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종려주일 낮설교 - 예수님의 고난

 

 

예수님의 고난

히 5:1~10

종려주일 낮설교
 

오늘은 고난주간의 첫 날이자 종려주일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기 위해 예루 살렘에 입성하신 날로서, 이때부터 주님이 부활하신 전(前)날, 즉 토요일까지의 일주일을 고

난 주간이라 합니다. 고난주간에는 금식과 철야 또는 새벽기도 등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며 그리스도가 당한 고난을 깊이 생각하고 몸소 체험하며 그 뜻을 깊이 깨닫는 기간이 되어야

합니다.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나?', '왜 주님은 십자가의 엄청난 고난을 받으셨나?', '과연 누구 때문인가?', '그 십자가의 고난과 나와는 어떤 상관이 있나?' 깊이 묵상하면서 다시 한 번 주님의 큰사랑에 감격, 감사하는 기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 북쪽에 조그만 언덕이 있습니다. 나무도 별로 없고 붉은 흙으로 덮인 곳, 바로 히브리어로 '골고다'요, 라틴어로 '갈보리', 그리고 우리말로는 '해골의 곳'이라는 장소입니

다.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으로써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을 받으신 곳입니다.

 

금요일 아침, 안토니아 성문 앞에서는 예수를 잡아죽이라는 무리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벌써 닷새 전에 우리의 '구세주'라고, '메시아'라고 고백했던 입술들이,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 시는 이여'라고 찬양하던 입술들이 지금은 아주 돌변하여 굶주린 사자 떼 같이 큰소리로 ' 죽이시오. 죽이시오.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시오' 하고 불끈 쥔 주먹을 휘저으며 아우성을 치 고 있습니다. '바라바는 살리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광기 어린 외침을 하고 있습 니다. 비겁하지만 합리적인 빌라도는 '그대들은 이 사람을 데려다가 십자가에 매달든지 말

든지 마음대로 하라.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노라'며 군중의 뜻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내어 주었습니다.

 

그 전날인 목요일 저녁, 겟세마네 동산에서 로마 군인들에게 잡히신 주님은, 대제사장 가야 바의 법정과 총독 빌라도의 법정, 그리고 헤롯의 법정에까지 밤새도록 끌려 다니시며, 모욕

과 멸시와 침 뱉음과 고초를 당하신 끝에 결국 십자가의 형을 받게 되신 것입니다.

 

주님은 밤새도록 심문을 받고 채찍질을 당하였기 때문에 몹시 지친 몸이셨습니다. 그러므로 무거운 십자가 틀을 지고 가는 일을 감당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여러 번 넘어지셨습니다. 넘

어지고 또 넘어지셨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로 인하여 쓰러질 때마다 무릎은 터지고 깨졌고, 발은 돌 뿌리에 채여서 붉은 피로 물들었으며, 그 얼굴은 로마 병정들에게 맞아 멍들어 부

풀어올라 분간할 수 없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바로 당신이 못 박힐 그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향하여 고통스럽게 걸어가셨습니다.

 

오전 9시경, 겨우 겨우 갈보리 산상에 올라오니, 악당들은 주님의 입은 옷을 다 발가벗기고, 십자가 위에 눕힌 채 사지를 결박한 후, 13cm의 못을 입에 물고, 예수의 손목 중 뼈가 없는

부분을 찾아 그 위에 힘차게 못을 때려 넣었습니다. 그리고 백부장이 '끌어 올려라'고 소리 쳤습니다.

 

십자가를 올릴 때 예수의 손목은 비틀어졌고, 검붉은 피는 치솟아 흘러내렸습니다. 갑작스럽 게 어둠이 밀려왔고 하늘은 어두워졌습니다. 고통을 덜어주는 쓸개 탄 포도주도 안 받으시

고,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6시간 동안 십자가에 달리셔서 몸부림치시고 목마르셨습니 다. 결국, 옆구리에까지 창을 받아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그리고 죽으셨습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을 모시던 제자들은 다 어디로 갔으며, 병고침을 받은 사람들, 문제해결 받 고 할렐루야! 외치며 기뻐 뛰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죽었다가 다시 산 나사로는

어디 갔고, 순교를 각오했던 베드로는 어디 갔습니까? 관리들이 예수님을 버렸고, 헤롯왕은 예수님을 미친 사람 취급했고, 대제사장은 예수님이 '참람하다'면서 정죄하였습니다. 이처럼

모든 인간에게 버림을 당하고 심지어 유일한 피난처인 하나님 아버지에게 마저 버림당하는 슬픔을 맛보셨습니다. 모두에게 버림을 받으신 예수님은 아주 외롭고 쓸쓸하게 죽으셨습니

다.

