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설교 <감사의 때 (When we are thankful)>

 

 



누가복음 17 ; 11 - 19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우리는 어떤 현상이나 자극에 대해 받아들이는 성향을 일반적으로 감수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잘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것을 표현하는 사람을 흔히 감수성이 풍부하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일반적인 사람에게는 그냥 들에 핀 꽃이지만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에게는 꽃이 그냥 꽃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으로 느끼며 꽃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꽃을 의인화하기도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도 영적인 감수성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감수성은 어떠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순간순간 느끼고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날마다 마시는 공기와 태양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보면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깨닫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똑같이 밥을 먹고 물을 마시면서도 하나님 은혜를 깨닫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감사하는 추수감사절입니다.

그러나 똑같이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였지만 어떤 분들은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감사함을 깊이 깨닫는 분들이 있고 어떤 분들은 크게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분들도 분명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저와 여러분의 영적인 감수성은 어떠하십니까?

만일 매년 이 맘 때에 드려지는 추수감사절의 절기가 단순히 헌금 한 번 더 내는 절기로 혹은 잘 차려서 풍성하게 먹는 그러한 절기로만 여겨진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실제로 어떤 분들은 ‘요즘 농사도 짓지 않는데 왜 추수감사절을 지켜야 하는가?’ 라면서 추수감사절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전의 농경산업에서 산업사회로 그 일터만 바뀌었을 뿐이지 다시 말해 직종이 바뀌었을 뿐이지 일하여 소득을 얻는 것은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추수감사절의 의미는 충분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추수감사절에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려야 할까요?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위해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시면서 한 마을에 들어 가셨을 때에 예수님이 지나시는 것을 알고 예수님께 나아와 자신들을 불쌍히 여기고 고쳐달라며 외치던 열 명의 나병환자들이 나옵니다.

 

이들은 왜 그토록 주님을 향해 소리를 지른 것일까요?

거기에는 분명 나름대로 그들에게 믿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시 나병환자는 저주를 입은 사람으로 여김 받아 사람들과 격리되어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면 자신들의 병도 치료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부르짖는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기도를 해주거나 안수를 해주신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해주지 않으시고 한마디 말씀만 하십니다.

14절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왜 그럴까요? 당시에는 제사장은 마치 의사와 같아서 병을 진단하고 치유에 대한 판결도 내렸습니다.

레13:9 ‘사람에게 나병이 들었거든 그를 제사장에게로 데려갈 것이요’ 

율법에는 제사장이 나병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고, 제사장이 병이 나았다고 하면 정상인이 되어 다시 가정과 사회로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나병환자들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지도 않고서 먼저 제사장에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연히 반감이 생길 수 있습니다.

‘아니 이게 뭐야? 안수도 안하고 기도도 해주지 않고서 이대로 제사장한테 가라고? 가다가 사람들에게 맞아 죽으라고?’ 얼마든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곧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제사장에게로 갔습니다. 여러분 어찌하였든 이 또한 큰 믿음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어떻게 되었습니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제사장에게 가는 도중에 몸이 깨끗해진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니 얼마나 놀랐을까요?

여러분 상상이 갑니까? 아마도 이들은 길거리에서 환호를 하고 춤을 추고 난리가 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15-16절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사마리아 사람 한사람만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 예수님께로 돌아와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를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왜 사마리아 사람만 돌아와 감사를 했을까요? 아홉 명이 주님께 돌아와 감사치 못한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이들을 통해 우리는 왜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하며 살아가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나중에 감사하자는 것입니다.

치료해 주셔서 감사하지만 우선은 제사장에게 가서 완치 판정을 받는 것이 우선이고 그리고 가족에게 가서 이 기쁨을 나누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선순위가 잘못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모두 현재이지 나중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감동하시면 지금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시간이 지나 감사하려면 사탄이 틈을 타 방해하고 그러면 기회를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따라해 보시기 바랍니다. “감사는 바로 하자” 감사를 결코 내일로 미루지 마시기를 축원드립니다.

 

둘째로 마음으로만 감사했습니다.

아홉 모두가 나음을 받았을 때에 말로는 당연히 감사하죠. 왜 감사한 마음이 없겠습니까?

아홉 모두 마음속으로는 감사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기적을 체험하고도 감사가 없다면 그것이 사람이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 감사가 말이나 행동으로 표현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마음만이 아니라 표현되어 질 수 있어야 합니다.

감사는 마음이 중요하지만 말이나 행동으로 이어질 때에 진정한 감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홉은 마음 뿐이었지만 사마리아인은 행동으로 감사를 실천했습니다.

