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학교 선생님들을 위한 기도

 

 

 

참되신 하나님,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제자들에게 제대로

가르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고뇌하는

이 땅의 선생님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경제적으로도 넉넉하지 못하고 과다한

업무에 시달리면서도 오직 어린 제자들에게

옳은 길을 깨우쳐 주는 보람에 사는 우리의

선생님들을 기억하옵소서.

오늘 우리의 상황은 옳지 못한 것을 보고도

침묵함으로써 거짓을 강요하는 힘이 기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이 되는 길을

가르치는데 일차적 관심을 두어야 할 학교의

본래의 모습은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기술을 가르치는 데에만 너무 열심이며

어울려 사는 것을 가르치기보다는 오직

경쟁을 통하여 남 보다 앞서야 한다는 것만

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소신을 갖고 올바름과 진실을

가르치는 이 땅의 선생님들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위로하시고 용기를 더하여 주옵소서.

참된 삶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며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적인 인간이 아닌

이웃들의 아픔에 동참할 줄 아는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 힘쓰고 애쓰는

이 땅의 선생님들의 삶을 축복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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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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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기본교리] 교회론(敎會論:ECCLESIOLOGY)

 

 

 

 

대부분의 학자들은 신약성경이 씌어진 당시에 교회들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동의하지만, 신약성경의 교회의 원리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심지어 어떤 이들은 성경의 모본이 오늘날에는 "실제적"인 것이 못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교회는 어떻게 조직되는 것이며 예배는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에 대해(일반적인 원칙으로서) 신약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지침을 주셨다면 우리는 마땅히 그대로 따라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형성

신약성경에서 "교회"라고 번역되는 단어는 "불러낸 무리" 혹은 "모임"을 뜻합니다. 이 단어는 에베소에 있는 이교도들의 모임이나(행19:32) 애굽에서 불려나온 무리인 광야에 있던 이스라엘을 가리킬 때도 쓰이고 있습니다만(행7:38),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에 대해 사용되는 것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믿는 자들을 가리키는 말로서 교회는 세 가지 면에서 분명히 구별되어 사용됩니다. 이 단어는 살아있거나, 죽었거나, 혹은 아직 세상에 나지 않은 모든 사람들에 대해 사용되는데, 이 사람들은 오순절부터 휴거 때까지의 기간 중 믿었거나 믿게 될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오늘날 영어권에서 이러한 뜻으로 사용될 때 "교회"라는 단어는 지역교회와의 구분을 위해 종종 대문자(Church)로 쓰여집니다.


이 단어는 특정 시기에 이 땅에 살았던 신자들에 대해 사용됩니다(가령 "16세기 교회"처럼). 이 단어는 어떤 지역에서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함께 모여 예배하고, 기도하며, 성경을 공부하며, 전도도 하는 어떤 지역의 신자들에 대해 사용됩니다. 한 지역에 여러 개의 교회가 있는 경우에는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갈1:2), "마게도냐 교회들"(고후8:1)과 같이 복수형인 "교회들"(church)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결코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건물을 가리켜 "교회"라 부르지 않으며, 교회협회나 특정 교파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이 모두는 다 성경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 와서 만들어낸 개념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흔히 추상적인 개념이 분명하게 이해되게 마련인데, 바로 성경에는 이런 식의 설명이 가득해서 우리의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에베소서에서 우리는 교회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예를 몇 가지 보게 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엡1:22,23). 그리스도는 머리로서 하늘에 계시고, 교회는 그 몸으로서 이 땅에 있으면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12:12,13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한 건물입니다(엡2:20-22). 그리스도는 이 건물의 모퉁이 돌이시며, 이 건물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고린도전서3:9,16도 보십시오. 교회는 한 새 사람이라고 불리우고 있습니다(엡2:15). 전에 원수가 되어 서로 싸움을 벌이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부터 하나님은 한 새 사람을 만드셨는데, 이는 새 피조물이요 곧 교회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엡5:25-27, 고후11:2).여기서 교회는 사랑의 대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이것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신부인 점과 비슷하지만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신약성경의 다른 곳을 보면 교회를 나타내는 예들이 또 있는데 가령 양무리(요10:16), 하나님의 밭(고전3:9), 하나님의 집,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3:15) 등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에게는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이루어진 한 새로운 몸이 언젠가 생길 것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고 감추인 바 되었기에 성경은 교회를 가리켜 "비밀"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교회는 거룩한 비밀로서 하나님께서 신약의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통해 이제 알게 하셨다는 것입니다(엡3:4,5,9. 골1:26. 롬16:25,26). 그리스도는 마태복음16:18에서 미리 장래를 내다보시고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라"(미래 시제) 하셨고 사도행전1:5에서는 제자들에게 약속하시기를 그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도행전5:11은 교회가 현재 존재하고 있음을 말씀하고 있고, 고전12:13은 그리스도의 몸이 성령의 세례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미리 예언하신 말씀과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교회에 대한 언급(이 언급은 바울이 성령께서 모든 믿는 자들에게 세례를 주사 한 몸이 되게 하신다고 한 묘사와 부합됩니다) 사이에 오순절이 있었습니다(행2:4). 그러므로 오순절은 그리스도인의 교회가 탄생한 날입니다. 유대교의 특성 일부가 기독교에 남아있긴 하지만, 그 기원과 목적, 운명에 대해서는 이스라엘과 교회는 분명히 구별됩니다. 이렇게 상이한 두 무리를 혼동하면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들 각자에 대한 성경의 특별한 가르침 중 많은 것을 혼동하게 되며 그리하여 기독교에만 있는 은혜와 복들을 유대교의 율법주의와 함께 퇴색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믿는 자들이 모이는 각 지역교회는 우주적인 교회의 진리를 반영해야 합니다. 그 특징이라 하면 ① 하나됨(엡4:4 참된 교회는 하나 밖에 없습니다), ② 머리에 순종함(그리스도께 엡5:23, 골1:18. 같은 하나님으로서 그리스도를 대표하시는 성령님께 요14:16, 26), ③ 보편성(행2:47, 고전12:12-26 모든 믿는 자들은 이 한 몸에 속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역 교회는, 정결한 삶을 살고 심각한 과오를 계속 저지르지 않는 모든 믿는 자들을 영접해야 하는데, 이는 이들이 우주적인 교회의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④ 거룩함(고전3:17 하나님은 이 죄악된 세상으로부터 자기 백성들을 구별하셨으며 이는 전 성도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지역교회의 성도 각자는 순결하고 선한 삶을 유지함으로써 이 사실을 나타내고 또한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해드려야 합니다), ⑤ 성장(엡4:11,12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교회에게 주신 은사들로 말미암아 굳게 세워져[덕이 세워져]갑니다), ⑥ 믿는 자의 만인 제사장(벧전2:5,9 이것은 모두가 설교한다는 것이 아니며 모두가 예배하는 제사장으로서 그 역할을 감당한다는 뜻입니다) 등이 있습니다.

 

모든 신자는 믿음을 전파하는 일에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각자가 가진 은사를 통해서 하게 됩니다. 숫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우주적인 교회와 지역 교회들은 에베소서4:12,13에 그려져 있는 대로 일종의 연쇄반응에 의해 세워져 나갑니다. 은사를 주신 것은 성도를 온전케 하고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입니다. 그래서 은사 있는 인도자들은 성도들이 자라서 섬김으로 몸을 세우는 일을 하도록 애쓰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지역교회에는 각각의 은사를 발휘할 분야가 있는데, 이러한 은사를 쓰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 교회로 하여금 권리를 잃게 하는 것입니다. 국내와 해외에서 여러모로 말씀을 전파하고, 가르치고, 돕는 일을 할 때 우주적인 교회가 사도행전에서와 같이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로마까지 어떻게 전파되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행1:8).

 

신약교회가 어떻게 그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지에 대해 보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왜 교회를 만드셨는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여기에 대해 에베소서가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엡3:10,21)고 답을 주고 있습니다. 교회는 복음 전파와 그리스도로 충만된 신자들의 삶을 통해 세상 뿐만 아니라 천사들의 세계에도 하나님의 지혜를 증거하는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역교회에서 믿는 자들이 함께 모여 그분께 예배하고 찬양할 때 영광을 받으십니다. 교회가 온 세상을 다 주님께 돌아오게 하는 데 성공할 것이라는 사상은 말세에 배도가 있을 것이라는 성경의 예언과 상반되는 것입니다(딤전4:1-3,7, 딤후3장, 4:1-4, 벧후2 장, 유3,4).

 

교회의 기능

 

하나님께서 지역교회로 하여금 그분의 지혜와 은혜를 영광스럽게 증거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하시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분은 자기 성도들에게 능력과 은사, 조직, 예식, 징계, 여자들의 섬김, 재정지원 수단을 주셨습니다.
참 교회의 능력은 한 위격 안에 있습니다. 그분은 다름 아닌 성령님이십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행1:8). 교회는 기도모임 가운데 탄생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의 능력은 기도를 통해서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2:42에서 우리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고 기록된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흔히 기도모임은 교회의 여러 집회들 중에서 참석자가 가장 적지만 그리스도는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겠다고 약속하셨을 뿐만 아니라 합심기도와 연관된 특별한 약속도 주셨습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19,20).
어떤 누구도 아닌 바로 성령님이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되십니다. 공적인 사역을 결정함에 있어서나, 헌금을 적절히 분배해 사용하는 일에나, 예배와 집회를 준비함에 있어서나, 범죄한 신자를 징계함에 있어서나, 또 그 외 크고 작은 모든 일에 있어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인위적인 계획을 구상하는 것은 비교적 쉽지만 성령 하나님께 여쭙고 그분의 답을 구하는 데는 영적인 지도력이 필요합니다. 성령님의 역사를 제한하는 고정된 규제사항들을 가지고 성령을 "소멸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아담하고 질서 있게" 그리고 신약성경의 원리라는 틀 안에서 일을 처리하기만 한다면, 예배나 공중 집회, 혹은 기타 다른 부분에서 모든 지역교회가 똑같아야 될 의무는 전혀 없습니다. 은사 있는 형제들과 성경적으로 인정받는 장로들의 인도는 일의 질서를 유지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승천하실 때 사람들에게 은사를 주셨습니다.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엡4:8-16). 여기에는 은사로 일컬어지는 다섯 가지 유형의 사람들 즉,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 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가 있습니다. 또한 고린도전서12:8-10에도 그가 목사나 교사 혹은 전도자이든 관계없이 어느 신자에게든지 성령께서 주시는 재능적인 "은사"의 목록이 있습니다. 이것은 전임 전도자가 되지 않고도 사람을 구주께 인도하는 전도자의 일을 할 수 있는 은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 장에서는 에베소서4장에 나오는 주요 은사 다섯 가지를 상고할 것입니다.