 

불법한 빌라도의 채찍에 맞아 터지고 멍든 그 몸의 상처, 우리 주님의 전신에서 예리 하게 흘러내리는 보배로운 피를 다시 한번 쳐다보시기 바랍니다. 그 고통의 넓이와 높이와

깊이를 인간의 적은 두뇌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고난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과연 주님의 고난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왜 고난

을 당하셨으며, 우리는 왜 오늘도 그 고난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하나요? 주님께서 주신 고난의 의미를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나를 위하여 죽으심에 대한 감격과 다른 하나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해야 된다고 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고난받으실 때, 제자들의 생활상태를 찾아보면 한심함뿐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기도 의 고난을 당하시는데 잠만 자고 있는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불법한 로마의 군

병들에게 잡혀가실 때는 제 갈 길로 뿔뿔이 흩어진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심문을 당하시며, 조롱과 모욕을 당하실 때는 멀찍이 따라가며 비자들과 불을 쪼이던 제자도 있었

습니다. 은 30을 받고 예수님을 팔기 위해 모의를 하던 제자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신앙인의 자세가 절대로 아닙니다. 신앙인의 자세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7), '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빌 1:29)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만 분의 일이라도 동참하는데 고난 주간을 지키는 의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고난은 어떤 고난이었을까요?

 

첫째로, 기도의 고난이었다.

 

본문 7절에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 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심한 통곡과 눈물의 기

도를 드리셨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우면 심한 통곡으로 기도하셨겠습니까?

 

마태복음 26장 37, 38절에 보면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 새 고민하고 슬 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심히 고민하고 죽게 된 상태에서 기 도하셨습니다. 죽게 된 지경에서 기도하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이었습니다.

 

사실, 사람이 심히 고민하고 죽게 될 지경이 되면 기도도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지경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죽을 지경에서의 통곡하는 기도는 십자가

의 고난보다 더 컸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놓고 결판을 내는 기도 였기에 더욱 고통스러웠습니다. 잠시나마 하나님께 버림당할 것과 하나님께 멀어지고 끊어

질 저주를 앞두고 하신 기도였습니다. 아버지에게서 멀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를 알았기 때문에 고통스러웠습니다. 하나님께 버림당할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아셨기

때문에 고통스러우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고통을 없이 해 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 라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간구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장 44절에 보면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 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고 했습니다. 땀은 다 쏟아지고, 진액은 다 빠져나가고, 땀구멍으

로 핏방울이 쏟아지는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것이 너무도 유명한 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였습니다. 겟세마네는 '기름틀'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름

을 짜듯이, 그런 기도를 드리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히브리서 기자는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히 5:7)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서 '올렸고'라는 말은 제물을 드린다는 술어입니다. 즉 '제물을 가져다 바친다'는 뜻 인데, 구약시대에 드렸던 제물은 곧 신약시대의 기도를 의미합니다.

 

제물은 언제나 고난과 희생을 뜻했습니다. 속죄 제물은 죽여서 피를 흘리는 것이요, 번제 제 물은 태워서 드리는 제사이며, 소제 제물은 가루로 드립니다. 그러니까 내 몸이 부서지고 깨

져 가루가 되기까지 드려지는 기도여야 합니다. 피를 쏟는 기도여야 하고, 내 몸이 태워지는 기도여야 하고, 기름을 짜내듯 온 영혼을 다 짜내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야곱처럼 환도뼈

가 부러지는 기도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스승이신 예수께서 생명을 건, 처절한 기도를 드리고 있다는 것을 알지도 못한 채, 쿨쿨 잠만 자고 있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와 함

께 한 시(時)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마 26:40) 하시며 탄식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고난 주간이 되어도 감각이 없는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한 주간의 고난에 동참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고, 그 고난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며, 주님의 기도의 고난에 동참하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둘째로, 순종의 고난이 있다.

 

본문 8절에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 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뜻

을 포기하고 순종하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드리실 때, 예수님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자기의 소원을 버리고 아버지의 소원을 따른 것입니다. 자기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구한 것입니다. 나의 욕

망을 죽이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것은 십자가의 고난 못지 않은 고통인 것입니다. 아 무리 나의 생각이나 주장이 옳다 하여도, 그 고집을 버리고 아버지 말씀에 복종하는 순종의

고난을 배워야 합니다.

