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찬양예배설교]   Sunday Night Service
제목 :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말씀 : 벧전1:6-9

 

1.금보다 귀한 믿음

누누이 말씀드렸지만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무엇인가?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 물론 생명 즉 영원한 생명이다. 이것은 천하와도 바꿀 수 없다. 육신의 생명, 세상 부귀영화, 입신양명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 이유는 말할 것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만이 영적 육체적 물질적 정신적 모든 영역에서 우리에서 완전하고 영원하고 온전한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주기 때문이다.

오늘 7절 말씀을 보라.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또 잠3:14절을 보라.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물론 금도 재물도 지식도 명예도 지위도 귀하다. 그러나 믿음이 더 귀하다. 당연하지 않나? 세상의 것을 아무리 많이 가져봐야 참되고 영원한 행복과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풀의 꽃과 같다. 그리고 그것만 따라가다가는 영원한 고통 가운데 처한다. 그러나 주 예수께 대한 믿음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은총, 기쁨, 평안, 은혜, 사랑, 자유를 준다. 질적으로 시간적으로 완전하다. 영원히 온전히 완전한 기쁨과 평안과 은혜와 영광을 누리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마6:19,20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금보다 귀한 믿음을 얻은 우리는 정말 감사하며 기뻐하며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자. 무슨 일이 있어도 금보다 귀한 믿음을 지켜 나가자. 우리의 후대들에게 다른 어떤 것보다 이 믿음의 유산을 남겨두자. 이 금보다 귀한 믿음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자. 그래서 나도 귀하고 복되고 다른 사람도 귀하고 복되게 하는 복된 삶을 살아가자.

2.믿음에는 시련이 있음.

그러나 믿음을 가지고 산다고 무조건 만사형통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미 영광의 나라는 주어져 있지만 완전한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 이 땅을 떠나 천국에 갈 때 이루어진다. 지금도 물론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긴 하지만 여기는 아직 완전하지 않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마귀사탄이 역사하고 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그것도 모르고 사탄의 유혹에 빠져 그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위해 살아간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마귀사탄의 역사와 싸워야 한다. 마귀 사탄은 영적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으로 온갖 방법으로 유혹하고 도전하고 시험하고 넘어뜨리려고 한다. 이걸 분별하고 물리쳐야 한다. 그리고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왜곡된 풍조 속에 살아가고 있는데 우리는 거기에 휩쓸리지 말고 그걸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래서 이런 많은 도전과 유혹과 시험이 있기에 천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길은 그렇게 쉽지만은 않은 길이다.

그러나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물론 지금 여기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살아가려면 그런 것들에게 속거나 타협하거나 져서는 안 된다. 깨어 있어 기도하며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물론 힘들고 어렵고 억울하고 손해보고 자신을 부인해야 할 때가 많다. 그러나 모든 귀한 것은 그냥 얻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그냥 얻어진 귀한 귀하지 않다. 믿음과 믿음을 통한 구원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너무나 고귀한 것이기에 너무나 고귀한 대가를 치르고 주어진 것이다.

물론 구원은 대가없이 믿음으로 받는다. 그러나 결코 거저가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엄청난 대가가 있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일단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주님을 찾아야 한다. 말씀을 들어야 한다. 자신의 죄와 무지를 인정하고 겸손히 엎드려야 한다.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 그냥 제멋대로 살아가는데 믿음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또 믿음을 얻고 나서도 마찬가지다. 그 귀한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싸워야 한다.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 세상의 왜곡된 가치관과 풍조에 맞서야 한다. 오직 선과 진리와 의를 향하여 가야 한다. 그러자니 어려움도 있다. 고난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죄와 무지가 만연되어 있는 세상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오늘 6절에서는 말씀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또 벧전4:12절에서 말씀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그러므로 오직 믿음만이 가장 소중하고 귀하고 금보다 귀하다는 것, 거기에만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이 죄와 무지 속에서 사탄이 역사하는 세상에서 그래서 사람들이 왜곡되고 죄 되고 엉뚱한 길로 달려가는 세상 속에서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있어도 늘 깨어 기도하면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우리에게 도전해 오는 모든 세력을 이기고 승리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자.

3.믿음의 결과

그러면 왜 믿음이 금보다 귀한가? 왜 시험 중에도 기뻐하는가? 말할 것도 없이 믿음으로 죄에서 구원받는 자에게만이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오늘 8절을 보자.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즐거움 일까?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이다. 어떤 이들은 천국에 가면 심심할거 같다고 말한다. 맨날 찬송이나 하고 예배나 드리고 일도 안하고 놀고 먹으니.... 거기는 농사를 지을 일도 없고, 취직하기 위하여 애쓸 일도 없다. 무슨 취미생활 할 일도 없다. 취미생활은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착각마라. 아무것도 안해도 그냥 마냥 즐겁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지 말라. 지금 아무것도 안하면 심심한 것은 우리의 심령의 상태가 온전치 못한 까닭이다. 우리가 영화의 몸을 입고 심령이 온전히 회복되면 심심이라는 단어는 없다. 쓸쓸하고 고독하고 미워하고 슬퍼하고 아파하고 그런 개념 자체가 없다.

그냥 즐겁다. 그냥 영광스럽다. 그냥 기쁘다. 그냥 사랑이 철철 넘쳐 흐른다. 영광스런 즐거움이 넘친다. 그러니 믿음이 금보다 천배만배 귀하다. 이게 바로 믿음의 결국이다. 오늘 9절을 보라.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즉 믿음의 결과는 영혼구원이고 영혼 구원을 받을 때에 영광스러운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도 영혼이 구원을 받아야 한다. 영혼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받는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고 그 주님을 모셔들일 때만이 영혼의 구원을 받고 영혼의 구원의 받을 때만이 영생복락을 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놀라운 사실을 분명히 알고 예수님을 온전히 영접함으로 구원의 은총을 누리며 이로 인하여 정말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소망과 기쁨 가운데 살아야 한다. 그리고 이 놀라운 사실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이 사실을 전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보면 세상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교인들도 영혼 구원에 대한 감각이 둔하다. 어떤 이는 교회를 오래 다녀도 영혼 구원에 대해서 잘 모른다. 자기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들이 영혼 구원을 받지 못했는데도 무덤덤하기도 하다. 그러나 영혼이 구원 받지 못하면 헛일이다. 영혼의 구원을 받아야 영원히 영광스러운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 그러나 영혼이 구원받지 못하면 영원한 고통 속에 처하게 된다. 생각만해도 몸서리가 처지는 일이다. 그래서 믿음이 금보다 귀한 것이다. 이것이 교회에 다녀야할 목적이고, 이유이고,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요즘에 전도가 참 어렵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잘 먹고 잘 살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식과 문화와 물질문명과 과학의 발달도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다보니까 마치 인간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긴다.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것처럼 여긴다. 정말 가소로운 일이다. 인간이 물질문명과 과학과 지식을 지금보다 천배 만배 더 발전시킨다해도 인간은 여전히 죄인이고 한계 속에 있다. 죄와 무지 속에서 무엇이 옳은지 알지 못하고 올바른 길로 가지도 못하고 때론 알면서도 할 수 없는 일들이 부지기수이다. 우리가 알고 해결하고 누릴 수 있는 일보다 알 수 없고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천배만배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이 왜곡된 흐름에 휘말리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교회도 세상의 그런 왜곡된 가치관에 휘말리고 있다. 세상 사람들과 같이 물질문명 속에 젖어 인본주의와 개인이기주의에 빠져 있다. 그래서 영혼의 풍성함을 위하여 힘쓰지 않는다. 깨어 기도하고 말씀묵상하며 무엇보다도 영성을 풍요롭게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거룩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그냥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 듣고 귀히 여김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야 하는데 도리어 지탄을 받고 있다. 그래서 그러지 않아도 물질문명이 발달한 세상에서 사람들이 그 꼴난 지식과 과학을 믿고 하나님을 점점 더 멀리하고 있는데 교회마져 거기에 휩쓸려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어 복음의 역사를 이루기가 정말 더욱 힘들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깨어 기도하고 말씀 묵상하자. 그래서 먼저 내 영혼이 풍성해 짐으로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며 살아가자. 거룩하고 진실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자. 그리고 정말 죽어가는 저 영혼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갖자. 지금 우리가 사순절 전도를 하고 있는데 정말 이 일을 위해서 더욱 기도하자. 잘 안돼서 맥이 빠질 때도 있지만 그러나 한편으로는 거룩한 모습으로 본을 보이고 말씀을 증거 할 때에 분명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가 있다.

그러므로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이라는 이 가장 중요한 명제를 잊지 말고 엎드려 기도하며 복음의 역사에 참여할 때에 주님의 몸된 교회를 든든히 세워가며 더욱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면서 주님의 거룩한 역사를 이루어가는 복되고 아름다운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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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 Sunday night worship
제목 : 진정한 승리자

말씀 : 딤후2:7-13

 

딤후2장에서 사도바울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군사(병사)라고 말씀한다.(3,4절) 왜냐하면 세상은 영적인 전쟁 터이기 때문이다. 안 그런가? 마귀사탄이 얼마나 교활하게 우리를 공격하고 있는가? 얼마나 무리를 넘어뜨리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가? 그래서 벧전5:8절에서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말씀한다. 그래서 엡6:12절에서는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전신갑부를 입으라고 하신다.

그렇다. 세상은 치열한 영적 전쟁터이다. 사탄마귀가 끈질기게 우리를 공격한다. 때로는 사납고 포악하게 때로는 교활하게 때로는 달콤하게 다가와 유혹하여 넘어 뜨리려고 한다.

그래서 앞 부분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운데 강하라, 말씀을 가르치라, 승리하려면 예수의 은혜로 강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고난을 받으라, 주님을 기쁘게 하라, 법(말씀)대로 살라고 하셨다. 왜? 그래야 우리가 성령의 능력과 지혜를 덧입어 사탄마귀의 흉계와 거짓을 간파하여 물리치고, 성령의 능력으로 그런 것들과 싸워 이김을 우리 자신이 생명의 은총을 누리며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계속되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서의 삶의 태도에 대하여 말씀한다. 이 말씀을 묵상할 때에 주님의 은총을 덧입어 더욱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우뚝 서서 모든 마귀사탄의 역사와 흉계와 도전을 물리치고 승리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자.

1.말씀을 묵상하여 총명을 얻으라.

딤후2:6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

내가 말하는 것이란 앞의 말씀 전체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보다 직접적으로 1~6절의 말씀들이다. 예수의 은혜로 강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예수님과 함께 고난에 참여하고,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말고, 법대로 경기해야 한다.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하라. 그러면 주께서 총명을 주신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총명이란 물론 진리를 아는 것이다. 바르게 알고 깨닫는 것이다. 그러면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 은혜의 말씀을 따라 살게 된다. 그러면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면 유혹에 빠지지 않는다. 그러면 고난이 와도 이긴다. 세상 물결에 휩쓸리지 않는다. 그러면 평안을 누리고 기쁨과 자유를 누린다.

과연 무엇이 총명인지, 총명을 어떻게 얻는 지 기억하라. 물론 말씀이다. 거기에 생명과 기쁨과 자유와 평안과 희망이 있다. 그러므로 언제 어느 때나 말씀을 묵상하며 심비에 새기고 그 말씀을 잣대와 등불과 희망과 소망과 힘으로 삼고 그 말씀을 의지하여 주님과 동행하라. 그리하여 그 은혜와 능력과 지혜로서 생명의 은총을 누리며 그 역사를 이루어가는 복된 인생이 되자.

2.예수님을 기억하라.

딤후2:8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은혜의 길을 잘 달려가 승리하려면 예수님을 생각하라. 예수님을 생각하되 십자가의 죽음을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라. 그러면 무엇을 따라 가야 할지 알리라.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리라. 진정 진리가 무엇인지 알리라. 능력을 받으리라.

