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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희망을 낳습니다

히11:1-6


새해가 밝았습니다. 묵은 해는 지나고 새해가 왔습니다. 새해를 맞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신 것은 “희망”입니다. 세상에 희망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어느 대학의 심리학과에서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두 개의 큰 통에 물을 가득 채우고 크기가 비슷한 쥐 한 마리씩을 넣었습니다. 예상대로 이들은 열심히 헤엄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두 통은 서로 달랐습니다. 하나는 뚜껑이 닫혀 있고 다른 하나는 뚜껑이 열려 있었습니다. 뚜껑이 닫혀 있는 쥐는 한참 헤엄치다 탈출구가 눈에 보이지 않자 아예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4분만에 죽었습니다. 뚜껑이 열려 있는 쥐는 뚜껑이 열려 있음을 알고 여유있게 움직여 36시간이나 헤엄을 쳤습니다. 문제는 통의 뚜껑이었습니다. 뚜껑이 열리고 닫히고의 차이가 그렇게 큰 차이인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연구원들이 이런 결론을 냈습니다. “살고 죽는 것은 희망에 달려 있다. 희망이 있으면 살고 희망이 없으면 죽는다”.

그렇습니다. 희망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살기 때문에 희망이 있는 것이 아니라 희망이 있기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음식없이는 40일 밖에 살 수 없고, 물이 없이는 8일 밖에 살 수 없고, 공기가 없이는 4분 밖에 살 수 없지만, 희망없이는 단 몇 초도 살지 못한다”. 이렇게 희망이 중요합니다.

작년 가을, 하나님이 새해 우리 교회가 나갈 방향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얼마동안 낑낑대며 기도하는 데 어느 새벽에 저에게 한 단어가 전광석화처럼 떠올랐습니다. 희망이었습니다. 작년 한 해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는 한 해였습니다. 세월호로 인해 온 국민이 좌절에 빠지고 경제란, 남북관계의 경색등으로 힘들게 살았습니다. 한국교회도 이런 저런 실수로 비난을 받아 자신감을 잃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기 원하실까? “희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기 원하셨습니다. 문제는 이 희망이 어디서 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다가 어느날 롬15:13을 읽었습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여기에 “소망의 하나님”이 번뜩 눈에 띄였습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모든 좋은 것은 소망의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기쁨과 평강을 주십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안에서” 옵니다. “믿음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믿음이 희망을 낳고 믿음이 희망을 충만케 합니다.

오늘 말씀 히11:1을 보시겠습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오늘 말씀은 희망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히11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1-3절은 믿음이 무엇인가를 말합니다. 4-40절은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말합니다. 여기서 실명으로 10명이 나옵니다. 그리고 익명으로 많은 사람들이 나옵니다. 1-3절에 나오는 믿음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고 또 하나는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믿음은 먼저 바라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믿음의 본질은 바라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희망은 믿음안에 있었습니다. 믿으니까 바라는 것입니다. 저희 부모님은 어릴 때부터 저를 많이 믿었습니다. “공부잘하고”, “착하고”, 그래서 희망을 가졌습니다. “윤재는 커서 무엇인가 할거야”. 목사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일반 대학에 가서 법조인이 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제가 부모가 기대한 것만큼 된 것은 아니지만 부모의 기대가 저를 여기까지 인도한 것은 사실입니다. 부모는 저를 믿었고 믿기 때문에 바라셨습니다.

믿음은 또한 보이지 않은 세계에 대한 관심입니다. 1절,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보이는 세계만 본다면 어떻게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믿음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미리 보는 것입니다. 누가 천국을 가 보았습니까? 천국에 가면 돌아올 수도 없습니다. 누가 영생을 보았습니까? 못 보았지만 영생이 있음을 믿습니다. 믿음의 세계는 본질적으로 미지의 세계며 미래의 세계입니다. 믿음은 곧 보이지 않는 미래의 세계에 미리 가 있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이 곧 희망입니다.

