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감사충만한 인생

말씀 : 대상29:10~17

1.감사가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미국의 유명한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라는 여성이 있습니다. 이 분은 1954년에 미시시피 주의 어느 시골에서 사생아로 태어나서 외할머니, 어머니, 아버지 손을 전전하며 상처투성이로 자랐습니다. 그녀는 심지어 9살 때 친척에게 성폭행을 당했고, 역시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14세에 아이를 출산했는데 아이는 2주 만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그 충격으로 가출하여 마약을 복용하며 한동안 지옥같은 삶을 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고통 속에서도 끝내 주저앉지 않고 다시금 일어나 눈물을 흘리며 성경을 읽으며 위로를 받고 희망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학교에 들어가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며 책을 많이 읽는지 선생님이 더 좋은 학교의 장학생으로 추천해 주어서 좀 더 좋은 학교에서 공부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한편으로는 열심히 성경을 보고 다른 한편으로는 열심히 공부하여 대학을 나오고 박사과정을 마치고 1983년에 시카고에서 시청률이 제일 낮은 에이엠 시카고(AM Chicago)라는 토크쇼의 진행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이 프로를 맡은 지 한 달 만에 이 프로그램이 시카고에서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 되었고 그러자 이 토크쇼를 아예 ‘오프라 윈프리 쇼’로 바뀌어 전국적으로 방영되자 미국 전역에서 가장 인기있는 프로그램이 되어 전 세계 140여개 나라로 배급이 됨으로 세계적인 토크쇼가 되었습니다.

이 후로 그녀는 미국 뿐 아니라 세계적인 명사가 되어 1985년 미국 아카데미시상식 여우조연상, 2004년 유엔이 주는 올해의 세계지도자상, 2005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명사 100人 중 최고의 명사, 2010년 케네디센터 평생공로상, 2012년 아카데미 시상식 평생공로상, 2013년 포브스 지에서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유명인사 100인 중의 한 사람이 되는 등 그야말로 세계 최고의 명사 중 한명이 되었고 그러 사이에 재산도 불어나 7억 달러가 넘는 억만장자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녀는 어떻게 이렇게 불우한 처지를 이기고 세계적인 명사가 되었습니까? 세가지 정도를 볼 수 있습니다. 우선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녀는 절망 중에서도 성경을 읽으며 위로를 받고 희망을 찾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공부입니다. 그는 그 서러운 처지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이를 악물고 공부했던 것입니다. 남보다 몇 배 더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감사였다고 합니다. 그녀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몇 년동안 방황하긴 했지만 다시 시작하며 감사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를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고 수치스럽게 하던 모든 기억들을 지워버리고 그래도 그런 가운데서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미움과 원망과 절망이 점점 사라지고 열심히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녀가 계속해서 과거의 상처와 아픔과 미움 속에 빠져 있었더라면 그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점점 더 깊은 절망의 늪 속으로 빠져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로 방황을 바꾸고 열심히 노력한 결과 세계적인 명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감사의 습관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그녀는 그 바쁜 일과 중에서도 매일 하루 일과를 마치고나면 감사한 일 다섯가지를 적으며 감사를 드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세계적인 명사가 되었음에도 그녀의 감사의 조건은 그렇게 대단한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그녀가 적어 놓은 감사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①오늘도 거뜬하게 잠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②오늘은 유난히 눈부시고 파란 하늘을 볼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③오늘 점심때 맛있는 스파게티를 먹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④오늘 얄미운 짓을 한 동료가 있었는데 잘 참고 화내지 않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⑤오늘 책을 한권 읽었는데 너무 좋은 책을 써준 작가에게 감사합니다.

여러분, 여기서 생각할 것은 감사 거리는 그렇게 먼데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감사거리는 항상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모든 것들이 감사거리인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런 느낌도 없이 그냥 당연히 그런 것처럼 생각하는 것들이 실상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안 그렇습니까? 오늘 하루 살아 숨 쉴 수 있다는 것도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오늘 아무 걱정 없이 밥 한 끼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오늘 하루 일과를 마치고 편히 누워 쉴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누군가 함께 앉아 밥을 먹고 이야기를 하고 잠을 자며 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길을 가다가 국수 한 그릇 사먹을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합니까? 목마를 때 물 한 모금 마실 수 있다는 게 정말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렇게 마음껏 숨쉴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더군다나 오늘 이와 같이 우리가 마음껏 모여서 예배드릴 수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더 감사한 일입니까? 영원한 천국이 보장되어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더 감사한 일입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받은 바 은혜는 죽을 때까지 말해도 다 못할 만큼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살전 5:18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성도와 이웃과 교회와 국가와 회사와 동료와 공무원과 농사짓는 분과 장사하시는 분과 여하튼 모든 사람에게 감사하고, 모든 환경에 감사하고, 밥 한 그릇에 감사하고, 냉수 한 모금에 감사하고, 숨한번 쉬면서 감사하고, 따뜻한 잠자리에 감사하고, 일어날 때 감사하고 그저 앉아도 감사 서서도 감사 집에서도 감사 나가서도 감사 우리 곁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이 감사거리를 생각하며 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감사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로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런 감사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2.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인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료로 주셔서 마음껏 누리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을 지을 예물 드리기를 마친 다음에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 장면 중 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 앞 부분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린 예물들이 나타나 있는데 그 중 3,4절에 보면 다윗은 개인의 사유의 금 3천달란트와 순은 7천달란트를 드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금 3천달란트와 은 7천 달란트는 지금 돈으로 따지면 몇십조원 되는 천문학적인 액수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렇게 엄청난 예물을 드리면서 감사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금덩이를 주셔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금덩이를 드리고 너무 너무 감사해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렇게 드리면서 감사할 수 있었습니까? 좀 길지만 1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한마디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비록 왕이 되어 많은 것을 누리게 되었어도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고 하나님께서 주셨고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셨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그 동안 누린 것이 감사하고 기쁜 마음으로 드릴 수 있는 믿음과 마음을 주신 것이 감사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이 고귀한 일에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 감사하고 그저 모든 것이 감사해서 영광과 찬양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 것 중에서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어디 있습니까? 모두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공짜로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내 생명과 몸과 마음과 시간과 재능과 지혜와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거저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모든 삶의 터전들을 공짜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내 생명을 유지하며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을 무료로 공급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다윗은 그걸 알았던 겁니다. 그래서 그것을 누릴 수 있고,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게 하신 것에 대하여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정말 이 사실을 인정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지혜를 짜내고 일을 하고 공부를 하고 뛰어 놀고 숨을 쉬고 밥을 먹고 놀고 하는 그 모든 것 중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도 공짜로 그냥 주신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면 수백억조도 넘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잊지 말고 하나님께 정말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절대로 모든 것이 자기 것인 양, 자기 힘과 지혜로 된 것인양 여기며 살아가는 그래서 감사할 줄도 모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도 못하는 어리석은 인생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 몸, 내 생명, 내 시간, 내 재능, 내 능력, 내 지혜, 우리가 밟고 살아가는 땅, 숨쉬는 공기, 마시는 물, 따뜻한 태양, 쉴 수 있는 집, 먹는 밥,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온전한 신앙고백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게 해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은총과 능력과 기쁨을 더욱 충만하게 누리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주님께 드리면서 감사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고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면 우리는 마땅히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진정 감사함이 있다면 드림도 늘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이 엄청난 것들을 주셨는데 어떻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고, 이렇게 받은 바 은혜가 큰 줄을 알고 감사드린다면 어떻게 드리지 않고 배길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오늘 14절을 보겠습니다.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나와 백성 즉 우리들 모두는 너무나 부족한 존재인데 우리가 무엇이기에 이 많은 것들을 주셨습니까? 하면서 정말 감사와 기쁨으로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지금 엄청난 예물 들을 드리면서 이 모든 것이 주님께서 주신 것임을 고백하면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어마어마한 예물을 드리면서 그저 주님의 손에서 받은 것을 바쳤을 뿐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코 내 것을, 내가 노력하고 힘써서 벌은 것을 바쳤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주님의 손에서 받은 것을 바쳤을 뿐이라고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것을 바쳤을 뿐이니 그 많은 것을 주셨으니 감사할 뿐이요, 그걸 그동안 내가 누릴 수 있었던 것이 감사할 뿐이요, 그걸 드릴 수 있는 믿음을 주셨으니 감사할 따름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기억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주님이 주신 것이라는 것을 알면 정말로 기쁨으로 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 많은 것을 주셨는데 어찌 감사가 없겠으며, 그런 감사가 있을 때 어찌 기쁨으로 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 우리가 정말 주님을 사랑한다면 어찌 기쁨으로 드리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는 얼마나 기쁨으로 자녀에게 줍니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얼마나 감사와 기쁨으로 줍니까? 그렇다면 주님에게는 어떻겠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신 분이십니다. 천지만물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들을 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당신의 생명마저도 내어 주셨습니다. 그것도 십자가의 그 끔찍한 저주받은 죽음을 당하시기까지 하시면서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건져주시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을 얼마나 더 소중히 여기고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고 사랑해야 하겠습니까? 그렇게 사랑한다면 얼마나 기쁜 마음으로 주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이 주는 기쁨을 맛보며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사랑한다며 줄 수 밖에 없고 주면서 너무너무 기쁘고 행복하게 됩니다. 안 그렇습니까?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얼마나 기쁨으로 줍니까? 주면서 얼마나 행복합니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얼마나 기쁨으로 줍니까? 주면서 얼마나 행복합니까? 그러면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얼마나 기쁨으로 드리겠으며, 드리면서 얼마나 행복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받는 게 행복합니까? 주는 게 행복합니까? 물론 받는 것도 행복합니다. 그러나 주는 것이 더 행복하고 몇 배 더 기쁩니다. 줄 수 있을 때 자신이 자랑스러워집니다. 뿌듯해집니다. 자부심과 긍지가 생깁니다. 자신이 자신을 보아도 웬지 흐뭇해집니다. 또한 다른 사람도 기쁘고 행복하게 합니다. 더구나 주님께 드리는 것은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립니다. 주님의 역사를 이룹니다.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는 너무나 귀한 도구가 됩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하고 귀하고 영광스럽고 복된 일입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우리가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요, 더구나 우리 주님은 당신의 그 고귀한 생명까지 바쳐서 우리에게 영생복락을 주셨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정말로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감사와 기쁨으로 드리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고 여러분 자신도 정말 더욱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정말 감사하면 정직하게 드려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안다면 감사와 기쁨으로 드려야 하는데 드릴 때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정직하게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17절을 보겠습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마음을 감찰하시고 정직을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내가 정직한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즐거이 드렸사오며 이제 내가 또 여기 있는 주의 백성이 주께 자원하여 드리는 것을 보오니 심히 기쁘도소이다.”

