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저녁예배설교(Wednesday Evening Sermons)

믿음의 대상 

디모데전서 2장 4절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 믿음의 대상을 정하곤 합니다. 하나님보다 돈이나 부모를 믿는 사람이 있고 자신을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크리스천들이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것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이유는 영혼의 구원 문제가 기독교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아는 것과 다릅니다. “믿습니다”라고 해서 믿음이 생기는 것도, 큰 믿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한 바른 믿음은 반드시 그 근거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바른 믿음은 영혼을 구원합니다. 바른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육신을 쫓지 않고 성령을 따르게 합니다. 바른 믿음은 옳고 그름을 분별할 줄 아는 영적 분별력을 갖게 합니다. 특별히 구원 얻는 믿음은 자기 생각이나 확신이 아닙니다. 죄에 대한 정확한 자각과 함께 회개와 예수님께서 이루신 것을 믿음으로 마음에 받아들일 때 이루어집니다. 구원 얻는 믿음은 성경 지식이나 믿음의 크기가 아니고 ‘내용’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믿느냐’는 것입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죄에 대한 자각’과 ‘하나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는 구원 얻는 믿음이 생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심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죄를 깨닫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의 은혜를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셨고, 사도 바울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증거했다”고 사도행전 20장 21절에 기록돼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고 하셨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죄인임을 기분 나쁘지만 인정해야만 합니다. 인정하면 구원의 길이 보입니다.

구원 얻는 믿음이란, 첫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나의 모든 죄를 용서했다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류의 죄를 자신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히9:12).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흘리신 그 피로 나의 모든 죄가 용서되었다는 성경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둘째, 내가 받아야 할 죄의 심판, 즉 죄의 형벌을 예수님께서 내 대신 받아주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대가, 죄의 형벌을 십자가에서 대신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대신 죗값을 치르신 것이죠. 그래서 침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하였습니다. 셋째,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도,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했다는 것도 거짓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이십니다. 이것을 마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지 않으신 분이 계시다면 하나님 앞에 자신이 죄인임을 회개하고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마음에 영접하십시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으며 진리에 이르기를 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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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예배설교(Wednesday Evening Sermons)

십자가는 완성입니다
요한복음 19장 30절

 

“다 이루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기 직전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목마르다”고 하셨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인간적으로 극심한 고통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것은 무언가를 완성했다는 의미입니다. 완성이라고 하면 자신이 볼 때 만족스러운 상태, 흠이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렇게도 힘든 십자가의 잔을 마시면서 다 깨지고 상하신 상태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십니다. 도대체 이런 상태가 어떻게 다 이룬 상태가 될 수 있을까요.

생각해 보니 이 원리는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에덴동산을 생각해 보십시오. 에덴은 완전한 곳이었습니다. 그 에덴동산 가운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것을 거기에 두었을까요. 에덴동산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어야 완성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이 동산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데는 조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창조주가 계시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바로 이 땅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겉으로 볼 때 제한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결국 완성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단은 그것은 완전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만족과 제한이 없는 상황을 추구하라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바로 그 말에 넘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로 온 세상이 그 말에 계속 속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내실 뿐 아니라 우리가 속은 거짓말에서 회복시키는 유일한 길입니다. 진정한 완성은 내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결점 같아 보이는 것을 통해 나를 죽이면 그곳에서 완성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경험한 것 같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서 이런 말씀을 합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약점과 아픔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더욱 온전해진다는 것입니다. 약점이 도리어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다가 원하지 않는 일이 일어나면 당황합니다. 때로는 원망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당신의 삶에서 원하지 않는 일이 일어나면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님을 기억하라.”

만약 그것을 통해서 자아를 죽이면 그곳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내 인생에 일어난 어려운 일들이 축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진짜 문제는 내가 만족스러운 상태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자아에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내 교회와 가정과 사회가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모든 분쟁의 근원이 됩니다. 반대로 자기를 버리면 그곳에 평화가 생깁니다. 자기를 부인하면 그곳에 진정한 만족이 생깁니다. 당신은 십자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나요. 아니면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나요.

이경렬 부산 온천제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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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설교 (Wednesday Worship Sermon)

 

믿음으로 승리하는 길  

 

마가복음 5장 25~34절

 

오늘 본문에는 12년간 고통 속에 살던 한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혈루증을 앓던 그녀는 수많은 의사들을 찾아다녔지만 치료 방법을 찾지 못했고, 재산을 다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병을 죄에 대한 형벌과 같이 생각했던 당시 이스라엘인들은 그녀를 철저히 고립시켰을 것입니다.

고통에 빠진 사람에게 처음 들리는 것은 사단의 음성입니다. 사단은 우리를 낙심시켜 하나님께 등을 돌리게 만듭니다. 자아의 음성도 들립니다. 우리의 시선은 좁아져 겪고 있는 아픔과 슬픔 속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동안 받은 하나님의 은혜는 다 잊고 마치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처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들어야 할 것은 성령의 음성입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시선을 갖고 내 문제를 볼 때 고통을 이길 힘을 얻게 됩니다.

고통 속에 몸부림치던 이 여인이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본문 27절을 보면 이 여인이 ‘무리 가운데 끼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이런 용기를 갖게 된 것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이스라엘에 퍼진 희망의 소식을 굳게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녀에게 믿음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무리들 틈에 끼어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을 때, 혈루증의 근원이 마르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에게 온전한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은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우주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통의 원인을 모르시겠습니까. 모든 고통의 근원까지 마르게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본문 30절을 보면 능력이 예수님에게서 나갔다고 나옵니다. 예수님은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시지요. 제자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수많은 인파가 예수님의 옷을 스쳤고 심지어 예수님의 몸에 접촉한 사람들도 너무나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찾으신 손은 소문을 자신의 믿음으로 발전시킨 사람의 손입니다. 믿음의 손이 예수님의 능력을 나타나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하는 것은 오직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찾자 여인은 엎드려 모든 사실을 고했습니다. 허락도 없이 옷자락을 만졌기에 그녀는 자신의 병이 고침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잘한 일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모든 무리들이 여인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녀를 바라보십니다. 그 짧은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졌을까요. 잠시 시간이 흐른 뒤 예수님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라고 말하십니다. 그제야 여인은 환하게 웃었고, 동시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녀의 정체성이 회복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딸, 구세주의 딸, 예수님의 딸로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평생 듣고 싶었던 말, 평생소원이 믿음으로 인해 해결되었습니다. 모든 고통이 사라지고 새로운 인생이 그녀에게 펼쳐진 것입니다.

