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나귀 타신 예수님(Wednesday Evening Sermon)

나귀 타신 예수님  
마태복음 21장 1∼11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번성과 승리를 상징하는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주여, 나를 지금 구원하소서, 호산나!”라고 외치며 예수님을 맞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개선장군처럼 정복자의 위엄과 힘을 상징하는 전차와 말을 타지 않으시고 보잘 것 없는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사람이 왕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을 구원할 왕이 보잘 것 없는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럽습니까. 누가 봐도 이 세상을 구원할 왕의 모습은 아닙니다.

스가랴 9장 9절 말씀은 예수님이 겸손한 왕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자신의 힘을 스스로 제한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마땅히 누릴 수 있는 지위를 스스로 낮추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겸손한 왕으로 이 세상의 구원자가 되시겠다는 것은 자신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포기하는 겸손과 섬김으로 세상을 구원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따라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겸손과 섬김의 무기력은 이제 곧 일어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희생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팬터마임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예수님을 기대하고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결정됩니다.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그 힘의 숭배,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가져야 하고, 더 많은 성공을 이루어야만 한다는 세속적 욕망을 갖고 있다면 우리는 힘 있고 권세 있는 예수님을 기대하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것은 열광적으로 예수님을 환영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대했던 모습입니다. 이들은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겸손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신적인 능력을 갖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 패권을 가진 힘 있는 권력자의 모습을 기대하며 예수님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마가복음에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라고 외쳤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융성했던 다윗의 시기를 회복할 메시아라는 뜻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들은 예수님이 무기력하게 로마 군인들에게 붙잡혀 끌려 다니고 채찍 맞는 모습을 보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며 폭력적으로 돌변합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돌변’이 아닙니다. 그들 안에 잠재됐던 힘의 숭배가 드러난 것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환영하고 받아들이는 예수님은 나귀를 타신 겸손한 예수님입니다. 나귀 타신 예수님을 우리 자신의 욕망의 투사로 변형시키면 안 됩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해서 찬양하거나 예배하면 안 됩니다. 그건 예배가 아니라 우상숭배입니다. 적지 않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이 욕망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예배합니다. 나귀 타신 겸손한 예수님의 모습보다 능력과 이적을 베푸시는 예수님의 모습만 보려 합니다.

여러분, 나귀 타신 겸손한 예수님을 진심으로 영접하고 호산나 찬양할 때, 우리가 어떤 삶을 살게 됩니까. 힘으로 자기를 축적하는 인생이 아니라 겸손과 섬김으로 끊임없이 자기를 비우고 낮추는 십자가 인생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받아들이고 환영하고 영접하는 예수님은 권력과 힘으로 이 세상을 다스리고 지배하는 예수님이 아니라 겸손과 섬김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입니다. 자신을 제로로 낮추는 십자가 죽음을 향해 기꺼이 나귀 타고 가시는 예수님의 겸손을 깊이 묵상하고 받아들이는 사순절 기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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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예배설교] 복의 사람 아브라함 (Wednesday Evening Sermon)

복의 사람 아브라함
창세기 12장 1∼3절

 

하나님은 아담을 통해 세상을 맡기고, 하나님의 뜻대로 관리하고자 계획을 세우셨으나 인간이 죄를 범해 복의 사람이 저주의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인간이 모이는 곳마다 죄악이 넘쳐나고 심지어 사람 지으심을 한탄하신다는 하나님의 탄식소리가 천지를 울렸습니다. 인류는 결국 하나님의 진노 아래 노아의 홍수를 당할 수밖에 없었고,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새로운 인류 구원의 계획을 세우셔야 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으로 인류 구원의 서막을 여시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 1∼3절에는 복이라는 단어가 5번이나 계속해서 쓰여 있는데, 그 복이라는 단어가 히브리어로는 ‘브라카’이며, ‘하나의 복’ ‘복 자체’ ‘복덩이’ 등으로 해석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복 대신 하나님의 저주가 아담에게, 가인에게, 함에게, 뱀에게, 그리고 자연에게까지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저주가 창세기 12장 1∼3절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복으로 바뀌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불행과 저주에서 복과 생명으로의 전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본문 2절을 보면 먼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은 천하 만민에게 복의 통로가 될 만큼 충분한, 차고 넘치는 복이었습니다. 천지창조를 마치시며 마지막으로 사람을 만드신 주님께서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조금도 부족함이나 모자람이 없는 넉넉한 복이시기에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어 ‘브라카’의 상태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충분한 복을 받아 그 사람 자체가 복덩이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복덩이가 되면 그가 머무는 곳과 일하는 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넘침같이 하나님의 복으로 충만할 것입니다. 본문 3절은 브라카가 된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선포입니다. 하나님은 누군가 아브라함을 저주하면 그 저주가 저주한 사람에게 되돌아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복은 손자인 야곱으로까지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복으로 무장한 사람을 저주의 화살이 빼앗지 못했고, 저주와 불행도 그를 침범할 수 없습니다. 비양심적인 삼촌 라반도, 폭력적인 형 에서도 야곱을 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어 3절 하반절에는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임이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복이 아브라함에게만 주어진 복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매개로 해 열방과 모든 민족과 모든 족속에게로 흘러간다는 의미입니다. 이 복이 우리에게까지 흘러 우리 모두가 축복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도 모두 한 사람의 축복의 통로가 돼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브라카’가 되려면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순종했나요. 갈 바를 알지 못했던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순종하며 나아갔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복과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아브라함처럼 복의 사람임을 믿고 그 복으로 이웃을 주님의 사랑으로 나누며 섬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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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예배설교] 좋은 마음과 복음의 열매(Wednesday Evening Sermon)

좋은 마음과 복음의 열매 

누가복음 8장 4-15절

 

본문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입니다. 비유의 마지막인 15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주님께서 무엇 때문에 본문의 씨앗과 밭 비유를 하셨을까요. 어느 사람은 복음을 듣고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잘 맺었는데, 어느 사람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을 보시고 이것을 잘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본문의 교훈은 씨앗과도 같은 하나님 말씀이 좋은 밭에 뿌려지면 열매를 맺지만 길가와 돌밭과 가시밭과 같은 곳에서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몇 십 년 믿어도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지 못했다면 그것은 말씀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 마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같은 상황에서 어느 무엇을 탓하기보다 자신의 마음이 문제인 것을 직시해야 합니다. 본문 15절에서 열매를 맺는 좋은 땅을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기 위해 우리 마음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좋은 마음과 성숙한 인격으로 옥토를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를 위해 더욱 기도하고 힘써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개인주의와 물질주의가 어느 때보다 팽배한 속에서 살아가기에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마음은 세상의 것으로 황폐화되기 쉽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복음의 열매를 맺는 데 본이 되시는 예수님 마음을 항상 바라보고 닮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때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고 물질과 명예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사셨습니다. 또한 온유하고 겸손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사셨습니다. 우리도 세속적 영향 아래 있는 우리 자신을 의지하기보다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며 말씀이라면 죽기까지 순종해야 합니다. 온유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우리 언어와 행실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 성적과 결과는 말씀을 지성적으로 아는 것보다, 세상의 좋은 지위에서 생활하는 것보다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우리 마음자세에 달려 있습니다. 공부를 많이 한 목사님들이 교회를 성장시키지 못한 원인을 후에 깨닫고 말씀하시기를 “나의 지식에 너무 의존했기 때문이었다”고 고백하셨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이웃을 자신보다 더 사랑하고 그들을 위하는 삶을 살 때 교회가 성장했다고 증언합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도 영국 옥스퍼드 대학 출신이었지만 지성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세련되게 설교할 때는 영혼 구원에 실패했습니다. 비논리적이더라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설교할 때는 많은 영혼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지금도 주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 선포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삶에서 하나님 나라의 승리가 실현되고 있습니다. 말씀을 듣는 사람의 마음은 다양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어떤 사람에게 풍성하게 임하는지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을 들었을 때,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는가가 중요합니다. 복음의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좋은 마음과 인격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닮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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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예배설교] 풍성한 열매를 (Wednesday Evening Sermon)

 

풍성한 열매를 맺읍시다
요한복음 15장 5∼8절

 

광대한 성경 말씀을 한 단어로 요약한다면 어떤 단어가 좋을까요. 바로 예수(복음)일 것입니다.

예수 복음의 내용이 요한복음 3장 16절에 잘 요약돼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지만 이런 기쁜 소식이 있음에도 문제는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사람 모두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을까요.

십자가에 달린 독생자를 믿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 안에 생명의 주인으로 주님을 모셔 들여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 내가 거하고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할 때 구원의 새 생명을 얻게 됩니다(요 15:5).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새로운 피조물로 구원받게 됩니다(고후 5:17). 그러나 우리는 입으로만 “주여, 주여” 부를 수 있습니다. 그것을 간파하신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노아 당시에도 입으로는 “주여, 주여”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방주(예수 안) 안에는 거하지 않아 구원받은 사람은 겨우 8명이라고 베드로전서 3장 20절에 쓰여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도 입으로 “주여, 주여” 부르고 그들의 목적(떡, 병고침 등) 때문에 주님을 따랐지만 정작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 안에 거하지 못하고 떠난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었습니다(요 6:66∼68).

