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선한 싸움을 싸우라

말씀 : 딤전6:11-12

 

 

1.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세상이 너무 왜곡되어 있어서 자칫 잘못하면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세상의 왜곡된 물결에 휩쓸려 가기가 쉽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얼마나 물질주의와 인본주의와 이기주의와 편의주의와 향락주의가 만연되어 있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즐기고 큰 집에서 좋은 차 타고 좋은 옷 입고 좋은 것 먹으며 많은 것을 누리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 명예와 권세를 누리며 대접받고 살아가는 것이 인생인양 여기고 있지 않은가? 그러려면 어찌 하든 남을 이겨야 하고 더 많은 것을 가져야 하니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고 그래서 결국 갈등과 아픔과 상처와 고통을 주고 미움과 시기와 질투에 빠지고 그래서 결국 싸우고 속이고 빼앗고 심지어 죽이고 하며 살아가지 않는가?

그래서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있지 않으면 그런 삶의 양태를 따라 살아가기 쉽기 때문에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벧전4:7절에서는 말씀한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또 예수님께서는 마26:41절에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고 하신 것이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바로 이러한 세상에서 우리가 정말 믿음으로 승리하기 위하여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을 묵상할 때에 주님이 주시는 믿음과 은혜와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왜곡된 가치관과 삶의 모습들을 물리치고 주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삶을 살아감으로 주님의 은총이 넘치는 삶이 되기를 바란다.

2.세상의 왜곡된 것을 피하라.

딤전6: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1)하나님의 사람임을 잊지 말라.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하나님의 사람.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인가? 얼마나 존귀한 이름인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이름인가? 그렇다면 그 이름값을 좀 해야 되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사람이 마귀의 사람들과 같은 사고를 가져야 되겠는가? 하나님의 사람에 땅에 얽매여서야 되겠는가?

그러므로 ‘너 하나님의 사람아.’하시는 이 말씀을 기억하라.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하지 말고 주님을 닮아가자. 사탄이 가져다 주는 왜곡된 가치관과 삶의 모습을 버리고 주님의 사람처럼 아름답게 기쁘게 가치 있게 보람 있게 거룩하게 살아가자.

2)세상 욕망을 피하라.

이것들을 피하라. 이것들은 앞의 9,10말씀. 돈을 사랑하는 것, 부하려 하는 것, 세상적인 욕심. 이런 것들을 피하라는 것이다. 즉 세상에 만연되어 있는 왜곡된 가치와 풍조를 따르지 말라는 것. 그런 것들을 피하고 주님의 가치관을 따르라는 것.

그렇다. 어떤 목표를 향해 가려면 먼저 피할 것은 피해야 한다. 박사, 판사, 의사가 되려는 사람이 놀고 먹고 마시고 향락을 가까이 하면? 술을 안 마시려면 술집을 피해야. 술꾼을 피해야. 천성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돈이나 향락이나 죄된 장소를 바라보고 가까이하면 어떻게 거룩한 모습으로 주님을 향해 가겠는가?

히11: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마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물론 돈을 완전히 배격하라는 것은 아니다. 돈이 주인이 되지 않게 하라. 예수님이 주인이 되게 하라. 내가 돈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돈이 나에게 의하여 지배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돈보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일이 우선이어야. 돈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마음껏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내가 돈을 지배하는 삶이다.

그러면 어떻게 돈에 지배당하는 삶이 아니라 돈을 지배하는 삶이 될 수 있는가? 주님의 영광을 본 사람은 이게 가능해 진다. 그까짓 세상 부귀영화와 비교할 수 없는 그 영광의 나라를 본 사람이 그까짓 돈 따위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안 그런가? 그 영광의 나라를 아는데 그게 내 건데 그까짓 돈 몇 푼에 혹하겠는가? 그 완전하고 영원하게 영광스럽고 그야말로 어둠과 절망과 고통과 미움과 한숨과 슬픔과 고통이라고는 찾아야 볼 수 없는 영원한 영광만이 가득한 그 나라를 본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세상의 별거 아닌 것에 목맬 필요가 뭐란 말인가? 돈 몇푼 때문에 신앙생활 제대로 못하고, 돈 몇푼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돈 몇푼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에 먹칠을 하겠나?

그러므로 그까짓 세상의 것에 연연하지 말라.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라. 세상의 죄된 곳을 피하라. 주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드리고, 찬양하고, 사랑하고 은혜를 나누고 섬기고 하는 곳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반드시 풍성한 삶을 살아간다. 참된 자유인이 된다. 평강을 누리게 된다.

피할 것을 피하고 멀리할 것을 멀리한 다음에 이제는 따를 것을 따르고 가까이 할 것을 가까이 하라고 말씀하신다.

3.진리를 따르라.

딤전6: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1)의를 따르라.

의를 따르라. 의란 무엇인가? 옳은 것이다. 그럼 진정으로 옳은 일은 무엇인가? 옳은 사람은 누군가? 오직 말씀만이 옳다. 오직 예수님만이 완전한 의이시다. 세상의 어떤 것도 완전히 옳은 것은 없다. 세상의 어떤 사람도 완전히 옳은 사람도 없다. 세상의 진리가 비록 상대적인 의가 있다 해도 그것은 완전한 의가 아니다. 생명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천국으로 안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직 말씀만이 오직 예수님만이 완전한 선이며 생명이며 의이며 거룩이며 사랑이시다.

그러므로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오직 말씀을 따르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만을 따르라. 그리하여 의의 길,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달려가 주님의 은총을 누리라.

2)경건을 따르라.

경건을 따르라. 두려워하고 공경하며 삼가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 세상의 욕심과 향락과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 무엇을 따를 것인가? 진리를 따를 것인가? 세상 사람들을 따를 것인가? 주님을 따를 것인가? 돈을 따를 것인가?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설령 손해를 보더라도 선과 진리와 의와 사랑과 거룩과 성실과 진실을 따르라.

3)믿음을 따르라.

예수님께 대한 믿음. 천국에 대한 믿음.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도하심에 대한 믿음. 승리에 대한 믿음. 영광의 나라에 대한 믿음. 그러면 그 믿음을 따르라. 그 믿음이 내 행동을 좌우하게 하라. 사람이 좌우하고, 세상의 가치관이 좌우하고, 돈이 좌우하게 하지 말라. 정말로 믿으면 주님을 따르라. 도대체 주님보다 신뢰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 주님께서 주실 은혜보다 더 큰 것을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세상의 어떤 것도 믿을만하지 못하다. 죄와 무지와 악속에 있다. 사람이건 돈이건 학문이건 예술이건 체육이건 문화가 어떤 것도 우리 미래를 보장하지 못한다. 오직 예수님만이 완전한 신뢰의 대상이다. 완전한 생명을 보장한다. 완전히 선하시다. 완전히 구원하신다. 완전히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믿음을 따르라.

4)사랑을 따르라.

