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학교 여름성경학교 기도문

 


  

여름성경학교 기도문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34:9-10)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주님,
저희들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심을 감사드리오며 이 시간
찬송과 영광을 돌리옵니다.

메마른 땅에 단비를 주시사, 만물이 신선하게 자라게 하시며,
젖은 땅에 햇빛을 비취사 오곡 백과가 성숙케 하시며,
온 천지가 주의 은혜와 축복 속에 자라고 또 자라게 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주님, 이 시간도 지난 한 주간 동안
아쉬웠던 경건한 삶을 회복하게 하시고,
주님의 참 자녀로 인격이 갖추어지게 하시며, 맡은 일을
성실히 이행하고 책임을 다하여 이 여름을 알차게
살아갈 수 있는 인격과 믿음을 심어 주시옵소서.

가물어 메마른 땅 위에 단비를 내리시고 충분한 비를 주시되
부족함 없도록 채워주신 주님, 저희의 심령에 장
마비와 같은 은혜의 비를 내리셔서, 그 비를 심령 깊숙이
충만하게 받아들이게 하시고, 저희의 믿음 또한 무성하게
자라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무더운 여름을 맞이하여
교회가 여러 가지 여름 행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계획하고 준비하는 자들에게 지혜를 주셔서,
소문만 무성한 여름 행사가 아니라 열매를 많이 맺어
주님께 큰 영광 돌리는 향기로운 여름 행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어린 학생들을 지도하고 양육하는 교사들마다 그 심령을
충만하게 하셔서, 어린 심령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교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교사들이 하는 일마다 건성으로 임하는 일이 없게 하시고
주님처럼 늘 희생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책임감 있는
교사들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예배의 시종의 주님께 의탁하오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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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학교  유치부 예배 대표기도문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 일주일 동안 건강하고
안전하게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지런하고 착하고 예쁜 유치부 친구들이
기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모였습니다.
선생님 따라 찬양과 율동을 열심히 하여
예수님을 기쁘게 하여드리고 또 칭찬받는
우리 친구들 되게 해주세요
전도사님이 재미있게 전하시는 성경 말씀도 똑 바로
앉아서 귀기울여 들을 때 예수님은 살아서
우리 친구들과 늘 함게 하시는 분임을
믿는 지혜로운 친구들 다 되게 해주세요
또 집에서는 엄마 아빠 말씀도잘 듣고 식사때나
잠자기전 아침에 일어나서도 열심히 기도하고
하나님을 안 믿는 친구들에게 전도하는데
앞정서는 전도왕들이 다 되게 해주세요
예수님! 우리 모든 친구들에게 큰 믿음과 지혜를
주셔서 튼튼하게 자라도록 인도해 주시고
또 예수님의 사랑을 듬뿍 받는 하나님의 아들 딸
되게 해주세요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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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성경학교를 위한 요일별 기도문

 

 

 

 

 

성경학교를 위한 기도문입니다.(세부적으로 기도하네요)

하루에 한 번, 각자가 정한 장소에서 다같이 기도 드립시다!

* 월요일 - 전체기도
* 화요일 - 교육· 프로그램
* 수요일 - 홍보·동원
* 목요일 - 등록·재정·배식
* 금요일 - 시설·날씨·안전
* 토요일 - 진행·섬김,

● 월요일 - 성경학교 자체를 위한 기도

1. 하나님께서 성경학교 전체를 인도하시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서 받으소서.
2.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의 소망인 소년부 어린영혼들을 변화시키시며, 성경학교를 통하여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 주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3. 방해하는 사탄의 세력을 결박시켜 주시고, 모두가 사탄의 분열시키고자 하는 전략을 알아, 더욱 하나됨을 힘써 지키게 하소서.
4. 참석하시는 지도자, 교사, 학생들 모두가 성경학교에 참석하기 전부터 사모하는 마음을 갖고 기도로 준비하게 하시며, 자신의 죄를 통회하는 마음을 가지고 진정한 회개를 하게 하소서.
5. 성경학교 장소에 성령의 강한 임재하심이 있게 하시며, 참석한 어린이들의 상처와 아픔이 치유되고, 어린이들이 분명한 비전과 삶의 목적을 발견하며 인격과 삶의 변화가 있게 하소서.
6. 우리 어린이들이 민족 복음화, 세계 복음화를 위해 헌신하는 영적 부흥의 불씨가 되게 하소서.
7. 말씀을 전할 하나님의 종에게 성령충만케 하셔서, 주님이 사용하여 주시며, 어린 영혼들을 향한 사랑과 열정으로 담대히 말씀을 전하게 하소서.
8. 성경학교를 준비하는 교사, 봉사자들이 성령충만하고 영육이 강건하게 하시며, 한 마음으로 동역을 잘 이루게 하소서.
9. 성경학교 동안 받은 은혜대로 살게 하시고, 이후 지속적으로 교회에서 훈련이 이루어지고 충성된 일꾼으로 육성되게 하시며, 이 시대에 하나님의 귀한 일꾼들이 되게 하소서.
10. 성경학교를 통하여 우리 소년부가 더욱 성장하며 발전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하소서.


● 화요일 - 교육·프로그램을 위한 기도
1. 예배의 시간들을 통하여 영성을 회복시켜 주시고, 기도하며 찬양하고 말씀을 사모하는 성경학교가 되게 하소서.
2. 조별모임시 조 편성에 불만이 없게 하시고 조와 조원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하소서.
3. 성경 학습때 아이들이 말씀에 귀기울이게 하시고 가르치는 선생님께도 지혜를 주소서.
4. 운동하는 시간과 수영하는 시간에 다치지 않도록 보호하시고 모두가 참여하는 즐거운 시간이 되게 하소서.
5. 기도할 때에 선생님과 아이들 모두 기도의 입술이 열리게 하시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6. 아침마다 있을 경건의 시간때 아이들이 졸리지 않게 하시고 깊은 말씀의 기쁨을 개인적으로 누릴 수 있도록 인도하소서.
7. 모든 프로그램 가운데 함께 하셔서 주님께서 친히 진행하시고 이끌어 주시옵소서.
8. 모든 프로그램이 사랑 안에서 진행되게 하시고, 교사와 아이들이 하나되게 하소서.


● 수요일 - 홍보·동원을 위한 기도

1. 21세기 민족과 세계의 주역이 되며, 교회의 귀한 일꾼이 될 어린영혼들을 많이 보내주소서.
2. 꼭 필요한 친구들에게 전달되어지고 최선의 홍보가 이루어지게 하시며, 온 교회의 관심이 되게 하소서.
3. 선생님들, 부모님들이 성경학교를 적극적으로 홍보하게 하시며, 아이들이 성경학교에 참석하려는 사모하는 마음을 갖게 하소서. 그리고 유년부, 초등부, 소년부의 모든 아이들이 다 참석하게 하소서.
4. 우리 아이들을 지도할 보조 교사들을 보내주소서.
5. 선생님들을 통하여 아이들 개개인에게 잘 홍보가 되어 모두 참석하게 하옵소서.
6. 성경학교가 학교 행사와 학원 학습과 겹치지 않게 하시고, 혹 겹치더라도 믿음으로 성경학교에 우선 순위를 두고 참석하게 하소서.
7. 부모님의 반대, 학원공부, 여행, 개인적인 성격, 등록비의 부족 등 참석에 어려움을 주는 요인을 믿음으로 극복하게 하소서.


● 목요일 - 등록·재정·배식을 위한 기도
1. 성경학교 전에 등록이 완료하여 준비에 협력이 되게 하시고, 성경학교 준비에 차질이 없게 하소서.
2. 등록된 학생들이 차질없이 참여할 수 있도록 일정을 주장하여 주소서.
3. 등록인원과 등록비가 차질이 없게 하시고, 지혜롭고 규모 있게 재정이 관리, 사용되게 하소서.
4. 등록비로 어려운 학생들의 필요를 채워주소서.
5. 배식을 위하여 봉사하시는 집사님들에게 일정을 허락하시고, 지혜와 건강을 주소서.
6. 봉사하시는 집사님들의 가정을 살피셔서, 성경학교 기간동안에 평안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7. 성경학교 동안에 배탈 등 질병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일들이 없도록 하나님께서 지켜주소서.
8.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음식을 감사히 먹게 하시고, 그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드리는 성경학교가 되게 하소서.


● 금요일 - 시설·날씨·안전을 위한 기도
1. 숙소, 강의장, 운동장, 수영장 그 외 필요한 시설들이 확보되게 하시고, 잘 설치되게 하셔서 모든 순서를 통하여 영육간에 유익을 얻게 하소서.
2. 전체 시설을 사용할 때, 시설물(샤워장, 화장실, 식당, 숙소, 예배실 등)이 깨끗하고 질서 있게 사용되게 하소서.
3. 방송 음향시설이 적절히 설치, 사용되어 진행을 돕게 하소서.
4. 성경학교 동안에 은혜 받기에 적합한 날씨를 허락하시고, 더위로 인해 진행에 어려움이 없게 하소서.
5. 오고 가는 동안 경미한 사고도 없게 하시고 제 시간에 잘 도착이 이루어지도록 하소서.
6. 방문을 위하여 오고 가시는 성도들의 교통 안전도 주님께서 책임져 주소서.
7. 운전, 배식 등 봉사로 수고하시는 모든 분들의 안전과 건강을 지켜주소서.
8. 운동 및 물놀이에서 안전을 지켜주시고, 건강함으로 성경학교를 은혜 중에 마치게 하소서.


● 토요일 - 진행·섬김을 위한 기도

1. 총 진행을 담당할 부장님과 총무 선생님께 하나님께서 특별한 능력을 허락해 주소서.

2. 각 프로그램의 진행을 담당할 선생님들이 겸손과 진실함, 성령의 충만함과 지혜로 잘 준비하며, 인도하게 하소서.
3. 각 순서에 시간이 잘 지켜지게 하시고, 이동할 때에 혼란이 없게 하소서.
4. 전체적인 진행을 위해서 봉사할 분을 보내 주시며, 봉사자들의 업무 분담이 잘 이루어져서 진행이 원활하게 하소서.
5. 각 교사들이 담당한 업무분담이 명확하게 이루어지게 하시며, 또 교사간 협조가 긴밀하게 하소서.
6. 성경학교에 참석하는 모든 교사와, 봉사하시는 분들이 모든 아이들을 하나님이 주신 자기 자녀처럼 잘 돌아보고 돕게 하소서.
7. 주변 마을의 도움을 적극적으로 받게 하셔서, 전체 진행에 큰 도움이 되게 하소서.
8. 성경학교 동안 참석자 모두가 자발적으로 숙소와 성경학교 장소를 청결하게 유지하게 하시고, 쓰레기 수거와 처리가 잘 이루어지고 불편함이 없게 하소서.
9. 성경학교 모든 부분이 촬영, 기록되어 좋은 자료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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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학교 어린이예배 대표기도문

 


   

사랑하는 하나님,

높고 푸른 가을하늘을 선물로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을 하늘과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저희들이 되게 해주세요. 

