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가며 던진 성경/ 토마스 선교사

 

 

죽어가며 던진 성경

토마스 선교사

 

"여러분, 지금 세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순교하는 신앙이 아니고는 할 수 없습니다. 복음 전하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복음을 듣고 영접하고 구원에 감사하는 영혼들을 볼 때 저는 선교사로 부르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순교하는 신앙으로 세계 곳곳에 나아가 복음 전할 사람들을 간절히 찾고 있습니다."

 

학교를 찾아 온 선교사의 말을 듣던 토마스의 마음은 선교의 열정에 사로잡혔다. "주님, 지금까지는 제가 웨일즈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복음을 전하였는데 이제 중국에 가서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제 길을 열어주세요." 간절한 기도로 하나님께 아뢰었다. 그리고 그는 곧 바로 런던선교회를 찾아가 중국선교사로 파송해 줄 것을 신청하였다.

 

18635"토마스 씨, 런던선교회는 당신을 중국선교사로 파송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연락을 받았을 때, 토마스는 중국선교사로 불러주신 하나님께 감격하며 찬양을 드렸다. "캐롤라인 드디어 내가 중국선교사로 파송 받게 되었소! 우리가 함께 가는 것이오." 그는 약혼자인 캐롤라인에게 달려가 이 소식을 알렸다. 그리고 선교사로 떠나야 하는 토마스는 캐롤라인과 결혼한 후 곧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의 나이 24살이었다. 드디어 토마스 부부는 1863721일 그래이부센드 부두에서 출발하는 폴메이스호를 타고 중국을 향해 출발했다. 그러나 중국에 도착한 토마스 부부의 선교활동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여보, 맛이 없더라도 건강을 생각해서 좀 먹어봐요" 남편인 토마스의 염려하는 말에 임신하여 입덧에 시달리던 캐롤라인은 "입맛이 없어서 음식이 먹히지가 않네요."라며 수저를 내려놓았다. 설상가상으로 토마스는 런던선교회의 선임선교사인 무어헤드와의 불화로 사역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럼에도 토마스 부부는 "주님, 저희들에게 이곳 중국에서 새로운 생명을 선물로 주심으로 위로하여 주심에 감사합니다. 저희에게 주어진 중국에서의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새 힘을 주옵소서."하고 기도하며 서로를 위로하였다.

 

그렇게 중국사역을 진행하던 토마스는 18643월에 임신한 아내를 홀로 남겨두고 한구라는 곳으로 출장을 떠났다. 그런데 토마스의 이웃에 살며 친하게 지내던 미국선교사 부인이 갑자기 풍토병으로 죽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것을 곁에서 본 캐롤라인은 심한 충격을 받았다. 그런 연유로 캐롤라인은 남편이 없는 가운데 혼자서 태중의 아기가 유산되는 고통을 겪었다. 출장을 떠났던 토마스는 모든 일을 마치고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아내와 태중에 있을 아기를 생각하며 빠른 걸음을 재촉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여보, 내가 돌아왔소. 떠나 있는 동안 당신이 너무 보고 싶었소."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순간 토마스는 섬뜩한 생각이 스치고 지나면서 온 몸이 부르르 떨렸다. 다급한 마음으로 "캐롤라인! 캐롤라인! 아니 어떻게 된 거야! 당신 자고 있는 거요?" 이렇게 말을 하며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간 토마스는 "- "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캐롤라인이 누워있는 곳에는 핏자국이 여기저기에 뒤엉켜 있었다. 그의 아내는 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었다.

 

"캐롤라인 내가 왔소! 눈을 떠 봐요 내가 왔단 말이오." 그러나 싸늘한 몸으로 누워있는 그의 아내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캐롤라인은 아기가 유산된 후에 아무도 돌봐주는 이 없는 가운데 이미 일주일 전에 혼자 죽어간 것이었다. 아내의 죽음으로 토마스가 받은 충격은 너무도 컸다. 그 고통으로 인하여 그는 선교에 대한 회의에 빠져갔다. 마치 미친 사람의 모습과도 흡사했다.

 

"캐롤라인! 나를 두고 당신 혼자서 가면 어떻게 하오. 하나님 캐롤라인은 우리의 사랑스런 아기를 유산시키고 혼자서 죽어갔습니다. ? 나에게 이런 어려움을 주시는 것입니까? 내가 여기에 왜 왔는데요. 중국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겠다고 고향과 부모를 떠나 이곳까지 왔는데. 당신이 내게 한다는 것이 고작 이것입니까? 내 아내와 자식을 데려가는 것이 당신의 뜻이냐구요. 저와 캐롤라인은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를 선교사로 키우려고 했습니다. 그러려면 차라리 저도 데려가지 왜 저 혼자만 이렇게 남겨두셨습니까? 아무 말도 없이 그렇게 계시지만 말고 뭐라고 말씀 좀 해보세요. 하나님 당신은 사랑이시라고 했잖아요. 정말 당신이 사랑이신 분이 맞아요? 그런 분이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시는 거예요. 나를 선교사로 부르신 것인지 이제는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토마스는 아내를 잃은 충격으로 많은 날을 헤매어 보았지만 하나님에 대한 그의 분노와 원망은 가라앉지 않았다. 토마스는 런던 선교회에 편지를 썼다. "처음 편지가 이런 것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내 캐롤라인이 지난달 24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더 글을 써 내려가지 못하겠습니다."

 

괴로움을 견디다 못한 그는 런던선교회에 선교사 사직서를 제출하고 중국 해상세관에 통역으로 취직하였다. 세관에 취직한 그는 모든 것을 잊기 위하여 일하는 것에 전념하였다. 그러던 중에 토마스는 우연한 기회에 조선인 '동지사' , 조선시대에 동지를 전후하여 중국에 공물을 갖고 보내던 사신 일행을 만나서 조선 내에서의 가톨릭교도들에 관한 수난을 듣게 되었다. 동지사로부터 가톨릭교도들이 참수당하는 소식을 듣게 된 토마스의 마음에는 또 다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뜨거워졌다. 그리고 조선에서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며, 순교의 피를 흘리고 있다는 동지사의 말이 그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 이제부터 나의 선교지는 조선이다. 죽어가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겠어!" 토마스의 마음은 조선에 대한 선교열정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러한 생각으로 마음을 불태우고 있을 때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윌리엄슨 선교사가 그를 찾아왔다.

 

 

"토마스, 계속하여 세관에서 통역하는 일만 할 생각이오? 당신이 아내를 잃은 것이 얼마나 큰 아픔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내를 잃은 아픔을 떨쳐버릴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토마스, 당신은 중국어와 러시아어, 몽골어 등의 언어에 능통한데 하나님께서 왜 당신에게 이러한 언어의 재능을 주셨을 것 같소. 복음 전하는 것에 사용하도록 함이 아니겠소."

 

"그렇지 않아도 세관에 사표를 내려던 참입니다. 저는 그동안 제 믿음이 좋아서 이곳 중국까지 와서 복음을 전하게 된 줄 알았는데, 캐롤라인의 죽음 앞에서 사정없이 흔들리는 제 약한 모습을 보면서 제가 참으로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선교는 자식을 무덤에 묻는 아픔 없이는 감당하기 어렵다고 하셨던 분들의 이야기가 이제 실감이 납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잠시도 제 스스로 설 수 없는 자란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토마스의 모습은 조용하지만 복음전하기 위해 준비된 결연한 모습이 보였다. "윌리엄슨, 사실은 얼마 전에 조선의 동지사를 만나 그곳 소식을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지금 조선에는 많은 가톨릭신자들이 예수를 믿는 것으로 죽음을 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오작통이라고 하여 한 가족이 예수를 믿으면 다섯 가족이 죽음을 당하는 등의 핍박을 당하고 있답니다. 이 말을 듣고 난 후부터 제 마음은 어떻게 하면 제가 조선에 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답니다. 저는 중국에 복음전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주님께서는 제가 조선에 복음 전하길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까! 그럼 내 당장 조선에서 나를 찾아온 두 사람을 만나게 해 드리지요." 윌리엄슨의 말에 토마스의 마음은 설레기 시작했다. 윌리엄슨의 안내를 받으며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가자 두 젊은이가 앉아 있었다. "이 분은 토마스 목사입니다. 인사하시지요." 윌리엄슨의 말을 들은 두 젊은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저는 김좌평입니다. 저는 최선일입니다." 하고 자신들을 소개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토마스 목사입니다. 저는 조선에 가서 야소(예수)교를 전하려고 합니다." 라고 말했다. 조선에 가서 야소교를 전하겠다는 토마스의 말에 놀란 두 젊은이는 ".... 안됩니다. 조선은 지금 박해가 심해서 야소를 믿던 우리도 목숨을 걸고 피해 왔습니다. 조선에 있다간 칼날에 맞아 죽습니다." 화들짝 놀라며 소리치는 젊은이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토마스 목사가 입을 열었다.

 

"그것은 칼날에 맞아 죽은 것이 아니라 순교당하는 겁니다. 그러니 나와 함께 다시 조선으로 갑시다."하는 말에 "글쎄 돌아간다는 것은 죽으러 가는 것이라니까요." 두 젊은이는 손을 내저으며 만류하였다. "그건 다시 사는 겁니다. 거듭나는 거지요." 젊은이들은 토마스 목사의 말을 알아듣기 어렵다는 듯 어안이 벙벙하였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하고 토마스 목사가 말을 꺼내자 "마태복음...?"하면서 젊은이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성경을 안가지고 계십니까?" "없습니다.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은 성경책과 교리문답을 갖고 있습니다. 저희들도 성경을 가지기를 원합니다." 두 젊은이가 합창하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성경책을요? 저를 조선으로 안내해 주십시오. 제가 그들에게 성경책을 갖다 주겠습니다." 결국 두 젊은이는 토마스 목사의 말에 감동을 받아 조선으로 떠날 것을 결심하였고 윌리엄슨 목사는 토마스 목사에게 다량의 한문성경을 공급하여 주었다. 그리하여 186594일에 토마스 목사는 두 젊은이와 함께 다량의 한문성경을 실은 목선을 타고 제1차 한국방문길에 올랐다. 중국의 지포를 출발한 그들은 10일 만에 황해도 창린도 자자리 군포에 도착하였다. 바닷가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는 사람을 본 토마스는 "안녕하세요. 저는 야소교 목사입니다. 이 책은 야소교 책입니다. 받으세요!" 외치면서 그들에게 성경을 내밀었다.

 

"에구머니나, 이상하게 생긴 코쟁이가 어떻게 우리말을 하지?" 주민들은 토마스 목사가 건네주는 성경책을 받아들었다. 토마스 목사는 백령도 부근의 섬을 2개월 반 동안 돌면서 섬 주민들에게 성경책을 주고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자임을 가르쳤다. 토마스 목사는 동시에 섬 주민들에게 많은 조선말을 배웠다. 토마스 목사가 돌아간 후 관가에서는 성경책이 법으로 금하는 천주학쟁이들의 책이라고 하여 백령도 참사로 하여금 주민들에게 성경책을 회수하도록 하였는데 그때 거두어들인 책이 99권이나 되었다.

 

토마스 목사 일행은 서울로 가서 전도할 생각으로 범선을 타고 한강을 향하였으나 난데없는 폭풍으로 접근치 못하고 표류하다가 북경으로 되돌아왔다. 이 일로 18664월까지 북경에 체재하던 토마스 목사는 조선의 동지사 일행을 만나 친숙한 교제를 나누는 기회를 얻었다. 그는 동지사인 평양감사 박규수대감을 만나 "저는 야소교목사 토마스입니다." "~오 어떻게 조선말을 잘 하시오? 놀랍소이다." "작년에 조선에 가서 배웠습니다." "난 박규수라 하오." "지난번에 조선에 가서 천주교 박해가 심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들었습니까? 지금은 그렇게 심하지는 않소이다." "저는 또 조선에 갈 생각입니다." "조선이 그렇게 좋더이까?" "저는 조선에 가서 야소를 전할 생각만 하면 가슴이 마구 뜁니다. 대감에게 제가 이 책을 선물로 드리고 싶습니다." "고맙소이다."

 

토마스 목사가 박규수 대감에게 선물한 책은 한문으로 된 신약성경이었다. 그가 조선동지사인 박규수 대감을 만나고 나올 때 누군가 따라 나와 작은 종이쪽지 하나를 건네주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토마스 목사가 묻는 말에 대답을 못하고 주춤거리던 그는 얼굴이 빨개지더니 달아나듯이 뛰어갔다. 정신을 차리고 받은 종이쪽지를 읽던 토마스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 하나님 감사합니다." 종이쪽지를 들고 있던 토마스 목사의 두 손이 가슴에 모아졌다. 그곳에는 "백령도에서 뿌렸던 야소교 책을 꼭 구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이 후로 조선선교에 대한 그의 가슴은 더욱 뜨거워졌고 어떻게든지 조선에 갈 방법을 찾아 나셨다. 그때 조선에는 천주교인들이 핍박을 당하여 강산이 피로 얼룩지고 있었다. 그 사건의 발단은 러시아 군함이 원산에 들어와 통상압력을 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조정은 이러한 압력에 대처할 능력이 없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이 때 천주교도였던 승지 남종상이 대원군을 찾아가 한 가지 방도를 제안하였다.

