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파 신앙과 알미니아니즘|종교개혁자들
알미니아니즘(Arminianism)은 홀란드(Holland)에서 개혁파 교회의 목회자였던 제임스 알미니우스(James Arminius, 1560-1609)의 이름에서 유래된다. 그는 1603년 라이덴(Leyden) 대학교의 신학교수가 되었다. 라이덴에서 교수직에 있는 동안 개혁파 신앙을 떠나게 되었다. 비록 1609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교리는 지속적으로 가르치고 발전되어 추종자들이 있게 되었다.
본래 알미니안 논쟁은 1604년-1619년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레이든 대학교의 두 명의 교수, 즉 알미니우스와 고마루스 간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리하여 네덜란드 전역으로 급속히 확산되어서 교회의 하나됨이 국가의 존폐의 위기까지 가기에 이르렀다.
문제의 발단은 철저한 칼빈주의 사상을 지키는 가운데 약간씩 수정하여 받아들이는 자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할렘(Haarlem)의 법률가였던 코른헤르트(Dirk Volkerts Coornhert, 1522-90)이 예정론을 수정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그를 반박하도록 알미니우스가 보내졌는데 그를 비판하기보다 그를 동의하였다. 더욱이 1603년 레이든의 교수로 된 알미니우스는 코른헤르트를 동조하는 자신의 신학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에 의하면, 우선적인 하나님의 예정은 미리 예정하는 것이 아니고, 창조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피조물들이 타락하도록 허용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은혜의 수단을 제공하는 것이고; 네 번째 예정은 구원받을 사람을 예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신적 예지를 가지고, 회개할 사람과 은혜를 받을 사람을 아시기 때문에 예정하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철저한 칼빈주의자였던 프란시스 고마루스(Francis Gomarus, 1563-1641)는 그를 공격하게 이르렀다. 하지만 논쟁이 무르익게 되어 전 네덜란드로 퍼져나갔다. 결국 논쟁을 즐기지 않는 알미니우스는 헤이그(Hague)에서 열린 남부 주들 앞에 자신을 변호하라는 부름을 받았으나 연약한 건강에 강하게 받은 심신의 긴장으로 알미니우스는 병을 얻게 되어 1609년에 죽었다. 그러자 그를 따르는 자들, 즉 ‘항의자들’(Remonstrants)이 힘을 규합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게 이르렀다. 그는 도르트회의(Synod of Dort, 1618-19)에서 억압을 받은 사람들과 같은 운명을 피할 수 있었다.
1610년 “항의서”(Remonstrance) 또는 “알미니안 5개 항목”(The Five Arminian Articles)라 알려진 문서가 46명의 목회자들이 서명하여 연합 주의 시민 권위자들에게 제출되었다:
I.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하시고 불변하신 작정으로,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자신의 아들을 의지하고 이런 믿음 안에서 이런 은혜를 통해 끝까지 신실한 순종을 일삼을 사람들을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기로 결심하셨다; 그리고 다른 면으로, 요한복음 3:16에 있는 복음에 따르면, 믿지 않는 자들을 죄 가운데 내버려두시기로 또 그리스도로부터 그들을 소원시키셨다.
II.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 그래서 그는 모든 사람에게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죄들의 화해와 용서를 얻게 하신다; 그러나 요한복음 3:16에 따르면, 신자들 외에 누구든 이와 같은 죄의 용서를 실제로 누릴 수 없다.
III. 사람은 저절로 구원받는 은혜나 자유의지의 힘을 소유하지 못한다. 사람은 저절로 그리고 스스로 참된 선을 생각할 수도, 원하지도, 그리고 행할 수도 없다(구원받는 믿음은 분명히 이와 같다); 하지만,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성령을 통해 하나님께로 다시 태어나야만 하며, 요한복음 5:5에 따르면, 참된 선을 올바로 이해하고, 생각하고, 원하고, 그리고 행하기 위해서 이해, 성향, 의지, 그리고 모든 능력에서 새롭게 태어나야만 한다.
IV.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는 시작, 계속, 그리고 모든 선의 완성인데 이 은혜는 심지어 중생한 사람이 스스로 예기, 후원, 깨달음, 순종, 그리고 협력하시는 은혜 없이는 결코 생각할 수도, 원할 수도, 선을 행할 수도, 악의 유혹을 이길 수도 없는 데까지 이른다; . . . 하지만 이런 일에 대해 이 은혜는 저항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은 성령을 저항한다. 사도행전 7장과 다른 곳을 보라.
