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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적 경험에서 본 혼전 성관계 
 
 

인디애나에 Grace Theological Seminary라는 곳이 있다.  독일계 재세례파의 후예들이지만 칼빈주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신학적으로 세대주의를 지향하는 독특한 교단이었다.  아카데미 한 것에 치중하기 보다는 철저하게 현장중심의 실천신학 중심의 신학이었고 교수들은 너무나 인격적이었으며 학생을 사랑하는 태도에 있어서 탁월하였다.  이곳에서 통역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중, 혼전 성관계에 대한 강의가 인상이 깊어 소개하고자 한다.

성경에는 혼전 성관계에 대해서 명시적으로 다룬 곳이 거의 없다. 그러나 간음을 혼인의 언약 밖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성적 행위라고 규정한다면, 우리는 혼전 성관계 역시 명백한 간음 행위로 간주하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혼전 성관계를 그렇게 나쁜 행위로 보는데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이라면, 특히 결혼을 앞둔 사이라면 허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전자의 생각은 사랑 앞에서는 절대적인 예외가 없다고 보는데 대단히 위험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현대 신학은 대체적으로 사랑을 하나님을 본질로 설명하면서 정의의 하나님을 부차적으로 만드는데 개혁주의 신학은 한 번도 정의의 하나님 혹은 법의 하나님을 부차적으로 다룬 적이 없다.

Soto 교수는 결혼 상담을 15년간 해 온, 결혼 상담의 베테랑이었다. 그에게 혼인 생활에 문제가 있어서 이혼을 염두에 두고 상담하기 위해 온 사람이 많이 있었는데, 그들이 오면 Soto 교수는 제일 처음에 이 질문을 똑 같이 던졌다고 하는데, 놀라웁게 15년 동안 상담을 해온 모든 사람들의 대답이 한결같이 Yes였다. 그 질문은 바로 혼인 전에 성관계를 한 적이 있는가였다.

이 상담 결과에 근거하여 Soto 교수는 다음과 같은 점을 분명히 하였다. 1. 혼전 성관계는 상대방의 신뢰를 깨뜨린다.  2.  혼전 성관계로 깨드려진 신뢰를 잘 회복이 되지 않는다. 3. 부부간의 성생활에 만족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성의 만족은 서로간의 신뢰감에 의해서 증진되기 때문이다. 성생활의 불만족으로 자연스럽게 부부간의 불화로 이어진다.

많은 사람들이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것은 사랑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Soto 교수의 상담 결과는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더 맞을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서로간의 사랑의 행위는 일시적으로 육체적인 기쁨을 줄 수 있을 지 모르지만, 그것이 언약 밖에 있을 때는 그 사랑의 행위는 오히려 혼인을 파괴하는 무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상담 결과에 근거하여 Soto 교수는 젊은이들이 주례를 부탁할 때, 제일 먼저 그들에게 성관계를 가진 적이 있는가라고 묻는다고 한다. 만약 없다면 혼인식 전까지 성관계를 하지 않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면 철저히 회개하게 한 후 6개월 동안 교육을 받게 하는데 그 기간 동안 성관계를 하지 않을 것을 엄숙하게 맹세하게 한다고 한다. 만약 이를 어길 때에는 그 시점으로부터 혼인식을 6개월 연장시킨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속도위반"한 선배를 알고 있다. 그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는데 결혼식 이후 몇개월 되지 않아 출산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 선배도 누구나 생각하기에 착한 신앙인이었고 자매도 아주 신실한 자매였다. 아니다 다를까? 얼마전에 들려 온 소식에 의하면, 선배는 다른 여자가 생겼고 이혼하기 위해서 이혼에 동의하지 않는 자매에게 상습적으로 폭행을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더욱 화가 나는 것은, 이들의 결혼식 적에, 교회나 그를 아는 형제 자매가 그들의 혼전 관계를 문제 삼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떤 권징이나 죄의 고백없이 혼인식은 모두의 축하 속에서 이루어졌다.  이제라도 목사는 젊은이들에게 혼인의 신성함을 잘 가르쳐야 할 준비를 해야 한다.

고전 13장을 보자.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혼인식 전까지 참지 못하는 사람이 평생 자기 아내가 될 사람을 혹은 남편이 될 사람을 신실하게 사랑할 수 있을까? 이 점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혼전 성관계를 심각하게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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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연합과 에큐메니칼 운동(WCC)에 대한 소고


 

김영재 교수(합동신학원)

 

 

시작하는 말

 

2013년 세계기독교연합회(WCC)가 한국에서 개최되는 일을 앞두고 한국기독교협의회(KNCC)가 거기에 속하지 않은 회원 교회에 동참을 권유하며 협조를 요청하고 있어서, 이러한 요청에 한국 교계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논의를 거듭하고 있다.

현재 한국기독교협의회에 속한 교단 교회는 기독교 장로회(기장), 예수교 장로회(통합), 기독교 감리회, 성공회, 구세군, 복음교회, 정교회, 순복음교회(기독교하나님의성회)의 8개 교단이다.

KNCC와 양립하는 교회 연합 조직으로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있다. 거기에는 보수적인 장로교회를 비롯하여 보수적인 복음주의 교회들이 속해 있으나, 통합측 장로교단과 기독교하나님의성회가 양 기관에 다 회원이 되어 있으므로 한기총이 WCC에 반대하는 기관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한국 교회 여러 교단을 상대로 한 여론 조사에서는 WCC에 대한 찬반의 의견이 거의 반반이었다. 그것은 KNCC에 속하지 않은 교회 사람들 가운데서도 찬성하는 사람들이 상당 수가 된다는 뜻이다. 보수적인 교회 교단 사람들도 꽤 많은 사람들이 찬성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교회 연합의 명분이 따르기 때문일 것이다.

교회가 하나 되는 것은 주 예수께서 소원하시고 명하신 것이며, 사도 바울도 교회에 관하여 말씀할 때 간곡이 부탁하는 것이다. 반면에 교회가 하나이기를 힘쓰라는 말씀에도 불구하고 WCC를 반대하는 이들은 무엇 때문에, 무슨 명분으로 반대하는 것인지 알아야 할 것이다.

 

1. 역사 속에 나타난 교회의 분열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단으로 정죄 받은 교회들이 분립하는 경우들이 더러 있었다. 1054년 콘스탄티노플을 중심하는 동방교회와 로마를 중심하는 서방교회로 크게 둘로 분열하였다. 교회가 동방과 서방으로 나누진 원인은 언어, 문화, 역사적 배경의 차이가 너무 커서 더 이상 하나로 싸맬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양 교회는 15세기에도 하나가 되려고 회의를 열어 노력하기도 하였다.

동방과 서방의 교회가 각기 유지해 오던 중, 16세기 종교개혁이 여러 지역에서 일어나면서 서방 교회는 여러 교파와 국민 교회들로 분열하게 되었다. 종교개혁의 교회들이 각 나라 사람들이 자기 나라 말로 성경을 읽고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예배를 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분열된 것이다.

중세 가톨릭교회는 사람들이 알아듣든 말든 라티어로 예배하고 성경도 라틴어 성경만 허용하였다. 그러한 처사는 교회를 하나로 유지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으나 사람들은 무지에 내버려둠을 당하였으며, 그럼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부패하게 된 것이다. 로마 가톨릭과 종교개혁 교회는 서로 다시 연합해 보려고 더러 시도하였으나 그럴 때마다 교황주의 및 사제주의와 성찬에 대한 이해의 차이를 재확인할 뿐이었다.

개신교 교회들이 다시 연합해야 하겠다고 생각을 강하게 갖게 된 것은 19세기 후반부터였다. 18세기 말에 일어난 경건주의 운동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부흥이 교파를 초월하여 확산 되고, 교회들이 교파를 초월하여 부흥에 참여하면서부터이다. 특히 아직 교회 전통이 없는 선교지에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은 누구보다 더 교회 연합에 대한 이상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교파를 초월한 선교회들이 서게 되었으며, 선교지에서 선교사들이 하나의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는 일도 있었다.

선교사들이 전하는 복음, 예수 그리스도, 회개, 중생, 새 사람으로 사는 일 등의 교리는 실은 모든 교파 교회들이 갖고 있는 공통적인 신앙이다. 분수를 두고 말하자면 공통분모인 셈이다. 그래서 교회 연합의 이상을 가지게 된 것이다.

많은 선교 단체들이 교회 연합을 모색한 결과 드디어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제1회 WCC 총회가 열렸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의 세계에는 복음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고 자유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많이 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자유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수가 더 많아졌다. 그리고 이런 자유주의 신앙을 가진 이들이 교회 연합에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그것이 WCC가 출발할 때부터 안게 된 문제였다.

자유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순전한 마음으로 믿고 받아들이지 않으며, 전통적인 신앙고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시인하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요, 참 사람이시라고 고백하지도 않으면서 기독교의 종교적 가치는 인정하고 윤리적인 교훈 만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이다.

 

2. 1950년대의 한국 교회와 WCC

 

한국에서는 WCC가 있기 이전, 즉 1924년 9월에 한국기독교협의회가 결성되어 복음을 공동으로 증언하는 일에 힘을 썼다. 1930년대 이후 신사참배의 시련을 당하면서부터는 그 기능을 다하지 못했으나 해방을 맞이한 이듬해 1946년 10월 9일 제1회 한국기독교연합회총회를 열었다.

거기서 KNCC는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리는 세계기독교연합회 창립총회에 장로교회의 김관식 목사와 엄요섭 목사, 감리교회의 변홍규 목사를 파견하여 참석케 하였다. 진보적인 기장측은 처음부터 WCC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KNCC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여 왔다. 하지만 1950년대 중반에만 하더라도 WCC의 정체가 어떤 것인지 관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한국의 보수적인 장로교회를 주도해 오고 개혁주의 신학의 기초를 공고히 한 분이 조직신학자 박형룡 목사님과 성경신학자 박윤선 목사님이다. WCC에 대하여 제일 먼저 경종을 울린 이는 박윤선 목사님이다. 이미 1950년 고려신학교에 재직할 때였다. 그는 ‘한국 교회는 어디로?’라는 소책자를 발간하여 WCC에 반대하는 견해를 다음과 같이 선명하게 밝힌 바 있다.

