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성탄절예배설교 (December 2018 Christmas Worship Preaching)

 

 

 
제목 : 기쁨의 성탄절
말씀 : 눅 2:8-14


요즘 우리 사는 세상에 너무 슬프고 아픈 소식이 많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베네수엘라에서는 사상 최대의 홍수가 나서 5만명 이상이 희생될 것 같다고 합니다. 필리핀에서는 여객선이 침몰하여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종교분쟁이 일어나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희생을 당했다고 합니다. 엊그제에는 영국에서 우리 대한항공 화물기가 폭발과 함께 추락하여 기장과 승무원등 4명이 죽었습니다. 21세기를 즐겁게 맞이하려는 우리들에게 이런 소식들은 불안과 두려움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슬프고 아픈 소식들 틈에서 21세기에 희망의 빛을 주시는 하나님의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8절에 보면 한 밤중에 밖에서 양을 치는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말하기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오늘은 20세기 마지막 성탄절입니다. 21세기를 닷새 앞둔 우리들에게 세상에서 들려오는 모든 험악하고 불안한 소식들을 다 잊게 하고 새로운 시대의 새 희망을 주시기 위해 구주 성탄의 기쁜 소식을 들려주고 계십니다. 이 시간 이곳에 모인 모든 분들에게 참 빛으로 오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새 천년의 희망이 넘치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구주 예수께서 탄생하신 소식"은 온 우주에 가장 큰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 탄생하셨을 때, 그 소식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기뻐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마리아, 목자들, 그리고 동방의 박사들.. 그 외에 예수님을 만난 모든 사람들은 기뻐 찬양했으며, 하늘의 천사들까지 기쁨의 찬양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성탄절이 되면 우리는 "merry christmas"라고 인사하는 것입니다. 오늘 20세기 마지막 성탄을 맞이하는 여러분들에게 첫 번째 성탄절의 기쁨이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성탄의 기쁨은 어떤 것입니까? 첫 번째 성탄을 맞이하던 사람들을 통해서 진정한 성탄의 기쁨이 어떤 것인지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 목자들의 기쁨


8절-11절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2000년 전 당시 구세주의 탄생의 첫 증인이 된 사람들은 목자들이었습니다.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께 경배하는 이 거룩한 일에 목자들이 그것도 첫 번째로 참여했다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엄청난 도전이 되는 말씀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사회적으로 가장 신뢰받지 못했던 계층의 하나가 목자였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신뢰받지 못했다기보다는 멸시받는 계층이었습니다. 그들은 직업 속성상 한 곳에 정착할 수 없는 떠돌이 삶을 살았기 때문에 종교적인 의무를 행할 수도 없었고, 또 이리저리 떠돌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입히기도 했던 사람들로 인식이 되어 법정에서 증인 노릇 할 권리마저 박탈당한 그렇게도 멸시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천사들을 보내어 구세주 탄생의 가장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엄청난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멸시받는 사람들을 택하셔서 존귀한 자리에 두시기를 좋아하십니다. 미련한 자들을 택하셔서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며 약한 자들을 택하셔서 강한 자를 놀라게 하십니다. 아무 것도 아닌 자들을 택하셔서 권세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제대로 된 권리 하나 없는 목자들을 택하셔서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가 탄생하신 것을 증거 하게 하신 것입니다. 온 세상이 영적 어둠에 잠겨 있었습니다. 얼마나 영적으로 어두웠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던 서기관들조차도 구세주의 오심을 예상조차 하지 못했겠습니다. 이렇게 세상은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소망 없는 세상 한 구석에서 멸시받고 천대받는 목자들에게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 계신 구세주를 집적 목격하게 함으로 세상의 모든 유력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 것입니다. 부끄러운 자들로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이러한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목자들의 기쁨은 무엇입니까? 11절을 봅시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아멘. 이 말씀은 "오늘(today)구주가 나셨으니"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약속의 성취됨입니다. 새로운 시대를 여는 소식입니다. 은혜가 임하는 소식입니다. 멸시가 사라지고 고통의 날이 끝나고 흑암이 물러가고 밝은 빛 속에서 새 삶이 시작된다는 복된 소식입니다. 이제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는 기쁨의 날이 왔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소식을 목자들이 들었고, 20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그들이 들은 그 기쁨의 좋은 소식을 귀로만 들은 것이 아니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마음으로 영접한 기쁨에 찬송과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이 기쁨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릅니다. 불편했던 모든 관계가 새롭게 될 때 얻는 기쁨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맛보고 하늘의 평안을 얻었을 때, 누리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삶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어떠한 염려나 근심이라도 초월할 수 있는 기쁨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기쁨의 일 번지입니다. 그분만 있으면 즐겁습니다. 그분만 생각하며 기쁨이 넘칩니다. 빼앗길 수 없는 기쁨 그분 안에서 샘솟는 기쁨이 끊어지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 안에서 누리는 특권이요 영광입니다. 구유에 누인 아기를 우리의 구세주로 주인으로 모실 때, 우리들에게도 목자들과 동일한 기쁨이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2. 마리아의 기쁨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실 때, 가장 고통스럽고 힘들었던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였을 것입니다. 그는 요셉이라고 하는 청년과 결혼을 약속한 여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정혼을 하였다는 것은 함께 살지는 않지만 완전한 부부가 되기로 약속된 사이이기 때문에 서로에게 부정행위가 드러나면 율법에 따라 돌로 쳐서 죽이는 무서운 형벌이 가해지게 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마리아에게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좋은 소식을 전하는 천사입니다. 그런데 가브리엘 천사가 하는 말이 마리아가 하나님의 성령으로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가 바로 예수라고 했습니다. 처녀에게 이 소식은 좋은 소식입니까? 나쁜 소식입니까? 분명히 나쁜 소식입니다. 지금 당장에 보기에는 엄청난 비극의 일이지만 하나님의 기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브리엘이 온 것입니다. 그러면 마리아의 기쁨은 어떤 것입니까?


①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의 기쁨입니다. 누가복음 1:30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하나님의 선택으로 전개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갈릴리 나사렛에 살고 있는 한 이름 없는 처녀를 선택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도 똑똑한 사람이 많았을 텐데, 왜 하필이면 하나님께서 갈릴리의 작은 동네 나사렛에 천사를 보내셨는지 우리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믿음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기 위해 한 여자를 선택하셨는데 그 여인이 바로 마리아였습니다. 그리고 천사가 그를 향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여"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리아의 기쁨인 것입니다. 이 일로 모진 수모와 멸시를 받을 것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 적인 선택의 은혜가 주어졌기 때문에 마리아는 큰 기쁨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바로 이 은혜를 얻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진노하시거나 그냥 모른 척하고 지나칠 수 있었는데, 원수 마귀가 내 마음을 혼미케 하여 복음을 듣지 못할 수도 있었는데, 어쩌다가 나에게까지 복음이 전해지고 또 어떻게 내 마음이 예수님을 믿을 마음이 생겼는지, 생각만 해도 감사하고 기쁜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엄청난 기쁨을 소유한 백성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②마리아가 기뻐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라고 하는 말씀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큰 축복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많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은혜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마리아와 함께 하신다고 선언하여 주신 것입니다. 소망이나 바람이 아니라 지금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에게 야곱에게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라고 말씀하신 하나님, 그 약속의 말씀이 있었기에 그들의 생애가 힘들고 고통스러운 역경 속에서도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는 그 엄청난 과업을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함께 하심" 때문이었습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있었던 비밀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확신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이 지금 마리아에게 함께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이 마리아가 그 힘든 상황에서도 찬송을 부를 수 있었던 비밀이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기뻐할 수 있었던 비밀인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은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는 뜻입니다. 오늘 이 시간 마리아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사람의 모양으로 오신 것입니다. 나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오늘 왜 우리에게 성탄절이 기쁨의 절기입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우리를 선택하여 구원하셨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이 믿음 때문에 여러분과 나의 삶에 참 기쁨이 넘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동방 박사들의 기쁨


예수님의 탄생을 목격하고 경배한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동방의 박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오늘의 페르시아(이란)아나 아니면 인도 같은 이방 나라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천체와 우주를 연구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들은 하늘의 이상한 기운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하늘에 큰 빛 하나가 나타나 움직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분명히 만왕의 왕이 나실 징조라고 깨닫고 왕을 만나면 바치려고 몰약과 황금과 유향을 선물로 준비하고 급히 그 별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 별을 따라 베들레헴의 한 마굿간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한 아이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것을 보게 되었으니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의 기쁨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1장 10-11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집에 들어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 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동방박사들의 기쁨은 참 빛을 발견한 기쁨이었습니다. 어둡고 암울한 세상, 당시 로마의 거대한 세력이 마구 세상을 짓밟고 있어 로마에 식민지가 된 나라마다 배고픔과 가난으로 힘겨운 삶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비단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고대 근동지역이 모두 그랬습니다. 그들은 희망을 보기를 원했습니다. 암울한 역사가 영원히 지속되지 않으리라는 기대를 하면서도 어디에서 그 희망의 빛을 찾아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바로 동방의 박사들이 그 희망의 빛을 찾은 것입니다. 그가 바로 온 인류의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참 빛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은 1장 9절부터 읽겠습니다.


