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예배설교] 성령을 속이는 사건 Friday Night Sermon

성령을 속이는 사건

(행5:1-11절)

 
우리들이 봉사를 하고 헌금을 할 때 어떤 믿음과 정신으로 하느냐가 참으로 소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의 열정과 감사는 우리들로 하여금 깊은 감동과 은혜 속에서 일하게 합니다.

본문 말씀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 자리에서 죽게 되는 사건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기적의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과연 이 같은 사건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1.본문의 내용 줄거리와 잘못된 해석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라는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 부부는 자신의 소유를 팔아 사도들 앞에 내 놓을 때 판 금액의 일부를 감추고 나머지만 내놓았습니다. 이때 사도 베드로는 금액의 일부를 감추는 행위는 "사탄이 아나니아 속에 가득하여 성령을 속이는 행위라"고 합니다.

그 행위는 결국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거짓말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자 듣고 있는 아나니아가 그 자리에서 갑자기 죽게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했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그의 시신을 메고 가서 장사지낸 이후 3시간 정도 지났습니다.

그후에 그의 아내 삽비라가 자기 남편이 이미 죽은 줄 모르고 들어옵니다. 남편인 아나니아가 금액의 일부를 감출 때 아내도 알았다고 합니다. 그 때 아내 삽비라에게 땅 판 값이 이게 전부냐고 물었습니다. 그렇다고 하자 베드로는 책망합니다. 왜 주의 영을 시험하러 하느냐고 합니다.

그러면서 "너도 남편처럼 너에 시체를 메어 나가리라"고 하자 베드로 앞에서 엎드러져 혼이 떠나 죽게 됩니다. 이런 상황을 목격한 온 교회는 크게 두려워했다는 것이 본문의 사건입니다. 이 말씀은 초대 교회가 두려워했던 것처럼 우리들에게도 참으로 두려운 말씀입니다.

"교회 다니면서 빨리 죽을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하는 그런 말씀입니다. 교회 나올 때는 조심해야 합니다. 헌금하고 봉사한다고 해서 그게 다가 아닙니다. 그래서 두려운 마음으로 해야지 장난 삼아 하나님을 놀린다면 자칫하면 내 생명이 죽을 수도 있겠구나 라는 긴장감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이런 말씀이 우리들을 두렵게 하는 말씀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우리들을 협박하는 그런 말씀은 아닙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함부로 해석해서 협박하는 그런 말씀으로 적용하면 안됩니다.
교회 당회장 목사님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 당회장 목사에게 순종하지 않으면 누구든지 이렇게 된다던가 또 헌금을 반드시 목사 발 앞에 내 놓아야 한다고 해서도 안됩니다.

또한 교회 건축헌금을 작정하는데 이용해서도 안됩니다. 어떤 분이 이런 아픔을 상담해 왔습니다. 교회에서 건축헌금을 작정한 이후 마침 집을 팔아 이사하게 되어서 목돈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작정헌금의 일부를 교회에 헌금했습니다. 그런데 담임 목사님은 설교 시간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사건을 통해 치는 설교를 했다는 것입니다.

도저히 그 교회에 붙어 있을 수가 없어서 나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신이 정말 아나니아 삽비라부부에 해당된 그런 못된 신앙인이냐고 물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오해는 잘못된 적용을 낳고 그 결과가 좋지 못합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돈에 대한 말씀은 아닙니다. 그래서 제대로 헌금을 하지 않으면, 이렇게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은 금물입니다.

물론 교회 헌금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며 오늘날 우리들에게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2.하나님의 교회와 성령의 역사입니다.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님은 초대교회를 설립케 하였습니다. 그 교회는 성령께서 주관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게 하십니다. 이 일에 사도들이 쓰임 받았습니다. 성령에 충만하여 권능을 받은 사도들이 놀라운 기적들을 일으킴으로 예수를 증거 했습니다.

그 증거와 그 증거에 따른 반응과 삶의 변화들은 성령께서 주도적으로 이끄셨습니다. 이런 성령의 역사는 곧 믿는 모든 무리들로 하여금 한 마음 한 뜻으로, 물건과 재물들을 서로 나누게 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 삶의 모습뿐만 아닙니다. 행4:33-35정을 보시겠습니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주었더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주어진 일들입니다.

초대교회에 활동했던 사도들이나 교회는 그 활동에 필요한 재정적인 보충이 이렇게 큰 은혜를 받은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음을 암시해 줍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36절에서 말하는 바나바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요셉이라는 사람입니다.

36절에 보시면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요셉이라는 사람이 사도들을 재정적으로, 얼마나 도왔으면 그의 별명을 권위자라고 했겠습니까? 이 권위자라고 했을 때 권은 권할 권(勸)자에 위로할 위(慰)자입니다.

요셉은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성령에 충만한 은혜를 받고 땅을 팔아 낸 헌금이 초대교회에 상당히 요긴하게 사용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도들로부터 칭찬과 존경을 받아 권위자, 혹은 위로자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바나바가 이렇게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소유를 팔아 사도들에게 바치므로 다른 사람에게도 큰 은혜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영광과 칭송을 받는 것이 탐났던 모양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밭을 팔아 그 돈을 내면 교회에서 칭찬을 받고 자신의 이름을 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돈으로 교회에서 자신의 이름을 높이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 부부는 자신들도 그렇게 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부부가 하는 행동과 생각이 죽을 만한 죄목에 해당되느냐는 것입니다. 작정한 금액의 반만 냈는데 그것이 그렇게도 죽음을 당할 일입니까? 여기서 성령께서 돈의 액수를 가지고 트집잡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사역의 결과 은혜를 받아 그분이 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나 시키지도 않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 일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영광과 칭송이 탐남으로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 그렇게 봉사하라고 명령하시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서 하라고 했습니다.

3.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을 통해 주신 교훈은 무엇입니까? 인간적인 방법으로 교회가 유지되게 하 는 것을 추방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물론 예배와 찬송과 기도를 흉내낼 수는 있을 것입니다. 또한 봉사와 헌금생활도 흉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우리들에게 요구한 것은 그런 흉내내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오직 그 이름 예수 그리스도로 모든 것이 통해야 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없었습니다. 마음에 자신이 칭송을 받고 싶은 생각, 즉 그의 마음에 사탄이 가득하게 된 것입니다. 사탄의 특징은 항상 현실을 볼 때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사탄에게 유혹을 받은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생각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한 나머지 자기 중심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행동할 때 사탄의 유혹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고 합니다.

