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자.(Series 1) - 박 한 응(朴 漢 應)

본  문 : 로마서 12 : 1 - 3
제  목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자

찬  송 : 213, 214, 321, 325, 327, 539

 

할렐루야!!
오늘도 좋으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충만한 은혜를 내려주시려고 오늘 거룩한 날을 허락하셨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은사를 충만하게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예> 서울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하루는 그 교회의 권사님이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저, 목사님 긴히 말씀 드릴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아, 예, 어려워 마시고 말씀하십시오’ 라고 대답을 하자 그 권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저 목사님, 저 아무래도 권사를 못하겠습니다.’
‘아니 권사님,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금까지 잘 해오셨잖습니까?’
‘일도 많고 너무 바쁘고 해서 집사하고 바꿔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권사는 못하고 집사는 할 수 있습니까?’
‘네 가만히 보니까 집사는 심방도 하지 않고, 또 하는 일도 별로 없고, 이름만 가지고 있어도 되잖습니까?’ 라고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는 이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분이 한 분도 없기를 바랍니다.
 하기야 우리 교인들 중에는 권사라고 해도 심방 한 번 하지 않는 분도 있습니다.
속장이라고 해도 속회 심방 한번 하지 않는 속장도 있습니다.
집사, 권사라고 해도 새벽기도 한 번도 나오지 않고, 십일조도 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 달에 감사헌금

한 번도 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남이 안 한다고 내가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죽으면 따라서 죽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길고 짧은 것은 주님 심판대 앞에 가 보아야 합니다. 주님 심판대 앞에서는 모든 것이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히4: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갈6:7-8)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정말 하나님 앞에서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나의 불신앙적인 행동이 나 하나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따라 행하여 함께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이와 같은 불신앙적인 신앙생활이 남에게 믿음의 상처를 준다거나 실족케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와 책망을 피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마18:6-7)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 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리라.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잘못하는 사람을 본받으려고 하십니까? 기왕이면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을 본받아야 합니다. 도둑놈 따라가면 결국 도둑놈 됩니다. 노름꾼 따라다니면 결국 노름꾼 됩니다. 게으름뱅이를 따라가면 결국 게으름뱅이가 됩니다.
민수기 16:31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가데스바네아에서 고라가 다단과 아비람과 온과 더불어 당을 조직하고 모세를 반역하였습니다. 이때 고라를 추종하는 사람이 250명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고라와 그의 가족들을 땅을 갈라서 생매장을 시켰고 추종하던 250명은 제단에서 불이 나와 모두 타죽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은 곡식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공존의 시대입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함께 자라지 않습니다. 추수 때가 되면 반드시 가라지를 먼저 묶어 지옥 불에 던져 태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13:29-30)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또한 마지막 때가 되면 악한 사람은 더 악해지고 선한 사람은 더 선해진다고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세가 가까울수록 믿음 있는 사람은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믿음 없는 사람은 자꾸만 하나님과 멀어지고 교회와 멀어지고 세상과 가까워집니다.
(계22:10-12)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 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 되게 하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그뿐만이 아니라 말세에는 사람들이 완악 하여져서 바른 교훈이나 바른 말 듣기를 싫어한다고 하였습니다.
(딤후4:3-4)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래서 신앙으로 말씀으로 권면을 하여도 듣지 않습니다.
주일성수를 하여야 하늘의 신령한 영적 축복을 받는다고 하여도,
새벽기도를 하여야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동행하여 주시며 만사를 형통케 하시는 축복을 받는다고 하여도,
또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야 물질의 축복을 받고 황충을 금하며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는 축복을 받는다고 아무리 설교를 하여도 마이동풍이고 권면을 하여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완악하고 강퍅해졌기 때문입니다.

 

집사, 권사, 속장은 이름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부르기 좋으라고 붙여준 이름이 절대로 아닙니다. 교회에서 받은 직분은 그 직분이 어떤 것이든 간에 죽도록 충성하라고 주신 직분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아멘>
 (계 2:10)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그런데도 그 직분에 충성하지 않으면 결국 하나님 앞에서 심판 받을 때에 반드시 책망을 받게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행한 대로 갚아 주신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겔16:59)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네가 맹세를 멸시하여 언약을 배반 하였은즉 내가 네 행한 대로 네게 행하리라”
(마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지금까지 쌓여만 가던 모든 죄악은 모두 아침 안개의 사라짐같이 빽빽한 구름이 물러감같이 사함을 받고 예수님의 흘리신 보혈로 씻음 받아 거듭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아 멘!>

 

그래서 저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여러 가지 방법론이 제기되겠습니다만 저는 오직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은 『예배』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우리 인간들에게 주신 사랑이요 은혜이며 은총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할렐루야!! <아 멘!>
만약에 우리에게 예배가 없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하는 생각만 해도 앞이 캄캄합니다. 하나님은 죄악으로 타락한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을 허락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그렇게 믿으시면 다 같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아 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선교도 중요하고 기도도 중요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예배입다. 그래서 오늘과 다음 주일까지 예배에 대한 말씀으로
오늘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자”
오늘 저녁예배에는 “예배를 바로 드려야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인다”
다음 주일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방해하지 말자”
그리고 다음 주일 저녁예배에는 “예배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
이렇게 시리즈로 말씀을 드리면서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다 같이 한번 따라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자”<아멘!>
우리 ○○교회 성도들은 기왕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1.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급에서 인도하시고 모세를 통하여 성막을 건축케 하신 후에 성소에서 만나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출25:2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하나님이 우리와 만나 주시는 곳은 성전입니다.
출30:6절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곳에서 너를 만날 것이라” 고 하셨고 왕상 9:3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앞에서 기도하며 간구함을 내가 들었은즉 내가 너의 건축한 이 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나의 이름을 영영히 그곳에 두며 나의 눈과 나의 마음이 항상 거기 있으리니…” 라고 하셨습니다.
 (시11:4)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장소는 광야가 아닙니다. 세상이 아닙니다. 골방도 아닙니다. 여러분의 안방도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성전, 교회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아 멘!>

(1) 하나님과 만날 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①삭개오는 예수님을 한 번 보기만 하여도 평생소원이 없으리라고 생각하였지만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오시고 그로 인하여 그의 온 가정이 구원받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습니다.
 ②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는 죽어가면서도 메시아로 오셔서 인류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시는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영혼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눅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③요한복음 4장 5절 이하의 기록된 사마리아 수가성의 한 여인은 남편을 다섯씩이나 거느린 한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이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남으로 구원을 받고 그의 인생이 변화되었으며 그리스도를 온 성에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④막달라 마리아는 창녀였습니다. 일곱 귀신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만나고 그의 인생이 변화되어 일평생 주님을 섬기는 생활로 변화되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신 후 아리마대 요셉이 자기의 무덤에 장사지낸 지 삼일 째 되는 날 아침 일찍이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갔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2) 하나님과 만나고 예수님과 만날 때 치유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를 치료하는 여호와니라”(출15:26) 고 말씀 하셨고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①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을 고치셨습니다.
       ② 여리고성의 소경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③ 열 명의 문둥이를 고치셨습니다.
       ④ 거라사 지방의 군대 마귀 들린 자를 고치셨습니다.
       ⑤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주님을 만난 모든 사람들이 모두 병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 주님은 지금도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셔서 우리와 만나고 계시며 우리의 모든 질병을 고쳐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 멘>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믿고 영접하는 자는 곧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기 때문에 병 고침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는 줄로 믿습니다.<아 멘!>

(3) 하나님을 만날 때 기적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① 창21:14절 이하에는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쫓겨난 하갈이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가지고 온 물과 떡이 모두 떨어지고 그의 아들 이스마엘이 죽어 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고 방성대곡하여 울 때에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저를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샘물을 주시고 그의 아들 이스마엘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② 요한복음 6장의 말씀에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일어난 한 가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좇아와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예수께서 5병2어를 가지시고 저들을 배불리 먹이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5병2어를 가지고 남자 장정만 5천명을 먹였다는 것은 초자연적인 기적의 역사입니다. 바로 한 소년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일어난 사건입니다.
③ 왕상 17:8절 이하의 말씀에는 사르밧의 한 과부가 선지자 엘리야를 만났습니다. 그 과부는 엘리야 선지자의 요구를 듣고 순종하였을 때 밀가루 통에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기름병에 기름이 끊어지지 않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초자연적인 기적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아 멘!>

2. 예배는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용서받는 시간입니다.

(사55:6-7)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탕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분배받아 집을 나간 아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재산을 허랑 방탕하여 허비한 후에 설상가상으로 흉년까지 들어서 아사 상태에까지 되었습니다. 이때 그 아들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들이 집을 떠난 후로 아버지는 그 아들이 언젠가는 돌아올 것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는 거지가 되어서 돌아오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달려가서 그 아들을 얼싸 안았습니다.
아들이 생각하기엔 아버지가 도무지 용서해 줄 것 같지 않아서 아들은 고사하고 그저 품꾼으로라도 받아만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라는 생각으로 돌아왔을 때 그 아버지는 아들의 지난 모든 일을 묻지도 않으시고 용서해 주시고 아들로서의 모든 권한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사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라고 말씀하셨고,
또 기억치도 않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43:25)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치 아니하리라”
(렘31:34)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치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할렐루야!!

 

3. 예배는 하나님과 화목 하는 시간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거역하였기 때문에 죄를 범하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원수 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화목제물이 되셔서 우리가 다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롬5:8-10)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복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고 하셨고
        (욥22:21)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 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고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우리의 예배를 통해서만이 할 수 있습니다.

 

4. 예배는 우리의 영의 양식을 공급받는 시간입니다.

        예배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영적 생명을 공급받는 귀한 시간입니다.
        모든 생명체들은 사람이든 동물이든 아니면 식물들까지도 성장할 수 있는 양식을 공급받아야 살 수 있습니다.
        우리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영적 생명의 양식을 공급받을 수 있는 오직 귀한 시간이 바로 예배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배 시간이야 말로 얼마나 귀한 시간인 것을 새삼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예배를 소홀히 하는 성도가 있어서 참으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삼상2:30) 고 말씀하셨고 예수님은 성전을 더럽히는 자들에게 분을 내시며 저들을 책망하여 내쫓으셨습니다.

         우리의 심령이 영적으로 기갈이 들으면 안 됩니다. 영적으로 갈급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영혼은 항상 은혜가 충만하고 성령이 충만하고 하나님이 시간마다 순간마다 주시는 은혜로 충만해야 합니다. 믿으시면 다 같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아 멘!>

 

         하나님은 항상 좋은 것으로 만족하게 채워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시107:9)
         (사25:6)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라”
         그런데 문제는 기름진 것이 눈앞에 있는데 먹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의심과 두려움과 세상의 재리와 염려로 인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영의 양식을 먹지 못하여 영양실조가 되었는데도 이 핑계 저 핑계로 하나님의 주시는 신령한 영의 양식을 먹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22;1-14절 말씀에 예수님은 혼인 잔치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혼인 잔치를 베푼 왕이 종들을 불러 청한 사람을 모셔오라고 하였지만 청함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거절하고 사양을 하였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의 우리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 청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슨 무슨 이유를 대면서 거절하고 사양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심령 상태는 지금 아사(餓死) 상태인데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지막 말세가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갈이 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암8:11-13)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 하여 피곤하리라”
        이와 같은 마지막 말세가 가까이 다가오는 이때에 오늘 예배드리는 ○○교회 성도 여러분들은 은혜를 사모하고 간구하여 항상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5.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

(1) 신령한 예배를 드려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요4:23-24)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십니다.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면 오히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처럼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습니다.

(2) 산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롬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산 예배는 피 흘림이 있는 예배입니다.
        피 흘림이 있는 예배는 희생과 헌신과 감사가 있는 예배를 말합니다.
        희생이 없고 감사가 없고 제물이 없는 예배는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없고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제단 쌓는 곳에 강림하셨고, 제물 있는 곳에 불로 응답하셨습니다. 또 제물 있는 곳에서 만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출29:42) “이는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 회막 문에서 늘 드릴 번제라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

(3) 새롭게 변화된 몸과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말씀에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변화를 받는 것” 은 성령의 역사로 되어지는 것으로써 내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는 세상 것을 다 끊어버리고 새로운 몸과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성령이 역사 하시고 거듭남의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며 그런 다음에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옷도 아무렇게나 입던 옷 그대로 입고, 또 지각이나 하고, 와서는 졸기나 한다면 이런 예배를 진실로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는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여 부르짖고 찾아서 만나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신4:29)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그를 구하면 만나리라”
        (잠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렘29:12-14)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만나지겠고 너희를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막혔던 모든 문제들이 열려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구원의 문이 열려지고 우리를 끈질기게 괴롭히는 모든 질병도 깨끗하게 고침 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아 멘!>
         아무쪼록 이 시간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시며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구주가 되심을 고백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은총과 축복을 충만히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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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용규 목사 간증 - 천국과 지옥을 체험하다!


우연히 연로하신 선배목사님으로 부터 오래전에
고 박용규목사님의 천국과 지옥 간증
비디오테프를 받았으며 그것을 본지가 한참 오래
된것같은데 얼마전 
새삼 천국과지옥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면서
많은 분들에게 알리고자 비디오테프를 동영상파일로
작업하여 유튜브에 올려 놓았습니다.
예수를 믿는 교인들은 한 번 들어보시길 추천합니다.
듣고 나면 가족이나 친지들에게 전도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시게 될것입니다

뿐만아니라 모든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겠다는 다짐을 하시게 될 것입니다.

전도와 선교는 우리모두에게  주어진 사명이며

주님의 명령임을 기억합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복하시고
모두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시길 소망합니다.

 

동영상을 보시려면 여기를 클릭하세요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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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예배/십자가


어떤 십자가를 지고 가십니까?

(막15:16-32)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마 16:24). 십자가와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예배의 주제입니다. 모든 정상적인 목회자들은 모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릅니다. 그러나 목회자마다 십자가를 지는 느낌은 다릅니다. 십자가에 대한 나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1. 억지로 지는 십자가(막15:16-25).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에 이르러”(막15:21-22).