예배를 통해 주님을 더욱 가까이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들이 비록 어리지만, 하나님을 생각하며 순종하는 마음은 쑥쑥 자라서 큰 일꾼되게 해주세요. 

7월 8일에 해피데이 전도 초청잔치가 있습니다.

나오지 않는 친구들과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친구들을 위해 기도하며  

이 날에 손붙잡고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하나님께 올라가시면서 명령하신 말씀을 기억하며

전도하는 일에 힘을 쓰는 저희들이 되게 해주세요.

성령님, 친구들에게 예수님 전하는 일이 기쁨이 되게 해주세요.

예수님 믿고 따르는 일이 그 어떤 것보다 즐거운 일임을 깨닫게 해주세요. 

감사하는 마음을 모아 아버지께 예배를 드립니다.

다른 생각이나 졸음은 다 몰아내고 하나님께 집중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저희들을 목숨보다 더 사랑하심을 기억합니다.

이 예배를 받아주시옵소서.

사랑하는 가득 담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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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여름성경학교 기도문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34:9-10)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주님,
저희들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심을 감사드리오며 이 시간
찬송과 영광을 돌리옵니다.

메마른 땅에 단비를 주시사, 만물이 신선하게 자라게 하시며,
젖은 땅에 햇빛을 비취사 오곡 백과가 성숙케 하시며,
온 천지가 주의 은혜와 축복 속에 자라고 또 자라게 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주님, 이 시간도 지난 한 주간 동안
아쉬웠던 경건한 삶을 회복하게 하시고,
주님의 참 자녀로 인격이 갖추어지게 하시며, 맡은 일을
성실히 이행하고 책임을 다하여 이 여름을 알차게
살아갈 수 있는 인격과 믿음을 심어 주시옵소서.

가물어 메마른 땅 위에 단비를 내리시고 충분한 비를 주시되
부족함 없도록 채워주신 주님, 저희의 심령에 장
마비와 같은 은혜의 비를 내리셔서, 그 비를 심령 깊숙이
충만하게 받아들이게 하시고, 저희의 믿음 또한 무성하게
자라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무더운 여름을 맞이하여
교회가 여러 가지 여름 행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계획하고 준비하는 자들에게 지혜를 주셔서,
소문만 무성한 여름 행사가 아니라 열매를 많이 맺어
주님께 큰 영광 돌리는 향기로운 여름 행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어린 학생들을 지도하고 양육하는 교사들마다 그 심령을
충만하게 하셔서, 어린 심령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교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교사들이 하는 일마다 건성으로 임하는 일이 없게 하시고
주님처럼 늘 희생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책임감 있는
교사들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예배의 시종의 주님께 의탁하오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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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학교 설교 (하나님 영광과 믿음)  Sunday school's Sermon

 

 

누가복음17장 11-19절
  
사람이 무엇을 만들때는 목적을 가지고 만드는 거예요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처음 만든 사람인데 왜 비행기를 만들었을까요 ?
아마도 하늘을 날아서 빨리 이동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만들었을 거예요
  
사람들이 왜 슈퍼에 갈까요 ?
자기가 필요한 물건을 사려는 목적을 가지고 가겠지요...
  
아이들이 학교에 왜 갈까요 ?
공부를 해서 많은 지식을 습득하고 훌룡한
사람이 되려고 갑니다
  
이처럼 무엇을 만들거나 무슨 일을 할때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만들고 또한 일을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여러분을 이땅에 태어나게 하셨는데
무슨 목적을 가지고 여러분을 이땅에 보내셨을까요 ?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 첫 번째 물음에 보면
우리가 이땅에 사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 하는 거라고 정의 하고 있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이땅에 보내신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시려고
우리를 이땅에 보내셨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 의 영광과 믿음이 무엇인지
공부할 거예요
  
오늘본문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 잘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에 열명의 나병 환자가 모여 살고 있었어요
예수님 당시에 나병에 걸렸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은 병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고칠수 없는 병이었어요
요즘이야 의술이 발달해서 나병환자도 고칠수가 있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불치 병 이었어요
  
문둥병에 걸리면 성안에서 가족과 같이 살수가 없었어요
성바깥으로 쫒겨나서 성안에서 던저 주는 음실을 받아 먹으며
살았어요
  
몸은 상처가 나서 썩어 들어가고
자고 일어나면 자기도 모르게 발가락 이 떨어져 나가고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고 코가 덜어져 나가는
병이 나병인 거예요
  
그들에게 소망이란 없었어요
죽지못해 살아가고 있는 거지요
  
그런 그들에게 복된소식 복음이 들려 왔어요
죽은자도 살리시고 앉은뱅이도 일으키시며 중풍병자도 고치시던
예수님이 자기들 옆을 지나간다는 소식이었어요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들은 그들은 한가닥 희망을 가지고
예수님을 기다렸어요
그때 멀리서 예수님이 지나가는 것이 보였어요
  
그들은 예수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는 존재 들이었어요
문등병 걸린 자들은 부정한 존재들 이기 때문에
다만 멀리서서 소리 높여 예수님 이름을 불렀어요
  
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이 여겨 주세요
긍휼을 베풀어 주세요
그들이 할수 있는 것은 예수 이름을 부르는 것 밖에
달리 할수 있는 것이 없었어요
예수를 부르는 소리를 예수님이 들으시고 그들을 보셨어요
그리고 말씀 하셨어요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말씀이 들리자 그대로 순종 하여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어요
  
문둥 병자들은 얼마나 좋았을까요
한번 상상해 보세요
기뻐서 펄쩍 뒤고 난리가 났겠지요
내 몸이 깨끗해 졌다고 정상으로 돌아 왔다고
기뻐서 어쩔줄을 모를고 난리 법석을 떨었겠지요
  
그러나 고침을 받은 10명중 9명은 제갈길로 가버리고
그중에 한명만이 큰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 께 돌아와 발아래 업드려 감사했는데
그는 유대인들로부터 개 돼지 취급을 받는
사마리아 사람 이었다는 거예요
  
예수님은 말씀하셨어요
열명이 다 고침을 받지 않았느냐
아홉은 어디 있는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온자가 없느냐 ?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을 향하여 말씀 하셨어요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감사한
사마리아 사람은 육체적인 구원을 얻었을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구원을 얻을수가 있었어요
  
그러나 고침을 받은 9명은 육체적인 구원은 얻었지만
영혼 까지 구원을 받을수는 없었어요
..................................................................................
  
이 이야기는 먼 옛날 예수님 당시의 이야기가 아니고‘
현재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을 말씀하고 계시는 거예요
  
말씀에 보면
열명의 나병환자다 나옵니다
열이라는 숫자는 완전한 수예요 또한 전체를 뜻하는 수예요
  
열명의 나병 환자는 실제로 열명 숫자를 말할수도 있지만
세상의 사람들의 모든 영혼 의 현재 상태를 말하고 있는거예요
  
세상 사람들의 모든 영혼 상태는 아담의 범죄이후
문둥병자 와 같이 죄로 인하여
영혼이 썩어 문드러지고 냄새가 나고 아무 소망 없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 라는 것을 설명해 주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은 하나님 이셔요
예수님은 어쩌다 우연이 사마리아와 갈리리 사이로
지나 가신 것이 아닙니다
나병환자에게 가신 것은 하나님의 크신 계획 안에 있는거예요
예수 님은 반드시 그 길을 지나 가야 하는 거예요
왜 냐 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만 움직였으니까요
  
열명의 문둥 병자들은 예수님을 만났고 똑같이 병고침을 받았어요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고칠수 없는 병이 나았다면
그것은 분명이 하나님 만이 하실수 있는 일을 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이 셨구나를 깨달아야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봐야 했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본사람은 사마리라 사람 한사람 뿐이었다는 거예여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아홉 사람은 그냥 제갈길로 간거예요
눈에 보이는 제사장을 만나러 간건지 가족을 만나러 간건지
더 이상 그 다음 이야기가 나오지를 안아요
  
그러나 그중의 한사람 사마리아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고 영광의 본체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닫고 대 제사장이신 예수님 께 자기 몸을 보이러 나아오는 거예요
내가 깨끗해진 것은 내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요 은혜입니다 감사하며 나아오는 거예요
  
  
그럼 그 일이 지금 나에게 일어나고있는 일인데
지금은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데 구원 받은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 께 나아가나요 질문이 생길수가 있어요
  
우리도 사마리아 문둥병자와 같이 이 우주 만물속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예수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말씀의 약속을 믿어야 하는 거예요
우리 맘속에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계심을 끈임없이
생각해 내야 하는 거예요
말씀속에 예수님이 계시기에 늘 말씀을 읽어야 하고 설교를 통해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이 예수님 께 나아 가는 거예요
또한 끈임 없이 주님 이름 예수님을 불어야 합니다
이름을 부른 다는 것은 그 분의 전부요 실체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이 영광 돌리고 감사하며 나아오자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느니라 말씀 하셔요
다시 말해서 영광 돌림과 믿음을 똑같이 보았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믿음의 삶을 살수 있잔아요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가요 ?
어떻게 생겼나요 ?
.................................................
        