V.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결합한 사람은 그것으로 생명을 주시는 성령과 함께 하는 사람이 되고, 그것으로 사탄, 세상, 그리고 자신의 육체와 싸울 수 있고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 성령의 도우시는 은혜로 이것이 이루어짐을 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유혹에서 자신의 성령을 통해 그들을 도우시고, 자신의 손을 펴시며, 그들이 싸울 준비가 되었고 그의 도움이 필요하고, 활동적일 때에만, 그들을 떨어지지 않도록 하신다. 그 결과 그리스도의 말씀 즉, 요한복음 10:28에 따르면, 사탄의 계략이나 능력이 아니더라도 그들은 실족할 수도 있고, 그리스도의 손에서 끌려 내릴 수도 있다.1)
이 항목들은 “항의자들”(Remonstrants) 또는 알미니안들의 교리를 말하는데 특히 예정론, 속죄의 범위, 구원받는 은혜의 근거, 그리고 견인(perseverance)에 관한 것이었다. 논쟁 초기에는 무관심 속에 있었지만 항의자들이 성장하면서 그들의 5개 항목에 대한 개혁파 신앙의 5대 교리, 즉 무조건적 예정, 제한적 구속, 전적 타락, 불가항력적 은혜, 그리고 성도들의 견인 등이 나타났다. 이 5대 교리가 개혁파 신앙 또는 칼빈주의를 정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개혁파 신앙은 진리의 체계이며 5개 항목 이상으로 규정될 수 있다. 하지만 5대 교리 안에 본질적인 내용들이 다 포함되어 있다고 하겠다. 알미니안들이 공격하는 5대 교리들 가운데 칼빈주의는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것들은 알미니안 체제와는 정반대의 입장을 갖는다. 그렇다고 알미니아니즘의 잘못을 5개 항목으로 제한시켜서도 안된다. 알미니아니즘은 신학이며 이 신학과 개혁파 교회의 신학과는 다르다. 알미니안 신학은 5가지로 요약되기 때문에 과거의 논쟁도 5가지로 대두되었던 것이다.
1. 무조건적 예정
1610년의 항의파들의 첫 번째 항목은 예정론에 관한 것이었다. 초기 종교개혁자들은 모두 예정론에 관해 일치를 가졌다. 루터만 아니라 칼빈이 소유했던 절대적 예정론의 주도권은 개혁파교회만이 유지했다. 무조건적 예정의 의미를 웨스트민스터 고백서 3장에서 찾을 수 있다:
1항. 하나님은 영원 전에 그 자신의 가장 지혜롭고 거룩한 의도에 따라 자유롭게 그리고 불변하게 앞으로 일어날 모든 것을 정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그것에 의해 하나님이 죄의 조성자가 되거나, 피조물의 의지에 강제력을 행사하거나, 제2원인의 자유와 우연성이 제거되지 않고 오히려 확립되는 방식으로 하셨다.
2항 비록 하나님이 모든 가상된 상황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어떤 것도 그것을 미래로, 또는 그와 같은 상황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으로 예견하기 때문에 정하지 않으셨다.
3항 그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하나님의 작정에 의해, 인간과 천사의 일부는 영원한 생명으로, 나머지는 영원한 사망으로 미리 운명이 예정되었다.
4항 이와 같이 운명이 미리 예정된 천사들과 사람들은 개별적으로 그리고 변경되지 않도록 설정되었으며, 따라서 그들의 수가 매우 확실하고 확정되어서 증가되거나 감소될 수 없다.
5항 세계의 기초가 조성되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의 영원하고 불변하는 목적과 자기 뜻의 비밀한 의도와 선한 기쁨에 따라, 생명으로 예정된 일부의 인류를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계속될 영광으로 선택한 것은 단지 그의 값없는 은혜와 사랑에서 나온 것이며, 결코 신앙이나 선행, 혹은 그 중 하나의 견인이나 피조물 안에 있는 다른 어떤 것에 대한 예견이 그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움직인 조건이나 원인이 아니다. 따라서 모든 공로가 그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찬양하는데 돌려져야 한다.
1645년 웨스트민스터 교회 지도자들이 구성한 이 교리 설명은 개혁파 교회가 고수하고 알미니안들이 공격했고 초기 종교개혁자들이 유지했던 것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 중요성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주적 역사를 크든 작든 하나님의 계획과 작정에 포함된다는 것이며, 발생하는 모든 것은 크든 작든, 선하든 악하든, 영원 전부터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모든 것이 발생한다는 것에 있다. 첫 번째 문장에서 알미니안과의 충돌되는 것은 하나님의 전 포괄적인 작정과 연관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이런 작정이 이성적 존재의 운명에 의존되며, 특별히 인간의 운명에 의존되며, 다시 말하면 작정이 다른 사람들의 죽음에 관해 미리 숙명적(foreordination)이고 어떤 인간들의 삶을 예정한다는 것 적용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유롭고 불변하게 발생하는 일들을 예정(ordains)하신다면, 어떤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멸망 받을 시키는 일이 일어난다면, 하나님은 틀림없이 이런 사실들만 아니라 다른 사실들까지 자유롭게 그리고 불변하게 예정했다(ordained)는 것이다. 만일 알미니안들이 후자를 부인한다면 전자를 부인하는 것이다.
