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설교
말씀 : 수14:6-12

제목 : 멋있는 인생


1.내면이 멋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멋있는 게 뭡니까? 보통은 멋있다 그러면 겉모양을 생각하죠. 저 사람 멋있다. 아름답다. 그러면 인물도 좋고 허우대도 멀쩡하고 세련되고 그러면 보통 멋있다. 아름답다 그러죠. 물론 기왕이면 다홍치마라는 말도 있고,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말도 있듯이 기왕이면 외모도 멋있고 아름다운 것이 좋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누구나 예쁘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지 못나고 추한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정말 멋있고 아름답고 훌륭한 사람은 외면이 아름답고 멋있는 것보다는 내면이 아름답고 멋있고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설령 겉보기에는 썩 아름답고 멋있고 세상적으로 내 놓을 만한 것이 없어도 내면이 아름다운 사람은 뭔가 모르게 그 사람에게서 향기가 뿜어져 나옵니다. 반면에 설령 높은 지위와 학식이 있고 멋있게 생겼어도 내면이 추하거나 악한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삶속에서 악취가 나게 마련 인 것입니다.


사실 뭐 당연한 거죠. 여러분, 우리 삶의 모습들이 무엇에 의하여 결정됩니까? 물론 내면 즉 우리 마음속에 들어 있는 것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지요. 안 그래요? 우리 마음속에 올바르고 고상하고 깨끗하고 의롭고 선한 것들이 들어있다면 당연히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반면에 왜곡되고 추하고 거짓되고 악한 것들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면 말하고 행동하는 것도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눅6:45절에 보면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말씀그대로 마음속에 선이 쌓여 있으면 선한 행동이 나오고, 악이 쌓여 있으면 악한 행동이 나온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또 삼상16:7절에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사람은 외모 권력 능력 돈 조건 등의 외적인 조건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오직 마음이 얼마나 진실하고 아름답고 깨끗하고 성결하고 사랑과 은혜가 많으냐 그걸 본다는 것입니다. 왜요? 그게 선이니까요. 그게 인간의 생명을 아름답게 하는 거니까요. 그게 우리를 아름답고 평화롭고 복되게 하는 것이니까요.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물론 기왕이면 외적인 것도 아름답고 넉넉하고 멋있어야 하겠지만 그보다 어찌하든지 먼저 여러분의 심령을 믿음과 사랑과 은혜와 선과 진리로 채우는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향기가 있고 아름다움으로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받고 인정받으며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쳐나는 아름답고 복되고 멋진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대접받기보다 역할에 충실했던 사람


오늘 본문에는 바로 이런 귀하고 훌륭하고 아름답고 멋있는 분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갈렙이라는 분인데 오늘 말씀에 보면 이 분이 얼마나 멋있고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였는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 중에 우리가 먼저 생각해 볼 것은 이분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던 분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40년동안 힘든 생활을 보내고 드디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에 도착하여 땅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이 상황을 생각해보세요. 그들은 천신만고 끝에 꿈에도 그리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에 도착하여 각 지파별로 땅을 분배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아마도 누구나 기왕이면 좋은 위치에 많은 면적을 분배받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혹은 우리 지파는 출애굽과 광야생활에서 이렇게 충성하며 공적을 세웠다며 은근히 자신을 내세우며 기대를 하고 있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타난 갈렙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먼저 오늘 12절을 보겠습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 내리이다.”

 

여러분, 보세요. 갈렙은 어떤 땅을 달라고 합니까? 헤브론 산지입니다. 게다가 그 땅에는 누가 있다고 했습니까? 아낙 자손 즉 거인 족속들이 살고 있는 땅입니다. 그리고 견고한 성읍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고많은 땅 중에 하필 그 땅을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넓은 들판에 초지가 형성되어 있고,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 꽃들이 만발하고 그래서 농사를 짓거나 목축하기에 좋은 땅이 아니라 반대로 산지에 그것도 거인들이 살고 있고 견고한 성읍이 있어 정복하기도 힘든 땅을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갈렙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45년전 가데스바네아에서 이스라엘이 각 지파별로 한명씩 열 두명의 정탐꾼을 보낼 때에 유다지파의 대표자로 선발되어 가나안 땅을 탐지하러 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40일 동안 정탐을 마치고 돌아와 보고를 할 때에 다른 10명의 정탐꾼들이 그 땅 거민이 워낙 강하고 성읍도 튼튼해서 그 땅을 점령한다는 것은 도무지 불가능하다고 할 때 ‘아니다. 우리는 할 수 있다. 그들이 비록 강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우리는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다.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라고 외쳤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수인 열 명의 정탐꾼의 이야기를 듣고 원망하고 불평하여 결국 출애굽 1세대의 사람들은 다 죽고 가나안 땅에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직 믿음으로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다고 외쳤던 갈렙과 여호수아 두 사람만 살아남아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들어왔던 것입니다. 즉 갈렙으로 말할 것 같으면 출애굽 1세대 중 여호수아와 함께 딱 두 명 밖에 살아있지 않은 이스라엘의 어른 중에 어른이요, 원로중의 원로요, 이스라엘 역사의 산 증인이요, 이스라엘의 영적 정신적인 지주와 같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만하면 이제는 대접을 받을 만한 위치에 있지 않습니까? 나이로 보나 공로로 보나 지위로 보나 무엇으로 보아도 이제는 좋은 땅을 분배받아 좀 편히 쉴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습니까? 오랫동안 이스라엘 역사와 함께 하며 공적을 남기며 이스라엘을 이끌어왔던 원로중의 원로이니 백성들이 미리 알아서 대접을 해 줄만한 위치에 있고, 그럴만한 충분한 권리가 있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갈렙은 오히려 산지를 내게 달라...... 거기 비록 아낙 자손이 거하고 있지만 그까짓 것 문제될게 없다... 비록 그 성읍은 크고 강하고, 내 나이 85세로 비록 늙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니 나는 충분히 그들과 싸워 이길 수 있다. 그러니 거인이 거하고 있는 그 땅, 크고 견고한 성읍이 있는 그 땅을 내게 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요? 물론 일차적으로는 믿음 때문이었고 동시에 그는 자신이 뭔가 한 것이 있다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그 자체가 축복이요 감사거리였고 영광을 돌릴 일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정말 안 그래요? 내가 무언가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은혜입니까? 하나님께서 할 수 있는 마음과 힘과 능력과 지혜와 여건과 상황과 환경을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 아닙니까? 정말 내가 가정이나 교회나 직장이나 마을에서나 국가에서나 뭔가 할 수 있다면 얼마나 큰 은혜요 기쁨이요 영광입니까? 얼마나 큰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까? 반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얼마나 초라한 인생입니까? 아니 얼마나 무가치한 인생입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걸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정이나 교회나 직장이나 마을이나 국가를 위해 무언가 기여한 부분이 있었다면 그건 너무나 큰 축복이요, 감사거리요,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했다면 그것이 부끄럽고 송구스러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뭔가 좀 했다고 내세울 일이 무엇입니까? 대접받으려 할 것이 무엇입니까? 오히려 감사한 것 뿐이요, 영광스러운 것 뿐이지요.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내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서 무언가 기여한 부분이 있다면 정말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내가 무언가 할 수 있었던 게 복이요 은혜요 귀한 일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가정이나 교회나 직장에서나 어느 곳에서나 자신을 내세우거나 권리를 주장하기보다 더욱 감사와 기쁨으로 자신의 역할을 충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더욱 하나님과 사람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고 귀히 쓰임받는 복되고 아름답고 멋있는 인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85세나 된 어른의 대단한 믿음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갈렙은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가운데 오직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정말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역사를 볼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일찍이 45년전 다른 열 명의 정탐꾼들이 한결같이 이 땅 사람들은 거인이요, 성읍은 요새라서 우리는 도저히 그들을 이길 수 없다고 했을 때에 ‘무슨 말이냐, 이 땅은 하나님이 주신 땅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비록 강할지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한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라고 외쳤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45년의 세월이 지나 나이가 85세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이 85세이면 이젠 패기도 용기도 도전심도 다 사라지고 현실에 안주하며 편히 쉬며 대접받으며 살고 싶어할 나이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었기에 지금도 여전히 젊은이와 같은 아니 젊은이보다 나은 믿음과 용기와 도전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원로중의 원로요, 어른 중의 어른인 그가 ‘나는 산악지대이든, 거인이 거하든, 견고한 성읍이 있든 관계없다. 그 땅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땅이니 내가 가서 점령하겠노라고, 그러면 그 땅은 반드시 내 땅이 될 것이라.’며 헤브론 산지를 요구한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이 85세의 노인이 어떻게 그런 용기가 있었을까요? 물론 그건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9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이 말씀은 신1:36절에 나오는 말씀으로 그가 가나안 땅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그들은 우리 밥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한 그 땅은 우리 땅’라는 긍정적인 보고를 했을 때 그 믿음대로 내가 그 땅을 너에게 주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갈렙은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곳이 산지이든, 아낙자손이 있든, 성읍이 강하든 내가 가서 취할테니까 나에게 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당연히 이래야 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완전한 능력과 사랑과 지혜와 권세와 선과 의와 진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은 완전한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입니다. 오직 거기에 생명이 있고 축복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일점일획도 틀림없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오직 그 말씀을 믿고 주님의 약속의 땅을 향해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분명히 그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무조건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 은혜의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거기 생명이 있고 은혜가 있고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 자기가 잘나고 똑똑하다고 여기며 하나님의 말씀을 잘 따르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말씀따라 살기보다는 자기 생각과 경험과 지식과 이성대로 살아갈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우리 인생이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물론 잘나고 똑똑하고 위대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모습도 있습니다. 아니 많습니다. 때로는 정말 대단한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생은 얼마나 죄와 무지와 어리석음 속에 있는지 모릅니다. 아는 게 많은 것 같지만 실상은 쥐꼬리 만큼도 안됩니다. 모르는 것이 천배만배 더 많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 많은 것 같지만 못하는 만배 억배 더 많습니다. 우주에 대하여, 인간에 대하여, 영원한 세계에 대하여, 선과 진리와 의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아는 게 별로 없고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도 자기 생각과 지식과 경험만을 믿고 살아간다며 세상에 이렇게 어리석고 무모한 인생이 어디 있습니까? 아니, 안 그래요? 모르고 할 수 없는 것이 천배만배억배 더 많은데 어찌 자기 지식과 경험을 따라 살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래서가지고서야 어찌 진정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가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인간의 경험과 논리와 지식과 환경과 이해관계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유일한 전능자이시여 전지하시고 완전한 사랑과 은혜와 능력과 진리와 선이신 하나님의 말씀과 그 약속을 믿고 겸손히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다가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된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순수하고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갈렙에게서 또 하나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성실함입니다. 오늘 7절을 보세요. “내 나이 사십 세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하게 하였으므로 내가 성실한 마음으로 그에게 보고하였고...”


여기서 ‘내 마음에 성실한대로’라는 말씀은 그 어떤 가식이나 꾸밈이나 과장이나 거짓 없이 오직 마음속에 있는 그대로, 내가 확신하는 그대로 보고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가나안 사람들에 대하여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 그 땅은 우리 땅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우리는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다’는 보고는 전혀 과장도 아니요, 허풍도 아니요, 꾸밈도 아니고, 아부의 말도 아니고 마음에 있는 사실 그대로, 확신한 그대로라는 것입니다. 내게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너무나 분명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 땅은 우리 땅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전혀 의심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과 믿음은 지금도 여전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믿음입니다. 주님은 완전히 신뢰할 만하고, 주님의 약속은 100% 진짜인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순도가 100%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는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100%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정말로 갓난아기가 엄마를 100%신뢰하고 죽으나 사나 엄마 손잡고 따라가듯 주님의 손을 잡고 졸졸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갈렙은 바로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진실로 하나님께 대한 전폭적인인 신뢰속에서 성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왔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추호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젊었을 때부터 85세가 된 지금까지 변치 않는 성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순수하고 성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자신의 권리나 대접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가기 싫어하는 땅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땅으로 들어가 결국 견고한 성읍을 무너뜨리고 거인들을 물리치고 그 산지를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며 살다가 마침내의 아름다운 인생을 마감하고 할렐루야 찬양하며 영광의 나라를 향하여 갔습니다. 얼마나 멋진 인생입니까?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러한 그의 삶에는 얼마나 기쁨과 자유와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넘쳤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이 귀한 말씀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과 성실함으로 주의 말씀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무언가 한 일이 있다면 자신의 권리나 공로나 업적을 이야기하기 전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 은혜요 축복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후로도 계속해서 가정이든 교회이든 사회이든 어느 곳에 있든지 믿음과 감사와 기쁨으로 충성스럽게 역할을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과 은혜 가운데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남에게도 생명의 기쁨을 가져다주는 복된 아름답고 멋있는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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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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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추감사주일설교

주일낮설교   

제 목 :

말 씀 : 시103:1-5

1.너무나 큰 은혜 속에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의우총사진 보여주기) 주일날 아침부터 그것도 감사주일 아침부터 웬 무덤이냐고 하시겠지만 이게 무슨 무덤인지 아세요. 의우총이라고 소의 무덤과 묘비입니다. 이 의우총은 상주에 있는데 이 의우총이 세워진 유래는 이렇습니다.

상주시 사벌면 묵상리의 서상모라는 분이 암송아지 한 마리를 사다 기르게 되었는데 이웃에 사는 김보배라는 할머니가 이 소를 너무 예뻐해서 오고가며 늘 쓰다듬어 주고 배추나 고구마나 옥수수 등 먹을 것을 종종 갖다 주곤 했답니다. 그렇게 송아지때부터 어미소가 될 때까지 아니 그 후로 약10년간 그렇게 이 소를 사랑해주다가 87세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이 할머니의 장례를 마친 다음날 이 소가 없어져 동네 사람들이 나서 찾았는데 글쎄 이 소가 김보배 할머니의 무덤에 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할머니의 무덤은 외양간에서 2km 정도 떨어진 산 중에 있었는데 어떻게 찾아갔는지 거기에 가 있었고, 더 기가 막힌 것은 이 소가 할머니의 산소를 향해 고개를 푹 숙이고 계속 눈물을 흘리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머니의 아들이 이 소가 하도 기특하고 고마워서 막걸리와 두부와 배추 등을 접대하며 조문객으로 예우를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10년 후에 이 소가 19살의 나이로 늙어 죽었는데 마을사람들이 이 소를 극진한 예를 갖춰 장례를 치러 주었고, 상주시에서는 그 소를 기념하기 위하여 의로운 소의 무덤 ‘의우총’을 만들어 교육의 장으로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물론 약간은 과장이 되었을 수도 있지만 이 소를 통해 어떤 것을 생각하게 됩니까? 사실 이 소뿐만 아니라 우리는 은혜 갚은 동물 특히 은혜 갚은 개의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듣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동물도 이와같이 은혜를 알고 갚을 줄 아는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우리는 얼마나 더 해야 하겠느냐 그런 이야기입니다. 안 그래요? 만물의 영장인 우리가 동물만 못해서야 어떻게 체면이 서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면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물론 은혜를 안다면 은혜에 감사하며 보답할 줄 아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다 자기가 잘나서 자기 힘과 능력과 지혜로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여기지만 사실 우리는 은혜가 아니면 한시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일차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살고, 이차적으로는 사람의 은혜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일단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없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누리는 것 중에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기본적으로 생명은 어디서 왔습니까? 물론 부모님이 주셨지요. 그럼 그 부모님은 어디서부터 오셨습니까? 물론 조부모님이십니다. 그러면 그 분들은 어디서 오셨습니까? 끝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거기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진화론을 사실로 생각하는데 사실이 아니라 가설에 불과한 것입니다. 어찌해서 단세포 생명체가 생겨나더니 점점 진화해서 무슨 벌레 같은 것이 되고 좀더 진화해서 어류도 되고 파충류도 조류가 되고 그러다가 짐승이 되고 그 중 하나인 원숭이가 점점 진화해서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과학의 법칙에 의해서도 생명체는 결코 저절로 생겨날 수 없습니다. 설령 만에 하나 단세포 생명체가 생겼다해도 그 단세포 생명체가 이 신비하고 오묘하고 지혜롭고 영광스러운 사람까지 진화가 된다는 것은 과학적으로든 논리적으로든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안 그래요? 벌레의 어디에 인간의 이 신비하고 오묘하고 지혜롭고 영광스러운 유전자가 있기에 그게 사람까지 진화가 됩니까? 우주만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빅뱅론이니 뭐니 어쩌구하는데그것도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생명이든 자연이든 하나님의 창조가 아니면 그 어떤 방법으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이든 인간이든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모든 물질, 생명, 육체는 물론 이성, 지성, 감성, 능력, 지혜 모두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우리가 먹고 입고 마시고 숨쉬고 하는 것들이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생명과 지혜와 능력과 지성을 가지고, 하나님이 주신 삶의 터전에서,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태양과 공기와 물과 양식을 먹고 마시고 숨쉬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단 1분 1초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대상29:14절 하반절을 보겠습니다.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모든 것이 주님이 주신 것임을 고백하며 기쁨으로 주님께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고 있는 은혜는 하나님의 은혜만이 아닙니다. 사람의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부모님의 은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부모님이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우리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셨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또 부모님만 아닙니다. 교회가 있기 때문에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알고 생명을 얻고 영생복락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매일 먹고 입고 잠자고 하는 것은 물론 자동차, 스마트폰, 텔레비전, 냉장고, 문화시설, 체육시설, 이 부요함, 평화, 자유, 질서 이 모든 것들에 이웃이 함께 했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우리가 누리고 할 수 있는 것 중에 오로지 혼자만의 힘과 지혜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오늘 맥추감사주일인데 바로 이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람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물론 매일 매순간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걸 망각하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제 잘나서 저 혼자 사는 것처럼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이웃의 은혜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걸 알고 먼저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이 더 행복하고 아름답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하여 먼저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부모님을 비롯한 모든 이웃들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또 최선을 다해 그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 자신의 삶속에 더욱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충만하고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가져다주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늘 감사하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감사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정말 너무나 많은 은혜가운데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그 다음에는 그렇게 많은 은혜 속에 살고 있는 것을 안다면 언제나 감사의 눈으로 세상을 보며 살아야 합니다. 그게 당연하고 그게 내가 네가 함께 행복하게 사는 길입니다. 여러분, 실제로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얼마나 감사할 것이 많습니까? 여러분, 지금 한번 눈을 감고 감사거리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비록 부자는 아니지만 천하보다 귀한 생명이 있습니다. 몸이 온전치 못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마음껏 활동할 수 있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풍족하고 편히 쉴 집이 있습니다. 자유와 평화와 질서가 있습니다. 태양이 이렇게 아름답게 빛나고 그 태양아래서 온갖 식물과 곡식들이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습니다. 시냇물은 졸졸 흐르고 새들은 노래하고 마실 물이 있고, 숨쉴 수 있는 공기가 있고, 밤하늘의 별들이 아름답게 빛나고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이웃이 있고 동료가 있고 일할 수 있는 능력과 지혜가 있고 차도 있고 냉장고도 있고 텔레비전도 있고 스마트폰도 있고, 마음껏 예배드리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예배드릴 수 있고..... 여하간 있고 있고 있고 계속해도 한이 없습니다. 그러니 어찌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정말 어리석게도 자꾸만 없는 것, 부족한 것만 생각하며 가난뱅이처럼 삽니다. 자꾸만 남의 탓, 환경 탓, 상황 탓하며 불평불만을 터트립니다. 세상을 향해 에이 망할 놈의 세상, 에이 도적놈들 하면서 비난을 퍼붓기도 합니다. 자신에 대해서도 못난 것, 잘 못하는 것만 생각하며 부모 탓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미련할데가 어디 있습니까? 있는 것도 누리지 못하고 자꾸만 더 달라고만 하면 도대체 어쩔 셈입니까? 그런 사람은 암만 많이 줘봐야 소용없습니다. 있는 것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많은 것을 줘도 누리지 못합니다.


