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일당은 한 데나리온
포도원 주인의 횡포?
마태복음 20장에서 하루 일당 한 데나리온에 일꾼을 고용한 포도원 주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인은 아침 9시뿐만 이 아니라 정오, 오후 3시, 오후 5시에도 시장을 돌며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데요. 저녁 6시가 되고 일당 정산을 하는 과정에서 주인과 일꾼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집니다.
9절)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을 한 일꾼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10절) 그런데 맨 처음에 와서 일을 한 사람들은, 은근히 좀 더 받으려니 하고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13절) 그러자 주인이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보시오, 나는 당신을 부당하게 대한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14절) 당신의 품삯이나 받아 가지고 돌아가시오. 당신에게 주는 것과 꼭 같이 이 마지막 사람에게 주는 것이 내뜻 이오.
15절)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내가 후하기 때문에, 그것이 당신 눈에 거슬리오?”하였다.
이 이야기는 연식이 늘어갈수록 이해하기 어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유치부 시절에는 순수한 마음으로 편견 없이 이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있지만, 성인이 되고 사회의 치열한 경쟁 속에 시달리며 한 달 한 달 버티다보면 언젠가부터 아 침 9시부터 일한 사람의 불평이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각자의 일한 시간을 고려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모든 일꾼에게 동일한 일당을 준 포도원 주인의 뜻은 무엇일까요? 그는 갑의 횡포를 부리는 악덕 고용주인 걸까요? 이 비유에 담긴 뜻을 풀어내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번 글에서 저는 과학의 관점에서 이 비유를 드신 예수님의 뜻을 헤아 려보려 노력해보겠습니다.
아이폰을 압도하는 놀라운 발견, 미적분학의 기본정리
고등학교 수학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미적분학의 기본정리’ 를 이해하는 것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어떤 좋은 조건 하에서 다음 식이 성립합니다. 1
1 고등학생 시절에 보았던 식과 약간 다를 것입니다. 고등학교 미적분학에서 배웠던 미적분학의 기본정리를 복소함수 버전으 로 아주 약간 일반화한 것입니다. 혹시라도 있을 이공계 독자를 위해 조금 더 정확하게 서술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f는 복소 함수, F는 f의 역도함수, γ는 복소평면 위 두 점 a, b를 잇는 path.
갑자기 수식을 만나서 많이 놀랐죠? 괜찮아요? 어디 다치진 않았어요? 많은 분들이 갑작스러운 수식에 불편한 마음 을 가지시겠지만, 겁 먹을 필요 하나도 없습니다. 저는 이 글에서 계산 따윈 하나도 하지 않을테니까요. 해치지 않겠 습니다. 저는 지금 위 식이 아이폰 따위는 가뿐히 압도해버릴만큼 놀랍고 신기한 발견임을 설명해 드리려해요. 그리 고 그 놀라운 원리는 오늘 인용한 자비로운 포도원 주인의 이야기와도 일맥상통합니다.
우선 위 식의 왼쪽은 대단히 어려운 계산입니다. 수학에서 (integral)은 다 더하라는 명령어인데요. 다시 말해 식의 왼쪽은 시작점 a부터 도착점 b까지 어떤 길 γ을 걸어가면서 얻는 함수 f의 값을 다 합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최종적인 값은 함수 f뿐만 아니라 경로 γ에도 영향을 받음이 분명합니다.
반면 식의 오른쪽 F(b) – F(a)은 너무 쉬운 계산인데요. 그냥 단순히 두 출발점(a)과 도착점(b)을 함수 F에 입력하고 출력된 두 값을 빼면 되니까요. 한 가지 유심히 봐야 할 점은 오른쪽 계산을 하는데에는 경로 γ가 전혀 사용되지 않았 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식의 왼쪽과 오른쪽은 등호 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왼쪽을 보면
a 에서 b까지 가는 무수히 많은 길 중에서 무엇을 선택할지가
대 단히 중요한 문제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 지만 어떤 길을 선택해도
a 에서 출발하여 b에 도착했다면
최 종적인 출력값은 변하지 않는다고 오른쪽이 보장해줍니다.
정말 놀랍지 않나요? 언뜻 생각하기에 이 결과는 대단히 반직관적이며 공평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해요. 하지만 조금만 유심히 자연과 사회를 관찰해보면 여러 현상들이 이러한 원리에 의해 작동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데요.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볼게요.
‘모로 가도 서울로 가면 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하철을 탈 때를 생각해봅시다. ‘국회의사당역’에서 승차 하여 ‘막장역’에서 하차했다면 중간에 내가 어떤 경로를 택해 몇 번 환승을 하건 요금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또한 우 리는 택시를 이용할 때 출발점과 도착점에만 의존하여 요금을 가늠하며, 운전 기사의 미숙함 또는 고의에 의해 이동 거리에 비례하여 추가 요금이 붙는 것을 무척 싫어하고 불합리하다고 생각합니다.
설악산 입구에서 설악산 정상까지 올라간다고 생각해보세요. 어떤 등산로를 택하여 올라가건 정상과 입구의 고도(高度)차는 1,708 m로 변하지 않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전하를 띤 물체가 전기장 속을 움직일 때 하는 일의 총량은 도착
점과 출발점의 전기적 위치 에너지의 차와 같습니다. 이 전위차를 우리는 흔히 전압이라 부릅니다. 예. 110 볼트, 220 볼트 하는 그 전압이요.
누구에게나 주어진 선물, 구원
이제 이과생스러운 이야기는 그만 접고, 다시 마태복음 20장으로 돌아가 생각해봅시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포도원 주인이 임금을 정산할 때 누가 얼마나 열심히 일을 했는지, 누가 꾀를 부렸는지, 얼마나 많은 소출을 내었는지를 세밀 하게 따지는 것이 합당해보입니다. 마치 식의 왼쪽에서 경로를 신경쓰며 계산하는 것처럼요.
하지만 실제 포도원 주인은 모든 일꾼이 포도원에서 일을 하였다는 사실에만 주목하였습니다. 포도원에 입장했고, 끝 까지 자리를 지켰다면 누구나 임금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식의 오른쪽에서 출발점과 도착점에만 주목하여 계산하는 것처럼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하루 하루 생계를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일할 기회와 가족을 부양할 임금을 주는 것이 포도원 주인의 자비로운 마음이었을테고, 우리에게 구원을 선물로 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일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는 것이다. – 요한복음 3장 16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