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예배설교 /  고통의 터널 끝에서 마주친 하나님 Friday Night Sermon

제목 / 고통의 터널 끝에서 마주친 하나님
본문 / 욥기 42:1~6

 

1.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2.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4.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욥기는 사탄이 하나님께 시비를 거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욥기 1장 9절에 보면, 사탄은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라고 시비를 걸기 시작했습니다.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유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욥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잘해주시니까, 욥이 축복을 많이 받아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지, 만일 축복을 빼앗아버리면, 하나님을 섬기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욕하고 떠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가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영적 세계에서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영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니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욥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의 제안을 받아들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욥 1:12). 하나님께서는 사탄이 욥의 신앙의 진위(眞僞)를 시험하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사탄이 욥에 대해 하나님께 고발한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합니다. 사탄은 신자들의 믿음의 진위를 늘 공격합니다. 저 사람이 왜 예수님을 믿는가. 저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왜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왜 믿음생활을 하십니까? 예수님을 믿는 이유를 확인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재물의 복을 주셔서입니까? 건강의 복을 주시고, 자녀의 복을 주시고, 가정에 행복을 주셔서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과 은혜 등 감사할 것이 많습니다. 만일 내가 가진 것을 하나님께서 다 빼앗으셔도 예수님을 믿겠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허락이 떨어지자 욥에게 무차별적인 고난이 찾아왔습니다. 재산이 모두 없어져버렸습니다. 자녀들까지 잃었습니다. 나중에는 아내까지 그에게 저주하고 떠나버렸습니다.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욥은 혼자 남았습니다. 생명만 겨우 남았습니다. 모든 것이 한순간에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욥은 고통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습니다. 친구들은 욥에게 와서 욥이 당한 고난에 대해 다양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욥이 고난의 한가운데서 어떻게 반응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욥은 처음에는 고난에 대해 잘 대처했습니다.
욥은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욥 1:21).
모든 것을 잃고 난 후에 이렇게 고백한다는 것은 대단한 믿음입니다.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욥이 어느 단계에 이르렀을 때, 인내의 한계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조금씩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아주 험악해졌습니다. 욥이 하나님께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으시는 하나님에 대해 고분고분하지 않는 욥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욥은 하나님께 까다로운 질문을 하며 대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응답하지 않으시고, 아무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길고 긴 시간 동안 욥이 혼자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침묵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욥기에서 가장 힘든 부분은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장면입니다. 욥은 깊은 고통 속에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셨습니다.

아무리 부르짖어도 하나님께서 침묵하시고, 하나님께서 반응하시지 않으실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순간에도 욥은 쉬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 무엇인가 쏟아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대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하나님으로부터 찾으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화를 내는 것이 낫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나쁜 기도는 없습니다.

자녀가 아무리 버릇없이 행동해도 집 안에서 결판내려고 하는 것이 가출해버리는 것보다 낫습니다.
가정에서 부부가 싸우는 것은 괜찮습니다. 부부가 싸우는 것은 두 사람이 둘 사이에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것입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서로에 대해 관심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싸우지 않는 것입니다. 서로 무엇을 하든 개의치 않고, 따로따로 생활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할 것은 다 합니다. 주일예배에 빠지지 않고, 봉사도 하고, 새벽기도와 철야기도에도 열심히 참석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내어놓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외적 행동은 있는데,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상태입니다.

기도는 하지만, 자신이 진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허공을 치는 기도를 합니다. 그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향한 기도가 아니고, 의미 없는 되뇜에 불과합니다.
기도를 마치고 집에 가지만, 뭔가 허전합니다. 기도다운 기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형식은 있지만, 하나님을 향하고 있지 않습니다.

남편에게 밥도 차려줍니다. 집 청소도 합니다. 아이들도 돌보지만, 마음은 가정에서 떠난 여인과 같습니다.
대화하지만, 대화 속에 서로에 대한 애정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저 한 집에서 함께 살 뿐입니다. 정신적 이혼 상태와 같습니다.

욥의 인내는 우리가 생각하는, 점잖은 인내가 아닙니다. 처음에는 욥이 친구들의 변론에 대해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는 입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난에 대해 하나님께 대들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집요하게 달려들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그에게 회개하라고 했지만, 욥은 친구들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친구들의 말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정을 속이지 않고 우리 속에 있는 것을 털어놓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기도는 대부분 정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체면을 차립니다. 우리 속에 있는 것을 그대로 털어놓지 않고, 근사하게 꾸미려고 합니다.
마치 바리새인들처럼 모양을 내고, 규격화된 기도를 하려고 합니다. 형식을 갖추고, 예의를 갖추고, 미사여구로 꾸미려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통정(通情)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의문화가 있습니다. 속은 그렇지 않은데, 겉으로는 그럴 듯한 모습으로 행동하려고 합니다.
욥은 처음에 그렇게 행동했습니다. 그래서 욥은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라고 고백했습니다(욥 1:21, 2:10).

그러나 욥은 무조건 참지 않았습니다. 그는 지독한 고통의 한가운데서 힘겹게 사투(死鬪)를 벌이며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하나님을 떠났으면 좋겠는데, 그는 화가 난 상태에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욥은 고난 속에서 피를 토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깊은 곳에 쌓여있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습니다.

막다른 길에서 출구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곳으로 도망가거나, 다른 곳에서 해답을 얻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물고 늘어졌습니다.
욥은 고난 때문에 다른 곳으로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집요하게 하나님께 따졌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가볍게 생각하고, 간단하게 해답을 얻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 성급하게 결론내리고, 자신의 문제를 무마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으면서 이미 답을 얻은 것처럼 태연하게 행동하거나, 어려운 문제를 만나 매우 힘든 상태에 있으면서도 마치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 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문제가 너무 많아 그냥 문제를 덮어버린 것입니다.
너무 힘들어 생각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길이 없고, 답이 없다고 스스로 결론을 내려버린 것입니다.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데, 그것조차 싫어졌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기대를 끊어버렸습니다.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창자가 뒤틀릴 만큼 기도할 용기가 없어졌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고난이 찾아오고, 어려운 문제에 부딪치면, 답이 보이지 않고, 막막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불러도 대답이 없습니다.
너무 힘들면, 말씀을 들어도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해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통이 오면, 외로워집니다. 나의 고통 안으로 들어와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더 고통스럽습니다.

욥기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삶의 해답은 간단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고통은 다면체(多面體)입니다. 그래서 삶이 헷갈립니다.
고통에 대한 답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고통에 대한 답을 쉽게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얄밉습니다.

고통의 때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쉽게 답을 얻은 것처럼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솔직해져야 합니다.
화가 나면 화난다고 해야 합니다. 힘들면 힘들다고 해야 합니다. 이해되지 않으면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야 합니다. 죽고 싶으면 죽고 싶다고 해야 합니다.
따지더라도 하나님께 따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해도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속이 넓은 분이십니다. 맹숭맹숭하게 기도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창자가 끊어질 듯이 기도해야 하는데, 그렇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제 속에서 그런 기도가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문제를 풀려고 하는, 전투적 의지가 우리에게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결론을 내려버립니다.
그리고 점잖고 형식적인 기도를 되뇌고 있습니다. 의미 없이 맹숭맹숭하게 영양가 없는 미사여구로 기도를 꾸미고 있습니다.

우리는 욥기에서 십자가와 마주칩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난해(難解)한 사건입니다. 욥의 고난이 난해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이해하기 힘든 사건입니다.
십자가는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사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십자가를 내칩니다. 십자가를 미련한 것으로 여깁니다. 십자가를 무시합니다. 십자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경험하신 고통은 독특한 고통입니다. 어떻게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시고, 종이 되셔서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는지, 그 비밀을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토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독특한 고통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마 26:39).
예수님께서는 세 번 반복해서 기도하셨습니다.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의 터널을 지나시며 아버지께 절규하며 기도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에서 중요한 레슨(lesson)은 정직함입니다. 욥기를 보면, 욥은 자신의 감정을 매우 정직하게 여과 없이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하나님께 대들었습니다.
고통 속에서 정직해야 합니다. 고통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 정직해야 합니다. 정직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영혼 깊은 곳에서 진실하게 터져 나오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욥기를 통해 우리는 욥의 진실함을 배웁니다. 욥의 인내도 중요하지만, 욥의 진실함을 배웁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는 고통을 위장(僞裝)하거나 신앙이 좋은 체 하지 않았습니다.
정직해야 하는 순간에 자신을 위장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여러분이 처한 고통과 환경에 대한 여러분의 감정을 정직하게 드러내면, 이곳은 눈물바다가 될 수도 있습니다. 데굴데굴 구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고통을 위장하려 합니다. 고통을 합리화하려고 합니다. 고통을 멋지게 꾸미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정직함, 진실함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멋지게 기도하는 것을 듣고 싶어 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정직하게 기도하는 것을 듣고 싶어 하십니다. 고통의 한가운데서 나오는, 영혼의 정직한 고백을 듣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미사여구로 꾸며 자신을 감추어버린 기도에는 관심이 없으십니다. 사실 그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언어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가슴을 치며 펑펑 우는 것이 오히려 더 낫습니다.
영혼이 없는 기도를 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영혼이 없는 기도를 할 때가 있습니다. 기도하러 교회에 왔다고 해서 기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고 답답해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영혼이 없는 기도, 토해내지 않는 기도, 감정을 숨긴 기도를 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그런 기도는 하나님께로 향하는 기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기도하는지도 모른 채 기도할 때가 많습니다. 안락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셔가며 마치 음악을 감상하듯이 기도하는 것에는 우리의 진실한 마음이 표현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적 치열함이 묻어있지 않는 기도를 싫어하십니다. 시련과 고통과 환난과 어려움의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몸부림치며 끊임없이 다가가지 않는 기도를 싫어하십니다.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직면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고통보다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치명적인 약점은 가벼움입니다. 신앙의 형식만 남아있고, 내용은 얄팍해져버렸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의 고난에 매우 가볍게 다가갔습니다. 남은 고통 속에서 죽어 가는데, 친구들은 그럴듯한 교리로 무장한 교과서적인 답만 늘어놓았습니다.

저는 설교자이기 때문에 늘 그것을 고민합니다. 제 나이에 삶 속에서 머리로 이해되어지는 인간의 고난의 깊이를 몸에 어느 정도 습득하고 있지만, 성도들이 직면한 고통에 대해 말씀을 통해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고 너무나 쉽게 다가가 답을 주려고 하는 얄팍한 설교자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제게 있습니다.
좋은 말을 하는데, 얄미운 사람이 있습니다. 맞는 말을 하는데, 기분을 나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통의 바깥에서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모르는 사람이 고통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말할 때, 참기 어렵습니다.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는 “상처를 입어보지 않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흉터를 놀린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가진 상처는 겉으로 보기에 아주 작아 보이는 상처라도 그는 죽을 뻔한 경험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고난을 당할 때에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다가가십니까? 삶이 무너질 때,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착한 신자들은 하나님께 대들 생각을 감히 하지 못합니다. 현실은 받아들이기 힘들고, 이해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결론만 붙들고 애쓰지만, 속으로는 심히 불편하고, 하나님께 대해 불만을 가진 적은 없습니까.

문제를 피상적으로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 집요하게 다가가야 합니다. 욥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가져갔습니다.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쏟아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 생각 없이 고분고분한 신자를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신앙과 삶의 문제로 인해 깊이 고민하지 않는 사람은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신앙의 세계 안에서 씨름한 흔적 없이 믿음을 쉽게 가진 사람은 힘이 없습니다. 인생에 회오리바람이 불면,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저 고상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안에서는 요동치는데,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합니다.
분명히 문제가 있는데,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않습니다.

지성적이고 고상한 사람이라 하나님께 떼쓰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적당히 거리를 두고,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려고 합니다.
하나님께 무엇인가 해결해달라고 떼쓰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려는 마음도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사이에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냉랭합니다. 하나님과 주고받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무덤덤하게 하나님과의 거리를 유지하며 힘없이 신앙생활을 합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아주 좋아하는 것도 아닙니다. 어려움이 와도 그저 그렇고, 평안한 때에도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생명 없는 종교생활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다 보면, 세월이 흘러도 하나님과의 교제가 깊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야곱과 에서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에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어려움이 찾아와도 하나님을 찾으려는 마음이 그에게 없었습니다. 그는 철저히 육적(肉的)인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은 문제가 많았습니다. 치졸했습니다. 간사했습니다. 인간성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인생의 문제 앞에서 지독하게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과 씨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과 함께하실까요.

성경을 읽다가 이해되지 않으면, 하나님께 물어보아야 합니다. 인생에 문제가 있으면, 성경을 들고 고민하고 씨름해야 합니다.
답이 나오지 않으면,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답을 주세요.”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욥은 이전에도 하나님을 알았고,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그러나 인생에 거대한 폭풍이 몰아닥치고, 그 기간이 길어지니 욥은 흔들렸습니다.
욥은 매우 좋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생에 풍랑이 일어나고, 고통의 시간이 길어지니 욥은 흔들렸습니다.
친구들은 기막힌 답을 그에게 이야기해주었지만, 욥은 그것에 쉽게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직접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과 승부를 걸려고 했습니다.

인생에서 만만한 것은 없습니다. 인생 자체가 싸움입니다. 무엇과 싸우시겠습니까. 욥은 마귀, 친구와 싸운 것이 아닙니다. 욥은 하나님과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모든 결론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욥은 알았습니다.
길고 긴 고통의 터널을 지나는 가운데,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이 본문 욥기 42장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욥은 고통의 터널을 통과했습니다. 욥기 42장에 보면, 마침내 회복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욥기 42장에 보면, 욥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결코 가볍게, 쉽게 만난 것은 아닙니다. 그는 길고 길었던 고통의 터널을 통과한 후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냉랭한 교리적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머리로, 상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책으로 공부한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욥은 깊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솔직하게 질문한 사람들만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긴 고통 속에서 뒹굴고 소리치며 하나님께 원망하며 대들다가 마침내 그는 하나님과 마주쳤습니다.

욥기 42장 5절에 보면, 욥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신앙의 차원이 달라졌습니다.
그는 그동안 듣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보게 되었습니다. 듣는 것과 보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다른 세계의 일입니다.
듣기만 하던 사람이 자신이 들은 것을 직접 보게 되면 전혀 다른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눈으로 직접 보게 되면, 모든 전쟁이 끝납니다. 모든 시비가 그칩니다. 왜 말이 많습니까? 왜 애매모호합니까?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는 헷갈렸는데, 이제 보았습니다. 더 이상 헷갈릴 것이 없습니다.
욥은 마침내 하나님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귀로 듣기만 하다가 이제는 눈으로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고통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고통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고통이 이해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하나님에 대해 오해하고 있던 것이 풀렸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문제가 있어도,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면, 이해되지 않는 문제 때문에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가 이해되지 않고, 고통이 이해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으면 됩니다.
나의 고통이 해석되지 않지만,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면, 고통이 더 이상 문제되지 않습니다. 고통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기 때문입니다.

욥은 자신이 고난당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이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시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다는 것을 알고 난 후에는 모든 의문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은 것은 한 번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믿음이 부족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면 고통마저도 축복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면, 모든 것이 새로운 국면에 들어가게 됩니다.

욥기를 읽어보면, 비슷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과 그의 친구들의 이야기를 계속 듣고 계셨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이야기에 전혀 개입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이야기에 전혀 끼어들지 않으셨습니다. 말이 되지 않는, 그들의 이야기를 하나님께서는 계속 듣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인내는 욥의 인내보다 탁월하십니다.

욥은 앙탈을 부리며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쏟아놓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듣고 계셨습니다. 욥이 언제 하나님께 다가오는지,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보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나중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욥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욥을 다그치지도 않으셨습니다. 모든 것을 욥에게 맡기셨습니다.

욥이 갈등하고 괴로워하며 하나님께 대들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욥이 하나님께 나아오기를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이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신앙을 가지기 원하셨기 때문에 끝까지 기다리셨습니다. 욥이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하고, 하나님을 경험하기까지 하나님은 기다리셨습니다.
답을 빨리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답을 찾아가야 합니다. 욥이 고통 속에서, 고통의 대가(代價)를 통해 고통의 크기만큼 하나님을 깊이 경험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욥을 하나님 앞에 항복하는 자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욥을 다루고 계십니다. 그리고 더 깊은 세계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에 대해 모른 척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을 하나님께로 끌어당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사람을 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주 뻔한 방식으로 사람을 만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대하시는 방식을 아주 다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답을 미리 노출하시지 않으십니다. 수학문제를 풀 때, 답을 미리 보고 나면, 실력이 향상되지 않습니다. 문제를 올바로 풀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를 풀 수 없습니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물론 옆에서 누군가가 도와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와주는 것은 진정으로 그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아닙니다. 망하게 하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 몸부림치며 익힌 만큼, 그것이 자신의 것이 됩니다.

성경공부 시간에 리더가 설명해주는 하나님은 머리에만 남을 뿐입니다. 쉽게 사라질 수 있습니다.
고난의 거대한 폭풍이 몰아치면, 머리에 남아있는 하나님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머릿속에 지식으로 남아있는 하나님은 삶과 연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직접 경험해야 합니다. 삶의 고통 속에서 싸우며 오랜 시간 동안 하나님과의 관계를 열어가야 합니다. 그 시간은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닙니다.

욥은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욥은 자신이 알지 못한 것을 마치 아는 것처럼 떠들었던 것을
 회개했습니다. 욥은 고통을 경험하면서 자신이 알고 있던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리게 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루터(Martin Luther)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버리시다니, 누가 이것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다 알 수 없습니다.
욥은 자신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욥은 자신에게 고통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욥은 의롭게 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욥은 탁월하게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자녀들이 죄를 짓지 않도록 욥은 자녀들을 위해 번제를 드렸습니다. 욥은 정결한 삶,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고통 속에 빠졌을 때, 욥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 분노하고 따졌습니다. 욥은 자신의 감정을 쏟아냈습니다.

욥은 힘들고 어려운 과정 속에서 하나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전에 알던 하나님과 크게 다른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그에게 어려움이 없었다면, 그는 하나님을 도무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입술을 통해 욥의 정직한 고백을 듣고 싶어 하셨습니다. 고통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서 이 고백이 나오는 순간까지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귀의 시비를 잠재워버리시고, 욥이 하나님의 친구라는 사실을 사탄 앞에서 입증하셨습니다.
욥기는 하나님의 인내가 돋보이는 책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욥으로 하여금 고통을 겪게 하시고, 욥이 고통당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 계셨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을 지나가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 쉬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하는 고통을 없애버리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고통을 제거하시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는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통을 통해 이전보다 더 깊어지기를 원하십니다. 고통을 통과한 만큼,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다워지기를 원하십니다. 고통 속에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더욱 깊이 경험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에 찾아오는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진가(眞價)를 발휘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고통 가운데 두십니다.

도자기를 몇 도에 굽느냐에 따라 도자기의 강도(强度)가 달라진다고 합니다. 낮은 온도에서 구우면, 쉽게 깨어지는 그릇이 됩니다. 귀한 그릇이 아닙니다.
힘든 일만 없으면 상관없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믿음이 필요 없습니다. 인내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약한 단계에 머물러있으면, 하나님께 부탁하느라 시간을 다 보냅니다. 조금만 힘들어도 죽는다고 야단입니다. 이것은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무당을 찾아가 액땜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것을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관계로 하나님과 우리가 맺어지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기를 원하십니다. 둘도 없이 친밀한 사이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어떤 것도 끼어들 수 없는 관계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바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라고 고백했습니다(롬 8:35,37~39).
하나님과 바울의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들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도 끼어들 수 없다고 했습니다. 죽음의 위험마저도 하나님과 바울 사이에 끼어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완벽한 사랑 때문입니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다른 이유가 없다는 것을 입증했습니다. 사탄은 욥이 왜 경건하게 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그가 복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소유가 넘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사탄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까닭을 제거해버리면, 욥이 하나님을 떠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사탄의 모든 시험을 무색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욥은 자신의 믿음은 오직 하나님 때문이라는 것을 입증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외에는 다른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모든 것 되십니다. 주님은 나의 전부이십니다. 내 믿음의 이유이십니다.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되십니다. 죽음마저도 받아들일 수 있고, 하나님 한 분 만으로 충분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무슨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할 수 있습니까?

살아가다 보면, 인생이 흔들릴 때가 반드시 있습니다. 그때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을 테스트 받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무엇이 끼어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욥은 자신이 귀로 들었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았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을 분명하게 만나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면, 결론이 분명해집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 안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욥은 혼자 고난당하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의 주인이시고, 통치자이시고, 주권자이십니다.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때로는 친구가 되십니다. 이것은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축복입니다.

마침내 욥은 자신에게 일어난 고난을 전부 이해할 수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하겠다고 고백했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욥은 고통의 끝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욥의 모습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오버랩(overlap)되고 있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발악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혹과 배신과 고독과 오해의 긴 터널을 통과하셨습니다. 욥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완성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라갈 때, 고난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의 한가운데에 빠질 수 있습니다. 사탄은 지금도 여전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싸움은 계속됩니다.
고난이 찾아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칠 때, 하나님을 향해 정직하게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더 깊고 높고 풍성한 자리로 나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통당할 때에 모르는 척하시는, 비정한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손들게 됩니다. 그 후에는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우리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무조건 순종하며 살 수 있습니다. 더없이 좋으신 하나님을 만나고 나면, “나는 충분합니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수없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예배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욥은 이전보다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졌습니다. 그것이 승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승리로 이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이겨낸 우리를 칭찬하시고, 더 풍성한 은혜를 통해 우리를 회복시켜주십니다.

고통에는 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의 주관자가 되십니다. “어떤 경우에든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높여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나는 항상 하나님을 찬송하겠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겠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어떤 것도 끼어들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고통의 한가운데서 정직하게 반응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 여러분의 감정을 그대로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고통의 끝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온 사람만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귀로 듣기만 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머리에서 맴도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세계로 나아가 하나님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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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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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저녁예배설교] 믿음은 뒤로 물러나지 않는다 Friday Night Sermon

제목 / 믿음은 뒤로 물러나지 않는다
본문 / 히브리서 10:36~11:1

 

10: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37.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38.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앞으로 나아가는 인생이 있는가 하면, 자꾸 뒤로 물러나는 인생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뒤로 물러나고 있습니까.

본문 히브리서 10장 끝 부분에 보면, 뒤로 물러나는 인생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장입니다.
본문 히브리서 10장 38~39절에 보면,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믿음을 가진 자의 삶은 뒤로 물러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믿음은 뒤를 보는 것이 아니라, 앞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믿음은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미래적입니다.

그런데 자칫하면 뒤로 물러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과거의 아픈 상처들, 아픈 경험들이 우리에게 족쇄가 될 때가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포로가 되어 살아갑니다. 과거의 아픈 경험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이 생각보다 아프게 작용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에 오랫동안 노예생활을 했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간 듯한데, 뒤로 돌아왔습니다. 계속 제자리를 맴돌았습니다.
앞으로 치고 나아가야 하는데, 과거에 노예생활을 했던 경험이 믿음의 삶을 방해했습니다. 그래서 가는 듯하다가 돌아오기를 되풀이했습니다. 늘 제자리를 맴돌았습니다. 그들은 광야 속에 갇혀있었습니다.

과거에 실수한 것을 가지고 자책(自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못난이야. 나는 실패자야. 나는 할 수 없어.”라고 스스로 자신의 점수를 매깁니다.
과거의 실수로 인해 스스로에게 딱지를 붙입니다. 과거의 경험, 과거의 이력(履歷) 속에 갇혀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과거를 돌아보면, 부끄러운 부분이 많습니다. 누구든지 과거를 돌아보면, 성공한 것보다 실패한 것이 더 많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실패가 더 많습니다.
유혹에 넘어간 것, 죄를 지은 것 등 숨기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지난날을 생각하면, 부끄러운 것이 많습니다. 이러한 과거의 경험이 자신을 위축시킵니다.
과거의 경험은 굉장히 강력합니다. 외상증후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과거의 강한 경험은 쉽게 잊히지 않고, 오늘 나의 삶에서 나의 발목을 잡습니다.
그래서 큰 교통사고를 경험한 사람은 운전을 하지 못합니다. 비 오는 날에 교통사고를 경험한 사람은 비가 오면 운전을 하지 못합니다. 비가 오면,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끔찍했던 사고가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자꾸 뒤로 물러서게 합니다. 좋지 않은 일을 경험한 사람은 생각이 부정적이고 어둡습니다.
어두운 생각의 습관이 자신을 꽁꽁 묶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나아가는 듯하다가 뒤로 물러나고, 제자리를 맴돕니다.
사실은 태도에 문제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지 않고 이전의 경험으로 만들어진 태도의 영향을 받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과거로 돌아가지 않고, 미래로 향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뒤로 물러나게 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과거로 돌아가지 않고, 과거로부터 미래로 향하게 합니다. 과거에 어떻게 살았는가는 상관없습니다. 믿음은 미래적인 삶을 살게 합니다.
우리의 삶은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뒤에서 잡아당기는 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쉽지 않습니다.

성도들과 상담해보면, 과거의 힘이 얼마나 강한가를 느낍니다. 과거의 힘은 아주 강합니다. 과거는 어느 시점에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지난날의 실수와 실패, 아픈 경험들을 묵상하고 곱씹게 합니다. 과거의 환영(幻影)에 시달리게 합니다. 과거의 경험, 사건, 좋지 않은 기억들이 완전히 지워지기를 축원합니다.

믿음은 과거로부터 자유하게 합니다. 과거로부터 벗어나게 합니다. 이사야 43장 18~19절에 보면,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광야로 가는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노예생활을 하는 동안 경험했던 어둡고 끔찍한 일들을 기억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새 일을 행하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뒤로 물러나게 하지 않으시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과거의 어두운 기억에 갇혀 사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뒤로 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과거로부터 나오게 하셨는데, 왜 자꾸 과거로 돌아가려고 합니까? 뒤로 물러서면 안 됩니다. 믿음의 삶은 앞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비행기는 후진(後進)하지 않습니다. 비행기에는 후진 기능이 없습니다. 비행기가 이륙하기 전에도 자체적으로 후진하지 못합니다.
믿음의 삶이 그렇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믿음의 날개를 단 사람입니다. 믿음의 날개를 단 사람은 뒤로 날아가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믿음이라는 자동차에는 백미러(back mirror)가 없습니다. 그 기능 자체가 필요 없습니다. 앞으로만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사막에 사는 맹수(猛獸)들을 보면, 눈이 앞에 있습니다. 옆을 보지 않습니다. 옆을 볼 필요도 없습니다. 목표물이 보이면 전진합니다. 앞으로 달려갑니다.
그런데 사슴을 비롯한 연약한 동물들은 눈이 옆에 있습니다. 누가 공격하지는 않는지 살피며 불안해하고 두려워합니다.

믿음은 전진형(前進形)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앞을 바라봅니다. 믿음은 실상(實狀)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실상을 손에 잡은 것처럼 바라보면서 앞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미래를 보는 것입니다.

미술전시회에 갔을 때, 그림을 볼 줄 모르는 사람은 그림을 보면서 할 말이 없습니다. 특히 추상화의 경우에는 뭐가 뭔지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림에는 화가의 사상과 철학이 담겨있습니다. 그냥 그린 것이 아닙니다.

눈이 있다고 해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볼 줄 알아야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은 볼 줄 아는 것입니다. 볼 줄 아는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을 가지면, 미래가 보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으면, 과거가 보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매입니다. 과거로 돌아가려 합니다.

믿음을 가지면, 과거가 지워져버립니다. 미래가 더 강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매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은혜가 임해야 합니다.
과거에 실수했습니다. 실패했습니다. 넘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고, 믿음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미래가 보여야 합니다. 미래가 선명하게 보일수록 담대해집니다. 누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까? 과거보다 미래가 더 선명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기억하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과거를 기억하고 추억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을 통해 미래를 바라보라는 의미입니다. 미래를 바라보기 위해 믿음을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과거의 사건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기억하라는 것은 과거의 추억에 사로잡혀 있으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행하신 사건들을 보면, 하나님께서 미래에 행하실 역사(役事)에 대한 기대감이 생깁니다.
홍해 사건을 깊이 묵상하면, 홍해가 갈라진 사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단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로 바뀝니다.
거룩한 상상력이 일어납니다. 믿음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게 되어, 성경에서 일어난 역사가 내 삶에도 일어날 것 같습니다.

소년 다윗이 거인 골리앗을 넘어뜨린 이야기를 읽다 보면, 가슴이 뜁니다. 다윗의 이야기는 신화(神話)나 동화가 아니고, 실제 사건입니다. 얼마나 통쾌합니까.
이런 이야기를 계속 읽고 묵상하다 보면, 그 이야기가 액자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에 재현(再現)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생기면서 믿음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의 사건을 왜 기록해놓으셨습니까? 단지 재미있게 읽으라고 기록해놓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믿음을 일으키시려는 것입니다.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의 역사가 오늘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을 일으키시려는 것입니다.

