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개혁 운동 후 독일의 발전

 

 

 


각지 종교 개혁 운동의 발전과 성형(成形)

1. 종교 개혁 후 독일의 발전

 

1). 슈파이어 회의와 아우크스부르크의 회의

보름스(Worms)에서 회의가 있은 후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는 마르틴 루터를 이단자로 판정하고 그의 모든 저작을 없애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외국과의 전쟁이 빈번하여 그 명령은 철저하게 이행되지 못 했다. 독일 남부의 제후들은 모두 제국과 천주교에 순종했고 북부의 제후들은 루터를 지지했다. 종교 개혁 인사들과 제후들의 촉구로 1526년에 제1차 슈파이어 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회의가 정식으로 시작되기 전에 제후들은 스스로 신앙을 선택할 수 있고 직접적으로 하나님과 황제에게 책임진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렇기 때문에 보름스에서 루터에게 내린 처벌은 잠시 유보되었다. 1529년 제2차 슈파이어 회의가 열렸다. 카를 5세의 지지 아래, 천주교를 지지하는 제후들은 보름스에서의 왕명을 단호하게 관철하고 개혁파의 지역을 천주 교화하려고 하였다. 루터파는 이것에 대하여 신랄하게 항의했다.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항의하는 자)는 여기에서 유래된 말이다. 1530년 카를 5세가 국경을 침범한 오스만 터키 군대를 격파한 후에 제국 내의 종교 문제를 다시 자세하게 파악하려고 아우크스부르크 회의(Diet of Augsburg)를 열어 천주교와 루터파에게 회의에서 신앙을 진술하도록 했다. 루터는 당시 불법자의 신분으로 제재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필리프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을 대표로 출석하게 했다. 멜란히톤은 회의에서 그 유명한 "아우구스부르크 신앙 고백서"를 발표했다. 그것은 종교 개혁의 중요한 문헌이 되었을 뿐 아니라 후에 루터파의 신앙을 성명하는 표준이 되었다. 로마 천주교 측은 즉시 그 성명을 반박하는 "반박문" 을 발표하였으며 카롤 5세에게 그것을 금지해 줄 것을 요구함으로 양쪽의 협상은 다시 깨졌다. 루터를 지지한 제후들은 카를 5세가 군대로 진압을 할까 두려워서 1531년 2월에 슈말칼덴 동맹(schmalkaldic league)을 조직하였다. 그때 오스만 대군이 다시 국경을 침범하여 쌍방은 휴전을 체결하고 협력하여 외적을 막기로 하였다. 후에 몇 차례의 협상 회의를 열었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

 

2). 동 시대의 다른 개혁자들

제2차 슈파이어 회의가 끝난 후 헤센의 란트 그라프 필리프(Landgraf Philip)는 독일과 스위스 지역에 있는 종교 개혁 세력과 루터, 츠빙글리 그리고 다른 개혁자들을 마르부르크(Marburg)의 협상에 초청했다. 그러나 성찬에 대한 교리의 관점이 달라서 합일하려는 헤센 공의 목표는 달성되지 못 했다. 당시 출석한 사람들 중에는 헤센 공의 친한 친구인 프랑수아 랑베르(Francois Lambert)도 있었다. 그는 프랑스와 독일과 스위스 일대에서 교회 개혁의 청사진의 기초를 세우고 교회는 마땅히 회중이 다스려야 하며 정치 세력이 개입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루터가 개입하여 허사가 되었다. 루터는 당시의 개혁파와 천주교가 서로 대립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귀족의 지지가 필요하지 시민들의 뜻을 논의하는 것은 너무 이르다고 생각했다. 귀족 세력을 구슬리기 위해 루터는 정치권력으로 교회의 성직과 성례의 일을 결정하였다. 동시에 한 개혁자가 있었는데, 그는 슐레지엔(Schlesien)의 귀족 슈벵크펠트(Kaspar von Schwenckfeld, 1489~1561)이다. 그는 로마 천주교에 동조하지도 않았고 루터파나 재침례파도 함께하지 않았다. 슈벵크펠트는 성경을 연구하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그는 '성경 전체의 총합은 그리스도'라고 하였으며, 성경을 읽을 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나오면 "상하 문맥을 연구하여 성경으로 성경을 풀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는 교회는 신약의 교회를 모형으로 하여야 하며 각 지방에서 출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고 성령께서 다스리시게 해야 하며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를 살아 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침례에 대하여 '믿고 침례를 받는 것' 은 한 실체에 양면이 있는 것처럼 어느 것도 소홀히 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재침례파에 가입하지는 않았다. 슈벵크펠트는 성찬의 교의에 있어서 루터와 다른 관점을 가졌고, 그가 성경을 근거로 세운 교회가 갈수록 흥왕하였기 때문에 루터파와 당국의 공격과 박해를 받아 30년 동안 유랑하였다. 그가 자기가 세운 단체를 감히 교회라고 인정하지 못한 것은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의 파가 되어 주님을 사랑하는 더 많은 믿는 이들을 섬길 기회를 잃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슈벵크펠트와 그의 무리는 또한 잠시 침례와 떡을 떼는 것을 멈추고 교회가 하나 될 수 있도록 성령의 부으심을 위해 기도하고 기다렸다. 그들의 소임은 사람을 주께 돌려드리는 것이었고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진리와 생명을 공급하고 장래의 영광을 소망하는 것이었다.

 

3). 농민 혁명

중세기의 농민들은 교회와 귀족들에게 장기적인 착취를 당했기 때문에 자주 항의하고 난을 일으켰다. 루터의 종교 개혁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농민이었고 그들 가운데는 종교 개혁을 빌미로 사회 혁명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농민을 압박하는 정치와 종교 제도를 폐지할 것을 요구했다. 루터의 신학은 믿음과 자유를 강조하였기 때문에 농민들이 사회 운동을 하는 기초로 이용되었다. 1524년 6월 독일 남부의 제후들이 루터파를 박해했기 때문에 계속해서 농민 폭동이 일어났다. 농민 폭동은 다음 해에 더욱 스위스와 독일의 각지에 확산되어 하층 계급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삼십만 명이 동참하였다. 이어서 혁명 단체가 출판한 <12 조항(Twelve Articles of the Peasantry)>은  루터가 '믿는 이는 모두 제사장'이라는 관점을 근거로 하여 강제 노역 규제와 십일조의 세금 징수 면제, 그리고 정치 개혁 등을 요구하였다. 또한 루터가 수도 주의를 몹시 배척한 것을 근거로 수도원을 모조리 약탈하고 재물을 몰수하여 공유화하였다. 농민 폭동의 지도자인 토마스 뮌처(Thomas Muenzer)는 원래 신부였으며 루터의 권유와 원조를 받아 복음 전도자가 되어 루터의 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너무나 극단적이어서 점차 루터와 마찰을 일으키다가 결국 루터를 반대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루터가 교황의 권위를 뒤집고 성경을 권위로 삼지만 절반만 그렇게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더 나아가 성경의 도움 없이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직접 성령을 받을 수 있으며 이상한 꿈이나 상상을 통해 얻은 내적 말씀(Inner Light)으로 말미암아 계시를 얻는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성령의 부으심을 받고 선택된 이들의 단체에 가입하여 세상에서 분별되어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계시록을 인용하여 무력으로 불신자들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통치권을 세워 하나님의 왕국을 지상에 가져올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신령한 것을 추구하는 신비주의는 개신교에 영향을 주었고 농민들을 격동시켜 폭동에 종교적인 색채가 깊어지게 했다. 루터는 초기에 농민에게 동정을 표하며 "나는 농민의 아들이며, 나의 아버지, 할아버지, 선조들은 모두 진정한 농민이다."라고 하며 자신의 출신을 자랑했다. 폭동 초기에 그는 <평화의 충고: 12조 항에 대한 답변>을 쓰고, 농민을 '사랑하는 형제', '친구'라고 부르며 불합리한 영주들을 질책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그리스도인은 천부의 권리에 호소하여 사회적 정의를 요구할 권리는 없다며 농민들에게 정부를 존중할 것을 훈계하였다. 그러나 폭동은 갈수록 잔혹해져서 살인과 방화를 하는 등 극단적인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서로 주장하는 신앙과 개혁에 대한 견해가 다른 상황에서 뮌처가 뮐하우젠(Muelhausen)에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명분으로 진압자를 살해하고 그 위협이 비텐베르크에 이르게 되자 루터의 분노가 폭발하였다. 루터는 즉시 "농민들의 집단 약탈과 대량 학살을 반대함"이라는 글을 썼는데, 거기에서 그는 농민들의 약탈, 살인, 복음의 명분으로 행한 것에 대하여 응당 엄벌해야 하며 제후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폭동을 제지해야 한다고 했다. 제후들은 루터의 '권고'를 근거로 농민들을 대량 도륙하여 십만여 명이 살해당했으며 수많은 사람이 중상을 입었다. 윈처도 그때 참살되었다. 루터는 귀족들의 흉악함과 잔인함에 매우 상심하여 자신이 모든 농민들을 죽였으니 농민들의 피가 자신에게 돌려져야 한다고 말했다. 악몽과 같은 농민 폭동은 루터와 농민 사이에 큰 간격을 가져왔다. 원래 농민들은 루터의 종교 개혁에 충실한 지지자였으며, 루터가 자신들을 이해하고 동정하며 도울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루터가 관심했던 것은 물질적인 사회 개혁이 아니라 종교와 신학적인 면에서의 개혁이었다. 루터는 사회는 부패하여 사람을 구원할 수 없으며 좋은 사회도 사람을 개선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받으신 것이 고난이기 때문에,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사회로부터 분별됨으로 겪는 고난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농민 폭동으로 루터와 농민은 상호 신뢰를 상실하게 되었다. 농민이 자유와 평등을 구호로 한 폭동을 일으켜서 복음이 왜곡되자 루터는 즉시 로마서 14장과 디모데전서 2장을 신성한 권력에 대한 가르침으로 인용하여 세상의 권위를 통해 평화와 질서가 있는 사회를 세우고 복음이 전파되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각 국왕 하에 있는 제후 정권은 루터의 말을 빌미로 영주 권력을 강화해 나갔다. 농민 혁명 후 독일의 북부는 루터파에, 남부는 천주교에 속하게 되었다. 귀족과 지주 계급들은 다시 폭동이 일어날까 두려워서 제후의 권력을 강화하기 원했고 루터를 지지하여 독일의 국교의 형성을 촉진하였다.

 

4). 천주교 내부의 개혁

초기에 루터가 종교 개혁하기 전에 천주교 내부에서는 영성을 고양하자는 소리가 높아졌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를 본받아(Imitation of Christ)>의 저자 토마스 아켐피스(Thomas A Kempis), 인문주의 학자 에라스무스(Erasmus) 등이 성경과 초기 교부들의 가르침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루터가 95개 조항을 내세운 해에 "신성한 사랑의 모임(Oratory of Divine Love)" 이 로마에 세워졌고, 후에 서로 돕고 선행을 강조하는 조직과 수도회가 계속해서 세워졌다. 그리고 순회하는 수도사는 도시와 시골에서 부흥되도록 격려하며 기도와 영성에 관한 작품을 열람하고 교의를 비판하지 않고 생명 방면에서 부흥을 가져올 것을 기대하였다. 이 시기에 세워진 수도회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수도회는 '예수회(Society of Jesus)'이다. 예수회의 창립자인 이그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Loyola)는 스페인의 군인이었는데, 1521년 중상을 입어 퇴역하였다. 그는 건강을 회복하는 동안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한 것과 초기 성도들에 관한 서적을 읽고 깊이 감동을 받아 예수의 군병이 되어 규율을 엄수하고 그리스도께 순종할 것을 맹세했다. 후에 그는 계속 공부를 하고 여행도 하면서 저술 활동을 하였다. 1528년에 그는 파리 대학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했다. 놀랍게도 같은 시기에 칼뱅도 같은 학교에 다녔으나 두 사람은 만나지 못했으며 후에도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길을 갔다. 1533년에 칼뱅은 종교 개혁 운동에 참여하였고, 1534년에 로욜라는 룸메이트 프란체스코와 다섯 명의 동반자들과 함께 빈궁한 생활을 하며 자비를 베풀고 선교를 하며 교황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했다. 1540년에 교황은 정식으로 예수회를 인정했다. 예수회의 규정은 로욜라에 의해 제정되고 수정되었다. 예수회의 세 가지 주요 임무는 신교를 대항하고 높은 수준의 교육을 제공하여 선교 활동을 촉진하는 것이었다. 예수회 수도사들은 하나님의 땅에서의 왕국이 로마 천주교에 있다고 믿고 교황을 대표 권위로 여겼다. 그리고 교황청을 떠난 모든 조직이나 교의는 이단으로 여겼다. 그들의 세력은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등으로 신속하게 확장되었다. 그들은 종교 재판소의 지지 하에 개신교를 공격하고 천주교를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로 전파하였다. 중국 명나라 때 중국에 간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아담 샬(John Adam Schallvon Bell) 등도 예수회의 선교사이다. 개신교의 위협 때문에 천주교의 신분이 낮은 성직자들과 더불어 학술계는 개혁을 위해 대공 의회를 열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였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는 즉위한 후에 신속히 교회를 개혁하려 하였다. 초기에 그는 루터를 통해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였으나 루터는 너무나 급진적이었다. 1521년 교황 레오 10세가 갑자기 죽자, 카롤 5세의 압력으로 교황청에서는 카롤 5세의 스승이었던 하드리안(Hadrian)을 후임으로 선출하였다. 하드리안은 매우 경건하였으며 이전의 성경을 연구하고 성직자를 교육하며 설교하는 방식으로 개선하는 등 많은 개혁을 하였다. 그는 사람들을 감원하여 경비를 절감하는 일련의 개혁을 실행하였으며 날마다 미사를 주관하였다. 그는 재위한 지 20개월 만에 과로로 죽었다. 그의 묘비에는 "그의 일생에서 가장 큰 불행은 교황으로 선출된 것이다."라고 쓰여있다. 바오로 3세는 1534년 교황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구체적인 개혁 조치로써 성직자의 불량한 소행을 엄중하게 처리하고, 예수회의 성립을 동의했으며, 개혁에 진력한 걸출한 인사들을 추기경으로 임명하였다. 반대하는 추기경들과 맞서기 위해 그는 카를 5세와 프랑스 국왕 1세(Francois 1)가 대공 의회를 열 수 있도록 협조할 것을 재촉했다. 결국 1545년에 트렌트 공의회(Council of Trent)가 열렸다. 천주교의 역사상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하기 위해 회의는 장장 18년 동안 스물다섯 차례 열렸다. 그 회의는 400년 동안 천주교의 조직과 교의에 영향을 미쳤다. 회의에서는 쟁론을 일으키는 교의에 대하여 상세한 토론이 이어졌으며 개신교의 모든 관점들은 거절되고 전통과 교황의 권위가 거듭 표명되었다. 그리고 공재설 이외의 모든 입장을 반대하고 성례의 효능을 강조하고 연옥과 선한 일을 하여 공덕을 쌓는 것에 관한 관념을 확고히 하였다. 회의에서 '벌 게이트' 번역본 성경을 천주교의 표준 번역본으로 하였으며, 성경의 진정한 의미와 해석을 결정할 권리는 로마 천주교회에 있다고 선포하였다. 트렌트 회의에서는 천주교의 교의를 확정했을 뿐 아니라 성직자의 규율에 대하여도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교황청의 수많은 악정을 하나하나 제거하였으며 중세기 후의 로마 천주교에 한줄기 부흥의 기운을 가져왔다. 그러나 종교 개혁자들의 불참으로 동시대의 천주교회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잘못된 체계가 더욱 분명하게 세워져 "반종교 개혁 운동(Counter Reformation)"이라 불렸다.

 

5). 루터파의 형성

천주교의 압박으로 루터는 세상 정권과 타협하고 성직을 받는 의식을 채택하였다. 1536년 12월에 루터는 고심 끝에 슈말칼트 조례(Schmalkald Articles)라는 한 편의 신경(Creed)을 구상해 내어 다음 해 2월에 승낙을 받았다. 루터가 세상을 떠난 후 그를 따랐던 사람들 사이에 신학적 관점에서 불일치가 일어났다. 루터의 조력자 멜란히톤은 성품이 온화하여 로마 천주교와 화해할 것을 주장하는 동시에 칼뱅파의 교의(敎義)도 감상했다. 천주교와 타협하기 위해 멜란히톤은 독일 주교와 "라이프치히 잠정안" 을 체결하였다. 그 조약에서는 루터파의 기본 교의를 견지하는 동시에 천주교의 전통의 일부도 고수하였다. 이것은 루터를 충성스럽게 따르는 사람들을 '필리프 파'(Philippisten)라고 하였으며 자신들을 '정통 루터파'라고 하였다. 쌍방은 아우크스부르크 신조가 만들어진 지 50년이 지나도록 계속 싸우다가 1577년 "협약 신조(Formula of Concord)" 가 만들어진 후에 잠시 휴전하면서 많은 루터파의 사람들의 동의를 얻어 내었다. 그러나 아우크스부르크 신조와 비교해 볼 때 협약 신조는 경직되고 활력이 부족했으며 스콜라 철학 사상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루터파 고등 신학이 그것으로 인해서 발족되었다. 1622년 예나(Yena) 대학의 요한 게르하르트(Johann Gerhard)는 루터파의 전형적인 스콜라 철학적 이성 신학이 되는 "신학대전(神學大全)" 을 발표하였다.

 

6). 루터파의 발전

슈말칼덴 동맹이 성립되었을 때 독일의 북부만이 아니라 남부의 일부 대도시도 그 동맹에 가입하였다. 이후에 카를 5세가 프랑스와 함께 오스만을 향해 전쟁을 일으켜 루터파의 발전을 간섭할 겨를이 없었다. 츠빙글리파의 사람들이 죽자 독일 남부는 더욱 루터파를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1546년 통계에 따르면 독일 지역의 90%가 루터파에 속했다. 당시 오스트리아 인구의 삼분의 이 이상이 루터파 신자였다. 보헤미아, 모라비아, 폴란드를 포함한 대부분의 지역이 개신교에 속했으며 그들도 주위 나라들에 개신교를 전파하였다. 그러나 이때 루터파는 가장 어려운 시기를 맞게 되었다. 1544년에 카를 5세는 프랑스와 평화 조약을 맺고 쌍방이 국경 내에 개신교를 제거할 것을 동의하였다. 다음 해 10월에 또 오스만과 휴전 협정을 맺었다. 12월에 트렌트 공의회가 열렸을 때 루터파는 대표를 파견하지 않아서 황제와 교황의 무력 공격을 받는 빌미가 되었다. 1546년 12월 18일 새벽, 루터는 그가 태어났던 곳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비텐베르크 성당의 강단 오른쪽에 안장되었다. 오래지 않아 교황은 십자군을 일으켰는데 십자군에 가입하는 사람마다 모두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했으며 카를 5세에게 군자금을 원조했다. 다음 해 슈말 칼텐 동맹이 실패하고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와 헤센 공 필리프는 갇히게 되었으며 종교 개혁 운동의 활활 타오르던 성화는 거의 소멸되었다. 교황 카를 5세는 결탁하여 개신교를 분쇄하였으나 서로의 세력을 견제하더니 결국은 상극의 관계가 되었다. 1552년 카를 5세는 오스만, 프랑스와 다시 교전하였다. 새로 직입한 작센 공능 전쟁 전에 카를 5세를 위협하여 평화 조약을 맺게 하였다. 이로써 종교적 상황은 1545년 당시로 복귀되었다. 3년 후에 아우크스부르크의 회의에서 루터파의 종교개혁 운동은 천주교에게 인정되었으며 '지배자의 신앙이 곧 지배자의 신앙'이라는 원칙을 세웠다. 각 제후들은 하나의 신앙을 선택해야 하고 의견을 달리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이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츠빙글리 파나 칼뱅파, 그리고 소수 급진파는 배제되었다.

 

7). 30년 전쟁

16세기의 유럽에서는 종교적인 영토의 재정립으로 여러 차례의 전쟁이 일어났다. 이것은 주로 천주교가 무력으로 개신교를 진압하여 그 교권을 견고하게 하려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 일로 개혁자들은 반기를 들고 항의하였다. 아우크스부르크 평화 조약 후에 천주교는 창끝을 다른 개신교에 돌렸다. 당시에 가장 강했던 스페인과 천주교의 신앙을 가졌던 프랑스, 천주교의 신앙을 회복하려는 영국 등은 모든 지역을 대규모로 박해하였다. 예를 들면 스페인 통치 아래 있던 네덜란드는 수만 명이 종교 재판소에 의해 해를 입었다. 영국의 메리 여왕도 "피의 메리(Bloody Marry)"을 얻었다. 이 전쟁은 최후에는 개신교가 승리를 거두었다. 1598년 프랑스 앙리 4세는 개신교에서 천주교로 개종하고 낭트 칙령(Edict of Nantes)을 반포하여 종교의 자유를 허락했으며 개신교에게 정치적 권리를 주었다. 1558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하면서 종교에 대하여 유화 정책을 취했다. 1582년 네덜란드 공화국은 스페인에 독립을 선언하였고 칼뱅파의 신앙이 국교가 되었다. 그렇지만 종교 분쟁은 끝나지 않았다. 독일 지역에서는 천주교와 칼뱅파가 아우크스부르크의 협정에 대하여 불만을 가졌다. 예수회는 개신교 파의 수중에 있는 재산을 되돌려 줄 것을 요구하였고 날로 강해지던 칼뱅 파는 자신들이 여전히 종교법을 위반하는 사람들로 여겨지는 것에 대하여 불만을 품었다. 거기에 제후들의 정치적 원한이 더해져서 결국 중요하지 않고 의미 없어 보이는 대전쟁이 1618년부터 1648년까지 3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전쟁은 네 단계로 나뉜다. 전쟁은 보헤미아, 모라비아(오늘날의 체코 동부지방)에서 오스트리아에 이르기까지 유럽 대부분의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그 피해가 극심했다. 중부 유럽 지역의 인구는 삼 분지 이가 감소하였고 들판은 황무해졌으며 상공업은 거의 다 파괴되어 1세기 동안 피폐한 상태가 계속되었다. 전쟁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Peace of Westphalia)이 체결되어 종결되었다. 이 조약에서 영토의 경계를 분명히 하였고, 개신교의 각 종파를 포함해서 '지배자의 신앙이 곧 지배자의 신앙'이라는 원칙을 거듭 천명하였다. 또한 제후들은 신앙을 바꾸어서는 안 되고 천주교는 각 제후의 영지 내 종교의 일을 간섭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개신교는 천주교와 대등하게 맞서게 되었으며 독일 지역의 지지를 받았다. 쌍방의 지리적 경계는 지금까지 큰 변화가 없다.

 


2. 북부 유럽의 종교 개혁 운동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이 1397년 연합 왕국으로 통합되었고 주로 덴마크가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루터가 종교 개혁을 할 때,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2세도 자신의 권위로 그의 관활에 속한 교회 체계를 세우려고 하였다. 그는 스웨덴에서 스웨덴 애국정당이 천주교를 보호한다는 것을 이유로 이 정당을 분쇄하였다. 1521년에 스웨덴은 독립하였고, 1

523년 11월에 교황청 주교의 선거 비준과 교회세 납부를 거절하였으며 천주교와 갈라서고 개신교에 가입하여 1531년 첫 번째 개신교 대주교를 선출하였다. 크리스티안 2세는 주교의 권위를 제한하는 등 개혁 운동을 찬성하는 법을 제정하였으나 특권층의 반발로 1523년 결국 퇴임당했다. 후임 덴마크 왕으로 선출되는 조건은 반드시 귀족의 권리를 옹호하고 개신교의 이단의 전파를 금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루터교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후임 왕은 교묘하게 대주교를 질투하는 귀족 세력을 키우고 이들이 천주교의 권리와 재산을 공격하는 것을 지지하여 이들에게서 자신의 종교 개혁 정책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 내었다. 일반 평민들은 면죄부 등을 지나치게 판매하는 천주교의 악행을 혐오하여 국왕의 조치에 동의하였다. 1527년 국왕은 주교의 직위가 국왕 아래 있어야 함을 명령하고 루터교와 천주교의 위치가 동등함을 인정하였다. 1532년에 덴마크는 슈말칼덴 동맹에 가입하는 비준을 얻어 정식으로 루터회의 신앙을 받아들였다. 노르웨이는 덴마크와 동맹하였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아 루터파의 신앙을 받아들였다. 아이슬란드를 관할하는 두 명의 주교 가운데 한 명은 루터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는 고향에 돌아간 후 1540년에 주교가 되어 곧 종교 개혁 운동을 일으키고 아이슬란드어 신약 성경 번역본을 간행하였다. 1554년에 아이슬란드는 루터파의 신앙을 국교로 삼았다. 스웨덴의 종교 개혁은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던 두 명의 학자가 귀국하여 대대적으로 루터교를 전파해서 일어났다. 1521년 독립운동의 지도자 구스타브 바사(Gustav Vasa)는 일찍이 이 두 사람에게 교육을 받았으며 국왕으로 당선된 후에 경제적인 어려움에 직면하자 종교 개혁 운동을 통해 천주교의 재산을 몰수하고 대주교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1526년 스웨덴어 신약 성경이 출판되었다. 다음 해 의회는 국왕이 스웨덴 교회의 최고 지도자이며 루터파 신앙을 받아들인다는 결의를 하였다. 이 운동이 핀란드에 신속하게 전파되자 북유럽 전체가 루터파의 세상이 되었다. 30년 전쟁 중에 덴마크가 가장 먼저 개신교 파에 참여하였다. 1629년 개신교 파가 대패하자 천주교 측은  개신교 수중에 들어간 교회 재산의 반환 등을 내용으로 하는 "반환령" 을 공포하고 전 유럽을 천주교 제도 가운데로 복귀시키려고 압박하였다. 1630년 스웨덴 왕 '북방의 사자' 구스타브 아돌프(Gustav Adolf)는 스웨덴이 천주 교화되는 것을 막고자 먼저 개신교를 보호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독일로 올라갔다. 그리고 다음 해에 천주교 동맹군을 격파한 뒤 거침없이 라인강으로 진격하였다. 그다음 해에 구스타브는 천주교 측의 명장 발렌슈타인(Wallenstein)과 라이프치히(Leipzig) 부근의 뤼첸(Luetzen)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인 후 승리하였으나 전사하였다. 프랑스는 당시에 천주교를 신봉하였지만 합스부르크 왕조(Habsburg)의 세력이 계속 팽창하는 것을 보고 먼저 스웨덴을 경제적으로 지원하고 후에 군대를 보내어 전쟁에 참전함으로 결국은 스웨덴과 함께 승전국이 되었다. 스웨덴의 세력이 강해져서 발트 해가 스웨덴의 영해가 되었다. 개신교는 이러한 전쟁을 통해 종교적 영역을 온전히 확립하게 되었다.

