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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존재하는 이유 - C.S.루이스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드림

 

25.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28.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29.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31.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32.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33.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 14:25-33)

 

1. 얼마나 희생해야 할까?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모든 사람이 갖는 일반적인 생각은 얼마나 많은 것을 드려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다양한 욕구와 이해 관계를 가진 보통의 자아를 신앙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리고 그 다음에 ‘도덕’이라든가 ‘점잖은 행동’, ‘사회의 이익’ 같은 어떤 것을 위해 자신의 자아를 희생시킨다. 왜냐하면 대개 그러한 것들은 자아의 욕구에 제동을 걸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하게 산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사회적 요구에 대해 자신을 포기하는 것을 말한다. 보통의 자아가 하고 싶어 했던 일이 때로는 소위 ‘잘못된’ 것으로 드러날 경우도 있다. 그러한 경우에는 마땅히 그것을 포기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행히 ‘옳은’ 것으로 판명될 경우도 있는데, 그럴 때에는 마땅히 그것을 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 속에는 모든 요구 조건이 충족되어도 여전히 자아가 남아 있어서 나름대로의 삶을 영위하고, 또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 기회와 시간을 갖고 싶어하는 본능이 있다. 사실상 우리는 세금을 정직하게 꼬박꼬박 내는 사람과 매우 흡사하다. 그 사람은 세금을 확실하게 잘 내기는 하지만 세금을 내고도 여전히 자기가 먹고 살 만큼의 돈이 남아 있기를 진정으로 원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본래의 자아를 여전히 출발점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갈등이 있는 것이다.

 


2. 두 가지 결과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볼 때 두 가지 결과가 예상된다. 선하게 살기를 포기하고 자아에 충실하든가, 아니면 자아를 버리고 완전히 불행해지든가 이 둘 중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자아의 희생을 요구하는 모든 요구 조건들을 진정으로 충족시키려고 하다 보면 틀림없이 자기에게는 기본적으로 있어야 할 것조차 남아 있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양심에 따라 살면 살수록 그 양심은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우리의 자아는 매 순간마다 굶주리고 괴로워하며 염려하게 되므로 점점 더 화를 내게 된다.

 

그래서 마침내 우리는 선하게 살기를 포기하든가, 아니면 소위 ‘남을 위해 살면서도’ 늘 우리 자신을 순교자로 자처하고 남이 그것을 더 잘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며 불만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 중의 하나가 되고 말 것이다. 일단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고 나면, 처음부터 솔직히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것보다 우리와 함께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들에게 훨씬 더 해로운 존재가 될 것이다.


 

3. 어렵고도 쉬운 길

 

       그리스도인의 길은 어렵기도 하고 쉽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나에게 모든 것을 바쳐라. 나는 너의 시간과 물질과 일을 원하지 않고 바로 너를 원한다. 나는 너의 자아를 괴롭히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그것을 없애려고 왔다. 미봉책은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한다. 나는 여기저기 가지만을 잘라내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 전체를 베어 넘어뜨리기를 원한다. 자아 전체를 내어 버려라. 악하다고 생각되는 욕망만이 아니라 선하다고 생각되는 요구까지도 모두 내어 버려라. 마음의 소욕을 모두 내어 버리면 그 대신 내가 새로운 자아를 주겠다. 사실, 나는 너에게 나 자신을 줄 것이다. 나의 모든 것이 너의 것이 되도록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길은 우리 모두가 하고자 하는 것보다 더 어렵기도 하고 더 쉽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때로는 그리스도인의 길이 매우 어렵다고 하셨고, 또 때로는 매우 쉽다고도 하셨음을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예수님께서는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포로 수용소에서 맞아 죽을 정도까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곳에서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고 말씀하셨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길이 어렵기도 하고 쉽기도 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가 모두 옳은 것임을 알 수 있다.

 


4. 더 어렵게 일하지 말고 더 지혜롭게 일하라

 

       교사들의 말을 들어 보면, 게으른 학생일수록 결국에는 가장 어렵게 공부를 한다고 한다. 이 말의 뜻은 다음과 같다. 두 명의 학생에게 똑같은 기하학 문제를 주었다고 하자. 수고하고 땀 흘릴 준비가 되어 있는 학생은 그 문제를 이해하려고 할 것이고, 게으른 학생은 지금 당장은 노력이 적게 들기 때문에 그것을 암기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6개월 후 정작 시험 준비를 할 때, 미리 땀을 흘린 학생은 금방 이해하고 자신있게 푸는 문제를 게으른 학생은 여러 시간을 애써 고생해야 하는 것이다.

 

       게으르면 결국 더 많은 고생을 해야 한다.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한 번 살펴보자. 전투를 하거나 등산을 할 때에 종종 많은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 용기와 결단이 결국에는 가장 안전한 것이 될 수가 있다. 한편 결단해야 할 순간에 두려워하거나 겁을 내어 결단하지 못한다면, 시간이 지난 후에 오히려 자신이 더 큰 위험에 처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비겁한 일이 가장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5. 그렇다면 어느 것이 더 쉬울까?

