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낮 예배 설교 / 절망 중에서 구원하심

 

 


막 5:25-29 

 


“…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막 5:25-29)

Ⅰ. 본문해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많은 기적을 베푸셨다. 그러나 이것은 기적을 바라보고 살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이 땅에 임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기적을 베푸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그분 안에서 제시된 구원을 받아들이게 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Ⅱ. 불행에 항거함
본문에는 혈루증에 걸린 여인이 나온다. 혈루증은 아마 여자의 몸 속에서 하혈이 계속되는 병을 가리키는 듯하다. 율법은 이러한 병을 부정한 것으로 간주하였기에, 이 여인은 부정한 자가 되어 성전에 갈 수 없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도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이 여자는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소외당한 채 12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 12년의 세월 동안 그녀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경험하였다.

A. 괴로움을 받음
첫째로, 여자는 많은 의사에게 괴로움을 당하였다. 낫고자 하는 그녀의 갈망은 많은 의사를 찾게 하였다. 그녀는 유명하다는 의사를 찾아다녔을 뿐만 아니라 민간에 전해져 오는 방법으로도 자신을 치료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병은 낫지 않았고, 마가는 그녀가 많은 의사에게 괴로움을 당했다고 말한다. 오직 살아야겠다는 희망 하나로 많은 의사를 찾았지만 그녀는 병을 치료하는 과정 중의 많은 고통과 수치심을 받았던 것이다.

B. 재산을 허비함
둘째로, 여자는 가진 재산을 다 허비하였다. 처음에는 어느 정도 재산이 있었겠지만 많은 치료 비용을 지불하면서 결국 가진 것을 다 소비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이 여자의 문제는 개인의 것이 아니라 가족의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그녀가 아픔으로써 가족들도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삶의 평안함은 상실하게 된 것이다.

C. 병세가 중해짐
셋째로, 여자는 병세가 더 중해지게 되었다. 많은 의사에게 괴로움을 당하며, 가진 것을 전부 소비하였지만 아무 효험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병세가 더 중해졌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의지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구원은 이렇게 자신이 의지하던 것에 대한 깊은 절망에서 시작된다. 이 여자는 자기가 의지하던 모든 것들을 버렸다. 의사들을 의지했었고, 자신의 재물을 의지했었다. 스스로 병을 낫고자 하는 열망을 거두지 않고 살아갔다. 그렇지만 이제 이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가 온 것이다. 그때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다.

Ⅲ. 예수를 믿음
그녀가 듣게 된 것은 갈릴리에서 오신 어떤 사람이 병든 자를 고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예수에 대해 받은 인상은 인간 의사들과는 달랐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단지 병만을 고치는 것이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르침을 전함으로써 그들의 마음까지 치료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자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구원”을 뜻하는 헬라어 ‘쏘데’는 그야말로 구원을 말한다. 왜 여자는 내가 그의 옷에 손을 대면 나으리라고 하지 않고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였을까? 이 여자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병뿐만 아니라 상처 입은 그녀의 인생 전체가 구원받을 것이라는 모종의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직 그리스도 이외에 나를 구원할 분이 없으며, 모든 구원은 그분께로부터 나온다는 믿음, 이것이 곧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다.

Ⅳ. 결론
하나님은 이 가련한 여자를 버려두지 않으셨다.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하나님은 그녀의 병을 근원적으로 치료하셨다. 만약 훌륭한 의사를 만나 고침을 받았다면 이 여자의 삶은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벼랑 끝에서 주님을 만나자 그녀는 믿음의 여인이 되었고, 이제 하나님을 향해 사는 사람이 되었다. 이처럼 만약 여러분이 실패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굳게 붙든다면, 오늘 여러분의 인생에 드리우는 실패의 그림자가 하나님을 만나는 곳으로 여러분을 데리고 갈 것이다. 그러므로 시련과 실패 속에서 간절히 주를 찾는 자들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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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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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주일 낮 예배 설교 (Sunday worship Preaching, September 2018) 
 

 

 


말씀 : 마13:3-9

제목 : 마음을 옥토로 만들때

1.풍성한 열매의 관건은 밭입니다.

농사를 지어서 풍성한 수확을 얻으려면 여러 가지 구비 조건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밭이 가장 중요하지 않나 생각이 됩니다. 아무리 품종이 좋고 기후나 기술이 좋아도 토질이 형편없으면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농부가 농사를 지으려면 밭을 갈아 부드럽게 하고, 돌멩이를 골라내고, 퇴비도 넣고 토양 소독도 하면서 밭을 장만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이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의 밭이 깨끗하고 진실하고 겸손하고 지혜로워야 인생의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주님께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하여 바로 이러한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생명의 말씀을 받아들임으로 마음을 옥토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30배 60배 100배의 풍성한 열매를 맺어 생명의 풍성한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늘 말씀의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깊이 묵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려면 우리 마음을 바르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인간의 심령이 너무 왜곡되어 있어서 복음이라는 너무 귀하고 복된 생명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전해졌는데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귀한 생명의 말씀을 아예 받아들이지도 않고,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들마저도 생명의 풍성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얼마든지 생명의 은총을 누릴 수 있는 상황속에 있습니다.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과 영광의 나라와 동시에 이 땅에서도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평화와 소망을 주는 복음의 씨앗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의 밭에 뿌려 졌고 또 얼마든지 그것을 믿고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릴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말씀을 거부하고, 어떤 이는 겨우 받아들이긴 했으나 열매를 맺지 못하고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거나 심지어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고 극히 일부의 사람들만이 생명의 열매를 맺으며 그 은총을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무엇이 문제입니까? 왜 같은 생명의 씨앗이 들어갔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거부당하고, 어떤 사람은 조금 자라다가 말라죽고, 어떤 사람에게는 근근이 목숨만 부지하고 있고, 어떤 이들에게는 생명의 열매가 풍성히 맺히는 것입니까? 그건 다름 아니라 복음을 들은 사람들의 마음의 밭이 문제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의 밭이 완고하고 단단하게 굳어져 있거나 돌밭과 같이 얄팍하거나 세상의 온갖 잡초들로 무성하여 복음의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나지 못하여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능력을 본 사람들 중에도 어떤 이는 복음을 받아들였고, 어떤 이는 복음을 거부하였다는 사실에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은 감히 세상의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지혜와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엄청난 능력으로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시고,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군중들이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능력을 본 사람들 중 끝까지 예수님을 믿고 따른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예고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님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시면서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셨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하는 가장 근본적인 요인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의 마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죄와 무지와 어리석음과 연약함과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히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자는 생명의 복음을 받아들여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지만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자기 생각과 지식과 경험과 이성대로 살아가는 완고하고 어리석은 자는 복음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겨우 받아들인다해도 말씀을 따르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살아감으로 생명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마음의 밭을 잘 다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것으로 인해 단단해지고, 세상의 온갖 잡초로 가득하고, 자신의 힘과 지식과 이성을 의지하려는 완고하고 교만한 마음을 성령의 능력으로 깨트리고 부드럽고 깨끗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마음이 옥토가 되어 생명의 말씀이 싹이 트고 자라나 풍성한 열매를 맺어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 마음의 밭을 옥토로 만들 수 있습니까?

2.단단히 굳어진 마음을 깨트려야 합니다.(3,4절)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옥토로 만들려면 자신의 무지와 어리석음과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히 주님 앞에 엎드려 말씀묵상하며 깨어 기도함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심령속에 들어있는 단단하게 굳어진 것들을 깨트려 버려야 합니다.

오늘 말씀속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데 먼저 3,4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이 말씀은 비유의 말씀으로 씨를 뿌리는 자는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씨는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고, 밭은 인간의 마음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길가란 단단하게 굳어져 있는 인간의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전해졌건만 사람들의 마음이 세상에 태어나서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한 것들로 완전히 굳어져 있어서 생명의 말씀을 도무지 이해하지도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생명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죽음의 길로 치닫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인간의 심령은 세상에서 보고 듣고 배운 것으로 너무나 단단하게 굳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에서 보고 듣고 배운 것들은 대부분 물질적으로 많고 좋은 것을 누리며 높은 자리에 올라가 대접받으며 육체적 물질적으로 평안하고 부요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을 위하여 기를 쓰고 공부하고 일하고 힘쓰고 애쓰며 거의 대부분의 시간과 정열을 거기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육체적 물질적 사고로 심령이 완전히 굳어질 수 밖에 없고, 그러한 물질적 사고로 심령이 굳어지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명의 말씀에는 아예 관심도 없고,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도 못함으로 이를 거부하고 영원한 멸망의 길로 치달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나마 복음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마저도 아직도 그 심령 속에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있는 물질적 육체적 가치관으로 인하여 말씀 따라 가지 않고 세상을 따라 감으로 생명의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단단하게 굳어진 심령을 깨트려 부드럽게 하고 생명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다른 방법 없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죄와 무지가운데 있는 존재인지, 자신의 지식과 경험과 이성과 얼마나 작은 것인지를 인정하고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너무나 왜곡되게 굳어진 옛자아가 깨트려 주심으로 진리를 향해 갈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성령이 역사하시고 성령이 역사하시면 그 동안 살아오면서 단단하게 굳어진 왜곡된 가치관들이 깨지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고,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하며 그 말씀을 따라 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 심령 속에서 말씀의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나서 풍성한 생명의 열매를 맺게 되어 그야말로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복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어찌 하든지 정말 겸손한 마음으로 더욱 자신을 말씀 앞에 세우며 기도하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죄인이요 어리석은 자요 완고한 인생임을 고백하고 기도하며 성령의 역사하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능력과 은혜가 여러분의 심령 속에 충만하게 임함으로 세상의 것으로 굳어져 있던 마음이 활짝 열려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이 여러분의 심령에 온전히 심겨지고 그래서 그 말씀이 여러분 심령 속에서 싹이 트고 자라나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그 은총을 충만히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말씀이 심령 속에 깊이 뿌리 내려야 합니다.(5,6절)

그렇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 마음이 옥토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 속에 들어온 말씀이 우리 심령 속에 깊이 뿌리 내리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5,6절을 보십시오.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여기서 돌밭은 돌이 많은 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위 위에 약간 흙이 덮여있는 밭을 말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싹이 텄으나 가뭄이 들자 땅속의 습기를 공급받지 못함으로 금방 말라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심령도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심령에 말씀의 씨가 겨우 들어가긴 했는데 그 마음속이 아직도 세상에서 살면서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한 물질주의와 인본주의적 가치관이 자리 잡고 있어서 말씀이 그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주님 안에 있는 진정한 생명의 도를 알지 못하고 세상의 복이나 기쁨이나 평안을 위해서 다니고, 그래서 뭔가 믿는 흉내를 내기는 내는데 조금만 어려운 일이 있으면 그만 실족하여 넘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일들이 많습니다. 10년 20년 30년 교회에 다녔다고 하면서 아직도 세상의 가치관으로 굳어진 심령이 깨지지 않음으로 그저 세상 기쁨이나 평안이나 위로나 복을 위해서 다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교회에서 별일 없이 웃고 떠들고 재미있게 교제할 때는 그 재미로 교회에 다닙니다. 또 뭔가 어려움이 없고 일이 잘 되면 좋다고 교회에 다니고 어떤 때는 은혜를 받은 것처럼 눈물 흘리며 기도하기도 하고, 교회 일도 열심히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분들은 교인과 뭔가 관계가 틀어지고 뭔가 좀 어려운 일이 있으면 그만 낙심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게 됩니다. 뭔가 좀 자기에게 서운하게 대하는 것처럼 느껴지거나 알아주지 않는 것처럼 여기면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나도 왕년에 세례를 받았다, 성가대를 했다, 교사를 했다고 하면서 교회에 안 나오는 분들도 많습니다. 여러분, 그건 그냥 교회에 왔다갔다 한 것이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속된 말로 때려 죽여도 교회에 안 나올 수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생명의 주를 만났는데, 천국과 지옥을 아는데 어떻게 교회를 안 나올 수가 있습니까?

그러면 왜 이런 일이 벌어집니까? 다름 아니라 마음이 돌밭이라 그렇습니다. 말씀을 받기는 받았는데 그 심령 속에 아직도 인간적인 생각과 가치관과 경험과 이성이 바위처럼 굳어 있어서 그냥 인간적인 생각으로 교회생활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절대로 그렇게 교회생활하면 안됩니다. 정말 나 자신을 깨트려 부수고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안에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고, 오직 그 말씀만이 진리이며 생명이라는 걸 알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이게 신앙생활입니다.

그냥 인간적으로 사랑하고 돕고 위로하는 것은 직장이나 마을이나 동호회나 계모임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거기서도 사랑도 나눌 수 있고 서로 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단순히 인간적으로 교제하는 곳이 아닙니다.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그래서 이 땅에서도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다가 무엇보다도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분명한 진리이고 이것을 아는 사람은 죽어도 교회를 떠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윤리적으로 종교적으로 교회생활하면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물론 조금 어려움이 오고 일이 잘 안 풀리면 그만 졸업해 버립니다. 교회가 자신을 알아주지 않고 조금 서운하게 하면 그만둡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정말 우리 심령 속에 바위처럼 굳어져 있는 인간의 이성과 경험과 지식의 단단한 것들을 주님의 능력으로 깨트려 버려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인간적인 기쁨이나 평안이나 욕구 충족을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말씀으로 거듭나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며, 오직 말씀안에서 주님과 동행함으로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며 그 역사를 이루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그렇게 살다보면 인간적인 생명의 기쁨과 자유와 평화와 사랑은 저절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 심령속에 굳어진 왜곡된 생각들을 하루속히 버리고 오직 우리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 가운데 오직 주님의 말씀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권능과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어려움과 유혹과 시험을 이기고 먼저는 나 자신이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며 주님의 거룩한 역사를 이루어가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마음속의 잡초를 뽑아버려야 합니다.(7절)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을 옥토로 만들어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기 위해서는 세상의 것들로 완고하게 굳어져 있는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그 다음에는 마귀 사탄이 끊임없이 우리 마음에 뿌려놓는 잡초를 제거해야 합니다. 아무리 마음의 밭을 부드럽게 해도 온갖 못된 잡초들이 무성하면 생명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7절에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말씀을 겨우 받아들이긴 했는데 그래서 뭔가 자라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만 마음속에 세상의 온갖 잡동사니 같은 것들로 가득차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밭을 아무리 부드럽게 하고 퇴비를 넣고 씨앗을 뿌려도 잡초가 무성하면 어떻게 좋은 열매를 맺겠습니까?