 
사도들은 교회의 터를 세우는 일을 위해 있었습니다(엡2:20). 이들은 우리 주님의 부활의 증인이었고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능력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구원받을 때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뵈었습니다). 오늘날 사도라는 이 낱말이 지닌 의미에 완전히 걸맞는 사도는 아무도 없습니다. 물론 선교사들이("사도"라는 말은 "보냄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모두 이 사도들과 비슷한 일을 하지만 이들에게는 바울이나 베드로가 가졌던 놀라운 은사나 권능은 없습니다. 오늘날 자기가 사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도의 권위를 도둑질하려고 애쓰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피해야 합니다. 사도들에게는 "후계자"가 없습니다.

 

신약성경이 기록되기 전 신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았고 장차 올 사실들을 예언하였으며 지역교회에 전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는 누구도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는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완성된 신약성경이 신앙과 실제적인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자기가 신약의 선지자들과 동등한 수준에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속은 자들이거나, 아니면 속이는 자, 혹은 둘 다입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항상 전도자가 필요하며 또 항상 전도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널리 알려졌든 아니면 지역교회 안에만 알려졌든지 간에 이들은 복음을 전함으로써 사람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언제나 여기 저기 다닙니다. 그래서 주님께 돌아온 자가 여럿 되면, 목자들과 교사들이 이 새신자들을 가르쳐서 새로운 모임을 세우거나 이미 그곳에 모이는 모임에 더해지게 합니다. 진정한 전도자는 성령님을 의지하여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정하게 합니다. 성경적이지 않거나 정직하지 못한 "전도" 때문에 교회가 비난을 많이 받았습니다. 단지 몇 달이나 혹 그보다 더 짧은 기간에 끝나버리는 거짓 신앙고백 보다는, 차라리 "결신자"가 적거나 없는 것이 더 낫습니다.

 

목자는 목자장 밑에 있습니다. 목자장은 그리스도십니다. 목자들(신약에서는 언제나 복수형으로 나옴)은, 일반적으로 잘못된 생각처럼 지역교회의 통치자가 아니라 은사입니다. 목자들은 장로나 감독의 책무를 맡은 자들과 동일한 사람인 것으로 보입니다. 성경원문에서는 목자들이 교사들과 너무나 긴밀히 관련되어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은 목자와 교사가 한 가지 은사의 양면이라고 믿습니다. 다시 말해서 만일 가르침의 은사가 없다면 결코 진정한 목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분명 목자들은 가르침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영적인 양식을 자기 양떼에게 먹이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부탁하신 양떼를 돕기 위해 다른 일들도 해야 합니다. 격려의 말을 해주고, 병이 든 자들과 방황하는 자들을 심방하고, 문제를 가지고 있는 이들을 상담해 주는 일들은, 이들이 해야될 많은 일들 중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목자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성령님의 도우심을 따라 성도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게 됩니다. 은혜를 입은 여러 목자들이 있는 지역교회는 실로 복된 것이며 큰 교회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한 사람이 수백 명 혹은 수천 명을 돌본다는 것은, 그 사람이 아무리 능력이 있고 성심성의껏 일하는 사람이라 해도 마땅히 감당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교사가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즉 정보를 전달해주는 사람인 것입니다. 영적인 면에서 교사는 이런 수준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왜냐하면 가르침의 은사는 자기가 가르치는 내용을 삶으로 실천해야 하고 또 그가 가르치는 것이 영감받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의 "교리(Doctrine)"(행2:42)는 단지 사도들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성령님 없이는 어떠한 가르침도 성경적 수준에 미칠 수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구체적인 사실이나 건전한 교리를 학문적으로 배울 수는 있지만 이렇게 하는 것은 인간의 교만만 부추기고 영적 성장을 저해합니다. 성경을 배우기에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지역교회에서 가르침의 은사를 가진 사람으로부터 배우는 것입니다. 한 번에 조금씩 배우기 때문에 이를 실천할 수 있습니다. 건전한 기독교 학교에서 정식으로 성경을 배우면 체계적인 가르침으로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으며 또한 지역교회에서 안 가르칠지도 모르는 어떤 배경지식들을 습득하는 데도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교회 안에서 목회하기 전에 정식으로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조건은 없습니다. 말씀으로부터 훈련받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특별히 교육을 많이 받았다고 해서 늘 신령한 은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교회들이 이 점 때문에 파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전도하고, 성도를 돌아보며(목회하며), 말씀을 증거하고, 가르치는 일에 수고하는 모든 사람들을 존경하고, 귀히 여기며, 재정적인 지원을 해주고,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신약성경은 조직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고 있을까요?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닙니다(고전14:33). 지역교회 안에는 질서가 있어야 하는데, 사람의 질서가 아닌 하나님의 질서이어야만 합니다.
빌립보에 보낸 편지는 그 받는 대상이 세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즉 성도들과 감독(지키는 자)들과 집사들이었습니다. 교회의 모든 신자들 가운데에는 감독들과 집사들이 포함되지만, 이 감독이나 집사에 속하는 사람들은 지역교회 안에서 특별한 조직상의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 안에는 신약성경 곳곳에 나타난 질서인 여러 명으로 된 각 부류가 있었습니다. "직분을 맡은 자들"(굳이 용어를 사용하자면)이 중요하지만 사도들의 문안 편지에서 첫 번째 자리에 놓인 부류는 예배하는 제사장인 모든 지체가 놓여 있는데, 이것은 소위 "성직자"가 첫째 위치에 있고 "평신도"가 두 번째 위치에 있는 오늘날 널리 퍼진 일부 제도와는 매우 다릅니다.

 

감독(bishop)이란 낱말은 "지키는 자" 혹은 "감독관"이란 뜻의 낱말을 그저 영어로 옮긴 것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권위를 지닌 한 사람의 성직자(즉 "주교" - 역주)가 여러 개의 교회를 주관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적으로 볼 때 한 교회 안에 감독들이 몇 명씩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20장(17절과28절을 비교해보십시오)과 디도서1장(5절과7절을 비교해 보십시오)은 "감독"과 "장로"가 같은 뜻임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두 용어의 차이점은 이 위치에 있는 사람의 의무(감독하는 일)와 위엄(장로)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밝히고 있는 장로가 되기 위한 자격기준은 매우 높으며 또 영적인 것입니다. 사업을 성공적으로 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장로가 될 자격을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디모데전서3:1-7과 디도서1:7-9은 장로가 되기 위한 분명하고도 세밀한 자격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님만이 누가 이 높은 직위를 맡기에 합당한지 보여주실 수 있을 뿐입니다. 그분은 양떼를 주인이 아닌 목자처럼 돌볼 사람들, 자신과 자기 가족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들, 그리고 거짓 교사들을 대하여 믿음을 지키고자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을 선택하실 것입니다(벧전5:2, 행20:28). 비록 장로들의 의무이기 때문에 양무리를 꾸짖고 권고하더라도(이로 인해 마음이 상한 자들이 그들을 인기 없는 자로 만들 수도 있지만), 우리는 그들을 가장 귀히 여기며(살전5:13), 잘 다스리는 자를 또한 "배나 존경"해야(이 낱말은 흔히 재정적으로 돕는 것을 의미합니다) 됩니다(딤전5:17). 성실히 일한 충성된 감독들은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을 받게 됩니다(벧전5:4).

 

헬라어 디아코노스( )는 단지 종이라는 뜻입니다. 때로 이 낱말은 신약에서 전혀 비전문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며 또한 그렇게 번역되고, 어떤 때는 빌립보서1:1에서처럼 특별한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며, 영어로 표기할 때 단순히 집사라는 단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아마도 사도행전6:1-7은 집사들을 언급한 최초의 말씀일 것입니다. 이 단락에서는 실제로 집사에 해당되는 단어가 아닌 연관된 동사("섬기다")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집사들의 봉사는 그저 식탁에서 시중드는 것보다 더 범위가 넓어서, 온갖 일을 다 포함하되 장로들이 직접 책임 맡고 있는 일은 포함하지 않는다고 여겨집니다. 집사의 자격 요건은 높으며(딤전3:8-13), 장로들의 자격요건과 비슷합니다. 또한 집사들은 정식으로 섬김을 허락 받기 전에 다음 사항들이 증명되어야 합니다(10절). 즉 단정하고, 신앙이 건전해야 되며, 이(利)를 탐내지 않는 것 등이 그 자격요건 중 일부입니다. 11절은 집사들의 아내(흠정역) 혹은 여자 집사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로마서16:1은 뵈뵈를 여자 집사로 부르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그를 교회 안에서 섬기는 종으로 부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잘 섬기는 집사는 아름다운 지위를 얻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습니다(딤전3:13).

사람들은 예식 혹은 성사(聖事)를 많이 만들어 왔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오직 두 가지 예식을 언급합니다. 즉 물 침례와 떡을 떼는 것 두 가지입니다. 이 예식들이 참여자들에게 무슨 "은혜"를 주는 것은 아니며 다만 구주께 대한 사랑과 순종의 증표가 되는 것입니다. 침례식은 한 사람에게 단 한 번 베푸는 것이 옳습니다. 성찬은 자주 빈번하게 베풀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침례를 지역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에 필수요건으로 삼습니다. 이상적으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침례를 받아야하지만 성경 어디에서도 침례를 교회지체가 되는 것과 연관 짓고 있지는 않습니다. 사실 지역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것에 대한 성경말씀은 있지도 않습니다. 침례가 마음속에서 이미 이루어진 것을 겉으로 드러내는 표시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면 침례에 대한 논란은 많이 없어질 것입니다. 침례는 죄를 씻지 못합니다. 다시 말하면 침례는 사람을 구원할 수도 없고 또 구원하는 데 도움도 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침례가 인생의 새로운 출발을 가리키며, 또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되심과 부활하심에 있어 그분과 한 몸으로 여김받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성령으로 침례받는 것을 상징한다"고 여깁니다. 요컨대 모든 전도자들이 동의하고 있는 것은 침례가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는 행위요, 한 사람을 공적으로 구별하여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일부 국가에서는 오늘날도 단순히 믿음을 고백하는 것보다 침례를 받는 것이 더 큰 핍박의 신호가 되고 있습니다.