사랑을 따르라. 무슨 말인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길을 따르라. 이웃을 사랑하는 길을 따르라는 것이다. 자신과 돈과 세상 즐거움을 사랑하는 길이 아니라 주님과 의와 진리와 이웃을 사랑하는 편을 택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정말 무엇을 따르나? 물질적 유익을 따르나, 사랑을 따르나? 내 욕심을 따르나 사랑을 따르나? 주님 사랑을 따르나, 자녀 사랑을 따르나? 주님의 몸된 교회 사랑을 따르나? 세상의 것 사랑을 따르나? 교회의 일과 세상의 일 중 어느 편을 따르나? 교회가 더 중요한가? 세상이 더 중요한가? 정말 무엇을 더 사랑하나? 이 집이 내 아버지 집인데, 주님의 몸인데. 믿음 안에서 한 가족들인데.......

5)인내를 따르라

인내는 물론 참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을 참으라는 것인가? 세상에서 열심히 참고 일하고, 열심히 참고 공부하라는 것인가? 물론 그런 인내도 필요하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인내는 믿음안에서의 인내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주님을 끝까지 신뢰하고 주님의 선하심을 믿고 주님의 때를 기다리라는 것이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데 어렵고 힘들어도 인내하며 주님의 일을 하라는 것이다. 불평하고 원망하고 좌절하고 짜증내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주님의 일도 뭔가 일이 잘 풀리고 인정해주고 칭찬해 주면 신이 나서 하고 힘들거나 알아주지 않으면 그만 낙심해서 예배고 봉사고 다 집이치우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힘들 때라도 겸손히 주님 앞에 엎드리며 진리의 길을 가라는 것이다.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가신 주님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주님의 십자가, 주님의 몸에 찍힌 채찍 자국, 그 손의 못 자국, 그 허리에 창 자국, 그 당하셨던 온갖 모욕들, 침 뱉음, 따귀를 맞으심 등을 생각하며 진리의 길을 달려가라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이 도우심과 인도하심으로 결국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 힘들면 낙심과 절망과 나아가 원망하고 불평한다면 결국 나도 너도 다 힘들어지고 주님의 능력도 덧입지 못한다. 은혜도 자꾸 멀어진다. 그러면 자꾸 더 힘들어진다. 그러므로 힘들더라도 그저 겸손히 주님의 뜻을 인정하고 엎드리며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라. 그러면 분명히 주님이 힘주시고 은혜 주셔서 감당케 하신다.

6)온유를 따르라.

온유. 부드러운 것. 그러나 그냥 단순히 인간적으로 부드러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능력과 권한과 사랑을 의지하여 겸손한 태도를 말한다. 이렇게 하나님의 능력과 주권과 사랑을 의지하며 겸손히 엎드리면 당연히 다른 사람에 대해서 부드러운 모습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왜?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알기에. 모든 것이 하나님의 권한에 있음을 알기에. 그도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임을 알기에. 그러므로 나는 그저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리며 나의 일을 할 뿐 나머지 문제는 주님께 맡기면 될 것이기에 분노하고, 정죄하고, 짜증내고, 화내고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물론 이것도 인간적으로는 쉽게 안 되겠지만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하다.

4.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딤전6: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앞에서 말씀했던 모든 내용들이 결국의 믿음의 선한 싸움이다. 세상의 추한 것을 피하는 것도 선한 싸움이요,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는 것도 선한 싸움이다. 결국 자신과의 싸움이다. 믿음의 싸움이다. 이 싸움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서만 승리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부르심을 받았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며 그 은총을 누리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자꾸만 육체적인 것들과만 씨름하지 말고, 돈과만 씨름하지 말고, 정말 진리와 믿음과 의와 거룩과 경건과 사랑을 따르며 그것들을 지키는 일에 더욱 힘쓰자. 그러기 위하여 더욱 말씀과 기도와 찬양에 힘쓰자. 그래서 성령의 능력을 덧입자.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승리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더욱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삶을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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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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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 주님을 통해서 봅시다Sunday evening Service
말씀 : 막8:22~26

제목 : 주님을 통해서 봅시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존재이기에 세상에 존재하는 세 가지 영역의 세계를 모두 볼 수 있는 존재입니다. 하나는 물질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육신의 눈을 가지고 산이나 바다나 땅이나 사람이나 기타의 모든 물질세계를 볼 수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우리 인간은 지적, 정신적 눈을 가지고 정신적이고 지적인 세계를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눈을 가지고 있기에 도덕적 가치를 분별하며, 철학적 사고를 하고, 음악이나 미술 등의 예술 활동을 하는가 하면 과학이나 수학 등의 지적인 활동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인간은 영적인 눈으로 신령한 세계를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지정의는 물론 영혼을 가진 존재이기에 이 영적인 눈으로 신령한 세계를 보고, 하나님의 세계를 보며,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반드시 보아야 할 이러한 세 영역의 세계를 모두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세가지 영역의 세계를 보되 바르게 그리고 밝게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이 올바르고 풍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벳새다 지방의 맹인을 고쳐주시는 과정에서 이 맹인에게 육적인 눈과 아울러 영적인 눈도 밝게 해 주신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벳새다의 맹인의 고쳐주시는 과정을 통하여 우리가 생각할 것은 무엇입니까?

1.주님의 방법을 따라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은 주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셨는데 그 방법이나 과정은 매우 다양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맹인을 고쳐주신 기사도 여러 번 나타나는데 그들을 고쳐주신 방법도 다양했습니다.

먼저 오늘 23절에서는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오늘 말씀에서는 맹인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눈에 침을 뱉고 안수하셔서 고치셨습니다. 그러나 마9:27~31절에서도 맹인을 고쳐주신 기사가 나오는데 거기서는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눈이 밝아졌습니다.