입술로는 “주여, 주여”라고 부르짖을지라도 생명의 떡이며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 15:6)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노아 때 사람들처럼, 벳세다 들녘 예수님 당시 사람들처럼 입으로는 “주여, 주여” 부르면서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 있지 않으면 썩은 가지처럼 버림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내 마당(성전 뜰)만 밟는다고 탄식하고 계십니다(사 1:12). 이처럼 성전 뜰(교회 안)에서 “주여, 주여” 부른다고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안에 거하지 않고 욕심 때문에 성전 뜰만 밟은 벳세다 들녘의 무리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생명의 떡을 먹고 지성소 안에 들어가 거룩한 영광의 빛이신 예수님 안에 거해야겠습니다.

예수의 부활 승천을 준비하는 사순절 기간입니다. 거룩하고 경건하게 지내는 교회 절기입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요 3:20)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을 마음 판에 새겨야겠습니다. 우리의 정과 욕심 때문에 죄로 인해 어두워질수록 빛이신 예수님을 멀리하지 말고 그 영광의 빛 속으로 들어갑시다.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 그 거룩한 영광의 빛 속에서 찬란한 부활의 풍성한 생명을 누립시다. 2014년 부활절을 앞두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풍성한 부활의 생명의 열매를 많이 맺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 돌리는 주님의 제자가 됩시다.

이천구 광명 행복한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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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snuday sermons

 

고난 뒤에 있는 축복   (벧전 5:7-11)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
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
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권능이 세세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베드로전서 5장 7절-11절)


1. 모든 사람들은 힘든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을 바다를 항해하는 것에 비유했고, 그것도 고해(苦海), 고통의 바다를 항해하는 것에 비유했습니
다.
힘들게 살아가는 것은 우리나라 뿐만은 아닙니다.
세계 어느 곳에 가도 힘들게 사는 사람들은 다 있습니다.
그렇게 풍요로운 나라라는 미국에서도 보면, 어렵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실 따져보면 편하게 사는 사람들 보다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이 세상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찬송가에도‘이 세상 험하고 나 비록 약하나 늘 기도 힘쓰면 큰 권능 얻겠네’라는 찬송을 부릅니다.
이 세상은 험하고 나는 약한 존재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힘들게 살아가는  것은 우리의 삶의 터전이 흔들리는 터전이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어디를 가 보아도 안전한 삶의 터전은 없습니다.
<흔들리는 터전>이라고 하면 실감이 나지 않을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한번 <지진>이 날 때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진이 날 때 보면 땅의 기초가 흔들립니다.
아무리 높은 건물도 터가 흔들리니 무너져 내립니다.
우리의 삶의 터는 어디에 가 살아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요즘 탈북자들을 일컬어 <새터민>이라고 부릅니다.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한 사람이란 뜻일 것입니다.
저들이 천신만고 악몽과 같은 생활의 터전에서 탈출하여 <새터민>이 되었지만, 정작 남한에 와 보니 역시 세
상이 그렇게 살기가 쉽지만은 않음을 절감할 것입니다.
이것은 미국에 새 터를 마련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민 가서 고생하지 않고 자리를 잡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성공한 사람들 뒷이야기를
들어보면 모두 눈물날 정도로 고생한 분들입니다.


그렇게 보면 어딜 가나 모두 힘든 세상임이 분명합니다.
그러기에 신앙생활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신앙인과 신앙이 없는 사람의 차이는 이 세상 안에서도 구별됩니다.
신앙인은 터가 흔들릴 때도 이겨 낼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위에 찬송가처럼, 이 세상 험하고 나 비록 약하지만 늘 기도 힘쓰면 큰 능력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도 비유적으로 말씀한 적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집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무너지지 않을 반석위에 지은 집이 있고, 다른 하나는 모래위에 짓는 집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반석이 바로 믿음을 의미합니다.
신앙이 왜 필요한가?
잔잔할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이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파도가 일어나 몰려오기 시작하면 닻이 필요합니다.
<닻>을 내리면 파도를 이겨낼 수 있습니다.
똑같은 힘든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가정은 무너지지 않는데, 어떤 가정은 무너져 내립니다.
믿음이란 닻줄이 없거나 끊어졌거나 하기 때문입니다.


2. 믿음의 터가 견고해 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믿음의 터는 <고난>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육체도 튼튼해지려면 단련해야 튼튼해집니다.
팔뚝의 힘도, 다리의 힘도, 반복된 운동을 통하여 견고해집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왜 기성세대에 비하여 약해졌습니까?
고난의 연단이 없이 자랐기 때문입니다.


6.25 세대들을 보면 모두 삶의 연단을 통해 단련된 사람들이었기에 지금 세대들 보다 강하게 현실을 극복해 낼 수 있었습니다.
왜 군대에서 해병대가 강하다고 합니까?
훈련을 강하게 시키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한계 상황까지 이르도록 훈련을 시키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일어나는 고난은 삶의 터를 견고케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우리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고난 중에 있을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 근신하라고 했습니다.
둘째, 깨어 있으라고 했습니다.
셋째, 마귀를 대적하라고 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고난 중에 근신하지 못하고, 깨어있지 못하고, 마귀를 대적하지 못하고 마귀가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술 취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낙심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방탕하는 일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남들이 낙심할 환경에서 일어난 사람들입니다.
남들이 포기하는 환경에서 정면으로 대결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낙심케 하고, 부정적인 생각으로 이끄는 마귀를 대적하여 일어나야 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낙심하면 들어 누워 버립니다.
술 취해서 비틀거립니다.
제대로 걸음걸이를 못합니다.
그리고 남의 얼굴을 그어 버립니다.
폭력을 씁니다.
주먹을 휘두릅니다. 
그래서 다시 감옥으로 갑니다.
그러다 나오면 다시 반복해 그런 길을 걷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흔들리는 터전에서 <닻줄>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붙들어 맬 수 있는 믿음이란 닻줄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닻줄이 있는 사람에게는 고난 뒤에 올 축복을 바라보게 됩니다.
폭풍이 지난 후에 떠오를 태양을 바라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반드시 신앙의 눈으로만 보여 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이 눈을 통하여 <미래>를 바라보았습니다.
요셉도 이 눈을 통하여 고난 뒤에 올 <축복>을 보았습니다.
에스더도 이 눈을 통하여 담력과 힘이 생겼습니다.
신앙의 사람들은 현재의 고난을 보면서 낙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고난 뒤에 오는 축
복을 바라보는 영안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3. 고난 뒤에 있는 축복을 바라보는 영안이 열려야 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난 중에서도 주님이 함께 하심을 영적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자들에게는 현세에서도 100배나 얻고 영생을 얻지 못할 자가 하나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고난을 당하면서도 주님과 복음을 위한다는 고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의 고리입니다.
그 고리에 닻줄을 매어 놓으면 어떤 세상의 어떤 풍랑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복음 성가 중에 이런 노랫말이 있습니다.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지 마세요.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 미리 보면서 감사 하세요. 너무 견디기 힘든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이 일하고 계시잖아요, 남들은 지쳐 앉아 있을지라도 당신만은 일어서세요.
<후렴>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주님이 손잡고 계시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함을 믿는다면 어떤 역경도 이길 수 있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함을 믿는다면 어떤 역경도 이길 수 있잖아요”참으로 가사에 은혜가 되는 복음성가입니다.


저는 이 노래를 우연하게 들으면서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면서 눈물이 왈칵 났었습니다.
참으로 돌아보면 험한 세월을 살아왔다고 봅니다.
우리 세대가 다 그런 험한 세상을 만난 세대들이었지만, 전쟁, 죽음, 배고픔, 가난의 험한 세월을 지내왔습니다.
  그런 중에도 힘들고 어려운 목회의 길에서 이제까지, 이 자리까지 인도해 주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   
미리 보면서 감사 하세요”라는 말은 자꾸만 가슴에 와 닿는 말입니다.
고난 중에 있을 때 고난만 보지 말고,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을 바라보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영안이 열려지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벌써 우리 보다 앞서간 성도들의 걸어간 길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고난 뒤에 있는 축복을 바라보면서 승리합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 가운데 지금 고난 중에 있는 분들이 있습니까?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미리 감사 하십시요.
우리의 믿음의 터는 이 고난을 통하여 더욱 더 견고해 질 것입니다.
모쪼록 남들은 지쳐 앉아 있을지라도 당신만은 일어 서십시요.
일어서는 자들에게 주님은 그의 팔로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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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설교,snuday sermons

고난을 받는 자세  (골 1:24) 


본문 :
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로새서 1:24)

[믿음대로 살아도 고난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살아있는 것, 예수 믿게 된 것, 기도할 수 있게 된 것.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가장 큰 것은 예수 믿어서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믿음으로 천국시민이 된 은혜보다 더 큰 은혜를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믿음을 가짐으로 받는 은혜와 축복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음으로 믿음이 자라고 믿음이 자랄수록 말씀대로 살고 하루의 삶이 더 행복해지는 줄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은혜를 받고 믿음으로 살면서 행복하게 사는 삶이 계속 되면 참 좋겠지만 때때로 고민을 하게 되는 일이 생기는데 그것이 말씀대로 사는데도 불구하고 고난이 있을 때입니다. 지금같이 은혜롭게 살고 지금같이 좋을 때가 없는데 갑자기 하나님이 고난을 주시는 이유가 무엇일까를 고민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고난이 없으면 더 말씀대로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믿음으로 살고 말씀대로 살아도 전혀 생각 밖의 어려움이 생길 때가 있고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성경에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도 이런 때가 있었습니다. 갑자기 흉년이 와서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었습니다. 이삭, 야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윗의 믿음은 정말 훌륭합니다. 그럼에도 그의 일생은 고난이 정말 많았습니다. 욥과 같은 경우도 하나님이 칭찬하실 정도였지만 엄청난 고난이 닥치는 것을 봅니다. 사도 바울은 일생을 하나님에게 바치고 다 희생하며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고난이 날마다 있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도 고난 없이 산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인생이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욥 5:7) 엄마 뱃속에 있던 아기가 나올 때에도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그러니까 태어날 때부터 엄청난 고난 속에서 태어나고 죽을 때까지 고난이 있습니다.