"침례를 주다"는 단어에는 헬라어로 "물에 담그다" 혹은 "물에 잠기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 단어의 이차적인 의미는 "동일한 것으로 여김"인데, 그리스도와 동일시된다는 것은 침례에 있어 중요한 개념입니다. 물에 완전히 잠겨야 침례를 올바르게 받는 것입니다. 침례요한은 "물이 많은"(요3:23) 장소를 골라 침례를 베풀었습니다. 만일 물을 뿌리거나 붓는 것이 옳은 방식이면 이렇게 많은 물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침례받으실 때 "물에서 올라오셨으며"(마3:16), 빌립과 에디오피아 내시는 둘 다 "물에 내려갔습니다"(행8:38).


침례의 의미나 방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침례의 대상입니다. 구원받지 못했으나 종교적인 사람이 기독교 내에서 조직을 갖춘 어떤 무리에 의해서 어떤 방식으로든지 침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여전히 침례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신약에서는 구원받은 사람만이 침례를 받습니다. 침례받는 사람이 다 어른이라야 되는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구원받은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아기나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침례를 주게되면 자기 영혼의 안전에 대해 그릇된 인식을 갖게 됩니다. 사람은 너무나 쉽게 종교의식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순서를 보면 언제든지 "믿고 세례를 받더라"며 결코 그 반대가 아닙니다. 가끔 빌립보 간수의 경우를 예로 들며, 진실한 믿음과 관계없이 온 집안 사람이 다 침례를 받아야 된다는 주장을 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행16:34)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가서 모든 족속을 가르치고 세례를 주라고 명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이 가르침이 성경적이라는 것과 또한 침례 자체에 대해서도 살펴보았습니다(마28:19,20).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것은 "성찬식"이나 "주의 만찬", 또는 사도행전에서처럼 "떡을 떼는 것"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합니다. 성찬식은 단순한 예식으로서 침례와 마찬가지로 복음서에 명령되어 있고 사도행전에서 실천되고 있으며 서신서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잡히시던 날 밤 주 예수님은 떡을 떼고 잔을 나눔으로써 다시 오실 때까지 주님을 기억해야 할 예식을 제정하셨습니다(고전11:26). 주님의 분부이기 때문에 이렇게 주님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사람의 연약을 알고 계신 주님은 자비롭게도 우리에게 눈에 보이는 상징을 주셨는데, 곧 우리를 위해 주신 주님의 몸을 나타내는 떡과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흘린 피를 나타내 주는 포도열매를 주신 것입니다. 이런 상징들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교회를 사랑하신다는 최고의 증거로서 우리의 기억을 생생하게 소생시켜 주는 것입니다.
믿는 자인 동시에 제사장으로서 함께 모여 죽으신 주님을 예배할 때, 우리는 주의 상에 둘러앉음으로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임을 나타내며 하나님의 존전에 직접 나아감을 얻습니다(히10:19-22). 성찬식은 오랜 세월을 내려오며 변함없이 믿음을 고백하는 대부분의 교회에서 예배의 중심이 되어왔습니다. 현대에 들어와 일부에서 의식주의(儀式主義)를 두려워한 나머지 성찬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일도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만일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진심으로 예배를 드리게 하실 수 있다면, 떡을 떼는 것이 단순한 의식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기억하는 모임은 믿는 자들에게 놀라운 영적 유익을 주며,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을 막아주는 보루가 되어줍니다.

우리가 주의 만찬을 기념하기 위해 얼마나 자주 모여야 하는지에 대한 엄격한 규칙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초대교회 성도들은 매 주일마다 주의 만찬에 참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행20:7). 분명 연보도 이 날 드렸을 텐데, 그 이유는 매주일 첫날에 자기들의 헌금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입니다(고전16:2). 본성적으로 우리는 대부분 너무나 냉담하고 고마움을 모르는 자들이기에,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영적으로 자주 돌이켜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함께 그리스도인의 삶은 사는 데에 중요한 부분을 이루는 것입니다.


교회의 간증은, 복음집회나 성경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각종 집회에 참석하는 모든 부류의 사람들에 의해 손상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찬에 참여하도록 허락을 받자마자 함께 믿는 신자로서 성도들과 교제가운데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는데, 그것은 부도덕하거나 경솔하게 살도록 잘못 인도하는 자나 혹은 잘못된 교리를 퍼뜨리는 자를 징계하는 교회의 다스림을 받을 의무도 됩니다. 오늘날 교인을 잃을까 염려해서 징계라고는 전혀 하지 않는 교회들이 많습니다. 또한 어떤 지역이나 무리 중에서는 징계 가운데 있다가도, 다른 곳에 가면 아무 잘못도 범한 적이 없는 사람인양 영접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징계의 온전한 목적은 잘못한 자를 바로 잡아 다시 교제를 할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에 있어 지혜와 은혜가 절대 필요하지만, 만일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교회가 거룩하려면 규모없는 자에게는 반드시 경고가 주어져야 합니다(살전5:14). 규모 없는 자들은(살후3:11,14, 15) 분쟁을 일으키는 자들과 더불어 피해야 될 대상입니다(롬16:17). 또 이단은 딱 잘라서 거절해야 합니다(딤3:10). 신약에서 이단은 중요한 교리상의 문제에 있어 잘못된 견해를 받아들임으로써 분열을 조장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징계의 최종적인 형태는 출교입니다(고전5:11,13). 출교는 신중하게 해야되며, 음행하는 자와, 탐람하는 자와, 우상 숭배하는 자와, 후색하거나 술취하거나 토색하는 자들이 그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징계는 공정해야 되며 교회문제는 그 교회 성도들만 알게 하고 교회 밖으로 나가게 해서는 안됩니다. 앞에서와 같이 자격을 전적으로 상실한 사람들 중 일부가 어느 다른 건전한 모임에 교제를 요청할 때 통제되어진다면 아마 우리는 복음증거에 있어서 더 많은 하나님의 은총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여자들의 섬김은 대단한 것이지만, 강단 사역은 그들의 영역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으로는 동등하지만(갈3:28), 여자들은 교회에서 말해서는 안되며(고전14:34,35) 남자들을 가르치거나 남자의 권위를 빼앗아 주관하려 해서도 안됩니다(딤전2:12). 여자는 다른 여자들과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지만 남자가 섞여있는 무리를 가르쳐서는 안됩니다. 여자는 남자에게 순종하는 표시로 머리를 가려야 하는데, 이것은 교회의 질서를 지켜보고 있는 천사들에 대한 간증이기도 합니다(고전11:10). 여자들이 순종해야되는 이유는 여자가 나중에 지음 받았고 죄는 먼저 범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자가 설교자나, 공적인 교사나, 혹은 장로가 될 수 없다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 것일까요? 여자는 자기의 물질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으며(눅8:3), 손 대접을 할 수 있고(롬16:1), 자기보다 나이 어린 여자들을 또한 가르칠 수 있습니다(딛2:4). 교회 밖에서는 여자도 브리스길라가 남편 아굴라를 도와 아볼로를 가르쳤던 것처럼 남자들을 비공식적으로 가르칠 수 있습니다(행18:26). 여자는 모든 사람을 격려할 수도 있습니다. 지난 수세기 동안 헌신된 여인들은 구제나 해외선교, 또 그 밖에 셀 수 없이 많은 봉사를 활발하게 벌여 왔습니다. 여자들은 성경의 제한 안에서 쉽게 머무를 수 있으나,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봉사가 결코 적은 일이 아닙니다.

 

지역교회의 모임 장소를 준비하거나 선교사와 장로들, 과부와 가난한 자, 설교자와 전도자를 지원하는 데는 비용이 듭니다. 이 돈들은 다 어디서 오는 걸까요? 즐겨내고 사랑으로 하는 성도들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에서 이스라엘은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이 의무였지만, 은혜 아래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최소한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입니다! 헌금은 수입에 비례해야 하며(고전16:2), 은밀해야 하며(마6:1-4), 즐겨 내야 합니다(고후9:7). 우리 모두는 할 수 있는 한 많이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토록 즐겨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할 수 없는 은사를 잊지 말아야겠습니다(고후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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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기본교리] 종말론 (그리스도의 재림,천년왕국 )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베푸시는 구원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구원입니다. 성령님은 쉬지 않고 믿는 자를 죄의 권세에서 구출해내시지만, 옛 성품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아무리 성숙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때때로 죄를 지으려는 내적인 충동이 있습니다. 이 옛 성품은 주 예수님께서 오실 때에 영원히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메시야가 이 세상에 오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구절들은 메시야가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했으며(예를 들어 시편22편, 69편), 또 어떤 구절은 그분의 영광에 대해 말씀했습니다(시2편, 72편). 선지자들은 이런 두 가지 상반된 예언이 어떻게 성취될 것인지 몰랐습니다(벧전1:10,11). 여기에 대해 설명을 하자면 그리스도는 초림하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재림시에 다시 영광 중에 오신다는 뜻입니다. 구약의 많은 구절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바울과 요한 모두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고 여러 차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친히 "내가 다시 와서…"(요14: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상고해 보면 한 가지 사실이 더 밝혀집니다. 초림에 두 가지 국면이 있었던 것과 똑같이, 재림도 두 가지 양면성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초림에 대해서, 한 선지자는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베들레헴에 오실 것이라 했으며(미5:2), 또 다른 선지자는 말하기를 그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오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슥9:9). 이 두 예언은 글자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마2:1, 21:1-11). 재림에 대해서도 어떤 구절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성도들을 위해 오신다 했으며(살전3:13), 다른 구절들은 그분의 성도들과 함께 오신다고 했습니다(요14:3). 그러므로 이 두 사건 사이에는 어느 정도 시간적인 간격이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장차 일어날 사건들을 그 시간적인 순서대로 상고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의 휴거

그리스도께서 자기 성도들을 위해 다시 오실 때, 성도들은 공중으로 들림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휴거"라고 합니다. 영어 성경에는 "휴거"라는 말이 나오지 않지만, 이 말은 "잡아채다"라는 뜻을 지닌 말에서 유래하는 것입니다. 이 표현은 데살로니가전서4:17을 라틴어 성경에서 "우리가 들림받아 … 공중에서 주를 만나게 될 것이라"라고 번역한 데서 볼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휴거의 진리를 가르치고 있지 않은데 이는 휴거가 그리스도인들로 된 교회와만 관계있고, 이 교회는 이스라엘에게 감추인 "비밀"이었기 때문입니다(엡3장). 바울은 또 휴거를 "비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고전15:51). 그는 이 진리를 "주의 말씀으로", 즉 직접적인 계시에 의해 받은 것입니다(살전4:15). 성경 전체를 통해 우리는 영광 중에 오시는 그리스도에 대해 읽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께서 먼저 성도를 위해 오신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이 진리를 상세히 설명했습니다.
이 진리에 대한 가장 중요한 부분 두 가지는 고전15:51-56과 살전4:13-18에서 발견됩니다. 이 말씀들로부터 우리는 주께서 호령과 더불어 강림하신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이미 죽은 신자들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일어날 것입니다. 살아있는 신자들은 변화되어 새로운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이들은 공중으로 들림 받게 되는데 이 일은 갑작스럽게, "눈 깜빡할 사이에"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 일은 언제 일어날까요? 주님은 우리가 예비하고, 언제나 깨어 있어 주님을 기다리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그 날을 가르쳐주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주님 오실 때가 가깝다는 약속이 기쁘고도 놀라운 "복스러운 소망"입니다(딛2:13). 그러나 이런 즐거움과 더불어 우리로 정신을 차리게 만드는 것은 우리들 각자가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롬14:12).