무엇이 생명인가? 무엇이 은혜인가? 어디에 영광이 있나? 어디에 기쁨이 있나? 무엇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인가? 무엇이 소망인가? 무엇이 영생복락을 가져다 주나? 무엇이 진정 영광스러운 삶인가? 물론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구원을 완성하셨다. 우리도 거기에 동참해야 한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다시 살아야 한다. 오직 거기에 생명과 구원과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다. 지금 여기서도 진정한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알고 선과 진리와 의 가운데 살아간다. 그래서 참된 생명의 기쁨과 자유와 평안을 누리게 된다. 세상의 모든 환경과 상황을 이기게 된다. 사탄의 역사를 분별하고 물리치며 주님의 역사를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언제나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억하며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의 방법을 따르며 주님과 동행함으로 생명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자.

3.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

딤후2:9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바울은 말씀으로 인하여 숱한 고난을 받았다. 주의 복음을 증거 하다가 지금도 감옥에 갇혀 있다. 그것도 순교를 앞두고 있다. 그래서 때로는 말씀이 막힌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너무나 엄청난 장벽이 앞을 가로막아 답답할 때도 있었다. 조바심이 날 때도 있었다. 걱정과 염려가 있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낙심과 절망과 원망도 불평도 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역사는 결코 중단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죽어도 지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도리어 죽음을 통하여 생명의 역사는 더욱 힘있게 이루어져 가기 때문이다. 실제로 기독교역사는 고난 시에 도리어 생명의 역사가 불같이 일어났다. 때로는 위축되는 듯이 보여도 때로는 심지어 배교자도 생기기도 해도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그런 환난과 핍박을 통해 생명의 역사는 더욱 힘있게 이루어져 왔다.

반면에 잘먹고 잘살고 평안하고 안전하고 걱정과 염려가 없을 때 기독교역사는 도리어 퇴보했다. 서양교회가 그렇고 우리나라 교회가 그렇다. 어렵고 힘들 때 도리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무릎 꿇었다. 우리의 무능을 인정하게 되었다. 의지할 곳은 하나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주님 앞에 엎드려 도우심을 구했다. 주님 앞에 매달렸고 힘들고 어려워도 오히려 더 봉사했고 오히려 더 열정을 가졌다. 그럴 때 교회는 힘과 능력과 은혜가 있었다. 거룩한 삶이 있었다. 그래서 비록 힘들지만 그들은 생명력있는 신앙생활을 유지했고,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왔다.

그런데 잘먹고 잘살고 여유가 생기고 그러니까 도리어 나태해졌다. 평안해 지니까 아쉬운 게 없어졌다. 등 따뜻하고 배불러지니까 슬슬 딴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세상의 것이 좋았고, 재미있는 게 많아졌다. 세상에서 먹고 싶은 것도 많아지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아 졌다. 좋은 세상이라며 세상으로 자꾸만 나갔다. 그래서 하나님과 도리어 멀어졌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이 결코 우리를 삼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고난이 우리를 주님 앞에 묶어두는 끈과도 같다는 것을 기억하며 고난에 동참하라. 그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역사는 절대로 멈추지 않는다는 기억하며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라. 원망하지 말라. 도리어 고난 가운데 더욱 주님을 바라보고 의지함으로 하나님과 가까이하는 계기로 삼으라. 그래서 주님 안에 있는 은헤의 풍성함을 마음껏 누리라.

4.고난은 영광을 가져다 준다.

딤후2:10~12 그러므로 내가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 /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바울은 고난이 결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말씀을 결코 막히지 않음을 알았다. 그래서 어떤 고난 속에서도 주님의 역사를 위하여 달려갔다. 왜? 자신이 영광의 나라를 누리는 것은 물론 사람들이 그 영광에 참여하도록 해야 했기 때문에, 그렇지 않으면 저들이 영원한 형벌 가운데 처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할 때 반드시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질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참고 복음의 역사에 진력했다.

그래서 10절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11절에서는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라고 하였다. 또 12절에서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고 하였다. 즉 그의 복음의 사역에는 정말 많은 고난들이 있었지만 죽어가는 영혼들을 영원한 영광의 나라로 인도하기 위하여, 주와 함께 죽으면 주와 함께 살아 영원한 영광을 차지할 것을 믿었기에, 참고 영광의 나라를 향하여 달려가면 주와 함께 왕노릇 할 것을 알았기에 복음의 역사를 위하여 힘차게 달려갔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정말 기억해야 한다. 세상에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위하여 고난도 달게 받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내해야 한다. 하나님의 역사는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고 단시간에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내 생각과 뜻대로 다 되는 것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역사로 된다. 우리는 다만 그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때로 바라보며 열심히 씨를 뿌리고 가꾸면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11절 말씀처럼 죽어야 한다. 내 자아가 죽고 내 가치관과 목표와 목적과 삶의 양식과 우선순위와 방법과 경험이 죽고 주님의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우리도 주님과 함께 다시 살게 된다. 영광을 누리게 된다. 죽지 않으면 다시 살지 못한다. 영광도 누리지 못한다. 죽지 않으면 거듭난 것이 아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새것을 누리지 못한다. 그러나 죽으면 다시 산다. 주님의 것이 된다. 주님과 동행하게 된다. 그러면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여러분, 다시 산다는 것, 얼마나 굉장한 일인가?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그냥 다시 사는 것이 아니라 주와 함께 왕노릇하기 위하여 다시 사는 것이다. 왕노릇 한다고 무슨 권력을 휘두르고 명령을 내리고 복종시키고 그런 왕노릇을 말하는 게 아니다. 한마디로 완전한 영광을 누리는 상태를 말한다. 그 어떤 악의 세력이나 어둠의 세력이 근접하지 못하고 그야말로 완전무결한 기쁨과 은혜와 자유와 평화와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의 어떤 왕도 누릴 수 없고 어떤 백만장자라도 누릴 수 없고 어떤 지식인이라도 누릴 수 없는 것이다. 그야말로 완벽한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 그까짓 세상의 왕이나 부귀영화나 권세 따위는 새발의 피도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까짓 세상 명예와 부귀영화 따위는 배설물로 여기고 복음의 역사를 위하여 수고했던 것이다. 우리 모두 그런 은혜를 누리자.

5.주님의 약속은 완전하다.

딤후2:13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미쁘다는 것은 완전히 믿을만하다. 신뢰할만하다는 뜻이다. 즉 우리는 신뢰할만하지 못하지만 주님은 완전히 신뢰할만한 분이시라는 것이다. 주님은 항상 미쁘시다. 주님을 결코 자기를 부인할 수 없으시다. 자기를 부인하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메시야로서의 정체성은 물론 자기 자신의 말이나 행동을 부인할 수 없다는 말이다. 즉 자신의 말씀과 약속과 행동에 대하여 완전히 책임을 지신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상황이 불리하면 오리발을 내밀기도 하고, 아니면 능력이 없어 못하기도 하지만 주님은 절대로 딴 소리도 안하시고 능력이 없어 못하지도 않으신다. 약속을 100% 완전히 지키시는 능력자이시고 신실하신 분이시다.

그렇다. 주님의 나라는 너무나 확실하다. 주님의 약속은 100%이루어진다. 주님의 재림도 천국도 완전하게 이루신다. 영광의 나라도, 영광의 면류관도 완전히 100% 다 이루신다. 세상이 쪼개지고 박살나도 주님의 약속은 변개치 않는다. 아니 도리어 세상이 박살날 때 하나님의 말씀은 더욱 온전하게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감사하라. 기뻐하라. 우리에게 이 놀라운 지혜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이를 알지 못하는 죽어가는 저 많은 영혼들을 주님품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더욱 기도하고 힘쓰자. 그런 진리를 위한 삶을 살려면 고난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영광의 고난임을 기억하고 감사함으로 참여하자. 그러기 위해 더욱 주님의 십자가에서 함께 죽고 거듭난 자아로 살아가자. 그래서 주께 영광돌리고 주님의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며 그 역사를 이루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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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찬양예배설교]   Sunday Night Service

제목 : 서로 덕을 세우라

말씀 : 살전5:9-11

영국인 의사 제임스 Y. 심프슨 卿(Sir James Y. Simpson 1811~1870)은 29세의 나이에 에딘버러 의과대학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수술을 많이 하면서 환자들이 당하는 고통을 지켜볼 때마다 너무 마음이 아팠다. 당시에는 마취제가 없어서 환자의 수족을 결박한 후 수술을 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창세기를 읽다가 창2:21 말씀이 눈에 들어왔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아담의 갈빗대를 꺼내어 여자를 만드셨으니 인류최초의 대 수술장면인 셈이다. 그런데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셔서 하나도 아프지 않게 수술을 하신 것이다.

심프슨은 이 말씀을 묵상하며 깊이 잠들게 하는 약품을 찾기 시작했다.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던 심프슨은 마침내 클로로포름이라는 흡입마취제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사용을 거부하자 자기가 직접 마취제를 흡입하여 몇시간 깨어나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그러다가 빅토리아 여왕이 왕자를 분만할 때 이 마취제를 사용하여 고통 없이 순산시켜 이 마취법이 공인이 되었다. 물론 지금은 더 안전하고 마취력이 강한 마취제가 발견되어 이 마취법은 잘 사용하지 않으나 당시로서는 가히 의학계의 혁명과 같은 일이었고, 심프슨은 이 마취제의 발견으로 의학계의 거목이 되었고 영국황실로부터 의사로서는 처음으로 경(Sir)의 칭호를 받게 되었다.

그렇게 유명한 의사가 되어 강의를 하던 어느 날 한 제자가 물었다. “선생님께서 지금까지 발견한 것 중 가장 큰 발견은 무엇입니까?” 학생들은 당연히 마취제의 발견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심프슨은 전혀 다른 대답을 하였다. “나의 발견 중에 가장 큰 발견은 내가 큰 죄인이라는 것과 오직 예수님만이 온 인류의 구세주라는 사실일세.”

우리의 가장 큰 발견은 무엇인가? 우리의 가장 큰 행복은 무엇인가? 우리의 신앙생활의 가장 큰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가장 큰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님의 구세주 되심이다. 예수님 안에 있는 구원이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다. 안 그런가? 이보다 더 크고 귀한 것이 무엇인가? 이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복된 것이 무엇인가?

그러므로 예수님을 알게 된 우리는 더욱 감사와 기쁨과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며 구원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자.

1.우리를 부르신 목적(9절)

살전5:9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우리를 부르신 목적을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왜 부르셨는가? 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는가?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지 않으면 안 되셨는가? 두말할 나위도 없이 구원이다. 구원이 목적이다. 물론 세상에서 사랑하고 화평하고 기쁘고 은혜가 충만하고 복된 삶을 살기 위한 목적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근본적인 목적은 구원이며 구원이 이루어질 때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이 헐리고 관계가 회복될 때 세상에서의 평안이나 기쁨이나 자유나 은혜나 사랑이나 이런 것들도 비로소 올바르게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이것이 믿음의 핵심이며 근본이며 목적이며 이유이다. 그러나 아직도 신앙생활을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 우리가 받은 은혜가 진정 무엇인지, 왜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인지, 왜 우리는 기뻐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 이걸 잘 모르는 분들도 있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이걸 알아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구원의 은총을 누린다. 영원한 구원의 은총을 누린다. 이 땅에서도 진정한 자유인으로 산다. 진정 기쁨과 은혜와 능력 가운데 산다. 그러므로 내가 먼저 그런 삶을 살아가고 아직도 잘 알지 못하는 분들도 그러한 은혜를 누릴 수 있도록 정말 기도하고 힘쓰자.

2.구원의 방법과 목적(10절)

살전5:10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구원의 방법과 구원의 목적을 말씀한다.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십자가의 죽으심만이 우리의 죄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이다. 다른 길은 없다. 오직 예수님의 죽으심으로만 죄의 문제가 해결된다. 동시에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만 새생명을 얻는다. 그래서 깨든지 자든지 예수님과 함께 살게 된다.

