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에 관하여 알아야 할 내용

 

 

 

한편 부활절을 의미하는 영어 '이스터'(Easter)는 고대 앵글로 색슨어인 Eastre와 Ostara가 합성된 말로, 유럽의 튜튼족이 숭배한 새벽과 봄의 여신을 뜻하는 말에서 유래된 것이다. 즉 새벽은 어둠을 물리친다는 의미에서, 봄은 새 생명이 겨울을 이기고 나온다는 의미에서 각각 부활절의 의미와 관련이 있는바 두 단어를 합성하여 부활절을 가리키는 명칭이 되었던 것이다.
 

부활절의 유래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기록들이 비교적 많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대부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자체에 관련된 것이며 부활절의 기념과 그 행사에 대한 것은 유월절과 관련되어 잠깐 언급될 뿐이다(고전 5:7).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그들의 종교력으로 1월인 니산월 14일, 즉 유월절에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였다. 이렇게 유월절이 부활절로 변용되어 기념된 것은, 예수의 부활이 유월절기에 이루어졌다는 사실과 출애굽시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게 하심으로 당신의 택한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구속과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 사역이 그 의미에 있어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출 12:13).

 

전통적으로 소아시아 지역의 동로마 교회들의 성도들은 부활절에 양고기를 먹으면서 승리의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기도 했는데, 이는 오늘날에도 일부 나라에서 행해지고 있다. 또한 부활 주일 이전의 월요일로부터 토요일까지 고난 주간 행사로 금식이 행해졌고,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부활주일에는 함께 애찬과 성찬을 나누는 관습이 있었다.

 

그러나 서로마 교회들은 어떻게 부활절을 기념했는지, 또 그 시기는 언제였는지 확실히 알려진 것은 없다. 서로마 교회에서는 유월절에 기초해서 부활절을 기념하는 동로마 교회와는 달리 유대 전승에 근거한 부활절을 거부하고 보다 성경의 기록에 근거한, 로마 전승을 반영한 부활절을 기념하기를 원했다. 이러한 이유로 동, 서로마 교회는 부활절 시기 문제에서 합의를 보지는 못했으나, 이날을 성대하게 기념한 것은 동일했다.

 

A.D. 325년 니케아 회의에서 부활절 시기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진 이후부터, 이들 교회들은 부활절과 관련한 보다 다양한 행사를 갖게 되었다. 각 교회들은 부활절 전날 촛불을 밝히며 부활절 전야제 등을 거행하였다. 또한 이날 교회에서는 예배 시간에 모세 오경과 주님의 수난 설화 등을 낭독하였으며, 성유를 바르는 의식 및 성찬을 행하였다.

 

부활절의 풍습

 

▶ 부활절 새벽 예배(일출 예배)

 

부활절에 행해지는 대표적인 풍습으로 부활절 새벽 예배가 있다. 이는 초대 교회 시대부터 행해진 것으로, 초대 교회 성도들은 부활절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하기 위해 위로 세 번 뛰어 오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구름을 뚫고 찬란하게 비치는 태양 광선은 기쁨의 춤을 추는 천사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하며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해가 솟아오르는 순간을 보기 위해 새벽에 넓은 들이나 언덕 꼭대기에 모여 기도와 노래, 부활 축하 타종 등으로 해돋이 순간을 맞이하였다.

오늘날도 이러한 풍습은 유럽 등지에서 행해지며 미국에서는 새벽 예배 형식으로 행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부활절 연합 예배로 곳곳에서 새벽 예배를 드린다.

 

▶ 부활절 행진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행해지는 풍습으로 부활절 행진이 있다. 이는 부활절 아침에 예배를 마친 사람들이 꽃과 부활절 촛불로 장식된 십자가를 선두로 행렬을 지어 기도를 음송하고 부활절 찬양을 부르며 마을을 행진하는 풍습이다. 이때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흰 예복을 입었으며, 이미 세례를 받은 사람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었음을 축하하는 뜻으로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이 행렬에 참가하였다.

이러한 부활절 풍습은 원래 콘스탄틴대제 때 의회에서 명령한 것으로, 이는 부활절에는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한데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나 종교 개혁 이후로 이러한 부활절 행진은 부활의 참 뜻을 기리기보다는 의상에 너무 치중하는 부활절 패션 행진으로 되어가고 있다는 비난과 함께 거부되었다.

 

▶ 부활절 달걀 나누기

 

부활절에 달걀을 나누어 주는 풍습은 많은 부활절 풍습 중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것이다. 달걀은 봄과 풍요의 상징으로, 달걀을 주고받는 것은 원래 새해에 행해졌다고 한다. 그런데 유대의 종교력으로 새해가 시작되는 때는 주님이 고난 받으심을 기억하며 경건히 보내야 하는 사순절 기간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주님의 살아나심을 축하하는 부활절로 옮겨지게 된 것이다.

붉은 색 또는 그 밖의 여러 색의 물감으로 색칠한 달걀을 선물로 주는 풍습은 어느 불우했던 부인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어느 한 부인이 남편을 잃고, 살던 집조차 빼앗겨 살길이 막막했을 때 마을 사람들이 그 부인을 도와주었다. 마을 사람들의 친절을 늘 감사하게 생각했던 부인은 그 마음에 보답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부인은 그 방법으로 친절한 마을 사람들을 축복하는 글과 성경 구절을 달걀에 써서 동네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이것이 점점 보편화 되었다고 한다.

 

한편 부활절 달걀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상징으로 그 껍질은 예수님이 사흘 동한 머무르셨던 바위 무덤을, 달걀 껍질에 칠하는 붉은 색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흘리신 피를 상징한다는 주장도 있다. 기독교인들은 부활절에 채색한 부활절 달걀을 이웃이나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오늘날 교회에서도 이날 다양하게 장식한 부활절 달걀을 성도들에게 나누어 준다.

  

▶ 부활절 타종

 

부활절에 종을 치는 풍습은 러시아, 폴란드 등지에서 행해졌던 고대 풍습이다. 우크라이나 지방 같은 경우 부활절을 연중 가장 중요한 날로 여겼기 때문에 이를 축하하며 부활의 사실을 널리 알리기 위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교회의 종을 울렸다고 한다. 부활절 종소리는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도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기쁜 소식을 실어다 주며, 엄숙하고 경건한 가운데 주님의 부활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였다.

  

▶ 부활절 촛불 밝히기

 

부활절 전야에 촛불을 밝히는 풍습은 이미 3세기 중엽 로마 교회 등에서 행해진 것이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부활절 전야에 밝힌 촛불로 인해 도시 전체가 환하여 졌다고 한다. 이때 사람들은 각자 밝힌 촛불을 들고 교회에 와서 철야 예배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이 풍습은 새해 아침에 제단에서 행해지던 예식, 즉 부싯돌로 새로운 불을 붙여 그 불을 다른 양초들에 옮겨 붙이던 예식에서 유래된 것이다.

촛불을 밝히는 것은 이 땅에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기념하며 우리 성도 역시 빛으로 살기를 다짐하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서 중세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사랑받는 풍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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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에 관하여 알아야 할것

 


 

 

사순절을 뜻하는 영어 렌트(Lent)는 고대 앵글로 색슨어 Lang에서 유래된 말로, 독일어의 Lenz와 함께 '봄'이란 뜻을 갖는 명칭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40일간의 기념일'이라는 뜻의 희랍어인 '테살코스테'를 따라 사순절로 번역한다. 이는 부활주일을 기점으로 역산하여 도중에 들어있는 주일을 뺀 40일간을 주의 고난과 부활을 기념 묵상하며 경건히 보내고자 하는 절기이다.

 

40이란 수는 예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시험받으심, 40일간 시내산에서의 모세의 금식, 이스라엘의 40년간의 광야 생활, 예수의 부활에서 승천까지의 40일 등과 같이 성경에 여러 번 고난과 갱신의 상징적 기간으로 등장한다. 이에 고난 주간을 포함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인의 구속을 위해 수난을 당하신 사건에 담긴 구속사적의의를 살펴보며 자신의 신앙을 재 각성하고자 비교적 긴 40일간의 절제 기간을 갖는 것이 바로 사순절이다. 사순절은 항상 수요일부터 시작되는데, 이 날은 재의 수요일, 성회 수요일, 속죄일 등으로 불리워진다.

 

사순절의 유래

 

사순절은 초대 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를 기념하는 성찬식을 준비하며, 주님이 겪은 수난에 동참한다는 의미를 가진 금식을 행하던 것으로부터 유래되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준비하기 위해 유월절 전에 금식을 행했는데, 초대 교회 성도들도 신앙의 성장과 회개를 통한 영적 준비라는 차원에서 구약의 유월절 만찬을 새롭게 해석하여, 주님께서 제공하신 성찬식에 앞서 금식을 행했던 것이다. 또한 사순절이 끝나는 부활절에는 새로 영접되는 성도의 성례식이 있게 되는데, 세례 예비자들은 이때 세례와 입교(入敎)를 받기 위하여 두 주간의 준비기를 두고 금식과 기도로 신령한 훈련에 참여하기도 했다.

 

사순절 행사로서의 금식은 수세기 동안 매우 엄격하게 지켜졌다. 사순절의 식사로는 저녁 전에 한 끼 식사만이 허용되었으며, 물고기와 고기 등의 육류는 물론 우유와 달걀로 만든 음식까지도 금지되었었다. 그러나 8세기 이후로 가면서 이 규정은 많이 완화되기 시작해 14세기에는 금식 기도 대신에 절식 기도가 행해졌으며 , 15세기에 와서는 정오에 식사하는 것이 일반적인 종교 관습이 되었고, 저녁 시간에도 간단한 식사인 콜레이션(collation)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사순절 기간 동안에 연극, 무용, 연애 소설 읽는 것과 같은 오락 해위는 여전히 금지되었으며, 화려한 옷을 입는 것, 좋은 음식을 먹는 것 등 호화 생활 등도 자제되었다. 대신 자선과 예배 참석, 기도 등이 권장되었다.