 

  구레네 사람 시몬은 예수를 대신하여 얼마동안 십자가를 "억지로" 짊어져야 했습니다. 군인들의 창과 칼 앞에 자존심을 다 구기고 마지못해 십자가를 졌습니다.   이날은 시몬에게 "개 같은 날의 오후"며 재수 없는 날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시몬에게 원치 않았던 굴욕이요,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며, 빨리 던져버려야 속이 시원한 불편한 짐이었으며 그가 비방하고 조롱한 형벌에 불과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의 위협에 시달리다 더 버티면 어쩐지 뒤끝이 좋을 것 같지 않다는 느낌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은 아닐까요? “이보게나, 내가 피 흘려 산 교회를 위해 그렇게 불평과 원망의 느낌을 가지고 십자가를 짊어져야 한다면 이제 그만 내려놓게나. 내 마음이 편치 않네.”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마16:24). 십자가의 감격을 회복하도록 주님, 도우소서! 십자가를 하나 더 얹어주실지라도 기꺼이 지고 갈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을 십자가의 은혜로 채워주소서!


  2. 마취제를 거절한 십자가(막15:22-25).


  “내가 목마르다!” 예수의 외침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십자가를 지는 삶에는 목마름과 고통이 있습니다. 갈증이 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고통과 갈증을 면하기 위해 마취제 같은 쓸개 탄 즙은 거절하셨습니다. 우리들이 목회자가 되어 한 없이 양보하고,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려 할 때 고통과 목마름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피곤해지는 순간이 있으며, 좌절을 겪기도 합니다. 하나님, 십자가의 목마름을 성스러운 목마름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우소서! 이런 저런 목마름을 환영하는 모습으로 살 수 있도록 도우소서!  

  예수님께는 십자가의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있으나 쓸개 탄 마취제를 거절하심으로 온 몸 그대로 고통을 느꼈습니다. 비통한 희롱과 조롱, 외면이 주는 정신적 고통도 감수했고 무서운 저주도 온 몸과 영으로 받았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로 향하는 가파르게 보이는 해골의 언덕을 오를 때 사람들이 제공할 고마운 마취제를 고대하며 십자가를 등에 지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위로인 마취제가 필요 없었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눅23:34). 하나님, 사람들의 비난과 비평에 몸서리치고 있는 저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조롱하는 자들이나 죽을 준비가 되었다고 큰소리치고는 잽싸게 달아나 버린 제자들을 향한 원망의 느낌, 버림받았다는 서러움의 느낌을 못 박아 버렸기에 마취제를 거절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자기 연민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기 때문에 마취제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길 원했습니다. 십자가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여, 우리들을 축복하소서! 십자가를 하나님의 위로며 영광으로 들어가는 감격으로 받을 수 있도록 도우소서! 


3. 죽어야 사는 십자가(막15:30-32).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믿겠다”고 했으나 주님은 십자가에서 내려 올 수 없었습니다. 우리들의 구원을 “다 이루었다”고 선언할 때까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도록 막고 있던 휘장을 하나님께서 친히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버리심으로 구원의 새롭고 산 길 을 열어 놓으시기까지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 올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죽어서야 십자가에서 내려 왔습니다. 저주를 받은 뒤에야 내려 왔습니다. 우리들의 구원을 완성한 뒤에 내려 오셨습니다!

“주님 오늘도 제 몸은 당신께 드리는 희생제물입니다. 명령을 기다립니다.”

  서 아프리카 선교사로 사역했던 테일러 스미스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오늘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죽을 각오가 되어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들은 교회 사임을 생각하고 있을 지 모릅니다. 우리들은 교회사역을 그만 둘 적절한 타이밍을 찾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린 애써 기도하며 개척했던 사역지를 떠나려는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왜 우리들은 사명을 중단하려는 것일까요? 왜 우리는 더 이상 헌신을 하지 않으려는 것일까요? 죽기살기로 헌신하더니 10년도 못 채우고 사역지를 떠나려는 것일까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5:24).

  성령님께서 나에게 물으십니다. "육신적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가? 세상에 대해 죽었는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고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길 원하는가?"(고후 4:10)  "아닙니다. 성령님, 내 자존심 때문에 더 이상 목회 못하겠습니다." 성령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죽어야 그리스도가 나타난다네. 네 자존심이 죽고, 네 욕심이 죽어야 교회가 살지 않겠나!"

   

  지금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있다면?  ‘사람들의 칭찬, 명예, 자존심, 대우’에 대해서 전보다는 더 적게 관심을 기울일 것입니다. 우리는 욕심에 대해 죽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좋게 말하느냐 아니냐가 우리들의 헌신의 질을 결정할 만큼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죽는 순간에 이르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열심히 추구하던 것이 별 의미가 없게 됩니다. 죽음의 자리에선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들이 다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혹독한 비판에 대해 죽은 자입니까? 사람들의 불친절에 대해 죽은 자입니까? 오늘도 나 자신을 향해 죽고 하나님의 영광과 목적을 위해 살려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인준하지 않으신 욕심에 대해 죽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죽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열매 맺기 위함입니다.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십자가에서 자아를 단호히 처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진가(眞價)를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게 함이니”(빌3:8-9). 오늘도 십자가를 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4:10).  하나님, 죽은 줄로만 알았던 내가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실망해도 분노가 치밀고, 조금만 나의 지도력이 손상 당해도 견딜 수 없어하는 나를 철저히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 주십시오! 내 눈물은 주님을 위한 눈물이 아니라 서러워서, 속상해서, 억울해서 흘리는 눈물 뿐이니, 주여 이 상한 마음마저도 십자가를 못 박을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4. 당돌한 십자가(막 15:42-47; 요 19:38-42)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taking courage)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요셉이 세마포를 사고 예수를 내려다가 이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막15:42-47)


  하나님의 아들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제자들은 모두 달아났습니다. 예수님은 실패자처럼 보입니다. 아무도 예수님 편에 서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십자가 주변에는 그 당시에 아무런 사회적 권리나 힘이 없는 여성들만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요, 실패자의 자리에 나서서 자신이 예수의 제자라며 밝히며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해 가겠다고 한 사람이 아리마대 요셉입니다. 그는 주변에 믿는 사람처럼 보이는 이들이 없고, 믿는 사람들이 다 넘어진 것 같을 때 실망하지 않고 나서서 당돌히 십자가를 졌습니다. 억지로가 아닙니다. 마지못하여 십자가를 찾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용기있는 태도로 십자가를 졌습니다.

 

  요셉을 당돌하다고 표현한 이유는 그가 한 행동은 홀로 죄악에 맞서는 용기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반역자의 신분으로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반역자의 시신은 가족들도 가져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요구한 것은 스스로 반역자의 제자라고 공개하는 일이므로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잃을지라도 예수의 제자임을 밝힌 신앙이 바로 빌라도와 세상이 볼 때 당돌한 신앙이고, 하나님이 보실 때 용기 있는 신앙입니다.  “반역자로 몰아가도 좋다. 아니 예수는 반역자가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죄 없는 아들이심을 내가 믿는다. 빌라도 당신도 예수가 무죄라는 것을 알지 않는가!”라는 담대함이 이 시신을 달라는 요구에 담겨있었습니다.

 

  요셉이 용기있게 십자가를 지는 태도는 다른 사람에게 거룩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요 19:39). 자신의 신분 노출을 두려워해서 밤중에 찾아왔던 니고데모, 예수님이 비난당할 때 드러내 놓고 변호하지 못했던 니고데모, 드디어 그도 요셉을 보고 힘을 얻었습니다. 당당히 자신이 예수의 제자임을, 예수를 사랑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동료를 보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장례를 치르기 위해 100근이나 되는 값비싼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가지고 왔는데 이 양은 왕족의 장례를 치를 때에 사용하는 만큼의 많은 분량입니다. 내가 용기있게 십자가를 지고가는 삶이 어둠 속에서 자신들의 존재를 감추고 살아가는 수많은 니고데모들이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와 당당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주게 되도록 도와주소서! 

 

  5. 자랑의 십자가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갈6:14).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아무 것도 자랑하지 않고 사신 분 중에 최초의 미국 침레교 선교사 아도니람 저드슨이 있습니다. 그는 미얀마에서 7년 동안 열심히 사역했지만 7년이 지나도록 예수 믿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주변의 냉대 속에서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마저 병으로 잃었습니다. 자기 아내를 묻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친한 친구가 이렇게 위로했습니다.

“여보게 저드슨 형제, 너무 낙심치 말게나.”

그러자 저드슨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낙심이라고? 예수 안에서 소망은 태양처럼 빛나고 있다네!”  

  25년의 세월이 흘러 저드슨은 미국으로 돌아 왔습니다. 지금까지는 선교하면 영국이 대표였습니다. 미국이 아직 선교에 미약할 때였는데 위대한 사역을 마친 저드슨이 돌아오자 전 미국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를 환영하고 그의 보고하는 자리에 몰려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선교사의 입에서 나올 흥미진진한 선교 이야기들을 듣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저드슨 선교사는 첫째 날 우리 죄인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설교했습니다. “역시 하나님의 사람이구나”하고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둘째 날은 저드슨이 번역한 미얀마-영어 사전과 미얀마 번역성경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싶어했습니다. 또 7년 동안 열매가 없다가 그 후 20여 년 동안 3,000명이 넘는 미얀마 원주민들을 예수님 앞으로 인도하고 침례를 베푼 영웅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어했습니다. 또 감옥에 끌려가서 죽을 뻔한 고비를 수없이 넘긴 일화도 자세히 알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저드슨은 둘째 날도 예수 그리스도만 이야기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사 53:5). 사람들은 셋째 날엔 틀림없이 선교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셋째 날에는 죄의 권세를 깨치시고 부활의 능력으로 오늘도 우리 속에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해 말씀했습니다. 그러자 사회를 보던 목사님이 기다리다 못해 안타까워서 말했습니다.

“저드슨 선교사님, 성도들은 오늘 다른 설교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이야기 말고 선교사님이 겪으신 재미있고 극적인 이야기를 좀 해주십시오. 또 선교사님이 회중교회 선교사의 신분으로 출발했다가 배를 타고 가면서 성경공부를 하는 중에 왜 침례교회 선교사로 바뀌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이야길 들려주십쇼”라고 부탁드렸습니다.

그러나 저드슨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저에게는 저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나를 위해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우리 주님 이야기보다 더 재미있고 더 감격스러운 이야기는 없습니다.”  

 

  저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세상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우리 주님을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감격스럽습니까? 자랑의 십자가가 우리 마음을 꽉 채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십시다. 하늘에서 드리는 예배의 중심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 5:12). 아멘!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합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합시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니라”(고전2:2). 아멘.

 

  어떤 십자가를 지고 부활의 주님에게 나아가겠습니까?   (김택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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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예배/ 예수부활


 나는 왜 예수부활을 믿는가?  
 
  부활 신앙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 15:17).   


1. 나는 부활에 대한 역설적(逆說的) 증거 때문에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


  1)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을 맹목적(盲目的)으로 믿지 않았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맹목으로 믿는 것이 아니다. 충분히 의심하고, 충분히 불신하고, 충분히 거리를 두고 예수의 부활을 검토한 뒤에 믿기 시작한 것이다. 사기꾼들은 처음부터 믿음을 주려고 노력한다. 성경은 제자들의 믿음을 그렇게 과장하거나 포장하지 않는다.

  첫 번째 부활의 날 아침 신문 속보에 실린 1면 기사는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아다닌 사람들 이야기’가 정작 부활하신 주님보다 더 많이 다루어졌다. 부활 아침에 제자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았으나 부활하신 예수를 찾지는 않았다.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막 16:6).   

 

  여인들이 빈 무덤을 보고 와서 제자들에게 이야기 했을 때 마가복음 16:11은 이렇게 반응을 보여준다. “그들은 예수의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듣고도 믿지 않았다. 누가복음 24:11은 좀 더 강하게 묘사한다.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눅 24:11). 심지어 마태복음 28:17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자신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시고 말씀을 하실 때의 반응도 보여 준다. “오히려 의심하는 자가 있었다.” 예수님은 그들의 불신을 책망하셨다.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눅 24:25).

  제자들은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무 이야기나 덥석 믿어버리는 맹목적인 사람들이 아니다. 어리석은 촌뜨기들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침내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 부활에 목숨을 건 제자들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다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도 나희 믿음도 헛것이며”(고전 15:14).  

 

2)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신앙을 날조(捏造)하지 않았다.

  ‘날조’란 없는 일을 있는 일처럼 조작하는 것이다. 만약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완전히 날조하여 퍼트리려고 작정했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처음부처 실패했다. 복음서를 보면 제자들은 모습은 마치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은 것 같은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검찰이 론스타 회사의 불법을 조사하기 위해 700상자 분량의 서류를 검토한 적이 있다. 불법을 저지르려면 철저하게 잘못을 감춰야 한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을 위해서 어떤 안전장치도 만들어 놓지 않았다. 부활 사건을 보호하려는 어떤 인간적인 시도도 하지 않았다. 부활을 음모하려면 모든 제자들이 모여서 입을 맞추고, 모든 사건 순서와 모든 내용을 똑같이 증언해야 하며, 부활에 대한 대단한 확신도 보여주어야 하고, 부활에 대한 모든 증언이 일치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성경은 지난 수천 년 동안에 오류를 바로 잡을 기회가 있었으나 한 번도 그런 시도를 한 적이 없다. 왜? 부활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오류가 있을 수 있으나 부활 사건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꾸밀 필요가 없다. 예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오류나 인간의 잘못으로 하나님의 사건이 오류가 되지 않는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들도 잡혀가 죽을 까봐 문을 걸어 잠그고 두려워했다. 그들은 부활신앙을 믿는 사람들 같지 않았다. 부활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 같았다. 얼마나 겁이 났던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그 주변에는 요한을 빼고는 아무도 없었다. 다 달아났던 제자들이다. 예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 장례를 치른 것은 의외의 인물들이다. 예수 믿는 신앙을 감춰왔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가 나서서 예수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렀다.

 

  이런 정황으로 보건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꾸미거나 부활을 확신하는 척하거나 목숨을 걸고 군인들이 지키는 무덤에 가서 예수의 시신을 훔쳐갔다고 보기엔 너무 무리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은 예수 믿는 신앙을 후회했다. 그들의 믿음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함께 끝이 났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소문을 듣고 오히려 마음이 상했다. 그들은 마치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시골로 내려가는 실패한 사업가와 같았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황우석 박사의 추종자들만도 못했다. 목숨을 건 제자도 없고, 나서서 데모하는 제자도 없었다. 그들은 예수의 부활을 위하여 어떤 인위적인 시도조차도 할 수 없었을 만큼 부활을 믿지 않았던 자들이다.

