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회설교 / 복음의 비밀은 영광의 소망

 

골로새서 1장 27절

세상의 소망은 꽃처럼 잠깐 있다가 사라집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 헛된 영광을 좇아 시기하고 다투며 살아갑니다. 오늘날 기독교인이 세속화되는 이유는 하늘의 영광을 소망하지 않고, 이 땅의 재물을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재물과 하나님을 겸해 섬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복음의 비밀은 그리스도며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이 창세 전에 계획하신 복은 하늘의 신령한 복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광입니다. 사람은 죄를 범해 거룩하지 못합니다. 때문에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야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영원한 영광을 그리스도와 함께 유업으로 받습니다. 이 유업은 하나님이 창세 전에 계획하신 비밀입니다. 이 비밀은 복음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이 비밀은 너희 안에 있는 그리스도니 곧 영광의 소망”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소망은 믿음이 신실한 성도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충성함으로 하늘에서 받는 아름다운 지위와 상급입니다. 이를 사모하는 사람은 거룩하고 흠 없이 살아가게 됩니다.

구약시대 믿음의 선진들은 하늘의 소망을 바라보며 승리의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 “큰 민족을 이루고, 가나안 땅을 자손에게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번성해 왕들이 나올 것이며, 가나안 온 땅을 영원한 기업이 되리라 언약하셨습니다. 이 약속의 일부는 여호수아시대에 이루어졌고, 왕들에 대한 약속은 다윗시대에 이루어졌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3절에는 믿음의 선진들이 약속의 성취를 바라보고 기뻐하며 믿음을 따라 죽었다고 증거합니다.

참 복은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면서 장막에 거한 것은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위해 하늘에 새 예루살렘 성을 예비하십니다.

이 세상의 재물과 명예는 달란트입니다. 달란트를 가지고 충성한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복을 누리게 됩니다. 구약시대는 복음의 빛이 희미했어도 믿음의 선진들이 하늘의 기업을 소망하며 살았습니다. 오늘날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늘의 소망이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천국에 들어갈 자격과 하나님 앞에 가서 상을 받기에 합당한 삶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마지막장(22장)에서는 예수님 재림의 목적을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얻게 되는 하늘의 기업은 생명보다 귀합니다. 생명을 희생해서라도 이 영광에 참여해야 합니다. 신앙의 목적을 알지 못해 방황하거나 죄악에 얽매이면 안 됩니다. 주를 향한 소망을 분명하게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게 되며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게 됩니다.

지극히 영화롭고, 아름다운 영광의 자리에 참여합시다. 이 영광의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갈망하며 영광의 보좌에 계신 주님 앞에 흠 없는 자녀로 서도록 믿음으로 순종하며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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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 / 어두운 시대의 희망   
 

사무엘상 3장 1~10절

선민사상이 투철한 이스라엘 민족은 지금도 자기의 나라를 부를 때 ‘거룩한 땅(Holy land)’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다른 나라보다 그 땅이 기름지고 윤택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나라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나라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메마른 땅입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민족은 자신들의 땅을 거룩한 땅이라 칭합니다. 왜 그럴까요? 여기에는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비록 눈에 보이는 땅은 불완전한 요소가 많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약속한 축복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신앙의 기초 위에 민족의 공동체가 이루어졌고, 나라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땅에서 말씀대로 살면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말씀이 형통이요, 복이라는 증언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보이지 않는 시대였다고 증언합니다. 그것은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희귀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같이 소망이 없는 시대라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소망을 주시려고 아이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사무엘이 부름 받은 시대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경제적으로 풍요를 구가하던 시대였습니다. 여인들은 포도주에 취하고, 제물을 드리는 때에 황소 한 마리를 드릴 수 있었음을 보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도덕적으로는 질서가 파괴됐던 시대였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처럼 성적으로 타락하였고, 관리들은 뇌물을 받아 ‘무전유죄 유전무죄’의 재판이 횡행했으며, 군사적으로는 주변 나라들의 끊임없는 침략에 시달리고 있었던 시대였습니다. 종교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힘을 잃었던 시대였습니다. 다 돌아보면 어려운 시대에 하나님의 정의를 바로 선포하여야 함에도, 자신의 편안함만을 추구하며 살며 더 이상 희망을 기대할 수 없는 시대였습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이 땅에도 많은 문제를 안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정치적으로 이념 대결이 심화되어 있고, 경제적으로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에 불균형이 너무도 심각합니다. 무엇보다 더구나 종교적으로는 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은 증발돼 사라지고, 제 각자의 이권을 추종하는 작금의 현실은 암담할 따름입니다. 때가 이러한데도 겉보기에 그럴듯하여 살 만하다는 생각에 속기도 합니다.

