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의 만남

 

 

하나님과 친밀하게 동행하는 삶을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하나님과의 만남의 시간입니다.

이 시간이 없이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의 시간과 관련하여 우리는 우리 삶의 모델이신 예수님에게서 네 가지 요소를 배울 수 있습니다.

-여주봉의 [내발의 등] 중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해서 우선적으로 기도를 통해 나아가야 합니다.

또한 정기적으로 시간을 떼어서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또한 한적한 곳에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충분한 시간동안 하나님 앞에 머물러야 합니다.

회막은 하나님을 찾는 곳입니다.

우리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회막이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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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가 주는 유익 Benefits of Prayer

 

 

 

1)확신적인 신앙을 가질 수 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고 또 기도가 응답되고 성취 되었을 경우

우리들 심령에 어떤 현상이 일어 날 것인가 대하여는 두말 할 여지가 없다.

"과연 하나님은 살아 계시는구나","과연 하나님 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시구나!",

"과연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다!"
"과연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시는구나!"......등 확신적인 신앙이 확립되는 것이다

2)영적 평화를 얻는다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 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이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우리는 지금 각박한 세상에 살면서

여러 가지로 괴롭고 답답하고 무거운 짐들을 많이 짊어지고 있다.

이럴 때 신앙 없는 사람들은 근심 걱정 번민에 시달린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평강이 그 마음속에 가득히 넘치는 것이다

3)영혼이 자란다


성도의 거듭난 영혼은 자라나도록 되어있다

성도란 그리스도의 충만한 데까지 자라나야 할 하나님의 사람들이다(엡4:13)
그러면 영혼 성장의 방법은 무엇인가?
두가지 요소가 있다 즉 말씀(성경)과 기도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의 양식이 되므로 필요하고

기도는그 양식(말씀)을 소화시키는 작용을 하므로 필요하다.
한 마디로 말해서, 말씀 없이 또는 기도없이는 영혼이 자라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4)하나님의 인도를 받는다


기도란 자신의 모든 일들을 주님께 부탁하고 맡기는 행위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도는 기도하는 사람에게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인도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지혜로 나타난다
*특별한 경험으로 나타난다(은혜...은사...
*환경의 조성으로 나타난다+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5)일이 형통한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나타나면 일은 저절로 해결된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도우시는가? 두말할 것도 없이 기도하는 사람을 도우신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사람이다

6)매사에 유능한 사람이 된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가장 약한 자라고 생각했다(고후12:9).
그러나 그는 약자로써 세상을 살지 않았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이것도 사도 바울의 신앙고백이다

이것을 보면 바울은 가장 능력있는 사람으로서 세상을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이렇게 능력 있게 하시는가?

두말 할 것도 없이 기도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약함을 솔직하게 시인하면

오직 기도로써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에게 큰 능력과 배경이 되어주시는 것이다.

당신은 능력있는 신자가 되기를 원하는가?

또 능력있는 직분자,능력있는 생활인이 되기를 원하는가?

그러면 기도의 사람이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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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당에 갔느냐? 지옥에 갔느냐?



옛날 스님 한 분이 절에서 먼 마을로 탁발(托鉢:적선을 구하는 일)을 나갔다가
날이 저물어 어느 양반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습니다.

이튿날 아침에 스님은 주인과 하인이 대화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마당쇠야"

"예, 주인마님"

"윗마을에 사는 박첨지가 어젯밤에 죽었다는데,
그가 지옥에 갔는지 천당으로 갔는지 알아보고 오너라."

예"

그 말을 듣고 있던 스님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일평생 염불과 참선수행을 하였지만 죽은 사람이 천당으로 가는지 지옥으로
가는지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는데, 이 영감이 어떻게 저런 소리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당쇠가 돌아와 주인에게 아룁니다. "지옥으로 갔습니다요."

스님은 더욱 기가 막혔습니다.

'저 마당쇠가 죽은 사람이 지옥으로 가는 것을 볼 수 있는 신통력이라도 있는
것인가?'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있는데,
주인이 또 마당쇠에게 지시하였습니다.

"얘 마당쇠야, 아랫마을 김진사도 죽었다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보고 오너라."

마당쇠는 한참 만에 돌아와서 이렇게 고합니다.

"영감마님, 김진사께서는 천당으로 갔습니다요."

