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예배 설교  :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잘 아시는 예수님

 

 

 
찬송 : '주 안에 있는 나에게' 370장(통 455장)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마태복음 8장 14∼17절

예수님 제자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섬기는 자로 세워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모습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예수님은 우리의 아픔을 먼저 만져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치유 사역을 보면 질병에 대한 생각이 일반 사람들과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헬라 사람들은 이원론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먹은 음식이 소화가 안 되는 이유는 다분히 위장 장애 때문만이 아닙니다. 안 좋은 소식을 들으면 소화가 잘 안 됩니다. 이렇게 보면 정신적인 것도 병에 포함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단순히 육체의 질병만이 아니라 영적인 문제까지도 치유해 주십니다.

나아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까지 인도해주십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며 만져주십니다. 예수님께로 나오기만 하면 우리의 질병뿐 아니라 마음의 상처와 정신까지도 회복될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이 만져줌에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잘 아시는 예수님은 베드로의 장모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켜주셨습니다. 그런데 손을 가만히 잡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마가복음 원어로 보면 '움켜잡았다'(막 1:31)고 기록했습니다. 그러자 그녀에게서 열병이 떠났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악한 영의 권세와 질병의 세력들, 마음의 슬픔, 괴로움과 공허감, 공포 그 무엇이라도 예수님께서 움켜잡으실 때 회복됩니다.

셋째, 예수님의 만지심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베드로의 장모는 열병에서 일어난 뒤 예수님의 수종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을 그냥 일어나게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삶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 목사는 "성화되었다면 새로운 삶의 모습으로 세상을 성화시켜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에만 국한돼 있다면 우리의 믿음은 병들기 쉽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자녀가 되었다면 말씀과 기도로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성화되었다면 이제는 저 어두운 세상을 밝은 빛으로 비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복음의 자리로 인도해주신 목적입니다.

 

인생은 테니스 경기와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당신이 경기에서 이길 수 있는 한 가지 비결은 서브를 잘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서브(serve) 즉 '섬김'입니다. 성공의 길을 가려면 서브를 잘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를 부르시고, 상처를 만져주시고, 회복시켜주시는 것입니다. 섬기며 살아갑시다.

기도 : 하나님, 약한 나로 강하게 하시는 주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우리의 약함이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무엇을 발견해야 하는지 깨닫게 하시고, 회복을 통한 새로운 은혜를 경험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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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종려주일설교 :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예수

 

 

 

제목 :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예수

말씀 : 누가복음 18:31~34

 

3월에는 고난 주간에 이어 부활주일이 함께 있는 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느 때와는 달리 좀더 특별한 자세를 가지고 이 한 달을 생각하게 됩니다.

당시 초대교회에서는 부활주일을 앞에 두고 2~3일 동안 금식했다고 합니다. 이기간 동안 하루 한끼, 혹은 온종일 금식하면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감사하며 경배했다고 합니다. 주후 4세기 경쯤 교회가 굉장히 부흥하고, 교회 제도가 제도화되면서 '사순절'이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사순절은 예수님의 부활 직전 40일 동안을 특별한 방법으로 금식하는 절기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고난을 기념하기 위해 하루 한끼나  각자 정한 대로 40일 동안 금식하면서 그분의 고난을 묵상하고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잃어버린 복음을 다시 찾고 교회가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하기 시작하면서, 사실상 사순절이라는 구교의 형식적인 행사를 따르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사순절이라 하여 특별한 행사를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 반드시 기억해야 될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고난주간을 앞두고 우리의 삶이 좀더 경건하고 거룩해져야 겠다는 것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욕심을 절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묵상하면서 그분의 은혜에 감사하는 계획을 세우고 생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말씀을 보면서 다시 한번 우리가 어떤 자세를 갖고 이번 한 달을 살아야 할 것인가를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생각하고 마음에 담을 수 있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보아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동안 예루살렘을 몇 차례 오르내리셨지만 이번 행차는 단순한 방문이 아님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거기에 올라가면 선지자들이 이미 구약에서 예언하고 기록한 대로 인자가 이방인들, 즉 로마인들에게 넘기워져 희롱과 능욕과 침 뱉음, 그리고 채찍질을 당한 다음 결국 십자가에 죽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예언하십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세상을 떠나실 것인가를 세세하게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시편 22편에서, 예수님은 사람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여 사람들의 훼방거리와 백성들의 조롱거리가 될 것이고, 십자가에 매달려 수족이 못 박힌 채 죽게 될 것이며, 그분의 겉옷과 속옷을 제비를 뽑히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53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허물과 죄 때문에 상하고 찔릴 것이며, 우리의 모든 죄악을 홀로 담당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면 그 예언대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 사건은 피할 수 없는 사건이거나 돌발적으로 일어날 사건이 아닙니다. 이는 수백 년 전부터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각본대로 일어날 사건입니다. 곧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길을 따라 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사실들을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하신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제자들은 손에 칼을 들고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줄 메시야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유대 나라에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파라다이스를 세울 수 있는 메시야를 꿈꾸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그렇게 하고도 남음이 있는 능력자라고 믿고 따라 다녔습니다. 예수님께서 초자연적으로 역사하면,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신다고 하자 '지금이야 말로 그때가 왔구나!' 하고 마음으로 반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는 예루살렘에 가면 이방인에게 넘겨져서 능욕과 침 뱉음과 모욕을 당하고 채찍질을 맞아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칼을 손에 든 메시야를 꿈꾸던 제자들의 마음에 십자가를 등에 짊어지고 죽으시는 메시야란 도무지 받아 들일 수 없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렇듯 자기들이 듣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니었기에 그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듣고 싶은 설교는 귀에 잘 들리지만, 듣고 싶지 않은 말씀은 아무리 큰 소리로 전해도 다 옆으로 새고 맙니다. 손에 칼을 든 정복자 메시야를 꿈꾸고 있는 사람에게 십자가에서 죽는 메시야에 대한 이야기가 들릴 리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라고 말씀합니다.(34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자신이 십자가에 죽음으로 세상을 구원하는 일이었습니다. 십자가의 길 외에 세상을 구원하는 길이 없음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절대 복종하기로 각오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세상을 위해 생명을 내어 놓기로 작정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해 발을 옮기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8절에 있는 말씀대로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에 자기 몸을 맡기셨습니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고 계신 것입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시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모습이 퍽 침울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묵묵히 죽음의 길을 가십니다. 이어서 제자들이, 그들로부터 조금 떨어져 무리들이 따라 갑니다. 그런데 하나같이 그 뒤를 따라가면서 심히 두렵고 무서워했다고 말합니다.(막10:32) 여기에서 우리는 어둡고 가라앉은 분위기를 금새 느낄 수 있습니다.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당하는 사람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당하는 사람과는 천지 차이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세밀하게 내다보고 그것을 당하는 자는 그 비극을 겪기 전에 이미 2번, 3번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한걸음씩 발을 옮겨놓고 계십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저는 먼저 '내가 큰 죄인이구나.' 하는 사실을 느낍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나의 죄를 짊어지고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죄 없는 예수를 죽인 죄인인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어린양에게 자신의 죄를 전가시키는 절차가 있었습니다. 먼저 제사장에게 어린양을 끌고 와서 그 위에 자기 손을 얹고는 자신의 모든 죄를 고백하는 기도가 끝나면 그 어린양을 제사장에 맡겼습니다. 그러면 이 어린양은 주인의 죄를 모두 짊어지고 제단에서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죄의 어린양이 되셔서 예루살렘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놓고 계십니다. 나의 검은 손을 그분의 머리 위에 얹고 내 모든 죄를 그분에게 뒤집어 씌우고는 내 대신 죽도록 예루살렘을 향해 밀어 내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입니까? 죄 있는 나를 대신하여 죄 없는 예수님을 죽음의 형틀에 밀어 넣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입니까? 그러므로 저는 예루살렘을 향해 묵묵히 가시는 주님을 보면서,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 죄인 중의 괴수구나. 정말 이것은 살 가치가 없는 무서운 죄인이구나.' 하고 느끼는 것입니다.

 

흔히 교회 안에서 보면, '죄' 또는 '죄인'이라는 말을 듣는 것을 거북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죄라는 말을 듣는 것은 마치 죽음이라는 말을 듣는 것처럼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고 우울한 반응을 보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분들 중 상당수가 '죄'나 '죄인'이라는 말을 교회에서 사용하는 상투적인 단어쯤으로 생각하고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립니다.

이 말은 고귀하고 품위 있는 모임이나 기쁨의 축제인 예배에서는 되도록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받은 상처로 하나님의 위로를 특별히 기대하면서 예배 드리는 사람들에게 죄, 죄인이라는 어두운 말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게 여기는 목사님들이나 교인들도 많습니다. 사랑의교회와 같이 복음주의 입장에 굳건히 서있고, 양질의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런 말을 새겨 듣지 못하는 분들이 이따금씩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평생 가슴 아프도록 느껴보지 못한 채 예배를 드리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런 분들은 죄, 죄인이라는 말을 가급적이면 듣지 않길 원하고,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쉽게 인정하지도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무슨 가책을 받을 만한 일을 했다 할지라도 그것을 자기 탓으로 돌리지 않고, 할 수 있으면 다른 사람이나 환경 탓으로 돌리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사람들은 항상 자기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선하다는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준은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기준으로 삼아 내가 선하지 악한지를 판단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과 비교하는 데서 우월감을 가지려는 태도는 출발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자신의 어렸을 때 경험을 이야기한 글을 소개합니다. 그 목사님이 어렸을 때 조금 개구쟁이였는지 자기 방 청소를 잘 하지 않았습니다. 아침마다 어머니가 들어와서는 눈을 부릅뜨고 화를 냅니다. "너 어떻게 방을 이 모양으로 정리하니? 침대는 이게 뭐니? 양말은 양말대로, 옷은 옷대로 어떻게 이런 식으로 정리하면 되겠어?" 하고 나무랐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때마다 이 목사님은 주저하지 않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도 엄마, 내가 형보다는 나아요. 형 방에 한번 가보세요." 사실 형 방은 자기 방보다 훨씬 더 지저분합니다. 그래서 형과 비교하면 자기 방은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어머니는 두말하지 않고, 아이의 팔을 끌고는 아래층에 있는 엄마 방으로 내려간답니다. 엄마 방에 가보면 침대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화장실도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습니다. 무엇 하나 흐트러진 것이라고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엄마가 큰 소리로 "내가 네 방을 깨끗이 치우라는 것은 바로 이렇게 치우라는 거야. 네 형처럼 하라는 것 아니야. 이 방처럼 치우라는 거야." 하고 호통쳤다고 합니다. 그 목사님의 어린시절 경험에 비추어, 우리가 죄인이라고 말할 때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지 않고 날마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기준을 맞추어 '나는 그래도 좀 선하다.'고 생각한다면 철없는 어린 애와 똑같다는 것 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자기 자신의 기준에 맞추어 우리도 그만큼 의롭고 선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어 인정 받을 만한 선이라곤 하나도 없습니다. 똑 같은 사람들끼리 비교하기 때문에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비교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볼 때 우리는 형편없는 죄인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를 십자가에 밀어 넣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만큼 우리는 악한 죄인들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깊이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자리에 계시는 많은 성도들 가운데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해야 될 분들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근본적인 변화란 철저한 죄인 의식을 갖는 것입니다. 이러한 철저한 변화를 위해선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야 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앞에서 이 예수를 내가 죽였다고 고백하는 자리까지 가야 합니다. 그럴 때 나는 철저한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영적인 체험을 근본적으로 바로 할 때 비로소 그 믿음이 바로 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을 보면 이런 철저한 변화, 근본적인 변화를 체험하지 못한 채 교회 다니는 분들이 많습니다. 오늘 이 시간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의 마음을 감동해주시길 바랍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시는 예수님을 보십시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나의 죄를 짊어지고 자기 몸을 십자가에 못박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묵묵히 향하시는 예수님을 보십시오. 그분을 거기에 가도록 한 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나입니다. 그러므로 나만큼 큰 죄인이 없다는 의식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네덜란드의 화가 램브란트(Rembrandt)를 기억할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장면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그는 먼저 예수님을 그린 다음 그 주변에 예수님을 죽이라고 소리치며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동조하는 군중들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그 군중들 가운데 한 사람을 자기 얼굴로 그렸습니다. '이 군중 가운데 내가 있다. 내가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인 장본인이다.'라는 것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무릎 꿇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못 박았습니다. 내가 예수를 못 박는 이 무리들과 한패가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나는 겉잡을 수 없는 슬픔을 가지고 대성통곡을 했노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내가 예수를 오래 믿었든, 늦게 믿었든 상관없습니다.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한두 번쯤은 깊이 실존적으로 인식하고,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며, 그것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그것 때문에 십자가를 부둥켜 안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됩니다. 이런 변화를 전혀 모른 채 신앙생활 하는 것은 십자가를 우롱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성령께서 이 시간 우리 모두의 마음을 움직여 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밀어 넣은 죄인이 아닌가? 죄인 중에 괴수가 아닌가?' 하고 깊이 인식하는 마음이 있을 때 은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묵묵히 발걸음을 옮기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또 무엇을 느끼십니까? 저는 하나님의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를 느낍니다. 너무나 크고 풍성하신 은혜, 내 입으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은혜를 느낍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하신 일이 있습니다. 내 죄를 예수님께서 짊어진 대신 자기의 의를 나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없는 예수님은 죄인이 되고, 죄 있는 나는 의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신분이 이렇게 바뀌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의를 들고 서있는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로 영접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만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18절에도 이러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우리를 불의한 자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의인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그의 마음에 흡족한 의가 있는 자만을 받아들이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의로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에게서 그 의를 얻을 때 가능합니다. 예수님의 의만 가지면 하나님께서는 만족하시고 우리를 받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그 의를 주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맥스 루카도(Max Lucado) 목사님은 자신이 경험했던 작은 에피소드를 통해 예수님께서 주신 이 의의 은혜를 설명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교회 직원들과 함께 쿠키 파티를 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이 파티에 참석할 수 있는 자격은 각자 자기가 만든 쿠키 한 접시를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만든 쿠키든지 간에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은 쿠키를 만들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교회 직원들에게 이메일을 통해 하소연했다고 합니다. "나는 쿠키를 만들지 못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위해서 쿠키 한 접시만 만들어 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이 파티에 기꺼이 참석할 수 있게 됩니다. 저를 도와주세요." 그러자 교회 직원 중 한 자매가 정성껏 쿠키 한 접시를 만들어서 목사님에게 드렸습니다. 목사님은 그 쿠키 한 접시를 들고는 파티에 참석했습니다. 그리고는 파티석상에 놓여진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온 다양한 쿠키들을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나라에 파티를 열어놓고 계십니다. 그것은 쿠키 파티가 아닙니다. 그것은 의의 파티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의를 가지고 오면 하나님께선 무조건 받아 주시고, 하늘 나라에 있는 모든 행복과 기쁨을 누리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영원히 영생할 수 있는 축복을 선물로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하나님나라의 파티에 들고 갈 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의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이것은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 밑에서 나대신 죄인이 되신 예수님, 그리고 자기의 의를 나에게 넘겨 주신 예수님, 자기는 죄인이 되고 우리는 의인으로 만드신 이 예수님의 은혜 때문에 우리는 이 의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의를 들고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손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보시고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빈부귀천을 따지지 않으십니다. 예수를 오래 믿었느냐, 늦게 믿었느냐를 따지지 않으십니다. 무조건 우리를 받아 들이시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의 파티에 참석하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자격은 오직 예수님께서 주시는 의의 소유 여부에 있습니다. 다른 모든 것은 소용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의를 내가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의를 다 소유한 것으로 믿습니다. 그런데 이 의를 소유하고 있지만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를 깨닫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는 것 같습니다. 머리 속에 남아 있는 상식일 뿐, 가슴으로 그 은혜에 감격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시는 주님, 머지 않아 십자가 형틀에 그 발을 올려 놓으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그렇게 비참한 죽음을 당하시는 이유는 나를 의인 만들어 하나님나라의 파티에 참석할 수 있도록 자격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주님의 사랑 때문에 가슴 속에 눈물이 솟고 흥분할 정도로 그 은혜에 깊이 감격하고 있습니까?