영광은 크게 세가지로 나뉠수 가 있어요
1, 본체적 영광 (본유적 영광)
2. 발산적 영광 (발로적 영광)
3. 효과적 영광 (반응적 영광)
  
첫 번째 : 본체적 영광이란 무엇인가요 ?
본체적 영광이란
다른 피조물들 과는 비교할수 없는 하나님 안에 실제하고 있는
탁월한 신성 자체를 말하는 거예요
다시말하면 하나님 자신모든 것 을 본체적 영광이라고 할수 있어요
  
하나님의 외적인 탁월성과 내적인 완전성을 본체적 영광이라
말할수 있는데
  
외적인 탁월성 에는
시작과 끝이 없으신분 영원 하신분(광대하시고 크신분, 우리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수 없는 부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시작과 끝이 있으나 하나님은 시작과 끝이 없는 분이셔요
  
무소부재 한신분 (아니계신 곳이 없으며 세상 어느곳에도 계신분)
시공간을 초월 하신분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사시는 분이고 막힌 공간일지라도 그곳을 걸림 없이 넘나 드실수 있는 분이셔요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모든 피조물들은 스스로 존재할수 없음)
말씀으로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붙들고 계시는 힘 하나님의 능력 등을
외적인 탁월성 하나님의 영광 이라고 말할수 있어요
  
내적인 완전성 에는 
그는 지혜와 지식과, 능력, 거룩과 의, 선에 있어서 무한하신분. 즉 그는 완전자 이신분.
사랑 온유 인내 긍휼 등이 인간과 비교할수 없이 완전함을 말해요
(시편 29편3, 에베소서 1장17절)
그는 완전 충족 하셔서 어떤 점에서도 부족이 없으셔요.
하나님의  완전성은 곧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두 번째 발산적 영광
본체적 영광인 신성이 밖으로 흘러나와 피조물 에게 입혀지고 보여지고
경험 되어지고 인식 되어 지는 것을 발산적 영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충만하신 신성이 만물에게 충만하게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되는 것
(시편8:1-3) 자연을 통해 나타나지요
    
예를 들어
예뿐 꽃을 보면 정말로 예쁘죠 꽃무뉘 점 하나 하나 까지
사람이라면 도저이 만들 수 없음을 느끼게 되고
그 꽃속에 하나님이 만드심을 보게될 때
 
예수를 안믿는 사람들은 꽃을 보면서 단순히 예쁘다 말하지만
예수를 믿는 우리들은 그속에 계신 하나님의 발산적 영광을 보게 되고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하고 저절로 주님의 영광을 노래하게 됩니다
  
또 성경속에는 하나님의 발산적 영광으로 가득차 있어요
그래서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발산적 영광을 경험하고 보게 되는 거예요
  
세 번째 효과적 영광
자연이나 성경을 통해서 발산적 영광을 경험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자 하는 갈망이나 행위로 인하여
나타나는 결과물 (대상16:25-29)
  
다시말해 성경에서 하나님 말씀이 원수까지 사랑하라 했기에
나는 사랑하기 싫은데 하나님 말씀이 사랑하라 했기에
순종해서 사랑했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효과적인 영광이 되는 거예요
  
발산적 영광을 경험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다른사람들에게 삶으로 보여지고 입으로 자랑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효과적인 영광을 나타내며 사는 거예요
  
우리 그리스도 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살아야 하는데
그 영광은 이 효과 적인 영광을 말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발산적 영광을 받고 그 영광을 나타내며 사는 삶을
살 때 그 영광은 내것이 아니기에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말하며 자랑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라는 거예요
  
그런자를 향하여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느니라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다시 찾은 사마리아 문둥병자는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문둥병을 낫게 할사람은 하나님 밖에 없어
그렇니 내병을 낫게 한 예수님은 하나님 인거야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하나님 만이 가진 능력의 영광을 본거예여
그렇니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밖에 없었고 감사할 수밖에 없었어요
  
우리가 세상에 살때에 하나님의 영향력으로
말씀에 순종하여 나타나는 결과물에 대하여
이 일은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이것은 본래 하나님 것이었습니다
하고 하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께 돌려 드릴때에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말씀하시며 믿음이 있구나
칭찬 하십니다
  
믿음 생활은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사는 것이 믿음 생활입니다
내 힘이나 능력으로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능력으로 사는 것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 것이며
하나님 만이 하실수 있는 일입니다 하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우리
주사랑 교회 학생들이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부탁 드립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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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존재하는 이유 - C.S.루이스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드림

 

25.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28.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29.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31.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32.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33.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 14:25-33)

 

1. 얼마나 희생해야 할까?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모든 사람이 갖는 일반적인 생각은 얼마나 많은 것을 드려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다양한 욕구와 이해 관계를 가진 보통의 자아를 신앙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리고 그 다음에 ‘도덕’이라든가 ‘점잖은 행동’, ‘사회의 이익’ 같은 어떤 것을 위해 자신의 자아를 희생시킨다. 왜냐하면 대개 그러한 것들은 자아의 욕구에 제동을 걸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하게 산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사회적 요구에 대해 자신을 포기하는 것을 말한다. 보통의 자아가 하고 싶어 했던 일이 때로는 소위 ‘잘못된’ 것으로 드러날 경우도 있다. 그러한 경우에는 마땅히 그것을 포기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행히 ‘옳은’ 것으로 판명될 경우도 있는데, 그럴 때에는 마땅히 그것을 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 속에는 모든 요구 조건이 충족되어도 여전히 자아가 남아 있어서 나름대로의 삶을 영위하고, 또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 기회와 시간을 갖고 싶어하는 본능이 있다. 사실상 우리는 세금을 정직하게 꼬박꼬박 내는 사람과 매우 흡사하다. 그 사람은 세금을 확실하게 잘 내기는 하지만 세금을 내고도 여전히 자기가 먹고 살 만큼의 돈이 남아 있기를 진정으로 원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본래의 자아를 여전히 출발점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갈등이 있는 것이다.

 


2. 두 가지 결과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볼 때 두 가지 결과가 예상된다. 선하게 살기를 포기하고 자아에 충실하든가, 아니면 자아를 버리고 완전히 불행해지든가 이 둘 중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자아의 희생을 요구하는 모든 요구 조건들을 진정으로 충족시키려고 하다 보면 틀림없이 자기에게는 기본적으로 있어야 할 것조차 남아 있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양심에 따라 살면 살수록 그 양심은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우리의 자아는 매 순간마다 굶주리고 괴로워하며 염려하게 되므로 점점 더 화를 내게 된다.

 

그래서 마침내 우리는 선하게 살기를 포기하든가, 아니면 소위 ‘남을 위해 살면서도’ 늘 우리 자신을 순교자로 자처하고 남이 그것을 더 잘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며 불만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 중의 하나가 되고 말 것이다. 일단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고 나면, 처음부터 솔직히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것보다 우리와 함께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들에게 훨씬 더 해로운 존재가 될 것이다.


 

3. 어렵고도 쉬운 길

 

       그리스도인의 길은 어렵기도 하고 쉽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나에게 모든 것을 바쳐라. 나는 너의 시간과 물질과 일을 원하지 않고 바로 너를 원한다. 나는 너의 자아를 괴롭히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그것을 없애려고 왔다. 미봉책은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한다. 나는 여기저기 가지만을 잘라내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 전체를 베어 넘어뜨리기를 원한다. 자아 전체를 내어 버려라. 악하다고 생각되는 욕망만이 아니라 선하다고 생각되는 요구까지도 모두 내어 버려라. 마음의 소욕을 모두 내어 버리면 그 대신 내가 새로운 자아를 주겠다. 사실, 나는 너에게 나 자신을 줄 것이다. 나의 모든 것이 너의 것이 되도록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길은 우리 모두가 하고자 하는 것보다 더 어렵기도 하고 더 쉽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때로는 그리스도인의 길이 매우 어렵다고 하셨고, 또 때로는 매우 쉽다고도 하셨음을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예수님께서는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포로 수용소에서 맞아 죽을 정도까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곳에서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고 말씀하셨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길이 어렵기도 하고 쉽기도 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가 모두 옳은 것임을 알 수 있다.

 


4. 더 어렵게 일하지 말고 더 지혜롭게 일하라

 

       교사들의 말을 들어 보면, 게으른 학생일수록 결국에는 가장 어렵게 공부를 한다고 한다. 이 말의 뜻은 다음과 같다. 두 명의 학생에게 똑같은 기하학 문제를 주었다고 하자. 수고하고 땀 흘릴 준비가 되어 있는 학생은 그 문제를 이해하려고 할 것이고, 게으른 학생은 지금 당장은 노력이 적게 들기 때문에 그것을 암기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6개월 후 정작 시험 준비를 할 때, 미리 땀을 흘린 학생은 금방 이해하고 자신있게 푸는 문제를 게으른 학생은 여러 시간을 애써 고생해야 하는 것이다.

 

       게으르면 결국 더 많은 고생을 해야 한다.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한 번 살펴보자. 전투를 하거나 등산을 할 때에 종종 많은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 용기와 결단이 결국에는 가장 안전한 것이 될 수가 있다. 한편 결단해야 할 순간에 두려워하거나 겁을 내어 결단하지 못한다면, 시간이 지난 후에 오히려 자신이 더 큰 위험에 처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비겁한 일이 가장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5. 그렇다면 어느 것이 더 쉬울까?

 

       이 물음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우리의 자아를 전부 주님께 바치는 것, 즉 우리 마음의 소원이나 앞날에 대한 대책까지도 모두 그리스도께 내어 맡기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거의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나름대로 하려고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쉽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려고 하는 것은 소위 ‘우리 자신’을 그대로 두면서 개인의 행복을 인생의 커다란 목적으로 삼는 것이고 그와 동시에 ‘선하게’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마음의 소욕을 좇아 돈이나 쾌락이나 야망에 초점을 두고 살아가고자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직하고 정숙하며 겸손하게 살아가기를 소원한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경고하시는 내용이다. 예수님께서는 엉겅퀴가 무화과를 낼 수는 없다고 말씀하셨다. 만일 내가 잡초 씨만 뿌려진 밭이라면 밀을 생산할 수 없다. 그 잡초를 잘라 낸다 해도 다만 짧아지는 것 뿐이다. 여전히 잡초를 낼 뿐이며 밀은 낼 수가 없다. 만일 밀을 생산하고 싶으면 밭의 표면만 바꾸어서는 안 된다. 그 밭을 갈아 엎고 다시 씨를 뿌려야 한다.

