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글  / 행복한 동행 !  


시편 16편 1∼4절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할 때 메마르지 않는 행복을 맛보게 됩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수가성의 여인에게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특히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다시 목마르지 아니하리라’라는 이 말씀을 필히 체험해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영이 참 만족과 행복을 얻으려면 우리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영혼이 만족함을 얻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영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 즉 마음이 있습니다. 혼이라고도 합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사건 전후를 보면 사람을 만드실 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흙으로 모양을 만드시고 코에 하나님의 호흡을 불어넣으니 생령이 됐다고 했습니다. 생령은 곧 사람의 정신을 말합니다.

 

우리는 영과 혼과 육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영은 하나님과의 관계, 육은 자연과의 관계에 건강 여부가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정신 즉 혼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따라 건강이 좌우됩니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은 처음에 아담에게만은 짝을 만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만 아시겠지만 사람에게 사모함을 갖게 하려고 하신 것이라 짐작합니다. 배우자의 필요함을 느끼고, 소중함을 갖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믿음이 좋아도 옆에 있는 사람과의 관계가 바르지 못하면 그 사람을 불행하게 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사람입니다. 정신의 건강, 혼의 건강 정도는 다른 사람과 얼마나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느냐를 통해 체크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행복을 얻고자 하십니까. 먼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함을 얻고 살아야 합니다. 두 번째로 주변의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그 관계에서 얻어지는 행복을 얻고 살아가야 합니다. 다윗은 이것을 먼저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 2절에서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라며 곧이어 3절에서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라고 고백합니다.

 

다윗의 고백 가운데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습니다. 성도를 존귀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나와의 관계가 우선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므로 존귀히 여긴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덕분에 사람에 대한 태도가 달라져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놓치고 사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사탄은 믿는 사람들을 유혹하기 위해 제일 먼저 의심하도록 합니다. 의심이 드는 순간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180도 바뀝니다. 신뢰하고, 의지할 수 없습니다. 우리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면 상대방을 존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아름다운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크리스천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예수님의 사랑을 나누는 것을 당연시하고, 그럴 때 주님이 기뻐하신다는 생각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굳건히 하고, 인생의 항로를 함께 갈 사람을 만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존귀한 성도가 여러분 옆에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사람을 찾아내시기 바랍니다.

문희성 목사 (광주 한빛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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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

 

음의 글 /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에베소서 4장 6절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 것일까요”라고 묻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가를 묻기 전에 과연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느냐를 먼저 물어야 합니다.

보이는 눈을 갖고 있지 않다면 우리에게 하나님은 상상 속의 존재로만 남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우리의 눈이 열리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주위의 많은 부분에서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어디에나 존재하는 분이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잘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으며 찾을 수 있는 곳은 우리 역사의 한복판입니다. 하나님은 성막과 성전 혹은 종교의 영역에만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 안에 계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계심을 발견하고, 우리의 사회와 역사가 하나님이 계심으로 인해 아름다운 곳이 되도록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 모두의 사명이자 책임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고통받고 있는 우리 삶의 역사 한복판에 계십니다. 우리의 역사 안에 계시는 그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 열린 마음과 볼 수 있는 눈이 우리에게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심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이 계실 수 있는 장소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자기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은 바로 자신의 삶에서 천국을 이루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살아서 ‘하늘사람’이 되는 방법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으로부터 형제를 향한 미움과 증오, 시기심과 욕심을 몰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이 계실 수 있는 장소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이 계시는 곳으로 만들어가며 지금 여기에서부터 천국을 이뤄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또한 우리의 이웃 안에 계십니다. 주님께 있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전혀 별개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우리 이웃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내 안에 계신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이웃 안에 계십니다. 이웃 안에 계신 하나님을 보는 사람은 더 이상 지금과 같은 태도로 이웃을 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먼 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이웃 안에 계십니다. 다른 사람 안에 계신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는 예수님 안에 계신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무엇보다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가장 잘 계시해 주십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이루어지는 곳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증명은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사역이 이루어지고 있는가에 의해 판단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예수님의 영이 계신 곳에서 가장 확실하게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으로 가득 찬 우리 생애와 우리 사회, 우리 역사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 그곳이 바로 천국이며 하늘나라입니다. 어디서나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함으로써 오늘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홍인식 목사 (멕시코 장로회 신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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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글 / 사람은 신이 아니다     