어려운 시대에 주님의 종으로 부름 받은 성도들이 일어나 외쳐야 합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책망하며 백성을 꾸짖듯, 엘리야가 아합을 책망하며 백성에게 권고하였듯, 하나님께서 위탁하신 진리의 말씀으로 힘껏 외쳐야 할 때입니다. 사람의 눈으로 이 시대를 보지 말고, 이 땅의 문제를 제대로 통찰해야 합니다. 말씀이 홍수같이 쏟아져도 그 말들이 사람에게서만 나온 것이라면 그것은 다 헛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고 전해야 합니다. 넘쳐흐르는 축복의 말씀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진정 기뻐하시는 정의의 말씀도 외쳐야 합니다.

이제 영적 침체를 걷어내고 이스라엘 역사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가져온 사무엘 같은 주의 종들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말한 것을 행하리니 그것을 듣는 자마다 모두 두려워 떨리라 이는 엘리가 그의 아들들의 죄악을 엄히 다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라는 주님의 음성이 다시 울리게 될 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 한국 교회의 영적 수준을 높여, 어두운 시대의 희망이 되어야 할 때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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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도마의 부활절 요20장24~29절

 

기독교에는 중요한 두 절기가 있습니다. 하나는 성탄절이요, 또 하나는 부활절입니다. 성탄절은 이 세상을 구속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난 절기요, 부활절은 예수께서 죽음에서 살아나심으로 사망권세를 깨고 인간의 구속을 완성시킨 절기입니다.

 

즉, 성탄이 인류 구속의 시작이라면 부활절은 인류구속을 완성한 절기입니다. 그러므로 이 의미를 바로 깨닫고 믿는다면 이 두 절기의 축복과 은혜는 한없이 나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이 두 절기를 개개인에게 적용해본다면 또 다른 의미와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성탄절은 객관적인 주님의 탄생이지만 부활절은 주관적인 주님의 탄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계실 때는 모든 사람의 주님이 되시지만 실제로 주님은 그 당시 만난 사람들 속에서만 역사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 아니 가까이 하지 못한 사람들은 예수를 믿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절 이후에는 예수님이 부활한 후 성령으로 오시어 누구든지 어디서든지 어느 때든지 믿을 수도 있고, 주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 개인으로 보면, 성탄절보다 부활절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부활은 나의 부활절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부활절을 기념하기 위하여 주님의 수난의 행사 등을 하며 기념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성령으로 체험하지 못한다면 그런 행사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절은 나의 부활절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도마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도마는 의심 많은 제자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왜 도마가 의심 많은 제자가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신 자리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은혜 받는 자리에 도마만이 빠져 있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주님을 쫓아다닌다고 해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신앙은 뿌리를 내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흔들리는 의심의 장벽을 넘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마는 다음과 같이 말하게 됩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요20:25)

 

그러나 사랑이 많으신 주님은 도마를 사랑하사 도마가 있는 장소에 다시 나타나시고 손을 내밀어 옆구리를 만져보라고 하십니다. 그때 도마에게 부활의 주님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지금까지 의심 많고 피상적인 신앙의 장벽을 넘게 된 것입니다.그리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 이다.”(요20:28)

 

