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수요저녁예배설교 예수님의 십자가 (September,Wednesday Worship Sermon)

예수님이 베푸신 사랑

마가복음 15장 11∼15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산헤드린은 예수님께 신성모독죄를 적용해 처형했지만 실상은 그보다 더 절박한 사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십자가 처형을 고집한 산헤드린의 속사정을 살펴봅시다.

마가복음 15장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위해 새벽부터 분주하게 움직이는 산헤드린의 모습으로 시작합니다(1절). 산헤드린의 주된 구성원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서기관들입니다. 산헤드린이 예수님을 죽일 계획을 세운 주동자라면 가룟 유다는 결정적인 공모자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한통속이 된 것은 그들의 속성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가룟 유다를 도적이라 했습니다(요12:6).

산헤드린에 대한 평가는 한마디로 위선자라 할 수 있습니다(마23:13). 재판장인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죽일 만한 그 어떤 죄, 더구나 십자가에 처형할 만한 죄를 찾지 못하고 놓아주려 했습니다. 하지만 산헤드린의 사주를 받은 군중들의 요구를 따라야 했습니다. 산헤드린의 목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 했을까요. 종교 지도자들의 ‘외식’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23:27) 대접 받고 문안 받는 것을 좋아했고, 부자들과는 억지로라도 친구가 되려 했어도 가난한 자들과는 눈도 마주치기 싫어했습니다.

누가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말뿐인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을 통렬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눅10장).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얼마나 위선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약한 자의 편이 되어야 할 저들은 오히려 그들을 외면했습니다.

주님은 어디를 가든 병자의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한센병 환자도, 이방인도, 죄인이라고 비난받는 이들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부자도 가난한 자도,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유대인도 사마리안도 심지어 로마인도 찾아가 만나주시고 함께하셨습니다.

예수님 곁은 언제나 인산인해였습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에 감사하고 감탄하며 찬송하고 영광을 노래했습니다. 주님께서 감싸주시는 따스함은 저들의 지친 몸과 마음을 위로하며 그들에게 소망을 주었습니다. 산헤드린이 주님을 따를 수 없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점점 커가는 데 자신들은 작아져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대책이 무엇이었습니까. 산헤드린은 군중을 충동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예수님이 베푸신 사랑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의 완결판입니다.

주님의 마지막 말씀은 “다 이루었다”(요19:30)입니다. 그 증거가 예수님 부활입니다. 2017년 부활의 주님을 경험하는 한국교회가 되길 소망하면서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한 주 되길 바랍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22:3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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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회설교 / 성경 스타일의 삶 ( Dawn Prayer Meeting Sermon)

사도행전 1710~15

 

극단적인 상황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현대는 극단적 말씀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말을 듣지 않을 뿐 아니라,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이라는 무늬만으로 살려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세상엔 나를 변화시키지 못하는 복음, 예수님의 진리가 삶의 결론이 되지 못한 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많습니다. 여전히 가치관과 세계관의 변화 없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로 득실거립니다.

 

그러나 이대로는 안 됩니다. 복음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예수님만으로 충분한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실제가 되어야 하고, 우리가 갖는 믿음이 부도 맞은 믿음이 아니라 살아있는 믿음이 되어야 하며, 천국과 지옥이 반드시 실제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십자가 앞에서 내 이름표 달고 나대신 죽으신 예수님처럼 살아가려는 것이 우리의 핵심가치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로만이 아니라, 내 생각과 지식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현장으로 내놔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 스타일의 삶입니다. 성경 스타일의 삶이란 신자이든 비신자이든 우리를 보고 ! 저 사람 성경대로 사네? 스타일이 완전 성경스타일이네?”라고 말하는 삶입니다. 말씀을 항상 적용하는 삶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과 실라가 2차 전도여행 중 데살로니가에서 베뢰아로 쫓겨 가서 말씀을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다 유대인이며 상당히 영향력도 있고 품위도 있는 그런 사람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그들이 말씀을 열정적으로 받아들였고, 이것이 진리라는 결론에 이르자 날마다 성경을 연구했다고 말합니다. 나름 배운 사람들이었고 귀족 출신들이며, 고상하고 품위를 갖춘 사람들이었는데 말씀 앞에서 진지하게 반응하더라는 말입니다.

 

많은 분들이 말씀을 듣지만 믿음도 생기지 않고 자라지도 않습니다. 그저 성경의 단편적 지식들이 머리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뭘 좀 깨닫는가 싶다가도 말씀을 자기 기준으로 판단하고 듣기 때문에 제자리걸음만 계속합니다. 그러나 베뢰아 사람들은 짧은 시간에 변화됩니다. 말씀을 절대 결론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겐 무엇이 문제였던 것일까요. 알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고, 말씀이 결론이 되지 못하니까 그렇습니다. 진리가 결론이 되게 하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말입니다. 결론 났으면 결론으로 삼아야지 토를 달고, 내 상황에 꿰맞추려 하거나 이리 저리 빠져나갈 궁리를 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말씀은 영원합니다. 내 형편이 어떠한가를 상관하지 않고 말씀을 결론으로 받아 순종했던 사도바울처럼 사는 삶이 성경스타일의 삶입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너희는 이때까지 우리가 자기 변명을 하는 줄로 생각하는구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고후 12:19)

 

우리의 신앙이 가짜이거나, 말씀이 머리에만 돌고 있거나, 천국과 지옥이 실제가 되지 않으면 망합니다. 에스겔 선지자의 말씀(16:46)처럼 예수 생명 붙잡고 성경스타일로 승리하시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그래서 신앙과 생활에서 모두 승리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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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정교회,가정예배가 바로서야 미래가 있다.

 

제 목 : 하나님의 인도하심

본 문 : 창세기 24:41-49  / 찬송가 560

아브라함의 종은 라반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지루하리만큼 자세하게 간증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라반에게 분명히 알려 주고 싶었습니다. 헤브론을 떠날 때부터 라반의 집에 도착할 때까지의 모든 여정이 하나님의 섬세한 인도하심이었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도 섬세하게 이끌어가고 계십니다. 뒤돌아보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구석구석까지 통치하시고 다스리고 계십니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에벤에셀의 하나님은 지금도 함께하시며(임마누엘) 장래에도 인도하실 것입니다(여호와 이레).

  

오늘의 만나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어떻게 증거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맡기는 당당함 

종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말한 후 라반의 결혼 승낙을 기다렸습니다. 그는 라반에게 아첨하거나 혹은 위협하지 않았습니다. 좋은 결과를 만들기 위해 편법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는 항상 하나님만을 의지했기 때문에 당당하게 행동했습니다. 종은 미래의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고 오로지 현재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매사가 당당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의기소침하지 않고 비굴하거나 아첨하지도 않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맡기기에 담대하게 한 걸음씩 전진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만나 

오늘 하나님이 맡겨 주신 일에 최선을 다하며 당당하기 위해 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기도 

개인  

날마다 삶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증거하게 하소서. 

가정

하나님을 의지하며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가정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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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 위로하시는 메시야를 만납니다

 

찬송 : ‘이 몸의 소망 무언가’ 488(539)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이사야 4015 

 

말씀 : 본문은 바벨론에 있는 유다 백성에게 전하는 말씀입니다. 그 첫마디는 위로하라 위로하라입니다. 마더 테레사가 쓴 글입니다. ‘가장 큰 질병은 결핵이나 한센병이 아닙니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고, 아무도 위로하지 않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 이것이 가장 무서운 질병입니다. 세상에는 빵이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도 많지만 작은 사랑이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이 세상에 위로가 필요 없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다 그렇습니다. 상처받았다는 말은 곧 위로받고 싶다는 뜻입니다. 대한민국에도 위로가 필요합니다. 한때 한국인인 것에 자부심을 느끼며 살았던 우리는 오늘날 말로 다 할 수 없는 허탈감과 국제적 수치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위로받아야 할 이들을 가리켜 하나님은 내 백성이라 부르셨습니다. 그들에게 노역의 때가 끝났고 모든 죄가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다 백성은 주전 605년 바벨론의 공격을 받아 포로로 잡혀갔습니다(1차 포로). 그 바벨론은 주전 539년 바사(페르시아)에 멸망당했습니다. 이듬해 바사왕 고레스는 칙령을 발표해 포로로 잡혀 온 모든 민족들을 돌려보내고 그들의 성전을 재건하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주전 537년 스룹바벨의 인도 아래 유다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왔습니다(1차 귀환). 이사야는 이런 사정을 가리켜 노역의 때가 끝났다라고 했습니다.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는 선지자가 해야할 일은 광야에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거기서는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됩니다(4).

 

작은 모습으로, 아주 낮고 천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메시야를 영접하려면 우리 마음에 있는 크고 작은 산같이 삐쭉하게 솟아있는 것들이 낮아져야 합니다. 바리새인 못지않은 교만한 마음, 자기가 남보다 잘났고 자기 의견만이 남의 의견보다 옳다고 억지를 부리는 오만한 마음, 자기가 하는 일이 남들이 하는 일보다 더 중요하고 잘 해낸 듯이 생각하는 얼토당토않은 마음 등 뾰족한 것들이 다 낮아져야 비로소 마구간에서 태어나시는 아기가 메시야로 보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40:1011).