이 말씀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 때 보이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은 보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돈에 눈이 멀어 예수님을 팔았는데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죽음을 기록한 누가는 누가복음 22:3-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줄 방도를 의논하매 그들이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 지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행동입니다.

우리들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면 안됩니다. 마귀는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높이지 말도록 유혹합니다. 그러면서 우리 멋대로 살도록 합니다.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살려고 하는 사탄의 유혹과 그런 사고방식으로 살려고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그래서 마태복음 26:41절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시험이란 마귀의 유혹입니다. 마귀의 유혹을 받지 않도록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시험을 받았다고 한다면 그는 이미 마귀의 유혹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우리 주변에 시험을 받은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성도들은 자신이 과연 예수님을 믿고 성령의 지배와 인도를 받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아니면 지금 마귀의 유혹을 받아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인 하나님의 교회를 거부하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이 마귀의 유혹으로 벗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4:7절에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찌 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녀된 권세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큰 승리가 있을 줄 믿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을 통해서 성경이 우리들에게 보여주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가를 추적하는 것은 성경에 대한 우리들의 일차적인 관점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관점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행동 속에서 우리가 본받지 말아야 하는 어떤 규칙들을 찾아내어 그 규칙들을 신앙의 원리로 삼곤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그런 인물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우리들의 신앙의 생활 기준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구원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그 하나님은 어떤 분으로 설명되고 있는가에 대한 분명한 진리가 설명되어져야 하는데 그것이 우리들에게 늘 부족했습니다. 예수님을 팔았던 기룟유다와 같이 이들 부부들도 그들의 마음속에 사탄이 들어가게 됩니다.

사탄의 유혹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나라는 생각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탐욕과 허영심을 위해서 하나님의 교회까지 이용하고 사도들까지 이용하겠다는 그들의 사탄적 발상에 철퇴를 가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 성령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으로 하나님께 헌신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에 짐을 나누어야 합니다. 교회에 구경꾼으로 다닌 자들이 많습니다. 교회가 어렵게 되었는데도 불보듯 구경만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비정한 사람입니까? 과연 그런 사람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크게 쓰임받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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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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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철야예배설교] 앉은뱅이를 일으킨 기적 Friday Night Sermon

앉은뱅이를 일으킨 기적,

(행3:1-10절)

 
사도행전 1장과 2장은 어떻게 해서 사도행전이 가능하게 되었고 사도행전이 무엇을 위해서 기록된 말씀인가를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1장에서 세가지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그 첫째는 성령 세례를 약속해 주셨고, 둘째는 복음이 유대인의 울타리를 뛰어 넘어 이방인에게 증거될 것을 약속해 주셨고,

세번째는 예수님께서 재림,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2장에서는 1장에서의 약속대로 성령 강림을 통한, 성령세례의 역사가 오순절에 나타났고 방언을 통해서 복음이 땅끝까지 증거되게 하기 위한 발판이 마련되고 있습니다.

또한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서 구약의 약속이 성취된 사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증거와 그 반응을 성령의 사역으로 이루어지게 하신 놀라운 사실들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1.본문의 전후 문맥입니다. 본문 3:1-10절 말씀은 사도인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을 일으켜 세워주는 사건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사도행전 1장과 2장의 말씀에 대한 결과로 나타난 사건이 라는데 일단 관심의 촛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이 본문 사건만을 가지고 묵상한다면 본문을 통하여 말씀하신 말씀의 의도가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에서 이미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여 임하시면 권능을 받아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땅끝에 이르기 까지 예수의 복음이 증거될 것을 제자들에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런 약속을 해 주시면서 그 복음의 성격을 오순절 성령강림과 베드로의 설교라는 형식을 통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제 3장에 와서 그 제자들에게 임한 성령께서 권능으로 예수의 복음이 증거되게 하시고 선포되게 합니다. 이같이 성령께서 하시는 이 일은 천상인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이 지상의 교회와 온 땅을 지배하시고 다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입니다. 사도행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천상사역이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은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성령께서는 이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위해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영원히) 파송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하시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입니다. 그같은 성령께서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으로"(행1:22)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에게 1:8절에 약속하신 성령의 권능을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게 하십니다. 사도행전 3장은 어떤 형태로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일을 통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제자들을 사용하시되 제자들의 도움을 전혀 의지하지 않고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이 앉은뱅이를 일으킨 후 베드로는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3:13)고 외칩니다.

2.기적의 사건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본문 사건은 그야말로 놀라운 기적의 사건입니다. 감히 우리 인간이 흉내낼 수 없는 놀랄만한 사건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이 기적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해주는 말씀입니까? 제자들이 믿음만 있으면 이런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우리들도 그런 믿음만 있으면 그런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말입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오늘날도 복음이 증거되는 곳이라면 당연히 이런 기적이 일어난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문의 사건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그 기적의 의미와 목적을 살펴보 아야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복음서에 보시면 많은 병자와 귀신을 고쳐 주시고 많은 권능과 이적들을 베푸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이런 기적들이 우리들에게 일어나고 병에 걸리지 않고 귀신이 꼭 쫓겨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이 이런 사건들을 그런 의미에서 사용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인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의미에서 그런 기적들을 도입하고 그런 기적들을 통하여 보여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계시)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또한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개념을 바르게 깨닫는 것도 중요 하지만 그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날 우리들에게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도 매우 중요합니다. 바로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와 적용" 의 문제인 것입니다. 이런 기적은 권능을 베푸시는 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시겠습니다.

마 11:20절에 보시면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라고 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권능은 이적을 통한 권능입니다. 그같은 권능을 베푸신 목적은 회개하여 예수님을 믿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렇지 않는자들에 대한 심판이 목적입니다.

본문은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권능과 이 기적은 11절 이후에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건을 해석해 주고 있는 베드로의 설교에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회개를 촉구해서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심판이 있을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3.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여전히 성전에 들어가 기도하는 시간을 갖었습니다. 예루살렘이 주후 70년경에 함락되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말씀대로(요2:19) 성전 역시 무너졌습니다. 3:1에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쌔"라고 합니다.

아직도 당시에는 아직 성전이 그들 가운데 있습니다. 그 성전에서 하루 두번씩 예배와 기도시간이 있었습니다. 오전 9시와 오후 3시입니다. 그때 예배란 제사를 의미합니다. 예배가 시작되면 예배하러 온 사람들은 제단 가까이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제사장은 그 제단위에 놓은 양을 잡아 이스라엘의 죄를 대속하게 됩니다.

