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둘째주일 낮예배 설교 (August.snuday sermons)


고난을 은혜로 (고후 12:7-10)


찜통더위가 늦게까지 기승을 부리더니, 이제 슬슬 물러설 차비를 하는 것 같습니다. 저 자신만 해도 예전에는 한여름 무더위가 즐겁기만 했는데, 이젠 여름 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참 힘들다, 지친다 할 즈음에 또 이렇게 계절이 바뀌는 신비를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총으로 허락하십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는 데는 언제나 쾌청하고 신선한 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더운 날도 있고, 매서운 추위와 싸우는 날도 있습니다. 사는 날들이 언제나 해뜨는 날만 있는 것이 아니라, 흐린 날도 있고, 비바람 몰아치는 폭풍의 날도 있습니다.

우리 생활도 그렇습니다. 언제나 행복하고, 기쁨과 웃음만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한숨짓고, 비통의 눈물을 흘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성공할 때가 있는가 하면, 역경에 처할 때가 있고, 건강할 때가 있는가 하면, 뜻하지 않은 병마와 씨름할 때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다 자기 나름대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만이 남보다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점에 고통의 무게가 있고, 고통이 고통 되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젊은이들은 나만이 실연당한 상처를 입고 사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사업에 실패한 분들은 나만이 이런 큰 고통 가운데 헤멘다고 여깁니다. 건강을 잃은 분들은, 왜 하필 내가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그 병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고통이 고통 되는 것입니다.

전에 섬기던 교회에 연세 많으신 할머니 한 분이 눈이 어두워 앞을 보기 어려웠는데, 결국 시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심방을 가도 위로를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이라면 왜 꼭 내 눈을 멀게 했습니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저 원망만 하고, 반항만 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몰고 가고, 잘해 주는 이웃에게 오히려 악하게 대합니다. 이 분은 자기 스스로를 괴롭히는 자학의 힘으로 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생각하면 이 세상에는 나보다 더 어려운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시력만 해도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할 수만 있어도 그 고통의 무게는 반으로 줄어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당한 고통은 나만 당한 것이요,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하는, 나만의 쓰라린 고통을 겪고 있다고 저마다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고통이 점점 더 커지는 원인 입니다.

어쨌든 왜 사람들은 이런 고통과 고난 속에서 살아야 하느냐? 그 이유를 따진다면 몇 가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인간 자체가 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얇은 유리그릇과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닥치면 금이 가고, 심하면 깨어집니다. 몸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마음과 정신은 더욱 그렇습니다.

둘째는 실수 때문입니다. 실수는 누구나 피할 수 없습니다. 실수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실수 때문에 생기는 고통은 심각합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야고보 사도는 고통스럽게 고백합니다.

셋째는 삶 자체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산다는 것, 그 자체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죄 범한 인간들에게 주어진 필연적인 고난입니다. 그래서 전도서에서는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라고 말하고, 시편 시인은 “하나님, 내 영혼이 피곤합니다” 호소합니다.

넷째는 무지 때문입니다. 사람이 무얼 좀 안다고 하지만 별 것 아닙니다. 우리는 죽는 날을 모릅니다. 미래를 모릅니다. 내 앞에 어떤 일이 전개될 지 전혀 모릅니다. 이 사건들이 어떻게 풀릴지, 이 일들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뿐만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이 생애, 이 의미의 깊이를 모릅니다. 그래서 불안하고, 그래서 고통스럽습니다.

신앙생활도 살펴보면 마찬가지입니다. 사노라면 신앙생활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갈등이 있습니다. 불평, 불만, 원망이 있습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 영혼이 시원하지 못하고 때로는 답답함이 있습니까? 모르기 때문입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깊은 뜻을 모르기 때문에, 내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귀한 존재요, 복된 존재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다섯째는 무능 때문입니다. 아는 만큼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학생 때 공부해야 하는 줄 알았지만, 열심히 못했습니다. 내가 가야 할 길을 아는데, 못 갔습니다. 잘 될 때 내가 행해야 할 일들을 알고 있었는데, 그만 그대로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누가 빼앗은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린 그 많은 좋은 기회를 알고 있기에 이제 괴로운 것입니다. 이것이 고통입니다. 여기에 고난이 있습니다.