이 말을 듣고 더 이상 궁금함을 억누를 수 없었던 스님은
주인을 찾아가려고 일어서는데, 때마침 주인이 밥상을 내오기에
물어보았습니다.

"처사님(處士:초야에 묻혀서 벼슬을 하지 않은 선비),
죽은 사람이 지옥에 갔는지, 천당에 갔는지 도대체 어떻게 압니까?"

주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합니다.

"죽은 사람 동네에 가면 금방 알 수 있지요.
모든 사람들이 '그 사람, 나쁜 일만 일삼고
남을 못살게 굴었으니 지옥 갔을 거야'라고 말하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지옥밖에 더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 동네에 꼭 필요한 사람이고
착하고 아까운 사람'이라고 모든 사람들이 아쉬워하면
그 사람은 필경 천당에 갈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약2:17)

오늘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오늘의 교회를 향하여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귀 기울이고 들어야 할 것입니다.


미국의 백만장자 록펠러(John D. Rockefeller 1839-1937)는
유년시절에는 아주 가난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열심히 노력하여 33세에 백만장자가 되었고,
43세에 미국의 최대 부자가 되었으며,
53세에 세계의 최대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고백과 같이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55세에 불치병에 걸렸는데, 모든 의사들은 남은 수명이 1년밖에 안된다고
했습니다.

그는 절망가운데 마지막 검진을 받으려고 휠체어를 타고 갈 때,
병원 로비에 걸려있는 액자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

그 글을 보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 전율이 생기고 눈물이 났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모으기만 했지 줄 줄을 몰랐구나.

선한 마음이 온 몸을 감싸는 가운데 눈을 지그시 감고
지금까지 자기가 살아온 삶에 대하여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조금 후 주위의 시끄러운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떤 어머니가 딸의 입원비 문제로 애걸하며 다투는 소리였습니다.

병원 측은, 입원비가 없으면 입원이 안된다 하고,
어머니는 입원시켜 달라고 울면서 사정하는 소리였습니다.

록펠러는 곧 비서를 시켜 소녀의 병원비를 지불하고
누가 지불하였는지 모르게 하였습니다.

얼마 후 은밀히 도운 소녀가 기적적으로 회복이 되어 퇴원하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든 록펠러는 얼마나 기뻤던지 후일, 그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인생을 살면서 이렇게 행복한 삶이 있는지를 몰랐다!."

그때부터 그는 나누는 삶을 작정하였는데, 신기하게도 그의 병이 치료되기
시작하였답니다.
그 뒤로 그는 98세까지 살면서 나누는 일에 힘썼고 자선사업에 인생을 
바쳤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는 이렇게 회고합니다.

"내 인생 전반기 55년은, 쫓기면서 불행하게 살았으나,
후반기 43년은 참으로 행복하였노라."

이렇게 록펠러의 인생을 변화시킨 것은 누구입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한 교회였습니다.

"항상 정당한 방법으로 최대한 벌어서,
베풀 수 있는 만큼 베푸는 것이 신앙인의 의무니라.”고 전하는
교회였습니다.

인생은 나누는 것이 "행복"이요, "평화" 이다. 


 <오늘의 말씀>

너는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영원히 살리라”(시편3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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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일당은  한 데나리온

 

포도원 주인의 횡포?

 

마태복음 20장에서 하루 일당 한 데나리온에 일꾼을 고용한 포도원 주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인은 아침 9시뿐만 이 아니라 정오, 오후 3, 오후 5시에도 시장을 돌며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데요. 저녁 6시가 되고 일당 정산을 하는 과정에서 주인과 일꾼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집니다.

 

9)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을 한 일꾼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10) 그런데 맨 처음에 와서 일을 한 사람들은, 은근히 좀 더 받으려니 하고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13) 그러자 주인이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보시오, 나는 당신을 부당하게 대한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14) 당신의 품삯이나 받아 가지고 돌아가시오. 당신에게 주는 것과 꼭 같이 이 마지막 사람에게 주는 것이 내뜻 이오.

 

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내가 후하기 때문에, 그것이 당신 눈에 거슬리오?”하였다.

 

이 이야기는 연식이 늘어갈수록 이해하기 어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유치부 시절에는 순수한 마음으로 편견 없이 이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있지만, 성인이 되고 사회의 치열한 경쟁 속에 시달리며 한 달 한 달 버티다보면 언젠가부터 아 침 9시부터 일한 사람의 불평이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각자의 일한 시간을 고려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모든 일꾼에게 동일한 일당을 준 포도원 주인의 뜻은 무엇일까요? 그는 갑의 횡포를 부리는 악덕 고용주인 걸까요? 이 비유에 담긴 뜻을 풀어내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번 글에서 저는 과학의 관점에서 이 비유를 드신 예수님의 뜻을 헤아 려보려 노력해보겠습니다.

