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저녁설교] Sunday evening Service
제목 : 존귀한 신분, 존귀한 삶

말씀 : 골1:13-23

 

골로새서도 다른 서신서와 마찬가지로 전반부(1,2장) 복음, 후반부(3,4장) 삶. 우리도 항상 먼저 복음. 그 다음에 삶을 중시해야. 복음을 믿고 구원받아야 하고, 구원받았으면 구원받은 삶이 뒷받침 되어야. 그래야 진짜 믿음, 생명의 능력과 은혜와 감격과 기쁨 가운데 주께 영광 돌리고 그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인생.

오늘 말씀. 복음의 내용, 그 복음을 믿고 구원받은 자들의 존귀한 상태, 그리고 그 이유. 기독교의 핵심. 믿음이 뭐냐, 왜 우리가 교회에 다녀야 하느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가 무엇이냐? 그리고 왜 우리를 부르셨나? 어떻게 해야 하나?

1.복음을 믿은 결과(13,14절)

골1:13,14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여기서는 복음을 믿은 자들의 상태 혹은 그 결과에 대하여 말씀. 흑암의 권세에서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다. 흑암의 권세, 사탄의 권세, 죽음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아들의 나라로, 영광의 나라로, 은혜의 나라로 옮겨졌다. 그러면 어떻게 그렇게 되었나? 그 아들 안에서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두가지 중요한 사실, 1)아들안에서 죄사함 받는 것. 이것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 천국을 누릴 수 있는 길.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되는 길. 즉 모든 인간은 죄인이기에 구원받으려면 죄사함을 받아야 하는데 그 방법은 예수님을 믿는 것. 왜 죄를 가지고는 천국에 갈 수 없으므로. 죄씻음을 받는 길은 오직 예수님 뿐이므로.

2)예수님 믿으면 흑암의 권세에서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짐. 흑암의 권세, 사탄의 권세, 죽음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아들의 나라, 영광의 나라, 은혜의 나라로 옮겨졌다. 굉장한 사실, 엄청난 사실. 지옥에서 천국으로.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더럽고 추하고 멸망당할 사탄의 자녀에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로.. 그래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릴 수 있는 신분.

이것이 복음의 핵심, 이것이 교회에 다녀야할 가장 중요한 이유,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양하고 영광을 돌려야 할 가장 중요한 일, 이거 하나면 얼마든지 감사와 영광을 돌릴 수 있어. 우리 모두 이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고 더욱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자.

2.예수님 만이 구원자이신 이유(15-19절)

골1:15~19 15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16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8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19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왜 예수님만이 구원자이신가? ①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셨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15절) 여기서 먼저 나신 자라는 말씀은 마치 예수님이 피조물이라고 생각할 오해의 여지가 있다. 물론 아니다. 이 말씀은 천지만물에 대한 예수님의 우월성과 소유권을 말씀하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이 있기 전부터 만들어진 자가 아니라 저절로 나신자로 계시다는 말씀.

그래서 곧바로 16절에서는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라고 말씀. 또 요1:1절에서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셨고, 요10:30절에서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말씀.

②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엄청난 사실, 놀라운 사실, 이 말씀에 온 우주만물이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할 모든 이유가 들어있다. 하나님의 능력, 지혜, 지식, 주권, 주인 되심 등의 ... 그러므로 물론 당연히 주님만이 인류를 심판하고 구원하실 주권을 가지고 계시다. 16절을 다시보라.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 요1:1-3절을 보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③천하만물의 으뜸이시기 때문이다. 골1: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여기서 으뜸이란 ‘첫째, 최초, 최고’라는 말로 우주만물의 첫 자리를 점유하다는 의미. 즉 예수님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므로 당연히 천하만물의 으뜸이시오, 주관자이시고, 다스리는 분이시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님만이 구원자로서의 능력과 자격과 지혜와 사랑과 선과 의를 온전히 갖추신 유일한 구원자.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으라. 믿었으면 정말 예수님을 최고의 자리에 앉혀 드리라. 주권을 인정하라. 소유권을 인정하라. 나나 자식이나 돈이나 물질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육체적 안일함이나 즐거움이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안된다. 오직 예수님을 최고의 자리에 앉혀 드리고 그 통치와 그 뜻을 따르며 살자.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잘 달려가 여기서도 생명의 은총을 누리다가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자.

3.우리를 구원하신 이유(20-22절)

골1:20~22 20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21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22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왜 우리를 아들의 자리로 옮겨주셨는가? ①하나님과 화목케 하기 위한 것이었다.(20절) 하나님과 화목하다는 것이 왜 중요한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모든 생명과 은혜와 축복과 기쁨과 평안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화목할 때만이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모든 좋은 은혜들을 누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도리어 진노의 대상이 되었다. 죄를 가지고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다. 그래서 십자가로 죄의 권세를 깨뜨려 버린 것이다. 하나님과 불화하게 만드는 장애물을 제거해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화목케 되어 아들의 지위로 회복되고, 아들의 지위가 회복되니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유업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더욱 하나님과 화목한 삶을 살라. 물론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가 되었지만 아직은 온전한 것은 아니다. 근본적인 원죄는 치유되었지만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들은 남아 있다. 아직도 죄된 본성과 생각과 행동들이 남아 있다. 이것을 최소화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과 최대한 화목해야 한다. 그래서 최대한의 은총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자.

②흠없는 자로 서게 하려 하심이다.(22절) 우리를 구원해 주신 궁극적인 목적이다. 물론 지금 여기서도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 속에서 구원의 은총은 물론 세상에서 누려야 할 은혜도 누리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다. 십자가로 구원하셨다. 그러나 그것 뿐만 아니라 장차 주님 앞에 섰을 때도 흠없는 자로 서기를 원하신다. 마지막 심판 때에 주님 앞에 아름답고 진실하고 거룩하고 의로운 모습으로 흠없는 자로 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영광의 기쁨을 온전히 누리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세우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사함받아 구원함을 받았으니 하나님의 아들답게 더욱 성결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모습으로 주님과 동행함으로 하나님과 온전히 화목한 관계속에서 살아가자. 그래서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자. 동시에 그렇게 흠없는 자로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하여 힘쓰며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자.

4.구원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는 방법(23절)

골1:23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그러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구속함의 은총을 누릴 수 있는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옮김을 받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흠없이 설수 있는가? 두말할 나위없이 믿음에 거하는 것이다. 복음의 소망위에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23절)

믿음에 거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그 안에 뿌리를 내리고 그 안에서 함께 살아간다는 말이다. 즉 우리의 모든 삶의 근거가 복음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복음이 말씀이 우리의 모든 삶의 방향을 결정하고 목표가 되고 기준이 되고 그래서 그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을 말한다.

또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상황이나 환경이나 조건 속에서도 세상의 것은 머잖아 지나가고 우리에게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그 나라에 소망을 두고 꿋꿋하게 말씀위에 서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환난이 오나 핍박이 오나 세상의 가치관이나 문화나 삶의 방향이 어떻게 흘러가든 거기에 휩쓸리지 말고 우왕좌왕하지 말고 영광의 나라를 향하여 달려가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럴 때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로써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여 창조주 예수님, 만물의 주관자이신 예수님을 다시한번 되새기자. 그 예수님의 통치를 온전히 따르자. 그 예수님이 날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구속함을 얻고 영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음을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자. 어떤 상황속에서도 믿음의 굳게 서서 주님과의 온전한 화목한 관계속에서 살아갈 때 주님 안에서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온전히 누리며 살다가 흠없는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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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 Sunday Night Service

제목 :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말씀 : 살전4:13-18절

 

데살로니가 교회. 참 좋은 교회. 믿음 소망 사랑 가운데 서 있는 교회. 그런데 지상 교회는 불완전. 데살로니가 교회에도 두가지 큰 문제. 성적 부정 행위와 재림에 대한 오해. 그래서 성결하라. 형제(사랑하는 배우자)를 저 버림은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일을 하라.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더라도 오시는 그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라고 강조.

그러면서 오늘 말씀에서는 주님의 재림에 대한 확실한 증거. 이것으로 위로를 삼고 믿음을 지키라.

1.믿는 자의 소망(13절)

살전4:13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세상 사람과 다르다. 전혀 다르다. 본질적으로 다르다. 완전한 소망이 있다. 영원한 소망이 있다. 죽음은 끝이 아니다. 영광의 나라로의 이사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 어느 때 어떤 형편에서든지 소망이 있다. 기쁨이 있다. 이 소망은 세상의 소망과 다르다. 아니 세상의 것은 그것이 돈이든 명예든 권력이든 문명이든 과학이든 다른 어떤 것이든 진짜 소망이 아니다. 완전한 소망이 아니다. 질적으로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한계가 있다. 곧 썩는다. 갖고 있는 동안도 별것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소망은 완전하다. 영원하다. 영원히 완전하게 지금 여기서나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나 완전한 소망과 기쁨과 은혜와 평안을 준다. 자유와 위로를 준다.

그래서 시39:7절에서는 말씀한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그래서 또 롬8:24절에서는 말씀한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그러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사실을 잊지 말라. 세상은 잠시잠깐이다. 곧 영광의 나라가 온다. 주님이 오신다. 아니면 내가 주님께로 곧 간다.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자를 위하여 영광의 나라를 예비해두고 계신다.