마가복음10:46~52에는 바디매오라는 맹인을 고쳐주셨는데 거기서 예수께서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시자 눈이 떠졌습니다. 즉 여기서는 오직 말씀으로만 고쳐 주셨던 것입니다. 또 요한복음 9:1~7을 보면 나면서부터 맹인된 사람에게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시며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시자 그가 그대로 하자 눈이 떠졌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침으로 이긴 진흙을 눈에 바르고 나서 어떤 행동을 요구하셨고 그 요구에 순종할 때 고쳐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같은 맹인을 고쳐주시는데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셨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주님은 사람이나 환경이나 물질이나 그 어떠한 것의 제한도 받지 않으시고 당신의 주권에 의하여 자유롭게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 믿음과 순종을 요구하시고 때로는 무조건 고쳐주시기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인간은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따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주님의 방법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주님의 능력을 마치 자기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기기도 합니다. 자신이 원하면 자신이 원하는 방법대로 주님께서 역사해 주실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소위 특별한 은사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이런 오류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믿음이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무지와 교만의 소치입니다. 주님은 결코 내 생각대로 내 뜻대로 내가 원하는 방법대로 내가 원하는 시간에 얽매어 역사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약 주님의 역사하심을 맛보기를 원한다면 다만 주님앞에 겸손하게 엎드려 주님의 뜻대로 주님의 방법대로 주님의 때에 주님께서 역사해 주실 것을 간구하며 기대하며 주님께 맡기는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2.주님께 전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어떤 방법을 취하시고 무엇을 요구하시든 그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오늘 23절 다시 봅니다.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이 치유의 과정에서 우리는 우선 두 가지 사실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께서 그를 동네 밖으로 데리고 가셨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의 눈에 침을 뱉고 안수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치유과정에 대해서도 우리는 자칫하면 회의 또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일부러 동네 밖으로 데리고 가신 것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굳이 사람들이 없는 동네 밖으로 데리고 가실 이유가 없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아니 도리어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서 고쳐 주시면 얼마나 주님의 인기가 높아지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굳이 그를 동네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그 이유는 26절을 통하여 짐작할 수 있는데 거기에 보면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이르시되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유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단지 병이나 고쳐주는 분인 줄 알고 병이나 고침받기 위하여 따라다니는 것을 우려해서 였을 것입니다. 마치 오병이어의 기적 때와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기억할 것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해도 주님께서 뭔가를 요구하시거나 뭔가를 행하실 때에는 반드시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무조건 주님의 방법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우리가 생각해 볼 장면은 주님께서 그를 데리고 나가서 그의 눈에 침을 뱉고 나서 안수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만약 누군가 우리 얼굴에 침을 뱉는다면 어떻겠습니까? 극심한 모멸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물론 주님께서 눈에 침을 뱉는 것은 전혀 다른 경우이긴 하지만 아니 기왕 고쳐 줄 것이면 좀 고상한 방법으로 하시지 왜 하필이면 침을 뱉아 고쳐주시느냐고 불평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 그랬지 않았습니까?(왕하5장) 그는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 갔을 때 무슨 대대적인 종교의식을 통하여 고쳐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엘리사선지자가 나와 보지도 않고 요단강에 가서 씻으라고 하니까 모멸감을 느끼며 제깐 놈이 뭔데 나와 보지도 않고 그 잘난 요단강에 가서 씻으라고 하느냐, 그까짓 요단강에서 씻으려면 차라리 그보다 몇배 더 크고 아름다운 우리 아람의 아바나와 바르발 강에서 씻겠다고 하면서 화를 내며 돌아가려고 했던 것처럼 말이지요.

그러나 이 맹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하시든지, 그것이 이성적으로 수용이 되든 안되든, 침을 바르든, 물을 바르든, 진흙을 바르든, 심지어 똥을 바르든 주님의 방법에 순응하고 수용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순순히 주님을 따라 나서야 합니다. 내 의사와 내 이성의 생각과는 별개로 주님께서 어떤 방법을 사용하시든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그때 결국 주님의 역사는 일어나는 것입니다.

3.주님을 통해서 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일단 침을 바르고 안수하신 다음에 무엇이 보이느냐고 질문을 던지자 맹인이 대답합니다.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막8:24) 그러니까 아직 제대로 못보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는 들이었기 때문에 나무들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나무가 많이 서있는 것을 보고 사람 같기도 하고 나무 같기도 해서 마치 나무들이 걸어가는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다시 안수를 하시자 그가 말합니다.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막8:25)

여러분,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는데 안수를 두 번 하신 것입니다. 23절에서 안수하고 25절에서 다시 안수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한번 안수로 병을 못고치시나요? 아니 안수하지 않으면 못고치나요? 아니죠. 말씀만으로도 고치시죠. 그런데 왜 굳이 침을 뱉고 두 번씩이나 안수를 하셨을까요? 일단은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어떻게 하시든지 순종하라는 의미가 있고 다른 하나는 이 맹인이 믿음이 부족해서입니다. 그래서 온전히 주님을 믿고 바라보고 의지하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다시 안수를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안수는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 또는 영력이 주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손을 얹고 기도한다고 하나님의 역사가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안수를 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모두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믿는 마음으로 성령의 임재를 간절히 사모하며 행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임재하심으로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안수를 두 번하셨다는 것은 물론 안수를 받는 자의 태도가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안수를 하셨는데 그러자 이 사람이 주목하여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처음에는 주목하여 보지 않아서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 같은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제대로 눈이 안떠진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안수하니까 주목하여 보게 되었고 그러자 온전히 보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하여 보았다는 문자적인 뜻은 ‘~을 통하여 보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의역을 해서 주목하여 즉 열중하여 보다는 의미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의 원뜻은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을 보기를 간절히 열망하는 마음으로 보았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고쳐주실 것을 믿고 확신하는 마음으로 있는 힘을 다하려 세상을 보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주님이 보였고 세상이 보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주님을 통해서 세상을 바르게 보기 위한 열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고 귀를 열어 주심으로 주님과 천국과 세상을 밝게 바르게 볼 수 있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세상이 바르게 보입니다. 목적과 방향과 목표가 확실히 보이게 됩니다. 주님 안에서 주님을 통해서 세상을 보고 자신을 보고 물질계를 보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보면 그 모든 것이 바르게 정확하게 확실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로소 정말 올바르고 정확한 눈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영역의 눈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맹인은 오직 주님을 통하여 세상을 보면서 모든 어둠에서 해방되어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벳새다 맹인은 고쳐주시는 과정을 다시한번 기억하면서 주님께서 언제 어떻게 역사하실지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엎드리며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역사하시든 그대로 믿고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을 통해서 모든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통해서,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세상을 보고, 물질을 보고, 경제를 보고, 정치를 보고, 소망을 보고, 영광의 나라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밝고 바르고 정확한 눈으로 모든 물질계를 보고, 지적이고도 정신적인 세계를 보며,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르게 확실하게 보면서 살아가실 때에 더욱 온전한 생의 은총을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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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 Sunday night worship
말씀 : 마11:7~12

제목 : 천국을 침노합시다.

 

1.가장 위대한 선지자 세례 요한

오늘 말씀에 보면 세례 요한에 대한 더 할 수 없는 칭찬이 나타나 있다. 11절 상반절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인간 세상에서 세례 요한보다 위대한 선지자는 없다는 말씀이다. 얼마나 대단한 칭찬인가? 그것도 다른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예수님께 이런 칭찬을 들었으니 얼마나 영광인가? 어떻게 이렇게 예수님께 최고의 칭찬을 받았을까?

첫 번째 이유는 세례 요한은 세상 풍조에 흔들리지 않고 사명을 감당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오늘 7절에 보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라고 예수님이 말씀한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란 세상 조류에 따라 이리 저리 변하는 모습을 말한다. 상황과 환경과 이해관계에 따라 생각과 태도가 변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세상에 물결에 휩쓸려 다니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말든 끝까지 회개를 외쳤다. 욕을 먹어도 핍박을 당해도 말씀의 메신저로서의 역할을 감당했다. 심지어는 헤롯이 동생의 아내를 빼앗은 것에 대하여 책망하였다. 그래서 결국 순교를 당했다.

두 번째는 그는 세상의 부귀영화에 연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8절에 보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고 하셨다. 세례요한은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부드러운 옷이란 비단옷과 같이 화려한 권세와 부요를 상징한다. 당시에 헤롯 임금이나 사두개인 제사장들은 화려한 의복으로 치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살았다.(마3:4) 즉 세례요한은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세상의 부귀영화에도 연연하지 않고 오직 주님이 주신 사역에 충실하였기 때문에 예수님께 극찬을 받는 선지자가 되었던 것이다.

세 번째는 세례 요한은 직접적으로 메시야 길을 준비했기 때문이었다. 10절에 보면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길을 직접 예비한 선지자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누구보다도 위대한 선지자라는 것이다. 물론 구약 선지자들이나 다른 위대한 신앙인들도 메시야에 대해 예언했고, 온갖 우상숭배와 도덕적으로 타락한 세상에 대하여 경고하며 그것을 따르지 않았다.