깨든지 자든지는 죽든지 살든지라는 말씀이다. 죽은 자든 산 자이든 예수님과 함께 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와 산 자이다. 그런 자들은 예수님의 보혈로 죄사함 받고 예수님의 부활을 덧입어 생명의 부활로 나오게 된다. 단순히 부활을 하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여 예수님과 함께 생명의 완전한 은총을 가지고 살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은 무엇인가? 일차적으로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축복이다. 그때의 생명은 질이나 시간이나 공간이나 모든 면에서 완전한 생명이다. 어둡고 칙칙하고 더럽고 추하고 슬프로 고통스럽고 억울하고 분하고 원망스럽고 절망스럽고 외롭고 쓸쓸하고 아프고 죽고 미워하고 원망하고 싸우고 죽이고 헐뜯고 하는 등의 그 어떤 부정적인 것들도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기쁘고 즐겁고 만족하고 행복하고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은혜롭고 깨끗하고 자유롭고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누리게 된다. 하나님과 주님 안에는 그 어떤 어둠의 세력도 감히 깃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이 땅에서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위하여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다. 믿음 안에서 진리와 의와 선과 거룩과 사랑과 은혜와 자비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도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누리며 생명의 역사를 이루는데 참여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영원하고도 완전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될 그 날을 바라보며, 선과 의와 진리를 따르며 살아갈때에 지금 여기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이루어가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은총을 누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생이 되자.

3.피차 권면하고 덕을 세우라.(11절)

살전5:11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무엇을 권면하라는 것일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앞서 말씀했던 내용으로 권면하라는 말이다. 주님이 다시 오신다. 주님과 함께 살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도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누리게 된다. 그러므로 죽으나 사나 주님과 함께 사는 삶을 통하여 나도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 안에 있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 그리고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주님 안에서 살아감으로 여기서 누려야 할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는 것, 이걸 강조하고 권면해야 한다. 다시 말해 그저 건강하게 잘먹고 잘사는 것보다도 믿음 안에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선과 진리와 의 가운데 살아가는 것을 권면하고 강조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왜? 그래야 영원한 영광의 나라도 누리고, 이 땅에서도 진정 사랑과 은혜와 평안과 기쁨과 자유 가운데 살게 되니까.

피차 덕을 세우라는 것도 그렇다. 서로 믿음 안에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와 이 땅에서의 아름답고 복된 삶을 살아갈 것을 권면함으로 교회에 참된 덕을 세움으로 교회가 더욱 믿음 위에 서서 천성을 향해 힘차게 달려가면서 주님과 동행함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며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도록 굳게 세워가라는 것이다.

여기서 세운다는 말은 건축물을 조화롭게 아름답게 튼튼하게 세워가는 것을 말한다. 건축물을 세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기초를 잘해야 한다. 교회를 잘 세우려면 기초를 잘해야 한다. 교회의 기초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한 영원한 새생명이다. 그러므로 그 예수님을 온전히 모셔들여야 한다.

그리고 나서는 머리되시는 예수님의 지시에 따라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의 역할을 해야 한다. 질서있게 움직여야 한다. 연합해야 한다. 화목해야 한다. 성도나 마을 사람들에게 긍정적이고 아름답고 건설적인 영향을 미쳐야 한다. 말에나 행동에나 모범을 보여야 한다. 성도들에게 힘을 얻게 하고 위로를 받게 하고 소망을 얻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덕을 세우는 일이다. 그러면 교회는 아름답고 든든하게 서가고 주의 영광이 나타나고 우리도 큰 기쁨과 은혜로 신앙생활하게 된다.

그런데 요즘에 보면 덕을 세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직장과 마을과 교회에서 덕을 세워야 하는데 도리어 분열을 조장하기도 하고 시기와 질투를 가지고 서로 미워함으로 덕은커녕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하나님의 교회를 헐고 마는 결과를 초래할 때가 많다. 그러나 물론 그러면 일단은 하나님 앞에 죄짓는 것이고 자기 인생 초라해지고, 남에게 상처와 고통과 아픔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건 사단의 역사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다. 사탄은 어찌하든 죽이는 게 목적이고 하나님의 목적은 살리는 것이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를 부르신 목적을 바르게 알자. 구원이 근본적이고 핵심적이고 기초적인 부르신 목적이요 이유임을 기억하자. 또 그 안에 진정한 기쁨과 은혜와 감사와 만족과 행복과 생명의 풍성한 은총이 있음을 알고 믿고 구원을 통해 주시는 영원하고도 완전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자.

동시에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하는 일을 위하여 서로 권면하고 덕을 세워 나가자. 자녀이든 이웃이든 형제이든 이것이 가장 중요함을 알고 이것이 인생의 행복을 좌우하는 길임을 알고 세상의 무슨 돈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물질보다도 구원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는 삶을 살도록 기도하고 권면하고 함께 협력해 나가자.

바로 이 일을 위하여 덕을 세워 나가자. 교회가 바로 서고, 교회가 구원의 역사를 감당해 나가기 위하여 머리되시는 주님의 지시를 따라 교회에 주신 질서를 따라 각자의 위치에서 사명을 다하며 말이나 행동이나 아름답고 거룩하고 은혜로운 모습으로 덕을 세움으로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복음의 역사를 이루는 가운에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는 삶을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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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 Sunday Night Service

말씀 : 잠7:1-5

제목 : 말씀과 삶

 

인간에게는 생존하기 위하여, 혹은 보다 더 나은 삶을 누리기 위한 욕구가 있다. 인간의 욕구는 1차적인 생리적 욕구와 2차적인 사회적 욕구로 분류된다. 생리적 욕구는 본능적인 욕구를 말하는 것으로 생욕, 식욕, 성욕과 같은 것이며, 사회적 욕구는 물론 본능적인 성격도 있지만 그보다는 주로 사회생활 속에서 형성되는 것으로 명예욕, 소유욕, 성취욕, 지배욕, 권력욕 등이 이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욕구들은 인간의 삶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들이다. 그 모든 욕구들 하나하나가 모두 인간의 삶을 유지시키고 발전시키고 인간의 생명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중요한 요소들이 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욕구들이 잘못 사용되었을 때 그것은 오히려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역할을 한다.

그중에서 인간의 삶을 가장 심각하게 파괴할 우려가 있는 욕구는 소유욕과 성욕, 명예욕이라고 한다. 실제로 인간사회에 나타나는 모든 부조리와 갈등과 고통의 현상들이 바로 이러한 소유욕과 성욕과 명예욕에 의하여 발생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러한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와 관련된 범죄에 대하여 많은 경고를 하고 있다.

물질적인 욕망으로 인한 범죄와 관련해서는 제8계명에서는 “도적질하지 말지니라.”고 하셨고, 또 제10계명인 출20:17에서는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고 하시면서 남의 물건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자신의 것을 족한 줄로 여기며 살 것을 말씀하고 있다.

또 성적인 범죄에 대하여 십계명중 7계명인 출20:14에서 “간음하지 말지니라.”고 하셨고 레20:10절에서는 간음하는 자는 돌로 쳐서 죽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즉 인간 속에 자리잡고 있는 이러한 욕망들이 반드시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잘못 사용될 경우 인간에게 심각한 고통을 안겨다 줄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러한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를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함으로 일어날 수 있는 죄악을 어떻게 이길 수 있는지를 말씀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씀 안에 굳게 서면 그 말씀이 우리를 모든 유혹으로부터 보호해 준다는 것이다.

1.말씀이란 무엇인가?

먼저 1~4절을 보자. “내 아들아 내 말을 지키며 내 계명을 간직하라 / 내 계명을 지켜 살며 내 법을 네 눈동자처럼 지키라 / 이것을 네 손가락에 매며 이것을 네 마음판에 새기라 / 지혜에게 너는 내 누이라 하며 명철에게 너는 내 친족이라 하라

여기에 보면 말씀에 다양한 표현이 있다. 우선 1절에는 ①‘내 말’이라고 말씀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말씀이라는 말이 엄청나게 많이 나온다. 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혹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혹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등등의 표현이 굉장히 많이 나온다. 무슨 뜻인가? 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 주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임으로 진리이고, 생명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감히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순종해야 하고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1,2절에서는 ②‘계명’이라고 말씀한다. 계명이란 말씀그대로 우리가 지킬 것을 명령하신 계율이다. 그래서 이 말씀을 개역성경에서는 ‘명령’이라고 되어있다. 그러니까 말씀을 ‘명령’이라고 하신 것은 말씀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절대적인 규범으로 그것은 우리가 지켜야 할 의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지혜 이것은 결코 단순한 권면이나 그럴듯한 종교철학이나 사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이 반드시 지켜야 할 하나님의 지시요 명령이라는 것이다. 명령이니까 반드시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2절에서는 ③‘법(도)’이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말 그대로 말씀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삶의 법칙이라는 의미이다. 법은 어떤 기준이다. 말의 기준, 행동의 기준, 준거가 곧 법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법이라는 것은 말씀이 인간의 행동의 모든 기준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삼는가?

또 4절에서는 말씀을 ④‘지혜’라고 부르는 것은 말씀이 인간에 참된 진리의 세계를 알려주는 올바른 지식이라는 측면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모든 지식과 지혜와 진리가 들어있다는 말씀이다. 그렇지 않은가? 무엇이 진정 지혜인가? 무엇이 진정한 지식인가? 물론 생명을 주고 더 나아가서는 생명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지혜요, 지식이 아닌가? 생명을 주는 지혜,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주는 지식은 오직 예수님과 그 말씀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 지식을 알고 그것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린다. 그래서 그 사람이 가장 지혜로운 자인 것이다. 따라 말씀이 곧 지혜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에 대해서 그것이 법이고 지혜이고 명철이고 율례이고 하나님의 말씀이고 명령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래서 정말 그것을 잣대로 삼자. 참 지혜가 거기 있음을 알고 그 말씀을 따르자.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엄중히 다루자. 그래서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 때 말씀의 인도를 따라 참 생명의 은총의 길을 걸어가자.

2.말씀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곧 법이요, 명령이요, 계명이요, 지혜인데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그건 앞에서 보았던 1~4절에 역시 나타나 있다.

1절의 ‘지킨다’는 것은 「지키다, 보호하다, 망보다」는 의미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따르라는 것이다. 빼앗기지 말라는 것이다. 팔아먹지 말라는 것이다. 손해가 나도 힘들어도 어려워도 세월이 어떻게 변해도...... ‘간직한다’는 것은 「숨기다, 비축하다, 저장하다」는 의미이다. 이것도 비슷하다. 팔아먹지 말라. 간직하고 있어서 언제 어떤 상황이라도 그것을 따라가라는 말씀.

2절은 1절의 연속인데 후반부에는 눈동자처럼 지키라는 말이 있다. 사람이 어떻게 눈동자를 지키는가? 한마디로 민첩하게 지킨다. 반사적으로 지킨다. 눈에 무엇인가가 가까이 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이 깜박여져서 눈꺼풀이 눈동자를 덮어 보호하는 것이다. 눈은 그만큼 중요한 기관으로 반사적으로 지키는데 이와 같이 무엇인가가 말씀을 침범하려고 하면 다른 어떤 것을 지키는 것보다도 중요하게 잽싸게 지키라는 것이다.

3절의 손가락에 매라는 것은 가까이 하라는 것인데 「곁에 두다, 떠나지 않다, 함께하다」라는 의미이다.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한다. 늘 보고 듣고 배워야 한다. 그래야 남는다. 새겨진다. 아주 그냥 내 가치관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어차피 우리는 무엇을 보고 듣고 배우냐에 따라 인생이 결정된다. ‘새기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기록하다, 명부에 올리다, 등록하다」는 의미이다. 완전히 심비에 새겨서 지워지지 않게 하고 그것을 따라가라는 말씀이다.

또 4절의 내 누이, 내 친족이라 하라는 것은 친근히 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가까이 하다, 좋아하다, 기뻐하다」는 의미이다. 말씀 안에 생명이 있고 기쁨이 있고 능력이 있고 평안이 있고 복이 있으니까 세상의 다른 것을 가까이 함도 말씀을 가까이 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래서 물론 말씀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라는 것이다.

이 말씀들을 종합해보면 우선은 말씀을 마음에 새겨넣고, 새겨 넣으려면 가까이하고 친하게 지내야 하며, 그 다음 다음에는 잘 간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잘 간수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잘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어떤 것들이 침범하여 마음속에 들어 있는 말씀을 빼앗아가지 못하도록 지키라는 말이다.