그리고 선한 길, 바른 길,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내가 걸어가야 할 것을 알면서도, 마음은 원하여도 육신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내 고집을 꺾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는 나의 무능력함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남도 믿지 못하고, 세상도 믿을 수 없고, 나 자신도 못 믿습니다. 그 누구도, 아무 것도 믿을 것 없으니, 항상 불안 할 뿐이요, 고통스러울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도, 지혜도,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에 빠져 들어가는 제자가 예수님께 부르짖습니다. 나를 구원해 주소서, 소리칩니다. 그 때 예수님은 손을 잡아 일으키면서 ‘적게 믿는 자여, 어찌 의심하느냐’ 했습니다. 의심, 믿지 못하는 것으로 인해서 계속 고통이 따르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고난의 한 복판을 살아가는 사도 바울의 소중한 간증을 들어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라고 하면 신약 성경의 약 절반을 쓴 인물이요, 기독교 신앙을 체계화한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의 인물도 인간적으로 보면, 평생을 가시밭 속에서 이리저리 가시에 찔리며 상처를 안고 살았습니다.

그에게 큰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 어려운 고통을 제거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나가서 세 번을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이 세 번이란 그저 세 번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특별한 기간을 두고, 금식 했는지, 철야 했는지, 특별 작정을 하며 세 차례나 기도했는데, 이에 대한 응답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생을 위탁한 사람입니다. 온 생을, 전 생명을 하나님 앞에 깨끗하게 바쳐서 헌신하는 충실 된 주의 종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더욱 복을 많이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넘치도록 축복하셔야 되는 게 아닙니까? 그러나 이런 상식이 통하지 않습니다.

과연 바울이 받은 복은 무엇입니까? 부귀는 없다 해도, 건강은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는 건강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가정은 없어도 명예는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명예조차 없습니다. 성공은 없다 하더라도, 보람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늘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고통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복을 받아야 할 것 같은데, 일반적인 상식으로 말하는 그런 복은 바울에게는 없었습니다.

칭찬 대신에 비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동족의 오해와 친구들의 몰이해와 많은 사람들의 비난 속에서, 외롭게 살면서 복음을 전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여기 결정적인 고민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육체의 가시, 사탄의 사자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육체의 질병이 있었다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어떤 이는 그 병이 안질이라 합니다. 어떤 이는 주기적으로 오는 열병이라 합니다. 어떤 이는 간질병이라 합니다.

뭐니뭐니해도, 육체의 고통은 참으로 큰 것입니다. 내 몸이 아프고 쓰라릴 때, 그 누가 나를 위로해 줄 수 없습니다. 쑤시고 아픈 육체의 가시는 참으로 큰 고통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닙니다. 나아가서는 이것이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몸만 아픈 것이 아니라, 몸으로 인해서 마음도 아픕니다.

주의 종이 되어서 몸에 간질병이 있어서 되겠습니까? 남에게 안수해서 병 고치고, 내 손수건만 닿아도 병을 낫게 했는데, 내 병을 고치지 못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심령이 고통스러워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병을 고쳐 주시지 않으시고, 기도 가운데 놀라운 신앙의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바울아,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이는 나의 능력이 너의 약한데서 온전하여지기 때문이니라.” 평소에 육체의 가시는 영육 간에 나를 약하게 만드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시를 통해 나를 더욱 강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는 바울을 그대로 아멘!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믿었습니다. 또 지금 당장은 납득이 안가는 부분이 있을찌라도 그 부분은 그대로 믿었습니다. 충분한 것으로 믿었습니다. 즉 가시가 없어져서 감사한 것이 아니라, 가시를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더 큰 은혜를 깨달은 것을 감사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고난에 대해 몇 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첫째, 고난을 긍정적으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나에게 다가오는 고난을 극복하는 기본자세는, 고난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고난을 인정해야 합니다. 어째서 내게만 이런 고난이 닥치는가, 왜 하필 내게 이런 문제가 있는가? 이런 질문은 아무런 해결을 우리에게 주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는 내게 닥치는 고난을 먼저 긍정적으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사람이 건강하게 살기를 원하지만, 건강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건강으로 타락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공하기를 바라지만, 성공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성공으로 교만해 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실패가 축복이 되고, 잠시 병든 것 때문에 더 위대하게 된 사람도 많습니다.

예전에 세계의 존경과 사랑을 받던 토스카니니라는 유명한 지휘자가 있었습니다. 원래 그분은 첼로 연주자였습니다. 눈이 나빠서 제대로 악보를 볼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악단의 지휘자가 병으로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단원 중 누군가가 급히 지휘를 해야 할 입장이었습니다. 그 때 악보를 몽땅 외우고 있던 토스카니니가 지휘했던 것이 인연이 되어 세계적인 지휘자가 된 것입니다. 시력이 나쁜 것을 그대로 받아 들이고,그래서 악보를 통째로 외운 것이 세계적인 지휘자로 등장하게 했던 것입니다.