제물을 잡는 예식을 마친 후 예식을 집전하는 제사장은 제단을 떠나 성소로 들어갑니다. 제사장이 제단을 떠나 성소로 들어가 있는 동안 사람들은 개인기도에 들어갑니다. 누가복음 18:9절 이하에 기록된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는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당시에 모든 역사와 구원은 성전안에서 제사를 드리므로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통상적인 이야기가 뒤집혀 지는 순간입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사건은 성전 안이 아니라 성전 마당 밖입니다.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로부터 구걸하는 앉은뱅이가 있었습니다.

그 앉은뱅이가 성전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구걸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베풀 수 있는 "금과 은"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6절)고 할 때 그 앉은뱅이가 곧 일어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성전과 제사는 유대인들에게 독점물이었습니다.

이 말은 유대인들만이 구원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구원이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증거되게 하셨습니다. 이제 그 성전이 신앙의 중심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성전은 허물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전되신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이 일어납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이제 그 구원이 유대인들에게만 임한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 유대인에게만 임한다는 그들의 상식이 예수 그리스도 이름 앞에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행2:21).

그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권세가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통일되었습니다.

4.여전히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다스리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도 만왕의 왕으로 이 세상을 지배하시고 병마와 귀신을 지배하시고 다스렸지만 십자가에 죽으신 후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도 계속 성령님을 통하여 병마와 귀신을 지배하시고 다스리시고 계십니다.

또한 당신의 택한 자녀들과 교회를 다스리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사역을 보여주시는 것이 바로 앉은뱅이를 일으키심으로 이제 예루살렘 성전이 아닌 그 성전 되신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것을 지배하시고 이방인들의 구원이 가능하게 되어진 것 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원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도 하늘의 권세와 땅의 권세를 갖고 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고 꾸짖으면 사탄은 한길로 들어왔다가 일곱길로 도망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어려운 현실에 봉착하였을 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므로 축복의 통로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 응답받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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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철야예배설교] 기도란 무엇인가? Friday Night Sermon

기도란 무엇인가?

"마 7:7-8절

 
우리들이 이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인간이기 때문에 부족한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달라고 구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왜 무엇 때문에 필요에 따라 기도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일차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즉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든지 필요한 것을 요구할 수 있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같은 확신의 농도만큼 기도의 중요성을 알게 되면 기도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1.기도를 하되 예수님의 이름으로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16:24절에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전까지는 예수님으로 이름으로 기도하는 법을 몰랐습니다.

구약성경은 제사장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기도를 해 주고 대신 그들의 죄를 위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서 죄용서를 받곤 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삼상12:19절에 보면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자신들을 위해서 제사장 사무엘에게 기도를 부탁한 것입니다.

"모든 백성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의 종들을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우리로 죽지 않게 하소서 우리가 우리의 모든 죄에 왕을 구하는 악을 더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만인 제사장들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하면 우리는 응답을 받습니다.

요14:13절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함이라"고 했습니다. 요15:16절에도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행사를 위해서 경비를 청구합니다. 청구서의 내역을 다 쓰고 나서 맨 나증에 청구자의 이름을 기록합니다. 우리들도 하나님께 청구서를 낼 때 그 내역을 아뢰고 마지막에 청구자를 씁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청구자는 누구여야 하느냐는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라는 말은 청구자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할 때 그 기도를 우리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십니다.

2.기도를 하면 반드시 응답을 받습니다. 그런 기도를 하고 나면 그 기도에 대한 결과는 어떤 형태로든 지 응답을 받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때와 시기를 이해하지 못해서 우리가 중도에 포기하는 일이 있어서 응답을 받지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낙심하지 아니하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기도를 많이 할 수록 많은 것을 응답해 주십니다.

기도를 많이 한다는 것은 내 실적과 내 공로가 많기 때문에 그 나의 공로를 보시고 응답해 주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기도를 많이 한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많이 의지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겼다는 것입니다. 그 순수한 어린아이들과 같은 신앙과 믿음을 보시고 우리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를 열심히 하고 많이 기도를 해야 많이 응답해 주신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어린 자녀들 중에도 가만히 보면 부모님께 자꾸 달라고 하는 이들이 더 많이 받습니다. 부모 입장에서 보면 자꾸 달라고 할 때 화를 내다가도 "내 새끼니까 나에게 이렇게 달라"고 보채는 구나 하고 그 아들부터주는 법입니다. 이것이 부모와 자녀의 사랑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아버지와 자녀의 사랑스러운 관계라면 자꾸달라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들은 달라고 기도를 하지 않습니까? 나는 못받더라도 너나 많이 받아라는 양보심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기도하면 들어주신다는 확신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내가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는 응답해 주신다는 그 사실을 제대로 믿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자신 있게 기도하지 못합니다. 믿고 있다고 하더라도 확신 있는 믿음이 없다거나 그 믿음이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믿음 없음을 도와 달라고 해야 합니다.

그 믿음은 내 마음대로 가질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믿음을 위해서 우리는 더 열정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자신의 부족을 느끼는 자만이 기도합니다. 자신이 능력이 있고 좀 괜찮은 사람이라고 한다면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런 자는 교만한 자입니다. 따라서 기도한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요,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어떠한 자가 겸손한 사람입니까? 바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가만히 보면 언제나 기도하지 않는 교만한 사람으로부터 모든 문제가 생깁니다.

3.기도의 3단계의 방법과 3단계의 응답의 축복이 있습니다. 마7:7-8절에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믿는 신앙이라면 누구나가 다 암기할 정도로 친근한 축복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바로 예수님께서 친히 해주시는 말씀입니다. 기도의 3단계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구하라. ②찾으라. ③두드리라. 이 3단계 기도의 방법에 따라오는 3단계 응답의 축복은, ①구할 때 얻는다.