다윗은 지금 엄청난 예물을 드리면서 정직한 마음으로 즐거이 드렸다고 했습니다. 정직하게 드린다는 것은 원문의 뜻은 충만하게, 완전하게, 마음의 중심을 다해... 이런 뜻입니다. 즉 조금치의 거짓이나 불성실이 없이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해 온전한 마음으로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정말 마음과 정성과 믿음을 담아서 드리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정말 순수하게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내 생각이나 감정이나 환경이나 상황에 의하여 좌우되지 않고 진정 하나님께서 우리 내면에 들려주시는 그 음성을 따라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즉 진정한 정직이란 내 생각에 의하여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거짓이나 위선이나 변명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내 생각 처지 환경의 모든 주변적인 것들을 벗어던지고 다만 나와 하나님 사이에 일대일로 대면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음성에 겸손히 귀를 기울이고 그 뜻대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우리 심령 속에 들려주시고 요구하시고 권면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가감없이 솔직하게 내 생각이나 환경에 영향 받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내 생각을 첨부하거나 상황과 환경과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들을 첨부하게 되면 하나님의 뜻을 왜곡시키게 되고 그러면 마음과 정성을 다해 드릴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걸 잘 못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자꾸 하나님의 말씀에 세상의 다른 것들을 섞어서 혼잡하게 만듭니다. 특히 하나님께 드리는 문제에 있어서는 이런 왜곡과 혼잡이 심각합니다. 자기 편의대로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가치 기준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받을 것은 크게 생각하고, 드릴 것은 적게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할 일은 내 믿음과 형편보다 더 많이 하고, 하나님께 대하여 할 일은 내 믿음과 형편보다 훨씬 작게 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반대로 해야 합니다. 부족한 것은 적게 생각하고 감사할 것은 크게 생각해야 합니다. 받아야 할 것은 적게 생각하고 드려야 할 것은 크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럴 때 마음이 넉넉해지고, 인생이 풍요로워 지고, 진정 자유하게 되고, 감사가 넘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정직한 자의 신앙의 고백이며, 그럴 때 그 인생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 자랑스러운 인생이 되며 잘했다 칭찬받으며 은혜의 풍성함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정말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총을 기억하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이 주셔서 누리게 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기쁜 마음으로 드릴 줄 아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진정한 자유인이요 부요한 인생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며 주님의 은총을 충만하게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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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영성(시100:1-5)  


제 목 : 감사의 영성

말 씀 : 시100:1~5

1.자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현대를 ‘더(more)의 시대’라고 합니다. 더 많은 돈, 더 좋은 직장, 더 좋은 차, 더 좋은 집, 더 많은 지식, 더 날씬한 몸매, 더 젊고 예쁜 얼굴 등등 현대인들은 끊임없이 ‘더, 더, 더’ 타령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더 더 더’가 언제 나오는 소리인지 아십니까? 음주 측정할 때 하는 소리입니다. 술 먹은 사람은 어찌하든지 음주측정기를 안 불려고 하지요. 어쩔 수 없이 불때도 알콜 농도가 적게 나오게 하려고 살짝 불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경찰 아저씨가 더 불라고 더 더 더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더 더 더와 음주측정 할 때 더 더 더는 좀 다른 차원의 더더더이긴 합니다만 여하튼 ‘더, 더, 더’하는 소리는 결코 좋은 소리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건 뭔가 모자란다는 뜻이거든요. 뭔가 모자라니까 자꾸 ‘더 더 더’하게 되고 그렇게 자꾸 더더더하다보면 결국 감사도 기쁨도 은혜도 누리지 못하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시기와 질투와 원망과 불평과 갈등과 싸움을 유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사람들이 자꾸 더 더 더 하며 살아가니까 많은 것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행복하지 못한 것입니다. 옛날에는 쌀밥만 먹을 수 있어도, 아니 때로는 죽이라도 한 그릇 먹을 수 있으면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정말 멋지고 근사한 곳에서 진수성찬을 먹으면서도 감사 할 줄을 잘 모릅니다. 오히려 맛이 있네 없네 하면서 타박을 하기가 일쑤입니다. 또 옛날에는 자전거만 타고 다녀도 얼마나 근사했는지 모릅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 우리 집 앞 신작로로 한 멋쟁이 신사 아저씨가 삐까뻔쩍 빛나는 신사용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곤 했는데 저는 그게 얼마나 멋있어 보였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지금은 좋은 자가용을 타고 다녀도 감사가 없고 더 좋은 것을 바라봅니다. 옛날에는 초가삼간에 살아도 먹을 것만 있으면 행복했었는데 지금은 30평 40평 50평 호화주택에 살면서 만족하지를 못합니다. 여러분, 얼마나 바보 같은 일입니까?