그리스도의 심판대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10).
믿는 자들은 이 일이 일어날 때 자기 죄에 대해 심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기 때문입니다(롬8:1).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믿는 자들은 충성스럽거나 헌신적으로 봉사한 것에 대해 상급을 받게 될 것이지만, 어떤 이들은 비록 자신은 구원 얻되 자기가 한 일이 불꽃 가운데서 살라지는 것을 슬퍼하며 보게 될 것입니다(고전3:13-15). 만일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휴거와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염두에 두고 산다고 하면, 삶이 놀랍게 변화될 것입니다!

어린양의 혼인잔치

충성스럽게 섬긴 것에 대해 상을 주실 때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벌어지게 됩니다(계19:1-8). 주님과 주님께 속한 자들은 말할 수 없는 즐거움에 참예할 것입니다. 성경이 여기에 대해 세부적으로 말씀하고 있지는 않지만, 혼인잔치야말로 우리를 영원한 복락으로 인도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도록 하기에 적절한 방법입니다.

 

대환난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온 이래로 사람은 슬픔과 고통을 겪어왔습니다. 지진과 태풍, 기근, 전염병 등은 인간이 흔히 겪는 것이며 전쟁은 유사(有史)이래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것과 비교할 수 없는 대환난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계7:14). 마태복음24장에서 예수님은 "재난의 시작"이라고 알려진 장차 오게 될 고통의 시기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세상이 알고 있던 것 중 가장 큰 환난의 때까지 잇따르게 될 것입니다(마24:8,21). 많은 세부적인 내용들이 마치 그림처럼 계시록6장부터 18장에 묵시적인 형태로 나타납니다. 아마도 이 환난은 우상에게 무릎을 꿇으려 하지 않는 유대인들이 공격을 받는 것으로 시작될 것이며, 그 다음에 모든 유대인에게로 확산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에 대해 유대인들을 심판하려고 그들이 핍박을 받도록 허락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의 유대인들에 대한 핍박이 정도에 지나게 될 것이고, 이것과 다른 이유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가 열방에게도 쏟아지게 됩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온통 두려움에 휩싸이게 됩니다(계6:15-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기를 거부합니다. "…회개치 아니하고 … 회개치 아니하였더라…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며… 하나님을 훼방하고"(계9:20,21, 16:9,11).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거대한 범위 속에서 이 환난의 주된 이유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늘 사람에게 자비하시지만, 사람은 계속 죄 가운데 행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만일 사람이 아직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의 죄에 대해 심판하신다면, 사람은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알아차리고 회개하여 그분께 돌아갈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진노를 남김없이 다 보여주셔도, 사람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대환난이 이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대환난은 교회가 떠난 후에(계3:10 원래 의미는 "그 때를 피하게"),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다시 오시기 전에 일어납니다. 이 환난은 너무도 끔찍해서 하나님은 "그 날들을 감하실 것"입니다(마24:22). 선지자 다니엘은 칠년 간의 황폐에 대해 말했습니다(단9:27). 처음 삼년 반은 비교적 조용하고 번영도 합니다만, 나머지 삼 년 반은 무서운 날들이 될 것입니다. 참 그리스도인들은 이 칠 년간의 환난기간이 시작되기 전에 끌어 올려 영광 중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영광 중에 주님과 함께 안전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대환난 중에도 진리를 증거하는 자들을 일으키셔서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

 

대환난은 그리스도께서 땅에 임하실 때 돌연 멈추게 됩니다.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24:29,30). 환난 전 휴거는 우리 주님의 재림에 대한 전체 모습 중 한 부분일 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먼저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기 민족이 메시야를 어떻게 배척했었는지를 기억하고 애곡할 것입니다(슥12:10). 주님께서 승리 가운데 나타나실 때 그리스도의 통치에 대한 모든 열방들의 반대는 중지될 것입니다(계19:11-21).

살아 있는 민족들이 받는 심판

다음으로 살아 있는 민족들이 심판을 받게 됩니다(마25:31-46). 신실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인 하나님의 백성들을 도움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나타낸 이방인들은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 외의 사람들은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모든 악한 것들이 정결케 되어질 때, 그리스도는 지상왕국을 세우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는 그 소망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큰 위로의 근원이 되어왔습니다. 이 진리가 사단의 특별 표적이 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조롱하는 자들은 항상 재림을 비웃어 왔으며, 훗날에 이런 사람들의 공격은 더더욱 맹렬해질 것입니다(벧후3:3,4). 더욱이 많은 잘못된 사상들이 난무함으로써 주님을 욕되게 했는데, 그런 사상 가운데는 성경을 모르기 때문에 생겨난 경우도 더러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사람이 믿을 때 주님께서 그 마음에 들어가심으로써 주님의 재림이 성취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죽을 때 그리스도께서 그 영혼을 위해 재림하신다고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 말들이 전혀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재림하시는 것은 개인적으로, 문자적으로 이루어질 것이고, 눈으로 볼 수 있게 일어날 사건입니다."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다시 오시리라"(행1:11). 오히려 신자들은 죽으면 그리스도께로 가는 것입니다.

교육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 교회의 의무며 그 이후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다는 대중화된 교리가 있는데, 이것을 가리켜 "후천년설"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한 세대에 두 번의 세계대전은, 복음이 점진적으로 세상에 변화를 줄 것이라는 이론에 전혀 도움이 안됩니다.

일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교회가 "그 죄를 씻기 위해서" 환난을 통과하거나 혹은 최소한 그 일부를 겪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환난은 "개신교의 연옥"이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믿는 자에게 징계가 있기는 하지만, 이는 그로 하여금 계속 죄를 짓지 않게 하려는 것일 뿐입니다. 환난은 이 악한 세상을 징벌하기 위한 것입니다.

"부분휴거설"에 따르자면, 교회의 일부는 반드시 환난을 통과하게 되는데, 이 말은 곧 이 세상에서 주님께 순종하지 않은 성도들이 환난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리스도의 몸은 그 일부만이 영광스럽게 부활한 몸을 입고 혼인잔치를 즐기게 되는 반면, 몸의 나머지 부분은 이 땅에 남아 불시험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모든 자기 사람들이 그가 계신 곳에 함께 거하게 될 때까지 만족을 얻지 못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환난이 있기 전에 이미 육신적으로 살다가 죽은 신자들은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이들도 다 부활해서 고난을 받아야만 된다는 것입니까?

아직도 주님이 몇 날 몇 시에 재림하신다고 날짜를 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날짜 중에는 성경에 나오는 숫자와 이름들을 놓고 온갖 상상을 동원하여 신비적으로 해석하여 정한 날짜와, 점성술이나 심지어 피라미드를 측량해서 얻은 자료로 정한 날짜들까지 있습니다 ! 이런 노력은 언제나 실패하고 맙니다. 인자이신 주님조차도 땅에 사실 때 그 날과 시간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막13:32). 하나님의 지혜로 보건대 우리가 주 예수님의 재림의 때를 모르는 것이 더 나은 것입니다. 주님이 오늘 오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재림을 예비할 마음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3).

 

천년왕국

 

구약성경의 예언은 메시야가 왕으로서 온 땅을 다스리게 될, 미래에 있을 황금시대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계시록 20:4에서 그분이 천년 동안 다스리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기간을 "일 천년"을 의미하는 두 단어로 된 라틴어에서 유래해서 "천년왕국"이라고 부릅니다. 땅은 아담의 죄로 인하여 저주 아래 있게 되었으며(창3:17,18), 지금 그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낙원은 다시 회복될 것이며(계2:7), 사막은 백합화처럼 필 것입니다(사35:1). 야생 짐승들이 길들여지고(사65:25), 모든 피조물이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것입니다(롬8:19-22).
천년왕국 기간 중에는 세계 열방이 번영하게 될 것입니다. 전쟁도 없을 것이며(사9:7), 범죄도 최소로 줄어들 것입니다. 평화시에도 치안과 국방을 위해 엄청난 예산을 투자하던 일들이 그때는 사라지게 됩니다. 한편 오늘날 거짓종교는 그 복잡한 의식을 유지하느라 엄청난 돈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계시록17장과 18장에서 우리는 상업화된 종교의 멸망을 보게 됩니다. 천년왕국에서는 단순한 영적 질서로도 충분합니다. 그 때에는 병과 죽음이 흔한게 아니라 오히려 극히 적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대단히 오래 살게 될 것입니다(사65:20). 천년왕국에 들어가게 되는 사람들은 숫적으로 얼마 되지 않겠지만, 천년왕국 기간 중에 인구가 증가하게 될 것이며,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의 필요를 공급하실 것입니다. 이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요3:5, 마25:34). 이 사람들에게서 태어나는 자식들은 거듭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며, 많은 사람들이 거듭나게 됩니다. 실제로 믿지 않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마지못해 겉으로는 의로운 척할 것입니다(사11:4,5). 사단은 결박될 것이며(계20:2), 그를 따르는 수많은 악령들도 활동하지 못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이사야60:12에서 이스라엘이 세계를 이끄는 최강국이 될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지위는 이스라엘의 왕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스라엘에게 주실 것입니다. 열두 사도는 주님과 함께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됩니다(마19:28). 이 환난 기간동안 신실함이 입증된 유대인들도 권세를 받게 됩니다(눅19:17).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며, 그분의 신부로서 그분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게 될 것입니다(요14:3).
천년왕국 기간동안 그리스도께서 보좌에 계시는 한 모든 사람은 그분께 복종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회가 오면 많은 사람들이 왕을 대적하여 반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천년의 세월이 끝나는 때 사단은 잠시동안 풀려나게 됩니다(계20:3). 그는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로 군대를 이루어 하나님의 보좌를 전복시키려는 마지막이자 최대 규모인 반란을 감행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군대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불에 의해 전멸 당하게 됩니다. 또 마귀는 불못에 던지우고(계20:10), 하나님의 통치를 거스리던 모든 것이 영원히 끝이 나게 될 것입니다.

