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글 / 낫고 싶으냐?  


현대는 타인을 짓밟고, 올라서는 것을 능력으로 여기는 치열한 경쟁사회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5장에도 이런 모습이 나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양문 옆에는 베데스다 연못이 있었습니다. 가끔씩 천사가 내려와 이 연못을 휘저어 놓는데 그때 그곳에 처음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이든 낫는다는 전설이 있었습니다.

때문에 연못 주변에는 늘 수많은 병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가난해서 의사에게 갈 수 없거나 당시 의학으로 치료받을 수 없는 병을 가진 사람일 것입니다.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베데스다 연못입니다.

그러나 이곳은 잔인한 곳이기도 합니다. 천사가 내려와 물이 움직였을 때 치료받을 수 있는 사람은 맨 처음 들어간 단 한 명뿐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천사가 내려와 물이 동하는 순간 그들은 서로 밟고 잡아당기며 먼저 들어가려 할 것입니다.

 

여기서 오늘 우리 사회를 바라봅니다. 내가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짓밟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주님은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함께 더불어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는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나와 있습니다.

 

주님은 경쟁으로 지치고 힘들어하는 영혼을 찾아가십니다. 가장 힘없고 소외된 자들을 찾아가십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분은 바로 주님입니다. 주님은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만납니다. 지칠 대로 지쳐 있고 낙심할 대로 낙심한 영혼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던 사람입니다.

 

우리는 38년 된 이 환자처럼 포기하지 않고 끈기 있게 기도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주님이 그에게 물으십니다. “낫고 싶으냐.” 단순히 병을 고치고자 하는 열망을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나를 통하여 낫고 싶으냐”고 물으신 겁니다. 세상 방식으로 고침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방법대로 주님을 의지해 치유 받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신 겁니다.

 

그러나 이 환자는 본문 7절에서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라며 “내가 가는 동안에 남들이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는 아직도 베데스다 연못을 통해서만 치유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만물을 지으시고 모든 병을 고치시고 생명까지도 살리시는 능력의 주님을 자신의 한계 안에 제한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어리석음은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주님은 치열하고, 잔인한 경쟁 속에서 상처받은 우리에게 찾아와 “낫고 싶으냐”고 물으시지만 우리는 “주님, 우리들이 이 경쟁사회 속에서 이길 수 있도록 도와세요”라고만 답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38년 된 환자를 향해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데스다의 경쟁사회에서 벗어나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힘으로 걸어가라고 하십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베데스다 연못에 언제까지 멈추어 서 있으렵니까. 경쟁에 구원이 없음을 기억하고 주님이 허락하신 사명을 따라가십시오. 그 길이 좁은 길일지는 몰라도 나와 이웃을 살리는 생명의 길입니다.

안해용 고양 너머서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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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글 /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오늘 본문은 세상 권력자들의 홈그라운드인 예루살렘에 들어온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는 과정을 추적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지만 창조주를 영접하지 않는 자기 폐쇄적 인간세계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하나님에게 있어 사랑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극복의 대상입니다. 이런 세상에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하는 세상의 신이 왕성하게 활동합니다(요 14:30, 요 15:19, 고후 4:4, 엡 2:2∼4; 6:10∼17). 세상 신에게는 죄인을 들뜨게 만드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그리스와 로마제국의 신들은 가장 현세적이고 욕망 분출적인 신이었습니다. 이를 믿는 그리스와 로마는 정복욕과 음란, 권력욕과 호전성을 충족시키는 데 열정을 다 바치는 세상이 돼 버렸습니다. 성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 1∼10권이 잘 보여주듯 로마는 지극히 호전적이고 음란했으면서도 신을 경배하는 종교적 열기로 가득 찬 세상이었습니다.