[애매한 고난을 주시는 이유는 은혜 받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죄로 말미암아 당하는 고난, 애매한 고난, 선한 일을 위하여 받게 되는 고난”(벧전 2장)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죄로 인해 당하는 고난은 당연합니다. 죄 값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고난은 유익이 많습니다. 그 고난으로 인하여 회개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벧전 4:1) 그 뿐만 아니라 죄 가운데 사는 사람이 고난 중에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사람이 많습니다. 고난 중에 예수 믿어서 하나님 앞에 돌아와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이 자리에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범하고 죄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찾아온 고난은 축복입니다. 그래서 고난은 축복입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괜찮다고 해보십시오. 그러면 당장 이 곳은 지옥이 될 것입니다. 이 고난 때문에 세상이 이 정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중에 고난을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십시오.

2. 또 선한 일을 하는 중에 고난을 받은 사람은 기쁨으로 참을 수 있습니다. 이런 고난은 받은 상과 영광을 생각할 때 이 고난을 잘 참을 수 있습니다.

3. 그러나 문제는 애매한 고난입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인 것입니다. 말씀대로 믿음대로 사는데도 왜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시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더 답답하고 괴로운 것입니다. 이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에게 복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는 기회로 만드는 것이 제일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 생각하면 이런 고난이 올 때 화가 나고 원망 불평할 수 있습니다. 또 해결이 안 되어서 고민하고 낙심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고난이 없어지기만을 바라면서 살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4. 하나님께서 이런 애매한 고난을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이유는 첫째로 우리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서이고, 둘째로 하나님께서 이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통해서 영광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이 믿음이 매우 중요합니다. 전혀 이유를 알 수 없는 애매한 고난이라도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유익을 주시려고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라는 그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성숙한 사람이 고난을 받는 자세]

  믿음이 어린 사람과 성숙한 사람의 차이가 고난을 당할 때 고난을 받는 자세에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왔을 때 고난 받는 자세를 보면 그 사람의 믿음의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1.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기도합니다.

  믿음이 성숙한 사람은 애매한 고난이 왔을 때 첫째로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기도합니다. 믿음이 성숙한 사람은 주권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믿는 사람입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이 애매한 고난이 온 이유도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이 무엇인가 내게 말씀하시고 알게 하시려는 것이 있기 때문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세상에 우연한 일은 없습니다. 절대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아니면 절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건 하나하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뜻을 알기 위해서 엎드리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고난이 크면 클수록 크게 부르짖으십시오. 그러면 큰 은혜를 받습니다. 그리고 큰 믿음을 가집니다. 그러면 큰 축복을 받고 큰 일꾼이 됩니다. 어떤 고난이 와도 엎드리면 자신에게는 복이 되고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고난은 기도하라는 사인입니다. 다니엘은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기 때문에 사자 굴에 들어가서 밥이 되는 고난이 왔을 때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변명도 하지 않고 오직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 하나만 했습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2-3) 예레미야가 하나님 앞에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눈을 여셔서 하나님의 엄청난 일을 보여주셨습니다. 『보라 내가 이 성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강과 성실함에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내가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여 그들을 처음과 같이 세울 것이며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의 내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 이 성읍이 세계 열방 앞에서 내게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찬송과 영광이 될 것이요 그들은 나의 이 백성에게 베푼 모든 복을 들을 것이요 나의 이 성읍에 베푼 모든 복과 모든 평강을 인하여 두려워하며 떨리라』(렘 33:6-9) 이 시대는 포로로 끌려가고 있는 시대였습니다. 포로로 끌려갔던 사람들이 돌아와서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회복시키신다는 것입니다. 나라가 망하고 성전이 불타도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그 비밀을 알았으니 참 행복했을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은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지역마다 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라고 하는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앗수르 왕이 쳐들어왔습니다. 밤새도록 엎드려 기도했을 때 18만5천의 군사들이 다 죽어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히스기야의 이름이 더 높아지고 그 위기가 축복으로 바뀌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히스기야에게 죽음이 찾아왔을 때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고 15년이나 더 살게 하시고 증거로 해 그림자가 15도나 더 뒤로 물러나는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에게 힘든 일이 생길 때 낙심하지 마시고 히스기야처럼 엎드리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2. 더욱 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삽니다.

  두 번째로 믿음이 성숙한 사람은 더욱 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것만을 결심합니다. 이유는 말씀대로 살 때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대로만 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늘 복 받을 것을 믿습니다. 고민할 것 없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더 말씀대로 살 것을 결심하고 애를 쓰면 반드시 축복하시고 책임지시는 것을 눈으로 볼 줄 믿습니다. 창세기 26장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이삭에게 하나님은 애굽으로만 내려가지 말고 내가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이삭은 흉년 때에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그랄 지방에 갔습니다. 그 때에 100배의 축복을 주셔서 마침내 거부가 되었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준행하시기 바랍니다. 요셉이 억울하게 감옥에 갔을 때도 거룩하게 말씀대로 살 때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말씀대로만 살면 하나님께서 책임지십니다. 이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십시오. 다니엘이 포로였지만 왕의 진미로 몸을 더럽히지 않고 늘 3번 기도했을 때 어려움이 닥쳐도 하나님께서 결국 축복해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오래 전에 서울에서 집회했을 때의 일입니다. 교회를 새로 잘 짓고 저를 불러주셨습니다. 보통은 강사숙소를 호텔로 자주 정하는데 저에게는 교회에서 5분 정도 거리에 있는 집사님 댁에 큰방을 주셨습니다. 제법 큰집이었지만 추운 날씨였는데도 방에 불을 떼지 않았고 물도 찬 물만 나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좀 기분이 나빴습니다. 장로님들과 저녁 식사를 하는데 집사님 남편이 왔습니다. 그 남편이 제게 공손히 인사하면서 ‘목사님, 저는 1년에 한 두 번 교회에 소풍갑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더 기분이 더 나빴습니다. 그 말은 결국 자신을 교회에 데리고 가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식사 후에 모두 교회에 가고 저는 조금 여유 있게 가려고 혼자 남았습니다. 그런데 그 남편이 걸어가면 5분 거리를 고물 자동차에서 저를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아주 놀랐습니다. 저녁예배 드리고 나오니까 또 차로 저를 집에 데려주었습니다. 그 다음날 새벽 예배 때에는 5시 정각에 남편이 넥타이까지 매고 부인 성경을 들고 차에서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새벽예배를 드린 후에는 제가 1시간 이상 기도하니까 그 분이 못 기다리고 먼저 가셔서 저는 걸어서 오곤 했습니다. 그렇게 집회를 계속 했습니다. 그 남편을 보면 귀하고 방을 보면 짜증이 나곤 했습니다. 목요일 새벽에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데 남편이 추리닝을 입고 뛰어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차를 경찰이 몰고 오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까 면허도 없이 새벽에 운전 연습한다고 자신이 끌고 돌아다니다가 걸린 것이었습니다. 사실 운전 연습한다고 저를 데리고 다닌 것이었습니다. 참 기가 막혔습니다. 그래서 제 마음 속에 ‘하나님께서 이 가정을 축복해주셔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가정이 축복을 받아야 주의 종이 대접받는 것이 즐겁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낮 공부 때까지 계속 기도할 때니까 방해하지 말라고 하고 집중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 기적이 일어나는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낮 공부를 마치고 점심을 시내에서 먹고 돌아오니까 대문을 활짝 열고 남편이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남편이 저를 데리고 소파에 앉더니 두 내외가 큰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때문에 축복을 받았다면서 절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분은 중동에 수출을 했는데 사업을 확장시켰다가 부도가 났습니다. 은행에서 압류하려고 결정을 내리는 상황에 부흥회가 있었고, 교회에서는 부흥강사를 위해서 호텔도 얻고 준비도 했는데 두 내외가 모시겠다고 하니까 믿음이 약한 사람들이 낙심할까봐 허락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새벽 예배 나가서 부인집사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처음에는 십일조 생활을 했는데 회사가 잘 되니까 십일조의 액수가 커져서 떼먹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회 5분 거리에 살면서도 장로님, 목사님 아무도 대접한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 번도 대접하지 못하고 집이 날아갈 상황이 되자 부흥강사를 대접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제가 거기서 머문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망한 사람이 결심하고 십일조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겠다고 결심하고 장로님들과 저를 대접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목요일에 경찰에 걸리는 바람에 저는 기도했는데 그 시간에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수출전람회 중에 그 회사도 전시를 했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그 회사를 보다가 1억 5천만원을 주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에 1억이 얼마나 큰 돈입니까! 그래서 그 회사를 살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 수출 제품을 들고 교회에 가져와서 간증하고 설교했습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왔을 때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첫째로 기도하기로 결심하십시오. 둘째로 말씀대로 살겠다고 결심하십시오.