그제서야 예수님은 도마의 주님이 된 것입니다.즉 도마의 부활절이 온 것입니다. 도마가 그랬듯이 의심 없이 주님을 믿는 것이 복된 것입니다. 그것은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지만 오직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됩니다. 즉 나 자신의 성탄이 되는 부활절이 와야 합니다. 그래야 이 어렵고 힘든 세대를 믿음으로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의심은 했지만 도마처럼 자신의 부활절을 맞이하여 주님을 만난 자는 복된 자입니다. 보지 못하고도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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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놀라운 사랑, 그 십자가 경험해야 마태복음 27장45~46절

 

십자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이 결정됩니다. 십자가로부터 인생의 승패, 생사가 갈라집니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생은 사십부터가 아니다. 이십부터도 아니다. 인생은 십자가로부터다”

 

그러면 당신은 십자가를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십자가의 의미를 바로 깨닫고 있으면 생명을 얻는 자요, 그렇지 않으면 죽음으로 치닫고 있는 자입니다.

 

온갖 고난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주를 위하여 모든 것을 드려 불꽃처럼 살다간 이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모두 다 십자가를 경험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마음에 사랑이 일어나고 십자가를 경험할 때 이웃의 허물을 용서할 수가 있습니다. 십자가가 밀려올 때에 탄식을 감사할 수 있고 십자가가 느껴질 때에 고난도 능히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묻습니다.

 

“그대, 겟세마네_그 신음이 들리는가? 갈보리_그 십자가를 사랑하는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마27:46)

 

이는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네번째 유언입니다. 예수께서 그 영혼이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단절 당하심'에 대한 탄식이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깊은 아픔은 단절로부터 오는 고통입니다. 사랑하는 이와의 단절, 그토록 믿었던 이에게서의 배신 등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너무나 크나큰 아픔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사랑하는 아버지로부터 그 영혼이 완전히 단절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 영혼의 고통이 얼마나 깊었던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그 땀방울이 핏방울 되어 떨어졌습니다. 그 심연의 고통이 이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로 터져 나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는 이렇게 처절하게 완전히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아야만 했을까요?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것이 곧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의 방법이요 하나님의 지혜였기 때문입니다(고후1:18).

 

예수께서 그렇게 처참하게 버림받게 된 것은 바로 우리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버림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로서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신 어린 양으로서 죄인들을 대신해 속죄 제물로 드려진 것입니다(요1:29).

 

그러므로 십자가 위에 부어진 하나님의 진노는 아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신 바로 죄인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아! 놀라운 사랑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바로 주께서 그렇게 버림받음으로 우리가 다시 살아난 대속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바로 이 사랑 때문에 나는 가치 있는 존재, 십자가의 값을 지불해서라도, 독생자를 대속하여서라도 구원할 만한 존귀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 감격은 울거나 감사하는 것, 그것만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알고, 십자가를 사랑하는 것은 그 이상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그 피토하는 절규가 바로 너희 죄악을 인한 대속의 죽음이라고 누가 일러 주겠습니까? 누가 십자가 외에는 이 땅에 자유가 없고 생명이 없고 희망이 없다고 전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십자가의 사랑의 고백을 바로 당신이 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골고다의 십자가 사랑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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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나사로 한 사람 때문에 요한복음 12:9~11

 

정신의학자 칼 융은 “최후 결과의 본질적인 요인은 한 사람의 생명으로 말미암는다. 그 한 사람이 역사를 만드는 것이다. 위대한 역사의 변혁도, 전 세계의 미래도, 소망도 한 사람의 숨어 있는 자원에 의 해서 이루어진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기독교는 온 인류를 구속하는 종교입니다. 그 구원의 역사는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특별히 가까이 지냈던 가정이 있는데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의 집이었습니다. 예수는 종종 예루살렘에서 5리가량 떨어져 있는 나사로의 집에서 쉬면서 친교를 나누셨습니다.