 

“우리 장로회는 세계기독교연합회(World Council of Churches)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회에 참가하고 있는 것이 우리 장로교 교리에 대한 위반인 것입니다. 그 이유는 위의 세계기독교연합회의 움직임이 전통적인 정통주의 그대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정통주의가 아닌 사실은 누구나 다 인정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장로교회더러 그 옳지 않은 회(세계기독교연합회)와 보조를 같이 하며 합류하라고 가르치는 분들도 그것을 자증하고 있습니다.

세계기독교연합회에는 신신학자(新神學者), 위기신학자, 사회복음주의자 등이 그 주동 인물이 되어 있습니다. 그 회의 주요한 목적은 세계 교회의 사교를 위한 것이라기보다, 세계 교회의 진로(進路)를 교도(敎導)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이미 암스테르담 회의에서 결정한 것입니다.

그들은 급속히 처음부터 각 교파의 교리를 그들의 그릇된 주장대로 통일하려는 행동은 취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계적으로 먼저 교회 실권(교회 정치력, 다대한 사람 수 내지 국가의 권력) 잡기를 노력하는 듯이 보입니다. 그들은 이런 실권을 잡은 후에 그것으로 세계 교회를 장악하려 합니다. 사태가 결국 그렇게 되는 때에는 세계 교회의 각 교파는 성경과 교리에 의거하여 행동을 취하지 못하고 그런 세계 교회 운동의 실권에게 포로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박형룡 목사님은 그 이후 8년이 지난 1958년 초 “신학지남”에 ‘에큐메니칼 운동의 교리와 목적’이란 글을 씀으로써 그의 견해를 밝혔다. 그의 글은 장로교회뿐 아니라 다를 교파 교회에도 WCC의 정체를 관망하던 사람들에게 각자의 견해에 따라 헤쳐 모여 하는 신호탄이 되었다.

박형룡 교수는 글을 맺는말에서 우리 교회는 결코 자유주의자들이 주도하는 에큐메니칼 운동에 순응할 수 없으며 교회 합동과 단일 교회를 바라보는 목적에 찬동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자신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 대한예수교장로회는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WCC 총회에 남한 총회의 대표가 가서 참여하고 그 후 WCC의 지부인 대한기독교연합회(NCC)의 일원이 되어 오므로 이 에큐메니칼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칼빈주의 개혁파 장로교회의 전통적 복음주의 신앙을 충실히 보수하여 오는 입장에 있으니 이 WCC 에큐메니칼 운동에 방심하고 무조건 참여할 수 없는 형편이다. 우리 교회는 결코 이 에큐메니칼 운동의 자유주의 지도에 순응할 수 없으며 교회합동 단일 교회를 바라보는 목적에 찬동할 수 없다.

1957년 제42회 총회는 에큐메니칼 연구위원회의 보고에 의하여 우리 교회는 이 운동의 교회친선과 사업협동에만 참여하고 교파합동에는 반대한다는 결의를 지었다. 이것은 상술(上述)의 대책에 적응하는 결의라 할 수 있으니 우리 교회는 세계적 교회친선의 중요함을 생각하여 이 운동에 참여하나 교리상 경계와 비타협의 태도를 취할 것이며, 장차 어떤 날 교파합동의 계획이 구체화할 때는 이 운동으로부터 단연 탈퇴할 것이다.”

 

그 당시 한국 장로교회는 세 교단으로 나뉘어 있었다. 한국 장로교회는 1952년에 분립한 고신측과 1953년에 분립한 기장측이 있었다. 그리고 1959년에 총회측이 WCC 회원으로 잔류하기를 찬성하는 통합측(연동측)과 반대하는 합동측(승동측)으로 분열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박윤선 목사와 박형룡 목사의 정보가 정확했으며 그 운동의 진로에 대한 예측은 적중했는가?

 

3. WCC의 역정(歷程)

 

WCC는 제1차 총회 때부터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교회는 정치적 및 사회적인 이념을 초월해야 한다면서 공산주의를 용납하였다. 그리고 교회가 하나 되는 데 걸림돌이 되는 교리나 신앙고백은 덮어두기로 했다.

제2차 총회에서도 일치된 선교의 공동체가 되기 위하여 각 교파와 교회의 전통과 특성을 부인하는 결단을 해야 한다고 했다. 선교도 사람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는 선교보다는 교회가 세상 속으로 들어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61년 제3차의 뉴델리 총회에는 러시아의 그리스정교의 대표들을 비롯하여 루마니아, 불가리아, 폴란드 대표들이 참가하였다. 그리고 타종교와의 대화가 제안되었으며 ‘우주적 그리스도’ 혹은 ‘익명의 그리스도인’을 강조하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1968년의 제4차 총회에서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가 강조되어 교회의 사회 참여가 첨예화되었다. 마르크스주의 등 사회학적인 통찰을 기독교 신학에 적극 수용하였으며, 불의에 대항하는 폭력을 정당하고 가능한 것으로 수용함으로써 비폭력적 혁명을 교회가 도와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였다. 해방신학의 탄생과 때를 같이한 주장이었다.

이어 1969년 3월 WCC의 주최로 제네바 근방의 까르티니(Cartigny)에서 22명의 회교도와 기독신자들이 모임을 가졌으며, 1970년부터는 본격적으로 타종교와의 대화를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기독교와 타종교의 대화국(對話局)을 신설하고 본격적으로 ‘대화의 신학’을 발전시켰다.

1975년의 제5차 나이로비 총회에는 90개국에서 대표들이 참석했으며, 로마 가톨릭, 불교, 힌두교, 이슬람, 유대교 등이 옵서버로 참석하였으며 영성의 문제를 두고 각 문화의 전통적 경건과 극단적 성령 운동의 체험, 동양의 신비주의 등 다양한 종교 요소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혼합 종교의 성격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제7차 총회는 1991년 2월 호주 캔버라에서 “오소서 성령이여, 만물을 새롭게 하소서”라는 주제로 개최되었고 온 지구를 구원하는데 성령 현존의 중요성 또는 영성의 중요성을 언급하였다. 한국인 참가자 정현경은 성령의 강림을 부르느라 무당의 강신굿도 행하였다. 이처럼 종교다원주의와 혼합종교에 문을 활짝 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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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성한 예배를 향하여

 

개혁주의 예배관 / 개혁주의를 말하다

이성호 교수

 

1. 서론: 예배의 대상이신 삼위 하나님

예배의 현장에는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과 예배를 드리는 그의 백성이 존재한다. 둘 중에 누가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당연히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예배를 받으시는 분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 온전한 예배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오늘날 예배에 관한 논의에 있어서 예배를 받는 분에 대한 논의는 진지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마치 예배를 받는 분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배를 받는 분에 대한 논의가 없으니 예배학이 하나의 인간학이 되어 버린다. 예배학이 범주 상 신학에 속한다면 예배의 주된 관심사도 예배를 받는 분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예배와 나쁜 예배를 나누는 기준도 내가 얼마나 예배 속에서 은혜를 받았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나 나의 예배를 기쁘게 받으셨는가?”가 되어야 한다. 또한 예배학에 있어서 핵심 질문도 우리가 어떻게 예배를 드릴 것인가?”가 아니라 하나님은 어떤 예배를 받으시는가?”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예배의 대상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시다.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를 거짓 종교와 구분 짓는 핵심교리이다. 이 교리가 이해하기 힘든 교리라고 해서 아예 제쳐 놓아서는 안 된다. 비록 이해하고 설명하기는 힘들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체험할 수는 있기 때문이다. 예배는 그것을 가장 분명하고 확실하게 체험할 수 있는 현장이다. 예배의 부름 속에서 삼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당신이 베푸신 잔치로 초대하시고, 우리는 송영을 통하여 그 분의 이름을 영화롭게 한다; 삼위 하나님은 설교를 통하여 당신의 백성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는 그 분에게 찬송과 기도로 응답한다; 삼위 하나님은 성찬 속에서 굶주리고 배고픈 우리의 영혼에게 참된 양식과 음료를 주시고 우리는 믿음으로 그 양식을 받아 먹는다; 삼위 하나님은 축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우리는 아멘으로 화답한다. 예배를 이렇게 이해한다면 예배는 왕이신 삼위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이 함께 누리는 언약적 친교(covenantal communion)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신학과 예배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 제1문은 사람의 제일된 목적에 대해서 질문한다. 여기에 대한 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고신교회의 진정한 고백이라면 예배는 교회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심에 위치한다. 참된 예배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소교리문답이 가장 첫 질문에서 예배가 신자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심이라는 것을 두드러지게 교회에 선포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교리문답은 교리 그 자체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교리 혹은 신학은 예배를 위해서 존재한다.

 

신학과 예배는 분리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예배가 신학이고, 신학이 예배라고 할 수 있다. 신학을 테오로기아(theologia)라고 하는데, 이것은 하나님(theos)’(logos)’의 합성어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말혹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로 번역될 수 있다. 신학을 이렇게 정의한다면 예배야 말로 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예배 속에서 하나님은 설교를 통해서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시고, 그 말씀을 들은 백성이 하나님께 기도와 찬송으로 응답하기 때문이다. 굳이 차이가 있다면, 신학은 이성적인 성격이 강하다면 예배는 경험적 혹은 체험적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신학적 작업을 통하여, 우리는 보다 분명하고 풍성한 이해를 가지고 예배에 임하게 되고, 그 예배의 결과 우리가 고백하고 있는 신학에 대하여 보다 굳건한 확신을 얻게 된다.