사도행전 12장 20∼23절

이스라엘에 헤롯이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두로와 시돈 지방에 사는 사람들을 대단히 미워했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헤롯의 영토에서 식량을 공급받고 있었는데 왕의 미움을 샀으니 큰 불이익을 당할 것이 뻔했습니다. 그래서 두로와 시돈 사람들은 왕과 화친하기 위해 헤롯왕의 침소를 담당하고 있는 관리를 설득한 다음 그 힘을 빌려 헤롯에게 화평을 청했습니다.

 

헤롯은 정한 날에 용포를 두르고 옥좌에 앉아 두로와 시돈 사람에게 연설했습니다. 연설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두로와 시돈 사람들은 “이것은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신의 소리다”라고 외쳐댔습니다. 물론 왕의 환심을 사기 위한 아부성 외침이었습니다. 그러나 헤롯은 그 말을 듣고 자신을 신으로 착각했고, 사람들 앞에서 신처럼 행세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사자가 그를 치니 그는 죽고 말았습니다.

 

인류 역사에는 이따금 신으로 자처하면서 신처럼 행세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로마의 네로, 프랑스의 루이 14세, 그리고 우리나라의 주권을 빼앗았던 일본의 히로히토가 그랬습니다. 그들은 신처럼 보이기 위해 사람들 앞에서 완전하고 특출한 자로 위장해야만 했습니다. 거기에서 오는 부자유스러움과 불안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결국 그들은 역사에 큰 혼란의 소용돌이를 일으켰고 자신은 물론 많은 사람에게 불행을 가져왔습니다.

 

사람은 신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완전하거나 절대적이지 못합니다. 잘못할 수도 있고 실수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완전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언젠가 회의와 실망을 맛보게 될 것이며, 순수한 자기 삶의 즐거움을 상실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완전한 척하는 사람, 허물이 전혀 없는 것처럼 허세를 부리는 사람은 위선자입니다. 그런 사람은 남을 속이고 자기 자신을 기만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부족함을 인식하는 사람, 잘못을 시인하는 사람, 미숙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사람이 인격자이며 인간미 넘치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남보다 조금 앞서 간다고, 남에게서 몇 마디 칭찬을 들었다고 자신을 신처럼 특출하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완전한 신이 아니라 불완전한 인간임을 항상 명심하며 인간다운 순수성을 지니도록 힘써야 합니다.

 

내가 신이 아니듯 다른 사람도 신이 아닙니다.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서 신적인 완전성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을 완전한 자로서가 아니라 불완전한 자로 인식할 때 이해와 용서가 가능하며 거기에 평화와 행복이 깃들게 됩니다. 사람을 신격화하는 어리석음에도 빠져서는 안 됩니다. 좀처럼 달성하기 어려운 업적이나 성과를 이루어냈다고 신처럼 여기는 것은 우상숭배의 시작입니다. 존중은 필요하나 숭배는 금물입니다.

 

사람을 신처럼 숭배하면, 반드시 상대를 교만에 빠트려 패망에 이르게 할 것이며, 자신은 스스로 사람의 노예가 되는 어리석음에 빠지게 됩니다. 하물며 정신병자처럼 스스로 신이나 구세주로 자처하는 사이비 교주들을 신처럼 믿고 추종하는 일이야말로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어리석은 일입니까. 오직 참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야만 하겠습니다.

최윤식 목사(익산 울밖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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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글 /  무릎 꿇자 
    


다니엘 6장 10절

다니엘은 하루에 세 번씩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정해 놓은 시간이 되면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다니엘은 한결같았습니다.

