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예배설교 (추수감사절예배설교) 하나님의 은혜라

 

 

 


제목: 하나님의 은혜라.

성경: 고전 15:9-10

1517년, 마틴 루터가 독일에서 종교개혁을 시작한 이후 그 영향은 곧바로 인근 유럽지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영국에서는 독일에서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난지 약 20년뒤인 1534년부터 종교개혁의 물결이 일어났습니다. 그리하여 신교와 구교가 엎치락뒤치락하다가 1558년에 즉위한 엘리자스(Ⅰ세)여왕에 의해 영국국교회제도가 기틀을 잡게 됩니다. 영국국교회는 제도적으로는 로마카톨릭교회를 따르고, 신앙의 내용에 있어서는 개신교를 따르는 신교와 구교의 절충형 형태의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영국국교회의 모습에 반대하여 일어나 운동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청교도 운동이었습니다. 이 운동은 과거 로마 카톨릭 교회의 부패한 잔재를 완전히 버리고 루터와 칼빈의 정신을 따라 철저히 영국교회를 개혁하려고 일어났던 운동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개인의 중생과 성화를 중시하며, 가정에서의 기도생활, 사회에서의 엄격한 도덕생활과 절제의 생활로 참다운 신앙생활을 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이들의 이러한 태도는 결국 영국국교회의 탄압을 받게 되어 일부는 국내에서 끝까지 싸우다가 죽기도 하고 다른 일부는 유럽대륙으로 이주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그들이 꿈꾸는 신앙의 자유를 누리며, 참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상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102명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 미국을 향하여 출발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1620년 9월 16일의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몇 개월간의 천신만고 끝에 드디어 1621년 1월 미국의 동부해안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러나 천신마고 끝에 도착한 그땅에는 그들을 반겨줄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니 반겨주기는커녕 그들은 그해 겨울이 지나기 전에 그러니까 불과 2-3개월동안에 질병과 인디언의 습격을 받아 반수 이상이 죽고 마는 불행을 당하고 맙니다. 그러나 그러한 악조건속에서도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속에서 필사적인 개척자정신을 발휘하여 그 해 가을에는 어느 정도의 농산물을 수확하게 됩니다. 그들은 첫열매를 거두어 들이고 나서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울며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며 감사제를 지냈습니다. 이것이 유래가 되어 오늘날 교회에서는 11월 셋째 주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주일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은 온갖 어려움속에서도 수확을 할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했던 청교도의 정신을 따라서 지금까지 우리를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함께 기쁨을 나누는 절기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바울의 고백은 우리가 무엇 때문에 누구에게 감사해야 하는지를 잘나타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고 있는 바울의 감사의 내용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고백은 자신의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볼때, 걸어온 자취자취 돌아볼 때, 그리고 현재 자기의 위치를 생각해 볼 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것이라고하는 감사와 감격에 벅차 외친 영혼의 고백이었습니다.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이러한 바울의 감사가 우리 모두의 감사가 되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바울은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감사했을까, 왜 우리는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같이 생각해보고자합니다.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애창하는 찬송가 405장의 작시자는 죤.뉴턴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죄라는 죄는 안지어본 죄가 없을 정도로 많은 죄를 지었던 탕자였습니다. 노예상인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후 후에 목사가 되어 자신과 같은 엄청난 죄인을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격에 벅차 읊은 시가 바로 저 유명한 “Amazing grace”입니다.

“나같은 죄인 살리신 주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은혜 고마와

나처음 믿은 그시간 귀하고 귀하다.

이제껏 내가 산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찬양 하리라.”