 

예배가 본질적으로 체험적이기 때문에 올바른 신학적 작업이 없다면 원래의 순수성에서 벗어날 위험성을 항상 안고 있다. 이것은 성경 자체가 그렇게 증거하고 있고, 교회 역사 속에서도 입증되어 왔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 숭배의 늪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못하였으며, 신약 이후의 교회에서도 순수한 예배 속에 세속적인 누룩이 항상 침투해 들어 왔다. 중세 로마 교회가 교리적으로 타락했을 때, 문제는 교리에서만 끝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예배의 타락으로 이어졌다. 만약 교리 자체만이 신*구교 사이에 문제였다면 종교개혁은 단지 교리의 개혁으로 끝났을 것이고 교회의 분열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개혁파 교회가 출현하게 된 결정적이 이유는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하고 싶은 거룩한 열정 때문이었다. 그 결과 이전의 예배 형식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예배가 교회에서 드려지게 되었고, 참 성도는 그 예배 안에서 참 자유와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3. ‘오직 성경과 예배

 

일반적으로 종교개혁 당시 카톨릭과 개신교의 근본적인 교리의 차이를 이신칭의에서 찾는 경우가 많다. 어떤 이들은 성찬에서 찾기도 한다. 처음에는 그렇게 보였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두 그룹의 본질적인 차이는 권위에 관한 것이 분명해졌다. 개신교의 교리가 맞는지 아니면 로마교회의 교리가 맞는지 그것을 결정할 수 있는 최종 권위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어떠한 사소한 교리적 문제도 해결될 수가 없었다. 두 그룹이 결국 하나가 되지 못한 이유는 바로 이 최종 권위에 대한 생각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이 두 그룹은 모두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들였으나 카톨릭은 성경의 충분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교회의 전통을 성경과 동일한 권위로 인정하였다. 반대로 개신교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충분하며, 모든 종교적 논쟁에 있어서 최종적 권위를 가진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는데, 언뜻 보면 별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이 원리 때문에 두 교회가 결국 분리의 길을 걷게 되었다.

 

오직 성경은 특별히 예배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개혁교회는 이전에 전통의 이름으로 관습화되어 왔던 예전들을 비평적으로 검토하여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나거나 부족한 것이 있으면 철저하게 개혁을 하기를 원하였다. 그리하여 개혁교회의 예배는 철저하게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한 예배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개혁교회의 예배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성경에 충실한 예배라고 할 수 있겠다. 개혁교회의 역사는 바로 이 예배를 교회 안에 올바르게 정착시키기 위한 긴 투쟁의 역사였다.

 

4. 규범적 원칙(Regulative Principle): 개혁교회 예배원리의 독특성

 

오직 성경의 원칙을 교회에 구체적으로 적용시키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았다. 특히 이것은 예배의 경우에 더욱 그러하였다. 개신교 교회가 모두 오직 성경의 원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각 교파들 사이에 예배는 다양성이라는 말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할 정도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루터파와 개혁파의 예배가 다르고, 개혁파와 재세례파 사이에도 큰 차이가 있다. 이 말은 오직 성경이라는 원칙을 각 교파마다 달리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루터파의 경우 성경의 명시적인 가르침과 충돌하지 않는 한 성경이 허용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 결과 루터파는 성경의 가르침과 상충하는 로마교회의 화체설은 거부하였지만 로마 교회의 성만찬 예식은 거의 그대로 받아들였다. 한편 재세례파의 경우에는 성경이 직접적으로 명령한 것만을 받아들였다. 따라서 성경에서 직접적이고 명시적인 가르침이 없는 유아세례는 예배에 있어서 거부되었다. 반면, 개혁파는 성경이 명시적으로 명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성경의 전체 가르침과 조화를 이루고,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추론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필연적이고 선하다면 성경의 가르침으로 인정하였다. 유아세례는 성경 전체의 가르침, 특히 언약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과 너무나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예배에 대한 논쟁은 영국교회에서 보다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영국교회의 교권주의자들은 예배의 일치는 교회의 일치를 위해서 필수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영국교회는 영국 안의 모든 교회들이 따라야 할 공동 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를 작성하였다. 이름과 달리 이 책 속에는 기도에 관한 가르침뿐만 아니라 예배에 필요한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이 책은 예배 형식에 관한 세세한 규정을 담고 있는데 영국교회의 머리라고 불린 영국 왕들은 모든 영국교회 회원들이 이 책의 규정에 따라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엄하게 명하였다.

 

공동기도서는 내용에 있어서 로마교회의 반성경적 혹은 비성경적 예배를 배척하였고, 심지어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대륙의 개혁교회의 영향을 많이 반영하기도 하였지만, 보다 더 철저하게 예배가 개혁되기를 원하였던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 이들은 청교도라고 불렸는데, 그들에게 있어서 공동기도서의 가장 큰 문제는 개 교회의 자유가 박탈당하였다는 사실에 있었다. 청교도는 성경이 명시적으로 규정한 것만이 신자의 양심을 구속할 수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은 개 교회의 자유에 맡겨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을 전문적인 용어로 규범적 원칙이라고 하는데, ‘오직 성경이라는 종교개혁의 모토가 예배의 영역에 적용된 것이다.

 

예를 들어 성직자가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는가와 같은 문제는 성경에서 침묵하고 있는 비본질적인 영역(아디아포라)이기 때문에 청교도들은 각 교회가 알아서 판단할 문제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각 교회에 주신 자유의 영역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침범할 수 없다고 보았다. 반면 영국교회 지도자들은 각 교회에 그와 같은 자유가 주어지게 되면 교회의 가시적 일치가 상실되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기 때문에 성경과 명백히 상충하지 않는 한 비본질적인 문제는 교회의 지도자, 보다 구체적으로 주교회의에 의해 결정되어 통일성 있게 실천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렇게 예배에 대한 이해가 달랐기 때문에 청교도들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위해 오랫동안 투쟁을 하였고 마침내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의 예배모범에서 그 결실을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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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서강해
 
넘치도록 풍성한 은혜 (디모데전서 1:12-17)

Exceedingly Abundant Grace

 

1. 은혜 이전 (Before Grace)

* 비방자 박해자 폭행자

(Blasphemer/ persecutor/ violent aggressor)

* 무지 때문에 범죄(레 5:15-19)

(Because of ignorance)

* 율법주의 도표

(Diagram of Legalism)

 

2. 은혜 이후 (After Grace)

* 긍휼과 은혜 (Mercy and grace)

* 은혜의 파문 (The ripple of grace)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을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15-16).

* 죄인의 괴수 (Chief of sinners)

* 은혜의식의 도표 (Diagram of grace-consciousness)

 

3. 항상 은혜 (Always Grace)

* 겸손 (Humility) (1:15)

* 감사 (Gratitude) (1:12)

* 선포 (Propagation) (1:15)

 
디모데전서를 통해서 우리는 바울이 주님에게서 받은 은혜을 상기하며
넘치도록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라고 표현합니다.
그 은혜를 받기 전후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넘치도록 풍성한 은혜 (디모데전서 1:12-17)

1. 은혜 이전

바울은 '넘치도록 풍성한 은혜’를 고백했지만, 그것은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에 부딪힌 후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부딪히기 전 바울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13절에서 바울은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다고 했습니다.
“비방자”란 ‘신성 모독자’란 뜻입니다. 바울은 언행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도록 강요했습니다.

“박해자”는 사냥꾼이 맹수들을 사냥하듯, 교회를 사냥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살기(殺氣)와 위협이 등등(??)했습니다(행 9:1).
스데반 집사를 돌로 때려죽이는 일에 찬동했습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박해한 것은 결국 그리스도를 박해한 것이었습니다(행 9:4).

“폭행자”란 거드름을 피우는 지독한 박해자입니다.
바울은 기독교 신자들이 수치와 고통을 당할 때에 고소하게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기독교 신자들을 때려잡는 깡패였습니다.

2. 은혜 이후

바울은 주님의 긍휼과 은혜에 대해서 이렇게 감격하고 감탄했습니다.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14).
주님을 믿게 된 것이 주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고 주님을 사랑하게 된 것이 주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십니다(엡 2:4). 하나님은 은혜가 풍성하십니다(엡 2:7).
바울을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바울에게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우리 주의 은혜가...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긍휼과 은혜로 바울을 구원하실 뿐 아니라, 박해자(persecutor)를 설교자(preacher)로,
살인자(murderer)를 목회자(minister)와 선교사(missionary)로 바꾸셨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변화시키신 것은 너무도 전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사도들과 교인들이 바울을 받아들이는데 상당히 힘들 정도였습니다(행 9:26-31).


하나님은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맡기실 뿐 아니라,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주셨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나약한 질그릇 같은 바울이지만, 오뚝이 같은 능력을 받았습니다(고후 4:7-12).


바울은 세월이 가면 갈수록 태양보다 더 밝은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주님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을 볼 때 너무 크신 주님에 비해 너무 작은 자신을 보았습니다.


바울은 세월이 흐를수록 주님을 더 가까이 하면서 자신의 죄악을 더 깊이 보았습니다.
교만할래야 교만할 수 없는 자신의 추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주님의 긍휼과 은혜가 아니면 한시도 살 수 없는 자신을 보았습니다.
태양보다 더 밝은 주님 앞에서 바울은 “나는 죄인 중에 괴수이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바울은 죄인의 괴수인 자기까지도 구원하시는 예수님이 어떤 죄인이라도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하신다는 복음의 무한한 능력을 확신한 것입니다.

복음이 좋은 소식인 것은 하나님이 사람들을 변화시키시는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3. 항상 은혜

신앙생활은 주님의 은혜에 부딪힌 사람이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이미 앞에서 나왔지만, 바울은 항상 겸손했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더하십니다(1:15; 벧전 5:5).