 

둘째 부활과 크고 흰 보좌

이 일 후에 둘째 부활이 있습니다. 우리는 천년 왕국이 세워지기 전, 휴거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것을 앞에서 살펴보았습니다만,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사람들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고전15:22). 모든 사람은 몸과 영과 혼을 온전히 다 가진 채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그런데 크고 흰 보좌 앞에는 오직 구원받지 못한 자들만이 서게 되며, 그 앞에는 책들이 펴지고 모든 사람들이 자기 행한 것을 따라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심판자로서 앉으실 것입니다(요5:22).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배척한 사람들에게는 절대 구원이 없습니다. 이들의 이름은 어린양의 생명책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이 사람들은 본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해 예비된 불못 속으로 던지우게 될 것입니다(계20:11-15).
지옥은 무엇이며 또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주 예수님은 잃어버린 바 된 자들이 겪게 되는 고통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두려움, 슬픔, 분노" 등과 같은 말로 묘사해 주셨습니다. "바깥 어두운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마22:13, 25:30). 사악한 자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입니다(유13). 우리는 지옥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있다는 것 말고는 어디 있는지 아는 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8:21).
성경은 천국이나 지옥에 대해 많은 말씀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천국에는 슬픔, 우는 것, 고통, 저주, 사망 등이 없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곳에는 빛과 생명 그리고 사랑과 영광이 있을 것입니다(계21:22- 22:5).

 

영원한 상태

시간은 영원이라는 무한한 바다에 둘러싸인 작은 해변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시간이 얼마나 오래 계속될 지 알지 못합니다. 세상이 지음 받기 전 영원이라고 하는 무한한 기간이 있었습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시90:2). "영원"이라는 낱말은 끝이 없거나 무한정한 기간 동안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바울과 베드로와 요한은 다 한결같이 "영원무궁한 세월"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원에는 결코 끝이 없을 것입니다.
영원무궁한 역사 동안 하나님은 여러 가지 면으로 자신을 계시해오셨습니다. 예를 들어 율법 시대, 은혜 시대, 천년왕국 시대가 있는 것입니다. 장래에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엡2:7). 또한 성경과 역사, 그리고 자연에 대해 풀 수 없었던 수수께끼들에 대한 답을 알게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물론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아시지만, 영원 가운데 거하게 될 구속받은 자들은 지금처럼 한계를 갖지 않을 것입니다.

죄로 인해 더럽혀진 이 우주는 불로 멸해지고, 하나님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것입니다(벧후3:10-13). 이사야는 말하기를 이전 것은 기억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사65:17).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이상을 보았습니다(계21:1). 현재의 땅에서 천년왕국 기간동안 의가 통치할 것이지만(사32:1), 새 땅에서는 의가 거하게 됩니다(벧후3:13).
악인은 멸절을 당하거나 아니면 아마 하나님과 화목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영원"이란 말을 써서 세세토록 계신 하나님을 묘사하고 또 동일한 말로써 끝없는 형벌을 묘사하고 있습니다(계14:11과 15:7). 끝끝내 그리스도를 저버린 사람들은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될 것입니다. 그들이 받을 형벌은 구원받은 사람들의 영생과 마찬가지로 "영원할 것"입니다.
믿는 자들은 세세토록 왕노릇할 것입니다(계22:5).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요17:24).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후사가 될 것입니다(롬8:17).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게 될 것입니다(요일3:2). 우리는 영원토록 주의 우편에 있게 될 것입니다(시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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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교회에 가는 이유? “설교 아니다”


 

▲ⓒPixabay

 

사람들이 교회에 가는 이유? “설교 아니다”


최근 브랜든 힐게만 목사가 웹사이트 프로프리처에 '사람들이 교회에 가는 이유'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다. 다음은 그 주요 내용.


퓨 리서치 센터(Pew Research Center)는 '이달 초 미국인들이 종교적인 예배에 참석하는 이유'에 대해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이 조사는 4,729명의 미국 성인을 대상으로 지난 해 12월 4일부터 18일까지 실시됐다.

한달에 한두번 예배에 참석하는 미국 성인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교회에 참석하는 이유에 대해 약 81%의 응답자가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고 싶어서'라고 대답했다.

69%는 "아이들이 도덕적 기반을 가질 수 있어서"라고 응답했으며 68%는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교회에 출석한다고 응답했다.

교회를 출석하는 이유 다섯 번째 순위(59 %)는 "설교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라고 응답했다.


사람들이 응답한 가장 중요한 세 가지 대답은 그들이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고, 자녀들이 하나님을 따르며 더 하나님과 같이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이밖에 "어려움과 슬픔에 대한 위로를 얻기 위해"(66%), "믿음의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 싶어서"(57%), "가족들의 신앙 유산을 지키기 위해"(37%) 등을 교회 출석의 이유로 응답했다.

또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위해(19%) 혹은 배우자가 가족을 기쁘게 하기 위해 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한다고 대답한 사람들도 있었다.


정규 예배 참석자들을 대상으로 한 후속 질문에서 교회에 참석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로 한 가지에 대해서는 약 60%가 "하나님에게 가까워 지고 싶어서"라고 대답한 응답자가 대다수를 차지했다.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는 8%, "신앙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 싶어서"(6%), "설교가 가치 있어서"라는 응답은 4%에 불과했다.

따라서 설교가 필수적이지만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과 가까워지고자 하는 갈급함이 있다.

나는 그 이유를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주일 내내 하나님께 가까이 있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일상 생활의 고민 , 죄의 유혹, 하나님을 믿지 않는 친구, 가족 및 동료들에게 둘러싸여 현실 세계에 산다 .

주일이 돌아오면 그들은 영적으로 매우 굶주린 상태다.
우리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잊을 수 없다.
그들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는데 도움이 필요하다.

많은 설교는 도덕적 생활과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에 초점이 있지만, 그것은 사람들이 교회에 올 필요를 느끼는 것은 아니다. 그것 역시 중요하다. 그러나 그들의 기본적인 필요는 더 나은 행동이 아니라 더 좋으신 하나님이다.

다른 설교는 교회의 비전에 초점을 맞추고 그 비전을 위해 사람들에게 돈과 시간을 할애하라고 말한다. 그것은 또한 중요하다. 그러나 그들의 가장 큰 필요는 더 큰 교회가 아니라 더 큰 하나님이다.

설교의 또 다른 경향은 성경에 대한 더 많은 지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것 역시 아주 좋다. 그러나 그들의 기본 필요는 성경 지식이 아니라 성경의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아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고려해야 할 질문이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교회 예배는 어디로 회중을 데리고 가고 있는가?

사람들을 더 나은 행동, 참여 또는 더 많은 지식으로 이끌고 있는가? 또는 우리는 사람들을 궁극적으로 그들의 삶을 변화시킬 만남인 하나님을 알기 위해 이끌고 있는가?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는 법을 모른다.

이것이 일부 교회가 죽어 가고 다른 교회는 성장하는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성장하는 교회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기를 기대하는 곳에 대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그의 존재를 느끼고, 그의 목소리를 듣고, 그의 사랑을 경험하기를 기대한다.

이 설문 조사에 따르면, 지역 사회의 일부가 되고 좋은 설교를 듣는 것이 여전히 중요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굶주림과 갈증을 느끼는 것은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는 것이다.

조언이나 도덕을 가르치지 말라.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이끌어 내라.

목회자 자신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부족하다면 사람들을 하나님께 인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부족하다면 거기에서 시작하라.


이미경 기자

[출처] 크리스천투데이
[원본링크] http://www.christiantoday.co.kr/news/3155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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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청년부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

 

 

 

 

청년부 사역에서 수련회는 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역이다.

늘 청년들이 모였다가 헤어지는 주일예배와는 달리 여름 수련회를 비롯한 여러 수련회는 합숙을 하며 말씀과 기도에 집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비전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귀한 시간이 된다.

 

경험적으로 볼 때 여름수련회를 잘 치르면 6개월 동안 주일모임을 인도한 이상의 효과가 나타난다.

한 공간에 계속 머물면서 말씀, 기도, 교제, 심방 등 모든 목회적인 활동이 일어나기 때문에 수련회를 잘 기획하고 진행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젊은이 사역을 만드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

교회 부흥과 성장을 위한 가장 좋은 수련회를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수련회가 잘 되려면 평소 훈련이 잘 되어 있어야 한다.

여러 교회 청년부 수련회 강사로 다녀오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수련회를 통한 짧은 만남이지만 평소 그 교회의 영적훈련상태를 가늠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평소 주일 모임이 잘 되지 않은 교회는 수련회가 말씀중심보다는 친목형태로 흐르고, 합심기도를 해도 깊은 영성보다는 억지로 힘을 쓰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마치 평소 운동 안하던 학생이 장거리 달리기에 나와 헉헉거리는 모습이 연상된다.

 

둘째, 수련회 참석률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는 것이다.

많은 사역자들이 프로그램을 잘 준비하고 행사진행을 위해 노력하지만 정작 인원동원에 실패하는 것을 보게 된다.

수련회의 첫 단추는 확실한 참여를 통한 인원동원에 있다. 이것만 잘되면 나머지 행사는 저절로 잘 되게 된다. 수련회 참석인원은 평소 교회 출석보다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하도록 계획을 잡는 것이 좋다. 필자가 내수동교회 청년부에 출석할 때 항상 여름수련회가 평소 출석률보다 더 높았다. 그만큼 수련회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의미이다. 수련회가 잘되려면 구성원의 참석률을 높이는데 최대한 신경을 써야 한다.

 

셋째, 좋은 강사를 모셔라.

잘되는 청년부, 잘되는 수련회를 보면 좋은 강사를 모신다는 것이다.

한 공동체에서 좋은 수련회 강사를 매년 모셔서 약 3년 정도만 꾸준히 밀고 가면 주변에서 수련회에 대한 기대감과 공동체의 위상이 달라졌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좋은 강사를 모시기 위해서는 발품의 수고를 해야 하고 연초부터 강사를 섭외 예약해야 하며 충분한 예우를 해서라도 좋은 강사를 모실 수 있어야 한다. 좋은 강사를 수련회에 모실 수 있는 여부는 사역자의 능력이다.