여러분, 인간의 마음의 밭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심령에는 너무나 많은 잡초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 근심과 걱정이 잡초입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의 향락과 즐거움이 잡초가 됩니다. 어떤 이는 원망과 불평과 미움과 욕심이 잡초입니다. 어떤 이는 돈과 권력에 대한 집착과 욕심이 잡초가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잡초는 얼마나 질기고 강하고 잘 자라는지 모습니다. 밭에 곡식의 씨앗을 뿌려 놓으면 잡초가 먼저 납니다. 조금만 방치하면 잡초가 곡식을 완전히 덮어 버려 곡식은 약해져 죽거나 겨우 살아남아도 열매가 별로 없습니다.

우리 인간 심령도 그렇습니다. 마귀가 얼마나 강렬하게 역사하는지 조금만 방심하면 온갖 왜곡되고 추하고 부정적이고 악하고 불신앙적인 것들이 우리 심령을 차지해 버립니다. 세상의 돈과 명예와 영광과 향락과 원망과 불평과 증오와 미움과 같은 잡초들이 말씀을 덮어 버립니다. 그래서 말씀이 열매를 맺지 못함으로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걸 제거하고 이겨야 합니다. 이걸 이기는 방법도 다른 게 없습니다. 더욱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의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능력과 은혜를 덧입어 마귀가 잡초의 씨앗을 뿌리지 못하게 하고 자라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아니 완전히 뿌리째 뽑아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생명의 말씀이 무럭무럭 자라나서 생명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음으로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8절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우리의 심령을 부드럽게 하고 말씀으로 채우고 잡초들을 제거하면 생명의 풍성한 열매를 맺고 그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 심령속에 있는 세상의 온갖 잡다한 것들을 제거하고 진정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 은혜의 말씀, 사랑의 말씀이 무럭무럭 자라난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복되고 귀하고 영광스럽겠습니까? 얼마나 자신의 삶이 윤택하고 부요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의 은총을 가져다 주겠습니까? 주님은 오늘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이러한 삶이 되기를 간절히 촉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의 심령을 부드럽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심령 속에 온전히 뿌리박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심령의 밭에 있는 모든 잡초들을 제거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진정 주님의 인도하심과 성령님의 역사하심 가운데 오직 옥토와 같은 마음으로 주님과 동행할 때에 여러분의 심령 속에서 생명의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나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면서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갈 수 있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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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예배설교] 이 세대를 바라보시는 예수님

 

 

 

누가복음 19장 41∼44절 
성령으로 거듭나 변화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눈물을 아는 중보자, 곧 예배자입니다. 변화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부활 생명, 부활 영광의 모습을 보는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바뀝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 땅을 바라보시며 보좌 위에서 흘리는 하나님의 생명수(눈물)를 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성을 보고 우셨습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41절)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에 들어오실 때 많은 사람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습니다. 그들은 “호산나, 찬송하리로다”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환영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우신 겁니다. 눈앞에 펼쳐진 예루살렘성은 수많은 사람으로 온통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는 메시아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주님을 나라를 세울 왕으로 오해하고 환영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 보시기에 얼마나 안타깝고 속상하셨겠습니까.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면 우리도 예루살렘성 사람들과 똑같이 행동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다윗왕 때부터 예배와 기도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눅 19:42)

죄를 회개하면 참자유와 소망이 되시는 예수님이 오십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게 되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계속적인 외침에도 불구하고 죄가 잉태한즉 사망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결국 재앙이 되어 예루살렘이 무너진 것입니다.

지금 이 세대는 어떻습니까. 교회의 모습에서, 하나님이 세운 지도자와 교수, 성도들의 모습에서 빛의 자녀로서 열매가 나타나고 있습니까. 주님은 오늘도 계속적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기회를 주시고 계십니다. 주님은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살전 5:22).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의 모습은 크게 두 가지로 구별됩니다. 그것은 변화 받지 못한 육의 사람과 변화 받은 성령의 사람입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 5:19∼21)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2∼2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예수님은 이 땅을 바라보시면서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다. 이제부터라도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립시다. 하나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구별된 거룩한 성도가 되어 시대를 분별하고 생명을 선포합시다. 그런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서윤석목사(미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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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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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절 설교 -  감사하는 삶    Thanksgiving preaching

 

 

 


제 목 : 감사하는 인생

말 씀 : 시100:1~5

1.자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현대를 ‘더(more)의 시대’라고 합니다. 더 많은 돈, 더 좋은 직장, 더 좋은 차, 더 좋은 집, 더 많은 지식, 더 날씬한 몸매, 더 젊고 예쁜 얼굴 등등 현대인들은 끊임없이 ‘더, 더, 더’ 타령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더 더 더’가 언제 나오는 소리인지 아십니까? 음주 측정할 때 하는 소리입니다. 술 먹은 사람은 어찌하든지 음주측정기를 안 불려고 하지요. 어쩔 수 없이 불때도 알콜 농도가 적게 나오게 하려고 살짝 불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경찰 아저씨가 더 불라고 더 더 더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더 더 더와 음주측정 할 때 더 더 더는 좀 다른 차원의 더더더이긴 합니다만 여하튼 ‘더, 더, 더’하는 소리는 결코 좋은 소리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건 뭔가 모자란다는 뜻이거든요. 뭔가 모자라니까 자꾸 ‘더 더 더’하게 되고 그렇게 자꾸 더더더하다보면 결국 감사도 기쁨도 은혜도 누리지 못하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시기와 질투와 원망과 불평과 갈등과 싸움을 유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사람들이 자꾸 더 더 더 하며 살아가니까 많은 것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행복하지 못한 것입니다. 옛날에는 쌀밥만 먹을 수 있어도, 아니 때로는 죽이라도 한 그릇 먹을 수 있으면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정말 멋지고 근사한 곳에서 진수성찬을 먹으면서도 감사 할 줄을 잘 모릅니다. 오히려 맛이 있네 없네 하면서 타박을 하기가 일쑤입니다. 또 옛날에는 자전거만 타고 다녀도 얼마나 근사했는지 모릅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 우리 집 앞 신작로로 한 멋쟁이 신사 아저씨가 삐까뻔쩍 빛나는 신사용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곤 했는데 저는 그게 얼마나 멋있어 보였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지금은 좋은 자가용을 타고 다녀도 감사가 없고 더 좋은 것을 바라봅니다. 옛날에는 초가삼간에 살아도 먹을 것만 있으면 행복했었는데 지금은 30평 40평 50평 호화주택에 살면서 만족하지를 못합니다. 여러분, 얼마나 바보 같은 일입니까?

여러분, 우리는 이런 바보같은 인생이 되면 안됩니다. 우리는 작은 일에도 감사하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적은 것을 가지고도 주어진 것에 행복할 줄 아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자꾸만 더 더 더 하는 인생은 아무리 많은 것을 주어도 늘 불만 불평 속에서 자신도 불행하고 남도 불행하게 만들고 하나님 마음도 아프게 하는 어리석은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딤전6: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보십시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 알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우리가 받은 바 은혜가 얼마나 많은 지를 되새겨보며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려고 하는데 오늘 말씀을 함께 되새겨보며 저와 여러분은 작은 것에서부터 감사할 줄 아는 삶을 통하여 자신도 행복하고 남도 행복하게 만들고 하나님도 기쁘시게 해드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교회 안에 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감사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지만 뭐니뭐니해도 우리가 지금 교회 안에 앉아 있다는 것만큼 감사한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교회 안에 앉아 있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여러분, 보십시오. 감사함으로 그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그 문이란 물론 성전 문입니다. 즉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성전으로 들어갈 때에 큰 감사와 기쁨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이 교회 문을 드나들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가 예수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 찬양하며 이 땅에 사는 동안에서 주님의 주시는 생명의 은총을 누리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특권을 갖게 되었다는 것, 이보다 더 감사하고 기쁘고 행복하고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 여기에 교회가 세워지지 않았으면 어쩔 뻔 했습니까? 교회가 세워졌어도 우리가 마음이 완고하고 강퍅해서 복음을 거부했다라면 어쩔 뻔 했습니까? 그러면 영원한 고통가운데 처할 수 밖에 없었던 비참한 인생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예수님을 알고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얻어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얼마나 다행스럽고 감사하고 영광돌리고 찬양해야 할 일입니까?

제가 제법 오래 전에 대구의 한 큰 마트 같은데 들어갔다가 물건을 좀 사 가지고 계산을 하려고 하는데 회원권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없다고 하니까 여기는 회원권이 있어야 물건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으로 ‘야, 이 놈들아 물건만 팔면 되지 무슨 얼어 죽을 회원권이냐? 회원권 없으면 내 돈 주고 물건도 못 사냐?’ 그러고 그냥 놔 둬 버리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좀 창피하기는 했습니다.

즉 세상에서도 뭔가 그럴듯한 곳에 들어가려면 출입증이나 회원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청와대나 안기부나 기타 중요한 공공 기관은 물론 말할 것도 없고 지금은 웬만한 큰 회사에도 들어가려면 출입증이 있어야 되고, 무슨 큰 아파트에도 들어가려면 무슨 카드 같은 게 있어야 들어가고, 골프장이나 기타 그럴듯한 곳에 다니려면 회원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너무나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의 출입증이 있는 것입니다. 영광의 나라의 시민권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사실 따지고 보면 별 것도 아닌데 뭐 좀 잘난 곳에 들어가려면 돈을 내든지 무슨 시험을 치든지 뭐 이것 저것 따져 묻고 난린데 하나님께서는 그저 우리 믿음 하나 보시고 천국 출입증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시민권을 내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세상의 무슨 출입증, 허가증, 회원권 그까짓 별거 아닙니다. 그런 것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뭐 대단한 특권이라고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여길지 모르지만 그래서 뭐 얼마나 행복하고 기쁘고 영광스럽겠습니까? 까짓것 하루 아침에 다 다 날아갈 것들인데.. 그것만 믿고 까뿔다가는 영원한 진노가운데 처할 수 밖에 없는데..... 그러나 천국 시민권은 완전히 다릅니다. 우리에게 완전하고 영원한 영광과 기쁨과 평안과 소망을 보장합니다. 그 어떤 어둠의 세력으로부터도 완전히 보호해 줍니다. 그야말로 완전하고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보장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초특급 출입증, 허가증, 시민권을 가지고 있으니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주님의 몸된 교회 안에 들어와 앉아서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영광 돌리고 할 수 있는 이 일이 얼마나 굉장하고 대단하고 영광스러운 일인지를 늘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우리를 길러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선 감사할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이고, 다음에 감사할 것은 좋으신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께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 뿐 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도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풍성하게 채워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3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시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는 하나님의 이름이고 하나님은 신, 전능자라는 뜻입니다. 즉 여호와만이 유일하시고 전능하신 참 신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전능하신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예비해 주시고 인도해 주셔서 우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시고 기르시는 주인이고 우리는 하나님의 어린양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과 베풀어 주시는 은총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유일한 창조주이시며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분으로 하나님께 지으시지 않고는 우주만물을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과 때를 따라 채워주시는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단 한순간도 살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셔서 존재하고 나아가 생명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심으로 존재가 가능한 것입니다. 먹고 입고 잠자고 쉬고 활동하고 하는 모든 행위가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좋은 옷에 좋은 집에 좋은 차에 좋은 것을 먹으며 살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물론 우리도 힘써서 일 했지만 우리가 힘써 일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생명도 지혜도 능력도 없습니다. 숨조차 쉴 수 없습니다. 아무리 뼈 빠지게 일해도 태양과 물을 주시지 않으면 도로 아미타불입니다. 땅이 없으면 헛일입니다. 그러니 어찌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반포지효(反哺之孝)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까마귀가 어미가 늙으면 다 큰 새끼들이 먹이를 먹고 돌아와서는 도로 뱉어서 어미에게 먹여 준다는 데서 유래되었습니다. 이 말이 사실인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까마귀는 어미새가 늙어 힘이 없어 스스로 먹이를 구할 수 없게 되면 다 자란 어른이 된 새끼 새가 먹이를 잡어 먹고 와서 도로 뱉어서 어미의 입에 넣어 준다고 합니다. 이게 반포(돌이킬反, 먹일哺)입니다. 먹었던 것을 도로 뱉어서 먹여준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새끼가 먹었던 것을 도로 뱉어 어미 새에게 먹여줄 만큼 지극 정성으로 부모님을 섬기는 반포지효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한갓 미물에 불과한 까마귀도 이렇듯 부모를 섬길 줄 아는데 인간이 부모님을 섬길 줄 모른다면 미물인 까마귀만도 못한 인간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하나님께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 육신의 생명을 주시고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고 성장해서 스스로 살아갈 수 있을 때까지 온갖 사랑과 수고와 희생을 아끼지 않으신 부모님도 당연히 정성으로 섬겨야 하지만 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우리를 직접 창조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고 생활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께는 얼마나 더 그래야 하겠습니까?

