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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글 / 복음의 비밀은 영광의 소망     

 

골로새서 1장 27절

세상의 소망은 꽃처럼 잠깐 있다가 사라집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 헛된 영광을 좇아 시기하고 다투며 살아갑니다. 오늘날 기독교인이 세속화되는 이유는 하늘의 영광을 소망하지 않고, 이 땅의 재물을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재물과 하나님을 겸해 섬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복음의 비밀은 그리스도며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이 창세 전에 계획하신 복은 하늘의 신령한 복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광입니다. 사람은 죄를 범해 거룩하지 못합니다. 때문에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야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영원한 영광을 그리스도와 함께 유업으로 받습니다. 이 유업은 하나님이 창세 전에 계획하신 비밀입니다. 이 비밀은 복음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이 비밀은 너희 안에 있는 그리스도니 곧 영광의 소망”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소망은 믿음이 신실한 성도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충성함으로 하늘에서 받는 아름다운 지위와 상급입니다. 이를 사모하는 사람은 거룩하고 흠 없이 살아가게 됩니다.

구약시대 믿음의 선진들은 하늘의 소망을 바라보며 승리의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 “큰 민족을 이루고, 가나안 땅을 자손에게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번성해 왕들이 나올 것이며, 가나안 온 땅을 영원한 기업이 되리라 언약하셨습니다. 이 약속의 일부는 여호수아시대에 이루어졌고, 왕들에 대한 약속은 다윗시대에 이루어졌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3절에는 믿음의 선진들이 약속의 성취를 바라보고 기뻐하며 믿음을 따라 죽었다고 증거합니다.

참 복은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면서 장막에 거한 것은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위해 하늘에 새 예루살렘 성을 예비하십니다.

이 세상의 재물과 명예는 달란트입니다. 달란트를 가지고 충성한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복을 누리게 됩니다. 구약시대는 복음의 빛이 희미했어도 믿음의 선진들이 하늘의 기업을 소망하며 살았습니다. 오늘날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늘의 소망이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천국에 들어갈 자격과 하나님 앞에 가서 상을 받기에 합당한 삶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마지막장(22장)에서는 예수님 재림의 목적을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얻게 되는 하늘의 기업은 생명보다 귀합니다. 생명을 희생해서라도 이 영광에 참여해야 합니다. 신앙의 목적을 알지 못해 방황하거나 죄악에 얽매이면 안 됩니다. 주를 향한 소망을 분명하게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게 되며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게 됩니다.

지극히 영화롭고, 아름다운 영광의 자리에 참여합시다. 이 영광의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갈망하며 영광의 보좌에 계신 주님 앞에 흠 없는 자녀로 서도록 믿음으로 순종하며 살아갑시다.

황혜연 목사 (인천 세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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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글 / 어두운 시대의 희망    

 

사무엘상 3장 1~10절

선민사상이 투철한 이스라엘 민족은 지금도 자기의 나라를 부를 때 ‘거룩한 땅(Holy land)’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다른 나라보다 그 땅이 기름지고 윤택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나라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나라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메마른 땅입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민족은 자신들의 땅을 거룩한 땅이라 칭합니다. 왜 그럴까요? 여기에는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비록 눈에 보이는 땅은 불완전한 요소가 많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약속한 축복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신앙의 기초 위에 민족의 공동체가 이루어졌고, 나라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땅에서 말씀대로 살면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말씀이 형통이요, 복이라는 증언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보이지 않는 시대였다고 증언합니다. 그것은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희귀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같이 소망이 없는 시대라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소망을 주시려고 아이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사무엘이 부름 받은 시대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경제적으로 풍요를 구가하던 시대였습니다. 여인들은 포도주에 취하고, 제물을 드리는 때에 황소 한 마리를 드릴 수 있었음을 보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도덕적으로는 질서가 파괴됐던 시대였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처럼 성적으로 타락하였고, 관리들은 뇌물을 받아 ‘무전유죄 유전무죄’의 재판이 횡행했으며, 군사적으로는 주변 나라들의 끊임없는 침략에 시달리고 있었던 시대였습니다. 종교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힘을 잃었던 시대였습니다. 다 돌아보면 어려운 시대에 하나님의 정의를 바로 선포하여야 함에도, 자신의 편안함만을 추구하며 살며 더 이상 희망을 기대할 수 없는 시대였습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이 땅에도 많은 문제를 안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정치적으로 이념 대결이 심화되어 있고, 경제적으로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에 불균형이 너무도 심각합니다. 무엇보다 더구나 종교적으로는 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은 증발돼 사라지고, 제 각자의 이권을 추종하는 작금의 현실은 암담할 따름입니다. 때가 이러한데도 겉보기에 그럴듯하여 살 만하다는 생각에 속기도 합니다.