 

 
3. 17세기의 경건주의 운동

​30년 전쟁 후 독일은 정식으로 개신교 지역이 되었으나 교회가 점차 국교화되자 정부의 관섭과 관여를 벗어날 수 없었다. 성직자들이 공직자들과 같아지면서 영성이 보편적으로 하락하였다. 루터 자신은 개인이 하나님과의 주관적인 체험을 갖는 것을 중요시하였으나 점차로 체험보다는 교의를 강조하는 멜란히톤의 조례식 신앙으로 대치되어 스콜라적 루터교가 발전하였다. 멜란히톤의 조례는 명목상으로는 성경을 근거로 하였지만 실제적으로는 진부하고 유통성이 없고 정체된 교리 해석이었다. 백 년이라는 짧은 기간 내에 루터교는 원래 주의했던 하나님과의 교통을 통한 주관적인 믿음에서 다시 죽은 교리와 의식으로 떨어졌다. 믿는 이들은 단지 세례를 받고 성례와 교의를 지키며 시간에 맞추어 예배를 드리면 좋은 신도가 되었다. 그래서 더 깊고 의미 있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추구하는 한 무리의 개혁자들이 일어났다. 생명의 체험을 중요시하는 경건주의 운동은 17세기의 유럽에 보편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들이 경건한 생활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경건파(The Pietistas)"라고 불렸다. 이러한 믿는 이들은 루터교를 뒤집거나 떠난 것이 아니라 루터가 주장한 '이상(理想)'을 하나하나 실행해 냈다. 그들은 자주 가정에서 함께 모여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였다. 집회에서는 한 사람만 말하고 다른 사람들은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제사장'이라는 원칙 아래서 함께 누림을 나누었다. 그들은 성경 읽기를 다만 지식 만이 아닌 생명과 양육을 얻는데 중점을 두었다. 성경을  반드시 실제 생활 가운데 적용해야 하며 성결하고 도덕적인 생활을 살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개인적인 체험 방면에서 그들은 믿는 이들이 회개하고 거듭나는 주관적인 체험과 그리스도가 그들의 중심이 되며 그분의 은혜로 충만하게 되는 것을 중요시하였다. 이외에 그들은 사회 구제를 실행하여 가난한 사람과 과부를 돌보고 해외 선교에 쏟았으며 당시 정체되어 있던 루터회에 신선한 활력을 불어넣었다.

 

1). 경건주의 운동의 시작-슈페너

독일 경건주의 운동의 주요 인물은 필리프 야코프 슈페너(Philip Jacob Spener)이다. 그는 1635년 알자스(Alsace)에서 태어나 35세에 프랑크푸르트(Frankfurt)의 루터교 목사가 되었다. 그는 스위스에서 라바디(Labadie)의 영향을 받았다. 라바디는 원래 천주교 수사였는데, 당시의 천주교와 개신교의 부패함을 보고 성경에 있는 초대 교회의 모습을 회복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경건한 생활의 능력은 하나님과의 교통에 근거하며, 사람은 성령의 빛 비춤을 통해서만 비로소 성경을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라바디는 제네바에서 목사를 담임하다가 후에 네덜란드의 미델부르크(Middelburg)에서 개혁을 실행하였다. 암스테르담에서는 '가정 집회'를 시도하였으나 개혁을 성공시키지는 못 했다. 슈페너는 요한 아른트(Johann Arndt)의 <진정한 기독교(True Christianity)>의 영향을 받았다. 30년 전쟁이 가져온 동란과 영성의 하락으로 인하여 슈페너는 교회 개혁의 필요성을 깊이 느꼈다. 그는 거듭남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믿는 이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을 갖도록 격려하였으며, 개인적으로 기도하며 성경을 읽는 습관을 세울 것을 말했다. 1675년 그는 '경건한 소원'을 뜻하는 <피아 데시데리아(Desideria)>라는 책을 출판하여 루터파를 소생시키기 위한 여섯 가지의 건의 사항을 제시하였다. 첫째는 개인이 성경을 정독하고, 둘째는 믿는 이들이 모두 제사장에 관한 진리와 실행을 회복하고, 셋째는 성경 지식 만이 아닌 살아 있는 믿음과 사랑이 있어야 하며, 넷째는 성경을 읽을 때 신학적인 쟁론을 줄이고 진리를 추구하는 데 중점을 두며, 다섯째로 숭고한 도덕적 표준으로 신학 교육이 개혁될 필요가 있으며, 여섯째는 복음 강연을 부흥시켜 복음을 널리 전파해야 한다는 것이다. 슈페너는 가정 집회에서 믿는 이들이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누림을 나누는 등, 사도 시대와 같이 모든 사람이 기능을 발휘하는 상호적인 집회 방식을 회복하기 바랐다. 슈페너는 시종일관 경건한 루터회의 회원이었지만 그의 개혁은 루터회 신학자들의 맹렬한 비판을 받았다. 그들은 슈페너가 지나치게 영적 수양을 중요시하고 교의를 소홀히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슈페너의 개혁은 경건한 생활을 추구하는 많은 믿는 이들을 매혹시켜 17세기의 독일 기독교에 맑은 물을 주입하였다.

 

2). 독일 경건주의 운동의 발전과 흥성-프랑케

슈페너의 영향을 받은 많은 사람들 가운데 청년 강사 아우 구스 헤르만 프랑케(August Hermann Francke)가 있다. 그는 1687년 주관적인 회개와 거듭남을 체험했다. 후에 프랑케는 드레스덴에서 슈페너와 2개월 동안 함께 머물면서 경건주의를 완전히 받아들였다. 그는 라이프치히에 돌아온 후에 대학에서 강의하여 열열한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이것이 루터파의 선제후에게 불안한 마음을 일으켰고, 선제후는 '소그룹 집회' 실행을 금하였다. 프랑케는 에르푸르트로 가서 목회를 하였다. 1697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빌헬름 3세는 할레에 대학을 세웠다. 이 빌헬름 3세가 바로 후에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이다. 슈페너의 추천으로 프랑케는 할레 부근 글 라우 카우(Glauchau)에서 목회를 하며 할레 대학의 교수직을 맡았다. 30년간의 그의 영향으로 할레 대학은 경건주의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는 아동 교육원, 성경학교, 라틴어 학교, 고아원, 구제 센터, 진료소, 성경 인쇄 출판소를 경영하며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교육 기관을 창설했다. 그가 임종할 즈음, 그의 고아원에서 교육을 받은 학생이 2200명에 달했고, 134명의 고아들이 합당하게 돌봄을 받았다. 친젠도르프 역시 이전에 이곳에서 공부하였다. 이렇게 방대한 비용은 프랑케의 믿음과 기도로 말미암아 유럽 각지의 기부금으로 충당되었다. 할레 경건주의 운동의 주목할 만한 또 다른 특징은 해외 선교에 대한 열정이다. 1705년 덴마크 국왕이 소집하여 인도에 복음을 전하러 간 선교사 중에는 두 명의 할레 대학생이 있었다. 18세기 동안 할레와 그 교육 기관은 육십 명의 해외 선교사를 보냈다. 그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은 일생 동안 인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주님 품으로 간 슈바르츠(Schwartz)이다. 교회사 가운데 경건주의는 아주 큰 공헌을 하였다. 경건파 믿는 이들 중 고트프리트 아르놀트(Gottfried Arnold)는 1699년 "중립 교회와 이단 사관" 을 발표하였다. 그는 당대의 조류에 따라 믿는 이들을 이단으로 판단해서는 안되며 반드시 그 사상을 깊이 살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심지어 기독교 역사에서 많은 '이단자들' 이 천명한 진리가 소위 '정통'이라고 하는 단체들이 천명한 진리보다 많다고 여겼다. 당시 보편적으로 주류 교회와 부합한 교회사의 논점과 비교하여 말할 때 이러한 관점은 진보적인 것이었다.

 
4. 연합 형제단과 요한 아모스 코메니우스

(Johann Amos Comenius)

1) 연합 형제단에 관한 간단한 소개

1415년 얀 후스(Jan Hus)가 이단이라는 죄명으로 천주교에 의해 화형 된 후, 그의 추종자들은 심한 박해를 받았다. 후스를 따르는 사람들은 세 파로 나뉘었다. 그중 한 파는 정치와 타협하지 않고 무력으로 대항하지도 않으며 오직 신앙을 위해 기꺼이 고난받기를 원했다. 그중 한 사람인 페터 첼시 스키(Peter of Chelcicky)는 자신의 저서에서 교회를 건물로 비유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건물들은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무너지고 불태워져 폐허 더미가 되었다. 그들의 목적은 붕괴된 건물의 잔해 속에서 진정한 터를 찾아 무언가를 회복하려는데 있었다. 박해를 받은 이 믿는 이들은 보헤미아의 한 농촌 쿤네발트(Kunewald)에 은둔하였다. 1457년에 그들은 성경의 원칙에 따라 교회를 세웠는데, 그들 자신을 "연합 형제단(United Brethren)"이라 불렀다. 이들이 모라비아 교회의 전신이다. 그들은 자신을 하나님을 섬기고 범사에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하는 사람으로 여겼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며 피차 권면하고 안정되고 경건한 생활을 했다. 생활에서나 봉사에서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했다. 그들은 50년 동안 이러한 평화로운 생활을 하였다.

1501년에 그들은 성 시집(聖詩集)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후에 그들은 루터와 칼뱅과 연결됨으로 교리에 있어서 더욱 완전하게 되었다. 독일에서 개신교가 막 일어난 때인 1517년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교황이 연합하여 개신교를 공격했을 때에 이러한 무리들도 그냥 두지 않았다. 그들을 진멸하려 했고 그 후에도 지속적인 박해가 있었다. 1548년에 황제가 그들에게 나라를 떠나라는 명을 내렸기 때문에 그들은 폴란드의 한 지역 오스트로로크(Ostrorog)에 정착하고 그곳에서 복음을 널리 전파하여 교회를 세웠다. 1556년에 신임 보헤미아 국왕의 통치 하에서 그들의 귀국이 허용되자,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와 그들의 모임을 다시 시작하였다. 교회의 큰 부흥이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와 폴란드 세 곳으로 확산되었다. 1571년에 한 폴란드 귀족이 그들의 모임에 와서 감동을 받아 이렇게 말했다. "영생이신 살아 계신 하나님이여, 제 마음에 기쁨이 충만합니다. 제가 보고 들은 것으로 인해 저 자신이 에베소와 데살로니가 혹은 다른 사도 시대의 교회 안에 있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저는 신약 서신에 읽었던 모든 것들을 친히 귀로 듣고 눈으로 보았습니다." 1579년부터 1593년 사이에 그들은 성경을 체코어로 번역하였는데, 이 번역본은 오늘날 체코 성경의 근간이 되었고 현대 체코 문학의 기초가 되었다. 연합 형제단에 가입한 이들 중에는 귀족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박해를 피하기 위해 연합 형제단의 신앙을 보헤미아 국교로 삼을 것을 구상했다. 1609년에 귀족들의 무력적인 위협으로 보헤미아 국왕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내용의 헌장에 서명하고 정부가 종교 보호 위원회를 설립하고 개신교의 신앙을 보호해 줄 것을 서명했다. 1617년에 천주교를 신봉하고 예수회의 교육을 받았으며 개혁 운동을 반대한 페르디난트 2세(Ferdinand Ⅱ)가 보헤미아 왕이 되자 그는 천주교를 신봉하는 신하와 결탁하여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는 헌장을 폐지했다. 그러나 개신교를 믿는 귀족들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국왕을 선택할 주장이 있다고 선택하며 1616년에 두 명의 천주교에 속한 정계 인사를 창밖으로 내던졌다. 그리고 군사를 소집하여 페르디난트 2세를 폐하고 칼뱅주의를 신봉하는 팔라티나트(Palatinate)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Fredrick Ⅴ)를 국왕으로 선출하였으며 예수회 수사들을 모두 축출하였다. 쌍방의 충돌은 갈수록 격렬해졌고 불행하게도 페르디난트 2세가 1619년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됨으로 지역적인 전쟁이 전체 신성 로마 제국으로 확대되어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이것이 30년 전쟁의 막을 올리게 된 것이다. 1620년에 프라하 근처에서 벌인 백산 전투(the battle of the White Mountain)에서 천주교 연합군이 대승하자 종교 개혁을 부축했던 귀족들이 참수당하고 국내에는 폭동이 일어났으며, 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이끌고서 보헤미아와 모라비아를 떠나게 되었다. 그때 떠난 가구가 3만 6천여 가구에 달했다. 17세기에 연합 형제단의 믿는 이들은 다만 은밀하게 하나님을 경배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인도자였던 코메니우스는 하나님께서 보호하신 감추어진 씨앗이 있을 것이라고 그들을 격려하였다. 1660년 코메니우스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체험에서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께서 어떤 교회들이 잔해당하게 하시고 또 어떤 교회들이 일어나게 하시거나 혹은 그들이 다른 곳에서 다시 일어나게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교회로 하여금 그 지방에서 살아남을지 죽게 될지 혹은 다른 곳에서 일어나게 하실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복음은 항상 하나님의 다룸을 받은 그리스도인을 통해 이 땅에 있는 다른 민족에게 전파됩니다. 그러므로 … 우리의 손실이 세상 사람들의 축복이 될 것입니다." 1707년에 조지 제슈케(George Jaeschke)도 83세의 임종 직전에도 이와 비슷한 말을 했다. "현재 형제회 무리들은 막다른 골목에 이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녀들이여, 여러분은 남아 있는 모든 이들의 분깃이 될 큰 구원을 보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 구원이 모라비아 지방에 임하게 될지 아니면 여러분이 바빌론의 땅에 떠나야 할지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러한 구원이 곧 실현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 여러분을 위한 한 피난처가 예비될 것입니다. 그곳에서 여러분은 아무 두려움 없이 주님의 거룩한 말씀에 따라 그분을 섬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말대로 훗날 그의 아들들과 손자들은 아내와 자녀들을 데리고 친젠도르프의 영지에 발을 내디딘 첫 번째 무리의 모라비안 믿는 이들이 되었다.

 


2) 코메니우스의 생애에 대한 간략한 소개

요한 코메니우스(Johan Comenius, 1592~1670)는 모라비아의 니브니츠(Nivnitz)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 코메니우스는 연합 형제단의 경건한 그리스도인이었는데, 요한 코메니우스가 열 살 때 세상을 떠났다. 그 후 2년 동안 코메니우스의 어머니와 두 여동생도 잇달아 죽자 의지할 데가 없게 된 코메니우스는 슈트라스니츠(Strassnitz)에 있는 숙모의 집에 거하면서 초등교육을 받았다. 1618년에 코메니우스는 모라비안 형제회에서 운영하는 프레라우(Prerau) 라틴어 학교에 들어가 정식으로 중등교육을 받았다. 2년 후에 독일 낫사우(Nassau)에 있는 헤르본(Herborn) 대학에 들어가 공부했다. 1618년부터 코메니우스는 풀네크(Fulllneck)에서 연합 형제단을 목양하였다. 1620년에 스페인군이 풀네크에 진군하여 대대적으로 파괴하므로 제로틴의 찰스(Charles of Jerotin) 성으로 피난하여 그 지방의 형제들의 인도자가 되었다. 그는 오래된 그 성에서 <세상의 미로와 마음의 낙원(The Labyrinth of the World and the Paradise of the Heart)>이라는 책을 썼다. 그 책의 성격은 <천로역정>과 비슷한데, 사람이 세상에서 평강을 찾을 수 없고 오직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만이 사람들의 진정한 평강이라는 것을 우화의 방식으로 묘사했다.

후에 코메니우스는 박해를 받자 다시 피신하였는데, 그는 마지막으로 남은 한 무리의 모라비안 성도들을 이끌고 갔다. 그 노정에서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그의 아내와 아들이 잇달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담대하게 성도들을 격려하였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들을 위해 감추어진 씨앗을 남길 것이라고 믿었다. 최종적으로 그들은 폴란드의 리사(Lissa)에 정착하였다. 코메니우스는 그 지방에서 교직을 맡게 되었다. 그는 또한 영국과 스웨덴에도 가게 되었다. 1650년에 코메니우스가 쓴 <위험에 처한 어머니의 간증(The testament of the Dying Mother)>이라는 책에서 믿는 이들을 잉태한 어머니인 교회가 술 취한 딸들의 피를 빨아먹는 마귀가 되었기 때문에 모든 자매들, 곧 복음주의의 교회가 마땅히 회개하고 하나님을 모독한 바빌론에서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성실히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진리 안에서 서로 연합하고 하나 되며, 무지한 사람들의 열심에서 나와 성경의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진리의 터 위에 돌아가 교통을 통해 하나님의 긍휼과 예수님의 보배로움과 성령의 은사를 얻어야 한다고 부르짖었다.

1660년 폴란드에서 천주교의 박해를 받자 그곳에서 그는 <애통의 소리(Voice of Mourning)>와 <한 가지 부족한 것(One Thing Needful)>을 저술하였다. 1670년에 그는 암스테르담에서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에 그는 이미 전 유럽에 알려졌고 교육계에 위대한 선구자 중의 한 사람으로 공인되었다.


5. 네덜란드 지역의 종교 개혁 운동의 발전

 

1). 종교 개혁 운동의 간단한 역사

16세기의 네덜란드는 스페인 통치 하에 17개의 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 범위는 오늘날의 벨기에, 네덜란드 땅에 걸치며, 도합 350개의 도시를 포함한다. 농업과 공업과 상업이 발달한 네덜란드는 점차적으로 인재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고 인문주의의 창시자 에라스무스가 바로 이곳에서 출생하였다. 인쇄술의 발달로 각종 성경 번역본과 이에 관련된 서적들이 대량 출판되고 발행되었다. 그러므로 루터파, 왈도파, 신비주의, 인문주의, 칼뱅파 등 새로운 종파들이 다 이곳에서 발전되었다. 출신이 같기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파의 수도사들은 일찍부터 루터파의 교의를 받아들였고 선교 기관을 조직하여 독일 국적을 가진 모든 상인들이 네덜란드 각 성에서 종교 개혁 사상을 확산하는 중심이 되게 하였다. 후에 천주교의 압박으로 인해 칼뱅 파는 무력으로 대항할 것을 주장하여 대세를 잡게 되었다. 1555년에 이르러 카를 5세가 물러나고 스페인과 폴란드와 네덜란드와 이탈리아 경내에 있는 스페인의 통치권이 그의 아들 펠리페 2세에게 넘어가자 네덜란드의 대부분 사람들이 칼뱅 파이고 그다음이 재침례파이며 루터파는 오히려 적은 무리의 단계가 되었다. 펠리페 2세는 네덜란드와 스페인으로 하여금 정치와 종교에 있어서 일치되게 하였고 추기경의 추밀원(Privy Council)이 실권을 장악하게 하였으며, 스페인의 종교 재판소가 이곳에서 이단을 소멸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했으며 군대를 파견하여 반항자들을 진압하게 하였다. 1567년부터 6년 동안 1만 8천 명이 처형되어 전국이 공포의 분위기로 가득했다. 또한 대대적으로 재산을 몰수하고 모든 업종에 10%의 세금을 부과하여 심각한 경제난을 초래했다. 이것은 귀족들과 중산계급의 불만을 쌓이게 하여 반대 운동을 야기했다. 1572년에 알바공의 잔악한 통치에 대항하여 오렌지 공 윌리엄(William of Orange)은 군중들을 이끌고 브릴(Brill)을 다시 빼앗다. 그러자 네덜란드의 주요 도시인 셸란(Zealand)과 프리슬 란드(Friesland), 위트레흐트(Utrecht) 지방들은 이에 반기를 들고일어났다. 장기전을 거치면서 북부의 7개 주로 구성된 네덜란드 연방(United Provinces)이 1581년에 성립되었다. 윌리엄은 1573년 칼뱅파 신앙을 받아들였다. 1584년 윌리엄이 피살되자 올덴 바르네 벨트(jan van oldenbarnevelt)가 군중들을 인도하고 칼뱅파의 신앙을 받아들일 것을 선포하였다. 네덜란드의 승전은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의 군사적인 지원을 받은 것이었다. 게다가 장기적인 정치적 원한 관계가 가증되자 펠리페 2세는 무적함대로 영국을 공격한 후 다시 네덜란드를 평정하려고 하였다. 스페인 무적함대가 칼레(Calais)에 도착하자, 플리머스에서 출발한 영국의 해군이 강력한 공격을 가함으로 스페인은 패전하고 말았다. 그러나 스페인과 네덜란드 간의 전쟁은 지속되었고, 1609년에 네덜란드 연방은 사실상 독립을 달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스페인이 네덜란드에 공식적으로 독립적인 지위를 인정한 것은 30년 전쟁이 끝난 때인 1648년에 이르러서였다. 혁명 기간에 무력으로 자기 나라를 지킬 것을 주장한 칼뱅파 교회가 점차적으로 네덜란드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얻게 되었다. 그들은 장로 제도, 하이델베르크 교의 문답(Heidelberg Catechism), 1562년에 결의했던 벨기에 신조(The Belgic Confession)을 채택하였다. 1571년에 전국 의원회의가 네덜란드 국경 밖의 엠덴(Emden)에서 거행되었다. 원래 네덜란드는 통상과 무역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고 또한 독립 과정에서 이웃 나라들의 원조를 받았기 때문에 네덜란드 개신교는 각종 다른 신앙에 대해 매우 너그러웠다. 심지어 천주교 신자들이 자유롭게 거주하며 생활할 수 있고, 재침례파 믿는 이들이 공개적으로 집회를 가질 수 있는 등 그곳이 종교의 박해를 받는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게 했다. 하나님께서 그곳을 축복하셔서 17세기 초에는 해상 강국이 되었고, 심지어 한때 대만과 인도네시아를 점령하기까지 했다.

 

2). 메노파(Mennonites)의 간단한 역사

메노 시몬(Menno Simons, 1492-1599)은 본래 천주교 신자였다. 그 자신의 증언에 따르면, 24세에 천주교 신부가 되어 네덜란드 북쪽의 한 농촌에 있었는데, 그때까지 성경을 접해 본 적이 없었고 떡과 잔에 대한 인식도 없었다고 한다. 성경을 연구한 후부터 그는 천주교의 많은 전통적인 관습들이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하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는 1530년에 로마 천주교를 떠나 자유주의 복음파의 전도자가 되었다. 후에 메노 시몬은 재침례파가 박해를 받는 것에 대해 듣고서 재침례 받는 것을 이상하게 느꼈다. 그래서 그는 성경을 주의 깊게 읽어보고 성경에는 전혀 유아 세례에 대해 언급한 것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1536년에 메노 시몬은 재침례파 믿는 이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성결한 생활을 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들 재침례파 믿는 이들은 뮌스터의 폭력 사태를 위험한 일로 여기고 우려를 표했다. 이들은 종교 분쟁에 염증을 느끼고 단순하게 복음을 전파하며 십자가를 짊어지는 삶을 살고자 했다. 메노 시몬은 이러한 모습에 대해 감동을 받고 매료되었다. 그들의 요청 하에 메노 시몬은 다시 침례를 받고 그들과 합류하여 양 무리를 목양하는 책임을 맡게 되었다. 1537년부터 메노 시몬은 사방을 다니며 각지에 흩어진 믿는 이들을 심방하고 그들을 강화함으로써 그들을 다시 모이게 하고, 교회를 세우며 25년 동안 수고했다. 메노 시몬은 스스로 이렇게 설명했다. "제 몸과 영혼을 모두 주님의 손에 맡깁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따라 침례를 주고 저의 작은 은사를 다하여 주를 위해 일하며 그분의 거룩한 성과 성전을 건축하여 떨어져 나간 돌들을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놓기 원합니다."  메노 시몬은 폭력으로 박해를 대항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는 믿는 이들이 마땅히 혹독한 시련과 고난 속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본성을 나타내야 한다고 여겼다. 이것은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신학자들과 사람들의 피를 흘렸던 폭군들을 부끄럽게 하고 설자리가 없게 하였다. 1543년에 메노 시몬은 사람들에게 불법을 행하는 자로 무고당하여 네덜란드 각지로 유랑하게 되었다. 몇 년 후에 덴마크의 알레 펠트 백작(Count Alefeld)의 보호를 받아 홀슈타인(Holstein) 령 프레젠부르크(Fresenburg)에 거주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재침례파의 신앙을 보호하는 문서를 출판하였다. 이러한 출판물을 통하여 당시 위정자들은 재침례파의 신앙에 대해 어느 정도 바로 알게 되었다. 이로써 그들에 대한 박해가 누 그려졌고 믿는 이들은 집회의 자유를 어느 정도 얻게 되었다. 1559년 메노 시몬은 프레젠부르크에서 평안히 잠들었다.

3). 칼뱅파와 아르미니우스파의 신학적 분쟁

17세기 중엽 네덜란드 독립운동이 종결되자 신학적 분쟁이 즉시 개신교 교회 듣 가운데 전개되었다. 중요한 쟁점은 신학자들의 선택과 구원의 진리에 대한 견해가 다른데 있었다. 칼뱅을 주동으로 한 학파는 무조건적인 선택과 제한적인 구속을 이룬 그리스도(그리스도께서 선택받은 사람만을 위해 죽었음)를 주장하였다. 또 한 무리는 라이덴(Leiden) 대학의 신학 교수인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Jacobus Arminius, 1560~1609)를 주동으로 한 학파로서 칼뱅의 관점을 반대하였다. 그들은 또한 "항변파(Remonstrants)"라고 불리기도 했다. 아르미니우스는 1576년부터 1582년까지 라이덴 대학에서 공부한 후, 제네바에 가서 신학을 더 깊이 연구하였다. 그는 1588년에 암스테르담에서 목사직을 맡았고 후에 라이덴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쳤다. 신학 교수로 있을 때 아르미니우스는 하나님의 뜻과 선택의 방면에 관한 많은 신학적 질문에 관해 답변해야 했다. 그러므로 그는 칼뱅 신학에서의 무조건적인 선택과 구원에 대한 사람의 책임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이러한 쟁론은 라이덴 대학에서 이루어졌고 뒤이어 네덜란드 개신교 전체로 확산되었다. 칼뱅 파는 인간이 타락하여 죄의 억압 아래 있으므로 구원에 있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여겼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타락하기 전에 이미 어떤 사람들을 선택받도록 예정하셨고, 사람이 타락한 후에는 구원의 은혜를 그 선택받은 사람들에게만 주신다고 하였다. 그러나 아르미니우스는 인간이 아담의 범죄로 연약하게 되었지만, 영적인 일을 선택하는 것에 있어서 자유 의지를 가진 것으로 여겼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사람이 타락하기 전에 선택받은 사람들을 예정하지 않으셨고, 사람의 타락은 자유 의지의 결과이고, 타락한 후에야 하나님께서 선택하러 오셨다고 그는 주장했다. 아르미니우스가 죽은 후에 요하네스(Johannes)가 그의 관점을 발전시켰다. 1610년 정부 관원의 지지 아래 그는 "항변 선언" 을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 예수의 구원을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있다.

(2)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

(3) 성령께서는 모든 사람이 참된 선을 행하도록 도우신다.

(4)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을 거절할 수 있다.

(5) 그리스도인은 구원을 잃을 수 있다.