 

진정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픈 마음, 거친 마음, 괴로운 마음을 토닥토닥 달래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속에 물든 마음의 옷을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갈아입는 것, 상하고 지친 우리 마음을 하나님 영광에 머무는 자리로 갈아엎는 것입니다

 

기도 :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고후 1:34) 주님. 저희를 위로해 주시고 또 위로하는 자로서 우리를 사용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기도문 

 

정현진 목사(서울 수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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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거룩한 칭호

 

말씀 : 요일3:1~6

 

1.가장 위대하고 놀랍고 영광스러운 칭호

 

여러분, 세상에서 뭔가 특별한 사람에게는 특별한 칭호가 붙습니다. 성왕 다윗, 지혜의 왕 솔로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또 일반적으로도 음악의 아버지, 축구의 황제, 가왕 누구누구, 요샌 뭐 외모지상주의에 빠져 여신, 얼짱, 몸짱 그러면서 그럴듯한 칭호를 붙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놀랍고 위대하고 영광스럽고 복되고 거룩한 칭호는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하나님과 예수님께 대한 칭호로서 하나님, , 그리스도, 구세주 등의 칭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우주만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 인류의 구속주로 기름 부음을 받으신 예수님, 인류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해 주실 분 등등의 의미이지요. 세상에 이렇게 거룩하고 복되고 위대한 칭호가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아무리 위대하고 훌륭하고 능력과 지혜가 뛰어나고 인품이 좋고 엄청난 업적과 공로를 남겨 대단한 칭호를 얻어도 하나님께 적용되는 칭호에 비한다면 새발의 피도 안되지요.

 

그런데 여러분, 인간에 붙여진 칭호 중에 그래도 어느 정도 하나님께 대하여 붙여진 칭호에 근접하는 칭호가 있습니다. 그게 뭐겠습니까?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성도라는 칭호입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 누구누구, 성도 누구누구 이런 칭호말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물론 하나님, , 그리스도, 구세주라는 칭호에는 어림도 없지만 그래도 인간으로서는 세상의 다른 어떤 위대한 칭호나 타이틀이나 지위와도 비교도 할 수 없이 위대하고 아름답고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칭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물론 이 땅에서도 어느 정도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게 되지만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갔을 때 어떻게 됩니까? 거의 예수님과 같은 모습을 갖게 됩니다. 물론 능력과 지혜에 있어서는 예수님과 비교할 수 없지만 거룩과 의와 선과 사랑 등의 영화로운 속성에 있어서는 거의 예수님 수준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체적으로 영화로운 몸을 입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존재로 영광의 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 칭호가 얼마나 굉장하고 대단하고 영광스러운 것이냐는 말씀입니다. 세상에서도 뭔가 특출 나서 다른 사람들이 가질 수 없는 멋진 칭호를 얻는 것도 귀한 일이고 복된 일이고 영광스러운 일일진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 세상의 다른 어떤 칭호와도 비교할 수 없는 이 영광스러운 칭호를 가진 우리들은 얼마나 대단한 존재 들이냐 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1절을 보십시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보라.’ 너무나 엄청난 일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감탄의 소리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이 얼마나 대단하고 영광스럽고 복된 것인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만 생각하면 감사와 기쁨의 탄성이 저절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의 자녀라는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칭호를 가지고 있는 자로서 늘 자부심과 긍지 속에 감사와 기쁨과 거룩한 살아감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의 은총 풍성하게 누리는 삶이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사실을 상기시키며 우리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은 무엇인지, 하나님의 자녀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2.하나님의 자녀가 된 과정

 

1절을 다시 봅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우리에게 어떠한 사랑을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컴을 받게 하였는가!’ 그러니까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엄청나고 놀랍고 경이로운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그 경이로운 사랑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대로입니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신 것만해도 엄청난 사랑인데 게다가 예수님을 십자가의 죽음까지 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냥 일반적인 인간이라도 그런 일을 하면 대단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과 사람과는 그 비중이나 가치가 비교할 수 없이 다릅니다. 물론 사람도 생명을 바쳐 다른 사람을 살린다면 대단한 일이고 칭찬과 상급도 받아야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죄와 무지 속에 있고, 어리석고 무모하고 심지어 더럽고 추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숭고한 헌신도 그 가치가 줄어 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 물론 그 결과도 그렇습니다. 한 사람이 자신을 희생하여 몇 사람을 살린다해도 숫자적으로 얼마 안될 뿐 아니라 그 영혼을 살릴 수는 없기 때문에 온전한 것이 못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없고 흠없으신 분입니다. 자신을 위해서라면 그럴 이유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게다가 수적으로도 예수님의 헌신과 희생은 수억명을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이 사랑과 헌신과 섬김을 우리가 어디에 견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놀랍고 크고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사랑을 받은 자인지를 늘 기억하며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할 때에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마음껏 받아 누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하나님의 자녀들의 특권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 엄청나고 고귀하고 영광스러운 신분을 얻게 되었는지를 말씀하고 나서 2절에서는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여기서 그가 나타나시면 그와 같을 줄을 안다는 것은 마지막때에 주님이 오실 때 우리도 변화되어 주님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이 변화되어 그 영광스러운 모습을 직접 보게 됨으로 우리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존재인가를 확실히 보게 된다는 것이다.

 

장래일이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은 그렇게 영광스럽게 변화되어 거룩하신 영광에 참여하는 것은 기정사실이나 구체적으로 언제 어떻게 주님이 재림하시고, 어떤 모습으로 어떤 환경 속에서 살아가게 될지는 확연하게 우리에게 보여 주시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우리는 주님과 같이 영광스럽게 변화되어 그 영광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능력과 지혜와 권세가 주님과 똑같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신령하고 영화로운 몸을 덧입어 주님처럼 거룩하고 영화롭고 선하고 의로운 모습으로, 죽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고 그 어떤 어둠의 그림자도 없는 빛과 같은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엄청나지 않습니까? 세상에서 무슨 권세와 능력과 지혜가 이런 특권을 주겠습니까? 우리가 감히 주님과 같이 된다는 것이 어마어마한 특권이요, 주님처럼 되기 때문에 주님 안에 있는 그 온전하고 영원하고 영화로운 은총들을 충만하게 받아 누리며 살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 엄청난 사실을 기억하며 기뻐하며 감사하며 찬양하며 영광과 존귀를 돌려드리며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엄청나게 귀하고 복되고 영광스러운 삶을 살 수 있는 특권을 가진 만큼 거기에 어울리는 삶 또한 있어야 합니다.

 

오늘 3~6절의 말씀이 그 말씀인데요, 한번 같이 보겠습니다.“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라는 것은 장차 주님과 같이 되어 영광스러운 주님 앞에서 서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영원한 영광을 누릴 소망이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자녀는 이 소망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세상에서도 물론 어느 정도 소망거리가 있긴 하지만 그건 별거 아니니까 다른 어떤 것보다 주님을 향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정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는 것이지요.

 

그러면 이런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깨끗하게 살아야 한다.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죄는 불법, 즉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이므로 결코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 질 수 없다. 그래서 주님 안에 거하는 자는 범죄하지 않고, 만약 범죄한다면 하나님을 모르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가지고 있어야 가장 중요하고 가장 기본적인 덕목은 무엇입니까? 물론 겸손 사랑 자비 긍휼 용서 의 선 지혜 등 많은 것을 말할 수 있겠죠.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거룩입니다. 물론 거룩이란 하나님께 속한 것, 하나님께 받쳐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세상에서 구별되고 분리되어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구별되고 분리되었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오직 하나님의 뜻과 방법과 방향과 목적에 부합된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와 무지 속에 있는 인생은 그런 삶을 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세상의 왜곡되고 혼돈된 가치관과 목적과 방향을 버리고, 그래서 세상과 구별되어 하나님의 목적을 향하여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한 삶의 의미이고 그러면 세상에서 모든 욕심 욕망 미움 저주 시기 질투 불법 악 폭력을 버리고 그야말로 거룩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지요.

 

오늘 날 우리가 힘이 없고,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도리어 비난을 받는 이유는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돈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를 크게 짓고 시스템을 멋지게 하고 재미있게 유쾌하게 편안하게 해 준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봉사하고 선을 행해도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하면 교회는 결코 신뢰성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가 봉사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교회가 존재해야 할 목적을 그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봉사하고 섬기는 것에 대하여 뭐 그렇게 칭찬하지 않습니다. 해야할 일을 하는 것 뿐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거룩하게 진실하게 깨끗하게 아름답게 살아가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우선 자신의 심령속에 먼저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마음껏 누리게 되고, 동시에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게 됩니다. 그래서 인정받고 신뢰받게 되고 그러면 복음의 역사도 저절로 일어납니다. 그러면 주님 앞에서 섰을 때 큰 상급도 받아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놀랍고 귀한 특권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자로써 한편으로는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고 동시에 거룩하고 깨끗하고 진실하고 아름다운 삶의 모습으로 주님의 향기를 발함으로 먼저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를 마음껏 누리고,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며 주님과 동행하다가 주님 앞에 섰을 때 큰 상급도 받아 누릴 수 있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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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예수님 안에 있는 진정한 자유

 

말씀 : 2:19~21

 

1.진리 안에서의 갈등

 

 