여러분, 우리는 이런 바보같은 인생이 되면 안됩니다. 우리는 작은 일에도 감사하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적은 것을 가지고도 주어진 것에 행복할 줄 아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자꾸만 더 더 더 하는 인생은 아무리 많은 것을 주어도 늘 불만 불평 속에서 자신도 불행하고 남도 불행하게 만들고 하나님 마음도 아프게 하는 어리석은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딤전6: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보십시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 알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우리가 받은 바 은혜가 얼마나 많은 지를 되새겨보며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려고 하는데 오늘 말씀을 함께 되새겨보며 저와 여러분은 작은 것에서부터 감사할 줄 아는 삶을 통하여 자신도 행복하고 남도 행복하게 만들고 하나님도 기쁘시게 해드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교회 안에 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감사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지만 뭐니뭐니해도 우리가 지금 교회 안에 앉아 있다는 것만큼 감사한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교회 안에 앉아 있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여러분, 보십시오. 감사함으로 그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그 문이란 물론 성전 문입니다. 즉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성전으로 들어갈 때에 큰 감사와 기쁨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이 교회 문을 드나들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가 예수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 찬양하며 이 땅에 사는 동안에서 주님의 주시는 생명의 은총을 누리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특권을 갖게 되었다는 것, 이보다 더 감사하고 기쁘고 행복하고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 여기에 교회가 세워지지 않았으면 어쩔 뻔 했습니까? 교회가 세워졌어도 우리가 마음이 완고하고 강퍅해서 복음을 거부했다라면 어쩔 뻔 했습니까? 그러면 영원한 고통가운데 처할 수 밖에 없었던 비참한 인생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예수님을 알고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얻어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얼마나 다행스럽고 감사하고 영광돌리고 찬양해야 할 일입니까?

제가 제법 오래 전에 대구의 한 큰 마트 같은데 들어갔다가 물건을 좀 사 가지고 계산을 하려고 하는데 회원권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없다고 하니까 여기는 회원권이 있어야 물건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으로 ‘야, 이 놈들아 물건만 팔면 되지 무슨 얼어 죽을 회원권이냐? 회원권 없으면 내 돈 주고 물건도 못 사냐?’ 그러고 그냥 놔 둬 버리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좀 창피하기는 했습니다.

즉 세상에서도 뭔가 그럴듯한 곳에 들어가려면 출입증이나 회원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청와대나 안기부나 기타 중요한 공공 기관은 물론 말할 것도 없고 지금은 웬만한 큰 회사에도 들어가려면 출입증이 있어야 되고, 무슨 큰 아파트에도 들어가려면 무슨 카드 같은 게 있어야 들어가고, 골프장이나 기타 그럴듯한 곳에 다니려면 회원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너무나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의 출입증이 있는 것입니다. 영광의 나라의 시민권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사실 따지고 보면 별 것도 아닌데 뭐 좀 잘난 곳에 들어가려면 돈을 내든지 무슨 시험을 치든지 뭐 이것 저것 따져 묻고 난린데 하나님께서는 그저 우리 믿음 하나 보시고 천국 출입증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시민권을 내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세상의 무슨 출입증, 허가증, 회원권 그까짓 별거 아닙니다. 그런 것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뭐 대단한 특권이라고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여길지 모르지만 그래서 뭐 얼마나 행복하고 기쁘고 영광스럽겠습니까? 까짓것 하루 아침에 다 다 날아갈 것들인데.. 그것만 믿고 까뿔다가는 영원한 진노가운데 처할 수 밖에 없는데..... 그러나 천국 시민권은 완전히 다릅니다. 우리에게 완전하고 영원한 영광과 기쁨과 평안과 소망을 보장합니다. 그 어떤 어둠의 세력으로부터도 완전히 보호해 줍니다. 그야말로 완전하고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보장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초특급 출입증, 허가증, 시민권을 가지고 있으니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주님의 몸된 교회 안에 들어와 앉아서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영광 돌리고 할 수 있는 이 일이 얼마나 굉장하고 대단하고 영광스러운 일인지를 늘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우리를 길러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선 감사할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이고, 다음에 감사할 것은 좋으신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께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 뿐 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도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풍성하게 채워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3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시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는 하나님의 이름이고 하나님은 신, 전능자라는 뜻입니다. 즉 여호와만이 유일하시고 전능하신 참 신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전능하신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예비해 주시고 인도해 주셔서 우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시고 기르시는 주인이고 우리는 하나님의 어린양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과 베풀어 주시는 은총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유일한 창조주이시며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분으로 하나님께 지으시지 않고는 우주만물을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과 때를 따라 채워주시는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단 한순간도 살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셔서 존재하고 나아가 생명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심으로 존재가 가능한 것입니다. 먹고 입고 잠자고 쉬고 활동하고 하는 모든 행위가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좋은 옷에 좋은 집에 좋은 차에 좋은 것을 먹으며 살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물론 우리도 힘써서 일 했지만 우리가 힘써 일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생명도 지혜도 능력도 없습니다. 숨조차 쉴 수 없습니다. 아무리 뼈 빠지게 일해도 태양과 물을 주시지 않으면 도로 아미타불입니다. 땅이 없으면 헛일입니다. 그러니 어찌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반포지효(反哺之孝)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까마귀가 어미가 늙으면 다 큰 새끼들이 먹이를 먹고 돌아와서는 도로 뱉어서 어미에게 먹여 준다는 데서 유래되었습니다. 이 말이 사실인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까마귀는 어미새가 늙어 힘이 없어 스스로 먹이를 구할 수 없게 되면 다 자란 어른이 된 새끼 새가 먹이를 잡어 먹고 와서 도로 뱉어서 어미의 입에 넣어 준다고 합니다. 이게 반포(돌이킬反, 먹일哺)입니다. 먹었던 것을 도로 뱉어서 먹여준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새끼가 먹었던 것을 도로 뱉어 어미 새에게 먹여줄 만큼 지극 정성으로 부모님을 섬기는 반포지효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한갓 미물에 불과한 까마귀도 이렇듯 부모를 섬길 줄 아는데 인간이 부모님을 섬길 줄 모른다면 미물인 까마귀만도 못한 인간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하나님께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 육신의 생명을 주시고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고 성장해서 스스로 살아갈 수 있을 때까지 온갖 사랑과 수고와 희생을 아끼지 않으신 부모님도 당연히 정성으로 섬겨야 하지만 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우리를 직접 창조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고 생활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께는 얼마나 더 그래야 하겠습니까?

