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예배설교)오직 바른 교훈을 따르라

 

 

 

제목 : 오직 바른 교훈을 따릅시다

말씀 : 딤전6:3-5

1.유일한 완전한 진리인 성경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크게 보면 두가지 차원에서 생각할 수 있다. 우선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 없이는 우주도 나도 그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음을 믿는 것이다.

안 그런가? 어떻게 우주만물이 존재하는가? 자연발생설, 진화론 모두 말도 안 되는 엉터리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연적으로는 그 어떤 것도 생길 수도 없고 완전히 사라질 수도 없다. 어떤 사람은 세상이 저절로 될 수 있다는 것은 20만개나 되는 비행기 부품을 다 흩어 놓았더니 어느 날 저절로 조립이 되어 비행기가 나왔더라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고 하였다. 그런데 사실은 만에 하나 20만개의 부품이 저절로 조립되어 비행기가 된다해도 우주는 그렇게 될 수 없다. 우주의 부품이 20만개만 되겠는가? 20만개가 아니라 2,000만 조도 넘는다. 아니 그야말로 천문학적 숫자이다. 그런데 그게 어떻게 저절로 생겨서 저절로 조립되어 이 신묘막측한 질서가 이루어진다는 말인가?

즉 저절로 생기는 것도 불가능하고 만에 하나 어찌어찌 해서 생긴다해도 그 지극히 단순한 물리적 원리와 생명이 이 엄청나고 신비하고 복잡미묘한 존재로 진화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에 불과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은 오직 한가지 방법 밖에 없다. 성경이 말씀한 그대로 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것만이 정답이고 이것만이 유일한 가능한 방법이다. 그런데 죄와 무지 가운데 있는 인생들이 엉뚱한 소리를 하는데 속된 말로 개풀 뜯어먹는 소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걸 바르게 믿으라. 분명히 알라.

두 번째는 하나님의 속성과 사역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는 당연한 것인데 그러면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냐 하는 것이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자존하시는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 완전한 선이며 진리이며 생명이심을 믿는 것이다. 바로 그런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우주만물을 창조하셨고, 그런 사랑과 선와 의 때문에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구원하신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고, 그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시는 것이다. 이걸 확실히 알고 믿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여기서도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믿음의 근거는 무엇인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성경이다. 성경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성경이 생명의 말씀이요, 진리의 말씀이다. 오직 말씀만이 기준이며, 규범이며, 준거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고 따를 때만이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은혜의 길을 가게 된다.

오늘 본문 3절을 보라.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결코 다른 교훈을 따르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만을 따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교만한 자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가장 무식한 자이며 거기서부터 모든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성경 말씀만이 바른 말이요, 올바른 교훈이라는 걸 기억하고 이것만을 받아들이고 따라 살아야 한다. 안 그런가? 정말 옳은 말씀이 무엇인가? 정말 진리의 말씀이 무엇인가? 정말 무슨 말씀이 옳고 선하고 완전하며 무슨 말씀이 우리에게 정말 생명과 기쁨과 은혜와 평안을 주겠는가?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성경 말씀에 정말로 귀 기울이지 않고 자꾸 자기 생각과 경험과 이성을 따라 살려고 한다. 당장에 뭔가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을 따르려한다. 당장 편하고 물질적 육체적으로 좋아 보이는 것을 따르려고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도 안 오면서 하나님은 믿는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믿는다면서 성경대로 믿지 못한다. 이런 건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 자기가 만들어 놓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교회에 다녀도 성경대로 믿지 않으면 내가 만든 하나님에 불과한 것이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어떤 이들은 교회에 나오긴 나오는데 자기 경험과 지식과 이성을 따라 교회 생활한다. 주일날 교회에 오고 싶으면 오고 바쁘면 밭에 가서 앉아 있다. 십일조도 형편에 따라 자기 기준에 맞추어 하게 되면 하고 못하게 되면 그만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교회를 섬기는 일은 자신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것도 예수님의 교훈을 바르게 따르지 않는 것으로 온전한 신앙의 모습이 아니다. 자기의 생각과 가치관과 기준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말씀대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정말 세상의 그 어떤 다른 교훈도 따르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라. 조금도 가감하지 말고 말씀그대로 믿으라. 이해가 되건 안되건, 내 생각과 같건 다르건 말씀 그대로 믿으라. 오직 주님의 말씀만이 생명의 말씀임을 믿고 순종하라. 그리하면 반드시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리라.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 물론 여기서고 진정 은혜와 사랑과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넘치는 삶이 되리라.

2.성경을 믿지 않으면 가장 교만한 것

딤전6:4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그렇다. 성경을 거부하면 가장 교만하고 어리석고 무지한 인생이다. 당연하지 않나? 인생이 아는 게 얼마나 있다고 그걸 거부하겠나? 태초부터 있었는가? 모든 것을 알 수 있는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가? 도대체 우리가 알 수 있고, 할 수 있고,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게 얼마나 있는가? 그런데 마치 자기가 다 아는 것처럼 이러쿵저러쿵 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얼마나 교만한 일인가?

가장 유식한 것은 성경을 바로 알고 믿고 따르는 것이다. 당연하지 않나? 진정한 지식이 뭔가? 생명을 살리고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지식이 생명을 살리고 풍요롭게 하나? 진정 인생이 가야할 길과 목적과 방향과 의미와 가치를 누가 알려주나? 오직 성경 밖에 더 있나?

그런데 요즘에 정말 엉뚱한 소리 하는 사람들 많다. 성경이 아니라고 하는데 자기가 그렇다고 하고, 성경이 그렇다고 하는데 자기가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그건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는 자살행위에 불과하다.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계22:18,19절을 보라.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아니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이 말씀이 우습나?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히 엎드리라. 다른 무엇보다 말씀을 바르게 알고 믿고 따르라. 그리하여 진정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잘 달려가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라.

3.성경을 따르지 않으면 문제 발생

딤전6:4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그렇다. 성경을 그대로 믿지 않고 따르지 않으면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 당연하다. 성경이 오직 유일한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인데 그걸 믿지 않으면 결국 생명과 진리를 버리는 것인데 문제가 안 발생하는 게 도리어 이상하지 않은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따르지 않으면 결국 거짓 것을 따라가는 것인데, 참 진리의 길, 생명의 길도 모르고 죄와 무지와 어둠 속에서 캄캄한 길을 더듬고 다니는 것인데 어찌 문제가 생기지 않겠나?

변론과 언쟁과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왜 날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무지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겸손히 하나님 앞에 엎드려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알게 된다. 주님이 주시는 사랑과 은혜와 기쁨과 평안이 우리 가운데 임하게 된다. 그러면 당연히 시기와 분쟁과 싸움과 비방과 악한 생각들이 물러가는 것이다. 도리어 사랑과 기쁨과 은혜와 위로와 소망이 넘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싸우고 헐뜯고 악을 행하겠는가?

또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은혜로 구원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그러면 어떻게 되나?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형제자매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나? 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서로 사랑하며 도우며 위로하며 살게 된다. 그러니 어찌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교만한 가운데서 서로 싸우고 헐뜯고 비방하고 불화하겠는가? 심지어는 원수조차 사랑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진정 하나님을 알고 그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이러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찌 하든지 성경으로 돌아가라.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라. 하나님 말씀을 마음 판에 새겨 넣으라.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영혼이 소생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능력과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면서 남에게도 생명의 은총을 주는 복된 인생이 되자.

4.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삼지 말라.

딤전6: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이것은 성경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또 다른 폐단이다. 성경을 바르게 알지 못하며 마음이 부패해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조차도 이익의 방도로 삼는다. 이익의 방도로 삼는다는 것은 경건을 물질적, 육체적 유익의 도구로 이용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목회자일 경우에는 삯군 목사요, 성도일 경우에는 하나님을 세상 행복의 도구로 부려먹으려는 거짓 성도가 되는 것이다.

물론 참 목자와 참 신자라도 경건을 올바른 이익의 방도로 삼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올바른 이익이란 정신적으로는 경건생활을 통하여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서 예수님을 닮아가며 참 사랑과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누리는 것을 말한다. 또한 물질적, 육체적으로는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강건함과 풍성함을 누리는 것이다. 이것도 사실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성실하게 열심히 진실하게 살아가면 하나님과 사랑에게 귀히 여김 받게 된다. 그러면 육체적으로나 물질적으로도 풍성함을 누리는 것도 사실인 것이다.

그래서 잠3:3,4절에서는 말씀한다. “인자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또 잠3:9,10절에서도 말씀한다.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그러므로 이런 은혜도 누려야 한다.

그러나 경건을 잘못된 이익의 방도로 사용하면 안 된다. 돈 많이 벌고 건강하게 출세하고 자식이 잘되는 등 그저 세상의 복을 위하여 경건생활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건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왜곡된 모습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도 이런 모습들이 있다. 삯군 목자도 있고, 그저 세상적인 복이나 바라며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도 있다. 우리는 이걸 잘 분별해야 한다. 사탄마귀가 그럴듯하게 미혹해서 우리를 자꾸 그쪽 방향으로 몰고 가려고 한다.

물론 돈이나 건강이 평안함과 기쁨도 구해야 한다. 그러나 그 자체만을 구하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서 그런 것을 추구한다든지 하는 것은 결국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삼는 행위로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든 오직 진리의 말씀, 은혜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따르자.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만이 영원토록 바른 말씀, 생명의 말씀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그 말씀을 기준으로 신앙생활하자. 경건을 세상적 유익의 수단으로 삼지 말고 오직 주님 안에 있는 참된 생명과 은혜를 구함으로 진정 참되고 영원한 생명의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면서 그 은혜를 세상에 끼치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자.

/조학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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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찬양예배설교  예수님의 전도방법

 

 

 

말씀 : 예수님의 전도방법

제목 : 요4:1-5

어느 날 목사님이 강단에서 성도들에게 전도에 대하여 힘주어 말했다. “여러분, 전도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우리의 사명입니다. 죽은 영혼을 살리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입니다.”

그러자 한 집사님이 말했다. “목사님, 우리는 지혜도 부족하고, 말씀도 잘 모르고, 성령의 능력도 부족해서 전도를 잘 못합니다. 그런 일은 아무래도 목사님이 전문가시니까 목사님이 하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목사님이 대답했다. “양이 새끼를 낳지 목자가 새끼를 낳는 것 보았습니까? 목자는 양을 푸른 초장으로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고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보호해 주면 양들이 안전하게 꼴을 먹으며 성장하게 되고 그러면 자기들끼리 새끼를 낳아 양무리가 많아지는 것 아닙니까?”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목사는 전도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은 아니다. 예수님도 전도를 하셨는데 감히 누가 전도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다만 전도는 목사만 하는 일이 아니라 성도라면 누구나 해야 할 가장 막중한 사명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주님이 오신 목적이고, 십자가를 지신 목적이다. 그것이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고,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전도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왕도는 없다. 전도에 대한 분명한 사명감 가운데 열심히 실천하는 것이다. 물론 기도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기도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일은 가만히 앉아서 하는 일은 아니다. 기도하며 가르침을 받으며 훈련하며 하나씩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앞에서 전도의 기본적인 사항들을 보았다. 오늘부터는 전도의 실제적인 측면으로 여러 가지 전도의 방법들을 살펴보려고 하는데 가장 먼저 예수님의 전도에 대한 태도와 방법을 배워보자.

1.전인적인 방법을 동원하셨다.