여러분, 문제는 상황이나 소유가 아니라 마음입니다. 같은 상황이라도 어떤 사람은 긍정적이고 가능한 것을 먼저 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부정적이고 불가능한 것을 먼저 봅니다. 똑같이 믿음 생활하면서도 어떤 사람은 이미 주신 것, 이미 누리고 있는 것을 생각하며 그저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없는 것만 생각하며 맨날 달라고 달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잘아시는 살전5:16~18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항상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왜요? 정말로 감사할 일이 많고, 또한 감사하는 자가 은혜를 아는 자요, 또한 그렇게 감사할 때에 나도 행복하고 남도 행복하게 만들고 하나님도 기쁘시게 해 드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감사해야 합니다. 더구나 여러분, 우리가 어떤 사람들입니까? 죄와 무지로 영원한 형벌가운데 처할 수 밖에 없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릴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하고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오늘 3,4절의 말씀 보겠습니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그러니까 우리가 감사하고 영광을 돌려야 할 일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특별히 우리의 죄악을 사해주시고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해 주신 그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정말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모든 인생은 그들이 알든 모르든 죄와 무지 속에 있고 심히 연약하고 한계 속에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모르고 그저 제 잘난 멋에 살다가 그 죄와 무지로 말미암아 영원한 형벌 가운데 처할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천만다행히도 우리가 죄와 무지와 한계속에 있는 존재임을 알고 하나님 앞에 나와 하나님을 알고 믿고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할렐루야 찬양하며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며 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엊그제 우리 교회 가까이에 계신 이웃분이 위암으로 위 전체를 절제하는 수술을 받았다고해서 다녀왔습니다. 그렇게 위 전체를 절제해야 할 만큼 엄중한 상황이었는데도 그래서 자칫하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할 상황이었는데 천만다행히 다른 곳으로 전이가 되지 않아 수술이 잘 되어 생명을 건지게 되었다고 가족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물론 육체적인 생명도 너무나 귀한 것이니까 너무나 기쁜 일이긴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암을 고침 받은 것은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생명을 조금 연장시킨 것일 뿐 얼마 있으면 결국 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그건 영원한 생명입니다. 영원한 생명도 또 죄와 고통과 아픔 속에 살아야 한다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누릴 영생복락의 세상은 그야말로 고통이나 슬픔이나 괴로움이나 아픈 것이나 죽음의 그림자는 눈꼽만큼도 없는 나라입니다. 오직 기쁨과 즐거움과 평안과 행복과 사랑과 은혜만이 가득한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사람들이 알든 모르든 인정을 하든 말든 그건 인간의 죄와 무지와 한계에서 비롯된 어리석은 결론에 불과하고 반드시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오직 예수님의 보혈로 죄씻음의 은총을 입은 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바로 그런 혜택을 누린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어찌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정말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먼저 우리에게 생명과 세상에서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시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감사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가정에서도 늘 서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하며 살아야 합니다. 잘났건 못났건 능력이 많건 적건 내 남편 내 아내, 내 부모, 내 자녀가 최곱니다. 예수님이외는 이보다 소중한 존재가 없습니다. 세상의 누가 내 남편이나 아내나 부모보다 나를 더 아껴주고 더 사랑해 주겠습니까? 어떤 다른 남편이나 아내나 부모가 나를 위해서 그토록 수고해 주고 아껴주고 하겠습니까? 누가 내 남편이나 아내나 부모보다 더 의지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교회도 그렇습니다. 내가 출석하는 교회가 최곱니다. 누가 여러분에게 생명을 주었습니까? 누가 여러분을 양육해 주었습니까? 누가 여러분을 위하여 그렇게 애타게 기도해 주겠습니까? 누가 여러분이 힘들고 어려울 때 찾아가겠습니까? 누가 여러분을 위하여 맨날 기도하며 말씀을 준비해서 전해 드리겠습니까?


직장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떤 직장에 있든지 감사하며 일해야 합니다. 직장이 있어 일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너무나 감사한 일입니다. 일 할 수 있는 건강과 지혜와 능력이 있다는 것도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직장을 통하여 내 가정의 생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도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농사를 짓는 것도 그렇습니다. 물론 농촌 환경이 많이 열악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농사지을 땅이 있다는 것도 감사한 일이요, 농사지을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도 감사한 일이요, 비록 넉넉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농사를 통하여 가정을 꾸려오고 자녀를 양육할 수 있었다는 것도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나아가 농사를 경영하여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인 먹거리를 제공해 줄 수 있다는 것도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은 정말 우리가 하나님께나 교회에나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도 다른 어느 곳에서나 우리가 정말 받은 바 은혜가 너무나 크다는 것을 기억하며 먼저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동시에 부모님을 비롯한 모든 가족과 교우들과 직장동료들과 심지어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다른 이웃들에게도 늘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감사를 표하며 어떤 형태로든 그 은혜에 보답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삶의 자리가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천국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감사하는 사람에게 복을 주십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에는 축복이 오고, 감사하는 마음 속에 하나님은 더 많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불평불만하는 사람에게는 있는 것까지 빼앗아 버립니다. 여러분 같으면 안 그러겠습니가? 줘도줘도 감사는커녕 투덜거리고 못마땅하게 여기고 불평불만하면 줬던 것도 빼앗아버리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정말 그 은혜와 사랑을 알고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하는 사람에게는 더 주고 싶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 5절을 보십시오.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총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며 감사하는 자에게 더 좋은 것을 채워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능력과 은혜와 평강과 위로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며 가까이하는데 어찌 그 은혜를 누리지 못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어찌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리며 사는 자들에게 분명히 좋은 것들로 충만케 채워주십니다.

 

또한 그렇게 감사하여 살아갈 때에 우리의 삶을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감사하여 찬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힘과 능력과 은혜를 주어 창공의 지배자인 독수리가 힘차게 땅을 박차고 날아올라 아무 걱정이나 두려움이나 염려없이 창공을 누비듯이 그 삶이 힘차고 능력이 있고 자유와 평안이 넘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 새로운 생명을 가진 자로서 그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게 해 주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감사하고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분명히 힘과 능력과 은혜와 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그 삶에 힘이 있습니다. 생동감이 있습니다. 감사가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이기게 됩니다. 근심 걱정 원망 불평 미움 질투 시기 욕심 다 이겨낼 수 있습니다. 세상의 어둔 것들이 대들지 못하고 설령 대들어도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넉넉히 이겨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하여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감사와 기쁨과 은혜와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정말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지 말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동시에 부모님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에게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더욱 충만하게 덧입어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가득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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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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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제목 : 참된 생명의 기쁨

말씀 : :요일1:1-4

1.신앙은 생명에 관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병든 자를 고쳐주시기 위해서 일까요? 배고픈 자에게 빵을 나누어 주시기 위해서 일까요? 잘 먹고 잘사는 세상을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 일까요? 착한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며 살도록 해 주시기 위해서 일까요? 전쟁과 기아와 폭력이 없는 평화의 땅으로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 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보다는 혁명을 일으키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강력한 능력으로 침략하고 착취하고 죽이고 빼앗고 압제하는 자들을 제거하고 강력한 세상적 메시야 왕국을 만드셨을 것입니다. 또 수백수천의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사 아니 오병이어의 기적이 아니라 그냥 하늘에서 먹을 것이 막 쏟아져 내려오게 하셔서 당시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능력과 지혜와 권세가 있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도리어 33살의 젊은 나이에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로마의 군병들과 유대종교지도자들에게 모진 고초와 온갖 멸시 천대를 다 당하셨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당하시고 무덤까지 내려가셨습니다.


왜 입니까? 예수님은 단순히 이 세상에 물질적, 정신적, 정치적 파라다이스를 건설하려고 오신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생명을 주시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예수라는 그 이름 자체가 그런 뜻 아닙니까? 마1:21절을 보십시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님은 구원자이신데 무슨 구원자이시냐 죄에서 구원하실 분, 그래서 마귀사탄의 권세에서 구원하여 영원한 천국을 주실분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가 왜 교회에 다녀야 합니까? 물론 구원받고 생명의 은총을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 전인격적 생명의 은총을 누리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그리고 그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것, 이것이 교회에 다녀야 할 이유이고 교회가 존재해야 할 이유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요10:10절 보겠습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보세요. 예수님이 왜 오셨습니까? 생명을 얻게 하려고... 또 요11:25,26절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보세요. 나를 믿는 자는 어떻게 된다고요? 부자되고 건강해지고 높아지고 그게 아니라 온전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의 것도 얻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생명을 얻는 게 중요하다. 그런 말씀입니다.


물론 건강, 권세, 명예, 평안도 좋습니다. 아니 그것도 주십니다. 그러나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예수님 온전히 믿고 참된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것, 이것이 중요하고 이것이 우선이고 이것이 예수님 믿어야 할 이유인 것입니다. 그래야 행복하고 그래야 평안하고 그래야 자유합니다. 그래야 건강하고 그래야 부유해지고 그래야 현재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기서도 진정한 평안도 기쁨도 자유도 만족도 누리지 못하고 게다가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되니 이렇게 안타깝고 미련하고 어리석은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세상의 다른 것을 바라보고 거기에 얽매이고 그것 때문에 지지고 볶고 시기질투 낙심근심 원망불평하지 말고, 그런 것들을 위하여 정열을 다 바치지 말고 오직 예수님을 심령속에 온전히 모셔들이고 오직 주님의 말씀과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주님의 듯을 바르게 분별하고 주님의 방법대로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생명의 기쁨과 자유와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넘쳐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예수님이 생명의 주이심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예수님 안에 있는 이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예수님이 진정 완전하고 유일한 생명의 주님이 되심을 믿어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고 평안이 있고 위로가 있고 소망이 있음을 분명하게 확실하게 마치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이는 것처럼 알고 믿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야 죽어도 예수님을 따라 살면서 그 안에 있은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예수님 자신과 예수님 안에 생명의 은총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면 어떻게 예수님 따라 가며 그 은총을 누리겠습니까? 반대로 예수님이 진정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그 안에 정말 영원하고 완전하며 영적 육체적 물질적 정신적 온갖 풍성한 생명의 은총이 넘쳐난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실히 알고 믿는다면 어찌 주님을 따라가지 않겠습니까? 그러한 영적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 완전한 생명의 은총을 가져다주시는 예수님을 확실히 알고 따라간다면 어찌 그 은혜를 누리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진정하고 유일한 완전한 생명의 주가 되심을 확실히 믿어야 하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건 다름 아니라 내 지식과 경험이나 이성을 내려놓고 오직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인 성경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여러분,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알면 얼마나 알고 경험했으면 얼마나 했겠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한계와 무지 속에 있습니까? 우리가 영생복락의 길을 어떻게 압니까? 천국과 지옥을 어떻게 압니까? 알 수가 없지 않습니까? 아니 이 짧은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어떻게 압니까? 아니 우리가 다 죄가운데 무지가운데 있는데 어떻게 압니까? 아니 죽음 이후의 세상을 스스로 어떻게 압니까? 그런데 마치 영원전부터 영원후까지 모르는 것 하나없이 다 아는 것처럼 여기고 자기 생각과 경험과 이성을 따라 살아간다면 세상에 이렇게 미련할 데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아십니다. 인생의 길도, 행복의 길도, 참된 진리도 선도 의도 영원한 세계에 대해서도 모두 알고 계신 분이십니다. 아니 그 이전에 그것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배워야 하는데 그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 것을 기록한 것이 성경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부르셔서 가르쳐주시고 보여주신 것을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이성과 지식과 경험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알고 그 길로 달려가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즉 이 말씀은 제자들이 자신의 생각을 기록한 것도 아니고, 꾸며낸 것은 더더구나 아니고 직접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예수님께 보고 듣고 가르침을 받고 경험한 것을 액면 그대로 기록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대로 예수님은 오직 유일한 생명의 주가 되심으로 이 예수님 믿고 구원의 은총을 누리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3년간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예수님이 일으켰던 기적과 그분이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시고 죽으시는 것과 사망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것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분이 명령하시자 죽어서 나흘이 지나 냄새가 나던 나사로가 어정어정 걸어 나오는 것을 보았고, 야이로의 딸이 살아나는 것을 보았고,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일어서고, 중풍병자가 일어나며, 귀신이 쫓겨나며, 주님의 말씀에 성난 파도가 가라앉고, 바람이 잔잔해 지는 것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또한 그들은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두 귀로 똑똑히 들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시고,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시고, 그 말씀대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말씀과 기적과 능력으로 똑똑히 보여주셨고, 그들의 두 눈으로 승천하시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그분이 다시 오시마 약속하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습니다. 그렇게 직접 보고 듣고 만져보고 확인해서 이 분이 정말 메시아구나, 이 분안에 생명이 있구나, 영광의 나라가 있구나 하는 것을 확실히 알고 믿고 기록한 것입니다.

어떤 강퍅한 사람들은 예수님이 병든 자를 고치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죽을 자를 살리고 자신이 살아나고 한 것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신격화시켜 꾸며낸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도 강퍅하고 무지한 인간의 어리석은 소리에 불과합니다. 여러분, 만약 제자들이 예수님이 일으키신 기적이나 능력이나 말씀이나 이런 것들을 뻥튀기해서 기록했다면 그래서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신 것도, 예수님이 자신이 부활하신 것도, 다시 오마 약속하신 것도, 천국과 지옥도 거짓이라면 어떤 바보가 그렇게 자기가 꾸며놓은 거짓말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겠습니까? 아니 안 그렇습니까? 거짓말을 기록하고 그것을 증언하다가 무슨 부귀영화나 큰 권력이나 명예라도 얻게 된다면 혹시 몰라도 어떤 바보멍청이가 자기가 꾸며낸 허무맹랑한 것을 위하여 핍박당하고 멸시천대를 당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칼에 맞아 죽고 불에 타서 죽고 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습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의 처절한 고통을 당하심으로 죄사함의 은총을 주신 예수님, 그러나 그 크신 권세와 능력으로 사망권세 깨트리시고 부활하셔서 영원한 승리를 주신 예수님, 그리고 마침내 때가되면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예수님, 그 분만이 우리의 완전하고도 유일한 생명의 주십니다.

여러분, 이걸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 믿음을 주셔서 영원한 생명의 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이 믿음이 있어야 인생의 모든 문제는 해결됩니다. 가장 근본적으로 죄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천국의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죄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소유하게 된 사람은 지금 여기서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게 됩니다. 참 자유와 기쁨과 평강과 위로와 감사가 넘쳐나는 복된 인생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정말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완전하고도 유일한 구세주시오 생명의 주님이심을 알고 믿고 따라 살아감으로 정말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쳐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예수 그리스도 안에 생명의 기쁨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축복은 단지 영원한 생명의 은총만이 아닙니다. 제가 앞에서 세상에서 복받고 건강하고 출세하고 부자되고 평안하기 위해서 예수님 믿는 것이 아니라고 한 것은 그것이 진정한 신앙의 목적이 아니라는 말씀이지 세상의 복은 필요치도 얻을 수도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히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 믿는 사람은 일차적으로는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고 계시고 이차적으로는 육체적, 물질적, 정신적 복도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28:2-6절에서는 “2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3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4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5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6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6:33에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일단은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얻게 되고 그러면 이 땅에서도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는 가운데 육체적 물질적 필요도 채워주심으로 말 그대로 영육간에 풍성한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죄와 무지 속에 있는 내 생각과 이성과 지식과 경험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 속에 주님과 온전히 동행해야 합니다. 그래야 정말 예수님 안에 있는 모든 영적 육체적 물질적 복을 온전히 누리게 됩니다.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믿지도 않거나 믿는다고 하면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멀리하며 살아가면 어떻게 예수님 안에 있는 복을 충만하게 누리겠습니까? 안 그래요? 빛을 떠나 빛의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까? 영하 50도나 되고 칼바람이 몰아치는 허허벌판에 서서 따뜻함을 누릴 수 있습니까? 더럽고 추하고 썩은 내가 풀풀나는 곳에서 향기로울 수 있습니까?

그래서 앞에서 말씀드린 신명기 28장의 축복의 말씀에도 조건이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입니다. 그러면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네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세상의 모든 것을 더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오늘 3절도 보세요.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이 말씀을 전하는 것은 너희들로 하여금 사도들과 사귐이 있게 하려는 것인데 사도들과의 사귐은 단순히 인간적 사귐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 안에서의 사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사귐을 갖게 되면 생명을 얻고 더 나아가 기쁨이 충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참된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과 행복은 절대로 돈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지식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런 것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누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참되고 영원하고 온전한 기쁨과 만족하고 행복과 자유는 예수님과의 올바른 사귐을 가질 때 찾아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내안에 온전히 모셔들임으로 예수님과 온전한 사귐이 이루어지면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막혔던 담이 허물어지고, 죄의 벽이 무너지고, 어둠이 물러가고 생명의 빛이 들어옵니다. 그러면 물론 하나님 안에 있는 온갖 좋은 것들이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충만하게 있는 영원한 생명, 온전한 평안, 충만한 기쁨, 위로, 소망, 안식, 사랑, 은혜 모든 것이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온전한 사귐이 이루어지면 하나님과 나 사이만 회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자아와 나 사이에도 회복이 이루어집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도 회복이 이루어집니다. 나와 자연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나와 물질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그래서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 받고 천국 가는 것은 물론 이 땅에서의 모든 문제도 해결됨으로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화목하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존중하며 살게 됩니다. 그러면 내 심령과 가정과 교회와 이 땅에 현재적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여기서도 천국과 같은 은총을 누리다가 마침내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온 성도님들은 우리가 교회에 다녀야 할 목적, 신앙생활의 목적을 바르게 알고, 진정 영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인생의 복이 어디서 오는 지를 분명히 알고 세상의 다른 어떤 것들을 구하고 바라보기 전에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모셔 들이고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다른 무엇과 교제하기 전에 주님과의 온전한 사귐 속에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주님과 온전히 사귀는 삶을 위하여 더욱 말씀과 기도와 찬양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과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고, 이웃과 물질과 자연과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어 이 세상에서나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기쁨을 풍성히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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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말씀 : 고후5:13-17

제목 : 내가 새 것이 되어야 합니다.