생명과 예정, 그리고 죽음과 숙명(foreordination)은 본질적으로 영원부터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자신의 뜻의 방침에 따라 인류의 정한 수를 영생으로 선택하셨다는 것, 또 하나님은 그들을 개인적으로 선택하셨다는 것, 그리고 이런 선택에 있어 하나님은 믿음이나 선행을 미리 보심을 조건으로 하지 않으셨고 단지 선택이 스스로와 다른 어떤 것에 영향을 받지 않으시는 가운데서 발견되는 주권적 기쁨으로 결정하셨다. 다른 말로 하면, 절대적, 무조건적, 그리고 불변하는 작정으로 하나님은 자유로운 은혜와 사랑으로부터 어떤 사람들의 구원을 결정하셨고, 그러한 작정에 따라 하나님은 자신의 은혜와 사랑의 목적을 실행하신다. 죄인들의 응보하시는 것처럼 영원한 형벌로 정하시기로 작정하신 동일한 주권적 선한 기쁘심을 실행하심으로 선택하시지 않으셨다.
이런 교리를 알미니아니즘은 부인한다. 제임스 알미니우스는 “하나님께서 절대적으로 어떤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로 미리 예정하시지 않으셨지만 작정 안에서 그들을 신자들로서 여기셨다”고 말한다. 이런 사실은 인식해야만 하는 것이다. 믿음의 항목에서 알미니아니즘의 근본적 원리는 개혁파 기준들 안에 나타난 교리를 부인하는 것이다. 알미니아니즘은 부정적인 견해, 즉 주권적 무조건적 선택 교리를 부인한다. 하지만 알미니안 입장의 긍정적 노력이 아무리 긍정적 노력으로 구현된다 하더라도 무조건적 선택을 부인하는 한 알미니안이기를 결코 쉬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것은 주요한 질문이다. 무조건적 선택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개혁파 교리의 본질인 진리의 면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이미 지적했듯이 알미니안 견해는 단순히 부정적인 것 이상이다. 항의파들(Remonstrance)은 이렇게 말한다: “1항. 세상의 근본 앞에 예수 그리스도 그의 아들 안에 있는 영원하고 불변한 목적으로 인해 하나님은 타락하고 죄성을 가진 사람들을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기 위해 결정하셨다. 그들은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성자 예수님을 믿을 것이며, 믿음, 즉 순종하는 믿음 안에서 끝까지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견인할 것이다.” 언 듯 보면 이것과 개혁파 기준들 안에 정착된 입장 간에 본질적인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 성자를 믿고 끝까지 견고케 하시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결정하신 하나님의 영원하고 불변하는 목적을 말하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은 영원토록 불변하게 끝까지 믿고 거룩하고 견인하는 자들을 구원하시려고 결정하신다. 하지만 알미니안이 여기서 확언하는 것과 칼빈주의자가 확언하는 것 간에 차이점의 큰 간격이 있다.
그 차이점은 이와 같다. 칼빈주의자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약정되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이런 작정으로 인해 주권적으로 구별하신 특별한 사람들의 구원을 영원토록 불변하게 작정하신다고 확언한다. 구원의 작정에 따라 하나님은 그 성취를 향해 목적들을 작정하시고, 믿음을 주시기로 작정하시고, 그리고 구원에 예정된 모든 사람들을 견인케 하신다. 알미니안은 개인의 구원을 정하는 그러한 작정을 부인하고, 그 대신 확언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끝까지 믿고 순종하는 자들을 견인케 하실 모든 자들을 구원하시려고 작정, 목적하셨다고 한다. 칼빈주의적 견해는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의 대상들인 사람들의 구원에 영원한 의도(destination)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으며 알미니안적 견해는 믿음과 견인으로 특징 지워지는 계층(class)을 구원하시려는 신적 목적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전자는 사람들의 선택이고 후자는 능력(qualities)을 가진 모든 자들이 구원받을 것이라는 규정을 가진 능력자들의 선택이다.
어떤 알미니안들은 논쟁 속에서 또 주석적 기반 아래서 계속적인 견해를 유지할 수 없음을 간파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믿는 모든 자들을 작정하실 뿐만 아니라 믿는 모든 자들을 선택하신다고 말한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구원받게 될 모든 사람들의 선택의 수, 즉 개인의 영원하고 불변하는 선택이 있다고 그들은 말한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개혁파 기준들의 가르침이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살펴보면 이것이 허위임을 알 것이다.
칼빈주의의 특징은 무조건적 선택이며, 알미니아니즘의 형태는 당연히 거부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개인들의 정해지고 불변하는 선택을 고백한다. 하지만 의미는 하나님께서 믿는 모든 자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고, 믿을 자들을 영원부터 미리 온전히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러한 개인들이 영생에 이르도록 예견하신다. 하나님은 믿을 것이고 끝까지 견인할 것이라고 예견하시는 모든 자들을 선택하신다. 하나님의 선택은 사람들 가운데 존재하는 어떤 잘못된 점들을 미리 예견하심으로 결정된다. 그 차이점이란 하나님께서 스스로 원인이 아니시고 단지 인간의지의 측면에서 주권적 선택이라는 것이다. 선택의 이러한 형태에 나타난 결정적 요소는 하나님의 주권적 무조건적 선한 기쁘심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예견하시는 인간의 의지의 결정이다. 선택은 믿음의 근거가 아니라 예견된 믿음은 선택의 근거 또는 조건이 된다.