  

3) 예수 부활은 가장 믿을 수 없는 사람들에 의해 처음으로 증언되었다.

  예수님이 처음 태어나셨을 때 그의 증인은 목동들이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목격하고 전한 사람들은 여성들이었다. 목동이나 여성들은 1세기 유대사회에서 별 볼일 없는 그룹이다. 그들의 증언은 법정에서 증언으로 채택되지도 않는다. 만일 사람들을 믿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면 좀 더 그럴싸한 증인을 내세워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부활소식을 전하게 하려고 초대교회는 믿을 만한 사람을 뽑아서 사기극(詐欺劇)을 연출할 필요가 없었다. 하찮은 여인들의 증언이야 말로 초대교회가 부활을 날조하지 않았다는 좋은 증거다. 노예해방의 전기를 가져온 엉클 톰의 이야기를 쓴 사람을 만났을 때 링컨은 놀랐다. 이렇게 키도 작은 여성이란 사실에. 부활의 증인은 위대한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고, 예수님을 만난 사람, 예수님을 만나서 변화된 사람이면 족한 것이다.

  

  4) 예수 부활 사건 기록은 수정되거나 보완되지 않았다.

  만일 예수 믿는 사람들의 음모나 날조로 부활이야기가 생겼다면 시간이 흘러 부활 이야기는 좀 더 완벽한 시나리오로 고쳐질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교회 한만오 목사님이 미국에서 논문 초고를 제출하면서 지도교수에게 물었다. “이 논문이 지금 어느 정도 평가를 받겠습니까?” 슈미트 박사는 말하기를 “이 논문은 B급이라”고 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한만오 목사님이 실망하여 내게 전화를 했다. “목사님, 어떡하면 좋지요? 내 논문이 B밖에 안 된데요.”

  내가 웃었다. 그리고 이렇게 격려해 드렸다. “목사님, 논문 초고(first draft)를 내면서 B라면 아주 잘한 겁니다. 논문 수정을 한 번 거치면 B가 B+이 되고, 두 번 거치면 B+이 A-가 되는 겁니다.  졸업할 때까지 논문 방어를 하고 나서 한 번 더 수정하면  A-가 A가 됩니다. 틀림없이 A 받으실 겁니다.” 성경은 사람들에게 부활 점수를 A로 받기 위해 박사 논문을 수정하듯 손대지 않았다. 수정할 필요도 없다. 성경은 누구의 변호도 필요치 않는다.

 

  데이빗 스티브스는 1957년 공군 중위로 공군 훈련 제트기를 타고 훈련받다가 비행기가 추락, 실종 된지 54일 만에 캘리포니아 주 시에라 산중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이미 시종 사망 처리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스티브스가 말하는 것처럼 추락한 비행기의 잔해를 찾지 못해 사건 조작 혐의로 강제 전역 당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뒤에 그 비행기 잔해가 캠프 하던 보이스카우트 소년들에게 발견되어 20년 만에 그의 이야기는 사실로 확인되었다.

 

  왜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동산지기라고 생각했을까? 그것은 마치 부활이 조작이라고 말하도록 만들게 되지 않을까? 그의 청중을 위해 예수님이 한 번에 알아볼 수 있도록 나타나셨다고 수정하고 싶지 않은가?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은 왜 실망하여 예루살렘을 떠나려했고, 그들은 예수님이 대화에 끼어들어 한 동안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알아채지 못했을까? 뭔가 부족한 듯 보이는 이 이야기를 좀 더 완벽하게 수정하고 싶지 않을까? 그러나 성경은 예수의 부활 이야기를 도무지 변증하거나 잘 보이려고 애쓰거나, 보다 완벽한 구성을 해서 제공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실 그대로, 부활 사건을 경험했던 충격 그대로 우리에게 기록하여 전해준다. 나는 부활에 대한 역설적(逆說的) 증거 때문에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


2. 나는 부활의 역사적(歷史的) 사실 때문에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


   프랑스의 한 신문사가 세계의 저명인사 100명에게 ‘지구의 파멸이 시작되었을 때 가장 먼저 안전하게 반출해야 할 지구상의 보물이 무엇이냐?’고 설문조사를 했다. 2위는 인간예술의 극치로 평가받는 미로의 비너스상이다. 1위는 무엇일까? 폭 1m, 길이 4m 20cm인 세마포, 예수님의 시체를 쌌던 하찮은 삼베 수의천이 인류 최고의 보물로 간주되었다. 수년 전 이탈리아 토리노 대성당 화재가 일어나 완전히 전소되었을 때 그 역사적 성당 안에 수많은 보물들이 불에 타 한 줌 재가 되어버렸다. 그 당시 가장 큰 관심은 토리노 성당 안에 있던 세마포였다. 화재 신고를 받은 소방대원들은 화염에 휩싸인 성당 안으로 목숨을 걸고 들어가 3층으로 된 방탄유리를 도끼로 찍어 깨트린 뒤 그 세마포가 담긴 상자를 안고 나왔다. 왜 세마포롤 첫 번째 보물로 여기고, 소방관은 자기 목숨을 잃을 지경이 되면서도 세마포를 가지고 나왔을까?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것을 보라”(마 28:6). 

 무덤은 비었고, 수의는 어떻게 되었는가? 요한복음 20:3-08을 보면 “시몬 베드로도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수의는 예수님을 장사지낼 때처럼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향유를 바르고, 미이라를 만들어 놓았던 바로 그 모양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1) 빈 무덤과 빈 수의는 부활의 큰 증거다.

  2) 유대 지도자들은 부활에 관한 어떤 반박도 하지 못했다.

  3) 유대 종교와 로마의 통치 속에서 기독교가 탄생했다.

  4) 주일을 예배드리는 날로 시작한 것은 부활의 역사적 부산물이다.

 

3. 나는 부활 신앙을 인해 변화된 사람들 때문에 예수부활을 믿는다.

 

  의심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의 부활을 믿으라고 하면 쉽게 믿어지겠는가? 믿기 어려워서, 믿을 수 없어서 고민한 사람들이 많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누가 돌을 치웠는가?」(Who Moved the Stone?)이라는 책을 쓴 영국의 저널리스트 프랭크 모리슨이다. 모리슨의 의도는 부활이 사실이 아님을 증명하려던 것이었는데 쓰다 보니 결론은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영국의 두 젊은 무신론 변호사 길버트 웨스트(Gilbert West)와 리틀톤(Lyttleton)은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기독교를 무너뜨릴 궁리를 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사울의 회심 이야기가 역사성(歷史性)이 결여되었다는 사실을 입증만 하면 기독교는 모래성처럼 허물이 지게 될 것이라는 데 의견일치를 보았다. 길버트는 예수의 부활에 대해, 리틀톤은 사울의 회심에 대한 책을 각각 쓰기로 했다. 성경을 포함한 많은 책을 읽고 연구를 하던 중 얼마 후에 그들은 다시 만났다.

  그들의 결론은 놀라웠다. 아무리 보아도 예수는 부활하셨고, 사울은 다메섹에서 회심한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들이 조사하고 연구한 책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과「사울의 회심」(The Conversion of St. Paul)이다. 「벤허」라는 영화의 원작을 쓰기 전까지 월러스(Wallace)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몰랐다. 그는 예수를 믿는 것을 우습게 여겼던 작가이다. 그의 친구의 말을 믿고 있었다. “기독교는 얼마 후에 이 세상에서 존재를 감추고 우리의 기억 속에서만 남을 것이다.” 그러나 월러스가 소설을 쓰기 위해 성경을 읽고, 역사적인 자료들을 검토하면서 영화 속의 불신자 벤허처럼 그는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 앞에 무릎을 꿇어다. 영화 속의 벤허는 복수심에 불타 칼과 창으로 민족을 해방시키겠다는 사람이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자 그는 딴 사람이 된다. 부활하신 예수를 믿자 그는 딴 사람이 되었다.  


   1) 부활을 받아들인 예수님의 제자들은 놀라운 변화를 체험했다.

  숨어있기에 급급했던 이 제자들은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면서, 부활하신 예수를 40일 동안 11번 넘게 만나면서, 순교도 마다않는 겁 없는 전도자들로 변했다. 그들의 변화를 무엇으로 설명하겠는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슬픔이 사라진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공포가 사라진다.  


  2) 예수의 육신적인 형제며 불신자인 야고보의 변화도 부활의 증거다.

  야고는 부활 사건 전까지는 예수의 주님 되심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부활 사건은 그의 형을 그의 구세주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의심이 사라진다.


  3) 의심 많은 제자 도마의 변화도 부활의 증거다. 

  요한복음 20:25을 보면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했던 제자이다. 도마에게 감사하자.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의심해 준 것, 우리가 거쳐야 했을 고민을 그가 먼저 해 준 것을 감사하자. 요한복음에서 가장 감격적인 신앙 고백은 도마의 입술에서 나왔다. 그는 먼저 회의론자, 의심 많은 자로서 고통스런 시간을 먼저 보냈다.  그런 뒤에 이런 위대한 고백을 했다.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요 20:28).


  4) 부활을 믿지 않았던 사울은 부활의 증인으로 변했다.

  사울은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던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다. 교회들을 핍박하고 잡아 가두는데 힘썼다. 그런 그가 부활하신 예수를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만난다. 그것은 사울에게 엄청난 충격이자 사건이었다. 그는 3일 간을 금식하며 자신의 죄를 회개했다. 그리고 나서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 그는 왕 앞에서도 부활을 증거 했고, 이방인들 앞에서도 부활을 증거 했다. 그의 변화는 마치 아인슈타인이 예수를 믿은 것보다 더 큰 사건이다. 위대한 과학자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노후에 기독교 신앙을 가지면서 이런 유명한 고백을 남겼다.

 

“나는 평소에, 특별히 젊었을 때 교회를 경멸했습니다. 교회를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내 조국 독일이 어두워 졌을 때, 그리고 나치의 핍박 아래 있었을 때 내가 경멸하고 무시했던 교회는 우리 민족의 유일한 소망이었고 사람들의 안식처였습니다. 그리고 내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내 노후에 인생의 석양녘에 나는 교회 이외에 내 영혼의 위로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를 찾지 못했습니다. 나는 이제 교회로 다시 돌아옵니다. 내 영혼의 안식처인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진짜 똑똑한 사람들이 예수도 잘 믿는다. 나는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인 이유와 근거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다. 소크라테스는 하나님을 믿었다. 갈릴레오, 베이컨(Bacon), 과학자 아이삭 뉴톤 경(Sir Isaac Newton), 파스테르(Pasteur) 같은 뛰어난 과학자, 철학자, 사상가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 그들이 바보라서 믿었을까? 아니다.

  예수님만이 인간의 죄에 대한 해답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예수님만이 우리들의 삶과 죽음에 의미를 주시기에 그 분을 신뢰하는 것이다.

  예수님만이 죄의 고통에서 우리를 건져내시기에 삶을 의탁하는 것이다. 이별의 아픔에서, 무덤의 그림자에서, 죽음의 공포에서, 예수님만이 구원하시며 희망이시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아멘.

  예수님만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부활의 보증이시다.  

  예수님만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에 충분하신 분이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주이시다.

  예수님만이 영원한 생명과 부활에 관한 희망을 주신다.

 

4. 나는 예수님의 손에 있는 못 자국 때문에 예수 부활을 믿는다.


  예수님은 다른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못 자국 난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다(요 20:20). 왜 우리를 향한 대속(代贖)의 상처는 낫지 않았을까? 사라지지 않은 채 주님 몸에 남아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 상처에서 희망(希望)을 본다. 그 상처는 십자가의 사건과 부활을 이어주는 중요한 표시이다. 구원과 구원의 보증(保證)의 표시이다. 상처가 준 고통은 사라졌지만 상처의 흔적은 남아서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1) 나를 위해 어떤 사랑의 희생(犧牲)도 치를 수 있음을 보여준다.

  2) 나를 구원할 능력이 충분(充分)함을 보여준다.

  3) 나의 죄 사함과 구원이 영원(永遠)함을 확증한다.


  언젠가 주님은 우리의 손을 잡아주시며 그 손에 난 상처를 보실 것이다. 부활신앙이란 우리가 흘린 눈물, 우리가 당한 비극,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 치른 모든 희생을 주님이 기억하여 주시는 것이다. 예수 몸에 난 상처가 그렇듯이 나와 여러분의 마음과 몸에 난 상처는 새로운 몸을 입어도 남게 될 것이다. 그것은 주님에게 증거가 된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증거가 된다. 얼마나 사랑했는지. 얼마나 큰 대가를 치렀는지.  나는 어머니의 굵게 파인 주름살을 기억한다. 나는 어머니의 거치러진 손의 느낌이 가슴에 남아있다. 나는 그 손을 만져보고 싶고, 그 주름진 얼굴이 보고 싶은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상처 난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며 말씀하신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인도에 썬다씽이라는 유명한 성자가 있다. 그거 어느 해 영국을 방문해서 국회에서 연설을 할 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의 강연을 경청하였다. 참석자 중의 유명한 교수 한 사람이 질문을 했다. “당신은 뿌리 깊은 힌두교의 유명한 학자이고 철저한 힌두교인인데 어떻게 해서 기독교로 개종했습니까?”

  썬다씽은 이렇게 대답했다.