성경은 단순한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생명의 책입니다. 진리의 책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살아계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도 여전히 살아있는 생명의 생생한 언어입니다.
성경은 단순한 역사(歷史)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역사(役事)는 계속됩니다. 성경 어디를 보든지 하나님께서 함께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추억하려는 목적으로 기록된 책이 아닙니다. 미래를 향해 마음이 움직이게 하는 책입니다. 믿음으로 성경을 읽다 보면, 미래가 보여야 합니다. 그것이 정상(定常)입니다.
다윗의 이야기,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읽는데, 왜 미래가 보입니까? 아브라함에게 역사하셨던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삶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겠구나.’라고 기대하게 됩니다. 답답한 상황 속에 있지만, 홍해를 여신 하나님을 기대하게 됩니다. 홍해는 오늘도 열립니다. 홍해는 오늘도 갈라질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우리를 미래로 이끌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흥분하게 됩니다. 꿈이 생깁니다. 가슴이 뜁니다.
필립 얀시(Philip Yancey)는 “믿음은 시간이 지나야 이해될 수 있는 것을 미리 믿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가서 직접 보고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미리 보고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것, 지금은 이해되지 않는 것을 미리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미래에 될 일이 미리 보이고, 그것이 믿어지면, 그것을 통해 우리가 힘을 얻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살면, 다른 사람보다 몇 단계 앞선 삶을 살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단계적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삶은 그렇지 않습니다. 점프합니다. 도약이 일어납니다. 출발 지점부터 다릅니다. 믿음은 점프하게 하고, 상상을 넘어섭니다.
기적이 무엇입니까? 논리적으로 도약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성이나 현실적으로 계산 가능한 세상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고, 크게 점프한 것입니다. 그것이 기적입니다. 산술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영역의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은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바라봅니다. 그런데 씨앗만 보면 초라합니다. 별 것 아닙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들은 씨앗 하나를 보면서 그것을 통해 어마어마하게 펼쳐질 농장을 기대합니다.

믿음으로 미래를 바라본다는 것은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실상, 보이지 않는 것을 마치 손에 잡힌 것처럼 보는 것입니다. 마치 실물을 쥐고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환상이 아니라, 실상을 가리킵니다.
믿음의 삶이 깊어지면, 멀리 있는 것이 나에게 가까이 다가온 것처럼 느낍니다.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마치 내 앞에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왜 우리는 미래를 두려워합니까? 까마득하게 잘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믿음을 가지면, 내 앞에 와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절망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절망합니다. 눈앞에 있는 것만 보이고, 멀리 있는 것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절망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멀리서 바라봅니다. 마치 그것이 내 앞에 펼쳐진 것처럼 여깁니다. 그러므로 뒤로 물러날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앞에 있는데, 왜 뒤로 물러납니까?
믿음은 미래를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말하는 것입니다. 미래를 본 사람은 미래에 일어난 일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과거형보다는 미래형을 많이 사용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반석’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장차 게바라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42). 게바는 반석이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베드로는 반석과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반석은 흔들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굉장히 충동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매우 불안정한(unstable)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해 “장차 게바라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왜 이렇게 이름 지어주셨습니까? 현재의 모습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미래의 모습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촐랑거리는 베드로의 모습 때문이 아니라, 사도행전에서 주역(主役)으로 뛸, 견고한 베드로의 모습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게바라는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담대하고 흔들림 없이 복음을 전하는 베드로를 예수님께서 미리 보시고 베드로에게 “장차 게바라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언어를 사용하셨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믿음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현재를 말하지 않고, 미래를 말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과거를 말합니다. “너는 이전에 실패했잖아. 그래서 너는 안 돼.”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폐쇄적이고 부정적이고 비관적(cynical)인 용어를 얼마나 많이 사용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믿음의 세계는 다릅니다. 항상 미래적입니다.

우리에게서 믿음의 언어가 흘러나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믿음의 언어가 흘러나온다는 것은 미래적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결을 맞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결을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하나님과 결을 맞추는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묵상이 깊어지면, 어느 순간, 입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흘러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우리가 엽기적인 소설을 계속 읽으면, 생각도 오염되고, 말도 엽기적으로 사용하게 됩니다. 머리에 들어있는 것이 밖으로 튀어나오게 됩니다.
우리가 그냥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묵상한 말씀이 우리의 입을 통해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여러분의 말을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입에서 흘러나와야 합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전 미문 앞에 앉아있는,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향해 베드로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선포했습니다(행 3:6).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는 계속 성전 미문 앞에 앉아있었습니다. 그에게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40세 정도 되었습니다. 과거에 묶여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를 향해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선포했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선포입니다. 미래적인 말입니다.

놀라운 것은 베드로가 이렇게 선포했다는 것입니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이가 일어난 것도 기적이지만, 더 놀라운 것은 베드로의 변화입니다.
베드로 역시 얼마 전까지 과거에 묶여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그는 디베랴 바닷가로 도망갔습니다.
베드로가 물고기를 잡으러 디베랴 바닷가로 간 것은 과거로의 회귀(回歸)를 의미합니다. 물고기 잡던 과거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는 실패자요 예수님을 더 이상 따를 수 없는 낙오자의 모습으로 과거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과거로 숨었습니다. 뒤로 물러났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는 성령을 받고 난 후 과거에 사로잡혀있지 않을 뿐 아니라, 과거에 사로잡혀있는 사람을 믿음의 선포를 통해 일으켜 세웠습니다.
베드로는 미래를 향해 믿음의 눈을 뜬 것입니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이에게만 기적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베드로에게도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과거에 머물러있고, 과거로 도피했던 삶에서 미래를 보고, 다른 사람까지 미래로 이끌어주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여러분, 믿음의 눈을 뜨셔서 과거의 것을 모두 떠나보내고, 앞에 선명하게 보이고, 눈이 열려서 다른 사람까지도 미래로 이끌어주는 단계로 나아가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베드로가 믿음의 눈으로 보니, 나면서 못 걷게 된 이가 일어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렇게 선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배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장차 게바라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미래형을 사용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통해 살아있는 믿음의 형태를 실제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향해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선포했습니다.
베드로는 나면서 못 걷게 된 이의 현재 운명을 말한 것이 아니라, 그가 일어나 춤출 것을 미리 보며 말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믿음의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믿음의 언어를 사용하려면,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골로새서 3장 16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면, 그 말씀이 우리 안에서 흘러나오게 되고, 그 말씀으로 다른 사람들을 권면할 때, 사람들이 힘을 얻게 됩니다. 자신도 모르게 말씀이 흘러나옵니다.
내 안에 가득 차 있는 말씀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말씀이 나오기 시작하면, 그 말씀은 그냥 말씀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말씀이 됩니다.

교역자가 성도의 집에 심방을 가면, 바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성도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동안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물론 심방을 가면서 말씀을 준비해가지만, 성도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성령께서 생각나게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가정에 가장 필요한 말씀이 무엇인지 생각나게 하십니다. 그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그 말씀은 그 성도의 가정에 살아서 역사하시는 말씀이 됩니다. 그 말씀을 통해 힘을 얻습니다. 그 말씀이 성도의 가정을 살립니다.

그런데 말씀이 생각나려면, 먼저 말씀을 많이 읽고 묵상하고 암송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없는데, 성령께서 말씀을 생각나게 해주실 수는 없습니다. 자기 속에 있는 말씀이 흘러나오게 해야 합니다.
내 안에 말씀이 차 있으면, 말씀이 내 삶을 바꿉니다. 믿음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믿음으로 말씀을 읽다 보면, 말씀에 내 속에 충만히 거하게 되고, 말씀이 나를 사로잡고, 내 삶을 바꿉니다. 그리고 그것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저는 목사이기 때문에 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며 말씀 속에 삽니다. 이것이 제게 축복입니다. 독수리같이 날아오르게 하시는 은혜를 경험합니다.
행복한 마음으로 여러분과 말씀을 나눌 수 있는 것은 말씀이 저를 사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얼마든지 설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40일간 금식하신 후,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가셨을 때, 사탄이
 예수님을 공격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입에서 말씀이 흘러나왔습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예수님께서 ‘이때는 뭐라고 말해야 하나’라고 고민하지 않으셨습니다. 머리에서 짜낸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말씀이 흘러나왔습니다. 말씀이 가득 채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말씀을 열심히 읽어야 합니다. 주야(晝夜)로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말씀을 가득 채워야 합니다.
밥 한 끼를 먹지 않으면 배고픔을 느낍니다. 그런데 1주일 동안 말씀을 읽지 않아도 영이 생생하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계속 먹으면, 힘든 상황이 다가와도 말씀으로 힘든 상황을 이겨냅니다. 힘든 상황에 적합한 말씀이 떠오르면, 힘이 납니다. 진리의 힘이 바로 그렇습니다.
말씀의 능력은 엄청납니다. 상황에 맞는 적절한 말씀이 떠오르면, 그 말씀이 힘이 됩니다. 고난의 순간에도 말씀이 나에게 임하면, 그 말씀으로 인해 고난을 넉넉히 이깁니다.
말씀을 믿음으로 받으면, 말씀은 우리를 미래로 이끌어갑니다. 현재는 암울하고 힘들어서 낙심할 수밖에 없지만, 말씀을 믿음으로 받으면, 말씀은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힘이 납니다. 말씀을 통해 미래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입술에서 말씀이 흘러나오면, 그 말씀은 이미 여러분 안에서 능력이 되어있습니다. 그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선포하면,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말씀에 대한 강한 믿음이 생기면, 미래는 이미 열린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읽고 암송하고 묵상하세요.

성경에 보면, 역사서도 있고, 예언서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렵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잘 알려져서 우리에게 익숙한 명구(名句)는 계속해서 읽어야 합니다. 암송해야 합니다. 성경을 암송하고 묵상하고 수시로 입으로 되뇌세요.
기도할 때에도 말씀을 가지고 기도하는 습관을 가져보세요. 자신의 말로 주절주절 기도하지 말고, 말씀을 떠올리며 기도하세요.

조지 뮬러(George Müller)의 기도 방식이 이러했습니다. 조지 뮬러는 기도하기 전에 말씀을 읽었습니다. 말씀을 읽다가 확신이 생기는 말씀이 있으면, 그 말씀을 가지고 기도했습니다. 5만 번 기도응답 받은 조지 뮬러의 기도의 파워는 말씀에서 나온 것입니다.
말씀을 붙잡고 기도할 때, 그 기도는 파워가 있습니다. 기도할수록 말씀에 대한 믿음이 생깁니다. 확신이 생깁니다. 그 확신은 우리를 미래로 이끌어갑니다. 그래서 기도가 강력해집니다.

감사와 불평은 단순히 말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결을 맞출 때, 감사할 수 있습니다.
왜 불평 불만합니까? 하나님과 결이 어긋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결이 맞는가 맞지 않는가에 따라 그림이 달라집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에 대해 기대할 때,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기대 때문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현실만 보고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아멘”으로 반응하는 것은 하나님과 결을 맞추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결이 맞춰지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말씀을 들을 때, “아멘”으로 반응하는 것은 하나님과 결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어느 날 말씀이 우리의 삶 속에서 흘러나오게 됩니다. 그것이 곧 능력이 되고, 현실이 되고, 미래가 됩니다. 그것을 통해 기적이 일어납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서 익어가고 흘러넘쳐서 우리의 입을 통해 선포될 때, 말씀의 능력이 우리의 삶 가운데 실제화 됩니다. 미래를 향해 우리의 삶이 열립니다.

믿음으로 미래를 본 사람들이 순종합니다. 믿음은 미래를 보는 것입니다. 믿음은 말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믿음은 순종을 통해 미래를 향해 갑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을 보면, 믿음이 순종으로 나타났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순종으로 나타났습니다. 아브라함의 눈에 본향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분명히 이루어질 것을 믿음으로 보았습니다.
믿음은 미래를 보게 하고, 미래를 본 사람으로 하여금 순종하게 합니다. 아무나 순종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의 눈이 열리지 않으면, 순종할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 보면, 가나의 혼인 잔치 집에서 마리아의 믿음이 돋보였습니다. 혼인 잔치 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그때 마리아는 믿음의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라고 말했습니다(요 2:5). 마리아는 이미 보았습니다. 앞으로 되어질 일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순종하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순종의 단계에서는 위기를 맞이합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마리아가 예수님께 알렸을 때, 예수님께서는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2:4).
예수님의 싸늘한 반응에 마리아는 당혹스러웠을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려고 할 때, 상황이 묘해지기도 합니다. 마리아에게 두려움이 찾아왔지만, 마리아는 두려움을 이겨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믿음을 강화하여 하인들에게 믿음의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라고 말했습니다.
마리아는 이미 보았습니다. 이미 보았기 때문에 순종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기대하는 마음이 가득 차 있습니다.

믿음으로 미래를 기대하는 사람들은 순종하는 것을 미루지 않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감각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육감(六感), 여섯 번째 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께서 기적을 행하실 것을 예감했습니다.
믿음은 기대감을 갖게 하고, 구체적으로 행동하게 합니다. 그래서 미래를 본 사람들은 행동하는 데 민첩합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을 익히면,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당장 역사가 일어나지 않아도, 믿음으로 사는 법을 익히면, 그것 자체가 축복입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해서 모든 일이 잘 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믿음과 반대되는 상황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익히고 살아가다 보면, 반드시 믿음의 역사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삶의 방식이 다릅니다. 생각하는 태도가 다릅니다.

오병이어 사건을 보면, 빌립은 믿음의 태도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요 6:5)”라고 말씀하셨을 때, 빌립은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요 6:7)”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4:16).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을 훈련시키셨습니다. 믿음을 사용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먹을 것을 주려고 접근하는 사람과 흩어져서 각자 알아서 해결하게 하려는 사람은 태도가 다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이 상황 속에서 제자들이 무엇인가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자세히 보면, 답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먹을 것을 주라”라고 말씀하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창조자이십니다.

교회에서 사역하면서 믿음으로 접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 번 해보자”하는 긍정적인 태도로 접근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은 부정적으로 접근합니다. 항상 부정적으로 이야기합니다. 반대부터 합니다.

야구를 보면, 타율(打率)이 높은 선수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은 방망이를 많이 휘두릅니다. 방망이를 휘두르는 횟수가 많아야 공을 맞출 확률이 높아집니다.
아무리 잘 치는 선수라도 지나치게 신중하면 공은 그냥 지나가버립니다. 삼진아웃 되어버립니다. 이것은 확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태도를 바꾸어놓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을 가지고 있습니다. 삶의 태도가 다릅니다. 관점이 다릅니다. 그래서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산다고 해서 모든 것이 잘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의 태도를 가지고 꾸준히 살면, 확실히 다른 인생이 펼쳐집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가는 길이 다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확신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미래에 대해 긍정적이고 열려있습니다. 무엇이든 해보려고 합니다. 실패하더라도 해보려고 합니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이고 열린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려워도 도전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출발점이 다릅니다. 출발하기 쉽습니다. 무엇이든 시작하는 것이 쉽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무엇인가 시작하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고민하는 시간이 매우 깁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시작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오랫동안 갈등하고 고민하고 주저하고 멈칫거리며 세월을 보냅니다.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는 자신의 묘비명을 스스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묘비에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라고 썼습니다. 우물쭈물하다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우물쭈물하다가 인생이 지나가버렸다는 것입니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아닙니다. 제대로 한 번 살아보고 죽어야지, 사는 것처럼 살지 못하고 죽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제대로 살아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두려울 뿐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시작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쉽게 시작합니다. 이것이 특징입니다.
특별하게 살았던 사람들은 무엇인가 시작하는 데 별로 고민하지 않습니다. 시작하는 것이 쉽습니다. 실패할지 모르지만, 쉽게 시작합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아찔한 일인데, 믿음의 사람은 시도해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쉽게 시작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시작할 때에 고민을 지워버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나중에 돌아보면, ‘내가 어떻게 그 일을 했지?’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저도 그런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저는 이전에 굉장히 소심했습니다. 그런데 제 삶에서 중요한 고비에는 미친 결정을 했습니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가 났는가, 어떻게 그 일을 시작했는지 의문스럽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믿음이 저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믿음의 사람이 많이 필요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앞으로 나아가 있습니다.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습니다.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시작하는 것이 쉽습니다.

순종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보면, 순발력이 있습니다. 다윗은 대단한 순발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엘라 골짜기에서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40일 동안 대치(對峙)하고 있었습니다. 40일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엘라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블레셋 군대를 고함치고 있고, 이스라엘 군대는 벌벌 떨고 있습니다. 어느 쪽도 먼저 행동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소년 다윗이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의 도시락을 가지고 왔다가 그 장면을 보았습니다. 다윗은 막대기와 물맷돌을 가지고 골리앗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순발력을 가지고 사고를 저지른 사람은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은 물맷돌을 들고 전혀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전혀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물맷돌을 고르는 데 시간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아무렇게나 주워들고 갔습니다. 다윗은 이미 이긴 자의 모습으로 골리앗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베드로도 순발력이 있었습니다. 밤에 예수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베드로가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마 14:28).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바로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었습니다. 대단한 순발력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베드로는 우물쭈물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바로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었습니다. 탁월한 순발력입니다. 풍랑이 이는 바다 위에서 주님께서 “오라”라고 말씀하시니 베드로는 바로 배에서 내려서 물 위를 걸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베드로는 풍랑의 높이와 길이를 재거나 따지지 않았습니다. 이 순발력으로 인해 베드로는 쓰임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사도행전에서 주역(主役)이 되었습니다. 그는 사도행전의 전반부를 장식하는 리더가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행동파였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불을 받고 난 후, 그는 온전하게 행동하게 되었습니다.

믿음은 앞으로 내딛는 것입니다. 뒤로 물러서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탁월한 순발력을 통해 드러납니다.
순종하는 데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앞으로 되어질 일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미래가 보이는 사람은 순종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미래에 되어질 일을 보았습니다. 멀리서 본 사람입니다.
현실에서는 약속을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 못했지만,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멀리서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을 예비해놓으신 것이 매우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그들을 가로막는 것이 있고, 어떠한 핍박이 있다 해도 뒤로 물러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그들의 앞에 선명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믿음은 뒤로 물러서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바칠 만한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뒤로 물러나는 사람이 아닙니다. 믿음의 삶은 뒤로 물러나는 삶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앞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나 멸망할 자들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미래를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과거에 붙들리지 마세요. 과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평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과거에 실패한 것을 붙잡고 평가하는 것에 연연해하지 마세요.
과거에 실패한 것은 과거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으로 앞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미래를 향해 담대히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새 일을 시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물쭈물하지 마세요. 믿음으로 현실을 정면 공격하고, 정면으로 승부하세요.
우리에게는 믿음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미래를 말하세요. 미래를 선포하세요. 믿음의 언어를 사용하세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히 채우셔서 말씀이 흘러나가면, 그 말씀이 살아있는 말씀이 되고, 현실이 됩니다.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되고,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가 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기도하는 동안 미래가 선명하게 보이는 은혜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읽을 때, 말씀이 오늘도 현실화되는 약속임을 믿으시고, 미래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두려움 없이 순종의 발걸음을 내딛을 때, 순종이 기적을 낳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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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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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철야예배설교]  가까이 다가오신 하나님 Friday Night Sermon

제목 / 가까이 다가오신 하나님
본문 / 출애굽기 3:1~12

 

1.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3.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 때에
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5.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
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8.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9.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래서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은 나의 가장 가까운 곳에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높고 높은 보좌 위에서 팔짱을 끼시고 물끄러미 바라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초월자이시지만,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 가까이에 다가오시는 분이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잘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까이 계시는데, 하나님을 잘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부재(不在)’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무지(無知)와 무관심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무지하고 무관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부재를 느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려고 하시는데, 우리는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셔도, 바쁘게 살아가다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시는 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거리감 때문에 힘들어합니다. 하나님이 멀리 계신다고 느낍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멀리 계신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힘이 빠집니다.
신앙생활을 하지만, 하나님이 멀리 계시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낯설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 속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집요하게 인간에게 다가오십니다. 하나님은 집요하게 우리의 곁에 다가오십니다.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경험하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힘을 잃습니다. 주일도 잘 지키고, 교회의 활동에도 참여하지만, 하나님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바깥 세계에 계시는 분이라고 생각하고 신앙생활하면,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지 못하면, 종교생활을 하는 것이 됩니다. 신앙에 힘이 없습니다. 늘 제자리를 맴돕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면, 우리의 삶은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나님과의 거리에 달려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우리의 신앙은 어려워지고, 우리의 삶은 딜레마(dilemma)에 빠집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는 삶의 매 순간 놀라운 변화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만날 때, 우리의 삶은 사건이 됩니다. 우리의 삶에 역사(役事)가 일어나고,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시는 순간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다가오시면 역사가 일어난 것을 발견합니다.
야곱이 홀로 외로이 돌 베개를 베고 잘 때,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야곱이 얍복 나루에서 죽음의 위협 앞에서 모든 것을 상실할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과 씨름하며, 하나님의 거친 숨소리를 들었을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다가오셨습니다. 모세는 그것을 느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떠나신 적이 없습니다.
모세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함께하셨습니다. 모세가 나일 강에 띄워질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보고 계셨습니다.
그가 왕실에서 자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애굽을 떠나 광야를 지나는 동안에도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모세에게 하나님은 잊힌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가까이 다가오셨습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광야의 길을 지나다녔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순간은 뭔가 다릅니다. 특별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것을 직감했습니다. 부인할 수 없는 경험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떨기나무가 불에 계속 타는데, 불이 사라지지 않은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불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 것입니다. 불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불이 타고 있는 상징적인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임재를 뚜렷하게 경험했습니다.
저 멀리 계신다고 생각했고, 자신과 상관없을 것 같던 하나님께서 모세의 생애 가운데 아주 가까이 다가오셨습니다. 모세는 불 가운데 임하신 하나님을 아주 뜨겁게 느꼈습니다.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멀리서 불을 구경하는 것과 불에 대한 그림책을 읽는 것은 매우 다릅니다. 불은 이론으로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뜨겁고 강력합니다.
화재의 현장 근처에 가보면, 불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것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모세는 매우 충격적인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 문자로 이해하는 하나님과 실제로 온몸으로 경험하는 하나님은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글을 읽고 감동을 느끼는 것과 하나님의 임재를 직접 경험하는 것은 매우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가까이 다가오셨다는 것을 느끼면, 용광로 근처에 있는 것보다 더 강력한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떨기나무에 불이 붙어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불꽃 가운데 계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불꽃보다 더 뜨거운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타지 않으시는 불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고강도의 열기와 함께 빛으로 오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직감(直感)했습니다. 충격적이고 경이로운 경험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까이 찾아오실 때에는 용무(用務)가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하나님께서 가까이 다가오시는 때는 매우 특별한 순간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냥 다가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말을 거십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이름을 부르시며 모세에게 말을 거셨습니다.
모세가 애굽의 왕실에 있을 때에 사람을 죽이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쳤습니다. 그 후에 그는 은둔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가까이 다가오셨습니다. 이때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인간의 편에서는 저항할 수 없고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모른 체 하거나 딴청을 피울 수도 없었습니다. 매우 강력했기 때문에, 그 자리에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본문에서 모세는 가던 길을 멈춰 섰습니다.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일을 경험하신 적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매우 가까이 다가오셨습니다. 그때에는 모든 것을 멈출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일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에 매우 가까이 다가오시면, 아무리 바쁜 일이 있고, 귀중한 일이 있다 해도, 우리 가까이에 다가오신 하나님께 주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일을 경험하신 적 있습니까?
이런 때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시선을 주목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만 집중하게 하십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자신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것을 경험한 적이 없습니다. 그냥 지나다녔을 뿐입니다. 양을 치며 풀을 찾아 다녔을 뿐입니다. 그저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모세는 불타는 떨기나무의 강한 흡입력으로 인해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저항할 수 없는 힘에 끌려갔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매우 가까이 다가오신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 순간, 모세가 하나님을 주목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주목하시는 것입니다.
이때는 한눈 팔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한눈팔지 않으십니다. 모세를 주목하고 계십니다. 이때는 무조건 멈춰서야 합니다. 다른 것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다가오실 때,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멈춰 세우십니다. 열심히 살아가는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시면, 세상에서 잘나가는 직장에서 전성기를 구가하던 사람도 꼼짝할 수 없습니다. 가던 길을 멈추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가오시면, 그 앞에서 꼼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길을 열심히 걸어갔던 사울을 멈춰 서게 하셨습니다.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다가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미션(mission)을 가지고 그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현재와 만나는 순간입니다.

본문 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이곳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과거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지금 이곳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라고 질문했습니다(출 3:13).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I am who I am)”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 3:14). 이것은 하나님 외에는 쓸 수 없는 표현입니다.

모세가 만난 하나님은 지금 이곳에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과거의 하나님도 아니고, 미래의 하나님도 아닙니다. 현재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현재이십니다.
타고 만 잿더미 속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떨기나무가 불에 타면, 잿더미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떨기나무가 사그라들지 않았습니다. 계속 불이 붙어있었습니다. 불 속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셨습니다.

떨기나무가 잿더미가 되어버리면, 과거가 되어버립니다. 나무가 잿더미가 되어버리면, 과거로 끝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현재이시기 때문에, 불 가운데서 계속 타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현재의 시간 속으로 들어오셔서 모세를 만나고 계십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곳에, 모세 앞에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만나는 시간은 우리의 삶 속에서도 현재입니다.

모세는 궁에서 40년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지냈습니다. 80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이 시간은 잃어버린 시간입니다. 과거의 시간입니다. 묻힌 시간입니다. 흘러가버린 시간입니다. 그 시간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실패와 방황으로 점철된 시간입니다.

우리가 방황하고 고통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확실하게 쥘 수 있는 현재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제는 금방 지나가버렸습니다. 나이가 들었습니다. 우리의 시간은 계속해서 과거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가버리고 추억으로 남습니다. 그리고 흘러가버린 시간은 후회로 남습니다. 미래는 아직 우리의 손에 쥐어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내일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내일은 낯섭니다. 그리고 내일은 언제나 불안정합니다. 그래서 미래에 대해서는 모두 염려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34). 이것은 내일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내일에 대해서는 늘 염려스러워합니다. 그렇다고 내일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입니다.

현재의 시간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현재의 시간도 눈 깜빡할 사이에 과거로 흘러가버립니다. 우리는 달력을 넘기느라 바쁩니다. 지금도 순간순간이 과거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가 과거로 끝나버리지 않고, 현재가 현재가 되려면, 지금 이곳에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영원히 현재이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모세는 지금 그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양떼를 치며 호렙 산을 지나고 있습니다. 어제와 똑같이 반복되고, 과거로 흘러가버릴 수밖에 없는 시간입니다.
곧 과거가 되어버릴 한 시점에서 현재적인 하나님이 모세를 찾아오셨습니다.

우리의 삶은 늘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 임재하신 하나님을 만나면, 그 순간의 시간은 단순한 시간이 아니고, 하나님의 현재와 만나는 시간이 됩니다.
특별한 시간이 됩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한 시간이 됩니다. 하나님의 존재로 인한 충만함이 현재의 나의 시간 속으로 들어올 때, 내 삶의 시간은 특별한 현재가 됩니다.
단 한 시간이라도 내 삶을 바꾸어놓습니다. 과거의 40년, 80년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시간의 질량이 폭발해버립니다. 마치 핵이 분열하여 엄청난 에너지를 발하는 것과 같습니다.
영원히 현재이신 하나님께서 나의 시간 속으로 침입해 들어오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고린도후서 6장 2절에 보면,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시편 118편 24절에 보면, “이 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현재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실 때, 이 시간은 흘러가버릴 과거의 시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현재와 만나서 시간의 질량이 폭발하면서 인생에 특별한 사건이 벌어질 때, 내 삶은 단순히 과거가 아닙니다.
내 인생에서 두 번 다시 경험할 수 없는 특별한 현재적 사건이 됩니다. 그 시점부터 내 인생은 뒤로 물러가는 것이 아니라, 전진하게 됩니다.
이때는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생명이 밀고 들어오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충만한 에너지가 넘쳐흐르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다가오신다는 것은 거대한 사건입니다. 애굽의 바로를 꺾는 힘이 여기에서 나오고,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과거의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 출애굽하게 만드는 힘이 여기에서 나옵니다.
폭풍 같은 힘이 나옵니다. 영원히 현재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시간 속으로 찾아오시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현재 속에 찾아오시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출애굽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나를 묶고 있던 아픔과 상처를 떠나보낼 수 있습니다.
현재의 시간에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나면, 이때부터 과거로 되돌아가지 않습니다.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사역 현장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면, 전혀 새로운 일이 벌어집니다. 사건이 일어납니다.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가까이 다가오시는 곳은 특별한 장소가 아닙니다. 모세는 양떼를 몰고 다니던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곳은 매우 평범한 곳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상 속에 다가오시면, 그곳은 특별한 곳이 됩니다. 우리가 어디로 가야 특별한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직함을 가져야 특별한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가까이 다가오신 그 순간은 특별한 현재가 됩니다. 그 순간을 붙잡고 놓치지 않으면, 우리의 시간은 미래를 향해 빠르게 움직입니다. 바로 이때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순간에 선택해야 합니다.

