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학교 강좌

 

 

 

제 목 구세주냐? 심판주냐?

(계시록 20:11~15)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였던 찰 G 피니(Charles G.Finny)는 원래 법률 공부를 한 변호사였습니다. 젊은 변호사 피니는 뉴욕에서 오래된 건물에 사무실을 하나 얻어 간판을 걸고 변호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어느날 아침 일찌기 사무실에 들어와 앉아 있는데, 조용한 가운데 주 님의 음성이 들려오기를 "피니야, 너는 이 다음에 무엇을 하려느냐?"하고 들려왔을 때, 피니는 "이 간판을 떼 버리고 훌륭한 변호사가 되지요""그 다음에는 무엇을 하려느냐?"(Then What?) "부자가 되지요""그 다음에는 무엇을 하려느냐?"(Then What?)"은퇴하지요""그 다음 에는?""죽지요""그 다음에는?"하고 또 물어을 때 떨리는 말로 "심판을 받겠지요"하고 대답을 하고나서 얼마후 반 마일이나 되는 곳에 있는 한 숲속으로 달려가서 하나님과 화목하기 전에는 이 자리를 뜨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고 종일 기도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 의 심판대앞에서 있는 자신을 보았습니다. 그는 4년동안 법률 공부를 하고 난 후 지금까지 이기주의적 생활의 허무함과 이 세상 쾌락만 좇아 살아온 자기 중심적인 생활의 잘못된 것을 다 깨달았습니다. 오랜 투쟁끝에 저녁때가 되어서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영원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을 하기로 목표를 세우고 나왔습니다.

그후부터 그의 생활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채워진 생활이 되었고 놀라운 능력이 함께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리하여 변호사로서가 아니라 목사로서 수만명을 회개시켜 구원하는 일을 하며 50 년을 보낸 유명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찰스 G 피니(Charles G.finny)목사가 일찌기 깨달은 것처럼 우리 모든 인간은 한사람도 빠짐없이 하나님의 심판대앞에 서야만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단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기 전에 나의 구주로 믿 고 영접한 사람은 그분이 구세주가 되어 주시고 죽기까지 예수님을 믿기 거절한 사람에게는 무서운 심판 주가 되어서 심판대에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판사가 해수욕 갔다가 물에 빠져 죽게된 사람을 건져 주었는데 몇 해 후에 공교롭게도 그 사람이 큰죄를 짓고 그 판사앞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판사를 알아본 죄수는 "판사님 전에 제가 물에 빠져 죽게 되었을 때 살려주시지 않았습니까?"하고 애원하니까 판사는 대답하기를 "전에는 내가 사랑으로 너를 구원해 주었지만 지금은 너의 죄를 재판하는 판사이지 너를 살려주는 사 람이 아니야"하고 냉정하게 재판하더랍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당신을 구원한 구세주이십니까? 아니면 이 다음에 당신의 심판주로 심판대에서 대면하시렵니까? 예수님이 여러분의 구세주가 되든지 심판주가 되든지 둘 중에 하나가 결정되어야 합니다.

1.지금 믿으면 구세주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을 사랑하셔서 죄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고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 할 루리를 구원하시고 하늘나라의 영광을 버리교 육신을 입고 오셔서 나와 여러분에게 임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그 몸으로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죽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삼 일만에 부활하여 우리의 구세주가 되셔서 누구든지 저를 믿기만 하면 멸망치 않고 구원을 받게 해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그리고 17 절 이하에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느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자는 하나님의 독생자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서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지금 살아서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여 구세주로 삼지 아니하면 죽은 후에 무서운 심판주가 되어 심판을 받아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구세주입니까? 아니면 미래의 심판주가 되실 것입니까? 여러분, 존귀하신 분이 값진 사랑의 선물을 가지고 찾아와서 받으라고 하는데 발길로 차 버린다면 그 다음에는 사랑이 분노로 하고 선물이 무서운 형벌이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끝절에 "아들을 믿는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엄히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이순간,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구원을 받고 죽으면 영원한 천국으로 영접해 주십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어떤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예수님을 믿으면 다 구원을 받습니다. 로마서 10장 9절, 10절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도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 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도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 무서 운 심판의 자리에 서지도 않고 영원한 형벌에 들어가지도 않습니다.

2. 안 믿으면 심판주가 되십니다.

믿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데도 믿지 않고 거절하면 예수님이 구세주가 아니라 무서운 심판주로 우리를 심판하려는 때가 옵니다. 요한 계시록 20장 11절에서 15절까지에 두려운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내가 크고 희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 받지못한 사람은 자기의 지은 죄대로 심판을 받고 영 원한 불못에 더지워져 영원히 고통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사람은 영생을 얻고 거듭나서 어린양 생명책에 기록되었다가 영원한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육신이 한번 태어난 사람은 두번 죽고 영원한 불못에 들어가고(20:14),그 영혼이 거듭나 두번 태어난 사람은 육신의 죽음을 한번만 당하고 영생 천국에 들어갑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분명히 구주로 믿고 두번 태어났습니까? 아직도 거듭나지 못한채 육신만 살아 있습니까? 그렇다면 둘째 사망 즉 영원한 불못에 던지워집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0 절에도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고 엄히 말씀했습니다. 지옥에 한번 들어가면 다시는 피할 길이 없고 다시는 나올 수 있는 출구도 없습니다. 다시는 나올 수 있는 출구도 없습니다. 다시는 사랑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고 믿을래야 믿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영원히 잠을 잘 수도 없습니다. 목이 타들어가도 물 한 방울도 허락되지 않는 곳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 위선자들이 있다고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 나 지옥에서 영원히 위선자들과 사는 것보다 교회에서 짧은 생애동안 위선자들과 함께 사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요한계시록 21장 8절에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 지옥 불에 들어가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 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했고, 히브리서 10장 31절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찐저"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보다 더 무서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 요사이 서울대학생 박 종철 군이 고문당하다가 죽었다고 전국이 떠들석하고 국회의원들의 특별회의가 소집된다고 하는데, 한 사람의 영혼이 심판을 받고 영원한 지옥불에 들어가는 것은 이보다 몇 천만배 큰 사건인데도 여기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것을 가장 기뻐하시고 가장 귀중히 보십니다. 마태복음 10장 28절에 예수님께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모과 영혼을 능히 직오게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당신의 구세주가 되 되십니까? 예수님이 당신의 구세주가 되십니까? 아니면, 심판주가 되십니까?

3. 생명책이냐? 행위의 책이냐?

요한 계시록 20장 12절에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고 했는데 생명책은 하나로 되어 있고 각 사람의 행위를 기록한 책은 복수로 되어있는 것을 보면, 구원받은 사람은, 어린양 생 명책에 기록되어 있고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은 각각 자기의 행뒤대로 죄가 기록되어 있어서 지옥에 들어가되 그 죄에 따라서 형벌이 결정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들의 모든 죄는 예수님의 피로 구속받았으므로 예수님 재림하실때 그 행한대로 상급과 면류관이 주어지는 줄 압니다. (고린도 전서 15장 58절, 빌립보서 3장 14절) 구원받은 사람이 잘못하고 범죄하면 내세의 심판을 받지않는 대신에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어떤 모양으로든지 징계와 채찍을 받습니다. 물질로나, 질병으로나, 사업의 실패로나, 사람을 통 해서나, 사랑의 채찍으로 심판을 받습니다.(고린도 전서 11장 31절-32절, 히브리서 12장 5절-13절) 여러분의 이름이 어린양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습니까? 심판대옆에 행위의 책에 기록되어 있습니까?

미국 서부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청년이 크게 잘못한 일 없이 잘 살아 가고 있었는데, 어느날 카드놀이를 하다가 그만 이성을 잃고 화를 내며 다투다가 권총을 빼들고 덤벼드는 상대편을 쏴 죽였습니다. 그 결과로 이 성실한 청년은 교수형의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그 청년이 과거에 성실하게 살았기 때문에 그의 친척들과 친구들이 진정 서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실이 다른 마을 다른 도시에도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이 그 진정서에 간절히 서명했습니다. 결국 그 진정서가 주지사에게까지 전달이 되었는데 마침 그 분은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는 바구니에 가득히 들어있는 진정서를 읽고 눈물을 흘렸습 니다. 그리고 그 청년을 용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사면장을 써서 포켓에 넣고 성직자의 까운을 입고 형무소를 찾아갔습니다. 그가 사형수 감방으로 접근했을 때, 그 청년이 벌떡 일어나 접근했을 때, 그 청년이 벌떡 일어나 철책문으로 다가오더니 "여기서 가시요! 보기도 싫소. 당신같은 사람을 벌써 일곱번이나 만났소. 나도 집에서 종교생활을 했단 말이요" "그러나 잠깐만 젊은이"하고 주지사가 말을 하고, "내가 당신을 위해 가지고 온것이 있으니 말좀하게 해 주시요"라고 했더니 "듣기 싫어요" 그 청년은 화를 내면서 소리쳤습니다.

"만일 당장에 여기서 나가지 않으면 간수를 불러서 끌어내게 하겠소" "그러나 젊은이"하고 간청하듯 말하면서 "내가 당신을 위하여 가장 좋은 소식을 가져 왔소. 말좀하게 해 주시요" 그랬더니 "내가 말했지 않소! 당장 나가지 않으면 간수를 부르겠고"하고 젊은이가 소리쳤습니다. "그러면 좋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주지사는 슬픈 마음을 가지고 돌아서 나왔습니다. 잠시후 간수가 가까이 오더니 "저, 청년, 지금 주지사님이 방문하고 갔읍니다." 라고 말하자 "뭐라고요?" 하고 울부짖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분은 당신의 사면장을 포켓에 넣고 왔으나 당신이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라고 하더니, 가져다 주자 앉아 울면서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습니다. "경애하는 주지사님,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당신에게 무례한 행동을 한 것 대단히 잘못했습니다." 그 주지사는 그 편지를 받고 돌아서서 그 편지 뒤에다 "이 사건 에 더 이상 흥미가 없소"라고 써서 보냈습니다. 그 청년의 사형 집행일이 되었습니다. "죽기 전에 할 말이 없습니까?"라고 물으니 "예, 있습니다. 미국의 모든 청년들에게 이 말 좀 전해주십시요. 내가 죽는 것은 살인해서가 아니라구요. 주지사는 나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나는 살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내가 죽는 것은 주지사의 용서를 받아 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분명히 구주로 영접하여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어찌하든지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는 데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출처:금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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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이는 우리가 원수였을 때에 ... <로마서 5:10>

 

타락 이전에 선을 행할 수 있었던 인간은 선을 행할 능력을 상실 합니다. 이제는 사탄이 우리의 마음에 죄를 넣지 않아도 우리 안에 죄가 생겨 하나님도 알아 볼 수 없고, 함께 할 수도 없게 됩니다. 그리고 선의 기준 되시는 하나님께서 창조주로써 만드신 이 세상의 법이 아닌 인간의 자의적인 선악 기준을 통해 법을 정하고 그것을 옳다고 여기게 됩니다.

