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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연합과 에큐메니칼 운동(WCC)에 대한 소고


 

김영재 교수(합동신학원)

 

 

시작하는 말

 

2013년 세계기독교연합회(WCC)가 한국에서 개최되는 일을 앞두고 한국기독교협의회(KNCC)가 거기에 속하지 않은 회원 교회에 동참을 권유하며 협조를 요청하고 있어서, 이러한 요청에 한국 교계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논의를 거듭하고 있다.

현재 한국기독교협의회에 속한 교단 교회는 기독교 장로회(기장), 예수교 장로회(통합), 기독교 감리회, 성공회, 구세군, 복음교회, 정교회, 순복음교회(기독교하나님의성회)의 8개 교단이다.

KNCC와 양립하는 교회 연합 조직으로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있다. 거기에는 보수적인 장로교회를 비롯하여 보수적인 복음주의 교회들이 속해 있으나, 통합측 장로교단과 기독교하나님의성회가 양 기관에 다 회원이 되어 있으므로 한기총이 WCC에 반대하는 기관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한국 교회 여러 교단을 상대로 한 여론 조사에서는 WCC에 대한 찬반의 의견이 거의 반반이었다. 그것은 KNCC에 속하지 않은 교회 사람들 가운데서도 찬성하는 사람들이 상당 수가 된다는 뜻이다. 보수적인 교회 교단 사람들도 꽤 많은 사람들이 찬성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교회 연합의 명분이 따르기 때문일 것이다.

교회가 하나 되는 것은 주 예수께서 소원하시고 명하신 것이며, 사도 바울도 교회에 관하여 말씀할 때 간곡이 부탁하는 것이다. 반면에 교회가 하나이기를 힘쓰라는 말씀에도 불구하고 WCC를 반대하는 이들은 무엇 때문에, 무슨 명분으로 반대하는 것인지 알아야 할 것이다.

 

1. 역사 속에 나타난 교회의 분열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단으로 정죄 받은 교회들이 분립하는 경우들이 더러 있었다. 1054년 콘스탄티노플을 중심하는 동방교회와 로마를 중심하는 서방교회로 크게 둘로 분열하였다. 교회가 동방과 서방으로 나누진 원인은 언어, 문화, 역사적 배경의 차이가 너무 커서 더 이상 하나로 싸맬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양 교회는 15세기에도 하나가 되려고 회의를 열어 노력하기도 하였다.

동방과 서방의 교회가 각기 유지해 오던 중, 16세기 종교개혁이 여러 지역에서 일어나면서 서방 교회는 여러 교파와 국민 교회들로 분열하게 되었다. 종교개혁의 교회들이 각 나라 사람들이 자기 나라 말로 성경을 읽고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예배를 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분열된 것이다.

중세 가톨릭교회는 사람들이 알아듣든 말든 라티어로 예배하고 성경도 라틴어 성경만 허용하였다. 그러한 처사는 교회를 하나로 유지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으나 사람들은 무지에 내버려둠을 당하였으며, 그럼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부패하게 된 것이다. 로마 가톨릭과 종교개혁 교회는 서로 다시 연합해 보려고 더러 시도하였으나 그럴 때마다 교황주의 및 사제주의와 성찬에 대한 이해의 차이를 재확인할 뿐이었다.

개신교 교회들이 다시 연합해야 하겠다고 생각을 강하게 갖게 된 것은 19세기 후반부터였다. 18세기 말에 일어난 경건주의 운동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부흥이 교파를 초월하여 확산 되고, 교회들이 교파를 초월하여 부흥에 참여하면서부터이다. 특히 아직 교회 전통이 없는 선교지에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은 누구보다 더 교회 연합에 대한 이상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교파를 초월한 선교회들이 서게 되었으며, 선교지에서 선교사들이 하나의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는 일도 있었다.

선교사들이 전하는 복음, 예수 그리스도, 회개, 중생, 새 사람으로 사는 일 등의 교리는 실은 모든 교파 교회들이 갖고 있는 공통적인 신앙이다. 분수를 두고 말하자면 공통분모인 셈이다. 그래서 교회 연합의 이상을 가지게 된 것이다.

많은 선교 단체들이 교회 연합을 모색한 결과 드디어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제1회 WCC 총회가 열렸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의 세계에는 복음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고 자유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많이 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자유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수가 더 많아졌다. 그리고 이런 자유주의 신앙을 가진 이들이 교회 연합에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그것이 WCC가 출발할 때부터 안게 된 문제였다.

자유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순전한 마음으로 믿고 받아들이지 않으며, 전통적인 신앙고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시인하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요, 참 사람이시라고 고백하지도 않으면서 기독교의 종교적 가치는 인정하고 윤리적인 교훈 만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이다.

 

2. 1950년대의 한국 교회와 WCC

 

한국에서는 WCC가 있기 이전, 즉 1924년 9월에 한국기독교협의회가 결성되어 복음을 공동으로 증언하는 일에 힘을 썼다. 1930년대 이후 신사참배의 시련을 당하면서부터는 그 기능을 다하지 못했으나 해방을 맞이한 이듬해 1946년 10월 9일 제1회 한국기독교연합회총회를 열었다.

거기서 KNCC는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리는 세계기독교연합회 창립총회에 장로교회의 김관식 목사와 엄요섭 목사, 감리교회의 변홍규 목사를 파견하여 참석케 하였다. 진보적인 기장측은 처음부터 WCC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KNCC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여 왔다. 하지만 1950년대 중반에만 하더라도 WCC의 정체가 어떤 것인지 관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한국의 보수적인 장로교회를 주도해 오고 개혁주의 신학의 기초를 공고히 한 분이 조직신학자 박형룡 목사님과 성경신학자 박윤선 목사님이다. WCC에 대하여 제일 먼저 경종을 울린 이는 박윤선 목사님이다. 이미 1950년 고려신학교에 재직할 때였다. 그는 ‘한국 교회는 어디로?’라는 소책자를 발간하여 WCC에 반대하는 견해를 다음과 같이 선명하게 밝힌 바 있다.

 

“우리 장로회는 세계기독교연합회(World Council of Churches)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회에 참가하고 있는 것이 우리 장로교 교리에 대한 위반인 것입니다. 그 이유는 위의 세계기독교연합회의 움직임이 전통적인 정통주의 그대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정통주의가 아닌 사실은 누구나 다 인정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장로교회더러 그 옳지 않은 회(세계기독교연합회)와 보조를 같이 하며 합류하라고 가르치는 분들도 그것을 자증하고 있습니다.

세계기독교연합회에는 신신학자(新神學者), 위기신학자, 사회복음주의자 등이 그 주동 인물이 되어 있습니다. 그 회의 주요한 목적은 세계 교회의 사교를 위한 것이라기보다, 세계 교회의 진로(進路)를 교도(敎導)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이미 암스테르담 회의에서 결정한 것입니다.

그들은 급속히 처음부터 각 교파의 교리를 그들의 그릇된 주장대로 통일하려는 행동은 취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계적으로 먼저 교회 실권(교회 정치력, 다대한 사람 수 내지 국가의 권력) 잡기를 노력하는 듯이 보입니다. 그들은 이런 실권을 잡은 후에 그것으로 세계 교회를 장악하려 합니다. 사태가 결국 그렇게 되는 때에는 세계 교회의 각 교파는 성경과 교리에 의거하여 행동을 취하지 못하고 그런 세계 교회 운동의 실권에게 포로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박형룡 목사님은 그 이후 8년이 지난 1958년 초 “신학지남”에 ‘에큐메니칼 운동의 교리와 목적’이란 글을 씀으로써 그의 견해를 밝혔다. 그의 글은 장로교회뿐 아니라 다를 교파 교회에도 WCC의 정체를 관망하던 사람들에게 각자의 견해에 따라 헤쳐 모여 하는 신호탄이 되었다.

박형룡 교수는 글을 맺는말에서 우리 교회는 결코 자유주의자들이 주도하는 에큐메니칼 운동에 순응할 수 없으며 교회 합동과 단일 교회를 바라보는 목적에 찬동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자신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 대한예수교장로회는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WCC 총회에 남한 총회의 대표가 가서 참여하고 그 후 WCC의 지부인 대한기독교연합회(NCC)의 일원이 되어 오므로 이 에큐메니칼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칼빈주의 개혁파 장로교회의 전통적 복음주의 신앙을 충실히 보수하여 오는 입장에 있으니 이 WCC 에큐메니칼 운동에 방심하고 무조건 참여할 수 없는 형편이다. 우리 교회는 결코 이 에큐메니칼 운동의 자유주의 지도에 순응할 수 없으며 교회합동 단일 교회를 바라보는 목적에 찬동할 수 없다.

1957년 제42회 총회는 에큐메니칼 연구위원회의 보고에 의하여 우리 교회는 이 운동의 교회친선과 사업협동에만 참여하고 교파합동에는 반대한다는 결의를 지었다. 이것은 상술(上述)의 대책에 적응하는 결의라 할 수 있으니 우리 교회는 세계적 교회친선의 중요함을 생각하여 이 운동에 참여하나 교리상 경계와 비타협의 태도를 취할 것이며, 장차 어떤 날 교파합동의 계획이 구체화할 때는 이 운동으로부터 단연 탈퇴할 것이다.”

 

그 당시 한국 장로교회는 세 교단으로 나뉘어 있었다. 한국 장로교회는 1952년에 분립한 고신측과 1953년에 분립한 기장측이 있었다. 그리고 1959년에 총회측이 WCC 회원으로 잔류하기를 찬성하는 통합측(연동측)과 반대하는 합동측(승동측)으로 분열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박윤선 목사와 박형룡 목사의 정보가 정확했으며 그 운동의 진로에 대한 예측은 적중했는가?

 

3. WCC의 역정(歷程)

 

WCC는 제1차 총회 때부터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교회는 정치적 및 사회적인 이념을 초월해야 한다면서 공산주의를 용납하였다. 그리고 교회가 하나 되는 데 걸림돌이 되는 교리나 신앙고백은 덮어두기로 했다.

제2차 총회에서도 일치된 선교의 공동체가 되기 위하여 각 교파와 교회의 전통과 특성을 부인하는 결단을 해야 한다고 했다. 선교도 사람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는 선교보다는 교회가 세상 속으로 들어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61년 제3차의 뉴델리 총회에는 러시아의 그리스정교의 대표들을 비롯하여 루마니아, 불가리아, 폴란드 대표들이 참가하였다. 그리고 타종교와의 대화가 제안되었으며 ‘우주적 그리스도’ 혹은 ‘익명의 그리스도인’을 강조하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1968년의 제4차 총회에서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가 강조되어 교회의 사회 참여가 첨예화되었다. 마르크스주의 등 사회학적인 통찰을 기독교 신학에 적극 수용하였으며, 불의에 대항하는 폭력을 정당하고 가능한 것으로 수용함으로써 비폭력적 혁명을 교회가 도와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였다. 해방신학의 탄생과 때를 같이한 주장이었다.

이어 1969년 3월 WCC의 주최로 제네바 근방의 까르티니(Cartigny)에서 22명의 회교도와 기독신자들이 모임을 가졌으며, 1970년부터는 본격적으로 타종교와의 대화를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기독교와 타종교의 대화국(對話局)을 신설하고 본격적으로 ‘대화의 신학’을 발전시켰다.

1975년의 제5차 나이로비 총회에는 90개국에서 대표들이 참석했으며, 로마 가톨릭, 불교, 힌두교, 이슬람, 유대교 등이 옵서버로 참석하였으며 영성의 문제를 두고 각 문화의 전통적 경건과 극단적 성령 운동의 체험, 동양의 신비주의 등 다양한 종교 요소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혼합 종교의 성격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제7차 총회는 1991년 2월 호주 캔버라에서 “오소서 성령이여, 만물을 새롭게 하소서”라는 주제로 개최되었고 온 지구를 구원하는데 성령 현존의 중요성 또는 영성의 중요성을 언급하였다. 한국인 참가자 정현경은 성령의 강림을 부르느라 무당의 강신굿도 행하였다. 이처럼 종교다원주의와 혼합종교에 문을 활짝 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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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고난과 순교

 

(서론)
왜정 36년간 일제의 교회 박해는 강압과 회유 매수 등 가진 수단과 방법을 다했다. 신사참배 강요는 민족 전체에게 강요되었다. 그러나 교회만이 피를 흘려 항거하였다. 이로 인해 2백여처의 교회가 페문되었고 2천여명의 신도가 투옥되었고 50여명의 교역자가 순교하였다. 한국기독교는 민족을 위해 순교한 피 제사로 튼튼하고 흔들림 없는 민족교회로서의 대발전의 축복을 하나님으로부터 보장 받았다.

제1장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박해
1. 기독교학교에 대한 참배와 요구
2. 교회를 향한 신사참배 박해 개시

제2장 신사 불참배운동의 궐기 파급
1. 주기철 목사 시무한 산정현교회의 투쟁
2. 항거자들의 결사 반대운동 전개
3. 신사 불참배로 인한 순교자 속출

제3장 신사 불참배로 인한 순교자 속출
1. 전시하 기독교인들의 일대고난
2. '한국교회' 명칭의 박탈 소멸

*제1장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박해

*1.기독교학교에 대한 참배와 요구
1930년 일본은 대륙 침략의 제일보를 만주사변을 일으켰으며 부의를 황제로 세워 괴뢰 만주국을 건설하였다. 1936년에는 노구교 사건을 유발하여 본격적으로 중국 본토를 침략하는 전쟁을 수행하였다.

일제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하여 어떤 정신적인 통일이 필요했던 모양으로,이러한 정신적인 지주를 신사 참배에서 찾으려고 했다.신사란 일본 역대의 천황들의 영과 국가를 위한 유공자 특히 전쟁에 참가하여 전사한 군인들의 영을 모신 곳이라 하면서, 한국 기독교인들을 향해서도 여기에 머리숙여 절하라고 강요하였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행동이야말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크나 큰 범죄가 되며,더우기 한국 민족의 긍지와 애국심을 상실 당하는 결과가 된다고 판단하여 한사코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일본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한국 기독교인들을 자기들의 종교에 끌어 넣어 신에게 머리 숙이게 하여 굴복케 하기 위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강요를 거듭하였다.

1935년 가을, 평안남도 일본인 야스다께 지사는 도내에 있는 중고등학교의 교장 회의를 소집하였고 그 자리에서 교장 일동은 평양신사에 참배하여야 한다고 명령하였다. 이때에 숭실학교 교장 윤산온(G.s.McCune)을 비롯하여 숭의여학교와 안식교 계통의 의명학교 교장 등은 종교의 교리상 그렇게 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이에 야스다께 지사는 정식으로 공문을 방송하기를 '신사참배는 국민 교육상의 요건임으로 불응시에는 단호한 조치가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답변을 요구하였다.

사태 추이의 중대성을 느낀 미국 북장로회 선교회에서는 신사참배 문제에 대한 대책을 수립하기 위하여 1935년 12월 23일 윤산온 교장 댁에서 실행위원회를 소집하였다. 문제의 심각성에 비추어 회의는 심야까지 계속되었으나 결국 신사참배는 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야스다께 지사는 이 사건의 보고를 총독에게 올리면서 총독부 학무국에서 처리해 줄 것을 의뢰하였다. 총독부에서는 곧 전국의 도지사와 경찰부장,경찰서장 연석회의를 소집하여 기독교 학교에 대하여 신사참배를 강요하기로 결정하고 불응 시에는 교장을 교체할 것과 학교 폐쇄의 두가지 방법으로 탄압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험악한 사태 하에서 윤산은 교장은 학교를 살린다는 명분하에 학교 대표자 개인의 자격으로 신사참배를 하겠다는 내용의 답서를 발송하려고 마음 먹었다. 그러나 그는 답서 제출에 앞서 신사참배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평양 신학교 교수 박형룡 목사와 산정현교회의 주기철 목사를 만나 의견을 타진하였다. 그랬더니 그들은 개인의 참배라고 학교 대표자이니만큼 불가하다고 의결을 표시하였다. 이에 윤산온 교장은 단호한 결심을 갖게 되어 신사참배를 거부한다고 회신하였다.

이를 계기로 숭실,숭의의 두 학교는 교장직 인가가 취소되었고 뒤이어 학교가 폐쇄되고 말았다. 윤산온 교장은 파면된지 2개월이 지나 1936년 3월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갔으며,그는 미국에서도 계속 신사참배의 부당성을 강조하였다. 한국 주재 북장로회 선교사 가운데는 신사참배 문제는 개인의 신앙 야심에 맡기고 학교는 교육사업이니만큼 계속하여야 한다는 의견도 없은것이 아니었다.

미국 남장로회 선교회에서는 시종 강경한 태도로서 신사참배를 반대하였다. 그것은 미국 남장로회 외지 선교국의 태도가 강경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외지선교국의 총무로 있은 훌튼(C.Darly Fulton)박사는 신사참배는 종교 해우이라고 엄격히 규정하여 남장로회 경영의 학교는 폐교하는데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1938년 2월까지 미국 북장로회 경영의 8개 학교와 남장로회 경영의 10개 학교가 모두 문을 닫어야 하는 수난을 만났다.


*2.교회를 향한 신사참배 박해 개시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기독교 학교를 폐교케 한 총독 당국은 이제는 제2차 단계로서 교회에 대하여 신사참배를 강요할 계획을 세웠다.

드디어 조선 총독은 한국교회에 대하여 신사참배를 강요하여 한국교회의 목을 졸라 질식케 하는 살인마적 작업에 돌입하였다. 이러한 때에 문제가 된 것은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 차차로 신사참배를 국가 의식으로 인정하려는 기운이 일어나 의견의 불통일을 가져오게 된 것이었다. 이는 교히의 큰 비극이오 유간이 아닐 수 없었다.

안식교 계통의 의명중학교는 처음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였으나 1936년 1월 교장 이희명은 신사참배 하기로 굴복함으로서 안식교의 신사참배 문제는 일단락을 고하였다. 천주교에서는 1918년 '신사는 다른 신들을 위하는 곳이므로 참배할 수 없다'라는 한국 천주교회의 장정을 작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국세정서 하에서 이탈리아와 일본과의 친선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취한 로마 교황청 포교성의 '신사참배하는 종교적 행사가 아니고 애국적 행사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 참배를 허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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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  도전과 응전의 시대

 

한국교회협의회의 조직과 변천을 살펴보려면 1912년 한국개신교 복음주의연합공의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출발할 때에는 장감의 신앙은 어느 정도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연합할 수 있었던 것은 한반도에 개신교 전체를 대변하는 연합운동의 협의체 구성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또 선교의 목적이 같았던 블레어와 하디 선교사의 제의가 채택되었고 캐나다 장로교선교회의 윌리엄 스캇이 적극적인 추진으로 교회협의회(FCC)가 결성되었던 것이다. 이 협의회가 공헌 한 것은 한국교회와 세계교회를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복음운동에 한국의 각 교단의 교회들과 협력하는 일에 앞장섰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일본에 있는 40만의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일본연합공의회, 입본의 캐나다장로교회와 협력하도록 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1927년을 기점으로 북장로교선교회는 한국교회연합을 통한 장감의 연합운동에 깊은 회의를 느끼기 시작하고 결국 탈퇴하기로 결정하여 연합체는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렇게 하면서 한국의 교회는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질서로 재편되어 나가기 시작한다. 1930년대에는 그동안 한국교회를 주도하는 중심세력이었던 장로교와 감리교에 이어서 성결교가 한국교회의 중심세력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다. 이는 복음주의에 입각한 회개 운동과 부흥운동에 혼연일체가 되어 부흥운동에 전력투구하였기 때문이다. 성결교회의 복음전파 방식은 그들이 소중하게 간직하는 중생과 성결의 체험 교리인 그리스도의 보혈로 원죄의 씻음과 신유와 부활과 재림과 영생을 전하는 것이었다. 특히 이들이 중점을 둔 것은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사중복음은 놀라운 부흥운동을 경험한 한국교회 교인들에게 어렵지 않게 수용될 수 있는 가르침이었기 때문에 더욱 호소력이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내주하심과 죄에서의 자유에 대한 새로운 체험을 강조하는 성결교회의 가르침은 대 부흥운동을 거치면서 역동적인 신앙의 체험을 강조하는 이들에게 적지 않은 도전을 주었다.