끝으로, 이것은 결코 신적 선택이 아님을 분명해진다. 사람들 가운데 존재하는 차이의 궁극적 결정요인이 사람 안에 있는 어떤 것이며 하나님의 주권적 선한 기쁘심에 있지 않기 때문에 주요한 점에서 불가능하다. 먼저 개혁파 입장에 근접한 것처럼 여겨지는 알미니아니즘의 이런 형태는 단순히 두 체제들 간에 전적인 차이점을 보다 분명히 할 뿐이다. 개혁파교회 내부에서 가르치는 선택은 구원과 영생에 이르는 선택이고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의 성취를 향한 하나님께서 정하신 수단으로서의 믿음과 모든 다른 은혜들을 위한 선택이다. 선택은 믿음을 조건으로 하지 않지만 믿음은 선택의 열매이다.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사람들 안에서 사역하신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시려고 정한 영원한 방침 안에 갖고 있으시기 때문이다. 믿음은 선택의 논리적 사건(prius)이 아니라 선택은 믿음의 영원한 사건이며 근거이다. 알미니아니즘은 이와 같은 모든 가정들을 부인한다.
무조건적 선택 부인은 하나님 은혜론의 핵심에 충격을 가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절대적으로 주권적이고, 구원하시는 은혜의 절대적 주권을 인식하는데 실패는 인간 마음의 교만의 표현이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면에서 사람들을 다르게 다루심을 요청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르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궁극적 요소에서 구원의 결정적 요소는 사람이 행하는 것임을 의미하고, 사람의 구원을 결정하는 분이 하나님이 아니시고, 자신들의 구원을 사람들이 결정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과 동일하다. 구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 아니시고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이슈이다.
2. 제한적 구속
1610년에 제출된 알미니안 항의자들의 두 번째 항목은 속죄의 범위에 관한 것 이었다: “항목 2. 세상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죄의 용서와 구속을 주셨지만; 어느 누구도 실제로 신자들 외에는 이러한 죄 용서를 즐기지 못한다. 요한복음 3:16에 보면 . . . 그리고 요한일서 2:2를 보면, . . .” 이런 주장은 우주적(universal) 속죄론으로 알려진 것이며, 그 핵심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고 동등하게 그리고 차별 없이 죄의 용서와 구속을 베푸신다는 의미이다. 이와 같이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베푸신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한다는 것이며 모든 사람들이 구원의 상태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주장과는 정반대로 개혁파 신앙은 제한적(limited) 구속으로 본다. 제한적 구속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1) 선택자들을 위해 속량된(purchased) 구속
가장 최선의 대답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8장 5항을 보면 뚜렷하게 알게 될 것이다:
주 예수는 그의 완전한 순종과 영원한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 단번에 드려진 그 자신의 희생에 의하여 아버지의 공의를 완전히 만족시키셨으며,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화해뿐 아니라 하늘나라에서의 영원한 기업을 사주셨다.
천국에서의 영원한 유업과 화해는 성부에 의해 성자에게 주어진 모든 사람들을 속량했다는 것을 분명히 정의하고 있다. 그들은 누구인가? 1항에 보면:
그의 영원한 목적 안에서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이신 주예수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 선지자, 제사장 및 왕, 그의 교회의 머리와 구원자, 만물의 상속자, 그리고 세계의 심판자로 선택하고 임명하기를 기뻐하셨다. 하나님은 그에게 모든 영원 전부터 일단의 사람들을 주어 그의 씨가 되도록 그리하여 때가 이르면 그에 의해 구속, 소명, 칭의, 성화, 그리고 영화되도록 하셨다.
그리스도에게 주신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 사람들과 동일한 사람들이다. 3장 5항을 보면:
세계의 기초가 조성되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의 영원하고 불변하는 목적과 자기 뜻의 비밀한 의도와 선한 기쁨에 따라, 생명으로 예정된 일부의 인류를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계속될 영광으로 선택한 것은 단지 그의 값없는 은혜와 사랑에서 나온 것이며, 결코 신앙이나 선행, 혹은 그 중 하나의 견인이나 피조물 안에 있는 다른 어떤 것에 대한 예견이 그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움직인 조건이나 원인이 아니다. 따라서 모든 공로가 그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찬양하는데 돌려져야 한다.
또 그들은 단순히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된 인류, 즉 선택된 백성들이다. 그들에 관하여 계속하여 6항에서:
하나님께서 선택된 자들을 영광으로 지명하시면서, 그는 또한 자기 뜻의 영원하고 가장 자유로운 목적에 의해, 거기에 이를 수 있는 모든 방편을 미리 설정하셨다. 그러므로 선택된 자들은 아담 안에서 타락하였어도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속되며, 정해진 시기에 역사하시는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가지도록 유효적으로 소명되고, 그의 능력으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통하여 칭의 되고, 양자로 입양되며, 성화되고 보존된다. 오로지 선택된 자 외에는 다른 아무도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되거나, 유효적으로 소명되어, 칭의되고, 입양되며, 성화되어 구원받지 못한다.
생명으로 예정된 자들, 즉 선택된 자들은 성부로부터 성자에게 주어진 자들이고, 영원한 영광에 이르도록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나라에 화해와 영원한 유업을 받은 자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받은 자들이다. 그래서 이제 알미니안과 차이점이 분명히 드러나게 된다.
