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철야기도회 기도문

   

1. 죄에 대해서는 엄하신 하나님 이시지만

 

자녀된 우리들에게는 정말로 생명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시는

 

마음 약하신 나의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2. 이밤 세상 속에서 시달리는 자녀들을 보시고 안타까우신 마음에

 

그토록 목사님을 통해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기에 선택된 저희 자녀들을 불러

 

이 자리에 앉게 하셨으리라 생각 됩니다.

 

아버지 한편 부끄럽기도 하지만 정말 너무나 감사합니다.

 

3. 그러한 주님의 마음이 우리 가슴속에 다가옴을 느낍니다.

 

이시간 세상에 살다가 묻혀온 모든 죄와 허물을 회개하는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4. 이 자리에 모인 우리들 고민하고 걱정하는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사업실패, 취직과 승진문제, 질병, 가족 건강 및 구원, 재물축복, 경제불황, 교회의

 

화합과 일치를 위한 문제, 질병등 많은 기도와 간구의 문제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여!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구하라>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 하지 아니 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 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저희들이 공의를 위해 간구한다 하지만 혹여 저희들의 간구가 주님

 

뜻에 미치지 못하는 부족한 간구들이 많을 줄로 압니다.

 

긍휼히 여겨 주옵시고 공의를 위해 구하는 성도들 되게 하옵소서

 

5. 아버지! 특별히 우리 신천재단을 기도로 섬기시는 지상천 담임목사님을

 

사랑하여 주시고, 사모님과 자녀들의 건강을 지켜 주옵소서

 

부목사님, 전도사님, 모든 교역자님들 각각 맡은 역할을 잘 감당하실수 있도록

 

건강과 형통의 복을 주옵소서

 

6. 장로님들과, 주일학교, 교사, 속장, 성가지휘, 반주, 성가대, 주차봉사, 식당봉사,

 

화장실봉사, 예배를 위한 각종 봉사에서 보이지 않게 수고하시는

 

일꾼들의 손에 묻은 땀을 보시고 그들의 노고를 잊지 마옵소서

 

7. 특별히 공산권에서 해외선교를 위해 목숨을 걸고 선교활동을 하시는 선교사들을

 

돌아보옵소서. 그들이 영적으로 육적으로 건강하게 하여주옵시고, 기도와 물질의 동역자가 연결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영적인 리더쉽과 지혜를 주옵시고 또한 필요한 재정 및 물질과 안심하고 선교할수 있도록 자녀들의 교육과 영적성장도 주님께서 돌아보옵소서

 

8. 끝으로 우리 신천교회가 이 지역사회 교회의 화합을 이끄는 등불이 되게 하여 주옵시고, 또한 어렵고 힘든 이웃들을 아무런 조건없이 은혜와 사랑을 베풀고 나누는 교회로 우뚝 서게 하옵소서

 

우리 성도들을 눈물로 사랑하시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하였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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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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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 길을 묻다 ( October,Friday Night Sermon)

 

본문성구 : 요한복음 14:1-6

 

참고성구 : 빌립보서 4;4-7

1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5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 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I.70년대 사건 기사 슈퍼맨, 원더우먼 사고 기사

 

우리나라에 흑백 TV가 처음 선보인 것은 전쟁이 막 끝난 뒤인 1954 7월 이라고 합니다. 그 때는 방송도 없었고 미군이 가져온 텔레비전이 전부였습니다. 본격적인 TV방송은 1961년에 국영 KBS가 개국하면서 시작되고,66년에 이르러 국산 텔레비전이 시중에 선보이게 됩니다. 그때 이후 80년 말에는 컬러 tv시대가 열립니다.

 

텔레비전이 주는 즐거움 중에 하나는 외국영화를 안방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일 겁니다. 당시에도 텔레비전을 통해 여러가지 외국영화들이 인기를 많이 끌었는데요. 특히 기억나는 것 가운데 원더우먼, 600백만불의 사나이, 슈퍼맨 등 흥미진진한 볼거리들이 많았죠. 그런데, 초창기에 사람들이 TV프로그램을 현실과 혼돈하면서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특히, 아이들이 이런 프로그램을 보고 대책없이 흉내를 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 일부 아이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참 안타까운일입니다. 혹시7.80년대 이후 태어나신 분들 중에 제 말씀이 믿기지 않는 분들이 있으신 것 같아 자료를 준비했습니다. (사진자료1,2,3). 이 아이들이 부모님께 한 번만이라도 영화속 이야기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물어봤더라면 그런 비극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

 

이렇게 모르는 것이나, 혹은 미심쩍은 일은 물어봐야 합니다. 그래야, 큰 손해를 미리 막을 수 있는 겁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기자 생활을 해 본 저로서는 좋은 질문이 좋은 기사를 낳는다는 사실을 현장에서 많이 체험했습니다. 집요하고 계산된 질문이 취재원들의 허를 찌를 때 진실과 가까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됩니다.

 

자녀교육에도 질문은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미 목사님을 통해 여러번 들어신 이야깁다만, 우리 학부모들은 아이들에게 학교가면 선생님 말씀 잘 듣고 딴짓하지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부모는 좀 다르다고 합니다. 선생님들은 훌륭하신 분들이니까 모르는 것을 많이 물어보라고 한답니다. 질문을 하고 답을 듣고, 혹은 답을 찾기 위해 다른 질문을 받고, 그런 문답의 과정을 통해 아이들의 창의력과 지능이 발달된다고 합니다. 저도 학교에서 질문을 많이 하려고 합니다만, 잘 되지 않더라구요. 영어도 영어지만 괜히 수업시간에 지장을 주는 것 같고,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 주로 뒤에 앉아서 경청하는 편입니다. 듣는 훈련을 하는 거죠

 

II.성경공부나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좋은 질문을 통해서 성경구절 속에 들어 있는 감추어진 보물을 캐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질문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바로 도마입니다. 도마는 특히 요한 복음에서 믿음의 또 다른 차원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식의 모든 것을 맡기는 믿음과는 조금 색깔이 다릅니다. 의심합니다. 따져봅니다. 짚어봅니다. 그리고 믿습니다. 그래서, 질문을 많이 하죠. 이번에도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가셔야 할 아버지의 집, 영원한 하늘나라에 대해 이야기 하십니다. 그리고 그곳에 가는 길을 제자들도 다 알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도마가 다른 제자들이 얼굴에 의아한 표정을 품고도 아무 말을 하지 않자, 불쑥 질문을 던집니다.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데 그 길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우리가라고 이야기 하는 걸 보니까 당시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이 가시고자 하는 곳에 대해 긴가민가 했던 모양입니다. 사실, 다른 사람들은 짐작하고 있었는데, 도마만 모르고 불쑥 던진 질문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도마가 우리가 알지 못한다라고 말한 것으로 미뤄 당시 제자들 다수도 몰랐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어째든 이 질문의 답이 참 걸작입니다.

 

III.여러분들이 너무도 많이 들어 보셨던 유명한 말씀이라 외우시는 분들도 많으실 줄 압니다. 다같이 대답해 보실까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

 

저는 처음 이 말씀을 읽었을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참 예수님은 어떻게 보면 너무나 자기중심적이시구나. 더 솔직히 말씀드리면 너무 교만하신 것 아니야. 길을 가르쳐 달라고 하면 상식적으로 그 곳은 이렇게 이렇게 가는 거야, 어디 어디 지나서, 혹은 그 곳이 비유적이고, 추상적인 곳이라면 , 좀 시적인 표현으로 돌려서 말씀하시거나

 

,한편으로는 정말 대단하시다, 내가 믿는 신이 이정도는 되야지, 다른 종교에서는 천상천하 유하독존이라고 외치는 분도 있는데, 멋있다. , 진리, 생명, 좋은 말 다 들어가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말씀을 준비하면서 참 개인적으로 너무나 많은 우연을 체험했는데요, 마치 누군가가 소를 몰아가듯 저를 몰아가는 듯 했습니다. 사실, 좀 폼나는 설교를 하기 위해 주석부터 펴서 배경과 원어에 관련한 지식 등 평소 성경공부 모임에서 하는 공부와 묵상 방식과는 다르게 시작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정답을 알아가는 것 같아 참 뿌듯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건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만의 묵상, 저만의 질문이 없었던 겁니다. 다 남의 말입니다. 좋은 말입니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그래서 여러분께 설명해 드릴 수 있겠는데, 감동이 없었습니다. 은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책을 덮고 사람들을 만나고, 기도하고, 묵상하는데 주력했습니다. 평소하던대로 나만의 두레박으로 은혜의 강가에서 물을 길어 올리려고 마음 먹었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이번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고 또 한번 큰 회개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것을 오늘 여러분과 나누려고 합니다.

 

먼저 왜 주님께서는 당신을 길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도마는 눈에 보이는 길을 가르쳐 달라고 한 것 같은데 주님은 난데 없이 당신이 길이라고 하십니다. 좀 처럼 마음에 와 닿지 않았습니다. 아까 말씀드린대로, 몇몇 주석을 참고해 보니, 이 길은 십자가의 길이고, 유대인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삶의 방식을 나타내고 등등등.. 주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은 이해가 되는데, 이것이 어떻게 내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이 되는지, 단지 영적으로만 생각하면 그럴 듯 한데, 감동이 없었습니다. 좀 힘들었습니다. 시간은 가는데 설교의 핵심적인 깨달음은 없고, 좀처럼 건져지는 게 없었습니다. 히루 하루 지나가고 목요일 밤이었습니다. 지은이와 함께 놀다가 이른바 아하 모먼트를 맞이하게 됩니다. 제 딸이 설교준비 잘되가느냐고 물어서, 제가 이렇게 대답했어요, ‘아니’, 말씀이 뭐냐고 해서 예수님이 당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한 부분이라고 했죠. 설교문 쓰기가 좀 힘들다고 덧붙였습니다. 특히 아빠는 왜 예수님이 당신을 굳이 길이라고 하셨는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죠. 그랬더니 지은이도 그러게 예수님이 왜 그러셨을까, 예수님은 우리가 밟고 지나가는 길도 아니신데” “밟고 지나가는 길

 

저는 그 순간, 몇해전 목사님과 저녁을 먹다가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일본에 파견된 한 선교사가 배교를 했다는 소식을 조사하기 위해서 파견된 한 신부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요지는 이렇습니다. 막부시대에 일본은 서양의 천주교의 유입을 막았고 박해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측은 체포된 신부들이 예수의 얼굴이 그려진 성화를 발로 밟고 지나가면 지역의 천주교인들을 살려주겠다고 했고, 끝내 그 신부님은 고뇌끝에 예수님의 얼굴이 그려진 그림을 밟고 지나갔다는 이야깁니다. 언듯 들으면 참 믿음없고, 순교의 열정이 없어 보이는 이야깁니다.

 

 

 

이 이야기는 1966년 소설로 출판되어 종교소설로 노벨 문학상 후보까지 올라다고 합니다. 이 작품은 일본 작가인 엔도슈샤쿠 가 쓴 침묵이라는 실화소설입니다. 주인공인 예수회 소속 세바스티앙 로드리고 신부는 동료신부의 배교 행위를 조사하기 위해 1635년 일본에 갑니다. 그리고, 그 참혹한 박해 현장을 체험합니다. 이 신부는 하나님을 배신하는 것과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는 일 사이에서 깊은 방황을 하게 됩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해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응답 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순간 철저히 침묵하셨습니다. 결국 로드리고 신부는 사람들을 살리기로 하고 성화를 발로 밝으려는 순간, 음성을 듣게 됩니다.

 

밟아라,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질 것이다

 

과연 진짜 이런 음성이 들였는지, 아니면 신부님의 마음속 소리였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습니다만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선 기독교인의 선택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생명입니다.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세상의 생명을 구원하시고자 아들을 버리실 계획을 세우신 하나님, 그 형언할 수 없는 은혜를 값싼 싸구려 은혜로 둔갑시켜온 저 자신이 미웠습니다.