두 학파의 쟁론은 정계로까지 번졌고 주지사는 항변파를 지지하게 되었다. 아르미니우스의 정적인 칼뱅 파는 국가회의를 소집하여 정점을 해결하자고 주장하였으나 주지사는 각 주별로 종교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1618년에 쿠데타가 일어나자 주지사는 체포되었고 그다음 해에 처형되었다. 칼뱅 파는 도르트 종교회의(The Synod of Dort:1618~1619)를 소집하였는데, 그것은 개신교 역사 이래 가장 큰 회의였다. 네덜란드, 독일, 스위스, 등지에서 온 개신교 대표들이 모두 출석하였다. 그 회의에서 아르미니우스의 결의를 일제히 거절하는 안을 통과시켰고, 벨기에 신조와 하이델베르크 교의 문답을 승인하여 네덜란드 개혁파의 공동 교의로 삼았다. 아르미니우스는 감리교 주의(Methodism)의 선구자가 되었다.
 
 

6. 영국의 종교 개혁 운동     

1). 종교 개혁의 서막

일찍이 종교 개혁이 일어나기 100년 전(14세기)에 옥스퍼드 대학 출신 신학자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제3장 참고)는 천주교에 대해 각종 비판을 한 바 있다. 위클리프의 종교 개혁 운동은 루터보다 100년 앞섰지만 개혁의 중점은 루터와 뜻하지 않게 일치하였다. 논문에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참된 신앙의 진정한 원천'이라는 것과 '오직 성경만이 진리'라는 점을 분명하게 밝혔다. 그는 모든 권위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고 권세 잡은 이들은 반드시 권위를 사용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 앞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관점은 교황의 절대 권위를 부인하고 성직자의 중보의 위치를 부정해 버렸다. 위클리프는 또한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여 모든 일반인들이 읽을 수 있게 하였다. 이것은 당시에 큰 영향을 주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을 신앙과 행동의 원칙으로 삼도록 직접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들은 성경의 권위를 받아들이고 교회의 타락과 우상숭배를 통분히 여겼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당시 영국인 가운데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위클리프 파 신자들이었다고 한다. 위클리프의 개혁은 자연히 로마 천주교의 불만을 낳았는데, 다행히 영국 귀족의 보호로 살아 있는 동안 위클리프는 어떤 심판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사후에 몇몇 종교 회의에서 교황청은 이단이라는 죄명으로 그의 시신을 무덤에서 파내어 불태우고 그의 저서를 불살랐을 뿐 아니라, 그의 추종자들로 구성된 복음 단체인 롤러드파를 박해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해 이 학파는 영국에서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일반인들의 사랑을 더 많이 받게 되었고 반(反) 성직 계급 사상이 일반인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되었다. 게다가 당시 인문주의와 민족주의 그리고 대량으로 유입된 루터의 저작들이 영국 종교 개혁의 주된 원동력이 되었다.

 

 

2). 종교 개혁 과정

영국은 일찍부터 로마 교황청에 대해 진절머리를 냈다. 1215년 영국이 대헌장(Magna Carta)을 제정할 때부터 교황청의 권위 하에 있는 귀족의 기본 자유를 보장해 주었다. 후에 교황이 아비뇽(Avignon)에 있을 시기에 의회가 법을 통과시켜 교황청에 소송하는 것을 금지하도록 하였다. 또한 국왕만이 국내 종교적인 안건을 처리하는 최고 권위라고 선포하였다. 그러나 16세기부터 17세기까지 영국의 종교 개혁의 실제 도화선은 영국 국왕 헨리 8세의 혼인 분제였다. 헨리 8세의 아내 케서린(Catherine)은 스페인의 공주로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겸 스페인 국왕 카를 5세의 고모였다. 케서린은 결혼한 지 십여 년이 넘도록 아들을 낳지 못 했다. 헨리는 왕위를 계승할 왕자가 없으면 영국에 내전이 일어날 것이라는 핑계로 교황에게 왕비와 이혼하고 다른 아내를 취하는 것을 허가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교황은 카를 5세를 두려워하여 헨리 8세의 요구에 즉각적인 답을 피하고 시간을 끌었다. 헨리는 궁녀인 앤 불린(Anne Boleyn)과 열애에 빠져 이혼 문제를 빨리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때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라는 케임 부리지 대학교수가 이 문제에 대해 각 대학의 신학자들에게 의견을 구해 볼 것을 건의하였다. 헨리는 한 면으로 학자들의 지지를 구하고, 한 면으로 성직자들을 압박하여 국왕이 영국 교회의 수장이 되게 하고 교황에게 세금을 납부하는 것을 중단하였으며 교황에게 소송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을 승인하게 하였다. 일반인의 지지를 얻기 위해 1529년 부활절에 개혁파의 서적이 유포되는 것을 허락하고 1532년에 열성적인 개혁파 믿는 이인 토머스 크롬웰(Thomas Cromwell)을 우두머리로 세웠다. 1533년에 헨리는 앤 불린을 왕비로 취하고, 크랜머를 대주교로 세워 그의 혼인을 승인케 하였다. 그다음 해 교황은 헨리 8세의 교적을 파면하고 영국 의회는 "수장령(首長令, The Act of Supremacy)"을 통과시켜 영국 국왕이 교회의 유일한 머리이며 "반란 법(Act of High Treason)" 을 통과시켜서 영국 왕을 이단자라고 칭하거나 헌법에서 헌법에서 국왕에게 부여한 권한을 부인하는 사람은 누구나 반란죄의 명목으로 사형에 처한다고 선포하였다. 곧이어 헨리는 영국 교회의 기도 책에서 교황의 이름을 삭제할 것을 공포하였다. 이로부터 영국은 로마와 완전히 분리되었다. 1535년에 헨리는 왕국의 권위를 부정하는 유명인사들을 처형하였다. 그중에는 케임 부리지 대학 전(前) 학장이 자 추기경인 존 피셔(John Fisher)와 과거 헨리의 친한 친구이자 <유토피아>의 저자인 토마스 모어(Thomas More)가 포함된다. 그는 또한 각지 수도원의 토지와 재산을 몰수하고 학교를 세우고 새로운 교구를 형성하는 데 이를 부분적으로 사용했다. 결국 378곳의 수도원이 해체되고 645곳의 수도원은 이로 인해 파산하여 영국에서 수도 주의가 완전히 근절되고 청교도주의로 그 지위가 대치되는 결과에 이르렀다. 헨리의 복잡한 혼인 관계에서 헨리를 지지했던 대주교 크렌 머는 루터파의 관점에 기울어지게 되었다. 그는 위크 리프의 사상을 받아들여 국가가 종교 개혁의 책임을 감당하고 성경을 제창하는 주된 책임을 감당하게 되기를 원했다. 1536년에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에 근거하여 "10개 신조(Ten Articles)"를 작성하였는데, 그것은 개신교에 대한 최대의 양보였다. 거기에서는 성경과 사도신경, 니케아 신경, 아타나시우스 신경, 이 세 가지 신경을 신앙의 원칙으로 삼았고 세례와 장례식과 성찬식을 필수적인 성례로 남겨 두었다. 그런데 헨리는 성찬의 변질성, 죽은 자의 미사, 우상 숭배 등의 전통을 여전히 고수하였다. 개혁파의 문답집인 <그리스도인의 수양(The Institution of a Christianman)>이 편저되었고 각종 성경 번역본도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535년에 윌리엄 틴들(William Tyndale)의 번역본을 골격으로 한 마일스 커버데일(Miles Coverdale) 틴들 영어 성경이 간행되어 크랜머와 크롬웰의 허락 하에 모든 예배당이(틴들의 번역본을 골격으로 한) 영어 성경을 한 권씩 비치하여 모든 사람들이 읽을 수 있게 하였고 영어로 주기도문과 십계명을 가르쳤다. 그렇지만 성례의 예식은 여전히 라틴어를 주된 언어로 사용하였다. 1539년에 크랜머가 서언을 쓴 <대성 경(The Great Bible)>이 간행되었다. 헨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경을 살 것을 명하였고 모든 성직자들도 사람들에게 성경을 부지런히 읽도록 권해야 한다고 명했다. 헨리는 천주교와 결별하였지만 신앙에 있어서는 여전히 교의(敎義)와 예식을 정통으로 삼았다. 헨리가 원했던 것은 성질에 있어서는 국가에 속하고 엄격히 국왕의 통제를 받는 개혁적인 로마 천주교였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 헨리는 독일 지역에 있는 루터파 제후들의 협력을 구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루터교의 교의에 근거를 두지 않은 어떤 맹약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헨리는 크게 노하여 프랑스와 스페인과의 협정을 바꾸어 1539년에 "6개 조항(Six Articles)"을 강제로 통과시켰다. 그 조항들은 어느 누구도 영국 내에서 루터파의 교의를 전수하는 것을 루터파를 포함한 모든 개혁파 믿는 이들을 공격하였으며 천주교의 교의를 다시 새롭게 제창하여 공재설에 대해 이의를 가진 사람들을 다 처형할 것을 언급하였다. 1540년 헨리는 천주교 신자인 캐서린 하워드(Catherine Howard)를 아내로 취하고 개혁파를 거절한다는 뜻으로 카를 5세와 군사 동맹을 매었다. 1543년 그는 또 중혼하는 동시에 틴들의 번역본을 포함한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 번역본을 한 권도 남기지 말고 모두 불태워 없애라는 명령을 내리고, 그 명령을 지키지 않은 사람은 모두 엄벌에 처하였다. 정부 관원들과 귀족들만이 가족들과 성경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고 상인들도 혼자 성경을 읽을 수 있었다. 이외의 사람들은 다른 책들은 읽을 수 있었지만, 공개적으로나 사적으로 성경은 읽을 수 없었다. 이처럼 천주교를 반대하는 것에 대한 헨리의 잔혹함은 그로 "영국의 네로"라는 칭호를 얻게까지 하였다. 1547년에 헨리가 죽자 그의 세 번째 아내가 낳은 아들인 에드워드 6세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가 왕위에 오를 때의 나이가 아홉 살이었으므로 그의 고모부인 에드워드 시모어(Edward Seymour)가 섭정하였다. 이때 와서야 비로소 총명한 크린 머가 대외 정책에 있어서 개신교의 방식을 대대적으로 채택하였다. 이것이 결국 영국 종교 개혁 운동과 문화에 있어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게 되었다. 에드워드는 어려서부터 개혁주의자들에게서 훈련받았고 시모어도 소작농들에 대해 매우 우호적이었고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였기 때문에 개신교의 세력이 크게 확장되었다. 1547년에 의회는 과거에 제정한 6개 조항을 폐지하고 사상과 출판의 자유를 어느 정도 허용하였다. 크랜머의 환경하에 유럽에 있는 개혁주의에 관련된 저서들이 잇달아 영국에 들어왔다. 이것이 개신교의 일을 강화하였고 많은 우수한 성직자들을 배출시켰다. 1549년에 의회가 "통일령(Act of Uniformity)"을 실시하여 각지에 있는 교회가 크랜머가 편집한 공동 기도문을 사용하도록 명하였고, 주교와 장로와 집사의 계급을 보류하였으며 형식의 간소화를 실행하며 영어로 예배를 보고 성경과 성경 읽는 것을 예배의 기본으로 삼았다. 1553년에 크랜머는 여섯 명의 신학자들과 함께 "42개 조항의 신조(Forty-Two Articles Religion)"를 완성하였는데, 후에 39개 조항으로 고쳐서 영국 교회의 규범을 제공하였다. 1553년 에드워드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누나 메리(헨리의 첫 번째 아내 캐서린의 딸)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메리는 에드워드 재위 기간에 있었던 모든 종교 법령을 폐지하고 영국을 다시 천주교로 돌이키고자 하였다. 1554년에 의회의 각료들을 무릎 꿇게 하였고 로마 천주교가 이교(異敎)라는 죄명을 벗기고 영국이 다시 천주교로 돌아오게 했다. 또한 그의 삼촌 카를 5세의 안배로 카를의 아들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와 결혼하게 되었다. 이것은 영국 국민들로 하여금 불안감을 느끼게 하였고 외국 세력의 개입을 두려워하게 하였다. 메리는 각지의 폭동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천주교로 돌아가게 하는 데 온 힘을 쏟았고 크랜머 등 300여 명의 개신교 지도자들을 처형하였다. 이러한 박해로 많은 사람들이 스코틀랜드와 유럽 대륙으로 피난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메리는 "피의 메리"라는 악명을 얻게 되었다. 당시의 순교자들이 나타낸 용기는 영국 국민들에게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겼고 애국주의와 개신교는 그들 마음속에 동의어가 되었다. 1558년에 아들이 없는 메리는 병으로 죽고 그의 동생(헨리의 두 번째 아내 앤 불린의 딸) 엘리자베스가 왕위에 올랐다. 엘리자베스는 온건한 정책을 채택하여 모든 국민의 지지를 얻었다. 1559년에 의회가 "수장령(The Acts of Supremacy)" 을 통과시켜 교황의 권위를 폐지하고 영국 왕을 교회의 최고 통치자(Supreme Governor)로 세웠다. 그러나 많은 신부들이 이것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했다. 동시에 주교들이 국왕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자 거의 모든 주교들을 폐하였다. 천주교의 강력한 반발은 엘리자베스로 하여금 더욱 개신교로 돌이키게 하였다. 그녀는 "35개 조항의 신경"을 다시 제정하여 영국 의회의 신앙의 선언문이 되게 하였고 1571년에 의회의 동의를 얻었다. 1563년에 의회는 "심사령(The Test Act)" 을 통과시켜 모든 정부 관료들에게 여왕에게 충성할 것을 맹세하게 하고 천주교 신자들이 하원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동시에 존 폭스(John Foxe)의 <순교 열전(Books of Martyrs)>이 세상에 알려지자 국민들은 천주교에 대한 반감을 더욱 갖게 되었다. 당시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었던 메리는 천주교 신자였고 엘리자베스의 조카였으며, 그의 남편은 프랑스 국왕이었다. 1559년에 칼뱅파가 된 존 녹스(John Knox)는 제네바에서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종교 개혁을 일으켰는데, 그때 프랑스가 군대를 동원하여 진압하려고 했다. 다음 해에 엘리자베스는 칼뱅파와 맹약을 맺고 프랑스의 세력이 들어오는 것을 저지하였다. 1567년에 칼뱅파 장로회가 득세하자 메리는 그 세력에 밀려 퇴위하고 런던으로 도망하였다. 그 후 20년 동안 메리는 프랑스와 스페인이 영국을 반대하는 구실로 삼았던 중심인물이 되었다. 1569년의 엘리자베스의 개혁이 북부에서의 천주교 신자들의 폭동을 일으키자 로마에서도 예수회 수사들을 비밀리에 영국에 침입시켜 음모를 꾸미고 무력으로 정권을 전복하여 그녀의 조카인 메리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려고 하였다. 1587년 메리는 이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을 받았다.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 해군의 맹공격을 받아 패배하자 영국 종교 개혁은 큰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고 영국 교회는 "성공회"라고 불리게 되었다. 
 
 

3) 청교도주의의 일어남과 발전

영국의 종교 개혁이 교회의 개혁을 제창함에 따라 잔재하는 천주교의 독소를 제거하는 개혁주의자들이 많이 일어났는데, 그들이 소위 청교도들이다. 메리 여왕이 통치하던 기간에 많은 청교도들이 세력에 밀려 외국으로 유리하게 되었다. 엘리자베스가 왕위에 오르자 그들은 분분히 강렬한 칼뱅주의 사상을 가지고 귀국하여 교회를 개혁하기를 바랐다. 당시 엘리자베스가 온건 정책을 시행하여 천주교의 형식과 개혁주의의 신학을 혼합하였기 때문에 개혁주의자들의 불만의 소리가 날로 높아졌다. 대부분의 청교도들은 국교회에 남아 있으면서 점진적으로 개혁하는 방식을 주장하였다. 비교적 급진적인 한 파는 정교의 분리를 요구하였는데, 그들은 "비 순응 주의자들(Non-Conformists)"이라고 불렸다.

국교회에 남아서 개혁에 힘쓰는 청교도들과 영국 성공회 사이의 가장 큰 쟁점은 성례 의식과 성직자 의복에 관한 문제였다. 1563년에 엘리자베스가 성공회 성직자는 평일에 특별히 지정된 복장을 입어야 한다고 내린 명령은 청교도들의 반대를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믿는 이들이 모두 제사장이므로 복장으로 구분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또한 믿는 이들이 무릎을 꿇고 성찬을 받는 것과 세례를 받을 때 성호를 긋는 행동을 반대했다. 비록 교회의 총회에서 한 표차로 패배하였지만 그들은 거대한 세력을 이루게 되었다. 1572년에 케임 부리지 대학교수인 토머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는 한걸음 더 나아가 청교도들의 회의에서 믿는 이들의 평등에 대한 논점을 제시하였고 주교 제도를 포기하고 믿는 이들이 장로를 추천하고 세우는 것을 요구하였다. 의심할 것 없이 이것은 성공회의 주교에 대한 큰 도전이었으므로 그는 교수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러나 카트라이트는 한 무리의 청교도들과 여러 강습회와 종교회의를 조직하여 영국 장로교를 창시하였다.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주장했던 또한 무리의 청교도들은 '회중 주의(Congregationalism)'를 창시하였다. 1580년에 케임 부리지를 졸업한 로버트 브라운(Robert Browne)은 노리치(Norwich)에서 첫 번째 독립 회중 교회를 세웠다. 그는 교회가 참된 믿는 이들로 구성되고 믿는 이들이 자체적으로 교회를 치리할 것을 주장하였고 지방이나 지역에 있는 교회만이 교회 행정의 진정한 단위이며 신약에 따라 믿는 이들이 스스로 표준을 제정할 권한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청교도들에 대해 엘리자베스는 1577년에 강경파에 속한 사람들이 대주교를 맡도록 위임하였고 천주교로 하여금 청교도들을 진압하게 하였다. 1593년에 의회는 믿는 이들이 자체적으로 모일 수 없다는 법령을 통과시켰고 발각되면 즉시 강제로 추방하였다. 라이트와 브라운을 포함한 유랑했던 청교도들은 모두 유럽의 네덜란드에 거점을 갖고 그곳에서 신속히 발전하게 되었다. 그 후에 신대륙으로 가기 위해 메이플라워호를 탔던 승객들은 대부분 이때 박해를 받았던 사람들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은 후 조카 메리의 아들인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1세가 즉위하여 영국 국왕을 겸임하게 되었다. 그때 청교도들은 연명하여 상소를 올려 성공회의 예식 조항을 고치기를 바랐다. 제임스는 청교도들과 회의를 통해 토론할 것을 승낙하고 1604년에 햄프턴(Hampton) 궁에서 종교회의를 개최하였다. 유일한 결론은 바로 새로운 성경을 번역하는 것이었다. 54명의 학자들이 참여하고 5년에 걸쳐 완성된 이 성경이 바로 훗날 가장 광범위하게 알려진 영국 "흠정역 성경(King James Version)"이다.

제임스는 왕권 신수설을 주장했기 때문에 성공회의 조항을 고칠 마음이 없었고 모든 교회가 주일 예배 후에 스포츠, 게임, 춤 등을 즐길 것을 명했다. 경건한 생활을 추구했던 청교도들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그 땅을 떠났다. 1607년에 한 무리의 청교도들이 존 로빈슨(John Robinson)과 존 스미스(John Smyth)의 인도 하에 종교의 자유를 추구하기 위해 신대륙으로 건너갔다.

스미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먼저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 도착하여 그곳에 머물렀다. 그들은 메노파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스미스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침례를 받는 메노파의 주장에 동의하여 그곳에서 침례교를 세웠고 또한 메노파와 연합할 것을 계획하였다. 1612년에 반대자들이 영국으로 돌아와서 런던에서 침례교를 세웠다. 그러나 그 입장이 아르 미니 안파에 가까웠기 때문에 일반 침례교라 불리었다. 그리고 칼뱅의 주장을 찬성했던 일부 믿는 이들은 분리되어 나가 칼뱅파 침례교를 세웠다.

로빈슨과 그의 추종자들은 라이덴에 정착해 독립교회를 세웠다. 이 양쪽에 있는 믿는 이들은 후에 신대륙으로 가야 한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로빈슨의 축복의 송별로 스피드웰(Speedwell, 식물의 한 종류임) 호는 네덜란드를 출발하게 되었고 메이플라워호는 영국에서 한 무리를 태우고 그들과 합류하였는데, 스피드웰 호가 파선하여 배에 물이 들어오자 그들은 프리머스에 닻을 내렸다. 그 후에 메이 플라워호가 다시 출항하였지만 폭풍이 너무 심해 사람들은 모두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그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앞으로 나아갈 것을 굳건히 결심하여 결국 9주 후에 신대륙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들 대부분이 칼뱅파에 열심히 있는 믿는 이들이었기 때문에 미주에 도착한 후에 그들은 민주적인 방식으로 교회를 관리했다. 이것은 훗날 미국의 민주 정치 체제의 기초를 세웠고 새로 일어난 강대국의 흥왕과 번영의 기초를 닦았다.

 

4) 청교도 혁명-정교의 분리, 신앙의 자유

찰스 1세가 제임스 1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고 나서 독재와 학정은 더욱 심해졌다. 찰스 1세는 왕권신수설을 굳게 믿었고 외적인 형식을 중요시했으며 또한 그가 아르 미니 안파로서 영국과 스코틀랜드 지역의 구교(성공회)를 따르지 않는 모든 믿는 이들을 있는 힘을 다해 압제하자 스코틀랜드 장로교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그와 의회와의 불화로 인해 내전이 발발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의회주의자들은 '원두당(圓頭黨, Rroundheads)'이라고 불렸고, 교황 주의자들은 '기사당(騎士黨, Cavaliers)'이라고 불렸다. 의회가 스코틀랜드에 원조를 요청하고 스코틀랜드의 요구에 응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estminster Confession)" 등을 제정하며 장로교 방식의 교회 행정을 채택하였다. 피의 전쟁이 있은 지 4년이 지난 후 찰스 1세는 1646년에 포로로 잡혔다.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은 원두당의 지도자로서 참전하지 않은 전투가 없었고 사람들은 그의 부대를 "철기대(Ironsides ) " 불렸다. 전쟁 후에 한때 그는 명망을 떨쳤다. 그는 국왕에 버금가는 최고 지휘자로서 의회를 통해 실권을 잡기 바랐고 웨스트민스터 회의에 근거하여 국가교회를 세우기를 주장했으며 또한 침례파와 독립파를 수용하였다. 크롬웰 자신과 그의 군대 장교 중에 독립파에 속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기 때 문에 칼뱅파와 충돌이 일어났다. 칼뱅 파는 의회를 장악하여 군대를 해산할 것을 제시한 후 양식을 쌓아두고 군인들에게 제공하지 않았으며 나머지 군사들은 아일랜드로 보냈다. 찰스 1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스코틀랜드 사람들과 비밀 협정을 체결하여 그 위기에서 벗어나려고 하였다. 크롬웰은 6개월 내에 반대자들을 한 사람씩 모두 공격하였다. 그는 국가 반역죄로 국왕을 처형하고 의회를 해산시키고 공화국(Common Wealth)을 세웠으며 스스로 '호국경(護國卿, Lord Protector)'으로 취임하였다.

크롬웰은 종교의 자유를 구실로 봉기하였지만, 대권을 잡은 후에는 교인들과 유대인들에게만 신앙의 자유를 보장해 주었다. 그가 베푼 은혜는 천주교와 성공회만 못 했다. 평등주의자들(Levellers)이 그에게 자유를 요구했을 때 그는 "그들에게 호흡할 자유는 있다."라고 대답했다. 한 군병이 평화주의자의 전단을 군모에 부착했을 때 그는 그것을 떼어 낼 것을 명하였고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은 그 자리에서 총살했다. 그의 "이곳에 한 귀족이 필요하고 또한 신사가 필요하다. 한 농부가 필요하며 하인이 필요하다. 이것이 일을 합당하게 처리하는 방법이다."라는 말에서 그에게 계급적인 의식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은혜를 잘 베풀 줄 모르는 잔혹한 성격의 소유자이고 그의 부하는 포로를 죽이는 적이 있었다. 그는 아일랜드에 진군하여 같은 신교를 믿는 아일랜드를 향해 선전포고를 하였고 또한 천주교를 신봉하는 프랑스와 함께 스페인을 향해 선전포고를 하였다.

크롬웰이 1658년에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이 뒤를 이어 2년 동안 통치하였다. 그때 찰스 1세의 장자는 외국으로 유랑하면서 국왕을 죽이는 일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이들은 추궁하지 않겠다고 선포하자 군대의 장군들은 찰스 1세의 장자가 영국으로 돌아와 복귀하는 것에 호응하였다. 찰스 2세가 왕위에 오르자 크롬웰의 시신을 무덤에서 파내어 군중 앞에서 6시간 동안 나무에 달아놓고 또한 머리를 잘라내었는데 후에 그것이 개인의 소유물이 되어 심지어 골동품으로 수차 거래되었다. 1960년에 옥스퍼드 대학의 시드니 서삭스 단과대학(Sidney Sussex College)에서 그것을 받아 예배당 옆에 안장하였다. 그것은 크롬웰이 1616년과 1617년까지 이 대학의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찰스 2세는 천주교 신자였지만 옹호자들의 반대로 인해 성공회를 조금밖에 개혁할 수 없었다. 그의 동생 제임스 2세는 왕위에 오르자 즉시 천주교 적힌 숭배를 회복하는 데 힘썼고 결국 이것이 1688년의 명예혁명을 불러일으켰다. 개신교를 신봉하는 그의 딸과 사위, 네덜란드 국왕 윌리엄이 왕위에 오르자 영국인의 과거의 자유인권을 보호하는 법안을 다시 통과시켰으며 "관용 법(Toleration Act)" 을 시행하여 이단에 속하지 않은 모든 개신교 파가 자유롭게 예배를 볼 수 있는 권한을 허락해 주었다. 이러므로 장로교, 독립파. 회중 주의. 침례교, 퀘이커회, 성공회 등의 단체들이 정식으로 조직을 만들어 훗날 해외 선교를 위한 견고한 기초를 닦게 되었다.

 

5). 생명 노선을 지켜 온 증인들

영국 역사에서 가장 환영받고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친 작가는 존 번연(John Bunyan)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칼뱅파 침례교 신자라는 이유로 붙잡혀 12년간 투옥되었다. 그 기간에 그는 <거룩한 성(Holy City)>, <넘치는 은혜(Grace Abounding)>, <천로역정(Pilgrim’ s Progress)>을 저술하였는데, 그것들은 영적 전쟁을 묘사하고 구속의 확고함을 회고하기 위한 것이다. 결국 그는 신앙을 위해 순교했다. 또 한 사람은 존 밀턴(John Milton)이다. 그는 시각장애자였지만 <실낙원(Paradise lost)>, <복낙원(Paradise regained)>을 저술하여 인류의 타락과 구속받음을 설명하였다.

<순교 열전>의 저자인 존 폭스는 퀘이커 회의 선구자로서 당대의 유명한 성경학자였다. 그는 외적으로 복잡한 형식과 호화로운 교회 건물에 대해 극력 반대하였다. 지나치게 물질적인 것을 중요시하는 믿는 이들의 생활은 영적인 것에 대한 필요성을 가린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사람을 만족케 할 수 있는데,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말했다. 그리고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참된 기쁨을 맛보아 한다고 말했다.