②찾을 때 찾는다. ③두드릴 때 열린다. 종합해 보면 구하는 자가 얻고, 찾는 자가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열립니다. 여기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기도는 간절한 기도를 말씀합니다. 또한 점진적으로 확대되면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간절히 기도하다 보면 찾게 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간절히 자신을 향하여 찾는 자를 버리시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은 우리들의 필요를 하나님께 찾으라고 하지만 그보다 더 소중하게 먼저 찾아야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말씀입니다. 시27:8절에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사55:6절에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했습니다. 암5:4절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했습니다.암5:8절에 "묘성과 삼성을 만드시며 사망의 그늘로 아침이 되게 하시며 백주로 어두운 밤이 되게 하시며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자를 찾으라 그 이름이 여호와시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났던 사람은 이제 우리들에게 무엇인가를 찾으라고 하십니다. 예를 들어서 전도에 대해서 기도를 한다면 "한 달에 몇 명을 전도하고 싶습니다"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도와주십니다. 이런 기도를 간절히 하다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누구에게, 어떤 자에게 전도할 것인가를 묻습니다다.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해서 우리 마음을 주장하시고 감동을 주셔서 하나님께서 전도의 대상까지 확신을 주십니다. 그 때 내가 전도할 대상을 찾게 됩니다. 기도하면 내 마음 속에 성령께서 감동을 주시고 찾게 해 주십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나서 찾습니다. 문을 두드립니다. 그러면 분명코 문이 열리는 법입니다. 찾기만 찾고 끝나 버리는 것이 아니라 두드립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들어줍니다.

4.기도 응답의 조건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요15:7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 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15:1-6절까지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 비유를 통하여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포도나무는 누구를 상징하고 있는가?

예수님이십니다. 가지는 누구입니까? 개인적으로 적용한다면 예수님을 믿는 내개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이고 나는 거기에 붙어있는 가지입니다. 나무와 가지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붙어 있는 관계입니다. 어떻게 붙어 있는 관계입니까? 장난감이나 어떤 기계가 연합된 것이나,

조립으로 조립되어져서 붙어 있는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살아있는 관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우리 기도가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주 안에서 믿음으로 간구하여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성도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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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철야예배설교] 수가성 여인의 구원 Friday Night Sermon

수가성 여인의 구원

(요4:1-54절)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생수에 대해 언급하셨고, 그 여자는 그분의 말씀에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생수를 얻기 위해서는 먼저 분명하게 정리돼야 할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녀의 삶에 있어서의 죄의 문제, 예배, 메시야, 하나님을 섬기는 일의 문제 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녀와 더불어 이 문제들에 대하여 하나씩, 하나씩 말씀하셨습니다. 본 장은 사마리아 여인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역 부분(4:1-42절)과, 귀족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기적을 베푸신 부분(1:43-54절)으로 구분됩니다.

어떤 면에서, 두 부분 모두 기적을 내포하고 있는데, 사마리아 여인의 변화는 왕의 신하의 아들을 위한 "먼 거리에서의" 치료만큼이나 놀라운 것입니다.

1.사마리아 여인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역입니다.(1-42)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혼혈인이었으므로 유대인들에게서 배척되고 증오 받는 대상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과 경쟁하느라 그들 자신의 종교 체계를 가지고 있었으며(4:20-24절) 메시야가 오실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4:25절).

예수께서는 "사마리아로 통행하셔야 했는데"(4절), 이는 하나님께서 죄 많은 한 여인을 위하여 그녀가 그리스도를 만나 그에게서 생수를 발견하게 되는 일을 계획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만남에 대한 기록에서 우리는 이 여인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각기 다른 단계들을 보게 됩니다.

1)"당신은 유대인으로서"라고 했습니다.(1-9절) 유대의 랍비가 사마리아 여인에게 호의를 요청했다는 것은 그녀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녀는 그리스도에게서 유대인이라는 사실 이상의 것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처럼, 죄인은 그리스도에 대해 장님이며, 영원한 것보다는 단지 물을 얻으려는 것과 같은 생활에 관한 일에 더 관심을 갖습니다.

2)"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라고 했습니다.(10-15절) 예수께서는 10절에서 그녀의 무지함을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선물인 구원과, 그녀의 면전에 있는 구세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생수(생명수)를 말씀하셨으나, 그 여인은 문자 그대로의 물로 받아들였습니다.

죄인은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얼마나 잘 혼동합니까?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육적인 탄생으로 생각했었으며(3:4절), 제자들조차 후에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인 떡으로 생각하였습니다.(31-34절). 예수께서는 그녀에게 세상 것들은 만족을 주지 못함과, 그리스도가 없이는 사람들이 항상 "다시 목마를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눅16:19-31절은 이 사실을 매우 명확하게 규명합니다. 이 생에서 쾌락의 갈증을 느꼈던 부자는 지옥에서조차도 다시 목말라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생수가 신자의 속에서 솟아나서, 그를 계속적으로 소생시키며 만족시킬 것을 약속하셨는데, 여전히 이 여인은 혼동하면서 그 물을 요청하였습니다.

3)"당신은 선지자로소이다"라고 고백합니다.(16-24절) 비록 혼동하고는 있었으나 생수에 대해 관심을 나타내었던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죄에 직면하였습니다. "가서 네 남편을 데려오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은 그녀의 양심을 자극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며, 그녀는 자신의 죄를 직시하였습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죄를 숨기고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잠28:13절). 이 여인의 화젯거리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눈여겨 보시기바랍니다. 오늘날의 회심한 죄인처럼, 그들은 종교에 있어서의 차이점에 대해 논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예배하리이까?" "어느 종교가 옳은지요?"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과, 이 일은 다만 구원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구원은 유대인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그녀가 자신의 죄와, 만족을 추구하는 욕망과, 그녀의 종교적 신앙의 공허함(헛됨)을 직면하게 하셨습니다.

4)"내가 그(그리스도)로라"고 말씀하셨습니다.(25-42절) 이제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 말씀의 권위에 눈이 뜨인 그녀는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았습니다. 그녀는 그 동네의 사람들에게 공적으로 간증을 함으로써 자신의 믿음을 입증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녀의 성격을 알고 있었음이 분명한데, 그들 역시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이 신자들의 마지막 간증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는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니라"고 했습니다. 본 장에서 제자들에 대해 주목해 보는 것도 흥미 있는 일입니다. 그들은 영적인 음식보다도 육적인 음식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피곤하셨고(6절) 목말랐으며, 분명히 배고프셨습니다.