 

세상 신은 죽음의 권세와 부귀영화를 무기로 휘두르며 사람을 지배합니다. 일찍이 광야에서 예수님은 자신에게 경배하면 천하만국을 다스리는 절대 권력과 부귀영화를 주겠다고 약속한 사탄을 책망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빌라도의 법정에서 로마제국의 군사력을 무력화할 강한 하늘군대를 동원할 생각도 해보셨습니다. 강한 메시아가 되고 싶은 열망을 잠시나마 느낀 것입니다. 그러나 무기력하고 연약한 사람들의 구원자가 되기 위해 스스로 무능한 메시아로 죽임당하는 현실을 받아들입니다. ‘절대 갑’ 로마제국의 통치를 거부하는 ‘절대 을’ 유대인이 강요하는 십자가 처형을 받아들여 절대 갑을 이기는 연약한 메시아가 된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예수님은 죽음의 공포와 혈투를 벌였고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시달렸습니다. 하지만 이로써 로마제국과 이기기 위해 그보다 더 강한 제국의 군주가 되겠다는 열망을 극복했습니다. 절대적 고독감과 무기력감 속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가득 채운 하나님의 인격적 현존을 맛보았습니다. 연약한 이들의 메시아가 돼 십자가를 메기로 결단함으로써 힘으로 세상을 이기는 ‘강력한 메시아’의 욕망을 이겼습니다.

세상의 환란은 우리에게 이해타산적인 사람이 되라고 요구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기보다 당장 자가 구원의 방책을 강구하라 다그칩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것은 심지어 하나님께도 버림받는 길이라며 그런 고독을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겁줍니다. 다소 불의하더라도 든든한 인맥 안에 머물러야 잘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혼자 버려진 그 순간이 하나님께서 당신을 가득 채운 시간임을 확신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긴 방법입니다.

십자가 죽음을 받아들인 것도 신앙의 승리라 볼 수 있지만 절정은 죽은 자 가운데서 3일 만에 부활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홀로 버려진 것처럼 보였지만 3일 만에 부활하면서 자신을 죽인 세상 권력자들을 영구적으로 패배케 하셨습니다.

 

혹시 세상에 혼자 내버려진 것 같습니까? 흔들리지 않는 신적 평안을 누릴 때 우리는 세상을 이깁니다. 하나님과 사귀는 것이 세상 모든 이들에게 버림을 받는 것보다 낫다는 것을 깨닫는 자, 그가 바로 세상을 이긴 자입니다.

김회권 목사(숭실대 교목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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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글 / 인생을 바꾸는 기회 

 

하나님은 날마다 기회를 주십니다. 그 기회를 잡으면 복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놓치면 뻔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실패한 인생을 사는 건 이러한 기회를 놓치고 잘못된 선택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선택을 하며, 어떤 기회를 잡으며 살아야 할까요.

 

우선 살면서 맞닥뜨리는 모든 문제에는 ‘배경’이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갑자기 아무 이유도 없이 문제가 생기진 않습니다. 병에 걸렸다고 가정해 봅시다. 어느 날 갑자기 걸리게 되는 병은 거의 없습니다. 잘못된 식습관이나 스트레스가 오랜 기간 누적돼 병에 걸립니다.

 

질병 외에도 많은 문제들은 우리 삶에 잠복해 있다 어느 순간 터져나옵니다. 성경은 여러분이 살면서 마주하는 문제들, 그 뒤에 숨겨진 영적인 ‘배경’에 대해 기술한 책입니다. 성경을 읽어야 운명의 저주를 피할 수 있습니다. 이미 운명의 저주에 빠졌다면 탈출할 방법 역시 성경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대부분 사람들은 잘못된 응답을 하는데 베드로만 올바른 신앙고백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같은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축복이 시작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신앙을 고백하는 일은 인간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내 인생의 해답은 그리스도구나’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인생의 온갖 문제들을 쉽게 헤쳐나갈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유일한 구원자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그분의 능력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거친 풍랑을 잠잠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온갖 재앙과 저주가 사라지는 걸 목격했습니다. 베드로는 메시아가 아니면 저런 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은 참 제사장으로서 저주와 재앙을 끊어버리는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이런 엄청난 사실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여러분 스스로 알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제대로 된 신앙고백이 있으려면 영적인 싸움이 선행돼야 합니다. 육신의 문제에만 매달리면 인생은 언제나 실패합니다. 열등감, 타인으로부터 받는 상처, 질병…. 여러분이 생각하는 이런 문제는 ‘진짜’ 문제가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영적인 싸움입니다.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은 인생의 축복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담대히 선포하지 못하도록 영혼을 혼미케 하는 마귀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떠나가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선포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우뚝 설 때 당신은 주님의 ‘응답의 모델’이 됩니다. 날마다 예수의 제자임을 고백하는 일, 이것은 우리의 인생을 바꾸는 최고의 ‘기회’입니다. 아울러 언제든지 잡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이 사실을 날마다 선포하며 영적인 싸움을 계속한다면 우리 인생은 바뀌게 됩니다. 아무리 작은 문제에도 주님은 크게 화답하실 것입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입니다. 아멘.