폭스는 복음의 전파를 위해 자신을 헌신하였고 직업적인 전도인 이 되는 것을 거절하였으며 어떤 성례(聖禮)도 찬성하지 않았고 오직 영적 실재만을 주의하였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그와 함께 모이게 되었다. 비록 당국의 박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붙잡히고 심지어 감옥에서 죽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유럽과 북미와 서인도제도 등지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였다. 윌리엄 펜(Sir. William Penn)이라는 한 귀족이 그들과 합류하였는데, 영국 국왕이 그의 아버지에게 빚을 졌기 때문에 북미에 있는 한 조각의 땅을 그에게 주었다. 그것이 오늘날 미국의 펜실바니아(Pennsylvania) 주이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그곳으로 이주하는 것을 도와주었고, 1624년에 필라델피아(Philadelphia, '형제 사랑'이라는 뜻임) 시가 세워졌다. 당시에 믿는 이들이 가정에서 자유롭게 모일 수 있다는 법령이 통과되어 이집 저집에서 모이는 것이 합법화되었고 믿는 이들의 무리는 더 확장되게 되었다.

이들 외에 아이작 왓츠(Issac Watts)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경건하고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었다.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는 주님에 대한 충성 때문에 투옥되었다. 어머니는 주님을 매우 사랑하는 청교도로서 순교자의 영을 가지고 있었고 자주 그를 데리고 남편을 면회하였다. 아이작 왓츠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고 총명했기 때문에 장차 성공회 목사가 되도록 명망 있는 사람들이 그에게 옥스퍼드 대학에 가서 공부할 것을 추천하였다. 그러나 사랑 안에서 성령의 부어짐으로 인해 그러한 권유를 거절하고 부모의 발자취를 따를 것을 굳게 결심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충성을 다해 주님의 길을 가기 원했다. 일생 동안 그는 육천 곡의 시를 작사하였는데 그 찬송들은 느낌이 섬세하고 사람들에게 커다란 감동을 준다. 그 유명한 찬송으로는 "십자가를 생각할 때", "내 사랑 나의 하나님" 이 있다. 이러한 찬송들은 지속적으로 전해져 많은 이들에게 큰 감동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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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과학] 땅을 공간에 다신 하나님

 


 
이웅상
 
「종교와 과학」이란 과목을 강의하고 나오는데 한 학생이 따라와 이렇게 물었다. '목사님, 교황이 성서의 오류를 시인하면서 갈릴레오를 복권조치 했다는 기사를 읽어보셨습니까?' 이에 나는 '아직 못 봤습니다. 복권조치 한 것은 잘한 일이지만 성서의 오류를 인정했다는 것은 이해가 가질 않는군요' 라고 대답하며 그 학생이 들고 있는 신문을 건네 받아 관련기사를 읽어보았다.

11월 3일자 동아일보의 '횡설수설' 난에 독일의 극작가 브레히트의 희곡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생애'를 간단히 소개하면서 지동설을 주장했다가 파문 당한 갈릴레오를 천주교에서 성서의 오류까지 시인하면서 진실을 옹호한 데에는 커다란 역사적 의의가 있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려 있었다. 또한 이에 대해 11월 7일자 기독신보에서는 갈릴레오뿐만 아니라, 1518년 이단으로 규정하고 1520년 파문시켰던 마틴 루터도 복권시켜야 할 것이 아닌가 논박하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그러나 따지자면 중세 암흑시대에 종교재판에 의해 희생된 유명 무명의 진정한 신앙인들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지금에 와서 이들에게 교황이 절을 하며 사죄하고 복권조치를 한다고 해서 감사하며 카톨릭에 복귀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일들이 그렇지 않아도 물질주의와 과학만능주의에 세뇌되어 성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현대인의 마음을 더욱 닫게 하며,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한다는 데 있다.

중세 로마 카톨릭의 타락과 갈릴레오가 주장한 지동설이 옳다는 것은 현대인이면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갈릴레오의 희생은 성서의 오류 때문이 아니다. 천동설은 이집트의 천문학자 프톨레미(Clandius Ptolemaeus)가 제안한 이론으로 16세기까지 정설로 받아들여져 왔다. 즉  이 당시까지만 해도 지구가 태양계의 고정된 중심으로 태양과 그 외의 혹성들이 지구 주위를 돌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 후 1543년 폴란드의 천문학자인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에 의해 최초로 지동설이 제안되었으나 천동설의 견해가 당시 로마 카톨릭의 지도자들에게 깊이 뿌리 박혀 있었기 때문에 심한 반대에 부딪혔다. 뒤를 이어 갈릴레오가 지동설을 지지하며 나오자 교황이 그를 파문시킨 것이지 성서가 천동설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 것이다.

성경의 어느 곳에도 천동설을 주장하고 지동설을 부인하는 구절이 없다. 오히려 성경은 과학자들이 16세기까지 믿어오던, 지구가 무엇엔가 고정되어 있다는 생각을 부정하고 있다. 욥기 26장 7절에 보면 욥은 지금으로부터 4천년 전에 '그는 북편 하늘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공간에 다시며' 라는 말씀으로 하나님을 찬양했다. 지구가 어떤 것에 고정되어 태양계의 중심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공간에 떠있는 것임을 정확히 묘사하고있는 말씀인 것이다. 뉴톤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기까지 어찌 인간의 지혜로 이 놀라운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뿐만 아니라 욥기 26장 10절에는 '수면에 경계(원)를 그으셨으되 빛과 어두움의 지경까지 한정을 세우셨느니라'고 기록함으로써 지구가 평평한 것이 아니라, 둥근 모양임을 기술하고 있다. 또한 잠언 8장 27절에도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원)으로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바다의 수평선이 원으로 되어 있다는 말씀은 지구가 둥근 모양으로 되어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성경은 지구의 모양뿐만 아니라 지구가 공중에 떠 있음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으나, 당시의 천동설로 인해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다.

당시 지구를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된 또 하나의 오류는 지구의 기둥에 대한 성경의 언급에 관한 것이다. 욥기 9장 6절은 '그가 땅을 움직여 그 자리에서 미신즉 그 기둥을 흔들리며' 라고 말씀하고 있고, 사무엘상 2장 8절에는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 위에 세우셨도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을 인용하며 일부학자들은 성경이 지구가 기둥이나 지주 위에 놓여 있다는 히브리인들의 전설을 근거로 해서 쓰여졌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성경 본문의 '기둥' 이란 말로 번역된 히브리어 '암무드(ammud)를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 단어는 '기둥' 이란 뜻으로 쓰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기초' 란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욥기 9장 6절은 '기둥'이 흔들린다는 표현이 아니라, 땅속의 '기초'가 흔들린다는 말씀인 것이다. 이렇게 이해될 때 이 말씀은 이미 언급한 욥기 26장 7절의 '허공에 지구가 떠 있으며', 욥기 38장 7절의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는 말씀과 조화를 이룰 수 있지 않겠는가.

오히려 '지구의 기둥'에 관한 말씀들은 지구의 중심부에 대한 놀라운 정보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들이다. 현대 과학자들은 지표면 속에는 맨틀이 있고 그 속에는 외핵과 내핵이 있지만 정확히 어떤 물질로 되어 있는지는 잘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다만 지구 자장으로 미루어보아 자장을 만드는 니켈과 철로 되어 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을 뿐이다.

예레미야 31장 37절에는 이에 대해 '위로 하늘을 측량할 수 있으며 아래로 땅의 기초를 탐지할 수 있다면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행한 일을 인하여 그들을 다 버리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고 말씀하고 있다. 결국 이 모든 모순들이 성서의 오류 때문이 아니라 과학의 영향을 받은 인간의 잘못된 해석 때문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결론적으로 과학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성경구절들을 대할 때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자.

첫째로, 과학의 모든 이론은 가정에서 출발한 것으로 끊임없이 변해왔으며, 또한 앞으로도 계속 변할 것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마태복음 5장 18절에 분명히 말씀하시길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말씀)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했다. 그런데 어찌 이처럼 자주 변해왔고 또 변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이론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할 수 있겠는가!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겸손히 과학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 기다리는 태도를 가져한다.

둘째로, 성경 자체를 바르게 해석하고 있는지 세심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올바른 성경관에 기초한 신앙서적 등을 참조하여 한 개인의 잘못된 경험과 편견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있는지 않는지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 때로는 지나간, 수정된 과학적 이론과 자료들에 의존함으로 인해 성경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경우도 흔히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의 가르침을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성경 해석의 최종 권위를 가지고 계신 분은 성령이시며 성도들의 교사되신 분 역시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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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교회사] 초기 종교 개혁 운동

 

 

 

 

1.​중세기 종교 개혁 운동의 선봉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

 1). 정치적 배경

14세기에 민족주의가 일어나자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 지역은 로마 교황청의 장기간 통제에 대해 불만이 높아갔고, 국왕과 교황청 간의 권력 다툼은 갈수록 증가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배경은 당시 천주교 내부의 부패 상황에 불만을 갖고 있던 개혁가들에게 좋은 정치적 보호를 제공하였다. 그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영국의 존 위클리프(Johon Wycliffe)이다. 위클리프는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한 뛰어난 개혁가로서 성경의 권위를 높인 인물이다. 그는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여 영어를 사용하는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수 있게 하였다.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의 아들 존은 위클리프의 좋은 친구이자 지지자였고, 위클리프도 국왕과 교황의 권력 다툼에서 영국 왕을 지지하였다. 위클리프는 교회가 재산을 모으는 것과 교황이 정사에 관여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는 참된 교회는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으며 하나님께 선택받고 부름받은 사람들로 구성된다고 여겼다. 또한 부름받은 믿는 이들은 모두 제사장이며 성경을 읽을 권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였고 복음과 진리를 영어권 세계에 널리 전파하였다. 위클리프가 전한 말은 교황청에 매우 불리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1377년 교황은 위클리프를 잡아오라는 명령을 다섯 번이나 내렸다. 그러나 왕자 존과 다른 귀족들의 보호로 위클리프는 안전을 보장받았다. 위클리프는 말년에 귀족과 평민이 손을 잡고 교회를 공격하는 농민 운동(1377-1381)이 일어났다. 교황청은 모든 파괴와 손실을 위클리프 파에게 돌렸다. 그러나 정치 세력의 보호로 인해 위클리프는 살아 있을 때 어떠한 박해도 받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 천주교는 교회를 새롭게 정비한다는 명분으로 위클리프에게 이단이라는 죄명을 씌우고 그의 시신을 파내어 불살랐으며 그의 추종자들을 대대적으로 박해하였다. 15세기 초에 위클리프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은 얀 후스(Jan Huss)라는 학자가 보헤미아(오늘날 체코의 서부지방)에서 또 다른 개혁의 움직임을 전개하였다. 1347년 카를 4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임되었고 프라하를 주교 관할 지역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중부 유럽의 첫 번째 대학인 카를 대학을 세워 유럽의 학술 사상이 발전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동시에 천주교 교황청의 부패와 보헤미아에서 독일어를 게르만족과 체코어를 사용하는 체코인의 충돌은 얀 후스가 보헤미아에서 전개하는 개혁을 주목하게 만들었다. 위크 리프처럼 후스는 성경을 평민이 사용하는 체코어로 번역하였을 뿐만 아니라 체코어로 말씀을 전하여 체코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교황청의 부패에 대한 후스의 비판은 천주교의 강한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 이로 인해 천주교는 영국의 위클리프 파를 진압한 뒤 즉시 보헤미아로 방향을 전환하여 후스파를 계속해서 진압하였다.

 

2). 영적인 방면의 개혁

위클리프와 후스의 '믿음'과 '성경'의 권위에 대한 확신은 마르틴 루터보다 백 년 빠른 것이었다. 그들은 성경을 유일한 권위로, 믿음을 구원의 조건으로 주장하였다. 이 두 관점은 그 뒤에 나온 "오직 성경으로" , "오직 믿음으로"라는 주장의 출발점이 되었는데, 이는 16세기 종교 개혁의 주된 내재적 본질이었으며 또한 주님의 회복 안에서 회복된 진리의 한 항목이다. 교회 간의 방면에서 위클리프는 교회는 결코 인위적인 조직이 아니라 선택받은 믿는 이들로 구성된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말했다. 후스는 천주교의 낡은 관습을 통렬하게 비판하였으나 교회의 진일보한 의미를 제시하지는 못 했다. 그는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지 결코 교황이 아니며 신약만이 교회의 법규라고 주장하였다. 후스의 다른 개혁은 평신도들도 미사에서 거룩한 잔을 취할 수 있도록 하였다. 천주교의 미사 규정에 따르면 오직 성직자 계급만이 거룩한 잔을 취할 수 있었다. 평신도는 다만 떡만 먹을 수 있었을 뿐 잔은 마실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우둔한 평신도들이 '그리스도의 피'를 흘러넘치게 할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평신도들에게 잔을 주는 '잔의 개혁'은 후스 운동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3. 후스 운동의 발전 및 영향

민족의식의 고양을 위한 현실적 필요로 인해 후스의 개혁은 보헤미아 국왕의 지지를 얻었다. 1409년에 교황 요한 23세는 체코에 사람을 보내 면죄부를 팔게 하였다. 후스는 대학의 변론회에서 담대하게 면죄부의 사기성을 폭로하였는데, 이것은 천주교의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 1411년에 교황청은 후스를 제명하였으나 그는 문서와 언론으로 교황과 교황청의 부패 행위를 계속 공격하였고, 심지어 교황을 주님을 팔았던 "유다"라고 책망하였다. 1414년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지기스문트(Sigismund)는 교회의 분열, 교황들의 분쟁, 이단 등의 무제를 처리하기 위해 특별히 로마 교황을 청하여 콘스탄츠 공의회(Council of Constance)를 열었다. 당시 다른 두 명의 교황은 자신의 안전을 고려하여 대표만 파견하였다. 후스는 독일 황제에게서 그의 안전을 보장하고 신변을 보호한다는 문서를 받은 뒤 회의 장소로 갔다. 후스는 군중들의 환호 가운데에 콘스탄츠에 도착했다. 그러나 회의에서 교황은 후스에게 발언 기회를 주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었으며 그가 자신을 변호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회의 소집인 인 요한 23세는 죄들이 너무 많아 이 회의에서 면직되었다. 1415년에 법정은 후스가 위클리프와 왈도 파의 이단이므로 반드시 화영에 처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형이 집행되기 전 후스는 자신의 신앙을 다시 한번 공표하며 마지막 연설을 하였다. 교황청은 후스의 시신이 사람들이 숭배하는 성물이 될 것을 두려워하여 후스의 뼛가루를 그를 화형 한 장소의 흙과 함께 라인강으로 뿌려 버렸다. 후스가 화형 당하였다는 소식이 프라하로 전해지자 체코인들의 감정이 격화되어 교황의 폭행과 황제의 실언을 원망하였고 국가 전체가 폭동으로 휩싸였다.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봉기한 체코인들은 두 파로 나뉘었다. 귀족들은 주로 프라하에서 프라하의 통치권을 탈취하여 네 가지 항목의 "프라하 신앙 고백"을 채택하였다. 이 신앙 고백에서 전도와 성만찬에 참여한 모든 사람이 떡과 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자유를 요구하였고, 또한 체코의 종교 독립을 요구하였다. 농민과 노동자를 위주로 한 다른 파는 남부의 타보르(Tabor)에서 봉기를 시작하였다. 1419년에 농민 운동이 폭발하여 귀족과 평민은 손을 잡고 군대를 일으켰으며 보헤미아 왕은 그 충격으로 죽었다. 봉기 군의 지도자 시즈카(John Zizka)는 "전차 보루"라는 전술을 사용하여 적군을 여러 차례 격퇴시켰다. 지즈 카가 죽은 뒤에도 봉기 군은 계속해서 싸워 독일 국경까지 공격하였다. 그렇지만 이러한 승전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봉기군 내부는 세 파로 분열되고 있었다. 한 파는 타협을 주장한 귀족들이었다. 그들은 시의 관리권을 얻는 목적이 이미 성취되었기 때문에 전쟁을 빨리 끝내고자 하였다. 1433년 독일의 봉건 제후들과 이들 귀족들은 프라하에서 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의 주 내용은 체코의 평신도들이 거룩한 잔을 취할 수 있으며 귀족도 이미 취득한 재산을 보유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또 다른 한 파는 계속해서 전쟁을 하자는 타 보르 파이다. 그들은 귀족의 배반과 많은 사상자로 인하여 일부분은 지하로 숨어 민족주의 저항 운동을 계속 진행하였다. 나머지 한 파는 무력 항쟁을 하지도 않고 천주교와도 타협하지 않았다. 그들은 왈도 파를 본받아 신앙과 간증을 위하여 기꺼이 고난받고자 하였다. 이들은 스스로 독립적인 집회를 시작하여 보헤미아의 형제단(Bohemian Brethren)이 되었다.

 


 2. 독일의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 운동  

​16세기 초, 유럽의 정치와 경제 및 학술 사상은 변화를 도모하고 있었고, 이러한 변화는 종교 개혁 운동을 배양하고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이 당시 성경의 권위가 갈수록 높아져 신약의 초기 교회 생활로 돌아가고자 하는 갈망을 더욱 자극하여 유럽 곳곳에서 종교 개혁 운동이 구름처럼 일어났다. 마르틴 루터는 그 당시 종교 사회의 황당무계한 미신을 타파하고, 성경의 순수한 신앙으로 돌아가도록 최선을 다하여 믿는 이들과 교회에 강한 충격과 영향력을 주었다.

 

1). 마르틴 루터의 생애에 대한 간략한 서술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독일 작센(Sachen)의 아이스레벤(Eisleben)에서 태어났으며 부친은 광부였다. 루터는 젊었을 때 종교에 대한 시골 사람들의 미신을 보았는데, 이것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루터는 일찍이 마그데부르크(Magdeburg)에 있는 공동생활 형제단의 학교에서 학문을 닦았고, 후에 아이제나하(Eisenach)에서 고급 라틴어를 배웠다. 1502년에 루터는 에르푸르트(Erfurt) 대학을 졸업하고 부친의 뜻을 따라 계속 법률을 공부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잇달아 일어나는 돌발적인 사건들 때문에  그는 계획을 바꾸었다. 1505년에 스토테른하임(Stotternheim) 근처를 지나고 있던 그는 거의 벼락을 맞을 뻔했다. 그러한 위급한 상황에서 그는 부친의 수호성인인 성 안 나(St, Anne)에게 자신이 죽지만 않았다면 수사가 되겠노라고 서원했다. 2주 뒤 부친의 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당시 수도원 가운데 가장 엄격하고 청빈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가입했다. 그러나 어린 시절의 미신과 연옥에 대한 공포로 루터의 수도생활은 고통스러웠다. 그는 수련과 속죄 가운데에서 발버둥 치며 하나님의 용서를 얻기를 소망했다. 1510년부터 1511년까지 루터는 종교의 중심지인 로마를 방문하여 이곳에서 진정한 평강을 얻고자 하였으나, 성직자들의 허례허식과 부패는 그에게 더욱 실망만 안겨 주었다. 그는 독일로 돌아온 뒤, 그의 은사인 요한 폰 슈타우피츠(John von Staupitz)의 소개로 비텐베르크(Wittenberg)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동시에 신학 박사 학위 공부를 계속하였다.

 

2). 종교 개혁의 과정

1512년부터 1516년까지 루터는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 등 성경을 강의하였다. 어느 날 그가 로마서를 연구하고 있을 때 갑자기 하나님 말씀이 그를 비추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 이에 대하여 루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때부터 나는 나 자신이 새로운 생명을 얻었음을 느꼈고, …성경 전체가 내게 완전히 새롭게 열렸으며, 성경 곳곳에 이와 유사한 말씀이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사람의 구원이 결코 행위에 의항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모든 것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임을 발견하였다. 루터의 이러한 관점의 근원은 성경 자체로부터 온 것이지만 이외에도 공동생활 형제단과 은사인 스타우피츠의 영향도 있었다. 그들의 저서와 가르침은 루터를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외적인 두려움에서 은혜의 주관적인 쳬험으로 전환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오직 성경으로(solascriptura)", "오직 믿음으로(sola fide)"라는 종교 개혁이 중요한 두 가지 관점들을 발전시켰다. 루터는 비텐베르크의 프레드릭(Frederick the Wise)의 보호 아래 그곳에서 장기간 거주하며 강의했다. 1517년 루터와 천주교의 충돌이 일어났다. 테첼(Tetzel)이 비텐베르크에서 수치심도 없이 면죄부를 팔며 재물을 축적하자, 이를 반대하기 위하여 루터는 "95개 조항"을 비텐베르크의 성당 대문에 못 박았다. 그는 각 계층을 초청하여 면죄부의 매매와 교황의 죄를 사면하는 권위 그리고 교회의 보물 창고, 이 세 가지의 의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논쟁하였다. 이러한 행동은 당시 인쇄술의 발달과 보급으로 인해 유럽 전체를 흔들었고, 교황의 권위와 교회의 재원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1518년 루터는 아우구스부르크(Augsburg)에서 추기경 카에탄(Cajetan)과 회담을 가졌으며, 그다음 해에는 라이프치히(Leipzig)에서 에크(Eck)와 변론했다. 루터는 양보하는 것을 재차 거절하였고 오직 성경의 권위만을 내세웠다. 1520년 루터는 문서의 일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독일의 귀족에게 보내는 공개 서신> <바벨론으로 포로 된 교회>, <그리스도인의 자유> 그리고 수백 권의 독일어 소책자를 출판하였다. 이러한 소책자들은 유럽에서 매우 광범위하게 환영받았고, 그와 동시에 교황의 분노를 일으켰다. 교황은 루터에게 60일 내에 회개하라는 조서를 내렸으나 루터는 오히려 이 조서를 공개적으로 불살랐다. 다음에 1월에 교황청은 마르틴 루터의 교적을 파면한다고 공식적으로 선포하였다. 이로 인해 루터와 천주교는 정식으로 결별하였다. 1521년 교황의 재촉으로 새로운 황제 카를 5세는 보름스에서 회의(Diet of Worms)를 개최하였으며, 루터에게 출석하여 해명할 것을 요구하였다. 루터는 황제의 의회 앞에서 성경의 권위를 재천명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성경과 진리에만 굴복합니다. 나는 교황과 의회의 권위를 받아들일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항상 자기모순적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나는 달리할 수 없고 또한 어떠한 신념도 바꿀 수 없습니다. …제가 여기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 루터는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친구들에게 납치되어 바르트부르크(Wartburg) 성에 갇혔다. 회의 끝나고 한 달 뒤에 황제는 루터를 우둔하고 완고하며 융통성이 전혀 없는 이단자라고 선포하였고, 그를 체포하고 그의 간행물의 발간을 금지하라고 명령하였다. 바르크부르크에서 루터는 건강이 좋지 않았으나 문서를 집필하는 데 모든 힘을 쏟았다. 9개월 동안 그는 열두 권의 책을 썼고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그리하여 성경이 독일 국민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러나 루터가 바르크부르크에 머므는 동안 개혁 운동은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1521년 루터의 동료 안드레아스 칼스타트(Andreas Carlstadt)는 성 안에서 성찬을 거행하였고, 고해성사와 신부의 의복을 없애버렸다. 그리고 떡과 잔을 평신도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정부가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도록 하였고, 성당에 있는 그림과 성상들을 파괴하였다. 같은 해 말에 '츠비카우의 선지자들(Zwickau Prophets)' 이 비텐베르크로 와서 말세의 메시지를 전했는데, 이것은 당시 상황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1522년 루터는 비텐베르크의 요청에 따라 돌아와서 그 국면을 장악하였다. 루터의 출현으로 칼스타트는 파면되어 그곳을 떠났고, 루터가 다시 종교 개혁 운동의 핵심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그의 동료 필리프 멜란히톤(Philip Melanchthon)은 뛰어난 인문주의 학자로서 시종 루터의 개혁을 뒷받침해 주었고, 그의 유능한 조력자가 되어 루터의 개혁 정신을 계승하였다.

 

3). 루터와 그 개혁의 논쟁

비록 루터가 주님께 쓰임 받아 천 년이라는 암흑시대를 종결하였지만 그의 사람됨에는 부족이 있었고, 종교 개혁 운동에서는 논쟁거리를 남겼다. 마르틴 루터는 일찍이 자신을 '거칠고, 광폭하고, 격렬하고, 호전적'이라고 묘사한 바 있었다. 말년에 비텐베르크에 있었을 때 그는 불안정하였고, 다른 사람을 공격하기를 좋아했으며, 항상 겸허와 용맹 사이를 오갔다. 루터가 비록 '오직 믿음으로'와 '오직 성경으로'라는 종교 개혁의 두 기둥을 세웠지만 그는 '성모 마리아의 노래"에 주(註)를 달면서 마리아를 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 칭했고, 성모와 성인의 중보기도의 효력을 인정했다. 루터와 츠빙 그리의 성찬 논쟁에서도 그의 외고집과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성격을 엿볼 수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루터와 츠빙글리가 대면했을 때, 츠빙글리가 루터에게 악수를 청했으나 루터는 그의 악수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성찬 의식에 대한 두 사람의 인식이 일치하지 않자, 루터는 화를 내며 협상을 거절하고 탁자 위에 "이는 내 몸이니"라는 성경 구절을 남기고는 나가버렸다. 이로 인해 종교 개혁에서 성찬 의식이 로마 천주교회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이외에도 재침례파를 박해하는 일에서 루터는 그때까지도 자신에게 적대적이었던 천주교와 손을 잡았다. 그 당시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던 통속적인 말이 있었는데, 그것은 "침례를 원하는 사람들로 물에 빠져 죽게 하라"라는 것이었다. 결국 재침례파의 많은 인도자들이 강물에 익사당하는 참변을 겪었다. 1540년, 루터를 계속 지지해 왔고 츠빙글리와의 성찬 논쟁에서 그에게 협조했던 헤센의 필리프 공(Phillip of Hessen)의 중혼(重婚)은 독일의 종교 개혁 운동에 새로운 풍파를 불러일으켰다. 이 일은 공개적인 반대에 직면하였으나 루터는 필리프와의 사적인 친분으로 인해 그의 중혼에 찬성하였다. 이것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종도 인성의 연약함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비록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의 연약함을 초월하여 그를 사용하시지만 이러한 개인적인 어려움들은 결국 일에 어려움이 되고, 하나님께서 계속적으로 전진하시는 데 제한이 된다.