여러분, 사실 육신의 부모는 어느 정도 성장하면 우리 곁에 계시지 않아도 우리가 살아가는데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육신의 부모는 우리가 다 성장할 때까지만 키워주시면 그것으로 의무를 다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성장을 하고 백살 천살 만살이 되어도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과 은혜가 없이는 단 순간도 살 수 없습니다. 그러니 육신의 부모에게 감사하며 섬기는 것이 인간의 마땅한 본분이라면 모든 인류와 우주만물의 아버지가 되시는, 우리가 살아 숨쉬는 모든 동안에 아니 지금 여기서 살아 있는 동안만 아니라 영원한 천국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께는 얼마나 더 감사하며 극진히 섬겨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물론 육신의 부모님께도 감사드리며 잘 섬기시되 특별히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며 우리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필요한 모든 것을 만들어주시고 섭리하심으로 이와같이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하신 하나님께 진정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더욱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음을 감사하고, 동시에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하는데 그러나 감사할 것이 그 뿐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사람에게도 감사하고, 동물에게도 고마워해야 하고, 식물에게도 고마워해야 하고 그밖에 땅, 태양, 물 등 우리 주변의 모든 것에 고마워해야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모두가 얼마나 고마운 존재들입니까? 사랑하는 가족이 얼마나 고맙고 소중한 존재입니까? 가족이 없으면 얼마나 삭막하겠습니까? 아니 가족이 없으면 내가 있지도 못하지요. 또 이웃도 얼마나 고맙고 소중한 존재입니까? 내 주변에 이웃이 하나도 없으면 얼마나 적막하겠으며, 무엇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비록 혹시 사람들 보기에 번듯하지 못하다해도 직장이 얼마나 고마운 존재입니까? 우리가 매일 아무렇지도 않게 먹는 밥은 얼마나 고맙습니까? 마시는 물은 얼마나 고마운 존재입니까? 어디 가다가 음식 한 그릇 사먹을 때 그 식당이 얼마나 고마운 존재입니까? 좀 그렇긴 합니다만 심지어 화장실에 앉아 마음 놓고 볼일을 볼 수 있는 것도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여러분, 우리는 이와같이 감사의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감사의 습관을 가진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감사의 습관은 자신도 기쁘게 하고 남도 기쁘게 합니다. 그래서 건강과 행복도 가져다 줍니다. 긍정의 에너지를 발산함으로 힘차게 능동적으로 일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러나 불평의 습관은 자신도 남도 어둡게 만듭니다. 부정과 어둠의 에너지를 방출하여 자신도 힘들게 하고 남도 힘들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살전5:16~18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보십시오. 항상 기뻐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유는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우리가 얼마나 놀라운 은총 속에 살고 있는지 다시 한번 기억하며 정말 감사의 영성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의 자녀가 되어 이와 같이 마음껏 주님의 몸된 교회를 출입하며 예배드리며 영광을 돌리며 주님의 은총을 누리고 있음에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은총임을 되새기며 우리를 길러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인도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또한 여러분의 가족과 이웃과 동료와 친구와 여러분 곁의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 주변의 모든 물건들에게까지도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대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심령이 그야말로 감사로 넘쳐날 때에 기쁨과 평안과 행복이 가득하고 주께 영광을 돌리고 세상에 행복을 가져다주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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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절설교 /  감사의 축복(잠3:9,10) 


말씀 : 잠3:9,10

제목 : 감사의 축복

여러분, 전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가 어느 나라인지 아십니까? 바로 대한민국입니다. 세계적으로 공신력을 가지고 있는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전 세계 나라를 대상으로 치안상태를 조사했는데 우리 대한민국이 100만점에 83.1을 기록하여 1등이고 그 다음에 싱가폴, 카타르, 일본 등이고 서유럽이나 미국은 6,70점대에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아프리카나 남미 지역은 2,30점대가 수두룩하고 가장 치안이 불안한 나라는 베네수엘라인데 15점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83점으로 당당히 1등입니다. 한마디로 가장 안전한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범죄율은 가장 낮고 범인 검거율은 1위라고 합니다. 그래서 밤 늦은 시간에도 밤거리를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나라, 술에 취해 길바닥에 누워 있어도 안전한 나라, 식당이나 편의점이나 심지어 술집에서도 휴대폰이나 카메라를 두고 나와도 누가 가져가지 않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저도 제법 오래전에 제 스마트폰을 식당에 두고 왔는데 사모님에게 전화가 왔더라고요. 폰 두고 가지 않았느냐고.... 제 폰에 저장 되어 있는 아내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해 준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나라는 어림없다는 것입니다. 술에 취해 길거리에 누워 있으면 어떻게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뭐 좋은 현상은 아니지만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술에 취해 밤거리를 혼자 돌아다니거나 길거리에 누워있는 것을 보며 저 사람 저러다가 무슨 봉변을 당하려고 저라나 싶어서 깜짝 놀란다는 것입니다.

여하튼 여러분, 우리나라 좋은 나라입니다. 치안상태만 좋은 게 아닙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얼마나 자유와 평화가 보장 되어 있습니까? 얼마나 풍요로습니까? 올해도 농사가 대풍이어서 올해 쌀생산량이 약434만톤으로 최근 6년간 최고의 풍작이라는 것입니다. 해마다 풍년이라 쌀이 남아돌아 정부 창고에 쌓여 있는 쌀이 140만톤이나 되어 처치 곤란이라는 것입니다. 또 요즘에는 우유가 남아돌아 난리입니다. 그래서 젖소 수를 줄이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젖소를 도축하고 그래도 안되어 분유를 만들어 처리하는데 분유 재고가 쌓여 난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행복한 고민입니까? 어느 나라를 먹을 게 없어 난린데 우리는 남아돌아서 난리인 것입니다.

뭐 그밖에 감사할 것을 따지자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우리나라 60년대의 1인당 국민소득이 100불도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2만8천불 약300배나 부자가 되었습니다. GDP 그러니까 국민총생산량이 세계 11위입니다. 게다가 이렇게 마음껏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나라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적으로 완전히 안정되어 있고 풍요롭고 자유와 평화를 마음껏 누리는 나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감사하여 사시기 바랍니다. 혹시 남보다 많은 것을 가지지 못했다해도, 혹 힘든 일이 있다해도 그래도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가지고 누리고 있고 게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까지 주어져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오늘 추수감사주일인데 추수감사주일은 바로 그런 절기입니다. 비록 때때로 어렵고 힘든 일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 귀하고 복된 삶의 터전을 주신 하나님,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건져주신 하나님, 그래서 이렇게 자유와 평화와 풍요로움을 누리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려드리고 우리도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로 채워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좀더 구체적으로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1.구원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게 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렇게 일부러 추수감사주일을 제정해 두시고 이를 지키며 살라고 하신 이유는 그렇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에 구원의 기쁨과 능력을 확실하게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시50:23절을 보겠습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사람에게 구원의 은총을 마음껏 누리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당연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일단 하나님의 은혜를 알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과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를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까지 보내주시고, 예수님은 나 같은 것이 무엇이기에 나 같은 것을 위하여 십자가의 그 처절한 고통을 당하시고 돌아가셨습니까? 그 놀라운 사랑으로 저 흉악한 마귀사탄의 권세에서 해방되고, 사망과 지옥의 권세에서 해방된 것을 생각할 때에 어찌 기쁘지 아니하며 어찌 감사 찬양하지 않으며 어찌 영광을 돌리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고 찬양하고 영광 돌리며 살아가면 어떻게 됩니까? 물론 당연히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받은 은혜를 생각할 때 기쁨과 소망이 넘치게 됩니다. 그렇게 구원의 은총과 감격가운데 살다보면 당연히 세상의 별 것 아닌 것들에 대한 욕심과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게 됩니다. 또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볼 때에 세상의 환경과 상황을 이기게 됩니다. 무슨 원망 불평 미움 질투 시기 따위를 하지 않게 됩니다. 이렇게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참된 평안과 소망과 기쁨 속에 살게 됩니다.

