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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티자료모음  모세를 따라 살았던 여호수아처럼 

 

 

 
•찬송 1장 (통 1장) 찬송듣기

 
•성경 여호수아 12:1~12:24 성경감추기
•1 이스라엘 자손이 요단 저편 해 돋는 쪽 곧 아르논 골짜기에서 헤르몬 산까지의 동쪽 온 아라바를 차지하고 그 땅에서 쳐죽인 왕들은 이러하니라
•2 시혼은 헤스본에 거주하던 아모리 족속의 왕이라 그가 다스리던 땅은 아르논 골짜기 가에 있는 아로엘에서부터 골짜기 가운데 성읍과 길르앗 절반 곧 암몬 자손의 경계 얍복 강까지이며
•3 또 동방 아라바 긴네롯 바다까지이며 또 동방 아라바의 바다 곧 염해의 벧여시못으로 통한 길까지와 남쪽으로 비스가 산기슭까지이며
•4 옥은 르바의 남은 족속으로서 아스다롯과 에드레이에 거주하던 바산의 왕이라
•5 그가 다스리던 땅은 헤르몬 산과 살르가와 온 바산과 및 그술 사람과 마아가 사람의 경계까지의 길르앗 절반이니 헤스본 왕 시혼의 경계에 접한 곳이라
•6 여호와의 종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을 치고 여호와의 종 모세가 그 땅을 르우벤 사람과 갓 사람과 므낫세 반 지파에게 기업으로 주었더라
•7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이 요단 이편 곧 서쪽 레바논 골짜기의 바알갓에서부터 세일로 올라가는 곳 할락 산까지 쳐서 멸한 그 땅의 왕들은 이러하니라 (그 땅을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지파들에게 구분에 따라 소유로 주었으니
•8 곧 산지와 평지와 아라바와 경사지와 광야와 네겝 곧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라)
•9 하나는 여리고 왕이요 하나는 벧엘 곁의 아이 왕이요
•10 하나는 예루살렘 왕이요 하나는 헤브론 왕이요 하나는 야르문 왕이요
•11 하나는 라기스 왕이요
•12 하나는 에글론 왕이요 하나는 게셀 왕이요
•13 하나는 드빌 왕이요 하나는 게델 왕이요
•14 하나는 호르마 왕이죠 하나는 아랏 왕이요
•15 하나는 립나 왕이요 하나는 아둘람 왕이요
•16 하나는 막게다 왕이요 하나는 벧엘 왕이요
•17 하나는 답부아 왕이요 하나는 헤벨 왕이요
•18 하나는 아벡 왕이요 하나는 릿사론 왕이요
•19 하나는 마돈 왕이요 하나는 하솔 왕이요
•20 하나는 시므론 므론 왕이요 하나는 악삽 왕이요
•21 하나는 다아낙 왕이요 하나는 므깃도 왕이요
•22 하나는 게데스 왕이요 하나는 갈멜의 욕느암 왕이요
•23 하나는 돌의 높은 곳의 돌 왕이요 하나는 길갈의 고임 왕이요
•24 하나는 디르사 왕이라 모두 서른한 왕이었더라

 
•성경 길라잡이 
 
여호와의 종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6절): 모세의 사역이 강조된 부분이다. 모세의 지도로 정복한 땅이 두 지파 반에게 분배된다. 이런 모습은 땅을 정복한 여호수아가 따라야 할 모범이 된다.
그 땅을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지파들에게 구분에 따라 소유로 주었으니(7절): 여호수아가 모세의 모범을 따라 정복한 땅을 분배했음을 보여준다.


•묵상과 삶

모세가 요단 서편을 정복하고 분배한 내용과,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한 내용이 순차적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모세를 통해 시작되었던 땅을 정복하고 분배하는 일이 여호수아를 통해 계승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세와 여호수아의 업적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온 땅에 전파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세상의 질서와 권세를 심판하시고 제압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의 구원이 이 세상 가운데 허락된 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셨던 십자가의 길을 따라 세상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이루도록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모세를 따라 하나님께 순종했던 여호수아처럼,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증언하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우리들은, 이제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모세의 뒤를 따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나타냈던 여호수아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하나님의 구원을 증언하는 역할을 맡은 것입니다. 또한 우리 앞에 놓여있는 삶의 자리 가운데 도사리고 있던 세상 권세들을 몰아내고,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질서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처럼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써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의 길을 걸어감으로써, 죄로 말미암아 세상이 겪고 있는 고통을 제거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써 일상에서 몰아내야 할 죄와 사망의 질서로 어떤 것들이 있는지 묵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로 대적해야 할 세상 왕들의 목록을 작성해봅시다.

 
•1.5.3 묵상질문
 153 묵상질문

•1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들을 구원하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5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무엇입니까?
•3 -

 
•기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부르신 새로운 정체성과 비전을 깨닫게 해주십시오.
우리 삶에 도사리고 있는 세상의 질서를 몰아내고, 십자가의 질서를 따라 살아가게 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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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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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교리] 구원론(구원)  


죄에 대한 연구는 우리에게 구원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를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구원에 대한 연구는 "구원론(Soteriology)"이라고 하며, 이 단어는 "구원자(Soter)"를 뜻하는 헬라어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 때, "다 이루었다"고 승리를 외치셨습니다(요19:30).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사역은 모든 사람이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며 다만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을 수 있도록 예비해놓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사역의 주요한 면을 요약하고 있는 낱말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대속(substitution)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이르기를,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겔18:20)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율법을 무시할 수 없었고, 이제는 사랑이 하나님의 거룩한 합법적인 요구들을 만족시켜주는 방법을 찾아내어야만 했습니다. 결국 죄지은 자를 위해 기꺼이 죽을 대속물이 필요했습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죄인은 자기 죄로 인해 죽어야 했으며 그러므로 그에게는 구원이 없었습니다.


한편 이 대속물은 ①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해야 했습니다. 사람이 보기엔 이 외에 뭔가 다른 계획도 가능할 것 같지만, 재판관이신 하나님을 만족시켜드려야만 합니다. ② 정죄받은 사람과 동등해야 했습니다. 짐승은 사람보다 열등합니다(히10:4). 천사는 사람보다 더 뛰어나지만 순수한 영일뿐 육체가 없으므로 죽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적합한 대속물은 바로 사람이라야 했습니다. ③ 죄가 없어야 했습니다. 자기 죄가 단 하나라도 있는 사람은 아무도 다른 사람을 위한 대속물의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 죄를 위해 죽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④ 기꺼이 죽을 수 있어야 했습니다. 무죄한 어떤 사람을 억지로 다른 사람을 위해 죽게 한다면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 못되실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하셨다면 마귀는 곧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고소했을 것입니다. ⑤ 무한한 생명을 지니고 있어야 했습니다. 죄가 없더라도 그저 평범한 한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 단 한 명만 구하기에 족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생명은 생명으로"(신19:21)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무한하십니다. 다시 말하자면 완벽한 대속자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셔야 했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며 동시에 사람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말고는 어느 누구도 이러한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서 그리스도는 성부와 성령으로 더불어 동등하신 분입니다. 사람으로서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셨습니다. 하나님이자 동시에 사람이셨던 주님께서 기꺼이 버리신 생명은 무한한 생명이었습니다. 이에 구원받은 피조물들의 찬송과 경배는 하나님께 돌아갑니다.


"대속물"(substitute)이란 말을 흠정역 성경에서 찾을 수는 없어도, 대신해서 고난을 당한다는 개념만큼은 흠정역 전체에서 두루 찾아볼 수 있습니다. 구약의 짐승제물들은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그림으로 하나님께서 받아주셨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아벨의 양은 받으셨지만 가인의 피 없는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창4:4,5). 하나님께서 친히 이삭 대신 죽을 숫양을 공급하셨습니다. 레위기의 제사제도 아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역사를 통해 말 그대로 수백만 마리의 짐승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대속의 진리는 이사야가 이사야서 53장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종이 우리 허물을 인해(5절), 우리의 죄악을 인해(5절),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해(8절), 속건제물로서(10절), 범죄자를 위하여 죽을 것이라고 했던 것입니다(12절).


신약성경을 통해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자기 몸을 주시고, 우리를 위해 그 피를 흘리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눅22:19,20). 바울과 베드로는 대속의 진리를 거듭 거듭 가르쳤습니다(롬5:8, 갈3:13, 벧전3:18).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해 죽으셨으며 이는 곧 죄인들을 대신해, 그들을 위해, 그들의 유익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분은 또 죄 때문에 죽으시되 친히 그 형벌에 대한 책임까지도 지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완전한 사람으로서 이상적이며 합당하신 그리고 유일하신 대속물이십니다!

다음은 구속(redemption)입니다. "구속하다"라는 말은 "무엇을 사다" 또는 "되사다"는 뜻합니다. 구속은 죄와 또 거기에서 풀려나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구약을 보면 한 사람이 병이나 가난 때문에 자기 재산을 팔아야 할 처지에 놓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구속자(goel) 혹은 유업을 무를 자라고 하는 그의 친척에게는 그 재산을 언제든 도로 사서 되찾아 줄 수 있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 사람과 그 친척은 자기 집안의 재산을 지키게 되었습니다(레25:23-25). 룻기4:1-10과 예레미야32:6-12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신약에는 "구속하다", "값을 주고 사다" 등으로 번역되는 헬라어 동사가 다섯 가지 있습니다. 이 단어들은 하나님의 정하신 절차를 보여주며, 또 그리스도의 사역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 완벽하게 예비된 것으로 오직 믿는 자들(택함을 입은 자들)에게만 효력이 있고 유용할 뿐임을 가르쳐 줍니다.


그 첫 번째 낱말로 "시장에 자주 가다" 혹은 "시장에서 사다" 라는 뜻을 가진 것이 있습니다(마13:45,46, 눅9:13). 모든 사람, 즉 이 세상에서 가장 악한 죄인까지도 그리스도께서 예비하셨다는 점에 있어서 모두 속함을 받고, 사신 바 되었다는 것입니다(벧후2:1). 믿는 자의 몸은 값으로 사신 바가 되었습니다(고전6:20). 우리는 피로 사신 바 되어 나라와 제사장들이 됩니다(계5:9,10).
두 번째 낱말은 첫 번째 것과 비슷합니다만 접두사(ex)가 붙음으로써 판매대상에서 제외되고 과정을 되돌릴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낱말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예비하신 구원을 받아들인 신자들에게만 쓸 수 있습니다(갈3:13, 4:5).