여러분, 사실 육신의 부모는 어느 정도 성장하면 우리 곁에 계시지 않아도 우리가 살아가는데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육신의 부모는 우리가 다 성장할 때까지만 키워주시면 그것으로 의무를 다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성장을 하고 백살 천살 만살이 되어도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과 은혜가 없이는 단 순간도 살 수 없습니다. 그러니 육신의 부모에게 감사하며 섬기는 것이 인간의 마땅한 본분이라면 모든 인류와 우주만물의 아버지가 되시는, 우리가 살아 숨쉬는 모든 동안에 아니 지금 여기서 살아 있는 동안만 아니라 영원한 천국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께는 얼마나 더 감사하며 극진히 섬겨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물론 육신의 부모님께도 감사드리며 잘 섬기시되 특별히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며 우리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필요한 모든 것을 만들어주시고 섭리하심으로 이와같이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하신 하나님께 진정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더욱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음을 감사하고, 동시에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하는데 그러나 감사할 것이 그 뿐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사람에게도 감사하고, 동물에게도 고마워해야 하고, 식물에게도 고마워해야 하고 그밖에 땅, 태양, 물 등 우리 주변의 모든 것에 고마워해야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모두가 얼마나 고마운 존재들입니까? 사랑하는 가족이 얼마나 고맙고 소중한 존재입니까? 가족이 없으면 얼마나 삭막하겠습니까? 아니 가족이 없으면 내가 있지도 못하지요. 또 이웃도 얼마나 고맙고 소중한 존재입니까? 내 주변에 이웃이 하나도 없으면 얼마나 적막하겠으며, 무엇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비록 혹시 사람들 보기에 번듯하지 못하다해도 직장이 얼마나 고마운 존재입니까? 우리가 매일 아무렇지도 않게 먹는 밥은 얼마나 고맙습니까? 마시는 물은 얼마나 고마운 존재입니까? 어디 가다가 음식 한 그릇 사먹을 때 그 식당이 얼마나 고마운 존재입니까? 좀 그렇긴 합니다만 심지어 화장실에 앉아 마음 놓고 볼일을 볼 수 있는 것도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여러분, 우리는 이와같이 감사의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감사의 습관을 가진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감사의 습관은 자신도 기쁘게 하고 남도 기쁘게 합니다. 그래서 건강과 행복도 가져다 줍니다. 긍정의 에너지를 발산함으로 힘차게 능동적으로 일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러나 불평의 습관은 자신도 남도 어둡게 만듭니다. 부정과 어둠의 에너지를 방출하여 자신도 힘들게 하고 남도 힘들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살전5:16~18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보십시오. 항상 기뻐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유는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우리가 얼마나 놀라운 은총 속에 살고 있는지 다시 한번 기억하며 정말 감사의 영성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의 자녀가 되어 이와 같이 마음껏 주님의 몸된 교회를 출입하며 예배드리며 영광을 돌리며 주님의 은총을 누리고 있음에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은총임을 되새기며 우리를 길러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인도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또한 여러분의 가족과 이웃과 동료와 친구와 여러분 곁의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 주변의 모든 물건들에게까지도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대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심령이 그야말로 감사로 넘쳐날 때에 기쁨과 평안과 행복이 가득하고 주께 영광을 돌리고 세상에 행복을 가져다주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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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 주일낮예배설교 /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말씀 : 엡2:1~9

제목 : 지극히 풍성한 은혜

1.놀랍고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여러분도 잘 아시는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이런 우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토끼가 길을 가다가 함정이 있어서 내려다보았더니 함정에 빠져 며칠을 굶어 다 죽어가는 늑대 한마리가 제발 나 좀 구해달라고 애걸복걸을 합니다. 그러자 토끼가 너를 구해 주면 날 잡아 먹을 것이 아니냐며 거절을 하자 늑대는 어떻게 생명의 은인을 잡아먹을 수 있겠느냐며 그런 배은망덕한 일은 절대 없을 테니 제발 한번만 살려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토끼는 늑대가 너무 불쌍해서 기다란 나무를 내려 주어 늑대는 겨우 함정 밖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함정 밖으로 나온 늑대는 갑자기 태도가 돌변하더니 나는 지금 너무 배가 고파 다른 사냥감을 구하기도 어려워 어쩔 수 없이 너라도 잡아먹어야겠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토끼가 세상에 생명의 은인을 잡아먹는 이런 배은망덕한 일이 어디 있느냐며 따졌지만 도무지 통하지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때 마침 여우가 지나가기에 토끼가 여우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판결을 좀 해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여우는 정확한 상황을 알아야 공정한 판단을 할 수 있으니 처음부터 상황을 재현해 보라고 합니다. 그러자 늑대가 함정에 뛰어 들어가서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함정에 빠져서 이러고 있을 때……” 그러자 여우는 늑대의 말을 조금 듣다가 말했습니다. “너는 거기서 계속 갇혀 있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토끼와 함께 떠나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뜻은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만 배은망덕한 자가 되면 도로 함정에 갇힌 늑대와 같은 신세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을 때는 바로 함정에 빠진 늑대와 같은 처지에 있었습니다. 죄와 무지의 깊은 함정 속에 빠져 아무리 발버둥쳐도 도무지 빠져나오지 못하고 결국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이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그 죄와 무지의 함정, 지옥의 함정에서 우리를 건져 주신 것입니다.

오늘 1~3절을 보십시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보십시오. 우리가 과거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에는 허물과 죄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공중 권세 잡을 자르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삶으로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 얼마나 무시무시한 말입니까? 하나님의 진노를 당할 수 밖에 없는 그래서 영원토록 형벌을 받을 수 밖에 없는 끔찍한 인생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모르는 인생의 현주소요,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때의 실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런 우리를 불쌍히 여겨 찾아와 주시고 구원해 주심으로 이제는 반대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영원토록 할렐루야 찬양하고 감사하며 빛과 같은 은혜를 누리는 특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얼마나 감사하고, 얼마나 다행입니까? 얼마나 은혜에 보답하며, 얼마나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실상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단 한순간도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나마 죄가운데 빠져 자연 상태로는 허물과 죄로 진노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찾아와 그 죄의 함정 속에서, 사망의 함정 속에서, 지옥의 함정 속에서 건져 주셔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려드리며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갈 뿐 다른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말 그대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졌는데,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얻었는데 다른 무슨 필요한 것이 있겠습니까? 물론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필요한 것들이 있는 있죠. 그러나 그런 것들은 그렇게 대단한 것들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실 세상에서 필요한 것들은 이미 있어야 할 만큼 주셨습니다. 그러면 됐지 우리가 뭘 그렇게 더 바랄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본질상 진노의 자녀에서 구원받아 거꾸로 영광의 자녀가 되었다는 이 엄청난 사실을 기억하며 정말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돌려드리며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좀더 구체적으로 과거의 우리의 상태는 어땠습니까? 어떻게 그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까? 이 엄청난 은혜를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2.허물과 죄로 죽은 인생의 모습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지 못할 때는 참으로 처참한 인생이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1절을 다시 봅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허물과 죄로 죽은 존재였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죽음은 물론 육체적 죽음이 아니라 영적 죽음, 즉 둘째 사망입니다. 즉 지옥에 처할 인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랬느냐? 허물과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허물이란 미끄러졌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허물은 의도적으로 잘못한 것이 아니라 실수로 잘못한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죄는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던 목적에서 벗어난 모든 것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부합된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모든 것들이 곧 죄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허물과 죄란 고의든 실수든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지 않는 모든 생각과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는 모두가 이런 죄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궤계에 빠진 이후로 인간에게 대물림하여 내려온 원죄로 자연인으로의 인간은 누구도 이것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허물과 죄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이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제 아무리 법 없이도 살 만한 천사 같은 사람이나 성인군자라도 허물과 죄가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인생의 도와 목적을 알 수도 없고, 알아도 그것을 따라 살아갈 능력도 없습니다. 그래서 영원한 형벌에 처할 수 밖에 없는 인생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인생은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였는데 그 허물과 죄가운데 있는 인생의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앞에서 보았던 2,3절을 다시 봅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이 말씀에 보면 허물과 죄로 죽은 인생이 살아가는 모습 세가지를 말씀하고 있는데 첫 번째는 세상 풍조를 따른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것이고, 세 번째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산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세상풍조를 따른다는 것은 한마디로 세상의 물결 따라 유행 따라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로 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와 선과 의가 인생이 살아가야할 방향이요 목적이요 기준이 되어야 하는데 그런 것들은 뒷전이고 그냥 당장 눈에 보기에 편하고 좋고 유리한대로 세상의 물결을 좇아 흘러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 풍속이 다 나쁘고 악한 것은 아닙니다. 그 중에는 좋은 전통도 많고 미풍양속도 많습니다. 나름대로 진리와 선과 의를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또 사실 세상의 문명의 이기나 문화나 과학이나 예술이나 스포츠나 우리가 함께 공유하고 누리고 따라가야 할 것도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유감스럽게도 세상에는 너무나 왜곡된 풍조가 만연되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돈과 명예와 권세와 세상 즐거움을 추구하며 인본주의와 개인이기주의와 물질만능주의 속에서 자기 마음과 생각과 지식과 경험과 이성을 따라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로 가는 모습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것들이 눈에 좋게 보이고 유익이 되고 기쁨이 되고 편하고 자유를 줄 것처럼 여기지만 그러나 이런 것들은 결코 우리에게 진정한 생명과 자유와 평안과 기쁨을 주지 못합니다. 도리어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함으로 생명의 은총을 빼앗아 가버리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삶에 대하여 계속 경고를 보내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죄와 무지속에 있는 대부분의 인생들은 이걸 모르고 자기가 보기에 옳은 길로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세상의 대세가 되어버리고, 대세가 되니까 더 많은 사람들이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자유의 길, 평화의 길을 버리고 엉뚱한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리에서 구원받아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더 이상 그런 허물과 죄로 죽은 인생들이 따라가고 있는 세상의 풍조에 휩쓸려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가 생각하기에 옳은 것이 아니라 세상 많은 사람들이 달려가는 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고 의롭고 바른 것을 따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당연히 거기에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자유와 평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결코 세상의 물결을 따라, 유행을 따라, 가치를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의 말씀안에서 주님과 동행할 때에 진정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온전히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공중권세 잡을 자를 따른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한마디로 마귀를 따른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세상 풍조를 따르는 모든 것이 마귀를 따르는 일이지만 특별히 여기서는 온갖 종류의 우상을 섬기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있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때 인생은 얼마나 우지하고 어리석고 바보 같은 짓을 합니까?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어렸을 때만해도 떡을 하면 제일 먼저 한 접시 담아서 장독대로 가서 항아리 위에 올려놓곤 했습니다. 또 달에게 빌고, 해에게 빌고, 나무에다 빌고, 마을 앞 한길을 지나다가 마귀 어귀에 있는 서낭당에 돌을 하나 쌓고 가곤 했습니다. 나무를 베면 귀신이 노해서 화를 당한다고 나무도 못 베고, 못도 아무데나 못 박고, 결혼이나 이사도 제 맘대로 못 다니고 귀신한테 물어보고, 사랑하는 자녀의 이름도 제 맘대로 못 짓고 귀신한테 물어보고....... 얼마나 무지몽매한 일입니까? 이게 바로 마귀의 하수인이 되어 귀신을 섬기고 있는 어리석은 인생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게 마귀의 하수인이 되어 꼼짝 못하고 종노릇하다가 결국 영원한 형벌가운데 처하게 되니 이 얼마나 가련하고 불쌍하고 어리석은 인생의 모습입니까?

또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간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진리니 생명이니 의니 정직이니 성실이니 이런 것들은 뒤로 밀려나 있고 오직 육체의 욕심을 채우는 길로 달려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이게 동물과 다른 게 뭐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게 뭡니까? 영이 있고 이성 즉 정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영은 영적인 옳고 그름을 잘 판단해서 섬길 자를 섬기고 버릴 것을 버려야 합니다. 이성은 정신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해서 옳은 일을 택하도록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육신은 우리의 영과 혼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산다는 것은 그런 영과 이성의 지배를 벗어던지고 오직 육신의 유익만을 구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영과 이성이 없는 동물과 같은 삶이고, 하나님의 고위한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생이 짐승과 같은 삶을 산다며 결국 하나님에게서 끊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6:3절 하반절에서는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육신이 되었다. 이미 육신을 가지고 있는데 뭘 또 육신이 됩니까? 영이 완전히 죽어 오직 육의 원리를 따라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이신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겨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언젠가 뉴스에 보니까 강원랜드 카지노 주변에서 집에도 못가고 빌빌 거리고 있는 사람들이 7천명인지 몇 명인지 된다고 합니다. 그 사람들은 카지노에서 도박으로 보통 몇 억씩 날린 사람들인데 그래서 집에 가지 못가고 가족도 가정도 다 잃어버리고 쪽방 같은데 살며 식당 등에서 일하며 겨우 먹고 살면서 그나마 돈 몇푼 모이면 또 카지노에서 다 날리고 그러면서 산답니다. 참 기가 막힌 노릇 아닙니까? 이게 바로 영과 이성이 마비된 인생들의 모습이지요. 어디 이 뿐이겠습니까? 영과 이성의 지배를 받지 못하고 육신과 물질의 종이 되어 온갖 짓들을 다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고 과거에 바로 그런 자들이었는데 이제는 거기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과 혼의 지배를 받으며 주님과 동행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더 이상 세상 풍조를 따라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를 따르는 삶을 살아감으로 더욱 주님이 주시는 은혜의 충만함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인생

여러분, 우리는 정말 생각하면 할수록 감사할 것 뿐이고 영광 돌릴 것 뿐입니다. 우리는 정말 죽을 때까지 아니 영원토록 감사하며 기뻐하며 영광을 돌리며 찬양하며 살아도 모자라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도 앞에서 말씀드린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권세 잡은 자를 따르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던 사람이었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그것을 깨닫게 하시고 예수님을 알게 하시고 그래서 본질상 진노의 자녀에서 벗어나 영광의 나라를 소유한 백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종종 말씀드리지만 얼마나 다행입니까? 얼마나 감사합니까? 내가 만약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면,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고 끔찍하고 몸서리가 처지지 않습니까? 여러분, 앞에서 보았던 3절에서 뭐라고 그랬습니까?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는 것입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니 얼마나 두렵고 끔직한 말씀입니까? 어떤 분들은 별로 느낌이 없는 것 같은데 여러분, 상상해 보기도 싫은 일이지만 상상해 보십시오. 이 몸이 죽고 싶어도 영원히 죽지도 못하고 영원히 활활 타오르는 불구덩이 속에서 살아야 된다면 그 고통과 아픔과 비참함과 끔찍함이 얼마나 하겠습니까? 어떤 분들은 이걸 무슨 상상 속의 이야기라고 착각하는데 천국과 지옥은 상상의 세계가 아니라 실제 상황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우리는 반드시 둘 중의 한 군데로 가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는 거기서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냥 불구덩이에서 구원받은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반대되는 세상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완전히 영원히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행복과 만족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만이 넘치는 천국 백성이 된 것입니다. 그것도 우리가 무슨 잘나고 똑똑하고 의로워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입니다.