 

본문 말씀에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모함하여 죽이려 했을 때 나사로까지도 죽이려고 모의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토록 보존하리라”(요한복음 12:24~25).

 

예수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음과 같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는 진리를 생물학적인 사실을 통해서 가르쳐주셨습니다. 나사로 한 사람,즉 나 하나의 소중성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 한 사람의 모험과 신앙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선민이 되었고, 모세 한 사람의 신앙과 용기로 말미암아 노예생활 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인류가 타락한 것과 같이 예수로 말미암아 그 분을 믿는 사람마다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진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칼 한 번 쓰지 않고 여리고를 정복했습니다.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 한 사람 한 사람 때문에 나라와 민족에 영광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한 사람 한 사람 때문에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됩니다. 벽돌 하나, 하나가 쌓여 큰 건물을 이루는 것과 같이 우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맡겨진 사명을 다할 때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죽었던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마포삼열 선교사는 평양 시내에서 낯모르는 소년의 손에 전도지 한 장을 쥐어주었습니다.16세 밖에 안된 이 소년은 가정 외에 별다른 외출을 모르고 사는 어머니께 그 전도지를 전해드렸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소년의 어머니는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 후 평양 장대현교회 교인이 되었고 이 여인 한 사람으로 인해 한국 최초의 여전도회를 조직하게 되었으니 그분이 바로 이신행 여사입니다.

 

미국의 하버드대학에 가면 캠퍼스 안에 동상이 하나 서 있는데 그것은 설립자인 존 하버드의 동상입니다. 하버드는 1636년에 영국에서 이민 온 목사입니다. 하버드 목사는 신천지를 복음화하려고 목사를 양성키 위해 자기의 모든 재산과 장서를 바쳐 하버드대학을 창설했습니다. 초기에 목사를 양성하던 대학이 지금은 수많은 세계의 석학들을 배출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 말미암아 인류역사에 큰 공헌을 한 하버드대학이 된 것입니다.

 

“한 자루의 초에 불을 밝히는 것이 어둠 속에 그냥 있는 것보다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하나님은 우리를 가정과 교회, 직장에서 너와 더불어 살게 하셨습니다.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살다보니 힘든 일도, 냄새나는 일도, 고통스런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나를 향해 변화되고 나를 이해해주길 바랍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더 큰 상처가 생길 수 있습니다.나사로 한 사람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예수를 믿게 되었음을 고백하는 오늘의 말씀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나 한 사람 때문에 오는 결과의 중요성을 깨닫고 한 알의 밀알이 되어 그리스도를 따름으로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여기시는 성도가 되시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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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그리스도인의 삶은 섬기는 삶 막10장 32~45절, 빌1장 1절~11절

 

그리스도인의 삶은 섬기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고 섬기기 위해서 왔으며 많은 사람들의 죄 값을 위하여 나의 생명마저 내어 주려고 왔다”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세상의 것과 다른 가치기준이 있습니다. 교회의 모든 직분은 봉사를 위한 것입니다. 교회의 직분을 세상의 권세처럼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때때로 교회 안에서 세상적인 가치기준을 버리지 못한 직분 자들 때문에 문제가 야기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서도 그런 문제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야고보와 요한 두형제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왕이 되거든 특별한 대우를 해 달라고 청탁을 했는데 이 일로 제자들이 야고보와 요한을 비난한 것입니다.

 

교회가 왜 불화하고 다투며 분열합니까?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진 직분 자들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통치자들은 백성을 권력으로 지배하고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게 되고 싶은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 싶은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섬기는 사람이고 교회는 섬기는 것을 배우는 학교이며 섬기는 것을 훈련받는 훈련소입니다.

 

지금은 사순절 기간입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섬김의 삶을 사셨고 우리에게 명령하셨으니 우리도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섬김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가 그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나를 용서해 주시고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동기가 된 섬김이 향기로운 봉사입니다.