그러므로 언제 어느 때 어느 상황이라도 이에 대한 분명한 믿음 가운데 주님과 동행함으로 세상의 모든 험한 것, 힘든 것, 유혹들을 이기고 승리의 기쁨을 누리는 복된 삶이 되자.

2.주님의 재림과 부활, 휴거(14-17절)

살전4:14~17 14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5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16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주님이 다시 오실 때의 상황에 대한 말씀.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인데 다시 오실 때에 이미 예수님 믿고 낙원에 있는 영혼들을 데리고 오실 것이며 그 때에 천사의 나팔소리가 울려 퍼질 것이고 그러면 이미 죽은 자들이 부활하여 신령한 육체를 입게 되고, 그 때까지 살아있는 잘은 곧바로 신령한 육신으로 변화하여 공중으로 떠올라 예수님을 영접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

그런데 사실 재림 사건이나 그 이전의 대 환난기나 천년왕국이나 이런 것들은 단정적으로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분명 심판이 있고 천국과 지옥이 있을 것은 너무나 확실한데 그 방법과 과정에 대해서는 논리적으로 딱 잘라 말씀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물론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가 때문에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죄-심판, 믿음-구원이다. 그러나 그래도 이런 부분에 대해서 궁금한 것도 사실인데 오늘 재림에 관한 말씀이니까 여기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자.

일단 신앙생활에 있어서 좀 혼동되기 쉬운 것은 예수님의 재림 전과 재림 후가 어떻게 다른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과 지옥이 완전히 갈라지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 후에 있을 것으로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계20:11-15 11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12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3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그러면 이런 심판이 있기 전까지는 어떤 상태로 있는가? 낙원과 음부이다. 낙원은 천국으로 들어가기 위한 대기 장소이고, 음부는 지옥으로 가기 위한 대기 장소이다.

눅16:22-24 22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눅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러니까 일단 죽으면 천국과 지옥의 대기 장소로 들어가게 된다. 낙원은 천국에 갈 사람들이 대기 장소요, 음부는 지옥 갈 사람들의 대기 장소이다. 물론 이때는 아직 신령한 몸을 입지는 않았고 영으로 존재한다. 낙원에 간 영혼은 천국과 같은 은총을 누리며 대기하다가 예수님 재림 시에 부활하여 영혼과 신령한 육체와 결합하여 완전한 천국으로 들어가고, 음부에 들어간 영혼들은 지옥과 같은 고통을 누리다가 예수님 재림 시에 역시 영생하는 몸을 입고 지옥으로 들어간다. 물론 이것도 완전한 정보는 아니지만 성경을 종합해 보면 거의 확실하다고 볼 수 있다.

오늘 말씀도 보라. 이렇게 주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죽은 영혼들은 낙원과 음부에서 대기하다가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살아나게 되는데 때가 되면 주님이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가 들릴 것이라고 했다. 호령은 말그대로 위엄차게 큰 소리로 외치는 명령이다. 감히 아무도 항거할 수 없는 명령이다. 아마도 죽은 자들을 깨우는 소리 일 것이다. 어쩌면 예수님을 맞아들일 것을 촉구하는 말씀일지도 모른다. 천사장의 소리, 하나님의 나팔은 재림하시는 주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승리의 나팔, 영광의 팡파르이다. 이때 그리스도안에서 죽은 자들도 그 영광의 팡파레에 맞추어 일어나 영화로운 몸을 입게 된다.

고전15:51,52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그러면 그때까지 살아있는 자는? 살전4: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러니까 이때는 산자와 죽은 자가 똑같이 되는 것.

그렇다면 이때의 불신자는? 물론 성경에서 정확한 정보는 없다. 그러나 일단 죽어 음부로 간다. 그리고 이들은 주님의 백보좌 심판이 있을 때까지 음부에서 대기. 일단 주님이 재림하시면 성도들이 먼저 영광의 부활체를 입고 성도들은 주님과 함께 천년동안 왕노릇하게 됨.

계20: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그러다가 천년이 차면 다시 잠깐 마귀사탄이 놓이고 이때 곡과 마곡의 전쟁, 아마겟돈 전쟁. 그러나 물론 마귀사탄의 패배. 그리고 드디어 백보좌 심판, 이후 완전한 천국과 지옥. 앞에서말씀드렸듯이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 완전한 천국이 이루어기기 까지의 과정은 세세하고 정확하게 말씀 드릴 수 없어.

그러나 분명한 반드시 부활이 있다. 주님이 다시 오신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자는 것이다. 영광의 몸을 입게 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영적인 존재인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 완전히 다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지 않은 다른 피조물들은 죽으면 끝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다. 영생이 있다. 천국에서 영생이냐, 지옥에서 영생이나 이것만 다를 뿐이다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복의 개념을 세상적인 것에 국한시키지 말라. 시간적으로 잠시잠깐의 시간에 맞추어 살지 말라. 영원한 안목을 가지고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그 방법을 따르며 살아감으로 여기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자.

3.천국의 삶(17,18절)

살전4:17,18 17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18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그렇다. 주를 믿는 자들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주님을 영접하게 된다. 거기서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열린다. 그리고 이후로는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게 된다. 주와 함께 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주님의 완전한 보호와 인도와 사랑과 축복과 은혜를 누리며 산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요 기쁨이용 영광이다. 이것 때문에 믿음 생활하는 것이다.

물론 지금도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지만 여기는 아직 천국이 완전히 이루어진 상태가 아니다. 천국이 우리 가운데 이루어졌지만 아직 완성된 상태는 아니다. 이미 인침을 받았고 보장도 되어 있지만 지금 여기서 우리가 누리는 것은 천국의 그림자이다. 완전한 천국은 주님이 다시 오시고 백보좌 심판을 하시고 완전한 천국이 이루어질 때 누리게 된다.

그 때의 상태는 계21,22장에서 말씀하고 있다. 계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계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21: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계22: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사람들은 죽으면 그만이라도 한다. 어떻게 알겠느냐고 한다. 그래서 그냥 세상의 것에 얽매어 산다. 세상의 것을 소망으로 삼는다. 그러나 아니다. 끝도 아니고 모르는 것도 아니다. 세상의 것이 소망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은 아신다. 오직 성경은 그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분명한 것은 믿는 자는 영생복락이요, 믿지 않는 자는 영영 형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핵심이다. 이것이 근본이다. 이런 믿음을 가질 때에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 물론 여기서도 참 생명의 기쁨과 자유를 누리게 된다. 소망과 감사와 능력과 은혜가 넘치게 된다. 우리 모두 이 사실을 잊지 말고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질 영광의 나라에 대한 소망 속에서 세상에서 다가오는 모든 어려움과 힘든 일과 환난과 핍박과 유혹을 이기고 진정 생명의 은혜와 감사와 기쁨과 소망이 넘치는 삶을 영위하다가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되고 아름다고 영광스러운 인생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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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 Sunday night worship
제목 : 말씀을 생각나게 하라

말씀 : 벧후1:12~15

 

1.마음에 무엇이 들어있는가?

지난 주일에 주일학교 예배에 박현재 혼자 나와 예배를 드렸다. 설교 중에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을 말씀하여 예수님은 우리를 천국에도 보내주시고 우리에게 지혜도 주시고 예쁜 마음도 주시고 나쁜 것에서도 지켜주셔서 멋있게 훌륭하게 해 주시는 분이므로 끝까지 예수님 잘 믿고 나쁜 말이나 행동도 하지 말고 나중에 크면 술이나 담배도 피우지 말고 예쁘게 살아야 한다고 하니까 현재가 하는 말이 걸작이었다. ‘근데요, 우리 아버지는 자꾸 술을 먹어요. 술 귀신이 들어갔나봐요.’ 예상치 못한 말에 놀랍기도 하고 우습기도 해서 설교하다가 한참을 웃었다.

한참 웃다가 ‘그래 네 아버지 속에 술귀신이 들어있다.’고 하려다가 그러면 현재가 아버지한테 목사님이 아버지 속에 술 귀신이 들어있다고 했다고 하면 공연히 현재마져 교회에 못 나오게 할 까봐 그러지는 못하고 속으로 그래 네 말이 맞다고 했다.

물론 그렇다고 실제로 술귀신이 들어갔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무슨 음란 귀신이다. 술귀신이다. 돈 귀신이다 그러면서 귀신이 들어있다고 하는데 그러나 특정 귀신이 들어 있다기보다는 마귀에게 완전히 지배당하고 있는 상태이다. 술이나 담배나 마약이나 음란이나 향락이나 이런 것들 얽매이는 사람은 그 영혼이 성령의 지배를 받지 못하고 마귀의 지배를 받아 자꾸 그런 것들이 생각나 거기에 얽매이니까 귀신이 들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렇다. 우리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있느냐, 무엇의 지배를 받고 있느냐에 따라 말과 행동이 나온다. 그 마음을 지배하고 그 마음속에 가득차 있는 것들이 결국은 말과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15:18절에서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찌하든지 우리 마음을 믿음과 말씀과 진리와 선과 의와 사랑 등의 거룩한 것으로 채워야 한다. 그래야 믿음과 선과 진리의 말이 나오고, 믿음과 진리와 선과 의의 행동이 나오는 것이다.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채워야 한다. 그래야 낙심하고 좌절하고 원망하고 불평하지 않고 천국을 바라보며 나아가게 된다. 우리 마음을 돈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세상 영광이나 욕심으로 채우지 말고 주님으로 채워야 한다. 그래야 생명의 은총을 누리고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살지 않고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말씀을 가까이하라. 기도하라. 찬양하라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 심령이 하나님과 말씀과 선과 의와 거룩과 진리로 가득차 진리의 사람으로 살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오늘도 여기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데 함께 살펴볼 때에 늘 말씀을 가까이 하는 삶을 살아감으로 주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며 하나님의 영광의 나타내는 삶을 살아가자.