 

 

러시아를 격퇴시키려면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그것은 프랑스 신부의 도움이 있으면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프랑스 신부의 도움을 받으려면 천주교를 인정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이에 대원군은 러시아 함대만 격퇴시키면 천주교의 포교를 인정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유림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것으로 대원군은 난처한 입장에 빠졌다. 그러던 차에 러시아 함대가 스스로 물러갔다.

 

그때서야 나라의 위기를 이용하여 포교의 자유를 얻으려 했던 남승상의 속셈을 알게 된 대원군은 분노하여 천주교를 사교로 간주하고 책을 불태우도록 하였다. 그리고 다섯 가구 중 한 가구만 천주교를 믿어도 다섯 가구 모두 처형되는 오작통을 실시하였다. 그뿐 아니라 누구든지 서양인과 만나는 사람을 엄하게 다스렸고, 천주교도를 고발하거나 체포하는 사람들에겐 포상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8,000명의 천주교도들이 처형되고 9명의 프랑스 신부가 처형된 병인년 박해의 발단이었다. 그리하여 프랑스는 자국인의 신부를 학살한 것을 항의하고 압력을 행사하기 위하여 프랑스 함대를 조선에 원정을 가도록 하였다.

 

이 때 마침 토마스는 통역으로 동행할 것을 제의받았다. 통역으로 동행할 것을 수락한 토마스는 조선에 가져갈 성경과 전도지를 준비하여 소식이 오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

 

"토마스 목사 뭘 그리 골똘하게 생각하고 있소." "윌리엄슨 목사님, 왜 프랑스에서 연락이 오지 않는 거죠?" "프랑스 배는 오지 않는답니다. 프랑스의 식민지인 반도지나에 변란이 일어나서 그곳으로 뱃머리를 돌렸다고 합니다. 대신 미국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무역을 위해 조선으로 간답니다. 그 배에 통역관으로 승선하여 합류하는 것이 어떻소?"

 

"! 그것 잘되었습니다. 지금 그 선장을 만나보면 안될까요?" "성미도 급하십니다. 마침 지금 그곳으로 가는 길이랍니다. 같이 가봅시다." "선장님, 이 분은 조선말을 잘하시는 토마스 목사입니다." "안녕하시오. 우리는 한양으로 가서 무역을 할 계획입니다." "그러지 마시고 평양으로 가는 것이 어떨까요? 평양감사가 저와 친분이 있어서 도와준다고 약속했는데요. 아직까지 조선과 무역을 시작한 나라가 없는데 누군가 도와준다면 통상을 시작하는데 도움이 될 겁니다." "글쎄, 그럼 평양으로 가도록 합시다."

 

186689일 토마스 목사는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목적지인 평양에 가기 위하여 대동강을 출발하였고 제2차 조선선교여행에 오른 토마스 목사는 이번 조선여행에서 선교를 잘 감당하기 위하여 뱃머리에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였다. 셔먼호가 조선국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821일에 포리에 다다랐을 때 그들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이 배는 미국배로 조선과 무역을 하려고 왔습니다." "프랑스 배가 아닌가요?" 주민들은 프랑스배가 아니라는 말에 실망한 듯하였다. "하나님께서 조선을 사랑하십니다. 자 이걸 받으세요. 성경책입니다." "이걸 그냥 받아도 됩니까?" "여러분들에게 선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이 소문이 사람들에게 퍼지자 수많은 사람들이 배 위에 올라와서 배는 가라앉을 지경이었다. 이 때 나누어 준 성경이 500여 권이나 되었다. 그리고 셔먼호가 북상하여 석호정까지 올라왔을 때 토마스 목사는 배의 갑판으로 나와 "야소 (예수)를 믿으세요! 야소를 믿으세요!" 외치면서 사람들에게 성경을 던져 주었다.

 

이때 4일간 머물면서 100여 권의 성경을 주민들에게 주었다. 셔먼호가 석호정에서 만경대까지 다다르자 팽팽한 긴장이 고조되었다. 조선에서는 그 배가 닿는 곳마다 문정관을 파견하여 목적지와 항해의 목적을 물었다. 통역으로 승선한 토마스는 목적지가 평양이며 통상을 원한다는 것을 밝혔다. 셔먼호에서는 양식과 땔감을 요구하였고 조선에서는 그것을 공급해 주었다. 그러나 셔먼호의 미국인 선장은 조선인 이익현을 협상을 하는 것처럼 속여 배로 유인한 다음 그를 억류하였다. 이것을 알게 된 토마스 목사는 선장에게 "이러면 안 됩니다. 어서 저 사람을 보내주시오." "당신은 상관 마시오. 내가 선장이요." "정말 조선과 교역을 원하신다면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두고 보시오 저들은 곧 내 말을 듣고 통상을 요구해 올 것이오." "이건 비겁한 짓입니다. 빨리 저 사람을 보내고 저들에게 잘못을 사과하시오"

 

그러나 선장은 토마스 목사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익현의 억류로 화가 난 조선의 군사들은 소극적이던 자세를 버리고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이 틈에 박춘권이라는 부교가 이익현을 셔먼호에서 구출하였다. 대포로 공격을 하던 셔먼호 선장은 조선 군사들의 공격이 거세지자 퇴각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홍수로 불어났던 물이 줄어들어 배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하는 소리와 함께 배는 모래에 좌초되었다. 이 순간을 놓칠 리 없던 조선의 군사들은 일제히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이 순간에 토마스 목사는 "야소" "야소 믿으시오!" "야소!" 소리치며 배 안에 있던 성경을 군사들에게 던졌다. "잠깐, 항복하겠으니 우리를 돌려 보내주시오." 배 안에 있던 선장이 외쳤다. "항복하면 돌려보내주겠소. 잠깐만 기다리시오." 하는 소리와 함께 대포는 조선의 군사들을 향해 발사되었다. 선장의 비열한 처사에 화가 난 조선의 군사들이 일제히 횃불을 싣고 셔먼호에 접근하여 불화살을 쏘아대었다. 배에 떨어진 불화살로 셔먼호는 불타기 시작했다. 배에 있던 사람들은 놀라서 강으로 뛰어내렸고 목숨을 건져 뭍으로 나오는 사람들은 성난 조선의 군사들에 의하여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하였다. 그리하여 대동강은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다. 배가 활활 타오르고 있는 와중에서도 누군가 한손에 백기를 들고는 "야소, 야소" 외치면서 성경책을 던졌다.

 

"야 저러다가 저 사람 불타 죽겠다. 야소교 목사라고 했던 사람이지 않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사람들이 근심스런 표정으로 말하였다. 그의 옷에서도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순간 두 팔을 높이 든 토마스는 "야소!" 큰 소리로 외치더니 강물에 뛰어내렸다. 헤엄을 쳐서 뭍으로 나온 그를 목 베려고 누군가 칼을 쳐들었을 때, 부교인 박춘권은 그를 생포하도록 명령하였다.

 

"당신은 총 한번 쏘지 않고 책만 던지던데." "저희들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오." 토마스 목사 외에도 3명의 사람이 생포되었다. 평양감사는 이들에게 국법을 어기고 사교를 전하고 백성들을 살해하였으므로 모두 부교인 박춘권으로 하여금 참수토록 명하였다. 죄수로 묶여 있는 그들은 살려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조용히 눈을 감고 주님만을 찾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대동강 변에서 국법에 따라 한 사람씩 목을 베는 형벌이 실시되었다. 선장과 중국서기인 조능봉, 이팔행이 먼저 목 베임을 당하였다. "다음 영국 야소교 목사 토마스"하자 북소리가 둥--둥 울리기 시작했다. 칼을 잡은 박부교의 손이 높이 올려진 순간이었다. "잠깐만 이걸 받아 주십시오. 제가 드리는 마지막 물건입니다." 이 말에 멈칫하고 놀란 박부교는 토마스 목사가 내미는 작은 보따리를 얼떨결에 받아들었다. 그러자 토마스는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 이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오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 일로 조선 땅에 뿌린 복음이 열매로 맺게 하여 주옵소서."

 

18669328세의 젊은 나이로 영국인 선교사 토마스 목사는 대동강의 한사정 백사장에서 순교의 피를 뿌렸다. 토마스가 죽고 난 다음 33년이 지난 1899년의 일이다. "목사님! 저는 이제 더 이상 이대로는 못살겠습니다. 제가 토마스 목사를 죽인 박춘권입니다. 그 때 그가 죽어가면서 제게 주었던 작은 보따리가 있었는데, 그것은 성경책이었습니다. 그것을 읽고 제 마음이 찔려서 이렇게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 말을 듣고 있던 마펫 선교사의 눈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영감님, 영감님이 토마스 목사를 직접 보셨단 말입니까?" "보다마다요. 제가 토마스 목사를 죽였다니까요?" "하나님께서는 토마스 목사의 죽음을 통하여 영감님과 같은 분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기를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으로 너무 괴로워하지 마세요. 이제부터 영감님도 예수를 믿고 전하면 됩니다." "목사님, 정말 그럴까요? 그때 셔먼호가 불타는 가운데 사람들을 향하여 성경을 던지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보았습니다. 그 중에는 성경을 읽고 예수를 믿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도 어느 여관에 갔을 때 방안이 온통 성경으로 도배가 되어있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여관주인을 불러서 연유를 알아보니 토마스 목사가 포리에서 500여 권의 성경을 배포할 때 박영식이라는 평양감청 경비가 사람들이 버리는 책을 주워 다가 도배를 했답니다. 그것을 여관주인인 최치량이 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여관에 묵어가는 사람들 가운데 이 글을 읽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제게 들려주면서 자신도 예수를 믿는다고 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알기로도 토마스 목사에게 성경을 받고 예수를 믿은 사람이 많습니다. 홍신길은 후에 대동문에 교회를 세웠으며, 그의 동생도 예수를 믿고 장로가 되었고, 김영섭은 원래 천도교였으나 동생 종권과 함께 교인이 되어 장로가 되고, 황명대는 셔먼호가 불탈 때 "야소, 야소"하는 소리를 듣고 평양 초대교회의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 밖에도 많습니다."

 

이렇게 토마스 목사가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뿌렸던 성경은 살아서 조선의 교회가 세워지는 초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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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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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위클리프

(개혁의 선구자)

 

 

종교개혁 이전에는 극히 적은 부수의 성경밖에 없었으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이 완전히 없어지도록 허락지 아니하셨다. 성경의 진리가 영원히 숨겨지지는 않을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감옥의 문과 철문을 열어서 당신의 종들을 쉽게 해방시켜 주실 수 있었던 것처럼 그분께서는 생명의 말씀도 쉽게 해방시킬 수 있으셨다.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어 감추인 보화를 찾듯이 진리를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 아래 성령의 지도를 받고, 비상한 흥미를 가지고 거룩한 말씀을 연구하였다. 그들은 어떤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빛을 받고자 하였다. 그들은 모든 것을 분명히 깨닫지는 못했지만 오래 묻혀 있었던 많은 진리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하늘의 사자들로 파견되어, 오류와 미신의 쇠사슬을 끊어 버리고, 오랫동안 속박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얻으라고 부르짖었다. 왈덴스인들을 제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유식한 사람들만 알 수 있는 언어로 여러 시대 동안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성경이 번역되어 모든 사람들이 자국어로 된 성경을 가질 수 있는 시대가 왔다. 세상은 깊은 밤중을 지냈다. 흑암의 시대는 지나가고, 많은 나라들에서는 날이 새는 징조들이 나타났다.

 

14세기에 영국에서 종교개혁의 샛별이 나타났다.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는 영국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교국을 위한 개혁의 선구자였다. 그가 허락을 받아 로마교에 제기한 큰 항의는 결코 침묵시킬 수 없을 것이었다. 그 항의는 마침내 개인과 교회와 국가의 해방을 초래하게 될 투쟁을 빚어냈다.

 

위클리프의 청년 시대

 

위클리프는 고등 교육을 받았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었다. 그는 대학 시절에 이미 놀라운 재능과 학식뿐만 아니라 그의 열성 있는 신앙으로 명성이 높았다. 지식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한 그는 모든 방면의 학문에 통달하고자 애를 썼다. 그는 스콜라 철학을 공부하는 동시에 교회법과 국법, 특히 자기 나라의 법률을 공부하였다. 이와 같이 닦은 청년 시대의 교육이 후년에 가서 그 가치를 크게 드러내었다.

 

그는 당시의 사변 철학(思辨哲學)에 정통하였으므로 그 오류를 지적할 수가 있었고, 국법과 교회법을 공부하였으므로 국가와 종교의 자유를 위하여 크게 활약할 수 있는 준비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얻은 무기를 사용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 지적 훈련을 쌓았기 때문에 학자들의 수법(手法)도 알고 있었다. 그의 천부(天賦)의 재능과 깊고 넓은 지식은 동료들과 원수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의 지지자들은 그들의 투사가 당시의 국내의 지도자들 가운데서 첫째가는 사람인 것을 만족하게 여기고 있었고, 그의 원수들은 개혁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무지와 약점을 폭로함으로 감히 개혁 사업을 멸시하려고 하지 못하였다.