 


6.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 몸에 배게 하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진정한 문제가 대부분의 일반 사람들이 찾고 있지 않는 곳에서 생기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우리가 매일 아침 눈을 뜨는 바로 그 순간부터 문제는 시작된다. 우리가 그날 그날 갖게 되는 모든 소원과 희망이 사나운 야수처럼 우리에게 덤벼든다. 매일 아침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모든 문제를 뒤로 미루어 놓는 것 뿐이다. 그리고는 다른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다른 관점을 받아들이며, 좀더 크고 좀더 강하며 좀더 경건한 다른 삶이 내 삶에 흘러 넘치게 하는 것 뿐이다. 이런 식으로 하루 종일을 사는 것이다. 하찮은 일로 야단법석을 떨고 소란을 피우는 것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서 바깥 바람을 벗어나 안으로 들어오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처음에는 잠시 동안만 이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로부터 점점 새로운 종류의 삶이 우리의 생활 영역 전반에 걸쳐 퍼지게 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주님께서 바로 우리 우편에 서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그 차이는 단지 표면에만 칠해지는 페인트와 속까지 깊숙이 파고드는 염색이나 녹의 차이와 같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막연하거나 이상적인 헛된 말씀을 하시지 않았다. 그분이 “온전하라”고 했으면 그 말 그대로 온전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어렵다. 사실 타협이란 불가능하다. 알이 변하여 새가 되기는 어렵다. 그리고 그 알이 새로 변하지 않고 날기를 배운다는 것은 정말로 더 어렵다. 우리는 지금 알과 같은 존재들이다. 그러나 그냥 무한정 평범한 보통의 알로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알은 부화되거나 썩거나 둘 중의 하나가 되어야만 한다.


 


7.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

 

       앞서 말한 것을 한 번 돌이켜보자. 그것은 기독교 전반에 관한 것이다. 그 밖의 다른 것은 없다. 그러나 그것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지 않고 혼란해지기가 매우 쉽다. 교회가 교육, 건축, 선교, 예배 등 많은 목적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것은 마치 국가가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목적 외에 많은 다른 목적들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기 쉬운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떻게 보면 훨씬 더 단순하다. 국가는 단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만 인간의 일상적인 행복을 보호하고 증진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남편과 아내가 난로를 쬐며 대화를 나눈다든가, 몇몇 친구들이 선술집에 모여서 다트 놀이를 한다든가, 아니면 정원을 판다든가 하는 이런 것이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이다. 그리고 만일 모든 법률과 국회와 군대와 법정과 경찰과 경제 상태 따위가 이러한 국민의 일상적인 삶의 순간들을 증진시키고 연장시키며 보호해 주는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그 모든 것들이 시간 낭비에 불과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여 그들을 작은 그리스도로 만드는 것 외에는 다른 존재 이유가 없다. 만일 모든 교회와 성직자와 선교와 설교가, 심지어 성경 그 자체까지도 그 일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그 모든 것들은 단지 시간 낭비에 불과할 것이다. 바로 그러한 목적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신 것이다. 때로는 온 우주가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해서 창조된 것이 아닌가 의심이 생길 때도 있다. 그러나 성경은 온 우주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락한다고 말한다.

 


8.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하자

 

       나는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이러한 일이 온 우주에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구에서 수천만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과연 무엇이 살고 있는지 모른다 (만약 이 우주 공간에 다른 무엇인가가 존재한다고 가정했을 때의 말이다). 심지어 이 지구상에서조차 인간이 아닌 다른 사물에 그것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는 다만 그것을 기대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관해서만 하나님의 계획을 보아왔다.

 

       우리가 지금까지 들어온 말은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들어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우주의 왕자이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아버지께 드리고자 했던 그 멋진 선물 속에 우리가 어떻게 포함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인데, 그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며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우리까지도 포함이 되는 것이다. 이것만이 우리가 지음을 받은 유일한 목적이다. 성경에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자연 만물까지도 회복되기 시작할 것이라는 이상하고도 흥미로운 암시가 많이 나와 있다. 그때가 되면 악몽은 물러가고 아침이 올 것이다.

 


Mere Christianity / C. S. 루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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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집회 (특별기도 대표기도)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중에라도 잊지 마옵소서."(합3;2)

 

마른 뼈를 살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허물 많은 저희를 살리시려 부흥성회를

 

허락하심을 감사합니다. 우리 마음을 달아보시는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거짓과 위선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우리의 마음을 돌이키기 원하오니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어 회복해 주옵소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다락방에 모인 자들에게 성령 충만을 허락하셨던 주님,

 

이 시간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달려온 회중 가운데 성령의 충만을 허락해 주옵소서.

 

사랑하는 주님, 셩령의 역사 속에서 '형제여 어찌할꼬?' 하며 통회하는 간되게 하시고,

 

상한 심령위에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를 부어 조소서.

 

하나님과 사람을 무시하며 살았던 교만한 마음을 통회합니다.


선을 좇아 살지 않고 악한 일에 발을 들여놓았던 행악들을 고백합니다.


믿음으로 행하지 않고 불평과 원망속에 주의 일을 행했던 죄악들을 자백하오니


이 시간 성령의 불로 태워주소서. 십자가의 거룩한 보혈로 더러운 양심을 깨끗하게 하시고


우리의 자아를 깨뜨려 주님의 뜻에 주목하게 하옵소서.


오순절에 나타났던 오늘 이곳에 나타나길 소원합니다.


이 자리에 모인 자들이 불같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능력을 받고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게 하옵소서.


방런하고 통변하는 역사가 있게 하시고, 병든자가 고침을 받게 하옵소서.


깨어지고 상한 심령이 회복되기 원합니다.


병든 마음과 생각이 변화되는 은총을 허락해 주옵소서.


이 땅에서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게 하시고, 자기 사업에 분주하던 우리에게


하늘 비전을 붙잡게 하셔서 하나님이 주심 선교와 사랑의 명령을 성취해 나가게 하옵소서.


회개와 부흥의 열풍이 한국 교회와 사회를 변화시키는 거룩한 운동으로 번져가게 하옵소서.


은혜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주님, 주의 사자를 통해서 예비하신 은혜를 풍족하게 부어 주시고,


그동안 기도로 준비한 심령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축복이 있게 하옵소서.


은혜가 넘치는 곳에 사탄의 훼방이 있사오니 사탄의 권세를 묶으시고 성령만 역사해 주옵소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살아갈 수 없는 저희에게풍족한 은혜를 주셔서 사탄과 세상을 이기고


자신과정욕을 지어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옵소서.


은혜받기에 최고의 날씨를 허락하시고, 집회 기간 동안 가정과 직장과 사업장에 사탄의 방해가 없도록


지켜 주옵소서. 은혜받기를 갈망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마음을 갖게 하시고,


주의 일을 위해 헌신하는 실천이 앞서게 하옵소서.


말씀을 받는 데만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순종함으로 거룩한 열매를 맺게 하옵소서.


말씀을 전하시기 위해 준비하신 강사 목사님에게 성령의 권능을 덧입히시고


성대를 지켜 주시고건강하게 하옵소서.

그동안 기도로 준비하신 담임 목사님에게도 흡족한 은혜의 단비를 내리시고성령의 권능을


풍족히 내려주옵소서.날마다 풍족한 은혜로 채우시는 예수님의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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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교리] 구원론(구원)  


죄에 대한 연구는 우리에게 구원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를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구원에 대한 연구는 "구원론(Soteriology)"이라고 하며, 이 단어는 "구원자(Soter)"를 뜻하는 헬라어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 때, "다 이루었다"고 승리를 외치셨습니다(요19:30).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사역은 모든 사람이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며 다만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을 수 있도록 예비해놓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사역의 주요한 면을 요약하고 있는 낱말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대속(substitution)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이르기를,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겔18:20)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율법을 무시할 수 없었고, 이제는 사랑이 하나님의 거룩한 합법적인 요구들을 만족시켜주는 방법을 찾아내어야만 했습니다. 결국 죄지은 자를 위해 기꺼이 죽을 대속물이 필요했습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죄인은 자기 죄로 인해 죽어야 했으며 그러므로 그에게는 구원이 없었습니다.


한편 이 대속물은 ①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해야 했습니다. 사람이 보기엔 이 외에 뭔가 다른 계획도 가능할 것 같지만, 재판관이신 하나님을 만족시켜드려야만 합니다. ② 정죄받은 사람과 동등해야 했습니다. 짐승은 사람보다 열등합니다(히10:4). 천사는 사람보다 더 뛰어나지만 순수한 영일뿐 육체가 없으므로 죽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적합한 대속물은 바로 사람이라야 했습니다. ③ 죄가 없어야 했습니다. 자기 죄가 단 하나라도 있는 사람은 아무도 다른 사람을 위한 대속물의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 죄를 위해 죽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④ 기꺼이 죽을 수 있어야 했습니다. 무죄한 어떤 사람을 억지로 다른 사람을 위해 죽게 한다면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 못되실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하셨다면 마귀는 곧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고소했을 것입니다. ⑤ 무한한 생명을 지니고 있어야 했습니다. 죄가 없더라도 그저 평범한 한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 단 한 명만 구하기에 족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생명은 생명으로"(신19:21)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무한하십니다. 다시 말하자면 완벽한 대속자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셔야 했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며 동시에 사람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말고는 어느 누구도 이러한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서 그리스도는 성부와 성령으로 더불어 동등하신 분입니다. 사람으로서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셨습니다. 하나님이자 동시에 사람이셨던 주님께서 기꺼이 버리신 생명은 무한한 생명이었습니다. 이에 구원받은 피조물들의 찬송과 경배는 하나님께 돌아갑니다.


"대속물"(substitute)이란 말을 흠정역 성경에서 찾을 수는 없어도, 대신해서 고난을 당한다는 개념만큼은 흠정역 전체에서 두루 찾아볼 수 있습니다. 구약의 짐승제물들은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그림으로 하나님께서 받아주셨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아벨의 양은 받으셨지만 가인의 피 없는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창4:4,5). 하나님께서 친히 이삭 대신 죽을 숫양을 공급하셨습니다. 레위기의 제사제도 아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역사를 통해 말 그대로 수백만 마리의 짐승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대속의 진리는 이사야가 이사야서 53장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종이 우리 허물을 인해(5절), 우리의 죄악을 인해(5절),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해(8절), 속건제물로서(10절), 범죄자를 위하여 죽을 것이라고 했던 것입니다(12절).


신약성경을 통해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자기 몸을 주시고, 우리를 위해 그 피를 흘리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눅22:19,20). 바울과 베드로는 대속의 진리를 거듭 거듭 가르쳤습니다(롬5:8, 갈3:13, 벧전3:18).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해 죽으셨으며 이는 곧 죄인들을 대신해, 그들을 위해, 그들의 유익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분은 또 죄 때문에 죽으시되 친히 그 형벌에 대한 책임까지도 지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완전한 사람으로서 이상적이며 합당하신 그리고 유일하신 대속물이십니다!