이게 바로 구원의 은총을 누리는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원의 은총을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릴 때 하나님께서 더욱 믿음과 은혜와 사랑과 기쁨과 능력으로 채워주심으로 그 삶에 더욱 생동감이 넘치고 힘이 넘치는 것입니다. 기쁨과 위로와 소망이 넘치는 것입니다. 돈과 상황과 환경과 조건에 얽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의 욕심과 욕망과 시기에 빠지지 않습니다. 절망과 한탄 따위는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더욱 큰 은혜와 믿음과 능력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으로 넘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더욱 감사가 넘쳐나고 얼굴에는 기쁨이 넘쳐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녕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소유한 자로서 이 땅에서의 천국을 마음껏 맛보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16:11절에서는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며 살아가는 사람에게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있습니다. 감사하면 할수록 점점 은혜가 넘치고, 감사하지 않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낙심하고 절망하면 할수록 은혜는 점점 멀어집니다. 아니 원망하고 불평하면 있는 것까지 빼앗아 갑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자녀나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주었을 때 정말 감사하며 그것을 잘 사용해서 자신도 행복하고 남에게도 행복을 주며 산다면 준 사람이 얼마나 마음이 뿌듯하겠습니까? 그런 사람에게 얼마나 더 주고 싶겠습니까? 그러나 맨 날 받기는 받는데 감사할 줄도 모르고 자꾸만 더 달라고만 하고 도리어 적게 준다고 원망과 불평을 하고, 준 것도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한다면 준 것이 얼마나 아깝겠습니까? 누가 그런 사람에게 더 주고 싶겠습니까? 아니 더 주기는커녕 주었던 것마저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주고 싶지 않겠습니까? 이건 제 이야기가 아니고 주님의 말씀입니다.

눅19:24~26절 보십시오.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 그들이 이르되 주여 그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 주인이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감사하며 그것을 잘 활용할 줄 알며 그래서 자신도 남도 기쁘게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도 너무 좋아서 더 많은 것을 맡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신 것에 감사하지도 않고 올바르게 활용할 줄도 모르면서 자꾸 불평이나 하고 더 달라기만 하는 사람은 준 것도 아까워 주었던 것도 도로 빼앗아 감사와 기쁨으로 올바르게 사용할 줄 아는 사람에게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 이 자유와 평화와 안식을 주신 하나님, 게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까지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늘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아갈때에 하나님께서 더욱 큰 은혜와 기쁨과 평강으로 채워주심으로 여러분의 가정과 교회와 우리 사회가 더욱 은혜와 기쁨이 넘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능력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감사하는 자에는 하나님께서 큰 능력으로 채워주십니다. 감사하는 자는 세상을 이기고, 마귀사탄을 이기고 대적자들을 이기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감사가 뭡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아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과 은혜를 알고 감사하는 사람에게 어찌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어찌 능력있는 삶이 되지 않겠습니까?

대하20:21절을 보겠습니다.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이 말씀은 여호사밧 왕때에 모압과 암몬과 에돔족속이 연합군을 이루어 침공했을 때의 일로 이때에 여호사밧은 성가대를 앞세워 하나님을 찬송하며 감사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적국들이 자기들끼리 서로 치고 받고 싸우며 자멸해 버리고 이스라엘은 가만히 앉아서 엄청난 전리품만 취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했습니까? 찬송하며 감사할 때, 감사하며 찬송할 때...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상황이라도 오직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인도하심을 믿으며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맡기고 감사하며 찬양할 때 어찌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면 이기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해결하지 못할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여러분, 감사가 곧 믿음입니다. 감사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고백입니다. 감사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섭리와 인도하심에 대한 믿음입니다. 또한 이후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할 때에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임재하십니다. 그러면 당연히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약하고 부족한 것들과 모든 도전과 유혹과 모든 어둠의 권세와 기타 여러 가지 상황과 환경과 조건을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믿음속에서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인도하심을 믿고,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은총을 고백하며 감사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역사하심으로 그 은혜와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며 더욱 많은 은총을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물질적으로도 복을 받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사하는 사람에게 영혼의 복도 주시고 마음에 평안과 기쁨을 주시고 그러면 육신도 더욱 건강해 지고, 더불어 물질의 복까지도 주십니다. 그래서 감사하면 할수록 자꾸만 감사한 일이 넘치게 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사하는 사람에게 감사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주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하고 사랑받을 일을 만들어 주십니다. 기뻐하는 하는 사람에게 기쁜 일을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나 불평 불만하는 사람에게는 자꾸만 불평 불만할 일이 생깁니다. 원망하면 자꾸 원망할 일이 생깁니다. 미워하면 미워할 일이 생기고, 투덜거리며 투덜거릴 일이 생깁니다.

여러분,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도 한번 두번 안오면 자꾸 교회에 못 올 일이 생깁니다. 마귀사탄이 자꾸만 이래서 못가고 저래서 못가고 하면서 가지 못할 일만 보이게 만듭니다. 교회에 오려고 하면 꼭 일이 생깁니다. 그런데 사실은 교회 못 올 일이 생긴 게 아니라 얼마든지 교회에 올수 있는 상황인데 내가 교회에 가지 못할 상황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그렇게 보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교회에 열심히 오면 자꾸만 교회 갈 일이 생깁니다. 이래서 가야 되고, 저래서 가야 되고 그러면서 교회에 계속 가게 되는 것입니다.