2.항상 말씀이 생각나게 해야 합니다.

벧후1:12 그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서 있으나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이미 베드로후서의 독자들이 베드로 사도가 말씀한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러나 그들이 더욱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새기고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말씀이 생각나 그 말씀을 따라 살게 하려고 다시 이 말씀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항상 생각나게 하려한다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즉 형통하나 불통하나 건강하나 그렇지 못하나 상황이 좋거나 나쁘거나 부자이거나 가난하거나 항상 말씀이 생각나게 해야 한다. 그러면 낙심 염려 걱정 불평 불만 원망에 빠지지 않는다. 시험에 들지 않는다. 유혹에 빠지지 않는다. 왜? 항상 말씀이 생각나면 그 말씀으로 인하여 분별력과 능력을 갖게 되어 소망과 위로를 얻게 되고 악한 것들을 물리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당연하지 않나?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 능력의 말씀, 지혜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힘과 능력과 지혜와 지혜를 주신다. 우리를 선과 진리와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 그러면 그 말씀이 우리의 심비에 새겨져 있으면 당연히 그 말씀이 우리를 생명의 길, 진리의 길로 인도하고 힘과 능력과 위로와 소망을 줌으로 당연히 승리하지 않겠느냐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우리 심령을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으로 채워야 한다.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말씀듣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예배드리는 일에 힘써야 한다. 그러면 우리 심령이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 가득차게 된다. 그러면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의 인도하심을 받게 되고 사탄의 유혹에 속지 않게 된다. 마귀 사탄이 감히 대들지도 못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에 끌려 다닌다. 유혹에 속는다. 왜곡된 가치관에 휩쓸려 다니게 된다. 늘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을 따라 다니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정말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예배에 힘씀으로 우리 심령이 주님으로 말씀으로 은혜로 거룩으로 진리로 가득 참으로써 세상의 헛된 것들에게 속지도 말고 끌려 다니지도 말고 마귀 사탄에 속지도 말고 상황이나 환경이나 조건의 지배도 받지 말고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자.

3.성경을 주신 목적

벧후1:12 그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서 있으나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12절 말씀에서 우리가 한가지 더 생각할 것이 있다. 그것은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이다. 오늘 말씀은 사도 베드로가 본서를 쓴 목적이기도 하다. 진리에 서서 항상 이것이 생각나게 하려고 이 말을 한다. 그런데 이 말이 뭐냐하면 그 앞의 말씀들을 보면 믿음에 굳게 서서 열매있는 자가 되고 더욱 힘써 우리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실족하지 않고 영원한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말씀이 언제라도 생각나 언제 어느 때 어느 상황이라도 믿음을 잘 지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기에 부족함이 없게 하려고 이 말씀을 다시 쓴다는 말씀인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게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라는 것이다. 죄와 무지 가운데 영원한 형벌로 치달아가고 있는 인생에게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알려주어 예수님 믿고 영생복락을 누리게 하는 것, 이것이 성경의 목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 그저 평안하게 건강하게 잘 먹고 잘살게 하려는 것이 주목적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물론 물질적 세상적 복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있지만 말씀과 진리와 은혜 가운데 살다보며 저절로 평안도 건강도 물질적인 부요함도 오는 것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그래서 요20:31절에서도 말씀하셨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또 딤후3:16,17절에서도 말씀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그런데 오늘 날 그렇지 못할 때가 너무 많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이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의 은총을 누리지도 못하고 역할을 잘 못할 때가 너무 많다. 세상의 것에 끌려 다니고 세상의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치 못할 때가 너무나 많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도 생명의 은총도 누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광도 나타내지 못하고 하나님의 나라도 이루어가지 못하는 어리석고 바보 같은 일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목적, 믿음의 목적을 바르게 알고, 우리 자신이 먼저 진정한 생명 안에서 세상의 모든 것을 초월하여 생명의 기쁨을 누리고 거룩하고 진실하고 의로운 삶의 모습으로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을 살아가자.

4.육신의 장막에 있을 동안에 힘써야 할 것.

벧후1:13~15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 나도 나의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내가 육신의 장막을 벗어던질 때가 멀지 않았는데 육신의 장막에 있는 동안 어찌 하든지 너희를 믿음 위에, 말씀 위에 굳게 서게 하여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고 거룩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하여 이 말씀을 준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사도 베드로가 자신의 몸을 장막이라고 말씀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 장막이란 말 그대로 천막을 말하는 것으로 임시 거주지라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 육신은 우리 영혼이 임시 거주하는 집이라는 의미이다. 우리 인간이 육신과 영혼으로 되어 있는데 육신은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에 우리 영혼이 잠시 머무는 텐트인 것이다.

따라서 이 장막은 세월이 가면 갈수록 낡아지고 결국 무너지고 썩는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육신인 것이다. 물론 그것으로 인생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육신은 흙으로 지어진 장막 집이므로 곧 허물어지지만 영혼은 죽지 않으므로 다시 하나님께로 가서 죄사함의 여부에 따라 천국과 지옥으로 가는 것이다. 그래서 고후5:1절에서 사도 바울은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 하셨다.

그런데도 죄와 무지 속에 있는 인생들이 정작 중요한 영혼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금방 썩어 없어질 육신의 즐거움을 위하여 먹고 마시고 즐기며 인생을 바치고 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야말로 껍데기만 붙들고 늘어지고 있는 것이다. 껍데기를 아름답게 치장하고 즐겁게 하기 위해서는 온갖 것을 다하면서도 정작 더 중요한 영혼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한 일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곧 무어질 육신의 장막집만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또한 우리가 떠난 후에 우리 후대들이 어떻게 살기를 바라는가? 우리 자녀들을 위하여 정말 힘써야 할 것은 무엇인가? 물론 말씀 안에서 살게 하는 일이다. 껍데기가 아니라 알맹이가 생명력이 풍성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며 사람을 사랑하며 거룩하게 의롭게 진실하게 깨끗하게 살게 하는 일이다. 이것이 중요한 일이고, 이것이 인류를 살리는 일이고, 서로가 평안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죽으나 사나 말씀을 따라야 하고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말씀을 가르쳐야 한다. 자녀들에게 다른 것은 못 남겨 주어도 말씀의 유산만을 남겨 주어야 한다. 경제적 정치적으로 어려운 것이 문제가 아니다. 물론 문제이긴 하지만 영혼이 죽어가는 것에 비교하면 작은 문제이다. 진짜 문제는 영혼이 죽어가는 것이다.

누누이 말씀드렸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라. 마4: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요6: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그러므로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예배 생활에 힘써 더욱 믿음과 말씀위에 굳게 서서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자. 우리 후대들이 부와 명예와 권세를 얻어 건강하게 잘 먹고 잘살기를 바라며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것을 위하여 후원하는 것도 필요는 하지만 그보다 말씀 위에 굳게 서서 진리의 사람 의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게 하자. 육신의 장막에 머물고 있는 동안에 자녀들을 믿음으로 잘 양육하자. 그리하여 우리 모두 주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 가운데 주님과 동행할 때에 주님이 주시는 생명과 기쁨과 자유와 평안과 소망을 마음껏 누리며 살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된 인생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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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저녁설교] Sunday evening Service

제목 : 은혜에 굳게 서라

말씀 : 벧전5:12~14

 

오늘 말씀은 베드로전서의 마지막 부분이다. 베드로사도는 마지막 부분에서 본 서신의 대필자를 소개하고 은혜에 굳게 설 것과 서로 문안 할 것을 권면한 후 축도로 마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는 몇가지 교훈들을 살펴보자.