"(9)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10)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참 빛 곧 세상에 비추는 빛이 있었으니 그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희망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이 어둡고 칙칙한 세상을 밝고 아름답게 열어 가실 영원한 희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생명과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최고의 기쁨이요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방의 박사들은 이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세상의 정부도 로마도 희망이 없으나 온 세상을 비추는 큰 빛을 따라 달려와 만난 아기 예수가 희망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들의 보화를 드려 왕 되심을 천하에 선포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참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십시오. 그 생명의 주님,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이제껏 세상에서 누려보지 못한 엄청난 희망이 열려질 것이며, 동시에 하늘의 기쁨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끝으로 그러면 여러분의 기쁨은 무엇입니까? 목자들과 마리아와 동방박사들, 그들이 아기 예수님을 만남으로 얻은 그 기쁨이 저와 여러분의 삶에 늘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그야말로 기쁜 성탄절입니다. 이 기쁨이 영원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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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를 통해 성숙해가는 크리스천 ( 주 안에서 안식을 누리라)

 

 


찬송 : '즐겁게 안식할 날' 43장(통 57)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출애굽기 20장 8∼11절
 
말씀 :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은 어떻게 다를까요. 기본적으로 구약시대처럼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구약의 율법을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구약을 해석할 때 우리는 항상 예수님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봐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을 기념해 주일로 지키게 된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을 그대로 따를 필요는 없지만 그 율법의 정신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유효합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그 정신은 강화됐습니다. 예를 들어 구약율법의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을 지키려면 사람을 실제로 죽이지만 않으면 됐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신 이후에는 마음으로 미워하는 것까지 금지됐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이 율법을 폐기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성경을 보면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에 십계명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똑같이 십계명을 말하지만 약간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출애굽기에서는 ‘하나님이 창조사역을 마치시고 7일째 쉬었기 때문에 너희들도 쉬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쉬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지은 모든 것을 감상하며 즐기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제정하신 안식일은 영원한 안식일이지만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면서 이 안식이 깨어져 버립니다. 잃어버린 안식은 마지막 날에 다시금 회복될 것입니다.

그 안식이 회복될 때까지 일주일에 한 번 그 영원한 안식을 조금이라도 맛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출애굽기에서 말하는 안식일이란 창조에 대한 기념일입니다.

 

반면에 신명기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킨 것을 기념하는 의미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은 그 백성을 구원하시고 참 자유와 안식을 주셨습니다. 그것을 기념하는 것이 안식일의 의미였습니다. 출애굽을 통한 구원은 곧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직결됩니다. 

 

이렇게 본다면 안식일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신 창조에 대한 기념일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에 대한 기념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안식일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즐기면서 쉼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에 감사하며 진정한 쉼을 누리지 못하면 안식일을 지켰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안식일에 또 우리는 죄와 사망에 얽매여 있던 죄인들을 해방시키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주일은 6일간 하던 모든 일을 중단하고 쉬어야 합니다. 그냥 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을 즐거워하면서 보내야 합니다. 이 안식일에 참 자유와 평안을 얻고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제정하신 주일에 참 안식과 기쁨을 누리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분주한 일상 때문에 예배를 소홀히 하는 일이 없게 하시고, 주일을 보낼 때마다 영원한 안식이 있는 천국을 소망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기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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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첫주 주일오후예배설교 (드보라의 찬양)

 

 

 
주일오후설교  


제목 : 드보라의 찬양

말씀 : 삿5:1~9

하나님을 아는 자는 찬양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과 은혜, 그 위대하신 능력과 지혜와 위엄, 그 거룩하시고 영화로우심, 선하심과 의로우심, 구원하심을 기억할 때 어찌 찬양 안하랴! 오늘도 여선지 드보라를 비롯한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맛보고 감사와 영광의 찬양을 드리는 장면.

드보라는 이스라엘 제4대 사사로 B.C. 1200년경에 약 40년간 사사로 활동. 그의 직전 사사는 에훗이었는데 에훗이 사사로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는 어느 정도 하나님을 따르다가 그가 죽고 곧바로 사사가 세워지지 않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또다시 이방신을 섬기고 악을 행함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나안왕 야빈의 손에 팖으로 이십년 동안 학대받음.(삿4:1~3)

그때서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또다시 하나님께 부르짖고 이에 응답하셔서 에브라임 산지에 살고 있는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 드보라를 사사로 세우시고 그녀를 도와 이스라엘을 야빈의 손에 건져주시고 40년동안 평안을 주심.

오늘 말씀은 이와같이 20년동안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가나안 왕 야빈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물리치고 감사의 찬양을 드리는 장면. 이들의 찬양의 내용을 살펴보자.

1.부르짖음을 들으심을 찬양함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스라엘이 끊임없이 거역했지만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여호와 하나님을 찾아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호소하고 간절히 타원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불상히 여겨 다시 구원해 주셨다는 것이다. 먼저 삿4:3절을 보자. “야빈 왕은 철 병거 구백 대가 있어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했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가나안 왕 야빈에게 극심한 압제를 당하자 하나님 앞에 엎드린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나? 드보라를 세워 회개운동을 하게 하신 다음에 이스라엘을 도왔던 것이다. 삿4:15절을 보자. “여호와께서 바락 앞에서 시스라와 그의 모든 병거와 그의 온 군대를 칼날로 혼란에 빠지게 하시매 시스라가 병거에서 내려 걸어서 도망한지라.”

참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그렇게 거듭해서 부족하고 연약하고 죄된 모습을 보였던 이스라엘이었건만 또다시 불쌍히 여겨서 그들을 구원해 주신 것이다. 사실 우리들도 별로 다를 게 없다. 거듭 불순종하고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무릎 꿇을 때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찾아와 구원해 주시는 것이다. 만약 이런 하나님의 계속적인 은혜가 없다면 천국의 골인지점을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므로 더욱 겸손히 엎드려 회개하며 이토록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 그래서 결국 구원의 길로 이끌어 가시는 주님께 감사와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드리자.

2.하나님의 도우심을 찬양함

하나님은 단지 긍휼히 여기실 뿐만아니라 우리를 구체적으로 도와주신다. 드보라의 승리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이었다.

삿4:7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의 병거들과 그의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 하셨느니라.” 기손강은 와디 즉 우기에만 물이 흐르는 강인데 지금은 건기이다. 그래서 시스라군대의 철병거를 이쪽으로 끌어들여 폭우를 내림. 삿4:15 “여호와께서 바락 앞에서 시스라와 그의 모든 병거와 그의 온 군대를 칼날로 혼란에 빠지게 하시매 시스라가 병거에서 내려 걸어서 도망한지라.” 병거를 칼날로 쳤다. 시스라가 걸어서 도망갔다. 즉 병거가 꼼짝 못했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 4절도 보라. “여호와여 주께서 세일에서부터 나오시고 에돔 들에서부터 진행하실 때에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물을 내리고 구름도 물을 내렸나이다.” 즉 번개와 우레를 동반한 폭우가 쏟아졌다는 것이다. 이때는 건기라 비가 전혀 오지 않을 때인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도우시기 위하여 폭우를 보내신 것이다.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하였던 것. 그래서 그렇게 구체적으로 도우셔서 승리케 하신 하나님을 찬양한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체적, 현실적으로 도우신다. 우리의 죄와 무지를 하나님께 고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면 우리의 삶속에 필요한 것들로 채워주신다. 영적으로 천국으로 인도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막연히 추상적이고 내적인 평안이나 은혜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 실제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시며, 약하고 부족하고 힘든 문제들을 해결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승리의 기쁨을 누리며 살게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병든 자를 고치시고, 오병이어로 오천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이시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귀먹은 자를 듣게 하시는 등 인간의 현실적인 필요로도 채워주셨던 것이다. 그것이 본질적인 목적은 아니지만 주님 앞에 회개하고 주님을 향해 부르짖고 주님과 동행할 때에 이런 현실적인 것들로도 채워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더욱 주를 의지하고 바라보고 주님과 동행할 때에 지금 여기서 몸담고 사는 동안에도 주님의 구체적이고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도우심 가운데 모든 어렵고 힘든 문제들을 해결 받고 현실적, 실제적 삶에서도 더욱 윤택함을 누리며 더욱 감사 찬양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인생이 되자.