그런데 주님은 세례 요한을 이런 모든 선지자들보다도 뛰어난 선지자라고 칭찬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님의 길을 직접 예비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예수님을 직접 대면했고, 심지어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고 하며 자신은 예수님의 신발끈을 풀어주기에도 부족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흥해야 하고 자신은 쇠해야 한다면서 자신의 제자들도 예수님께로 보냈다. 그래서 요한은 극찬을 받았던 것이다.

사실 이보다 더 큰 일이 어디 있는가? 이보다 더 위대한 모습이 어디 있는가? 예수님을 직접 소개하는 일. 예수님께로 직접 인도하는 일.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일, 이보다 위대한 일이 어디 있겠나?

우리가 사순절을 맞이하여 전도를 하는 것도 그렇다. 이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 귀한 일은 없다. 큰 일은 없다. 시급한 일도 없다. 가족과 친척과 이웃을 구원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그래서 심지어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롬9:3절이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설마 가족을 위해서라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도 좋다는 뜻일까? 그만큼 가족과 친척을 구원하는 것이 간절히 원하는 바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풍조에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지도 말고,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지도 말고, 오직 어찌 하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 일에 힘씀으로 여기서도 생명의 기쁨과 가치를 누리며 살고, 주님 앞에 섰을 때 잘했다 칭찬받고 큰 상급도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자.

2.천국을 침노하라

세례요한을 극찬하신 다음에 그러므로 우리도 그런 모습으로 천국을 이루어 가야 할 것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12절을 보자.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천국은 침노를 당한다. 침노하는 자는 빼앗는다고 하신다. 물론 천국은 결코 침략을 당하지 않는다. 인간도 마귀도 그 누구도 천국을 침략해서 얻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천국을 침노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한마디로 천국을 차지하기 위하여, 혹은 이루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여 적극적으로 공략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침략하기 위하여 정보도 수집하고, 군비도 확충하고, 군량미도 확보하며 최신식 무기도 준비하고 병사들도 강하게 훈련시키는 것처럼 우리도 천국을 얻고 이루어가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천국을 차지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공략하라는 것이다. 말씀을 열심히 묵상하여 천국에 대하여 확실히 알고,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그 능력으로 마귀의 도전을 물리치고, 천국을 향해 가는 발걸음을 무겁게 하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버려야 한다. 또한 세상의 무사안일과도 싸우며 적극적으로 천성을 향하여 힘차게 달려가야 한다.

세례요한은 바로 이런 사람이었다. 천국을 향해 열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공격적으로 천국을 이루어가는 사람이었다. 그가 얼마나 저돌적이었는지 마3:7,8절을 보라.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사두개인들은 성전을 장악하고 있었고, 바리새인들은 율법선생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독설을 퍼부으며 너희들이 성전을 지킨다해도, 너희들이 율법선생으로 율법을 가르친다해도 회개하고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열정과 적극성이 세상의 어떤 조류에도 휩쓸리지 아니하고, 세상의 어떤 협박이나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천국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힘이 되었던 것이다.

예수님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요2:14~17절을 보자.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성전에 대한, 하나님께 대한 열정으로 그들을 꾸짖으셨던 것이다.

그래서 마23장에서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문을 닫고 너도 안 들어가고 남도 못들어가게 하는구나.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하시면서 신랄하게 책망을 하신 후에 엄중한 경고의 말씀을 하신다. 마23:33절이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이런 하나님께 대한 열정, 적극성이 결국 그들의 눈에 가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던 것이다. 바로 그런 열정이 생명의 역사를 일으켰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열심을 내야한다. 세상에서 일하는 것의 반만 열심을 내어도 신앙생활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먹고사는 일을 위해서는 죽자사자 일하면서 천국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렇지 못하다. 자녀교육에는 죽어라고 투자하면서 영혼의 생명의 위해서는 그렇지 못하다. 세상에서 재미있고 신나는 일이 있으면 열일 젖혀 놓고 쫓아가면서 예배드리는 일이나 교회 일을 하는데는 그렇지 못하다. 자녀를 위해서는 아무리 바빠도 시간을 낼 수 있지만 교회 일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 어떤 것보다도 천국을 위하여 열심을 내야 한다. 무엇이 더 중요한가? 무엇이 더 기쁜 일인가? 무엇이 더 가치있고 의미있는 일인가? 무엇이 더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인가? 무엇이 더 행복하고 평안하고 영원토록 진정한 기쁨과 만족과 위로와 소망을 누릴 수 있는 일인가?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 모두 적극적인 신앙인이 되자. 예배드리는 일과 말씀 듣는 일과 교회를 섬기는 일에 열심을 내자. 특별히 천하보다도 귀한 생명을 살리는 일을 위하여 더욱 열심을 내자. 그래서 우선은 내가 천국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자. 동시에 저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하자. 그렇게 생명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며 역사를 이루어가다가 주님 앞에 섰을 때 큰 칭찬과 상급을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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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 Sunday Night Service

말씀 : 잠7:1-5

제목 : 말씀과 삶

 

인간에게는 생존하기 위하여, 혹은 보다 더 나은 삶을 누리기 위한 욕구가 있다. 인간의 욕구는 1차적인 생리적 욕구와 2차적인 사회적 욕구로 분류된다. 생리적 욕구는 본능적인 욕구를 말하는 것으로 생욕, 식욕, 성욕과 같은 것이며, 사회적 욕구는 물론 본능적인 성격도 있지만 그보다는 주로 사회생활 속에서 형성되는 것으로 명예욕, 소유욕, 성취욕, 지배욕, 권력욕 등이 이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욕구들은 인간의 삶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들이다. 그 모든 욕구들 하나하나가 모두 인간의 삶을 유지시키고 발전시키고 인간의 생명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중요한 요소들이 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욕구들이 잘못 사용되었을 때 그것은 오히려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역할을 한다.

그중에서 인간의 삶을 가장 심각하게 파괴할 우려가 있는 욕구는 소유욕과 성욕, 명예욕이라고 한다. 실제로 인간사회에 나타나는 모든 부조리와 갈등과 고통의 현상들이 바로 이러한 소유욕과 성욕과 명예욕에 의하여 발생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러한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와 관련된 범죄에 대하여 많은 경고를 하고 있다.

물질적인 욕망으로 인한 범죄와 관련해서는 제8계명에서는 “도적질하지 말지니라.”고 하셨고, 또 제10계명인 출20:17에서는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고 하시면서 남의 물건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자신의 것을 족한 줄로 여기며 살 것을 말씀하고 있다.

또 성적인 범죄에 대하여 십계명중 7계명인 출20:14에서 “간음하지 말지니라.”고 하셨고 레20:10절에서는 간음하는 자는 돌로 쳐서 죽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즉 인간 속에 자리잡고 있는 이러한 욕망들이 반드시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잘못 사용될 경우 인간에게 심각한 고통을 안겨다 줄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러한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를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함으로 일어날 수 있는 죄악을 어떻게 이길 수 있는지를 말씀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씀 안에 굳게 서면 그 말씀이 우리를 모든 유혹으로부터 보호해 준다는 것이다.