 

3. 츠빙글리와 스위스 독일어권의 종교 개혁 운동

 1). 츠빙글리의 종교 개혁 운동

울리히 츠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는 스위스의 빌트 하우스(Wildhaus)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 바젤(Basel)과 베른(Bern)에서 교육받으며 고전어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스승인 토마스 비텐바흐(Thomas Wyttenbach)의 영향으로 츠빙글리는 면죄부의 오류를 인식하게 되었고, 또한 이로 말미암아 믿음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1517년(마르틴 루터가 95개 조의 선언문을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내걸은 해)에 츠빙글리는 아인지델른(Einsiedeln)의 신부로 임명되었으며, 그곳에서 중세 천주교의 미신적인 것들을 체험하게 되었다. 1519년 츠빙글리는 취리히로 왔고, 그곳에서 한 전염병을 앓게 되었다. 그는 만약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려 주시면 반드시 일생토록 그분을 위해 일하겠다고 서원하였다. 1520년에 츠빙글리는 사상의 자유를 얻기 위하여 교황청의 수당을 포기하였다. 그는 성경의 권위를 높였고, 또한 신부가 직접 성경에 의거하여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자유를 줄 것을 정부에 촉구하였다. 동시에 그는 성경 각권의 모든 단어를 조금씩 연구하기 시작했고, 1525년에 신약 전체를 완전히 강해하였다. 어느 날 츠빙글리는 말씀을 전하면서 천주교의 절기(사순절) 중 금식하는 규례를 신랄하게 비판했는데, 이것은 당시 콘스탄츠(Constanz) 주교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그러나 취리히 의회는 츠빙글리를 지지하였고 모든 종교적인 관습은 반드시 순수한 말씀에서 기인한 것이어야 한다며 콘스탄츠 주교의 권리를 박탈했다. 이 사건은 취리히의 종교 개혁의 도화선이 되었고 수차례의 공개 변론을 촉발했다. 1523년에 시 정부 청사에서 열린 제1차 변론에서 츠빙글리는 "67개조(Sixty-Seven Articles)"를 발표했는데, 여기에서 그는 교회의 전통적인 권위가 아닌 성경의 권위를 내세우며 교황 제도, 성인 숭배, 미사, 성지 순례, 성직자 독신제, 면죄부, 고행, 연옥 등과 같은 실행들을 비판했다. 이 변론에서 츠빙글리는 대승리를 거두었으며, 연방의회의 지지로 전면적인 개혁을 시작하였다. 같은 해 9월에 제2차 공개 변론에서 츠빙글리는 천주교의 미사 형식을 공격하고 예배당 안에 있는 모든 진열품과 장식들을 일제히 제거하였다. 츠빙글리가 취리히에서 순조롭게 개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스위스 연방제도의 힘이 컸다. 연방에 소속된 각 지방이 정치적으로 독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각 지방 의회는 개혁을 받아들일 것인지의 여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충분한 권한이 있었다. 얼마 후 츠빙글리는 베른(Bern)으로 갔고, 또한 동역자들을 바젤과 슈트라스부르크(Strassburg)등, 기타 스위스의 독일어권으로 보내 종교 개혁 운동을 확산했다. 1529년에 스위스의 산골짜기에 있는 자치 정부들은 거의 츠빙글리의 종교 개혁 진영에 합류했다. 그러나 종교 개혁을 진행할 때, 츠빙글리와 여전히 로마 천주교를 신봉하고 있던 연방 정부 사이에는 충돌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비록 양측이 담판과 화해를 시도했지만 1531년에 전쟁이 일어나고 말았다. 천주교의 연방 정부 연맹은 신속하게 승리하였고, 츠빙글리 자신은 군대를 따라 출정하였는데, 카펠(Kappel) 성에서 사망했다. 스위스의 종교 개혁 운동은 여기에서 일단락을 고했다. 그 뒤 일어난 칼뱅 운동으로 인해 츠빙글리의 운동도 더 방대하고 영향력 있는 개혁 운동에 편입되었다.

 

2). 츠빙글리와 마르틴 루터

츠빙글리는 마르틴 루터의 저서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었으며, 그의 초기의 저술들 곳곳에서 루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사상이 루터의 교리의 산물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비록 두 사람이 성경의 권위와 이신칭의 방면에서는 어느 정도 유사한 점이 있었지만, 성찬의 교리에서는 견해가 같지 않았다. 이로 인해 필리프 공(公)은 특별히 두 사람이 마르 부르크에서 공개적인 변론을 갖도록 하였다. 두 사람은 루터가 기초한 "마르부르크 조문(Marburg Article)" 가운데 있는 성찬 교리에 대해 공통된 인식을 가질 수 없었다. 츠빙글리는 성찬은 단지 주님을 기념하는 의식이며 떡과 잔은 하나의 상징일 뿐, 결코 실질적으로 주님의 몸과 피가 될 수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는 "공재설(共在說, consubstantiation)"을 발표하고 성찬 시 주님의 몸과 주님의 피는 확실히 떡과 잔에 임재한다고 여겼다. 양측은 각각 자신의 견해를 주장하였고 결국 루터가 회의장을 나가버림으로써 회담은 결렬되었다.

 

3). 츠빙글리와 재침례파

츠빙글리가 스위스에서 개혁 운동을 전개했던 초반기에 그와 매우 가까웠던 두 명의 동역자, 그레벨(Conrad Grebel)과 만쯔(Felix Manz)는 츠빙글리의 개혁이 철저하지 못하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츠빙글리에게 신약 교회의 모형을 빨리 회복하라고 자주 재촉하였으며 특별히 유아 세례를 폐지할 것을 자주 언급했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정치적인 고려 때문에 급진적이기를 원치 않았고, 그 때문에 개혁 운동 초반기의 지지자들에게 심한 비평을 받기 시작하였다. 역사는 이들을 재침례파(Anabaptists, 그들 자신은 이 명칭을 받아들이지 않았음)라고 칭했는데, 그들은 유아 세례를 반대했고 참되게 회개한 성인(成人)들에게 침례를 주었다. 츠빙글리는 처음에 그들을 동정하고 이해하였으나 그들의 급진적인 말과 행동을 점차 인내할 수 없게 되었다. 재침례파가 교회와 정치의 연합을 강력하게 비판하자 정치 세력에 계속 의지해 온 츠빙글리는 그들에게 불만을 표시하였고, 결국 재침례파 믿는 이들을 공격하는 대열에 참여하게 되었다. 1520년부터 1530년까지 수 천명의 침례파 믿는 이들이 피살되었고, 천주교와 개혁주의자들은 이 일에서 예상외로 같은 진영이 되었다.

4. 칼뱅과 스위스 불어권의 종교 개혁 운동

 

1). 스위스와  제네바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간략한 서술

​스위스 건국의 역사는 독일어 권의 세 연방이 1291년에 결성한 '계약 공동체'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위스는 지리적, 경제적으로 중요한 전략적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부근의 지역들이 연맹을 맺어 외부의 침략에 함께 대응하였다. 16세기 초에 스위스는 원래 알프스 산맥에 있던 독일어권으로부터 서쪽의 불어권 지역으로 확장되어 총 13개 지역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지역들은 각각 독립적이었고 자치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스위스의 종교 개혁 운동은 부근의 프랑스, 독일의 방식과는 확연히 다르게 전개되었다. 제네바는 스위스 서남부에 있으며 프랑스 남부와 이탈리아 북부와 인접한 곳이었다. 1533년에 제네바는 사보이(Savoy) 왕조의 통치에서 벗어나 연방국 가로 독립하였다. 스위스에서 츠빙글리의 종교 개혁 운동으로 전통 천주교를 신봉하는 지역과 종교 개혁 사이에 긴장 상태가 조성되었다. 제네바는 정치적 고려에 기초하여 1536년에 종교 개혁 대열에 가입한다고 선포하였고, 같은 해에 장 칼뱅(Jean Calvin)도 윌리엄 파렐(William Farel)의 초청으로 제네바에 와서 복음파의 개혁에 힘을 다하였다.

 

2). 스위스의 종교 개혁

마르틴 루터가 독일 지역에서 개혁을 진행하고 있을 때, 다른 종교 개혁 운동이 동일한 시기에 스위스에서 일어났다. 그중 가장 유명한 두 지도자는 츠빙글리와 칼뱅이다. 츠빙글리는 스위스에서 태어났으며 아우구스티누스의 작품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또한 루터의 저서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루터의 성경에 대한 권위와 믿음에 대한 주장에는 찬성하였으나 성찬 문제에 있어서는 그와 다른 의견을 가졌다. 그는 주로 스위스의 독일어권 지역과 취리히에 영향을 주었다. 칼뱅은 1509년에 프랑스의 노용(Noyon)에서 출생하였고, 파리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1536년에 칼뱅은 제네바로 와서 그가 계획한 일련의 개혁을 시작하였고, 개혁 운동의 가장 완전한 교리서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 강요(Institutes of Christian Religion)>를 완성하였다. 1541년부터 세상을 떠나기까지 23년 동안 칼뱅은 정교일치의 방식으로 제네바의 사회와 종교 업무를 전반적으로 지도하였다. 칼뱅주의는 제네바가 프랑스 개혁파의 피난처가 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네덜란드, 스코틀랜드, 등의 종교 개혁에 전반적인 영향을 주었다.

 

3). 칼뱅의 종교 개혁 운동

칼뱅은 원래 로마 천주교를 떠날 의도가 결코 없었다. 그러나 그는 뜻하지 않게 그의 친구인 니콜라스 콥(Nicholas Cop)의 종교 개혁 운동에 연루되어 지명수배를 당하게 되었다. 이후로 칼뱅은 로마 천주교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개혁 운동가들과 같은 전선에 서야 될 필요를 스스로 느끼게 되었다. 1536년 26세의 칼뱅은 신학에서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기독교 강요>라는 책을 출간하였고, 개혁 운동가들의 신앙을 분명하게 표명하였다. 이 책이 출판된 지 얼마 안 되어 칼뱅은 파렐의 요청으로 제네바로 와서 거주하였다. 1537년에 칼뱅은 제네바 의회에 개혁을 부추기는 일련의 문건들을 제출하여 그의 마음에 품은 이상 사회를 건설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성찬 실행의 논쟁으로 칼뱅과 파렐은 의회에 의해 국경 밖으로 쫓겨났다. 1540년의 선거에서 칼뱅을 반대하던 당파가 정권을 잃게 되자 칼뱅은 다시 제네바로 돌아와 그가 제기한 조문들에 기초하여 교회 법규(Eecclesiastical Ordinances)를 제정하였고, 시민들이 종교 교육을 받도록 강압하였다. 그는 열두 명의 덕망 있는 장로로 구성된 교회 법정(Consistory of pastors and elders)을 설립하여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한 모범적인 사회를 창조하려고 했다. 그러나 제네바에서 진행된 칼뱅의 개혁도 장애가 전혀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스페인의 급진 종교 개혁자인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는 항상 칼뱅의 교리에 반대하였다. 그는 "삼위일체 교리의 오류를 논한다"라는 글을 발표하여 삼위일체의 교훈을 부인하였다. 1533년에 세루베투스가 저술한 <기독교 강요를 재고함>이라는 책은 칼뱅의 <기독교 강요>를 전면적으로 비판한 것이었다.  칼뱅의 재촉으로 세루베투스는 체포되었다. 제네바 의회는 그를 이단으로 결정하고 화형에 처하라는 명을 내렸다. 칼뱅은 인정에 호소하며 자비로 처우해 줄 것을 희망하였으나 세루베투스는 결국 1553년 기둥에 묶어 화형 당했다. 세루베투스를 사형에 처한 사건은 반대자들에게 공격의 명분을 주었으며 칼뱅의 일생에 오점을 남겼다. 1550년부터 1564년까지 칼뱅은 성경 해석에 관한 저술에 전념하였는데, 성경에 대한 그의 인식과 성경의 영적인 의미에 대한 통찰력으로 그의 성경 해석 저술들은 매우 큰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1549년 츠빙글리파는 불링거(Heinrich Bullinger, 1504-1575년)의 인도로 칼뱅파와 연합하였다.

 5. 재침례파

1). 재침례파의 기원

츠빙글리가 스위스에서 개혁을 추진할 때, 그는 유아 세례라는 매우 민감한 문제에 봉착했다. 당시 츠빙글리의 동역자였던 그레벨과 만쯔는 오랫동안 실행해온 유아 세례를 강하게 반대하였다. 그들은 성경에는 유아 세례에 관한 가르침이 전혀 없었으며, 마음과 지성이 성숙한 사람이 스스로 침례 받기를 원한다면 그에게 침례를 줄 수 있다고 여겼다. 그들은 그들의 의견을 츠빙글리에게 표명하였고, 츠빙글리는 유아 세례를 폐지할 것을 의회에 촉구하였다. 그러나 의회의 많은 의원들은 유아 시기에 세례를 받았고 일단 새로운 법령을 반포하면 그들은 즉시 교회에서 축출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고려로 츠빙글리는 시간을 끌며 행동을 늦추었는데, 이것은 그레벨 등과 같은 사람의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1525년 취리히 의회는 유아 세례에 관한 공개 변론을 열었다. 의회는 유아 세례를 계속 실행하기로 결정을 했을 뿐 아니라, 아이들은 출생한 날로부터 8일 안에 세례를 받아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 부모를 교회에서 축출할 것이라고 명령했다. 이뿐 아니라 의회는 그레벨과 만쯔 등과 같이 개인적으로 성경을 연구하는 집회도 정지하라고 명했다. 의회의 결정이 공포된 그날 저녁 그레벨과 만쯔는 함께 모여 대책을 강구하였다. 기도하는 중에 블라우로크(Blaurock)라는 형제가 성령에 감동되어 땅에 무릎 꿇고 기도하며, 그레벨에게 자기를 위해 침례를 베풀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레벨은 그 요구에 응하여 정식으로 그에게 침례를 베풀었다. 그들이 성인 침례를 시행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제 침례파"라고 불렀다. '재침례파' 는 사실 그 당시 사람들이 그들을 비웃고 놀리던 명칭이었으며, 그들 스스로는 결코 이것을 그들의 명칭으로 취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유아 세례는 결코 효력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오직 성인의 침례만이 첫 번째 침례였던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몸을 굽히는 한 무리"라고 칭하며 초기 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모든 그림과 형상을 제거하며 단순하고 소박한 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전심으로 성경, 특히 신약을 연구하였고, 이른바 신경(Creed)과 교회의 조직에 대해서는 관심하지 않았다. 그들은 루터와 츠빙글리가 주장한 정교 연합을 반대하였고, 또한 형식화된 조직과 성직자 계급을 반대하였다. 믿는 이들 사이에는 오직 은사와 사역의 분별이 있을 뿐이었다. 교목의 책임은 성경을 연구하고 믿는 이들을 감찰하며, 집회를 인도하고 있는 믿는 이들의 영적인 상황 등을 관심하는 것이었다. 침례 방면에서는 오직 참된 마음으로 회개하고 주님을 향하여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 만이 침례를 받을 수 있었다. 성찬 방면에서 그들이 떡을 떼는 것은 주님의 죽음을 위하는 것이었고, 또한 형제자매들이 함께 누리는 애찬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대부분 집에서 떡을 떼면서 한 면으로는 가정의 따뜻함을 누렸고 또 한 면으로는 형식이 가져온 미신적인 것을 피했다. 이 외에도 그들은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믿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위임을 중시하였는데, 특히 복음 전파에 적극적이었다.

 

2). 재침례파가 받은 박해

16세기에 정교 연합의 상황은 매우 보편적이었으므로 대다수 정치가와 종교 지도자들은 교회와 정치가 연합하는 것에 반대하는 재침례파에 대하여 매우 적대적이었다. 그들은 천주교와 신교에게 공동의 공동의 적이 되었으며, 번 전통적이고 반질서적인 이단으로 간주되었다. 1525년에 그레벨과 만쯔, 그리고 20명의 재침례파 믿는 이들이 체포되었다. 그레벨은 감옥에서 탈출하였으나 흑사병으로 사망하였다. 만쯔는 1527년에 리마트(Limmat) 강가에서 수장당했다. 블라우로크는 취리히에서 피신한 뒤, 도처에 다니며 전도하다가 1529년에 천주교에 체포되어 화형 당하였다. 1524년부터 1525년까지 독일 지역에서 농민 운동이 폭발하였는데, 많은 사람들은 재침례파가 그 배후라고 여겼다. 츠빙글리파, 루터파, 칼뱅파 그리고 천주교는 함께 손을 잡고 재침례파를 유럽 대륙에서 완전히 제거하고자 하였다. 재침례파의 믿는 이들은 감금, 벌금, 수장형, 화영, 학대, 등과 같은 각종 잔혹한 박해를 받았다. 당시 '정부 교회'에 위반되는 모든 죄, 예를 들면 십일조를 내지 않는 것, 집회에 불참하는 것, 가정 성경공부에 참가하지 않는 것, 전도하기를 원하지 않는 것 등을 재침례파의 믿는 이들에게 돌렸다. 1529년 슈파이어 회의(Diet of Speyer)에서 천주교와 루터파는 공통된 의견을 갖고 신성 로마 제국 국경 내에 있는 모든 재침례파 믿는 이들을 처형하는 데 동의하였다. 그리하여 짧은 수년 사이에 수천 명의 재침례파 믿는 이들이 세속 정권과 교회가 손을 잡고 행한 박해로 순교하였다.

 

3). 재침례파의 발전 및 영향

16세기의 재침례파는 당시 유럽 전체의 정치 및 기독교의 주류인 츠빙글리, 루터, 칼뱅파의 일치된 공격을 받게 되었다. 정교 연합, 유아 세례 등과 같은 논쟁 외에도 또 다른 주된 원인이 있었는데, 바로 소수의 재침례파 믿는 이들이 극단적인 개혁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수의 급진주의자들이 일으킨 사회적인 사건들로 인하여 재침례파는 역사적으로 이단이라는 이름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이러한 급진적인 사람들과 단체들은 농민 운동을 일으킨 뮌처(Muenzer), 쯔비카우(Zwickkau)의 선지자들과 호프만파(Hofmannites)와 마티스(Jan Matthys)의 뮌스터 왕국 등이 있었다. 뮌처는 사회 운동에 심취하여 자신에게 성령의 인도가 있다고 선포하고, 신권 단체를 세우려고 하였다. 그는 폭동을 선동하여 신교도와 천주교를 쫓아내고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여 유럽 사람들에게 재침례파에 대해 매우 좋지 않은 인상을 남겼다. 호프만은 원래 루터파의 신도였는데, 루터파의 성찬 교리에 동의하지 않아서 덴마크로 쫓겨났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프랑스로 가서 재침례파의 무리에 가입하였고, 말세 사상을 제창하였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지도자이므로 자기에게 반대하는 모든 사람은 멸망할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1533년에 슈트라스부르크로 강림하실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호프만의 충성된 신도인 마티스는 일찍이 스스로를 에녹이라고 칭하였다. 1533년 호프만의 예언이 실현되지 않자 마티스는 호프만의 예언이 틀렸다고 하면서 참된 새 예루살렘은 슈트라스부르크가 아니라 네덜란드의 뮌스터라고 선포하였다. 마티스는 무리를 이끌고 뮌스터를 무력으로 공격하여 성도의 왕국을 세우려고 기도하였으나 루터와 천주교에 의해 제지 당하였다. 뮌스터 사건으로 재침례파는 정부, 사회, 도덕 및 종교 각 방면에서 악명을 얻었다. 허술한 이러한 사람들이 결코 모든 재침례파의 믿는 이들을 대표하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재침례파 믿는 이들은 여전히 초기의 개혁 정신을 유지하였다. 참되게 재침례파를 대표하는 단체들은 스위스 형제단(Swiss Brethren), 모라비아의 후터파 형제단(Hutterites), 메노나이트(Mennonites) 및 아미시파(Amish) 등이다. 스위스 형제단은 취리히에서 그레벨과 만쯔를 따르던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가장 초기의 재침례파로 성인들의 침례와 소박한 성찬을 준비하였고, 재침례파가 원래 가지고 있던 진정한 개혁 정신을 계승하였다. 후터((Jacob Hutter)는 아우 스피츠(Auspitsz)에서 브루더 호프(Bruderhof)라고 불리는 공동체를 세우고 물건을 통용하는 것을 실행하였다. 후에 많은 재침례파 믿는 이들이 이곳으로 피신하여 모라비아에 많은 '브루더 호프' 가 세워졌다. 이로 인해 "모라비아의 후터파 형제단"이라고 불렸다. 후터는 1536년에 기둥에 묶여 화형 당했다. 재침례파의 또 다른 분파는 메노파이다. 메노(Menno Simons)는 원래 천주교의 신부였으나 1530년에 로마 천주교를 떠나 재침례파에 가입하였다. 그의 주된 활동 범위는 네덜란드, 독일 북부 일대였다. 메노의 관점과 스위스 형제회의 관점은 유사하여 유아 세례 및 교회가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들은 군 복무를 하지 않았고 선서하는 것을 거절하였으며 또한 정부의 어떤 자리도 거절하였다. 16세기 말에 메노파는 심각한 분열이 일어났는데, 보수적인 아만(Jakob Amman)과 그의 추종자들은 매우 엄격한 교파를 스스로 형성해 아미시 파라고 칭했다. 그들은 똑같은 복장을 했고 수염을 자르지 않았으며 사회에서 스스로 분리되어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다. 아미시파 신도들은 지금도 여전히 중세기 농장의 생활 방식으로 유지하고 있고, 어떠한 전기용품도 사용하지 않으며 사진을 찍지 않고, 또 마차를 자동차 대신 사용하고 있다. 비록 그들은 경건한 외모를 유지하고 있으나 영적 실재는 잃어버렸다. 16세기의 재침례파는 많은 박해를 받았으나 유럽의 기독교, 예를 들면 영국의 독립 교회, 침례교, 퀘이커교 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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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사] 중세의 교회사-교황제도의 확립


중세의 교회사

1. 교황 제도의 확립

 

 

 

1). 로마 교회의 배경

초기 교회는 예루살렘에서 발원하여 복음의 전파를 따라 확산되었다. 각지에서 일어난 교회들은 서로 수평적 관계에서 동등한 지위를 가졌다. 그러나 점차 로마 교회가 모든 교회들 위에 군림하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들이 있다. 사도 베드로와 바울이 모두 로마로 왔고 또한 모두 로마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지는데, 이것이 로마 교회로 하여금 영향력을 갖게 하였다. 당시 로마는 서방의 정치, 문화 그리고 경제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2세기 말에 소아시아 및 팔레스타인 일대에서 기독교의 세력은 갈수록 미약해지는 반면, 로마 교회의 세력은 갈수록 확장되었다. 이것 외에도 로마 교회가 이단에 성공적으로 대항했던 사실도 그들의 지도적인 위치를 크게 강화시켰다. 또 다른 방면에서 로마 교회는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 가난한 이들과 각종 재난에 처한 이들을 구제하는 것을 매우 중시했고 아낌없이 베풀었기 때문에 그들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그러므로 각지 교회가 로마 교회를 교회의 머리로 받들지 않았지만 로마 교회는 그들 자신에게 권위가 있다고 자처하였다.

 

2). 로마 교권의 확립과 확장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로마 제국을 통일하고 교회를 육성하는 각종 조치를 취했다. 먼저 319년에 법령을 발표하여 성직자들의 병역 및 납세 의미를 면제하였고, 321년에 다시 법을 세워 교회에게 유산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였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가 로마 교회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준 것은 330년에 수도를 동쪽 지중해와 흑해의 통로에 있는 노바 로마(Nova Roma, 새로운 로마)-콘스탄티노플-로 옮긴 것이다. 395년에 이르러 테오도시우스가 임종하기 전에 다뉴브 강과 아드리아 해역을 경계로 영토가 동과 서로 나뉘었다. 동쪽은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하였는데 역사는 이를 동 로마 제국이라고 칭하고, 서쪽은 로마를 수도로 정하였는데 역사는 이를 서 로마 제국이라고 칭한다. 동 로마 제국은 종교를 황제의 통제 아래에 두는 이른바 '황제-교황 일치 제도(caesaropapism)'를 확립하여 교회를 국가 교회로 발전시켰고 성상 파괴 논쟁 등을 거치면서 서방의 로마 천주교와 대립하였다. 동 로마 제국은 비잔틴 제국으로 발전하였다. 서 로마 제국은 라틴어를 주로 사용하였고 정치적 혼란과 이민족 침입이라는 상황 하에서 로마 주교가 백성들의 의지처가 되면서 실질적인 정치 지도자 역할을 했으며, 후에 교황으로 변하게 되었다. 452년에 훈족이 이탈리아를 침입하였고 455년에 게르만의 반달족(Vandals)이 로마를 공격하였는데,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교황 레오 1세의 간곡한 부탁으로 군대가 철수하였다고 한다. 476년 동고트족(Ostrogoths)의 오도아케르(Odoacer)가 왕위를 찬탈함으로써 서 로마 제국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 후 수많은 이민족 왕국이 일어났다. 예를 들면 서 고트족(415-711), 동 고트족(493-554), 부르군 디족(443-542), 프랑크족(586-774), 롬바르드족(586-774) 등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이 당시 이탈리아는 이민족 침입과 정치권력의 무질서로 로마 주교가 백성들을 보호하는 지도자가 되었다. 590년 교황이 된 그레고리(Gregory the Great)가 로마의 공공사업을 정리하고 군대를 조직하여 롬바르드족을 몰아냈다. 야만족이 침입한 시대에 교회는 침략을 완충해 주는 주된 역할을 하였고, 동시에 긍정적인 영향을 더욱 발휘하여 야만족의 신앙을 바꾸어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하였다. 이로 인해 로마 교황청은 갈수록 이탈리아의 가장 강하고 유력한 권력기구가 되었다. 그레고리 시대는 로마가 이미 고대 왕국에서 중세기의 로마 천주교가 통일한 기독교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임을 나타낸다. 그레고리는 로마 교회의 마지막 주교였을 뿐만 아니라 중세기의 첫 번째 교황이었다. 우리는 로마 교회의 지위와 교황의 세력이 서로 협력하면서 점진적으로 성장하였음을 볼 수 있다. 정치권력을 얻은 교회는 행정의 효율성을 강화하기 위해 국가와 유사한 조직을 만들 필요성을 점점 느끼게 되었다. 또한 이단의 침해를 방지하고 교리 상의 논쟁으로 일어나는 분열을 막기 위해 최고 권위를 가진 이가 교회의 신앙을 보호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로마 교회는 '사도들의 계보'를 강조하여 교황 권력의 이론을 점진적으로 형성하였다. 로마의 수위권을 확보하게 하고 베드로 좌에 등극한 최초의 실제 교황은 레오 1세인데, 그는 베드로가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의 대표이기 때문에, 교황은 베드로의 직접적인 계승자이고 모든 사도들의 머리라는 주장을 내세웠다. 그러므로 그레고리 시대로부터 로마 교회는 서유럽과 북유럽의 각 지역에 선교사를 파견하여 교회를 세웠고 각지의 주교는 교황에게 직접적으로 책임을 졌고 교황의 명령을 들었다. 이러한 것들은 교황의 권력을 대대적으로 강화시켰다.

 


2. 수도원 운동이 일어남

3세기 말 4세기 초에 교회가 세곡화됨에 따라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세속을 떠나 은둔하며 성결과 금욕의 수도 생활을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4세기 초에 콘스탄티누스가 제국을 통일하고 기독교로 귀의한 뒤, 시류에 편승하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왔기 때문에 교회는 세속적인 것들과 혼합되었다. 당시 하나님에 대한 경배가 갈수록 형식화됨에 따라 많은 믿는 이들이 그러한 상황에서 나와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가까이하는 영적 생활을 추구하였고 또한 은둔 생활을 하였다. 초기 교회의 가장 유명한 수도자는 안토니(Anthony)이다. 이집트 중부의 코마(Koma)에서 태어난 그는 285년경에 은둔생활을 시작하였는데, 많은 이들이 그의 세속을 벗어난 생활에 매혹되어 그의 발자취를 따라갔다. 그 후 파고 마우스(Pachomius)가 수도 생활을 더욱 개선하였고, 315년에서 320년 사이에 이집트 남부에 첫 번째 수도원을 세웠다. 수도원 운동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베네딕트(Benediict of Nursia)이다. 그는 480년 경에 태어났으며, 529년에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카시노(Caassino) 수도원 및 베네딕트 수도회 규칙을 세웠다. 수사들은 수도원에서 단체적으로 엄격하고도 청빈한 수도 생활을 하였다. 11세기까지 모든 수도원은 이 규정을 채택하였다.