1.신실한 조력자 실루아노

벧전5:12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신실한 형제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써서 권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즉 앞의 말씀들은 베드로가 실루아노를 시켜 이 서신을 대필하게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오늘 12절부터 14절까지만 베드로가 직접 기록한 것이다. 마지막 부분을 직접 기록한 것은 본 서신이 베드로의 서신이라는 것을 확증하기 위한 것이다. 즉 베드로는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나 자신이 직접 서신을 기록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실루아노에게 대필케 하고 그를 통하여 편지를 전해 주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실루아노는 실라와 동일인으로 사도행전에 자주 나오는 2차 전도여행시 바울과 함께 전도를 했던 신실한 동역자이다. 실루아노라는 이름으로는 고린도후서나 데살로니가전후에서 자주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어떤 경로로 베드로를 돕고 있었는지는 잘 나타나 있지 않지만 여기서는 베드로를 도와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를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즉 실라 즉 실루아노는 때론 처음에는 바울의 신실한 동역자로 있다가 지금은 베드로의 신실한 동역자가 되어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무슨 일이든 전면에 나서서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사람도 필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곁에서 도와줄 조력자들도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또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에게는 아론과 훌과 같은 훌륭한 조력자들이 있었고, 바울에게는 실라 디모데 디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뵈뵈 등의 훌륭한 조력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가정이나 교회나 직장이나 어떤 공동체나 마찬가지다. 물론 앞장서서 이끌어가는 사람이 잘해야 하지만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잘 도와주고 협력해 주지 않으면 어떤 공동체도 바르고 힘있게 서 갈 수가 없는 것이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다. 제가 종종 말씀드리지만 어떤 사람들은 집에서 밥하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아기보고 하는 일을 하찮게 여기고 우습게 여기는 데 이런 사람은 미련한 사람이다. 그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그런 내조가 없이 무슨 일을 할 수 있나? 저도 물론 마찬가지다. 저의 목회사역의 반 이상은 아내가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늘 고맙고 다른 한편으론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교회에서도 물론 그렇다. 교회청소나 식사준비나 차량운행이나 예배위원이나 모두 너무 귀한 사역이다. 다시 말해 꼭 성가대나 교사나 구역장이나 무슨 선교회나 전도회의 임원이나 이런 것만 중요한 게 아니라는 말씀이다. 이 모든 일들이 교회를 세워가는데 꼭 필요한 일이고 이런 일들로 말미암아 교회가 아름답게 유지하고 제 기능을 감당하게 되는 것이다.

또 이 사회도 마찬가지다. 이 사회구조가 아주 잘못된 것 중의 하나는 말로는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공부많이하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대단한 것으로 알고 농사를 짓거나 작은 공장이나 식당이나 혹은 속된 말로 노가다 일을 하면 아주 우습게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그런 곳에 일하는 분들이 안계시다면 이 사회가 어떻게 유지되겠나? 누군가는 청소도 해야하고 농사도 지어야 하고 공장에서 일도 해야 하고 노가다도 해야 한다. 우리가 먹고 입고 마시고 잠자고 타고 보고 듣고 누리는 모든 것들이 바로 그런 분들의 수고에 의하여 가능해 지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 분들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일단은 나 자신이 가정이든 교회이든 직장이든 어떤 곳에서든지 어떤 일을 맡았든 성실하게 열심히 최선을 다하자. 그리고 그렇게 수고하는 분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귀히 여기자. 그래서 우리 모두의 가정과 교회와 사회가 아름답게 세워지고 하나님 나라도 이루어가며 함께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자.

2.은혜에 굳게 서라

벧전5:12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서신의 대언자를 말씀한 베드로는 마지막 권면에 들어간다. 마지막 권면의 첫째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 은혜가 뭐냐? 내가 지금까지 써서 보내는 것이 참된 은혜인데 바로 이 참된 은혜위에 굳게 서라는 것이다.

그러면 베드로가 써서 보낸 참된 은혜란 무엇인가? 물론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혜택들이다. 우리 생명,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터전, 우리 삶에 필요한 모든 것들 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물론 그 중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님을 보내 주신 것이 은혜이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은혜이다. 그래서 영원한 천국의 은총을 주신 것이 은혜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씀하는 이 은혜란 그런 포괄적인 의미가 아니라 지금까지 베드로전서에서 강조했던 내용들이다. 우리는 산 소망이 있다. 그러므로 조금 힘들어도 참고 기다려야 한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기꺼이 고난을 받으라. 그게 도리어 영광스러운 일이다.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한 젖을 사모하라.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다. 그러므로 거룩한 삶을 살아가며 선을 위하여 고난도 받으라.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 되라.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그 은혜위에 서라는 것이다. 그것이 은혜중의 은혜라는 것이다.

그렇다. 이것이 진짜 은혜이다. 그냥 잘먹고 잘살고 만사형통하고 그래서 그것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면 물론 은혜이긴 하지만 그것은 온전치 못한 은혜이다. 그런 은혜에 빠지면 환난과 핍박이 오고 뭔가 일이 잘 안되면 낙심하고 절망하고 원망하고 하게 된다.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지 못하게 된다. 일이 잘 풀되고 알아주면 주의 일을 좀 하다가 일이 잘 안되고 알아주지 않고 상황이 힘들어지면 주의 일을 회피하게 된다.

그러나 진정으로 은혜를 받은 사람은 무조건 편하고 좋은 것만을 찾지도 않고, 상황과 환경에 따라 좌우되지 않으며, 누가 알아주든 몰라주든 관계없다. 주님 주신 은혜와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너무 크기 때문에 고난이 오거나 누가 어떻게 뭐라고 하든 개의치 않는다. 그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워 감사하며 주의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본래 약하고 악하고 거짓되고 죄로 말미암아 어두운 곳이 세상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진리 안에 있는 자에게는 더 많은 시련과 유혹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 것들엔 일희일비하지 않고 의연히 주신 사명 감당하며 천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은혜, 진정한 은혜를 받자. 주님이 주신 은혜가 얼마나 큰 지,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생각하자. 그래서 어떤 상황과 환경과 조건에도 휘둘리지 않고 오히려 영광의 나라에 참여하게 됨을 감사하고 기뻐하며 모든 상황속에서 감사와 기쁨으로 주신 사명 감당하며 의연하게 천성을 향해 나아감으로 주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며 주님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자.

3.서로 문안하라.

벧전5:13,14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사도는 마지막으로 서로 문안할 것을 권면한다. 여기서 바벨론이란 오직 육체적 물질적 유익과 기쁨과 만족만을 추구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의 세력을 상징한다. 그래서 계18:2절에서는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그래서 당시 교회에서는 오직 세속적 관점으로 나라를 통치하며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가장 큰 세력인 로마를 바벨론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내 아들 마가도 너희에게 문안한다고 하였다. 마가는 마가의 다락방으로 유명한 사람으로 상당히 부유한 가정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처음에 멋모르고 1차 전도여행 시에 바울과 바나바를 따라 갔다가 너무 힘들어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오게 된다. 그래서 2차전도 여행시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 이 사람을 데리고 가는 문제로 의견 충돌이 생겨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따로 따로 전도여행을 하게 된다. 이후로 마가는 신실한 동역자가 되어 바울에게도 인정받고 베드로에게도 아들과 같은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로마교회와 마가가 너희에게 문안한다고 하면서 너희 끼리도 서로 입맞춤으로 문안하라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볼이나 이마나 손등에 입을 맞추며 인사를 했다. 물론 이것은 친밀감의 표현이다. 그렇게 너희도 서로 친밀하게 문안하라는 것이다.

물론 문안한다는 것은 그저 서로 안부나 물으라는 것은 아니다. 믿음안에서 형제자매된 자들로서 마땅히 서로가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고 사랑하면서 형편을 살피며 기도해주고 축복해 주고 위로자가 되고 힘이 되고 도우며 좋은 교제 가운데 더욱 믿음 위에 굳게 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가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안에서 형제자매라는 것을 기억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대하자. 서로 가까이하며 위로자가 되고 힘이 되자. 그러기 위하여 더욱 친밀한 교제도 이루어가자.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진정한 가족으로써 서로 위로받고 힘을 얻으며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가자.

4.축도

벧전5:14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서신서의 마지막은 언제나 축도이다. 고전16:23,24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 고후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엡6: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빌4:23 골4:18, 살전5:28, 살후3:18, 딤전6:21, 딤후4:22, 딛3:15.....

이러한 축도에서 우리는 두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하나는 축복하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축복의 내용이다. 그렇다. 우리는 무조건 서로 축복해야 한다. 예수님은 원수조차 사랑하라 하였고, 롬12:14절에서는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서로 축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물론 그 말씀대로 살 때에 결국 우리 모두가 함께 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며 어떤 일이 있어도 서로 축복하는 삶을 살아가자. 결코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저주하고 하지 말라. 그건 마귀가 하는 짓이다.

그러면 축복하되 가장 큰 축복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다. 물론 돈과 건강과 명예의 복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의 은혜보다 더 필요한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받아야 생명을 얻고, 물질도 육체도 명예도 진정한 의미를 갖게 되고 모든 상황에서도 진정한 은혜를 누리게 되고 물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정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그 은혜 때문에 감사하고, 그 은혜를 인하여 비록 힘들고 어려워도 믿음을 지키자. 아니 믿음을 지키는 정도가 아니라 도리어 그리스도를 위하여 환난과 핍박을 받는 것이 영광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어떤 일이 있어도 감사와 기쁨으로 기꺼이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자. 이 일을 위하여 서로 기도하고 위로하고 축복하며 천성을 향하여 나아갈 때에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며 하나님의 은총을 충만히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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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찬양예배설교]   Sunday Night Service
제목 : 보배로운 믿음

말씀 : 벧후1:1~4

 

A.D.64년경. 로마 네로 황제의 기독교 핍박 시작. 아직 본격적으로 박해가 시작되진 않았지만 로마제국 내에 흩어져 거류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박해에 대비해 믿음으로 이겨 나갈 것을 권면. 우리는 산 소망이 있는 자들, 영혼의 구원을 받은 자들로 잠깐 근심 할 수 밖에 없지만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은 것, 오직 주의 말씀만 영원함.