여러분,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때때로 마음이 무겁고 갈등과 고민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초신자들은 공연히 교회에 나와서 마음이 편치 않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차라리 아예 하나님도 모르고 말씀도 듣지 않았더라면 부담없이 내 마음대로 내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텐데 공연히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 말씀 듣고 보니까 부담만 되고, 걱정이 되고, 갈등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일을 잘 하지 못하는 것도 부담이 되고, 이웃을 섬기지 못해서 마음이 무겁고, 때로는 주일날도 가족들하고 어디 나들이나 다녀오고 싶은데 그것도 맘대로 못하고, 헌금생활 제대로 못하는 것도 마음이 무겁고 그렇다고 또 하자니 돈이 아깝고 그래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갈등과 고민이 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만약 여러분에게 이런 고민과 갈등이 있다면 그것은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현상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혼의 감각이 살아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런 고민과 갈등이 없다면 그 영혼은 완전히 죽어서 감각이 없는 영혼인 것입니다. 영혼이 죽은 사람은 죄와 무지 가운데 있는 육신이 시키는대로 살아가면 됩니다.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놀고 싶으면 놀고, 아무거나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등도 고민도 없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도덕적 감각이 완전히 죽어 있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도적질을 하고도 오늘 한건 했다며 먹고 마시고 즐깁니다. 사기꾼들은 사기 쳐서 돈을 빼앗고는 기분이 좋아서 낄낄 거립니다. 마약에 취한 사람은 죽어가는 줄도 모르고 좋다고 희희낙락합니다. 술에 취하면 죄를 짓는데 용감해 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도덕성이 마비되어서 그런 것입니다. 양심이 죽어서 감각이 없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때리고 차고 꼬집고 별짓을 다해도 아픈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영혼이 죽은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고 죄짓고 제멋대로 살아가면서도 고민이 없습니다. 희희낙락합니다. 제 마음대로 살아가면서 나는 자유하다, 평안하다며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살아있는 것은 아픔이 있습니다. 양심이 살아있는 사람은 죄를 지으면 아픕니다. 조그마한 죄에도 통증을 느낍니다. 그러나 죽은 것은 아픔이 없습니다. 죄를 짓고도 뻔뻔합니다. 그래서 영혼과 정신이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는 갈등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그저 육의 욕구를 따라 살면 되었지만 예수님 믿고 영혼이 살아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한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직도 옛 자아가 남아서 자꾸만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도록 충동질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주인이었기 때문에 내 맘대로 살면서 아무 갈등과 고민 없이 마음대로 살았지만 이제는 새주인이신 예수님을 모셔들이고 예수님이 이끄시는대로 살아가려고 하는데 아직까지도 내가 주인 노릇하던 그 행세가 남아 있어서 자꾸만 육의 욕망을 따라 가려고 할 때가 많기 때문에 우리 안에서 계속해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진리 때문에 겪는 고민과 갈등이 있다면 그것은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영혼이 살아나고 있다는 증거요, 진리에 대한 갈증이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갈등과 고민이 우리를 더욱 하나님 앞에 세움으로 성화의 길을 가게 하고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좀 더 풍성하게 누리게 하는 긍정적인 에너지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후7:10절에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하였지만 그 죄인중에 괴수라는 인식이 자신을 더욱 하나님 앞에 가까이 세우게 함으로써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역사를 이루었던 신앙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신앙생활하면서 진리 때문에 겪는 갈등과 고민이 있을 때, 내가 정말 너무 부족하고 미련하고 죄많은 인생이라고 생각될 때, 하나님께 너무 죄송스럽고 마음에 부담이 되고 갈등이 생길 때 너무 낙심하고 탄식하고 자책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책하고 탄식하고 낙심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를 더 주저앉힐 뿐입니다. 힘을 빼놓고 무기력하게 만들 뿐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방법은 하납니다. 주님 앞에 엎드려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그러한 연약함과 부족함을 인정하고 그래서 갈등과 고민이 있을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주님 앞에 엎드려 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좋으신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께서 힘주시고 은혜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점점 성화되어가고 그러면 점차 그런 갈등과 고민도 최소화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고민과 갈등보다는 성령께서 주시는 자유와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훨씬 크기 때문에 감사와 기쁨과 은혜와 평안과 소망과 참 자유가운데 할렐루야 찬양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하면 좀 더 성화되어 주님과의 갈등을 최소화시켜 주님의 은혜들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을까요?

 

2.속사람을 강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갈등과 고민을 이기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우리를 그렇게 고민과 갈등과 죄속으로 몰아가는 옛자아를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옛자아를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나님께서 주시는 속사람을 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자아보다 새 자아가 힘이 훨씬 세면 우리는 옛자아에게 질질 끌려다니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자아보다 옛자아가 힘이 세면 옛자아에게 질질 끌려다니니까 우리의 삶이 엉망이 되는 것입니다.

 

한 인디언 노인이 손자에게 말했었습니다. “얘야, 사람의 마음속에는 늘 두 마리의 늑대가 싸우고 있단다. 한 마리는 악마 같은 놈으로 늘 거짓과 미움과 도적질과 향락과 음란과 분노와 질투와 탐욕과 교만 등의 악한 모습으로 나타나 우리를 나쁜 길로 내몰려고 하고, 다른 한 마리는 착한 늑대로써 믿음과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희망과 친절과 선함과 겸손과 진실과 용서 쪽으로 우리를 끌고 가려고 하지.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이와 같이 나쁜 늑대와 좋은 늑대가 들어 있어서 끊임없이 싸우고 있단다.”

 

그러자 손자가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그러면 좋은 늑대와 나쁜 늑대가 싸우면 누가 이기나요?” 그러자 할아버지가 말했습니다. “그야 사람이 먹이를 주는 늑대가 이기지!” 그러니까 나쁜 늑대에게 먹이를 주면 나쁜 늑대가 힘이 세져서 이기고, 좋은 늑대에게 먹이를 주면 좋은 늑대가 힘을 얻어서 나쁜 늑대를 굴복시킨다는 것이지요. 힘이 센 놈이 이기는 것은 당연한 거지요.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 믿고 예수님을 새 주인으로 모셔들이더라도 지금까지 우리를 완전히 지배해왔던 이 나쁜 늑대인 옛자아가 완전히 물러가지 않아서 자꾸만 새자아에게 도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나쁜 늑대인 옛자아를 물리쳐야 하는 것입니다. 이 나쁜 옛자아를 이기려면 새자아를 강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엡3:16절에서는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속 사람을 강건케 하라. 그래야 너희가 세상의 모든 죄와 유혹과 왜곡된 사상들을 이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나쁜 늑대의 힘을 약하게 만들고, 좋은 늑대를 힘이 강하게 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육체를 강건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육신에 필요한 영양분을 듬뿍 공급하고 열심히 운동을 하면 됩니다.

 

영혼의 강건함도 동일합니다. 영적인 좋은 양식을 충분히 섭취하고 영적으로 열심히 훈련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나쁜 늑대인 옛 자아에게는 먹이를 주지 말고, 좋은 늑대에게만 먹이를 주고 그 좋은 늑대가 열심히 움직이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쁜 늑대는 점점 힘을 못쓰게 되고, 완전히 먹이를 끊어 버리면 굶어 죽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좋은 늑대인 새자아에게는 영양가 있는 풍성한 양식을 충분하게 공급해 주면 살이찌고 생명력이 풍성해지고 힘이 세지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양식만 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영양가 있는 양식을 듬뿍주고 열심히 운동을 시켜야 근육이 튼튼해져 힘이 세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새자아에게 영양가 있는 음식을 듬뿍 공급하고 열심히 운동을 시키면 힘이 세져 바짝 말라서 힘없는 옛자아 따위는 단숨에 때려 눕힐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쁜 늑대에게 주는 먹이는 무엇이고, 좋은 늑대에게 주는 먹이는 무엇입니까? 물론 영적, 정신적 양식입니다. 나쁜 늑대에게 주는 먹이는 이런 것들입니다. 맨날 싸우고 죽이고 빼앗는 폭력적인 오락을 즐기거나 그런 폭력적이고 음란한 영화를 보고, 술집이나 도박장을 기웃거리고, 거짓되고 속되고 우상숭배와 저속하고 더러운 말을 일삼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 등이 모두 못된 늑대가 좋아하는 먹이인 것입니다.

 

반대로 책을 읽어도 건전한 교양도서를 읽고, 아름다운 사랑과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줄수 있는 영화를 보고, 믿음의 사람들, 선한 사람들, 진실한 사람들을 가까이 하는 것은 좋은 늑대에게 먹이를 주는 것입니다. 물론 가장 확실한 영혼의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 은혜의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는 것은 우리 영혼을 살리는 확실한 양식입니다. 기도하며 찬양하며 믿음 안에서 아름답게 교제하는 것도 우리 영혼을 살찌게 하고 아름답게 하고 생명력이 넘치게 하는 귀한 양식인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교회를 섬기고 이웃을 섬기고 전도를 하고 이웃을 돕고 선을 행하는 것은 좋은 늑대를 열심히 운동을 시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의 양식을 먹고, 세상에서도 아름답고 선한 것들을 가까이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에 참여하며 선을 행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 바로 좋은 늑대에 양식을 풍성하게 공급하고 열심히 운동을 시키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은 100% 확실하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자아가 옛자아를 이겨 거룩하고 아름답고 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꾸만 옛자아에게 먹이를 주고 새자아는 거의 굶다시피 한다면 보나마나 옛자아가 새자아보다 힘이 세니까 옛자아에게 져서 질질 끌려다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6:55절에서는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양식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생수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우리 심령에 모셔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을 끊임없이 묵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걸 잘 안하니까 영양실조에 걸려 새자아가 맥을 못추는 것입니다. 자꾸만 세상의 헛된 양식만을 사모하며 그것만을 쫓아다니니까 옛자아는 기세등등하고, 새자아는 빈약하기 짝이 없어 옛자아 앞에서 기도 못펴고 초라한 모습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시편1:1-3절에서는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양식을 잡수시기 바랍니다. 억지로라도 잡수시기 바랍니다. 살기 위해서 잡수시기 바랍니다. 밥맛이 없을 때 살기 위해서라도, 힘을 내기 위해서라도 억지로 먹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억지로라도 먹고 영적인 운동을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몸을 안 움직이면 몸이 자꾸 약해집니다. 아예 안 움직이면 온 몸이 굳어서 꼼짝도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움직이기 싫어도 자꾸 움직여야 합니다. 운동하기 힘들고 귀찮아도 자꾸 운동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몸이 힘을 쓰는 것입니다.