  

사순절의 풍습
 
 

▶ 종려나무의 재로 이마에 십자가 그리기

 

종려나무를 태운 재 혹은 숯으로 이마에 십자가를 그리는 풍습은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Ash Wendnesday)에 행해지던 풍습이다. 이때 사용되는 재는 지난해 종려 주일에 사용했던 종려나무를 태워 만든 것으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대속의 죽음으로 이끌었던 인간의 죄에 대한 참회의 표시로 이마에 십자가를 그렸다. 이는 또한 아름다운 풀과 꽃이 잠깐 후면 마르고 시들 듯 세상의 모든 부귀와 영화도 잠시 잠깐 후면 사라지고, 한 줌의 흙에서 왔던 우리도 또 다시 흙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엄숙한 인생의 교훈을 담고 있다. 또한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될 우리의 삶의 자세를 정비한다는 점에서도 그 의미를 가지고 있다.

  

▶ 금식 기도

 

금식은 사순절의 가장 중요한 관습이었다. 시기와 장소에 따라 금식의 기간과 그 엄격성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구속 사역을 기리고 하늘나라의 백성됨을 감사하며 그 백성 된 자로서의 삶의 자세를 돌이키게 하는 금식 기도는 초대 교회 시대부터 행해졌었다. 오늘날 행해지는 금식 기도는 엄격했던 초기의 형태에서 많이 변형되어 절식(節食) 기도의 형태로 행해지고 있다.

  

▶ 구제와 선행 베풀기

 

사순절에는 범죄한 인류를 위해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의미에서 불우한 이웃을 위한 구제와 자선이 행해졌다. 특히 사순절에 행해지는 금식 기도를 통해 주님의 고난에의 동참, 불의한 자신에 대한 회개뿐만 아니라 불우한 이웃의 배고픔과 가난을 생각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의 실천에 있음을 기억할 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사랑을 본받아 이를 실천함은 성도의 마땅한 자세라 할 것이다.

 

성 고난 주간(Holy passion week)의 금요일에 죽어 장사되신 주님은 삼일만인 일요일, 곧 주일날 스스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 하셨다. 부활절은 이를 기념하는 주일날을 가리킨다.

 

초대교회에서는 부활절을 '파스카'(Psacha)로 불렀다. 이는 구약의 유월절(Passover)을 뜻하는 히브리어 '페사흐'( j s p )에서 나온 말이다. 이는 구약의 초대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유월절 양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구속 희생을 당한 사실에 근거하여 구약의 유월절을 예수의 부활 기념일로 변용시켜 기념한데서 유래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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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초기 교회의 역사

 

 

 

 

1). 로마에서의 바울과 베드로의 발자취

오순절 이후로 교회들이 세워지고 복음이 팔레스타인의 예루살렘 일대에서 로마의 전 영토로 신속하게 확산되었다. 예루살렘의 큰 박해로 인해 제자들이 각지로 흩어졌는데, 먼저는 시리아의 안디옥에 이르렀고 이어서 시리아, 길리기아, 아시아, 마케도니아, 아가야 등으로 확산되었고 결국 이탈리아의 로마에까지 이르렀다. 사도행전 18장은 아굴라와 부리스길라가 원래는 로마에 거했는데 클라우디우스(Claudius) 황제의 박해로 인해 로마를 떠나 고린도에 거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바울을 만나게 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바울은 일찍이 두 번 로마 감옥에 갇힌 적이 있었다. 첫 번째는 62년에서 64년 사이에 유태인의 고소로 인한 것이었다(행 28:17-20). 그 기간에 그는 골로새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그리고 빌레몬서를 썼다. 자신을 위한 변호에서 승리를 거두고 석방된 뒤 바울은 다시 에베소와 마케도니아를 방문하였고(딤 전 1:3) 그곳에서 디모데전서를 썼다. 바울은 67년 네로 황제가 그리스도인들을 대대적으로 박해할 때 두 번째로 투옥되었고, 그곳에서 순교하였다. 순교하기 전에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디모데후서를 썼다. 교회사에 있어서 바울은 진리 방면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가 쓴 열네 서신은 하나님의 뜻을 매우 안전하게 계시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완성하는 그의 사역은 요한의 보수하는 사역과 베드로의 사람을 얻는 사역과 함께 신약의 3대 사역이다. 진리를 변호하고 신성한 계시를 전파하는 사역에 있어서 바울의 일생은 향기로운 전제와 같이 후세 사람들의 믿음의 일에 부어졌다. 그리하여 주님의 일이 더욱 힘차게 전진하게 되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사도 베드로도 일찍이 로마를 방문하였고 또한 바울과 거의 동일한 시기인 네로의 제위기에 로마에서 순교하였다고 한다. 클레멘트, 오리게네스(Origenes), 이그나티우스 등과 같은 많은 초기의 교부들은 그들의 서신 가운데에서 이 일을 언급하고 있다. 에우세비우스의 교회사는 더욱 분명하게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클라우디우스가 통치할 때 하나님의 인자와 은혜로운 안배로 위대하고도 능력 있는 사도 베드로가 로마 성으로 가도록 인도 받았고, 그는 그곳에서 용감하게 앞장서서 이 악한 무리들(사기꾼 시몬을 가리킴)을 대항하였다. 베드로는 신성한 군복으로 무장한 하나님의 존귀한 장군과 같았고 당시 동방에서 서방으로 놀라운 계시의 빛을 가득 가지고 온 사람이었다. 그는 빛과 유익한 교훈을 전했고 하나님의 왕국을 전파하였다."

 

2). 초기 교회의 신앙과 실행

초기 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과 교통 안에 견고히 머물며 지속적으로 이집 저집에서 떡을 떼며 기도하였다. 박해로 인해 믿는 이들은 대부분 소규모로 집에서 집회를 하였다. 바울이 교회에 쓴 서신에서 우리는 이미 "경륜', "분배" 등의 단어와 '사람이 하나님이 되는' 성화(聖化) 의 사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후반기의 교부들의 저서에서 이러한 진리들에 언급이 점차 적어졌으며  심지어 사람들에게 잊히게 되었다.   초기 교회가 보편적으로 준행한 "12사도 유훈(遺訓)"에는 단지 생명을 얻는 길과 사망에 이르는 길, 그리고 침례, 금식, 만찬 등의 실행 상의 규례만을 기록하고 있고, 곳곳에서 그 당시 경건에 대한 가르침과 도덕을 중시한 것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예를 들면  "12사도 유훈"의 제14장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주일에 여러분이 집회에서 떡을 떼고 축사할 때 여러분의 죄를 자백해야만 그 후에 여러분의 제물이 정결케 될 수 있다. 무릇 동반자와 다툰 자는 그들이 다시 화목하게 될 때까지 다른 이들과 집회하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 그러나 침례, 금식, 떡을 떼는 것등의 실행은 세부적인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의문과 형식에 치우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3).초기 교회의 내부적인 어려움

외부의 압력 이외에도 초기 교회는 이단의 해를 입었고 논쟁으로 인한 분열의 문제에 부딪치게 되었다. 이 두 방면은 교회의 생명에 매우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우리는 반드시 과거의 이단을 인식함으로 우리가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움을 받아야 하고, 동시에 과거에 있었던 분열이 가져온 피해를 경계로 삼아 하나의 간증을 유지하는데 노력을 다해야 한다. 교회가 가장 초기에 직면한 이단은 에비오니즘(Ebionism)이다. "에비오니"의 원문의 뜻은 '빈궁'이라는 뜻이다. 교부 터틀리안(Tertullian)의 해석에 따르면 그들이 에비오니파로 불린 이유는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인식이 너무 빈궁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 에비오니파에 있어서 주된 것은 유태인의 신앙이었는데, 그들은 기독교를 유태화 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강조하였는데, 비록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였으나 그분이 육체가 되신 하나님이심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은 종으로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수복과 성결함으로 인해 그분을 아들로 인정하셨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이 단지 신분에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이지 실제적으로는  사람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도세티즘(Docetism)은 에비오니파와 거의 동시에 출현하였다. 이 파는 물질세계가 악하다고 믿었기에 성결한 본체를 가지신 하나님께서 물질에 속한 육체를 취할 수 없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육신에 대하여 매우 다른 견해를 가졌다. 그들은 성육신이 진정으로 발생하지 않았으며 그리스도의 육신은 단지 하나의 환영(幻影)으로 사람들에게 일종의 환각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그들은 그분이 실제적으로 물질세계 가운데 출현한 것과 세상 사람들이 본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환영에 불과하며,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고통받은 이는 실제로 주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단지 환영일 뿐이라고 여겼다. 사도 요한이 쓴 복음서와 서신서에서도 항상 이들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이들에 대해 반박하고 있다. 이상의 두 이단보다 더 체계적이고 깊게 영향을 미친 것은 그노시스주의(Gnosticism, 영지주의)이다. 그노시스주의는 기본적으로 동방의 이원론과 신비 신앙 및 헬라 철학의 혼합체이며, 후에 다시 기독교의 외투를 걸친 것이다. 바울 시대에 고린도와 골로새 교회에는 이미 그노시스파가 출현하였다. 그노시스파는 주후 80년에서 150년 사이에 형성되었으며 마지막에는 교회와의 관계에서 벗어나 스스로 한 계파가 되었다.

