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복주의 비판(1)
(기획) 20세기 한국의 부끄러운 자화상 기복주의
신광철(한신대학교 종교문화학과 교수)
기복신앙과 기복주의
한국종교가 기복주의의 양상을 보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 우선 세 가지 종교적 동기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어떤 동기를 가지고 종교적 행동을 취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은 분명한 목적하에 믿음을 수행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종교적 행동을 취하게 되는 동기는 크게 기복적 동기, 구도적 동기, 개벽적 동기로 짜여져 왔다.1)
첫째로, 기복적 동기란 말 그대로 현세적 복을 기원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 동기에서는 시간적 초점이 현세에 맞추어지고, 공간적 초점은 ‘이 땅’에 맞추어지게 된다. 다시 말해서 ‘지금 이 곳’에 종교적 관심이 집중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기복적 동기하에서는 현실적인 사회 질서에 대한 변혁 가능성보다는 그것의 안정의 필요성이 강조된다. 둘째로, 구도적 동기란 진리를 추구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 동기에서는 인간 실존의 제약성에 대한 끊임없는 회의와 함께 그것을 초월하는 또 다른 세계에 대한 동경이 중요한 종교적 동기로 부각된다. 현실을 뛰어 넘는 또 다른 세계, 즉 내세의 중요성이 부각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셋째로, 개벽적 동기란 현실세계의 조건을 보다 능동적으로 바꾸고자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동기에서는 현실조건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아예 그 조건 자체를 변혁하려는 적극적인 의지가 중요한 종교적 동기를 이루게 된다. 이 동기에서는 역사의 황금시대가 상정되고, 그때를 준비하기 위한 삶에 초점이 맞추어지며, 나아가 그 때를 더욱 앞당기기 위한 투쟁이 중요하게 부각된다.
위에서 소개한 세 가지 종교적 동기들은 각기 분명한 지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어떠한 종교 전통이든지 위에서 제시한 세 가지 동기 모두를 지니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나의 종교 전통에는 위의 세 가지 동기가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특정의 동기가 더 강조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예컨대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전이하는 과도기에는 종교가 시대변혁의 이념으로 제시되면서 개벽적 동기가 상대적으로 부각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종교경험에 기복·구도·개벽의 동기가 깔려 있다고 한다면, 유독 기복주의가 문제시되는 현상은 보다 세심하게 해명되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종교현상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기복 행위가 함께 존재한다. ‘복을 비는 행위’, 즉 기복 행위는 종교현상의 기본 양상이다. 그렇다면 기복주의가 문제시되는 것은 어떠한 맥락과 의미를 지니는가? 이를 위해서 아래의 자료들을 검토해 보기로 하자.
<자료 1>
(A) 10월에 제천을 하는데 국중대회(國中大會)로 동맹(東盟)이라고 한다. (중략) 나라 동쪽에 큰 동굴이 있는데 수혈(隧穴)이라 한다. 10월 국중대회 때 이 수신을 맞이하여 나라 동쪽‘강’ 위에 모시고 가 제사를 지내는데, 나무로 만든 수신을 신의 자리에 앉힌다.2)
(B) 항상 10월이면 제천을 하는데, 밤낮으로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춘다. 이를 무천(舞天)이라 한다. 또 호랑이를 신으로 여겨 제사한다.3)
<자료 2>
극단적인 예이지만 어느 부흥사는 ‘하나님께서 되로 퍼서 드리면 말로 갚아 주시고, 말로 퍼서 드리면 가마니로 갚아 주시며, 가마니로 퍼서 드리면 트럭으로 갚아 주신다’고 말하여 양식 있는 기독교인들의 빈축을 사기도 하였다.4)
위에 제시한 <자료 1>은 고대 한국의 제천의례에 관한 기사이며, <자료 2>는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부흥집회의 광경에 대한 기사이다. 위의 인용을 통해서는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우리의 상식을 동원해서 두 자료의 배경을 이루는 종교현상의 양상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자료 1>의 고대 제천의례에서 “밤낮으로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은 오늘날의 대동 굿과 대체로 유사하였을 것이다. 더욱이 음주가무가 며칠에 걸쳐 지속되었다면, 상당히 열정적이고 신비적인 양상을 띠었을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자료 2>의 부흥집회의 경우 매우 열정적이고 신비적인 양상을 띠었을 것이다. 일부 부흥집회는 그 양상에 있어 무속의 굿판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사례도 있어왔다. 그렇다면 두 자료의 배경을 이루는 종교현상은 어느 정도 비슷한 양상을 띤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밖으로 나타나는 형식에서만 비슷한 것이 아니다. 둘은 그 동기에 있어서도 비슷한 내용을 보여준다. 둘은 모두 ‘복 빌기’, 즉 기복이라고 하는 동기를 공유한다.