 

새 자아도 그렇습니다. 억지로라도 먹어야 합니다. 귀찮아도 먹어야 합니다. 힘들어도 영적인 활동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새자아가 강해집니다. 힘이 세집니다. 그래서 옛자아를 이깁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양식, 생명의 양식을 열심히 먹고, 열심히 영적인 활동을 함으로 말미암아 여러분 속에 있는 새 자아, 영혼, 좋은 늑대가 토실토실 살이찌고 강건해지고 생명력이 넘침으로 끊임없이 우리에게 도전해오는 옛자아를 단숨에 눕혀 버리고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예수님을 완전한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속사람을 강건케하여 옛자아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듣고 선하고 좋고 아름다운 것을 보고,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에 열심히 참여해야 하는데 그러면 우리 가운데 나타나는 변화가 무엇입니까? 바로 그런 과정에서 예수님이 내안에 온전히 들어오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그런 지혜와 능력과 은혜를 달라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세울 때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드디어 예수님이 완전히 우리 가운데 들어오시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내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시고, 볼 수 있는 눈을 주시고,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시고, 믿음을 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은혜를 주셔서 진리가운데 살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옛자아란 놈이 감히 준동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악바리 같은 옛자아가 대들긴 하겠지만 그러나 한방에 K.O. 시켜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옛자아가 우리 가운데 온갖 유혹과 정욕과 탐심을 불러 일으켜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하고 협박도 하지만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셔서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시면 옛자아는 이빨도 빠지고 발톱도 빠지고 힘도 다 빠져버린 호랑이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빨도 발톱고 힘도 다 빠져 버린 호랑이는 무늬만 호랑이지 실상은 호랑이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이런 나쁜 늑대, 나쁜 호랑이에게 끌려다니지 않고 그런 것들을 물리쳐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런 삶을 살았기에 승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주님을 온전히 그의 심령속에 모셔 들여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의식을 가지고 살았을 때에 모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과 도전과 유혹과 핍박과 환난과 고난을 이기고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0절에서 그는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나는 죽었다.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 내가 이 육신을 가지고 살아있는 것은 오직 믿음 안에서 즉 믿음을 따라서, 말씀을 따라서,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산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인이 되셔서 완전히 그를 사로 잡았기 때문에 주인이신 주님만을 위해서 살 수 밖에 없는 인생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에게는 옛자아가 더 이상 준동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모든 역경속에서도 주님의 은혜가 내게 족하다고 하면서 항상 기뻐하며 감사하며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에게 신앙적 갈등과 고민이 있습니까? 마음이 무거울 때가 있습니까? 희망적 징조입니다. 무언가 영혼이 살아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그렇다고 거기에 안주하지도 마십시오. 주님 앞에 엎드리십시오. 조금 더 힘을 내어 여러분의 거듭난 자아에게 양식을 듬뿍 공급하십시오. 영적인 활동을 조금 더 활발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예수님이 여러분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힘 주시고 은혜 주시고 능력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새자아가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생명력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새자아가 옛자아를 확실히 제압하고 예수님 안에 있는 진정한 자유와 기쁨과 평안과 은혜를 온전히 누리는 복된 삶이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삶이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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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첫주일 오후찬양예배설교 September Sunday night worship


제목 : 본이 되는 믿음

말씀 : 살전1:2-8

1.감사가 나오는 교회

여러분, 데살로니가교회는 정말 아름답고 복되고 바람직한 교회였다. 얼마나 복된 교회인지 그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감사가 나오는 교회였다. 오늘 2절을 보라.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여러분, 보십시오. 이 교회를 생각 할 때에 항상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였다. 물론 교회가 세워진 것이 감사요. 그곳에 성도들이 있다는 그 자체가 감사이다. 그런데 데살로니가교회는 단순히 그런 이유로 감사한 것이 아니라 생각할 때에 특별히 더 감사가 나오는 교회였다. 그 이유가 뒤에 쭉 나오는데 3절에서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있는 교회라고 하였고, 6절에서는 많은 환난 속에서도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주를 본받은 교회라고 말씀하고 있고, 7절에서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는 교회라고 하였으며, 8절에서는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진 교회라고 하였다.

여러분, 얼마나 복된 모습인가?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있는 교회, 많은 환난 속에서도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주를 본받은 교회, 그래서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는 교회, 그래서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진 교회. 정말 부럽기도 하고 너무나 감사하고 복된 교회 아닌가?

여러분, 우리도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부모에게 감사와 기쁨을 주는 자녀, 부부간에 서로 감사와 기쁨을 주는 부부, 주님께 기쁨을 주는 성도, 성도와 성도 간에 서로 감사과 기쁨이 되는 성도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반대로 가정이나 학교나 교회나 마을이나 국가에서 근심 걱정거리가 된다며 근심 걱정하게 만든 본인이나 근심 걱정하는 사람이나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가?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어찌 하든지 주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받고 주님을 본받아 삶으로 먼저 자신이 행복하고 주님과 가족과 이웃과 교회에 기쁨과 감사가 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바란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감사거리가 된 이유는?

2.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은 교회.

오늘 6절을 보자.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여기에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가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 인내 가운데 든든히 서 있어서 생각할 때마다 감사가 나오는 교회가 될 수 있었던 이유가 잘 나타나 있다.

그게 뭐냐?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았다는 것은 말씀 그대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로서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그것도 평안하고 형통하고 좋은 시절이 아니라 많은 환난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다시 말해 비록 상황은 많이 어려웠지만 그 환경과 상황과 처지나 혹은 세상의 가치관이나 자신의 욕망이나 지식이나 경험이나 생각에 좌지우지 되지 않고 오직 성령의 감동감화하심을 따라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고 그대로 감사함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여러분, 이게 중요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상황과 환경이나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여 말씀그대로 감사와 기쁨으로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오직 유일한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 은혜의 말씀, 축복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 안에 생명과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따라가는 자에게는 반드시 주님의 놀라운 은총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언제 어떤 상황이라도 오직 유일한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 은혜의 말씀, 축복의 말씀인 주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갈 때에 주님의 놀라우신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바란다.

3.주님과 사도를 본받은 교회.

앞에서 보았던 6절을 보면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다.’고 말씀한다. 여러분, 당연하지 않은가? 하나님의 말씀을 아멘으로 받았으니 그 말씀을 주신 주님을 본받는 것도 당연하고, 또 우리보다 먼저 주님을 본받아 살던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을 본받는 것도 당연하지 않느냐는 말씀이다.

다시 말씀드리면 세상적으로 똑똑하고 잘나고 대단한 사람들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혹은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인류의 유일한 참 빛이시며 생명이시며 진리이신 주님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직 겸손하고 진실하고 성실하게 주님을 본받아 살아가는 분들을 가까이 하며 그런 분들의 삶의 모습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하잖은가? 거기 생명과 은혜와 소망과 축복이 있는데 왜 엉뚱하게 다른 것을 따라 살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안타깝게 자꾸 세상을 따라가려고 한다. 세상에서 잘나고 똑똑하고 많은 것을 누리는 사람들을 본받으려고 한다. 또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본받아 살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탄의 장난이다. 속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우리 모두가 망하는 길로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기쁨으로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시기기 바란다. 세상 사람들을 본받지 말고 오직 주님을 본받으며,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본받으며 주님과 동행할 때에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의 은총을 누리며 믿음의 아름다운 모습을 세상 속에 보여주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바란다.

4.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있는 교회

살전1: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여러분,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와 같이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고, 주님과 성도들을 본받았을 때 결국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운데 든든히 서는 교회가 되었다. 이것도 당연하잖은가? 말씀 위에 서서 주님을 본받으며 살아가는데 어찌 믿음 소망 사랑 가운데 든든히 서지 않겠는가?

그러면 믿음의 역사가 무엇인가? 역사는 일, 행위라는 뜻으로 한마디로 믿음을 따라 살아가는 것. 그래서 뭔가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 사랑의 수고란 말그대로 사랑과 기쁨과 은혜로 주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겼다는 것. 소망의 인내란 힘들고 어려워도 소망으로 인내하며 믿음을 지켰다는 뜻이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 주님을 믿는다면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주님을 믿으니까, 그 안에 생명과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과 영광이 있으니까요. 그렇게 그 믿음을 따라 살아가면 분명히 주님의 능력과 지혜와 은혜로서 복음의 역사도 일어나고 평안과 기쁨와 소망 속에 생명력 넘치는 삶을 살게 되니까.

사랑의 수고도 당연하다. 사랑한다면 수고가 있게 마련이지요.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녀를 위한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것처럼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면 마땅히 사랑의 수고가 있어야 하고, 그럴 때 주님도 나도 사랑을 받는 대상도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고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그 역사도 이루어가는 것이다.