혹시 고통의 긴 터널을 지나고 계십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이 여인처럼 믿음을 회복합시다. 믿음이 있을 때,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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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예배설교(Wednesday Evening Sermons)

 

하나님의 뜻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

 

우리 믿는 사람들은 자기 뜻대로 살면서 하나님의 뜻인 양 착각하며 살아가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성경 말씀 속에서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뜻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본문을 중심으로 세 가지만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모든 것을 치유하는 좋은 약입니다. 기뻐하며 사는 것은 보약을 먹는 것보다 훨씬 좋습니다. 사도 바울은 옥중에서도 기뻐했습니다. 항상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기뻐하며 사는 것은 모든 병을 이기는 비결입니다. 기뻐하며 사는 것을 마귀는 싫어합니다. 기뻐하며 주를 바라보십시오. 인생은 짧습니다. 기뻐하며 살기도 바쁩니다. ‘항상 기뻐하라.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합니다. 해를 보고 기뻐하고 달을 보고 기뻐하세요. 배우자를 보고 기뻐하고 누구를 보더라도 기뻐하세요.

둘째, 쉬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해산한 산모가 모든 신경이 갓난아이에게 집중돼 있듯 기도를 호흡하듯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인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킵니다. 태양과 달도 기도로 멈추었듯, 모세의 기도로 이스라엘이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듯, 불의한 재판관이 밤낮 부르짖는 과부의 기도에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주었듯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시작 전에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을 부르시기 전에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기도하시고, 십자가 위에서도 운명 직전까지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쉬지 말고 기도하며 사신 분이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아프리카 어느 마을의 추장은 기우제를 지내도 비가 안 오는데, 다른 마을의 추장은 기우제를 지내기만 하면 비가 오더랍니다. 이유를 알아본즉 다른 마을의 추장은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기도가 아프리카 추장만도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응답이 올 때까지 쉬지 말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기도하세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처럼 이 땅 위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말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셋째,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잘될 때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잘 안될 때도 감사하십시오. 감사하는 자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십니다. 감사하는 자는 영혼 구원의 복을 받습니다. 가진 것이 없더라도 하박국 선지자와 같이 감사하세요.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해 감사하세요. 좋은 생각은 감사입니다. 시험이 닥쳐도 감사하세요. 실패해도 감사하세요. 물질이 없어도 감사하세요. 모든 것을 가졌어도 불평하면 가난한 자요, 가진 것이 없어도 감사하면 부자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가진 부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다 주셨습니다. 심지어 독생자까지 우리를 위해 주셨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천국 문이 열렸습니다. 이것보다 더 큰 감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천국을 바라보며 늘 감사하는 신앙생활이 중요합니다. 그러다 보면 세상 만복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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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  

무기력한 부활신앙

요한복음 20장 11~18절

 

본문의 주인공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일곱 귀신 들렸던 여인, 예수님을 만나서 고침 받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축복의 주인공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예수님의 부활 현장에서 울고 있습니다(요 20:11). 그녀는 왜 울고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무덤 속에 있던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왜 우느냐고 물었을 때 사람들이 주님을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13절)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을 끝까지 보살피고자 하는 여인의 착한 심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이 반드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와 일치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본래부터 이 땅에 오실 때 십자가를 지고 죽임을 당하는 고난에 참여하려고 오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신을 대속물로 주시기 위한 것(막 10:45)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구체적으로 곧 일어날 일들을 설명해 주셨습니다(마 20:18∼19).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가로막혀 있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속물이 되기로 작정하고 고난의 길을 피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음의 길을 걸어가야만 하였고 죄악의 권세를 이기기 위해 부활하셔야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이나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주님의 이러한 가르침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모두가 십자가 앞에서 절망하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부활의 현장에서도 여전히 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의 성취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찬양하는 대신 울고 있습니다. 주님의 시신을 누가 훔쳐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녀에게 찾아오셔서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십니다. 주께서 부활하셨다면 무덤이 비어 있어야 당연한 것 아닐까요. 만일 무덤에서 예수님의 시체를 보았다면 안심하고 울지 않았을까요. 말씀이 이뤄진 현장에서 오히려 감격하고 기뻐해야 될 자리에서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어찌하여 우느냐고 물으시는 주님의 질문은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신앙인의 불신앙에 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무엇보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자리에서도 낙심하여 울고 있는 여인처럼 부활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믿고 무덤에 찾아와 그곳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되었다면 만남은 환희와 감격의 순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여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결코 우리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절망하던 제자들처럼 무기력하게 비춰지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부활하셨고 승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은 여전히 사람을 살리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무기력한 모습으로 울고 앉아 있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기 위해 먼저 갈릴리로 가셔서 우리들에게 빨리 그곳으로 오라고 명하십니다. 우리의 지난 허물을 들추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족한 죄인들에게 새로운 사명을 부여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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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사도행전 16 ; 16 - 34
제  목 :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찬  송 : 250, 258, 259, 261, 287, 285.
복음송 : 예수 믿으세요.25(찬미예수2000 No,1020)