 

아이폰을 압도하는 놀라운 발견, 미적분학의 기본정리

 

고등학교 수학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미적분학의 기본정리를 이해하는 것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어떤 좋은 조건 하에서 다음 식이 성립합니다. 1

 

1 고등학생 시절에 보았던 식과 약간 다를 것입니다. 고등학교 미적분학에서 배웠던 미적분학의 기본정리를 복소함수 버전으 로 아주 약간 일반화한 것입니다. 혹시라도 있을 이공계 독자를 위해 조금 더 정확하게 서술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f는 복소 함수, Ff의 역도함수, γ는 복소평면 위 두 점 a, b를 잇는 path.

 

갑자기 수식을 만나서 많이 놀랐죠? 괜찮아요? 어디 다치진 않았어요? 많은 분들이 갑작스러운 수식에 불편한 마음 을 가지시겠지만, 겁 먹을 필요 하나도 없습니다. 저는 이 글에서 계산 따윈 하나도 하지 않을테니까요. 해치지 않겠 습니다. 저는 지금 위 식이 아이폰 따위는 가뿐히 압도해버릴만큼 놀랍고 신기한 발견임을 설명해 드리려해요. 그리 고 그 놀라운 원리는 오늘 인용한 자비로운 포도원 주인의 이야기와도 일맥상통합니다.

 

우선 위 식의 왼쪽은 대단히 어려운 계산입니다. 수학에서 (integral)은 다 더하라는 명령어인데요. 다시 말해 식의 왼쪽은 시작점 a부터 도착점 b까지 어떤 길 γ을 걸어가면서 얻는 함수 f의 값을 다 합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최종적인 값은 함수 f뿐만 아니라 경로 γ에도 영향을 받음이 분명합니다.

 

반면 식의 오른쪽 F(b) F(a)은 너무 쉬운 계산인데요. 그냥 단순히 두 출발점(a)과 도착점(b)을 함수 F에 입력하고 출력된 두 값을 빼면 되니까요. 한 가지 유심히 봐야 할 점은 오른쪽 계산을 하는데에는 경로 γ가 전혀 사용되지 않았 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식의 왼쪽과 오른쪽은 등호 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왼쪽을 보면

 

a 에서 b까지 가는 무수히 많은 길 중에서 무엇을 선택할지가

 

대 단히 중요한 문제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 지만 어떤 길을 선택해도

 

a 에서 출발하여 b에 도착했다면

 

최 종적인 출력값은 변하지 않는다고 오른쪽이 보장해줍니다.

 

정말 놀랍지 않나요? 언뜻 생각하기에 이 결과는 대단히 반직관적이며 공평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해요. 하지만 조금만 유심히 자연과 사회를 관찰해보면 여러 현상들이 이러한 원리에 의해 작동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데요.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볼게요.

 

모로 가도 서울로 가면 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하철을 탈 때를 생각해봅시다. ‘국회의사당역에서 승차 하여 막장역에서 하차했다면 중간에 내가 어떤 경로를 택해 몇 번 환승을 하건 요금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또한 우 리는 택시를 이용할 때 출발점과 도착점에만 의존하여 요금을 가늠하며, 운전 기사의 미숙함 또는 고의에 의해 이동 거리에 비례하여 추가 요금이 붙는 것을 무척 싫어하고 불합리하다고 생각합니다.

 

설악산 입구에서 설악산 정상까지 올라간다고 생각해보세요. 어떤 등산로를 택하여 올라가건 정상과 입구의 고도(高度)차는 1,708 m로 변하지 않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전하를 띤 물체가 전기장 속을 움직일 때 하는 일의 총량은 도착

 

점과 출발점의 전기적 위치 에너지의 차와 같습니다. 이 전위차를 우리는 흔히 전압이라 부릅니다. . 110 볼트, 220 볼트 하는 그 전압이요.