바울은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했습니다(1:12). 주님의 은혜를 망강하고 불평하면 주님의 은혜에 부딪히지 않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할 때에 주님의 은혜에 부딪힙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은혜를 항상 기억하고 감사해 보십시오.
주님의 은혜에 더욱 강하게 부딪힐 것입니다(신 8:11-18).


바울은 주님의 은혜의 복음을 선포했습니다(1:15).
주님의 은혜의 복음을 자신만 간직하고 있으면 주님의 은혜에 부딪히지 않습니다.
주님의 은혜의 복음을 선포할 때 주님의 은혜의 복음에 점점 더 강하게 부딪힙니다.
우리는 주님의 축복의 통로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 축복이 우리를 통해서 계속 흘러갑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은 정말 능력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주님이 쏟아 부어주시는 은혜에 감격하여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생활입니다.
율법에 매여 있으면, 스스로 교만하고 남을 정죄하여 남을 죽입니다.
은혜에 부딪혀 살 때는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말씀대로 살면서도 겸손하고 남에게 은혜를 전하여 남을 살립니다.


‘넘치도록 풍성한 주님의 은혜’에 부딪혀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1:17).

출처 : 총회 목회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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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사 역사적 개관


초대교회사를 통해 하나님은 초기 기독교 500년 동안 성도들의 고난과 박해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교회는박해에도 불구하고 무럭무럭 성장하여 소아시아와 유럽을 넘어 로마제국을 뒤덮었습니다. 그리하여 복음은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편만하게 전파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사에 대한 이해는 목회자나 성도들에게도 필수 입니다.
또한 초대 교회사를 모르면 이 시대와 교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초대 교회사는 교회사의 기초요 모판입니다. 초대교회는 언어적으로는 헬라어와 라틴어이고 지리적으로는 지중해 중심이며 정치적으로는 로마제국의 지배아래 있었습니다.
1.제국의 통치 아래 기독교는 고난과 박해를 받았지만 교회는 결국 고난을 이겨 냈습니다.
박해 이후 많은 이단들이 등장하여 교회는 대 혼란에 빠지게 되었지만 속사도들과 변증가들이 등장해 바른 신학을 지켜 냈습니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사 500년은 교회의 건설과 신학적 체계를 확립한 시기입니다. 초대 교회사는 펀의상 3기로 구분됩니다.
시도시대, 사도 후 시대, 니케아 공의회 시대
이 시기의 교회사적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 이후 그의 부활. 2. 오순절 성령 강림과 사도들의 전도 활동
3.속사도들의 신앙전승, 4. 로마 황제들의 박해, 5. 기독교 변증가들의 논쟁. 6. 배교자와 여러 이단들의 등장, 7. 성경의 정형 과정, 8. 수도원의 태동과 발전, 9. 기독교 공인과 국교 선언, 10. 동서로마의 분리, 11. 니케아와 예베소 공의회, 12.칼게돈 공의회를 통한 삼위일체와 기독론 교리의 체계화, 13. 아우구스티누스와 동서방교부들의 신학, 14. 사도직의 전승과 교황권의 학립, 15. 초기 기독교 선교,
사람들은 초대 교회를 정신적으로,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정신적으로는 예수님의 죽음 이후부터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우(430년)까지입니다.
정치적으로는 476년 서로마의 멸망까지입니다. 종교적으로는 예수님의 죽음 이후 590년 그레고리우스 대제의 등장까지입니다. 이 시기는 다시 사도 시대, 사도 후 시대, 니케아 공의회 시대로 구분됩니다.  사도시대는 예수님의 죽음 이후 제자들이 활동하던 초기 100년까지의 기간으로, 신약교회가 태동하고 초대 교회의 조직과 예배가 형성된 시기입니다.
사도 후 시대는 100년부터 313년 기독교가 공인되기까지의 기간입니다.
이 시기에 교회는 로마의 박해을 받았으나 초기 교부들과 변증가들의 헌신을 통해 사도적 전통을 지켜 냈습니다. 또한 교회는 여러 이단과 분파주의 등장으로 매우 혼란했으나 정경을 채택하고 신조를 체계화함으로써 교회 제도들이 정착되었습니다.
니케아 공회 시대는 313년부터 590년 그레고리우스 대제의 등극까지로 이때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었으나 교회 내부에서 신학 논쟁들이 대거 발생했습ㄴ다.
이런 논쟁들이 공의회를 통해 정리 되면서 신학적 체계가 구체화되었습니다. 이어서 선교 운동의 확장과 수도원 운동. 동서방 교부들의 신학체계 확립 및 예배와 교회 직제의 조직화
로마 교황의 교권 강화와 교회의 발전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초대 교회의 교회 역사를 체계적으로 저술한 사람은 유세비우스입니다. 그는 교회사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는데 323년 완성된 10권의 '교회사'는 그의 대표작입니다. 유세비우스 이후 그의 교회사를 계승한 사가들이 곳곳에서 등장했습니다. 대표적인 역사가는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그는 초대 교회의 완성자로 기독교 신학 전반에 많은 저술을 남긴 목회자요 신학자요 역사가였습니다. 많은 저술 중에 기독교의 역사를 잘 정리한 '신국론'은 히포의 감도으로 있을 때 13년에 걸쳐 기록한 대작입니다. 당시 로마는 야만족의 침입으로 함락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자 모든 책임을 기도교에 떠넘겼습니다. 그런 주장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침묵했습니다.  이 같은 비판에 맞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적극적으로 기독교를 변호했습니다.
그는 신국론에서 모든 세속적문화와 사건들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재조명했습니다.
이로써 지금까지 고대 헬라인들이 갖고 있던 순환 개념 대신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단회적 사건과 획일적 역사관을 주장했습니다.
결어
초대 교회의 교리적 체계 확립은 이후 교회 역사의 산실이 되었으며
오늘날처럼 교회가 세상의 지탄의 대상이 되고 교리적으로 혼탁한 때에 교회는 초대 교회
성도들 처럼 바른 교리의 체계 확립에 힘써야 할 것이다.

출처 : 총회목회대학원,총회 목회대학원,개혁신학,개혁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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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신학과 그리스도

여호수아 6-8장의 언약적 의미

1.들어가는 말

여호수아서는 모세 오경의 언약과 유기적이며 점진적으로 연결되며, 아브라함의 언약이 하나님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은혜 아래 역사 속에서 성취되었음을 보여 준다.따라서 가나안 땅의 정복 및 분배조차도 여호와의 전쟁을

통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언약의 성취의 한 과정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2.여호수아서의 주제 및 특징

여호수아서의 주제는 성경 전체의 주제와 동일한 하나님의 구원이다. 즉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움에 의한 무조건적인 은혜의 결과임을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언약은

여호수아의 인도로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감으로써 비로소 성취되었다.

3. 여호수아서의 언약적 위치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애굽에서 한 민족으로 성장한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해방되어 다시

언약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것이라는 약속에 따라 이곳 가나안 동편 모압 평지까지 오게되었다(15:13-16).

모세의 후계자가 된 여호수아가 이곳에서 언약의 백성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것은

단순한 가나안 입성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언약 성취라는 큰 언약적 의미가 있다.

4. 여호수아와 그리스도

여호수아서의 메시아 사상은 우선 여호수아의 이름에서 엿볼 수 있다. 이 이름의 문자적 의미는 구원과 연관되어

있으며 호세아(13:6)와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 여호수아라는 이름은 구원자라는 의미의 헬라어 예수(예수스)

의미와 같으며 자기의 백성을 구원하고 부요하게 하기 위해 오신 메시아의 다른 호칭이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였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믿는 자를 하나님 나라의 안식으로

인도하신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중재자이었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믿는 자들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여리고성을 바치라(6장 원문강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점령한 역사적 사실은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 아브라함의 언약이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즉 아브라함의 후손이 애굽에 내려간 후

사대 만에 가나안 땅으로 다시 올라오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을 하나님께서 이루고 계심을 보여 준다.

둘째, 여리고 성 주위를 도는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그 성을 무너지게 하신 것은 이미 그 성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음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여호수아서 전체적인 내용은 요단을 건너라(1-4), 가나안 땅을 취하라(5-12),가나안 땅을 분배하라

(13-21), 그리고 여호만 섬기라(22-24)는 네 부분으로 요약된다.

여호수아서의 내용은 단순한 한 민족의 역사가 아니라 성경 전체의 주제인 언약의 역사 곧 하나님의 구원 역사

가운데 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언약사인 것이다.

결론

여호수아를 통해 낭독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축복 및 저주의 형태로 역사 속에서 반드시 성취될 언약이었다.

즉 신명기 27장의 에발산을 향한 저주 선포는 역사 속에서 반드시 성취될 하나님의 언약이었다. 이 축복과 저주의

선언대로 이스라엘 백성은 훗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축복을 받기도 했으나 불순종함으로 심판을 받아

이방인에게 사로잡혀 가서 저주를 받았다. 마침내 축복과 저주의 언약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를 믿는 자의 축복 및 그리스도 예수를 믿지 않는 자에 대한 저주로 역사 속에서 성취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의 여리고 및 아이 성 점령은, 가나안 거민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며 동시에 노아의 언약 및

아브라함의 언약을 역사 속에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언약 성취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십자가 사역 이후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영적 이스라엘이며 아브라함 자손이

됨으로써 이방인과 이스라엘의 구분이 사라졌다. 구약의 축복과 저주 선언은 오늘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구원과 영생이,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에게는 저주와 심찬이 선언되는 모형과 그림자이다.

출처 : 총회목회대학원,총회 목회대학원,개혁신학,개혁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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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의 원리들

Reformation Principles

John Murray(1898-1975) / 서문 강 역

이 내용은 1953년에 런던의 Evangelical Library의 연례 강좌에서 연설한 것이다.