 

위클리프는 대학에 있을 때 성경 연구를 시작하였다. 초기인 당시에는 성경이 고어(古語)로만 되어 있었으므로 학자들은 진리의 근원으로 나아갈 수 있었으나 무식한 일반 사람들에게는 그 길이 막혀 있었다. 그와 같이 개혁자로서의 위클리프의 장래의 사업에 대한 길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학식이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함으로 그 속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큰 진리를 발견하였다. 그 진리를 가르침으로, 그들은 진리의 지식을 전파하였고, 다른 사람들을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향하도록 인도하였다. 위클리프는 성경 연구에 뜻을 두고 학교에서 학과를 공부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그것을 연구하였다.

 

그는 지금까지 스콜라 철학이나 교회의 가르침에서 만족을 얻지 못하고 항상 부족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이전에 얻지 못했던 것을 찾아내었다. 거기서 그는 구원의 계획을 깨달았고,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유일한 중보자이심을 알게 되었다. 그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사업에 바치고 자기가 발견한 진리를 전파하기로 결심하였다.

 

폐습의 타파(打破)

 

위클리프는 후세의 다른 개혁자들처럼 그의 사업의 초기에는 자기가 어디로 인도될 것인지 알지 못하였다. 그는 고의적으로 로마교에 반대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진리에 투신하게 되자 그는 필연적으로 거짓과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법왕권의 오류가 분명해지면 질수록 더욱 열렬하게 성경의 교훈을 설명하였다. 그는 로마교가 사람의 유전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는 것을 보고 성경을 저버린 신부들을 담대하게 질책하고 성경을 백성들에게 돌려줄 것과 성경의 권위를 교회 안에서 다시 한 번 확립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그는 재간 있고 열성 있는 교사요 웅변적인 설교자였으며, 자기가 전한 진리를 자기의 일상생활로써 실증했다.

 

성경 지식, 그의 논증의 설득력, 그의 깨끗한 생애, 그의 변함없는 용기와 성실성 등은 일반 사람들의 존경과 신뢰를 얻었다. 그러므로 로마교에 편만한 불법을 눈으로 목격한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종래의 신앙에 불만을 가졌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감출 수 없는 기쁨으로 위클리프가 밝히 제시한 진리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법왕교의 지도자들은 그 개혁자가 그들 자신들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을 보고 심히 분노하였다.

 

위클리프는 오류를 발견하는 데 예민한 사람이었으므로 로마교의 권위로 승인한 여러 가지 악폐에 대하여 기탄없이 공격하였다. 그는 국왕의 왕실 목사로 재직할 당시에 법왕이 영국 국왕에게 요구하는 조공에 대하여 단호히 반대하는 입장에 섰으며, 법왕이 세속적 통치자를 지배하는 권위를 가지는 것은 이성과 계시에 어긋나는 일임을 보여 주었다. 법왕의 요구는 심한 의분을 일으켰었다. 위클리프의 가르침은 그 나라의 지도층 인사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하여 왕과 귀족들은 속권에 대한 법왕의 요구를 부인하고 조공의 지불을 거절하는 일에 결속하였다. 이와 같이 영국에서는 법왕 최상 권에 효과적인 타격을 입혔다.

 

승단(僧團)의 부패와 타락

 

이 개혁자가 오랜 시일을 두고 단호한 투쟁의 대상으로 삼아 온 또 하나의 악폐는 탁발승단(托鉢僧團) 제도였다. 이 탁발승들은 영국 안에 너무 많이 있었으므로 국가의 번영에 큰 장애가 되고 있었다. 산업, 교육, 도덕이 모두 그 쇠퇴의 영향을 입고 있었다. 승려들의 게으른 생활과 구걸은 사람들에게 재정적으로 막대한 손실을 주었을 뿐 아니라 유용한 노동을 멸시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리하여 청년들은 부도덕하고 타락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탁발승의 영향으로 수도원에 들어가서 은둔 생활(隱遁生活)에 몸을 바치도록 권유를 받았다. 그들은 부모와 합의하지도 않고 부모에게 알리지도 않고 그들의 명령을 거스르고 은둔 생활에 들어갔다.

 

초대 로마교의 어떤 교부(敎父)는 자녀로서의 사랑이나 의무에 대한 의리보다도 수도 생활(修道生活)이 더욱 중요함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비록 너의 아버지가 너의 문 앞에 누워서 울고 슬퍼할지라도, 너의 어머니가 너를 낳았던 몸과 너를 젖먹이던 가슴을 보일지라도, 너는 그들을 발로 짓밟아 버리고 그리스도에게로 곧장 달려가야 한다.” 후일에 루터는 이에 대하여 이런 “무서운 비인도적 행위는 그리스도인과 사람의 행위라기보다는 차라리 이리나 폭군의 행위”(Barnas Sears, The Life of Luther, pp.70, 69)로 생각된다고 말하였다.

 

이런 일들이 자녀들의 마음을 부모에 대하여 무정하게 만들었다. 이리하여 법왕교의 지도자들은 옛날 바리새교인들처럼 그들의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가정들은 황폐되었으며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들과의 교제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심지어 대학교의 학생들까지도 승려들의 거짓된 말에 속아서 그들의 대열에 가담하게 되었다. 그런 후에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애를 해롭게 하고 부모에게 슬픔을 안겨준 것을 알고 후회하게 되었으나 일단 올무에 단단히 걸린 다음에는 다시 자유를 찾을 수 없었다.

 

많은 부모들은 승려들의 영향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아들들을 대학으로 보내지 않았다. 그리하여 학문의 위대한 중심지에 모여드는 학생 수는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학교들은 쇠퇴하여 갔고 무지(無知)는 편만하게 되었다. 법왕은 승려들에게 사람들의 자복을 듣고 용서해 주는 권세를 주었다. 이것이 또한 죄악의 큰 원인이 되었다. 승려들은 그들의 사복을 채우기 위하여 사람들이 어떠한 죄악을 고백하든지 곧 사면하여 주므로 그 결과로 가장 악한 죄악이 급격히 증가하게 되었다.

 

병자와 가난한 자들은 돌아보지 않으면서 마땅히 그들의 궁핍을 제거하는 일에 쓰여져야 할 선물들은 승려들에게로 넘어갔다. 승려들은 위협으로 사람들의 시여(施與)를 강요하였고, 그 일을 거절하여 기부하지 않는 자에게는 불온한 말을 하며 비난하였다. 표면상으로는 빈곤하다고 말하지만, 승려들의 재산은 계속해서 증가하였다. 그들의 훌륭한 저택과 사치스러운 식탁은 백성들의 빈곤을 더욱 심하게 해주었다. 그들 자신은 향락과 사치에 빠져 시간을 보내면서, 기괴한 이야기와 옛 전설과 백성들을 경박하게 만들어 주는 농담들밖에 할 수 없는 무지한 사람들을 그들 대신 보내어 사람들을 더욱 완전히 승려들의 속임수에 넘어가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신적인 일반 사람들은 그러한 승려들을 지지하고, 법왕의 절대권을 인정하고, 성도를 숭배하고, 승려들에게 선물을 드리므로 종교적 의무를 완전히 다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함으로 천국에 들어가기에 넉넉한 자격을 얻게 된다고 믿었다. 학식 있고 경건한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탁발승의 제도를 개혁하고자 수차 시도하였으나 헛수고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예민한 통찰력을 가진 위클리프는 그 제도 자체가 거짓된 것이므로 폐지되어야 한다고 선포하면서 악의 뿌리를 공격하였다. 토론과 의문이 사방에서 일어났다.

 

승려들이 법왕의 면죄부(免罪符)를 팔면서 각처로 돌아다니는 것을 본 많은 사람들은 과연 돈으로 죄사함을 얻을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하여 의심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로마 법왕에게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 죄 사함을 구하여야 할 것이 아니냐고 질문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결코 만족할 줄 모르는 것처럼 보이는 탁발승(托鉢僧)들의 탐욕에 놀랐다. 그들은 “로마의 승려와 신부들이 암(癌)처럼 우리를 좀먹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으면 백성들은 멸망할 것이다”(D’Aubigne, b.17, ch.7)라고 말하였다. 구걸하면서 다니는 그 승려들은 자기들의 탐욕을 감추기 위하여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이 백성들의 자선에 의하여 생활하였다고 주장하므로 그들은 구주의 모본을 따라가고 있노라고 하였다.

 

그와 같은 주장은 그들의 사업에 해로운 결과를 가져왔다. 왜냐하면 그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배우기 위하여 성경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그것은 어떤 일보다 로마가 가장 싫어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은 바로 로마교가 숨기고자 하는 진리의 근원을 찾아 나아가게 되었다.

 

위클리프는 탁발승단을 반대하는 소책자를 저술하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그들과 논쟁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사람들의 마음을 성경과 그 저자 되시는 하나님의 교훈으로 인도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법왕의 사면하거나 파문하는 권세가 보통 신부 이상의 권세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먼저 정죄의 선고를 받지 않는 한 아무도 참으로 파문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이 일은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과 몸을 속박하기 위하여 법왕이 제정한 영적 및 세속적인 거대한 조직체를 파괴하는 데 있어서 더할 수 없이 효과적인 방법이 되었다.

 

영국 국왕과 위클리프

 

위클리프는 로마 법왕의 침략적 세력에 대항하여 영국 국왕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하여 다시 부름을 입었다. 그는 국왕의 사신이 되어 네덜란드에서 2년 동안 지내면서 법왕의 사절들과 회의를 하였다. 거기서 그는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의 승려들과 교제하게 되었으며, 그로 인하여 그들의 이면을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고, 영국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을 깨닫게 되었다. 거기서 그는 장래 활동에 도움이 되는 것들을 많이 배웠다. 이 법왕권의 대표자들을 통하여 그는 그 교직 정치(敎職政治)의 참된 성격과 목적을 알았다. 영국에 돌아간 후에 그는 종래의 가르침을 더욱 담대하게 되풀이하였고, 더욱 큰 열성으로 탐욕과 교만과 기만이 로마교의 신(神)이라고 공언하였다. 그는 자기가 저술한 소책자에서 법왕과 법왕의 모금자(募金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들은 우리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의 생계비를 빼앗고, 해마다 수천 마르크의 돈을 성직 매매의 저주받은 이단에 불과한 성물과 신령한 행사를 위하여 빼앗아 가며, 모든 그리스도 국으로 하여금 그 이단을 찬동하고 지지하도록 만든다. 참으로 우리나라에는 금으로 된 거대한 산이 있는데 지금껏, 그것을 가져가는 자가 없었으나, 오직 저 교만하고 세속적인 신부라는 모금 자가 가져가고 있으므로 세월이 지남에 따라 그 산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나라에서 돈은 가져가고 성직 매매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저주만을 남겨 놓기 때문이다”(John Lewis, History of the Life and Sufferings of J.Wycliffe, p.37).

 

위클리프가 영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아니하여, 그는 칙명(勅命)으로 루터워드의 교구장(敎區長)이 되었다. 이 사실은 적어도 국왕이 그의 솔직한 말을 불쾌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증해 주는 일이었다. 위클리프의 감화는 긍정의 태도를 결정하고 국민들의 신념을 형성하는 일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곧 법왕의 진노와 위협이 그에게 다가왔다. 대학과 국왕과 감독들에게 보내는 세 가지 교서가 영국으로 급히 전달되었다. 그 내용은 모두 그 이단의 교사를 침묵시키기 위하여 즉각적이고 단호한 조치를 취하라는 명령이었다(Augustus Neander, General History of the Christian Religion and Church, period 6, sec.2, pt.1, par.참조).

 

이 교서가 하달되기 전에 이미 감독들은 격분한 나머지 위클리프를 법정으로 소환했었다. 그러나 국내에서 가장 세력 있는 두 왕족이 그를 동반하여 법정에 임석하였고, 군중들이 법정 밖을 에워싸고 마침내 법정 안으로 뛰어 들어가려는 소동까지 일으켰으므로, 재판을 진행하던 법관들도 이를 두려워하여 심문을 잠깐 중지하고 그를 놓아 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감독들이 나이 많은 에드워드 3세로 하여금 그 개혁자를 배척하도록 하고자 꾀하였으나 얼마 후에 그 왕은 죽고, 전에 위클리프를 보호하던 이가 섭정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교서가 도착되자 이단자를 체포하여 옥에 가두라는 엄한 명령이 온 영국에 선포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분명히 화형주(火刑柱)를 의미하였다.