교회가 그노시스파의 해를 처리하는 데 분주할 때 또 다른 극단주의가 출현하였다. 이 극단주의는 몬타누스주의(Montanism)이다. 몬타누스주의는 140년 경에 일어났는데, 성령의 능력과 선지자의 강론을 강조하였다. 그들은 예수님 이후에도 하나님께서 여전히 끊임없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선지자를 통해 인류에게 계시하고 있다고 여겼다. 성령의 실재성을 특별히 중시하였기에 그들은 스스로 완전한 성결의 생활을 살아야 된다고 요구하였는데, 그것은 거의 고행에 가까웠다. 그들은 술을 입에 대지 않았고 항상 금식하였으며, 주님의 다시 오심을 열렬히 기다렸고 또한 그들이 살아 있을 때 주님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믿었다. 이단의 출현에 대응하기 위하여 교부들은 기독교의 기본 신앙을 체계적으로 표방하였을 뿐만 아니라 상세하게 해석하였다. 이처럼 교회의 정통 신학은 점진적으로 형성되었고 성경의 정경(正經)도 동시에 확립되었다. 약 1세기의 발전을 거친 뒤 정통 신학은 주후 325년에 이전에 없었던 가장 큰 도전에 직면하였는데, 이는 바로 아리우스주의(Arianism)의 출현이었다. 그것은 가장 격렬한 신학 논쟁 가운데로 빠지게 하였고, 신학도 이로 인해 이성화되고 분석화되었으며 논쟁으로 가득한 색채를 띠게 되었다. 당시 교회는 이로 인해 분열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논쟁을 거치면서 그 정기는 크게 손상받았다. 아리우스(Arius, 256년~336년)는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장로였는데, 그는 그리스도가 자존하시면서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으며, 성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기 전에는 근본적으로 존재하시지 않았다고 믿었다. 이러므로 성자와 성부의 본질은 차이가 있기에 신성한 삼일성의 진리는 이로 인해 동요되었다. 이 이단을 처리하기 위하여 교회는 이전에 없었던 큰 회의를 소집하였는데, 이 회의는 325년에 니케아에서 거행되었다. 당시 적지 않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아리우스를 지지하였으나, 결과는 정통 신앙이 승리를 거두었고 그리스도와 아버지 하나님은 그 본질이 같고 동등하며 동일한 영광을 갖고 있다는 진리도 확립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풍파가 가라앉자, 또 다른 풍파가 일어났다. 논쟁의 초점은 삼일성의 위격에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로 이전되었다. 먼저 문제를 일으킨 이들은 네스토리우스파(Nestorians)였는데, 이들은 *경교(景敎)의 선구자였다. 네스토리우스파의 문제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분별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이 둘은 서로 상관이 없는 것으로 나누었으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인성을 단지 신성을 담는 용기로만 여기는 데 있었다. 교회는 회의에서 네스토리우스파를 이단으로 정죄하였고, 그들의 신성과 인성이 나누어질 수 없으며 또한 이 둘이 연합한 것임을 믿는다고 분명히 밝혔다. 그리스도는 참된 하나님이시자 동시에 참된 사람이시다. 네스토리우스파가 불러일으킨 논쟁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연합에 대한 각종 논쟁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 가운데에는 그리스도께서 육체가 되신 후, 그분이 한 분이신가 두 분이신가, 단지 하나님이신가 아니면 하나님이시면서 또한 사람이신가, 하나님과 사람이 동시에 존재하는가에 관한 논쟁이 있었다. 이러한 논쟁들을 처리하기 위하여 교회는 많은 정력과 시간을 쏟아부었고 수많은 회의를 소집하였으나 논쟁할수록 더 복잡해졌다. 451년에 교회는 칼케돈(Chalcedon)에서 회의를 소집하여 그리스도에 관한 논쟁을 철저하게 해결하였다. 회의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절대적으로 진실된 것이며 동시에 그리스도는 오직 한 인격이며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본성과 사람의 본성은 서로 함께 연합되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칼케돈 공의회(Council of Chalcedon) 후에 정통 신앙은 더욱 분명한 표현을 얻게 되었고 또한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져 논쟁이 비로소 끝나게 되었다.

4).초기 교회의 유명한 교부와 저서

이 시기의 교부들은 사도 후반기와 니케아 전반기의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사도 후반기의 비교적 유명한 교부들은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Ignatius), 서머나의 폴리캅(Polycarp), 로마의 헤르마스(Hermas) 그리고 순교자 저스틴(Justin)을 들 수 있다. 니케아 전반기의 유명한 교부들은 이레니우스(Iranaeus), 터툴리안(Turtulian),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그리고 오리게네스(Origenes)을 들 수 있다. 로마의 클레멘트는 제3대 로마 감독을 역임하였는데, 일찍이 고린도인들에게 서신을 보내 그들 가운데에서 장로를 내쫓고 당파를 결성한 혼란을 책망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를 "클레멘트 서신"이라고 칭했다.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는 로마로 순교하러 가는 길에 일곱 서신을 써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높였고 믿는 이들이 자신들의 감독과 장로를 존중해 주기를 희망했다. 폴리캅은 일찍이 사도 요한의 제자였는데, 사도 시대와 니케아 전반기 사이에 있는 작가들 간의 중요한 교량이 되었다. 폴리캅은 견고하게 기독교를 보호한 사람으로 항상 성경의 말씀을 인용하여 당시 그노시스파의 이단인 마르키온(Marcion)과 논쟁을 벌였고, 주님을 위해 충성을 다하고 86세의 고령으로 순교하였다. 로마의 헤르마스는 계시록의 형식으로 <헤르마스의 목자(The Shepherd of Hermas)>를 썼는데, 그 내용은 이상과 교훈 그리고 비유를 포함하면서 죄의 회개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외에도 <바나바 서신(Catholic Epistle)>, 이름을 알 수 없는 <사도들 서신>등이 널리 읽혔다. 폴리캅의 제자인 이레니우스는 로마 천주교회의 위대한 신학자 중 한 사람이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이단에 반대하며(Against Heresies)>인데, 그는 여기에서 그노시스주의의 교훈에 반박하였으며 하나님의 삼일성에 관한 선구자가 되었다. 터툴리안은 북아프리카의 교부로 교리를 보호하는 수많은 작품들을 썼으며, 당시의 <아버지 하나님의 고난받음>이라는 이단에 반박하는유명한 <프락세아스에 반박하며(Against Praxeas)>라는 책은 삼일 하나님의 과점을 분명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의 <인간론(De Anima)>은 성경 심리학에 관한 첫 번째 저서였다. 오리게네스는 교회 역사에 있어서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신학자로서 그의 성경관과 삼일 하나님의 관점은 그 나름의 가치를 갖고 있다. 오리게네스의 영혼론은 신비주의와 금욕주의의 영향을 받아 한쪽으로 치우쳤기 때문에, 543년 콘스탄티노풀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한국복음서원 교회사 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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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학교] 청년부 설교

 

 

 

 제목 : 꿈의 정상에 오르기까지
 말씀 : 창세기21:8~12


여러분 혹시 여러분도 이런 충동받으신 적 있으십니까? 나를 괴롭게 하는 친구가 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 중에서 다른 친구들을 괴롭게 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우리 가운데에는 이러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랍니다. 혹시 어려운 일을 당하여 답답하고 아픈 사람은 전도사님과 만나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딸인데, 우리가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데, 우리가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데,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입니까?

여러분 우리는 믿음의 자녀답게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몇 주간 계속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꿈꾸는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하나님의 꿈쟁이라고 이름을 붙여보았습니다. 여러분의 꿈을 이루어 가는데 있어서,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저는 오늘 두 사람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먼저 생각해 볼 사람은 입다라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어머니는 기생이었습니다. 그가 한 남자를 알게되어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바로 입다입니다. 그런데 그 남자의 본 부인이 자녀를 낳자 입다는 집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비록 서자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장성하던 그에게 있어서 이러한 아픔은 커다란 충격이 되었을 것입니다.