 

3. 교황 제도의 발전과 부패

콘스탄티누스 이후 로마 천주교는 점차 그틀을 갖추었고, 그레고리가 교황에 오른 뒤 종신 교황제가 시작되어 중세기 교황 제도의 시작이 되었다. '교황(Pope)'은 원래 '아버지'라는 뜻이다. 로마 천주교는 마태복음 16장 18절을 근거로 베드로를 성경 가운데 첫 번째 교황으로 인정하였다. 이후 "교황 조서"와 교황은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는 "교황무오 론(無誤論)"으로 교황의 말이 성경의 권위와 동등할 정도로 높아졌고 교황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위가 부여되었다. 중세기의 교황 제도는 매우 부패하였는데, 교리적으로 사악한 이교의 실행으로 인해 누룩이 생겼을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타락의 극치에 이르렀다. 중세기의 교회사 가운데 많은 교황들이 음행을 범했다. 일부 소수 교황만이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고, 대다수의 교황들은 믿기 어려운 죄악을 범하였다. 뇌물을 받고 성직을 매매하고 권력을 찬탈하기 위해 암살하고 성경을 불태우고 성도들을 학살하는 일들을 수없이 저질렀다. 일부 사학자들은 이 시기를 성직자들의 성적 타락을 빗대어 "포르노 크라시(pornocracy, 도색 정치)"라고 칭한다. 9세기에서 10세기의 교황 선출은 이탈리아의 몇몇 가문의 수중으로 떨어져 교황의 직위가 특정 가문에 세습되었고 결국 지위가 매매되는 상황으로 변했다. 심지어는 동일한 시기에 세 명의 교황이 출현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교황의 위신이 일순간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것 외에도 그들은 바빌론의 수많은 이교적 우상 숭배를 들여왔다. 로마 천주교는 '어머니와 아들', 즉 마리아와 예수를 숭배하였다. 표면적으로 보면 그들은 지극히 높으신 아버지와 성모 그리고 성자를 숭배하는 것이지만, 실제적으로는 단지 어머니와 아들 만이 그들의 진정한 숭배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교훈은 마귀에게서 온 것으로서, 그 목적은 이 교훈을 사용하여 세상을 다스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신앙을 포기하고 사람을 미혹하게 하는 교훈에 주의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딤 전 4:1). 이는 마치 계시록에서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계 18:3)라고 말한 것과 같다. 어머니와 아들의 우상을 숭배하는 것 이외에 수많은 비밀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사후에 연옥에 들어가 겹겹이 쌓인 죄를 씻을 수 있다는 것과 무수한 성례를 지키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 등이다. 동정녀 마리아를 숭배하는 것은 381년부터 시작되었는데, 그들은 마리아를 '하늘의 황후(天后)'로 숭배하였다. 4세기 말에 이르러 이러한 우상 숭배는 더욱 보편화되었고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경배를 뛰어넘었다. 수많은 이방의 신전들이 대대적으로 복원되었고 보수되었다. 우상을 숭배하는 의식도 새롭게 제정되었으며 여성 우상의 이름이 '마리아'로 개명되었다. 로마 성내 기독교 예배당이라는 곳에서 사람들이 엎드려 절하는 대상은 사실상 바빌론 교의 천후이다. 이는 천후가 주 예수님의 지위를 완전히 점유했음을 말할 수 있다.

 

4. 천주교 체제 하의 개혁

1), 교황청 자체의 개혁

11세기에는 교회가 타락하여 성직을 매매하고 정욕을 방종한 상황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교황 레오 9세(Leo IX, 1049-1054년 재위)는 개혁을 추진하여 초기 기독교의 성결함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그레고리 7세(Gregory VII, 1073-1085년 재위)도 교황의 자리에 오르자 전면적으로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는 성직 매매를 엄격하게 금하였고 성직자 독신 제도와 교황의 권리를 확고하게 확립하였는데 이를 일컬어 "그레고리 대개혁"이라고 한다. 로마 교황청은 자체 개혁으로 위신을 다시 한번 높였다. 그 가운데 언급할 만한 일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카노사(Canossa)의 사건이다. 1075년 교황 그레고리 7세는 하인리히 4세(Heinrich, IV)에게 독일 국경 내에 있는 각 교회의 주교 임명권을 포기하라고 명령함으로 성직자 서임권 투쟁을 불러일으켰다. 교황은 하늘로부터 성직자 서임권을 받았다는 말로 귀족들의 지지를 얻어 내고 하인리히 4세를 파면했다. 1077년에 하인리히 4세는 카노사(Canossa)로 찾아가 눈 덮인 성 뜰에서 맨발로 3일 동안 자기의 잘못을 회개하며 자비를 구하여 비로소 사면을 받았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당시 교황의 권력이 황제의 권력을 압도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나 이러한 수모를 당한 황제는 세력을 키워 로마를 공격하였고 숨어 있던 그레고리 7세를 찾아내어 죽였다. 12세기 때 교황청은 세속 정권과 계속적으로 권력 다툼을 해 왔는데, 몇 명의 뛰어난 교황으로 말미암아 교황청의 권력이 점차 우세해졌다. 인노 켄티우스 2세(Innocentius Ⅱ)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를 성공적으로 대항하였고, 에우게 니스(Euegenius) 3세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황제에게 교황의 권위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 후에 교황이 된 알렉산더 3세는 더욱 강경한 입장을 취하면서 영국 왕 헨리 2세로 하여금 자신의 명령을 따르게 하였다. 교황의 권력은 인노켄티우스 3세(Innocentius Ⅲ, 1198-1216년 재위) 때 극에 달하였다. 그는 어린 황제의 후견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스페인, 노르웨이, 영국을 포함하는 전 유럽의 실질적인 통치자였다. 그의 재위기에 황제에 대한 교황의 우월권이 확고해졌다. 그는 또한 종교 재판소를 세우고 제4차 십자군 원정을 조직하여 비잔틴 교회의 통치권을 탈취하였으며, 제4차 라테란 회의(Lateran Council IV)를 거행하여 영적인 일과 세속적인 일, 양자에 있어서 무한한 권리를 지닌 교황이 되었다.

 

 

2). 수도회의 개혁

이때 교황청의 자체 개혁 이외에, 수도원에서도 개혁의 풍조가 일어났다. 10세기에 클루니(Cluny) 수도원이 주도한 수도원 개혁 운동은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므로 11세기에 그레고리 7세가 추진한 전면적인 개혁과 10세기에서 12세기에 있었던 모든 개혁은 클루니 개혁 운동이라고 칭할 수 있다. 클루니 개혁 운동이 달성하고자 했던 목적은 베네딕트 수도원의 엄격한 규율을 회복하여 개인의 영적 생활을 배양하고 수사의 노동량을 가볍게 하며 예배 의식을 발전시키고 자체적으로 토지를 경작하여 자립함으로써 세속 군주와 제후 세력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이 시기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수도원에서 나와 각지를 돌아다니며 전도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몸에 금전이나 재물을 전혀 가자고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의 구제를 의지해야 했다. 그러므로 이들은 "탁발 수도회(Mendicant Orders)"라고 불렸다. 이렇게 돌아다니며 전도하는 수도사의 무리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무리는 프란체스코회(Ffrancisans), 도미니크회(Dominicants). 가르멜 회(Carmelites),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Augustinian Orders)이다. 마르틴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수사였다. 이러한 수도회들은 모두 청빈하고 순복하는 생활을 하고 자선 사업과 기도를 중시했으며 엄격한 단체 생활의 규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중세기 개혁의 선구자가 되었다. 수도원 운동에는 은둔을 강조한 수도원과 각지를 돌아다니는 탁발 수도회가 포함된다. 이어서 몇 개의 유명한 수도 단체를 소개하겠다. "서방 수도 주의의 족장"이라는 칭호를 갖고 있는 베네딕트 수도회는 열두 곳에 수도원을 세우고 "성 베네딕트 회칙(Rule of St Benedict)" 을 세워 수도원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들의 수도 생활은 비교적 중용을 시켰는데, 흑암의 시대에 이민족에 대한 문화 전파에 매우 좋은 효과를 거두었다. 909년에 창립된 클루니 수도회는 지방의 영주나 주교의 통제를 받지 않고 로마 교황청의 직접적인 보호를 받는 것을 쟁취하였다. 그들은 각종 사회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많은 수도원들이 이러한 모형을 따라 세워지거나 혹은 서로 연합하였다. 그들이 비교적 부유하고 사회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 중 어떤 이들은  더 소박하고 원시적인 생활 방식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시스터시 안 수도회(Cistercians)는 클루니 수도원 운동에 대한 반응으로 고행하며 수행을 한 수도원으로 유명하였다. 그들은 권력보다 선지자의 정신을 중시했다. 그들은 일을 신성시 했기 때문에 학술보다 노동을 강조하였으며 심지어 농업 발전의 선구자가 되었다. 시스터시 안 수도회는 12세기 말에 총 530곳에 수도원을 세웠고, 그 후 백 년 동안 계속해서 150곳에 수도원을 세웠다. 가장 유명한 수도사는 베르나르디 클레르보(Bernard de Clairvaux)이다. 그는 중세기 신비주의의 대표자인데, 성경에 익숙하였고 자신을 매우 엄격하게 통제하였다. 그는 품행과 도덕 수준이 높았고 사랑이 많았으며 악한 것을 극도로 싫어했기 때문에 "유럽의 양심"이라고 불렸다. 1144년에 새로운 회교 세력이 일어남에 따라 베르나르는 그의 제자였던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의 위임을 받고 성지를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십자군을 모집하였다. 이러한 원정은 후에 프랑스와 독일 두 국왕이 서로 협력하지 않아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십자군 원정이 실패하자 민중들은 베르나르를 원망하였다. 베르나르는 구약의 모세를 예로 들면서 실패의 원인을 십자군의 정욕의 방임과 비잔틴인들의 약속 위반으로 돌렸다. 또한 더 나아가 콘스탄티노플을 응징해야 한다고 제의하였는데 이 제의는 제4차 십자군 원정을 촉발시켰다. 탁발 수도회의 수도 단체 중 가장 유명한 두 파가 있었는데, 한 파는 프란체스코회(Francisans)이고 다른 한 파는 도미니크회(Dominiciants)이다. 프란체스코(Francis Xavier)는 1209년 아시시(Assisi)에 세워진 소규모의 구걸 수사단에 있었다. 그들은 마태복음 10장 7절부터 9절까지의 교훈을 준수하고 밖으로 나가 복음을 전했으며 또한 사도의 청빈 생활과 유사한 단순한 규율을 정하였다. 그들은 절대적인 청빈, 재산을 소유하지 않음, 주교의 허락을 거치지 않고 개인적으로 선교하지 않음, 신학 문제의 논쟁에 관여하지 않음, 원수와 화해함 등의 사상들로 세상 사람들에게서 칭송을 받았다.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교황에 대한 절대적인 순복은 교황의 인정을 받았으며 후에 교황의 권위의 중요한 버팀대가 되었다. 프란체스코는 1182년 이탈리아 중부의 한 촌에서 태어났는데, 초년기에는 세상을 사랑하며 실속 없이 겉만 화려한 생활을 했다. 후에 그는 계시를 받고 주 예수님의 본을 따라 살기를 결심했다.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기본 방침은 자아를 버리고 가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며 주님의 제자들을 본받아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다. 프란체스코는 자신은 청빈과 결혼했다고 말했다. 그는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였는데, 만약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은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친구가 아니라고 하였다. 한동안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인수는 급격히 증가하여 5천 명이 넘기도 하였다. 프란체스코는 항상 밖으로 나가 복음을 전했는데, 그의 행적은 이탈리아를 거쳐 이집트와 시리아에 이른다. 프란체스코는 교육을 많이 받지 못하여 라틴어에 대항 이해는 그다지 깊지 않았으나 열심히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재산을 모으지 않았다. 그는 이웃을 사랑하고 선행을 하는 것이 학문을 연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후에 신학을 말하였고 조직을 개편한 이후에는 점차 학술에 중점을 두었는데, 후에 배출된 몇몇 영국의 뛰어난 철학자들은 프란체스코회 출신이었다. 탁발 수도회의 또 다른 유명한 수도 단체는 도미니크회로서, 창설자는 스페인 사람 도미니크(Dominic)이다. 그들의 주된 목적은 신앙을 지키고 이단인 알비파(Albigenses)의 믿는 이들을 다시 돌이키게 하는 것이었다. 도미니크는 오직 청빈하고 소박한 생활을 해야 초대 교회의 사도들과 유사한 체제를 세울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만 이 수도하는 이단자들의 신앙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그는 지식과 학문을 추구하는 이들과 이단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부담을 가진 이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였는데, 이러한 움직임은 종교 재판소의 전신(前身)이 되었다. 그의 주장은 대학에서 인정을 받았고 학술계에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1233년에 교황 그레고리 9세는 도미니크회에게 알비파를 소멸할 것을 명령하였고, 그 결과 아비 파는 14세기 말에 멸절되었다. 이상에서 언급한 수도 단체 이외에 카르멜 수도회,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병원 기사단(Kinghts Hospitals), 성전 기사단(Knights Templars) 등과 같은 소형 단체들이 있었다. 1154년 팔레스타인에 세워진 카르멜 수도회는 극단적인 고행에 중점을 두었고 청빈과 독신 그리고 채식을 지켰다.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는 "아우구스티누스 규례"에 근거로 하여 세워진 수도회로서 규례의 집행에 있어서 비교적 융통성이 있었다. 종교 개혁 운동의 주된 인물인 마르틴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속했었다. 병원 기사단은 원래 11세기 말에 병자를 돌복 여행객과 십자군을 접대하기 위하여 조직된 기사 단체였으나 나중에 정규군대로 발전되었다. 성전 기사단은 1118년에 예루살렘을 보호하고 회교도에 대항하기 위하여 기사 수도 단체였다. 영향력이 매우 컸던 그들은 각자에 보루를 많이 세워 수도원과 기병대가 주둔하는 이중 용도로 사용하였다. 그들은 지지자들에게서 많은 기부금을 받았는데, 이를 파리와 런던의 '성전'에 보관하였다. 이로 인해 그들은"믿을 만한 금융가"로 불렸다. 그러나 그들은 1312년에 부도덕하고 미신적이며 이단을 신봉한다고 고소되어 진압당하였다.

 

5. 천주교 체제 외의 개혁과 교황청의 박해

12, 13세기는 교회의 정치권력이 극에 달한 시기였다. 특히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의 제위기에 교회의 정치권력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인노켄티우스 3세는 정치에 큰 공헌을 하였는데 그는 당시 부패한 교회를 개혁하기 위하여 로마에서 제4차 라테란 회의(Lateran Council IV)를 개최하여 건전한 교회 조직과 성직자들의 생활에 관한 혁신적인 방안을 세웠다. 대다수 교황의 주된 개혁은 모두 정치적 위기로 인하여 뿌리를 내리지 못 했다. 그러나 일반 믿는 이들은 도덕성의 회복과 사상의 변혁을 간절히 원했기 때문에 검소한 생활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개혁 단체들이 계속해서 출현하였다. 그들이 바로 왈도파와 알비파이다.

 

1). 왈도 파

중세기의 로마 천주교가 교황의 권리를 확장하고 정치권력을 쟁취하고 부를 축적하려고 힘을 다하고 있을 때, 프랑스 서부와 이탈리아 북부 산악 지역에서는 성경으로 돌아가 사도의 교훈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고결한 단체인 왈도파가 출현하였다. 창시자 피터 왈도(Peter Waldo)는 리옹의 시민으로서 원래 사교와 상업  그리고 정치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부상이었다. 1173년부터 1176년 사이에 그에게 큰 변화가 있었다. 먼저 그는 라틴어 성경을 그 지방 언어로 번역했다. 그다음 그는 마가복음 10장 21절의 말씀에 따라 모든 가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고 공공장소와 사방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파하였다. 왈도의 전파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매혹하였는데 이들은 "리옹의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불렸다. 그들은 각지에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고 물건을 공용하였고 소박한 생활을 했는데, 후에 왈도파라고 불렸다. 이 운동은 프랑스의 남부로부터 이탈리아와 독일 라인 강 지역으로 퍼졌고 심지어 스페인, 보헤미아, 폴란드까지 확장되었다. 왈도 파는 13세기 때 두 파로 분열되었는데, 보수적인 한 파는 로마 교회로 돌아갔고 비교적 진보적인 파는 자신의 주장을 계속해서 견지하였다. 왈도 파는 성경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으며 그리스도를 신앙의 유일한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에게는 주교나 교황이 없었다. 그들은 모든 인위적인 신조를 거절하였으며 또한 평신도들에게 성경에 따라 복음을 전파할 권리가 있음을 견지하였다. 그들은 맹세를 하지 않았고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취하는 것을 반대하였으며 연옥의 교리와 미사를 부정하였고 세례와 떡 떼는 것 이외의 모든 성례를 부정하였다. 그들은 성인과 성상  그리고 생물을 경배하기를 원치 않았고 십자가도 경배하지 않았다. 십일조를 드리는 것을 반대하고, 종교 재판소, 십자군과 사형 등 성경에 위배되는 실행에 반대하였다. 그들은 청빈하게 생활했고 집에서 집회를 했으며 거리를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파하고 성경을 가르쳤다. 그들은 성경에 계시하는 예수님과 사도의 본을 최선을 다해 따랐다. 그들은 교회가 사도들의 발자취를 쫓아갈 때 주님의 부르심에 충성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반대로 교회가 세상의 권세와 부를 포기하기를 원치 않을 때 교회는 세속적으로 변하고 교회의 실재를 잃어버리게 된다고 믿었다. 또한 그들은 4세기 때 로마 천주교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정권이 연혼(連婚) 한 것으로부터 교회가 타락하게 되었다고 간주했으며, 성직자들의 세속화와 사치스럽고 음란한 생활은 성경이 계시하는 사도의 생활을 위반한다고 여겼다. 왈도 파는 로마 천주교와 적이 아니었으며 또한 자신의 파벌을 세울 뜻이 없었다. 그들은 심지어 어떤 사람이 자신을 교회밖에 있는 또 다른 단체라고 느끼거나 스스로 영적이라고 자인하면서 교회에게 대적하는 것은 스스로 멸망이 길을 취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로마 천주교는 오히려 평신도들(성직자 계급이 아닌 사람들)이 복음을 전파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품었다. 그들은 오직 사도 직분을 계승한 성직자만이 복음을 전파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이 '가난하고 학식 없는 이단'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13세기의 종교 재판소의 보고로부터 왈도 파에 대한 당시의 교황청과 정권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그들은 왈도 파가 무지하고 무식한 백성들이며 각 성과 각 가정, 심지어 각 회당에 가서 잘못된 교훈을 전파한다고 여겼다. 리옹의 주교는 일찍이 왈도 파에게 그들의 행동을 금지하라고 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도에게 피조물을 향하여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이미 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사람에게 순종하기보다는 반드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성직자들의 생활이 부유하고 나태하다고 지적하였는데, 이로 인해 성직자들을 멸시한다는 죄명으로 고소당했고, 또한 빈궁한 옷과 성결의 가면을 쓰고 사도의 추종자라고 거짓되이 일컫는 자들이라고 조소당하였다. 상술의 원인으로 인해 왈도의 믿는 이들은 로마 천주교와 권력 다툼을 하는 정치인 그리고 난폭한 병사들에게서 혹독한 박해를 받았다. 그중 가장 혹독한 박해는 1655년에 왈도 파가 대량으로 학살당한 것이었다. 퀄번(L, P, Qualben)은 <교회사(A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라는 책에서 "왈도 파는 후스파와 보헤미아 형제회의 미리 예비한 선봉"이라고 언급하였다. 얀 후스는 개신교에서 종교 개혁의 선봉과 정통이라고 간주되며, 개신교 역사학자들도 왈도 파를 개신교의 주류 사상 층의 하나인 칼뱅주의와 함께 자매로 간주하였으나, 13세기의 로마 천주교회는 왈도 파의 신앙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배척하였다. 왈도와 동시대에 있었던 프란체스코도 청빈을 주장하고 실천하였으나 로마 교황청은 그를 교회의 성인으로 추앙하였다. 이것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왈도 파에 대한 개신교와 천주교회의 견해가 매우 다르다는 것이다. 왈도 파가 가졌던 복음 이상(理想)은 사실상 비난받을 만한 것이 없었으나 로마 교황청에 의해 이단으로 단정되었다. 심지어 정치적으로 연루되어 심한 박해를 받고 대학살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박해 속에서도 살아남아 종교 개혁 운동이 일어난 뒤 신교의 일부분으로 편입되었다. 왈도 파의 충성과 깨끗한 마음 그리고 성경에 대한 그들의 순종 및 사도들의 가르침을 바싹 쫓아간 것은 실로 중세기 교회의 흑암의 역사에서 한줄기 서관이었으며 종교 개혁의 선봉이 되었다.

 

2). 알비 파

알비 파(카타리파)는 1145년부터 1244년 사이에 존재했다. 카타리(Cathari)의 수많은 신도들이 프랑스의 알비(Albi)d에 거주 했기 때문에 알비파라고 불렸다. 프랑스 남부의 랑그도크(Languedoc) 주에 거주했던 사람들의 풍속과 습관은 북부와 매우 달랐으며 오히려 이탈리아와 매우 유사하였고 또한 프랑스어를 사용하였다. 그들은 유럽 사람들과는 달리 로마의 기독교를 신봉하지 않았고 별도로 발칸 반도에서 일어난 비교적 독특한 기독교를 믿었다. 당시 로마 천주교가 권력을 탐하고 뇌물을 받는 등 부패했기 때문에 이러한 순수하고 소박한 기독교가 랑그도크에 신속하게 퍼졌다. 현지 주민들은 로마 교회의 성직자들을 축출하고 그들의 수도원과 성당을 탈취하였으며 이러한 시설물들을 접수하고 관리하였다. 이 파의 분포는 매우 광범위하여 로마 천주교와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다. 그들은 참된 교회는 영원하며 고압적인 수단으로 그 존재를 유지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그들은 엄격하게 고행하며 수도하는 것을 실행하였는데, "커타리(Cathari)"라는 단어는 '정결하다'라는 뜻으로 고행으로 수도하며 영혼의 불결함을 벗고자 갈망하였음을 나타낸다. 그들은 혼인과 출산 그리고 전쟁을 반대하였고 십자가와 성례를 받아들이는 것을 거절하였으며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고 신약을 연구하였으며 또한 신약을 지방어로 번역하였다. 알비 파의 신도들이 로마 천주교를 반대함으로 인해 교황으로부터 이단이라고 선고받았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재위하는 동안 알비파가 유럽에서 전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랑그도크에서 세력이 가장 큰 레이몽 백작에게 알비 파를 영지 내에서 쫓아내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레이몽은 교황의 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교황의 특사를 죽였다. 이에 분노한 교황은 1208년에 칙령을 공포하여 각 나라를 불러 십자군 원정대를 조직하여 이단을 정벌하고자 했다. 사실 박해는 1145년에 시작되었는데, 몇 명의 알비 파 신도들이 쾰른(Keoln)에서 화영 당하였고 그 후 1209년 교황청은 알비 파를 공격하라고 분명히 명을 내렸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 황제는 십자군을 조직하여 알비 파를 처리하였고 심지어 이단을 신봉하는 것을 사형 죄에 해당한다고 선포하였다. 그의 이러한 행동으로 프랑스 남부는 20년 동안 대대적으로 유린되었다. 인노켄티우스 3세 후에 교황이 된 아들은 모두 알미 파에 대한 박해를 계속하였으며 또한 종교 재판소가 정식적인 기구가 되어 이러한 '이단'을 소멸하는 직무를 계속해서 집행하였다.

 

3). 종교 재판소

종교 재판소(Inquisition)는 교회 역사 가운데 있어서 가장 어두운 한 페이지이다. 로마 천주교는 '이단을 소멸하는 것'을 목적으로 1233년에 이단을 전문적으로 심판하는 교회 법정을 세웠다. 법정에서 이단으로 고소된 사람은 변호사를 둘 수 없었고 원고의 신분을 알 수 없었다. 일단 이단으로 고소되면 어린이나 범죄자의 증언, 심지어 확인되지 않은 소문까지도 모두 정식 증인으로 받아들여졌다. 무고함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피고는 유죄로 간주되었다. 법정에서 회개한 자는 사형에서 종신형으로 감면되었다. 무릇 피고의 변호자도 공범으로 간주되었다. 어떤 역사학자들은 당시의 종교 재판소가 채택한 가혹한 형벌이 그 당시 일반 범법자들에게 자백을 강요할 때 사용한 방법이었음을 발견하였다.  로마 천주교는 무력의 수단으로 가라지를 뽑으려고 기도하였으나 오히려 수많은 생명의 밀알을 잔해했고 주님을 참되게 사랑하는 믿는 이들을 살해하였다. 이단에 대한 종교 재판소의 징벌은 스페인에서 극에 달하였다. 그러나 종교 재판소의 구성원은 대다수 본래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 오히려 종교 재판소에서 박해를 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참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전하신 복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단의 가르침'을 거절하였다가 오히려 '이단'이라는 누명을 받고 치욕을 받았으며 결국 신앙을 위해 순교하였다.

 

6. 십자군 원정

오랜 세월 동안 유럽의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 등의 성지를 순례하였다. 그러나 터키인들이 일어남으로 인해 성지 순례를 하는 사람들의 안전에 문제가 생겼으며 게다가 터키인들은 비잔틴에 대한 무형의 압력을 가하였다. 이에 1095년 동 로마 제국 황제의 요청 하에 교황은 믿는 이들을  모아 십자군을 조직하였고 회교도의 수중으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이 잃어버린 영토를 수복하려고 기도하였다. 1074년부터 1270년 동안 유럽에서는 여섯 차례 주된 십자군 원정이 있었다. 십자군의 부름은 열열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교황은 십자군에 가입하면 죄를 사하여 줄 뿐만 아니라 사후에 천당에 갈 수 있다고 확신을 주었다. 그러나 성지 탈환을 명분으로 한 십자군이 오히려 성지인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점령한 뒤 살육과 노략질을 하여 로마 교황청의 위신을 크게 떨어트렸다. 게다가 원정 군대의 대부분이 오합지졸이어서 유럽을 불안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자원도 소모하였다. 1212년에 교황청은 심지어 수 천명의 어린이로 조성된 어린이 십자군을 불러 모았는데 그들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항구에서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렸다. 십자군 원정은 유럽의 사회의 구조를 철저하게 바꾸었고 또한 동서무역과 문화의 교류를 촉진시켰다. 귀족의 지위는 하락하였고 새로 일어난 상인과 지주가 세력을 떨쳤다. 방직품과 식물 그리고 향료의 수입은 유럽의 경제 발전을 자극하였고 십자군이 가져온 부도 화폐의 제조와 유통을 촉진하였으며 자유사상이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과거에 잃어버렸던 그리스 고전 문학과 철학의 문헌이 이 시기에 다시 발견되어 서방 교회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서방 교회는 이러한 새롭게 들어온 사상에 맞서거나 응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종합해서 말한다면 십자군 원정은 비록 성지인 예루살렘 탈환을 명분으로 하였으나 그 목적은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십자군의 원정으로 말미암아 유럽의 상업과 경제에 가져온 혁명적인 영향은 동서 문화의 교류를 촉진하였고 향후 르네상스의 발생을 자극하였다.