 

제가 좋아하는 찬송 중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오르신 그 발, 흘린 피로 나의 죄를 대속하셨네." 자신이 흘린 피로 우리에게 의를 주시고, 우리를 의인으로 만드신 예수 그리스도. 이 은혜 앞에 울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가슴은 반석일 것입니다. 이 은혜 앞에 무릎을 꿇지 못하면 그 무릎은 굳은 무릎일 것입니다. 이 은혜 앞에 가슴 속에서 우러나는 뜨거운 사랑을 바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중생 받은 자의 가슴이 아닐 것입니다.

이 은혜를 아십니까? 의가 없는데도 나를 의인 만드신 은혜를 아십니까?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나갈 수 있는 이 축복을 주신 은혜를 얼마나 느끼십니까?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터치하셔서 식어버린 이 은혜의 마음을 다시 한번 뜨겁게 해 주시길 바랍니다. 잊어버렸던 이 은혜를 다시 회상할 수 있길 바랍니다.

최근 어느 검사로부터 들은 말입니다. 그 검사가 이렇게 질문 했습니다 "형무소에서 가장 기뻐하는 자가 누군지 아십니까?" 언뜻 답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형무소 시설이 좋다고 해도 거기서 기뻐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자 그 분이 대답했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형을 3개월 받고 들어온 사람이 이제 나갈 일이 가까이 왔으므로 제일 기뻐할 것 같죠?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진짜 형무소에서 기뻐하는 사람은 사형수로 있다가 무기수로 감형된 사람입니다." 언제 죽을지 몰라 조마조마한 가슴을 안고 사형 집행 날을 기다리던 사람에게, 사형 집행이 중지되고 비록 감옥에서나마 종신 살 수 있는 무기형이 선고되면 너무 기뻐서 소리지르며 돌아다닌다는 것입니다. "나 이제 살게 됐어요. 나 이제 살게 됐어요." 하면서 말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공감이 갔습니다. 생명이란 소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나 대신 십자가에 죽으시고 나를 의인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주님이 주신 그 의를 들고 하나님나라에 가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종신형에서 무기형으로 감형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셔서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토록 하늘에 있는 모든 축복과 행복을 누리도록 허락하셨으니 어찌 큰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이런 은혜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한달 동안 예루살렘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 놓으시는 예수님, 그리고 그곳에 가셔서 십자가에 발을 올려놓으시고 우리를 위해 자기 생명을 바치시는 예수님을 묵상하면서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자주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이 놀라운 의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면서 주님께 내 마음을 드릴 수 있는 한 달이 되길 바랍니다. 주님 앞에 내 정성과 사랑을 고백할 수 있는 한 달이 되길 바랍니다.

 

다같이 기도합시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내가 하나님 앞에 영원한 의인이 되어 주님 앞에 받아 누릴 수 있는 모든 축복과 행복을 받아 누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우리 성도들이 이번 고난 주간을 앞두고, 죄 없는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큰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 은혜가 있게 해 주시길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죄인이 되심으로 내가 의인이 된 이 놀라운 은혜 앞에 감격하여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하고 찬송할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예수님 외에는 우리가 자랑할 분이 없고, 예수님 외에는 우리가 찬양할 분이 없음을 믿고 주님을 높이 받들며 사는 귀한 하루가 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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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 요셉이 감옥으로 간 까닭 (고난이 우리 삶에 끝이 아님)

 

 

 

요셉이 감옥으로 간 까닭은?

 

< 본문 - 창세기 39:19-23 >

 

  

  한국 영화사상 최초로 국제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영화가 있습니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라는 제목의 영화입니다. 우연히 산새 한 마리를 죽이게 된 동승(童僧)이 성불(成佛)에 이르기 위해서 겪어나가는 고뇌의 과정을 그린 영화입니다. 이 영화가 1989년 스위스 로카르노에서 열린 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인 금표범상을 비롯하여 국제기자협회상 등 4개의 특별상을 받았습니다.

  영화의 제목에서 보여준 것처럼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이 무엇인지 여러분은 아십니까? 달마(達磨)는 남인도 향지국(香至國)의 세 번째 왕자로, 대승불교의 승려가 되어 6세기에 중국에 와서 선종(禪宗)을 창시한 사람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 달마가 고향 인도를 떠나 동쪽 중국으로 먼 길을 간 까닭은 제자를 만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제자 하나를 만나겠다는 열망 때문에 고향을 떠나 수 천리의 먼 길을 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라는 영화에서는 달마처럼 먼 길을 가던 동승이 노중에 겪었던 고뇌와 갈등을 그리고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모든 여정에는 그 나름대로의 뜻이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때로는 불필요하고 때로는 의미 없는 것처럼 보이는 과정이라 하더라도 다 나름대로의 뜻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고난과 역경의 길에도 그 나름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오늘의 고난이 우리 삶에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5:3-4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또 로마서 8:18절에서도 말씀합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우리는 이 말씀의 진리를 믿기에 때로 어려움을 당해도 그것 때문에 낙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 당하는 환난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역경이나 환난이 그것으로 끝이라고 한다면 그 어려움 가운데 기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게 끝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당한 환난이나 고난을 이겨내면 우리에게 더 큰 영광과 기쁨이 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죽음이라는 인생 최고의 두려움 앞에서도 우리 신앙인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음은 더 아름답고 행복한 세상인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 신앙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사람이 바로 요셉입니다. 요셉은 성경에 나오는 그 어떤 신앙의 선조들보다 더 성실하고 본받을만한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실하게 살았던 요셉이 누구보다도 큰 시련과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당한 그 고난은 그 어느 것 하나 의미 없는 것이 없었습니다.

  요셉은 야곱의 11번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야곱은 4명의 아내로부터 12명의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았습니다. 그 중에서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아내 라헬에게서 낳은 아들은 요셉과 베냐민 단 두 명뿐입니다. 라헬은 야곱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지만 오랫동안 아이를 낳지 못하다가 11번째 아들로 요셉을 낳게 되었고, 마지막 베냐민을 낳다가 죽고 맙니다. 그래서 야곱은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낳은 두 아들 요셉과 베냐민을 남달리 사랑했습니다. 특히 라헬이 첫 번째 낳은 아들 요셉은 아버지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 때문에 요셉은 형제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고 결국 애굽으로 팔려가게 됩니다.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던 요셉은 어린 나이에 노예가 되어 이국 땅으로 팔려가고 말았습니다.

  당시 노예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비참했습니다. 노예에게는 자유가 없습니다. 자신의 생명이 주인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주인이 언제든지 다른 사람에게 팔아버릴 수도 있고, 심지어는 죽일 수도 있습니다. 노예의 목숨은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파리 목숨’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죽도록 일만해야 했습니다. 일을 잘 했다고 칭찬받는 것도 아닙니다. 죽도록 일한 후에 늙으면 버려지는 것이 노예의 일생이었습니다.

  

  요셉이 노예로 팔려가서 처음 일하게 된 곳이 애굽 왕 바로의 친위대장이던 보디발의 집이었습니다. 보디발은 당시 굉장한 권력자였습니다. ‘바로의 친위대장’이라는 그의 직책이 말해 주듯이, 그는 바로로부터 특별한 신임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친위대장이라는 말은 요즘으로 하면 대통령 경호실장입니다.

  그런 보디발의 집에서 요셉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성실하게 일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보디발의 신임을 받게 되고, 어린 나이에 보디발의 집 가정 총무까지 맡게 됩니다. 가정 총무의 자리는 당시 노예가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자리였습니다. 보디발의 집 모든 살림살이를 주관하는 위치였습니다.

  

  노예로서 그렇게 잘 나가던 요셉에게 또 한 번의 시련이 닥쳐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젊고 잘 생기고 똑똑하기까지 한 요셉을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단호하게 그런 유혹을 거절합니다. 한번은 집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또 유혹했습니다. 요셉의 옷을 붙잡고 동침하자고 유혹했습니다. 이것은 유혹이 아니라 주인으로서의 명령입니다. 그런데 유혹이든 주인의 명령이든 간에 요셉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유혹과 명령을 거부했습니다. 집요한 주인아주머니의 손에서 빠져나오느라고 요셉은 자신의 옷을 벗어버리고 도망쳐 나와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화근이 되었습니다. 요셉을 유혹하는 일이 실패로 돌아가자 보디발의 아내는 오히려 요셉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워버립니다. 요셉이 벗어버리고 간 옷을 증거물로 삼아 남편 보디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종 요셉이란 놈이 나에게 못된 짓을 하려고 하다가 내가 소리를 지르니까 이 옷을 벗어놓고 도망갔습니다.’ 물론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런데도 요셉은 그것 때문에 결국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요셉은 참으로 기구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 때문에 형들로부터 미움을 사서 이국땅으로 노예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가장 고통스런 삶으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노예생활이 좀 풀려지는 듯싶더니만, 이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더 처절한 삶의 자리로 곤두박질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요셉과 같은 처지에 놓였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노예로 팔려온 것도 억울한데, 이제 감옥에까지 갇히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잘못한 것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것 때문에, 믿음을 지키겠다는 것 때문에 그는 더욱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의 자리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한 말이나 행동 때문에 오히려 고통을 당하고, 오히려 손해를 본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믿음 때문에 당하는 고통이나 손해가 적은 것이라면 그저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당한 일은 작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노예가 된다는 것도 엄청난 것이었고, 감옥에 갇히는 것 역시 곧 죽음을 의미할 정도로 아주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아마 제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저는 하나님께 불평했을 것입니다. ‘어찌 이럴 수가 있느냐’고 원망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살았는데 왜 내게 이런 시련을 주시느냐’고 하나님께 불평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노예로 팔려갔을 때에도, 또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도 않았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나 감옥에 갇혔을 때에나 요셉이 보인 삶의 자세는 한결같았습니다. 그는 어디에서나 성실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는 주인 보디발이 그를 신임하고 집안 모든 살림살이를 그에게 맡길 만큼 성실했고, 감옥에서도 간수장이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들을 다 관리할 수 있도록 제반 사무를 다 요셉에게 맡길 정도로 그는 신실했습니다.

  

  요셉이 그런 비참한 삶 속에서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성실하게 살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는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꿈이 있는 사람은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이 찾아와도 묵묵하게 참고 이겨냅니다. 지금의 고통과 역경이 그 꿈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고통의 과정 없이 성공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고통의 순간에 그만두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나 꿈이 있는 사람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유명한 스포츠 선수나 연예인들, 그리고 우리가 성공했다고 말하는 수많은 사람들, 그들 가운데 힘들지 않게 그 자리에 올라온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숨이 턱 밑에까지 차오르는 고통의 순간을 참고 이겨낸 선수만이 승리의 메달을 목에 걸 수 있습니다. 고된 훈련의 과정이 없었다면 영광과 환희의 순간이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렇게 힘들 때 끝까지 꿈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마지막에 승자가 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1등의 꿈을 꿉니다. 그러나 그 꿈이 이루어질 때까지 고통을 참아내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 힘들기 때문에 꿈을 포기해버립니다. 그래서 그 꿈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나 꿈이 분명한 사람은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아니 포기할 수 없습니다. 꿈이 숱한 고난과 역경, 좌절과 슬픔 속에서도 다시 일어서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꿈을 이루어내게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꿈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어떤 꿈을 갖고 계십니까? 오늘의 고통과 역경보다 훨씬 큰 꿈이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는 고통과 역경을 참고 견디며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려움 앞에서 불평하고 자신의 처지를 원망한다면 그건 우리의 꿈이 우리가 당한 어려움보다 작기 때문입니다. 꿈을 잃어버렸거나 꿈이 작으면 어려움 앞에서 좌절하고 불평하게 됩니다. 역경을 이겨낼 힘이 내게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노예로 팔려간 요셉에게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꿈이 있었습니다.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꾸게 하신 바로 그 꿈입니다. 형들뿐만 아니라 아버지, 어머니도 자기 앞에 무릎을 꿇을 정도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크게 쓰실 것이란 꿈을 늘 가슴에 안고 살았습니다. 그 꿈이 너무너무 힘들 때에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만들어주었습니다. 그 꿈을 이룰 때까지는 어떤 어려움이나 힘든 상황에 내몰린다 하더라도 자신의 삶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인생의 가장 밑바닥인 노예로 전락했을지라도, 또 감옥에 갇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그는 원망이나 불평으로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이루어야 할 굼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꿈을 주십니다. 인생의 꿈뿐만이 아니라 신앙의 꿈을 주십니다. 내가 살아가면서 나를 통해서 이루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꿈이 있습니다. 나를 사용하셔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실 하나님의 꿈입니다. 때로는 그 꿈을 우리가 알지 못한 채 살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하나님께서 그 꿈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마지막에 쟁취하고 얻게 될 영원한 꿈이 있습니다. 천국이라는 꿈 말입니다. 그 꿈이 이루어질 때까지 우리는 그 꿈을 꼭 붙잡아야 합니다. 그 꿈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떤 어려움이 와도, 어떤 역경과 고통의 순간이 와도 이길 수 있습니다. 내 힘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그 꿈이 우리를 하여금 담대하게 만들어줍니다. 그 꿈이 우리로 하여금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갖게 해 줍니다.