 

또 그리스도인의 봉사는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소유는 모두가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자기만을 위해 사용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재물이나 지식, 재능까지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길 때, 그 모든 것들은 참 가치가 있고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은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남을 섬기라고 내게 맡겨주신 것입니다. 봉사하는 사람은 항상 이러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봉사는 그의 신앙의 열매입니다.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알 수 있는 것처럼 봉사하는 모습을 보고 그 사람의 신앙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에서 참 섬김의 자세를 종을 예로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종은 자기가 한 일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둘째, 종은 대가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무슨 일을 했든지 “나는 마땅히 한 일을 한 것뿐입니다”라는 자세를 잃지 않습니다. 셋째, 종은 자기의 의지대로 무슨 일을 하지 않습니다. 오직 주인의 뜻을 따를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섬기는 일을 위하여 부름 받은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섬기는 삶을 살 때 기뻐하십니다. 주님께서 스스로 종이 되셔서 섬기는 삶을 사신 것처럼 우리가 섬기는 삶을 사는 것이 진정 사순절을 지키는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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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고난은 축복의 기회 눅12:16~21

 

프랑스의 한 철학자는 “전 세계는 행복을 열광적으로 찾고 있다. 그러나 인생의 행복을 분명히 알지 못하면서도 행복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공통적인 욕구”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예외 없이 동일하다는 것과 문제는 행복을 추구하되 그것을 분명히 모른다는 데에 인생의 숙제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행복이며 과연 어디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요.본문의 어리석은 한 부자는 창고를 크게 지어 모든 곡식과 필요한 물건을 거기 가득 쌓아두고 평안히 쉬며 먹고 마시고 즐기고자 했습니다. 자기를 위해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해 부요하지 못한 자에게 미처 생각하지 못한 놀라운 질문이 던져졌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부자는 아무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먼저 부자가 먹고, 마시고, 즐기고, 고통 없이 쉬는 육체적 만족에 행복이 있다고 생각한 것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육체적 만족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육체적인 욕망의 허망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육체적 만족을 느꼈다 할지라도 만족이 크면 클수록 만족 후에는 육체적인 욕망의 허무감이 더욱 큰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육체의 욕망을 좇는 일에 줄달음질을 치고 있습니다. 자기가 빠졌던 함정에 다시 빠지고 앞서가는 사람들이 빠진 웅덩이에 자신을 던져 넣는 결과에 주목하지 않는 비극적인 삶을 보게 됩니다.

 

이 세상의 수고와 고난은 잠깐이요, 구원의 행복은 족히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큽니다. 진정한 행복은 육체의 만족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육신의 생각으로는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를 발견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지어 그 안에 물건과 곡식을 쌓는 물질의 부요가 자신에게 최대의 행복을 보장해줄 걸로 알았습니다.

 

현대를 3M의 시대라 합니다. 기계(Machine)가 지배하는 시대, 다수(Mass)가 높이 평가되는 시대, 돈(Money)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물질만능주의의 시대로 특징지어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은 경제적인 안정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생활만 부하면 모든 염려가 물러가고 마음의 평화가 보장되는 줄로 착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방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경제적으로 부요하지만 정신적인 면에서 과연 부요합니까? 그러므로 물질의 풍요를 누리는 인간이 행복의 소재를 어디에 두었느냐가 문제입니다. 풍요를 누리면서 행복의 소재를 하나님과의 관계에 둔다면 그 이상의 더 큰 행복은 없을 것입니다.

 

진정한 인생의 행복은 하나님과의 정당한 관계를 맺는데 있습니다. 본문 21절에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는 이와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모든 육체와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이 시들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는 바람을 잡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께 대해 얼마나 충족한 부요를 쌓았느냐가 문제입니다.

 

행복이 어디에 있을까요. 결코 육체의 만족이 아닙니다. 물질의 풍요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행복은 예수를 사랑하는데 있습니다. 그를 알고 그에게 헌신할 때 비록 괴로워도, 고단해도 그것은 고통이 아니요 진정한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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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최후의 만찬 갈3장13~14절

 

어느 날 영국의 북부도시 에딘버러 시립공원에 12그루의 나무가 심어졌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열두제자의 이름을 따서 나무 하나 하나에 이름을 붙였습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그리고 맨 마지막엔 가롯유다의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나무들은 모두 다 잘 자랐습니다.