2) 속량과 적용의 동시성
8장 8항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구속을 사신 모든 사람에게, 그는 확실하고 유효적으로 그것을 적용하며 전달하시는데, 그들을 위하여 대신 간구하시며, 그들에게 말씀 안에서 그리고 말씀에 의하여 구원의 비밀들을 계시하시고, 그의 성령으로 믿고 순종하도록 효과적으로 설득하시며,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 그들의 마음을 다스리시고, 그의 놀랍고 심오한 경륜에 가장 일치하는 양식과 방법으로 그의 전능하신 능력과 지혜를 사용하여 그들의 모든 원수를 물리치신다.
구속의 속량의 범위는 실제적 구원의 범위와 동일하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해 속량하셨다면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고 주어진다. 제한된 숫자만 궁극적으로 구원받는다면 그 숫자만 그리스도께서 구속을 속량하신다.
너무나 분명하기에 다른 설명이 불필요하다. 하지만 이것이 간과해야할 성명이 아니라 고백적 가르침의 결정적 원리이기 때문에 보다 분명하게 진술될 필요성이 있다:
그리스도는 그의 순종과 죽음으로 이와 같이 칭의된 모든 자들의 빚을 다 갚아주시고, 그들을 대신하여 자기 아버지의 공의에 정당하고 실질적이며 완전한 만족을 드리셨다. 그러나 성부께서 그를 그들에게 주셨고, 그들 대신에 그의 순종과 만족을 받아주셨는데, 둘 다 값없이 주셨고 그들 안에 있는 어떤 것 때문이 아니므로, 그들의 칭의는 오직 값없는 은혜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엄정한 공의와 풍성한 은혜가 죄인들의 칭의에서 영광을 받게 하신 것이다(11장 3항)
그리스도께서 빚을 갚으셨고 공의를 만족시키셨던 사람들은 칭의를 받는다. 하지만 칭의 받는 자들은 역시 효과적인 부르심을 받는다.
하나님께서 유효하게 부르신 사람들을 그가 또한 값없이 의롭게 하시는데, 이는 그들에게 의를 주입함으로서가 아니라, 그들의 죄를 용서하고 그들의 인격을 의롭게 여겨 받아줌으로서 이다. 이는 결코 그들의 노력이나 성취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위한 행위로서, 신앙 자체 즉 믿음의 행위나 그 외의 어떤 복음적 순종을 그들에게 그들의 의로 전가시킴으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순종과 만족을 그들에게 전가시킴으로서 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의지하는데, 이 믿음도 그들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11장 1항).
효과적 부르심은 10장에 언급되어 있는데 예정론으로 되돌아가도록 한다.
하나님은 그가 생명으로 예정하신 모든 사람들을, 그리고 그들만을 그가 정하시고 수락하는 때에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 그들이 본질상 처해있는 죄와 죽음의 상태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은혜와 구원에 이르도록 효력 있게 부르기를 기뻐하신다. 그들의 마음을 영적으로 그리고 구원적으로 밝혀 하나님의 일들을 이해하게 하시고, 그들에게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며 그들의 의지를 새롭게 하시고, 그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들이 선한 일을 추구하도록 결정하시며,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효력 있게 이끄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의 의지를 변화시켜 가장 자유롭게 나아오게 하신다.
또 11장 4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모든 선택받은 자들을 의롭게 하기로 작정하셨으며, 그리스도는 때가 차매 그들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그들의 칭의를 위하여 부활하셨다. 그러나 성령께서 적당한 때에 실제로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적용하실 때까지는 그들이 의롭게 되지 않는다.
생명, 구속, 효과적인 부르심, 그리고 칭의에 이르도록 예정되었다는 것이다.
2) 한정적 구속
선택받지 못한 자들, 즉 실제적으로 구원의 참여자가 아니고 마침내 잃어버리고 마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속량하신 구속의 범위 내에 들어오지 못한다. 이러한 사실은 위에 인용된 고백서의 가르침에서 충분히 인용할 수 있다. 그래서 3장 6항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선택된 자들을 영광으로 지명하시면서, 그는 또한 자기 뜻의 영원하고 가장 자유로운 목적에 의해, 거기에 이를 수 있는 모든 방편을 미리 설정하셨다. 그러므로 선택된 자들은 아담 안에서 타락하였어도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속되며, 정해진 시기에 역사하시는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가지도록 유효적으로 소명되고, 그의 능력으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통하여 칭의 되고, 양자로 입양되며, 성화되고 보존된다. 오로지 선택된 자 외에는 다른 아무도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되거나, 유효적으로 소명되어, 칭의 되고, 입양되며, 성화되어 구원받지 못한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속되거나”와 “속량된 구속”은 같은 말이다. 그리스도에 의한 구속이나 구속의 속량은 구원받는 자들만을 위한 것이다. 부름을 받지 않았지만, 의롭고, 선택되고, 성화되고, 그리고 구원받는 자들이다. 구속은 포괄적(extensively)일뿐만 아니라 한정적(exclusively)이다. 반복하는 것이지만 고백서의 가르침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1) 구속은 선택자들을 위해 속량 된다; 2) 구속은 속량된 모든 자들에게 적용 된다; 3) 구속은 선택받지 못한 자들, 즉 마침내 멸망 받을 자들을 위해 속량되지 않았다.