예수님의 전도사역을 압축해서 말씀하고 있는 부분이 두군데 있는데 그것은 마4:23절과 9:35절이다. 마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마9: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즉 예수님은 가르치심과 전도와 병고침을 통하여 전도사역에 힘쓰셨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이 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은 기도나 하시면서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시는 그 순간까지 계속해서 복음전파와 가르침과 병고침을 통해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힘쓰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렇게 직접 복음을 전하시는데 전인적인 방법을 동원하셨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한편으로는 직접 말씀을 전하시고 가르치시고 나아가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셨다는 것이다.

그냥 기도만 한 것이 아니라 직접 행동으로 하셨고, 말로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면서 하셨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기도하고 말씀 묵상하였으면 실천해야 한다. 실천하되 한편으로는 직접 복음을 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결국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런 일에 적극적인 참여자가 되자.

2.사람들과의 충돌을 가급적 피하셨다.(1-3)

오늘 본문 요4장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의 수가성이라는 곳에서 어떻게 한 여인을 주님품으로 인도했는가를 보여주는 내용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먼저 생각해 볼 것은 예수님은 사람들과의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셨다는 것이다.

오늘 1-3절에 보라.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와 예수님의 제자들에 의하여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세례요한의 제자들보다 많아졌다는 사실이 바리새인들이 알게 된 것을 계기로 하여 예수께서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출발하셨다는 말씀이다. 왜 그러셨을까? 한마디로 지금은 다른 할 일이 많으셨기 때문에 유대인들과 변론하거나 충돌하여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 배경을 보면 이렇다. 당시 세례요한은 갈릴리지역을 통치하던 헤롯이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빼앗아 아내를 삼은 것에 대하여 부당함을 말하다가 헤롯에 의하여 체포되어 구금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사실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는 너무나 기쁜 소식이었다. 왜냐하면 세례요한은 유대인들과 유대종교지도자들을 비난하면서 서슴없이 독설을 퍼붓곤 했기 때문이다. “마3: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니까 눈에 가시같은 존재가 자기들의 노력 없이도 다른 사람에 의하여 제거되었으니 얼마나 통쾌한 일이었겠는가?

그런데 이렇게 세례요한이 제거되어 좋아하고 있을 때 이번에는 또 다른 정적이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님이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들에게는 예수님은 그저 하나의 정적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것도 세례요한보다 더 강력한 적이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고소할 증거만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칫하면 그들에게 어떤 빌미를 제공할 여지가 있다고 판단하신 예수님은 아직은 이들과 불필요한 마찰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으셨기에 갈릴리로 가시기로 한 것이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아직 할 일이 많으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는 가급적 세상의 일반 대중이나 지도자나 통치자들과 가능한 마찰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찰이나 갈등이나 대립관계는 복음의 역사를 방해하고, 시간과 열정을 낭비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그저 좋은 게 좋다고 그들과 어울려서 적당히 살라는 것은 아니다. 분명 아닌 것은 아니고, 옳지 않은 것은 옳지 않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 속에서 살아갈 때에 우리는 정말 지혜가 필요하다. 자칫 그들과 갈등이나 대립 관계가 되면 복음의 역사에도 지장을 받게 되고, 공연히 에너지를 낭비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할까? 한마디로 말하면 분명히 선을 그을 부분은 긋되 협력해야 할 부분은 적극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건전하고 유익한 일에는 우리가 더욱 앞장서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적인 일이라도 선한 일, 의로운 일, 유익하게 하는 일들에 대하여서는 우리가 그들보다 먼저 적극적으로 나서서 행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결국 우리를 인정하게 되고, 나아가 존경심마져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복음의 역사도 보다 효과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5:16절에서 말씀하셨지 않는가?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세상에서 어떤 영역에서든지 빛된 모습을 가지자. 세상과 갈등하고 대립하고 기피하고 정죄받지 말고 정말 옳은 일, 선한 일, 의로운 일, 정직하고 거룩한 일등을 통하여 세상에서 인정받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되자.

3.사람들이 기피하는 장소를 찾아가셨다.(4,5)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이유로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출발하게 되었는데 유대인들이 기피하여 들어가지 않는 사마리아땅으로 들어 가셨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를 기피하는 이유는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마리아는 옛날 남북분열왕국시대에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가 있었던 곳이다.

그런데 북왕국이 B.C.722년 앗수르에 의해 먼저 멸망하면서 앗수르 사람들은 사마리아의 유력한 자들을 포로로 잡아가고 그 대신에 자기네 나라 사람들과 그들의 정복지에서 다른 많은 이방인들을 사마리아로 보내어 함께 생활하도록 하였다. 그러다보니까 자연히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함께 혼인을 하게 되었고 결국 이방인을 죄인으로 취급하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경멸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때로부터 남왕국 유다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을 아주 추하게 여기며 멸시하며 상종하는 것을 꺼려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은 북쪽에 있는 갈릴리를 가려면 같은 나라이면서도 사마리아 땅에 들어가는 것을 기피하여 서쪽의 해변길로 돌아가든지 아니면 동쪽의 베뢰아 길로 돌아가든지 하여 그 땅에 들어가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실에 전혀 개의치 않으시고 사마리아 땅으로 들어가셨던 것이다. 사마리아 땅으로 들어가시되 그냥 가깝기 때문에 가신 것이 아니다. 사마리아로 가야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가신 것이다. 그곳에서 주님께서 하실 일이 있었기 때문에 굳이 사마리아로 들어가신 것이다. 그것은 오늘4절 말씀에 기록되어 있다. “사마리아를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하는 말씀이다.

여기서 통행하여야 하겠다는 것은 다른 방법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가겠다는 말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KJV에서는 “He must needs go through Samaria.”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니까 반드시 사마리아로 통과해야할 필요를 느끼셨고, 그래서 그 땅으로 일부러 들어가셨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하여야 할 것은 사마리아에 대한 주님의 관심이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경멸하고 더럽게 여기는 땅이었지만 주님에게만은 그렇지가 않았던 것이다. 유대나 사마리아나 갈릴리나 주님에게는 모두가 죽어가는 영혼들이 살고 있는 안타까운 땅이었다. 그래서 그곳에도 유대와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해야 할 필요를 느끼셨던 것이다. 아니 단순히 필요를 느낀 정도가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할 대상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오늘 이 사실에 먼저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인간적으로 멸시당하고 다른 사람들에게서 그다지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자들에 대하여 편견을 가지지 말고 그들에게도 최선을 다하여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우리가 된다안된다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 아무리 완고하고 추한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영혼이나 우리 영혼이나 똑같이 주님이 사랑하시는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 생명이나 우리 생명이나 천하보다 귀한 것은 똑 같은 것이다.

그래서 딤전2:4에서는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하여 세가지 사실을 명심하자.

첫째는 예수님은 직접 행동으로 복음을 전하시되 전인적인 방법을 동원하셨다는 것이다. 기도만 하지 않고 발로 뛰셨으며 복음을 전함과 동시에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직접 전하고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

두 번째는 세상과 가급적 갈등관계를 피하고 협력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거룩히 성별된 삶을 삶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정말 건전하고 유익한 일들을 위하여서는 발벗고 나서서 세상의 좋은 협력자가 되어서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멸시당하고 소외당하고 추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다. 그 영혼과 우리의 영혼이 똑같은 주님의 사랑의 대상이요, 천하보다도 귀한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그 영혼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쏟으며 복음의 역사를 위해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한편으로 기도하고 진리의 말씀을 전하며 다른 한편으로 선한 일로 사랑의 빛을 비출 때 교회가 세상에서도 인정받고 존경받으며 복음의 역사도 더욱 힘있게 이루어 가는 것이다.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될 수 있도록 같이 기도하며 힘쓸 때 정말 주님의 복음의 역사가 아름답게 이루어지고 우리들도 잘했다 칭찬듣고 주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조학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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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예배설교]인생의 완전한 보험

 

 


제목 : 인생의 완전한 보험

 

말씀 : 잠3:5~8

 

1.하나님만이 완전하고 영원한 보호자이시다.

사람이란 어차피 무엇인가를 의지하여 살 수 밖에 없다. 돈이나 권력이나 건강이나 능력이나 지식이나 사람이나 여하튼 무엇인가를 의지하여 산다. 이런 것들과 관계없이 홀로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신의 생명을 풍요롭게 하는 것들을 찾아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어떤 사람은 돈을 의지해서 산다. 돈만 있으면 아무 걱정없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건강하나 믿고 산다. 몸만 건강하면 문제없다고 여긴다. 어떤 사람은 권력을 믿고 산다. 그래서 권력을 추구하며 권력자를 가까이하며 그것을 든든한 백으로 여기고 산다. 어떤 사람은 지식을 의지해서 산다. 지식이 많으면 인생이 풍요로워 질 것이라고 여기며 죽자사자 지식을 추구한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그런 것들이 우리를 얼마나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을까? 얼마나 확실한 보험이 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하다. 그런 것들은 결코 완전한 보험이 될 수 없다. 우리를 끝까지 책임질 수 없다. 길어봐야 100년이다. 그나마 그 100년 동안도 우리를 완전하게 지켜주지 못한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을 의지하는 것이 가장 안전할까? 물어 보나마나 하나님이시다. 완전한 능력과 지혜와 사랑과 생명이신 하나님만이 우리를 완전하게 지켜줄 수 있다. 완전하고 영원한 보험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오늘 5절에서는 말씀한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인간의 명철 즉 인간의 지혜, 지식, 능력, 과학, 돈 그 어떤 것이든 인간에게 속한 것은 온전치 못하다는 것이다. 그런 온전치 못한 것을 의지하고 살면 그 온전치 못한 것과 함께 망한다는 것이다. 완전한 능력과 지혜와 구원이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 때 영원한 안전을 보장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것을 바라보며 그것을 의지하며 사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말라. 진정한 생명과 길과 진리와 능력과 은혜와 구원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 인도하심을 따라 살라. 그리하여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자.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할 것인가?

2.마음을 다하여 의지해야 한다.

앞서 말씀드린 5절을 다시보자.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데 어떻게 의지하느냐하면 마음을 다해서 의지하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마음은 「마음, 정신, 이해력, 의지, 중심」등의 의미이다. 또한 다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총동원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마음과 정신과 의지와 지식과 이성과 육체의 모든 것을 총동원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말씀이다.

그렇다. 사실 우리가 무엇인가에 맡기고 의지한다는 것은 우리의 전 인격을 드리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부부간에 서로 믿고 의지한다면 모든 영역을 믿고 신뢰해야 한다. 만약 돈을 맡기지 않는다든지, 몸을 맡기지 않는다든지, 시간을 맡기지 않는다면 온전한 믿음의 관계가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도 동일하다.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영혼도 감정도 육신도 물질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이것이 마음을 다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그렇지를 못하다.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 감정과 지식과 이성을 하나님께 맡기지 못할 때가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의 지식과 이성과 감정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이다. 또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물질적인 것은 맡기지 못하여 하나님께 올바르게 드리지 못할 때가 있다. 또 시간적으로도 온전히 맡기지 못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야 할 시간을 드리지 못할 때가 있다.

사실 이런 모습들은 어불성설이다. 전인격을 다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이성과 지식과 상황과 조건과 세상풍조와 물질과 권세와 명예를 더 신뢰하며 그것을 따라 살겠는가? 정말로 믿는다면 그런 것들에 의하여 영향을 받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따라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신뢰이고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전적으로 책임져 주시고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맛보며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인생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을 믿고 따라감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풍성하게 누리는 삶을 살아가자.

3.오직 하나님 편을 택해야 한다.

또 이 말씀 5절에서는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서는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의뢰하며 살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너무나 지당한 말씀이 아닌가? 우리는 결국 더 지혜롭고 더 유익이 되고 더 기쁨이 된다고 여기는 것을 따라가게 되어 있다. 그런데 만약 내 명철을 의지한다면 내 명철이 하나님보다 더 현명하고 지혜롭고 생명의 기쁨을 줄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아닌가? 그래가지고서야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하게 따르겠는가?