3.백성들이 즐거이 헌신하게 된 것을 찬양함

그렇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만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찬양하고 있다. 그래서 2절에서는 “이스라엘의 영솔자들이 영솔하였고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여호와를 찬송하라.”고 하였고, 9절에서는 “내 마음이 이스라엘의 방백을 사모함은 그들이 백성 중에서 즐거이 헌신하였음이니 여호와를 찬송하라.”고 하였다.

영솔자들이 영솔. 백성들이 즐거이 헌신. 그러므로 찬양하라. 즉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적들을 물리치는 일에 지도자들은 지도자들대로, 백성들은 백성들대로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다. 이런 온 백성들이 감사와 기쁨으로 참여하게 된 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도 깊이 묵상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분명히 도우신다. 역사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만히 앉아있는 자를 돕지는 않으신다. 제 마음대로 살아가는 자를 구원하지는 않으신다. 구원을 향하여 힘써 나가야 한다. 우리가 싸울 것은 싸워야 한다. 우리가 믿음으로 해야 할 일은 해야 한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을 때, 모세가 믿음으로 지팡이를 내어 밀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으로 요단강에 들어갔을 때, 나아만 장군이 믿음으로 요단강에서 씻었을 때, 기생라합이 믿음으로 정탐꾼들을 숨겨 주었을 때,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배 오른편에 그물을 내렸을 때, 12년을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 그 옷자락에 손을 대었을 때 역사가 일어났던 것이다.

드보라와 바락은 이와같이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참여하게 된 것에 대하여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그 참여할 수 있게 된 것도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거기에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세상 어떤 것보다도 영광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더욱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자.

4.경제 및 일상생활을 회복시켜 주심을 찬양함

드보라와 바락이 하나님을 찬양한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이 그렇게 하나님께 회개하고 부르짖었을 때 찾아와 구원해 주심으로 그들의 영성이 회복되고 일상생활이 회복되었을 뿐 만아니라 경제적으로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나안 왕 야빈의 압제를 받을 때 얼마나 피폐해져 있었는지 오늘 6,7절에서는 말씀한다. “아낫의 아들 삼갈의 날에 또는 야엘의 날에는 대로가 비었고 길의 행인들은 오솔길로 다녔도다. / 이스라엘에는 마을 사람들이 그쳤으니 나 드보라가 일어나 이스라엘의 어머니가 되기까지 그쳤도다.”

대로가 비었다는 것은 무역이 그쳤다는 것을 말한다. 당시 대상들은 여러 마리의 낙타를 끌고 다니며 여러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다녔으므로 대로가 필요했다. 그래서 대로가 비었다는 것은 그들이 사라졌다. 그래서 경제가 피폐해졌다는 말이다. 행인들은 오솔길로 다녔다는 그 만큼 압제가 심했다는 것이다. 공연히 대로로 다니다가 압제자들의 눈에 띄어 봉변을 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오솔길로 숨어 다녔다는 말이다. 마을 사람들이 그쳤다는 것은 사람들이 먹고 살기 힘들어 촌락을 떠났다는 말이다.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길러봐야 압제자들이 빼앗아가므로 이를 포기하고 유리방황하는 자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언제까지였느냐? 드보라가 일어나기 전까지 였다. 즉 드보라가 일어나서 회개운동을 벌이고 이방신을 버리고 악을 제했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도우셔서 압제자에게서 건져주시고 일상생활이나 경제생활도 회복되게 되었다는 말씀이다. 이 사실을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일이 있다. 우리의 삶에 진정한 회복은 무엇으로부터 시작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다. 영성이 회복되어야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한다. 그래야 일상생활이 회복되고, 경제가 회복되고, 정치가 회복된다. 온갖 우상을 섬기고 제멋대로 행동하고 물질과 지식과 과학을 우상처럼 받들면 뭔가 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결국은 망한다. 결국은 무너진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회복되어야 승리한다.

내가 예언하지만 만약 저 서유럽이나 미국이 계속해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지 않고 인본주의, 물질주의에 빠져 있으면 반드시 망한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정말 회개하고 그 잘난 인본주의와 과학지상주의, 물질지상주의를 버리고 순수한 말씀으로 돌아가 하나님 앞에 엎드린다면 계속해서 번영한다. 우리 개인도 동일하고 우리나라도 동일하다. 분명한 것은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방법대로 진실하게 정직하게 성실하게 열심히 살아갈 때에 그 영혼과 그 가정이 복되고 형통하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고, 역사가 증명한 사실이고, 너무나 당위적인 일이다.

오늘 이 귀한 말씀을 묵상하며 우리 모두는 정말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오지 못한 것이 있으면 철저하게 회개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음으로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과 도우심과 은총을 덧입어 우리 영혼이 온전히 회복되고 일상생활이 회복되고 경제적으로 회복되어 더욱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하며 영광돌리는 삶을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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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장례식 고 서윤희 성도 장례예배  용인추모공원(2018년 12월)

 

 

예식사

집례자 : 故 서윤희 성도님의 장례예배를 시작하겠습니다. 순서지를 따라서 예배에 참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려울 때마다 힘을 주시는 하나님! 주님의 품으로 출발한 서희전 성도님의 영혼 위에 큰 은총을 베풀어 주시고, 서희전 성도님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는 분들을 위로하여 주소서.

회 중 : 하나님, 우리에게 영원한 소망을 주소서. 아멘.

 

찬송 / 370장, 주 안에 있는 나에게 1,2절

      1.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2.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 되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복음서의 말씀 / 누가복음 12장 22절-26절

                (눅 12:22)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고,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눅 12:23) 목숨은 음식보다 더 소중하고, 몸은 옷보다 더 소중하다.

               (눅 12:24) 까마귀를 생각해 보아라. 까마귀는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또 그들에게는 곳간이나 창고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먹여주신다. 너희는 새보다 훨씬 더 귀하지 않으냐?

                (눅 12:25) 너희 가운데서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제 수명을 한 순간인들 늘일 수 있느냐?

                (눅 12:26) 너희가 지극히 작은 일도 못하면서, 어찌하여 다른 일들을 걱정하느냐?”

 