1.내가 새것이 되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대부분 새 것을 좋아합니다. 새 집, 새 차, 새 옷, 새 신발, 새 전자제품 등등 새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물론 일단은 새것이 일반적으로 깨끗하고 아름답고 편리하고 성능이나 기능도 좋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늘 접하는 것들은 우리 감성을 무디게 만들어 식상해지고 그래서 뭔가 만족이나 설렘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뭔가 새로운 것들은 우리 오감을 자극하여 신선감과 설렘을 주기 때문에 뭔가 자꾸 새것을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실은 새로운 것을 찾는 이러한 것들은 겉으로 보이는 외견적인 이유이고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그건 물론 인간의 본성속에 자리 잡고 있는 뭔가 더 기쁘고 만족하고 행복하려는 욕망 때문입니다. 그런데 늘 곁에 있는 것들은 식상함을 느끼게 되어 그러한 더 기쁘고자하는 욕망을 채워주지 못하고 새로운 것들은 뭔가 신선감과 셀렘을 주기 때문에 자꾸 새것을 찾는 것입니다. 더 많은 것을 찾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야 좀 더 다양하고 새로운 경험들을 할 수 있으므로 좀더 만족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러다보니까 인간은 커다란 딜레마 또는 역설적인 현실에 직면하게 됩니다. 즉 행복하기 위하여 자꾸 더 새롭고 좋고 많은 것을 찾는데 오히려 그게 우리를 행복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행복하기 위하여 무언가 끊임없이 더 새롭고, 더 좋고, 더 아름답고, 더 많은 것을 찾다 보니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그렇게 죽어라고 더 좋은 것, 더 많은 것, 더 새로운 것, 더 아름다운 것을 찾으러 다니다가 그만 거기에 노예가 되어버려 정작 본래 우리가 찾아다니던 만족도 기쁨과 자유도 평안도 누리지 못하는 역설적인 현실을 초래하게 된 것입니다. 아니 그냥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거기에 노예가 되어 하나님과 진리와 선과 의를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악한 방법으로라도 그걸 얻으려고 하니까 행복은 고사하고 멸망 길로 치닫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좀더 새롭고 좋고 아름다운 것을 구하지 말아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분명히 우리가 영적으로만 아니라 정신적 물질적 육체적으로도 아름답고 멋있고 좋고 더 많은 것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신28장에서도 분명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하면 ‘네 몸의 소생과 가축의 새끼와 토지의 소산을 많게 하시며....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즉 많게 높게 해 주시겠다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열심히 하나님과 동행했던 아브라함과 다윗과 솔로몬도 부귀영화를 누리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도 영적으로만 아니라 육체적 물질적으로도 기왕이면 더 좋고 많은 것을 누려야 합니다. 그래서 나도 풍요롭고 남도 풍요롭게 하고 하나님의 나라도 더욱 힘있게 이루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왜 성경에서는 자꾸 부자가 되려고 하지 말라. 세상의 것을 사랑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까? 이런 말씀들은 하나님 말씀을 잘 들으면 부자가 되게 해주시겠다는 모순되는 말씀입니까? 물론 그럴 리가 없지요.


그럼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그것도 당연히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마6:33절을 보실까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말씀그대로 죽자 사자 세상의 것에 매달리지 말고 먼저 하나님을 찾고 말씀과 진리와 선과 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의 것도 바르게 찾게 되고 그러면 세상의 것으로도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말할 나위가 뭐 있습니까? 본래의 하나님의 형상을 찾아야 합니다. 아담의 범죄 이래로 죄인이 된 인생은 영성이 파괴되어 하나님을 완전히 떠나거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멀리하며 선과 진리와 의를 먼저 찾지 않고 죽어라고 세상 것만 좇아 살고 있는데 이제는 다시금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아와 먼저 하나님을 찾고 의와 진리와 선을 따르며 세상의 것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적 정신적 육체적 물질적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그렇게 새 사람이 되어 하나님 보시기에 옳고 바르고 좋은 사람이 되면 설령 세상의 것을 많이 주시지 않는다해도 상관없습니다. 돈이나 명예나 지식이나 심지어는 건강이 좋지 않아도 내가 새사람이 되어 하나님께서 주신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게 됩니다. 내가 새 사람이 되면 세상과 환경과 상황을 탓하지 않고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원망과 불평의 대상이었던 세상이 감사의 대상이 됩니다. 미움이 변하여 사랑이 되고, 원수가 변하여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집은 같은 집이라도 그 집이 새 집이 되고, 천국이 됩니다. 같은 직업이라할지라도 내가 새것이 되면 나의 직업이 그렇게 귀하고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내가 달라지면 가족도 맨 그 가족일지라도 더 사랑스러워지고 귀해지고 더 예뻐 보이는 것입니다. 이웃이 그대로 있어도 고맙고 감사한 존재가 됩니다.

 

그래서 엡4:23,24절에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러므로 여러분, 세상에서 새것을 찾기 전에 먼저 나 자신이 새것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무언가 새것을 찾고 더 많은 것을 찾으며, 더 많은 것을 요구하기 전에 내가 먼저 새것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심령이 아름답고 깨끗하고 진실하고 가치있고 사랑과 은혜가 넘침으로 자신도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가운데 살아가며 남에게도 생명의 기쁨을 가져다 주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진정 우리가 이렇게 새것이 되어 새생명의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건 말할것도 없이 내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하실 때에 가능한 일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우리가 정말 새로워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일단 먼저 죽어야 합니다. 죽지 않으면 결코 새것이 될 수 없습니다. 내 자아가 죽지 않으면 아무리 발버둥쳐도 옛자아가 그대로 남아 있으면 새로운 인생을 살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은 죽어야 하는데 그러나 죽기만해서도 안됩니다. 일단은 죽어야 하고 그 다음에는 새로운 것을 덧입어야 합니다. 안 그래요? 죽고 가만히 있으면 뭐 합니까? 설령 죄가운데 살지 않는다해도 생명이 없으니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고 그러면 새로운 존재로서의 삶은 요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우리가 온전히 새로운 인생을 살면 죄에 대하여 죽고 새생명을 얻어야 하는데 그것은 오로지 예수님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우리를 영적 육체적 물질적 정신적으로 온전히 죽게 하고 다시 살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인간의 지식이나 과학이나 문명이나 물질이나 이런 것들이 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인간에게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으로 조금 유익을 주고 희망을 주고 조금 더 좋은 방향으로 도움을 줄 수 있을지는 모르나 절대로 인간을 죄와 무지에 대하여 죽게 만들고 자유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 안에 있는 죄와 무지를 일깨울 수도 없고, 그래서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알게 할 수도 없고, 영원한 생명을 줄 수는 더더구나 없습니다. 죄된 본성을 이기게 할 수도 없고, 영원하고 완전한 생명의 길, 진리의 길로 인도해 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셔서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우리를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알려 주시고 그리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래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됨은 물론 이 땅에서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는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17절에서는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보십시오. 우리가 이제는 이전 것 즉 죄와 무지 속에서 세상의 헛된 것들을 따르던 삶은 지나가고 이제 새로운 인생,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는데 그건 어떻게 가능했느냐,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심령 속에 온전히 모셔드리면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되고 영원하고 온전한 새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러면 경험과 이성과 물질로 말미암아 감겨있던 눈이 온전히 떠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이고, 천국이 보입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영원히 그리고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됩니다. 그리하여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자신이 달라지고 내 이웃이 새롭게 보이고, 세상이 새롭게 아름답게 보입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과 은혜와 능력을 깨닫게 됩니다. 날 구원해주신 그 은혜에 감사와 영광과 찬양이 터져 나오게 됩니다. 참된 사랑과 인생의 목표와 인생의 가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와 기쁨으로 살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심령의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완전한 능력과 사랑과 은혜와 생명의 영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여 여러분의 심령 속에 주인으로 모셔들이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생명의 영, 사랑의 영, 은혜의 영, 감사의 영이신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우선은 여러분 자신이 기쁨과 은혜가운데 살아가며 동시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이웃을 기쁘게 하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예수님의 사랑으로 채워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새로운 존재로써 기쁨과 감사로 주님과 동행하려면 일단 예수님을 온전히 모셔들여야 하고, 모셔들였다면 당연히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으로 내 심령에 채워야 합니다. 오늘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즉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나 자신이 완전히 깨지고 새로운 존재가 되었을 때 그리스도의 그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알게 되었고 그러자 그 놀라운 그리스도의 사랑에 완전히 사로잡혀서 자신의 모든 가치관과 생각과 경험과 영광을 버리고 그 사랑의 포로로 살아갈 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먼저 예수님을 모셔들여야 하고 모셔들였으면 정말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알고 감사하며 그 사랑과 은혜로 우리 심령을 채워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분명히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과 세상과 이웃을 바르게 사랑하게 됩니다. 원망과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불평이 기쁨과 감사와 사랑 안에서 살게 됩니다. 근심 걱정 절망이 아니라 위로와 소망 가운데 살게 됩니다.

 

여러분, 안 그렇겠습니까? 주님이 얼마나 끔찍이 나를 사랑하셨기에 그 십자가의 죽음까지 마다하지 않으셨는지를 생각한다면 우리가 어찌 작은 어려움에 원망 불평하겠습니까? 주님의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시켜주시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신 그 은혜를 기억한다면 어찌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나의 죄를 위하여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신 그분의 은총을 기억한다면 어찌 이웃의 죄를 용서하지 못하겠습니까? 주님이 나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모든 인생을 나와 똑같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가 어찌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그러한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하고 복되고 생명의 은혜가 넘쳐나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주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주시려고 그 멸시천대 고통 다 당하시고 결국 자신을 송두리째 드릴만큼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우리의 심령 품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그 놀라운 사랑으로 자신과 가족과 이웃을 올바르고 아름답게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래서 주님도 기쁘시게 해드리고 이웃에게도 기쁨을 주며 하나님의 나라를 마음껏 누리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예수님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새 사람으로 새 인생을 살기 위하여서는 또 기억해야 할 것은 이제는 자신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결국은 나를 행복하게하고 이웃을 행복하게 하고 주님을 행복하게 하는 복된 삶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15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한마디로 예수님을 알지 못할 때는 죄와 무지 속에서 살던 때는 인생이 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도무지 알지 못해서 그저 자신만을 위해서, 그저 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만을 위해서 살아왔는데 이제 예수님을 만나 죄와 무지에서 해방되고 인생의 의미와 가치와 참된 생명의 은총을 알게 되었은즉 다시는 자신의 육체의 정욕만을 위해 살아가는 그런 이기적이고 볼품없는 인생이 되지 말고 주님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은 물론 일단은 말씀그대로 우리를 구원하여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하려 하심이요, 더 나아가서는 이러한 생명의 역사에 참여함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도 생명의 은총을 가져다주는 복되고 아름답고 멋있고 상급 받는 인생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나만 구원받고 천국 가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할 것도 없이 그게 정말 아름답고 멋있고 귀하고 복되고 다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인간은 결코 그저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자신의 욕망만을 위하여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쌓고 소유하고 사용하며 살아가는 존재로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서로 함께하면서 사랑과 선과 진리와 의와 물질과 시간을 함께 하면 나누는 가운데 거기서 복을 누리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무언가 진리와 가치 있는 어떤 것과 올바른 그 무엇을 사랑하고 그것을 위하여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을 투자함으로 무언가 가치를 창출해내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타인을 행복하게 하면서 거기서 삶의 가치와 행복을 누려야 할 존재입니다. 물론 그럴 때 우리 모두가 함께 행복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고 세상에는 생명의 은총이 충만해집니다. 그렇게 우리가 함께 행복하고 기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실 때에 하나님께서도 너무나 행복해하십니다. 그게 바로 인류를 창조하신 목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혼자 잘 먹고 잘살고 그저 육신의 욕구충족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인생은 가치가 있는 인생이 될 수 없습니다. 아름답고 훌륭하고 멋있고 생명의 풍성한 은혜가 넘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도리어 갈등과 시기와 질투와 거짓이 난무하게 됩니다. 그러면 결국 나도 행복하지 못하고 너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심령 속에 온전히 모셔 들이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모셔 들임으로 온전히 새로운 존재가 되어 새로운 삶의 양식, 새로운 삶의 가치, 새로운 삶의 방향, 새로운 삶의 방법을 가지고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정말 감사와 사랑과 은혜 가운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진정 올바르게 자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사회를 사랑하며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정말 진리와 생명과 복음의 역사에 기쁨으로 참여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 자신이 먼저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면서 여러분의 가족과 이웃과 이 사회 속에 행복을 가져다주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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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제 목 : 순진한 믿음

말 씀 : 고전2:1-5


1.순진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언젠가 어떤 유명한 배우가 ‘나는 개그맨들을 정말 존경한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유가 뭐냐고 했더니 자기들은 남이 다 써 준 각본대로 연기만 하면 되는데 개그맨들은 때로는 밤을 새워가며 머리를 쥐어짜서 뭔가 끊임없이 새로운 아이템을 만들고 그 아이템을 가지고 어찌하든지 사람들을 웃게 만들기 위하여 끊임없이 생각하고 연구하고 연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매 회마다 색다른 소재를 발견한다는 게 너무너무 어려울 것 같다고 하며 자기는 그렇게 못할 것 같다고 하며 그래서 개그맨들을 존경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솔직히 그 말을 듣고 보니까 개그맨들이 다시 보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사실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게 뭐냐하면 시키는대로 하는 것은 쉽고, 스스로 생각하고 연구하여 물질적인 것이나 지식적인 것이나 정신적인 것이든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이미 전부터 있었던 것, 남이 다하는 것, 이미 다른 사람들이 다 연구해놓아 지금까지 해 왔던 것들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냥 그대로 따라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이 하지 않았던 것, 아직 표준화 되지 않고 매뉴얼이 없고 스스로 뭔가 개발하며 표준화시키고 매뉴얼을 만들고 하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이지요. 하다 못해 간단한 장난감을 하나 만드는 것도 뭔가 완전히 새로운 것을 혼자 연구해서 만들려면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비로소 완성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중요한 것은 인생은 더욱더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우리가 알지도 못하고 경험하지도 못한 길이기 때문에 혼자 생각하고 연구하고 경험하여 개척하며 가려면 너무나 어렵고 너무나 많은 오류와 착오를 겪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너무나 고차원적이고 변화무쌍하고 복잡한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 스스로는 인생의 문제를 온전하게 풀어낼 방정식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분들은 목사님, 왜 불가능합니까? 왜 혼자 연구하고 혼자 생각하는 길입니까? 우리 선인들이 오랜 세월의 경험을 통해서 생각하고 연구해서 만들어 놓은 매뉴얼이 있지 않느냐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아닙니다. 우리 선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그들이 알 수도, 경험할 수도 없는 길을 나름대로 연구해 만든 매뉴얼이기 때문에 물론 그 중에 옳은 것도 많지만 그러나 왜곡되고 잘못된 것도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인생의 완전한 매뉴얼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생의 완전한 매뉴얼은 무엇입니까? 말할 것도 없이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대하여 말씀하신 성경 말씀뿐입니다. 오직 거기에 우리 인생이 무엇인지, 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궁극적인 목적지가 어디인지 완벽하게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매뉴얼인 성경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길만이 유일하게 완전히 안전한 길이고 가장 쉬운 길이고 완전하게 옳은 길이고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길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은 인간 자체가 죄와 무지와 한계 속에 있기 때문에 결코 완전한 매뉴얼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한번도 가보지도 않은 길이고 알지도 못하는 길인데 자꾸 혼자 이리저리 연구하며 자기 나름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고 너무나 큰 시행착오와 낭패를 경험하고 그러다가 결국은 영원한 고통 속으로 갈 수 밖에 없는 그런 딱한 처지에 이르고 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안타깝고 어리석은 일입니까? 아니 도대체 죄와 무지와 한계 속에 있는 인생이 어떻게 인생의 완벽한 매뉴얼을 만들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건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매뉴얼을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걸 마다하고 자꾸 알지도 보지도 경험하지도 못한 일에 대하여 자기 마음대로 하다가 실패를 경험하고 고통을 맛보고 생명의 기쁨은커녕 멸망 길로 가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아니 이미 하나님께서 다 가르쳐 주신 쉬운 길을 놔두고 어려운 길로 가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에이, 목사님. 하나님이 정해주신 매뉴얼대로 사는 게 어떻게 쉽습니까?’하실지 모르지만 그러면 그게 쉽지 않으면 무엇이 쉽습니까? 알지도 못하는 길을 혼자 개척하며 연구하며 가는 게 쉽습니까? 혼자서 온갖 유혹과 어둠의 세력과 상황과 환경과 세상의 거센 풍파와 맞서 싸우며 사는 게 쉽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이미 정해 놓으신 길을,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의 능력과 지혜로 모든 어둠의 세력들과 약한 것과 도전과 유혹과 시험을 이기며 가는 길이 쉽습니까? 전혀 모르는 길을 혼자 찾아가는 게 쉽습니까? 안내자를 따라 가는 게 쉽습니까?

 


여러분, 신30:11절과 14절 말씀 보십시오. 11절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14절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보세요. 이 말씀은 어려운 것도 아니고 먼 것도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 저 미국이나 러시아라도 가야 있는 게 아니라 지금 바로 우리 눈앞에 있지 않습니까? 말씀을 따라가는데 억만금이 드는 것도 아니고, 피땀 흘리며 뼈 빠지게 일해야 되는 것도 아니고, 머리 싸매고 골머리를 앓으며 연구해야 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 농사짓는 게 쉽습니까? 하나님 믿는 게 쉽습니까? 세가 빠지게 일하는 게 쉽습니까?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게 쉽습니까? 아니 얼마나 쉽고 평안하고 좋습니까? 그냥 교회에 와서 평안히 앉아서 말씀 듣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얼마나 쉽습니까? 하나님이 그렇다 그러면 네, 하나님 알겠습니다. 그러고 그냥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분명 하나님께서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과 지혜와 평안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놀라운 은총가운데 살게 하십니다. 세상에 이 쉽고 이 좋은 것을 왜 안하는지 도대체 이해가 안 갑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자신이 알지도 가보지도 못한 길을 자꾸 혼자서 자기 마음대로 어렵게 가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신 길, 예수님이 우리의 인도자가 되셔서 이끌고 가시는 그 길을 그냥 예수님만 졸졸 따라 가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완전한 매뉴얼인 성경을 따라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 가운데 생명의 길, 복의 길로 잘 달려가 생명의 은혜가 넘쳐나는 삶이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자기 지혜를 의지하면 실패합니다.