그런데 우리는 <자료 1>의 경우를 ‘기복주의’라고 규정하지는 않는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고대 제천의례는 하늘을 중심으로 여러 신을 모시는 공동체 의례의 성격을 지닌다. 그것은 어떤 개인만의 복락을 빌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복락을 빌기 위한 것이었고, 공동체 전체의 삶에 대한 감사의 제전이었다. 그래서 제천의례는 중앙집권적인 고대국가로 전이하는 길목에서 여러 소국이나 부족의 연합체의 성격을 띠던 당시 사회를 통합시켜주는 기능을 담당했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자료 2>의 부흥 집회의 경우는 대체로 개인의 복락을 빌기 위한 것이 많다. 기껏해야 개교회(個敎會)의 부흥을 위한 것이지, 교회 바깥의 공동체까지를 아우르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은 것이다.
복을 비는 행위는 종교현상에서 무시할 수 없는 비중을 지닌다.5) 그러나 복을 비는 행위가 그것 자체로 목적일 수는 없으며, 그것이 자신만의 복 빌기로 그쳐서는 안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사례를 통해서 기복의 방향성을 생각해 보았는데, 종교적 동기로서의 기복적 동기 자체가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문제는 공동체성을 상실한 복 빌기이다.
기복주의의 현상
오늘날 한국 종교계가 그 기복주의 성향을 비판받고 있다면, 그 비판의 초점은 공동체성을 상실한 복 빌기, 즉 개인적 복락의 추구에 함몰되어 있다는 데에 집중되어 있다. 그렇다면 한국 종교계는 어떠한 연유에서 기복주의적 성향을 비판받고 있으며, 그러한 기복주의적 성향은 무엇에 기인하는 것인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한국의 종교계에 나타나고 있는 기복주의 성향에 대한 논의는 그것 자체로 방대한 과제를 이루게 된다. 여기에서는 논의의 효율성을 위하여 개신교의 경우를 예로 들고자 한다. 현재 개신교는 사회문화적 영향력이 가장 큰 전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신교는 올곧은 사회적 공신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 개신교가 신자의 규모나 제반 역량에서 강력한 사회적 영향력을 지니면서도 그에 걸맞는 사회적 공신력까지를 담보해내지 못하는 까닭은 대체로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로, 개신교가 스스로의 한국적 전통을 창조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개신교가 과연 우리의 전통문화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는가? 다시 말해서 개신교가 명실상부한 한국종교로서 거듭났는가? 아니면 개신교는 여전히 하나의 외래종교인가? 이러한 물음들이 문제의 심각성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둘째로, 개신교의 일부 흐름이 기복주의의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다. 개신교의 기복주의의 경향은 개개 신자들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 개신교의 문제 가운데 하나로 지적되고 있는 ‘개교회주의’는 기복주의의 문제가 확산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개신교의 기복주의 경향은 여러 가지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한국 개신교의 기복주의 경향을 개신교의 의례 및 신행, 헌금, 커뮤니케이션 구조 등을 통해 살펴 볼 수 있다. 기복주의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개신교 의례는 정기 의례보다는 특별 의례인 경우가 많다. 부흥 집회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부흥 집회의 양상은 정기 의례(예배)의 경우와는 사뭇 다르다. 부흥 집회는 과도하게 감정적으로 몰입하는 면에서 마치 한 판의 흐드러진 굿과도 같은 양상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이러한 부흥 집회의 양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러한 부흥 집회가 행해지는 목적이 무엇인가에 있다. 부흥 집회는 교회의 건축 등 교회 내적인 필요에 의해 열리는 경우가 많다. 즉 철저하게 개교회주의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종교(교회)가 갖는 사회적 봉사의 기능은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개교회주의가 갖는 결정적인 한계는 전체 한국 교회가 아닌 ‘내’ 교회의 발전만이 중요
하게 간주된다는 데 있다. 오직 자기 교회의 복락만이 중요할 뿐, 한국 교회나 한국 사회의 복락은 부차적인 것이다.
개교회주의는 한국 교회의 대형화 현상의 배경을 이루기도 한다. 우리는 주위의 경관을 압도하는 거대한 교회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실제로 세계 50대 교회 가운데 23개가 한국에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단일 교회 가운데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여의도 순복음교회),
장로교회 가운데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충현교회),
감리교회 가운데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광림교회) 역시 한국에 있다.