보통 우리가 이러한 상처를 받았으면 평생동안 복수하겠다는 생각으로 인생을 허비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입다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비록 집에서 쫓겨난 신세였지만, 하나님앞에 정직하게 자신의 삶을 돌이키면서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원망과 답답한 마음과 분노를 꿈으로 이기며, 하나님앞에 범죄하지 않고 날마다 말씀과 동행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실 꿈을 꾸며, 날마다 믿음으로 준비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나라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암몬 족속이 이스라엘을 쳐들어 온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스라엘은 아주 조그만 나라입니다. 그 당시에 이스라엘주위에는 강대국들이 많았습니다. 암몬족속도 강대한 나라였습니다. 이스라엘백성은 위기에 봉착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라가 위태할 때에 나라를 구할 사람을 찾는 것이 사람들의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 나라의 사람들이 나라를 구해줄 사람으로 주목한 사람이 누구인가하면 바로 입다입니다. 서자라고 쫓아 내버린 그 사람을 이제는 그들의 주인으로 대장으로 섬기려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 서자라고, 기생의 자녀라고 쫓겨났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저도 통영 육아원 어린이를 수년동안 섬기고있습니다만, 그들의 말중에서 많은 이들이 자신을 버린 부모가 원망스럽다고 합니다. 그런데 입다또한 그러한 생각이 없었겠습니까? 분이 나서 도리어 복수의 칼을 갈고 싶은 생각이 세상사람들의 가치관입니다. 그러나 입다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 인생의 주인임을 철저하게 고백하였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삶에 부어주신 꿈을 반드시 이루어주실 것임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결국 입다는 이스라엘의 대장이 되어서 나라를 구원하는 도구로 쓰임 받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노라면 어려움도 있습니다. 그리고 답답한 일도 당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꿈의 정상에 이르기 전에 반드시 어려운 역경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러나 억울하다고 이만 갈고있으면 안됩니다. 답답하다고 세상과 짝하고 살면 안됩니다. 우리는 힘들고 어려워도 주님만 의지함으로 자신의 실력을 키우고 준비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준비되어지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들어 사용 할 것입니다. 그 날이 오기까지 우리가 낙심하지 않고 주님 앞에 믿음으로 세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입다는 비록 부모님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하면서 믿음으로 자신의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가정에 상처가 있는 사람들은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난 가정이 이러 이러하기 때문에 자포자기한다!” 아닙니다. 그것은 꿈이 없는 세상사람들의 가치관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주십니다. 비록 가정이 형편없고, 내 삶에 역경이 닥쳐와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인생의 꿈을 갖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역사를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두 번째로 살펴볼 사람은 이삭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믿음으로 낳은 아들 이삭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입니다. 25년 동안 기다렸다 주신 하나님의 꿈의 실현이니 얼마나 귀하고 소중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꿈으로 낳은 아들이 아닌 사람인 이스마엘이 하나님의 꿈으로 낳은 이삭을 회롱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다는 이유 때문에 회롱을 당한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다는 이유 때문에 조롱을 당한 적이 있습니까? “예수를 믿느니 내 주먹을 믿어라” “예수는 엉터리야. 거짓말쟁이야” “예수쟁이들은 위선자들 뿐이야” “야 교회 가지마! 시간 낭비쟎아” 이스마엘이 자꾸 믿음의 아들인 이삭을 희롱하듯이 우리에게도 믿음으로 살려고 할 때 인간적인 생각은 자꾸 우리의 믿음을 흔들어 놓고 갈등 속에 빠지게 합니다.

믿음을 가진 청소년들에게도 이런 희롱을 있습니다. 따라서 꿈을 향해 나아가려고 할 때 반드시 우리 안에 있는 인간적인 생각과 세상의 기준을 내쫓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믿음은 늘 흔들리고 갈등 속에서 꿈을 향해 더 이상 나가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스마엘을 물리치고 꿈의 정상에 이를 수 있을까요? - 이스마엘의 희롱에서 이삭이 벗어날 수 있는 비결은 이스마엘을 쫓아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희롱하고, 조롱하며 하나님께 가는데 방해하는 대상은 협력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향한 여러 소리들을 내 쫓아야 합니다. 또한 세상의 방법을 따르면서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려는 욕심을 내 쫓아야합니다. 거짓말하면서 이루려는 꿈의 유혹을 내 쫓아야합니다. 세상과 타협하면서 얻는 성공과 정상의 야망을 내 쫓아야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유혹들을 과감하게 내쫓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꿈쟁이임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확신하는 고백을 날마다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꿈의 정상에 서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어야 합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손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여기 프랑카드에 적힌 우리의 정체성을 날마다 고백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매주예배마다 한번씩 외치려고 합니다. 우리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십시오.

제가 선창하면 모두 따라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하나님의 꿈쟁입니다.

하나, 나는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하나, 나는 가치있는 사람이다.

하나, 나는 능력있는 사람이다.

하나, 나는 소중한 사람이다.

하나, 나는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다.

하나, 나는 세상에 영향을 주는 사람이다.

하나,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하나, 나는 주님 안에 주님은 내 안에 산다.

하나, 나는 소금과 빛으로 세상에서 산다.

하나,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


비록 입다가 서자였고, 창녀의 아들이었지만 하나님의 꿈의 정상에 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의 배경이 무엇이냐를 묻지 않습니다. 네 부모가 무엇이냐를 묻지 않습니다. 네 학식이 얼마나 있냐를 묻지 않습니다. 네가 믿음으로 사는 나의 아들이냐? 나의 딸이냐를 묻는 것입니다.

이삭은 어린 나이였지만 조롱하고, 회롱하는 모든 요소를 내쫓음으로 이겨냈습니다.
우리를 조롱하고 희롱하는 모든 대상들에게 우리의 정체성을 선포합시다. 우리안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줍시다. 우리에게도 꿈의 정상까지 가는데 여러 시험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꿈의 정상까지 어떻게 도달하시겠습니까? 하나님만 의지하고 믿음으로 세워지시길 바랍니다

출처: 한일장신대학교 신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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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학교 설교] 꿈이 없는 사람

제목: 꿈이 없는 사람

말씀: 창세기 19장 4-8절

 

 

오늘 본문은 소돔과 고모라 땅에 너무나 많은 죄악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가 너무나 많아서 그 땅을 심판하려는 결심을 갖게됩니다. 그런데 그 땅에는 아브람의 조카 롯의 가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롯은 부유한 곳, 화려한 곳, 윤택한 곳 소돔에 가서 잘 살아보려고 아브람을 떠났던 사람입니다.

 

처음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우상의 도시 갈대아 우르를 떠났을 때에 아브라함과 롯은 비슷한 인생의 길을 걷는 듯했습니다. 롯도 아브라함을 따라서 새로운 비전의 땅을 위해 고향을 떠났던 것입니다. 하지만 롯은 하나님의 비전을 품지 못하고 자신의 야망을 위해 소돔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꿈과 인간적인 야망은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해 보일 수 있지만 전혀 다른 것입니다. 롯은 소돔에 가서 나름대로 성공적인 인생을 산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어느 정도 재산도 모아졌고, 두 딸도 풍요함 속에서 있었습니다. 부족한 것이 전혀없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진정한 꿈을 갖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청소년들은 세상의 가치와 하나님의 기준에서 늘 갈등을 하며 살게됩니다. 그래서 세상과의 타협이란 위기에 노출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기에 꿈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꿈이 없는 사람, 그저 인간의 야망을 갖고 성공을 추구하는 사람은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소돔이 얼마나 부패하였는지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전할 천사가 소돔에 도착하여 롯의 집에 머물게됩니다.

 

그런데 밤에 소돔 사람들이 노소를 막론하고(4), 찾아와서 롯의 집에 온 손님을 내 놓으라고 외치며, 그들과 상관하겠다고 합니다. 상관하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바로 동성애적인 성관계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어른들만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청소년도, 아이도 있었습니다. 그런 부패한 곳에서 롯은 신앙은 있었지만, 눈에 보이는 화려함, 성공, 부유함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세상적인 안목으로 롯의 가족은 성공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가 가진 것은 꿈이 아니라 야망이었고, 그의 야망은 성공적일지 모르나 그 인생은 실패한 인생인 것입니다.

 

우리 학생들에게도 이러한 도전들이 계속하여 있을 것입니다.

 

학교에서도, 부모님도, 선생님도 말입니다. 너희들이 정직하든 말든 좋은 대학가라. 너희가 부패하든 말든, 성공해라. 세상이 타락하든 말든 부자가 되라. 가난한 사람이 굶주려 죽어가든 말든 너희는 배불리어라. 영혼이 썩어 문드러지든 말든 출세해라. ...............

   

누가 세상을 아름답게 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잘못된 것을 바로 잡을 수 있겠습니까?

 

누가 이 시대를 건질 수 있겠습니까?

 

바로 꿈이 있는 여러분입니다.

 

바로 제일교회 학생들입니다.

 

 

제 말은 여러분에게 좋은 대학 들어가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공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져 세상, 눈에 보이는 야망에 사로잡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좋은대학가십시오. 성공하십시오. 돈도 많이 버십시오. 유명한 사람도 되십시오. 그러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성공, 그 부유함, 그 유명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부패한 곳을 정화시키는 소금이 되며, 어두워 캄캄한 곳에 빛이 되어주십시오.

 

꿈이 없는 롯이 얼마나 세상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보십시오. 그 도시 사람들이 손님을 내어달라는 아우성에 그가 취한 행동을 보십시오. 자신의 딸을 그 사람들에게 주려고 합니다. 얼마나 악한 행동입니까? 얼마나 세상에 젖어있는 모습입니까? 우리가 세상에 젖어있다보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가치관은 세상의 가치관에 점령당해있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만족하며 살다가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가치관은 어디론가 가버린 것입니다.

 

즉 세상에 젖어 살다보니 세상과 타협하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은 있는 듯하나, 그 가치관은 세상 사람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롯은 소돔사람들이 악을 행하려할 때 악을 행하지 말라고 말하면서도 자신의 딸을 강간당하도록 내어놓았습니다. 손님이 동성애적인 욕을 당하는 것은 악한 일이고 자신의 딸이 사람들에게 강간을 당하는 것은 악한 일이 아닌 것입니까? 롯은 세상의 어려운 시험앞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정직하게 불의를 뚫고 나가기보다는 타협하고 만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야망은 끊임없이 세상과 타협합니다. 이 야망은 우리의 꿈, 하나님의 꿈과 행복을 무너뜨리게 하는 원인입니다.

 

우리 학생들에게도 롯과 같은 유혹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야망이 크게 보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유혹에게 벗어날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입니다. 자비하신 하나님의 성품이 없다면 우리는 모두 소돔같은 세상에서 타협하며 살다가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1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자비를 더하심이었더라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임해야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까? 바로 우리가 하나님앞에 서야합니다. 어렵고 힘들어도 주님앞에 와야합니다. 실패해도, 유혹이 와도, 왕따를 당해도, 고통이 있어도, 슬픔, 좌절, 어려움이 있어도 하나님께로 나오십시오. 하나님께 나와야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경험하게됩니다.