 

이 시대 한국교회가 만나 또 하나의 움직임은 신학적 변천이다. 한국교회는 1930년에 접어들어 이단, 신흥종교, 자유주의, 신비주의 부흥운동, 그리고 무교회주의의 등장으로 그 동안 견지해 왔던 신학적 통일성이 깨지고 다양한 신학사상들이 발흥하기 시작했다. 1934년 한국 북장로교 선교 희년을 맞으면서 블레어가 신학적 변천에 깊은 우려를 표명했던 것처럼 수많은 이단들이 등장, 이 시대의 기독교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사상적 변천은 리더십의 전환과 별도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 상호 깊은 연계성을 지니고 진행되었다. 1920년대 중반 이후부터 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다. 장로교의 남궁혁, 백낙준, 박형룡, 이서휘, 송창근, 채필근, 김재준, 윤인구, 김치선과 감리교의 전영택, 임영빈, 변홍규, 정경옥, 류형기, 그리고 갈홍기는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1955, 전성천 박사는 한국개신교의 분열과 일치라는 예일대학의 박사학위논문에서 한국에는 언더우드, 알렌, 헤론, 앨러스 등 4명의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있었으며, 4명의 선교사들 주에서 전통적인 장로교 신학에 동의했던 사람들은 언더우드 한 사람밖에 없었다고 했다. 언더우드 외에 다른 사람들은 신학적으로 동의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들이 북장로교 내의 주류 곧 구학파의 전통, 성경의 무오성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이들의 4명의 선교사들 가운데 신학교육을 제대로 받은 선교사는 언더우드 밖에 없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의사나 간호사였기 때문에 좀 더 개방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신학교육을 받은 이들이기는 하지만 다수의 개척 선교사들이 그 같은 입장을 가졌다는 것은 선교 초기 신학적 분위기를 꼭 보수적인 것 많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1889년 마포삼열을 비롯한 보수적인 맥코믹 출신 북장로교선교사들과 1892년 이눌서를 비롯한 남부의 보수주의를 대변하는 남장로교 출신 선교사들이 국내에 대거 입국하면서 1890년대에 접어들면서 전반적인 장로교 선교회의 신학적 성향은 보수적인 분위기로 바뀌었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자유주의는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였고 한국교회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자유주의 도전이 주는 가장 큰 교훈은 1930년대 들어 지금까지 정통신학의 토대 위에 확고하게 서 있던 한국교회에 진보적인 신학이 하나의 세력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 같은 진보적인 세력은 얼마 후 신사참배문제로 평양신학교가 폐교되자 조선신학교 설립을 통해 한국교회에 깊숙이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1920년대까지 한 목소리를 내던 장로교와 감리교의 신학적 통일성이 서서히 깨어지고 다양한 신학이 역사에 부상하기 시작했다. 정경옥의 자유주의, 김재준의 진보주의, 박형룡의 정통주의, 김교신의 무교회주의 그리고 이용도의 신비주의가 그것이다.

 

감리교 신학자 정경옥이 한국교회에 자유주의를 정착시킨 주인공라면 김재준은 한국교회에 진보주의를 정착시킨 인물이었다. 김양선의 말을 빌린다면 그는 파괴적인 성경비판을 감행하는 극단의 자유주의 신학자는 아니었으나 성경의 축자적 영감과 성경의 완전무오를 거부하고 그 같은 사상과 대결하여 싸우려는 철저한 자유주의 신학자였다. 그는 정경옥의 자유주의와 박형룡의 정통주의 사이에 진보주의라는 중도적 입장을 개척하는데 성공했다.

 

박형룡 박사는 신학적인 색깔뿐만 아니라 삶의 스타일이나 사고방식에 있어서 김재준 목사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김재준 목사가 개방적이었다면 박형룡 박사는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절제하고 철저하게 칼빈주의 입장에서 정통주의를 변호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김재준에게 정통주의가 갖고 있는 문제점은 바로 신학을 사변적이고 객관적인 굴레 속에 가두어 두고 삶 속에 구체적으로 연계시키지 않는 데 있었다. 반면에 박형룡에게 진보주의는 성경의 권위를 파괴하고 교회와 그리스도인을 성경과 기독교의 전통에서 벗어나게 만들어 결국 기독교 유일성마저 흔들어 놓는다는 점이었다.

 

1930년대 박형룡은 정통주의 대변자로 주로 교단 장로교회에서 만인의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그의 화려한 학력, 탁월한 근면성, 한국에서의 선교사 1세대와의 두터운 교분, 그리고 무엇보다도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강력한 의지는 그를 일약 한국교회 정통의 대변자로 부상시키기에 충분했다. 더구나 귀국 후 한국교회 안에 일고 있던 정경오류로 대변되는 자유주의 신학과 김재준으로 대변되는 진보주의 신학, 김교신의 무교회주의와 이용도의 신비주의 부흥운동의 발흥은 기왕에 한국교회에 바른 신앙과 바른 신학을 구축하는 일에 자신의 생애를 바치기로 다짐했던 박형룡의 신학적 방향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신학 논쟁과 교회의 응전이 1930년부터 1935년까지 한국교회를 특징짓는 중요한 사건이었다면, 1935년부터 1945년 해방될 때까지 한국교회를 특징짓는 사건은 신사참배 논쟁이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앞에 한국교회는 신사참배를 하느냐 반대하느냐라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처했다. 호주장로교선교회가 보고한 것처럼신사참배문제는 한국의 교회가 직면하였던 가장 중대한 문제였다.”

 

신사참배는 1911년의 105인 사건이나 1919년의 3.1운동 탄압보다도 더 크고 직접적으로 기독교 신앙에 위협을 가했던 문제이다. 그것은 105인 사건이나 3·1운동으로 인한 탄압이 민족의 독립운동과 관련된 일제의 탄압이었다면, 신사참배 강요는 신앙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신앙 양심을 유린당하는 본격적인 종교박해였고, 교회 전체가 당한 대 박해였고, 전 민족이 당한 일대 수난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신사참배 문제는 세속권력을 절대화하고 인간을 신격화하는 일제의 천황제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것으로 저이, 종교, 교육, 문화 등 여러 부분에 걸친 복합적인 문제였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신사참배 강요에 대해 순응 또는 타협함으로 신앙의 본질을 왜곡하느냐 아니면 끝까지 신상참배의 강요에 맞서 신앙을 지키느냐 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한국교회의 신사참배 문제는 신앙의 본질과 그 해석, 더 나아가 그 적용과 실천에 관한 문제와 깊숙이 연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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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전과 응전의 시대

 

한국교회협의회의 조직과 변천을 살펴보려면 1912년 한국개신교 복음주의연합공의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출발할 때에는 장감의 신앙은 어느 정도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연합할 수 있었던 것은 한반도에 개신교 전체를 대변하는 연합운동의 협의체 구성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또 선교의 목적이 같았던 블레어와 하디 선교사의 제의가 채택되었고 캐나다 장로교선교회의 윌리엄 스캇이 적극적인 추진으로 교회협의회(FCC)가 결성되었던 것이다. 이 협의회가 공헌 한 것은 한국교회와 세계교회를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복음운동에 한국의 각 교단의 교회들과 협력하는 일에 앞장섰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일본에 있는 40만의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일본연합공의회, 입본의 캐나다장로교회와 협력하도록 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1927년을 기점으로 북장로교선교회는 한국교회연합을 통한 장감의 연합운동에 깊은 회의를 느끼기 시작하고 결국 탈퇴하기로 결정하여 연합체는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렇게 하면서 한국의 교회는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질서로 재편되어 나가기 시작한다. 1930년대에는 그동안 한국교회를 주도하는 중심세력이었던 장로교와 감리교에 이어서 성결교가 한국교회의 중심세력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다. 이는 복음주의에 입각한 회개 운동과 부흥운동에 혼연일체가 되어 부흥운동에 전력투구하였기 때문이다. 성결교회의 복음전파 방식은 그들이 소중하게 간직하는 중생과 성결의 체험 교리인 그리스도의 보혈로 원죄의 씻음과 신유와 부활과 재림과 영생을 전하는 것이었다. 특히 이들이 중점을 둔 것은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사중복음은 놀라운 부흥운동을 경험한 한국교회 교인들에게 어렵지 않게 수용될 수 있는 가르침이었기 때문에 더욱 호소력이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내주하심과 죄에서의 자유에 대한 새로운 체험을 강조하는 성결교회의 가르침은 대 부흥운동을 거치면서 역동적인 신앙의 체험을 강조하는 이들에게 적지 않은 도전을 주었다.

 

이 시대 한국교회가 만나 또 하나의 움직임은 신학적 변천이다. 한국교회는 1930년에 접어들어 이단, 신흥종교, 자유주의, 신비주의 부흥운동, 그리고 무교회주의의 등장으로 그 동안 견지해 왔던 신학적 통일성이 깨지고 다양한 신학사상들이 발흥하기 시작했다. 1934년 한국 북장로교 선교 희년을 맞으면서 블레어가 신학적 변천에 깊은 우려를 표명했던 것처럼 수많은 이단들이 등장, 이 시대의 기독교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사상적 변천은 리더십의 전환과 별도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 상호 깊은 연계성을 지니고 진행되었다. 1920년대 중반 이후부터 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다. 장로교의 남궁혁, 백낙준, 박형룡, 이서휘, 송창근, 채필근, 김재준, 윤인구, 김치선과 감리교의 전영택, 임영빈, 변홍규, 정경옥, 류형기, 그리고 갈홍기는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1955년, 전성천 박사는 “한국개신교의 분열과 일치”라는 예일대학의 박사학위논문에서 한국에는 언더우드, 알렌, 헤론, 앨러스 등 4명의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있었으며, 이 4명의 선교사들 주에서 전통적인 장로교 신학에 동의했던 사람들은 언더우드 한 사람밖에 없었다고 했다. 언더우드 외에 다른 사람들은 신학적으로 동의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들이 북장로교 내의 주류 곧 구학파의 전통, 성경의 무오성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이들의 4명의 선교사들 가운데 신학교육을 제대로 받은 선교사는 언더우드 밖에 없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의사나 간호사였기 때문에 좀 더 개방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신학교육을 받은 이들이기는 하지만 다수의 개척 선교사들이 그 같은 입장을 가졌다는 것은 선교 초기 신학적 분위기를 꼭 보수적인 것 많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1889년 마포삼열을 비롯한 보수적인 맥코믹 출신 북장로교선교사들과 1892년 이눌서를 비롯한 남부의 보수주의를 대변하는 남장로교 출신 선교사들이 국내에 대거 입국하면서 1890년대에 접어들면서 전반적인 장로교 선교회의 신학적 성향은 보수적인 분위기로 바뀌었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자유주의는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였고 한국교회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자유주의 도전이 주는 가장 큰 교훈은 1930년대 들어 지금까지 정통신학의 토대 위에 확고하게 서 있던 한국교회에 진보적인 신학이 하나의 세력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 같은 진보적인 세력은 얼마 후 신사참배문제로 평양신학교가 폐교되자 조선신학교 설립을 통해 한국교회에 깊숙이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1920년대까지 한 목소리를 내던 장로교와 감리교의 신학적 통일성이 서서히 깨어지고 다양한 신학이 역사에 부상하기 시작했다. 정경옥의 자유주의, 김재준의 진보주의, 박형룡의 정통주의, 김교신의 무교회주의 그리고 이용도의 신비주의가 그것이다.

 

감리교 신학자 정경옥이 한국교회에 자유주의를 정착시킨 주인공라면 김재준은 한국교회에 진보주의를 정착시킨 인물이었다. 김양선의 말을 빌린다면 “그는 파괴적인 성경비판을 감행하는 극단의 자유주의 신학자”는 아니었으나 성경의 축자적 영감과 성경의 완전무오를 거부하고 그 같은 사상과 “대결하여 싸우려는 철저한 자유주의 신학자”였다. 그는 정경옥의 자유주의와 박형룡의 정통주의 사이에 진보주의라는 중도적 입장을 개척하는데 성공했다.

 

박형룡 박사는 신학적인 색깔뿐만 아니라 삶의 스타일이나 사고방식에 있어서 김재준 목사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김재준 목사가 개방적이었다면 박형룡 박사는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절제하고 철저하게 칼빈주의 입장에서 정통주의를 변호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김재준에게 정통주의가 갖고 있는 문제점은 바로 신학을 사변적이고 객관적인 굴레 속에 가두어 두고 삶 속에 구체적으로 연계시키지 않는 데 있었다. 반면에 박형룡에게 진보주의는 성경의 권위를 파괴하고 교회와 그리스도인을 성경과 기독교의 전통에서 벗어나게 만들어 결국 기독교 유일성마저 흔들어 놓는다는 점이었다.

 

1930년대 박형룡은 정통주의 대변자로 주로 교단 장로교회에서 만인의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그의 화려한 학력, 탁월한 근면성, 한국에서의 선교사 1세대와의 두터운 교분, 그리고 무엇보다도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강력한 의지는 그를 일약 한국교회 정통의 대변자로 부상시키기에 충분했다. 더구나 귀국 후 한국교회 안에 일고 있던 정경오류로 대변되는 자유주의 신학과 김재준으로 대변되는 진보주의 신학, 김교신의 무교회주의와 이용도의 신비주의 부흥운동의 발흥은 기왕에 한국교회에 바른 신앙과 바른 신학을 구축하는 일에 자신의 생애를 바치기로 다짐했던 박형룡의 신학적 방향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신학 논쟁과 교회의 응전이 1930년부터 1935년까지 한국교회를 특징짓는 중요한 사건이었다면, 1935년부터 1945년 해방될 때까지 한국교회를 특징짓는 사건은 신사참배 논쟁이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앞에 한국교회는 신사참배를 하느냐 반대하느냐라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처했다. 호주장로교선교회가 보고한 것처럼“신사참배문제는 한국의 교회가 직면하였던 가장 중대한 문제였다.”

 

신사참배는 1911년의 105인 사건이나 1919년의 3.1운동 탄압보다도 더 크고 직접적으로 기독교 신앙에 위협을 가했던 문제이다. 그것은 105인 사건이나 3·1운동으로 인한 탄압이 민족의 독립운동과 관련된 일제의 탄압이었다면, 신사참배 강요는 “신앙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신앙 양심을 유린당하는 본격적인 종교박해였고, 교회 전체가 당한 대 박해였고, 전 민족이 당한 일대 수난”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신사참배 문제는 “세속권력을 절대화하고 인간을 신격화하는 일제의 천황제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것으로 저이, 종교, 교육, 문화 등 여러 부분에 걸친 복합적인 문제”였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신사참배 강요에 대해 순응 또는 타협함으로 신앙의 본질을 왜곡하느냐 아니면 끝까지 신상참배의 강요에 맞서 신앙을 지키느냐 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한국교회의 신사참배 문제는 신앙의 본질과 그 해석, 더 나아가 그 적용과 실천에 관한 문제와 깊숙이 연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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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장로교 총회 100년 역사, 역사적 개관/ 박용규 교수

 


이것은 이미 총회 설립 이전부터 예고된 일이었다. 미국 북장로교 내지 선교사 총무 아더 브라운(Arthur J. Brown)이 한국장로교 총회 설립 2년 전, 1910년에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의 로체스터 대회(Rochester Convention)에서 보고한 “가난하고 천대받으며 보잘것없는 이 나라가 이제 비기독교 국가들 중에서 복음화 되어 더 거대한 사역을 위해 하나님께 쓰임 받는 최초의 국가가 될 것처럼 보인다”는 예상은 1세기가 지난 오늘 사실로 입증되었다.

 한국교회의 성장은 세계 기독교 역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드문 일이다. 특히 장로교회는 한국교회의 성장을 주도하는 중심 세력으로 처음부터 그 위치를 톡톡히 감당해왔다. 비록 ‘한국장로교가 한국이라는 사회적 역사적 상황 속에서 교회로서의 사명을 다하여 왔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할 때 항상 긍정적인 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난 100년 동안 장로교는 하나님이 베푸신 놀라운 은혜에 힘입어 장족의 발전을 이룩하였다. 새로운 세기로 접어들면서 틀을 다지기 시작한 한국장로교회는 그간의 수많은 대 사건들과 역사의 질곡 속에서도 한국교회를 주도하는 중심세력으로 흔들리지 않고 역사를 이어왔다. 1904년 러일전쟁, 1905년 을사조약과 1910년 한일합방의 치욕, 이어 진행된 일제의 36년의 식민 통치 그리고 1945년 해방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굴곡 많은 민족사 속에서도 교회는 여전히 생명력을 지니며 오늘에 이르렀다.

 

 하나님께서는 고난 가운데서도 1903년 원산부흥운동,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1920년대 김익두 부흥운동, 6.25 직후 회개운동 그리고 1970년대 대중전도운동과 민족복음화 운동을 통해 한국교회의 영적 생명력을 지켜주셨고, 해외 선교열을 불어 넣어 주셔서 한국교회로 하여금 세계 선교를 주도하는 교회로 성장시켜 주셨다. 그리고 이 일에 예장총회를 그 중심에 세워주셨던 것이다. 때로는 신사참배에 굴복하고 일제의 식민통치의 시녀로 전락했던 암울한 시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한국장로교회는 민족과 사회의 선도 기관으로서의 면모를 지켜올 수 있었다.

 

 지난 역사를 회고할 때 그동안 한국장로교회는 크게 선교사 입국과 장로교 설립(1884-1900), 대부흥운동과 노회 및 총회의 조직(1901-1910), 해외선교 및 사회 변혁과 한국장로교 성장(1910-1930), 도전과 응전의 시대(1930-1945), 대립과 분열의 시대 (1945-1960) 그리고 개혁과 재편의 시대(1960-2000)로 대별될 수 있다. 이런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 어떻게 한국장로교회 총회가 지금까지 이어져 왔는가를 고찰하려고 한 것이 본서의 목적이다. 이를 위해서는 장로교 총회는 물론 교회가 처한 시대적 역사적 환경도 충실히 반영되어야 할 것이라고 본다. 
  