구속은 희생, 화해, 구속, 신적 의의 만족, 빚의 탕감이라는 의미임을 고백서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하나님께서 선택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기로 예정하셨다는 의미로 구속을 정의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구속 사역으로 인해 그들의 구원을 보장하시기 때문에 그들은 구원받는 것이다. 잃어버린 자들은 보장된 구원의 품, 즉 그리스도께서 행하셨던 구속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알미니아니즘과 칼빈주의 간에 차이점은 다시 한번 분명히 여기에서 들어난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가능하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 희생 제물로 자신을 드리면서 죽으셨는가? 또는 자신의 백성들의 구원을 틀림없이 보장하시기 위해 하나님께 희생 제물로 자신을 드렸는가? 알미니안들은 전자를 고백하고 후자를 부인하지만 우리의 바른 견해, 믿는 것은 성경께서 후자를 지지한다는 것이다.
3) 거부된 대답
‘제한’구속이란 말은 많은 공격을 받는다. 그렇게 호감을 주는 언어는 아닌 상 싶다. 오해와 그릇된 설명이 있어진다. 어떤 이들은 “정해진”(define) 또는 “특별한”(particular) 구속이라는 의미로 설명한다. 하지만 분명하게 변호되어야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어떤 용어가 선정되었느냐는 것이다. 만일 “제한적”(limited)이라는 용서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그 용어가 상징하는 교리를 단념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다시 말하면 그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개혁파 신앙의 적과 타협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그 용어 사용을 고수해야만 한다. 구속은 제한적이다. 그 이유는 영원한 구원에 이르도록 하나님의 결정적 목적 안에서 예정하신 자들에게만 그 정확한 의미, 뜻, 그리고 효력이 발하기 때문이다. 국가, 민족, 언어, 문화를 따라 사람을 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끔 제한구속론이 완전한 구원과 자유구원에 대한 설교를 불가능하게 한다고 반대한다. 전적으로 그릇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성취된 구원은 무제한적으로 충족하고 우주적으로 적합하다. 구별함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은혜로운 믿음(bona fide)을 무제한적으로 충족시키고 완전하게 적합함을 나타내기도 한다. 제한구속론은 주권적 선택론이 복음의 제안을 둘러싼 울타리를 보다 견고하게 하는 것 이상이다. 화목제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이라는 복음은 구별됨 없이 모든 자들에게 주어진다. 주권적 선택과 제한구속으로부터 이 사실, 즉 은혜의 강물이 지속적으로 흘러나온다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신적 주권성과 복음의 충만하고 자유로운 제안이 우리에게 와 닿게 되는 제한구속의 물결을 타는 것이다. 모든 자들에게 제안하는 구원은 은혜로운 믿음이다. 믿는 모든 죄인들은 틀림없이 구원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목적과 진실하심은 거짓되지 않기 때문이다.
제한구속론이 복음을 자유롭게 제안하지 못하다도록 한다는 비평은 복음 전파를 위한 보장과 믿음의 우선성의 의미를 잘못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자들을 위해 죽으셨지만 우주적인 초청, 복음의 요구와 약속은 구세주와 구속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완전 충족성과 적합성과 하나가 된다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이름 안에서 요구하는 복음의 사도라는 의미는 잃어버리고 무력한 죄인이 확실히 구원받을 것이라는 구원을 위해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근거하고 받아들여진다는 청원과 함께하는 모든 것의 충족한 구속주에게 자신을 헌신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잃어버린 죄인이 믿음의 보장을 근거로 하여 자신이 구원받을 것이라는 신뢰, 즉 확신을 가지고 구주에게 자신을 헌신하는 것이다. 그가 믿는 것은 구원받았다(has been)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이 그의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해 죽으셨다는 확신, 즉 다시 말하면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사람의 대상이라는 사실은 믿음의 우선적 행위(primary act)가 아니다. 신자의 의식 속에 논리적으로 심리학적인 구별을 의식할 수 없다는 믿음의 우선적 행위와 가깝게 밀착되어 있다. 하지만 믿음의 우선적 행위는 모든 것의 충족하시고 적합한 구세주에게 자신을 헌신하며 그 신뢰의 유일한 보장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와 구원의 차별 없고, 충만하고 자유로운 제안이다.
3. 전적 타락
알미니아니즘의 5개 항목들 중 세 번째는 원죄 또는 인간타락에 관한 것이다. 인간타락에 관한 알미니안의 분명한 입장에 대해 윌리엄 커닝험(Willing Cunningham)은 이렇게 말한다: “논쟁 과정에서 분명하게 드러난 것처럼 전적 차이점은 알미니우스를 추종하는 자들이 자신들의 견해들은 이런 주제에 전적으로 근거하고 있는 인간의 자연적 상태와 속성이라는 주제에 성경론과 종교개혁이 놓여있다고 주장하면서부터였다.”2) 알미니안들은 일반적으로 타락한 인간성을 주장한다. 하지만 그것의 핵심을 피해간다. 문제의 핵심은 전적, 또는 완전히 타락했느냐 아니냐 라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고백은 우리의 첫 부모와 금지된 실과를 먹음으로 지은 죄에 관해 말하고 있다.