한국 교회가 이처럼 대형화된 것은 무엇보다도 복락을 전체 교회, 나아가서는 전체 사회와 함께 나누기보다는 ‘내’ 교회의 복락만을 추구해 온 결과인 것이다. 그 결과 한국 개신교는 100년이 훨씬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 한국 교회를 아우를 수 있는 ‘문화’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개신교의 기복주의 경향은 ‘내’ 교회의 식구들의 복락을 비는 데서 절정에 달한다. 가장 대표적인 현상이 ‘대학입시를 위한 특별기도회’일 것이다. 해마다 입시철이 되면 거의 모든 교회가 특별기도회를 갖는다. 심지어 ‘100일 기도회’를 열기도 한다. 새벽기도회가 성황을 이루는 것도 바로 입시철인 11월이다. 신도들은 오직 ‘내’ 자식의 합격을 위해서 기도에 매달리는 것이다.
개신교의 기복주의 경향은 헌금 부분에서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헌금이란 말 그대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삶과 꿈을 지켜 주는 신의 은총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바치는 것으로서, 그것을 계기로 더욱더 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겠다는 헌신의 표현이다. 이러한 의미를 지녀야 할 헌금이 앞의 <자료 2>의 경우에서처럼 더 많은 물질적 보상을 받기 위한 투자가 된다면, 그것은 전형적인 기복주의의 양상을 나타내는 것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개신교의 현실은 어떠한가?
한국 개신교의 헌금은 우선 종류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대부분의 교회 헌금 봉투에는 줄잡아 10종 이상의 헌금 내역이 세분되어 있다. 이들 다양한 종류의 헌금은 실상 신도들의 삶의 전방위에 걸친 복락과 연관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신과 인간 사이의 ‘복 주고받기’의 효과를 겨냥한 것이기도 하다. 한국 교회는 헌금이 지니는 복 주고받기의 효과를 신앙적으로 정리해 주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부추기고 있다.
강단에서는 목회자들이 ‘복 받기 위한’ 헌금의 필요성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부 교회에서는 이른바 힘있는 자들이 대접을 받는 풍조마저 자리잡고 있다.6) 이러한 현상은 결국 신도들의 신앙을 마비시키는 효과를 발하게 된다. 우리는 영화 <투캅스>에서 매우 희화적인 장면을 목격할 수 있다. 뇌물과 부정으로 점철된 일상을 살아가는 부패한 경관(안성기 분)은 헌금을 바치면서 스스로 정화(淨化)됨을 느끼고 또다시 자신의 복락을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 부패한 경관의 복락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고통의 씨앗이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복 빌기는 정도(正道)를 벗어난 것일 수밖에 없다.
개신교의 기복주의 경향은 교회의 커뮤니케이션 구조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한국 교회는 전형적인 목회자 중심주의의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한국 교회는 목사(특히 담임 목사)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경향이 매우 강하며, 신도들의 목사에 대한 의존도가 상당히 높은 편이다. 이러한 현상은 설교를 중시하는 프로테스탄트의 전통과도 연관되는 것이겠지만, 이 현상의 이면에는 종교직능자에 대한 한국인의 전통적인 사유 체계가 깔려 있다. 한국 교회에서 목사가 차지하는 위상은 무속에서 무격(巫覡)이 차지하는 위상에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무속은 신과 인간, 그리고 둘 사이를 중재하는 무격의 관계 구조로 이루어지는 전통이다. 무속에서 인간은 신과 직접 만나지 못한다. 신과 인간의 만남은 언제나 무격이라는 중재자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7) 그런데 한국 교회의 경우 이 중재자의 개념이 종교직능자인 목회자 쪽에 집중됨으로써 그리스도교 본래의 중재자인 예수 그리스도와의 직접적인 만남에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는 소지가 발생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실제로 한국 개신교 신도들에게는 목사들의 말이 지상 명령이 되는 경우가 많으며, 그러한 현상은 때때로 신도들로 하여금 신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예컨대, 한국 개신교 신도들은 성경을 통해서 신의 뜻을 직접 발견하기보다는 강단에서 이루어지는 목사의 설교를 통해서 신의 뜻을 감지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 개신교가 나름의 ‘평신도 문화’를 형성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으며, 평신도들의 주체적 신앙 형성을 어렵게 함으로써 목사에게 의존해서 복을 비는 기복 현상이 한층 심화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밖에도 한국 개신교의 기복주의 현상은 치병(治病)에 대한 관심과 기도원 현상, 축귀 현상 등 귀신에 대한 과도한 관심 등을 통해서도 나타나고 있지만, 지면 관계상 구체적인 논의를 미루기로 한다. 이상에서 서술한 기복주의 경향의 내용은 개신교 외의 다른 종교 전통들에도 대체로 적용되는 것이다.