마6:24절을 보라.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만약 내 명철을 의지하여 산다면 내가 주인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섬기노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내 명철을 따라산다면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을 경히 여기는 행위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둘 중에 하나를 의지해야 한다. 자기 자신이냐 하나님이냐, 돈이냐 하나님이냐, 권력이냐 하나님이냐, 과학이냐 하나님이냐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이다. 너무 극단적인 흑백 논리가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셨다. 실제로도 만약 세상의 것을 더 섬긴다면 그건 분명히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자기 자신보다 하나님 편을 택해야 한다. 이유는 당연하다.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인간은 무능하며, 하나님은 전지하시지만 인간은 한계가 있고, 하나님은 영화로우시지만 인간은 비천하며, 하나님은 지혜로우시지만 인간은 미련하고, 하나님은 거룩하시지만 인간은 죄로 오염되어 있으며, 하나님은 완전한 사랑이시지만 인간은 그렇지 못하며, 하나님은 영원하시지만 세상의 것은 영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자기 지식과 자기 경험과 자기 능력과 자기 의지를 포기하고 온전히 하나님께 매달리자. 그렇게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주님과 동행할 때 주님의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삶이 되자.

4.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해야 한다.

본문 6절에 보면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했다. 범사라는 말이 우리말 성경에는 한단어로 되어 있지만 원문성경에는 범과 사가 각각 다른 단어로 되어있다. ‘범’은 ‘모두, 전체, 완전함’을 의미하며, ‘사’는 ‘길, 도로, 여행, 태도, 습관, 인생행로, 행위, 일, 일의 방식’ 등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범사란 영적, 물질적, 정신적, 육체적 모든 영역에서 인간의 삶 전체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을 말하는 것이다. 또 인정한다는 것은 ‘알다, 이해하다’라는 뜻으로 경험해서 이해하여 완전히 수긍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그냥 그런가보다 하는 정도가 아니라 내가 완전히 경험을 해서 아, 정말 그렇구나. 확실하구나 하고 온전히 수긍하고 그래서 그것을 따라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하나님을 경험해서 안다면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모든 것이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월등하신 하나님, 세상의 돈이나 명예와나 권력과도 비교 할 수 없는 완전한 능력이신 하나님, 모든 영역에서 완전하시고 은혜로우시고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 나의 생명과 영원을 책임져 주실 하나님, 이 하나님을 안다면 어찌 그 하나님을 따르지 않겠나?

그러므로 정말 하나님을 경험하여 알라. 그 앞에 진실로 엎드리라.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그래서 그 완전하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생명의 하나님, 진리이신 하나님, 영원한 승리이신 하나님을 바르게 만나 경험하여 알라. 그래서 모든 영역에서 온전히 하나님을 인정하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라. 그 안에 생명과 진리가 있음을 인정하라. 그 방법이 옳음을 인정하라. 그리하여 세상이 어떻게 변해도, 가치기준이 어떻게 달라져도, 상황이 어떻게 변해도, 심지어는 교회가 어떻게 변해간다해도 오직 하나님만을 유일한 잣대로 삼고 주님과 동행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생명을 온전히 충만하게 누리며 살아가자.

5.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받는 복

오늘 본문 6절 하반절에 보면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하셨다. 인간의 부족함을 깨닫고, 하나님을 바로 알아,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며, 범사에 그를 인정하면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우리의 길을 인도해 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그 능력과 지혜와 사랑과 은혜로 우리의 길을 이끌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생명의 길로 나아가게 하고 그래서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8절에서는 말씀한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를 윤택하게 하리라.” 자신을 지혜롭게 여기지 않고 오직 하나님 편을 택하여 주님과 동행할 때에 골수가 윤택해지는 즉 몸과 마음과 영혼이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즉 생명력이 넘쳐흐르는 복된 인생이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당연하지 않는가? 하나님 앞에 생명이 있는데, 하나님이 길이요 진리인데, 하나님의 모든 생명과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의 근원이신데 그를 따르는 자에게 어찌 이런 은총이 없겠는가?

그렇다. 오직 하나님만이 전능하시며 전지하시며 생명과 사랑과 능력의 은혜가 충만하신 분이시다. 그러기에 그분만이 우리의 완전한 목자요, 선한 목자이시다. 우리의 명철이나 경험이나 지식이나 물질이나 과학이나 이런 것들은 다 불완전한 것들이다. 다 연약하고 부족하고 한계가 있고 곧 사라질 것들이다.

그러므로 주님을 의지하라. 전인격을 동원하여 의지하라. 부분적으로 하지 말고, 취사선택해서 하지 말고, 어느 한 영역만을 맡기지 말고 전영역을 다 맡겨라.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우리의 삶의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인정하라. 그리고 그를 따르라. 그리하여 선한 목자 되시는 주님의 지도하심가운데 인생의 발걸음을 옮겨 놓을 때에 하나님 안에서 풍성한 생명과 기쁨과 평안과 은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자.

[출처] 인생의 완전한 보험(잠3:5-8)|작성자 학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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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저녁설교] Sunday evening Service

제목 : 선을 행하다 낙심치 맙시다.

말씀 : 살후3:13-18

1.끝까지 선을 행합시다.

옛날에 수리시설이 잘 안되어 있어서 농사짓기가 힘들었던 시절에는 가뭄이 들면 논에 물을 대는 문제로 곧잘 싸움이 벌어지곤 하였다. 바로 그런 시절의 이야기인데 한 농촌교회의 한 집사님이 밤 늦게까지 수고해서 논에 물을 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아침에 일찍 일어나 논을 나가보니 자기 논에는 물이 하나도 없고 바로 아랫 논에만 물이 있었다. 아랫논 임자가 자기 논의 물을 훔쳐간 것이다. 집사님은 당장 달려가서 멱살을 잡고 싸우고 싶었지만 예수님 믿는 사람이기에 한번 꾹 참고 다시 밤늦게 까지 논에 물을 대고 돌아왔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 논을 살펴보니 또 아랫논 임자가 논둑을 터서 물을 훔쳐갔다. 그래서 집사님은 화가 치밀어 당장 달려가서 때려죽이고 싶었지만 그래도 꾹 참고 목사님을 찾아가서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목사님이 말했다. “집사님, 예수님께서는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잘잘못을 따지지 말고 이번에는 그 사람의 논에 먼저 물을 대어주고 그 다음에 집사님의 물에 대면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집사님은 한번 더 참기로 하고 먼저 그 원수 같은 사람의 논에 몰을 대준 다음에 자기 논에 물을 대어놓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랬더니 다음 날 아침 일찍이 그 고약한 사람이 이 집사님을 찾아와서는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나는 당신이 달려와서 내 멱살이라도 잡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내 논에 물을 대주다니 예수님 믿으면 그렇게 됩니까? 그러면 나도 예수님 믿겠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 집사님의 선행으로 귀한 영혼을 구원하고 이후로 좋은 친구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가게 되었다.

그렇다. 선을 행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때론 당장 열매가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 아니 열매는커녕 도리어 손해를 보기도 하고, 억울한 일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알고 계시고 동시에 언젠가 어떤 형태로든 열매를 맺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만이 진정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는 길이라는 것이다. 물론 설령 열매를 맺지 못해도, 인정을 받지 못해도 해야 한다. 그게 선이니까.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계시고 알고 계시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상황에서도 낙심치 말고 선을 택하여 선의 길로 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갈6:9절에서는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하셨고, 오늘 13절에서도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고 하셨다.

오늘 데살로니가 교회에 이 말씀을 주신 특별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데살로니가 교회는 핍박과 환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켰으나 여전히 어려움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살전1:6절을 보라.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많은 환난 속에서도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았다. 사도 바울과 주님을 본받는 교회가 되었다. 그러나 힘든 현실들이 계속되다 보니 점점 낙심도 되고, 심지어 회의가 생길 수도 있다. 그렇지 않은가? 아무 어려움 없이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도 어려운데 게다가 교회를 핍박하고 대적하는 자들이 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그러니 낙심하는 자도 생기고 회의를 갖는 자도 생기지 않겠는가?

그래서 바울사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을 행하라. 믿음을 따르라. 힘들고 어려워도 낙심하지 말라. 그것만이 살길이고 그럴 때 분명 열매가 있을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선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진리다. 그러나 문제는 선을 따라 사는 삶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어렵고 힘들고 당장에 눈에 보이는 성과도 없어 낙심하기 쉽고 포기하기 쉽다. 그건 나나 세상이 온전치 못하기 때문이다. 죄와 무지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사실을 인정하고 어렵고 힘들고 당장에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어도 참고 기다리며 선을 따라야 한다. 그러면 분명히 그 열매를 누리게 된다.

아브라함은 아들의 약속을 받고 25년 만에 얻었다. 다윗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도 사울에게 쫓겨 다니기를 10년 이상 도망 다니다가 결국 왕으로 등극했다. 요셉은 형들에 의하여 애굽에 팔려가서 10년 이상을 노예와 같은 삶을 살며 온갖 억울한 일을 당했으나 참고 선을 따랐을 때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 사도 바울은 오직 주님을 위해 헌신했음에도 너무나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끝까지 복음을 위해서 수고하며 선을 따랐다. 그럴 때 결국 전세계에 복음의 역사를 이루는 위대한 사도가 되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 오직 주님의 말씀을 믿고 주님의 말씀따라 살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라. 잘 몰라도 그저 기다리라.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

2.순종치 않는 자들에 대한 태도(14,15절)

그러나 이런 위대한 신앙의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반면에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많았다. 데살로니가 교회도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 가운데 든든히 서 있어서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진 교회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다 그런 것은 아니다. 그 중에서도 교회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대하여 교훈을 주고 있다.

살후3:14,15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지 말고 형제같이 권하라.”

여기에 보면 순종치 않는 자들에 대한 세가지 태도가 있다. ①지목하라. ②사귀지 말라. ③부끄럽게 하라.

지목하라는 것은 대상자를 밝히라는 것이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밝히지 말아야 할 때도 있겠지만 대상자를 공개적으로 밝힘으로 그런 잘못된 사람이나 태도에 대한 분명한 경계심을 가지고 그런 자들의 미혹에 넘어가지 말라는 뜻이다. 사귀지 말라는 것도 결국 같은 의미이다. 그들과 절교하고 내치고 함께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그냥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함께 교제함으로 그들의 잘못된 태도에 물들지 말라는 뜻이다. 부끄럽게 하라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죄가 얼마나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럽고 창피하고 어리석은 일인지를 알게 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고 사람과의 관계가 깨져 생명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모든 과정에서 사랑을 전제로 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을 미워하고 정죄하고 내치기 위하여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과의 온전한 관계 속에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하기 위하여 마음이 아프지만 이런 조치를 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게 그 개인을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는 길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 악을 그냥 묵인하고 감싸주고 내버려 두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분명히 악을 악이라 말하고 뉘우치고 회개하고 돌이키게 만들어야 한다. 죄를 지으면서도 당당하게 수치도 모르고 살게 하면 안 된다. 그러면 자신도 망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복음의 문을 막는다. 교회 공동체에 죄를 누룩처럼 퍼지게 하여 교회 공동체마져도 어려움을 겪게 만든다.