        할렐루야!!
        한량없이 크고 넓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이 오늘 이 시간 은혜를 사모하여 주님 전에 찾아 나오신 성도 여러분에게 충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한 여름 그렇게도 기승을 부리며 전혀 수그러들 것 같지 않던 더위가 이제는 완연한 가을이 되었습니다. 이번 주 목요일(22일)은 절기상으로 추분(秋分)입니다. 추분은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절기입니다.
        또한 지난 여름 그렇게도 기승을 부리던 폭염이 지나간 들녘에는 가을이 어김없이 찾아와 황금물결이 춤추고 여름내 가꿔온 모든 곡식과 과일들이 무르익어 가고 있습니다. 본격적인 추수철 농번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마9:37-38)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오늘의 농촌에서는 일손이 부족하여 해마다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런데 농촌에서만 일꾼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일꾼이 부족합니다. 주님은 일꾼을 부르십니다.
        (사6: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나님이 일꾼을 찾으실 때에 이사야 선지자가 응답하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이 마지막 말세를 당한 이때에 하나님의 추수 꾼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일꾼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이 일 년 내 가꾸어 온 곡식을 추수하는 것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더욱 중요한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착하고 충성된 일꾼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요즘의 세계정세를 살펴보면 세계 곳곳에서 천재지변이 계속 일어나고 있고 또한 분쟁이 그치질 않고 있습니다. 이태리와 미얀마에서는 사상 최대의 지진이 일어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고 경제적인 손실은 천문학적인 손해를 입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IS는 갈수록 포악해져서 세계 곳곳에서 테러를 일삼고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온 세계가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들이여!!
         이와 같은 일들이 왜 일어나야 합니까? 극도의 이기주의와 국수주의자들 때문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명을 경시하는 사탄들의 역사입니다. 요즘 인터넷을 통하여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자살 사이트와 음란 사이트가 성행을 하고 있고 사탄 숭배 사상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 동안 세계의 지도자들은 이 지구상에서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또 테러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자고 모여서 회의도 많이 하고 있지만 곳곳에서 테러와 분쟁은 끝일 줄을 모르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단11:27) “이 두 왕이 마음에 서로 해하고자 하여 한 밥상에 앉았을 때에 거짓말을 할 것이라 일이  형통하지 못하리니 이는 아직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아니할 것임이라”


        예수님께서는 일찍이 2천 년 전에 오늘과 같은 일들이 일어날 것을 아시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24:6-8)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
        그러므로 이런 일을 당할 때마다 우리들은 다시 한 번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깨어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마24:16-18)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성도 여러분들이여!!
        그러면 우리가 도망하여 피할 수 있는 산이 어디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살인을 하고 도피성으로 도망을 하면 살 수 있는 길이 있었습니다. 6.25 전쟁 때 남으로 남으로 피난을 갈 때 안면도에 가면 산다고 그곳으로 피난들을 많이 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말세에 우리 성도들이 피할 수 있는 산은 영원한 피난처가 되는 교회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아 멘!>

 


        오늘 본문 말씀은 여러분이 잘 아는 사도 바울이 빌립보 선교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바울은 아시아에서 복음을 증거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성령이 이를 막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날 밤에 환상 중에 마게도냐 지방의 사람이 마게도냐 지방에 와서 복음을 전해 달라는 간절한 청을 하였습니다. 이튿날 바울 일행은 배를 타고 마게도냐 지방으로 떠났습니다. 그래서 몇 날 며칠을 항해를 하여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 빌립보에 닿아서 거기서 복음을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까닭에 그곳에 가면 굉장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날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처음부터 시련을 당하였습니다.
        첫 번째 시련은 예배할 처소가 없었습니다. 그러든 중에 루디아가 예수를 믿고 영접하여 바울 일행을 자기 집으로 영접을 하여 루디아의 집이 복음을 전하는 기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시련이 다쳤습니다.
        빌립보 성에 귀신이 들려서 점을 치는 한 계집종이 있었습니다. 그 여자는 바울 일행을 보고 계속 그를 따라다니면서 말하기를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고 떠들고 다닙니다.

 


         성령의 역사는 귀신(사탄)이 먼저 알아차립니다.
         그 여종은 점을 쳐서 주인에게 돈을 많이 벌어주었습니다. 바울과 신라는 이를 불쌍히 여겨 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었습니다. 그가 제정신을 차리니까 더 이상 점을 못 치게 되고 그의 주인은 돈을 벌지 못하게 되자 바울과 신라를 고소하였습니다. 빌립보 성의 관원들은 재판도 하지 않고 바울과 신라를 마구 때리고 옥에 가두었습니다.

 


        바울과 신라는 옥에 갇혀서도 태연하게 찬송과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밤중에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옥 터가 흔들리고 옥문이 모두 열리고 쇠고랑이 모두 풀렸습니다. 밖에서 지키고 있던 간수가 깨어보니 옥문이 모두 열렸습니다. 죄수들이 모두 도망을 친 줄 알고 간수는 칼을 빼어 자결을 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때 바울이 소리쳤습니다. “여보시오 죽지 마시오. 우리는 도망가지 않고 다 여기 있소” 당시의 법에는 죄수가 도망을 치면 간수가 대신 중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간수는 자결을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간수가 등불을 들고 들어가 보니 바울과 신라는 쇠고랑이 모두 풀리고 옥문이 모두 열렸는데도 태연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간수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간수 생활 수십 년간 이와 같은 일은 처음입니다. 누구든지 갇히게 되면 어떻게 하든지 빠져나가려고 하고 도망을 치려고 하는 것이 사람이나 짐승이나 똑같은 본능입니다. 그런데 옥문이 다 열렸는데도 쇠고랑이 다 풀렸는데도 도망을 가지 않았습니다.