세 번째 것은 속전을 받고 풀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드로전서 1:18,19은 이 속전(값)이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가리키고 있으며, 디도서2:14은 우리가 불의로부터 구속받아서 그분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네 번째 동사는 세 번째 것과 비슷하나, 접두사(apo)가 붙어 있어서 "무엇으로부터 떨어져" 풀려난다는 뜻이 더 강하며 로마서3:24과 에베소서1:14에는 명사형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섯번째 것은 앞의 낱말들과는 어근의 의미가 조금 다릅니다만 사도행전20:28에 "사셨다"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담긴 뜻은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취하시고 또한 돌보셨다는 것입니다.
날 때부터 사람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지으셨으나 죄로 말미암아 다른 것의 다스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에 그리스도께서 속전을 지불하셨습니다. 사실 그분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곧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 것이며 이렇게 하심은 "극히 값진 진주(사랑하시는 교회)"를 사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상 우리가 살펴본 낱말들은 교훈을 얻기 위한 것이므로, 이 은유적인 말들을 성경에서 인정하고 있는 범위를 벗어나 지나치게 강조하여서는 안됩니다. 가령 성경은 그 속전을 누구에게 지불했는지 말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사단에게 주시지 않은 것은 분명합니다). "피로 대속하셨다"는 이 위대한 교리를 생각해볼 때, 그리스도인들의 찬송이 구속자께 드리는 찬양과 구속받은 자들의 영광으로 가득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닌 것입니다!

 

화목제물(propitiation)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죄에 대해 구속을 이루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만족(또는 화목)하게 해드리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렸고, 또한 하나님께서 자기 의와 거룩함, 공의를 저버리지 않으시고도 죄인들을 대하여 사랑으로 행하실 수 있게 해드렸습니다. 성부는 늘 진노하시고 온유하신 성자 예수님은 그 성부의 마음을 달래드린다고 하는 사상은 정말이지 생각해 볼 가치조차도 없습니다. 실상은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자기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신 동기가 바로 사랑때문이란 것을 요한일서4:10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고 하신 요한일서 2:2 말씀은 하나님을 만족시켜드린 것의 효력이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진노는 하나님과 화목되지 못한 결과로 임하는 것입니다. 신약에서 사용된 헬라어 "속죄소"(히9:5)와 "화목제물"(롬3:25, 그리스도를 가리킴)은 구약의 동일한 단어를 번역한 것입니다. 속죄소는 죄를 가리는 것과 의의 거룩한 표준이 요구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누가복음18:13에 나오는 세리의 기도는 "하나님이여 죄인인 저와 화목해주시옵소서"라고 번역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사역으로 만족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이 이루신 일은 단 한 번으로 완전하게 된 것이었습니다(히9:28). 화목제물로 인해 하나님은 자유롭게 그리고 정당하게 모든 죄를 용서하실 수 있게 되었고 믿는 자는 누구든지 의롭다고 하실 수 있게 되었으며, 모든 은혜와 영광을 죄인들에게 베푸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자비로운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비하시다는 사실과 예수님과 그분이 이루신 사역에 완전히 만족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은 그러하십니다. 우리도 그와 같이 되어야하겠습니다.

 

성경에는 또 화목(reconciliation)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죄에 대한 대속, 구속, 하나님께서 진노를 거두셨다는 화목, 그리고 이제 사람편에서 하나님과 화목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고난받으시고 죽으심으로써 이루신 주요 공로들입니다. 우리는 죄론에서 죄의 성품에 대한 심판을 위해 준비된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해 알아보았는데, 그분은 위대한 두 가지 다른 업적인 죄사함과 정결함의 근본이십니다. 흔히 범하는 실수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 편에서 사람과 화해하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성경의 가르침은 화해가 필요한 당사자는 바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흔히 화해라는 말을 쓸 때 피차 사이가 불편하던 두 사람을 화합하게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화해는 입장을 완전히 바꾸는 것을 뜻합니다. 흠정역 로마서 5:11에 "대속"{"화목"(개역성경) : [역주]}(atonement)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실상은 "화해"를 가리키는 헬라어 명사를 영어로 옮긴 것입니다. 10절을 보게되면 이 단어의 동사형은 "화목되었다"로 정확하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대속"은 신학자들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사역에 대해 일반적으로 쓰고 있는 용어이지만 신약에서는 단 한 번 쓰일 뿐입니다(그리고 바로 이때도 "화해"라는 뜻의 단어를 쓸 자리에 잘못 들어가 있는 경우입니다). 실제로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죄를 "덮는다"는 개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둘 것 같으면 대속이라는 용어를 써도 하등 문제가 없습니다. 화목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적대적인 위치에서 다정한 관계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바로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인해 얻어진 이 화해에는 잠정적인 측면과 실제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잠정적인 측면에서 온 세상은 하나님과 화목되었습니다(고후5:14,15, 19). 이것은 세상이 지금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이 지금 구원받은 상태라거나 온 세상이 구원받게 되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온 세상이 구원받을 수 있는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실제적인 화목은 고린도후서5:20에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과 화해를 하게 될 때 모든 것이 새롭게 되며 그의 지위 또한 "아담 안"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바뀌고 죄에서 의로 옮기게 됩니다. 죄에 대한 대가는 지불되고 새로운 피조물이 존재하게 되며, 믿는 자는 구원을 받은 자가 됩니다. 하늘에 속한 것들, 곧 보좌들과 정사들과 권세들도 화목되었다는 것 또한 주목하시기 바랍니다(골1:16,20).

 

택정하심

택정은 문자적으로 "선택하는 것", "골라내는 것" 또는 "정하는 것"으로서 성경의 가장 어려운 가르침들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도를 깨달을 의무는 없지만,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비록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의무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을 택하기 전에, 하나님이 미리 아시고 그 사람들을 골라내셨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택하심이 아닙니다. 이것은 단지 사람의 "선택"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유의지의 갖고 있으며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구원받는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선택하사 구원받게 하신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구원받을 자격을 갖춘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주시기 위해 선택하셨습니다(요6:37).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누가 잃어버린 자가 되기로 택함을 받았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불못은 마귀와 그 천사들을 위해 예비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누구도 그곳에 "보내시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지옥에 가는 것은 오로지 그리스도를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9장은 선택에 대한 대표적인 말씀이지만, 교회 안에 있는 신자들에 대한 말씀은 아닙니다. 여기서 천사들, 이스라엘, 또 그리스도까지도 모두 "택함받은 자"로 말씀하고 있습니다(딤전5:21, 사45:3-4, 벧전2:6). 그리스도인들이 택함을 받은 자들이라고 불리우고 있는 곳은 롬8:33, 골3:12, 벧전1:2입니다. 아무도 구원받을 자격을 갖춘 이가 없기 때문에, 설사 하나님께서 어떤 이들은 구원받게 하시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대로 두신다고 해도 이는 부당한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지 못하는 그 사람들은 자기 의지로 복음을 거절한 사람들로서 책임을 지닌 존재들입니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목적을 갖고 있다고 믿는 자들에게는 그 "택하심"이 격려가 됩니다. 택함받았다는 것은 섬김의 동기가 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선택이 하나님의 주권을 높인다는 것입니다. 택하심에 대해 이해하기 힘들면 성구사전의 도움을 받아 "택함", "선택", "예정" 등의 낱말들을 상고해보시기 바랍니다. 예정은 미리 정하심(롬8:29)과 양자 삼으심(엡1:5,11) 보다 더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부르심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롬8:30). 부르심의 수단은 복음입니다(살후2:14).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자기에게 모으시는 행위를 말합니다. 부르심에는 일반적인 면과 실제적인 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일반적인 부르심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오라고 초청하는 것이며 모든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것"과 관계 있습니다(요12:32). 많은 사람들은 누구든지 오라는 이 일반적인 부르심을 거절하고 있는데 반드시 그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될 것입니다(히12:25). 실제적인 부르심은 확실한 구원을 얻게 합니다. 이것은 요한복음6:37,44에 나오는 "이끄심"과 관계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드님에게 주신 사람들은 틀림없이 그리스도께 나아와 그분을 영접하게 됩니다. 어느 누구도 복음을 받아들이라는 강요를 받지 않습니다. 오히려 택함을 받은 자들은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영광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기에, 이들이 구원받는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롬8:39). 부르시는 분은 분명히 이 일을 하실 것입니다(살전5:24).
부르심의 결과는 확실하지만 그 방법은 복음이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전도해야만 합니다.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자연과 양심, 또 오래 전부터 알려진 진리 중 일부 남은 것들(많은 오류 가운데서도 조상때로부터 보존되어진 많은 문화)로부터 받은 빛에 의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온 세상의 심판자는 이런 이교도 백성들에 대해서 공정하게 심판하실 것입니다. 의심할 바 없이 그들의 책임은 많은 복음적인 교회와 기독교 라디오 방송과 기독문서 등이 있는 나라에서 그리스도를 배척한 사람들의 책임보다 훨씬 적을 것입니다.

 