 

몇 년이 지나 나무들은 제법 무성하게 가지를 드리우고 그늘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나무 그늘에서 쉬거나 지나가면서 나무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베드로 나무야 많이 자랐구나. 좀 더 무성해 지거라.”또는 “요한 나무야 잘 있었느냐. 너는 사랑스럽구나. 그래, 어서 더 자라서 더 많은 사랑을 받아야지” 그런데 사람들은 가롯유다의 이름이 붙은 나무를 보기만하면 약속이나 한 것처럼 “예끼 이 몹쓸 가롯유다야! 네가 예수님을 팔아먹었지? 네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했지. 저주를 받아라.”하고 침을 뱉으면서 지나갔습니다. 그런지 3년이 못되어 가롯유다 나무는 시들시들해지더니 끝내 말라 죽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의 저주와 욕설에 그 나무는 살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저주는 이렇게 무섭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주일 넷째 날인 성목요일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사랑하는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셨습니다(마 26:26~28). 예수님은 그 밤에 감람산에 올라가셔서 밤새워 기도하시고 원수들에게 붙잡혀 온갖 모욕과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옷을 벗은 채 가죽 채찍으로 피가 쏟아지도록 맞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영광의 십자가가 아니라 저주의 십자가였습니다(신 21:22).

 

예수님은 저주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아무도 지려하지 않는 치욕의 십자가를 나를 위해 기꺼이 짊어지신 것입니다. 하나님마저 얼굴을 돌려버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_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통곡하며 부르짖던 저주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욕심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거짓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불순종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미워하는 마음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정욕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혈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자존심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맞아야할 그 매를 대신 맞으시고 예수님은 내가 써야 할 가시관을 대신 쓰셨으며 예수님은 내가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받으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저와 여러분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죄 값을 치를 능력이 없습니다. 그 죄 값을 치러 주시려고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저주에서 풀려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우리 모두가 죽음의 저주에서 풀려났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우리 모두가 마귀의 저주에서 풀려났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고통과 근심의 저주에서 풀려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 때문에 저주에서 풀려 진정한 자유함을 얻은 우리가 된 것입니다.

 

한 주간동안 고난주간이 계속됩니다. 갈보리 언덕에 우뚝 선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내가 져야할 저주의 십자가를 다시 바라봅시다. 그리고 십자가 구속의 은총을 다시 바라봅시다. 그리고 십자가 구속의 은총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며 받을 때, 아브라함에게 신령한 복과 기름진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축복이 항상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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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죽기를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기독교의 부활은 세계에서 가장 큰 명절입니다. 성탄절보다 더 큰 명절입니다. 예수님의 탄생기록은 마태와 누가복음에만 있지만 예수님의 부활기록은 네 복음서가 다 취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소식은 참으로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눅 2:10)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죽음을 가장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들을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히 2:15)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바로 그들에게 죽음이 정복된다는 말씀은 얼마나 귀한 소식입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암을 퇴치하는 약은 찾아도 죽음을 정복하는 약을 찾지 않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지 역사적인 사건만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물론 죽음이 정복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의미를 가질 수 있지만 거기에는 더 많은 내용들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내용들을 알고 믿을 때에 더 풍성하고 의미 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영원토록 보장받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 암을 치료하는 특효약을 발명했다면 그때부터 사람들이 암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

 

둘째로 예수님의 부활은 운명도 극복된다는 사실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어야 하는 운명에 매여 사는 것은 두렵고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죽어도 산다는 예수님의 증거는 얼마나 다행하고 기쁜 일일까요? 성경과 기독교역사에서 사람의 운명을 바꾼 기적과 능력의 증거가 셀 수 없을 정도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부활은 선한 자의 승리를 보장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는 악이 승리하고 선이 패배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것은 하늘이 빛을 잃고 땅에는 지진이 일어날 만큼 충격적이고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심으로' 악은 패배하고 선은 궁극적으로 승리한다는 통쾌한 진리를 들어내 주셨습니다.