3. 고난을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성숙한 믿음의 사람들은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욥의 문제는 기뻐하고 감사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살아있는 것 자체가 한심스럽고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이 데려가시는 것이 났다는 약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만약 욥이 그 상황 중에 기뻐하고 감사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은 어떤 고난이 있어도 기뻐하고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성숙한 믿음을 가진 사람]

  그러면 어떤 믿음을 가진 사람이 이렇게 살겠습니까?

1. 첫째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고난은 우리에게 복이 된다는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고난은 위대한 사람을 만듭니다. 고난은 마치 뜨거운 불의 용광로와 같아서 금을 넣으면 모든 찌꺼기가 사라지고 정금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유도 없이 고난을 주시는데 목적 가운데 가장 큰 것이 그 사람의 찌꺼기를 없애기 위해서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정욕, 혈기, 교만, 위선, 오만의 모든 찌꺼기들을 없애기 위해서 고난의 용광로 속에 하나님은 우리를 넣습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왔을 때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할 때 그는 은혜를 받으면 위대해지지만 자신에게 고난을 준 사람을 원망하고 미움을 가지면 그 사람은 더 악한 사람이 됩니다. 고난을 받는 자세를 보면 그 사람의 믿음 상태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고난 받는 자세가 무척 중요한 것입니다. 억울하게 고난 받을 때 하나님은 생각지도 않고 사람과 세상을 원망하고 불평하면 더 악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2.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고난은 반드시 전화위복이 된다는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요셉과 같이 억울한 고난은 반드시 더 큰 축복을 가져온다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이런 믿음의 소유자들은 항상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을 믿으십시오.

3. 세 번째로 고난이 왔을 때 항상 기뻐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된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다니엘은 이런 믿음으로 사자굴에 들어가도 기도하고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이고 스데반도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기쁨이 충만했고 원수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것입니다. 그 자리에 사울이 있었습니다. 사울이 스데반의 그 모습으로 사도 바울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영적성숙의 변화는 고난 받는 태도와 정비례합니다. 그 사람의 믿음이 성숙해져가는 것은 고난 받는 태도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 1:29)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주시는 목적인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소원과 목표가 주님을 위해서 기쁨으로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따라오려면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딤후 2:3)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딤후 4:5) 계속 디모데에게 강조하는 것이 고난을 잘 받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우리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실 때까지 남은 고난을 자신의 몸에 채운다는 것입니다. 이 사도 바울의 자세가 얼마나 위대한지 모릅니다. 저와 여러분도 고난 많은 이 세상에서 살면서 고난 때문에 낙심하는 사람되지 말고 모든 고난을 자신에게 복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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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둘째주일 낮예배 설교 (August.snuday sermons)


고난을 은혜로 (고후 12:7-10)


찜통더위가 늦게까지 기승을 부리더니, 이제 슬슬 물러설 차비를 하는 것 같습니다. 저 자신만 해도 예전에는 한여름 무더위가 즐겁기만 했는데, 이젠 여름 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참 힘들다, 지친다 할 즈음에 또 이렇게 계절이 바뀌는 신비를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총으로 허락하십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는 데는 언제나 쾌청하고 신선한 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더운 날도 있고, 매서운 추위와 싸우는 날도 있습니다. 사는 날들이 언제나 해뜨는 날만 있는 것이 아니라, 흐린 날도 있고, 비바람 몰아치는 폭풍의 날도 있습니다.

우리 생활도 그렇습니다. 언제나 행복하고, 기쁨과 웃음만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한숨짓고, 비통의 눈물을 흘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성공할 때가 있는가 하면, 역경에 처할 때가 있고, 건강할 때가 있는가 하면, 뜻하지 않은 병마와 씨름할 때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다 자기 나름대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만이 남보다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점에 고통의 무게가 있고, 고통이 고통 되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젊은이들은 나만이 실연당한 상처를 입고 사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사업에 실패한 분들은 나만이 이런 큰 고통 가운데 헤멘다고 여깁니다. 건강을 잃은 분들은, 왜 하필 내가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그 병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고통이 고통 되는 것입니다.

전에 섬기던 교회에 연세 많으신 할머니 한 분이 눈이 어두워 앞을 보기 어려웠는데, 결국 시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심방을 가도 위로를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이라면 왜 꼭 내 눈을 멀게 했습니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저 원망만 하고, 반항만 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몰고 가고, 잘해 주는 이웃에게 오히려 악하게 대합니다. 이 분은 자기 스스로를 괴롭히는 자학의 힘으로 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생각하면 이 세상에는 나보다 더 어려운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시력만 해도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할 수만 있어도 그 고통의 무게는 반으로 줄어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당한 고통은 나만 당한 것이요,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하는, 나만의 쓰라린 고통을 겪고 있다고 저마다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고통이 점점 더 커지는 원인 입니다.

어쨌든 왜 사람들은 이런 고통과 고난 속에서 살아야 하느냐? 그 이유를 따진다면 몇 가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인간 자체가 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얇은 유리그릇과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닥치면 금이 가고, 심하면 깨어집니다. 몸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마음과 정신은 더욱 그렇습니다.

둘째는 실수 때문입니다. 실수는 누구나 피할 수 없습니다. 실수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실수 때문에 생기는 고통은 심각합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야고보 사도는 고통스럽게 고백합니다.

셋째는 삶 자체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산다는 것, 그 자체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죄 범한 인간들에게 주어진 필연적인 고난입니다. 그래서 전도서에서는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라고 말하고, 시편 시인은 “하나님, 내 영혼이 피곤합니다” 호소합니다.

넷째는 무지 때문입니다. 사람이 무얼 좀 안다고 하지만 별 것 아닙니다. 우리는 죽는 날을 모릅니다. 미래를 모릅니다. 내 앞에 어떤 일이 전개될 지 전혀 모릅니다. 이 사건들이 어떻게 풀릴지, 이 일들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뿐만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이 생애, 이 의미의 깊이를 모릅니다. 그래서 불안하고, 그래서 고통스럽습니다.

신앙생활도 살펴보면 마찬가지입니다. 사노라면 신앙생활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갈등이 있습니다. 불평, 불만, 원망이 있습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 영혼이 시원하지 못하고 때로는 답답함이 있습니까? 모르기 때문입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깊은 뜻을 모르기 때문에, 내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귀한 존재요, 복된 존재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다섯째는 무능 때문입니다. 아는 만큼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학생 때 공부해야 하는 줄 알았지만, 열심히 못했습니다. 내가 가야 할 길을 아는데, 못 갔습니다. 잘 될 때 내가 행해야 할 일들을 알고 있었는데, 그만 그대로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누가 빼앗은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린 그 많은 좋은 기회를 알고 있기에 이제 괴로운 것입니다. 이것이 고통입니다. 여기에 고난이 있습니다.

그리고 선한 길, 바른 길,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내가 걸어가야 할 것을 알면서도, 마음은 원하여도 육신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내 고집을 꺾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는 나의 무능력함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남도 믿지 못하고, 세상도 믿을 수 없고, 나 자신도 못 믿습니다. 그 누구도, 아무 것도 믿을 것 없으니, 항상 불안 할 뿐이요, 고통스러울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도, 지혜도,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에 빠져 들어가는 제자가 예수님께 부르짖습니다. 나를 구원해 주소서, 소리칩니다. 그 때 예수님은 손을 잡아 일으키면서 ‘적게 믿는 자여, 어찌 의심하느냐’ 했습니다. 의심, 믿지 못하는 것으로 인해서 계속 고통이 따르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고난의 한 복판을 살아가는 사도 바울의 소중한 간증을 들어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라고 하면 신약 성경의 약 절반을 쓴 인물이요, 기독교 신앙을 체계화한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의 인물도 인간적으로 보면, 평생을 가시밭 속에서 이리저리 가시에 찔리며 상처를 안고 살았습니다.

그에게 큰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 어려운 고통을 제거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나가서 세 번을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이 세 번이란 그저 세 번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특별한 기간을 두고, 금식 했는지, 철야 했는지, 특별 작정을 하며 세 차례나 기도했는데, 이에 대한 응답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생을 위탁한 사람입니다. 온 생을, 전 생명을 하나님 앞에 깨끗하게 바쳐서 헌신하는 충실 된 주의 종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더욱 복을 많이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넘치도록 축복하셔야 되는 게 아닙니까? 그러나 이런 상식이 통하지 않습니다.

과연 바울이 받은 복은 무엇입니까? 부귀는 없다 해도, 건강은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는 건강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가정은 없어도 명예는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명예조차 없습니다. 성공은 없다 하더라도, 보람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늘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고통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복을 받아야 할 것 같은데, 일반적인 상식으로 말하는 그런 복은 바울에게는 없었습니다.

칭찬 대신에 비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동족의 오해와 친구들의 몰이해와 많은 사람들의 비난 속에서, 외롭게 살면서 복음을 전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여기 결정적인 고민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육체의 가시, 사탄의 사자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육체의 질병이 있었다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어떤 이는 그 병이 안질이라 합니다. 어떤 이는 주기적으로 오는 열병이라 합니다. 어떤 이는 간질병이라 합니다.