  

머레이는 1898년 스코틀랜드 서덜랜드(Sutherland) 지방의 크레이크(Creich)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청교도 신앙의 가정에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통해 엄격한 신앙 교육을 받고 자랐다. 대학을 진학하기 위하여 스코틀랜드의 교육 도시인 글라스고우로 옮겨 가서 그곳에서 1919년부터 1923년까지 석사학위(M.A.)를 마쳤다. 그 이후 1924년에 프린스턴 신학교에 유학하여 당대의 유명한 워필드와 메이첸으로부터 개혁주의 신학의 깊은 영향을 받고, 고향인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에서 다시 돌아와 계속 공부하던 중 1929년에 프린스턴 신학교의 부름을 받고 조직신학자 카스퍼 핫지 교수를 돕는 강사로서 신학교와 인연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가 프린스턴에 돌아온 그 이듬해에 프린스턴은 좌경화 문제로 인해 둘로 나뉘어지게 되었고, 그 역사의 현장에 서있던 머레이는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하고 철저히 역사적 기독교를 옹호하는 존 그레샴 메이첸을 따라서, 1930년 오스왈드 앨리스(Oswald T. Allis) 그리고 R. D. 윌슨(R. D. Wilson), 코넬리우스 반틸(Cornelius Van Til) 등과 함께 필라델피아에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설립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메이첸이 설립한 정통장로교회의 목사로 안수를 받고(1937넌), 1966년 은퇴하기까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쳤고, 은퇴 이후에도 줄곧 웨스트민스터에서 강의를 하다가 1975년 사망을 하였다.

​머레이는 반틸과 더불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성경적 개혁주의 신학을 대변해주는 대표적 신학자로서, 철두철미하게 분명하고 확실한 언어로 신학을 표현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러한 신학적 입장은 그로 하여금 한번도 애매모호한 언어유희로 신학적 도전을 피해가는 비겁한 일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또한 말하기를 “가장 합당한 신앙적 교훈은 인식적인 앎뿐만이 아니라 실천적 경건을 이루는 것이라”고 하여 기독교 교육의 원리를 강조하였다.


성경 주해에 있어서 머레이의 신학적 강조는 ‘로마서 주석’에서 명백하게 드러나듯이 그리스도를 중심한 ‘구속론’에 있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되는 양자됨을 구속적인 특권의 극치로 묘사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신학과 사상을 그의 삶에 그대로 실천하였다. 주일을 철저히 거룩히 지켰으며, 말을 상당히 조심스럽게 하는 습관이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의를 주재하거나 젊은이들의 넘치는 기상을 다루는 데 있어서는 그 품위와 권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대단했다. 그의 설교는 ‘선명한 설교의 모델’이 되었고, 스코틀랜드 칼빈주의자의 주목할만한 ‘언어 사용’을 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렇게 학문과 함께 경건을 겸비했던 존 머레이 교수는 구프린스턴과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찰스 핫지-워필드-메이첸으로 이어지는 미국 장로교의 청교도 개혁주의 신학의 맥을 잇는 탁월한 조직신학자로서 길이 남아 뒤를 따르는 후배들에게 좋은 귀감으로 자리잡고 있다. 머레이가 남긴 저술들은 그가 살았던 시대뿐만이 아니라 지금도 탁월한 신학서적으로 인정되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기독교 윤리를 다룬 『그의 행동 원리(His Conduct of Condect)』, 『로마서 주석(Commentary on the Epistle to the Romans(2 vols., 1959, 1965)』, 그리고 그의 독특한 구속관이 제시된 『구속론(Redemption-Accomplished and Applied, 1955)』은 지금도 신학생들에게 널리 사용되어지고 있다.

   

우리가 16세기와 17세기의 프로테스탄트 문헌을 읽어보면, 로마교회를 논쟁의 상대로 삼은 논박(論駁, polemic)의 구조가 매우 광범위하게 틀을 잡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 시기의 성경주해적인 문헌도 로마교회의 입장을 언급하는 진술들이 가득 배어 있습니다. 그런 쟁론을 담은 주해들의 경우에도 그런 프로테스탄트적 성경 해석자들의 사상과 관심에서 아주 멀리 벗어나는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시대가 지나고 난 후 세기들에 두드러진 변화가 보입니다. 그렇다고 로마교회의 주장을 반박하는 분위기가 완전하게 사라졌다는 것도 아니고 그런 로마교회를 상대한 쟁론이 전혀 쓸모없게 되었다는 말도 아닙니다. 다만 강조점의 변화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19세기와 20세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알아보려면 해답을 찾기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프로테스탄트 진영 안에 여러 세력들이 각축을 벌이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세력들은 본질상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대항하여 저항하였던 세력들로서 정통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잉글랜드에서 이신론(deism, 자연신론) 운동, 프랑스와 독일에서도 그와 동류라 할 수 있는 운동들이 일어났습니다.

 

이 이신론적 운동은 기독교를 본성적 이성(natural reason)의 수준으로 하락시킨 운동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복음이 복음적인 열정을 결핍한 생명 없는 도덕주의로 보이는 경향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 관점이 프로테스탄트의 전체 운동에 광범한 영향을 미쳤고, 역사와 신학의 재구성과 가장 친밀한 논리적 함수관계를 가지고 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19세기에 절정에 이릅니다. 슐라이마허(Schleiermacher)와 릿츌(Ritschl)의 신학들은 바로 이러한 운동에서 파생되어 자란 것으로 밖에는 이해될 수 없습니다. 곧 이 신학들은 계몽주의(啓蒙主義, enlightenment)의, 합리주의(合理主義, rationalism)의 반작용, 또는 반감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니 보다 최근 세기의 논박들의 대상이 그에 비례하여 프로테스탄트 경내 안에서 칩거한 사상(思想) 운동들이었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이러한 갈등은 항상 상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250년 전, 또는 100년 전, 또는 50년 전에 못지않게 이 갈등을 겪어야 합니다. 기독교 논박의 형태는 시대가 지날 때 마다 바뀔 것입니다. 그 형태는 역사와 전혀 무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상대할 원수(怨讐)가 시대마다 모양은 달리 취하겠지만 그 악의 본질은 항상 그대로일 것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논박의 국면에서 16, 17세기의 개혁자들이 가졌던 열정이 덜해진 이유를 이해하기란 아주 쉽습니다. 18세기 합리주의로 말미암아 야기된 갈등에서 어느 정도까지는, 로마교회 신학자들과 비평주의 신학자들이 진리를 위해 싸우는 프로테스탄트 논객들의 적수들이라기보다는 동맹자들로 보일 수도 있었고, 사실이 그러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문해야 합니다. 우리 선조들로 하여금 서구 기독교국을 분열시킬 것을 요구하였던 사상체계와 삶의 방식에 대한 논박이 소실되어 간다 하고 그 열기가 식어지는 것이 정말 정당한 것인지 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정통 기독교가 지금도 프로테스탄티즘 내에 작용하고 있는 불신앙적 세력을 상대하여 투쟁할 근거를 제공하였고, 그 유산(遺産)을 갖추어 주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이 그 유산을 위해서 로마교회를 대항하여 저항하였던 것에 대한 이해가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후회스런 두 가지의 결과를 초대하였습니다.

 

첫째로, 로마교회와 논박할 터전을 상실한 것입니다. 로마교회는 그 문서발행과 공세적 선전(宣傳)에 결코 수동적이지 않고 아주 적극적입니다. 그리고 프로테스탄트들은 문서에 있어서도 무장되어 있지도 않고, 로마교회의 문서발행과 공세적인 능동성에 상응할 만한 공세적 활동을 보이지도 않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생각과 운명에 로마교회가 끼치는 불길한 영향을 대응할 것을 계산하고 대처하는 조처도 취하지 않고 있습니다.

 

둘째로, 로마교회의 위협에 대한 바른 경계심도 갖지 않아 정통 신앙과 삶을 위한 영적 전쟁의 전선(前線) 전체를 따라 우리를 유도할 전망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프로테스탄티즘 내에 있는 파괴적인 세력들을 대항하여 벌이는 논쟁은 근본적으로 다른 기본 이슈들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때의 기본적인 이슈들은 무엇이었습니까? 저는 여기서 두 가지 이슈만 다루어 보겠습니다.

   

1. 권위(權威, Authority)

이 권위의 문제가 16세기 종교개혁의 중추적인 문제였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믿음과 실제, 특히 믿음과 예배의 문제들에서 무엇이 권위인가?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어째서 우리가 그것을 믿어야 하는가? 어떻게 예배하여 하는가? 어째서 우리가 바로 그 특별한 방식으로 예배해야 하는가? 바로 그 문제를 두고 첨예한 전투가 벌어졌었습니다. 로마교회는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無誤性)도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로마교회는 전통(傳統,혹은遺傳, tradition)과 교회의 권위도 함께 주장하였습니다. 바로 그 두 가지 사실은 다음과 같은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1) 전통의 권위와 교회의 권위는 사실상 하나입니다. 로마교회는 경건의 느낌을 존중하며 전통들을 경외합니다. 로마교회는 바로 그 전통과 경건의 느낌들은 다 그리스도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구전(口傳)으로(orally) 지시된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래서 로마교회는 성경과 동등하게 이것들을 존중합니다. 그러나 이 전통들은 ‘기록이 없는’ 전통들입니다. 로마교회는 주장하기를, 그것들이 ‘보편교회’(Catholic Church)(로마교회는 자기 교회가 바로 ‘보편교회’라고 주장하고 있다. - 역자 주) 안에서만 보전되어 전수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교회는 이러한 전통들을 보유하고 지키는 관리인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의 계승자들로서의 교회의 공적 사역자들은 이 전통을 보유하고 있는 기관(器官)들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통은 교회가 각 세대 속에서 견지되어야 하며, 그것이 교회의 살아 있는 목소리라고 주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전통에 대한 이 관점이 얼마나 느슨하고 편리하게 변형될 수 있는지를 여기서 간파해야 합니다. 새로운 교의(敎義)와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새로운 규례가 ‘전통’이라고 주장되면서 권위 있게 선포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에 대한 좋은 예로 1854년에 반포된 마리아 무염시태설(無染始胎說, Immaculate Conception), 1870년의 교황 무오설, 1950년의 동정녀 마리아 몽소승천설((蒙召昇天設, Assumption of Virgin) 등입니다. 이런 모든 일들은 성직자단을 교회로 보고, 그 교회의 중심은 로마 감독이라고 보는 교회관에 입각하여 교회가 하나님의 살아있는 음성이라는 입장을 반영한 것입니다.