  

  요셉이 노예로 팔려갔을 때에도,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에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불평하지 않을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그에게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늘 자신에게 꿈을 주신 하나님을 생각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의 눈길을 보내오고 자신과 동침하라고 명령을 내려도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라고 말하면서 유혹을 뿌리쳤습니다.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짓은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 믿음 때문에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지만, 그런 믿음 때문에 또한 노예생활과 감옥생활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 가운데 하나는 ‘교회에 다니면 절대로 어려움이 없다.’거나 ‘믿음으로 살면 언제나 좋은 일만 일어난다.’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셉을 보십시다. 요셉은 믿음을 따라 살려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요셉만이 아닙니다.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자신들이 가진 믿음 때문에 고난을 겪기도 하고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온갖 박해를 견뎌야 했습니다. 심지어는 믿음 때문에 죽음의 길을 가야 했던 사람들도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길을 갔습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인들이 가야할 신앙의 길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다. 믿음을 지키다가 당하는 고난이나 역경을 이기는 방법은 오직 하나 밖에 없습니다. 믿음입니다. 아니 우리의 삶에 닥친 그 어떤 어려움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이기는 방법은 오직 하나 믿음뿐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 어떤 어려움을 당하든지, 또 어떤 역경이나 고난이 우리를 힘들게 하든지 오직 믿음으로 나아가십시다. 힘들다고 믿음을 버리거나 고통스럽다고 믿음의 자리를 떠나는 사람만큼 어리석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을 이기는 것이 믿음인데, 믿음을 버린다면 무엇으로 그 어려움과 시련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믿음이 우리에게 승리를 줍니다. 믿음이 우리 앞에 당한 고난과 어려움을 재해석하게 해 줍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일어설 수 있게 해 줍니다.

  

  요셉에게는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주인아주머니의 유혹과 부당한 명령 앞에서도 ‘지금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고, 지금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데 내가 어찌 그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을 수 있겠느냐’고 말하고, 단호하게 거절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감옥에 가는 것도 두렵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감옥에서도 불평하지 않고 성실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믿음대로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본문 20-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고.” 또 23절에서도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곁을 떠나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보호하시며 지켜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특히 어려운 일을 만나면 내 주위에 아부도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더욱 힘이 듭니다. 심지어 기도를 해도 하나님은 너무 멀리 계신 것처럼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아무 것도 안 하고 계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 한 순간도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왔을 때에도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하셨습니다. 창세기 39:2절에서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라고 말씀합니다. 요셉이 노예생활할 때 하나님께서 늘 요셉과 함께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은 늘 요셉과 함께하셨습니다. 요셉은 그것을 믿었고, 그것 때문에 요셉은 범죄에 빠지지 않고 성실한 삶을 살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도 이 믿음을 가지십시다. 내가 어떤 어려움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일수록 하나님은 더욱 우리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그 믿음으로 고통의 순간에 하나님을 찾고, 힘들 때 내 손을 꼭 붙잡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이끌림 받으며 사십시다. 우리가 내민 손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요셉의 그 믿음이 그의 길을 형통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주의해서 읽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23절 마지막에서 말씀하고 있는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똑같은 말씀이 39:2-3절에도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여러분, 형통하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것이 형통한 것입니까? 우리는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찬송가 384장)고 찬송합니다. 그렇다면 만사형통한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흔히 별 어려움이 없이 내가 계획한대로 잘 되어가면 형통하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이 순풍에 돛을 단 것처럼 평안하게 잘 진행되고 있으면 형통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내가 계획한대로 잘 이루어져 가고 있으면 형통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형통’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만사형통하리라”고 찬송할 때도 그런 의미의 형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형통한 삶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인도하시는 대로 되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내 계획이나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바대로 되어가는 것이 형통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간 것도 형통한 길이고,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것도 형통한 길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왜 자신이 노예로 팔려오게 되었는지, 왜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지를 나중에 형들을 만났을 때 그들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세기 45:5-8)

  요셉은 자신이 노예로 팔려왔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꿈을 이루시기 위해서 자신을 먼저 여기로 보내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감옥에 갇히는 것도 억울하게 누명을 썼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꿈을 이루시기 위해서 이 과정을 거치게 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바로 형통한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기기 위해서 그 과정을 거치게 하시는 것이기에 어려움과 고통의 순간을 만나도 기쁨으로 이겨낼 수 있었고, 불평 대신에 찬송과 감사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요셉이 형들에 의해 팔려 애굽 땅으로 오지 않았다면 그는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없었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지 않았다면 그는 바로 왕 앞에 설 수 없었습니다. 감옥에 와서 바로 왕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는 바로 왕 앞에 설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과정이 없었다면 요셉의 가족들은 7년의 흉년 가운데서 굶어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과정들을 통해서 당신이 뜻하신 바를 이루어가셨고, 결국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의 약속들을 이루어가게 하셨습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가정총무의 일을 하게 된 것이나 감옥에서 제반 사무를 보게 되었던 것이 나중에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을 때 국정을 운영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요셉이 언제 어디에서 행정경험을 쌓을 수 있겠습니까? 보디발의 가정총무와 감옥에서의 제반 사무를 보던 것이 큰 경험이 되어서 국무총리의 직무를 잘 수행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지내고 보면 우리의 삶에 그냥 되어지는 것도 없고, 의미 없이 경험되는 것도 없습니다. 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한 섭리의 과정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러기에 여러분, 내가 지금 어려운 가운데 있다고 생각된다면 지금 내가 겪는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어디로 인도하실 것인가를 기대하시고, 그 어려움을 잘 이겨나가면 나중에 그 경험이 내 인생에 아주 중요하게 쓰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37-50장까지 기록된 요셉의 이야기 가운데 특이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요셉의 삶에는 어떤 특별한 기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꿈을 해석하는 능력을 가진 것 외에, 그 어떤 기적을 행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어떤 기적이 일어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요셉의 위대한 모습은 계속된 고난과 역경 속에서 하나님을 단 한 번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꿈이 있었고, 믿음이 있었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요셉에게 있는 꿈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요셉이 가진 믿음 우리도 가질 수 있습니다. 요셉이 가졌던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 우리도 가질 수 있습니다. 그 꿈과 믿음과 확신을 회복하셔서 그것을 더욱 굳게 붙잡고 사십시다. 그러면 요셉을 통해 이루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오늘 우리를 통해서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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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종려주일 낮 설교 - 예수님의 고난 (히브리서 5:1~10 )

 


제목 : 예수님의 고난

말씀 : 히 5:1~10

 

 

오늘은 고난주간의 첫 날이자 종려주일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기 위해 예루 살렘에 입성하신 날로서, 이때부터 주님이 부활하신 전(前)날, 즉 토요일까지의 일주일을 고

난 주간이라 합니다. 고난주간에는 금식과 철야 또는 새벽기도 등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며 그리스도가 당한 고난을 깊이 생각하고 몸소 체험하며 그 뜻을 깊이 깨닫는 기간이 되어야

합니다.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나?', '왜 주님은 십자가의 엄청난 고난을 받으셨나?', '과연 누구 때문인가?', '그 십자가의 고난과 나와는 어떤 상관이 있나?' 깊이 묵상하면서 다시 한 번 주님의 큰사랑에 감격, 감사하는 기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 북쪽에 조그만 언덕이 있습니다. 나무도 별로 없고 붉은 흙으로 덮인 곳, 바로 히브리어로 '골고다'요, 라틴어로 '갈보리', 그리고 우리말로는 '해골의 곳'이라는 장소입니

다.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으로써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을 받으신 곳입니다.

 

금요일 아침, 안토니아 성문 앞에서는 예수를 잡아죽이라는 무리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벌써 닷새 전에 우리의 '구세주'라고, '메시아'라고 고백했던 입술들이,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 시는 이여'라고 찬양하던 입술들이 지금은 아주 돌변하여 굶주린 사자 떼 같이 큰소리로 ' 죽이시오. 죽이시오.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시오' 하고 불끈 쥔 주먹을 휘저으며 아우성을 치 고 있습니다. '바라바는 살리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광기 어린 외침을 하고 있습 니다. 비겁하지만 합리적인 빌라도는 '그대들은 이 사람을 데려다가 십자가에 매달든지 말

든지 마음대로 하라.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노라'며 군중의 뜻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내어 주었습니다.

 

그 전날인 목요일 저녁, 겟세마네 동산에서 로마 군인들에게 잡히신 주님은, 대제사장 가야 바의 법정과 총독 빌라도의 법정, 그리고 헤롯의 법정에까지 밤새도록 끌려 다니시며, 모욕

과 멸시와 침 뱉음과 고초를 당하신 끝에 결국 십자가의 형을 받게 되신 것입니다.

 

주님은 밤새도록 심문을 받고 채찍질을 당하였기 때문에 몹시 지친 몸이셨습니다. 그러므로 무거운 십자가 틀을 지고 가는 일을 감당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여러 번 넘어지셨습니다. 넘

어지고 또 넘어지셨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로 인하여 쓰러질 때마다 무릎은 터지고 깨졌고, 발은 돌 뿌리에 채여서 붉은 피로 물들었으며, 그 얼굴은 로마 병정들에게 맞아 멍들어 부

풀어올라 분간할 수 없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바로 당신이 못 박힐 그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향하여 고통스럽게 걸어가셨습니다.

 

오전 9시경, 겨우 겨우 갈보리 산상에 올라오니, 악당들은 주님의 입은 옷을 다 발가벗기고, 십자가 위에 눕힌 채 사지를 결박한 후, 13cm의 못을 입에 물고, 예수의 손목 중 뼈가 없는

부분을 찾아 그 위에 힘차게 못을 때려 넣었습니다. 그리고 백부장이 '끌어 올려라'고 소리 쳤습니다.

 

십자가를 올릴 때 예수의 손목은 비틀어졌고, 검붉은 피는 치솟아 흘러내렸습니다. 갑작스럽 게 어둠이 밀려왔고 하늘은 어두워졌습니다. 고통을 덜어주는 쓸개 탄 포도주도 안 받으시

고,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6시간 동안 십자가에 달리셔서 몸부림치시고 목마르셨습니 다. 결국, 옆구리에까지 창을 받아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그리고 죽으셨습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을 모시던 제자들은 다 어디로 갔으며, 병고침을 받은 사람들, 문제해결 받 고 할렐루야! 외치며 기뻐 뛰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죽었다가 다시 산 나사로는

어디 갔고, 순교를 각오했던 베드로는 어디 갔습니까? 관리들이 예수님을 버렸고, 헤롯왕은 예수님을 미친 사람 취급했고, 대제사장은 예수님이 '참람하다'면서 정죄하였습니다. 이처럼

모든 인간에게 버림을 당하고 심지어 유일한 피난처인 하나님 아버지에게 마저 버림당하는 슬픔을 맛보셨습니다. 모두에게 버림을 받으신 예수님은 아주 외롭고 쓸쓸하게 죽으셨습니

다.

 

불법한 빌라도의 채찍에 맞아 터지고 멍든 그 몸의 상처, 우리 주님의 전신에서 예리 하게 흘러내리는 보배로운 피를 다시 한번 쳐다보시기 바랍니다. 그 고통의 넓이와 높이와

깊이를 인간의 적은 두뇌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고난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과연 주님의 고난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왜 고난

을 당하셨으며, 우리는 왜 오늘도 그 고난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하나요? 주님께서 주신 고난의 의미를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나를 위하여 죽으심에 대한 감격과 다른 하나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해야 된다고 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고난받으실 때, 제자들의 생활상태를 찾아보면 한심함뿐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기도 의 고난을 당하시는데 잠만 자고 있는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불법한 로마의 군

병들에게 잡혀가실 때는 제 갈 길로 뿔뿔이 흩어진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심문을 당하시며, 조롱과 모욕을 당하실 때는 멀찍이 따라가며 비자들과 불을 쪼이던 제자도 있었

습니다. 은 30을 받고 예수님을 팔기 위해 모의를 하던 제자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신앙인의 자세가 절대로 아닙니다. 신앙인의 자세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7), '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빌 1:29)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만 분의 일이라도 동참하는데 고난 주간을 지키는 의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고난은 어떤 고난이었을까요?

 

첫째로, 기도의 고난이었다.

 

본문 7절에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 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심한 통곡과 눈물의 기

도를 드리셨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우면 심한 통곡으로 기도하셨겠습니까?

 

마태복음 26장 37, 38절에 보면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 새 고민하고 슬 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심히 고민하고 죽게 된 상태에서 기 도하셨습니다. 죽게 된 지경에서 기도하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이었습니다.