오늘 5절과 8절 말씀 보겠습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5절)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8절) 여러분, 이게 웬 떡입니까? 웬 은혜입니까? 웬 사랑입니까? 웬 축복입니까? 우리가 그럴만한 자격이 있습니까? 그럴만한 공로가 있습니까? 그럴만한 지혜와 능력이 있습니까? 그럴만한 선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죄과대로 갚으셨다는 우리는 속된 말로 찍소리도 못하고 영원한 형벌에 처할 수 밖에 없었던 인생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 작은 믿음 하나 보시고 우리를 본질상 진노의 자녀에서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며 그 은혜에 만분의 일이라도 갚기 위하여 애써야 하겠습니까?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의 아주 유명한 시조가 있지 않습니까? 먼저 이방원이 하여가(何如歌)를 지어 정몽주를 회유하려고 합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 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누구의 세상인들, 세상이 어떠한들 그게 뭐가 중요하냐? 그냥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 나와 손잡고 100년의 권세를 누려봄이 어떠하냐? 뭐 그런 정도의 뜻이겠지요. 그러자 정몽주가 그 유명한 단심가(丹心歌)를 지어 답을 하지요.

이 몸이 죽고 죽어 일 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 가실 줄이 있으랴

이 몸이 백번을 죽어도, 백골이나 넋이 있든 말든 임금을 향한 일편단심은 변할 수 없다는 거죠. 그리고 결국은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철퇴에 맞아 순교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잠시잠깐 세상에 왔다가 사라져 갈 세상의 임금을 위한 충신의 자세가 이러하다면 영원토록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신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마음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세상에서 은혜를 입은 임금의 은혜를 이와 같이 죽음으로 갚았다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우리를 구하여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주신 이 엄청난 은혜를 받은 우리는 어떻게 주님의 은혜에 보답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이 귀한 말씀을 묵상하며 정말 저와 여러분은 우리가 얼마나 엄청난 은혜를 받은 존재인지, 우리가 얼마나 존귀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이름을 얻게 되었는지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리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정말 세상의 왜곡된 풍조나 공중권세 잡은 자나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만을 따라 주님과 동행할 때에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 물로 지금 여기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그 놀라운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평안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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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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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예배설교 (추수감사절예배설교) 하나님의 은혜라

 

 

 


제목: 하나님의 은혜라.

성경: 고전 15:9-10

1517년, 마틴 루터가 독일에서 종교개혁을 시작한 이후 그 영향은 곧바로 인근 유럽지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영국에서는 독일에서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난지 약 20년뒤인 1534년부터 종교개혁의 물결이 일어났습니다. 그리하여 신교와 구교가 엎치락뒤치락하다가 1558년에 즉위한 엘리자스(Ⅰ세)여왕에 의해 영국국교회제도가 기틀을 잡게 됩니다. 영국국교회는 제도적으로는 로마카톨릭교회를 따르고, 신앙의 내용에 있어서는 개신교를 따르는 신교와 구교의 절충형 형태의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영국국교회의 모습에 반대하여 일어나 운동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청교도 운동이었습니다. 이 운동은 과거 로마 카톨릭 교회의 부패한 잔재를 완전히 버리고 루터와 칼빈의 정신을 따라 철저히 영국교회를 개혁하려고 일어났던 운동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개인의 중생과 성화를 중시하며, 가정에서의 기도생활, 사회에서의 엄격한 도덕생활과 절제의 생활로 참다운 신앙생활을 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이들의 이러한 태도는 결국 영국국교회의 탄압을 받게 되어 일부는 국내에서 끝까지 싸우다가 죽기도 하고 다른 일부는 유럽대륙으로 이주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그들이 꿈꾸는 신앙의 자유를 누리며, 참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상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102명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 미국을 향하여 출발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1620년 9월 16일의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몇 개월간의 천신만고 끝에 드디어 1621년 1월 미국의 동부해안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러나 천신마고 끝에 도착한 그땅에는 그들을 반겨줄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니 반겨주기는커녕 그들은 그해 겨울이 지나기 전에 그러니까 불과 2-3개월동안에 질병과 인디언의 습격을 받아 반수 이상이 죽고 마는 불행을 당하고 맙니다. 그러나 그러한 악조건속에서도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속에서 필사적인 개척자정신을 발휘하여 그 해 가을에는 어느 정도의 농산물을 수확하게 됩니다. 그들은 첫열매를 거두어 들이고 나서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울며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며 감사제를 지냈습니다. 이것이 유래가 되어 오늘날 교회에서는 11월 셋째 주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주일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은 온갖 어려움속에서도 수확을 할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했던 청교도의 정신을 따라서 지금까지 우리를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함께 기쁨을 나누는 절기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바울의 고백은 우리가 무엇 때문에 누구에게 감사해야 하는지를 잘나타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고 있는 바울의 감사의 내용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고백은 자신의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볼때, 걸어온 자취자취 돌아볼 때, 그리고 현재 자기의 위치를 생각해 볼 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것이라고하는 감사와 감격에 벅차 외친 영혼의 고백이었습니다.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이러한 바울의 감사가 우리 모두의 감사가 되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바울은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감사했을까, 왜 우리는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같이 생각해보고자합니다.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애창하는 찬송가 405장의 작시자는 죤.뉴턴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죄라는 죄는 안지어본 죄가 없을 정도로 많은 죄를 지었던 탕자였습니다. 노예상인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후 후에 목사가 되어 자신과 같은 엄청난 죄인을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격에 벅차 읊은 시가 바로 저 유명한 “Amazing grace”입니다.

“나같은 죄인 살리신 주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은혜 고마와

나처음 믿은 그시간 귀하고 귀하다.

이제껏 내가 산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찬양 하리라.”

우리의 지난 세월을 돌아봅시다. 지금 우리의 주위를 둘러 봅시다. 목석이 아니라면, 소나 말과 돼지같은 짐승이 아니라면 우리는 정말 감사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나를 낳아 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이 계시니 감사합니다. 형제자매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가 있습니다. 머리둘 보금자리가 있습니다. 자녀가 있으니 감사합니다. 땀흘려 일할 수 있는 일터가 있습니다. 사시사철 아름다운 계절이 있습니다. 저 눈부신 태양이 있습니다. 맑은 물, 신선한 공기. 그저 감사 감사할 뿐입니다. 미우나 고우나 우리의 이웃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웃이 있다는 것 정말 감사하십시오. 더더구나 사랑하는 주의성도들이 여러분 곁에 있다는 것 정말 감사하십시오. 감사함으로 사랑하십시오. 여러분이 만약 저 무인도에 혼자 살게 되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아마 며칠도 못 살고 미쳐서 죽을지도 모릅니다. 정말 우리는 감사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감사의 조건들이 하나하나 모여 오늘의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내가 이땅에 이렇게 서 있는것, 나혼자 가능했을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참으로 얼마나 많은 다른 사람들의 은혜를 입고 사는 존재인지 모릅니다. 설령 여러분곁에 별로 달갑지 않은 이웃이 있더라도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비 신앙인들과 다른 차원의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감사는 한단계 높은 차원의 감사입니다. 그저 우리가 복받고, 물질적으로 무언가 척척 풀려 나갈때만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우리가 남들처럼 지위가 높지 않다고 해도, 돈이 남들처럼 많지 않다고 해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우리의 주위에는 감사해야 할 일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정도로도 우리의 감사의 조건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한단계 더 높은 수준의 감사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속에 나타난 바울의 감사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는 고전 9:19-22에 고백했던 것처럼 때로는 자존심도 다팽개치고 살았습니다. 어리석다고 비웃음을 당하며 살았습니다. 미련하게 살았습니다. 주변도 없고 고집도 없고 속도 없는 무골충과 같이 살았습니다. 억울하게 핍박당하며 살았습니다. 죽을 고비를 몇번이나 넘기며 살았습니다. 왜그랬을까요? 무엇이 그 똑똑했던 바울을 그렇게도 바보로 만들었을까요? 그 이유는 오직 하나, 하나님의 사랑때문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은총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을 생각할 때 그는 “내까짓게 뭔데...”라는 고백을 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죽어라고 자기를 포기하고 살았지만 하나님의 고마우심에 비해본다면 억만분의 일도 보답되지 않습니다. 그 은혜와 사랑이 너무너무 고마와 “어떻게 하면 보답하고 살까?”그것만 생각하고 살다보니 “나”라는 존재는 다 죽어 없어지고 주님만 남게 되었습니다. 고후 11:22-27까지 자기의 좋은 조건을 다 열거하면서 그러나 “이까짓게 뭔데...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과 고마우심을 생각하면 이제는 자신이 박살이나고 가루가 된다해도 아무런 여한도 없었습니다. 억만분의 일이든 보답할 수만 있다면 자기 한 몸 불속에라도 던질 각오가 되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왜요? 나의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당신의 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우리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망극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 못박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를 살리기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버리신 우리 주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무나 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하며 찬양해야 합니다. 감사찬양하며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는 정말 간사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아서 불평을 할 시간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아니 감사할일이 이렇게도 많은데, 감사할 것을 찾아도 다 찾지 못할판에 왜 불평거리를 찾아야 한단 말입니까?

지금 저 밖을 잠시 내다 보십시오. 하늘을 한 번 우러러 보십시오. 저 신비로운 산천을 한 번 둘러 보십시오.돌아보면 볼수록, 생각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것이 없습니다. 창조로부터 시작해서 오늘날까지 그 신비한 경륜가운데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경이로움을 한 번 보십시오. 저 에머랄드빛 하늘을 창조하신 분은 누구십니까? 저 화창한 봄날을 주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꽁꽁 얼어붙은 땅에 묻혀 있던 그 작은 씨앗하나에 다시금 싹을 틔우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저 신비롭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이 가을의 풍요로운 결실을 주시는 분을 누구십니까? 누가 저 따사로운 태양빛을 주고 계십니까?

여러분께서는 저 대자연속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들리십니까?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아니 들을려고 하지 않아도 들려야 합니다. 우리의 지성이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의 이성이 구원받은 이성이라면, 우리의 감성이 구원받은 감성이라면 우리는 한 마리 작은 새의 지저귐을 들으며 거기서 하나님의 찬미소리를 듣습니다. 들녁의 한 작은 들꽃을 보며 거기서 하니님의 신비로운 솜씨를 발견합니다.

탕자가 집을 떠나 허랑방탕할때는 어머니의 사랑을 잘 모릅니다. 고마움도 모릅니다. 밥 한그릇의 소중함도 모릅니다. 그러나 허랑방탕하다가 있는 것을 다 허비하고 돌아왔을 때 그를 맞이하는 따뜻한 어머니의 품에서 탕자는 어머니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허랑방탕할때는 밥은 그냥 밥일뿐이었습니다. 자신이 입고 있는 옷도 그냥 그저 입혀 있는 옷에 불과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모든 것을 허비하고 돌아와서 어머니 품에 안겼을 때 그는 어머니의 밥 한 그릇에 눈물겨운 고마움을 알게 됩니다. 어머니가 깨끗하게 빨아 입히는 그 옷을 입으며, 그는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품에 안겼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서 살때는 저 대자연의 아름다움도 고마움도 제대로 알수 없습니다. 풀 한포기, 꽃 한송이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저 태양이 저 물이 공기가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품에 안긴 사람은 압니다. 구원받은 이성은 거기서 하나님의 찬양소리를 듣습니다. 감사하게 됩니다.

어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그뿐입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나라는 존재가 그렇게 대단한 존재입니까? 나보다 도덕적으로 선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나보다 윤리적으로 깨끗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나보다 점잖고 잘나고 지위 높은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왜 하필이면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와 같은 나를 사랑하십니까? 내가 무엇이 그렇게 하나님께 소중한 존재이기 당신의 아들을 주십니까? 무엇이 내가 잘한 것이 있다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고귀한 생명을 주신단 말입니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슨말을 하겠습니까? 그저 입이 있어 겨우 한마디 할수 있다면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뿐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한마디 뿐이 아니겠습니까?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세계 복음전도대회’가 세계 4,000여명의 대표가 모여서 “성경이 말씀되게 하자”라는 주제를 가지고 열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틀째 저녁 예배에 특별찬송을 위해 한 맹인 여가수가 안내원의 안내를 받으며 무대 중앙에 올라섰습니다. 그리고는 찬송하기 시작합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못하네

저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위에

죄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제로 삼으시고 죄 용서하셨네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이 맹인 가수가 조용히 찬송을 부르는 동안 4,000여 청중들은 감사의 감동에 젖어 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느듯 한사람 한사람씩 감사의 뜨거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거기 모인 모든 대표들은 감사로 성령의 충만함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이 맹인 여가수는 6.25전쟁때 두눈을 잃고 선교사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음악공부를하여 가수가 된 한국인 킴 스윜양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이 맹인가수가 가졌던 그런 감사가 있습니까? 우리는 정말 감사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지구상에 왔다간 사람은 수천억이 된다고 합니다. 그 수천억중의 한 사람인 나,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 수천억중의 한 사람에 불과한 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만큼 그렇게 소중한 존재가 아닙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에게 수천억원이 있다고 가정했을 때 여러분에게 있어서 1원이라는게 얼마나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사실 하나님앞에서 우리는 수천억원중에 1원에 불과한 존재입니다. 나 하나쯤 이 세상에서 없어 진다 해도, 세상은 눈하나도 깜짝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로 그런 나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나를 사랑하셔서 이 아름다운 대 자연을 우리게주셨다는 말씀입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 수천억중의 한 사람에 불과한 나를 당신의 자녀로 인치셨다는 말씀입니다. 지옥의 형벌에 나를 살리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수가 있단 말입니까?