 


오늘본문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보게 되는데요, 오늘 말씀에 보면 예수님을 만난 후에 정말 자신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갔던 사람 바울이 한 때 실패를 경험한 사실에 대하여 말씀하며 그 실패를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또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보지는 않았지만 3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여러분, 보세요. 바울이 약하고 두려워하고 떨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심히 떨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이 누굽니까? 그는 빌립보에서 죽지 않을 만큼 맞고 쇠사슬에 묶여 감옥에 갇혀서도 찬송하고 기도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귀신을 쫓아내고, 그의 몸에서 앞치마나 손수건을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기도 하였습니다. 심지어 유두고라는 청년이 창문에서 떨어져 죽자 기도하여 살게 한 사람입니다.

 


이런 천하의 바울이 약하고 두려하고 심히 떨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아덴에서의 실패의 경험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오기 전에 아덴에서 자신의 지식과 지혜로 사람들을 설복시키려다가 실패했던 것입니다. 아테네는 헬라제국의 수도로서 당시 철학, 문화, 학문, 종교, 정치, 경제의 중심지였으나 심지어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제단도 있을 만큼 우상이 득실거리는 곳이었습니다.

 


이것을 본 바울은 의분이 일어나 너희가 ‘알지 못하는 신’이라고 생각하는 그가 누구인지 알려 주겠다면서 그게 바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이라고 역설하며 철학적 지식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설복시키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덴 사람들은 그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말쟁이인가보다 하며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관심도 갖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크게 낙담하여 그곳을 포기하고 고린도로 왔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실패하고 낙심하고 좌절했던 원인은 무엇입니까? 그건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이성과 지혜를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늘 2절에 보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즉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바울은 아테네에서 자기 이성과 지혜를 의지했다가 철저히 실패하고 그곳을 떠나 고린도로 오면서 다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절대로 내 꼴 난 지혜를 의지하지 않으리라.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만을 증거하리라. 그리고 고린도에서는 오직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힌 것과 부활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무식쟁이처럼 오직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결국 고린도에서 성공적으로 교회를 세우고 죽어가는 많은 영혼들을 구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참된 지식이나 능력은 결코 인간의 지식과 지혜와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자신의 그 죄와 무지와 한계 속에 있는 이성과 지식과 경험을 내려놓고 오직 예수님 앞에 엎드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그 도를 따라 살아갈 때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진정한 지혜와 능력 가운데 생명의 길로 달려가며 인간의 모든 문제를 이기고 생명의 기쁨을 누리는 진정한 능력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설령 세상이 아무리 외적으로 좋아진다해도 인생의 문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래요? 여러분, 보세요. 오늘날 세상은 불과 100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발전했습니다. 과학이나 문화나 교육이나 소득 수준이나 모두 백배 천배는 올라갔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얼마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까? 물론 가난과 질병의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해결된 문제보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백배 천배 많습니다. 못먹고 못살던 옛날이나 잘먹고 잘사는 지금이나 병들고 늙고 죽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죄악은 오히려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고 싸우고 빼앗고 사기치고 강도짓하고 간음하고 살인하고 성폭력을 저지르로 하는 일들은 더욱 많아져 가고 있습니다. 이만큼 잘 살게 되었으면 좀 감사하며 살만도 한데 힘들어 못살겠다고 아우성을 치고 극심한 이기주의와 물질주의로 말미암아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툭하면 싸우려고 대들고 폭언과 독설을 퍼붓고 투쟁을 하곤 합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아무리 과학과 문화와 지식이 발달하여 혹 물질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좀더 풍요로워진다해도 그런 걸 가지고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니 도리어 그런 것들 때문에 하나님을 멀리하고 더욱 죄의 길로 달려감으로 말미암아 더욱 멸망의 길로 치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세상의 지식과 지혜와 과학과 물질문명에 내 인생을 맡기면 안 됩니다. 세상의 지식과 과학과 물질문명이 좀 발전했다고 그것 의지하고 바라보고 그런 관점에서 살아간다면 세상에서도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결국 영원한 멸망길로 갈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만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게 참된 능력이요 지혜요, 그런 사람들이 여기서도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된 인생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 5절에서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믿음은 인간의 지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꼴난 인간의 이성과 지혜와 경험으로 요리조리 백날 생각해봐야 참 생명의 도는 알 수 없다. 그저 우리의 약함과 무지와 부족함과 허물과 죄를 인정하고, 그저 순진한 아이처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한다. 그러면 주의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그러면 영광의 나라를 알게 되고 그럴 때 생명의 능력이 넘쳐나는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별 것 아닌 지식과 이성과 경험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그런 거 내려놓으십시오. 죄와 무지와 한계 속에 있는 인생이 백날 연구하고 따져보고 해봤자 그야말로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맨날 거기가 거깁니다. 알 수 없습니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알고 이해하면 그게 이상한 것입니다. 그건 우리가 하나님같이 되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죄와 무지와 한계를 인정하고 그냥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는 것뿐입니다. 오직 예수님이 그리스도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다. 예수님 안에 영광의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그냥 어린애처럼 받아들이고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확실히 믿게 하십니다. 그러면 생명의 능력과 은혜가 넘쳐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삶이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순종할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복음을 순진하게 받아들이고 따라가면 복음에는 생명이 있고 능력이 있기 때문에 분명히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오늘 4절을 보십시오. “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인간의 이성이나 능력이나 지혜나 이런 다 집어 치우고 그냥 단순무식하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때 성령에 성령께서 역사하셨고, 성령이 역사하시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분명한 것은 주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 앞에 순진한 사람이 될 때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분명 은혜의 사람, 능력의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지혜와 능력과 지식을 신뢰하고 그걸 따라가는 사람은 너 잘났으니 네 맘대로 해봐라 하면서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않으면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길은 요원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진정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며 살았던 사람들은 모두 순진한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험한 풍랑 일어나는 바다위로 걸어오라고 하자 풍덩 물속으로 뛰어 들어가 물위를 걸어서 주님을 향하여 걸어갔습니다. 주님의 말씀이니까, 주님이 지켜 주실 것을 믿고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물위로 뛰어내렸고 그리고 실제로 물위를 걸어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 가다가 험한 풍랑 일어나는 바다를 보자 그만 주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그러나 인간적으로 두려운 마음이 들기 시작하였고 그러자 능력을 잃어버리고 물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로마의 백부장은 어땠습니까? 하인이 병이 들자 예수님을 찾아가자 예수님이 가서 고쳐주겠다고 하자 그저 말씀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나이다하고 말합니다. 주님이 수고스럽게 저희 집까지 가실 일이 뭐있습니까? 그냥 말씀 한마디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내 하인이 나을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이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하시자 그 즉시 하인의 병이 낫지 않았습니까?

 


열두 해를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만대어도 낫겠다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만졌을 때 병이 나았습니다. 나면서부터 소경이었던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침으로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른 다음에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는 지시를 받고 그대로 하자 눈이 떠졌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니까 순진하게 드리자 하나님께서 이삭도 살려주시고 복을 주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지켜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믿고 순진하게 골리앗을 향해 돌진하여 결국 승리하였습니다. 나아만장군은 하나님의 사람의 말을 듣고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까 문둥병이 떠났습니다.

 

여러분, 믿음에는 어린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아니 우리가 정말 우리 자신을 안다면 모든 면에서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합니다. 안다고 하는 순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됩니다. 본다고 하는 순간 아무것도 못 보는 진짜 소경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9:41)고 하십니다. 그들은 성경과 천국과 하나님에 대하여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아무것도 못 보는 소경이 되었던 것입니다. 차라리 부족하고 연약하고 미련함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렸더라면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참된 생명과 진리를 알게 되련마는 그 꼴난 자신의 지식과 경험과 이성으로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하여 결국은 영원한 멸망의 길로 갈 수 밖에 없는 소경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순진하게 주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내 지혜나 이성이나 감정이나 경험을 일단 다 내려놓고 주님 앞에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뭐가 어떠니 저떠니 이야기하지 말고 그저 겸손하게 엎드려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 다시 오실 예수님을 믿고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향해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겸손하고 순진한 마음으로 예배드리고 설교 듣고 찬양하고 기도하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성령의 능력이 여러분과 함께 하심으로 세상의 모든 것들을 이기고 더욱 은혜와 능력과 기쁨이 충만한 복된 삶이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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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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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예배설교


제목 : 새 사람을 입었으니...
말씀 : 골3:9,10


1.삶의 전 영역에서 거룩해야 합니다.
옛날에 어떤 교회에 부흥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교회를 다니지 않고 있는 한 여집사님 때는 이때라 생각하고 남편을 붙들고 통사정을 하여 부흥회에 데리고 가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가니까 사람들이 벌써 제법 많이 모여 있고, 강단 앞에 큰북을 갖다놓고 크게 두드리면서 뜨겁게 찬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찬양하고 나서 드디어 강사 목사님이 강단에 오르시더니 때로는 재미있게 때로는 폭풍처럼 몰아치며 예수님을 영접할 것을 외쳤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열변을 토하더니 설교가 마칠 때쯤 되어 강사목사님이 지금부터 예수님 믿기로 작정한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앞으로 나오는 사람은 안수 기도를 해 줄 터인데 안수기도를 받으면 성령을 받아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남편을 데리고 온 여집사님이 남편을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서 빨리 앞으로 나가라고 재촉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끝내 나가지 않았고 결국 그렇게 부흥회가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여집사님은 너무나 아쉽고 야속한 마음이 들어서 남편에게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 ‘아니, 그렇게 애원을 하는데 좀 나가지, 그렇게 끝까지 안 나갈게 뭐예요?’ 그러자 남편이 말했습니다. ‘내가 왜 안 나갔는지 알아?’ ‘왜 그랬는데요?’ “아까 목사님이 예수 믿기로 작정하고 앞으로 나와 안수기도를 받으면 새로운 삶이 있을 거라고 그랬지?” “네, 그럼요. 예수님이 믿으면 분명히 새로운 삶이 시작되지요.” “그런데 말야, 당신을 보면 새로운 삶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안 들어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다운 삶의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 품으로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물론 핑계없는 무덤은 없다고 자기가 나오기 싫으니까 남 핑계 대는 것도 있지만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다운 삶의 모습을 살지 못하면 그들이 교회를 비난하고 욕하고 그래서 교회에 가고 싶지 않다는 핑계거리를 제공해 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사람답게 거룩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왕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왕같은 제사장다운 삶의 모습을 가져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고, 주님의 향기가 되고, 빛과 소금이 되어 이 땅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고, 나 또한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5:16절에서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장로교의 창시자 존 칼빈 선생은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첫째 의무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행동으로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디는 “만일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교적 삶을 충만하게 산다면 인도에는 힌두교도는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숙제는 거룩입니다. 어떻게 거룩한 삶을 살 것이냐, 어떻게 거룩한 교회가 될 것이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로 여기에 복음의 역사가 이루어지느냐 그렇지 못하느냐가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끊임없이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신서에서는 앞부분에서는 믿음의 도에 말씀하신 다음에 뒷부분에서는 믿음 안에 있는 사람으로서 어떤 삶을 살아가야하는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거룩한 백성으로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데 거룩한 삶은 결코 영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전 인격에 관련된 것으로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모든 영역에서 거룩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거룩하다는 것은 유일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나의 하나님이시오, 나의 구세주로 온전히 섬기며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육체적 거룩한 삶이란 우리 몸과 시간과 물질을 주님의 뜻대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과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생명을 살리고, 기쁨과 유익과 은혜와 사랑과 평강과 소망을 주는 일에 사용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정신적, 윤리적, 도덕적으로 거룩하다는 것은 주님의 가치관을 가지고 사랑과 감사와 기쁨의 마음을 가지고 성실하게 진실하게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미움이나 원망이나 근심이나 염려나 불평이나 좌절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감사와 기쁨으로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영적 육체적 정신적으로 거룩한 삶을 살아갈 때에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주님의 향기가 되고 이 땅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우리도 생명의 기쁨 가운데 주님과 동행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 모든 삶속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감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이 주시는 은혜의 풍성함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가 거룩한 사람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는데 이 말씀을 묵상할 때에 좀더 거룩한 삶을 향하여 나아감으로 주의 은혜가 더욱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2.거짓을 버리고 정직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도 정직해야 합니다. 요즘 보면 우리 믿음의 사람들조차도 거짓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웬만한 거짓말은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지나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짓은 하나님이 심히 미워하시는 것으로 큰 죄악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십계명 중 제9계명에서는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출20:16)고 하셨고, 시5:6절에서는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와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거짓말을 싫어하시고 미워하시겠습니까? 거짓은 사탄에게서 나온 것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속이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수많은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요8:44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사탄을 거짓의 아비라 하였습니다. 사탄이 거짓말을 만들어낸 자로서 거짓의 시발점이라는 것입니다. 사탄이 에덴동산에서 교묘한 거짓말로 아담과 하와를 속여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이간질하고 갈라놓고 그래서 범죄하게 만들고 그래서 결국 죽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모든 거짓은 여기서 나온 것으로 그래서 결국 거짓말은 사탄에게 속한 것으로 하나님을 속이고,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임으로 결국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인간관계에 불신과 갈등을 유발시킵니다. 남에게 손해를 끼치고 불의의 이득을 취하는 악을 행하게 만듭니다. 결국 거짓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 인간과 인간 사이를 파괴시키는 역할을 하는 악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거짓말을 그토록 미워하시고 그래서 오늘 9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거짓말은 마귀에 속한 것으로 옛사람 즉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으로 그래서 결국 하나님과 사람을 속이고 상처와 아픔과 고통과 갈등을 가져다주는 것이므로 예수 안에서 거듭난 너희들은 그런 것들 벗어던지고 하나님의 사람답게 거룩하게 진실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 진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거짓을 미워하고, 합리화 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설령 손해를 볼망정 진리 편을 택해야 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적당히 임기응변하며 처세술에 능하게 이권을 챙긴다해도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저 우직하게 정직하게 성실하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일터에서나 사회생활에서나 정직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정직하게 행하지 않고 거짓을 행한대 해도 우리는 정직해야 합니다. 뭐 융통성이 있느니 없느니 그런 소리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저 곧이곧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정직하게 진실하게 성실하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또 다른 표징인 것입니다. 그냥 열심히 예배드리고 성경읽고 기도하고 찬양하기만 하면 신앙생활 올바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고 그 받은 바 은혜를 따라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 안에 있는 은혜의 풍성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정말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자존감을 가지고 진리를 택하고 선을 택하고 성실을 택함으로 결국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고 빛을 비추며 주님의 은총 충만하게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새로운 지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새 지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새 지식이란 물론 우리가 과거에 가지고 있던 국어 영어 수학 과학 등에서 학문적인 지식이나 아니면 문화나 각종 기술등의 실제적인 지식이나 이런 세상적인 지식과 대비되는 하나님이 주시는 지식입니다.

물론 세상의 지식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지만 새로운 지식이란 그런 세상의 지식 외에 하나님과 직접 관련된 하나님께 대한 지식, 말씀에 대한 지식, 구원에 관한 지식, 인간의 생명에 관한 지식,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대한 지식, 그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속한 사람으로서 이 땅에 어떠한 삶을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지식 등 인간의 근본과 생명과 궁극에 관한 지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지식보다도 이 지식을 알아야 하고, 이 지식을 따라 살아갈 때 만이 진정하고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1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보십시오. 우리는 새사람을 입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로워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과거에는 죄와 무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으로 가져야 할 지식을 다 까먹고 캄캄한데서 살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저 여기가 세상의 전부인양 여기며 그래서 그저 먹고 마시고 소유하고 즐기고 내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인 양 여기며 살았습니다. 뭐 조금 고상한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남에게 피해 안 입히고 어렵고 힘들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기도 하고 심지어는 이웃과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는 사람도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기껏해야 그게 한계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죽자사자 돈 따라 명예 따라 세상 영광과 세상 즐거움을 따라 살아가고 조금 고상해봤자 다른 사람을 조금 수고하고 애쓰며 기여하는 삶을 살아갈 뿐 진정으로 섬겨야 할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인간의 뿌리를 알지 못하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누려야 할 그 영원한 영광스러운 생명의 기쁨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목적을 깨닫지 못하고 종착역도 알지 못한 채 그저 세상의 것을 위하여 살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면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면 비로소 인생을 알게 됩니다. 인생의 근본과 목적을 알게 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능력을 알게 되고 인생의 영원한 미래에 대하여 알게 되고, 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왜 공부하고 일하고 가정을 이루고 돈을 벌고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비로소 알게 됩니다.

그래서 창조주이신 하나님, 모든 것의 소유권자이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선이요, 그 선이야말로 지고지선이고 거기만이 진정하고도 영원한 행복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 길만이 생명의 길이고 너와 내가 함께 기뻐하며 그야말로 영원히 영광스러운 은총을 누리며 사는 길임을 알게 됩니다. 모든 생명도 시간도 물질도 재능도 그 어떤 것이라도 내 것이 아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서야할 존재, 심판이 있을 것, 재림이 있을 것, 부활이 있을 것임을 알고 그 날을 준비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안에 있는 신지식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지식만이 인간에게 참된 생명과 기쁨과 영광과 자유와 평화를 가져다두는 참지식이고 완전한 지식이고 영원한 지식입니다.