 

       이 물음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우리의 자아를 전부 주님께 바치는 것, 즉 우리 마음의 소원이나 앞날에 대한 대책까지도 모두 그리스도께 내어 맡기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거의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나름대로 하려고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쉽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려고 하는 것은 소위 ‘우리 자신’을 그대로 두면서 개인의 행복을 인생의 커다란 목적으로 삼는 것이고 그와 동시에 ‘선하게’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마음의 소욕을 좇아 돈이나 쾌락이나 야망에 초점을 두고 살아가고자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직하고 정숙하며 겸손하게 살아가기를 소원한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경고하시는 내용이다. 예수님께서는 엉겅퀴가 무화과를 낼 수는 없다고 말씀하셨다. 만일 내가 잡초 씨만 뿌려진 밭이라면 밀을 생산할 수 없다. 그 잡초를 잘라 낸다 해도 다만 짧아지는 것 뿐이다. 여전히 잡초를 낼 뿐이며 밀은 낼 수가 없다. 만일 밀을 생산하고 싶으면 밭의 표면만 바꾸어서는 안 된다. 그 밭을 갈아 엎고 다시 씨를 뿌려야 한다.

 


6.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 몸에 배게 하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진정한 문제가 대부분의 일반 사람들이 찾고 있지 않는 곳에서 생기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우리가 매일 아침 눈을 뜨는 바로 그 순간부터 문제는 시작된다. 우리가 그날 그날 갖게 되는 모든 소원과 희망이 사나운 야수처럼 우리에게 덤벼든다. 매일 아침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모든 문제를 뒤로 미루어 놓는 것 뿐이다. 그리고는 다른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다른 관점을 받아들이며, 좀더 크고 좀더 강하며 좀더 경건한 다른 삶이 내 삶에 흘러 넘치게 하는 것 뿐이다. 이런 식으로 하루 종일을 사는 것이다. 하찮은 일로 야단법석을 떨고 소란을 피우는 것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서 바깥 바람을 벗어나 안으로 들어오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처음에는 잠시 동안만 이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로부터 점점 새로운 종류의 삶이 우리의 생활 영역 전반에 걸쳐 퍼지게 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주님께서 바로 우리 우편에 서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그 차이는 단지 표면에만 칠해지는 페인트와 속까지 깊숙이 파고드는 염색이나 녹의 차이와 같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막연하거나 이상적인 헛된 말씀을 하시지 않았다. 그분이 “온전하라”고 했으면 그 말 그대로 온전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어렵다. 사실 타협이란 불가능하다. 알이 변하여 새가 되기는 어렵다. 그리고 그 알이 새로 변하지 않고 날기를 배운다는 것은 정말로 더 어렵다. 우리는 지금 알과 같은 존재들이다. 그러나 그냥 무한정 평범한 보통의 알로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알은 부화되거나 썩거나 둘 중의 하나가 되어야만 한다.


 


7.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

 

       앞서 말한 것을 한 번 돌이켜보자. 그것은 기독교 전반에 관한 것이다. 그 밖의 다른 것은 없다. 그러나 그것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지 않고 혼란해지기가 매우 쉽다. 교회가 교육, 건축, 선교, 예배 등 많은 목적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것은 마치 국가가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목적 외에 많은 다른 목적들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기 쉬운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떻게 보면 훨씬 더 단순하다. 국가는 단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만 인간의 일상적인 행복을 보호하고 증진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남편과 아내가 난로를 쬐며 대화를 나눈다든가, 몇몇 친구들이 선술집에 모여서 다트 놀이를 한다든가, 아니면 정원을 판다든가 하는 이런 것이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이다. 그리고 만일 모든 법률과 국회와 군대와 법정과 경찰과 경제 상태 따위가 이러한 국민의 일상적인 삶의 순간들을 증진시키고 연장시키며 보호해 주는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그 모든 것들이 시간 낭비에 불과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여 그들을 작은 그리스도로 만드는 것 외에는 다른 존재 이유가 없다. 만일 모든 교회와 성직자와 선교와 설교가, 심지어 성경 그 자체까지도 그 일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그 모든 것들은 단지 시간 낭비에 불과할 것이다. 바로 그러한 목적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신 것이다. 때로는 온 우주가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해서 창조된 것이 아닌가 의심이 생길 때도 있다. 그러나 성경은 온 우주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락한다고 말한다.

 


8.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하자

 

       나는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이러한 일이 온 우주에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구에서 수천만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과연 무엇이 살고 있는지 모른다 (만약 이 우주 공간에 다른 무엇인가가 존재한다고 가정했을 때의 말이다). 심지어 이 지구상에서조차 인간이 아닌 다른 사물에 그것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는 다만 그것을 기대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관해서만 하나님의 계획을 보아왔다.

 

       우리가 지금까지 들어온 말은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들어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우주의 왕자이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아버지께 드리고자 했던 그 멋진 선물 속에 우리가 어떻게 포함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인데, 그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며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우리까지도 포함이 되는 것이다. 이것만이 우리가 지음을 받은 유일한 목적이다. 성경에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자연 만물까지도 회복되기 시작할 것이라는 이상하고도 흥미로운 암시가 많이 나와 있다. 그때가 되면 악몽은 물러가고 아침이 올 것이다.

 


Mere Christianity / C. S. 루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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