(2) 성경은 교회가 해석하여야 하며, 성경이 무엇을 의미하고 말하고 있는 것을 해석하는 권위는 교회에 있다고 그들은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본질을 들여야 보면 로마교회의 최종적인 권위는 교회이며, 이는 로마교회의 성직자단의 꼭대기에 교황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870년에 교황 무오성의 교의가 반포된 일은 바로 이런 식으로 권위 사상을 발전시킨 결과였습니다.

 

이는 어떤 일을 함축하고 있습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이는 결국 인간들의 양심은 인간들의 지시와 인간들이 세운 법령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식입니다. 그것은 우리 종교의 근본적인 성격과 예배, 그리고 권위의 원리를 표현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는 삶에 거의 어떤 차이도 가져 오지 못합니다. 만일 사상과 믿음과 양심과 삶과 행실이 궁극적으로 인간의 권위나 인간이 작성한 어떤 실체에 부복한다면, 그것은 상대적으로 이 권위를 주장하는 형태가 무엇이냐에 상관없이 아무런 차이를 가져오지 못합니다. 그것이 교황의 권위를 내세워 역설되든지 아니면 모든 교회 성직자단 전체가 하나가 되어 압력을 행하사여 나온 것이든지 간에, 아니면 신자들이 합동하여 나온 자기들의 소견(所見)들을 종합한 것이든지 간에, 아니면 사회(社會)가 원하는 뜻이라는 식으로 나온 것이든지 간에, 그것도 아니고 최대 다수의 최다 선(善)으로 추정된다는 식으로 주장된 것이든지 간에, 그것도 아니고 정치 지도자의 뜻이라는 형태로 주장되든, 개인의 양심이나 뜻의 차원으로 주장되든 간에, 결과는 항상 동일합니다. - ‘자기가 자기를 다스리는 정부’(self- government)의 속박과 노예와 폭군적 행태에 불과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양심의 자유를 정말 대단히 존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한 것은 옳았습니다. 양심의 자유는 기독교의 자유, 곧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상관됩니다. 그러나 양심의 자유만 고집하게 되면 비열한 노예 제도처럼 사람을 속박하게 됩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Westminster Assembly)의 신실한 총대들이 양심의 문제에 관하여 정말 고상하고 정말 정확하고 진술한 여러 문장들 중 하나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제 20 장 2항을 들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 양심을 인간들의 교리들과 명령들에 매이지 않고 자유하게 해 놓으셨다(God ····· hath left it from the doctrines and commandments of men).” 정말 정미한 진술입니다. “인간들의 교리들과 명령들에 매이지 않고 자유하게 해 놓으셨다.” 그렇게만 진술하고 말았다면 그 양심의 문제를 충분하게 말한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거기에 어떤 ‘인간의 교리들과 명령들인지’를 규정하는 어구가 부연되어 있습니다. “어떤 일에서든지 하나님의 말씀과 위배되는, 또는 믿음이나 예배의 문제들에 있어서 말씀을 벗어난(which are, in any thing, contrary to His word; or beside it, if matters of faith, or worship).” 이는 정말 중요한 부연입니다. 특히 믿음이나 예배하는 문제들에 있어서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과 위배되는 것 뿐 아니라 말씀을 벗어난 것에 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그 신앙고백이 거기서만 멈추었다 해도 충분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만일 거기서만 멈추었다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기독교적 자유와 양심의 자유에 대한 ‘대헌장’(magna charta)이 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만이 양심의 주(主)가 되신다. 하나님께서는 양심으로 하여금, 어떤 일에서든지 하나님의 말씀과 위배되거나 믿음과 예배의 문제들에 있어서 사람들의 교리들과 명령들에 매이지 않고 자유하게 해 놓으셨다.” 그것이 없으면 나머지 모두를 소극적인 부정문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을 주요한 요점은 “하나님께서만이 양심의 주가 되신다”는 적극적인 진술입니다. 양심의 자유는 본질적으로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가 아닙니다. 물론 당연한 결과와 귀추로 그렇게 되는 것이지만 말입니다. 양심의 자유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권위에 매이는 것이며, 하나님께만 속박을 당하는 것입니다. 루터(Martin Ruther)는 보름스 의회(Diet of Worms)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교황들과 공의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의 포로일 뿐입니다.”

 

종교개혁의 이슈가 그 선언 속에서 집약되었습니다. 프로테스탄티즘 자체 내에서 우리가 치러야 할 싸움에서 중심적인 이슈는 바로 그것입니다. 프로테스탄트 진영 밖에서나 안에서나 영적 전투의 전체 전선(前線)을 따라 오늘날 우리가 싸워 지켜내야 할 이슈가 바로 그것입니다. 로마교회와의 논쟁에서 그 권위의 이슈는 결코 의미를 조금도 상실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최근에 선포된 로마교회의 교의와 동정녀 마리아 몽소승천설 속에서 바로 그 이슈가 새롭게 부각된 것이 아닙니까? 그것은 성경의 최우위성, 충분성, 최종성의 문제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오직 유일한 주권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무엇 보다 먼저 종교개혁 시대에 그것을 주도한 영혼들의 활동 영역 속에서 추구되었고 승리를 거두었던 바로 위대한 이슈에 대한 이해와 평가로부터 우리가 끌어내는 전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 문제가 결코 학문적인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루터는 그 이슈를 위하여 싸우느라고 거의 기진하여 절망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는 인간 권위의 속박에서 건짐을 받아서, 오직 성경의 굳건한 반석 위에서 해방된 자유인으로 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것이 바로 새롭게 구축된 믿음의 주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칭의’의 조항만 절박한 위기를 만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칭의의 교리가 함축하는 것과 관련하여 더 광범위한 문제는, 내가 무엇 위에 서야 하느냐?의 문제였습니다.

 

보름스에서 루터의 저항적 선언,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의 포로일 뿐입니다.”라는 선언 속에 그 더 광범위하고 깊은 문제가 요약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를 지배하는 오직 유일한 권위이며, 우리를 지시하고 우리를 판단하는 척도의 규범이 됩니다. 여러 세기들에 걸쳐서 그 문제는 가장 단순한 대칭적 반명제들로 단순화되어 ‘하나님의 주권이냐’ ‘인간의 자율이냐’로 싸우고 있지 않습니까? 인간의 자율성의 문제는 다중적인 형태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에덴동산에서 시험자가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고 유혹을 하였을 때에 인간이 맞게 최초의 갈등 영역에서 처음 등장하였던 그 도발적인 형태를 항상 속에 두고 있습니다.

   

2.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Salvation by grace)

우리는 품삯과 은혜의 선물 사이, 공로와 은혜 사이의 구분에 대하여 익숙하여 있습니다. 죄로부터의 구원이 값을 요구하지 않는 은혜로 주어진다는 사실이 죄에서 구원받는 것을 보편적으로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게 할 수 있습니다. 선물을 받는 것은 아주 쉬운 일입니다. 그 은택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우리 편에서 수고하여야 할 어떤 대가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특히 영생의 선물을 주신다하고 할 때에도 여전히 그러합니다. 그런데 복음이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놀랍고 이상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대가를 요구하지 않으시고 값없이 은혜로 구원하여 주신다는 개념을 사람들이 고맙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은혜의 구원은 인간 사고(思考)의 전체 성향과 배치되는 것입니다. 다만 사람들이 스스로 고안하여 낸 종교적인 체계들을 재고하기만 하면 금방 그 원인을 발견합니다. 사람들은 모종의 공로적인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 또는 신들의 은총을 확보한다는 개념 위에 자기들의 종교를 구축합니다. 기독교가 타락하고 왜곡되게 되면 역시 같은 노선을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 왜곡된 기독교는 항상 동일한 그러한 충동에 자리를 내 주기 마련입니다. - 사람들은 자기들의 의를 구축하기 위하여 방황하며, 하나님의 의(義)에 우리 자신을 복종시키지 않습니다. 보름스에서 루터는 말하였습니다. “이 문제는 하나님과 그 말씀에 저촉되는 문제입니다. 또한 영혼 구원의 문제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정말 의미 있게 서로 떨어지지 않게 조밀하게 하나로 짜여 져 있는 짝들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 ‘영혼의 구원’!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와 자기 영혼의 평안에 대한 이야기는 그의 자서전에서 뿐 아니라 종교개혁의 역사에서도 유명한 에피소드입니다. 금식하고 밤을 새워 기도해도 괴롭고 뒤틀린 영혼을 가진 루터의 마음과 생각은 얼마나 무서운 절망에 사로잡혔던지요! 그 일화는 아주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제가 두려워하는 것은 때로 충분하게 인식들을 하지 못하고 있는 한 가지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루터의 모든 갈등과 그 마음과 양심의 고통의 중추가 되는 것인데, 하나님의 엄위하심에 대한 깊은 이해가 그로 하여금 그런 고통에 처하게 만든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이해를 하고 나니 자기 양심의 가공스러운 가책을 이겨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로마교회가 사이비 복음적인 체계를 통해서 구체화시킨 바로 그 ‘공로 구원의 전체계’의 이면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다른 무엇보다도 한 가지의 요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위엄과 거룩에 대한 그릇된 이해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죄의 극악성의 진상을 평가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의 의(義), 특히 인간이 고안하여낸 의(義)를 하나님께 제출하면 인간의 죄책을 무마시키고 상급을 받을 근거가 될 것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은 하나님의 거룩에 대한 엄청난 모독입니다. 그 자체가 정말 깊고 극악한 불의입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입니다. 왜냐하면 그 복음에 하나님의 의(義)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사실 만큼 하나님 앞에 총애를 받아내겠다는 구실로 제출한 인간적 의(義)의 거짓됨을 통째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칭의(稱義)의 복음이 선포하는 것이 바로 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이 경우에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 고유하게 존재하는 공정을 의미하는 의가 아닙니다. 도리어 신의 성품이 배태(胚胎)된 의입니다. 그 의는 신적 속성으로서의 의가 아니라, 신적인 여러 속성들과 함께 하는 의입니다.