다음은 구속(redemption)입니다. "구속하다"라는 말은 "무엇을 사다" 또는 "되사다"는 뜻합니다. 구속은 죄와 또 거기에서 풀려나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구약을 보면 한 사람이 병이나 가난 때문에 자기 재산을 팔아야 할 처지에 놓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구속자(goel) 혹은 유업을 무를 자라고 하는 그의 친척에게는 그 재산을 언제든 도로 사서 되찾아 줄 수 있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 사람과 그 친척은 자기 집안의 재산을 지키게 되었습니다(레25:23-25). 룻기4:1-10과 예레미야32:6-12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신약에는 "구속하다", "값을 주고 사다" 등으로 번역되는 헬라어 동사가 다섯 가지 있습니다. 이 단어들은 하나님의 정하신 절차를 보여주며, 또 그리스도의 사역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 완벽하게 예비된 것으로 오직 믿는 자들(택함을 입은 자들)에게만 효력이 있고 유용할 뿐임을 가르쳐 줍니다.


그 첫 번째 낱말로 "시장에 자주 가다" 혹은 "시장에서 사다" 라는 뜻을 가진 것이 있습니다(마13:45,46, 눅9:13). 모든 사람, 즉 이 세상에서 가장 악한 죄인까지도 그리스도께서 예비하셨다는 점에 있어서 모두 속함을 받고, 사신 바 되었다는 것입니다(벧후2:1). 믿는 자의 몸은 값으로 사신 바가 되었습니다(고전6:20). 우리는 피로 사신 바 되어 나라와 제사장들이 됩니다(계5:9,10).
두 번째 낱말은 첫 번째 것과 비슷합니다만 접두사(ex)가 붙음으로써 판매대상에서 제외되고 과정을 되돌릴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낱말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예비하신 구원을 받아들인 신자들에게만 쓸 수 있습니다(갈3:13, 4:5).


세 번째 것은 속전을 받고 풀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드로전서 1:18,19은 이 속전(값)이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가리키고 있으며, 디도서2:14은 우리가 불의로부터 구속받아서 그분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네 번째 동사는 세 번째 것과 비슷하나, 접두사(apo)가 붙어 있어서 "무엇으로부터 떨어져" 풀려난다는 뜻이 더 강하며 로마서3:24과 에베소서1:14에는 명사형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섯번째 것은 앞의 낱말들과는 어근의 의미가 조금 다릅니다만 사도행전20:28에 "사셨다"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담긴 뜻은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취하시고 또한 돌보셨다는 것입니다.
날 때부터 사람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지으셨으나 죄로 말미암아 다른 것의 다스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에 그리스도께서 속전을 지불하셨습니다. 사실 그분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곧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 것이며 이렇게 하심은 "극히 값진 진주(사랑하시는 교회)"를 사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상 우리가 살펴본 낱말들은 교훈을 얻기 위한 것이므로, 이 은유적인 말들을 성경에서 인정하고 있는 범위를 벗어나 지나치게 강조하여서는 안됩니다. 가령 성경은 그 속전을 누구에게 지불했는지 말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사단에게 주시지 않은 것은 분명합니다). "피로 대속하셨다"는 이 위대한 교리를 생각해볼 때, 그리스도인들의 찬송이 구속자께 드리는 찬양과 구속받은 자들의 영광으로 가득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닌 것입니다!

 

화목제물(propitiation)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죄에 대해 구속을 이루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만족(또는 화목)하게 해드리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렸고, 또한 하나님께서 자기 의와 거룩함, 공의를 저버리지 않으시고도 죄인들을 대하여 사랑으로 행하실 수 있게 해드렸습니다. 성부는 늘 진노하시고 온유하신 성자 예수님은 그 성부의 마음을 달래드린다고 하는 사상은 정말이지 생각해 볼 가치조차도 없습니다. 실상은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자기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신 동기가 바로 사랑때문이란 것을 요한일서4:10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고 하신 요한일서 2:2 말씀은 하나님을 만족시켜드린 것의 효력이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진노는 하나님과 화목되지 못한 결과로 임하는 것입니다. 신약에서 사용된 헬라어 "속죄소"(히9:5)와 "화목제물"(롬3:25, 그리스도를 가리킴)은 구약의 동일한 단어를 번역한 것입니다. 속죄소는 죄를 가리는 것과 의의 거룩한 표준이 요구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누가복음18:13에 나오는 세리의 기도는 "하나님이여 죄인인 저와 화목해주시옵소서"라고 번역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사역으로 만족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이 이루신 일은 단 한 번으로 완전하게 된 것이었습니다(히9:28). 화목제물로 인해 하나님은 자유롭게 그리고 정당하게 모든 죄를 용서하실 수 있게 되었고 믿는 자는 누구든지 의롭다고 하실 수 있게 되었으며, 모든 은혜와 영광을 죄인들에게 베푸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자비로운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비하시다는 사실과 예수님과 그분이 이루신 사역에 완전히 만족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은 그러하십니다. 우리도 그와 같이 되어야하겠습니다.

 

성경에는 또 화목(reconciliation)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죄에 대한 대속, 구속, 하나님께서 진노를 거두셨다는 화목, 그리고 이제 사람편에서 하나님과 화목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고난받으시고 죽으심으로써 이루신 주요 공로들입니다. 우리는 죄론에서 죄의 성품에 대한 심판을 위해 준비된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해 알아보았는데, 그분은 위대한 두 가지 다른 업적인 죄사함과 정결함의 근본이십니다. 흔히 범하는 실수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 편에서 사람과 화해하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성경의 가르침은 화해가 필요한 당사자는 바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흔히 화해라는 말을 쓸 때 피차 사이가 불편하던 두 사람을 화합하게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화해는 입장을 완전히 바꾸는 것을 뜻합니다. 흠정역 로마서 5:11에 "대속"{"화목"(개역성경) : [역주]}(atonement)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실상은 "화해"를 가리키는 헬라어 명사를 영어로 옮긴 것입니다. 10절을 보게되면 이 단어의 동사형은 "화목되었다"로 정확하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대속"은 신학자들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사역에 대해 일반적으로 쓰고 있는 용어이지만 신약에서는 단 한 번 쓰일 뿐입니다(그리고 바로 이때도 "화해"라는 뜻의 단어를 쓸 자리에 잘못 들어가 있는 경우입니다). 실제로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죄를 "덮는다"는 개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둘 것 같으면 대속이라는 용어를 써도 하등 문제가 없습니다. 화목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적대적인 위치에서 다정한 관계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바로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인해 얻어진 이 화해에는 잠정적인 측면과 실제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잠정적인 측면에서 온 세상은 하나님과 화목되었습니다(고후5:14,15, 19). 이것은 세상이 지금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이 지금 구원받은 상태라거나 온 세상이 구원받게 되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온 세상이 구원받을 수 있는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실제적인 화목은 고린도후서5:20에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과 화해를 하게 될 때 모든 것이 새롭게 되며 그의 지위 또한 "아담 안"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바뀌고 죄에서 의로 옮기게 됩니다. 죄에 대한 대가는 지불되고 새로운 피조물이 존재하게 되며, 믿는 자는 구원을 받은 자가 됩니다. 하늘에 속한 것들, 곧 보좌들과 정사들과 권세들도 화목되었다는 것 또한 주목하시기 바랍니다(골1:16,20).

 

택정하심

택정은 문자적으로 "선택하는 것", "골라내는 것" 또는 "정하는 것"으로서 성경의 가장 어려운 가르침들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도를 깨달을 의무는 없지만,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비록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의무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을 택하기 전에, 하나님이 미리 아시고 그 사람들을 골라내셨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택하심이 아닙니다. 이것은 단지 사람의 "선택"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유의지의 갖고 있으며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구원받는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선택하사 구원받게 하신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구원받을 자격을 갖춘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주시기 위해 선택하셨습니다(요6:37).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누가 잃어버린 자가 되기로 택함을 받았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불못은 마귀와 그 천사들을 위해 예비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누구도 그곳에 "보내시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지옥에 가는 것은 오로지 그리스도를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9장은 선택에 대한 대표적인 말씀이지만, 교회 안에 있는 신자들에 대한 말씀은 아닙니다. 여기서 천사들, 이스라엘, 또 그리스도까지도 모두 "택함받은 자"로 말씀하고 있습니다(딤전5:21, 사45:3-4, 벧전2:6). 그리스도인들이 택함을 받은 자들이라고 불리우고 있는 곳은 롬8:33, 골3:12, 벧전1:2입니다. 아무도 구원받을 자격을 갖춘 이가 없기 때문에, 설사 하나님께서 어떤 이들은 구원받게 하시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대로 두신다고 해도 이는 부당한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지 못하는 그 사람들은 자기 의지로 복음을 거절한 사람들로서 책임을 지닌 존재들입니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목적을 갖고 있다고 믿는 자들에게는 그 "택하심"이 격려가 됩니다. 택함받았다는 것은 섬김의 동기가 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선택이 하나님의 주권을 높인다는 것입니다. 택하심에 대해 이해하기 힘들면 성구사전의 도움을 받아 "택함", "선택", "예정" 등의 낱말들을 상고해보시기 바랍니다. 예정은 미리 정하심(롬8:29)과 양자 삼으심(엡1:5,11) 보다 더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부르심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롬8:30). 부르심의 수단은 복음입니다(살후2:14).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자기에게 모으시는 행위를 말합니다. 부르심에는 일반적인 면과 실제적인 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일반적인 부르심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오라고 초청하는 것이며 모든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것"과 관계 있습니다(요12:32). 많은 사람들은 누구든지 오라는 이 일반적인 부르심을 거절하고 있는데 반드시 그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될 것입니다(히12:25). 실제적인 부르심은 확실한 구원을 얻게 합니다. 이것은 요한복음6:37,44에 나오는 "이끄심"과 관계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드님에게 주신 사람들은 틀림없이 그리스도께 나아와 그분을 영접하게 됩니다. 어느 누구도 복음을 받아들이라는 강요를 받지 않습니다. 오히려 택함을 받은 자들은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영광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기에, 이들이 구원받는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롬8:39). 부르시는 분은 분명히 이 일을 하실 것입니다(살전5:24).
부르심의 결과는 확실하지만 그 방법은 복음이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전도해야만 합니다.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자연과 양심, 또 오래 전부터 알려진 진리 중 일부 남은 것들(많은 오류 가운데서도 조상때로부터 보존되어진 많은 문화)로부터 받은 빛에 의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온 세상의 심판자는 이런 이교도 백성들에 대해서 공정하게 심판하실 것입니다. 의심할 바 없이 그들의 책임은 많은 복음적인 교회와 기독교 라디오 방송과 기독문서 등이 있는 나라에서 그리스도를 배척한 사람들의 책임보다 훨씬 적을 것입니다.