헌금도 그렇습니다. 십일조헌금 감사헌금 한번 두번 안하다보면 자꾸만 헌금을 할 수 없는 상황처럼 보이게 됩니다. 이래서 할 수 없고, 저래서 할 수 없고... 그런데 실은 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 마귀에게 속아 내가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판단해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 점령을 앞두고 12명의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똑같이 가서 똑같은 장소를 보고 왔는데 10명은 거기 들어갈 수 없는 상황만 보았습니다. 이래서 못 들어가고 저래서 못 들어가고... 그러나 갈렙과 여호수아는 들어갈 조건만 보았습니다. 이래서 들어가고 저래서 들어가고..... 그래서 그들의 생각대로 되었습니다. 열명의 정탐꾼과 그들에게 동조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동안 실컷 고생만하다가 다 엎드러져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래서 들어가고 저래서 들어간다며 들어갈 조건만 헤아렸던 갈렙과 여호수아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자꾸 될 일을 찾아야 합니다. 자꾸 감사거리를 찾아야 합니다. 자꾸 사랑해야 할 일을 만들어야 합니다. 자꾸 교회에 올 일을 만들어야 합니다. 자꾸 헌금할 일을 만들어야 합니다.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양하고 사랑하고 주고 드리며 자꾸 복받을 일을 해야 합니다. 자꾸 은혜받을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 자들에게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더욱 풍성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왜요? 그게 믿음이니까요. 그게 하나님께 대한 신뢰니까요.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을 믿고 따르고 신뢰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자에게는 더 큰 은혜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9절,10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보십시오.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모든 재물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며 그것을 주신 것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요? 본래 하나님의 것이니까. 하나님께서 주셨으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것이니까, 내가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니까,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으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 주신다고 하였습니까? 네 창고마다 곡식이 가득찰 것이다.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칠 것이다. 농사가 잘되고, 곡식이 풍성하고, 장사가 잘되고, 직장에서 인정받게 되고 그래서 물질적으로도 넉넉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정말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면 하나님께 가장 중요한 것을 드릴 줄 아는 인생에게 어찌 복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늘 감사하며 사는 인생에게 어찌 복이 찾아들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 감사하죠. 부모님께 감사하죠. 이웃에게 감사하죠.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모든 사람들에게 대하여 감사와 기쁨과 은혜로 대하겠습니까? 또 얼마나 성실하게 일하겠습니까? 그러니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복을 받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지금까지 지켜주신 하나님, 아니 지금까지 살아 숨쉬는 동안 모든 은혜로 채워주신 하나님,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정말로 감사한다면 내게 있는 가장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며 영광과 찬양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축복거리를 하늘 곳간에 차곡차곡 쌓아올림으로 여러분의 삶에 더욱 은혜가 쌓이고 기쁨이 쌓이고 축복이 쌓여 생명의 기쁨이 넘쳐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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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설교 / 주님의 역사, 은총의 빛   

 

이사야 49장 1~6절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 평강이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2014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로운 역사의 문이 열렸습니다. 새 역사는 신앙인에게 주님이 이끄시는 역사, 주님이 계획하시는 역사입니다. 바울 사도는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었다”(엡1:11)고 했습니다. 주님이 이끄시는 역사 속에서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만나고 삽니다. ‘주님의 역사’는 ‘은혜의 역사’입니다. 세상의 역사는 ‘은혜 없는 역사’의 반복입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는 말씀이 있습니다. 은혜의 빛을 깨닫지 못하는 세상은 은혜 없는 역사의 반복입니다. 말씀에 의지하지 않는 시대, 믿음이 없는 시대, 죄의 본성을 따르는 악순환의 반복입니다. 이것을 멈추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주님의 은혜입니다. 1800년대 인물인 조지 뮐러는 ‘고아의 아버지’로 불렸습니다. 60년이 넘도록 1만명의 고아들을 보살피는 위대한 사역을 했습니다. 이 위대한 사역을 감당하는 단 한 가지 방법은 기도였습니다. 은혜가 메마른 이 세상에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오늘도 살아계십니다. 은혜 없는 악순환의 시대에도 우리에게 은혜의 빛을 비추고 계십니다. 주님의 역사에는 ‘은혜의 능력’이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 보시기에 영화롭게 되었으며 나의 하나님은 나의 힘이 되셨도다.”(사49:5)

주님의 역사 안에서는 나의 능력, 나의 생각, 나의 힘, 나의 명예, 나의 지혜로 살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만으로 사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연약할지라도 주님의 은혜 안에 있고자 한다면 은혜의 능력과 힘이 믿음의 자녀들에게 역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했을 때 역사를 봅시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라 광야의 메마른 사막이었습니다. 그들은 40년을 그곳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역사와 능력이 일어났습니다. 하늘의 만나를 먹이시고, 메추라기를 먹이시고, 반석에 생수를 내시고, 입히시고 돌보셨습니다. 광야같이 메마른 곳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은혜가 부어지고 주님의 은혜의 능력으로 사는 곳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우리가 광야에 놓인 것 같은 인생을 살면서도 불안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거센 폭풍처럼 세상의 방해가 일어나는데도 왜 마음은 평안할까요. 주님 은혜의 능력 덕분입니다. 주님은 은총의 빛으로 역사를 이끄십니다.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사49:6) 주님은 은총의 빛을 지금도 비추고 계십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믿음의 선진들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바라고, 믿음으로 증거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봤고, 증거로 얻었을까요. 주님의 은총의 빛입니다. 세상을 향한 주님의 은혜입니다. 은혜의 능력이 믿음의 선진들을 증거 받은 사람들이 되게 했습니다.

주님의 역사 가운데서 주님은 우리를 은혜의 빛의 증거자로 부르셨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은총의 빛, 생명의 빛을 우리에게 비춰주시고 승리하게 하심으로 주님의 역사를 이끄십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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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설교 /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복 있는 사람   

  

마태복음 5장 3절

10여년 전 단기선교팀을 이끌고 아프리카 케냐의 해안가 무슬림 지역을 방문했던 때였습니다. 아프리카는 물 사정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 해안가는 더욱 그렇습니다. 우물을 파도 얕게 파면 짠물이 섞여 있기 때문에 깊이 파야 해서 비용이 많이 듭니다. 그런데 무슬림 사원인 모스크에는 언제나 우물이 있습니다. 모스크에서는 이방인이나 이방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우물을 이용하지 못하게 하고, 무슬림들만 이용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무슬림 지역의 기독교인들은 바로 옆 모스크에 우물이 있어도 수㎞를 걸어가 물을 길어 와야 했습니다. 그 마을에서 우리가 전도를 시작하자 한 무슬림이 우리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알라는 이렇게 돈이 많아서 우리에게 우물도 파주고 한다. 그런데 너희가 믿는 예수는 가난해서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데, 무엇 때문에 그를 믿어야 하는가.” 이 말이 오늘도 제 귓전을 때립니다. 돈이 없는 가난한 예수는 아무것도 우리에게 해주지 못한 것인가. 가난하면 안 되는 것인가. 그런데 왜 예수님은 그렇게 가난한 말구유에서 태어나셨는가.

최근 한 선배 선교사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아프리카에 있었던 영적 부흥의 역사를 알았습니다. 아프리카 교회의 역사에도 선교사가 아니라 주민들 스스로 영적인 변화를 통해 부흥을 일으킨 시대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도 이 아프리카에 어느 대륙보다 큰 영적 부흥이 있고, 4억명 정도의 크리스천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선배 선교사께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가난했기 때문에 다른 것을 붙잡지 못하고 예수님만 붙잡을 수 있었다. 다른 것은 바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만 의지했다.”

가난이 힘들기는 하지만 그 가난이 우리의 인생과 삶을 진지하게 한다는 것을 저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고 삶의 진정한 가치를 알려고 하는 것이 가난함에 있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어느 인디언 추장이 미국 대통령에게 이런 조언을 했다지요. “어떻게 하늘, 그리고 땅을 팔고 살 수가 있을까요. 우리에게는 아주 이상한 생각입니다. 신선한 공기와 반짝이는 물은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을 팔 수 있습니까.” 세상에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존재할 때 아름다움과 고귀함을 유지하고 지킬 수 있습니다. 신앙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믿음도 돈으로 매겨보려 하는 우리의 어리석음 때문에 주님의 귀한 가르침마저 뒷전으로 밀리고 있습니다. 저는 무슬림의 말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이전에는 더 많은 재정을 이곳 아프리카에 쓰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재정만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저에게도, 저의 자녀에게도 그리고 아프리카 형제와 자매들에게도 돈으로 살 수 없는 예수를 제대로 전하고 싶습니다.