1.말씀이란 무엇인가?

먼저 1~4절을 보자. “내 아들아 내 말을 지키며 내 계명을 간직하라 / 내 계명을 지켜 살며 내 법을 네 눈동자처럼 지키라 / 이것을 네 손가락에 매며 이것을 네 마음판에 새기라 / 지혜에게 너는 내 누이라 하며 명철에게 너는 내 친족이라 하라

여기에 보면 말씀에 다양한 표현이 있다. 우선 1절에는 ①‘내 말’이라고 말씀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말씀이라는 말이 엄청나게 많이 나온다. 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혹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혹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등등의 표현이 굉장히 많이 나온다. 무슨 뜻인가? 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 주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임으로 진리이고, 생명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감히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순종해야 하고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1,2절에서는 ②‘계명’이라고 말씀한다. 계명이란 말씀그대로 우리가 지킬 것을 명령하신 계율이다. 그래서 이 말씀을 개역성경에서는 ‘명령’이라고 되어있다. 그러니까 말씀을 ‘명령’이라고 하신 것은 말씀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절대적인 규범으로 그것은 우리가 지켜야 할 의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지혜 이것은 결코 단순한 권면이나 그럴듯한 종교철학이나 사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이 반드시 지켜야 할 하나님의 지시요 명령이라는 것이다. 명령이니까 반드시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2절에서는 ③‘법(도)’이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말 그대로 말씀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삶의 법칙이라는 의미이다. 법은 어떤 기준이다. 말의 기준, 행동의 기준, 준거가 곧 법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법이라는 것은 말씀이 인간의 행동의 모든 기준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삼는가?

또 4절에서는 말씀을 ④‘지혜’라고 부르는 것은 말씀이 인간에 참된 진리의 세계를 알려주는 올바른 지식이라는 측면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모든 지식과 지혜와 진리가 들어있다는 말씀이다. 그렇지 않은가? 무엇이 진정 지혜인가? 무엇이 진정한 지식인가? 물론 생명을 주고 더 나아가서는 생명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지혜요, 지식이 아닌가? 생명을 주는 지혜,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주는 지식은 오직 예수님과 그 말씀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 지식을 알고 그것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린다. 그래서 그 사람이 가장 지혜로운 자인 것이다. 따라 말씀이 곧 지혜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에 대해서 그것이 법이고 지혜이고 명철이고 율례이고 하나님의 말씀이고 명령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래서 정말 그것을 잣대로 삼자. 참 지혜가 거기 있음을 알고 그 말씀을 따르자.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엄중히 다루자. 그래서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 때 말씀의 인도를 따라 참 생명의 은총의 길을 걸어가자.

2.말씀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곧 법이요, 명령이요, 계명이요, 지혜인데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그건 앞에서 보았던 1~4절에 역시 나타나 있다.

1절의 ‘지킨다’는 것은 「지키다, 보호하다, 망보다」는 의미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따르라는 것이다. 빼앗기지 말라는 것이다. 팔아먹지 말라는 것이다. 손해가 나도 힘들어도 어려워도 세월이 어떻게 변해도...... ‘간직한다’는 것은 「숨기다, 비축하다, 저장하다」는 의미이다. 이것도 비슷하다. 팔아먹지 말라. 간직하고 있어서 언제 어떤 상황이라도 그것을 따라가라는 말씀.

2절은 1절의 연속인데 후반부에는 눈동자처럼 지키라는 말이 있다. 사람이 어떻게 눈동자를 지키는가? 한마디로 민첩하게 지킨다. 반사적으로 지킨다. 눈에 무엇인가가 가까이 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이 깜박여져서 눈꺼풀이 눈동자를 덮어 보호하는 것이다. 눈은 그만큼 중요한 기관으로 반사적으로 지키는데 이와 같이 무엇인가가 말씀을 침범하려고 하면 다른 어떤 것을 지키는 것보다도 중요하게 잽싸게 지키라는 것이다.

3절의 손가락에 매라는 것은 가까이 하라는 것인데 「곁에 두다, 떠나지 않다, 함께하다」라는 의미이다.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한다. 늘 보고 듣고 배워야 한다. 그래야 남는다. 새겨진다. 아주 그냥 내 가치관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어차피 우리는 무엇을 보고 듣고 배우냐에 따라 인생이 결정된다. ‘새기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기록하다, 명부에 올리다, 등록하다」는 의미이다. 완전히 심비에 새겨서 지워지지 않게 하고 그것을 따라가라는 말씀이다.

또 4절의 내 누이, 내 친족이라 하라는 것은 친근히 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가까이 하다, 좋아하다, 기뻐하다」는 의미이다. 말씀 안에 생명이 있고 기쁨이 있고 능력이 있고 평안이 있고 복이 있으니까 세상의 다른 것을 가까이 함도 말씀을 가까이 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래서 물론 말씀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라는 것이다.

이 말씀들을 종합해보면 우선은 말씀을 마음에 새겨넣고, 새겨 넣으려면 가까이하고 친하게 지내야 하며, 그 다음 다음에는 잘 간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잘 간수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잘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어떤 것들이 침범하여 마음속에 들어 있는 말씀을 빼앗아가지 못하도록 지키라는 말이다.

그런데 어떤가? 말씀을 얼마나 잘 지키는가? 돈을 지킴보다, 내 육체를 지킴보다, 내 명예를 지킴보다 말씀을 지키는가? 돈이냐, 말씀이냐하는 기로에서 무엇을 택하는가? 육체의 생명이냐 말씀이냐하는 기로에 선다면 무엇을 지킬 것인가? 명예이냐 말씀이냐하는 양자택일을 강요받는다면 무엇을 지킬 것인가?

잠4:23절을 보라.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또 마22:37절을 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명보다 물질보다 명예보다 지식보다 말씀을 지키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생명보다 물질보다 명예보다 권력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왜? 하나님이 욕심장이라서? 독재자라서? 폭군이라서? 물론 아니다. 그게 생명의 길이기 때문에... 그게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가장 풍요롭게 가장 가치있게 살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말씀을 새기고 간직하고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이다. 4절을 보라. “지혜에게 너는 내 누이라 하며 명철에게 너는 내 친족이라 하라.” 무슨 말인가? 한마디로 친근히 하라는 말이다. 가까이 하라는 말이다. 여기서 누이와 친족을 구별해서 말씀하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친족처럼 형제처럼 그렇게 가까이 하라는 것이다. 함께 하는 것을 좋아하라는 것이다. 즐거워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가까워지고 함께 있게 되고 떠나지 않게 된다.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이 함께 있으면 나의 삶에 은혜가 충만하게 된다.

그러므로 말씀을 가까이 하라. 즐거워하라. 좋아하라. 사랑하라. 묵상해야 하라. 교회를 가까이하라. 예배를 가까이하라. 적용하기를 가까이하라. 그리하여 더욱 은혜 가운데 살아가자.

3.말씀을 지킨 결과는 무엇인가?

말씀을 새기고 간직하고 지키고 가까이하라고 말씀하신 다음에 5절에서는 그 결과를 말씀하고 있다. 왜 말씀을 지켜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그 말씀들이 자신을 지켜 줄 것이라는 말씀이다.