어려운 시대에 주님의 종으로 부름 받은 성도들이 일어나 외쳐야 합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책망하며 백성을 꾸짖듯, 엘리야가 아합을 책망하며 백성에게 권고하였듯, 하나님께서 위탁하신 진리의 말씀으로 힘껏 외쳐야 할 때입니다. 사람의 눈으로 이 시대를 보지 말고, 이 땅의 문제를 제대로 통찰해야 합니다. 말씀이 홍수같이 쏟아져도 그 말들이 사람에게서만 나온 것이라면 그것은 다 헛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고 전해야 합니다. 넘쳐흐르는 축복의 말씀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진정 기뻐하시는 정의의 말씀도 외쳐야 합니다.

이제 영적 침체를 걷어내고 이스라엘 역사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가져온 사무엘 같은 주의 종들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말한 것을 행하리니 그것을 듣는 자마다 모두 두려워 떨리라 이는 엘리가 그의 아들들의 죄악을 엄히 다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라는 주님의 음성이 다시 울리게 될 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 한국 교회의 영적 수준을 높여, 어두운 시대의 희망이 되어야 할 때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멘.

이선규 목사(서울 금천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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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글 / 나는 선한 싸움을 하고 있는가?  
  

소치 동계올림픽에 출전한 우리 선수들의 경기를 보면서 금메달을 향한 열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결과보다는 과정에 응원을 보내는 사람도 많지만 결국 금메달을 딴 선수에게 이목이 쏠리게 됩니다. 이솝우화 ‘토끼와 거북이’에서 거북이는 목표를 향해 쉬지 않았지만 토끼는 거북이를 보고 방심하다가 역전을 당했습니다.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은 결국 승리를 위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이런 노력을 기울인 사람이 마지막에 승리의 면류관을 쓸 수 있습니다. 주변을 지나치게 의식해서는 목표를 달성하기 어렵습니다.

김연아 선수는 러시아로 떠나기 전 홈그라운드의 열렬한 응원을 받고 있는 러시아 선수 율리아 리프니츠카야에 대한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제 갓 데뷔한 선수다. 그 선수 입장에서 이번 대회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다. 다른 선수들의 성적에 신경 쓰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준비한 만큼 잘 보여주고 오겠다.”

김 선수의 목표는 자신을 넘어서는 것이요, 본인이 계획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밖에는 없어 보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선한 싸움을 하며 달려가고 있습니까. 남을 의식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신앙 목표를 세우고 스스로 끊임없이 채찍질을 하고 계십니까.

본문에서는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격려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믿음을 지키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의 직무를 잘 감당하기를 당부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핍박을 받고 감옥에 갇히는 등 어려움이 컸지만 굴하지 않고 적극적인 자세로 최선을 다하는 자세를 디모데에게 강조합니다. 주변 상황을 탓했다면 아마 사역 과정에서 불평을 쏟아내고 스스로를 넘어서는 선한 싸움을 하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의 믿음을 지키는 것도 힘들었을지 모릅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사도요, 부름을 받은 사명자들입니다. 믿음 안에서 최선을 다해 부르심에 합당한 노력을 하고 있는지, 주변 상황을 의식하면서 목표를 잊어버리지는 않았는지 늘 되돌아봐야 합니다.