 “예수 부활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이 있다. 힌두교나 불교는 인생무상이다. 그러나 기독교만이 생명을 준다.  주님께 감사하자. 의심 많은 내게 상처 난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며 다가오신다.  주님께 감사하자. 의심의 돌을 굴려버리시고 죽음에서 일어나셨다. 주님께 감사하자. 슬픔으로 앞이 보이지 않는 우리들 때문에 다시 무덤까지 찾아주시기 때문이다.  주님께 감사하자.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실망의 길을 걷는 우리들을 따라오신다.  주님께 감사하자. 종종 낯선 사람의 모습으로, 낯선 방법으로, 낯선 음성으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신다. 기뻐하자. 예수께서 부활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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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예배 / 어린일 주일

  

부지런히 가르치라/ 신6:4-9

2000. 5. 7(어린이 주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안녕하셨습니까? 우리 주 예수님의 평안이 성도 여러분에게 항상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미국에는 한 여성의 이야기가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브렌다 반즈라는 43세의 여성입니다. 펩시 콜라 회사의 회장으로 미국담당 최고경영자입니다. 그는 현재 미국 여성중에서 가장 많은 연봉을 받고 있는 최고위직 전문여성입니다. 그녀는 22살에 펩시 콜라 회사의 평사원으로 입사합니다. 뛰어난 미모와 지성을 갖춘 그녀는 출세와 성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도전합니다. 그 결과 비록 43세의 젊은 나이지만 일약 세계최대 기업가운데 하나로 정착한 펩시콜라 회사의 최고 경영자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미국기업사에 기록될만한 입지전적 인물입니다. 그녀가 최고경영자 자리에 오르자마자 회사는 더더욱 놀라운 성장을 계속합니다. 그래서 작년 한 해동안 그녀는 77억 3000만 달라, 우리 돈으로 거의 10조원에 달하는 경이적인 판매고를 올립니다. 순수익만 1조 3000억이 넘는 엄청난 재정 흑자를 기록합니다.그녀는 열심히 일하는 여성입니다. 그녀는 매일 새벽 3시에 기상합니다. 30분 동안 간단히 아침준비를 하고 새벽 3시30분부터 새벽기도로 하루의 일과를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녀의 업무시간은 새벽 3시30분부터 저녁 7시 30분까지 하루에 16시간을 일합니다. 게다가 1주일의 3분의 2는 집에도 가지 않고 밤새워 회사에서 일하는 것이 그녀의 업무 스타일입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노력하는 그녀는 어느새 펩시 콜라회사의 신화가 되어 있었습니다.그러던 그녀가 어느날 갑자기 회사에 사표를 제출합니다. 그리고 아무런 미련없이 가정으로 돌아옵니다. 거대기업의 전성기 최고경영자직을 미련없이 버리고 평범한 어머니로 가정에 복귀합니다. 신문기자들에게 그녀는 그렇게 말합니다.


?아무런 미련이 없습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 바로 그때가 가장 빠른 때입니다. 가정으로 보다 빨리 돌아왔어야 했습니다. 내게는 회사가 보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세 아이들이 내 인생 최고의 보물입니다. 우리 아이들은 현재 7살, 8살, 10살난 재롱둥이들입니다. 하지만 나는 늘 바쁘다는 이유로 아이들의 학예회를 비데오 테이프로 보는 것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의 생일이 평일일 때는 그냥 지나치기 일수였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보물로 선물하신 아이들을, 내가 보물로 키우지 못하고 인생 쓰레기로 키운다면, 하나님 앞에서 가장 중요한 사명을 저버리는 직무유기의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이제 나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 가정으로 돌아갑니다.?


미국의 매스컴은 이 사건을 두고 대대적인 보도경쟁을 벌입니다. 이 사건을 향해 ?경이로운 결단?이라고 합니다. ?아름다운 반란?이라고 합니다. 새로운 가정복귀운동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또 한국의 한 여성기자는 신보수주의 운동이 미국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도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데는 일리가 있습니다. 지금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의 여성들은 남성중심의 인류역사를 비판하며 당당하게 가정을 버리고 직장으로 뛰쳐나갑니다. 이것이 시대적 추세요 현대의 조류입니다. 선진국의 이혼추세는 이미 절반을 넘어 섰습니다. 가정은 더 이상 천국이 아닙니다. 가정은 인생 쓰레기장(골머리가 썩는 곳, 문제투성이, 상처받는 곳, 폭력과 살인이 자행되는 곳)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슬픈 현실입니다. 새천년 새시대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는 시대라 할지라도 가정이 죽으면 온 인류가 죽습니다. 새천년 인류를 살릴수 있는 유일한 길은 가정회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일어나야 합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탕자처럼 두손들고 가정에 충실하지 못한 것, 하나님께 회개하며 아버지 품(가정)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브렌다 반즈처럼 가정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잃어버렸던 낙원을 회복해야 합니다.


가정은 천국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천국의 보물입니다. 기쁨과 행복이 넘치는 파라다이스로 가정이 회복되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의 책임이요, 소망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자라난 아이, 그 아이는 행복한 아이(축복받은 아이, 하늘나라 보물)가 됩니다. 그러나 부모로부터 저주(욕설, 매질)를 받고 자라난 아이는 불행한 아이(저주받은 아이)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현대의 비극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사람을 죽이는 살인마로 태어나는 아이(나쁜 아이)는 없습니다. 오직 있다면 그렇게 착한 아이를 죄짓게 하는 잘못된(썩어진, 부패한) 사회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혼돈된 가치관과 더러운 죄악들이 가득찬 세상입니다. 그럴수록 아이들에게 세상을 이길수 있는 힘(소망, 용기, 올바른 인생관)을 주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서 좋은 직장을 얻고 행복한(축복받은) 가정을 이루도록 부모님들이 기도해야 합니다. 도와 주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은 신명기 전통입니다.

자녀교육의 축복장이라고도 불리웁니다. 자녀들을 이렇게 키우면 천대만대 축복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키워야 합니다. 아이들이 집에 있을때나, 길을 갈때나, 누워 있을때나, 곧 낮밤을 가리지말고 비록 여행중이라도 부지런히 가르치라는 말씀입니다.

돈(출세, 성공) 보다도 먼저 사랑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 사람 사랑, 이 두가지를 가르치는 것이야말로 가정(교회와 국가와 온세계)을 살리는 지름길입니다.

 

신명기 전통(쉐마)는 우리에게 3가지 교훈을 줍니다.


1. 인생의 행복은 사랑에서 출발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아이들의 가슴속에 씨를 뿌리고 삽니다. 아무리 착한 아이라도, 그의 가슴에 분노의 씨, 미움의 씨, 싸움의 씨를 뿌리면, 그 아이는 적개심으로 불타 사회질서를 파괴하는 살인자, 질서파괴자, 범죄자로 인생을 살다가, 모든 사람을 저주하고 원망하며, 상처받은 심령을 안고 병들어 죽게됩니다.


그러나 사랑의 씨를 뿌리면 아이는 살아납니다. 그리고 축복된 인생을 살아갈수 있습니다.


엡6:4에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분노의 씨를 뿌리지 말고 사랑으이 씨를 뿌리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이 거주하는 주소는 가정입니다. 그래서 가정은 모든 실수와 허물이 가려지는 곳입니다. 사랑과 만족과 웃음과 미소가 꽃피는 곳입니다. 밖에서는 긴장과 스트레스, 고통과 시련, 다툼과 갈등이 있어도, 일단 집안에 들어서면 모두가 사라져야 합니다. 평안과 위로가 있는 곳, 용서와 격려가 기다리고 있는 곳, 만남의 기쁨과 가슴벅찬 설레임이 있는 곳, 편안한 안식과 따듯한 포옹이 있는 곳, 바로 그곳이 우리가 지켜야 할 소중한 우리의 가정입니다.

 

인류역사의 종말이 오늘 온다고 하더라도, 이 지구상에서 가정보다 더 소중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천하만물을 다 얻어도, 돈많은 벼락부자가 되어도, 한나라의 최고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신분에 오르더라도, 대기업 재벌총수가 되어도, 가정이 흔들리면(가정이 파괴되면, 가정을 잃으면) 그는 분명히 인생의 실패자입니다. 가정이 곧 천국이요,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는 곳이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2.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은 온통 기쁨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은 참으로 살만한 가치가 있는 인생입니다. 행복으로 가득찬 인생입니다.

봄에 피어나는 들꽃을 보아도,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을 보아도, 우리 곁에 함께 숨쉬며 살아가는 친구들을 보아도, 연로하신 부모님의 거친 손끝만 바라보아도, 우리 주변은 온통 경이로운 생명(충만한 기쁨)으로 가득차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야 합니다.


물론 인생을 살다보면 고통도 찾아옵니다. 그래도 우리가 사는 인생은 진정 살만한 가치가 있는 기쁜 인생임을 가르쳐야 합니다. 기쁨의 씨가 곧 행복의 씨입니다. 우리의 자녀를 행복한 인간으로 만들고 싶거든, 어려서부터 기쁜 얼굴, 기쁜 환경, 기쁜추억, 기쁜마음, 기쁜생활, 기쁜 인생의 즐거운 분위기를 보여줘야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슬픔의 노래를 기쁨의 춤으로 바꾸라. 슬픔의 상복을 벗어버리고 기쁨의 나들이 옷으로 갈아입으라?(시30:11). 아이들에게 기쁨의 나들이 옷을 입혀야 합니다.


인생은 길게 살아도 팔구십입니다. 참으로 짧은인생, 참으로 기쁘게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성령충만은 아이들에게 구체적으로 기쁨의 충만입니다. 기쁨이 넘치는 가정만큼 아이들을 살찌우게 하는 음식은 없습니다. 바울은 심지어 ?항상 기뻐하라, 슬플때도 기뻐하고 감사하라?고 강조합니다.

 

부모님은 아이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입니다. 어떤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까? 아이들에게 침울한 하나님, 우울한 하나님, 화를 잘내는 하나님, 쉽게 폭력을 행사하는 하나님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아이들 가슴속에 영원히 각인될 부모님의 모습은 언제나 미소짓는 하나님, 언제나 푸근하고 넓은 가슴을 보여주는 하나님, 사시사철 어린아이들이 즐겁고 행복하고 안심하고 언제나 매달릴수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어야 합니다. 인생의 기쁨을 가르치는 부모님이 되어야 합니다.

 

3. 어린이 인생은 무한히 성장할 수 있습니다. 어린이에게 꿈(천국소망)을 심어주고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 제일교회의 미래는 바로 어린아이들에게 달려있습니다. 그래서 신명기는 어린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칠 것을 교회의 전통으로 세웠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을 알게하는 것이 그들을 축복으로 인도하는 길임을 확신한 것입니다.

 

씨를 뿌리면 언젠가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의 아이들은 지금 어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가슴에 사랑의 씨, 기쁨의 씨, 소망의 씨, 축복의 씨를 뿌릴 때 그들은 금방 자라납니다. 쑥쑥(몰라보게, 어느새, 순식간에) 자라납니다.


우리 아이들이 커서 위대한 대통령(훌륭하신 선생님, 자랑스러운 사업가)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꿈(소망)을 가지고 자녀들을 키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자녀를 믿음안에서 잘 양육할 때, 우리 자녀들은 세상에서도 승리할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에서도 천국소망 가운데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소망을 심어줌으로 충만한 하나님의 사랑(축복)을 회복하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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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주일

어린이 주일은 자녀 교육에 대해 새로운 각성을 다짐하는 주일입니다. 자녀 교육의 중요성은 오늘 하루뿐만 아니라 매일의 숙제이며 과제입니다. 자녀 교육은 실험삼아 할 수도 없으며 실패해서도 안되는 절대 명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상급으로 주신 자녀들을 아름답고 선하고 훌륭하게 키움으로써 자녀 교육에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 첫째는 자녀들을 절망의 잠에서 일으켜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회당장의 집으로 가셨습니다.슬퍼하고 있는 가족과 사람들을 보시며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시고 󰡒 달리다굼 소녀야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라󰡓 하실 때 소녀가 벌떡 일어나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 자녀들의 상황이나 교육 여건 등을 생각해볼 때 두렵기 한이 없습니다. 대화가 되지 않고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으며 극단적인 이기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비행과 탈선을 행하고 세속적 향락 문화만을 추구해나가고 있습니다. 제일 무서운 것은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믿으라는 말씀입니까.당신의 자녀가 다시 살아날 것과 잘 자라나서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당신의 자녀들이 절망에 빠져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생각하십니까. 부정적인 생각을 떨쳐버리십시오.자녀들에 관한 모든 것들을 긍정적으로 보고 생각하며 일으켜세우는 부모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방황의 늪에서 일으켜야 합니다. 오늘날의 청소년은 방황과 방탕 생활을 하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올바른 양육을 통해 청소년들을 정신적 방황과 문화적 방황에서 이끌어내야 합니다.


셋째로 무기력으로부터 일으켜야 합니다. 요즘 청소년들은 자기 향락과 쾌락에는 쉽게 빠져드나 미래적 환상과 도전에는 무기력합니다.부유한 시대의 자녀들은 안일에 앉아있고 삶의 목표 설정과 행동강령에는 무능력합니다. 우리는 두가지 방법 즉 훈육과 칭찬하는 방법을 통해 자녀들을 무기력으로부터 일으켜세워야 합니다.


넷째로 기도로 일으켜야 합니다. 회당장의 부탁이나 동네사람들의 부탁도 현실적으로 해석하면 기도였습니다. 자녀의 장래는 부모의 무릎에 달려 있습니다.부모의 기도는 저주의 쇠사슬을 끊습니다.어머니의 눈물의 기도는 자녀들을 승리로 이끌어갑니다. 아버지의 축복의 기도는 자녀로 하여금 반드시 축복을 받게 합니다. 그러므로 매일의 상황과 여건에 관계없이 부모가 자녀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예레미야 애가 2장19절에 󰡒일어나 부르짖을지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 각 길머리에서 주려 혼미한 네 어린 자녀의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지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자녀들을 온전히 맡기고 기도하며 나아가는 부모들이 되기시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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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부활은 우리의 믿음

 

사도 바울은 본문 고린도전서 1512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그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것이 복된 소식이요, 듣는 자로 하여금 기뻐 뛰게 하는 요점이었습니다. 아마 이러한 말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육에 속한 사람들, 거듭나지 않은 이들에게는 이해가 가지 않고 또 어리석게 들릴 것입니다. 이 일은 바로 신령한 비밀에 속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 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3~14). 육에 속한 사람들, 세상에 속한 이들, 아직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이들은, 1970여년, 거의 이천년 전에 일어난 일, 그 일이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기쁜 일이라는 것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 문제의 근원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는, 사람을 새롭게 하고 사람을 개선하고 사람을 개조하여 전혀 딴판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사람 그 자체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개조하기 위한 여러 가지의 행동 양식과 법칙들을 만들어서 시행하곤 합니다. 요즈음 시중에 나와 있는 책들 중에는 사람들을 개조하여 성공적인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책자들이 아주 인기리에 팔리고 있고, 그러한 행동개발을 위한 여러 원칙들을 제시한 책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모든 시도들은 사람이 그냥 그대로는 못쓴다, 사람 그대로는 합당치 못하다, 많은 난제와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좋은 이상적인 인간상(人間像)을 설정하여 놓고 거기에 이르기 위해 여러 가지의 정책과 실행계획을 세우고 실천해 나갑니다.