우리의 지난 세월을 돌아봅시다. 지금 우리의 주위를 둘러 봅시다. 목석이 아니라면, 소나 말과 돼지같은 짐승이 아니라면 우리는 정말 감사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나를 낳아 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이 계시니 감사합니다. 형제자매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가 있습니다. 머리둘 보금자리가 있습니다. 자녀가 있으니 감사합니다. 땀흘려 일할 수 있는 일터가 있습니다. 사시사철 아름다운 계절이 있습니다. 저 눈부신 태양이 있습니다. 맑은 물, 신선한 공기. 그저 감사 감사할 뿐입니다. 미우나 고우나 우리의 이웃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웃이 있다는 것 정말 감사하십시오. 더더구나 사랑하는 주의성도들이 여러분 곁에 있다는 것 정말 감사하십시오. 감사함으로 사랑하십시오. 여러분이 만약 저 무인도에 혼자 살게 되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아마 며칠도 못 살고 미쳐서 죽을지도 모릅니다. 정말 우리는 감사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감사의 조건들이 하나하나 모여 오늘의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내가 이땅에 이렇게 서 있는것, 나혼자 가능했을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참으로 얼마나 많은 다른 사람들의 은혜를 입고 사는 존재인지 모릅니다. 설령 여러분곁에 별로 달갑지 않은 이웃이 있더라도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비 신앙인들과 다른 차원의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감사는 한단계 높은 차원의 감사입니다. 그저 우리가 복받고, 물질적으로 무언가 척척 풀려 나갈때만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우리가 남들처럼 지위가 높지 않다고 해도, 돈이 남들처럼 많지 않다고 해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우리의 주위에는 감사해야 할 일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정도로도 우리의 감사의 조건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한단계 더 높은 수준의 감사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속에 나타난 바울의 감사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는 고전 9:19-22에 고백했던 것처럼 때로는 자존심도 다팽개치고 살았습니다. 어리석다고 비웃음을 당하며 살았습니다. 미련하게 살았습니다. 주변도 없고 고집도 없고 속도 없는 무골충과 같이 살았습니다. 억울하게 핍박당하며 살았습니다. 죽을 고비를 몇번이나 넘기며 살았습니다. 왜그랬을까요? 무엇이 그 똑똑했던 바울을 그렇게도 바보로 만들었을까요? 그 이유는 오직 하나, 하나님의 사랑때문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은총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을 생각할 때 그는 “내까짓게 뭔데...”라는 고백을 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죽어라고 자기를 포기하고 살았지만 하나님의 고마우심에 비해본다면 억만분의 일도 보답되지 않습니다. 그 은혜와 사랑이 너무너무 고마와 “어떻게 하면 보답하고 살까?”그것만 생각하고 살다보니 “나”라는 존재는 다 죽어 없어지고 주님만 남게 되었습니다. 고후 11:22-27까지 자기의 좋은 조건을 다 열거하면서 그러나 “이까짓게 뭔데...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과 고마우심을 생각하면 이제는 자신이 박살이나고 가루가 된다해도 아무런 여한도 없었습니다. 억만분의 일이든 보답할 수만 있다면 자기 한 몸 불속에라도 던질 각오가 되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왜요? 나의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당신의 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우리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망극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 못박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를 살리기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버리신 우리 주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무나 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하며 찬양해야 합니다. 감사찬양하며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는 정말 간사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아서 불평을 할 시간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아니 감사할일이 이렇게도 많은데, 감사할 것을 찾아도 다 찾지 못할판에 왜 불평거리를 찾아야 한단 말입니까?

지금 저 밖을 잠시 내다 보십시오. 하늘을 한 번 우러러 보십시오. 저 신비로운 산천을 한 번 둘러 보십시오.돌아보면 볼수록, 생각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것이 없습니다. 창조로부터 시작해서 오늘날까지 그 신비한 경륜가운데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경이로움을 한 번 보십시오. 저 에머랄드빛 하늘을 창조하신 분은 누구십니까? 저 화창한 봄날을 주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꽁꽁 얼어붙은 땅에 묻혀 있던 그 작은 씨앗하나에 다시금 싹을 틔우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저 신비롭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이 가을의 풍요로운 결실을 주시는 분을 누구십니까? 누가 저 따사로운 태양빛을 주고 계십니까?

여러분께서는 저 대자연속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들리십니까?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아니 들을려고 하지 않아도 들려야 합니다. 우리의 지성이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의 이성이 구원받은 이성이라면, 우리의 감성이 구원받은 감성이라면 우리는 한 마리 작은 새의 지저귐을 들으며 거기서 하나님의 찬미소리를 듣습니다. 들녁의 한 작은 들꽃을 보며 거기서 하니님의 신비로운 솜씨를 발견합니다.

탕자가 집을 떠나 허랑방탕할때는 어머니의 사랑을 잘 모릅니다. 고마움도 모릅니다. 밥 한그릇의 소중함도 모릅니다. 그러나 허랑방탕하다가 있는 것을 다 허비하고 돌아왔을 때 그를 맞이하는 따뜻한 어머니의 품에서 탕자는 어머니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허랑방탕할때는 밥은 그냥 밥일뿐이었습니다. 자신이 입고 있는 옷도 그냥 그저 입혀 있는 옷에 불과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모든 것을 허비하고 돌아와서 어머니 품에 안겼을 때 그는 어머니의 밥 한 그릇에 눈물겨운 고마움을 알게 됩니다. 어머니가 깨끗하게 빨아 입히는 그 옷을 입으며, 그는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품에 안겼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서 살때는 저 대자연의 아름다움도 고마움도 제대로 알수 없습니다. 풀 한포기, 꽃 한송이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저 태양이 저 물이 공기가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품에 안긴 사람은 압니다. 구원받은 이성은 거기서 하나님의 찬양소리를 듣습니다. 감사하게 됩니다.