사순절이 곧 다가옵니다. 믿음의 훈련이 필요한 때입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다짐을 하고 있습니까.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8)는 말씀처럼 여러분에게도 승리하실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여러분은 선한 싸움을 하고 계시나요. 믿음의 선한 싸움을 마치고 의의 면류관을 받아 쓰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 승리의 면류관을 쓰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스케이트 선수들의 발은 훈련 과정에서 생긴 굳은살과 크고 작은 상처를 제외하면 다른 사람들의 발과 다를 게 없습니다. 피나는 노력을 한 그들에게 주어지는 상급은 당연한 것입니다.

항상 입으로 복음을 증거하고 이웃을 섬기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당연한 의무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상급은 모든 이에게 선망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사 52:7).”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승리의 면류관을 위해 지금도 선한 싸움을 하며 믿음의 경주를 하고 있는 모든 분들에게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박정기 목사(대전제일루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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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글 / 기도가 축복을 좌우합니다   

 
 

마태복음 1장 18∼23절

주전 1200년 그리스 이타이카 왕국의 왕 오딧세이는 트로이 전쟁을 떠나면서 자기 아들 텔레마쿠스를 믿는 친구에게 맡겼습니다. 그 친구의 이름이 멘토였습니다. 멘토는 오딧세이가 전쟁에서 돌아올 때까지 왕자의 선생과 아버지, 그리고 친구 역할을 하면서 위로하고 격려하며 키웠습니다.

오딧세이가 트로이 전쟁을 마치고 10년 만에 돌아왔을 때 아들은 당당한 사내로 훌륭하게 성장해 있었습니다. 대신 아버지 역할을 하며 아들을 잘 키웠던 멘토 덕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멘토란 지혜와 믿음, 사랑을 가지고 아버지처럼 이끌어주는 지도자와 동의어로 사용됩니다.

사람이 성공하는 데 가장 필요한 사람이 바로 멘토입니다. 여러분이 힘들고 고난당할 때 여러분을 위로의 길로 이끌어주고 어려울 때 금방 달려와줄 멘토 같은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성도라고 하면 누구나 있습니다. 바로 주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의 영원한 멘토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멘토이신 예수님은 처녀인 마리아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어집니다(18절). 요셉은 마리아의 잉태 문제를 조용히 처리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로 마리아의 파멸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요셉은 그 문제를 가지고 성급하게 행동하지 않고 깊이 기도하며 결정했습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가끔 이해하지 못할 일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도 믿음과 감사를 잃지 않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피할 길을 열어주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임마누엘’로 예언돼 있었습니다(23절). 히브리말로 ‘임마누’는 ‘우리와 함께’란 뜻이고, ‘엘’은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말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하나님이 어떤 선한 목적을 가지고 잠시 침묵하고 지켜보는 일은 있어도 우리를 떠나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1877년 미국의 곡창 미네소타에 3년째 가뭄이 계속됐습니다. 메뚜기떼까지 창궐하면서 사람들은 내일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때 미네소타 주지사인 필스베리가 절망과 좌절에 빠진 주민들에게 “감사하는 날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믿고 먼저 살아있다는 사실에 감사하자”고 했습니다. 농작물이 거의 죽어가지만 아직 살아있으니 감사하자는 말에 대부분 주민들이 근처 밭으로 나가서 무릎 꿇고 기도했습니다. 바로 그날 3년 동안 들판을 뒤덮었던 메뚜기떼가 하루 만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처럼 힘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선한 섭리를 믿고 감사기도를 드리면 하나님은 그 믿음과 기도를 기억하시고 가장 선한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도입니다. 기도하면 축복이 더욱 커지고 뚜렷해집니다. 또한 기도만큼 중요한 것이 입술의 고백입니다. 축복의 말을 계속 입술로 고백하고 선포하는 기도를 하십시오.