모세는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하는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이전에는 양떼들을 거느리고 광야를 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가오신 순간, 평범했던 삶이 비범하게 바뀌었습니다. 이때 기회가 온 것입니다. 결단을 해야 합니다.

이전에는 머뭇거렸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머뭇거릴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면 됩니다.
이전에는 모든 것이 불확실했습니다. 그러나 가야 할 길을 하나님께서 선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가야 할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모세, 가라. 고통하고 신음하는 내 백성들에게 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삶을 흔들어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순간과 나의 선택이 만나면, 폭발이 일어납니다. 사건이 터집니다. 모세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살았던 세월을 청산하고, 구원사(救援史) 속으로 들어가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것은 마치 핵이 분열하여 폭발하는 것과 같습니다.

선택의 순간에 선택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 일 없이 지나가버립니다. 순간으로 끝나버립니다.
시간은 매정합니다.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지나가버린 시간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지나가버린 파도로는 서핑(surfing)을 탈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순간에 적절하게 반응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에 반응할 때, 우리의 인생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수많은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반응하지 못하면, 인생 전체가 안타까운 과거가 되어버립니다. 과거의 시간이 되어버립니다. 과거는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간 속에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말을 거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선택은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찾아오셨고, 모세는 선택해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모세가 당황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이미 40년간 광야를 떠도는 목동의 생활에 익어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반응하기를 주저했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이제 무엇인가 새롭게 시도할 나이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 저는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 가보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모습은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모세처럼 반응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저는 아닙니다. 그냥 살던 대로 살도록 내버려두세요. 이 나이에 무엇을 하겠습니까. 힘들지만 그런 대로 살 만합니다. 이제 익숙해졌습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렵습니다. 두려운 일입니다. 미래는 항상 두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일을 시도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회를 주실 때, 우리는 그 순간을 붙잡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새로운 일을 시작할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위기의 순간에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힘들고 어려워서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는 상황 속에 빠져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모세의 나이 80세였습니다. 히브리 민족들은 애굽의 압제 속에서 고통이 극에 달해있었습니다. 고통으로 인한 부르짖음이 하늘에 닿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위기의 순간에 다가오십니다.

욥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욥 42:5).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깊이 실제적으로 경험했다는 의미입니다.
부인할 수 없는 놀라운 경험은 인생의 위기의 순간에 경험하게 됩니다. 단순히 은혜 받았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오순절에 불과 바람 같은 경험과도 같습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를 흔들어놓습니다. 모든 경험보다 뛰어난 경험입니다.
어떤 위기도 뚫고 지나갈 수 있는 새로운 경험입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이롭고 신비로운 경험입니다.

폭풍 속에서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만날 수 있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환난의 순간에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경험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는, 인생의 밑바닥에서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을 만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위기의 순간에 염려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문제에 사로잡혀서 시간을 보냅니다. 바람이 불면, 바람을 보며 불평합니다.
그런데 무엇이든 보려고 할 때에 보입니다. 사람이 앞에서 왔다 갔다 해도 보려고 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주님께서 가까이에 다가오셔서 말을 거시는데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한 충격으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폭풍이 몰아치면 앞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그들의 시력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불안과 염려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위기가 다가왔을 때, 하나님이 다가오신 것을 모든 사람이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위기가 닥치면, 사람들은 감각이 무디어지고, 생각이 좁아지고, 마음 문이 닫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당황합니다.
모세도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다가오신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기이한 사건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다가오신 것을 확실히 알려주시려고 하셨습니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특이한 일입니다. 모세는 가까이에서 보려고 떨기나무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이름을 부르시며 모세에게 말을 거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을 소개하셨습니다.

인생에서 폭풍을 만났을 때에 중요한 것은 폭풍이 잠잠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폭풍 속에 다가오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생에서 폭풍을 만났을 때에 중요한 것은 폭풍이 아닙니다. 폭풍을 다루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헷갈리면 안 됩니다.

폭풍이 아무리 거세다 할지라도 폭풍에 정신이 팔려서 폭풍 가운데 찾아오신 하나님을 놓치면 안 됩니다. 인생에 폭풍과 같은 문제가 몰아닥친다 해도 하나님을 만나면, 폭풍은 잠잠해집니다.
하나님은 실재(實在)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폭풍은 왔다가 사라지지만, 하나님은 현존(現存)하십니다. 지금 이곳에서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놓치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인생은 폭풍으로 인해 흔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흔들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놓칠 때, 우리는 어려움을 당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떠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곁에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포기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통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시편 23편 4절에 보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깊을수록 하나님의 임재는 더욱 빛납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통의 바깥에서 점잖게 무게 잡고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하는 고통의 가장 깊은 곳에 들어와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통 당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고통의 한가운데서 함께 고통하고 계십니다.
지금 고난 중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가장 가까이에 와 계십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문제에 빠져서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들어가지 못하고, 문제에만 사로잡혀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문제 가운데 찾아오시고, 고통 가운데 찾아오십니다.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를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 속에 찾아오실 때, 더 이상 인생의 아픔으로 인해 시달리지 않습니다. 내 삶에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시간 속에 가까이 다가오셔야 일이 시작됩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쓰라린 경험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시지 않고,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지 않은 상태에서 그가 스스로 하려고 했던 것은 모두 실패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시간 속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야 합니다. 그때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 떨기나무에 불이 사라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불’은 파워(power)를 상징합니다.
출애굽기 3장의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어떤 힘도 다루실 수 있는 분이심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떨기나무가 계속 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불을 통제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이라는 엄청난 힘을 계속해서 다루고 계시니까 불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파워를 다스리실 수 있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면, 어떤 일도 해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것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불은 계속 타고 있습니다. 떨기나무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불을 계속해서 붙이려면, 기름이 있어야 합니다. 불을 태울 수 있는 원료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전혀 없는데도 불이 계속 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타고 있는 불과 같은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충분하시고, 자원이 전혀 고갈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충분하고 흘러넘칩니다. 하나님은 에너지가 영원히 넘치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불 가운데 찾아오셨습니다. 사라지지 않는 불로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능력을 주셔서 새 일을 행하시기 원하셨습니다.

불 가운데 찾아오신 하나님, 사라지지 않으시는 하나님, 영원히 자존(自存)하시는 하나님, 영원히 충분하신 하나님, 영원히 넘쳐흐르시는 하나님, 에너지가 충만하신 하나님, 스스로 능력을 통제하시고 조절하시고 다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놀라운 일을 행하셨던 것처럼, 우리 가운데에도 그런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떨기나무는 사막에서 아주 흔한 나무입니다. 사막에는 떨기나무만 자랍니다. 다른 나무는 사막에서 살 수 없습니다. 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떨기나무는 잎도 나지 않습니다. 사막에서 물이 있는 낮은 지역에서만 자랍니다. 떨기나무는 사막에서 잎도 나지 않는 거친 나무, 그늘도 만들지 못하는 쓰임새 없는 나무입니다. 불에 타면, 재가 한 줌도 남지 않는 나무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3장에 보면, 떨기나무에 불이 붙어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떨기나무와 같은 존재입니다. 볼 품 없는 존재입니다. 불이 붙으면, 한 줌의 재 밖에 되지 않을 인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존재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소멸되지 않는 성령의 불이 우리에게 붙으면, 우리에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떨기나무와 같이 보잘것없는 인생이지만, 척박한 땅에 심겨 있다 할지라도 영원한 불이신 하나님께서 임하시면, 어떠한 경우에도 망하지 않고 살아날 것입니다. 활활 타오를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드러내는, 멋진 인생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순간, 우리의 삶은 거대한 힘에 의해 이끌려갑니다.
그때는 우리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이 하려고 했던 일과는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납니다.

광야에서 모세와 출애굽의 모세는 전혀 다른 인생입니다. 영원한 현재로 다가오신 하나님을 만날 때,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타는 떨기나무 가운데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난 것은 모세의 인생 가운데 매우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모세가 자신의 인생에 가까이 다가오신 하나님을 만난 순간, 그의 인생에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과거와 완전히 구분되는,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 속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의 시간 속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새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찾아오셔서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되면, 전혀 다른 인생이 펼쳐질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지각변동이 일어날 것입니다.
나이와 상관없습니다. 스펙과도 상관없습니다. 모세는 살인자의 딱지가 붙은 사람입니다. 그는 양치기였습니다. 도피하는 삶을 살았고, 자랑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다가오시는 순간, 하나님의 현재와 만났습니다. 그의 인생에서 과거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시간이 우리의 삶에 종종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가까이 다가오신 때가 언제입니까?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경험한 적이 언제입니까?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경험입니다.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것입니다. 나의 발걸음을 멈추고, 나의 존재를 흔들어놓는 경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막의 떨기나무를 이용하셔서 모세를 집중시키셨습니다. 아무리 둔하다 해도 알아차릴 수 있는 확실한 사인(sign)을 통하여 다가오셨습니다.
우리가 깨어있고 민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 가운데 가까이 다가오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삶에 임합니다.
이런 일은 특이한 곳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곳에서 일어납니다.
사막은 모세가 늘 다니던 곳이었습니다. 그 길에서 모세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우리가 일상 가운데 늘 다니는 곳, 우리가 하고 있는 일, 우리에게 익숙한 곳에서 하나님과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가까이 다가오시는 것을 언제 체험해보셨습니까. 길을 걷다가 하나님의 강한 임재를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강력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 하나님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직장에서 일하는데, 하나님께서 가까이 다가오셔서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저는 설교하다가 그런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설교하는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느낍니다. 제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말씀을 준비하다가 그런 경험을 할 때도 있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에 사로잡히는 것을 경험합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말을 거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무릎을 꿇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시는 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모세는 그의 걸음을 멈추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인을 경험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불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을 거십니다. 우리의 삶을 흔들어놓으십니다. 우리에게 새 일을 시작하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과거로 돌아가지 않게 하십니다.
이 사건 이후, 모세는 과거회귀형의 인생을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미래의 시간으로 갔습니다. 영원한 현재이신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과거로 돌아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우리의 모든 상황은 바뀝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우리의 삶은 후회로 점철됩니다. 돌아보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이만 한 살 더 먹었을 뿐입니다.

40년 동안 모세의 인생은 광야에서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들었습니다. 40년 동안 광야에서 헤맸으니 얼마나 쪼그라들었겠습니까. 매일 반복되는 일상만 반복되었습니다.
사라질 운명이었던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영원한 현재이신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타지 않는 불 되신 하나님께서 모세의 인생 가운데 찾아오셔서 반전(反轉)을 일으켜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 가운데 다가오시지 않으시면, 우리의 인생은 그냥 흘러갈 수밖에 없습니다.
사라지는 인생이 많습니다. 사라져서 한 줌의 재가 되고 맙니다. 시간은 과거로 흘러가버립니다. 초라하게 쪼그라듭니다.
사라지지 않고 불꽃 같이 일어나는 인생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가까이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만나세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현재 시간으로 찾아오십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신 시간을 통하여 우리의 인생의 이야기를 새롭게 써나가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와 우리의 이야기가 겹쳐질 때, 우리의 삶은 기적이 되고, 인생의 특별한 스토리가 쓰여집니다.

그냥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시간 속으로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가오시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경이를 만나게 되고, 놀라운 기적과 특별한 사건들이 하나님의 스토리 안으로 들어가고, 그것이 우리의 삶에 간증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까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 문을 노크하십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마음 문을 열지 않습니다.
나에게 다가오시고, 나와 마주 앉기 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면, 시간은 흘러가버리고 맙니다.

40년 광야의 삶에 종지부를 찍어버릴 수 있는, 80년의 세월이 한 줌의 재로 사라져버릴 수밖에 없는 시점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인생에 위대한 반전을 일으키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과 마주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임재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디로 데려가시는가에 대해 온전히 반응하고 순종하면, 색다른 인생이 펼쳐질 수 있습니다.

후회로 가득 찬 과거형의 인생이 아니라, 영원한 현재이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현재이십니다.
영원히 현재이신 하나님을 만나면, 후회로 점철된 인생이 아니라,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새로워집니다.

하나님을 갈망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가까이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열어놓고,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시기 바랍니다. 가까이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마주 대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밋밋하지 않습니다. 강력합니다.
오순절에 불처럼 바람처럼 임하셨던 성령의 충만함이 사도들의 삶을 바꾸어놓았던 것처럼, 역사를 새롭게 썼던 것처럼,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적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과거에 빠져서 과거에 묻혀 살아가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반복된 삶을 살아가는 우리를 이끌어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를 사용하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불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면, 우리는 불이 됩니다. 사그라들지 않는 불꽃처럼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에너지가 우리 속에 임합니다. 하나님의 에너지는 소멸되지 않습니다. 충만한 에너지입니다. 하나님은 불꽃 가운데 계십니다.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매우 가까이 다가오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다가오시면, 우리의 인생은 달라집니다. 파묻히거나 사그라들지 않습니다.

불은 하나님의 영광의 실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끊임없이 충분히 드러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때, 끊임없이 영광을 드러내는 복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불은 능력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어떤 시련과 환난도 이겨내게 하시는, 하나님의 불이 우리 가운데 임하심으로 사건이 일어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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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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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철야예배] 행동보다 기다림이 먼저다 Friday Night Sermon

제목 / 행동보다 기다림이 먼저다
본문 / 시편 62:1~12

 

1.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2.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3.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이 사람을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공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4. 그들이 그를 그의 높은 자리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 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 (셀라)
5.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6.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7.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8.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9.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
10. 포악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
11.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12. 주여 인자함은 주께 속하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입니까? 어려운 것 중에 가장 어려운 것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것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다급한 상황에 코앞에 닥치면 기다리기 어렵습니다. 그때의 기다림은 죽음을 의미할 수도 있고, 실패, 파산일 수도 있고, 우리의 삶을 망가지게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더 참을 수 없을 것처럼 압박감이 밀려오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습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실패하는 이유는 기다리는 것에서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기다림의 끝에 있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지 못하고, 조기(早期)에 무너져버립니다.

본문은 다윗이 인생의 역경 가운데서 절박한 상황 속에서 기록한 시입니다. 사람들의 추측에 의하면,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에 이 시를 기록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죽음을 피해 다니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 기록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아들 압살롬의 반역에 의해 죽음의 위기를 느꼈던 때에 이 시를 기록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습니다.
다윗의 인생 가운데 어려운 순간이 많았지만,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 죽음이 몰아닥쳐 왕권과는 멀어져가던 때와 왕이 되었음에도 아들의 반역으로 인해 쫓겨 다니던 이때가 가장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다윗은 인생의 혹독한 시기를 보내며 이 시를 기록했습니다.

본문 1절에 보면, 다윗은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바란다는 말에는 기다린다(wait)는 의미가 있습니다.
신앙은 기다림입니다. 믿음은 기다림을 통해 단련되고, 기다림을 통해 증명됩니다. 믿음이 있다면 기다립니다. 기다림을 통해 믿음이 정금(正金) 같이 다듬어집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기다림을 통해 믿음을 입증합니다. 노아는 120년을 기다렸습니다. 굉장한 시간 동안 기다렸습니다. 모세는 40년을 기다렸습니다. 아브라함은 25년을 기다렸습니다. 요셉은 17년을 기다렸습니다.
다윗도 왕이 되기까지 계속 도망자로 살았습니다. 그는 지겹도록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어려움이 있을 때, 어려움이 언제 끝날 것인지를 기다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신자들은 기다림을 통해 훈련을 받습니다. 시련을 통과하게 됩니다.

그런데 기다리는 동안에는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본문 1절에 보면, 다윗은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라고 기록했습니다. 기다리는 사람은 잠잠히 기다려야 합니다.
본문에서 다윗은 어떤 상황 속에 있습니까? 본문 3절에 보면,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이 사람을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공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입을 열지 말라는 것입니다. 잠잠히 있는 것은 기다리는 자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왜 입을 열면 안 됩니까? 입을 열면, 원수들이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일제히 공격합니다. 본문 3~4절에 보면,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이 사람을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공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그들이 그를 그의 높은 자리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 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악인들은 다윗을 흔들려고 입을 엽니다. 독설(毒舌)을 퍼붓습니다. 겉으로는 축복을 말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저주를 퍼붓고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에 가장 힘든 것은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악담을 듣는 것입니다. 축복인지 저주인지 헷갈립니다. 좋은 말인 것 같은데, 속을 파고듭니다.
욥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 주변 사람들이 그에게 좋은 말을 해줬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쓴 소리였습니다.
사람들이 쏟아내는 말에 귀 기울이면 정신없습니다. 내가 힘들 때에 주변 사람들의 입방아가 오히려 더 힘들게 합니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기다리다 보면, 스스로 자신을 변호하고 싶은 유혹이 생깁니다. 자신이 기다리는 이유를 설명하고 싶습니다. 자신이 바보가 아님을 말하고 싶습니다.
어려움이 많아지면, 사람들은 할 말이 많아집니다. 왜 자신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어려움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말하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말하면 기다리는 것에서 실패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더 큰 부끄러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설명해도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습니다. 나를 온전히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주변의 사람들은 무기력하기 때문에 기다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기다리는 것을 쓸데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문제가 있을 때에 기도합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것을 사람들은 무기력한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실패자로 여깁니다.

본문 1절에 보면, 다윗은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냥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잠잠히 기다려야 합니다. 침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는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에는 우리도 침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리는 사람은 침묵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떠들어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해도 침묵해야 합니다.

어려운 순간이 찾아왔을 때에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네가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 있다면, 무엇인가 해야 한다. 왜 기다리고 있냐, 뭐하는 거냐.”라고 다그칩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무기력하고 게을러 보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없습니다.

본문 9절에 보면, 다윗은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사람들을 의지할 필요도 없으니 사람들을 신경 쓰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의 입방아도 끝나는 날이 옵니다.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말을 귀담아 듣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넋을 놓고 막연히 있는 무기력한 상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기다리는 것에는 고도(高度)의 영적 집중력이 필요합니다.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시켜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영적 집중력을 말합니다.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것을 말합니다.

삶 속에서 이슈(issue)는 끝없이 일어납니다. 세상적으로도 그렇고, 개인의 삶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시선을 빼앗아가는 것이 매일매일 수없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시선을 고정하는 것은 매우 힘듭니다. 전쟁과 같습니다.

오늘 하루에도 수많은 일들이 생겼습니다. 우리의 삶에 사고가 끝없이 터지고, 우리의 시선을 빼앗아갑니다.
은혜 받았을 때에는 좋습니다. 그런데 세상으로 나아가면, 여러 가지 문제들이 우리의 시선을 빼앗아갑니다. 마치 그 문제밖에 없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 사건이 삶에서 중심부를 차지해버립니다. 그래서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 두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영적 집중력을 테스트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나만 바라볼 수 있겠니? 나만 바라보고, 나만 기다릴 수 있겠니?”라고 물으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시선을 빼앗기지 않고, 우리가 만난 문제보다 더 크신 하나님께 고정할 수 있겠는지 하나님께서는 물으십니다.

신앙의 여정(旅程)에서 실패한 순간을 더듬어보세요. 하나님만을 기다리는 것에 실패했을 때, 우리의 인생은 무너집니다.
문제 때문에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고정시켰던 시선을 문제 때문에 놓칠 때에 삶이 무너집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기다리다가 문제가 인생 가운데 크게 찾아와서 모든 것을 포기해버렸기 때문입니다. 회오리바람이 부니까 정신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선을 놓치면, 우리의 삶은 요동칩니다. 세상이 요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에 고개를 돌리게 하는 유혹이 매우 많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수많은 방법을 찾습니다. 묘수(妙手)를 찾아다닙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 외에 많은 길이 우리 앞에 펼쳐져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우리가 하나님만을 바란다는 것은 다른 많은 가능성과 기회를 포기한다는 의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는 것에서 실패합니다. 중도(中途)에서 포기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길을 걸어갑니다. 그런데 자기의 길을 걸어가다 보면, 길을 잃어버립니다.
다윗은 광야 속에서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했습니다. 이것이 그에게 가장 큰 과제였습니다.

기다리는 과정에서 힘든 것은 기다리고 있는데 상황이 더욱 악화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기다리고 바라고 있는데, 상황은 더 악해집니다.
상황이 좋아지면 좋겠는데, 상황이 악해질 때, 불안함을 느낍니다. 그때 자신이 무엇인가 하려고 액션(action)을 취합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수많은 고비를 넘어야 합니다. 죄악의 고비를 수없이 통과해야 합니다.
최악의 상황으로 내몰리면서 막바지를 통과해야 합니다. 도무지 출구가 보이지 않는 듯한 막바지를 통과해야 합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시선을 놓치지 않고, 하나님을 바랄 때, 승리하게 됩니다.

기다리다가 지친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납니다. 흩어집니다. 흩어지고 떠나고 난 후에 마지막으로 남은 자들과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고비를 넘으면서도 마지막까지 시선을 놓치지 않고,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믿고 기다린 사람을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기다린 자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하나님을 바라고 기다린 자들을 결코 무시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눈을 고정하고 기다린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결코 거절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기다리는 자들을 위해 일하십니다.

이것이 다윗의 스토리(story)입니다. 다윗이 기름 부으심을 받고 왕이 되는 그 날까지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선을 놓칠 만한 사건들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그의 시선에서 하나님이 사라질 것 같았습니다.
이것이 끝이구나, 이것이 마지막이구나, 이제 벼랑 끝이구나, 이제 죽음이구나라고 생각될 만한 자신을 죽일 듯한 어마어마한 문제들이 그에게 닥칠 때, 그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선을 놓칠 뻔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시켰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다릴 때, 사람들은 궁금해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기다림에 반응하실까? 자칫하면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 수치를 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들을 향해 사람들은 욕할 거리를 찾고 있습니다. “네가 하나님을 기다렸는데,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 오히려 네 삶은 힘들어지지 않았느냐?”라고 공격하려고 합니다.

시편 69편 6절에 보면, “주 만군의 여호와여 주를 바라는 자들이 나를 인하여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를 찾는 자가 나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기다리고 찾는 자들이 수치를 당하거나 욕을 당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어렵고 힘든 순간에 기다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대적들이 둘러싸고 있을 때에 가만히 있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우리에게 신앙은 기다림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기다림은 비활동적인 것입니다. 활동적인 것이 아닙니다. 기다림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활동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것입니다.
오늘날은 활동적인 사람을 좋아합니다. 활동적인 사람이 인정 받습니다. 활발하게 움직이고,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을 유능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너의 실력을 입증해봐”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광야에서 금식하신 후에 약해지신 주님께 사탄은 “너의 실력을 보여 봐”라고 말했습니다. 문제를 빨리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문화는 우리를 다그칩니다. 우리를 정신없이 몰아갑니다. 능력을 드러내라고 합니다.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해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가만히 있지 못하게 합니다. 문제를 만났는데, 왜 가만히 있느냐. 왜 기도만 하고 있냐고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무능한 사람으로 취급합니다.
무엇인가 해보라고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굶어죽는다고 합니다. 가만히 있지 말고 움직이라고 활동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귀가 아프도록 듣는 이야기입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압력을 넣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무엇인가 노력하라고 우리를 부추깁니다. 기도하지 않고, 충동적으로 살라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충동질에 막 몰려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신없이 무언가를 합니다. 마치 지금 하지 않으면 망할 것처럼, 마귀는 우리를 몰아넣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새도 없습니다.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들은 움직여야 할 때와 기다려야 할 때를 구분할 줄 압니다. 액션을 취해야 할 때와 기다려야 할 때를 구분할 줄 아는 것이 영적 센스(sense)입니다.
잠잠히 기다리라는 것은 해야 할 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신자가 세상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과 하나님께서 하셔야 하는 일을 구분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있으면 안 됩니다.

학생이 시험공부를 하지 않고 교회에 와서 “하나님만 잠잠히 바람이여, 내일 시험 문제의 답은 하나님께서 알려주실 줄 믿습니다.”라고 기도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 살 것인지 진로에 대해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에는 잠잠히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 저의 미래를 주님께 맡깁니다. 무엇을 해야 할까요?”
공부는 내가 해야 하는 것입니다. 길을 여시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시험 문제에 대한 답은 책에 있지만, 인생의 문제에 대한 답은 교과서에 있지 않습니다.
공부는 잘했어도 인생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인생에서 알 수 없는 어려움에 빠지면, 답이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풀 수 있는 문제보다 풀 수 없는 문제가 훨씬 많습니다.

다윗은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사울 왕이 그를 죽이려고 추격했습니다. 답이 없었습니다. 왕을 죽일 수도 없습니다. 도망갈 수밖에 없습니다.
언제 어떤 일이 닥칠지 알 수 없었습니다. 다윗 스스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아들이 반역하여 아버지의 권좌(權座)를 빼앗으려 했습니다.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일입니다.
교과서에 없는 문제입니다. 교실 안에서 출제되지 않는 유형의 문제가 세상 속에는 매우 많습니다.
다윗만 이런 문제를 경험한 것이 아닙니다. 예상하지 못한 난제(難題)들이 오늘도 끊임없이 밀고 들어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죽음의 위협이 수시로 닥칩니다.

세상이 강조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런 상황 속에서 무엇인가 해보라고 합니다. 인간의 노력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릅니다. 우리의 행동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시편 46편 10절에 보면,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신자가 경험해야 하는 매우 중요한 레슨(lesson)입니다.
이것보다 우선되는 것은 없습니다. 이것을 경험하지 못하고, 열심히 하는 것만 배운다면, 큰 낭패를 당하게 됩니다.
우리의 행동 이전에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내가 무엇인가 열심히 하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는가를 기다리고, 그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겉으로 보면, 인간의 노력과 재능으로 만든 세상이 대단해보입니다. 스티브 잡스(Steve Jobs)나 빌 게이츠(Bill Gates)가 만들어놓은 것은 세상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제가 전도사 시절에만 해도 설교를 준비할 때 원고를 종이에 손으로 썼습니다. 쓰다가 틀리면 찢어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써야 했습니다. 그런데 타자기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컴퓨터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태블릿PC를 보며 설교합니다.
과학 문명은 끝없이 발전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인공지능을 가진 로봇시대가 올 것입니다. 음식을 주문하면, 사람이 철가방을 들고 오는 것이 아니라, 로봇이 철가방을 들고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과학이 우리에게 주는 편리함과 신속함과 생산성은 놀랍습니다. 앞으로 로봇 산업이 대단할 것 같습니다. 이미 굉장히 많이 진화되었습니다. 앞으로 지능이 있는 로봇이 인간이 하던 일을 다 빼앗아갈 것입니다.

인간의 문명은 어마어마하게 진화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문명을 보세요. 인간이 열심을 다해 만들어놓은 것으로 인간이 만족해하고 행복해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절망합니다. 열심히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 열심히 해서 인간은 오히려 절망에 빠집니다.
인간 스스로 만들어낸 것은 한계를 만납니다. 인간이 가진 문명끼리 충돌을 일으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터집니다.

우리가 노력하여 얻은 것에 만족하는 순간, 곧 절망에 빠집니다. 한평생 심혈을 기울여 직장에서 높은 성과를 내며 최선을 다했는데, 은퇴한 이후에는 ‘이 일을 위해 내 인생을 바쳤는가.’하는 실망과 좌절에 빠집니다. 허무가 밀려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허무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잘 살았다고 생각하고, 세상에서는 성공적인 인생이라고 평가받은 사람들도 마지막에는 허무에 빠집니다. ‘내가 누구인가, 내가 어디에 있나, 내가 어디에서 왔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자신이 노력하여 얻은 성과를 아무도 쳐다보지 않습니다. 그토록 몸부림치며 업적을 쌓았는데, 아무도 보지 않습니다. 기억조차 하지 않습니다.
경쟁에서 지지 않으려고 죽을힘을 다해 노력했는데,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얼마나 허망하겠습니까.

그럴수록 인간의 능력과 활동이 더욱 강조됩니다. 조급해집니다. 문제를 빨리 해결하려고 애씁니다.
그런데 오히려 더 큰 어려움에 빠집니다. 온 세상이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다가 오히려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지혜와 능력을 강조할수록 오히려 더 큰 미궁(迷宮)에 빠집니다. 하나님을 기다리기보다 사람의 도움을 얻으려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다윗의 태도는 분명합니다. 그는 자신의 액션과 자기 방법, 자기 지혜를 내려놓고, 하나님을 기다립니다.
왜 기다려야 합니까?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다리는 것은 헛된 것이 아닙니다.

하박국 2장 3절에 보면,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고 했습니다. 상반(相反)된 말씀이 나옵니다.
사람의 편에서 보면, 지체(遲滯)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편에서는 지체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정확한 때에 역사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편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우리가 아무리 기다려도 늦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시간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때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기다리는 시간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시간에 강력하게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작품을 만드시는 시간입니다. 다윗을 다윗답게 빚어내시는 시간입니다. 우리의 활동보다 하나님의 활동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다립니다.

우리가 신뢰할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 훨씬 더 크고 놀랍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1년, 10년, 20년, 한평생 쏟아 부은 것보다 하나님의 1분이 더 낫습니다. 우리는 한평생 모든 것을 쏟아 부었지만, 오류가 있습니다. 불완전합니다. 허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 순간 역사하셔도 완전하십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기다리면서 초조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이 하는 일과 비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기다려야 하는 이유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현실은 갈수록 어려워졌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졌습니다.
단순히 약속만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랫동안의 기다림을 통해 마침내 믿음의 조상으로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우뚝 세워주신 것입니다.