그런데 어떤가? 말씀을 얼마나 잘 지키는가? 돈을 지킴보다, 내 육체를 지킴보다, 내 명예를 지킴보다 말씀을 지키는가? 돈이냐, 말씀이냐하는 기로에서 무엇을 택하는가? 육체의 생명이냐 말씀이냐하는 기로에 선다면 무엇을 지킬 것인가? 명예이냐 말씀이냐하는 양자택일을 강요받는다면 무엇을 지킬 것인가?

잠4:23절을 보라.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또 마22:37절을 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명보다 물질보다 명예보다 지식보다 말씀을 지키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생명보다 물질보다 명예보다 권력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왜? 하나님이 욕심장이라서? 독재자라서? 폭군이라서? 물론 아니다. 그게 생명의 길이기 때문에... 그게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가장 풍요롭게 가장 가치있게 살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말씀을 새기고 간직하고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이다. 4절을 보라. “지혜에게 너는 내 누이라 하며 명철에게 너는 내 친족이라 하라.” 무슨 말인가? 한마디로 친근히 하라는 말이다. 가까이 하라는 말이다. 여기서 누이와 친족을 구별해서 말씀하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친족처럼 형제처럼 그렇게 가까이 하라는 것이다. 함께 하는 것을 좋아하라는 것이다. 즐거워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가까워지고 함께 있게 되고 떠나지 않게 된다.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이 함께 있으면 나의 삶에 은혜가 충만하게 된다.

그러므로 말씀을 가까이 하라. 즐거워하라. 좋아하라. 사랑하라. 묵상해야 하라. 교회를 가까이하라. 예배를 가까이하라. 적용하기를 가까이하라. 그리하여 더욱 은혜 가운데 살아가자.

3.말씀을 지킨 결과는 무엇인가?

말씀을 새기고 간직하고 지키고 가까이하라고 말씀하신 다음에 5절에서는 그 결과를 말씀하고 있다. 왜 말씀을 지켜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그 말씀들이 자신을 지켜 줄 것이라는 말씀이다.

5절 말씀을 보라. “그리하면 이것이 너를 지켜서 음녀에게, 말로 호리는 이방 여인에게 빠지지 않게 하리라.” 즉 그 말씀을 네가 네 마음속에 지키면 이제는 반대로 그 말씀이 너를 지켜 줄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너를 모든 악의 유혹으로부터 보호해 줄 것이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요셉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그는 너무나 많은 시련 속에서도 오직 말씀으로 승리한 사람이다. 형제들이 자신을 죽이려다가 팔아넘긴 악행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 들여 형들을 미워하지도 않았고 원수를 갚지도 않았다. 또 물질적으로도 신앙양심에 입각해서 살았고, 육체적으로 성결한 삶을 살았다. 창39장에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요셉은 말한다. 창39:9절을 보자.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당신은 보디발의 아내가 아니냐? 그런데 내가 당신을 범한다면 그것은 물론 당신의 남편 보디발에게도 악이 되겠지만 그에 앞서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다.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다. 그러니 난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그가 그러한 유혹 앞에서도 결코 넘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심령 안에 말씀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삶의 모든 순간순간 속에서 말씀이 그를 인도했기 때문이다. 혹시 죄를 저지를 만한 상황이라고해도 그의 심비에 새겨져 있던 말씀이 즉시 그를 인도하여 그가 죄악 속에 빠지지 않도록 제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의로운 삶을 살았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인정받았다. 축복을 받았다.

이제 말씀을 정리한다. 인간에게는 많은 욕구가 있다. 생욕, 식욕, 성욕, 물욕, 명예욕, 승부욕 등등.... 이러한 욕구들은 물론 건전하게 사용하면 인간에게 약이 된다.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욕구들을 잘못 분출시키면 독이 된다. 인간의 삶을 파괴한다. 그러한 인간의 욕망들을 잘못 사용하면 결국 자신과 남과 가정과 교회와 사회를 파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르게 사용해야 한다. 그럼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방법은 한가지다. 말씀을 심비에 새기고 사는 것이다. 말씀을 간직하고 사는 것이다. 가까이하는 것이다. 말씀을 지키는 것이다. 우리가 말씀을 지키면 그 말씀은 우리를 지킨다. 그러므로 말씀안에서 살아가자. 간직하고 살자. 새기고 살자. 가까이하며 살자.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을 아름답고 올바르게 사용하여 복된 삶을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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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저녁설교] Sunday evening Service

제목 : 서로 용납합시다.

말씀 : 골3:12-14

 

오늘 본문에서도 계속해서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에 대하여 말씀한다. 한마디로 자비를 베풀고 용납하고 참으며 사랑을 베풀라는 것이다. 이 말씀도 말은 쉬울지 몰라도 실천하기는 너무나 어려운 말씀이다. 나를 사랑해주고, 내 편을 들어주고, 나를 지지해 주는 사람에게는 그런대로 가능할지 모르지만 내 생각과 가치관과 목적과 방향이 다르고 더 나아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는 경우에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것도 성령의 도우심을 받고, 계속해서 훈련하다보면 조금씩 가능해진다. 주님 앞에 엎드려 끊임없이 기도하며, 자신을 낮추면서 무언가 작은 것 하나라도 실천하고 용서하고 받아주고 용납하기를 연습하다보면 조금씩 그런 모습을 갖게 되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묵상할 때에 그저 자신을 낮추고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할 때에 좀더 거룩한 삶의 모습으로 나아가기를 바란다.

1.사랑과 자비와 긍휼등의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이유

골3: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사랑과 거룩의 삶을 살아갈 것에 대해서 말씀하시기 전에 우리가 그런 삶을 살아가야할 당위성에 대해서 말씀한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심과 사랑을 받은 거룩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그에 걸맞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하나님의 너무나 큰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다. 하나님께 너무나 큰 특혜를 받은 사람들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우리가 어떤 특혜를 받았는가? 우리가 어떤 신분을 갖게 되었는가? 우리는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 그것도 뭐 남들보다 크게 선해서 그런 것도 아니지 않는가? 남들보다 좋은 일을 많이 하고 깨끗하고 아름다워서 그런 것도 아니지 않는가? 그런데 나를 택하셔서 이 특권을 주시지 않았는가?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나라의 백성으로 삼아주시기 않았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마땅히 자신을 거룩하게 지켜 나가고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 그런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주님의 사랑의 법을 적용시키며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우리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얼마나 주의 영광을 나타내고 향기를 발할까? 얼마나 크나큰 은총 속에 살아갈까?

2.구체적 사랑의 모습들

골3: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1)긍휼히 여기라

긍휼이란 불쌍히 여기다. 동정하다. 연민을 갖다는 뜻이다. 사실 우리가 이 마음만 가지면 사랑하지 못할 일이 없다. 용서하지 못할 사람이 없다. 결국 모두가 불쌍한 인생이 아닌가? 무지해서, 연약해서, 심각하게 타락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그래서 사실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그러한 연약함과 무지와 어리석음을 아시고 우리를 끊임없이 용서해 주시지 않는가? 오죽하면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수밖에 없었겠는가? 그러므로 혹 누군가가 잘 사랑해지지가 않고 용서가 잘 안된다면 그의 무지와 죄와 어리석음과 죄로 오염된 마음의 상태를 생각해보고, 동시에 내가 어떻게 주님의 은혜가운데 살고 있는지 되새기며 어찌 하든지 긍휼히 여기고 그래서 용서하고 그래서 함께 주의 은총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자.

2)자비를 베풀라

자비란 선함, 친절함, 우호적임, 온화함 등을 말하는 것으로 긍휼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불쌍히 여기고 동정하고 연민을 가지면 자비를 베풀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따라 주님의 자녀가 되었은즉 최대한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왜? 불쌍한 영혼이니까. 왜 나도 하나님의 자비로 용서받고 주의 은총가운데 살고 있으니까?

눅6:36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3)겸손하라.

겸손은 말 그대로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자신을 낮추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 갈등도 일어나지 않는다. 누구라도 사랑할 수도 있다. 사랑하지 못하고, 싸우고 대접받으려고 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모든 것이 결국은 교만에서 나온다.

자신을 낮춘다면 사랑하고 용서하고 긍휼히 여기지 못할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주님 앞에 설 때에 나 자신이 흉악한 죄인이요, 벌레만도 못한 존재라는 사실을 안다면 내가 뭘 그렇게 잘 났다고 남을 업신여기고, 용서하지 못하고, 허물을 받아주지 못하겠는가?

벧전5:5(하),6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4)온유하라.

온화하고 친절하고 부드러운 것을 말한다. 물론 사람마다 성격이 있고, 기질이 있지만 우리는 자신을 깨트리고 부서트려서 부드러워져야 한다. 부드럽지 못한 것은 아직도 내 자아가 남아 있다는 증거이다.

물론 온유하라고 해서 죄와 추함과 더러움 마져도 적당히 받아 주라는 의미는 아니다. 흔히 하는 말 맞다나 사람은 미워하지 않되 죄는 미워해야 한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물에 물탄 듯 술에 술 탄 듯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하라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도 계속해서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도 화를 내기도 하셨다. 어려운 이야기지만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최대한 부드럽게 상냥하게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 교회에서도 좀더 친절하자. 상냥하자.

마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5)오래 참으라.

앞서 말씀드렸던 일들은 인내 없이는 불가능한 일들이다. 긍휼히 여기고 자비를 베풀고 겸손하고 온유하다고 해서 세상이 금방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진심을 금방 알아주는 것도 아니다. 도리어 그런 점을 이용해 먹으려고도 한다. 뭔가 나만 손해보고 나만 바보 되는 것 같을 때도 많다.

그러다보면 그만 나도 모르게 사랑과 자비와 긍휼과 온유를 지키지 못하고 화를 내거나 같이 대적하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열 번 잘하다가 한번 잘못하여 앞에 잘한 것까지 말짱 도루묵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정말 인내가 필요하다. 인내도 내 맘대로 잘 안된다. 기도해야 한다. 엎드려야 한다. 깨져야 한다. 훈련해야 한다.

눅8: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6)용서하라.

골3: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여기서 불만의 원어적인 뜻은 비난, 허물, 책망을 의미하는 말로 서로 상대방의 허물이나 자신에게 잘못하는 일을 가지고 서로 헐뜯고 비난하는 것을 말한다. 즉 싫은 사람, 미워하는 사람, 나를 비난하는 사람도 받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참 얼마나 힘든 일인가?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도 사랑하고 그 요구를 다 받아주기 힘든데 나에게 잘못하는 사람은 얼마나 더 힘들겠는가?

그러나 이것도 주님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가능해 진다. 주님이 나를 받아 주신 것을 생각하면, 주님이 나 같은 것을 위해서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당하신 것을 생각하면, 주님이 영원한 형벌 가운데 처할 수 밖에 없는 이 죄인을 용서해 주신 것을 생각하면 어찌 불가능하기만 하겠는가? 일만달란트 빚진 것을 탕감받은 사람이 일백데나리온의 빚을 탕감해주지 않고 그걸 가지고 물고 늘어지고 비난하고 욕하고 원수같이 생각한다면 얼마나 어불성설인가?

마5: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7)이 모든 것위에 사랑을 더하라.

골3: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여기서 온전하게 매는 띠란 옷을 입고 모든 옷을 정리해주는 역할을 하는 띠를 말한다. 즉 사랑이 앞서 말했던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용서 등을 하나로 묶어서 온전하게 해 주는 띠와 같다는 것이다. 실제로 사랑만 있으면 앞에서 언급된 모든 문제들은 저절로 해결되기 때문이다. 마치 자녀가 온전치 못하고 타인에게는 욕을 먹을망정 부모는 그를 미워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런데 솔직히 그 사랑이라는 것도 마음은 그렇게 하고 싶지만 행동으로 잘 안될 때가 많다. 그야말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할 때가 너무 많은 것이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변명만 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저 다른 방법이 없다. 은혜받아야 한다. 능력 받아야 한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내 자아가 깨져야 한다. 생각이 바뀌고 가치관이 바뀌고 목적이 바뀌어야 한다. 물론 그래도 온전치는 못하겠지만 그렇게 할 때 그나마 조금 주님의 사랑의 모습을 닮아서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고 용서하고 용납하며 사랑하며 살아 갈 수 있다. 그럴 때 나도 행복하고 너도 행복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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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저녁설교] Sunday evening Service

 제목 : 성실한 그리스도인

말씀 : 살전4:9-12절

 

1.믿음의 사람들은 끊임없이 영적 전투를 해야 함

데살로니가 교회는 아름다운 교회였지만 문제점도. 크게 두가지. 하나는 당시 고대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성적 부정한 행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음. 다른 하나는 올바른 재림관을 갖지 못하여 어떤 이들은 재림이 없다하고, 어떤 이들은 재림을 믿는다는 이유로 일도 하지 않고 무위도식에 빠져 있었다.