 


         <예> 상당히 여러 해 전 흑백 텔레비죤을 보든 시절 TV에서 ‘뿌리’ 라는 영화를 상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영화의 주인공인 쿤타킨테는 백인들에게 잡혀서 노예로 팔려 다니는데 그는 오르지 도망을 하여서 자기가 살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그의 소망이었습니다. 그래서 도망을 치다가는 붙들려서 매를 맞고 나중에는 도망을 가지 못하도록 발가락을 모두 잘려도 또 도망을 칩니다.
         또 ‘빠삐용’ 이라는 영화를 보면 그 영화의 주인공인 빠삐용은 도망을 치는 것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바다 가운데 무인도의 수용소에서 탈출하는데 성공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의 바울과 신라는 도망치지 않고 오히려 자결을 하려고 하는 간수를 제지하였습니다. 간수는 이 사람이야말로 보통 사람이 아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전하는 하나님과 그의 전하는 예수가 참된 신앙인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신라 앞에 무릎을 꿇고 간절한 마음으로 물었습니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간수는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인생이 헛된 삶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당시 사회의 부패와, 정치적 부패 등등 모든 것에 회의감을 느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이 말은 모든 인생들의 질문이며 당면한 가장 시급하고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바울과 신라는 이 물음에 다음과 같이 대답을 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사도행전 2장 37절 말씀을 보면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때에 모든 사람이 마음이 찔려 사도들의 발 앞에 엎드려서 묻기를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 고 하였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 한 부자 청년이 찾아와서 영생의 길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청년에게 말씀하시기를 (마19: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고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하였습니다.
        비슷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결과 다릅니다. 간수는 바울의 말씀대로 예수를 영접하여 구원을 얻었고 또 베드로의 말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여 구원을 받고 또 성령을 충만하게 받았습니다. 그런데 유독 부자 청년은 예수님 앞에까지 와서 영생의 길을 알려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길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간수는 바울과 신라를 자기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상처를 치료해 주고 음식을 차려서 대접하고 바울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온 가족이 모두 하나님을 믿고 크게 기뻐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이야기는 예화가 아닙니다. 비유도 아닙니다. 실제로 있었던 실화입니다. 그 후 이 간수는 루디아와 귀신들렸던 여종과 함께 빌립보 교회를 개척하는데 크게 공헌을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하여야 할 것은 간수가 바울에게 물었던 말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이 문제는 모든 인류가 해결하려고 부단히 애쓰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래서 종교가 생겨나고 사람들은 각자 자기의 종교를 통해서 이 구원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사전에 보면 “큰 재난과 파멸에서 구출 받는 것” 이라고 해석이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홍수가 나서 떠내려가는 사람을 구출해 주는 것 또는 화재가 났을 때 용감한 소방관이 불 속에 들어가서 아이를 구출해 내는 것도 구원입니다. 회사가 부도가 나서 쓰러지기 직전에 좋은 친구가 돈을 대 주어서 사업의 실패에서 구출 받는 것도 구원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육체적인 것, 물질적인 것의 구원보다 가장 시급하고 귀중한 것은 생명의 구원이며 영혼 구원입니다.
         이 영혼 구원에 대해서도 각종 종교가 자기네들 나름대로의 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에서도 이 구원의 교리야 말로 그 어떤 교리보다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어떻게 하여야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이 문제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그 해답을 찾고 또 그 말씀을 통하여 이 시간 은혜 충만한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1.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을 때 구원을 얻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중에 바울이 간수의 질문에 대답을 하였습니다.
         (행16:31)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독교의 구원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어서 영원한 하나님의 영생에 들어가는 길은 여러 갈래의 길 중에서 한가지의 길이 아닌 오직 한길 유일(唯一)한 길입니다.
         그런데 근자에 와서 구원은 교회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고 하고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여 교계에 큰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행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딤전2:5-6)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 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
         구원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고행이나, 수양이나, 명상, 도덕, 제도, 이런 것으로 얻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던 강도 한사람은 그가 살아오는 중에 아무런 공로가 없었어도 십자가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구주로 믿었기에 즉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밝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엡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아 멘>  그래서 믿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다 같이 복음성가를 부르겠습니다.


               예수 믿으세요
       당신은 지금 어디로 가나요 발걸음 무겁게
       이세상 어디 쉴곳 있나요 머물곳 있나요
       예수안에는 안식이 있어요 평안이 넘쳐요
       십자가 보혈 믿는자마다 구원을 받아요
       예수 믿으세요 예수 믿으세요
       예수 믿으세요 예수 믿으세요

 

 

2. 죄 사함을 받아야 구원을 받습니다.

 


        (행2: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 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예수에 대하여 증거하는 말씀을 듣고서 많은 청중들이 어찌하면 되겠느냐고 가슴을 치며 물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하나님의 아들 인류의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공범자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 때 베드로의 대답은
        (행2:38-41)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구원을 얻는데 필수적인 조건이 회개입니다. 회개 없이 청결할 수가 없고 청결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뵈올 수가 없습니다. 세례 요한도 요단강에서 회개를 외쳤습니다. 예수님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나니라” 고 외쳤습니다. 더러운 육체, 죄악의 몸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가 없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 받아 의롭다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눅19:9에는 삭개오가 지난날의 죄와 허물을 철저히 회개할 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라고 인정을 하여 주었습니다.

 


        회개할 때 구원을 받습니다.
        (마3:8-10)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회개는 지난날을 청산하는 것입니다. 잘못 가던 길에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른 길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믿었으면 행동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찬송가 257장 3절>
          나 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아서 주앞에 옳다함 얻음은
          확실히 믿기는 어린양 예수의 그피로 속죄함 얻었네
          속죄함 속죄함 주예수 내죄를 속했네 할렐루야 소리를
          합하여 함께 찬송하세 그피로 속죄함 얻었네

 

 

3.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구원을 받습니다.