 

그 의는 믿음에 계시된 의입니다. 그러니 단순한 인간적인 불의와 대조되는 의(義)가 아니라 인간적 의와 대조되는 의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의와 대조되어 하나님의 의가 부각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의(義) 대신 그 자리에 인간의 의를 대체시켜 놓으면 그 자체가 가장 큰 불의가 되며, 진정 불의의 총체가 되는 셈입니다.

로마교회의 행위 종교는 복음 안에 있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중추를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 3:9)

 

만일 우리가 이러한 전망과 시각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의 복음을 분별하는 능력을 주신다면, 이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이슈를 위해서 이 시대에 다시 전투를 벌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로마교회의 체계는 하나님의 의를 대적하기 위해서 세워놓은 인간 자율성의 체계입니다. 권위의 문제에 있어서 로마교회가 하나님의 권위를 대항하여 인간의 권위를 세워 놓은 것 같이, 로마교회의 구원관은 하나님의 권위를 대항하여 자기의(自己義)의 형태로 나타난 ‘인간 자율성’의 체계입니다.

 

인간의 타락한 본성 속에는 두 성향이 깊이 뿌리 박혀 있습니다. 그 둘은 바로 율법주의와 제멋대로 하는 싶은 자율성의 성향입니다. 서로 상반되어 보이고 같은 인격 안에서 동시적으로 공존할 수 없어 보입니다. 만일 그 둘이 서로 충돌하는 것이라 인정한다 해도 그 둘이 공존할 수 없다는 논리가 형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죄가 풀어 낼 수 없이 엉켜있는 모순의 넝쿨로 그 둘을 감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오직 진정한 의미의 모순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진리와 오류사이, 옳은 것과 그릇된 것 사이,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않은 것 사이, 하나님과 죄 사이의 모순입니다.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Antinomianism)은 둘 다 잘못되었습니다. 그 둘은 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의 진수를 표현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둘은 우리의 부패한 성품 속에 함께 고착되어 있습니다. 율법주의는 은혜를 충돌하고, 반율법주의는 율법을 충돌합니다. 전자는 우리로 하여금 구원하고 구속하는 은혜의 복음을 대적하고, 후자는 하나님의 주권과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대적합니다. 이 두 악으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왜곡시키는 가장 악독한 폐해가 나옵니다. 로마교회는 이 둘을 교묘한 기술로 조합한 실례이며, 프로테스탄티즘은 자주 이러한 성향들에 굴복하지 않으려고 긴장을 가지고 싸워야하며, 동시에 16세기의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주도적 그 원리를 고수하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종교개혁 때의 쟁론(polemic)은 폐물이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있는 영혼들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로 인하여 해방된 영혼들이 있는 한 그 쟁론은 계속 될 것입니다. 로마교회가 존재합니다. 그 로마교회가 사람들의 영혼을 속박하고 있습니다. 또한 흑암을 배경삼아 영혼을 속박하는 체계를 가지고 있는 종교가 사람들에게 생명의 소망을 주겠다고 덤비고 있습니다. 로마교회가 인간적인 의를 제출하고 있습니다. 그러는 한에서는 거룩한 의분(義憤)으로 잘 조직화하고 정교화 한 그 체계를 대항하여 일어설 필요가 있습니다. 그 체계는 수백만 영혼들의 충성을 받아 내고 있는데, 기독교란 이름을 달고 있는 다른 어떤 체계로는 어느 체계로도 극복되지 않을 인간 자율성의 원리 위에 서 있는 체계입니다. 우리는 사도가 다음의 말씀을 기록할 때 가졌던 그 거룩한 분노감으로 불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 9).

 

- 진리의 깃발 116호

[출처] 종교개혁의 원리들 - 존 머레이(John Murray, 1898-1975)|작성자 바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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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가지 신학체계와 루터의 신학

1 근본주의, 복음주의,그리고 개혁주의

1.서론

우리는 근본주의, 복음주의, 그리고 개혁주의라는 용어를 자주사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용어들을 깊이 이해하고

각각의 차이점을 분명히 없이 무분별하게 사용함으로써 많은 혼란이 야기되고 있다.

2. 근본주의 역사

근본주의 운동은 192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근본주의 운동을 형성하는 주된 요소들은 그 이전부터

형성되어 있었다. 1871년 신구파의 여낳ㅂ 이후, 북장로교 안에서는 자유주의 도전이 점점 더 거세지기 시작했다.

3. 근본주의 해석

근본주의는 일반적으로, 20세기초 미국에서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반현대주의적 기독교 운동이다

근본주의란 일차적으로 미국에서 일어난 현재주의와 진화론과 자유주의에 대항해서 정통 기독교를 보수하려는

보수적인 기독교 인들의 광범위한 연합 운동이었다. 근본주의자들이 제시한 다섯가지 기본교리들 성경의 무오성,

동정녀 탄생, 대속, 부활과 재림, 이적의 역사성-은 정통 기독교 신학의 핵심 교리들임에는 틀림이 없다.

우리가 반드시 수호해야 할 교리들이다.

4. 근본주의 다른 면

근본주의 운동이 나중에는 분리적이고 전투적인 모습을 띠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이 근본주의자들의

기본적인 특성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부정적인 측면에서의 근본주의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 집단들은 아직도

존재한다. 이것은 우리가 극복해나가야 할 모습이다. 근본주의의 부정적 모습과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이미 복음주의

운동이 시작되었고, 복음주의는 21세기 기독교의 주류를 형성해나가고 있는 중이다.

복음주의

복음주의의 역사

복음주의를 예수는 그리스도시라는 복음의 중심 메시지를 믿음을오 받아들이고 성경의 무오한 신적 권위를 받아들이는 입장으로 규정한다면, 복음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에 근원을 두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볼 때 복음주의 운동은

18세기 영미 부흥운동을 그 시작으로 삼는다. 미국의 복음주의 운동은 20세기 초반의 근본주의 운동과의 관련성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근본주의 운동은 복음주의적 개신교들이 중심이 되었던 운동이였기 때문이다.

2.복음주의자의 특성

일반적으로 복음주의자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대개 복음주의란 2000년 기독교의 역사적 전통성을 보수하는 입장으로

규정하는 입장을 규정한다. 복음주의자는 성경의 신적 권위와 영감과 무오성을 믿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셨다. 또한 교회와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대사회적 책이과 봉사를 강조한다.

. 개혁주의

1.개혁주의 역사적 뿌리

스위스의 쯔빙글리와 제네바의 칼빈과 스코틀란드의 낙스 등의 종교개혁자들의 개혁사상이 개혁주의의 역사적 뿌리라고 할 수 있다. 이후 개혁파는 화란(네델란드)과 영국까지 확산된다. 유럽에서는 스코틀란드와 화란이 개혁주의 전통을

가장 충실하게 계승해왔다고 볼 수 있다. 영국의 경우, 개혁파드은 본국의 종교적 핍박을 피하여 미국으로 건너가서

새로운 종교공동체를 건설했다. 이들이 청교들이다. 청교도들의 개혁신앙은 미국 국가 정신의 기초를 이루었다.

결어

근본주의, 복음주의, 및 개혁주의와 한국교회

근본주의란 말은 일차적으로 미국 내에서 일어난 개신교 운동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현재에는 주로 부정적인 의미로

, 신학적으로 편협하고 비관용적이고 전투적이고 분리주의적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한국 교회 내의 진보주의 자들은 보수주의 자들을 향해서 무차별적으로 근본주의자라고 비난한다. 이러한 경향은 진보주의자들이 기독교 역사에 대하여 정확한 지식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개혁주의는 일정한 신학체계를 가리키는 말이고, 복음주의란 신학적 체계라기 보다는 신학적인 운동 또는 신학적인 성향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개혁주의자들은 복음주의 운동의 특성과 방향을 예의주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 개혁주의도 본래 교리적인 측면에서나 교회적인 측면에서 폭이

좁지 않다. 개혁주의의 문화 신학적 측면이 충분히 계발되면 복음주의적인 여러 특성들 중의 상당 부분을 포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개혁주의 자들은 복음주의라는 큰 흐름 안에서 개혁주의의 특성을 견지하면서 복음주의의 장점을

흡수해나감으로써, 개혁주의가 현대의 정통 기독교 운동의 주류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출처 : 총회목회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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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와 구원서정의 관계

 

성경이란 하나님이 다른 목적이 아닌 인간의 구원을 위해 주신 계시, 즉 구속계시라는 점이 가장 우선적으로

인식되어야 하며, 그 계시의 특성인 역사성-즉 그리스도에 초점을 두고 점진적으로 드러나는 구속의 역사-

반영하는 되어야 하며, 성경이 바로 그런 역사적 방법론으로 구원서정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원서정이

성경속에 어떻게 나타나는 살펴본다

 

1) 누가복음 2444-49

본문은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이다. 이 본문에는 특별한 의미가 담겨있으리라 본다

44절을 보면 예수님은 당신이 제자들과 함께 공생애 사역을 하면서 늘 당부하셨던 말씀을 상기시키시고 계신다.

다시말해 모든 것이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이루어져야 할 것, 성경이 당신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음을 자주 말씀하셨다.