동서양이나, 예나 지금이나를 막론하고 남들 보다 앞서 인간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그 인간의 난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위해 자신을 던졌던 수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종교가들이 있었습니다. 도덕가들이 있었습니다. 윤리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석가나 공자나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나, 우리나라의 이퇴계나 이율곡 선생 같은 이 등은 그러한 면에서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인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들 모두가 한결같이 인간의 난제를 개선하고 고치기 위해 사람 자체를 손대었습니다. 인간 자체, 인간성 자체, 인간의 윤리의식, 인간이 가지고 있는 도덕의식 등 자체를 개선시키려고 애를 썼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그러한 노력이 사람들에게 아무런 기여도 전혀 하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은 합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그 나름대로의 영향을 끼쳐서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과 정서에 효과를 낸 것만은 사실입니다. 또 사람이기에 그러한 시도를 하는 것이겠지요. 개나 원숭이가 그러한 시도를 하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그런 시도들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의 문제가 교육이나 도덕성의 고양이나 종교성의 계발이나 어떤 극기 훈련이나 어떤 행동 규례들을 세워놓고 자기를 통제하는 것만으로 해결이 되는 것인가라는 점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문제의 근본은 인간 자체 내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에 있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과 그에 수반되는 인격적인 제반 문제는 인간 자체를 길들임으로써 해결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들이 인간의 난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단순하게 사람이 마음을 잘못 쓰는 것, 행동이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하고 교양적이지 못하고, 그래서 여러 가지의 우발적인 사고를 내어 자신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쯤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잘못 쓰는 이들을 잘 쓰게 하고,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한 이들을 세련되고 우아하게 다듬고, 교양적이지 못한 이들을 교양적으로 만들어 내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식으로들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한 마음을 잘 쓰지 못하고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하고 거칠고 교양적이지 못한 것은 하나의 증상(症狀)에 불과하지 그 근본은 아닙니다. 근본은 바로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 자체만을 가지고 아무리 집중적이고 주밀하게 연구한다 해도 온전하게 설명이 안 되는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인간은 제대로 설명이 되고, 인간의 난제들에 대한 원인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그 인간 자체를 다루고 개선시키고 세련되게 연마하여 거기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새로운 인간상을 도출하여 내시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저희 집에서 아주 큰 무를 사왔습니다. 시커먼 흙이 묻고 싱싱하였습니다. 정말 보기 드물 정도로 탐스럽고 크고 퉁퉁하고 살이 많은 일등품 무였습니다. 굵은 부분은 직경 8, 9cm는 족히 될만하였고 무 길이도 약 20cm는 족히 되어 보였습니다. 지난 겨우내 아주 잘 보관한 무였는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기대감이 가게 하는 무였습니다. 저는 옆에서 그 무를 손질하려는 것을 보면서 기대감에 찼습니다. 이제 흙을 털어내고 잘 씻고 칼을 대어 여러 쪽을 내면 아주 쓸모 있을 것 같았습니다. 칼을 대어 그 무의 속을 다 드러내게 잘랐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겉으로부터 약 1.5cm 정도의 깊이까지는 가락지 모양으로 싱싱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은 바람이 들어서 말 그대로 시꺼멓게 썩어 딱딱하게 덩어리져 있었습니다.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습니다. 그 무는 손을 댈 수가 없었습니다. 그 무가 가지고 있는 부패의 요소를 다 긁어내고 거기에 대신 새로운 생명의 풍성을 채워넣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능력이 전혀 없으니 버릴 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 자체가 그러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근사하게 꾸미고 우아하고 세련되게 다듬어도 속이 부패하여 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17:9).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일에 있어서 그들에게 직접 손을 대어 변화시키고 개선시키는 방식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썩은 것 자체를 가지고 아무리 해도 생명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썩은 것 자체에서 생명이 나오게 하실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합당하지 못한 일입니다. 죽은 것 자체에서 생명이 나오게 하지 않습니다. 물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썩어 문드러진 것을 살리게 하시기는 하십니다. 죽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사로의 썩은 몸 자체에서 생명을 뽑아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밖에서 그에게로 생명을 불어 넣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점에서 분명하게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썩은 것 자체에서 생명을 찾아 내지 않으십니다. 죽은 것 자체를 가지고 생명을 창출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인간 자체에 손을 대어 개선시켜 새롭게 하시는 방식을 취하시지는 않으십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개선시키려는 여러 가지의 행동법칙 자체만 가지고는 우리를 개선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도덕적 의지로 여러분을 개선시키고 더 착하게 하려는 노력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문제는 해결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셨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 밖에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 영혼 자체를 가루로 만들어서 새롭게 빚는 방식을 쓰지 않으시고, 우리는 내버려두고 대신 우리 인격 밖에서 먼저 그 일을 하셨습니다. 곧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태어나기 전, 아니 우리 부모들이 서로 만나서 애정을 느끼고 결혼할 마음을 가지기 전에, 아니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 우리의 증조부, 증조모가 태어나기 전에, 바다와 산과 별과 달과 해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곧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새롭게 지으실 뜻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 세계 속에서 그 뜻을 성취하여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 그리스도께서 이천년 전에 동정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아기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셨습니다. 무덤에 장사지낸 바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사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죄로 죽은 우리를 영원히 살리시는 방식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있어서 복음입니다.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사람으로 태어나셨고, 사셨고, 고난을 받아 죽으셨고, 장사지낸 바 되셨고, 다시 사셨다 라는 이것이 복음의 진수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 우리가 아직 태어나려면 아직도 1900여년 이상이 더 지나야 했던 그 때에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입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위해 중요한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영원한 화해를 위한 대가를 지불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고후 4:18).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에, 우리가 알지도 생각하지도 꿈꾸지도 못하던 때에 말입니다. 우리 인격 밖에서 말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에 말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8).

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안에서 저와 여러분을 새롭게 창조하고 계셨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하나님께서 본래 죄로 부패하여 죽어있는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려고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창출하고 계셨습니다.(5:24; 10:28~30).

그러니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의 저와 여러분의 문제, 곧 죄의 문제를 영원히 부수어 다시는 그 죄의 문제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내지 못하게 법정적인 조치를 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우리를 영원히 용서하실 공의롭고 정당한 근거를 마련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므로 이제 누구든지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8:1)라고 사도는 말하였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죄가 왕노릇하는 옛 사람을 또한 죽여버리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6:6)라 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옛 사람을 죽이고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을 새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죽이는 일만 해서는 안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넣어주시는 것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반드시 살아나셔야 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 속에서 행하신 대속의 의미가 부활을 통해 확증되고 광포되고 사실적으로 입증이 되었던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었다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미도 무색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다시 사시는 것은 필연적으로 있어야 하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고, 우리 죄를 지신 것이니 죽음에 매여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의 과정을 통해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를 완전하게 만족하셨으니,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더 이상 죽으심에 묶어 놓으실 이유가 없으셨습니다. 마치 예전에 대제사장이 백성들을 위해 일년에 한 차례씩 대속죄일에 백성들의 죄 대신 죽은 염소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의 속죄소에 뿌리고 나온 것과 같습니다. 만일 그 제사가 열납이 되지 못하면 거기 들어간 제사장은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거기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위한 속죄희생의 피를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이요,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속죄일에 백성들은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지성소에 나아가 제사를 드리고 나오기를 간절하게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나오게 되면 환호하며 찬미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죄를 대신하는 염소의 피를 받으셨고 그 대제사장의 드리는 제사를 열납하시고 만족하셨다는 증거였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들어간 대제사장이 다시는 나오지 못하였다면 백성들은 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자기들의 죄에 대해 자기들에게 직접 물으실 터이니 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죄를 지시고 대신 형벌을 받으시고 그 증표로 당신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의 하늘 성소에 들어가신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들어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주님의 십자가의 피를 흡족하게 여기시고 우리 죄에 대한 공의의 요구를 만족하게 여기셨으면 반드시 우리의 대제사장은 다시 살아나오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다시 부활하시지 않으시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우리 주님의 속죄사역이 완전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새로운 관계를 가지게 되셨음을 광포하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옛 생명의 체계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의 관계, 체계를 광포하실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반드시 다시 살아나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되어진 그 모든 효력을 믿음을 통해 각 개인에게 적용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저수지 공사를 하고 나서 그 밑에 있는 논에다 수로를 따라서 물을 나누어주기 시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이는 그 효력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성령께서 오시었습니다. 그리고 최초의 증거자들인 사도들을 감동하셨고 사도들의 증거를 따라서 믿게 하셨고, 그들이 또한 전도자들이 되어 다시 증거하였고, 그 증거를 통해 당신의 백성들에게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 전도는 하나님께서 이미 아들 안에서 구원하여 놓으시고 당신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에게 그 효력을 누리고 차지하라고 알리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전도를 통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부활의 확실성은 우리의 믿음의 근거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주님의 부활의 역사적인 사실을 믿지 않으려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고린도교회 안에서도 어떻게 부활하는 일이 있겠느냐고 믿지 않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 하였습니다. 물론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을 정면으로 부인하였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앞으로 없을 것이라고 하는 관점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사실 따지고 보면 그 이면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을 부인하는 행동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은 그들 자신이 아직도 거듭나지 못하였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아직 그리스도를 사도가 말하는 대로 믿지 않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아마 그들은 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살겠느냐, 썩은 자가 다시 살겠느냐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이들의 심정 속에는 과학적으로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냐는 물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식으로 말하는 이들은 그들의 과학적인 고상한 지식과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을 함께 말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과학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여 주신 자연질서에 속한 진리와 이치를 발견하여 세운 학문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하나님께서 영적인 세계에 세운 진리와 이치에 속한 것입니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적인 질서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일을 과학 운운하면서 따지는 것은 하나님의 행사의 깊이를 잘 모르고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세계에 대해서만 아는 옅은 지식의 소유자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세계의 다국면적인 방면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물리적인, 우주 천체적인 질서가 있습니다. 심미적인 세계, 소리와 시각과 색조의 세계, 그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여 그 원리를 적용하여 예술이라는 것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세계에 세우신 질서가 있습니다. 나무에서 잎이 나고 꽃이 피고 달고 맛있는 과실이 크게 열리는 것을 과학적으로 어떻게 설명이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과학적으로 열매를 낼 수 있습니까? 주어진 현상의 질서를 연구하고 관찰할 뿐인 것입니다. 사람의 인체의 신비에 대해 어떻게 안다는 말입니까? 영적인 원리, 하나님께서 당신과 사람 사이에 세우신 영적인 원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활이 없다고 하는 이들은 영적인 원리에 대해 무식한 자들입니다(고전 15:13~14).

복음의 진수는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셨다는 데 그 핵심적인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가르친 것은 도덕적인 착함과 공로와 업적을 쌓아서 구원받는 것을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 사실, 그것을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바로 자기의 구주로서 그 일을 하셨다, 나를 위해 죽고 나를 위해 다시 살았다라고 믿는 사람에게 그 구속의 효력이 미치게 되어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속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6:23).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이 없었다면, 그저 공자와 석가와 소크라테스나 어떤 성현의 말을 배우고 도덕성과 윤리의식을 고취하여 자신을 세우려는 것이나 하등의 다른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라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셨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과 그 효력을 성령으로 말미암은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적용하십니다. 그러니 기독교는 선의 개념이나 이상(理想)의 관념이나 높은 도덕, 또는 윤리 의식을 우리에게 고취시켜 우리를 도덕적으로 개선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주님께서 다시 사신 그 사실에 기초하여 그 사실의 효력을 누리며 산 소망을 가지고 참된 기쁨을 가질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얻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의 산 소망의 충분하고 완전한 근거를 오직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러니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이 없었다면 기독교의 모든 교훈, 아니 성경 전체는 아무 것도 아닌, 하나의 케케묵은 골동품 서적의 가치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과 그 모든 행사에 대한 것은 거짓 것으로 드러날 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주님의 부활의 사실성과 필연성을 강력하게 역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고전 15:16~19).

모든 사도들은 모든 이들에게 바로 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되심과, 그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증거하고 그 사실을 기초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역설하였습니다. 어느 사도도 그 사실을 빼놓고 자기의 강론을 시작하거나 진행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와 그에 관한 모든 사실들의 증인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 아닐진대 자기들은 거짓 증인으로 발견될 것이라고 합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15:15).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터를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하심의 확실성 위에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보혜사 성령님의 역사를 따라서 산 소망을 가진 자답게 죄와 세상과 마귀의 시험을 이기며, 성 삼위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이 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도 성령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주님께서 행하신 그 죽으심과 부활의 영광을 우리에게 항상 상기시키시고 그 속에서 늘 가르쳐주시고 양육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가지신 영원한 계획과 목적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1:3~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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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사에 감사하는 은혜  (데살로니가전서 5:18)

오늘은 추수감사주일로 지킵니다. 한해 동안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인간다운 삶은 영위하게 하시며, 특별히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신 은혜를 돌이켜보면서 감사하는 주일입니다. 이런 주일을 맞이하여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과연 우리가 이 말씀에 순종하면서 사는지 돌이켜보는 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감사를 많이 하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훨씬 건강하고 행복하다고 합니다. 감사지수가 높으면 높을수록 건강지수와  행복지수가 높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인간의 행복을 논하면서 다음과 같이 충고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대의 마음 속에 감사하는 생각이 없으면 그대는 파멸의 노를 젓고 있는 사람이다. 부디 다른 공부보다도 먼저 감사하는 공부를 배우라." 그만큼 감사는 우리의 삶을 윤택하고 행복하게 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인 것입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인간의 근성은 감사에 인색합니다. 심지어 러시아의 대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은 감사할 줄 모르는 두발 달린 동물이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자녀를 키우면서 쉽게 동감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요즘같이 풍요로운 사회에서 부모들은 자식이 원하는 것이라면 대부분 거절하지 아니하고 다 들어줍니다. 그러나 그렇게 애지중지하며 키운 자식일수록 나중에 부모님의 은혜를 망각한 채 살아갑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말세가 가까워 질수록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이 없어진다고 예언하신바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절 이하에 보면, 말세에 나타나는 삭막한 인간성 중 하나가 감사를 모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역시 50년 전, 100년 전 그 혹독한 가난가운데 힘들게 살았던 우리 조상들에 비해 훨씬 감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처럼 세상은 점점 감사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 하나님께서는 "범사에 감사하라"고 교훈 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범사에 감사할 때, 영과 육이 건강하고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범사에'라는 말은 헬라어로 '엔 판티'(en panti)라고 하는데 이에 대해 영어 성경에서는 크게 3가지로 번역합니다. 곧 '어떤 형편에서든지', '모든 일에', 마지막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도' 감사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 다 비슷해 보일지 모르지만, '범사에'라는 말을 다양한 각도로 살펴 보면 3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좋은 일에도 감사할 뿐 아니라 안 좋은 일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사소한 일에도 감사할 뿐 아니라 큰 일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인생의 양지에 있을 때도 감사할 뿐 아니라 음지에 있을 때도 감사해야 합니다. 그래서 감사하지 않고 지나치는 것이 하나도 없게 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의 참뜻입니다.