 

저는 순간 지금까지 의미없이 밟아 온 주님의 얼굴이 떠올라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욕심 때문에 팽개쳐지고 짓밟혀진 주님의 일그러진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비로소, 왜 주님께서 도마의 질문에 자신이 길이라고 말씀하셨는지 이해가 됐고, 성경학자들이 이 길을 십자가의 길이라고 말하는 이유를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십자가 사건을 염두해 두시고 이 말씀을 하신 것 같습니다. 정말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IV.십자가의 고난, 그 좁은 길, 그 길은 진리의 길이도 합니다. 사실 도마사도가 의심이 많았지만, 결국 요한 복음 20장에서는 누구도 하지못한 고백을 합니다. 우리가 앞서 한 찬양에도 나오지만 부활하신 주님의 상처난 자국을 확인하고 이렇게 고백하지요, “나의 주 나의 하나님”.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 한 고백보다 더 직설적인 고백입니다. 그리고 더 친근한 고백입니다. 도마는 십자가에서 죽으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고, 확인한 뒤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의심에 여지가 없는 참하나님, 참신을 만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실재 모습, 참되신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의 실재 모습이십니다. 그래서 진리입니다. 세상의 진리, 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조건에 따라 변하는 상대적인 진리와는 차원이 다른 절대적이고 영원한 진리입니다. 신약성서학자인 윌리엄 버클레이(William Barclay)는 그의 요한복음 해설서에서 많은 성인들이 진리를 이야기 했지만, 자신이 그 진리라고 이야한 사람은 예수님 한 분 뿐이라며 그것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완전하다는 주장이 예수 안에서 최고조를 이룬다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완전하다는 사실이 그 안에서 실현됐음을 의미한다고 말했습니다. 쉽게 풀이하면, 많은 성인들이 진리 가르치고 그 진리에 입각해 살려고 했지만 완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 모든 인류를 구원에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따라서, 그의 말씀과 행위는 원천적으로 완전히 일치하여 도덕적으로 무결하며 참되다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V.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여기에 쓰인 그리어 단어는조에라고 해서 생명이라는 뜻인데, 요한 복음에서는 많은 경우 영원한 생명(eternal life)을 뜻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 예수님의 생명은 바로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이 영생은 바로 참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합니다(17:3).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구주로 고백하며 그가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 가겠다고 선포하고 나서는 순간 우리는 영생에 반열에 오른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바울 사도는 로마서 64절에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레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이곳에 새생명도 같은 단어입니다.

 

또 이사야서 4319절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광야의 길과 사막의 강은 무슨 말씀입니까?

 

광야는 어떤 면에서 역설의 땅입니다. 왜냐면, 아무것도 없는 공허한 땅이지만,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땅입니다. 히브리어로 광야는 미드바인데 그 원뜻은 직역하면From the word ‘말씀으로부터라는 뜻이되죠. 애굽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곳은 바로 광야생활을 하면서 였습니다. 또한 사막에 강물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죽음의 땅 열사의 땅 사막에 물은 곧 생명을 의미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 생명은 유한한 생명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말씀은 영원하고, 죄인들에게 영생의 복을 줍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과 우물에서 만나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4:14)”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라 그 십자가의 길, 좁은 문으로 들어가면 우리는 이 생명,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선물로 받습니다.

 

성도여러분, 여러분들은 바로 이런 진리의 길이요, 생명의 길 위를 걷고 계십니다.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는 바로 그렇게 살다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고 그분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우리는 어떻게 예배할 수 있습니까? 바로 눈에 보이는 예수님을 통해섭니다. 우리가 역사속에서 우리와 함게 숨쉬다 떠나시고 다시 오마 약속하신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 분과 충만한 사랑의 교제를 나누지 못한 채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왜냐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서는 아버지를 알 수가 없기 때문에 그 분께 갈 수도 없는 것입니다. 길을 알아야 갈 것 아닙니까?

 

정상에 오를 길은 많다고 합니다. 마호메트도 있고, 부처도 있고, 공자도 있고, 노자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대로 된 길, 바른 길은 그래서 길을 잃지 않고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길은 바로 당신을 밟고 가라시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십니다.

VI.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 새학기가 시작되고 또 직장과 가정에서 일상적인 일들속에서 바쁘실 줄 압니다. 그러나, 사소한 것이라도 당연하게 보지말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 길을 여쭈어 보시기 바랍니다. 침묵하신다고 불평만 하지 마시고, 미세하게 들려오는 그 분의 응답에 새벽마다 귀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밟힘을 당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합시다. 2000년 전 십자가 사건은 과거의 사건이 아닙니다. 지금도 고통의 현장에서 함께 하시는 주님을 믿습니다.

 

 

박해의 현장에서, 불의가 판치는 폭력의 현장에서, 돈과 목숨을 바꾸어야 하는 야만의 현장에서, 여전히 함께 울고 고통해 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봅니다. 찢겨지고 짓밟힌 주님의 얼굴을 봅니다. 그러나 그속에 영원한 생명, 천국의 소망을 봅니다. 그리고 다시 생활을 돌아보며 회개의 자리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매일 매일 말씀에 비춰 우리의 삶을 돌아 보며 아파할 때만이, 우리에게 밟힘을 당하러 오신 예수님의 그 크신 사랑과 은혜를 싸구려로 만들지 않는 것이 됩니다. 마치 예수님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며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신앙으로 일관할 때 우리는 매일 매일 그분의 얼굴을 의미없이 밟고 지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당신의 생명을 던지신 그 희생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각자가 성령 말씀을 통해 각자가 은혜의 강물을 길어 올리는 체험을 하셔서 머리로만 아는 성경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는 성경 말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말씀에 갈급해지고 그 말씀을 실제로 실천하면 할 수록 주의 희생을 값지게 만드는 것임을 명심했으면 좋겠습니다.

 

 

끝으로, 바울 사도는 이런 하나님의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깨닫고 평생을 십자가의 길로만 갔습니다. 그리고 빌립보서 4장을 통해 이렇게 권면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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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네째주일낮설교 / 버림과 얻음 (September,Sunday Sermon)

 

제목 : 버림과 얻음

 

말씀:5:1-3

 

1.심령이 가난해 져야 합니다.

 

여러분,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얻기 위한 선행조건이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지만 먼저 버리는 작업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뭔가 새로운 것을 얻기 위해서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생각이나 가치관이나 습관이나 이런 것들을 과감히 버리고 그래서 뭔가가 새롭게 들어갈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오물이 잔뜩 들어있는 컵에는 깨끗한 물을 따라 마실 수가 없이 않습니까? 주먹에 돌을 쥐고 있으면 금덩어리를 집어 들 수가 없지 않습니까? 마음속에 미움이 가득 들어 있으면 어떻게 사랑의 마음을 담겠습니까? 마음에 거짓이 가득차 있으면 어떻게 진실을 담겠으며, 원망과 불평이 가득하다면 어떻게 감사의 마음을 담겠습니까?

 

여러분, 성경에서 자꾸만 낮아지고 버리고 비워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 이유가 뭡니까? 바로 이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먼저 버려야 새것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16:25절을 보겠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여기서 목숨이란 물론 그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을 말합니다. 즉 목숨을 버리라는 것은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생명도 바쳐야 하겠지만 꼭 생명을 바치라는 뜻이라기 보다는 예수님 안에 진정 생명의 은총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작고 보잘 것 없고 한계속에 있고 죄와 무지속에 있는 우리 생각과 뜻과 그밖에 우리가 소중하다고 여기는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심령 가운데 온전히 자리잡게 되고 그러면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게 된다는 말씀이지요.

 

여러분, 그렇습니다. 정말로 무엇인가를 얻으려면 일단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내가 버리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강제로 빼앗아 갈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눅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어떤 부잣집 아들이 부모에게 유산을 미리 달라고 떼를 써서 결국 자신의 몫을 가지고 집을 나갔습니다. 그러나 이 미련한 아들은 돈좀 있다고 진탕 먹고 마시고 세상 연락을 즐기며 허랑방탕하여 있는 돈 다 날려 버리고 그야말로 알거지가 됩니다. 그래서 남의 집에 돼지치기로 들어갔는데 하필 그해 따라 너무 큰 흉년이 들어서 먹을 것이 없어서 주인집도 먹을 것이 제대로 없어서 돼지밥을 먹으면서 돼지를 치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주목할 것은 바로 이때부터 반전의 드라마가 펼쳐진다는 것입니다. 그는 빈털터리가 되었을 때 즉 그가 자발적으로 그랬든 강제적으로 그렇게 되었든,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몽땅 잃어버렸을 때 비로소 아버지를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 집에는 먹을 것이 많은데, 내 아버지 집에는 품꾼도 좋은 것을 먹는데 나는 여기서 굶주려 죽게 되었구나 하면서 내가 한 짓이 있으니 아들로 맞아 달라고는 못할 거고 품꿈으로라도 써달라고 하자 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돌아갔을 때 아버지의 환대를 받고 아들로서의 지위가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비유의 핵심은 아무리 죄와 무지가운데 살던 인생이라도 하나님품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그 크신 사랑과 은혜로 큰 잔치를 베풀며 환영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부가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게 이 탕자가 지위가 회복되는 그 반전 드라마가 언제 펼쳐졌느냐? 그가 어떻게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느냐? 하면 굶어 죽을 지경이 되었을 때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뭔가 자신이 가지고 있을 때, 그래서 뭔가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여길 때, 돈이 있어서 흥청망청 쓸 때, 술 친구들과 기생들이 아첨을 하면서 같이 놀아주니까 세상이 제 세상 같았을 때 그는 아버지집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돈 떨어지고, 술떨어지고, 친구떨어지고, 쾌락도 다 떠나고 그래서 철저하게 낮아지고 버림받고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었을 때 그는 비로소 자신이나 돈이나 세상 즐거움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지 뼈저리게 느끼고 두손두발 다 들고 아버지 품으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자꾸 우리에게 비워라 낮아져라 죽어라는 하는 것은 우리가 다 알거지라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알거지를 만들기를 바라시겠습니까? 비우고 죽이고 낮아지라는 것은 우리의 지혜와 능력과 경험과 이성이 얼마나 작은 것인지를 인정하고 그것을 의지말고 하나님의 말씀과 인도하심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들이 내 삶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고, 삶의 우선순위가 되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마음 내뜻대로 살지 말고 하나님뜻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자신을 바르게 알고 겸손하게 낮아져서 가난한 심령으로 주님과 동행할 때에 천국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3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말입니다. 말씀 그대로 심령 곧 마음 혹은 영혼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란 자신의 죄와 무지와 연약함과 부족함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과 공급해 주시는 은혜가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며 그 뜻대로 힘써 살아가는 그 겸손한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가 이루어져 하나님 안에 있는 온갖 좋은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게 됨으로 천국을 소유하게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정말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과 무지함을 인정하고 겸손히 하나님 앞에 무릎꿇어야 합니다. 내 생각과 경험와 이성과 능력과 지혜가 얼마나 작은 것인지를 인정하고 그런 것들을 앞세우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우고 그 원리와 그 방법과 그 뜻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생각은 나보다 천배만배억배 더 큽니다. 더 지혜롭습니다. 더 선하십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을 따를 때에 내가 생각하고 바라고 원하던 것들보다 천배만배억배 더 수지맞는 일이 생깁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물론이고 지금 여기서도 얼마든지 천국의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은혜와 능력과 평강과 위로와 자유를 맛보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은 꼭 이런 은총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심령이 부유하면 진노의 대상이 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분명히 주님의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심령이 부유하면 교만한 자가 되어 주님의 은총은커녕 도리어 주님의 책망과 진노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다시 말씀드려 심령이 부유하면 그냥 주님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분명한 책임추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눅12장에 보면 이런 어리석은 자들에게 주시는 경고의 비유가 있습니다. 소위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거기에 보면 어떤 마을에 큰 부자가 있었는데 어느 핸가 엄청난 풍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곡식을 쌓아 둘 창고가 모자라 곡간을 하나 더 짓고, 곡간마다 곡식을 잔뜩 쌓아놓았습니다. 그렇게 여러개의 곡간에 곡식이 잔뜩 쌓인 것을 보자 마음이 너무 든든하였습니다. 이제는 아무 걱정이 없었습니다. 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말합니다. 12:19절입니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그러자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12:20절을 계속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그러니까 부자는 곡식을 잔뜩 쌓아 놓고 내 영혼아 이제 부러울 것이 무엇이냐, 걱정할 일이 무엇이냐, 이제는 남은 인생 실컷 먹고 마시며 멋지게 즐겨보자꾸나 그런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 미련한 인사야, 네가 그렇게 많은 물건을 쌓아 두었다만 만일 오늘 밤에 내가 네 영혼을 거두어 간다면 너의 쌓아둔 곡식이 다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오늘밤 그 양식을 내가 다 가져간다면 너는 무엇으로 평안을 누리겠느냐, 오늘 밤 너의 건강을 빼앗아 간다면 너는 정말 실컷먹고 마시며 즐거워할 수가 있겠느냐? 너는 너의 생명이 내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이 미련한 인생아, 그랬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자는 마치 자기가 쌓아둔 양식이 순전히 자기 힘으로 농사지어 얻어서 순전히 자기의 것으로 알았습니다. 먹을 것을 잔뜩 쌓아 두었으니 이제는 먹고 마시며 즐기며 살기만 하면 될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그 많은 곡식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땅을 주시고 비를 주고 생명을 주셔서 자라나고 싹이트고 열매를 맺게 하신 것입니다. 또한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서 지금이라도 가져가시면 그만입니다. 생명도 권력도 명예도 건강도 지식도 물질도 하나님이 도로 가져가시면 그것은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집니다. 결코 내 영혼을 지켜주지 못합니다.