데살로니가 교회를 보며 참 안타까운 마음.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 가운데 서 있는 교회.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삶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생각대로 신앙생활하는 이들도.

우리는 정말 기도해야. 온전치 못한 지상교회의 모습. 그러나 당연시 여겨서는 안된다. 어쩔 수 없이 부족하긴 하겠지만 최선을 다해 죄와 왜곡된 가치와 싸워야 한다. 그래서 엡6:12절에서는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앞부분에서는 더욱 많이 힘쓰라. 거룩함을 취하라. 우리를 부르심은 거룩케 하려 하심이다. 오늘도 계속 거룩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말씀. 이 말씀을 묵상하며 더욱 거룩한 삶으로 주님의 향기가 되고 주님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자.

2.사랑이나 선에는 끝이 없음.(9,10절)

살전4:9,10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에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욱 그렇게 행하고...

형제를 사랑해야 하는데 너희가 이미 말씀을 따라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될 정도이다.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를 대하여 그렇게 행하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권한다. 더욱 그렇게 하라.

그들은 이미 상당한 수준의 사랑.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 말씀대로 사랑을 실천하며 살기를 힘씀. 그것도 자기 교회만 아니라 마게도냐 지역 전체의 교회들에게. 이 정도면 상당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는 더욱 많이 하라고 말씀. 1절에서도 ‘더욱 많이 힘쓰라.’고 하였다. 지금까지 많이 힘썼지만 더욱 힘써라. 과연 무엇이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인지 생각하며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에 더욱 힘쓰라.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힘써야 한다. 형제사랑만 아니라 선과 의와 진리를 따르는 일에는 완성도 졸업이 없다.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 힘써야. 자기 가족이나 자기 교회만이 아니라 다른 교회에도 해야되고 지역에도 해야 된다. 과거에 많이 했다고 오늘 중단해서도 안된다. 주님 앞에 설 때까지 해야 한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빌3:12절에서 말씀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그러므로 주님 앞에 서는 순간까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잘싸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가운데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자.

3.열심히 수고해야 함.(11절)

살전4:11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잘못된 신앙관을 가진 자들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이제 곧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인데 열심히 일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들. 어떤 이들은 재림이 없다고 생각하여 탈이고, 어떤 이들은 곧 재림이 있을 터이니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고 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면서 모여 다니며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살후3:10,11절에서도 말씀.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우리는 분명하고 올바른 종말관을 가지고 있어야. 종말은 반드시 온다. 예수님도 반드시 재림하신다. 모든 인류는 부활한다. 생명의 부활이냐, 심판의 부활이냐만 다를 뿐이다.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다시 오시마 약속하셨다.

요14:2,3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 막13:26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그러나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른다. [마24:36]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그러면 어떤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 예비하고 있으라. [마24:44]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그러면 예비하는 것이 무엇인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며 자기 일을 하는 것이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교회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저 기도만하고 찬송만 해서도 안 된다. 속세를 떠난 사람처럼 맨날 산 기도나 다니고 무슨 신령한 은사만을 사모해서도 안 된다. 반대로 맨날 먹고사는 일에만 집착하며 거기에 목숨을 걸어서도 안된다. 하나님께 나와 말씀과 기도와 찬양에 힘쓰며 주님의 역사에 참여해야 한다. 뿐만아니라 가정과 이웃과 직장을 위해서 열심히 일해야 한다. 이것이 올바른 예비이다. 영적인 일과 물질적인 일에 균형을 잡아야 한다.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의 역할 잘 감당해야 한다. 그래야 영육간에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최선을 다함으로 주님의 은총 풍성하게 누리며 주님의 영광 나타내고 그래서 주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복된 삶이 되자.

4.믿음의 사람들은 단정해야 함.(12절)

살전4:12 이는 외인을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열심히 자기 일을 해야 할 이유이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지역사회에서 단정한 삶을 살기 위하여 열심히 일해야 한다. 일은 하지 않고 먹고 놀고 한량생활이나 하고 그래서 엉뚱한 짓이나 하고 그래서 사람에게 욕먹는 삶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또한 물론 열심히 일함으로 궁핍함이 없어 자신도 풍요롭고 하나님을 위해서 귀하게 쓰임 받고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기 위하여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믿음의 사람들은 단정해야 한다. 열심히 일하며 규모있게 살아야 한다. 그리고 물론 너무 누추하거나 궁상맞고 초라하고 추래서도 안된다. 마음적으로도 거룩하고 진실하고 청결하고 육체적으로도 단정해야 한다. 일하는 것도 규모있게 일해야 한다. 그래서 덕을 끼치고 윤택하고 남에게도 기쁨과 유익을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규모없이 행하고 너무 가난하고 누추하고 초라하고 무지하고 추하면 하나님의 영광도 드러내기 어렵고. 하나님의 역사도 이루어가기 어렵게 된다.

물론 하나님은 가난하고 못나고 부족하고 힘없고 무지하고 연약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사 사랑.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나서도 계속해서 가난하고 힘없고 초라하고 누추한 자리에 있어서는 곤란. 하나님의 자녀답게 모든 영역에서 누구보다도 잘해야 한다. 일도 규모있게 열심히, 사회생활도 멋있게, 물질적으로도 기왕이면 풍성하게 그래서 영적으로는 물론 육체적 물질적 정신적으로도 고상하고 아름답고 윤택하고 풍요로워야. 그래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그래야 하나님의 일도 하고 그래야 다른 사람도 도와주고 그래야 나도 당당하고 멋진 삶이 되는 것.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뭐 우리가 해서 되나요? 하나님이 해 주셔야 되지요. 하면서 자신의 일을 회피하는 사람들도. 그건 믿음이 좋은 게 아니라 변명이다. 고의적은 아니겠지만 책임을 하나님께 떠넘기는 것. 물론 백날 힘써봐야 하나님께서 안 도와 주시면 아무 일도 못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는 가만히 앉아 있으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엿새 동안은 힘써 일하라고 하셨다. 오늘11절에서는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본적인 것은 주신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주신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능력으로 잘 활용하여 잘 가꾸어 나가야 한다. 무엇인가를 창출해 나가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힘써 일하는 그것을 통하여 역사하시고 은혜를 주시고 넉넉하게 채워주신다.

오늘 말씀을 보며 주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더욱 힘쓰자. 가정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성실하게 자기 일을 하자. 그래서 영적 육체적 물질적으로 단정한 삶을 살자. 본이 되는 삶을 살자. 남에게 줄지언정 달라는 자가 되지 말자. 그래서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나 윤택한 삶을 살아가며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복된 인생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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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찬양예배설교   Sunday Night Service 

제목 : 영문밖으로 나아가자

말씀 : 히13:7~13

 

히브리서도 역시 다른 서신서들과 같이 전반부(1~10장)는 믿음, 후반부(11~13장)는 삶에 대하여 말씀. 전반부에서는 마지막에 아들을 세우심. 그는 천사나 모세와 비교할 수 없는 분,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 대제사장과는 비교할 수 없는 완전한 대 제사장, 새 언약의 중보자,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분. 그러므로 오직 그 분 안에 영구한 소유.

그리고 나서 후반부인 11장부터 그리스도인의 삶. 믿음으로 아벨은, 믿음으로 에녹은, 믿음으로 노아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하시면서 믿을 따라 살 것을 촉구. 그래서 12장에서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라. 13장에서도 동일. 형제를 사랑하라. 돈을 사랑하지 말라. 그리고나서 오늘 본문. 말씀으로 가르치고 인도하던 자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세상의 다른 교훈에 끌려가지 말라. 너희 예수님처럼 영문밖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며 그 은총을 누리라.

우리는 믿음과 행위의 조화를 이루어야. 그래야 인생의 수레바퀴가 잘 굴러가. 어쩌면 세상의 모든 이치가 마찬가지. 커다란 두 축이 조화를 이루어야. 땅과 하늘, 밤과 낮, 겨울과 여름, 남자와 여자, 물과 불, 영과 육, 하나님과 인간이 조화를 이룰 때에 가장 아름답고 가치 있고 의미 있고 풍성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모습을 가게 돼.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믿음과 행위를 잘 조화시킴으로 더욱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되자.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1.믿음의 선진들을 본받으라.(7,8절)

히13:7,8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말씀을 일러주고 인도하던 자들을 본받으라. 히브리서가 기록된 것은 A.D.64년~70년 사이. 어떤 사도들은 순교 당했고, 어떤 사도들은 아직 생존. 바울은 왕성하게 활동을 하다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을 즈음. 그러므로 여기서 말씀을 일러주고 인도하던 자들이란 사도나 속사도 즉 사도들의 제자들. 여하튼 여기서 강조하는 바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살던 믿음의 선진들, 믿음의 위대한 스승들의 말씀을 따르고 그 삶을 본받으라는 것.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은? 주님을 본받고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을 본받아야. 그것을 모델로 삼고 기준으로 삼고 방향으로 삼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믿음을 지켜나가고 생명력 넘치게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돼. 세상에서도 그렇다. 보다 아름답고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살려면 위대한 인물들을 롤모델로 삼아야. 잘하는 사람, 멋있는 사람, 훌륭한 사람, 바람직한 사람을 모델로 삼아야.

그런데 안타깝게 자꾸 세상을 본받으려고 해. 세상 사람들에게 끌려 다녀. 세상이 그런데, 다른 사람도 그런데, 교회 다니는 사람들도 그렇던데, 어느 장로도 그렇던데, 어떤 교회에서는 이렇게 하던데 하면서 성경의 가르침과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들을 따라 가려해. 또 어떤 때는 지금은 세월이 다른데, 환경이 다른데 하면서 세월 따라 환경 따라 상황 따라가려고 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물론 진리가 아냐. 죄와 무지와 어리석음속에 있는 인생의 왜곡된 모습. 우리는 끝까지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모델로 삼고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을 본받아야. 그것이 생명의 길이고,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는 길. 그것이 교회가 사는 길, 주님의 역사를 이루는 길.

그래서 8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말씀. 즉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동일하게 생명이시고 진리이시고 부활이시고 빛이시고 생명의 떡이시고 선한 목자다. 따라서 물론 그 말씀도 영원한 진리이고 생명양식이고 빛. 그러므로 당연히 세월이 어떻게 변하고, 과학이 어떻게 발전하고 사람들의 가치관이 어떻게 달라져도 무조건 주님의 말씀을 따라야. 세월이 변하고 가치관이 변하면 그게 변질된 것이지 예수님의 말씀이 틀린 것이 아니다.

또한 우리 믿음의 선진들이 섬기던 예수님이 우리가 섬기는 예수님과 같은 분. 동일한 예수님. 동일한 말씀, 동일한 생명, 평안, 소망을 주신 주님. 그러므로 그들이 섬겼던 방법이 지금 이 시대에는 맞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섬겼던 방법이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아니다. 만약 그들이 섬기던 방법과 지금 우리가 섬기는 방법이 다르다면 그건 우리가 섬기는 방법이 왜곡되고 변질된 것. 하나님께 인정받고 칭찬 듣고 복음의 역사를 힘있게 이루어갔던 그들이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월이 어떻게 변하고 삶의 모습과 가치관과 인생관이 어떻게 변한다해도 오직 영원토록 변함없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리고 그러한 주님의 말씀을 따라 모든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며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갔던 위대한 믿음의 선진들의 믿음을 본받아 살아가자. 그리하여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며 자손 만대로 복음의 진리를 올바르게 전수시켜 자손만대로 주님의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게 하는 복된 삶을 살아가자.