그래서 벧후3:18절 전반절에서는 말씀합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왜요? 그래야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런 말씀들을 기억하며 우리는 진정 하나님의 형상으로 거듭난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거룩하고 진실하고 성실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적으로 물론 좋은 지식을 가지고 자신도 남도 풍요롭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대한 지식,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대한 지식, 인생의 근본과 목적과 영광에 관한 지식을 바르게 앎으로 위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고, 아래로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거룩하게 진실하게 성실하게 열심히 살아갈 때에 정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의 기쁨을 주면서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더욱 풍성하게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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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철야예배설교


제목 : 성령을 따라 행합시다
말씀 : 행11:11~18


1.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미국 경영학의 대가라는 드러커(Peter Drucker)라는 분은 “회사 경영이 실패하는 원인의 60%는 회사원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이 잘 안 되는데 있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부부 상담자인 퀘베인씨는 이혼하는 원인의 50%는 부부 사이의 교통이 원활하지 않은데 있다고 하였습니다. 범죄 심리학자들은 범죄자의 90%가 다른 사람과의 대화나 교제 등 사람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였다고 말했습니다.
즉 교제가 인간관계에 굉장히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뭔가 의사소통이 잘 안될 때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의사소통이 잘 안되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죽음의 길로 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자기 생각과 의지와 지식 속에서 하나님과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예배와 말씀과 기도와 찬양을 통해 늘 하나님과 가까이 교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의사소통이 잘 안되니까 하나님 뜻과는 다른 엉뚱한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여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약4:8절에서는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하나님을 가까이 즉 늘 가까이서 모시고 섬기며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밀접한 관계속에서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까이 해 줄 것이고 그러면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 안에 있는 은혜의 풍성함을 마음껏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생명과 기쁨과 은혜와 풍성함을 주시는 하나님을 가까이함으로 더욱 은혜의 풍성한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우리는 그런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하여 고넬료 가정을 구원시키고 돌아온 베드로에게 하나님과의 교통이 올바르게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들이 도리어 베드로를 비난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그가 어떻게 성령과 교통했는지를 차근차근 해명하여 그들을 설득시켰고, 결국 그들도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어 베드로의 행위를 인정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무엇이 문제인지 어떻게 이런 문제를 해결해야 할지를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2.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비난하는 사람들(1-3절)
오늘 본문 다 읽어드리지 못했지만 오늘 말씀 전에 보면 베드로가 어떻게 이방인 고넬료를 구원시켰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10장에 있었던 일인데 여기서 중복해서 다시 나타나고 있습니다. 왜 그랬느냐하면 그렇게 고넬료의 가정을 구원하는 과정에서 베드로가 무할례자의 집 즉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서 함께 음식을 먹었다며 베드로를 비난했기 때문입니다. 행11:2,3절을 봅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세상에 이런 무지하고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이 일이 비난 받을 일입니까? 아니면 예루살렘교회가 잔치를 벌이며 베드로에게 상을 줄 일입니까? 구원의 역사가 그것도 이방인 그것도 로마의 백부장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일이고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누가 구원받았어도 마찬가지겠지만 특별히 로마군대의 백부장이 온 가족과 하인과 친구까지 불러 말씀을 듣고 성령을 받아 구원을 받게 되었으니 얼마나 더 기쁘고 감사하고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릴 일입니까?
그런데 예루살렘에 있던 할례자들은 고넬료 가정이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도리어 왜 그 집에 들어가서 이방인과 함께 먹었느냐고 베드로를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나 예수님을 배척하는 유대종교지도자들도 아닙니다. 이들도 엄연히 유대교에서 개종하여 예수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 2절의 할례자라는 말은 할례당으로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기독교에 입교한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기독교로 개종하긴 하였지만 여전히 모세 율법에 충실하여 할례의식을 비롯하여 기타 정결례 등을 잘 준수하고 있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이들은 예수 믿는 것은 예수 믿는 것이고 유대인이니까 모세의 율법대로 할례는 할례대로 받고, 정결법은 정결법대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율법에 이방인과 교제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왜 이방인인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서 함께 먹고 마셨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베드로를 비난하는 자들의 오류는 무엇입니까?
1)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아직도 과거의 잔재를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과거에 그들이 지켜왔던 관습이나 문화나 가치관을 버리지 못하고 그대로 가지고 있어서 그러한 과거의 잔재들 때문에 도리어 복음의 역사를 막고, 자기 자신도 복음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고 있지 못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베드로를 비난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못 들었을 리가 없습니다.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하고 하나님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까지도 구원하시기 원하신다는 말씀도 들었을 것입니다. 성령 받으면 땅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해야 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방인인 고넬료 집안이 구원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고 영광을 돌리기는커녕 이방인의 집에서 함께 먹었다는 이유로 도리어 베드로를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보다는 아직도 과거의 잔재들이 그들의 삶에 있어서 우선순위가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관습, 문화, 가치관, 경험들이 판단의 기준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과거의 율법주의에 어긋나는 행동에 대하여 비난을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오류에 빠지면 안됩니다. 내 생각이나 관습이나 경험들이 판단의 근거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일에 내 모든 편견과 고집과 이성을 버리고 하나님의 역사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2)베드로를 비난하는 자들의 두 번째는 문제는 그들이 아주 사소한 문제로 시비를 걸고 있다는 점입니다. 지금 이 사람들이 문제 삼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즉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도외시하고 아주 사소한 문제 집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넬료의 가정에 복음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기뻐하고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베드로 일행을 대대적으로 환영하고 칭찬하고 격려를 해야 될 일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복음의 역사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이 그저 자신들의 생각과 좀 다른 행동을 하였다고 하여 그것을 가지고 비난하며 시비를 걸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 할 것은 보다 본질적인 문제에 집중하고,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서로 갈등하고 비난하면서 정열을 낭비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된 편견을 잣대로 해서 비난하는 것은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삼가야 하지만 혹시 자신이 옳고 다른 사람이 좀 약간의 실수나 방법상의 잘못이 있더라도 그것이 큰 문제가 아니라면 그것을 가지고 비난하고 시시비비를 가리면서 문제를 삼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위하여 결코 도움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다 대의적인 차원에서 그리고 보다 본질적인 차원에서 모든 문제를 풀어나가야 합니다. 교회에 있어서 대의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는 말할 것도 없이 복음입니다. 생명의 역사입니다.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본질적인 문제를 위해서는 양보해야 합니다. 때로는 덮어 두어야 합니다. 혹시 내 생각, 내 가치가 옳다고 하더라도 나 한 사람 죽음으로 교회에 덕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에 도움이 되고, 복음의 역사에 도움이 된다면 나의 뜻을 접고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함으로 복음의 역사를 이루어 자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베드로의 변론(4-17절)
할례자들이 비난거리가 아닌 것을 비난했지만 베드로는 이에 대하여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아주 냉정하고 지혜롭게 풀어나갑니다. 자신이 어떻게 성령의 역사하심을 받게 되었고, 어떻게 고넬료의 집에 가게 되었는지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하여 차근차근 설명하여 자칫하면 내부적인 갈등이 일어날뻔 한 사건에 대하여 지혜롭게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이야기는 보면 이렇습니다. 내가 욥바에서 기도하는 중 환상을 보았는데, 하늘에서 큰 보자가에 네발 달린 짐승과 들짐승과 기어다니는 것들과 공중의 새들이 보이더니 나에게 잡아먹으라고 해서 난는 속된 것이나 부정한 것을 한번도 먹은 일이 없다며 그럴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내가 깨끗하게 한 것을 네가 왜 속되다고 하느냐면서 먹으라고 하셨고, 그렇지만 나는 또다시 그럴 수 없다고 하였지만 세 번씩이나 이런 말씀을 하셨다. 그 후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하고 있을 때에 고넬료가 보낸 사람이 와서 고넬료가 천사의 지시를 받고 자신들을 보내어 왔다고 말했고, 이 때 성령께서 의심하지 말고 따라 가라고 해서 결국 그들을 따라갔고 결국 고넬료의 가정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 성령이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여 그들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내게 하라고 하신 일인데 내가 어떻게 이것을 거역할 수가 있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변론에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무엇입니까?
1)먼저 베드로는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대하여 화를 내거나 감정적으로 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할례자들이 비난하는 것은 아무 근거도 없고, 잘못된 것이었다. 그래서 실컷 귀한 일을 하고 나서 비난을 받았으니 사실 기분이 상할만한 일이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기껏 복음을 전하여 큰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는데 기뻐하고 영광돌리며 잘했다고 칭찬하고 상은 못 줄 망정 도리어 사소하고 엉뚱한 것을 빌미로 비난하고 하고 있으니 속이 상할만도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자칫하면 서로 감정의 대립이 생길 수도 있고, 갈등이 생길 수도 있는 상황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베드로는 그들의 잘못된 비난에 대하여 화를 내거나 같이 비난하거나 감정적으로 대하지 않음으로 문제가 잘 풀려나갔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여기서 한가지 더 생각할 것은 베드로가 부정한 짐승들이 담겨 있는 바구니가 내려와 먹으라고 할 때에 절대로 먹을 수 없다고 한 것은 자기도 환상을 보고 고넬료의 가정에 가서 복음을 전하여 성령의 역사하심을 보기전까지는 그들과 똑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도 이방인과 식사하면 안 되는 줄로 알았고, 이방인들은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된 사람들처럼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하심에 이끌려 그곳에 가서 성령의 임재하심을 맛보고 나도 내가 얼마나 어둠속에 있었는지, 진정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당시의 상황을 소상히 이야기하며 나도 그 전까지는 당신들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당신들이 비난하고 있는 그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아직 성령의 능력을 충분히 덧입지 못해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데서 온 잘못된 생각이다. 하면서 문제를 차분하게 또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이해시키면서 원만하게 해결해 나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무언가 서로 간에 약간의 오해가 있거나 좀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이 있더라고 좀더 의연하게 그리고 좀더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입장에서 차근차근 문제를 풀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같이 감정적으로 대하거나 무시하거나 분노하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을 수용해 주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서로 의논하면서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결국 이해하고 하나님의 뜻안에서 원만하게 문제를 해결해 나감으로써 교회를 잘 세워 가야 할 것입니다.
2)어떤 일이 있어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17절을 보겠습니다.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이게 무슨 말입니까? 나도 처음에는 당신들처럼 생각해서 내키지 않는 발걸음이었지만, 나도 사실 이방인을 더럽고 추한 사람들이라고 여겨 상종하기를 꺼려했는데 그러나 하나님께서 저들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저들도 사랑하시는데 내가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도 깊이 명심해야 합니다. 혹시 내가 생각하는 것과 좀 다른 점이 있다고 할지라도 정말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지, 과연 하나님의 뜻은 어디 있는지 먼저 그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특별히 교회에서 하는 일들에 대하여 방법이나 과정이 나의 생각과 약간 다를 수도 있습니다. 우선순위가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무엇을 먼저 생각합니까? 물론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복음의 역사입니다. 과연 어떤 것이 성령께서 원하시는 일인지. 성령께서는 어떻게 주님의 뜻을 이루어가기를 원하시는지 이것을 먼저 생각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합니다. 내 생각과 가치관이 행동의 기준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행동의 기준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들을 기억하며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다 부족해서 때로는 뭔가 의견이 다르고 오해가 생길 때에 우리는 정말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살피면서 서로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 결국 성령 안에서 하나 되어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 갈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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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철야예배설교

 

제목 / 믿음으로 산을 옮길 수 있나
본문 / 마태복음 17:14~20

 

14. 그들이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이르되
15.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16.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
18.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 때부터 나으니라
19. 이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20.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우리로 하여금 삶을 살게 만드는 힘은 믿음입니다. 평소에는 돈에 위력(偉力)이 있는 것 같아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돈은 힘이 없습니다.
평소에는 세상적인 힘이 우리를 붙들어줄 것 같고,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만, 그런 것은 우리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어제 믿음이 있었다고 해도 오늘은 그것이 유효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불신(不信) 세상을 살아갑니다. 우리의 문화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과 반대되는 환경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을 좇아 살아갑니다.
우리가 믿음을 잃으면, 웬만큼 무장하지 않으면, 세상에 나아가는 순간,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눈에 보이는 것을 절대적이고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모두 그렇게 살아갑니다.

우리의 문화는 눈에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 검증된 것을 받아들이는 문화입니다. 그런 세상 속에서, 그런 문화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 속에는 죄성(罪性)이 있습니다. 죄성은 끊임없이 의심을 만들어냅니다. 처음에는 믿는다고 하지만, 조금 지나면 의심이 찾아옵니다. 특별집회를 할 때에는 의심이 적어집니다. 은혜를 받을 때에는 의심이 적어집니다. 그런데 우리 속에는 죄성이 그대로 있습니다. 어느 순간이 되면, 의심이 올라옵니다. 그래서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도 의심에 시달리고, 영적 침체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불사조(不死鳥)처럼 보였습니다. 거대한 로마 가톨릭과 싸운 마틴 루터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거대한 로마 가톨릭의 권력과 맞서 싸울 수 있었던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곁에서 그를 지켜보았던 사람들은 그가 겪는 내적 고통이 얼마나 큰가를 알았습니다. 루터가 친구 멜랑히톤(Melanchthon)에게 쓴 편지에 보면, 영적 시야가 희미해지고, 하나님이 자기를 떠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에는 매우 힘들어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 때가 있습니다. 그때 믿음은 가물가물해집니다. 한순간에 의심으로 돌아서버릴 수 있습니다. 인간의 연약함 때문입니다.
교회사(敎會史)를 보면, 믿음의 사람들도 흔들릴 때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영혼의 깊은 밤을 통과했습니다.
그때는 믿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본성이 아닙니다. 우리의 본성은 의심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불신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세계 속에 있다 할지라도 의심과 불신앙은 불쑥불쑥 솟아오릅니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노력하지 않으면, 한때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할지라도 의심과 불신앙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강화(强化)하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해야 합니다. 믿음을 강화하는 작업을 계속하지 않으면, 어느 날 빈털터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나에게 믿음이 있다고 해도 그 믿음이 계속해서 유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활성화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본문의 앞에는 변화 산 사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의 내용은 변화 산 사건과 연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산에 오르셨습니다. 산에서 기막힌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주님의 모습이 바뀌고, 천국의 예고편처럼 하늘의 영광이 스쳐 지나가는, 특별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아주 놀라운 광경을 보았기 때문에, 베드로는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라고 말했습니다(마 17:4).

산 위에서는 놀랍고 신비로운 일이 일어났는데, 산 아래에서는 전혀 다른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 아들을 한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아들을 고쳐주지 못하고 쩔쩔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에서 내려오시자 이 사람은 아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부탁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께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라고 말했습니다(마 17:15~16).

그때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7:17). 주님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라고 한탄하시며 아이에게 있던 귀신을 쫓아내시고, 아이를 낫게 하셨습니다.
이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라고 질문했습니다(마 17:19).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7:20).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질문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도 없었습니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는가?”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겨자씨 한 알은 매우 작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에게는 그만큼의 믿음이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제자들의 믿음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제자들은 자신들의 능력으로 기적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능력의 출처는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기 위해 노력했는데, 자신들의 능력을 의지했습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9:29). 능력의 출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기도 외에는 길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능력이 나타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힘으로는 믿음을 키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믿음이 커집니다.
믿음은 우리가 키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크고 작은 것의 문제는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과 연관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 안에서 자가 생산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닦달해도 우리에게서는 나올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번 의존하고 나면, 한참 동안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속적으로 의존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항상 의존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납니다. 어제는 의존했지만, 오늘은 의존하지 않는다면, 어제의 능력이 오늘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서는 능력이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에게서 나올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만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라는 태도를 유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무게중심을 나에게서 하나님께로 옮기는 것입니다.

기도를 처음 시작할 때에는 마음이 무겁습니다. 마음만 무거운 것이 아니라, 몸도 무겁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기도하다 보면, 마음이 점점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를 짓누르던 무게중심을 나에게서 하나님께로 옮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작용이 일어나는 과정입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의 힘으로 무엇인가 해보려고 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귀신을 내쫓고 병자들을 고치는 능력을 제자들에게 이미 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런 능력을 주셨어도 능력이 무조건 나타나도록 하신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능력을 주셨지만, 제자들은 대행자(代行者)들일 뿐입니다.
대행자는 능력의 출처인 하나님을 항상 의지해야 합니다. 마치 자기에게 능력이 있어서 실력을 행사하듯이 능력을 행사하려고 하면, 능력이 오히려 사라져버립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라고 외친다고 능력이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매 순간 철저히 전적으로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셨다고 해서 우리가 능력을 마음대로 사용한다면, 세상은 혼란스러워질 것입니다. 능력을 받은 사람들이 능력을 자기 마음대로 대행한다면, 능력을 얼마나 남용하게 되겠습니까? 능력을 부여받았다고 해서 능력을 마구 사용한다면, 사람들은 더 이상 하나님을 찾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능력은 마술(magic)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마술(魔術)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능력을 사용할 때에는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어제 능력이 있었다고 해서 오늘 그 능력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능력 자체가 아니라, 능력을 행하고자 하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마음을 유지해야 합니다. 이것이 어렵습니다. 제자들은 여기서 실패했습니다.
한때 불을 받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험합니다. 그러나 유지하기는 어렵습니다.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실패합니다. 한때는 주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의지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속에서 일어납니다.

기도생활을 꾸준히 한다는 것은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태도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할 수 없기 때문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도에 소홀해지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능력이 떠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관건은 전적으로 지속적으로 항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실패하면 안 됩니다. 꾸준하게 지속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둘째, 제자들에게 일어난 문제는 교만함입니다.
마가복음 9장에 보면, 길에서 제자들이 누가 서로 높은지 키 재기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가 예수님과 함께 산에 올라간 후, 남아있던 아홉 명의 제자들은 자신들만 남은 것에 대한 아쉬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늘 자리다툼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 세 사람만 데리고 산 위에 올라가신 후, 귀신 들린 아이를 데리고 왔을 때, 남아있던 제자들은 ‘기회가 왔다. 지금이야말로 실력을 보여야 할 때이다. 멋지게 귀신을 쫓아내고, 주님께서 오시면 칭찬을 받을 기회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도전했지만, 그들은 실패했습니다. 제자들은 멋지게 귀신을 쫓아내고, 아이를 고쳐보려 했지만, 제자들은 실패했습니다.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에게 부끄러운 모습만 보이고 말았습니다.

마가복음 9장에 보면, 이 사건 후에 제자들은 누가 크냐 하는 문제로 쟁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이야기를 들으시고,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9:35).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섬김을 받기 위해 첫째가 되려고 합니다.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자 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능력을 행하는 것보다 능력이 나타난 이후가 중요합니다.
만약 제자 중 누군가가 귀신 들린 아이를 낫게 했다면, 그 사람은 얼마나 힘주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 세 사람만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신 이후, 심기가 편하지 않았던 상황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실력을 증명해보이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에게 찾아온 내적 유혹입니다.

교만하면 능력이 사라집니다. 우리는 최고가 되고 싶은 유혹에 시달릴 때가 많습니다. 세상의 문화가 그렇습니다.
사역하는 가운데, 허영심이 늘 따라다닙니다. 돋보이고 싶습니다. 그런 것들을 이겨내야 합니다.
우리가 능력을 나타나고자 한다고 능력이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나타내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드러내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만한 사람은 자신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능력을 행함으로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산 위에 올라가지 못했던 것을 만회하기 위해 산 아래에서 기적을 한 번 행함으로 주님의 제자로서의 자격을 입증해보이고 싶었습니다.