뭐니뭐니해도, 육체의 고통은 참으로 큰 것입니다. 내 몸이 아프고 쓰라릴 때, 그 누가 나를 위로해 줄 수 없습니다. 쑤시고 아픈 육체의 가시는 참으로 큰 고통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닙니다. 나아가서는 이것이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몸만 아픈 것이 아니라, 몸으로 인해서 마음도 아픕니다.

주의 종이 되어서 몸에 간질병이 있어서 되겠습니까? 남에게 안수해서 병 고치고, 내 손수건만 닿아도 병을 낫게 했는데, 내 병을 고치지 못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심령이 고통스러워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병을 고쳐 주시지 않으시고, 기도 가운데 놀라운 신앙의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바울아,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이는 나의 능력이 너의 약한데서 온전하여지기 때문이니라.” 평소에 육체의 가시는 영육 간에 나를 약하게 만드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시를 통해 나를 더욱 강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는 바울을 그대로 아멘!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믿었습니다. 또 지금 당장은 납득이 안가는 부분이 있을찌라도 그 부분은 그대로 믿었습니다. 충분한 것으로 믿었습니다. 즉 가시가 없어져서 감사한 것이 아니라, 가시를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더 큰 은혜를 깨달은 것을 감사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고난에 대해 몇 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첫째, 고난을 긍정적으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나에게 다가오는 고난을 극복하는 기본자세는, 고난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고난을 인정해야 합니다. 어째서 내게만 이런 고난이 닥치는가, 왜 하필 내게 이런 문제가 있는가? 이런 질문은 아무런 해결을 우리에게 주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는 내게 닥치는 고난을 먼저 긍정적으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사람이 건강하게 살기를 원하지만, 건강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건강으로 타락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공하기를 바라지만, 성공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성공으로 교만해 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실패가 축복이 되고, 잠시 병든 것 때문에 더 위대하게 된 사람도 많습니다.

예전에 세계의 존경과 사랑을 받던 토스카니니라는 유명한 지휘자가 있었습니다. 원래 그분은 첼로 연주자였습니다. 눈이 나빠서 제대로 악보를 볼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악단의 지휘자가 병으로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단원 중 누군가가 급히 지휘를 해야 할 입장이었습니다. 그 때 악보를 몽땅 외우고 있던 토스카니니가 지휘했던 것이 인연이 되어 세계적인 지휘자가 된 것입니다. 시력이 나쁜 것을 그대로 받아 들이고,그래서 악보를 통째로 외운 것이 세계적인 지휘자로 등장하게 했던 것입니다.

어느 분은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내가 고칠 수 있는 것은 고칠 수 있는 용기를 주옵소서. 내가 고칠 수 없는 것은 그대로 받아 들일 수 있는 평온함을 주옵소서. 그리고 이 두 가지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우리 모두가 드릴 귀한 기도입니다.

둘째, 고난 속에서 겸손해 져야 합니다. 이 고난은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에게 주셨다고 겸손히 받아 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사람의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은 언제나 온전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 강하다고 여길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사람들 가운데서 온전히 나타나지 못합니다. 오히려 사람이 자신의 약함을 스스로 깨달을 때에 주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나는 법입니다.

토기장이의 능력과 기술은 흙이 부드럽고 연할 때에 온전히 나타날 수 있습니다. 흙이 굳었을 때에는 그 흙을 토기장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없습니다. 대장장이가 쇠로 무엇을 만들 때에, 그 쇠가 뜨거워져서 부드러워져야만 대장장이의 능력이 발휘되는 것입니다. 쇠가 단단해 졌을 때는 주인이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며 때로 고난을 당합니까? 예기치 않던 큰 어려움이 있습니까?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 앞을 가로막습니까? 바로 이 때가 하나님이 나를 쓰시고자 하는 때입니다. 약함으로 나를 강하게 하시고, 나의 이 약함을 통해 능력 있는 존재가 되게 하려 하심을 믿으면서 그 고난을 이겨나가야 할 것입니다. 겸손히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 앞으로 나아가서 바울처럼 주님 주시는 은혜를 덧입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 고난 속에서 할 일을 찾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시련을 통해 강한 존재가 되어 승리의 생활을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고난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10절 말씀입니다.

우리는 큰일을 하든, 작은 일을 하든, 주님을 위해 일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내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공하든, 실패하든, 이곳에서 내가 할 사명을 찾아야 합니다. 시련은 나의 할 일을 가시 보자기에 싸서 나에게 줍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나의 일을 찾은 사람에게는 가시가 면류관으로 바뀌어 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실망과 불행을 모르고 산 것은 그에게 고난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환경이 좋았기 때문이 아니라, 할 일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을 만나면 그들을 위해 할 일을 찾았습니다. 이방인을 만나면, 또한 그들을 위해 할 일을 찾았습니다. 감옥에 들어가면 감옥에서 할 일을 찾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할 일을 찾았기에, 고난도 은혜가 된 것입니다.


올해는 광복 59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의 큰 굴레를 벗겨 주셔서, 일제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는 광복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감사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 한국 기독교의 신앙은, 비바람 속에서 피어난 꽃처럼 순교와 박해 속에서도 절개를 지키며 꿋꿋하게 피어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순교자의 피를 밑거름으로 피어난 오늘의 기독교라는 꽃을 우리가 즐기고 누릴 수 있기까지는 이 광복을 기다리고, 사모하던 많은 어르신들의 소망과 기원과 노력이 담겨 있었음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이 광복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한편 일제의 강점 36년이 참 길었는데, 우리 민족의 분단 상황은 반세기를 넘어 이제 회갑이 되어갑니다. 우리 민족은 통일을 맞이하기까지는 참된 광복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유일한 분단국가, 우리는 이 민족의 고난을 오히려 은혜로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 통일은 단지 남과 북의 통일이 아닙니다. 온 인류의 화해와 일치와 공동 번영을 이루는 일입니다. 이 일을 감당하라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단의 고난을 허락하신 줄 믿어야 합니다. 이 민족의 소명을 감당할 때 고난도 은혜가 되는 줄 믿습니다.


또한 오늘 우리는 장학 주일로 지킵니다만, 어려운 여건 속에서 공부하고 있는 우리 자녀들, 학생들 고난을 은혜로 바꾸는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어려운 형편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더욱 겸손해 지며, 그 가운데서 나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사명을 찾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장학 헌금을 내시는 분들은 우리 평화교회 내 식구 내 자녀들의 어려움을 은혜로 바꾸는 일에 동참함을 감사하시며 헌금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바라기는 이와 같이 때로 우리가 만나는 고난 속에서도, 고난을 은혜로 여기며, 고난을 믿음으로 이겨 나가고, 고난 가운데서도 나의 사명을 찾아 나가는 축복받은 하나님의 백성들 모두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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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snuday sermons

여호와께 감사하라  (시136:21-26)


저희의 땅을 기업으로 주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곧 그 종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를 비천한데서 기념하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를 우리 대적에게서 건지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주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21-26

한 해의 추수가 끝나고 하나님께서 주신 수확을 감사하며 풍성한 곡식과 함께 우리의 마음을 바치는 절기입니다. 지금 계절적으로는 겨울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지만, 우리의 금년을 풍요롭게 해주신 하나님을 다시 한 번 바라봅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모든 것이 허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금년에는 거두어 들인 곡식만 예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과 가정을 함께 드리는 절기가 되시길 바랍니다.

유대력에 의한 3대 절기는 출애굽기 23:14-17에 계시된 바와 같이, 무교절이라고 하는 유월절과, 칠칠절 또는 초실절, 오순절이라고 하는 맥추절과, 초막절이라고도 하는 수장절이 있습니다. 이 절기의 목적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언약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먼저 바라보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서원 제물과 감사 제물을 드렸습니다.

히브리인의 유일하신 하나님 사상에서부터 신약의 영적인 진리를 받아들이는 모든 사건은 이러한 절기를 통하여 하나님을 경배하고 민족적 단결을 도모한 것이 그 중심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구약 때의 수장절을 은혜 시대의 감사의 제사로 여기고 하나님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감사의 조건이 주어질 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의 조건이 없는 상태에서 감사할 조건을 주실 하나님을 신앙하며 먼저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광야 40년의 노정에서 지칠 대로 지친 나그네의 삶이었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해 주시지 않았으면 허허한 벌판에 천막을 치고 그들이 어떻게 광야 생활을 견디어 내었겠습니까? 그들의 기다림은 맹목적인 신앙의 기다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구름이 머물러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옮겼다가는 그들에게 금방 내려질 하나님의 심판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그들의 경험에 의한 확신이었습니다. 구름이 머무는 곳은 성막 한 가운데입니다. 말씀 중심의 삶을 훈련시키신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그 언약의 백성들이 고통의 종점이 되었다 싶으면 가나안에서 또 다른 고통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감사가 없었다면 오늘날 그들의 후손을 통한 구원의 메시지는 결코 전파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을의 수확에 대한 기쁨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그들은 감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그들이 얻은 약속의 땅에서 영원한 기업을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1년 동안 수고한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는 그들의 삶의 우선권이 먼저 하나님께 있다는 뜻입니다. 매사에 먼저 하나님을 바라보았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서 우선권을 하나님께 돌릴 때 우리에게 약속해 주신 기업을 소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는 하나님을 먼저 바라보는 자 누구에게나 이미 응답된 기도의 내용이 될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는 그리스도인들이라 불리우는 무리들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고통과 좌절과 슬픔의 역사로 점철되어 온 민족사 속에서 ‘한의 눈물’을 흘릴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말세에 ‘동방의 빛’으로 선택해 주신 하나님의 영원하시고 인자하신 축복 앞에 감사의 눈물로 제사드립시다. 그리하여 우리의 눈물이 ‘애통하는 눈물’이 되어야 합니다. 출애굽을 경험했고 40년 광야 생활도 경험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가나안 족속과 수많은 피를 흘리며 전쟁을 치러 왔습니다.