2.은혜로써 마음을 굳게 하라.

히13:9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이 말씀도 앞의 말씀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세상의 잘못된 교훈에 끌려 다니지 말고 오직 마음을 은혜로 풍성하게 함으로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좇아 주님과 동행함으로 주님 안에 있는 은혜의 풍성함을 누리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다른 교훈에 이끌리지 말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다른 교훈이란 당시 만연되어 있던 유대주의를 말한다. 즉 유대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따지며 예수님 믿어도 구약의 율법에 규정되어 있는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의 규례를 비롯한 모든 규정들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거기에 현혹되지 말라는 것.

물론 음식 문제만이 아니라 음식 문제는 ‘여러 가지 다른 교훈’ 중의 하나의 예. 즉 그 당시 기독교내에 여러 가지 잘못된 교훈을 가르치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 그 중에 특히 유대주의자들이 극성을 부리고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도 믿어도 율법도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주장. 그러나 너희들은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이 진리위에 굳게 서서 어떤 말이나 왜곡된 가치관이나 이단의 달콤한 유혹이나 현혹에 휩쓸리지 말라는 것.

그렇다. 우리는 ‘여러 가지 다른 교훈들’을 조심해야 한다. 자칫하면 우리도 걸려 들 수도 있다. 특히 이단자들을 조심해야 한다. 그들은 때로는 광명의 천사처럼 다가온다. 어떤 신비한 것을 가르쳐 주겠다고 찾아온다. 성경을 가지고 다니면서 마치 자기들만 성경의 신비한 비밀을 깨달은 것처럼 떠들어대고 다닌다.

요즈음에는 유대주의적 이단자들보다는 그 반대의 성향을 가진 이단자들이 더 많다. 즉 예수님만 믿으면 무조건 구원받는다는 것. 육체는 본래 더럽고 악하고 죄덩어리이요, 썩어 없어질 것이기 때문에 구원과 관련이 없다는 것. 그냥 믿기만하면 영혼이 깨끗함을 받아 천국에 간다는 것. 그러나 사탄의 수작일 뿐. 주님은 결코 그런 말씀하시지 않았다. 믿으면 구원받지만 영혼이 깨끗해지면 육도 거룩하고 아름답게 사용해야. 영혼이 깨끗한데 육은 돼지처럼 사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죄사함 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는데 옛날에 살던 방식대로 육신의 정욕대로 살던 삶을 그대로 답습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 요즘에는 물질주의와 인본주의가 가장 강력한 이단 사상이다. 요즘 세상은 성경과는 정 반대로 가고 있다. 사람과 물질이 주인이 되고, 사람이 영광을 받는 세상이다. 외적인 조건들과 외모와 물질과 지식과 능력에 의하여 평가받는 세월. 이게 바로 이단 사상이다. 하나님은 결코 외적인 것으로 사람을 보지 않는다. 마음의 중심과 믿음을 보신다. 믿음안에서 성실하게 진실하여 열심히 살아가는 것을 가장 크게 보신다.

그러므로 이런 왜곡된 풍조를 분별하고 이겨야 하는데 그러면 어떻게 이기나?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고 하셨다. 말씀그대로 마음을 은혜로 충만하게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유대주의적 이단이나 반대로 행함을 구원과 관계없다는 영지주의적 이단이나 기타 세상의 왜곡된 가치관에 끌려 다니지 않고 물리치고 승리한다는 것이다.

당연하지 않나? 은혜 받으면 어떻게 되나? 믿음으로 구원받는 도를 알게 된다. 또한 믿음으로 구원받고 죄사함 받은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게 된다. 또 그렇게 살아가는 마음이 간절해지고 그렇게 선과 진리와 의를 따라 사는 삶이 기쁘고 행복하다. 그래서 엉뚱한 것에 미혹되지도 않고 마지못해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도 아니고 정말 감사와 기쁨과 은혜로 주님과 동행하며 은혜의 풍성함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정신을 차리고 깨어 기도하며 말씀 묵상하며 찬양함으로 믿음 위에 굳게 서고 은혜로 충만하게 하게 하자. 그래서 오직 주님을 심령속에 온전히 모셔 들임으로 정말 주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덧입자. 그래서 올바른 분별력과 능력으로 세상의 다른 교훈에 끌려 다니지 말고 왜곡된 이상 사상이나 헛된 교훈에 속지 말고 은혜와 기쁨과 감격과 능력으로 더욱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자.

3.영문밖으로 나아가자.

히13:10~13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그 위에 있는 제물을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이 이 제단에게 먹을 권이 없나니 /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우리에게 제단이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미하지만 제단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제단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완전한 속죄를 전체를 의미한다.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먹을 권한이 없다는 것은 특별히 속죄제를 드릴 때는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인은 물론 제사장조차도 11절 말씀처럼 제물의 그 어떤 것도 취할 수 없고 피는 전부를 제단에 쏟고 제물은 몽땅 진영 바깥 재버리는 곳에 태우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레4:1~12)

그런데 그러한 구약의 제사는 실상 모형일 뿐이고 예수께서 완전한 속제제물이 되어 구약의 속죄제물이 제단에서 피를 다 쏟고 영문밖에서 태워진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영문밖으로 나가셔서 자신의 피를 다 쏟고 불태워지는 것 이상의 고통을 당하심으로 예수님 당신 자신이 제단 즉 죄사함의 은총을 주는 은혜의 단이 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연히 세상의 헛된 교훈에 미혹되지 말고 오직 유일하고 완전하고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만을 믿고 예수님따라 영문밖으로 나가 주님과 동행함으로 그 은총을 누리며 그 역사를 이루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영문밖으로 나가자는 것은 한마디로 고난의 장소로 가자는 것이다. 즉 예수께서 온갖 수치와 멸시를 당하며 성문밖으로 나가 자신의 피를 다 쏟고 죽으심으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 것처럼 우리도 그저 영문 안 즉 자신의 삶의 자리에 안주하며 편안한 삶만 추구하지 말고 외롭고 힘들더라도 ‘예수님께서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라는 것이다. 물론 그게 예수님의 구속의 은총을 입은 자의 당연한 태도요, 그게 한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주님의 말씀을 알고 있는 자의 삶이요, 그게 생명의 역사를 이루고, 자신의 삶도 귀하고 복된 아릅다고 가치있는 의미있는 삶이되는 비결인 것이다.

당연하지 않나? 그저 자신의 편안함만을 추구하고 자신의 삶의 자리에 안주하고 있다면 어떻게 주님을 따르겠나? 주님을 따르지 않고 어떻게 그 은혜를 누리겠나? 어떻게 그 역사를 이루겠나? 어떻게 진정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과 자유와 평안가운데 살겠나?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는 정말 믿음의 선진들의 삶의 발자취를 따르자. 말씀을 바르게 배우고 새기고 오직 믿음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자. 그리하여 세상의 그 어떤 헛소리나 왜곡된 가치관이나 인생관이나 이런 것들에 미혹되지 말고 오직 믿음과 선과 진리와 의를 따라 주님과 동행함으로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고 주의 역사 이루어가는 복된 인생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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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 Sunday night worship
제목 : 참으로 많아야 할 것

말씀 : 벧전1:1,2

 

오늘 말씀은 베드로전서의 서론적인 말씀. 1절에 송신자와 수신자를 밝히고 2절에서는 수신자들의 정체성을 말씀해주며 축복하는 내용이다.

1.송신자와 수신자

1)송신자 : 사도 베드로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 본명은 시몬이다. 그는 안드레의 형제로 갈릴리 벳새다의 어부출신이다.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신 후에 베드로 즉 반석이라는 이름을 주셨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즉시 모든 생업을 던져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게 된다.(마4:18~20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이 후 야고보 요한과 함께 예수님 제자의 핵심인물이 되지만 그는 성격이 급하고 다혈질이어서 여러 번 실패도 겪게 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것이라고 하시자 절대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나섰다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꾸중을 듣기도 하였다.(마16장)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붙잡히셨을 때에 칼을 휘둘러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베었다가 칼을 쓰면 칼로 망한다는 꾸중을 듣기도 했다.(마26장,요18장) 제자들과 배를 타고 가다가 험한 풍랑으로 고난당하다 예수님이 물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풍덩 뛰어 들었다가 그만 험한 풍랑을 보고 두려워하여 점점 가라앉을 때에 예수님께서 손을 잡아 구원해 주시며 왜 의심하였느냐는 책망을 받기도 한다.(마14장)

가장 뼈아픈 실패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사건이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죽으러가자고 하자 예수님께서 오늘밤에 너희들이 다 나를 버릴 것이라고 하신다. 이때 베드로는 다른 사람은 다 떠나도 나는 죽을지언정 떠나지 않겠다고 큰소리 쳤지만 결국 예수님을 저주까지 하며 부인하는 뼈아픈 실패를 경험하게 된다.(마26장)

그러나 이후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 충만을 받고 예수님의 수제자의 역할을 잘 감당하게 된다. 그가 설교할 때에 하루에 삼천명 오천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고, 40년동안 걷지 못하던 앉은뱅이에게 일어나 걸으라 하니 즉시 일어나 뛰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으며, 중풍병으로 자리에 누운지 팔년이 되는 애니아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고 하자 즉시 일어나 자리를 정돈하였으며, 욥바의 다비다(도르가)가 죽었을 때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다시 살아나기도 하였다. 또한 룻다, 욥바, 가이사랴를 비롯한 각처를 순방하면서 성도들의 믿음을 굳게 하고 복음을 전하고 기적을 행하다가 사명을 감당하였다.

고대 문서들에 의하면 안디옥교회도 베드로가 설립하였다고 하며 소아시아 지역에서 감독으로 활동하다가 후에 바벨론, 로마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였다고 한다. 그의 말년에는 로마교회의 감독으로 있었는데 네로의 박해 시에 제자들의 간곡한 청원으로 로마를 떠나던 중 주님이 나타나 어디론가 가실 때에 베드로 쿼바디스(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묻자 네가 회피하는 십자가를 다시 지러간다고 하시자 베드로는 발걸음을 돌이켜 로마로 가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였다.(A.D. 68년경)

이런 베드로의 삶에서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다 실수하고 깨어지기 쉬운 존재라는 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그러한 뼈아픈 실수를 딛고 주님 앞에 쓰임 받게 된다는 사실이다. 또한 정말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그저 자신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주님의 역사에 어떤 형태로든 동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 약하고 부족하지만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서 모든 약하고 부족하고 허물된 것들을 이기고 주님의 역사에 쓰임 받음으로 주님의 나라를 이루어가고 영원한 영광의 은총을 누리자.

2)수신자 : 소아시아 지역에 흩어져 있는 성도들(1절)

벧전1: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이 지명은 모두 소아시아 지역. 흩어진 나그네라는 말씀은 실제로 박해로 흩어진 사람들을 의미하기도 하고 단순히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모든 크리스천들을 의미하기도. 당시 흩어진 유대인 크리스천이나 현지의 그리스도인들은 너무나 힘든 삶을 살았다. 유대동족들에게도 핍박을 당하고 특히 이 당시는 로마로부터도 박해를 당하기 시작하던 때였으므로 종교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많은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다.

그래서 본서에 보면 이들에게 소망을 주기 위한 말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3절 산 소망이 있다. 4절 썩지 않은 유업이 있다. 6절 여러 가지 시험으로 잠깐 근심하지 않을 수 없으나 도리어 크게 기뻐한다. 모든 육체는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다.(벧전1:24,25)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다.(벧전2:9)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5:7) 등등....