 

그런데 죄와 무지 가운데 있는 인생은 그만 어둠으로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무엇인가 좀 있으면 마치 자신이 다 얻은 줄로 여기고, 자신이 다 마음대로 할 수 있을 줄로 여기고 교만하고 미련하게 하나님을 찾지 못하고 제멋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 힘만 믿고 살아갑니다. 자기 지식이나 돈이나 권력이나 건강만 믿고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고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18:12에서는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가진 생명도, 먹고 입고 자고 하는 모든 생명의 활동들도,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 우리가 발딛고 살아가는 모든 삶의 터전들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과 보호속에서만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면 단 한시도 살 수 없는 연약하고 무지하고 곤고하고 어리석은 인생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정말 가난한 심령으로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렇게 정말 피조물로서의 자기 분수를 알고 겸손히 하나님 앞에 엎드는 삶을 살 때 정말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속에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꼭 이런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버릴 때 가장 좋은 것을 얻게 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버리라, 낮아지라, 심지어 죽으라 하심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버리라 하심은 가짜를 버리고 진짜배기로 채워주려 하심입니다. 낮아지라 하심은 우리를 진정한 의미에서 높아지게 하려 하심입니다. 우리에게 죽으라하심은 진짜 생명을 주시려 함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하나님의 은총과 능력을 입었을 때가 언제입니까? 그것은 그가 철저하게 낮아지고 자신의 것을 송두리째 다 버렸을 때입니다. 그는 애굽의 궁궐에서 왕자로 40년을 살았습니다. 애굽의 왕자로서 모세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명예도 권세도 부귀도 지식도 영광도 있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의 모세에게는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도 필요없었습니다. 이미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그는 뒤늦게 자신이 히브리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동족들이 애굽의 노예가 되어 학대받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자기 동족을 괴롭히는 애굽 사람을 보고 분노하여 그 애굽 사람을 죽이고 말지요. 그리고 결국 이 일이 탄로나서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가는 도망자 신세가 됩니다. 하루아침에 왕자의 자리에서 가진 것이라곤 알몸둥이 하나밖에 없는 거지로 전락한 것입니다.

 

거기서 그는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을 철저히 버려야 했습니다. 왕자의 자리도 버려야 했습니다. 권세도 물질도 평안함도 호화스러움도 그곳에서 배웠던 학문도 기술도 모두 포기해야 했습니다. 당시 세계 최강국이었던 이집트의 왕자의 신분에서 이제는 더 이상 내려 갈래야 내려 갈곳이 없을 만큼 인생의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그야말로 천당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때가 곧 기회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기회였던 것입니다. 모세가 이집트 왕자에서 하나님의 왕자로 새롭게 시작하는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렇게 철저하게 빼앗기고 잃어버리고 낮아졌을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셨던 것입니다. 즉 그로 하여금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하게 하시고 그래서 그가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 때 그를 이집트 왕장가 아닌 하나님 나라의 왕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인간의 모든 것을 완전히 잃어버린 다음에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게 됩니다. 세상적인 것을 완전히 제거하신 다음에 하나님의 권능으로 대신 채워 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시킵니다.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천하를 호령하는 바로왕 앞에 당당히 서서 대결을 펼쳐 애굽에 열가지 재앙을 이스라엘을 구원해 냅니다. 홍해바다의 넘실거리는 파도를 물리칩니다.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오고, 메추라기 떼가 몰려오고, 쓴 물이 단물이 되고, 반석에서 샘물이 터지고, 대적자들을 물리쳤습니다. 작은 것을 잃고 어마어마한 것을 얻은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보다 천배만배억배 더 지혜롭고 능력이 있고 은혜와 사랑이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여러분, 55:8,9절을 보십시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뭐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와 비교가 되겠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영광의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 그 안에 모든 생명과 부귀와 영광과 지혜와 축복과 평강과 위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작은 것들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따를 때 우리는 놀라운 은혜 가운데 살게 됩니다. 얼마든지 능력있는 삶을 살아갑니다. 어떤 적들도 물리칠 수 있습니다. 환경이나 상황의 적도 물리칩니다. 사탄의 궤계를 물리치고 능력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까짓 죄의 세력 얼마든지 이길 수 있습니다. 고난과 핍박도 얼마든지 이길 수 있습니다. 더럽고 추한 것들로부터 얼마든지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세상 욕심과 향락과 명예와 권세로부터 얼마든지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해도 넉넉히 천성을 향하여 달려 갈 수 있습니다. 마귀가 어떻게 교묘하게 유혹하게 당장에 간파해 낼 수 있습니다. 사탄이 유혹할 때 사탄아 물러가라고 큰 소리 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말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내 능력과 재물과 이성과 지식과 경험과 과학으로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마귀 사탄의 권세, 죄의 권세, 지옥의 권세 절대로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런 것들 의지하다가는 맨날 그런 것들에게 끌려다니며 노예 생활을 할 뿐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과 권능을 의지할 때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는 위대한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와 지혜를 덧입으려면 겸손히 주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자신 안에 있는 모든 추하고 더럽고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이고 인본주의적이고 물질주의적인 악하고 추하고 왜곡된 것을 비워내야 합니다. 성령의 불길로 태워 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주시는 지혜와 능력과 은혜가 내안에 들어오게 됩니다. 내 심령이 거룩하고 아름답고 의롭고 올바른 가치관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그러면 그 은혜와 능력로 지혜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정말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 우리 자신의 작음과 나약함과 한계와 죄됨과 무지함을 인정하고 겸손히 주님 앞에 엎드려 그것이 환경이든 상황이든 고난이든 핍박이든 유혹이든 죄이든 그 어떤 것이든 모든 어둠의 세력들을 주님의 은혜와 능력과 지혜로 이기고 왕같은 제사장으로서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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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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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네째주일낮설교 / 순수한믿음 (September,Sunday Sermon)

 

제목 : 믿음으로 살리라

 

1:13-17

 

1.순수한 믿음을 회복합시다.

 

어떤 인터넷 블로그에서 네팔의 수도 카투만두에서 활동하고 있는 변성우선교사의 글을 보았습니다. 이 분이 활동하고 있는 카투만두 남쪽 가까운 곳에 수까우다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이곳은 너무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정령숭배에 빠져 세상 모든 것에 영혼이 깃들어져 있다고 여기며 그것들을 섬기며 가난에 찌들어 살고 있는 산골 마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는 쩐드라라는 사람이 세운 가정교회가 하나 있는데 교인이라야 그의 아내와 장인 장모 모두 네명뿐이었습니다. 쩐드라는 이 마을에서 태어나 자라고 결혼까지 하였지만 한쪽 눈은 보이지 않고 너무나 가난해서 동네에서도 무시당하며 살다가 카투만두로 상경하게 되었습니다. 카투만두에 온 그는 다행히 어떤 복음전도자를 만나 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교회 다닌지 6개월만에 큰 은혜를 받고 고향에 가서 복음을 전하야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생겨 고향 수까우다로 돌아와 가정 교회를 세우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느 날 변성우 선교사님이 쩐드라가 다니던 교회 사람들에게 그의 이야기를 듣고 그 교회 리더들과 함께 이 수까우다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수까우다 교회에 도착하여 기도회를 열어 쩐드라의 간증을 듣고나서 통성으로 간절히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약30분동안 간절히 기도를 드릴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들이 뜨겁게 기도하는 동안에 쩐드라의 한쪽 눈이 완전히 회복되어 정상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변 선교사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도 큰 은혜를 받아 할렐루야 찬양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합니다.

 

여러분, 불과 교회 다닌지 6개월 밖에 안된 이 쩐드라에게 어떻게 이런 역사가 일어났을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순수한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그 감격, 그 무한한 기쁨, 그 주체할 수 없는 은혜, 그 절대적인 심뢰감, 무한한 존중감, 그래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가정교회를 세우고 감사와 기쁨으로 섬기던 그 사랑과 열정과 은혜가 그로 하여금 놀라운 능력을 맛보게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정말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그 감격과 은혜와 기쁨과 신뢰와 사랑, 그래서 정말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주를 따르며 의지하며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가는 그 믿음말입니다.

 

요즈음 딸바보라는 말을 쓰는 것을 보았습니다. 딸을 너무 사랑하니까 딸을 위해서 바보처럼 무엇이든 하는 그런 태도를 말하는 것이지요.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그저 모든 것이 은혜요, 모든 것이 감사요, 모든 것이 사랑이요, 모든 것이 은총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해도 곧이 곧대로 믿어지고,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내가 바보 멍청이가 되어도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순수한 믿음으로 살아갈때에 은혜와 능력과 생명력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11:39,4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예수께서 죽은지 나흘이 지나 냄새가 나는 나사로가 다시 살 것이라고 하자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때는 살 줄 안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다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면서 지금 살 것이라고 하시며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마르다가 말한 것입니다. 아니 죽은지 나흘이 지나 냄새가 나는데 어쩌시려구요?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냄새가 나는 게 뭐 어쨌단 말이냐? 그가 살아는데 무슨 문제가 있느냐? 썩어서 냄새가 나는 정도가 아니라 그 몸이 완전히 다 분해되어 없어졌다라도 그게 무슨 대수란 말이냐? 하나님께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 내가 누구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그러므로 너의 생각과 이성과 경험들일랑 집어 던지고 나를 믿으라. 그러면 은혜를 체험하리라.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런 말씀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지혜와 권능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영혼을 소생시키고 육신도 소생시키고 마음도 소생시킵니다. 힘과 능력과 지혜와 권세와 용기와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을 믿으면 역사는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말씀드릴 게 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세상을 떠나 육신의 장례를 치를 때에 화장에 대하여 제가 몇 번 말씀드렸는데 아직도 의문을 제기하는 분들이 계시더라고요. 제가 그렇게 못 미더우신가요? 어디서 그런 얘기를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설령 총회장이 그랬더라도 아니 대한민국 총회장 아니라 전세계의 총회장이나 교황이 그렇게 말했더라도 그건 큰 실수한 것입니다. 아니 화장하면 하나님이 부활을 못시키시나요? 아니 또 화장과 매장이 뭐가 다릅니까? 백년 천년 후에 뭐가 다릅니까? 천년 후에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아니 설령 만에 하나 다른점이 있더라도 하나님이 능치 못할 일이 있으십니까?

