤에 예수님이 찾아오심으로 그날 이후로 그들은 새로운 인생을 출발하게 됩니다. 텍사스 제일가는 부자들이 자신의 부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평생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기도의 후원자, 재정적 후원자가 됩니다.
   청소부 흑인 아주머니의 가벼운 전도가 그 세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은 것만 아니라 빌리 그래함의 사역에 영향을 미쳤고, 수많은 사람들을 살렸던 것입니다.
   전도는 우리가 하지만 열매는 주님이 맺게 하십니다. 우리가 가볍게 전도를 해도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큰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날을 앞당기려면 믿는 우리가 전도자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② 하나님의 날을 앞당기려면 세계선교를 해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언제 재림하실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 되고난 이후입니다. 마 24:14을 보면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처럼 작은 교회를 세계선교에 헌신하게 하시는 것은 재림의 시기를 앞당기시기 위함입니다.
   어떤 비행기가 엔진고장으로 추락하고 있었습니다. 비행기 안에 탄 사람들이 공포와 두려움에 질려서 어쩔 줄 몰라 합니다. 한 사람이 태연스럽게 앉아있는 것을 본 옆 사람이 그 사람의 표정을 살핍니다. “당신 뭐하는 사람이요?”, “나는 목사입니다.”, “그럼 잘 됐습니다. 지금 비행기가 추락하고 있는데 당신이 믿는 하나님께 빨리 기도해서 추락을 모면해 달라고 부탁을 드려보시지요.” 애타게 부탁했습니다. 목사님이 이 사람을 가만히 보더니 “저도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비행기가 떨어지고 안 떨어지고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천국 기획국이나 비서실 소관인데 저는 영업파트에 있기 때문에 도무지 힘을 쓸 수가 없습니다. 저는 실적만 잘 올리면 됩니다. 당신 예수 믿습니까?”라고 질문하더라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유머 속에 뼈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믿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되는 사람인지 분명히 알려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타고 있는 비행기가 추락하는 상황에서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 비전교회는 중보기도와 세계선교 그리고 이스라엘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우리 모두가 헌신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날이 앞당겨질 것입니다.
 
   ③ 하나님의 날을 앞당기려면 이스라엘 선교를 해야 합니다.
   롬 11:25,26을 보면 만물이 주에게로 돌아가기 전에 이방인의 수가 차고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금세기 들어서 이스라엘의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주님의 날이 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지금은 믿는 유대인의 수가 2만 명에 불과하지만 롬 11:26 말씀대로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는 그날이 올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역사의 종착점에서 이스라엘 구원이라는 마침표를 통해서 세계의 역사를 정리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 비전교회가 이스라엘 선교에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시간표가 진행되는데 있어서 우리들이 중요한 사명을 맡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내년에 하게 될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중보기도 사역이 기대가 됩니다. 흥분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격이 되고 또 감사합니다.
   사명의 길은 힘들어도 가야 합니다. 사명의 길을 가면 행복합니다. 인생의 의미는 사명에서 찾는 것입니다.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목숨을 걸만한 사명을 발견하고 하루를 살아도 사명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주님 다시 오십니다. 마라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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