후손을 얻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을 통해 아브라함이 믿음의 족장으로 태어난 것이 중요합니다.
기다림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아브라함 되게 하셨습니다. 다윗을 다윗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다림을 통해 역사하신다는 것을 경험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레슨입니다. 기다리는 것이 훈련된 사람은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라이센스(licence)를 가졌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하나님보다 앞서지 않는 태도를 견지(堅持)해야 합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하든지 먼저 액션을 취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실 것을 기대하며 잠잠히 기다릴 줄 아는 것, 그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본문에서 다윗의 고백을 살펴봅시다. 다윗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잘 알고 있습니다. 본문 5절에 보면,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본문 7절에 보면,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핵심은 우리가 행동하기 이전에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비활동적인 것입니다. 내가 일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기다리는 것을 먼저 익혀야 합니다. 내가 열심히 하기에 앞서 하나님의 열심을 경험해야 합니다.
급하게 서두른다고 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이 급하다 해도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먼저 일을 시작하여 다 망쳐놓은 후에 하나님께 책임지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며 기다리지 못하고, 성급하게 내 뜻대로 다 망가뜨려놓습니다.
기다리지 못할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하나님의 역사를 망쳐놓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 가운데서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잠잠히 기다려보셨습니까. 남편에 대해, 아내에 대해, 자녀에 대해, 주변의 환경에 대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기다려보셨습니까.
우리는 기다리기 전에 답답한 현실 앞에 '문제를 확실히 고쳐놓고야 말겠어.'라고 생각하며 먼저 칼을 들어버립니다.

아이를 부모의 마음대로 바꿔놓을 수 있습니까? 아이가 사춘기만 되어도 부모가 아이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남편을 아내의 마음대로 바꿔놓을 수 있습니까? 아내의 마음대로 남편을 바꿀 수 없습니다. 오히려 더 엉망으로 만들어놓고 난 후에야 손을 듭니다.

다윗은 기다릴 줄 알았습니다. 다윗은 지독스럽게 기다린 사람입니다.
그는 어두운 터널의 끝이 어디인지 몰랐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황무지로, 굴로 계속해서 옮겨 다녔습니다.
상황은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블레셋까지 도망가서 미친 체 하고 살았습니다. 아들 압살롬이 그를 반역할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신앙은 기다림입니다.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행 1:4).
120명의 무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었습니다. 그들은 기다려야 하는 이유를 확실히 알았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활동과 노력과 재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들은 기다릴 줄 알았습니다.

본문에서 다윗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본문 1절에 보면,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순절에 120명의 사람들이 기다린 것은 무엇일까요? 그들은 성령을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다른 것을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성령 하나님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1절에 보면, 다윗은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라고 고백했습니다. 다윗은 더 나은 상황을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기다렸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문제를 당하면, 그것이 해결되기를 원합니다. 문제가 빨리 해결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형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문제가 해결되는 것보다 하나님을 기다렸습니다.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안에 모든 것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삶은 환경이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입니다. 아무리 늦어도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면, 늦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이 산 것은 허송세월한 것이고, 후회만 남습니다.

하나님 안에 들어가면, 그곳에 인생의 해답이 다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다윗의 고백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본문 2절에 보면,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시편에서 여러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본문 5~7절에 보면,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몰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그의 시선이 고정되어있습니다. 그 안에서 모든 것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어려운 시기를 광야에서 보냈습니다. 광야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곳입니다. 위험한 곳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광야에서 반석과 힘과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세상은 요동칩니다. 불완전합니다. 갈수록 더 심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항상 흔들립니다. 요동치지 않는 순간은 한 순간도 없습니다.
안전을 위해 담을 치지만 무너져버립니다. 높은 울타리도 흔들립니다. 그렇게 되면 공격자들이 침입해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우리에게 답을 말해줍니다. 답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문제에 휩싸이지 마세요. 하나님께 사로잡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압도당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문제를 풀려고 하면, 오히려 더 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본문 11절에 보면,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능력은 위기의 순간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문제가 꼬이고 복잡할 때, 내가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기다려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셔야 합니다. 우리의 실적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실적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쌓아도, 우리가 쌓는 것은 쌓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쌓으시는 것은 쌓입니다.

우리의 능력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경제력은 우리의 힘이 아닙니다. 인간의 재능과 실력은 우리가 믿을 만한 것이 되지 않습니다.
세상이 흔들릴수록 뚜렷한 음성은 하나입니다. 하나님만 우리의 의지가 되시고, 우리가 믿을 만한 분이십니다.

삶의 문제가 당장 해결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여러분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마세요.
우리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다 보면, 하나님의 역사를 망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잘 만들어 가시려는데, 괜히 끼어들어 망가뜨리게 됩니다.

여러분의 노력을 내려놓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먼저 경험해야 합니다. 아무리 오래 기다린다 해도, 기다리는 것은 마이너스(minus)가 아닙니다. 믿음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이고, 인생의 노정(路程)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끊임없이 들리는, 세상의 소리가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가만히 있지 말라고 합니다. 무언가 하라고 합니다. 움직이라고 합니다.
요란한 소리에 귀 기울이지 마세요. 먼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경험하기 위해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리는 가운데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경험하고 나면, 우리에게 담대함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길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됩니다.

기분이 나아지는 법을 찾지 마세요. 상황이 완화되는 길을 찾지 마세요. 오직 하나님만 찾으세요.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시키세요.
먼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경험하면, 삶의 어떤 순간에도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상황보다 크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기다리는 것을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이 있는 만큼, 기다릴 수 있습니다. 믿음은 결코 헛되지 않고,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합니다.

삶 속에서 어려운 문제를 당한 분이 계십니까? 스스로 문제를 풀려고 하지 마세요. 기다리세요.
상황이 악화되더라도 기다리세요. 결코 마이너스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바라고 기다리는 것은 결코 후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경험하기 위해 고비를 넘으면, 상황을 넘어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시편 46편 10절에 보면,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하고 나면, 우리의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우리의 삶에 어떤 문제가 찾아와도,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으로부터 놓치지 않고,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문제가 터지면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시켜야 합니다. 어떤 문제가 터져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문제보다 훨씬 더 크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문제에 빠지지 않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길이 없습니까? 그때야말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chance)입니다. 다른 길을 찾지 마세요.
문제를 두려워하지 마세요. 문제 때문에 기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경험할 수 있는, 기막힌 순간입니다. 기다리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언제까지 하나님을 기다리는가를 보십니다. 언제까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가를 보십니다.

본문 시편 62편에 보면, ‘그만(He alone)’라는 문구(文句)가 반복해서 나옵니다. 그 외에 다른 길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만을 철저히 신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어려움이 와도 기도의 줄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기도의 줄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유일한 줄입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기도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기도의 줄을 붙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다가 그만둬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도하다가 그만두는 것처럼 억울한 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줄은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기도의 자리에 앉아야 합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기도의 자리에 앉아있어야 합니다.
하나님만을 바라고, 하나님만을 기다리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외면하지 않으시고, 무시하지 않으시고,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십니다.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드러나게 됩니다.

저는 제 삶에서 그런 것을 경험했습니다. 호주에 가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 그런 것을 경험했습니다.
길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왜 여기에 왔지’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당황스러웠습니다. 모든 것이 막힌 것 같았습니다.
제가 기대한 것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졌습니다. 정말 암울했습니다. 어떤 것도 의지할 수 없었습니다. 막다른 길에 놓인 것 같았습니다. 비상구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하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주머니에 돈도 없었습니다. 이역만리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액션을 취하고 싶은 욕망이 일어났습니다. 세상의 많은 줄을 잡고 싶었습니다. 사람의 방법을 찾고 싶었습니다. 묘수를 찾고 싶었습니다.
그때 기다려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기다려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끝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방법을 찾고 싶은 욕망이 목까지 차올랐을 것입니다. 사무엘상 24장에 보면, 사울이 굴에 들어왔을 때,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어려움을 더 이상 겪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방법대로 하면, 문제가 깨끗하게 해결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다렸습니다.

실력이 있고, 재주가 많아서 우리의 열심을 펼쳐나가는 것을 먼저 배웠습니다. 그래서 많은 실패와 좌절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경험해볼 기회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리고 끊임없는 딜레마(dilemma)에 빠집니다.
이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인생의 막다른 길에서 액션을 취하지 않고,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다림의 끝에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볼 때, “하나님, 당신은 위대하십니다. 놀라운 분이십니다.”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될 것입니다. 그 후로는 우리에게 찾아오는 모든 문제들 앞에 두려움 없이 하나님만을 기다릴 수 있게 됩니다.

문제가 오면,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해야 합니다.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라고, 우리 스스로 방법을 찾으라고, 우리의 실력을 보이라고 우리를 충동합니다. 사탄이 끊임없이 활동하는 이 시대 속에서 믿음은 비활동적인 것입니다.

힘든 일을 겪고 있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때야말로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먼저 경험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날아오르게 될 것입니다. 문제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액션이 발달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터지면, 자기가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뒤로 돌려놓습니다.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래서 더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여러분의 실력으로 살려는 행위를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경험할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믿음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 단계까지 이르지 못하면, 우리는 끊임없이 요동치는 세상 속에서 자기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발버둥치며 살아가는 삶을 반복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은 능력 있으십니다. 모든 소망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삶의 완성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알파와 오메가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다른 것을 찾지 마세요. 움직이지 마십시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바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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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철야예배] 아낄 것을 아끼지 않을 때에 일어나는 반전
Friday Night Sermon

제목 / 아낄 것을 아끼지 않을 때에 일어나는 반전
본문 / 요한복음 6:1~13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2.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3.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4.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8.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12.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본문에 나오는 오병이어 사건은 아주 유명합니다. 소년이 바친 오병이어로 남자만 5천 명이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은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 속에는 다양하고 깊은 메시지가 많이 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누군가가 바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기적을 행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소년이 가져온 오병이어를 가지고 축사(祝謝)하신 후에 그것을 나누어주셨습니다.
여기서 오병이어가 참 중요합니다. 오병이어는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데 있어서 마중물 역할을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얼마든지 기적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십니다. 성자 예수님도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자가 되신다는 것은 무(無)에서 유(有)로 만드실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안드레가 소년의 오병이어를 가지고 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가지시고, 축사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아시고, 제자들을 테스트하시기 위해 누군가가 가지고 오기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무엇인가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가지고 일하십니다.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소년이 가지고 온 오병이어를 가지고 기적을 베푸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참여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역사(役事)에 참여하는 기쁨을 누리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기적을 베푸신 사건은 유명합니다. 소년의 이름은 성경에 기록되어있지 않지만, 소년이 바친 오병이어는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는 재료가 되었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은 4복음서에 다 기록되어있습니다.
주님께서 기적을 행하셨지만, 소년의 오병이어가 부각되고 있습니다. 소년의 오병이어는 기적을 일으키는 데 있어서 원인을 제공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것이 아니고, 이미 있는 것을 가지고 일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도움이 필요 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존(自存)하시는 분이십니다. 홀로 스스로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도와드리는 것이 하나님께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하고 싶어 하시는 일들을 마음껏 얼마든지 무한하게 하실 수 있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돕지 않아도, 하나님의 일에는 조금도 차질이 생기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충해드려야 하나님의 일이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돕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전혀 불편하지 않으십니다. 아쉬움이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누군가의 도움이 전혀 필요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소년이 가지고 온 오병이어를 통해 역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어린 아이의 도시락이 탐나셔서 그렇게 하셨을까요? 아이의 도시락에 눈독을 들이신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기를 원하십니다.

본문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벳새다 들판에 5천 명의 남자가 앉아있습니다. 여자와 아이들까지 다 합하면, 2만 명가량 될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앉아있는 가운데, 기쁨이 가득한 얼굴을 가진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자신의 도시락을 내어놓은 소년입니다.
소년이 바친 오병이어를 예수님께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배불리 먹고도 남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소년이 이것을 직접 눈으로 보며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에, 하나님의 역사에, 하나님의 기적으로 불러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러주시고, 하나님의 역사에 우리를 끼워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상(床)을 차려놓으시고, 우리에게 그 위에 젓가락만 올려놓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어마어마한 잔치에 젓가락만 올려놓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돕든지 돕지 않든지 하나님께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얼마든지 마음껏 무한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오병이어를 가지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을 때, 제자들도 신났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이후, 가장 신나는 날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기고만장했을 것입니다. 흥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병이어를 바친 어린 아이가 가장 기뻤을 것입니다. 자신이 드린 작은 도시락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먹는 것을 보며 기뻐했을 어린 아이의 모습을 상상해보세요.

주님께서는 그냥 기적을 행하실 수 있으셨지만, 소년의 오병이어를 사용하셨습니다. 도시락의 위대한 변신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일에 끌어들이시는 이유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들판, 어두운 곳, 빈들, 아무것도 없는 곳, 사람들이 허기진 절박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일을 행하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 아이의 오병이어를 사용하셔서 일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참여의 기쁨을 누리게 하십니다. 오병이어, 그것 자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한 아이가 먹어버렸다면,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소년이 그것을 가져왔을 때,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을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 아이의 한 끼 분량의 도시락으로 많은 어른들을 먹이고도 남는 역사를 일으키셨습니다.
어린 아이의 작은 도시락으로 많은 어른들을 먹이고도 남는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은 일종의 반전(反轉)입니다. 작은 도시락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끼어들 때, 우리는 초라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을 통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의 일상과 하나님의 역사가 만나는 지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어린 아이와 주님이 만났을 때, 땅과 하늘이 만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작은 도시락이지만, 주님의 손에 드려지니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거대한 역사를 일으키시는 타이밍(timing)과 우리의 작은 행동이 맞아떨어지면,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많은 군중 속에서 오병이어를 예수님께 내어드리는 어린 아이의 행동은 눈에 띄지 않습니다. 감추어질 수 있는 작은 행동입니다.
많은 군중들이 운집해있는 가운데, 아이가 자신의 도시락을 가져오는 행위는 묻힐 수도 있습니다. 눈에 띌 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거대한 역사를 일으킬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거대한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충격적이고 감동적이고 경이로운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들판에 있는 사람이 모두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러고도 남았습니다.

누가 오병이어를 바쳤습니까? 어린 아이가 오병이어를 내어놓았습니다. 많은 어른들은 뭐했을까요? 먹을 것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어린 아이 뿐이었을까요?
성경은 어린 아이의 출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오병이어를 가지고 왔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생각이 단순합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생각이 복잡합니다. 본문에 보면, 안드레와 빌립, 다른 제자들은 생각이 복잡했습니다. 그곳에 있던 다른 어른들도 빌립과 안드레처럼 생각이 복잡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 외에도 음식을 가지고 온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벳새다 들판은 외딴 곳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간식을 챙겨왔을 것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먹을 것을 챙겨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생각이 복잡했습니다. ‘나만 먹어도 모자라는데, 각자 알아서 하겠지. 이런 때에는 가만히 있는 것이 상책이야.’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는 생각이 단순합니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이 좋지만, 어떤 행동을 해야 할 때에는, 무엇인가 결정해야 할 때에는 생각이 단순해야 합니다.
역사가 일어날 때에는 행동합니다. 결정하고 행동하기 전에는 생각이 천 갈래, 만 갈래로 나뉩니다. 그러나 결정하는 순간에는 생각이 단순해집니다.

어른들은 생각이 많고 복잡하여 생각이 정리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복잡하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단순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습니다.
일을 해내는 사람들은 단순합니다. 고수(高手)는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만듭니다. 하수(下手)는 단순한 것을 복잡하게 만듭니다. 아이들은 생각이 단순합니다.

문제가 있을 때,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너무 오랫동안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행동으로 빨리 옮기는 사람들은 생각이 단순합니다. 아이들은 복잡하게 생각할 줄 모릅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경우의 수를 생각하고, 여러 가지를 복잡하게 생각합니다.
어른들은 얼굴만 보아서는 속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속이 환하게 보입니다. 단순하기 때문입니다. 수를 감추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의 상징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오병이어 이야기에 아이가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벳새다 들판에 어른들이 수없이 많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이를 사용하셨습니다. 벳새다 들판에 남자 어른만 5천 명이 있었습니다. 어른들이 가지고 있는 보리떡은 아주 큰 것이었을 것입니다.
한글 성경에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라고 기록되어있지만, 원어 성경에 보면, ‘아주 작은 보리떡 다섯 개와 아주 작은 물고기 두 마리’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멸치 정도 되는 물고기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외형이나 크기, 수와 상관없습니다. 똑똑한 사람, 재력이 있는 사람, 말 잘하는 사람과 상관없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어린 아이를 통해 역사가 일어납니다.

왜 염려가 생깁니까?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일들이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도하면, 우리의 생각이 단순해집니다.
기도하고 난 후에도 머리가 계속 아프다면, 기도하지 않고 생각을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절에서는 기도시간에 기도하지 않고 딴 짓을 하면 죽창으로 맞습니다.

기도하기 전에는 머리가 복잡하고 아프다가도 기도한 후에는 머리가 맑아져야 합니다. 기도하기 전에는 머리가 복잡했는데, 기도하고 나면 개운해져야 합니다.
먹구름이 걷히고, 머릿속이 맑아집니다. 문제가 단순해졌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안고 씨름하다가 문제를 하나님께 맡겼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안고 있으면 복잡합니다. 그러나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면 간단합니다. 복잡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아이가 오병이어를 가지고 복잡하게 생각하거나 계산했다면, 그것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생각이 많습니다.
아이는 계산 없이 오병이어를 가지고 주님께 나아갔습니다. 자신은 오병이어를 가지고 있는데, 말씀을 가르치시는 주님께서 계시니까 오병이어를 가지고 주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오병이어를 가지고 주님께 나아간 것이 중요합니다. 아주 단순한 행위입니다. 그러나 삶의 핵심을 가르쳐줍니다.
나에게 있는 것이 얼마가 되든지,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그것이 무엇이든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주님과 연결시켜야 합니다.

기도는 우리의 문제를 주님께 넘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주님께 넘기시기 바랍니다.
내가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한 후에 그 문제를 다시 가져가십니까? 다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문제를 주님께 맡기면, 문제는 주님의 손에 있습니다. 이것을 행동으로 옮겨본 사람에게는 단순한 일이지만, 행동으로 옮겨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어려운 일입니다. 자기가 가진 문제를 주님께 옮기는 데 10~20년 걸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생각을 단순하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설득당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복잡한 생각들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께서 정리해주시는 답을 붙잡으면, 우리의 생각이 단순해집니다.

아이는 계산할 줄 몰랐습니다. 아이는 안드레처럼 ‘이것이 얼마나 도움이 되겠나’라고 생각하거나, 빌립처럼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할 것이다.’라고 산술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이에게는 그렇게 생각할 능력이 없습니다.
계산을 넘어선 곳에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계산하면 계산으로 끝납니다. 계산하지 않은 곳에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본문에 나오는 어린 아이처럼 단순하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복잡한 생각, 수많은 계산 등을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문제를 주님께 올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힘으로 풀 수 있는 문제라면, 여러분 스스로 해결하세요. 여러분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을 주님께 기도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할 수 없는 것 때문에 끙끙댈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께 올려놓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삶은 단순해지는 것입니다. 고민하고 염려하고 생각한다고 문제가 해결됩니까? 머리만 복잡해집니다.
둘째, 오병이어입니다.
단순히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아닙니다. ‘아주 작은 보리떡 다섯 개와 아주 작은 물고기 두 마리’입니다. 그래서 안드레는 예수님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원재료는 아주 미미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무시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것을 무시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작다고 해서 작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수량을 봅니다. 그러나 수량을 보아서는 안 됩니다. 어린 아이가 주님께 바친 오병이어는 어린 아이의 전부였습니다.

아이가 먹을 것을 내어놓은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것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아이는 배고픈 것을 참지 못합니다. 어른들은 배고파도 참습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굶더라도 아이들은 먹입니다.
아이들은 이기적입니다. 자기밖에 모릅니다. 어린 아이가 공동체를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아이들은 너무 배고프면 옆에 있는 아이의 것을 빼앗아먹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먹을 것이 풍성하지 않았습니다. 슈퍼마켓이나 편의점이 있던 시대가 아닙니다. 아주 작은 보리떡과 아주 작은 물고기는 그 시대가 빈곤했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한 끼 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시 배고픔을 느낍니다. 넉넉한 상황이라면, 남에게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교회 로비를 지나가다가 아이들이 무엇인가 먹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제가 다가가 “목사님 하나 줄래?”라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아이의 반응을 보면, 아이의 가정 배경을 알 수 있습니다. 선뜻 주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손을 뒤로 숨기는 아이도 있습니다.
선뜻 주는 아이의 손에는 하나가 더 있습니다. 풍족하기 때문에 선뜻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과자 한 봉지를 가지고 있으니, 하나 정도는 선뜻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지고 있는 것이 별로 없을 때에는 주면서도 고민합니다. 하나만 있을 때에는 줄 수 없습니다. 더구나 자신이 좋아하고, 맛있는 것은 더욱 줄 수 없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보릿고개가 있었습니다. 풍족하지 않은 시대였습니다. 먹을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저희 집에는 식구가 열다섯 명이었습니다. 저희 형제 6남매에 고모와 삼촌까지 같이 살았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께서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식사 시간이 되어 어머니께서 상을 차리시면, 전쟁이 벌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빨리 먹지 않으면,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생선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생선이 반찬으로 없는 날에는 밥을 먹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생선이 있어야 밥을 먹었습니다. 가난한 시절에 철없이 생선을 달라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제가 본문의 어린 아이였다면, 보리떡 다섯 개는 내어놓았겠지만, 물고기 두 마리는 끝까지 내어놓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생선을 어떻게 내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어렸을 때에는 가난했기 때문에, 사물을 보면, 먹을 수 있는 것인지 먹을 수 없는 것인지 두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산에 올라가 꽃을 따서 먹기도 하고, 나무뿌리를 먹기도 했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나누어먹는 것은 아이에게 어려운 일입니다. 게다가 배고프고, 가진 것이 하나밖에 없을 때에는 더더욱 어렵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아이는 자신이 가진 것의 전부를 내어놓았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허기진 배를 채울 유일한 음식이었고, 아이가 가진 전부였습니다. 이것을 작은 것이라고 치부할 수 있겠습니까. 아이에게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그것을 대단한 것으로 여기셨습니다. 주님은 수량을 보지 않으셨습니다. 아이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셨습니다. 아이가 그것을 가져오기까지 얼마나 망설였겠습니까.

아이가 오병이어를 예수님께 가져온 때는 이미 해가 저물었을 때였습니다. 사람들은 이미 허기진 상태였습니다.
아이는 허기진 상태에서 떡과 물고기를 예수님께 내어놓았습니다. 그것은 아이에게 있어서 전부였습니다. 아이의 엄마가 그 도시락을 얼마나 정성껏 싸주셨겠습니까.
아이들에게는 절제력이 없습니다. 먹는 것에 있어서 인내력이 없습니다. 먹고 싶은 것을 절제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아이는 자신이 가진 떡과 물고기를 예수님께 내어놓았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우리는 오병이어를 통해 기적이 일어난 것만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이에게 있어서 오병이어는 전부였습니다. 절제력이 없고, 이기심이 많은 아이의 관점에서 보면, 배고픈 상태에서 오병이어를 내어놓았다는 것은 설명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어른들도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자제력이 약하고, 먹는 것을 밝히는 아이가 자신에게 오직 하나밖에 없는 도시락을 주님께 가져왔다는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아이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모두 예수님께 가져왔습니다. 그가 가진 전부를 가져왔습니다.

아이가 자신이 가진 전부를 가져왔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이라면 조금은 남기고 가져올 것 같은데, 본문에 나오는 아이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가져왔습니다.
아이가 오병이어를 가지고 오면서 아까워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아이는 자신이 가진 전부를 아끼지 않고 내어놓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소년의 행위를 봅니다.

움켜쥐고 싶어 하는 욕망이 사람에게 있습니다. 하나라도 더 가지려고 몸부림칩니다. 많이 가졌음에도 더 가지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남의 것들을 빼앗으며 살아갑니다. 그런 점에서 생각해보면, 소년이 자기가 가진 도시락을 아끼지 않고 내어놓았다는 것은 특별한 일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소년이 자기가 가진 것을 아끼지 않고 내어놓은 것을 주목해서 보아야 합니다. 소년은 자신의 배를 채울 수 있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고 내어놓았습니다. 이것은 특별한 행위입니다.
아이가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그래서 오병이어의 사건은 4복음서 모두에 기록될 만한 특종거리입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붙잡아야 할 핵심적인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오병이어의 사건은 단순히 기적이 일어난 사건이 아니고,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의 사건을 통해 단지 군중들이 배불리 먹었다는 것을 말씀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려 하십니다.

요한복음 6장의 뒷부분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떡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떡을 먹고도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6:49~51).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이가 내어놓은 보리떡 다섯 개를 놓고 축사하시고, 군중들을 먹이셨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소년이 바친 보리떡은 곧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제자들이 떡을 나누어주는 행위는 주님의 살이 찢어지는 것을 상징합니다.

아이가 떡과 생선을 아끼지 않고 내어놓은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내어주신 것과 오버랩(overlap)됩니다.
아이가 아끼지 않고 내어놓은 떡으로 군중들이 먹고 배부름을 경험한 것 같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심으로 인류가 구원 받았습니다.

아이가 자기에게 가장 귀중한 것을 내어놓은 행위를 4복음서에서 대서특필(大書特筆)한 이유는 그 속에 구원사적인 의미가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놓으심으로 우리가 구원 받았습니다. 우리의 근원적인 목마름과 배고픔이 사라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만찬을 행하실 때, 떡을 떼시며 제자들에게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6:26). 주님을 먹음으로 우리의 영혼이 배부름을 얻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소년이 자신의 도시락을 아낌없이 내어놓은 사건을 통하여,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놓으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것을 아끼지 않고 내어놓을 때, 하나님의 아낌없는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기심을 버려야 합니다. 소년은 아낌없이 내어놓으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아낌없음과 하나님의 아낌없음이 만날 때, 상상을 초월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본문의 사건을 통하여 우리는 흘러넘치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부요하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소년이 가지고 있던 한 끼 분량의 도시락을 통해 5천 명, 아니 2만 명이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크게 축복하시는 것을 30배, 60배, 100배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본문의 오병이어 사건은 100배가 아닙니다. 아이의 한 끼 도시락을 통해 2만 명이 먹고도 남았으니 2만 배입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수입니다. 흘러넘치고도 남도록 부어주시는 은혜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은혜는 수치(數値)로 측량할 수 없습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어떤 것도 아끼지 않으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32절에 보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이것은 복음입니다. 아마도 바울은 이 말씀을 기록하면서 흥분했을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19절에 보면,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것은 바울 자신이 경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상상을 초월할 만큼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면서 당당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자존감의 근거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내어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귀중한 아들 예수님을 우리를 위해 내어주셨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을 확인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나라에는 모든 것이 흘러넘칩니다. 부족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살아간다면, 바닥을 긁으며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계산하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머리를 굴리며 살지 마세요. 하나님께서는 마구 부어주시는데, 따지고 계산하며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본문에 보면, 자신의 도시락을 아낌없이 내어놓은 아이의 행위가 클로즈업(closeup)되고 있습니다. 아이는 아끼거나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아끼려고 하십니까? 무엇을 움켜쥐고 계십니까? 여러분 자신이나 주변 사람들은 본문의 안드레처럼 “그것을 가지고 무엇 하려고?”라고 이야기할지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우리의 삶을 드리려고 할 때, 주변 사람들이 우리에게 불신앙적인 말을 쏟아 부을 수 있습니다. 그 말에 귀 기울이지 마세요.

우리가 떡을 쥐고 있으면, 그것으로 끝납니다. 그것을 주님의 손에 올려드려야 수많은 역사가 일어납니다. “주님, 여기 있습니다.”라고 주님의 손에 올려놓아야 합니다.
오병이어가 여러분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것 같고, 재주도 없어도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마세요.

자신의 것을 주님의 손에 올려놓아야 합니다. 자신의 가장 귀중한 것을 주님의 손에 올려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직업일 수도 있고, 돈일 수도 있고, 재능일 수도 있고, 젊음일 수도 있고, 여러분의 삶 전체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끼는 것, 그것이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주님 앞에 올려놓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쥐고 있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을 주님의 손에 올려놓으면, 위대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아낌없음과 하나님의 아낌없음이 만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 5천 명 중의 한 사람, 어린 아이, 어린 아이의 작은 도시락을 가지고 허기진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시고도 남게 하셨습니다.
본문은 어린 아이의 작은 도시락이 하나님의 손에 닿았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배고픈 현실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어린 아이를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내셨습니다.