죄를 책망하시는 성령님의 역사

성령님의 역사가 없으면 어느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 태어난 그대로, 육에 속한 채로 있다면 이 사람은 죄 가운데서 죽은 자이며(엡2:1-3), 사단에 의해 눈먼 자입니다(고후4:3,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며(고전2:14) 이들 중 단 한 사람도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롬3:10-18). 기도를 해주거나 복음을 전하지는 않고 그저 믿으라고 압박만 가했을 경우 결국 사람들이 구원받았다고 고백은 합니다만 실제는 아무것도 없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성령님은 오늘날 전 세계의 죄인들에게 죄에 대해, 의에 대해, 심판에 대해 책망하는 일을 하시고 계십니다(요16:8). 이렇게 책망을 듣고 죄를 깨달은 죄인들이 반드시 그 깨달음을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습니다만 아무튼 자기들의 죄가 무엇인지는 인식하게 됩니다. 맨 먼저 죄인들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있다는 이 큰 죄에 대해 책망을 받습니다(요16:9). 다음에는 의에 대해 책망을 받는데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 가시기 때문입니다(10절).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 가시는 것이 그분의 의를 입증한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그리스도는 죄인처럼 저주받은 나무 위에서 죽으셨지만 무죄하신 분이셨습니다). 즉, 그리스도는 영광의 몸을 입은 분으로서 의의 표준이 되십니다. 10절의 이 말은 또 그리스도께서 땅에 계실 때 사람들에게 죄를 깨닫게 하는 일을 하셨으나 지금은 성령님께서 이 일을 계속하시고 있다는 뜻인 것으로 보입니다. 세번째로 사람들은 심판에 대해 책망을 받습니다(11절). 이것은 십자가에서 사단에 대한 심판을 가리킵니다. 죄의 주모자가 그렇게 심판받았다면 그를 따르는 자들도 그가 만들어 놓은 세상의 제도에 참여한 것에 대해 심판을 받을 것이 틀림없습니다(자기가 사단의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 사람들이 알았는지 여부는 관계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우게 되는 실제적인 교훈은 성령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통해 이러한 책망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제대로 살지 않는다면 죄를 책망하는 성령님의 일을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의 조건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 이것이 구원의 "조건들"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온갖 행위와 의식(儀式)들을 이 단순한 복음에 더해보려고 갖은 애를 써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덧붙여본들 결국 구원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요 아무것도 더할 게 없다는 사실만 부각될 뿐입니다(엡2:8). 회개는 믿음의 일부입니다. 과거에 대해 마음이 전혀 바뀌지 않는다면 진정으로 믿는다거나 믿음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단지 마음을 바꾸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이 회개하면 감정의 변화가 아울러 따르기도 합니다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회개할 때 울어야 되고 통성기도를 해야한다는 생각은 사실적인 근거나, 성경적인 근거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입으로 고백하는 것, 물 침례를 받는 것, 그리스도의 주재권과 또 그 외 여러 가지를 구원의 일부로 삼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구원받으면 나타나는 합당한 결과이긴 하지만 오직 믿음 하나만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구원을 주시는 통로가 됩니다. 이것 외에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믿음"에 대해 세상 사람들이 보통 내리는 정의는 "다른 사람이 선언한 것에 마음으로 동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혼을 구원하는 믿음에는 그저 동의하는 것 이상으로 훨씬 더 많은 것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사랑을 나타내셨고 그리스도인들은 이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해줄 때, 만일 듣는 자가 머리로만 아니라 마음으로도 이 복음을 믿으면 그에게는 믿음이 생깁니다. 신뢰, 확신,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쉬는 것 등은 믿음이 가진 여러 면모들인 것입니다. 믿음은 값없이 주시는 구원의 선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내미는 마음의 손입니다. 오직 성령님께서만 사람에게 참된 믿음을 주실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심은 하나님께서 영광을 취하시고 사람은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납니다(읽는 것도 포함함; 롬10:17).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에 대해 증거하신 것에 기초한 것입니다(요일5:7-9). 복음을 말하거나 설교할 때 우리는 듣는 이에게 그들의 믿음을 맡길 수 있는 어떤 것,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해주어야만 합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인품을 통해 죄를 책망하시기보다 오히려 말씀 그 자체를 통해서 하십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특권은 바로 "말씀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이는 꼭 강단에서가 아니더라도 일상생활에서 분명히 누릴 수 있는 특권인 것입니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 맡기신 일, 즉 우리 죄인들을 위한 대속물로, 죄에 대한 구속으로, 하나님께 대한 화목제물로, 사람을 위한 화목으로, 자신을 드리신 사역을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십자가 위에서 이루셨는지 보았습니다. 또한, 이러한 드리심이 성령님의 책망을 듣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효과를 나타내는가도 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죄인들이 그 아들을 믿을 때 성부께서 어떻게 죄인들을 구원하시는지, 즉 위대한 구원사역 안에서 삼위이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하시는 완전한 사역에 대해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이미 우리는 구원론에서, 구원이 그저 지옥에서 벗어나는 "비상구" 이상의 것임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성부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이와 같은 사실에 훨씬 더 큰 증거를 더해줄 것입니다. 췌이퍼(L.S.Chafer) 박사는 죄인이 믿는 순간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해주시는 일 서른 세 가지를 목록으로 만들어서 설명하였습니다!(췌이퍼의 조직신학 제3권 "하나님 은혜의 부요함"). 여기서는 그중 몇 가지만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칭의(稱義:justification).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교리 중 하나입니다. 무엇인가를 없애주는 용서는 소극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믿는 자에게 무엇을 더해주는 칭의는 적극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십니다(롬4:5). 이 말은 경건치 아니한 자들이 믿을 때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운 자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신다는 뜻입니다. 의롭다하심은 의롭게 만든다거나 현재 의로운 상태라는 것이 아니며 법적인 의미에서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의롭다" 와 "옳다"는 분명히 같은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얻은 자가 됩니다"(롬3:24). 칭의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루신 구속을 그 기초로 합니다. 갈라디아서에도 칭의에 대한 가르침이 많이 나오긴 합니다만, 로마서가 칭의 교리에 대한 대표적인 책입니다. 로마서는 어떻게, 어떤 수단에 의해 의롭다하심을 얻는 것인지 말씀해줍니다. 이것은 은혜로 말미암습니다(3:24). 곧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에 의해서입니다. 이것은 또 믿음으로 말미암습니다(5:1). 곧 하나님의 베푸시는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는 피로 말미암습니다(5:9). 곧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치르신 값입니다. 또 칭의는 의로 말미암는데(5:18,19) 곧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순종하신 것입니다. 의롭다하심을 얻은 결과로서 로마서에 나와 있는 것들은 화평(사32:17, 롬5:1), 정죄로부터 벗어남(롬8:33,34), 후사가 됨(딛3:7, 롬8:17), 영화롭게 됨(롬8:30)입니다.
야고보서2:21,25에 묘사되어 있는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은 위에서 설명한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의롭게 됨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보기에 의롭다고 여겨지는 것이며, 오직 경건으로 일관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때에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런 식의 의롭다함을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는 오직 행위와 관계없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다하심을 받은 후에라야 가능합니다.

중생(重生:regeneration).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는 것을 "영적으로 죽었다"고 봅니다. 이는 죄의 결과입니다(엡2:1). 이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은 아담이 가졌던 것과 똑같은 육에 속한 생명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이 생명은 지구에서, 또 특별한 조건을 갖추면 우주에서 사는 데도 적합할 수도 있지만, 천국에서 살기에는 전혀 적합지 않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거듭납니다(요3:5, 벧전1:22). 우리는 혈통으로나(자연적인 출생), 육정으로나(스스로의 결심이나 스스로의 노력), 사람의 뜻에 의해서(누군가 다른 사람의 행위에 의해, 가령 제사장의 중보나 침례) 하나님의 자녀로 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사람들이 이러한 권세를 얻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 이름을 믿음으로써 얻습니다(요1:12,13).
거듭남에 의해 우리는 거듭나고 새 생명을 얻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옛 것은 지나가고 모든 것이 새 것으로 됩니다(고후5:17). 우리는 새 사람을 입습니다(골3:10). 우리는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할 수 있고 또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후사들이며(갈4:7), 그리스도와 더불어 유업을 받을 자들입니다(롬8:17). 유업을 이을 자로서 우리는 아버지의 징계를 받게 되는데 이런 징계는 아버지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위해 베푸시는 것입니다(히12:6).


이제 요약해 보면 거듭남, 즉 두 번 나는 것은 영생을 나누어받는 것이며 이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중생한 사람만이 구원을 받은 것이며 오직 하나님만 우리를 거듭나게 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목적은 우리로 그 지으신 피조물 가운데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려 하심이며(약1:18), 유업을 이을 자가 되게 하고(벧전1:3,4) 선한 일을 행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심입니다(엡2:10).

 

양자(養子:adoption). 이 용어는 바울의 서신에만 나옵니다. 이 용어를 오늘날 친자식이 아닌 아이들을 자기 아이로 삼는 "입양"한다고 하는 것과 절대 혼동해서 안되겠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거듭난 자기 자녀들에 대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업을 이을 모든 권리를 가진 자녀들이라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속해 있는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양자가 되는 것도 구원받는 순간 얻게 되며, 이는 믿는 자가 이 교리에 대해 알든지 모르든지 상관없이 되는 것입니다(마치 훌륭한 집에 새로 태어난 아이가 그 스스로 알지 못하더라도, 육체적으로 태어난 순간부터 그 이후까지 출생으로 인한 모든 혜택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이른 바 "제2의 은총"이 아닙니다. 우리가 거듭날 때 자녀가 되었지만,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는 우리의 이와 같은 신분이 분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양자의 영을 소유하고 있지만 이것이 완전히 드러나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롬8:15,23).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나타내는 증거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롬8:14), 세상과 분리되는 것(고후6:14-18), 이기는 삶(계21:7), 그리고 아버지의 징계하심이 있습니다(히12:6-8).

 

성화(聖化:sanctification). 성화에는 매일 실제로 거룩하게 되어가는 것과 또 구원받을 때 얻는 지위 상의 거룩함이 있습니다. "거룩하게 한다"는 것은 어떤 특별한 목적을 위해 따로 구별되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분리(구별)된다는 것입니다. 과거를 볼 때 신자는 죄의 형벌로부터 분리되었고, 현재는 죄의 권세로부터 분리가 되었고, 미래에는 죄의 존재로부터 분리됩니다. 이 분리가 실제적으로 이루어지는 기초는 모든 믿는 자가 하나님의 "성도"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이러한 신분에 맞게 살아야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순서를 바꿔놓고 말하기를 "지금 착하게 사는 사람들이 나중에 가면 성자라고 불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서10:10-14은 이 신분상의 성화는 단번에 완전히 주어진 것이며 다시 반복할 수도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거룩함은 절대적입니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거룩함이 되시기 때문입니다(고전1:30). 모든 믿는 자는 구원받는 그 순간에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그리고 영원히 구별(거룩하게)되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믿는 사람 각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점점 더 "거룩하게 될(죄에서 분리될)" 의무가 있습니다(요17:17, 벧전1:15,16).

 

용서(forgiveness). 칭의는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의를 인정받는 것입니다. 반면에 용서는 죄로부터 풀려나는 것이요, 불의가 우리에게서 제하여지는 것입니다. 이 교리는 우리 일상 생활에서 그와 상응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이해하기 쉽습니다. 예를 들면 곧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신분적인 면에서 볼 때 용서는 우리가 믿을 때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엡1:7, 4:32, 골1:14, 3:13). 하지만 실제적인 삶에 있어서는 아버지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는 우리가 실패할 때마다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께 우리 죄를 자백해야만 하는 것입니다(요일1:9). 어떤 이들은 자기의 미래의 죄까지도 이미 용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워합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당시에는 우리의 모든 죄가 미래의 것이라는 것을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었을 때 우리의 모든 죄는 주님이 다 가져가셨습니다(완전히 용서받았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용서받았기 때문에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엡4:32).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잊어주신 것처럼 잊어버려야 합니다.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8:12). 죄를 용서받은 결과는 큰 기쁨과 평안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감. 이것은 하나님의 존전(尊前)에 들어가는 권리입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얻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무한한 복을 누리게 해줍니다(롬5:2). 믿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은 한 성령에 의해 아버지의 존전에 나아가게 됩니다(엡2:18). 이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화목케 하시는 역사에 기초하기 때문에 이렇게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갈 때 온전한 담대함이 뒤따르게 됩니다(엡3:12, 히4:16, 10:19,20).