물론 소망의 인내도 동일하다. 여러분, 데살로니가 교회는 만사형통해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환난과 핍박이 있었다. 그러나 주님께 대한 소망,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대한 소망 때문에 그것을 넉넉히 이기고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를 이루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좀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주님께 대한 믿음과 주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우리에게 주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믿음을 지키고, 사랑으로 주님과 교회와 성도를 서로 섬기며 주님과 동행할 때에 주님의 은혜와 능력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며 맛보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5.믿는 자의 본이 된 교회

여러분, 데살로니가 교회는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고 예수님을 본받고 사도들을 본받을 어떻게 되었는가? 7절을 보자.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그러니까 그들이 그렇게 기쁨으로 말씀을 받고 주님을 본받고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을 본받았을 때 그들 자신도 다른 사람들이 본받을 만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당연하지 않는가?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따라가느냐에 따라 우리의 모습이 결정되지 않겠는가? 주님을 바라보고,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들과 같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 결국 신실하고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변해 가지 않겠는가?

여러분, 우리도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믿는 자에게도 본을 보이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본을 보여야 한다. 교회 안에서도 서로 좋은 본을 보여야 한다. 특히 제직들 특히 중직들은 더욱 그래야 한다. 예배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 기도와 찬송의 본을 보여야 한다. 아름다운 말과 행실에 본을 보여야 한다. 그래서 성도들이 아 신앙생활을 저렇게 하는 거구나. 믿는 사람들은 저렇게 살아야하는구나 하는 마음을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반대로 장로도 그렇게 하던데, 권사도 이렇게 하던데, 집사도 그렇던데 하면서 나쁜 본을 보이면 안된다. 물론 본을 받는 사람들도 좋은 것을 본받아야지 나쁜 것을 보면서 저렇게 해도 되는구나 하면 안 되겠지만....

그리고 여러분, 우리는 특별히 믿지 않는 자들에게 더 좋은 본을 보여야 한다. 우리는 거룩한 백성이니까요. 너무나 영광스럽고 거룩하시고 사랑과 선과 의와 진실만이 충만하신 하나님의 자녀이니까요. 그러므로 어찌하든지 거룩하고 진실하고 의롭고 선하고 겸손하고 온유하고 깨끗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그런 거룩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빛나게 해야 한다. 마5:16절을 보십시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그러므로 우리 모두 예수님을 본받아 거룩하고 진실하고 선하고 의롭게 살아감으로 우리 자신이 주님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고 나아가 믿는 사람들에게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 좋은 본이 되어 저들도 주님 품으로 온전히 인도하여 주님의 은총을 누리게 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6.믿음의 소문이 퍼진 교회

여러분, 물론 당연한 일이지만 데살로니가 교회는 주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나아가서 그들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본이 되자 믿음의 아름다운 소문을 퍼트리는 멋진 교회가 되었다.

여러분, 소문이 중요하다. 때로는 헛소문이 많아서 소문을 잘 분별해서 들어야 하지만 그러나 좋은 소문은 정말 큰 힘을 가지고 있다. 음식점이 아무리 대대적인 홍보를 해도 맛이 없고 청결하지 못하다는 소문이 나면 얼마 못가서 문 닫아야 한다. 그러나 청결하고 맛이 있다는 소문나면 그야말로 대박이 된다.

교회도 좋은 소문이 나야한다. 사랑의 소문이 나야 한다. 교회는 정직하고 깨끗하고 거룩하다는 소문이 나야 한다. 화목하고 아름다운 소문이 나야 한다. 교회에 다니면 새 사람이 된다는 소문도 나야 한다. 교회에 다니면 행복하고 감사하고 기쁨이 온다는 소문도 나야 한다. 그런데 교회가 싸우고 헐뜯고 미워한다더라. 교회에 다녀봤자 별거 없다더라. 교인들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싸우고 거짓말하고 속이고 한다더라. 이런 소문이 나면 교회 꼴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런데 한국교회가 이렇게 믿음의 아름다운 소문이 퍼트리지 못하고 도리어 좋지 않는 소문을 퍼트릴 때가 많다. 물론 경우에 따라선 억울한 소리를 들을 때도 많은 것은 사실이긴 하지만 그러나 교회가 부족해서 그런 일도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더욱 겸손히 주님 앞에 엎드려 오직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아멘으로 받자. 오직 주님과 거룩한 성도들을 본받자. 그래서 세상에 본이 되어 빛을 비추. 믿음의 아름다운 소문을 퍼트리는 성도와 교회가 되자. 그리하여 이번 가을에는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성령의 열매를 많이 맺어 기쁨으로 충만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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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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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첫째주일낮예배설교 / 믿음과 순종과 축복 (September,Sunday Sermon)


말씀 : 창22:9~14

제목 : 믿음과 순종과 축복

1.믿음과 순종과 축복

믿음이 있는 곳에 순종이 있고, 순종이 있는 곳에 축복이 있다. 여러분, 맞는 말입니까? 예, 맞는 말입니다. 안 그래요? 믿음이 있으면 순종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지요. 있고말고요. 아니 믿는데 순종이 없을 수 있습니까? 안 그래요? 좋으신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을 믿는데 어찌 순종이 없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또 순종이 있는 곳에 축복이 있다. 이것도 마찬가지잖아요. 순종하는 복이 안 오면 그게 이상한 거지요. 능력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축복의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데 어찌 복이 없겠습니까? 여러분, 신28:2절 보세요.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잖아요. 그러면서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하시면서 오만가지 복을 다 주실 것을 말씀하고 있잖아요. 여러분, 하나님이 뭐 허튼소리 하시는 분이 아니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진실로 믿음으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았던 사람들은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 물론 지금 여기서고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오늘 말씀에 나오는 아브라함인데요, 오늘 말씀은 여러분이 너무 많이 들어서 식상하실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어떻습니까? 귀가 따갑도록 들었는데 잘 됩니까? 잘 안되지요. 왜요? 귀가 따갑도록 들었지만 실상은 그래봤자 얼마나 안 되기 때문입니다. 안 그래요? 이 이야기 들어봤자 몇 번 들었습니까? 한 백번 들었을까요? 그런데 세상에서 정치이야기, 경제이야기, 먹고 마시고 놀고 즐기며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는 몇 번 쯤 들었을까요? 한 천 번 들었을까요? 만 번도 더 들었을걸요. 그러니까 믿음 안에서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이야기는 아무리 많이 해도 세상에서 먹고 입고 잠자고 놀고 하는 이야기의 백분의 일, 천분의 일도 못 듣고 못 보는 거예요. 그러니 잘 안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하지요. 그러면 안 되는 게 당연하다고 가만히 있을 겁니까? 아니죠. 그러므로 더욱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일에 힘써야 하지요. 그래야 조금이라도 기독교적 가치관이 확립되고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그래야 조금이라도 하늘의 신령한 은혜와 땅의 기름진 축복을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인간적으로는 말도 안되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아브라함의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다 읽어드리지 못했지만 2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삼아 각을 뜨고, 불에 태워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말이 됩니까? 인신제사는 우상숭배자들이 하는 악습으로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일입니다. 게다가 이삭은 하나님께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시고 무려 25년 만에 달랑 하나 주신 약속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장차 큰 민족을 이루고 주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삭을 잡아 불에 태워 번제물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게 말이나 되느냐 말입니다.

아마도 아브라함도 처음에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게 정말 하나님의 말씀일까? 이삭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자녀가 아닌가? 그것도 아이를 도저히 낳을 수 없는 100세나 되어서 기적적으로 주신 아들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큰 민족을 이루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았는가? 큰 민족을 이루려면 오히려 더 많은 자식을 주셔야 하는데 겨우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불에 태워 인신제사로 드리라니 내가 늙어서 헛소리를 들었나? 망령이라도 들었나?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아브라함은 인간적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고 말도 안되는 명령에 순종합니다. 왜요? 그게 하나님의 명령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선하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기에는 분명 말도 안되지만 분명 뭔가 하나님의 섭리와 뜻과 계획이 있을 것을 믿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우리의 이성으로 다 수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섭리는 언제나 우리 보다 높고 깊어서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이성과 경험과 능력을 초월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성적으로 이해가 됩니까? 예수께서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다. 경험적으로 납득이 갑니까? 저 영원한 천국, 이것이 인간의 논리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착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이성적으로 믿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모든 이성과 과학과 논리를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니 그런 것들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이해가 되든 말든 납득이 되든 말든 순종할 것 뿐입니다. 아브라함이 만약 조금이라도 이성이나 논리를 가지고 생각했더라면 절대로 이삭을 바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인신제사를 드리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그런 명령을 내리실 수 있습니까? 어떻게 내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땅의 티끌과 같이 많게 해주시겠다고 해놓고 25년 만에 겨우 아들 하나 주어놓고 그걸 도로 달라고 하십니까? 하면서 따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자신의 모든 생각들을 다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과 선하심과 인도하심을 믿고 순종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취해야 할 태도인 것입니다. 이해가 가든 안가든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죄와 무지를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높으심과 인도하심과 선하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언제나 내 뜻과 이성과 경험과 논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고 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잠3:5,6절에서는 말씀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이해가 되든 말든, 세상의 가치와 같든 다르든, 내 경험과 맞든 안 맞든, 손해가 되든 유익이 되든, 내 생각과 관계없이 인정하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의 태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내 모든 생각과 경험과 환경을 떠나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오직 온전한 길이며 진리며 생명이신 예수님의 뜻에 온전히 순복하십시오. 그저 갓난아이와 같이 주님의 말씀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십시오. 그때에 분명 주님 안에 있는 은혜의 풍성함이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2.온전한 순종