 

죄를 책망하시는 성령님의 역사

성령님의 역사가 없으면 어느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 태어난 그대로, 육에 속한 채로 있다면 이 사람은 죄 가운데서 죽은 자이며(엡2:1-3), 사단에 의해 눈먼 자입니다(고후4:3,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며(고전2:14) 이들 중 단 한 사람도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롬3:10-18). 기도를 해주거나 복음을 전하지는 않고 그저 믿으라고 압박만 가했을 경우 결국 사람들이 구원받았다고 고백은 합니다만 실제는 아무것도 없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성령님은 오늘날 전 세계의 죄인들에게 죄에 대해, 의에 대해, 심판에 대해 책망하는 일을 하시고 계십니다(요16:8). 이렇게 책망을 듣고 죄를 깨달은 죄인들이 반드시 그 깨달음을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습니다만 아무튼 자기들의 죄가 무엇인지는 인식하게 됩니다. 맨 먼저 죄인들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있다는 이 큰 죄에 대해 책망을 받습니다(요16:9). 다음에는 의에 대해 책망을 받는데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 가시기 때문입니다(10절).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 가시는 것이 그분의 의를 입증한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그리스도는 죄인처럼 저주받은 나무 위에서 죽으셨지만 무죄하신 분이셨습니다). 즉, 그리스도는 영광의 몸을 입은 분으로서 의의 표준이 되십니다. 10절의 이 말은 또 그리스도께서 땅에 계실 때 사람들에게 죄를 깨닫게 하는 일을 하셨으나 지금은 성령님께서 이 일을 계속하시고 있다는 뜻인 것으로 보입니다. 세번째로 사람들은 심판에 대해 책망을 받습니다(11절). 이것은 십자가에서 사단에 대한 심판을 가리킵니다. 죄의 주모자가 그렇게 심판받았다면 그를 따르는 자들도 그가 만들어 놓은 세상의 제도에 참여한 것에 대해 심판을 받을 것이 틀림없습니다(자기가 사단의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 사람들이 알았는지 여부는 관계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우게 되는 실제적인 교훈은 성령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통해 이러한 책망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제대로 살지 않는다면 죄를 책망하는 성령님의 일을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의 조건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 이것이 구원의 "조건들"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온갖 행위와 의식(儀式)들을 이 단순한 복음에 더해보려고 갖은 애를 써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덧붙여본들 결국 구원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요 아무것도 더할 게 없다는 사실만 부각될 뿐입니다(엡2:8). 회개는 믿음의 일부입니다. 과거에 대해 마음이 전혀 바뀌지 않는다면 진정으로 믿는다거나 믿음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단지 마음을 바꾸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이 회개하면 감정의 변화가 아울러 따르기도 합니다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회개할 때 울어야 되고 통성기도를 해야한다는 생각은 사실적인 근거나, 성경적인 근거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입으로 고백하는 것, 물 침례를 받는 것, 그리스도의 주재권과 또 그 외 여러 가지를 구원의 일부로 삼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구원받으면 나타나는 합당한 결과이긴 하지만 오직 믿음 하나만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구원을 주시는 통로가 됩니다. 이것 외에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믿음"에 대해 세상 사람들이 보통 내리는 정의는 "다른 사람이 선언한 것에 마음으로 동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혼을 구원하는 믿음에는 그저 동의하는 것 이상으로 훨씬 더 많은 것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사랑을 나타내셨고 그리스도인들은 이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해줄 때, 만일 듣는 자가 머리로만 아니라 마음으로도 이 복음을 믿으면 그에게는 믿음이 생깁니다. 신뢰, 확신,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쉬는 것 등은 믿음이 가진 여러 면모들인 것입니다. 믿음은 값없이 주시는 구원의 선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내미는 마음의 손입니다. 오직 성령님께서만 사람에게 참된 믿음을 주실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심은 하나님께서 영광을 취하시고 사람은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납니다(읽는 것도 포함함; 롬10:17).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에 대해 증거하신 것에 기초한 것입니다(요일5:7-9). 복음을 말하거나 설교할 때 우리는 듣는 이에게 그들의 믿음을 맡길 수 있는 어떤 것,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해주어야만 합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인품을 통해 죄를 책망하시기보다 오히려 말씀 그 자체를 통해서 하십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특권은 바로 "말씀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이는 꼭 강단에서가 아니더라도 일상생활에서 분명히 누릴 수 있는 특권인 것입니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 맡기신 일, 즉 우리 죄인들을 위한 대속물로, 죄에 대한 구속으로, 하나님께 대한 화목제물로, 사람을 위한 화목으로, 자신을 드리신 사역을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십자가 위에서 이루셨는지 보았습니다. 또한, 이러한 드리심이 성령님의 책망을 듣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효과를 나타내는가도 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죄인들이 그 아들을 믿을 때 성부께서 어떻게 죄인들을 구원하시는지, 즉 위대한 구원사역 안에서 삼위이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하시는 완전한 사역에 대해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이미 우리는 구원론에서, 구원이 그저 지옥에서 벗어나는 "비상구" 이상의 것임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성부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이와 같은 사실에 훨씬 더 큰 증거를 더해줄 것입니다. 췌이퍼(L.S.Chafer) 박사는 죄인이 믿는 순간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해주시는 일 서른 세 가지를 목록으로 만들어서 설명하였습니다!(췌이퍼의 조직신학 제3권 "하나님 은혜의 부요함"). 여기서는 그중 몇 가지만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칭의(稱義:justification).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교리 중 하나입니다. 무엇인가를 없애주는 용서는 소극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믿는 자에게 무엇을 더해주는 칭의는 적극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십니다(롬4:5). 이 말은 경건치 아니한 자들이 믿을 때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운 자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신다는 뜻입니다. 의롭다하심은 의롭게 만든다거나 현재 의로운 상태라는 것이 아니며 법적인 의미에서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의롭다" 와 "옳다"는 분명히 같은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얻은 자가 됩니다"(롬3:24). 칭의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루신 구속을 그 기초로 합니다. 갈라디아서에도 칭의에 대한 가르침이 많이 나오긴 합니다만, 로마서가 칭의 교리에 대한 대표적인 책입니다. 로마서는 어떻게, 어떤 수단에 의해 의롭다하심을 얻는 것인지 말씀해줍니다. 이것은 은혜로 말미암습니다(3:24). 곧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에 의해서입니다. 이것은 또 믿음으로 말미암습니다(5:1). 곧 하나님의 베푸시는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는 피로 말미암습니다(5:9). 곧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치르신 값입니다. 또 칭의는 의로 말미암는데(5:18,19) 곧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순종하신 것입니다. 의롭다하심을 얻은 결과로서 로마서에 나와 있는 것들은 화평(사32:17, 롬5:1), 정죄로부터 벗어남(롬8:33,34), 후사가 됨(딛3:7, 롬8:17), 영화롭게 됨(롬8:30)입니다.
야고보서2:21,25에 묘사되어 있는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은 위에서 설명한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의롭게 됨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보기에 의롭다고 여겨지는 것이며, 오직 경건으로 일관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때에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런 식의 의롭다함을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는 오직 행위와 관계없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다하심을 받은 후에라야 가능합니다.

중생(重生:regeneration).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는 것을 "영적으로 죽었다"고 봅니다. 이는 죄의 결과입니다(엡2:1). 이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은 아담이 가졌던 것과 똑같은 육에 속한 생명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이 생명은 지구에서, 또 특별한 조건을 갖추면 우주에서 사는 데도 적합할 수도 있지만, 천국에서 살기에는 전혀 적합지 않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거듭납니다(요3:5, 벧전1:22). 우리는 혈통으로나(자연적인 출생), 육정으로나(스스로의 결심이나 스스로의 노력), 사람의 뜻에 의해서(누군가 다른 사람의 행위에 의해, 가령 제사장의 중보나 침례) 하나님의 자녀로 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사람들이 이러한 권세를 얻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 이름을 믿음으로써 얻습니다(요1:12,13).
거듭남에 의해 우리는 거듭나고 새 생명을 얻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옛 것은 지나가고 모든 것이 새 것으로 됩니다(고후5:17). 우리는 새 사람을 입습니다(골3:10). 우리는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할 수 있고 또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후사들이며(갈4:7), 그리스도와 더불어 유업을 받을 자들입니다(롬8:17). 유업을 이을 자로서 우리는 아버지의 징계를 받게 되는데 이런 징계는 아버지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위해 베푸시는 것입니다(히12:6).


이제 요약해 보면 거듭남, 즉 두 번 나는 것은 영생을 나누어받는 것이며 이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중생한 사람만이 구원을 받은 것이며 오직 하나님만 우리를 거듭나게 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목적은 우리로 그 지으신 피조물 가운데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려 하심이며(약1:18), 유업을 이을 자가 되게 하고(벧전1:3,4) 선한 일을 행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심입니다(엡2:10).

 

양자(養子:adoption). 이 용어는 바울의 서신에만 나옵니다. 이 용어를 오늘날 친자식이 아닌 아이들을 자기 아이로 삼는 "입양"한다고 하는 것과 절대 혼동해서 안되겠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거듭난 자기 자녀들에 대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업을 이을 모든 권리를 가진 자녀들이라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속해 있는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양자가 되는 것도 구원받는 순간 얻게 되며, 이는 믿는 자가 이 교리에 대해 알든지 모르든지 상관없이 되는 것입니다(마치 훌륭한 집에 새로 태어난 아이가 그 스스로 알지 못하더라도, 육체적으로 태어난 순간부터 그 이후까지 출생으로 인한 모든 혜택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이른 바 "제2의 은총"이 아닙니다. 우리가 거듭날 때 자녀가 되었지만,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는 우리의 이와 같은 신분이 분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양자의 영을 소유하고 있지만 이것이 완전히 드러나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롬8:15,23).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나타내는 증거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롬8:14), 세상과 분리되는 것(고후6:14-18), 이기는 삶(계21:7), 그리고 아버지의 징계하심이 있습니다(히12:6-8).