박종환 목사(충남 온양루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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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글 / 인생에서 만나는 골리앗을 물리치는 비법...  


크리스천에게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일까요. 흔들리지 않고 예수님을 잘 믿는 것입니다. 목사인 저도 돌이켜보면 참 부끄럽게도 예수를 믿는다면서도 비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비겁한 신앙은 언제 나타날까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골리앗’을 만났을 때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골리앗을 만납니다. 저는 현역으로 입대한 지 4개월 만에 사고로 척추를 다쳐 대전국군통합병원에 입원했습니다. 부상이 심각해 수술하고 10개월 만에 의병전역했습니다.

당시엔 제게 닥친 일들이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제게 다가온 첫 번째 골리앗이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별다른 아픔 없이 정말 평탄한 삶을 살았습니다. 저는 그 사고 이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재활이 어렵다고들 했지만 기적적으로 몸을 회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어 주신 은혜가 어찌나 크던지 아프고 힘들었던 기억들은 애써 잊어버리려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사라졌습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라는 찬송가 가사가 절로 나왔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도대체 다윗은 어떤 사람이기에 모두가 두려워하는 골리앗을 이겼을까요. 그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구하며 골리앗을 물리칩니다. 우리도 골리앗과 마주칠 때 그와 같아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골리앗이 내 눈앞에 나타날 때 다윗처럼 담대하게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 당당히 싸우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골리앗을 만난 사람들이 모두 다윗처럼 되는 것은 아닙니다. 힘든 일이 생각지도 않는 순간에 닥쳐왔을 때 다윗처럼 당당하게 서기는커녕 숨고 타협하며 사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참 속상한 일입니다. 결국 우리 인생은 골리앗과의 싸움입니다. 하나의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나면 또 하나의 골리앗이 도전해오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럴 때마다 과거 나에게 베푸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할 때 과감히 뿌리칠 수 있었던 요셉처럼 믿음으로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매일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읍시다. 힘들어도 틈만 나면 성경을 읽고 묵상합시다. 다윗이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는 골리앗에 맞서려고 할 때 모두들 말립니다. 어떤 이들은 비아냥거립니다. 36절에 보면 이때 다윗은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고 말합니다. 내가 비록 보잘것없어도 나에게는 남들이 모르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습니다. 다윗은 위기에 처하고 두려움이 몰려올 때, 사나운 맹수가 내가 보호해야 하는 양들을 공격할 때 하나님께서 내게 어떤 은혜를 베푸셨는지를 기억한 것입니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던’ 바로 그 추억이 정말 강력한 영적 실력입니다. 다윗과 같이 확신을 갖고 골리앗과의 싸움에 당당히 맞서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예배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영적 실력을 쌓아 놓으십시오. 그렇기만 한다면 살다가 골리앗을 만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쓰러뜨릴 수 있습니다. 모두 승리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원영오 목사(안산 등대감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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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글 / 투정도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이들이 자주 투정을 부릴 때가 있습니다. 특히 자기들이 갖고 싶은 것을 사 주지 않았을 때, 먹고 싶은 것을 사 주지 않았을 때는 엄청난 투정을 부립니다. 자기들이 돈을 맡겨 놓은 것도 아니면서 그렇게 투정을 부립니다. 처음에는 화도 나고, 야단도 치기도 하지만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사 주곤 합니다. 하지만 만약 내 자녀가 아닌 남의 집 아이가 내 아이들처럼 투정을 부리면 관심을 두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내 아이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정말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고, 능력이 많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인 우리가 투정을 부릴 때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요. 나 몰라라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투정을 부릴 때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것이라면 아낌없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다고 하나님께 투정을 부렸습니다. 마라에서는 물이 없다고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더군다나 과거를 회상하면서 원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음을 면하게 하셨고, 노예 생활을 청산해 주셨는데 그들은 오히려 “애굽에서 살다가 죽게 놔두지, 왜 지금 먹을 것이 없게 해서 어렵게 만들었느냐”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홍해 기적과 마라의 쓴물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는데도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자 먹을 것에만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까맣게 잊은 채 배불리 먹고 살았던 애굽 생활을 그리워했습니다.