한국 최초의 소래교회  
 
 1884년 9월 20일 중국에서 활동하던 북장로교 소속 의료선교사 알렌이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 한국에 입국하면서 개신교 선교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다음해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그리고 스크랜톤이 입국하여 한국의 선교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889년에 헨리 데이비스와 그의 누이동생 메리 데이비스가 내한함으로써, 호주 장로교 선교가 시작되었고, 1892년에는 언더우드 선교사의 노력의 결실로 남장로교 선교사인 레이놀즈, 전킨, 테이테 선교사가 파송되어 남장로교의 한국 선교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남장로교 선교가 시작된 이후 6년 후인 1898년에는 캐나다 장로회가 공식적으로 한국선교를 시작하였다. 한국에 파송된 장로교 선교회는 1893년 장로교 공의회를 일찍이 형성하여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 협력선교를 자신들의 선교의 모토로 삼았다. 4개의 장로교 선교회는 한국선교를 위해 구체적인 계획을 설정,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장로교 공의회는 네비우스 선교정책, 성경번역, 자립, 자치, 자전을 통한 한국인에 의한 복음전도 그리고 효율적인 복음의 확산을 위해서 선교지 분할 협정을 채택하였던 것이다. 선교사들의 이런 선교정책이 대단한 효과를 거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성경중심의 선교에 기초한 선교정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1890년 중국 산동성에서 활동하던 존 리빙스톤 네비우스 선교사의 조언을 받아들여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한국 장로교 선교정책으로 채택했다. 네비우스 선교정책이 성공을 거둔 것도 저변에 뿌리내린 성경공부 때문이며 성경번역이 조기에 완성된 것도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의 성경에 대한 사랑 때문이며 자립, 자전, 자치가 성공한 것도 성경공부를 통한 개혁주의, 복음주의 신앙에 기초하였기 때문이다. 감리교와는 달리 장로교는 성경중심의 선교가 상당한 결실을 맺었으며 초기의 한국교회를 성경중심의 교회로 형성하는 계기를 마련하여 주었던 것이다. 일부 진보주의 한국의 신학자들과 교회사가들은 한국의 초기 선교사들이 1930년대 길선주 목사나 박형룡 박사와는 달리 상당히 개방적인 성경관을 소유하였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근거 없는 주장이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 특별히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지역 주재 선교사들과 평양신학교 신학 교육을 맡았던 선교사들은 구학파 출신으로 상당히 보수적인 신앙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 초기 선교가 성공한 것은 균형 잡힌 선교를 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순히 복음만 전하지 않았다. 복음전파와 함께 의료선교 및 교육선교를 중요한 선교정책으로 삼고 추진하였다. 선교초기에 의료와 교육은 상당히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학교와 병원의 설립은 천주교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쇄신하고 개신교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1914년까지 선교사들은 14개의 병원을 설립하였고 1910년대까지 37개의 학교를 설립하였다. 더불어 1900년에 신약성경 시험역본을, 1906년에 신약성경 공인역을, 그리고 1911년에 구약성경의 번역을 완성하여 출간하였다.

 

 이북지역의 교회는 평양의 마포삼열을 비롯하여 맥코믹신학교 출신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원산과 함경도 지역에서는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중부지역에는 언더우드와 그의 매서인들을 중심으로, 부산과 경남은 호주 빅토리안 장로교 선교사들과 베어드를 중심으로, 경상도 지역에서는 게일, 베어드, 아담스 그리고 그 후에 입국한 호주 장로교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전라도 지역은 레이놀즈, 전킨, 테이트를 비롯한 남장로교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교회가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이들 장로교회 선교사들을 통해 복음이 전국적으로 놀랍게 확산되었고, 자연스럽게 장로교회는 한국선교를 주도하는 중심 세력으로 굳게 자리를 잡아갔다. 이즈음에 서상륜, 김흥경, 박태선, 유흥렬이 경성에서, 신화순, 도정의, 이춘경 등이 고향 김포에서 전도를 하여 교회를 개척하여 갔다.

 

 1883년에 소래교회, 의주교회가 설립되었고, 서울 경성지역에는 새문안교회(1887), 남대문교회(1887), 승동교회(1893)가 세워지고, 연동교회 전신 연못골 교회(1894), 행주교회 그리고 김포읍교회가 각각 1894년에 설립되었다. 감리교 선교구였던 강원도에는 1901년에 와서야 양양군의 양양교회(1901)를 시작으로 춘천중앙교회(1902)등이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강원도 지역에서는 장로교의 웰본 선교사와 감리교의 하디선교사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역시 감리교 선교구였던 충청지방은 경성지방이나 북한지역보다 교회설립이 늦었다. 1901년에 와서야 청주 강서에 신대교회가 그리고 2년 후인 1903년에 괴산에 괴산읍교회가 설립되어 교회의 틀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영남권의 선교는 상당히 일찍 진행되었다. 1893년에 한위량, 소안론, 호주 빅토리안 선교회 선교사의 노력의 결실로 설립된 초량교회와 부산진교회를 시작으로 부산지역에 교회들이 세워지기 시작했고, 1895년 대구에 처음으로 베어드와 아담스가 이 지역 선교에 헌신한 결과 수많은 교회들이 설립되고 놀라운 복음전파가 이 지역에서 나타났다. 대구 제일교회의 전신인 대구의 남성정교회(1894), 울산의 병영교회(1895), 밀양의 춘화교회(1897), 함안의 신혼교회(1897), 김해읍교회(1898), 합안군 이령교회(1899), 군위군 매성교회(1900) 그리고 영천군 조곡리교회(1900)가 1900년 이전에 영남권에 설립된 교회들이다. 특히 평양대부흥운동을 거치면서 대구는 남부지역 교회 성장을 견인할 만큼 놀라운 성장을 이룩했다.

 1893년부터 전라도 지역에도 테이트, 레이놀즈, 전킨 등의 헌신적인 선교 노력에 힘입어 박해 가운데서도 놀랍게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 전주서문교회를 시작으로 군산, 김제, 목포, 광주, 순천에 교회들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평양신학교 
  
 이 기간 동안은 한국교회가 가장 놀라운 성장을 이룩하고, 교회로서의 틀을 다진 기간이기도 했다. 1895년의 청일전쟁, 1904년의 러일 전쟁, 1905년의 을사조약, 1910년의 한일합방은 이 민족에게 위기를 가져다 준 참으로 불행한 사건들이었지만, 동시에 이 민족이 소망을 하나님께만 두도록 하는 자극제가 되기도 하였다. 당시는 러시아와 중국, 일본과 미국 등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주변의 강대국들이 한반도에서 기득권을 차지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러시아는 태평양으로 이어지는 아시아 발판기지로, 중국은 한국에 대한 전통적인 기득권으로, 패권주의 일본은 대륙의 발판기지로 그리고 미국은 동아시아의 전초기지로 한반도를 노리고 있었다. 미국의 외교 전문가 포스터가 말한 대로 당시 한반도는 강대국들이 노리고 있는 ‘나봇의 포도원’이었다. 이러한 시대에 영적각성운동이 한국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1903년의 원산부흥운동, 1907년의 평양대부흥운동 그리고 1909년의 백만인 구령운동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들 한국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은 한국교회의 성장과 틀을 다져준 한국교회사상 가장 중요한 축복의 사건이었다.

 

 사경회 운동은 한국교회 부흥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이 발흥했던 것은 1907년 1월 2일부터 15일까지 진행된 사경회 기간 동안이었다. 1890년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채택하고 바로 그 해부터 언더우드 집에서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일환으로 사경회가 시작된 후 사경회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한국장로교 선교의 중요한 근간을 형성했다. 일 년에 한차례 혹은 두 차례씩 일주일에서 한 달 동안 열리는 사경회에서 전국의 거의 모든 교우들이 오전에는 말씀을 공부하고 정오에는 기도하고 오후에는 전도를 나가고 저녁에는 이들을 대상으로 전도 집회를 열었다. 이 전도 집회는 기성 신자들에게는 영적각성의 기회가 되었고, 새 신자들에게는 주님을 영접하는 계기가 되었다. 함께 모여 말씀을 체계 있게 연구하고 개인과 교회와 민족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말씀과 더불어 놀랍게 역사하셨다. 한국교회의 대부흥운동은 이러한 사경회 운동과 매우 밀접하게 연계되어 진행되었다. 1903년의 원산부흥운동도 하디를 주강사로 한 1903년 8월 24일부터 30일까지 열린 원산 기도회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 기도회는 말씀을 공부하고 함께 기도하는 일종의 선교사 사경회였다. 역사적인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도 1907년 1월 2일부터 15일까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평안남도 도 사경회에서 일어났다. 1890년부터 1910년까지 한국장로교회는 말 그대로 폭발적인 성장을 하였다. 이 기간 동안에 세례교인 수는 매년 30%씩 증가하였다. 이처럼 부흥운동이 성경공부를 중심으로 하는 사경회에서 기원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하여서는 안 된다.

 

 이들 부흥운동은 한국교회의 성장을 가속화시킨 중요한 요인이었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이 발흥하던 그 해 한국의 장로교 독노회가 조직되어 장로교회가 민족교회로서 발돋음 할 수 있게 되었고, 1909년 백만인 구령운동이 일어나 민족복음화가 진행된 후 1912년 총회가 조직되었다. 러일전쟁부터 한일합방 그리고 이듬해 105인 사건에 이르기까지 한반도는 위기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민족의 위기 속에서 일련의 부흥운동이 발흥하고, 교회가 틀을 다짐으로써 한국교회가 양적, 질적으로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런 일련의 주변 환경은 한국인으로 하여금 진정한 이 민족의 미래를 인도하실 분은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그 분만이 참된 소망이라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이 시대 시대적 환경은 정치적 독립 소망에서 기독교의 영적 소망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돌이켜 볼 때 한국교회의 성장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역사에 개입하고 계셨던 것이다.

 

이런 한국교회의 급성장은 한국장로교회의 제도적인 틀을 촉진시켜 1907년 독노회 설립에 이어 1912년 총회의 설립으로 이어지는 자연스런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다. 드디어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평북, 평남, 황해, 함경, 경충, 경상, 전라대리회가 모여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를 구성하고 그로부터 5년 후인 1912년 9월 1일 평양장로회신학교에서 총회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총회의 결성은 한국개신교 선교가 시작된 지 28년만의 일이며 노회가 결성된 지 5년만의 일이다. 미국의 장로교가 1706년에 노회가 결성된 지 83년만인 1789년에 가서야 총회가 결성된 것에 비하면 한국의 장로교총회는 상당히 조기에 형성되었던 것이다. 총회의 결성을 통하여 한국장로교회는 한국민족의 교회로서 공식 출범하게 된 셈이며 장로교 성장의 도약을 위한 틀을 마련한 셈이다.
1884년부터 1912년까지 한국장로교회의 성장을 주도한 것이 평양을 중심으로 한 이북 지역이었지만 어느 정도 지역적인 균형을 맞추면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다음은 1910년의 한국 장로교회의 지역별 세례 교인 수이다.
 
 총회가 설립되던 1912년부터 1945년 해방이 되기까지 한국장로교회는 3?1운동, 자유주의 도전, 신사참배문제 등 일련의 위협적인 사건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평양신학교를 중심으로 상당히 안정된 성장을 계속하고 있었으며 한국개신교를 주도하는 교단으로 손색이 없을 만큼 괄목할 만한 성장을 계속하였다. 부흥운동을 통해 한국교회가 놀랍게 성장하자 일제는 교회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한국장로교회는 많은 어려움을 만났다. 1911년 105인 사건, 1919년 3·1운동, 1935년부터 1945년까지 신사참배 강요와 일제의 신민화 정책으로 인한 직 간접적인 교회의 탄압은 그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1911년에 발생한 소위 105인 사건은 일제가 기독교를 탄압하고 궁극적으로 선교사들을 한국에서 추방하려는 전혀 근거 없는 음모였다. 이후 선교사들은 일제의 한국 통치를 긍정적으로 보던 이전의 견해에서 돌아서 일제의 한국 통치에 대해 내심으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기 시작했다. 종교와 지역과 신분과 연령을 초월하여 이 민족이 결집하여 민족의 독립을 전 세계에 선포했던 1919년 3?1운동은 기독교의 힘이 하나로 모여 태동된 자랑스런 민족의 독립운동이었다. 이로 인해 교회가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1919년 삼일운동이라는 민족적 위기 속에서도 한국장로교회는 흔들리지 않고 전국적인 교회 성장을 주도했고, 일련의 사회개혁운동도 전개했다. 금연, 금주를 비롯, 절제운동, 농촌운동, 청소년운동, 의료, 고안원운동 등을 통해 일제의 수탈로 인한 농어촌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길선주와 김익두는 부흥운동을 통해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백성들에게 우리의 참된 소망이 어디에 있는가를 선명하게 제시하였다. 이런 가운데서도 총회는 국내외 선교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한국교회는 선교하는 교회였다.

 제주도에 이기풍 선교사를 파송한 이후 일본, 간도, 중국, 시베리아 선교를 총회적인 차원에서 전개하여 처음부터 한국장로교회는 선교하는 교회로서의 진면을 보여주었다. 당시 일본의 식민지 수탈로 인한 피폐된 경제 상황 속에서도 교회는 복음의 빚진 자의 사명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1930년대 일기 시작한 자유주의 도전 앞에서도 교회는 결연하게 대처, 전통적인 신앙을 재확인하고 처음 선교사들로부터 전해 받은 정통개혁주의 신앙을 계승하려고 하였다. 그 후 찾아온 신사참배 요구로 한국교회가 너무도 쉽게 배도의 길을 택했을 때에도 한국장로교회는 결연한 자세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1938년 한국장로교 총회 역시 집요하고 줄기찬 일제의 신사참배의 강요 앞에 무너지고 말았다. 그 후 한국장로회는 여느 교단처럼 그 정통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만약 이 시대 주기철, 손양원, 박관준, 한상동을 비롯 신사참배 강요 앞에 끝까지 굴하지 않았던 양심의 소리가 없었다면 한국교회는 일제에 의해 도태되었을 것이다. 이들은 참으로 한국장로교회의 자랑일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의 영광이었다.

 

1936년 5월 교황청이 신사는 종교적인 예식이 아니라 국민의례일 뿐이라는 교황청의 발표가 있은 후 한국천주교는 신사참배를 수용하고 제사제도도 수용하면서 배도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 이듬해 1937년 한국감리교회가 무너졌고, 다시 1938년 제 27회 총회에서 총회장 홍택기 목사와 총대들이 신사참배를 가결했다. 이런 가운데 외롭게 생명을 내걸고 신사참배를 반대했던 이들은 한국교회의 신앙의 자존심을 지켜준 이 시대 폴리갑이었고, 존 낙스였다. 1938년 이후 한국장로교회가 정통성을 상실하고 일제의 신민화 정책의 시녀 역할을 자처하고 있을 때 이들은 다니엘과 사드락 메삭 마벳느고 친구의 신앙으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섰던 것이다. 기실, 이들 외에 얼마나 많은 양심의 소리들이 일선 현장에서 신사참배문제와 고투했었는가? 해방 후 무너진 제단을 다시 재건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생명을 무릅쓰고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앞에 당당히 맞섰던 순교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초대교회 터툴리안이 말한바 “순교는 교회의 씨”라는 진리는 여전히 한국교회, 특별히 한국장로교회 안에 그대로 적용될 역사적 진실이었다.

 획일화시킬 수는 없지만 끝까지 신앙을 지킨 이들 대부분이 처음 전해 받은 성경적인 신앙을 그대로 간직하려고 했던 이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바른 신앙이 바른 행동을 태동시킨 것이다. 참된 신앙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행동으로 이어지도록 되어 있다. 그런 면에서 신사참배는 한국교회의 시금석이었고, 이 시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끝까지 신앙을 지킨 이들이야말로 이 시대 민족의 자존심을 지켜준 주인공들이었다.

 이 시대 한국교회는 생존을 위해 싸워야 하는 상황에서 본래 가졌던 직접선교와 간접선교의 균형, 곧 복음전파와 사회적 책임을 동시에 구현해야 한다는 역사적 소명에 충실할 수 없었다.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정착, 종말론 중심의 타세적인 신앙의 강조, 사경회의 확산, 신사참배문제 등 시대적인 요인과 선교정책의 변천으로 말미암아 전기(1884년에서 1912년까지)에 찾아 볼 수 있었던 복음의 균형 잡힌 발전이 상당히 줄어들면서 교회의 사회적인 책임을 간과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특별히 1930년대 총회가 일련의 자유주의의 도전과 신사참배의 문제로 갈등을 겪던 그 시대에 두드러졌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라는 민족적 위기 앞에 교회는 대 사회적인 문제에 귀를 기울일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민족적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친히 이끄시고 성장시키셨다. 이 기간 동안 한국장로교를 주도한 곳은 평양신학교가 자리 잡고 있던 평양을 비롯하여 서북지역이었다. 특히 이 기간 동안에 평양은 한국장로교의 센터 역할을 톡톡히 감당했다. 총회설립 후 1942년까지 31회의 총회 중에서 22회가 북한에서 개최되었으며 총회장 31명중에서 거의 70%인 20명이 이북 출신이었다. 선교사 출신 4명의 총회장을 제외한다면 단지 7명만이 남한 출신이었던 것이다. 총회의 개최지나 총회장의 연고지만을 가지고 평가하는 것이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만큼 북한지역이 한국장로교회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노회의 수에 있어서도 북한지역이 단연히 앞서고 있었다. 북한에 14개의 노회가 있었으며 남한에 10개 그리고 만주에 4개의 노회가 있었다. 교역자 수에서도 분명히 차이가 있다. 1940년을 기준으로 할 때 장로교 전체 925명의 교역자 중에서 북한에 551명 남한에 374명이 있었다. 이것은 북한의 교세가 단연 남한의 교세를 압도하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북한의 장대현교회, 서문밖교회, 창동교회, 산정현교회가 교세에서 서울의 새문안교회, 승동교회, 연동교회, 남대문교회를 압도하고 있었다. 이 기간에 지역별 교세는 다음과 같다.
   

 위의 통계가 보여주듯이 1912년부터 1945년 해방되기까지 한국장로교회의 세례인 수 110,002명중 북한 지역에 약 67%에 해당하는 74,528명이 있었다. 그러나 경기. 충청, 경상도, 전라도 지역도 성장속도에 있어서는 북한 지역의 교회성장에 크게 뒤지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남쪽지역에서 두드러지게 급성장한 곳은 경상도 지역이다. 1912년 총회 설립 시에 7,817명이던 세례교인수가 1938년에는 무려 22,697명에 이르며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신사참배문제 등으로 1942년에 16,284명으로 줄어들었다.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대체로 1945년 해방 이전까지는 북한의 교회가 한국장로교회를 주도하고 있었다는 것은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해방이후 이 상황은 더 이상 계속되지 않았다.
  