 

성화(聖化:sanctification). 성화에는 매일 실제로 거룩하게 되어가는 것과 또 구원받을 때 얻는 지위 상의 거룩함이 있습니다. "거룩하게 한다"는 것은 어떤 특별한 목적을 위해 따로 구별되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분리(구별)된다는 것입니다. 과거를 볼 때 신자는 죄의 형벌로부터 분리되었고, 현재는 죄의 권세로부터 분리가 되었고, 미래에는 죄의 존재로부터 분리됩니다. 이 분리가 실제적으로 이루어지는 기초는 모든 믿는 자가 하나님의 "성도"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이러한 신분에 맞게 살아야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순서를 바꿔놓고 말하기를 "지금 착하게 사는 사람들이 나중에 가면 성자라고 불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서10:10-14은 이 신분상의 성화는 단번에 완전히 주어진 것이며 다시 반복할 수도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거룩함은 절대적입니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거룩함이 되시기 때문입니다(고전1:30). 모든 믿는 자는 구원받는 그 순간에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그리고 영원히 구별(거룩하게)되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믿는 사람 각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점점 더 "거룩하게 될(죄에서 분리될)" 의무가 있습니다(요17:17, 벧전1:15,16).

 

용서(forgiveness). 칭의는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의를 인정받는 것입니다. 반면에 용서는 죄로부터 풀려나는 것이요, 불의가 우리에게서 제하여지는 것입니다. 이 교리는 우리 일상 생활에서 그와 상응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이해하기 쉽습니다. 예를 들면 곧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신분적인 면에서 볼 때 용서는 우리가 믿을 때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엡1:7, 4:32, 골1:14, 3:13). 하지만 실제적인 삶에 있어서는 아버지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는 우리가 실패할 때마다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께 우리 죄를 자백해야만 하는 것입니다(요일1:9). 어떤 이들은 자기의 미래의 죄까지도 이미 용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워합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당시에는 우리의 모든 죄가 미래의 것이라는 것을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었을 때 우리의 모든 죄는 주님이 다 가져가셨습니다(완전히 용서받았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용서받았기 때문에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엡4:32).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잊어주신 것처럼 잊어버려야 합니다.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8:12). 죄를 용서받은 결과는 큰 기쁨과 평안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감. 이것은 하나님의 존전(尊前)에 들어가는 권리입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얻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무한한 복을 누리게 해줍니다(롬5:2). 믿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은 한 성령에 의해 아버지의 존전에 나아가게 됩니다(엡2:18). 이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화목케 하시는 역사에 기초하기 때문에 이렇게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갈 때 온전한 담대함이 뒤따르게 됩니다(엡3:12, 히4:16, 10:19,20).

 

율법으로부터 해방됨. 율법은 경건치 않은 자들을 제어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딤전1:9), 결코 구원의 길이 아니었는데, 이 점은 구약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은혜 아래에서도 규범이 있지만(신약성경은 계명으로 가득 차 있지만 불순종에 대한 형벌을 정하는 법조항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일상생활규칙과 같은 법 아래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롬8:2). 즉 우리는 율법에 대해 죽었으며(롬7:4) 또한 율법으로부터 구원받았습니다(롬7:6). 이 모든 것이 우리가 구원받을 때 일어났으며 이때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사역의 다른 부분들도 더불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거룩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을 나타내는 말씀으로 모세의 윱법을 존중하지만, 은혜는 율법이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난 삶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확신(Assurance)과 안전(Security)

신약에서 가장 큰 위안을 주는 교리 중 하나는 사람이 일단 구원받으면 다시는 잃어버린 바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지금" 구원받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확신입니다. 또 자기가 "영원토록" 구원받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안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자는 가지고 있지만 후자는 불가능하다거나 혹은 받기엔 너무 염치없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불행하게도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은, 이 두 가지 중 어느 것도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이 진리에 대한 문제들의 대부분은 잘못된 가르침, 타고난 두려움, 그리고 구원이 정말 무엇인지 오해하고 있는 것들로부터 생깁니다.

확신에 대해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요일5:13, 3:1과 요3:36, 5:24을 주의해서 상고해보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들은 확신에 대한 유명한 구절 중 일부입니다. 물론 더 있습니다. 믿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주로 확신을 얻게 됩니다. 우리 구원의 기초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입니다만, 우리 확신의 기초는 하나님께서 그렇다고 친히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나 보내신 이를 믿는…").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시거나 마음을 바꾸실 수가 없는 분입니다.
구원의 또 다른 두 가지 증거로 그리스도인의 체험과 성령님의 내적인 증거입니다. 체험은 우리의 감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우리 감정은 날씨와 건강과 환경에 따라 변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깊이 의식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만일 누군가 가진 교리가 잘못되었다든지 혹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떠나서 살고 있다면 물론 그가 겪는 체험은 별로 격려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체험에는 형제 사랑과(요일3:14, 롬8:29), 성경을 이해하고 간절히 사모하는 것(고전2:14), 죄에 대해 책망을 받는 것(요일1:5-10, 3:7-14), 착한 행실(약2:14-16), 하나님이 자기 아버지임을 의식하는 것(마11:27)과 자기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를 의식하는 것(고후13:5),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는 이 믿음을 다른 사람들도 함께 가지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것 등이 들어갑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속에서 하시는 사역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케 하는 것과(롬5:5), 우리를 인도하는 것과(롬8:14), 우리에게 증거하시는 것(롬8:16)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회심할 때 느낀 감정이나 우리가 들은 설교방식이 나 또는 우리가 복음을 완전히 이해했는가 보다는,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 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얻는 구원의 복음을 믿었습니까? 우리가 믿음의 손을 내밀어 주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로서 구원을 받았습니까? 만일 그렇게 했다면 우리는 구원받았다는 절대적인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영원한 안전에 대해 상고해 보겠습니다. 지금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고 새 생명의 증거들도 가진 많은 사람들이 가장 중요한 의문을 아직도 갖고 있습니다. 곧 "진실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혹 그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나?"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타락한 사람"은 구원을 잃고 지옥에 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무조건적인 영생을 확신한다면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계속 죄를 지으며 살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 자녀를 징계하시되 때로 죽게도 하시며 이렇게 하심으로써 자기 자녀들의 죄를 다루신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부정한 자와 호색하는 자는 다만 거짓 신자요 십자가의 원수일 뿐입니다(엡5:5,6, 빌3:18,19).
성경은 안전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씀할까요? 요10:27,28과 벧전1:5, 요11:26, 딤후1:12, 히7:25, 유24절을 읽어보십시오. 이 구절들 중 맨 마지막 말씀에 나오는 "능히… 하실 자"라는 부분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안전의 참된 열쇠입니다. 신자들은 그 믿음 가운데서 인내해야 됩니다. 신자는 실제로 이렇게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를 보존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내의 이러한 양면성은 빌2:12,13에서 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끝까지 인내함으로 구원을 이루는 것은(수학문제 풀이처럼)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초자연적으로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이 디모데후서2:19에서도 말씀하기를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악에서 떠나야 합니다(사람 편에서). 이는 주께서 자기 백성들이 누구인지 아시기 때문입니다(하나님 편에서).
사람이 일단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라고 가르쳐 주는 다른 구절들이 많이 있습니다. 만일 구원이 조건적이라면 "영원한 생명"이라는 말조차도 모순이 되고 말 것입니다. 로마서8:31-39은 네 가지 수사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과 더불어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답도 제시하고 있으며 이 모두는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다른 구절들로는 요6:37,39, 롬11:29, 고전1:8,9, 빌1:6, 엡4:30이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들이 일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만, 이것은 문맥을 무시한 채 그 구절들만 따로 떼어 이해할 때 생기는 오해일 따름입니다.
마태복음24:13은 흔히 그 문맥을 무시한 채 인용하여 교회시대에 대해서 잘못 적용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구원받은"이란 단어는 헬라어로 "건짐받은"이란 단어와 동일합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자들이 자행하는 대학살과 환난을 견디어내는 유대인들이 건져내어질 것이라고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정말 믿는 자들임을 나타내는 것은 바로 그들이 "끝까지 견디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에스겔 33:7,8을 써서 만일 우리가 잃어버린 바 된 영혼들에게 경고하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의 영혼도 잃어버리고 말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이스라엘을 경고하라고 선지자 에스겔에게 가르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의 교회에게 말씀하는 것도 아니며, 에스겔이 자기 영혼의 구원을 잃게 될 것이란 말씀도 아닙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잃어버린 바 된 영혼들에게 경고해야 되지만, 에스겔서가 그렇게 해야할 증거를 담고 있는 책은 아닙니다!
디모데전서4:1,2은 배도자들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믿는다고 거짓으로 고백하지만 실제로 거듭난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 구절에서 "그 믿음"이라 한 것은 그리스도께 대한 개인적인 믿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배도자들에게는 이 개인적인 믿음이 없음), 기독교인다운 신앙을 가리키는 것임을 주목하십시오.
베드로후서2:1-22에 나오는 거짓 교사들은 단지 잠정적인 측면에서만 사신 바 되었습니다. 이 구절에서는 이 사람들이 실제로 거듭난 적이 있었는지 전혀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이 개들이라고 불리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먼저 이들이 부정한 이방인임을 보여줍니다.
믿는 자의 영원한 안전을 부인하고 있다고 제시되는 많은 구절들이 사실은 단지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나 개심(改心)한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으며 이들은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마태복음13:1-8은 넘어지는 자들에 대한 예를 들고 있지만 이들이 진짜 구원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말씀은 없습니다. 고린도전서15:1,2와 히3:6에 있는 굳게 지키는 것이 구원받았다는 증거이기는 하지만 구원받는 조건은 아닙니다.
요15:6은(어떤 사람들에게) 가지가 제하여져서 잃어버린 바 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리스도는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제자들에게 열매 맺는 것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지 구원에 대해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가지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열매맺는 자리에서 쫓겨나 던지우게 됩니다.
히브리서6:1-8은 믿는 자들이 구원으로부터 "떨어져서" 잃어버린 바 될 수 있다고 가르치는데 흔히 사용되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견해는 히브리서 전체의 맥락과 반대되는 것입니다. 이 서신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신지 얼마 되지 않아 유대 배경을 가진 신자들에게 쓴 것이며 몇 가지 매우 특별한 권면과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이 서신은 믿는 자들에게 유대교의 의식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실재성 속에서 성장하라는 권고를 하고 있습니다(히6:1-3). 이 서신에는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거짓으로 고백하는 유대인들에게 주는 매우 심한 경고도 몇 가지 들어 있습니다(히2:1-3, 3:7-13, 6:4-8, 10:26-31). 이런 사람들은 지적으로는 복음의 비췸을 얻었습니다(그러나 영적으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하늘의 은사를 맛보았고, 겉으로는 성령에 참여하였으며,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그리스도와 사도들의 능력 있는 역사와 이적들)도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영적인 기회를 가졌으면서도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복 받기를 거부하고 유대교의 죽은 의식으로 돌아가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이런 사람들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모든 것을 주셨지만 이들은 의도적으로 자기들에게 베풀어진 기회의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간에 서서 이들은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쪽을 택했으며 그리하여 현저하게 그리스도를 욕보였습니다(히6:6 하반절).
이 구절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에게 적용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늘날 기독교를 연구하고 자기 주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목도(目睹)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그리스도를 거부하기로 결심을 굳히고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더 이상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영원한 심판만이 있을 뿐입니다.
갈라디아서5:4은 "은혜에서 떨어지는 것"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은혜로 사는 고차원적인 삶에서 율법주의라는 열등한 삶의 원리로 추락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떨어진다"는 말에 들어있는 개념은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골1:21-23이나 고전9:27, 그리고 요13:8과 같은 구절들도 가끔 이것과 관련해 인용되기도 합니다만, 사실 이 구절들은 믿는 자들이 상급을 잃어버리거나 아니면 교제가 끊어지게 되는 것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각 위께서 지니신 속성과 하시는 일이 영원하고 확실한 구원을 보장해주고 있습니다. 구원의 성격 자체가 영원한 안전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이 구원은 근원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택정받은 것과 연관이 있으며 또한 이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슨 내세울 것이 있어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무슨 부끄러운 점이 있다고 해서 구원을 잃어버리는 것도 아닙니다. 구원은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요19:30).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안전을 주신 것은 그분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일에 분발케 하기 위함이며(유24,25: 벧전1:3-5), 거룩한 삶을 살게 하는 자극제로서(엡4:30, 시55:23), 또 그분을 섬기려는 동기가 일어나게 하려고 주신 것임을 친히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고전15:58). 우리의 영혼과 섬김에 대한 상급은 안전합니다. 우리는 "결코 멸망치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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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과학]  화석 생물들은 언제 죽었는가?