 

우리도 믿음 생활을 하다가 문제가 생기면 믿음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돈이 없으면 돈에 신경을 쓰고, 건강하지 못하면 건강에 신경을 쓰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하나님의 은혜는 잊고 세상의 것에만 온통 마음을 쏟게 됩니다. 과거를 그리워하곤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과거는 어떤 삶인가요. 우리의 과거는 죄의 삶이었습니다. 주님을 만난 뒤 은혜의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의 삶을 살더라도 종종 우리는 세상의 염려 때문에 은혜를 잊을 때가 있습니다. 나의 과거는 이미 주님께서 다 청산해 주셨습니다.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같이 식사한 사람이 음식 값을 다 계산했는데 여전히 식사비를 걱정하고 있는 것은 미련한 짓입니다.

우리의 과거는 이미 주님의 은혜로 인해 다 청산된 삶입니다. 과거에 얼마나 잘 살았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죄 모두를 깨끗이 청산해 주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지금의 문제를 주님께 가지고 나아가 기도하는 겁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주십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출 16:4)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구원자이신 동시에 이스라엘의 먹을 것을 책임져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망과 불평을 쏟아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원유 유출로 많은 충남 태안 주민들이 삶의 터전을 잃었다고 원망과 불평을 쏟아냈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지으신 이곳을 다시 회복시키시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끝이 없습니다.

김진택 목사(태안 학암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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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글 / 이 시대에 어떻게 행할 것인가?  


이 땅의 크리스천들은 긴장하며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그날을 기다려야 합니다. ‘이 시대에 어떻게 행할 것인가’를 늘 고민하며 심령의 귀를 열고 교회에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15∼16절에는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고 나와 있습니다. 지혜 있는 자는 인생의 의미를 깨닫고 세월을 아끼는 사람입니다. 시간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시간 속에 태어나서 시간 속에 살다가 시간 속에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생명을 잃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시간은 더 소중합니다. 악인의 천 일보다 그리스도인의 하루가 더 소중합니다. 불신앙의 모든 삶은 생명 없는 헛된 삶입니다. 누가복음 15장 24절에 보면 돌아온 탕자를 가리켜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라고 말합니다. 또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5장 6절에서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불신앙의 세월은 헛됩니다. 그리고 그 대가는 지옥입니다. 지옥불 속에서 고통당하는 영혼이 주님께 간절히 구하는 것이 있다면 단 10초만이라도 세상에 내보내 달라는 것일 겁니다. 그 10초 동안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다시는 지옥에 오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지옥은 물 한 방울로 혀끝을 적셔 달라는 요구조차 거절되는 곳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한정된 시간을 가장 지혜롭게 활용하기 위해 오직 복음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본문 17절에는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당부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만세전부터 계획하신 구원역사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복음의 방향을 어떻게 주도하시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한국 기독교 130년의 역사를 분석해 보면 부흥기(1885∼1920년)와 연단기(1921∼1955년), 또다시 부흥기(1956∼1990년) 그리고 침체기(1991∼현재)의 패턴을 보입니다. 지난달 각 교단의 정기총회에서 발표한 교단의 교세 현황을 보면 최근 3년간 침체는 더욱 심각합니다.

부흥은 저절로 오지 않습니다. 지금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침체 요인은 거룩함과 경건을 잃어버리고 세속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 벗어난 성공주의와 기복신앙을 개혁해야 합니다. 마음을 찢는 금식과 애통하는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복음의 본질을 회복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말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소망해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거룩하고 흠 없는 자녀로 살아야 합니다. 그 뒤에 부흥의 시대가 오리라 확신합니다.