어떻게요? 15-16절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다른 아홉 명과 다른 점입니다.

여러분 감사는 마음만이 아닌 말과 행동이 따를 때에 진정한 감사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셋째로 다른 이가 하지 않는다고 자신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열 명이 같이 가다가 다 나음을 받았지만 아홉은 집으로 갔습니다.

이들은 분명 마음속으로 ‘다른 사람도 다 집으로 가네, 나보다 믿음이 좋다는 사람도 집으로 가네. 애라 모르겠다. 남들도 가는데 나도 집으로 가자’ 라고 생각 했을 것입니다.

서로가 ‘저 사람도 그렇게 하니 나도 그렇게 해도 되겠지’ 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여러분 감사는 남들 따라하거나 비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들이 다 저렇게 하는데 나라고 뭐 잘났다고 해야하냐?’ 이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남들 따라가는 신앙은 평범한 신앙은 될지 모르나 큰 복을 누리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복이 임하지 않는다면 한번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어쩌면 나는 항상 ‘다른 사람이 하는 것 만큼만 감사 해야지’ 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는지 모를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코 감사할 수 없고 복을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는 무엇 보다 때가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 타이밍입니다. 그렇다면 왜 감사는 때를 놓치면 안될까요? 여기에는 몇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때를 놓치면 받은 은혜를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시간이 지나면 다 잊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망각의 존재입니다. 그래서 수없이 많은 은혜를 누리고 살면서도 시간이 흐르면 그 은혜를 다 잊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의 은혜를 다 잊어버리니 부모님을 모시는 것을 힘들다고 하는 것입니다.

스승의 은혜도 그렇습니다. 예전에는 스승의 은혜를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스승의 은혜를 은혜로 생각지 않습니다. 다 돈 벌기 위해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존경심도 사라지고 감사하는 마음도 없습니다.

목회자의 은혜도 그렇습니다. 목회자는 늘 성도들을 품고 기도하며 보살피지만 이들은 조금이라도 마음이 틀어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떠납니다.

목회자들이 가장 가슴 아플 때가 이럴 때입니다. 정말 사랑하고 기도해 주고 하였지만 말 한마디라도 하면 다행이지 말 한마디 없이 떠납니다. 전화도 받지 않습니다. 그때 받는 충격은 정말 견디기 힘든 고통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무엇보다 사람에게 받은 은혜도 잊어도 되지만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는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

시50:22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얼마나 두려운 말씀입니까?

그러나 시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구원을 보이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감사의 때를 놓치지 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때를 놓치면 하나님께 영광 돌릴 기회를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단순히 감사로 끝나지 않습니다. 감사의 때를 놓치면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기회를 놓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 한사람이 감사했을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17-18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이방인 한사람이 감사를 드렸을 때 주님은 그것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 이라고 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드리는 감사는 단순한 감사가 아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그를 영화롭게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는 방법이 감사입니다.

 

의사들이 말하기를 ‘질병의 원인은 찾아낼 수 있어도, 건강의 원인은 모른다’ 고 합니다.

실제로 어지간한 질병은 다 찾아내고 치료가 가능합니다. 물론 아직 불치의 병도 있지만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치료의 길이 있습니다.

하지만 ‘왜 사람이 건강한지’ 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원인을 모릅니다. 불신자들은 그것을 자신의 공로나 우연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하나님 은혜에 둔감합니다.

하지만 영적인 사람은 똑같은 사건을 경험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고 감사합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를 놓치면 하나님께 영광 돌릴 기회도 놓치는 것입니다.

 

셋째로 때를 놓치면 주님께서 주시는 복을 잃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때가 있습니다. 아홉 명의 나병환자도 다들 감사한 마음은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기회를 미루었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은 그길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예수님께 감사를 직접 드릴 수 있는 기회를 잃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아홉 명은 육신은 나병에서 구원받았으나 그들의 영혼은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사마리아 사람 한사람은 감사하는 그 마음을 갖고 주님께 나왔다가 영혼도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19절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그렇습니다. 여기서 ‘네 믿음’ 이 무엇입니까? 감사하는 그 믿음입니다.

그것이 너를 구원했다고 할 때 그 구원은 질병에서 구원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니 감사는 믿음이고 감사는 복을 누리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의 때를 놓치면 이것도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감사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감사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감사하고 있느냐가 내가 얼마나 은혜를 누리냐를 결정합니다.

다시 말하면 여러분이 느끼는 감사의 온도가 여러분에게 임한 하나님 은혜의 온도가 되는 것입니다.

원하기는 오늘 추수감사절에 저와 여러분 모두가 이 감사의 기회를 잃지 않고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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