하루 세 번의 기도는 성경 여러 곳에 등장합니다. 베드로가 그랬고 고넬료가 그랬습니다. 초대 유대인 성도들도 대부분 하루 세 번씩 기도했습니다. 세 번이란 숫자는 유대인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무엇이든 세 번만 하면 후회하지 않을 만큼 했다고 생각합니다. 겨루기를 할 때도 삼세판을 합니다. 이렇게 해서 지면 불만이 없습니다. 이기면 제대로 된 승리라고 자부합니다.

다니엘의 기도에서 세 번이라는 수보다 중요한 것은 시간을 정해 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신에게 무릎을 꿇으면 죽인다는 위협에도 불구하고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다리오 왕은 조서에서 30일 동안 왕 외에 어떤 신이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겠다는 금령을 내렸습니다. 하나님께 무릎 꿇고 기도하면 사자 굴에 던져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이 금령에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최근 개봉한 영화 ‘신이 보낸 사람’을 보면서 다니엘을 생각했습니다. 영화에서는 핍박 속에서 신앙을 지켜가던 사람들이 죽이겠다는 위협에는 두 손을 듭니다. 그만큼 목숨을 내놓고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의 무릎은 큰 도전이 됩니다. 다니엘의 무릎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다니엘의 무릎은 하나님보다 더 크신 자가 없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우리도 하나님보다 더 크신 이가 없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생명에 위협이 닥쳐도 다니엘처럼 무릎을 꿇는 믿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겠다고 결심하지만 자주 포기합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사실 하찮습니다. 죽음의 위협도 아닙니다.

 

직장 상사의 위협, 거래처의 위협, 부모의 위협, 형제의 위협이 있습니다. 하지만 대개 그렇게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런 위협에 기도하기를 포기합니다.

이유는 하나님보다 이들을 더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나의 생존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멀리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무릎은 감사의 고백입니다. 다니엘은 형통하지 않았지만 감사했습니다. 의지할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신 것만으로도 감사하며 죽음도 불사하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우리도 항상 감사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감사해야 하고, 하나님이 계신 것에 감사하고 출석할 교회가 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2014년 사순절을 보내며 저마다 무릎을 꿇고 있을 것입니다. 이 시간을 다른 것에 양보하거나 대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목숨에 위협이 와도 이 시간만큼은 고수하겠다는 결심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손이 움직이고 하나님의 손은 기도가 움직인다고 말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무릎 꿇기를 바랍니다. 무릎이 우리 삶의 막강한 에너지원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감사하는 다니엘의 모습이 2014년 사순절을 지내는 우리 교회의 모습이기를 소망합니다.

이강춘 목사(이천 늘푸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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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3장 31∼32절  / 하나님 나라와 종자의식

 