 

사실, 사람이 심히 고민하고 죽게 될 지경이 되면 기도도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지경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죽을 지경에서의 통곡하는 기도는 십자가

의 고난보다 더 컸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놓고 결판을 내는 기도 였기에 더욱 고통스러웠습니다. 잠시나마 하나님께 버림당할 것과 하나님께 멀어지고 끊어

질 저주를 앞두고 하신 기도였습니다. 아버지에게서 멀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를 알았기 때문에 고통스러웠습니다. 하나님께 버림당할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아셨기

때문에 고통스러우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고통을 없이 해 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 라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간구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장 44절에 보면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 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고 했습니다. 땀은 다 쏟아지고, 진액은 다 빠져나가고, 땀구멍으

로 핏방울이 쏟아지는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것이 너무도 유명한 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였습니다. 겟세마네는 '기름틀'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름

을 짜듯이, 그런 기도를 드리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히브리서 기자는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히 5:7)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서 '올렸고'라는 말은 제물을 드린다는 술어입니다. 즉 '제물을 가져다 바친다'는 뜻 인데, 구약시대에 드렸던 제물은 곧 신약시대의 기도를 의미합니다.

 

제물은 언제나 고난과 희생을 뜻했습니다. 속죄 제물은 죽여서 피를 흘리는 것이요, 번제 제 물은 태워서 드리는 제사이며, 소제 제물은 가루로 드립니다. 그러니까 내 몸이 부서지고 깨

져 가루가 되기까지 드려지는 기도여야 합니다. 피를 쏟는 기도여야 하고, 내 몸이 태워지는 기도여야 하고, 기름을 짜내듯 온 영혼을 다 짜내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야곱처럼 환도뼈

가 부러지는 기도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스승이신 예수께서 생명을 건, 처절한 기도를 드리고 있다는 것을 알지도 못한 채, 쿨쿨 잠만 자고 있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와 함

께 한 시(時)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마 26:40) 하시며 탄식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고난 주간이 되어도 감각이 없는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한 주간의 고난에 동참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고, 그 고난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며, 주님의 기도의 고난에 동참하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둘째로, 순종의 고난이 있다.

 

본문 8절에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 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뜻

을 포기하고 순종하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드리실 때, 예수님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자기의 소원을 버리고 아버지의 소원을 따른 것입니다. 자기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구한 것입니다. 나의 욕

망을 죽이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것은 십자가의 고난 못지 않은 고통인 것입니다. 아 무리 나의 생각이나 주장이 옳다 하여도, 그 고집을 버리고 아버지 말씀에 복종하는 순종의

고난을 배워야 합니다.

 

순종의 사람 사무엘은 불순종하여 하나님께 버림당한 사울을 향해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삼상 15:22)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몸이 소제의 제물같이 가루가 된다 할지라도, 순종하지

않은 것이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자기의 몸을 불사르게 번제로 드린다 할지라도 순종 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합니다. 자기의 몸을 드리고, 많은 재물을 하나님께 바친다

해도 그의 명령에 복종하지 못하면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순종하면 당장은 손해일 것 같아도,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 시험과 분쟁으로 금방 죽을 것 같아도, 결국은 복이요 승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주님의 제자들

이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서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는 은혜를 체험한 후, 복음을 전파하며 기 적을 베풀고 다닐 때입니다.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제자들을 잡아다가

심문을 하며, 예수의 이름으로는 사람을 더 이상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베드로는 담대하게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행 5:29)면서 조금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산 제사의 믿음이요, 이 믿음으로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 달려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루 한 가지씩이라도 순종합시다. 사랑할 수 없 는 사람을 사랑하고, 기도할 수 없는 환경에서 기도하고, 충성할 수 없는 처지에서 충성하

고, 참을 수 없는 지경에서 참으면서 예수님의 고난에 참예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제사장적 죽음의 고난이 있다.

 

본문 10절에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고 했습 니다. 구약시대에 대제사장은 1년에 한번씩 온 백성의 죄악을 짊어지고 지성소에 들어가서

희생의 피를 뿌리며 속죄제를 드리는 사명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대제사장이라고 히브리서는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

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 2:17, 18),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님 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히

6:20), '저가 저 대제사장들의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 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히 7:27).

 

이와 같은 말씀들을 요약하면 그리스도께서 구약시대에 많은 짐승을 잡아서 속죄제를 드리 던 것을 자기의 몸을 희생의 제물로 단번에 드려 마지막 대제사장이 되어주셨다는 것입니

다.

 

예수님의 고난의 최절정은 제물로서 죽으신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그분은 벌써 온 몸을 채찍에 맞으셨습니다(마 27:26). 그래서 멍이 든 온 몸은 군데군

데 터지고 미어져 핏빛이었습니다.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셨습니다(마 27:29). 그래서 가시에 찔린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로 온 얼굴은 흥건하였습니다. 무려 6시간 동안이나 십자가에 달

리셔서 몸부림치시고 목마르셨습니다(막 15:25, 34: 요 19:28). 그리고 죽음을 확인 받기 위 해 옆구리는 창으로 찔리셨습니다(요 19:34). 모든 인류의 죄값으로 저주를 받으신 고난이었 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옥불에 들어가서 당해야 할 고난을 홀로 담당하신 고난이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고 부르짖으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를 부른다'고 하 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엘리야를 부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을 부르신 것입니다.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절규하시는 이 순간이야말로 고난과 고민, 고초과 고통의 최절정의 순간입니다. 인류의 죄를 지시고 버림받은 죄인으로

몸은 깨어지고, 심장은 파열되고, 조롱을 당하시고, 멸시를 받으시며 죽으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당하신 이 고난을 생각하며,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 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이

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십자가는 가장 극악무도한 죄인이나 노예들을 처형하는 형틀로써 당시 사람들은 십자가형을 듣기만 해도 몸서리치고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십자가가

영광과 복과 평화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바라보고 또 십자가를 통하여 참되고 영원한 구원과 희망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우주와 모든 인류에게

가장 큰 이적이요 기적입니다. 바로 절망의 십자가가 희망의 십자가가 되었다.

 

저주의 십자가가 축복의 십자가로 변화되었고, 치욕의 십자가가 영광의 십자가로 변화되었 습니다. 멸시의 십자가가 존귀의 십자가로, 고통의 십자가가 평화의 십자가로, 실패의 십자

가가 승리의 십자가로, 그리고 사망의 십자가가 영생의 십자가로 변화되었습니다. 따라서 아 무리 힘들고 고통스럽고 괴로워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고난에 함께 동참합시다.

그러면 여러분의 생애 위에 축복과 영광과 평화와 승리와 형통과 영생의 역사가 충만하게 임할 것을 믿습니다.

 

ex) 몇 사람이 크고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십자가가 너무 크고 무겁다고 불평을 하면서, 중간쯤 가다가 아무도 모 르는 곳에서 톱으로 십자가를 잘라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끝까지 지고 갔습니다. 어느덧 예수님께 상급 받을 종점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사람의 힘으로는 뛰어넘을 수 없는 큰 강이 있었습니다. 그 강을 마지막으 로 넘어야 저편의 황홀하고 아름다운 왕관을 들고 서 계신 예수님께 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

다. 물론 그 강은 지금까지 자신이 지고 온 십자가를 강 위에 걸쳐서 건너게 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묵묵히 끝까지 인내하며 십자가를 지고 온 사람은 당당하게 잘 건너갔고, 무겁다고

불평하다 자신의 십자가를 잘라버린 어리석은 사람은 짧아서 건너기는커녕, 오히려 강에 빠 지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삶 가운데 다가오는 시련과 고통을 잘 견디어내지 못하면 결코 예수님의 상급을 받 을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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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주일예배 설교 - 기약없는 주님의 사랑 (The love of the Lord)

 

 

제목 : 기약없는 주님의 사랑
말씀: 눅22:31-34

 

[“시몬아, 시몬아, 보아라. 사탄이 밀처럼 너희를 체질하려고 너희를 손아귀에 넣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나는 네 믿음이 꺾이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네가 다시 돌아올 때에는, 네 형제를 굳세게 하여라.”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나는 감옥에도, 죽는 자리에도, 주님과 함께 갈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한다.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 오늘의 교회 현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겨울바람이 어느덧 봄바람으로 바뀌고, 산수유 노란 꽃망울이 봄이 왔다고 가만히 외치고 있습니다. 삐죽 고개를 드는 새싹들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생명의 기운을 지렛대로 삼아 대지를 들어 올린 것입니다. 벌써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입니다. 우리 속에도 예수라는 꽃이 조금쯤 피어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십니다. 굳어있던 사람들의 마음을 사랑으로 녹이고, 남의 아픈 사정을 헤아리지 못한 채 자기 욕망 주위만 맴돌던 사람들을 이끌어 하나님 나라를 맛보게 하시던 주님은 당신의 때가 이르렀음을 직감하셨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 순례자들이 꿈에도 그리는 그곳을 사람들은 ‘평화의 도성‘이라 불렀지만, 사실 그곳에는 평화가 없었습니다. 헤롯대왕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리모델링한 성전은 아름다웠지만, 그 속에서 벌어지는 일은 아름답지 않았습니다. 도살되는 짐승들의 피가 흐르고, 경건을 가장한 욕망이 지배하는 곳이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성전을 보며 “선생님, 보십시오! 얼마나 굉장한 돌입니까! 얼마나 굉장한 건물들입니까!” 하고 찬탄했을 때 주님은 전혀 예상치 못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는 이 큰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막13:1-2). 제자들은 성전의 아름다움을 보았지만, 주님은 그 속에서 벌어지는 참담한 현실을 꿰뚫어보셨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주후 70년 로마의 장군인 Titus에 의해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성전을 성전답게 하는 것은 건물이 아닙니다. 그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이런저런 일들로 인해 병들고 찢긴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절망의 어둠 속에 있던 이들에게 빛을 비추고, 뭔가에 짓눌린 채 살아가던 사람들을 해방하여 자유인으로 살도록 하는 것, 그리하여 마침내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도록 하는 것, 바로 그것이 바로 성전의 존재 이유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외형은 성전이었지만 실제로는 강도의 소굴, 곧 신의 무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잘 섬긴다고 자부하는 이들, 소위 종교 전문가들로 인해 모독당하고 계셨습니다. 

오늘의 교회 현실도 그 때와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교회에 절망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오늘의 개신교회에 대한 사회의 시선이 싸늘합니다. 어느 기독교 대학 교수님이 자기 학교에 들어오는 학생 가운데 기독교인이라고 밝힌 이들은 10%에 불과하다고 말하더군요. 실제로 교회 다니는 학생들이 더 있을지도 모르지만, 학생들은 그 사실을 숨기고 싶어합니다. 교회 다닌다는 사실이 부끄럽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은 편협하고, 열광주의적이고, 비이성적인 사람들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참담한 현실입니다. 교회는 영영 희망이 없는 것일까요? 객관적으로 타당한 대답은 누구도 할 수 없습니다. 희망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현실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할 가치입니다. 루쉰은 ‘길이란 처음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걸어 다니는 동안 형성되는 것’이라 했습니다. 희망은 그것을 가슴에 품고 희망을 살아내려는 이들을 통해서만 현실이 됩니다. 지금 우리 모습이 추하다고 해서 쉽게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보이지 않는 보폭으로 담을 넘는 담쟁이처럼 우리도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더 나은 교회를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약함을 너무도 잘 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못났다 책망하시거나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붙들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우리에게 전하여 주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봅시다.

● 주님의 외로움
예루살렘에서는 예수를 죽일 음모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과 더불어 어떻게 예수를 그들에게 넘겨줄지를 의논했습니다.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님은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빵을 들어 감사 기도를 드린 다음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저녁 식사 후에 잔을 들어 감사 기도를 드리신 후에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다.” 비장하기 이를 데 없는 순간이었습니다. 찢긴 빵은 머지않아 찢기실 주님의 몸을 상징했고, 나누어 마신 포도주는 주님이 흘리신 피를 상징하건만 제자들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그들은 자기들 나름의 꿈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의 눈을 가렸던 비늘이 제자들의 눈도 가리고 있었습니다.

3년이나 주님과 동고동락 했지만 그들은 예수의 길을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습니다. 세 번이나 당신의 고난과 죽음을 예고했지만 아무도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장밋빛 미래에 도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누구를 가장 큰 사람으로 칠 것이냐를 놓고 말다툼을 벌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철저히 외로우십니다. 지상에서의 삶의 종착역이 저만치 보이는데, 제자들은 여전히 미숙한 신앙 속에 머물고 있습니다. 신학교 시절, 사순절 특별 기도회 광경이 떠오릅니다. 별 기대도 없이 참석한 예배였는데, 4학년 선배가 홀로 부른 찬송가가 제 마음을 온통 뒤흔들었습니다. 청아하지만 쓸쓸한 목소리에 담긴 가사가 심장을 파고 들었습니다.