 

죄가 있으면 심판하셔야 하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항하여, 하나님을 적으로 규정하고 대놓고 반란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따른 인간의 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노력과 인간의 방법으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배제하고 유토피아를 만들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만든 세상에서 하나님이 없는 유토피아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에녹 성을 쌓은 가인, 바벨탑을 쌓은 니므롯, 공산주의 체제를 다진 스탈린, 모든 사람이 주인이 되자는 

 

십자가 복음

 

그럼에도 하나님은 인간의 구원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스스로 이 땅에 오셔서 육신을 입고 인간을 대신해서 모든 죄를 뒤집어 쓰는 것 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분명합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입니다. 인간의 죄에는 반드시 형벌이 뒤따라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어떠한 소망도 없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란을 일으킨 모든 죄에 대해서 심판을 받아야 마땅 합니다. 인간은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존재 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누군가가 그 죄값을 대신 받겠다고 나선 것 이었습니다. 그것은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유월절에 십자가에 달린 것은 유대인 지도자들의 의지가 아니였습니다. 십자가에서 심판을 내린 것은 빌라도가 아니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은 것 이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것을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가 복음 15:34>

반역자가 달리는 십자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가 달리는 나무에서 예수님은 우리 대신에 하나님의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신명기 21:23>

이로써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이 십자가에 동참하는 사람들과 연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죄로 인해 교제할 수 없었던 하지만 너무나 사랑했던 사람과 교제할 수 있게 되셨습니다. 그 둘 사이를 연결한 것은 그 둘을 갈라 놓았던 벽을 허문 것은 십자가의 사랑 이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화평이시니라. 그분께서 둘을 하나로 만드사 우리 사이의 중간 벽을 허무시고 <에베소서 2:14>

이 구원은 인간의 행위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이루어지는 것 입니다. 이 구원은 오직 예수님의 믿음을 얻음으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힘으로 그래서 예수님과 하나됨으로 얻을 수 있는 것 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라. 그러나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 나는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 <갈라디아서 2:20>

 

나는 이제 죄와 상관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죄를 멸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죄들을 제거하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알거니와 그분 안에는 죄가 없느니라. 누구든지 그분 안에 거하는 자는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누구든지 죄를 짓는 자는 그분을 보지 못하였고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요한 1서 3:5~6>


- 기독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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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사순절 주간

 

 

 

 

 

예수님께서 사셨던 지상에서의 마지막 주간을 묵상하는 장식을 꾸며보자.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면서 시작된 그의 거룩한 주간을 더듬으면서 주님이 누구이셨는가를 생각하도록 한다. 이 장식은 예수님의 행적을 추적하는데 도움을 주는 말씀과 성화로 만든다.
이 장식은 캔트지를 패널의 소재로 삼아 꾸민다. 여기에는 시간의 순서로 주제를 선택하여 성화와 이에 대한 말씀으로 만든다. 여기에 사용되는 본문은 개역성경만 고집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어린이들이 읽고 이해하기 쉽도록 오늘날의 문체로 작성된 번역본들을 이용한다. 그리고 각각의 패널에는 주제의 제목, 성화 성경 본문의 수록으로 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복음서에서 기록을 발췌할 수 있다.

 

1) 예루살렘 입성

- 마태복음 21: 7-11, 누가복음 19: 28-44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무리의 대부분은 그 겉옷을 길에 펴며 다른 이는 나무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이는 누구뇨 하거늘 무리가 가로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2) 성전을 깨끗하게 하심

- 마태복음 21: 12-17, 누가복음 19: 45-48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두목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침을 찾지 못하였더라

 

3) 다락방에서의 마지막 식사

- 마태복음 26: 17-30, 누가복음 22: 7-30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으로 유월절을 잡수시게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매
예수께서 제자 중에 둘을 보내시며 가라사대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 가서
어디든지 그의 들어가는 그 집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뇨 하시더라 하라
그리하면 자리를 베풀고 예비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라 하신대
제자들이 나가 성내로 들어가서 예수의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예비하니라
저물매 그 열 둘을 데리시고 와서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저희가 근심하여 하나씩 하나씩 여짜오되 내니이까
이르시되 열 둘 중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뻔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가니라”(막 14: 12-26).

 

4) 겟네마네 동산의 기도

- 마태복음 26: 30-36, 누가복음 22: 39-46
“저희가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나의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았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돌아오사 제자들의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 저희가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
세번째 오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이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막 14: 32-42).

 

5) 유다의 배신: 예수님을 팔다

- 마태복음 26: 47-56, 누가복음 22: 47-53
“말씀하실 때에 곧 열 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 파송된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예수를 파는 자가 이미 그들과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 맞추는 자가 그 이니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가라 하였는지라
이에 와서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하고 입을 맞추니
저희가 예수께 손을 대어 잡거늘
곁에 섰는 자 중에 한사람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라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오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막 14: 43-52).

 

6) 대제사장에게 재판을 받으심

- 마태복음 26: 57-27: 1-10, 누가복음 22: 57-71
“저희가 예수를 끌고 대제사장에게로 가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다 모이더라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안까지 들어가서 하속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니
이는 예수를 쳐서 거짓 증거하는 자가 많으나 그 증거가 서로 합하지 못함이라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예수를 쳐서 거짓 증거하여 가로되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
오히려 그 증거도 서로 합하지 않더라
대제사장이 가운데 일어서서 예수에게 물어 가로되 너는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의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잠잠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가로되 네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그 참람한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뇨 ?' 하니 저희가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
혹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우고 주먹으로 치며 가로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속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막 14: 53-65).

 

7)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베드로

- 마태복음 26: 69-75, 누가복음 22: 54-62
“베드로는 아래 뜰에 있더니 대제사장의 비자 하나가 와서
베드로의 불 쬠을 보고 주목하여 가로되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새
비자가 그를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다시 이르되 이 사람은 그 당이라 하되
또 부인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당이니라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의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생각하고 울었더라”(막 14: 66-72).

 

8)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심

- 마태복음 27: 11-31, 누가복음 23: 1-25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로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
빌라도가 묻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 말이 옳도다 하시매
대제사장들이 여러 가지로 고소하는지라
빌라도가 또 물어 가로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저희가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소하는가 보라 하되
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기이히 여기더라
명절을 당하면 백성의 구하는 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민란을 꾸미고 이 민란에 살인하고 포박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
무리가 나아가서 전례대로 하여 주기를 구한대
빌라도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이는 저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러라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는 내가 어떻게 하랴
저희가 다시 소리지르되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니라
군병들이 예수를 끌고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모으고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엮어 씌우고
예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희롱을 다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막 15: 1-20).

 

9)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

- 마태복음 27:32-56, 누가복음 23: 26-49
“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새 누가 어느 것을 얻을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때가 제 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그 위에 있는 죄 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 하고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제 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
제 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곁에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가로되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융에 신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우고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운명하심을 보고 가로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
이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좇아 섬기던 자요 또 이 외에도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가 많이 있었더라
이 날은 예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므로 저물었을 때에 "(막 15: 21-42).

 

10) 성전의 휘장이 찢어지다

- 마태복음 27: 51, 누가복음 23: 45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막 15: 38).

 

11) 빈 무덤

- 마태복음 28: 2-6, 누가복음 24: 1-7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찌기 해 돋은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눈을 들어 본즉 돌이 벌써 굴려졌으니 그 돌이 심히 크더라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막 1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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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기 목사 번역 및 추천 도서 「천국은 확실히 있다」, 비성경적 위험천만

 


예장합동 소속, 성남시 분당구 한돌교회 담임목사 림헌원

onestone3@korea.com

 

 

 


「천국은 확실히 있다!」(HEAVEN is so REAL)

토마스 주남(여) 씀, 조용기 옮김, 서울 말씀사, 2004.

 


- ‘계시관. 천국관. 기독론’등이 비성경적, 비신학적으로서 ‘위험천만!’

그리스도의 거룩성에 흠집! 그리고 십계명의 제2계명과도 충돌되며, 성경계시의 최종성과 만족성을 위협하는 ‘제2의 계시록?’처럼 주장- 정통 기독교 신자들로서는 대부분의 내용이 용납하기 어려운 것들로 가득하다.

 


그런데도 조용기 목사는 ‘이 책은 신학적이거나 교리적인 저서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책에 담긴 내용을 신학적이거나 교리적인 논쟁의 대상으로 여기지 말고 주님과 함께 천국을 구경하신 토마스 여사의 진솔한 체험이 사실 그대로 담긴 기록으로 받아들이고 읽으면 좋을것’ 이라고 말한다.(4,5쪽)

 


신학적 또는 교리적 논쟁거리도 안 되는 것처럼 말하는 비성경적인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어 ‘주님의 크신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의문이다. 저자인 토마스 주남은 자신의 천국 체험을 철저하게 성경적 사실이라고 주장한다.(17쪽)

 


이것은 성도들이 1세기의 초대교회 당시 베뢰아 교인들처럼 성경신학을 통해서 ‘옳음과 그름을 분별’하려는 노력을 사전에 봉쇄하여 거짓되고 악한 것에 ‘눈멀고 귀먹게’ 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의심받기에 충분하다.

 


바른 신앙은 바른 신학에서 나오며, 바른 신학은 바른 성경 해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번역한 책에 관해 다음 몇 가지의 문제점을 살펴보기로 한다.

 


Ⅰ. 계시관의 문제점 (- 제2의 계시록?’처럼 주장)

 

- 성경계시의 최종성과 만족성을 부인!

(16,17,96,117,152,178,182,203,205,206,291,338,348,354,394,491쪽 등)

 


‘그러나 주님은 내게 자신이 재림하시기 전에 자신의 백성들에게 스스로를 정결케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실 것이라고 확신을 주시면서 그 때문에 나를 택하여 이 책을 쓰게 하셨다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성경이 말씀하는 것을 믿지도 않고 또 주님이 자신의 백성들을 위해 곧 오시리라는 것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또한 이 책이 수백만의 영혼들을 구원하는 도구가 될 것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354쪽)

 


이 책은 사도요한의 요한계시록과 하박국과의 ‘동등함’을 넘어서 마치 무능력해진 66권의 성경말씀을 능가하는 구원의 도구로서 예수재림직전에 마지막 기회로 주어지는 제2의계시록!? 인양 주님의 계획에 따라 명하여 쓰여진 책이라고 시종 주장하고 있으니 성경계시의 최종성과 만족성을 철저히 부인한다는 의심을 면하기가 어렵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66권의 말씀을 가감하지 말라고 신구약 전체를 통하여 엄히 경고 하시고 계신다.(신12:33 ; 잠30:6 ; 계22:18-19)

저자는 사도요한과 엘리야처럼 살아서 천국 체험을 했던 소수 중에 하나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구약의 엘리야와 하박국 선지자, 그리고 신약의 사도 요한과 맞먹는 말세의 독특한 여선지자로서 제2의 계시록!?을 쓰는 정당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성경 계시의 최종성과 만족성을 부인하고 있으니 이는 다른복음(갈1:6-9)을 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Ⅱ. 천국관의 문제점

 

-천국은 우리가 살아생전 왔다 갔다 하는 장소가 아니다.

(76,78,84,85,97,147,174,209,221,224,240,242,286쪽 등등)

 


‘나는 종종 왜 주님과 내가 다른 곳이 아니라 해변에서만 출발해야 하는지 의아해 했습니다. 그러다가 나는 그 장소가 보통 이른 아침 시간에는 사람의 왕래가 없기 때문일 것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나는 내가 주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누군가 본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를 생각하니 재미있어서 소리 내어 웃었습니다. 십중팔구 그들은 외계인이 납치해 간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환각현상이라고 생각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들은 아마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까 겁이 나서 아무에게도 그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97쪽)

 


영적천국은 죽음 월편(越便)의 세계이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히11:1에서처럼 천국에 관한 내용이건 사후에 관한 내용이건 요한 계시록에 다 기록하지 않은 것은 우리 로 하여금 궁금증을 갖고 천국을 소망하고 내세를 소망케 하시려는 것이다.