 


         요한복음 3장 1절 이하의 말씀에 보면 니고데모라고 하는 바리새인이 예수를 밤중에 찾아왔습니다.
         (요3: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고 하시자 니고데모가 다시 말하기를 사람이 어떻게 모태에서 다시 태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라고 질문을 하자 예수님은 그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요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거듭난다 하는 것은 변화를 말합니다. 감리교의 창설자 요한 웨슬레는 이를 성화(聖化)라고 하였습니다. 거룩하게 변화한다는 뜻입니다. 맞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믿고 지난날의 모든 죄악을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은 분명히 변화되어야 합니다. 만약에 회개를 하고도 변화가 되지 못하였다면 그의 신앙은 무엇인가 잘못된 것입니다. 신앙이 변하고, 믿음이 변하고, 생각이 변하고, 생활이 변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변화가 자신의 의지, 또는 이성이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의 역사로만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것으로 될 수가 없습니다.
         (슥4:6)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비겁하고 겁쟁이며 두려워 떨고 있었는데 오순절에 120명의 신도들과 같이 성령을 충만히 받고서야 변화가 되었습니다.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빛을 통한 하나님의 성령을 받고서야 바울로 변화가 되어 이방 나라에 예수의 복음을 증거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성령을 받고서야 하나님의 부르심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 주소서” 라고 응답을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에베소 교회가 지식으로 예수를 믿다가 바울이 와서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행19:2) 고 물을 때 저들은 성령이 있다는 말도 듣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때에 바울이 저들에게 안수를 하니 모두가 성령을 충만히 받고 뜨거운 교회로 변화가 되었습니다.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구원 문제는 모든 인류에게 가장 중요하고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 중요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곳은 천지 만물 중에 오직 교회밖에 없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아 멘>
         이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모든 죄를 회개하여 용서함 받고, 그리고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러게 되면 우리가 원하는 완전한 구원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여러분들은 이미 예수를 믿고 나왔으니 이제 철저히 회개하여 성령 받고 변화되어야 합니다.
        (고후6:2)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이미 이와 같은 단계에까지 들어간 성도도 있을 줄로 믿습니다.
        이제 날마다, 시간마다, 순간마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 속에 성령의 도우심으로 변화되어지는 성도가 되어서 우리 주님께서 사랑하는 성도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영원한 하나님의 영생의 나라에 다 들어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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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는 완성입니다

 

요한복음 19장 30절

 

“다 이루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기 직전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목마르다”고 하셨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인간적으로 극심한 고통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것은 무언가를 완성했다는 의미입니다. 완성이라고 하면 자신이 볼 때 만족스러운 상태, 흠이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렇게도 힘든 십자가의 잔을 마시면서 다 깨지고 상하신 상태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십니다. 도대체 이런 상태가 어떻게 다 이룬 상태가 될 수 있을까요.

생각해 보니 이 원리는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에덴동산을 생각해 보십시오. 에덴은 완전한 곳이었습니다. 그 에덴동산 가운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것을 거기에 두었을까요. 에덴동산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어야 완성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이 동산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데는 조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창조주가 계시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바로 이 땅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겉으로 볼 때 제한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결국 완성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단은 그것은 완전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만족과 제한이 없는 상황을 추구하라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바로 그 말에 넘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로 온 세상이 그 말에 계속 속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내실 뿐 아니라 우리가 속은 거짓말에서 회복시키는 유일한 길입니다. 진정한 완성은 내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결점 같아 보이는 것을 통해 나를 죽이면 그곳에서 완성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경험한 것 같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서 이런 말씀을 합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약점과 아픔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더욱 온전해진다는 것입니다. 약점이 도리어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다가 원하지 않는 일이 일어나면 당황합니다. 때로는 원망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당신의 삶에서 원하지 않는 일이 일어나면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님을 기억하라.”

만약 그것을 통해서 자아를 죽이면 그곳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내 인생에 일어난 어려운 일들이 축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진짜 문제는 내가 만족스러운 상태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자아에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내 교회와 가정과 사회가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모든 분쟁의 근원이 됩니다. 반대로 자기를 버리면 그곳에 평화가 생깁니다. 자기를 부인하면 그곳에 진정한 만족이 생깁니다. 당신은 십자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나요. 아니면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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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력한 부활신앙

 

요한복음 20장 11~18절

 

본문의 주인공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일곱 귀신 들렸던 여인, 예수님을 만나서 고침 받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축복의 주인공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예수님의 부활 현장에서 울고 있습니다(요 20:11). 그녀는 왜 울고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무덤 속에 있던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왜 우느냐고 물었을 때 사람들이 주님을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13절)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을 끝까지 보살피고자 하는 여인의 착한 심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이 반드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와 일치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본래부터 이 땅에 오실 때 십자가를 지고 죽임을 당하는 고난에 참여하려고 오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신을 대속물로 주시기 위한 것(막 10:45)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구체적으로 곧 일어날 일들을 설명해 주셨습니다(마 20:18∼19).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가로막혀 있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속물이 되기로 작정하고 고난의 길을 피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음의 길을 걸어가야만 하였고 죄악의 권세를 이기기 위해 부활하셔야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이나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주님의 이러한 가르침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모두가 십자가 앞에서 절망하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부활의 현장에서도 여전히 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의 성취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찬양하는 대신 울고 있습니다. 주님의 시신을 누가 훔쳐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녀에게 찾아오셔서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십니다. 주께서 부활하셨다면 무덤이 비어 있어야 당연한 것 아닐까요. 만일 무덤에서 예수님의 시체를 보았다면 안심하고 울지 않았을까요. 말씀이 이뤄진 현장에서 오히려 감격하고 기뻐해야 될 자리에서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어찌하여 우느냐고 물으시는 주님의 질문은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신앙인의 불신앙에 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무엇보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자리에서도 낙심하여 울고 있는 여인처럼 부활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믿고 무덤에 찾아와 그곳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되었다면 만남은 환희와 감격의 순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여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결코 우리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절망하던 제자들처럼 무기력하게 비춰지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부활하셨고 승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은 여전히 사람을 살리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무기력한 모습으로 울고 앉아 있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기 위해 먼저 갈릴리로 가셔서 우리들에게 빨리 그곳으로 오라고 명하십니다. 우리의 지난 허물을 들추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족한 죄인들에게 새로운 사명을 부여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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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