 

이 시대에 주님의 뜻을 깨달아도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주님의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중심은 성령이십니다. 복음의 불길은 성령의 바람을 타고 타오릅니다. 성령이 충만해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야 교회 전도의 문이 열립니다. 믿음의 문이 열립니다. 부흥의 문이 열립니다. 성령을 기쁘게 하지 않고 근심하게 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성령을 소멸시키고 육신의 생각으로 산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목마른 심령으로 성령 충만을 사모합시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이 오직 성령으로 충만해 복음의 비전을 품고, 헌신하는 역사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황혜연 목사(인천 세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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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글  / 작은 자의 가치   


판단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옳고 그름, 좋고 나쁨, 아름답고 추함 등을 헤아려 가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판단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실판단이고 또 다른 하나는 가치판단입니다. 사실판단이란 객관적 상황에 대한 인식이요, 가치판단이란 이 인식된 사실에 대한 각자의 주관적인 평가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살아계실 때 말씀하신 종말에 대한 비유 가운데 가장 중요한 심판에 대한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5장 31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의 재림 때 있을 최후의 종말에 관한 심판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셔서 전 민족을 모아놓고 심판을 진행합니다. 먼저 두 종류로 나눕니다.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고” 그리고 오른편에 있는 양무리에게 먼저 “복 받을 자들이여” 하시면서,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 즉 영생의 나라로 들어갈 것이라고 하셨고, 왼편에 있는 염소의 무리들에게는 “저주를 받을 자들”이라고 하시면서,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오른편에 있는 양의 무리는 축복의 나라, 영생의 나라로 들어가고, 염소의 무리는 저주의 나라 영벌의 나라로 들어갑니까. 이유는 단 한 가지, 이 땅에서 소외된 자에게 사랑을 베풀었느냐 그렇지 않느냐 입니다. 소외된 자를 주님께서는 ‘작은 자’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작은 자는 누구입니까. 주린 사람, 목마른 사람, 나그네, 벗은 사람, 병든 사람, 옥에 갇힌 사람입니다. 이들에게 사랑을 베푼 자가 양의 무리에 속해 영생의 나라로 들어가고, 이들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은 자가 염소의 무리로서 영벌의 나라로 들어갑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주님은 소외된 여섯 부류의 사람들을 자신과 동등한 인격자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근거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인간 편에서는 구원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백성은 인생의 가치관이 달라져야 합니다. 떡이 먼저가 아니라 말씀이 먼저여야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인이 왜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세상 사람들처럼 말씀이 먼저가 아니라 떡이 먼저라고 생각하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부요함이 가득하다고 자랑했지만, 실상은 곤고하며 가련하며 눈이 멀었으며 벌거벗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서머나교회처럼 환난과 궁핍함이 있어도, 고난이 있어 힘들고 어렵다 해도 좋은 지도자 밑에서 충성된 일꾼으로서 사랑으로 봉사하는 곳이라면, 비록 작은 교회라도 좋은 교회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주변에 작은 자를 살펴보길 원하고 계십니다. 과부와 고아, 나그네 된 자를 찾고 계십니다. 낮은 자로 오셔서 작은 자였던 우리를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주시고 이 땅에서 거룩한 가치와 의미를 찾는 인생으로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도 믿음 안에서 작은 자의 승리를 경험하는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위정식 목사(서울 반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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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의 글 / 살면서 생기는 갈등을 풀어 가려면...   


갈등은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가정에서는 부모자식간 고부간 부부간에, 회사에서는 상사·동료간에 갈등을 빚기도 합니다. 인간의 갈등은 창세기 4장에 등장하는 ‘가인과 아벨’ 사건 이후 인류 역사와 함께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살아가면서 어떤 갈등을 겪고 계십니까. 그 갈등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습니까. 갈등의 사전적 의미는 ‘개인이나 집단 사이에 목표나 이해관계가 달라 서로 적대시하거나 충돌함 또는 그런 상태’입니다.