 

율법으로부터 해방됨. 율법은 경건치 않은 자들을 제어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딤전1:9), 결코 구원의 길이 아니었는데, 이 점은 구약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은혜 아래에서도 규범이 있지만(신약성경은 계명으로 가득 차 있지만 불순종에 대한 형벌을 정하는 법조항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일상생활규칙과 같은 법 아래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롬8:2). 즉 우리는 율법에 대해 죽었으며(롬7:4) 또한 율법으로부터 구원받았습니다(롬7:6). 이 모든 것이 우리가 구원받을 때 일어났으며 이때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사역의 다른 부분들도 더불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거룩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을 나타내는 말씀으로 모세의 윱법을 존중하지만, 은혜는 율법이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난 삶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확신(Assurance)과 안전(Security)

신약에서 가장 큰 위안을 주는 교리 중 하나는 사람이 일단 구원받으면 다시는 잃어버린 바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지금" 구원받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확신입니다. 또 자기가 "영원토록" 구원받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안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자는 가지고 있지만 후자는 불가능하다거나 혹은 받기엔 너무 염치없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불행하게도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은, 이 두 가지 중 어느 것도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이 진리에 대한 문제들의 대부분은 잘못된 가르침, 타고난 두려움, 그리고 구원이 정말 무엇인지 오해하고 있는 것들로부터 생깁니다.

확신에 대해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요일5:13, 3:1과 요3:36, 5:24을 주의해서 상고해보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들은 확신에 대한 유명한 구절 중 일부입니다. 물론 더 있습니다. 믿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주로 확신을 얻게 됩니다. 우리 구원의 기초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입니다만, 우리 확신의 기초는 하나님께서 그렇다고 친히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나 보내신 이를 믿는…").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시거나 마음을 바꾸실 수가 없는 분입니다.
구원의 또 다른 두 가지 증거로 그리스도인의 체험과 성령님의 내적인 증거입니다. 체험은 우리의 감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우리 감정은 날씨와 건강과 환경에 따라 변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깊이 의식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만일 누군가 가진 교리가 잘못되었다든지 혹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떠나서 살고 있다면 물론 그가 겪는 체험은 별로 격려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체험에는 형제 사랑과(요일3:14, 롬8:29), 성경을 이해하고 간절히 사모하는 것(고전2:14), 죄에 대해 책망을 받는 것(요일1:5-10, 3:7-14), 착한 행실(약2:14-16), 하나님이 자기 아버지임을 의식하는 것(마11:27)과 자기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를 의식하는 것(고후13:5),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는 이 믿음을 다른 사람들도 함께 가지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것 등이 들어갑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속에서 하시는 사역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케 하는 것과(롬5:5), 우리를 인도하는 것과(롬8:14), 우리에게 증거하시는 것(롬8:16)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회심할 때 느낀 감정이나 우리가 들은 설교방식이 나 또는 우리가 복음을 완전히 이해했는가 보다는,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 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얻는 구원의 복음을 믿었습니까? 우리가 믿음의 손을 내밀어 주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로서 구원을 받았습니까? 만일 그렇게 했다면 우리는 구원받았다는 절대적인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영원한 안전에 대해 상고해 보겠습니다. 지금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고 새 생명의 증거들도 가진 많은 사람들이 가장 중요한 의문을 아직도 갖고 있습니다. 곧 "진실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혹 그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나?"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타락한 사람"은 구원을 잃고 지옥에 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무조건적인 영생을 확신한다면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계속 죄를 지으며 살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 자녀를 징계하시되 때로 죽게도 하시며 이렇게 하심으로써 자기 자녀들의 죄를 다루신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부정한 자와 호색하는 자는 다만 거짓 신자요 십자가의 원수일 뿐입니다(엡5:5,6, 빌3:18,19).
성경은 안전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씀할까요? 요10:27,28과 벧전1:5, 요11:26, 딤후1:12, 히7:25, 유24절을 읽어보십시오. 이 구절들 중 맨 마지막 말씀에 나오는 "능히… 하실 자"라는 부분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안전의 참된 열쇠입니다. 신자들은 그 믿음 가운데서 인내해야 됩니다. 신자는 실제로 이렇게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를 보존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내의 이러한 양면성은 빌2:12,13에서 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끝까지 인내함으로 구원을 이루는 것은(수학문제 풀이처럼)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초자연적으로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이 디모데후서2:19에서도 말씀하기를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악에서 떠나야 합니다(사람 편에서). 이는 주께서 자기 백성들이 누구인지 아시기 때문입니다(하나님 편에서).
사람이 일단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라고 가르쳐 주는 다른 구절들이 많이 있습니다. 만일 구원이 조건적이라면 "영원한 생명"이라는 말조차도 모순이 되고 말 것입니다. 로마서8:31-39은 네 가지 수사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과 더불어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답도 제시하고 있으며 이 모두는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다른 구절들로는 요6:37,39, 롬11:29, 고전1:8,9, 빌1:6, 엡4:30이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들이 일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만, 이것은 문맥을 무시한 채 그 구절들만 따로 떼어 이해할 때 생기는 오해일 따름입니다.
마태복음24:13은 흔히 그 문맥을 무시한 채 인용하여 교회시대에 대해서 잘못 적용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구원받은"이란 단어는 헬라어로 "건짐받은"이란 단어와 동일합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자들이 자행하는 대학살과 환난을 견디어내는 유대인들이 건져내어질 것이라고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정말 믿는 자들임을 나타내는 것은 바로 그들이 "끝까지 견디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에스겔 33:7,8을 써서 만일 우리가 잃어버린 바 된 영혼들에게 경고하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의 영혼도 잃어버리고 말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이스라엘을 경고하라고 선지자 에스겔에게 가르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의 교회에게 말씀하는 것도 아니며, 에스겔이 자기 영혼의 구원을 잃게 될 것이란 말씀도 아닙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잃어버린 바 된 영혼들에게 경고해야 되지만, 에스겔서가 그렇게 해야할 증거를 담고 있는 책은 아닙니다!
디모데전서4:1,2은 배도자들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믿는다고 거짓으로 고백하지만 실제로 거듭난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 구절에서 "그 믿음"이라 한 것은 그리스도께 대한 개인적인 믿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배도자들에게는 이 개인적인 믿음이 없음), 기독교인다운 신앙을 가리키는 것임을 주목하십시오.
베드로후서2:1-22에 나오는 거짓 교사들은 단지 잠정적인 측면에서만 사신 바 되었습니다. 이 구절에서는 이 사람들이 실제로 거듭난 적이 있었는지 전혀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이 개들이라고 불리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먼저 이들이 부정한 이방인임을 보여줍니다.
믿는 자의 영원한 안전을 부인하고 있다고 제시되는 많은 구절들이 사실은 단지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나 개심(改心)한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으며 이들은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마태복음13:1-8은 넘어지는 자들에 대한 예를 들고 있지만 이들이 진짜 구원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말씀은 없습니다. 고린도전서15:1,2와 히3:6에 있는 굳게 지키는 것이 구원받았다는 증거이기는 하지만 구원받는 조건은 아닙니다.
요15:6은(어떤 사람들에게) 가지가 제하여져서 잃어버린 바 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리스도는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제자들에게 열매 맺는 것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지 구원에 대해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가지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열매맺는 자리에서 쫓겨나 던지우게 됩니다.
히브리서6:1-8은 믿는 자들이 구원으로부터 "떨어져서" 잃어버린 바 될 수 있다고 가르치는데 흔히 사용되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견해는 히브리서 전체의 맥락과 반대되는 것입니다. 이 서신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신지 얼마 되지 않아 유대 배경을 가진 신자들에게 쓴 것이며 몇 가지 매우 특별한 권면과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이 서신은 믿는 자들에게 유대교의 의식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실재성 속에서 성장하라는 권고를 하고 있습니다(히6:1-3). 이 서신에는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거짓으로 고백하는 유대인들에게 주는 매우 심한 경고도 몇 가지 들어 있습니다(히2:1-3, 3:7-13, 6:4-8, 10:26-31). 이런 사람들은 지적으로는 복음의 비췸을 얻었습니다(그러나 영적으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하늘의 은사를 맛보았고, 겉으로는 성령에 참여하였으며,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그리스도와 사도들의 능력 있는 역사와 이적들)도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영적인 기회를 가졌으면서도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복 받기를 거부하고 유대교의 죽은 의식으로 돌아가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이런 사람들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모든 것을 주셨지만 이들은 의도적으로 자기들에게 베풀어진 기회의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간에 서서 이들은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쪽을 택했으며 그리하여 현저하게 그리스도를 욕보였습니다(히6:6 하반절).
이 구절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에게 적용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늘날 기독교를 연구하고 자기 주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목도(目睹)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그리스도를 거부하기로 결심을 굳히고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더 이상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영원한 심판만이 있을 뿐입니다.
갈라디아서5:4은 "은혜에서 떨어지는 것"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은혜로 사는 고차원적인 삶에서 율법주의라는 열등한 삶의 원리로 추락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떨어진다"는 말에 들어있는 개념은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골1:21-23이나 고전9:27, 그리고 요13:8과 같은 구절들도 가끔 이것과 관련해 인용되기도 합니다만, 사실 이 구절들은 믿는 자들이 상급을 잃어버리거나 아니면 교제가 끊어지게 되는 것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각 위께서 지니신 속성과 하시는 일이 영원하고 확실한 구원을 보장해주고 있습니다. 구원의 성격 자체가 영원한 안전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이 구원은 근원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택정받은 것과 연관이 있으며 또한 이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슨 내세울 것이 있어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무슨 부끄러운 점이 있다고 해서 구원을 잃어버리는 것도 아닙니다. 구원은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요19:30).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안전을 주신 것은 그분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일에 분발케 하기 위함이며(유24,25: 벧전1:3-5), 거룩한 삶을 살게 하는 자극제로서(엡4:30, 시55:23), 또 그분을 섬기려는 동기가 일어나게 하려고 주신 것임을 친히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고전15:58). 우리의 영혼과 섬김에 대한 상급은 안전합니다. 우리는 "결코 멸망치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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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교회 특강] 성령을 좇아 살면 영원히 삽니다

 

 

 

 

육체을 좇아 살면 죽고 성령을 좇아 살면 영원히 삽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육체가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성령)이 사람안에 거하지 않음입니다.

 

성령을 좇지 않음으로 육체를 좇는 것입니다.