우리는 그냥 무조건 감싸주고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감싸주는 것은 실수하고 부족하고 연약하고 지혜와 능력이 모자라는 것 등을 덮어주는 것이다. 고의적 악의적 의도적으로 행하는 악한 죄나 습관을 덮어주는 것은 감싸는 것이 아니라 악에 빠져 죽게 만드는 것이다. 용서도 그렇다. 죄와 악을 행하고도 아무런 반성이나 회개나 돌이킴이 없는데 무조건 없는 것처럼 여기라는 의미는 아니다. 누구나 죄와 허물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러나 그 죄와 허물에 대하여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고 그것을 벗어던지고 선을 따라 살아가기를 힘쓰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그럴 때는 당연히 백번 천번이라도 용서해야 하지만 그런 과정도 없이 그냥 무조건 죄를 없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 용서는 아닌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도 우리를 징계하실 때는 징계하신다. 우리에게도 분명히 책망할 것을 책망하라고 하신다. 아이를 훈계할 때도 때로는 매도 들라고 하신다. 교회에서도 분명히 징계할 것을 징계하라고 하신다. 그러면서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 하신다. 왜냐하면 이것이 생명을 살리고 풍요롭게 하는 진정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계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잠23:13,14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 마18: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그러므로 가족이든 교회 안에의 형제자매이든 진정어린 사랑을 가지고 대하되 그러나 윤리적 도덕적인 죄나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바로잡아 진정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함으로 진정으로 그들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자.

3.하나님의 평강과 은혜를 기원함(16-18절)

살후3:16, 18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는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실지어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데살로니가 후서의 마지막 부분으로 교인들을 축복하고 있는 부분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축복의 내용인데 그것은 평강과 하나님의 은혜이다. 평강의 주께서 때마다 일마다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무리에게 있을지어다.

우리는 무슨 축복을 받기를 원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축복해 줄 때 가장 기쁜가? 물론 돈, 건강, 물질도 중요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평강과 은혜이다. 즉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 기쁨, 위로, 소망, 믿음, 사랑, 보호, 인도 등의 인생에게 진정하고도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주는 것들이다. 먼저 이것을 누려야 한다. 설령 세상의 것은 조금 못 누려도 이것만은 누려야 한다. 세상의 것을 아무리 많이 받아도 은혜를 받지 못하면 가장 불쌍한 인생이다. 세상의 것을 아무리 적게 받았어도 은혜를 충만히 받은 사람은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가장 행복하게 산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그 어디나 하늘나라가 된다. 그러나 세상의 것을 다 가졌어도 은혜를 받지 못하면 생명의 은총을 누리지 못한다. 진짜 자유 평화 기쁨 은혜 소망 누리지 못한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받자. 그래서 모든 여건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자.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자. 사랑으로 책망할 것은 책망하며 거룩한 삶을 살도록 기도해주고 이끌어가자. 그리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풍성함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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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찬양예배설교

 

제목 : 예수님의 사역

말씀 : 마4:23~25

 

오늘 말씀. 예수님의 사역. 물론 예수님의 궁극적인 사역은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인류에게 죄사함의 은총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 그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며 예수님의 가장 근본적 사역.

그러나 그렇게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죄사함과 부활과 천국을 알리고 깨닫게 하고 그래서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과 천국을 믿고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 3년간의 공생애를 통하여 이러한 사실을 끊임없이 전하시고 가르치심.

오늘 말씀에서는 예수님의 핵심 사역 세가지. 복음을 전하심. 가르치심. 병을 고치심. 즉 하나님과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알리심. 선포하심. 그리고 하나님을 알고 믿은 다음에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가르치심. 그 다음에 천국의 은총을 누리는 삶을 살기 위하여 세상에서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심.

이것이 교회의 사역. 이것이 인간의 삶의 우선순위. 인간의 삶을 가장 풍요롭게, 생명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게 하는 일.

오늘날 이런 의미가 많이 퇴색, 예수님의 오심, 성탄절의 의미가 상당히 왜곡. 인간적인 사랑,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 하나됨, 서로 인정함. 물론 이런 의미도 있고 또 상당히 중요한 일이기도. 그러나 그것이 정말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아님. 예수님의 궁극적 관심은 생명. 하나님의 나라,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이나 사역에서 잘 나타남.

1.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천국 복음은 전하심

요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 요4:13,1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분명.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물론 섬기시고 사랑의 계명을 주신 것도 사실. 그러나 단순히 인간적인 섬김이 아니라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결국 십자가까지. 사랑도 단순한 인간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동기는 생명. 인간에게 참된 생명을 주고 그 생명을 풍요롭게 하려는 것.

그래서 마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회개 천국 모두 영원한 생명에 관한 것. 그리고 사실 이 생명을 얻지 못하면 세상 모든 것을 다 얻어도 소용없어. 그래서 또 말씀. 막8: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그래서 천국 복음을 전하심. 마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러므로 성탄의 의미를 바르게 알자. 바르게 믿자. 바르게 영접하자. 그리하여 진정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고 생명의 소식을 전하자.

2.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기 위해 가르치심

마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천국복음을 전하신 다음에는 가르치심.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정말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께 대하여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물질과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나? 무엇이 우리 삶의 우선순위인가? 등 하나님의 형상, 천국시민으로서 어떤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하여 가르쳐 주심.

우선은 믿어야.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고 천국을 믿고 영생복락을 믿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믿고 심판을 믿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믿어야.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 현실적으로 우리 눈앞에 전개될 현실적인 세상. 단순히 우리가 바라는 이상향이나 마음속의 소원이 아니라 실제적인 생활 공간.

그리고 나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이 중요한 일인가? 무엇이 정말 행복하게 하는가? 무엇인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하는가를 가르치심.

그러므로 열심히 듣고 배워야. 그리고 그 말씀따라 살아야. 세상의 돈과 명예와 권세와 육체적인 건강이 우선시되는 삶에서 주님이 우선되는 삶으로 방향전환해야. 돈이나 명예보다 믿음과 진실과 성실과 거룩과 의가 우선시 되는 삶을 살아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 위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고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며 생명과 기쁨을 은혜를 주는 삶. 주님 앞에 설 날을 준비하는 삶. 이런 모습으로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주님의 나라를 이루어가고, 교회의 거룩성을 회복해야. 이런 모습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는 삶을 살아야. 그럴 때 진정 참된 생명의 기쁨과 자유와 평화와 풍성함 가운데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됨.

3.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하기 위해 이웃 돌보심.

마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예수께서 하셨던 세 번째 일은 고통받는 이웃을 돌보시는 사역. 병과 약한 것을 고치셨다. 돌보심이다. 비단 몸 뿐 아니라 물질적인 필요도 채워주셨다. 그래서 귀신들린 자의 귀신을 쫓아내시고,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시고, 중풍병자를 일으키시고,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셨다. 죽은 야이로의 딸, 어떤 과부의 청년 아들과 죽은지 나흘리 지나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리셨다.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시고(마14장), 칠병이어로 사천명을 먹이셨다.(마15장)

즉 예수님은 인간의 전 영역에 관심을 가지고 그 영혼과 육신과 물질의 필요를 채워주심. 물론 분명히 우선순위가 있었다. 먼저는 영혼을 살리는 것. 그리고 천국백성으로 살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천국의 백성의 삶은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만은 아니다. 육체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도 거기에 포함된다. 그래서 육신과 물질적으로 돌보셨다.

이것이 교회가 해야 할 일이다. 이것이 균형적인 믿음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이런 균형잡힌 믿음의 모습을 가져야 한다. 먼저는 영혼이 온전히 거듭나야 한다. 천국과 지옥을 믿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확실히 믿어야 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현실적인 것이 우선시되는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지를 바르게 알고 그 나라에 들어갔을 때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해야 한다. 주님의 뜻대로 몸과 마음과 영혼과 시간과 물질을 사용해야 한다. 주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이웃을 섬겨야 한다.

성탄절주민초청잔치는 바로 이런 자리다. 복음을 전하는 자리이다. 예수님을 바르게 알리는 자리다. 그 안에 생명이 있음을 선포하는 자리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리는 자리다. 동시에 주님의 사랑을 나누는 시간이다. 주님의 사랑으로 그들에게 다가가는 시간이다. 어찌하든지 그들의 교회 마당을 밟게 하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의 문을 조금이라도 열리게 하는 시간이다. 주님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느끼게 하는 시간이다.

그리하려면 한명이라도 더 오게 해야 한다. 관심을 갖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벤트나 홍보도 필요하다. 이벤트를 위한 이벤트가 아니라 사람들이 모이게 하는 이벤트다. 한명이라도 더 관심을 갖게 하고 일단 오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뭐가 되어도 된다. 그들이 마음의 문을 열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복음을 전할 수도 없고 전해도 튕겨나간다.

그러나 우리가 계속해서 교회의 문을 열고 그들에게 다가가고 뭔가 조금이라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사랑을 베풀고 하다보면 결국은 조금이라도 교회에 대하여 좋은 이미지를 갖게 될 것이다. 이미지가 중요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이미지가 중요하다. 그러나 요즘 교회의 이미지가 별로 좋지 않다. 왜 그럴까? 이유는 간단하다. 믿음과 삶이 일치되지 않기 때문이다. 말은 어쩌구저쩌구 잘하지만 행동은 전혀 따라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이 오신 목적인 무엇인지 그 역사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지를 되새겨 보며 먼저 나 자신이 그런 예수님을 온전히 모셔들이고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자. 그리고 더 나아가 그렇게 주님을 만났으면 진정 거듭난 자로서 거기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자.

주님께서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고 사랑을 나누는 일에 힘썼던 것처럼 우리도 그 일에 힘쓰자. 그 일환으로 실시하는 성탄절주민초청잔치에도 적극적인 자세로 홍보하고 참여 함으로써 많은 분들이 교회를 찾아오게 하자. 그래서 그들이 복음을 듣고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믿게 하자. 혹시 당장 마음의 문이 열리지 않는다해도 마음이 점점 부드러워져서 결국은 주님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더욱 기도하고 힘쓰는 삶을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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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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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예배설교 / 하나님의 영광 Sunday Night Service
제 목 :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말 씀 : 고전10:31-33

 

1.인간 존재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입니다.(31절)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모습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존재의 목적에 부합한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아름답고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해도 만약 존재의 목적에 부합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가치한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 컴퓨터가 있습니다. 컴퓨터의 목적은 정보를 잘 처리하는 것입니다. 사용자가 키보드나 마우스를 통해서 원하는 정보를 입력하면 중앙처리장치에서 정보를 처리하여 디스플레이어에 그 결과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보여 주어야 합니다. 이러한 목적을 수행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고성능의 컴퓨터도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여기 서서 마이크를 통해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이 마이크가 여기에 있어야 할 목적은 여러분에게 제 음성을 보다 잘 전달해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이 마이크가 저의 목소리를 여러분에게 잘 전달해 주지 못한다면 이 마이크는 폐기처분해야 합니다.