또한 신약성경 다수 기록한 사도 바울이 천국의 낙원을 다녀온 경험이 있지만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아니하고 침묵했던 이유를 깊이 묵상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고후12:1-7)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라서 사람들이 지나치게 생각하여 오해할 수 있기에’ 더 이상의 말을 그만 두겠다는 사도 바울의 겸손을 떠나서 오히려 그 사도 바울의 견해를 뛰어 넘어‘철저하게 성경적 사실이라’(17쪽)는 말로 호도해가며 천국 소개를 하고 있는 사실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영적인 천국을 경험한 사도바울의 계시도 일반화, 보편화 시키지 않았다. 그런데 어찌하여 저자는 개인적 체험을 일반화 또는 보편화 시켜서 이 세상 마지막 구원의 도구로 직통계시를 받은 책이라 주장하고 또한 철저히 성경적이라면서 비성경적인 책을 마치 사실인 것처럼 전파하고 있으니 위험천만한 일이다.

 


살아있는 인간이 변화된 육체의 모습으로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도록 이른 아침에 천국으로 올라간다!(84,85,97,204,205,206,319쪽 등등) 그리고 영적천국에 도착하여서도 슬픔과 염려와 은으로 된 화장실의 욕조를 언급 하고 있다.(147쪽)

또 여성들이 화장하고 옷을 갈아입는 파우더 룸이 있다고 하였다.(197쪽 등) ‘화장’은 현세에서 연극을 할 때 돋보이게 하려는 일종의 얼굴 가면이요 위장술이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한 천국에서 무엇이 부족하여 화장을 하여 돋보이게 할 필요가 있겠는가?

영적 천국에는 육체의 정욕들이 자리 잡지 못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 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마22:29,30)

마22:23절 이후에서 사두개인 들은 부활후의 천국세계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완전히 새롭게 되는 세계(요한계시록21:5)인 줄 모르고 단순히 현세(슬픔,욕정 등)의 연장인줄로만 알아 오해 했던 것이다.

 


문패가 달린 저택은 매우 특별한 자녀들을 위한 것이라 한다. (286쪽)

누구는 문패가 있는 대저택, 누구는 쓰러져가는 집, 또 누구는 개털, 소털 면류관을 쓰게 된다는 등등의 이야기는 지구촌 현세의 물질적 자본주의적 개념으로 오해된 생각들일 뿐이다.

 


현세에서 열심히 주의 일을 잘 한 사람에게 베푼다는 천국의 상급(영광)개념은 천국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하게 채워진 곳이기 때문에 현세처럼 더 이상 물질의 양으로 판단하는 소유적 개념이 아니다.(고전15:40,41)

 


천국에서 고기 굽는 그릴, 자동문, 주님이 버튼을 누르자 달리는 배들, 오븐 옆에 달린 버튼을 누르는 주님!(78,209,221,224쪽 등) 현대 최근 문명의 수준이 버튼을 누르는 정도 보다 더 발전이 된 최첨단 전자동화 인텔리전트(intelligent,인공지능) 수준에까지 발전되어 마음이 생각하는 전파나 말로 명령만 내려도 집안의 모든 것이 자동 검색이 되고 움직이는 수준인데 계시된 천국은 너무 문명이 낙후되어있는 후진국 문명이다. 마치 현대 지구촌문명의 이기의 일부를 천국으로 직수입한 느낌을 준다. 오히려 이 땅(지구촌)이 더 천국 같다는 역전 현상이 나올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롬14:17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의와 평강과 희락보다 천국에서 먹을 것이 많다고 한다

 


Ⅲ. 기독론의 문제점

 


(-그리스도의 거룩성에 흠집! 그리고 십계명의 제2계명과 크게 충돌!)

저자는 주님과 팔짱도 끼고 어깨에 기대고 서로 안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와 유사한 표현이 이 책 전체에서 주류를 이루며 연애 소설 같은 느낌으로 천국계시록(?)을 쓰고 있다.)

138,145,176,182,185,186,199,210,211,218,230,238,242,244,254,260,266,277,278,282,309,322,323,324쪽 --- 등등 외 다수

 


“우리는 서로 끌어안았고, 주님은 ‘딸아, 사랑한다’라고---‘저도 주님을 사랑해요’(266쪽),”주님은 나를 불러서 옆에 앉으라고--- 나는 주님의 팔에 손을 끼고 얼굴을 주님의 어깨에 기댄 채 ---“(210쪽))

 


예수그리스도와의 사랑은 아가페적 사랑 곧 영적인 거룩한 사랑인데도 남.녀 간의 애정행각처럼 에로스적 사랑 곧 상대적 사랑으로 거룩한 아가페적 거룩한 사랑을 지상의 남녀관계의 만남수준으로 끌어내려 표현하는 시도는 아주 불경건하며 매우 위험천만한 발상인 것이다.

그것은 거룩한 성자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의 거룩성에 흠집을 내려는 시도이자 그리스도에 대한 모욕이며, 비성경적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단들이 하나님과의 아가페적 거룩한 사랑의 관계를 남.녀간 애정행각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작업을 자주하여 온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 주님의 생김새(머리카락, 키, 나이, 손, 옷차림, 입)를 구체적으로 보았다고 한다. ‘골격이 크고, 머리카락은 구불구불, 목은 비단같이 희고, 손의 피부는 올리브 색깔, 손가락은 길고 날씬, 나이는 30-40사이의 젊은이, 키는 약 180센티미터를 약간 넘는 것 같다?’(14쪽)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몸은 고고학적으로도 증명을 못한다. 예수님의 몸이나 천사의 몸을 서양의 백인 우월주의 시각과 얼짱!과 몸짱!으로 존재하는 세계라고 한다. 그것은 동양아시아계 여인의 한계가 보이는 것으로서 그동안 서양인들의 외모 앞에 상대적 박탈감에 대한 보상심리는 아닌가? (이사야53장과, 마가복음16:12 을 통해 주님을 보라)

 


예수님의 생김새를 거론하는 것은 십계명의 제 2계명과 연결하여 상고할 때 심각하게 충돌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 단호한 진술은 하나님을 우리가 아는 가장 고귀한 피조물인 인간으로 묘사하는 그림들과 상과 환상들을 사용하는 것 역시 배제되어야 한다.(출24:9,10; 신4:15,16; 요4:24; 롬1:20; 딤전6:16; 약1:17)

그것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으로 묘사한 그림과 상을 사용하는 것을 배제한다.

 


비록 하나님(제2위이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 자신이 과거에 인간의 몸을 입으셨고 아직도 여전히 그 몸이 부활하시어 뼈와 살을 갖는 인간의 몸을 갖고 계시지만 말이다. 왜냐하면 모든 환상체험과 그림과 형상은 필연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인간됨을 ‘닮은 모습’으로 만들어지거나 상상이 되며 따라서 제2계명에서 금하고 있는 범주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칼빈은 이렇게 썼다.

“하나님의 참된 형상은 세상 속에서 발견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하나님이 눈에 보이는 형태로 우리 앞에 보일 때 하나님의 영광은 더럽혀지며 그 분의 진리는 거짓에 의해 타락해 버리게 된다.---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고안해 내는 것은 그 자체가 불경스러운 일이다. 하나님의 존엄성이 훼손되며, 하나님은 실제의 하나님이 아닌 다른 어떤 존재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하나님 또는 예수님에 대한 상상, 그림들과 형상들을 반대하는 핵심적인 이유는?

그것들이 자신이 묘사하는 신적 존재의 인격적 본질과 특성에 대한 진리의 대부분을-전부 는 아니라 하더라도-불가피하게 숨기게 되기 때문이다. 아론의 금송아지가 어떻게 하나님의 도덕적 성품, 의로우심, 선하심, 오래 참으심 등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겠는가?

 


성경 말씀의 계시이외에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계시를 받았다면서 성경이외의 또 다른 특별계시를 운운 하거나 철학적 추론에 의거하고 있는 모든 사변적인 신학은 이 점에서 잘못 되어 있다.(이러한 문제는 주의 말씀을 특히 주목하라 ☞ 마24:4,5,11-14,23-27; 요8:47)

 


바울은 이런 유의 신학이 결국 어떻게 되는가를 말한다.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고전1:21).

요점은 분명하다.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눈에 보이는 환상적 체험이나 상징을 보여 주신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롬10:8-17(---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시48:12; 빌2:12; 약2:22; 고전4:20; 요일1:1; 눅16:19-31)을 주목하라.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환상과 상징들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인간이 만든 하나님의 모든 형상은 주물을 부어서 만든 것이건 정신적인 것이건 환상적인 것이건 실제로 죄 많고 불경건한 세상의 도구들로부터 빌려 온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과 조화를 이룰 수 없다,

어떤 형상을 취한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으로부터가 아니라 인간적 출처나 물리적 현상에서 취하는 것이며, 바로 이것이 형상이나 환상과 상상을 취하는 일이 잘못된 까닭임을 밝혀두는 것이다.

 

 

끝으로 저자와 번역자 그리고 독자들에게 고한다. 그동안 신.구약 성경(66권)이 천국에 대한 소망과 신앙생활의 독려함에 얼마나 부족 하였기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오서 말세의 여선지자를 통하여 새로운 천국소망과 구원의 길라잡이를 주셨다는 것인가? (신명기13장을 묵상하라)

 


신.구약 성경(66권)말씀을 통해서‘천국이 확실히 있음’을 믿기가 불충분하던가? 신.구약 성경(66권)을 통해서 신앙생활(흔히 기성교회가 좋은 신앙이라고 말하는 기준 곧 십일조 잘 내고, 교회 봉사, 헌신, 기도 등의 목표)에 독려받기가 너무나 부족하였는가?

 


성경(66권) 자체로는 충실한 신앙생활을 하라는 메시지가 부족하므로 새로운 유익을 찾아 주는 말세 계시의 책을 쓰게 되었다는 의도로 해석이 가능한가?

 


이 책 서두의 ‘번역에 부쳐’에서 번역자가 교리적, 신학적인 논쟁의 대상으로 여기지 말자라고 선언한 것은 뭔가의 의도를 감추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이렇게 비성경적인 책을 출판하여 세상에 내놓았다는 것 자체가 마치 종교적 흥행을 염두에 둔 상업적 발상이라는 오해를 받을 소지가 있을 수 있으므로 마땅히 자제 했어야 할 일이었다.

 


성경적신학과 교리 등을 도외시하고 신비체험만을 강조하면 신비주의로 빗나갈 뿐 아니라 결국 만신이 우글거리는 원시종교로 회귀하자는 것밖에 안되며,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 즉 너희는 가서 ‘빛과 소금’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 사상’에로의 문화변혁을 추구하라는 ‘제자의 도’는 어디에 가서 찾겠느냐는 것이다.(마태복음5장과 28장을 주목하라)

 


혹여 다음과 같은 해괴한 생각은 안 했을 것이라 보지만 단지 신앙생활(흔히 기성교회가 좋은 신앙이라고 말하는 기준 곧 십일조 잘 내고, 교회 봉사, 헌신, 기도 등의 목표)을 독려하기위해서 영적인 천국을 이 땅에 있는 형이하학적 수준으로 끌어내려 표현하려고 했다면 신.구약 성경 말씀과 바른 신학의 객관적인 측면에서 하나님과 영혼들을 두 번 속이는 무책임한 발상인 것이다. 바른 신앙 올바른 신학을 위해서는 주관적, 객관적, 역사적 방법이 동시에 조화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계시라고 빙자하여 어린 하나님의 백성들을 유인하여 비성경적으로 빗나간 계시 안에 포로가 되게 하려는 의도라면 얼마나 무섭고도 섬뜩한 일일까?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 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갈2:4)

그러므로 신.구약 성경말씀과 비교하여 비판을 하는 진위작업은 주 예수님께오서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계속되어야 할 일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색안경을 끼고 비판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색안경은 불편하다.

이제 진실로 부탁하는 것은 다음의 내용을 깊이 묵상(meditation)하길 권하는 것이다.