 

 

 

넷째, 새로운 형제들을 초청하라.

수련회가 우리들만의 리그로 끝나지 않게 하며, 수련회 자체를 전도의 기회로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새로운 형제와 자매들을 초청할 경우 프로그램 운영상 약간의 기술이 필요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공동체 수련회를 통해서 전도하고 공동체를 알릴 수 있는 기회로 십분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다섯째, 말씀과 기도중심의 수련회가 되도록 해야 한다.

최근 수련회의 경향은 교제중심으로 흐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말씀과 기도가 뒷받침되지 않는 교제 중심의 모임은 공동체의 쇠퇴를 앞당기게 된다. 성도의 능력과 공동체의 능력은 말씀과 기도에서 나온다. 말씀과 기도는 수련회에서 최우선적으로 생각해야 부분이며, 말씀과 기도에 집중하는 수련회가 되어야 한다.

 

여섯째, 이성교제와 결혼에 대한 좋은 기회들을 만들어 주는 수련회도 기획해 볼 필요가 있다.

청년들의 가장 큰 고민은 결혼이다. 특히 교회 안에서 형제와 자매의 비율이 맞지 않기 때문에 실질적인 문제이다. 올바른 이성관, 가정관, 결혼관에 대한 특강을 통해서 바른 가치관을 심어주는 것도 필요하다.

 

필자가 대학부를 담당할 때였다.

해외에 나갔던 한 지체가 귀국하자마자 집에 도착했는데 그때 시간이 12시가 넘었다.

도착하자마자 수련회장소로 데려달라고 엄마에게 때를 써서 새벽 2시에 수련회 장소에 왔다. 이렇게 변한 아이를 보고 부모도 놀랐고, 지도자로서 부서의 부흥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모두가 사모하는 최고의 수련회를 기획해야 한다. 수련회를 통해 얻는 공동체의 유익은 생각보다 훨씬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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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학교는 한국교회의 미래이다

 

 

 

 

주일학교 어린이 주일의 유래
 

어린이 주일은 성경에 나타나 있는 절기는 아니지만 근세에 들어오면서 어린이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교회의 절기로 보편화되었다. 자라나는 어린이가 어떻게 교육되느냐는 미래의 무한한 가능성과 직결되기에 몇몇 뜻있는 목회자들은 어린이들을 위한 교회의 특별한 봉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국 최초로 어린이 주일을 제정한 유니버셜리스트 제일교회의 레오날드(G.H Leonald)목사 역시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던 한 사람으로 1856년 어린이들을 그리스도인으로서 훈련시키고 어른들에게 어린이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한다는 취지에서 6월 둘째 주를 자신이 사역하는 교회의 어린이 주일로 정하고 그날 어린이 주일 행사를 거행했다. 

 

레오날드 목사의 어린이 주일 시행이후 교회들은 이에 대한 높은 관심을 나타냈고, 그 결과 1868년에는 미국 감리교에서 6월 둘째 주를 어린이 주일로 정식으로 승인하게 되었다. 이러한 결정은 다른 교파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어 1883년 미국의 장로교를 비롯한 대부분의 다른 교파들도 "어린이 주일"안을 결의안으로 통과시키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어린이 주일은 교회 절기의 일부분으로서의 위치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 무렵의 우리 나라에서는 아직도 어린이에 대한 인식이 성숙하지 못했음은 물론 어린이라는 호칭조차 없던 상태였다. 따라서 당시 우리에겐 어린이 주일의 제정보다도 자라나는 어린이들에 대한 바른 인식이 더 필요했다. 이러한 때에 방정환, 마해송 등의 어린이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선각자들이 1922년 일본 동경에서 색동회를 조직하여 1923년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해 어린이 인격보호와 바른 성장에 대한 어른들의 관심과 각성을 촉구하는 등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면서 우리 나라 사람들도 어린이의 중요성을 자각하고, 어린이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한편 초창기 5월 1일이었던 어린이날이 1927년부터는 5월 첫째주일로, 그리고 1946년에 오늘날과 같은 5월 5일로 변경되었고, 1957년에는 어린이 헌장이 제정, 공포되었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교회들도 초창기에는 미국에서 처음 제정된 6월 둘째 주일을 어린이 주일로 지켜오다가 1956년부터 5월 첫째 주를 어린이 주일로 변경하여 보다 활발하게 지켜오고 있다.

 

어린이 주일은 성경에 나타나 있는 절기는 아니지만 근세에 들어오면서 어린이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교회의 절기로 보편화되었다. 자라나는 어린이가 어떻게 교육되느냐는 미래의 무한한 가능성과 직결되기에 몇몇 뜻있는 목회자들은 어린이들을 위한 교회의 특별한 봉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국 최초로 어린이 주일을 제정한 유니버셜리스트 제일교회의 레오날드(G.H Leonald)목사 역시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던 한 사람으로 1856년 어린이들을 그리스도인으로서 훈련시키고 어른들에게 어린이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한다는 취지에서 6월 둘째 주를 자신이 사역하는 교회의 어린이 주일로 정하고 그날 어린이 주일 행사를 거행했다. 

 

레오날드 목사의 어린이 주일 시행이후 교회들은 이에 대한 높은 관심을 나타냈고, 그 결과 1868년에는 미국 감리교에서 6월 둘째 주를 어린이 주일로 정식으로 승인하게 되었다. 이러한 결정은 다른 교파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어 1883년 미국의 장로교를 비롯한 대부분의 다른 교파들도 "어린이 주일"안을 결의안으로 통과시키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어린이 주일은 교회 절기의 일부분으로서의 위치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 무렵의 우리 나라에서는 아직도 어린이에 대한 인식이 성숙하지 못했음은 물론 어린이라는 호칭조차 없던 상태였다. 따라서 당시 우리에겐 어린이 주일의 제정보다도 자라나는 어린이들에 대한 바른 인식이 더 필요했다.

 

 이러한 때에 방정환, 마해송 등의 어린이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선각자들이 1922년 일본 동경에서 색동회를 조직하여 1923년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해 어린이 인격보호와 바른 성장에 대한 어른들의 관심과 각성을 촉구하는 등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면서 우리 나라 사람들도 어린이의 중요성을 자각하고, 어린이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한편 초창기 5월 1일이었던 어린이날이 1927년부터는 5월 첫째주일로, 그리고 1946년에 오늘날과 같은 5월 5일로 변경되었고, 1957년에는 어린이 헌장이 제정, 공포되었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교회들도 초창기에는 미국에서 처음 제정된 6월 둘째 주일을 어린이 주일로 지켜오다가 1956년부터 5월 첫째 주를 어린이 주일로 변경하여 보다 활발하게 지켜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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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학교 유치부교육 계획안 만들기

 

 

 

1. 부서조직 
예 배 부 -
음 영 부 -
축 위 부 -
환경미화부 -
총 무 부 -
차량운행부 -

2. 각반 담임 및 학생현황

Ⅰ. 교 육 활 동

1. 교회표어:
행1:8 마 28:20
마가복음 4장 23절 가르치며 전파하고 치유하는교회

2. 교육표어:
예수님의 제자가 되자 (마28:19)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3. 교육목표:
1) 열심히 배우는 어린이 (예수님, 성경)
2) 모이기를 힘쓰는 어린이 (재적목표 120명, 전도목표 60명)
3) 열심히 기도하는 어린이 (교회, 나라, 자신, 가정)

4. 교육 목표 실천 계획

1) 예배생활 잘하기 (시간지키기, 주일예배꼭참석하기, 내친구심방)
2) 전도생활 (출석인원 90명, 교인 자녀 출석권유, 새친구관리철저,
학기별 전도왕시상)
(심방철저 - 전화, 편지(엽서), 부모님과 유대관계 조성)
3) 기도생활 (기도하는 방법 배우기, 교회와서 가장먼저 하나님께 기도하는
친구되기)
4) 찬양생활 - 어린이 찬양대를 세워 어린이 찬송 보급
5) 실천학습 - 공과공부를 통한 실천교육 강화
6) 교육을 통한 신앙성장 (교사 공예배 참석, 성경학교, 교사 강습회참석)
7) 특별예배 - 절기를 통한 특별예배와 특별활동 실시,
년 2회 어린이 찬양예배 실시
어린이주일 / 성탄절에 어린이 헌신예배 실시한다.

5. 성장목표

* 전체목표 ◎ 현재인원 재적 - 65 명 평균출석 45 명
◎ 재적목표 120 명
◎ 출석목표 90 명
◎ 평균출석목표 80 명

 

6. 성장목표 실천방안

1) 전도실천목표 - 선생님 1명당 전도목표 6명 정하고 전도에 힘쓴다.
2) 연 5회 총동원주일을 가지며 결석없는 주일을 갖는다.
3) 출석 우수반(모범반)을 분기별로 시상한다.
4) 결석어린이에게 주보 보내기, 전화, 심방하여 관리한다.
5) 결신상담을 통해 구원의 확신을 심어준다.
6) 잃은 양을 찾아 교회로 인도한다.
7) 영적 성장을 위해 말씀 잘 먹이고 늘 관심을 갖는다.
8) 영적지도를 통해 하나님(예수님, 성령님)을 알게한다.
9) 생활지도를 통해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과 선생님 말씀에 순종하며
친구들과 즐겁게 지낸다
10) 심방 잘하고 상담, 교제를 통해 부모님과 유대관계 조성
(불신자 가정 전도중점) - 어린이 전도
11) 오후 활동을 통하여 신앙성장에 도움을 준다
12) 어린이가 1명씩 전도하고 땅끝까지 전도하고 잃은양을 찾는다

7. 교 육 활 동

(1) 교 사
1) 경 건 회 : 매주일 오전 8시 40분
기 도 회 : 오전 오후예배후 10분 기도회
전체기도회 : 매월 첫주일 오전 8시 30분
2) 월 례 회 : 매월 마지막주 오후 5시
3) 공 과 준 비: 매주일 오후 5시 30분 예비공부
월1회 교사공과 연구수업을 통해 다양한 공과교수법을 소개하고 연구한다.
4) 교 사 양 성: 절기교육 및 강습회 참석,교사세미나
5) 어린이 심방일지 성경교안 보고서작성 제출 (매주)
6) 전도교육 : 1달에 1번 정기적인 노방전도
7) 예배 전, 후에 교사기도회를 통해 친교와 교육을 실시한다
8) 전문강습회 참석 : 년 3회에 걸쳐 전문강습회를 통하여 교육을 받는다
(새학기 강습회, 성경학교 강습회, 성탄절 강습회)
9) 분기별 반 모범상 / 전후반기 전도상/ 연개근,정근상

* 어린이의 목자는 오직 주님을 무엇보다도 더 사랑하고 주님의 양을 먹이고 치는
사역의 수고와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최후의 생의 헌신의 기도를 드린다.