오늘 우리는 대적하고 있는 우상 숭배와 부정과 불의와 향락의 불레셋과 싸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시편 136편에서와 같이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자신에게 향하여 선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 우리 가정에 선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 우리 사회에 선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 우리 국가와 민족에게 선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구약 시대 히브리인들의 하나님의 역사가 재조명된 이 땅에서, 그들이 순전한 맘으로 감사하지 못하여 빼앗긴 축복을 우리가 찾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1. 창조의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이 땅을 지으신 하나님의 뜻을 선하시고 인자하셨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이 있기까지 인간은 낙원에서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있을 특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지으신 땅에서 선택받은 백성으로 살게 해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수많은 심판과 축복 속에서 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이류에게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이 확대되었습니다. 빛으로 오신 하나님이 어둠에 속한 사람들에게 빛을 비춰 주었지만, 그들은 육체를 입고 빛으로 오신 하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러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는 말씀과 같이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감사 제물로 ‘빛의 열매’를 드립시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입니다. 시편 기자는 먼저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섭리된 삶을 살아감으로 감사드립시다. 그것은 오직 빛의 자녀답게 사는 것입니다.

2. 구원의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애굽땅에 종이 되었던 430년, 요셉은 정착한 고센 땅에서 이제는 떠나야 했습니다. 비록 고통스럽긴 해도 먹을 것이 많은 나일강변을 떠나 황량하고 적막한 땅으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출애굽의 고통이 없다면 우리는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출애굽이 있기까지 백성들의 부르짖음은 하늘에 닿았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들에게 고통이 임박해지자 그들은 탈출을 주저했습니다. 오늘 수많은 고통 속에 살고 있는 세상 사람들은 막상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하여 자유를 찾게 해주어도 잠시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영원한 자유를 포기합니다. 우리는 오늘 그 고통을 이기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그것은 유월절 어린 양의 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앞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온갖 경험을 한 다윗은 시편 118:6에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애굽을 떠난 자만이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부터의 탈출입니다. 세상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3. 생활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우리의 삶은 고통과 안정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전도서 3장에 보면, 범사에 기한이 있다고 했습니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행복한 때가 있는가 하면 불행한 때가 있고, 즐거운 때가 있는가 하면 괴로운 때가 있습니다. 광야 40년 동안에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지 아니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에도 하나님은 함께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위하여 이스라엘과 함께 싸우셨습니다. 하나님이 앞장서신 싸움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고통스럽든지 평안하든지 하나님은 함께 계셔서 약속의 자녀들을 위하여 영원토록 싸워 주십니다. 다윗의 원수들이 벌떼처럼 그를 에워 쌌으나 하나님께서 자기를 지키신 것을 알고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능력과 찬송이시오 또 나의 구원이 되셨도다”라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진실된 감사는 삶 속에서 여호와를 의뢰하고 사는 것입니다.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내가 안다”는 고백 속에서 하나님 앞에 자기의 전부를 드림으로 감사절의 서원 제물을 삼읍시다. 오늘도 우리의 모든 쓸 것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실 것입니다.

4. 소망의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오늘도 우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요 14:1, 2). 오늘 우리의 삶이 고통스럽더라도 이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감사할 제물이 없을 정도로 가난할지라도 천국을 소망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비록 우리에게 질병과 절망이 있다 하더라도 나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 주님의 모습을 따라 살아야 됩니다. 눈물과 슬픔이 없는 곳, 사망과 고통이 없는 곳,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영원한 삶을 소망하며 승리해야 합니다. 금년 감사절은 우리의 산 소망이 흔들리지 않도록 자신을 드리는 축제의 제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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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낮 설교  / snuday sermon

 

감사하며 삽시다  (시100:4)

(시 100:3,4)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하나님께 감사생활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교훈해 주는 내용의 글이 있습니다.
『버려도 전혀 아까운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낡고 찌그러진 아
빠의 신발을 볼 때마다 나는 견딜 수 없이 우울하고 슬프기만 했습니다. 내가 이런 비참한 마음을 갖기 시작한 것은 아빠가 실직한 이후부터였습니다. 아빠의 실직 이유를 나는 아직도 알지 못하지만 아빠는 그 일로 몹시 괴로워하셨습니다. 가끔 주무시다가도 몸을 부르르 떠시던 모습은 마치 활동사진처럼 내 기억 속에 생생합니다. 실직 하신지 3개월쯤 되었을 때 아빠는 어느 회사의 신입사원으로 새로 입사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전 회사와는 전혀 다른 업종의 회사였는지라 아빠에게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었나 봅니다. 입사한지 1개월이 조금 지나, 아빠는 다른 사람들이 꺼려하는 출장근무를 자원하셨고, 회사의 허락을 받은 아버지는 그 이후 늘 출장만 다니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3-4일이었던 출장이 조금 지나서는 1-2주로 늘어나더니 요즘에 와서는 한 달에 한 번씩만 겨우 집에 들어오십니다. 아빠가 출장을 다녀오실 때마다 아빠의 구두는 검정색인지 황토색인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아빠는 어딘지는 알 수 없으나 거의 매일 걸어 다니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나마 어느 구두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습니다. 원래 낡았던 구두가 어느 샌가 뒷 굽도 다 닳고 앞은 입을 벌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빠는 그 낡은 구두를 몇 번이나 수선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수선마저 불가능하게 되었을 때, 아빠는 가장 값싼 운
동화를 사 신으셨습니다. 우리 남매를 키우시느라 구두를 살 형편이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운동화 역시 한번 출장을 다녀오시면 금방 낡은 신발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빠의 그 신발을 볼 때마다 나는 가슴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가오는 아빠의 생신 때에는 반드시 구두를 선물해 드리리라 다짐을 했습니다. 하지만, 용돈을 따로 받아 모을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학교 오갈 때 버스를 타는 대신 걸어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몇 주 지나지 않아 금세 2,000원이 모였습니다.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한없이 기뻤습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난 어느 토요일 오후였습니다. 소복히 쌓인 은행잎들을 밟으며 중앙청 앞길을 걸어 집으로 향해 가던 중, 저 앞앞에 웬 키작은 남학생 한 명이 낙엽을 터벅터벅 밟으며 힘없이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내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동생의 팔을 잡으면서 말했습니다. “너 왜 자꾸 누나 말 안 듣니? 넌 아직 어려서 걸어 다니면 피곤해 성적 떨어진다고 반드시 버스 타고 다니라고 했잖아?” 동생이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 “그럼 난 아빠 구두 값을 어떻게 모으란 말야?” 나는 동생에게 애원하듯 말했습니다. “누나가 다 모을테니까 넌 걱정하지 말랬잖아” 갑자기 동생이 표정을 바꾸면서 물었습니다. “누나 누나는 얼마나 모았어?” 2,500원이란 대답을 들은 동생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럼 내가 모은 것과 함하면 웬만한 구두는 살 수 있겠다! 누나 나 그 동안 2000원 모았어! 잘했지?” 나는 동생이 너무나 대견스러워 하마터면 대로변에서 울음을 터뜨릴 뻔 했습니다. 일주일이 지난 가 다음 토요일, 동생과 나는 남대문 시장에서 만원짜리 구두를 쌌습니다. 그리고 예쁘게 포장한 다음, 며칠 남지않은 아빠의 생신을 기다렸습니다. 아빠가 그날만큼은 꼭 집에 오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입니다. 마침 동생이 풀이 죽어 있었습니다. “너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빠가 오늘 못 오신대. 그러니까 구두를 드릴 수가 없잖아” 동생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다 낡아빠진 싸구려 운동화를 신고 지금도 어느 길 위에선가를 걷고 계실 아빠를 생각하자 어느새 내 눈에도 뜨거운 이슬이 한 방울씩 맺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쉬움의 눈물이었을 뿐, 더 이상 슬픔의 눈물은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아빠에게 드릴 새 구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1985년경 영락중학교 한 여학생의 글입니다.)
  본시는 '감사의 시'라는 표제가 붙은 시로서, 예배자들이 감사제의 예물을 가지고 성전 문과 뜰을 통과할 때 부른 노래입니다.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한 관계인가를 분명히 밝혀주며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우리도 감사하며 삽시다.