46절의 기록내용은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으로써 성경이 무엇을 기록하고 있느냐는 관점에서 우리에게 친숙한 내용이며

충분이 공감이 되는 부분이다. 47절을 통해 우리가 놀랍게 받아들이게 되는 사실은 계속해서 구원의 일이 이루어질 것에 대해서도 기록할 뿐만 아니라, 그 일 또한 그리스도에 관한 기록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정리하면, 구약성경이 그리스도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고, 그것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 내용은 두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그리스도가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구원을 완성하셨다는 구속사이고, 다른 하나는 이제 그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구원의 적용사역이 계속된다는 내용이다. 신구약 성경의 통일성이 전제될 때, 성경은 구속사(구원의완성)의 일과 구원서정(구원의 적용)의 일을 서로 뗄 수 없는 유기적 관계속에서 하나의 일로써 성경관에 근거한 우리의 방법론이 설정되는 것이다.

 

2) 사도행전 21-21

누가복음에서는 대체로 복음서 전부가 그런 면을 보이는 것이 사실인데 - “성령이라는 단어의 사용이 다소 자제된 듯한 느낌을 주는 반면 사도행전에서는 서두에서부터 성령이라는 단어가 거침없이 등장한다.

2장 본문이 성령이 강림한 결과에 대해 제일 먼저 지적하는 것이 4절에서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는 거이다. 그리고 성령충만한 결과로 그들이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지작했다고 적고 있다.

구약성경을 읽다 보면 가끔 여호와의 신(성령)이 어떤 사람들에게 임했다는 기록을 보게된다. 구약은 특정한 사람에게

특정한 때에 특정한 목적을 위해 여호와의 신(성령)이 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요엘 선지자는 욜2:28절에서

만민에게 여호와의 신이 부어지는 때가 온다는 것이다.이 때 만민에는 일반이도 포함되고,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인도

포함되고, 자유자가 아닌 종도 포함됨을 뜻한다. 요엘의 선지자는 당시의 정형을 넘어서는 시대적 패러다임을 깨는,

선언이 아닐 수 없다. 구약의 정서에서 요엘의 예언은 어쩌면 신성모독으로 몰려 돌에 맞아 죽을 수도(24:16)있는

깜짝 놀랄만한 선언이 아닐 수 없다. 요엘은 시대적 종교적 정서에 맞서 앞으로 그런 때가 올 것이라는 예언의 사명을

다한 것이다. 그러면 베드로가 요엘을 인용함으로써 입증한 것이 무엇인가? 베드로는 14절에서 말한 이 일그리고 11절의 ”“하나님의 큰 일이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부터는 누구든지, 즉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육체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일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선포한 것이다. 구속사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완성을 근거로 이제

성령이 강림하시는 일까지 진행됐고, 그 결과 뭇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받는 일이 가능해 진 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루신 큰 일인 것이다.

 

3)요한 복음 737-39

요한 복음 7:37-39의 내용은 사복음서 중 요한 복음에만 등장한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 본문은

구속사와 구원서정의 관계에 대한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는 이유에서 중요하다. 본문에서 예수님의 표현이 직설적이기 보다는 매우 은유적인 화법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소 난해하다. 구원서정의 일이 시작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성취가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이 있어야 하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는 일이 먼저 진행되어야 구원서정의 일(성령이 그들에게 임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4) 요한복음 2019-23

이 보문은 우리가 관심을 갖는 구속사와 구원서정의 관계에 대한 단초를 제공하는 본문으로서 중요하다. 이 본문을 이해하는 있어 우리는 본문의 사건이 부활 이후의 시점에 일어난 사건임을 기억한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한 마디로 평화를 완성하신 사역이었던 것이다. 이제 부활 후 제자들에게 처음 나타나신 자리에서 어느 말씀에 앞서 평강이 있을 지어다샬롬하신 것은 실로 그리스도의 사역의 클라이맥스에 해당한다. 그가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의 모든 고난과 굴욕을 감당하신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와 원수 되었던 우리에게 평화를 주기 위해서 !

 

5) 결어

구원서정은 신약에서만 나타는 현상이 아니라 이미 구약이 말하고 있었고, 고대하던 일임을 확인하였다. 구속사가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끝이 아니라 성령강림까지 나아가야 하는 일이었으며 그리고 나서야 구원서정이 가능해지는 관계인 것을 보았다.

  구원론 / doctrine of salvation / salvation in christ

출처 :총회 목회대학원 / 총회 목회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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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과 신앙의 요체

오직 성경의 신학만이 성경적 신학

1.연원

개혁주의란 무엇인가 ? 자주 이 말은 칼빈주의와 동의어로 사용된다.

개혁주의는 오직 서역으로 라는 모토로 집약된다.오직 성경안에 오직 믿음,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모토가 들어 있다. 성경의 가르침에 가장 충실할 때, 그것이 가장 신학적이라고 여겼다. 그의 신학은 성경에서 시작되고 성경에서 머문다. 개혁주의는 성경의 가르침에 따른 참 신학과 참 경건함을 추구한다. 개혁주의가 보수주의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것이 고유한 기원과 근원에 충실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혁주의가 근본주의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것이 추호도 타협하지 않고 참 근본을 교회의 서고 넘어지는 조항으로서 견지해 왔기 때문이다.

2.개혁주의와 개혁신학

개혁주의에 대한 정의가 다체롭다, 최광의로 이를 이해하는 입장은 그것이 성경적 진리와 정통 신학 그리고 삶을

망라하는 개념이라고 본다. 우리가 개혁주의를 칼빈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칼빈의 사상이 이러한 하나님의 자기 세계관을 창조, 계시, 구원의 관점에서 생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칼빈은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다라는 자기부인에 기독교 철학이 가장 분면하게 새겨져 있다고 보았다.

3. 개혁주의 근본원리 하나님의 근본원리

기독교 강요에서 언약신약에 대한 칼빈의 입장이 전개되는 신구약에 관한 장들은 기독론 안에서 다루어 지고 있다.

칼빈은 구약이 그 실체에 있어서는 동일하나 경륜에 있어서 다양하다는 원리를 분명히 제시한다. 신구약 실체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가 말씀의 실체라는 측면에서 칼빈은 율법과 복음을 이해한다. 율법은 언약의 법으로 약속을 담고있고 복음은 그 약속을 성취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관한 소식을 정의한다. 밀러는 이 부분에 착안하여

칼빈과 칼빈주의의 연속성을 예정에 대한 칼빈의 기독론적 이해에서 찾았다. 존 녹스는 예정에 대한 언약신학적 입장을 전개함에 있어서 장로교의 신학적 기초를 놓았다.

4.개혁신학의 원리와 중심교리

칼빈의 신학이 그의 후예들에 의해서 칼빈주의로 수립되어 가는 과정에서 신학의 원리혹은계시의 원리라는 개념이

신학의 서론으로서 논의 되었다. 칼빈은 이러한 계시의 원리가 삼위일체론적이며 기독론적으로 이해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성부하나님은 계시의 시작 혹은 뜻이며, 성자는 계시물 즉 말씀이며, 성령은 계시의 작용이다.

5.개혁교리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참 교회에 대하여 논의하면서 종교[기독교]의 합당한 가르침을 삼위일체의 교리,기독론 교리,

전적은혜의 구원 교리를 제시하고 있다. 이 세 가지 교리에 성경의 모든 진리가 합의된다. 또한 개혁주의 전통은 몇몇교리를 중심으로 성경의 전체의 가름침을 배변하기도한다. 대표적인 사례로 도르트 신경으로부터 수립된 칼빈의 5대교리를 들을 수 있다: 전적 타락, 무조건적 선택, 제한 속죄, 불가항력의 은혜, 성도의 견인, 그리고 1910년 미국의 북장료교회가 성경과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서의 가르침으로 선포한 다섯 가지를 들을 수 있다: ”성경의 무오,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그스도의 대속,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그리스도의 기적들.” 대체로 개혁신학은 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에서 특징적으로 잘 나타나듯이 죄, 은혜, 감사,을 담고 있다.

6. 결론 : 우리가 서 있는 자리

한국교회는 칼빈과 칼빈주의자들에 의해서 수립된 개혁주의를 여러 경로를 통하여 받아들였다. 이에 대한 영향을 미친

초기 선교사들은 개혁신ᄒᆞᆨ에 대한 식견이 깊었으며 신앙 또한 그에 걸맞게 경건했다. 특히 보수적인 장로교 합동 교단은 12신조를 받으며 그 선언에서 웨스트민스트 신도게요서와, 성경 대소요리문답은 성경을 밝히 해석한 책으로 인정한 것이라고 공표함으로 신학과 신앙의 자리를 분명히 했댜.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서는 개혁주의 신학의ㅣ 윈리를 성경이라고 명명한 제 일장에서 분명히 천명한다.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완전하고 무오한 신앙과 생활의 법칙이다.성경은 살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분은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와 경륜을 역동적으로 파악하는 개혁주의 입장을 반영한다. 하나님의 주권은 신비한 예정의 교리에서 현저하게 나타나는데 예지예정론을 반대하고, 선택과 유기가 만세 전에 미리 정해졌다는 이중예정을 뚜렸이 공표한다. 이것이 전적타락 교리와 함께 천명된다.

타락한 인류는 전적으로 무능하고 부패해서 은혜가 아니면 언약의 당사자가 될 수 없다. 교회는 끝까지 붙드시는 하나님의 견인을 확신하는 성도들이 유일하신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 한 몸으로 모인 언약 공동체이다.

정통신학은 신구약 성경의 천계와 영감으로 말미암아 온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리고 우리의 신앙과 행위의 정확무오한 법칙으로 인정하는 초자연적인 성경관을 가진다고 피력하여 그 자리매김을 분명히 하였다. 그것이 개혁보수주의

신학과 신앙의 원리에 정확하게 잇대어 있다.

출처 : 총회 목회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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