 

순종의 사람 사무엘은 불순종하여 하나님께 버림당한 사울을 향해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삼상 15:22)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몸이 소제의 제물같이 가루가 된다 할지라도, 순종하지

않은 것이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자기의 몸을 불사르게 번제로 드린다 할지라도 순종 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합니다. 자기의 몸을 드리고, 많은 재물을 하나님께 바친다

해도 그의 명령에 복종하지 못하면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순종하면 당장은 손해일 것 같아도,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 시험과 분쟁으로 금방 죽을 것 같아도, 결국은 복이요 승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주님의 제자들

이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서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는 은혜를 체험한 후, 복음을 전파하며 기 적을 베풀고 다닐 때입니다.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제자들을 잡아다가

심문을 하며, 예수의 이름으로는 사람을 더 이상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베드로는 담대하게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행 5:29)면서 조금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산 제사의 믿음이요, 이 믿음으로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 달려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루 한 가지씩이라도 순종합시다. 사랑할 수 없 는 사람을 사랑하고, 기도할 수 없는 환경에서 기도하고, 충성할 수 없는 처지에서 충성하

고, 참을 수 없는 지경에서 참으면서 예수님의 고난에 참예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제사장적 죽음의 고난이 있다.

 

본문 10절에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고 했습 니다. 구약시대에 대제사장은 1년에 한번씩 온 백성의 죄악을 짊어지고 지성소에 들어가서

희생의 피를 뿌리며 속죄제를 드리는 사명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대제사장이라고 히브리서는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

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 2:17, 18),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님 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히

6:20), '저가 저 대제사장들의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 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히 7:27).

 

이와 같은 말씀들을 요약하면 그리스도께서 구약시대에 많은 짐승을 잡아서 속죄제를 드리 던 것을 자기의 몸을 희생의 제물로 단번에 드려 마지막 대제사장이 되어주셨다는 것입니

다.

 

예수님의 고난의 최절정은 제물로서 죽으신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그분은 벌써 온 몸을 채찍에 맞으셨습니다(마 27:26). 그래서 멍이 든 온 몸은 군데군

데 터지고 미어져 핏빛이었습니다.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셨습니다(마 27:29). 그래서 가시에 찔린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로 온 얼굴은 흥건하였습니다. 무려 6시간 동안이나 십자가에 달

리셔서 몸부림치시고 목마르셨습니다(막 15:25, 34: 요 19:28). 그리고 죽음을 확인 받기 위 해 옆구리는 창으로 찔리셨습니다(요 19:34). 모든 인류의 죄값으로 저주를 받으신 고난이었 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옥불에 들어가서 당해야 할 고난을 홀로 담당하신 고난이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고 부르짖으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를 부른다'고 하 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엘리야를 부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을 부르신 것입니다.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절규하시는 이 순간이야말로 고난과 고민, 고초과 고통의 최절정의 순간입니다. 인류의 죄를 지시고 버림받은 죄인으로

몸은 깨어지고, 심장은 파열되고, 조롱을 당하시고, 멸시를 받으시며 죽으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당하신 이 고난을 생각하며,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 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이

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십자가는 가장 극악무도한 죄인이나 노예들을 처형하는 형틀로써 당시 사람들은 십자가형을 듣기만 해도 몸서리치고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십자가가

영광과 복과 평화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바라보고 또 십자가를 통하여 참되고 영원한 구원과 희망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우주와 모든 인류에게

가장 큰 이적이요 기적입니다. 바로 절망의 십자가가 희망의 십자가가 되었다.

 

저주의 십자가가 축복의 십자가로 변화되었고, 치욕의 십자가가 영광의 십자가로 변화되었 습니다. 멸시의 십자가가 존귀의 십자가로, 고통의 십자가가 평화의 십자가로, 실패의 십자

가가 승리의 십자가로, 그리고 사망의 십자가가 영생의 십자가로 변화되었습니다. 따라서 아 무리 힘들고 고통스럽고 괴로워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고난에 함께 동참합시다.

그러면 여러분의 생애 위에 축복과 영광과 평화와 승리와 형통과 영생의 역사가 충만하게 임할 것을 믿습니다.

 

몇 사람이 크고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십자가가 너무 크고 무겁다고 불평을 하면서, 중간쯤 가다가 아무도 모 르는 곳에서 톱으로 십자가를 잘라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끝까지 지고 갔습니다. 어느덧 예수님께 상급 받을 종점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사람의 힘으로는 뛰어넘을 수 없는 큰 강이 있었습니다. 그 강을 마지막으 로 넘어야 저편의 황홀하고 아름다운 왕관을 들고 서 계신 예수님께 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

다. 물론 그 강은 지금까지 자신이 지고 온 십자가를 강 위에 걸쳐서 건너게 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묵묵히 끝까지 인내하며 십자가를 지고 온 사람은 당당하게 잘 건너갔고, 무겁다고

불평하다 자신의 십자가를 잘라버린 어리석은 사람은 짧아서 건너기는커녕, 오히려 강에 빠 지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삶 가운데 다가오는 시련과 고통을 잘 견디어내지 못하면 결코 예수님의 상급을 받 을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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