우리는 택하신 족속, 왕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된 백성. 그러기에 거짓 것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선한 싸움을 해야 함으로 오히려 더 많은 고난과 핍박. 그러므로 깨어 근신하며 굳건한 믿음으로 마귀를 대적하며 기꺼이 고난 받을 것.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증표로써 도리어 영광스러운 일. 그렇게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할 때에 하나님이 끝까지 지켜줘 승리할 것.

그렇다. 죄와 무지와 어둠속에 있는 세상. 마귀사탄이 역사하고 있는 세상. 나도 세상도 다 죄와 무지와 어둠. 끊임없는 죄와 유혹과 핍박과 도전. 그러므로 고난과 핍박도. 그러나 우리는 진리에 속한 자이므로 좁은 길.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달려가야. 진리를 위해 고난 받는 것을 기뻐해야. 깨어 근신해야. 하나님이 지켜 주실 것.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차지할 것.

베드로 후서

베드로가 두 번째 보낸 서신. 베드로전서를 보낸 뒤 3,4년 뒤에. 네로의 핍박이 더욱 가중되던 때. 믿음이 흔들리는 사람들 발생. 어느 정도 견디다가 믿음이 연약한 자들은 배교하기도. 특히 주님의 재림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의문. 곧 오실 줄 알았던 주님이 오시지는 않고 핍박만 가중되자 낙심하는 사람들.

이에 베드로사도는 다시 서신을 보내어 생명과 경건에 속한 것을 주셨으니 믿음을 굳게 지킬 것. 믿음으로 인내 할 것. 개가 토하였던 것을 도로 먹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로 돌아가듯 과거로 돌아가지 말라.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끌려가지 말라.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음을 기억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믿음을 지킬 것을 강조.

우리도 정말 조심해야.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지 말아야. 우리들 주변에 도사리고 있는 온갖 왜곡된 가치관에 속지 말아야. 마귀 사탄은 때로는 달콤하게 때로는 환난과 핍박으로 때로는 세상의 온갖 왜곡되고 거짓된 사상으로 우리를 넘어트리려고 함. 깨어 있어야.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아야. 오직 그것만이 진리의 길, 생명의 길. 그러려면 참고 기다려야.

오늘 말씀. 송신자와 수신자. 축복 기도. 성도의 정체성 상기.

1.송신자와 수신자

벧후1: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1)예수 그리스도의 종 - 송신자

베드로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라고 소개.

종은 dou'lo"로 노예라는 뜻. 완전히 주인에게 종속되어 있는 자, 주인을 섬기며 그 뜻을 받들어 수행하는 자. 주인의 뜻을 헤아려 준행하며 그 명령을 따라 움직이는 자. 그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자. 동시에 종으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했을 때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자.

우리는 완전히 주님께 종속되어 주님의 수족이 되어 주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존재. 종은 몸도 마음도 시간도 물질도 재능도 생각도 오직 주인의 것. 주인의 뜻에 의하여 움직여야. 주님은 완전한 생명과 사랑과 은혜와 기쁨과 위로와 소망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그 주님 뜻대로 살아갈 때 최고의 가치, 의미, 복, 은혜 누리다가 영광의 나라.

사도는 ajpovstolo"로 ‘보냄을 받은 자’ 원칙적으로 모든 인간은 관리인으로 보냄을 받은 자. 주어진 자리에서 잘 관리하여 하나님의 주신 동산을 아름답게 가꾸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며 그 가운데서 생명의 은총을 누리도록. 그러나 세상 사람은 몰라.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거기다 한가지 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보냄을 받은 자.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자로 보냄을 받은 자. 그러므로 보냄을 받은 자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해야.

그러므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님의 뜻대로 바르게 사용함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고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며 살아가자.

2)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자들 - 수신자

베드로는 수신자들의 신분 또는 정체성을 상기시킴.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 즉 베드로는 이 편지를 받는 그들이 얼마나 굉장한 사람들인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상기시킴, 즉 귀한 믿음의 소유자답게, 그 엄청난 신분의 소유자답게 세상의 어떤 것과 바꿀 수 없는 이 보배로운 믿음을 굳게 지키고, 의와 진리와 선 가운데 귀한 삶을 살라는 것.

우리는 세상의 어떤 것과 바꿀 수 없는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자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어 얻게 됨. 그러므로 이 보배로운 믿음을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바꾸면 안돼. 환난과 핍박이 와서 설령 육체의 생명은 잃은 망정 이것만은 잃어서는 안돼.

당연하지 않나? 믿음보다 큰 보배가 어디 있는가? 무엇이 믿음보다 우리에게 더 큰 생명의 은총을 가져다주겠나? 무엇이 이보다 더 큰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과 영광을 가져다주겠나? 이것은 상대적인 문제가 아니다. 세상의 무엇과 비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세상의 것은 다 잃어봤자 별거 아니다. 그러나 믿음은 잃으면 끝장. 영원히 끔찍한 고통.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말씀.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16:26) 또 마13:44절에서 말씀.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장 큰 보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자. 가장 큰 보배를 가진 자들임으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살아가자. 세상의 별 것 아닌 것들에게 조금이라도 믿음을 팔아먹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자. 오직 말씀대로 살아갈 때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영원하고도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자.

2.축복기도

벧후1:2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모든 서신서의 서두와 종결 부분에서 계속 말씀했던 내용. 여기서는 두 가지를 강조. 첫째는 인생의 진정한 복이 무엇인가? 둘째는 그 복은 어디로부터 어떻게 오는가? 물론 인생의 복은 하나님께로부터. 하나님이 복의 근원. 그 하나님을 알고 바르게 섬길 때 은혜와 평강. 인생의 진정한 복은 하나님이 위로부터 내려주시는 생명과 은혜와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 말할 것도 없고 세상에서 누리는 진정한 평안과 기쁨과 즐거움과 위로와 소망도 오직 하나님이 주실 때 가능. 세상의 돈과 명예와 물질과 지식도 어느 정도 우리 삶에 유익이 되나 거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는 게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때 가능하다. 그리고 그 은혜는 하나님을 앎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을 알 때 믿게 되고 믿을 때 그 은혜를 누리게 된다.

그러므로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 주님이 주시는 평강과 위로와 소망을 구해야. 그러려면 주님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어야. 주님이 누구신지 어떻게 믿고 어떻게 따라야 하는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주님의 뜻을 바르게 알아야 한다. 그러려면 더욱 주님을 가까이 해야 한다. 엎드려야 한다.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주님이 깨닫게 하시고 도우시고 인도하셔서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가게 한다. 그래서 주님의 평강과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게 된다.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게 된다.

그러므로 세상의 것들을 찾고 바라보고 의지하고 따라가기보다 주님을 찾자. 겸손히 엎드리자. 주님을 사모하자. 그래서 주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주님이 주시는 은혜의 충만함으로 세상의모든 것을 이기고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자.

3.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심

벧후1: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셨다. 여기서 생명이란 하나님이 본래 주셨던 기쁨과 은혜와 복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영원토록 조금도 부족함 없이 완전히 누릴 수 있는 영원한 생명. 물론 이것은 신기한 능력 즉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완성된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이다. 우리의 죄와 무지와 허물과 연약함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이런 완전한 생명의 소유자가 되는 것.

경건이란 그런 완전한 생명을 가진 자들이 가져야 할 삶의 태도. 생명은 우리 믿음의 사람들의 본질적인 정체성. 경건은 온전한 생명을 가진 자들이 가져야 할 삶의 외견적인 모습. 그런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셨다는 것은 그렇게 생명을 가진 자로 경건한 삶의 모습을 가지고 살아갈 때 주어지는 모든 은혜들을 주셨다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고, 특혜이고, 외견적으로 보여주어야 할 삶의 모습. 그러므로 특별한 은혜를 받은 자들답게 특별한 삶의 자세를 가지고 세상과 야합하거나 타협하거나 끌려 다니지 말고 믿음을 지켜나가라는 의미.

그러므로 우리는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존귀한 인생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긍지와 자존심을 가지고 험하고 혼탁하고 왜곡된 세상에 끌려가지 말자. 이것은 오직 예수님 안에서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오직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주의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잘 달려감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받아 누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생이 되자.

4.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됨.

벧후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이로써’ 라는 것은 3절의 자기 영광과 덕으로써 라는 말씀으로 오직 주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지극히 큰 약속을 주셨다는 말씀. 지극히 큰 약속이란 물론 영원한 영광의 나라. 따라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 때문에 그까짓 썩어 없어질 세상의 것에 끌려 다니거나 노예가 되지 않고 신성한 성품 즉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따라 사는 자가 되게 하셨다는 말씀이다.

그렇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생명과 경건에 속한 것을 받은 자들이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약속으로 받았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약속으로 받으면 세상의 것들이 작은 것임을 안다. 거기에 연연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거기에 끌려 다니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고 살게 된다.