여러분,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었지만 말씀에 순종합니다. 창22:3,4절 보세요.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여러분, 이 말씀을 보십시오. 그는 아침 일찍 떠났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솔직히 무언가 하나님의 섭리가 있을 것임을 믿었지만 밤새도록 얼마나 고민을 했겠습니까?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아들을 잡아서 번제로 드리라는데 그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날이 밝자마다 곧장 시행에 들어간 것입니다. 아내 사라에게 말도 없이 떠났습니다. 아내에게 말했다가 보나마나 이 양반이 나이가 들더니 드디어 망령이 들었냐고 하면서 핀잔만 들을 것이 뻔했기 때문에 아내에게 말도 하지 않고 떠난 것입니다. 그리고 솔직히 자신도 시간을 지체하다간 아들을 번제로 드릴 자신이 없었기에 마음 변하기 전에, 마귀가 틈타기 전에 떠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즉시 시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시행하고 그 뜻대로 살아가는 일을 뒤로 미루면 안됩니다. 어떤 사람은 계속 나중에 나중에 그럽니다. 이것만 해 놓고, 저것만 해결하고...... 나중에 생활이 안정되면, 나중에 시간 나면, 나중에 할 일 없어지면... 그러나 여러분, 지금 못하는 사람이 나중에 여유 생기면 할 수 있을 것 같죠? 그런 사람은 99%는 여유생기면 놀러 다닙니다. 여유돈 있으면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즐기는데 쓰게 됩니다. 설령 나중에 한다 해도 지금 못한 것은 죽을 때까지 아니 천국에 가서 까지 못한 것으로 계속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마귀가 장난칩니다. 마음이 변하기 쉽습니다. 방해꾼이 생기기 쉽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길을 떠나 사흘 동안 걸어 하나님이 지시하는 곳으로 걸어갑니다. 여러분, 그 사흘길을 걸어오는 동안 아브라함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아무리 하나님의 무슨 뜻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고, 그래서 길을 떠나오긴 했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외아들을 자기 손으로 잡아 불에 태워서 번제로 드려야 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 마음이 과연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마음을 다잡으며 발걸음은 재촉합니다. 이삭을 잡아 번제로 드릴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천갈래 만갈래 찢어지는 듯 아팠지만 그는 묵묵히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께서 지시한 산 밑에 이르러 종들을 거기 머물라고 하면서 번제에 쓸 나무를 아들의 등에 지우고, 자기는 칼과 불을 들고 산을 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때 이삭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번제를 드리려면 제물이 있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제물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아버지, 나무와 불은 있는데 제물은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이 말을 듣는 순간 아브라함의 마음이 얼마나 뜨끔했겠습니까? 차마 ‘네가 바로 번제물이다. 하나님께서는 너를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단다. 나도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지만 하나님께서 너를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단다. 그러니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구나.’ 차마 이렇게 말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비해 주실 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묵묵히 산에 올라 드디어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에 도착하게 되고, 아브라함은 번제를 드릴 준비를 합니다. 장작을 쌓아 올렸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제물을 잡아서 각을 떠서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태워야 할 차례였습니다. 그 번제물은 다름 아닌 사랑하는 아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떨리는 목소리로 아들에게 말합니다. ‘아들아, 하나님께서 너를 번제로 드리라는구나. 내가 너를 대신해서 번제가 될 수만 있다면, 내가 너를 대신해서 죽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니? 그러나 내가 아닌 너를 요구하시는구나. 그러나 사랑하는 아들아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있을 거야. 그러니 순종해야지.’ 하면서 아들을 결박합니다. 그 운명의 순간에 하늘이 무너지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과 아픔이 몰려 왔습니다. 그러나 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떨리는 손으로 아들을 붙잡아 결박하고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죽이려고 눈을 감고 칼을 높이 들어 올렸습니다.

여러분, 그 상황을 상상해 보십시오. 아들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결박하는 아버지의 심정. 아들을 장작더미위에 올려 놓고 칼을 높이 들어 올린 아버지의 심정, 정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 이삭, 그것도 하나 밖에 없었던 아들 이삭,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해서 결박 당할수만 있다면.... 내가 너를 대신하여 번제물이 될 수만 있다면...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해서 죽을 수만 있다면...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해서 불 태워 질수만 있다면.... 이런 마음으로 이삭 대신 자신이 번제물이 되고 싶었지만 하나님이 요구하는 건 자신이 아니라 이삭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무슨 선한 뜻이 있을 것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이니 거역할 수 없었기에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속에서 도저히 눈뜨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눈을 감고 아들을 향해 칼을 내리치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게 순종입니다. 내 생각과 달라도, 도저히 이해가 안가도, 있을 수 없는 일을 시켜도 그냥 따르는 것이 순종입니다. 아무리 내 생명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것이라도 하나님이 필요로 하신다면 그냥 드리는 것이 순종입니다. 이것이 믿음이고 이것이 순종입니다. 그래서 순종하는 자에게 주님의 은총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게 믿음이고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정이며 하나님께 대한 신뢰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믿습니까? 주님의 선하심을 믿습니까? 구원자이심을 믿습니까?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상황이 이래요. 형편이 이래요. 저래요. 이래서 곤란해요. 저래서 곤란해요. 그럼 내가 손해봐요. 웃음거리 돼요. 주일날 하루 쉬면 손해가 얼만지 아세요? 아니 이 귀한 걸 달라고요? 그럼 난 어떻게 살라고요? 여러분, 이런 거 다 버리세요. 그냥 믿고 따르세요. 순종하세요. 그게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의 사람에게 주님의 한량없는 은총이 임합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순종하는 자에게 임할 복

여러분, 그렇습니다. 순종이 곧 온전한 믿음이기에 순종하는 자에게 주님의 놀라우신 은총이 임합니다.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내리치려고 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창22:11,12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이삭을 바치라고 하시던 하나님께서 도리어 다급하게 아브라함을 제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너 정말로 이삭을 잡으려는 것이냐? 내가 정말 이삭을 죽여서 번제로 받기를 원하는지 아니냐? 아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네 믿음을 보고 싶었단다. 이제 충분하다. 그 믿음이면 충분하다. 너는 정녕 믿음의 조상이 될 만한 자격이 있다. 그러니 이삭을 풀어주고 내가 너를 위해 준비한 양으로 번제를 드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아들을 풀어주고 옆에 뿔이 나무에 걸려 꼼짝 못하고 있는 양을 가져다가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삭이 아닌 양으로 제사를 모두 마쳤을 때 다시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창22:16,1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요구했던 것은 이삭이 아니라 믿음이었습니다. 순종이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독자 이삭을 빼앗아가려고 했겠습니까? 왜 말도 안되는 인신제사를 드리라고 했겠습니까? 그게 아니라 믿음과 순종을 요구하셨고 그 믿음과 순종이 있는 자에게 임할 하나님의 은총을 그렇게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순종하게 되고, 순종하는 자에게는 축복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순종이 곧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순종이 하나님께 대한 신뢰이기 때문입니다. 순종이 곧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신앙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순종이 하나님의 나의 주인이라는 종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종이 주인에게 따질 수 있습니까? 우매 자가 지혜 자에게 따질 수 있습니까?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왜 그래야 하느냐고 따질 수 있습니까? 죄인이 구세주에게 이러니저러니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믿음과 순종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요, 진정 주님만이 생명의 주님이시오, 구원자시오, 주권자라는 믿음이 있다면 순종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종이 곧 믿음이요, 그래서 순종하는 자에게 복이 임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러한 순종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때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아도, 현실적으로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워도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달라고 하셔도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결코 빼앗으려는 것이 아니라 주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온전히 주인으로 모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순종하실 때에 좋으신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께서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우리의 모든 생각 지식 경험 이성 가치관 나 내려놓고 순종하심으로 주님께서 채워 주시는 영육간의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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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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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추감사주일

 

제 목 : 행복한 인생

 

말 씀 : 103:1-5

 

1.너무나 큰 은혜 속에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개나 소나 짐승이지만 참 사람처럼 은혜를 잊지 않고 먼 길을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상주에는 의우총이라고 하는 소의 무덤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의우총이 세워진 유래는 이렇습니다.

 