실로 이 말씀은 우리에게 엄청난 부담감을 줍니다. 어떻게 이 말씀을 실천하라는 것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감사의 내용을 알면 그 고민은 한층 더 무거워집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감사는 막연히 느끼는 고마운 감정이 아닙니다. "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내가 구원의 잔을 높이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소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시116:2-14)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감사에는 적어도 3가지 요소가 있음을 가르쳐줍니다.

첫째로 감사에는 마음이 담겨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하나님께서는 이런 간절한 마음이 담긴 감사를 원하십니다. 어떻게 보답하는 것이 하나님께 감사 드릴 수 있을까? 이런 간절한 마음을 담는 것이 감사요.

둘째로 궁극적인 감사의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물론 고마운 사람에게 감사할 수 도 있지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이여 감사합니다" 하고 그 앞에 경배하는 것을 일컬어서 감사라고 합니다. 10명의 문둥병자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제사장을 찾아가는 도중 병이 낫게 되었습니다. 9명은 "우와! 내 병이 나았네. 아이고, 고마워라." 하며 고맙다는 느낌을 가졌지만 그 이상 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1명, 바로 사마리아 사람은 병이 낫자, "하나님이여 감사합니다"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가던 길을 돌이켜 예수님에게로 다시 달려왔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 앞에 넙죽 엎드려 주님을 경배하면서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셋째로 진정한 감사는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예물을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나의 소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소원이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약속하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 제 기도를 들어주시고 응답해 주시면 제가 이렇게 하겠습니다."라고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정말 응답해주시면 너무나 감사해서 자기가 서원한 것을 그대로 시행하는 것입니다.

한나는 아들을 달라고 기도하던 중 정말로 아들을 얻자 그 은혜에 감사하여 아들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평생 기도한 것을 다 받고 나니 너무나 감사해서 말년에는 자신이 쌓아 놓았던 모든 재산을 성전을 짓는데 드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감사하라"고 할 때 그 감사에는 마음이 담겨야 하고, 하나님께 경배하는 자세가 있어야 하고, 경우에 따라 감사의 예물을 들고 나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범사에 감사하면서 살아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굉장히 어려운 말씀입니다. 고맙다고 느끼는 것으로 머물면 안되고, 감사하다는 말로 끝나서도 안됩니다. 정말로 하나님 앞에 거룩한 제사로 드려지는 감사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범사에 감사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까? 

이처럼 범사에 감사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3가지를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첫째는 좋은 일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이 험하고 악해도 좋은 일이 종종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무더운 여름에 소낙비를 주시듯 가끔 우리에게 삶의 기쁨을 주십니다. 

자녀를 낳아 키우는 것이 엄청난 수고요, 희생이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좋은 일을 자주 맛보곤 합니다. 평생 부부로서 사는 것이 굉장한 희생과 인내를 필요로 하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종종 좋은 일을 주십니다. 한 생을 살면서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나름대로 각자에게 좋은 일이 있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경험하게 된 좋은 일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지 못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들이 감사헌금을 잘하시는 것에 늘 하나님 앞에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감사헌금을 보면 감사에 대한 성도들의 정성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습니다. 저희 교회는 몇 만 명이 모이는 대형교회입니다. 그런데 몇 백 명 모이는 교회에 비하면 감사헌금이 그리 많은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감사할만한 좋은 일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좋은 일 하나하나마다 '이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하는 뜨거운 심정으로 손에 헌금을 들고 주님 앞에 나오는 사람들이 드물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좋은 일이라고 자연스럽게 감사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긍정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마땅히 감사해야 될 좋은 일을 감사 없이 넘겨버릴 때가 많이 있음을 인정하고 회개할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는 나쁜 일에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해 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현재 그들은 엄청난 핍박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장차 받을 환란을 너희에게 말하였더니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살전3:4) 바울은 전도하면서 이제 예수를 믿게 되면 핍박을 받게 될 것이라고 미리 예언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예수 믿고 나니 엄청난 환란과 핍박이 그들에게 덮친 것입니다. 여기에서 핍박이란 믿음을 지키기 위해 다른 것을 다 포기해야 되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중국에 가보면 정부와 결탁하여 그들의 비위를 맞추는 삼자 교회는 버젓하게 교회 문을 열어놓고 예배를 드리지만, 공산주의와 타협하지 않고 지난 수십 년 동안 복음을 들고 투쟁한 지하교회들은 지금도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공 셍리앙(Gong Shengliang) 목사님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크게 쓰시는 종입니다. 그분을 따르는 신도만 해도 2, 3만 명에 이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통해 구원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면서 집회마다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자 중국 정부에서 핍박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핍박의 구실을 만들고자 그 교회에서 예수 잘 믿고 인물이 있는 여 집사 몇 명을 끌고 가, 공 목사가 성폭행한 사실을 인정하도록 고문을 해서 허위자백을 받아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근거로 공 목사를 잡아 들여 재판을 치루고는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이 사실을 안 세계인권위원회는 중국 정부에 압력을 가했고 결국 사형선고에서 종신형으로 감형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핍박이란 예수 한번 바로 믿기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상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형편에 있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핍박 받는 것도 감사하고, 매 맞는 것도 감사하고, 가족들이 끌려가서 죽는 것도 감사하고, 이리저리 쫓겨 다니는 것도 감사하고, 굶는 것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얼마나 무서운 말씀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아무리 나쁜 일을 많이 보고 마음에 원치 않는 일을 경험한다고 할지라도 핍박을 받는 사람에 비하면 가벼운 것입니다. 핍박 받는 데살로니가 교인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신다면,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요. 언짢은 일에도, 손해 보는 일에도, 내 몸이 망가지게 되더라도, 사랑하는 이가 일찍 죽는 것을 보고도 감사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감사하라는 말씀입니다.

셋째는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기 쉬운 일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 빚지고 있는 것들입니다. 숨쉬고 있는 공기로부터 시작해서 마시는 물, 우리가 당연시 여기는 내 몸의 모든 기능, 하나님이 주신 내 자녀, 일용할 양식, 어느 것 하나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날마다 풍성하게 주시니까 우리가 소중한 것을 받고도 당연한 것처럼 여기기가 쉽습니다. 당연하게 여길 때는 감사가 따라오지 않습니다.

오늘날 현대 문명은 무엇이든지 당연하게 여기도록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서 왔다는 빚진 감정을 갖지 못하도록 합니다. 1세기 전만 해도 사람들에겐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빚진 의식 또는 의존 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과학이 발달하고 모든 것이 풍족해지면서 서구사회로부터 영향을 받은 모든 나라들이 이제는 빚진 감정 대신 권리 의식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의존 의식보다도 자율의식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잘나고 내가 능력이 있어서 이 모든 것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에 인기 있는 만화 작가 바트 심슨(Bart Simpson)이 한번은 어느 레스토랑에서 식사 기도를 부탁 받았습니다. 그러자 그가 이런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시여, 우리가 이 모든 음식을 위해서 친히 값을 다 지불했습니다. 그래서 감사할 것이 하나도 없음을 감사합니다." 얼마나 방자하고, 거만하고, 교만한 태도입니까? 내가 누리는 것은 내가 노력해서 내 능력으로 얻었는데, 무슨 감사냐는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무서운 범죄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서 받았기 때문에 일일이 감사할 의무가 있습니다.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인에게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할렐루야이다." 입니다. 그 어느 것을 보아도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너무 풍족한 세상을 살아서 많이 오염되었습니다. 그래서 빚진 의식보다 권리 의식에 은근히 더 오염된 것 같습니다. 70년 전만해도 우리는 식민지에서 겨우 벗어난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설상 가상으로 6·25전쟁이라는 끔찍한 동족상잔을 겪으면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던 것입니다. 그런 나라가 불과 반세기도 되기 전에 OECD에 가입할 정도로 세계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된 것입니다.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먹고 마시는 모든 것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보다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는 냉랭한 마음이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도 전 세계를 보면 60억 인구 가운데서 1/10에 해당하는 6억 인구의 하루 생활비가 1달러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전기가 없는 사람들의 수가 20억이 넘습니다. 식수 시설이 되어 있지 않아 아무데서나 퍼 마시는 사람들의 수는 10억이 넘습니다. 인간다운 삶은커녕 이렇게 끔찍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조그마한 한반도에서 우리가 이만큼 먹고 마시며 여유를 가지고 살수 있다는 것은 결코 당연히 여겨야 할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한번 종합병원에 가서 진료과목들이 얼마나 많은지, 한 의사가 다루고 있는 병이 몇 가지나 되는지 살펴 보십시오. 병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병에 걸리지 않고 이렇게 당당하게 걸어 다니고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보통 감사할 일이 아닙니다.

정범진이라는 사람은 교통사고로 평생을 전신마비로 살아야 되는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각고의 노력 끝에 미국 브루클린 검찰청의 부장검사까지 되었습니다. 그가 쓴 책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단 하루만 걸을 수 있다면, 내가 가장 하고 싶은 것은 화장실에 들어가 변기 앞에서 시원하게 오줌을 누는 것이다." 그는 전신이 마비되었기 때문에 화장실에 들어가서 볼일을 보는데 2시간동안 사투를 벌일 때도 있다고 합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하나하나 뜯어보면 절대로 당연시 하고 넘길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체스터튼(G. K. Chesterton)이라는 사람의 말에 공감합니다. "나의 주된 인생관은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받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도록 연습하는 것이다." 우리가 범사에 감사하려면 이와 같은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좋은 일에도 감사해야 하지만 나쁜 일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누리는 당연한 것들에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뜻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범사에 감사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은 허황한 소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핍박을 당하고 있는 데살로니가 교인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신 것은 아무런 근거 없이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할 수도 없는 일인 줄 뻔히 아시면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실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실 때는 반드시 그 명령을 순종할 수 있는 은혜까지 준비하십니다. 따라서 범사에 감사하는 일은 은혜의 산물이지, 노력의 산물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은혜를 받아야 가능한 것이지,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처한 상황을 뛰어넘어 감사할 수 있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당하는 모든 일을 앞에 놓고 "할렐루야" 할 수 있는 은혜가 내 안에서 치밀어 오를 때 가능한 것이지, 내가 노력하고 결심하고 연습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데살로니가 전후서를 읽어보면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핍박 중에서도 범사에 감사할 수 있었던 이유가 나옵니다. 바로 구원의 은혜였던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듣고 난후 이렇게 변했습니다.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 말하니."(살전1:9-10) 이 말씀을 다시 한번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예수를 믿고 나서 과거에 우상숭배하던 것을 다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섬기는 구원 받은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나아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그분과 함께 영원히 살 하나님나라의 영광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배후에는 이런 구원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은혜를 힘입으면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되자 자비로우시고 전능하시며 광대하신 하나님이 그들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러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세상에 있을 동안 너희들이 어디에 가든지 내가 동행해주마. 불 가운데로 지나갈 때도 내가 너희와 함께 하마. 물 가운데로 지나갈 때도 내가 너희와 함께 하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할 때도 내가 지팡이와 막대기로 너를 안위하리라. 원수들 앞에서 너희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높여주리라. 좋은 일이 생기든, 나쁜 일이 생기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해주마. 그리고 너희들이 어려울 때마다 나에게 기도하여라. 그러면 내가 언제든지 귀를 기울이고 들어주마. 환란 중에 내가 너희를 건져주리라. 악한 자가 와서 만지지도 못하도록 내가 너희를 보호해주리라." 이처럼 헤아릴 수 없는 약속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내 아버지가 되셔서 나에게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생각하면 범사에 감사하는 자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날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기만을 간절히 고대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핍박을 받기에 더더욱 그러했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셔서 그분과 함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살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황홀한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의 영광을 눈 앞에 그려보면서 현재의 고난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장차 그 나라에서 누릴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결론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세상에서 당하는 이런 일 저런 일이 땅에서는 중요하게 보이는 일이지만, 하나님나라의 영광에 비추어 보면 잠깐 지나가는 꿈에 불과한 것입니다. 

지난 3월에 6가족을 포함한 25명의 탈북자들이 북경에 있는 스페인 대사관에 몰려들어가 한국행 망명을 요청했습니다. 그리고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며칠 동안 그들은 엄청난 절망에 빠져있었고, 처벌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으니 살려달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대사관 안에서 기다리면서 북한으로 다시 끌려가서 죽을지, 아니면 한국으로 와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지 갈림길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 한국행이 결정되었다는 통보가 왔습니다. 바로 그 때 그 사람들의 마음에 제일 먼저 찾아온 감정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이 '살았다. 이제는 한국으로 간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그 동안 마룻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추위에 떨면서 자던 것도 감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대사관 직원들이 멸시하고 천대하던 과거의 모든 일도 다 감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비행기가 늦어져 며칠 더 기다려야 한다는 통보를 받고도 오히려 감사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살았기 때문입니다. 한국으로 가게 되니까 모든 것이 감사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한국이 아닌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가고 있습니다. 이런 은혜를 받으며 살기에 세상에서 좋은 일에도 감사할 수 있고, 나쁜 일에도 감사할 수 있고, 하찮은 일도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구원의 은혜가 우리에게서 샘 솟을 때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구원의 은혜 때문에 범사에 감사하면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의 은혜가 있으면 얼마든지 승리할 수 있습니다.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에게 구원의 은혜를 충만하게 주시옵소서. 구원 받은 은혜에 취해서 살게 해주시옵소서. 내가 예수님 때문에 얼마나 큰 구원을 얻었는가를 알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 때문에 들어가게 될 하나님나라의 영광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날마다 바라보면서 흥분하며 살게 해주시옵소서." 이런 구원의 은혜가 있으면 세상에서 겪는 어려운 일에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다른 일로는 범사에 감사할 수 없습니다.  오직 구원의 은혜에 우리가 흠뻑 젖어 있을 때 감사할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은혜를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넘치도록 부어주시길 바랍니다.