거룩하고 구체적인 소원을 품고 기도하십시오. 경제적인 기적을 꿈꾸되 사명감을 갖고 사용하겠다는 비전을 품고 계속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영원한 멘토이신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것을 믿음대로 이뤄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성호 목사(목포 광명나사렛 성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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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의 글 /  배려하는 삶이 아름답다  

 

요한복음 21장 3∼7절

배려란 남을 이해하고, 말과 행동도 남을 위해서 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서로 배려하며 살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죄는 인간 안에 배려의 마음 대신 자기를 위하는 마음을 갖게 했습니다. 오늘날 세상의 가르침들은 배려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것이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일은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배려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배려에는 온유 인내 겸손 용납(엡4:1∼3) 같은 성품이 포함됩니다. 죄로 무감각해지고 이기적이 된 세상에서 배려의 마음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배려하는 것은 힘없는 자의 모습 같고 손해 보는 것같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배려하는 삶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갖춰야 할 참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은 절망에 빠진 베드로가 회복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을 만났습니다(20장). 이상하게도 베드로에게 어떤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붙잡히기 전 자신은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다가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가 이때 어떤 생각을 가지겠습니까? 침묵하던 베드로가 마침내 한마디 했습니다.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이것은 의논이 아닙니다. 권고도 아닙니다. 이것은 선언이었습니다. “너희는 여기서 예수님을 기다려라. 그러나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라고 말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기다리고 만나는 것이 이제 베드로에게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의미였습니다. 그것은 마음 아픈 절망의 외침이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어떤 권면이나 설득도 하지 않았습니다. 비난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들은 “우리도 함께 가겠다”(3절)고 했습니다. 함께 배를 탔습니다.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했지만,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제자들은 베드로의 아픔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먼저 알아보고 베드로에게 알려주자 그는 겉옷을 두르고 바다로 뛰어들어 예수님께 왔습니다.

베드로는 몇 년 전 갈릴리 호수에서 예수님을 만난 날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때도 지금처럼 밤새 수고했지만 소득이 없었습니다. 지쳐있던 그에게 예수님은 그물을 깊은 곳에 던지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대로 했고, 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그날 그 일은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습니다. 처음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와 지금은 매우 차이가 있습니다. 처음 그때는 순수했지만 지금 깊은 상처로 절망 가운데 있고, 주님을 향한 사랑조차 차마 고백하기 어렵습니다. 그런 그에게 처음 예수님을 만났던 시간은 놀랍고 아름다운 추억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겉옷을 두르고 바다에 뛰어내려 달려온 그 행동은 바로 예수님께 처음 가졌던 그 순수한 마음의 모습입니다. 또 사도 요한을 생각해 보십시다. 우뢰의 아들이란 별명을 갖고 있던 그는 예수님을 만난 뒤 사랑의 사도로 변했습니다. 그는 먼저 예수님을 알아보았지만, 베드로에게 “주시다”라고 알려주었습니다. 먼저 뛰어갈 수 있었고, 다른 제자들에게 말할 수도 있었지만 베드로에게 말하고 그가 예수님께 먼저 달려가도록 했습니다.

이 시간 우리의 배려가 필요한 이웃이 누가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다. 주님은 우리가 그에게 어떤 배려를 보이기를 원하시는지, 어떻게 배려하기를 원하시는지 생각해 보십시다.

전재국 천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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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글  / 공평하신 하나님을 아는 온전함    

 

마태복음 5장 38∼48절

한 학생이 “풍족하고 자원이 넘치는 나라가 있는 반면 가난하고 어려운 환경에 놓인 나라도 많은데 왜 하나님은 이런 불공평함을 그대로 지켜보시느냐.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또 끊이지 않는 각종 범죄를 왜 그냥 내버려두시느냐고 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반문했습니다. “정말 불공평하게 느껴지겠구나. 그럼 모두가 온통 얼음과 가스로 돼 있는 저 목성과 토성에서 살면 공평할까.”

 

과연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똑같다면 진정 공평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찾아 나선 공산주의가 과연 진정 인간이 꿈꾸는 유토피아를 만들었는지요?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꿈꾸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참된 복이 무엇인지, 천국을 소유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또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마5:45)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인가 잘해내면 하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따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억울해도 참고, 손해를 봐도 넘어가고, 손가락질 당하거나 폭력을 당해도 침묵했습니다.