 


희생의 어린양이 되신 주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의 대가로 얻은 구속역사를 죄인인 자신과 분명한 관계가 있음을 회개하고 믿으면 성령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받게 될 것(행19:2,고후1:20-22)이며 그 때 신.구약 성경 66권을 읽거나 듣고 믿으면 감동과 영적인 깨우침이 분명하고 비로소 정상적인 성도들과 같아질 것이다.(주목해야할 성경 ☞ 요8:47,요16:4,7,13,14,요18:37,고전2:9-16) 그것은 성령하나님이라는 같은 영을 비로소 받았기 때문인 것이다.

 


이제는 기회를 놓치지 말고 올바른 감동과 영적인 깨우침을 위해서라도 이미 기록된 신.구약 성경 66권의 성경계시가 말씀하는 성령하나님을 받아 구원에 이르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세상과 교회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번역자와 저자가 이러한 책과 관련하여 반성과 사과 그리고 하나님 앞에 회개할 용기를 갖는다면 신.구약 성경 안에서의 바른 복음을 전파하는데 있어서 이 보다 더 아름다운 일이 있을까하여 기대하여 본다.

 


1992년 10월 28일 시한부 종말론의 예수 재림(휴거계시 사건)에 대한 빗나간 예언 직전에 한국교회에 선전되어 절찬리에 판매되던 ‘내가 본 천국-펄시콜레 씀’이라는 책의 영향력이 한국 교회들의 종말론적 영성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놓지 않았던가?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과 성경 그리고 한국 교회를 향하여 허구와 거짓이라며 모욕을 주 던 그 시절을 잠시라도 기억을 하는가?

 


그 당시에 예수그리스도의 재림(휴거사건)에 대한 빗나간 예언과 잘못된 종말관에 대하여 그래도 영향력이 있다는 교회와 교단들 그리고 개신교 4인방 리더를 자처하는 사람들조차 비판다운 비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벙어리가 되었던 악몽이 되살아난다.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제자라고 한다면 바른 복음을 위한 시대의 나팔수로 광야의 들 소리를 내질러야 할 시대의 사명자가 아니던가? 그래도 늦지는 않았다. 무엇이 교회의 위기를 불러들인다고 생각하는지 성경적 기독교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그 심각한 오류들을 이끌어내어 뜨거운 가슴과 냉철한 이성을 갖고 혁신하여야 할 것이다.

 


“Protestant always protest"

교회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갱신(Renewal)하기 위하여 Protest(항변, 이의주장)가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 간혹 놓친 부분도 있겠으나 성령론 등 그 외의 문제점들이 다수 발견되었었다. 그러나 지면 관계상 가장 크게 문제가 되는‘계시관’,‘천국관’,‘기독론’만 정리한 것임.

 


출처 : http://cafe342.daum.net/_c21_/home?grpid=19Y4A

      http://cafe.daum.net/ci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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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을 말하다  ( The Lord's Prayer )

 

 

 

 

 

주기도문, 익숙한 데서 벗어나라

 


어거스틴과 루터, 칼뱅처럼 기도를 가르친 위대한 스승들은 그 누구도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기도의 논리를 전개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산상수훈의 골간을 이루는 주기도문(마 6:9-13)을 최고의 본보기로 삼아 거기서 무얼 믿고 훈련할지 뽑아냈다. 루터의 고전적인 편지들도 그렇지만 칼뱅의 [기독교 강요] 역시 예수님이 본보기로 가르쳐 주신 기도를 한 줄 한 줄 연구하고 분석하는 데 관련된 지면(제20장)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성경적인 주석과 해석학적인 저작들뿐 아니라, 목회적이고 신학적인 글에 이르기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적어도 한 군데씩은 적잖은 분량을 배정해 주기도문에 대해 설명했다.

 


지금부터 이 위대한 스승들의 사상을 통해 주기도문을 살피면서 기도라는 주제에 관한 그들의 지혜를 온전히 끌어내고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깊이를 더듬어 보려고 한다.

 


주기도문 속에 길이 있다


인류 역사상 주기도문만큼 자주 되풀이되며 입에 오르는 성경 구절이 또 있을까? 예수 그리스도는 풍요로운 기도의 곳간을 여는 열쇠로 이 주기도문을 주셨다. 그런데 그 엄청난 자원이 방치되다시피 하는 데는 지극히 익숙하다는 사실도 한몫하는 듯하다.

 


당신이 난생처음 철길 옆에 사는 지인을 찾아갔다고 생각해 보자. 한가하게 앉아서 대화를 나누는데 갑자기 기차가 굉음을 내며 쏜살같이 달려온다. 앉은 자리를 고작 몇 미터 상관으로 스치듯 지나가는 바람에 기겁을 하고 일어나며 소리친다. "저게 도대체 뭐지?" 하지만 주인인 친구는 되묻는다. "뭐가 뭐야?" 다급하게 대꾸한다. "저 소리 말일세! 난 뭐가 벽을 뚫고 둘어오는 줄 알았어!" 친구는 그제야 태평스럽게 설명한다. "아, 저거? 그냥 기차야. 난 이제 익숙해져서 가는지 오는지 신경도 안 써." 상대는 말문이 막힌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주기도문도 마찬가지다. 온 세상은 신령한 체험을 갈구한다. 예수님은 몇 마디 말을 주셔서 그 도구를 삼게 하신다. 이를테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셈이다. "온 우주를 다스리는 하늘 아버지와 날마다 마주 앉아 그분 앞에 마음을 다 쏟아 놓고 그분이 귀 기울여 듣고 사랑해 주시는 경험을 하고 싶은가?" 우리로서는 두말할 것도 없이 환영이다. "예!" 예수님은 대답하신다. "주기도문 속에 모두 들어 있단다." 우리는 듣도 보도 못한 소리라는 듯 반문한다. "어디 ... 들어 있다고요?" 너무나 익숙해서 거기엔 신경도 쓰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리스천에게 필요한 게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문 안에 다 있다. 어떻게 하면 '익숙함'이라는 치명적인 위험을 피할 수 있을까? 오랜 세월 성찰하고 훈련하면서 주기도문의 깊이를 가늠해 왔던 이 위대한 세 스승의 말을 유념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를 어떻게 드려야 한다고 그들은 생각했을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는 부르는 말이고, 사실상 간구는 아니다. 칼뱅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행위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설명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의 자녀로 입양되지 않는 한, 누가 감히 하나님 아들의 영광을 주장할 수 있겠는가?" 루터도 이 구절은 곧장 하나님과 이야기를 나누려는 의도가 아니라 기도로 진행하기 전에 우선 스스로의 처지를 되새기고 그리스도 안에서 갖게 된 위치를 자각하려는 부름말이라고 보았다. "하나님은 엄중한 심판을 받아 마땅한 우리에게 ... 그분을 아버지로 여기고 또 그렇게 부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고 평안해 하는 믿음을 마음에 심어 주시길" 구하는 것으로 기도를 시작해야 한다. 칼뱅 역시 "주님은 한없이 다정한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모든 불신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고 말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현대인들로서는 첫 번째 간구를 이해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거룩히 여김을 받다'라는 동사가 요즘 흔히 쓰이는 말이 아니며 세속화된 사회에서 '거룩'이란 개념 자체가 낯설기 때문이다. 루터가 지적했듯 논리적인 문제도 발목을 잡는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기를 구한다는 건 도대체 무얼 기도한다는 얘긴가? 주님의 이름이야 이미 거룩하지 않은가?" 루터는 곧바로 그분의 이름이 거룩하다는 데는 재론의 여지가 없지만 "그분의 이름을 사용하는 우리의 마음가짐이 항상 거룩한 건 아니다"라는 답을 달았다. 그리고 세례를 받은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이름을 지녔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존귀한 이름을 품은 존재로서 선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표하므로, 부름을 받은 그 호칭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우리 스스로 선하고 거룩해질 힘을 주시도록 꾸준히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영광을 받으신 것처럼 열방 가운데서 영화롭게 되시기를" 소원하는 어거스틴 기도에 깊이 공감하면서 루터는 또 다른 의미로 바라보았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온 세상 방방곡곡에 두루 퍼지며 크리스천들이 그리스도를 닮은, 한마디로 거룩한 삶을 살아서 주님을 드높여 드리고 더 많은 이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분의 이름을 부르게 되길 요청하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칼뱅은 전반적인 기조를 같이하면서 내면 깊숙이 새기고 있던 생각 하나를 덧붙였다. "은혜를 짓밟는 행위로 조금이나마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막는다면, 그만큼 가당찮은 짓이 어디에 있겠는가?" 다시 말해서 주께 배은망덕하고 냉담한 태도를 가지면 그분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한다는 것은 그저 착하게 사는 차원을 넘어 늘 기꺼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며, 더 나아가 그 아름다움에 경이감을 품는다는 뜻이다. "주님을 바라보며 탄복하는 마음에 사로잡히지 않는 한," 그분의 이름을 드높이며 경배할 리가 없다.

 


"나라가 임하오시며"


어거스틴은 한사코 눈을 뜨지 않으려는 이에게는 사방이 암흑 천지인 것처럼, 지금도 하나님은 변함없이 세상을 통치하시지만 그분의 법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고 말한다. 사실, 모든 인간고(人間苦)의 원인이 여기에 있다. 인간은 창조주를 섬기도록 지음을 받았으므로 마땅이 주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다른 것들을 두고 섬기면 영적, 심리적, 문화적, 심지어 물질적인 문제들이 줄을 잇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가 '임해야' 한다.

 


칼뱅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데는 두 가지 경로가 있다고 보았다. 하나는 "정욕을 바로잡아 주시는 성령님"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생각들을 빚어 주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것은 '주권'과 관련한 간구다. 왕이신 하나님이 감정과 욕구, 사상과 헌신을 비롯한 삶의 모든 영역에 왕권을 펼쳐 주시길 구하는 것이다. 이는 토머스 크랜머(Thomas Cranmer)의 기도를 떠올리게 한다. "주님이 약속하신 것을 얻게 하시고, 명령하신 것들을 사랑하게 하소서." 하나님이 온전히 다스려 주셔서 온 마음을 다해 기쁨으로 순종하고자 하는 생각이 가득하길 구하는 것이다.

 


루터는 여기에 외면적이고 미래적인 관점을 덧댔다.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통치가 부분적으로 드러날 뿐이지만, 장차 다가올 하나님 나라에서는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완전하게 실현될 것이다. 온갖 고통과 상처, 가난과 죽음은 사라진다. 그러므로 "나라가 임하시오며"라는 기도는 "정의와 평화가 흘러넘치는 미래의 삶을 갈망하는" 간구다. "앞으로 나타날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이 우리 가운데서 시작하신 나라의 완결과 완성"을 구하는 것이다.

 


"뜻이 이루어지이다"


루터는 세 번째 간구의 의미를 더없이 생생하고 솔직하게 설명한다. 그는 이 구절을 이렇게 풀이했다.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 주셔서 온갖 질병과 가난, 수치와 고통, 역경을 기꺼이 견디며 주님의 거룩한 뜻이 그 가운데서 우리의 뜻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음을 알게 해 주소서." 이처럼 담대하게 말하기엔 입술이 잘 떨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주기도문 첫 구절이 갖는 중요성만큼은 또렷이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심을 가슴 깊이 확신하지 않는다면, 감히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할 수 없다. 어린아이들에게 아버지는 속을 알 수 없는 존재이기 십상이다. 네 살배기 아이는 이것도 하지 말고 저것도 해선 안 된다는 아버지의 갖가지 금지 명령을 납득하지 못한다. 그저 믿고 따를 뿐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신뢰하고 의지할 때만 인내하고 감사하며 어려움을 견딜 은혜를 구할 수 있다.