 

위클리프는 오래지 않아서 반드시 로마의 보복의 희생 제물이 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옛날의 노독 중의 한 사람에게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라”(창 15:1)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는 또다시 손을 펴사 당신의 종을 보호하셨다. 죽음이 다가왔으나 그 죽음은 개혁자에게가 아니고 도리어 개혁자에게 죽음을 선고한 법왕 자신에게 다가왔다. 그레고리우스 Ⅱ세는 죽었다. 그러므로 위클리프를 심문하기 위하여 모였던 교직자(敎職者)들은 부득이 산회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섭리와 개혁 사업의 발전

 

하나님의 섭리는 여전히 여러 사건을 지배하여 개혁 사업이 발전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레고리우스 법왕이 죽은 후에 두 법왕이 대립하여 선출되었는데, 그들은 각각 자기가 절대로 무류하다고 공언하고 사람들의 복종을 요구하였다. 두 사람은 각각 자기에게 충성하는 자들을 소집하여 상대편에게 도전하게 하고,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는 심한 저주를 하는 한편, 자기를 지지하는 자에게는 하늘에서 보상을 받을 것을 약속함으로 자기를 지지해 주기를 강요하였다. 이러한 사태로 말미암아 법왕권의 세력은 현저하게 약화되었다. 두 파는 각각 있는 힘을 다하여 상대방을 공격하였으므로, 그 틈을 타서 위클리프는 얼마 동안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서로 저주하고 비난하는 투쟁이 두 법왕 사이에 전개되었고, 각자의 주장을 세우기 위하여 유혈 참극까지 벌였다. 교회 안에는 범죄와 추문이 차고 넘쳤다. 이러는 사이에 개혁자 위클리프는 루터워드에 은거하면서 서로 싸우고 있는 법왕들로부터 사람들의 눈을 평화의 임금이신 예수님께로 돌리고자 애를 썼다. 온갖 투쟁과 타락을 자아낸 분열은 사람들로 하여금 법왕권의 진상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어 도리어 개혁의 길을 열어 주었다.

 

위클리프는 자기가 저술한 “법왕의 불법”이란 소책자에서 서로 상대편을 적그리스도라고 정죄하고 있는 두 승려의 말이 참말인지 생각해 보라고 백성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미 악마와 같은 그들 중의 하나로만 통치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고…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들을 더욱 쉽게 이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둘 사이에 분열을 일으키셨다”(R.Vaughan, Life and Opinions of John de Wycliffe, vol.2, p.6)고 말하였다.

 

위클리프는 그의 주님처럼 빈곤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루터워드의 교구 안에 있는 비천한 백성들에게만 빛을 전하는 것으로 흡족히 여기지 않고, 영국의 각 곳에 전해야 하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는 그 목적을 위하여 진리를 사랑하며 그것을 널리 증거하기 위하여 아무것도 아끼지 아니하는 단순하고 경건한 선교사들로 구성된 하나의 조직체를 만들었다. 그들은 어느 곳이든지 가서 시장(市場)에서나 대도시의 거리에서나 시골의 길가에서 설교하였다. 그들은 늙은이들과 병든 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찾아가서 하나님의 은혜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위클리프는 옥스포드 대학교의 신학 교수로서 그 대학의 강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강의하였다. 그는 자기에게 가르침을 받는 학생들에게 진리를 너무도 성실하게 소개하였으므로 복음 박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위클리프의 온 생애를 통하여 최대의 사업이라고 할 만한 것은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것이었다. 그는 “성경의 진리와 의미”라는 저서에서 자기가 성경을 번역하여 영국 국민으로 하여금 모두 자국어로 하나님의 놀라운 업적을 읽을 수 있게 할 뜻이 있다는 것을 표명하였다.

 

영역 성경의 완성

 

그런데 갑자기 그의 활동은 중단되었다. 아직 60세도 안 되었지만 끊임없는 수고와 연구와 원수들의 공격이 그의 기력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그는 신속히 노쇠하게 되었다. 그는 위험한 병에 걸렸다. 이 소식은 탁발승들에게 큰 기쁨이 되었다. 그들은 이제야 그가 교회에 대하여 범한 악행을 깊이 뉘우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의 자복을 듣기 위하여 그가 거처하고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네 종교 단체에서 온 대표자들과 네 사람의 정부의 관리들이 임종이 가까운 것으로 생각되는 그의 주위에 모여 있었다.

 

“그대의 죽음이 임박하였으니 이제 과거의 모든 죄과를 뉘우치고 일찍이 우리에게 손해를 주기 위하여 말한 모든 것을 우리 앞에서 취소하라”고 그들은 말하였다. 그 개혁자는 조용히 듣고 있다가 시중드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침상에서 일어나, 신앙의 취소를 들으려고 기다리고 있는 그들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그처럼 자주 떨게 해주었던 분명하고 큰 음성으로 다음과 같이 외쳤다.

 

“나는 죽지 않고 살아날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너희 탁발승들의 악행을 공개할 것이다”(D’Aubigne, b.17, ch.7).

 

천만 뜻밖에 질책을 받은 승려들은 그만 놀라고 부끄러워서 그 자리에서 급히 나가 버렸다. 위클리프의 말은 성취되었다. 그는 로마를 대항하는 모든 무기 중의 가장 강력한 무기, 곧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고, 그들을 계몽시키고 교화시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성경을 자기 동포들의 손에 쥐어 주기까지 생명이 연장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 사업의 완성을 보기까지 여러 가지 큰 장애를 겪었다. 위클리프는 건강이 대단히 좋지 못하므로 자기가 일할 수 있는 시간이 불과 몇 년밖에 남지 않은 것을 알았으며, 또한 반드시 반대를 만나게 될 것을 내다보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있는 허락으로 힘을 얻어서 그는 결코 굴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지금껏 왕성한 지력(智力)과 풍부한 체험 속에서 그의 사업 중의 가장 위대한 사업을 위하여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에 의하여 보호를 받고 준비하여 왔다. 모든 그리스도교국이 온통 혼란 중에 빠져 있는 그 때에, 이 개혁자는 루터워드의 목사관(牧師館)에서 외부의 폭풍과는 상관없이 자기에게 주어진 그 사업에 몰두하였다.

 

드디어 사업이 완성되어 최초의 영어 성경이 나오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국에 공개되었다. 개혁자는 이제 감옥이든지 화형 주든지 두려워할 것이 없었다. 그는 결코 꺼질 수 없는 빛을 영국 국민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는 자기의 동포들에게 성경을 줌으로 무지와 죄악의 사슬을 끊어 버리는 것 이상의 것, 자기의 나라를 해방시키고 향상하도록 이끌기 위하여 전쟁터에서 빛나는 승리를 얻은 것보다 더욱 위대한 일을 성취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아직도 인쇄기가 발명되지 아니하였으므로 성경의 부수를 증가시키려면 더디고도 번거로운 수고를 할 수밖에 없었다.

 

성경을 가지고 싶은 욕망이 너무나 많았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복사하는 일을 자원하여 담당하고자 했다. 그러나 요구되는 만큼의 부수를 공급하기는 어려웠다. 그 중에 돈이 많은 부자들은 성경전서를 사고자 욕망하였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일부분만을 샀다. 많은 경우에, 여러 가정들이 합하여 성경을 샀다. 그리하여 위클리프의 성경은 많은 사람들의 가정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와 같이 사람의 이성(理性)에 호소한 결과, 사람들은 법왕교의 교리에 맹종하던 상태에서 각성하였다.

 

위클리프는 이제 개신교의 명확한 교리, 곧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과 성경의 절대적인 확실성에 대하여 가르쳤다. 성경을 전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은 전도자들은 이 개혁자의 저서도 전하였는데, 그로 인하여 영국 국민의 약 절반이 이 새 신조를 받아들이게 되리만큼 큰 성공을 거두었다.

 

위클리프의 만년(晩年)의 대 활동

 

성경이 나오게 되자 교회의 당국자들은 당황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제 위클리프보다 더욱 강한 것, 곧 그들의 무기도 거의 소용없을 정도의 큰 힘과 대결하게 되었다. 그 당시 영국에는 자국어로 된 성경이 출판되지 아니하였으므로, 아직까지 성경을 금지하는 법령이 생기지 아니하였다. 그런 법령들은 그 후에 제정되어 강력하게 시행되었다. 그러므로 승려들의 반대는 있었을지라도 얼마의 기간 동안 성경이 배포(配布)될 기회가 주어졌다.

 

법왕교의 지도자들은 개혁자의 소리를 침묵시키기 위하여 다시 음모를 꾸몄다. 개혁자는 세 번이나 심문을 받기 위하여 법정에 소환되었으나 방면되었다. 그러나 첫째로 감독들의 종교 회의에서 그의 저서를 이단이라고 선고하고, 그들은 젊은 왕 리챠드 2세를 그들 편으로 끌어들여 누구나 금지된 교리를 지지하는 자는 투옥시킬 것이라는 칙령을 반포하게 하였다.

 

위클리프는 종교 회의로부터 국회에 호소하였으며, 그는 국회에서 두려움 없이 교직 정치를 비난하고, 교회가 시인한 무서운 악폐들을 혁신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는 확신을 가지고 법왕 측의 참람과 타락을 폭로하였다. 그의 원수들은 혼란에 빠졌다. 이미 위클리프의 친구들과 지지자들은 부득이 굴복하도록 강요되었다. 그러므로 고립무원(孤立無援)한 늙은 개혁자도 임금과 법왕의 연합된 권위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으리라고 기대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는 대신에 법왕교도들은 자기들이 패배당한 것을 알게 되었다. 의회는 위클리프의 감동적인 호소에 감화를 받고, 핍박하는 칙령을 철회시켰다. 그리하여 개혁자는 다시 자유롭게 되었다.

 

그는 세 번째의 심문을 받게 되었는데, 국내의 최고 종교 재판소에서 받았다. 이곳은 이단자에게 아무런 유리한 판결이 내릴 수 없는 곳이다. 여기에서 로마교는 최후의 승리를 얻고, 개혁자의 활동은 정지되리라고 법왕교도들은 생각하였다. 무슨 방법으로든지 그들의 목적을 성취할 수만 있다면 위클리프는 하는 수 없이 자기의 교리를 버리든지 화형의 선고를 받고 법정을 떠나가든지 할 것이었다.

 

그러나 위클리프는 자기의 교리를 철회하지도 않고 숨기지도 않았다. 그는 두려움 없이 자기가 가르치는 바를 주장하고 자기를 박해하는 자들의 비난을 반박하였다. 그는 자기 자신과 자기의 위치와 자기의 환경을 다 잊어버리고, 그의 청중들을 하나님의 심판 정에 세워 놓고, 그들의 궤변과 기만을 영원한 진리의 저울로 달았다.

 

성령의 권능이 그 법정 안에 충만하였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이상한 힘이 청중들에게 임하였다. 그들은 그 자리를 떠나갈 힘이 없는 듯이 보였다. 개혁자의 말은 마치 하나님의 전통(箭筒)에서 나온 화살처럼 듣는 이들의 마음을 찔렀다. 그를 이단이라고 비난했던 그들의 고소를 그는 설복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이제 그 사람들에게 되돌렸다. 어찌하여 그들이 자기들의 오류를 퍼뜨리고자 하였는가라고 그는 부르짖었다. “이(利)를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상품화하고자?”

 

그는 또 마지막으로, “그대들은 누구와 더불어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무덤에 들어가기 직전에 있는 늙은이와 더불어 싸우고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대들은 진리, 곧 그대들보다 더욱 강하며 마침내 그대들을 이기고야 말 진리와 더불어 싸우고 있는 것이다”(Wylie, b.2, ch.13)라고 말하였다. 그렇게 말한 다음에는 법정을 나왔으나 그의 원수들 중에서 한 사람도 그를 막는 자가 없었다.

 

법왕에 대한 최후의 경고

 

위클리프의 사업은 거의 마쳐졌다. 오랫동안 쥐고 있던 진리의 깃발은 곧 그의 손에서 떠날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한 번 복음을 위하여 증거 할 것이었다. 그 진리는 바로 오류의 왕국의 본거지에서 선포되어야 할 것이었다. 위클리프는 심문을 받기 위하여 너무도 자주 성도들의 피를 앗아간 로마법왕의 재판정에 호출되었다. 그는 자기를 위협하고 있는 위험을 알고 있었지만 그 소환에 응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마침 그 때 그는 중풍으로 여행을 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육성으로는 로마에서 말할 수 없었을지라도 편지로는 말할 수 있었으므로, 그는 결국 그렇게 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자기의 목사관에서 법왕에게 보낼 편지를 썼다. 그 편지에는 예의바른 언사와 그리스도인적 정신이 나타나 있었으나 법왕청의 허식과 교만을 날카롭게 견책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신앙을 모든 사람, 특히 로마 주교(법왕)에게 공개하여 주장할 수 있는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나는 이 신앙이 건전하고 참된 줄로 믿기 때문에 그는 가장 즐거운 마음으로 내가 주장하는 신앙에 동의할 줄로 믿으며, 만일 그 신앙이 잘못된 것이라면 역시 교정하여 줄 줄로 믿는다. 나는 첫째로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의 율법의 전부라고 믿는다. …로마 감독이 지상에 있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면, 그는 다른 어떤 사람보다 복음의 율법에 결속되어 있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스도의 제자들 가운데서 위대하다고 하는 것은 어떤 세속적 위엄이나 명예에 있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의 생애와 그분의 태도에 가깝게, 또한 정확하게 따라가고 있는 점에서 그러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셨을 당시의 생애는 가장 빈곤하고, 모든 세속적 권력과 명예에서 떠난 생애였다. 어떤 신실한 사람도 법왕이나 어떤 성인을 따라갈 때, 그들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간 그 점에 있어서만 그를 따라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베드로와 세베대의 아들들은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대신에 세속적 명예를 사모함으로 죄를 범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그와 같은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 법왕은 자기의 모든 영토와 통치권을 세속적 권력에게 마땅히 넘겨주고, 또한 자기에게 속한 모든 교직자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치고 그렇게 이행하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셨고, 특별히 그분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점들에 있어서 내게 잘못이 있으면 나는 겸손한 마음으로 이를 정정(訂正)할 것이며, 만일 필요하다면 죽음이라도 사양치 아니할 것이다. 내 자신의 뜻과 소원대로 한다면, 나는 틀림없이 로마 감독 앞으로 달려 나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와 반대로 다른 일이 내게 생기게 하셔서 나로 하여금 사람을 순종하기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도록 가르쳐 주셨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편지를 마쳤다.