한국의 어느 시골 교회에서 수요예배를 드릴 때 그곳 목사님이 부르셨던 노래가 기억납니다. 지금도 그 노랫소리가 귀에 쟁쟁합니다. 그 노래를 부르며 울었던 그 시간을 기억합니다. “돈으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힘으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거듭나면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잘 생겨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지식으로 못가요 하나님 나라 거듭나면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이상윤 목사 (케냐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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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꿈꾸며 살아가야 할까?  믿음의 글  

 

마태복음 6장 19∼34절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요소가 무엇일까요? 상호 신뢰 없이는 살아가기 어렵지 않을까요? 그래서 우리가 사는 사회를 신용이 필요한 사회, 신용사회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현금보다 편리한 카드 사용이 일반화되기까지는 개인과 기업의 신용이 담보되어 있습니다. 신용이 무너지면 부도가 나고 파산하게 됩니다.

신앙생활도 같습니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출발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물어봅니다. “나를 정말 신뢰하느냐?” 살아계시며 전능하신 하나님, 나를 돌보시는 하나님으로 믿고 있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모든 일에 믿음이 없어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돌보심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이 먼저라고 말씀하십니다.

삶의 문제 대부분이 먹고사는 것과 관련된 게 아닐까요? 그러나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며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믿음 없는 사람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믿고 고백한다면 먹고사는 일에 얽매이는 삶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분의 뜻대로 살아갈까를 고민하며 구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것이 믿음이요, 하나님을 향한 의를 이루는 것입니다(창 15:6, 롬 4:3).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내게 가장 소중한 보물을 하늘에 쌓아 그의 나라와 의를 이루어 가길 원하십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내 마음이 있기에 나의 마음과 순종을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보물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도록 요청하십니다.

먹고사는 문제에 사로잡혀 보물을 땅에 쌓아두는 어리석은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의를 이루어가는 믿음의 사람이 됩시다. 내가 무엇을 바라보며 꿈꾸는가에 따라 보물의 위치가 결정됩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라 하십니다. 눈이 나쁘면 어둠이요,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입니다. 무엇을 보며 꿈꾸는가에 따라 내 몸이 밝기도 하고 어둠에 갇히기도 합니다. 먹고사는 문제에 마음을 빼앗기면 온몸이 어둠에 갇히며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온몸이 밝을 것입니다.

모세는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더 큰 재물로 여겨 상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히 11:26). 모세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민족의 지도자로 출애굽의 큰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우리도 눈을 들어 하늘의 소망을 바라보며 상 주시는 하나님을 소망합시다(빌 3:14). 우리의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온 몸이 밝아 어둠을 몰아낼 것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음같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내게 있어 보물은 무엇인가요? 출세입니까? 돈 명예 권력입니까? 나를 입히시고 먹이시며 필요를 채우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나의 아버지로 믿고 보물을 하늘에 쌓아봅시다.

내 삶의 모든 것을 드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이 우선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내 삶의 주인이 출세나 돈이나 명예와 권력과 같은 먹고사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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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설교 / 예수가 빛이다  
 

마태복음 4장 12∼23절

이사야서의 전체적인 배경은 ‘흑암’과 ‘어둠’입니다. 이사야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쳐올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흑암과 어둠은 절망을 의미합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을 ‘절망하는 존재’로 규정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실존하는 인간,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제외한 모든 인간’은 절망합니다.

‘믿음 없음’이 곧 절망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모두 절망합니다. 절망은 곧 죄입니다. 이사야서에서 말하는 흑암과 어둠은 믿음 없이 절망 속에서 허우적대는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이사야가 이들에게 비쳐올 것이라고 예언한 빛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가장 먼저 “빛이 있으라”(창1:3)고 하셨습니다. 그 빛으로 어둠을 밝히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의 말씀을 보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그 하나님께서, 그 로고스(말씀)께서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생명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 빛이 비치는 곳마다 생명이 싹트게 하는 참 생명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이 캄캄하고 공허하고 절망적입니까.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정치 지도자들이 미덥지 못하거나 범죄자들이 들끓어서인가요. 주머니 사정이 좋아지지 않아서인가요. 그런 것도 한몫하겠지만 근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삶에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우리 삶의 밝기는 달라집니다. 흑암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십니까. 우리의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다른 대안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우리의 빛이고 소망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이 기록돼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셨고, 부름을 받은 제자들은 예수를 따라갔습니다. 여기서 ‘따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가르치셨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고 병들고 약한 자들을 고치셨습니다. 그로 인해 예수님께서 가는 곳마다 수많은 무리들이 따라다녔습니다. 하지만 이후 수많은 무리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는 성난 군중이 됐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이 돌변한 이유는 십자가의 길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것은 십자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가 교회 위에 뿌려졌습니다.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잔인함은 흑암이라 말할 수 있으나 그들의 순교는 결코 흑암이 될 수 없습니다. 고난 속에 감춰진 십자가의 영광이며, 그 영광의 빛은 지금까지도 우리를 강하게 비춥니다. 진정한 영성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순교한 이들의 삶 속에서 빛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그 빛을 발했던 것처럼 말이죠.

우리는 지금 예수님이 생명의 빛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주현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마4:16)는 말씀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킬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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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회설교 / 어두운 시대의 희망  


 

사무엘상 3장 1∼10절

선민사상이 투철한 이스라엘 민족은 지금도 자기의 나라를 부를 때 거룩한 땅(Holy land)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다른 나라보다 그 땅이 기름지고 윤택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나라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나라라고 해도 실상 성지 순례에서 살펴본 바로는 의문점이 남기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기네 땅을 거룩한 땅이라 칭합니다. 왜 그럴까요? 여기에는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비록 눈에 보이는 땅은 불완전한 요소가 많아도 하나님께서 약속한 축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셨다는 이런 신앙의 기초 위에 나라가 세워지고 민족의 공동체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약속의 땅에서 말씀대로 살면 복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 말씀이 곧 형통이요. 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보이지 않는 시대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희귀해졌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에 희망을 볼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와 같이 소망이 없는 시대라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소망을 주시려고 아이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아이 사무엘이 부름 받은 시대는 먼저 경제적으로 풍요를 구가하던 시대였습니다. 여인들은 포도주에 취하고 제물을 드리는데 황소 한 마리를 드릴 수 있었던 점을 보면 이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는 또 도덕적인 질서가 파괴된 시대였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처럼 성적으로 타락하여 여자들은 성소에서 주정하고 뇌물 받고 ‘무전유죄’ ‘유전무죄’의 재판이 횡행하는 시대였습니다.