그러나, 육적인 것 이상의 영적인 것들을 두셨습니다. 제자들은 식품(유익한 것)을 사 온 반면, 그리스도는 영혼(보다 나은 것)을 구하셨습니다. 사마리아로 올 때에 제자들은 아마도 "여기서는 아무도 구원할 수 없을 겁니다. 이 곳 사람들은 마음이 굳은 사람들이고 유대인들의 적이니까요"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추수하도록 무르익은 들을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뿌린 이들과 거둔 이들 모두가 추수할 밭에서 함께 일해야 함을 상기시키셨습니다.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고전3:5-9).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자신의 적절한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영혼 구원자로서의 그리스도의 모범을 주목해 보시기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가리우는 개인적인 편견이나 육적인 필요들을 허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 그 여인과 우호적인 방법으로 만나셨고, 결정하도록 그녀를 강압하지 않으셨습니다. 현명하게도, 그리스도는 대화를 이끌어 그녀의 마음에 효과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한 그녀에게 구원의 방법에 대해서 개인적이고 애정 있게 제시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물과 같은 일상적이고 직접적인 것에 대해 말씀하심으로써 그녀의 주의를 사로잡아, 이것으로 영원한 생명에 대한 실례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는 죄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피하지 않았고, 그녀의 필요에 직면하게 하셨습니다.

2.왕의 신하를 위해 베푸신 그리스도의 기적입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일곱 가지의 기적 가운데 두번째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적들은 사람이 구원받는 방도와 그에 따르는 결과를 묘사하고 있음을 상기하게 될 것입니다. 첫 번째의 두 가지 기적은 갈보리의 가나에서 일어났습니다.

물이 포도주로 바뀐 것은 구원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예증하며, 이 장에서 아들을 고치심은 구원이 믿음에 의한 것임을 보여 줍니다. 그 아들은 가나에서 27km떨어진 가버나움에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자기와 함께 가시기를 원하였는데,

이는 그가 그리스도께서 거리상 멀리 떨어져 있어도 소년을 치료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그와 함께 가지 않으셨으나 그 대신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가 집으로 돌아가는 데에 서너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을 터인데 52절의 "어제"라는 말은 그가 가나에서 하루 내내 머물러 있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그 소년은 1시에 치료를 받았는데, 그 다음날에야 아버지는 집에 당도하였습니다.

이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제로 믿었음을 나타내는데,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려고 집으로 내달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길을 보여 줍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으니 그대로 이룰 것을 나는 믿는다." 그 귀족은 분명히 가나에 머무르면서 어떤 업무를 처리한 후, 그 다음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믿음 안에서 기쁨과 평강"을 소유하였습니다.(롬15:13절). 그의 신뢰가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종들에게서 "당신의 아들이 살았나이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에 놀라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지 언제 치료되었는가를 그들에게 물었고, 그 시각이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던 바로 그 때임을 확인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의 온 집안이 그리스도를 신뢰하였습니다.

롬10:17절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42절에서 사람들이 믿지 않는 이유가, 그들이 무엇인가를 보며 표적과 기사들을 경험하기를 원하는 데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단도 속이기 위해 표적과 기사를 이룰 수 있음을 기억하셔야합니다.(살후2:9-10절).

만약 당신의 구원이 느낌, 꿈, 환상, 음성 또는 어떤 다른 육적인 증거들에 근거하고 있다면 매우 위험한 바탕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의 믿음만이 우리에게 영생의 확신을 줄뿐입니다.

요일5:9-13절에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 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 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 하신 것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3.증거 하는 신앙입니다.(53-54절) 1)그 사람은 "자신의 온 집안 사람들"에게 증거 하였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자신의 경험과 예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과 교훈들을 전해주었고, 그들은 그것을 모두 믿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믿고 그분께 자신들을 전적으로 맡겼습니다.

2)예수님을 증거 한다는 것은 이 사람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고위직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부패한 정부 속에서 부도덕한 관리들과 어울리는 환경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증거 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조롱과 핍박을 겪을 뿐 아니라 아마도 지위를 박탈당하고 심지어 생명까지 잃을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의 신앙은 증거 하는 신앙이었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자신을 위해 하신 일로 인하여 예수님을 사랑했고 또한 다른 사람들도 예수님의 놀라운 구원을 알게 되기를 원하였습니다. 마5:16절에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했습니다.

눅8:38,39절에 "귀신 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하였으나 예수께서 저를 보내시며 가라사대 집으로 돌아가라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신 것을 일일이 고하라 하시니 저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하신 것을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고 했습니다.

행16:30-31절에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였다면 그 속에 예수 새 생명이 있기에 전하지 아니하고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게으르고 나태하다면 자신을 뒤돌아보며 점점하여야 합니다. 과연 내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였는가? 나에게 구원의 확신이 있는가? 구원받은 백성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므로 하나님의 자녀임을 간증하는 복된 성도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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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철야예배설교]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예수님 Friday Night Sermon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예수님,

(요5:1-18절)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마9:35)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기록한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 하신 일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신 일을 기록하신 목적은 예수님이 과연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주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우리들도 상대를 이해하고, 자신을 소개할 때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를 통해서 자신을 소개하기도 하고 상대를 소개받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을 통하여 자신이 어떤 분이신가를 소개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 중에 병을 고쳐 주신 일을 통하여 어떤 예수님을 우리들에게 소개해 주고 있는가를 살펴보면서 은혜를 받기를 원합니다.

1.하나님의 아들로 증거 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하셨던 일을 세 가지로 요약한 다면 첫째, "가르치시는 일"이요, 둘째,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는 일"이요, 셋째, "모든 병과 약한 것들을 고치시는 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모든 병을 고쳐 주신 일"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의도하셨는지를 살펴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8:16-17절에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이 말씀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 주신 이유을 설명합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메시아에 대한 예언(사53:4)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셔야 합니까? 예수님 자신이 메시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은 본인들의 믿음과 상관없이 자신에게 가지고 온 “모든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 병을 고쳐 주시므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이심을 증명하고 증거 하셨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은 모든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여기에 병을 고쳐 주신 예수님의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이것을 계시라고 합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모든 사건은 이런 계시를 보여주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렇다면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 주신 사건을 읽고 예수님이 과연 어떤 분이신지를 소개받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 예수님을 바르게 알도록 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바로 곧 영생이기 때문입니다(요17:3). 그런데 예수님께서 병을 고친 사건을 읽고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이 성경의 의도인데 그 의도에 충실하기 보다 병을 고치는 내가 주체적으로 등장할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2.예수님께서 38 년된 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동안 약 세 번 정도 예루살 렘을 방문한 것으로 요한복음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명절 때 예루살렘을 방문하신 것은 구약에서 제시한 명절에 동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베데스다라는 연못을 방문하였습니다.