사람도 물론 마찬가지입니다. 제아무리 인물이 훤하고 키가 크고 능력이 많아도 만약 인간으로서의 존재의 목적에 부합되지 않는다면 그런 인생은 쓸모없는 인생이요, 무가치한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제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아무리 능력이 많아도 그 지식과 능력을 합목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 지식과 능력은 죽은 지식입니다. 아니 그저 죽은 지식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43:7에서는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혼자 영광을 독차지 하기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갈 때에 인간은 최상의 가치를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자신과 자신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갖게 되고 그럴때에 결국 인간 자신도 진정한 생명과 은혜와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물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한다는 것이고 이차적으로는 그것이 인간의 행복을 보장해주는 조건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31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주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먹는 문제를 비롯하여 모든 삶의 행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 여러분께서는 언제나 여러분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여러분의 삶의 모든 부분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진정 하나님도 기쁘시게 해드리고 여러분의 삶도 참된 기쁨과 가치와 의미가 있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여러분, 좀전에 말씀드렸던 31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라는 말씀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것은 인간의 생존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행위 또는 욕구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이고도 본능적인 욕구나 행위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음식을 먹는 일 조차도 그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먹는 것이 아니라, 아니면 단순히 식욕을 채우기 위하여 먹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무언가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식생활을 하나님보시기에 합당하게 영위하여 그래서 육신의 건강도 도모하고, 건강한 육신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의, 식, 주 등의 모든 문제가 포함됩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 볼때에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어떤 분들은 유명한 음식점을 여기저기 찾아 다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한끼에 몇만원씩하는 음식을 아무렇지도 않게 먹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몇십만 몇백만원짜리 옷을 입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넥타이나 티셔츠 하나에 몇십만 몇백만원 가는 것도 있습니다. 참고로 제가 지금매고 있는 이 넥타이는 오천원짜리입니다. 저는 이런 행위는 하나님께서 별로 기뻐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특히 먹고 마시는 문제를 생각할때에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음주와 흡연의 문제입니다. 오늘날 일부 한국교회의 성도들 특히 일부 젊은이들 사이에는 술과 담배를 개방해야한다는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제법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를 파괴하고 사람들을 하나님과 교회로부터 멀어지게 하려는 사단의 유혹에 불과한 잘못된 생각입니다.

여러분, 술 담배가 그 해독이 얼마나 심각합니까? 많은 사람들이 술과 담배로 인해 건강을 해치고, 심지어는 생명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술로 인하여 가정 폭력이 발생하고 심지어 가정이 파괴되는 경우도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 모든 범죄의 80%이상이 술담배에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모든 퇴폐향락의 중심에는 언제나 술과 담배와 마약이 관계되어 있습니다. 또 술과 담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물질을 낭비합니까? 그 시간과 그 물질을 복음의 역사를 위하여 사용한다면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겠습니까?

더군다나 술과 담배는 결국 하나님을 불신하게 만들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께서 천하보다도 귀하게 여기는 생명체를 파괴하고, 죄의 길로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허용하라고 한다는 이것이 마귀의 유혹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31절의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일을 하든지 그것이 과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냐, 아니면 하나님께 누를 끼치는 일이냐를 생각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행위인 의식주 문제를 비롯해서 공부를 하는 것도, 일을 하는 것도, 결혼을 하는 것도, 직장생활을 하는 것도, 농사를 짓든 어떤 일을 하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저 먹고 마시고 즐기며 살기 위해서 공부를 하고, 돈을 버는 것이 아닙니다. 높은 지위와 권력과 명예를 얻어서 대접받고, 호의호식하기 위하여 공부하고 힘쓰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쉬고 노는 일 까지도 그저 쉬고 놀기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을 통하여, 직장을 통하여, 쉬는 것을 통하여, 권력이나 지식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고 그리하여 결국에는 자신과 자신의 가정과 이웃에게 기쁨과 은혜와 행복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께서는 언제 어디서 어떤 삶을 영위하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먹고 마시는 일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말 한마디 할 때도 과연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공부를 할 때나 일을 할 때나 직장을 구할 때나 결혼을 할 때나 무엇을 할 때나 언제나 먼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대전제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정말 여러분이 하시는 모든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고, 바로 그러한 삶을 통하여 여러분 자신은 하나님과 사람앞에서나 인정받으며 남에게도 큰 유익을 주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거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는 거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32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거치는 자」라는 것은 물론 남을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남의 진로를 방해하고, 장애물이 되고,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사람을 말합니다. 남에게 상처와 고통을 주고, 진리의 길로 가는 것을 막고 하는 모든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하나님의 교회라는 것은 한마디로 모든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우리 교회나 남의 교회나 어쨌든 상대방이 그 누구라고 할지라도 남을 걸려서 넘어지게 하고, 남에게 상처를 주고, 고통을 주는 자가 되지 말라는 그러한 말씀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정말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 속에 보면 너무나 이런 모습들이 많습니다. 남이야 고통과 상처를 받든 말든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려는 풍조가 만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기치고 도적질하고 빼앗고 때리고 죽이고 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남의 길을 가로막아서 자기가 앞서 가려고 합니다. 남을 넘어뜨려서 자기가 일어서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남에게 상처를 주고 아픔을 주고 헐뜯고 난리입니다. 요즈음 너도나도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와서 떠들어대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가관도 아닙니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것은 교회에서도 이런 모습들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말과 행실을 바로 해야지 나보다도 못한데 내가 거기 가서 무엇을 배우겠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회내에서도 많은 갈등들이 있습니다. 교회가 너무 분열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다 거치는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빨리 청소를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나의 말 한마디가, 나의 잘못된 행동이 혹시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의 말 한마디가, 나의 잘못된 행동이 남을 실족하게 하고, 하나님에게로 나아오는 길을 막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교회에 누를 끼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의 행동 하나 하나가 정말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를 늘 생각하시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정말 여러분께서는 결코 남에게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남을 세워주고, 남을 위로해주고, 천국길로 인도해주는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여러분 자신에게도 정말 은혜와 기쁨이 넘치는 삶이 펼쳐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3)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려면 남에게 유익을 주어야 합니다. 세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남에게 상처와 고통이 아니라 기쁨을 주어야 합니다. 천하보다 귀한 생명들을 정말 귀하게 대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그래야 결국 인간들의 삶이 풍요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남을 유익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렇다면 남을 유익하게하는 삶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남을 위해서 할 일이 무한히 많을 것입니다. 먹을 것이 없는 자에게는 먹을 것을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입을 것이 없는 자에게는 입을 것도 주어야 합니다. 병든자를 고쳐주기도 하고, 좌절과 낙심 중에 있는 자를 위로도 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십시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무슨 말씀이겠습니까? 쉽게 말씀드리면 남을 위한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결국 구원이라는 말씀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가난한 자에게 천만금을 준다해도, 헐벗은 자에게 아무리 좋은 옷을 많이 준다해도, 병든자에게 아무리 병을 고쳐준다고 해도 만약 그 영혼이 구원받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물론 먹을 것을 주고, 입혀주고, 병을 고쳐주는 일들이 무의미하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그럴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고, 또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통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고, 그것을 통하여 그들이 구원을 얻게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먹고 입을 문제가 해결된다고 할지라도 그 영혼이 구원을 받지 못하면 결국은 다시금 절망 할 수 밖에 없고, 죽을 수밖에 없고, 영원한 고통을 당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진정한 유익을 끼치고자 한다면 먹고 입을 문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고,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정말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게하는 것이 그들에게 가장 큰 유익을 가져다주는 일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한 영혼 한 영혼을 구원의 길로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일에 보다더 관심과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의 구원의 은총을 누리는 가운데 그것을 바탕으로 세상에서 누려야 할 영적, 물질적, 정신적, 육체적 은혜로 누리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 인생을 전인적으로 행복하게 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러한 일에도 적극 참여해야 합니다. 주님의 복음의 역사에 참여하여 죽어가는 영혼들이 주님품으로 돌아오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는 물론 직접 나가서 전도도 해야 합니다. 사랑도 베풀어야 합니다. 물론 교회학교 교사로, 성가대원으로, 찬양단원으로, 차량운행 봉사로, 청소와 식사당번으로 모든 영역에서 열심히 봉사도 해야 합니다. 헌금에도 물론 당연히 감사함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이런 모든 일들이 결국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요, 생명을 살리는 일이요, 남을 유익하게 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가장 아름다운 인생은 존재의 목적에 부합되는 삶을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인생 존재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인생만이 먼저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뿐만 아니라 자신과 남의 생명을 유익하게 하는 가장 아름답고 가치있는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 모두 언제나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말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먹고 마시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공부하고 일하고 힘쓰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거치는 자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남을 넘어지게 만들고 아프게 만들고 상처받게 하는 사람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남을 기쁘게 하고, 남의 유익을 구하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거룩한 역사에 적극 참여하여 많은 사람을 구원의 길로, 생명의 길로 인도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결국 모든 것들이 합력하여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려지고, 여러분의 삶에는 은혜와 기쁨이 충만하고, 여러분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진정한 유익을 주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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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저녁찬양예배설교/ 서로 덕을 세우라 (살전5:9-11)

 

제목 : 서로 덕을 세우라

말씀 : 살전5:9-11

 

영국인 의사 제임스 Y. 심프슨 卿(Sir James Y. Simpson 1811~1870)은 29세의 나이에 에딘버러 의과대학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수술을 많이 하면서 환자들이 당하는 고통을 지켜볼 때마다 너무 마음이 아팠다. 당시에는 마취제가 없어서 환자의 수족을 결박한 후 수술을 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창세기를 읽다가 창2:21 말씀이 눈에 들어왔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아담의 갈빗대를 꺼내어 여자를 만드셨으니 인류최초의 대 수술장면인 셈이다. 그런데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셔서 하나도 아프지 않게 수술을 하신 것이다.

심프슨은 이 말씀을 묵상하며 깊이 잠들게 하는 약품을 찾기 시작했다.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던 심프슨은 마침내 클로로포름이라는 흡입마취제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사용을 거부하자 자기가 직접 마취제를 흡입하여 몇시간 깨어나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그러다가 빅토리아 여왕이 왕자를 분만할 때 이 마취제를 사용하여 고통 없이 순산시켜 이 마취법이 공인이 되었다. 물론 지금은 더 안전하고 마취력이 강한 마취제가 발견되어 이 마취법은 잘 사용하지 않으나 당시로서는 가히 의학계의 혁명과 같은 일이었고, 심프슨은 이 마취제의 발견으로 의학계의 거목이 되었고 영국황실로부터 의사로서는 처음으로 경(Sir)의 칭호를 받게 되었다.

그렇게 유명한 의사가 되어 강의를 하던 어느 날 한 제자가 물었다. “선생님께서 지금까지 발견한 것 중 가장 큰 발견은 무엇입니까?” 학생들은 당연히 마취제의 발견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심프슨은 전혀 다른 대답을 하였다. “나의 발견 중에 가장 큰 발견은 내가 큰 죄인이라는 것과 오직 예수님만이 온 인류의 구세주라는 사실일세.”

우리의 가장 큰 발견은 무엇인가? 우리의 가장 큰 행복은 무엇인가? 우리의 신앙생활의 가장 큰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가장 큰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님의 구세주 되심이다. 예수님 안에 있는 구원이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다. 안 그런가? 이보다 더 크고 귀한 것이 무엇인가? 이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복된 것이 무엇인가?

그러므로 예수님을 알게 된 우리는 더욱 감사와 기쁨과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며 구원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자.

1.우리를 부르신 목적(9절)

살전5:9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우리를 부르신 목적을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왜 부르셨는가? 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는가?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지 않으면 안 되셨는가? 두말할 나위도 없이 구원이다. 구원이 목적이다. 물론 세상에서 사랑하고 화평하고 기쁘고 은혜가 충만하고 복된 삶을 살기 위한 목적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근본적인 목적은 구원이며 구원이 이루어질 때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이 헐리고 관계가 회복될 때 세상에서의 평안이나 기쁨이나 자유나 은혜나 사랑이나 이런 것들도 비로소 올바르게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이것이 믿음의 핵심이며 근본이며 목적이며 이유이다. 그러나 아직도 신앙생활을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 우리가 받은 은혜가 진정 무엇인지, 왜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인지, 왜 우리는 기뻐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 이걸 잘 모르는 분들도 있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이걸 알아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구원의 은총을 누린다. 영원한 구원의 은총을 누린다. 이 땅에서도 진정한 자유인으로 산다. 진정 기쁨과 은혜와 능력 가운데 산다. 그러므로 내가 먼저 그런 삶을 살아가고 아직도 잘 알지 못하는 분들도 그러한 은혜를 누릴 수 있도록 정말 기도하고 힘쓰자.