 

여러분, 화장하나 매장하나 매 한가지입니다. 화장해도 흙으로 돌아가고 매장해도 흙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화장해서 한줌 흙으로 돌아가나 매장해서 나중에 한줌 흙이 되나 뭐가 달라요? 매장해도 나중에는 다 썩고 분해되고 가스가 되어 땅과 공중의 원소가 되어 우주 공간 어디엔가 남아 있고, 화장해도 땅과 공기속에서 어떤 원소의 형태로 우주 공간에 남아 있는 거예요. 그러다가 하나님이 다시 원위치로 돌아와라 그러면 돌아와서 본래의 모습을 찾게 되는 거예요. 아니 설령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도 원상태로 돌아와라 그러면 돌아오는 거지 뭐 그렇게 어렵습니까?

 

여러분, 내 작은 생각과 경험과 이성과 지성과 논리의 틀속에 갇혀 있지 말고 권능의 하나님, 지혜의 하나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올 주님을 믿으십시오. 정말 순수한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십시오. 그리하여 정말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덧입어 세상의 모든 의심과 의문과 문제를 이기고 은혜충만 능력충만 감사충만 기쁨충만 생명충만한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순수한 믿음이 곧 능력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가장 크고 영원하고 무한한 능력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반드시 큰 은헤와 능력으로 채워주십니다. 오늘 16절 말씀을 같이 보겠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여러분, 무엇이 능력이라고 하였습니까? 복음입니다. 복음이 뭡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입니다. 예수님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의 죽을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 승천하셨습니다. 그래서 영광의 나라를 예비하고 계십니다. 예수님 다시 오십니다. 그때에 완전한 천국의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이게 바로 복음입니다. 이 복음이 능력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복음이 왜 능력입니까?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기 때문입니다. 오직 이 복음을 믿는 자만이 구원의 은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복음을 믿는 자는 죽음의 권세, 지옥의 권세를 비롯한 모든 마귀사탄의 역사를 이깁니다. 모든 환경과 상황의 권세를 이깁니다. 모든 어둠의 권세, 사람의 권세 다 이깁니다. 이게 바로 능력입니다. 세상에서는 돈과 명예와 권세와 지식과 기술과 스펙이 능력인 줄 압니다. 물론 그것도 능력은 능력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작은 능력입니다. 곧 무너지는 능력입니다. 마귀사탄에게 판판히 깨길 수 밖에 없는 그래서 죄와 사망과 지옥의 권세에 속절없이 무너져내리는 보잘 것 없는 능력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것을 이깁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깁니다. 환경과 상황의 권세를 이깁니다. 영적 육체적 물질적 정신적 모든 것을 이깁니다. 사람과 돈의 권세를 이깁니다. 모든 어둠의 권세를 이깁니다. 오직 이 복음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십니다. 이 믿음만이 영혼을 살리고 몸을 살리고 마음을 살리고 영생복락의 은총을 가져다 주는 유일무이한 능력인 것입니다.

 

이런 능력이 우리에게 어떻게 주어집니까?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 인류의 유일한 완전한 능력인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믿으면 그 복음의 능력이 완전히 내것이 되어 영적 육체적 정신적 육체적 물질적 모든 것을 이기는 승리자가 됩니다.

 

여러분, 성경의 핵심주제가 뭡니까? 다른 거 없습니다. 믿음에서 시작해서 믿음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성경의 핵심은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바라보고, 의지하고, 사랑하고, 따라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시작해서 예수님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18세기 계몽주의가 대두되면서 사람들은 믿음보다는 이성을 중시했습니다. 이성적으로 문화적으로 철학적으로 과학적으로 종교적으로 깨어났다고 여기면서 그 잘난 이성과 과학과 경험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점점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성경조차도 제 손바닥위에 올려놓고 이러쿵 저러쿵 하면서 난도질을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어떻게 되어 가고 있습니까? 결국 서구 기독교문명은 지금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만약 서구 세계가 회개하지 않고 이대로 한세기를 지난다면 서구기독교문명은 종말을 고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을 통하여 그 역사를 이루어가실 것입니다.

 

여러분, 11:6절을 보십시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어떻게요?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한다. 제아무리 잘나고 똑똑하고 유능하고 멋있고 심지어 성경을 달달 외워도 믿음이 없으면 헛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구원을 믿고 심판을 믿고 믿었으면 그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하니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과 권세와 은총을 마음껏 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정말 순진한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원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 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믿고, 똥을 된장이라 그래도 믿어야 합니다. 이해가 안되고 믿고, 불가능해보여도 믿고, 경험에 맞지 않아도 믿고, 세상 이치와 거꾸로 말씀해도 믿고, 죽어도 믿고 살아도 믿고, 망해도 믿고 흥해도 믿고, 잘되도 믿고 안되도 믿고, 그냥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이 순수한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런 순수한 믿음을 가질 때에 정말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는 능력있는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여러분. 하나님은 경험이나 이성이나 과학이나 이런 따위에 얽매이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것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런 것들을 다스리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지식이나 지혜나 이성이나 과학이나 경험 따위는 내려놓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 믿음의 소유자가에게 능력이 있습니다. 구원이 있습니다. 은혜가 있습니다. 그 은혜와 능력과 지혜로 그 어떤 상황과 환경도 어떤 장애물도 이기게 됩니다. 어떤 죄의 권세나 마귀 사탄의 유혹도 이기게 됩니다. 사람이든 물질이든 문화이든 이성이든 그 어떤 것이든 주님의 능력과 지혜로 이기고 승리하게 됩니다. 모든 죽음의 권세, 지옥의 권세, 어둠의 권세, 물질의 권세, 죄의 권세, 유혹의 권세, 상황과 환경의 권세, 그 밖의 다른 모든 권세를 넉넉히 이기고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주님께 대한 순수한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심으로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세상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믿음이 우리 삶을 이끌어가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렇게 순수한 영혼으로 예수님을 믿고 은혜를 받아야 하는데 그리고 나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런 순수한 믿음의 삶의 원리가 우리 삶 전체를 지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세상이 아무리 왜곡되고 변질되고 죄악 가운데로 흘러간다고 해도 우리는 결코 그런 세상의 삶의 원리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원리를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의 현실은 그런 삶을 살기가 너무나 힘든 세대입니다. 세상이 너무나 변질되어 있어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죄되고 무지하고 왜곡된 가치관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돈이 하나님보다 우선시되고, 인간의 욕구가 주님의 요구보다 우선되고, 감각적이고 쾌락적인 것이 진리보다 우선 되고, 주님의 말씀과 뜻보다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것들이 우선 되고, 하나님보다 사람을 우선시 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죄악과 부조리와 왜곡된 가치와 사상과 현상들이 판을 치고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세상에 만연된 그런 왜곡된 풍조속에 그냥 묻혀서 휩쓸려 갈때가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박고 그 말씀을 따라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세월이 어떻게 변해도,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도, 환경과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어도 해도 우리는 오직 예수님께 대한 믿음안에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해 주신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영혼이 살고 생명의 은혜와 능력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여러분, 오늘 17절 말씀을 보십시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 하나님의 의는 말그대로 하나님의 옳으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죄에 대한 심판, 인류의 죄를 사하시고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모든 것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복음을 믿는 자는 그 하나님의 의를 덧입어서 의롭다 인정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인침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혼이 살고 마음이 살고 육신이 살아 진정 살아있는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믿음으로 말미암아 몸과 마음과 영혼이 살아나면 또한 마땅히 그 살아있는 몸과 마음과 영혼을 가지고 그 믿음을 따라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영혼이 살아난다는 말씀이요, 이차적으로 그렇게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난 영혼을 가지고 믿음을 따라 살아감으로써 생명력있는 삶을 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았습니다. 영혼이 살아나고, 마음이 살아나고, 육체가 영원한 구원의 은총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영혼이 살고, 마음이 살고, 육신이 살았으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두말할 나위도 없이 그 새롭게 산 영혼과 마음과 육신으로 세상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이든 환경이든 간에 예수님께 대한 믿음으로 그 말씀과 삶의 원리를 따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월이 어떻게 흘러가든지, 사람들이 어떤 삶의 양식을 가지고 살든지, 대세가 어떻게 흘러가든지, 심지어는 교회가 어떻게 하든지 우리는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 딱 달라붙어서 그 말씀과 그 원리와 그 삶이 우리의 생각과 행동과 삶을 이끌어가는 원리요 지침이요 푯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때 진정한 승리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녹은 그 왜곡된 세상에서도 철저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으로 옮겨졌습니다. 노아는 온갖 어려운 현실속에서도 믿음으로 120년간 방주를 지어 온 인류가 멸망하는 중에 온 가족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믿음으로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엘리야는 온갖 핍박과 고난 속에서도 믿음으로 사명을 감당하다가 병거타고 승천하였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계속되는 핍박속에서도 오로지 믿음으로 신실하게 대처함으로 성왕이 되었습니다. 다니엘은 믿음으로 왕의 산해진미를 거부하고, 믿음으로 기도하다가 사자굴에 던져졌으나 사자들의 입을 봉하여 승리하였습니다.

 

요셉은 또 어떠했습니까? 그는 형들의 시기 때문에 억울하게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같이 대항 원망 불평 낙심 절망 한탄 통곡 증오하지 않고 믿음으로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보디발 장군 집에서 종으로 팔려갔지만 역시 원망 불평이 아니라 믿음으로 성실하게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주인의 신임을 받아 가정의 총무가 되지만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하는데 요셉이 꿈쩍도 안하니까 원한을 품고 도리어 요셉에게 누명을 뒤집어 씌워 또 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러나 그래도 원망이나 불평이 아니라 믿음으로 묵묵히 성실하게 임하여 또 감옥의 총무가 됩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하나님이 주시는 지헤와 능력으로 바로의 꿈을 알려주고 그 대비책까지 세워주어 일약 애굽의 총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선하심과 인도하심과 역사하심과 선하심을 믿고 모든 걸 하나님께 맡기며 그저 하나님의 말씀대로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고 이것이 승리의 비결인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순수한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능력과 지혜와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그래서 완전히 신뢰할만 하고, 완전히 따를 만하고, 그 안에 완전한 구원과 생명과 은혜가 있습니다. 이런 주님을 믿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갈 때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능력과 지혜와 기쁨과 은혜속에서 세상 모든 것을 이기는 자들이 됩니다. 죄의 권세, 사망의 권세, 지옥의 권세, 마귀의 권세 뿐만 아니라 모든 상황과 환경도 이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정말 순수한 믿음으로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과 형편에서든 주님을 갓난아기와 같이 믿고 의지하고 따를 때에 정말 성령충만 은혜충만 능력충만 감사충만 기쁨충만 사랑충만 지혜충만함으로 세상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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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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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설교 / 십자가의 승리 (September,Sunday Sermon)

 

제목 : 성령 세례를 받읍시다.

