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 길을 묻다 ( October,Friday Night Sermon)
본문성구 : 요한복음 14:1-6
참고성구 : 빌립보서 4;4-7
1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5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 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I.70년대 사건 기사 슈퍼맨, 원더우먼 사고 기사
우리나라에 흑백 TV가 처음 선보인 것은 전쟁이 막 끝난 뒤인 1954 년 7월 이라고 합니다. 그 때는 방송도 없었고 미군이 가져온 텔레비전이 전부였습니다. 본격적인 TV방송은 1961년에 국영 KBS가 개국하면서 시작되고,66년에 이르러 국산 텔레비전이 시중에 선보이게 됩니다. 그때 이후 80년 말에는 컬러 tv시대가 열립니다.
텔레비전이 주는 즐거움 중에 하나는 외국영화를 안방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일 겁니다. 당시에도 텔레비전을 통해 여러가지 외국영화들이 인기를 많이 끌었는데요. 특히 기억나는 것 가운데 원더우먼, 600백만불의 사나이, 슈퍼맨 등 흥미진진한 볼거리들이 많았죠. 그런데, 초창기에 사람들이 TV프로그램을 현실과 혼돈하면서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특히, 아이들이 이런 프로그램을 보고 대책없이 흉내를 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 일부 아이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참 안타까운일입니다. 혹시7.80년대 이후 태어나신 분들 중에 제 말씀이 믿기지 않는 분들이 있으신 것 같아 자료를 준비했습니다. (사진자료1,2,3). 이 아이들이 부모님께 한 번만이라도 영화속 이야기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물어봤더라면 그런 비극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
이렇게 모르는 것이나, 혹은 미심쩍은 일은 물어봐야 합니다. 그래야, 큰 손해를 미리 막을 수 있는 겁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기자 생활을 해 본 저로서는 좋은 질문이 좋은 기사를 낳는다는 사실을 현장에서 많이 체험했습니다. 집요하고 계산된 질문이 취재원들의 허를 찌를 때 진실과 가까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됩니다.
자녀교육에도 질문은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미 목사님을 통해 여러번 들어신 이야깁다만, 우리 학부모들은 아이들에게 “학교가면 선생님 말씀 잘 듣고 딴짓하지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부모는 좀 다르다고 합니다. 선생님들은 훌륭하신 분들이니까 모르는 것을 많이 물어보라고 한답니다. 질문을 하고 답을 듣고, 혹은 답을 찾기 위해 다른 질문을 받고, 그런 문답의 과정을 통해 아이들의 창의력과 지능이 발달된다고 합니다. 저도 학교에서 질문을 많이 하려고 합니다만, 잘 되지 않더라구요. 영어도 영어지만 괜히 수업시간에 지장을 주는 것 같고,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 주로 뒤에 앉아서 경청하는 편입니다. 듣는 훈련을 하는 거죠
II.성경공부나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좋은 질문을 통해서 성경구절 속에 들어 있는 감추어진 보물을 캐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질문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바로 도마입니다. 도마는 특히 요한 복음에서 믿음의 또 다른 차원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식의 모든 것을 ‘턱’맡기는 믿음과는 조금 색깔이 다릅니다. 의심합니다. 따져봅니다. 짚어봅니다. 그리고 믿습니다. 그래서, 질문을 많이 하죠. 이번에도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가셔야 할 아버지의 집, 영원한 하늘나라에 대해 이야기 하십니다. 그리고 그곳에 가는 길을 제자들도 다 알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도마가 다른 제자들이 얼굴에 의아한 표정을 품고도 아무 말을 하지 않자, 불쑥 질문을 던집니다.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데 그 길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우리가’ 라고 이야기 하는 걸 보니까 당시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이 가시고자 하는 곳에 대해 긴가민가 했던 모양입니다. 사실, 다른 사람들은 짐작하고 있었는데, 도마만 모르고 불쑥 던진 질문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도마가 “우리가 알지 못한다”라고 말한 것으로 미뤄 당시 제자들 다수도 몰랐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어째든 이 질문의 답이 참 걸작입니다.
III.여러분들이 너무도 많이 들어 보셨던 유명한 말씀이라 외우시는 분들도 많으실 줄 압니다. 다같이 대답해 보실까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
저는 처음 이 말씀을 읽었을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참 예수님은 어떻게 보면 너무나 자기중심적이시구나. 더 솔직히 말씀드리면 너무 교만하신 것 아니야. 길을 가르쳐 달라고 하면 상식적으로 그 곳은 이렇게 이렇게 가는 거야, 어디 어디 지나서, 혹은 그 곳이 비유적이고, 추상적인 곳이라면 , 좀 시적인 표현으로 돌려서 말씀하시거나…
또,한편으로는 정말 대단하시다, 내가 믿는 신이 이정도는 되야지, 다른 종교에서는 천상천하 유하독존이라고 외치는 분도 있는데, 멋있다. 길, 진리, 생명, 좋은 말 다 들어가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말씀을 준비하면서 참 개인적으로 너무나 많은 우연을 체험했는데요, 마치 누군가가 소를 몰아가듯 저를 몰아가는 듯 했습니다. 사실, 좀 폼나는 설교를 하기 위해 주석부터 펴서 배경과 원어에 관련한 지식 등 평소 성경공부 모임에서 하는 공부와 묵상 방식과는 다르게 시작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정답을 알아가는 것 같아 참 뿌듯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건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만의 묵상, 저만의 질문이 없었던 겁니다. 다 남의 말입니다. 좋은 말입니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그래서 여러분께 설명해 드릴 수 있겠는데, 감동이 없었습니다. 은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책을 덮고 사람들을 만나고, 기도하고, 묵상하는데 주력했습니다. 평소하던대로 나만의 두레박으로 은혜의 강가에서 물을 길어 올리려고 마음 먹었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이번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고 또 한번 큰 회개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것을 오늘 여러분과 나누려고 합니다.