 

넷째로 예수님의 부활은 어떤 환경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활은 실패와 절망, 고통과 슬픔을 말끔하게 벗어버리게 하는 저력을 갖게 합니다. 만일 누가 세상에서 도무지 헤어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졌다해도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는 말씀대로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이 다시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누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부활하신 모습을 목격한 사람이 겨우 5백명에 지나지 않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겨우 1백20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우리시대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확실히 믿고 따르는 자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오늘도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생명의 예수님은 오늘도 두 팔을 벌리고 돌아오는 자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직도 운명에 매여 절망을 안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까? 사망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오늘도 교회 안에 역사하시는 그 능력과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를 풍성히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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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의 소망(빌1:20~21)

 

 

사람은 누구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학생은 열심히 공부하여 좋은 대학을 마치고 훌륭한 사람이 되는 소망을 가지고 공부합니다. 농부의 소망은 씨앗을 뿌려 백배의 열매를 맺어 거두는 것입니다. 군인의 소망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애국하는 일일 것입니다. 사업가의 소망은 사업에 성공하여 많은 물질로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것입니다. 희망이 없는 삶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기에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영국의 의사 겸 작가였던 토머스 풀러(Tomas Fuller;1654~1734)는 “위대한 희망은 위대한 인생을 만들어 낸다.”고 하였습니다. 인생은 소망이 있을 때 삶이 풍성해지고 소망이 사라질 때 절망이 오며 좌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국의 시인인 윌리엄 워즈워드(William Wordsworth;1770~1850)는 “희망이 풀잎에 맺힌 이슬 같아도 사람들은 그것을 붙들고 위대한 역사를 만들어 낸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소망은 어떤 것이어야 합니까? 사도 바울은 본문 20절에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라고 말씀하면서 성도로서의 소망을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 바울은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길 소망했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빌1:20)”라고 했습니다. 성도에게 가장 자랑스러운 일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언제나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는 일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죄에서 용서 받은 자들로 죄와 상관없이 생활하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언제 어디서나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합니다. 셰익스피어는 “하루를 행복하려면 목욕을 하십시오. 일주일을 행복하려면 새 옷을 사 입으십시오.3개월을 행복하려면 말을 타십시오.3년을 행복하려면 결혼을 하십시오. 그러나 일평생을 행복하려면 정직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행복은 일평생 정직한 데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부끄럽지 않게' 사는 생활이 행복한 삶입니다.

 

둘째 바울의 소망은 `사명을 위해 죽을 것도 각오'하는 소망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죽을 것을 각오하는 사람입니다. 죽을 각오를 하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생명을 걸고 싸우는 병사가 가장 용감하게 싸웁니다. 사자가 맹수의 왕자가 되는 것은 한번 싸우면 목숨을 걸고 싸우기 때문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일사각오'라는 설교를 했습니다. “부활 진리위해, 복음전파 위해, 이웃을 위해 일사각오”했기에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성경은 죽으면 산다고 합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12:24)고 하였습니다.“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는 말씀처럼 죽을 각오로 사명에 충성하는 성도가 됩시다.

 

셋째 오직 예수(Only Jusus)소망이었습니다.

바울은 오직 예수를 위해 살고 예수를 위해 죽었습니다.27절에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하였는데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오직 예수입니다. 믿음의 질문과 믿음의 해답과 믿음의 주제는 오직 예수입니다. 말씀 따라 사는 길, 순종하며 사는 길은 오직 예수 중심의 삶입니다. 주님의 명령만 지킬 때 참된 신앙의 길이 있습니다. 오직 예수의 명령에만 순종하고 예수의 말씀만 따라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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