 

갈등은 왜 생길까요. 경제적 이해관계 때문에, 자존심 때문에, 권력 때문에, 애정 때문에 생깁니다. 종교나 지역, 파벌 간에 다른 입장이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갈등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방법으로 갈등을 해결해 나갑니다. 국제 선교단체인 ‘워크 스루 더 바이블’에서 개발한 건강한 인간관계 형성을 위한 진단 프로그램인 ‘피플 퍼즐’에 따르면 갈등을 풀어가는 인간의 유형을 4가지로 분류했습니다. ‘주도형은 독재한다, 사교형은 공격한다, 안정형은 묵종한다, 신중형은 회피한다.’ 성서적인 갈등 해소법은 다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 돌아오는 이방인들을 두고 ‘그들에게 모세의 율법대로 반드시 할례를 받게 해야 한다’ ‘안 받아도 된다’는 주장으로 갈등이 생기자 이 문제를 예루살렘 교회에 갖고 왔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크고 작은 갈등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구원은 받았지만 온전하지 못한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교회 사도와 장로들 사이에 벌어진 긴 토론이 끝난 뒤 베드로가 일어나 말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행 15:10∼11) 뒤이어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도 말합니다.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행 15:19∼20) 요약하자면, 오랜 시간 각자의 의견을 허심탄회하게 주고받았습니다. 성령님이 어떻게 역사하고 있는지 주목했습니다. 전통보다 구약성경 말씀에서 근거를 찾았습니다. 베드로나 야고보 같은 영적 지도자의 권위를 존중해 주었습니다. 만장일치로 결정하고 핵심을 요약해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통보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격차로 이혼하는데 정확히 말하면 성격을 조화시키지 못해 헤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는 서로 다른 톤을 갖고 있지만 각자의 소리를 상대방의 음에 맞출 때 멋진 합창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의 갈등 소식을 들은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고전 12:13∼20)

 

갈등은 상대를 추하게 보는 마음이나 화합은 귀하게 보는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갈등을 조장하는 ‘트러블 메이커’가 아니라 평화를 전하는 ‘피스 메이커’가 됩시다.

김용혁 목사(대전 노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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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글 / 인생에서 시험에 부딪힐때...    


최근 질병관리본부가 발표한 통계를 보면 놀랍게도 우리나라 성인 8명 중 1명꼴로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느낄 정도의 우울증을 겪은 적이 있다고 합니다. 한국 사람으로 삶을 이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새삼 실감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주의 형제 야고보가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편지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당하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시험과 시련에 대해 잘 대처하고 승리할 수 있도록 격려하기 위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성도는 시련이 강할수록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힘들어도 세상과 다른 사람들을 향해 마음의 문을 닫지 말고 필사적으로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오늘 편지를 쓴 야고보는 늘 순교의 위협 속에서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야고보뿐 아니라 많은 사도들은 항상 자신의 당면한 위험보다는 늘 주의 마음으로 성도들을 격려하고 한 영혼이라도 주께로 인도하려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우리도 고통과 시련이 있을지라도 마음의 문을 닫지 말고 더 넓혀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할까요.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우리가 당하는 모든 연단과 시련은 우리를 사람과 세상을 사랑할 줄 아는 성숙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이기 때문입니다. 힘에 부치는 어려움을 겪으면서 내가 가진 다른 사람들을 아프게 하는 모난 것들을 비로소 깎아내는 것입니다. 나밖에 모르던 사람이 배우자의 고통을 이해하고, 가족의 사랑을 알고, 사람들이 얼마나 사랑받아야 할 존재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어려움을 당해서도 오히려 사람들을 향해 마음의 문을 닫고 원망한다면 우리를 향한 시험은 결코 멈춰지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고 섭리라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끝까지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여기에서 중요한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주님을 향한 진정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고통 속에서도 나를 온전하게 구비해 조금도 부족함 없는 사람으로 세우려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내 삶의 여정 전체를 붙들고 계시며, 책임지고 계신다는 것을 신뢰해야 합니다. 이런 마음이 없이는 우리는 결코 시험을 기쁘게 여길 수도, 통과할 수도 없습니다.