 

“우리 하나님께서 법왕 어반 6세의 마음을 감동하사 그가 친히 본을 보여 그의 교직자들과 함께 그 생활과 태도에 있어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고, 또한 그들이 백성들을 효과적으로 가르쳐서 그들과 마찬가지로 신실히 주님을 따르게 되기를 우리는 기도하는 바이다”(John Foxe, Acts and Monu-ments, vol.3, pp.49, 50). 이와 같이 위클리프는 법왕과 그의 추기경들에게 그리스도의 온유와 겸손을 나타내 주었고 이들이 대표하고 있노라고 공언하는 주님과 그들 자신과의 현저한 차이를 그들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교국에 나타내 보여 주었다.

 

위클리프의 신앙과 성경

 

위클리프는 자기가 하나님께 계속해서 충성한다면 자기의 생명이 희생당할 것이라고 깊이 생각하고 있었다. 왕과 법왕과 감독들이 모두 힘을 합하여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그는 늦어도 수개월 후에는 틀림없이 화형에 처하게 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의 용기는 조금도 흔들리지 아니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어찌하여 너희들은 순교자의 면류관을 멀리서 찾고 있노라고 말하느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저 교만한 주교들에게 전하라. 그리하면 순교는 틀림없이 오고 말 것이다. 살아서 침묵을 지키고 있어야 한다고? 결단코 안 될 말이다. 탄압하려거든 해보라. 나는 그 일이 있기를 기다리고 있다”(D’Aubigne, b.17, ch.8).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여전히 당신의 종을 보호하였다. 자기의 온 생애를 통하여 날마다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담대히 진리를 옹호하고 있는 이 사람은 원수들의 증오의 희생물로 쓰러질 것이 아니었다. 위클리프는 전혀 자기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지 아니하였지만 주님께서 그의 보호자가 되셨다.

 

바야흐로 그의 원수들이 틀림없이 그를 희생 제물로 삼을 수 있다고 느낀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의 손은 그들의 손이 미치지 못할 곳으로 그를 옮기셨다. 그는 루터워드에 있는 자기의 교회에서 성찬식을 집례하려고 하다가 갑자기 중풍병으로 쓰러졌는데 그 얼마 후에 사망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위클리프에게 그의 사업을 지정해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입에 진리의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이 백성들에게 전해지게 하시고자 그의 신변을 지키셨다. 그리하여 개혁의 위대한 사업을 위한 기초가 놓일 때까지 그의 생명은 보호되고, 그의 활동은 연장되었다. 위클리프는 암흑시대의 흑암 속에서 나타났다. 그와 같이 개혁 사업의 기초를 놓은 사람이 그 전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침례 요한과 같이 그는 특수한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일어난 새 시대의 선구자였다.

 

그러나 그가 밝혀낸 진리의 체계는 그 후의 개혁자들이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어떤 것들은 그 후 백년이 지나서도 미칠 수 없을 만큼 통일성과 완전성이 있었다. 그 기초는 넓고 깊으며, 그 구조는 튼튼하고 완전하므로 그 후에 나타난 사람들이 그것을 재건할 필요가 없었다. 위클리프가 착수한 위대한 운동, 곧 양심과 지성을 해방시켜 주고, 질곡(桎梏)에 속박되어 있던 여러 나라들에게 자유를 준 운동의 근원은 성경이다.

 

14세기 이래 각 시대를 통하여 마치 생명수처럼 흘러내린 축복의 근원은 바로 성경이었다. 위클리프는 단순한 마음으로 성경을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영감의 계시요, 믿음과 행실의 완전한 표준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일찍이 로마교회를 거룩하고 절대 무류의 권위를 가진 교회로 여기고, 천여 년 동안에 걸쳐서 확립된 그 교리와 관습을 절대적인 존경심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교육을 받았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순종하기 위하여 이 모든 것들로부터 돌아섰다. 이 거룩한 말씀은 그가 백성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고자 역설한 권위의 말씀이었다.

 

유일의 참 권위는 법왕을 통하여 말하고 있는 교회가 아니라,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그는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는 성경이 하나님의 뜻의 완전한 계시인 동시에, 성령께서 성경의 유일한 해석자이므로 모든 사람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연구하여 스스로 자기의 본분을 깨달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렇게 하여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법왕과 로마교회로부터 성경 말씀으로 돌이켰다.

 

위클리프의 인격과 사업

 

위클리프는 가장 위대한 개혁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해박한 지식, 명석한 사고력, 진리를 주장할 때 보여준 확신, 그리고 진리를 옹호하기 위한 담력 등은 그보다 후에 나타난 사람들 중에서도 그와 필적할 사람이 별로 없다. 그가 살던 시대에는 지적으로 몽매하고 도덕적으로 부패한 시대였지만, 이 최초의 개혁자의 봉사는 생애의 순결, 연구와 활동에 있어서의 근면, 매수되지 않는 청렴, 사업에 있어서의 그리스도와 같은 사랑과 충성 등으로 특징을 이루었다.

 

이와 같은 위클리프의 인격은 성경이 사람을 교육시키고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는 것을 증명해 주는 좋은 예증이 된다. 과연 성경이 그로 하여금 그러한 인물이 되게 하였다. 계시에 나타난 위대한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노력은 모든 기능에 새로움과 활기를 준다. 그것은 마음을 넓혀 주고, 이해력을 예민하게 해주고, 판단력을 성숙하게 해준다.

 

성경 연구는 어떤 연구보다도 사상과 감정과 욕망을 더욱 정화(淨化)시켜 줄 것이다. 그것은 견인불발의 정신과 인내와 용기와 굳센 마음을 가져다준다. 그것은 품성을 세련시켜 주고, 심령을 거룩하게 만들어준다. 성경을 존중하고 열심히 연구하는 사람의 마음은 무한하신 하나님의 마음과 직접 접촉하게 되므로, 어떠한 인간적인 철학이 가져다주는 가장 훌륭한 결과보다 더욱 고상한 원칙은 물론이요, 더욱 강하고 적극적인 지성을 갖춘 인물이 되게 해줄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을 열므로 우둔한 자에게 비취어 깨닫게 하나이다”(시 119:130)고 말하고 있다.

 

위클리프가 가르친 교리는 그 후에도 얼마 동안 널리 전해졌다. 그를 따르는 자들, 곧 위클리프 교도와 롤라드 교도라고 불리는 무리들은 영국에 복음의 지식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외국에까지도 그것을 가지고 나아갔다. 이제 지도자는 없어졌으나 그 전도자들은 전보다도 더욱 큰 열성으로 일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가르침을 듣기 위하여 모여들었다. 그들이 전한 복음을 듣고 회개한 사람들 중에는 귀족도 있고 왕비도 있었다. 많은 곳에서 사람들의 생활 상태가 현저하게 개혁되었고, 로마교의 우상적 상징은 교회에서 제거되었다. 그러나 무자비한 박해의 폭풍이 성경을 그들의 지도자로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곧 몰려왔다.

 

영국의 국왕들은 로마 법왕의 지지를 얻어 자기들의 권세를 강화시키기 위하여 개혁자들을 희생시키는 일을 주저하지 아니하였다. 영국 역사상 최초로 복음의 사도들에 대하여 화형의 선고가 내렸다. 순교자가 계속하여 뒤를 이었다. 법률의 보호를 박탈당하고 고문에 시달리는 진리의 옹호자들은 만군의 여호와께 부르짖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 그들은 교회의 원수요 국가의 반역자로 누명을 쓰고 추격을 받으면서도 몰래 복음을 전하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빈궁한 자들의 집을 그들의 가장 좋은 은신처로 삼았고, 때때로 굴속을 그들의 피난처로 삼기도 하였다. 격렬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타락한 종교의 세력을 대항하여 전개한 조용하고, 경건하고, 열렬하고, 꾸준한 반항은 여러 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진리에 관한 지식을 일부분밖에 알지 못하였다. 마치 사도 시대의 제자들과 같이 여러 사람이 그리스도의 사업을 위하여 세상의 재물을 희생하였다. 다행히 가정에서 살도록 허락 받은 사람들은 추방당한 형제들을 기꺼이 숨겨 주었고, 그들 역시 추방을 당해야 할 경우에는 즐거이 그 운명을 받아들였다. 물론 그 중에는 박해자들의 분노를 두려워하여 신앙을 희생하여 자유를 얻고, 참회자의 옷을 입고 감옥에서 나와 신앙의 취소를 선언한 자들도 수천 명이 있었다.

 

그러나 감옥과 롤라드탑(塔)에 갇히든지, 심지어는 고문과 화형을 받을지라도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고 두려움 없이 기쁨으로 진리를 위하여 증거 한 사람들이 결코 적지 않았다. 그들 중에는 빈궁하고 비천한 사람들도 있었으나 귀족 출신의 사람들도 있었다. 그의 종말 법왕교도들은 위클리프가 살아 있을 동안에 그들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몸이 무덤에서 조용히 쉬고 있을 동안에도 그들의 증오심은 충족되지 못하였다. 그가 죽은 지 40여 년 후에 열린 콘스탄스 회의의 결의에 의하여, 그의 유골을 다시 파내어 공중 앞에서 불태우고, 그 재를 그 근처에 흐르고 있는 시냇물에 던져 버렸다.

 

 

그 사실에 대하여 옛날의 한 저술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시냇물은 그 재를 아본 시내로, 아본 시내는 세버언 강으로, 세버언 강은 영국 해협으로, 영국 해협은 대양으로 옮겨 주었다. 그리하여 위클리프의 재는 오늘날 온 세상에 퍼져 있는 그의 교리를 상징하고 있다”(T.Fuller, Church History of Britain, b.4, sec.2, par.54).

 

그의 원수들은 자신들의 악의에 찬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거의 깨닫지 못하였다. 보헤미아의 얀 후스(John Huss)가 로마교의 많은 오류를 버리고 개혁 사업을 착수한 것은 위클리프의 저서를 통해서였다. 그 두 나라는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진리의 씨는 그와 같은 방법으로 뿌려졌다. 그 사업은 보헤미아에서 다른 나라로 확장되어 나갔다. 사람들의 마음은 오랫동안 잊어버렸던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하나님의 손이 위대한 종교개혁의 길을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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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빙스턴 (아프리카 선교사)

 

 

 

아프리카 선교사였던 리빙스턴이 오랜 만에 조국인 영국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글래스고 대학은 그에게 명예 박사학위를 수여했는데, 학위 수여식장에 나타난 그를 보고 사람들은 모두다 손을 입에 대었습니다. 왜냐하면 리빙스턴 박사는 굉장히 미남이었습니다. 그리고 키도 훨씬 크고 몸도 좋았는데 박사 학위를 받으러 나온 리빙스턴은 달랐습니다. 완전히 얼굴이 형편이 없이 늙었습니다. 그리고 몸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원시림에 다니면서 병자를 고치고 복음을 증거 하다가 사자에게 물려서 몇 번이나 죽음의 고비를 겪고 그 다음 무서운 아프리카 토속 병에 걸려서 열이 많이 나도 치료할 도리가 없어서 몇 번이나 죽다가 살아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날 리빙스턴이 사람들 앞에서 나는 고향에 찾아왔으나 또다시 내가 있을 곳은 아프리카 오지지 이 영국의 런던에 내 있을 곳이 없다.”고 다시 아프리카로 간다고 말할 때 사람들은 다 놀라고 수근 거렸습니다. 그때 리빙스턴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저는 아프리카 어느 곳에 가도 세상 끝 날까지 어느 곳에 가도 나와 같이 계시겠다는 예수님이 함께 하십니다. 주님께서 저의 길동무가 되어 주셔서 원시림과 광야를 함께 걸어가 주십니다. 그러니 제게 무슨 두려움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나와 함께 행하신다는 그 말 자체가 예수님인 것입니다. 말을 안 하면 예수님이 함께 계시지 않아요. 오늘날은 예수님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 가운데 계신 것입니다. 그 말씀을 해야 돼요. 예수님이 나와 같이 계십니다. 그 말씀 속에 예수님이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외롭고 괴롭고 고통스러울 때 주님이 나와 같이 계십니다.

 

볼지어다 세상 끝 날까지 내가 항상 같이 하리라

 

이 말씀을 자꾸 외우고 묵상하고 받아들이면 그 말씀 자체가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리빙스턴은 항상 예수님이 자기와 같이 계신다고 말을 했고 그 말을 통해서 예수님이 리빙스턴과 같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사자가 우글대는 원시림 속에서도 리빙스턴의 신앙고백을 통해서 같이 계셨습니다.