한 사형수가 있다고 합시다. 사형날자가 잡혀 이제 철장안에서 죽을날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이제는 땅도 하늘도 봄 여름도 부귀 영화 권세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이제 그 사형수에게 있어서는 전혀 무용지물들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특사로 무죄방면되었다고 합시다. 그가 감옥에서 나오는 순간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는 아마도 엎드려 땅에 입이라도 맞추지 않겠습니까? 하늘을 우러러 보며 환호성을 지르지 않겠습니까? 길가에 피어 있는 꽃은 얼마나 아름다워 보일까요? 그렇습니다. 그가 감옥에서 나오는 순간 그에게 펼쳐지는 모든 것에는 이전에는 그가 미쳐 몰랐던 엄청난 의미가 부여 될것것입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실 모두가 한 사형수였습니다. 바로 그래서 예수께서 오셨고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있어서 세상의 의미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구원받기 전과 구원받은 후에는 모든 것이 다른 의미다 부여됩니다. 아니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전에는 구원받지 못한 이성 때문에 알지 못했던 것을 구원받은 이성의 활동으로 비로소 알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제는 구원받은 이성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이제는 구받은 지성의 눈으로 생각하십시오. 이제는 구원받은 감성의 눈으로 기쁨을 누리십시오. 감사하십시오. 지금까지 여러분의 감사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돈벌었을 때만 감사하는 사람, 돈 잃으면 감사하지 못합니다. 건강하다고만 감사하는 사람, 건강 잃었을 때는 감사하지 못합니다. 성공했다고만 감사하는 사람, 실패하면 감사 못합니다. 내 소원들어주셨다고만 감사하는 사람, 내소원이 안이루질때는 감사하지 못합니다.

진정한 감사는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단순히 풀한포기를 바라보며 감사하며 찬양하는 것입니다. 한끼의 밥을 먹으면서 진정으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생각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 그래서 그 희생을 통하여 나를 살리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범사에 감사할수 있습니다. 우리는 승화된 감사를 통하여, 진정한 감사를 통하여 기쁨의 삶을 살수 있습니다. 감격의 삶을 살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은혜를 정말이지 마음속에 깊이 되새기며 진정한 감사와 사랑과 기쁨을 누리는 여러분의 삶이 되어지시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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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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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주일  추수감사절설교  감사생활(합3:16-19)

 

 

 

말씀 : 합3:16-19

 

제목 : 전천후 감사생활

 

1.감사의 마음으로 채워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중에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식도 없고, 꾀도 없이 힘만 믿고 살아가려면 육신이 고달프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물론 이 말도 맞는 말이긴 합니다만 그러나 저는 인생을 고달프게 하는 것은 더 근원적인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그 말을 이렇게 고쳐보았습니다. 「마음이 나쁘면 평생을 고생한다」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사실 지식이나 꾀가 없어서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그보다는 마음을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하여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가 더 많지 않습니까? 또 설령 지식이나 꾀가 좀 부족해도 마음만 바르게 먹으면 우리는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아담과 하와를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낙원을 창조하셔서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사실 머리를 쓸 필요도 없었고, 뼈빠지게 일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먹고 입고 잠자고 살아가는 모든 것들이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었으니까요.

 

입는 것은 처음부터 아예 걱정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요? 벌거벗고 살았으니까요. 물론 먹거리도 사방 천지에 쌓여 있었고, 잠자리도 염려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냥 아무데나 누우면 거기가 안방이었습니다. 지나다니다가 과일 몇 개 따서 먹으면 거기가 곧 주방이었습니다. 아무데나 앉아서 이야기하면 거기가 곧 응접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완전한 환경속에 살던 그들에게 불행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게 됩니다. 그만 그 아름다운 낙원에서 쫓겨나고 만 것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것은 머리가 나빠서도 아니고 지식이 없어서도 아니었습니다. 마음이 문제였습니다. 마음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그 많은 은혜들을 감사한 마음으로 누리지 못하고 감히 하나님같이 되려고 하다가 그만 낙원에서 쫓겨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고생하는 것은 지식이 없거나 문명과 과학의 혜택을 받지 못해서 일때도 있지만 그보다 더 인간을 고생시키는 것은 인간의 잘못된 마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잠4:23에 보면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을 바르게 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옳게 하라는 것입니다. 네 마음이 항상 진리를 향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네가 비로소 생명의 은총을 온전하게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다른 무엇보다도 마음을 올바르게 가져야 합니다. 성실과 진실과 진리가 우리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어야 합니다. 감사와 기쁨과 사랑의 마음으로 우리의 심령이 채워져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행복을 가름하는 중요한 관건인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진리와 사랑과 감사의 마음으로 채우는 것이 지식과 돈과 명예와 권력과 건강을 얻는 것보다도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비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온 성도여러분은 마음을 바르게 가지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 진실과 성실로 채우시기 바랍니다. 사랑과 은혜로 채우시기 바랍니다. 감사와 기쁨으로 가득 채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정말 생명의 풍성한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추수감사주일인데 추수감사주일의 의미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줄 알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무언가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아등바등 살던 삶을 잠시 멈추고 이미 받아 누리고 있는 은혜를 새삼스레 떠올리면서 감사와 기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와 기쁨과 은혜 가운데 주님과 동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저와 여러분의 심령에 더욱 감사와 기쁨으로 채우시길 바랍니다.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은혜가운데 살고 있는지를 생각해 볼때에 저와 여러분의 심령에 감사로 충만하게 채워지고 그리하여 저와 여러분의 삶이 진정 감사와 기쁨이 충만한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이미 받은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합시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감사의 생활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쉬운 방법은 이것입니다. 없는 것에 집착하지 말고 있는 것을 헤아려 보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무엇이든 가지고 누리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많든 적든 그것을 생각하며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누리고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 여기 편안히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집에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렇게 자유롭게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찬바람을 피하고 따뜻하게 누워서 잠잘 집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가족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교우들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웃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조국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기름진 땅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 맑은 공기가 있습니다. 태양이 있습니다. 강물이 있습니다. 산이 있습니다. 나무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사랑하는 자녀가 있습니다. 혹은 부모님이 계십니다. 형제자매가 있습니다. 입을 옷이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이 있습니다. 과일도 있고 야채도 있고 감자도 있고 고구마도 있고 우유도 마실 수 있습니다. 승용차가 있는 사람, 승합차가 있는 사람, 트럭이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토바이 자전거도 있습니다. 텔레비젼도 있습니다. 냉장고도 있습니다. 컴퓨터도 있습니다.

 

아니 그 모든 것들은 차치하고라도 그 무엇보다도 우리 곁에는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피흘려 돌아가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주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습니다. 저 천국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있습니다. 있습니다. 있습니다. 있습니다.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있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에게는 누려야 할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고,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하고, 이건 이래서 안되고 저건 저래서 안되고, 없고 없고 없고 안되고 안되고 안되고 하면서 원망하며 불평하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이렇게 어리석고 미련하고 억울한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아니 정말 가지고 있는 것이 이렇게 많은데 왜 하필 없는 것 때문에 속상해하고 기죽고 불평하며 살아야 한단 말입니까?

 

여러분, 없는 것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없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배우지도 못했을까? 나는 왜 이렇게 못 났을까? 나는 왜 이렇게 지질이도 남편 복도 없고, 자식 복도 없을까? 남의 집 자식들을 잘만 되던데 우리 자식들은 왜 잘 안될까?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안다녀도 잘먹고 잘 살던데 우리는 왜 이럴까? 어떤 이들은 못된 하면서도 건강하게 잘 살던데 나는 왜 이렇게 건강이 좋지 않을까, 나는 왜 촌에 자리를 잡아서 이 고생을 하면서 살까하면서 자신의 좋지 않은 환경을 탓하기 시작하면 자신은 정말 지질이도 복도 없고 불행한 사람처럼 여겨집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소외감을 느끼고, 빈곤감을 느끼는 것이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지금 농촌이 아무리 어렵다해도 옛날 부자집 대감보다 오히려 더 잘먹고 잘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힘들어하고 소외감을 느끼는 것은 보다 많이 가진 자들에 비해서 자기가 없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자기가 초라하고 비참해 보이고, 그래서 자신을 패배자처럼 여기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와같이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습니까?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 것이 그렇게 많은데 왜 하필 가지지 못한 것 때문에 속상해하고 불평하다가 가지고 있는 것까지도 없는 것처럼 여기는 그런 바보같은 삶을 살아야 합니까?

여러분, 성경 딤전6:8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먹을 것과 입을 것만 있어도 감사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만 있어도 만족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행복한 삶의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여러분께서는 먼저 있는 것을 생각하며 감사하며 만족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없는 것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한량없는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정말 기쁨의 삶, 은혜의 삶, 감사의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장차 받을 것을 생각하며 감사합시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얼마든지 감사와 기쁨과 은혜의 삶을 살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이미 받은 것 때문만이 아니라 앞으로 받을 은혜가 더 크고 영광스럽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우리는 바로 그런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하박국 선지자의 감사와 찬양의 고백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3:17-18)

 

참으로 놀라운 감사의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에게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감람열매도 없고, 채소와 곡식과 소와 양도 없었습니다. 현대식으로 말한다면 흉년이 들어 농산물을 하나도 수확하지 못하고, 사업이 부도나서 망하고, 직장을 잃어버려 실업자가 되었을지라도 그는 감사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인도하심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은 비록 힘들지라도 머지않아 하나님께서 이 어려운 상황을 이기게 할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지금의 어려움은 곧 사라지고 기쁨의 날이 올 것이기 때문에 그는 그런 상황속에서도 감사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 당시의 이스라엘의 상황은 너무나 절망적이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이미 오래전에 앗수르에 의하여 멸망하였습니다. 남왕국 유다도 바벨론의 위협 앞에서 풍전등화같은 상황입니다. 게다가 내적으로도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부패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백성들은 돌보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에만 급급해 있었습니다. 백성들 역시도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도 타락해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국가의 운명이 내우외환으로 풍전등화와 같은 처지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참아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합1:13)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답변하십니다.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3-4)고 말입니다.

 

다시말씀드리면 이 모든 것은 너희들의 범죄로 인하여 발생한 것이므로 참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때가 되면 내가 너희를 건져주리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박국 선지자는 감사의 찬양을 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하박국 선지자는 지금은 너무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그래서 심지어는 먹을 것조차 구하기 힘든 상황이지만 그러나 종내는 구원해 주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대하면서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민족의 앞날에 어두운 먹구름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절망하지 않고, 먹구름이 비가 되어 쏟아져 내리고 나면 화창하게 갤 그 날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비록 자신들의 범죄로 말미암아 이러한 어려운 현실이 닥쳐오게 되었지만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들을 구원해 주시겠다고 하는 말씀에 감사하며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어려운 일, 억울한 일을 당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그것이 나의 죄로 인한 경우도 있고, 직접적인 나의 죄와는 관계없이 세상속에 침투되어 있는 보편적인 죄로 인하여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나 상황속에서건 우리는 그러한 어려운 현실속에서 원망하거나 절망해서는 안됩니다.

원망과 불평과 절망은 어려운 상황 그 자체 보다도 오히려 더 큰 문제를 야기시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의 모습도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어려움 속에서 더욱 주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 구원의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십니다. 무언가 때로는 우리가 잘 알수 없지만 거기에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우리를 훈련시키고 연단시켜서 결국은 우리를 승리케 하십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며 주님을 바라보는 자는 결국 승리하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요즘 새벽시간에 시편을 묵상하고 있는데 거기서 우리는 정말 위대한 신앙인의 모습을 봅니다. 시편은 절반 이상이 다윗의 시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다윗의 시편을 보면 다윗을 놀라운 신앙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사실 다윗만큼 많은 어려움을 당한 사람도 드뭅니다. 10여년간 사울에게 쫓겨다니며 엄청난 고난을 당합니다. 여러번 죽임을 당할 뻔하고, 블레셋으로 망명을 갔다가 죽을 위기에 처하니까 미치광이 행세를 하여 겨우 빠져 나오기도 하고 왕이 되기까지 참으로 많은 고난을 당합니다. 왕이 되고 나서도 심지어는 아들에게 쫓겨다니는 신세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의 시편의 절반 이상이 그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의 위대한 점은 그렇게 극난한 고통을 당하여 하나님앞에 호소하면서도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리며 마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하나님은 의로운 하나님이시기에 반드시 의와 진리와 선과 믿음이 승리케 하실 것이라는 확신하면서 그 처절한 고통가운데서도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돌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는 놀라운 칭호를 받게 되었고, 믿음으로 승리하고 위대한 성왕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이런 신앙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선취적 신앙 즉 앞에 주실 것을 미리 앞당겨 누리는 신앙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진실로 어떤 상황속에서도 구원의 하나님을 바라보시면서 감사하며 찬양하며 살아가심으로써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하나님의 역사하심 가운데 더더욱 큰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승리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감사합시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 어떤 것보다도 감사할 수 있고, 기뻐할 수 있고, 찬양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혹시 오늘 현실 속에서 좀 어려움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까짓 것은 사실 별거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닥치면 다 이겨 나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곧 지나가버리면 그만입니다. 저도 이래뵈도 웬만큼 많은 고난도 당해봤던 사람입니다. 안해 본 것 없이 거의 다해봤습니다. 어렵게 공부했던 사람입니다. 새벽에 신문도 돌려보고, 노가다도 해보고, 겨울에는 산에 나무도 하러 다녀보고, 농사도 좀 져 봤습니다. 그러나 그까짓 고생은 별거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 지옥의 고난은 별거 아닌게 아닙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지옥의 고통에 비한다면 새발의 피도 안됩니다. 그 고통의 강도에 있어서나 그 고통의 시간에 있어서나 세상의 것은 고통도 슬픔도 아닙니다.