말씀의 증언 / 새로운 창조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인간은 ‘죽음으로 향하는 존재’(Sein-zum-Tode)라고 부릅니다. “현존재는 세계 속에 존재하자마자 죽음을 떠맡는 하나의 존재양식이 된다.”(존재와 시간, 317쪽) 죽음 앞에서 걱정이 시작됩니다. 소크라테스(Σωκράτης)는 죽음 앞에서 걱정을 이겼습니다. “몸(soma)은 몸대로 혼에서 떨어져 나와 그것 자체로만 있게 되고, 혼(psyche)은 혼대로 몸에서 떨어져 나와 그것 자체로만 있는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게지? 죽음이란 이것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겠지?”(파이돈, Φαίδων, 64c, 「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 박종현 역주, 288쪽) 소크라테스는 혼의 불멸을 확신하면서 죽음의 걱정을 이겨냈습니다. 그러나 혼은 죽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는 인간을 영<스피릿(spirit), 프뉴마(πνεῦμα), 루아흐(רוח)>, 혼<소울(soul), 프쉬케(ψυχὴ), 네페쉬(נפש)>, 몸<바디(body), 소마(σῶμα), 게셈(גשמ)>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여러분의 영과 혼과 몸을 흠이 없이 완전하게 지켜 주시기를 빕니다.>(데살로니가전서 5.23) 이 세 가지는 구분은 되지만, 분리는 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어떤 행동도 영혼과 육체로 깨끗이 나누어질 수 없다. 양자는 구분되지만 결코 나누어질 수 없으며, 하나의 통일체, 곧 전체로서의 인간을 형성한다.”(죽음의 신학, 김균진, 289쪽) 사람의 몸과 혼과 영을 분리할 수 없다면, 인간의 죽음은 전 존재의 죽음입니다. 혼의 불멸이 아닙니다. 혼도 죽습니다. 혼이 죽지 않고 살아 있으면, 부활이 불가능해집니다. 예수께서 죽음의 걱정을 이기는 다른 차원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고,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22절) 목숨은 <프쉬케(ψυχῇ), soul, life>, 혼입니다. 목숨을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몸은 <소마티(σώματι), body>, 몸을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목숨과 몸은 하나님의 소관입니다.(24절) 걱정이 수명을 늘일 수 없습니다.(25절) 생명의 길이는 나의 소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목숨과 몸을 걱정하는 것은 감히 하나님의 소관을 걱정하는 것입니다.(26절) 하나님의 소관 안에 있는 가장 결정적인 것이 부활입니다. 죽음은 전 존재의 죽음이고, 부활은 전 존재의 부활입니다. “엘러트에 의하면, 부활은 죽음 후에도 남아있던 인간의 어떤 부분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완전한 ‘새 창조’이다.”(죽음의 신학, 김균진, 344쪽) 부활은 새로운 존재로의 새로운 창조입니다. “예수는 자기 안에 있는 어떤 불멸의 것으로 인하여 부활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새 창조의 능력으로 부활하였다. 그러므로 부활은 하나님의 독자적 은혜의 행위이며 ‘기적’이다.”(죽음의 신학, 김균진, 347쪽) 사람들이 부활한 예수의 몸이 보이지 않는다고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고린도전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늘에 속한 몸도 있고, 땅에 속한 몸도 있습니다.>(고린도전서 15.40) 부활은 땅에 속한 몸으로 환생하거나, 재생하는 것이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늘에 속한 몸으로 완전히 새롭게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나팔이 울릴 때에, 눈 깜박할 사이에, 홀연히 그렇게 될 것입니다. 나팔소리가 나면, 죽은 사람은 썩어 없어지지 않을 몸으로 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5.52) 서희전 성도님은 1943년 2월 5일에 출생하셨습니다. 1970년 9월에 미국으로 건너가 홍인숙 선생님과 함께 뉴욕에 한국 여성들을 위한 퀸즈YWCA를 세우셨습니다. 평생을 약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은퇴하신 이후에 퀸즈YWCA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 2014년 9월에 귀국하셔서 신앙생활과 봉사활동을 하시면서 아름답게 사시다가 지난 2018년 11월 1일, 밤 10시에 소천하셨습니다. 예수의 생명을 모시고, 예수의 말씀을 따라서 사신 서희전 성도님은 마지막 나팔이 울릴 때에, 썩어 없어지지 않을 몸으로,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부활할 것입니다. 아름다운 소녀의 모습으로 사신 서희전 성도님, 예쁜 우리 윤희 선생님, 주님의 품으로 잘 가세요. 선생님, 사랑합니다. 선생님, 축복합니다.

 

주님께 맡김

           집례자 : 자비하신 주님! 우리가 주님께 故서윤희 성도님을 맡깁니다. 다시는 죽음과 고통과 애통이 없는,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이르도록 받아주소서.

회 중 : 아멘.

 

찬송 / 370장, 주 안에 있는 나에게 3,4절

3. 내 주는 자비하셔서 늘 함께 계시고 / 내 궁핍함을 아시고 늘 채워주시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 내 앞 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4. 내 주와 맺은 언약은 영 불변하시니 / 그 나라 가기까지는 늘 보호하시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 내 앞 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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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대강절 설교 그날을 바라보며

 

 

 

말씀:이사야 35:1-10

제목:그날을 바라보며

영국의 극작가 사무엘 베켓은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작품으로 1969년도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이 책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두 사람이 황량한 길가에서 <고도>라고 하는 미지의 인물이 나타나 그들을 구원해줄 것을 막연히 기다리면서 행하고 있는 여러 가지 삶의 모습들을 그리고 있는 책입니다.

그들은 고도가 나타나면 그들을 구원하여 무언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해 줄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무작정 고도를 기다리면서 서로 다투기도 하고, 아무런 의미도 없이 떠들어대기도 하고, 혹은 소리를 지르며 노래를 불러보기도 하는 등의 별 의미도 가치도 없는 행동을 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때로는 절규하기도 하고, 때로는 희희낙낙하기도 하고, 때로는 절망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다시 희망을 갖기도 하면서 그저 무한정 고도를 기다리는 것으로 이 책의 이야기는 아주 허무하게 종결을 짓고 있습니다.

무슨 결론도 없고 마치 쓰다가 만 책처럼 그렇게 끝을 맺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책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것은 오늘날 방황하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을 아주 예리하게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는 참된 인생의 목표나 기다림도 없이 그저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으로 세월을 보내는, 그것이 마치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길인 것처럼, 그것이 마치 인생의 목적인양 생각하며 무의미하게 살아가고 있는 인생의 모습을 고발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현대인들은 인생의 진정한 목표와 소망을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궁극적으로 가야할 영원한 고향을 망각한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저 먹고 마시고 소유하고 즐기면서 육신의 정욕을 만족시키는 것이 마치 인생의 의미요, 인생의 가치로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의 모습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기쁨도 될 수 없고, 참된 만족과 가치를 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것은 진정한 소망이 될 수 없고, 기다려야할 대상도 될 수 없습니다. 도리어 허무와 좌절과 고독만을 가져다 줄 뿐입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영원한 절망과 고통만을 안겨 줄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영원한 기쁨과 만족과 은혜를 주실 분은 누구십니까? 정녕 우리가 기다려야 할 대상은 누구입니까? 정녕 우리 인류가 소망을 걸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말할것도 없이 성육신하셔서 이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온 인류의 유일한 구세주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기쁨이며 소망이며 기다려야 할 유일한 분이십니다.

 

1.갈림길에 서 있는 인생

여러분,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오늘 말씀에서는 두 개의 세상을 대비시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광야와 같은 세상입니다. 식물도 동물도 제대로 살 수 없는, 설령 산다고 해도 온갖 고초속에 살아가야 할 그런 험하고 거친 세상입니다. 소경과 귀머거리와 저는 자들이 있을 수 밖에 없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세상입니다. 우리를 넘어뜨리고 상처를 주고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그런 사나운 세상이요, 소망이 없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것과 정 반대의 세상입니다. 그야말로 낙원과 같은 세상입니다. 광야와 사막 위에 샘물이 솟아나서 백합화가 무성하게 피어나고, 온갖 종류의 풀과 꽃들이 만발한 샤론평원처럼 아름다움과 향기가 넘치는 그러한 세상입니다. 저는 자는 일어나고, 귀머거리의 귀가 열리고, 소경의 눈이 열려서 누구하나 소외당하거나 고통 당하는 사람이 없이 함께 은혜와 기쁨을 누리는 그런 세상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분명 기억해야 합니다. 이 두 개의 상이한 세상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직시해야 합니다. 이러한 두 개의 상이한 세상이 다만 우리의 상상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갓 이상향에 지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세상이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약속된 세상이며, 우리를 위해서 예비된 그런 세상이라는 것을 우리는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사람들이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누리고 있든 누리고 있지 못하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지금도 이 두 개의 세상은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 두 개의 세상중 어느 한쪽에 속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광야와 같은 세상속에서 험하고 절망적이고 영원한 고통의 삶을 살아 갈것이냐 아니면 낙원과 같은 세상속에서 영원한 영광과 은혜의 삶을 누릴 것이냐 우리는 이 두가지를 선택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물론 누가 광야의 삶을 원하겠습니까? 누가 영원한 고통과 절망의 삶을 원하겠습니까? 누가 낙원의 삶을 바라지 않겠습니까? 누가 영원한 행복과 은혜의 삶을 원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하면 이 광야의 삶에서 해방되어, 이 절망과 무의미의 삶에서 벗어나서 영원한 기쁨과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가 있겠습니까? 고도를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그저 적당히 먹고 마시고 즐기는 가운데 거기에 진정한 행복과 은혜의 삶이 있겠습니까?