먼저 왜 주님께서는 당신을 길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도마는 눈에 보이는 길을 가르쳐 달라고 한 것 같은데 주님은 난데 없이 당신이 길이라고 하십니다. 좀 처럼 마음에 와 닿지 않았습니다. 아까 말씀드린대로, 몇몇 주석을 참고해 보니, 이 길은 십자가의 길이고, 유대인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삶의 방식을 나타내고 등등등.. 주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은 이해가 되는데, 이것이 어떻게 내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이 되는지, 단지 영적으로만 생각하면 그럴 듯 한데, 감동이 없었습니다. 좀 힘들었습니다. 시간은 가는데 설교의 핵심적인 깨달음은 없고, 좀처럼 건져지는 게 없었습니다. 히루 하루 지나가고 목요일 밤이었습니다. 지은이와 함께 놀다가 이른바 아하 모먼트를 맞이하게 됩니다. 제 딸이 설교준비 잘되가느냐고 물어서, 제가 이렇게 대답했어요, ‘아니’, 말씀이 뭐냐고 해서 예수님이 당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한 부분이라고 했죠. 설교문 쓰기가 좀 힘들다고 덧붙였습니다. 특히 아빠는 왜 예수님이 당신을 굳이 길이라고 하셨는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죠. 그랬더니 지은이도 “그러게 예수님이 왜 그러셨을까, 예수님은 우리가 밟고 지나가는 길도 아니신데…” “밟고 지나가는 길”…
저는 그 순간, 몇해전 목사님과 저녁을 먹다가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일본에 파견된 한 선교사가 배교를 했다는 소식을 조사하기 위해서 파견된 한 신부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요지는 이렇습니다. 막부시대에 일본은 서양의 천주교의 유입을 막았고 박해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측은 체포된 신부들이 예수의 얼굴이 그려진 성화를 발로 밟고 지나가면 지역의 천주교인들을 살려주겠다고 했고, 끝내 그 신부님은 고뇌끝에 예수님의 얼굴이 그려진 그림을 밟고 지나갔다는 이야깁니다. 언듯 들으면 참 믿음없고, 순교의 열정이 없어 보이는 이야깁니다.
이 이야기는 1966년 소설로 출판되어 종교소설로 노벨 문학상 후보까지 올라다고 합니다. 이 작품은 일본 작가인 엔도슈샤쿠 가 쓴 ‘침묵’이라는 실화소설입니다. 주인공인 예수회 소속 세바스티앙 로드리고 신부는 동료신부의 배교 행위를 조사하기 위해 1635년 일본에 갑니다. 그리고, 그 참혹한 박해 현장을 체험합니다. 이 신부는 하나님을 배신하는 것과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는 일 사이에서 깊은 방황을 하게 됩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해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응답 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순간 철저히 침묵하셨습니다. 결국 로드리고 신부는 사람들을 살리기로 하고 성화를 발로 밝으려는 순간, 음성을 듣게 됩니다.
“ 밟아라,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질 것이다”
과연 진짜 이런 음성이 들였는지, 아니면 신부님의 마음속 소리였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습니다만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선 기독교인의 선택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생명입니다.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세상의 생명을 구원하시고자 아들을 버리실 계획을 세우신 하나님, 그 형언할 수 없는 은혜를 값싼 싸구려 은혜로 둔갑시켜온 저 자신이 미웠습니다.