5절 말씀을 보라. “그리하면 이것이 너를 지켜서 음녀에게, 말로 호리는 이방 여인에게 빠지지 않게 하리라.” 즉 그 말씀을 네가 네 마음속에 지키면 이제는 반대로 그 말씀이 너를 지켜 줄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너를 모든 악의 유혹으로부터 보호해 줄 것이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요셉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그는 너무나 많은 시련 속에서도 오직 말씀으로 승리한 사람이다. 형제들이 자신을 죽이려다가 팔아넘긴 악행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 들여 형들을 미워하지도 않았고 원수를 갚지도 않았다. 또 물질적으로도 신앙양심에 입각해서 살았고, 육체적으로 성결한 삶을 살았다. 창39장에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요셉은 말한다. 창39:9절을 보자.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당신은 보디발의 아내가 아니냐? 그런데 내가 당신을 범한다면 그것은 물론 당신의 남편 보디발에게도 악이 되겠지만 그에 앞서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다.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다. 그러니 난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그가 그러한 유혹 앞에서도 결코 넘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심령 안에 말씀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삶의 모든 순간순간 속에서 말씀이 그를 인도했기 때문이다. 혹시 죄를 저지를 만한 상황이라고해도 그의 심비에 새겨져 있던 말씀이 즉시 그를 인도하여 그가 죄악 속에 빠지지 않도록 제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의로운 삶을 살았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인정받았다. 축복을 받았다.

이제 말씀을 정리한다. 인간에게는 많은 욕구가 있다. 생욕, 식욕, 성욕, 물욕, 명예욕, 승부욕 등등.... 이러한 욕구들은 물론 건전하게 사용하면 인간에게 약이 된다.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욕구들을 잘못 분출시키면 독이 된다. 인간의 삶을 파괴한다. 그러한 인간의 욕망들을 잘못 사용하면 결국 자신과 남과 가정과 교회와 사회를 파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르게 사용해야 한다. 그럼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방법은 한가지다. 말씀을 심비에 새기고 사는 것이다. 말씀을 간직하고 사는 것이다. 가까이하는 것이다. 말씀을 지키는 것이다. 우리가 말씀을 지키면 그 말씀은 우리를 지킨다. 그러므로 말씀안에서 살아가자. 간직하고 살자. 새기고 살자. 가까이하며 살자.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을 아름답고 올바르게 사용하여 복된 삶을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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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 Sunday Night Service

제목 : 참으로 감사한 이유

말씀 : 골1:1~8

 

1.모든 교회에 대한 관심과 사랑과 기도

골로새서는 A.D. 62년경 로마의 감옥에서 바울이 기록한 옥중서신. 주된 내용은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강조하며 세상의 어떤 감언이설이나 이단 사설에 빠지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 갈 것을 강조함.

그런데 사실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세운 교회는 아니었음.(골2:1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어떻게 힘쓰는 것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에베소에서 약 150Km 동쪽에 있는 골로새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3년간 사역할 때 이곳에서 복음을 들은 에바브라가 고향인 골로새에 들어와 교회를 세운 것으로 보고 있음.(골1:7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교회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다. 바울은 자신이 직접 세운 교회는 아니었지만 골로새 교회를 사랑하고 가르치고 평안하고 바로 서게 하기 위하여 기도하며 사랑을 쏟았던 것이다. 우리도 주님의 자녀로서 이런 자세를 가져야 한다.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가 바로 서고 교회가 평안하고 교회가 은혜가운데 든든히 서 가기를 힘쓰고 사랑가운데 하나 되어 복음의 역사를 이루어가 가기를 기도해야 되는 것이다.

2.소명의식(1절)

골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여기에 보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과 디모데라고 말씀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이란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말이다 하나님께 바울을 선택하고 부르셔서 사도로 세우셨다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내가 목사로 세우심을 받았든 장로나 집사나 권사로 세우심을 받았든 아니면 교사나 다른 직책으로 세움을 받았든 더 나아가 성도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으로 성도가 되었고 집사가 되었고 권사 장로 목사가 된 것이다. 내 의지대로, 내 계획대로 되는 게 아니다.

심지어 마10:29절에서는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즉 참새 한 마리가 죽고 사는 것도 하나님 섭리 하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하나님의 허락하심 하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이다. 바울도 하나님이 그를 부를 수도 안 부를 수도, 사도로 세울 수도 안 세울 수도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선택하셔서 믿음을 주시고 게다가 사도로 세우셨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확실한 인준 가운데서 하나님 백으로 사도가 되어 감사와 기쁨으로 이 일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나같이 부족하고 연약하고 허물 많은 인생을 부르시고 선택하셔서 믿음을 주시고 직분을 주시고 직책을 주셔서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하시고 그 영광의 나라를 위하여 쓰임 받게 하신 것에 대하여 다른 어떤 것보다도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며 자부심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여 그 사명을 감당함으로 주께 영광 돌리며 주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며 하나님의 나라를 마음껏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3.축복의 근원과 내용(2절)

골1:2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축복기도의 내용은 이미 여러 번 말씀 드렸다.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임하기를.... 은혜와 평강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돈이나 권력이나 지식이나 명예가 아니다. 진정하고도 영원한 은혜와 평강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또한 우리가 정말로 구할 것은 돈이나 권력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있으면 세상의 다른 것도 저절로 오거니와 설령 오지 않아도 은혜와 기쁨의 삶을 살게 된다.

그러므로 오직 모든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찾자. 하나님을 찾되 세상적인 복이 아니라 진정 하나님 안에 있는 은혜와 평강을 구하자. 그리하여 진정한 평안을 누릴 뿐 아니라 그렇게 전적으로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갈 때에 외적으로 베풀어주는 은혜도 동시에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자.

4.감사의 내용(3-6절)

이렇게 자신을 소개하고 진정한 하나님의 복이 함께 하기를 기도한 다음에 사도는 골로새 교인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1)감사의 기도가 나오는 교회

골1:3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기도할 때마다 감사가 나왔다. 얼마나 멋있나? 얼마나 아름다운가? 누군가 날 위해 기도할 때에 감사의 기도가 나온다면 서로가 얼마나 행복할까? 반대의 경우라면 얼마나 안타까울까? 그러므로 우리는 누군가 나를 볼 때 감사가 나오고 마음이 평안해지고 위로가 되는 삶을 살아가자. 그러면 무엇을 감사했나?

2)믿음, 사랑(4절)

골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정말로 가장 감사한 것은 무엇일까? 믿음을 가졌다는 것이다. 믿음보다 더 감사한 것은 없다. 믿음이 있으면 세상의 모든 것을 얻은 것이요, 믿음이 없으면 세상의 모든 것을 잃은 것이다. 믿음 있음에 감사하라. 믿게 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자녀들에게 무엇보다도 믿음의 유산을 남겨주라.

믿음은 필연적으로 사랑을 동반한다. 믿음이 있으면 사랑도 온다. 믿으면 주님의 구속하심으로 구원을 받을 뿐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은혜와 주님의 자비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성령은 사랑의 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물론 서로가 사랑함이 얼마나 복되고 아름다운 일인지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 안에서 사랑으로 살아감으로 그 은혜를 누리고 생명의 기쁨을 주는 복된 인생이 되자.