 

말씀 : 1:4,5

 

1.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여러분, 사람은 누구나 먹고 싶은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보고 싶은 것도 많고 얻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재물도 얻고 싶고, 건강도 얻고 싶습니다. 기왕이면 권세도 얻고 싶습니다. 기왕이면 예쁜 부인이나 백마 탄 왕자같은 남편도 얻고 싶습니다. 평안도 자유도 즐거움도 기쁨도 사랑도 존중도 받고 싶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다 좋은 것을 누리며 사랑과 축복과 기쁨 속에 살기를 원하기 때문에 당연한 일입니다. 또 그렇게 뭔가 좋은 것들을 누리고 싶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얻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게 됨으로 좀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동기가 됨으로 이러한 것들에 대한 건전한 추구는 도리어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도 열심히 노력해서 얻고 누려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정말로 이러한 것들보다 더 우선해서 받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도 우리 인생에게 보템과 유익과 기쁨이 되지만 그보다 더욱 보템과 유익과 은혜와 기쁨을 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을 받아야 우리는 인생의 충만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연인으로서의 인간 영혼은 죄와 무지속에 있어서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축복의 길을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말 우리 인간 영혼이 하나님의 고귀한 형상으로서 누릴 수 있는 그 엄청난 축복들을 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영, 생명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우리 심령속에 들어오셔서 우리 심령속의 굳어지고 무지한 것들을 깨트려 버리고, 죄된 것들을 씻어 버려야 비로소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알게 되면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보이게 되고 예수님 믿고 정말로 그 안에 있는 그 놀라운 생명 은혜 기쁨 자유 평안을 마음껏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세상에서 천만금을 얻을 것보다도, 천하제일의 권세를 얻은 것보다도 비교할 수 없는 생명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는 인생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4절 말씀을 보십시오.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무엇을 기다리라? 아버지께서 약속한 것. 그게 뭡니까? 성령입니다. 14:16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바로 이 약속하신 성령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 성령을 받아야 너희들이 나를 바르게 알고 사명을 힘있게 감당할 수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가 약속하 것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받아야 죄로 말미암아 더러워진 심령이 깨끗해져서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이 보이게 됩니다. 하나님이 보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리고, 천국이 보이게 됩니다. 그래야 자신을 알고 인생의 목적과 방향을 알게 됩니다. 성령을 받아야 예수님을 믿게 되고 그래서 성령의 역사하심 가운데 생명과 기쁨과 평강과 위로 속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어떤 상황이나 환경이나 위협이나 유혹도 넉넉히 이기고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다 도망던 제자들, 심지어 예수님을 모른다고 저주하고 맹세까지 하며 부인했던 베드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믿지를 못했던 제자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한곳에 모여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있던 제자들도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다가 성령 충만함을 받은 다음에는 완전히 180도 달라겼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자 예수님의 부활이 믿어지고 하늘나라가 보였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참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두려워서 걸어 잠갔던 문을 열어젖히고 밖으로 뛰어나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 그러나 부활하셨다. 이 분이 그리스도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라고 힘차게 외쳤습니다. 유대종교지도자들이 죽이겠다고 위협하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게 옳으냐 너희들 말 듣는 게 옳으냐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하루에 삼천명 오천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가 세워졌고, 계속해서 성령의 능력을 받은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의 헌신을 통하여 또 다른 교회가 세워지고 오늘날 저와 여러분에게 까지 이 복음의 역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성령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20:22절을 보겠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돈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지식을 얻는 것도 좋지만 그러나 그보다 먼저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 받아야 죄사함 받습니다. 그래야 심령이 깨끗해 집니다. 그래야 눈이 밝아집니다. 천국이 밝게 보입니다. 선과 악을 바르게 분별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똑똑하게 들립니다. 지혜와 능력과 분별력을 갖게 됩니다. 상황과 환경을 이깁니다. 죄와 유혹을 이깁니다. 능력있게 생명있게 담대하게 천성을 향하여 나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생명의 은혜가 풍성한 복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을 구하기 전에 먼저 성령의 충만함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생명의 영이요, 진리의 영이요, 지혜의 영이요, 능력의 영이신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따라 생명과 진리와 능력이 충만한 복된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됩니까?

 

2.교회를 가까이 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려면 교회를 가까이 해야 합니다. 여러분, 교회가 뭡니까? 누누이 말씀드렸지만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1:23절이지요.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교회는 주님의 몸이기 때문에 만물을 충만케하시는 이 곧 예수 그리스도 곧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사랑, 예수님의 은혜, 예수님의 생각, 예수님의 지혜, 예수님의 능력으로 가득한 곳이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지상교회는 온전치 못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교회 안에 만이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예배가 있습니다. 주님의 삶과 주님의 가르침과 주님의 뜻을 가르쳐 주는 곳은 오직 교회 뿐입니다. 그러니 이런 주님의 몸된 교회를 가까이해야 성령 충만 받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앞에서 보았던 4절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예루살렘은 어떤 곳입니까?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던 모리아 산입니다.(22:2) 다윗이 장막을 치고 언약궤를 모셔두었던 곳입니다.(대상15:1)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곳입니다.(대하3:1)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 인류구원의 역사를 이루신 곳입니다. 즉 예루살렘은 인류구원의 역사의 중심에 서 있는 거룩한 성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이 있는 곳, 말씀이 있는 곳, 하나님의 특별하신 임재가 있는 곳,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안에 머물며 더욱 말씀 위에 서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성령의 능력을 덧입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지금까지는 너희 연약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제자의 사명을 감당할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의 예루살렘은 어디 입니까? 교회밖에 더 있겠습니까. 주님의 피값으로 세우신 곳,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 예배와 기도와 말씀과 찬양과 전도와 섬김과 봉사가 있는 곳입니다. 이런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봉사와 섬김 등으로 주님과 교제하고 성도와 교제할 때 성령을 받지 못한 자는 성령을 받게 되고, 이미 받은 자는 더욱 충만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의 충만하게 받은 사람은 생명의 은총이 있고 기쁨이 있고 사랑과 은혜가 충만한 가운데 주님의 능력으로 승리하며 주의 사역 힘있게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주님의 몸된 교회,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섬김이 있는 교회, 그래서 이 땅에서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유일한 기관인 교회를 가까이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다른 어떤 곳을 가까이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보다도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섬기고 교제하는 일을 기뻐하고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정말 말씀과 사랑과 은혜와 기도와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교제할 때에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어 정말로 생명과 기쁨과 자유와 평강과 위로와 소망이 넘쳐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기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 교회를 가까이 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그 중에 하나는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제자들이 언제 참 제자가 되었습니까? 앞서 말씀드린대로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나서부터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었습니까? 기도에 힘쓸 때였습니다.

 

1:14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제자들이 예수님의 분부를 따라 예수님을 따르는 다른 많은 분들과 더불어 마가의 다락방에서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열흘이 지났을 때 드디어 오순절 날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후 제자들은 능력있는 제자들이 되어 놀라운 복음의 역사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즉 기도할때에 그들은 성령의 능력을 받았고, 기도로 성령의 능력을 받은 이후 능력있는 제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여러분, 9:29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어느 날 예수님은 산에 기도하러 가시고 제자들만 남았는데 어떤 아버지가 귀신 들린 소년을 데리고 와서 제자들에게 고쳐달라고 하였지만 못고쳐 주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이 오셔서 귀신아 나가가 한마디 하니까 귀신이 줄행랑을 쳤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우리는 왜 못쫓았습니까, 그러니까 기도외에는 이런 류가 나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너희 믿음의 기도를 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기도할 때에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이런 모든 잡류들, 더러운 것들, 추한 것들, 유혹들, 마귀의 장난들 다 물리쳐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기도하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수요기도회, 새벽기도회에 열심히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는 영적인 호흡입니다.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말씀을 듣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살피는 시간입니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하여 하나님의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성도들과 신령한 교제를 나눌 때 성령의 능력을 덧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감히 더럽고 추하고 악한 것들이 대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깨어 기도하며 주님과 온전한 교제를 이룰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모든 더럽고 추하고 악한 것들을 물리쳐 버리고 더욱 큰 감사과 기쁨과 은혜와 능력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겸손히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교회를 가까이 한다는 것은 또한 말씀을 듣고 받기 위함입니다. 그럴 때 성령의 능력을 덧입게 되는 것입니다. 10:44절을 보겠습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이 말씀은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의 가정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 사실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넬료는 환상 중에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온 가족과 친척과 친구들까지 불러 모아놓고 베드로를 모셔옵니다. 베드로가 도착하자 밖으로 나가 발 앞에 절하고 모셔 들이고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자 그 말씀을 들을 때에 말씀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이 역사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정말 사모하는 마음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고넬료는 베드로가 오자 그 발아래 엎드려서 절했습니다. 가족은 물론 친척, 친구들까지 모아놓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만큼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 앞에 엎드렸다는 것입니다. 그 때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사모하는 마음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내 생각과 가치관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귀를 기울기시기 바랍니다. 생명의 말씀, 은혜의 말씀, 능력의 말씀 앞에 조용히 무릅꿇고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곳에 은혜가 있습니다. 능력이 나타납니다. 다윗은 얼마나 말씀을 사모했는지 말씀이 송이꿀보다도 더 달다고 하였습니다. 새벽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말씀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위대한 신앙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저와 여러분은 더욱 말씀 앞에 겸손히 엎드리고, 말씀에 귀를 기울여 말씀의 은혜로 내 심령이 밝아지고 희망과 은혜가 넘치고 능력이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성령의 지배 속에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할 이유는 기본적으로 그래야 믿음을 갖게 되고 나아가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운데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뿐이 아닙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온전히 성령의 지배속에서 살면서 능력있는 신앙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진정한 능력이 어디서 나오겠습니까? 세상에서는 돈이 힘이고 권력이 힘이고 아는 것이 힘이라고 하지만 그게 진짜 힘이 아닙니다. 진짜 힘은 죄를 이기는 힘입니다. 사탄의 권세를 이기는 힘입니다. 상황과 환경과 유혹과 핍박과 죽음을 이기는 힘입니다. 그런 힘이 어디서 나옵니까? 성령의 충만함에서 오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며 세상의 모든 것, 심지어는 죽음도 마귀사탄의 권세도 모두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못하면 아무리 돈과 명예와 권세가 있어도 결국 지는 자가 됩니다. 심지어 아무리 고상하게 종교생활해도, 교회가 아무리 웅장해도 성령의 능력을 받지 못하면 힘이 없습니다. 환난풍파 몰아치면 무너집니다. 세상의 유혹앞에 속절없이 무너져 내립니다.

 

그래서 엡5:18절에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술 취하지 말라. 술의 지배를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술은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무감각하게 만듭니다. 혼란스럽게 만들고 분별력을 희미하게 만듭니다. 영적 도덕적 윤리적 감각을 무디게 만듭니다. 술 뿐아니라 세상의 것들이 다 그렇습니다. 향락과 오락은 말할 것도 없고 물질과 명예와 지식과 권세와 이런 것들도 그렇습니다. 그런 것들에 취하면 마침내 감각이 무디어지고 영혼이 황폐해지고 그러다 마침내 죽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에 취하지 말고 성령으로 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성령은 살리는 영이니까. 지혜의 영이니까, 생명의 영이니까, 사랑의 영이니까, 은혜의 영이니까, 화평과 위로와 소망과 자비의 영이니까, 이런 영으로 충만해야 비로소 올바른 분별력이 생기고 기쁨과 은혜와 사랑과 능력이 충만해 지니까, 그러므로 성령 충만함을 받아서 성령의 역사하심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세상의 다른 것으로 취하지 말고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능력을 맛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정말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 물밀 듯 쏟아져 내려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쏟아져 내려오는 완전한 생명의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세상의 돈이나 명예나 권세나 지식이나 그까짓 술이나 향락이나 오락이나 이런 것들이 주는 기쁨과는 비교도 할 수 없습니다. 이 기쁨은 영원한 기쁨입니다. 모든 상황과 환경과 조건을 이기는 기쁨입니다. 모든 더러운 것과 추한 것들과 죄와 유혹과 핍박을 이기는 고상하고 아름답고 거룩한 기쁨입니다. 그러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되는 퍼펙트한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을 구하기에 앞서 성령의 충만함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위하여 교회를 가까이 하고 말씀과 기도와 찬양으로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정말 한분도 빠짐없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세상의 모든 죄와 추한 것들과 환난과 환경과 상황과 조건을 이기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영원한 생명과 기쁨과 감사와 평강과 위로 소망이 충만한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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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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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은혜받은 믿음

 

말씀 : 20:1~16

 

1.포도원품 꾼의 비유의 의미

 

오늘 본문은 유명한 포도원 품꾼의 비유입니다. 어느 날 포도원 주인이 포도를 한창 수확할 시기에 일손이 너무 부족하여 장터로 품꾼을 데리러 나갔습니다. 처음에는 아침 일찍 즉 0(오전 6)나가 몇 명을 불러 포도원으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일손이 부족하여 3(오전9)에 장터에 가서 사람들을 불러 가서 일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계속 일손이 부족하여 육시, 구시, 심지어 십일시 즉 오후5시에도 가서 일꾼을 불러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라하고 하였습니다.