열매와 씨앗은 본질상 같은 것이지만 기능은 분명히 다릅니다. 씨앗이나 열매는 모두 우리의 식단을 채울 수 있으나,

종자로 구분되는 씨앗은 아무리 배가 고파도 남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대를 이어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씨앗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사는 동안 분명한 ‘종자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전 인류의 종자가 되고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받은 모든 백성의 종자가 되었듯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종자들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보면 항상 택한 한 사람 혹은 택한 민족을 통해 큰일을 이루셨습니다. 마치 누룩 비유나 겨자씨 비유처럼 작은 것에서 시작해서 전체에게 확산되는 방법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백성을 택하시고 부르셔서 그리스도의 태반이 되게 했으며, 신약의 선교 역사를 보면 로마와 영국, 미국 등과 같은 나라들을 통하여 선교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그렇게 쓰임 받은 나라들은 처음부터 복음의 도구가 된 것이 아니었지만 그들이 갖고 있는 국력과 경제력, 문화적 힘에 복음을 실어 전 세계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로마 제국의 경우에는 칼과 병거로 유럽과 아프리카를 지배했으나 그 지배력은 결국 복음 전파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대영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별칭을 얻었던 영국은 제국의 힘에 복음을 실어 전 세계에 전파했습니다. 현재의 미국도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데 쓰임 받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 대한민국은 어떻습니까? 대한민국은 전 세계 175개국 중 726만명이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세계 8대 경제대국이 되었으며, 문화적으로는 한류라 불리는 드라마와 K팝이 전 세계인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확산되고 있습니다. 역사상 대한민국의 영향력이 이렇게 커진 때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하여 우리 민족을 쓰시려고 만드신 환경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는 선교 초기부터 해외선교를 위해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실제로 많은 성과도 보았습니다. 초기 선교의 경우 가난한 나라가 가난한 나라에 복음을 전하는 입장이었다면 이제 경제력과 문화적 힘을 바탕으로 보다 공격적인 선교 역량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 한국 교회는 선교 역량을 극대화하기 위해 힘을 모으고, 더욱 순전한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도록 하는 데 진력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동족이면서도 하나가 되지 못한 북한 동포들을 가슴에 품고 살아갑니다. 북녘 땅은 우리에게 아직도 미전도 지역으로 남아 있는 ‘땅끝’입니다. 새로운 지도자가 등장했지만 북한 상황은 결코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상황이 아무리 비관적이라고 해도 우리는 동토의 땅 북한에도 복음이 전파될 것을 기대하며 파종해야 합니다. 그 종자는 탈북 동포들일 수 있고, 중국 국경에 살아가는 조선족일 수도 있으며, 북한 땅에 드나드는 경제인일 수도 있습니다. 대량의 종자가 아니라 단 한 알의 종자라도 좋은 땅에 뿌려지기만 하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음을 믿음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의 종자의식을 갖고 북한 땅에 뿌려질 종자를 찾아 파종하는 데 우리의 역량을 모아야 할 것입니다.

심권호 목사 (부평 일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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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글 / 억지로 진 십자가의 신비    


마태복음 27장 27~32절

살다보면 하고 싶어서, 좋아서 하는 일도 있지만, 싫어도 억지로 해야 하는 일들도 많습니다. 밥, 억지로라도 먹어야 합니다. 공부, 억지로라도 해야 합니다. 효도, 억지로라도 해야 합니다. 직장생활, 억지로라도 해야 합니다. 운동도 억지로라도 해야 합니다. 누가 도와 달라고 하면 억지로라도 도와야 합니다. 사순절 고난주간입니다. 억지로 십자가 지다 축복받은 시몬을 통해 은혜 받으시는 고난주간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도 억지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자원해서 십자가 지신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자원해서 십자가 지셨지만, 억지로도 지셨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지려 세상에 오셨지만, 막상 지려니 끔찍합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저주와 지옥의 형벌을 너무 잘 아시는 분 아닙니까.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십자가 지려 하니 고민되어 죽겠다. 나를 위해 기도 좀 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시를 “하나님 아버지,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세요”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곧이어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십니다. 결국 주님은 자원해서, 그리고 억지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억지로 주님 지신 십자가로 우리가 구원 받고, 천국을 얻었고, 성령 받았고, 죄용서 받았고, 병고침 받았고, 평강을 누리며, 지혜를 얻었고, 만 가지 은혜를 입었습니다. 억지로 십자가 지다보면 거기에 만 가지 축복이 임합니다.

 