그래서 행복하고 천국을 소유하게 됐는지요? ‘크리스천 콤플렉스’를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왜 크리스천은 늘 무언가 이익을 보지 못하고 누군가 화를 내면 잘못하지도 않았는데 참아야 하며 억울해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덮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랑도 인내도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우리의 한계를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판단해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맹세하고 무엇을 해냈다고 자랑할 수 없습니다. 과연 한계가 뚜렷한 우리가 무엇을 기준으로 공평함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까. ‘그 어떤 것에도 맹세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에 그 답이 있습니다. 하늘로도 땅으로도 저 성읍으로도 심지어 우리의 것이라고 여기는 우리의 머리로도 하지 말라고 명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답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먼저 무엇을 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여름철에 내리는 비가 지긋지긋하게 느껴지는 사람도 있지만 농부들에게는 작물을 잘 길러내는 데 필요한 단비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힘들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때도 있지만 하나님의 은총은 이 순간에도 우리에게 내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는 진리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가장 연약한 곳을 채워주십니다. 그 은총을 누가 막아내거나 거절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는 사람의 기분과 상황을 감안해 쉽고 편안하게 전해지는 데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감동이나 재미를 주려고 전파되는 게 아니라 선포 그 자체에 목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공평함입니다. 복음은 신분과 지역과 환경을 초월해 전파되고 있습니다. 이를 믿는 가운데 우리가 온전함을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우리의 자랑은 온전히 아버지 하나님인 것입니다. 바울은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전3:23)고 말했습니다. 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오직 예수 안에서 온전함을 입어 공평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여러분과 함께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안신광 목사 (큰빛루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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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글 / 하나님께 상달하는 부르짖음  

 

출애굽기 2장 23∼25절

고난의 부르짖음과 해방의 응답은 출애굽 사건의 핵심입니다. 요셉과 야곱 가문의 애굽 생활은 끝까지 평화가 유지되지 않았습니다. 후대의 왕들은 요셉을 알지 못했고 이스라엘의 번성은 애굽에 위협적 요소였기 때문입니다. 권력의 견제가 심화됐고, 이스라엘의 고통은 가중됐습니다. 길고 긴 430년의 고역을 끝내고 해방의 감격을 이룬 첫걸음은 이스라엘의 탄식하는 부르짖음이었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하셔서 이 부르짖음에 응답하신 것입니다.

95년 전 우리 선조들은 일본의 식민 지배에 맞서 한반도 전체를 부르짖음으로 채웠습니다. 성별과 나이, 지역과 이념 종교를 뛰어넘어 모두가 하나 돼 평화적으로 독립을 부르짖었습니다. 비록 곧바로 독립과 해방으로 연결되지는 못했다 해도 훗날 해방의 감격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3·1운동과 같은 거대한 부르짖음의 물결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3·1운동은 일제의 강점에 숨죽이고 있던 중국과 아시아의 영혼을 흔들어 깨웠고 해방의 그날까지 잔잔한 물결이 되어 해방과 평화의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는 3·1운동에 한국교회가 중심적인 역할을 감당했다는 사실은 우리교회의 정체성과 앞으로의 향방을 제시합니다. 95년 전 한국교회는 규모는 작았지만, 사회의 기대에 충분히 응답했습니다. 그 대가로 교회는 끔찍한 핍박을 받았지만 교회의 수난은 암울한 일제시대의 우리 민족에게 희망의 등불이 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세계정세 특히 동북아의 정세가 격동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거대화와 일본의 전쟁국가로의 회귀 움직임이 주요 요인입니다. 뿌리 깊은 일본의 전쟁집단들은 2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형성된 평화헌법을 치욕으로 여기며 이를 폐기하려는 운동을 끊임없이 추동해 왔습니다. 또 문화와 교육, 군과 산업 분야 등에 걸쳐 제국의 향수를 조직적으로 되살리고 있습니다.