 

드디어 십이시 즉 오후 6시가 되어 일을 마치고 품삯을 주는데 먼저 제일 늦게 온 사람 즉 1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에게 하루 품삯인 1데나리온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아침부터 일찍 와서 열심히 일한 다른 품꾼들이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저 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받으면 우리는 훨씬 더 받겠구나.’하고 은근히 기대를 하며 품삯을 받으러 갔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한 데나리온 밖에 주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주인에게 따집니다. ‘아니, 이 사람은 다 저녁때 와서 겨우 한시간 밖에 일하지 않았고 우리는 하루종일 12시간 동안이나 뙤약볕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일했는데 어떻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 밖에 안 줍니까?’ 그러자 주인이 말합니다. ‘내가 너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냐? 애시당초 너희와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고 일하지 않았느냐? 나중에 온 저 사람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준 것은 그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선을 행한 것이어늘 너는 너는 내가 저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준 것을 악하게 보느냐? 너는 네가 받아야 할 것을 정당하게 받은 것이니 네 것이나 가지고 가거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비유의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1절을 보겠습니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여러분, ‘천국은 마치하시면서 이 비유의 말씀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비유는 무엇에 대하여 우리에게 가르쳐주려고 하신 것입니까? 그렇죠. 천국에 대해서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의미입니다. 천국이 있다. 천국을 믿어라. 천국을 믿고 천국시민으로 살아라 그런 이야기죠.

 

그 다음에는 포도원주인이 새벽6, 아침9, 정오, 오후3, 오후5시에 계속 품꾼을 찾으러 나갔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포도원 주인은 물론 하나님이시오, 품꾼은 우리들입니다. 포도원주인이 계속 품꾼을 찾으러 갔다는 것은 우선은 하나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천국으로 보내시기 위하여 계속해서 우리를 찾아와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의미로 하나님은 우리를 천국으로 보내시기 위하여 계속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천국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다른 것은 몰라도 천국은 반드시 소유하야 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시려고 끊임없이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세 번째 의미는 우리를 그렇게 계속 찾아오시는 것은 우선은 우리를 천국백성으로 삼기 위해서 이지만 단순히 그것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꾼으로 세우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품꾼이 일꾼 아닙니까? 우리를 하늘나라 일꾼으로 세우셔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데 참여시키려고 부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 의미는 저녁때가 되어 품삯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저녁때란 우리에게 활동할 수 있도록 주어진 시간이 다 지나고 하나님품으로 갈때를 말합니다. 그때에는 우리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그 삯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포도원 품꾼의 비유의 말씀의 교훈인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며 첫째는 천국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이요, 두 번째는 천국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은혜로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이요, 셋째, 그렇게 천국백성이 되었으면 그 너무나 소중한 하늘나라를 위해 일해야 한다는 것이며, 네 번째는 그렇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하나님 뜻안에서 살아갈 때에 천국은 물론 큰 상급까지 주신다는 것입니다.

 

2.예수님은 천국을 가장 강조하셨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하여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천국은 반드시 존재한다. 천국은 예수님이 다른 어떤 것보다고 강조해서 말씀하신 가장 중요한 명제다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약성경에 보면 천국 혹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씀이 60여차례 나오는데 대부분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4:17절에서는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 제일 먼저 하셨던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습니다. 4:23절에서는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다고 하셨습니다. 5장의 팔복에서는 계속해서 어떻게 어떻게 하면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16:19절에서는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22:2절에서는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25:1절에서는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고 하시는 등 수없이 천국에 대하여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계속해서 천국에 대하여 강조하고 계십니까? 두말할나위도 없이 천국이 반드시 존재하고, 천국이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수 없는 가장 중차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천국을 주시려고 오셨고 그것에 대하여 계속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조차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꾸 강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13:44절을 보십시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한마디로 천국은 우리의 전 재산을 다 팔아서라도, 아니 우리의 육체의 생명을 팔아서라도 반드시 사들여야 할 가장 중요한 재산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정말로 천국을 바르게 알고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천국이 신앙생활의 목적입니다. 물론 지금 여기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느냐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원한 천국입니다. 천국이 궁극의 목적이고, 궁극적 종착점이며, 우리가 마침내 들어가 살아야 할 영원하고 완전한 복락의 본향집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천국 천국 그러면 아주 유치한 것으로 알고 뭐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철학적으로 고상하고 선하면 대단한 것으로 압니다. 성경을 요리조리 분해하고 쪼개고 뭐 그럴듯한 말을 하면 대단한 것으로 알고 천국을 이야기하면 시원치 않게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닙니다. 무슨 대단한 미사여구를 사용하고 무슨 아주 심오한 철학적인 이치를 말하고 요리조리 분석해보고 쪼개보고 무슨 심오한 철학적 이론을 대입해봐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합니다. 간단명료합니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내가 세상의 빛이다. 나를 믿으라.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산다. 나는 다시 온다. 믿는 자는 생명의 부활로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온다. 그러므로 나를 믿고 나를 따르라. 보화를 땅에 쌓지 말라. 하늘에 쌓으라. 그냥 단순명료한 화법을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냥 그 단순명료한 명제를 그대로 믿고 따르면 되는 것이지 거기에 무슨 다른 해석이나 주석이나 조건을 붙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냥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그토록 강조하신 천국을 확실히 믿고 공연히 이것 저것 갖다 붙이지 말고 그냥 단순무식하게 천국의 법과 원리와 규범과 목적과 가치를 따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영원한 천국의 은총을 누리는 것은 물론 지금 여기서도 높은 산이 거친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찬양하며 모든 상황과 환경과 조건을 초월하여 현재적 천국와 영원한 천국을 마음껏 맛보며 감사와 기쁨과 소망과 위로를 마음껏 맛보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하나님은 열심히 우리를 찾고 게십니다.

 

그렇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와같이 천국은 우리에게 있어서 다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한 명제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천국에 가기를 간절히 원하셔서 열심히 우리를 찾아오셔서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계십니다.

 

오늘 1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보십시오. 포도원 주인이 이른 아침에 직접 집을 나가 품꾼을 찾았습니다. 여기서 포도원의 의미는 이중적입니다. 하나는 이 땅에 이루어진 현재적인 천국이요, 다른 하나는 영원한 천국입니다. 다시 말해 일단 하나님을 믿으면 현재적 천국을 누리다가 마침내 예수님께서 오실 때에 영원한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천국의 놀라우신 은총을 주시기 위하여 이른 아침부터 저녁 해가 저물 때까지 일꾼을 찾고 계신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른 아침에 집을 나가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삼시 육시 구시 열한시까지 계속 일꾼을 부르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포도원 들여보내시려고 새벽부터 저녁까지 계속 찾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포도원 들어가기만 하면 우리는 그 놀라운 천국의 은총을 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 천국의 은총을 누리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끊임없이 찾아오셔서 우리를 만나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죄와 무지 속에 신음하고 있는 인생을 찾아오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과 먹고 죄에 빠져 두려움 속에 숨어있는 아담을 찾아와 만나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을 찾아와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수많은 선지자를 보내어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까지 보내주셔서 우리를 찾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도 제가 비록 부족하지만 제 입술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되게 함으로 여러분을 찾아가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런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그 놀라우신 사랑과 열정으로 살게 된 것입니다. 정말 너무 약하고 추하고 때로는 정말 악하기까지 한 우리들이지만 이렇게 찾아오셔서 불러주시고 은혜주셔서 그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고,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운데 살게 된 것입니다. 내가 무슨 큰 능력이 있어서, 무슨 구원받을 만한 선행이나 공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오직 우리를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그 은혜로 말미암아 살게 되었고 구원받고 천국시민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저와 여러분은 이 놀라우신 은총을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그 앞에 겸손히 엎드려 절하며 그 놀라우신 사랑과 은혜를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살아숨쉬고 천국백성되어 영광의 나라를 향하여 나아가게 된 것은 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하며 오로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며 겸손히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정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고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큰 은혜를 채워주시는 그 은총을 덧입어 정말 감사와 기쁨과 은혜와 찬양이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은혜 받았으면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포도원으로 부르시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포도원에 들어와 풍성한 것을 누리게 하려 함임과 동시에 우리를 포도원 품꾼으로 쓰시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오늘 1절 말씀을 또 보십시오. 오늘 비유의 말씀의 핵심을 모두 1절에 다 들어있습니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무엇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 보낸다? 품꾼입니다. 품꾼이 뭐하는 사람입니까? 일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일만 시키려는 것은 아닙니다. 포도원에서 주인의 보호와 인도와 사랑을 받으며 살게 됩니다. 그리고 일한 연후에는 삯도 받습니다. 그런데 그런 은혜를 받았으면 그리고 그러한 삯을 받으려면 마땅히 자신이 있는 그곳에서 열심히 일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포도원에 살게 하신 것은 첫 번째는 하나님의 동산의 은총을 누리게 하려 하심이, 두 번째는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기까지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동산에서 일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동산을 가꿈으로 또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동산의 은총을 주기 위해서 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열심히 하나님의 동산에 서 수고하다가 일을 그칠 때가 오는데 그때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한대로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는 새벽 6시에 온 사람이나 오후5시에 온 사람이나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셨다고 말씀함으로 마치 1시간 일한 사람이나 12시간 일한 사람이나 무조건 똑같이 주는 것처럼 생각할지 모르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많이 했다고 자랑하지도 말고 적게 했다고 낙심하지도 말고 그저 주어진 시간 동안 부름 받은 그 시간와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라는 말씀이지 무조건 똑같이 주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22:12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큰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면 마땅히 은혜를 받은 자로서의 삶이 있어야 합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그 은혜를 누리며 그 은혜의 역사를 위하여 수고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면 내려놓아야 할 짐이 있고, 반면에 새롭게 짊어져야 할 짐이 생깁니다. 11:28~30절을 보겠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여러분, 보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즉 인생의 모든 수고와 무거운 짐을 맡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그저 먹고 마시고 입고 잠자고 육신의 것만을 위해서 사생결단하며 살아가는 무거운 짐을 벗겨 주겠다는 것입니다. 또한 죄와 근심과 걱정과 염려의 무거운 짐도 벗겨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쉼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면에 나의 멍에를 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멍에는 뭡니까? 생명의 역사를 위한 멍에, 사랑의 멍에, 헌신의 멍에입니다. 생명과 진리와 평안과 참된 기쁨을 위한 멍에입니다. 그러면 왜 어떤 짐은 벗으라 하시고 어떤 짐은 지라고 하십니까? 물론 이유는 간단합니다. 세상의 짐과 죄의 짐은 우리를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고 생명을 죽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이 주시는 짐은 생명을 살리고 기쁨과 은혜와 능력과 희망과 소망과 위로를 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분명히 그렇습니다. 우리를 죽이는 짐이 있고 살리는 짐이 있습니다. 죽이는 짐은 뭡니까? 죄의 짐입니다. 그저 육신의 영광만을 위하여 수고하는 짐입니다, 육신의 정욕을 채우기 위하여 지는 짐입니다. 그러면 살리는 짐은 어떤 짐입니까? 사랑의 짐입니다. 진리를 위한 짐입니다. 생명의 역사를 위한 짐입니다. 이런 짐들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기쁨을 주고 은혜를 주고 참된 가치를 가져다 줍니다. 긍지와 자부심과 자존감과 뿌듯함을 가져다 줍니다. 나를 행복하게 하고 남을 행복하고 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부모는 자녀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자녀를 위하여 짐을 지면서 행복해 합니다. 남녀가 서로 사랑하면 서로를 사랑하기 때문에 서로를 위해서 짐을 지면서 행복해 합니다. 자신이나 남에게 생명과 기쁨과 은혜와 행복을 주는 짐을 지고 나면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자신만을 위한 짐, 심지어는 죄를 행하며 지는 짐은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도리어 결국 자신과 남을 죽게 만듭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런 세상의 모든 짐은 내게 맡기고 내가 너에게 주는 생명의 짐, 사랑의 짐, 진리를 위한 짐을 지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럴 때 영원한 천국의 은총을 누림은 물론 지금 여기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충만하게 이루어져 사랑과 기쁨과 위로와 소망과 행복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천국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천국이 우리의 삶의 중심에 있게 하시기 바랍니다. 아직 천국을 확실히 알지 못하는 분들을 위하여 더욱 사랑과 말씀과 기도로 관심을 쏟음으로 온 가족과 모든 교우들이 한분도 빠짐없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우선해서 하늘나라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렇게 천국의 은총을 누리게 되었으면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총을 이라는 점을 잊지 말고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각자 주어진 자리에서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포도원을 가꾸는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힘있게 이루어가는 가운데 주님의 거룩한 생명의 역사에 참여하는 자로서 누릴 수 있는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과 은혜와 보람과 가치와 의미와 행복을 누리며 현재적인 천국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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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수요저녁설교 (September,Wednesday Worship Sermon)

제목/절대기쁨을 누리는 방법

성경/빌1:15-18

 

● 신앙생활 하다보면 늘 즐겁고, 늘 기쁘고, 늘 은혜 속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저런 일 때문에 교회 안에서 상처를 입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일을 하느냐 마느냐 고민하기도 하고, 심하면 교회를 떠나야 하느냐 마느냐 갈등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상처의 대부분이 사람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예배드리고 은혜를 받고 봉사하면 문제 될 것이 없는데, 그런 일에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것이 바로 사람입니다. 그것도 같이 신앙생활하며 예배 하는 가까운 사람들 때문에 신앙에 장애가 되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신앙의 평정심을 잊지 않고 기쁨을 누리며 시험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본문을 통해서 잠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 오늘 본문 속에서 바울이 어떤 상황 속에 놓인 것을 알게 됩니까? 15절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옥에 갇혔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바울을 시기하고 질투했던 사람들의 반응과 바울을 좋아하고 따르던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바울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좋아 했겠습니까?