3)하늘에 쌓아둔 소망(5절)

골1:5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이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듣고 소망을 하늘에 쌓아 두고 있음에 감사하고 있다. 그들은 복음 진리를 듣고 우리의 소망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있음을 알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복음을 진리를 바르게 들으면 하늘에 소망을 두게 된다. 그렇지 않은가? 복음 진리가 뭔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으면 어떻게 되는가? 구원받는다. 거듭난다. 구원받고 거듭나는 것은 영혼만이 아니다. 생각과 마음과 가치관과 목적과 목표가 거듭난다. 그러면 세상의 것에 연연하지 않게 된다. 천국의 은총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안다. 그러면 세상의 것을 얼마든지 초월할 수 있다.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내 시간과 물질과 능력과 정열을 바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것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라. 하늘에 소망을 쌓으라. 그리하여 세상의 것에 얽매어 힘든 삶을 살지 말고 감사와 기쁨과 소망과 은혜가운데 능력 있게 주님과 동행하라.

4)열매를 맺음(6절)

골1:6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골로새 교회는 복음을 듣고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열매를 맺어 자라기 시작했다. 즉 복음을 듣고 은혜를 받으니 세상의 가치관을 따르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게 되고 그러니 인격적으로 영적으로 성장하여 열매를 맺었던 것이다.

그렇다. 복음을 들으면 은혜를 깨달아야 한다. 은혜를 깨달았으면 어떤 형태로든 열매를 맺어야 한다. 복음을 듣고 은혜를 깨닫지 못하면 소용 없다. 만약 은혜를 깨달았다고 하면서 열매가 없다면 이 또한 소용없다. 즉 복음을 듣고 은혜를 깨닫고 열매를 맺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먼저 들어야 한다. 듣되 나를 버리고 들어야 한다. 나의 모든 선입견과 고정관념과 이성과 지식과 경험을 내려놓고 성령의 조명을 받으며 들어야 한다. 그러면 은혜를 받게 된다. 은혜를 받으면 삶이 다른 양상으로 바뀐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진리의 길을 알고 그러한 삶의 방향으로 가게 된다. 그러면 열매를 맺는다. 우리도 그런 삶을 살아가자.

5.골로새 교회가 아름답게 세워진 이유(7,8절)

골1:7,8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알린 자니라

7절에서 에바브라가 골로새 교회의 설립자임을 알 수 있다. 에바브라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3년간 목회 할 때에 바울에게 배우고 고향인 골로새로 가서 교회를 세우고 교인들을 가르친 것이다. 골로새 교인들은 이 에바브라에게서 복음을 듣고 배워 믿음과 사랑과 하늘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 에바브라는 어떤 사람이었냐하면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라고 하였다. 신실은 충성과 같은 말로 ‘신실한, 믿을만한, 진실한’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두가지 사실을 발견한다. 첫째는 배우고 깨닫고 은혜를 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앞의 6절에서 그들은 말씀을 듣고 깨닫고 열매를 맺었다고 했다. 7절에서는 에바브라에게 배웠다고 했다. 즉 골로새 교회는 진리의 말씀을 열심히 배웠던 것이다. 특별히 영적인 일은 세상적인 이치와 법과 지식과는 전혀 다른 것이므로 우리의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성령의 조명을 받으며 겸손하게 배워야 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의 일꾼은 신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에바브라는 신실한 종이라고 했다. 신실과 충성은 앞에서 말했듯이 원어가 똑같다. 신실한, 믿을만한, 진실한이라는 의미이다. 즉 그리스도의 일꾼의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덕목이 무엇이냐하면 신실하고 믿을만하고 거짓이 없고 진실한 것이라는 말씀이다. 무슨 지식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능력이나 이런 것들이 우선되는 덕목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능력 있고 뛰어나고 많이 알고 힘세고 외모가 좋고 한 것을 강조하지 않고 오직 충성스럽고 진실하고 성실하라고 말씀하신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자.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믿음을 소중히 여기고 감사하자. 주님과 이웃과 가족에 대하여 진실한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자.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하늘에 소망을 두자. 자기 자신을 내려놓고 열심히 말씀을 듣고 배우고 은혜를 받고 열매를 맺어가자. 무엇보다도 신실한 모습으로 각자의 사명을 감당하자. 그래서 열매를 맺고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며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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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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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 Sunday night worship

제목 :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말씀 : 벧전4:1~6

 

제법 오래 전에 인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인도 북부의 ‘무자파르나가르’라는 작은 동네에 엄청난 땅을 소유한 큰 부자가 있었는데 그 중에는 미간척지도 많아서 이웃사람들에게 자신의 땅을 개간해 주면 1/3은 개간한 사람의 땅으로 만들어주겠다고 많은 사람들이 땅을 개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땅을 개간하다가 엄청난 고대유물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 뿐 아니라 인근 마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땅을 개간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물을 발견하여 몰래 빼돌리기도 하고 주인도 부자가 되면 뭔가 자기 몫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안 인도의 문화재 관리국에서 당국자들이 나와서 100년 이상 된 유물은 개인소장이 불가함으로 집으로 가져간 모든 유물을 회수할 것이고 지금부터 유물을 유출하는 자는 엄단할 것이라고 경고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주인과 주민들이 반발하며 유물을 내주지 못하겠다고 버텼고 결국 경찰이 출동하여 경찰과 주민 사이에 큰 충돌이 벌어졌는데 주민들이 과격하게 저항함으로 급기야 경찰이 실탄까지 발사하여 사상자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마을 주민들은 더욱 난폭한 폭도로 변하여 삽과 낫과 곡괭이와 총을 들고 저항하게 되어 결국 많은 경찰이 투입되어 수십 명의 주민이 죽거나 다치고 나서야 폭동이 진압되고 유물은 문화재당국이 몽땅 회수해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아무 소득도 없이 수십 명이 죽거나 다치고 많은 사람들이 구금당하는 것으로 사태가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황금유물이 발견되기 전에는 비록 부자는 아니었지만 평화롭게 지내던 마을이 황금유물이 발견된 후에 사람들이 그만 돈에 눈이 어두워 정부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마을은 쑥대밭이 되고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고 감옥에 갇히고 남은 사람들 많은 사람들이 마을 떠나 유령마을처럼 번해 버렸던 것입니다. 세상에 이렇게 어리석을 데가 어디 있습니까? 그만 황금에 눈이 멀어 마을은 황폐화되고 많은 사람들이 죽고 육체적 정신적 너무나 큰 상처와 아픔만을 남겼으니 말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물론 돈도 중요하긴 하지만 그게 진짜 중요한 게 아닙니다. 진짜 중요한 건 물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과 그 말씀을 따라 거룩하게 진실하게 선하게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영원한 생명은 물론 이 땅에서도 진정한 생명의 기쁨과 평강과 위로와 소망과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베드로전서는 바로 그런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혹시 고난을 받는 한이 있어도 오직 유일한 우리의 소망이신 주님을 바라보며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데요, 이 말씀을 묵상할 때에 주님의 은혜가 충만하게 임하여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오직 주님을 따라 주님과 동행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합니다.