아낌없이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무궁무진한 축복을 우리에게 부어주시기 원하십니다. 30배, 60배, 100배가 아닙니다. 천 배, 만 배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구원도 우리가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얻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경이(驚異)로운 일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일을 행하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드러내시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아끼는 것을 아끼지 않고 내어놓을 때,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반전이 일어나는 역사를 우리에게 보여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세요. 무엇인가 움켜쥐고 있으면, 움켜쥐고 있는 것으로 끝나버립니다. 우리의 삶을 주님 앞에 내어놓을 때, 주님의 위대한 손길 속에서 무한대로 확장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주님의 손에 올려질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찾고 계십니다. 주님은 그것을 통해 주님의 일을 이루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작은 것을 하나님의 위대한 나라의 도구로 사용하기 원하십니다.

여러분 중에 움켜쥐고 있거나 아끼는 것이 있다면, 주님께 올려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아끼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어린 아이가 자신의 가장 귀중한 것을 아끼지 않았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기적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요하신 분이십니다. 무한하신 분이십니다. 흘러넘치시는 분이십니다. 제 삶 속에서 경험한 하나님은 흘러넘치시는 분이십니다. 부요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까다로운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넉넉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0:10).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십니다(엡 3:20).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헤아리는 것 이상으로 흔들어 넘치도록 우리에게 안겨주십니다. 하나님의 부요함이 여러분의 삶에 흘러넘치시기를 바랍니다.

아이의 작은 도시락을 통해 수많은 군중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는 엄청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광야와 같고, 빈 들과 같고, 벳새다 들판과 같은 이 세상에서 허기진 군중들을 먹이고도 남는 구원의 만찬에 여러분의 삶이 기막히게 쓰임 받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삶에서 귀중한 것들을 하나님 앞에 올려놓기를 원하십니다. 자신이 내어놓은 도시락이 제자들의 손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지는 것을 보며 소년은 최고의 기쁨, 환희, 즐거움으로 충만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그렇게 쓰임 받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쫀쫀하지 않습니다. 바닥을 긁는 삶이 아닙니다. 부요한 삶입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그런 분이십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막혀있는 것이 터져야 합니다. 삶을 가로막고 있어 삶을 답답하게 만들고, 응고되게 하는 것이 터져야 합니다. 그것이 터지면, 하나님의 무한대와 연결되어 상상할 수 없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그렇게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우리 교회는 귀한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귀한 일을 우리 교회에 맡기실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면 어떤 것이든 어렵지 않습니다.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우리 교회와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게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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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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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철야예배] 잘 먹는 것이 신앙이다 Friday Night Sermon

제목 / 잘 먹는 것이 신앙이다
본문 / 여호수아 14:10~15

 

10.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하게 하셨나이다 오늘 내가 팔십오 세로되
11.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 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
12.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니
13. 여호수아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을 위하여 축복하고 헤브론을 그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매
14.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라
15. 헤브론의 옛 이름은 기럇 아르바라 아르바는 아낙 사람 가운데에서 가장 큰 사람이었더라 그리고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

오늘날 우리는 쉽게 포기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너무 쉽게 포기합니다. 물론 본인에게는 쉽게 포기하는 것이 아니겠지만, 사람들은 이전에 비해 쉽게 포기합니다.
결혼생활에 어려움이 오면, 길이 없다고 생각하고 포기해버립니다. 직장생활을 하다가 어려우면, 쉽게 포기해버립니다. 학업이 힘들다고 학업을 포기하는 학생도 있습니다. 삶이 힘들다고 인생 자체를 던져버리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를 가리켜 ‘포기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오죽하면 사람들이 포기하겠습니까. 포기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사회 구조를 보면, 포기하지 않고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실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일에서 반복하여 실패하면, 포기하고 싶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자신이 생각했던 대로 되지 않으면, 사람들은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포기는 어떤 한계점을 넘어설 때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더 이상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사람들은 포기합니다.
이 시대를 살다 보면, 많은 한계점에 부딪칩니다. 우리를 좌절하게 하는 일들이 매우 많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절대긍정적인 사람이라도 현실의 벽에 반복해서 부딪치면,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패배감에 빠진 젊은이들이 매우 많습니다. 그런데 젊은이들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모든 세대가 끙끙 앓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살아가기 어렵지만, 젊은 세대만 힘든 것이 아니고, 모든 세대가 힘듭니다.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얼마나 힘듭니까.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취준생’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피가 마르는 듯한 고통을 겪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도 힘들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겪는 고통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렇다면 취직한 사람은 괜찮을까요? 국내 최고의 기업에 취직했던 엘리트들이 그곳에서 평균 6년을 버틴다고 합니다. 힘들게 입사했으나, 평균 6년을 버틴다고 합니다. 6년을 버틴 후에 이직(移職)합니다.
젊은이들에게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고령화 시대를 살아가는 노인들에게도 걱정은 태산 같습니다. 건강, 물질, 가정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산적(山積)해있습니다.

사람들이 쉽게 포기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 어려움을 만났을 때, 삶을 포기해버리는 이유는 잘못된 기대감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현실을 가볍게 바라보는 태도를 우리는 경계해야 합니다. 근거 없는 낙관주의를 조심해야 합니다.

‘희망고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희망해도 얻을 수 없는 현실 속에서 계속 희망을 이야기함으로 고통을 겪게 하는 것입니다.
거대한 현실의 벽 앞에서 희망을 찾아볼 수 없는데, “조금만 더 기다려보라”라고 말하는 것은 고통이 됩니다.

세상은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느낍니다. 처세술이나 성공하는 법에 대한 책을 읽는다고 답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너무 힘드니까 “잘 될 것이다.”라고 현실의 삶에 최면을 겁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전혀 생각하지 않은 문제들이 여기저기서 터집니다.

행복을 위해 결혼했는데, 배우자가 데이트할 때와 다릅니다. 전혀 다른 사람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때 사람들은 실망합니다.
서로 사랑하여 결혼한 두 사람이 마음을 모아 한평생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연애하고 결혼하면 좋을 줄 알았습니다. 함께 살면 행복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너무나 사랑해서 결혼하여 살아가는데, 결혼생활이 만만하지 않습니다.
사업을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악한 사람이 그렇게 많다는 것을 이전에는 알지 못했습니다. 사기꾼이 그렇게 많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아무리 선한 의도를 가지고 일하려고 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이면(裏面)을 들여다보면, 세상은 우리가 낙관적으로 생각할 만큼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거대한 풍랑이 끊임없이 밀려옵니다. 풍랑은 한 번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풍랑은 끊임없이 연속해서 밀려옵니다. 풍랑에 휩싸여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데, 그 위에 또 다른 풍랑이 덮칩니다.
이런 일을 겪는 사람을 쉽게 위로할 수 없습니다. “큰 문제없을 거야. 조금만 참아봐. 잘 될 거야.”라고 말하는 것은 오히려 희망고문이 됩니다.
신앙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기도해. 잘 될 거야.”라고 쉽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은 삶에 대한 잘못된 기대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결혼할 때에는 완벽한 배우자를 만나 그림 같은 집을 짓고, 날마다 행복을 누리며 살 것이라 생각합니다. 자신이 사귀는 사람에 대한 기대감으로 부풉니다.
사업을 시작할 때에는 온 세상의 돈이 굴러들어올 것 같습니다. 무엇을 하든 성공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매우 다릅니다. 기대한 것과 다른 현실에 부딪치면, 사람들은 절망합니다. 절망이 깊어지면, 체념하게 되고, 모든 것이 끝이라고 결론내리고 포기해버립니다.

우리의 삶에 쉬운 것은 없습니다. 가정을 꾸리는 것도 어렵습니다. 공부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돈을 버는 것도 어렵습니다. 대인관계도 쉽지 않습니다. 모두 어렵습니다. 쉬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문제 없는 삶은 없습니다.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문제 없는 삶이 아니라, 문제투성이 세상에서 문제를 하나하나 풀어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문제가 생겼을 때 ‘왜 이 문제가 생겼는가’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문제가 생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인생이 그런 것입니다.

문제가 생기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문제가 생기는 것은 정상(正常)입니다. 인생 자체가 불편하고 까다롭고 위험한 문제투성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문제를 만났을 때, 언제나 승리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실패한다고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실패를 통해 얻는 유익이 참 많습니다. 실패를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실패를 통해 겸손을 배우게 됩니다. 실패를 통해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실패를 통해 하나님의 곁에 붙어있는 삶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깨닫습니다.
실패를 모르면 위험합니다. 하나님을 떠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인생 전체가 공중에서 분해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므로 실패는 좋은 것입니다.

실패 때문에 포기할 이유는 없습니다. 성경을 보세요.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실패한 사람들입니다.
요셉의 인생은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모세, 다윗, 룻, 욥, 다니엘 등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은 어마어마한 시련과 고통과 문제 등에 휩싸였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끝이라고 소리 지르고 싶은 순간을 끊임없이 통과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절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에 포기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포기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포기하고 싶은 순간을 통과할 때,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가 임합니다.

둘째, 거대한 문제에 부딪치면, 우리는 포기하고 싶어집니다.
인생에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너무 큰 문제에 부딪치면, 누구나 포기하고 싶어집니다. 그렇게 큰 파도가 밀려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시드니에서 목회할 때의 일입니다. 교민들 중에 바닷가에서 낚시하다가 1년에 한두 명씩 죽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파도가 잔잔하게 올 때에는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낚시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큰 파도가 옵니다. 한국에서도 그런 일이 있을 것입니다. 갑자기 큰 파도가 올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파도에 휩쓸려서 바위에 부딪쳐 쓸려 내려가 목숨을 잃게 됩니다.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면, 시야에서 모든 것이 사라져버립니다. 이와 같이 인생에서 큰 문제가 닥칠 때에 사람들은 시선을 놓쳐버리고, 문제에 휩쓸려버립니다.

큰 문제를 만나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집니다. 절망하게 됩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 포기하지 않는 한 사람 갈렙을 봅니다.
본문 12절에 보면, 갈렙은 여호수아 장군에게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 보면, 아낙 자손과 크고 견고한 성읍이 나옵니다. 견고하고 심히 큰 장벽 앞에 서있습니다.

큰 문제 앞에 서면, 대부분의 경우에는 짓눌립니다. 작은 파도가 아니라, 큰 파도가 밀려오면, 겁에 질립니다.
아낙 자손들은 심히 장대(壯大)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거대한 문제 앞에 갑자기 부딪치면, 문제만 보이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절망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려 합니다. 비슷하면 시도해보겠는데, 비슷하게 견주어볼 만하지 않고, 거대한 문제가 오면,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현실의 벽이 매우 크기 때문에 엄두가 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여깁니다. 현실의 벽이 크고 두껍게 느껴집니다.
아낙 자손과 크고 견고한 성읍이 갈렙 앞에 버티고 있습니다. 세상 안으로 들어가 보면, 이렇게 거대한 장벽이 많습니다. 장벽이 하나인 것이 아니고, 거대한 장벽이 밀림과 같이 놓여있습니다. 하나의 장벽을 통과하면, 더 큰 장벽이 놓여있습니다. 장벽의 숲 같습니다.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심히 장대한 아낙 자손과 이스라엘의 오금을 저리게 합니다. 모두 거기서 물러섰습니다. 골리앗 앞에 선 사울과 이스라엘 사람들과 같습니다. 블레셋의 전설인 골리앗 앞에서 이스라엘의 장수(將帥)들은 꼼짝하지 못하고 떨고 있었습니다.
문제 앞에서 떨고 주저앉는 것은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갈렙은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갈렙은 어떻게 해서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었습니까? 갈렙이 거대한 장벽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요?
민수기 14장 9절에 보면,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말했습니다.
개역개정판 성경에는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라고 기록되어있지만, “개역한글판 성경에 보면,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의 밥이라”는 표현이 우리에게 더욱 와 닿습니다. 기막힌 표현입니다.

견고한 성읍, 아낙 자손, 철옹성 같은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성을 바라보며 갈렙은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라고 생각했습니다. 갈렙은 문제를 밥으로 보고 있습니다.
갈렙은 거대한 장벽과 문제를 밥으로 봤습니다. 특이한 관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주목해야 하고 배워야 합니다. 갈렙은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승리하는 비결, 다른 삶을 사는 비결을 배우게 됩니다.
거대한 문제가 갈렙에게는 밥으로 보였습니다.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가 우리에게 일어나야 합니다.

밥은 무엇입니까? 매일 먹는 밥은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밥을 먹어야 힘을 내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먹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밥의 힘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밥을 먹지 않으면, 힘을 낼 수 없습니다. 밥을 먹지 않으면, 우리는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힘이 빠졌다가도 밥을 먹고 나면 힘이 납니다. 그러므로 밥은 우리에게 필수적인 것 중에서도 필수적인 것이요,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갈렙은 무엇을 밥이라고 했습니까? 갈렙은 거대한 장벽, 난공불락의 견고한 성읍을 바라보며 “우리의 밥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려운 문제를 만나면, 사람들은 힘이 빠집니다. 그런데 갈렙은 오히려 반대였습니다. 어려운 문제를 밥으로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문제를 보며 벌벌 떨고 있는데, 갈렙은 입맛을 다시고 있습니다. 마치 식사 때가 되어 달려온 사람 같습니다. 문제를 보며 낙심하거나 포기하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힘이 났습니다. 문제는 문제가 아니라, 밥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2절에 보면, 갈렙은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라고 말했습니다. “거대한 성읍, 크고 견고한 성읍, 아낙 자손들이 사는 거대한 성읍을 내게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밥 좀 주십시오. 지금 밥 먹게 해주십시오. 심히 허기져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갈렙은 문제를 만나 좌절하거나 낙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힘이 났습니다.
이때 갈렙은 85세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젊었을 때나 지금이나 동일하다고 말했습니다. 45년 전과 같이 힘이 넘쳤습니다. 기력이 조금도 쇠하지 않고, 오히려 힘이 넘쳐흘렀습니다.

그동안 갈렙은 수많은 전쟁을 치렀습니다. 그는 백전노장(百戰老將)입니다. 전쟁은 게임과는 다릅니다. 항상 긴장감이 넘칩니다. 사느냐 죽느냐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그런데 갈렙은 전쟁으로 인해 지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45년 전과 동일하게 힘이 넘치는 청년의 모습이었습니다.

갈렙은 거대한 문제 앞에서 입맛을 다시고 있습니다. 그는 문제를 문제로 보지 않고, 밥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갈렙은 살아오는 동안 수많은 전쟁을 치르면서 수많은 문제를 뛰어넘었습니다. 문제를 뛰어넘었다는 것은 밥을 먹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문제를 딛고 승리하며 얻은 힘이 밥입니다.

문제는 밥입니다. 큰 문제는 큰 밥입니다. 아주 어려운 문제는 별미(別味)입니다. 갈렙은 지금까지 밥의 힘으로 살아왔습니다. 싸움을 치르며 경험한 난관과 문제가 그의 밥이었습니다.
많은 문제들은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의 힘을 빼는 것입니다. 그러나 갈렙은 문제를 통해 오히려 힘을 얻었습니다.

갈렙은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었을까요? 45년이 지난 후에도 어떻게 변함없이 강건함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요?
본문 12절에 보면, 갈렙은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적이 아무리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면’ 이것이 답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아무리 거대한 문제라도 우리에게는 밥이 됩니다.

다윗도 이것을 경험했습니다. 시편 23편 5절에 보면, 다윗은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여기서 ‘상’은 밥상(table)을 의미합니다.
원수와 결전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다윗은 주님께서 차려주신 밥상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감히 원수의 목전에서 밥상을 차려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실 수 있으십니다.
갈렙은 다윗이 고백한 것과 같은 것을 가나안으로 입성하는 전쟁에서 이것을 수없이 경험했습니다. 크고 작은 경험들을 통해 갈렙의 삶은 더욱 풍성해졌습니다.

여호수아서는 정복의 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가나안은 하나님께서 차려주신 밥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을 밥상 위에 올려놓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입을 열고 먹어라. 먹는 것은 네 힘으로 먹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갈렙은 하나님께서 차려주신 상(床)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난공불락의 성이 그의 눈에는 밥으로 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면, 우리는 먹으면 됩니다. 밥은 한 번 먹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밥은 계속 먹어야 합니다.
밥은 한두 번 먹고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밥을 먹지 않으면, 힘이 없을 뿐 아니라, 나중에는 죽습니다. 믿음의 삶은 밥을 먹는 행위와 비슷합니다.
45년이 지났지만, 갈렙은 동일하게 힘이 넘치는 것은 그가 이런 밥을 계속 먹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들에게는 전쟁이 두려울지 모르지만, 갈렙은 오히려 신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차려주신 밥을 먹는 재미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승리를 거두어들이는 즐거움, 하나님께서 주신 상을 받아먹는 즐거움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밥을 두려워하여 먹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본문에서 갈렙은 85세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청년과 같았습니다. 그는 밥을 너무 잘 먹었습니다. 그리고 잘 소화했습니다. 식욕이 왕성했습니다.

다른 지파 사람들은 대충 만족했습니다. 남아있는 아낙 자손과 견고한 성읍에는 아무도 눈을 돌리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편안한 현실에 젖어있었습니다.
그러나 갈렙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배고팠습니다. 거대한 장벽을 통과한 승리 이후에 주어지는 밥의 힘은 대단한 것입니다. 거대한 문제가 닥치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를 경험하고 나면, 힘이 솟습니다.

언제 살맛이 납니까? 아무 문제없는 세상에서 산해진미(山海珍味)를 먹어야 살맛이 나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다 한두 번 먹을 때는 좋을지 모르지만, 계속 그렇게 생활하면 죽습니다.
자살을 많이 하는 북유럽의 나라가 그렇습니다. 문제가 별로 없는 곳에서 자살률이 더 높습니다. 생활고(生活苦)로 인한 자살은 엄청나게 많습니다.

언제 밥맛이 최상입니까? 어렵고 힘든 일을 통과하고 난 후에 먹는 밥맛은 최고입니다. 어려운 문제를 극복하고 난 후에 느끼는 감정이 어떤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문제가 해결되고 난 후에 희열(喜悅)을 느끼신 적 있습니까?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밥입니다.
힘들고 어려워서 죽을 것 같았는데도 하나님께서 문제를 통과하게 하시고 난 후에 주어지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것이 밥입니다. 그것으로 인해 힘이 솟습니다. 날아갈 듯이 힘이 솟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기쁩니다. 이런 밥맛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아무런 어려움 없이 사는 것이 신앙생활은 아닙니다. 어려운 문제를 두려워하지 않고, 어려운 문제 앞에 맞서서 도전하여 믿음으로 승리했을 때의 주어지는 기쁨이 우리의 인생의 밥입니다.

갈렙은 그 밥맛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갈렙은 영원한 청춘입니다. 항상 청년같이 살았습니다. 갈렙은 문제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했기 때문에 영원한 청춘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문제를 계속 밥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문제를 통과하고 난 후에 힘이 솟았습니다. 그는 기력이 조금도 쇠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명기 34장 7절에 보면,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모세는 백전노장으로 홍해를 가르고, 광야를 통과하는 동안 숱한 시련과 문제를 하나님의 은혜로 통과했습니다. 모세 역시 문제를 밥으로 삼아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힘이 나게 하는 원천은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지치지 않고, 시간이 갈수록 힘이 넘치는 삶을 살게 하는 비밀을 알아야 합니다. 문제를 밥으로 보고, 문제를 밥 삼아 살아가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밥상이 있다고 해서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 밥상은 보이지 않고, 원수만 보입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덤비는 세력만 눈에 띄면, 밥상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본문 10절에 보면, 갈렙은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하게 하셨나이다 오늘 내가 팔십오 세로되”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대목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하게 하셨나이다’입니다. 갈렙의 인생을 하나님께서 책임지셨다는 의미입니다. 갈렙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왜 포기합니까?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크기 때문에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으시는 것 같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낙심합니다. 홀로 고생한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서러워하고 포기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갈렙은 지난 45년 동안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하셨다는 믿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항상 전쟁의 한가운데에 있었습니다. 갈렙은 자신이 살고 있는 것은 하나님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믿음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죽고 사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상황이 나를 죽일 것처럼 보이지만, 상황이 나를 죽이는 것은 아닙니다.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우리는 상황과 조건이 나를 죽인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허약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허약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식욕이 없습니다. 문제 앞에서 문제만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상황에 갇혀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늘 문제만 바라보고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뛰어넘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문제가 닥치면 기가 죽고 절망합니다.

영적 세계에서 시험을 이겨낸 적이 있습니까? 믿음으로 문제를 돌파하는 사람은 그 속에서 놀라운 힘이 생깁니다. 그래서 힘이 있습니다.
마귀와 싸워서 이겨본 사람은 마귀가 별 것 아님을 압니다. 마귀와 정면대결해서 나아가면, 마귀는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마귀는 사람에게 겁을 줍니다. 이것이 마귀의 기본 전략입니다. 마귀가 왜 겁을 주는지 아십니까? 마귀는 힘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상대에게 겁을 주어 스스로 무너지게 만듭니다. 이것이 마귀가 사용하는 전법(戰法)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마귀를 겁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대장 되신 주님과 함께 싸우면, 마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왜 마귀와 싸워보지도 않고, 지레 겁먹습니까. 마귀는 우리의 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를 겁내면 안 됩니다. 오히려 마귀가 우리를 겁내야 합니다. 그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마귀를 단칼에 끝내버리지 않으시고, 마귀를 그대로 두실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괴롭히시려고 마귀를 그냥 두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마귀를 그대로 두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마귀를 처단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마귀를 해결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마귀를 해결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귀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직접 확인하도록 마귀를 그냥 두셨습니다. 마귀는 강력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 것을 하나님께서는 마귀를 통해 드러내고 싶어 하십니다.

마귀는 우리의 밥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시험을 만나면 절망하고 포기합니다. 그러나 신자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문제를 취하여 우리의 밥으로 삼기를 원하십니다. 문제가 우리를 절망하게 하고, 낙심하게 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문제를 붙잡고, 믿음으로 문제를 돌파하여 그것을 밥으로 삼아 우리의 인생에 힘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서 힘을 빼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문제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문제를 통해 우리에게 힘을 주시려고 우리에게 문제를 허락하십니다.
옛날에는 숱한 문제를 통과하면서 좌절하고 낙심하고 넘어졌지만, 어느 순간부터 믿음으로 문제를 돌파하고 이겨냅니다. 그리고 그 후에 자신감과 당당함이 생겨 삶에 힘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밥 먹을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관점을 바꾸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밥을 먹고 힘을 내라는 의미입니다. 문제가 얼마나 크고, 우리가 얼마나 형편없는 자인가를 확인하게 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난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문제를 위한 문제를 주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자는 우리의 보호자가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는데, 우리를 보호하시지 않으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해주시는 분이시라는 의미입니다. 구원자는 곧 보호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책임져주시고 지켜주시는 분이십니다.
성경 곳곳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신실하게 보호하시고 지키시는 분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방패가 되십니다.

절대 포기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무엇인가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본문 11절에 보면, 갈렙은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 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싸움은 특수한 상황을 의미하고, 출입은 일반적인 삶을 의미합니다. 갈렙은 자신이 지금 모세가 자신을 가나안의 정탐꾼으로 보낼 때와 똑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 때나 지금이나 같아서”라는 대목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4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청년의 때와 동일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때 대단하게 살았는데, 어느 순간 기력이 쇠하고, 점점 눌려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앙은 왕년의 추억에 잠겨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한때는 대단했지.’라고 생각하며 살아서는 안 됩니다. 신앙은 지금이 중요합니다. 현재가 중요합니다. ‘지금 이곳’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유년기, 청소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갈렙을 보면, 영적인 면에 있어서는 그에게는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가 없습니다. 갈렙은 언제나 영적인 청년기였습니다. 영적으로 언제나 청춘이었습니다.
20년 전에도, 40년 전에도 기력이 쇠하지 않았습니다. 에너지가 넘쳤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문제와 위기와 장벽을 밥상으로 보고 달려들었습니다.

그는 항상 거침없이 도전했습니다. 문제를 피해가거나 어려움이 오면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굶주린 자가 밥을 찾듯이 도전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14절에 보면,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갈렙은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습니다. 이것이 답입니다. 마음이 분산되지 않고, 두 마음이 아닌 상태로, 하나님만 좇았다는 것입니다.

환경과 상황, 문제를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현실을 분석하는 데 시간을 많이 보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시세를 너무 많이 압니다.
그렇다고 현실을 무시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쓸데없이 너무 많이 아는 것은 병입니다. 인터넷 뉴스를 실시간으로 보고, 문제를 확인하고 고민하고 분석합니다. ‘문제가 심각하구나. 답이 없구나. 포기해야겠다.’라고 생각하며 절망합니다.

제가 아는 분 중에 이혼상담 변호사가 있습니다. 이분은 이혼과 관련한 것만 다루는 변호사입니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꼬이고 꼬인 가정사를 매일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인지 어느 날부터 자신의 부부생활에도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분도 결국 이혼했습니다. 이혼상담을 계속 하다가 자신도 이혼해버렸습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납니까? 복잡한 가정의 문제를 들여다보고, 문제를 분석하고, 그 문제 속에 살다 보니 인간과 가정에 대한 환상이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리고 염증을 느꼈습니다. 자신도 문제 속에 빠져들었습니다.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엇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는가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기가 막힌 산해진미로 상을 차려주시는 하나님,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다윗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라고 고백했습니다(시 23:4).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본 것이 아니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데,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않고, 음침한 골짜기를 보면, 두려움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두려움에 대한 처방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두려워하고 낙심하여 문제로부터 도망쳐서는 안 됩니다. 어렵다고 포기하고 도망치면, 밥에서 점점 멀어지고, 힘이 점점 빠져서 나중에는 죽습니다.
어려울수록 문제에 직면해야 합니다. 손을 뻗어야 합니다. 그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민수기 13장 30절에 보면,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갈렙은 백성들에게 “우리가 능히 이기리라”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면, 시각(視覺), 관점, 감각이 바뀝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과 관점이 바뀌는 것입니다. 문제가 밥으로 보입니다. 하나님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확실히 이길 것이라는 확신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밥맛과 입맛이 살아날 때, 힘이 넘치게 됩니다. 밥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문제에 휩싸여도 죽는다고 소리 지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힘이 납니다.

밥은 늘 먹어야 합니다. 신앙은 밥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에게 일어난 문제는 여러분으로 하여금 힘을 빼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여러분에게 힘나게 하시기 위한 밥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 사람들과 살아가는 방식의 차이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지금도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문제를 정면 돌파하기를 원하십니다. 큰 문제를 믿음으로 이겨내고 나면, 그것이 인생의 힘이 됩니다. 능력이 됩니다. 살맛이 되고, 밥맛이 됩니다.

힘은 어디로부터 옵니까? 이 세상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이기는 힘은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을 베풀어주셨습니다. 가나안은 난공불락이지만, 많은 난제(難題)가 있지만, 하나님께서 이미 허락해놓으신 승리의 전쟁에서 숟가락만 들고 입에 갖다 넣기만 하면, 능히 이기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힘을 다른 데서 찾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문제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문제를 믿음으로 이겨낼 때, 그것이 인생에 힘이 나게 합니다. 그래서 문제는 밥입니다.
밥을 먹지 않으면 죽습니다. 매일 밥을 먹어야 합니다. 밥은 믿음으로 문제를 돌파할 때에 주어지는 은혜요, 위로입니다. 격려요, 소망이요, 기쁨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살도록 끌고 가는 능력이 됩니다.
문제를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문제 앞에 좌절하거나 도망가지 마세요. 밥을 피하면 죽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정면 돌파했습니다. 문제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힘이 솟구치게 하십니다.

갈렙은 영원한 청춘이었습니다. 45년 동안 기력이 쇠하지 않고, 힘이 솟았던 것은 밥을 열심히 먹었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어떤 밥을 드셨습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허락하신 밥상을 드셨습니까? 그것이 힘나게 하는 것입니다.

문제를 피하지 마세요. 문제 앞에서 포기하지 마세요. 문제를 정면돌파하세요. 우리가 취할 것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밥을 한 그릇, 두 그릇 먹고 나면, 기골이 장대해지고, 영원한 청춘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45년 동안 하나님께서 갈렙과 함께하셨습니다. 그래서 갈렙은 나로 생존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
살고 죽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문제 때문에 죽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죽을 수 없습니다.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밥 잘 먹는 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모든 문제를 밥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큰 문제가 있습니까? 밥그릇이 크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감사하세요. 믿음으로 밥을 취하시기 바랍니다.
승리의 기쁨과 즐거움이 여러분을 살게 하는 에너지입니다. 하나하나 정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하나 취하시기 바랍니다. 두려워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어떤 것도 포기하지 않고, 물러서지 않고, 밥상을 끌어안고 취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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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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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예배설교] 기도의 위력을 믿는가 Friday Night Sermon

제목 / 기도의 위력을 믿는가
본문 / 마태복음 7:7~11

 

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합니다. 오늘날 세상을 비영적 세상이라고 말합니다. 영적인 것을 무시합니다.
우리는 철저히 세속화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물질에 매여서 살아갑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손에 잡히는 것만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자칫하면 신자도 세상 속에 휘말릴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 비영적인 것, 손에 잡히는 것만 전부라고 믿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 속에 휩쓸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상 속에 휘말리면, 동일하게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속화된 세상 속에 빠지면, 하나님을 찾지 않게 됩니다. 기도하지 않게 됩니다. 기도하지 않는 순간,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 추구하게 됩니다.
기도하고, 기도하지 않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순간,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세상에 압도당합니다.