우리 믿는 사람들은 자기 뜻대로 살면서 하나님의 뜻인 양 착각하며 살아가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성경 말씀 속에서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뜻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본문을 중심으로 세 가지만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모든 것을 치유하는 좋은 약입니다. 기뻐하며 사는 것은 보약을 먹는 것보다 훨씬 좋습니다. 사도 바울은 옥중에서도 기뻐했습니다. 항상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기뻐하며 사는 것은 모든 병을 이기는 비결입니다. 기뻐하며 사는 것을 마귀는 싫어합니다. 기뻐하며 주를 바라보십시오. 인생은 짧습니다. 기뻐하며 살기도 바쁩니다. ‘항상 기뻐하라.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합니다. 해를 보고 기뻐하고 달을 보고 기뻐하세요. 배우자를 보고 기뻐하고 누구를 보더라도 기뻐하세요.

둘째, 쉬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해산한 산모가 모든 신경이 갓난아이에게 집중돼 있듯 기도를 호흡하듯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인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킵니다. 태양과 달도 기도로 멈추었듯, 모세의 기도로 이스라엘이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듯, 불의한 재판관이 밤낮 부르짖는 과부의 기도에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주었듯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시작 전에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을 부르시기 전에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기도하시고, 십자가 위에서도 운명 직전까지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쉬지 말고 기도하며 사신 분이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아프리카 어느 마을의 추장은 기우제를 지내도 비가 안 오는데, 다른 마을의 추장은 기우제를 지내기만 하면 비가 오더랍니다. 이유를 알아본즉 다른 마을의 추장은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기도가 아프리카 추장만도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응답이 올 때까지 쉬지 말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기도하세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처럼 이 땅 위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말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셋째,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잘될 때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잘 안될 때도 감사하십시오. 감사하는 자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십니다. 감사하는 자는 영혼 구원의 복을 받습니다. 가진 것이 없더라도 하박국 선지자와 같이 감사하세요.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해 감사하세요. 좋은 생각은 감사입니다. 시험이 닥쳐도 감사하세요. 실패해도 감사하세요. 물질이 없어도 감사하세요. 모든 것을 가졌어도 불평하면 가난한 자요, 가진 것이 없어도 감사하면 부자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가진 부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다 주셨습니다. 심지어 독생자까지 우리를 위해 주셨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천국 문이 열렸습니다. 이것보다 더 큰 감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천국을 바라보며 늘 감사하는 신앙생활이 중요합니다. 그러다 보면 세상 만복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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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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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제목 : 샬롬을 누립시다

말씀 : 대하14:1~7

 

1.부정적인 에너지를 추방합시다.

여러분, 우리나라의 독특한 병 중에 화병이라는 게 있습니다. 화병은 불 화(火)자에 질병 병(病)자를 씁니다. 즉 가슴 속에 속에 불덩어리 같은 게 들어있는 병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가슴속에 분노나 증오나 불평 등의 뭔가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부정적인 에너지가 가득 차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화병의 원인은 한마디로 억압된 감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분노 증오심 불평불만 시기질투 등의 감정을 표출하지 못하고 마음속에 쌍아둠으로써 마음속에 화덩어리가 뭉쳐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물론 살다보면 분노나 미움이나 불평불만이나 시기질투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속된 말로 쎄가 빠지게 일해도 겨우 돈백만원 조금 넘는 월급을 받으며 힘겹게 살아가면서 시대가 하도 속되어 결혼도 조건을 보고 하는 시대라 이런 사람들은 심지어 결혼조차하기 힘든 그런 상황에 처하기도 합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부모가 능력이 있거나 혹은 머리가 뛰어나거나 재주가 좋아 억대 심지어는 몇 십억의 연봉을 받으며 온갖 좋은 것들을 누리며 대접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그들도 그런 위치에 오르기까지 많은 노력을 했겠지만 그래도 해도 너무하다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솔직히 마음에 불평불만 시기질투가 생길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어떤 경우든 원망이나 불평이나 분노나 증오나 이런 부정적인 에너지를 마음에 담고 있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들에게 있어서 합당하지 않은 것입니다. 합당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나쁜 에너지로서 우리들의 삶에 너무나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러한 부정적인 에너지가 우리 심령 속에 들어 있으면 자연히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들이 부정적이고 독하게 되고 원망과 불평이 터져 나오게 되고 공격적으로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내 심령이 황폐하게 되고 가족과 이웃에게도 상처와 고통을 주어 서로의 삶을 파괴하기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엡4:26,27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그러니까 잠깐 분이 일어날 수는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 분을 마음에 계속 품고 있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귀가 틈타 그 분(憤)이 우리를 삼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전5:16~18절에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혹시 힘들고 어렵고 심지어는 좀 억울한 일을 당한다해도 원망이나 불평이나 분노나 이런 나쁜 에너지를 마음에 품고 있지 마시기 바랍니다. 설령 어렵고 힘들고 불공평하고 억울해도 실상은 우리가 받은 은혜가 더 크다는 것, 게다가 우리에게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예비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오직 믿음 안에서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먼저 여러분 자신이 생명의 기쁨과 평안을 마음껏 누리고 다른 사람에게 생명의 기쁨을 주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그런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차피 죄와 무지 속에 있어서 불공평한 일도 있고 어려운 현실도 때로는 억울한 일을 만나기도 합니다. 천국에 가기까지는 그런 현실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부조리한 현실들이 없애고 평안을 누리려 하지 말고 그것을 뛰어넘어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완전한 생명이시며 진리이시며 선이시며 평안과 위로와 소망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심령 속에 온전히 모셔 들이면 주님이 주시는 평안으로 말미암아 이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도 불평불만이나 분노의 감정이 잘 일어나지도 않거니와 설령 일어난다해도 쉽게 이기고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예수님을 내 심령 속에 온전히 모셔들임으로 주님이 나를 온전히 지배한다면 어떻게 불평불만 시기질투 미움 분노의 감정이 일어나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주님은 완전한 사랑과 기쁨과 은혜와 빛과 평안과 위로이시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주님이 내 이성과 생각과 감정을 완전히 사로잡으면 어떻게 우리 심령 속에서 미움과 원망과 증오와 불평불만과 시기와질투가 일어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물론 우리는 완전할 수 없기 때문에 전혀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완전할 수만 있다면 완전하게 일어나지 않겠지만 완전치 못하기 때문에 그런 부정적인 감정들이 일어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나를 사로잡고 있지 않을 때와는 비교도 안되게 적게 일어나고 또 내가 부족해서 일어난 그 부정적인 감정들도 사랑의 주님, 은혜의 주님, 위로의 주님, 능력의 주님께서 내 마음을 다스려 주시고 인도하셔서 얼마든지 다스리며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미술대학교에서 ‘평안’을 주제로 그림경시대회가 열려 많은 학생들이 실력을 인정받고 상금도 타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실력을 동원해서 평안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주어진 시간이 지나고 심사를 하기 시작했는데 두 학생의 그림이 최종결선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평안이라는 주제로 그림을 그렸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완전히 반대였습니다.