우리도 나그네들이다. 나그네 길은 고달프고 힘들고 외로울 때가 많다. 우리에게도 환난과 핍박이 있을 때도 있다.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에 참고 견뎌야 하고, 우리 자신을 부인해야 할 때도 많다. 그러나 그게 죄와 무지 속에 있는 세상,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진리에 속한 사람들이 가야할 길이다. 오직 거기에 생명이 있고 산 소망이 있다. 영광의 나라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것들에 휩쓸려가지도 말고, 나그네 길과 같은 세상의 삶에 목숨 걸지 말고 천성에 소망을 두고 나그네 길의 아픔을 이겨나가자. 더 나아가서 광야의 나그네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이런 소망위에 설수 있도록 더욱 기도하고 힘쓰자. 그래서 우리 모두 함께 여기서도 승리하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자.

2.수신자들의 정체성

벧전1: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이 말씀에 보면 크게 두가지 주제가 나타난다. 첫 번째는 수신자들의 정체성으로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그런 하나님의 백성들을 축복하는 내용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라는 말씀이다.

먼저 정체성을 보자.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 즉 하나님의 택하심을 따라 성령께서 거룩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는데 그럼 왜 그렇게 하셨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 거룩하신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하려 하심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또 우리는 세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①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이다. 오늘 본문은 예정 교리 한 모습이 나타나나는데 솔직히 예정교리는 너무나 어려운 말씀이다.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것이다. 그래서 신학적으로도 딱 부러지게 정리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신비한 지혜에 맡겨두는 수밖에 없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다 이해할 수도, 다 알 수도 없다. 따라서 우리가 다 이해 할 수 없는 신비한 영역에 대해서는 그냥 하나님께 맡겨두고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셨다는 것, 나를 부르셨다는 것, 내가 부름 받고 선택받았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이다. 자부심과 긍지와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②성령의 역사하심이다. 성령이 거룩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셨지만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해서 내 마음 내 생각대로 살 때가 많았다. 심지어 하나님을 떠나서 내 멋대로 살 때가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으셨고, 성령께서 감동감화를 주시고 역사하셔서 믿음을 주심으로 예수님 믿고 죄사함 받고 깨끗케 된 것이다. 이 모든 일들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불가능한 것이다. 예수님 믿고 구원받는 것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저 천국을 바라보면서 이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과정이 그렇다. 성령의 인도하심과 성령의 능력과 지혜를 덧입어야 한다. 그렇게 성령의 지배 속에서 성령의 능력과 지혜로 세상을 살아갈 때에 우리는 진정 거룩한 인생이 되는 것이다.

③우리를 깨끗케 하신 것은 순종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보혈로 깨끗함을 입었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죄 가운데 씻음 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죄는 당연히 씻음받고 우리 생각과 목적과 방향과 가치관과 이성과 경험과 지성이 다 깨끗함을 받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더럽고 추하고 속된 생각들 속에서 살아가지 않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하고 아름답고 올바른 모습으로 회복된 것을 말한다. 이것이 진정으로 예수님의 보혈로 영과 육과 혼의 전인격이 거듭난 인생의 모습인 것이다. 그렇게 거듭나면 당연히 순종하게 된다. 주님의 말씀과 뜻과 삶을 따라 살게 된다. 그러면 당연히 주님의 은총을 누리며 주께 영광을 돌리며 주의 나라를 이루어가게 된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는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기뻐하고 감격하고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살아가며, 더욱 거룩하고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삶을 살기 위하여 더욱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어 성령의 능력과 인도와 지혜가운데 살아감으로써 주님의 말씀에 순존하여 죽께 영광을 돌리고 주의 은혜를 충만히 누리며 살아가자.

3.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축복

벧전1: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택하신 백성들의 정체성을 말씀하신 다음에 사도는 그들을 축복하고 있다.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 지어다.” 서신서는 대부분 서두에서 축복하고 말미에서 축복함으로 축복으로 시작하고 축복으로 마치는 것을 보게 된다. 물론 그리고 그 사이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 안에 있는 은혜와 그들이 잘못한 부분들, 고쳐야 될 부분들, 지켜야 할 들을 말씀한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우선 성도는 항상 서로를 축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책망할 때도 있고, 강권할 때도 있고, 심지어는 징계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행위들은 성도를 축복하려는 목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혹은 자신에게 해를 끼쳤다고, 혹은 제멋대로 살아간다고 저주하거나 미워해서는 안 된다. 모든 성도에 대하여 축복의 마음을 가지고 기도해 주고 축복해야 하고 함께 기도하고 찬송하며 함께 기쁨을 나누어야 한다.

그런데 축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축복의 내용은 더 중요하다. 물론 건강도 중요하고, 물질도 중요하고, 권세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천배 만배 더 중요한 게 있다. 바로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다. 그래서 사도는 그들을 위하여 물질이나 육신이나 세상의 명예를 위하여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 무엇이 더 중요한가? 무엇이 인생에게 자유를 주고 행복을 주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가졌어도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없으면 행복한 인생이 못된다. 만약 그러고도 행복을 누리다면 제정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있으면 참된 생명을 얻는다. 자유와 평화와 감사와 기쁨 속에 살아간다.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는 자가 된다. 은혜가 내 영혼과 생각과 신을 감싸면 만사형통이다. 형통하지 않아도 형통이다. 하늘 평안을 누리게 된다. 세상의 모든 조건과 상황과 환경을 초월하는 은혜를 누리게 된다.

그러므로 정말 오늘 말씀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성령의 깨끗케 하심과 인도하심을 따라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에 성령 충만함을 받아 은혜와 평강 속에서 정말 세상의 모든 조건과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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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 Sunday Night Service

제목 : 참으로 감사한 이유

말씀 : 골1:1~8

 

1.모든 교회에 대한 관심과 사랑과 기도

골로새서는 A.D. 62년경 로마의 감옥에서 바울이 기록한 옥중서신. 주된 내용은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강조하며 세상의 어떤 감언이설이나 이단 사설에 빠지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 갈 것을 강조함.

그런데 사실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세운 교회는 아니었음.(골2:1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어떻게 힘쓰는 것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에베소에서 약 150Km 동쪽에 있는 골로새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3년간 사역할 때 이곳에서 복음을 들은 에바브라가 고향인 골로새에 들어와 교회를 세운 것으로 보고 있음.(골1:7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교회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다. 바울은 자신이 직접 세운 교회는 아니었지만 골로새 교회를 사랑하고 가르치고 평안하고 바로 서게 하기 위하여 기도하며 사랑을 쏟았던 것이다. 우리도 주님의 자녀로서 이런 자세를 가져야 한다.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가 바로 서고 교회가 평안하고 교회가 은혜가운데 든든히 서 가기를 힘쓰고 사랑가운데 하나 되어 복음의 역사를 이루어가 가기를 기도해야 되는 것이다.

2.소명의식(1절)

골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여기에 보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과 디모데라고 말씀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이란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말이다 하나님께 바울을 선택하고 부르셔서 사도로 세우셨다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내가 목사로 세우심을 받았든 장로나 집사나 권사로 세우심을 받았든 아니면 교사나 다른 직책으로 세움을 받았든 더 나아가 성도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으로 성도가 되었고 집사가 되었고 권사 장로 목사가 된 것이다. 내 의지대로, 내 계획대로 되는 게 아니다.

심지어 마10:29절에서는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즉 참새 한 마리가 죽고 사는 것도 하나님 섭리 하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하나님의 허락하심 하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이다. 바울도 하나님이 그를 부를 수도 안 부를 수도, 사도로 세울 수도 안 세울 수도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선택하셔서 믿음을 주시고 게다가 사도로 세우셨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확실한 인준 가운데서 하나님 백으로 사도가 되어 감사와 기쁨으로 이 일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나같이 부족하고 연약하고 허물 많은 인생을 부르시고 선택하셔서 믿음을 주시고 직분을 주시고 직책을 주셔서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하시고 그 영광의 나라를 위하여 쓰임 받게 하신 것에 대하여 다른 어떤 것보다도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며 자부심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여 그 사명을 감당함으로 주께 영광 돌리며 주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며 하나님의 나라를 마음껏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3.축복의 근원과 내용(2절)

골1:2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축복기도의 내용은 이미 여러 번 말씀 드렸다.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임하기를.... 은혜와 평강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돈이나 권력이나 지식이나 명예가 아니다. 진정하고도 영원한 은혜와 평강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또한 우리가 정말로 구할 것은 돈이나 권력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있으면 세상의 다른 것도 저절로 오거니와 설령 오지 않아도 은혜와 기쁨의 삶을 살게 된다.

그러므로 오직 모든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찾자. 하나님을 찾되 세상적인 복이 아니라 진정 하나님 안에 있는 은혜와 평강을 구하자. 그리하여 진정한 평안을 누릴 뿐 아니라 그렇게 전적으로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갈 때에 외적으로 베풀어주는 은혜도 동시에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자.

4.감사의 내용(3-6절)

이렇게 자신을 소개하고 진정한 하나님의 복이 함께 하기를 기도한 다음에 사도는 골로새 교인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1)감사의 기도가 나오는 교회

골1:3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기도할 때마다 감사가 나왔다. 얼마나 멋있나? 얼마나 아름다운가? 누군가 날 위해 기도할 때에 감사의 기도가 나온다면 서로가 얼마나 행복할까? 반대의 경우라면 얼마나 안타까울까? 그러므로 우리는 누군가 나를 볼 때 감사가 나오고 마음이 평안해지고 위로가 되는 삶을 살아가자. 그러면 무엇을 감사했나?

2)믿음, 사랑(4절)

골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정말로 가장 감사한 것은 무엇일까? 믿음을 가졌다는 것이다. 믿음보다 더 감사한 것은 없다. 믿음이 있으면 세상의 모든 것을 얻은 것이요, 믿음이 없으면 세상의 모든 것을 잃은 것이다. 믿음 있음에 감사하라. 믿게 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자녀들에게 무엇보다도 믿음의 유산을 남겨주라.

믿음은 필연적으로 사랑을 동반한다. 믿음이 있으면 사랑도 온다. 믿으면 주님의 구속하심으로 구원을 받을 뿐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은혜와 주님의 자비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성령은 사랑의 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물론 서로가 사랑함이 얼마나 복되고 아름다운 일인지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 안에서 사랑으로 살아감으로 그 은혜를 누리고 생명의 기쁨을 주는 복된 인생이 되자.

3)하늘에 쌓아둔 소망(5절)

골1:5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이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듣고 소망을 하늘에 쌓아 두고 있음에 감사하고 있다. 그들은 복음 진리를 듣고 우리의 소망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있음을 알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복음을 진리를 바르게 들으면 하늘에 소망을 두게 된다. 그렇지 않은가? 복음 진리가 뭔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으면 어떻게 되는가? 구원받는다. 거듭난다. 구원받고 거듭나는 것은 영혼만이 아니다. 생각과 마음과 가치관과 목적과 목표가 거듭난다. 그러면 세상의 것에 연연하지 않게 된다. 천국의 은총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안다. 그러면 세상의 것을 얼마든지 초월할 수 있다.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내 시간과 물질과 능력과 정열을 바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것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라. 하늘에 소망을 쌓으라. 그리하여 세상의 것에 얽매어 힘든 삶을 살지 말고 감사와 기쁨과 소망과 은혜가운데 능력 있게 주님과 동행하라.

4)열매를 맺음(6절)

골1:6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골로새 교회는 복음을 듣고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열매를 맺어 자라기 시작했다. 즉 복음을 듣고 은혜를 받으니 세상의 가치관을 따르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게 되고 그러니 인격적으로 영적으로 성장하여 열매를 맺었던 것이다.

그렇다. 복음을 들으면 은혜를 깨달아야 한다. 은혜를 깨달았으면 어떤 형태로든 열매를 맺어야 한다. 복음을 듣고 은혜를 깨닫지 못하면 소용 없다. 만약 은혜를 깨달았다고 하면서 열매가 없다면 이 또한 소용없다. 즉 복음을 듣고 은혜를 깨닫고 열매를 맺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먼저 들어야 한다. 듣되 나를 버리고 들어야 한다. 나의 모든 선입견과 고정관념과 이성과 지식과 경험을 내려놓고 성령의 조명을 받으며 들어야 한다. 그러면 은혜를 받게 된다. 은혜를 받으면 삶이 다른 양상으로 바뀐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진리의 길을 알고 그러한 삶의 방향으로 가게 된다. 그러면 열매를 맺는다. 우리도 그런 삶을 살아가자.