거기에 대한 해답은 오늘 본문의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크게 두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2.인간을 찾아오신 하나님

먼저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구원해 주실 그때에만 진정한 은혜와 행복의 삶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4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는 굳세게 하라, 두려워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수하시며 보복하여 주실 것이라 그가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는 말씀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바벨론 포로와 같은 세상속에서 좌절과 두려움과 참된 평강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인생에게 주님이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오셔서 어둠의 세력들을 물리쳐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좌절하고 고통스럽고 근심걱정하게 하는 모든 사단의 세력을 물리쳐주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소경의 눈이 열리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저는 자는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를 고통스럽게하는 모든 것이 물러가고 우리는 진정한 은혜와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는 우주 만물의 주관자이시며,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만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외에는 다른 어느 누구도 해결할 자격도 능력도 없는 것입니다. 오직 천지의 주인이신 하나님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땅에 오신 것입니다.

인간의 불행의 근원인 죄와 사단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주시기 위하여, 그리하여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우리를 건져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 오신 것입니다.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사망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안에 있는 자에게 진정한 생명과 평강과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먼저 이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잊지 말고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이 대강절넷째주일을 보내면서, 성탄절을 준비하면서, 그리고 이제 성찬식과 세례식에 참여하면서 먼저 이천년전에 이땅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끊임없이 거역하고 불순종하고 어리석고 미련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은혜를 주시려고 기쁨을 주시려고 변함없이 찾아오시는 주님께 감사드리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찾아오셨을 때 비로소 구원의 길이 열리고, 은혜의 길이 열리고, 낙원으로 향하는 통로가 열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더욱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주님을 영접해야 할 인간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찾아오셨다는 사실과 더불어 우리가 진정한 은혜와 기쁨과 영광의 삶을 살기 위하여 또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셔서 우리를 찾아오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조건적으로 베풀어주신 은혜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해 놓으신 구원의 길이요, 생명의 길입니다.

그러나 그것과 더불어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을 우리는 어떻게 영접하느냐하는 문제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다리를 만들어 주셨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그 다리를 건너가지 않으면 그 다리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진수성찬을 차려놓았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먹지 않으면 아무리 풍성한 진수성찬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십시다. 8절 말씀입니다. “거기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지 못한 자는 지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된 것이라.” 무슨 말씀입니까? 광야와 같은 세상에 대로를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거룩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거룩한 길을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그 영광의 나라에서, 그 낙원과 같은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길을 누가 갈 수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누가 그 길을 통과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누구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깨끗지 못한자는 지나가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만이 그 길을 통과할 수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덧입어서 죄사함의 은총을 입은 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씻음을 받고 그래서 죄로부터 해방되어 깨끗하게 되어 질때에 우리는 그 거룩한 길을 건너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대로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가 영원한 영광과 기쁨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의 행동만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결단만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찾아오셔서 유일한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영접하고 그분을 믿음으로 그분의 보혈로 깨끗함을 받고 구속함을 받을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다만 그분을 진실로 영접하고 믿고 따르기만 한다면 그 거룩한 길이, 그 영광의 나라가 우리의 것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얼마나 감격스런 일입니까?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무지로 말미암아, 어둠으로 말미암아, 완고함과 강퍅함과 고집스러움과 교만함으로 말미암아 이것을 모르는채 광야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알았습니다.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주님을 믿고 죄 사함의 은총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영원한 영광과 기쁨의 나라를 맛보며 또한 그 나라를 바라보며 살고 있습니다.

이 어찌 감사하지 않으수 있으며, 이 어찌 영광돌리지 않을 수 있으며, 이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으며, 이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오셨습니다. 이천년전에 이땅에 오셨습니다. 오셔서 자유와 평화와 기쁨과 생명을 주셨습니다.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향한 통로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지금도 변함없이 우리의 심령속에 가정속에 교회속에 끊임없이 찾아오셔서 기쁨과 은혜와 생명을 주시고 계십니다.

물론 아직은 영광의 나라가 완성된 것이 아니기에 힘이 들때도 있을 것입니다. 고통의 순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조차도 영광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하실 것입니다.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게 영원한 기쁨과 안식과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그때에는 아무도 우리를 괴롭게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직 은혜만이 안식만이 영원한 영광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대강절 넷째주일을 보내면서 이러한 주님의 은혜를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이 광야에 같은 세상에서, 죄와 사단의 권세에서 건지시어 참된 생명과 기쁨과 은혜가운데 살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주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오직 주님께 소망을 두고 그 나라를 바라보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 영광의 나라를 오늘 여기서 맛보며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려드리는 삶을 살아가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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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받는 기도 Prayer to answer

 

 

성도가 기도하지 못하는 것은 영적인 가난을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기도의 응답의 체험이 없기 때문이다. 기도의 응답이 없는 것은 대부분 기도 해 놓고 응답이 자기 방식대로 되어지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며 또한 무엇을 구했는지 기도 해놓고 잊어버리기 때문에 사소한 응답은 체험을 못한다.

 

또한 기도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세상 안일에 빠져 영적인 일에 무관심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 것을 가진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신앙을 좀먹는 무서운 병인 것을 알아야 한다.

 

주님은 무관심한 신앙을 책하셨다.

[눅 7:31-32]또 이르시되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 32)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영적인 가난을 모르는 라오데기에 교회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계 3:14-17]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15)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17)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

 

라오데기에 교회에 하신 말씀이 토하여 내 치리라 했다.

그 이유는 신앙이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기 때문이다. 신앙이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한 것은 영적인 가난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라오데기야 교회가 우상 숭배하거나 간음하거나 살인하거나 하지 않았다. 세상 안일에 빠져 영적인 무관심이었다. 이것을 회개하지 않을 때 토하여 내 치신다고 했다.

 

영적인 가난을 모르는 라오데기아 교회에게 하신 말씀을 깨달아야 한다.

기도는 신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기도는 나의 영력 테스트이다. 기도하는 만큼 나의 영력이 있다.

 

기도는 영적 노동이다. 그러기에 힘써 기도하여야 한다. 기도가 저절로 되어지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 몰론 내가 힘을 쓰면 성령께서 도우신다. 기도는 보이지 않는 믿음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나의 믿음과 비례한다.

 

1. 먼저 마음을 비워야 한다.

 

묵은 땅을 기경하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라고 했다.

(렘4:2-4)진실과 공평과 정의로 여호와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면 열방이 나로 인하여 스스로 복을 빌며 나로 인하여 자랑하리라 나 여호와가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이같이 이르노라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 속에 파종하지 말라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기도하는 손이 피가 가득하기에 눈을 가리운다고 했다.

(사1:15)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묵을 땅을 기경하라고 하였다. 기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마음을 헤아려 행하라고 하였다.

 

마음에 가죽을 벗기고 악업을 버리고 하였다. 네가 손을 펼 때에 눈을 가리운다고 하셨다. 네 손이 피가 가득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스스로 손을 씻으라고 하였다.

 

위의 말씀은 철저하고 진실하게 회개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회개하지 않는 자는 들어주고 싶어도 줄 수 없다고 하신다. 무엇을 구하기 전에 먼저 회개가 선행되어야 한다. 지난날의 죄악을 진실하게 숨김없이 고백하여야 한다.

 

그리고 행실을 고치겠다는 철저한 약속이 있어야 한다. 범죄하면 징벌도 감당하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한다. 죄악이 담겨 있는 마음에 거룩한 하나님의 은혜를 줄 수 없다. 진정한 회개는 용서만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 죄로 인한 채찍도 징벌도 감사할 줄 아는 것이다. 왜냐 하면 용서는 면제이기도 하지만 탕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거룩한 것이다. 그러기에 거룩한 그릇에 담아야 한다.

(마 5:7)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 임이요

 

거룩한 것을 개나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고 했다.

(마 7:6)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2. 기도의 목적이 선하여야 한다.

 

정욕에 쓰려고 구하는 것은 얻지 못한다고 했다.