시몬이 억지로 십자가를 집니다. 구레네 시몬은 아프리카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 근처 ‘구레네’에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고 가시다 너무 힘들어 쓰러졌다 일어났다를 반복하시더니, 쓰러져 일어날 줄을 모릅니다. 로마 군인이 구경하던 사람들 중에 힘 꽤나 써 보이는 시몬에게 “너 이리 와!” 해서 싫다는 사람에게 억지로 십자가를 지워줍니다. 시몬은 주님의 십자가 억지로 졌습니다. 억지로 진 십자가 덕분에 시몬의 가문이 대대로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늘 기쁨으로 살고 언제나 순종하면서 살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힘이 들 때가 있습니다. 교회에 나가기 싫을 때, 예배드리기 싫을 때야말로 억지로라도 교회에 나오고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억지로 진 십자가가 가장 큰 축복입니다. 구레네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지고 골고다까지 갔습니다. 시몬은 그 덕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온 가족이 다 믿고, 두루 존경을 받았습니다. 시몬과 그 기족이 얼마나 존경을 받았는가하면, 마가복음 15장 21절에 보면 시몬을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고 소개합니다. 사도 바울은 시몬과 그 부인을 자기 부모로 모셨습니다(롬 16:13). 시몬이 억지로 진 십자가는 시몬의 온 가족이 구원받고 존경 받게 된 은총의 십자가였습니다. 이런 십자가는 억지로라도 져야 합니다. 성도들은 날마다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억지로 지고가야 합니다. 자원해서 기쁨으로 하면 좋겠지만 억지로라도 하시기 바랍니다.

 

억지로 진 십자가가 내게 주시는 최고의 복입니다. 억지로 시작한 일이 우리 인생을 바꾸어 놓습니다. 조금만 힘들어도, 마음 상해도 중단해버리는 시대에, 억지로 교회 다니고, 억지로라도 봉사하다보면 그게 최고의 복이 됩니다.

안만호 목사(새광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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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글 / 밑바닥 인생에서 

 
요나서 2장1∼10절

인생을 살다 보면 밑바닥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심한 우울증과 자살 충동을 느끼기도 합니다.

기독교인들도 예외 없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지만 밑바닥 인생을 살 때가 있습니다.

그 원인이 죄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죄와 상관없이 고난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요?

 

첫째, 우리는 인생의 밑바닥에서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1·4절).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시는 이유는 내 고집 내려놓고 하나님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내 환경과 내 운명에 매여 있지 말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밑바닥 인생에서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본문 2절에서 요나의 고백을 보십시오.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요나는 고통이 자신의 죄로 인해 생겼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고통이 하나님의 징계라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요나는 그 고통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의지합니다. 모든 고통이 죄로 인해 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밑바닥 인생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점검해 볼 수 있는 영성을 지녀야 합니다.

둘째로, 인생의 밑바닥에서 감사로 예배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9절).

하나님의 백성은 가장 크게 실패했을 때 가장 크게 감사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실패 속에서도 나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의 손길을 보기 때문입니다.

본문 9절에 보면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라고 했습니다.

지금 고난을 겪고 계십니까? 인생의 밑바닥까지 내려오셨습니까?

이제 환경을 보지 마시고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회복의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오른손을 붙들고 계시다는 것을 보십시오.

그리고 그 구원의 하나님을 예배하십시오.

 

이 순간의 예배는 나의 눈물과 회개와 헌신이 담긴 최상의 예배가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인생의 밑바닥에서 서원에 대한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9절).

요나는 자신이 지금 왜 배 밖으로 던져졌고, 물고기 뱃속에 처해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고요하던 바다가 왜 풍랑이 심하게 이는지, 선원들이 제비를 뽑았는데 왜 요나 자신이 뽑혔는지,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는데 왜 큰 물고기가 자신을 집어삼켰는지, 다 이해합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전도자로 쓰시려고 집요하게 붙들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사랑입니까.

이제 요나가 하나님의 그 명령에 순종할 때가 왔습니다.

9절에서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라고 합니다.

요나서 3장을 보면 요나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니느웨 백성들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을 선포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으며 회개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 땅을 용서하셨습니다.

인생의 밑바닥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새 인생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 여러분 한 사람을 통하여

수많은 영혼이 구원받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생의 밑바닥에서 감사하고 헌신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박정수 목사(이수성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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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글 / 잃은 것과 얻은 것    


누가복음 16장 19∼25절

사람들은 많은 것을 손에 움켜쥐기도 하지만 또 잃어버리기도 한다. 잃어버린 것만 생각하면서 후회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지혜를 가진 사람은 잃어버린 것 중에서 얻은 것을 깨닫는다.