어느 분은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내가 고칠 수 있는 것은 고칠 수 있는 용기를 주옵소서. 내가 고칠 수 없는 것은 그대로 받아 들일 수 있는 평온함을 주옵소서. 그리고 이 두 가지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우리 모두가 드릴 귀한 기도입니다.

둘째, 고난 속에서 겸손해 져야 합니다. 이 고난은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에게 주셨다고 겸손히 받아 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사람의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은 언제나 온전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 강하다고 여길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사람들 가운데서 온전히 나타나지 못합니다. 오히려 사람이 자신의 약함을 스스로 깨달을 때에 주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나는 법입니다.

토기장이의 능력과 기술은 흙이 부드럽고 연할 때에 온전히 나타날 수 있습니다. 흙이 굳었을 때에는 그 흙을 토기장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없습니다. 대장장이가 쇠로 무엇을 만들 때에, 그 쇠가 뜨거워져서 부드러워져야만 대장장이의 능력이 발휘되는 것입니다. 쇠가 단단해 졌을 때는 주인이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며 때로 고난을 당합니까? 예기치 않던 큰 어려움이 있습니까?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 앞을 가로막습니까? 바로 이 때가 하나님이 나를 쓰시고자 하는 때입니다. 약함으로 나를 강하게 하시고, 나의 이 약함을 통해 능력 있는 존재가 되게 하려 하심을 믿으면서 그 고난을 이겨나가야 할 것입니다. 겸손히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 앞으로 나아가서 바울처럼 주님 주시는 은혜를 덧입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 고난 속에서 할 일을 찾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시련을 통해 강한 존재가 되어 승리의 생활을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고난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10절 말씀입니다.

우리는 큰일을 하든, 작은 일을 하든, 주님을 위해 일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내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공하든, 실패하든, 이곳에서 내가 할 사명을 찾아야 합니다. 시련은 나의 할 일을 가시 보자기에 싸서 나에게 줍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나의 일을 찾은 사람에게는 가시가 면류관으로 바뀌어 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실망과 불행을 모르고 산 것은 그에게 고난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환경이 좋았기 때문이 아니라, 할 일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을 만나면 그들을 위해 할 일을 찾았습니다. 이방인을 만나면, 또한 그들을 위해 할 일을 찾았습니다. 감옥에 들어가면 감옥에서 할 일을 찾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할 일을 찾았기에, 고난도 은혜가 된 것입니다.


올해는 광복 59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의 큰 굴레를 벗겨 주셔서, 일제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는 광복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감사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 한국 기독교의 신앙은, 비바람 속에서 피어난 꽃처럼 순교와 박해 속에서도 절개를 지키며 꿋꿋하게 피어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순교자의 피를 밑거름으로 피어난 오늘의 기독교라는 꽃을 우리가 즐기고 누릴 수 있기까지는 이 광복을 기다리고, 사모하던 많은 어르신들의 소망과 기원과 노력이 담겨 있었음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이 광복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한편 일제의 강점 36년이 참 길었는데, 우리 민족의 분단 상황은 반세기를 넘어 이제 회갑이 되어갑니다. 우리 민족은 통일을 맞이하기까지는 참된 광복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유일한 분단국가, 우리는 이 민족의 고난을 오히려 은혜로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 통일은 단지 남과 북의 통일이 아닙니다. 온 인류의 화해와 일치와 공동 번영을 이루는 일입니다. 이 일을 감당하라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단의 고난을 허락하신 줄 믿어야 합니다. 이 민족의 소명을 감당할 때 고난도 은혜가 되는 줄 믿습니다.


또한 오늘 우리는 장학 주일로 지킵니다만, 어려운 여건 속에서 공부하고 있는 우리 자녀들, 학생들 고난을 은혜로 바꾸는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어려운 형편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더욱 겸손해 지며, 그 가운데서 나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사명을 찾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장학 헌금을 내시는 분들은 우리 평화교회 내 식구 내 자녀들의 어려움을 은혜로 바꾸는 일에 동참함을 감사하시며 헌금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바라기는 이와 같이 때로 우리가 만나는 고난 속에서도, 고난을 은혜로 여기며, 고난을 믿음으로 이겨 나가고, 고난 가운데서도 나의 사명을 찾아 나가는 축복받은 하나님의 백성들 모두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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