어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그뿐입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나라는 존재가 그렇게 대단한 존재입니까? 나보다 도덕적으로 선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나보다 윤리적으로 깨끗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나보다 점잖고 잘나고 지위 높은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왜 하필이면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와 같은 나를 사랑하십니까? 내가 무엇이 그렇게 하나님께 소중한 존재이기 당신의 아들을 주십니까? 무엇이 내가 잘한 것이 있다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고귀한 생명을 주신단 말입니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슨말을 하겠습니까? 그저 입이 있어 겨우 한마디 할수 있다면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뿐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한마디 뿐이 아니겠습니까?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세계 복음전도대회’가 세계 4,000여명의 대표가 모여서 “성경이 말씀되게 하자”라는 주제를 가지고 열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틀째 저녁 예배에 특별찬송을 위해 한 맹인 여가수가 안내원의 안내를 받으며 무대 중앙에 올라섰습니다. 그리고는 찬송하기 시작합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못하네

저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위에

죄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제로 삼으시고 죄 용서하셨네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이 맹인 가수가 조용히 찬송을 부르는 동안 4,000여 청중들은 감사의 감동에 젖어 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느듯 한사람 한사람씩 감사의 뜨거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거기 모인 모든 대표들은 감사로 성령의 충만함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이 맹인 여가수는 6.25전쟁때 두눈을 잃고 선교사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음악공부를하여 가수가 된 한국인 킴 스윜양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이 맹인가수가 가졌던 그런 감사가 있습니까? 우리는 정말 감사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지구상에 왔다간 사람은 수천억이 된다고 합니다. 그 수천억중의 한 사람인 나,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 수천억중의 한 사람에 불과한 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만큼 그렇게 소중한 존재가 아닙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에게 수천억원이 있다고 가정했을 때 여러분에게 있어서 1원이라는게 얼마나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사실 하나님앞에서 우리는 수천억원중에 1원에 불과한 존재입니다. 나 하나쯤 이 세상에서 없어 진다 해도, 세상은 눈하나도 깜짝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로 그런 나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나를 사랑하셔서 이 아름다운 대 자연을 우리게주셨다는 말씀입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 수천억중의 한 사람에 불과한 나를 당신의 자녀로 인치셨다는 말씀입니다. 지옥의 형벌에 나를 살리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수가 있단 말입니까?

한 사형수가 있다고 합시다. 사형날자가 잡혀 이제 철장안에서 죽을날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이제는 땅도 하늘도 봄 여름도 부귀 영화 권세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이제 그 사형수에게 있어서는 전혀 무용지물들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특사로 무죄방면되었다고 합시다. 그가 감옥에서 나오는 순간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는 아마도 엎드려 땅에 입이라도 맞추지 않겠습니까? 하늘을 우러러 보며 환호성을 지르지 않겠습니까? 길가에 피어 있는 꽃은 얼마나 아름다워 보일까요? 그렇습니다. 그가 감옥에서 나오는 순간 그에게 펼쳐지는 모든 것에는 이전에는 그가 미쳐 몰랐던 엄청난 의미가 부여 될것것입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실 모두가 한 사형수였습니다. 바로 그래서 예수께서 오셨고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있어서 세상의 의미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구원받기 전과 구원받은 후에는 모든 것이 다른 의미다 부여됩니다. 아니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전에는 구원받지 못한 이성 때문에 알지 못했던 것을 구원받은 이성의 활동으로 비로소 알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제는 구원받은 이성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이제는 구받은 지성의 눈으로 생각하십시오. 이제는 구원받은 감성의 눈으로 기쁨을 누리십시오. 감사하십시오. 지금까지 여러분의 감사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돈벌었을 때만 감사하는 사람, 돈 잃으면 감사하지 못합니다. 건강하다고만 감사하는 사람, 건강 잃었을 때는 감사하지 못합니다. 성공했다고만 감사하는 사람, 실패하면 감사 못합니다. 내 소원들어주셨다고만 감사하는 사람, 내소원이 안이루질때는 감사하지 못합니다.

진정한 감사는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단순히 풀한포기를 바라보며 감사하며 찬양하는 것입니다. 한끼의 밥을 먹으면서 진정으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생각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 그래서 그 희생을 통하여 나를 살리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범사에 감사할수 있습니다. 우리는 승화된 감사를 통하여, 진정한 감사를 통하여 기쁨의 삶을 살수 있습니다. 감격의 삶을 살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은혜를 정말이지 마음속에 깊이 되새기며 진정한 감사와 사랑과 기쁨을 누리는 여러분의 삶이 되어지시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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