 

▶ 바울을 좋아하고 따르던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서는 16절에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한다.”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하나님께서 복음을 위하여 세우심을 입은 사람임을 기억하고 바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더욱더 애정을 갖고 바울이 하던 복음 사역에 더욱 열심을 냅니다.

 

▶ 반면에 바울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서는 17절에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 옥에 갇힘으로 바울의 명성이 크게 손상되고 위축되었다고 생각하고 이 틈을 타서 자신들의 명성과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복음 사역에 열심을 내는 사람들입니다.

 

만일 우리가 바울과 같은 상황 속에 놓인다면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불쾌하게 생각하고, 이들로 인해서 마음이 많이 언짢을 겁니다. 왜냐하면 나의 어려운 상황을 이용하여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고, 나를 넘어서는 지지를 받기 위해 애를 쓴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울과 같은 상황이 아니라도 그런 사람을 보게 된다면 그 열심히 순순하지 않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볼 것입니다.

 

▶ 선배 목사님들이 하시는 말씀 중에 부교역자를 선택할 때는 설교를 못하는 사람을 선택하라고 말씀합니다. 부교역자가 담임목사님보다 설교를 잘하면 성도들이 담임목사님 보다 부교역자를 더 좋아하고 따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혹여 교회에 문제라도 생기면 그 부교역자를 따라 교회를 나가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만일 그런 마음으로 부교역자를 선택했을 때 마음 불편 할 것입니다. 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 쓰이고, 눈에 거슬릴 것입니다. 혹여 집사님들이랑 모여 웃으며 이야기를 하게 되면 그 부교역자는 미운털이 박히게 됩니다. 그 속에서 기쁨이 있겠습니까? 어렵습니다.

지금 바울이 그런 상황입니다. 자신의 입지는 좁아지고, 자신을 시기하고 질투하던 사람들이 이 일을 틈타 복음 전파 사역에 열심을 냅니다. 그 속에서 바울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18절 말씀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 바울은 자신을 좋아하고 따르는 사람들의 마음으로 하던, 혹은 자신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으로 하던 복음에 대해서 열심을 품고 전파하는 일에 대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핵심이 무엇입니까? 복음 사역은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1. 사역을 중단하지 말라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사람들 때문에 기쁨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어떤 이유로든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은 중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귀가 성도들을 시험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중단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배를 중단하게 만들고, 기도를 중단하게 만들고, 헌신을 중단하게 만들고, 주일성수를 중단하게 만들고, 십일조를 중단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상황들과 핑계 거리를 만들어서 지금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역을 중단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 이유들이 합당할 수 있습니다. 아파서 못한다, 바빠서 못한다, 멀어서 못한다. 없어서 못한다. 그러나 중단하게 되면 하나님께로부터 흘러나오는 은혜의 기쁨은 누릴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역을 중단하면 안됩니다.

 

▶ 느헤미야서를 보면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할 때에 반대 세력들이 있었습니다. 산발랏과 도비야가 성벽 재건을 방해합니다. 회유를 하기도 하고, 조롱을 하기도 하고, 협박을 하기도 하고, 공격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벽 재건을 중단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성벽재건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한 손에는 병기를 잡고, 한 손으로는 일을 하면서 끝까지 성벽을 재건하였습니다. “성을 건축하는 자와 담부하는 자는 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는데”(느4:17)

 

▶ 고린도전서15:6을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목격한 오백여형제가 있었음을 말씀합니다. 누가복음24:49에서는 “볼찌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하시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정작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며 성령의 역사를 경험한 무리는 120명입니다. 나머지 380명은 어디로 갔을까요? 그들은 기도하며 기다리면서 마귀의 숫한 공격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것, 기다리는 것을 중단했을 것입니다. 중단하므로 그들은 성령의 뜨거운 역사를 경험할 수가 없었습니다.

 

각자 모양은 다르지만 중단하게 하는 것이 마귀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4:2)고 말씀합니다. 중단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역을 하다보면 반드시 열매를 보게 되어 있습니다.

 

2. 복음에만 집중하라

 

더불어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사람들 때문에 기쁨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는 복음에 집중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 앞에, 예수 그리스도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우리의 자존심도 있고, 우리의 체면도 있고, 우리의 이익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복음에만 집중하기 보다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내 자신의 체면을 생각하고, 우리의 어떤 유익들을 구하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입게 됩니다. 그러므로 복음에만 집중해야 하나님이 주시는 절대기쁨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오늘 본문 18절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 말씀을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놓치지 않고 누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한 사도 바울의 모습 속에서 먼저는 “복음을 전파 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정과 욕심을 내려놓고 “복음에만 집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도 바울과 같이 “복음에만 집중하여 복음전파 사역을 끝까지 감당”하므로 하나님이 주신 기쁨을 마음껏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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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수요저녁설교  가까이 감의 능력 (September,Wednesday Worship Sermon)

 

제목/가까이 감의 능력

성경/ 빌1:8-11  

 

●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 - 맹자의 어머님이 맹자를 위해 세 번 이사한 이야기/ 무덤가, 시장통, 서당옆 = 어디에 서 있느냐가 중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의 발이 어디에 서 있는가 점검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 8-11절 말씀을 중심으로 가까이 감의 능력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8절 말씀에 보면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는 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빌립보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하나님이 증인이라고 하는 바울의 사랑의 표현이 무엇입니까? “기도”입니다. 바울은 9절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내가 기도하노라” 가족을 사랑한다면, 자녀들을 사랑한다면, 교회를 사랑한다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필수적인 사랑의 표현은 “기도”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기도 없는 사랑은 가장 중요한 것을 놓쳐 버린 사랑의 표현입니다. (앙꼬 없는 찐빵)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감사할 것도 많고, 자랑할 것도 많지만 무엇보다 기도할 것도 많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해야 하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가장 큰 사랑의 표현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9절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기도의 내용이 “빌립보 성도들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풍성”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여기서 “지식”이란 단순한 앎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아는 지식”입니다. 유대인들은 체험적으로 아는 지식을 “야다”라고 하는데 그것은 부부간의 경험, 체험을 뜻합니다. 아주 구체적인 경험입니다. 창세기에 아담과 하와가 동침하였다라고 할 때 “동침”이란 단어가 바로 “야다”입니다. “총명”이란 “지식을 통한 바른 판단력”을 뜻합니다.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라는 말씀은 한마디로 “지식이 있는 사랑이 풍부”해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지식이 있는 사랑”을 통하여 “더 많은 기쁨”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하는 지식이 어떤 체험적 지식이겠습니까? 당연“하나님에 대한 지식”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풍부할 때 우리는 더 많은, 그리고 더 큰 기쁨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 그럼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풍부하게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성경공부를 많이 하면 됩니까? 물론 성경공부를 통하여 하나님을 많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기본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너무 커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우주를 볼 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확실하게 우주에 대해서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술이 그 만큼 발달하지 못하였기에 사용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망원경을 통해 보는 것입니다. 허블우주망원경이란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라도 가까이 하여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아주 멀리 떨어진 별들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 또한 아주 작아 볼 수 없는 미생물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가까이 가면 됩니다. 전자 현미경을 통해서 봅니다. 가까이 갈 때 볼 수 없는 것들을 볼 수 있고, 가까이 갈 때 느낄 수 없는 것들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갈 때 하나님을 경험적으로 체험적으로 알게 됩니다. 부지런한 발로, 기도 자리에 가고, 예배 자리에 가고, 전도 자리에 가고, 봉사 자리에 가고, 말씀이 있는 자리에 가면 하나님을 많이 경험 할 수 있습니다. 그 속에서 더 풍부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가까이 갈수록 잘 보이고, 크게 보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하나님이 크게 보입니다. 하나님만 보입니다. 그러면 다른 많은 문제들은 작게 보입니다.

 

시편 속에 다윗이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가까이 하므로 하나님만 그에게 보입니다. 그래서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라.”라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가까이 갈 때 문제는 작아지고 해결됩니다. ▶ 예수님을 따랐던 수많은 무리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무리들이 고침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가까이 가서 옷자락을 만진 여인만이 혈루병의 고침을 받았습니다. ▶ 예수님을 가까이 하여 예수님 발 앞에 앉아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긴 마리아만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그녀를 기념하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 야고보서4:8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 시편73: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

 

● 그렇게 하나님을 가까이 하므로“지식이 있는 사랑의 풍부함”으로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무엇 하기를 기도합니까? 10-11절 “10.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첫째는 선한 것을 분별하라고 합니다.

둘째는 진실하여 허물이 없게 하라고 합니다.

셋째는 의의 열매를 가득히 맺으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여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며 살아야 합니다. 더욱이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진실하게, 정직하게 살아야 함은 당연합니다. 언제까지 그러게 살아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해야 합니다. 그런 삶을 통해 “의의 열매”를 맺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빌립보 교회를 향한 바울의 기도이며, 오늘을 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부지런한 발이 필요합니다. 기도의 자리, 예배의 자리, 전도의 자리, 봉사의 자리, 선교의 자리에 우리가 어디에 와 있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하므로 지식이 있는 사랑을 통해 선한 것을 분별하며, 진실하여 의의 열매를 많이 맺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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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둘째주일 수요저녁예배설교 (September,Wednesday Worship Sermon)

 

제목/능력이 있는 기도는  

성경/빌1:3-5     

 

“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5.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 빌립보서를 살펴보고 있는데 빌립보서는 두 가지의 별칭이 있습니다. 하나는 바울이 로마의 옥중에서 썼다 하여 “옥중서신”이라는 것과 그 주제가 “기뻐하라”는 것에 맞추어져 있다하여 “기쁨의 서신”으로 불리 웁니다. 신앙의 능력, 믿음의 능력은 바로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는 기쁨에 있음을 빌립보서가 보여줍니다. 그 기쁨의 뿌리가 은혜와 평강임을 지난 시간에 보았습니다.