여러분에게도 믿음이 있습니까? 보이는 환경에서 희망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은 믿음에서 희망이 생기는 것을 믿습니까? 희망의 근원은 믿음입니다. 요14:1을 기억하십니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마음의 근심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방법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모든 문제가 풀립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나님 믿는 것이 희망의 시작입니다. 그러면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합니까? 그것이 오늘 말씀 6절입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크게 세 가지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는 믿음, 두 번째는 하나님은 그를 찾는 자에게 상주신다는 믿음, 그리고 세 번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다는 믿음, 이 믿음이 희망을 낳습니다. 새해 벽두에 희망의 하나님이 믿음안에서 여러분에게 기쁨과 평강을 주며 성령의 능력안에서 희망으로 넘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희망을 낳는 첫 번째 믿음은 하나님은 살아계신다는 믿음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는 것을 믿습니까? 이 질문이 왜 중요합니까? 이 질문이 모든 믿음과 희망의 출발이기 때문입니다. 몇 년전 모 기독교 신문에서 기독교인들을 상대로 그런 조사를 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을 믿습니까?” 그랬더니 “하나님은 확실히 살아계신다”고 믿는 사람이 64.2%, “살아 계신 것 같은 데 확신할 수는 없다”가 28.9%, 그리고 “잘 모르겠다”가 14.5% 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40% 가까운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살아 계신지 잘 모르겠다. 있는 것 같은 데 확신할 수 없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고 믿습니까?

성경은 먼저 자연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합니다. 3절입니다. 히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존재를 우선 가장 쉽게 아는 방법이 자연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연은 우리 눈에 가장 잘 띄기 때문입니다. 작년 여름에 교회학교 어린이들이 시골로 수양회를 다녀왔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산에서 무엇을 보았니?” “별을 보았어요. 밀가루같이 많은 별들을 보았어요”. 그러나 우리 아이들이 보았던 별은 아마도 우주안에 있는 수많은 별들중에 지극히 작은 부분을 보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팔을 벌려 동전 100원짜리를 쳐들면 그 순간 하늘에 떠있는 별 1,500만개가 우리 눈에 가려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은하계는 지구에서 약 2백만 광년 떨어진 안드로메다 성운입니다. 빛이 200만년 달려야 도달할 있는 은하계가 안드로메다 은하계인데 그 은하계가 이 우주에 1천억 개 이상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 우주는 얼마나 넓습니까? 그 넓은 우주를 하나님은 손가락하나로 지으셨습니다. 시8:3,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하나님은 자연속에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 또 하나의 증거는 역사입니다. 제가 작년에 독일통일세미나를 참석하기 위해 독일을 갔습니다. 동서독은 분단된지 45년인 만인 1989년11월에 통일되었습니다. 저는 독일 가기 전에 독일 통일은 어떻게 될만하니까 되었겠지 막연하게 생각하고 갔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독일 통일은 기적이었습니다. 우선 독일을 둘러싼 모든 나라가 통일을 반대했습니다. 영국, 프랑스, 미국, 다 반대했습니다. 반대한 이유는 물론 달랐습니다. 무엇보다 동독은 소련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적어도 소련이 물리력을 동원하면 통일은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때 나타난 사람이 고르바쵸프입니다. 그가 1985년에 공산당 서기장이 되었습니다. 동서독 분단의 최정점에 서기장이 된 것입니다. 그때는 이미 동서독 통일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었고 라이프니찌 교회에서 몇 년씩 통일 기도회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때 고르바쵸프의 행동이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고르바쵸프는 때맞춰 일어난 동구권의 개혁운동을 소련군 탱크가 진압하지 않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전에 베이징에서는 민주화운동을 탱크로 진압했던 중국 공산당과는 대조적이었습니다.

소련이 할 수 있는 것은 무력인데 무력을 포기하는 일은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닙니다. 소련이 스스로 한 일입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도 아무런 진압이 없었습니다. 공산국가로서는 경이로운 일입니다. 누가 시킨 일입니까? 누가 역사를 움직입니까? 독일 통일이 필요할 때 고르바쵸프를 세운 분은 누구입니까? 그래서 통일은 대박이기 전에 신비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평화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통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믿습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루터가 종교개혁하다가 실망했습니다. 모든 일이 마음대로 안됩니다. 그래서 낙심해서 누었습니다. 어느날 보니까 아내 카타리나가 상복을 입고 앉아 있습니다. 루터가 깜짝 놀라 물었습니다. “아니, 누가 죽었나요?” 카타리나가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죽었어요”. 루터가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죽다니. 무슨 소리야? 하나님이 왜 죽어?” 부인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죽지 않았다면 당신은 왜 그렇게 실망할 수 있어요?” 그때 루터가 자리에서 일어났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는데 무엇을 두려워 하겠는가?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데 내가 무엇을 낙심하겠는가?