세상의 고통은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이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옥의 고통은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고통입니다. 세상에서는 고통속에서도 무언가 낙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옥에는 눈꼽만큼의 기쁨과 즐거움도 소망도 없습니다.

반대로 세상의 즐거움은 별거 아닙니다. 세상의 즐거움은 언제 사라질지 모릅니다. 세상의 즐거움은 한참 지나면 시들해 집니다. 세상의 즐거움의 한켠에는 고통도 함께 자리잡고 있습니다. 세상의 즐거움만 구하다가는 결국은 영원한 고통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천국의 즐거움은 영원합니다. 거기에는 고통과 슬픔과 절망은 그림자도 없습니다. 거기는 죽음의 그림자도 없습니다. 그곳의 기쁨은 100%의 기쁨입니다. 영원한 기쁨입니다. 100% 완전한 행복입니다. 그래서 성경 롬8:18에서는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는 그 영생복락의 세계를 약속받은 사람들입니다. 성령이 보증인이 되시기 때문에 믿는 자들은 100% 그곳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얼마든지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운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설령 세상에서 어떤 극한 상황이 온다고해도 우리는 얼마든지 감사와 영광을 돌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은 바로 그런 고백입니다. 아무것도 없어도, 다 빼앗겼어도, 그래서 정말 절망스럽고 고통스러워도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감사는 하나님의 축복을 담는 그릇입니다. 특별히 오늘 추수감사예배를 드리면서 지금까지 우리를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진실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주실 은혜를 인하여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인하여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진실로 어떤 상황속에서도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승리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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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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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절 설교. <범사에 감사하는 은혜 >

 


범사에 감사하는 은혜  (데살로니가전서 5:18)

오늘은 추수감사주일로 지킵니다. 한해 동안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인간다운 삶은 영위하게 하시며, 특별히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신 은혜를 돌이켜보면서 감사하는 주일입니다. 이런 주일을 맞이하여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과연 우리가 이 말씀에 순종하면서 사는지 돌이켜보는 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감사를 많이 하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훨씬 건강하고 행복하다고 합니다. 감사지수가 높으면 높을수록 건강지수와  행복지수가 높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인간의 행복을 논하면서 다음과 같이 충고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대의 마음 속에 감사하는 생각이 없으면 그대는 파멸의 노를 젓고 있는 사람이다. 부디 다른 공부보다도 먼저 감사하는 공부를 배우라." 그만큼 감사는 우리의 삶을 윤택하고 행복하게 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인 것입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인간의 근성은 감사에 인색합니다. 심지어 러시아의 대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은 감사할 줄 모르는 두발 달린 동물이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자녀를 키우면서 쉽게 동감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요즘같이 풍요로운 사회에서 부모들은 자식이 원하는 것이라면 대부분 거절하지 아니하고 다 들어줍니다. 그러나 그렇게 애지중지하며 키운 자식일수록 나중에 부모님의 은혜를 망각한 채 살아갑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말세가 가까워 질수록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이 없어진다고 예언하신바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절 이하에 보면, 말세에 나타나는 삭막한 인간성 중 하나가 감사를 모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역시 50년 전, 100년 전 그 혹독한 가난가운데 힘들게 살았던 우리 조상들에 비해 훨씬 감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처럼 세상은 점점 감사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 하나님께서는 "범사에 감사하라"고 교훈 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범사에 감사할 때, 영과 육이 건강하고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범사에'라는 말은 헬라어로 '엔 판티'(en panti)라고 하는데 이에 대해 영어 성경에서는 크게 3가지로 번역합니다. 곧 '어떤 형편에서든지', '모든 일에', 마지막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도' 감사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 다 비슷해 보일지 모르지만, '범사에'라는 말을 다양한 각도로 살펴 보면 3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좋은 일에도 감사할 뿐 아니라 안 좋은 일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사소한 일에도 감사할 뿐 아니라 큰 일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인생의 양지에 있을 때도 감사할 뿐 아니라 음지에 있을 때도 감사해야 합니다. 그래서 감사하지 않고 지나치는 것이 하나도 없게 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의 참뜻입니다.

실로 이 말씀은 우리에게 엄청난 부담감을 줍니다. 어떻게 이 말씀을 실천하라는 것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감사의 내용을 알면 그 고민은 한층 더 무거워집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감사는 막연히 느끼는 고마운 감정이 아닙니다. "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내가 구원의 잔을 높이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소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시116:2-14)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감사에는 적어도 3가지 요소가 있음을 가르쳐줍니다.

첫째로 감사에는 마음이 담겨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하나님께서는 이런 간절한 마음이 담긴 감사를 원하십니다. 어떻게 보답하는 것이 하나님께 감사 드릴 수 있을까? 이런 간절한 마음을 담는 것이 감사요.

 

둘째로 궁극적인 감사의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물론 고마운 사람에게 감사할 수 도 있지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이여 감사합니다" 하고 그 앞에 경배하는 것을 일컬어서 감사라고 합니다. 10명의 문둥병자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제사장을 찾아가는 도중 병이 낫게 되었습니다. 9명은 "우와! 내 병이 나았네. 아이고, 고마워라." 하며 고맙다는 느낌을 가졌지만 그 이상 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1명, 바로 사마리아 사람은 병이 낫자, "하나님이여 감사합니다"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가던 길을 돌이켜 예수님에게로 다시 달려왔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 앞에 넙죽 엎드려 주님을 경배하면서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셋째로 진정한 감사는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예물을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나의 소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소원이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약속하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 제 기도를 들어주시고 응답해 주시면 제가 이렇게 하겠습니다."라고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정말 응답해주시면 너무나 감사해서 자기가 서원한 것을 그대로 시행하는 것입니다.

한나는 아들을 달라고 기도하던 중 정말로 아들을 얻자 그 은혜에 감사하여 아들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평생 기도한 것을 다 받고 나니 너무나 감사해서 말년에는 자신이 쌓아 놓았던 모든 재산을 성전을 짓는데 드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감사하라"고 할 때 그 감사에는 마음이 담겨야 하고, 하나님께 경배하는 자세가 있어야 하고, 경우에 따라 감사의 예물을 들고 나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범사에 감사하면서 살아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굉장히 어려운 말씀입니다. 고맙다고 느끼는 것으로 머물면 안되고, 감사하다는 말로 끝나서도 안됩니다. 정말로 하나님 앞에 거룩한 제사로 드려지는 감사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범사에 감사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까? 

이처럼 범사에 감사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3가지를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첫째는 좋은 일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이 험하고 악해도 좋은 일이 종종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무더운 여름에 소낙비를 주시듯 가끔 우리에게 삶의 기쁨을 주십니다. 

자녀를 낳아 키우는 것이 엄청난 수고요, 희생이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좋은 일을 자주 맛보곤 합니다. 평생 부부로서 사는 것이 굉장한 희생과 인내를 필요로 하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종종 좋은 일을 주십니다. 한 생을 살면서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나름대로 각자에게 좋은 일이 있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경험하게 된 좋은 일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지 못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들이 감사헌금을 잘하시는 것에 늘 하나님 앞에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감사헌금을 보면 감사에 대한 성도들의 정성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습니다. 저희 교회는 몇 만 명이 모이는 대형교회입니다. 그런데 몇 백 명 모이는 교회에 비하면 감사헌금이 그리 많은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감사할만한 좋은 일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좋은 일 하나하나마다 '이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하는 뜨거운 심정으로 손에 헌금을 들고 주님 앞에 나오는 사람들이 드물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좋은 일이라고 자연스럽게 감사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긍정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마땅히 감사해야 될 좋은 일을 감사 없이 넘겨버릴 때가 많이 있음을 인정하고 회개할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는 나쁜 일에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해 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현재 그들은 엄청난 핍박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장차 받을 환란을 너희에게 말하였더니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살전3:4) 바울은 전도하면서 이제 예수를 믿게 되면 핍박을 받게 될 것이라고 미리 예언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예수 믿고 나니 엄청난 환란과 핍박이 그들에게 덮친 것입니다. 여기에서 핍박이란 믿음을 지키기 위해 다른 것을 다 포기해야 되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중국에 가보면 정부와 결탁하여 그들의 비위를 맞추는 삼자 교회는 버젓하게 교회 문을 열어놓고 예배를 드리지만, 공산주의와 타협하지 않고 지난 수십 년 동안 복음을 들고 투쟁한 지하교회들은 지금도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공 셍리앙(Gong Shengliang) 목사님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크게 쓰시는 종입니다. 그분을 따르는 신도만 해도 2, 3만 명에 이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통해 구원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면서 집회마다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자 중국 정부에서 핍박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핍박의 구실을 만들고자 그 교회에서 예수 잘 믿고 인물이 있는 여 집사 몇 명을 끌고 가, 공 목사가 성폭행한 사실을 인정하도록 고문을 해서 허위자백을 받아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근거로 공 목사를 잡아 들여 재판을 치루고는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이 사실을 안 세계인권위원회는 중국 정부에 압력을 가했고 결국 사형선고에서 종신형으로 감형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핍박이란 예수 한번 바로 믿기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상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형편에 있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핍박 받는 것도 감사하고, 매 맞는 것도 감사하고, 가족들이 끌려가서 죽는 것도 감사하고, 이리저리 쫓겨 다니는 것도 감사하고, 굶는 것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얼마나 무서운 말씀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아무리 나쁜 일을 많이 보고 마음에 원치 않는 일을 경험한다고 할지라도 핍박을 받는 사람에 비하면 가벼운 것입니다. 핍박 받는 데살로니가 교인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신다면,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요. 언짢은 일에도, 손해 보는 일에도, 내 몸이 망가지게 되더라도, 사랑하는 이가 일찍 죽는 것을 보고도 감사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감사하라는 말씀입니다.

 

셋째는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기 쉬운 일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 빚지고 있는 것들입니다. 숨쉬고 있는 공기로부터 시작해서 마시는 물, 우리가 당연시 여기는 내 몸의 모든 기능, 하나님이 주신 내 자녀, 일용할 양식, 어느 것 하나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날마다 풍성하게 주시니까 우리가 소중한 것을 받고도 당연한 것처럼 여기기가 쉽습니다. 당연하게 여길 때는 감사가 따라오지 않습니다.

오늘날 현대 문명은 무엇이든지 당연하게 여기도록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서 왔다는 빚진 감정을 갖지 못하도록 합니다. 1세기 전만 해도 사람들에겐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빚진 의식 또는 의존 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과학이 발달하고 모든 것이 풍족해지면서 서구사회로부터 영향을 받은 모든 나라들이 이제는 빚진 감정 대신 권리 의식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의존 의식보다도 자율의식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잘나고 내가 능력이 있어서 이 모든 것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에 인기 있는 만화 작가 바트 심슨(Bart Simpson)이 한번은 어느 레스토랑에서 식사 기도를 부탁 받았습니다. 그러자 그가 이런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시여, 우리가 이 모든 음식을 위해서 친히 값을 다 지불했습니다. 그래서 감사할 것이 하나도 없음을 감사합니다." 얼마나 방자하고, 거만하고, 교만한 태도입니까? 내가 누리는 것은 내가 노력해서 내 능력으로 얻었는데, 무슨 감사냐는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무서운 범죄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서 받았기 때문에 일일이 감사할 의무가 있습니다.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인에게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할렐루야이다." 입니다. 그 어느 것을 보아도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너무 풍족한 세상을 살아서 많이 오염되었습니다. 그래서 빚진 의식보다 권리 의식에 은근히 더 오염된 것 같습니다. 70년 전만해도 우리는 식민지에서 겨우 벗어난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설상 가상으로 6·25전쟁이라는 끔찍한 동족상잔을 겪으면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던 것입니다. 그런 나라가 불과 반세기도 되기 전에 OECD에 가입할 정도로 세계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된 것입니다.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먹고 마시는 모든 것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보다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는 냉랭한 마음이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도 전 세계를 보면 60억 인구 가운데서 1/10에 해당하는 6억 인구의 하루 생활비가 1달러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전기가 없는 사람들의 수가 20억이 넘습니다. 식수 시설이 되어 있지 않아 아무데서나 퍼 마시는 사람들의 수는 10억이 넘습니다. 인간다운 삶은커녕 이렇게 끔찍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조그마한 한반도에서 우리가 이만큼 먹고 마시며 여유를 가지고 살수 있다는 것은 결코 당연히 여겨야 할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한번 종합병원에 가서 진료과목들이 얼마나 많은지, 한 의사가 다루고 있는 병이 몇 가지나 되는지 살펴 보십시오. 병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병에 걸리지 않고 이렇게 당당하게 걸어 다니고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보통 감사할 일이 아닙니다.