능력을 행하는 사람이 드러나거나 강조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을 위해서 능력을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능력의 목적은 섬김이어야 합니다. 섬기는 자는 드러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의 자랑을 확인시켜주기 위해 동원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실패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작은 잘하지만, 나중에는 실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우리를 끊임없이 따라다니는 주제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끊임없이 높아지려고 했습니다. 높아지려고 한다는 것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자아실현, 자아성취를 목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기만의 성(城)을 쌓게 됩니다. 그것은 우상숭배입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9:35). 능력을 베푸는 자는 점점 작아져야 합니다. 우리가 위대해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겨자씨 한 알은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매우 작습니다. 내세울 만한 것이 아닙니다. ‘겨자씨 한 알 만큼만’이라는 것은 있는 듯 없는 듯한 상태를 말합니다.

만약 주님께서 바윗돌만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면, 상당히 부담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겨자씨 한 알 만큼만”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에게 기대할 만한 것이 별로 없음을 의미합니다. 최소한의 것만 있으면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만 의지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무엇인가를 찾지 않으십니다.

능력을 행할 때, 우리의 편에서는 할 것이 별로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을 행하실 때, 우리가 도울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능력은 하나님께서 행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을 행하실 때, 우리는 그 옆에 살짝 붙어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모세가 홍해(紅海)를 갈랐습니까? 모세는 지팡이만 들고 있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셨습니다. 모세는 지팡이를 바다 위로 들고 있었을 뿐입니다. 모세가 할 만한 위대한 일도 없었고, 모세는 위대한 일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겸손하게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면, 그때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쉽고도 어렵습니다. 여기에서 실패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무엇인가를 찾아내려고 합니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무엇인가 극대화시키려고 합니다. 우리 안에 무엇인가 대단한 것이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을 할수록 우리는 점점 작아지고, 하나님만 점점 커져가야 합니다. 그러면 정말 멋지게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대단해야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산을 옮긴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일반적으로 산은 크고 장대(長大)한 것입니다. 거대한 산을 보면, 위용(偉容)이 대단합니다. 거대한 산맥을 이루는 산을 보면, 그 앞에서 우리는 한없이 작아집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역사(役事)를 실감나게 표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산을 옮길 수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사람들은 산을 옮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누가 감히 산을 옮길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믿음이 하는 일은 놀랍습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해냅니다.

사람들은 산은 옮길 수 없다는 결론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산을 옮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바보 같은 이야기이라고 생각합니다.
산이 옮겨졌던 일이 가끔이라도 있었거나 옮겨질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문제는 다릅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산을 옮긴 일은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살아갑니다.

세상 사람들은 운명론에 빠져서 살아갑니다. 연말연시가 되면, 사람들은 왜 토정비결을 보고, 점을 보러갑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점을 보러 많이 갑니다. 정치인들도 점을 보러 갑니다. 점을 보는 것이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점을 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신의 운명을 알고 싶어서입니다. 사람들은 운명이 이미 정해져있다고 믿습니다.

운명론에 빠지면, 삶의 태도가 수동적입니다. 승패(勝敗)가 정해진 게임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주(四柱), 관상(觀相)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운명이 정해져있다는 것입니다.
정해진 운명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삶이 무겁습니다. 우리 민족은 전체적으로 운명론에 잡혀있습니다. 사주를 보는 것이 다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삶의 경험이 부정적이거나 잦은 실패를 한 사람일수록 운명론을 믿습니다. 동양의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는 운명론자가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천재지변(天災地變)에 순응하며 살아갑니다. 산에 촛불을 피워놓고 굿을 하는 것은 운명을 달래려는 것입니다.
운명론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나는 안 돼. 우리 아버지도 불가능했어. 나도 안 될 거야.’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도피적이고 부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미리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결론을 내리고 살아갑니다. 무엇이든 시작하기 전에 미리 결론부터 내립니다. 이런 사람들은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은 운명론적으로 살아가는 삶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믿음은 운명론적인 삶을 다 걷어냅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멋진 말씀입니까. 운명론적인 것들을 모두 걷어 내버리는, 강력한 태도입니다.

좋지 않은 꿈을 꾸고 나면, 그 꿈에 매이는 분이 계십니다. 운명론자들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나쁜 꿈을 꾸었을 때에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꿈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예감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그런 것을 거부합니다. 좋지 않은 꿈을 꾸었다고 해도 꿈에 매이지 않습니다. 좋지 않은 꿈을 꾸어 기분이 나쁠 때에는 기도로 이겨냅니다. 좋게 해석하여 이겨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해석을 잘합니다. 요셉은 자신의 삶에 일어난 문제를 잘 해석했습니다. 멋지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해석을 잘합니다.
누가 해석을 잘합니까? 꿈에 하나님을 모시고 오면, 잘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라고 말했습니다(창 50:20).
요셉은 문제 속에 하나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셨다는 것입니다. 원래는 불행으로 갈 수밖에 없었는데, 내 인생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꿈에 찾아오시면, 그 꿈은 길몽(吉夢)입니다. 아무리 좋지 않은 꿈이라도 꿈속으로 하나님을 모시고 오면 됩니다.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 할지라도 고난으로 인해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시면, 하나님께서 그 고난을 선으로 바꾸실 것입니다.

산을 옮긴다는 것은 유대문학에서 불가능한 것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유대문학에서 ‘산’은 불가능을 의미합니다. 산을 옮긴다는 것은 불가능을 의미합니다.
제자들 역시 불가능 앞에서 무너졌습니다. 제자들은 귀신 들린 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가능을 믿음으로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산을 명하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산에게 명령하라는 것입니다. 산을 향해 명령하면, 산은 순종해야 하는 대상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산을 옮기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명령하면 됩니다. 산은 우리의 명령에 순종하는 대상입니다.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실 때, 모세가 지팡이로 홍해를 내리쳤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명령입니다. 풍랑이 이는 바다 위에서 예수님께서는 풍랑을 향해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은 창조주의 능력입니다. 이것이 권세입니다. 권세를 가진 사람들이 명령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권세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하늘과 땅의 권세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내쫓으실 때에도 명령하셨습니다. 질병에 걸린 사람에게도 명령하셨습니다.
믿음의 삶이 무엇일까요? 명령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불가능한 현실에서 명령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명령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대행자라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이 왜 무너집니까? 불가능한 문제 앞에서 자기 자신과 대화를 시도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들여다보며 한숨짓기 때문입니다. 자신과 대화할수록 절망적인 답을 얻게 됩니다. 아무리 우리의 안을 들여다보아도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불가능한 문제 앞에서 다른 사람과 의논하면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까? 다른 사람을 만나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불가능하다면, 다른 사람도 불가능합니다. 친구들을 만나 불가능한 문제에 대해 의논하면, 오히려 더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좌절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불가능한 문제를 놓고 사람들과 모여 회의(會議)해보세요. 회의(懷疑)만 생길 뿐입니다.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인간관계를 잘 점검해보세요. 믿음을 활성화시켜주는 그룹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믿음으로 충만한 그룹을 만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회의적인 그룹이 많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격려해주는 그룹을 만난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일반적인 경우, 우리의 믿음을 격려해주기보다는 오히려 낙담하게 하고, 더 절망하게 하고, 더 큰 두려움에 빠지게 합니다.
자신의 믿음이 신통하지 않으면서 믿음 없는 친구들과 몰려다닌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길이 없습니다. 산을 향해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산에 의해 최면에 걸려 꼼짝하지 못하게 됩니다.
주변을 돌아보세요. 사람들은 죽는 소리를 합니다. 물론 저마다 타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은 왜 산을 향해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명령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답은 간단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능력을 위임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능력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산을 향해 명령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아무 능력도 없는데, 우리에게 명령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산을 향해 명령하라고 말씀하신 분은 산보다 더 크신 분입니다. 산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능력 많은 분이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습니다. 주님의 능력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라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일에 대해 명령하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위임하셨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거꾸로 우리를 시험합니다. “산을 옮기는 것은 불가능해. 네가 움직여. 네가 포기해.”라고 말합니다.
믿음이 약해지면, 내가 움직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도망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강해지면, 산이 움직여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삶은 두 갈래로 갈라집니다. 지금도 믿음으로 산을 옮길 수 있습니다.

산을 명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손으로 머리로 산을 옮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산은 하나님께서 옮기십니다.
믿음이란, 산을 옮기실 수 있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절대 믿음, 하나님을 한계 속에 가둬놓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 앞에 수많은 산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수많은 산들이 우리 앞을 가로막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면, 산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산들을 걷어내는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계속해서 돈을 모으고, 세상의 실력을 모아 인생이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믿음을 쌓아가야 합니다.
믿음을 쌓아간다는 것은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고,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태도를 유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때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던 거대한 산이 없어지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믿음이 사라지면, 수많은 산들이 우리를 질식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믿음이 있으면, 그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여도 산이 옮겨질 것입니다.
불가능했던 것이지만, 우리가 믿음 안에서 명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절대적 믿음으로 산이 옮겨지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그런 믿음이 있습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없다면, 그 사람은 신자가 아닙니다.
신자에게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그런 믿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산은 옮겨질 수 있습니다.

‘불가능하다’라는 말은 우리에게 믿음이 없을 때에 사용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불가능이 없습니다.
우리를 드러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만을 드러내려고 하십시오.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십시오. 우리는 24시간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한순간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때가 없어야 합니다.

우리에게서는 눈곱만큼의 능력도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의지하는 믿음의 태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면, 산의 높이가 100m이든 1,000m이든 문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는 높은 산이든 낮은 산이든 똑같습니다. 우리가 불가능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아닙니다.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의지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여러분이 작아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에게 아무것도 없다고 낙심하지 마세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한 분입니다. 우리는 능력의 하나님만 의지하면 됩니다.
여러분이 가진 것, 여러분의 자랑과 허영을 내려놓고,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안에 있는 자랑은 계속해서 솎아내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허영심을 계속해서 쏟아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자랑할 만한 것을 감추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 의지하는 겸손함을 유지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실 줄 믿습니다.

우리의 삶에 산들이 계속해서 나타날 것입니다. 그것을 불가능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것을 향해 명령하시기 바랍니다.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라는 말씀을 의지하여 명령하시기 바랍니다.
그 명령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권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명령하는 것입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가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향해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선포했습니다(행 3:6). 그때, 나면서 못 걷게 된 이가 일어나 걸었습니다.
베드로는 선포했습니다. 명령했습니다. 베드로가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향해 명령했을 때, 그 명령이 시행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권세 앞에 굴복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환경이 우리의 삶을 결론짓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앞에 있는 모든 산들은 우리가 명령하고 없애야 할 존재입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수많은 불가능의 환경에 의해 굴복당하지 마시고, 오히려 명령하시기 바랍니다.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산을 옮겨버리시기 바랍니다. 산을 무너뜨려버리시기 바랍니다. 산을 녹여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평지가 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운명론에 사로잡히지 마세요. 그 속에 갇혀있지 마세요. 산 앞에서 기죽지 마세요. 산으로부터 명령을 받지 마세요. “나는 안 된다. 나는 불가능하다. 나는 실패한다.”라고 말하는 것에 귀 기울이지 마세요.
오히려 우리가 명령해야 합니다. 산을 향해 믿음으로 명령하세요.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날 줄 믿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입니다.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드러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점점 작아져야 합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은 아주 미미한 것입니다. 그것 자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만일 큰 믿음에서 능력이 나타난다면, 예수님께서는 바위만한 믿음이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능력을 행하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손만 내밀면 됩니다. 그때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능력을 드러내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 좌절하지 마세요. 낙심하지 마세요. 물러나지 마세요. 쉽게 결론을 내리지 마세요.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명령하시기 바랍니다.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산들을 옮겨버리시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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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철야예배설교

 

제목 / 믿음은 순종으로 증명된다
본문 / 히브리서 5:8~10

 

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신앙의 핵심은 믿음입니다. 믿어야 역사(役事)가 일어납니다. 믿음이 능력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반드시 행위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 행위는 순종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삶은 순종입니다.

우리는 믿음과 순종을 분리시켜 생각하려 합니다. 그러나 믿음과 순종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곧 순종입니다.
믿음과 순종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동전의 양면을 뗄 수 없습니다. 동전의 양면을 뗀다면, 돈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동전의 양면은 붙어있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과 순종은 붙어있습니다.

믿는다면 행동해야 합니다. 믿는다면 순종이라는 행위가 나타나야 합니다. 믿음과 순종은 서로 독립되어있지 않습니다.
순종이 따르지 않는다면, 믿음이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말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말로만 믿을 때가 많습니다. 모든 것을 말로 합니다.
어디까지 믿느냐 하는 것은 어디까지 순종하느냐라는 의미입니다. 순종하는 데까지가 믿음입니다. 순종이 없다면, 아직 믿음이 증명되지 않은 것입니다. 믿음인지 아닌지 알 수 없습니다. 믿음 안에 순종이 들어있습니다. 믿음과 순종은 하나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데, 애매모호하게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고민할 뿐입니다. 작년에도 올해도 갈등합니다.
믿음이 행위로 나아간다는 것이 간단한 일은 아닙니다. 우리 안에 죄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성 안에는 불순종의 뿌리가 내려져 있습니다. 그 뿌리가 깊습니다. 그 뿌리는 아담에게까지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후손에게 일어나는 불순종의 뿌리는 깊습니다.

에베소서 2장에 보면, 마귀를 가리켜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했습니다(엡 2:2). 사탄은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할 뿐, 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는 역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불순종의 삶을 살면, 마귀의 부하가 되는 것입니다.
마귀의 속성 자체가 불순종입니다. 불순종으로 태어난 영이 마귀입니다. 그래서 마귀가 하는 가장 핵심적인 일은 불순종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순종을 간단히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불순종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쉽게 빠지지 않습니다. 불순종의 영은 오늘도 온 세상을 지배하는 강력한 영입니다. 세상 어디를 가든 불순종의 영이 역사하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불순종의 영은 이전에도 우리를 지배했습니다. 불순종의 영과 거역의 영이 세상을 뒤덮고 있습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이라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불순종합니다. 불순종의 영이 더덕더덕 붙어있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스스로 밥을 먹을 정도만 되어도 그 아이에게 불순종의 영이 역사합니다.

인간의 고통은 불순종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불순종의 영이 떠나지 않는 한, 우리의 삶에서 고통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인류에게 찾아온 저주, 인류에게 찾아온 모든 고통의 원흉(元兇)은 불순종에 있습니다. 불순종의 뿌리, 불순종의 잔재(殘滓)가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의 삶에 고통이 끊임없이 밀려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순종으로부터 구원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아브라함은 우리에게 순종을 보여줍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하는 아브라함의 생애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는 순종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났습니다. 말씀에 따라 약속의 땅을 향해 옮겨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불순종으로 인해 무너진 인간을 구원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가장 먼저 순종을 요구하셨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깨어진 삶을 회복하는 길은 순종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통해 순종을 배우게 됩니다. 그가 믿음으로 반응한 것은 순종으로 나타났습니다. 그의 순종은 그가 믿음으로 출발한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모리아 산에서 아들을 바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습니다. 이를 통해 불순종의 고리를 끊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통해 순종의 삶을 배웁니다. 믿음의 최상(最上)의 질은 순종으로 결정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순종으로 증명되었습니다.

순종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더욱 확실하고 구체적으로 드러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의 위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하심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의 키워드(keyword)는 순종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한 마디로 정의 내린다면, 순종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들로서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동안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의 모든 것은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우리는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께서 능력을 행하시는 것을 봅니다. 병을 고치시고, 숱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의 생애의 초점은 기적과 능력을 행하신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삶의 목적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적 행하시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으시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는 것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었다면,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병을 고쳐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의 목적은 단 하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순종하는 것이 예수님의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신 일을 하므로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6:38).
예수님의 사역은 기적과 능력을 행하시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과정 속에 능력을 행하시고, 기적을 행하신 것이지, 기적과 능력을 행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삶의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에 기적이 일어나고, 병이 낫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통해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일들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도록 이끄십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성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적입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본문 8~9절에 보면,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순종의 학교’에 다니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순종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순종의 삶을 따라가게 하셨습니다.

인류가 불순종으로 인하여 저주 아래에 있는 삶의 고리를 끊어버리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보내셨습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출발한 순종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이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의 클라이맥스(climax)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의 클라이맥스인 독자(獨子) 이삭을 모리아 산에 올리는 사건은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와 오버랩(overlap)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여 묶여 모리아 산의 제단 위에 있는 이삭처럼 말없이 순종하셨습니다. 그 순종이 이 땅에 있는 불순종의 고리를 모두 끊어버리고, 모든 저주를 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깊고 깊은 불순종의 뿌리를 끊어버리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순종을 배웁니다. 순종을 배우는 삶을 통해 우리에게 있는 어두움과 모든 아픔이 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순종을 배우게 하십니까? 순종을 통해 우리의 삶을 회복시키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비하신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순종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해 우리에게 부어주시려는 약속된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순종을 통해 우리에게 임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위대함은 순종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위대함은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 ‘어떻게 하면, 아버지의 뜻에 순종할 것인가’입니다. 그것 밖에 없습니다.
기적을 행하실 때에도 그냥 기적을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기적을 행함으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죽은 자를 일으키실 때에도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기적을 통해 예수님께서 무언가를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에 집중하셨습니다. 순종의 절정은 십자가였습니다.

순종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순종의 길은 죽음의 길입니다. 순종은 자아(自我)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바치는 사건은 “순종은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낳은 아들을 바쳐야 했습니다. 아들의 죽음은 곧 자신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런 점에서 갈보리 언덕과 비슷합니다.

순종의 첫 발을 내딛고, 구원의 길로 나아갔던 아브라함의 삶은 창세기 22장에서 순종의 절정을 보여주었습니다. 100세에 낳은 아들을 제단에 바치는 순종은 자신이 죽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칼날로 내리치려는 제단 위에 누워있던 이삭의 모습에서 아버지께 순종하여 십자가에 매달리신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의 핵심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습니다.

순종은 어렵습니다. 순종이 쉽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에 멈칫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진노의 잔을 마시기 전에 멈칫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순종의 삶을 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바치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여 나아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기까지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마 26:39). 예수님은 순종을 결단하고, 십자가 위에 매달리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 이루었다”라고 외치셨습니다(요 19:30).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이루셨습니까?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신 그 일을 이루셨습니다. 그 일에 순종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라는 외침 속에는 완전한 순종이 들어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완전한 순종이 들어있습니다. 이것이 인류의 저주를 끊어버리는 놀라운 사건이 되었습니다.
“다 이루었다”라는 말 속에는 완전한 순종이 들어있습니다.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신 그 일에 완전히 순종했다는 의미입니다. 99% 순종한 것이 아닙니다. 100% 순종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하다 보면, 우리도 모르게 목적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왜 그 일을 하고 있는지 방향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나중에 보면 불순종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방향과 목적을 잃으신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위대한 생애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찬사(讚辭)를 보냅니다. 그가 남긴 말, 그가 행한 행적(行蹟)에 대해 감동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들과 예수님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예수님은 삶의 모든 것이 아버지의 뜻에 맞춰져있었습니다.
위대한 생애를 살았던 사람들은 훌륭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말을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위대한 분이시지만, 자신의 말을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말을 하셨을 뿐입니다.