“1. 감람산 깊은 밤중에 별빛은 희미하여라/주 예수 고민하시며 외로이 기도하시네
2. 주 홀로 깊은 밤중에 고민에 싸여 계시나/그 사랑 받던 제자들 스승의 괴롬 모르네
3. 한 밤중 피 땀 흘리며 인간의 죄를 지신 주/무릎을 꿇고 애쓸 때 성부는 힘을 주시네
4. 한 밤중 하늘로부터 천사의 노래 들리네/인간은 듣지 못하나 주 예수 위로 받도다”

이 아름다운 찬송가가 지금 찬송가에 왜 빠졌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주님의 외로우심‘이라는 이미지에 확고히 사로잡혔습니다. 주님을 외롭게 해드리지 말자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습니다. 물론 여전히 저는 주님을 외롭게 해드리고 있지만, 그 마음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찬송가 134장 감람산 깊은 밤중에


● 우리 마음이 흔들릴 때에도
주님은 외로우셨지만 그 때문에 마음이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섭섭함과 분노에 사로잡혀 마음이 황폐해지지도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티끌에 불과함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히브리 시인의 노래가 떠오릅니다. “부모가 자식을 가엾게 여기듯이, 주님께서는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가엾게 여기신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창조되었음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며, 우리가 한갓 티끌임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시103:13-14). 그 마음이었을 겁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앞으로 경험하게 될 혼돈과 아픔과 절망까지도 자기 안으로 끌어안으십니다. 하지만 쓸쓸함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경고하십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아라. 사탄이 밀처럼 너희를 체질하려고 너희를 손아귀에 넣기를 요구하였다.“(31)

이게 현실입니다. 고난의 태풍 앞에서 시몬의 마음은 속절없이 흔들릴 겁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그 말을 강하게 부정합니다. “주님, 나는 감옥에도, 죽는 자리에도, 주님과 함께 갈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33) 나는 이 마음에 조금의 거짓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베드로는 정말 그런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자신이 한갓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말입니다. 공포와 두려움이 쓰나미처럼 밀려올 때, 이성적인 판단이나 결심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그는 아직 알지 못합니다. 저는 ‘죽을 각오로‘ 혹은 ‘목숨을 걸고’라고 말하는 이들을 믿지 않습니다. 그 말은 진실한 말이 아닐 가능성이 많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한다.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34) 같은 일이 세 번 반복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철저한 부정을 뜻하는 말일 겁니다. 누가복음 본문만 보더라도 베드로는 주님과의 관련성을 강력하게 부인합니다. 자기의 정체를 드러내려는 이들에 맞서 베드로가 한 말에 우리는 참담함을 느낍니다. “여보시오, 나는 그를 모르오.” “이 사람아, 나는 아니란 말이오.” “여보시오, 나는 당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소.” 베드로는 이렇게 철저히 무너졌습니다. 베드로의 삶을 포도에 비유하자면 그는 이제 으깨진 포도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자기라고 믿어왔던 그 자기 정체성이 무너진 겁니다. 가까스로 살아남는다 해도 그는 자기에 대한 혐오와 절망감을 품고 살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 희망의 뿌리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은 이미 그의 약함과 배신까지 품어 안으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네 믿음이 꺾이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네가 다시 돌아올 때에는, 네 형제를 굳세게 하여라.”(32)

한번 넘어지면 그걸로 끝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서면 됩니다. 넘어진 자리를 숙명처럼 받아들이면 희망이 없지만, 기어코 몸을 일으켜 세울 수만 있다면 희망은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패자 부활전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한번 루저는 영원한 루저로 취급당합니다. 흙수저들은 금수저가 될 수 없는 세상입니다. 이게 악한 세상의 실상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넘어짐도 삶의 일부분임을 가르쳐주십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믿음이 꺾이지 않도록 기도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모멸감이나 자기혐오에 사로잡히면 다시 일어설 용기를 내지 못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혹은 그럴 가능성이 큰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가 아니었다면 베드로는 베드로로 살 수 없었을 것입니다.

● 새로운 소명
물론 베드로가 위기 속에서도 굳건하게 믿음을 지키고, 신념대로 살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무너졌습니다. 주님께서 그를 양심의 시험대 앞에 세우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시련의 시간을 면제해주지 않으십니다. 일전에 서양의 엄마들과 한국 엄마들을 피실험자로 한 실험 장면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풀기 어려운 문제가 제시됩니다. 아이들은 고심을 거듭하지만 쉽게 대답을 찾지 못합니다. 서양 엄마들은 아이가 스스로 답을 찾을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렸습니다. 시행착오를 용납한 것입니다. 그에 비해 한국 엄마들은 좀 달랐습니다. 거의 대부분이 아이들이 답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아이들은 실패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했던 것입니다.

비가 내린 후에 땅이 굳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픔을 겪어본 사람이라야 아파하는 이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실패의 쓰라림을 맛본 사람이라야 지금 자기에게 절망한 이들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으깨진 포도처럼 생의 밑바닥을 맛본 사람이라야 그런 처지에 있는 이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주님이 겪으신 고난과 죽음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는 몸소 시험을 받아서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시험을 받는 사람들을 도우실 수 있습니다”(히2:18).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다시 돌아올 때에는, 네 형제를 굳세게 하여라” 하고 당부하셨습니다. 저는 ‘다시 돌아올 때’라는 구절에 감동합니다. 하지만 당시에 베드로는 그 말씀의 깊은 의미를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그 말씀은 영혼의 어둔 밤에 사로잡힌 그의 앞을 비추는 등불이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께 등을 돌릴 베드로에게 격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배신할 것을 내다보셨지만, 그가 다시 돌아올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으셨습니다. 시몬이라는 갈릴리의 어부 속에서 베드로 곧 반석을 보셨던 주님의 그 가없는 사랑과 신뢰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 사랑과 신뢰가 베드로의 희망입니다. 주님은 그에게 형제를 굳세게 하라 이르십니다. 새로운 소명입니다.

누구나 넘어질 수 있습니다. 도덕적으로도 완벽하지 못하고, 신앙적으로도 담대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주 실패를 경험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실패를 계속한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실패를 디딤돌 삼아 더 나은 존재가 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실패입니다. 어느 축구팀이 연전연패를 거듭할 때 해설자가 하는 말이 제게 크게 다가온 적이 있습니다. “저 팀은 패배하는 일에 너무 익숙해졌어요.“ 패배에 익숙해졌다는 말처럼 슬픈 말이 없습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부름 받은 우리들도 세상과의 싸움에서 패배를 자명한 사실로 받아들이고 사는 것은 아닌지요? 가끔 아무리 외쳐보아도 세상은 달라질 리 없다는 절망감이 저를 사로잡을 때도 있습니다. 물질과 욕망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진리를 외치는 이들의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몸과 마음을 곧추 세우는 까닭은 우리를 위해 빌고 계신 주님이 계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값싼 위안이나 구하라고 택함 받은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넘어졌더라도 그 자리를 딛고 일어나 형제를 굳세게 하라는 소명 앞에 서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비록 으깨진 포도 같은 우리라 해도, 주님의 가없는 사랑을 신뢰할 때 향기로운 포도주처럼 새로운 존재로 거듭날 것입니다. 주님의 일을 위해 우리를 바칠 때 우리는 성찬의 포도주처럼 거룩한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우리들을 통해 이 척박한 땅에 사랑과 생명의 씨를 심으려 하십니다. 이 거룩한 소명에 기쁨으로 응답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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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가대헌신예배 설교 - 거룩한 사역자

  

 

제목 : 거룩한 사역자

말씀 : 대하20:20~23

오늘 말씀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말씀 중의 하나입니다. 남 유다의 여호사밧 왕 당시 암몬과 모압과 에돔 사람들이 연합군을 이루어 유다를 침공하였는데 여호사밧은 온 백성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는데 전쟁은 내게 속한 것이라며 너희가 싸울 것이 없이 내가 싸울 것이니 너희는 대열을 이루고 서서 내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여호사밧은 희한한 결정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군대를 이끌고 나가 대열을 이루고 그 앞에 성가대를 앞세워 찬송을 하게 합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지지요. 찬송이 시작될 때에 모압과 암몬과 세일산 사람들이 서로 치고받고 하면서 자멸하고 맙니다. 그래서 여호사밧은 칼 한번 안 쓰고 오직 찬양으로 전대미문의 승리를 하게 됩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보면 성가대가 가져야 할 자세를 볼 수 있는데요 이 말씀을 묵상하며 성가대가 어떤 자세로 주님을 섬겨야 할지를 살펴볼 때에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1.성가대원들은 거룩한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먼저 오늘 21절 보겠습니다.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여러분, 여기에 보면 거룩한 예복 즉 성가대 가운을 입혀서 찬양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지금이 어떤 상황입니까? 비상 상황입니다. 그런데 찬송은 왠 찬송이며 거룩한 예복은 또 뭡니까? 그럼 왜 이런 비상상황에 거룩한 예복을 입혀서 찬양했습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거룩한 사명감의 고취라고 볼 수 있습니다. 거룩한 예복을 입힘으로 그들이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거룩하신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영광스러운 직분을 받은 자라는 사실을 재인식시키면서 믿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성가대도 거룩한 예복 즉 가운을 입는데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폼으로 입는 게 아닙니다. 사람보기에 멋있으라고 입는 게 아닙니다. 목사 가운이나 장로 가운이 성가대 가운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이제 우리는 거룩히 구별되어 그리스도로 옷입었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거룩한 사명을 받은 자로 구별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물론 가운을 입는다고 거룩해 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자세로 그 거룩한 직분이나 사명을 감당하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가대원들은 이런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우선은 그리스도의 피로 구별된 백성이라는 그래서 거룩한 백성이라는 고백이 확실해야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찬양을 위하여 특별히 세움 받은 자라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겉으로 입는 예복도 중요하지만 이러한 믿음과 고백과 사명감이 진정한 예복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고백이 있다면 일상적인 삶도 거룩하게 성결하게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일상적인 삶은 아무렇게 하면서 성가대석에 앉아서 아무리 꾀꼬리 같은 소리로 찬양을 해도 그 찬양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물론 예배도 마찬가지겠습니다만 세상에서는 그냥 내 마음대로 살다가 그럴듯한 옷을 입고 그럴듯하게 찬양한다고 그게 온전한 찬양이 되겠습니까? 찬양은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과 구원과 인도하심과 거룩하심과 영광스러움과 인자와 자지를 높여 드리는 일인데 그러한 진정한 고백을 가지고 찬양해야 하고 그렇게 진정한 고백을 가지고 찬양한다면 당연히 일생생활에서도 거룩한 모습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우리 성가대는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나는 주님의 보혈로 깨끗함을 받아 성별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찬양 사역을 위하여 구별된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일상생활도 거룩하고 진실하고 아름답게 살아가며 믿음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찬양할 때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성도들에게 큰 은혜를 끼치며 더욱 생명의 은총과 능력이 넘쳐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성가대는 믿음으로 앞장 서야 합니다.

성가대는 귀한 사명을 가진 자들이니 만큼 일상생활에서나 교회생활에서나 모범을 보여야 하고 앞장서야 합니다. 귀한 일을 맡으면 맡을수록 모든 일에 본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보았던 21절 다시 봅니다.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여러분,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여호사밧은 성가대원들에게 거룩한 예복을 입혀서 군대의 앞에 세워 찬송을 하게 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전술적으로보면 이렇게 어리석은 일이 어딨습니다. 적군이 성가대를 향해 돌진해오면 그야말로 속수무책으로 죽을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성가대원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았다면 두렵고 떨려서 찬양도 제대로 못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선두에 서서 찬양을 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20절 하반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사밧이 서서 이르되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즉 여호사밧이 ‘걱정 말아라. 하나님을 믿으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러면 형통할 것이다.’라고 하자 성가대원들이 그 말씀을 믿고 적을 눈앞에 두고 군대의 제일 앞에서 담대히 찬양을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물론 우리 모두가 마찬가지지만 성가대원들은 이런 믿음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 속에서 믿음 생활에서 앞장서고 본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떤 교회는 성가대가 목사님 강단보다도 더 앞에 있더라고요. 그래서 성가대원들은 목사님 뒤통수 보면서 예배를 드리더라고요. 오늘 이 말씀을 보고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이건 아닌 것 같아요. 뭐니뭐니해도 예배의 꽃은 말씀인데 말씀보다 앞에 가면 좀 그렇지 않을까요? 또 어떻게 보면 뭐 그렇지는 않겠지만 제일 앞의 제일 높은 자리에 앉아 영광을 받는 것 같기도 하고...... 설령 그렇지 않아도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듣고 하려면 마주보고 해야지 뒷모습보고 하면 좀 그렇잖아요. 여러분, 이야기할 때 한 사람이 뒤돌아서서 하면 어떻겠어요?

여하간 여러분,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귀한 사명, 귀한 직분을 맡은 사람은 언제나 남보다 앞장서야 하고 본을 보여야 한다는 겁니다. 성가대도 동일합니다. 특히 성가대는 예배의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모든 교우들이 마찬가지지만 성가대는 정말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일이 아니면 예배에 빠지면 안됩니다. 안 그래요? 예배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데 빠지면 어떻게 되겠어요? 바쁘다고 빠지고 집안에 무슨 일이 있다고 빠지고 상황이 그래서 여건이 그래서 빠지고... 아닙니다. 생명이 죽고 사는 일이 아니라면 예배보다 우선 될 수는 없습니다.

사탄은 온갖 그럴듯한 이유로 예배를 방해합니다. 합리화시킵니다. 그러나 그런 합리화나 변명은 하나님의 소리가 아닙니다. 사탄의 소립니다. 우리가 속고 있는 것입니다. 아휴 목사님, 세월이 그런데요. 요새 교인들 다 그런데요. 그러면 교인들 다 도망갑니다. 그러면 힘들어서 교회 생활 못합니다. 여러분, 그래서 교회가 힘들어진 게 아닙니다. 반대입니다. 거꾸로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따라 환경 따라 상황 따라 사람 따라 사람 생각대로 편한대로 하니까 믿음이 죽어가고 교회가 힘을 잃고 교회가 욕을 먹고 생명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지면 안됩니다. 이 싸움에서 이기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은혜와 능력과 지혜를 덧입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탄의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모든 일에 본이 되고 앞장서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는 자세도 본이 되어야 합니다. 성가대석에 앉아서 졸면 안됩니다.