   우리를 지으신 자이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삽시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오.' 인간을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특별히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 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합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거룩한 성품을 부여받은 가장 존귀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최초의 범죄로 말미암아 그러한 거룩한 속성이 많이 손상되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과 성품을 간직하고 있는 존재요, 따라서 모든 인간은 가장 존귀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한 존재이기에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이기까지 하시면서 모든 인류를 대속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인간을 '천하보다 귀하게'대해 주셨습니다.
(마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과 이웃을 대할 때 죄와 허물만을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 영혼 속에 내재하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어진 자신과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대로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여호와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라고 묘사했습니다.
이러한 시인의 묘사는 우리가 하나님의 작품이요 소유라는 사실을 밝힘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것으로 그치지 않으시고 우리의 호흡이 다하는 순간까지 계속해서 돌보아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헨리 왕은 퀸카게시마 주일날(Quinquagesima Sunday:사순절의 바로 전 일요일-역자 주) 사냥을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수행원들은 다 흩어지고 왕 혼자만 어떤 숲 어귀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근처에 교회가 있는 것을 발견한 왕은 그리로 갔습니다. 그리고 마치 군졸인 양 행세하면서 사제에게 미사를 집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사제는 매우 경건한 사람이었지만, 얼굴이 심히 일그러져 사람이라기보다는 괴물처럼 보였습니다. 왕은 사제에 관해 곰곰이 생각을 하였습니다. 왜 모든 아름다움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이렇게 못생긴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성례전을 집전하게 하실까 하고 그는 몹시 궁금해졌습니다. 그런데 미사가 진행되어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라는 말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한 소년이 이 말씀을 영창하자, 사제는 소년이 안이하게 노래한다고 그를 꾸짖었습니다. 그리고 큰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우리를 지으신 자는 주님이시요 우리 자신이 아니다.' 이 말씀을 들은 왕은 그가 선지자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사제를 쾰른 대주교로 승진시켰습니다. 이후 그 사제는 뛰어난 헌신과 덕으로 큰 칭송을 받았습니다. -로저 웬도버(Roger Wendover, Flowers of History, ?-1237).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그대로 감사하며 사는  모두가 됩시다.

   우리를 자신의 소유 삼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삽시다.
'우리는 그의 것이니.'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주는 말씀입니다.
(사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흙으로 만드시고 생기를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땅의 것과 하나님의 것이 합하여진 존재입니다. 영과 육이 합하여 있는 존재가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과 육은 다 내 것이 아닙니다.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내 것입니다. 그런데 내 영과 육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말하기를 우리 몸은 값을 주고 산 것이라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고전6;19-20)
우리의 영혼도 하나님의 것이라고 에스겔 선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 것이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함같이>(겔18;4)
우리의 절대 주권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에게 속하여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 해군장교 가와가미 기이치씨가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현실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져 있었습니다. 그는 매일 불평과 불만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활이 계속되자 그의 몸이 굳어져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정신과의사인 후치다씨는 그에게 이런 처방을 내렸습니다. “하루에 1만번씩 ‘감사합니다’라고 말하세요. 감사의 마음이 당신의 병을 치료해줄 것입니다” 그는 병석에서 매일 ‘감사합니다’라고 중얼거렸습니다. 하루는 그의 아들이 감 두개를 건네주었습니다. 가와가미 기이치씨는 손을 내밀며 ‘감사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굳었던 몸이 풀리고 질병에서 벗어났습니다. 불평과 불만, 원망과 저주는 모든 질병의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는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특효약입니다. 행복은 감사의 문으로 들어와서 불평의 문으로 나갑니다. 행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항상 ‘감사’가 풍성하다는 것입니다(인터넷 정보클럽- 감사와 치유)
우리를 소유 삼으신 하나님 치시기도 하시고 고치시기도 하시니 감사하며 사는 모두가 됩시다.

    우리를 그의 백성 삼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삽시다.
  '그의 백성이요.' 이 말씀은 우리의 통치자는 하나님이시라는 시인의 절대적인 선언입니다.
(레 26:12)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니라 합니다.
우리가 섬겨야 하고 경배해야 하며 통치 받아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명령을 두려워해야 하며, 절대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의 뜻을 이뤄 들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 개개인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 모두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나라 백성입니다. 이를 감사하여야 합니다.
고대 왕정 시대의 백성들은 임금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을 가장 가치 있는 일이요, 최대의 기쁨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희생하여 왕의 뜻을 이루어 드렸습니다. 바로 이러한 자세로 성도들은 하나님을 떠받들고 그의 통치에 순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남편이 집으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부인이 받지 않고 다른 여자가 받더니 말했습니다. <저는 파출부입니다> 주인아주머니 좀 바꿔달라고 말했더니 파출부가 말했습니다. <아주머니는 남편 분하고 침실로 드셨는데요? 들어오지 말라고 했는데 누구시죠?> <헥! 남편이라고 했습니까?><예, 야근하고 오셨다던데...> <이백, 아니 오백, 드릴 테니 좀 도와주세요. 부탁입니다. 몽둥이 하나 들고, 몰래 침실에 가서 남편 뒤통수를 사정없이 내리쳐서 기절시키세요. 만약에 마누라가 발악하면 마누라도 같이 때려눕히세요. 뒷일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부탁입니다> 파출부는 잠시 망설이더니 한번 해보겠다고 하였습니다. 전화도 그냥 내려놓았습니다. 전화를 통하여 으악 윽 아이구 소리가 요란하였습니다. 잠시 후 파출부가 다시 수화기를 들었습니다. <시키는대로 했어요, 둘 다 기절했는데... 이젠 어떻게 하죠?> <잘했습니다. 두 사람을 묶어두세요. 거실 오른쪽 구석에 다용도실이 보이죠? 그 안에 끈이 있으니 가져오세요> 파출부는 한참 찾았습니다. 다시 전화기를 들고 말했습니다. <이 집엔 다용도실... 없는데요?> 남편이 잠시 생각하더니 물었습니다. <거기 532-37XX 아닌가요?> 파출부 대답은 <아닌데요>였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지키시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시 79:13) 그러하면 주의 백성 곧 주의 기르시는 양 된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로 전하리이다 하신대로  우리를 백성 삼으시고 다스리시고 지키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삽시다.

   우리를 기르시는 양 삼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삽시다.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합니다. 하나님이 길러주신다는 말씀은 완전하게 복되게 길러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양은 목자가 없으면 굶어 죽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는 목자이시고 우리는 그의 양입니다. 하나님이 길러 주시고 보호하여 주셔야 제일 안전합니다. 목자는 양의 처지를 양보다도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양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알며 운동해야 할 시간과 안식해야 할 시간을 압니다. 또한 양의 아픈 곳을 알며 치유책을 압니다. 아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목자는 양의 처지를 아는 대로 그 필요를 채워 줍니다. 그래서 양이 배고플 때는 좋은 목초지로 인도하며 목이 마를 때는 맑은 시냇가로 인도합니다. 목자가 이처럼 양떼의 사정을 잘 알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은 그만큼 양떼에게 관심을 쏟기 때문입니다. 관심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늘 주시하게 되고 늘 주시하기 때문에 그들의 사정을 잘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목자가 양떼에게 쏟는 것과 같은 지극한 관심과 보살핌은 목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 똑같은 관심과 보살핌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양된 백성들에게 가지십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시 139:1)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완벽한 보호를 받는 사람들이 우리 성도들입니다.

경상도 영주의 영주 중고등학교 교장을 지내시고 지금은 이사장이신 강 경훈 장로님의 젊은 시절에 관한 이야기가 신문에 실린 적이 있습니다. 이 강 장로님이 일제 말엽, 보급대로 끌려가 채석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채석장의 하루 일과는 아침 일찍 일어나 바위들 마다 구멍을 뚫고 그 구멍들 마다 다이너마이트를 집어넣는 작업을 점심시간 이전까지 합니다. 그리고는 점심시간 바로 직전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려 놓고 돌을 부숴뜨린 후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돌을 나른다고 합니다. 이날도 어김없이 오전일을 마치고 다같이 둘러 앉아 점심을 먹게 되었습니다. 강 장로님은 그날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믿는 자녀로서 식전에 하나님 앞에 간절함 마음으로 감사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개 한 마리가 와서 기도하는 장로님의 도시락을 물고 가는 것입니다. 장로님은 기도를 마치고 보니 개가 자신의 도시락을 물고 저만치 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옆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조롱했겠습니까? “배고픈데 빨리 먹지 무슨 기도는 기도냐! 하나님이 계시다면 저 도시락도 안 지키시고 어디 계신가!”하면서 조롱합니다. 그래서 장로님은 도시락을 찾으러 개를 쫓아가는데 장난을 치듯 개는 잡힐 만큼 가까이 가면 얼른 도망가고 천천히 가면 개도 천천히 가면서 어느새 백여 미터를 넘어 이 백여 미터 가깝게 갔을 때 이상하게 그 개는 도시락을 놓고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장로님이 도시락을 주어 돌아서는 순간 다이너마이트가“꽝”하며 터지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오전에 바위구멍에 넣어 두었던 다이너마이트가 다 터진 줄 알았는데 그중 불발탄이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 곳에 모여 점심을 먹던 사람들이 다 죽고 개에게 도시락을 빼앗겨 멀리 온 강 장로님만 살아 나게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지키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도시락을 빼앗은 것이 아니라 그 수고를 통해 그의 생명을 살리셨음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맥추 감사주일입니다. 과거 농경 사회에서 보리농사를 거두고 나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였습니다만, 오늘 현대 사회에 있어서는 한 해의 전반기를 은혜 가운데 보내며, 또 후반기를 하나님의 손에 의탁하며 드리는 절기입니다. 맥추감사 주일을 지키며 우리를 지으신 자시며 우리를 자신의 소유 삼으시고 백성 삼으시며 기르시는 양 삼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는 모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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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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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저녁예배설교 

 

제목 : 우리를 택하신 이유

말씀 : 딤전1:12-17

우리는 정말 감사할 게 너무 많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정말 행복하게 기쁘게 살아야 마땅한 사람들이다. 받은 바 은혜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안 그런가? 우리가 하나님께 받지 않은 게 어딨나? 내가 무얼 잘나고 선하다고 날 찾아와 만나주셨나? 뭐 남보다 선하다고 날 구원해 주셨나? 내 생명, 시간, 육신,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 천가지 만가지 억가지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닌가? 그러니 어찌 찬양하고 감사하고 영광돌리지 않을 수 있겠나!