 

사람이 육체가 되었다는 것은 욕심과 정욕을 따라사는 마귀의 종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니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창6:3)

육체가 된 사람들로 인하여 세상에 죄악이 관영함과 사람들의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창6:7)

 

 
이것은 하나님 영광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 영광과 자기 의와 자기와 세상을

하나님보다 사랑하는 자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죄악이 관영함과 마음의 계획이 다 악하다는 것은

사람들의 모든 삶이 다 사단의 조정을 받으며 산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한 뱀인 사단마귀에게 미혹되어

하나님과 생명과 사랑의 관계가 끊어져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이 마르고 떨어져

영원히 멸망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사람의 정욕대로 사는 것을 더러운 것이며 자기 몸을 서로

욕되게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롬2:24~25)

 

 
사람이 육체의 정욕을 따라 사는 것은 우리의 영혼을 거스리는 것이라

말씀하고 있으며,

이렇게 육신을 따라 더러운 정욕으로 살면,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가 되어 특별히 형벌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2:11)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에게는

특별히 형벌하실 줄을 아시느니라.(벧후2:10) 


 
하나님과 관계가 끈어진 사람은 하늘의 신령한 자로 신의 성품을 벗어나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주님의 거룩하신 뜻을 좇아 사는 것이 아니라,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엡2:3)

 

이것은 멸망할 마귀의 자녀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마귀의 종이며 자녀가 된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요?
 
사도바울도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아래 팔렸도다 하였으며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하며

 

우리 인간은 하와의 범죄의 씨에 의한 육체로 난 죄인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체로 사는 것이 죄입니다.

 

육체로 사는 사람이 죄인이며,

이 사람은 주님이 주인인 것이 아니라, 마귀가 주인인 것입니다.

이 육체의 산물은 사단마귀가 심어 놓은 것입니다.

 

사단의 조정을 받으며 사는 사람이 육체를 따르는 사람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죄는 사단의 종으로 사는 것이며,

사단의 종으로 사는 사람이 죄인인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육신을 따는 것이 주님이 말씀하시는 죄의 근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을 구주로 영접했으며, 구원의 확신도 가지고 있으니

대부분의 그리스쳔들이 스스로 의인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육체의 종이 되어 세상이나 세상의 것들을

주님보다 사랑하며 구하며 사는 죄인임을 인식하지 못 합니다.

 

이것은 죄와 죄인의 개념을 성경적으로 이해하지 못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스스로 의인으로 여겨도

여전히 육신으로 살면 죄의 짓고 사는 죄인인 것입니다.

 

성경은 아무리 주여 주여 하며 주님을 사랑한다 해도

죄의 종으로 살면 죄의 종일 뿐이라 말씀합니다.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는다 하시면서

욕심이 죄의 원인임을 말씀합니다.

 

이 욕심은 우리 육체로 사는 동안에는 끝없이 충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욕심을 다스리지 않으면 죄의 덫에 걸려 넘어지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믿는 사람들이 자기는 예수를 믿고 교회에 잘 출석하니까

주님을 믿는다 하면서 자기의 욕심을 좇아 사는 것을 깊이 인식하지 못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 교회밖의 세상 불신자들이 이야기로 여깁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믿음 밖에 있는 불신자들이나

주여 주여 부르면서 자기 목적을 위하는 이방인들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주님을 찾고 따르는 제자들에게 주셨음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을 자기 자신에게 100% 적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받로 나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육체로 사는 삶을 그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새생명으로 사는 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새생명은 육신의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의 영과 한 영되어 주님의 영으로 사는 신령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일을 버려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체를 따르는 삶을 살면, 육체의 열매를 맺게 되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 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
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
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5:19~21)

 

 
예수를 믿다는 것은 육신으로 사는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를 믿는 것은 육체로 사는 것을 버리기 위해 육체로 난 자신과

육신으로 살려고 하는 죄의 본성(욕심과 정욕)과 싸우는 것입니다.


 
그로므로, 우리는 육체의 남은 때에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거룩함에 이르는 영생에 이르는 삶을 살기 위해 주님과 같이

육체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곧 사람의 육체와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삶을 날마다 살아야 합니다.

이 삶이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하신 사도바울의 삶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벧전4:1~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롬6:22)

 

 
우리 예수를 믿는 사람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6:6)


 
육체가 된 우리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정욕과 욕심을 따라 사는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아 정욕으로 살지 않도록

제어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찌니.(갈5:24~25)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지 않는 육체(사람)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은 사람은 주님앞에서 죄인으로 서게 됩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곧 육체를 좇지 않고 성령을 좇는 것입니다.

 

 
주님! 십자가를 견고히 지어

육신을 좇지 않고 성령을 좇아 살게 하소서.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어 믿음의 부요한 자로 세워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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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복음  십자가 복음을 전하자

 

오늘날 교회에서 외면 당하는 십자가 복음
 
 
성경은 십자가의 도를 기록 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예수님도 십자가의 도를 말씀 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쫒을 것이니라(마16;24)
 
 
사도 바울도 십자가의 도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6;14)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가로 작정 하였음이라(고전2;2)
 
 
예수님을 믿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두 말할 것 없이 구원을 받아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지요
 
  
믿음의 결국은 영혼 구원입니다(벧전1;9)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다 영혼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갈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성경의 기록에는
 
 
예수를 주로 믿은 자가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고(롬8;17)
 
좁은문으로 통과 하여야(마7;13)구원을 얻게 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 당시 따르던 제자들에
 
직접 말씀 하시기를
 
예수를 주여 주여 불렀었어도 많은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7;22)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3)
 
 
위의 사람들이 분명히 예수를 믿었었고 예수 이름으로
 
여러가지 사역을 했는데도 왜 주님은 저들을 모른다고 하실까요?
 
 
그이유는 십자가의 도를 모르는 상태에서 사역을 했거나
 
아니면 십자가의 도를 누가 전해 주었어도 믿지않고 외면 하면서
 
자기 열심으로 사명을 감당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날 십자가의 도가 교회안에서 외면을 당하고
 
믿는 자들로 부터 버림을 당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십자가의 도를 깨달은 소수의 종들이 외치기를
 
예수는 그냥 지식적인 동의로 마음에 믿기만 해서는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예수를 믿는 증거가 그 사람 안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요일5;10)

 
 
예수를 믿었으면 자기 안에 그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 증거는계명을 지켜야 하고 죄를 짓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를 믿고도 죄를 지으면 죄의종으로(롬6;16)사망에 이릅니다
 
 
어떤이는 말하기를
 
사람이 어찌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하나님께로 난 자는 죄를 짓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요일3;9)
 
예수를 주로 영접했다면 그는 하나님께로 난 자입니다(요1;13)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 하니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요일3;9)

 
죄를 짓지 아니하는 비결이 바로 십자가의 도 입니다

 십자가의 도 안에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계명을 지키고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사람의 힘으로는 도무지 불가능 하니
 
믿는 자가 십자가를 지고 죽을 때에
 
죄 없으신 주님이 죄 있는 그 사람의 내면에 들어가셔서 능력으로 함께 하심으로
 
계명도 지키게 되고 죄도 안짓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십자가를 지고 죽지 아니하고
 
그냥 지식으로 믿고 동의 하는 상태에서는
 
주님은 믿는 자 안으로 들어오사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이 것이 십자가의 도의 원리입니다
 
 
죄인의 눈에 감추어진 십자가의 도

 
죄인을 죄에서 해방시키고 천국으로 인도하는
 
십자가의 도가 성경에는 이미 기록되어 있었으나
 
초대교회 이후로 시대마다 믿는 자들의 눈에 감취어져 있다가
 
 
하나님의 뜻을 쫒아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한 종을 통하여 십자가의 도를 열어 깨닫게 하시고
 
오랜 기간 하나님의 연단을 거쳐 완성된 진리로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지 않고서는 주님을 만날 수도 없고
 
죄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는
 
 
믿는 자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십자가의 도의 진리를 외치니
 
오늘날 교회들은 믿으면 구원이지!! 무슨소리야 하며 듣기 싫어합니다
 
 
교회는 듣기 싫어하며 귀를 막아도
 
진리는 전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듣던지 아니듣던지 십자가의 진리를 외치는 것입니다(딤후4;2)
 
 
이렇게 외칩니다
 
예수를 믿는 형제여러분 천국을 가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십자가의 도를 깨달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십자가의 도는 주와 함께 죽는 것입니다(롬6;6)
 
예수를 주로 믿는자는 이 세상에 속하여 살면 안됩니다
 
 
십자가의 도의 기본은
 
이 세상의 것들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것들을 버리세요
 
하나님의 사랑은 이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요일2;15)
 
 
이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면 간음하는 여자입니다(약4;4)
 
간음하는 자는 하나님과 원수되어 지옥갑니다..라고 외치면서
 
 
현재 교회에서 가르치고 전하고 있는 복음은 잘못되었습니다
 
회개하십시요..라고 외치고
 
 
또 십자가의 도 외에는 구원이 없으니
 
만약 회개치 않으면 절대 천국은 못간다...라고 인터넷에서 설교나 글로서 전하니
 
 
초대교회 당시
 
스데반이 둘러선 무리들을 향하여 진리의 복음을 외칠때에
 
저들이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저들이 마음에 찔려 저(스데반)를 향하여 이를 갈면서(행7;54)
 
저희가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듯이(행7;59)
 
 
오늘날도
 
십자가의 도를 깨달은 소수의 종들이
 
 
교회안에서 율법의 바리새인 같이 종교 생할에 머물고 있는 자들과
 
예수를 믿으나
 
무엇이 죄인지도 모르고 죄가운데 살고 있는 자들과
 
마귀에게 속한 이 세상을 쫒아 사는 무늬만 예수뿐인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의 성전은 마음에 짓는 것임에도 알지 못하고
 
예수 이름으로
 
교회를 크게짓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일부 목사들과
 
 
예수믿고 이 땅에서도 복을받고
 
죽은 후에 천국도 가자 하는 세상과 간음하는 교인들에게는
 
십자가의 진리는 꺼리낌이 되어
 
 
주님이 십자가의 피를 흘려 세운교회로 부터
 
십자가의 도는 문전 박대와 외면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심이 심히 가까운 이때에
 
교회는 마땅히
 
허리에 띠를 띄고 등불을 켜고 주님을 사모함으로 기다려야 함에도(눅12;35)
 
 
불구하고

이 세상의 쾌락과 안일함에 취하여 살고있는 목회 자들과 교인들에게는
 
십자가의 도는 눈에 가시처럼 여겨져
 
예수 믿는 자로 부터 외면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단 하나 뿐입니다
 
죄인을 죄에서 해방시키고 천국으로 인도하는 진리는
 
바로 십자가 복음 입니다(십자가 복음 외에 다른 그 어떤 복음은 없습니다)
 
 
십자가의 복음는
 
예수믿고 의롭다함을 받은 자가 땅에서 사는 날동안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질때에
 
 
주님이 그 사람의 내면에 들어오시어 그 분의 능력으로
 
능히 세상(마귀)를 이기게 하시고
 
또 죄를 그치게 되어 (점.흠)이 없는 자가 되어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천국으로 들려 올라가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이 심히 가까웠음을 여러 징조로 알 수있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는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마24;40)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기회를 놓치지 마시십시요
 
지금 기회 있을 때에 십자가의 도를 귀를 막고 외면하고 버리면
 
그 날에 주님으로 부터 버려둠을 당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살면서
 
사람들에게는 외면 당할 수 있으나 별로 큰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장차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른다 하면 어찌합니까?