그리고 물론 교회의 다른 일에도 앞에서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폼 나게 싹 차려입고 하는 일에는 제법 참여하고 궂은 일은 안 하려고 합니다. 부모들도 보면 자녀들을 폼나는 일은 안시켜주면 뭐라고 그러고 궂은 시킨다고 뭐라 그럽니다. 그러나 안됩니다. 그러면 결국 자기가 영광을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쁘고 즐거운 일만 아니라 어렵고 힘들고 궂은 일에도 동참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경주의 어떤 교회 이야기인데 그 교회 장로님이 자기 교회는 성가대 찬양 소리가 잘 안 들릴 때가 많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성가대가 잘 못해서 그런 게 아니라 성가대와 함께 다른 쪽에서 학생들이 관현악기 현악기 타악기가 합주를 하는데 그 악기 소리 때문에 성가대가 찬양할 때에 고음은 그런대로 들리는데 저음은 안들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님이 악기연주자를 줄이자고 하니까 목사님이 악기를 연주하는 학생들의 부모들이 서운해 해서 곤란하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학생들에게 교회 화장실 청소를 시키다가 그만두라고 했으면 어땠을까요? 아니 화장실 청소를 시키면 난리가 날 겁니다. 여러분, 폼나는 자리는 안 앉혀 준다고 뭐라 그러고, 궂은 일은 시킨다고 뭐라 그런다면 이게 믿음있는 행동입니까? 여러분, 가정에서든 교회에서도 궂은 일도 해야 합니다. 궂은 일 하는 사람 따로 있고 폼나는 일하는 사람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폼나는 일만 하려고 한다면 그건 믿음이 아닙니다.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요 자기가 영광을 받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특별히 너무나 귀한 찬양의 사역을 맡은 우리 성가대는 찬양하는 일뿐 아니라 신앙생활의 전반적인 영역에서 모범을 보이고 앞장섬으로 삶의 예배가 뒷받침되어 여러분의 찬양이 진정 향기로운 찬양이 되고 여러분의 삶에도 은혜와 기쁨이 넘쳐나는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또 한가지 성가대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찬양은 자기 만족이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니고 위로와 소망과 기쁨을 얻기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찬양을 하면서 우리도 은혜와 위로가 되고 소망도 갖게 되고 능력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분명한 것은 찬양은 그게 목적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찬양이 뭡니까?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과 구원과 인도하심을 기억하며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즉 찬양은 나의 기쁨이나 만족이나 은혜나 소원을 이루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오직 전지전능하시고 영화로우시고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며 기쁘시게 해드리며 영광을 돌리는 것이 목적인 것입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와 능력을 주셔서 상황이나 환경도 이기게 되고 위로도 받고 소망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순서가 바뀌어 자신이 뭔가 얻으려고 찬양을 한다면 그건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노래이므로 찬양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21절 후반부 다시 봅니다.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보세요. 이 급박한 상황에서도 그들은 하나님 우리를 도와주세요. 힘을 주소서. 용기를 주소서. 저들을 물리쳐 주소서. 그렇게 찬양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인자하심을 믿고 그래서 그렇게 구원해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찬양소리가 나기 시작했을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도와달라고 위로해달라고 힘을 달라고 소망을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감사와 영광을 돌리자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게 진짜 찬양입니다. 나의 위로 소망 구원 도움이 목적이 되면 찬양이 아니라 찬양을 나의 필요를 채움받기 위한 도구로 전락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 진정 믿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성가대는 이 찬양 사역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를 되새겨보며 믿음으로 감사와 기쁨으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찬양하는 일만 아니라 신앙생활 전반에 걸쳐 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일상생활도 거룩하게 아름답게 하시기 바랍니다. 사람 보기에 그럴듯한 일이든 그렇지 못한 일이든 교회를 섬기는 일에도 앞장 서 주시기 바랍니다. 그때에 정말 여러분의 찬양과 삶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 아름답게 상달되어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며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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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 191장
기도 : 박 미혜 집사

제목 :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오는가 ?  3
말씀 : 시 121:1-8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만 의존하며 살도록 만드셨는데 인간이 스스로 더 잘 살아보려고 하는 교만 때문에 타락한 것입니다.
인간의 심각한 문제는 하나님 아닌 다른 것으로부터 도움을 구한다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을 큰 산과 같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아무리 큰 산, 큰 인물이 있다고 해도 우리에게 진정한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도움을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 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 하리로다”(시 62:1-2)

지금 내가 처해있는 환경보다 더 크신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도움은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실질적인 우리의 육적인 삶의 도움입니다.
 
주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우리를 지키십니다.
여기서 지킨다는 것은 우리의 육적인 삶을 빼앗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건강, 물질, 자녀, 남편, 부모, 회사, 직장 등 우리의 육적인 삶을 눈동자처럼 지켜주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시 121:3-4)
 
자연으로부터 지켜 주시고 보호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사막에서 살 수 있던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보호해 주십니다.
 구원 받은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도 복되게 살 수 있고 하나님께서 돕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환경에서도 병들어 죽게 됩니다.
우리의 진정한 환경은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시 121:5-6)
 
하나님은 우리를 영적으로 보호하고 도우십니다.
 
진정한 ‘나’는 ‘영혼’입니다.
나의 영혼을 지켜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죄악과 저주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환란과 역경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지키십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시 121:7-8)

하나님을 열심히 믿으려고 몸부림을 치는 사람들에게도 예기치 않는 일들이 생깁니다.
 특히 말씀 안으로 들어가 말씀대로 살려고 할 때 어둠은 그냥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광야의 기간 동안 혹독한 고난을 치르고 믿음의 선물을 받았음에도 시시탐탐 노리는 악의 세력은 눈을 부릅뜨고 보지 않으면 믿음을 지키는 일에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을 믿어도 소용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어둠의 세력이 이미 짜 놓은 각본에 말려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을 영적으로 해석하지 않으면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해석하면 다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게 온 문제를 깨닫고 이해하게 되면 그 문제는 더 이상 내게 고통이 되지 않습니다.
이유 없는 고난이 힘든 것입니다.
 
사람들이나 환경을 통해 일어나는 고통의 대부분은 하나님께서 나를 십자가 안으로 좀 더 가까히 들어오게 하시려는 무대임을 믿어야 합니다.
이유 없는 괴롬힘, 모함, 왕따 특히 직장생활에서 대인관계가 잘 형성이 안 되면 그곳은 이미 지옥입니다.
그러나 지옥에 있어도 주님이 그 곳에 계심을 믿으면 그곳은 천국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옥과 같은 환경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게 하신 후 주님과 온전한 연합을 이루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오히려 주님과 하나가 되게 하는 능력의 도구가 됩니다.
그래서 그런 환경이 오면 먼저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영적 분별력이 없으면 도저히 감사할 수 없습니다.
성숙한 성도는 영적 분별력을 간구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삶에 대한 해석이 가능해지면 더 이상 문제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일이"라고 생각하기 보다,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중에 왜 내게 이런 일들을 허락하셨습니까?

아무리 암흑 같은 시기가 올지라도, 마치 하나님이 안계신 것처럼 느껴질지라도, 하나님은 그곳에 나와 함께 계신다는 말씀을 믿어야합니다.
비록 어제 오늘 예기치 못한 일들이 엄습해 와도  왜? 가 아니라 그런 일도 허용하신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던 그 곳에도 함께 계셨습니다.
그렇기에 나와 늘 함께 동행하시고 나의 작은 신음에도 크게 반응하신다는 확신을 가지면 더이상 어두운 곳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 당신의 아들이 너무 약하고 힘듭니다 "  라고 솔직히 고백하면 마음 속에 참 평안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친밀함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며, 마음을 허튼 곳에 빼앗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혹 주님보다 더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십자가 앞에 내려 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배우자, 자녀라면 더더욱 주님께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주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그들을 더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내가 사랑하면 율법이지만 그분이 주시는 마음에 순종해서 사랑할 때 그것은 곧 은혜가 됩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이 은혜로 다가올 때 그것을 지킬 수 있습니다.
 절박한 환경에서 언제나 그렇듯이 주님의 도우심은 지푸라기 하나도 잡을 힘이 없을 정도로 내가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도움으로 다가옵니다.
우리는 가족, 직장, 교회를 통해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짐의 연속입니다.
만남의 인연은 참으로 소중합니다.
모래알과 같이 많은 사람들중에 부부로의 관계로, 자녀와 부모의 관계로 ,스승과 제자, 교우등의 소중한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사를 돕기 위해서 만나게 된 서로 돕고 동역하라고 하는 관점으로 여겨야합니다.
때로는 측은 지심으로, 섬김의 대상으로 서로에게 긍휼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순종하며 도우심을 구하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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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종려주일 낮설교 - 예수님의 고난

 

 

예수님의 고난

히 5:1~10

종려주일 낮설교
 

오늘은 고난주간의 첫 날이자 종려주일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기 위해 예루 살렘에 입성하신 날로서, 이때부터 주님이 부활하신 전(前)날, 즉 토요일까지의 일주일을 고

난 주간이라 합니다. 고난주간에는 금식과 철야 또는 새벽기도 등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며 그리스도가 당한 고난을 깊이 생각하고 몸소 체험하며 그 뜻을 깊이 깨닫는 기간이 되어야

합니다.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나?', '왜 주님은 십자가의 엄청난 고난을 받으셨나?', '과연 누구 때문인가?', '그 십자가의 고난과 나와는 어떤 상관이 있나?' 깊이 묵상하면서 다시 한 번 주님의 큰사랑에 감격, 감사하는 기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 북쪽에 조그만 언덕이 있습니다. 나무도 별로 없고 붉은 흙으로 덮인 곳, 바로 히브리어로 '골고다'요, 라틴어로 '갈보리', 그리고 우리말로는 '해골의 곳'이라는 장소입니

다.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으로써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을 받으신 곳입니다.

 

금요일 아침, 안토니아 성문 앞에서는 예수를 잡아죽이라는 무리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벌써 닷새 전에 우리의 '구세주'라고, '메시아'라고 고백했던 입술들이,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 시는 이여'라고 찬양하던 입술들이 지금은 아주 돌변하여 굶주린 사자 떼 같이 큰소리로 ' 죽이시오. 죽이시오.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시오' 하고 불끈 쥔 주먹을 휘저으며 아우성을 치 고 있습니다. '바라바는 살리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광기 어린 외침을 하고 있습 니다. 비겁하지만 합리적인 빌라도는 '그대들은 이 사람을 데려다가 십자가에 매달든지 말

든지 마음대로 하라.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노라'며 군중의 뜻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내어 주었습니다.

 

그 전날인 목요일 저녁, 겟세마네 동산에서 로마 군인들에게 잡히신 주님은, 대제사장 가야 바의 법정과 총독 빌라도의 법정, 그리고 헤롯의 법정에까지 밤새도록 끌려 다니시며, 모욕

과 멸시와 침 뱉음과 고초를 당하신 끝에 결국 십자가의 형을 받게 되신 것입니다.

 

주님은 밤새도록 심문을 받고 채찍질을 당하였기 때문에 몹시 지친 몸이셨습니다. 그러므로 무거운 십자가 틀을 지고 가는 일을 감당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여러 번 넘어지셨습니다. 넘

어지고 또 넘어지셨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로 인하여 쓰러질 때마다 무릎은 터지고 깨졌고, 발은 돌 뿌리에 채여서 붉은 피로 물들었으며, 그 얼굴은 로마 병정들에게 맞아 멍들어 부

풀어올라 분간할 수 없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바로 당신이 못 박힐 그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향하여 고통스럽게 걸어가셨습니다.

 

오전 9시경, 겨우 겨우 갈보리 산상에 올라오니, 악당들은 주님의 입은 옷을 다 발가벗기고, 십자가 위에 눕힌 채 사지를 결박한 후, 13cm의 못을 입에 물고, 예수의 손목 중 뼈가 없는

부분을 찾아 그 위에 힘차게 못을 때려 넣었습니다. 그리고 백부장이 '끌어 올려라'고 소리 쳤습니다.

 

십자가를 올릴 때 예수의 손목은 비틀어졌고, 검붉은 피는 치솟아 흘러내렸습니다. 갑작스럽 게 어둠이 밀려왔고 하늘은 어두워졌습니다. 고통을 덜어주는 쓸개 탄 포도주도 안 받으시

고,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6시간 동안 십자가에 달리셔서 몸부림치시고 목마르셨습니 다. 결국, 옆구리에까지 창을 받아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그리고 죽으셨습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을 모시던 제자들은 다 어디로 갔으며, 병고침을 받은 사람들, 문제해결 받 고 할렐루야! 외치며 기뻐 뛰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죽었다가 다시 산 나사로는

어디 갔고, 순교를 각오했던 베드로는 어디 갔습니까? 관리들이 예수님을 버렸고, 헤롯왕은 예수님을 미친 사람 취급했고, 대제사장은 예수님이 '참람하다'면서 정죄하였습니다. 이처럼

모든 인간에게 버림을 당하고 심지어 유일한 피난처인 하나님 아버지에게 마저 버림당하는 슬픔을 맛보셨습니다. 모두에게 버림을 받으신 예수님은 아주 외롭고 쓸쓸하게 죽으셨습니

다.

 

불법한 빌라도의 채찍에 맞아 터지고 멍든 그 몸의 상처, 우리 주님의 전신에서 예리 하게 흘러내리는 보배로운 피를 다시 한번 쳐다보시기 바랍니다. 그 고통의 넓이와 높이와

깊이를 인간의 적은 두뇌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고난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과연 주님의 고난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왜 고난

을 당하셨으며, 우리는 왜 오늘도 그 고난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하나요? 주님께서 주신 고난의 의미를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나를 위하여 죽으심에 대한 감격과 다른 하나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해야 된다고 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고난받으실 때, 제자들의 생활상태를 찾아보면 한심함뿐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기도 의 고난을 당하시는데 잠만 자고 있는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불법한 로마의 군

병들에게 잡혀가실 때는 제 갈 길로 뿔뿔이 흩어진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심문을 당하시며, 조롱과 모욕을 당하실 때는 멀찍이 따라가며 비자들과 불을 쪼이던 제자도 있었

습니다. 은 30을 받고 예수님을 팔기 위해 모의를 하던 제자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신앙인의 자세가 절대로 아닙니다. 신앙인의 자세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7), '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빌 1:29)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만 분의 일이라도 동참하는데 고난 주간을 지키는 의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고난은 어떤 고난이었을까요?

 

첫째로, 기도의 고난이었다.

 

본문 7절에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 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심한 통곡과 눈물의 기

도를 드리셨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우면 심한 통곡으로 기도하셨겠습니까?

 

마태복음 26장 37, 38절에 보면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 새 고민하고 슬 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심히 고민하고 죽게 된 상태에서 기 도하셨습니다. 죽게 된 지경에서 기도하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이었습니다.