그 베데스다에는 많은 병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에 있는 38년 된 병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이 바닥날 때 제일 먼저 들어간 사람은 어떤 병에 걸렸을지라도 낫는다는 말을 듣고 많은 병자들은 연못에 물이 마를 때 첫 번째로 들어가 자신의 병을 고침 받기 위한 소망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38년된 병자는 그 첫 번째로 들어갈 가능성이 전혀 없는 말 그대로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런 병자에게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셨습니다. 모두가 관심을 보이지 않을 법한 사람에게 예수님은 다가가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8년 된 병자의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런 약한 병자를 어루만져 주시고 고쳐 주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입니다. 혹 우리 가운데 "나는 나 혼자"라고 생각되신 분은 안 계십니까? 모두가 나를 외면하는 것 같습니다. 한 평생, 나의 청춘을 바쳐 회사를 위해 일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이제 당신은 우리 회사에 있을 이유가 없다"고 합니다. 억장이 무너질 것 같습니다. 모두가 나를 버린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우리들에게 주님이 계십니다. 나와 함께 하십니다. 눈물을 흘리고 있는 우리들에게 다가 오셔서 우리들의 눈물을 닦아주십니다. 그러시면서 두려워 말라고 합니다. 이런 위로가 여러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3."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십니다.(17절).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38년된 병자 를 안식일에 고쳐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범했다고 트집을 잡았습니다. 16절을 다같이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이때 예수님께서 반박합니다. 그 내용이 17절에 기록됩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 한다 하시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말을 듣고 유대인들은 더욱 들고 일어났습니다. 18절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일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안식일을 범했다는 것입니다. ②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했다는 것입니다. ③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 말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비난하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고 쉬었습니다. 그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안식일에 일을 했습니다.

예수님 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일을 하고 계신다고 합니다. 안식일에 하나님도 일을 하시기에 예수님도 안식일에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일을 하시기 위해서 38년 된 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맞습니까? 아니면 유대인들의 말이 맞습니까? 물론 예수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물어 보면 누구의 말이 맞다고 합니까?

자신들이 맞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직도 안식일인 토요일에 일을 하지 않고 쉽니다. 우리 나라에 안식일 교회가 토요일이 안식일이라고 생각하기에 안식일에 예배를 드립니다. 구약의 전통을 지키겠다고 하는 자들 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구약의 안식일이 어떻게 신약의 예수님에게로 성취되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를 한 번 쉽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구약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6일동안 세상을 너무나 완벽하게 지으셨습니다. 너무나 완벽하게 지으셨기에 더 이상 하실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7일째 되는 날에 쉬셨습니다. 즉 안식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안식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안식이라는 말은 '쉰다'는 개념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쉬셨습니까? 6일동안 너무나 완벽하게 지으셨기에 다른할 일이 없음으로 쉬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쉬셨다는 것은 "창조의 완벽성"을 지칭한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범죄하였습니다. 범죄한 그 인간을 고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쉬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지금 일을 하고 계신다는 말씀으로 의미를 확대 해석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일을 하셔야 합니다. 죄를 범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고쳐 주어야 합니다. 죄와 병으로 인하여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상대로 예수님은 일을 하십니다.

즉 그 죄로부터 구원하시고 병을 고쳐 주시므로 진정한 안식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지금 안식을 범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안식이 있도록 하기 위하여 일을 하고 계십니다. 유대인들은 단순히 날짜 지키는 것이 안식을 지키는 것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주님의 안식을 범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더욱 억압하게 합니다. 쉴 수 없도록 많은 법 조항을 만들어서 법에 가두고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와 해방과 안식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11:28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안식의 주인이십니다.

우리들의 진정한 안식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제공됨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희년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편히 쉬게 하셨습니다. 사망의 무서운 멍에 속에서 우리들을 구출하셨습니다.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같은 자유와 안식을 주시기 위하여 우리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로뎀나무 밑에서 죽기를 구하는 엘리사에게 하나님은 찾아오셨습니다. 찾아오셔서 위로해 주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에게도 위로와 안식을 주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자리에 우리 주님은 찾아오신 줄로 믿습니다. 찾아오셔서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위로와 평강을 주신줄 믿습니다. 미래에 대한 소망을 주신 줄 믿습니다.

4."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십니다.(14절)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후에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 14절에 기록됩니다. 다같이 1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 속에는 다음과 같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 병을 고침 받았다고 다 끝난 것은 아닙니다. 38년 된 병자가 고침을 받았지만 자신의 행동 여하에 따라 "더 심한 것"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들로 하여금 어떤 경우에서라고 교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병고침 좀 받았다고 마치 자신은 이제 완벽한 사람이 된 줄로 착각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복을 받아 잘 풀렸다면 그것이 다인줄 알고 교만하면 안됩니다. 명심해야 합니다. 둘째, 죄가 심한 병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더 심한 병에 걸리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합니다. 여기 "다시는" 이라는 말은 이미 죄 때문에 병이 왔는데 그 병을 고쳐 주신 예수님께서 또 다시 죄를 범하므로 더 심한 병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어떤 병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신 것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씀한 38년 된 병자는 자신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셋째, 안식과 자유를 주셨으니 다시는 죄의 종이 되지 말라고 합니다. 38년 동안 병마의 고통과 싸웠을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람의 가정이 온전했겠습니까? 평화와 기쁨이 있었겠습니까?

그런 병자에게 우리 예수님은 고통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자유와 쉼을 주셨습니다. 그러시고 난 다음에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합니다. 죄의 종이 되지 말라고 합니다. 죄의 노예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께서는 갈5:13절에서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참 자유와 행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자유와 행복을 죄 짓는데 사용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합니다. 교회를 봉사해야 합니다. 이웃을 섬기고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삶을 통하여 예수의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이런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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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수요저녁예배설교] 억지로 진 십자가의 신비 (Auguest, Wednesday Evening Sermon)

억지로 진 십자가의 신비

마태복음 27장 27~32절

 

살다보면 하고 싶어서, 좋아서 하는 일도 있지만, 싫어도 억지로 해야 하는 일들도 많습니다. 밥, 억지로라도 먹어야 합니다. 공부, 억지로라도 해야 합니다. 효도, 억지로라도 해야 합니다. 직장생활, 억지로라도 해야 합니다. 운동도 억지로라도 해야 합니다. 누가 도와 달라고 하면 억지로라도 도와야 합니다. 사순절 고난주간입니다. 억지로 십자가 지다 축복받은 시몬을 통해 은혜 받으시는 고난주간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도 억지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자원해서 십자가 지신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자원해서 십자가 지셨지만, 억지로도 지셨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지려 세상에 오셨지만, 막상 지려니 끔찍합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저주와 지옥의 형벌을 너무 잘 아시는 분 아닙니까.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십자가 지려 하니 고민되어 죽겠다. 나를 위해 기도 좀 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시를 “하나님 아버지,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세요”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곧이어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십니다. 결국 주님은 자원해서, 그리고 억지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억지로 주님 지신 십자가로 우리가 구원 받고, 천국을 얻었고, 성령 받았고, 죄용서 받았고, 병고침 받았고, 평강을 누리며, 지혜를 얻었고, 만 가지 은혜를 입었습니다. 억지로 십자가 지다보면 거기에 만 가지 축복이 임합니다.