정범진이라는 사람은 교통사고로 평생을 전신마비로 살아야 되는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각고의 노력 끝에 미국 브루클린 검찰청의 부장검사까지 되었습니다. 그가 쓴 책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단 하루만 걸을 수 있다면, 내가 가장 하고 싶은 것은 화장실에 들어가 변기 앞에서 시원하게 오줌을 누는 것이다." 그는 전신이 마비되었기 때문에 화장실에 들어가서 볼일을 보는데 2시간동안 사투를 벌일 때도 있다고 합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하나하나 뜯어보면 절대로 당연시 하고 넘길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체스터튼(G. K. Chesterton)이라는 사람의 말에 공감합니다. "나의 주된 인생관은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받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도록 연습하는 것이다." 우리가 범사에 감사하려면 이와 같은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좋은 일에도 감사해야 하지만 나쁜 일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누리는 당연한 것들에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뜻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범사에 감사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은 허황한 소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핍박을 당하고 있는 데살로니가 교인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신 것은 아무런 근거 없이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할 수도 없는 일인 줄 뻔히 아시면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실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실 때는 반드시 그 명령을 순종할 수 있는 은혜까지 준비하십니다. 따라서 범사에 감사하는 일은 은혜의 산물이지, 노력의 산물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은혜를 받아야 가능한 것이지,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처한 상황을 뛰어넘어 감사할 수 있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당하는 모든 일을 앞에 놓고 "할렐루야" 할 수 있는 은혜가 내 안에서 치밀어 오를 때 가능한 것이지, 내가 노력하고 결심하고 연습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데살로니가 전후서를 읽어보면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핍박 중에서도 범사에 감사할 수 있었던 이유가 나옵니다. 바로 구원의 은혜였던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듣고 난후 이렇게 변했습니다.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 말하니."(살전1:9-10) 이 말씀을 다시 한번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예수를 믿고 나서 과거에 우상숭배하던 것을 다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섬기는 구원 받은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나아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그분과 함께 영원히 살 하나님나라의 영광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배후에는 이런 구원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은혜를 힘입으면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되자 자비로우시고 전능하시며 광대하신 하나님이 그들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러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세상에 있을 동안 너희들이 어디에 가든지 내가 동행해주마. 불 가운데로 지나갈 때도 내가 너희와 함께 하마. 물 가운데로 지나갈 때도 내가 너희와 함께 하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할 때도 내가 지팡이와 막대기로 너를 안위하리라. 원수들 앞에서 너희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높여주리라. 좋은 일이 생기든, 나쁜 일이 생기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해주마. 그리고 너희들이 어려울 때마다 나에게 기도하여라. 그러면 내가 언제든지 귀를 기울이고 들어주마. 환란 중에 내가 너희를 건져주리라. 악한 자가 와서 만지지도 못하도록 내가 너희를 보호해주리라." 이처럼 헤아릴 수 없는 약속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내 아버지가 되셔서 나에게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생각하면 범사에 감사하는 자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날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기만을 간절히 고대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핍박을 받기에 더더욱 그러했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셔서 그분과 함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살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황홀한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의 영광을 눈 앞에 그려보면서 현재의 고난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장차 그 나라에서 누릴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결론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세상에서 당하는 이런 일 저런 일이 땅에서는 중요하게 보이는 일이지만, 하나님나라의 영광에 비추어 보면 잠깐 지나가는 꿈에 불과한 것입니다. 

 

지난 3월에 6가족을 포함한 25명의 탈북자들이 북경에 있는 스페인 대사관에 몰려들어가 한국행 망명을 요청했습니다. 그리고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며칠 동안 그들은 엄청난 절망에 빠져있었고, 처벌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으니 살려달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대사관 안에서 기다리면서 북한으로 다시 끌려가서 죽을지, 아니면 한국으로 와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지 갈림길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 한국행이 결정되었다는 통보가 왔습니다. 바로 그 때 그 사람들의 마음에 제일 먼저 찾아온 감정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이 '살았다. 이제는 한국으로 간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그 동안 마룻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추위에 떨면서 자던 것도 감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대사관 직원들이 멸시하고 천대하던 과거의 모든 일도 다 감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비행기가 늦어져 며칠 더 기다려야 한다는 통보를 받고도 오히려 감사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살았기 때문입니다. 한국으로 가게 되니까 모든 것이 감사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한국이 아닌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가고 있습니다. 이런 은혜를 받으며 살기에 세상에서 좋은 일에도 감사할 수 있고, 나쁜 일에도 감사할 수 있고, 하찮은 일도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구원의 은혜가 우리에게서 샘 솟을 때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구원의 은혜 때문에 범사에 감사하면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의 은혜가 있으면 얼마든지 승리할 수 있습니다.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에게 구원의 은혜를 충만하게 주시옵소서. 구원 받은 은혜에 취해서 살게 해주시옵소서. 내가 예수님 때문에 얼마나 큰 구원을 얻었는가를 알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 때문에 들어가게 될 하나님나라의 영광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날마다 바라보면서 흥분하며 살게 해주시옵소서." 이런 구원의 은혜가 있으면 세상에서 겪는 어려운 일에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다른 일로는 범사에 감사할 수 없습니다.  오직 구원의 은혜에 우리가 흠뻑 젖어 있을 때 감사할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은혜를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넘치도록 부어주시길 바랍니다.

다같이 기도합시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우리를 향해서 명령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이렇게 명령하신 이유는 우리가 너무나 큰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앞에는 하나님나라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이 큰 구원의 은혜를 우리가 값없이 얻었기 때문에 이 은혜 안에서는 좋은 일도 감사하고 나쁜 일도 감사하고, 큰 일도 감사하고 작은 일도 감사하고, 어떤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우리 모두에게 구원의 기쁨을 회복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구원 받은 자의 행복과 기쁨을 다시 한번 회복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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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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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설교 <교회란 무엇인가? >

 

 

 


교회란 무엇인가?

 

1.들어가는 말


교회는 경건한 신앙인의 집단이기 이전에 하나님에 의해 설립되고 유지되며 갱신되는 하나님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의지에 기초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본성을 닮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공동체는 '공동 체로 계신 하나님'을 닮고 있습니다. '공동체로 계신 하나님'이라는 말은 20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칼 바르트가 썼던 말인데, 이 말은 하나님이 혼자로 계신 분이 아니라 삼위일체를 이루시는 분이라는 것을 신학적으로 표현하는 말입니다. 즉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고백하는 하나님은 유대교나 이슬람교인들의 하나님과는 달리 유일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삼위로 계시는 가운데서 통일성을 이루시는 분이라는 말 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미 그 자신 안에서 코이노니아(사귐) 안에 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현대신학자 몰트만은 이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사회적 삼위일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깨달아야 할 소중한 진리의 하나는, 바로 우리가 신앙하는 하나님은 언제나 공동체를 향한 의지를 갖고 계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홀로 계신 분이 아니라 공동체를 창조하시고 보존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다른 말로 표현해서, 하나님은 이미 그 자신 안에서 교회, 즉 친교 혹은 사귐을 이루시는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개인주의자가 아니라, 더불어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의미에서 사회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사회주의자라고 표현하니까, 교단의 어떤 분은 제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좌익의 이데올로기로 설명한다고 비판하셨는데, 본래 이 용어는 개인주의와 대립된 의미에서 사용된 것입니다. 그래도 이 용어가 이데올로기로서의 사회주의와 동일한 어휘를 갖는다는 의미에서, 단순하게 보면, 오해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방식이 공동체적이고, 그래서 하나님을 사회주의자라고 말한다면, 이 때 하나님의 존재방식으로서의 사회주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민주적 사회주의 혹은 사회적 민주주의와 유사하다고 할 순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과 이데올로기는 유사할 수는 있어도 완전히 일치하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는 유한한 존재로서 늘 불완전한 용어를 사용할 수 밖에 없고, 불완전한 사회체제나마 이를 수용하고 신앙의 눈으로 늘 이를 개혁해 나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본인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삼위일체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비한 사회적, 공동체적 존재양식입니다. 또 본인은 교회도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 성부-성자-성령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창조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를 이런 각도에서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령의 사귐'이라고 불립니다.

 


2.교회의 본질


1)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할 때,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이것은 바로 교회가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에게 무슨 임무를 맡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교회를 선택하시고 교회에게 특별한 임무를 맡기셨다는 것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선택하셨을 때, 하나의 믿음의 백성과 이 백성을 통하여 복을 받게 될 온 인류를 염두에 두셨는데, 이 때에 아브라함이 먼저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에게 복을 내릴 임무를 준 게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아 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큰 복과 임무를 주신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그의 믿음의 후손들인 하나님의 백성은 바로 하나님의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세우심을 받은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백성은 구약성서의 시대로부터 시작하여 신약성서의 시대와 교회사의 시대를 거치면서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섭리의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 한복판에서, 이 세상의 백성 한가운데를 지나가면서 '하나님의 도성', '하나님의 나라'를 찾아가는 백성, 유랑하고 순례하는 백성입니다.

물론 그 나라는, 요한계시록의 환상에서 나타났듯이, 어떤 저 먼 다른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세상 한가운데로 내려오기 때문에, 바로 이 세상에서 세워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계의 피안이 아니라 이 세계의 미래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후의 세계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부터 세워지고 경험되는 영원히 현재적인 세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저기 있지 않고 바로 '우리 가운데' 있다", "나라가 이 땅에 임하옵소서"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는 바로 이 세상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나 라를 찾고 구하고 두드리고 있으며,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도 이곳에 오라고 초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와의 관계에서 교회는 무엇입니까?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반영(反影), 복사(複寫), 거울, 즉 피사체(被寫體)입니다, 교회는 그 나라의 여명(黎明), 전조(前兆)이요, 그 나라의 전위대(前衛隊) 혹은 돌격대(突擊隊)입니다.

보충설명: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역사의 전체에 면면히 흐르는 신앙과 희망의 대상인 하나님의 나라는 1.정치적 독재-억압이 없는 민주주의적 정치, 2.경제적 독점-착취가 없는 사회주의적 경제, 3.차별-소외가 없는 평등주의적 사회, 4.자연의 지배-착취가 없는 공생주의적 생태계, 5.죄책감과 심판과 무의미로부터 해방된 하나님과의 교제 안의 영원하고 복된 생활을 지향하는, 성서의 중심되는 구원개념입니다.

 


2)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신약성서 시대에서는 교회론에 하나의 큰 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은 교회를 새롭게 소집하셨습니다. 그분은 옛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병들고 흩어져서 자신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시고, 이 백성을 치유하고 갱신하고, 이 백성이 다시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온전히 봉사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새로운 무리를 모으셨습니다. 그 중에서 12명을 택하신 것은 바로 상실된 이스라엘의 사명을 회복하시겠다는 예수님의 의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분은 온 몸을 다하여 제자들을 부르시고 섬기시고, 끝내 는 그 몸을 십자가에서 깨뜨려 피와 물을 아낌없이 쏟아 부으시면서까지 인류의 구원과 교회의 소집을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몸으로 다시 살아나셔서 인류와 교회에 새로운 희망을 주시고, 또 그분이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 주셔서 교회를 새롭게 소집, 갱신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형성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불렀습니다. 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몸을 아낌 없이 내어 주셔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그 구원받은 자들을 모아 자신의 몸으로 삼으시고, 그 몸된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사랑과 희생의 능력으로써 교회를 통치 하시고, 성령을 통하여 온갖 은사들을 주셔서 교회 안에서 은혜가 충만하게 하시며, 교회를 날로 날로 새롭게 하시고 새롭게 새우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우리가 깨달아야 할 사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모여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자신의 몸을 주셔서 우리를 그의 몸으로 삼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창설자는 능력있고 신앙심 깊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주인(머리)도 예수 그리스도이며, 교회를 유지, 갱신, 확장하시는 분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까 신약성서 시대에 와서도 교회는 여전히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선택으로 인하여 세워진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보충설명: 신약성서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현존(임재)하는 곳 혹은 형식은 1.복음을 선포하고 실천하는 사도적 생활(마태 28,18 이하), 2.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떼고 피를 마시는 성만찬 공동체(고전 11, 23 이하), 3.예수의 이름으로 모여 사귀고 예배하는 형제-자매적 공동체(마태 18, 20), 4.헐벗고 주리고 목마르고 옥에 갇힌 자들을 돌보고 섬기는 곳(마태 25,31 이하; 교회 밖의 교회 혹은 보이지 않는 교회 혹은 익명적 그리스도인!), 5.예수 그리스도의 화해의 능력으로써 충만해진 그분의 몸, 하나님의 대성전이 된 우주(골로새서, 에베소서)입니다.

 


3) 교회는 '성령의 교제'입니다.


셋째로 교회는 성령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교회는 또한 성령이 창조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공동체, 성령 안의 사귐, 성령의 코이노니아입니다. 물론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와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세우시고 부르시고 모으신 것입니다만, 아버지와 아들의 활동 속에는 언제나 성령도 함께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미 그 자신 안에서 서로 협력하고 협동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도우심이 없는 교회는 온전한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구약성서 시대에서 성부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시고, 신약성서 시대에 성자 예수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셨지만, 성령이 오심으로써 비로소 교회는 이 세상에서 구체적인 능력을 얻고 구체적인 모습, 즉 '성령의 교제'라는 모습을 띠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신학적 출발점은 하나님 아버지의 공동체 의지(천지 창조와 이스라엘의 선택)에 있고, 교회의 역사적 출발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역 사(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와 새로운 백성의 선택)에 있지만, 교회의 사회적 출발점은 바로 성령강림(오순절 사건과 선교적 파송)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교회 안에 풍성한 성령의 은사들을 선사하시고, 그리하여 성령의 은사들을 통하여 교회를 생기있고 활기차고 능력있게 하시고, 이 세상의 어두운 거짓 영들의 한복판에서 참 증인, 세상의 빛과 소금, 변화의 누룩으로 만드십니다.