 

누구에게나 주어진 선물, 구원

 

이제 이과생스러운 이야기는 그만 접고, 다시 마태복음 20장으로 돌아가 생각해봅시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포도원 주인이 임금을 정산할 때 누가 얼마나 열심히 일을 했는지, 누가 꾀를 부렸는지, 얼마나 많은 소출을 내었는지를 세밀 하게 따지는 것이 합당해보입니다. 마치 식의 왼쪽에서 경로를 신경쓰며 계산하는 것처럼요.

 

하지만 실제 포도원 주인은 모든 일꾼이 포도원에서 일을 하였다는 사실에만 주목하였습니다. 포도원에 입장했고, 끝 까지 자리를 지켰다면 누구나 임금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식의 오른쪽에서 출발점과 도착점에만 주목하여 계산하는 것처럼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하루 하루 생계를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일할 기회와 가족을 부양할 임금을 주는 것이 포도원 주인의 자비로운 마음이었을테고, 우리에게 구원을 선물로 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일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는 것이다. 요한복음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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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기고, 따라가고  

로마서 11장 36절

 

2017년 하면 왠지 모를 아쉬움과 후회가 있습니다. 그래서 “2017년 새해에는”이라고 하면서 각오를 다집니다. 새해에는 후회하기보다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고 했습니다. 먼저,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고 했습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라는 말씀은 창세기 1장 1절을 증거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돼 있습니다. 피조물의 근원과 인류 역사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됐다는 것입니다.

또 ‘주로 말미암고’는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뜻입니다. 나 그리고 나와 관련된 모든 분야를 하나님이 관리하십니다. 나, 가정, 사업장, 직장, 교회를 하나님이 운영하십니다.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역사를 마무리하신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1절에 ‘없어졌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유’에서 ‘무’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면 하나님도 일을 끝냅니다. 기독교 역사관은 분명합니다. 타 종교가 말하는 것처럼 끝없이 돌고 도는 것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가지고 그 방향으로 달려갑니다. 이것을 잊지 않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하나님은 인간의 삶을 통해 역사를 운영하십니다. 우리가 한 해를 시작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이끄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생각과 욕심에 아등바등할 뿐이지 결국 하나님의 이끄심에 순복하게 돼 있습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그는 큰 자가 되기 위해 아등바등했습니다. 인위적인 방법으로 장자권과 축복권을 움켜쥐었습니다. 외삼촌 집에서도 자기 방식대로 살았습니다. 자기 왕국을 세우기 위해 세겜으로 갔습니다. 그 결과 형 에서로부터 살해 위협을 받았고, 외삼촌에게 죽을 뻔했고, 가나안 사람들에게 온 가족이 원수가 돼 몰살당할 위험에 빠졌습니다. 권모술수로 얻고자 하는 것을 얻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과 재산을 모았지만 대가가 너무 컸습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지 않으셨다면 야곱의 인생은 종지부를 찍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기 인생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나그네로 이 땅을 산 지 백삼십년 밖에 안 되지만 험한 세월을 살았노라” 산전수전 다 겪은 후 하나님께 순복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이후 그는 하나님 말씀에 따라 벧엘로 올라갔고, 지팡이를 의지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면서 생애를 마감했습니다.

세 번째, 내가 하나님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복 받기 원한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요. 우리의 마음이 온통 하나님에게 열려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성경에 손이 저절로 갑니다. 말씀이 가슴에 채워집니다. 설교가 들립니다. 자연스럽게 깨닫습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분명해집니다.

환경을 초월하고 손에 쥔 것이 없다 할지라도 감사합니다. 방법이 없는데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감사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이끌리는 삶입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복입니다. 아무쪼록 올 한 해 하나님께 쓰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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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역사, 은총의 빛   믿음의 글  

 

이사야 49장 1~6절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 평강이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2017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로운 역사의 문이 열렸습니다. 새 역사는 신앙인에게 주님이 이끄시는 역사, 주님이 계획하시는 역사입니다. 바울 사도는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었다”(엡1:11)고 했습니다. 주님이 이끄시는 역사 속에서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만나고 삽니다. ‘주님의 역사’는 ‘은혜의 역사’입니다. 세상의 역사는 ‘은혜 없는 역사’의 반복입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는 말씀이 있습니다. 은혜의 빛을 깨닫지 못하는 세상은 은혜 없는 역사의 반복입니다. 말씀에 의지하지 않는 시대, 믿음이 없는 시대, 죄의 본성을 따르는 악순환의 반복입니다. 이것을 멈추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주님의 은혜입니다. 1800년대 인물인 조지 뮐러는 ‘고아의 아버지’로 불렸습니다. 60년이 넘도록 1만명의 고아들을 보살피는 위대한 사역을 했습니다. 이 위대한 사역을 감당하는 단 한 가지 방법은 기도였습니다. 은혜가 메마른 이 세상에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오늘도 살아계십니다. 은혜 없는 악순환의 시대에도 우리에게 은혜의 빛을 비추고 계십니다. 주님의 역사에는 ‘은혜의 능력’이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 보시기에 영화롭게 되었으며 나의 하나님은 나의 힘이 되셨도다.”(사49:5)