(2) 어 린 이
1) 주일 오전 : 신앙생활 발달 영역에 힘쓴다 - 기도, 찬송, 헌금, 말씀
2) 주일 오후 :
신앙 정서발달영역 - 새찬송 배우기
신앙 인지 발달 영역 - 공작, 종이접기 색칠공부 그리기
신앙 신체건강 발달 영역 - 율동, 무용, 게임, 체조
신앙 언어발달 영역 - 성경동화, 구연동화, 성경암송
찬양과 월별 계획에 따른 활동
선교교육 (선교사이야기, 비디오)
특별활동을 통해 신앙성장교육
3) 절기교육 : 사순절,부활절,감사절(맥추,추수),성탄절
4) 계절 학교 : 여름 성경학교
5) 전도 교육 : 글없는 책 익히기
6) 암송 교육 : 주기도문 / 사도신경 / 십계명 / 성경목록
주일 성경공과 요절 암송
7) 야외학습 : 국립묘지견학, 놀이동산, 소풍, 체육대회
8) 인성교육 : 생활교육

8. 교사실천사항 (교사 십계명)

① 예배 시간을 지키며 예배의 모범을 보이자
② 예배 시작 전 준비된 모습으로 어린이를 웃는 얼굴로 맞이하자
③ 공과준비는 기도로 주일오후부터 시작하도록 하자
④ 일주일 가운데 하루는 어린이들을 전화 심방하자
⑤ 하루에 한번씩 어린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자
⑥ 재적 어린이는 절대로 잃지 않도록 기도하자
⑦ 교사모임에 적극 참여하고 교회학교 모든 행사에 주님 주신 달란트로 참여하자
⑧ 주님의 마음을 품고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보자
⑨ 삶을 통해 가르치는 교사로 어린이와 1:1의 인격적인 관계를 갖자
⑩ 거룩한 하나님의 동역자로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자

9. 유치부 교사기도제목

① 천하보다 귀한 어린영혼을 주님의 마음으로 사랑하게 하옵소서
② 하나님을 알아가는 깊이와 넓이가 자라가게 하옵소서
③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에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게 하옵소서
④ 우리반 아이들에게 어버이 같은 스승이 되게 하옵소서
⑤ 유치부의 모든 교사들이 주님 안에서 하나로 화목하게 하옵소서
⑥ 맡겨주신 일들을 감당하도록 우리의 가정과 일터와 건강을 지켜 주옵소서
⑦ 유치부에서의 매주일이 늘 기쁘고 행복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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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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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의 신앙  영국 청교도와 장로정치

 

 

 
제10장 2차 대각성 운동과(선교운동) 프런티어 운동

1) 제2차 각성운동과 장로교회

독립전쟁의 여파로 미국은 도덕적 타락을 겪음. 이 때 미국인들을 치료하는 운동이 프런티어 운동과 함께 일어난 제2차 대각성운동이다.

2) 교회연합 운동과 장로교회

대각성은 다른 교단들과의 연합운동을 통해 일어나게 되었다. 19세기 초반 미국 장로교도들은 미국에 개혁주의 신앙을 토착화시키기 위해 개혁주의적이고 복음적 신앙을 고백하는 교회들과 교제하는 것을 장려 - 1801년 장로교 총회가 장로교회와 회중교회를 통합할 계획을 세우면서 가속화됨 --> 통합계획은 복음전도를 위한 전략으로, 당시 사람들이 서남부로 이민 - 변방에서 이사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한 연합사업 요청. 장로교회와 회중교회는 모두 칼빈주의적 교리를 고백하고 예배형식도 동일.
* 죠나단 에드워즈 2세는 두 교단을 통합. 연합활동으로 많은 이들이 장로교로 돌아옴.

3) 프런티어 운동과 장로교회

특히 장로교회의 부흥운동은 프런티어 지역에서 크게 일어남. 이 시기는 계몽주의와 자연신교, 경건주의 신학이 미국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기. 이 때 아치발드 알렉산더, 존 홀트 라이스, 제임스 맥그리디에 의해 1798년과 1801년 사이에 프론티어 지역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남.
* 제임스 맥그리디 - 1799년 켄터키의 호겐에서 그의 성도들에게 일주일에 한시간, 한 달에 하루를 기도할 것을 설교. 기도의 결과 큰 부흥. 부흥운동의 특징은 캠프 미팅으로 통나무 강단과 통나무 의자를 사용하여 천막 안에서 자면서 집회. 이 결과 주일학교 운동, 내지와 외지 '선교운동'이 일어남. 계몽주의, 합리주의는 영향력 상실.

이러한 부흥운동은 교세확장의 전환점이 됨. 장로교회와 회중교회에서 많은 교회들이 세워졌으나 파송할 목회자의 절대 부족, 반면에 감리교회와 침례교회는 교회조직과 목회자 교육에 유연성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개척자들을 따라가며 교회를 세움.

* 컴버랜드 장로교회의 분리운동 - 침례교회와 감리교회에 자극 받은 사람들이 장로교회를 확장하기 위해 목사의 수준을 낮추어 수급을 원활히 할 것을 제안, 2차 각성운동은 교리적인 것이 아니라 성경지식을 따를 때 일어난 것으므로 분쟁만 야기하는 교리적 논쟁을 지양할 것을 주장. 그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근거한 미국 장로교회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 교리를 배척하려는 시도를 보임.

** 분리운동에도 불구하고 교회연합과 대각성 운동의 결과 1800년에는 180명이던 목사의 수가 2,140명으로, 449개의 교회가 1,695개의 교회로, 2만명의 교인이 22만명으로 성장. 부흥운동은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선교운동으로 발전.

* 사무엘 밀즈 - 1806년 사무엘 밀즈와 윌리엄스 대학 학생들의 선교운동에 헌신할 것을 맹세하는 '건초더미의 서약'이 있었다. 그들은 선교에 헌신한 후에 '형제들의 선교회'를 조직. 외국 선교활동은 지원할 수 있는 단체를 만들라는 이들의 요구에 따라 1810년 '미국 해외 선교부'가 생김. 1812년 아도니람 저드슨 부부는 버마로, 루터 라이스는 아시아로 선교를 떠남 ---> 이러한 활동에 힘입어 장로교회 안에도 선교운동이 일어나게 됨. 1789년까지 건초더미의 서약의 영향으로 5개 이상의 선교부가 미국에 생기게 됨. 밀즈의 선교지 연구.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주일학교 생김. 미국에 소책자 협의회가 조직되어 기독교 소개, 장로교인들의 능동적 참여.

1812년 3명의 학생으로 프린스톤 신학교가 뉴저지에 설립. 초대교수는 아치발드 알렉산더, 세무엘 밀러. 나중에 찰스 핫지 / 부흥운동을 힘입어 장로교 계통의 신학교들이 세워짐. 1818년 어번 신학교, 1823년 버지니아의 유니온 신학교, 1827년 웨스턴 신학교, 1828년 컬럼비아 신학교, 1829년 레인 신학교, 1830년 매코믹 신학교, 1836년 뉴욕 유니온 신학교.

 

 

제11장 남북전쟁과 진보파와 보수파의 대결(도전 받는 장로교회)


1830년대의 장로교도들에게 중요한 문제는 흑인 문제. 흑인 노예 해방문제는 찰스 피니의 부흥운동에 의해 멀리 번짐.
* 피니 - 변호사, 1821년 개종. 1830-31년에 걸쳐 뉴욕주의 로체스터에서 큰 부흥운동을 일으킴. 인위적, 갈망석을 둠. 회심 없는 부흥은 마귀의 집회, 회심 체험 강조. "어떻게 하면 한 사람도 구원할 수 없는 설교를 하는가?"(랠프 왈도 에머슨의 합리주의적 설교를 꼬집음) 피니는 노예해방을 하나님의 뜻이라 주장.
* 죠지 번 - 피니의 노예해방 주장을 계승. 영국 태생, 버지니아의 렉싱톤 노회에서 안수받음. 설교를 통해 노예제도의 그릇됨을 주장.


노예문제로 사회가 혼란하게 되자 교회는 입장 표명.
1787년 뉴욕 필라델피아 대회 = 회원들의 유익과 사회적 상황에 맞추어 사용할 것을 권고, 1818년 장로교 총회 = 어느 한 종족이 다른 종족을 다스리는 것은 하나님의 법에 모순, 그리스도의 복음 정신에도 반대된다. 문제가 심각하게 되자 1836년 총회는 이 모든 문제를 무기한 연기. 1860년대 교회 안에는 북부 중심의 즉각적인 노예폐지론과 노예제도는 성경적이라는 남부 중심으로 나뉨.


노예문제, 신학적인 문제와 선교정책의 차이는 장로교회를 혼돈 가운데로 몰아넣음.
1) 자유주의 신학의 일어남
유니온 계획에 의해 회중교회 출신의 목사들이 장로교세 확장에는 공헌했으나 상호간의 신학적 차이는 교회를 혼란으로 인도함. 스코트-아일랜드 장로교회 츨신의 목사를 중심한 보수파(Old School)는 회중교회 출신 목사를 중심한 진보파(New School)에 대해 불평하기 시작.

(1) 칼빈주의 대신 자유로운 신학적 입장을 취함 - 교회조직, 관리, 선교활동에 있어 다른 입장.

(2) 특히 선교활동에 있어 재정관리문제가 심각. 보수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철저하게 따를 것과 모든 선교활동을 교단 직영으로 운영할 것을 주장.

(3) 노예문제가 교회분열을 심화시킬 것을 두려워하여 논의를 꺼림. 그러나 진보파들은 통합 계획에 대해 만족, 신학적 관용을 주장, 선교활동을 초교파적으로 시행, 노예폐지를 적극적으로 주장.