 

7. 교황 제도의 몰락과 종교 개혁의 선구(先驅)

 1). 교황 제도의 몰락

14세기에 민족주의가 일어나고 교황청과 군왕 사이에 충돌이 빈번하게 되었는데, 교황 보니파시오 8세(Bonifacio VIII)와 프랑스 왕(Phillip) 사이에 세금과 권력의 문제로 인해 일련의 투쟁이 발생하였다. 보니파시오 8세와 베네딕트 11세(Benedict XI) 두 명의 교황이 잇따라 죽은 뒤 새로 임명된 교황 클레멘트 5세(Clement V)는 프랑스 왕의 영향력 아래 있었고 로마의 불안한 정세 때문에 1309년에 프랑스 남부 아비뇽(Avignon)으로 교황청을 옮겼다. 아비뇽 교황청은 70년 동안 그곳에 있었는데, 역사는 이 기간을 "교회의 바빌론 유수 시기"라고 한다. 프랑스 왕의 지지 하에 아비뇽의 교황은 서유럽의 가장 권위 있는 사람이 되었지만 교황청 자신의 부패는 결코 개선되지 않았고 교황은 정치에 예속되었다. 이로 인해 교황도 그의 권위를 다시는 회복하지 못할 정도로 크게 잃어버렸고 서방의 교회도 영적인 인도가 부족함으로 인해 더욱 부패되었다. 당시 많은 이들이 교회에 대해 신뢰를 잃어버리게 된 주된 원인은 교회의 부패함 때문이다. 십자군 원정을 위하여 교회는 책임질 수 없는 영적인 구호로 사람들의 참가를 격려하였고 십자군에게 참여한 사람들에게 하늘의 보상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교회는 영적인 약속을 남용하여 신뢰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게다가 원정에 막대한 비용이 들었기 때문에 교황청은 그 재원을 충당해야만 했다. 1300년 보니파시오 8세는 그 해를 희년으로 선포하고 단지 로마로 성지 순례를 와서 세례를 받으면 죄가 청산된다고 하였다. 또한 무릇 로마로 오지 못한 이들은 금전으로 대치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로 인해 교황청에 재화가 쌓이게 되었다. 이후로 성당을 보수하려 하거나 재정이 군색해질 때면 교황청은 속죄 증명서를 대량으로 찍어 파는 면죄부 제도를 세웠다. 또한 부패한 성직자들 사이에 성직을 매매하고 사람들의 맹목적인 믿음을 이용하여 재물을 거두어들이는 일들이 수없이 발생했다. 성인의 유물, 뼈, 아론의 지팡이, 예수가 심판받을 때 걸었던 계단 등이 모두 사람들이 자신 혹은 연옥에 있는 가족의 속죄를 위한 수단이 되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이 나오게 되었다. "금화와 은화가 헌금 통에 떨어지며 딸랑 소리를 낼 때 영원히 즉시 연옥 가운데에서 나온다." 이것 이외에 중세기의 로마 교황청의 허례허식과 음란함은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으며 교황청은 거의 매춘부들의 거처와 같았다. 심지어 어떤 교황은 간음하는 현장에서 정부의 남편에게 살해되었다. 교황 피우스 2세(Pius II)가  "로마는 사상자가 관리하는 유일한 성이다."라고 말한 것도 전혀 이상한 말이 아니었다. 이처럼 영성과 도덕이 타락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충성된 종들은 교회를 개혁하고자 수차례 시도하였다. 그들은 면죄부 제도를 반대하였고 성경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그들의 노력으로 결국 개혁의 거대한 흐름이 모이게 되었고, 1517년에 마르틴 루터가 이 종교 개혁 운동을 전면적으로 열게 되었다.

 

2). 르네상스 시기의 사보나롤라(Savnarola)의 개혁

르네상스(Renaissance)는 1400년에 이탈리아의 피렌체(Firenze)에서 발원하였다. '르네상스'라는 불어의 뜻은 '재생'이라는 뜻으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을 재발견하는 것을 뜻하며 예술과 문학 그리고 정치적인 부흥을 가리킨다. 이 시대의 주제는 개인주의, 세속주의, 이상주의였으며, 사회의 중심도 봉건제도 아래의 군왕 귀족으로부터 점진적으로 경제적인 실권을 가지고 있던 상인과 평민에게로 전환되었다. 이 당시의 가장 중요한 인물은 피렌체의 메디치(Medici) 가문이었다. 메디치 가문의 통치로 인하여 피렌체의 경제는 활기차게 발전하였고 정치도 안정되었기 때문에 문예 부흥의 중심이 되었다. 원래 귀족이었던 이 가문은 13세기에 금융업으로 가문을 일으켰고 거대한 부를 쌓았다. 14세기에 이 가문의 경제와 정치의 영향력은 갈수록 증가되어 살 베스트로(Salvestro)는 피렌체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1382년에 살 베스트로는 독재와 잔혹함으로 인해 축출당하였고, 그 뒤를 이은 조반니(Giovanni)가 가업을 재정비하였다. 그리하여 이 가문은 이탈리아 심지어 전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이 되었고, 1421년에는 피렌체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그의 아들 코시모(Cosimo)는 평민들의 세금을 가볍게 하여 하류층 지지를 얻었으나 정적들의 불만을 사 정권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적들에게 정권을 빼앗긴 후 코시 모는 비록 정국에 주동적으로 간여하지는 않았지만 메디치 가문은 이미 정권의 유일한 핵심이 되었다. 더욱이 코시 모는 피렌체 사람들에게 "국부"로 존칭 되었다. 16세기에 메디치 가문은 자유주의를 제창하였다. 그들이 정부 관직을 통제하지는 않았지만 재력과 권세로 여전히 피렌체의 정치를 조정하였다. 그들의 인도 하에 피렌체의 영토는 크게 확장되었고 1530년에 이 가문은 피렌체를 세습 왕국으로 바꾸고 군주라고 자임하였다. 카트린 드 메이 시스(Catherine de Medicis)는 프랑스 국왕 앙리 2세와 결혼하여 프랑스의 실제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이것 외에도 메디치 가문은 르네상스 당시의 두 명의 교황을 산출하였는데, 한 명은 조반니(Giovanni Angelo)이고 다른 한 명은 알레산드로(Alessandro)이다. 르네상스 당시의 유명한 예술가인 미켈란젤로(Michelangelo), 라파엘(Raphael), 도나토 브라만테(Donato Bramante) 등은 초기에 모두 이 가문의 경제적인 지지를 받았다. 도미니크회(Dominicans)의 수사였던 지롤라모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는 1481년 피렌체 산 마르코 수도원으로 파견되었다. 설교 시에 사보나롤라는 항상 교황과 교회의 부패를 공격하였고 메디치 가문의 잔혹한 통치를 폭로하였으며 부자들의 교만과 사치스러움 그리고 음란과 방탕함을 반대하였다. 그는 새롭게 사회적인 도덕을 세우자고 주장하며 경건한 수도 생활을 주창하였는데 그의 언행은 평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1491년에 사보나롤라는 산 마르코 수도원 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491년에 프랑스 왕 샤를 8세가 이탈리아를 침공하자 메디치 가문은 투항하였으나 사보나롤라는 평민들이 일으킨 봉기의 정신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평민들을 인도하여 메디치 가문을 추방하고 공화 체제를 회복하였으며 피렌체를 신권 통치 하의 경건하고 소박한 도시로 개조하고자 하였다. 1497년에 사보나롤라는 종교 개혁을 주도하여 시 중심 광장에서 보석과 의복과 화려한 것들과 풍기를 문란하게 하는 서적 등을 모두 불살랐다. 그는 세속적인 음악을 금지하고 성가를 보급했으며 행정과 조세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는 교황 알렉산더 6세를 "사탄의 대표"라고 비방하여 같은 해 교황으로부터 파면을 당하였다. 1498년 4월에 알렉산더 6세와 메디치 가문은 기근이 일어난 상황을 이용하여 산 마르코 수도원을 공격하도록 군중을 선동했다. 사보나롤라는 분열을 일으키는 이단이라는 죄명으로 광장 한가운데서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그의 시신은 광장에서 불태워졌다. 1438년에 로마 천주교회는 피렌체에서 제17차 회의를 소집하여 동방과 서방의 교회가 1054년 이래로 분열된 상황에 대해 화해를 도모하고자 하였다. 이 회의는 바로 동방과 서방 교회의 분열에 영향을 준 "필레오 퀘(filioque, '… 와 아들로부터'라는 뜻임)"를 의제로 삼았다. 이 논쟁은 아우구스티누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씀은 단지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며 성령은 주로 아버지로부터 나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7세기 때 서방 교회는 "필레오 퀘"라는 단어를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에 그리스도에 관한 신조 가운데 집어넣어 "나는 성령이 …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온 것임을 믿는다."가 되었다. 동방 교회는 이것을 엄중하게 반대하였는데 이는 "필레오 퀘"라는 논리는 일종의 이단의 관점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것은 끊임없는 논쟁과 향후 교회 분열의 도화선이 되었다. "필레오 퀘"라는 논점의 논쟁 이외에 이 회의는 연옥의 교리 및 기타 교황의 권력에 관한 성명을 선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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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과학] 사람화석은 없나요?

 

 

 

 

 

 사람화석은 없나요?

 

 

“그 많은 화석 중에 사람화석은 왜 없나나요?”. 이 질문은 노아홍수 세미나 때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에 하나입니다. 지구상에 수백억 이상의 화석들이 돌 속에 매장되어 있고 이들이 노아홍수의 결과라면 사람화석도 그 가운데 발견될 것 같기 때문입니다.

 

지구상에 있는 화석들의 빈도를 보면 전체 화석 가운데 95%가 조개와 같은 해양 무척추 동물입니다. 그리고 그 5% 중에서도 95%는 바다식물이나 나무입니다. 그리고 그 나머지의 대부분이 물고기 화석입니다. 실제로 육지동물 화석은 아주 적은 양만이 발견되고 있죠. 박물관에 소장되어있는 공룡화석이 2,100구 정도 되는데, 이는 전체 화석에 비하여 아주 적은 양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몸 전체가 아니라 한 두 조각의 뼈만이 발견되었습니다. 사람화석도 보고된 적은 있지만 모두 조각들이어서 분명한 것이 없죠.

 

중요한 것은 화석은 생물들이 물에 빠졌을 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다량의 흙에 갑자기 매몰될 때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노아홍수 때 화석이 만들어졌다고 본다면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형성된 많은 흙들은 수면보다는 훨씬 아래에서 많은 퇴적물들이 섞인 혼탁류 상태로 이동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이동하면서 물에서 살고 있던 해양생물을 매몰시켰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우리가 화석으로 볼 수 있게 되었죠.


반면, 육지동물들은 물에 떠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화석이 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아홍수 모델로는 화석에서 육지생물이 해양생물에 비해 아주 적게 발견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화석의 대부분은 살아있을 때 물에서 살던 것들이라는 점은 노아홍수의 상황과 딱 맞아 떨어진다는 것이죠.

 

 

 

석탄의 경우도 똑같은데요. 지난 1월호에 석탄은 홍수 동안 물에 떠있던 나무에서 껍질이 분리되고, 무거워져서 가라앉게 된 껍질들이 진흙에 매몰되어 탄화된 것이라고 했었죠? 그런데 지구상에 나무껍질인 석탄은 엄청나게 분포해 있지만 그에 비해 나무자체 화석은 거의 발견이 되지 않습니다. 즉, 나무들은 홍수 동안 대부분 물위에 떠있었기 때문에 석탄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해양동물에 비해 육상동물 화석이 잘 발견되지 않는 것은 진화론자들에게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창조 이후 가장 큰 물리적 사건인 노아홍수의 과정을 통해서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글/ 이재만(창조과학회 미서지부장, 「창조과학콘서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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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사] 로마 천주교의 형성

 

 

로마 천주교의 형성

1). 콘스탄티누스 대제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e the Great, AD 274-337)는 원래 태양신 헬리오스(helios)를 숭배하였으나 그의 어머니 헬레나(Helena)는 경건한 그리스도인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퇴위한 뒤 로마는 내전의 혼란 가운데로 빠져들었다. 306년에 브리타니아의 로마 군대는 콘스탄티누스를 황제로 옹립하고 브리타니아와 골(Gaul) 그리고 스페인을 통치하였다. 막센티우스(Maxentius)는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를 다스리고 있었다. 얼마 안 있어 막센티우스는 콘스탄티누스를 공개적으로 적대하였다. 에우세비우스의 교회사 기록에 의하면 콘스탄티누스는 312년에 막센티우스와 싸우기 전, 정오에 "이 기호 안에 승리하리라!"라고 쓰인 불타는 십자가를 보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콘스탄티누스는 십자가를 그의 군대의 깃발로 삼아 물비안 다리(Mulvian Bridge)에서 막센티우스를 대패시키고 로마 제국 서쪽의 새로운 맹주가 되었다.

 

그다음 해인 313년에 콘스탄티누스는 밀란 칙령(Edict of Milan)을 반포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큰 신앙의 자유를 주었고 또한 박해받던 시기에 강제로 빼앗겼던 재산을 돌려주었으며 그가 통치하던 영토 내에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제재와 박해를 금지하였다. 밀란 칙령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교를 이긴 이정표를 세웠다고 말할 수 있다. 교회는 극소수의 유대 민족 단체와 그 구성원이 대부분 교육을 받지 못한 가난한 백성으로부터 시작하여 삼백 간의 공포와 피비린내 나는 박해와 이단의 사악한 공격을 거친 뒤 이러한 성장과 결과를 갖게 되었다. 많은 방면에서 그 요인을 해석할 수 있는데, 그 주된 요인은 '순교자의 피가 교회의 씨'라는 사실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또 다른 분명한 해답은 사람의 이해를 뛰어넘는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평강의 보호였다.

 

324년에 콘스탄티누스는 천하를 통일하고 기독교를 공개적으로 지지하였고, 또한 그다음 해에 신하와 백성들에게 기독교를 신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결과 교회는 '양'에 있어서는 증가가 있었지만 '질'에 있어서는 손실이 있었다. 밀란 칙령의 반포는 비록 교회사의 전환점이 되었지만 그것이 가져온 좋지 못한 영향은 수문을 열어 놓은 것과 같이 세상의 부패한 조류가 이 수문을 통하여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한 것이다. 과거에 교회는 묵묵히 고난을 받으며 승리하였으나 이때부터 그리스도인들은 전쟁을 복음 전파의 수단으로 삼아 목적을 이루었다. 오늘날까지 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은 콘스탄티누스가 회심한 동기에 대해 여전히 논쟁을 벌이고 있다. 한 측에서는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옹호한 것은 정치적인 목적 때문이었다고 여긴다. 다른 한 측에서는 콘스탄티누스가 그의 어머니 헬레나와 물비안 다리 전투의 영향으로 스스로 개종한 것이라고 믿는다.


2).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인정함으로 가져온 영향  

 

(1). 기독교가 국교가 됨

 

콘스탄티누스의 지지로 기독교는 합법적인 종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데오도시우스 황제 때에는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어 교회와 성직자들은 각 방면에서 특권을 누렸다. 이로 인해 많은 사병과 시민들이 집단적으로 교회에 가입하려고 하였다. 이렇게 새롭게 가입한 회중들 가운데에는 옥석(玉石)이 함께 섞여 있어서 교회는 점진적으로 세속화되어 계시록에서 언급된 세상과 연합한 버가모 교회가 되었다. 동시에 믿는 이들의 수가 증가됨으로 인해 교회는 대규모의 공개적인 집회 장소를 찾기 시작하였다.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 성전이나 신전 같은 건물을 집회 장소로 사용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인들이 평상시 장사를 하거나 기타 집회를 하던 장소와 원래 법정이 소재하였던 정부의 건축물(Basilica)을 그리스도인들이 집회하고 예배를 드리며 세례를 베푸는 큰 예배당으로 개축하였다.

(2). 정치와 교회의 혼합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된 후, 정부는 교회에 대하여 정치적인 기대를 갖게 되었고 이러한 기대는 특별히 백성들을 통합하는 구심력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수도 주의, 도나투스 주의(Donatus), 아리우스 주의 등의 신학적 논쟁이 교회에 영향을 미쳤고 심지어 사회에 영향을 미쳐 어려움이 생기게 되었다. 이로 인해 황제는 325년의 니케아 회의, 아리우스의 논쟁에 관한 회의 등 논쟁을 해결하는 회의의 소집인 이 되었다. 이것 외에도 주교는 더욱 많은 권리를 부여받았고, 로마 백성의 정신과 생활의 실질적인 인도자가 되었다.


(3) 잘못된 교훈으로 인해 교회 안에 누룩이 생김

기독교가 국교화됨으로 말미암아 이교의 신앙과 풍속이 점진적으로 교회 생활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러한 이교의 절기와 사악한 교훈은 마치 마태복음에서 언급된 여인이 가루 서 말속에 몰래 집어넣어 그 전체를 부풀게 한 누룩처럼 교회를 부패하게 하였다. 콘스탄티누스는 원래 태양신을 섬겼으나 주님을 믿은 후에는 매주의 첫째 날을 '태양일(Sunday)'로 정했으며, 또한 원래 태양신 탄일인 12월 25일을 예수께서 태어나신 날이라고 하였다. 초기 교회에서의 떡 떼는 실행은 번거로운 의식이 되었고 경배의 실재가 없는 '미사'와 '성찬'의 의식이 되었다. 게다가 성인(聖人)에 대한 숭배와 성인의 유물에 대한 미신적 신앙, 그리고 외적인 종교 의식은 점차 믿는 이들로 하여금 기존의 순수한 신앙과 경건한 생활을 잃어버리게 하였다. 이때 국교가 일어나고 초보적으로 신학이 발전된 것 이외에 로마 교회의 조직 구조와 교황 제도도 점진적으로 형성되었다. 니케아 회의에서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의 주교는 교구를 초월하는 성(省)의 주교로 지정되었다. 로마 교회와 주교는 계속해서 천하를 호령하였는데, 그들은 로마 교회가 사도 베드로가 친히 세운 교회로서 사도 베드로의 주교 직분을 계승한 것으로 보았다. 또한 로마 교회는 수차례 그노시스파, 아리우스파, 몬타누스파 등의 이단에 맞선 경험이 있었다. 더구나 로마의 지리적, 정치적 우월로 인해 로마 교회는 초기 교회들 가운데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로마 주교도 스스로 기타 주교들보다 우월하다고 여겼다. 451년에 네 번째 대공 의회가 니케아 부근의 칼케돈에서 소집되었는데, 육백여 명의 주교들이 참가하였다. 교회는 그리스도께 완전한 신성이 있음을 재차 확인한 것 외에 다시 그리스도께 온전한 인성이 있음을 인정하였는데, 이는 그리스도께 신성과 인성이 있으나 이 두 본성은 서로 혼합되지 않고 서로 교환되지 않으며 나누어질 수도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 회의는 로마 주교의 우월한 권위를 더 견고하게 하였다.


3).니케아 후반기의 저명한 교부와 저서

4세기 말부터 5세기 초까지 서방 교회의 세 명의 뛰어난 교부는 암부로 시우스(Ambrosius), 제롬(Jerome),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이다. 그들은 "라틴 교회의 아버지라고 불렸다. 니케아 신경의 전폭적인 지지자였던 암브로시우스는 박사로서 저술한 활동을 활발히 하였고 성시(聖詩) 보급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숭고한 도덕적인 생활의 간증을 용감하게 강조하였고 심지어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의 폭력 행사에 대해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공개적으로 죄를 자백하지 않으면 성찬을 받을 수 없다고 강하게 말하였다. 제롬은 340년에 달마티아(Dalmatia)에서 태어났고 로마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 행적은 로마 제국 전체에 미쳤다. 말년에 그는 예수님께서 출생하신 베들레헴으로 와서 죽기까지 동굴에서 은거하며 수도생활을 하였다. 제롬은 서방 교회에서 히브리어를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는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된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불가타(Vulata)"라고 불리는 이 라틴어 성경 번역본은 후에 로마 천주교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354년에 아우구스투스는 북아프리카 타가 스테(Thagaste)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어머니 모니카(Monica)는 경건한 그리스도인이었다. 16세 때부터 아우구스티누스는 북아프리카의 가장 큰 도시인 카르타고에서 공부하였으나 타락한 생활을 했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위해 끊임없이 진리를 추구하였다. 그가 밀란에서 수사학과 연설학의 교수로 있을 때 밀란의 주교는 암브로시우스였다. 그는 새로운 마음으로 암브로시우스의 말씀을 듣기 시작하였고 동시에 수도사들이 성결한 생활을 하는 간증을 듣고 큰 감동을 받았다. 어느 날 그가 로마서 13장 13절과 14절을 읽을 때 성령께서 그를 감동시키시어 회개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밀란 주교의 교의 기초반에 신청하도록 이끄셨다. 이로부터 그는 430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온 마음으로 교회 봉사에 참여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죄 가운데 태어났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 가운데에서 정하신 구원을 통해서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그의 가장 유명한 저작은 <참회록>과 <하나님의 도성>이다. 전자는 초기의 그의 은밀하고 개인적인 삶에 대한 고백과 구원에 대한 심령의 깊은 곳의 느낌이라고 말할 수 있다. 후자는 이교도들의 고소에 대항하기 위해 저술한 것으로 후대의 기독교의 가장 뛰어난 교리 변호 서가 되었다. 아우구스투스의 신학은 중세기 로마 천주교의 기본 틀이 되었고, 마르틴 루터와 기타 개신교의 지도자들은 대부분 이 위대한 교부에게서 일깨움을 얻었다.


4). 교회가 점진적으로 부패됨

계시록에서 요한이 일곱 교회에 쓴 일곱 서신으로부터 교회가 이미 부패되기 시작하였음을 발견할 수 있다. 사도 시대는 약 1세기 말에 끝났고 사도 시대 후반기의 교부들의 저서로부터 교회가 부패되었다는 상황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 후 사백 년 동안 상황은 갈수록 심해졌다. 5세기 말에 이르러 성경에 부합하지 않는 많은 교의와 활동들, 예를 들면 죽은 사람을 위한 기도, 연옥, 순교자 및 성인 숭배, 마리아 숭배, 성직 계급 등이 이미 교회에 뿌리를 내렸다. 숭배 의식은 갈수록 복잡해졌고 말씀은 갈수록 감소되었다. 그 원인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속화되어 응당 가져야 할 생활의 간증을 잃어버리고 죄 가운데 있는 즐거움을 찾는데 있다. 또 다른 원인은 그리스도 및 사도에 대한 교회의 무지와 성경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다. 게다가 당시 이교의 실행과 사상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각 방면에 침투하였다. 특히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은 수많은 이교도들을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하여 세상의 조류가 교회 안의 생명을 삼켜버리게 하였다. 교회가 표면적으로 승리한 그때가 오히려 교회가 크게 시험받은 가장 위험한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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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교회의 역사

 

 

 

인류의 역사는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어 많은 이들이 그들의 일생을 역사를 연구하는데 바쳤지만 역사의 기본적인 의미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가질 수 없었다. 역사를 인식하려면 반드시 기본 원칙과 노선을 정해야 한다. 먼저 우리는 역사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이 인류의 모든 생존과 행동을 지배하고(행 17:26), 그 목적이 그분의 영원한 경륜을 완성하기 위한 것임을 보아야 한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승천하셨으며, 또한 그분의 승천 안에서 면류관을 얻으셨고 보좌에 앉으셔서 모든 인류와 만유의 주가 되시어 온 우주를 관리하고 계시며(행 10:36),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그리스도로서 하나님의 경륜을 완성하시고(행 2:36), 또한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시어(계 1:5), 세상의 정세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의 환경을 안배하시어 그들을 구원하시는 것을 계시한다.

 

그리스도께서 이 위대한 일을 완성하시도록 하나님께서는 강력한 배경이 되는 로마 제국을  예비 하셨다. 열국은 바벨론부터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한편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득죄 함으로써 결국 주전 600년경에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을 헤파하고, 많은 사람들을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아가게 되었고 그들은 조국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바벨론의 패권은 메대 바사 왕조로 넘어갔다. 주전 300년경에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은 메대 바사를 정복하고 그 당시의 통치자가 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었을 때 그의 나이는 삼십여 세의 나이에 불과하였다.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뒤 그의 제국은 분열되었다. 지중해 주위의 열국을 지배했던 제국이 없어지자 로마 제국이 일어나기 전까지 전쟁과 동란이 끊임없이 발생하였다. 점진적으로 로마 제국은 특별히 줄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의 통솔 하에 주위에 있는 열국들을 패배시켰다. 줄리우스 카이사르의 생질의 아들이면서 양자였던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Gaius Octavianus)는 이집트를 정복하였다. 이로 인하여 지중해 주변 모든 땅이 로마의 통치 아래 놓이게 되었다.

 

주전 27년에 옥타비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는 칭호를 얻고 로마의 제1대 황제가 되었다. 그리스도는 아우구스의 통치기에 출생하였다. 누가복음 2장 1절은 "이때에 가이사 아우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라고 말한다. 주 예수님은 첫 번째 정식 황제의 통치 하에 출생하셨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다. 로마가 난동을 일으킨 지역에 내린 명령은 주 예수님이 인류 가운데 평탄하게 출생하실 수 있게 하였다. 당시 흉악범에 대한 로마의 사형 방식인 십자가도 주님의 죽음에 대한 성취되게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복음의 개척은 동일한 언어와 단일화된 통치, 그리고 사방으로 열린 도로와 로마가 세운 질서로 말미암아 매우 편리하게 진행되었다. 비록 신약은 거의 모두가 유대인이 쓴 것이었지만(누가만 유일하게 예외였음.) 헬라어로 쓰였지 히브리어로 쓰이지 않았다. 심지어 로마 제국이 일어나기 이전, 주전 3세기경에 히브리어로 쓴 구약도 이미 헬라어로 번역되었다. "헤라어 70인 역(the Septuagint)"으로 불리는 이 번역본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의 70명의 학자들이 번역한 것이다. 주 예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수차 인용하신 성경 말씀이 바로 헬라어 70인 역이다.

                 

로마가 정복한 영토는 주 단위로 구분되었다. 예를 들면 갈라디아 주, 아시아 주, 아가야 주와 마케도니아 주이다. 이러한 주들은 로마에 예속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제한받지 않고 자유롭게 국경을 넘을 수 있었다. 이 외에도 선박이 지중해를 오갈 수 있었다. 내륙의 운송 방면에 있어서도 로마인은 제국 전체를 관통하는 도로를 건축하였다. 동시에 약탈을 통제하였기 때문에 여행은 매우 안전하였다. 이러한 환경에서 타 지역으로 복음을 개척하러 나가는 것은 매우 편리하였다. 로마 시민들도 법의 보호 아래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일찍이 이러한 권리를 표명한 적이 있었다. 그는 채찍질을 당할 상황에서 백부장에게 "너희가 로마 사람 된 자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행 22:25)라고 정중하게 물었다. 이에 천 부장도 그가 로마 사람인 줄 알고는 그를 결박해 놓은 것을 두려워하였다(행22:29). 후에 바울은 자신의 동포인 유대인들이 베스도 앞에서 그를 고소할 때 자신이 로마 시민이라는 권리를 내세워 황제에게 상소할 것을 요구하였다(행 25:11). 그는 이것으로 인해 보호를 받았다.