어떤 큰 교회 목사님이 병들어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그는 평생 고생해서 교회를 개척하고 큰 교회로 부흥시켰으나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죽으면 이 교회는 어떻게 됩니까? 모두 뿔뿔히 흩어져 교회도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답니다. “네가 죽는 것이 문제냐? 내가 죽는 것이 문제지”. 그렇습니다. 내가 죽는다고 세상이 달라집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죽는다면 큰 문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죽습니까? 하나님은 죽는 분이 아니잖아요? 다시 히11;6, “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그는 반드시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은 죽지 않습니다. 영원토록 살아 산자와 죽은 자를 다스립니다. 자연과 역사와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찾는 자에게 상주십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두 번째 믿음은 하나님은 그를 찾는 자에게 반드시 상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문제도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언제라도 우리에게 보상을 주십니다. 히11장에는 그렇게 살았던 사람 10명이 등장합니다. 아벨로부터 기생 라합까지 입니다. 이들의 삶을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들이 모두 믿음으로 살았다는 것과 믿음으로 산 이들을 하나님이 복주셨다는 공통점입니다. 자. 4절, 아벨이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가인은 준비되지 않은 곡식으로 하나님께 예배했지만 아벨은 준비된 제물로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아벨의 믿음은 예배로 나타났습니다. 믿음의 예배는 정성과 희생으로 드립니다. 구약의 예배는 동물을 죽여 희생제사로 드렸습니다. 아벨이 그렇게 예배했습니다. 믿음은 예배로 표현되고 고백됩니다. 여러분도 올 한 해 예배로 믿음을 고백하겠습니까? 그렇게 예배드렸을 때 어떤 상급을 받았나요? 4절, 아벨을 “의로운 자”라 부르셨습니다. 믿음의 예배는 우리를 의로운 자로 만듭니다. 5절, 에녹은 어떻습니까? 에녹의 믿음은 천국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다”. “죽은 후에는 반드시 천국이 있다“. 이 믿음이 에녹으로 하여금 천국에 올라가는 상급을 받게 했습니다. C.S.루이스가 말했습니다. “지상에서 발자취를 남긴 사람들은 모두 천국을 목표했던 사람들이다. 천국을 목표삼으면 지상도 얻게 되지만 지상을 목표삼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올 한 해 에녹처럼 지상보다 천국을 더 목표하며 살겠습니까? 천국을 목표하고 살면 천국과 지상을 같이 얻습니다.

7절에 노아가 나옵니다. 노아는 어떻게 살았습니까? 믿음으로 방주를 예비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삶은 언제나 말씀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노아는 어느날 배를 만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배를 만들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햇빛은 쨍쨍 내려쪼이고 비는 올 기미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노아는 순종해서 배를 만듭니다. 그 결과 어떤 상급을 받았습니까? 다 죽었는 데 노아 8식구만 살았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의의 상속자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믿음으로 순종했더니 의로운 상속자가 되어 땅에 살아 남은 것입니다. 올 한 해도 말씀대로 순종하여 살겠습니까?

그 후에도 몇 명이 더 있습니다. 아브라함, 사라, 야곱, 모세, 라합, 이들이 믿음으로 살았던 방식은 서로 달랐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산 사람에게 하나님이 상급주신 것은 맞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세계 3대 종교의 조상이라는 명예를 받았습니다. 사라가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 다음 해 아들 이삭을 상급으로 받았습니다. 모세가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는 구원자의 상급을 받았습니다. 라합이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정복할 때 모든 식구가 다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사는 자에게 상급을 주십니다. 믿음의 삶은 헛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33절 이하에 이름없이 죽은 수많은 사람들이 나옵니다. 이들에게도 예외없는 약속과 상급이 주어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희생당했지만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40절에 결론입니다. 히11: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으니”. 언제나 더 좋은 것은 예비하신 하나님, 믿음에는 반드시 대가가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믿음은 공짜가 아니라는 것을 아십니까? 오늘 믿음으로 살면 내일 보상받고, 오늘 고생하고 살면 내일 축복받고, 오늘 기도하고 살면 내일 응답받고, 오늘 손가락질 받고 살면 내일 존경받고 살 것을 믿습니까? 희망은 여기에 있습니다. 믿음의 삶은 공짜가 아니기 때문에 희망이 있습니다. 반드시 상급이 있습니다.