기도는 신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경쟁력입니다. 기도를 놓치면 안 됩니다. 기도가 풀리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이 흔들리는 것은 물론이요, 삶 전체가 흔들립니다.
신앙생활을 할수록 기도가 깊어집니까? 기도생활에 탄력이 생깁니까? 기도생활에 파워가 생깁니까? 기도하는 것이 신납니까? 기도하는 것이 몸에 익어집니까?
기도하는 것이 뒤로 밀려납니까? 기도하는 것이 신통하지 않게 여겨지고, 지루하게 여겨집니까? 기도가 약해지지는 않습니까? 기도의 문이 활짝 열리기를 축원합니다.

공허한 기도를 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도 모르는 말을 주절주절하다가 기도를 끝내면 안 됩니다. 그렇게 기도하면, 기도하는 것이 재미없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신앙의 중심부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놓치면 안 됩니다. 기도는 신앙생활의 전부입니다. 사생결단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천하가 무너진다 해도 기도를 붙잡고 있으면 살 줄 믿습니다. 기도가 살면, 하늘을 날아오르게 될 것입니다. 춤을 추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문제가 큰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기도가 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기도가 살면, 문제가 더 이상 문제되지 않습니다. 문제가 오히려 축복으로 바뀔 것입니다. 왜 끙끙거리며 살아갑니까? 기도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기도의 원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용이 아주 선명합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구하는 것입니다.
본문 9~1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짧지만 강력하고 명확한 예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그동안 한국 교회는 기도에 열심이 있었습니다.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았습니다. 한국 교회 어디서든 철야기도를 했습니다. 어느 교회든 새벽기도 시간에는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적극적이고 열심 있게 기도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방적으로 기도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기도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편에서 열심히 하는 것을 많이 강조했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 교회가 그동안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옛날 물 떠다놓고 기도하신 어른들의 열심을 그대로 교회로 옮겨와서 새벽부터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신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6장 3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필요를 구체적으로 알려드려야 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언제 얼마나 필요한가를 아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응답하실 때에 혼동을 일으키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떡과 돌, 생선과 뱀을 구별하실 수 있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하실 때에는 배달사고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확하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기도에 정확하게 응답하십니다. 우리가 이상하게 기도해도, 하나님께서는 정상적으로 응답하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두루뭉술하게 기도하고, 무슨 기도를 하는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알아들으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구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지만, 정작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구하는 대로 하나님께서 다 응답하셨다면, 큰 일 날 뻔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 그렇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암이 낫는 것이 좋을 수도 있고, 좋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자신의 생명을 연장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생명을 15년 연장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후에 악한 왕이 되었고, 그의 아들 므낫세도 악한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고통 당했습니다.

우리가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정욕은 기도에 있어서 최대의 걸림돌이 됩니다.
야고보서 4장 3절에 보면,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가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 주십니다. 그러나 야고보서 4장 3절에서 딱 걸립니다. 정욕이 문제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정욕은 쉽게 처리되지 않습니다. 일평생 정욕이 처리되지 않아서 우리가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잘못된 안경을 쓰고 있기 때문에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잘 모릅니다.
아이들이 떼쓰는 대로 다 주었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것만 주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만 주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정욕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잘못 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응답하시는, 좋으신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 누구신가를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기도해야 하는가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 누구신가가 중요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집을 나간 아들이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결심한, 결정적인 순간이 있습니다. 탕자가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라고 깨달았을 때입니다. 탕자는 고생하다가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먹으려고 하다가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탕자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탕자가 왜 탕자입니까? 아버지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떠나는 순간, 그는 탕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그가 집을 떠나는 순간, 복잡한 문제가 그에게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가진 것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거지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의 삶에 한두 가지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는 순간,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모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집이 거지의 집이라면, 그 속에 들어가면 거지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집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가 누구인가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소개하고 싶은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을 통해 아버지를 소개하고 싶어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기도하면 응답 받는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누구인가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어 하십니다. 하늘 아버지를 우리에게 소개하고 싶어 하십니다.

본문 11절 끝 부분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아버지’는 누구입니까?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신 후에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시는 분이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오해하지 않고,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의 눈높이에 맞추셔서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도록 예를 들어서 설명하셨습니다.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주고,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줄 아버지가 있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있다 할지라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그런 분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예로 들어 기도를 설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예는 없습니다. 이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예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시는 아버지가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옷을 사다 주는 데, 질이 좋지 않고 허름한 옷을 사다 주는 아버지가 있겠습니까. 개와 고양이가 먹는, 유통기한이 지난 통조림을 아들에게 사주는 아버지가 있겠습니까.

하늘 아버지를 우리가 제대로 알면, 우리의 기도가 달라집니다. 왜 우리는 기도하지 않습니까? 열심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아버지가 누구신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늘 아버지를 마음에 와 닿도록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아버지를 모르면, 기도할 수 없습니다. 기도하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낯선 분에게 기도하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기도하면, 세월이 흐름에 따라 기도가 깊어지고 풍성해집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경험하지 못한 상태로 기도하면, 기도하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하나님이 낯설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별별 수식어를 다 쓰며 기도하게 됩니다.

육신의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로 인해 하나님 아버지에게 기도하는 것을 불편하게 느끼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아버지는 따뜻한 분이십니다.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동네 아저씨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는 세상의 어떤 아버지와도 비교할 수 없이 좋으신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아버지로부터 받는 것으로 아버지와의 관계가 끝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버지에게 구하는 것을 주기를 원하실 뿐 아니라, 우리가 아버지와 맞먹는, 아버지와 같은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이것이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려고 하는 핵심입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100평의 아파트에 사는데, 아버지의 옆에서 눈치 보며 사는 아들이 있겠습니까. 아버지와 아들이 같이 삽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같이 누립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구했을 때, 조금 주시고 우리를 약 올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버지와 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아버지의 소유가 나의 소유입니다. 아버지께서 누리시는 것을 나도 누립니다.
아버지가 대통령이라면, 아들도 대통령과 맞먹는 권세를 누립니다. 그래서 청와대를 마음껏 들락날락할 수 있습니다. 청와대에 있는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물건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전혀 문제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버지에 대한 개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구할 때에 우리가 구하는 것을 주시는 정도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가 누리는 것을 아버지와 함께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발을 동동 구르며 아슬아슬하게 사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늘 불안해하고 초조해하며, 시간에 쫓기며 힘들게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큰 아들에게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라고 말했습니다(눅 15:31).
아버지의 것은 모두 아들의 것입니다. 아버지의 소유와 아들의 소유는 구분되지 않습니다. 탕자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재산을 탕진하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받아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었습니다. 아들을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다 아버지의 것입니다.

제게는 아들이 두 명 있습니다. 저는 재산이 없기 때문에, 아들에게 남겨줄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책은 많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둘 다 영어권 나라에서 자라서 한글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한글로 기록된 책은 별로 소용없습니다.
다행히 영어로 기록된 책이 제게 조금 있습니다. 큰 아들이 목회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어느 날, 큰 아들이 제게 영어로 된 책을 달라고 한다면, 제가 아들에게 책을 줄까요? 당연히 줄 것입니다. 아들에게 책을 줄 뿐 아니라, 아들이 더 원하는 책이 있다면, 아들에게 책을 사줄 것입니다. 기쁨으로 줄 것입니다. 제 것이 제 아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분이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생각하지 마세요.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훨씬 풍성하고 거대하고 놀랍습니다.
가장 큰 축복은 무엇입니까?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최고의 축복입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말 속에는 구하면 주신다는 의미도 있지만, 아버지와 함께 있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삶에 고난과 시련이 찾아오지만, 고난으로 인해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서 주님과 함께 시간을 가지고, 주님을 배우고, 주님을 경험하고, 주님과 함께 거할 때에 고난은 축복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의 아들인데도, 자신이 아버지의 아들인 것도 알지 못하고, 세상 속에 빠져 살아가던 사람을 고난을 통해 아버지께로 나아오게 하십니다.
아들이 아버지께로 돌아와 아버지를 구하고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낼 때,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탕자가 깨달은 것은 무엇일까요? 아버지의 집보다 좋은 것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가 계신 곳보다 나은 곳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의 집은 아버지가 계신 곳입니다. 그곳에는 모든 것이 있습니다.
탕자는 아버지 없이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탕자는 오늘날 인간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오늘날의 문명은 탕자의 문명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떠나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자만합니다.
탕자의 문명의 특징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을 비웃습니다. 기도하는 것을 천박하게 여깁니다. 무능하고 유약한 사람들이 기도한다고 생각합니다.

가끔은 우리도 헷갈립니다. 기도하지 않는데도 잘 사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는데도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는데도 언제나 얼굴이 밝습니다. 행복해보입니다. 모순인 것 같습니다. 반대여야 할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큰소리를 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탕자가 많습니다. 누가 탕자입니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탕자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사람, 자기 힘으로 살아가려고 궁리하는 사람, 자신만만해하고 자기 인생은 자기의 힘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탕자입니다.

탕자는 우선은 모든 것이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합니다. 세상을 부러워하지 마세요. 오래가지 못합니다. 인생은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습니다.
주머니의 돈이 영원히 있는 것은 아닙니다. 돈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 큰소리치고 살아가는 사람을 부러워하지 마세요. 오래가지 못합니다. 영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이 자기의 힘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 기도하지 않는 사람, 기도를 무시하는 사람은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자원은 바닥나게 되어있습니다. 바닥을 긁게 되어있습니다. 주변을 보세요. 틀림없습니다. 한때는 큰소리쳤습니다. 그런데 계속 큰소리치는 사람은 없습니다.

개인이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때는 잘 나갑니다. 그런데 기도하기는 싫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간다면, 어느 날 자신의 인생의 자원이 바닥나게 되어있습니다. 돈만 바닥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있다 할지라도 삶의 모든 것이 쪼그라듭니다.
아버지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부재(不在)가 주는 엄청난 공간을 메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버지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큽니다.

세상을 들여다보세요. 늘 배고픕니다. 돈을 가지고 있는데도 늘 배고픕니다. 만족되지 않습니다. 성공을 했는데도 여전히 허전합니다. 인기를 얻었어도 여전히 배고픕니다. 약을 먹어야 잠을 이룰 수 있습니다. 고아의 영, 거지의 영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것입니다.
만족하지 못하는 병은 여간 큰 병이 아닙니다. 만족되지 않는 병은 큰 병입니다. 병원에서도 고칠 수 없습니다. 약이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고치실 수 있으십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 자신이 부족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만족할 수 있다면, 부족한 것이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전혀 부럽지 않다면, 문제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왜 부러워합니까? 은혜가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충만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보세요. 세상 사람들은 언제나 껄떡거립니다. 구걸하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아무리 많이 가져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무엇인가 더 찾습니다. 무엇인가 더 채우려고 합니다.

본문은 아버지와 함께할 때에 누리는 축복을 말합니다.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를 경험하고, 아버지와 함께할 때에 누리는 축복을 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는 한계가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불경기도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좋은 것을 함께 누리는 특권이 있습니다.

누가 아버지와 함께 기뻐할 수 있습니까? 아버지와 함께하면, 아버지와 함께 기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말했습니다(빌 4:4).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 아버지와 함께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원한 기쁨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울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평강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시편 23편 1절에 보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가 되시면,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시편 23편 4절에 보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함께하시니까 해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두려움이 없습니다. 만족합니다. 기쁩니다. 불안함이 없습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기도를 확실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해야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아버지와 함께하고 있는 삶 자체가 축복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보다 우리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안달해야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열심히 해야 우리에게 반응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우리보다 더 적극적으로 우리에게 열심을 다하십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말씀은 우리가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에게 응답하시려고 우리보다 더 적극적으로 기다리시는 아버지를 소개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보다 더 적극적이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적극적이라 해도 하나님 아버지보다 더 적극적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적극적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적극적이지 않으시면, 우리의 열심이 아무 소용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보다 더 적극적이십니다.

우리가 신통하지 않게 기도한다 해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믿는 사람은 아버지 안에서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시고, 우리에게 응답하시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받으실 하나님께서 먼저 존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소개하시기 위해 유치원 수준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계십니다.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도록 설명하고 계십니다.
아버지를 경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도는 아버지를 경험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머리로만 신앙생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공부 많이 해서 아는 것은 많은데,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 경험한 것이 하나도 없다면, 그 사람은 신앙생활하는 것이 재미없습니다.
아버지에 대해 연구하지 마시고, 아버지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아버지학, 아버지론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아버지를 맛보아 알아야 합니다. 아버지를 경험해야 합니다.
기도에 관련된 책 100권을 읽는 것보다 기도의 맛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도의 맛은 기막힙니다. 기도의 맛을 본다는 것은 아버지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전시용으로 만든 음식은 아무리 그럴 듯 하게 세팅되어있어도, 아무리 맛있어 보여도 먹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성경에 전시되어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추상적인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매일 우리의 삶에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우리와 함께 호흡하십니다. 우리와 대화하십니다. 우리와 눈길을 마주치십니다. 우리에게 속삭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거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리얼하게 경험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떡을 떼어주시며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6:26). 하나님을 경험하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앙을 잘 소개하셨습니다. 신앙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신앙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온몸으로 전율해야 합니다. 가슴이 뛰어야 합니다. 찬양을 부를 때에 심장이 쿵쿵 뛰어야 합니다.

기도를 경험하지 못한 분이 계십니까? 우리의 기도는 이름 모를 신을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독백이 아닙니다.
지금 이곳에서 나와 함께하시는 전능하신 하늘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느끼고,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고, 하나님의 속삭이심을 들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에 보면, “쉬지 말고 기도하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이 무슨 의미입니까?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지라는 의미입니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떠나시지 않으십니다. 언제든지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라는 의미입니다.
기도하는 시간을 따로 가질 수도 있지만, 우리의 삶 자체가 기도여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삶, 그것이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축복입니다. 성경에 보면, 구하면 주신다고 여러 번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 중의 약속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시작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시작합니다.
기도는 아버지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아버지의 임재 앞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 하나로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우리가 자녀의 권세를 누리려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셔 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모셔 들이는 일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아버지를 아버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로 인정해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가 활짝 열립니다.
기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최고의 선물이요 특권입니다. 기도는 아버지의 아들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특권입니다.
최고의 권세인 기도가 어떻게 우리의 삶의 주변부로 밀려날 수 있겠습니까. 기도는 중심 중에서도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기도가 우리의 삶의 중심에 있을 때, 우리의 삶이 회복되고, 하나님 아버지와 동일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첫째, 확신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먼저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라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자녀 됨을 누리려면, 자녀 됨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가를 우리에게 말씀하시려고 하십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소개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없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 되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를 소개하셨습니다. 그 배경에는 예수님의 죽으심이 깔려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만큼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기도에 힘을 실어줍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에 대해 설명하시며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께로 인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 것은 예수님 때문임을 우리에게 간접적으로 알려주십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본문의 배경이 됩니다.

우리가 담대하게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우리가 믿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당하게 구하고 찾고 두드릴 수 있음을 우리에게 확인시켜주십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멋진 배경이 되셔서 본문의 내용이 우리에게 더욱 멋지게 느껴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한, 우리의 기도는 무시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스러운 자녀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기적 중의 기적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 것입니다. 이 기적은 그냥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입니다.
우리에게 무언가를 주시는 것만 기적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 것이 기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 것보다 더 큰 기적은 없습니다.

기도해서 취직되면, 물론 좋습니다. 기도해서 암이 나은 것도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아니라면, 그것은 아무 소용없습니다.
비록 삶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도, 손에 잡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해도, 하나님께서 아버지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 속한 것입니다. 삶도 죽음도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죽음을 축복으로 바꿀 수 있는 권세가 하나님 아버지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선교사가 이역만리에서 말이 되지 않게 억울한 죽음을 당해 남들은 비극이라 말할지라도, 남이 보기에는 처참한 죽음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영생의 복으로, 하늘의 면류관으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은 기적 중의 기적을 경험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병이 낫든 낫지 않든 상관없습니다.
기적 중의 기적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것은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현상이 일어나는 것만이 기적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납니다. 인생의 결론이 이미 나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변함없는 분이시라면, 우리의 삶도 하나님의 변함없는 약속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은 우리의 의문과 두려움을 잠재우고도 남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선하시고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이것을 확신하시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다는 것이 우리에게 주는 충만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으면, 충만함이 없습니다. 다 가지고 있다 해도 무엇인가 빠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면, 가진 것이 없어도 충만 중의 충만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형편이 어떤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기도한다면,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아버지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둘째, 담대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은 굉장히 적극적인 태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담력을 얻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9절에 보면,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에 보면,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소극적으로 기도하지 마세요. 기도 자체가 적극적인 것입니다. 기도는 굉장히 능동적인 태도입니다. 기도 자체가 기대요 가능성이요 소망입니다.
우물쭈물 기도하지 마세요. 아버지의 입장에서 보면, 아들이 아버지 앞에서 우물쭈물하는 보면 답답합니다.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아버지 앞에서 우물쭈물 기도한다면, 아버지께서 답답하실 것입니다.

눈치 보지 마세요. 담대하세요. 담대하게 기도하세요. 소극적으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답답해 하실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 2절에 보면,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셋째, 사랑 안에서 기도하세요.
아들이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사랑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믿고 아버지께 구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합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기도했을 때에 우리에게 응답하시는 것으로 그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경험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응답에만 초점을 맞추고 기도하지 마세요. 기도하다가 낙심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기도하다가 낙심하면, 기도를 멈추어버립니다. 응답에만 초점을 맞추고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구한 대로 응답해주셔야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편에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 편에서는 우리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를 신뢰하고, 아버지의 사랑에 초점을 맞추고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알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다 아시면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구해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림으로 하나님께 나아오고, 하나님을 향해 “아빠”라고 부르고,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고, 하나님과 눈을 맞추고,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 속에 들어갈 때, 우리가 아무 말하지 않아도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손 안에 들어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기도하는 시간은 하나님을 느끼는 시간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눈을 마주치며,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확인하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말씀을 붙잡고, 삶 전체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깊이 경험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의 중심에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설명하신 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의 수준으로 내려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서 멀리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추상적인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너무 거룩하셔서 우리가 근접하기 어려운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알고 느끼고 경험하고 주고 받는 관계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부르면 들을 수 있을 만큼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그러므로 종교생활을 끝내시고, 지루한 신앙생활을 끝내시고, 무미건조한 신앙생활을 끝내시고, 아버지의 아들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신앙생활을 할수록 기도가 더욱 풍성해지고, 기도 속에서 주님을 마음껏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회복됨으로 고아의 영이 떠나고, 거지의 영이 떠나고, 양자의 영을 얻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며,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모든 것을 함께 누리는, 부요한 주님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기도에 맥이 빠졌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교만해졌습니다. 아버지가 없어도 살 수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돈도 잘 벌고, 교회도 커지고, 모든 것이 잘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외적인 조건은 풍성해졌지만, 바닥을 긁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면, 기도가 회복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버지의 아들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양자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아버지께로 돌아가세요. 그 안에는 모든 것이 있습니다. 풍성한 삶이 있습니다. 위대한 역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 되십니다. 아빠를 마음껏 부르짖으시기 바랍니다.
천하 열국을 자녀들에게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마음껏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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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좋은 신자는 갈망이 식지 않는다
본문 / 시편 34:8~10

 

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9.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10.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우리의 삶 속에서 행복한 순간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맛있는 것을 먹을 때에 행복을 느낍니다.

본문에 보면, 시편 기자는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맛보다’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이것은 신앙의 세계를 묘사하는,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시편 기자는 신앙이 어떤 것인지를 간결하면서도 멋지게 묘사했습니다.
신앙은 맛보는 것입니다. 맛보는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맛본다, 얼마나 실제적인 표현입니까. 느낌이 와닿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철학이 아닙니다. 사상도 아닙니다. 애매모호한 사설(私說)을 늘어놓는 것도 아닙니다.
‘맛본다’는 단어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맛본다는 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입니다. 맛을 느낀다는 것은 사람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무엇인가 먹고 맛을 느끼는 순간, 행복이 몰려오는 것 같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입맛이 살아있습니다. 아무리 아픈 사람이라도 입맛이 살아있는 사람은 살아납니다. 그러므로 입맛이 곧 살맛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맛을 볼 때에 혀의 기능이 중요합니다. 혀는 맛을 분별합니다. 좋지 않은 것을 계속해서 먹으면, 병에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맛만 좋은 것을 계속 먹으면, 성인병에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는 유해(有害) 식품이 많습니다.

우울증과 먹는 것과의 연관성에 대해 연구한 보고가 있습니다. 호주의 멜버른대학교에서 10년 동안 1천 명의 남녀를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에 의하면, 가공하거나 기름에 튀긴 음식, 설탕이 많이 들어간 음식 등 서구식 식단을 섭취한 여성이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그렇지 않은 여성보다 50%나 높다고 합니다.
반면, 채소나 과일, 잡곡, 생선을 먹은 사람은 우울증이나 불안장애에 걸릴 확률이 30% 낮다고 합니다.
정크푸드(junkfood)는 일시적으로 기분을 상승시켜주고, 일시적으로 에너지를 증가시켜주지만, 오래 가지 못하고, 불만과 갈증을 느끼게 합니다. 우선은 좋지만, 나중에는 힘들어집니다.
어떤 맛에 길들여지느냐, 어떤 맛을 추구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맛을 본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맛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에 맛을 들여가는 것입니다. 신앙에 길들여진다는 것은 영적 세계의 깊은 맛을 알아간다는 의미입니다. 맛을 아는 신자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맛을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아직 신앙이 깊지 않은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예배를 드리며 눈물을 흘리고 감격해하는데, 옆에서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맛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맛을 아는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해도 맛을 찾습니다. 참맛을 알기 때문에 맛을 찾아다닙니다. 그런데 맛을 모르면, 다른 것을 찾아다닙니다. 딴 데를 기웃거립니다.

신앙세계에서 최고의 맛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핵심입니다. 본문에서 시편 기자는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선하심’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맛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절정(climax)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하는 것은 신앙의 노른자입니다.

맛보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맛보기 전에는 알 수 없습니다. 맛을 본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아는 것과는 다릅니다. 맛본다는 것은 매우 구체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온몸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혀를 통해 맛을 느끼지만, 뇌에서부터 만족을 느낍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영혼 깊숙이 감동이 전해지는 것 같습니다.
혀끝으로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감각기관이 움직입니다. 그래서 맛있는 것을 먹을 때에 사람들은 탄성(歎聲)을 지릅니다. 너무 좋으면 온몸을 흔들리고 합니다.

사실 식욕을 일으키는 것은 입이 아니라 뇌입니다. 배는 부른데, 음식이 계속 당기는 것은 뇌의 작용 때문입니다.
맛을 보고 알게 된 것은 잊을 수 없습니다. 깊이 각인됩니다. 경험하고 난 후에 아는 것과 경험하지 않은 것은 매우 다릅니다.

여러분의 신앙세계를 잘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경험해서 아는 것이 쌓여가고 있습니까?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쌓여가고 있습니까?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쌓여가는 것과 경험을 통한 지식이 쌓여가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전혀 다른 길입니다.
맛을 보고 나면, 그 후에는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맛을 보기 전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듯 말 듯 합니다. 그러나 경험한 사람에게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유명한 식당에 갔다 온 사람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뛰어난 셰프(chef)가 만든 요리를 먹고 와서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그들이 먹으면서 느낀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식당에 가보지 못한 사람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도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없습니다.
김치를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김치의 맛을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김치 냄새라도 맡아보았으면,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텐데, 김치를 본 적도 없고,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김치를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직접 먹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습니다.

영적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이것은 김치를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에게 김치를 설명하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설명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매우 오묘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은 압니다. 하나님을 경험한 만큼 압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맛보는 것입니다.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디베랴 바닷가에 물고기를 잡으러 간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와서 조반을 먹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21:12).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와서 조반을 먹으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제자들을 향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자신을 배반하고 도망친 자들에 대한 용서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와서 나의 사랑을 먹으라”, “나의 용서를 먹으라”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용서에 대한 책을 많이 읽고, 용서가 무엇인지 공부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용서에 대해 강연하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와서 조반을 먹으라”라고 말씀하시며 제자들로 하여금 온몸으로 용서를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라는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성품이 담겨 있습니다. “너희들은 도망가고 나를 버렸지만, 나는 너희들을 용서한다. 나는 너희들을 사랑한다. 나는 너희들을 포기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순간, 제자들은 전율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용서하시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정확하게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조반을 맛본 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은 그들의 기억 속에서 잊을 수 없는 것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주님의 성품은 제자들의 온몸을 감싸고, 그들의 영혼까지 흔들어놓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날 수 없습니다.

마지막 만찬을 들 때에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떡을 나누어주시며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6:26).
먹는 행위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먹으면 음식이 위장으로 들어갑니다. 위장에 들어간 음식이 소화되면서 영양소로 분해됩니다. 혈관을 통해 온몸으로 흘러갑니다.
마지막 만찬은 하나의 의식(儀式)이 아니라, 기독교의 핵심적인 진리가 담긴 예수 그리스도의 기막힌 퍼포먼스(performance)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단순한 이론가가 아닙니다. 심오한 진리를 알 듯 모를 듯 던지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받아서 먹으라”, “마시라”라고 말씀하시며,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본문 8절에 보면,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아는 것 이전에 맛보는 것이 선행되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단순히 아는 것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맛을 본 후에 알아야 합니다. 맛을 보지 않으면,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지식 덩어리에 불과합니다. 맛을 보지 못한 사람은 늘 추상적으로 알 뿐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말에는 ‘배운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맛을 본 후에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공부하는 것으로 여기지 마세요. 말씀을 배우셨으면, 그것을 경험하셔야 합니다.

신앙의 추상화가 오늘날 가장 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하나님의 성품이 어떠한지 경험하지 못하고, 마치 뜬구름을 잡는 것처럼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알 듯 모를 듯 모호합니다.

어떤 사람이 ‘수박이 인체와 감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인문학적 소고(小考)’라는 제목의 논문을 썼다고 합시다.
수박을 먹어본 사람 1천 명을 만나 수박을 먹어본 느낌과 먹고 난 후에 일어난 인체의 반응에 대해 조사하여 정리했습니다.
수박을 예리한 칼로 다양한 각도에서 잘라서 분석하여 두꺼운 논문을 썼다고 합시다. 다양한 기호와 도표가 첨부되고, 수박을 먹어본 사람들의 진술을 정리했습니다.
그런데 논문을 쓴 장본인은 수박을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다면, 그 사람은 수박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을까요? 이 사람은 수박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실제로 신학자들 중에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고,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연구하는 뛰어난 학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중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학자들 중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굉장히 많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목사가 있다는 것을 유럽에서는 신기한 일로 여깁니다. 성경 지리에 있어서는 전문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해 아는 바가 없습니다.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이것은 신앙의 세계에서 굉장히 중요한 특징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맛을 보고 아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맛을 보고 아는 신앙의 세계로 진입하시기 바랍니다. 맛을 알아야 합니다.

기도의 맛을 경험해야 합니다. 기도의 맛이 어떻습니까? 기도의 형태는 매우 다양합니다. 하나의 기도의 형태에 있어서도 기도의 깊이는 매우 다릅니다.
기도에 관련한 책이 얼마나 많습니까. 기도에 대한 책은 다 명저(名著)입니다. 내용이 심오합니다. 최근에 출간된 팀 켈러(Timothy Keller) 목사가 쓴 〈기도(Prayer)〉도 명저입니다.
안식의 기도에 대한 내용만으로도 어마어마합니다. 묵상의 기도가 얼마나 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쉽게 정의내릴 수 없는 것처럼, 기도의 맛은 끝이 없습니다. 신앙의 깊이는 기도의 맛과 연관 있습니다.
기도의 맛을 경험한 사람은 기도하고 싶어 합니다. 기도가 당깁니다. 식욕이 당기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의무적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은 종교적 관습에 따라 기도합니다. 새벽기도에 열심히 나오지만, 기도의 맛을 경험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관습에 따라, 직분에 따라 의무적으로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나아가는 기도를 하면 시간이 갈수록 맛이 깊어집니다. 기도의 깊이가 있고, 넓이가 있고, 높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면서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하게 됩니다.

삶의 무거운 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냥 말씀을 읽지 마시고, 말씀을 읽으면서 말씀의 맛을 느끼셔야 합니다. 말씀의 진미(眞味)를 맛보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말씀을 읽는다’는 표현보다는 ‘말씀을 맛본다’, ‘말씀을 먹는다’는 표현이 맞습니다. 말씀을 머리로 읽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계 10:9).
시편 119편에도 보면,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시 119:103).
시편 기자가 경험한 것을 사도 요한도 동일하게 경험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몸속에서 소화되어, 혈관을 타고 온 몸으로 흘러 근육이 되고, 뼈가 되고, 살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을 때, 내 영혼에 힘이 솟고, 영적 근육이 생기고, 영적 에너지가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삶의 모든 것을 이기게 합니다. 영적 작용이 내 영혼 속에서 강력하게 일어납니다.