 

세계사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이 설령 인류의 역사를 알고 있다고 해도 세상의 정세와 하나님의  움직임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음을 알지 못한다. 사실상 세계정세는 바로 하나님의 안배 하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어떤 민족이든 그 민족의 시기를 정하고 그들로 하여금 이 일을 하거나 저 일을 하도록 정하시며, 각 나라의 영토를 확정하시고(행 17:26) 왕조를 흥왕 시키시고 멸망시키신다. 이것은 성경에서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모든 환경을 안배하시는 이유는 그분의 경륜을 완성하기 위한 것으로,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다음 네 가지를 위한 것이다. (1) 구속을 성취함, (2) 복음을 확산함, (3) 신약의 완성된 사역을 전파함, (4)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함.

 

1). 초기 교회의 배경-고대 로마 제국

​주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은 주님의 위임을 받아 예루살렘과 유다 온 땅과 사마리아에서부터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며 주님의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 그중 유다가 예수님을 팔았기 때문에 맛디아가 사도 직분을 잇게 되었다(행 1:26). 초대 교회의 전승에 의하면 사도들은 후에 세 조로 분류되었다. 베드로와 안드레와 마태와 바돌로매는 흑해 일대로 가서 복음을 전파하였고, 도마와 시몬과 다대오는 중앙아시아의 파티아로 갔으며, 요한과 빌립은 소아시아로 갔다. 에우세비우스(Eusebius)의 교회사도 도마가 파티아로 갔고 안드레는 수구디아로 갔으며 요한은 아시아에 남아 있다가 얼마 안 있어 에베소에서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비두니아 및 아시아로 돌아다니며 곳곳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였고 마지막에 로마로 돌아와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었다고 한다.

2).간략하게 본 로마 제국사

로마는 이탈리아의 중부에 있으며 주전 753년에 티베르(Tiber) 강에 연접한 일곱 개의 언덕 위에 세워졌다. 교회사에서 로마는 실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천 년 동안 로마의 수도였던 이 도시의 구석구석에는 초기의 사도들, 믿는 이들 그리고 수많은 순교자들이 복음과 진리의 전파를 위해 흘린 피와 땀으로 얼룩져 있다. 주전 7세기에 에트루리아인들(Etrurians)이 이탈리아를 침입하여 로마를 점령하고 왕국을 세워 왕정을 실행했는데, 역사는 이를 "왕정 시대"라고 칭한다. 왕정 시대의 사회는 귀족과 평민, 두 계급으로 나누어 있었다. 명의상 왕은 사법과 행정의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실권은 귀족으로 구성된 원로원(Senate)이 쥐고 있었다. 주전 509년 경에 라틴인들이 에트루리아인들의 통치를 물리치고 왕정을 폐지한 뒤 공화정이 수립되었는데, 역사는 이를 "공화정 시대"라고 칭한다. 주전 264년부터 146년까지 로마는 계속해서 카르타고, 시리아, 마케도니아, 그리스 등을 정복하였고 빠른 속도로 영토를 확장하여 대제국이 되었다. 주전 54년에 줄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와 브리튼을 평정하고 훗날 제국의 전제 정치의 기초를 닦았다. 줄리우스가 죽은 뒤 양자인 옥타비아누스가 일어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Marukus Antonius)를 물리치고 혼란스러운 삼두정치(三頭政治)를 마감하였다. 또한 주전 27년에 원로원에서 명명된 "아우구스투스(Augustus, 존귀한 사람)"라는 칭호 하에 옥타비아누스는 정식으로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가 되었다.

3). 로마 제국의 세 시기

로마 제국 시대는 세 시기, 곧 전반기 로마 제국, 위기의 3세기, 후반기 제국 시대로 나뉜다.

(1) 전반기 로마 제국(주전 30년~주후 193년)

아우구스투스의 원수정(주전 30년~주후 14년), 클라우디우스 왕조(주후 14년~68년), 플라비우스 왕조(주후 69년~96년), 안토니우스 왕조(주후 96년~193년)를 포함한다. 전반기 로마 제국은 상대적으로 안정된 시기였다. 상업이 발달하고 통상 범위도 확대되었다. 노예의 노동력에 의존한 대농장 제도는 후퇴하였고 대지주의 대농장이 소작인에 의해 경작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유 농의 수가 줄면서 변동이 심하여 사회 불안의 요인이 잠재되어 있었다. 이때 제국의 국경은 동으로는 유프라데스 강으로부터 서로는 스페인, 브리타니아(Britannia)까지 이르렀고 남으로는 북아프리카에 이르렀으며 북으로는 다뉴브 강과 라인 강까지 이르렀다.

(2) 위기의 3세기(주후 193년~284년)

세베루스 왕조(주후 193년~235년) 및 그 후 분열된 시기를 포함한다. 이 당시 제국의 위기는 경제 방면에서 충분히 표출되었는데 농업과 수공업이 쇠락하고 상업과 도시경제가 불황이었다. 정치 방면에 있어서 통치계급 내부에 분열이 있었고 백성들이 봉기하였으며 이민족이 침입하였다. 기독교가 신속하게 발전하였다는 것은 위기가 사람들의 정신세계에까지 깊게 침투하였다는 것을 반영한다.

(3) 후반기 제국 시대(주후 284년~476년)

​이러한 제국의 위기는 결국 제국의 멸망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 당시 로마제국은 원수제(Princeps)에서 군주(Dominus)로 전환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Gaius Aurelius Valerius Diocletianus, 약 주후 243년~313년)와

콘스탄티누스(Flavius Valerius Constantinus, 약 주후 280년~337년)의 통치 시기에 황제의 권력은 강화되었고 두 사람은 노예제도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개혁에 힘을 다했으나, 노예제도의 위기는 날이 갈수록 더하였고 백성들의 봉기는 전국으로 퍼졌다. 395년에 황제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주후 346년~395년)가 죽은 뒤 로마 제국은 동서로 분할되었다. 서로마 제국은 로마를, 동 로마 제국은 비잔티움(Byzantium)을 각기 수도로 정하였다. 4세기 이후 게르만 민족이 대대적으로 로마를 공격하였고 국내에서는 백성들의 봉기의 물결이 더욱더 높아졌다. 410년에 게르만 민족의 서고트족(Visigoths)이 지도자 알라리크(Alaric)의 인도 하에 이탈리아로 들어와 로마 성을 에워싸고 공격하였다. 성 내부에서 봉기를 일으킨 서고트족의 노예들이 성문을 열어 서고트족이 로마성을 공격해 들어왔다. 육일 밤낮 동안 서고트족이 로마 성을 약탈하여 즉시 모든 거리가 피로 물들었다. 일찍이 전 세계를 장악하였던 이 성이 이제는 오히려 약탈당하였다. 그 후 게르만 민족이 로마의 영토에서 많은 왕국들을 계속해서 세웠다. 이와 동시에 노예를 핵심으로 하는 백성들이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켜 서로마 제국은 멸망 직전에까지 이르렀다. 476년 서로마 제국의 게르만 출신 용병대장인 오도아케르(Odoacer)가 로마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Rommulus Augustulus)를 축출하여 서로마 제국은 멸망하였고 이후로 서유럽은 봉건사회로 들어가게 되었다. 동 로마 제국은 다른 역사적 조건 하에서 1453년까지 존속하였다.

4). 그리스도인에 대한 로마 제국의 열 번의 주된 박해

그리스도인에 대한 로마 제국의 박해의 잔혹함은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는 바이다. 5세기의 교회 역사학자인 오로시우스(Orosius)는 로마 제국의 박해를 네로(Nero),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트라얀(Trajan), 아우레리우스(Aurelius), 세베루스(Severus), 막시무스(Maximus), 데키우스(Decius), 발레리아누스(Valerianus), 아우렐리아누스(Aurelianus),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로 나누었다. 그리스도에 대한 네로 황제의 박해는 매우 잔혹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동물의 가죽을 입혀 원형 경기장에서 야수에게 갈기갈기 찢기게 하거나 그리스도인을 건초와 함께 묶어 야외 파티 장소를 밝히는 횃불로 삼았다. 교부 클레멘트(Clement)의 기술에 따르면 바울과 베드로는 네로의 박해로 순교하였다고 한다. 네로가 죽은 뒤, 도미티아누스가 계속해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들이는 동시에 백성들에게 자신을 주와 신으로 존칭할 것을 요구하였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사도 요한은 도미티아누스의 재위 시에 밧모 섬으로 유배되어 계시록을 썼다고 한다. 그 후에 트라얀 황제는 스스로 그리스도인임을 인정하는 모든 사람을 처형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의 통치기에 예루살렘의 감독인 시메온(Symeon)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안디옥의 감독인 이그나티우스(Ignatius)는 사자에게 물려 죽었다. 서머나의 감독인 폴리캅(Polycarp)도 피우스(Antoninus Pius)의 재위기에 순교하였다. 161년부터 222년까지 교회는 매우 큰 박해를 받았는데, 순교자 저스틴(Justin Martyr)은 이 시기에 살해당했다. 그 후 30년 동안 박해가 잠시 중단되어 그리스도인들의 긴장이 풀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250년에 데키우스 황제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을 포기하고 로마의 신에게 제사를 드리라는 명을 내렸을 때, 많은 이들이 느슨하고 안일하게 되어 참된 믿음을 버렸다. 그러나 260년부터 303년까지 교회는 다시 급속히 발전하였고 인수도 크게 증가하였다. 

303년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제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로마 시민에게 통일된 신앙을 요구하였다. 그는 성경을 불태우라는 명을 내리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우상에게 제물을 드리거나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을 먹을 것을 강요하였고, 또한 제사에 드린 술을 시장에서 파는 음식에 뿌려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배반하든지 굶어 죽든지 한 가지를 선택하게 하였다. 이 박해 기간에 살아남은 교회 역사학자인 에우세비우스는 박해자의 폭행과 순교자의 사적을 친필로 기록하였다. (한국복음서원 교회사 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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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사] 초기 교회의 역사

 

 


초기 교회의 역사

 

1). 로마에서의 바울과 베드로의 발자취

오순절 이후로 교회들이 세워지고 복음이 팔레스타인의 예루살렘 일대에서 로마의 전 영토로 신속하게 확산되었다. 예루살렘의 큰 박해로 인해 제자들이 각지로 흩어졌는데, 먼저는 시리아의 안디옥에 이르렀고 이어서 시리아, 길리기아, 아시아, 마케도니아, 아가야 등으로 확산되었고 결국 이탈리아의 로마에까지 이르렀다. 사도행전 18장은 아굴라와 부리스길라가 원래는 로마에 거했는데 클라우디우스(Claudius) 황제의 박해로 인해 로마를 떠나 고린도에 거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바울을 만나게 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바울은 일찍이 두 번 로마 감옥에 갇힌 적이 있었다. 첫 번째는 62년에서 64년 사이에 유태인의 고소로 인한 것이었다(행 28:17-20). 그 기간에 그는 골로새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그리고 빌레몬서를 썼다. 자신을 위한 변호에서 승리를 거두고 석방된 뒤 바울은 다시 에베소와 마케도니아를 방문하였고(딤 전 1:3) 그곳에서 디모데전서를 썼다. 바울은 67년 네로 황제가 그리스도인들을 대대적으로 박해할 때 두 번째로 투옥되었고, 그곳에서 순교하였다. 순교하기 전에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디모데후서를 썼다. 교회사에 있어서 바울은 진리 방면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가 쓴 열네 서신은 하나님의 뜻을 매우 안전하게 계시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완성하는 그의 사역은 요한의 보수하는 사역과 베드로의 사람을 얻는 사역과 함께 신약의 3대 사역이다. 진리를 변호하고 신성한 계시를 전파하는 사역에 있어서 바울의 일생은 향기로운 전제와 같이 후세 사람들의 믿음의 일에 부어졌다. 그리하여 주님의 일이 더욱 힘차게 전진하게 되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사도 베드로도 일찍이 로마를 방문하였고 또한 바울과 거의 동일한 시기인 네로의 제위기에 로마에서 순교하였다고 한다. 클레멘트, 오리게네스(Origenes), 이그나티우스 등과 같은 많은 초기의 교부들은 그들의 서신 가운데에서 이 일을 언급하고 있다. 에우세비우스의 교회사는 더욱 분명하게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클라우디우스가 통치할 때 하나님의 인자와 은혜로운 안배로 위대하고도 능력 있는 사도 베드로가 로마 성으로 가도록 인도 받았고, 그는 그곳에서 용감하게 앞장서서 이 악한 무리들(사기꾼 시몬을 가리킴)을 대항하였다. 베드로는 신성한 군복으로 무장한 하나님의 존귀한 장군과 같았고 당시 동방에서 서방으로 놀라운 계시의 빛을 가득 가지고 온 사람이었다. 그는 빛과 유익한 교훈을 전했고 하나님의 왕국을 전파하였다."

 

 


2). 초기 교회의 신앙과 실행

초기 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과 교통 안에 견고히 머물며 지속적으로 이집 저집에서 떡을 떼며 기도하였다. 박해로 인해 믿는 이들은 대부분 소규모로 집에서 집회를 하였다. 바울이 교회에 쓴 서신에서 우리는 이미 "경륜', "분배" 등의 단어와 '사람이 하나님이 되는' 성화(聖化) 의 사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후반기의 교부들의 저서에서 이러한 진리들에 언급이 점차 적어졌으며  심지어 사람들에게 잊히게 되었다.   초기 교회가 보편적으로 준행한 "12사도 유훈(遺訓)"에는 단지 생명을 얻는 길과 사망에 이르는 길, 그리고 침례, 금식, 만찬 등의 실행 상의 규례만을 기록하고 있고, 곳곳에서 그 당시 경건에 대한 가르침과 도덕을 중시한 것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예를 들면  "12사도 유훈"의 제14장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주일에 여러분이 집회에서 떡을 떼고 축사할 때 여러분의 죄를 자백해야만 그 후에 여러분의 제물이 정결케 될 수 있다. 무릇 동반자와 다툰 자는 그들이 다시 화목하게 될 때까지 다른 이들과 집회하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 그러나 침례, 금식, 떡을 떼는 것등의 실행은 세부적인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의문과 형식에 치우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3).초기 교회의 내부적인 어려움

외부의 압력 이외에도 초기 교회는 이단의 해를 입었고 논쟁으로 인한 분열의 문제에 부딪치게 되었다. 이 두 방면은 교회의 생명에 매우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우리는 반드시 과거의 이단을 인식함으로 우리가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움을 받아야 하고, 동시에 과거에 있었던 분열이 가져온 피해를 경계로 삼아 하나의 간증을 유지하는데 노력을 다해야 한다. 교회가 가장 초기에 직면한 이단은 에비오니즘(Ebionism)이다. "에비오니"의 원문의 뜻은 '빈궁'이라는 뜻이다. 교부 터틀리안(Tertullian)의 해석에 따르면 그들이 에비오니파로 불린 이유는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인식이 너무 빈궁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 에비오니파에 있어서 주된 것은 유태인의 신앙이었는데, 그들은 기독교를 유태화 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강조하였는데, 비록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였으나 그분이 육체가 되신 하나님이심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은 종으로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수복과 성결함으로 인해 그분을 아들로 인정하셨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이 단지 신분에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이지 실제적으로는  사람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도세티즘(Docetism)은 에비오니파와 거의 동시에 출현하였다. 이 파는 물질세계가 악하다고 믿었기에 성결한 본체를 가지신 하나님께서 물질에 속한 육체를 취할 수 없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육신에 대하여 매우 다른 견해를 가졌다. 그들은 성육신이 진정으로 발생하지 않았으며 그리스도의 육신은 단지 하나의 환영(幻影)으로 사람들에게 일종의 환각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그들은 그분이 실제적으로 물질세계 가운데 출현한 것과 세상 사람들이 본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환영에 불과하며,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고통받은 이는 실제로 주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단지 환영일 뿐이라고 여겼다. 사도 요한이 쓴 복음서와 서신서에서도 항상 이들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이들에 대해 반박하고 있다. 이상의 두 이단보다 더 체계적이고 깊게 영향을 미친 것은 그노시스주의(Gnosticism, 영지주의)이다. 그노시스주의는 기본적으로 동방의 이원론과 신비 신앙 및 헬라 철학의 혼합체이며, 후에 다시 기독교의 외투를 걸친 것이다. 바울 시대에 고린도와 골로새 교회에는 이미 그노시스파가 출현하였다. 그노시스파는 주후 80년에서 150년 사이에 형성되었으며 마지막에는 교회와의 관계에서 벗어나 스스로 한 계파가 되었다.

교회가 그노시스파의 해를 처리하는 데 분주할 때 또 다른 극단주의가 출현하였다. 이 극단주의는 몬타누스주의(Montanism)이다. 몬타누스주의는 140년 경에 일어났는데, 성령의 능력과 선지자의 강론을 강조하였다. 그들은 예수님 이후에도 하나님께서 여전히 끊임없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선지자를 통해 인류에게 계시하고 있다고 여겼다. 성령의 실재성을 특별히 중시하였기에 그들은 스스로 완전한 성결의 생활을 살아야 된다고 요구하였는데, 그것은 거의 고행에 가까웠다. 그들은 술을 입에 대지 않았고 항상 금식하였으며, 주님의 다시 오심을 열렬히 기다렸고 또한 그들이 살아 있을 때 주님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믿었다. 이단의 출현에 대응하기 위하여 교부들은 기독교의 기본 신앙을 체계적으로 표방하였을 뿐만 아니라 상세하게 해석하였다. 이처럼 교회의 정통 신학은 점진적으로 형성되었고 성경의 정경(正經)도 동시에 확립되었다. 약 1세기의 발전을 거친 뒤 정통 신학은 주후 325년에 이전에 없었던 가장 큰 도전에 직면하였는데, 이는 바로 아리우스주의(Arianism)의 출현이었다. 그것은 가장 격렬한 신학 논쟁 가운데로 빠지게 하였고, 신학도 이로 인해 이성화되고 분석화되었으며 논쟁으로 가득한 색채를 띠게 되었다. 당시 교회는 이로 인해 분열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논쟁을 거치면서 그 정기는 크게 손상받았다. 아리우스(Arius, 256년~336년)는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장로였는데, 그는 그리스도가 자존하시면서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으며, 성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기 전에는 근본적으로 존재하시지 않았다고 믿었다. 이러므로 성자와 성부의 본질은 차이가 있기에 신성한 삼일성의 진리는 이로 인해 동요되었다. 이 이단을 처리하기 위하여 교회는 이전에 없었던 큰 회의를 소집하였는데, 이 회의는 325년에 니케아에서 거행되었다. 당시 적지 않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아리우스를 지지하였으나, 결과는 정통 신앙이 승리를 거두었고 그리스도와 아버지 하나님은 그 본질이 같고 동등하며 동일한 영광을 갖고 있다는 진리도 확립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풍파가 가라앉자, 또 다른 풍파가 일어났다. 논쟁의 초점은 삼일성의 위격에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로 이전되었다. 먼저 문제를 일으킨 이들은 네스토리우스파(Nestorians)였는데, 이들은 *경교(景敎)의 선구자였다. 네스토리우스파의 문제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분별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이 둘은 서로 상관이 없는 것으로 나누었으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인성을 단지 신성을 담는 용기로만 여기는 데 있었다. 교회는 회의에서 네스토리우스파를 이단으로 정죄하였고, 그들의 신성과 인성이 나누어질 수 없으며 또한 이 둘이 연합한 것임을 믿는다고 분명히 밝혔다. 그리스도는 참된 하나님이시자 동시에 참된 사람이시다. 네스토리우스파가 불러일으킨 논쟁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연합에 대한 각종 논쟁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 가운데에는 그리스도께서 육체가 되신 후, 그분이 한 분이신가 두 분이신가, 단지 하나님이신가 아니면 하나님이시면서 또한 사람이신가, 하나님과 사람이 동시에 존재하는가에 관한 논쟁이 있었다. 이러한 논쟁들을 처리하기 위하여 교회는 많은 정력과 시간을 쏟아부었고 수많은 회의를 소집하였으나 논쟁할수록 더 복잡해졌다. 451년에 교회는 칼케돈(Chalcedon)에서 회의를 소집하여 그리스도에 관한 논쟁을 철저하게 해결하였다. 회의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절대적으로 진실된 것이며 동시에 그리스도는 오직 한 인격이며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본성과 사람의 본성은 서로 함께 연합되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칼케돈 공의회(Council of Chalcedon) 후에 정통 신앙은 더욱 분명한 표현을 얻게 되었고 또한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져 논쟁이 비로소 끝나게 되었다.

4).초기 교회의 유명한 교부와 저서

이 시기의 교부들은 사도 후반기와 니케아 전반기의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사도 후반기의 비교적 유명한 교부들은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Ignatius), 서머나의 폴리캅(Polycarp), 로마의 헤르마스(Hermas) 그리고 순교자 저스틴(Justin)을 들 수 있다. 니케아 전반기의 유명한 교부들은 이레니우스(Iranaeus), 터툴리안(Turtulian),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그리고 오리게네스(Origenes)을 들 수 있다. 로마의 클레멘트는 제3대 로마 감독을 역임하였는데, 일찍이 고린도인들에게 서신을 보내 그들 가운데에서 장로를 내쫓고 당파를 결성한 혼란을 책망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를 "클레멘트 서신"이라고 칭했다.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는 로마로 순교하러 가는 길에 일곱 서신을 써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높였고 믿는 이들이 자신들의 감독과 장로를 존중해 주기를 희망했다. 폴리캅은 일찍이 사도 요한의 제자였는데, 사도 시대와 니케아 전반기 사이에 있는 작가들 간의 중요한 교량이 되었다. 폴리캅은 견고하게 기독교를 보호한 사람으로 항상 성경의 말씀을 인용하여 당시 그노시스파의 이단인 마르키온(Marcion)과 논쟁을 벌였고, 주님을 위해 충성을 다하고 86세의 고령으로 순교하였다. 로마의 헤르마스는 계시록의 형식으로 <헤르마스의 목자(The Shepherd of Hermas)>를 썼는데, 그 내용은 이상과 교훈 그리고 비유를 포함하면서 죄의 회개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외에도 <바나바 서신(Catholic Epistle)>, 이름을 알 수 없는 <사도들 서신>등이 널리 읽혔다. 폴리캅의 제자인 이레니우스는 로마 천주교회의 위대한 신학자 중 한 사람이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이단에 반대하며(Against Heresies)>인데, 그는 여기에서 그노시스주의의 교훈에 반박하였으며 하나님의 삼일성에 관한 선구자가 되었다. 터툴리안은 북아프리카의 교부로 교리를 보호하는 수많은 작품들을 썼으며, 당시의 <아버지 하나님의 고난받음>이라는 이단에 반박하는유명한 <프락세아스에 반박하며(Against Praxeas)>라는 책은 삼일 하나님의 과점을 분명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의 <인간론(De Anima)>은 성경 심리학에 관한 첫 번째 저서였다. 오리게네스는 교회 역사에 있어서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신학자로서 그의 성경관과 삼일 하나님의 관점은 그 나름의 가치를 갖고 있다. 오리게네스의 영혼론은 신비주의와 금욕주의의 영향을 받아 한쪽으로 치우쳤기 때문에, 543년 콘스탄티노풀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한국복음서원 교회사 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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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과학] 석탄의 베일을 벗기다

 

 

 

석탄의 베일을 벗기다!

 

지구상에 검고 가벼운 에너지원이 있습니다. 바로, 석탄입니다. 지구상에는 엄청난 양의 석탄이 매장되어 있습니다. 오랫동안 연료로 사용되어 왔는데도 아직 많은 양이 남아있습니다. 이 석탄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석탄은 탄화된 나무입니다. 마치 숯과 같죠. 공기가 차단된 상태에서 가열을 하면 숯이 됩니다. 그러므로 석탄이 만들어지려면 공기가 차단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석탄은 나뭇의 가지나 잎보다는 대부분 나무의 껍질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석탄이 만들어지려면 공기가 차단되고, 나무자체와 껍질이 분리되는 어떠한 과정이 있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석탄에 관한 기존의 이론들은 늪지대에서 오랫동안 나무가 쌓이고 쌓여서 만들어졌다고 주장합니다. 만약 그 이론이 사실이라면 발견되는 석탄에 나무자체나 나뭇잎의 성분이 많아야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습지에서 나무들이 쌓여 석탄이 만들어진 경우는 없습니다. 
 

석탄의 형성을 설명하는 가장 설득력 있는 이론은 ‘떠다니는 매트이론’입니다. 바로 옆의 <그림 2>와 같은 모양입니다. 언젠가 나무들이 뽑히는 사건이 발생했고, 동시에 이들을 떠다니게 했던 홍수가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떠다니던 나무의 껍질들이 물에 의해 느슨해지고 무거워져서 아래로 가라앉은 것입니다. 이들이 밀려오는 흙에 의해 덮이고 이어서 열을 받아 석탄이 되었다는 이론입니다. 

 

 

석탄은 현재 지구상에 엄청난 규모와 면적으로 분포하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오늘날에 일어나는 어떤 사건도 이런 규모의 석탄을 만들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무가 뽑히는 사건과 함께 나무와 껍질이 분리되는 전지구적인 홍수만이 이것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노아홍수는 ‘모든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라고 시작합니다. 이는 엄청난 양의 나무가 뿌리 채 뽑히는 조건입니다. 또한 엄청난 나무껍질들은 천하의 높은 산이 잠기는 홍수 동안 마치 매트처럼 떠다녔으며, 물에 의해 느슨해지고 무거워진 나무껍질들은 가라앉아 쌓이고, 그 후에 열을 받아 석탄이 된 것입니다. 노아홍수는 석탄 형성의 필요충분조건입니다.
 

글/ 이재만 선교사(한국창조과학회 미서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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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학교 교사들을 위한 기도

 

 

 

구원의 하나님,

무지하며 교만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저희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또한 생활 가운데 주님의 선하신 은혜를 체험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저희에게 진실한 믿음에서 나오는 지혜와 용기를 주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는 도구가 되게 인도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주님께서 저희에게 맡겨주신 모든 일들을 철저하고 지혜롭게 잘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허락하여 주십시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 갈 때 생기는 여러가지 어려움들도 잘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약하고 악한 저희들을 강건케 하시어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할 수 있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오늘은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회학교 교사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어린 영혼들을 하나님 말씀으로 양육하는 그들에게 함께 하여 주십시오.

먼저는 그들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교사로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언제나 기억하게 해주십시오.

그래서 늘 기도하게 하시어 두려움으로 가르치는 교사들이 되게 해주십시오.

또한 아이들에게 존경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그들이 되길 원합니다.

아이들이 보고 따를 수 있는 모범적인 교사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이들의 필요를 잘 채우도록 아이들의 행동과 마음을 잘 살펴보는 교사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무엇보다 교사로서 남다른 사랑과 인내가 넘치게 도와주십시오.

 

어린 아이들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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