5.골로새 교회가 아름답게 세워진 이유(7,8절)

골1:7,8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알린 자니라

7절에서 에바브라가 골로새 교회의 설립자임을 알 수 있다. 에바브라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3년간 목회 할 때에 바울에게 배우고 고향인 골로새로 가서 교회를 세우고 교인들을 가르친 것이다. 골로새 교인들은 이 에바브라에게서 복음을 듣고 배워 믿음과 사랑과 하늘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 에바브라는 어떤 사람이었냐하면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라고 하였다. 신실은 충성과 같은 말로 ‘신실한, 믿을만한, 진실한’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두가지 사실을 발견한다. 첫째는 배우고 깨닫고 은혜를 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앞의 6절에서 그들은 말씀을 듣고 깨닫고 열매를 맺었다고 했다. 7절에서는 에바브라에게 배웠다고 했다. 즉 골로새 교회는 진리의 말씀을 열심히 배웠던 것이다. 특별히 영적인 일은 세상적인 이치와 법과 지식과는 전혀 다른 것이므로 우리의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성령의 조명을 받으며 겸손하게 배워야 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의 일꾼은 신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에바브라는 신실한 종이라고 했다. 신실과 충성은 앞에서 말했듯이 원어가 똑같다. 신실한, 믿을만한, 진실한이라는 의미이다. 즉 그리스도의 일꾼의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덕목이 무엇이냐하면 신실하고 믿을만하고 거짓이 없고 진실한 것이라는 말씀이다. 무슨 지식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능력이나 이런 것들이 우선되는 덕목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능력 있고 뛰어나고 많이 알고 힘세고 외모가 좋고 한 것을 강조하지 않고 오직 충성스럽고 진실하고 성실하라고 말씀하신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자.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믿음을 소중히 여기고 감사하자. 주님과 이웃과 가족에 대하여 진실한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자.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하늘에 소망을 두자. 자기 자신을 내려놓고 열심히 말씀을 듣고 배우고 은혜를 받고 열매를 맺어가자. 무엇보다도 신실한 모습으로 각자의 사명을 감당하자. 그래서 열매를 맺고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며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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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찬양예배설교]   Sunday Night Service
제목 : 성령을 따릅시다.

말씀 : 살전5:19-22

 

여러분, 우리 믿음의 사람들의 삶은 한편으로 감사와 기쁨과 은혜와 소망의 삶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비 그리스도인들보다 힘들고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편으로는 세상에 속한 자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늘나라에 속한 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쪽 나라의 법과 원리와 규례와 법도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엄청난 특권을 누릴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 엄청난 특권을 누리려면 마땅히 거기에 상응하는 책임과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지 않는 자들보다 더 많은 제약이 있고, 의무와 책임이 있기 때문에 힘들고 어려울 때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게 도리어 당연한 일이다. 세상은 죄와 무지 가운데 있고 우리는 존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소유한 신분이 전적으로 다른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생각과 가치기준을 가지고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런 사실을 기억하며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혹 어렵고 힘들지라도 그런 삶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존귀한 신분을 가진 존재로서의 올바른 삶이요, 자랑스러운 삶이요,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를 이루는 삶이요,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는 것은 물론 하나님 앞에 큰 상급받는 복된 삶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자부심과 긍지와 자존감을 가지고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오늘 본문에서도 바로 이런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삶의 자세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1.성령을 소멸치 말라.

살전5:19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얼마나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 사느냐 하는 것이다. 당연하지 않는가?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니까 하나님의 모든 것을 통달하고 계신다. 그리고 물론 생명과 진리와 사랑과 은혜와 평화의 영이시다.

그러므로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 하시면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깨닫고 분별하고 판단하며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은혜의 길로 달려갈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의 그 어떤 지식이나 이성이나 논리로도 불가능한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나님을 아시는 것이다.

동시에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면 성령께서 우리를 통제하고 다스리고 인도하시게 된다. 그래서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도 없고, 그 뜻을 향하여 갈 수도 없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게 되고 그러면 하나님과는 무관한 인생이 되는 것이다.

성령을 소멸치 말라는 한마디로 성령의 말씀을 무시하지 말라는 것이다. 성령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과 인도하심을 따라가라는 말씀이다. 성령이 말씀하시는 바를 알고도 거부하든 몰라서 거부하든 결코 성령의 소리를 거부하고 제멋대로 살아가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는 것이다.

여러분, 성령의 말씀에 민감해야 한다. 성령이 말씀하시는 것을 잘 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 심령에 성령에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 예수님이 진정 내 마음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세상의 돈이나 명예나 즐거움이나 욕심이나 인간적인 생각으로 가득차 있으면 성령의 소리가 들리지 않다. 마치 잔잔한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고 시끄러운 락 음악을 크게 틀어놓은 것과 같다. 그러면 시끄러운 락 음악 소리에 클래식 음악은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깨어 기도하며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고 말씀으로 무장하는 등 우리 심령을 어찌 하든지 하나님으로 채워서 우리 일생 생활에서 들려오는 모든 하나님의 음성을 캐치하고 그 말씀을 따라야 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자꾸만 세상의 소리에 끌려가려고 할 때가 많은데 어리석은 일이다. 주일에는 교회에 와야 한다. 가까운 친척집에 무슨 일이 생기고, 바쁜 일이 생겨도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이 성령의 소리이다. 월급이나 기타 어떤 소득이 있을 때 비록 생활비가 넉넉하지 못해도 하나님께 먼저 드리는 것이 성령의 소리이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신다. 너희 재물을 땅에 쌓지 말고 하늘에 쌓으라고 한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신다.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하셨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하셨다. 그 밖에 무슨 말씀을 더하겠는가? 이 모든 걸 깨닫고 성령을 따라 살려면 물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엡5:17,18절에서는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어떤 상황에서도 성령의 소리를 귀를 기울일 수 있기를 바란다. 교회 일을 할 때나 직분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때나 헌금을 할 때 사람을 대할 때나 시간을 사용할 때나 언제나 자신의 생각과 가치와 이성을 내려놓고 성령께서 무어라고 하시는지 겸손하게 엎드려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을 따라 사시기 바란다. 그러기 위하여 더욱 성령으로 충만하시기 바란다. 그래서 사람의 소리인지 사탄의 소리인지도 분별하지 못하고 그걸 따라가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의 음성을 바르게 듣고 바르게 따라갈 때에 주의 은혜와 능력이 충만한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2.예언을 멸시치 말라.

살전5:20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성경에서의 예언은 한마디로 하나님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물론 그 중에는 미래에 일어날 특별한 일에 관한 것들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특별한 일에 대한 예언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며 거기에 순응하며 살아가야 할 것을 알려주는 것이 예언이다.

그래서 이사야부터 말라기까지의 선지서를 예언서라고도 한다. 거기에는 물론 미래에 어떤 나라가 망하고 어떤 나라가 일어날 것인가 등의 미래적인 어떤 일에 대한 말씀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회개하라. 순종하라. 우상을 물리치라. 하나님께 바르게 경배드리라. 말씀에 순종하라는 내용들이다. 그래야 미래에 펼쳐지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신약에서는 더욱 더 그렇다. 고전14:3절에 보면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라는 말씀이 있는데 여기서 예언이란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예언을 멸시치 말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미리 알려주신 것들을 선포할 때에 그 메시지를 멸시치 말고 아멘으로 받아들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그 안에 성령이 없기 때문에 예언을 완전히 무시한다. 천국이 있다. 회개하라고 해도 콧방귀도 꾸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사람들은 절대로 예언을 무시하면 안된다. 현재에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미래에 어떤 일이 있을 것인지 그대로 믿고 따라야 한다. 특별히 천국에 대한 예언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여러분,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을 믿는가? 그때에 우리 모두가 새로운 존재로 부활할 것을 믿는가? 그리고 예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을 믿는가? 그리고 완전한 천국과 지옥이 있을 것을 믿는가? 믿어야 한다. 믿고 따라야 한다. 하나님 앞에 설 것을 준비하며 살아야 한다. 그래야 여기서도 바르고 복된 삶이 되며 물론 영원한 영광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의 말씀이다. 생명의 말씀이다. 은혜의 말씀이다. 유일한 잣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말씀대로 믿어야 한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게 진정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 가져야 할 마땅한 태도이다. 어떤 말씀이든지 그저 말씀 앞에 순종하는 것, 말씀을 두려워하며 그 앞에 순종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믿는 자의 태도이고 그런 사람이 결국 성령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코 예언을 무시하지 말고 말씀대로 살아갈 때에 주의 은혜 가득하시기를 바란다.

3.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21절)

살전5:21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범사란 물론 모든 일이다. 육적, 영적, 정신적인 것이나 환경이나 상황이나 조건이이 어떻든지 상관없이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또한 헤아린다는 것은 시험으로 입증하다, 옳은 것으로 인정하고 좋은 것으로 단정하다는 의미이다. 좋은 것은 선한 것, 아름다운 것, 옳은 것을 말한다. 취한다는 것은 말그대로 선택한다는 것이다.

즉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는 말씀은 모든 영역과 모든 조건 속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옳고 바르고 선한 것으로 입증된 것만 택하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 내가 보기에는 어떠하든지, 내 경험과 이성의 생각은 어떠하든지 당장에 육체적 물질적으로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그런 피상적인 것들을 잣대로 사용하지 말고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다도 인정하시는 것을 택하라는 것이다. 그것을 소유하라는 말씀이다. 물론 그럴 때 그것이 우리에게 진정 약이 되고 피가 되고 살이 되고 생명이 되고 은혜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그의 생애를 마감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짐을 받는다. 수24: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무슨 일이 있어도 오직 하나님을 택하고 그 말씀을 취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라는 것이다. 그럴 때 영원토록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더욱 깨어 기도하자. 성령의 충만함을 받자. 그래서 주님의 뜻을 주님의 말씀대로 바르게 헤아릴 줄 알자. 그래서 내 눈에 보기에 어떠하든지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든지 거기에 휘둘리지 말고 오직 주님의 뜻을 헤아려 그 편을 택하여 생명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는 복된 삶이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4.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22절)

살전5:22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악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모든 것이다.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데 하나는 모든 악의 종류를 버리라. 다시 말해 물질적, 육체적, 정신적, 영적 악을 버리라는 말씀이다. 다른 하나의 의미는 악과 비슷한 모양을 가진 것, 다시 말해 악과 조금이라도 닮은 것들을 버리라는 말씀이다.

성경에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셨으므로 조금 불평했다고 그게 무슨 그렇게 큰 잘못이 되겠는가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감사하라고 했는데 감사하지 않고 불평한다면 그게 바로 악인 것이다. 또 성경에 선한 말, 감사의 말, 위로의 말을 하라고 하셨으니까 누추한 말, 어리석은 말, 희롱의 말을 하면서 그럴 수도 있지 뭐. 이런 생각을 갖지 말라는 말씀이다. 하다보면 십일조 못할 수도 있지, 주일성수 못할 수도 있지, 좀 싸울 수도 있지, 살다보면 남의 것 좀 떼어먹을 때도 있지, 살다보면 거짓말 할 때도 있지, 어쩌다 한잔 할 수도 있지, 이런 생각을 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악은 모양이라도 비슷한 거라도 그 근처에 있는 거라도 버리라는 말씀인 것이다.(고전6:10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왜냐하면 물론 그 자체로 악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점점 악에 대해서 무감각해지고 결국 더 큰 악으로 발전해 나가기 때문이다.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다. 주일성수 몇 번 안하다 보면 주일날 빠지는 것을 예사로 알게 됩니다. 십일조 몇 번 안하다보면 뭐 당연한 것으로 알게 됩니다. 결국 영적, 윤리적 무감각에 빠지고 점점 더 큰 악속에 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약1:15절에서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하셨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늘 영적인 예민한 감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며 말씀에 아멘으로 순종하며 범사에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주님 보시기에 옳은 것을 택하며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는 삶을 통하여 더욱 거룩하고 아름다운 크리스천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 안에 있는 은혜의 풍성함을 마음껏 누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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