주님의 역사 안에서는 나의 능력, 나의 생각, 나의 힘, 나의 명예, 나의 지혜로 살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만으로 사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연약할지라도 주님의 은혜 안에 있고자 한다면 은혜의 능력과 힘이 믿음의 자녀들에게 역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했을 때 역사를 봅시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라 광야의 메마른 사막이었습니다. 그들은 40년을 그곳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역사와 능력이 일어났습니다. 하늘의 만나를 먹이시고, 메추라기를 먹이시고, 반석에 생수를 내시고, 입히시고 돌보셨습니다. 광야같이 메마른 곳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은혜가 부어지고 주님의 은혜의 능력으로 사는 곳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우리가 광야에 놓인 것 같은 인생을 살면서도 불안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거센 폭풍처럼 세상의 방해가 일어나는데도 왜 마음은 평안할까요. 주님 은혜의 능력 덕분입니다. 주님은 은총의 빛으로 역사를 이끄십니다.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사49:6) 주님은 은총의 빛을 지금도 비추고 계십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믿음의 선진들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바라고, 믿음으로 증거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봤고, 증거로 얻었을까요. 주님의 은총의 빛입니다. 세상을 향한 주님의 은혜입니다. 은혜의 능력이 믿음의 선진들을 증거 받은 사람들이 되게 했습니다.

주님의 역사 가운데서 주님은 우리를 은혜의 빛의 증거자로 부르셨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은총의 빛, 생명의 빛을 우리에게 비춰주시고 승리하게 하심으로 주님의 역사를 이끄십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멘.

김장헌 새길루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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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복 있는 사람  

 

마태복음 5장 3절

10여년 전 단기선교팀을 이끌고 아프리카 케냐의 해안가 무슬림 지역을 방문했던 때였습니다. 아프리카는 물 사정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 해안가는 더욱 그렇습니다. 우물을 파도 얕게 파면 짠물이 섞여 있기 때문에 깊이 파야 해서 비용이 많이 듭니다. 그런데 무슬림 사원인 모스크에는 언제나 우물이 있습니다. 모스크에서는 이방인이나 이방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우물을 이용하지 못하게 하고, 무슬림들만 이용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무슬림 지역의 기독교인들은 바로 옆 모스크에 우물이 있어도 수㎞를 걸어가 물을 길어 와야 했습니다. 그 마을에서 우리가 전도를 시작하자 한 무슬림이 우리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알라는 이렇게 돈이 많아서 우리에게 우물도 파주고 한다. 그런데 너희가 믿는 예수는 가난해서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데, 무엇 때문에 그를 믿어야 하는가.” 이 말이 오늘도 제 귓전을 때립니다. 돈이 없는 가난한 예수는 아무것도 우리에게 해주지 못한 것인가. 가난하면 안 되는 것인가. 그런데 왜 예수님은 그렇게 가난한 말구유에서 태어나셨는가.

최근 한 선배 선교사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아프리카에 있었던 영적 부흥의 역사를 알았습니다. 아프리카 교회의 역사에도 선교사가 아니라 주민들 스스로 영적인 변화를 통해 부흥을 일으킨 시대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도 이 아프리카에 어느 대륙보다 큰 영적 부흥이 있고, 4억명 정도의 크리스천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선배 선교사께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가난했기 때문에 다른 것을 붙잡지 못하고 예수님만 붙잡을 수 있었다. 다른 것은 바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만 의지했다.”