독일의 신학자로 위르겐 몰트만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이 1964년에 쓴 고전적인 책이 있습니다. 제목이 “희망의 신학”입니다(사진). 이 책은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희망이라는 것을 밝힌 책입니다. 이 책에 있는 몇 구절을 소개합니다. 묵상할만한 내용들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실로 한계선을 넘어간다는 것, 그것을 초월한다는 것, 탈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이란 현재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한계선을 넘고, 그것을 초월하고, 그것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믿음의 본질은 현재가 아니라 미래라는 말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미리 취한 희망 가운데서 십자가에 달린 자의 부활로 말미암아 무너진 그 한계선을 넘어간다는 것을 뜻한다”. 믿음은 현재의 한계선을 뛰어넘는 것이지만 혼자 뛰어넘는 것이 아니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뛰어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부활은 이미 죽음을 뛰어 넘어 영원한 미래로 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부활의 세계로 가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 희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현재는 육으로 현재를 살아도 우리의 미래는 영은 미래에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희망입니다.

한 마디 더 있습니다. “믿음이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되심을 아는 것이라면 희망은 그분과 함께 사는 것이다. 믿음이 우리에게 영생이 주어졌음을 아는 것이라면 희망은 우리가 영생을 누리며 사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은 희망을 세우고 희망은 믿음을 키운다”. 어떻습니까? 명확하지 않습니까? “믿음은 희망을 세우고 희망은 믿음을 키운다”. “믿음으로 살면 반드시 희망이 있다. 그 이유는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이미 죽음을 이기고 현재의 한계선을 뛰어 넘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면 반드시 하나님이 상주신다”. 그 믿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나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살겠습니다.
우리가 믿을 세 번째는 “나는 반드시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살겠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중심한 삶입니다.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가량 방안에 T.V있다고 합시다. “T.V야, 너는 네가 존재하는 이유를 알고 있니?” T.V가 말합니다. “잘 모르겠어. 왜 내가 방에 있는지”.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삼성전자에 갔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당신들이 이 T.V 만든 것이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당신들이 만든 이 T.V가 왜 존재하는지 그 이유를 말해주겠어요?“ 그때 삼성전자 직원들이 말합니다. ”T.V요?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만들었죠. 그런데 그것을 T.V에게 물어보면 어떻게 알겠습니까? 만든 사람에게 물어보셔야지. T.V는 사람들을 기쁘게 할려고 우리가 만들었지요“. 여기서 나오는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발병자만 발명품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피조물이 어떻게 자기 존재이유를 알겠어요? 만든 사람이 알지 않겠어요? 잠16:4입니다. “여호아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이 말씀을 영어 성경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The Lord has made everything for its own purpose”. 주께서 모든 것을 그 자신의 목적에 맞게 지으시고“. 그렇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이 그 목적에 맞게 지으셨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 분의 목적에 맞게 살도록 지음받았습니다. 희망은 어디서 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목적에 맞게 살 때 옵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목적입니다.

그래서 러셀 컬퍼라는 사람이 “당신이 당신이 된 것은”라는 시를 썻습니다.

당신이 당신이 된 것은 이유가 있지요.
당신은 하나님의 신묘막측한 계획의 한 부분이에요.
당신은 소중하고 완벽하고 독특하게 만들어졌으며
하나님은 당신을 그분의 특별한 여자와 남자로 부르고 있죠.

존재의 이유를 추구하는 당신
그러나 실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부터 손수 당신을 지으신 그분,
그러기에 당신은 그분이 원하는 바로 그 사람이지요.

당신의 부모님도 그분이 선택했어요.
지금 당신이 어떻게 느끼든
하나님의 빈틈없는 계획대로 그들을 선택하사
그들의 손에 주님의 확인 도장을 찍어주신 것이죠.

물론 당신이 당한 고통 견디기 쉽지 않았겠지만
하나님 역시 당신이 마음 상했을 때 눈물 흘리셨어요
하지만 그것을 통해 당신의 마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닮아가고 성장하길 원하셨죠