 

그렇다면 나는 그런 유혹에 전혀 넘어가지도 않았고, 그러한 야망도 없는데요? 하는 학생은 무엇을 합니까? 중보기도입니다. 롯이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중요한 근거는 바로 아브람의 중보기도입니다. 소돔성에 의인10명이 없으면 멸망하겠다는 천사들의 뜻이 있기까지 아브람이 중보기도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 주위에 세상의 유혹, 꿈 없는 야망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친구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공허한 가슴을 채우려는 학생들 같이 방황하는 친구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먼저 그들을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어주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여러분이 하나님의 가치관으로 바로 무장되어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가치관으로 무장되어있어야 다른 학생들에게 하나님의 가치관과 하나님의 꿈을 보여줄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가 이 시대의 꿈입니까? 누가 이 시대의 희망입니까?

 

바로 여러분입니다. 바로 여러분이 꿈이고 희망입니다. 그 희망을 나누는 일에 여러분이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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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본질을 왜곡하는 기복주의 비판

 

기복주의는 신앙의 본질을 영혼의 성장이나 구원에 두지 않고,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물질적인 축복을
받는 것을 위주로 하는 신앙 습성입니다.
특히 한국인은 뿌리 깊은 기복주의적인 습성으로 인해 모든 종교에서 기복주의적인 습성을 보임으로써
종교의 본질이 왜곡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있는 진리를 탐구하거나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성을 유지하는 것보다 당장의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고 매달리는데 연연합니다.
세상적인 교회에서는 교인들의 이러한 습성에 편승하여 교리적인 설교보다는 축복적인 설교를 하고, 교회에
많이 바쳐야 더 큰 복을 받는다는 비성경적인 관습을 만들게 됩니다.

요한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전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들은 영이요, 생명이라.

고전 15/50 그러나 형제들아, 이제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으며, 썩을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상속받을 수 없느니라.

로마서 8/13 너희가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이나 성령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그러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영의 구원을 위한 것이지 육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포함한 모든 복음은 영에 관한 말씀이지 육신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썩을 육신은 영원한 천국을 상속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육신을 따라 살면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성령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이면 영혼이 살게 됩니다.

또한 신앙의 본질은 나를 위해 예수님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 내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뜻을 위해 육신을 희생하고 예수님을 위하고 섬기고 사랑하면 예수님이 내 앞날을 책임져 주십니다.
그러나 내 육신을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는 이기적인 신앙은 예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아무 사심 없이 헌신할 때 예수님은 내가 필요한 것을 알아서 채워 주십니다.

갈라디아서 4/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함으로써 너희의 원수가 되었느냐?

사람들은 진리를 알고 싶어하면서도 막상 진리를 듣기는 싫어합니다.
바울 사도도 진리를 전파하기 시작하니까 오히려 교인들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참된 진리는 육신의 본성과 반대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육신이 원하는대로 살면서 천국에 가고자 하는 경향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 여기서는 한국 기복주의의 원조라 할 수 있는 S 교회의 교리에 대해 살펴 보겠습니다.

S 교회 교리의 가장 큰 문제는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이 육신적인 축복을 받기 위함이라고 가르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목적이 육신이 건강해지고, 돈을 많이 벌고,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처럼 오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참된 목적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믿음으로 연합해 죄의 몸을 멸하고, 예수님과 함께
일으켜진 거듭난 새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S 교회는 성령체험과 기복주의로 크게 성장했는데 이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교회에서 충족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교회에서 죄 짓지 말고 경건하게 살라는 말씀보다는 영적 체험을 주거나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산다는 설교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인간의 본성은 악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보통 하나님의 진리 말씀을 듣는 것을 싫어합니다.
구약시대에도 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이스라엘의 잘못을 지적했지만 대부분 듣기는 커녕
귀를 막고 싫어하거나 잔인하게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이 시대에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리보다는 거짓을 좋아하고, 금욕보다는 쾌락을 추구하며, 영적인 것보다는 물질적인 것을
좋아하고, 예수님의 재림보다는 이 세상을 사모하게 됩니다.
세상적 교회는 기업과 같은 마케팅 전략으로 운영되며, 성경적 진리에 대해 잘 알려주지도 않고, 자신들이
만든 교리를 주입시켜 우민화 함으로써 말 잘 듣는 목사 추종 세력으로 양성시킵니다.

디모데후서 4/4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건전한 교리를 견디지 못하고, 그들 자신의 정욕에 따라 가려운 귀를
즐겁게 해 줄 선생들을 많이 두리라. 또한 그들이 그들의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꾸며낸 이야기로 돌리리라.


빌립보서 3/18~19 내가 자주 너희에게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로 말하지만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로 행하고 있느니라. 그들의 종말은 파멸이며 그들의 하나님은 자기들의 배요, 그들의 영광은 자기들의
수치 속에 들어 있고 그들은 땅의 것들을 생각하느니라.

성경은 마지막 때 이러한 현상에 대해 명확히 명시하는데, 사람들이 기독교의 근본된 교리가 믿어지지 않고
하지 말라는 것이 많으므로 싫어하고, 자신의 정욕을 충족시켜 주는 축복적이고 향락적인 설교를 해 주는
선생(목사)들을 많이 둘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진리에서 돌이켜 성경에 근거 없이 목사의 사업을 위해 꾸며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는 것은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 것이고, 파멸의 길입니다.

골로새서 3/5 그러므로 땅 위에 있는 너희의 지체를 죽이라. 곧 음행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색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성경에 있는 진리대로 믿지 않고, 내 욕심에 따라 내가 믿고 싶은대로 믿는 것이 바로 다름 아닌 우상숭배란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하고 광야에서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간 사이 참지 못하고 금송아지를 만들었는데
이는 사탄의 형상이 아니라 출애굽 시킨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금 송아지를 보고 십계명 돌판을 내 던지며 대노했고, 금 송아지를 만든 사람들은 참혹하게
죽어갔습니다.


마태 7/21~23 나에게 ‘주여, 주여.’ 하고 부르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되느니라.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아니하였으며, 주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지 아니하였으며, 또 주의 이름으로 많은 경이로운
일들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라고 말하리니, 그때 내가 그들에게 분명히 말하되 ‘나는 너희를 전혀 알지
못하니, 너희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리라.

 

S 교회는 삼중축복을 중심교리로 내 세우고 있습니다.
S 교회의 홈페이지에 게시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영적 축복

죄 없으신 주님께서 십자가 형벌을 받으신 것은 바로 우리 모두의 죄와 허물을 대속하기 위함이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라고 외치셨을 때, 우리는 우리의 모든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청산받고 마치 단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은 사람처럼 부끄러움 없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법적 자격을 얻게 되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원수 되었던 관계가 청산되고 올바른 관계로 회복된 것이다.
이로써 인간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 영의 창문이 활짝 열려 성령이 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그 모든 지식이 창문을 통해 비치는 밝은 태양처럼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깊은 지식을 깨닫게 되고(고전 2:9,10), 그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롬 12:2).

 

2. 환경적 축복

아담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렇게 쫓겨난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리시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으셨다(마 27:46).
성경은 예수님의 환경적인 난과 저주의 대속에 대하여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고후 8:9; 갈 3:13).
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대신 저주를 짊어지시고 피 흘리심으로 저주의 세력을 멸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으면 미움, 불안과 초조, 공포와 절망, 좌절감과 죽음, 죄책, 정죄 등 모든 가시들이 제거된다.
그리고 마음속에 평화의 강물이 흐르고 삶 속에 축복의 강물이 흐르게 된다.

 

3. 육체적 축복

아담의 타락으로 다가온 육체적 질병과 죽음은 예수님의 대속으로 완전하게 회복되었다.
이제 우리는 육체의 남은 생애를 사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에 입각해서, 우리를 도적질하고 파괴하는 질병에 대한 치료와 건강의 회복을 단호하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죽은 우리의 육체를 부활시킴으로 우리는 연약함과 죽음을 완전히 극복하고 영생의 축복을 누리게 된다.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셔서 살려 주는 영이 되었으므로 예수님을 구주로 모신 사람, 즉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사람은 그 육체가 부활할 생명의 씨앗을 얻게 된다(고전 15:42-45).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어서 썩어 없어지지 않는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실 때 주 안에서 죽은 자가 먼저 일어나고 살아 남은 자도 변화되어 공중 으로 끌려 올라가 주와 함께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이다(살전 4: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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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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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복주의 비판(1)

 

 (기획) 20세기 한국의 부끄러운 자화상 ­기복주의­

 

 

 


신광철(한신대학교 종교문화학과 교수)

 

 기복신앙과 기복주의

 한국종교가 기복주의의 양상을 보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 우선 세 가지 종교적 동기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어떤 동기를 가지고 종교적 행동을 취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은 분명한 목적하에 믿음을 수행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종교적 행동을 취하게 되는 동기는 크게 기복적 동기, 구도적 동기, 개벽적 동기로 짜여져 왔다.1)

 

 첫째로, 기복적 동기란 말 그대로 현세적 복을 기원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 동기에서는 시간적 초점이 현세에 맞추어지고, 공간적 초점은 ‘이 땅’에 맞추어지게 된다. 다시 말해서 ‘지금 이 곳’에 종교적 관심이 집중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기복적 동기하에서는 현실적인 사회 질서에 대한 변혁 가능성보다는 그것의 안정의 필요성이 강조된다. 둘째로, 구도적 동기란 진리를 추구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 동기에서는 인간 실존의 제약성에 대한 끊임없는 회의와 함께 그것을 초월하는 또 다른 세계에 대한 동경이 중요한 종교적 동기로 부각된다. 현실을 뛰어 넘는 또 다른 세계, 즉 내세의 중요성이 부각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셋째로, 개벽적 동기란 현실세계의 조건을 보다 능동적으로 바꾸고자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동기에서는 현실조건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아예 그 조건 자체를 변혁하려는 적극적인 의지가 중요한 종교적 동기를 이루게 된다. 이 동기에서는 역사의 황금시대가 상정되고, 그때를 준비하기 위한 삶에 초점이 맞추어지며, 나아가 그 때를 더욱 앞당기기 위한 투쟁이 중요하게 부각된다.