 해방 이후 한국장로교회는 정치적인 분단에 의하여 불가피하게 남쪽과 남쪽으로 나뉘어졌다. 해방 이후 한국장로교회는 자신들의 문제를 정립하기도 전에 신사참배와 자유주의 문제로 일련의 대립과 논쟁의 시기를 맞이하여야 하였다. 1946년에 남쪽 총회에 의하여 조선신학교가 공식적으로 총회의 인준을 받았고 이에 반대하던 출옥한 신사참배 반대자들이 중심이 되어 진해에 고려신학교를 설립하였다.

 1947년에 조선신학교의 자유주의 교육을 우려한 51명의 복음주의 학생들은 조선신학교의 진보주의 신학 문제를 총회에 건의하게 되었고 총회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해 만주에서 박형룡 박사가 귀국하면서 한국의 장로교회는 전통적인 신앙을 고수하려는 보수주의 세력과 세계적인 학문의 조류를 과감하게 수용하려는 진보주의자들 사이에 일련의 신학적인 논쟁이 발생하였다. 진보주의 노선에서는 김재준 박사가, 보수주의 노선에서는 박형룡 박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신학적인 논쟁은 신학교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총회의 지도자들과 교회들이 중립을 지키기에는 이 신학적 논쟁이 너무도 심각하였다. 계속된 논쟁 후 한국장로교회는 세 차례의 대 분열의 아픔을 겪어야 하였다. 신사참배문제로 인한 1952년의 고신총회의 분열, 조선신학교 문제로 인한 1953년 기장의 분열은 한국교회의 뼈아픈 사건이었다. 그러다 1959년에 W.C.C.문제로 인하여 또다시 W.C.C.를 옹호하는 통합측이 분열 한국장로교회는 세 번 째 분열을 경험했다.

  1950년대 한국장로교회의 분열을 두고 한국교회사가들은 평가를 달리하고 있다. 적지 않은 이들이 자기 교단이나 교파 중심적으로 분열의 원인을 분석하고 교파주의적이고 교단사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자신이 서 있는 교단과 교파를 넘어설 수 없겠지만 이제 한국교회는 객관적이고 공정한 평가를 내려야 할 역사적 시점에 와 있다. 분명 1952년의 분열의 원인은 신사참배 문제였고, 1953년 기장의 분열은 조선신학교와 신학적 변천, 그리고 1959년 통합의 분열은 WCC와 에큐메니칼이 분열의 일차적인 요인들이었다. 그 외 다른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작용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들은 부차적인 요인들이었다.

 이제 한국장로교회는 과연 자신이 서 있는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면서도 한국교회와 사회 앞에 자성의 기회를 찾아야 할 것이다. 확실히 세 차례의 분열을 맞은 후 한국장로교회는 서로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반세기가 흐른 오늘의 시점에서 볼 때 고신, 기장, 통합, 그리고 본 교단은 신학적 방향을 달리하며 교회를 이끌어가고 있음이 분명하다. 다만 본 교단과 고신의 경우 큰 신학적 차이 없이 서로 유대를 가지며 지내오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각기 가는 방향이 다르다.

 1950년대 한국장로교회가 경험한 일련의 분열의 경험을 통해 한국장로교회는 해방 이전에 가졌던 통일성을 잃어버리고 문화적으로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심화시키고 말았다. 그리하여 한국교회는 사회적인 주도력을 점점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실수를 통해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셨다. 1945년부터 1960년까지 한국장로교회는 꾸준하게 성장하여 한국개신교의 주도적인 위치를 지켜갔다. 물론 이 기간 동안에 한국 장로교회는 북부를 제외하고는 고른 성장을 하였다. 1953년에 예수교장로교 세례인 수는 250,000명이고 기장 세례인 수는 16,944명이었다. 고려파를 합친다면 장로교회의 세례교인 수는 10년 동안에 약 3배가 증가한 셈이다. 이처럼 한국교회는 내외적으로 6.25전쟁, 교회분열, 신학적 논쟁, 이단의 등장 등 일련의 어려운 문제들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하게 성장을 계속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개입이라는 사실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총신대학교 100주년 기념관 

 

 이 기간 본 교단은 한국교회 성장을 견인하는 중심축이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광활한 양지캠퍼스 조정, 강남 대치동의 총회회관 건립, 한국 전체를 하나로 만든 통일찬송가 발간 등을 통해 한국교회 안에 중요한 리더쉽을 구축하며 성장을 거듭했다. 1960년 이후 새로운 환경 속에서 신앙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국내외 선교를 통해 한국교회 성장을 견인했던 것이다.

 분명 1960년대 이후 한국교회는 새로운 시대를 맞았다. 1950년대에 일련의 분열을 겪은 한국장로교회는 신학적 색깔을 분명히 표방하면서 자신들의 독자적인 길을 걸어왔다. 자신들의 정체성에 따라 한국장로교회는 토착화신학, 신정통주의 그리고 정통주의로 대별되기 시작하였다. 일찍이 진보주의를 표방하던 기장은 1960년 이후 기독교 사상 등 일련의 신학지를 통해 자신들의 개방적인 신학적 입장을 뚜렷이 표방하면서 진보주의 신학을 추구하였다. 1960년대 이후에 발흥한 토착화 논쟁, 민중신학 등 일련의 신학적인 작업을 통하여 전통적인 장로교 신학을 수정하고 한국적 장로교라는 기치 아래 토착화신학을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이점에 있어서는 감리교와 맥락을 같이하였다.

 한편 통합측은 에큐메니컬이라는 세계적인 교회 연합운동 속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파악하고 W.C.C.가 추구하는 신정통주의를 자신들이 걸어갈 새로운 장로교 신학의 방향으로 정립하기 시작하였다. 획일화 시킬 수는 없지만 상당수의 교수들이 신정통주의야말로 현대 한국 장로교의 신학적 방향이라고 생각하였다. 통합의 일부의 교수들과 목회자들은 민중신학 등 토착화 신학에 매력을 느끼기도 하였다. 1960년 이후 한국장로교회는 더 이상 신학적인 통일성을 찾아 볼 수 없다. 일련의 장로교 분열을 통하여 이전에 갖고 있던 신학적 통일성을 상실하고 만 것이다. 한철하 박사, 마삼락 선교사 등 이런 신학적인 입장에 반대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아세아연합신학원을 설립하여 좀더 복음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입장에서 자신들의 신학을 표방하기 시작하였다.

 1960년 이후에도 본 총회는 여전히 성경이 오류 없는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정통 개혁신학에 기초하여 신학교와 교단이 운영되어 왔다. 본 교단은 장로교의 전통적인 입장을 고수하기 위하여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본 교단은 평양신학교의 사상을 전수하려는 충실한 장로교 교단이라는 자의식을 갖고 초대 선교사들이 전수한 성경중심의 신앙을 고수하면서 현대의 변천하는 한국의 상황에 복음을 능동적이고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하여 끊임없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우리의 신학적 입장은 “수정되지 않은 칼빈주의”라는 표현이 적합할 것이다. 구 프린스턴 신학자들이 자신들의 신학적 정체성을 이야기할 때마다 자신들은 구 칼빈주의를 계승한다고 고백하였던 것처럼, 본 교단은 수정되지 않은 정통 칼빈주의를 교단의 신학적 입장임을 천명하고 있다. 이것은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존중하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포함되어 있는 역사적 개혁주의 신앙고백을 계승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한국의 장로교회의 남아있는 과업은 옛 프린스턴의 찰스 핫지가 성공적으로 했던 것처럼 신학교와 총회를 긴밀하게 연결하여 한국장로교회를 위한 신학교, 신학교를 구심점으로 하는 한국장로교회를 형성하는 것이다. 신학교가 교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신학교는 신학교로서의 생명을 다한 것이다. 신학교는 한국교회에 도움이 되어야 하며 또한 그런 방향에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지난 100년간의 총회의 역사는 우리에게 훌륭한 교훈을 제시한다.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로부터 성경 중심의 신앙을 전수받은 한국장로교회는 성경의 근본신앙을 파괴하는 현대주의를 관용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면서도 복음전파와 교회의 대 사회적, 민족적, 문화적 책임을 동시에 완수하여야 할 사명을 부여받았다. 지난 총회 100년의 역사를 돌아볼 때 한국장로교회는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1909년 백만인구령운동, 1920년 김익두 부흥운동, 1950년대와 1970년대 대중전도운동에 이르기까지 한국교회의 놀라운 부흥운동을 공유하였다. 부흥운동을 통해 한국교회 성장을 견인하는 구심점의 역할을 톡톡히 감당한 셈이다. 특별히 통합측이 분열되어 나간 후 본 교단은 1만 교회운동과 국내외 선교에 전념하여 놀라운 교세의 신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 한국교회가 침체를 맞고 있는 이 시기에 본 교단은 그 옛날의 복음의 생명력과 구령의 열정을 회복하여 다시 한번 복음전도에 매진하여야 할 때가 되었다.

 복음전파 노력 못지않게 교회가 소홀할 수 없는 것이 복음의 대 사회적 문화적 민족적 책임 구현이다. 근래 교단 일각에서 여기에 대한 자성이 일면서 이 일에 자의식을 가지고 동참하는 교회들이 상당히 늘고 있음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예를 들어 오랫동안 반포사회복지관을 운영해온 옥한흠 목사의 사랑의 교회(현 오정현 목사)나 안산동산고등학교를 설립하여 기독교학교의 새로운 장을 열어간 안산동산교회(김인중 목사), 그리고 근래 국가적인 태풍과 재난이 있을 때마다 헌신적으로 앞장서는 광염교회(조현삼 목사)는 이 일에 있어서 본 교단만 아니라 한국교회의 중요한 모델 역할을 충실히 감당해왔다. 이들 외에도 우리 교단의 수많은 교회들이 복음전파와 더불어 대사회적 책임 구현을 위해 피나는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는 것은 참으로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에 만족하지 말고 앞으로 본 교단은 이 일에 있어서 사회와 민족을 선도하는 구심점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해야 할 것이다. 성경적인 신앙이 삶의 실존 속에서 표출되지 않는다면 그 신앙은 얼마가지 않아 생명을 상실한 것이다. 교회는 세상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 한국장로교회는 개혁주의의 균형 잡힌 실천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교회가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다. 미국의 개혁파 복음주의 역사가 나단 해취(Nathan Hatch)가 지적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복음은 단순히 교회의 영역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고 사회를 포용하며 개인의 경건만 아니라 사회의 거룩함까지 포함하여야 된다.” 기독교인의 신앙을 표방하면서도 교회의 사회적인 책임을 외면하는 이런 이중적인 태도는 청교도들의 신앙관과는 차이가 있다. 청교도들은 경제, 직업, 사회, 정부 등 삶의 모든 분야를 성경적인 규범 아래로 가져가려는 일에 헌신적이었다. 한국장로교회도 세상 속에서 교회의 책임을 총체적으로 완수하여야 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총회 100년사를 점검하면서 한국장로교회사가 반성하며 얻어야 할 중요한 교훈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장로교의 역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역사가 없는 교회, 역사를 도외시한 교회는 성장할 수 없고 존재할 수도 없다. 한국장로교회는 한국장로교회의 역사를 정리하여야 할 중요한 시점에 와 있다. 정확한 역사사료에 근거한 한국장로교 역사의 정립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총회적인 차원에서 역사사료를 수집, 정리할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장로교회의 역사 정리를 위해서는 지역을 초월하여 총회 산하 전국교회들이 총체적으로 협력해야 할 것이다.

 총회 100년을 마무리하면서 우리가 발견하는 분명한 사실은 선교 초창기나 1959년 통합이 분립된 후 너무도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본 교단이 짧은 기간 동안 그토록 놀라운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성경관을 비롯한 역사적 청교도 개혁신앙을 견실하게 견지해왔기 때문이다. 성경 중심의 네비우스 선교정책과 초기선교사들의 개혁파 복음주의 신앙이 한국장로교회의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자립, 자치, 자전의 실현도 성경중심의 신학교육이 그 저변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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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하나님의 뜻-일본 제국주의와 식민통치에 대한 성경적 입장

  

뉴라이트 계열의 근본주의 개신교들 가운데서 일본식민사관을 가지고 일제 식민지 통치를 옹호하거나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는데 이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일제 식민통치가 한국이 근대화하는데 일조했다고 하거나,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보는 시각은 성경을 보는 신학의 부재에서 오는 기회주의자적 유치한 발상이다.   문제는 이러한 잘못된 역사관은 반개신교, 반기독교 정서를 가속화할 뿐이라는 사실이다.


이들은 조선이 제사를 드리고 미신을 믿는 등 우상숭배를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벌을 받아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신도를 믿고 신사에서 귀신에게 제사하며, 천황을 숭배한 일본은 하나님의 크나큰 축복을 받아서 세계 강국이 되어 제국주의를 이루었단 말인가?   비록 미국에게 전쟁에서는 패배했지만 다시 복구되어 세계의 경제대국이 된 것도 하나님의 축복이었단 말인가?


이런 식의 사고를 하는 목사들이 한국교회를 이끌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그들의 수준이 얼마나 저급하고 그들이 목회하는 교회에는 비전이 없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의 목회철학은 <복을 받아 잘 먹고 잘 살자!  죽으면 내세천당이다>  일 수 밖에 없기에 교회는 더욱 세속화와 타락의 길로 갈 수 밖에 없다.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자체가 비성경적이고,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1870년대 이후로 자본주의는 자본의 집적 ·집중에 따라 자유경쟁이 지배하는 산업자본주의의 단계에서 거대한 소수의 독점기업이 지배적인 힘을 가지는 독점자본주의 단계로 이행한다. 


이에 따라 세계 열강들은 앞다투어 팽창주의와 식민주의를 내걸고 약소국을 무력으로 침략하여 자본과 자원과 노동력을 착취하고 자국의 시장을 확장하였다.

 

제국주의를 표방한 세계 열강들은 막강한 군사력으로 약소국을 침략하여 자원을 약탈하고 그들의 상품을 팔아먹기 위해서 철도, 전기, 도로, 통신과 같은 사회 기간망을 확충하고 금융회사와 공장을 설립하였으며, 원주민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의사소통을 원할히 하고자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것은 식민지를 위한 정책이 아니라 오직 수탈과 침략을 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런 점에서 일제의 조선 식민통치는 그 맥락을 같이 한다.

 

그럼 이러한 제국주의가 하나님의 뜻인가?  피식민지를 무력으로 지배하면서 자원과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 철도와 전기와 통신, 금융회사, 공장들을 만들고 피식민지인들에게 열강의 언어와 문화를 가르치며 교육한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피식민지 국가들이 근대화하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하는가?

 

제국주의와 식민통치가 휩쓸고 간 피식민지는 종교적으로, 이념적으로 국민과 국가가 분열되는 큰 상처를 지니고 말았다.  그리고 그러한 분열은 지금까지 전 세계의 곳곳에 남아있어서 전쟁과 내란으로 큰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 

 

당장 중동의 시리아 내전을 보라.   과거 영국과 프랑스가 중동 지역을 식민지 분할 통치하면서 종파간, 부족간 분열정책을 실시하였고, 사분오열된 그러한 후유증은 지금까지 중동의 불안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제국주의와 식민통치가 휩쓸고 간 아프리카, 베트남, 중국, 대한민국을 보라.  분열과 전쟁으로 수많은 국민들이 희생당하였다.   이렇게 국가가 분열되어 오랫동안 전쟁을 겪은 근본적인 원흉은 열강의 제국주의 때문이다.

 

제국주의는 힘과 권력, 정복과 착취, 탐욕과 강포, 전쟁과 살인을 특징으로 하며, 이러한 것은 성경에서 사탄의 근본적 속성과 동일한 특성을 갖는다.    사탄은 탐욕의 화신이며, 죄악이 가득해 불공정한 거래와 무역을 일삼으며 강포를 저질어 범죄하여, 탐욕의 주인이 되었다.


사탄의 화신 제국주의와 식민통치는 불공정한 거래를 일삼고,  사람에게 살인과 강포를 저지르며, 돈과 이익을 위해 인간을 하나의 도구로 취급하는 모든 자본주의 정신구조와 시스템이다.   불합리한 甲 乙관계, 착취와 비인간화, 돈으로 인간의 계급을 나누고,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온갖 강포를 저지르는 합법적인 도둑들과 탐욕의 정신에 함몰된 사회구조와 시스템은 사탄의 영을 받은 자들이다.  


이러한 제국주의의 사탄적 속성은 정죄와 심판의 대상이지 결코 하나님의 뜻이 담겨있을 수 없다.

 

겔 28:16 네 무역이 풍성하므로 네 가운데 강포가 가득하여 네가 범죄하였도다 너 덮는 그룹아 그러므로 내가 너를 더럽게 여겨 하나님의 산에서 쫓아 내었고 화광석 사이에서 멸하였도다

겔 28:18 네가 죄악이 많고 무역이 불의하므로네 모든 성소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네 가운데에서 불을 내어 너를 사르게 하고 너를 보고 있는 모든 자 앞에서 너를 땅 위에 재가 되게 하였도다

 

문제는 기독교가 제국주의의 사탄적 속성을 경고하지 못하고 오히려 옹호하고 나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제국주의에 편승하여 개신교나 카톨릭을 신봉하는 국가들이 국가적 폭력을 사용하여 피식민지에 선교하였다. 


<오!  힘에 의한 선교가 하나님의 뜻이로다>   하지만 이러한 선교방법은 비성경적인 방법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방법이다.   하나님이 힘과 권력으로 피식민지를 정복하여 그들에게 강압적으로 선교하는 것을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이러한 선교방법이 진정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그대들은 성경과 하나님을 진정으로 아는 자들이 아니다.


정말 안타갑게도 제국주의에 편승하여 기독교가 전파된 지역은 순전한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서구의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을 전함으로서 물질문명과 맘몬숭배, 자연파괴와 경쟁, 착취와 비인간화를 유발하고 말았다.   선교사들은 순전한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의 사탄의 통치를 전한 실수를 하고 말았다


또한 독일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키면서 유태인을 대학살 할 때  독일 기독교가 그 정당성과 신학적 원리를 제공하고(악의 처단) 그에 부역하고 동조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이것이 기독교가 해온 비참한 참상이다.

 

이렇게 기독교가 제국주의에 편승한 결과 기독교는 급속한 세속화 과정을 겪고 세력이 약화되었다.  기독교의 신앙과 가치관은 무력화되었고 그 대신에 물질문명과 과학지상주의가 그 공간을 채워 나갔다. 

 

제국주의를 지지하고 힘과 권력에 의지한 기독교는 사람들에게 철저히 해체되어 참 생명을 잃어나갔다. 그리고 사람들은 더 이상 기독교에 희망을 걸지 않게 되었다.  지금 종교개혁의 뿌리였던 유럽을 보라.   누가 기독교를 참 생명의 종교로 생각하는가?  이것은 기독교가 제국주의에 편승한 참혹한 결과물이다.