당연하지 않나? 진정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보았는데 그까짓 세상의 것에 끌려 다닐 이유가 뭔가? 세상의 것을 바라볼 이유가 뭔가? 어찌 주님을 바라보지 않겠나? 그러면 성령님이 어찌 함께 하시지 않겠나? 그러면 얼마나 더 주님을 닮아가겠나? 그러면 얼마나 주님의 은총 누리며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겠나?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는 주님의 종임을 잊지 말고 주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주님의 뜻대로 바르게 사용하자. 진실로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자들이라는 기억하며 세상의 것에 휘둘리거나 낙심 원망 근심하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자.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소유한 자들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주님과 온전히 동행하며 주님의 영광 나타내며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며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마음껏 누리는 복되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인생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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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오후설교] Sunday Night Service

제목 :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삶

말씀 : 벧전1:18~21

 

뉴욕의 한 교회에서 아주 오래전 있었던 일입니다. 한 할머니가 예배가 끝내 갈 즈음에 손을 들더니 말했습니다. ‘목사님 죄송하지만 마지막으로 딱 한번만 강단에 나가서 간증 좀 하게 해 주세요.’ 할머니의 마음이 너무 간절해서 목사님이 허락을 하자 할머니가 앞으로 나가 이야기 했습니다.

저는 1860년 9월 19일, 이 교회 바로 옆에 있는 한 노예시장에서 노예로 팔려가기 위하여 다른 여러 명의 사람들과 함께 서 있었습니다. 이윽고 노예를 사려는 사람들이 모이자 우리를 팔아넘기기 위하여 경매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때 나는 ‘나는 어디로 팔려갈까, 내가 팔려 갈 집 주인들은 좋은 사람일까, 나를 학대하고 나를 짐승처럼 대하는 아닐까, 과연 내 운명은 어떻게 될까’하면서 불안과 초조 속에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 이 교회에서 사람들이 예배를 마치고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중 한 점잖은 신사분이 오시더니 나를 800불을 주고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이 분은 나를 해방시켜주며 이제는 당신은 자유인이 되었으니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분은 이 교회의 목사님이셨는데 그 날 예배시간에 우리가 지금은 노예 문제를 다 해결할 수는 없지만 이번 주일날 한 사람의 노예라도 해방시켜주자고 의논이 되어 노예 한 사람을 사게 되었는데 거기서 바로 내가 선택되었던 것입니다.

그 날 이 후로 나는 그 날의 감격과 기쁨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지금부터 약 70년전의 일이지만 그날의 상황들이 지금까지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까지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이 교회도 너무나 감사하고 도무지 이 은혜를 잊을 수가 없어서 한 평생 이 교회를 섬기고 기도하며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바쳐 나름대로 섬겨왔습니다.

이제 저는 얼마 안 있으면 하나님께로 갈 것입니다. 저는 너무나 미천한 사람이지만 이제 제가 하나님 품으로 가기 전에 여러분에게 꼭 이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이렇게 노예에서 해방되어 그 은혜를 도무지 잊을 수가 없어서 한평생 감사와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나를 해방시켜 준 이 교회에 감사함으로 섬겼던 것처럼,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고 다 죄와 사탄의 노예에서 해방된 사람들이니까 우리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놀랍고 영광스러운 것인지를 잊지 말고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주님의 교회를 섬기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인생이 정말 아름답고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너무나 놀랍고 영광스러운 구속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사람의 노예로 있다가 해방되는 것도 이와 같이 감격스럽고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충만하고 평생 잊을 수 없고, 평생 갚아도 다 갚지 못할 은혜일진대 죄와 사탄과 지옥의 노예에서 건짐 받은 이 은혜는 얼마나 감사하고 영광 돌려야 하고 찬양하고 얼마나 감사와 기쁨으로 섬겨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도 여기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속 받았는지, 구속함을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며 정말 우리가 받은 구원의 은총의 그 놀랍고 크고 영광스럽고 고귀함을 기억하며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쳐나는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1.세상의 헛된 것으로부터 대속 받음

벧전1: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 받았다. ‘헛된’이라는 말은 ‘공허한, 헛된, 효과 없는, 쓸데없는, 무가치한, 무익한’ 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헛된 행실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상숭배를 비롯한 세상의 헛된 사상이나 종교나 철학이나 물질 등의 죄와 무지 속에서 세상의 사상과 가치관과 종교를 따라 행하던 모든 행실들을 말합니다.

이런 것들은 헛되고 무익하고 쓸데없고 무가치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세상의 모든 사상과 가치가 완전히 무가치하지는 않을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우상까지도 100% 무가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비록 온전치는 못하나마 조금이라도 위안을 주거나 희망을 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헛된 것입니다. 혹시 그것을 통하여 무언가 약간의 유익을 얻는다해도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모독하고 나아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막음으로 인간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몰아가는 악한 행위에 불과한 것인 것입니다.

우리도 과거에는 그런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우상과 자신과 육신의 욕망과 돈과 명예와 사람 등의 헛된 것을 섬기며 그걸 인생으로 착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죽을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죄와 사망과 지옥의 노예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고 감사하고 다행스럽고 영광을 돌릴 일입니까? 사람의 노예에서 해방된 것도 평생 감격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며 은혜를 잊지 않고 은혜에 보답하며 살아야 할 텐데 하물며 마귀에게서 해방되고 영원한 지옥에서 구속되어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된 이 은혜를 어찌 다 형용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는지 기억하며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사람의 노예 생활하는 것도 두렵고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일일진대 마귀사탄의 종노릇하다가 지옥에 가는 것은 얼마나 더 끔찍스러운 일인지를 기억하며 거기서 해방되어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된 것이 정말 얼마나 놀라운 은총인지를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감격과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렇게 놀라운 은혜를 입었으니 평생 이 은혜를 잊지 말고 다시는 세상의 것에 종노릇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감사와 감격과 기쁨과 은혜가운데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며 주님과 동행할 때에 진정 세상의 모든 것들로부터 구원함을 받은 자들로써 진정 거룩하고 아름답고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2.우리의 대속은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된 것임.

벧전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우리가 과거의 모든 헛된 것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는데 그것은 금이나 은과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도 아니고, 지식이나 과학으로 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순한 인간이나 성인군자나 선지자나 능력자가 아니라 본래부터 하나님의 아들로 영원전부터 하나님께 함께 계셨던 그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물론 우선은 예수님은 단순히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온전히 영광스럽고 거룩하고 깨끗하고 정결하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아들로써 온전히 영광스럽고 거룩하시고 성결하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렇게 고귀하신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 구원의 은총을 입은 우리도 너무나 고귀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구속 혹은 대속이 뭡니까? 한마디로 값을 지불하고 처벌을 면제받아 구원받게 된 것을 말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노예로 팔린 사람을 돈을 주고 사서 풀어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구속을 받았습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그 고귀한 몸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죄의 삯을 지불하시고 죄와 마귀사탄과 지옥의 노예에서 구원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어마어마한 대가를 지불하고 우리를 사셨으니 우리는 얼마나 존귀한 존재입니까? 여러분, 세상에서 한 1,000억을 주고 산 물건이라면 얼마나 귀하겠습니까? 얼마나 애지중지 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천억 1조 100조가 아닙니다. 온 세상을 다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대속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엄청난 존재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 사실을 아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선은 물론 감사해야 합니다. 세상의 어떤 일도 이보다 기쁘고 감사하고 감격스럽고 복되고 행복한 일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세상에 이 보다 귀하고 영광스럽고 복된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평생을 감사와 기쁨과 감격과 은혜 속에 주님과 동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 우리가 고귀한 존재인지 안다면 우리는 정말 고귀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말하자면 몸값을 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무 귀한 존재이니까 귀하게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귀한 몸을 함부로 굴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왕자와 거지와 어울려 거지와 같은 삶을 살아 갈수는 없지 않습니까? 몇천만원짜리 옷을 입고 똥통에서 놀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모든 헛된 것들과 모든 죄와 마귀 사탄으로부터 너무나 귀하고 영광스러운 주님의 그 보배로운 피로 대속함을 받은 너무나 엄청난 은혜를 입은 사람들, 너무나 고귀한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한편으로는 정말 감사하고 기뻐하고 영광을 돌리며 다른 한편으로는 거룩하고 진실하고 아름답고 고귀하게 살아감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귀히 여김을 받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소망을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벧전1:21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우리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 그래서 영광을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다. 우리 믿음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우리 믿음의 대상도 하나님이시다. 우리 소망의 대상도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온전히 소망을 하나님께 두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과거에는 세상의 헛된 것에 소망을 두고 살았습니다. 거기에 생명과 생명의 기쁨이 있는 양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속고 있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죄와 무지의 결과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죄와 사탄의 권세에 있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과거의 헛된 것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 줄 알게 되었습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 생명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세주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알았습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분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 안에 얼마나 영광스러운 나라가 있는 줄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선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야 합니다. 또한 이렇게 고귀한 존재이니까 고귀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더 이상 땅의 것을 좇아 사는 인생이 아니라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 것이지요. 당연하지 않습니까? 과거에는 몰라서 세상의 것을, 헛된 것을 좇아 살았는데 이제는 그걸 알았으니까요. 얼마나 죄와 무지가운데 있었는지 알게 되었으니까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얼마나 엄청난 은혜와 기쁨과 영광과 은혜가 있는 줄 알았으니까요. 그러니 그걸 안다면 왜 세상의 헛된 것을 바라보며 살겠습니까? 왜 영광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정말 우리가 얼마나 고귀한 인생인지를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금보다 천하보다 세상 모든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귀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우신 은총으로 죄와 사탄의 노예에서 벗어나 주님의 종이 되어 하나님의 그 영광과 존귀와 거룩하고 기쁨과 은혜에 참여하게 된 자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정말 한편으로는 감사하고 감격하고 기뻐 찬양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 놀라운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여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정말 이 놀라운 신분에 걸맞게 거룩하게 아름답게 존귀하게 살아가며 또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갈 때에 주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의 나라 이루어가며 주님의 은총 풍성하게 누리는 복되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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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 Sunday night worship