한 크리스천의 남편이 친구 말을 듣고 투자했다가 큰돈을 잃었다. 이 문제로 가정불화가 그치지 않았다. 놀라운 사실은 아내가 그렇게 전도를 해도 끄떡하지 않던 남편이 큰돈을 잃고서야 하나님 앞에 나오게 된 것이다. 재물을 잃고 재물보다 더 큰 하나님을 만난다면 그 손해가 손해로 끝난 것이 아니지 않는가. 영적으로 본다면 하나님께서 재물을 내려놓게 하고 영원한 선물을 얻게 하신 것이다. 납득하기 어려운 말씀이지만 재물을 잃고 하나님을 만나게 됐다면 이보다 더 큰 은총이 어디 있겠는가. 병들어서야 하나님 앞에 손을 들고 나온 사람들도 봤다.

우리는 잃은 것만 쳐다봐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잃은 것을 통해 더 크고 영원한 것을 선물로 준비하고 있음을 믿어야 한다.

본문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다. 이 비유를 통해 우리는 사후의 세계를 볼 수 있다. 본문에 두 사람이 나온다. 한 사람은 부자이다.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은 것을 보면 신분이 높은 귀족임을 알 수 있다. 그는 날마다 호화롭게 잔치를 벌였다. 나사로라는 거지는 헌데를 앓고 있었다. 생계가 막막해 이 부자의 대문 앞에서 부자가 먹고 남은 것들로 목숨을 이어가고 있었다. 가난한 것도 힘든데 병이 들어 몸까지 망가진 것이다.

예수님은 두 사람의 인생에 대해서 길게 말씀하지 않고 22절에서 곧바로 두 사람의 죽음을 말씀하셨다. 먼저 거지 나사로의 죽음에 대한 말씀이 나온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인간이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은 명백히 말씀하셨다. 거지 나사로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고 하셨다. 천국에 들어갔다는 말씀이다.

부자는 죽은 뒤에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고 예수님은 묘사하셨다. 이 부자는 음부에 떨어져 꺼지지 않는 불 속에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당하게 된 것이다. 부자는 불 속에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브라함 품에 있는 나사로로 하여금 손가락으로 물을 찍어 이 뜨거움을 식혀달라고 소리쳤다.

아브라함은 부자에게 한마디 했다.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부자는 자기 좋을 대로 한세상을 살았다. 그의 마음에는 믿음도 하나님도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영원한 세계에도 관심이 없었다. 재물과 세상의 향락이 그의 주인이었다. 부자는 재물과 땅의 영광을 얻었다. 즐기고 누렸다. 이것이 인생의 전부였다.

그러는 동안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천국을 잃어버린 것이다. 땅의 것만을 바라고 인생을 산 것이다. 그러나 거지 나사로는 재물도, 건강도 잃어버렸지만 천국에 이르는 믿음을 잃지 않았다. 땅의 것은 잃었지만 하늘의 것은 잃지 않았다.

이 땅의 것을 움켜쥐었지만 땅의 것 때문에 하늘의 것을 잃어버렸다면 그 믿음은 실패한 것이 아니겠는가. 인생에서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얻었는지 돌아보면서 사는 자가 지혜를 가진 사람이요 복된 성도이다.

오세선 홍천 명업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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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의 글 / 십자가는 완성입니다   


요한복음 19장 30절

“다 이루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기 직전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목마르다”고 하셨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인간적으로 극심한 고통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것은 무언가를 완성했다는 의미입니다. 완성이라고 하면 자신이 볼 때 만족스러운 상태, 흠이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렇게도 힘든 십자가의 잔을 마시면서 다 깨지고 상하신 상태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십니다. 도대체 이런 상태가 어떻게 다 이룬 상태가 될 수 있을까요.