 

  위에서 소개한 세 가지 종교적 동기들은 각기 분명한 지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어떠한 종교 전통이든지 위에서 제시한 세 가지 동기 모두를 지니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나의 종교 전통에는 위의 세 가지 동기가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특정의 동기가 더 강조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예컨대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전이하는 과도기에는 종교가 시대변혁의 이념으로 제시되면서 개벽적 동기가 상대적으로 부각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종교경험에 기복·구도·개벽의 동기가 깔려 있다고 한다면, 유독 기복주의가 문제시되는 현상은 보다 세심하게 해명되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종교현상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기복 행위가 함께 존재한다. ‘복을 비는 행위’, 즉 기복 행위는 종교현상의 기본 양상이다. 그렇다면 기복주의가 문제시되는 것은 어떠한 맥락과 의미를 지니는가? 이를 위해서 아래의 자료들을 검토해 보기로 하자.

 


<자료 1>

  (A) 10월에 제천을 하는데 국중대회(國中大會)로 동맹(東盟)이라고 한다. (중략) 나라 동쪽에 큰 동굴이 있는데 수혈(隧穴)이라 한다. 10월 국중대회 때 이 수신을 맞이하여 나라 동쪽‘강’ 위에 모시고 가 제사를 지내는데, 나무로 만든 수신을 신의 자리에 앉힌다.2)

  (B) 항상 10월이면 제천을 하는데, 밤낮으로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춘다. 이를 무천(舞天)이라 한다. 또 호랑이를 신으로 여겨 제사한다.3)

 

<자료 2>

  극단적인 예이지만 어느 부흥사는 ‘하나님께서 되로 퍼서 드리면 말로 갚아 주시고, 말로 퍼서 드리면 가마니로 갚아 주시며, 가마니로 퍼서 드리면 트럭으로 갚아 주신다’고 말하여 양식 있는 기독교인들의 빈축을 사기도 하였다.4)

 


  위에 제시한 <자료 1>은 고대 한국의 제천의례에 관한 기사이며, <자료 2>는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부흥집회의 광경에 대한 기사이다. 위의 인용을 통해서는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우리의 상식을 동원해서 두 자료의 배경을 이루는 종교현상의 양상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자료 1>의 고대 제천의례에서 “밤낮으로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은 오늘날의 대동 굿과 대체로 유사하였을 것이다. 더욱이 음주가무가 며칠에 걸쳐 지속되었다면, 상당히 열정적이고 신비적인 양상을 띠었을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자료 2>의 부흥집회의 경우 매우 열정적이고 신비적인 양상을 띠었을 것이다. 일부 부흥집회는 그 양상에 있어 무속의 굿판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사례도 있어왔다. 그렇다면 두 자료의 배경을 이루는 종교현상은 어느 정도 비슷한 양상을 띤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밖으로 나타나는 형식에서만 비슷한 것이 아니다. 둘은 그 동기에 있어서도 비슷한 내용을 보여준다. 둘은 모두 ‘복 빌기’, 즉 기복이라고 하는 동기를 공유한다.

  그런데 우리는 <자료 1>의 경우를 ‘기복주의’라고 규정하지는 않는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고대 제천의례는 하늘을 중심으로 여러 신을 모시는 공동체 의례의 성격을 지닌다. 그것은 어떤 개인만의 복락을 빌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복락을 빌기 위한 것이었고, 공동체 전체의 삶에 대한 감사의 제전이었다. 그래서 제천의례는 중앙집권적인 고대국가로 전이하는 길목에서 여러 소국이나 부족의 연합체의 성격을 띠던 당시 사회를 통합시켜주는 기능을 담당했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자료 2>의 부흥 집회의 경우는 대체로 개인의 복락을 빌기 위한 것이 많다. 기껏해야 개교회(個敎會)의 부흥을 위한 것이지, 교회 바깥의 공동체까지를 아우르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은 것이다.

  복을 비는 행위는 종교현상에서 무시할 수 없는 비중을 지닌다.5) 그러나 복을 비는 행위가 그것 자체로 목적일 수는 없으며, 그것이 자신만의 복 빌기로 그쳐서는 안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사례를 통해서 기복의 방향성을 생각해 보았는데, 종교적 동기로서의 기복적 동기 자체가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문제는 공동체성을 상실한 복 빌기이다.

 


  기복주의의 현상

  오늘날 한국 종교계가 그 기복주의 성향을 비판받고 있다면, 그 비판의 초점은 공동체성을 상실한 복 빌기, 즉 개인적 복락의 추구에 함몰되어 있다는 데에 집중되어 있다. 그렇다면 한국 종교계는 어떠한 연유에서 기복주의적 성향을 비판받고 있으며, 그러한 기복주의적 성향은 무엇에 기인하는 것인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한국의 종교계에 나타나고 있는 기복주의 성향에 대한 논의는 그것 자체로 방대한 과제를 이루게 된다. 여기에서는 논의의 효율성을 위하여 개신교의 경우를 예로 들고자 한다. 현재 개신교는 사회문화적 영향력이 가장 큰 전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신교는 올곧은 사회적 공신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 개신교가 신자의 규모나 제반 역량에서 강력한 사회적 영향력을 지니면서도 그에 걸맞는 사회적 공신력까지를 담보해내지 못하는 까닭은 대체로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로, 개신교가 스스로의 한국적 전통을 창조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개신교가 과연 우리의 전통문화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는가? 다시 말해서 개신교가 명실상부한 한국종교로서 거듭났는가? 아니면 개신교는 여전히 하나의 외래종교인가? 이러한 물음들이 문제의 심각성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둘째로, 개신교의 일부 흐름이 기복주의의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다. 개신교의 기복주의의 경향은 개개 신자들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 개신교의 문제 가운데 하나로 지적되고 있는 ‘개교회주의’는 기복주의의 문제가 확산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개신교의 기복주의 경향은 여러 가지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한국 개신교의 기복주의 경향을 개신교의 의례 및 신행, 헌금, 커뮤니케이션 구조 등을 통해 살펴 볼 수 있다. 기복주의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개신교 의례는 정기 의례보다는 특별 의례인 경우가 많다. 부흥 집회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부흥 집회의 양상은 정기 의례(예배)의 경우와는 사뭇 다르다. 부흥 집회는 과도하게 감정적으로 몰입하는 면에서 마치 한 판의 흐드러진 굿과도 같은 양상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이러한 부흥 집회의 양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러한 부흥 집회가 행해지는 목적이 무엇인가에 있다. 부흥 집회는 교회의 건축 등 교회 내적인 필요에 의해 열리는 경우가 많다. 즉 철저하게 개교회주의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종교(교회)가 갖는 사회적 봉사의 기능은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개교회주의가 갖는 결정적인 한계는 전체 한국 교회가 아닌 ‘내’ 교회의 발전만이 중요

하게 간주된다는 데 있다. 오직 자기 교회의 복락만이 중요할 뿐, 한국 교회나 한국 사회의 복락은 부차적인 것이다.

 

 개교회주의는 한국 교회의 대형화 현상의 배경을 이루기도 한다. 우리는 주위의 경관을 압도하는 거대한 교회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실제로 세계 50대 교회 가운데 23개가 한국에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단일 교회 가운데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여의도 순복음교회),

장로교회 가운데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충현교회),

감리교회 가운데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광림교회) 역시 한국에 있다.

한국 교회가 이처럼 대형화된 것은 무엇보다도 복락을 전체 교회, 나아가서는 전체 사회와 함께 나누기보다는 ‘내’ 교회의 복락만을 추구해 온 결과인 것이다. 그 결과 한국 개신교는 100년이 훨씬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 한국 교회를 아우를 수 있는 ‘문화’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개신교의 기복주의 경향은 ‘내’ 교회의 식구들의 복락을 비는 데서 절정에 달한다. 가장 대표적인 현상이 ‘대학입시를 위한 특별기도회’일 것이다. 해마다 입시철이 되면 거의 모든 교회가 특별기도회를 갖는다. 심지어 ‘100일 기도회’를 열기도 한다. 새벽기도회가 성황을 이루는 것도 바로 입시철인 11월이다. 신도들은 오직 ‘내’ 자식의 합격을 위해서 기도에 매달리는 것이다.

  개신교의 기복주의 경향은 헌금 부분에서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헌금이란 말 그대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삶과 꿈을 지켜 주는 신의 은총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바치는 것으로서, 그것을 계기로 더욱더 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겠다는 헌신의 표현이다. 이러한 의미를 지녀야 할 헌금이 앞의 <자료 2>의 경우에서처럼 더 많은 물질적 보상을 받기 위한 투자가 된다면, 그것은 전형적인 기복주의의 양상을 나타내는 것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개신교의 현실은 어떠한가?