(약4:2-4)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

 

구해도 얻지 못하는 것은 정욕에 쓰려고 구하기에 줄 수 없다고 하신다. 이 말씀은 목적이 선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목적이 악한 것을 두시면 하나니은 악의 동조자가 되시기 때문이다. 방탕하기 위하여 구하는 것을 주실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의 미래의 마음을 아신다. 그러기에 믿음이 성숙되지 아니하면 은혜를 받을 수 없다.

 

3. 믿음으로 구하여야 한다.

 

무엇이든지 받을 줄로 여기라 했다.

(막11:24)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내 방식대로 응답하시지 않는 다는 말씀이다. 내 욕구대로 주시지 않는 다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합당하게 응답 하신다는 말씀이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고후 12:8-10]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후 눈이 보이지 않았다. 아나니아의 기도로 다시 보게 되었지만 완전히 고쳐지지 않았다. 눈병 때문에 전도하는 일이 너무 어려웠다. 또한 자기의 병도 고치지 못한 사람이 무슨 능력이 있느냐 하고 비난도 많이 받았다.

 

그래서 세 번을 절실하게 기도했다. 그랬더니 바울의 욕구대로 응답하시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응답하지 않았다. 왜냐 하면 현제 네가 받은 은혜만도 족하다고 했다. 그리고 네가 약한데서 하나님이 도 온전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말은 바울이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인 바울 자신이 아니라 바울 자신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인데 소위 말하면 자기의 안질 하나도 고치지 못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병을 치유하는 것은 자기의 능력이 아니라 순순한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하는 일은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한다는 것이 더 확실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 바울은 더 강해지고 기뻐하였다.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하지 말라고 했다.

(약1:6-8)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의심하는 사람은 마치 바다의 물결처럼 흔들린다는 것이며 환경에 따라 흔들린다는 말이다. 두 마음을 품기 때문에 순결한 신앙을 가질 수가 없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은혜인지 자신의 능력인지 자연 순리인지 구분을 못하고 신앙에 순수하지 못하다고 했다.

 

백부장의 믿음은 좋은 믿음이라고 했다.

(마8:12-13)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위의 말씀은 내가 구하는 것을 받을 줄로 믿고 구하라고 하였다. 확신하는 마음으로 구하라는 말씀이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하지 말라고 하셨다. 의심하고 구하는 것은 얻을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구하는 자들에게 네 믿음대로 되라고 하셨다.

 

믿음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믿음인데 진리를 믿는 믿음이다. 그리고 하나는 능력을 믿는 믿음이다. 전재를 인정하지 않는 자의 기도는 들으실 수 없다. 능력을 의심하는 자는 받을 수 없다.

 

4. 인내하며 끝까지 중단하고 구하여야 한다.

 

응답되는 기도는 신앙적 인내를 동반한다 했다.

[눅 18:1-5]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2)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3)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5)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신앙적 인내는 이루어 주실 때까지 구하는 것이다.

(눅11:7-9)저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 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위의 말씀 한 과부의 비유한 말씀과 밤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는 기도에 대한 신앙적 인내를 요구하는 말씀이다.

 

인정 없는 불신앙인인 재판장도 강청함 때문에 들어주었다고 하였다. 친구의 비유도 끈질기게 구하였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이시다. 그러기에 적극적으로 구하라 하신다. 구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않으신다고 하였다. 장사꾼이 문을 두드리는 것같이 하지 말아야 한다. 아들이 문을 두드리는 것같이 두드려야 한다.

 

가나안 여인은 끈질기게 기도한 여인이다.

(마15:26-27)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 하니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위의 말씀은 가나안 여인의 간구이다. 이 여자는 가나안 원주민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조가 쫓겨나 시돈에 거주하게 된 여자이다. 예수님이 이 지방에 지나가실 때에 딸을 위하여 간구하였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믿음을 보기 위하여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거절하고 무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간청하였다. 주님은 이 여인의 믿음을 높이 평가하시고 그 소원을 들어주셨다.

 

5. 최후에 순간까지 회개하고 기도할 때 응답하셨다.

 
 
십자가의 강도의 기도는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기도이다.

[눅 23:41-43]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십자가의 강도는 형틀에 매달리는 순간까지 강도였다.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지탄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다.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다. 외편에 있는 강도 한 사람에게 우리는 이런 보응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했다. 그 말은 자신은 생각해 볼 때 자신의 지금까지 행위는 이렇게 죽어야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영혼을 생각했다. 염치를 불구하고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했다. 그의 기도는 정욕적인 기도가 아니었다. 영혼을 단순이 영혼을 위한 기도였다. 주님은 이 강도의 기도를 들어 주셨던 것이다. 죽는 순간에도 기도하는 것은 응답하신다는 말씀이다. 영혼을 위한 순수한 강도의 기도를 들으셨던 주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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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드리는 구정 명절  가정예배 New Year Home Worship

 

 

 

 

오늘은 구정 명절입니다.

오랜만에 멀리 살던 가족들도 함께 만나게 되었는데,

감사한 마음으로 이 시간 예배를 드리도록 합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 드리고

찬송가 ; 310장(통410) 아 하나님의 은혜로

기도 ; 가족중

 

성경말씀 ; 시편 1 ; 1 - 6 

 

제목 ; 복이 있는 사람

 

 

 복이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상의 상태를 말합니다.

특히 사람들은 복을 참 좋아합니다. 그러나 누가 복을 주는지를 정작 잘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을 통해 복 받기를 원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조상님이 복을 주는 걸로 압니다.

어떤 사람은 복을 받으려고 우상인 바위나 고목을 찾아가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토정비결을 보고 손금을 보고 관상을 봅니다.

 

심지어 몇 만원, 몇 십만원, 몇 백만원을 주고 부적을 사서 붙이는 어리석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는 우상이

어떻게 복을 주겠습니까?

 

우리가 원하는 복을 주실 분은 단 한분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복을 주실 능력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말씀에 '시냇가에 심은 나무' 라고 하였듯이 이는 저절로 난 잡초가 아닙니다.

길가에 버려진 나무가 아닙니다.

그러나 시냇가에 심은 나무도 바람이 불면 바람을 맞을수 있으며 겨울에 눈이 내리면 가지가 부러지기도 합니다.

이처럼 복 있는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 아닌 평범한 인간입니다.

그도 세상 사람들이 당하는 어려움, 불경기, 불황을 다 겪으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모진 가뭄 가운데서도 물을 빨아먹고 생기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복있는 사람은 시련을 극복하고 이길 수 있는 힘의 원천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힘의 원천은 하나님이십니다.

 

원하기는 올 한해도 우리 가정 모두가 이와 같은 복이 있는 사림이 되기를 바랩니다.

 

찬송가 ; 301장(통460장)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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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예배 성탄절예배설교 / 진정한 성탄 준비 Sermon for Christmas preparation
  
 


 
제목 : 진정한 성탄 준비

말씀 : 요17:14-17

1.예수님은 생명을 주려고 오셨습니다.