한국 종교 기복주의의 배경
한국 종교의 기복주의 경향의 원인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어왔다. 이들 논의는 대체로 그 원인을 한국 종교를 관통하는 무속적 사유 체계에서 찾고 있다.8) 이러한 견해는 무속적 사유 체계가 갖는 현세구복적 성격을 전제할 때 일견 타당해 보인다. 무속은 한국 사회가 유교․불교․도교 등 동양고전종교로 대표되는 고전문화(古典文化)를 수용하기 전까지 한국인의 영성을 주관해온 세계관이었으며, 무속의 세계관이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행위, 즉 기복을 주된 지향으로 삼았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문제가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니다. 무속을 기복주의의 주요 원인으로 상정하는 것은 무속에 대한 부정적인 관점을 토대로 한 것이다. 무속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입장은 그것이 비합리적·비과학적·비윤리적·이기적이라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리고 무속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은 무속에 내재한 기복성을 드러내는 데에 집중되어왔다. 그러나 이른바 기복적인 것은 인간 삶의 정직한 반영이며, 인간은 누구나 현실적인 문제에 부닥칠 수밖에 없고 또 그것을 풀어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무속은 제장공동체(祭場共同體)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속적 사유체계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운용이다. 즉 무속적 사유 체계 자체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이 현실 속에서 작동하는 방식이 문제인 것이다. 앞에서도 이미 지적했듯이, 공동체성이 결여된 채 개인의 복락만을 추구하는 행위가 문제인 것이다. 우리 종교계에 만연한 공동체성이 결여된 개인의 복 빌기는 무엇에 기인하는 것일까? 그러한 현상의 이면에는 한국 특유의 가족주의가 놓여 있다.9) 가족에의 영원한 회귀, 그것은 우리 의식의 저변을 관류하는 종교적 동기를 이루어왔다. 가족주의는 기본적으로 ‘내’ 집안, ‘내’ 가문의 중요성을 전제하는 것으로서, ‘남의’ 집안, ‘남의’ 가문에 대해서는 ‘울타리’를 치는 현상이다. 우리 사회가 세계화 또는 지구화 담론으로 팽배해 있으면서도, 지연․혈연․학연의 굴레를 쉽사리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가족주의의 폐해인 것이다.
오늘날 인류사회가 고도의 정보화시대·신문화시대를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와 종교문화가 기복주의의 양상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으며, 어떠한 면에서는 기복주의의 경향이 더욱 심화되고 있는 현실은 무엇 때문인가? 한국인의 종교적 생활이 다른 나라에 비해 느슨한 것인가? 한국 그리스도교인들의 교회출석 빈도는 세계적으로도 대단히 높은 편이다. 그렇다면 한국 그리스도교(다른 종교들도 마찬가지이다)의 종교생활은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만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종교는 스스로의 목소리를 사회 바깥으로 확산시키지 못하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한국 종교는 현대사회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내부적인 활동 속에서 자족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종교적 차원에서 중요하게 생각되어야 할 사회적 변화를 두 가지 만남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현대 사회의 각 종교 전통은 세속 문명과의 만남과 다른 종교들과의 만남이라는 양대 과제에 직면하게 되었다.10) 종교적 영역에서 이 양대 과제는 종교의 세속화와 다원화 현상을 빚어내기에 이르렀다. 종교의 세속화와 다원화는 현대 종교전통들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작동하게 되었다. 그러한 현상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함으로써 야기되는 현상이 종교의 물상화(物像化)와 사사화(私事化)이다.
종교가 세속 문명의 조류에 휩쓸리게 되면 본래의 성스러움을 상실한 채 현세적 이익을 좇는 데에 급급하게 된다. 그리하여 종교가 지니는 본래의 구원적 기능이 물상화되고 만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이른바 영적 복지(spiritual welfare)의 구현은 무망할 수밖에 없다. 한국 종교의 기복주의가 극에 달했던 것은 산업화 기조가 사회 전반을 지배했던 때였음을 상기할 때, 종교가 세속화의 물결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만 하는 필요성은 더욱 강조될 수밖에 없다. 다원화 현상 또한 종교 영역에 커다란 변화를 불러 일으켰다. 다원화 현상으로부터 빚어진 현상 가운데 하나가 종교의 사사화, 즉 종교가 사사로운 선택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입맛에 맞는 종교들을 ‘골라서’ 믿기에 이른 것이다. 이른바 ‘카페테리아식 종교’(a kind of cafeteria religion) 현상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종교전통은 보다 큰 ‘구원’을 논하기보다는 개인의 작고 사사로운 ‘복락’에 봉사하게 될 가능성이 커진다. 결국 종교의 물상화와 사사화는 종교의 기복주의 경향을 강화하는 효과를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현재 한국의 종교계는 이러한 물상화와 사사화 현상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근대 한국 사회의 종교 변동에 직면해서, 당대의 종교적 지성들이 나름의 담론을 모색했던 전통을 간직하고 있다. 이제 한국의 지성계가 다시금 오늘의 현실에 걸맞는 종교담론을 모색해야 하지 않겠는가?
※ 출전:역사비평, 1999년 여름호, 350-36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