벧전4:1,2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므로 너희도 마음으로 갑옷을 입고 즉 마음을 단단하게 무장하고 고난을 받을망정 죄를 물리치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도 더 이상 죄가운데 살지 않고 우리에게 주어진 남은 시간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하시기 위한 것이므로 마음을 굳게 먹고 세월이 어떠하든 주님을 따라 진리와 선과 의 가운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왜 돌아가셨습니까? 우리 죄 때문에 돌아가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다시 죄가운데 살 수 있습니까? 또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 죄과가 사해진 것을 믿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예수님이 죽으실 때에 우리도 같이 십자가에 죽은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하여 죽으셔서 내 죄가 사해졌으니 예수님이 죽으실 때 내 죄가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종노릇하던 옛자아가 죽고 예수님께 종노릇하는 새 자아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죄의 종노릇을 하겠습니까? 죄에게 종노릇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죄를 향해 호통을 치고 명령하고 물리쳐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정말 믿음과 선과 진리와 사랑과 의 가운데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게 새생명을 가진 자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삶을 살려면 어쩔 수 없이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죄와 적당히 타협하며 어울리며 친구삼아 살아가면 고난이 없습니다. 그저 세상 물결 흐르는 대로 남들이 사는 대로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적당히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에 속한 사람이요, 죄에서 해방된 사람이므로 죄와 타협하고 어울리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싸워야 하기 때문에 도리어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새생명을 가진 자의 당연한 삶이고 그게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이기 때문에 그 길을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절에서 다시는 사람의 정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아가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과거에는 몰라서 그랬다 치고 이제는 진리를 아는 사람들이니까, 죄에 대하여 죽은 자들이니까 더 이상 과거처럼 죄에 질질 끌려 다니지 말고 우리에게 주어진 남은 시간을 주님의 따라 선과 진리와 의가운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래야 생명의 기쁨과 능력과 은혜와 평강과 소망이 넘치는 인생이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 죄와 무지와 왜곡된 가치관이 팽배해져 있는 세상에서 진리를 따라 가는 길이 혹시 어렵고 힘들어도 오직 성령의 능력과 지혜로서 모든 죄된 것들을 물리치고 주님과 동행할 때에 더욱 생명의 능력과 기쁨과 자유가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죄가운데 사는 것은 과거로 충분합니다.

벧전4: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참 이 말이 너무 가슴에 와 닿지 않습니까? 무지 속에서 어둠 속에서 사탄에게 얽매어 사탄의 하수인 노릇하던 것은 지난 것으로 이미 넘치지 않느냐? 지나간 세월을 그렇게 살아간 것만 해도 너무 억울하지 않느냐? 정말 무지해서 어리석어서 캄캄한 가운데서 어리석게도 바보같이도 미련하게도 마귀에게 속아서 그게 인생인줄 알고 그게 행복인줄 알고 그게 인생이 가야할 길 인줄 알고 그것을 바라보며 거기에 빠져서 죽자 사자 그런 것만을 따라서 세월을 허비하고, 돈을 허비하고, 육신을 허비하고, 정열을 허비하고, 능력을 허비하고, 아니 그냥 허비한 것이 아니라 악에게 바치고 마귀에게 바치고 살았으니 얼마나 원통한 일이냐, 얼마나 분한 일이냐, 얼마나 치욕적인 일이냐, 그러니 이렇게 지나간 죄악으로도 너무 분하고 억울하고 원통하고 아까운데 계속해서 그런 삶을 살아갈 수는 없지 않느냐하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술취함과 방탕함과 호색과 향락과 우상을 섬기던 모습을 생각하면 얼마나 한스럽습니까? 할 수만 있다면 우리 인생의 필름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것들 아닙니까? 할 수만 있다면 돌아가서 추한 모습 들 싹 다 지워버리고 새롭게 다시 시작하고 싶지 않습니까? 정말 안 그렇습니까? 마귀에게 철저하게 유린당한 세월입니다. 속고 살아온 세월입니다. 헛된 것을 위해서 살았던 세월입니다. 그냥 헛될 뿐 아니라 악하게 육신의 정욕을 따라 죄를 섬기며 세상의 온갖 우상들을 섬기던 세월이었습니다. 이런 모습들은 지나간 세월로 족하지 않습니까? 지나간 세월만으로도 원통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계속해서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죄와 무지가운데 살던 때는 지나간 시간만으로도 충분히 아깝고 억울하고 분하다는 것을 기억하며 이제는 정말 지나간 때에 죄를 따라 살던 삶의 모습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 진리를 따라 생명의 길로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말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를 기억하며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운데 주님과 동행할 때의 주님의 은총이 가득한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세상 사람들의 조롱을 이겨야 합니다.

벧전4:4~6 이러므로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 그들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에게 사실대로 고하리라 /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그러니까 우리가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는 길로 가지 않고 진리를 따라 주님을 따라 방탕과 음란과 향락 등의 온갖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살지 않고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갈 때에 세상 사람들이 비웃고 조롱하고 심지어 힘있는 자들이 핍박을 하기도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어리석은 자들 때문에 낙심하고 절망하지도 말고 그들의 죄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그저 우리 갈 길을 묵묵히 가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가는데 항상 조롱과 핍박과 그 밖에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아직 공중 권세 잡은 자들이 득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온갖 죄와 무지 속에서 그저 육신의 욕구만을 따라 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어찌하든지 우리를 시험에 빠트리고 구덩이 빠트리고 넘어지고 곤경에 처하게 하여 하나님에게서 떼어 놓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자기들이 가는 길과 다르다고 우리를 미워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오직 예수, 오직 믿음, 오직 천국만을 이야기하니까 자기들의 것을 헛것으로 만들어 버리니까 더더욱 우리를 미워하고 싫어하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은 이게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들과 다르니까요. 우리는 진리이고 그들은 비진리니까요. 그래서 딤후3:12절에서는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마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의 3:14절에서도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있는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왜? 물론 당연히 그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길이기 때문에 그 길로 가는 자만이 영생복락을 누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와 무지와 어둠속에 인생의 길을 알지 못하고 자기 멋대로 방탕하게 살아가며 심지어 의인을 핍박한 사람들은 결국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6절의 죽은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것은 이미 죽어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살아 있을 때에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복음을 전했느냐?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나 영으로 살게 하기 위하여, 즉 육체는 어쩔 수 없이 죽음을 당할 수 밖에 없으나 영으로 하나님을 따라 삶으로 하나님과 동행할 때에 하나님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게 하기 위해서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려면 물론 당연히 고난도 수반될 수 밖에 없으나 그러나 그게 생명의 길이므로 우리는 그 길을 달려가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비웃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심지어 핍박해도 그것 때문에 낙심하거나 절망하거나 같이 대항하여 싸우지도 말고 그저 모든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은혜의 길을 달려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결국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자신의 삶에 대하여 이실직고 할 수 밖에 없고, 그 때에 믿음 안에서 산자는 영생복락이요, 불신 가운데 자기 마음대로 산 자는 영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언제 어느 때 어느 상황에러도 오직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참된 생명의 기쁨과 자유와 위로와 소망 가운데 살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도 큰 상급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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