만약 우리가 자녀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 주어 별로 부족함 없이 살고 있는데 감사하지 않고 기뻐하지 않고 도리어 근심 걱정 염려 불평하며 산다면, 아니면 맨날 더 달라고 노래를 부른다면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깝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의무적으로라도 기쁘게 살아야 한다. 부모 앞에서 억지로라도 행복한 것처럼 살아야 하는 것처럼 의무적으로라도 하나님 앞에서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는 그럴 수 있는 모든 여건과 환경을 가지고 있다. 오늘 사도 바울은 바로 그런 사실을 말씀하고 있다.

1.죄인을 용서해 주시고 직분 맡겨 주심에 감사함(12,13절)

딤전1:12,13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내가 예수님께 감사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나 같은 것을 충성되이 여겨 이 직분을 맡겨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감사와 기쁨 속에 죽도록 충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말 그렇지 않은가? 나 같은 것을 충성되이 여겨 이 직분을 맡겨주셨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은총인가? 얼마나 귀한 일인가? 설령 충성되이 여겨 맡겨주신 것이 아니라 하도 일꾼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세워주셨다고 할지라도 감사하고 영광 돌릴 일이 아닌가? 아니 그렇다면 오히려 더 감사해야 할 일이다. 나 같은 것을 주님의 자녀로 인정해 주시고, 나 같은 것을 이 귀한 사역에 동참하게 해 주셨으니 이 얼마나 크나큰 영광인가?

게다가 과거에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 우리는 얼마나 추한 존재였나?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웠나? 얼마나 많은 죄와 무지와 어둠속에 있었나? 그런데 그런 나를 주님의 자녀로 받아 주신 것이다. 주님의 자녀라니 얼마나 영광인가? 얼마나 엄청난 특권인가? 왕자가 되는 것도 제법 근사하지 않은가? 재벌의 자녀가 되는 것도 제법 누릴 것이 많지 않은가?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그까짓 것들과 비교나 되겠는가?

또한 우리 각자에게 귀한 달란트와 사명을 주셨다. 직책과 직분을 주셨다. 이게 보통일인가? 어떤 사람들은 명암에 근사한 직함을 새겨 가지고 다닌다. 무슨무슨 박사 ○○○, 변호사 ○○○, 의사 ○○○, 국회의원 ○○○, 나는 목사 조학환이다. 나는 이게 가장 자랑스럽다. 목사라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자랑스럽다. 목사만 그런 것이 아니다. 장로 ○○○ 이것도 엄청난 영광이다. 꼭 목사 장로만 그런 게 아니다. 권사 ○○○, 집사 ○○○. 꼭 직분자만 그런 게 아니다. 성도 ○○○, 이것도 얼마나 굉장한 이름인가? 아니 사실은 이게 가장 영광스러운 명칭이다. 성도, 대단하지 않은가? 하나님의 자녀. 이 이상 더 귀한 이름이 어디 있나?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절대적으로 다르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다. 이게 상상이 가나? 세상의 무슨 직함이나 직책이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단 말인가? 또한 하는 일이 절대적으로 다르다. 얼마나 귀한 것인가?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 일이다. 천국으로 인도하는 길이다. 빛으로 생명으로 은혜로 인도하는 일이다. 세상에 어떤 일이 이 일보다 귀하겠나? 세상에 어떤 일이 이 일보다 아름답겠나? 중요하겠나? 보람 있겠나? 가치가 있겠나?

게다가 나 같이 자격도 없는, 공로도 없는 인생에게 이 귀한 생명과 이 귀한 믿음과 이 귀한 사명을 맡겨 주셨으니 그저 감사할 뿐이요, 그저 영광 돌리며 기쁨으로 감당해야 되지 않겠나? 그러므로 정말 감사와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리며 기쁨으로 주님의 일에 참여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인생이 되자.

2.주의 풍성하신 은혜에 감사함(14절)

딤전1: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으나 주님의 자녀가 되고 게다가 귀한 직분까지 맡겨 주신 모든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고백이다. 다시 말해 나 같은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일을 하며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는 모든 것이 내 의도 아니고 내 노력도 아니고 내 의지도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렇다. 우리가 은혜를 받은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믿음을 갖게 된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언제 어떻게 어떤 경로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게 하셨든지 그 모든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사람을 통해서 했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질병이나 환난을 통해서 했어도, 설령 나 혼자 믿게 되었어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인 것이다.

안 그런가? 뭐 우리가 그렇게 남들에 비해 특별하게 착하게 의롭고 아름다운 삶을 산 것도 아니다. 더 겸손한 것도 아니고, 더 하나님을 두려워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왜 다른 사람들은 놔두고 나를 부르셨는지는 모른다. 그건 그냥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문제이다.

오직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나를 택하셨다는 것이요, 그것이 결코 내 의와 공로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 의와 공로와 겸손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가까이 갈 수도 없는데 우리를 부르셔서 은혜와 사랑을 넘치도록 부어주셨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정말 그저 불러 주신 것에 감사하고, 세상에서 우리에게 필요를 따라 채워 주시는 것에 감사하고, 미련하고 부족하고 직분이나 직책이나 달란트를 주셔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신 것에 감사하며 기쁨으로 그 은혜를 누리며 사명을 감당하는 복된 인생이 되자.

3.긍휼을 입은 까닭.(15,16절)

딤전1:15,16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한다. 그렇다고 그가 무슨 살인죄나 음란죄나 도덕적 윤리적으로 몹쓸 짓을 했다는 것은 아니다. 이 말씀은 믿는 사람들을 핍박한 사실을 가리킨다. 사실 도덕적 윤리적 죄보다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죽이는 데 가표를 던지고 하는 일이 더 큰 죄이다. 물론 윤리적 경제적 정치적 죄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뜻에 거스르는 악한 죄이긴 하지만 복음의 역사를 막는 자들은 하나님께 정면으로 도전하는 자들이며 결국 많은 사람들을 지옥가게 만드는 죄이기 때문이다. 그런 죄수까지도 회개하는 자는 받아 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죄까지도 참으사 구원해 주신 것은 무슨 까닭인가? 물론 기본적으로는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다만 그뿐만이 아니다. 이렇게 죄인에 대하여 참으시며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뜻을 깨닫고 우리도 참음으로 기도하며 기다리며 복음의 역사를 감당해 나가야 될 것에 대한 모델을 보여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인 괴수와 같은 날 참으시고 구원해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참고 기다리며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야 한다. 어렵고 힘든 일도 참고, 심지어는 내게 대하여 악을 행하는 자들에 대하여도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참음으로 사명을 감당해 나가야 한다. 그리하여 믿지 않는 자들에게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본이 되는 삶을 살아감으로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숙제요 사명이요, 그럴 때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가고 우리도 더욱 생명의 능력과 은혜가 가운데 살게 되는 것이다.

4.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을 돌림(17절)

딤전1:17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바울은 이렇게 직분을 맡겨 주신 것, 풍성한 은혜를 주신 것, 죄인 중의 괴수를 불러 사람들에게 본이 되는 삶을 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그런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를 돌려보내고 있다.

만세의 왕이란 시간적으로 영원전부터 영원후까지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말씀한다. 썩지 아니한다는 것은 질적으로 사라지지 않고 영원한 것을 의미한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들이 고안해서 손으로 만든 어떤 것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완전히 초월적인 존재를 말한다. 홀로 하나라는 것은 오직 하나 뿐인 유일신 하나님을 말한다. 그 하나님만이 오직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받으실 유일하신 참 신이므로 이 모든 영광을 돌려 드린다는 말씀이다.

그렇다. 오직 하나님만이 만왕의 왕이시다. 영원불변하시고 무소부재하시다. 오직 유일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천지의 주재이시다. 우주 만물의 주권자이시다. 시간적 질적 공간으로 완전하신 유일한 하나님이시다. 그 분에 의하여 모든 역사는 진행된다. 알든 알지 못하든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그것은 사람의 문제이지 하나님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조건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한다. 영광을 돌려야 한다. 순종해야 한다.

더구나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셨다. 우리에게 직분을 맡겨 주셨다. 구원해 주셨다. 오래 참으시며 은혜를 풍성하게 내려 주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모습들을 통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본이 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저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돌리자. 감사와 기쁨으로 이 사명을 감당하자. 모든 믿지 않는 자들이나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되는 삶을 살아가자.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에게 주님의 향기를 발하여 주님 품으로 인도하고 우리도 더욱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는 복된 삶을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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