 

사실, 사람이 심히 고민하고 죽게 될 지경이 되면 기도도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지경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죽을 지경에서의 통곡하는 기도는 십자가

의 고난보다 더 컸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놓고 결판을 내는 기도 였기에 더욱 고통스러웠습니다. 잠시나마 하나님께 버림당할 것과 하나님께 멀어지고 끊어

질 저주를 앞두고 하신 기도였습니다. 아버지에게서 멀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를 알았기 때문에 고통스러웠습니다. 하나님께 버림당할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아셨기

때문에 고통스러우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고통을 없이 해 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 라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간구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장 44절에 보면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 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고 했습니다. 땀은 다 쏟아지고, 진액은 다 빠져나가고, 땀구멍으

로 핏방울이 쏟아지는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것이 너무도 유명한 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였습니다. 겟세마네는 '기름틀'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름

을 짜듯이, 그런 기도를 드리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히브리서 기자는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히 5:7)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서 '올렸고'라는 말은 제물을 드린다는 술어입니다. 즉 '제물을 가져다 바친다'는 뜻 인데, 구약시대에 드렸던 제물은 곧 신약시대의 기도를 의미합니다.

 

제물은 언제나 고난과 희생을 뜻했습니다. 속죄 제물은 죽여서 피를 흘리는 것이요, 번제 제 물은 태워서 드리는 제사이며, 소제 제물은 가루로 드립니다. 그러니까 내 몸이 부서지고 깨

져 가루가 되기까지 드려지는 기도여야 합니다. 피를 쏟는 기도여야 하고, 내 몸이 태워지는 기도여야 하고, 기름을 짜내듯 온 영혼을 다 짜내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야곱처럼 환도뼈

가 부러지는 기도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스승이신 예수께서 생명을 건, 처절한 기도를 드리고 있다는 것을 알지도 못한 채, 쿨쿨 잠만 자고 있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와 함

께 한 시(時)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마 26:40) 하시며 탄식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고난 주간이 되어도 감각이 없는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한 주간의 고난에 동참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고, 그 고난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며, 주님의 기도의 고난에 동참하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둘째로, 순종의 고난이 있다.

 

본문 8절에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 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뜻

을 포기하고 순종하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드리실 때, 예수님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자기의 소원을 버리고 아버지의 소원을 따른 것입니다. 자기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구한 것입니다. 나의 욕

망을 죽이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것은 십자가의 고난 못지 않은 고통인 것입니다. 아 무리 나의 생각이나 주장이 옳다 하여도, 그 고집을 버리고 아버지 말씀에 복종하는 순종의

고난을 배워야 합니다.

 

순종의 사람 사무엘은 불순종하여 하나님께 버림당한 사울을 향해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삼상 15:22)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몸이 소제의 제물같이 가루가 된다 할지라도, 순종하지

않은 것이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자기의 몸을 불사르게 번제로 드린다 할지라도 순종 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합니다. 자기의 몸을 드리고, 많은 재물을 하나님께 바친다

해도 그의 명령에 복종하지 못하면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순종하면 당장은 손해일 것 같아도,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 시험과 분쟁으로 금방 죽을 것 같아도, 결국은 복이요 승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주님의 제자들

이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서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는 은혜를 체험한 후, 복음을 전파하며 기 적을 베풀고 다닐 때입니다.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제자들을 잡아다가

심문을 하며, 예수의 이름으로는 사람을 더 이상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베드로는 담대하게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행 5:29)면서 조금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산 제사의 믿음이요, 이 믿음으로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 달려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루 한 가지씩이라도 순종합시다. 사랑할 수 없 는 사람을 사랑하고, 기도할 수 없는 환경에서 기도하고, 충성할 수 없는 처지에서 충성하

고, 참을 수 없는 지경에서 참으면서 예수님의 고난에 참예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제사장적 죽음의 고난이 있다.

 

본문 10절에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고 했습 니다. 구약시대에 대제사장은 1년에 한번씩 온 백성의 죄악을 짊어지고 지성소에 들어가서

희생의 피를 뿌리며 속죄제를 드리는 사명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대제사장이라고 히브리서는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

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 2:17, 18),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님 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히

6:20), '저가 저 대제사장들의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 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히 7:27).

 

이와 같은 말씀들을 요약하면 그리스도께서 구약시대에 많은 짐승을 잡아서 속죄제를 드리 던 것을 자기의 몸을 희생의 제물로 단번에 드려 마지막 대제사장이 되어주셨다는 것입니

다.

 

예수님의 고난의 최절정은 제물로서 죽으신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그분은 벌써 온 몸을 채찍에 맞으셨습니다(마 27:26). 그래서 멍이 든 온 몸은 군데군

데 터지고 미어져 핏빛이었습니다.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셨습니다(마 27:29). 그래서 가시에 찔린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로 온 얼굴은 흥건하였습니다. 무려 6시간 동안이나 십자가에 달

리셔서 몸부림치시고 목마르셨습니다(막 15:25, 34: 요 19:28). 그리고 죽음을 확인 받기 위 해 옆구리는 창으로 찔리셨습니다(요 19:34). 모든 인류의 죄값으로 저주를 받으신 고난이었 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옥불에 들어가서 당해야 할 고난을 홀로 담당하신 고난이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고 부르짖으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를 부른다'고 하 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엘리야를 부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을 부르신 것입니다.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절규하시는 이 순간이야말로 고난과 고민, 고초과 고통의 최절정의 순간입니다. 인류의 죄를 지시고 버림받은 죄인으로

몸은 깨어지고, 심장은 파열되고, 조롱을 당하시고, 멸시를 받으시며 죽으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당하신 이 고난을 생각하며,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 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이

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십자가는 가장 극악무도한 죄인이나 노예들을 처형하는 형틀로써 당시 사람들은 십자가형을 듣기만 해도 몸서리치고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십자가가

영광과 복과 평화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바라보고 또 십자가를 통하여 참되고 영원한 구원과 희망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우주와 모든 인류에게

가장 큰 이적이요 기적입니다. 바로 절망의 십자가가 희망의 십자가가 되었다.

 

저주의 십자가가 축복의 십자가로 변화되었고, 치욕의 십자가가 영광의 십자가로 변화되었 습니다. 멸시의 십자가가 존귀의 십자가로, 고통의 십자가가 평화의 십자가로, 실패의 십자

가가 승리의 십자가로, 그리고 사망의 십자가가 영생의 십자가로 변화되었습니다. 따라서 아 무리 힘들고 고통스럽고 괴로워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고난에 함께 동참합시다.

그러면 여러분의 생애 위에 축복과 영광과 평화와 승리와 형통과 영생의 역사가 충만하게 임할 것을 믿습니다.

 

몇 사람이 크고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십자가가 너무 크고 무겁다고 불평을 하면서, 중간쯤 가다가 아무도 모 르는 곳에서 톱으로 십자가를 잘라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끝까지 지고 갔습니다. 어느덧 예수님께 상급 받을 종점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사람의 힘으로는 뛰어넘을 수 없는 큰 강이 있었습니다. 그 강을 마지막으 로 넘어야 저편의 황홀하고 아름다운 왕관을 들고 서 계신 예수님께 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

다. 물론 그 강은 지금까지 자신이 지고 온 십자가를 강 위에 걸쳐서 건너게 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묵묵히 끝까지 인내하며 십자가를 지고 온 사람은 당당하게 잘 건너갔고, 무겁다고

불평하다 자신의 십자가를 잘라버린 어리석은 사람은 짧아서 건너기는커녕, 오히려 강에 빠 지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삶 가운데 다가오는 시련과 고통을 잘 견디어내지 못하면 결코 예수님의 상급을 받 을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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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부활절 메시지 - 부활의 주님을 찬양하라

 

 

 

제목 : 부활의 기쁨을 누리는 삶

말씀 : 고전15:1-8

주님께서 죄와 사망을 비롯한 모든 어둠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이 날, 다시 한번 주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부활의 기쁨이 충만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실 예수님의 부활이나 우리의 부활이나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기쁘고, 너무나 감격스럽고, 너무나 엄청난 일이라서 어쩌면 그 기쁨을 다 맛보고 있지 못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본래 기쁜 것이나 슬픈 것이나 좋은 것이나 그 크기가 너무 크면 우리가 그것을 다 알 수 없습니다. 다 누릴 수도 없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모든 영역에서 한계가 있습니다. 지식도 이성도 감정도 물질적인 영역도 다 한계가 있어서 일정한 한계를 벗어나면 우리가 그것을 다 이해할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밝으면 잘 보이지만 그러나 적당히 밝아야지 너무 밝으면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습니다. 따뜻하면 좋지만 적당히 따뜻해야지 너무 따뜻하면 몸을 데게 됩니다.

 

부활도 정말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 사실은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는 엄청난 일이라서 잘 받아들이지 못하기도 하고 또 너무나 큰 기쁨의 소식이라서 그 기쁨의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른다고 느낄 수 없다고 그 엄연한 사실이 취소되거나 축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현실은 현실이로되 사람들이 그것을 잘 알지 못하거나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관건은 어떻게 그것을 최대한 누리느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큰 기쁨의 소식을 알고 그것을 최대한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 누리는 사람은 생명을 얻고 더 풍성하게 얻어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의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됩니까? 정말 우리가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양하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려면 어찌해야 됩니까?

 

1.부활의 신앙위에 확고히 서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기독교가 타 종교와 다른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크게 두가지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이 두가지를 빼고 나면 다른 것은 거의 비숫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건전한 모든 종교들은 인간에게 나름대로 소망과 위로를 줍니다. 평안과 기쁨을 줍니다. 마음을 순화시켜줍니다. 선과 의와 거룩을 가르칩니다. 사랑과 자비를 가르쳐줍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오직 유일하게 기독교에만 있습니다. 이것은 누구도 모방할 수 없고, 해서도 안되고, 설렬 한다해도 소용도 없습니다. 그 사건은 한번이면 족한 것이고 이미 예수안에서 다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사건을 다시 일으키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니 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유일무이한 기독교의 핵심진리이며 유일무이한 구원의 길입니다. 그래서 이게 없으면 말짱 헛일입니다. 물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없으면 죄사함의 은총과 영원한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그 믿음은 헛믿음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이 이것인데, 생명의 길이 유일하게 거기에 있는데 이걸 알지못하고 믿지 못하면 무든 의미가 있겠습니까? 또 우리 인생이 알든 알지 못하든 인간은 영생하는 존재입니다. 영적인 존재이기에 필연적으로 영생합니다. 영혼은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의 영혼을 깨끗케하고,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을 덧입어 새로운 생명으로 덧입지 않으면 세상에서 아무리 훌륭한 삶을 살았다해도 그것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물론 조금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짧은 순간에 불과합니다. 영원한 시간속에서의 100년은 한 경점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설령 그 짧은 기간에 부귀영화를 누리고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해도 나머지 영원의 시간을 고통 중에 보낸다면 그건 분명 실패한 인생입니다.

 

그래서 오늘 다 읽지는 않았지만 같은 본문인 고전15:17-19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러니까 아무리 교회생활잘해도 이 부활신앙을 갖지 못하면 헛일이라는 것입니다. 아니 가장 불쌍한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공연히 헛수고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조금은 의미가 있겠지만 즉 소망도 가질 수 있고, 인격수양도 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좀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순간에 지날 것이므로 큰 의미를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부활의 신앙위에 확실히 서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분명 부활하셨습니다. 부님의 부활은 어느 한구석에서 숨어서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에 의하여 조작된 것도 아닙니다. 신화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사건이었고, 사실이었고, 큰 뉴스거리였습니다.

 

그것은 이미 예언된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누이 말씀하셨던 일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보았고, 예수님을 장사지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고, 수많은 사람들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유령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앞에서 함께 음식을 잡수셨습니다.

어떤 이들은 조작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미련하기 짝이 없는 말입니다. 조작될 수도 없고, 할 수도 없습니다. 산증인들이 있습니다. 그 부활하신 예수님을 위하여 제자들은 모두 순교했습니다. 조작된 사실을 위하여, 꾸며진 이야기를 위하여 누가 순교를 하겠습니까? 허무맹랑한 거짓에 목숨을 걸 바보가 세상천지에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 3-8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모든 성도여러분은 이 부활신앙의 기초위에 확실히 서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부활하셨고, 우리도 부활합니다. 주님은 승천하셨고, 우리를 위하여 천국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때가 되면 다시 오십니다. 그때에 모든 인류는 부활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여러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참혹함 죽음을 당하심으로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신 예수님, 그러나 사망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온전히 영접하여 주님의 능력으로 모든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2.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부활의 신앙위에 서야 합니다. 그 인생이 결국 마지막 승리자가 됩니다. 세상에서 그 부활의 신앙만 있으면 모든 것을 이기며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 부활의 신앙위에 서게 됩니다. 어떻게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나의 사전으로 받아들여지게 됩니까? 어떻게 주님의 부활이 믿어지고, 어떻게 주님의 부활의 생명이 나의 것이 됩니까? 믿으면 되는 줄은 알겠는데 그럼 어떻게해야 믿어집니까?

 

그건 간단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들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

그래서 롬10:17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그러니까 믿음이란 어디서 오느냐 그것은 들음에서 오는데, 그럼 무엇을 들을 것이냐,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다보면 그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무지 가운데 있었는지 말게 된다는 말입니다. 말씀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성령이 역사하시면 비로소 믿음의 세계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20:31에서는 또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즉 성경을 기록한 목적을 말한 것입니다. 성경의 기록목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알고 믿게하려는 것이요, 그렇게 그것을 보고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믿게 될 때 결국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인생이 바뀝니다. 십자가에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만나면 나의 죄가 얼마나 큰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죄의 심각성을 알게되고,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뿐임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당하셨음과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심으로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주셨음을 알고 이해하고 믿게 됩니다. 그러면 인생의 바꿉니다.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러면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기도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영성이 깨어납니다. 죽어있던 영혼이 살아나게 됩니다. 할렐루야 찬양이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기뻐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며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여러분께서는 주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 묵상하는 일을 늘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영혼이 맑아지기를 바랍니다. 부활의 주님을 온전히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더욱 기뻐하며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영원한 승리자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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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 설교 -다시 듣고 싶은 은혜의 설교

 

 

종려 주일 설교


[마리아에게 왔다가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대 사람들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 몇몇 사람은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가서, 예수가 하신 일을 그들에게 알렸다. 그래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공의회를 소집하여 말하였다. "이 사람이 표징을 많이 행하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 사람을 그대로 두면 모두 그를 믿게 될 것이요, 그렇게 되면 로마 사람들이 와서 우리의 땅과 민족을 약탈할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들은 아무것도 모르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민족 전체가 망하지 않는 것이, 당신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소." 이 말은, 가야바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 해의 대제사장으로서, 예수가 민족을 위하여 죽으실 것을 예언한 것이니, 민족을 위할 뿐만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자녀를 한데 모아서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예언한 것이다. 그들은 그 날로부터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였다.] 