오늘 대강절 넷째주일입니다. 대강절은 물론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참뜻을 되새기며 주님을 우리의 심령과 가정과 교회에 온전히 모셔 들임으로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기 위해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우리 심령 속에 온전히 모셔 들이고 주님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제일 먼저 주님이 누구신지, 왜 오셨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만약 왕이 우리 집에 오셨는데 그 분이 누구신지 모른다면 어떻게 왕의 예우를 해 줄 수가 있겠습니까?또 만약 왕이 나에게 높은 자리라도 하나 주려고 왔는데 난 높은 자리 따위는 필요 없고 돈이나 한보따리 달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돈이나 지위는커녕 왕의 분노만 유발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도 동일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바르게 알지 못하면 바르게 영접할 수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오신 참 뜻을 알지 못하면 엉뚱한 것만 바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도리어 실망과 좌절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이런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바르게 알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냥 성인군자라고 하고, 어떤 분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평화롭게 살게 하려고 오신 분이라고 여깁니다. 또 어떤 경우는 건강이나 물질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정말 주시려고 하는 것에는 큰 관심이 없고 자꾸 엉뚱한 것만 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탄절이 되어도 집안이나 거리나 상점이나 교회에 여러 가지 장식도 하고 선물을 주고받기도 하고 또 여러 가지 행사도 하고, 더 나아가서는 힘든 이웃을 도우며 사랑을 나누기도 하지만 정작 생명을 주려고 오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생명의 주님을 영접하지 못하여 주님이 주시는 참되 생명의 은총과 기쁨과 위로와 평안을 누리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물론 당연히 성탄축하프로그램도 하고 외부장식도 하고 주님의 사랑으로 어렵고 힘든 이웃들도 도우며 사람과 사람사이의 평화도 당연히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도 성탄절이웃초청잔치도 하고 어려운 분들을 돕기도 하며 성탄절 헌금의 거의 전부를 이웃을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단순히 우리에게 인간적으로 희망과 위로를 주고 서로 사랑하며 화목하게 살게 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유일한 참 구세주로서 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천배 만배 억배 중요한 생명을 주시려고 오신 분이십니다. 요10:10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또 마1:21절 보겠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보십시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즉 죄와 무지 속에 있는 인생을 위하여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죄에서 사함 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게 인류가 이 땅에서나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나 영원토록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지식과 문명과 과학이 발달해도 이 땅에서도 진정한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더더구나 영원한 고통 가운데 처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대강절을 맞아 성탄절을 준비하며 다른 무엇보다도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심령 속에 온전히 모셔 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심령이 주님이 주시는 새 생명의 은총이 넘침으로 진정한 생명과 기쁨과 위로와 소망 가운데 살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그렇게 주님을 온전히 모셔 들이고 새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유일한 생명의 주로 오신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믿고 영접하여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얻었으면 그 다음에 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세상의 모든 왜곡되고 악한 것들을 버리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우리 사이에 온전한 교통이 이루어져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온전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15절 말씀 보겠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여러분, 보십시오. 주님은 우리가 악에 빠지지 않고 온전히 보전되기를 기도하고 계십니다. 또 마6:13절을 보십시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이것은 주기도문의 마지막 부분입니다.어떻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까?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시험에 들지 않도록, 악을 행하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어 거룩하시고 영화로우시고 선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을진대 어떻게 악 가운데 머물 수가 있겠습니까? 또한 우리가 악 속에 있으면서 어떻게 은혜를 바라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왜곡되고 악한 것들을 떠나야 합니다.동시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광과 은혜와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누리기 위해서도 모든 악에서 떠나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오늘 날 많은 인생들이 이걸 몰라서 진정한 생명의 은혜와 기쁨과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고, 그 안에서 사랑과 선과 의와 진실가운데 살아갈때에 생명의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게 되는 것인데 오직 돈에 행복이 있는 줄 알고 믿음과 진리와 선과 의 등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소유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속이고 빼앗고 훔치고 하면서 악한 방법으로라도 더 많이 가지려고 합니다. 설령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하여 하나님과 사람에게 할 노릇을 제대로 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틈이 벌어져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을 누리지 못하고, 또한 사람과 사람 사이도 점점 틈이 벌어져 갈등과 불신과 싸움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행복하기는커녕 갈등과 불화와 상처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성탄절을 준비하며 또 오늘 성찬식과 세례식을 행하면서 생명의 주님을 온전히 모셔 들이고 그 다음에는 진정 주님의 거룩한 모습을 닮아 선과 의와 진실 가운데 거룩한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세월이 어떻게 흘러도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도 오직 주의 말씀을 따라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잘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과의 온전한 관계 속에서 주님이 주시는 은혜의 충만함으로 누리며 주님의 향기 발하며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거룩한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3.말씀과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악을 물리치고 믿음과 사랑과 의와 선가운데 거룩한 삶을 살려면 말씀과 기도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만 그 은혜와 능력으로 세상의 달콤하고 교묘한 유혹과 도전과 왜곡된 가치관을 분별하고 그걸 이길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래야만이 우리 심령 속에 성경적 가치관이 확립되어 세상의 왜곡되고 혼돈되고 악한 것들에게 휩쓸려 다니지 않게 됩니다. 마귀의 간계를 간파하고 즉시 물리치게 됩니다. 감히 마귀 따위가 장난치지 못하게 됩니다. 설령 겁 없이 대들어도 주님의 능력으로 물리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과 기도에 힘쓰지 않아 성령의 충만함과 지혜와 능력을 덧입지 못하면 세상의 유혹과 핍박과 환경과 왜곡된 가치관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이길만한 분별력도 능력도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만연된 인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와 개인이기주의와 종교다원주의와 향락주의에 끌려 다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7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진리로 거룩하게 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룩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우리 심령 속에 충만할 때에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그래서 그 말씀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몸과 마음과 시간을 하나님 뜻대로 사용하게 되고, 악을 분별하며 거부하고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달려감으로 거룩한 인생이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딤전4:5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말씀과 기도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대강절 특별새벽기도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특별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거의 대부분이 미동도 안하시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거 정말 회개해야 할 일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모이기를 힘쓰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예배드리는 자들을 찾고 계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만큼 모입시다. 기도합시다. 예배드립시다해도 꿈쩍도 안한다면 주님이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또 그래가지고서야 어떻게 선과 의와 진리가운데 거룩한 삶을 살아가겠으며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말씀과 기도와 찬양생활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탄절을 준비하며 또 오늘 성찬식과 세례식을 하면서 주님이 오신 참뜻을 바르게 알고 진실로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주 예수 그리스도, 평강과 위로와 소망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심령 속에 온전히 모셔 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먼저 여러분 자신이 주님이 주시는 생명과 은혜와 기쁨과 평강과 위로를 마음껏 누리며 동시에 이 왜곡되고 어두운 세상에서 거룩하고 의롭고 진실한 삶의 모습을 통하여 생명의 빛을 비춤으로 아직도 어둠속에서 방황하는 수많은 영혼들을 주님 품으로 인도하여 저들도 우리와 같이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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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믿음 특별한 은혜 <기생 라합에 관한 설교 Special Faith Special Grace>


 

 


특별한 믿음 특별한 은혜.

 

여호수아   2장  8절

 

하나님의 일꾼은 무엇보다도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기 때문입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믿음이 없는 헌신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행함으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야고보 사도는 말했습니다.

 

노아도 방주를 짓는 생활로 믿음을 증거 했습니다.

(히 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아브라함도 행함으로 믿음을 보였고 했습니다.

(히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라합은 특별한 믿음으로 특별한 복을 받은 여인입니다.

 

히 11: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 하였도다

 

1. 라합의 특별한 믿음.

 

1) 선교를 계시한 믿음이다.

  

가나안 종족은 여호와를 섬길 수 없는 종족이다. 가나안 종족은 함의 넷째 아들 가나안의 후손들이다. 그러기 때문에 저주를 받은 종족의 후손이다. 그러기에 노아로 하여금 땅을 상속 받을 소돔 고모라를 중심으로 하는 땅을 분할 받았다.

 

선민의 시대에 종족적으로 믿음을 가질 수 없는 종족이다. 그런데 이방인으로서 여호와를 영접하고 그에게 속한 여인이다. 자원하여 여호와께 돌아온 여인이다.

 

저주받은 종족이지만 여호와께 돌아가면 받아 주실 줄로 믿는 귀한 믿음이다.

 

2) 종교적으로 여호와를 섬길 수 없는 시대이다.

  

당시에 메소포다미아 지역은 바알 신앙이 정성기를 이룬 시대이다. 바벨탑 이후에 시작된 바알신앙은 이미 애급에까지 확장되어 있었다.

 

원래 바알신은 바벨탑을 주도했던 니므롯과 그의 아들 담무즈를 태양신(바알)으로 신격화 했고 니므롯의 아내 이면서 담무즈의 아내인 세미라미스를 달신(아스타롯)으로 신격화한 바알 신앙이 메소포다미에 성행했고 전 역에 퍼져 있었다.

 

그런데 라합은 그중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수 2:10-11]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11)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라합은 히브리인의 출애급이 여호와 하나님이 이끌고 있음을 믿었고 그들의 출애급 소문을 듣고 하늘 에서도 땅 아래서도 유일하신 여호와라고 고백했다.

 

하나님의 열 가지 재앙을 눈으로 목격 하고도 믿지 못했던 바로 왕에 비하면 소문만 듣고도 선택한 백성들을 이끌어 내시고 인도하시는 천하에 유일한 하나님으로 믿었던 것입이다. 수많은 함의 후예들 가운데 유일하게 여호와께 속한 귀한 믿음이었다.

 

바알 숭배소굴에서 살면서도 여호와를 알고 비록 우상 숭배한 죄인일지라도 받아 주실 것을 믿은 기한 믿음이다.