 

오늘은 “기도”라는 것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계시록 5:8, 8:3을 보면 기도에 대해서 표현하기를 하나님이 받으시는 향기라고 합니다.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계5:8)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계8:3)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는 능력 일 뿐 아니라 마귀를 대적하는 무기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를 살펴보면 참 많은 부분 속에서 무기력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럼 무기력한 우리의 기도를 어떻게 하면 능력 있는 기도로 만들 수 있을까? 본문을 통해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능력 있는 기도는 감사하는 기도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위한 기도 내용 가운데 한 부분이다. 바울은 자신의 모든 서신서에서 갈라디아서를 제외하고는 서두에 인사말을 하면서 반드시 기록하는 것이 감사에 대한 내용입니다. 본문 3절“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향기인데,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향기는 감사의 향기입니다. 이 감사의 기도는 우리에게 좋은 것들이 주어진 뒤에 하는 기도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감사할 조건이 있을 때 감사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감사의 기도는 어떤 상황이든 관계없이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전서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더불어 바울은 빌립보서4:6에서 반드시 감사로 기도할 것을 말씀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

 

다니엘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는 30일 동안 왕 외에 다른 사람이나 신에게 기도하는 자는 사자 굴에 넣을 것이란 (다리오) 왕의 어인에 찍힌 금령이 내려진 것을 알고도 여전히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6:10) 그렇다고 사자 굴에서 벗어났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굶주린 사자 굴에 던져집니다. 그러나 감사의 기도 때문에 하나님은 사자들의 입을 막아 버리십니다.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고 해서 모든 상황들이 180도 바뀌거나, 문제들이 없어지고, 대적들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감사의 기도는 나의 대적이 나를 넘어뜨릴 능력이 있어도 어찌 할 수 없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이러한 감사의 기도를 멈추지 않고 할 수 있는가? 우리가 우리를 생각하며 감사의 기도를 드릴 때는 한계가 있습니다. 왜요? 내가 나를 너무 잘 아니까? 하지만 믿음의 눈을 나에게서 다른 사람들에게 돌리면 감사의 내용들은 참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이 무엇이라고 기도합니까?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라고 말씀합니다.

 

 

▶▶ 이러한 감사의 기도를 잘 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들을 자꾸 생각하는 것입니다. 영어의 Think와 Thank의 어원이 같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들, 하나님께서 베푸신 것들을 자꾸 생각해 냄으로 감사의 기도를 잘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간을 방황하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갈 때에 하나님께서 요단강 가운데서 12개의 돌을 취하여 길갈에 세우라고 합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요단강에 건너게 하신 것을 기억하고 감사하게 만드시는 것 아닙니까?

 

 

▶▶ 더불어 감사의 기도를 잘하기 위해서는 먼저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실 것을 믿고 먼저 감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나타내실 때에 오천 명이 배부르게 먹고 12바구니가 남은 다음에 감사한 것이 아니라, 먼저 오병이어를 가지고 축사하시고 제자들에게 떼어 나누어 주라고 하심으로 오병이어의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주님께서도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3-24)

 

 

둘째로 능력 있는 기도는 기쁨하는 기도입니다.

 

 

기도는 앞에서 말씀 드렸듯이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는 능력 일 뿐 아니라 마귀를 대적하는 무기입니다. 이러한 기도를 더욱 강력하게 만드는 것이 기쁨으로 항상 기도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4절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기쁨으로 간구한다는 것은 자발적으로 즐거움으로 한다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기도를 할 때에 기쁨이 없다면 그것은 참으로 하기 힘든 노동중의 노동입니다. 그것만큼 힘든 일도 못할 것입니다. 차라리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하라고 하면 더 쉬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능력있는 기도는 기쁨으로 기도할 때 나타납니다.

 

 

▶ 사도행전 16장에서 사도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미하였다고(행16:25) 합니다. 어떻게 기도하며, 찬미했을까요? 억울해하며? 가슴을 치고 분해하며? 아마도 그들은 기쁨으로 기도하며 찬미했을 것입니다. 매를 맞았기 때문에 온 몸이 쑤시고 아프지만 예수님 때문에 당한 고난은 기쁨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군대에서 있었던 일 -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나를 믿어준 사건)

 

 

바울과 실라가 기쁨으로 기도한 기도의 능력이 무엇입니까? 그들을 막았던 옥문이 열리고, 손과 발을 묶었던 착고가 풀려지는 기적입니다. 우리가 기쁨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하면, 우리의 앞을 가로막고 우리를 붙잡고 있는 모든 문제들이 열리고 풀려질 것을 믿습니다.

 

 

● 말씀 정리

 

 

말씀을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속에서 참 많은 기도를 합니다. 그 기도 속에서 능력 있는 기도, 곧 응답받는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 가를 본문을 통해서 보았습니다.

 

 

먼저는 감사가 있는 기도가 능력 있는 기도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감사의 기도를 멈추지 않기 위해서는 나의 모습만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신앙생활하는 성도들을 바라보면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감사의 기도를 잘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고. 주실 줄로 믿고 먼저 감사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능력있는 기도는 기쁨으로 항상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자발적으로, 즐거움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가 능력있는 기도가 될 수 있도록 늘 감사하며, 늘 기뻐하며 항상 기도하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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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예배설교 ♡기쁨의 근원♡ (September,Wednesday Worship Sermon)

 

제목/하나님이 주신 기쁨의 근원

성경/빌1:1-2      

“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들어가기

 

 

빌립보서를 본문으로 하는 말씀을 많이 들어 보셨을 겁니다. 빌립보서와 관련되어 기억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빌립보서는 오늘날 그리스의 북동부에 있는 옛 도시입니다. BC 4세기에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필립에 의해 세워진 도시로서 금과 은이 풍부하고, 로마와 아시아를 연결하는 주요지점으로 상업과 문화의 도시였습니다.

 

 

빌립보는 바울이 2차 전도 여행을 하면서 아시아의 드로아에서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본 뒤에 오늘날 유럽인 당시의 마게도냐로 건너가 도착한 곳입니다. 그곳에서 자주 장사 루디아가 첫 번째 성도가 되었고, 점치는 여종의 귀신을 쫓아준 사건으로 인해 당시의 미풍양속을 헤친다는 이유 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 날 밤 지진이 나고 모든 죄수들이 도망간 줄 알고 간수가 자결하려고 할 때에 바울이 말리며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는 말씀을 듣고 간수와 그 가족들 모두가 예수를 영접하고 세례를 받으므로 빌립보 교회가 시작됩니다.

 

 

이러한 배경의 빌립보서는 두 가지 별명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옥중서신이라는 별명입니다. 바울이 로마의 옥에 갇혀 있으면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기록하였는데, 이것을 옥중서신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빌립보서의 또 다른 별명은 기쁨의 서신입니다. 4장으로 이루어진 빌립보서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바로 “기쁨”입니다. 빌립보서 말씀을 통하여서 어려운 시대 가운데 기쁨의 파도를 타는 성도들이되시기를 바랍니다.

 

 

▶ 그럼 왜 바울은 빌립보서를 썼을까요?

 

 

첫 번째 이유는 빌립보 교회가 로마의 옥에 갇힌 바울을 위로하려고 에바브로디도라를 선물과 함께 보냅니다. 그런데 에바브로디도가 바울과 함께 있는 동안 심한 병을 얻게 되어 죽을 지경까지 이르게 되고 빌립보로 돌아가는 일이 오랜 시간 지연되므로 그로인해 빌립보 교회에로부터 에바브로디도가 비난을 받지 않도록하기 위해서 빌립보서를 써서 에바브로디도 편에 붙입니다.

 

 

둘째로 빌립보서를 쓴 이유는 바울의 모든 선교 사역에서 빌립보 교회가 앞장서서 바울을 도와주었기 때문(빌1:5, 4:15, 고후8:1)에 감사함을 전하기 위해 빌립보서를 썼습니다.

 

 

세 번째로 빌립보 교회에 “유오디오와 순두게”라는 중요한 여인이 있었는데, 이들로 인한 교회의 분열을 막고(빌4:2), 거짓교사들(빌3:2)로 인한 교회의 혼란을 막기 위해서 빌립보서를 기록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이 옥중에 갇힌 것은 복음의 진보를 위한 것이므로 걱정하지 말 것을 요구합니다.

 

 

● 이러한 빌립보서로부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예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을 찾는 것입니다.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신앙생활을 무엇이라고 정의 하겠습니까? 어느 목사님이 말씀하시기를 신앙생활에 대해 정의하기를 “축제”라고 말씀하십니다. 축제가 무엇입니까? 즐거움 아닙니까? 기쁨 아닙니까? 고로 신앙생활이란 기쁨 속에 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신앙이 좋은 사람입니까? 모든 예배 시간에 참석하고, 기도 많이 하고, 전도 많이 하면 신앙이 좋은 사람입니까? 물론 맞습니다. 신앙이 좋지 않고야 예배와 기도와 전도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말 "신앙이 좋다."라고 말할 때는 고난이 와도, 난관에 부닥쳐도, 핍박을 당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며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어려운 상황인데, 힘든 상황인데, 남들이 보기에는 원망을 할 만한 일인데 그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할 수 있는 사람이 신앙이 좋은 사람 아니겠습니까? 그게 신앙의 힘입니다. 그 감사함 속에 그 기쁨 속에서 현재에 닥친 고난과 난관을 극복하는 것. 그게 신앙 아니겠습니까?

 

 

▶ 지금 사도바울은 죄인이 몸으로 옥에 갇힌 상태입니다. 모든 것이 자유롭지 못하고 불편한 상태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려는 열심 가운데 당하게 되는 고난이고 핍박입니다. 그런 속에서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향해 하는 말씀, 오늘날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기뻐하라”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빌립보서가 힘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모든 것이 잘 될 때 기뻐하라고 한다면 말씀의 힘이 약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어려움 상황인데 그 속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감사한다면 그 삶은 능력 있는 삶이 될 것입니다. 혹여 우리가 어려움 속에 있습니까? 기뻐하십시오. 즐거워하십시오. 감사하십시오. 그런 삶을 통해 나를 통한 하나님의 메시지는 더욱 강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 문제는 어떻게 이러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느냐하는 겁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빌립보서가 말하는 기쁨을 누리고 싶은 것이 그리스도인의 소망일 것입니다. 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모두 그러한 기쁨을 소망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러한 기쁨을 누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 기쁨의 뿌리가 무엇이겠습니까?

 

 

● 오늘 본문을 통해서 2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인사합니다. 2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 우리가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바로 은혜입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한 은혜를 받을 자격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냥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삭개오를 기억해 보십시오. 그가 왜 구원받았습니까? 뽕나무에 올라가서요? 아닙니다. 이유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뽕나무에 올라가 있는 삭개오에게 “내려오너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집에 가서 말씀하시기를 “오늘 구원이 이 짐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눅19:9) 뽕나무에 올라갔기 때문에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우리가 참 기쁨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야 할 곳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내 인생가운데 은혜를 부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한 번 뿐인 인생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어떻게 기쁨 속에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인생가운데 은혜를 부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둘째는 우리의 사역에 은혜를 부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직장이나 사업장, 가정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으면 어떻게 잘 될 수가 있겠습니까?

셋째는 우리의 문제에 은혜를 부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잔치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집니다. 이것은 그 가정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 곳에 예수님의 은혜가 임함으로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삶의 문제에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해결의 역사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러한 은혜를 통하여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 두 번째로 우리가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바로 평강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평강이 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평강이 무엇입니까? 평온함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실 때 가능합니다. 돈 없는 사람이 돈이 있으면 평강해 집니까? 느부갓네살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는 바벨론 제국의 왕입니다. 그에게는 권력도 있고, 명예도 있고, 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늘 불안해했습니다. 잠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단2:1) 그래서 시편127:2에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술과 마약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쾌락을 누리려고요?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무엇보다 갖고 싶은 것은 “평강”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주는 평강은 잠시 잠깐뿐입니다. 사도행전12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모습을 기억해 보십시오. 사도 야고보는 순교를 당하고 베드로는 옥에 잡혀 사형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 잠을 잡니다. 얼마나 평안하게 잠을 자는지 천사가 와서 옆구리를 쳐서 깨울 정도로 깊은 잠에 빠집니다. 사형을 앞두고 그런 평강을 누릴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 말씀을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빌립보서는 기쁨의 서신입니다. 옥중에 있는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향해 그리고 오늘날 우리를 향해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그 기쁨을 뿌리는 바로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 가운데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있도록 기도하므로 어떤 모습 속에서도 기쁨을 누리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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