임진왜란의 치욕을 겪은 우리는 300년 후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지 못했습니다. ‘일본의 한반도 재침략은 불가능할까?’ ‘미국은 정말 우리를 끝까지 지켜줄까?’ ‘후쿠시마 원전사고와 잦은 지진 및 쓰나미 등으로 피폐해져가는 상황이 언젠가는 대륙침략이라는 일본의 숙원을 실행하는 동기로 작용하지 않을까?’ 우리는 이러한 물음에 진지하게 대답해야 합니다.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똑같은 실패를 범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2011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은 3·1절 공동기도회를 합의했습니다. 사정 상 각자 기도회를 열 수밖에 없었지만, 남북 교회가 하나 돼 감사하며 부르짖은 것입니다. 잠시 멈추었던 남북교회의 기도행진은 올해 다시 ‘3·1운동 95돌 기념 공동합의문’을 발표함으로써 새롭게 이어가고 있습니다.

남북 교회는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과 전쟁야욕을 무너뜨리기 위한 운동을 힘차게 벌여나갈 것과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자주통일과 평화번영의 새 국면을 열어 나가기 위해 적극 연대해 나갈 것을 선언했습니다. 이는 대단히 뜻깊은 부르짖음입니다. 제국주의의 침략 앞에서 남과 북의 분열은 죄악입니다. 반대로 역사의 위험을 감지하면서 하나님께 한마음으로 부르짖는 것은 3·1운동의 중심에 섰던 한국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신 하나님께서 남북교회의 기도에 똑같이 응답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훈삼 성남 주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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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글 / 겸손한 자에게 주시는 은혜      


베드로전서 5장 5∼11절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한 자는 미련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복된 은혜는 겸손한 자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해 깨닫고 알아가는 축복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철학자 파스칼의 ‘팡세’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자기의 비참함을 모르고 하나님을 아는 것은 오만을 자아낸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자기 비참함을 아는 것은 절망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를 앎으로 자기 자신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알 수 없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또한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깨닫게 됩니다.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를 깨닫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남으로 구원받고 은혜 나누는 진실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의 교만함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내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이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드려 축복받는 차이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겸손함으로 나 자신을 인정할 때 임하는 것입니다. 겸손은 비움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삶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 그분의 때를 기다리며 잠잠히 바라보는 것, 주신 은혜를 망각하지 않는 것이 곧 겸손이요, 비움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시는 말씀은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입니다. 우리가 겸손할 때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겸손할 때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에 가슴 벅찬 감격을 느낄 수 있습니다. 겸손할 때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성경 곳곳에서 겸손으로 인해 축복받은 인물들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겸손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래서 겸손케 하시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축복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육체의 가시를 통해 내게 예수의 흔적이 있다고 고백하는 사도 바울의 모습에서 나를 겸손하게 하시고 그 은혜를 저버리지 않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겸허히 받아들이는 겸손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에 대항해 사람들을 이끌고 전쟁을 일으킵니다. 얼마든지 대항할 수 있었지만 다윗은 하지 않았습니다. 정처 없이 떠나는 피난길에서 시므이가 저주를 해도 하나님의 섭리에 순응하며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원망하지 않았던 다윗은 하나님께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인정받을 만큼 겸손한 사람입니다. 겸손을 통하여 다윗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본문에서도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오늘도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 아래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때가 이를 때에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모든 걱정과 근심을 하나님께 맡기시며 겸손의 은혜로 말미암아 축복의 삶을 사시길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전정순 목사(대전 주안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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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글 / 기도는 힘든 것인가 ?    


누가복음 11장 1∼4절

여러분들은 기도가 어렵고 힘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기도 순서라도 맡으면 부담을 느끼고 예배에 불참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성도께선 “목사님 저는 아무개 장로님처럼 은혜롭게 기도를 하지 못합니다.

저 기도시키지 말아주세요”라고 신신당부합니다.

기도가 어떤 것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본문 말씀은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 주기도문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눅 11:1)라며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눅 11:2)면서 가르침을 주십니다.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는 데서 시작하는 것임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어린이가 아빠 엄마를 부르는 것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기도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큰 복입니다.

아빠를 부르듯 ‘아버지여’라고 하나님을 부르라고 가르쳐주십니다.