 
 
기회는 항상 있지 아니합니다
 
오늘도 하루는 지나 가는군요
 
십자가의 복음 안으로 들어오시어 천국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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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가장 큰 목적 / God's greatest purpose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영광의 위엄을

우리에게 보이시매 불 가운데서 나오는 음성을우리

가 들었고 하나님이 사람과 말씀하시되 그 사람이 생

존하는 것을 오늘 우리가 보았나이다-신5;24

 

하나님은 그가 하시는 모든 일 속에서 그의 영광을 나타내려 하십니다.

 


그것이 그의 가장 큰 목적입니다.이보다 못한 목적은 하나님께 무가치합니다.

 


그런데 우리처럼 타락한 피조물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어찌 나타날 수 있을까요?

 


인간의 눈은 항상 자신의 영광을 구하며 곁눈질을 하고,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 합니다. 인간에게는 여호와의 영광을 볼 자격이

 


전혀 없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려면, 먼저 그 길을 가로막은

 


우리의 자아가 옆으로 비켜서야 합니다.바로 이를 위해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종종 곤궁과 어려움 가운데 빠트리십니다.

 


그 속에서 자신의 어리석음과 연약함을 의식하고 하나님이 그들의 구원을 위해

 


찾아오실 때 하나님의 위엄을 볼 수 있게 만들고자 하십니다.

 


그 생애가 평탄한 사람은 주의 영광을 거의 보지 못할 텐데,

 


자신을 비울 기회가 별로 없었던 고로 그 속이 하나님의 계시로

 


채워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별이나 빈곤 유혹이나 치욕이라는

 


거대한 대양의 파도 한가운데서 우리는 여호와의 능력을 배웁니다.

 


거기서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꺠닫게 됩니다.

 


따라서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험한 길로 인도하셨다면 이로 인해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인자하심을  체험하게 된 것도,

 


그 외의 방법으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지식의 부요함을 얻게 된것도 바로 그떄문이니까요.

 


고난 가운데 당신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기이한 손길  속에서

 


그의 영광의 광채를 보았음에 감사하십시오.


스펄전과 함께하는 아침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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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별설교] 사순절예배 설교 (Lent Preaching sermon)

 

 

 

제목 : 십자가의 도
성경 : 고전 1:18-24

 

주님은 오늘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다. 군중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호산나 만세를 부르며 열광적으로 주님을 환영하였다. 이렇게 예루살렘에 입성한 주님은 참으로 바쁜 한 주간을 지나게 된다. 더 정확히 말해서 5일간의 바쁜 한 주간의 수난주간의 일정을 마치고 성금요일 십자가를 지시고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가진 고통을 다 겪으시고 말할 수 없는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시고 십자가상에서 마지막 7마디를 남기시고 운명하셨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이요 기독교 복음의 진수요 핵심이다.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말씀하였다. 그럼 십자가가 어떻게 믿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지 묵상해 보려고 한다.

1) 십자가는 고난의 상징이요 표이다.

예수님은 죄 없으신 몸으로 나를 위해 내가 죄 값으로 고통을 당하고 매를 맞고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할 것을 대신 짊어지시고 대속의 고통과 죽음을 당하셨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신 멸시와 천대는 말할 수 없이 컸다. 그가 당하신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과 영적 고통은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주님이 당하신 육체적 고통을 살펴보면 금요일 오전 9시에서 오후 3시까지 6시간동안 아니 그 이전부터 많은 고난을 당하셨다. 주님은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든 멸시와 천대와 조롱을 다 당하셨다. 주님이 당하신 고통은 육체적인 이상으로 정신적인 것이었다. 그렇게 죽을지언정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던 베드로까지도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하는 모습, 그리고 자신이 체포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자 뿔뿔이 흩어지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는 아픔이 더 컸다.
한 걸음 더 나가 주님은 십자가상에서 우리 인간의 모든 죄를 걸머지시고 하나님께 버림받는 영적 고통과 절대고독을 체험하셨다. 우리의 죄 값을 한 몸에 짊어지시고 십자가상에서 당하시는 고통이 너무나 괴로워 '내가 목마르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울부짖었다. 왜냐하면 잠시 동안이지만 그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고 계셨기 때문이다.


2)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극치이다.

주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이 얼마나 공의로우시며 공의를 원하시는 가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다. 하나님은 불의를 미워하시고 죄를 심판하신다. 하나님은 죄를 용납하지 않으신다. 죄를 반드시 벌하시고 공의로 심판하신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죄에 대한 엄한 심판과 진노를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이시다. 십자가는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인간을 사랑하셨는가를 보여주신다. 만일 하나님이 공의로 다스리시고 심판한다면 하나님 앞에 설 자가 한 사람도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모두 죄인이기 때문이다. 아담 이브가 지은 죄성이 우리에게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시어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셔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모순없이 다 이루셨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했다.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연약할 때도 사랑하시고 우리가 원수될 때도 사랑하시며 우리가 죄인될 때도 사랑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세상 사랑은 내가 건강하고, 잘 살고, 성공하고, 부귀영화를 누릴 때 사랑하지만 내가 병들고, 가난해지고, 힘이 없고, 버림받게 될 때는 뒤돌아서는 냉정한 사랑이다. 변하는 사랑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마치 부모가 못나고 병약한 자녀를 더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듯이 우리가 연약하고 병들었을 때도 더욱 사랑하시는 사랑이다.


3) 십자가는 인류 구원의 승리였다.

히브리서에 보면 '피흘림 없이는 죄사함이 없다'고 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우리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참 소망을 주셨다. 그러기에 십자가는 믿는 자에게 구원의 능력이요 지혜이다. 월남전에서 살아 남은 미공군장교 프레드 체리(Fred Cherry)는 그의 수기 피(Bloods)에서 이런 이야기를 썼다. 그의 비행기가 격추되어 중상을 입고 포로가 되자 이제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포로병들은 '하노이 힐튼 호텔'이라 불리는 수용소에서 날마다 심한 심문과 고문을 당하면서 죽음의 날만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그러한 가운데서 누군가가 고안해 낸 벽을 두들기는 통신방법을 고안해 냈는데 날마다 그들이 주고받은 신호가 있었는데 그것은 C자였다. 그것은 Christ, Cross 또는 Church의 첫 글자가 되는 것으로써 주님을 바라보고 십자가를 바라보며 교회를 바라보라는 말이었다. 이 신호를 주고받으며 그들은 좌절하지 않고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구리뱀을 쳐다보았을 때 구원을 얻었던 것처럼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신 주님을 바라보는 자는 생명을 얻고 구원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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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정예배 설교] 은혜로운 삶

제목 : 은혜로운 삶

성경구절 시 139:1 

 


본문: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시편 139:1 )

 

말씀:인간의 삶에는 여러형태가 있습니다.  그 첫번째가 인본주의적인 삶

입니다. 인본주의적인 삶은 인간이  제일이요, 인간은 이성과 과학을 통해 삶 
상을 유토피아로  만들 수 있다고 믿는 사상입니다. 이러한 인본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무관심합니다.


 두번째가 율법주의적인 삶입니다.  율법주의는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습니

다. 그러나 아무리 신앙을 가졌다 해도 자기의 선한 행위나 공로로 자격을

얻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땀을 흘려  자기의 의를 나타내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세번째가 은혜주의적인 삶입니다.  은혜주의적인 삶이란 하나님께서는 살

아 계시며 영원하신 뜻과 계획에  따라 우리들을 위하여 친히 모든것을 예

비하시고 이루신다는 것을 믿고 그 뜻에 3坪의求 삶을 말합니다.


 오늘날 내 힘으로 수고하고 애써 구원을 얻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태어나기 2천년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죄값을 청산하시고 구원을  다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

리를 구원하시는 일에 우리가 거든 일이 없습니다. 이미 2천년전 하나님께

서 다 이루어 놓았는데 여기에 보탤  수도 없고 뺄 수도 없고 도움을 베풀

수가 없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구원받기 위해 우리가 한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또 율법주의자가  되어 하나님께서 이룩해 주신  구원의  선물을 부인하고

자기 힘으로  구원받기 위해 피땀흘려 노력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죄를 짓지 않은 의인은  없으니 결국 인간은 절망에 이르고 맙니

다. 율법주의자들은 하늘에 이르는4  사닥다리를 자기가 만들어 올라가려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사닥다리를 어떻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하

나님께서 하늘에서 사닥다리를 만들어  밑으로 내려 주셨는데 그것을 부인

하고 자기 힘으로 사닥다리를 만들어서 하늘에 올라가려고 하는 사람은 평

생토록 노력해도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결국 떨어져  멸망받고 말 것입니

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룩해 놓으시고 값없이 선물로

주시는 구원을 그저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감사히 누리며 살아야만 합니다.

그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구원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감사하게

살면 성령이 오셔서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경영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것이며 우리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므로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저 할렐루야하고 믿음으로 나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은혜

인지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은혜로 사는 삶입니다.


 기도 : 은혜의  주님. 저희가 하나님의 은혜를  굳게 믿고 항상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지켜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통성기도 : 화목한 가정을 위해

 주기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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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기본교리 (Christian basic doctrine) 구원의 10단계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구원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이제 '구원을 받는다'라는 것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라는 말씀과 같이,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과 예수를  자세히 모르고서는  확실하게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다음과 같은  10단계로 구분할  수가 있습니다. 

 

1. 작정.  2. 예정.   3. 부르심.  4. 회개.    5. 영접.  6. 중생.  7. 칭의.  8. 성화.   9. 영화.  10. 구원.