 


더러 하나님이 정말 믿을 만한 분인지 어떻게 아느냐고 묻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예수님 자신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상 누구도 마주한 적이 없는 지독히 참담한 처지에 몰렸을 때 주기도문의 이 부분을 고백하셨다는 사실이 답이 될 수 있겠다. 주님은 스스로의 욕구를 좇는 대신 아버지의 뜻에 따랐고 결국 우리를 구원하셨다. 이것이 그분을 신뢰할 수 있는 이유다. 예수님은 그가 해 주신 일보다 더 힘든 일을 하라고 물어보시지 않는다. 아무리 힘들고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더라도 말이다.

 


어거스틴의 뒤를 이은 루터는 이런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꿰차고 앉아서 자신에게 해를 입힌 상대에게 복수하려 들게 된다고 했다. 주님께 자신을 드리는 법을 배우고 나서야 비로소 "인신공격과 중상모략, 뒤에서 몰래 하는 험담 ... 다른 이들에게 퍼붓는 저주 따위를 피할 수 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서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고백하지 못한다면 한줌의 평화조차도 느낄 수 없다. 인간을 지배하고, 환경을 조작하며, 스스로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일을 몰아가고 싶은 마음을 주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삶을 통제하는 건 인간의 능력 밖의 일이어서 결국 자멸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기에 칼뱅은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한다는 건 어떤 환경이 닥치든 낙담하거나, 쓰라린 아픔에 시달리거나, 냉담하지 않도록 제 의지뿐 아니라 감정까지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것을 말한다고 했다.

 


지금까지 주기도문 앞쪽 세 구절에 담긴 간구를 살펴보았다. 어거스틴과 루터, 칼뱅은 하나같이 위치, 즉 이 세 가지 기원이 초반에 배치된 사실이 갖는 중요성에 주목했다. 기도의 도입부는 모두 하나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스스로의 필요나 문젯거리가 기도를 지배하게 두면 안 된다. 도리어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이며, 주님의 위대하심을 깨닫고 그분의 영광이 온 천지에 드러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길 갈망하며, 온전히 사랑하며 순종하기를 염원하는 걸 으뜸으로 삼아야 한다.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는 이러한 진리를 함축해서 아름답게 표현했다.

 


내 마음의 소원이

주님의 뜻을 향해 굽어지니,

완전히 들어맞게 되기를

열망합니다.

 


찬양과 감사(하나님 중심)가 우선이다. 시선이 자신을 향하여 시야를 왜곡하는 자기중심적인 마음가짐을 치유하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기도는 절반을 넘긴 셈이고 시각도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바라보는 쪽으로 바로잡히고 명쾌해졌으니, 이제 우리와 세상의 필요를 향해 흐름을 바꿔도 좋겠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어거스틴이 여기서 말하는 '일용할 양식'은 사치품이 아니라 생필품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예수님은 초반에 하나님을 참다운 양식이요, 재산이요, 행복으로 인정하는 것으로 세 가지 간구를 드렸다. 이제 필요를 채워 주시길 구하는 '기도 제목'을 새로 짜인 마음의 틀에 맞춰 정리하신다.

 


이미 얘기한 것처럼  어거스틴은 온전한 기도란 너무 가난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도 말고, 너무 부유해서 주님을 잊어버리지도 않게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라는 잠언 30장 8절처럼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칼뱅은 일용할 양식에 관해 언급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떠나는 게 아니라 ...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방편이 되는 것들을 구하라"고 강조하며 어거스틴과 같은 입장을 취했다. 크리스천들은 긍정적인 응답을 기대하며 필요를 들고 하나님 앞에 나오지만, 먼저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그분만을 신뢰하는 마음가짐이 전제되어야 한다.

 


루터는 이 기도에 사회적이 차원을 더했다. 누구나 빠짐없이 일용할 양식을 얻으려면 경제가 활성화되어야 하고, 취업률이 높아져야 하며, 정의로운 사회가 구현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우리(이 땅에 사는 모든 이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는 사업과 거래, 노동 시장에서 '가난한 이들을 짓밟고 하루하루 끼닛거리를 앗아 가는 악의적인 착취'에 대적하는 기도다. 루터는 불의한 짓을 하는 이들을 향해 여기에 내재된 능력을 역설하며 음울한 경고를 보낸다. "교회가 중보하고 있음을 똑똑히 알려 주고 ... 주기도문의 이 기도에서 배제당하지 않도록 조심시켜야 한다." 루터에게는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가 번영과 공정한 사회 질서를 갈구하는 간구였던 것이다.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다섯 번째 간구는 하나님,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모두 아우른다. 오랜 세월에 걸쳐 개인적으로 죄와 용서의 문제를 두고 치열한 씨름을 벌인 루터는 날마다 기도하며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누구든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고 남들을 멸시하는 이가 있으면 ... 이 간구와 마주서서 자신을 살피게 하라. 자신이 남보다 나을 게 없으며, 누구라도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고 겸손이라는 높이 낮은 문을 지나 용서의 기쁨 가운데로 들어가야 함을 깨달을 것이다.

 


아울러 루터는 이 간구를 교만에 대한 도전일 뿐만 아니라, 영적인 실상에 대한 검증으로 규정했다. 회개나 고백하는 것이 하찮게 여겨진다면, "마음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지 않으며 ... 복음에서 확신을 끌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꼬박꼬박 죄를 뉘우치고 고백하는데도 삶 가운데 확신과 기쁨이 점점 커지지 않는다면,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신앙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까닭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른 이들과의 관계에 직결시켜 판단하신다. 이는 두 방향으로 작용한다. 스스로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군가에게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상대를 용서하거나 편들어 줄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해소되지 않고 남아 있는 쓰라린 상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고 있다는 신호다. 뿐만 아니라, 원한을 그대로 품고 있다면 스스로는 용서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죄만큼은 하나님께 용서받기를 구하는 위선과 마주칠 따름이다. 칼뱅은 그런 현실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마음에 미워하는 감정을 계속 붙들고 있다면, 앙갚음할 궁리를 하거나 어떻게든 해코지할 기회를 골똘히 찾고 있다면, 더 나아가 원수처럼 여기는 상대가 보여 준 호의에 보답해서 거기에 어울리는 온갖 배려를 하려 애쓰지 않는다면, 이 기도를 드려 봐야 하나님께 우리 죄를 용서하지 말아 달라고 간청하는 꼴이 될 따름이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시옵고"

어거스틴은 이 간구를 두고 중요한 구분을 지었다. "이는 시험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게 아니라 시험에 끌려들어가선 안 된다는 기도다." 실험하고 검증한다는 의미의 시험은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기까지 하다. 성경은 고난과 환난을 심령의 숱한 불순물들을 '태워 없애서' 더 건강한 자기 인식과 겸손, 참을성과 믿음, 사랑을 갖게 하는 도가니로 풀이한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시험에 들지 않게"(마 26:41)는 죄에 굴복할 가능성이란 개념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칼뱅은 '오른편'과 '왼편', 두 범주로 나누어 시험을 열거한다. 오른편에서 오는 시험은 '부, 권력, 명예' 따위로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죄에 빠지게 몰아가는 유혹이다. 왼편에서 오는 시험은 '가난, 수치, 멸시, 고통'처럼 절망하게 하고, 소망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하고, 분노에 차서 하나님에게서 등을 돌리게 만드는 시험이다. 번영과 역경이 모두 쓰라린 시함이 될 수 있으며 제각기 주님을 향한 신뢰를 버리고 자기 자신이나 다른 무언가를 소유하고자 하는 '과도한 욕구'에 집중하며 살도록 유혹하는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칼뱅은 이 구절을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시옵고"와 한데 묶어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 간구로 취급했다. 그러나 어거스틴과 루터는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로도 번역할 수 있다. 루터는 이를 두고 "악한 나라에서 뿜어 나오는 구체적인 폐해 ... 가난, 수치, 죽음 ... 한마디로 우리를 위협하는 모든 것들에 맞서는 기도"라고 썼다. 어거스틴은 내면에 잔존하는 악에서 구해 주시길 간청하는 게 여섯 번째 간구라면, 일곱 째는 외부의 악, 곧 세상의 사악한 세력, 특히 호시탐탐 해칠 기회를 노리는 적들로부터 보호해 주시길 구하는 기도라고 해석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마지막으로 마무리 찬양에 해당하는 구절이 남았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어거스틴은 이 부분을 언급조차 않는다. 초기 성경 문서나 라틴어로 번역된 불가타성경에선 찾아볼 수 없는 구절이기 때문이다. 루터는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고 지나간다. 반면에 칼뱅은 "라틴어 판에 없는" 문절임을 알면서도 "여기에 두는 게 지극히 타당하므로 제외시키지 말아야 한다"고 믿었다. 크리스천은 결핍과 역경, 한계 따위에 깊이 들어갔었지만 마침내 하나님이 온전히 채워 주신다는 진리로 되돌아오게 마련이다. 세상의 그 무엇도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의 손에서 낚아챌 수 없음을 기억하고 '평온한 안식'으로 수렴하게 되는 것이다.

 


"베풀어 주시고 용서하시고 구원하소서, 우리를!"

칼뱅이 주기도문 해설을 마무리하며 결론은 참으로 유익하다. 루터가 [단순한 기도방법(A Simple Way to Prayer)]에서 그랬던 것처럼, 칼뱅 역시 주기도문을 대하는 크리스천은 어구의 특정한 형식에 매일 것이 아니라 내용과 기본적인 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한다. 누가만 하더라도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판박이처럼 똑같은 단어를 동원해 기록하지 않았다. 주기도문은 기도의 강조점과 주제, 목적과 정신을 규정하는 본질적인 지침을 제공하는 요약판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기도에 사용되는 "용어는 전혀 다를지라도 뜻이 변해서는 안 된다." 어떠한 기도를 드리든 끝없이 갈고 다듬어 그 안에 주기도문을 새겨 넣어야 한다. 자유롭게 간구하는 기도로 가기 전에, 루터가 했던 것처럼 하루에 두 번씩, 주기도문을 자기 식으로 바꿔 기도하는 연습은 더없이 유용한 도구다.

 


주님이 이 기도문을 복수형으로 주셨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포인트다. 크리스천들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도록 기도해야 하며, 될 수 있는 대로 "공개적이어서 ... 같은 믿음을 고백하는 이들 사이의 교제가 깊어지게 해야 한다." 미국의 신학자 마이클 호튼(Michael S. Horton)은 "공적인 사역이 개인의 경건을 빚어 갈 뿐,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칼뱅의 지적을 부각시킨다. 칼뱅은 기독교회의 공동 예배가 개인적으로 드리는 기도의 틀을 단단히 잡아 주길 바랐으므로 공중기도와 성례전을 규정하는 데 무척 공을 들였다.

 


그러므로 기도는 오롯이 개인적인 일이 아니다. 함께 모여 예배든 비공식적인 자리든, 힘닿는 데까지 다른 이들과 더불어 기도하는 게 바람직하다. 어째서 그런가? 하나님이 시작하신 대화를 이어가는 데 기도의 본질이 있고 하나님을 더 잘 아는 게 그 목적이라면 공동체 안에서 여럿이 어울려 간구하는 형태가 가장 효과적일 수밖에 없다.

 


C. S. 루이스는 개인을 알기 위해서는 다수가 모여 이룬 공동체를 통하는 게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스스로의 교우 관계를 되짚어 보면, 한 친구가 가진 인성의 일부 면모는 다른 벗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서만 드러나더라는 것이다. 두 번째 친구가 나타나지 않으면 그렇지 않았더라면 잘 알 수 있었을 첫 번째 친구의 일면을 놓쳐 버린다. "혼자 힘으로 한 인간을 총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만큼 나는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그의 전모를 드러내려면 나 외에 또 다른 빛들이 필요하다." 평범한 한 인간을 알아 가는 데도 공동체가 필요하다면, 수많은 이웃들은 물론 예수님을 알아 가는 데는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동료들과 더불어 기도하면, 예전엔 알지 못했던 예수님의 다양한 풍모를 보고 들을 수 있다.