제목 :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말씀 : 벧전4:1~6

 

제법 오래 전에 인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인도 북부의 ‘무자파르나가르’라는 작은 동네에 엄청난 땅을 소유한 큰 부자가 있었는데 그 중에는 미간척지도 많아서 이웃사람들에게 자신의 땅을 개간해 주면 1/3은 개간한 사람의 땅으로 만들어주겠다고 많은 사람들이 땅을 개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땅을 개간하다가 엄청난 고대유물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 뿐 아니라 인근 마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땅을 개간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물을 발견하여 몰래 빼돌리기도 하고 주인도 부자가 되면 뭔가 자기 몫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안 인도의 문화재 관리국에서 당국자들이 나와서 100년 이상 된 유물은 개인소장이 불가함으로 집으로 가져간 모든 유물을 회수할 것이고 지금부터 유물을 유출하는 자는 엄단할 것이라고 경고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주인과 주민들이 반발하며 유물을 내주지 못하겠다고 버텼고 결국 경찰이 출동하여 경찰과 주민 사이에 큰 충돌이 벌어졌는데 주민들이 과격하게 저항함으로 급기야 경찰이 실탄까지 발사하여 사상자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마을 주민들은 더욱 난폭한 폭도로 변하여 삽과 낫과 곡괭이와 총을 들고 저항하게 되어 결국 많은 경찰이 투입되어 수십 명의 주민이 죽거나 다치고 나서야 폭동이 진압되고 유물은 문화재당국이 몽땅 회수해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아무 소득도 없이 수십 명이 죽거나 다치고 많은 사람들이 구금당하는 것으로 사태가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황금유물이 발견되기 전에는 비록 부자는 아니었지만 평화롭게 지내던 마을이 황금유물이 발견된 후에 사람들이 그만 돈에 눈이 어두워 정부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마을은 쑥대밭이 되고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고 감옥에 갇히고 남은 사람들 많은 사람들이 마을 떠나 유령마을처럼 번해 버렸던 것입니다. 세상에 이렇게 어리석을 데가 어디 있습니까? 그만 황금에 눈이 멀어 마을은 황폐화되고 많은 사람들이 죽고 육체적 정신적 너무나 큰 상처와 아픔만을 남겼으니 말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물론 돈도 중요하긴 하지만 그게 진짜 중요한 게 아닙니다. 진짜 중요한 건 물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과 그 말씀을 따라 거룩하게 진실하게 선하게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영원한 생명은 물론 이 땅에서도 진정한 생명의 기쁨과 평강과 위로와 소망과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베드로전서는 바로 그런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혹시 고난을 받는 한이 있어도 오직 유일한 우리의 소망이신 주님을 바라보며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데요, 이 말씀을 묵상할 때에 주님의 은혜가 충만하게 임하여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오직 주님을 따라 주님과 동행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합니다.

벧전4:1,2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므로 너희도 마음으로 갑옷을 입고 즉 마음을 단단하게 무장하고 고난을 받을망정 죄를 물리치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도 더 이상 죄가운데 살지 않고 우리에게 주어진 남은 시간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하시기 위한 것이므로 마음을 굳게 먹고 세월이 어떠하든 주님을 따라 진리와 선과 의 가운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왜 돌아가셨습니까? 우리 죄 때문에 돌아가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다시 죄가운데 살 수 있습니까? 또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 죄과가 사해진 것을 믿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예수님이 죽으실 때에 우리도 같이 십자가에 죽은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하여 죽으셔서 내 죄가 사해졌으니 예수님이 죽으실 때 내 죄가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종노릇하던 옛자아가 죽고 예수님께 종노릇하는 새 자아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죄의 종노릇을 하겠습니까? 죄에게 종노릇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죄를 향해 호통을 치고 명령하고 물리쳐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정말 믿음과 선과 진리와 사랑과 의 가운데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게 새생명을 가진 자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삶을 살려면 어쩔 수 없이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죄와 적당히 타협하며 어울리며 친구삼아 살아가면 고난이 없습니다. 그저 세상 물결 흐르는 대로 남들이 사는 대로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적당히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에 속한 사람이요, 죄에서 해방된 사람이므로 죄와 타협하고 어울리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싸워야 하기 때문에 도리어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새생명을 가진 자의 당연한 삶이고 그게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이기 때문에 그 길을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절에서 다시는 사람의 정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아가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과거에는 몰라서 그랬다 치고 이제는 진리를 아는 사람들이니까, 죄에 대하여 죽은 자들이니까 더 이상 과거처럼 죄에 질질 끌려 다니지 말고 우리에게 주어진 남은 시간을 주님의 따라 선과 진리와 의가운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래야 생명의 기쁨과 능력과 은혜와 평강과 소망이 넘치는 인생이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 죄와 무지와 왜곡된 가치관이 팽배해져 있는 세상에서 진리를 따라 가는 길이 혹시 어렵고 힘들어도 오직 성령의 능력과 지혜로서 모든 죄된 것들을 물리치고 주님과 동행할 때에 더욱 생명의 능력과 기쁨과 자유가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죄가운데 사는 것은 과거로 충분합니다.

벧전4: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참 이 말이 너무 가슴에 와 닿지 않습니까? 무지 속에서 어둠 속에서 사탄에게 얽매어 사탄의 하수인 노릇하던 것은 지난 것으로 이미 넘치지 않느냐? 지나간 세월을 그렇게 살아간 것만 해도 너무 억울하지 않느냐? 정말 무지해서 어리석어서 캄캄한 가운데서 어리석게도 바보같이도 미련하게도 마귀에게 속아서 그게 인생인줄 알고 그게 행복인줄 알고 그게 인생이 가야할 길 인줄 알고 그것을 바라보며 거기에 빠져서 죽자 사자 그런 것만을 따라서 세월을 허비하고, 돈을 허비하고, 육신을 허비하고, 정열을 허비하고, 능력을 허비하고, 아니 그냥 허비한 것이 아니라 악에게 바치고 마귀에게 바치고 살았으니 얼마나 원통한 일이냐, 얼마나 분한 일이냐, 얼마나 치욕적인 일이냐, 그러니 이렇게 지나간 죄악으로도 너무 분하고 억울하고 원통하고 아까운데 계속해서 그런 삶을 살아갈 수는 없지 않느냐하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술취함과 방탕함과 호색과 향락과 우상을 섬기던 모습을 생각하면 얼마나 한스럽습니까? 할 수만 있다면 우리 인생의 필름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것들 아닙니까? 할 수만 있다면 돌아가서 추한 모습 들 싹 다 지워버리고 새롭게 다시 시작하고 싶지 않습니까? 정말 안 그렇습니까? 마귀에게 철저하게 유린당한 세월입니다. 속고 살아온 세월입니다. 헛된 것을 위해서 살았던 세월입니다. 그냥 헛될 뿐 아니라 악하게 육신의 정욕을 따라 죄를 섬기며 세상의 온갖 우상들을 섬기던 세월이었습니다. 이런 모습들은 지나간 세월로 족하지 않습니까? 지나간 세월만으로도 원통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계속해서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죄와 무지가운데 살던 때는 지나간 시간만으로도 충분히 아깝고 억울하고 분하다는 것을 기억하며 이제는 정말 지나간 때에 죄를 따라 살던 삶의 모습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 진리를 따라 생명의 길로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말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를 기억하며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운데 주님과 동행할 때의 주님의 은총이 가득한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세상 사람들의 조롱을 이겨야 합니다.