 


신사참배를 결정한 조선예수교장로회 임원들. 앞줄 중앙이 홍택기, 그 오른쪽은 김길창 목사

출처-<한국교회 친일파 전통>


신사참배 강요에서 나타난 일본제국주의의 죄악성


조선을 지배한 일제는 조선에서 독립운동이 고조되고 세계대공황이 발생하여 위기가 닥쳐오자 그 위기를 벗어나고자 의회 민주주의를 해체하고 군국주의체제로 전환하여 중국과 필리핀, 동남아 지역으로 침략전쟁을 확산해 나간다.   


이 과정에서 일제는 한반도를 병참기지화하고, 황국신민화 정책을 강화하였으며, 국민정신총동원령을 내려 경제적 수탈과 인력수탈을 극대화하였다.

 

그 결과는 내선일체, 전시동원체제, 강제징집, 강제동원, 창씨개명, 전쟁 위안부 동원, 신사참배, 친일과 반일의 국민분열 등으로 나타났다.

 

일제는 민족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인을 천황의 신민으로 만들기 위해 학교와 교회에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신사참배의 신도는 성경적 입장에서 보면 다신교적인 정령신앙, 자연숭배, 조상숭배, 영웅숭배, 귀신숭배, 천황숭배를 포괄하는 사악한 우상종교이다. 


이러한 신사참배에 조선의 장로교, 카톨릭,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성공회 등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이 굴복하여 동참하고 만다. 

 

하지만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순교한 이들이 있었으니, 주기철 목사 같은 분이다.  이런 고귀한 분들은 안으로는 분란을 조장하는 친일 기독교세력과 밖으로는 일제의 군국주의의 거대한 권력과 싸워야 했고, 많은 분들이 옥고를 치루며 순교하였다. 


이를 계기로 친일 기독교인들이 언론매체에 기고와 각종 시국 강연회를 만들어 강제부역과 전시동원, 내선일체를 옹호하는 행적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고, 결국 친일과 반일의 기독교로 양분된다.

 
신사참배에 굴복한 친일 기독교세력은 신사참배는


1)정치적인 문제이지 신앙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다.   


2)우상숭배였지만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이며, 생존의 문제에 대해 각자의 양심과 믿음이 분량에 맡겨야 한다 라고 변명하였지만, 성경의 관점에서 보건데 신사참배는 분명한 우상숭배이고, 배도이며 배교인 것이다.

 

어짜피 모든 배도의 시작은 정치적인 목적으로 시작되고 생존의 문제에 고통을 주며 신앙적인 문제로 귀결이 난다.   그러면 이러한 신사참배를 강요한 일제의 식민통치가 하나님의 뜻이란 말인가?

 

 

남산의 조선신궁(1918착공-1925완성)


불교의 친일행적도 비슷하다.  일제는 사찰에 임야 소유권을 양도하면서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활용했다.    조선의 총독부는 조선의 승려들을 식민지 정책에 적극 이용했다.  일제는 1911년 사찰령을 발동해 31본산 제도를 만들고 모두 사찰의 주지임명권과 재산의 처리, 사찰의 병합, 사찰의 신설등의 전권을 행사했다.    이에 따라 31본산 주지들에서 말사 주지들까지 불교 언론계와 학계 등이 전방위로 친일행위에 가담하였다.  1937년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친일승려들은 탁발보국이란 명목으로 군수품과 국방헌금등을 헌납했다.   1940년의 창씨개명에도 앞잡이 노릇을 했다. 

 

일본 임제종과 조계종의 합병을 도모해 불교계의 이완용으로 불리는 이회광은 친일단체를 조직하는 등 조선불교의 매국을 선동했다.   일제시대에 조계종이라는 종명을 처음으로 확립한 권상로는 각종 시국강연을 다니면서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였다.

 

국가적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뜻

 

구약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국가적 고난의 대표적인 예는 통일왕국을 이루던 이스라엘이 2개의 국가로 분단되어지고,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게, 남유다가 바벨론에게 각각 패망한 사건이다. 


국가가 패망한다는 것은 일반론적 입장에서는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외교적인 다양한 원인들로 해석할 수 있지만 구약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멸망의 원인의 해석은 영적인 것으로, 하나님을 저버리고, 우상숭배, 강포, 압제, 착취, 불의를 행하였기 때문이다.

 

신28장에는 언약적 복과 언약적 저주가 나타나는데,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한 언약적 저주의 결과물인 것이다.

 

신 28:15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를 것이니

신 28:25 여호와께서 네 적군 앞에서 너를 패하게 하시리니 네가 그들을 치러 한 길로 나가서 그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할 것이며 네가 또 땅의 모든 나라 중에 흩어지고

신 28:26 네 시체가 공중의 모든 새와 땅의 짐승들의 밥이 될 것이나 그것들을 쫓아줄 자가 없을 것이며

신 28:36 여호와께서 너와 네가 세울 네 임금을 너와 네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나라로 끌어 가시리니 네가 거기서 목석으로 만든 다른 신들을 섬길 것이며

신 28:37 여호와께서 너를 끌어 가시는 모든 민족 중에서 네가 놀람과 속담과 비방거리가 될 것이라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이 분단되거나 패망하는 것이 아니고, 회개하여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섬기는 신정국가, 왕같은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이었다.  구약의 예언서를 보라.   하나님이 얼마나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어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려 하셨는가?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들을 죽이고 핍박하였으며 더욱 강퍅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적하여 하나님을 거역하고 말았다.

 

남유다를 멸망시킨 바벨론은 거대 제국이었다.  바벨론은 왕을 숭배하고 다신교를 믿는 우상숭배의 나라였지만 이스라엘을 징계하는 악의 도구로 사용되었고, 악의 도구로써의 사용기간이 다 끝난 후에는 용도폐기되어 또 다른 거대제국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그럼 남유다의 입장에서 바벨론에게 멸망당한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는가?  남유다가 생각하기를 <약소국인 우리나라를 강대국인 바벨론이 침략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너무나 감사하고 좋은 일이 아닌가?  이제 우리나라도 잘 살수 있을 것이야> 라고 했을까?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을 거역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당한 신명기 28장의 언약적 저주였던 것이다.  


신 29:24 여러 나라 사람들도 묻기를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이 땅에 이같이 행하셨느냐 이같이 크고 맹렬하게 노하심은 무슨 뜻이냐 하면

신 29:25 그 때에 사람들이 대답하기를 그 무리가 자기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에 더불어 세우신 언약을 버리고

신 29:26 가서 자기들이 알지도 못하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시지도 아니한 다른 신들을 따라가서 그들을 섬기고 절한 까닭이라

신 29:27 이러므로 여호와께서 이 땅에 진노하사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대로 재앙을 내리시고

신 29:28 여호와께서 또 진노와 격분과 크게 통한하심으로 그들을 이 땅에서 뽑아내사 다른 나라에 내던지심이 오늘과 같다 하리라

 

오히려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하게 회복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입장에서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가 된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과연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왜 조선은 일제의 침략을 받아야 했는가?

 

당시의 조선을 구약의 이스라엘과 비교하는 것은 상당한 무리가 있다.  구약의 이스라엘의 고난은 불신앙과 불의와 강포외 죄악으로 발생하였지만, 조선이 일제의 침략을 받은 이유를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숭배를 하였기 때문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어떤 사악한 가계저주론자들은 조상들이 저지른 제사나 미신등의 우상숭배 죄악 때문에 조선이 벌을 받아 일제의 식민통치를 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조선의 패망을 구약 이스라엘의 패망과 동일시하는 것은 결코 성경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당시 조선은 구약의 이스라엘처럼 선민도 아니었고, 하나님과 언약적 복과 언약적 저주를 맺는 관계도 아니었다. 


이런 식의 역사관을 가진 개신교인들이 많다는 것은 너무나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이다.  이것은 신앙과 믿음이라는 울타리 안에 갇혀서 세계를 보는 역사적 관점이 부족한 무지한 목사들의 책임이 크다.


그런식으로 가정한다면 신도를 믿는 귀신의 왕국 일본은 어떻게 제국주의화를 할 수 있었을까?   천황을 숭배하고 귀신을 믿는 일본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기 때문에 세계 강대국이 되어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귀신을 믿는 우상숭배의 왕국 일본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러시아와 청나라를 물리치고 필리핀과 베트남과 동남아의 수많은 섬들을 정복하였는가?   귀신의 나라 일본은 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에게 원자폭탄 2개를 얻어 맞고 패망한 이후 지금까지 멸망당하지 않고 강대국으로써의 지위를 누리는 것은 한량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일까?  아직까지 우상숭배의 나라 일본에게 왜 원천기술과 첨단 전자부품과 기계장비를 수입하여 쓰고 의존하고 있는가?

  

당시의 조선은 해외선교사들이 조금씩 들어와 조선 국왕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학교와 병원과 교회를 세워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한 갖 유아기와 같은 시대였다.  이로 말미암아 각종 미신과 가난과 우매한 관습 등의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고 근대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는 초석을 쌓고 있었다.  


해외선교사들의 수고와 헌신으로 조선의 교회는 점차 성장하였고, 국제적인 기독교 네크워크망을 가질 수 있어서 외교적으로는 상당히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

 

하지만 과학혁명과 산업혁명을 경험하지 못하여 기술과 자본의 축적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군사력이 약하여, 세계 열강들의 제국주의 암투에 약소국으로 희생을 당하여야만 했다. 


당시의 조선은 부패한 세도정치를 겪으면서 국력을 강화시킬 원동력을 상실하였다.   세도정치하에 과거제 비리와 매관매직은 비일비재하였다.  


부패한 지방관리들은 조세제도를 불법적으로 운영하였다. 세도가문은 조선 후기 새롭게 성장하였던 상공인과 부농층마저 수탈하려고 애를 썼고 경제적 이권을 독점하여 사회문제를 야기시켰다. 그리고 삼정(토지세,군포,환곡)을 제멋대로 이용하여 평민들의 골수와 피까지 빨아먹었다. 

 

그 결과 잉여생산물이 나올 수 없었고 상업발달이 되지 않아 경제발전을 할 수없었다.  때문에 민란이나 혁명이 일어났지만 결국 민주주의 의식이 싹틀 수 있는 기회를 놓쳤고 오히려 외세를 끌어들이는 실책을 하고 말았다.  이러한 타락한 위정자들로 인해서 국민들은 미신과 무기력증의 나락으로 더욱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후에 세도정치를 개혁하기 위한 여러가지 시도가 있었지만 지나친 쇄국정책으로 세계의 급변하는 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하여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였다.  세계는 과학혁명과 산업혁명, 제국주의와 식민지화, 침략과 전쟁으로 요동치고 있었지만, 조선은 우물안의 개구리처럼 처신했고, 홀로 독야청청하였던 것이다.


뒤늦게 고종은 강한 조선을 꿈꾸며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조선의 근대화를 시도하였다.   고종은 근대국가로 가는 길에 방해가 됐던 신분제도와 보수사상을 타파하고자 의제를 개혁하고 관립학교를 설립 하는 등 백성들의 의식계몽에 힘을 쏟았다. 


실제로 고종은 해외 의병활동에 군자금을 보태고 끊임없이 세계열강에 밀사를 보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는 등 국권 회복을 위해 많은 시도를 했다.   또한 서구식 제복과 총으로 무장한 근대식 군대를 양성하고, 전신선·전기 가설 및 철도 부설 등 근대화를 위한 인프라 구축에도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이미 시기는 너무 늦었다.  


러,일,청의 군대가 들어와 주둔하면서 대한제국은 희생양이 되어 각국의 이익을 위한 각축장이 되었다. 일본이 청나라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 말미암아 한반도는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대한제국은 외교적으로 노력하였으나 서구 열강은 서로서로 약소국을 침략하여 식민지 건설을 경쟁하였기 때문에 대한제국이 내민 도움 요청을 묵살하였다.  .

<대한제국의 13년>

 

지금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미국을 기독교 국가요 하나님의 축복받는 세계 제일의 나라로 선망하고 있지만 그 미국이 과거에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하는데 동조하였다는 것(가쓰라-태프트밀약)은 알고 있는가?     

미국이 일제와 은밀한 거래를 하고 서로서로 제국주의를 용인해주면서 세계의 약소국을 침략하며 식민지화하 하는 것을 동조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만약 미국의 허락이 없었다면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는데는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 기독교 국가인 미국의 이러한 제국주의 행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일제침략과 식민지화에 대한 성경적 관점

 

구약의 이스라엘의 국가적 고난과 조선의 국가적 고난은 성격과 의미에서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구약의 이스라엘의 역사선상에서 조선의 고난을 해석하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오늘날  조선에 대한 일제침략은 성경적인 관점으로 볼 때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제국주의와 식민통치, 침략과 정복, 약탈과 강포, 전쟁과 살인, 비인간화와 억압과는 전혀 뜻을 같이 할 수 없다.  하나님은 일제의 지배를 통해 조선이 변화받기를 원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조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복음이 더욱 확산되고, 많은 수의 교회와 학교들이 지어져 위정자들과 국민들의 의식과 정신이 계몽되어 민주주의 의식이 싹을 틔우며, 온 국민이 힘을 합쳐 일제의 침략을 막아내도록 정치적, 외교적, 군사적 모든 방법을 강구하는 데에 있었다. 


하나님의 뜻은 복음의 능력으로 조선의 모든 국민의 의식이 변화를 받아 모든 미신과 패배의식과 무기력증에서 해방되어 비전을 가지고 나라의 미래를 설계하고 계획할 수 있는 단계까지 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현실적인 한계에 부딪혀 일제의 침략을 받았다 할지라도 그러한 국가적 고난속에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기도하며, 노력하고, 모든 방법을 동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일제의 침략에 순응하고, 운명론적 자포자기에 빠져 신사참배와 친일행위를 하면서 교회와 국민이 친일과 반일로 분열되는 것은 전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러한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국민이 하나로 단결하여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을 찾으며 현실의 한계에 도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약소국의 설움과 상처를 받았다 할지라도 믿음을 잃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숙명론과 패배의식과 무기력함을 극복하고 하나님 앞에 열려있는 새로운 미래를 향해 싸워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만약에 그랬더라면 일제로부터 해방을 앞당기고 남북 분단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만약 복음의 능력이 조선을 지배하고 끊임없이 저항하였다면 사회주의가 발을 붙여놓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복음의 능력을 무력화시키고 해체시키고 어용 기독교를 만든 일제의 지배에 맥없이 굴복했기 때문에 러시아의 사회주의가 일본과의 전쟁에 승리하면서 이 땅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이다.


많은 수의 독립 운동가들이 사회주의를 추종한 이유가 약소국에 대한 관심을 가진 유일한 강대국이 러시아 혁명정부였고 또한 반反일에 뜻을 같이 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러시아 사회주의와 교류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만약 서구 열강과 미국이 조선의 고통을 도와주고 독립운동에 협력적이었다면 과연 조선이 좌파 우파로 갈라졌을까?  이러한 일제침략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조선의 근대화가 앞당겨 질 수 있지 않았을까?

 
결론

 

이제 한국의 개신교는 바람직한 역사관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일제침략을 하나님의 뜻으로 돌리거나,  일제 때문에 한국이 근대화하는데 유리했다고 보는 시각을 고쳐야 한다.   


운명론, 숙명론, 자포자기를 하나님의 뜻이라는 구실로 자기한계를 포장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자기한계를 극복하며 믿음을 가지고 돌파구를 찾아가는 가운데 주어지는 것이다. 

 

신사참배와 친일행위를 한 기독교는 철저한 회개와 반성위에 모든 친일사관을 뜯어고쳐야 한다.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믿음을 지키려고 싸우다가 옥고를 치루고 순교한 이들 앞에 신사참배를 용인하고 굴복한 자들은 지울 수 없는 영원한 배도자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날의 친일 사관을 갖는 개신교는 자신들의 신앙의 뿌리가 신사참배를 용인하고 굴복한 부끄러운 기초위에 있는가 철저히 살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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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한복음 10:11”

 

 

김경종은 1894년에 함경남도 홍원군 홍원읍에서 출생했다. 그의 어린시절은 선천적으로 온유한 성품에 어질고 착한 기품을 갖고 자랐다. 그는 목회에 꿈을 갖고 그의 나이 서른이 지나 1929년 평양장로회신학교에서 소정의 과정을 이

수하고 졸업하였다. 졸업을 한 후 첫 목회지는 함남 혜산군 혜산읍 혜산리장로교회로 1932년까지 봉직하였다. 이 혜산교회는 1916년에 설립, 당시 갑산군의 김택서의 전도로 이인규의 사가에서 첫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때로부터 수년간 기독교의 여성 교육자이며 한국 최초의 의학박사이며 전도자였던 신마리아가 활동하였다. 김목사는 이 혜산교회에서 1933년에 다시 함경남도 함흥에 운홍리교회로 옮겨 활동하였다. 여기서 일본에 건너가서 신학을 더 공부하고 1934년 도쿄에 있는 아오야마학원 신학부를 졸업하고 다시 귀국하여 고향인 함경도로 돌아와 운홍리교회를 다시 맡아 목회에 전념하였다. 1940년에는 함남노회장에 피선되어 활약하기도 하였다.

 

 그는 신사참배에 적극적으로 대항하였던 인물로, 3.1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감옥에서 혹심한 고문을 받으면서 형을 살기도 하였고, 늘 일본 경찰 감시를 받아오기도 했다. 여러 고문을 받으면서도 1943년 9월 '일본 천황은 신이 아니다 다만 피조물인 사람일 뿐이고 그런 고로 경배의 대상이 결코 될 수 없다'고 역설하였다. 이와 같은 일 때문에 그는 5개월간이나 형무소 생활을 하기도 했다. 1939년 제 2차 세계대전과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한국인에 대한 탄압은 극심하였고 신사불참운동으로 인하여 교회는 수난의 연속이었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외국 선교사들은 강제 추방되고 투옥된 신자 수만도 무려 2,000명이나 되고 폐지되었던 교회는 200여처, 감옥에서 순교한 자만도 무려 50명이나 되었다.

 

일제는 신사참배만으로 끝내지 않았다. 궁성요배 또는 동방 요배라 하여 일본 왕이 거주하고 있는 궁성을 향해 왕의 은덕으로 살게 함을 감사하는 예의의 표시로 강요하였다. 궁성요배를 실시한 후에 예배가 진행될 수 있도록 강요하였으며 각 가정과 교회 안에 가정 제단의 신도를 강요하였다. 그는 이에 목숨 걸고 대항하였으며 결국 일제는 패망하고 나라와 민족은 해방이 되었다. 그러나 북한에는 무신론 공산주의가 교회와 교인들을 탄압하는 것은 일제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는 이 사실을 알고 정든 고향을 뒤로 하고 후일을 기약하면서 1948년 자유의 땅 이남으로 눈물로 월남하게 되었다.

월남한 후로 서울 후암교회를 맡아 2년간 사역하며 복음을 전했다.