한 학생의 그림은 정통적인 평화의 모습을 담은 그림으로 양 옆과 뒤쪽은 푸르고 아름다운 산에 둘러싸여 있고 앞에는 평평한 풀밭이 있는 호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호수 앞 풀밭에는 온갖 종류의 꽃이 만발해 있고, 양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고, 호숫가에는 몇몇 사람들이 모여 다정하게 담화를 나누고 있는 평화롭기 그지없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학생의 완전히 반대로 바닷가에 큰 바위 절벽에 엄청난 파도가 부딪쳐 사나운 거품을 뿜어내고 있었습니다. 바람이 얼마나 심한지 바위 절벽에 있는 나무가 부러져 바다에 떠다니고 있는 사납고 험악한 풍경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절벽 사이의 바위틈에 갈매기 둥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바위틈 둥지에서 갈매기 새끼들이 엄마 품에 안겨 평안히 쉬고 있었습니다. 둥지 밖에는 사나운 바람과 험한 파도가 난리를 치고 있는데 이 새끼들은 엄마 날개 밑에서 조금도 두려움이나 걱정 없이 평안히 쉬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 그림이 최우수작으로 선정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첫째 그림은 평화롭기는 한데 너무나 이상적인 환경에 의존하는 평안으로 그 상황이 변하면 언제든 깨질 평안의 모습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그림은 그 험한 풍랑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든 상황과 환경을 초월하여 누리는 평안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물론 외적인 평안 즉 모든 조건이 충족되어 누리는 평안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그보다도 내적인 평안 즉 조건이 충족되지 못했어도 누리는 평안이 진짜 평안이고 더 중요하고 우리가 꼭 누려야 할 평안입니다. 물론 외적인 평안 즉 조건이 충족됨으로 누리는 평안도 당연히 필요하고 누려야 합니다. 그러나 말 그대로 상황에 의존하는 것이므로 언제라도 상황이 변하면 곧바로 사라져버릴 그런 물거품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아비야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누우매 다윗 성에 장사되고 그의 아들 아사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 그의 시대에 그의 땅이 십 년 동안 평안하니라.” 여기에 보면 십년 동안 평안하였다고 하였는데 이 평안은 전쟁이 없으므로 누리는 외적인 평안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평안은 몇 년 동안 누렸다고 했습니까? 10년입니다. 왜 십년입니까? 십년 후에 외국군대가 침입하여 그 평안이 산산조각 났기 때문입니다. 오늘 다 읽지는 않았지만 9절에 보면 10년 후에 구스 나라가 백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하여 이 평화는 그만 물거품처럼 깨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즉 외적인 평안은 그 평안을 주는 외적인 조건이 사라지면 곧바로 사라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외적인 조건은 언제 어떻게 사라질지 모르므로 외적인 조건에서 오는 평안은 늘 불안한 평안이요 금방 사라질 평안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돈 때문에 평안한 사람은 돈이 없어지면 평안도 없어집니다. 건강 때문에 평안하면 건강이 사라지면 평안도 사라집니다. 높은 지위 때문에 누리는 평안은 지위가 사라지면 사라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렇게 돈과 명예와 권세와 건장을 지키려고 난리입니다. 왜요? 그런 것들로 평안을 누리려는 사람들은 그게 없으면 평안도 기쁨도 사라지니까요. 그래서 그것을 더 가지려고 난리를 치고 또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이 사라질까봐 전전긍긍하며 참 평화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평안과 기쁨과 은혜를 누리려면 외적인 평안보다 주님의 평안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는 완전히 질적으로 다른 진정하고 완전한 영원한 평안입니다. 주님은 모든 생명과 기쁨과 평강과 위로의 소망의 근원이십니다. 주님은 귀신을 쫓아내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바람을 잔잔케 하시고 성난 파도를 잠재우시고 모든 죄와 어둡고 칙칙하고 추하고 부정적인 것들을 쫓아내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 주님을 심령 속에 모셔 들이면 사탄에 속한 모든 어둠과 두려움과 분노와 원망과 불평을 쫓아냄으로 온전한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요14:27절에서는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보십시오. 내가 평안을 주겠다.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고 하십니다. 즉 세상이 주는 것은 잠시잠깐 뿐이요, 환경에 지배를 받는 것이지만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영원하고 모든 상황과 환경을 초월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근심걱정하지 말고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참 빛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안에는 분명 생명이 있고 기쁨이 있고 은혜가 있고 소망이 있고 평안이 있습니다. 그렇게 완전한 생명과 기쁨과 위로와 소망과 평안이신 예수님을 심령 속에 모셔 들이면 당연히 내 심령 속에 주님의 사랑과 은혜와 능력과 지혜가 충만함으로 분노와 미움과 저주 원망 불평과 사나움 등 모든 부정적인 에너지를 쫓아내고 주님이 주시는 참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충만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 주님을 심령의 중심에 모셔 들이고 주님과 동행할 때에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와 기쁨과 평안이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주님을 간절히 찾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심령 속에 모셔 들이고 주님 안에 있는 참 평안은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건 뭐 간단합니다. 주님을 간절히 찾아야 주님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주님을 간절히 찾으며 가까이하면 주님이 기쁨으로 내 안에 거하시게 됩니다. 그러면 내 안에 계신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진정한 평안과 기쁨과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아사와 시대에 평안을 누리게 되었던 이유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4절을 같이 읽습니다. “유다 사람에게 명하여 그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하며 그의 율법과 명령을 행하게 하고...” 또 7절 후반절도 보겠습니다. “우리가 주를 찾았으므로 주께서 우리 사방에 평안을 주셨느니라.”