 


루이스는 이사야 6장에서 천사들이 서로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라고 외쳤던 까닭이 거기에 있다고 본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제각기 한 면씩 목격하고 동료들과 공유했다는 것이다. 주님을 아는 게 집단적이고 누적 가중되는 일이라면, 기도와 찬양 역시 공동 작업이 되어야 한다. "하늘의 양식은 나누면 나눌수록 더 온전하게 되기 때문이다."

 

'팀켈러의 기도'에서 발췌(158-17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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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칠대신비 (The Birth of Jesus and the Death of Jesus

 

 

 

 
(이사야 9:6~7)

이태리 알프스 산에 있는 한 마을에 작은 교회가 하나 있는데 그 교회당 안에는 사면 벽둘레에 구약시대의 선자지들의 동상이 서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선지자들이 다 같은 방향으로 손가락을 가리키고 있는데 그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가보면 맨 마지막에 예수 그리스도의 큰 동상이 서 있다고 합니다. 이 동상들 즉, 모든 구약의 선지자들은 예수님을 가르키고, 그들의 눈은, 갈보리산을 향하여 보고 있다고 하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중에도 예수님에 관해서 가장 많이 말씀하고 있는 선지자가 이사 야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를 구약의 복음서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사야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예고할때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했고(이사야 7:14)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이사야 53: 5)"라고 예언했습니다.

 

특히 9장에 가서는 "그의 이름은 기묘라(Wonderful)"라고 했습니다. 이 예언대로 예수님은 기묘하고 신비스러운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 의 신비 일곱가지를 말씀드리고저 합니다.

 

1.탄생의 신비

때가 차서 영원의 시계가 정시를 칠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아들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세상에 내려가 세상을 죄에서 구원할 때가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낼것인가가 문제입니다. 천사로 보낼까? 왕으로 보낼까? 장성한 어른으로 보낼까? 그러나 다 합당치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를 작은 아기로 세상에 태어나게 하셔서 정상적인 방법으로 성장하면서, 모든 인간의 욕망도 알고 시련도 알고 유혹도 받아 알게 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탄생시킬 그릇이 될 여인을 찾고 계신가 동정녀 마리아에게 눈이 멈추어졌습니다. 마리아는 헌신적인고 마음이 깨끗하고, 사랑스러운 생활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옆에 있던 천사 가브리엘을 불러서 "마리아에게 내려가서 이르기를 너는 장차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컫는 아들을 잉태하리라 고 일러라 마리아가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하고 일렀습니다. 그리고 가브리엘에게 또 한가지 말하기를 "그 이름은 예수라고 하라고 일러 주어라"하고 했습니다. 이 소식을 곧 결혼하기로 된 마리아와 요셉에게 전달했습니다. 이 두사 람이야 말로 이 귀중한 책임을 맡기기에 합당한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때가 차서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여행하는 중 밤에 천사의 찬송이 들려오기를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하고 들려왔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처녀 탄생이라니 얼마나 신비스러운 일입니까? 아담과 이브이래 남녀의 융합이 없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에서만은 아무 남자도 관계가 없고 하나님 자신이 아버지요 마리아가 어머니였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없는 어머니의 품에 안기워 베들레헴 말구유에 누우시게 되었습니다. 어떤이는 동정녀 탄생을 못믿겠다는 이가 있으나 성경의 말씀을 못믿으면 무엇을 믿겠으며 천지를 장조하신 하나님께서 그것쯤 어려울 것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시는 그릇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이태되신 분이 아니라면 나는 안믿겠습니다. 그분이나 나나 다 같은 사람인데 무슨 숭배할 것 까지 있겠습니까? 모든 인간은 다 남자의 후손이지만, 예수님만은 여인의 후손으로 죄없는 사람으로 탄생한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여자의 후손은 네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말꿈치를 상하게 할것이닌라"고 예언했습니다. 저는 그전에 마리아도 죄인인데 어떻게 예수님이 죄가 없을까 하고 생각했으나 여러분 여자는 밭이라면 남자는 종자입니다. 밭은 콩을 심거나, 팥을 심거나, 심어 주는대로 내 놓기 때문에 종자를 결정할 권리가 없습니다 . 이와 같이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나신 분이므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가 없으셔서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가 있습니다. 요사이 어느 과학자가 말하기를 어느 서 식 동물은 숫놈이 없이도 새끼를 낳기 때문에, 성령의 잉태설은 얼마든지 가능하고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2.삶의 신비

신약성서는 예수님의 생애에 대해서 기록한데가 몇 곳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결코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입에 궤사가 없으시다"(벧전 2:22)라 했으며 히브리서 기자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서 죄는 없으시니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비교적 선한 사람들이 있었으나 완전한 사람은 한분 밖에 없습니다. 곧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생애에서 악한 것이라고는 한가지도 찾아 볼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이나 행동이나 생각에서 악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찾아 볼수 없습 니다. 우리는 빌라도와 같이 "우리는 그에게서 허물을 찾지 못하였노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교회에서 장례식을 하게 되었으니 아무날 아무시에 다 나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고인의 이름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장례식 날이 되서 관을 강단앞에 놓고 주위에 꽃을 장식하고 설교를 하는데, 고인이 누구라고는 하지않고 이 사람도 죄를 짓다가 죽은 사람이므로 영원한 슬픔을 다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설교를 끝마치고 누군지 알고 싶으면 한사람씩 이 관속을 들여다 보라고 했습니다.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와서 들 여다 보는 사람, 자기의 얼굴이 비쳤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깨우쳐 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루도 일분도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에서 그는 많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해서 보게 했고, 앉은뱅이를 일으켜 걷기도 했 고 문둥이를 깨끗케 했고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능력을 가지신 분이므로 신비한 일들로 꽉 찼습니다. 오늘날도 그 믿음으로 많은 병자가 고침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은 가시는 곳마다 착한 일을 많이 행하셨습니다. 예수님 의 말씀은 세상 아무도 따를 수 없는 훌륭한 진리의 말씀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기다리는 영광스러운 천국에 대해서 구원의 도리에 대해서 명확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도 신비로웠습니다.

 

3.죽음의 신비

예수님은 다른 어떤 사람도 죽어보지 못한 죽음을 죽었습니다. 어떤이는 희생적인 죽음을 죽기도 하고 어떤이는 큰 업적을 남기면서 죽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고 천국으로 이끌기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지 않아도 되었었습니다. 그는 생 명을 버릴 권세도 있고 얻을 권세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당신과 나를 위해서 그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했습니다. 아침 일지기 십자를 짊어지워서 골고다로 향해 끌어 갔습니다. 그 무거운 십자 밑에 몇번이고 몇번이고 한없이 쓰러지셨습니다. 그러다가 구레네 시몬이 그 십자를 떠메어 가지고 갔습니다. 골고다 산정에 이르러서는 상처나고 피투성이가 된 예수님을 십자가 형틀에 눕히고 굵은 쇠못을 양 발과 양 손에 사정없이 망치로 내리 박았습니다. 그 망치소리, 그 십자가를 구덩이에 털석 떨어뜨리는 소리가 들리는듯 합니다. 6시간이는 긴 시간동안 십자가에 달려 있었고 해도 그 빛을 읽었습니다. 마침내 오후3시가 되어서 고뇌와 저철한 고통의 시간이 지나고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큰 소리로 외치고 그 영혼이 하나님께로 가 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을 통해서 모든 죄를 씻는 샘이 터졌습니다. 인간의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구속받은 죄인을 위해 영광의 문을 열으셨습니다. 어떤 죄인이라도 구원받아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미국에 어느 목사님이 농부의 집에 하 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농부는 예수를 믿지 않고 그 부인은 늘 남편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읍니다. 그 목사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를 그에게 설명할 기회를 찾고 있었는데 하루는 아침에 그 농부가 목사님을 부르더니 닭장엘 같이 가보자고 하더랍니다. 가 보니까 그 닭장 둥우리에 알닭이 앉아 있는데 그 날개 밑에서 병아리들이 삐약삐약 소리를 내면서 한 마리씩 기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농부가 그 암닭을 건드려 보라고 해서 툭 건드렸더니 그 암닭은 죽어 있었습니다. 농부가 말하기를 "저 머리에 상처를 보십시요 족제비란 놈이 그 몸에서 피를 다 빨아 먹었는데도 그놈이 새끼들을 잡아 먹을까봐 꼼짝도 하지않고 그대로 죽은 것입니다." 그때 목사님은 "오! 저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같습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모든 고통을 참으셨읍니다. 예수님은 움직일수도 있고 십자가에서 내려와 자기 생명을 구원할 수 도 있었으나 그렇게 되면 당신과는 멸망 받기 때문입니다." 그

농부는 그 뜻을 깨닫고 즉시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모셔들였다고 합니다. "내 너를 위하여 몸버려 피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4.부활의 신비

그들은 예수님을 죽여서 무덤에 장사했으나 지상의 어떤 무덤도 그를 가두어 둘 수 없었습니다. 제 삼일째 되던날, 살아 나리라고 예언하셨던대로 무덤에서 걸어나와 영원히 살아나셨습니다. 그 부활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을 증명했습니다. 또 그의 하신 모든 말씀이 진리였음이 증명되었습니다. 부활은 그의 신성을 증거합니다. 해리 린멜 박사가 고관인 모스렘교도와 주고 받은 말입니다. (해리린멜)- 우리는 하나님이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하셨음을 믿는다. (모스렘 교도)-우리도 그것을 믿는다. (해리 린멜)- 창조를 통해서 자신을 계시한 것을 믿는다. (모슬렘 교도) - 우리도 그것을 믿는다. (해리 린멜)- 성경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한 것을 믿는다. (모슬렘 교도)-우리도 코란경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한 것을 믿는다. (해리 린멜)- 한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을 계시한 것을 믿는다.(모슬렘 교도) - 우리도 모하메드를 통해서 계시한 것을 믿는다. (해리 린멜) - 예수님을 믿는자를 위해 죽으신 것을 믿는다. (모슬렘교도) - 우리도 모하메드가 그 백성을 위해 죽으신 것을 믿는다. (해리 린멜)- 예수님은 부활하신것을 믿는다. (모슬렘 교도) - 우리는 그 선지자의 죽은 후에 관해서는 모른다. 옳습니다. 예수그리스도만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유일한 분입니다. 모하메드도, 공자도 부처 도 모두 그 무덤 앞에는 "그가 여기 누워 계시다"고 묘비가 새겨 있으나 예수님의 무덤 앞에는 "그가 여기 계시

지 않고, 살아 나셨느니라"고 한 천사의 말을 기억하게 됩니다.