보충설명: 바울의 가르침에 의하면, 성령의 은사는 교회의 모든 지체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은사들 간에 아무런 차이나 구별이 없으며, 그래서 진정한 의미에서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별과 차별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사들 간의 구분은 존재합니다. 바울에 의하면 세 가지 종류의 은사가 있는데, 1.'선포의 은사'에는 사도, 예언자, 전도자, 교사, 권고자가 속해 있고, 2.'봉사의 은사'에는 병고치는 자, 사랑을 베푸는 자(집사)가 있고, 3.치리의 은사에는 감독(장로)이 속해 있습니다. 바울에 의하면 심지어 고난도 하나님의 은사이며, 남 모르는 사랑의 행위, 기술적 봉사, 결혼, 순결(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독신적 삶) 등도 은사로 인정됩니다.이처럼 주님이 부르신 자에게는 모두 은혜의 분량대로 은사가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은사의 독점이나 획일화, 횡포나 지배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두가 각자에게 주어진 것대로, 서로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써 피차 복종해야 합니다. 교회는 성령과 그 은사들의 코이노니아(사귐, 교제), 즉 카리스마적 공동체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그 자신 안에서 이미 공동체를 이루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어떻게 각기 교회를 이루시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삼위 안에서 일치를 이루시듯이, 이 삼위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교회 즉 하나님의 백성-그리스도 의 몸-성령의 교제가 서로 조화와 일치를 이룰 때, 비로소 교회는 온전한 모습을 이룹니다. 카톨릭 교회는 전통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주로 강조해 왔고, 개신교 회의 대다수 교회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오순절 계통의 교회는 '성령의 교제'를 특히 강조해 왔습니다. 이 세 가지 교회론의 공통요소는 하나님의 은혜와 선택, 하 나님의 주도권에 있습니다만, 각기 독특한 차이점을 갖고 있습니다.


1.하나님의 백성은 교회의 역사성-시간성-세상성을 나타내고, 2.그리스도의 몸은 교회의 영원성-공간성-구별성을 나타내며, 3.성령 교제는 교회의 구체성-사회성-초월성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역사 안에 있으면서도, 영원하며, 그러면서도 구체적인 모임임을 알아야 합니다.

2.그리고 교회는 시간대(성부 시대- 성자 시대-성령 시대 혹은 구약 시대-신약 시대-교회사 시대)를 통과하면서도, 공간성(예수 그리스도와의 수직적 일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지니며, 그러면서도 사회적인 모임임을 알아야 합니다.

 

3.교회의 사명


교회가 이 세상 한 가운데서 해야 하는 역할, 임무 혹은 사명과 봉사는 무엇입니까? 교회가 그 무엇을 하든지 간에 결국에는 이 땅에서 복음(하나님의 나라)을 증언하는 것이야말로 교회의 유일하고도 독특한 사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의 모든 활동은 오직 이 증언으로 요약되며, 교회의 모든 봉사는 이 증언 때문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증언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증언은 두 가지 형태로 나누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와 치유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였듯이, 교회도 말과 행위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증언합니다. 그래서 칼 바르트는 교회가 말로써 증언하는 형태에 찬양, 설교, 교육, 전도, 선교 및 신학(6개)을 포함시켰고, 행위로써 증언하는 형태에 기도, 목회상담(영혼치유), 그리스도인의 모범적 생활, 봉사, 예언자적 행동 및 친교(6개)를 포함시킨 적이 있습니다(12개). 그러나 본인은 교회가 하나의 교회이지만,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로 둘로 나누어진다고 생각하면서, 이런 관점에서 교회의 사명을 설명해 볼까 합니다.


먼저, 교회는 모이는 교회입니다. 교회의 어원인 '에클레시아'는 바로 세상에서 불러 모여진 자들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거룩한 백성, 그리스도의 몸, 성도의 교제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즉 교회는 세상에서 부름받아 모인 거룩한 백성입니다. 이런 모이는 교회가 해야 하는 사명은 예배와 찬양, 설교, 교육, 신학, 목회상담 및 친교입니다(6개).

그리고 모이는 교회는 흩어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모이는 것은 흩어지기 위해서입니다. 교회는 결국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세상을 위해 존재합니다. 그래서 신학자 본회퍼도 "교회는 남들을 위해 존재할 때에만 교회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남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바깥을 향해 존재합니다. 교회가 남들을 위해서 해야 하는 기능에는 기도, 전도, 선교, 봉사, 모범적인 생활 및 예언자적 행동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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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선교회헌신예배 - 멋있는 사람

 


 
제목 : 멋있는 사람, 바나바

말씀 : 행9:26-31

1.멋있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입니다.

상명대학교 김경일 교수가 쓴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공자의 도덕은 사람을 위한 도덕이라기보다는 정치를 위한 도덕이었다. 여성을 제외시킨 남성만을 위한 도덕이었다. 생명을 위한 도덕이라기보다는 주검을 위한 도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사농공상과 양반과 상인으로 대표되는 계급적, 신분차별적 사회, 토론 문화의 부재를 낳게 한 가부장적 의식, 위선을 부추기는 군자의 도리, 온갖 갈등과 모함과 죽음을 불러온 혈연 사회, 여성을 거의 철저히 무시하는 남성 우월의식, 창조적 교육을 방해하는 스승의 권위 강조 등등을 지적하며 그런 의식들이 아직도 우리 사회의 근저에 자리잡고 있어서 우리 사회가 성숙한 민주주의로 발전해 가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우리사회가 보다 투명하고 평등하고 창의력이 있고 상대방의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 존중함으로 모든 갈등을 뛰어 넘고 나아가 섬김을 받기 보다는 섬길 줄 아는 성숙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그런 유교적 고리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김교수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감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꼭 기독교의 목사이기 때문이 아니라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그렇습니다. 우리 사회속에 만연되어 있는 형식주의, 혈연주의, 계급주의 등이 거의 대부분 유교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심각한 성차별도 유교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게다가 솔직히 유교의 문화는 산 자를 위한 문화라기 보다는 죽은 자를 위한 문화이기도 합니다. 죽은 자를 위하여 수많은 제사를 성대하게 지내고 무덤에는 왜 그렇게 집착을 하는지... 그거 다 허세입니다. 내로라하는 거지요. 우리 이렇게 성대하게 제사 지낸다. 우리 이런 양반이다. 우리 선조가 이렇게 출세했었다. 우리 가문은 이런 가문이다. 그걸 드러내기 위해서죠.

그게 중요합니까?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정말 아름답게 가치있게 의미있게 사느냐하는 것입니다. 신분이 중요합니까? 자리가 중요합니까? 물론 의미는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을 하든지 어떻게 아름답게 성실하게 정직하게 그 일을 수행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고귀한 존재로 태어나서 얼마나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으로서 거기에 걸맞는 삶을 살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가치관은 세상 가치관과 완전히 다릅니다. 세상에서는 그저 돈많고 빽있고 권세있고 섬김을 받는 위치에 있는 자들을 알아줍니다. 그들이 목에 힘주고 다닙니다. 그러나 주님의 가치는 다릅니다. 그 반대입니다. 그런 자세를 가지고는 주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낮추는 사람, 그저 자신의 일에 충실한 사람, 하나님께서 주신 공동체를 아름답게 섬기는 사람, 사람을 살리는 사람, 세워주는 사람, 화평을 가져다주는 사람, 은혜를 끼치는 사람, 기쁨을 가져다주는 사람, 섬기는 사람 이런 사람을 좋아하고 그런 사람을 높여 주고 그런 사람이 천국을 차지하고 상급을 받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20:26,27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세상적 가치관을 버리고 그저 주님의 가치를 따라 그저 성실하게 섬기는 자의 위치에서 이웃을 섬기고 교회를 섬길 때에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주님의 은총을 더욱 충만히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멋있는 사람은 남을 세워주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우리는 참으로 멋있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바로 바나바라는 사람입니다. 이 바나바에 대해서는 행4장에 나타나 있는데 그는 레위족속으로 구브로 섬 출신이었습니다. 그의 본명은 요셉이었는데 사도들이 바나바라는 이름을 주었습니다. 바나바란 권위자라는 뜻입니다. 물론 여기서 권위란 권력과 지위를 말할 때 사용하는 권위가 아니고 권고하고 위로한다는 뜻의 권위입니다. 즉 그는 많은 사람들을 돌아보고 위로하고 격려하여 힘을 주고 용기를 주어 세워주는 사람이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바나바의 이런 모습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사울 즉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사도들과 교제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한 뒤 아라비아로 가서 3년을 수행한뒤에 예루살렘으로 가서 사도들과 협력하여 복음의 사역을 감당하기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때 사도들은 아직 사울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26절 보세요.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그러니까 사울이 회심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가 누굽니까? 그가 예수믿는 사람들으 잡아 죽였던 사람이 아닙니까? 심지 예수믿는 사람들을 잡아오려고 자기 나라도 아닌 다메섹까지 갔던 사람아닙니까?

그런데 이 사람이 어느날 예수님을 만났다는 거예요. 그래서 전도도 하고, 3년간 수행도 하였다는 거예요. 그러나 제자들은 믿을 수가 없었지요. 그것도 아마도 예수님 믿는 사람들속에 들어와 보다 효과적으로 정보를 입수하여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기 위한 술책이 아닌가 의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에 바나바가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바나자는 바울을 믿고 그를 사도들에게로 데리고 간 것입니다. 데기고 가서는 그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27절 말씀이지요.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그러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 바나바는 사도들에게 신임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본래 이름은 요셉이었는데 사도들이 바나바라는 별명까지 지어줬던 사람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의 말이라면 안 믿을 수가 없지요. 그래서 바울은 예루살렘에 출입하겨 사도들과 교제하고 담대히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바나바의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실 바울로 말할 것 같으면 얼마전까지만 해도 예수님 믿는 사람들의 원수였습니다. 핍박자였습니다. 예수믿는 사람들을 죽였던 용서할 수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그런거 저런거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를 인정해 주었습니다. 그를 인정해 주고 그의 보증인 역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드디어 바울이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탄생하는데 큰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바나바는 자신이 지도자적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지만 바울이라는 지도를 세워준 훌륭한 일꾼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빈센트 반 고흐라는 화가의 이름을 한번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얼마나 대단한지 세상에서 가장 비싼 열 개의 그림 중에 이 사람의 작품이 3개나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젊은 시절에는 목사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어떤 시골교회에 전도사로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처음 목회했던 교회는 어떤 시골의 작음 교회였었는데 그 교회는 그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설교에 대하여 비판을 하고 목회하는 것이 어줍지않다고 푸념을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목회를 포기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는 세계적인 화가가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가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 갔으니 오히려 잘된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교회가 너무나 큰 인재를 잃었다고 안타까워 합니다. 그의 열정과 창의력을 볼때가 그가 만약 계속 목회를 했더라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설교가 중에 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 중론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한번 생각해야 됩니다. 나는 세워주는 사람인가, 주저 앉히는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워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제직들은 교회를 세워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구역장과 구역권찰들은 교회를 세우고, 구역을 세워주는 일을 해야 합니다. 힘빠지게 만들고, 맥이 풀리게 만들고, 의욕을 상실하게 만들고, 교회의 분위기를 가라 앉히는 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교회를 세우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에 힘을 북돋아주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서로 세워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의 분위를 세우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의 일을 할 때 분위기를 다운시키지 말고 같이 참여해서 분위기를 세워주는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목회자가 악을 향해 가지 않고 무언가 주님의 일을 한번 해보려고 하면 분위기를 다운시키지 말고 뭔가 본 해보는 것 같이 할 수 있도록 돕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결코 무슨 일에 든지 찬물을 끼얹는 자자 되지 말고 성령의 불을 붓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결국 교회 분위기가 살고, 교회가 활력이 있고, 교회가 활기차게 움직여서 주의 역사를 힘있게 이루어 갈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멋있는 사람은 물질을 바르게 사용하는 사람이다.

바나바라는 분은 인격만 멋있는 사람이 아니라 물질로도 주님의 영광을 나타냈던 사람이었습니다. 행4:36, 37절 말씀 보세요.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구브로는 소아시아 근처에 있는 사이프러스라는 섬입니다. 당시만 해도 이 도시는 아주 부유한 곳입니다. 광산이 있고, 무화과와 밀농사가 잘 되는 곳이고 기름이 났고, 벌꿀의 산지였습니다. 그래서 구브로 출신이라고 하면 부자로구나 하는 연상을 할 정도로 구브로는 풍성한 자원을 가지고 있던 도시였습니다.

바나바는 바로 이 지방 출신으로 집안 배경으로 상당히 넉넉한 재산을 가진 사람으로 짐작이 갑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신앙도 좋고 인격도 좋고 돈도 제법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재산을 그는 지금 교회에 헌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가 어떤 명목으로 내어 놓은 것이 아닙니다. 다시말해 무슨 건축헌금이나 선교헌금이나 구제헌금이나 어떤 명목을 정하지 않고 그냥 사도들 앞에 내어 놓습니다. 즉 그는 아무 조건없이 그냥 사도들 앞에 내어 놓은 것입니다. 사도들이 알아서 사용하십시오. 교회가 알아서 적당한 곳에 사용하십시오하면서 사도들을 전적으로 믿고, 교회를 전적으로 믿고 자신의 것을 조건없이 드렸던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멋있는 사람입니까? 얼마나 유익한 일입니까? 얼마나 보람있는 일입니까? 얼마나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까? 얼마나 생명의 역사를 이루는 일입니까?

여러분, 헌금도 잘해야 합니다. 이것은 돈의 문제가 아닙니다. 믿음의 문제이며 예수님께 대한 사랑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감사의 문제이며 이것은 죽어가는 영혼들에 대한 사랑과 관심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주님과의 관계의 문제입니다.

여러분, 마음이 있는 곳에 시간이 가고, 물질이 가고, 정열이 가는 것입니다. 마음이 있는 곳에 협력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신다면,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기기를 원하신다면, 주님의 교회를 아릅답게 세워가기를 원하신다면 헌금에도 인색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에게 주신 물질과 시간과 능력을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기 위하여, 불쌍한 이웃을 조금이라도 돕기 위하여 사용할 때에 주님의 나라를 이루어가고 여러분도 더욱 아름답고 가치있고 주님의 은총이 충만한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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