요한복음 12장 4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위대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좋은 말을 남겼습니다. 그 말은 그 사람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말을 하지 않으시고, 아버지께서 주신 말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철저한 순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할 말을 알려주시면, 그것을 전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아들로서 단독으로 무언가를 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철저하게 따랐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주님께서 행하신 모든 권세 역시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권세를 행사하지 않으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 3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무 능력이 없는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스스로 아무것도 행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하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열심히 사는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했는가’입니다.
초점을 맞추지 못하면, 인생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역을 하더라도 초점을 맞추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위대함을 드러내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셔서 능력과 권세를 나타내신 것이 아니라, 오직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순종’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삶의 키워드를 붙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순종에 초점을 맞추고, 순종을 배운 것은 우리에게도 순종을 배우게 하셔서 순종을 통해 모든 저주를 끊어버리고, 우리에게 순종을 가르쳐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관통(貫通)하는 키워드는 순종입니다. 순종을 놓쳐버린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순종이 새겨져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하기 위해 하나님을 끌어당깁니다. 우리의 목적을 이루는 데 하나님을 끌어당깁니다. 우리는 우리의 목적을 이루는 데 하나님이 순종하도록 하나님을 닦달합니다.
누가 누구에게 순종해야 합니까? 순종을 놓치면, 인생이 꼬여버립니다.

불순종은 딴 것이 아닙니다. 내 일에 몰두하고 사는 것이 불순종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전혀 상관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신 그 일, 성경이 말씀하는 진리를 외면하고, 내 일에만 빠져 정신없이 살아가는 것이 불순종입니다. 기도하더라도 기도 안에 하나님의 뜻이 없으면, 그 기도는 불순종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지만, 하나님과 상관없고, 결국 모든 것이 자기에게로 돌아가거나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수단화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마지막 가장 숨 가쁜 고비는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숨고르기를 하셨습니다. 매우 힘들고 벅찼기 때문입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은 인류의 죄악의 오물을 혼자 뒤집어쓰셨습니다. 죄악의 진노의 무게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왜 순종에 초점을 맞추셨습니까?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순종함으로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일어난 원죄(原罪)적 삶의 고리를 끊어버리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2:50). 친가족이라도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가족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혈육이라고 해도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가족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공동체는 불순종의 고리를 끊고, 순종의 영을 가진 사람들만 모여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공동체입니다.

믿음에서 순종이 나오지만, 아버지의 사랑으로 인해 순종이 깊어집니다. 사랑은 깊은 순종을 낳습니다. 사랑은 의무적인 순종이 아니라, 깊은 순종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요한복음 14장 2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2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면 순종하게 됩니다. 순종하지 않는 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순종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사랑한다면 순종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사랑한다면 말하기도 전에 이미 순종합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순종할 때, 사랑으로 결속됩니다. 사랑으로 순종할 때, 아버지와 더 깊은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과의 사랑의 단계로 나아간다면, 순종으로 연결됩니다.

믿음이 깊어진다는 것은 사랑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이 깊어지면, 더 깊은 순종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사랑은 순종을 낳고, 믿음이 순종을 낳습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사랑은 하나입니다.
인간관계에서도 사랑하면 순종적인 관계가 됩니다. 믿음과 순종, 사랑과 순종은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순종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은 무엇일까요?
첫째, 순종은 능력이 됩니다.
순종하는 삶 자체가 능력입니다. 주님께서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실 때,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 순종을 나타내셨습니다.
십자가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온 세상을 구원하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로마서 1장 16절에 보면,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순종이 능력을 낳습니다. 그 능력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순종의 숨은 비밀은 놀랍습니다. 십자가에 하나님의 능력이 숨어있습니다. 능력을 행하려고 해서 능력이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따라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능력을 구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아도, 말씀에 순종하면 저절로 이루어지게 되어있습니다. 순종하면 그곳에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납니다. 순종하는 곳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풀립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기적이 따라옵니다. 순종할 때에 말씀이 말씀으로 실현됩니다. 순종할 때에 말씀이 말씀으로 실제화됩니다.
말씀이 참된 말씀인 것을 확인하려면, 순종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순종할 때에 말씀이 사실로 드러나고, 말씀이 능력이 됩니다. 순종하지 않으면, 그것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기적이 일어난 현장, 하나님의 능력이 일어난 현장에는 순종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여리고 성을 돌게 하신 것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순종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머리로 생각해서는 순종할 수 없습니다. 이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믿는 행위는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보십시오. 순종이라는 통로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흘러넘치게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순종을 통하여 우리에게 축복하시기 원하십니다.
불순종으로 인해 모든 고통과 불행이 찾아왔다면, 에덴에서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비극적 사건이 일어났다면, 이제 우리의 순종을 통해 축복을 회복시키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한 사람이 범죄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었고, 한 사람이 죽으심으로 많은 사람이 은혜를 입었습니다. 로마서 5장에 보면,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롬 5:19).
인류가 불행하게 살아가는 원인은 한 사람 아담으로 인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었습니다.

모든 축복을 가로막는 주범(主犯)은 불순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지나가는 동안 불순종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이 불순종의 삶을 사는 만큼 방황이 길어졌습니다.
쉽게 지나갈 수 있는 거리를 40년 동안 돌고 돌며 고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불순종입니다. 불순종은 겪지 않아도 될 생고생을 자초(自招)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생애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소극적으로 순종했습니다. 아버지가 모든 것을 해주었습니다. 그렇다고 이삭이 불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이삭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삭은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모리아 산에서도 이삭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만히 있었습니다. 이삭도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적극적으로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야곱은 처음부터 불순종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했습니다. 아버지를 속이기도 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세 사람 중 누가 험악한 인생을 살았습니까? 야곱입니다. 야곱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야곱은 나중에 자신의 입으로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창 47:9).

우리의 삶의 축복은 순종으로 인해 주어집니다. 순종의 삶을 살면,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구하지 않아도 됩니다. 순종하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고민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놓고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고민할 것은 단 하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입니다.
인생을 해석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인생을 복잡하게 해석하려고 하십니까? 내가 오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풀어주실 수밖에 없습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복을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의 생애도 보면, 복에서 출발하여 복으로 끝납니다. 야곱은 복 때문에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복은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복 때문에 인생이 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심으로 복이 출발하게 됩니다. 인류가 잃어버린 복이 출발합니다. 잃어버린 축복이 회복됩니다. 저주를 끊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12:2,3). 하나님의 약속의 핵심은 복입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이 복을 되찾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향해 가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은 복을 받지 못하고, 고생하다가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2세대에게 신명기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1세대는 원망불평하고 불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놓쳐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2세대에게 신명기를 주셨습니다. 신명기의 핵심 주제는 ‘순종’입니다.
불순종으로 잃어버린 모든 축복을 되찾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2세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처럼 붙들고 순종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모든 것이 복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순종을 통해 복을 약속하시고, 인류의 복을 되찾게 하셨습니다. 갈보리 언덕에서의 순종을 통해 복이 완성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복은 순종을 통해 흘러가게 됩니다. 믿음에서 나온 순종이 우리를 복되게 합니다.

불순종으로 인해 찾아온 인류의 저주가 하나님의 아들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끊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순종을 통해 축복이 시작되었습니다.
지금도 우리의 순종은 축복을 가져옵니다. 기억하십시오. 축복의 원리는 순종입니다. 우리의 삶을 순종의 원리 위에 올려놓으면,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풀어주십니다. 우리가 순종의 삶을 살면, 묶인 것이 자동으로 풀리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에 꼬인 것이 있습니까? 무엇이 꼬여있습니까? 자세히 들여다보세요. 왜 꼬였는지 살펴보세요.
순종해야 하는 영역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주시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의 순종은 타협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우리의 복과 연결된 경우에는 항상 명령형을 사용하셨습니다. 타협이 불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불순종으로 인해 꼬여있던 것을 순종을 통해 푸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지금도 우리가 불순종하고 고집을 피우는 것이 있다면, 생수의 강이 막힙니다. 여러분의 삶에 순종하지 않는 영역이 무엇인지 살펴보십시오. 영적 전쟁을 벌이고 있는 영역이 무엇인지, 죄가 타협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십시오.
여러분의 삶에서 막힌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통해 뚫리는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이것이 성경의 핵심 원리입니다.

순종은 성경 속에서 거대한 핵심주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곧 형통이고, 축복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을 주고 싶어 하셔도 우리가 불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실 수 없습니다. 축복을 가로막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실 수 없습니다. 순종이 축복을 가져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순종을 기뻐하십니다. 최고의 순종은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를 통해 받으셨습니다. 아들이 온전히 순종하는 모습은 하늘 아버지의 기쁨이었습니다.
우리가 순종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부모가 자녀들을 통해 얻는 기쁨이 무엇입니까? 자녀가 순종할 때, 부모는 기쁩니다. 순종을 통해 관계가 깊어집니다.

사무엘상 15장 22~23절에 보면,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의(祭儀)적 제사보다 순종이 중요하고, 불순종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배 순서와 의식(儀式) 자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의 삶이 참된 예배인 줄 믿습니다.
우리가 매일 순종하고 사는 것 자체가 예배입니다. 걸어가는 것이 예배이고, 모든 행위가 예배입니다. 우리가 순종의 삶을 살면, 교회 안에 있든 밖에 있든 모든 것이 예배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축복이 임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가운데 계속 붙들어야 할 주제는 순종입니다. 신앙을 복잡하게 만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신앙생활을 복잡하게 하고, 복잡하게 설명하는 사람들은 순종이라는 키워드를 놓쳐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난 후에는 순종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순종을 익혀야 합니다. 순종이 점점 깊어져갈 때, 우리의 삶에 능력이 나타나고, 축복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순종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도 순종이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본문 히브리서 5장 8절에 보면,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배운다는 것은 학습한다는 의미입니다. 한순간 경험한 것이 아닙니다. 오랜 기간 동안 순종을 배워가므로 온전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도 한순간에 순종하신 것이 아닙니다. 고난을 통해 끊임없이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우리의 삶에 고난이 찾아오면,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왜 나에게 이런 고난을 주셨습니까? 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라고 원망 불평하면 안 됩니다.
나에게 허락하신 사건과 실패와 고통을 통해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귀를 기울이고, 그 일을 통해 순종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실 때에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순종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자신의 생각과 고집이 죽지 않으면, 순종하기 어렵습니다. 순종은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순종할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잉태했던 마리아를 보세요.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돌에 맞아 죽을 수 있는 위기를 겪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했습니다(눅 1:38).

순종은 조건과 상황을 따지지 않고, 말씀에 모든 것을 내어맡기는 것입니다. 순종은 십자가를 따르는 삶입니다. 순종학교의 주 과목은 십자가입니다.
순종은 위험한 것입니다. 순종은 위험한 것이지만, 우리를 가장 완전한 길로 이끕니다.

왜 우리가 성경을 읽고 공부합니까? 성경적 지식을 쌓기 위해서입니까? 성경적 지식을 쌓아서 무엇 하겠습니까?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공부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묵상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설교를 들으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좋은 설교를 들으려고 합니까? 목적은 단 하나, 순종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설교를 듣는 하나의 목적이 있다면, 순종하기 위해서입니다. 순종하기 위해 설교를 듣는 사람에게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그가 그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순종하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계시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그의 길을 열어주시고, 그의 영혼을 열어주셔서 말씀이 그 사람의 심비(心碑)에 새겨지게 하십니다. 순종하려고 하기 때문에, 성령이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런데 순종할 마음이 없다면, 귀가 닫혀버립니다. 순종하려고 하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계시가 닫혀버립니다. 불순종의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엘리 제사장이 불순종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稀貴)해져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들려주어도 소용없었습니다.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말씀을 더 이상 들려주시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공동체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폭포수 같이 임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순종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순종하지 않으려는 회중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실까요?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죽어가는 교회에서는 말씀을 전해도 말씀이 벽을 치는 것 같습니다. 말씀이 벽을 치고 다시 튀어나오는 것 같습니다. 성도들이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교회에는 말씀이 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에 생명을 걸겠다는 사람이 모여 있으면, 설교자의 머리와 영에 주의 말씀이 폭포수처럼 임하여 주의 종의 입술을 통해 말씀이 흘러가게 하십니다.
이미 그런 역사가 일어난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순종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왜 기도합니까? 기도의 최종적인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함입니다.
순종이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순종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주세요.”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앞에서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될 정도로 기도하셨습니다.
성령이 주님을 도우셔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게 하심으로 예수님의 기도가 끝났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응답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하여금 십자가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묵상하고 공부하고 훈련받고 기도하는 모든 행위의 목적은 오직 하나, 순종을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순종하기 위해 말씀을 들으면, 성령이 우리의 앞길을 인도해주실 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오직 순종에 초점이 맞추어져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순종으로 귀착(歸着)됩니다. 예수님은 순종하시되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의 핵심은 순종입니다. 믿음도 사랑도 순종으로 결론 나야 합니다. 성령을 읽고 묵상하십시오. 그런데 목적을 분명히 하고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없으면, 순종할 수 없습니다. 참 믿음은 순종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깊이 순종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순종이 깊어집니다.

순종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순종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말은 적게 하시고, 순종하는 법을 배워 가시기 바랍니다.
순종이 얼마나 놀라운 일을 만들고, 얼마나 많은 역사를 일으키는지 경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삶의 변혁은 순종으로부터 일어납니다. 우리의 삶을 틀어막고 있는, 모든 어둠, 저주 등이 순종을 통해 해결됩니다.

갈보리 언덕에서 하나님 아들의 순종은 불순종으로 인해 고통 받던 우리의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의 고리를 예수님께서 끊으셨습니다.
지난 날 우리 안에 있는,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불순종의 뿌리 때문에 하지 않아도 되는 고생을 하며 살았던 삶을 청산해야 합니다. 순종의 영이 여러분을 지배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오직 아버지의 말씀 앞에 거꾸러지고, 아멘으로 화답하며 실천할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믿음은 순종입니다. 믿음은 순종으로 증명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기꺼이 말씀에 순종하려고 해야 합니다.
순종하기 위해 말씀에 귀 기울이고, 힘들고 어려워도 순종해보세요. 그곳에서 기적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축복의 문이 열릴 줄 믿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 앞에서 “No”라고 했기 때문에 잃어버린 것이 있다면, 오늘 이후로는 “Yes”라고 반응하셔서 묶인 것이 모두 풀리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신앙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불순종의 영이 떠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순종하는 것까지만 믿음입니다. 순종하지 않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 기적을 일으킨다”라는 말은 믿음으로 순종할 때에 기적이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으로 기적이 일어난다”라는 말은 믿음으로 순종해야 기적이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믿음과 순종을 분리시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을 순종으로 증명해야 우리의 삶에 새로운 역사가 시작될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키워드는 순종입니다. 순종을 미루지 마시기 바랍니다. 완전한 순종을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편에서 99% 순종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불순종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온전한 순종을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할 때,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할 때, 인생이 도약하고, 변화가 일어나고,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고, 회복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여 우리의 삶 전체가 순종이 되면,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일이 우리의 삶에 일어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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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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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철야예배설교

 

제목 / 축복하고 축복하라
본문 / 민수기 6:23~27

 

23.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27.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성경을 보면, 선명하게 구분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축복과 저주입니다. 이 두 단어는 성경 속에서 대조되는 주제입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축복과 저주로 나뉘었습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아담을 축복하셨는데, 아담의 죄로 인해 축복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그에게 저주가 찾아왔습니다.

그 후, 우리는 세상 속에서 축복과 저주라는 실체(實體)와 계속해서 마주칩니다. 어떤 곳에는 축복이 있고, 어떤 곳에는 저주가 있습니다. 복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주 아래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축복과 저주는 아주 선명하게 구분됩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축복과 저주의 개념은 아주 분명합니다.

세상에서 불행스러운 사건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배경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가정에 비극적이고 안타까운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방황하고 불만족에 빠져있고, 중독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축복 받지 못한 삶이 원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에서 비껴나 있으면, 불행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죄와 타락으로 말미암아 축복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인간의 삶에 저주가 계속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은 인간의 노력 유무(有無)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축복 유무에 달려있습니다.
야곱의 생애가 불완전하지만, 야곱은 축복의 냄새를 맡으며 살았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에서가 멋지게 살아가는 것 같지만, 에서는 하나님의 축복과 무관(無關)한 자로 살았습니다. 두 사람은 극명(克明)하게 다른 인생을 살았습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축복과 저주가 아주 뚜렷하게 구별되는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유월절 사건입니다.
한쪽에서는 장자(長子)가 죽는 저주와 통곡의 밤을 보내며 절규하고 비명을 질렀습니다. 반면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집에서는 구원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빛과 어두움이 선명하게 구분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 축복과 저주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가르쳐주십니다. 한쪽에는 어두움이 가득하고, 한쪽에는 빛으로 충만했습니다.
피를 바르는 것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피가 어둠과 빛, 저주와 축복을 가르는 결정적인 요소였습니다.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르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피가 축복과 저주를 갈라놓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축복과 저주가 인류의 역사(歷史)를 선명하게 가르고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실 때에 하나님의 관심은 복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12:3).
하나님은 복을 잃어버린 인류에게 복을 되찾게 하시기 위해 아브라함을 불러내시고, 아브라함을 복을 흘려보내는 통로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복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잃어버린 복을 되찾게 하는 데 관심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신명기 28장에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신 28:6). 신명기 28장에서 하나님은 복과 저주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구원이 임하면, 축복이 임하고, 저주가 떠날 것입니다.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첫 설교로 복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축복과 저주를 가르는, 분명한 경계선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의 모든 저주는 사라지고, 축복이 임합니다. 이것이 구원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저주는 우리에게서 사라지고, 우리에게 축복이 임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축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세상은 축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혼란스럽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복을 경험해본 적이 없습니다. 축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화려하게 떵떵거리며 살아도 그것은 복이 아닙니다. 돈이 많은 것도 복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 주어지는 것은 복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돈만 가진 사람은 매우 불쌍한 사람입니다.
저주를 끊어버리고, 축복을 가져오는 출발점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세상은 축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 축복은 무엇입니까? 축복은 라틴어 ‘bĕnĕ dícere’(베네 디체레)에서 파생된 단어로, 칭찬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누군가를 축복한다는 것은 칭찬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축복은 특별한 형태의 칭찬, 인정(認定)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님에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고 축복하셨습니다(마 3:17).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인정해주신 것입니다.
“너는 누가 뭐라고 해도 내 아들이야. 내가 기뻐하는 자야. 사람들이 너를 욕하고 멸시하고 천대하고 너를 핍박해도 너는 내 아들이야. 세상의 모든 저주가 너에게 쏠려있어도 너는 내 아들이야.”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인정하시고, 아들을 특별히 칭찬하신 것입니다. “나는 너로 인해 기뻐해. 너를 인정해. 너는 존귀한 자야. 너는 나에게 사랑스러운 존재야. 나는 너를 보면 기뻐. 너는 나에게 아주 소중한 존재야.”라고 존재를 인정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축복입니다. 상대방을 향해 기뻐해주는 것이 축복하는 것입니다.