 

3) 직업 적으로 여호와를 믿은 수 없는 사람이다.

 

 

라합은 기생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직업이 여인숙 업이었다. 그리고 혼자 사는 여인이었다. 성결생활을 할 수 없는 직업을 가진 여자였다. 

 

고대에는 기생은 인생의 가장 정죄하는 직업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종교적인 면에서는 더욱 그렇다. 성경에는 음행하는 사람은 처형하라고 명하셨다.

 

(레 19:29) 네 딸을 더럽혀 창녀가 되게 하지 말라 음행이 전국에 퍼져 죄악이 가득할까 하노라

 

[신 23:17-18]이스라엘 여자 중에 창기가 있지 못할 것이요 이스라엘 남자 중에 남창이 있지 못할지니 18) 창기가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어떤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

 

그런데 라합은 죄인으로 절망하지 않고 여호와께 돌아온 여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로 하여금 아무리 중죄인이라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나타낸 믿음었다.

 


4) 가난한 자를 용납하시는 하나님을 믿었다.

 

 

라합의 가정은 빈궁한 가정이었다.

(수 2:13) 그리고 나의 부모와 나의 남녀 형제와 그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살려 주어 우리 목숨을 죽음에서 건져내라

 

그 당시 부자들은 성 중앙에 집을 지었습니다 서민은 성벽 꼭대기에 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라합은 가난하기에 성벽 끝에 집을 짓고 살았다

 

말씀을 보면 라합이 가족들을 거느린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부모 형제들 그리고 자에게 속한 사람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생명을 감당하는 위치에 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생은 넉넉한 생활을 하는 직업이 아니고 보면 가난한 생활을 하는 여인이고 혼자 벌어서 가족을 돌보는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호와는 가난한 자도 용납하시는 하나님인 것을 마음으로 믿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라합의 믿음은 흙속에 진주처럼 귀한 믿음인 것을 알 수 있다.

 

5) 목숨을 건 믿음이다.

 

 

예나 지금이나 정탐꾼을 숨기면 중죄로 다스린다. 처형되든지 심한 고문을 당하게 된다. 왕의 명령 한마디면 죽는 시대이다.

 

라합이 정탐꾼을 살리려고 숨긴 것은 만약 발각이 나면 자신의 신변에 위험이 있음을 각오하였을 것이다. 죽을 각오도 하였을 것이다. 고난을 당할 것을 각오하였던 것이다

 

예상 했던 대로 위기에 왔다 발각이 되어 이 집에 정탐꾼이 왔는데 어데 있느냐고 행정 당국에서 왔다.

 

하나님은 라합에게 지혜를 주어 위기에서 건지신다.

[수 2:4-5]그 여인이 그 두 사람을 이미 숨긴지라 이르되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5) 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내가 알지 못하나 급히 따라가라 그리하면 그들을 따라잡으리라 하였으나

 

라합은 이렇게 말합니다. 과연 그들이 우리 집에 왔었다고 헸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누구인지 말 몰랐다고 하고 어두워 질 무렵에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잘 모르겠고 급히 따라가지 않으면 잡을 수 없다고 했다.

 

라합이 정탐꾼들이 자기 집에 오지 않았다고 했으면 집안을 다 뒤졌을 것이다. 그러나 왔다고 했다. 해질 무렵에 나갔으니 어둡기 전에 빨리 쫓아가서 찾으라고 했다. 하나님은 위기에서 지혜를 주신 것이다 만약 라합이 오지 않았다고 했으면 집안을 뒤졌을 것이다 그러나 왔다가 바로 나갔는데 쫓아가면 잡을 것이라고 했다.

 

믿음은 역사가 따릅니다. 그는 생명의 위험을 각오하고 믿음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하나님은 믿음 있는 라합을 어려움을 당하도록 버려두시지 아니 하셨다 믿음으로 사는 라합을 죽도록 버려두시지 아니 하셨다 지혜를 주신 것이다.

 

지혜란 것은 배워서 하는 것도 아니고 그때 그 때 순발력이다. 하나님은 라합에게 지혜를 주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위험에서 건져 주셨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라는 말씀대로 목숨을 건 위험한 헌신한 자의 목숨을 살리셨다.

 

정탐꾼들이 숨겨달라고 사정하거나 고발하지 말라고 부탁한 일이 없고 라합이 자원해서 숨겨 주었기 때문에 헌신이라고 한 것이다.

 

2. 특별한 은혜.

 

라합은 크게 네 가지 넘치는 축복을 받았다.

 

1) 육신적으로 자신뿐 아니라 그에게 속한 모든 가족이 살았다.

   

(수 6:17) 이 성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되 기생 라합과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모두 살려 주라 이는 우리가 보낸 사자들을 그가 숨겨 주었음이니라

 

자기 목숨만 산 것이 아니라 자기 가족들 그리고 그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이 모두 같이 살게 되었다.


2) 생활 적으로 기생 업을 청산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기생이 없다. 지금도 이스라엘 나라에는 술집이나 기생집이 없습다. 그러므로 라합은 자연스럽게 기생직업을 청산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새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사람대우 받으면서 살게 되었던 것이다.

   

 

3) 라합은 육신만 산 것이 아니라 영혼도 살게 되었다.

 

 

그는 함의 후예로 태어났다. 저주의 자손이다. 그런데 믿었다. 믿음으로 선민이 되었다. 선민이 되었으니 영혼이 살게 된 것이다. 자신의 생명뿐 아니라 자신의 가족들의 영혼도 살게 된 것이다. 당시 가족들뿐 아니라 그들의 가문에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다. 애냐 하면 그들의 후손들도 하나님의 자손으로 선민의 자손으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4) 라합 개인은 왕족의 어머니가 된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왕족인 살몬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보아스를 낳았다. 그리고 다윗왕의 조모가 되었다. 기생으로서 왕족인 살몬과 결혼을 했고 이스라엘에서 가장 위대한 왕 다윗의 증조모가 되어 왕족의 족보에 기록되었다. 당시 여성으로 족보에 오른 것만도 축복인데 왕족의 종부에 오른 것은 여간 큰 축복이 아니다.

   

 

 결 론

    

라합은 귀한 신앙을 가진 여인이다. 저주의 백성에서 여호와를 찾았고 바알숭배 아스타롯 숭배 신앙 속에서 여호와를 찾았고 성결 생활에 어려운 기생 업에서 여호와를 찾았고 가난한 생활에서도 여호와를 찾았다. 그리고 자기 목숨뿐 아니라 온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자들이 살게 되었고 기생직업을 청산하게 되고 선민의 왕조와 결혼하여 이스라엘에서 가장 위대한 다윗왕의 증조모가 되어 족보에 기록된 넘치는 복을 받은 여인이다. 라합은 툭별한 믿음으로 특별한 축복을 받은 사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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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  성도들 상호 간에 나눔의 삶을 살아가는 것

 

사도신경 : 다 같이

* 찬 송 : 316장 주여 나의 생명

*기 도 : 맡은 이 (가족 중)

*말 씀 : 고후 8:7-15


*나 눔 :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을 향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연보와 관련해

연보의 의의와 목적에 대해서 설명을 합니다.

고린도교회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어느 누구보다도 먼저 자원하여 시작은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연보 모금 사역이

순조롭게 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이유에 대해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하나님의 큰 은혜로 풍부한 은사를 소유했고,

물질적으로도 풍요를 누렸지만

자기를 희생하는 헌신의 마음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부요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가난한 모습으로 오신 것과

출애굽기의 만나의 사건을 인용하여

성도들 상호 간에 나눔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로써

마땅히 해야할 사명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자로써

우리 주변에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사랑과 마음을 전하고 나눔의 삶을 통해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귀한 일에 동참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선한 일을 하고자 결단을 내렸다면,

그것을 이룰 수 있는 헌신과

적극적인 신앙의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 적 용 : 당신은 선한 일을 하고자 했던

믿음의 결단이 있습니까?

그리고 지금, 그것을 행하고 있습니까?

만일 잊어버리고 있었다면,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사랑과 진실함으로

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것을 나눔으로

작지만 풍성한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데

헌신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 마침 기도 : 그리스도께 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내 것을 나눌 수 있는

삶을 살게 하소서


*기도 제목 : 우리 가정을 위한

기도 제목을 함께 나누고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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