 

1. 작정.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奇異)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내가 은밀한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기 우지 못하였나이다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定)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冊)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오히려 주와 함께 있나이다'


(시139:14-18)라고 기록된 것처럼,   하나님의  신묘막측한 섭리는 온 세상  만물을  창조하기 전에 미리 계획하고 준비하시고, 바다의 모래보다도 많은  수의 이미 정해진 세상의 일들을 하나님의  작정 섭리와 뜻대로 움직이며 주관하시다가,  결국 최종  심판을 하시는 것을  보여 줍니다.  심지어 우리의 인생의 사소한  일들이라도 우리의 형질이 이루기 전에 미리 계획되고 작정된 대로 주의
생명 책에 기록되어져 있고, 하나님께서   그대로 성취하심으로 일어나게 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2. 예정.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신령한 복으로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 하
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1:4-7)라는 말씀과 같이, 예수를 믿는 성도들은  이미 창세 전에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을 입어 구원을 받기로
예정된 사람들인 것입니다.

 
3. 부르심. :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 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1:9)라는 기록대로, 하나님께서  오직 은혜로 영원한  때  전부터 예정된 성도들을 자녀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신을 부르는 주인의 음성을 분명히 깨닫고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고백하며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요10:3)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 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
르느니라.  요10:26-27)  혹자는 아무나  예수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지만, 성경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
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이여  함과  같으니라'(롬10:13-15)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음  전파하는 자를  보내어 말씀을  듣게하면, 믿음이 생겨서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므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섭리인 것입니다.


4. 회개. :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라'(고후7:10)라는 말씀과  같이, 성도가 자신이 죄인임을 스스로  깨닫고 회개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 뜻대로 근심하게 하심으로 회개케 하시는 것입니다.


5. 영접. :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1:12-13)라는  말씀에서 보면,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도 믿는 집안이라서 혹은  자신의 의지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라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로서  났다는  것은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히2:11)라는 말씀과 같이, '하나'라는 것은 이 시공  세계가
아닌 영원한 세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성도들은 비록 육체로는 이 세상 가운데 살고 있어도, 그 속의 내재하는  영은 영원한 세계의 존재로서  다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6. 중생.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라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중생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그  영이  '죽은 영'으로 태어납니다.  이는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처음 창조함을 입었을 때에는  '산 영'이었지만,  선악과 열매를  따먹고  그 영이 죽어 버렸던 것입니다.(첫째  사망)    그러므로  예수님을 마음속에  영접하여야만이 그  죽은 영이  다시 중생 되어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7. 칭의.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4)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2:6)라는 기록대로, 죄인된 성도들을 의롭다 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이라는 것도 역시 하나님의 선물이며, 아무나 누릴 수가 있는것도 아닌 것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엡:8-9)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 살후3:2)   


8. 성화. : 대체로 1에서 7단계까지는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은 인정하여도,  이 성화  과정만큼은 성도 스스로가 애쓰고 노력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과정  역시도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히6:17-18)라는 말씀과 같이, 성도들에게 구원을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그 예정하신  약속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보증으로 맹세까지 하심으로 확실함을 증거   하시고, 그 증거로써 보혜사 진리의 성령을 성도들의 마음속에 보내어 진리를 생각나고 깨닫게  하여 구원을 이루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14:26)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의 섭리가 있음으로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와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고전1:8)'라는 말씀과 같이, 주께서 성화시켜주시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성화시켜주시는 방법은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영혼의 생명의 양식으로 주셔서 그 영혼이 무럭무럭 자라 가게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엡4:13)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 벧전3:18)

 
9. 영화. :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15:49)라는 기록대로, 성도들이 이 세상 삶을  마치고 그  육체가 흙으로 돌아간 후, 마지막 심판의 나팔 소리에 성도들은 생명의 부활로 천사와 같은  모습으로 부활하게 되어 천국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영이  중생 되지 못하고  죽은 영으로  있는 사람들도 그 육체가 죽은  후에  결국 부활하게  되지만,  그들은 최후의 심판을 거쳐 둘째  사망 곧  영원한 지옥불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10. 구원. :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1:9)라는 말씀과  같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결국 그 영혼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어린 양의 생명책에 예약이 되어
있어야 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믿음이라는 것을 한 순간의 개념으로 이해하여 믿기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이해하여서는  안 됩니다.  즉 '믿음'이라는 것은  성도들이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의 일평생에 걸친 인생 여정동안,   하나님의 예정섭리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중생하여 그 영혼이 성경의 진리의  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먹고  마심으로  점차  성숙하여지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눙하신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하나님의 자녀로  택한 성도는 복음을 듣게 하여  믿도록 하여  주시고, 불택한 사람들은 그 영혼의 귀를 막으셔서 복음을 듣지 못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입니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이사야6:9-10)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오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하시느니라.  롬9: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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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주일 예배 대표기도문 (January prayers for sunday worship service)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온 우주를 창조하시어 우리에게 살아가는 터전을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제 더위를 주시는 계절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주신

아버지의 커다란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아침에 저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시고

저의 다닐 길을 알게 하여주신 주님께 한없는 감사를 드립니다.

 
은혜로우신 주님!

지난 한 주간도 주님에 말씀대로 살지 못하였음을 고백합니다.

저의 모든 육신의 생각과 말씀대로 살지 못함으로

스스로 거두어 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주님의 보혈로 정결케 씻어 주시옵기를 간구합니다.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말씀위에 굳게 세워주시고 제 안에 계시는 성령의 인도함에 의지하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자녀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생명이 있는 모든 피조물들이 왕성하게 활동하는 이 계절에

우리의 심령도 주님을 향하는 열심의 행함이 나타나도록 인도하시옵소서.


불의와 악에 타협하지 않도록 하시옵고 불의를 보고도 지적하지 않고

지나치는 육신의 모습이 되지 않도록 깨우쳐 주시고 가르쳐 주시옵기를 간구합니다.

말씀으로 이 땅에 오신 주님께서 주신 빛을 발하는 자녀가 되게 하시고 말씀 위에 서서

주님의 권능으로 이 성전에 모였사오니 커다란 은혜 가운데

주님을 사모하는 심령이 되게 하시옵소서.
 

사랑으로 지켜주시는 주님!

한창 밝게 자라야 할 이 땅에 청소년들이 악한 범죄의 표적이 되고 있나이다.

주님의 권능으로 보호하여 주시옵기를 간구합니다.

악인들의 눈에 띄지 않게 하시옵고

악한 범죄의 올무에서 헤어나서 이 나라를 책임지는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지켜주시옵소서.

부모들이 가정에서 밥상머리에서 말씀으로 함께 하시는 심령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지체의 머리되시는 주님!

저의 몸된 교회를 위해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곳에 주님의 뜻으로 주님의 터위에 세우신 저의 000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오늘까지 지켜주시고 인도하여 주셨음에 감사드립니다.

그 동안 저의 형제 자매들의 삶을 위해

우리 모두 중보기도를 통해 서로 나눔을 가졌습니다.

응답으로 화답하여 주시옵기를 간구합니다.

또한 육신의 질병으로 힘들어하는 형제 자매들에게

기름부으심으로 치유하여 주시옵고

삶의 물질로 어려워하는 형제 자매들에게 물질의 축복을 주시어

주님께 영광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시옵기를 원합니다.

저의 제일교회가 이 지역에 구원의 방주가 되게 하시어

죽어가는 많은 심령들이 복음의 기쁜 소식을 받아

주님 전에서 예배드리도록 전도하는 교회가 되게 하시옵소서.
 

오늘도 단위에서 우리들에 생명의 말씀을 전하시는 사자 목사님께

성령의 두루마기를 입혀주시어 그 말씀을 통해 듣는 우리 모두가

주님만을 바라보게 하시고 주님의 능력이 말씀을 통해

덧입혀지는 놀라운 말씀이 되게 하시옵소서.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여 주님의 일에 봉사하는

보이지 않는 손길들이 있사오니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저들에게 새로운 힘을 허락하시어 날마다

새로운 은혜를 공급받아 아름다운 결실맺는 삶이 되게 하시옵소서.


하나님께 아름다운 목소리로 찬양하여 영광을 돌리는

찬양대에 복을 주시옵고 저들이 가정에 큰 위로와 복락을 허락하사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여 주시길 기도합니다.


우리 모두의 형제자매들이 하나님의 선한 계획 가운데 순종하게 하시고

세상에 복음의 씨앗을 심으로 수있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구원해주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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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주일예배설교 / 생명력이 넘치는 교회(October,Sunday Sermon)

 

제목 : 생명력이 넘치는 교회 

말씀 : 2:42-47 

 

1.올바른 목적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스위스 영성가 프란시스 쉐퍼가 한번은 미국교회를 방문하고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미국교회는 모두 자기 행복, 자기 만족에 빠져 있다. 미국교회의 불행은 여기에 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이나 거룩한 삶이나 사명이나 헌신이나 하나님의 뜻이나 이런 것들은 별로 생각하지 않고 그저 세상에서 누릴 만족이나 기쁨이나 뭐 이런 것들만 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신앙의 목적이 지극히 이기적이고 육체적이고 세상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런 교인을 소비자교인이라고 불렀고, 그런 교회를 상품가게라고 하였습니다. 소비자 교인이란 사람들이 자기 구미에 맞는 음식이나 상품을 찾아 여기저기 찾아다니다가 원하는 것을 얻고 만족하는 것처럼 교인들도 자기 구미에 맞는 것을 찾아다니는 소비자로 전락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도 어떻게든지 신자들의 구미에 맞는 상품을 열심히 개발하여 사람들을 끌이들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예배자로 교회에 오는 게 아니라 자기 구미에 맞는 것을 얻기 위해 찾아온 소비자요, 교회는 교인들의 원하는 상품을 판매하는 상점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몇 년 전에 미국 교인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설문 조사에 의하면 미국 국민의 55% 주일에 교회에 나가는데 왜 나가느냐고 물었더니 45%는 삶에 유익한 말씀이나 교인들과의 친교를 통하여 뭔가 삶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답했고, 26%는 마음의 평화와 정신적인 안정을 얻기 위해서라고 응답했고, 20% 정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나머지 9%는 기타 등등 여러 가지 이유로 교회에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출석하는 55% 중에 20%만이 올바른 목적으로 왔으니 결국 고작 약11%만이 제대로 된 교인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교회에 와서 친교나 유익한 이야기나 인간적 만족을 구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자에게 만족과 기쁨과 정신적 안정과 안식을 주십니다. 이것도 신자가 누릴 수 있는 복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그런 인간적 만족과 행복이 교회의 존재 목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국의 옥스퍼드대학교, 캠브리지대학교 교수를 지내면서 하나님을 부정하다가 중년 이후에 주님 품으로 돌아와 순전한 기독교, 나니아 나라 이야기 등 수많은 기독교 저술을 남긴 C.S 루이스라는 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행복해지려고 교회를 찾은 것이 아니다. 그런 행복은 와인 한 병으로 얻을 수 있다.”