삶이 고단하고 어려울수록 사람을 향한 마음의 문을 열고 하나님에 대한 바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색하고 엄하신 분이 아닙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분”이라고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바라는 것뿐 아니라 때로는 미처 생각하지도 못한 것을 허락하시는 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우리는 안타깝게도 시험을 믿음으로 통과하고 나서야 알게 됩니다. 시험을 통과한 후에야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부족했는지, 얼마나 믿음이 없고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시련이 현재 머물러 있을지라도 시험에 져서 마음의 문을 닫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사람을 사랑하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렇게 힘을 내고 한없이 무겁지만 한 걸음씩이라도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때 시험은 참으로 기쁜 은혜의 사건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이용전 사랑제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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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의 글 /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살렸소!   


오늘 본문에서 ‘상태 변화와 그에 동반되는 행동’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은 ‘앉은 사람이 일어남’ ‘눈이 보이지 않은 사람이 보게 됨’ ‘앉아 있다가 따름’ 순으로 진행됩니다. 눈먼 거지가 앉아 있다가 일어나 보게 됐고, 예수 일행을 따랐고, 운동에 동참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변화’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기력한 이가 용기를 냈고, 믿지 못하는 이가 믿었습니다. 즉 자비만을 구하며 무기력하게 앉아 있던 이의 마음속에 용기가 생기고 믿음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그 믿음이 그를 살렸다는 예수의 선포가 뒤따릅니다.

 

오늘 말씀은 당시 독자에게 어떤 의미를 주었을까요. 이 말씀은 남들보다 높아지고 먼저 되려고 다투는 바로 앞의 제자들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불쌍하고 더러운지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탐욕으로 가득한 모습, 더 높아지고 더 가지기 위해 애쓰는 추악한 모습을 성찰하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눈이 가려져 진실을 보지 못하는 무기력한 인민들에게 일어나 따르라고 웅변하는 듯합니다. 따름에 동반되는 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을 보여주지 않았을까요.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먼저 눈먼 거지 바디매오는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거지 동냥을 하는 불결함’은 미추를 떠나 복잡하고 아리송한 삶을 사는, 스스로의 문제를 누군가에게 의존하거나 타인의 자비심에 의존하는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눈이 멀었다는 것’은 외면과 그 이면에 두려움을 안고 사는 우리 자신을 보여줍니다. ‘무기력함’은 바디매오처럼 무기력에 빠진 우리 인생을 의미합니다.

 

용기를 내 일어나려거든 겉옷을 벗어던지고 벌떡 일어나십시오. 자신의 무기력함을 칭칭 감고 있는 외피적 삶을 탈피하되 단숨에 하라는 것입니다. 겉옷을 벗어던진 바디매오처럼 겉모습을 벗어던져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게 믿음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주세요”라며 자신을 비하하는 그 삶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스스로를 살린다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자신이 자신을 살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바로 변화의 당사자입니다. 내가 또 우리가 구원받을 자신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선포했지만 자신의 결단과 믿음의 응답이 구원을 완성합니다. ‘사는 것’과 ‘구원’은 결과가 아니라 상태입니다. 구원은 행위와 율법에 의해 얻어지는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예수 이야기를 복원하니 ‘믿음은 행동’ ‘구원은 살기 위한 간절한 자기 노력’이 전제된 것입니다.

믿음은 ‘그 무엇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간절함’으로 이미 자신의 몫을 다한 것입니다. 결과를 바라는 신앙, 결과에 따라 거꾸로 믿음의 정도가 측정되는 것으로는 믿음의 본질에 다가설 수 없습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자비만을 구하고 앉아 있겠습니까. 아니면 스스로를 살리기 위해 눈을 뜨고 일어나겠습니까. 무기력하여 비참한 과거로 돌아가겠습니까. 아니면 희망을 향해 난 길을 계속 따라가겠습니까. 눈을 떠 진실을 보십시오. 일어서서 주를 따르십시오. 2000년 전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살렸소’라는 해방의 선언이 오늘 우리에게 이뤄지길 기원합니다.

우성구 서울 새날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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