벧전4:4~6 이러므로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 그들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에게 사실대로 고하리라 /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그러니까 우리가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는 길로 가지 않고 진리를 따라 주님을 따라 방탕과 음란과 향락 등의 온갖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살지 않고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갈 때에 세상 사람들이 비웃고 조롱하고 심지어 힘있는 자들이 핍박을 하기도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어리석은 자들 때문에 낙심하고 절망하지도 말고 그들의 죄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그저 우리 갈 길을 묵묵히 가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가는데 항상 조롱과 핍박과 그 밖에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아직 공중 권세 잡은 자들이 득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온갖 죄와 무지 속에서 그저 육신의 욕구만을 따라 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어찌하든지 우리를 시험에 빠트리고 구덩이 빠트리고 넘어지고 곤경에 처하게 하여 하나님에게서 떼어 놓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자기들이 가는 길과 다르다고 우리를 미워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오직 예수, 오직 믿음, 오직 천국만을 이야기하니까 자기들의 것을 헛것으로 만들어 버리니까 더더욱 우리를 미워하고 싫어하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은 이게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들과 다르니까요. 우리는 진리이고 그들은 비진리니까요. 그래서 딤후3:12절에서는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마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의 3:14절에서도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있는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왜? 물론 당연히 그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길이기 때문에 그 길로 가는 자만이 영생복락을 누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와 무지와 어둠속에 인생의 길을 알지 못하고 자기 멋대로 방탕하게 살아가며 심지어 의인을 핍박한 사람들은 결국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6절의 죽은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것은 이미 죽어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살아 있을 때에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복음을 전했느냐?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나 영으로 살게 하기 위하여, 즉 육체는 어쩔 수 없이 죽음을 당할 수 밖에 없으나 영으로 하나님을 따라 삶으로 하나님과 동행할 때에 하나님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게 하기 위해서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려면 물론 당연히 고난도 수반될 수 밖에 없으나 그러나 그게 생명의 길이므로 우리는 그 길을 달려가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비웃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심지어 핍박해도 그것 때문에 낙심하거나 절망하거나 같이 대항하여 싸우지도 말고 그저 모든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은혜의 길을 달려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결국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자신의 삶에 대하여 이실직고 할 수 밖에 없고, 그 때에 믿음 안에서 산자는 영생복락이요, 불신 가운데 자기 마음대로 산 자는 영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언제 어느 때 어느 상황에러도 오직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참된 생명의 기쁨과 자유와 위로와 소망 가운데 살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도 큰 상급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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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예배설교   (Wednesday Evening Sermon)

인생의 밑바닥에서

요나서 2장1∼10절

 

인생을 살다 보면 밑바닥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심한 우울증과 자살 충동을 느끼기도 합니다. 기독교인들도 예외 없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지만 밑바닥 인생을 살 때가 있습니다. 그 원인이 죄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죄와 상관없이 고난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요?

첫째, 우리는 인생의 밑바닥에서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1·4절).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시는 이유는 내 고집 내려놓고 하나님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내 환경과 내 운명에 매여 있지 말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밑바닥 인생에서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본문 2절에서 요나의 고백을 보십시오.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요나는 고통이 자신의 죄로 인해 생겼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고통이 하나님의 징계라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요나는 그 고통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의지합니다. 모든 고통이 죄로 인해 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밑바닥 인생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점검해 볼 수 있는 영성을 지녀야 합니다.

둘째로, 인생의 밑바닥에서 감사로 예배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9절). 하나님의 백성은 가장 크게 실패했을 때 가장 크게 감사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실패 속에서도 나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의 손길을 보기 때문입니다. 본문 9절에 보면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라고 했습니다.

지금 고난을 겪고 계십니까? 인생의 밑바닥까지 내려오셨습니까? 이제 환경을 보지 마시고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회복의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오른손을 붙들고 계시다는 것을 보십시오. 그리고 그 구원의 하나님을 예배하십시오. 이 순간의 예배는 나의 눈물과 회개와 헌신이 담긴 최상의 예배가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인생의 밑바닥에서 서원에 대한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9절). 요나는 자신이 지금 왜 배 밖으로 던져졌고, 물고기 뱃속에 처해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고요하던 바다가 왜 풍랑이 심하게 이는지, 선원들이 제비를 뽑았는데 왜 요나 자신이 뽑혔는지,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는데 왜 큰 물고기가 자신을 집어삼켰는지, 다 이해합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전도자로 쓰시려고 집요하게 붙들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사랑입니까.

이제 요나가 하나님의 그 명령에 순종할 때가 왔습니다. 9절에서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라고 합니다.

요나서 3장을 보면 요나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니느웨 백성들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을 선포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으며 회개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 땅을 용서하셨습니다.

인생의 밑바닥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새 인생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 여러분 한 사람을 통하여 수많은 영혼이 구원받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생의 밑바닥에서 감사하고 헌신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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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 (Wednesday Worship Sermon)  

그리스도인으로의 삶

요한복음 12장 23~30절

사순절 기간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깊이 되새기며 그리스도인으로의 삶을 되돌아볼 때입니다. 어떤 자세로 신앙생활을 해야 주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큰 사랑을 깨달으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 11장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대속의 죽으심을 앞두고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시는 기적을 통해 부활의 예고를 하십니다. 이어 12장에서는 헬라인 몇 명이 예수님을 뵙고자 제자들에게 요청을 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의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면서 밀알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면서 주님을 따르는 길은 영광의 삶이지만 희생의 길이라고 강조하십니다. 이 말씀은 믿는 자들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니라 헬라 사람들, 즉 이방인들도 들어야 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물론이거니와 오늘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깊이 생각해봐야 할 대목입니다. ‘영광스러운 삶의 비결’이 무엇인지를 성경을 통해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희생을 통해 하나님께 온전히 영광을 이루어 드렸습니다. 훗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역시 순교의 제물로 영광의 삶을 살았습니다.

요한복음 12장 27∼28절에는 앞으로 지고 가실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예수님의 괴로운 마음이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의 때를 면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으나 “내가 이때를 위해서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라며 결국 십자가를 지시겠다고 결심하십니다. 그때 하늘에서는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곁에 있던 사람들은 천둥소리가 들렸다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고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라며 진정한 영광의 삶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삶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초점을 두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밀알의 썩어짐을 통한 희생보다는 세상의 영광과 권위와 자부심과 명예욕으로 군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신의 명예와 권위를 위해 기대와 가치, 목표에 집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요한복음 12장 23절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합시다.

예수님께서는 그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앞에 놓고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믿음으로 사는 길에 고난이 닥치고 어려운 시련이 밀려와도 결코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말라는 메시지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희생과 헌신으로 온전히 영광을 돌려드릴 때가 왔구나’라고 여기며 십자가의 희생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렇게 담대하게 주님의 길을 따를 때 하나님께서는 귀히 여기시고 부활의 영광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요 12:26) 주님을 따라가는 그 길이 영광의 길입니다.

전정림 목사(진도 칠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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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예배설교 (Wednesday Evening Sermons)

복음의 도구

마태복음 13장 31∼32절

 

열매와 씨앗은 본질상 같은 것이지만 기능은 분명히 다릅니다. 씨앗이나 열매는 모두 우리의 식단을 채울 수 있으나, 종자로 구분되는 씨앗은 아무리 배가 고파도 남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대를 이어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씨앗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사는 동안 분명한 ‘종자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전 인류의 종자가 되고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받은 모든 백성의 종자가 되었듯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종자들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보면 항상 택한 한 사람 혹은 택한 민족을 통해 큰일을 이루셨습니다. 마치 누룩 비유나 겨자씨 비유처럼 작은 것에서 시작해서 전체에게 확산되는 방법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백성을 택하시고 부르셔서 그리스도의 태반이 되게 했으며, 신약의 선교 역사를 보면 로마와 영국, 미국 등과 같은 나라들을 통하여 선교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그렇게 쓰임 받은 나라들은 처음부터 복음의 도구가 된 것이 아니었지만 그들이 갖고 있는 국력과 경제력, 문화적 힘에 복음을 실어 전 세계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로마 제국의 경우에는 칼과 병거로 유럽과 아프리카를 지배했으나 그 지배력은 결국 복음 전파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대영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별칭을 얻었던 영국은 제국의 힘에 복음을 실어 전 세계에 전파했습니다. 현재의 미국도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데 쓰임 받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 대한민국은 어떻습니까? 대한민국은 전 세계 175개국 중 726만명이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세계 8대 경제대국이 되었으며, 문화적으로는 한류라 불리는 드라마와 K팝이 전 세계인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확산되고 있습니다. 역사상 대한민국의 영향력이 이렇게 커진 때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하여 우리 민족을 쓰시려고 만드신 환경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는 선교 초기부터 해외선교를 위해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실제로 많은 성과도 보았습니다. 초기 선교의 경우 가난한 나라가 가난한 나라에 복음을 전하는 입장이었다면 이제 경제력과 문화적 힘을 바탕으로 보다 공격적인 선교 역량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 한국 교회는 선교 역량을 극대화하기 위해 힘을 모으고, 더욱 순전한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도록 하는 데 진력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동족이면서도 하나가 되지 못한 북한 동포들을 가슴에 품고 살아갑니다. 북녘 땅은 우리에게 아직도 미전도 지역으로 남아 있는 ‘땅끝’입니다. 새로운 지도자가 등장했지만 북한 상황은 결코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상황이 아무리 비관적이라고 해도 우리는 동토의 땅 북한에도 복음이 전파될 것을 기대하며 파종해야 합니다. 그 종자는 탈북 동포들일 수 있고, 중국 국경에 살아가는 조선족일 수도 있으며, 북한 땅에 드나드는 경제인일 수도 있습니다. 대량의 종자가 아니라 단 한 알의 종자라도 좋은 땅에 뿌려지기만 하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음을 믿음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의 종자의식을 갖고 북한 땅에 뿌려질 종자를 찾아 파종하는 데 우리의 역량을 모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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