 

교회에 와야할 진정한 목적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단순히 우리가 인간적으로 원하는 만족이나 행복을 찾기 위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와 비교할 수 없이 훨씬 더 크고 아름답고 진정한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게 뭡니까? 그건 두말할 나위도 없이 일차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와 무지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는 것입니다. 2차적으로는 그렇게 예수님을 믿고 구원의 은총을 누림으로 지금 여기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인생의 목적을 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의 올바르고 가치있고 의미있는 삶이 무엇인지 바르게 알고 위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고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는 가운데 바르게 아름답게 정직하게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고 남에게도 생명의 기쁨을 주며 자신도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가치와 의미가 넘치는 삶을 살다가 영광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6:33절에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는 하나님을 알고 믿음으로 구원의 은총을 누리고 그 뜻대로 삶으로써 이 땅에서도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이 분명한 의미를 바르게 알고 올바른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할 때에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며 주님의 역사이루어가는 복된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주님께 대한 온전한 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올바른 믿음위에 서서 생명력있는 삶을 살려면 가장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올바르고도 분명한 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오직 유일한 하나님의 아들로써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신 구세주라는 사실에 대한 올바르고 분명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확고한 신앙고백이 있어야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뭡니까? 교회는 단순히 인간적 교제를 위한 단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단순히 세상에서 인간적 육체적 물질적으로 소망을 두고 위로하는 단체가 아닙니다. 교회은 고상한 인격과 정신적 수양을 하는 곳도 아닙니다. 교회는 단순히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곳도 압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나의 구세주라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단순히 이 사회를 아름답게 만들어나가는 공동체가 아니라 생명의 공동체요, 진리의 공동체요, 이 땅위에서 천국을 건설하는 공동체 인 것입니다.

 

여러분, 16장에 보면 어느 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그러자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 주님, 어떤 사람은 세례 요한, 어떤 사람은 엘리야, 또 어떤 사람들은 선지자중의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주님이 다시 묻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이 때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16:16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너는 복된 사람이라고 하시면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16:18절을 같이 읽습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여러분, 이 대화의 요지가 뭡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너희는 나를 무엇으로 알고 따라 다니느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나를 선지자나 선생으로 알고 있는데 너는 어떠냐? 나를 메시야로 알고 따르느냐 아니면 너희들도 그냥 선지자중의 한사람으로 아느냐, 아니면 나를 통해서 무슨 부귀영화라도 얻으려고 따라 다느니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시오, 메시아라고 고백을 하였고, 그런 고백을 들은 예수님은 베드로를 칭찬하시며 바로 그런 너의 그러한 신앙고백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바로 이와 같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고 믿고 고백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그런 예수님께 대한 올바른 신앙고백의 터위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대한 온전한 신앙고백이 없으면 교회의 겉모양이 아무리 그럴듯해도, 교인들이 아무리 인격적으로 훌륭해도 그냥 멋있고 훌륭한 사람이 될 수는 있어도 진정 생명력이 넘치는 성도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세상의 위대한 성인이나 영웅이나 선생이 아니라 그리스도 주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저 나에게 평안이나 위로나 기타 여러 가지 복이나 주시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유일한 구세주이심을 분명히 알고 오직 주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나의 유일한 구원자라는 분명한 신앙고백 가운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와 부활을 통하여 이루신 새생명의 은총이 내 안에 온전히 역사함으로 주님의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우리가 주님께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가운데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하겠는데 그러면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습니까?

 

그것은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하심과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이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믿음은 영에 속한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의 심령 속에 오셔서 우리의 죽었던 영을 살려 주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하나님에 대하여, 예수님에 대하여,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가르쳐주시고 믿게 하실 때만이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믿고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초대교회가 어떻게 설립되었습니까? 1:13,14절을 보겠습니다.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무슨 말씀이냐하면 열두제자를 비롯한 120여명이 감람산에서 승천하시는 예수님을 보내드리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분부를 따라 마가의 다락방으로 돌아와 오로지 기도하는데 힘썼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하기를 힘쓸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것이 바로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인 것입니다. 좀 길지만 같이 보겠습니다. 2:1~4절입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러니까 120여명의 문도들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오로지 기도에 힘 쓴지 열흘만에 강한 바람소리 같은 것이 방안에 가득하고, 마치 혀가 날름거리는 듯한 불길이 임하더니 거기 있는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제자들은 온전히 주님을 알게 됩니다. 주님의 능력을 덧입게 됩니다. 그래서 과감히 밖으로 나가 복음을 전하게 되고, 하루에 삼천명 오천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며 초대교회는 폭발적으로 부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이 창립52주년 기념주일이면서 성령강림주일인데 바로 이 사건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 임하였던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초대교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날을 기념하여 오늘 우리와 우리 교회도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고 바르게 신앙을 고백하고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우리 자신이 먼저 풍성하게 누리고 나아가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의 역사를 이루어가기를 다짐하고 힘쓰자는 취지에서 지키고 있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알게 됩니다. 자신의 죄와 무지를 알게 됩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보게 됩니다. 능력과 지혜를 얻게 됩니다. 그래서 감사와 기쁨으로 주를 섬기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의 온갖 왜곡되고 죄되고 무지한 것들을 분별하게 되고, 모든 연약하고 부족하고 부정적인 것들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교회창립기념주일과 성령강림주일을 보내며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정말 열심히 기도하고, 말씀 들을 때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정말 성령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 가운데 감사와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가운데 모든 도전 세력들을 이기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며 주님이 주시는 모든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는 복된 성도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사랑과 은혜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생명력이 넘치는 교회가 되려면 사랑과 은혜가 가득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성령이 충만함으로 바로 이런 사랑과 은혜가 충만함으로 더더욱 힘있게 발전해 나갈 수가 있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얼마나 사랑과 은혜가 충만했던지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44,45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자기 재산과 소유를 다 팔아 교회에 바치고 니꺼 내꺼 따로 없이 각각 필요한 만큼 가져다 썼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아름답고 사랑과 은혜가 가득한 모습입니까? 이것은 사랑과 은혜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랑과 은혜가 없으면 이런 일은 시작도 못하고 만에 하나 어떻게 시작을 했다 해도 날마다 온갖 시비와 갈등과 다툼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랑과 은혜가 충만했기에 자신의 것을 다 드려서 함께 사용했습니다. 날마다 함께 모여였습니다. 음식을 함께 나누며, 말씀 듣고 기도하고 찬양하였습니다. 그러니 더더욱 사랑과 은혜가 충만했고,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니 믿는 자의 숫자는 날마다 더해갔고, 더욱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가정이든 교회이든 사랑과 은혜가 넘치는 공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가정이나 교회나 다른 어떤 공동체라도 사랑과 은혜가 있으면 반드시 흥합니다. 망할래야 망할 수가 없고, 흥하지 않을래야 흥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요, 잘나고 못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배우고 못배우고의 문제도 아닙니다. 문제는 믿음과 사랑입니다. 믿음과 사랑이 있는 곳에 행복이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번영과 풍요로움이 있습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면 서로 귀히 여깁니다. 서로 이해하고 용납합니다. 서로에 대하여 성실합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열심히 성실하게 최선을 다합니다. 원망 불평 시기 질투하지 않습니다. 그런 공동체가 어찌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공동체에 하나님이 어찌 복을 주지 않겠습니까? 그런 공동체가 어찌 사람에겐들 인정받지 못하겠습니까? 그런 공동체가 어찌 든든히 세워지지 않겠습니까? 그런 공동체 안에 사는 사람들이 어찌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더욱 깨어 기도하고 말씀을 들음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라니다. 그렇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에 성령께서 주시는 평안과 기쁨과 은혜와 사랑으로 충만하게 되어 서로 사랑하며 은혜를 끼치며 도우며 기쁨과 은혜와 위로와 소망과 평안을 주고 받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렇게 성령과 사랑이 충만하여 생명력있는 교회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열심히 모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우선은 그들은 열흘동안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습니다. 그러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니까 더더욱 기쁨이 충만해서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게 되었습니다. 오늘 46절을 보겠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여러분, 보십시오. 날마다 모이기를 힘썼다는 것입니다. 주일이나 수요일만 아니라 매일 모였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들은 늘 성령의 충만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초대교회는 정말 아름답고 바람직한 순환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여서 전혀 기도하기를 힘쓸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니 사랑과 은혜가 넘쳤고, 그러니까 더욱 모이기를 힘쓰게 되었습니다. 모이기를 힘쓰니 더더욱 은혜와 사랑은 더욱 넘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성령충만함을 받고 사랑과 은혜와 기쁨과 평안이 넘치는 삶을 살려면 열심히 모여야 합니다. 모여서 기도하고 찬송하고 말씀을 들을 때에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사랑과 기쁨이 충만해 집니다. 그러면 더 교회가 오고 싶습니다. 말씀이 그리워집니다. 그래서 더욱 교회를 찾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충만한 성도의 선순환적인 삶입니다.

 

그러나 모이지 않으면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기도와 말씀과 찬양하는 일을 게을리 하면 은혜는 멀어져 갑니다. 은혜가 멀어지면 교회는 더 멀어집니다. 교회가 멀어지니 은혜는 더 다운되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과 사랑과 은혜와 활력이 충만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10:25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모이기를 게을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시대가 갈수록 사람들이 점점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영광돌리고 사랑과 은혜를 나누는 일을 멀리하고 그저 먹고 입고 자고 놀고 하는 세상 일에 바빠지는데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서는 성령으로 말씀으로 은혜로 사랑으로 충만함을 입고 은혜 충만한 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교회에 모여서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찬양하지 않으면 우리가 맨 날 하는 일이 뭡니까? 그저 맨날 보고 듣고 생각하고 행하는 것들이 먹고 입고 자고 돈벌고 일하고 뭐 그런 것들이 아니겠습니까? 맨날 그런 거만 생각하는데 어찌 영성이 풍요로워 지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교회창립52주년 기념주일과 성령강림주일을 맞이하여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이곳에 너무나 귀한 교회를 세워주셔서 생명 주심에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기초이신 예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의 고백을 통하여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위하여 모이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도간에 더욱 사랑과 은혜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성령 충만함을 받아 더욱 사랑과 은혜와 기쁨이 충만하며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의 생명의 역사를 힘있게 이루어갈 수 있는 우리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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