생각해 보니 이 원리는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에덴동산을 생각해 보십시오. 에덴은 완전한 곳이었습니다. 그 에덴동산 가운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것을 거기에 두었을까요. 에덴동산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어야 완성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이 동산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데는 조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창조주가 계시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바로 이 땅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겉으로 볼 때 제한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결국 완성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단은 그것은 완전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만족과 제한이 없는 상황을 추구하라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바로 그 말에 넘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로 온 세상이 그 말에 계속 속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내실 뿐 아니라 우리가 속은 거짓말에서 회복시키는 유일한 길입니다. 진정한 완성은 내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결점 같아 보이는 것을 통해 나를 죽이면 그곳에서 완성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경험한 것 같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서 이런 말씀을 합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약점과 아픔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더욱 온전해진다는 것입니다. 약점이 도리어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다가 원하지 않는 일이 일어나면 당황합니다. 때로는 원망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당신의 삶에서 원하지 않는 일이 일어나면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님을 기억하라.”

 

만약 그것을 통해서 자아를 죽이면 그곳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내 인생에 일어난 어려운 일들이 축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진짜 문제는 내가 만족스러운 상태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자아에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내 교회와 가정과 사회가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모든 분쟁의 근원이 됩니다. 반대로 자기를 버리면 그곳에 평화가 생깁니다. 자기를 부인하면 그곳에 진정한 만족이 생깁니다. 당신은 십자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나요. 아니면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나요.

이경렬 부산 온천제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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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글 / 믿음이란 시선이 바뀌는 것이다

 

히브리서 11장 1∼2절

이솝 우화에 ‘토끼와 거북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토끼와 거북이가 달리기 경주를 했는데 거북이가 이겼다는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거북이는 경주를 할 때 처음부터 끝까지 언덕 위에 있는 깃발만 보고 전진했습니다. 토끼가 열심히 뛰든 말든, 낮잠을 자든 말든, 거북이는 경쟁자와 자신을 비교하기보다는 오직 깃발만 보고 묵묵히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반면 토끼는 어땠습니까. 토끼는 처음부터 거북이만 보고 달렸습니다. “저런 느림보 거북이 같으니…”라고 비웃으며 안심하고 낮잠을 자다가 토끼는 결국 거북이에게 뒤지게 됐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시선이 바뀌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눈은 지금 누구를 바라보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아직까지 “주만 바라볼지라”가 아니라 세상만 바라보며, 주변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스스로 한탄하고 배 아파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저는 확신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제일 먼저 바뀌는 것은 바로 우리의 눈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가치관이 바뀌고, 기준이 바뀌고, 삶의 목표가 바뀌는 것입니다.

가나안땅을 정탐했던 12명을 보십시오. 10명의 정탐꾼들은 그곳에 사는 거인족속과 견고한 성을 봤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봤습니다. 다니엘이 봤던 것도 사자가 아닙니다. 배고픈 사자가 자신에게 덤벼드는 것을 봤다면 그는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눈은 바꾸지 않고 삶만 바꾸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눈을 바꾸는 종교입니다. 마태복음 13장 44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우리가 왜 예수를 믿습니까. 우리가 왜 주일마다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립니까. 그것은 바로 보물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눈이 변화되는 것이 축복입니다. 눈이 변화되는 것이 부흥의 첫걸음입니다. 눈이 변한 사람만이 세상의 가치관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살 수 있습니다. 믿음의 장이라고 불리는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 11:1∼2)

믿음은 남들이 볼 수 없는 것, 그것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망 속에서도 소망을 보며,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보며, 심판 중에 구원을 볼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 안에서 변화받은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과거에는 다른 사람의 부정적인 면만 보이고, 다른 사람의 단점만 보였지만 언제부턴가 감사가 보이고, 희망이 보이고, 그들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인생의 구주로 삼은 사람에게는 이런 고백이 나오리라고 믿습니다.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오늘 하루를 살면서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며 한탄하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만 바라보며 묵묵히 전진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김호진 목사(서울베델루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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