 광복의 기쁨도 잠시,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났다. 서울은 어이없게도 함락되고 또 한바탕의 수난을 겪어야만 했다. 김목사는 가족들을 떠밀어 부산으로 피난시키고 홀로 서울 후암교회에 남게되었다. “북에서도 양들을 두고 온 제가 서울에서 또 도망친다면 저는 예수님을 두 번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그는 폐허가 된 서울에서 남겨진 양들을 지켰다. 결국 자신은 미처 피하지 못한 채 북한 공산군들에게 납치되었고 순교의 삶으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 끝까지 교회와 양을 지켰던 김목사는 1950년 수많은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순교의 길을 걸어갔다.

/김경종[金庚鍾, 1895년 10월 17일-1950년 8월 23일

-참고문헌

# 한국 컴퓨터 선교회 http://kcm.kr/

# 한국 교회 순교자 기념 사업회 http://kcmma.org/board/

# CGN TV ‘예수님을 바로 보여주는 사람들’  [보기]

 

[출처] 2017. 06월 이달의 인물(국내): 김경종 목사 [金庚鍾, 1895년 10월 17일-1950년 8월 23일]|작성자 더세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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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에서귀감이 되는 주남선 목사님  


 

주남선 목사는 오직 한 길,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겸손하게 일하여 참된 목회자의 귀감이 되었다. 그의 생애 여정은 선한 목자의 길이었다. 그는 부드럽고 겸손한 목회자였지만 동시에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분명한 표준을 가지고 살았다. 그러기에 그는 세월이 지난 오늘에도 기억되어야 할 목회자로 남아 있는 것이다.

주남선 목사는 여러 면에서 우리의 흥미를 끌고 있다. 그는 기독교 전래 초기에 호주 선교사를 통해 복음을 받아들이고, 권서인(勸書人)으로 부르는 매서 전도자로 일한 바 있다. 또 독립 운동에도 가담해 3·1 운동 당시 투옥을 마다하지 않았고, 일제 하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해 5년 동안 옥중에서 지내기도 했다. 해방 후 김구 선생으로부터 제헌 국회에 출마해 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했지만 자신의 사명이 아니라며 거절했다. 그리고 독립 유공자로 포상하려 했을 때,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하는 것은 국민의 당연한 도리인데 ‘그것이 어찌 상 받을 일이겠는가’라며 포상을 사양하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가 주남선 목사를 주목하는 이유는 그의 훌륭한 점 때문이 아니다. 도리어 오직 한 길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겸손하게 일하고 참된 목회자의 귀감이 되었다는 점 때문이다. 그의 인생 여정은 선한 목자의 길이었고, 세상적인 명예나 명망에는 무관심한 삶이었다. 그는 부드럽고 겸손한 목회자였지만 동시에 옳고 그름에 대해서 분명한 표준을 갖고 살았던, 이름 그대로 ‘선한 목자’였다. 따라서 그는 세월이 지난 오늘날에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목회자로 남아 있다.

가정 배경과 입신 및 신앙 활동
주남선(朱南善) 목사는 1888년 9월 14일 경남 거창에서 한학자 주희현(朱喜賢)과 최두경(崔斗卿) 사이에서 3형제 중 차남으로 출생했다. 그는 어릴 때 한학을 배우며 성장했으나 아버지는 그가 15세 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는 효성이 지극해 거창 군수로부터 ‘효자상’을 받기도 했다. 17세까지 한학을 공부하며 농사를 돕던 그는 경남 안의에 있는 잠업 실습소를 수료하고, 한때 지방 관청에 등용돼 군수의 비서로 일한 적도 있다.
농업에 종사한 주남선은 1908년 친구 오형선(吳亨善), 조재룡(曺在龍)과 함께 호주 선교사를 통해 복음을 받아들이고 기독교에 입신했다. 그는 그들과 함께 지역 교회를 설립키로 하고 죽전(竹田)에 위치한 초가 한 채를 매입했는데, 이것이 1909년 10월 10일 설립한 거창교회였다. 1911년 12월에 호주 선교사 맹호은(Rev. F. J. L. Macrae)에게 학습을 받고, 이듬해 1912년 6월에 역시 맹호은에게 세례를 받았다. 1913년에 권서가 되어 1916년까지 활동했는데,1 그 기간 동안 약 6,000여 권의 성경을 거창군 일대에 반포했다.2 그 기간 중에도 거창교회 집사로 활동했다. 즉 1914년 4월에 집사로 임명되었는데 그것이 거창교회의 첫 집사 임명이었다. 그해 5월 10일에 의령 남병현 씨의 2녀인 남술남(南述藍)과 혼인했다.3 그는 집사로 임명 받은 후 교회에서 봉사하던 중에 복음을 더욱 깊이 깨닫기 위해 1917년 3월 진주에 있던 경남성경학원에 입학해 2년간 수학하고 1919년 졸업했다. 이 학교는 호주장로교 선교부가 주관하던 신학 교육 기관이었다. 그해 2월 28일에 오형선에 이어 거창교회 제2대 장로로 장립되었는데, 그때 그는 31세였다.

 

독립 운동에 참여함
그가 경남성경학원을 졸업하고 장로가 되던 해 3·1 운동이 일어났다. 국가와 민족에 대한 사랑도 남달리 깊었던 그는 지방의 독립 운동에도 가담했다. 즉 거창 지방에서 3월 20일 만세 운동이 있었는데 오형선, 고운서 등과 함께 독립 시위를 주도하면서 그때부터 보다 적극적으로 독립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주남선은 형인 남재(南宰)와 동생 남수(南守)와 함께 만세 운동에 가담했는데, 그 형제들은 그해 8월에 있었던 국권회복운동(國權恢復運動)에도 관여했다. 1919년 8월에 이덕생(李德生), 김태연(金泰淵), 오형선 등과 함께 독립군 자금과 의용병 모집에 관여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 일로 주남선은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에 1921년 12월 29일 부산감옥 진주분감(晋州分監)에서 가출옥했다.4
그의 출생과 성장기는 우리나라 역사의 변혁기였다.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고 기독교가 소개되는 역사의 길목에서 그는 당시 민족과 신앙의 강(江)에 두 다리를 적시고 한반도의 독립을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가 독립 운동에 관여한 것은 기독교에 입신해 집사, 장로가 되고 경남성경학교를 수학한 후였는데, 그는 민족 공동체에 속한 일원으로서 독립 운동은 당연한 의무로 여겼고 그것이 신앙 운동과 배치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 점은 독립 운동이나 민족 운동에 대해 상대적으로 무관심했던 한상동과 큰 차이를 보여 준다. 그는 출옥한 후 1922년에도 짧은 기간 동안 권서로 일한 것으로 보이지만, 성서공회 측 자료에 기록이 없다.

 

신사참배 반대와 해방 후 활동
주남선은 만세 운동과 군자금 및 의용병 모집 건으로 체포되기 전에 이미 평양신학교에 입학해 재적하고 있었고 1930년에 평양신학교를 제25회로 졸업했다.5 그가 학교에 재적하고 있던 동안 거창교회 전도사(1922. 1~10), 거창 지방 권서인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는 이홍식 목사 후임으로 거창교회 교역자로 부르심을 받고, 1930년 10월에 경남노회에서 목사 장립을 받았다. 1931년 2월에 거창교회 위임 목사가 되었을 때6 그는 43세였다.
주남선 목사의 목회 생활은 길지 못했다. 1935년부터 일제는 신사참배를 강요했는데 주 목사는 1938년 이래 거창 지방에서 신사 불참배 운동을 주도했다. 그 일로 그는 거창교회를 사면하게 되었다. 동 교회 제223회 당회록에 “회장이 부득이한 사졍에 의지하야 본교회 시무 사면을 졔출한고로 회중회에셔 쳐결하는 되로 하기로 가결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7 여기서 ‘부득이한 사정’이란 신사참배 반대로 인한 외부의 압력이었다. 주 목사는 1940년 7월 16일 소위 일제 검거 때 체포돼 약 5년간 투옥되었다가 1945년 8월 17일 해방과 함께 출옥했다. 그의 이름은 원래 주남고(朱南皐)였으나 옥중에서 주남선(朱南善)으로 개명했다.
주남선 목사는 거창교회 담임 목사로 다시 청빙을 받고 1945년 12월 거창으로 부임했다. 해방 후 경남 지방에서 교회 쇄신 재건 운동이 전개되었을 때도 그는 바른 교회 건설을 위해 노력했다. 특히 그는 한상동과 함께 신학교 설립 기성회를 조직하고, 개혁주의적 신학 교육 기관으로 고려신학교 설립에 동참했다. 주남선은 고려신학교 운영과 경영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으나,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고려신학교의 험난한 항해에 설립자로서의 짐을 회피하지 않았다.

 

목회와 목회 활동
앞서 언급한 대로 주남선은 1908년 기독교에 입신한 후 권서인, 집사, 장로로 봉사했다. 그리고 1930년 6월 거창교회에 목사로 부임한 이후 1938년 말까지 약 7년과 1945년 말에서 1951년 3월까지 약 6년을 합해 총 13년 동안 거창교회에서 목회했다. 그동안 주 목사는 목회 활동을 통해서도 존경과 신뢰를 받았다. 주남선 목사는 여러 일들에 관여했으나 자신은 오직 순전한 목회자이기를 원했고,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려는 욕심뿐이었다.

 

기도 생활
주남선 목사는 영적 지도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고, 기도는 그의 목회를 이끌어간 힘의 원천이었다. 영적 지도력과 감화력 그리고 신앙과 삶의 일치는 다른 목회자들의 모범이 되었다. 그는 신사참배를 반대해 싸울 때는 특별히 인간적 공명심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했다고 한다. 기도를 통해 시련을 이겼고, 출옥한 후에 한 번도 자신의 신앙 투쟁을 드러내거나 자랑하지 않았다. 1945년 12월 경남노회장으로 선출되었을 때 단상에 오른 주 목사는 신사참배한 사람들을 향해 “얼마나 수고가 많았습니까? 이 사람은 형무소에서 바깥 세상 일을 생각지 않고 주님만 생각하다 보니 어느덧 6년이 지났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그 포용과 여유도 그의 신앙적 인격을 보여 주는 단면이었다.8 그는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일제와 맞서 싸운 그 자체로 자기 의에 빠지지 않았다.
주 목사는 진정으로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기도는 본래 아성을 세워 가는 게 아니라 스스로 그 아성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는 목회 활동에서 기도 생활의 모범을 보였고, 새벽 2시에 교회에 가면 오전 9시나 10시까지 기도했다고 한다. 그를 가까이 대했던 사람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그는 큰 소리로 기도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 진실하게 기도하는 모습이 배어 있었고 그가 앉았던 자리는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고 한다.9 그는 다른 어떤 것을 의지하지 않고 실로 기도에 의지한 목회자였다.

설교
주남선 목사는 성경에 대해 부분과 전체가 영감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과 무오성 그리고 최종적 권위를 확신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이고 전폭적인 순종을 생활화했다. 그런 신앙이 신사참배에 대항했던 힘이었고, 목회와 설교의 바탕이었다. 그에게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은 ‘성경 전부’(tota scriptura)였다.
그의 설교는 요란하거나 잡다하지 않았고 오직 성경을 ‘단순하게’ 가르치려고 했다. 구변이 능하지 않았고 인간적 기교도 없었다는 점에서 ‘평범한 설교’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의 설교는 자신의 신앙적 삶에 근거한 진실한 것이었기에 많은 은혜를 끼쳤다고 한다. 한때 거창교회에서 함께 섬겼던 전성도 목사는 주 목사에 대해 “생활로 모범을 보여 주는 무언의 설교자”라고 평했다.10 그의 설교는 웅변적이지 않고 열변도 아니며 단순하고 조용한 선포였다.11 그저 자신이 믿고 깨달으며, 체험한 바를 전하려 했다. 오병세 박사는 주 목사의 설교에 대해 “그의 설교에 많은 사투리가 섞여 나오고 웅변도 아니었으나, 한 가지 특징이 있고 무기가 있었으니 곧 진실이었다. 그에게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 등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어른에게 시원스럽다든지, 훤하다는 것은 없어도 참이라는 것은 찾아볼 수 있었다”12고 회상했다.

 

목회 일반
주남선 목사는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로서 따뜻한 인간미를 지녔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될 때 한 치의 타협도 없는 외유내강한 사람이었다. 죽음의 고비를 넘나들었던 현실 초월적인 도량과 신앙적 인격을 겸비했다. 따라서 그의 삶의 여정이 목회 전반에 걸쳐 나타나 있다.
그는 목회 활동에서 심방을 중시했다. 1946년 8월 당시 거창교회의 주일 평균 출석수는 270명이었는데,13 그는 성도들의 가정을 알뜰하게 보살피고 성도들의 가정 문제를 자신의 일처럼 해결하려 힘썼다. 어느 해 여름 장맛비가 심하게 내려 수해가 나고 집이 침수되는 등 어려움을 당했을 때 한밤중에 등불을 들고 성도들의 집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위험에서 구했다고 한다. 자녀 없이 살던 한 노파가 친정에 가서 병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집사 세 분과 함께 먼 길을 찾아가 손수 장례를 치러 주고 오기도 했다고 한다.14
6·25 동란이 발발했을 때 자신의 생명은 아랑곳없이 피난을 가지 않고 교회를 지키며 성도들을 돌보았다. 박손혁 목사는 주남선 목사의 장례식에서 “1950년 6월 25일 사변이 발생하자 일주일간 금식 기도를 드린 후 피난을 단념하시고 동역자들을 역방(歷訪)하시면서 교회와 양떼를 사수하기를 권장하시며, 폭탄과 총탄이 비오듯 하는 때라도 아직 남아 있는 교인이 있지나 않나 하여 집집이 찾아다니셨다”고 추도했다. 또 그는 이와 같은 성도들의 심방을 위해 “8월 29일 함양 지방으로 순회하시던 중에 개평교회에서 복음 진리를 힘써 증거하시다가 인민군에게 붙잡혀 구금을 당하셨지만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로 놓임을 받으셨다”고 일화를 소개했다.15 이처럼 그는 성도들을 보살피고 교회 일에 관심이 많았던 자상한 영적 아버지였다.
그는 공사석에서 남을 비방하거나 헐뜯는 일이 없었고, 자신과 생각을 달리한다고 남을 비방하거나 험담하지도 않는 성숙한 신앙인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상한 아버지같이 교회를 돌보고 치리했다. 평소 한복을 즐겨 입었던 그는 선비적 자태로 교회를 섬겼다.

 

목회자적 신앙과 인격
주남선 목사의 생애를 살펴볼 때 그의 삶의 태도, 신앙적 면모, 인격 등을 다섯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주 목사는 무명(無名)에의 의지로 산 사람이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았던 사람이기에 자신의 명예나 영광에 관심이 없었다. 자신을 위해 사진 한 장, 글 한 편 남기기를 원치 않았다. 그 약한 몸으로 신사참배를 반대해 숱한 고초를 겪고도 해방 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 후유증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것이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될까 봐 늘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지요” 혹은 “나 같은 죄인이 그런 귀한 체험을 하였지요”라고 말했는데, 이처럼 자신의 이름을 내고 업적을 드러내고자 하는 일이 없었던 사람이다.
둘째, 주 목사는 건실한 교회 건설자였다. 그의 생애에서 궁극적 관심은 하나님의 교회였다. 신사참배 반대, 해방 후 교회쇄신운동, 고려신학교 설립, 목회 활동 등 모든 것은 한국 교회를 정화하고 바로 세우려는 일념에서 행한 일이었다. 그의 노력은 결국 하나님의 교회 건설의 일환이었다.
셋째, 역사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는 분명한 확신의 소유자였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에 대해 확신을 갖고 살았던 사람이다. 진리는 반드시 드러나고, 하나님께서 겸손히 의지하는 자에게 승리를 주신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겸손하고 신실하게 살고 가르치며 실천했다.
거창 지방의 불신자들에게도 존경과 신뢰를 받았던 주남선 목사의 영적 지도력, 신앙적 인격, 겸손하고 자상한 성품, 세상의 물질이나 명예나 권력의 유혹에서 자유했던 분명한 목회자적 철학 등은 오늘날 목회자들이 본받아야 모범이 되고 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목사다운 목사’라고 회상한다. 비록 좋은 목사에 대한 기준이나 표준은 다를 수 있어도, 자신의 것을 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며 겸손히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선한 목회자 상은 우리 시대의 귀감이 되고 있다. 교회 지도자들의 타락으로 인해 어둠의 세월을 보냈던 중세에 나온 유명한 경구가 더욱 마음 깊이 다가온다. “성직자의 삶은 평신도의 복음이다”(Vita clerici est evangelium laice).
불행하게도 주남선 목사의 봉사의 날은 길지 못했다. 민족상잔의 가슴 저미는 전화(戰禍)의 와중인 1951년 3월 23일(금요일) 오후 6시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3세였다. 그는 생시에 끝까지 거절했으나 사후 1977년 정부는 그에게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했고, 1996년에 대전의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으로 이장됐다. 하지만 이런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하나님 말씀의 겸손한 사역자였다는 사실이다.

주석
1) 「대한성서공회사 Ⅱ」(유대영, 옥성득, 이만열, 대한성서공회, 1994), p.408.
2) 위의 책 p.593. 이 책에 주남선의 권서 활동에 대한 켈리(J. T. Kelly)의 1915년 기록이 소개돼 있다. 장희근은 주남선이 거창 지방 권서인으로 5년간 활동한 것 외에 진주 지방에서 권서인으로 8년간 일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근거는 없는 상태다. 「한국장로교회사」(장희근, 아성출판사, 1970), p.285.
3) 후일 슬하에 경중(璟重), 경도(璟道), 경효(璟孝), 경세(璟世) 4남과 경순(璟順), 경은(璟恩) 2녀를 두었다. 부인은 1973년 7월 24일 세상을 떠났다.
4) 釜山監獄晋州分監長 朝鮮總督府典獄補 布村茂隆명의의 大正 10년 12월 29일자로 발행된 <假出獄證票>에 근거한다. 「해와 같이 빛나리」(심군식), p.304 참고.
5) 「장로교신학대학 70년사」, p.193.

 

- 출처 : 두란노 빛과 소금(http://www.duranno.com/sl/detail.asp?CTS_ID=36040)

[출처] -이달의 인물- 주남선 ' 한국 교회사에서 찾는 좋은 목사님'|작성자 더세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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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선교사, 이기풍 목사

 

1. 기독교 박해자에게 열렬한 신자로

이기풍 목사는 1865년 평양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1883년까지 개인사숙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괄괄한 성격으로 싸움과 술을 좋아해서 젊을 날을 허송세월하면서 서양선교사들
을 박해했다. 특히 그는 1890년 어느 날 평양서문통 네거리에서 노방전도를 하던 마펫 선교
사에게 돌을 던져 크게 다치게 한 것으로 유명하였다.

그후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원산으로 피난을 했다. 원산에서도 그는 신자들을 박해하는 등
못된 짓을 골라했다. 그러던 차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전군보라는 전도인의 전도
를 받고는 자신의 지난날의 잘못을 회개하며 기독교인이 되기를 결심한 것이다. 성령님의
놀라운 역사였다. 그후에 마펫 선교사를 찾아가 지난날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여 용서를 구
했다.