저는 순간 지금까지 의미없이 밟아 온 주님의 얼굴이 떠올라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욕심 때문에 팽개쳐지고 짓밟혀진 주님의 일그러진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비로소, 왜 주님께서 도마의 질문에 자신이 길이라고 말씀하셨는지 이해가 됐고, 성경학자들이 이 길을 십자가의 길이라고 말하는 이유를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십자가 사건을 염두해 두시고 이 말씀을 하신 것 같습니다. 정말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IV.십자가의 고난, 그 좁은 길, 그 길은 진리의 길이도 합니다. 사실 도마사도가 의심이 많았지만, 결국 요한 복음 20장에서는 누구도 하지못한 고백을 합니다. 우리가 앞서 한 찬양에도 나오지만 부활하신 주님의 상처난 자국을 확인하고 이렇게 고백하지요, “나의 주 나의 하나님”.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 한 고백보다 더 직설적인 고백입니다. 그리고 더 친근한 고백입니다. 도마는 십자가에서 죽으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고, 확인한 뒤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의심에 여지가 없는 참하나님, 참신을 만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실재 모습, 참되신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의 실재 모습이십니다. 그래서 진리입니다. 세상의 진리, 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조건에 따라 변하는 상대적인 진리와는 차원이 다른 절대적이고 영원한 진리입니다. 신약성서학자인 윌리엄 버클레이(William Barclay)는 그의 요한복음 해설서에서 “많은 성인들이 진리를 이야기 했지만, 자신이 그 진리라고 이야한 사람은 예수님 한 분 뿐”이라며 “그것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완전하다는 주장이 예수 안에서 최고조를 이룬다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완전하다는 사실이 그 안에서 실현됐음을 의미한다”고 말했습니다. 쉽게 풀이하면, 많은 성인들이 진리 가르치고 그 진리에 입각해 살려고 했지만 완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 모든 인류를 구원에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따라서, 그의 말씀과 행위는 원천적으로 완전히 일치하여 도덕적으로 무결하며 참되다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V.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여기에 쓰인 그리어 단어는’ 조에’라고 해서 생명이라는 뜻인데, 요한 복음에서는 많은 경우 영원한 생명(eternal life)을 뜻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 예수님의 생명은 바로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이 영생은 바로 참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합니다(요 17:3).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구주로 고백하며 그가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 가겠다고 선포하고 나서는 순간 우리는 영생에 반열에 오른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바울 사도는 로마서 6장 4절에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레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곳에 새생명도 같은 단어입니다.
또 이사야서 43장 19절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광야의 길과 사막의 강’은 무슨 말씀입니까?
광야는 어떤 면에서 역설의 땅입니다. 왜냐면, 아무것도 없는 공허한 땅이지만,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땅입니다. 히브리어로 광야는 미드바인데 그 원뜻은 직역하면From the word ‘말씀으로부터’라는 뜻이되죠. 애굽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곳은 바로 광야생활을 하면서 였습니다. 또한 사막에 강물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죽음의 땅 열사의 땅 사막에 물은 곧 생명을 의미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 생명은 유한한 생명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말씀은 영원하고, 죄인들에게 영생의 복을 줍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과 우물에서 만나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라 그 십자가의 길, 좁은 문으로 들어가면 우리는 이 생명,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선물로 받습니다.
성도여러분, 여러분들은 바로 이런 진리의 길이요, 생명의 길 위를 걷고 계십니다.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는 바로 그렇게 살다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고 그분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우리는 어떻게 예배할 수 있습니까? 바로 눈에 보이는 예수님을 통해섭니다. 우리가 역사속에서 우리와 함게 숨쉬다 떠나시고 다시 오마 약속하신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 분과 충만한 사랑의 교제를 나누지 못한 채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왜냐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서는 아버지를 알 수가 없기 때문에 그 분께 갈 수도 없는 것입니다. 길을 알아야 갈 것 아닙니까?
정상에 오를 길은 많다고 합니다. 마호메트도 있고, 부처도 있고, 공자도 있고, 노자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대로 된 길, 바른 길은 그래서 길을 잃지 않고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길은 바로 당신을 밟고 가라시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십니다.
VI.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 새학기가 시작되고 또 직장과 가정에서 일상적인 일들속에서 바쁘실 줄 압니다. 그러나, 사소한 것이라도 당연하게 보지말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 길을 여쭈어 보시기 바랍니다. 침묵하신다고 불평만 하지 마시고, 미세하게 들려오는 그 분의 응답에 새벽마다 귀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밟힘을 당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합시다. 2000년 전 십자가 사건은 과거의 사건이 아닙니다. 지금도 고통의 현장에서 함께 하시는 주님을 믿습니다.
박해의 현장에서, 불의가 판치는 폭력의 현장에서, 돈과 목숨을 바꾸어야 하는 야만의 현장에서, 여전히 함께 울고 고통해 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봅니다. 찢겨지고 짓밟힌 주님의 얼굴을 봅니다. 그러나 그속에 영원한 생명, 천국의 소망을 봅니다. 그리고 다시 생활을 돌아보며 회개의 자리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매일 매일 말씀에 비춰 우리의 삶을 돌아 보며 아파할 때만이, 우리에게 밟힘을 당하러 오신 예수님의 그 크신 사랑과 은혜를 싸구려로 만들지 않는 것이 됩니다. 마치 예수님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며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신앙으로 일관할 때 우리는 매일 매일 그분의 얼굴을 의미없이 밟고 지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당신의 생명을 던지신 그 희생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각자가 성령 말씀을 통해 각자가 은혜의 강물을 길어 올리는 체험을 하셔서 머리로만 아는 성경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는 성경 말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말씀에 갈급해지고 그 말씀을 실제로 실천하면 할 수록 주의 희생을 값지게 만드는 것임을 명심했으면 좋겠습니다.
끝으로, 바울 사도는 이런 하나님의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깨닫고 평생을 십자가의 길로만 갔습니다. 그리고 빌립보서 4장을 통해 이렇게 권면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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