2.구원의 방법과 목적(10절)

살전5:10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구원의 방법과 구원의 목적을 말씀한다.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십자가의 죽으심만이 우리의 죄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이다. 다른 길은 없다. 오직 예수님의 죽으심으로만 죄의 문제가 해결된다. 동시에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만 새생명을 얻는다. 그래서 깨든지 자든지 예수님과 함께 살게 된다.

깨든지 자든지는 죽든지 살든지라는 말씀이다. 죽은 자든 산 자이든 예수님과 함께 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와 산 자이다. 그런 자들은 예수님의 보혈로 죄사함 받고 예수님의 부활을 덧입어 생명의 부활로 나오게 된다. 단순히 부활을 하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여 예수님과 함께 생명의 완전한 은총을 가지고 살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은 무엇인가? 일차적으로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축복이다. 그때의 생명은 질이나 시간이나 공간이나 모든 면에서 완전한 생명이다. 어둡고 칙칙하고 더럽고 추하고 슬프로 고통스럽고 억울하고 분하고 원망스럽고 절망스럽고 외롭고 쓸쓸하고 아프고 죽고 미워하고 원망하고 싸우고 죽이고 헐뜯고 하는 등의 그 어떤 부정적인 것들도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기쁘고 즐겁고 만족하고 행복하고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은혜롭고 깨끗하고 자유롭고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누리게 된다. 하나님과 주님 안에는 그 어떤 어둠의 세력도 감히 깃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이 땅에서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위하여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다. 믿음 안에서 진리와 의와 선과 거룩과 사랑과 은혜와 자비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도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누리며 생명의 역사를 이루는데 참여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영원하고도 완전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될 그 날을 바라보며, 선과 의와 진리를 따르며 살아갈때에 지금 여기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이루어가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은총을 누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생이 되자.

3.피차 권면하고 덕을 세우라.(11절)

살전5:11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무엇을 권면하라는 것일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앞서 말씀했던 내용으로 권면하라는 말이다. 주님이 다시 오신다. 주님과 함께 살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도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누리게 된다. 그러므로 죽으나 사나 주님과 함께 사는 삶을 통하여 나도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 안에 있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 그리고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주님 안에서 살아감으로 여기서 누려야 할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는 것, 이걸 강조하고 권면해야 한다. 다시 말해 그저 건강하게 잘먹고 잘사는 것보다도 믿음 안에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선과 진리와 의 가운데 살아가는 것을 권면하고 강조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왜? 그래야 영원한 영광의 나라도 누리고, 이 땅에서도 진정 사랑과 은혜와 평안과 기쁨과 자유 가운데 살게 되니까.

피차 덕을 세우라는 것도 그렇다. 서로 믿음 안에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와 이 땅에서의 아름답고 복된 삶을 살아갈 것을 권면함으로 교회에 참된 덕을 세움으로 교회가 더욱 믿음 위에 서서 천성을 향해 힘차게 달려가면서 주님과 동행함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며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도록 굳게 세워가라는 것이다.

여기서 세운다는 말은 건축물을 조화롭게 아름답게 튼튼하게 세워가는 것을 말한다. 건축물을 세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기초를 잘해야 한다. 교회를 잘 세우려면 기초를 잘해야 한다. 교회의 기초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한 영원한 새생명이다. 그러므로 그 예수님을 온전히 모셔들여야 한다.

그리고 나서는 머리되시는 예수님의 지시에 따라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의 역할을 해야 한다. 질서있게 움직여야 한다. 연합해야 한다. 화목해야 한다. 성도나 마을 사람들에게 긍정적이고 아름답고 건설적인 영향을 미쳐야 한다. 말에나 행동에나 모범을 보여야 한다. 성도들에게 힘을 얻게 하고 위로를 받게 하고 소망을 얻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덕을 세우는 일이다. 그러면 교회는 아름답고 든든하게 서가고 주의 영광이 나타나고 우리도 큰 기쁨과 은혜로 신앙생활하게 된다.

그런데 요즘에 보면 덕을 세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직장과 마을과 교회에서 덕을 세워야 하는데 도리어 분열을 조장하기도 하고 시기와 질투를 가지고 서로 미워함으로 덕은커녕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하나님의 교회를 헐고 마는 결과를 초래할 때가 많다. 그러나 물론 그러면 일단은 하나님 앞에 죄짓는 것이고 자기 인생 초라해지고, 남에게 상처와 고통과 아픔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건 사단의 역사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다. 사탄은 어찌하든 죽이는 게 목적이고 하나님의 목적은 살리는 것이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를 부르신 목적을 바르게 알자. 구원이 근본적이고 핵심적이고 기초적인 부르신 목적이요 이유임을 기억하자. 또 그 안에 진정한 기쁨과 은혜와 감사와 만족과 행복과 생명의 풍성한 은총이 있음을 알고 믿고 구원을 통해 주시는 영원하고도 완전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자.

동시에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하는 일을 위하여 서로 권면하고 덕을 세워 나가자. 자녀이든 이웃이든 형제이든 이것이 가장 중요함을 알고 이것이 인생의 행복을 좌우하는 길임을 알고 세상의 무슨 돈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물질보다도 구원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는 삶을 살도록 기도하고 권면하고 함께 협력해 나가자.

바로 이 일을 위하여 덕을 세워 나가자. 교회가 바로 서고, 교회가 구원의 역사를 감당해 나가기 위하여 머리되시는 주님의 지시를 따라 교회에 주신 질서를 따라 각자의 위치에서 사명을 다하며 말이나 행동이나 아름답고 거룩하고 은혜로운 모습으로 덕을 세움으로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복음의 역사를 이루는 가운에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는 삶을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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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예배설교]  말씀과 삶 Sunday evening Service

 

말씀 : 잠7:1-5

제목 : 말씀과 삶

인간에게는 생존하기 위하여, 혹은 보다 더 나은 삶을 누리기 위한 욕구가 있다. 인간의 욕구는 1차적인 생리적 욕구와 2차적인 사회적 욕구로 분류된다. 생리적 욕구는 본능적인 욕구를 말하는 것으로 생욕, 식욕, 성욕과 같은 것이며, 사회적 욕구는 물론 본능적인 성격도 있지만 그보다는 주로 사회생활 속에서 형성되는 것으로 명예욕, 소유욕, 성취욕, 지배욕, 권력욕 등이 이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욕구들은 인간의 삶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들이다. 그 모든 욕구들 하나하나가 모두 인간의 삶을 유지시키고 발전시키고 인간의 생명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중요한 요소들이 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욕구들이 잘못 사용되었을 때 그것은 오히려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역할을 한다.

그중에서 인간의 삶을 가장 심각하게 파괴할 우려가 있는 욕구는 소유욕과 성욕, 명예욕이라고 한다. 실제로 인간사회에 나타나는 모든 부조리와 갈등과 고통의 현상들이 바로 이러한 소유욕과 성욕과 명예욕에 의하여 발생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러한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와 관련된 범죄에 대하여 많은 경고를 하고 있다.

물질적인 욕망으로 인한 범죄와 관련해서는 제8계명에서는 “도적질하지 말지니라.”고 하셨고, 또 제10계명인 출20:17에서는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고 하시면서 남의 물건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자신의 것을 족한 줄로 여기며 살 것을 말씀하고 있다.

또 성적인 범죄에 대하여 십계명중 7계명인 출20:14에서 “간음하지 말지니라.”고 하셨고 레20:10절에서는 간음하는 자는 돌로 쳐서 죽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즉 인간 속에 자리잡고 있는 이러한 욕망들이 반드시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잘못 사용될 경우 인간에게 심각한 고통을 안겨다 줄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러한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를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함으로 일어날 수 있는 죄악을 어떻게 이길 수 있는지를 말씀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씀 안에 굳게 서면 그 말씀이 우리를 모든 유혹으로부터 보호해 준다는 것이다.

1.말씀이란 무엇인가?

먼저 1~4절을 보자. “내 아들아 내 말을 지키며 내 계명을 간직하라 / 내 계명을 지켜 살며 내 법을 네 눈동자처럼 지키라 / 이것을 네 손가락에 매며 이것을 네 마음판에 새기라 / 지혜에게 너는 내 누이라 하며 명철에게 너는 내 친족이라 하라

여기에 보면 말씀에 다양한 표현이 있다. 우선 1절에는 ①‘내 말’이라고 말씀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말씀이라는 말이 엄청나게 많이 나온다. 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혹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혹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등등의 표현이 굉장히 많이 나온다. 무슨 뜻인가? 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 주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임으로 진리이고, 생명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감히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순종해야 하고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1,2절에서는 ②‘계명’이라고 말씀한다. 계명이란 말씀그대로 우리가 지킬 것을 명령하신 계율이다. 그래서 이 말씀을 개역성경에서는 ‘명령’이라고 되어있다. 그러니까 말씀을 ‘명령’이라고 하신 것은 말씀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절대적인 규범으로 그것은 우리가 지켜야 할 의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지혜 이것은 결코 단순한 권면이나 그럴듯한 종교철학이나 사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이 반드시 지켜야 할 하나님의 지시요 명령이라는 것이다. 명령이니까 반드시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2절에서는 ③‘법(도)’이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말 그대로 말씀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삶의 법칙이라는 의미이다. 법은 어떤 기준이다. 말의 기준, 행동의 기준, 준거가 곧 법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법이라는 것은 말씀이 인간의 행동의 모든 기준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삼는가?

또 4절에서는 말씀을 ④‘지혜’라고 부르는 것은 말씀이 인간에 참된 진리의 세계를 알려주는 올바른 지식이라는 측면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모든 지식과 지혜와 진리가 들어있다는 말씀이다. 그렇지 않은가? 무엇이 진정 지혜인가? 무엇이 진정한 지식인가? 물론 생명을 주고 더 나아가서는 생명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지혜요, 지식이 아닌가? 생명을 주는 지혜,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주는 지식은 오직 예수님과 그 말씀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 지식을 알고 그것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린다. 그래서 그 사람이 가장 지혜로운 자인 것이다. 따라 말씀이 곧 지혜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에 대해서 그것이 법이고 지혜이고 명철이고 율례이고 하나님의 말씀이고 명령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래서 정말 그것을 잣대로 삼자. 참 지혜가 거기 있음을 알고 그 말씀을 따르자.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엄중히 다루자. 그래서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 때 말씀의 인도를 따라 참 생명의 은총의 길을 걸어가자.

2.말씀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곧 법이요, 명령이요, 계명이요, 지혜인데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그건 앞에서 보았던 1~4절에 역시 나타나 있다.

1절의 ‘지킨다’는 것은 「지키다, 보호하다, 망보다」는 의미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따르라는 것이다. 빼앗기지 말라는 것이다. 팔아먹지 말라는 것이다. 손해가 나도 힘들어도 어려워도 세월이 어떻게 변해도...... ‘간직한다’는 것은 「숨기다, 비축하다, 저장하다」는 의미이다. 이것도 비슷하다. 팔아먹지 말라. 간직하고 있어서 언제 어떤 상황이라도 그것을 따라가라는 말씀.

2절은 1절의 연속인데 후반부에는 눈동자처럼 지키라는 말이 있다. 사람이 어떻게 눈동자를 지키는가? 한마디로 민첩하게 지킨다. 반사적으로 지킨다. 눈에 무엇인가가 가까이 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이 깜박여져서 눈꺼풀이 눈동자를 덮어 보호하는 것이다. 눈은 그만큼 중요한 기관으로 반사적으로 지키는데 이와 같이 무엇인가가 말씀을 침범하려고 하면 다른 어떤 것을 지키는 것보다도 중요하게 잽싸게 지키라는 것이다.