1894년 그는 슬왈슨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에 입교했다. 뜨거운 믿음의 사람이 된
것이다. 1898년부터 1901년까지 매서인으로 함경남북도를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파했다. 이
어 1902년 부터 1907년까지는 황핼 안악,문화, 신천, 해주 등지를 도며 조사로 시무했다.
한편 이때 마펫 목사의 권고를 받고 1903년 신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길선주, 양천백 등과
함께 최연소자 신학생으로 입학하여 학업에 열중했다.


2. 제주도에서 선교활동

그가 졸업하던 해에 독노회가 조직되었다. 여기서 서경조, 길선주, 양전백, 한석진, 방기
창, 송린서 등과 함께 목사안수를 받았다. 목사안수를 받은 이기풍 목사는 이 독노회의 결
의에 의해 우리 나라 최초의 외지 선교사로 임명되어 제주도로 떠났다. 부인 윤씨와 함께
인청항을 출발하여 목포를 경유해 제주도를 가려고 했다. 목포에 도착해 보니 마침 풍랑 너
무 심하여 목포에 가족을 남겨두고 홀로 제주도를 향해 떠나 난항을 거듭한 끝에 1908년 봄
에야 제주도에 도착했다.

한편 그의 부인 윤씨는 선교사 이길함의 양녀이며 숭의여학고 제1회 졸업생으로 당시로서는
엘리트 여성이었다. 한편 이때는 이미 정부가 기독교의 선교를 허락한 때이었지만 1899년의
신축교난으로 제주도 주민들이 기독교에 대해 갖은 편견은 여전히 가혹하기 그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수차례 주민들의 위협을 당해야 함을 물론이고 굶주림과 생활고까지 견뎌야 했
다. 그러나 그는 이런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오직 복음 전파에만 전심전력을 다했다.

뒤이어 총회에서는 그를 돕기위해 전도인 이관선 김홍련을 제주도 선교는 본격화되기 시작
했다. 1911년 10월 전라노회에가 결성되어 제주도는 1912년부터 전라노회 관할이 되었다.
이기풍 일행은 주민들의 온갖 핍박과 방해공작 속에서도 성내교회를 비롯 삼양 내도 금성
한림 협제 등지에서 복음을 전파했다.


3. 도서벽지를 통해 복음전파

1918년 그는 전라노회의 부름에 따라 광주 북문안교회 초대목사로 전임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초창기 교회발전에 전심전력을 다했다. 한편 그는 1920년 전라노회장 및 총회 부총회
장에 1921년 제10대 총회장을 역임했다. 막중한 책임과 왕성한 활동중에 그는 신병으로 고
생하게 되었다. 성대가 막혀서 말이 작 나오지 않는가 하면 관절염, 귀병 등으로 심한 고생
을 하게되었다. 그래서 일단 목회직을 사임하고 서울로 올라와 요양을 하기도 했다.

1923년 그는 다시 전남 순천교회 목사로 청비을 받아 부임했고 1924년 고흥교회로 전임되었
고 1927년 다시 제주도 성내교회 위임목사로 청빙되어 재차 부임하였다. 1913년에는 전남
벌교교회로 파송되었고 1934년에는 그는 칠순의 노구를 이끌고 아무도 가기 싫어하는 도서
벽지 여수군 남면 우학리에라는 작은 섬에 복음을 전파하려 들어갔다. 이외에도 이기풍은
돌산 완도 등지의 도서지방으로 순회 전도하면서 교회개척에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다.


4.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일경의 고문으로 병을 얻어 순교

일제의 치하에서 민족교회가 심한 박해와 시련을 겪을 때에는 과감히 일제에 대항하여 교
회를 굳건히 지켰다. 이러던 중 1936년을 기점으로 일제는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 그는 이
에 정면으로 맞서서 극력 반대했다. 이에 일제는 그에게 미제의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순천
노회 산하 오석주, 나덕환, 김상두, 김순배 목사 등과 함께 1938년 체포당했다.

칠순의 노구를 지탱하기도 힘든데다 일경의 심한 취조와 고문은 그에게는 정말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광주형무소로 압송되기 전에 졸도하여 벙보석으로 출감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기풍은 과로와 고문 등으로 이미 건강이 심히 악화되어 있었다. 게다가 칠순의 나
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회복되기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의 마지막
사역지인 우학리 교회 사택에서 1942년 6월 20일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소천했다. 그의 유
해는 우학리에 안장되었다.

그러다 11년 후인 1953년 전남노회 주선으로 광주 기독묘지에 이장되었으며, 1959년 대한예
수교장로회 제44회 총회에서는 그의 부인 윤씨에게 표창을 주었다. 1962년 12월 25일 신여
성으로서 평생 이기풍 목사의 성역을 도와 헌신한 부인 윤씨도 향년 84세로 별세했다. 유족
으로는 딸 하나가 있다.


 

스왈른 선교사를 도우며 열심히 전도를 하던 이기풍은 청일전쟁이 끝난 후, 스왈른 선교사와 함께 평양으로 돌아왔다. 평양으로 돌아온 이기풍은 마포 선교사를 찾아가 자기가 과거에 집안으로 돌을 던지고 턱에 상처를 낸 난봉꾼이었다는 것을 낱낱이 고하고, 그 후 회개하여 예수를 믿고 새 사람이 되었노라고 흐느끼며 자기 죄에 용서를 구했다. 마포 선교사는 감격스럽고 기이한 사실에 대하여 오직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또 감사드릴 뿐이었다.

이후 이기풍은 1901년까지 매서(성경책을 파는 사람, 나중에는 책을 팔면서 전도하는 사람인 권서로 불림)로서 함경도에서 성경을 배포하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리고 1902년에서 1907년까지는 스왈른 목사를 따라 황해도의 안악, 문화, 신천, 장연, 해주 지역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고, 선교사 업무를 돕는 조사(helper)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마포 선교사가 설립한 평양장로회신학교에 1903년경(연도가 정확하지 않다)에 입학하게 된다.

이기풍의 신학교 생활은 스왈른 선교사와 마포 선교사의 강력한 지원이 있었다. 이기풍은 복음을 전하고 성경공부를 시켜야 했던 권서 경험을 통해 해박한 성경지식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한학에 대한 지식도 풍부하여, 목사후보생으로 추천 받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신학교에 입학한 이기풍은, 대부흥운동이 절정에 달하였던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서경조, 한석진, 길선주, 양전백, 송린서, 방기창과 함께 우리 나라 최초의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이 목사 안수를 위하여 우리 나라 최초로 노회가 설립되었으며, 목사 안수 다음날 속회된 노회에서, 마포 선교사는 이기풍 목사에게 회중을 대표하여 참회기도를 인도하게 하였다. 그리고 3일째 회의가 열린 9월 19일에는, 7인의 목사가 탄생한 기념으로 제주도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의하였다는 전도위원회의 결의를 만창일치로 통과시키게 된다. 그리고 이기풍 목사는 우리 나라 최초로 제주도에 선교사로 파송을 받게 되었다.

평양의 술 주정꾼이 마포 선교사의 턱을 돌로 쳤으나, 회개하여 목사가 되어 제주도에 선교사로 파송되었다는 사실은, 현재 미국 장로교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는 <한국교회사> 첫 페이지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우리 나라 최초 외지 선교사 `제주 선교의 아버지' 이기풍 목사

이기풍목사는 1865년 12월 23일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청년시절 마포삼열 선교사의 턱을 돌로 쳐서 피를 흘리게 한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선교활동을 몹시 방해하던 혈기방장한 사나운 청년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꿈에 예수님이 환상으로 나타나셔서, "기풍아, 기풍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너는 나의 복음의 증인이 될 사람이다." 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놀란 이기풍은 끈질긴 전도를 하던 소안련(스왈른) 목사를 찾아가서 고백하고 1894년 마침내 예수를 믿기 시작하였다.
1888년부터 1901년까지 스스로 성경을 들고 기독교가 척박한 함경북도를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이런 모습을 진지하게 지켜보고 있던 마펫은 이기풍에게 신학교에 입학할 것을 권유했다. 마침내 1901년 장로가 되고, 1903년에는 평양신학교에 정식으로 입학하여 1907년에 먼 훗날 3·1독립운동 33인의 대표로 활약하였던 길선주, 양전백 등과 함께 장로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제1회 장로신학교 신입생은 이기풍을 비롯하여 서경조, 길선주, 양전백, 한석진, 방기창, 송린서 등 7명이었다. 이들은 학교를 졸업하던 해 독노회를 조직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 독노회 결의에 따라 이기풍이 외지 교회의 선교사로 임명되니, 한국 최초의 목사가 된 것이었다.


그로부터 13년동안 제주도에서 개척전도한 교회는 성내교회를 비롯해 성안, 금성, 성읍, 조천, 모슬포, 용수, 중문, 삼양, 한림, 법환, 세화교회 등 여러교회를 설립하였고 1918년에는 광주 제일교회(당시 북문교회)와 순천중앙교회의 초대목사로 부임했다.
이기풍 목사님은 일제가 강요하는 신사참배를 앞장서서 거부하심으로 투옥되어 갖은 고문을 당했습니다.

 

당시 신사참배는 한국교회 존립을 흔드는 중대사였기 때문에 죽으면 죽으리라는 강한 신앙으로 온갖 고초를 당하시다가 목사 안수받은지 35년이 되는 1942년 6월 20일 77세를 일기로 순교하심으로 그의 강한 믿음을 입증해 보이셨다. 그는 자신의 명리보다 성도들의 영혼생명을 위한 깊은 사랑으로 참 목자의 삶을 사셨으며, 목자의 사명 완수를 위해 죽음도 불사한 순교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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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 신사참배와 한국교회


1. 서론

 


   일본은 식민통치 초기부터 한국 민족의 특성을 말살하여 일본에 동화시키려는 정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왜냐하면 경찰과 군사력만으로는 한국을 안정적으로 지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그들은 식민지 민족의 특수성을 말살하여 ‘일본화’(日本化) 함으로써 식민지를 영구적으로 지배하려고 했다. 이러한 ‘동화정책’(同化政策)은 일본의 식민통치의 기본이었다. 1930년대에는 이 정책이 더욱 강화되어 ‘황국신민화정책’(皇國臣民化政策)으로 나타났다.

   이 정책은 1930년대에 ‘군국주의’(軍國主義)로 전환한 일본이 침략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수단이 되었다. 이것은 ‘정신교화운동’(精神敎化運動) 에서 나온 정책이었다. 그 목표는 ‘천황 신앙’을 중심축으로 하여 민족의 정체성을 말살하는 것이다. 일본은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한국인에게 ‘신사참배(神社參拜)’,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의 제창, ‘창씨개명’(創氏改名)과 일본어 사용 등을 강요했다.

   이 황국신민화정책 중에서 한국교회와 관련이 있는 것은 신사참배이다. 본고는 신사참배가 한국교회에 어떤 영향력을 미쳤는지 조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 필자는 신사참배의 본질을 밝히고 그것이 1930년대의 한국교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 볼 것이다. 그 후에 신사참배에 대한 필자의 의견을 제시하겠다.


2. 신사참배의 본질

 
   고대 일본인들은 자연의 모든 것과 그들의 조상을 ‘신’(神, 가미)으로 숭배했고 인간과 자연을 구별하지 않았다. 이러한 신앙은 고대 일본의 천황(天皇)의 권력 강화와 더불어 천황가의 조상신으로 여겨졌던 ‘천조대신’(天照大神, 아마테라스 오미가미)을 중심으로 한 신화적 인물이나 영웅들을 신사에 봉하여 함께 숭배하는 신앙의 형태로 굳어졌다. 이것이 고대 신도(神道, 신토)인데 황실과 정치권력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발달했다.

  하지만 고대 신도는 관습적 의례에 치중했기 때문에 근대 이전에는 불교에 눌려 있었다. 하지만 17, 18세기에 들어와 일본의 유학자들에 의해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들은 ‘복고신도’(復古神道, 훗코신토)를 발전시켰고, 이들의 문하에서 신도사상에 입각한 국수주의와 왕정복고를 주창하는 학자들이 많이 나왔다. 이들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1866~67)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다.

   메이지유신을 전후하여 신도는 천황을 절대신으로 하는 천황제 국가의 지도정신으로 이데올로기와 되었고 통치 원리로 채택되었다. 이때부터 신도는 일본 정부의 보호와 육성하에 급속히 발달하여 국교적 지위를 확립해갔다. 1871년 일본 정부는 일본의 모든 신도 사당, 즉 ‘신사’(神社)를 국가의 사당으로 하고, ‘사격제도’(社格制度)를 마련하여 신사를 체계화했다.

   그러나 이러한 ‘신도국교화정책’이 국내외의 비판을 받게 되었다. 이에 일본 정부는 1882년에 신도를 ‘국가의 제사’로서 일반 종교와 법적으로 분리시켰고, ‘국가의 제사인 신도’가 종교가 아닌 하나의 국가예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강변했다. 그리고 동시에 천황의 충실한 백성과 신하로서 천황가의 조상들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국가의식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것을 촉구했다.

   이러한 일본의 전통 신앙인 신도에 입각하여 천황가의 조상신이나 신화적 인물과 영웅 등을 안치해 놓은 ‘신사’나 ‘신궁’등을 참배하는 행위가 신사참배이다. 이것은 국가 종교의 경향이 강한 신도를 천황이 다스리는 국가의 지배 원리로 확립시키려는 의도에서 시작된 것이다.

  
3. 신사참배 강요

 

   일본의 신사참배 요구는 1910년에 한국을 강제로 병합한 직후부터 있었다. 1876년 개항 이후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을 대상으로 하는 신사가 걸립되었다가 강제 병합 후에는 한국인을 일본화하기 위해 신사참배를 요구했다. 그러던 중에 1930년대에 들어와서 침략전쟁의 사상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전쟁에 필요한 물자와 병력을 효과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정책의 하나로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당시 강요된 신사참배의 핵심은 천황가의 신적 기원에 대한 경배, 천황가와 전쟁영웅들에 대한 경배였다.

   이러한 신사참배 강요가 가장 먼저 발생한 곳은 교육계였다. 일본는 1932년 1월에 전라남도 광주(光州)에서 ‘만주사변에 대한 기원제’를 개최하고 학생들을 참석하도록 했으나 기독교계 학교가 이를 거부하여 문제가 되었다. 또한 같은 해 9월 평양에서 있었던 ‘만주사변 1주년 기념 전몰자 위령제’를 개최하고 기독교계 학교도 참석하도록 공식문서를 보냈지만 숭실전문학교(崇實專門學校)를 포함한 10개의 학교가 불참했다. 또한1933년 9월 원산의 캐나다 장로회 소속 진성여자보통학교(進誠女子普通學校)도 ‘만주사변 2주년 기념 순란자(殉亂者) 위령제’의 참가를 거부하여 경고를 받았다.

   일본이 기독교계 학교에 대하여 신사참배 거부를 이류로 직접적인 제재를 가한 것은 ‘평양 기독교계 사립학교장 신사참배 거부사건’이었다. 1935년 11월 14일 평안남도 도청에서 개최된 도내 공 ․ 사립 중등학교 교장회의에 참석한 교장들에게 도지사 야스다케(安武)는 개회에 앞서 평양신사(平壤神社)에 참배할 것을 요구했다. 이때 숭실학교 교장 맥큔(G. S. McCune), 숭의여학교(崇義女學校) 교장 대리 정익성(鄭益成), 순안(順安) 의명학교(義明學校) 교장 리(H. M. Lee)는 신사참배가 기독교 교리에 반대되고 양심상 이에 응할 수 없다고 했다. 이를 계기로 평안남도 도당국과 조선총독부는 이전의 유화책을 버리고 강경책을 쓰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후부터 학교장과 학생들의 참배 여부를 명확히 서면으로 답하도록 요구했다. 이에 따라 학교장의 파면과 학교를 폐교할 수 있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러한 총독부에 강경책에 대해 의명학교 교장은 신사참배를 하기로 했으나 숭실전문학교 교장 맥큔과 숭의여학교 교장 스눅(V. L. Snook)은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1936년 1월에 교장직에서 파면되었다.

   1938년부터 조선총독부는 한국교회에 대해 직접적으로 일본적 전향을 요구하고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같은 해 2월 총독부는 ‘기독교에 대한 지도 대책’을 세워 기독교인의 신사참배를 지도하고 강화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경찰력을 동원하여 개 교회에서부터 시작하여 노회와 총회에까지 압력을 가해 신사참배를 가결하도록 강요했다. 당시 총독부가 제시했던 신사참배 강요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1.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라 국민의례이며, 예배행위가 아니고 조상에게 최대의 경의를 표하는 것일 뿐이다.

2. 교육의 목적은 학생들의 지적인 육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로 하여금 천황의 신민(臣民)이 되게 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교사와 학생들이 모두 함께 신사참배를 통하여 천황에 대한 경의를 표하여야 한다. 그러나 일반인들의 신사참배는 자유에 맡길 뿐이고 강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는 기만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종교적인 입장에서나 민족적인 입장에서든 신사참배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4. 기독교의 대응

 

   그렇지만 신사참배 강요에 대해 교회의 반응은 일치하지 않았다. 먼저 외국 선교부의 입장을 살펴보자.

   미국 북장교회 선교부는 신사참배에 대해 대체로 거부하는 입장에 있었다. 하지만 이 안에서도 신사참배는 우상숭배이니 기독교 교리와 교육목적에 위배되고 신앙양심에 반하는 것이므로 교육에서 물러나더라도 절대로 응할 수 없다는 입장과, 신사참배에 비록 종교적 요소가 있다고 하더라도 일본 당국에서는 이것이 국민교육상 요구하는 애국적 행위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있으므로 학교를 살리고 기독교교육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이에 순응해야 한다는 입장이 대립했다.

   선교부는 홀드크로프트(J. G. Holdcroft)와 솔타우(T. S. Soltau)등 실행위원들을 중심으로 총독부와 교섭을 진행했으나 여의치 않자, 신사참배를 끝까지 강요할 경우 학교를 폐쇄하고 교육에서 인퇴(引退)할 수밖에 없다는 강경론이 우세했다. 결국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는 1938년 5월 교육 인퇴를 결의하였다. 그리고 이에 따라 평양 3숭(三崇 : 崇實中學, 崇實專門, 崇義學校), 대구의 계성(啓聖) ․ 신명(信明), 재령의 명신(明信), 선천의 보성(保聖) ․ 신성(信聖), 강계의 영실(英實), 서울의 경신(儆新) ․ 정신(貞信)등의 학교를 폐교했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는 신사참배 문제에 대해 가장 강경한 반대입장을 표명했다. 총독부가 남장로교 산하 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신사에 참배하기 보다는 학교를 폐교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선교본부에 연락하여 실행위원회 풀턴(C. Darby Fulton)의 내한을 요청하였다. 1937년 2월에 내한한 풀턴은 이 문제를 검토하고 “한국 학교에 대한 정책.”을 발표했다. 그 주제는 “기독교 교리를 수정하지 않고는 교육사업을 계속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학교를 폐쇄하고 교육에서 인퇴한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얼마 후 중일전쟁이 일어났고 총독부가 기독교계 학교에 본격적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남장로교 산하의 학교들은 이제 저항하여 폐교 당하거나 자진 폐교했다. 이때 폐교당하거나 자진 폐교한 학교는 광주의 숭일(崇一) ․ 수피아(須彼亞), 목포의 영흥(永興) ․ 정명(貞明), 순천의 매산(梅山), 전주의 신흥(新興) 기전(紀全), 군산의 영명(永明)학교 등이었다.