또 군사적으로는 주변 나라들로부터 끊임없는 침략의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었던 시대였습니다. 종교적으로는 엘리 제사장에게서 보는 대로 늙고 무기력하였습니다. 어려운 시대에 제사장이 하나님의 정의를 바로 선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안일하게 자신의 편안함만 추구하였기에 더 이상 희망을 기대할 수 없는 시대였습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오늘 이 땅도 많은 문제를 안고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정치적으로 이념대결이 심화되어 있고 경제적으로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에 불균형이 심각합니다. 더구나 종교적으로는 사회의 빛과 소금 역할은 증발되어버렸습니다. 살기 좋다는 말에 속아선 안 됩니다. 좋은 세상이라는 말에 미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어려운 시대에 부름 받은 주의 종들이 일어나 외쳐야 합니다. 엘리야가 아합을 책망하며 백성을 권고하였듯 사무엘이 사울을 책망하며 백성들을 꾸짖듯, 하나님께서 위탁하신 진리의 말씀으로 힘껏 외쳐야 할 때입니다. 인간의 감각으로 이 시대를 보지 말고 이 시대를 바로 직시해야 합니다. 말씀이 홍수같이 쏟아져도 그 말씀이 인간의 감각으로 흐른다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 말씀은 아닙니다. 물량주의 축복의 말은 홍수인데 진정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정의의 외침은 희귀한 시대입니다.

이제 영적 침체를 걷어내고 이스라엘 역사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가져온 사무엘 같은 주의 종들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말한 것을 행하리니 그것을 듣는 자마다 모두 두려워 떨리라 이는 엘리가 그의 아들들의 죄악을 엄히 다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이 이뤄질지도 모릅니다. 지금이야말로 한국 교회의 영적 수준을 높여야 할 때임을 명심하는 신자가 바로 이 시대의 희망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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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설교 / 신앙과 삶이 만나는 자리  

 

야고보서 2장 14∼23절

믿음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신념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입니다. 신념은 자신에 대한 믿음입니다. 신앙은 하나님 말씀을 의지하고 믿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에서는 믿음을 세 부류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감정이 앞서는 믿음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아무런 효력을 가지지 못함을 강조하는 의미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단순히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아예 죽은 믿음입니다. 헐벗고 굶주린 이웃을 보면서 동정심만 느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니라(17절)”라고 성경은 결론을 내립니다.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만으로, 말로만 하는 믿음은 죽은 것과 다름없다는 뜻입니다.

둘째, 지식이 앞서는 믿음입니다. 사탄은 성경에 대해 성도들보다 해박합니다. 광야에서는 성경 지식을 바탕으로 예수님을 시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 오직 한 분이신 줄 알고 그 하나님만 의지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이 생활화될 때 그 말씀의 씨앗이 자라나 30배, 60배, 100배의 기적을 맛볼 수 있습니다.

셋째, 따르고 함께하는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은 살아 있고 능력 있는 믿음을 가졌던 한 사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자신의 아들을 바치라는 하나님 말씀에 그는 어떻게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바로 하나님과 그 사랑, 그 능력을 믿고 따랐던 것입니다. 모든 것을 이루시고 채워주신 하나님, 불가능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체험하고 믿었기에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던 것입니다. 절망하면서 드린 것이 아니라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드렸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이것이 살아 있는 믿음의 능력입니다.

이런 행동하는 믿음, 즉 신앙과 삶이 만나는 촉매제 역할을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성령님입니다. 예수님 열두 제자들의 삶이 변화된 것은 3년 동안의 제자훈련이 아니라 오순절날의 성령 체험이었습니다. 그들은 성령이 충만해지면서 방언을 하게 됐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출발점이요 선교의 단초가 된 것입니다.

성경 공부를 하고 제자 양육을 받더라도 성령의 본을 받지 못한다면 우리의 모든 사역은 무용지물이 됩니다. 오늘 이 시대에 복음화의 처음과 나중, 알파와 오메가는 오직 성령님뿐입니다. 그래서 모든 교회와 기독인들이 전심으로 올라야 할 고지는 오직 성령 충만의 고지입니다. 심혈을 기울여 사모해야 할 주제 역시 오직 성령 충만입니다.

오늘날 세상 지식은 넘치고 넘치지만 초대교회가 보였던 능력을 쉽게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은과 금은 점점 풍족해지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할 만한 능력은 부족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이 아닌 것을 믿음이라 착각하고 바른 믿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신앙과 삶을 연결하는 성령님을 죽도록 사모해야겠습니다.

지식이 앞서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의한 행함과 함께하는 진정한 믿음이 있을 때 그 자리가 신앙과 삶이 만나는 자리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모습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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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설교 / 선한 양심을 가지라

 

베드로전서 3장 15~22절

부모님이나 학교 선생님들은 종종 자녀나 학생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생각을 올바르게 가져야 행동도 올바르게 나타난다.” 선한 생각은 선한 행동이 나타나도록 하는 뿌리가 된다는 말입니다. 대부분 이런 교육을 받은 우리들의 사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죄와 악이 만연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죄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 고백할 때 본문 말씀과 같이 “선한 양심을 갖게 해 주소서”라고 기도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선한 양심을 갖게 해 주시기 위해 우리 주님께서 어떤 가르침을 주시는지 말씀을 통해 깨닫고자 합니다.

첫째, 선한 양심은 그리스도를 ‘주’로 삼을 때 갖게 되는 마음입니다. 본문 15절에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 마음에 늘 그리스도 예수를 영적 주인으로 영접하고 우리 마음을 세상의 생각과 구별되는 성결한 마음으로 변화시키라는 것입니다. 가정과 학교에서 선한 생각을 갖도록 교육하고 있으나 이 교육은 세상에서 올바르게 살도록 하는 도덕적이고 이성적이며 인간 중심적인 교육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장 근본적인 인간 영혼의 문제에까지 세상 가르침은 침투하지 못하기 때문에 여전히 이 세상은 어지러운 것입니다. 인간 영혼에까지 선한 양심을 갖게 해 주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고 모든 죄를 회개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선한 양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로 삼을 때만 가질 수 있는 것이요, 그러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변화됩니다.

둘째, 선한 양심에는 언제나 고난이 따릅니다. 여기서 선한 양심은 세상적 양심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했을 때 갖게 되는 마음입니다. 기독교적 선한 양심을 가질 때만 온전한 선한 행동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을 통해 나타나는 선한 행동에는 언제나 고통이 따릅니다. 본문 17절에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사도 베드로는 말씀합니다. 모든 기독교인들이 선한 양심을 갖고 있다면 그 증거로 ‘고난이 따르는 선한 행동’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고난은 우리의 처지를 어렵게 하는 세상적인 고난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하나님을 통한 축복을 더욱 크게 받는 고난입니다. 기독교인의 선한 행동은 세상을 올바로 이끄는 원동력이 됩니다. 바로 여러분이 그 원동력의 주인공입니다.

끝으로 선한 양심만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길이 됩니다. 기독교인의 선한 양심은 선한 행동으로 나타나고 선한 행동은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열매로 결실을 맺습니다. 이 결실이 바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열매입니다. 선한 양심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선한 믿음입니다. 믿음을 올바르게 가지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영접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모든 기독교인이 선한 양심을 가진 자들로서 올바르게 행동하고, 올바르게 주님을 증거한다면 아직까지 주님을 영접하지 못한 많은 백성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 길의 역할을 잘 수행하시기를 바랍니다. 선한 안내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하나님 앞에서 칭찬 받으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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