가난이 힘들기는 하지만 그 가난이 우리의 인생과 삶을 진지하게 한다는 것을 저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고 삶의 진정한 가치를 알려고 하는 것이 가난함에 있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어느 인디언 추장이 미국 대통령에게 이런 조언을 했다지요. “어떻게 하늘, 그리고 땅을 팔고 살 수가 있을까요. 우리에게는 아주 이상한 생각입니다. 신선한 공기와 반짝이는 물은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을 팔 수 있습니까.” 세상에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존재할 때 아름다움과 고귀함을 유지하고 지킬 수 있습니다. 신앙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믿음도 돈으로 매겨보려 하는 우리의 어리석음 때문에 주님의 귀한 가르침마저 뒷전으로 밀리고 있습니다. 저는 무슬림의 말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이전에는 더 많은 재정을 이곳 아프리카에 쓰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재정만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저에게도, 저의 자녀에게도 그리고 아프리카 형제와 자매들에게도 돈으로 살 수 없는 예수를 제대로 전하고 싶습니다.

한국의 어느 시골 교회에서 수요예배를 드릴 때 그곳 목사님이 부르셨던 노래가 기억납니다. 지금도 그 노랫소리가 귀에 쟁쟁합니다. 그 노래를 부르며 울었던 그 시간을 기억합니다. “돈으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힘으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거듭나면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잘 생겨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지식으로 못가요 하나님 나라 거듭나면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이상윤 목사 (케냐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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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꿈꾸며 살아가야 할까?  

마태복음 6장 19∼34절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요소가 무엇일까요? 상호 신뢰 없이는 살아가기 어렵지 않을까요? 그래서 우리가 사는 사회를 신용이 필요한 사회, 신용사회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현금보다 편리한 카드 사용이 일반화되기까지는 개인과 기업의 신용이 담보되어 있습니다. 신용이 무너지면 부도가 나고 파산하게 됩니다.

신앙생활도 같습니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출발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물어봅니다. “나를 정말 신뢰하느냐?” 살아계시며 전능하신 하나님, 나를 돌보시는 하나님으로 믿고 있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모든 일에 믿음이 없어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돌보심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이 먼저라고 말씀하십니다.

삶의 문제 대부분이 먹고사는 것과 관련된 게 아닐까요? 그러나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며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믿음 없는 사람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믿고 고백한다면 먹고사는 일에 얽매이는 삶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분의 뜻대로 살아갈까를 고민하며 구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것이 믿음이요, 하나님을 향한 의를 이루는 것입니다(창 15:6, 롬 4:3).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내게 가장 소중한 보물을 하늘에 쌓아 그의 나라와 의를 이루어 가길 원하십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내 마음이 있기에 나의 마음과 순종을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보물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도록 요청하십니다.

먹고사는 문제에 사로잡혀 보물을 땅에 쌓아두는 어리석은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의를 이루어가는 믿음의 사람이 됩시다. 내가 무엇을 바라보며 꿈꾸는가에 따라 보물의 위치가 결정됩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라 하십니다. 눈이 나쁘면 어둠이요,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입니다. 무엇을 보며 꿈꾸는가에 따라 내 몸이 밝기도 하고 어둠에 갇히기도 합니다. 먹고사는 문제에 마음을 빼앗기면 온몸이 어둠에 갇히며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온몸이 밝을 것입니다.

모세는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더 큰 재물로 여겨 상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히 11:26). 모세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민족의 지도자로 출애굽의 큰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우리도 눈을 들어 하늘의 소망을 바라보며 상 주시는 하나님을 소망합시다(빌 3:14). 우리의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온 몸이 밝아 어둠을 몰아낼 것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음같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내게 있어 보물은 무엇인가요? 출세입니까? 돈 명예 권력입니까? 나를 입히시고 먹이시며 필요를 채우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나의 아버지로 믿고 보물을 하늘에 쌓아봅시다.

내 삶의 모든 것을 드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이 우선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내 삶의 주인이 출세나 돈이나 명예와 권력과 같은 먹고사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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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글  / 예수가 빛이다   

  

마태복음 4장 12∼23절

이사야서의 전체적인 배경은 ‘흑암’과 ‘어둠’입니다. 이사야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쳐올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흑암과 어둠은 절망을 의미합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을 ‘절망하는 존재’로 규정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실존하는 인간,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제외한 모든 인간’은 절망합니다.