 

  한국 개신교의 헌금은 우선 종류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대부분의 교회 헌금 봉투에는 줄잡아 10종 이상의 헌금 내역이 세분되어 있다. 이들 다양한 종류의 헌금은 실상 신도들의 삶의 전방위에 걸친 복락과 연관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신과 인간 사이의 ‘복 주고받기’의 효과를 겨냥한 것이기도 하다. 한국 교회는 헌금이 지니는 복 주고받기의 효과를 신앙적으로 정리해 주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부추기고 있다.

강단에서는 목회자들이 ‘복 받기 위한’ 헌금의 필요성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부 교회에서는 이른바 힘있는 자들이 대접을 받는 풍조마저 자리잡고 있다.6) 이러한 현상은 결국 신도들의 신앙을 마비시키는 효과를 발하게 된다. 우리는 영화 <투캅스>에서 매우 희화적인 장면을 목격할 수 있다. 뇌물과 부정으로 점철된 일상을 살아가는 부패한 경관(안성기 분)은 헌금을 바치면서 스스로 정화(淨化)됨을 느끼고 또다시 자신의 복락을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 부패한 경관의 복락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고통의 씨앗이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복 빌기는 정도(正道)를 벗어난 것일 수밖에 없다.

  개신교의 기복주의 경향은 교회의 커뮤니케이션 구조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한국 교회는 전형적인 목회자 중심주의의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한국 교회는 목사(특히 담임 목사)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경향이 매우 강하며, 신도들의 목사에 대한 의존도가 상당히 높은 편이다. 이러한 현상은 설교를 중시하는 프로테스탄트의 전통과도 연관되는 것이겠지만, 이 현상의 이면에는 종교직능자에 대한 한국인의 전통적인 사유 체계가 깔려 있다. 한국 교회에서 목사가 차지하는 위상은 무속에서 무격(巫覡)이 차지하는 위상에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무속은 신과 인간, 그리고 둘 사이를 중재하는 무격의 관계 구조로 이루어지는 전통이다. 무속에서 인간은 신과 직접 만나지 못한다. 신과 인간의 만남은 언제나 무격이라는 중재자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7) 그런데 한국 교회의 경우 이 중재자의 개념이 종교직능자인 목회자 쪽에 집중됨으로써 그리스도교 본래의 중재자인 예수 그리스도와의 직접적인 만남에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는 소지가 발생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실제로 한국 개신교 신도들에게는 목사들의 말이 지상 명령이 되는 경우가 많으며, 그러한 현상은 때때로 신도들로 하여금 신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예컨대, 한국 개신교 신도들은 성경을 통해서 신의 뜻을 직접 발견하기보다는 강단에서 이루어지는 목사의 설교를 통해서 신의 뜻을 감지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 개신교가 나름의 ‘평신도 문화’를 형성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으며, 평신도들의 주체적 신앙 형성을 어렵게 함으로써 목사에게 의존해서 복을 비는 기복 현상이 한층 심화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밖에도 한국 개신교의 기복주의 현상은 치병(治病)에 대한 관심과 기도원 현상, 축귀 현상 등 귀신에 대한 과도한 관심 등을 통해서도 나타나고 있지만, 지면 관계상 구체적인 논의를 미루기로 한다. 이상에서 서술한 기복주의 경향의 내용은 개신교 외의 다른 종교 전통들에도 대체로 적용되는 것이다.

 


  한국 종교 기복주의의 배경

  한국 종교의 기복주의 경향의 원인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어왔다. 이들 논의는 대체로 그 원인을 한국 종교를 관통하는 무속적 사유 체계에서 찾고 있다.8) 이러한 견해는 무속적 사유 체계가 갖는 현세구복적 성격을 전제할 때 일견 타당해 보인다. 무속은 한국 사회가 유교․불교․도교 등 동양고전종교로 대표되는 고전문화(古典文化)를 수용하기 전까지 한국인의 영성을 주관해온 세계관이었으며, 무속의 세계관이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행위, 즉 기복을 주된 지향으로 삼았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문제가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니다. 무속을 기복주의의 주요 원인으로 상정하는 것은 무속에 대한 부정적인 관점을 토대로 한 것이다. 무속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입장은 그것이 비합리적·비과학적·비윤리적·이기적이라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리고 무속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은 무속에 내재한 기복성을 드러내는 데에 집중되어왔다. 그러나 이른바 기복적인 것은 인간 삶의 정직한 반영이며, 인간은 누구나 현실적인 문제에 부닥칠 수밖에 없고 또 그것을 풀어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무속은 제장공동체(祭場共同體)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속적 사유체계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운용이다. 즉 무속적 사유 체계 자체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이 현실 속에서 작동하는 방식이 문제인 것이다. 앞에서도 이미 지적했듯이, 공동체성이 결여된 채 개인의 복락만을 추구하는 행위가 문제인 것이다. 우리 종교계에 만연한 공동체성이 결여된 개인의 복 빌기는 무엇에 기인하는 것일까? 그러한 현상의 이면에는 한국 특유의 가족주의가 놓여 있다.9) 가족에의 영원한 회귀, 그것은 우리 의식의 저변을 관류하는 종교적 동기를 이루어왔다. 가족주의는 기본적으로 ‘내’ 집안, ‘내’ 가문의 중요성을 전제하는 것으로서, ‘남의’ 집안, ‘남의’ 가문에 대해서는 ‘울타리’를 치는 현상이다. 우리 사회가 세계화 또는 지구화 담론으로 팽배해 있으면서도, 지연․혈연․학연의 굴레를 쉽사리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가족주의의 폐해인 것이다.

  오늘날 인류사회가 고도의 정보화시대·신문화시대를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와 종교문화가 기복주의의 양상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으며, 어떠한 면에서는 기복주의의 경향이 더욱 심화되고 있는 현실은 무엇 때문인가? 한국인의 종교적 생활이 다른 나라에 비해 느슨한 것인가? 한국 그리스도교인들의 교회출석 빈도는 세계적으로도 대단히 높은 편이다. 그렇다면 한국 그리스도교(다른 종교들도 마찬가지이다)의 종교생활은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만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종교는 스스로의 목소리를 사회 바깥으로 확산시키지 못하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한국 종교는 현대사회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내부적인 활동 속에서 자족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종교적 차원에서 중요하게 생각되어야 할 사회적 변화를 두 가지 만남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현대 사회의 각 종교 전통은 세속 문명과의 만남과 다른 종교들과의 만남이라는 양대 과제에 직면하게 되었다.10) 종교적 영역에서 이 양대 과제는 종교의 세속화와 다원화 현상을 빚어내기에 이르렀다. 종교의 세속화와 다원화는 현대 종교전통들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작동하게 되었다. 그러한 현상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함으로써 야기되는 현상이 종교의 물상화(物像化)와 사사화(私事化)이다.

  종교가 세속 문명의 조류에 휩쓸리게 되면 본래의 성스러움을 상실한 채 현세적 이익을 좇는 데에 급급하게 된다. 그리하여 종교가 지니는 본래의 구원적 기능이 물상화되고 만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이른바 영적 복지(spiritual welfare)의 구현은 무망할 수밖에 없다. 한국 종교의 기복주의가 극에 달했던 것은 산업화 기조가 사회 전반을 지배했던 때였음을 상기할 때, 종교가 세속화의 물결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만 하는 필요성은 더욱 강조될 수밖에 없다. 다원화 현상 또한 종교 영역에 커다란 변화를 불러 일으켰다. 다원화 현상으로부터 빚어진 현상 가운데 하나가 종교의 사사화, 즉 종교가 사사로운 선택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입맛에 맞는 종교들을 ‘골라서’ 믿기에 이른 것이다. 이른바 ‘카페테리아식 종교’(a kind of cafeteria religion) 현상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종교전통은 보다 큰 ‘구원’을 논하기보다는 개인의 작고 사사로운 ‘복락’에 봉사하게 될 가능성이 커진다. 결국 종교의 물상화와 사사화는 종교의 기복주의 경향을 강화하는 효과를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현재 한국의 종교계는 이러한 물상화와 사사화 현상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근대 한국 사회의 종교 변동에 직면해서, 당대의 종교적 지성들이 나름의 담론을 모색했던 전통을 간직하고 있다. 이제 한국의 지성계가 다시금 오늘의 현실에 걸맞는 종교담론을 모색해야 하지 않겠는가?


※ 출전:역사비평, 1999년 여름호, 350-3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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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 평양 대부흥운동

 

 

 

1907년 평양을 중심으로 일어나 전국 교회로 확산된 한국 교회의 대표적 부흥운동. 이 부흥운동은 1월 6일(주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평양 시내 네 교회 연합집회 형태로 시작되었다. 교회 장소가 협소하여 여자 교인은 자기 교회에, 남녀 중학생과 소학생들은 자기 학교 강당에 모였고, 남자 교인들만 2천여 명이 장대현교회당에 모였다.

이때만 해도 한국인 목사가 없어 부흥회는 선교사들 주관으로 진행되었다. 한 주간 동안 길선주 장로(당시 목사 안수를 받지 않음)는 한국 최초의 새벽기도회를 통해 큰 은혜를 끼쳤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이 '아간'과 같은 죄인임을 고백하며 회개했고, 이를 계기로 수많은 교인들의 회개가 터져나왔다. 1주간 내내 회개가 계속되자 소문을 들은 방은덕(方恩德)이라는 순포(경찰)가 흉악범을 잡으러 집회에 참석했다 자신도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된 일화도 있다.