본문 23절에 보면, 모세가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라”라고 말했습니다. 모세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축복하라고 명했습니다.
본문 27절에 보면, 모세는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라고 말했습니다. 모세는 축복하는 것을 사명이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축복은 무엇입니까? 축복은 바라봐주는 것입니다. 칭찬하고 인정하는 것은 그를 주목하는 것입니다. 그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목하신다, 바라보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목하시고 칭찬하시는 것이 바로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아시고, 나를 바라보신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님을 향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고 축복하셨습니다(마 3:17). 하나님은 아들을 향해 주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주목하십니다.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십니다.

우리는 일평생 주목받고 싶어 합니다. 누군가의 관심을 끌려고 합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이의 관심을 끌고 싶어 합니다.
가정에서 아이들은 주목받고 싶어 합니다. 아이 한 명을 키우다가 둘째를 낳으면, 둘째에게 관심을 갖느라 첫째에게 소홀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첫째 아이가 병이 납니다. 그래서 괜히 물을 쏟기도 하고, 동생을 때리기도 합니다. ‘나를 바라봐 달라’는 것입니다.
주목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들은 욕구 불만이 생깁니다. 주목받는다는 것 자체가 사랑을 받는 것이고, 축복입니다.
보육원에서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데도 그곳에 있는 아이들은 욕구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채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있는 아이들은 먹을 것보다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봐주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은 주목받지 못하면 불안해합니다. 눈과 눈이 마주칠 때, 안정감을 느낍니다. 평안을 느낍니다. 그것이 기쁨입니다. 그것이 회복입니다.
어린 아기들은 엄마의 품에서 주목받을 때, 안정감을 느낍니다. 아기는 엄마 품에서 만족을 느낍니다.
부모의 주목을 받으며 자란다는 것은 아이에게 축복입니다. 빗나가는 아이들은 주목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칭찬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무언가를 하면서도 계속해서 주목받기 원합니다. 혼자서 놀 수 있으면서도 계속해서 엄마를 부릅니다.

직장에서 승진하면, 승진한 것에 대한 기쁨도 있지만, 인정받은 것에 대한 기쁨이 더 큽니다. 주목받은 것에 대한 기쁨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주목해주는 것에 대한 기쁨이 있습니다. 그것이 행복입니다. 그것이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주목하십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인정해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존귀한 사람인 것을 그리스도를 통해 충분히
 보여주셨습니다. 이 지구에 나 한 사람만 있다 해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죽게 하실 만큼 우리가 귀중한 존재임을 우리에게 말씀해주십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은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우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성경을 보세요. 하나님은 사람을 단체로 취급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한 영혼, 한 영혼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의 비유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양 한 마리를 잃어버려도 하나님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이십니다.
백 마리의 양 중에 한 마리의 양을 잃어버렸습니다. 계속해서 관심을 갖지 않으면, 잃어버린 것조차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한 마리의 양을 잃어버린 것을 아십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양을 반드시 찾아내십니다. 한 영혼, 한 영혼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곧 관심입니다. 사랑의 반대는 증오가 아니고, 무관심입니다. 고개를 돌려버리거나 등을 돌린다는 것은 관심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바라본다는 것은 그냥 물끄러미 쳐다보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바라본다는 말에는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바라본다는 말에는 ‘나는 너의 삶과 함께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축복한다는 것은 진정으로 관심을 받고 있고,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그러므로 바라보는 것은 축복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시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눈길이 향하는 것이 곧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슬쩍 쳐다보시고 지나치시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바라봐주신다면, 그것이야말로 축복 중의 축복입니다.
본문 26절에 보면,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얼굴을 드셔서 바라보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고개를 돌리시는 것은 재앙입니다. 저주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히 받았고,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복덩어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주 소중히 여기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우리에게 충분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축복하신 나를 사랑하고 축복해야 합니다.
신자(信者)는 자신을 축복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나 자신을 끌어안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 한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경험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나를 내가 끌어안을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온몸으로 경험해보았습니까? 하나님의 축복을 깨달은 만큼 삶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주 커서 측량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축복하기 전에 자신을 축복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신은 돌보지 않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돌보지 않고, 다른 사람을 돌보는 사람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른다면,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레 19:18). ‘네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을 먼저 사랑하고 돌보고 축복해야 아내를 사랑하고, 남편을 사랑하고, 자녀를 축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남에게 저주를 쏟고, 남을 못살게 하는 이유는 자신을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 자신을 온전히 축복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축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 자신을 정말로 축복할 수 있고, 내가 나 자신을 축복하며 살아간다면,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축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관계 속에 문제가 일어나는 원인을 살펴보면, 첫 번째 문제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나를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고 축복해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끌어안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를 무시하고 멸시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학(自虐)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자기를 경멸합니다. 자기를 존중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칭찬하면, 손사래를 칩니다. 자신을 스스로 낮게 평가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비관적입니다. 그리고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자임을 확인해야 합니다.
사랑하고 축복한다는 것은 주목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주목해보세요. 대충 넘어가지 말고, 주목해보세요. 대충 평가하고 끝내버리지 말고, 자신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신이 얼마나 많은 축복을 받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스바냐 3장 17절에 보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성경 곳곳에 표현하셨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며 자신의 모습을 주목해보세요. 자신의 모습을 피하지 마세요. 자신이 못생겼다고 생각하십니까? 못생겼다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이 자신을 못생겼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남들이 뭐라고 평가하는 것보다 자신에 대한 자기의 평가가 중요합니다.

열등감이 무엇입니까? 남이 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무시하면, 답이 없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무시하면, 남이 아무리 칭찬해도 소용없습니다. 남이 아무리 칭찬해도 믿지 않습니다.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시하고 놀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열등감은 일종의 병입니다. 병 중의 병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무시하는데, 누가 건져주겠습니까. 건져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면 비참해집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말하든, 내가 나를 인정해주는 것이 나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잘생겼다, 못생겼다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기준은 늘 바뀝니다. 미인의 기준도 늘 바뀝니다. 시대에 따라 미남, 미녀에 대한 기준이 달라집니다.
방송에 나오는 미남, 미녀의 모습에 속지 마세요. 방송에 나오는 분들은 최고급 미용실에서 일류 미용사와 스타일리스트(stylist)가 비싼 화장품으로 가꾸어줍니다. 그런데 못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옷은 협찬을 받아 최고의 옷을 입습니다. 최고의 실력을 가진 카메라맨이 최고로 좋은 카메라를 이용하여 얼굴이 작게 보이도록 합니다. 그런데도 예쁘게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합니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합니다. 사랑의 눈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에도 사랑의 눈으로 보실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새롭게 빚으셔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벗어나있는 것은 없습니다. 아버지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의 외형(外形)과 이목구비(耳目口鼻),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빚어진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선물이고, 하나님의 사랑의 흔적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을 무시하지 마세요. 여러분을 자세히 바라보세요. 지금 나의 삶을 자세히 바라보세요.
자신이 가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자세히 보세요. 얼마나 많은 것이 하나님의 축복입니까. 원망하고 불평하고 열등감에 빠지는 이유는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필리핀에 다녀왔습니다. 필리핀은 인구가 약 1억 명입니다. 그 중 4천 5백만 명이 절대 빈곤층입니다.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 주변에 약 5천만 명이 삽니다. 그런데 그곳의 도시 빈민은 아프리카의 빈민과 또 다릅니다. 아주 참혹합니다.
제가 필리핀에서 만난 아이들은 다 행복해보였습니다. 그 아이들은 자기가 가난한 줄 모릅니다. 모두 가난하기 때문에, 가난하다는 것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아주 행복해보였습니다. 필리핀의 행복지수가 우리나라보다 훨씬 높습니다.

왜 불행합니까?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왜 불평합니까?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왜 자신이 못생겼다고 생각합니까?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자신보다 나은 사람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나답게 만드셨고, 지금 나의 삶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적합하게 선물하신 것이라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현재의 삶이 어떠하든지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순간 나에게 가장 적합한 것으로 맡기신 것입니다.

사울 왕을 보세요. 그는 왕이었습니다. 한 나라의 왕보다 더 높은 사람은 없습니다. 최고의 자리입니다. 그는 최고의 자리에서 모든 것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소년 다윗의 노랫소리가 사울 왕의 귀에 거슬렸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는 여인들의 노래를 듣고 사울은 속이 뒤틀렸습니다.
사울은 자신이 왕인데도 불구하고, 자신과 다윗을 비교하는 노랫소리에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열등감에 빠졌습니다. 왕인데도 열등감에 빠졌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더 이상 가질 것이 없는 자가 열등감에 빠졌습니다. 무언가를 가져야, 무엇인가 갖추어야 열등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주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귀중하게 여겨주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고, 인정해주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여기시는가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나를 사랑하고 축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신을 마음껏 사랑하고 축복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것 이상으로 자신을 축복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서 얼마나 사랑받는 존재입니까. 얼마나 귀중한 존재입니까,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기뻐하십니까, 하나님은 나를 지금의 모습 그대로 사랑하십니다.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거울 앞에서 “멋져, 훌륭해.”라고 선포하세요.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내가 나 자신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너는 정말 귀해. 내가 너를 위해 내 아들을 줄 만큼 너는 귀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천둥소리만큼 크게 들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바라보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주목하십니다. 그런 나를 축복해야 합니다.

신자(信者)는 자신을 축복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축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축복해야 합니다.

누군가 나를 힘들게 하면, 우리는 그 사람을 오히려 축복해야 합니다. 그가 나를 왜 힘들게 하는지 아십니까? 그가 축복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에게 축복을 흘려보내야 합니다.
내가 축복을 흘려보내는 데 인색했기 때문에 그가 축복을 받아 누리지 못하여 그의 안에 있는 불만과 안타까움이 나를 힘들게 하는 것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내가 그를 축복하여 그에게 축복이 흘러갈 때, 저주가 바뀌어 축복이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중독에 빠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축복 받지 못하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사랑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받고 싶은데, 사랑이 채워지지 않으니까 사물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기계에 집착하고, 엉뚱한 것에 집착합니다. 그것이 중독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나를 힘들게 할 때, 우리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들을 축복해야 합니다. 그가 나를 힘들게 하는 이유는 나를 통해 축복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 저주 받은 사람이 많으면, 우리도 힘들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축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축복하면, 우리 주변이 달라집니다. 주변에 축복하는 사람이 많으면, 그곳은 축복된 곳이 됩니다.

축복한다는 것은 바라보는 것입니다.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그곳이 밝아집니다. 축복하면 그곳이 빛나기 시작합니다. 축복하면 그곳이 회복됩니다.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는 “태양이 비치면 먼지도 빛나기 시작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축복해야 합니까? 상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관심을 가져주고, 인정해주고 칭찬해주어야 합니다.

주변을 바라보세요. 사랑은 주목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왜 힘들어합니까? 주목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외로워합니다.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를 바라봐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관심을 가져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인 김춘수 씨의 시 〈꽃〉은 아주 유명합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우리는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고, 관심을 가져주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그 꽃은 나에게로 다가옵니다.

젊은 연인들이 사랑에 빠지면, 어떻게 됩니까? 서로에게 주목합니다. 시선이 고정됩니다. 바라보는 것입니다. 바라본다는 것은 서로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를 사랑하고 존귀하게 여겨주는 것입니다.
주의가 산만하던 청년도 사랑에 빠지면, 대단한 집중력을 갖게 됩니다. 한곳에 꽂혀버립니다. 계속 바라보면, 그의 존재와 내가 하나가 됩니다. 젊은 연인들이 사랑하는 것을 보면, 둘이만 보고 있습니다.

축복한다는 것은 바라보는 것입니다. 지켜봐주는 것입니다. 시선이 머물러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사역입니다.
다른 사람은 바라보지 않는데, 나 혼자 바라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요, 하나님의 역사가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주목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임무입니다. 바라보는 것 자체가 놀라운 사랑입니다. 다른 것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바라보기만 하세요.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가까운 관계에서 실천해보세요.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위력(威力)이 있는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눈길은 다릅니다. 위력이 있습니다.

여러분보다 못한 사람을 바라보세요. 사람들은 자신보다 나은 사람을 바라보며 열등감에 빠집니다.
그러나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바라보며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그들에게 집중하면, 회복이 일어납니다.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는 주목받지 못한 곳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소외된 곳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낮은 곳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외로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모든 역사는 바라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는가에 따라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왜 주변을 바라보아야 합니까? 축복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축복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축복이 흘러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필리핀에 며칠 머무는 동안, 빈민들이 사는 마을의 깊은 곳까지 들어갔습니다. 그들이 사는 집에도 들어가 보았습니다.
다 쓰러져가는 집이었습니다. 집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곳이었습니다. 지붕이 없는 집도 있었습니다. 집 옆으로 악취가 나는 하수(下水)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들은 가난을 대물림하고 있었습니다. 가난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 보였습니다.

남자들이 직업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자들이 어린 나이에 임신하면, 같이 살아가려니 막막합니다. 그래서 남자가 도망가 버립니다.
여자 혼자서 아이를 낳아 키우다가 힘들어서 다른 남자를 만나서 같이 삽니다. 그래서 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합니다. 그런데 남자들은 아이를 생각하지 않고 또 도망가 버립니다. 그래서 아빠가 다른 아이들을 엄마 혼자서 키웁니다. 요한복음 4장의 수가 성 여인의 이야기와 똑같습니다.
작은 집에 아이가 10~12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밥을 한 끼밖에 먹지 못합니다. 절대 빈곤의 나라입니다.
참혹한 광경을 많이 봐서 문화적 충격이 컸습니다. 며칠 동안 소화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필리핀에서 교회를 중심으로 아이들을 돌보는 기막힌 사역현장을 보았습니다. 그곳에서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었습니다.
아이들이 스킨십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아이들이 제게 다가와 제 손을 주무르며 만졌습니다. 저는 아이들을 안아주고, 볼을 만져주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눈을 맞추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제가 아이들을 바라보니 아이들이 꽃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아이들과 계속해서 눈을 맞추었습니다. 아이들의 눈이 아주 예뻤습니다. 바라봐주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은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아이들을 바라보시는 것 같은 마음으로 그 아이들을 바라보려고 했습니다. 단지 불쌍한 아이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으로 아이들을 바라보려고 했습니다.

이전에는 그 아이들을 따뜻하고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던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아이들은 눈을 맞추며 바라봐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이들과 눈을 맞추었을 때, 제 눈을 피하는 아이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아빠에게마저 버림받은 아이들입니다. 그런데 낯선 나라에서 온 사람이 따뜻하게 웃으며 안아주고, 스킨십을 해주니 아이들이 아주 좋아했습니다. 아이들은 사진 찍는 것도 좋아했습니다.
그곳에서 사역하는 자매가 “이 아이들에게 이 순간이 얼마나 축복이 되는지 모릅니다. 이 아이들은 이 순간을 일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축복하는 법을 익힐 필요가 있습니다. 저주 아래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축복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저주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의 입에서는 저주만 쏟아져 나올 뿐입니다.
세상을 보세요. 비난하고 욕하고 저주하고 분노하며 살아갑니다. 그 결과 더 저주스러운 세상을 만들어갑니다.
지금 이슬람 국가들은 분노에 차있습니다. 자기들의 영토를 빼앗기고, 나라가 없는 것으로 인한 박탈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들은 온 세상을 향해 저주를 쏟아 붓고 있습니다.

누가 축복할 수 있습니까? 축복을 아는 사람들이 축복할 수 있습니다. 축복을 아는 사람들만 축복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가운데 우리가 축복해주어야 할 곳이 아주 많습니다. 우리가 바라보기만 해도 꽃이 될 곳이 아주 많습니다. 우리가 바라보기만 해도 치유될 곳이 아주 많습니다. 우리가 바라보기만 해도 회복될 곳이 아주 많습니다.

우리 교회 중ㆍ고등부 학생들이 금요철야예배에 참석한 것을 칭찬하고, 그들을 향해 박수쳐주었더니 우리 교회 중ㆍ고등부가 부흥하고 있습니다.
칭찬하고 박수쳐주는 것은 그들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중ㆍ고등부 학생들이 꽃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한국 교회에 내놓을 만한 우리 교회의 자랑입니다. 대한민국의 어디에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겠습니까. 놀라운 광경입니다.

집에서도 서로 축복해보세요. 남편이 아내를 축복하고, 아내가 남편을 축복해보세요. 부모는 자녀를 마음껏 축복해보세요. 마음에 들지 않아 아이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누르고, 오히려 자녀를 축복해보세요.

야고보서 3장에 보면,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약 3:10). 어떻게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올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의 입에서는 축복만 나와야 합니다. 우리의 입에서 축복이 나가지 않으면, 세상은 축복을 알 수 없습니다.

야고보서 3장 11절에 보면,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는 축복만 말할 책임을 가진 사람입니다.
축복을 받은 사람은 얼굴이 달라집니다.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면, 다시 살아날 곳이 아주 많습니다.

우리의 사명은 축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우리의 입으로는 험담을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축복해야 합니다. 비관적(悲觀的)으로 말해서도 안 됩니다.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는 축복해주어야 합니다. 비관적이고 부정적이고 절망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민족과 교회를 향해, 주변의 어두운 곳을 향해 축복해야 합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는 관심을 가져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을 들어 축복할 사람들을 찾아 그들을 축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을 축복하는 것은 우리의 최고 사명입니다.
세상의 불행은 관심을 받지 못하고, 소외감 속에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집 안에서도, 가족 사이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서로 바빠서 서로를 깊이 바라볼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마음이 병듭니까? 관심 받지 못하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동물과 식물도 관심을 받지 못하면 죽습니다. 그런데 관심을 쏟으면, 식물에서 빛이 납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사랑을 받고 주목받는 것이 축복입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필요한 것은 축복입니다. 바라봐주는 것입니다.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바라봐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것이 관심입니다. 그것이 이해입니다. 그것이 인정(認定)입니다. 그것이 축복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문제 때문에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지 못하고, 자신에게만 빠져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충분히 사랑을 베풀어주시고,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우리를 통해 축복이 사람들에게 흘러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너는 나에게 존귀한 존재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음성을 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기 스스로에게도 “너는 충분히 멋져.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괜찮은 존재야.”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축복해야 합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당신은 존귀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아름답고 멋진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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