6.2. 이 죄에 의해, 그들은 그들의 원래적 의와 하나님과의 교제로부터 타락했으며, 영혼과 육체의 모든 부분과 기능이 전부 오염되었다.
6.3 그들이 모든 인류의 근원으로서, 이 죄의 죄책이 통상적인 출생에 의해 그들로부터 내려오는 그들의 모든 후손들에게 전가되었으며, 또한 동일한 죄 가운데서의 죽음과 부패한 본성이 그들에게 전달되었다.
6.4 우리가 모든 선에 대하여 철저히 무관심하고 무능하며 대립하게 되고, 그리하여 전적으로 모든 악으로 기울게 된 이 최초의 오염으로부터 모든 자범죄가 나온다
9.3 죄의 상태로 타락함으로서, 인간은 구원에 수반되는 영적 선에 대한 의지의 모든 능력을 전적으로 상실하였으므로, 그러한 선으로부터 전혀 싫어하며 죄 가운데 죽어있는 자연인은 그 자신의 힘에 의해 그 자신을 회심시키거나 그 자신을 거기로 준비시킬 능력이 없다.
이상에서 전적 타락의 함축되고 간결한 의미는 조심스럽게 조명되어야 한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 본유적으로 있는 능력, 잠재능력에 관해 매우 낙관론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의미의 자유로운 선택에서 개인의 구원이 결정된다고 알미니안이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개혁파 교회들과 전적으로 무관한 말이다. 고백서에서는 우리가 자연적 덕행 또는 시민적 의로움이라 불리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비중생한 자들이 행한 행위들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으로 여길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타락했다는 것이나, 이러한 타락으로 인해 우리가 전적으로 불가능하고, 부적절하고, 모든 선한 것에 위해 되고, 그리고 사악한 것에 치우쳐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고백서에서 분명히 말하는 것은 신적 기준과 판단이란 입장에서 볼 때 사람들의 도덕적 영적 조건에 관해 성경에서 분명하게 가르치는 것에 말하고 있다. 그 규범에서 본다면 그들은 죄로 죽었고 전적으로 타락했음을 알 수 있다.
4. 불가항력적 은혜
계속되는 논쟁에서 드러나는 것은 전적타락론을 확언하느냐 부인하느냐라는 의미라는 면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연관되었다. 질문은 이것이다: 사람들이 믿게 하고 회개시킬 때 하나님의 성령의 신적 활동(operations)의 형태는 무엇인가? 모든 사람들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에 동의한다. 복음에 나타난 은혜의 제안을 구별 없이 받아들이는 사람들 가운데 어떤 이들이 믿고 어떤 이들이 믿지 않느냐라는 사실을 설명하면서 일어난다. 알미니안들은 사람들이 마음에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로운 활동을 떠나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은혜의 속성은? 믿음의 근거는? 어떤 이들이 그들의 영혼의 구원을 믿는 것과 어떤 이들이 그것을 믿지 않게 되는 이유는? 구별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인가 아니면 믿는 사람들에게만 은혜가 주어지는가? 그 은혜는 저항될 수 있는가 아니면 항상 목적을 효과적으로 일어나서 좌절되지 않는가?
알미니안들 가운데서도 상이점들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충족한 은혜, 즉 그 은혜가 자연적 소유인지 은혜로운 베푸심으로 여겨지든지 간에 그 은혜는 모든 사람들에게 거하고 계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믿을만한 능력을 갖고 있다. 어떤 사람이 믿고 어떤 사람이 믿지 않는다는 사실은 차이 나는 반응에서 전적으로 사람들의 편에 놓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차이 나는 반응은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협력하거나 증진하는 단계에 이를 수 있다. 하지만 차이 나는 반응은 특별히 인간의 자유 의지에 달려있다. 불신자의 경우처럼 신자의 편에서 차이 나는 반응에 대해 그 자신이 전적으로 책임을 지게 되지만 의지에 속한 자율을 실행하기 때문에 유일한 결정적 요소가 된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하나님은 믿지 않는 사람에게 사역하시는 것처럼 믿는 사람에게 구원적으로 효율적으로 역사하신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사역 가운데 이와 같은 차이에 대해 알미니안은 매우 격렬하게 반응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과 모두들에게 동등하게 행하심을 주장한다. 그래서 구원의 이슈는 인간의지의 주권적 결정에 놓여 있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다르게 할 수 있다.