   경상남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빅토리아장로교(오스트레일리아) 선교부도 1936년 2월에 있었던 위원회 특별회합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하기로 결정했다. 신사참배 강요가 계속되자 1939년 1월에 위원회 특별회합에서 “교회와 학교에서 신사참배에 응하지 않는다.” 고 결의했고, 이해에 부산의 일신(日新), 마신의 창신(昌信) ․ 의신(義信), 진주의 시원여학교(柴園女學校)등이 폐교했다.

   하지만 감리교계 선교사들과 캐나다선교부에서 운영하는 학교들은 1930년대 초반에는 어느 정도 저항했지만, 중반이 지나면서 신사참배를 국가의식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총독부와 별 다른 마찰이 없었다.

 

한국교회도 교파에 따라 신사참배에 대해 입장을 달리했다. 감리교를 포함한 대부분의 교파는 일본에 굴복하여 신사참배를 인정했다. 장로교만이 반대하다가 1938년 9월에 있었던 27회 총회에서 결국 일본의 강요와 압력으로 인해 신사참배를 가결했다.

   이미 이 문제는 장로교 내에서 1915년부터 공식적으로 거론되었다. 그러다가 총회에서 대두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1931년부터 장로교 총회에서는 이 문제를 매년 다루었다.

한편 일본은 거의 모든 교파들이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고, 기독교계 학교에 대한 신사참배 문제도 마무리 되어가자 1938년 초부터 그때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장로교를 굴복시키기 위해 경찰력을 동원하여 핍박했다.

결국 장로교도 1938년 봄부터 노회별로 신사참배를 가결했고, 1938년 9월 평양의 서문외(西門外)교회에서 열린 27회 총회에서 일본 경찰의 삼엄한 감시와 통제 속에서 미리 짜놓은 각본에 따라 다음과 같은 신사참배 가결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성명서

 

   아등은 신사는 종교가 아니오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 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며 또 이에 신사 참배를 솔선 여행하고 추히 국민정신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하에서 총후(銃後) 황국신민으로써 적성을 다하기로 기함.

 
소화 13년 9월 10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홍택기


   이렇게 한국교회의 모든 교파들이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였다. 이는 동시에 한국교회의 변질의 시작이기도 했다.

 
5. 한국교회의 변질 - 장로교를 중심으로


   마지막으로 신사참배강요에 굴복한 장로교는 이제 일본의 전쟁을 위한 협력단체 중 하나로 전락하였다. 1938년 10월 17일 서울에서 개최된 ‘시국대응기독교장로회 신도대회’에는 경기 ․ 경성노회 소속 신자들과 학생 3,000명이 모여 총독부 광장에서 미나미 지로(南次郞)의 연설을 듣고 행렬을 지어 남산에 있는 조선신궁을 참배하는 등의 행사를 치렀다. 같은 해 12월 12일에는 장로회 총회장 홍택기와 부총회장 김길창이 감리교 총리사 김종우와 전 총리사 양주삼(梁株三), 성결교 이사장 이명직과 함께 일본의 이세신궁, 메이지신궁(明治神宮), 가시하라신궁(橿原神宮), 아쓰다신궁(熱田神宮),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등을 참배하려고 일본으로 떠났다.

   1939년 9월 제28회 총회에서 장로교회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 연맹’을 결성했다. 9월 28일 결성된 황동노회 지맹(支盟)을 시작으로 각 노회별로 지맹이 결성되어 총회연맹의 지시사항을 수행하고 보고했다.

1940년 9월 제29회 총회에서는 총독부의 지도에 순응하여 헌법을 개정하고 중앙상치위원회의 설치 등을 결의했다. 그 목적은 총독부의 명령과 지시를 원활히 수행하기 위함이었다. 10월 3일 총독부 관계자들은 간담회를 열어 장로교 상치위원 7명을 지도했다. 그 후 총회장 곽진근 목사는 일본을 다녀온 후 총회 임원들과 함께 “조선예수교 장로회 혁신요강”을 작성하여 상치위원의 의견을 구한 다음 11월 10일 총회장의 담화와 함께 발표했다. 그 중 ‘지도원리’에 따르면 장로교는 일본의 정책을 충실히 수행하는 ‘일본적 기독교’가 되도록 할 것이며 일본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 동아시아에 일본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질서가 수립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이를 따라 장로교의 헌법이 일본기독교단의 헌법을 참조하여 1943년 5월에 ‘일본지독교 조선장로교단 헌법’으로 개정되었고, 찬송가의 가사 개정과 삭제 작업은 1942년 초에 완료되어 같은 해 1월 20일부로 그대로 사용했다. 한편 외국 선교사들은 1941년 11월에 대부분 철수했고, 몇몇 남아있던 선교사들도 1942년 6월경에 강제 송환되었다. 이로써 외국선교사와 장로교회의 관계는 단절되었다.

   1940년 12월 6일부터 8일까지 서울의 부민관 중강당과 신문내 예배당에서는 ‘황기 2천 6백년 봉축 조선예수교 장로회 신도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 첫날에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연맹’이 결성되었고, 결성식 후에는 일동이 조선신궁에 참배했다. 신도대회 기간 중에는 시국 강연이 이어졌다. 이러한 신도대회는 서울을 시작으로 하여 노회조직을 따라 지역단위로 개최되었다. 각 지역의 신도대회는 서울과 마찬가지로 ‘노회연맹’의 결성식도 겸했다. 장로교의 ‘총회연맹과 노회연맹’은 ‘국민총력 조선연맹’의 충성스러운 산하기구였다. 왜냐하면 이들 연맹들이 ‘조선연맹’의 지시사항을 전달하고 홍보하기 때문이었다.

   1941년 8월 14일 총회 산하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중앙상치위원회’는 서울의 총회사무실에서 위원회로 모여 “전시체제 실천성명서”를 결의하고 발표했다. 그리고 상치위원회가 실제적으로 총회를 대행하는 기관이 되게 했다. 그리고 9월 20일에 예정된 총회를 “시국정세”를 이유로 무기 연기했다.

   또한 이 성명서는 시국봉사의 실천으로 ‘애국기 헌납’, ‘금속품 공출’, ‘폐품 회수’를 제시했다. 그 가운데 ‘애국기 헌납’을 실행하기 위해 ‘조선장로교도애국기헌납기성회’를 8월 20일에 조직했다. 총독부로부터 기부금모금 허가를 얻어 10월부터 본격적인 모금운동에 들어갔다. 노회조직을 이용한 모금은 순조롭게 이루어져 1942년 2월 10일에 육해군에 애국기 1대와 육전기관총 7정의 대금인 15만 317원 50전을 헌납했다. 6월 19일에는 기성회 위원대표단이 조선군사령부를 방문하여 육군용 자동차 2대의 기금으로 2만 3천 221원 28전을 헌납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제31회 총회는 1942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신사참배를 가결했던 평양 서문외교회당에서 모였다. 회의록에 따르면 교회 총수는 전년도 3,624개 교회에서 2,543개 교회로 30%가 줄었고, 신자총수도 전년도 355,754명에서 249,666명으로 30%줄었다. 교회와 신자의 수가 급격히 줄어든 데에는 일본의 압력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지도자들이 일본에 야합하는 것에 회의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회장이 된 김응순 목사는 “기독교의 일본화”에 힘쓰겠다고 말했다.

   이 말대로 일본화에 힘쓴 ‘조선예수교장로회’는 결국 1943년 5월 4일부터 7일까지 있었던 상치위원회에서 김응순에 의해 해체되었고 새롭게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이 조직되었다. 그리고 미리 준비했던 ‘실천요목’을 그대로 채택하여 발표하고 각 교회에 공문을 보냈다. 이 ‘실천요목’은 교단의 교회가 일본에 협력하는 지침이 되었다. 이 교단의 통리자로 후(後)평양신학교교장인 채필근 목사를 선임했다. 5월 7일에는 통리 취임식이 있었다. 곧이어 포교규칙에 따라 교파명칭 변경 및 포교자 변경계를 총독부에 제출하여 같은 해 6월 25일자 관보에 실림으로써 공식적인 신고 ․ 등록 절차를 마쳤다.

   1944년 7월 24일부로 아베(阿部信行)가 조선총독으로, 엔토(遠藤柳作)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으로 임명되었다. 엔토는 9월 7일 기독교와 천주교 대표를 초청하여 교파간의 합동을 제시했다. 그럼에도 진척이 없자 엔토는 1945년 6월 25일에 장로교, 감리교, 구세군 지도자 55명을 초대하여 기독교계를 통합할 것을 촉구했다. 이에 그날 저녁에 통합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들은 다음날인 26일부터 29일까지 회의를 계속하여 교단 규칙을 만들고 통합총회 일정을 포함하여 상세한 계획을 작성했다. 그리고 통합된 교단의 이름을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하기로 했다. 이 교단은 임원과 직원을 세우는 등의 행정절차를 마무리 한 후에 1945년 8월 1일부터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1938년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한 후 장로교회는 겉으로만 복음을 전하는 교회였다. 그 내면의 중심에는 신사참배라는 우상종교의식이 자리하고 있었다. 더 이상 교회에서는 참된 복음을 들을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장로교는 그 본질을 잃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우상종교와 완전히 혼합되었다. 다른 교파도 장로교와 거의 비슷한 순서를 따라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통합되었다.

 
6. 신사참배 반대운동


   신사참배 강요는 교육기관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따라서 신사참배 반대도 기독교계 학교의 학생들과 교사와 학부형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 후 일본이 신사참배를 교회에까지 강요하자 목회자와 일반 교인들의 반대가 일어나게 되고, 그들이 서로 연합하여 대처하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까지 발전했다.

   한편, 1938년 9월 28일에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가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한 조선예수교장로회를 탈퇴하기로 결의했고, 이어서 10월 5일에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도 탈퇴를 결의했다. 미국 남장로교와 북장로교 선교부는 빅토리아 장로교 선교부와 함께 신사참배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노회에서 제명당한 목사들을 지지하고 후원했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크게 ‘신사참배 강요 금지 청원운동’과 ‘신사참배 거부 권유운동’이라는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신사참배 강요가 기독교계 학교에서 해마다 문제가 되자 1934년 장로회 총회는 두 차례에 걸쳐 총독에게 청원서를 제출하려 했으나 총독부 당국에 의해 저지당했었다. 1935년에 있었던 ‘평양 기독교계 사립학교장 신사참배 거부사건’이후 총독부는 신사참배에 대한 공식적인 토의를 금지시켰다. 따라서 청원운동은 개인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박관준(朴寬俊) 장로는 1935년부터 수차에 걸쳐 총독에게 청원서와 경고문을 보내 신사참배 강요의 부당성을 경고하다가 여러 차례 경찰서에 끌려갔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청원과 경고가 효력이 없자 1939년 일본 정계와 제국의회에 청원하기 위하여 선천 보성여학교 음악교사를 사퇴하고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던 안이숙(安利淑) 선생과 함께 일본에 건너갔다. 박관준 장로는 아들 박영창(朴英昌)과 함께 일본의 기독교 지도자들과 군의 지도자들과 전(前) 조선총독 등을 방문하고, 정치지도자들과의 면담을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이들은 순교할 각오를 하고 제74회 일본제국회의 중의원 회의장에 방청객으로 들어가 일본의 종교정책을 반대하는 내용이 담긴 경고서를 단상에 던졌다. 두 사람은 현장에서 바로 체포되었고, 경시청에 구금되었다가 평양감옥으로 이송되었다. 박관준 장로는 6년간의 감옥생활로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하기 직전에도 이러한 청원운동이 있었다. 장로교 총회장을 지냈었던 김선두(金善斗) 목사는 신사참배 문제로 평양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일본에서 공부하다가 사경회 강사로 일시 귀국한 김두영(金斗英)과 함께 1938년 8월에 일본으로 건너가 신사참배 강요 금지를 일본 정계에 청원하려 했다. 정계와 군부의 지도자들을 만나 그들과 함께 돌아온 김 목사는 총독부의 지시와 강압에 의한 장로교 총회의 신사참배 가결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이 사실이 탄로나 김 목사는 종로경찰서에 구속되었고 총회는 총독부의 뜻대로 진행되어 신사참배를 가결했다.

 

   한국교회가 신사참배에 굴복한 후에 이에 반대하는 교역자와 성도들이 서로 연대를 맺고 조직적인 집단적 저항운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본과 신사참배에 굴복한 한국교회를 비판하는 동시에 성도들을 대상으로 신사참배 거부를 권유하고 반대자들 사이의 결속을 강화했다.

   그 중심인물은 평안남도의 주기철(朱基徹), 평안북도의 이기선(李基善), 경상남도의 한상동(韓尙東) ․ 이인재(李仁宰) ․ 주남선(朱南善), 전라남도의 손양원(孫良源)등으로 전국에 분포되어 있었다. 만주지역에서는 박의흠(朴義欽), 헌트(Bruce F. Hunt, 韓富善)등이 활동하였다. 초기에는 교회와 인적 관계에 따라 연대가 이루어졌으나 점차 지역 간의 연대가 이루어져 경남, 서북, 만주 봉천지역사이에 교류가 이루어졌다

   의주에서 목회를 하던 이기선은 1938년 7월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교회를 사면하고 각지를 순회하며 신사참배 거부를 권유하면서 동지들을 규합하다가 1940년 6월경 일본 경찰에게 체포당했다.

   마산에서 목회를 하던 한상동은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교회를 사면하고 이인재와 함께 경상도 지역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주도했다. 이들은 빅토리아 장로교 소속 선교사인 호킹(D. Hocking, 許大是)와 트루딩거(M. Trudinger, 秋瑪田) 등과 협력하면서 서북지역의 신사참배 반대운동과 연대하여 조직적인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단지 종교운동으로만 그치면 그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우므로 조속히 정치운동으로 전환시킬 필요가 있음을 인식하고 1939년 12월에 다음과 같은 방안을 정했다.

 

첫째, 신사참배를 긍정하는 노회를 파괴하도록 할 것.

둘째, 신사에 참배하지 않는 성도들로 새로운 노회를 조직할 것.

셋째, 신사참배를 긍정하는 목사에게 세례를 받지 못하게 할 것.

넷째, 신사에 참배하지 않는 동지들의 상호 원조를 도모할 것.

다섯째, 가정 예배 및 가정 기도회를 힘써 개최하는 한편 개인전도 등의 수단으로 동지들을 획득할 것.

 
   이들은 1940년 4월 20일 주기철이 잠시 옥에서 풀려 나왔을 때 평양으로 가서 이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대시키기 위해 주기철을 비롯한 서북지역의 신사참대 반대운동 지지자들과 회합을 갖고 그 방안을 논의하고 돌아왔다. 한상동은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려는 노력을 하다가 1940년 7월 부산경찰서에 검속되었다.

   3 ․ 1운동 직후 독립군 군자금 모금과 지원병 모집운동을 벌이다가 감옥에 들어갔었던 주남선도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1938년 말 그는 거창읍교회를 사임하고 한상동과 이인재 등과 함께 조직적인 거부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경남 각 지역의 교회를 순회하며 신사참배를 거부할 것을 권유했다. 주남선은 이 일로 1940년 7월 16일에 검속되었다.

   평양에서는 주기철이 시무하던 산정현교회를 중심으로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는 공개적으로 신사참배를 반대했기 때문에 일본의 주목을 받았다. 1938년부터 4차에 걸쳐 7년간의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 4월 21일 순교했다. 산정현교회도 1940년 5월 이후에 폐교(廢敎) 되었다.

   만주에서는 미국 정통장로교회(Orthodox Presbyterian Chuch of America, OPC)의 헌트 선교사가 중심이 되어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이끌었다. 1938년 그는 조선예수교장로회 봉천노회의 총대 자격으로 27회 총회에 참석했다. 그때 총회의 불법적인 결의에 대해 저항했으나 일본 경찰에 의해 저지당했다. 이후 그는 신사참배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노회에서 면직 당한다. 하지만 봉천노회의 23개 교회의 성도들 중에 일부는 이러한 노회의 결정을 부당하게 여기고 헌트를 지지하면서 그와 함께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참여했다.

   그들은 자신의 자녀들을 신사참배를 실시하는 학교에 보내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가장 강력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시도했으며, 이로 인해 세 명의 성도가 감옥에서 순교했다. 1941년 가을, 만주에서 70명의 성도들이 체포되었고 헌트도 같은 해 10월 22일에 체포되었다. 그는 다른 성도들과 함께 감옥에서 고난을 당할 결심을 하고 있었지만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미국과 일본의 포로교환 협정에 의해서 그의 가족들과 함께 1942년 7월 4일에 미국으로 추방당했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기 위해 신사참배에 반대했다. 이근삼은 이들의 신사참배 반대 동기를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제시한다.

 
1.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복종과 교회에 대한 사랑

2. 종말론적인 기대와 그리스도 왕권에 대한 개인적 언약

3. 신적 진리에 대한 비타협적인 증언과 교회와 국가에 대한 기독교적 책임성

4. 순교에 대한 높은 평가와 하나님의 영광

 
   이와 같이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본질적으로 우상숭배를 거부하며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고 당시 교회의 변질을 경고하는 신앙운동이었다. 왜냐하면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교회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수하게 유지하고 보존하고자 하는 의식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7. 결론


   1930년대 말에 있었던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한 한국교회는 그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거룩한 공동체인 교회에서 인간인 천황과 그의 조상신을 섬기는 사상으로 무장된 일본의 침략전쟁을 수행하는 단체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때 한국교회의 생명은 이미 끝난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한국교회의 생명은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통해 끊어지지 않고 여전히 유지되었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한국교회가 복음의 진리를 완전히 버리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일본의 끊임없는 탄압으로 인해 이 운동도 완전히 사라지는 듯 보였지만, 결코 그러하지 않았다. 한국교회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수감된 감옥에서, 깊은 산속에 숨어서 참된 신앙을 지키려 했던 사람들 가운데서 여전히 남아있었다.

   한국교회의 지난날의 역사는 우리에게 이와 같은 사실을 지금도 말해주고 있다. 이에 우리는 신사참배에 참여했던 분명한 사실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하며 동시에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정신을 기억하고 보존하며 계승해야 한다. 왜냐하면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처럼 크게 부흥한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고 어찌하든지 성경대로 살려고 했던 신앙의 선배들이 신사참배라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한국교회를 지켜내었기 때문이다. 이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시대적 과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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