묵상한다는 것은 소가 되새김질하는 것과 같습니다. 소의 입에는 항상 무엇인가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계속 우물거립니다. 그것이 묵상입니다.
맛없는 것을 어떻게 계속 씹어 먹을 수 있겠습니까. 묵상의 즐거움을 아는 사람은 말씀의 맛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펼치기만 해도 잠이 온다면, 그 사람은 아직 말씀의 맛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말씀에는 음미할수록 맛이 있습니다. 끝없이 우러나오는 맛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빨아먹고 곱씹고 핥아먹어야 합니다.
이전에 여러 번 묵상한 말씀이라 할지라도 다시 묵상해보세요. 이전에 경험한 맛이 아닌, 또 다른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전에 은혜를 받은 말씀이지만, 세월이 지나 다시 묵상하면, 또 다른 맛으로 다가옵니다.

시편 119편은 총 176절로, 성경에서 가장 긴 장입니다. 1절부터 176절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말합니다. 그러므로 시편 119편을 보면, 말씀의 맛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시편 119편 103절에 보면,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시편 119편 131절에 보면, “내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참맛을 경험해보셨습니까? 시편 기자들은 말씀의 강력한 맛을 다양하게 묘사했습니다.

예배의 맛을 아십니까? 예배의 맛은 깊습니다. 공적 예배든, 삶에서 드리는 예배든 예배는 찬양과 기도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시간입니다.
예배는 세상의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가장 강력한 맛을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 기름 부으심(anointing)이 있고, 하나님과의 결합이 일어나는 순간에 압도하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들어갈 때에 경험하는 즐거움은 이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배가 깊어질 때, 우리는 그 안에서 이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즐거움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배를 통해 사람마다 경험하는 맛은 제각기 다릅니다. 맛의 강도(强度)와 질도 다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최고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전율하게 됩니다.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기절할 것 같은 감격이 밀려옵니다. 예배 안에 모든 것이 있습니다.

제대로 예배를 드리고 나면, 우리의 입술에서 “충분합니다(It's enough). 더 이상 구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이대로 충분합니다.”라는 고백이 터져 나옵니다. 그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주님의 속삭임, 주님의 터치(touch), 주님의 안아주심, 주님의 호흡, 주님의 향기를 느껴야 합니다.
찬양할 때에 느낄 수도 있고, 기도할 때에 느낄 수도 있고, 묵상하는 가운데 느낄 수도 있습니다. 예배가 시작되기 전 혼자 앉아있는 동안에 느낄 수도 있습니다. 온몸으로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의 깊은 맛을 경험하면, 세상의 것에 대한 욕망이 다 사라져버립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것을 갖다 준다 해도 소용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예배만큼 강력한 것은 없습니다. 예배가 가장 최고의 자리에 있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경험은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되지 않습니다.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깊은 맛을 안다는 것은 복된 것입니다. 세상을 압도하는 영적인 맛을 찾는다는 것은 복 중의 복입니다.

저는 청소년기에 예수님을 믿고, 은혜를 받아 예수님을 만나고 십자가와 복음을 경험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예배 시간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래서 매주 앞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찬양하는 것이 좋았습니다. 특히 보혈 찬송을 부르는 것이 매우 좋았습니다. “내 주의 보혈은 정하고 정하다.”, “예수 십자가에 흘린 피로써 그대는 씻기어 있는가.”, “샘물과 같은 보혈은 주님의 피로다.” 찬송을 부르면, 너무 행복했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 매우 행복했습니다. 기독교방송을 틀어놓고 귀에 갖다 대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집회 장소가 아무리 멀어도 가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배를 통해 강렬한 맛을 경험한 사람은 심령이 가난해집니다. 맛보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상태에 빠집니다. 그래서 오직 그것만을 구합니다.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저는 예배를 통해 깊은 은혜를 경험한 적이 많습니다. 기름 부으심이 있는 예배가 어떤 것인지 압니다. 기름 부으심이 있는 예배에는 압도하는 은혜가 있습니다.

좋은 신앙인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맛을 보았기 때문에 갈망이 깊어집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본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깊어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더욱 깊이 경험하고 싶어 합니다.
다른 것에 대한 갈망은 상대적으로 점점 줄어듭니다.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점점 깊어집니다. 그래서 쉽게 만족하지 않습니다.

진짜 맛을 경험한 사람은 그 맛을 다시 찾게 되어있습니다. 초콜릿을 좋아하는 사람은 초콜릿을 늘 찾습니다.
고강도(高强度)의 맛을 경험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맛에 이미 중독(addiction)되었기 때문입니다.

갈망은 아무에게나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맛을 경험한 사람에게 갈망이 생깁니다. 진짜를 맛본 사람은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것과 대체(代替)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비교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원조곰탕집에서 우려내고 우려낸 국물을 먹은 사람이 다른 것을 먹으려 하겠습니까.

세상에 대한 갈망이 완전히 사라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배고프면 밥을 찾습니다. 때로는 세상의 좋은 것을 누리고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나를 사로잡을 수 없습니다. 더 크고 강력한 것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나를 사로잡는 것이 있습니다.
영적 갈망이 깊어져야 합니다. 맛을 찾는 영적 선호(選好)가 뚜렷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고 싶어 하는 열망이 점점 더 강해져야 합니다.

저는 한때 콜라를 좋아했습니다. 심방을 가면, 성도들이 콜라를 내놓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콜라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콜라를 아예 마시지 않습니다. 대신 탄산수(sparkling water)를 마십니다. 선호하는 것이 바뀐 것입니다.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선호하는 것이 바뀝니다. 예전에 좋아했던 것에 대해서는 시들해집니다. 하나로 집중하게 됩니다. 영적 세계에 맛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영의 세계에서 오는 진짜 맛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것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맛있는 것도 계속 먹으면 싫증납니다. 이것이 세상의 것이 가진 한계입니다. 아무리 맛있는 것이라도,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한계가 있습니다.
전에는 미칠 것처럼 좋아했는데, 어느 순간 시큰둥해집니다. 예전에 집착하고 바보처럼 좇아 다녔던 것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그것보다 강한 맛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진짜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좇아 다녔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끝없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할수록 신비롭고 새롭기 때문입니다. 풍성하고 무궁무진하기 때문입니다.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세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 22~23절에 보면,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아침마다 새로운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했습니다. 주님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오늘도 자신이 살아있음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늘 새로운 분이십니다.
10년, 20년, 30년, 50년 간 신앙생활을 했어도, 하나님이 변함없이 새로운 분으로 느껴지십니까?

신앙생활의 적신호(赤信號)는 영적 입맛이 줄어드는 것입니다. 영적 식욕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고 싶지 않습니다. 말씀을 들어도 찬양을 해도 마음이 뜨거워지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자리가 그리워지지 않습니다. 아무런 기대가 생기지 않는다면, 영적 입맛이 사라진 것입니다.

본문 10절에 보면,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젊은 사자와 여호와를 찾는 자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식욕이 왕성한 젊은 사자가 주린 상태로 있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넓은 사막에 있다 하더라도 먹잇감을 찾을 때까지 돌아다니며 주린 상태를 만족시킬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젊은 사자와 여호와를 찾는 자를 대조함으로,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들은 젊은 사자가 주린 상태에 있는 것보다 더 갈망해야 함을 우리에게 말합니다.
수동적으로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됩니다. 찾고 또 찾아야 합니다. 구하고 또 구해야 합니다.

시편 34편은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난 후에 지은 시입니다. 매우 절박한 상태였습니다.
그는 살기 위해 미친 체하며 도망다녀야 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비참한 세월을 보내며 인생의 밑바닥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아주 절박한 상태에서 오직 하나님만 절실하게 갈망하며 시편 34편을 기록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아니면, 나는 살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젊은 사자가 주린 것보다 더 주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는다면, 영적으로 병든 것입니다. 세상의 것들이 너무 좋아서 교회에 나오는 것을 시큰둥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상한 것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상한 것을 맛보았기 때문에, 영적인 것에 대한 식욕이 점점 줄어드는 것입니다. 이런 증세가 오늘날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왜 신앙의 갈등이 일어납니까? 갈등이 일어나는 요인이 무엇입니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산만(散漫)하게 합니다. 우리는 영적 집중력을 떨어뜨리는 세상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밥 먹기 전에 아이가 엄마 몰래 사탕을 먹고 나면 밥맛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밥을 열심히 먹지 않습니다.
오늘날 영적 유해 식품이 세상에 널려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맛을 잃게 만듭니다. 예배의 참맛, 말씀의 참맛, 기도의 참맛을 잃고, 세상의 맛에 점점 빠져듭니다. 우리는 아차 하면 영적 삶을 놓치고, 세상의 너저분한 것을 찾아 헤매게 됩니다.

육욕(肉慾)에 빠진 사람들은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습니다. 영적 식욕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보기에 좋고, 만족을 주는 것 같아도, 그것은 우리의 영혼을 망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세상에 가득합니다. 우선은 좋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고통이 찾아옵니다.

입을 즐겁게 하는 것을 찾으면, 성인병에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건강에 좋은 것은 맛이 없습니다. 텁텁한 밥이 건강에 좋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영적인 갈망을 잃어버리게 만들고, 우리의 시선을 분산시키고, 영적 집중력을 흩뜨려 놓는 것들이 우리 주변에 가득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여러분의 영적 입맛을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에서 신앙이 결판납니다.
영적 입맛이 24시간 살아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앞에 기꺼이 반응하십니까? 늘 하나님을 사모하십니까? 하나님에 대한 사모함이 식지 않습니까?
세상의 것들로 배부른 자가 아니라, 평생 하나님으로 인해 배부른 자로, 하나님께 굶주린 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더욱 알기 원하고, 하나님을 더욱 경험하기 원하고,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즐거이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영적 식욕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언제나 충만한 상태를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기를 원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려면, 영적 입맛이 약해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영적 구미(口味)가 당기는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며 살아가며 거기서 힘을 얻어야 합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일어나도, 영적 입맛이 살아있고,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식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영혼을 만족시켜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혼은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말씀을 잘 먹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면, 이 땅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거기서 힘이 납니다. 영적 입맛이 살아있으면 됩니다. 말씀 앞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기도하는 것을 행복해해야 합니다. 그런데 영적 식욕이 떨어지면 죽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입맛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은혜의 자리에 빠지지 않아야 합니다. 모든 것이 은혜 중심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영적 입맛이 살아있으면,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구합니다. 갈망합니다. 사모합니다. 배부를 때까지 물러서지 않습니다.

본문 10절에 보면, 다윗은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이 채워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늘 주린 자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더 알기 원하고,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기 원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또 찾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채워지면,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소원은 사라질 것입니다. 기쁨의 극치(極致)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황홀합니다. 거룩한 즐거움이 넘쳐흐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 깊이 빠져들게 됩니다. 그때 소망이 넘칠 것입니다. 살맛이 날 것입니다.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모든 좋은 것이 흘러나올 때, 우리는 그 안에서 승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더욱 깊어지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영적 입맛이 사라지지 않기를 원해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 예배에 대한 갈증이 더욱 깊어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만족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삶 전 영역에서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식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사모함이 식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책임져주실 것입니다. 그 안에서 모든 좋은 것들이 흘러넘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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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철야예배] 잘 듣는 것이 신앙의 핵심이다 Friday Night Sermon

제목 / 잘 듣는 것이 신앙의 핵심이다
본문 / 요한계시록 1:1~3

 

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신앙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본문 3절에 보면,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시편 1편에 보면, 복 있는 사람에 대해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시 1:2~3). 이를 통해 말씀과 복이 연결되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을 잘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본문에서는 말씀을 읽고, 듣고, 말씀대로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것은 마지막 시대에 우리가 붙들어야 하는 신앙의 중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잘 읽고, 듣고, 말씀대로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핵심은 ‘말씀’입니다.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잘 듣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말씀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는가에 달려있습니다. 특히 우리는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수많은 정보가 쏟아지는 시대에 우리는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이 시대의 혼란의 원인은 진리의 부재(不在)입니다. 이것은 포스트모던시대의 큰 특징입니다. 진리가 실종되었다고 말합니다.
느낌이 강조되고, 상황에 따라 이론이 바뀌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혼란의 시대에 우리는 진리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이런 시대에 누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교회에 다닌다고, 예배에 참석했다고 모두 하나님의 백성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체성의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옵니다.
누가 신자입니까? 누가 하나님의 백성입니까? 하나님의 말씀, 진리를 듣고 따라오는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과의 교제를 의미합니다. 모든 것은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신앙에서 관계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맺어지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맺어졌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 관계가 맺어진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하나님은 잘 듣는 사람과 대화하고 싶어 하십니다. 말을 듣지 않으면, 대화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교제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사무엘상 3장에 보면, 사무엘 시대에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했습니다. 왜 희귀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침묵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근원적인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끊임없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사무엘 시대에는 말씀이 희귀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어린 아이 사무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제사장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 시대가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린 아이 사무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 없으면, 하늘이 닫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 많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시대를 가리켜 ‘기근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양식이 없어서 기근인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풍성해도 말씀이 들리지 않으면, 그 시대는 기근의 시대입니다. 사막과 같습니다.
다른 소리는 듣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신앙은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잘 듣는 것이 신앙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보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행동을 하기 이전에 듣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듣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열심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열심보다 듣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듣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에서 보면, 마리아는 듣는 것을 우선시했고, 마르다는 듣는 것보다 행동, 사역을 우선시했습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원망 불평하고, 예수님으로부터 책망을 들었습니다.

듣는다는 것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귀로 듣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귀로 듣고 우리의 마음에 받습니다. 이것을 이해의 영역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듣는 것에서 깨닫는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깨닫는 단계의 다음은 순종입니다.
듣는다는 말은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단순히 듣는다는 것이 아니라, 듣고 이해하고 받아들일 뿐 아니라, 깨닫고 순종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본문에서는 읽는 것, 듣는 것, 그리고 지키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이 말씀을 요약하면, 말씀을 듣고 깨달아 순종하는 것입니다. 듣고 깨닫고 순종하는 것은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정보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아주 많은 정보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하루에도 수많은 정보가 온라인, 오프라인으로 우리에게 밀고 들어옵니다. 우리는 정보의 홍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의 특징은
첫째, 정보가 너무 많기 때문에 대충 흘려듣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모든 정보에 집중할 수 있겠습니까. 듣지만 너무 많기 때문에 집중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충 읽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둘째, 무관심입니다.
너무 많은 정보가 쏟아지기 때문에 일일이 신경 쓸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반응하지 않습니다.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다 반응하면 병납니다.
그래서 이 시대 사람들은 듣지만 듣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고 있지만 사실은 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관심을 가져야 온전히 들을 수 있는데, 관심이 없기 때문에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정보화 시대의 특징입니다. 자기가 관심이 있는 것만 들으려고 합니다. 들어도 깊이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아는 것은 많지만, 가볍게 알고 있습니다. 아는 것은 많은데, 깊이가 없습니다.
돈이 되는 정보에만 귀 기울이고, 돈이 되지 않는 이야기에는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들려오는 수많은 정보에 무관심해져서 마침내 무지해집니다.
현대인들은 듣는 것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제대로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듣기는 들어도 흘려듣습니다.

인터넷에 들어가면, 수많은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한국의 교회 뿐 아니라, 미국과 전 세계 교회의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좋은 설교만 골라 들으시기 바랍니다. 많은 설교를 듣다 보면, 나중에는 설교를 음악 듣듯이 듣게 됩니다.
진리에 대해 깊이 경청(傾聽)하는 태도를 가질 수 없습니다. 마치 음악을 듣듯이 듣고 지나가버립니다. 설교를 들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이려는 태도를 가질 수 없습니다. 설교를 많이 듣지만, 가볍게 듣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진리에 대해 무관심하고 무지하여, 진리를 소홀히 여기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앙은 듣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냥 듣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경청하는 것입니다. 경청하는 사람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문제를 일으키는 성도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은 듣는 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은 잘 듣지 못합니다.

믿음은 듣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핵심은 듣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는 들음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첫째, 들음을 통해 믿음이 자랍니다.
듣는 것을 통해 변화가 일어납니다. 듣는 것을 통해 우리 안에 부흥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들어야 합니까? 듣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기독교는 스스로 도를 깨치는 종교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 무엇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혼자서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 안에서는 선한 것이 나오지 않습니다.

데카르트(René Descartes)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철학의 명제입니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생각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생각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하기 전에 우리의 생각보다 먼저 존재한 것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우월하게 여기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아무리 심오한 사상을 이야기한다 해도 그것은 불완전한 것이고, 그것을 의존하여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세계 안에서 무엇인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면, 메아리만 칠 뿐입니다. 우리는 질문에 스스로 대답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생각이나 사상(思想)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계시(啓示)의 종교’라고 합니다.
계시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는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바깥에서 우리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성경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믿음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믿음은 자가 생산되는 것이 아닙니다. 타의(他意)에 의해 수여(受與)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리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라고 합니다.
믿음은 내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의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나의 밖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시면, 나는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려고 해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셔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간다고 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편에서 어떻게 하시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종교적 열심을 낸다 해도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주시지 않으시면, 우리의 열심은 아무 소용없습니다. 우리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노력 이전에 하나님께서 이루어놓으신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만들어내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완전하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행위입니다.

신앙생활은 우리가 무언가를 쥐어짜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에 귀 기울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의 열정으로, 우리의 노력으로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위로부터 부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는 선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완전하신 하나님이 주시는 완전하신 말씀을 내가 받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들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행위는 듣는 것입니다.
들어야 합니다. 믿음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깥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들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똑똑하고 내게 지혜가 있어서 의미를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셔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기도는 듣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에서의 기도는 전투적인 면이 있습니다. 주먹을 불끈 쥐고, 주여 삼창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지 않으면 온전한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초신자들은 기도하려고 해도 기도가 잘 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씀을 별로 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이 기도를 잘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말씀을 많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들은 말씀에 반응하기 때문에 기도를 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초신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니까 기도하려고 해도 하나님께 할 말이 없습니다. 들은 말씀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처음에 말을 배울 때에는 말이 되지 않는 말을 마구 합니다. 그런데 엄마로부터 끊임없이 말을 들은 아이가 말을 잘합니다.
엄마가 아이에게 말을 별로 하지 않으면, 아이도 말을 쉽게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엄마들은 아이에게 본능적으로 말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잘 듣지 못하면, 우리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 기도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생활을 통해 말씀을 듣지 못하면, 자아 중심적 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지 않고 기도생활을 하시는 분들은 세월이 흐르고 나면 고집이 세어집니다. 자기중심적으로 기도해왔기 때문에 자기 고집을 강화(强化)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자아중심의 신앙으로 변질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일방통행이 되어버립니다.
성경에서 내가 원하는 하나님을 찾아낼 수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하나님은 성경 속에 계시지 않습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러려면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잘 듣지 않고 신앙생활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초입(初入)에서부터 듣는 훈련을 잘 받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가 매우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에 잘못 배워서 신앙생활의 틀이 잘못 잡히면, 잘못된 틀이 계속 이어집니다.

우리는 철저히 하나님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편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께 반응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핵심은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런데 듣는 것이 훈련되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잘 들으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듣지 않고 자신이 하나님께 하고 싶은 말로 하나님을 설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면, 아무리 오랫동안 기도해도 응답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보다는 자기가 하나님께 말하려 하고, 자기주장과 자기 고집이 강화되면, 변화될 수 없습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기도를 강조합니다. 그런데 윤리성은 많이 떨어져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윤리적인 면에 있어서는 세계 교회 가운데 떨어집니다. 그래서 위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면, 자신의 소리를 죽여야 합니다. 기도나 묵상의 핵심은 듣는 데에 있습니다. 듣는 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응답이 무엇입니까? 기도응답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물론 눈에 띄게 응답 받는 것도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기도에 응답 받는 것을 별다르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기도 응답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시면, 응답 받았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응답인지 아닌지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기도 응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면, 온전한 응답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삶에 실제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도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응답입니다.

성경을 볼 때에도 자신이 찾고자 하는 말씀이나 자신이 원하는 말씀을 읽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고 듣고, 말씀에 순종하는 과정에서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말씀을 들었는데, 왜 순종할 수 없습니까? 말씀을 듣는 과정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순종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을 잘 들으면,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시려는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큐티를 오랫동안 하신 분들은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큐티를 오랫동안 하다 보면, 본문을 여러 번 접하게 됩니다. 처음에 본문을 접했을 때에 줄을 그어놓은 말씀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러면 오늘 이 순간 성령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데에 방해가 됩니다.

우리 안에 욕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 강한 필요가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상황이 어려우면,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귀 기울이지 못합니다.
자신이 듣고 싶어 하는 것을 들으려고 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자꾸 자신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중심적으로 꼬아버립니다.

기도는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의 순종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다 보면, 처음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그러나 계속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부응하고, 하나님의 음성에 반응할 때, 우리에게 평안이 찾아옵니다.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은 “기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응답하시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응답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응답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오늘날은 우리의 욕망을 부채질하는 것이 많습니다. 가지고 싶은 것이 많고, 우리를 유혹하는 것이 굉장히 많습니다.
주일에 우리가 은혜를 받고,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지만, 우리의 욕망이 온전히 처리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 속에서 죄성이 계속해서 작용합니다. 우리의 환경 가운데 우리를 유혹하는 것이 굉장히 많습니다.

현대인들은 원하다, 갖다, 하다 이 세 가지 동사에 집중한다고 합니다. 현대인들은 탐하고 움켜쥐느라 안식을 모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듣기 위해 집중해야 합니다.

말씀이 들려야 신앙생활이 시작됩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들리는 그때부터 신앙생활이 출발합니다.
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말씀을 듣지 못했다면, 신앙생활은 불완전한 것이고, 앞길이 어둡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자 한다면, 그리고 말씀이 들린다면, 하나님은 그 말씀을 통해 우리를 어디론가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1:15, 눅 8:8). 요한계시록에서도 예수님은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향해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계 2:7,11,17,29, 3:6,13,22).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다는 것을 무엇을 통해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듣는 것에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관계가 깨어지면,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에 상대방의 말이 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든지 상대방이 말한 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곡해(曲解)하려고 합니다.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듣는 것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합니다.
듣고 또 듣는 가운데 믿음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많이 들어야 합니다. 많이 들을수록 좋습니다. 들음의 위력은 대단합니다.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듣고 또 듣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태도를 가질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聽從)하려는 자와 대화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쓸데없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느라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것을 듣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아주 많은 소음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비난 등에 시달립니다. 듣지 않아도 될 것을 들으며 살아갑니다. 쓸데없는 것에 관심을 갖습니다.
남들이 좋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잘 듣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는 귀 기울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많이 듣고 있습니까? 사람들의 소리를 많이 듣습니까? 사람들의 소리, 잡다한 소문, 인터넷 뉴스 등 어떤 것에 귀를 기울이십니까?

요즘 사람들은 무언가를 듣지 않으면, 견디지 못합니다. 운전할 때에도 무언가를 듣습니다. 걸으면서도 무언가를 듣습니다.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물론 좋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소리를 단절하고, 하나님의 말씀에만 주목하고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듣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들음에 문제가 생기면, 우리의 신앙은 깨어지고, 우리의 삶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기를 바랍니다. 듣는 일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듣는 것에 문제가 생기면, 우리의 신앙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므로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둘째, 들음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듣다 보면, 우리에게 깨달음이 일어납니다.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진리가 들릴 때, 진리가 들렸다는 것이 깨달음으로 나타납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깨달아지지 않으면, 단순히 정보(information)밖에 남지 않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듣는 과정 속에서 우리에게 깨달음이 일어납니다. 깨달음은 우리의 존재를 흔들어놓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관통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지식체계와 관념을 흔들어놓습니다. 새로운 영적 질서를 세웁니다. 그래서 영혼에 빛이 임하게 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머리가 시원해집니다. 고민이 많아 복잡하고 어지럽고 정신없던 머리가 시원해집니다. 어둠의 세계에 빛이 임한 것입니다. 진리를 통해 빛이 임한 것입니다.
때로는 몸에도 이상 증세가 나타납니다. 몸에 열이 납니다. 특이한 현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삶을 누르던 것들이 벗겨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진리가 속에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무거운 짐들이 벗겨지고, 어둠이 사라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영혼의 찌꺼기가 사라지면서 웅크리고 있던 것들이 기지개를 펴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렇게 되면 신이 납니다. 기쁨이 생깁니다. 염려와 근심이 사라집니다.

아직 깨달음이 없다면, 말씀을 온전히 들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깨달음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사건을 일으킵니다.
시편 49편 20절에 보면,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깨달음을 통해 우리에게 지혜가 생깁니다. 깨닫는 순간, 우리에게 지혜가 생깁니다. 인생의 답을 얻게 됩니다.

잠언에 보면, 솔로몬이 아들에게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라고 말했습니다(잠 4:20).
듣고 깨달은 것을 통해 지혜를 얻게 됩니다. 우리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 가운데, 우리도 모르게 지혜로워집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오래하신 분들의 말씀에는 지혜가 있습니다. 이것은 학교에서 터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하신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분들의 이야기는 깨달음을 통해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지식적으로 주워 담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혜’라는 말 속에는 ‘듣는다’라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잘 듣는 사람은 지혜자입니다. 듣는 과정을 통해 깨달은 것이 삶에서 지혜의 세계의 문을 열어놓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는 세상의 이치가 들어있습니다. 이 세상과 우주가 돌아가는 원리가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습니다.
신구약성경 66권은 그냥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원저자(原著者)는 한 분이시지만, 수많은 기록자들에 의해 기록된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일치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은 지혜로 충만합니다.
지혜는 어디로부터 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데서 옵니다.

돈을 가지고 있어도 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망합니까? 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혜는 우리의 삶을 생명의 길로 이끌어갑니다.
지혜의 근본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말씀을 읽고 깨닫는 가운데, 지혜는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영생의 길로, 생명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망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많은 것을 생각하고, 책을 많이 읽어서 지혜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듣고 깨달으면, 복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시편 1편에서 시편 기자는 복 있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말했습니다(시 1:2~3).

지혜가 없으면, 헛되고 미련한 짓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헛된 삶을 청산하는 길은 지혜를 얻는 것이고, 지혜를 얻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
깨달음은 듣는 것에서부터 옵니다. 잘 듣는 사람은 깨닫게 되어있습니다. 지혜를 얻게 되어있습니다.

깨달음을 통해 힘이 생깁니다. 깨닫는 것이 힘이 됩니다. 듣는 것이 모두 힘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깨닫는 것이 힘이 됩니다.
저는 목회를 하고, 설교를 많이 하지만, 제가 깨달은 말씀이 제 인생을 붙들고, 다른 말씀과 연결되어져서 제게 힘이 됩니다. 그것이 제게 힘입니다. 진리의 힘이 곧 깨달음의 힘입니다.

깨달음이 오기까지는 진리가 내 것이 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가 우리의 영혼을 뚫고 들어오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온전한 깨달음이 우리의 영혼을 흔들어놓습니다. 깨닫는 순간, 우리의 삶에 힘이 됩니다.
깨달음이 많이 쌓인 사람을 우리는 고수(高手)라고 합니다. 지식이 많은 사람을 고수라고 하지 않습니다. 깨달음이 쌓이면, 강력한 인생이 됩니다. 깨달은 진리가 나를 사로잡고 있기 때문에 진리의 힘이 나로 하여금 이기게 합니다.
깨달음이 주는 힘은 강력합니다. 삶의 환경이 아무리 어려워도 깨달은 진리가 나를 감싸고 있기 때문에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게 합니다.

깨달음을 통해 기쁨이 생깁니다. 여러분은 무엇에서 기쁨을 구하십니까? 진리를 통해 기쁨을 얻어야 합니다.
나이, 환경과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리는 기쁨은 진리를 통해 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진리를 깨달으면, 다른 것과는 비교되지 않는, 깊은 곳에서 기쁨이 솟아납니다. 우리의 영혼에서 기쁨이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죽으나 사나 말씀을 붙들게 됩니다.

말씀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통해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알아가고, 참된 진리를 알게 됩니다.
말씀에 대한 기쁨은 하나님에 대한 기쁨과 같습니다. 뚜렷하게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의 무질서와 혼란을 한순간에 잠재울 수 있습니다. 말씀이 말씀으로 들릴 때에 기쁨이 오고, 평화가 넘치게 됩니다.

듣는다는 것은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깨닫는 것입니다. 깨달은 것을 순종으로 온전히 옮길 때에 우리가 들은 것이 완성됩니다.
순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순종의 단계까지 나아가야 온전하게 들은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한 마디로 “청종하면 살리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코 복잡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우리가 설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완벽하게 디자인하신 것을 우리가 읽고, 그대로 가는 것입니다. 그 과정이 듣는 것이고, 깨닫는 것이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순종하지 않으면, 아직 들은 것이 아닙니다.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복잡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순종하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의 내용 중에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성경은 어렵게 써놓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을 때에 순종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읽으면, 성경의 내용이 쉽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을 가지고 자기를 합리화하려고 합니다. 자기만의 주석을 붙입니다. 자기 이론을 만들어냅니다. 말씀을 액면 그대로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누가 좋은 신자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불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습니다. 관심이 없는데 말씀대로 살고 싶겠습니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순종할 때에 진정한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순종을 무겁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순종하는 것을 힘들고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의무감으로 순종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순종은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순종하는 것이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제레미 테일러(Jeremy Taylor) 선교사는 “나는 한 번도 희생해본 적이 없다.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내 안에 있기 때문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기쁨의 세계 안에 있기 때문에, 주님을 위해서 했던 어떤 것도 의무감으로 힘들게 희생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얼마나 멋집니까.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나를 감싸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복음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누리는 은혜입니다.