 

그 하나님은 지금 우리하고도 함께 계십니다. 한 번 말씀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지금 나와 같이 계십니다. 그 말씀이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그 말씀이 내 입에 나오는 동안에 내 가슴속에 예수님이 와 계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주님이 같이 계신다는 것을 깊이 깨달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몸에 상처가 나면 약을 부지런히 발라야 합니다. 한 번 바르다가 그만 두면은 도로 덧나지요. 자꾸 약을 계속해서 바르는 것처럼 우리가 주님께 기도하고 난 다음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입었느니라. 한번 말하지 말고 자꾸 약을 바르듯이 이 영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치료를 계속해야 되는 것입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받았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받았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입었다. 그러면 그 영적인 그리스도의 살아계신 말씀이 양약이 되어서 낫습니다. 내 심장병은 고침을 받았다. 내 심장병은 예수님이 같이 계신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내 심장병이 고침을 받았다. 자꾸 말을 하면 계속 치료가 주어지기 때문에 낫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말씀이 살아서 운동력이 있다는 것을 믿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운동력이 있는데 이 말씀을 자꾸 받아서 우리가 속에 모셔드리면 속에 들어와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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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425장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고요한 중에 기다리니”

<찬송가 425장(217)를 작시한 “폴라드( Pollard)”에 관한 이야기>

 

 

 

 

찬송가 425장(217)은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고요한 중에 기다리니”입니다. 이 찬송가를 작시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폴라드( Pollard)”라는 분입니다 그녀는 시카고 지역에 모 사립학교 여 교사이었습니다. 수년 동안 당뇨병과 합병증으로 고생을 했습니다. 친구의 권유로 신유 부흥 집회(병 고치는 집회)에 가서 기도를 받고 난후 더 악화가 되었습니다. 신유 부흥사는 이단성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병이 악화되어 학교에 가서 가르치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조용히 시간을 보내던 중 선교역사에 관한 책을 읽었습니다. 읽던 중 “아프리카 선교사”로 가야겠다는 결심이 생겼습니다. 그는 그 후 성경 공부에 몰두했고 기도 모임에서 자신의 뜻을 결정한 후 함께 기도하고 영혼의 평안을 되찾았습니다. 이후 몸의 건강이 회복 되었고 선교사로서 헌신하여 생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폴라드는 은퇴한 이후에 1902년 어느 고요한 밤 한 기도회에 참석했습니다. 한 노쇠한 백발의 여인에 의해 드려진 기도가 바로 널리 불려지는 이 찬송의 영감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이 백발의 여인은 이 기도에서 축복과 물질에 대한 일반적인 기도 요청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우리 생애 어떤 일이 일어나도 좋사오니 주님의 뜻과 섭리만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오직 그녀의 지금까지 삶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게 해주시기를 구했는데 주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이 기도를 폴라드가 듣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예레미야 18장 4-6절의 묵상 했습니다.

 

“4.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5. ○그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6.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렘 184-6)

 

이 말씀에서 토기장이의 비유를 주제로 그 밤이 밝아오기 전에 이 찬송시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날도 이 찬송가는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에게 바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고요한 중에 기다리니 진흙과 같은 날 빚으사 주님의 형상 만드소서” 1절 가사입니다.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무엇입니까? 묻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뜻 분별이 어렵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고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것이 힘드니 어떻게 살아가려고 합니까?

 

찬송가 431장 “내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합소서”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쌀이 되든지 죽이 되든지 뜻대로 합소서."라고 하는 식으로 삽니다. 모든 것이 될 대로 되라는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뜻 분별이 어렵고 혼란을 주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 민주적이고 선택의 기회가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결혼문제를 생각해 봅시다. 과거 사회와 현대 사회를 비교해 봅시다. 과거에는 결혼 상대자를 누가 대부분 결정 했습니까? 대부분 부모님들이 결정했습니다. 국가나 사회의 흐름대로 결혼을 했습니다. 가령 양반 집안사람들은 양반 집안사람끼리 했습니다. 그래서 종들이 주인자녀들과 눈이 맞았다가는 죽임을 당하던지 불행한 일들이 일어난 것이 전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선택의 기회가 거의 없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 부모들의 의사에 따라서 결혼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 그러지 않습니다. 사귀든지 상대방을 찾아서 결혼을 합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결혼을 위해 선택한 서로를 위해 뭐라 말을 못하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부모님들은 말합니다. "너의 뜻들이 그렇다면 결혼 해야지 어찌 하겠느냐."입니다. 때로는 민주적인 사회는 선택의 기회가 열려 있기 때문에 뜻 분별이 어렵다고 여겨집니다.

 

2. 성경에 구체적인 결정이나 지시 사항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이 기도 많이 하고 성경 꼭 보고 하루 일을 시작했습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기도하고 시작 합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성경을 펴서 읽습니다. 기도 하면서 눈 감고 눈뜨자마자 성경을 펼쳐 들고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아침에 본 성경 이 가롯 유다가 예수님 팔고 목매어 죽은 구절이 나왔습니다. 그래도 주신 말씀이니 주님의 뜻이 이루어 질것을 믿고 '아멘' 하고 일어섰습니다. 그런데 기분이 안 좋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기도하고 성경을 폈습니다. 그랬더니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말씀이 나왔습니다. 이 말씀은 강도 만나 죽게 된 사람을 도와준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면 목매달아 가롯 유다 처럼 죽어야 하는가?

 

도저히 안 되겠다, 또 기도하고 성경을 폈습니다. 그러니 성경에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의 피땀 흘려 기도하신 모습이 나옵니다. '여기 답을 주시는구나'하고 더 읽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뭐라 기도 하셨습니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아버지의 뜻대로 하면 목매달아 죽어야지요. 성경은 이런 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만 성경에서 구체적인 결정 사항이나 지시가 없기 때문에 어려운 때를 만나도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뜻 분별이 혼란을 일으킬 때 어떻게 주의해야 하는 것입니까?

 

1. 호기심과 이기적인 동기를 가지고 앞일을 해결 하려는 태도는 금물입니다. 왜냐하면 1) 미래를 아는 지식은 때로는 우리를 해롭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무당이나 신접한자 점쟁이를 찾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 18:9-1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무릇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

 

현대에도 이런 비슷한 일이 교회에서 신자들이나 목사들 가운데도 일어납니다. 그래서 목사 무당도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 라스베가스에 제법 있다고 합니다. 축복 예언 기도를 받는다고 합니다. 가령 도박으로 돈을 따려는 사람이 목사한테 가서 '축복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합니다. 그리고 목사가 헌금 명분으로 돈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통해서 젯팟이 터졌다고 가정 해 봅시다. 하나님의 뜻입니까? 아닙니까? 아닙니다. 가령 복권(라로리)을 샀습니다. 교인으로서 호기심과 이기적인 동기를 가지고 앞일을 해결하려고 즉 집안 재정도 어렵고 교회도 어려우니 지금 200만 불 금액에 당첨되기 위해 복권을 이번 한번만 사기로 했습니다. 당첨되면 교회 헌금 백만 불 하고, 반은 집 한 채 사고 등등 뜻을 세웠습니다. 당첨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입니까? 아닙니다. 호기심으로 요행수를 바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점치는 무당이나 똑같은 일입니다. 만약에 교회 드리는 헌금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분명하게 성경이 그 답을 말씀 합니다.

 

(고후 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이처럼 인색함으로 아니하고, 억지로 아니하고, 헌금 액수와 상관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호기심이나 요행수나 라스베가스의 젯팟으로 복권이 당첨되어 드리는 헌금이 하나님의 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 이후에 감사 하는 마음으로 헌금은 드릴 수 있을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우리 일상생활에 닥쳐오는 많은 일들은 호기심과 요행수나 이기심으로 앞일을 해결해 보려는 태도로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뜻을 발견 할 수 있도록 생각하게 하고 실천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 성경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려고 해야 합니다. 1. 생각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경적인 명상을 해야 합니다. 2. 실천도 하나님의 말씀의 원칙으로 성령의 인도로 일어나는 표징을 점검해야 합니다.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말씀 두 곳만 소개 합니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으로 평생토록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실천에 옮겨야 할 말씀입니다.

 

그중 하나가 (살전 5:16-18)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말씀입니다. 세 가지 원칙은 환경에서 표징을 일으킵니다. 가령 도둑질을 하는 것과 비교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해 보려 합니다. 먼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냐를 분별해 보려고 합니다. 도둑놈이 도둑질을 하면서 기도합니까? '오늘 이집 귀한 것 잘 훔치게 하옵소서'라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까?

 

가령 도둑이 기도 합니다. '하나님 부처님 공자님 예수님 알라 신이여 도와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소원입니다. 귀중품 물건은 훔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도의 응답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살전 5:16) 말씀대로 쉬지 말고 기도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약 4:2)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라“ 했습니다. 성경에 기도해서 응답을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이유를 말씀합니다. 정욕으로 사용 하기위해 구하는 것을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도둑질을 하는 것과 비교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해 보려고 합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냐를 분별해 보려고 합니다. 도둑놈이 도둑질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기쁘다 구주 오셨네” 노래하면서 기쁨으로 도둑질합니까? 못합니다. 들킬까 봐서 조마조마합니다. 바스락 소리도 못 냅니다. 알람 장치를 부숩니다. 주인이 나타나면 도망갈 준비를 하든지 위협하려고 칼을 들었든지, 물총 아니면 가스총이라도, 새총이라도 준비해 가지고 있습니다. 집을 털고 나온다 해도 기쁨이 없습니다.

 

왜요? 주인이 잃어버린 물건을 신고합니다. 인상착의를 말합니다. CCTV 에 촬영된 증거로 인해 잡힐까 봐 기쁨을 잃고 살아갑니다. 도둑놈은 물건을 훔친 후 좋아할 수는 있어도 그 기쁨은 “항상 기뻐 할 수” 있는 기쁨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는 기뻐하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말씀 안에서입니다.

 

(빌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빌립보 옥중에서 죄수의 몸이 되어 신체적으로 부자유했지만 기뻐했습니다. 우리는 평생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서 살 것입니다. 살아가는 동안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많이 만납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쁨이 없거나 빼앗겨버린 일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다음으로 도둑질을 하는 것과 비교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해 보려고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냐를 분별해 보려고 합니다. 가령 도둑놈이 도둑질한 후 감사할 수 있을까요? '범사에 감사합니다'라고 할 수 없습니다. 도둑한테 기다리는 것은 잡히면 감옥에 가는 것입니다. 감옥에 가기로 결정된 자신의 운명을 감사할 수 없습니다. 매일 붙잡힐까 봐서 염려 속에서 살아갑니다. 왜요?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 계명에 어긋난 일들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거짓말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간음 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남을 이간질 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남을 것을 나쁜 방법으로 빼앗으면 그렇습니다. 왜 염려가 되고 기쁨이 없고 기도도 안 되고 감사가 없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으로 되어진 일들을 통하여 이렇게 말씀으로 확신을 주십니다.

 

(빌 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면서 살기를 원합니다. 평생토록 잊지 말고 (살전 5:16-18) 말씀을 먼저 묵상하십시오. 하나님의 뜻이라고 실천에 옮기기 전에 다시 묵상 하십시오. 집안, 가정에 가훈으로 삼아도 좋습니다. 사업을 시작하려고 합니까? 기도하십시오. 기도에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 사업을 말씀에 근거한 기쁨이 있습니까? 감사가 됩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뜻으로 보셔도 됩니다.

 

세 가지가 다 동시에 일어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일을 연기해야 합니다. 포기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학교를 선택할 때도 그렇게 하면 좋을 것입니다. 직장을 선택할 때도 그렇게 하면 좋을 것입니다.

 

오늘부터 모든 일에 행동에 옮기기 전에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발견하기를 원할 때 세 가지 원칙을 정하십시오. (살전 5;16-18)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 세 가지 원칙은 환경의 증거에서 표징을 일으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살아 보면서 하나님의 뜻을 위해 고민할 때도 있습니다. 이처럼 고민하는 동안 주셨던 말씀입니다. 그래서 방법을 찾았습니다.

 

(고후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고민이 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고민'은 원어적으로 볼 때 '하나님에 의한 고민'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해 허락하신 고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의 과정에는 크고 작은 차이는 있지만 피할 수 없이 직면하는 문제, 즉 '고민' 이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저도 문제들을 두고 하나님의 뜻대로 해야 할 근심이 있을 때 방법은 하나였습니다. 근심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어려울 때 말씀에 회개를 이루는 것이라 말씀 한 것처럼 혼자서 “천부여 의지 손들고 옵니다.” 회개합니다.

 

어려운 이민교회 한 이 오면 손꼽아 기다리고 반가워 헌신적인 마음으로 붙잡아 놓으면 몇 개월도 못 되어 어느 날 갑자기 이런 저런 이유로 교회를 떠날 때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이것이 주님의 뜻입니까?'라고 물어 봅니다. 그때 '주님, 제가 부족합니다' 부족한 것을 회개합니다. 기도하는 동안 “사망에 이르게 하는 세상 근심"이 떠나갑니다. 그리고 찬송이 나옵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 옵소서” 그러면 마음에 평안을 얻습니다. 주님의 뜻을 내가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어 주옵소서'라고 맡기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더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눈물을 닦으며 강 같은 기쁨으로 일어납니다.