만일 사람이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은혜를 협력하거나 증진시킬 수 있다면 사람이 어떤 선한 형적을 갖고 있어야만 한다.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의 요소가 매우 결정적이기 때문에 그 요소는 개인의 역사에서 일련의 사건들이나 가장 중요한 사건을 실천할 수 있도록 결정한다. 이것은 알미니안 입장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의 주권성과 효력만 아니라 죄성 있는 사람의 전적 타락에도 영향을 준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의 주권성과 효력을 부인하는 것이 전적으로 우리의 신앙고백이 말하는 것이다. 10장 1-2항에서 이렇게 말한다:
1항. 하나님은 그가 생명으로 예정하신 모든 사람들을, 그리고 그들만을 그가 정하시고 수락하는 때에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 그들이 본질상 처해있는 죄와 죽음의 상태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은혜와 구원에 이르도록 효력 있게 부르기를 기뻐하신다. 그들의 마음을 영적으로 그리고 구원적으로 밝혀 하나님의 일들을 이해하게 하시고, 그들에게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며 그들의 의지를 새롭게 하시고, 그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들이 선한 일을 추구하도록 결정하시며,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효력 있게 이끄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의 의지를 변화시켜 가장 자유롭게 나아오게 하신다.
2항. 이 유효한 소명은 오직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특별한 은혜에서 나오는 것이며, 결코 사람 안에 예견된 어떤 것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성령에 의해 되살아나고 새로워짐으로서 이 부르심에 응답하고 그 안에 제공되고 전달되는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는 완전히 수동적이다.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받는 영혼이 영접하는 믿음은 근원으로서 하나님의 주권적 예정과 관련을 맺고 있으며 그 원인으로서 핵심에 하나님의 중생하시는 사역과 관련을 맺고 있다. 하나님의 자신의 효력 있는 은혜를 베푸시기를 주권적으로 기뻐하신다. 또 그것은 믿음으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주권적으로 베푸시는 은혜로부터 오는 능력이다. 효율적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은 성령이 갱생시키실 때까지 수동적으로 임한다. 새로운 마음이 그에게 주어지고 올바른 영이 성령의 신비로운 사역으로 그에게 창조된다. 그가 새로운 마음과 올바른 영을 가졌기에 복음의 부르심에 그의 반응은 사랑하는 영접과 신뢰임을 의미한다. 육체적 마음의 반응이 하나님에 대한 적대심인 것처럼 성령의 마음의 반응은 믿음과 신뢰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자신을 나타내신 것처럼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새로운 마음의 성격이다.
고백서에서 중생과 믿음 간의 관계를 잘 볼 수 있다. 신학적 논쟁 영역에서 우리의 입장은 다음의 질문에 따른 대답으로 잘 알 수 있다: 우리가 믿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중생시키시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중생시키시기 때문에 우리가 믿는 것입니까? 다시 말하면 무엇이 우선적 원인, 중생, 또는 믿음인가? 믿음이 중생의 수단이라고 말하는 수많은 복음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을 중생시키신다고 한다. 그들이 믿기 때문이다. 그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알미니안 단체에 부속하며 개혁파 교리와는 정반대 입장이다. 그들은 참된 복음주의의 파괴를 이끄는 입장으로 나아간다. 새로운 탄생이라는 제한된 의미로 “중생”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이런 의미로 어거스티니즘과 칼빈주의에서는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본다. 그 이유는 믿음의 원인과 설명처럼 성령의 중생케 하시는 사역으로부터 나아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도록 선택하셨다. 이런 구원이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예정하셨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의 전적타락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믿음을 행사할 수 없다. 그들은 범죄와 죄로 죽었다. 그들은 믿음으로 되살리기 위해 하나님은 성령의 대리자를 통해 새로운 마음과 올바른 영을 그들에게 심으신다. 그래서 효율적으로 불가항력적으로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끄신다. 그들은 은혜에 의해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 그들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5. 성도들의 견인
효율적이고 불가항력적인 은혜론에 관련하여 신자의 영원한 보장하는 교리로 마무리되어야 한다. 알미니안은 이것을 막무가내 부인한다. 그들에 의하면 참 신자는 은혜에 있을 수 있지만 은혜로부터 떨어져 나갈 수 있고 끝내는 폐망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그러한 입장은 논리적으로 구원하시는 은혜론에 논리상 매우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개인의 구원의 문제에서 결정적 요인이 자신의 자유의지의 자율적이라면 일관성은 불확실하고 변덕스러운 입장과 같은 구원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최종적 분석에서 구원을 결정하는 것만큼이나 안정적이다.
효율적 은혜와 성도들의 견인과의 조화는 새롭게 우리들에게 드러난다. 개혁파 신앙은 하나님께서 죄인의 구원을 결정하시는 분임을 분명히 고백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것을 하나님은 완전히 완성하신다는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은혜에 놓여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손길을 버리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무효화 시키지 않는다. 고백서 17장 1-2항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1항. 하나님이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받아들이시고 성령으로 효력 있게 부르시고 거룩하게 하신 자들은 은혜의 상태로부터 전적이거나 최종적으로 타락할 수 없고 끝까지 확실히 견인하여 영원히 구원을 얻을 것이다.
2항. 이 성도들의 궁극적인 구원은 그 자신들의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값없이 주시고 변치 않는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예정의 불변성에 의한 것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중보의 효력과 그들 안에 성령과 하나님의 씨의 내주와 은혜계약의 본성에 의존된 것이니, 이 모든 것에서 또한 궁극적인 구원의 확실성과 무오성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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