상주시 사벌면 묵상리의 서상모라는 분이 암송아지 한 마리를 사다 기르게 되었는데 이웃에 사는 김보배라는 할머니가 이 소를 너무 예뻐해서 오고가며 늘 쓰다듬어 주고 배추나 고구마나 옥수수 등 먹을 것을 종종 갖다 주곤 했답니다. 그렇게 송아지때부터 어미소가 될 때까지 아니 그 후로 약10년간 그렇게 이 소를 사랑해주다가 87세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이 할머니의 장례를 마친 다음날 이 소가 없어져 동네 사람들이 나서 찾았는데 글쎄 이 소가 김보배 할머니의 무덤에 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할머니의 무덤은 외양간에서 2km 정도 떨어진 산 중에 있었는데 어떻게 찾아갔는지 거기에 가 있었고, 더 기가 막힌 것은 이 소가 할머니의 산소를 향해 고개를 푹 숙이고 계속 눈물을 흘리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머니의 아들이 이 소가 하도 기특하고 고마워서 막걸리와 두부와 배추 등을 접대하며 조문객으로 예우를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10년 후에 이 소가 19살의 나이로 늙어 죽었는데 마을사람들이 이 소를 극진한 예를 갖춰 장례를 치러 주었고, 상주시에서는 그 소를 기념하기 위하여 의로운 소의 무덤 의우총을 만들어 교육의 장으로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물론 약간은 과장이 되었을 수도 있지만 이 소를 통해 어떤 것을 생각하게 됩니까? 사실 이 소뿐만 아니라 우리는 은혜 갚은 동물 특히 은혜 갚은 개의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듣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동물도 이와같이 은혜를 알고 갚을 줄 아는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우리는 얼마나 더 해야 하겠느냐 그런 이야기입니다. 안 그래요? 만물의 영장인 우리가 동물만 못해서야 어떻게 체면이 서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면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물론 은혜를 안다면 은혜에 감사하며 보답할 줄 아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다 자기가 잘나서 자기 힘과 능력과 지혜로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여기지만 사실 우리는 은혜가 아니면 한시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일차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살고, 이차적으로는 사람의 은혜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일단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없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누리는 것 중에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기본적으로 생명은 어디서 왔습니까? 물론 부모님이 주셨지요. 그럼 그 부모님은 어디서부터 오셨습니까? 물론 조부모님이십니다. 그러면 그 분들은 어디서 오셨습니까? 끝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거기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진화론을 사실로 생각하는데 사실이 아니라 가설에 불과한 것입니다. 어찌해서 단세포 생명체가 생겨나더니 점점 진화해서 무슨 벌레 같은 것이 되고 좀더 진화해서 어류도 되고 파충류도 조류가 되고 그러다가 짐승이 되고 그 중 하나인 원숭이가 점점 진화해서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과학의 법칙에 의해서도 생명체는 결코 저절로 생겨날 수 없습니다. 설령 만에 하나 단세포 생명체가 생겼다해도 그 단세포 생명체가 이 신비하고 오묘하고 지혜롭고 영광스러운 사람까지 진화가 된다는 것은 과학적으로든 논리적으로든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안 그래요? 벌레의 어디에 인간의 이 신비하고 오묘하고 지혜롭고 영광스러운 유전자가 있기에 그게 사람까지 진화가 됩니까? 우주만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빅뱅론이니 뭐니 어쩌구하는데그것도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생명이든 자연이든 하나님의 창조가 아니면 그 어떤 방법으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이든 인간이든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모든 물질, 생명, 육체는 물론 이성, 지성, 감성, 능력, 지혜 모두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우리가 먹고 입고 마시고 숨쉬고 하는 것들이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생명과 지혜와 능력과 지성을 가지고, 하나님이 주신 삶의 터전에서,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태양과 공기와 물과 양식을 먹고 마시고 숨쉬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단 11초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대상29:14절 하반절을 보겠습니다.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모든 것이 주님이 주신 것임을 고백하며 기쁨으로 주님께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고 있는 은혜는 하나님의 은혜만이 아닙니다. 사람의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부모님의 은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부모님이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우리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셨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또 부모님만 아닙니다. 교회가 있기 때문에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알고 생명을 얻고 영생복락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매일 먹고 입고 잠자고 하는 것은 물론 자동차, 스마트폰, 텔레비전, 냉장고, 문화시설, 체육시설, 이 부요함, 평화, 자유, 질서 이 모든 것들에 이웃이 함께 했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우리가 누리고 할 수 있는 것 중에 오로지 혼자만의 힘과 지혜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오늘 맥추감사주일인데 바로 이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람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물론 매일 매순간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걸 망각하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제 잘나서 저 혼자 사는 것처럼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이웃의 은혜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걸 알고 먼저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이 더 행복하고 아름답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하여 먼저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부모님을 비롯한 모든 이웃들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또 최선을 다해 그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 자신의 삶속에 더욱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충만하고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가져다주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늘 감사하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감사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정말 너무나 많은 은혜가운데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그 다음에는 그렇게 많은 은혜 속에 살고 있는 것을 안다면 언제나 감사의 눈으로 세상을 보며 살아야 합니다. 그게 당연하고 그게 내가 네가 함께 행복하게 사는 길입니다. 여러분, 실제로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얼마나 감사할 것이 많습니까? 여러분, 지금 한번 눈을 감고 감사거리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비록 부자는 아니지만 천하보다 귀한 생명이 있습니다. 몸이 온전치 못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마음껏 활동할 수 있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풍족하고 편히 쉴 집이 있습니다. 자유와 평화와 질서가 있습니다. 태양이 이렇게 아름답게 빛나고 그 태양아래서 온갖 식물과 곡식들이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습니다. 시냇물은 졸졸 흐르고 새들은 노래하고 마실 물이 있고, 숨쉴 수 있는 공기가 있고, 밤하늘의 별들이 아름답게 빛나고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이웃이 있고 동료가 있고 일할 수 있는 능력과 지혜가 있고 차도 있고 냉장고도 있고 텔레비전도 있고 스마트폰도 있고, 마음껏 예배드리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예배드릴 수 있고..... 여하간 있고 있고 있고 계속해도 한이 없습니다. 그러니 어찌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정말 어리석게도 자꾸만 없는 것, 부족한 것만 생각하며 가난뱅이처럼 삽니다. 자꾸만 남의 탓, 환경 탓, 상황 탓하며 불평불만을 터트립니다. 세상을 향해 에이 망할 놈의 세상, 에이 도적놈들 하면서 비난을 퍼붓기도 합니다. 자신에 대해서도 못난 것, 잘 못하는 것만 생각하며 부모 탓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미련할데가 어디 있습니까? 있는 것도 누리지 못하고 자꾸만 더 달라고만 하면 도대체 어쩔 셈입니까? 그런 사람은 암만 많이 줘봐야 소용없습니다. 있는 것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많은 것을 줘도 누리지 못합니다.

 

여러분, 문제는 상황이나 소유가 아니라 마음입니다. 같은 상황이라도 어떤 사람은 긍정적이고 가능한 것을 먼저 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부정적이고 불가능한 것을 먼저 봅니다. 똑같이 믿음 생활하면서도 어떤 사람은 이미 주신 것, 이미 누리고 있는 것을 생각하며 그저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없는 것만 생각하며 맨날 달라고 달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잘아시는 살전5:16~18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항상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왜요? 정말로 감사할 일이 많고, 또한 감사하는 자가 은혜를 아는 자요, 또한 그렇게 감사할 때에 나도 행복하고 남도 행복하게 만들고 하나님도 기쁘시게 해 드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감사해야 합니다. 더구나 여러분, 우리가 어떤 사람들입니까? 죄와 무지로 영원한 형벌가운데 처할 수 밖에 없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릴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하고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오늘 3,4절의 말씀 보겠습니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그러니까 우리가 감사하고 영광을 돌려야 할 일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특별히 우리의 죄악을 사해주시고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해 주신 그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정말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모든 인생은 그들이 알든 모르든 죄와 무지 속에 있고 심히 연약하고 한계 속에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모르고 그저 제 잘난 멋에 살다가 그 죄와 무지로 말미암아 영원한 형벌 가운데 처할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천만다행히도 우리가 죄와 무지와 한계속에 있는 존재임을 알고 하나님 앞에 나와 하나님을 알고 믿고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할렐루야 찬양하며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며 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엊그제 우리 교회 가까이에 계신 이웃분이 위암으로 위 전체를 절제하는 수술을 받았다고해서 다녀왔습니다. 그렇게 위 전체를 절제해야 할 만큼 엄중한 상황이었는데도 그래서 자칫하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할 상황이었는데 천만다행히 다른 곳으로 전이가 되지 않아 수술이 잘 되어 생명을 건지게 되었다고 가족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물론 육체적인 생명도 너무나 귀한 것이니까 너무나 기쁜 일이긴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암을 고침 받은 것은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생명을 조금 연장시킨 것일 뿐 얼마 있으면 결국 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그건 영원한 생명입니다. 영원한 생명도 또 죄와 고통과 아픔 속에 살아야 한다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누릴 영생복락의 세상은 그야말로 고통이나 슬픔이나 괴로움이나 아픈 것이나 죽음의 그림자는 눈꼽만큼도 없는 나라입니다. 오직 기쁨과 즐거움과 평안과 행복과 사랑과 은혜만이 가득한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사람들이 알든 모르든 인정을 하든 말든 그건 인간의 죄와 무지와 한계에서 비롯된 어리석은 결론에 불과하고 반드시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오직 예수님의 보혈로 죄씻음의 은총을 입은 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바로 그런 혜택을 누린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어찌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정말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먼저 우리에게 생명과 세상에서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시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감사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가정에서도 늘 서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하며 살아야 합니다. 잘났건 못났건 능력이 많건 적건 내 남편 내 아내, 내 부모, 내 자녀가 최곱니다. 예수님이외는 이보다 소중한 존재가 없습니다. 세상의 누가 내 남편이나 아내나 부모보다 나를 더 아껴주고 더 사랑해 주겠습니까? 어떤 다른 남편이나 아내나 부모가 나를 위해서 그토록 수고해 주고 아껴주고 하겠습니까? 누가 내 남편이나 아내나 부모보다 더 의지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교회도 그렇습니다. 내가 출석하는 교회가 최곱니다. 누가 여러분에게 생명을 주었습니까? 누가 여러분을 양육해 주었습니까? 누가 여러분을 위하여 그렇게 애타게 기도해 주겠습니까? 누가 여러분이 힘들고 어려울 때 찾아가겠습니까? 누가 여러분을 위하여 맨날 기도하며 말씀을 준비해서 전해 드리겠습니까?