 

5.승천의 신비

1961년 봄에 한 사람이 우주에 올라갔을때, 온 세상이 인간의 과학에 놀라고 떠들석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주로 올러간 첫번째 사람이 아니라 그 이전에 있었읍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 40일간 세상에서 지내시다가 제자들을 데리고 감람산 위로 가셨습니다. 거기서 그 들은 놀라서 입을 벌리고 바라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우주선이나 우주 로켓트를 탄 것도 아니고 우주복이나 헬멧을 착용한 것도 아니며 무슨 전자기구를 쓴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오직 구름을 타시고 올라 가셨읍니다. 천국으로 아버지 하나님께로 되돌아 가신 것이며, 우주 창조 이전의 영광으로 되돌아 가신 것입니다. 고향으로 되돌아 간 것과 같습니다. 천사도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고 모든 성도들이 기뻐하며 외친 것입니다. 승천의 중요성은 무엇입니까?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었음이 증명되었고 승천을 통해서 주가 만유의 주가 되심이 증명된 것입니다. 부활로 말미암아 사망권세를 이기셨고 승천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죽음도 그에게 복종하는 것이 부활로 증거 되었고 만물이 그에게 복종하는 것을 승천으로 보여 주었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빌 2:9)고 했습니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가면 성령이 오셔서 모든 세상 사람들의 마음에 강력히 역사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6.현재 사역의 신비

현재 예수님은 하늘에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그는 우리 위해 도고하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이 나를 위해 기도한다고 하는 펴지를 받으면 기쁩니다. 그러나 더 기쁜 사실은 예수님이 우리 위해 기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 한분 한분의 이름을 아시고 사정을 아십니다. 그분이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7.재림의 신비

구약성서에 선지자들이 예수님의 초림을 예언했는데 해가 갈수록 그 소망이 희미해지다가 그 약속이 잊어버릴 즈음이 되었다가 막상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는 그를 몰라 보았습니다. 그를 맞을 준비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와같이 성경은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몇배나 더 말 씀하고 있습니다. 해가 지나감에 따라 예수님이 정말 재림하실까? 하고 의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아직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으니 그 약속은 헛된것이 아닌가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초림과 같이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모든 예언은 반드시 성취되었습니다. 헛 된 약속은 하나도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심은 우리 믿는 자를 축복하시기 위해서 오십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예수니이 공중에 재림하실 때 모든 믿는자를 끌어 올려 그의 형상과 같이 우리를 변화시킨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와 함께 영원히 있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모든 성도들을 하늘에서 모으시고 그들과 함께 다시 지상에 오십니다. 그때 만물이 새롭게 되고 예수님은 의로 세상을 1,000년 동안 다스리게 됩니다. 또한 예수님 재림하실때, 모든 성도들을 그 행한대로 심판을 받아 상급을 받게 하십니다. 이것은 상급 심판입니다. 행한 일이 없으면 상급이 없고 행한 일이 많으면 상급을 많이 받게 됩니다.

 

그후 1,000년 왕국시대가, 지난뒤 모든 불신자는 그 행한대로 하나님의 백보좌 앞에서 심판을 받아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이 심판과 영원한 형벌을 피하려면 지금 예수님께로 나와야 합니다. 당신의 구세주를 영접해야 합니다. - 아 멘 -
출처:금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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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학교를 위한 기도  /Prayer for church school

 

 

은혜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죄와 허물 속에 살던 저희들을 멸망할 세상 가운데 버려두지 않으시고 불러 주셔서 생명의 길로 가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저희들은 구원의 기쁨 속에 살지만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이 생명의 길을 알지 못해서 멸망의 길로 가면서도 그 길이 사망의 길인 줄조차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이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저희들에게 먼저 구원의 길을 알게 하신 것은 저희들뿐만 아니라 이 영원한 생명을 알지 못하는 이들과 나누게 하시기 위함임을 믿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우리의 기쁨과 만족에 도취되어 그들을 돌아보기에 게을렀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

 

저희들을 용서하여 주시고 이 생명의 진리를 나누는 일을 위해 열심을 낼 수 있도록 저희들 마음속에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시고, 복음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세우신 기관과 부서들을 통하여 교회가 더욱 부흥되기를 원합니다.

 

교회와 이웃을 더욱 잘 섬기며 열심히 봉사하는 기관들이 될 수 있도록 능력을 더하여 주옵소서. 특히 교회학교를 진리위에 든든히 서게 하셔서 교회학교를 통해서 훈련받는 주의 자녀들이 올바른 주의 일꾼이 되게 하시며 이 세상을 변화시킬 훌륭한 인재들이 될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그들로 인해 우리 민족의 장래와 교회의 장래에 희망이 있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 드려지는 예배를 통하여 영광 받으시고 저희들에게는 하늘로부터 내리는 신령한 은혜를 받는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세우신 주의 사자에게 능력을 더하셔서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실 때 그 말씀이 살아 역사하게 하옵소서.

 

생명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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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을 통해 십자가 복음 이해하기

 

 

 

 

십자가 복음이란 무엇인가?

 

십자가 복음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쉬운 말씀이요. 가장 기본적인 말씀이다.

그런데 사탄이 지금까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도록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모세의 수건이 아직도 벗겨지지 않아서 유대인들이 말씀을 읽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이 간절히 기다리는 메시야인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

 

그런데 예수님의 무엇을 믿어야하는지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죄를 회개하고 예수 믿으면 우리의 죄가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믿는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얻는다고 한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한다.

과연 이것이 진정한 복음인가를 숙고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에 교인수가 100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기독교 역사 120년 만에 1000만 명이 넘는다고 자랑을 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교인 수는 늘어나는데 교인들의 삶은 변화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속사람은 변화되지 않고 외형은 점점 화려해진다는 것이다.

지도자들은 성장 중독증에 걸려서 교회가 커지고 교인수만 많으면 목회에 성공한 것으로 알고

성도들의 영혼의 탄식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총체적으로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것을 누구도 부인 하지 않는다.

그래서 깨어있는 목사님들은 한국교회의 병폐를 고쳐보자고 여러 가지 방법을 내놓지만

큰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정녕 교인들을 변화시킬 방법이 없단 말인가?

정녕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흠이 없는 거룩하고 영광스런 교회를 세울 수 없단 말인가?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가는 거룩한 성도가 양산되는 방법이 없단 말인가?

있다!!. 방법이 딱 하나 있다.

바로 ‘십자가 복음’이다

이 말씀을 깨닫게 되면 속사람이 놀랍게 변화된다. 할렐루야!

 

그러면 ‘십자가 복음’이 무엇인가?

 

바로 로마서 6장 말씀이 십자가 복음에 대한 말씀이다.

특히 로마서 6장 6절은 십자가 복음의 핵심 말씀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 하려함이니”(롬6:6)

 

 

우리의 옛 사람(죄의 몸, 아담)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을 믿는 것이 십자가 복음이다.

 

“내가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장사되고 예수와 함께 부활했다”는 것을

믿는 것이 십자가 복음이다.

 

이 말씀을 믿으면 실제로 나의 옛사람(아담) 죽는다.

나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장사되고 예수와 함께 부활 할 때,

나도 예수님과 함께 부활해서 ‘새 사람’이 되는 것이다.

 

‘새 사람이 되었다’라는 것은 고린도 후서 5장 17절 말씀인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는 말씀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새롭게 재창조 되었다’라는 것이다.

 
 

옛 사람이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본질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물리적인 변화가 아니라 화학적인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다는 것이다.

염소가 죽어 양으로 완전히 새롭게 태어났다는 것이다.

 

염소인 옛사람에게 양가죽을 입혔다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대부분이 이렇게 예수님을 믿는다. 그래서 죄를 반복적으로 짓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옛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염소가 아예 죽어버리고 양으로 완전히 새롭게 태어났다는 것이다.

이것이 참 복음이다.

양으로 태어났으니 염소의 속성을 아무리 내려고 해도 안 된다는 것이다.

본성적으로 양의 성품이 나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양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십자가 복음이다.

십자가 복음인 로마서 6장 6절의 말씀을 믿는 순간

 
 

2000년 전의 십자가 사건이 지금 내 사건이 되는 것이다.

2000년 전의 십자가 사건이 지금 현재 나의 사건으로 체험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믿을 때”에 나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믿지 않으면 실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믿어야” 실제가 되는 것이다.

말씀은 믿어야한다. 믿으면 그대로 이루어진다.

내가 만약 암이 걸렸어도 암이 말씀대로 낫는다고 믿으면 실제로 낫는다. 믿지 않으면 낫지 않는다.

이처럼 말씀은 믿을 때에만 실제가 되는 것이다. 그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님도 병자들을 만났을 때에 꼭 물어본 것이 있었다.

‘믿음’을 물어보았다. 이유는 예수님도 말씀으로 치유하셨다. 말씀을 믿을 때만 역사하셨다.

다른 모든 것도 마찬가지다. 천국도 믿음으로 가는 것이다.

 

십자가 복음도 마찬가지이다.

 

십자가 복음도 믿음으로 되는 것이다.

내가 십자가 복음을 믿으면 실제로 나의 옛사람, 죄의 사람이 죽는다.

내 죄가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믿는 순간 내 죄가 십자가에서 실제로 죽는다.

히브리서 11장 1절 말씀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다.

믿음은 내가 소원하는 것, 내가 소망하는 것들이 실제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믿는 대로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십자가 복음을 믿으면 그대로 내 죄가 십자가에서 죽는다.

여기에는 이유가 없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말씀대로 되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 6장 1절과 2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해서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사도 바울은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었다고 당당하게 말을 하고 있다.

 

헬라어로 ‘죽은’은 현재가 아니고 ‘과거’이다. 이미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것이다.

 죄에 대해서 완전히 죽었다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내 죄가 죽었기 때문에 나하고 죄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죄에 대해서 죽었기 때문에 다시는 죄 가운데 살 수가 없다는 것이다.

 

어디서 죽었느냐? 바로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 로마서6장 3~5절이다.
 

 

로마서 6장 3~5절을 요약하면 “내가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장사되고

예수와 함께 부활해서 새사람이 되었다”라는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 복음이다.

이 말씀을 믿으면 실제로 내 죄가 십자가에서 죽는다.

죄인이 죽고 의인이 되는 것이다.

죄인이 죽고 거룩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롬6:22)

 
 

십자가에서 죄로부터 해방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다는 것이다.

 

죄에 대해서 죽었기 때문에 의인이 되는 순간부터 거룩함의 열매를 맺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열매를 맺었으니’에서 ‘맺었으니’는 현재 능동태이다. ‘맺을 것이다’가 아니다.

 

예수와 함께 죽은 사람은 예수와 함께 부활해서 거룩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거룩함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10:10)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다고 선언을 했다.

현재완료 수동태이다. 거룩함을 이미 십자가에서 얻은 순간부터 지금도 거룩해져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 복음을 믿는 순간 거룩해졌고 지금도 거룩하다는 것이다.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히10:14)

 
 
더욱더 놀라운 것은 한 번의 제사로 영원이 온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음으로 영원히 완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말씀도 ‘현재완료 능동태’이다.

십자가 복음을 믿는 순간 완전하게 되었는데 지금도 계속 완전하다는 것이다.

십자가 복음이 믿어지면 이런 말씀들이 다 이해가 된다.

 

또한 십자가 복음의 핵심인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이 믿어지면 주님이 내안에 오셔서 사시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나의 자아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것이다.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가 사신다는 것이다.

 
 

이 말씀을 믿으면 그대로 이루어진다. 할렐루야!

이것이 십자가 복음이다. 이것이 완전한 복음이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이 예수님을 이렇게 믿는다.

 

십자가 밑에서 무릎을 꿇고 “예수님! 내 죄를 용서해주세요!

예수님의 피로 내 죄를 용서해주세요!

내 죄를 용서해주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렇게 고백을 하고 예수님의 피로 용서함을 받고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예수님을 믿으니까 죄가 실제로 죽지 않고 반복해서 죄를 짓게 된다.

 

죄 덩어리인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고 예수님을 믿으니까

예수님을 믿어도 계속해서 죄를 짓는 것이다.

 

이 복음은 ‘불완전한 복음’이요 ‘반쪽짜리 복음’이다.

 

이렇게 믿어서는 죄는 용서함을 받을 수 있지만 죄가 끊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오늘날 반쪽짜리 복음을 믿기 때문에 갈수록 죄를 짓는 것이다.