 

 


화석 생물들은 언제 죽었는가?
: 아담 이전의 죽음은 성경을 왜곡하는 것이다.
(When did the fossils ‘die’?) 
 
 John D. Morris
지질학자
ICR(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 회장
 
   1800 년대 초부터 시작하여, 기독교 지도자들은 화석(fossils)으로 인해서 당황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로부터 유래하였다. (1)화석은 한때 살았던 동물과 식물의 잔존물인 것처럼 보인다. (2)제임스 허튼(James Hutton)과 찰스 라이엘(Charles Lyell)과 같은 일부 과학자들은 화석들은 오랜 기간 동안 느리고 점진적인 과정에 의해서 쌓여졌음이 입증되었다고 주장했다. (3)성경을 직설적(straightforward)으로 읽을 때, 창조(creation)는 단지 수천 년 전에 일어났으며, 사망(death)은 하나님의 원래의 계획 중의 하나가 아니라 아담과 이브의 범죄 때문에 들어오게 된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 이전까지 대부분의 과학자들과 신학자들은 화석은 노아 홍수에 의한 전 지구적인 파괴로 생겨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구의 나이에 대한 매우 오래된 연대 개념이 지지를 얻기 시작하면서, 어떤 무엇인가가 화석을 해석하는 데에 사용되어야만 했다. 신학자들은 그들이 두려워했던 반대 증거들에 직면하여 성경을 구하는 일이라고 주장하면서, 여러 가지 가능성들을 제시하였고, 이러한 오래된 연대 개념을 받아들이도록 인도하였다.

성경을 손상시키고 왜곡하고 있는 이러한 타협적인 개념들 중 하나는 ‘다중격변론(multiple catastrophism)’으로서, 지구 상에는 여러 번의 격변이 있었는데, 노아의 홍수가 여러 번의 격변들 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일어난 격변이었다는 것이다. (노아의 홍수는 신생대 제4기 홍적세 지층을 만들었던 홍수라고 주장함). 그래서 대부분의 화석들은 노아의 홍수와는 다른 수억 수천만년 전에 일어났었던 여러 번의 홍수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의 타협적 개념으로, 노아의 홍수는 어떠한 화석이나 지질학적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산들을 덮었던 ‘평온한 홍수(tranquil flood)’ 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가설로는 노아의 홍수는 단지 메소포타미아 계곡에 일어났었던 ‘지역적 홍수(local flood)’였고, 그래서 지층 깊이 들어있는 전 지구적인 화석들은 노아 홍수와는 관계가 없는 노아 홍수 이전에 장구한 세월동안 형성된 것들이라는 것이다.

스코필드(C. I. Scofield)는 ‘간격이론(gap theory)’이라고 불리는 견해를 대중화시켰다. 이 이론은 창세기 1장의 1절과 2절 사이에 광대한 시간의 간격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의 주석성경에서 기록했던 것처럼, “화석들을 태고의 창조 시기로 내쫒아 버리고, 창세기의 우주론과 과학이 충돌하지 않기 위해서”(page 4) 였다. 오늘날 더 인기가 있는 타협책은 ‘날-시대 이론(day-age theory)’이다. 이것은 창세기의 날(days)들은 화석들이 쌓여졌던 매우 오랜 기간이었다고 제안하는 것이다. 그리고 창세기를 아예 무시해버리는 ‘유신진화론(theistic evolution)’이 있다. 오늘날 복음주의 신학교에서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타협은 ‘골격가설(framework hypothesis)’이다. 이것은 창세기는 단지 영적인 진실만을 담고 있는 것이지, 과학적인 또는 역사적인 진실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견해이다. 이러한 주장들 각각은 화석 문제는 제거해버릴 수 있었지만, 그러나 사실 성경을 왜곡하는 것으로서 끝을 맺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과거에 일어난 일들에 대한 사람들의 추정(speculations)을 성경을 믿는 크리스천들이 받아들이도록 이끌고 있는가? 그들은 현재를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모든 것을 알 수 없지 않은가? 그들은 과거에 화석들이 만들어질 당시에 그곳에 없지 않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시작부터 틀렸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왜 크리스천들은 그러한 추정과 적합시키기 위해서 성경을 왜곡하는가? 성경(Bible)은 과거와 현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분의 기록이 아닌가. 성경에서 저자는 분명하고 명백하게 사망(death)은 사람의 범죄함으로 이 세상에 들어왔다고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17)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세기 3:19)

“죄의 삯은 사망이요” (로마서 6:23).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로마서 5:1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로마서 8:22)


성경은 또한 우리들에게 사망이 들어온 이후에 전 지구적인 엄청난 홍수가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것은 물에 의해서 생성되는 엄청난 양의 퇴적지층들을 쌓아놓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 수많은 생물체들을 파묻어버렸을 것이다. 퇴적물은 이제 퇴적암이 되었다. 그리고 죽은 생물들은 화석이 되었다. 우리는 엄밀한 과학적 조망으로 노아의 홍수를 입증할 수는 없다. 그러나 화석기록의 본질은 성경 기록에서 기대되어지는 것과 정확히 같은 것이다.  우리는 화석이 쌓여질 당시에 그곳에 있지 않았던 사람들의 추정보다, 그곳에 계셨던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보고 계셨던 분의 증언을 더 신뢰해야할 것이다!

 
 
출처 : Creation 14(2):12?13, March 1992
URL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14/i2/fossil.asp
번역자 : IT 사역위원회
 

관련 자료 링크:
 
1. 오래된 지구의 신 : 점진적 창조론, 간격이론, 날시대이론, 다중격변설... (The god of an old Earth) 
2. 점진론적 창조론 (Progressive Creationism) 
3. 창세기에 간격이 있는가? : 간격이론(Gap Theory)이란 무엇인가? (From the beginning of the creation) 
4. 위증인(僞證人) 타파하기 : 오래된 지구 창조론자인 휴 로스의 주장에 대한 반론 (Demolishing 'straw men') 
5. 오래된 지구 지질학에 대한 성경적 지질학자들의 반대 
6. 어느 믿음이 최근의 탈선인가? : 오래된 지구 또는 젊은 지구? (Which is the recent aberration? Old-Earth or Young-Earth Belief?) 
7. 오래된 지구 연대는 진화론의 심장이다 (1) (An Old Age for the Earth Is the Heart of Evolution) 
8. 오래된 연대에 대한 오래된 이야기 (The long story of long ages) 
9. 젊은 세계에 대한 증거들 (Evidence for a Young World) 
10. 조상들과의 만남 : 창세기 연대기의 정확성과 족장들의 긴 수명 (Meeting the ancestors) 
11. 젊은 지구(The Young Earth) 3장. 대조되는 2가지 견해 
12. 화석들은 점점 복잡해졌는가? (Fossils : they get more complex?) 
13. 화석기록 : 항상 더 무작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1) (The Fossil Record : Becoming More Random All the Time) 
14. 진핵생물의 진화는 10억 년이나 더 뒤로 내려갔다. (Supposed eukaryote evolution pushed back one billion years) 
15. 절지동물은 아마도 4천만년 더 일찍 육지를 점령했다. (Arthropods supposedly invaded land 40 million years earlier) 
16. 화석과 암석들 : 순환논법 (Fossils And Rocks : Circular Reasoning) 
17. 화석 판단의 돌변 : 화석의 연대 결정은 순환논법이다 (Fossil flip-flop) 
18. 화석과 지층 1 (Fossils and Strata) 
19. 화석과 지층 3 (Fossils and Strata) 
20. 과학자들이 화석에 대해 말한다 (Scientists Speak About Fossils) 
21. 화분의 순서 : 화분들의 분급작용은 홍수 시에 일어날 수 있다 (Pollen Order) 
22. 유공충 (Foraminifers) : 생태학적 서식 깊이와 화석 분포와의 관련성 
23. 화석과 지층 2 (Fossils and Str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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