3절의 손가락에 매라는 것은 가까이 하라는 것인데 「곁에 두다, 떠나지 않다, 함께하다」라는 의미이다.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한다. 늘 보고 듣고 배워야 한다. 그래야 남는다. 새겨진다. 아주 그냥 내 가치관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어차피 우리는 무엇을 보고 듣고 배우냐에 따라 인생이 결정된다. ‘새기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기록하다, 명부에 올리다, 등록하다」는 의미이다. 완전히 심비에 새겨서 지워지지 않게 하고 그것을 따라가라는 말씀이다.

또 4절의 내 누이, 내 친족이라 하라는 것은 친근히 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가까이 하다, 좋아하다, 기뻐하다」는 의미이다. 말씀 안에 생명이 있고 기쁨이 있고 능력이 있고 평안이 있고 복이 있으니까 세상의 다른 것을 가까이 함도 말씀을 가까이 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래서 물론 말씀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라는 것이다.

이 말씀들을 종합해보면 우선은 말씀을 마음에 새겨넣고, 새겨 넣으려면 가까이하고 친하게 지내야 하며, 그 다음 다음에는 잘 간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잘 간수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잘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어떤 것들이 침범하여 마음속에 들어 있는 말씀을 빼앗아가지 못하도록 지키라는 말이다.

그런데 어떤가? 말씀을 얼마나 잘 지키는가? 돈을 지킴보다, 내 육체를 지킴보다, 내 명예를 지킴보다 말씀을 지키는가? 돈이냐, 말씀이냐하는 기로에서 무엇을 택하는가? 육체의 생명이냐 말씀이냐하는 기로에 선다면 무엇을 지킬 것인가? 명예이냐 말씀이냐하는 양자택일을 강요받는다면 무엇을 지킬 것인가?

잠4:23절을 보라.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또 마22:37절을 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명보다 물질보다 명예보다 지식보다 말씀을 지키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생명보다 물질보다 명예보다 권력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왜? 하나님이 욕심장이라서? 독재자라서? 폭군이라서? 물론 아니다. 그게 생명의 길이기 때문에... 그게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가장 풍요롭게 가장 가치있게 살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말씀을 새기고 간직하고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이다. 4절을 보라. “지혜에게 너는 내 누이라 하며 명철에게 너는 내 친족이라 하라.” 무슨 말인가? 한마디로 친근히 하라는 말이다. 가까이 하라는 말이다. 여기서 누이와 친족을 구별해서 말씀하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친족처럼 형제처럼 그렇게 가까이 하라는 것이다. 함께 하는 것을 좋아하라는 것이다. 즐거워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가까워지고 함께 있게 되고 떠나지 않게 된다.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이 함께 있으면 나의 삶에 은혜가 충만하게 된다.

그러므로 말씀을 가까이 하라. 즐거워하라. 좋아하라. 사랑하라. 묵상해야 하라. 교회를 가까이하라. 예배를 가까이하라. 적용하기를 가까이하라. 그리하여 더욱 은혜 가운데 살아가자.

3.말씀을 지킨 결과는 무엇인가?

말씀을 새기고 간직하고 지키고 가까이하라고 말씀하신 다음에 5절에서는 그 결과를 말씀하고 있다. 왜 말씀을 지켜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그 말씀들이 자신을 지켜 줄 것이라는 말씀이다.

5절 말씀을 보라. “그리하면 이것이 너를 지켜서 음녀에게, 말로 호리는 이방 여인에게 빠지지 않게 하리라.” 즉 그 말씀을 네가 네 마음속에 지키면 이제는 반대로 그 말씀이 너를 지켜 줄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너를 모든 악의 유혹으로부터 보호해 줄 것이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요셉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그는 너무나 많은 시련 속에서도 오직 말씀으로 승리한 사람이다. 형제들이 자신을 죽이려다가 팔아넘긴 악행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 들여 형들을 미워하지도 않았고 원수를 갚지도 않았다. 또 물질적으로도 신앙양심에 입각해서 살았고, 육체적으로 성결한 삶을 살았다. 창39장에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요셉은 말한다. 창39:9절을 보자.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당신은 보디발의 아내가 아니냐? 그런데 내가 당신을 범한다면 그것은 물론 당신의 남편 보디발에게도 악이 되겠지만 그에 앞서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다.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다. 그러니 난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그가 그러한 유혹 앞에서도 결코 넘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심령 안에 말씀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삶의 모든 순간순간 속에서 말씀이 그를 인도했기 때문이다. 혹시 죄를 저지를 만한 상황이라고해도 그의 심비에 새겨져 있던 말씀이 즉시 그를 인도하여 그가 죄악 속에 빠지지 않도록 제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의로운 삶을 살았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인정받았다. 축복을 받았다.

이제 말씀을 정리한다. 인간에게는 많은 욕구가 있다. 생욕, 식욕, 성욕, 물욕, 명예욕, 승부욕 등등.... 이러한 욕구들은 물론 건전하게 사용하면 인간에게 약이 된다.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욕구들을 잘못 분출시키면 독이 된다. 인간의 삶을 파괴한다. 그러한 인간의 욕망들을 잘못 사용하면 결국 자신과 남과 가정과 교회와 사회를 파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르게 사용해야 한다. 그럼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방법은 한가지다. 말씀을 심비에 새기고 사는 것이다. 말씀을 간직하고 사는 것이다. 가까이하는 것이다. 말씀을 지키는 것이다. 우리가 말씀을 지키면 그 말씀은 우리를 지킨다. 그러므로 말씀안에서 살아가자. 간직하고 살자. 새기고 살자. 가까이하며 살자.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을 아름답고 올바르게 사용하여 복된 삶을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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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찬양예배설교]서로 용납하라 Sunday evening Service


제목 : 서로 용납합시다.

말씀 : 골3:12-14

오늘 본문에서도 계속해서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에 대하여 말씀한다. 한마디로 자비를 베풀고 용납하고 참으며 사랑을 베풀라는 것이다. 이 말씀도 말은 쉬울지 몰라도 실천하기는 너무나 어려운 말씀이다. 나를 사랑해주고, 내 편을 들어주고, 나를 지지해 주는 사람에게는 그런대로 가능할지 모르지만 내 생각과 가치관과 목적과 방향이 다르고 더 나아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는 경우에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것도 성령의 도우심을 받고, 계속해서 훈련하다보면 조금씩 가능해진다. 주님 앞에 엎드려 끊임없이 기도하며, 자신을 낮추면서 무언가 작은 것 하나라도 실천하고 용서하고 받아주고 용납하기를 연습하다보면 조금씩 그런 모습을 갖게 되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묵상할 때에 그저 자신을 낮추고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할 때에 좀더 거룩한 삶의 모습으로 나아가기를 바란다.

1.사랑과 자비와 긍휼등의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이유

골3: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사랑과 거룩의 삶을 살아갈 것에 대해서 말씀하시기 전에 우리가 그런 삶을 살아가야할 당위성에 대해서 말씀한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심과 사랑을 받은 거룩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그에 걸맞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하나님의 너무나 큰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다. 하나님께 너무나 큰 특혜를 받은 사람들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우리가 어떤 특혜를 받았는가? 우리가 어떤 신분을 갖게 되었는가? 우리는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 그것도 뭐 남들보다 크게 선해서 그런 것도 아니지 않는가? 남들보다 좋은 일을 많이 하고 깨끗하고 아름다워서 그런 것도 아니지 않는가? 그런데 나를 택하셔서 이 특권을 주시지 않았는가?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나라의 백성으로 삼아주시기 않았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마땅히 자신을 거룩하게 지켜 나가고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 그런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주님의 사랑의 법을 적용시키며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우리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얼마나 주의 영광을 나타내고 향기를 발할까? 얼마나 크나큰 은총 속에 살아갈까?

2.구체적 사랑의 모습들

골3: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1)긍휼히 여기라

긍휼이란 불쌍히 여기다. 동정하다. 연민을 갖다는 뜻이다. 사실 우리가 이 마음만 가지면 사랑하지 못할 일이 없다. 용서하지 못할 사람이 없다. 결국 모두가 불쌍한 인생이 아닌가? 무지해서, 연약해서, 심각하게 타락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그래서 사실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그러한 연약함과 무지와 어리석음을 아시고 우리를 끊임없이 용서해 주시지 않는가? 오죽하면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수밖에 없었겠는가? 그러므로 혹 누군가가 잘 사랑해지지가 않고 용서가 잘 안된다면 그의 무지와 죄와 어리석음과 죄로 오염된 마음의 상태를 생각해보고, 동시에 내가 어떻게 주님의 은혜가운데 살고 있는지 되새기며 어찌 하든지 긍휼히 여기고 그래서 용서하고 그래서 함께 주의 은총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자.

2)자비를 베풀라

자비란 선함, 친절함, 우호적임, 온화함 등을 말하는 것으로 긍휼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불쌍히 여기고 동정하고 연민을 가지면 자비를 베풀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따라 주님의 자녀가 되었은즉 최대한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왜? 불쌍한 영혼이니까. 왜 나도 하나님의 자비로 용서받고 주의 은총가운데 살고 있으니까?

눅6:36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3)겸손하라.

겸손은 말 그대로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자신을 낮추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 갈등도 일어나지 않는다. 누구라도 사랑할 수도 있다. 사랑하지 못하고, 싸우고 대접받으려고 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모든 것이 결국은 교만에서 나온다.

자신을 낮춘다면 사랑하고 용서하고 긍휼히 여기지 못할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주님 앞에 설 때에 나 자신이 흉악한 죄인이요, 벌레만도 못한 존재라는 사실을 안다면 내가 뭘 그렇게 잘 났다고 남을 업신여기고, 용서하지 못하고, 허물을 받아주지 못하겠는가?

벧전5:5(하),6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4)온유하라.

온화하고 친절하고 부드러운 것을 말한다. 물론 사람마다 성격이 있고, 기질이 있지만 우리는 자신을 깨트리고 부서트려서 부드러워져야 한다. 부드럽지 못한 것은 아직도 내 자아가 남아 있다는 증거이다.

물론 온유하라고 해서 죄와 추함과 더러움 마져도 적당히 받아 주라는 의미는 아니다. 흔히 하는 말 맞다나 사람은 미워하지 않되 죄는 미워해야 한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물에 물탄 듯 술에 술 탄 듯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하라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도 계속해서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도 화를 내기도 하셨다. 어려운 이야기지만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최대한 부드럽게 상냥하게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 교회에서도 좀더 친절하자. 상냥하자.

마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5)오래 참으라.

앞서 말씀드렸던 일들은 인내 없이는 불가능한 일들이다. 긍휼히 여기고 자비를 베풀고 겸손하고 온유하다고 해서 세상이 금방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진심을 금방 알아주는 것도 아니다. 도리어 그런 점을 이용해 먹으려고도 한다. 뭔가 나만 손해보고 나만 바보 되는 것 같을 때도 많다.

그러다보면 그만 나도 모르게 사랑과 자비와 긍휼과 온유를 지키지 못하고 화를 내거나 같이 대적하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열 번 잘하다가 한번 잘못하여 앞에 잘한 것까지 말짱 도루묵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정말 인내가 필요하다. 인내도 내 맘대로 잘 안된다. 기도해야 한다. 엎드려야 한다. 깨져야 한다. 훈련해야 한다.

눅8: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6)용서하라.