어떻게 평안을 누리게 되었다고 하였습니까? 하나님을 찾고 명령을 행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찾았다는 것은 ‘자주가다, 찾다, 구하다, 문의하다, 노력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늘 하나님을 찾아가서 엎드려 기도하며 무엇이 옳은 것인지, 나를 향한 주님의 뜻은 무엇인지 끊임없이 찾고 구하며 주의 뜻을 따라 살기를 힘썼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심령 속에 임재하심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지혜를 덧입게 되고 그럴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적군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인도하셨고 그래서 그들이 평안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 나타난 것은 주로 외적인 평안을 의미하지만 외적인 평안이든 내적인 평안이든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 심령 속에 임재하시면 우리를 도우시고 인도하시고 능력과 지혜를 주셔서 내적인 것이든 외적인 것이든 세상의 것을 이기고 평안과 기쁨과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은 평강의 주님이십니다. 은혜의 주님이십니다. 우주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성난 파도를 명령하여 잔잔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난 바람을 명령하여 잠재우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심령속의 모든 두려움과 공포와 욕심과 독과 화를 제거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만이 참 평안을 줄 수 있는 능력과 권한이 있으십니다. 하나님이 만이 평안을 주실 수 있고 끝까지 지켜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찌하든지 그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열심히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와 사랑과 지혜와 은혜를 덧입게 됩니다. 그러면 그 은혜와 능력과 지혜로서 외적인 것이든 내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세상에서 다가오는 모든 적들을 물리치고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직 하나님 안에 진정한 평안과 위로와 기쁨이 있다는 분명한 사실을 기억하며 세상의 다른 어떤 것들을 찾기보다 하나님을 열심히 찾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의 능력과 은혜와 평안을 충만하게 덧입어 세상의 모든 상황과 환경을 이기고 참된 평안과 기쁨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4.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 온전한 평안을 누리려면 먼저 주님을 찾아야 하고 그 다음에는 그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왜 하나님을 찾습니까? 물론 먼저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주님의 생명과 은혜와 능력과 지혜를 덧입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열심히 찾아 주님의 은혜와 능력과 지혜를 얻었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진정 생명의 은혜와 능력과 평안이 넘치는 삶이 되지 않겠습니까? 만약 찾아와서 말씀을 듣기만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살지 않는다면 그 찾아온 발걸음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도 그러한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데요, 4,5절의 말씀을 같이 보겠습니다. “유다 사람에게 명하여 그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하며 그의 율법과 명령을 행하게 하고 / 또 유다 모든 성읍에서 산당과 태양상을 없애매 나라가 그 앞에서 평안함을 누리니라.” 나라가 평안했는데 어떻게 평안했습니까?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리고는 모든 우상을 깨트리고 율법과 명령을 다 행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뭐 당연하지 않습니까? 생명과 평강과 위로와 소망의 근원이신 하나님, 완전한 선과 진리와 의이신 하나님, 전지전능하시고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과 동행하는데 어찌 평안이 없겠습니까? 반대로 이런 하나님을 거역하고 사탄의 조종을 따라 살아간다면 어찌 평안이 있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한 사실은 주님 안에 생명이 있고 평안이 있고 기쁨이 있고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생명이 있고 기쁨이 있고 평안이 있고 소망이 있기에 분명히 주님과 동행하는 자들은 그런 놀라운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약하고 허물 많고 미련하고 무지하고 어리석지만 우리 주님은 모든 마귀 사탄의 역사를 결박하고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승리하신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그 분 안에는 그 어떤 어둠도 깃들 수 없습니다. 마귀 사탄이 역사할 수 없습니다. 어둠의 세력이 득세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 오늘 말씀을 분명히 기억하며 진정한 생명과 평안과 위로와 기쁨은 세상의 돈이나 명예나 권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예수님을 여러분의 심령의 중심에 온전히 모셔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더욱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가까이와서 예배드리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 묵상하는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모셔들이고 찾고 가까이 하며 주님의 은혜를 받았으면 일상의 삶속에 온전히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죄와 무지와 왜곡된 가치관이 판을 치고, 그래서 불공평하고 힘들고 심지어 억울한 일을 만나기도 하는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주님의 능력과 은혜와 지혜와 인도하심으로 그러한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이기고 하나님이 무한정으로 내려주시는 샬롬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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