삶에 변화가 없는 것이다. 죄를 반복해서 짓는 것이다.

 

계속해서 미워하고, 혈기내고, 시기질투하고, 비방하고, 판단하고,

용서하지 않고, 원망불평하고, 고집부리고, 음란 하고, 욕심내고,

자존심을 조금만 건드려도 못견뎌하고, 조금만 책망을 해도 시험 들고 등등의 것들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십자가 밑에 와서 무릎을 꿇고 내 죄 용서해 주세요! 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지고 계신 십자가로 ‘나도’ 올라가야 한다.

 

나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하는 것이다.

십자가만 바라보지 말고 ‘십자가 위에’ 올라가야한다.

 
 

십자가 밑에만 있지 말고 십자가에 올라가서 예수님과 함께 못박혀야한다.

이것이 십자가의 참된 의미이다.

십자가 밑에서 무릎을 꿇고 예수님! 내 죄 용서해주세요! 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신다. “얘야! 십자가 밑에서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지 말고

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자!”라고 말씀을 하신다.

 

죄가 죽는 유일한 곳은 십자가 밖에 없다. 천상천하 어디에도 죄가 죽는 곳은 없다.

 

오직 십자가에서만 내 죄가 죽는다.

십자가 밑에서가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만 죄가 죽는다. 이것을 깨닫기 바란다.

십자가 위에 올라가서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 내 죄가 죽는다.

단순히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죽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받을 수 있지만 내 죄는 죽지 않는다.

십자가 밑에서는 아무리 해도 죄가 죽지 않는다.

십자가 위에서만 죽는다. 십자가에서 나도 함께 죽어야만 한다.

 


“십자가 밑에서 죄의 용서함을 받는 것”과 “십자가에 올라가서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의

차이점을 염소와 양을 모델로 설명하겠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의 상태를 ‘염소’라고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게 된 상태를 ‘양’이라고 하자.

십자가 밑에 죄인인 ‘염소’가 와서 무릎을 꿇고 죄를 용서해달라고 한다. 보혈로 내 죄를 씻겨달라고 한다.

그렇게 해서 죄의 용서함을 받고 죄인인 염소에게 양의 가죽이 씌워진다.

 

이것이 십자가 밑에서 죄의 용서함을 받는 것과 같다.

이런 상태로 신앙생활을 하면은 겉은 양인데 속은 염소이다.

그러니 속에서는 염소의 속성이 그대로 나간다. 염소의 성품이 나간다.

내가 아무리 죄를 안 지으려고 해도 속은 염소이기 때문에 염소의 속성이 나갈 수밖에 없다.

아무리 예수님을 믿어도 속은 염소이기 때문에 염소의 속성인 죄가 나가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뿔로 받지 않으려고 해도 내 속에 염소가 있기 때문에 건드리면 뿔로 받는다.

아무리 혈기를 안내려고 해도 십자가에서 혈기가 죽지 않았기 때문에 참다가 참다가 혈기를 낸다.

혈기를 참는다고, 누른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누르다가 폭발하면 더 무서운 폭발이 일어난다.

 

이와 반면에 죄인인 ‘염소’가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매달려 죽는다.

 

그러면 죄인인 염소는 예수님과 함께 죽을 수밖에 없다.

죄인인 염소는 예수와 함께 죽었기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장사된다.

장사를 지낸다는 것은 확실히 죽었다는 것이다. 군대용어로 확인사살이다.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장사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부활 할 때 나도 함께 부활을 한다.

예수님과 부활 할 때 나는 양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부활 할 때 염소로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양으로 부활을 한다. 의인 ‘양’으로 태어난다.

겉도 양이요 속도 양이다.

 

옛 사람인 염소는 십자가에서 죽고 새 사람인 양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염소의 속성이 나오지 않고

양의 속성이 나온다. 양의 성품만 나온다.

염소의 속성을 내려고 해도 안된다. 양에게는 염소의 속성이 없기 때문이다.

 

부활한 성도는 양의 속성만 나간다.

바로 이것이 “십자가 밑에서의 구원”과 “십자가 위에서의 구원”의 차이이다.

 
 

오늘날 교인들이 양의 가죽을 쓴 염소와 같다.

 

 
그러니 계속해서 죄를 반복적으로 짓고 있는 것이다.

 

더욱더 안타까운 것은 회개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회개를 외치는 강단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너무나 슬픈 현실이다.

오늘날 기도를 하지 않기 때문에 회개할 줄도 모른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도 교회를 보고 피눈물 흘리고 계시는 것이다.

염소가 십자가에서 죽어야한다 그리고 양으로 다시 태어나야한다.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장사되고 예수와 함께 부활해서

새 사람이 되어서 거룩하게 살아야한다.

 

십자가 복음만이 거룩한 삶을 살 수가 있다.

 

십자가 복음은 나도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장사되고

예수와 함께 부활 한 것을 믿는 것이다.

부활해서 새 사람이 된 것을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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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이해

 

 

 

 

요한복음의 목적
(a) 요한 스스로 자신이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을 밝히고 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20:31). 곧 요한복음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강조하기 위해서 쓰여진 책이다.
(b) 왜 요한은 마태/마가/누가 세 복음서가 이미 나와있음에도 불구하고 새삼스레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였을까? 당시 시대를 풍미하던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함이었다.
 영지주의(Gnosticism)=그노시즘(헬)=나스티시즘(영)= 영지주의자들은 영적인 것은 선한 것이고, 물질적인 것은 악하고 더러운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이들은 하나님께서 더러운 육체를 입고 이 악한 세상에 오셨을 리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영지주의자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을 때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기독교의 구원관에 동의하지 않는다. 대신 구원은 영적인 깨달음(靈知)이 있는 영적인 고수들에게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c) 따라서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생애를 연대기적으로 기록하는데 비중을 두기보다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보여주신 표적과 선언과 말씀을 중심으로 기록되었다.
(d) 당연히 기존의 세 복음서와는 거의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공통 부분은 8%에 불과하고, 공관복음에 기록된 ①예수의 탄생 ②시험 받으심 ③변화산 사건 ④최후의 만찬 ⑤많은 비유 등이 빠져 있다.

요한복음의 저자
(a)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에 의해서 쓰여졌다. ①13:23 ②19:26 ③20:2 ④21:7 ⑤21:20. 그렇다면 누가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인가? 예수님의 12 제자 중 수제자는 베드로, 야고보(요한의 형), 요한이다. 베드로는 요한복음에서 직접 이름이 거론되고 있고, 야고보는 일찍 순교하여 집필할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는 요한이다.  
(b) 요한은 어부였으나 품꾼을 부릴 만큼 부자였던 것으로 보인다(막 1:20).
(c) 유대 전승에 의하면 요한은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을 목격한 사람들 중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살았던 사람이다. 그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고 살았던 에베소에서 요한복음을,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기독교 박해를 피해 갔던 밧모섬에서 요한계시록을 쓴 것으로 전해진다.
(d) 요한복음의 저작 연도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단지 여러 가지 정황상 공관복음이 모두 쓰여지고 난 뒤인 AD 90년경에 저술된 것으로 본다.
(e) 헬라어 본문의 표제는 공관복음과 같은 형식인 ‘카타 요아넨’(요한에 의한)이다.

요한복음의 특징
(a) 요한은 믿음(faith)이라는 명사보다 믿다(believe)라는 동사를 선호한다. 신약 성경에 ‘믿다’라는 동사는 총 241번 나타나는데 요한이 요한복음에서 98회나 사용했다. 즉 요한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단순한 지적 동의를 넘어 몸으로 믿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b) 요한복음에는 ‘진실로’를 반복하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아멘 아멘 레고 휘민)라는 표현이 25회나 등장한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을 더 깊이 새기도록 촉구하려는 의도로 쓰여졌다.
(c) 요한복음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강조한다. 그래서 다른 복음서보다 예수님과 성부, 성령과의 관계를 더 많이 담고 있다. 예수님 스스로도 요한복음에서 ‘아버지’를 104회, 성령님을 8회 언급하셨고, 특히 성령님을 가리키는 ‘보혜사’라는 단어를 4회나 사용하셨다.
(d) 저자의 주해가 들어있다. 즉 요한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록하다가 독자들이 오해할 우려가 있다고 느낄 때면 서슴지 않고 개입하여 자세한 설명을 첨부했다.

요한복음의 숫자
(a) 요한은 완전수 7(창조)과 3(부활)을 즐겨 사용했다.
(b) 예수님의 7가지 표적을 기록하고 있다.
(c) 예수님께서는 7가지 자기 선언을 하셨다. (나는 xx이다=에고 에이미)
(d)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에 3번 가셨다.
(e)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을 3번 지키셨다. 따라서 예수님의 공생애는 3년이다.
(f)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3번 말씀하셨다(요한복음에서만).
(g)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3번 나타나셨다.
(h) 요한복음 전체가 21(3x7)장이다. 물론 이것은 후대에 편집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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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교리 기독론  /  그리스도의 이름

 

 

 

1. 그리스도의 이름
 
 
하나님의 이름이 그분의 속성을 잘 나타내 주듯이, 그리스도의 여러 이름들도 그분의 속성과 사역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준다.
 

1. 예수(Jesus)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이름 ‘여호수아’( [ v h y )의 헬라어 표기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탄생 전에 주어진 이름이며(눅 1:30,31), 그분의 사역 목적이 인간의 구원임을 분명히 보여준다(마 1:21). 따라서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인솔 하여 가나안 원주민을 무찌르고 약속의 땅에 정착시킨 여호수아의 사역은 예수께서 택한 자들을 사단의 권세에서 건져내어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만드는 일을 예표했었던 것이다.
 

2. 그리스도(Christ)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 있는 구약의 ‘메시야’( h y c m )와 동일한 의미를 지니는 핼라어 표현이다(요 4:25,26). 구약 시대에 기름 부음을 받았던 세 가지 직분 곧 선지자(왕상 19:16)와 왕(삼상 10:1), 그리고 제사장(출 29:7-9)은 완전한 메시야 곧 그리스도의 사역적 예표였다. 결국 이러한 사실은 신약의 그리스도가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어떠한 사역의 담당자이신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한편 여기에서 기름은 성령을 상징한다(삼상 16:13).
 

3. 인자(Son of Man)
 

그리스도의 비하(卑下)와 승귀(昇貴) 신분에 대하여 동시에 강조한다. 즉 재림주로서의 세상을 심판하실 분의 위엄을 강조한다고 할 수 있다(단 7:13,14; 마 16:27,28; 24:30; 26:64).
 
 

4. 하나님의 아들(Son of God)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모양은 가지셨으나, 성령으로 말미암으신 특수한 존재임을 암시한다(눅 1:35), 그러나 여기서 ‘아들’은 성부에 대한 성자의 열등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들’은 아버지와 동등하기 때문이다(요 5:18).
 

5. 주(Load)
 

당시 황제에게 적용되었던 명칭이었는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그분을 ‘주’(主)로 고백하는 한 개인과 이 세상에 대한 주권자 혹은 통치자이심을 분명히 보여준다(고전 12:3; 빌 2:11).
 

6. 말씀(Word)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시기 이전에도 이미 존재하셨으며 천지 창조와 계시의 주체이셨음을 보여준다(요 1:1-5; 14:9; 히 1:2).
 

7. 그밖의 이름
 

‘임마누엘’(마 1:23), ‘독생자’(요 3:16), ‘만왕의 왕’(딤전 6:15), ‘다윗의 자손’(마 1:1), 목자장’(벧전 5:4), ‘알파와 오메가’(계 1:17,18) 등의 명칭은 그분의 하나님되심과 성육신하심 및 역사의 주체이심과 구원자이심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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