 

직장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떤 직장에 있든지 감사하며 일해야 합니다. 직장이 있어 일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너무나 감사한 일입니다. 일 할 수 있는 건강과 지혜와 능력이 있다는 것도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직장을 통하여 내 가정의 생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도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농사를 짓는 것도 그렇습니다. 물론 농촌 환경이 많이 열악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농사지을 땅이 있다는 것도 감사한 일이요, 농사지을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도 감사한 일이요, 비록 넉넉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농사를 통하여 가정을 꾸려오고 자녀를 양육할 수 있었다는 것도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나아가 농사를 경영하여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인 먹거리를 제공해 줄 수 있다는 것도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은 정말 우리가 하나님께나 교회에나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도 다른 어느 곳에서나 우리가 정말 받은 바 은혜가 너무나 크다는 것을 기억하며 먼저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동시에 부모님을 비롯한 모든 가족과 교우들과 직장동료들과 심지어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다른 이웃들에게도 늘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감사를 표하며 어떤 형태로든 그 은혜에 보답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삶의 자리가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천국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감사하는 사람에게 복을 주십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에는 축복이 오고, 감사하는 마음 속에 하나님은 더 많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불평불만하는 사람에게는 있는 것까지 빼앗아 버립니다. 여러분 같으면 안 그러겠습니가? 줘도줘도 감사는커녕 투덜거리고 못마땅하게 여기고 불평불만하면 줬던 것도 빼앗아버리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정말 그 은혜와 사랑을 알고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하는 사람에게는 더 주고 싶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 5절을 보십시오.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총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며 감사하는 자에게 더 좋은 것을 채워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능력과 은혜와 평강과 위로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며 가까이하는데 어찌 그 은혜를 누리지 못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어찌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리며 사는 자들에게 분명히 좋은 것들로 충만케 채워주십니다.

 

또한 그렇게 감사하여 살아갈 때에 우리의 삶을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감사하여 찬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힘과 능력과 은혜를 주어 창공의 지배자인 독수리가 힘차게 땅을 박차고 날아올라 아무 걱정이나 두려움이나 염려없이 창공을 누비듯이 그 삶이 힘차고 능력이 있고 자유와 평안이 넘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 새로운 생명을 가진 자로서 그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게 해 주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감사하고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분명히 힘과 능력과 은혜와 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그 삶에 힘이 있습니다. 생동감이 있습니다. 감사가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이기게 됩니다. 근심 걱정 원망 불평 미움 질투 시기 욕심 다 이겨낼 수 있습니다. 세상의 어둔 것들이 대들지 못하고 설령 대들어도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넉넉히 이겨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하여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감사와 기쁨과 은혜와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정말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지 말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동시에 부모님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에게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더욱 충만하게 덧입어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가득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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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예수님의 사역

말씀 : 마4:23~25

 

오늘 말씀. 예수님의 사역. 물론 예수님의 궁극적인 사역은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인류에게 죄사함의 은총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 그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며 예수님의 가장 근본적 사역.

그러나 그렇게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죄사함과 부활과 천국을 알리고 깨닫게 하고 그래서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과 천국을 믿고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 3년간의 공생애를 통하여 이러한 사실을 끊임없이 전하시고 가르치심.

오늘 말씀에서는 예수님의 핵심 사역 세가지. 복음을 전하심. 가르치심. 병을 고치심. 즉 하나님과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알리심. 선포하심. 그리고 하나님을 알고 믿은 다음에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가르치심. 그 다음에 천국의 은총을 누리는 삶을 살기 위하여 세상에서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심.

이것이 교회의 사역. 이것이 인간의 삶의 우선순위. 인간의 삶을 가장 풍요롭게, 생명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게 하는 일.

오늘날 이런 의미가 많이 퇴색, 예수님의 오심, 성탄절의 의미가 상당히 왜곡. 인간적인 사랑,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 하나됨, 서로 인정함. 물론 이런 의미도 있고 또 상당히 중요한 일이기도. 그러나 그것이 정말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아님. 예수님의 궁극적 관심은 생명. 하나님의 나라,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이나 사역에서 잘 나타남.

1.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천국 복음은 전하심

요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 요4:13,1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분명.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물론 섬기시고 사랑의 계명을 주신 것도 사실. 그러나 단순히 인간적인 섬김이 아니라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결국 십자가까지. 사랑도 단순한 인간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동기는 생명. 인간에게 참된 생명을 주고 그 생명을 풍요롭게 하려는 것.

그래서 마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회개 천국 모두 영원한 생명에 관한 것. 그리고 사실 이 생명을 얻지 못하면 세상 모든 것을 다 얻어도 소용없어. 그래서 또 말씀. 막8: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그래서 천국 복음을 전하심. 마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러므로 성탄의 의미를 바르게 알자. 바르게 믿자. 바르게 영접하자. 그리하여 진정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고 생명의 소식을 전하자.

2.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기 위해 가르치심

마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천국복음을 전하신 다음에는 가르치심.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정말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께 대하여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물질과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나? 무엇이 우리 삶의 우선순위인가? 등 하나님의 형상, 천국시민으로서 어떤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하여 가르쳐 주심.

우선은 믿어야.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고 천국을 믿고 영생복락을 믿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믿고 심판을 믿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믿어야.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 현실적으로 우리 눈앞에 전개될 현실적인 세상. 단순히 우리가 바라는 이상향이나 마음속의 소원이 아니라 실제적인 생활 공간.

그리고 나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이 중요한 일인가? 무엇이 정말 행복하게 하는가? 무엇인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하는가를 가르치심.

그러므로 열심히 듣고 배워야. 그리고 그 말씀따라 살아야. 세상의 돈과 명예와 권세와 육체적인 건강이 우선시되는 삶에서 주님이 우선되는 삶으로 방향전환해야. 돈이나 명예보다 믿음과 진실과 성실과 거룩과 의가 우선시 되는 삶을 살아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 위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고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며 생명과 기쁨을 은혜를 주는 삶. 주님 앞에 설 날을 준비하는 삶. 이런 모습으로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주님의 나라를 이루어가고, 교회의 거룩성을 회복해야. 이런 모습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는 삶을 살아야. 그럴 때 진정 참된 생명의 기쁨과 자유와 평화와 풍성함 가운데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됨.

3.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하기 위해 이웃 돌보심.

마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예수께서 하셨던 세 번째 일은 고통받는 이웃을 돌보시는 사역. 병과 약한 것을 고치셨다. 돌보심이다. 비단 몸 뿐 아니라 물질적인 필요도 채워주셨다. 그래서 귀신들린 자의 귀신을 쫓아내시고,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시고, 중풍병자를 일으키시고,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셨다. 죽은 야이로의 딸, 어떤 과부의 청년 아들과 죽은지 나흘리 지나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리셨다.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시고(마14장), 칠병이어로 사천명을 먹이셨다.(마15장)

즉 예수님은 인간의 전 영역에 관심을 가지고 그 영혼과 육신과 물질의 필요를 채워주심. 물론 분명히 우선순위가 있었다. 먼저는 영혼을 살리는 것. 그리고 천국백성으로 살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천국의 백성의 삶은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만은 아니다. 육체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도 거기에 포함된다. 그래서 육신과 물질적으로 돌보셨다.

이것이 교회가 해야 할 일이다. 이것이 균형적인 믿음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이런 균형잡힌 믿음의 모습을 가져야 한다. 먼저는 영혼이 온전히 거듭나야 한다. 천국과 지옥을 믿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확실히 믿어야 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현실적인 것이 우선시되는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지를 바르게 알고 그 나라에 들어갔을 때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해야 한다. 주님의 뜻대로 몸과 마음과 영혼과 시간과 물질을 사용해야 한다. 주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이웃을 섬겨야 한다.

성탄절주민초청잔치는 바로 이런 자리다. 복음을 전하는 자리이다. 예수님을 바르게 알리는 자리다. 그 안에 생명이 있음을 선포하는 자리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리는 자리다. 동시에 주님의 사랑을 나누는 시간이다. 주님의 사랑으로 그들에게 다가가는 시간이다. 어찌하든지 그들의 교회 마당을 밟게 하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의 문을 조금이라도 열리게 하는 시간이다. 주님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느끼게 하는 시간이다.

그리하려면 한명이라도 더 오게 해야 한다. 관심을 갖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벤트나 홍보도 필요하다. 이벤트를 위한 이벤트가 아니라 사람들이 모이게 하는 이벤트다. 한명이라도 더 관심을 갖게 하고 일단 오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뭐가 되어도 된다. 그들이 마음의 문을 열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복음을 전할 수도 없고 전해도 튕겨나간다.

그러나 우리가 계속해서 교회의 문을 열고 그들에게 다가가고 뭔가 조금이라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사랑을 베풀고 하다보면 결국은 조금이라도 교회에 대하여 좋은 이미지를 갖게 될 것이다. 이미지가 중요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이미지가 중요하다. 그러나 요즘 교회의 이미지가 별로 좋지 않다. 왜 그럴까? 이유는 간단하다. 믿음과 삶이 일치되지 않기 때문이다. 말은 어쩌구저쩌구 잘하지만 행동은 전혀 따라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이 오신 목적인 무엇인지 그 역사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지를 되새겨 보며 먼저 나 자신이 그런 예수님을 온전히 모셔들이고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자. 그리고 더 나아가 그렇게 주님을 만났으면 진정 거듭난 자로서 거기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자.

주님께서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고 사랑을 나누는 일에 힘썼던 것처럼 우리도 그 일에 힘쓰자. 그 일환으로 실시하는 성탄절주민초청잔치에도 적극적인 자세로 홍보하고 참여 함으로써 많은 분들이 교회를 찾아오게 하자. 그래서 그들이 복음을 듣고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믿게 하자. 혹시 당장 마음의 문이 열리지 않는다해도 마음이 점점 부드러워져서 결국은 주님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더욱 기도하고 힘쓰는 삶을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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