이것이 기도의 시작이며 핵심입니다.

 

유창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듣기에 은혜롭게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라고 말씀하십니다.

힘들고 지치고 괴롭고 절망스러우며 어느 누구도 의지할 수 없을 때

‘아버지’라며 간절히 고백하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우리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달려오실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기도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유대인들은 허례의식이 강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부를 때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고

일거수일투족을 다 아시며 온 만물을 창조하시고

능치 못함이 없는 하나님이시여…”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세 살짜리가 아버지에게 “능력 많으시고 인격자이시며

훌륭하신 아버지여 과자 하나만 주시옵소서”라고 말한다면 어색하고 부자연스럽습니다.

기도는 어린이가 아버지를 부르듯 자연스럽고 솔직하고 꾸밈없이 나의 마음을 담아 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마르틴 루터의 명상의 시간’이라는 책에서

기도할 때 “무릎을 꿇거나 서서 두 손을 모으고 눈은 하늘을 향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기도의 내용에 대해서는 “당신 개인의 필요와 관심이어야 하는가? 아니다!”라며

하나님의 계명에서부터 시작하라고 합니다.

한때 가톨릭 사제였던 그는 ‘중언부언하는 것’(마 6:7),

다시 말해 뜻 없이 말만 늘어놓거나 쓸데없이 중얼거리며

시간을 채우려는 잘못된 기도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 9절부터 더욱 적극적인 기도 생활을 강조하십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적극적인 행동을 요구하십니다.

이것은 믿음이 있을 때만 가능한 행동이며 기도의 행동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주실 것입니다.

찾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찾게 하실 것입니다.

두드리십시오. 하나님께서 열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기도하고

늘 응답받아 승리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경회 제자들루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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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의 글  / 행복한 동행 !  


시편 16편 1∼4절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할 때 메마르지 않는 행복을 맛보게 됩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수가성의 여인에게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특히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다시 목마르지 아니하리라’라는 이 말씀을 필히 체험해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영이 참 만족과 행복을 얻으려면 우리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영혼이 만족함을 얻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영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 즉 마음이 있습니다. 혼이라고도 합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사건 전후를 보면 사람을 만드실 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흙으로 모양을 만드시고 코에 하나님의 호흡을 불어넣으니 생령이 됐다고 했습니다. 생령은 곧 사람의 정신을 말합니다.

 

우리는 영과 혼과 육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영은 하나님과의 관계, 육은 자연과의 관계에 건강 여부가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정신 즉 혼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따라 건강이 좌우됩니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은 처음에 아담에게만은 짝을 만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만 아시겠지만 사람에게 사모함을 갖게 하려고 하신 것이라 짐작합니다. 배우자의 필요함을 느끼고, 소중함을 갖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믿음이 좋아도 옆에 있는 사람과의 관계가 바르지 못하면 그 사람을 불행하게 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사람입니다. 정신의 건강, 혼의 건강 정도는 다른 사람과 얼마나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느냐를 통해 체크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행복을 얻고자 하십니까. 먼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함을 얻고 살아야 합니다. 두 번째로 주변의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그 관계에서 얻어지는 행복을 얻고 살아가야 합니다. 다윗은 이것을 먼저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 2절에서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라며 곧이어 3절에서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라고 고백합니다.

 

다윗의 고백 가운데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습니다. 성도를 존귀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나와의 관계가 우선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므로 존귀히 여긴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덕분에 사람에 대한 태도가 달라져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놓치고 사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사탄은 믿는 사람들을 유혹하기 위해 제일 먼저 의심하도록 합니다. 의심이 드는 순간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180도 바뀝니다. 신뢰하고, 의지할 수 없습니다. 우리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면 상대방을 존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아름다운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크리스천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예수님의 사랑을 나누는 것을 당연시하고, 그럴 때 주님이 기뻐하신다는 생각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굳건히 하고, 인생의 항로를 함께 갈 사람을 만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존귀한 성도가 여러분 옆에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사람을 찾아내시기 바랍니다.

문희성 목사 (광주 한빛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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