‘믿음 없음’이 곧 절망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모두 절망합니다. 절망은 곧 죄입니다. 이사야서에서 말하는 흑암과 어둠은 믿음 없이 절망 속에서 허우적대는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이사야가 이들에게 비쳐올 것이라고 예언한 빛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가장 먼저 “빛이 있으라”(창1:3)고 하셨습니다. 그 빛으로 어둠을 밝히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의 말씀을 보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그 하나님께서, 그 로고스(말씀)께서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생명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 빛이 비치는 곳마다 생명이 싹트게 하는 참 생명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이 캄캄하고 공허하고 절망적입니까.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정치 지도자들이 미덥지 못하거나 범죄자들이 들끓어서인가요. 주머니 사정이 좋아지지 않아서인가요. 그런 것도 한몫하겠지만 근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삶에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우리 삶의 밝기는 달라집니다. 흑암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십니까. 우리의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다른 대안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우리의 빛이고 소망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이 기록돼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셨고, 부름을 받은 제자들은 예수를 따라갔습니다. 여기서 ‘따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가르치셨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고 병들고 약한 자들을 고치셨습니다. 그로 인해 예수님께서 가는 곳마다 수많은 무리들이 따라다녔습니다. 하지만 이후 수많은 무리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는 성난 군중이 됐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이 돌변한 이유는 십자가의 길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것은 십자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가 교회 위에 뿌려졌습니다.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잔인함은 흑암이라 말할 수 있으나 그들의 순교는 결코 흑암이 될 수 없습니다. 고난 속에 감춰진 십자가의 영광이며, 그 영광의 빛은 지금까지도 우리를 강하게 비춥니다. 진정한 영성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순교한 이들의 삶 속에서 빛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그 빛을 발했던 것처럼 말이죠.

우리는 지금 예수님이 생명의 빛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주현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마4:16)는 말씀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킬지어다.

김동진 목사 (맑은샘루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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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의 글 / 신앙과 삶이 만나는 자리 


야고보서 2장 14∼23절

믿음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신념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입니다. 신념은 자신에 대한 믿음입니다. 신앙은 하나님 말씀을 의지하고 믿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에서는 믿음을 세 부류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감정이 앞서는 믿음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아무런 효력을 가지지 못함을 강조하는 의미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단순히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아예 죽은 믿음입니다. 헐벗고 굶주린 이웃을 보면서 동정심만 느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니라(17절)”라고 성경은 결론을 내립니다.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만으로, 말로만 하는 믿음은 죽은 것과 다름없다는 뜻입니다.

둘째, 지식이 앞서는 믿음입니다. 사탄은 성경에 대해 성도들보다 해박합니다. 광야에서는 성경 지식을 바탕으로 예수님을 시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 오직 한 분이신 줄 알고 그 하나님만 의지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이 생활화될 때 그 말씀의 씨앗이 자라나 30배, 60배, 100배의 기적을 맛볼 수 있습니다.

 

셋째, 따르고 함께하는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은 살아 있고 능력 있는 믿음을 가졌던 한 사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자신의 아들을 바치라는 하나님 말씀에 그는 어떻게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바로 하나님과 그 사랑, 그 능력을 믿고 따랐던 것입니다. 모든 것을 이루시고 채워주신 하나님, 불가능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체험하고 믿었기에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던 것입니다. 절망하면서 드린 것이 아니라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드렸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이것이 살아 있는 믿음의 능력입니다.

이런 행동하는 믿음, 즉 신앙과 삶이 만나는 촉매제 역할을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성령님입니다. 예수님 열두 제자들의 삶이 변화된 것은 3년 동안의 제자훈련이 아니라 오순절날의 성령 체험이었습니다. 그들은 성령이 충만해지면서 방언을 하게 됐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출발점이요 선교의 단초가 된 것입니다.

 

성경 공부를 하고 제자 양육을 받더라도 성령의 본을 받지 못한다면 우리의 모든 사역은 무용지물이 됩니다. 오늘 이 시대에 복음화의 처음과 나중, 알파와 오메가는 오직 성령님뿐입니다. 그래서 모든 교회와 기독인들이 전심으로 올라야 할 고지는 오직 성령 충만의 고지입니다. 심혈을 기울여 사모해야 할 주제 역시 오직 성령 충만입니다.

오늘날 세상 지식은 넘치고 넘치지만 초대교회가 보였던 능력을 쉽게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은과 금은 점점 풍족해지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할 만한 능력은 부족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이 아닌 것을 믿음이라 착각하고 바른 믿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신앙과 삶을 연결하는 성령님을 죽도록 사모해야겠습니다.

지식이 앞서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의한 행함과 함께하는 진정한 믿음이 있을 때 그 자리가 신앙과 삶이 만나는 자리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모습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아멘.

남형우 목사 (문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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