 

고난주일이며 종려주일인 오늘 아침, 주님의 전을 찾아 나온 모든 이들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소망이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지난 수요일은 춘분이었습니다. 춘분, 낮의 길이가 밤의 길이보다 길어지기 시작하는 절기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만 춘분은 자연계에 있어 가장 큰 변화가 일어나는 절기로 동양과 서양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춘분을 중요한 날로 여겨왔습니다. 겨우내 꽁꽁 얼었던 땅이 어느새 녹고 그 위로 새싹들이 쑥쑥 올라옵니다. 저 안에 무슨 생명력이 남아 있을까 싶어 보였던 메마른 나뭇가지 위에도 새순이 돋고 꽃들이 활짝활짝 피어납니다. 생명의 기적, 부활의 기적이 일어나는 절기가 바로 춘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을 기념하는 이 절기와, 생명이 새롭게 태어나는 춘분절기를 지내며 우리의 마음과 우리 사회에도 그런 참되고 아름다운 변화가 일어나길 소망해 봅니다.

 

● 예루살렘 입성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에 제자들과 더불어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최대의 명절로 그 어느 때보다도 예루살렘이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그해의 예루살렘은 유난히 붐비고 뜨거웠습니다. 이스라엘 대중 사이에 이번 유월절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오신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증언한 바 있었고,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수많은 기적을 일으키셨기에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자들은 이번 유월절 명절을 맞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게 되면 대중의 지지를 힘입어 이스라엘 전 사회에 큰 변화를 일으키실 것이라 믿었고, 그 변화는 자신들의 입지와 사회적 지위를 크게 높여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누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인가를 두고 다투기까지 했지요. 

예수님께서 성서의 예언처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자, 사람들은 구원자를 맞아들이는 예법으로 예수님을 맞았습니다. 큰 무리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다가 폈으며, 다른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았습니다. 그리고 앞에 서서 가는 무리와 뒤따라오는 무리가 외쳤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더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 마태복음 21장 10절에서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을 때에, 온 도시가 들떴다’(마 21:8-10)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결코 영광의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셨기에 제자들에게 세 번에 걸쳐 당신이 예루살렘에서 죽게 될 것을 예고하셨던 것이죠. 예수님은 사람들이 당신을 향해 열렬히 외치는 ‘호산나‘ 소리가 곧 ‘십자가에 못 박으라’라는 소리로 바뀔 것까지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그곳은 영광이 기다리는 자리 같았으나 죽음이 기다리던 곳이었습니다. 

 

● 예루살렘
예루살렘, 거룩한 하나님의 도성. 그 중심에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습니다. 헤롯에 의해 46년에 걸쳐 크고 웅장하게 지어진 성전, 비록 이스라엘이 로마의 식민지배하에 있었지만 아직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하심을 느끼게 해주던 곳,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곳곳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모여 제사를 통해 민족공동체성을 재확인할 수 있었던 곳. 그러나 그것은 예루살렘 성전의 겉모습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제사장을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은 순례자들을 대상으로 제물을 비싼 값에 팔았고 성전세금을 거두어 막대한 부를 쌓았으며 그 돈의 상당부분을 자기들의 비호세력인 식민지배자 로마에 갖다 바쳤습니다. 

“최고의 것이 부패하면 최악이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대제사장 무리는 이스라엘 최고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맡기신 자리를 옳게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식민지배하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위로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백성들의 돈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갈취해 자신들의 배를 불렸습니다. 그러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로마가 부여한 세금과 부역 이외에도 성전에 제물을 바쳐야만 했고 종교세를 내야만 했습니다. 그야말로 2중 3중의 고난으로 허리가 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 다음 날 바로 성전에 가셔서 제물을 파는 사람들의 의자와 돈을 바꾸어주는 사람들의 상을 둘러엎으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짐승들과 사람들을 모두 성전에서 내쫓으셨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불의하고 부패한 성전체제가 뒤집어져야 함을 표현한 것입니다. 

권력자 중에 자기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사람을 그냥 두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누가복음과 마가복음에 따르면 예루살렘의 제사장 무리는 그 순간부터 예수를 죽일 방도를 찾았습니다. (누가복음 19:47, 막 11:18)

 

●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이유
예루살렘은 예수님에게도 쉽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에 이르는 길 동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 차례나 예루살렘성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당신이 당할 고통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제자들을 준비시키기 위함이기도 했겠지만, 예수님 스스로에게도 고난을 준비하게 함은 아니었나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확신이 서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자주 말함으로써 자신을 확신시켜나가기도 하니까요. 

예수님께서는 소위 말하는 최후의 만찬 후에 제자들 몇 명과 함께 예루살렘 건너편에 있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러 가십니다. 마가복음은 그 장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셨다. 예수께서는 매우 놀라며 괴로워하기 시작하셨다. 그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마음이 근심에 싸여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머물러서 깨어 있어라.” (막14:33,34) 
‘매우 괴로워하다’. ‘근심에 싸여 죽을 지경이다’ 라는 표현은 왠지 예수님이 사용하시면 안 될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너무 연약하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만큼 그 고통이 크고 무거운 것이었다는 뜻이겠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아버지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세 번이나 기도하셨던 것이구요. 

기도 후 제자들과 이야기를 하고 계실 때,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장로들이 보낸 무리가 칼과 몽둥이를 들고 유다와 함께 찾아오게 되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붙잡혀 의회 앞에 끌려가 고난을 겪게 되십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적대자들이 우글거리는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걸까요? 굳이 그들과 정면으로 부딪히지 않으셨어도 되지 않았을까요? 오히려 그들과의 정면충돌을 피하고 갈릴리와 이방 땅으로 가셔서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좀 더 많은 기적을 행하시는 게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데 더 좋은 방법은 아니었을까요? 학교를 세워 더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고 당신의 말씀과 가르침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저술 작업에 힘쓰시는 게 더 나은 방법은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십자가를 지신다 해도 1,2년 더 미룰 수도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왜 꼭 그 때여야만 했던 것일까요?

 

● 양을 살리기 위해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이 전해주지 않는 예루살렘 입성 직전에 있었던 하나의 사건을 길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11장에 나오는 나사로를 살리신 이야기입니다. 장소는 베다니입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아주 가까운 마을입니다. 베다니는 예수님에게 좀 특별한 마을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마르다와 마리아, 나사로 남매가 살고 있었습니다.(11:5)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아프다는 말을 들으시고는 그곳으로 가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반대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가만두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죠. 그런데도 예수님은 끝내 베다니로 가셨고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다시 살려내셨습니다. 

모든 기적의 결과가 꼭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은 예수님의 적대자들의 두려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긴급대책회의(공의회)를 소집했습니다. 한 사람이 말합니다. “이 사람이 표징을 많이 행하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 사람을 그대로 두면 로마 사람들이 와서 우리의 땅과 민족을 약탈할 것입니다.” 그러자 대제사장 가야바가 말을 받습니다. “당신들은 아무것도 모르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 죽어서 민족 전체가 망하지 않는 것이, 당신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소.”

그들 논의의 결론은 한마디로 말해서 ‘예수를 죽이자’(11:53)였습니다. 그들은 크게 두 가지 잘못된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는, 자기 자신과 자기들이 속한 집단을 사회 전체와 동일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고방식은 생각보다 자주 만나게 되는 사고방식인데 무척 위험한 것입니다. 자기의 이익은 공동체 전체의 이익이요, 자기의 손해는 공동체 전체의 손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와 반대되는 의견을 가진 자는 공동체에서 제거해야 하는 불순분자로 생각합니다. 그야말로 자기가 ‘절대’가 되는 겁니다. 그들은 자신이 사회공동체의 여러 부분 중에 한 부분임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자신들의 무너짐이 오히려 공동체의 안정과 평안을 가져올 수도 있는 것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두 번째의 잘못된 생각은 자기들의 안정과 평안을 위해 그 누군가를 희생시킬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강요된 희생에 기반을 두고 유지되는 구조는 폭력적인 구조입니다. 자기가 살고자 남을 죽이는 구조는 악한 구조입니다. 또한, 그것을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구조는 악마적 구조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폭력적인 구조와의 충돌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는 그런 폭력적인 구조가 반대자를 처리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셨습니다. 대제사장 무리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한 시점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따르면 성전정화 사건 이후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이후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아예 성전정화 사건이 이 때 일어난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 일어난 일로 보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오신 목적이 나사로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든 나사로를 살리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려 작정하게 된다고 해도, 그래서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된다 하더라도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고 싶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 때문에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가신 것입니다. 

두 곳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 대책 없이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간 목자, 늑대와 같은 들짐승들이 자기에게 달려들 수도 있는 그 위험을 전혀 계산하지 않고 오직 잃어버린 한 마리만을 생각하며 온 땅을 헤매던 목자, 또 그 양 한 마리를 찾은 게 뭔 큰일이라고 사람들을 다 불러 모아 ‘나와 함께 기뻐해 달라’고 말하던 목자에 대한 예화가 떠오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있는 베다니로 가시기 전에 하셨던 말씀, “나는 선한 목자이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라는 말씀도 떠오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시기 위해 베다니가 있는 예루살렘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신 순간 그 예화와 그 말씀은 육신이 되었습니다. 

 

● 한 생명을 살리고자
여기서 주목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대제사장 무리의 방향성과 예수님의 방향성.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온 우주가 무장할 필요는 없다는 말도 있지만, 대제사장 무리는 예수 한 명을 죽이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동원했습니다. 하나님, 민족, 성전, 대중, 로마를 동원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죽이기 위해 동원한 하나님, 민족, 성전은 물론 올바른 하나님, 민족, 성전이 아니었지요. 그들이 겉으로 내세운 높고 숭고한 가치들의 이면에는 자기들의 잇속을 챙기고 자리를 지키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이권과 자리를 지키기 위해 어마어마한 무기들로 중무장하고 예수를 죽이러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그 중무장한 무리를 향해 나아가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권력화된 하나님도, 으리으리한 성전도, 민족을 대표할 권한도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고 물 위로 올라올 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참 좋아한다’라고 말씀해주신 하나님, 내 몸 하나를 하나님이 머무시는 성전으로 삼고 산다는 정신, 이스라엘 곳곳에서 자신을 메시아로 생각하며 따르는 가난한 민초들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치 연어가 강 상류에 새 생명을 낳기 위해 거칠고 험한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듯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베다니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결국, 대제사장 무리는 한 생명을 죽임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고, 예수님은 한 생명을 살림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오셨습니다. 

과연 우리의 삶은 어느 방향을 가리키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삶으로 보여주신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처럼 일체의 것을 뒤로하고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겉으로는 예수님을 말하지만 실상은 대제사장 무리를 따르고 있지는 않는지요?

얼마 전 <영재발굴단>이라는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9살 최주원이라는 어린이가 소개되었습니다. 주원이는 아인슈타인을 좋아합니다. 특히 특수상대성이론을 좋아합니다. 특수상대성이론은 속도가 빛보다 빨라지면 시간이 느려진다는 이론이고 실험을 통해서 증명된 바가 있는 이론입니다. 주원이는 블랙홀과 웜홀에도 관심이 많은데 웜홀은 영화 인터스텔라에서도 나온 바 있죠. 두 시공간이나 한 시공간의 두 곳을 잇는 좁은 통로를 의미합니다. 그 좁은 통로를 이동하는 비행체가 소위 말하는 타임머신이죠. 주원이는 이 타임머신에 엄청 관심이 많습니다. 9살짜리 주원이는 이 쉽지 않은 이론들을 줄줄 꿰고 있었습니다. 방송을 위해 찾아간 피디와 카메라 촬영기사를 앞에 세워두고 긴 강의를 하기도 했습니다. 주원이는 더 공부하고자 틈만 나면 책을 보고 영어사전을 찾아가며 영어논문들까지 보고 밤늦게까지 공부를 했습니다. 방송국 사람이 물었습니다. “주원이는 타임머신을 타고 뭘하고 싶어요?” 주원이는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세월호 침몰할 때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때로 돌아가 형, 누나들에게 저 배는 침몰하니까 타지 말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래서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좀 더 행복한 시간을 만들어주고 싶어요.” 

주원이가 5살 때 세월호 사건이 있었고 그때부터 주원이는 세월호 관련 뉴스를 보면서 굉장히 마음 아파했답니다. 주원이는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세월호의 형, 누나들을 구해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순수하면서도 바보 같아 보이는 열심, 한 생명을 살리고자 자기의 전부를 쏟아붓는 모습은 저를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고난주간, 온갖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나사로를 살리시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가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커다란 도전으로 서계십니다. ‘너 이곳에 올 수 있니?’, ‘너 또한 이곳에 서야 하지 않겠니?’ 물으시는 것만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나사로가 누구인지 모르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알려주셨습니다. 이 시대의 강도 만난 자가 우리의 나사로라고, 우리 가운데 있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가 우리의 나사로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는 혼자 감당할 수 아픔 속에서 절규하는 한 생명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그들의 아픔과 눈물을 외면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그 나사로들의 울음소리를 주님의 울음소리로 알아듣고 그들 곁으로 한 발 더 나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그들의 아픔과 고난을 품어 안아 줄 때, 그 아픔과 고난은 우리를 참된 생명에 이르게 해 줄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메마른 가지에서 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놀랍고 아름다운 변화일 것입니다. 이 변화의 춘분 절기와 고난과 부활의 절기를 지내며 우리의 삶에 그런 아름다운 변화가 일어나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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