 

요즈음 전 세계가 경제 위기 속에서 사는 것이 어렵습니다. 개인도, 사업도, 진로도 교회도 모두에게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데 고민을 안겨주는 살기가 힘든 세상입니다. 때로는 이 고민이 스트레스를 가중시키며 각종 질환을 유발시킵니다. 육신을 극도로 상하게도 합니다. 그래서 고민하는 방법을 바꾸어야 합니다. 가치 있는 고민이 되도록 하려면, 세상 고민을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고민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들 내면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통을 겪을 때에, 이런 고통이 왜 내게 있을까? 라고 원망하며 고민하기보다는 나는 왜 그 고통의 의미와 가치를 찾지 못하는가? 그리고 나는 왜 그 고통에서 만족한 것을 찾지 못하는가? 라고 고민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고민하는 방법을 바꾸는 것입니다. '왜 나는 많이 가지지 못했고 행복하지 못할까?'라고 고민하기보다는, '왜 나는 많이 가지지 못한 그 곳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또 행복하지 못한 조건에서 행복하지 못하는가'에 대해서 고민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길을 걸어가기 힘들다고 고민하기보다, 믿음의 길이 최고이며 기쁨의 것이 되지 못하는 자신을 고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워하는 사람을 향하여 ''저런 인간이 있을 수 있을까?'' 라고 미워하며 고민하기보다 ''왜 나는 저 사람을 용서하지 못할까?' '왜 나는 저 사람을 사랑하지 못할까?' '왜 나는 그를 위해 기도해 줄 수 없을까?' 라고 고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 내가 모욕과 무시를 당해야 하나?' 라고 고민하기보다, '왜 나는 이런 모욕과 무시에 예민해야만 하는가?' '왜 이런 일로 이렇게 민감하고 불쾌해야 하는가?' 라고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자랑할 수 없어서, 높아질 수 없어서, 인정받지 못해서 고민치 말고,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보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을 더 큰 즐거움으로 여기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고민은 결과에 대한 것이기 보다 원인에 대한 고민입니다. 나의 생각이 이루어지지 않는데 대한 고민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한 데에 대한 고민인 것입니다.

 

이제 세상고민을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고민으로 변화시키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사람은 세상의 모든 고민을 하나님의 뜻으로 하는 고민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처리하시는 결과가 나타나도록 해야 합니다. 성경 말씀 비추어보면 하나님이 뜻대로 하는 고민은 후회 없게 해주고, 회개의 삶을 만들어 주며, 구원의 삶을 이루어주는 유익한 결과를 맺도록 해줍니다.

 

우리의 세상적인 고민을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고민으로 바꾸어야 하며 하나님이 처리하시는 결과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자하는 나의 모든 고민을 하나님께로 가지고 가야 합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자신에게서 나오는 세상 고민이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고민을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고민''이 되도록 하십시다. 그리고 그 고민을 하나님께서 처리하시는 것이 되도록 하십시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모두 죄인들이기 때문 입니다.죄인들이기 때문에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 안에 우리 생의 주인이신 주님께 우리 고민의 내용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모두 내려 놓아야 합니다. 내 가정과 교회의 고민을 들고 있으면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삶을 통해 성령님이 고민 운데 일하시도록 하십시다. 그것이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그때 그 고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주님의 뜻으로 해결되어지는 응답의 삶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가치 있는 고민 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십시오.

 

찬송가 "내 주여 뜻대로"는 독일 루터교회 목사였던 벤자민 슈몰크(Benjamin Schumolk) 목사님이 지은 찬송입니다. 1618년에 시작된 구라파의 신 구교 전쟁은 1648년 전쟁이 끝나기까지 30년 동안 구라파를 피로 물들였습니다. 전쟁은 끝났지만 신구교의 대립은 여전했고, 건물은 폐허가 됐고 흑사병이 유행하면서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가고 있었습니다. 1730년 슈몰크 목사님은 과로로 쓰러져 오른손을 쓰지 못하게 되었고 백내장으로 실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앞을 보지 못하고 지팡이에 의지한 채 넓고 넓은 교구를 심방하며 살펴야 했습니다.

 

어느 날 슈몰크 목사님 부부가 심방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집이 완전히 불타고 여기저기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집에 있어야 할 아이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잿더미를 파헤치자 그 속에 어린 아들 형제의 시체가 있었습니다. 그때 두 아들의 시체를 앞에 놓고 통곡하여 울면서 드렸던 기도를 훗날 시로 옮겨 만든 찬송이 바로 "내주여 뜻대로"인 것입니다.

 

영어 가사를 그대로 직역하면, "나의 예수님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 당신의 뜻이 내 뜻이 되게 하소서. 슬픔 중이나 기쁨 중에 당신의 것으로 날 인도하시고, 내 주여 당신의 뜻이 이루어 지이다"라고 말할 수 있게 하소서"라는 것입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 몸과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 간 주 인도하시고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내 모든 일들을 다 주께 맡기고 저 천성 향하여 고요히 가리니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아멘.

 

내가 내 뜻을 관철하려고 하면 그것은 아집이 되고 고집이 되는 것입니다. 똑똑한 사람들이 잘 그럽니다. 그러나 주의 뜻을 따르고 순종하려고 하면 위대한 믿음이 되고 행복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과 내 뜻, 주님의 생각과 내 생각이 결코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의 생각과 뜻이 내 생각이나 뜻보다 천만 배 크고 높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하늘에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이 땅에도 주님의 뜻의 저의 삶에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이 땅 위에 적어도 60억 이상의 인구가 있다면 60억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뜻은 무엇입니까? 마귀의 뜻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에게는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집니다. 오늘부터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 것 애통하며 회개하며 출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증표를 확인하십시오. 주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케 하옵소서."(시 143:10)라고 고백하며 평생 주기도문이 가르치는 삶을 살아가기를 다짐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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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이수정의 성서 번역

 

 

 

 

이수정이가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하는 소식을 듣고 크게 기버한 사람은 누구 보다도 일본에 주재하고 있는 미국성서공회 총무인 헨리 루미스(Henry Loomis)목사이었다. 기독교가 엄격히 금지되어 있는 나라 사 람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이 용감히 신자가 되었다고 하는 사실은 외 국선교사들의 마음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하였다.

 

루미스목사는 즉시 이수정을 방문하여 성서를 한글로 번역 해달라고부 탁하였다. 이수정은 간곡한 요청을 받아들여 성서 번역에 착수하게 되 었으며 세례받은지 겨우 두달만에 한문성서에 토를 달은 소위 [현토한 한신약성서]의 작성을 완료하였다. 그는 계속하여 마가복음부터의 성 서한글 번역을 시작하였으며, 현토한한신약성서는 1884년에 출판되었 고 마가복음도 같은 해에 요꼬하마에서 출판되었다.

 

성서를 번역하는 일에 종사하면서 이수정은 상당한 경제적 난관에 봉 착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러한 어려움을 미국인 선교사나 일본인 목 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다. 가족들이 그 소식을 듣고 일본으로 건너갔 다. 동생은 형에게 일금 만량을 전달하면서 귀국하라고 권유하였다.

이수정은 그때 [나는 돈이 필요하지 않다. 또 돌아가지 않겠다. 나는 동포를 위하여 철도나 전신기나 기선보다 더 좋은 것을 발견하였으니 까]라는 말로써 성서번역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귀국을 거절하였다. 이수정은 일본을 다녀와 자신에게 개화사상을 일깨워 준 이동인에게 전도하여 불교로부터 기독교로 개종케 하였으며 성서번역 사업을 위한 협조자가 되게 하였다.

 

또한 김옥균이가 기독교의 한국 도입을 정부에 진언한 일에 있어서도 이수정이가 배후에서 크게 노력한 사실을 잊어 서는 안될 것이다. (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 1884,Vol, 1,p.336) 이수정이가 일본에 체류하면서 성서번역과 교회활동에 몰두하고 있는 기간에 국내에서는 1884년 12월에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정변은 삼일 천하로 실패하였고 개혁인사들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당시 일본 동 경에는 유학생들이 적지않게 있어 이들은 자연히 망명인사들과 접촉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못마땅히 여긴 본국정부에서는 유학생 전원에게 소환령을 내렸다. 유학생 20명중 3명은 곧 귀환하였으나 나 머지 사람들은 귀국을 불응하였다. 정부에서는 유학생들을 설득하기 위하여 안종수와 박준우를 쇄환사로 하여 일본에 특파하였다. 이수정은 그때 다른 유학생 5명과 함께 1886 년 5월 28일 귀국하였다.

 

귀국할 당시 그가 기독교신앙을 유지하고 있었는지에 관하여는 반론 이 우세하고 있다.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의 파슨 (Ellen C.Parson) 은 자신의 저서 [Fifteen Years in the Korea Mission,P.7) 에서 이수정 은 귀국을 앞두고 부득이 신앙을 버렸다고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수정은 이미 기독교신자로서 여러해 동안 기독교활동을 한것 은 사실이었다. 그러한 사실을 알고있는 정부로서는 국법을 어긴 위험 인물로 간주할 수 밖에 없었고 또한 개화인사였음이 분명하였는 고로 구는 귀국하자마자 보수파에 의하여 체포되었고 촌단의 극형으로 생명 을 잃었다. 이수정은 일본에 체재하는 기간에 조국의 기독교 선교를 염원하여 열 렬히 활동하였다. 1884년 3월에 그리고 12월 31일에 [세계 선교 평논] (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에 또한 같은 해 9월에는 [외국 선교지] (The Foreign Missionary)에 미국교회에 선교사를 꼭 한국에 보내야 한다고 애끓는 글로 기고하였다.

 

언더우드와 아펜셀라의 두 선교사는 한국으로 오는 도중 일본에 들 렸을 때 이수정이가 번역한 마가복음을 손에 들고 2개월간 동경에 체 류하면서 이수정으로부터 한국어를 배웠다. (L.H.Underwood, Underw- ood of Korea,PP,37-38) 그러기에 이수정이야말로 [한국의 마게도니아사람]이라는 말로 불려져 아주 적합한 인물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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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 언더우드의 한국선교 소명 

 

 

 

1884년 봄에 의사 헤론(John H.Heron)을 한국 선교사로 임명하여 일본 에서 때를 기다리게 하였고, 9월에는 중국에 파송되어 있던 알렌(Alle- n) 을 한국으로 옮겨 일하게한 미국 장로교 선교본부에서는 그동안의한 국 선교에 대한 신중정책을 전환하여 본격적인 선교사업으로 착수하게 되었다.

 

이러한 결정을 내리게된 가장 큰 이유는 한국에서의 정세가 호전된 점 도 있었겠지만, 직접적으로 언더우드(H.G,Under wood)목사와 같은 인물 이 선교사를 지원 한국행을 희망하여 나섰기 때문이었다. 그가 한국을 찾게된 동기와 사정을 회상한 내용을 살표보면 다음과 같다.

 

[일본에 주재중인 올트맨(Allert Oltmans)이 1883년 겨울에 선교 지원 자들을 모아놓고 은사의 나라 한국에 관하여 설명해 주었다. 그의 주장 은 그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교회가 기도하고 있고 또 1882년에는 한미 조약이 체결되어 선교사가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이 구비되었에도불 구하고 미국 교회가 무관심하여 1년동안을 허송세월 하였다는 내용이었 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으로 갈 사람을 찾고 있다고 열변을 토하였다. 나는 그때 인도에 갈 생각으로 의학공부를 했으며 한국에 갈 사람은따 로 있을 것이라고 쉽게 생각하였다. 교회 기관지들은 아직도 한국에 들 어가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기사로 나와있었다. 바로 이때에 나에게 하 늘의 메시지가 들려왔다. [너는 왜 못가느냐(Why not go yourself?) 이 었다.

 

그러나 인도에 대한 선교 희망이 한국행을 막고있었고 또 실제로 한국의문은 닫혀있는것 같았다. 나는 두차례나 선교본부에 가서 한국행 을 간청하였지만 쓸데없는 말이라고 핀잔을 받았다. 이제 나에게는 본 국에 머물러 목회를 하거나 인도에 가는 길밖에 없는것 같았다. 나는이 렇게 머뭇거리는 상태에서 뉴욕의 어느 교회로부터 청빙을 받았다. 나는 이 청빙에 응하기로 하여 수락하는 편지를 우체통에 넣으려고 하 였다. 그 순간에 [한국에 갈 사람은 없는가,(Not one for Korea)한국은 어찌할 터인가 (How about Korea?)라는 소리가 나의 귀에 쟁쟁하게 들 어왔다. 이때 나는 나도모르게 손에 쥐었던 편지를 호주머니에 집어넣 고 단숨에 중앙통에 있는 선교본부를 찾아갔다. 나는 수석서기인 엘린 우드(F.F.Ellin wood)를 만났다. 몇칠후 그에게서 받은 기별은 다음 회 의에서 내가 선교사로 일명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L.George Paik,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s in Korea,PP.100 101) 미국 장로교 선교본부에는 종래의 배외정책으로 복귀하지 않을 것이라 는 확정을 하였고, 1884년 7월 28일 언더우드를 한국을 위한 최초의 선 교목사로 임명하는데 합의하였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1885년 2월 3일미 국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태평양을 횡단하여 일본에 들렸다.