듣고 깨달은 후에 자연스럽게 순종으로 이어지는 삶을 통해 축복을 받게 됩니다. 말씀에 귀 기울이고, 말씀을 통해 깨달음이 올 때에 우리는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백부장이 가진 믿음을 갖게 됩니다.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백부장은 이방인으로서 예수님으로부터 가장 기막힌 칭찬을 들은 사람입니다. 백부장의 믿음이 어떠했기에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 8:10)라고 칭찬하셨습니까?
백부장은 예수님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마 8:8).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말씀대로 순종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백부장은 주님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의 위력이 어떠한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백부장은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에 능력이 있음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완전한 순종의 태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눈에 백부장이 얼마나 예쁘게 보였을까요. 얼마나 사랑스러웠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라고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만을 바랐습니다. 다른 것은 전혀 바라지 않았습니다. 오직 한 가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백부장은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지금의 상황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렵고,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아도,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가 떨어지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는 것을 믿을 때, 그 믿음은 경지에 오른 믿음입니다.

삶이 힘들어지면, 우리는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때로는 사람들의 도움을 간절히 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고, 그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우리가 믿기 때문입니다.

백부장이 예수님께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라고 말한 것이 왜 귀합니까? 그것은 단순히 듣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 말씀하신 대로 움직이겠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고 깨달은 자의 태도입니다.
나에게 죽으라고 말씀하시면 죽을 것이고, 포기하라고 하시면 포기할 것이고, 무엇이든 말씀하시는 대로 순종하겠다는 의미입니다. 나의 이해(利害)와 상관없이, 내가 처한 상황과 상관없이 순종하겠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순종했을 때에 내가 기대한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주님의 말씀은 옳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백부장의 한 마디의 말에는 믿음이 무엇인지, 순종이 무엇인지 내포되어있습니다. 여기서는 소극적인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가장 적극적인 순종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온전히 이해하고,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면, 순종하는 것은 쉽습니다. 순종이 어려운 이유는 진리가 나의 영혼을 관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순종이 멀게 느껴집니다.
말씀의 능력을 아는 사람은 순종하고 싶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망이 깊어집니다.
인생에서 가장 힘든 순간은 지금 눈앞에 벌어진 외적 상황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을 때가 가장 위기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묵상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과의 교제가 깊어지면,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시간이 갈수록 하나님의 음성을 더 잘 듣게 되고, 빨리 깨닫게 되고, 순종으로 옮기고 싶어집니다.
작은 음성에도 귀 기울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소음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소음과 전쟁하고 있습니다. 소음에 시달리며 살아갑니다.
수많은 정보가 쏟아져서 우리의 영혼을 피곤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듣지 못하게 유혹하는 문화로 가득합니다.
우리는 소음과의 전쟁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방해하는 소음을 어떻게 차단하고 살아갈 것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의 시선과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가는 것이 많습니다. 유튜브(Youtube)에서도 사람들을 유혹하는 것이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을 드나듭니다. 인터넷에 들어가면, 1시간이 금방 지나갑니다.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집중력을 깨어버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가볍고 짜릿한 정보에만 익숙해져서 하나님의 진리 앞에 기다리지 못합니다.

소음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차단기 역할을 합니다. 그대로 두면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수 없습니다. 치열하게 노력해야 합니다.
아차 하는 순간, 우리는 세상의 잡다한 것들에 우리의 시선을 빼앗기고,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게 됩니다. 우리의 집중력이 깨어져버립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 보는 것을 조심하세요. 우리는 늘 무엇인가 보아야 하고, 무엇인가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우리의 영적 집중력을 얼마나 떨어뜨리는가를 유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적 감각을 소멸시키고, 영적 활성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로부터 우리의 영혼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세상의 잡다한 일을 미주알고주알 다 알려고 하고, 세상의 일에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지 마세요. 범죄 기사(記事)들은 보지 마세요. 영혼에 해(害)가 됩니다. 그런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 거룩한 무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의 영혼이 풍성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세상에 대해 차단 기능을 작동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교신(交信)에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의 영은 매우 예민하기 때문에 세상의 것에 오염되기 쉽고, 영향을 받기 쉽습니다. 자칫하면 어둠의 영이 우리 속에 밀고 들어올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영혼의 뜰을 관리해야 합니다. 영혼의 정원을 가꾸어야 합니다. 지극정성으로 가꾸어야 합니다.

오늘날 옥토는 어떤 곳일까요? 세상에서 들려오는 소음으로부터 보호받는 마음 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의 씨앗이 뿌려진다고 해서 그냥 열매가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잘 준비된 영혼에 말씀이 뿌려질 때, 열매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느냐 들리지 않느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지금 내가 어떤 형편에 처해 있든지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다면, 문제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면 길이 열리고, 삶의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머리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진리의 영이 우리를 도우셔서 진리의 빛을 우리에게 비춰주심으로 우리의 영혼을 밝혀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셔야 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나 성경을 읽을 때나 공부할 때나 언제나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셔야 합니다. “성령이여, 깨닫게 하소서. 성령이여, 진리를 밝혀주소서. 성령이여, 도우소서. 진리를 열어주소서. 진리가 들리게 해주소서. 진리를 깨닫게 해주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암송하고 공부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주님과 시간을 가지면서 말씀을 많이 읽고, 암송하고, 공부하고, 말씀을 묵상하는 습관을 가지세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꽉 차 있어야 합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에도 우리 안에 꽉 차 있는 말씀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말씀이 많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나에게 말씀하시고 싶어 하시는데, 내 안에 말씀이 별로 들어있지 않다면, 성령께서 난감하실 것입니다. 일상 속에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실 때는 내가 아는 말씀으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말하고 싶어 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에게 말씀하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은 날마다 입을 여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우리가 잘 들을 수 있도록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채워지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많이 읽으시기 바랍니다. 평소에 말씀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계속해서 읽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순종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말씀하시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사람에게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단순히 지적 호기심을 가지고 말씀을 읽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아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성경을 읽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백성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우리는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넘어지고 또 넘어지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제대로 살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나는 안 되구나.’라고 생각하고, 포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매우 연약합니다. 그러나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말씀 앞에 다시 서면, 주님께서 우리를 말씀 가운데 다시 일으켜 세워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매우 연약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 순종하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우리의 최종 승리는 하나님의 편에서 결정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말씀이 비로소 말씀이 됩니다. 말씀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 능력이구나. 축복이구나. 생명이구나.’라고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순종하는 자가 복을 받습니다.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이 복이 됩니다. 실천하는 단계까지 나아가는 것이 복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말씀을 듣고 깨닫고, 말씀대로 순종하는 과정에서 믿음이 자라고,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에게 임할 줄 믿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상황이나 형편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는 훈련을 하므로 승리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사무엘상 3장 10절에 보면, 사무엘이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8장의 백부장의 믿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합니다. 말씀을 듣는 것보다 우선되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계속 말씀을 듣고 있다면, 결코 길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영적으로 계속 성장하고 강해질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게 할 것이고, 승리의 삶을 살게 할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깨닫고 순종하는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인생을 당할 자가 없을 것입니다. 말씀에 귀 기울이고, 말씀을 붙잡고, 말씀을 따라가면, 당할 자가 없습니다.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모든 질서를 잡아줄 것입니다. 모든 것을 회복시켜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것보다 우선되는 것은 없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말씀이 가장 우선되는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야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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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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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철야예배설교] 풍성한 삶 가능한가 Friday Night Sermon

제목 / 소비사회, 풍성한 삶 가능한가
본문 / 마태복음 6:24~34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오늘날 우리 사회를 ‘소비사회’라고 합니다. 몇 주 전에 중독에 대해 설교한 바 있는데, 소비사회와 중독은 서로 통합니다.
소비사회가 중독을 낳았습니다. 소비사회에 빠져들어가면, 중독 상태가 됩니다. 소비하게 하는 문화 안에서 중독은 꽃을 피웁니다. 소비를 조장하는 곳을 따라가다 보면, 중독되기 쉽습니다.

소비사회에서는 소비하는 것이 미덕(美德)입니다. 사실 소비해야 경제가 움직입니다. 경제가 움직이려면, 소비해야 합니다.
월급을 받았다면, 가만히 가지고 있으면 안 됩니다. 써야 합니다. 일을 많이 하기 때문에 월급을 받지만, 월급을 받는 이유는 열심히 소비하라는 것입니다. 소비해야 회사가 움직이고, 회사가 움직여야 경제가 움직이고, 경제가 움직여야 국가가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소비사회에서 가장 나쁜 행위는 소비하지 않는 것입니다. 돈을 쓰지 않는 것입니다. 소비해야 세상이 움직이게 되어있습니다. 소비하지 않으면, 경제가 멈추어버립니다.
때로는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돈을 풀어서 국민들로 하여금 돈을 쓰게 만듭니다. 돈이 회전되지 않으면, 경제가 막혀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국가에서 국민들로 하여금 돈을 쓰도록 만듭니다.

사람들이 돈을 버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소비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이 돈을 더 많이 벌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더 많은 것을 구입하고, 소비하기 위해서입니다.
소비사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돈을 벌면, 그 돈을 써야 할 곳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돈을 아무리 벌어도 쓰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돈이 생기면, 돈을 써야 할 곳이 반드시 생깁니다.

광고가 강렬하게 우리를 유혹합니다. 때로는 굉장히 폭력적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광고에 노출됩니다.
거리를 지나가다 보면, 거대한 네온사인이 번쩍번쩍합니다. 높은 빌딩에서 액정TV를 통해 화려하게 광고합니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도 광고가 붙어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눈을 둘 곳이 없어 광고를 수없이 보게 됩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외울 지경이 됩니다. 버스, 지하철, 택시, 심지어 전봇대에도 광고가 붙어있습니다.
우리는 하루에 3천 번 이상 광고에 노출된다고 합니다. 무슨 재주로 이것을 이겨낼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세상 속에서 계속해서 세뇌당하고 있습니다. 보험광고를 보면, 당장 가입해야 할 것 같습니다. 건강과 관련된 상품광고를 보면, 그것을 구입하지 않으면, 병에 걸릴 것 같습니다.

소비사회는 우리에게 염려하도록 계속해서 다그칩니다. 세상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걱정을 멈추지 못하게 합니다. 좀 더 행복해지고, 안전한 삶을 살려면, 돈을 더 벌어야 할 것 같습니다. 여러 가지를 좇도록 우리를 부추깁니다.
광고는 우리에게 ‘당신은 지금 충분하지 않습니다.’라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우리에게 무언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게 합니다. 그래서 잠시도 쉬지 못하게 합니다.

요즘 광고는 과시적 소비를 부추깁니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보이려고 소비하게 합니다. 어떤 물건을 통해 우리의 정체성(正體性)을 드러내게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굉장히 불안합니다. 자신이 소유한 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려고 하면,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소비사회에서는 필요하지 않은 것까지 구입하도록 압력을 가합니다. 그러므로 소비사회에서는 만족이 불가능합니다. 좋아하는 것을 가졌다 해도 더 좋은 것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소비사회는 끝없이 비교하는 문화를 조장합니다. 나만 좋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보다 나아야 직성이 풀립니다. 억만장자라 해도 또 다른 억만장자를 따라잡으려면, 멈출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소비사회는 끊임없이 비교하게 만듭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요트(yacht)가 있습니다. 사우디 왕가(王家)에서 보유 중인 147m의 호화 요트가 있습니다. 요트가 147m라면, 요트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두바이 국왕(國王)이 그것보다 더 큰 160m의 요트를 제작 중이라고 합니다. 147m보다 13m 더 긴 요트를 제작 중입니다.
그런데 러시아의 부호(富豪)가 그것보다 더 큰 요트를 제작 중인데, 길이를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길이를 공개하면, 누군가가 더 큰 것을 만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독일이 통일된 이후, 동독에 살던 가난한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나아졌습니다. 통일되기 전, 동독은 찢어지게 가난했습니다. 그런데 통일 이후 서독에서 많이 나누어주고, 서로 왕래하면서 동독이 경제적으로 나아졌습니다.
그런데 동독 사람들의 만족도는 이전보다 떨어졌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서독 사람들과 비교되기 때문입니다.
직장에 취직했어도 동독은 공산권 속에 있었기 때문에 숙련공이 없습니다. 모든 면에서 미숙하다 보니 임금을 적게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통일 이전보다는 많이 받지만, 서독 사람들과 비교되니까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끼고, 만족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오늘날 세상의 문화는 우리로 하여금 잠시도 쉬지 못하게 하고, 갈수록 가난하게 만듭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저는 필리핀의 빈민가를 돌면서 ‘어쩌면 이렇게 못 살 수 있나, 이렇게 찢어지게 가난할 수 있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일행 중에 탈북한 자매가 있었는데, 이들에 비하면 북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절대 빈곤층이 있지만, 필리핀의 빈민들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방글라데시보다, 필리핀보다 행복지수가 낮습니다.

소비사회는 아무리 가져도 불행하게 만듭니다. 늘 불만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피곤합니다. 늘 무언가에 쫓깁니다. 염려하고 좌절하고 낙심하고 상대적 빈곤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소비사회에 끌려다니다 보면, 아무리 벌어도 가난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궁핍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는 고성장시대에 있지 않습니다. 저성장시대에 있습니다. 고성장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초고속으로 성장하던 시대에는 검은 돈도 있고, 눈먼 돈도 있고, 갑자기 떼부자가 된 사람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것이 없습니다.
지금은 저성장시대입니다. 고속으로 성장할 때에는 갑자기 돈이 생기고, 부동산가도 폭등하는 등 별 일이 다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요즘은 일부러 전세로 사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삶의 방식(pattern)이 과거와 달라졌습니다. 지금은 소비가 조장되어 마음껏 소비하는 시대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삶의 태도가 바뀌어야 합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우리의 삶을 정리해야 합니다. 우리는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그 정도면 만족할 만한데, 본인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만족을 느끼지 못합니다. 상대적 빈곤을 느낍니다. 이렇게 되면, 가난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는가’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부요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풍성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점점 가난하고, 궁핍하고, 염려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우리에게 주님은 ‘어떻게 하면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는가’를 말씀하십니다.
첫째, 주님의 말씀을 확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소비주의 사회에 기막힌 답을 제시합니다. 소비주의 세상에서 승리하는 길을 정확하게 가르쳐줍니다.
본문 31~3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방인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이 세 가지로 압축됩니다.

TV를 보면,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과 관련한 프로그램과 광고로 가득합니다. 세상은 여기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이 세 가지에 올인(all in)합니다. 이것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그런데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이 세 가지가 결코 간단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에만 관심을 두어도 끝이 없습니다. 그냥 먹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단순히 먹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소비주의 세상에서는 먹는 것이 기업 마케팅과 연결되어 우리에게 수많은 선택을 요구합니다.
소비에 대한 유혹은 끝없습니다. 소비를 따라가면, 돈이 필요합니다. 돈은 아무리 벌어도 모자랍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염려는 이방인들이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이방인들은 염려합니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 꽂혀있으면, 염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트레이드마크(trademark)는 염려, 불안, 걱정, 두려움, 공포 등입니다.

우리는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며 ‘이것은 2천 년 전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니 오늘날과는 맞지 않다.’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오늘날 우리의 삶의 괴리가 매우 큽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지만, 말씀을 적당히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목사님, 어떻게 염려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까? 먹지 않고, 마시지 않고, 입지 않고 어떻게 살아갈 수 있습니까?”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는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는 강력한 소비문화가 우리의 영혼을 흔들어버립니다.
소비문화로 뒤덮인 이 세상에서 끊임없이 비교를 부추기며 우리 안에 있는 욕망에 불을 지르는 문화 속으로 들어가 버리면, 2천 년 전의 말씀을 오늘 우리 안에 적용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내 차보다 더 좋은 차를 보면서 마음이 흔들립니다.
그래서 ‘목사님의 설교는 훌륭한데, 목사님은 현실을 이해하시지 못하시는 것 같아. 말씀은 좋지만, 말씀대로 사는 것은 무리야.’라고 생각하며, 우리 마음대로 적용해버립니다. 각자 자기 나름대로 성경의 주석을 달기 시작합니다. 성경의 부록을 자기 스스로 만듭니다. 말씀을 말씀대로 받지 않는 태도가 우리 안에 아주 교묘하게 숨어있습니다.

주님은 본문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본문의 말씀대로 지키면, 전혀 염려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약속하십니다.
본문의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굉음(轟音)을 울리며 여러분들을 흔들어놓기를 바랍니다.

지금 우리는 거대한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왜 진리를 추구하려고 합니까? 무엇이 진리입니까? 시대가 지나도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를 믿습니다.
진리가 한 시대에는 멋지게 적용되고 타당한 원리였지만, 시대가 바뀜에 따라 또 다른 진리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그것을 왜 믿겠습니까. 시대가 바뀌어도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변함이 없습니다. 수천 년이 흘러도 하나님의 진리는 변함없이 우리에게 진리입니다. 정확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타협할 수 없는, 우리의 삶의 절대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현실성이 떨어지는 말씀이 아닙니다. 수학문제가 풀리지 않는다고 공식을 바꿉니까? 수학문제는 공식에 따라 풀어야 합니다. 성경의 진리는 우리의 삶에 정확한 해답이 됩니다. 여기서 한 치도 물러서면 안 됩니다.

만일 우리가 말씀을 적당히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우리의 인생은 미궁에 빠집니다. 가장 위험한 삶은 말씀을 말씀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고 적용하려는 것입니다.
문화가 주는 메시지를 삶의 기준으로 삼지 마세요. 상황을 가지고 말씀을 해석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세상의 문화와 상황을 해석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상황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려 합니다. 그것은 넌센스(nonsense)입니다.

본문은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5~7장은 2천 년 전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유효(有效)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삶의 진리로 붙들면, 이방인과 같이 염려하지 않아도 멋지고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삶이 힘들어지면, 우리는 말씀을 고쳐서 우리의 상황에 맞게 적용하려고 합니다. ‘이 말씀은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무리야.’라고 생각하며 타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삶이 힘들어지고 어려워질수록 우리는 진리의 말씀에 더 접근해야 하고, 더 집중해야 합니다. 힘들수록 말씀에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이 꼬여있고, 여러분의 삶에 문제가 있다면, 말씀에 더 가까이 다가가시기 바랍니다. 타협하며 적당히 애매모호하게 말씀을 붙잡았다면, 다시 확실하게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그때 문제로부터 빠져나오게 될 것입니다. 현실이 아무리 어려워도 상황에 밀리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진리가 주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진리는 우리의 삶이 엉망이 되고, 무질서해지고, 혼란에 빠질 때, 우리를 건져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우리는 진리를 붙잡아야 합니다.
진리가 없다면, 우리는 길을 잃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대로 살기만 하면, 우리는 염려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른 삶을 살면서도 만족하고, 풍성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 초점을 맞춘 삶에서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소비주의의 삶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 초점이 맞추어져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초점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두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의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본문은 세상과 동떨어진 삶을 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먹지 말라, 마시지 말라, 입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소비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소비하지 않고 어떻게 살 수 있습니까. 우리는 돈을 벌고, 돈을 써야 합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지, 그런 것은 필요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시험을 받으실 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4:4). 이 말씀은 사람에게 떡도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모두는 사막의 수도사(修道士)가 될 수 없습니다. 금욕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금욕주의자가 된다면,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금욕주의자가 된다면, 전도할 수 있겠습니까.

본문의 말씀은 주님께서 특별한 사람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선순위를 강조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선순위가 잡힌 삶입니다. 우선순위가 잡힐 때, 우리의 삶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삶의 태도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왜 염려가 생깁니까? 염려의 원인을 알아야 합니다. 염려가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에 집중할 때 염려하게 됩니다.
여러 가지에 집착할 때, 마음이 깨어지면서 염려가 찾아옵니다. 여러 가지를 좇다 보면, 마음이 짓눌립니다. 마음이 짓눌리므로 염려가 찾아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라는 생각은 반드시 염려를 불러옵니다.

그러나 우선순위가 분명해지면,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본문 3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삶의 태도를 바꾸라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초점을 세상에 두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에 두라는 의미입니다. 삶의 태도와 관점을 바꾸는 순간, 우리의 삶이 풍성해진다는 의미입니다.

소비중심의 문화에서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으로 우리의 고개를 돌리는 순간, 하나님은 우리에게 풍성한 삶을 약속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의식주에 우리의 눈길을 두는 순간, 우리는 가난해지고, 염려에 빠질 것입니다.
소비하는 것에 관심을 돌리는 순간, 우리는 우리에게 없는 것이 많다는 사실로 인해 낙심하게 되고, 불행해집니다. 소비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면, 낙심하게 되고, 불행해집니다. 소비에 관심을 두면, 우리에게 없는 것이 생각납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세상 문화의 간섭과 통치를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간섭과 통치를 받는 순간, 우리의 삶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풍성해집니다.

좋은 집을 갖는 것이 나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전도하고, 선교사님을 접대하는 등주님의 일을 위해 자신의 집을 활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집의 크기가 삶의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이 삶의 목표여야 합니다. 자기 혼자 만족하려고 더 좋은 것을 구하는 것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처럼 계속해서 갈증만 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의 태도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을 때, 하나님의 인도와 공급을 경험하며 살게 됩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염려하지 말라고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왜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주님께서 염려하지 말라고 거듭 말씀하신 것은 ‘네 인생은 내가 책임진다.’는 의미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네 인생은 내가 책임진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 하나님이 우리의 입을 것, 먹을 것, 마실 것을 책임져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삶의 공급을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소비주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무엇을 할 때마다 하나님께 여쭈어보는 태도를 가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의 결재 없이 우리 마음대로 물질을 사용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돈의 주인은 내가 아닙니다. 돈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마치 내가 돈의 주인인 것처럼 돈을 사용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는다면, 누구의 통치를 받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우리 안에 있는 욕망의 지배를 받고, 세상 문화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속했는지, 어둠에 속했는지를 알아보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돈을 어디에 사용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영적 전쟁을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날 영적 전쟁이 가장 치열하게 일어나는 것은 맘몬(mammon, 탐욕을 상징하는 악마)과의 싸움입니다.

우리가 사탄을 어떻게 대적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돈을 사용하는 것이 사탄을 강력하게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결재 없이 우리 마음대로, 육체의 본능을 따라, 욕망이 이끄는 대로 돈을 사용하면, 사탄의 권세 아래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탄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영적 전쟁이라고 해서 귀신 쫓는 것이 영적 전쟁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과 직결되어있습니다.
여러분의 돈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곳이 여러분이 가장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의(異意)가 없습니다.

본문 24절에 보면, 예수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두 주인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타협이 불가능합니다. 조금의 타협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만 선택해야 합니다.

애매한 태도로는 전쟁을 할 수 없습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세상의 재물이나 세상의 것에 관심을 보이지 말라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재물에 대해 포기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가 돈으로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에 관심을 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을 위해 돈을 구한다면, 우리는 이미 세상에 속한 자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얼마나 쓸데없이 많이 소비하며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가지고 있음에도 또 구입하고 쌓고 또 쌓습니다.
우리는 필요하다고 여기지만, 가만히 보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사실은 필요 없는 것이 아주 많습니다. 전혀 필요 없는 것임에도 꼭 필요한 것처럼 착각합니다.
앞으로는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해도 즉각 사지 말고 기도해보세요. 답이 금방 나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려면,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전 영역에 있어서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소비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는 특별히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결재를 받아야 합니다.

소비주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늘 불안해합니다. 폴 투르니에(Paul Trurnier)가 쓴 〈강자와 약자(The Strong and The Weak)〉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사회에는 강자와 약자가 있는데, 이들은 동일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강자는 늘 불안해합니다. 그리고 약자는 절망합니다.
경제적 강자도 언제나 불안해합니다. 경제라는 것이 불안한 것입니다. 사회적 약자들은 늘 절망합니다. 그런데 둘 다 똑같습니다. 더 가지지 못해 힘들어하는 것은 강자나 약자나 동일합니다.

경기(景氣)는 변화무상합니다. 더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두려움, 나보다 다른 사람이 더 가진 것으로 인한 염려로 인해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더 움켜쥐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것은 가진 것을 나누는 삶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중독사회에서 금식은 중요한 해독제가 됩니다. 소비사회에서 중요한 해독은 ‘나눔’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는 말씀을 이해하기 어려운 세상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나눔을 실천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실현된다는 것은 화해와 나눔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4).
이사야 58장에 보면,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사 58:6~7). 사람들의 짐을 벗겨주는 것이 의를 실현하는 것이요, 진정한 금식입니다.

우리의 가진 것으로 나를 위해 소비하는 삶에서 남을 돕는 삶으로 삶의 패턴을 바꾸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고, 그런 삶을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이 부요해집니다.
우리가 구체적으로 남을 돕는 삶을 살 때, 하나님도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에게 더해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잠언에 보면,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잠 19:17). 도울수록 부요하게 되는 원리가 성경 곳곳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오병이어의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아이가 자신의 오병이어 도시락을 주님께 드렸을 때, 5천 명이 먹고도 남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나눔을 통해 함께 행복해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샬롬(shalom)이요,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것입니다.

소비주의 사회에서 가장 불행한 일은 소비주의에 빨려 들어가 살다 보면, 인간 자신이 소비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불행한 일입니다.
현대인들은 소모되어가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자신의 에너지, 젊음 등을 쏟아 붓고 난 후에 얻은 일부를 소비하는 데에 사용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물질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잘 벌어서 주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잘 사용하며 살아가는 것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필요합니다.
이웃과 풍성하게 살아가는 삶이 우리를 부요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20). 예수님은 물질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물질을 어디에 쌓아둘 것인지, 무엇을 위해 사용할 것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삶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우리의 물질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섬길 때, 더욱 풍성해지는 역사를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더 풍성한 삶을 살아가려면, 우리의 삶의 기준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소비주의 세상의 강한 급류(急流)에 휩쓸려가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실천하는 일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가는 데 초점을 맞추면, 우리의 삶이 단순해집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 집중된 삶에서 빠져나오게 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생각에서 빠져나오는 데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의 의를 추구하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소비주의 세상의 급류에 휩쓸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인생은 소모되어버립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이 세상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날마다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이 우리의 삶의 주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하지 말고, 그것에 집착하지 말고, 그것을 염두에 두지 말고, 그것에 관심을 두지도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할 때, 하나님이 모든 것을 책임져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을 책임져주실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주님의 말씀이 얼마나 선명합니까. 어린 아이도 이해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공중의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하물며 너희일까보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반문(反問)하셨습니다. 거듭해서 강조하시며 쉬운 예화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들은 내 자녀가 아니냐, 내 백성이 아니냐, 내가 너희를 책임지지 않겠냐, 왜 염려하느냐. 이방인들이 사는 것처럼 살지 마라. 네가 하나님의 백성인 것을 알아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우리를 보고 우리를 따라오게 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소비주의 문화에 휩쓸려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문화에 휩쓸리지 않고, 소비주의에 휩쓸리지 않으면서 고상하고 매력적이고 여유롭고 안정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누가 부자입니까? 하나님을 진정으로 소유한 사람이 부자입니다. 누가 가난한 사람입니까? 영혼 가운데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인생입니다.

영혼 가운데 하나님이 없음에도 부자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자 행세를 하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거지입니다. 나눌 줄 모르고, 돈을 가지고 부들부들 떨고, 남들이 자기를 무시할까봐 허세를 부립니다. 그런 사람을 부자라 할 수 있습니까.
진정으로 부요한 삶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어야 합니다. 누가 부자입니까? 천하에 부러운 것이 없는 사람이 부자입니다. 부러운 것이 없다는 것은 충분히 만족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에게 그런 여유와 자신감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꽉 찬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어디를 가든 기죽지 않습니다. 기죽을 이유가 없습니다.
나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나보다 하나님을 더 잘 믿는 사람만 부러워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은 부러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돈으로 세상의 것을 마음껏 즐기면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소유하고 소비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용하고 나누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삶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시선을 분산시키는 소비주의 문화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에 초점을 맞추면, 우리의 삶은 바닥을 긁지 않고,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하나님의 공급을 받으며 풍성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에 집중해보세요.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더 부유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데 사용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에 초점을 맞추면, 내가 가진 물질에 하나님께서 더하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용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건강, 재산, 재능과 능력, 경험 등을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초점을 맞추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넘치게 부으셔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고, 나뿐만 아니라 내 주변까지도 부요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을 흩어놓는 소비주의에 우리가 끌려가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질서정연하고 멋지고 매력적이고 풍성하고 집중력 있고 파워풀(powerful)하게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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