시몬이 억지로 십자가를 집니다. 구레네 시몬은 아프리카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 근처 ‘구레네’에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고 가시다 너무 힘들어 쓰러졌다 일어났다를 반복하시더니, 쓰러져 일어날 줄을 모릅니다. 로마 군인이 구경하던 사람들 중에 힘 꽤나 써 보이는 시몬에게 “너 이리 와!” 해서 싫다는 사람에게 억지로 십자가를 지워줍니다. 시몬은 주님의 십자가 억지로 졌습니다. 억지로 진 십자가 덕분에 시몬의 가문이 대대로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늘 기쁨으로 살고 언제나 순종하면서 살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힘이 들 때가 있습니다. 교회에 나가기 싫을 때, 예배드리기 싫을 때야말로 억지로라도 교회에 나오고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억지로 진 십자가가 가장 큰 축복입니다. 구레네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지고 골고다까지 갔습니다. 시몬은 그 덕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온 가족이 다 믿고, 두루 존경을 받았습니다. 시몬과 그 기족이 얼마나 존경을 받았는가하면, 마가복음 15장 21절에 보면 시몬을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고 소개합니다. 사도 바울은 시몬과 그 부인을 자기 부모로 모셨습니다(롬 16:13). 시몬이 억지로 진 십자가는 시몬의 온 가족이 구원받고 존경 받게 된 은총의 십자가였습니다. 이런 십자가는 억지로라도 져야 합니다. 성도들은 날마다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억지로 지고가야 합니다. 자원해서 기쁨으로 하면 좋겠지만 억지로라도 하시기 바랍니다.

억지로 진 십자가가 내게 주시는 최고의 복입니다. 억지로 시작한 일이 우리 인생을 바꾸어 놓습니다. 조금만 힘들어도, 마음 상해도 중단해버리는 시대에, 억지로 교회 다니고, 억지로라도 봉사하다보면 그게 최고의 복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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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수요저녁예배설교] 복의 근원 (Auguest, Wednesday Evening Sermon)

 

복의 근원으로 살아가라
창세기 12장 1~8절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과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저마다 해야 할 일을 갖고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양한 일을 하며 살아가는 모든 삶의 의미는 복의 근원으로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며, 모든 사람이 깨달아야 할 사실입니다.

모든 삶의 의미는 소명의식에서 비롯돼야 합니다(창 12:1∼2). 물론 삶 자체에 의미가 있는지 묻는 젊은이들도 있습니다.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고민해볼 가치가 있습니다. 삶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갖고 열심히 살아갑니다. 삶의 의미를 찾아내지 못한 사람은 어둡고 지루하게 살아갈 가능성이 큽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삶의 의미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를 성경에서는 ‘복의 근원’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이 하는 일이 무엇이든, 그 일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받은 복을 전해주는 통로가 돼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높은 자리에 있든 평범한 자리에 있든 반드시 힘써야 할 것이 바로 복의 근원으로 살아가는 일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때 복을 누립니다(창 12:3∼8). 긴 삶 속에서도 삶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건강과 장수,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것이 복인 줄 압니다. 그런데 이런 복은 마치 모래알을 손에 움켜쥔 것과 같아서 시간이 흘러가면 다 사라지고 맙니다. 오랫동안 붙잡을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 말씀을 밤낮으로 묵상하는 사람을 ‘복 있는 사람’이라고 규정합니다(시 1:1∼6).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자신이 하는 일이 다 형통합니다. 또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자신의 의지나 욕망을 다 포기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두 아들 비유’(마 21:28∼32)는 순종의 삶이 어떤 것인지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순종할 수 있습니다. 제가 사는 서울 성동구의 구정 목표는 ‘사람 중심의 행복한 성동’입니다. 1910년대 러시아 혁명의 구호도 ‘인간이 주인인 세상을 건설하자’였습니다. 인간의 꿈과 의지를 실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상입니다. 이런 사상은 창조 이래 계속돼 왔는데 하나님 중심의 세상과 맞선 주장입니다.

그래서 낙원에서 쫓겨났고, ‘바벨탑 사건’과 같이 계속 하나님께 반항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인간은 인간의 꿈과 욕망을 실현하려고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인간이 주인인 세상을 만들고 싶어한다는 말입니다. 이 사상은 날이 갈수록 맹렬하게 불타오릅니다. 슬프게도 희망은 보이지 않고 절망이 더 가까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래서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고 탄식했습니다. 이에 대한 성경의 답은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요 14:26)입니다. 성령님의 도움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으며, 복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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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예배설교] 고난의 길을 가라 (Wednesday Evening Sermon)

고난의 길을 가라  

사무엘상 23장 1∼14절

 

사무엘상 23장에는 아주 인상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울의 공격을 피해 도망다니던 다윗은 모압 땅 미스베로 달아납니다. 그러나 언약의 땅인 이스라엘 지경을 벗어난 그 피난처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땅으로 돌아가라”고 명하시고, 다윗은 순종합니다. 그가 다시 돌아온 이스라엘 땅은 유다 땅 ‘헤렛 수풀가’입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포항의 호미곶이나 울산의 간절곶 같은 곳입니다.

사울이 찾아내기 힘든 외진 곳으로 도피한 것입니다. 이곳에서 다윗은 숨 죽인 채 지냅니다. 그러다 돌발 상황이 발생합니다. 그일라 지역으로 블레셋이 침공한 것입니다. 정부군을 이끌고 나가서 이들을 물리쳐야 하는 몫은 당연히 사울에게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자신이 감당해야 할 일로 인식합니다. 다윗이 기도하자 하나님은 전쟁에 참여하라고 응답하십니다. 그일라 땅은 우리나라로 치면 청주나 대전 정도가 됩니다. 내륙지방인 것이죠. 다윗의 처지에서 이곳으로 가서 전쟁을 벌이는 일은 상식 이하의 선택입니다. 블레셋 민족과 싸움을 벌여야 하는 동시에 사울에게 자신의 위치를 노출하게 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죠.