무르익은 집회는 1월 14일 월요일 저녁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 블레어(W.N. Blair)의 설교로 절정에 달했다. 고린도전서 12장 27절 말씀으로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리스도의 지체들이라'는 블레어 선교사의 설교가 끝나고

 수백 명의 성도가 통성으로 기도할 때 성령의 큰 역사가 임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대중 앞에서 구체적으로 자복하며 눈물로 회개했다. 반목과 질시하던 자들이 껴안고 화해하는 모습도 나타났다. 이런 감동적인 회개 역사는 새벽 2시까지 지속되었다.

이를 목격한 한 여자 선교사는 "입으로 고백하기 어려운 상상할 수 없는 무섭고 추한 죄악들이 쏟아져 나왔다. 마치 지옥 지붕이 젖혀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고 술회했다. 또, 당시 런던타임즈는 "마치 밖으로부터 뭔가 물밀듯 밀려드는 강력한 힘의 임재에 압도당한 듯했다."고 보도했다.

이런 역사는 화요일 아침 숭의여학교에서, 수요일 아침에는 숭덕학교에서도 일어났다. 김찬성 조사가 설교할 때 어린 학생들이 큰 은혜를 받고 수업을 중지한 채 오후 1시까지 통회 자복의 기도회가 지속되었다. 각 곳의 여자중학교와 부녀자들의 모임에서도 이런 역사는 계속되었다.

선교사들만 모이는 정오 기도회에도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 기도회를 30분간 연장하여 오후 2시까지 할 정도였다. 이 놀라운 평양 대부흥회는 그 해 봄 길선주 장로의 서울 집회에서도 나타났고, 이런 부흥의 불길은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평양 대부흥운동은 1903년 원산 부흥운동, 1909년 백만인 구령운동과 더불어 경건하고 건전한 부흥운동의 모델을 제시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를 질적으로 한 단계 도약시키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출처 : 교회용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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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 부흥운동

 

 

 

정의

1903년 원산에서 일어난 부흥회와 그에 따른 한국 교회의 영적 각성운동.

개설

원산 부흥운동은 좁은 의미로 1903년 원산에서 남감리회 선교사 로버트 하디(R. A. Hardie, 1865∼1949)가 인도한 사경회와 부흥회를 지칭하지만, 넓은 의미로는 1903년 하디 부흥회 이후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 지속된 한국 교회 부흥운동을 지칭한다.

역사적 배경

원산 부흥운동이 일어났던 시기(1903∼1906년)는 한국에서 개신교 선교가 시작된 지 20년이 되었지만, 기대했던 선교 결과가 나타나지 않았고, 중국 의화단사건(1900년) 여파로 선교사 배척 분위기가 확산되어 선교사들이 실망과 위기를 느끼던 때였다. 또한 한국 사회에서도 신축년 대기근(1901년) 이후 민중의 경제적 파탄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고, 러일전쟁(1904년)을 앞두고 정치적 불안도 가중되던 상황이었다. 이처럼 정치사회적 불안과 신앙적 위기가 점증되던 시기에 원산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경과

원산 부흥운동은 1903년 여름 중국에서 사역하다 한국을 방문한 미국 남감리회 여선교사 화이트(M. C. White)가 원산에서 사역하던 남감리회 여선교사 캐롤(A. Carroll)과 노울즈(M. Knowles), 하운셀(J. Hounshell), 그리고 캐나다장로회 여선교사 매컬리(I. H. McCully) 등과 함께 한 사경회에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8월 24일부터 한 주간 동안 사경회를 갖기로 하고, 하디에게 성경공부 인도를 부탁하였다. 당시 한국 선교 13년 차였던 하디는 선교 실적 부진으로 인한 실망감과 피로감으로 지쳐 있던 상태였다. 그런데 사경회를 인도하는 중 하디는 선교 실패와 부진의 원인이 밖에 있지 않고 ‘성령의 인도와 능력’을 따르지 않은 자신에게 있음을 깨닫고 회개하는 순간 ‘성령 충만’과 믿음의 확신이 생겼다. 당시 하디와 함께 집회에 참석했던 선교사들도 같은 경험을 하였다.

선교사 사경회를 마친 다음 주일예배 때 하디는 한국인 회중 앞에서 자신의 교만과 실수를 공개적으로 자복하였고, 그것이 ‘회개의 본’이 되어 한국 교인들의 공개 자백을 이끌어냈다. 9월 초 하디가 인도한 원산교회 직원 부흥회, 10월에 원산을 방문한 미국 스칸디나비아선교회 지도자 프랜슨(F. Franson)이 인도한 부흥회, 그리고 프랜슨 부흥회 직후 하디가 인도한 특별 부흥회에서도 교인들의 공개적 자복현상이 나타났다. 당시 교인들이 자복한 죄는 주로 횡령과 절도, 간음, 강간, 위선, 미움, 증오, 질투와 같은 ‘윤리적’ 내용이었다. 그리고 미워하고 증오했던 교인들 사이에 화해와 용서가 이루어졌고, 과거에 훔치거나 횡령한 것을 보상하거나 배상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김화 새술막교회 윤성근(일명 윤승근) 전도사는 원산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과거(기독교인이 되기 전) 인천주전소에 근무하던 시절 되돌려주어야 했던 회사(정부) 돈을 사용했던 것을 기억하고, 그 돈을 마련해 탁지부에 되돌려 줌으로 ‘양심전’(良心錢)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다. 이런 공개 자복과 윤리적 갱신이 원산 부흥운동의 특징적 현상이 되었다.

이렇게 원산에서 시작된 하디의 부흥운동는 1904년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하디는 1904년 1월에 개성 지방 사경회를 인도하였고, 2월에 김화 새술막교회와 지경터교회, 4월에 서울 자골교회 부흥회를 인도하였는데, 여기서도 공개 자복 현상이 나타났다. 이때까지 부흥의 범위는 하디가 속한 남감리회 소속 교회들로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해 9월 서울 정동제일교회 부흥회를 시작으로 10월 평양 지방, 11월 인천 지방에서 연합부흥회를 인도하였는데, 이곳은 교단이 다른 미감리회 구역이었다. 하디는 인천 지방 연합부흥회를 마치고 안식년 휴가를 얻어 미국으로 돌아갔고 그가 없는 사이 크램(W. G. Cram)과 캐롤, 하운셀 등 다른 남감리회 선교사들이 1905년 개성과 원산, 서울 등지에서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그리고 1905년 9월 장로교와 감리교 6개 선교부가 조직한 한국복음주의선교회연합공의회에서는 매년 연초에 각 지방별로 실시하는 사경회를 연합부흥회로 진행하기로 결의하였고, 그에 따라 1906년 1∼2월 서울과 원산, 평양 등지에서 초교파 연합 부흥회가 개최되어 원산부흥운동의 열기를 이어나갔다.

1906년 8월 안식년 휴가를 마치고 귀환한 하디는 곧바로 평양에 가서 선교사 연합사경회를 인도하였는데, 거기 참석했던 블레어(W. N. Blair)와 그레이엄 리(Graham Lee) 등 장로교 선교사들이 ‘성령 충만’을 경험했다. 그리고 한 달 후 미국 부흥운동 지도자 존스턴(H. A. Johnston)이 평양을 방문해서 영국 웨일즈와 인도에서 일어난 부흥운동 소식을 전함으로 평양의 선교사와 한국 교인들은 교회 부흥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3개월 기도로 준비한 끝에 1907년 1월 평양 장대현교회와 숭덕학교에서 개최된 연합사경회에서 교인들이 공개적으로 통회 자복하는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초기 한국기독교사에 큰 획을 긋는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이 시작되었다.

의의와 평가

원산 부흥운동의 역사적, 종교적 의미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선교사의 회개로 시작해서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회개로 이어져 교인들이 회개와 중생(거듭남), 성화(성결)로 이루어지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체득하였다.

둘째, 처음에는 남감리회 선교구역인 원산에서 시작되었지만, 점차 미감리회와 장로회 선교구역으로 확산되어 초교파 연합운동을 촉진시켰다.

셋째, 회개한 기독교인들의 ‘양심전’ 같은 윤리적 갱신이 이루어지고, 새벽기도와 통성기도 같은 ‘토착적’ 신앙양태가 나타나면서 선교사들이 소개한 기독교가 한국의 토착 교회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원산 부흥운동이 전개된 시기는 러일전쟁(1904년)과 을사5조약 체결(1905년)로 인한 민족적 위기 상황이었는데, 기독교인들이 정치·사회적 현실을 외면하고, ‘초월적’ 신앙에만 집착함으로써 교회의 ‘비정치화’(非政治化)를 심화시켰다는 비판적인 견해도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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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와 예수 그리스도

 

 

 

기독교의 예배는 기독론적 입장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로 서 계시며, 하나님을 인간에게 계시하시고, 인간은 또한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응답한다.

 

즉, 예배란 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인격적인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성도의 인격적이며 순종적인 믿음의 반응이다. 더욱이, 본질적으로 예배는 ②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교제이다. 물론, 이런 교제와 인격적 관계는 예배자의 영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이루시는 일이다.

 

예배의 중심 행위라 할 수 있는 '말씀'과 '성찬'은 그리스도께서 지난날 행하셨던 공생애 사역 및 십자가와 부활을 지금 여기에서 재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예배는 그리스도의 신비(고난과 부활의 신비)에 참여하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참여는 단순히 지적인 수긍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오직 예배에 참여함으로써 경험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예배와 관련하여 외적이고 형식적인 요소보다는 내적인 요소를 강조하셨고(요4:24), 특히 십자가 희생을 통해 자신이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시어 영원한 제사를 드리심으로써 모든 희생제사를 마감, 완성하셨다(히10:12-18).

따라서 신약의 성도는 희생제물을 드리는 대신 대속 제물로 죽으신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총을 감사, 찬송하며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높이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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