다같이 기도합시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우리를 향해서 명령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이렇게 명령하신 이유는 우리가 너무나 큰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앞에는 하나님나라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이 큰 구원의 은혜를 우리가 값없이 얻었기 때문에 이 은혜 안에서는 좋은 일도 감사하고 나쁜 일도 감사하고, 큰 일도 감사하고 작은 일도 감사하고, 어떤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우리 모두에게 구원의 기쁨을 회복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구원 받은 자의 행복과 기쁨을 다시 한번 회복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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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들아 이것이 옳으니라  (엡 6:1-4)

우리가 어렸을 적 많이 불렀던 ‘어머니 은혜’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양주동작사의 시에 곡을 붙인 것입니다.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기를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오어머님의 희생은 가이없어라어려선 안고 업고 얼러주시고자라선 문 기대어 기다리는 맘앓을사 그릇될사 자식 생각에고우시던 이마 위에 주름이 가득 땅 위에 그 무엇이 높다 하리오어머님의 정성은 지극하여라"
요즘도 이 노래를 우리 학교에서 부르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 노래를 부를때마다 정말 우리 어머니 우리 부모님들의 마음을 잘 담은 시라고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정말 어머니의 희생은 가이없습니다. 어머니의 정성을 지극합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의 희생과 정성으로 양육받은 자녀들은 그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요즘 우리나라가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 중에 하나가 고령인구로 인한 노인문제가 심각합니다. 점점 나이가 들어가는 노인들은 많아지는데 그분들을 모시는 시설이나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젊어서 자녀들을 위해서 죽어라 고생한 부모들인데 나이가 들어 늙어서는 자녀들이 서로 모시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서 버림받은 노인들이 점점 숫자가 늘어가고있다는 사실입니다. 또 모시기는 해도 어른들을 학대하여서 고통스럽게 하는 가정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알고 있는 어떤 할머니는 외아들입니다. 할머니의 남편은 교사였는데 일찍 암으로 돌아가시고 혼자 되었습니다. 그래서 쓸쓸하여서 아들과 함께 살고 싶은데 며느리가 절대로 시어머니와 함께 살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넓은 아파트에서 쓸쓸하게 혼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가정이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너무 보편적인 모습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많은 가르침 중에서 인간관계에서 “효도”를 무엇보다도 강조합니다.그래서 십계명 중 제 5계명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신약에서도 효도를 강조합니다. “만일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저희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을실 만한 것이다”(딤전5:4) 라고 어려서 부터 효도를 가르치도록 강조하고 있습니다.이렇게 가정에서 효도를 실천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이요 명령인 것입니다.
본래 가정의 창시자는 하나님이십니다.“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최초의 가정은 아담과 하와로 에덴동산에서 행복하게 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첫 사람에게 이 부부외에 “생육하고 번성하는 자식”의 복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죄를 짓고 하나님을 떠난 후부터는 이미 처음에 가졌던 행복이 깨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그 자녀의 축복도  “고통”중에서 얻어지도록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그리고 고통중에 이세상에 태어난 자녀들도 결국 부모에게 순종하기보다는 악한 존재로 불순종하며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태어날때부터 거역의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이미 어머니 뱃 속에 있을 때부터 죄악으로 잉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51:5 에서 다윗은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합니다.또한 이미 어릴때부터 항상 하나님 앞에 악한 모습을 보입니다.이런 악을 버리고 부모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여 자녀된 도리로서 효도하는 것에 대하여 부모로서 어떻게 효도하는 자녀를 기를 것인가에 대하여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자녀들은 주안에서 순종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6:1에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한것일까요?
보이는 부모님께 순종할때에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순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즉 보이는 부모에게 순종하는 사람이 곧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게도 순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 순종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순종하라”는 본래의 뜻은 “들을 준비를 하라”,“즉시 귀를 기울이라”는 것입니다.부모님께 순종하라는 것은 부모의 말을 귀기울여 듣고 기쁘게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순종의 시작은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듣는데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부모에게 순종하되 주안에서 순종하라고 합니다. 여기 자녀들은 주안에서  순종하라고 합니다. 이 의미는 자녀들이 주님께 대한 헌신의 표현으로 부모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정말 네가 주님 안에 있다면 만일 네가 정말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주님께 순종하듯이 부모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그래서 골로새서 3:20에서는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고 합니다. 부모를 순종하는 삶은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바로 주님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바로 보이는 하나님이십니다.만약에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에게 불순종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은 모든 권세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다스려갈 때 사람을 세워서 다스려가십니다. 가정을 다스려가기 위해서 부모를 먼저 세웠습니다.교회를 세워가기 위해서 장로를 세웠습니다. 나라를 세워가기 위해서 위정자들을 세웠습니다. 이렇게 권위자들을 세운 이유는 바로 질서를 잡아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고전14:33 “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고전14:40절에서는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부모가 위대해서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나의 부모의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위치를 하나님께서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의 인격들은 권위자들에게 순종함으로 성숙해진다는 사실입니다. 부모를 통해서 순종을 배울때 우리의 자녀들은 인격자로서 성숙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부모뿐만 아니라 모든 권위자들에게 순종함으로 나를 쳐서 복종할 때 우리는 주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세워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버지라는 망치와 어머니라는 못을 사용해서 자녀인 나를 깍으시고 다듬어가십니다. 까다로운 나를 바로 만드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듬어가십니다.

성경 구약에서는 불순종하는 자에게 아주 엄하게 다루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출21:17)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조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잠30:17)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 아비의 말이나 그 어미의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부모가 징책하여도 듣지 아니하거든 그 부모가 그를 잡아가지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거든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지니” (신21:18-21)
부모에게 순종하지 아니한 자를 쳐죽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이 땅에 오게한 근원을 말살하는 행위임으로 그것을 끊어 버리는 것입니다.이것은 곧 사람을 창조하시고 가정을 창조하신 행위를 부정하는 것입니다.결국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훼방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그럼으로 부모에게 향한 불순종은 하나님께 대한 불손종이요 부모에게 훼방하는 것은 하나님께 훼방하는 것임으로 반드시 죽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부모에게 가장 불순종한 대표적인 인물을 꼽으라고 한다면 다윗의 아들 압살롬을 꼽을 수 있습니다.압살롬은 다윗과 이방인 공주사이에 태어난 아들입니다. 그의 외모는 너무 멋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교만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그는 자기를 기념하는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전쟁은 하나님의 도움이기보다 자기의 힘으로 된 것으로 여겼습니다. 결국 그는 아버지 다윗을 대적하여 이스라엘의 왕이 되려고 난을 일으켰다가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말을 타고 도망가다가 긴 머리카락이 상수리나무에 걸려서 결국 그를 좇던 다윗의 신하들에 의해서 죽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현대판 압살롬들이 많습니다.
부모들에게 걱적을 끼치고 상처를 주는 자녀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한 인터넷설문조사 기관에서 전국의 부모를 대상으로 자녀들이 제일 미울때가 언제인가?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가장 많은 응답이 “자녀들이 거짓말을 할때”입니다. 그리고 2위가 ‘말안듣고 대들때“입니다.3위가 공부 취직 일을 제대로 안하고 빈둥거릴때’라고 했습니다.
부모들이 알면서 자녀들에게 속아주는 거짓말이 몇가지가 있습니다. 먼저‘결혼하고 부모님 꼭 모시고 살께요“ 다음이 ”오늘 일찍 들어올께요“ 다음이 ”참고서 사게 학원 등록하게 돈 주세요“ 다음이 ’성적표 안나왔어요‘등의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부모된 입장에서 자녀들이 비록 유명한 사람이 되지 않아도 정직하고 성실하게 부모 속 썩이지 않고 잘 살아가는 것만해도 이미 효도한 것입니다. 자녀이십니까? 그렇다면 주안에서 순종함으로 부모에게 효도하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2절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고 합니다.

공경이라는 말 속에는 존경의 요소와 두려움의 요소를 함께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것과 같은 차원에서 이해하면 됩니다.
경외하라는 말 속에서 “공경과 두려움”의 2가지 의미가 함께 공존하는 것이듯이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듯이 땅에 있는 육신의 아버지도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1) 우리가 부모를 존경하는 마음을 가진것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입니다.
    부모를 존경한다는 것은 부모 앞에 겸허한 마음의 태도를  가지는 것입니다.성경 잠언23장22절은 "너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그러므로 말씀을  잘듣고 경히 여기지 아니하는 검허한 마음의 태로를 가지는 것이 부모를 존경하는 것입니다.그리고 부모님을 귀중히 생각하는 것이  바로  존경하는 것입니다.잠언30장17절에도"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부모공경이 항상 쉬운 것이 아닙니다. 부모가 부모로서 역할을 잘 감당하여주지 못할 때 공경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경제력이 없어서 공부를 계속할 수 있돌고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 자녀된 입장에서 부모들의 형편과 처지를 이해하고 부모를 공경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다음 부모가 연로하여 자식들이 모셔야 할 때가 있습니다. 부모가 재산이 있으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면 서로 모시려고 합니다. 그러나 부모가 재산이 없고 모셔야 할때가 있습니다. 서구의 경우에는 부모들이 나이들어 늙으면 경제적인 부분을 연금이나 사회기관에서 책임져 줍니다. 그래서 외국의 경우에는 부모들이 구태여 자식들 눈치보면서 같기 살지 않습니다. 노인들만 전문으로 모시는 집과 양로원이 있어서 나라에서 책임지고 보살펴보줍니다. 앞으로 우리나라도 이렇게 되어질 것같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된 입장에서 자녀들에게 노년에 너무 기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어른으로서 끝까지 믿음으로 당당하게 자신을 세워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으로 신비로운 공경의 모습이 있기를 바랍니다.우리의 자녀된 입장에서 사실 노년의 어른들을 존경한다는 것은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어른들에게 잘 대접하는 것이 정말 공경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의 아버지는 영국에서 이민 온 직공의 후예로 신발을 만드는 일을 하였습니다. 링컨이 대통령이 되었을때에 그러한 사실을 확인한 상원들은 매우 충격을 받았습니다. 대부분 높은 학력에 귀족 출신이던 상원들은 신발제조공 집안 출신에다 제대로 학교도 다니지 못한 링컨 밑에서 일을 한다는 것이 굉장히 불쾌했습니다. 어느날 링컨이 상원의원들 앞에서 연설을 하게 되었을때에 한 상원의원이 일어나 링컨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대통령이 되다니 정말 놀랍소.그러나 당신의 아버지가 신발제조공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오. 가끔 당신의 아버지가 우리 집에 신발을 만들기 위해 찾아오곤 했소. 이 신발도 바로 당신의 아버지가 만든 것이오‘
그런후 그는 자기 신발을 내려다 보았습니다. 그러자 여기 저기서 킥킥 거리는 웃음이 나왔습니다. 링컨은 조용히 서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습니다. 그리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의원님. 한동안 잊고 있엇던 내 아버지의 얼굴이 기억났습니다. 내 아버지는 신발제조공으로 완벽한 솜씨를 가진 분이었습니다. 나는 아버지를 능가할 수 없습니다. 다만 아버지의 위대함을 따라잡으려 노력할 뿐이었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많은 귀족들의 신발을 만들었습니다. 이중에도 내 아버지가 만든 신발을 신었던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만약 신발이 불편하다면 말씀하여 주십시오. 내가 고쳐드리겠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내 아버지가 만드신 신발을 최선을 다해 고쳐드리겠습니다. 물론 제 솜씨는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비교할 수 없습니다만...
이 시대에 우리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공경받는 부모상을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 부모들을 어떤 상황에서도 공경할 수 있는 아름다운 전통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2)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부모를 잘 모시는 것입니다.
    부모를 잘 모신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부모의 의식주 생활을  도와주는 것을 말합니다.성경은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저희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
(디모데전서 5:4)고  말씀하셨습니다.
부모의 의식주 문제를 돌보아주고 그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그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부모를 잘 모시는 것인데  잘  모신다고 하면 의식주 문제를 전심전력으로 도와드리는 것이 잘 모시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노인들이 용돈이 부족하여서 삶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부모님들이 더 이상 경제능력이 없어 수입이 없다면 마땅히 자녀들이 필요한 용돈을 드려야 합니다.  할수만 있으면 부모들에게 용돈을 넉넉히 드릴 수 있는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부모님들이 경제능력이 있어 형편이 된다면 그런 경우는 괜찮습니다. 우리 교회도 노년의 부모님들이 많이 계시는데 할수만 있다면 일을 하시어서 스스로 자활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교회에 이미 70이 되었는데도 왕성한 경제활동을 하시는 부모님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당당하게 잘 사시는지 넘 보기가 좋습니다. 여러분 어른들도 할 수만 있는대로 일을 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그럴 수 없는 형편이라면 자녀들이 어른들을 잘 모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부모를 잘 모신다는 것은 될수 있는 데로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잠언 23장25절은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 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고 말한 것입니다.그러므로 부모가  어떻게  하면 마음을 즐거워할 것인가? 그것을 알아 보고 부모가 기뻐하도록 그렇게 모시는 것이 잘 모시는 것입니다.그뿐아니라 늘 기도할때 하나님께서 부모를 잘 지켜주시고 은혜를 베풀기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것이 부모를 잘 모실 수 있는 것입니다.