본문 3절을 보면 참모들이 반대하지만 다윗은 하나님께 받은 응답에 확신이 있어 그대로 밀어붙입니다. 5절에서 다윗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승리합니다. 하지만 그 뒤 참모들이 예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23장 7절에 보면 “다윗이 그일라에 온 것을 혹이 사울에게 고하매 사울이 가로되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붙이셨도다”고 나옵니다. 이것이 사울의 인식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순종의 결과가 참으로 비참합니다. 14절에는 “다윗이 광야의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광야 산골에도 머물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고 나옵니다. 다윗에게 주어진 은혜는 ‘목숨 보존과 도망’이 전부였습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의 인생을 다루시는 방식은 참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 그일라 전투에 나갔지만 결국 사울에게 쫓기게 될 줄 알았을까요? 다윗은 알고 있었습니다. 참모들이 알고 있는 것을 다윗이 몰랐을 리가 있겠습니까. 고난이 닥칠 것을 알고도 이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우리 시대 많은 성도들은 예수를 진심으로 믿은 대가를 보상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수고하고, 헌신하고, 고난 받는 삶 그 자체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은혜요 복이라고 인식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고난 받기로 작정한 사람들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요. 사도행전 5장 41절에는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고 나옵니다. 사도들의 신앙의 자세를 보면 다른 것이 은혜와 복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분의 교회를 위해 죽기까지 수고하고 고난 받을 수 있는 것, 그것이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복된 은혜입니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는 자리로 부름 받은 것 자체를 기뻐했던 것입니다.

다윗과 사도들이 보여주고 있는 ‘자원하여 고난 받는 삶과 신앙’의 자세를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와 능력이 여러분 모두의 현실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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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예배설교] 사랑합시다 (Wednesday Evening Sermon)

사랑합시다

요한복음 13장 34∼35절

 

사전에 보니 ‘사랑’은 ‘어떤 상대를 열렬히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의 희락이며 또 상대를 돕고 이해하는 마음’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성경에서 인간의 마음에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 것일까요.

첫째, 구원자 되신 예수님을 깊이 사랑해야 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시며 우리의 모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예수님께서는 그 은혜와 축복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먼저 내려주십니다. 다음의 말씀을 묵상하기 바랍니다.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내 말하는 것을 생각하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딤후 2:6) 수고하는 농부는 축복을 먼저 받는다고 했습니다. 사랑을 먼저 많이 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은혜도 많이 받습니다. 불신자에서 신자로 변화된 사도 바울은 누구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내 몸에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흔적을 가졌노라”고 고백합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과 사랑에 빠져 보십시오. 사도 바울처럼 기적이 일어나고 천국이 열릴 것입니다.

둘째, 가족들을 깊이 사랑해야 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 13:1∼8) 우리가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중요합니다. 권력을 갖는 것도 중요합니다. 명예를 갖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가족을 버리지 않고 잃지 않는 것입니다. 많은 가정들이 사랑이 없어 불화로 해체되고 있습니다. 자녀들이 탈선하고, 깨어지는 세상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가족을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가족 간 사랑 안에 용서와 희생과 헌신과 오래 참음이 있습니다. 가족을 사랑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셋째,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 지파인 우리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할 의무가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웃 사랑의 본질이 무엇일까요. 죽을 수밖에 없는 이웃의 영혼을 그 죽음에서 건져내준다면 이것처럼 큰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단 12:3)

2017년은 우리 삶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과 가족과 이웃을 마음껏 사랑하고 섬기시길 기원합니다. 직장과 사업과 학교에서 하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넉넉히 살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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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예배설교] 대속하러 오신 메시아 (Wednesday Evening Sermon)

대속하러 오신 메시아

이사야 53장 1∼12절

 

이사야 53장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비천한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메시아의 고난과 영광’을 주제로 그의 징계와 고난이 우리를 위하심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징계를 당함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사 53:5).

그런데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아의 모습은 초라합니다(1∼3절). 이사야는 앞으로 오실 메시아가 사람들이 기대하던 슈퍼영웅이 아니라 메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같이 애처롭고 초라한 모습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풍채나 사회적 지위, 가문, 경제적 부유함, 학문적인 어떤 매력도 없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는 연약한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언은 700년 후 복음서에서 그려진 예수님의 모습과 동일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46)고 한 것처럼 멸시받는 지역 나사렛 사람으로 나셨습니다. 그가 친구로 삼고 제자로 부르신 사람들도 갈릴리 어부였습니다. 또한 비난 받던 세리와 장애인, 병든 자,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는 죄인의 친구”라고 조롱했습니다. 그는 실제로 허물 많고 초라한 인생들의 친구가 되시고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또한 그 메시아는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셨습니다(4∼6절). 하나님께서 그에게 죄를 담당하도록 한 것입니다. 바로 대속주로 오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허물과 죄가 드러나지 않게 감추고 숨기고 의로운 척하며 살아갑니다. 같은 죄인들끼리 서로 정죄하며 판단하고 외면하고 멸시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 메시아는 죄가 없었으나 대신 죗값을 받으셨고 형벌을 받고 죽으셨습니다(7∼12절). 바로 대속 제물로, 제물 된 어린양으로 끌려가 죽임을 당하십니다. 완전한 의인이시면서도 죄인 취급을 받으시며 곤욕 당하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묵묵히 침묵하시며 재판을 받으시고 채찍에 맞으시며 십자가를 짊어지고 갈보리산으로 올라가신 예수님은 곧 나와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신 대속의 제물이십니다.

그러면 하필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방법을 사용해 죄인들을 구원하셔야 했을까요.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세우신 구원의 계획이라면 훨씬 더 강력하고, 훨씬 더 수월하며, 훨씬 더 설득력 있는 방법은 없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친히 죄인의 몸으로 오셔서 몸소 고난을 받아야 하는 이러한 방식을 피할 수는 없었을까요. 하나님께서 고난과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구원을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창조자이신 하나님, 세상을 만드시고 세상의 질서를 세우신 하나님께서 죄의 책임을 메시아에게 전가하시고, 대속하셔서 모든 인간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 방식을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고난을 통한 구속이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고전 1:18).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그 십자가의 대속을 능력으로 힘입는 성도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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