골3: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여기서 불만의 원어적인 뜻은 비난, 허물, 책망을 의미하는 말로 서로 상대방의 허물이나 자신에게 잘못하는 일을 가지고 서로 헐뜯고 비난하는 것을 말한다. 즉 싫은 사람, 미워하는 사람, 나를 비난하는 사람도 받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참 얼마나 힘든 일인가?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도 사랑하고 그 요구를 다 받아주기 힘든데 나에게 잘못하는 사람은 얼마나 더 힘들겠는가?

그러나 이것도 주님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가능해 진다. 주님이 나를 받아 주신 것을 생각하면, 주님이 나 같은 것을 위해서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당하신 것을 생각하면, 주님이 영원한 형벌 가운데 처할 수 밖에 없는 이 죄인을 용서해 주신 것을 생각하면 어찌 불가능하기만 하겠는가? 일만달란트 빚진 것을 탕감받은 사람이 일백데나리온의 빚을 탕감해주지 않고 그걸 가지고 물고 늘어지고 비난하고 욕하고 원수같이 생각한다면 얼마나 어불성설인가?

마5: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7)이 모든 것위에 사랑을 더하라.

골3: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여기서 온전하게 매는 띠란 옷을 입고 모든 옷을 정리해주는 역할을 하는 띠를 말한다. 즉 사랑이 앞서 말했던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용서 등을 하나로 묶어서 온전하게 해 주는 띠와 같다는 것이다. 실제로 사랑만 있으면 앞에서 언급된 모든 문제들은 저절로 해결되기 때문이다. 마치 자녀가 온전치 못하고 타인에게는 욕을 먹을망정 부모는 그를 미워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런데 솔직히 그 사랑이라는 것도 마음은 그렇게 하고 싶지만 행동으로 잘 안될 때가 많다. 그야말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할 때가 너무 많은 것이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변명만 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저 다른 방법이 없다. 은혜받아야 한다. 능력 받아야 한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내 자아가 깨져야 한다. 생각이 바뀌고 가치관이 바뀌고 목적이 바뀌어야 한다. 물론 그래도 온전치는 못하겠지만 그렇게 할 때 그나마 조금 주님의 사랑의 모습을 닮아서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고 용서하고 용납하며 사랑하며 살아 갈 수 있다. 그럴 때 나도 행복하고 너도 행복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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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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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오직 바른 교훈을 따릅시다

말씀 : 딤전6:3-5

1.유일한 완전한 진리인 성경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크게 보면 두가지 차원에서 생각할 수 있다. 우선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 없이는 우주도 나도 그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음을 믿는 것이다.

안 그런가? 어떻게 우주만물이 존재하는가? 자연발생설, 진화론 모두 말도 안 되는 엉터리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연적으로는 그 어떤 것도 생길 수도 없고 완전히 사라질 수도 없다. 어떤 사람은 세상이 저절로 될 수 있다는 것은 20만개나 되는 비행기 부품을 다 흩어 놓았더니 어느 날 저절로 조립이 되어 비행기가 나왔더라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고 하였다. 그런데 사실은 만에 하나 20만개의 부품이 저절로 조립되어 비행기가 된다해도 우주는 그렇게 될 수 없다. 우주의 부품이 20만개만 되겠는가? 20만개가 아니라 2,000만 조도 넘는다. 아니 그야말로 천문학적 숫자이다. 그런데 그게 어떻게 저절로 생겨서 저절로 조립되어 이 신묘막측한 질서가 이루어진다는 말인가?

즉 저절로 생기는 것도 불가능하고 만에 하나 어찌어찌 해서 생긴다해도 그 지극히 단순한 물리적 원리와 생명이 이 엄청나고 신비하고 복잡미묘한 존재로 진화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에 불과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은 오직 한가지 방법 밖에 없다. 성경이 말씀한 그대로 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것만이 정답이고 이것만이 유일한 가능한 방법이다. 그런데 죄와 무지 가운데 있는 인생들이 엉뚱한 소리를 하는데 속된 말로 개풀 뜯어먹는 소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걸 바르게 믿으라. 분명히 알라.

두 번째는 하나님의 속성과 사역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는 당연한 것인데 그러면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냐 하는 것이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자존하시는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 완전한 선이며 진리이며 생명이심을 믿는 것이다. 바로 그런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우주만물을 창조하셨고, 그런 사랑과 선와 의 때문에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구원하신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고, 그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시는 것이다. 이걸 확실히 알고 믿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여기서도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믿음의 근거는 무엇인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성경이다. 성경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성경이 생명의 말씀이요, 진리의 말씀이다. 오직 말씀만이 기준이며, 규범이며, 준거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고 따를 때만이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은혜의 길을 가게 된다.

오늘 본문 3절을 보라.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결코 다른 교훈을 따르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만을 따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교만한 자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가장 무식한 자이며 거기서부터 모든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성경 말씀만이 바른 말이요, 올바른 교훈이라는 걸 기억하고 이것만을 받아들이고 따라 살아야 한다. 안 그런가? 정말 옳은 말씀이 무엇인가? 정말 진리의 말씀이 무엇인가? 정말 무슨 말씀이 옳고 선하고 완전하며 무슨 말씀이 우리에게 정말 생명과 기쁨과 은혜와 평안을 주겠는가?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성경 말씀에 정말로 귀 기울이지 않고 자꾸 자기 생각과 경험과 이성을 따라 살려고 한다. 당장에 뭔가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을 따르려한다. 당장 편하고 물질적 육체적으로 좋아 보이는 것을 따르려고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도 안 오면서 하나님은 믿는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믿는다면서 성경대로 믿지 못한다. 이런 건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 자기가 만들어 놓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교회에 다녀도 성경대로 믿지 않으면 내가 만든 하나님에 불과한 것이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어떤 이들은 교회에 나오긴 나오는데 자기 경험과 지식과 이성을 따라 교회 생활한다. 주일날 교회에 오고 싶으면 오고 바쁘면 밭에 가서 앉아 있다. 십일조도 형편에 따라 자기 기준에 맞추어 하게 되면 하고 못하게 되면 그만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교회를 섬기는 일은 자신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것도 예수님의 교훈을 바르게 따르지 않는 것으로 온전한 신앙의 모습이 아니다. 자기의 생각과 가치관과 기준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말씀대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정말 세상의 그 어떤 다른 교훈도 따르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라. 조금도 가감하지 말고 말씀그대로 믿으라. 이해가 되건 안되건, 내 생각과 같건 다르건 말씀 그대로 믿으라. 오직 주님의 말씀만이 생명의 말씀임을 믿고 순종하라. 그리하면 반드시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리라.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 물론 여기서고 진정 은혜와 사랑과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넘치는 삶이 되리라.

2.성경을 믿지 않으면 가장 교만한 것

딤전6:4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그렇다. 성경을 거부하면 가장 교만하고 어리석고 무지한 인생이다. 당연하지 않나? 인생이 아는 게 얼마나 있다고 그걸 거부하겠나? 태초부터 있었는가? 모든 것을 알 수 있는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가? 도대체 우리가 알 수 있고, 할 수 있고,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게 얼마나 있는가? 그런데 마치 자기가 다 아는 것처럼 이러쿵저러쿵 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얼마나 교만한 일인가?

가장 유식한 것은 성경을 바로 알고 믿고 따르는 것이다. 당연하지 않나? 진정한 지식이 뭔가? 생명을 살리고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지식이 생명을 살리고 풍요롭게 하나? 진정 인생이 가야할 길과 목적과 방향과 의미와 가치를 누가 알려주나? 오직 성경 밖에 더 있나?

그런데 요즘에 정말 엉뚱한 소리 하는 사람들 많다. 성경이 아니라고 하는데 자기가 그렇다고 하고, 성경이 그렇다고 하는데 자기가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그건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는 자살행위에 불과하다.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계22:18,19절을 보라.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아니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이 말씀이 우습나?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히 엎드리라. 다른 무엇보다 말씀을 바르게 알고 믿고 따르라. 그리하여 진정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잘 달려가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라.

3.성경을 따르지 않으면 문제 발생

딤전6:4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그렇다. 성경을 그대로 믿지 않고 따르지 않으면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 당연하다. 성경이 오직 유일한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인데 그걸 믿지 않으면 결국 생명과 진리를 버리는 것인데 문제가 안 발생하는 게 도리어 이상하지 않은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따르지 않으면 결국 거짓 것을 따라가는 것인데, 참 진리의 길, 생명의 길도 모르고 죄와 무지와 어둠 속에서 캄캄한 길을 더듬고 다니는 것인데 어찌 문제가 생기지 않겠나?

변론과 언쟁과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왜 날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무지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겸손히 하나님 앞에 엎드려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알게 된다. 주님이 주시는 사랑과 은혜와 기쁨과 평안이 우리 가운데 임하게 된다. 그러면 당연히 시기와 분쟁과 싸움과 비방과 악한 생각들이 물러가는 것이다. 도리어 사랑과 기쁨과 은혜와 위로와 소망이 넘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싸우고 헐뜯고 악을 행하겠는가?

또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은혜로 구원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그러면 어떻게 되나?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형제자매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나? 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서로 사랑하며 도우며 위로하며 살게 된다. 그러니 어찌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교만한 가운데서 서로 싸우고 헐뜯고 비방하고 불화하겠는가? 심지어는 원수조차 사랑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진정 하나님을 알고 그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이러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찌 하든지 성경으로 돌아가라.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라. 하나님 말씀을 마음 판에 새겨 넣으라.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영혼이 소생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능력과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면서 남에게도 생명의 은총을 주는 복된 인생이 되자.

4.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삼지 말라.

딤전6: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이것은 성경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또 다른 폐단이다. 성경을 바르게 알지 못하며 마음이 부패해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조차도 이익의 방도로 삼는다. 이익의 방도로 삼는다는 것은 경건을 물질적, 육체적 유익의 도구로 이용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목회자일 경우에는 삯군 목사요, 성도일 경우에는 하나님을 세상 행복의 도구로 부려먹으려는 거짓 성도가 되는 것이다.

물론 참 목자와 참 신자라도 경건을 올바른 이익의 방도로 삼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올바른 이익이란 정신적으로는 경건생활을 통하여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서 예수님을 닮아가며 참 사랑과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누리는 것을 말한다. 또한 물질적, 육체적으로는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강건함과 풍성함을 누리는 것이다. 이것도 사실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성실하게 열심히 진실하게 살아가면 하나님과 사랑에게 귀히 여김 받게 된다. 그러면 육체적으로나 물질적으로도 풍성함을 누리는 것도 사실인 것이다.

그래서 잠3:3,4절에서는 말씀한다. “인자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또 잠3:9,10절에서도 말씀한다.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그러므로 이런 은혜도 누려야 한다.

그러나 경건을 잘못된 이익의 방도로 사용하면 안 된다. 돈 많이 벌고 건강하게 출세하고 자식이 잘되는 등 그저 세상의 복을 위하여 경건생활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건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왜곡된 모습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도 이런 모습들이 있다. 삯군 목자도 있고, 그저 세상적인 복이나 바라며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도 있다. 우리는 이걸 잘 분별해야 한다. 사탄마귀가 그럴듯하게 미혹해서 우리를 자꾸 그쪽 방향으로 몰고 가려고 한다.

물론 돈이나 건강이 평안함과 기쁨도 구해야 한다. 그러나 그 자체만을 구하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서 그런 것을 추구한다든지 하는 것은 결국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삼는 행위로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든 오직 진리의 말씀, 은혜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따르자.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만이 영원토록 바른 말씀, 생명의 말씀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그 말씀을 기준으로 신앙생활하자. 경건을 세상적 유익의 수단으로 삼지 말고 오직 주님 안에 있는 참된 생명과 은혜를 구함으로 진정 참되고 영원한 생명의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면서 그 은혜를 세상에 끼치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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