 

그가 일본으로 먼저 가게된 이유는 일본에서 한국말을 공부하기도 하고 또한 한국에 관한 지식을 습득하여 만반의 선교 준비를 갖추기 위함이었 으며, 혹 여의치아니하여 한국에서의 선교사업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될때 에는 한국에서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수 있게될 시기까지 일본에서 영어 학교 사업이라도 하기 위함이었다.

 

언더우드 목사는 일본에서 약 2개월동안 선배 선교사인 헤본(James C.H epburns)목사의 따뜻한 영접을 받으면서 그의 집에 기거하였다. 루미스목 사는 언더우드에 대하여 [그는 한국을 위한 적절한 인물]이라고 평가하였 다. (The Foreign Missionary,Vol.44,No,1,P,34) 언더우드 목사는 일본에 있는동안 한국인 유학생들과 교제하면서 한국풍 습을 익혔고 특히 이수정을 통하여 그의 번역서인 마가복음을 손에 들고 열심히 한국어를 배웠다.

선고사가 피선교지에 들어가 그나라말을 배우고 또 그 성경을 번역하기 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것인데 언더우드 목사는 이미 번역된 성서를손 에들고 한국말을 배우게 되었으니 그 감격이야말로 형언할 수 없으니 만 큼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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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아펜셀라의 인천상륙과 의료사업 
 


 

아펜셀라(Herry G.Appenxeller)는 드루우 신학교 재학시절에, 1883년 미국 하드포드에서 개최된 신학교연맹(The Hartgard Inter Seminaryconvention)집회에서 해외선교사가 되기를 결심하고 처음에는 일본에가려고희망하였다.

 

그러나 한국으로 가려고 했던 친우인 워드윌쓰(J.S.Wodaswoth)가 모친의중병으로 국내에 남아있을 사정이 되어 그를 대신하여 한국행을결심하게된 것이다.

 

미국 북감리교회지 선교회를 통하여 선교사의 임명을 받은 그는 1885년 2월 2일 한국을 향해 떠나기에 앞서 샌프란시코에서 목사 안수를받았다. 아펜셀라 목사와 동행으로 스크랜튼 의사 부부와 모친 스크랜튼여사가 있었다. 이들 감리교의 개척선교사 일행은 태평양을 횡단하여2월 27일 일본 요꼬하마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동경에 들려 선배 선교사인 매클레이 목사를 만났으며 3월 5일에는 뜻깊은 선교예배를 올렸다. 이때 매클레이 목사는 시편 121편에서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라는 구저를 읽고바울이 선교사업을 위해 맡은 일터로 떠나가는 모습을 연상케 하면서 한국을 향하여 선교사들의 장도를 격려하였다.

 

1885년 3월 31일에는 일본에서 재한선교회가 조직되었다. 파울러(C.H.Fowler) 감독은 감리사로 매클레이 목사, 부감리사에는 아펜셀라 목사,회계로는 스크랜튼 의사를 각각 임명하였다.

 

매클레이 감리사의 의견이 [여러사람이 함께 한국에 들어가면 의심을받을염려가 있으니 따로 따로 가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여 아펜셀라목사는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목사와 함께 일본 나가사끼를 떠났으며 4월 2일 아침에는 한국땅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곳은 부산이었으며 남해안과서해안을 돌아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 드디어 인천에 도달하였다.

 

얼마나 한국행을 갈망하였던지 그들은 상륙하자마자 땅위에 엎드려먼저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를 올렸다. [우리는 부활절 아침에 이곳을상륙하였습니다.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이시여!! 어서속히 이 백성들을 얽어매고 있는 흑암의 사슬을 끊으시사 하나님의 자녀로서 의 빛과 자유를 베풀어주시옵소서] (R.S.Maclay,Comen cementof the Korea MethodistEpiscopal Mission,The Gospelin All Lands for 1885,P,328) 아펜셀라 목사는 선교회에 보내는 보고문 가운데 위의기도문을 실었다.

 

아펜셀라 목사는 상륙하던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나의 아내가 제일 먼저 배에서 내려 한국 땅을 밟았다] (Harry A.Rh-odes,TheKorea Mission Field No.4,April 1935,P 78)라고 아펜셀라목사 부부와 언더우드 목사는 함께 한국을 찾아왔으나 한국내의 실정은아직까지 외국인 여자의 거주를 허락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아펜셀라 목사는 부득이 부인을데리고 일본으로 되돌아가야 했고 언더우드목사만 서울에 들어갈 수 있었다.

 

미국 대리공사 포오크 (George C.F-oulk)가 아무리 애써보았지만 [서울에서양인 여자가 들어가기는 어려운 사정인고로 부인을 잠시 일본으로 가 있다가 후일을 기다려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하는 수 없이 아펜셀라는 인천에 도착한지 9일만인 4월 13일에 부인과함께 일본으로 되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일본에 도착 다음날인 4월 18일청국의 대표 이홍장 과 일본 대표 이또오가 중국에서 텐진조약을 체결하여우리나라 정세의 긴장이 완화되기는 하였지만, 그때에는 여둑으로 건강을상한 부인의 치료로 아펜셀라목사의 한국 입국은계속 늦어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6월 20일에 가서야 아펜셀라 목사는인천에 또한번 상륙하였고 서울에 들어가 선교활동을 개시하게 되었다.

 

천주교에서 한국에 선교하면서는 한국 고대의 전통 의식이나 문화양식을고려하지 않고 거의 독단적인 선교방법으로 강행하다가 오해와 박해와 부작용을 일으킨 것이 사실이었다. 반면에 프로테스탄트교회에선 매사에 극히조심스럽게 태도를 취하였고 최대한으로 충돌을 회피하면서 한국민의 호감을 사고 선교 본래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방향으로 전진하였다. 그러기위하여 우선 의사를 보냈다. 이들은 육신의 병을 고쳐주어 친밀감을 느끼게 하였고 한국인의 신임을 얻으면서 복음을 전달할 기회를 포착하는데 성공하였다.

 

여기에도 난관과 애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한의사들의 시기와 멸시가있었고 환자들의 오해와 불평이 뒤따랐다. 선교본부로부터의 후원의빈약과때로는 선교의 의사들 사이에서 선교방법과 의견의 불일치로 어 려움을 격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이런것들이 바야흐로 열린 선교의 문호를 닫지는못하였다. 개척 선교사들의 의료사업은 한국민에게 과학문명의 혜택을 제공하면서 한국선교의 본격적 사업을 위한 시발대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였다.

 

선교사에 의한 의료사업은 네가지 분야에서 진행되었다. 첫째로 외국의영사관 직원들과 거류민을 위하여 치료를 베풀었고 다음은 국왕과왕실을포함한 한국민들을 치료대상으로 살아야 했다.

 

셋째로는 정부 병원을 설립하고 운영 관리해야 했으며 그리고 넷째로는의학 교육을 베풀어 의사를 양성하는 일까지 담당해야 했다.

광헤원은 정부 소속의 병원이었다. 그러면서도 미국 선교회와의 합작운영이었던 관계로, 육의 병을 고치면서도 궁극적인 목표에 있어서 영장이었다고 보아 당연하다 하겠다.

 

알렌은 원장겸 의사의 책임을 맡고 바쁜 일과를 보냈다. 그는 일반 환자를 위하여 분주하였지만 왕실을 위하여 더 분주했다. 국왕의 시의가 된 그를 위하여 참판이라는 벼슬이 1885년 7월 19일에 내렸다. 알렌은벼슬을 받고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국왕의 시의는 절대로 놀고먹는 직이 아니다. 자칫 잘못하면 엄하게책임을 추궁당해야했고 한의사들의 시기를 참아야 했다. 입시 하나는명령은밤 12시가 지나 더 늦게도 있었고, 그런 명령이 올 때에는 요란스럽게 가마를 보내와서 왕명이라는 고함 소리에 모두가 잠을 깨곤하였다. 더욱이 이나라의 관습은 정장하지 않고서는 국왕을 알현하지 못하는 법이 있어 반드시예복을 입고 입궐해야 하는 불편이 뒤따랐다]

[H.N.Allen, Things Korean,PP,193-195)

 

병원사업은 날로 번창하여 알렌 혼자서는 도저히 외래환자를 치료할수없을 정도로 분주하였졌다. 알렌은 불원내한하여 동료가 되어줄 혜론(gohn W.Heron,)의사에게 기대를 걸었다. 그런데 스크랜튼(W.B.Sc-ranton)의사가 먼저 들어와 병원에서 일하게 되었고 혜론 의사도 그뒤에도래하여병원사업에 동참하게 되었다.

 

스크랜튼은 1885년 6월에 병원을사퇴하였고, 알렌은 1887년에 원장을 혜론에게 넘겨주고, 한국정부가 박정양을 미국에 초대 공사로 파견할 때 참찬관의 직을 받고 그를 수행하여 갔다. 그러나 알렌은 1889년에 다시 병원사업의 임무를 맡아 제중원의 원장이 되었다.

한국에서의 복음선교에 앞선 의료사업의 개시와 활동은 한국인들의 육의생명을 건지는데 공헌했을 뿐만아니라.그 마음을 사게하여 한국정부의 기독교에 대한 금압정책을 완화케 하는데 결정적 효과를 올렸으며 전도의 길을 널리 개방하는데 크게 도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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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학교 / 교회학교 에서
중고등부예배 대표기도문

 

 

 

사랑의 하나님 오늘도 저희에게
00교회에 나오게 하시고 우리 중등부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먼저 일주일 동안의 잘못을 주님께서 용서해 주세요.
저희가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게 하시고 주님이
기도하셨던것 처럼 기도하게 하시고,
주님의 말씀을 더 가까이 하게 해 주세요.


항상 친구들과 선생님들께 감사하게 하시고, 전도하게 해 주세요.
또한 오늘도 우리를 위해 수고 하시는 중등부 부장선생님과
모든 선생님들을 주님께서 사랑해 주세요.


찬양대의 찬양을 받아 주시고 ,말씀 전하시는 목사님(전도사님)과
함께 하셔서 예수님만을 자랑하게 해 주세요.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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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학교 / 교회학교 에서
중고등부예배 대표기도문 (교회학교 찬양기도)

 

 

 

다같이 기도 드리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감사 합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우리를 건강하게 지켜주시고 오늘 거룩한 주의 날을 맞이하여 주님 앞에 나와

중등부 예배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게 해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사람은 복을 받을 것 이라고 말씀하신 주님...

우리가 주님을 의뢰하고, 의지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처럼,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우리에는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오직 주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할 수 있는 중등부 가족들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한사람이 꾸는 꿈은 꿈에 불과하지만, 우리 중등부

모든 가족이 함께 “같은 꿈”을 꾼다면... 그 꿈은 반드시 실현된다고 했습니다

소예배실의 빈자리를 가득 채울 수 있는 전도의 꿈을 꾸게 해 주시고,

막힌담 헐게 하시고 교회안에서 하나되게 하여서 이 중등부가 찬송과 기도와

 

감사가 넘치는 천국의 모형이 되게하여 주시길 원합니다.

 

특별히 학업중에 있는 학생들에게 성령의 지혜와 명철함을 더하여 주시고,

공부해야 할때에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다 하나님을 위한 일임을 알게 하시고

각자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을 발견하고, 잘 개발하여 하나님

영광을 위해 사는 자들이 되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그릇은 비울때 새것을 채울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들 마음이 욕심과 절망과 괴로움으로 채워져 있다면 이시간 이 예배를 통하여

그것들을 비우게 하시고 기도와 찬송과 감사함으로 채우게 하여 주시길 원합니다

 

 

말씀을 전하실 전도사님을 붙잡아 주시고 전하는 자나 듣는자 모두가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격하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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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학교 / 교회학교 에서
중고등부예배 대표기도문

 

 

 

중고등부 학생들이 이제까지 부모님의 손에 이끌리어 형식적으로 예배에 참여 했음을 고백합니다.
이제는 부모님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예수님을 믿게 해 주시고 성령의 은사와 방언의 은사를 체험케 하옵소서.
그리하여 기도하는데 기쁨을 주시고 찬양하는데 기쁨을 주시고 성경 말씀을 통하여 은혜 받게 하옵소서.

이 땅은 험란하고 황금 만능주의가 판을 치며 사람들을 유혹하는 악한 세력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직도 어리고 죄에 물들지 않은 이 학생들이 세상을 헤쳐 나갈 때 하나님의 권능으로 물리 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나라의 법칙이 세상의 법칙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중고등부 학생들이 컴퓨터와 게임 때문에 부모님과 다투고 싸운적이
있습니다. 마음속에 남아있는 아픈 상처들을 치료해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우리 학생들이 발랄하게 젊음을 마음껏 발산 할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까지 배운 컴퓨터와 게임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쓰임 받기를 원하옵니다.

하나님! 이제는 중고등부 학생들이 이 땅에 고통 받고 신음 받고 버림받은 낮고 천한 사람들을 사랑한

 예수님의 크신 사랑을 체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사랑을 체험하여 우리도 어려운 이웃과 가까이 있는 친구들을 위하여 항상 예수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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