2)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장로교도들의 반응
시간이 흐르면서 두 세력의 간격은 더욱 멀어짐.
1831년 피츠버그대회가 서부 해외 선교부를 조직하자 보수파는 1837년 장로교 해외 선교부를 조직해 서부 선교부 기금과 사업을 자신들의 관할 아래 두려 했다.
1835년 보수파는 교회를 순회하며 불건전한 교리의 보급과 신앙적 방종을 경고. [행위와 증거]란 소책자를 교회에 보급.
1837년에 이르러 보수파는 장로교회 안에서 5/9 이상의 다수가 되자 (1) 통합 계획을 폐지, (2) 통합계획에 의해 조직된 4개의 노회, 웨스턴 리저브 노회, 위티카 노회, 제네바 노회, 제니시 노회는 장로교 노회에 소속될 수 없다고 선언 - 진보파를 장로교회에서 제거함을 의미. 보수파는 남부와 북동부 지역을, 진보파는 북부지역을 차지하게 됨 - 이러한 교회의 분열은 미국 사회를 지리적으로 양분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두 교회의 적대감은 남북 전쟁의 원인을 제공.


노예문제로 시작된 장로교회의 분열은 다른 교회에게도 영향을 미쳐 1844년 침례교회가 남북으로 1845년감리교회가 남북으로 분열되었다.
진보파의 장로교회 총회는 노예제도를 정죄하는 결의를 통과시킴. 남부의 소수 진보파는 북부에서 이탈하여 '연합남부 대회'를 조직.
* 가드너 스프링스 목사 - 보수파는 노예제도 인정하는 입장. 1861년 뉴욕에서 가드너 스프링스 목사가 노예폐지론을 들고 나오면서 분열운동이 가속화됨. 그는 남과 북으로 나뉘어진 장로교회를 하나로 하기 위해서는 노예제도를 폐지할 것을 주장. 가드너 스프링스의 제안은 총회에서 156대 65로 채택. 그러나 노예제도를 지지하는 남부의 장로교회는 보수파에서 이탈하여 1861년 '미연방장로교회'를 조직(벤자민 팔마, 쏜 웰의 지도아래 아틀랜타의 아우구스타에 총회 - 결국 노예문제로 장로교회는 4조각으로 나뉨).


남북전쟁이 끝나고 1870년부터 화해의 무드 속에서 북부의 진보파, 보수파 모두 노예문제에 대해 같은 입장을 취하게 되어 북부의 진보파 교회와 보수파 교회는 1870년 합동 '미국 장로교회'를 조직(남부는 합동에 반대). 재결합된 북부 장로교회는 크게 부흥 --> 선교활동에 적극 참여, 19세기를 위대한 선교의 세기로 만듬.


19세기는 신학적인 격변의 시기
*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 미국 장로교 신학자들에게 받아 들여짐.
* 제임스 우드로우 - 성경을 진화론에 입각하여 해석하려 함.
* 찰스 브릭스 - 성경의 고등비평 사상을 미국 교회에 소개. 총회의 정죄 - 성경의 축자 영감과 무오성 선언.

제12장 20세기 장로교회(근본주의 운동과 장로교회)


20세기 전야에 미국을 특징지은 사건들
(1) 부흥운동
* 제레미야 랑페에 - 1857-1858년에 기도운동이 일어남. 1857년 6명의 동지와 기도 시작, 6개월 뒤 10,000명이 기도에 참석, 뉴욕 근처에 50만-100만명이 기독교로 돌아옴.
* D.L.Moody - 이러한 기도운동은 무디의 부흥운동으로 연결됨. 구두 수선공이었으나 은혜를 받은 후 벤쿠버의 브리티시 아일랜드에서 부흥운동 시작, 1873-1875년 사이 시카코의 복음화를 주도, 대중집회운동 전개, 찬송과 기도 회개운동이 일어남.
* 르우벤 토리, 집시 스미스, 빌리 샌디, 빌리 그래함 - 무디의 전도운동을 계승.
(2) 사회개혁 운동 : 19세기 말의 복음주의 운동은 노예폐지 운동과 금주와 같은 사회개혁운동으로 나가게 됨. 남북전쟁으로 음주문화가 만연할 때 금주운동과 절제운동, 1895년 살롱 폐지 협의체 조직.
(3) 자유주의 운동 : 1903년 북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수정 - 역사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입장을 떠났음을 보여줌. 이후 북장로교회는 컴버랜드 장로교회와 합동.
(4) 근본주의 운동 : 기독교 신앙에 대한 도전이 심해지자 신앙옹호를 위한 노력이 교회 안에서 일어남. 현대주의의 위협, 기본적 교리를 부정하는 자유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지역별로 근본주의자들은 모임을 가짐. 1909년 [근본적인 것들 - 진리의 증언]이란 책자가 나옴. 근본원리는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육체적 부활, 성경의 무오성, 대속적 속죄, 그리스도의 임박한 육체적 재림이었다.
그러나 이 입장에 서있던 근본주의자들은 전천년설 만을 바른 신앙이라 주장 - 다른 근본주의자들은 설 땅이 없게 됨.
 

1920년대의 프린스턴 신학교의 재구성 - 교과과정이 구시대적, 실천신학은 없고, 성서에 대한 연구도 없고, 성서비판만 강조. 교수 가운데 사변적 독일 신학에 심취한 자, 이단자들이 다수. 프린스턴은 새로운 교장을 새움으로 개혁하려 했으나 실천신학 교수였던 스티븐슨은 직무를 감당할 때 너무 독단적 학사 운영으로 많은 문제. 복음주의적이지 개혁주의가 아니었다. 이러한 가운데 그레샴 메이첸이 변증학 교수로 자리에 오르게 됨. 자유적인 총회는 스티븐슨을 지지하여 메이첸에게 압력을 가해 프린스턴을 떠나게 함.

 

* 그레샴 메이첸 - 프린스턴을 떠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세움. 그는 C.R.C. 계통에서 교리적인 신학자를 영입하고, O.P.C. 교단을 만들었다. 메이첸이 웨스트민스터를 세울 때까지만 해도 보수적인 많은 교회들이 그를 지지하였으나 천년왕국설로 인한 교회의 분열은 보수신앙에 대한 불신을 초래. 1930년대의 웨스트민스터는 근본주의 신학의 중심지. 그러나 필라델피아 근본주의 협의회가 웨스트민스터를 비난하고 전천년설을 공식적 교리로 채택하고, 훼이스 신학교를 세워 나감으로 보수세력은 약화되었다. 천년왕국 논쟁으로 근본주의자들은 분리주의자로 인정되어 많은 이들이 자유주의 교회로 떠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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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성경 학교를 위한 기도문 Prayer for Summer Bible School

 

 

 


 영광과 존귀와 감사와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주님,

온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머리 숙여

감사와 헌신의 제사를 드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일학교 교사 헌신예배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드리오니

기뻐 받아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우리 교회에 주일학교를 세워주시고 말씀으로

 양육할 다음 세대들을 불러주시고

이들을 가르칠

선생님들까지 택하시고

 헌신의 기회를 베풀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7월과 8월 앞으로 두 달 동안

유치부 성경학교부터 시작하여

 유초등부, 중고등부,

청년부, 남녀전도회 수련회까지

계획되어 있습니다.

가르치는 교사들에게는 지치지

않는 열정과 말씀을

 한치의 가감도 없이 가르칠 수 있도록

성령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된 자들이 되게 하시고


배우는 귀한

생명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각자의 마음 밭에 새겨져

 그 열매가 비록 먼 훗날에

맺어질지라도 땅에 헛되이

 떨어지지 않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특별히 이번 여름 행사 기간은

 우리 주일학교에

 속한 모든 생명들이

 예수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영접하여 나의 구주로

고백하며 성령을 체험하는

 각자의 삶에 역사적인 순간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그리스도를 모든 지체들이 영접하여

앞으로의 삶의 방향과

목표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

 분명하게 깨달아 믿음의 확신을 통해

예수그리스도만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십자가 군병들이 되게 하옵소서.

 

 

기도는 하나님과 나를 강하게 붙어있게 하는

 큰 능력이 있음을 깨닫게 하시고 기도하는 자의

위대함을 알게 되는 시간이 되게 하시며


하나님 앞에 부족한 입술로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중보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것임을

분명하게 알고 감사할 수 있는

성경학교 순서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교회의 넉넉한 재정의 형편이 아님에도

여름행사들을 계획한바 대로 차질 없이

 감당해 나가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재정을 의지하지 않고

기도와 하나님 함께 하신다는

 오직 예수,

하나님만 바라보는 훌륭한 믿음을 가진

 다음 세대의 양육에 집중하는 자랑스러운 교회로

성장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오늘 교사 헌신 예배를 통해

주님 영광 받아주시길 원하오며

 존귀하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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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여름 성경 학교를 위한 기도

 

 


영광과 존귀와 감사와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주님,

온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머리 숙여

감사와 헌신의 제사를 드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일학교 교사 헌신예배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드리오니

기뻐 받아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우리 교회에 주일학교를 세워주시고 말씀으로

 양육할 다음 세대들을 불러주시고

이들을 가르칠

선생님들까지 택하시고

 헌신의 기회를 베풀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7월과 8월 앞으로 두 달 동안

유치부 성경학교부터 시작하여

 유초등부, 중고등부,

청년부, 남녀전도회 수련회까지

계획되어 있습니다.

가르치는 교사들에게는 지치지

않는 열정과 말씀을

 한치의 가감도 없이 가르칠 수 있도록

성령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된 자들이 되게 하시고


배우는 귀한

생명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각자의 마음 밭에 새겨져

 그 열매가 비록 먼 훗날에

맺어질지라도 땅에 헛되이

 떨어지지 않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특별히 이번 여름 행사 기간은

 우리 주일학교에

 속한 모든 생명들이

 예수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영접하여 나의 구주로

고백하며 성령을 체험하는

 각자의 삶에 역사적인 순간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그리스도를 모든 지체들이 영접하여

앞으로의 삶의 방향과

목표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

 분명하게 깨달아 믿음의 확신을 통해

예수그리스도만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십자가 군병들이 되게 하옵소서.

 

기도는 하나님과 나를 강하게 붙어있게 하는

 큰 능력이 있음을 깨닫게 하시고 기도하는 자의

위대함을 알게 되는 시간이 되게 하시며


하나님 앞에 부족한 입술로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중보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것임을

분명하게 알고 감사할 수 있는

성경학교 순서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교회의 넉넉한 재정의 형편이 아님에도

여름행사들을 계획한바 대로 차질 없이

 감당해 나가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재정을 의지하지 않고

기도와 하나님 함께 하신다는

 오직 예수,

하나님만 바라보는 훌륭한 믿음을 가진

 다음 세대의 양육에 집중하는 자랑스러운 교회로

성장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오늘 교사 헌신 예배를 통해

주님 영광 받아주시길 원하오며

 존귀하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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