  3)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부모의 얼굴을 빛내드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부모의 얼굴에 빛을 낼 수가 있을 까요? 그것은  자식으로써 하나님께 칭찬받는 삶을 살때 그것이 부모님의 얼굴에 빛을 내는 것입니다. 자녀가 주일을 잘 지키고 하나님을 잘 공경하고 하나님께 사랑과 축복을 받는 그런 삶을 살면 부모의 마음이 편안하고 부모의  얼굴에  빛이납니다.이러므로 우리가 부모의 얼굴을 빛내드리는 것은 바로 부모를  잘공경하는 것입니다. 그뿐아니라 자식으로써 이웃에게 칭찬받고 살때에  부모의 얼굴에 빛을 내게 되는 것입니다.잠언 17장6절에는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요 아비는 자식의 영화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당진자식 참 잘 두었습니다.참 훌륭한 자식입니다.정말로 자랑스럽습니다"라는 칭찬을 들을 때 부모에 얼굴에 광채가 납니다.이것이 부모를 공경하는 방법인 것입니다.
  또,자녀가 국가 사회를 위해서 공을 세워서 국가사회에 존경을 받는 그런 위치에 서개 되면 부모로써 큰 영광을 느께게 됩니다.왜냐하면 자식은 부모의 연장된 생명입니다.이렇게 때문에 자식에게 영광이  임하는  것은 부모가 영광을 받는 것과 꼭 같습니다.이러므로 국가와 민족에 의로운 일을 행하여 크게 칭찬을 받는 것은 부모의 얼굴에 빛을 내 주는 것입니다.

  4) 부모를 용서해 드리는 것은 부모를 공경하데 중요한 것입니다.
    부모도 완전한 인간이 아닌 이상 일생을 자식을 키우면서,그 자식을 시집,장가 보내는데 섭섭한 일들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많은  일에  섭섭한 감정을 자식들이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부모로써는  자식에게  최선을 다하고 잘되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그러나 자식들이 볼 때는 여러 가지면에 있어서 섭섭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자기가 원하는대로 부모가  교육을 시켜주지 못했다든가 원하는대로 먹이고 입혀주지도  못했다든지  그리고 결혼할 때 원하는대로 재산도 나눠주질 못했고 이래서  여러가지  부모에  대해서 섭섭한 생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결혼하여 살면서 평생에 한으로 남아서 부모를 용서하지 못하고 원망하면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경우라도 부모를 원망해서는 안됩니다. 저는 가끔 입양아들이 부모를 찾는 것을 방영하는 티이부이 프로그램을 볼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비록 자기를 버렸지만 부모를 원망하지 않고 그때 상황에서 얼마나 어려웠으면 그렇게 하였을까 이해하고 받아주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흐뭇할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합니다.여러분,내가 나의 잘못도용서해 줘야 되는 것처렴  가장 가까운 부모의 죄도 용서해 줘야 되는 것입니다.은혜를 모르는 것은 짐승보다 못합니다.그러나 은혜를 받고도 모른체 하는 것은 참으로 못난 인간  입니다.은혜를 받았으면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고 그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그런 생각을 늘 품고 그대로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요,효를 다하고 공경을 다하는 것입니다.


세째 옳은 일을 한 자녀들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3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는 것입니다.
효도 뒤에 주어질 하나님의 복은 “잘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부모에게 효도를 잘 한 그 후손들을 보면 보통 잘 되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보십시오. 아버지가 모리아산에서 자신을 죽여 제물로 드리려고 했는데도 순종했습니다. 나중에 그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을 보십시오. 17세의 나이에 외국에 팔려가 종살이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기억하고 효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범사에 요셉과 함께 하시어서 얼마나 그를 축복하여 주십니까?
룻이라는 여인은 시어머니를 잘 공경하고 효도를 실천햇습니다. 시아버지도 죽고 남편도 죽고 시숙도 죽어 패망한 가정에서 그녀는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릅니다.자신을 떠나라고 하는 시어머니의 말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멀리 이국 땅에서 부터 그 시어머니 따라 이스라엘로 옵니다.그러나 이스라엘로 돌아온 뒤에 가난한 집안의 며느리로 룻이 해야할 일은 이삭을 줍는 일이엇습니다.그녀는 궂은 일 소에서도 원망하지 않고 그 시어머니를 정성껏 봉양합니다.이러한 룻에게 하나님은 좋은 길을 열어주십니다.룻이 이삭 줍던 밭의 주인 보아스와 결국 재혼하게 되고 룻은 바로 예수님의 조상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부모를 공경한 사람에게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합니다.
여기 “네가 잘 되고”라는 말씀은 영적으로 잘 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질적인 축복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하는 말씀은 계산적으로 오래 산다는 의미이기보다는 이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삶을 더 누릴 수 있는 복을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약속있는 첫 계명으로 부모공경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잘되게 하시려고 하는 뜻입니다.

나가는 말 )

중요한 것은 우리의 가정이 먼저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우리의 가정이 회복될때 우리의 삶도 회복되고 우리의 교회도 회복될 수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들의 가정에서 효도와 공경이 순종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래서 땅에서 잘되고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풍성히 누리면서 복된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 박춘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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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 명락교회 이 명선 목사

 

사무엘상 2장 12-26절을 중심하여 ‘엘리와 한나의 자녀교육’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립니다. 본문에서 두 가정을 보게 되고, 두 결과의 종말을 보게 됩니다.

한 가정은 엘리라는 제사장의 가정으로 이스라엘의 명문가정입니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가정에서 자랐지만 불행한 인생으로 막을 내립니다. 하나님의 제물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고, 성전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을 합니다. 나중에는 법궤를 어떻게 사용해야 되는지를 몰라서 전쟁터에 무기로 가지고 갔다가 빼앗기며, 두 형제가 동시에 죽게 되는 비극을 맞게 됩니다. 그 아내는 아이를 낳다가 죽으면서 아이의 이름을󰡐이가봇󰡑(하나님의 영광이 이 가정에서 떠났다)이라 지었고, 아버지는 아들의 소식을 듣고 의자에 앉아 있다가 떨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우리는 한 가정의 종말, 나아가 한 민족의 종말을 이 사건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이런 불행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엘리라는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또 한 가정은 한나의 가정입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괴로운 한 여인, 하나님을 향한 그의 사랑, 하나님으로 인해 구별된 삶은 사무엘이라는 자식에게 영향을 주게 됩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민족이 사사시대로부터 왕정시대로 넘어가는 큰 역사적인 시점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신앙적으로 결단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큰 영향력을 준 인물입니다. 동시에 다윗이라는 훌륭한 지도자를 발굴해서 키워내는 선지자로 세워졌습니다. 그의 그런 삶은 바로 한나에서 시작됩니다.

엘리와 한나 두 사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자녀 교육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엘리 제사장과 한나의 자녀교육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첫째, 엘리와 한나 자녀교육의 차이는 ‘분별력이 있고, 없고’입니다.

분별력은 영적 감수성을 말합니다. 분별력은 때를 잘 분별하는 것입니다. 나아가야 할 때와 들어가야 할 때, 말해야 될 때와 침묵할 때, 올라갈 때와 내려갈 때, 웃어야 할 때와 울어야 할 때를 잘 분별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이것을 잘 분별하지 못해서 울어야 될 때에 웃고, 나가야 할 때 들어오고 합니다. 또 붙잡아야 할 것과 놓아야 할 것, 사랑해야 할 것과 미워해야 할 것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미워해야 할 것을 붙들고, 버려야 할 것을 붙듦으로써 불행을 자초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인생에 있어서 우선순위를 분별해야 합니다.

엘리의 아내의 이름이 나오지 않은 것을 보면 아마도 홉니와 비느하스는 엄마가 없는 것 같습니다. 엄마 없는 자녀를 보는 엘리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그 아이들을 얼마나 사랑했겠습니까? 죄를 지어도 그 아이를 사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는 자녀를 사랑할 줄은 알았지만, 분별력 있는 사랑을 할 줄은 몰랐습니다. 자녀가 하나님이 쓰시기에 좋은 사람으로 자라기 위해서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아닌 것은 아니고, 맞는 것은 맞다는 것을 분별해서 가르쳐야 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자신의 삶이 게으르고 나태하고 분별력이 없습니다. 제사나 지내주고 백성들이 오면 재판해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아버지의 삶을 보면서 아이들이 다 배워버렸습니다. 정말 자식들에게 가르쳐야 될 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부모 품을 떠난 자녀는 아버지의 말을 더 이상 듣지 않습니다. 그러니 성전에 제물로 가져온 고기를 함부로 건져 먹고, 성전에서 일하는 여인과 동침해서 백성들 사이에서 말이 나오게 했습니다. 엘리는 그 상황에서도 자녀를 바르게 지도하지 못했습니다.

한나는 어떠했습니까? 자녀가 없을 때 하나님께 간구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아들을 주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이 아이의 평생의 삶이 하나님 앞에 드려질 수 있도록 제가 영향력 있는 삶을 살겠습니다.” 그렇게 스스로 결단했습니다. 매년 제를 드리러 올라가야 하는데, 그녀는 남편에게 양해를 구합니다. 품안에서 가르칠 수 있을 때 그 아이를 가르쳐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기도를 가르쳤고, 예배를 가르쳤고,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아이의 기본적인 인격은 아이가 3살이 될 때까지 다 형성이 된다고 합니다. 그 이후에는 엄마는 그다지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합니다. 한나는 사무엘이 자기 품안에 있을 때에 영향력을 줄 수 있을 만큼 최선을 다해 주고, 젖을 떼어도 되었을 때에 아이를 하나님 앞에 데리고 갔습니다. 주의 성전에 맡겼습니다. 세 네 살 밖에 되지 않은 자녀가 얼마나 눈에 그려지겠습니까? 그러나 내 아이가 하나님 앞에서 우선순위로 드려지기를 바라며 철저히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합니다. 그가 정말 분별력 있는 여인임을 이 대목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부모가 하나님 앞에서 정말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 자녀가 내 품을 떠나서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영향력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자녀를 바르게 지도하는 한나의 모습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 엘리와 한나 자녀교육의 차이는 ‘삶의 자리’입니다.

엘리의 삶의 자리는 ‘성전’이 아니라, ‘자기 처소’에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성전에 누워’ 있지만, 엘리는 자기 처소에 누웠다고 되어 있습니다. 엘리에 관한 본문을 읽다보면 '자기자리에 앉았더라'는 대목이 많이 나옵니다. 제사장의 자리는 어떤 자리입니까? 섬기는 자리입니다. 하나님과 늘 교통하는 자리요. 주님의 음성을 듣는 자리입니다. 그는 자기 처소에 누워 있다가, 즉 교만한 자리에 앉아만 있었습니다. 결국 그는 자기 자리에서 떨어져 목뼈가 부러져 죽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내가 나의 자녀와 이웃과 교회에 좋은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자리에 있는지, 나를 주장할 수 있는 자리에 앉아서 가만히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한나의 자리는 어떤 자리입니까? 그녀는 ‘기도의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고통이 있었을 때 원망하는 자리로, 낙심하는 자리로 갈 수도 있었지만 기도하는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자기 자녀 앞에서 영향력 있는 삶을 살도록 결단하게 하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사무엘은 나중에 어떤 사람으로 불립니까? 모든 신학자들은 그가 기도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 기도를 누구에게 배웠을까요? 자기의 어머니에게 배웠습니다. 나이가 들면 기도는 가르쳐지지 않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훈련되어야 합니다. 기도의 사람 사무엘은 하나님의 역사를 새롭게 만드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우뚝 섰고 영적인 하나님의 역사의 무대에 정말 존귀하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반면에 엘리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전쟁터에서 죽고, 그들의 멸망이 민족과 나라의 멸망으로 직결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세상의 음성을 듣는 자리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리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세상이 말하는 권위의 소리, 자기 내면의 아집의 소리, 기득권의 소리를 듣고 앉아 있으면 안 됩니다. 이제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엘리의 자리는 정말 존귀한 자리였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자리였지만, 고통의 자리가 되었고, 한나의 자리는 고통의 자리였지만, 축복의 자리로 변했습니다. 한나는 사무엘을 엘리 제사장, 성전에 맡깁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아이는 하나님이 책임을 지시고 잘 길러 주셨습니다. 한 사람의 쓸 만한 인물이 생긴다는 것은 굉장한 생명의 투자가 있어야 합니다. 아이를 위한 확실하고 분명한 교육 지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아이들도 하나님을 위해 사는 인물이 됩니다. 확고한 믿음을 가진 경건한 부모에게서 그런 믿음의 사람이 생기는 것입니다.

 
셋째, 엘리와 한나 자녀교육의 차이는 ‘비전’입니다.

엘리는 자기 자녀들에게 비전을 주지 못했습니다. 엘리의 자녀들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때 엘리는 그런 일을 하지 말라는 책망으로 그쳤습니다. 그 이상 하나님의 뜻과 사명, 즉 비전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어떻게 했습니까? 매년 제사를 드리러 올라갈 때 겉옷을 지어서 갖다 주었습니다. 그 옷은 직접 한나가 지은 옷입니다. 그 팔을 기우면서 “이 팔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능력의 팔이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가슴을 기울 때는 “주님의 마음을 품게 하여 주시옵소서,” 등을 기울 때는 “주님의 사명을 지고 가는 씩씩한 아이가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지 않았을까요? 매년 제사를 드리러 올라갈 때 옷을 지어 주면서 그 아이에 대한 비전과 꿈을 가지고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부모는 자녀를 위해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을 이야기해 주어야 합니다.

또 한나는 사무엘에게 에봇을 입혔다고 나와 있습니다. 에봇은 제사장이 입는 옷입니다. 그 옷을 아들에게 입히며󰡐“너는 하나님의 사람이야”라는 꿈을 심어 준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꿈과 이상입니다. 예수님의 마음, 말씀, 인격과 삶은 우리가 본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본받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꿈은 우리들의 시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했던 하나님의 일을 우리 자식들이 계속해서 할 수 있도록 꿈을 이어 주어야 합니다. 이제는 정말 하나님의 영적인 영향력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자녀들에게 비전을 물려줘야 합니다. 한나처럼 하나님의 꿈을 물려주는 여러 성도 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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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20장 19절-31절)


19.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20.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3.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24.열 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6.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    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고


27.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30.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오늘의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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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추천찬양(미션스쿨)


은혜의 찬양 / 순례자의 길 -찬양전도사 이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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