당신이 당신이 된 것은 이유가 있지요.
주님의 지팡이로 지어진 당신
당신이 사랑받는 당신이 된 이유는
하나님이 만드셨기 때문이죠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살겠습니까? 희망은 거기서 옵니다. 저는 이렇게 하나님을 기쁘게 하겠다며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고 산 사람중에 강영우 박사를 기억합니다(사진). 그는 일생 믿음으로 산 사람이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때 축구하다 실명한 후 맹아원에서 아내를 만나고, 그 후에 미국에 가서 한국인 최초의 맹인 교육학 박사가 되고 백악관 국가 장애인위원회 차관보로 일하게 된 것은 믿음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생이었습니다. 그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암에 걸렸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미국에서 최고의 의료진에서 치료받고 낫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그는 치료를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최근 여러번 병원에서 검사와 수술, 치료를 받았으나 앞으로 저에게 허락된 시간이 길지 않다는 것이 의료진들의 의견입니다. 여러분들이 저로 인해 슬퍼하시거나 안타까워하지 않으셨으면 하는 것이 저의 작은 바람입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누구보다 행복하고 축복받은 삶을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끝까지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렇게 하나둘 주변을 정리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할 시간도 허락받았습니다. 한분 한분 찾아 뵙고 인사드려야 하지만, 그렇게 못하는 점,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으로 인해 저의 삶이 더욱 사랑으로 충만하였고 은혜로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가 마지막까지 붙잡았던 것은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었고 그 믿음 때문에 희망을 가졌습니다. 그가 믿었기 때문에 가진 최고의 희망은 천국의 희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수술을 포기하고 하나님 나라를 택했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남긴 최고의 교훈은 이것입니다. “믿는 자는 희망을 가진 자다. 그리고 최고의 희망은 하나님 자신이다”. 그래서 그가 남긴 마지막 책이 “내 눈엔 희망만 보였다”입니다(사진).

어떻습니까? 새 해 첫 주일, 여러분도 믿으면 희망이 있다는 것을 믿습니까? 믿음은 희망을 낳으며 희망은 또한 믿음을 지킨다는 것을 믿습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에게 상주심을 믿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이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바로 여러분이 믿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희망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올 한 해 우리에게 주신 말씀으로 마치겠습니다. 롬15: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히11:1-6 2015.1.4(일)
믿음이 희망을 낳습니다
“음식없이는 40일 밖에 살 수 없고, 물이 없이는 8일 밖에 살 수 없고, 공기가 없이는 4분 밖에 살 수 없지만, 희망없이는 단 몇 초도 살지 못한다”.

롬15: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히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요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히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네가 죽는 것이 문제냐? 내가 죽는 것이 문제지”.

히11;6, “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하나님은 그를 찾는 자에게 상주십니다.

C.S.루이스, “지상에서 발자취를 남긴 사람들은 모두 천국을 목표했던 사람들이다. 천국을 목표삼으면 지상도 얻게 되지만 지상을 목표삼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히11: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으니”.

위르겐 몰트만, “희망의 신학”(사진).
“믿는다는 것은 실로 한계선을 넘어간다는 것, 그것을 초월한다는 것, 탈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믿는다는 것은 미리 취한 희망 가운데서 십자가에 달린 자의 부활로 말미암아 무너진 그 한계선을 넘어간다는 것을 뜻한다”.

“믿음이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되심을 아는 것이라면 희망은 그분과 함께 사는 것이다. 믿음이 우리에게 영생이 주어졌음을 아는 것이라면 희망은 우리가 영생을 누리며 사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은 희망을 세우고 희망은 믿음을 키운다”.

나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살겠습니다.

”발병자만 발명품을 안다“

잠16:4, “여호아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러셀 컬퍼, “당신이 당신이 된 것은”
당신이 당신이 된 것은 이유가 있지요.
당신은 하나님의 신묘막측한 계획의 한 부분이에요.
당신은 소중하고 완벽하고 독특하게 만들어졌으며
하나님은 당신을 그분의 특별한 여자와 남자로 부르고 있죠.

존재의 이유를 추구하는 당신
그러나 실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부터 손수 당신을 지으신 그분,
그러기에 당신은 그분이 원하는 바로 그 사람이지요.

당신의 부모님도 그분이 선택했어요.
지금 당신이 어떻게 느끼든
하나님의 빈틈없는 계획대로 그들을 선택하사
그들의 손에 주님의 확인 도장을 찍어주신 것이죠.

물론 당신이 당한 고통 견디기 쉽지 않았겠지만
하나님 역시 당신이 마음 상했을 때 눈물 흘리셨어요
하지만 그것을 통해 당신의 마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닮아가고 성장하길 원하셨죠

당신이 당신이 된 것은 이유가 있지요.
주님의 지팡이로 지어진 당신
당신이 사랑받는 당신이 된 이유는
하나님이 만드셨기 때문이죠

강영우 박사(사진).

“내 눈엔 희망만 보였다”(사진).

롬15: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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